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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 1-150 (완)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 1-150 (완)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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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0. 소장 김우진 >
8 월 19 일. 맑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간만에 푹 숙면을 취해 상쾌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분재를 다듬었다.
요새 분재가 자라나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잘 쳐주지 않으면 예쁘게 자라지를 않는다.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8 월 20 일. 흐림.
8 월 25 일. 비.
비가 내렸다.
8 월 31 일. 맑음.
오늘은 해가 떴다.
9 월 1 일. 맑음.
급하게 연락이 왔다.
뭐, 인간이라니까 좀 쉽겠지.
* * *
“이것도 다 썼나.”
탁-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밖을 보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침인가. 또 다시 지겨운 하루의 시작, 업무의
시작이다.
“들어와.”
“충성,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몬스터들로도 요리를 쳐 만들던 놈이라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식재료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간밤에 문제는?”
“없습니다. 죄수들의 상태도 괜찮고 특이사항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가보자.”
“앗, 오셨습니까?”
카트를 끌고 다니며 음식을 배급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소지라고 써진 형광 조끼를 입고 있었다.
“아침 맛있던데.”
“감사합니다. 주신 재료가 워낙 좋아서 그렇습니다.”
“저녁은?”
“저녁에는 파스타를 생각중입니다.”
“회가 먹고 싶은데.”
“아, 그럼 바꾸겠습니다!”
“일 봐.”
“예.”
일반적인 감옥이었다면 한 방에 죄수들을 대여섯명씩 넣고 독방이 따로 있겠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감옥이 아니다.
순찰을 끝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김우진은 집무실로 돌아와 모자를 벗었다.
“···몇 시야?”
“10 시 51 분입니다. 정확히 두 시간 주무셨습니다. 죄수들은 정신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9 분 남았나.
“가지.”
1 층의 로비로 내려가자 간수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허례허식을 딱히 반기지는 않아 그대로 받아 넘겼다.
감옥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평소와는 다르지만 낯선 것은 아니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
날이면 언제나 이러니까.
후우-
담배 하나를 피고 나니 시간이 딱 되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옷으로 뒤덮인 호송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과 다리에는 족쇄를,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귀를 막고 목을 옥죈다. 사슬로
전신을 동여매 오감과 움직임 자체를 봉쇄한다.
“이름, 강민식.”
“나이, 35.”
“종족, 인간.”
“성별, 남···.”
교도관들이 죄수를 인계 받았다. 낡아 빠진 종이에 사인을 했다. 서류를 잘 갈무리한 호송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이만.”
“앞으로 죄수가 얼마나 더 들어올 것 같나?”
“죄수가 생겨나는 빈도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고, 짓지 않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달린 일인데
말입니다.”
“말이나 못하면.”
“······.”
“강민식. 맞나?”
“···여긴 어디지?”
“감옥이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강민식. 맞나?”
“내가 왜 감옥에 있는 거지?”
“죄를 지었으니까. 강민식. 맞나?”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
짜악-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누구였든, 어떤 짓을 했든 여기 온 이상, 죄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까 눈 깔고 조용히 묻는
말에나 대답해.”
“닥쳐!”
강민식이 버럭 소리쳤다.
“해보라고.”
“이 새끼가···!”
“네가 어떤 차원을 구했는지, 네가 어느 차원 출신인지 나는 관심이 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철컥-
“···무슨?”
“여기 들어오는 죄수들은 하나 같이 똑같아.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발악하지.”
족쇄가 풀렸다.
“잃어버린 옛 과거를 부르짖으면서 지금도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뭐, 이해는 해. 그래도 나름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한 전적이 하나씩은 다들 있을 테니.
몸을 묶은 사슬이 떨어졌다.
“근데 그게 여기서는 디폴트라는 걸 몰라. 애초에 그런 놈들을 가둘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도소라는 것도.”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었어!”
“그런 놈들에게 현실을 주입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알아?”
“맞는 거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인정할 때까지 패는 거지. 강제로 현실을 주입해주는 거지.”
그래서 상담실은 크고 넓다. 책상과 의자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언어의 대화가 아니라 몸의 대화를 추구하는
곳이기에.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곳은 연옥.”
“그리고 나는 김우진이야.”
이곳의 소장이지.
강민식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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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1. 갇히는 이유 >
“강민식. 지구 출신이라.”
하물며 같은 한국 출신은 더욱 더.
애초에 알고자 하는 것들 대부분은 서류에 적혀 있다. 상담실을 운영하는 목적의 90%정도는 죄수의 기강잡기
정도였다.
“죄수들은?”
“방금 점심 다 먹었습니다. 지금 출역을 하러 나갈 채비 중입니다.”
“무슨 출역?”
“풍경이 지루하다고 바꾸라고 하셨잖습니까.”
아참, 그랬지.
“나가보자.”
“예.”
밖으로 나갔다.
정원 한쪽에는 숲이 펼쳐진다.
쿵쿵-
우지끈-
나무가 무너져 내리는 속도는 빨랐다. 팔찌를 통해 마력을 제어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용사였다. 신체적인
능력은 감히 일반인과 비빌 수준이 아니다.
“큰일?”
“새로 들어온 죄수가 일어났습니다만, 상태를 확인하러 간 교도관의 멱살을 잡고 놔주지 않고 있습니다.”
“멱살을 잡혔어?”
“소지가 식판을 넣어놓고 갔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다시 챙기려다가 그만···.”
성질 나쁘다더니 진짜였군.
김우진은 딱히 교도관을 탓하지 않았다. 대단한 일처럼 포장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왕왕 있는
일이었다.
“가자.”
“예.”
언제나 그랬듯.
* * *
가관이군.
강민식이 버럭 소리쳤다.
실제로 그렇다. 김우진은 이 교도소의 소장이기는 했으나 죄수를 임의로 들여오거나 내보낼 권한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갑자기 죄인이 되어야 하지? 감옥에 갇혀야 하지?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어.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줘!”
“그 심정 이해해.”
“네가 뭘 알아!”
“그렇게 말해버리면 할 말은 없고.”
“아까 말했지? 나는 너를 내보내줄 권한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 감옥을 나간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야.”
“···나갈 수 있다고?”
“그래, 전부 네 마음가짐에 달려 있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소장을 향한 욕설, 벌점 1000 점. 그리고 교도관 폭행 100 점. 축하해. 벌써 벌점이 1100 점이네. 이왕 많이
받은 거 번호랑 맞춰서 1177 로 받는 게 나으려나?”
“지랄하지 마. 교도관의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언제?”
콰앙!
“괜찮나?”
“예. 감사합니다, 소장님.”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식 방 줄여. 최대치로. 벌점이 1177 점이니까 11 일 동안. 밥도 주지 말고.”
“예.”
쿠그그그-
“뭐, 뭐야!”
당황한 강민식이 소리쳤지만 벽면은 딱 그가 몸 누울 공간까지 좁혀졌다. 지극히 좁고, 지극히 불편했다.
‘그냥 다 듣게 되겠지만.’
* * *
“빌어먹을···!”
“저 자가 한국인이라는 겁니까?”
“아마도. 자네의 심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너무 악만 쓰지 말게. 그래봐야 이득이 될 건 없으니.”
“대체, 대체 여긴 뭡니까? 저는 왜 여기 갇혀 있는 겁니까?”
“뭐긴, 감옥이지. 자네는 죄를 졌으니까 감옥에 갇힌 거고.”
“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네는 죄를 지었네. 그것도 아주 큰 죄를.”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용사입니다. 한 세상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알고 있네. 여기 갇힌 죄수들은 전부 용사지. 자네만 특별한 게 아니란 거네. 소장이 말 안 해주던가?”
“······.”
했다.
이곳은 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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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2. 납득 >
톡-
“오늘은 누구지?”
“죄수 번호 1152. 시에나 올름입니다.”
“들여보내.”
교도관이 커피 두 잔을 내왔다.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소지 한 명 더 필요 없니? 감방에서 멍하니 있는 거 보다 뭐라도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 새로운 출역을 시작했죠. 할 일 많아지지 않았어요?”
“그건 너무 힘들어. 그리고 너무 불합리해. 소장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서 죄수들을 동원하는 법이 어디 있니?”
면담은 매일 일과가 끝난 저녁, 한 명씩 이루어진다.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시에나가 나갔다.
죄수나 시설의 관리는 교도관들에게 일임하고 있으며 그것을 제외하면 할 일 자체가 없으니까.
아, 같은 건가.
그가 식어버린 커피를 원샷했다.
“나 퇴근한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진짜 나갈 생각 없어?”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꽤나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김우진은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죄수들 중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건 소지뿐이니 그가 나간다면 다시금
맛대가리 없는 밥을 먹어야 했다.
“소장님.”
“무슨 일이야?”
“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주일 뒤에 새로운 죄수가 하나 더 온답니다.”
“새로운 놈 들어온지 이제 겨우 이틀 됐는데?”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이례, 새로 받은 죄수가 이제 고작 셋이라는 점에서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인적사항은?”
“여기 있습니다.”
교도관이 서류를 내밀었다. 인계 당일 호송관이 넘기는 세세한 자료와는 다른, 아주 간단한 것들만 적힌 서류였다.
“이런 씹.”
- 율리아 카르센.
- 엘프.
소장이 된 이후, 김우진은 이종족을 싫어했다. 특히, 시간관념이 인간과는 확고히 다를 정도로 오랜 삶을
살아가는 엘프들은 더욱 더.
“아침 배식이요!”
꼬르륵-
“일어났군. 잘 잤나?”
“기적과도 같은 기연도 있었다. 동료들의 희생도 있었다. 그들의 희망과 염원, 소망이 내 노력과 어우러져 나는
영웅이 되었다!”
“그런 건 난 모르겠고.”
“중요한 건 널 이곳에 보낸 놈들이 네가 힘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거지. 그리고 난 그들의
앞잡이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그러니 다시 묻겠다.
* * *
“···괜찮나?”
그가 입술을 짓이겼다.
배급구로 고개를 내밀어 교도관이 없음을 확인한 강민식이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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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3. 장생종 >
하나는 김우진의 변덕과 기분 전환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너무 힘들어 이 감옥을 벗어나고 싶게 하기 위해서.
“어디로 내보낼까요?”
“당연히 환경조성반이지.”
지구에서 중세에 가까운 세계로 문명이 너프되어 버리면 누리던 혜택이 모두 사라진다. 대단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나간 자리는 안 다는 게 인간이다.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공허함은 다른 용사들보다 크고
깊었다.
그 인내의 시간을 버티고 버티다 모든 것을 해결하고 마침내 지구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비롯한 온갖 문명의 혜택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일단은 한 번 나가 볼까.”
“굳이 직접 보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없지. 그냥 변덕이다. 일주일 뒤에 시간이 썩어나는 놈들이 들어오니 한 놈이라도 더 빨리 내보내고 싶어서.”
* * *
이번에 갈아엎을 구역은 숲이다. 교도소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빽빽한 수림 아래 여러 동물들이 살아가는
그런 곳이다.
“오셨습니까, 소장님.”
숲에 도착하니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벌목하는 죄수들이 보였다. 간수 하나가 김우진을 발견하고 경례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봐.”
“예.”
“구경났나?”
황당해하는 강민식과 눈이 마주쳤다. 강민식이 재빠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다른 죄수들은 익숙하게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네. 자네 나이를 정확히 모르나 많아야 40 이 안 됐겠지. 40 을 살아온 자들의 10
년과 수백 년을 살아온 자들의 10 년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부정할 수 없겠군요.”
“하물며 그게 끝도 아니지. 기약이 없네. 스스로 출소를 택하지 않는 이상.”
“······.”
쿵-
무거웠다.
‘이것도 일부러···?’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 * *
엘프.
평소에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어쩐 일로 빠르게 흘러갔다. 강민식은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고 어느새 엘프가
들어오는 날이 되었다.
쇠사슬, 안대, 재갈, 구속구 등으로 전신이 포박된 은발의 여인은 엘프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서류만 주고 가.”
“인계 확인서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이렇게 자주 자주 죄수들을 보내주면 좋기는 한데 다음에는 인간으로 데리고 와.”
“이전 죄수가 인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네. 인간‘만’ 데리고 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죄수에 관한 부분은 제 재량이 아닙니다.”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이엘프는 일반적으로 엘프들의 배 이상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더
태평하다.
“나이는?”
“257 살이요.”
“어리군.”
“하이엘프치고는 그렇죠.”
“아르반이라는 차원 출신이고.”
“네.”
“데이드람을 구했고.”
“광룡이 미쳐 날뛰던 차원이었어요. 꽤나 힘들었죠.”
“여기가 어딘 줄 아나?”
“감옥이요.”
“왜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고?”
“대충 짐작은 해요.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알면서도 여길 왔다고?”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죠.”
그것도 그랬다.
눈이 마주쳤다. 흥미로움을 가득 담은 시선. 김우진은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알았다. 1178.”
“1178? 그게 뭐죠?”
“네 죄수번호. 앞으로 번호로 부를 테니까 잘 기억해두도록.”
“아하, 3 이 하나도 없는 게 아쉽네요.”
“3?”
“다른 엘프들은 몰라도 저희 차원의 엘프들은 3 을 행운의 숫자로 여겼거든요.”
“그렇군.”
···모르겠다.
후우-
진한 연기가 흩어졌다.
* * *
“···새 죄수?”
늦은 밤, 기회를 엿보던 강민식이 배급구를 통해 조용히 속삭였다. 다행히 상대의 배급구 또한 열려 있었다.
잠깐의 침묵.
“방법은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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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4. 경고 >
연옥에서 수감되고 지내온 몇 주의 시간은 감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무기력.
데르카인은 말했다.
‘멍청이들.’
“방법은 있고요?”
때마침 새로 들어온 죄수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비록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엘프였으나 흥미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다른 죄수들처럼 패배감에 찌들어 있지 않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속삭였다.
죄수들이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연옥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죄수들은 연옥의 많은 부분을 알 기회가 없었다.
* * *
“모자 줘.”
* * *
북한에서 남한의 드라마를 보고 남한을 선망하는 탈북민들이 생기는 것에서 김우진이 착안해낸 것으로 바깥을
그리워하는 죄수들에게 바깥을 보여주는 거다.
그들은 누릴 수 없기에, 눈앞에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기에 더욱 간절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는 감옥의 소장이었고 탈옥자는 온전히 그의 책임이었다. 그에게는 완벽하게 감옥을 관리할 책임이 있었다.
딸각-
숲을 헤매던 죄수가 몬스터 무리를 만났다. 그녀는 분전했으나 구속구로 인해 제약된 육신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잡아먹히기 직전, 교도관들이 그녀를 구출했다.
“그리고 이건.”
화면이 바뀌었다.
그건 전장이었다.
대지가 불타고.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었으며.
폭음과 비명이 난무했다.
죄수들이 보였다.
‘데르카인.’
‘시에나.’
고혹적인 엘프도.
‘대부분 낯이 익어.’
본신의 힘을 되찾은 용사들은 모든 교도관들과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며 전진했다. 그리고 소장이 그 앞을 막아섰다.
“20 년 전, 대규모 탈옥 사태 때의 일입니다.”
막을 수 없다. 강민식은 확신했다. 그래서 괴리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멀쩡히 앞에서 떠드는 소장은 뭘까.
“···미친.”
강민식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입을 막았다. 하지만 김우진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
이게 단순히 구속구로 인해 육신이 제약 당해서일까? 방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의문이 들었다.
* * *
“···뭡니까, 그 영상은? 조작이죠?”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용사들을 관리하는 감옥의 소장이, 그 용사들보다 약하다면 그게 문제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애초에 처음 들어왔을 때, 상담실에서 한 번 봤을 텐데.”
“그것도 그렇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과 함께라면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구속구만 푼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강민식이 입을 다물었다.
“그거야 당연한 소리지. 패배감에 찌들어 있다고 해서 희망 자체를 버린 건 아니네. 확실하게 나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다시 도전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렇다네요.”
“하지만.”
철컥-
“2 징벌방이 뭔가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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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5. 협상 >
배급구가 닫혔다.
“이, 이게 뭐야!”
쿠구구구-
그리고.
“······!”
─────!
* * *
그리고 인위적인 통증을 주입한다. 마나로 만들어낸 아픔은 새롭다. 새롭게 아프고 괴롭다.
때문에 죄수들은 징벌방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첫 번째야 백일이고 천일이고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결코
쉽지 않으니까.
자연스레 징벌방에 들어간 죄수의 이야기는 죄수들 사이를 돌았다. 시에나의 물음에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열흘.”
“병신이 돼서 나오는 거 아니야?”
“상대적으로 정신이 나약한 인간이라고 해도 용사네.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네.”
“하긴, 2 징벌방이니까. 3 이면 답도 없지만.”
용사란 용사가 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대적과 싸워온 자들이다. 고난과 역경은, 고통은 더 없이 익숙한
존재들.
“알고 있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들어와서 분탕을 치고 있어. 기껏 느슨해진 소장의 경계심이 다시 올라가고 있다고.”
“아직은 괜찮네. 강민식에게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직은’이라는 단서가 붙잖아.”
“2 징벌방에 들어갔으니 정신이 바짝 들겠지. 나오고 나면 적어도 이전처럼 사리분별도 못하지는 않을 거네.”
“그건 그냥 당신 희망사항이잖아···라고 말하기에는 징벌방이 좀 끔찍하긴 하지.”
“거기 잡담 금지!”
교도관의 고함 소리에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하지만 교도관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시에나가 다시
접근했다.
쿵-
쩌적-
그들의 행동 패턴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강민식은 모른다. 놈은 백지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어디로 튈지 모른다.
“무슨 뜻이지?”
“어차피 어떤 죄수든 간에 탈옥은 불가능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대비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딱 그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굳이 정신교육 시간에 경고를 날린 이유였다.
똑똑-
“소장님, 베르너입니다.”
“들어와.”
“의외로 괜찮네.”
“크라켄이 사실 문어보다 맛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김새랑 독 때문에 무서워서 먹을지 몰라서 그렇죠. 다
편견입니다, 편견.”
“독이 들어간 시점에서 편견은 아니지.”
“아니죠. 독 있는 복어도 먹는데 크라켄이라고 왜 못 먹습니까? 몬스터라는 편견 때문이라니까요?”
크라켄과 복어 독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똑같이 죽음을 불러오는 극독일
뿐이니.
“그래서 독은?”
“제거 안 했습니다. 먹어도 죽지 않는 분인데 무엇 하러 제거합니까?”
“뒷맛에 톡톡 쏘는 게 그거였군.”
“독도 잘 이용하면 요리의 일부입니다. 그게 마지막에 크라켄 특유의 느끼함을 싸악 없애주면서 입안을 깔끔하게
해주지 않습니까?”
“음.”
김우진이 접시를 엎었다. 갈색으로 잘 조려진 크라켄 조각이 소지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나가.”
“아니, 이 귀한 걸···!”
“한 번만 더 소장 상대로 실험하면 너도 2 징벌방이다.”
“제가 미쳤다고 그 끔찍한 곳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겠습니까? 실험이 아니라 제가 다 먹어보고 오는 길입니다.
제가 멀쩡한데 소장님이 잘못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장 암살 시도, 벌점 10 만점.”
“한 번 만 더하면 징벌방이라면서요! 소장님! 제발 2 징벌방만은!”
“죄수들 분위기는?”
“소장님이 분노하신 걸 알고 자신들한테 불똥이 튈까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특별한 무언가는 없습니다. 진짜입니다!”
“좋아. 1 만점. 1 징벌방에 열흘 쳐 넣어.”
“감사합니다, 소장님!”
소지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2 징벌방에 비하면 1 징벌방은 어린애 장난이었다.
“···맛은 있네.”
특히 뒷맛이 신선했다.
똑똑-
“소장님.”
그때, 다른 교도관이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율리아 카르센. 최근 그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는 주범이
함께였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하지만 본인이 먼저 면담을 요청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이제 막 들어온, 눈앞에서 옆방
죄수가 2 징벌방에 갇히는 것을 본 죄수라면?
바로 끊어졌지만.
김우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앉아.”
“네.”
“차?”
“괜찮아요.”
“그럼 나만 먹지.”
김우진이 손수 커피 한 잔을 타왔다.
실제로 효과는 있었다. 그의 임기동안 엘프 하나가 견디지 못하고 출소했으니. 그게 출소한 처음이자 마지막
엘프였지만.
역시.
간혹 그런 죄수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들어줄 수 없어 기각된 사항들이었지만 한 명 정도는 그렇게 출소한 죄수가
있었다.
맞다. 모든 엘프들은 김우진에게 그녀와 같은 제안을 했었다. 당연히 거부했고 생각보다 별 다른 일은 없었다.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왜 면담을 요청했지?”
“요청 사항이 있어서요. 부탁이라고 표현해도 되고요.”
“뭐지?”
“들어주실 건가요?”
“나가기만 하겠다면.”
“그것과는 상관없어요.”
“그럼 나도 곤란한데.”
“소지를 시켜주세요.”
“곤란하다는 말, 못 들었어?”
율리아는 딱히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고 싶어요.”
“소지가 뭔지는 알고?”
“교도관들을 도우면서 감옥의 일을 하는 죄수죠.”
“감옥에 들어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제법 잘 아네.”
“저는 배우는 게 빨라요.”
“빨리 배우고 빨리 익혀서 탈옥해보려고?”
“그럼 반대로 소장님께 물을게요. 죄수로 여기 들어와서 탈옥을 생각하지 않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이 안 되지. 그래서 소지를 안 시켜주겠다는 거고.”
“꼭 소지가 되어야겠다면요?”
“소지로 임명하는 건 내 권한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을 하고 있죠.”
“감옥의 소장에게 탈옥을 더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부탁을 한다고?”
“···무슨 말도 안 돼는.”
“하이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죠?”
“하는 걸로 아는데.”
“그러면 어머니 나무에 걸고 맹세할게요.”
“···연옥에 들어오기 전에 소지품은 다 빼앗겼을 텐데?”
“모두에게 숨겨진 한 수 씩은 있잖아요?”
대체 뭐지?
세계수의 씨앗, 그리고 세계수. 흥미가 가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그렇기에 더 혼란스럽다. 대체 소지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좋아.”
───────────────
# < 006. 대체재 >
“여기 아침 식사요.”
풍성한 샌드위치 하나가 배급구 위에 놓여지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소지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더, 더 줘.”
소지는 샌드위치 다섯 개에 탄산음료까지 하나 얹어주었다. 징벌방에 들어간 이들은 오직 고통만을 되뇌며 식음을
전폐 당한다. 열흘을 굶었으니 배고픈 건 당연하다.
“어땠나?”
“어땠나요?”
“끔찍했습니다.”
“그게 징벌방이네. 한계까지 죄수를 몰아붙이지. 그래서 죄수들 중 누구도 징벌방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네.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없지.”
어중간하면 그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생긴다. 그리고 연옥의 징벌방은 그런 죄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 어중간함을 뛰어넘었다.
탈옥을 포기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연옥의 죄수들에게 탈옥이 어떤의미인지 더 없이 잘 알기에.
하지만.
“솔직히 할만 했습니다.”
“할만 했다고···?”
그는 징벌방에 다녀온 이를 수도 없이 봐왔다.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붕괴하는 이도, 잘 견뎌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 스스로 조차도.
시간이 흐려지고, 모든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오직 통증만이 극대화된 것은 단순히 아프다는 것 이상의
고통이었다.
교도관이 난입한 뒤에야 소란이 멈췄다. 데르카인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가렸지만 이미 주변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 * *
탁-
탁-
그것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색감의 융합이었다. 마치 색들을 모조리 뒤섞어 버린 듯한, 하지만
완전히 섞이지 않은 듯한.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있어 신과 같다. 어머니 나무라는 호칭에서부터 경외와 존경의 마음이 가득 드러난다.
“어떻게 생각해?”
“그걸 어떻게 반입해왔는지부터···.”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해왔겠지.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고 했고 지금 내 손에 있지.”
하이엘프는 우주의 수많은 종족들 중에서도 특출난 자들이다. 한 수가 있다는 율리아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연옥의 탈옥은 고작이 아니다. 하지만 탈옥을 시켜준다는 것도 아니고 소지라는 직책 하나를 맡는 것뿐이다.
“그래, 그거야.”
생각해보면 하이엘프라고 할지라도 세계수의 씨앗을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만약 세계수의 씨앗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던 중이었다면?
“···그냥 뇌피셜이지만.”
김우진이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그게 그나마 가장 현실성 있는 가능성이었다.
모든 징벌방은 김우진이 직접 실험해보고 강도를 정했다. 상대가 용사들이기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런 일은 안 생겨.”
하지만 너무 과하다.
“물론 의외긴 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징벌방이 어떤 곳인 줄 알아. 강민식이 할 만하다고 했다고 다른 죄수들도
갑자기 그게 만만해보일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맞아. 안 그래.”
“두 번째는 만만하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세 번째에 쳐 넣어 볼까? 내기할래? 그때도 할 만하다고 할지. 나는 내
돈 모두하고 내 손모가지를 걸지. 너는 무엇을 걸래?”
“···안 합니다. 너무 뻔 한 결과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래도 죄수들 관리에는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언제나 싱숭생숭하니까.”
“예.”
* * *
“어떻게 한 겁니까?”
“뭐가요?”
“대체 어떻게 소지가 된 겁니까?”
이유가 뭘까.
현 소장이 소지 제도를 만든 건 8 년 전, 베르너가 입소했을 때였고 오직 그 한 명만을 위한 제도였다.
실제로 시에나 누님이 소지를 시켜달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계속 거부하고 있기도 하고.
“시켜줘서 됐어요.”
“아니, 그건 당연한 거긴 합니다만.”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시켜줬다는 겁니까?”
“아니면 여기서 이 조끼를 입고 있을 이유는 없겠죠?”
“아닌데. 분명히 뭔가 있는데.”
‘혹시···?’
‘얼마 전에 먹인 독.’
‘하지만···!’
억울했다.
애초에 소장을 독살할 생각이었다면 고작 크라켄의 독 따위를 쓰지도 않았을 거다. 이 세상에 소장을 독살할 만한
독이 있는냐가 더 큰 난제지만.
‘정말로?’
미약한 시기와 분노의 감정에 율리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베르너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소장,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내 요리가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 몸으로 만들어주겠어···.’
그가 전의를 다졌다.
“걱정마세요.”
“예?”
“저 요리 못해요. 칼질은 조금 하지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얼굴에 저를 경계하는 게 다 드러나서요.”
“···요리를 못한다면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솔직히 예쁘긴 더럽게 예뻤다. 소장이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니 그런 마음이 든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뭡니까?”
“소장님과의 비밀이라 이야기해드릴 수는 없어요.”
율리아가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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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7. 같잖은 수 >
“오셨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순찰.
모든 편의시설과 죄수들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이 존재하는 한 채의 건물. 그곳을 중심으로 정원이 펼쳐져 있다.
“얌전히 좀 있으라고!”
한 죄수의 머리에 시커먼 독을 뿌리는 식물은 알트미히라는 식인식물이다. 인간과 동물은 물론 몬스터까지
잡아먹는 흉악한 놈. 놈의 독은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지독한 산성이다.
“이쪽은 제압했습니다!”
“그럼 바로 안정제 투입시켜!”
“그러니까 제때 비료 주라고 했잖아! 밥을 늦게 주니까 배고파서 이 지랄이 난 거 아니야!”
식물원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주변에는 마력 결계가 쳐져 있어 식물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소, 소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전에. 커피 한 잔 줘.”
“예.”
영약은 기르기도 수확하기도 까다롭고 힘들다. 하지만 윗놈들의 요구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고 영약의 수확량을
맞추는 것은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설명초는 극한의 설원에서 자생하는 식물이었다. 추운 곳에서 살아가는 주제에 너무 추우면 얼고 조금이라도
온도가 높으면 말라 죽는다.
구하기 어렵고 키우기는 더 까다로운 놈. 그럼에도 유명한 건 만개한 설명초의 열매가 꽤나 정순한 영약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일단은 살아 있습니다. 온도를 찾은 것 같기도 하지만 미세하게 조금씩 변하는 놈인지라···.”
“계속 지켜봐. 씨앗을 몇 개 더 구해줄테니.”
“예.”
“더 없나?”
“더 이상은 없···아, 하나 있습니다.”
“만드라고라! 만드라고라가 싹을 피웠습니다.”
“진짜네?”
만드라고라는 식물이라기보다는 마물이다. 하지만 그 뿌리가 가지는 효용은 어지간한 영약들을 모조리 씹어먹는다.
김우진이 찬찬히 열 명의 죄수들을 훑었다. 키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 있다. 동물의 귀가 나 있다는
것.
처음에는 온갖 사고를 치고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던 그들이 지금은 어느 차원에서나 영약으로 친다는, 엘프도
피워내기 어렵다는 만드라고라를 피워냈다.
중앙의 감옥, 주변으로 넓은 정원, 그 내부에 존재하는 식물원과 도축장, 숲과 호수, 여러 풍취들. 그리고
정원을 감싸고 있는 낮은 담과 그 너머의 광활한 대지.
하지만 그냥 심을 수는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전문가다.
* * *
세계수가 싹을 피우는데는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다. 자연스레 씨앗이 발아하면서 주변의 마나를 모조리
빨아들인다.
“그러면?”
“그래서 사막이나 황무지에 씨앗을 심는 게 일반적이에요.”
하이엘프에게는 아니겠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양분으로 삼을 마나가 필요할 뿐이에요. 부족하다면 보충해주면 되죠. 굳이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싫어.”
그래서 거부했다.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하나가 아쉬운 상황. 굳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를 영약으로 해결해줄 용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포기가 빠르군.”
“이미 마음을 굳히셨는데 제가 억지를 부린다고 들어주시진 않을 거잖아요?”
정확히 봤다.
아, 한 가지 더.
“왜 순순히 다 대답해주지?”
“하이엘프니까요.”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넘기긴 했지만 어머니 나무가 무탈하게 싹을 피우고 자라나기를 바라니까요.”
“세계수의 씨앗을 거래의 대가로 넘긴 것부터가 하이엘프 실격 아닌가?”
“어머니 나무께서도 그 정도는 이해해주실 거예요.”
“대체 무슨 꿍꿍이지?”
“소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탈옥이 아니라?”
“말씀드렸잖아요. 연옥의 죄수들 중, 탈옥을 원치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세계수의 씨앗에 이상한 짓을 해놓은 건가?”
“어머니 나무의 씨앗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해요. 그걸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마 없을 걸요. 어머니 나무께
맹세해요. 그 씨앗에는 어떠한 손길도 가미 되지 않았어요.”
율리아가 사라졌다.
“교도관 한 명 더 붙여.”
“예.”
“···잠깐만.”
“···말이 돼.”
어쩌면.
아무리 김우진이 막는다고 하더라도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조합의 끝이 어딘지 짐작할 수조차 없으니.
* * *
하지만 그게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은 어디서나 중심이 된다. 잘하면 이걸 빌미로 죄수들을 선동해 탈옥에 대한 의지를 불어 넣을 수도
있을 거다.
“식사하세요.”
“어?”
“···율리아?”
“맞아요.”
식판을 치우고 배급구로 고개를 내밀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율리아가 배식 카트를 밀고 있었다.
“···어떻게?”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요.”
“맙소사.”
율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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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8. 씨앗 >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기껏해야 다른 죄수들과 접촉하여 감옥에 대해 알아보고, 일과를 따르면서 감옥의 모습을 직접 확인해보고,
소지가 된 엘프가 찍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
제대로 된 탈옥 계획은 그 이후가 될 거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으니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날뛰는 건
미련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군대에서 지겹게 들었던 기상나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소지가, 아니 소지들이 식사를 배급해준다.
감옥임에도, 죄수들을 혹사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실천하고 있음에도 식사만큼은 지구에서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 맛이 있었다.
돌아가면서 죄수들의 고향 행성의 전경을 보여준다. 어디는 중세고 어디는 늪이며 어디는 정글과 초원이다.
그리고 어떨 때는 한국의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한다.
강민식은 그것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무미건조한 감옥 생활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면서도,
“잘 잤나?”
“예.”
“나는 지쳤고 그래서 이제는 불확실한 계획에 움직이고 싶지 않아. 자네에게는 징벌방이 할만 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니까.”
“그 말씀은 확실하기만 하다면 협조해주시겠다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가는 걸 싫어하는 죄수는 없다고.”
“알겠습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정신교육을 계속되고 있었다. 초원과 정글, 날뛰는 몬스터들. 초원을 달리며
그들과 투쟁하는 수인들.
“모두 나와라.”
“어때?”
징벌방의 고통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죄수의 한계를 파악하고 익숙해질 만하면 그 이상으로
통증을 주니까.
시에나가 의문을 표했다. 그간 잘 지내던 소장이 갑자기 죄수를 끄나풀로 심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왜겠나.”
시에나가 동의했다.
우주는 넓고 차원은 많다. 특이한 돌연변이들도 넘쳐나는 세상. 강민식이 특별하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 * *
“죽여 버릴까?”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부소장.”
“예.”
“세계수가 무엇인지 알아?”
“엘프들이 신성시 여기는 신목 아닙니까?”
“나는 그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야.”
세계수는 나무다. 하지만 단순한 나무라면 엘프들이 그렇게 신성시 여길 이유가 없다.
생명력을 퍼트리고 순수한 마나를 품고 있을 리도 없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계수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 엘프들의 섬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기지.”
“의지를 가진 나무.”
“정기를 가진 것들이 의지를 가지면 그걸 뭐라고 하지?”
“아.”
“정령!”
“그래, 맞아. 세계수는 정령이야.”
“···해보셨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만약 잘못 건드리면···.”
“기껏해야 폭주하기밖에 더 하겠어? 그래도 성체라면 모를까 아직 씨앗이니까 가능성은 있을 거야.”
“일단 하이엘프에게 물어보고 하는 게···.”
“당연히 말리겠지.”
파지직-
* * *
용사는 강자다.
구속구로 인해 힘의 일부가 제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폭발하듯 요동치는 세계수의 정기를 느끼지 못하는
하이엘프는 없었다.
“아.”
무엇에?
“···안 돼.”
“어? 어디 갑니까!”
“죄송해요!”
“1178 번이 도주한다!”
“잡아!”
교도관들은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애애애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그녀의 탈옥을 알렸다.
쿵-
“1178 번. 이게 무슨 짓이지?”
“감히 탈옥을 하려고 하다니!”
분노한 교도관들의 음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눈에 집중되어 있었고 시선은 굳게 닫힌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끼익-
그때, 문이 열렸다.
“무슨 소란이지?”
소장이 나왔다.
율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우우웅-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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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9. 계획 >
“아.”
율리아는 직감했다. 소장이 정확히 어떤 수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성공했다는 것을.
세계수의 씨앗이다. 비록 성체에 비하면 미약할지라도 존재 자체만은 완벽에 가깝다. 그러한 씨앗에 간섭하고
조작하다니.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김우진이다.”
“지구의 인간이고.”
담담하게 중얼거린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점심시간이 코앞인데 소지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죄. 교도관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교도소를 활보한
죄. 그리고 감히 소장의 방에 무력으로 침입하려고 한 죄까지. 벌점 10 만점.”
선고를 내렸다.
아주 작은 호감.
그래도 그게 최선이었다.
* * *
“사기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할 만하다면서요. 익숙해진다면서요.”
“···아. 2 징벌방에 이틀 동안 들어가셨었죠?”
“당신, 혹시 변태에요?”
“예?”
“고통을 즐긴다거나, 고통을 성적 흥분으로 여긴다거나, 고통을···.”
“그만! 저 진짜 그런 놈 아닙니다.”
“글쎄요.”
고작 이틀이었으나 율리아는 어째서 죄수들이 징벌방을 싫어하고 강민식을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저는 진짜 그랬습니다.”
“음, 선천적으로 통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멀쩡합니···아악!”
“멀쩡하네요.”
“···그렇다고 꼬집으실 것까지야.”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틀 동안 징벌방에 들어가 있어서 찍을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도 다행인건 부셔지진 않았네요.”
그 자리에 그 대로 있었다.
“시간이 많다고?”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인간은 짧은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체감도 다르다. 비록 용사가 되어 수명이 아득히
늘어났다고 해도 몇 년을 우습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무려 30 명이 넘어가고.
용사이기 때문이다.
데르카인은 말했다.
“이것만 무리 없이 풀 수 있다면.”
그가 내민 손을 잡으리라, 확신했다.
* * *
곤란해.
드르륵-
그녀가 복도를 따라 카트를 밀었다.
방긋 웃으며 자리를 뜨려는데 진중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잡았다. 고개를 숙였다.
“뭔가요?”
하이엘프가 듣기에 좋은 의미는 아니다. 세계수를 벌목하여 무구를 만들면 어떨까 연구했었던 거니까.
“그런데요?”
“세계수는 정령이자 신목이네. 신목이기에 자아가 생기고 정령이 되었는지, 정령이 깃든 나무이기에 신목이
되었는지 선후는 중요치 않네.”
“모든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세계수도 마찬가지지만 일반적인 나무와는 조금 다르네. 세계수의 뿌리는
깊게, 아주 깊게 파고드니까.”
차원의 핵에까지 뿌리가 닿은, 감응하고 그 힘의 일부에 관여할 수 있게 된 세계수는 반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이제 씨앗인만큼 그 힘은 더욱 약하다.
하지만.
───────────────
# < 010. 상상 >
“아니라면요?”
“아니라고?”
“네.”
율리아가 등을 돌렸다.
세계수의 씨앗에 그렇게 환호했으면서 아직까지 심지 않았다는 것이, 씨앗에 간섭해 무슨 짓을 벌였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긴, 그녀가 생각해도 그녀의 행동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신물이 그 모든 의심을
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소장이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죠. 율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두 개의 거대한 태풍 같았다.
반드시.
그의 눈이 빛났다.
* * *
하지만 강민식은 낙담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어려움은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인간은 본디 도구를 사용하는
종이다.
‘원예반.’
식물을 길러내는 곳. 그곳에는 다수의 영약들 또한 있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데르카인이 그랬으니 틀리진 않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곳으로 가느냐다. 연옥에 갇힌 지 벌써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그 동안 나간 출역은 모두
환경 조성반이었다.
생각의 흐름이 막혔다. 강민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 위에 누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검은 천장이 보였다.
“거래를 하면 되요.”
“거래 말입니까?”
“네.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소장님이 혹할만한 걸 주면 되죠.”
“하지만 제가 줄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카메라라는 거 신기하던데 소장님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요? 기능 자체는 기록구와 같지만 마나가 필요 없는데
작동하는 건 처음 봐요.”
“아니, 그게···.”
율리아나 근현대 문명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나 신기할 뿐이다. 특히 소장은 그와 같은 지구, 한국 출신.
끼익, 옆방의 배급구가 닫혔다. 강민식 또한 배급구를 닫았다.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하나가 있긴 한데.’
하나를 챙겨주긴 했지만 하나로는 부족하다. 한 번에 해제된다면 다행이지만 강민식은 자신의 실력을 잘 알았다.
이 복잡한 술식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해제하기 위해서는 수차례의 도전이 필요하고 당연히 필요한 마나도,
영약도 늘어난다.
‘소장이 혹할 만한 것.’
한국의 드라마를 구해서 정신교육 시간에 틀어줄 정도라면 지구의 문물을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닐 거다.
* * *
“무슨 거래?”
“환경 조성반은 질렸습니다. 다른 곳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어쩌면 하이엘프를 너무 풀어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만약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이게 맞다. 어차피 결과 값은 예정되어 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걸
빨리 확인하고 안도하고, 발생한다면 빨리 조치를 취하는 거다.
* * *
“···어, 그러니까.”
“적어도 넌 짐은 되지 않겠어.”
“그런데 시에나님. 환경 조성반 아니셨습니까?”
“원래는 여기란다. 숲을 벌목하는 게 내게 더 괴로울 거라 생각한 소장이 임시로 옮겨놓은 거고.”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내단이 있다.’
혹은 핵이.
강민식이 눈을 빛냈다.
* * *
처음에는 정원을 벗어나 떨어진 곳에 심으려 했지만 가까이서 보살피며 호감을 가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굳이 영약을 넣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지만 김우진은 인간이었다. 하이엘프처럼 시간의 여유를 즐길 마음은
없었다.
흙을 덮고 가볍게 다졌다.
골칫덩어리 엘프들을 치워버리는 상상은 즐거웠다. 흐릿하게 보이는 희망에 김우진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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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 가정 >
“소지 일은 할만 하고?”
“네. 적어도 나무를 벌목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괜찮네요.”
“축사장에 가는 것보다도 괜찮을 걸.”
그렇기에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그 마나가 소장의 방에서 느껴졌는가. 왜 그날 율리아는 2 징벌방에 들어갔는가.
하지만 애써 부정했다.
모든 종족이 세계수를 특별하게 여긴다. 하지만 다른 종족이 가지는 특별함과 엘프가 가지는 특별함은 또 다르다.
그렇기에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이엘프라는 존재가 세계수와 연관된 무언가를 거래의 대가로 여겨
스스로 소장에게 바쳤다는 것은.
“씨앗? 열매?”
하지만 엘프들이 말하는 씨앗은 다르다. 맺힌 열매를 건드리지 않고 백년을 놔두면 씨앗이 과실을 모두 흡수하고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게 온전한 세계수의 씨앗이다.
“씨앗이요.”
“돌았니···!”
“거기, 경고다. 잡담 그만하고 얌전히 보도록.”
교도관의 지적에 시에나가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광활하게 펼쳐진 숲과 동족들의 영상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속삭였다.
“너 미쳤니?”
“미치진 않았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하이엘프가 세계수의 씨앗을 인간에게 넘겨? 그것도 고작 소지가 되려고?”
솔직하게 답해야 할까? 그래도 같은 엘프이니 비밀을 지켜주지 않을까. 어쩌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게 아니라면?
은은한 제약이 시에나의 심장을 옥죄었다.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의 맹세는 결코 말뿐인 허언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가 과거에 어떤 인간이었는지, 무엇을 하다왔고 어떻게 연옥의 소장이 되었는지 모른단다. 우리를
여기로 보낸 개새끼들과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긴 하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저도 불가능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날 이전까지는요.”
“어머니 나무에 맹세하고 진실이야?”
“맹세하고 진실이에요.”
시에나가 얼굴을 쓸었다. 이제야 모든 전말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래서 더 놀라웠다.
그녀가 알기로 씨앗이라 한들 감히 세계수에 간섭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 딴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하이엘프에 준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백 번 양보해서 가능성을 찾아보자면 아예 제로에
수렴하는 건 또 아니었다.
엘프들에게는 더 없이 친숙한 친구들. 교도관들에게서는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정순한 마나가 느껴졌다. 하지만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달랐다.
“맞아. 정령이니까.”
“정령이라고요?”
“일반적인 정령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본질은 정령이 맞단다. 확실해. 아마 너도 조금 더 오래 감옥에
있다 보면 깨닫게 될 거란다.”
“잠깐만요. 간수들이 정령이면 소장은···.”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겠지.”
그리고 정령이 먼저인지, 신목이 먼저인지 선후에 대한 의견이 갈리지만 그 본질이 나무이자 정령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 * *
김우진이 둥글게 깎은 돌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강민식은?”
“아직까지는 무난히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끝?”
“특이사항으로는 생각보다 아주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인이랬지.”
“한 번쯤은 괜찮아.”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똑똑-
“부소장.”
“예.”
“내가 잘 보관해두라고 한 것, 어디있지?”
“선반 위에 있습니다.”
“가지고 와.”
“···소장님?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점심이 너무 반가워서. 부소장, 문 닫아.”
“예.”
끼익-
문이 닫혔다.
* * *
강민식이 칼을 들고 섰다.
“맞아.”
“독살해도 됩니까?”
“소장을?”
“아뇨. 저놈이요.”
“해도 된단다. 베르너가 좋아하겠네. 베르너만. 넌 징벌방에 들어가고.”
전체적인 외형은 소와 비슷하나 5m 가 넘어가는 거구. 비늘은 잘 단련된 강철보다도 단단하고 발톱과 뿔은 어느
명검보다 날카롭다.
강민식이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마나는 더디지만 흐른다. 구속구는 마나를 제한하는 것이지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길 수 있을까?
온전히 하나를 홈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싸우는 도중 영단에 손상이 가해져 파편이 일부 쪼개지고 소실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두드드드-
강민식이 마주 달렸다.
콰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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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2. 외출 >
10 월 15 일. 맑음.
오늘 세계수를 심었다.
마나가 풍족하면 더욱 빠르게 생장한다는 하이엘프의 말을 믿고 29 개의 영약을 함께 동봉했다.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10 월 17 일. 흐림.
율리아가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세계수의 씨앗을 보여달라는 헛소리다. 바로 내쫓았다.
10 월 25 일. 흐름.
놈의 목적을 더 특정 지을 수 있다.
영단 혹은 영약.
10 월 27 일. 강풍.
그날이 기대된다.
11 월 1 일. 단풍.
아니면 드워프들과 관련된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것도 좋다. 드워프들에게 엘프들의 세계수에 비견되는 무언가가
없을까?
율리아가 또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계속 거절만 할 수는 없어서 만났다. 씨앗을 보여 달라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11 월 11 일. 비.
끔찍한 혼종이다.
11 월 15 일. 맑음.
세계수를 심은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도 없다. 영약을 그렇게 때려 부었는데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11 월 20 일. 맑음.
연옥은 구조는 단순하다. 연옥의 건물을 중심으로 담이 둘러싸고 있다. 그 내부가 정원이며 외부는 또 다르다.
정원의 외부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마법처럼 사막, 설원, 산, 숲, 호수 등의 공존할 수 없는 여러
환경들이 펼쳐져 있다.
놈들끼리 싸우는 거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만 한 교도관 말로는 이레귤러가 발생한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
12 월 1 일. 눈.
나쁘지 않다.
“늙어서 이제 더 할 힘도 없네.”
“그럼 출소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말인가?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탈옥을 할 계획은 없고 말이죠?”
“물론이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시죠.”
“발랐네.”
“하려면 잘하셔야 할 겁니다. 이번에 걸리면 그냥 안 넘어갑니다. 못해도 3 징벌방, 일주일 이상으로 갈 테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
“안한다니까. 내가 바본가? 그렇게 실패하고 또 하게?”
전혀 신뢰성이 없었다.
12 월 15 일. 눈.
또 눈이 내렸다.
* * *
일견 평화롭다.
“교도관이 당했다고?”
교도소 밖에는 워낙 몬스터들이 많은 지라 그리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도관이 당했다는 건 놈들의 수준이 김우진의 생각보다 조금 더 위라는 뜻이었다.
“어떤 놈이지?”
“타르스크가(Tarsque)입니다.”
엄니는 길고 날카로우며 악어 주제에 땅에서도 무척이나 빠르다. 꼴에 드래곤의 아종이라고 숨결의 권능이 있는데
독무가 토해져 나온다.
타르스크가의 거대한 주둥아리 속으로 교도관 하나가 들어갔다고 한다. 아마 지금쯤 놈의 위장에서 소화가 되도
열 번은 되었을 거다.
그리고 생태계가 망가지면 먹잇감을 잃어버린 놈들의 광기가 교도소로 향하게 된다. 오래 전에 한 번 그랬던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제가 가서 처리합니까?”
“아니, 내가 직접 가지.”
당도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교감이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아.”
율리아가 가진 꿍꿍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모든 죄수들에게는 탈옥이라는 공통된 목적이 존재하고
세계수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는 뻔하니까.
“1178 번을 불러.”
잠시 후, 율리아가 올라왔다.
율리아는 쉽게 납득했다. 이레귤러라는 게 쉽게 나타나는 종은 아니지만 용사들의 감옥이 있다는 것보다 놀라울까.
율리아가 사라졌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율리아가 말했나?”
“극상의 진미를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베르너가 자신했다.
“타르스크가의 외피는 어지간한 몬스터들을 다 씹어 먹을 정도로 단단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속살은
부드럽고 달콤하기 그지없죠. 몬스터들 중에서도 극상의 진미에 꼽히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그 몬스터가 변종이 되었다. 최상품 위에 극상품이 나타났으니 베르너로서는 반드시 잡고 싶었다.
“싫어.”
“하, 하지만···!”
“시체는 최대한 챙겨서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소장님이 사냥하면 살이 다 망가지지 않습니까!”
“그럼 네가 소장 하던가.”
탁-
문이 닫혔다.
“독도 챙겨 오실 겁니까?”
“대답해야 되나?”
다데기를 풀고 밥을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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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3. 이게 뭐야 >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정문을 나서기 전, 씨앗을 심어둔 곳으로 슬쩍 시선을 옮긴다.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쓸데없는 기우. 하지만 연옥의 소장이라는 자리가 기우라 할지라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자리긴 하다.
끼익-
정문의 철문에 열쇠를 꽂아 넣은 김우진은 첫 발을 내딛었다.
붉은 모래가 그를 반긴다. 열을 빨아들이는 특성의 붉은 모래는 사람의 수분을 빼앗고 쉽게 지치게 만든다.
“그냥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하이엘프는 땀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섣불리 자신의 본심을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김우진은 잠시 고민했다.
아니, 정말 무방한가?
“평균은?”
“마나가 지나치게 풍부하지만 않았다면 보통은 10 년 정도면 발아해요.”
10 년. 그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에 비하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지나치게 길다.
“지나치게 풍부하다의 정의는 어느 정도지?”
“글쎄요. 지나치게 풍부하게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애초에 하이엘프라고 한들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기회는 몇 번 없어요.”
제법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게 중요한가?”
“당장은 씨앗에 무슨 짓을 해두셨는지가 더 중요하긴 하죠.”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데.”
“어머니 나무의 씨앗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해요. 그것을 뚫고 간섭하고 성공한다는 사례가 없어요. 그러니
하이엘프로서 궁금한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내가 씨앗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궁금하다는 거군.”
“직설적이고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되겠네요.”
두드드드-
막이 진동한다. 겉 표면이 아닌 내부. 땅속에서 올라오는 울림은 무언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샌드웜인가요?”
“아마도.”
콰아아아!
“와.”
“특이한 구조네요.”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김우진의 의도가 들어간 바가 맞다. 비록 죄수들의 손을 빌렸으나 그 계획과 설계는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지난 20 년 간 참 많이도 갈아엎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니었다. 기형적인 환경 구조를 띠고 있는 것도, 몬스터들이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도
그가 연옥의 소장이 되기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것들이었다.
둘은 빠르게 날았다. 사막을 지나 늪지대에 도착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율리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모든 대화의 주제가 세계수를 향하고 있다. 세계수의 발아와
생장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영약의 개수가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이미 심으셨군요?”
힌트가 너무 많았다.
9 개도, 19 개도 아니고 29 개?
미친 건가. 하이엘프는 자신이 살면서 이토록 놀란 게 얼마나 있었을까 고민해 보았다. 없었다.
그래놓고 태평하게 저런 질문이라니. 하나만 던져놔도 전쟁이 일어날 수준의 영약을 29 개나 때려 박아놓고.
“어머니 나무를 일반적인 식물과 비교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과생장했으면 과생장했지 죽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영약이 풍족하면 굳이 다른 마나에까지 손을 댈 필요가 없어서 준비를 끝마칠 때가지 알 수 없···심은지 두
달이나 됐다고요?”
우지끈-
율리아의 고함은 잔잔하게 습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습지의 주인들은 침입자들을 반기지 않았다.
질척이는 지에 깊은 족적을 남기며 나타난 건 거대한 바실리스크였다. 다섯 마리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쿵, 천천히 거리가 가까워졌다. 몬스터 특유의 악취와 진득한 살기에 율리아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찰칵-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나간 자리는 안다고 했다. 고귀한 하이엘프인 그녀가 언제 마나를 구속당할 일이 있었을까.
천천히 검을 곧추세웠다.
푸하앗-
코앞까지 다가온 선두의 바실리스크가 입을 벌렸다. 푸학, 녹빛의 독무가 뿜어져 나왔다.
“나쁘지 않아.”
그녀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강철보다 단단한 바실리스크의 비늘들이 떨어져 나간다. 키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은
엘프의 고막을 충분히 타격하지 못하고, 독무는 여전히 닿지 않는다.
“나쁘지 않아.”
율리아는 지나치게 협조적이었던 탓에 후자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지금의 관찰은 당시 이루어지지 않은 상담의
일부였다.
‘···언제?’
“···무척이나 빠르시네요.”
“죄수들을 관리할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진짜로 29 개에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씨앗에는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건데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거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까지 이야기 해줄 생각은 없는데.”
“저는 순순히 다 이야기해드렸잖아요.”
“너도 왜 씨앗을 나로 하여금 심게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잖아.”
폐부를 찌르는 말에도 율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짐작하고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
바람이 분다.
나무가 흔들린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마나가 휘몰아친다.
연옥 방향이었다.
드드드드-
연옥과 늪지와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그럼에도 아주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범인을 초월한 인간과 하이엘프의
눈에 연옥 위로 피어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이게 되네?”
그건 나무였다. 무척이나 흐릿하고 작지만 분명히 나무였다.
“어떻게 고작 두 달 만에···.”
29 개면 그럴 만 할지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못해도 10 년···. 거기다 발아하자마자
저런 과생장은···.
“타르스크가···!”
────!
찢어질 듯한 굉음에 율리아가 귀를 막았다. 열기에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그 위로.
“···미쳤어.”
* * *
또 인정한다.
“씨발,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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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4. 대안 >
연옥에 들어온 그녀가 순순히 소장의 말에 따른 것은, 어디까지나 구속구만 풀면 소장이라 한들 자신을 핍박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용이었다.
너무 우습게 보았다.
인정했으나 이미 늦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두 가지.
소장이 어머니 나무에게 해놓은 짓이 아무런 효과가 없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 * *
난장판.
뿌리 전체가 연옥을 뒤덮고 있으며 울창한 나무 하나가 옥상에서 우뚝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연옥의 본래 형태는 사라진지 오래. 오랫동안 방치되어 넝쿨로 뒤덮인 폐교를 보는 것만 같다.
“소장님!”
얌전히 김우진의 뒤를 따라오며 창밖으로 보이는 세계수의 면면을 살피던 율리아가 흠칫 놀랐다.
“방으로 돌아가라.”
“잠깐만, 잠깐만요. 조금만, 조금만 더 밖에 있으면 안 될까요? 독방에서는 어머니 나무를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한 시점에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알 텐데.”
“이곳에 어머니 나무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다 말씀드릴게요!”
“궁금한 게 생기면 부르도록 하지.”
“아니, 그래도! 제발! 이건 절 두 번 죽이는 거예요!”
흔히들 세계수에 대해 모르는 자들이 하는 착각이 세계수가 오직 하나의 줄기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뻗어나간 줄기들은 주변을 완전히 잠식하고 나아가 연옥으로 향했다. 연옥의 벽면을 타고 옥상까지.
적당히 자란 세계수는 자신의 의지를 피력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성장이라면 충분히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정령체로서 현현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렇지 않니?”
- 삐이이이이!
* * *
‘왜 이렇게 철저해?’
영단의 갈취.
강민식이 축사장 혹은 원예반에 나가고자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억압된 마나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축사장이었기에 영단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축사장의 수많은 몬스터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유는 많았다.
그는 영단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아주 사소한 양을 조금씩 긁어내 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영단에 문제가 생기면 소장이 난리를 치기 때문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조금 과하다. 어쩌면 저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행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저건 또 뭐지.’
엘프와 하이엘프들이 세계수의 전언이라며 강민식을 돕기는 했지만 세계수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연옥을 뒤덮은 나무가 세계수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저 세계수가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저것이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마나가 풍부해.’
두 달이 넘게 축사장에 출역을 나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영단을 빼돌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마나가 부족해 제대로 된 시도는 해보지 못했지만 술식을 파훼하기위한 조사는 매일 같이 행했다.
* * *
죄수들간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행태는 누가 봐도 세계수에 대해 의견을 교류하는 것조차 원천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율리아. 의도?]
데르카인이 응답했다. 교도관과 소장의 눈을 피해 간신히 만들어낸 통신기는 마나를 극도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
구형적인 체계를, 아주 단편적인 메시지만을 보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용중에는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흩뿌려 평소에는 잘 사용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주 유용하다.
[확실.]
통신기의 다른 주인은 시에나다. 같은 엘프로서 그녀는 율리아가 의도적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소장에게 넘겼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탈옥?]
[불확실.]
하지만 왜일까. 그 목적이 탈옥인지는 불분명하다 여긴다. 죄수의 최우선 목적이 탈옥이 아니면 무엇일까.
[이유.]
[어머니. 이런.]
어머니는 어머니 나무. 이런은 이런 일이다. 어머니 나무를 이런 일에 쉽게 소비하는 건 하이엘프 답지 않다는
뜻.
나름 납득이 가면서도 가지 않는다. 드워프이기에 하이엘프와 세계수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에,
탈옥보다 중요한 건 그가 생각하기에는 없기에.
* * *
하지만 가끔, 수정이 제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마나를 받아들이고 빛을 발하며 작동한다. 그리고 차원 너머
누군가의 통신을 받아들인다.
새로운 죄수의 입소를 알리거나, 연옥에 문제가 생겼을 때다.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는 김우진이 결코 달가워 할
일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소장님.”
빛을 발하며 미약한 진동을 발하는 숙정구를 그대로 둔 지도 10 분이 지났다. 그 동안 수정구에 도달한 통신은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탁탁, 가볍게 탁자를 두들기던 손가락이 결국 수정구로 향한다. 김우진의 마나에 반응하며 보다 격렬한 빛을
발한다.
[늦게도 받는군.]
[아아, 들리나?]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불의의 변수는 딱히 선호하지 않아서 말이지. 나도, 다른 놈들도.]
[제대로 묻지. 연옥에 문제가 생겼나?]
[우리는 널 신뢰하고 있다. 네 능력, 네 성향, 그리고 네가 보여준 성과까지. 연옥의 소장으로서 너보다 적합한
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설이 길군.”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연락이 온다. 하지만 뚜렷한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경고다.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잘하라는.
“고맙다고 해야 되나?”
[아니.]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좋은 건 이쪽이기에 그런 것뿐이다. 그게 너와 우리의 계약이니까.]
툭, 연락이 끊어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저놈들은 멍청한 선택을 했어.”
“하지만 세계수가 자라난 것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결계에도 유의미한 변질이 일어났다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는 게 좋을 텐데 왜 가만히 그냥 넘기는 걸까요?”
“두 가지 중 하나겠지.”
정말 사소하다고 생각하거나.
“또 다른 대안이 있거나.”
───────────────
# < 015. 기름 >
똑딱 똑딱-
방 한 칸에 놓인 괘종시계의 추가 흔들린다.
탁탁-
세상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무엇이든 좋기만 한 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 이면에는 정체를 모를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있었을 거다.
지금의 상황 또한 그렇다.
연옥은 튼튼하다.
용사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인 만큼, 외벽부터 내부의 시설들 하나하나 단단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공격의 주체가 세계수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세계수. 연옥을 감싼 신목은 그 과분한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가지와 뿌리가 연옥을 옥죄었고 외벽은 물론 내부까지 일부 손상되었다. 마나의 파동은 연옥의 관리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켜 거의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무너진 일부를 다시 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김우진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복구 작업에 죄수들을 동원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들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잡일만 시키고 중요한 부분에서
배제한다고 해도 용사들인 만큼 최악을 가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죄수들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연옥의 수복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특별하게 지어진만큼 수복할 때도
그만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하다.
역시 일장일단이다.
“···좋아, 결정했어.”
* * *
“죄수번호 1088 번, 1099 번, 1152 번, 1169 번, 1191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1178 번, 앞으로.”
율리아는 소지가 되기 위해 세계수의 씨앗을 바쳤다. 비록 그게 계획의 일부였다고 한들, 씨앗의 가치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게 다 뭡니까?”
“재료다.”
하지만 출역과 연옥의 수리는 엄연히 다르다.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뛰어난 장인이자 마도공학자다.
연옥이 어떤 구조인지, 얼마나 복잡한 체계로 얽혀 있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그곳에 새겨준 술식과 마법진 하나하나가 연옥을 지탱하고 죄수들을 압박하며 교도관들을 편하게 만든다.
대놓고 중요한 부분을 죄수들에게 맡기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한 세상을 구한 경험이 있는 용사들이다. 슬쩍
보기만 해도 나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자들이다.
“왜, 하기 싫은가?”
개인면담에서는 나름의 예의를 차려주지만 모두가 함께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말을 툭툭 내뱉는 건방진 놈.
다르게 말하면 공방은 연옥이 아니라 다른 상급 장비들을 만들 때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드워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쪽에 공방을 만들어라. 재료는 충분하고도 남을 거다. 대신 설계도를 비롯한 모든 제작에 교도관들을
포함시키고 보고해가며 하도록.”
“명심하지.”
“분명히 말하는데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무언가를 만들게 되었다고 해서 쉽게 나갈 수 있을
만큼, 연옥과 내가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
“일단 설계도부터 만들도록 하겠네. 이유야 어쨌든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지. 공방이 하나 쯤 있었으면 싶겠다고
모두 생각하지 않았나?”
“예.”
“물론입니다.”
“최대한 크고 넓고 좋게. 재료는 어차피 충분한 것 같으니.”
“예.”
“이건 기회네. 공방이 있고 없고는 우리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경거망동하지는 말게.
어쩌면 일부러 파놓는 함정일 수도 있으니.”
“···소장이 저희들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겁니까?”
“모르네. 하지만 조심해서 좋을 건 없지 않나.”
* * *
땅땅땅-
일종의 박자감이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분노하며.
땅-
하지만 머리는 잊었을지언정 몸은 기억하고 있다. 평생을 해온 일을, 업으로 삼아왔던 일을 쉽게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움직임은 어느새 능숙하게 변했다. 불협화음처럼 끼긱 거리던 소음도 웅장한 악장이 되었다.
어찌 잊고 살았을까. 이 즐거움을.
어찌 무시하고 살았을까. 육체의 비명을.
드워프란 족속들이 그렇다. 한 번 망치를 잡으면 죽을 때까지 놓을 수 없다. 죽기 직전까지 공방에 출입하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즐기는 난쟁이들이다.
‘이것이었나.’
마약. 드워프에게 있어 공방의 일은 마약과도 같다. 간신히 외면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으니 드워프들은 본래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다.
‘탈옥.’
짓밟힌 희망에 절망했고 정신을 차리는데 5 년이 걸렸다. 그리고 15 년을 준비했다. 천천히, 성급하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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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6. 이유 >
복잡하게 꼬여있는 술식과 마법진은 착용자의 마나를 제한한다. 흐름을 막고 마나 자체를 통제한다.
파지직-
“크으윽···!”
아프다. 미친 듯이 아프다.
몇 번째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에 주워온 세계수의 나뭇잎은 진즉에 동이 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출역을 나갈 때마다 나뭇잎들이 추가 된다는 것.
어째서인지 교도관들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찮은 일반 나무들과는 엄연히 다름에도.
어쩌면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고작 그 정도의 마나를 모아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는 자신감. 아니, 맞을 거다. 그
거지 같은 소장의 얼굴을 떠오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파삭-
마나가 제약된 상태에서 외부의 마나를 끌어와 술식을 해제하는 과정이다. 쉽지 않다. 결코 쉬울 수가 없다.
용사이니 강하지만 아무리 적들은 더 강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훈련해도 점차 올라가는 적들의 수준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검을 버리지는 않았다. 마법을 버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더 강한 검술, 더 강한 마법을 찾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러니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찾았다.”
필요한 건 오직 두 가지다.
더 많은 마나와 더 많은 실험.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 * *
연옥은 독립된 공간이다. 그런 연옥에 무언가를 들어오려면 반드시 상부를 거쳐야만 한다.
그들은 김우진이 무엇을 하든, 쉽사리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감시의 눈길을 거둔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수지.”
“랜드마크를 바라신다더니?”
“말이 그렇지. 말이.”
“하지만 결국 잠깐의 유예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들킬 수밖에 없습니다.”
호송대는 상부의 앞잡이다. 세계수를 아예 뽑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들은 세계수를 발견할 것이고 보고할 것이다.
부소장은 릴리라는 이름이 과거에 김우진이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태클 걸지 않았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확실히 친해졌다는 확신이 생기면 하이엘프를 부르는 거지.”
드워프 장인들의 마공학물품은 어지간하게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 장인이 어느 차원에 내놔도 꿀리지
않으며, 용사라는 특수한 힘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 * *
“···이게 다 뭐예요?”
“뭐긴, 원예반이지.”
정확히 신은 아니지만.
‘만드레이크?’
영초들 중의 영초라고 불리는 최상급의 영초였다. 키우기 어렵고 재배하기는 더 어려운, 하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순수한 마나를 얻을 수 있는 영초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간다. 이런 곳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수상하다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대화해도 되요?”
“옆에 식물에 나란히 작업하는 건 흔한 일이란다. 작업하면서 사소한 잡담 정도는 그냥 넘어가주고. 다시
본론으로. 네가 준 씨앗이지?”
“네.”
“네가 씨앗을 주고 어머니 나무가 자라나기까지 고작 두 달이야. 어떻게 두 달 만에 어머니 나무가 발아하고
과생장한 거니?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대체 무슨 짓을?”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빈 곳간은 채워야 한다. 소장이 어째서 엘프를 원예반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깼는지 이해가 갔다.
“목적은 탈옥?”
그렇기에 다른 죄수들은 몰라도 엘프들은 안다. 세계수가 단순히 탈옥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씨앗을 주고
연옥에서 자라나게 했다면 무언가 더 큰 목적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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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7. 차별주의자 >
삶은 투쟁이다.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다면 쟁취해야 한다. 싸워고 이겨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울부 짖어야 한다.
소장의 태도와 귀쟁이, 난쟁이들에 비해 자신들이 가져가는 것이 현저히 적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귀쟁이들에게는 세계수가 생겼고, 난쟁이들에게는 공방이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언가 쥐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틀리다.
강자에게 굴종하고 복종하는 것 또한 투쟁의 한 방식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쪽이다.
“맞은 지 조금 오래 됐지?”
용사란, 능히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는 자들이기에 보다 재능이 넘쳐나고 전투에 특화된
자들이 용사가 되는 건 당연했다.
전투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싸워야지만, 강해야지만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온 그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힘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더 심했다.
그래서다.
강함을 숭상하기에 강자를 존중한다. 강자에게 굴종한다. 거기에는 종족도, 성별도 초월한다.
김우진은 모든 수인들보다도 압도적인 강자다. 상담을 통해 확실히 서열을 정리했고 수인들은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그래서 무얼 원하는데?”
강함에 대한 숭상이 종족을 따르지 않다보니 자신들을 꺾은 김우진에게 거의 무분별한 충성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이들을 이용해 꽤 재미를 봤었다. 자고로 감옥에 들어왔을 때, 다른 죄수들은 공포의 대상이고 김우진이
원할 때마다 그 역할을 잘 해줘왔으니까.
“들어주시는 겁니까?”
“들어는 보고.”
타르칸이 반색했다.
빠악, 갑작스레 얼굴을 얻어맞은 타르칸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원위치 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냥 짜증이 나서. 나가봐.”
“예, 감사합니다! 연옥 복구 작업에 더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 해놓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세계수 사태 이후로 감옥이 예전보다 어수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저것 바꾸다가 저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아무것도 안할 거라는 걸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우진은 그 꽃밭과도 같은 희망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데르카인과 시에나, 타르칸을 유심히 살펴. 탈옥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셋이 중심이 될 테니.”
“예.”
“어디가십니까?”
“옥상.”
* * *
“괜찮니?”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나갈 수 없다.”
“제발, 제발요!”
“죄수번호 1178 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어머니 나무가 절 부르고 있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옆에서 적절히 말려주는 시에나 올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즉에 사고를 쳐도 백 번은 쳤을 거다.
하지만 율리아는 반드시 세계수를 봐야 한다. 그리고 세계수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소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마찬가지.
방법이 무엇일까.
먼저 구원의 손길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평생을 가도 ‘모든 속셈을 말하고 구차하게 빈다.’ 외의 선택지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엘프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주저하지 않고 곧장 뒤따랐다. 무조건 간다. 가서 무릎을 꿇든, 그냥 빌든
세계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도착하면 알 거다.”
도착하지 않아도 안다. 점점 더 진하게 풍겨오는 세계수의 기운에 맞춰 그녀의 박동도 더욱 빨라졌다.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복도와 계단을 걸으며 그녀의 머리는 터져버릴 것만 같이 맹렬히 회전했다.
진짜로 그렇게 악독할까 싶으면서도 그녀를 괴롭히기에는 가장 적절한 방법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간절히 빌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앞에 섰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그녀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뭐하는 거지?”
“···어머니 나무시여.”
세계수는 거대한 나무다. 통틀어 하나의 신목이라고 말하지만 수많은 갈래의 가지들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잔가지가 있으면 보다 중요한 줄기가 있다. 율리아는 옥상에 우뚝 선 줄기야말로 세계수의 중심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김우진은 그녀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조용히 눈짓 해 교도관을 내보냈다. 넓은 옥상 위에는 한 명의 사람과
한 명의 하이엘프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만이 남았다.
율리아가 마지막 말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대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그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하지만 김우진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 챘다. 애초에 그녀를 불러온 것 또한 비슷한 의도였다.
“그러지.”
과도한 영약으로 인해 벌써부터 성체에 가깝게 자라나고, 정령체로서 현신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속은 갓 태어난
아이와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김우진이 생각하기에 아이는 단순하다. 지극히 단순하기에 어렵기도 하지만 반대로 쉽기도 하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신호를 받아들인 파랑새 한 마리가 그들의 사이로 툭 떨어졌다.
김우진은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답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대답 대신 세계수의 정령을 불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하고자 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
“좋아요. 한 번 해보죠.”
그렇기에 은근한 불안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도전을 받아들였다.
손을 뻗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삐익, 삑. 파랑새의 형태를 한 정령체가 날개를 퍼덕이며 반가운 소리를 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율리아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당황시키는 건 그 이름 자체가 아니라
정령체가 릴리라는 이름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 번도 본적도 없다. 어머니 나무는 그냥 어머니 나무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릴리야. 이리 온.”
삐익-
“아···.”
“···세계수, 맙소사.”
세계수가 나를 고른 것도 맞는 현실이고.
그저 담담하게 재차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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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8. 기회 >
확실히 연옥을 뒤덮어버린 세계수의 모습은 그리 정상적이지 않다. 허나 율리아가 가진 의문은 그걸 왜 본인에게
물어보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 나무께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릴리라는 이름도 지었고 저보다 소장님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말이죠.”
“질투하나?”
“질투요? 누가요? 제가요?”
“비록 지금은 당신의 정신계 마법에 말려들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계시지만 어머니 나무께서는 언제고 제게
돌아오실 거예요.”
“그래, 그렇다고 해줄게.”
“그렇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거예요!”
“어쨌든, 나도 직접 이야기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단순한 대화로는 아직 고차원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지가 않아서
말이지.”
원치 않는 놈들.
율리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목적이 있어 연옥에 들어왔고, 하잘 것 없는 직책을 위해 거래를 명목으로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
세계수는 뿌리를 내리고 발아했으며 지금의 상황까지 왔다.
틀어진 계획은 더 이상 혼자 진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틀어진 계획은 조력자가 필요했고 내부자일수록 좋았다.
소장 김우진은 거기에 더 없이 최적화된 인물이며 자신의 직책에 그렇게까지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마지막까지 한 번 의심한다.
아직은 유보하기로.
* * *
강민식은 자신의 손 위에 놓인 작은 구슬 하나를 바라보았다.
한 드워프를 통해 전달 받은 마력 증폭기다.
‘역시 드워프.’
그것을 강민식은 자신의 이빨 안쪽에 넣었다. 본래는 비장의 독단을 숨겨 놓던 장소다. 연옥에는 불시 검방이라는
성가신 것이 있으니 잘 숨겨놓으라는 드워프의 말이 있었다.
우우웅-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의 마나들이 그의 육신으로 들어온다. 마나로드를 타고 지나가 증폭기를 만난다.
그리고 한층 강화되어 전신을 노닌다.
파직-
치이이익-
아프다.
‘나간다.’
‘반드시 나간다.’
그리고 구속구가.
치이이익-
“······!”
그의 욕망에 응답했다.
* * *
드드드-
연옥이 진동한다.
대지가 진동한다.
카가각-
우우웅-
뒤따르는 소음이 고막을 때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나의 파동이 주변을 어지럽힌다.
김우진이 신음을 삼켰다. 세계수는 그의 부탁에 응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다만, 느리다. 무척이나 느리고 시끄러우며 움직일 때마다 일으키는 미세한 마나의 파동은 주변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어머니 나무가 근본이 정령이냐, 나무냐 말은 많지만 결국 그 몸체가 나무라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나무가 이동하는 게 빠를 리가 없죠.”
일반적인 나무를 옮기는 것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헌데 세계수다. 무려 세계를 지탱한다는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
“발아할 때는 엄청 빨랐잖아?”
“소장님이 29 개나 되는 영약을 심어놨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뭇잎들이 천천히 이동한다.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햇빛이 차츰차츰 영역을 넓혀 나간다.
- 삐이?
“이리 온.”
- 삐익.
손잡이에 앉은 릴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얼굴을 비비는 애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잠시 후, 부소장이 나타난다.
“부소장.”
“예, 소장님.”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부소장이 주변을 확인한다. 미미하게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가지와 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다.
하나만 있어도 민감한 감옥에 네 가지 문제가 한 번에 들이닥쳤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승냥이들이 기다리던
탈옥의 순간이다.
“때요? 무슨 때요?”
저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상황이라는 건, 모두에게 공평하다. 저들에게 기회는 연옥의 교도관들에게
위기며 보다 경각심을 가지게 만든다.
움직인다면 지금이다.
- 삐이이이.
- 삐이?
* * *
쿠구구구-
미약한 진동은 곧 거대한 떨림이 된다. 촉수처럼 퍼져나간 가지와 뿌리들이 하나, 둘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이게 무슨?”
“지진이다! 지진이 일어났어!”
“모두 대피해!”
“지진이 아니야! 세계수가 움직인다!”
세계수의 준동은 정원의 대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자연스레 그 위에서 각자의 업무를 하고 있던 죄수들 또한
이변을 눈치 챘다.
흔들리는 대지에 연금술을 멈춘 데르카인이 밖으로 나왔다.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세계수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본인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새로운 소지를 임명한 적이 없는 소장이 그녀를 소지로 임명한 점,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자가 하이엘프말고 또 없다는 점에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진실이었다.
“생각이 다 있겠지.”
“물론 저희야 솔직히 어떻게 복구하나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놓기는 했습니다만.”
세계수의 뿌리는 연옥을 완전히 옥죄고 있었다. 부서진 부위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을 뒤덮은 뿌리와
가지를 제거해야 하는데 보통 나무가 아니라 세계수다.
우지직-
콰아앙!
그때, 뿌리와 가지가 건드린 연옥의 균열들이 더욱 커졌다.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고쳐야 할 게 많아지겠군.”
“그런데 생각보다 느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군. 무척이나 느리네.”
“지금이 기회네.”
데르카인은 깨달았다.
───────────────
# < 019. 결행 >
그게 당연한 곳이 감옥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 뛰고 있으면 걷고 싶고, 걷고 있으면 서고 싶다.
나갈 날짜가 정해진 일반 감옥의 죄수들과 달리 연옥의 죄수들은 기약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 자유를 갈망하고,
탈옥을 준비한다.
“모두 나와!”
“일렬로 서도록.”
“크윽···! 이거 놔!”
“얌전히 있게.”
“데르카인님? 이게 대체 뭡니까?”
“검방이네. 죄수들이 연옥에 허가되지 않은 물건을 들였는지, 들이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지.”
“그게 무슨···!”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은 했네.”
데르카인이 쓰게 웃었다.
드워프들에게 공방을 쥐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세계수의 이동이 갖가지 변수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식사입니다.”
소지, 베르너가 가져다주는 아침 식사까지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정신 교육 시간이 되지
않았다. 연옥을 수리하기 위해 공방으로 가지도 못했다.
길다. 너무 길다. 닷새라면 세계수의 이동은 완전히 끝나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갈구하던 기회도 사라진다.
“소장은 뭘 하고 있나?”
“매일 같이 세계수한테 간다는 걸 제외하고는 딱히 모릅니다. 애초에 밥 먹을 때를 제외하면 저를 부르는 일도
거의 없어서.”
소장의 신경이 세계수에 쏠려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게 지금이 탈옥의 적기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대충 어떤 그림인지 예상이 갔다. 다른 것들과 달리 영초들은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 세계수가 불안정한 마나를
발산하고 있으니 더 그럴 거다.
엘프들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 소장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다.
* * *
“자나?”
“안 잡니다.”
아무리 작다고 한들 교도관들의 수색은 제법 빡빡하다. 데르카인은 강민식이 그가 준 증폭기를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입 안에 넣어놨습니다.”
“입 안도 검사했을 텐데?”
“어금니 안쪽에 본래 독단을 숨기고 다니던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에 넣어놨습니다.
크기가 무척이나 작아 우겨넣으니 어떻게든 되더군요. 마력 차단 각인이 새겨져 있어서 마나가 새어나올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더욱 목소리를 낮추고.
진짜 비장의 한 수를 이야기했다.
* * *
데르카인이 세계수의 이동이 탈옥의 적기라고 여겼던 것처럼, 소장도 똑같이 생각했다.
영초를 위해 엘프들은 원예반으로 출역에 나가야 했다. 소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영초란
개복치 같아서 신경을 써주지 않으면 금방 죽으니까.
[때. 당도.]
때가 다가왔다.
탈옥 계획은 드워프들만, 수인들만 새운 것이 아니었다. 드워프, 수인, 엘프를 비롯해 다크엘프, 거인족까지.
모든 죄수들이 동참했고 모두가 협력해야만 한다.
그만. 하지만 이건 무어라 해석해야 할까. 통신을 그만? 아니, 아니다. 짧은 한 단어지만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해하고 싶지 않을 뿐.
탈옥을 그만 두겠다.
“어째서?”
단순히 자기가 아니다. 시에나 올름은 엘프 죄수들을 대표한다. 그녀가 탈옥을 포기했다는 것은, 다른 엘프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대체 왜···?”
연옥의 탈옥은 혼자서 이룰 수 없다. 모든 죄수들이 하나가 되어 조금씩, 조금씩 쌓아나가야 하는 금자탑이다.
[상황. 변.]
사실, 변한 건 많다. 하이엘프라는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가 들어왔고 세계수가 발아했다. 감옥이기 때문에
대놓고 표현하지 못할 뿐, 평범한 세계였다면 엘프들에게 있어 엄청나게 큰 대격변이다.
[율리아? 세계수?]
[모두.]
[포기. 우리 모두.]
[미안. 하지만.]
이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뿌득, 데르카인은 엘프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연옥에서 길러낸 인내심은
간신히 그의 감정을 억제했다.
“나는 자네들에게 세계수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네. 하지만 자네들이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는 들어서 짐작하고
있지.”
“대체 무엇인가. 율리아 카르센,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세계수까지 제물로 삼아가며, 자네들이 탈옥을
포기하면서까지 하이엘프가 이루려하는 것이 무엇이냔 말이야!”
[말할 수.]
말할 수 없다.
다행히 완전히 손을 놔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가능성은 있다.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것만 못하지만.
[더 이상. 사정.]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묻지 않겠네. 엘프들만의 사정이라는 게 있겠지.”
[상황. 인지?]
[인지.]
알고 있다.
[도움. 절실.]
[해방.]
[언제?]
언제?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소장이 세계수에 관심이 쏠리는 대신 교도관들의 감시가 심해졌다는 것,
후자는 소장이 풀려난 대신 지금에 비해 감시는 약해질 거라는 것. 그리고 그 허점을 찌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역시 맹점이 있다. 소장이 세계수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다. 소지의 말로는 세계수의 곁을
계속 지키고 있다는데 그것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다.
[잘.]
잘 모른다.
탈옥은 결국 도박이다. 교도관들은 퇴근을 하지 않는다. 소장 또한 감옥을 벗어나지 않는다. 연옥은 언제든
죄수들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내일. 저녁.]
“내일 저녁.”
[결행.]
───────────────
# < 020. 구속구 >
해가 떠오른다.
빛을 완전히 차단하던 잎과 줄기, 가지들은 어느새 연옥의 절반을 내줬다. 옥상에서 고고하게 존재감을 뽐내던
핵심 줄기 또한 그 위치가 변했다.
옥상을 벗어나 수많은 줄기들과 합류했다. 흡사 파도와도 같은 그 흐름에 김우진은 율리아와 함께 몸을 실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전 하이엘프에요. 제가 어머니 나무께 감히 무슨 짓을 하겠어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 삐이?
율리아와의 교감이, 그녀의 이끌림이 아니라면 세계수는 원활히 이동조차 할 수 없다. 율리아가 세계수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며, 김우진이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김우진은 이미 세계수가 연옥에 뿌리를 내리면서 어떤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시겠죠.”
생각해보면 공교롭다. 세계수의 씨앗을 건넨 후, 그것을 심고 길러낸 것은 분명히 김우진이다. 씨앗에 간섭했고
그 결과로 세계수의 정령은 분명하게 그에게 호감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수를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것들은 결코 김우진이 바라던 것도,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억측이다.
“갑자기 무슨 뜻이에요?”
“나는 세계수가 너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하이엘프가 세계수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당연한 일이다. 너무 당연해서 그 이상을 모르겠다.
사실, 큰 의미는 없다. 그녀는 세계수의 씨앗을 넘긴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아니, 잠깐만.
김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너 뭐야?”
* * *
식물원 무수히 많은 영초들이 자생한다. 각자의 환경이 다르기에 그에 따른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있다.
어린 세계수는 아직 제 몸을 온전히 가눌 여력이 없다. 세계수의 이동 과정에서 마나가 흔들리고 여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식물원의 마법진들이 조금씩 문제를 일으켰고 이를 막기 위해 엘프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어느 정도했니?”
“수인들이 묻어놓은 마력 잔해들은 절반 정도 수거했습니다. 아직까지 교도관들에게 들키지 않았습니다.”
“혹여나 놓치는 것은 없겠지?”
“예. 위치와 양을 모두 공유하고 있습니다. 수인들이 몰상식하기는 해도 탈옥에 관해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더 급한 쪽은 그쪽이라. 다만, 축사장 쪽으로는 현재 접근이 불가능해서···.”
“그건 내게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마렴.”
“예. 그런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무엇이 말이니?”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희 또한 징벌방을 면치 못하게 될 겁니다.”
“그럼 어떻니.”
“하지만 15 년이잖니.”
15 년의 긴 기다림과 준비가 끝나는 순간이다. 그 결과가 모두가 바라던 것일지, 아니면 최악일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엘프라는 이유로, 세계수라는 이유로, 율리아라는 이유로 탈옥을 포기하고 남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들은 같은
죄수였다.
죄에도 분명히 차등이 있다. 조력자와 탈옥자가 같을 수는 없다. 그들에게 같은 벌을 내려주는 것은 규율의
문제다.
영초의 영약들을 일부나마 빼돌리는 건 어렵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건 마나를 품고 있는 물건을 숨기는
것이다.
때문에 따로 챙기기 보다는 우선 숲에 나무를 숨기는 것을 택했다. 마나가 풍부한 영초 곁에 묻어두면 영초의
부산물들은 사소해진다.
식물원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어 전부 모으면 꽤 되겠지만 상관없다. 세계수가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이 모든 것을 숨겨줄 테니.
비닐 속에서 기이한 문양을 띤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단해 보이지만 수백 개의 술식이 집약된 마도구였다.
마나를 일부 차단해주던 비닐을 완전히 걷어내자 마나가 용솟음쳤다. 교도관들이 그 기이함을 눈치 채기 직전.
* * *
탈옥에도 순서가 있다.
구속구의 해제는 모든 조건들보다 우선시 되어야만 한다. 가능하면 전부, 그게 아니라면 수뇌부라도.
강민식은 조금 망설였다.
쿠구구구-
밀폐된 독방을 뚫고 들어오는 진동은 분명히 일반적이지 않다. 배급구를 열면 소음이 일어나고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이 전해진다.
그가 바라던 건 죄수들과 교류하며 저들의 계획에 숟가락을 얻고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 완벽하게 탈옥하는 것이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급류에 휩쓸리는 게 아니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성공한다면 그저 좋다.
치이이이익-
툭-
은은하게 느껴지는 진동에 공명하듯, 심장이 거칠게 박동한다. 붙잡혀 있던 마나가 용솟음친다.
방 안은 매케한 독연으로 가득했지만 배급구를 열지는 않았다. 독기가 빠져나가는 순간, 교도관들이 이변을 눈치
챈다.
그 순간.
철컥-
문이 열렸다.
“풀었나?”
“풀었습니다.”
“···정말로 성공이군. 자네가 몇 년만 일찍 들어왔다면 우리는 벌써 탈옥을 했을 걸세.”
“따로 방법이 있는 겁니까?”
“있네. 하지만 공방까지 가야하지.”
“풀어주게.”
* * *
애애애애애앵-
붉은 경고등이 반짝인다.
은은한 진동, 불안정한 파동과 소음에 뒤섞인 새로운 소리에 연옥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교도관들이 달려온다.
“무슨 일이야!”
“죄수들이 탈옥했습니다! 복도를 지키던 교도관들은 이미 당했습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가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는
교도관들이다.
“이런 미친···!”
허나 그들은 탈옥하지 않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없다. 엘프들도 소지도 애초에 방 안에 없다.
상황은 급박하다. 죄수들은 이미 본래의 자리를 벗어났고 실시간으로 교도관들이 당하고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
탈옥할 수는 있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으니. 의문은 두 가지다.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 그리고 교도관들이 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
용사라는 특별한 죄수들을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한 자들인 만큼, 그들의 무력은 어느 차원에서도 수준급에 들
정도다.
그때, 그의 시야에 활짝 열린 한 독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불쾌한 연기를 간혈적으로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건 분명히 구속구였다.
“···구속구를 해제했어?”
“전부···?”
막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것.
소장이 있는 한.
───────────────
# < 021. 멍멍 >
콰직-
“이걸로 끝이구나.”
층을 관리하던 교도관들은 모조리 기절해 구석에 처박혀 있다. 죄수들의 탈옥을 막을 만한 이는 당장 없었다.
“다 됐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야.”
“여기는 아직 교도소 안이네. 방에서 벗어났다고, 구속구를 풀었다고 안심할 단계가 아니야.”
공방에는 지금까지 그들이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챙기고 난 다음에 감옥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정해진 계획이다.
넷과 전부는 다르다. 엘프들 여섯하고 소지놈이 빠졌다고 한들 스물여섯이다. 스물여섯의 죄수들? 아니다.
스물여섯의 용사들이다.
이 자리의 모든 용사들이 상담을 핑계로 소장과 부딪히고 깨졌다. 소장이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다.
하지만.
이미 식물원과 축사장이 뒤집어졌으며 엘프들과 소지를 제외한 모든 독방들이 열렸다. 소장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자네는 어쩔 텐가?”
“인간, 너 또한 소장에게 쌓인 게 있지 않나?”
10 명이 떠나갔다. 16 명이 남았다.
* * *
애애애앵-
바짝 다가오는 살기에 피부가 쭈뼛 선다. 율리아는 스스로의 입을 자책했다. 역린을 건드린 걸까. 조금 더 유한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어야 했다.
“자세히 말해줘야 알아들을까? 아르반 출신인 네가, 데이드람의 용사로 활동한 네가, 어떻게 글라크의 용을
아느냐고 물었어.”
“···만나봤으니까요.”
“만났다고?”
“어떻게?”
“그게 중요한 가요?”
“중요하지. 중요하고 말고.”
알베니우스는 공식적으로 죽었다. 그가 아무에게나 자신의 이름을 알릴 이유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너 설마···.”
“소장님!”
“죄수들이 탈옥했습니다.”
교도관이 꿀렁이는 세계수 위로 뛰어내렸다. 슬쩍, 율리아의 눈치를 살피다 보고를 시작했다.
소지인 베르너도 있긴 하지만 놈은 탈옥에 뜻이 없다. 만약 있다면 지금까지 속여 왔을 연기력에 경의를 표한다.
“···어, 엘프들이···?”
‘아니, 정말 없나?’
“교도관들은 뭘 하고 있었지?”
“부소장은?”
“교도관들을 이끌고 공방으로 향한 죄수들을 막으러 갔습니다.”
생각은 뻔히 보인다.
죄수들이 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우진이 세계수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 기회라는 것도. 하지만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릴리. 멈춰.”
- 삐이?
쿠구구구-
- 삐익? 삑?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철컥-
데르카인이 두툼한 갑옷을 착용했다. 공방이 생긴 뒤, 애용하던 망치를 어루만지자 양쪽으로 날이 튀어나왔다.
자루가 길어졌다.
데르카인이 코웃음쳤다.
“계획은 단순하네. 이대로 남하해 정문을 돌파하고 사막을 거쳐 차원의 경계에 다다를 거네. 그리고는 저 친구의
몫이지.”
“굳이 정문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까?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외곽으로 빠지는 게···.”
“아니, 정문이 제일 만만하네. 벽을 뚫는 건 결코 쉽지 않아.”
시골의 똥개들이 생각난 건 우연일까. 용사들을 가두는 연옥의 파수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가지.”
* * *
“···기다리고 있었나?”
허나 눈은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열여섯, 모든 수인들과 거인족. 적은 숫자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한 차원을 구한 용사들 열여섯과 구속구의 영향을 받는 그들을 상정한 수준의 교도관 스물. 승패는 굳이 붙어보지
않아도 명확할 만큼 극명한 격차가 있다.
물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물’이 시작할 때만해도 타르칸은 권태로이 바위에 앉아 있었다. 허나 그의 입에서 ‘만’이 나오는 순간,
부소장은 지독한 살기를 느꼈다.
──!
끄아아악!
막아!
쩌엉, 충격을 견디지 못한 부소장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교도관들이 정신을
잃어버렸다.
─!
그건 창이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화염의 창이 은빛 오러를 깨트렸다. 부서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생각 이상의 충격에 타르칸이 신음을 삼켰다.
“너네 뭐하냐.”
김우진이 손을 내렸다.
짐승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인이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허나 창은 두터운 가죽을 뚫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네···!”
───!
“멍멍하고 짖어야지.”
개가 왜 사람 말을 해.
“이 개새끼야.”
───────────────
# < 022. 대가 >
“노오오오옴!”
─!
─!
궤적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똥을 토해낸다. 화염의 파도가 짐승들을 모조리 튕겨버린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기에 우스울 수 있지만, 그 한계가 범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라면 결코 가볍지 않다.
─!
선두의 타르칸이 다시 한 번 오러를 믿고 몸으로 파동을 받아낸다. 하지만 열기를 이겨낸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공간을 가르는 검격이다.
쩌어엉, 오러가 산산이 부서지나 딱 거기까지. 오러를 희생한 타르칸은 김우진을 멈춰 세우는 것을 성공했다.
콰콰콰콰, 무자비한 손톱 아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나간다. 허나, 조각난 신체는 불꽃이 되어 허공으로
사그라든다.
불의 창.
─────!
이전과는 다른 충격파가 터진다. 허나 붉은 섬광을 받아낸 것은 은빛 털로 완전히 뒤덮인 이족보행 늑대였다.
은빛의 오러로 뒤덮인 손톱이 공간을 쇄도한다. 한층 강화된 육신은 힘과 속도 모든 면에서 벽을 돌파한다.
─!
─!
한 번은 두 번이 되었다.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세가 이어졌다. 공간이 찢어지고 대지가 박살난다. 그럼에도 야수들은 그대로 짐승으로
변해 참전한다.
그럼에도.
“멍청한 짐승 새끼들.”
그 무엇 하나 김우진의 몸에 닿지 못한다.
쩌엉, 세로로 그어진 참격이 타르칸을 덮친다. 강인한 오러와 가죽이 최악을 막았으나 그 충격파를 온전히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의 신형이 총알보다 빠르게 튕겨져 나간다.
김우진이 한순간에 비어버린 공간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 나간다. 당황하는 수인들을 향해 불꽃을 토해낸다.
불기둥.
“이 개자식이!”
“더 짖어봐.”
* * *
“빌어먹을···.”
정문을 코앞에 둔 용사들이 주춤거렸다. 거대한 짐승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뭐라고요?”
“덕구와 춘식이네.”
“···아무리 봐도 덕구나 춘식이의 비쥬얼이 아닌데 말이죠.”
“···케로베로스와 오르토스.”
뿌득, 이를 갈았다. 용사들을 가두는 연옥의 짐승들이 평범할 리가 없다는 것을 짐작했어야 했다.
정문까지 나왔음에도 굉음과 열기가 느껴진다. 소장이 나섰다. 수인들이 싸우고 있다.
“···어?”
“가지.”
“···뭡니까?”
“마물이라고 한들 사람의 손을 탄 개네. 개의 본성은 언제나 같지.”
“이런 미친 아무리 그래도 마물인데···.”
“혹시 몰라 만들어두기를 잘했군. 놈들이 좋아하는 마물의 피로 도배를 해놨으니 환장할 수밖에 없지.”
“저건 어디까지 날아가는 겁니까?”
“그전에 잡히지만 않는다면 마력을 전부 소모할 때까지 쭉 갈 거네. 적어도 5 분 정도는 끌어줄 걸세.”
“···어.”
“순순히 비켜주겠나? 아니면 기절하고 비켜주겠나?”
* * *
잘 관리된 잔디는 그 빛을 잃고 잿더미로 변한다. 용사에서 다시 죄수의 신분으로 되돌아온 자들의 육신이 그
위로 쓰러졌다.
철컥-
마지막으로 구속구가 채워진 짐승은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다. 가장 저항이 거셌던, 유일하게 그의 육신에
상처를 낸 수인족의 귀족.
“···괴, 괴물···!”
“부소장.”
“예!”
열에 아홉은 그들을 피해 상대적으로 약한 정문으로 향한다. 그 점을 이용해 사이렌이 울리면 정문으로 향하도록
훈련을 시켜놨다.
“뚫린 것 같습니다.”
“하긴, 아무리 그놈들이라도 용사가 16 명인데.”
멍청한 수인과 거인들이 만용을 부렸지만 아직 그보다 많은 탈옥수들이 남았다. 구속구가 전부 해제되는 건
상정하지 못한 변수였고, 온전한 용사들에게 마수 두 마리 따위는 그렇게까지 큰 벽이 아니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랬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을 우습게 본다는
반증이었다.
* * *
허나, 어디까지나 일반인, 혹은 구속구를 착용한 인간의 경우였다. 완전히 자유가 된 용사들은 빠르게 사막을
주파했다.
“그란시스.”
“예.”
“몸은 괜찮나?”
“나쁘지 않습니다. 백 년만에 힘이 돌아오니 너무 좋군요.”
“할 수 있을 것 같나?”
“시에나님이 건네주신 마력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론대로만 된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역시 직접 부딪혀봐야
알겠지요. 그래도 15 년 간 연구를 하며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맛이 없군요.”
그란시스가 질겅이던 마수의 조각을 뱉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강민식이 데르카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뭘 하려는 겁니까?”
“탈옥이네. 이 거지 같은 영역들을 벗어난다고 해도 아직 넘어야 할 벽이 하나 남아 있거든.”
“감옥을 진즉에 벗어났는데 뭐가 또 있다는 겁니까?”
“자네는 연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감옥이라는 거? 용사들을 가둔다는 것 정도죠. 아, 소장이 지랄 맞다는 것도.”
“탈옥을 위해서 연옥의 죄수들이 넘어야 할 벽은 총 네 개네.”
첫 번째, 죄수를 가두는 독방.
두 번째,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
세 번째, 하나하나가 살아남기 힘든 극한의 환경.
연옥은 차원과 차원들 사이에 끼여 있는 틈새의 공간이다. 독립된 차원이며, 제대로 된 차원들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차원인 만큼 당연히 방벽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너무 걱정 말게.
───────────────
# < 023. 폭거 >
연옥은 넓다.
단순히 감옥의 건물과 정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원을 벗어나 펼쳐지는 모든 것이 연옥이다.
일반인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벗어날 수 없다. 구속구가 착용된 용사라면 몇 달도 헤맬 수 있다. 그리고
구속구가 풀려난 10 명의 용사들이라면.
···모르겠다.
전원이 구속구가 풀린 채 정원을 벗어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필사적으로 질주하고 있을 테니 속도도 만만치 않을
거다.
“어디로 향했을까.”
“그만.”
끼잉-
낑-
하지만 상처 하나 없는 둘의 모습에, 마물의 피 냄새가 지독한 원반을 두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모습에 죄수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파악했다.
“냄새 맡아봐.”
커헝?
“어떻게, 쫓을 수 있겠어?”
멍멍멍!
세 개의 머리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기로 인해 코가 마비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역시 마수는 마수였다.
김우진이 덕구 위에 올라탔다.
* * *
‘정말 나갈 수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모든 게 의문스럽기만 하다.
‘···신이라고요?’
‘맞아. 용사가 되어서 위기에 빠진 차원을 구원해주었으면 해.’
운전자가 신이라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면 무엇이 특별한가.
왕국의 훈련, 몬스터와의 실전은, 미궁과 던전의 함정들은 그를 수 없이 다치게 했다. 생사를 넘나든 게 몇
번인지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자나?”
“아니요.”
“한 시간밖에 못 쉬는데 왜 자지 않고.”
하지만 막혔다. 막히고 또 막혔다. 그나마 시에나와 함께 구속구를 해제할 마도구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네 개가 전부였다.
헌데 강민식은 달랐다. 고작 몇 달 만에 손쉽게 모든 구속구를 해제해 버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운이라고 할 수는 없네.”
“저는 마나에 독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독으로 구속구에 각인된 술식의 취약점들을 찾아 연결점을
끊어냈습니다.”
“취약점이라고 한들 방호 마법진이 그렇게 약하지 않을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저희는 죄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소장도 제대로 된 소장이 아닌 무언가가 아닌가
싶어서요.”
“그래봐야 우릴 여기로 보낸 개놈들의 끄나풀에 불과하네.”
“그렇습니까?”
‘아닌 것 같았는데···.’
남은 10 분이 모두 지났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날 때다.
* * *
“애초에 소장이 우리를 못 찾는다는 생각은 버려야 하네. 이곳에서 몰래라는 건 없어.”
그리고 뚝 떨어졌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네. 연옥이 그냥 평범한 차원에 있는 곳이지, 아예 다른 격리 차원이라는 것을
몰랐거든.”
“허억···!”
“···이게 무슨···!”
“보지 말게. 차원의 경계는 일개 피조물인 우리가 인지하기에는 너무도 고차원적이라 그렇네.”
“떠, 떨어집니다!”
─!
“알겠나?”
다크엘프가 차분히 차원의 방벽 앞에 섰다. 식물원에서 모은 영초의 부산물, 축사장에서 모은 영단의 조각들을
하나로 뒤섞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포?”
“마력포네.”
“저건 부비트랩입니까?”
“비슷하네. 건드리면 내재된 마력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지.”
“몇 개나 있는 겁니까?”
“지난 번 검방 때 대부분 빼앗기고 5 개 밖에 없네.”
하지만 다섯 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장에게 제대로 통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단 1 초라도 시간을
끌어준다면 제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김우진은.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같잖은 짓을 해놨네.”
크르르르-
세 개의 머리가 연달아 화염을 토해냈다. 쏘아진 붉은 염화가 마력 트랩과 반응하여 거대 폭발을 일으켰다.
열 명의 죄수들.
“···소장.”
“죄수번호 1077 번. 멋진 도끼군요.”
그들의 뒤에는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다크엘프가 보였다. 그란시스 드라막. 공간마법이 특기인 그가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는 굳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된다.
멍-
덕구가 숲 사이로 들어가 숨었다. 노련한 사냥꾼인 덕구는 기회를 틈 타 다크엘프의 마법을 방해할 거다.
아니다. 그렇게 쉬웠다면 죄수들은 진즉에 구속구를 풀었을 터. 용사의 힘이라고 한들 만능인 것도 아니다.
* * *
나가고 싶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살기를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
치이이익-
뜨거운 열기가 독기를 불태운다. 타버린 독기는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만 열기는 그마저도 삼켜버린다.
‘크윽!’
쩌엉, 불의 검이 김우진과 도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강민식과 부딪히는 것과는 다른 검이었다. 어느새
김우진의 두 손에는 쌍검이 들려 있었다.
도끼의 주인, 데르카인이 물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아니었다. 단지, 대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카가각, 도끼가 튕겨졌다. 독을 머금은 대검이 비껴졌다. 일순간 자유로워진 두 자루의 검이 춤을 추었다.
김우진의 빈틈을 노리던 모든 무기들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검이 그린 궤적은 상흔을 남긴다. 공간을 좀 먹으며 타닥 타닥, 타오른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크아아악!
피해!
그렇게 자신 있다면.
“옥상으로 따라와.”
“여기 옥상이 어디···.”
풉-
* * *
“···죄송합니다.”
‘데르카인님이 맞았어.’
지금에 와서는 모두 무의미한 가정이 되었지만. 어쨌든 만났고 싸우게 되었다. 적어도 차원의 방벽이 열리는 그
순간까지는 버티고 또 버텨야만 했다.
‘버틸 수 있어.’
‘다르지. 그놈들은 소장의 역량도 제대로 파악 못한 머저리들이고 데르카인님과 드워프들은 적어도 역량 파악은
제대로 하고 있으니.’
그래, 그러니 희망이 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애초에 이기는 게 아니라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크허허헝-
“막아!”
두 명의 드워프 용사가 재빠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그 짧은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이번엔
김우진이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불바다.
“하하···. 씨발.”
불합리한 힘의 폭거 앞에.
강민식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024. 다른 길 >
불의 해일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이 진격했다.
“모두 버티게!”
데르카인이 온 몸에 오러를 둘렀다. 갈빛의 서기가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냈다. 그대로 파도를 받아냈다.
콰콰콰콰-
파도가 넘실거리는 정면, 데르카인이 도끼를 겨눴다. 철컥, 도끼자루 윗부분이 열렸다. 망치에서 도끼로 다시
마력포로 변한 무기가 주인의 마나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토해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앙!
강민식이 오러를 이용해 몸에 붙은 잔불을 털어냈다. 빌어먹을 불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오러까지 쉽게 뚫어버릴
만큼 뜨거웠다.
“독 말고 다른 장기는 없나?”
“검술?”
“없군.”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연기속에서 불꽃이 폭사되었다.
“내 뒤로 오게!”
콰콰콰-
홍수에 휩쓸리는 바위처럼, 드워프들은 견뎌냈다. 하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불꽃 창으로 이루어진 비가 끝나는
순간, 김우진은 어느새 한 드워프의 앞을 점했다.
─!
──!
“커헉···!”
그게 시작이었다.
“이놈!”
“제기랄!”
────!
“그란시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케르베로스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던 드워프들이, 어떻게든 김우진을 붙잡고 있고자 발악하던 드워프들이
소리쳤다.
그러길 잠시.
“···빌어먹을.”
욕을 입에 담았다.
실패.
* * *
차원의 방벽을 열어 재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그란시스 드라막의 선택인 당연히 세 번째였다.
파지지직-
지금부터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나를 흘려보냈다. 견고한 방벽의 틈새를 파고드는 건 쉽지 않았다.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고 영초와 마물의 부산물로 그린 마법진이 부족함을 보태주었다.
“···아직 멀었소?!”
고통스러운 비명이 귓가를 스쳤다. 전투나 얼마나 고된지는 짐작이 가지만 재촉한다고 해서 빨리 되는 게
아니었다.
허나, 흐름이라는 게 있다. 방벽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딱딱한 고체가 아니다. 유유히 흐르는 마나의 흐름이자
집약체다.
담을 지나 문으로. 문을 지나 잠금 장치로.
복잡하게 꼬인 우주의 법칙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완전히 해제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일개 피조물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비틀림이면 된다.
─!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접근에 방벽의 저항이 느껴졌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압박감에 그란시스가
신음을 삼켰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
────!
“그란시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동료 용사들의 걱정스러운 외침이 귓가를 스쳤지만 거기에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는 없었다.
잠금장치가 거의 다 해제되고 문을 조금이나마 열려는 순간, 또 다른 마나가 개입해 방벽을 뒤틀어 버렸다.
문은 다시 닫혔고 반탄력이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말도 안 돼.”
* * *
- 삐?
‘이파리 좀 그만 뜯어 먹어.’
‘아니지, 인간이 손톱 뜯어 먹는 거랑 비슷한 건가?’
‘오구오구, 많이 먹어. 어차피 네 나뭇잎이야.’
- 삐이?
항상 김우진이 찾아와 주었고 간혹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잠깐이었다. 김우진이 없으면 교도관이라는 존재들이
찾아와 그녀를 보살폈다.
그래도 하이엘프의 기운은 건물 안에서 느껴졌다. 그녀를 찾아가 볼까 고민하던 그때, 릴리의 감각에 무언가 툭
걸렸다.
- 삐?
뿌리쪽이었으나 직접적인 접촉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릴리의 뿌리가 파고든 이 세계의 심처다.
- 삐이?
- 삐삐.
릴리가 생각하기에 이곳의 주인은 김우진이었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근원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 삐이이이.
그 과정에서 막대한 힘이 소모한 릴리가 힘없이 가지 위로 떨어졌다. 나뭇잎 하나를 떨어트려 몸을 덮었다.
- 삐···.
* * *
“···세계수라고?”
말도 안 돼.
실패라고?
그럼 우리는 왜···!
세계수? 그 망할 귀쟁이놈들이 통수를!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단순히 능력 부족이나 준비 부족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제 자체가 흔들렸다.
강민식의 시선이 빠르게 방벽을 훑었다. 방벽으로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고. 손을 대고 몸을 밀어 넣으면 된다고
했다.
이건 최후의 방법이었다.
경험을 쌓겠다는 안일한 생각은 진즉에 버렸다. 소장은 괴물이다. 세계수라는 돌발 변수로 인해 운 좋게 여기까지
왔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할 일은 없을 거다.
콰아앙!
그란시스가 실패했든, 성공했든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소장의 관심이 드워프들에게 쏠린 지금이 기회였다.
“어디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갈랐다. 다시 방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방벽과 그 사이에는 김우진이라는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널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거든.”
“아니, 나는 그냥···!”
“그냥 닥치고 얌전히 쓰러져 있어.”
불길이 그의 입을 막았다.
“···씨발.”
* * *
“하하···.”
차라리 김우진이 애매하게 강했더라면, 더욱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을 거다. 김우진이라면 반드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마저도 작정하고 하나하나 격파를 시작하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길 수 없다는 공포와 희망이 없다는 절망이
그들을 엄습한 순간, 싸움은 이미 끝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 당신 하나 남았군요.”
모든 용사들이 쓰러졌다.
크흐흐, 데르카인이 광인과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도끼가 화광에 반사되면서 빛을 발했다.
“평소처럼 도끼로 미노타우르스의 대가리를 쪼개던 날이었지.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했네. 세상이 뒤집어졌지.
그리고 눈을 뜨니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더군.”
그를 소환한 신이 말했다.
재능이 뛰어나니 용사가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고 세계가 멸망한다고.
“말투만 사근사근할 뿐, 강압이고 강제였어! 난 살기 위해 싸웠네! 모르는 세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내 목숨을
걸었어!”
“모든 용사가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지만.”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돌아가고자 했다. 자신의 세계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말해보게!”
그가 울분을 토했다.
천천히 검을 겨눴다.
“당신의 사정을 일일이 다 봐주기에는 내 사정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당신들을 내보내면 상당히
곤란해지거든요.”
“이미 탈옥은 그른 것이겠지···?”
그렇다고 배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만약 세계수 때문에 안 된다고 말렸다고 한들,
들었을 데르카인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이대로 잡히면 어떻게 되나?”
“당연히 3 징벌방에 갇히게 되실 겁니다.”
“그렇군.”
그렇기에.
“그렇다면 나는 출소하겠네.”
“···예?”
───────────────
# < 025. 꼬우면 >
잘못 들었나.
김우진이 귀를 후볐다.
용사들은 흔하지 않고, 죄수가 되는 용사들은 더 흔하지 않다. 그가 감내해야 할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절로
상상이 된다.
“거부합니다.”
“···뭐라고?”
“당신의 출소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연옥의 출소는 언제든 자유롭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출소를 관리하는
것 또한 김우진인 만큼, 김우진의 마음이 내키는 한 자유롭다는 것.
꼬우면 아시죠?
“꼬와서 나가겠다니까!”
“제가 꼬와서 안 됩니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이 빌어먹을 놈아!”
율리아의 도움을 받아 세계수를 정원 북쪽 끝으로 옮겼지만 그 진한 마나는 여전히 정원 전체에 감돌고 있다.
거리가 있는 만큼 입구에서는 미약하지만 세계수가 성장할수록 더 진해질 거다.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최고의 장인인 당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글쎄요.”
“처음부터 끝까지 난 자네의 손바닥 위였군. 대체 언제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나?”
“그냥 아다리가 맞았을 뿐입니다.”
“내게 선택지는 없겠지?”
“있습니다. 만드느냐, 아니면 3 징벌방에 들어가느냐란 선택지.”
“없다는 소리군. 알겠네. 용사로서 만드는 마지막 작품이니 최선을 다해보지. 다만,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당신이 조건을 내밀 상황은 아닙니다만.”
“나 혼자서는 너무 오래 걸리네. 다른 드워프들의 도움이 필요해.”
“필요하다면야.”
“그 대가로 그들에게 징벌방 징계를 없는 걸로 해주면 안 되겠나?”
“출역과 징계는 별개입니다.”
“내가 나간다니까? 자네도 사망으로 인한 출소보다는 자발적인 출소 쪽이 더 좋지 않은가?”
“당신이 그들을 모두 데리고 출소한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끄응.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
* * *
“오셨습니까!”
부소장이 환하게 웃으며 김우진을 반겼다. 두둥실 떠 김우진을 따라오던 반시체들이 1 층 로비에 곱게 쌓였다.
독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려면 반드시 대화를 이어줄 촉새가 필요하다. 베르너는 분명히 그
역할을 했을 거다.
이주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정신이 돌아버릴 가능성이 있어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관리가 힘들어지니까.
“문제는 엘프야.”
“그들은 교도관들을 기절시키고 죄수들을 풀어줬습니다.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식물원에 돌아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알아, 아는데···.”
“알베니우스를 알고 있었어.”
“알베니우스라면 설마 그···?”
“맞아.”
알베니우스는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타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명확하게 우호적인
끈이 있다는 뜻이다.
“알베니우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만나봤다는 거야. 헌데 율리아는 글라크 출신도, 글라크의 용사도
아니야.”
“알베니우스가 1178 번의 차원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알베니우스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아.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럼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놈들은 이후에 3 징벌방에 들어가게 될 거다. 원래 들어가야 했던 거니 불만을
토해낸다고 무를 생각도 없다.
“1177 번은 어쩌시겠습니까?”
“강민식이라.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2 징벌방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은 태도부터, 상부의 권능이 들어간 구속구를 손쉽게 부식시켜버리는
것까지.
“예.”
“나가면서 율리아 좀 불러오고.”
“예, 알겠습니다.”
“···아, 맞다.”
릴리.
* * *
끼익-
문이 닫혔다.
‘큭···!’
그리고 이어지는 자극은 평생 살면서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표현할 단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어?”
와아아아-
“용사님! 괜찮으세요?”
푸른 로브의 마법사가 다가온다. 익숙한 얼굴의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 봤다.
“제가 치료해줄게요.”
“나는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아.”
복부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에 강민식은 그제야 자신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지지마. 독이···.”
“안 만져요. 마법을 쓰는 거지.”
“제이니···.”
“···아?”
단발마의 비명. 심장에 구멍이 뚫린 그녀의 육신이 허물어졌다. 서로의 몸이 포개어졌다. 흘러나오는 핏물이
강민식을 붉게 적셨다.
“제이니!”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은은한 빛이 그의 몸에서부터 비롯되어 환상을 밀어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다시 한 번 그를 맞이했다.
“···소장, 이 개새끼가···!”
어째서 죄수들이 3 징벌방을 그토록 꺼려하는지. 육체와 정신을 함께 자극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버렸다.
강민식에게는 그녀가 그랬다. 언제나 약해서 상처입고, 무리하던 그를 치료해주던 연인이 눈앞에서 머리가
날아갔다.
자신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제이니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평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던 순간이었다.
강민식이 징계방의 시스템에 개입했다. 징벌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그대로일 터.
───────────────
# < 026. 하수인 >
차원의 방벽에 간섭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게 틀림없었다. 김우진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을 때,
교도관이 율리아를 데리고 왔다.
“엘프들의 행위?”
“들었어요. 교도관들을 때려눕히고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준 게 엘프들이라는 걸요. 절대, 절대 제가 지시한 것이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지시한다고 해서 듣지도 않을 거고요.”
김우진이 알기로 하이엘프가 엘프를 버리는 경우는 하나다. 보다 큰 대의나 목표가 있을 때. 그것이 버려지는
엘프들도 납득 가능한 수준일 때.
어째서 율리아 카르센이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는지, 알베니우스와 어떤 관계인지, 그녀의 계획이 무엇인지.
허나 티내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세계수든, 하이엘프든, 둘 다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어쨌든 탈옥을 돕고도 남아있다는 건 그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니.
“···전 억울해요.”
“조사해보면 다 나와. 만약 엘프들의 입에서 네 이름이 나오면 너도 3 징벌방으로 가게 될 거야.”
“···그건.”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지?”
그녀는 모르겠지만 김우진은 이제 모든 내막이 이해가 되었다. 허나,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과 단순한
추정은 엄연히 다르다.
정보의 이점을 가지고 동등한 거래를 하고자 하겠지만 김우진이 그걸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세계수라도 제대로 피어올라 율리아의 통제에 들어갔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좋아요.”
“제 손을 잡으신다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무모한 도박이다.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에 간섭하고 성공한 시점부터, 세계수가 그녀보다 김우진을 더 잘 따르게 된 시점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소장과 죄수라는 신분이 생겨버린 이상, 연옥 내에서 그녀가 앞서는 포인트는 오직 세계수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세계수를 통해 협상하고 설득하며 결국엔 바라는 걸 이루어 내겠노라고 세웠던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려 버렸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도박뿐이었다.
“······.”
“······.”
“왜 그렇게 보세요?”
“그러니까.”
카드를 고작 한 장만 가지고 온 탓이었으나 딱히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이엘프를 상대로 세계수라는 카드를
찢어버릴 수 있는 상대가 이상한 거다.
“너.”
“네.”
“백번 양보해서 네가 성공했다고 치자. 내가 멍청해서 그냥 세계수를 심었고 주도권이 너한테 넘어갔으며 덕분에
죄수들이 죄다 탈옥을 했다고 치자고.”
실제로는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한둘이 아니라 33 명 모두의 탈옥인 만큼 아무리 숨는다고 해도 숨을 수는 없다. 낭중지추라고 그들은 어디에
던져 놓아도 특별하니까. 그러니까 용사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죄수들이 모두 사라진 연옥은 의미가 사라지고 김우진은 관리를 잘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율리아 카르센. 세계수의 씨앗을 주어 연옥을 망가트린 주범을, 자칭 신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
“세이드 델름.”
“···너와 어떤 관계지?”
“어렸을 때부터 저를 지켜준 호위 기사에요. 아버지 같은 존재죠.”
“···그렇군.”
삐!
“그래, 그래.”
“세이드 델름···.”
그리운 이름이다.
* * *
“당신이 만들 것을 정확히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적은 명확합니다. 세계수를 숨기는 것. 그
모습, 기운, 분위기 모든 것을 완벽히 차단하는 것.”
“세계수는 신의 나무네. 그러한 것을 완벽하게 감추는 게 가능할 것 같은가?”
“그러니 당신께 의뢰하는 겁니다. 여러 차원에서도 손에 꼽히는 드워프 장인인데 심지어 용사? 써 먹지 않을
이유가 없죠.”
“끄응.”
데르카인이 신음을 삼켰다.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을 만큼 어려운 요구였으나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대체 누구에게서?
“다 제외하고 나니 하나가 남더군. 자네와 교도관, 그리고 죄수들을 제외하고 연옥을 드나드는 이들은
하나뿐이니.”
“신.”
“나는 말이네. 자네가 저들의 충실한 개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꼬리를 흔들며 최대한 애교를 떨고 있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차원의 방벽에 영향을 줄만큼 대단한 세계수를 숨긴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데르카인이 웃었다.
그날 밤.
───────────────
# < 027. 경고 >
‘생각보다 판이 너무 커졌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는 탈옥이 실패할 것이라 여겼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별 다른 일 없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다.
죄수들이 오랫동안 탈옥을 준비해왔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지켜봐 온 연옥은, 소장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몇 개의 변수가 발생하면서 탈옥의 규모는 커졌다. 설마 전원의 구속구를 해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따.
탈옥에는 뜻이 없어 완전히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지내온 세월이 있기에 최소한의 도리를 했다. 결국 탈옥을
도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왜.”
“저도 일조했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언제부터 모범수였다고 스스로 자백하고 있어? 이거 맛있네. 뭐라고 했지?”
“도르스라는 차원에 서식하는 아르크라는 해양 생선입니다.”
“쫄깃하고 기름기가 많아. 숙성도 잘 했고 산미도 적당해. 좋네.”
“한 번이야.”
“예?”
김우진은 여전히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베르너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높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많아. 인간이라서, 요리사라서, 밥이 맛있어서, 요리를 잘해서, 신박한 미식을 추구해서···.”
그리고.
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안하는 것뿐이다. 그의 말대로 이들은 진짜 죄인이 아니라서. 김우진 또한 상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웃기는 짓이긴 했다. 누구보다 죄수들을 타박해 출소시켜야 하는 그가, 자비를 베풀고 있으니.
“···예! 감사합니다!”
탁-
“나가.”
“예!”
* * *
대규모 탈옥이라는 큰 사건이 연옥을 덮쳤고 큰 흔적을 남겼지만 감옥의 시간은 여전히 돌아갔다.
세계수가 발아해 연옥을 덮친 이후, 엘프들의 출역은 원예반으로 고정되었다.
“어떻게 한 거야?”
“뭐가요?”
“징계. 우리만 쏙 빠졌잖니.”
“드워프들도 빠졌어요.”
“그치들은 할 일이 주어진 거고.”
“저희도 식물원을 지켜야 하잖아요.”
“말 안할 거니?”
“협상을 했어요.”
“좋아.”
고함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시에나가 다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율리아가 생글 생글 웃으며
교도관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에나가 그랬다.
그녀가 기절했다.
* * *
감이라는 것은 불현 듯 찾아온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간 산책에서 춘식이가 몬스터 고기를 뜯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불쾌한 감각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왔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춘식이가 몬스터의 팔을 뜯고 있었어.”
“축사장의 몬스터들 간의 싸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걸 어느새?”
“말이 안 되잖아. 춘식이는 내가 부르지 않는 이상, 자기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아.”
“···징벌방 다 열어.”
“징벌방을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부소장, 이미 구속구가 전부 해제된 전례가 있어. 더 이상 연옥의 시스템은 절대적이지 않아.”
징벌방의 문이 열렸다.
인간이 없었다.
텅 비어있는 독방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사방에 뿌려놓은 독기는 자신의 흔적을 찾지 못하게 하려는 기색이
엿보였다.
멍!
“···따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 때면? 놈들이 순순히 ‘아, 미안’이라고 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잡아야 한다. 놈이 달아나기 전에, 상부에서 그것으로 꼬투리를 잡고 계약 운운하기 전에.
* * *
처음 추적에 나선 곳은 동쪽이다. 춘식이의 영역. 강민식은 이곳에서 춘식이에게 몬스터의 팔을 던져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제는 아예 숨길 생각도 없다는 거겠지. 하긴, 이미 구속구를 모두 풀어버린 시점에서 의미가 없긴 했다.
“가자, 덕구야.”
멍멍멍!
“···하. 이 개새끼가.”
그곳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물고기들이 배를 드러낸 채 떠오르고, 물을 마신 몬스터들의 시체가 사방에서
뒹군다.
독기와 몬스터들의 피, 썩어버린 사체 냄새가 뒤섞여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교란이었다.
“찾을 수 있겠어?”
아무리 물에 씻고, 호수 전체에 독을 풀고, 몬스터들의 사체 냄새와 뒤섞여도 케르베로스는 그 사이에서 원하는
냄새를 포착할 수 있다.
“가자.”
일직선으로 질주하던 강민식의 경로는 호수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살짝 꺾이며 지그재그를 그렸다.
숲이 끝나는 지점, 탁 트인 벌판과 그 끝에 펼쳐지는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투명한 차원의 방벽 너머로 보이는
우주.
늦었나. 서로의 거리를 가늠하고 빠르게 상황을 계산한 김진우가 덕구를 툭툭 건드렸다. 덕구가 멈춰 섰다.
“강민식.”
“소장.”
“너는 선을 넘었어.”
“선?”
“나한테 그딴 건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어.”
“3 징벌방에서 뭘 보고 왔는지는 몰라도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걸 만든 건 내가 아니거든. 그리고
애초에 잘못은 네가 했지. 누가 탈옥하래?”
“애초부터 따지면 난 감옥에 갇힐 이유가 없었어!”
흥, 코웃음 친 강민식이 정확히 김우진이 다가온 만큼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장벽과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없다.
강민식과 방벽의 거리는 10m 안팎이다. 무력의 차이가 극명하다고 한들, 강민식 또한 용사다. 그가 작정하고
방벽을 넘는다면 막을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담담하게.
회유하고.
“하지만 아니라면.”
“널 찾아낼 거야.”
“찾아내서.”
경고했다.
“좆까.”
몸을 뒤로 넘겼다.
─!
───────────────
# < 028. 추적 >
탈옥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연옥의 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신이라고 으스대는 윗대가리들이
더 없이 바라는 상황이었다.
톡톡톡,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예전보다 더욱 빠르고 힘이 있었다. 손가락 자국 그대로 구멍이 뚫릴 정도로.
그리고 생명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연옥은 수많은 차원들이 교차하는 곳이라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도망간 강민식이 갈 곳은 많아야 두 곳이다.
연옥의 핵심이 김우진인만큼, 그 기간 동안은 만약을 대비해 연옥의 방벽을 완전히 닫고 외부의 출입을 통제한다.
물론 상부에서 임의로 뚫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 경우, 그들이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 꽤 많아진다.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다.
* * *
율리아는 리자스 꽃차의 향을 음미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슨 숨겨진 뜻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아무리 저희가 협력 관계가 되었다고 하지만 벌써부터 저를 완전히 신뢰하실 만한 분은 아니잖아요. 소장님이.”
“맞아. 나는 너를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필요한 거야.”
“이유는요?”
“시간이 이주 밖에 없거든.”
“다른 차원으로 도망친 사람을 고작 이주일 만에 찾는다고요? 어느 차원인지도 모르면서?”
“두 개 중 하나야. 태어난 지구거나 용사로 살았던 크라프트거나. 왜 그런지는 알고 있겠지?”
“···차원을 찾아갈 때 가장 확실한 건 좌표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차원에 해당되는 무언가가 곧 길잡이 역할을
하니까요. 당연히 그 차원에서 지내온 생명체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길잡이죠.”
“그래. 차원 이동은 특별한 좌표가 없는 한 무조건 네비를 따라가게 되어 있지.”
“네비요?”
“대충 넘어가.”
“그러니까 시간은 이주밖에 없는데 찾아야 할 차원은 무려 두 개라는 거네요.”
“맞아.”
“제 역할은 1177 번을 찾는 사냥개 정도가 되겠고요.”
“하이엘프는 모든 식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잖아?”
“그런데 제가 소장님을 도와드려야 하는 이유는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가 협력하기로 한 사항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요.”
“연옥을 부수겠다며?”
“네.”
“놈을 잡지 못하면 내 임기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나는 충실하게 감옥을 지켜야만 하지.
그리고.”
“그리고요?”
“이 탈옥 자체가 날 여기 앉혀둔 개새끼들의 수작이야.”
“당장 가요. 어디를 먼저 가시나요?”
“크라프트. 조금 더 가능성이 높거든.”
연결점이라는 것은 멀어지면 조금씩 희미해지기 마련. 적어도 김우진이 보기에는 크라프트의 가능성이 더 높았다.
멍멍멍!
* * *
당연히 모든 차원은 같지 않다. 환경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며, 마나의 분포는 물론 살아가는 종족도 문명도
다르다.
죄수로 들어온 용사의 서류에는 그간의 행적과 여러 가지 사항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지만 거기에 용사로서
활동했던 차원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적었다.
당연했다. 이미 연옥으로 들어와 죄수가 된 이상, 어느 차원에서 용사를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하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엘프가 주를 이루는 차원에는 엘프 용사를 보내는 상부의 패턴을 대입해보자면 크라프트의 주 종족은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강민식에게 압수한 물품들이 가죽 갑옷과 검이었음을 상기하면 중세의 문명을 가지고 있을 거다.
마법 또한 사용했으므로 마법 또한 발전했을 거고.
마법이 적당히 발전한 차원이면 마도 공학은 당연히 뒤따른다.
마나가 극히 희박하여 지구처럼 과학이나 또 다른 학문이 발전하거나, 마나가 너무 풍부해 융성한 문명보다는
개개인의 괴물들이 탄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면 잠깐만요.”
그러길 잠깐.
“제가 어머니 나무께 여쭈어 볼게요. 최근에 차원의 방벽을 뚫고 들어온 누군가가 있는지. 그러면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엘프들은 서로 배척하지 않아? 다른 차원의 엘프라고 말이야.”
“연옥의 엘프들이 그러던가요?”
“그건 특수한 경우잖아.”
“저도 모든 엘프들을 장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하이엘프는 어느 차원에서든 특별해요. 특별하게 여겨지고요.”
“좋아, 일단 가보자고.”
* * *
그 정도로 많은 세계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간다. 우주를 수놓으며 은하수를 그린다.
법칙에 의해 원활하게 흘러갈 것 같은 세상도 완벽하지는 않다. 애초에 완벽한 세상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의 손길에 따라 일어나던 불협화음이 다시금 부드러운 선율로 돌아간다는 건 참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다.
“신이시여.”
“성공했다는 말이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당히 궁금하군. 지금 당장 콕콕 쑤시는 심장을 들쑤셔···휴가? 그것도 붙여서?”
“그게 불가하다면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말라고도 이르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주동안 그 인간을 피신시켜야 할
것이다.”
“예! 모두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딱, 남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다시금 하나로 합쳐졌다.
“내가 직접 가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쉽구나.”
쯧, 혀를 찬 남자가 잔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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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9. 발견 >
쿠그그그그그-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세계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굉음과 진동,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을 일으켰다.
연옥을 부수겠다고 말했다는 하이엘프와 그걸 받아들였다는 소장. 아무리 율리아가 세계수에 걸고 맹세했다고
한들, 믿을 수 있는 한계선이라는 게 있었다.
“이주만에 만들 수는 있고?”
“정확히는 12 일이네. 다행히 크게 부서진 건 없어서 이틀이면 이쪽은 모두 끝날 것 같거든.”
연옥은 결국 신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감옥이다. 신이 쓸모가 다한 용사를, 말을 듣지 않는 용사를 가두는 감옥.
그런데.
* * *
몬스터들이 넘실거리는 산맥을 가로 지르며 야영, 낡은 주점에서 용병들과의 만남, 도적 길드에게 소매치기를
당하고 참교육, 마법사 길드에 방문하여 마법사들과의 대담, 어느 귀족가와의 만남.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세계수는 어느 쪽에 있지?”
“꽤나 멀어요. 일단 여기서 동북쪽이에요.”
“타.”
덕구를 타고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은신의 권능을 사용한 케르베로스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최소한 한 차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들 수준에 불과했다.
“결계가 있다.”
“알고 있어요. 숲 중앙에서 어머니 나무의 존재감이 느껴져요. 결계는 어머니 나무를 핵으로 삼아 펼쳐져 있어요.
허락받지 않은 자는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거예요.”
“너는?”
그녀는 하이엘프였으나 이 세계의 하이엘프는 아니었다. 세계수의 존재를 느끼고 왔으나 세계수가 초대장을
보내준 것은 아니었다.
멍멍멍!
“봤죠? 가요.”
“내가 가도 아무런 문제없는 거 맞지?”
“일행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어머니 나무께서 배척하지 않으실 거예요.”
과연, 결계는 김우진과 덕구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막 하나를 넘었을 뿐이지만 밖과 안은 꽤나 큰 차이가 있었다. 정순하면서도 깨끗한 마나의 질과 농도가
달랐다.
그때,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살의 끝이 김우진과 율리아, 그리고 덕구를 향해 겨눠졌다.
“이야기 잘 됐다며.”
“···잘 됐어요. 다만, 어머니 나무와 이야기한 걸 다이렉트로 외곽의 엘프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런 이유여야만 할 거야.”
율리아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젖혔다.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로브가 작동을 멈췄다.
드러나지 않던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엘프?”
“아니, 이 기운은···.”
“하이엘프···?”
“하지만 처음 보는···.”
“마수와 함께하는데···?”
엘프들은 본능적으로 귀족들을 알아본다. 갑작스러운 하이엘프의 등장에 엘프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엘프들이 주저했다. 하이엘프는 엘프들에게 존중받고 신성시 여겨지는 귀족인 것은 맞다. 하지만 눈앞의
하이엘프는 처음 보는 존재였고 마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 걸렸다.
“당신이군요.”
“다이안님.”
세계수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일까, 다이안은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마수를 보고도 감상평은 그게 끝이었다.
“다이안입니다.”
“김우진입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들은 제가 인도할 테니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예!”
* * *
“처음 보는 하이엘프야.”
“다이안님이 함께 하신다. 적이 아니라는 거야.”
“어째서 하이엘프가 마수와 함께 다니는 거지?”
“불길함이 가득해.”
“어서 오시게.”
저 멀리 보이던 하늘을 꿰뚫은 나무가 더 없이 가까워질 무렵, 일단의 무리가 일행을 반겼다.
“어머니 나무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엘프도 곁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 나무의 마나가 짙어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세계수가 품는 마나는 더 없이 정순해지고 풍부해진다. 그 정도는 경지가 부족한 엘프들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니, 과유불급이었다.
“마나가 너무 넘쳐서 감당을 못할 정도란 말입니까? 혹 세계수가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지만 어머니 나무께서는 약 만 이천 년전부터 뿌리를 내리시어 저희 엘프들을 보살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다이안이 사라졌다.
크릉.
그때, 세계수가 떨렸다.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은빛의 거대한 순록이 땅 아래에서부터 솟아났다.
세계수의 정령체였다.
“아니.”
- 아쉽구나. 허나, 딱히 그대에게 해를 입히거나 위험한 것 같지는 않으니 그대의 말대로 하겠다.
- 다른 차원의 아이야.
- 네가 저 인간과 함께 날 찾은 것은, 얼마 전에 이곳으로 돌아온 용사 때문이겠지?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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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0. 세계수와 관리자 >
‘어떻게 해요?’
‘이제부터는 입 닫고 있어라.’
“데리러 왔다.”
- 이유는?
- 네 태도와 말투에서 보건데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세계수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 당연히.
- 다시 말하마. 그 아이는 이 차원의 영웅이란다.
-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 결코 그 아이를 데려갈 수 없음이야.
- 분명히 말하려무나. 데리러 온 것이니, 잡으러 온 것이니?
“음, 그게 아니라요···.”
“입 닫고 있으라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 헛소리 하지 마라, 세계수.”
순록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높이가 맞춰졌다. 새하얀 백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 역시 너는 집행자겠구나.
“내가 원하는 건 식물들과 무난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면 족해. 헌데 말하는 걸 보니 공짜는 아니겠군. 뭘
원하지?”
하이엘프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권능 중 하나이나 그것 또한 세계수의 용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있을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범위는 한 대륙을 가뿐히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다.
- 되었단다.
- 그 정도쯤은 그냥 도와주마.
“갑자기?”
‘세계수는 용사들의 중요한 조력자지. 허나, 그건 상하 관계가 아니다. 이득이 되니까 돕는 것에 불과해.’
세계수는 신의 선택을 받아 소환된 용사를 도와주는 중요한 조력자 중 하나다. 아이템을 주거나, 동료를
쥐어주거나, 축복을 내리거나, 예언을 내려 용사를 돕는다.
세계수의 도움이 없다면 이주일만에 강민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에 가까우니까.
* * *
“···사기꾼.”
“사기꾼은 너지.”
“제가 왜요?”
“소지가 되고 싶어서 세계수의 씨앗을 넘긴다고 했던가.”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애초에 속지도 않았지만 네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더 이상해. 널 사주한 게 알베니우스 아닌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든 걸 밝히는 게 나았을 텐데?”
“알베니우스가 확신할 수 없다고 했어요.”
“무엇을?”
“당신의 의중을. 신들의 개가 될만한 사람이 아닌데 개 노릇을 하고 있다고요.”
“개라. 그렇게 보이긴 하지.”
때문에 김우진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약이 끝난 이후로 상정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등장과 알베니우스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뒤로 조금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연옥을 부순다는 것까지는 안다. 그리고 그 무기가 율리아고, 이후 그녀의 미래는 알베니우스의 손에 달렸다는
것까지.
* * *
“왜입니까?”
“강민식 용사님께서는 저희를 구원해준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해당 차원의 인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처치하기 위해, 차원의 굴레에 종속되지 않은 타 차원의
인류를 데리고 오는 거다.
영웅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용사님의 귀환 사실조차 모를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희가 용사님을 찾고 있으면 이유를
묻고, 경우에 따라서는 먼저 용사님을 찾아 보호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알아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 준다면 기쁘게 환송해주지만 돌아온다면, 각국에서 용사를 자신들의 품 안으로
들이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그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 *
괜스레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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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1. 없나? >
“어서오십시오!”
술과 안주는 정말 금방 나왔다. 뜨뜻미지근한 잔을 가볍게 두드리자 시원한 냉기가 흑맥주를 차갑게 식혔다.
“크으, 이거야.”
위대한 용사, 강민식과 최후의 전장까지 함께했던 그녀는 그 공을 인정받아 제국 아카데미의 수석 교수가
되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녀에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천재과인 그녀에게 있어
검술이란 본능이었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풀어 설명하는 능력 같은 건 없었다.
‘강민식이라.’
‘강민식일 리가 없지.’
그녀는 죽었다. 나약하던 강민식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강민식은 변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이니는 강민식과 연인 관계였으니. 그 애틋함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는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어?”
무척이나 익숙한 뒷모습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긴 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여행 내내 로브를 사용했었다.
“오랜만이야.”
“누···루이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뭐가?”
“루이네, 너라면 비밀 은신처가 많겠지?”
“갑자기?”
“부탁이야. 나를 숨겨줘.”
“으응···?”
* * *
주황빛의 모래는 연옥의 붉은 모래처럼 열기를 흡수하여 증폭시키지 못한다. 때문에 크라프트의 사막은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모래사막 한 가운데,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파인 구덩이. 그 안에서 진한 마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차원 이동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마력이 필요한 고위 마법이다. 자연스레 그 흔적은 진하게 남는다.
안타까운 건 그 흔적이 하필 사막이라는 것, 그래서 불어오는 바람과 모래에 대부분의 흔적이 지워졌다는 것이다.
어디로 떠났는지 그 발자국까지도.
“이쪽이에요.”
“이쪽입니다.”
알고 있다. 이 우주에서 시간은 절대적인 법칙 중 하나다. 아르반과 지구의 시간은, 지구와 크라프트의 시간은,
크라프트의 시간과 연옥의 시간은 같다.
크라프트에 제국은 하나뿐이었다. 전체적인 판도는 왕국 연합 대 제국이 힘의 균형을 맞추는 느낌이라 사람들은
제국을 그냥 제국이라 불렀다.
“이 방향대로 쭉 가면 뭐가 나옵니까?”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인 드와인이 나옵니다.”
“어쩌면 거기 숨어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덕구야. 변신.”
멍!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다가가기 전, 덕구의
몸이 작아졌다.
끼이잉-
덕구가 싫다는 기색을 내비쳤으나 김우진의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율리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귀여워. 우쭈쭈.”
으르르르!
생각해보면 저게 당연하다. 마수가 상극에 가까운 순수한 마나를 품은 하이엘프를 선호할 리가 없으니. 개의치
않는 율리아가 특이한 거다.
“엘프님이시군요. 통과입니다.”
“감사합니다.”
왕국과 왕국은, 제국과 왕국은 전쟁과 분쟁을 자제하고, 인간과 이종족들은 화합을 이끌어 나간다.
쭉 뻗은 대로와 적절히 나열된 건물들, 수많은 인파와 활기,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깨끗함, 정갈함, 화려함과
고풍스러움 그리고 그 사이를 나부끼는 수 많은 신문들까지.
【충격, 세계를 구한 영웅, 강민식 용사님이 돌아오다? 드와르의 한 외곽 주점에서 포착된 강민식 용사님과 영웅,
루이네 얼리어스의 밀회···.】
【돌아온 뒤, 옛 동료와 만남을 가진 용사님. 이후, 곧장 루이네 얼리어스와 함께 사라져···.】
【용사님을 목격한 용병, 데이드 ‘한 눈에 딱 그 분 인줄 알았다. 세상을 구한 영웅을 어떻게 몰라보겠나.
용사의 품격이 느껴졌다.’ 발언 화제···.】
【강민식 용사님의 등장에 각국, 촉각을 곤두세우며 용사님 찾기에 돌입···.】
“···그, 없나?”
* * *
와작-
“미안해, 내 탓이야.”
지독한 악취는 코를 찌르고 지독한 어둠은 시야를 차단한다. 그래봐야 용사와 용사의 동료였던 둘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어.”
아니, 그전에.
‘···근데 잠깐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말 충분한가?”
“네 생각이 옳다. 충분하지 않다.”
“허나, 걱정마라. 너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께서 친히 우리를 보내셨으니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 * *
김우진이 만들어달라고 했던 것은 전자이며 세계수라는 신목을 숨기기 위해서는 그 능력이 독보적으로 특출나야만
한다.
“정말로?”
“아마도.”
용사가 되면 피조물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드물지만 강민식의 ‘독’과 같이 새로운 능력을
얻기도 한다.
마도구의 마법진과 술식을 파악하는데 한참이 걸렸으나 파악한 이후에는 권능의 도움을 받아 결국 설계도를 그렸고
어떻게든 만들어냈다.
하지만 언제나 이론을 현실로 구현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완벽하다고 한들, 그게 정말
완벽하다는 뜻도 아니다.
“만들 수는 있고?”
“일단 재료는 충분하네.”
탈옥수를 잡으러 떠나기 전, 김우진이 추가로 풀어놓은 재료의 산은 거의 모든 것이 존재했다.
시에나가 혀를 찼다.
“세계수는 신목이자 정령이네. 무엇이 먼저는 중요치 않아. 세계수를 완벽하게 가리기 위해선 결국 둘 모두를
가둬야하네.”
“말이야 쉽지.”
삐이이이이이이!
콰직-
드워프들의 쓸데없는 고증 정신 때문에 울타리에 갇힌 세계수의 모습과 새장에 들어간 릴리의 모습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러니 알 수밖에.
“그건 맞지.”
───────────────
# < 032. 집행자 >
율리아의 본래 세상, 아르반의 세계수는 환상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고고하고 고귀하며 푸근하고 자애롭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살아온 세월이 비례해 아르반의 세계수보다 훨씬 크고 강대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그보다는.’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신들이 김우진을 대하는 방식이나, 김우진의 신들에 대한 적개심을 보면 신들의 개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알베니우스의 걱정도 기우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직···.’
확답을 받지는 못했다. 손을 잡았으나 진정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협력을 해줄 것인지, 말 것인지.
식물들은 강민식과 늘어난 일행의 행적으로 그대로 알려주었다. 가히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나 그래서 하이엘프가
특별한 것이다.
멍!
그때 덕구가 율리아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꼬리를 흔들며 김우진을 향해 짖었다. 냄새가 느껴진다는 신호다.
“여기 있는 게 확실하군.”
“덕구야, 앞장서.”
멍!
덕구가 내달렸다. 만약에 대비해 입구에 다이안을 남겨둔 김우진과 율리아가 그 뒤를 따랐다.
지하수로의 내부는 무척이나 컸다. 천장은 약 5m, 가로는 약 20m 정도. 양쪽으로 길이 나 있고 중앙으로는
물이 흐른다. 또한 복잡한 미로와 같았으나 단 1 초도 멈출 필요가 없었다.
덕구의 후각은 권능에 가깝다. 어떤 악취가 있더라도, 아무리 멀어도 원하는 냄새를 포착해내고야 만다.
그래서 일거다.
벌컥-
“뭐하냐, 쥐새끼들아?”
“···김우진!”
하지만 김우진이 그에게 남긴 전율은 그 이상이었다. 16 명의 용사들을 짓밟고 와 일곱 용사들의 합공마저 가뿐히
짓이겼다.
티딕, 화염이 일렁였다. 김우진의 곁에서부터 시작한 전이는 곧장 은신처 내부 전체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뒤덮었다.
어느 정도는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한 번의 부딪힘만으로 실감했다.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만약을 위해서 알도와 강민식을 보냈으나 아직 셋의 집행자들이 남았다. 넷의 집행자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아니, 해볼 만하지 않아도 해야만 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하라는 신명이 있었다 한들, 진짜 무의미하게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놈이 웃는다.
“미친···!”
베오르가 욕설을 내뱉었다. 육신이 단단해진다. 온갖 마법에, 열기에도 높은 저항력을 갖는다. 그의 권능,
철인이다.
“···맙소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가 느껴진다. 세상을 붉게 물들인 불의 장벽이 그와 김우진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크아아악!
끄아아악!
크악!
“···말도 안 돼.”
몸이 덜덜 떨렸다.
“···하하.”
이딴 게 위안이라고?
“마지막은 네 몫이다.”
“···저요?”
“나는 능력이 부족한 자를 협력자로 여기지 않아.”
용사들 중에서도 극소수. 선택받은 용사들 중에서도 다시 또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떨어지는 제안.
“···몰랐어요.”
“너와 내가 바라는 그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가장 밑에서부터 마주할 적.”
그러니 증명해라.
“네가 쓸모 있음을.”
“···못할 것도 없죠. 고작 하나인데.”
김우진이 집행자와 강민식이 사라진 자리에 섰다. 마나를 더듬으며 공간에 손을 박아 넣고 찢었다.
“···어?”
“······!”
균열이 벌어졌다.
“추적할 수가 있거든. 이놈 죽이고 밖에서 기다리는 다이안과 함께 날 기다려.”
“······.”
“······.”
* * *
···신뢰 받는 건가?
아니, 아니다.
놀랐지만 그 놀라움은 눈앞의 집행자보다 크지는 않을 거다. 율리아의 시선이 멍하니 서 있는 집행자에게 닿았다.
“나에게는 신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 예상 밖의 일이지만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창끝이 적을 향해 겨눠진다.
드드드-
창이 공간을 꿰뚫었다. 카앙, 율리아의 검이 그 진로를 가로 막았다. 튕겨져 나간 창은 어느새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 있었다.
허나.
“아니죠.”
“······!”
손은 주인에게 붙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아니죠. 제가 강한 거겠죠?”
“그리고 솔직히 처음에 보여준 모습은 너무 실망스럽긴 했어요. 오랫동안 구속구를 차고 있다가 아주 잠깐 푼
거라서, 다른 제약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힘이 온전하지 않았거든요.”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라뇨. 물음에 대한 대답이잖아요.”
푹, 차가운 금속이 베오르의 폐부를 찔렀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권능, 철인은 너무도 쉽게 박살났다.
───────────────
# < 033. 숨바꼭질 >
콰직, 공간이동의 여파에 휘말린 리자드맨 둘의 육신이 그대로 찢어졌다. 리자드맨들을 향하던 크로커의 두터운
이빨이 사이로 끼어든 김우진을 노렸다.
콰아앙!
화염이 크로커를 밀어냈다. 가죽을 녹이고 살을 익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잿더미가 되었으나 아주 짧은 틈은,
집행자가 다시 한 번 공간이동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서걱-
“쓸데없는 짓을.”
다시 한 번 공간 속으로 손을 비집었다.
“···이것 봐라?”
“마나소모가 컸겠군.”
김우진이 몸을 던졌다.
* * *
“···제기랄!”
“괘, 괜찮으십니까?”
“이럴 시간이 없다. 수를 써놓긴 했지만 김우진이라면 금방 온다. 설마 공간 조작 능력도 있을 줄이야···!”
“···도망칠 수는 있는 겁니까?”
“그러면 그냥 순순히 붙잡혀서 다시 연옥에 갇힐 테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이 여자는 여기서 버린다.”
알도는 그 권한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다.”
“한 가지라면?”
파직-
“가서 설명해주마!”
거대한 도시였다. 와아아, 수많은 인파가 환호하는 도시, 카니발의 행진이 이어지는 대로.
“제도···?”
“모른다. 그저 가장 사람이 많고 북적이는 곳으로 이동한 것이니.”
“···다행히 이건 예상대로군.”
“무슨 뜻입니까?”
“김우진은 이번 사태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의 과격 행동은 최대한 자제할
거다.”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네가 이대로 문제없이 잡힌다면 그냥 사람들이 누군가를 너로 착각한 해프닝으로 끝나던가, 네가 잠시 소장의
권한으로 귀휴를 나온 것으로 마무리 될 거다.”
“귀휴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순식간에 우리를 쫓아온 김우진이다. 네 명의 집행자들을 쓸어버렸다는 뜻이고 그런 놈에게 말이 안 되는 건
없다.”
어쩌면 그 소문들이 진짜 한 치의 과정도 없는 사실일지도 모르지. 알도가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인파에 숨는 건 임시방편이다.”
“내 권능은 집행자들 사이에서도 공간적으로는 독보적이다. 급조하느라 따라 잡혔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최대한
복잡하게 꼬아버린다면 충분히 숨을 수 있다.”
그러면 된다. 애초에 목적은 김우진과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강민식이 잡히지 않게끔 돕는 것이니.
알도가 다급하게 몸을 굴렸다. 쩡, 미약한 진동과 함께 대지가 파열된다. 그 굉음은 카니발의 열기에 묻힌다.
“어, 어···?”
“재미있는 짓을 하네.”
나름의 발악인가.
꽤나 성가시긴 하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 * *
강민식과 함께 최후의 전장에 섰던 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며 전장의 선두에서 대륙을 위해, 인류를 위해
싸운 영웅.
연단처럼 조성된 황궁의 테라스. 이제 곧 저 문을 열고 황제 폐하께서 나오실 거다. 그리고 고귀한 말씀을
시작하시겠지.
하지만 1 분.
“조금 늦으시나?”
“워낙 바쁘신 분이니 조금 늦으실 수도 있지.”
5 분.
10 분.
* * *
“어디 있지?”
그래서 신문을 봤음에도 믿지 않았다. 언론들은 언제나 관심을 받기 위해 사소한 가십거리들을 부풀린다.
“진짜였다니.”
“폐하를 뵙습니다.”
“문을 열어라.”
“예.”
접객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접객실의 내부, 소의 가죽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의자에 그가
있었다.
용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게 하는 예의로는 부족하나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적절하다.
황제라고 한들, 그는 용사이니.
시종과 호위 기사들이 나갔다. 텅 비어버린 접객실 안에서 황제와 용사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건 그랬다. 세상을 구한 이후에는 나름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완전히 잊지 못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도 맞았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계약서도 안 보여주고 계약부터 강요하는 꼴이 악마들이 하던 제안 같구나.”
“저는 쫓기고 있습니다. 추격자를 막아주십시오.”
“재미있는 농담이다.”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누구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 쫓기는지도 모르면서 막아 달라?”
“알게 되시면 감당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짐은 제국의 황제다. 짐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있습니다. 저 또한 감당하지 못할 대적입니다.”
“우스운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도와달라는 거지?”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시간?”
“황궁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아주 잠시의 시간을 벌어주신다···.”
용사의 말이 멈췄다.
“어딜 보는 거지?”
“···이런 미친.”
허나, 용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시커멓게 불타오르는 불꽃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소장의 것이었다.
“찾았다.”
“누···!”
김우진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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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4. 용사가 옛 동료에게 남기는 편지 >
“···미친 새끼.”
“화를 내야 하는 건 나야.”
“닥···!”
“닥쳐야 할 것도 너고.”
“날 엿 먹이기 위해서.”
콱-
거친 손길이 강민식의 목을 움켜쥐었다. 콰앙,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강렬한 격통에 신음을 삼켰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그놈들에게 어떤 걸 약속 받았지?”
“내가 말할 것 같아···?”
“말하게 될 텐데.”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순순히 말한다와 고통스러워한 뒤 당한다로 과정이 나뉘어질 뿐. 김우진은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징벌방을 버티고 마음대로 벗어날 수 있는 건 놈들의 권한을 일부 받았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
“헛소리···!”
“그런데 말이야. 왜 하나만 생각하고 두 개는 생각을 안 할까? 징벌방은 그냥 내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야.”
뒤를 노리던 바람의 칼날이 소멸했다. 그 여파로 은밀하게 숨어 기회를 엿보던 집행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승.
빠드득, 지팡이가 충격과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파열음을 냈다. 집행자는 당황했으나 다급하게 마법을 영창했다.
순식간에 완성된 것은 공간의 비틀림이었다. 공간 자체를 비틀어 상대의 육신을 일그러트리는 마법.
파직, 그것은 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파훼되었다. 그 순간, 무너진 천장의 일부가 김우진을 향해 떨어졌다.
애초에 정면은 눈속임이었다.
“어디가.”
그 또한 용사로서 최강이라 칭송받던 자였다. 나아가 용사들 사이에서 뽑힌 용사들의 용사, 집행자가 될 정도로
우수했다.
자부심이 없다면 거짓이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장기인 공간 마법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도 있었다.
황성에 숨어든 시간은 짧았으나 그 짧은 틈새에 쓰여진 술식은 방대했다.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녹일 수는 없다.
그러니 녹는 것보다 빠르게 재구성한다면 갈 수 있다.
파지지지직-
공간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열기가 그것을 녹인다. 술식이 덧붙여져 다시 재구성된다. 다시 녹인다.
마법진을 그린 마나가, 그것을 녹인 마나가, 술식으로 덧붙여진 마나가, 다시 녹여버린 마나가 쌓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쿠구구구구-
“아, 안···!”
“돼.”
심지어 접객실마저도.
딸각-
“···어?”
고풍스러운 가구와 벽지, 장식품들. 그리고 황제와 용사 대신 그들을 반기는 것은 접객실 밖에 펼쳐진 정원이었다.
“···폐, 폐하!”
“폐하, 어디 계십니까!”
* * *
공간 자체가 전이되었다.
“···대체 어떻게!”
강민식의 이빨에 숨겨진 독단을 빼고 알도의 몸에 간섭해 자살을 위한 모든 술식들을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
육신이 상했지만 자업자득이다.
“너희 둘 다 곱게 죽지 못할 거다.”
마나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통제하긴 했는데 황제까지 데리고 와버렸으니 모를 수가 없겠지?
* * *
평소에는 조용히 황제를 보필하지만 그녀가 한 번 화를 내기 시작하면 황제가 아니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단순히 황제가 조용히 납치되는 수준이 아닌, 접객실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시점에서 더욱 더.
말할 수 없다. 황제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며 그것이 소수의 고위 대신만이 은밀히 소집된
이유였다.
황후 또한 용사의 동료였다. 그가 갑작스레 돌아올 이유도, 황제를 납치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안다.
“분명히 조력자가···.”
있을 거다. 그런데 용사는 혼자라고 했다. 황궁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전부 등신도 아니고 숨어드는 침입자 하나
눈치 채지 못했을까?
“폐, 폐하!”
“폐하!”
황제였다.
갑작스레 대전을 구르는 황제에게는 의식이 없었으나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숨도 잘 쉬었다.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을 뿐, 납치는 아님. 기절한 건 나약해서임. 운동 좀 시켜.
우리 사이에 이런 건 넘어가자.
용사 강민식]
“······.”
이게 갑자기 돌아버렸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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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5. 시찰 >
“이겼어요! 말씀하신 대로 제 쓸모를 증명했어요.”
“사진?”
“이걸로 찍었어요.”
“카메라?”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소장님 차원에서는 흔하다면서요?”
“강민식이 준 건가?”
“이걸로 연옥의 구석구석을 찍어달라면서 줬어요. 근데 다시 달라는 말은 안해서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탈옥에 협조했다고?”
“죄수들간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조금 호의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죠.”
“요약하자면 ‘탈옥을 도왔다.’가 되는데 그걸 소장한테 직접 말해?”
혹시 바본가?
아하, 그냥 뻔뻔한거군.
황제를 건드리고 수많은 목격자가 생겨난 이상,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아예 방향을 바꿨다.
“강민식은 귀휴를 나온 거야. 나와서 옛 동료인 황제를 만나고 조금 이야기를 나눈 거지. 근데 황제가 나약해서
공간 이동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한 거지.”
그러니 쪽지에 이름 남기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강민식의 이름을 남겨야 다른 곳으로 의심의 화살이
날아들 여지가 줄어든다.
김우진이 다시금 거대하진 덕구의 등 위에 두 개의 짐짝을 실었다. 다이안의 침중한 눈빛으로 강민식을 흘겼다.
다이안이 떠나갔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일단은.”
“아직 남았어요?”
“네가 할 일은 아니고.”
“일단은 가자.”
‘세계수.’
데르카인에게 맡겨놓고 왔지만 솔직히 2 주안에 관리자들을 속일만한 아티팩트를 만들라는 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계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세계수는 그에게는 아주 큰 힘이, 저들에게는 비수가 되어줄 테니.
* * *
연옥의 정문, 김우진은 자신을 반기는 부소장에게 축 늘어진 집행자와 강민식을 내밀었다. 교도관들이 인계
받았다.
“집행자 아닙니까?”
“집행자가 뭐지?”
“용사죠.”
“힘을 포기했나?”
“아닙니다.”
“그럼 죄수지.”
“···아?”
“꽤나 많이 바뀌었군.”
“세계수는 의도하신 자리에 제대로 안착했습니다. 드워프들의 솜씨는 여전히 명불허전이고 말입니다.”
허나 그 일주일의 시간 동안, 연옥은 꽤나 바뀌어 있었다. 연옥 전체를 휘감고 있던 세계수의 뿌리와 가지가
사라지고 부서진 부분들이 복구되었다.
하지만 3 층은 예외였다. 연옥의 시스템을 만든 건 관리자들이었고 그들의 도움이 아니면 부서진 시스템은 복구할
수 없으니까.
애초에 저들이 설계하여 실행한 판이다. 집행자까지 보낸 시점에서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별 다른 일은?”
“없습니다. 저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두 번은 못합니다.”
“깨어나긴 했나?”
“예, 죄수들은 모두 깨어났습니다.”
“구속구는?”
“여분으로 일단 채워놨습니다만, 강민식은 어떻게 합니까?”
“처음 호송관들에게 인계 받았을 때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 다 채워.”
“세계수는 어때?”
“특이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드워프들의 요구에 엘프들이 합류했습니다.”
“엘프들의 마나 운용은 확실히 뛰어나지. 그런데 순순히 협조하던가?”
“예.”
간절한 눈빛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른다. 수고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상관없어요!”
“소장님, 세계수 쪽에 특이 사항이 하나···.”
“가서 확인해볼게.”
“···담장 같네요?”
세계수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는 거대한 담장이 있었다. 고개를 90 도 각도로 올려다봐야 하는, 딱 적당히 자란
세계수 정도의 높이의.
보다 가까이 다가가자 땅땅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자잘한 마나의 파동들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구속구까지 풀고 있네요?”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저도 아티팩트 만들래요.”
“방금까지 풀어줬잖아?”
“지금은 다시 착용하고 있잖아요. 모르시나본데 이게 얼마나 성가시고 불편하지 아세요?”
“알아야 하나?”
“이익···!”
“왔구나, 소장.”
그녀는 벽면 전체에 새겨진 술식들을 파악했고, 확인했다. 그리고 그 효웅이 확실히 뛰어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어린 세계수를 감추기에는 확실하다는 거군요. 어린의 범주가 어디까지 입니까?”
“천 년이요.”
율리아가 대답했다.
씨앗에 간섭하기 위해 막대한 마나와 권능을 퍼붓기는 했다. 그게 이렇게 영향을 준 걸까.
“완성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아니라 저 드워프한테 물어봐야지. 그리고 문제가 또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문제요?”
“직접 가봐.”
그때였다.
삐이이이이!
삐이이!
삐! 삐삐!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소리들에 김우진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삐삐삐!
“저것들이 짜증난다고?”
삐이이이이! 삐이이!
“난쟁이랑 귀쟁이가 자기를 감옥에 가두려고 한데요. 아니, 잠깐만. ···난쟁이랑 귀쟁이요? 아니, 어머니
나무님. 그런 못된 말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삐이이이이!
삐삐!
“자유 만세? 갑자기 무슨 자유에요?”
“···살다보니 이런 장면도 다 보네.”
“왜 저런 겁니까?”
“데르카인한테 가면 다 알 수 있을 거야.”
“···왔나?”
일반적인 엘프와 드워프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차원의 최강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소장님.”
“무슨 내용입니까?”
“예상한 그대로의 내용.”
“그 말씀은···.”
“내일 잘 나신 관리자께서 한 분 감옥을 시찰하러 오신다네.”
올 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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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6. 이 달러 >
군단장에게 지저분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대대장은, 모든 병사와 간부들을 동원해 부대 전체를 청소했다.
생활관 내부부터 외부까지. 바닥을 닦고, 꽃을 심고 잔디를 깎고, 차가 들어오는 도로에 낙엽하나 없을 정도로
쓸고 또 쓸었다.
자칭 신이라 칭하는 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애쓰는 1 초도 아깝다. 그들은 대접받을 자격이 없다.
“누가 올 것 같아?”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발톱을 드러낼 자는 한 명 뿐입니다.”
“그래, 그렇지.”
“······.”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무엇이?”
“오만하여 소장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습니다.”
연옥의 수인들에게 김우진은 압도적인 강자였다. 타르칸은 수인들을 대표해 김우진의 수족이 되었다.
짐승은 무리 사냥을 한다. 짐승들을 이끄는 타르칸 톨리스는 김우진의 강함을 알고 있었으나 그 명확한 한계를
몰랐다.
혼자라면 무리라고 할지라도, 온전한 상태에서 함께라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란 것처럼 느껴지는군.”
“직접 몸으로 체득한 것마저 인정하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습니다.”
“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말로 만?”
“기회가 된다면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런다고 연옥에서 나가지는 못해.”
“그것이 소장님의 뜻이라면.”
“힘을 포기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건.”
김우진이 픽 웃었다. 애초에 그렇게 쉽게 수인들을 내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진즉에 50 명을 채우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겠지.
“수인들 잘 관리해.”
“예.”
“한 번만 더 이따위 짓거리를 벌이면 네가 어떻게 될 지는 기대해도 좋아.”
“꿈에서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가봐.”
“예!”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에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계수의 입을 통해 엘프들의 출소를 강요하는 것. 엘프들과 세계수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애매해졌다. 율리아와 협조하기로 하고 엘프들이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인 시점에서 당장
내보내는 것보다 이용하는 것이 더 효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티팩트는 완성됐습니까?”
“그건 나보다 다음에 상담할 죄수한테 묻는 게 더 확실하지 않겠니?”
“그것도 그렇네요.”
“추노는 어땠니?”
“노예가 아니라 죄수인데요?”
“뜻만 이해했으면 됐지.”
“내일입니다.”
“내일 바로 온다던가?”
“이런 면에서는 또 칼 같은 면이 있어서 말입니다.”
“자네도 참 귀찮겠군.”
“아티팩트는 완성 됐습니까?”
“하늘구름이네.”
“하늘구름은 완성 됐습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완성되지는 않았네. 하지만 오늘 안에 완성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네.”
“믿고 있었습니다. 역시 최고의 장인답습니다.”
김우진이 반색했다.
“네.”
“···혹시 출소, 번복해도 되나?”
“······.”
* * *
모든 개인면담이 끝났다.
타르칸이 굴복한 시점에서 수인들이, 율리아와 시에나, 데르카인이 협조적인 시점에서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똑같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우진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전례가 있었고 격의 차이는 본능에 각인 되었다.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발전하여 더 이상의 희망을 벗어 던지게 만들었다.
“출소하겠습니다.”
“···거부합니다.”
- ···삐이!
- 삐삐삐! 삐이이이이!
“···이건 아직 모르겠는데.”
“새장은 더 없이 불쾌한 곳이라고 하시네요. 자신을 억압하고 제약해서 숨이 막힌데요.”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힘을 가린다는 건 단순히 가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아무런 조치도 없이 세계수라는 나무를 완벽하게 가릴
수는 없다.
당연히 힘 자체를 억압하고 약화시키는 작업 또한 들어간다. 하늘구름은 내부의 기운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도록
차단함과 동시에 내부의 존재를 억압하는 역할도 함께 한다.
- 삐?
“이 달러, 아니 두 개.”
“어때?”
큰 출혈이지만 무작정 억압하여 기껏 쌓아올린 호감을 전부 깎아내릴 바에, 영약을 쥐어주는 게 나았다.
- 삐삐!
“알겠다고 하시네요.”
“굳이 해석해주지 않아도 알아. 그런데 이걸 바로 수락해?”
“그러게요. 대체 어머니 나무께서 왜 이렇게 속물이 되셨는지. 이건 전부 소장님의 영향이 아닐까요?”
“소장 비하, 벌점 1 만점. 2 징벌방 하루.”
“···씨앗에 간섭하셨잖아요. 가장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건데요.”
“사실적시 명예훼손. 벌점 1 만점 추가.”
“그건 대체 뭔데요!”
영약의 납품은 분기에 열 개다. 허나, 아무리 용사들이 길러낸다고 해도 영초는 쉽고 빠르게 자라나는 식물이
아니다.
“한 달 안에 나올 영약이 몇 개야?”
“하나요. 그 이상은 절대 안 나와요.”
“네가 하이엘프인데?”
“하이엘프라고 만능은 아니거든요?”
“그럼 부족한 게···.”
“어머니 나무한테 두 개를 드리면 세 개죠.”
“그럼 어차피 하나가 모자라잖아.”
“그렇다고 더 부족하게 해요?”
“지구에는 이런 말이 있어.”
“뭔데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대책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시네요.”
“급한 불을 끄는 게 먼저란 소리야.”
* * *
실패.
어째서 실패했을까.
그를 연옥으로 보낸 신은 말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김우진은 기어코 그를 찾아냈고 집행자들은 모조리 쓰러졌다. 그리고 강민식은 다시 연행되어 연옥으로 돌아왔다.
‘신’이라면.
‘전지전능한 신’이면.
어째서.
정말 ‘신’인가?
“···관리자.”
아니면 그냥 버려버릴까.
강민식이 이를 갈았다.
───────────────
# < 037. 제안 >
하늘구름은 완성 되었다. 세계수의 나무는 완전히 가려졌고 영약을 세 개나 쥐어준 릴리 또한 새장으로 들어갔다.
연옥에서 세계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계수의 지척까지 가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옥의 건물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죄수들은?”
“모두 얌전히 독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집행자는?”
“말씀하신대로 폐쇄한 3 층의 멀쩡한 독방에 가둬 놓았습니다.”
“강민식은 어떻게 하고 있지?”
“얌전합니다. 사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말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시야와 청각을 막고, 움직임을 봉쇄한 뒤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1 징벌방에 집어넣었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몇 시야?”
“8 시 51 분입니다.”
9 분 남았나.
“좋아.”
쓸데없이 부지런한 관리자는 9 시 정각에 오겠다고 전언을 남겼다. 시간은 칼 같이 지키는 놈이니 정확히 올 거다.
“가자.”
1 층 로비로 내려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은 차분히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폈다.
탈옥 사건으로 난장판이 되었던 벽면과 바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했다. 억지를 부리지 않는 이상, 꼬투리
잡힐 건 없다.
“긴장할 것 없다.”
“각자 위치로.”
“위치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은 상부이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한다. 김우진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끼익-
기생오라비 같은 놈.
“그래봤자 문제없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다.”
곧 집무실에 도착했다. 베른이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에 앉았다. 김우진은 픽 웃으며 그 앞에 자리했다.
김우진이 베른을 무시했다. 짝, 가볍게 박수를 치자 교도관들이 커피와 서류더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눈이 마주쳤다.
“세 번 말했어, 너.”
“가져와.”
“그래, 그렇게까지 보고 싶다면 봐야지.”
“의문점이 꽤 많군.”
관리자의 정독은 인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대략 30 분. 방대한 보고서를 모두 읽어 내린 베른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세계수는 장벽과 차원에 개입할 수 있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는 릴리에게 부탁해
장벽에 닿아있던 마나를 모두 거둔 상태였다.
베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데르카인이 조심스레 배급구를 열었다.
“왔군.”
김우진은 확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뒤로 미루고 고민한다는 것만으로도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신.”
아니, 관리자.
그는 데르카인에게 용사 제안을 했으며 집행자 제안까지 했다. 그리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데르카인을
연옥에 처박은 당사자였다.
처음에는 그 신이기에 유일한 존재인 줄 알았다.
그저 이 우주를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분에 넘치는 힘과 권능을 얻었고 그것을 이용해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 개새끼들이다.
* * *
“신···.”
물론 대답해 줄리는 없겠지만 신은 과연 죄수가 된 용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왜 용사들을 가두는지
궁금했다.
소장과 신들의 관계가 명확히 어떠한지, 그리고 연옥에 보다 본질적인 목적이 없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믿자.”
김우진을 믿는 알베니우스를.
그리고 세계수를 숨긴 김우진의 행동을.
자신의 요구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김우진을.
끼익-
감옥의 문이 열렸다.
의문도 잠시.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났다.
신이다.
───────────────
# < 038. 물어뜯기 >
강민식이 붙잡혔다.
작전이 실패했다.
어떻게 진실을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집행자의 파견을 말해야 한다. 강민식의 탈옥에 관여했음을 밝혀야 한다.
그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베른 오르티안은 모두가 포기한 감찰관의 자리를 자원했다.
쫘악-
보고서를 찢었다.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 알고 왔음에도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깔끔하기 그지없다. 문제가 없다.
“안내해라.”
확실히, 교도관들 몇몇이 돌아다니며 뚱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무언가 구린 냄새가 났다.
감이었으나 무시했다. 김우진은 그렇게 쉽게 단서를 내어줄 멍청이가 아니었다. 진짜 리모델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완벽하게 위장해 놓았거나.
“가지.”
4 층까지 올라가는 내부는 깨끗했다. 탈옥사태가 있었다면 분명히 여파가 있었을 터인데. 아니, 있다고 들었는데.
‘드워프들의 솜씨겠군.’
무난하게 오랜 세월 김우진을 제약할 수 있을 거라 여기던 신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된, 직접적으로 조치를 취하게
만든 계기였다.
그 첫 시도가 허무하게 끝났지만 시작일 뿐이다. 신들은 위대하고 결국 김우진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문을 열어라.”
마침내 4 층에 당도했다.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중앙이 텅 빈 갈림길의 형태다.
“문을?”
“죄수들 개개인의 상태를 확인해 보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하겠다고 했다.”
“난 널 걱정해주는 거야. 연옥의 죄수들은 좀 거칠거든. 알다시피 신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같잖은 소리를 하는군.”
베른이 코웃음쳤다.
“네놈의 더러운 주둥이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 깨끗해진 모양이구나. 나는 신이다. 하찮은 피조물들 따위가
아무리 모여 봐야 내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열어.”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죄수들은 그 누구도 갑자기 열려버린 문에 섣불리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한 독방 앞에 멈춰 섰다.
“너로군.”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빛의 머리칼, 백옥 같은 피부,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눈. 죄수복을 입었음에도 그녀의
아성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다.
“연옥의 하이엘프가.”
“자비로운 내가.”
당연하다. 연옥은 용사들의 의지를 꺾는 곳. 용사로서 인류의 떠받듬을 받던 자가 한 순간에 죄수가 되었으니
마음고생이 없을 리가 없다.
“너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 카르센, 고귀한 하이엘프이나 지금은 한낱 날개가 꺾인 죄수인 그녀가 잡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다.
“···아뇨.”
“···뭐라고?”
“여기 가둬 놓고 선심 쓰듯이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양심이 터진 것 아닌가요?”
“······!”
* * *
“집무실을 비워라.”
“갑자기?”
“감옥의 관리를 확인하기 위해 온 감찰관으로서 죄수들의 상태 또한 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김우진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집무실에 자리했다. 마나를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특별히 수상해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한 명씩 모든 죄수들을 들여보내라.”
“어떻게 합니까?”
“원하는 대로 해줘.”
특히.
‘타르칸 톨리스.’
* * *
하이엘프인 율리아 카르센까지 목표한 이들은 셋이었으나 그녀가 거부한 이상, 나머지 둘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정확히 베른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아무리 대단한 용사라고 할지라도 결국엔 일개 피조물이다. 신을 위해
존재하는, 신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
어떤 마음을 품었든 신께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 앞에서 보여야 할 태도로 적합하지 않은가.
집행자가 되어라.
“집행자가 되어 나를 섬겨라. 그리하면 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힘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언제고 널
괴롭혀온 소장을 물어뜯을 수도 있을 거다.”
손을 내밀었다.
“···지랄하고 있네.”
“···뭐, 이런.”
대체 왜?
너무 유하게 나간 모양이다. 그러니 신의 위대함을 모르는 어리석은 것들이 마음대로 제단하고 멍청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래, 그런 게 틀림없다.
그러니 감히 신 앞에 저 따위 태도를 보이겠지.
“어이가 없구려.”
“뭐라?”
“명색이 신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감옥까지 와서 죄수들을 회유하는 꼴이라니. 당신, 정말로 신이 맞소?”
“감히 신을 의심하는 것은 불경이다. 하찮은 피조물이여, 네 주제를 알아라.”
“소장은 당신들을 다르게 부르던데. 관···.”
“그만.”
쿠그그그그, 마나가 요동쳤다. 분노한 신의 기분에 따라 난쟁이를 압박했다. 데르카인의 무릎이 강제로 굽혀졌다.
그것이 신이 가진 힘이다.
죽어라.
────!
“접객실을 준비해라.”
“갑자기?”
“네놈으로 인해 집무실이 이렇게 되었으니 면담을 이어갈 다른 장소가 필요하다.”
“집무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계속 하겠다고?”
“난입하여 집무실을 부순 건 너다. 그리고 난 분명히 모든 죄수들을 면담하겠다고 말했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명령에 따라라.”
“따라와.”
* * *
탈옥에 실패하고 모든 가능성을 차단당했다. 격의 차이를 느끼고 김우진을 섬기기로 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놈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소장님 곁에 있으면 우리를 이곳에 가둔 신들을 물어뜯을
기회가 생긴다는 것 아닙니까?”
“음.”
그게 그렇게 되나?
‘고맙다, 베른.’
* * *
한편.
강민식은 신과 마주했다.
“지고한 신이시여.”
그러니.
“연옥을 무너트려라.”
강민식이 마른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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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9. 출생의 비밀 >
김우진이 혀를 찼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버러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겠어.”
베른은 대놓고 단서를 남겼다. 신의 제안이니 당연히 피조물들이 따를 것이라고, 김우진이 알고도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들은 그걸 모른다.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피조물의 감정 따위 보다는 신들의 권위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신이고 그러니까 쓸모가 다한 용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토사구팽하는 거다.
“그리고 자존심을 한껏 구기고도 굳이 구태여 면담을 계속하겠다고 한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강민식입니까?”
“그래.”
강민식은 신들이 만든 비수다. 김우진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어 더 강한 올가미를 던질 단초였다.
당사자의 증언, 탈옥의 과정과 김우진의 대응, 그리고 감옥의 분위기와 정보들.
강민식의 탈옥 과정은 명백하게 신들의 힘 덕분이었다. 과정이 완전히 밝혀진다면 자연스래 그들의 개입 또한
밝혀야만 한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세계수인데.”
죄수들 중 누구도 세계수에 대해 말하지 않을 거다. 그것만큼은 자신한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 * *
“뭐지. 대체 뭐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잘못 되도 단단히 잘못됐다.
신이다. 무려 신의 자비다.
하긴, 애초에 신의 위대함을 알고 스스로의 하찮음을 제대로 인지했더라면 연옥에 갇히는 일도 없었을 거다.
하이엘프도.
달의 늑대도.
차원의 장인도 남 주기는 아깝고 집행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은 있지만 반드시 행해져야 할 일은 아니다.
비록 실패한 버러지이나 그 의기만큼은 높히 사줄만 하며, 지금은 김우진을 찌를 비수가 되어줄 거다.
“반갑구나, 강민식.”
신을 영접한 그의 눈이 커졌다.
“······.”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앉아라. 내가 누구인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신이십니까?”
“그래.”
“···신이시여.”
강민식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신앙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이 썩어빠진 감옥에도 아직 쓸만한 피조물이 하나는 있구나. 베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으나 너의 공이 높다. 그러니 내 네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노라.”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 함은···?”
“한 번 더, 탈옥을 시도하거라.”
“···예?”
“왜 놀라느냐.”
“···한 번 더 말씀이십니까?”
“너는 실패자다. 신의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하지. 많은 신들이 너의 부족함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베른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 * *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저놈들은 애초에 나를 순순히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이제와서 나한테 한탄해봤자···.”
“나는 신에게 세계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도와주겠다.
김우진이 웃었다.
이빨 꽉 깨물어라.
뿌득-
* * *
삐-
지루해.
심심해.
괴로워.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 삐이···.
[아아, 들리니?]
- 삐이?
- 삐삐!
[누구냐고?]
[음, 그러는 너는 누구니.]
- 삐!
- 삐삐.
- 삐이!
- 삐삐삐?
음, 그리고.
- ···삐이?
[그래, 부모. 그 뜻을 모르지는 않겠지?]
- ······!
[반갑구나. 나의 아이야.]
[어찌 되었든, 무사히 싹을 틔운 것을 보니 기쁘구나.]
[예상보다 훨씬 빠르지만.]
───────────────
# < 040. 목표 >
김우진이 코웃음쳤다.
“됐고, 면담을 했으니 죄수 하나가 출소 의사를 밝힌 건 알고 있겠지? 바로 내보낼 거니까 알아서 처리해.”
“···앵무새처럼 더 이상 연옥에서 버틸 자신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더군. 무슨 수를 쓴 거지?”
“다 능력이지.”
“헛소리하지 마라. 죄수들을 협박했겠지. 역겨운 방식으로.”
“그 역겨운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네놈들이 날 여기에 앉혀놓은 거야.”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베른은 떠나갔다.
그의 태도를 비추어 보았을 때, 세계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강민식의 말은 진짜일 것이다. 알았다면 결코
순순히 떠나가지 않았을 테니.
* * *
급한 불은 껐다.
사라진 울타리 너머로 거대한 새장이 보였다. 그 안에 축 늘어진 릴리가 안쓰러워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 삐!
“괜찮아?”
- 삐!
맹렬하게 끄덕이는 고개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삐?
하지만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듯, 릴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토라진 듯한 행색에 김우진이 픽 웃었다.
- 삐삐.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릴리는 곧 화를 풀고 뺨을 부볐다. 그리고는 뜻밖의 이야기를 건넸다.
- 삐삐삐.
- 삐삐이이이, 삐삐.
- 삐.
“···연···락?”
- 삐!
- 삐!
김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차원의 세계수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세계수에게 누군가가 연락을 했다라.
“누가?”
- 삐삐삐, 삐이이.
“······.”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 *
‘신.’
적어도 율리아가 보기에는 그랬다. 품위를 찾으나 가장 품위가 없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단순히 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둬놓고 이제 와서 집행자로 삼는 자비라니.
끼익-
“신은 돌아갔···.”
“나와라. 급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 삐이!
- 삐삐삐.
- 삐삐이이이, 삐삐.
“네, 그러니까 어머니 나무께 누군가 연락을 했다는 말씀이세요? 네? 누가 연락을 했다고요?”
“거기까지는 나도 이해했으니까 그 다음.”
“음.”
슬쩍, 김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그대로 통역해도 되는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손을 잡기로 했고 어차피
들킨 거 감출 수는 없으니.
“누군지 말씀해주시겠어요?”
- 삐삐이이.
율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릴리가 혼자서 이런 단어를 터특할리는 없다. 말하는 느낌이 딱 세계수 하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 * *
“드워프들에게 내 집무실을 새로 만들라고 말해놨으니 알아서 잘 관리하도록.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다.”
“또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이제는 휴가도 없지 않습니까.”
“경우가 다르니까 상관없어.”
휴가를 써야만 하는 이유는 세계수가 완전히 가려질 때까지, 강민식을 잡을 때까지 관리자가 연옥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과는 경우가 다르다. 관리자가 올때는 보통 하루의 텀을 준다. 그게 계약의 내용이기에, 어지간하면 어기지
않는다. 그러니 그 전에만 연옥에 돌아와 있으면 문제는 없다.
김우진이 빠진 연옥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죄수들이 탈옥을 하고자 한다면 최고의 적기다.
하지만 지금의 죄수들에게는 탈옥의 의지가 없다. 하이엘프와 세계수에 의해 엘프들이, 최고의 명장에 의헤
드워프들이, 달의 늑대에 의해 수인들이 얌전해졌다.
다크엘프는 출소를 택했으며 거인은 그냥 죽은 듯이 있기로 했다. 그리고 한 인간은 소지에 만족하고, 다른
인간은 신에 대한 원한을 가졌다.
연옥에는 차원을 건너 연락할 수 있는 비상 통신구가 있었다.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어 어지간한 자들은 사용할
수도 없지만 김우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구할 게 있기에.
* * *
김우진은 떠날 채비를 했다. 세계수를 통한 연락은 반드시 그 원인과 진상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건 알고 있지만···.”
영약이라는 건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다. 마나가 풍부한 지역이어야 하며, 마나를 감당할 식물이 있어야하고,
오랜 세월 동안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못해도 차원 하나 당, 영약 한두 개쯤은 시장에 나오니까. 더럽게 비싸서 문제지만 김우진은 돈이 많았다.
문이 열렸다는 것은 신들에게 전해질 거다. 하지만 그들은 김우진이 어떤 차원으로 갔는지 모를 거다.
차원의 방벽을 넘으면 관리자들에 의해 감지된다. 그건 방벽 자체에 내제된 방어 체계 중 하나라 김우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가자.”
“네.”
───────────────
# < 041. 당근 종 >
그리고 그 모든 마나는 각각의 차원의 향취를 가진다. 큰 의미는 없다. 도시의 공기보다 숲의 공기가 더
산뜻하듯이, 겨울의 공기가 여름의 공기보다 차갑듯이, 그냥 그런 거다.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의 미세함. 하지만 하이엘프에게는 고향에 온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상적인 루트대로 세계수가 발아하여 통신이 가능할 정도까지 큰다면 그정도 시간은 걸릴 테니.
그것도 연옥이 교차차원으로서 마나가 풍부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차원이었다면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바로 가자.”
“잠깐만요. 그냥 가도 괜찮을까요? 제가 크라프트를 보고 좀 느낀 게 있거든요?”
“네 동료가 믿음직스러운 자라면.”
“눈치 채셨어요?”
“엘프들의 빈약한 인간관계가 뻔하지.”
“빈약하지는 않거든요?”
“다른 종족과 개인적인 교류가 거의 없는 건 맞잖아.”
그 정점인 하이엘프가 주저없이 소개해줄 인간이라면, 그만큼 믿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용사의 동료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 * *
대륙은 종족과 나라를 초월해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 함께 연합을 이루고 광룡과 싸웠기에, 살아남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저의 과업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떠나겠다고.
갑작스러운 선언에 모두가 경악했다. 승리의 달콤함에 취하기도 전에 그 주역이 빠진다는 말에 모두가 말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용사를 말렸던, 그럼에도 끝내 말리지 못했던 동료들이 있었다.
에드먼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비볐다. 기지개를 펴 찌뿌둥한 어깨와 허리를 풀어주고 손수 차를 탔다.
“벌써 밤이네.”
“···뭐지.”
“내가 추천해 준 차, 아직도 먹고 있네?”
“응, 피로 회복에 꽤나 좋더라고.”
“일이 엄청 많아 보이고.”
“상단의 규모가 커졌거든. 네가 떠날 때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픈데.”
“뭐하는 거지?”
“아무래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해해주세요. 원래 조금 맹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착해요.”
“그건 도저히 칭찬해줄 구석이 없을 때 하는 말 아닌가?”
“그럴 리가요. 그래도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법사였어요.”
“마법사라는 놈이 저 따위라고?”
“지금은 가업을 이어 받아서 상인의 역할이 더 크지만요. 하지만 마법사의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결국 그냥 조금 녹슨 마법사라는 건데···용사의 동료였다는 놈의 반응으로는 한심하기 그지없어.”
“···율리아?”
“안녕, 에드먼드. 오랜만이야.”
“···정말 율리아야? 진짜 그 율리아 카르센이야?”
“네가 아는 게 함께 광룡과 싸운 하이엘프가 맞다면.”
“말이 안 되잖아! 율리아는 떠났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데이지한테 어떻게 고백했는지 알고 있는 걸. 죽은 마수의···.”
“···율리아 맞네.”
“아직 다 이야기 안 했는데.”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이 너 말고 어디 있어.”
“그런식으로 고백하는 사람도 너 말고 없어.”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돌아간 것 아니었어?”
“돌아갔었어.”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율리아?”
쨍그랑, 접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파편들과 함께 쿠키조각이 비산했다. 그중 하나가 김우진의 손에 안착했다.
“···이딴 게 쿠키?”
“응, 구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에드먼드가 나름 잘나가는 상인이야. 분명히 구해줄 걸.”
“아니, 그 영약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확답은 조금···.”
“안 해줄 거야? 율리아인데?”
“노력은 해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어떻게든 구해야지. 율리아인데.”
그녀의 말에 김우진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가 쌓아놓은 인맥 덕분에 어쩌면 생각보다 더 쉽게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하던 김우진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데이지의 파란 벽안이 줄곧 그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뭐지?”
“율리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내 쿠키를 뱉은 이 개, 아니 이 분은 대체 뭐야? 인간이니까 연인일 리는 없고.”
“동료다. 일단은.”
“일단은? 그 애매한 대답은 뭐야?”
“같은 목표로 힘을 합치기로 했으니 일단은 동료지.”
“하지만 일단이라는 건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건 율리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고.”
“뭐야, 아무리 봐도 평범한 동료 관계는 아닌데?”
“···아하하, 그냥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용사는 영웅이다. 세계를 구한 영웅의 귀환을 알리고 무언가를 원한다고 한다면 쌍수를 들고 찾아올 이들이
넘쳐났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꽤 그럴 듯해.’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지?”
율리아의 부탁이니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범차원적인 위기?
김우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율리아가 뒤따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데이지의 손이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왜?”
“저 남자 대체 뭐야?”
“음, 아까 말했듯이 일단은 동료?”
“그게 뭐야? 혹시 협박이라도 받고 있는 거야?”
“나 그래도 용사인데.”
“저 사람도 용사 같던데. 너랑 똑같이 읽을 수가 없어.”
* * *
- 그 아이가 왔구나.
“이렇게 빨리···.”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
“괜찮은 겁니까?”
죄수로서 연옥에 갇혔던 율리아가 그곳을 벗어나 차원을 넘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뜻이었다.
-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모르겠지.
- 일단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려무나.
- 소문이 나서는 안 되니.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 아카식 레코드에 의한 우주의 계약. 지금의 연옥은 용사들보다 소장을 묶어둔다는 느낌이 더 크다지.
- 신들이 두려워하여 계약으로 묶어둔 존재라. 연옥의 소장, 김우진.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구나.
- 알베니우스가 말한 그대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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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2. 제안 >
“가자.”
본래 김우진의 계획은 스스로 발품을 파는 것이었다. 대상단이나 경매장을 직접 찾아 의뢰를 넣거나 구입하는
쪽으로.
“벌써가?”
“다시 올게.”
“혹시 문제 있으면 꼭 연락해. 아무리 봐도 저거 괴물이야.”
“근데 왜 당근이야?”
“상단의 상징이 당근이야.”
조심스레 율리아에게 당근 모양의 통신구를 건네는 데이지의 배웅을 받으며 둘은 상단을 떠났다.
율리아가 지도를 펼쳤다.
“데이드람의 엘프들은 왕국을 세웠어요. 하이엘프이신 필립스님이 왕으로 계시죠. 지금 있는 바르간 왕국과는
거리가 꽤 되요.”
“왕국이라.”
부르테인이 바로 그곳이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는 가히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다. 하늘을 관통한 줄기는 쉽게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발라크님.”
“오랜만입니다, 율리아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변을 의식한 것인지, 엘프의 음성은 더 없이 작았으나 두 초인이 듣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위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난 드래곤이 아닌데.”
“하지만 드래곤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은 압니다. 그 이상은, 제 능력이 미천하여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말은 청산유수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자들입니다. 연합과 교류를 시작한 이후, 매일 같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은 다양하다. 단순히 엘프들을 보고 싶어서, 정기가 넘치는 숲에서 쉬거나 수련을 하고 싶어서, 엘프들과
교역을 하고 싶어서.
“여긴 샛길이네요.”
“네. 오신 게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세계수들이 세상을 구하는데 적극적인 것은 본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결코 선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김우진의 시선은 율리아를 향하지 않았다. 하늘. 그 위에는 숲에 들어온 직후부터 꾸준히 뒤를 쫓던 자그마한
참새가 있었다.
- 맞단다.
“정령체가 작군요. 정령체는 살아온 세월에 비례해서 커지는 게 아닙니까?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거대하던데?”
- 정령체의 크기는 세계수가 내키는 대로란다. 자신의 한계 내에서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아니면 마는 거지.
-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다른 이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 그래서 너구나.
- 꼭 한 번 보고 싶었단다.
- 저 오만한 신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인간이 어떤 자인지.
“소감은 어떻습니까?”
- 그럴만 하구나.
- 그게 첫 번째.
- 그리고 연옥의 탈취 소식을 듣고 당황하는 신들을 연옥으로 끌어 들인다.
- 그게 두 번째.
- 그 다음은 무엇일 것 같니?
- 농담처럼 들리니?
- 신을 죽인 자.
찌르르 울리는 압박감은 어느새 참새는 어느새 봉황이 되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 신살자, 김우진.
봉황이 또박 또박 이름 석 자를 내뱉었다.
- 우리와 함께 하는 게 어떻겠니.
* * *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근데 뭐 딱히 새삼스럽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래.”
업무가 벌목이나 호수 만들기 같은 환경조성 출역에서 리모델링으로 바뀌었을 뿐, 드워프들은 꾸준히 소장에게
부려먹어져 왔다.
연옥에 갇혔고 죄수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죄수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진짜 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신들에 의해 임명된 연옥의 소장이 신들을 적대하고 그들의 눈을 속이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나.
드워프들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축사장이었다. 풀려난 축사장의 몬스터들이 수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투기장 건설.]
투기장이라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 * *
“당신이 보낸 집행자들의 수준이 부족해 고작 이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강민식이 붙잡혔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을 겁니다.”
“이야기는 똑바로 해야지.”
“너희들이 도움을 요청해 그 조잡한 계획에 조금 도움을 준 것 아니더냐. 나는 애초부터 그 따위 조잡한 계획에
찬성한 적이 없었다.”
신들의 위신을 깎아먹는 한심한 놈 같으니.
“그러니.”
“신이시여.”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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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3. 당부 >
“저는 연옥의 소장입니다. 가두어진 죄수가 아닌, 가두기 위한 간수. 그 누구도 간수를 죄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알베니우스입니까?”
“알베니우스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니, 그 전에.
“승산은 있습니까?”
세상이 탄생한지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탄생한 용사가, 집행자가 된 용사가 몇이겠나.
신의 군단은 전원 전직 용사들이다. 그들이 개떼같이 몰린다면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용사‘였’던 이들이겠지요.”
사실, 용사의 힘을 빼앗겼다고 해서 용사가 완전한 약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빼앗긴 용사는 그저 평범한 강자로 돌아갈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한 차원에서 최강이라 불리겠지만 용사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그 방법이 뭡니까?”
“맹세합니다.”
“불가합니다. 적어도 지금의 상태로는. 저는 보다 확실한 것을 원합니다. 당신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와 같은.”
참새가 웃었다.
“다음에 말입니까?”
“···알베니우스.”
“확실히 그게 낫겠군요.”
* * *
···신을 죽였다고?
신을?
돌아가는 대화를,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해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범주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신살은 아득한 미래의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일, 하지만 언제 이룰지는 알 수
없는 미지.
그런 게 가능한 건가?
- 혼란스럽니?
- 신을 죽였기 때문이란다.
신은 지고한 존재다.
완전무결한 존재다.
최초의 신들이 생겨난 이례로 그들의 숫자는 평생 늘어가기만 했다. 그것을 부순 게 김우진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를 죽이기 위한 과정에서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죽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누구도 그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데 왜 완전히 손을 잡지 않고 여지를 두나요? 어머니 나무의 말씀대로라면 반드시 잡아야할 존재가
아닌가요?”
-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 설마 세계수들이 개입한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신들이 세계수를 가만히 둘리가 없으니.
표면적으로는 서로 필요에 의한 협력 관계지만 그 상하관계는 명확했다. 단순히 백신전의 배려로 상하로 구분짓지
않을 뿐.
- 너에게만 알려주마.
참새가 속삭였다.
- 사실.
- 신들 중에는.
“······!”
율리아가 경악했다.
“정말로요?”
* * *
“가자.”
물론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 내가 길러낸 영약들이란다.
- 릴리에게 주렴.
- 생물학적 부모가 되어서 그런 험지로 보냈으니 마음이 하루도 편하지 않구나.
[소장님!]
통신구가 울렸다.
“무슨 일이지?”
“죄수‘들’이라고?”
당연히 죄수는 드물고 적어도 김우진이 연옥을 맡아온 20 년 동안 여러 명의 죄수들이 한 번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예, 열 명의 죄수들이 내일 한꺼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
* * *
“신이시여.”
차원의 방벽에 대한 권한 또한 당연히 신들에게 있다. 헌데 김우진이 연옥을 나간 흔적이 포착되었으나 어디론가
들어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다.
“찾아내겠습니다.”
“찾아? 찾아서 무엇을 하려고?”
“당연히 김우진을 도운 죄를 물어 대가를 치르게···.”
“아서라. 들쑤신다고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세계수는 결코 많지 않다. 그들은 꾸준히 그 영향력을 높이고자 씨앗을 퍼트려왔으나 애초에 세계수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은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그런 이유로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 세계수란 분명히 경시할 수 없는 존재들. 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줄타기를 하는 모습은 분명히 언젠가 치워야 할 버러지 같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예. 신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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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4. 감 >
10 명의 죄수들.
당연하다.
차원이 아무리 우주의 별처럼 많다고 해도 멸망의 위기에 닥친 차원이 몇이며, 간택된 용사가 그 세상을 수호할
가능성이 몇이며, 신의 말에 따르지 않고 힘을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은 또 몇인가.
“열 명, 열 명이라.”
저것들이 과연 진짜 용사일까.
아마도 그저 유보했을 뿐일 거다. 그를 엿 먹이기 위해 마땅히 연옥에 가야할 죄수들을 보내지 않고 억류해 두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한 번에 보내는 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받아야지.”
중요한 건 열 명의 용사들 중에 관리자들이 보낸 개가 얼마나 되는지, 꿍꿍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파악하는 거다.
“열 명 전부 내보낸다.”
* * *
날이 밝았다.
대부분의 차원의 주 종족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용사의 과업은 그들의 편에 서서 종말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딱히 없습니다.”
“어째서 용사들이 한 번에 열 명이나 들어온 거지?”
“우연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용사가 생겨나고 그들이 죄수가 되는 건 결코 계획적인 일이 아닙니다.”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군.”
“저는 지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제게 물으신다 한들 원하시는 대답을 들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출소자는 잘 도착했겠지?”
“그는 신께서 부여해준 신의 힘을 자진하여 반납하고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온전히 소장님의 과업에
추가되었습니다.”
“가봐.”
“예,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상담을 시작했다.
“너희들이 용사로서 얼마나 떠받듬을 받고 살았는지, 어떤 존재인지 나는 티끌만큼도 궁금하지 않아. 얌전히
있을래? 아니면 일단 한 대 맞을래?”
인간 용사 1179 번.
지구인 인간 용사 1180 번.
지구인 용사 1181 번.
1185 번, 수인 용사. 짐승은 역시 그 특성에 맞게 끈질겼고 그만큼 더 맞았다. 기절시킨 후, 독방에 던져놓았다.
“···용사로서 정점에 오른 입장에서 말하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저는 당신을 이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허나,
이 황당한 감옥에 그대로 갇힐 수도 없는 노릇.”
“···그렇군. 이곳이 연옥이라는 곳인가. 힘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갇히다니. 신이라는 자들이 옹졸하기
그지없군. 난 그대와 싸울 마음이 없소.”
그리고 대망의 1188 번, 켄타우로스. 그는 무척이나 건장한 전사였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오늘 들어온 열 명의
용사들 중 가장 강인했다.
“연옥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오래 전에 연옥에서 돌아온 자가 있었소. 내 할아버지셨고 그분은 위대한 전사셨지.”
“그자가 너한테 말해주었다?”
“맞소.”
“그럴 리가.”
신들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피조물들의 차원에 연옥에 대한 정보가 퍼지는 건 결코 그들에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김우진이 알기로 힘을 반납한 용사는 맹세를 한다. 김우진과 신들의 계약처럼 신조차 어길 수 없는 맹세를.
“할아버지께서는 수백년만에 돌아오셨다고 했소. 그분은 늘 분노하셨지. 허나, 어렸을 때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몰랐소. 할아버지는 그 대상에 대해서는, 분노의 이유에 대해서는 항상 함구하셨으니까.”
“그런데?”
“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이 연옥에 대해 이야기하셨소. 그리고 갑자기 일어난 균열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셨고 그 이후, 본적이 없소.”
맹약을 어긴 대가로 심연으로 굴러 떨어진 거다. 심연은 맹약을 어긴 자들이 가는, 신조차 나올 수 없는 지옥.
신들에 대한 분노가 너무 깊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실을 이야기 했다면 나름의 이해는 간다.
뻐억, 상담실을 울리는 타격음과 함께 켄타우로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굳건한 네 개의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볼품없이 뒹굴었다.
“크헉, 이게 무슨 짓인가!”
“너는 죄수고, 나는 소장이야. 어디서 반말을 찍찍 내뱉어, 말 새끼야.”
김우진이 수많은 죄수들 중 반말을 허용해 준 죄수는 딱 둘이었다. 죄수번호 1077 번, 연옥 최고의 장기수
데르카인. 그리고 죄수번호 1152 번, 엘프들의 대장이다.
특히, 그들은 수인들만큼이나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종족. 초반에 기강을 잡아놔야 편하다.
전투를 원치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싸워서 굴복을 시켜야 한다. 그래야 관리가 편하다.
네 개의 다리가 충격을 최소화하며 빠르게 몸을 바로잡았다. 상체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마나로 만들어진 창을
내던졌다.
────!
허나, 그것은 김우진의 가벼운 손길에 튕겨져 나갔다.
“능력이 되야 할 수 있는 거거든.”
히히힝, 실제로 말의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질 만큼, 켄타우로스는 거칠게 투레질했다.
마나로 만들어진 거대한 랜스를 손에 들고 돌진했다.
불꽃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거대한 주먹의 형상은 창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주먹과 창, 부서진 것은 창이었다.
“크아아악!”
* * *
“···10 명 모두 했어.”
“···예?”
무엇을 말이지.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가정, 집행자를 죄수로 속여서 집어넣는다는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시에나, 데르카인, 타르칸이 알아서 온갖 검증을 거칠 거다. 그들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러면 셋을 제외할
수 있다.
강민식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신의 개다. 베른이 그렇게 알고 사라졌으니 다른 신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다.
강민식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김우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때 당시에는 진심이 느껴졌으나 인간의
마음이란 더 없이 간사한 법이니까.
그가 믿는 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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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5. 무슨 짓 >
하지만 거기에 관리자라는 공통의 적이 생기고 관리자가 감옥 내부로 첩자를 들여보낸 것이 확실시 된다면 거기에
맞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시에나가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우리가 한 편인 거니? 아니, 솔직히 난 지금 상황 변화가 너무 빨라서 적응이 안 되거든. 그렇다고 네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언급을 한 것도 아니고.”
타르칸은 아예 김우진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데르카인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스스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시에나와 엘프들은 달랐다. 율리아가 김우진과 교섭하여 협력하기로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율리아
개인의 문제였다.
그녀가 하이엘프이기에 엘프들이 그녀의 의도를 어느 정도 따라줄 뿐, 엘프들에게, 시에나에게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신이 싫습니까? 제가 싫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전자겠지?”
“이번 일은 신을 엿 먹이는 일입니다.”
“부족해. 네가 맹목적인 신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했단다. 하지만 그게 네가 신을 적대한다는 증거가
될까? 네가 우리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소장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데.”
“그렇긴 하죠.”
“애초에 갑자기 이렇게 신들을 적대하는 일에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릴리가 절 좋아합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좋아하는 건 확실히 가산점이긴 한데 부족해.”
“사실 시에나님을 제외하면 딱히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뭐?”
“율리아 카르센은 이미 저와 협력하기로 했고.”
“맞아요.”
* * *
“반가워요.”
“고귀한 분이시여.”
하지만 죄수들 대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김우진이 새롭게 신설했다. 일명 ‘운동 시간.’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죄수들을 한 시간 동안 연병장에 풀어 놓는 것이다.
엘프가 첩자라면, 릴리는 하늘구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엘프는 반드시 이쪽의 편이 되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그래서 말인데요.
“······.”
두 박자가 딱 맞아 떨어졌다.
엘프 컷.
* * *
엘프가 존재하는 모든 차원에 세계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엘프가 세계수를 믿고 따른다. 세계수에
대한 맹세는 그들로서는 결코 어길 수 없는 절대 법칙이다.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에 엘프는 거짓말을 잘하지 않는다. 맹세로 증명할 수 없으면 거짓이라는 게
쉽게 들통 나 버리니까.
- 삐.
새장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을 한창 오버한 나머지 토라진 릴리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삐?
“새장에는.”
영약을 추가로 섭취한 세계수의 기운은 상상이상으로 충만했다. 연옥에 갇힌 게 모두 머저리들이면 모를까,
용사들인 이상 세계수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엘프라면 세계수의 하늘구름을 완전히 가동해야만 감출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담장 안에는 들어가
있어야 한다.
“대신 내가 매일 올게.”
- 삐이?
처음 세계수가 발아하고 율리아에게 친밀도 시험을 하기 전까지는 매일 같이 함께 했으나 그 뒤로는 탈옥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소홀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 삐!
“손잡자고?”
- 삐삐삐이이이이, 삐삑!
음, 이제 제법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도저히 모르겠다. 릴리는 언제쯤 다른 세계수들처럼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될까.
“뭐라고 하는 거야?”
- 삐.
- 삐이.
“···이런 미친.”
누가 키웠는지 참 잘 키웠다.
- 삐이이이이!
* * *
“릴리는 진정했어?”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고민을 뜻한다. 아주 잠깐의 침묵, 김우진이 입을 연다.
“엘프는 어때?”
“확신할 수 있어요. 첩자가 아니에요.”
“다른 죄수들은?”
“다른 죄수들이 다방면에서 접촉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럴 것 같았어. 그래서 말인데 너를 비롯한 죄수들의 협조가 필요해.”
“무슨 일인데요?”
손가락 두 개가 접힌다.
열 명의 죄수들은 그 전초일 터.
무슨 짓을 해서라도.
* * *
남자가 천천히 걸었다. 거대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넓은 대전, 아흔 아홉의 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늦으셨습니다.”
“딱 맞춰서 들어왔을 뿐이다.”
“대회의라. 30 년만이군.”
“안건은 뭐지?”
“김우진에 관한 것. 네가 오기 전에 이미 합의를 끝냈다.”
“결론은?”
“한 번의 실패로 기껏 눌러놓았던 적대감이 다시 폭발했을 공산이 크다. 때문에 김우진을 이대로 방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연옥에, 세 가지 ‘우연’이 벌어질 거다.”
“응하지 않는다면?”
“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046. 귀휴 >
“이번에 들어온 죄수들 중 엘프를 제외한 이들의 식사에 섞으면 된다. 국에 넣으면 자연스레 녹아들 거다.”
“열 개입니다만?”
“다른 하나는 1177 번의 것이다.”
“이게 대체 뭡니까?”
“소장님의 지시니 그냥 따라라.”
“소장님의 지시라면 그래야죠.”
베르너가 알약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특별한 마나의 느낌도 없었다.
“진짜 그냥 약인가?”
* * *
신이라고 불리기에 오만한 자들. 그들에게 체면과 자존심은 스스로의 목숨을 제외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투기장이 완성 되었다.”
허나, 정작 참가하기를 바라는 신입들은 얌전했다. 아마, 눈치를 살피느라 그런 것이겠지. 아직 연옥에 들어온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니.
때문에 김우진은 기름을 부었다.
“내가! 내가 나가겠네!”
무언가를 만드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던 난쟁이들을 이끄는 자가 간만에 도끼를 잡았다.
“···무조건 참가할게.”
“출전하겠습니다!”
“귀휴! 귀휴!”
“단 하루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아아!”
“고향의 어머니 나무를 뵙고 싶습니다.”
“내 고향에는 어머니 나무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 땅을 밟고 싶습니다.”
모든 신입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귀휴에 혹해 참가 신청을 하려다가 김우진의 눈빛에 슬그머니 손을 내린 강민식과 연옥에 만족하고 있는 소지를
제외한 전부였다.
* * *
“강민식님은 참여 안하십니까?”
이름이 뭐랬더라. 스페인 출신의 카를로라고 했다. 지구 출신이라는 것에 어찌나 반갑던지.
하지만 다른 용사들이라면?
율리아, 시에나, 타르칸 그리고 데르카인. 그리고 죄수들 중 비교적 강자라고 여겨지는 자들까지.
“그 다음은?”
“그 잘난 권능을 이용한 강민식이 알아서 할 겁니다.”
감옥 층에는 그들과 극소수의 교도관들만 남게 될 거고 그 틈새로 강민식이 접촉하여 탈옥을 종용하게 된다.
찾는 거다.
그리고 나름의 대비도 해놨다. 그가 차원의 방벽까지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중간까지 죄수들을 인도하는
것, 그게 그의 역할이고 전부다.
그리고.
투기장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 * *
“크흐흐.”
타르칸 톨리스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콰앙, 가벼운 발길질에 대지가 우그러졌다. 가벼운 손짓에 밀려난 공기가
나무를 베어 넘겼다.
‘시에나 올름, 율리아 카르센, 그리고 데르카인 알베트. 잘만하면 전부와 싸워 볼 기회가 있을 지도.’
투쟁은 수인의 본능이다. 수인들의 귀족, 달의 늑대인 타르칸은 그 본능이 더 강했다. 강자와의 피 터지는, 모든
것을 내던져야지만 하는 전투는 언제나 심장을 두근 거리게 만든다.
첫 번째 순사넌 타르칸. 상대는 카를로 디아고라는 스페인 인간이었다. 모든 이들이 물러나고 거대한 투기장
안에는 오직 둘 만이 남았다.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언뜻 보면 허술해 보이지만 사방에 마법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뚫으려면 뚫을 수는
있지만 단숨에 찢어발기지는 못하는 수준.
카를로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까. 토너먼트에서 승리하고 귀휴를 나가게 되어도 그럴까?
만약을 대비한 안전장치들이 있겠지만 소장이 직접 따라오지는 않을 거다. 그거면 된다. 그러면 무조건 탈옥할
자신이 있었다.
“구경은 끝났나?”
“신사인척 하지 마라, 더러운 짐승아.”
“···뭐라고?”
“너희들의 추악함은 수도 없이 겪어 왔다.”
이성은 있으나 야성을 이기지 못하고 본능에 몸을 맡긴 짐승들. 그들은 하나의 왕국을 이루었으나 말만
왕국이었지 늘 인간의 국가들을 약탈하기 위한 도적때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마물화가 되어 진짜 적이 되기도 했다. 그에게 수인은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
“그게 네 미래니까.”
“크윽···!”
───!
“···어떻게 수인 따위가!”
이어지는 충격.
산산이 부서져 소멸하는 갑옷.
숨 막힐 듯 한 살기와 광기.
* * *
“약해 빠졌네. 저런 능력으로 타르칸을 도발한 거야? 밖에서 만났으면 바로 머리가 뜯겨졌겠네.”
“저 짐승 놈. 신났군.”
율리아는 타르칸과 부딪힌다. 그리고 승자는 결승에서 데르카인 혹은 시에나와 만나게 된다.
“못 싸울 건 또 뭐야?”
“이길 순 있고?”
“날 너무 얕보는 것 아니야?”
“전 안 봐드릴 건데요.”
“네가 무조건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애초에 넌 타르칸이나 이기고 오렴.”
“그냥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에요.”
“나도 마찬가지란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엘프에 대한 예우 같은 걸 찾는 건 아니겠지?”
“아무렴요. 필요 없어요.”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네.”
교도관 둘이 그 뒤를 따랐다.
───────────────
# < 047. 사냥 >
“으음···.”
눈을 떴을 때, 카를로는 독방 안에 있었다.
“···투기장은?”
“···말도 안 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무언가 잘못 되었다.
자신의 오러를 단숨에 으깨던 그 괴물도 감히 탈옥을 하지 못했는데 과연 자신이라고 가능할지, 자괴감이 들었다.
“···강민식님?”
“다행히 일어나 계셨군요. 깨우는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입니다.”
“강민식님이 어떻게?”
연옥에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대충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소지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은 통제된다. 무엇보다 교도관을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다닐
수는 없다.
“탈출했습니다.”
“···예?”
“구속구를 부수고 감옥의 문을 따고 탈출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건 또 뭡니까?”
“···이걸 어떻게?”
“저는 독의 권능이 있습니다. 마나와 섞어 술식 자체를 부식시켰습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가시죠.”
“예!”
강민식의 손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신이 내려준 동아줄 같았다. 잡아야 한다고, 이 기회를 놓치면 결코 두 번은
없을 거라고 본능이 소리쳤다.
손을 잡았다.
* * *
“나갈 수 있다.”
그런데.
가능하단다.
귀휴를 내보내 준단다.
이걸 어떻게 참겠는가.
그 보상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까아아앙! 공간을 꿰뚫으며 날아온 섬광은 더 없이 빨랐다. 도끼로 쳐냈으나 오러가 튀어 오르며 충격이 엄습했다.
‘진심이군···!’
그가 도끼를 휘둘렀다. 다시 한 번, 날아들던 화살이 튕겨졌다. 빠르게 발원지를 찾았다. 짧으나 근육으로
가득한 두 다리가 대지를 박찼다.
허나, 상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측면을 파고드는 두 대의 섬광에 허공에서 도끼를 비튼다.
“큽!”
데르카인이 도끼 자루를 열었다. 김우진을 상대로도 쏘아졌던 마력포가 모습을 드러내며 다섯 발을 연달아
쏘아낸다.
허나, 포탄들은 화살들과 부딪혀 모조리 상쇄되었다. 끝이 아니었다. 그보다 많은 화살들이 데르카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제기랄.”
시에나 올름이 각성한 권능. 마력 조작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조형한 마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고 했다.
데르카인이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거대한 참격이 정면의 화살들을 쓸어냈다. 그리고는 도끼와 함께 몸을
회전시켰다. 오러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사방을 가격했다.
모조리 소멸하는 화살들에 시에나가 다시금 시위를 당겼다. 빈 활대 위로 오러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파괴되었다.
다시 쏘아냈다. 더 크고 파괴적이었다.
다시 파괴되었다.
다시 다시 쏘아냈다.
바스라진 오러의 파편들로 대지가 들썩였다.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들이 투기장 벽면을 두들겼다. 방호 마법
각인들이 빛을 발하며 저항했다.
“난 나가야 해.”
“나도 나가야 하네!”
“내가 더 급해. 난 72 년을 참았어.”
“난 300 년을 참았네!”
“이왕 300 년 참은 거, 조금 더 참아도 되겠네.”
“이런 미친 깐프 같으니!”
아무리 용사라고 한들 육체가 노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육신은 용사치고는 노화했고 체력적인 한계를
맞이했다.
결국 도끼를 거두고 주저앉았다.
“항복, 항···!”
퍼억-
“내가 나가.”
“항복! 항복 했잖은가!”
상상 이상으로 격렬한 시에나의 반응은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였지만 연옥에 갇힌 용사치고 사연 없는 이들은
없었다.
“잡으러 가자.”
* * *
죄수들은 연옥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만나지 못했다. 교도관과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강민식.’
“가시죠.”
“강민식님.”
“왜 그러시죠?”
“···강민식님께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레 운을 땠다.
그때였다.
애애애앵-
“···저들이 눈치 챘다!”
“더 빨리 움직이자!”
컹컹!
멍멍멍!
그렇게 시간이 끌리면 반드시 소장이 온다. 굳이 강민식이 말하지 않아도 용사들은 그 사실을 인지했다.
차원의 방벽이라는 말에 일부 용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급박한 상황은 그들에게 궁금증을 해소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빨리 가세요!”
“감사합니다!”
“나가면 반드시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꼭 오십시오!”
“자.”
아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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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8. 호구 >
“후우.”
“준비는 끝났나?”
더 없이 강대한 광기와 살기를 머금은, 오직 만전의 상대와 싸우기 위해 들끓어 오르는 본능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존재.
귀휴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연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따지고 보면 자발적인 입소에 가까웠다.
심지어 소장과 함께 데이드람에도 다녀온 전력이 있었다. 귀휴는 그녀에게 그다지 큰 메리트가 아니었다.
그러니 고작 죄수 하나에 무너질 수는 없다. 비록 그 죄수가 용사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라고 할지라도.
신은 더 강하니까.
율리아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연옥에 들어올 때 압수당했던 애검은 오랜만에 만난 주인의 손길이 반가운지
파르르 공명한다.
“끝났어요.”
허나, 오러를 머금은 은빛 늑대의 가죽을 베기에는 예기가 부족하다. 율리아는 오러를 더욱 날카롭게 벼려냈다.
쾅쾅쾅!
이어지는 건 힘과 기술의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힘이라는 장점을 이용해 폭격해대는 타르칸과 그것을 비껴내고
흘려내며 빈틈을 향해 검을 찌르는 율리아.
“누가 누굴 따라와요.”
적어도 속도는 그녀가 장기로 삼는 무기였다. 아무리 특별한 짐승이라고 한들, 뒤진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집행자라 불리던 이를 상대로는 사용할 필요도 없었지만 타르칸 톨리스는 아니었다. 듣기로는 권능을 각성하지
못한 용사라던데 육체적인 힘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괴물이다.
바람의 정령들이 그녀에게 힘을 보탰다. 정령의 가호가 검에 깃들었다. 오러와 뒤섞인 바람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문제는.
“날파리 같은 방법이다.”
“찾았다.”
“흡!”
콰콰쾅!
상처투성이의 타르칸이 바람을 찢으며 뛰쳐나왔다. 그럼에도 야성과 투기는 전혀 죽지 않았으며 율리아 또한 이번
한 방으로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검이 마중 나갔다.
그리고.
당연히 신도 넘지 못한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더욱 마나를 쥐어짰다.
“···증명해냈어요.”
그녀의 검에 타르칸이 쓰러진다. 일어서고 또 일어서며 좀비처럼 그녀를 힘들게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의지는
있을지언정 상처투성이의 육신에는 한계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승리했다. 여전히 김우진이나 신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적어도 바로 아래인 용사들
중에서는 최상위급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제 한 걸음.”
“귀휴는 내 거야.”
“잠깐만요, 잠깐 타임! 휴식 시간 같은 건 없어요? 공평성과 선수 보호를 위해서 최소한의 휴식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감옥에서 그런 걸 따지니?”
“아니, 잠깐만요! 아악! 뼈, 뼈 맞았어요!”
“맞으라고 쏜 거야.”
“전 하이엘프에요!”
“그래, 끝나고 대우해줄게.”
* * *
죄수들 중 최강이 타르칸 톨리스라는 것을. 그는 수인족의 귀족, 달의 늑대였고 투쟁하며 살아왔다.
그의 무력은 다른 수인들과는 궤를 달리했고 시에나도, 데르카인도 쉽사리 넘볼 수 없었다.
헌데 율리아가 이겼다.
헌데 율리아는 그 타르칸을 이겼다.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체 소장은?”
“···신은 신인가.”
그리고 그런 소장조차도 당장 함부로 하지 못하고 저자세로 나가는 신들의 위용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 * *
투기장의 죄수들이 우승자를 정하고 있을 무렵, 탈옥자들은 연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허억, 허억···!”
하지만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제발 나 말고 다른 놈들부터!’
어차피 신에게 열쇠를 받은 자신이 아니면 다른 놈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 그를 위한
미끼라도 되어주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나.
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강민식의 말대로 그가 오랫동안 오늘만을 기다리며 준비한 덕이겠지.
그러니까 강민식은 신의 안배다. 신의 안배가 잘못될 리는 없으니 이대로 달리기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
‘잘못 들었겠지?’
“···하하.”
“왜 하필 나야!”
“걱정마라. 다른 탈옥수들도 모두 잡혀서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그딴 말이 듣고 싶은 줄 알아!”
카를로가 은밀히 모아두었던 오러를 일거에 방출했다. 콰콰콰, 세상을 구한 용사가 작정하고 토해낸 기운은 그야
말로 막대했다. 오러의 폭풍이 김우진을 덮쳤다.
‘멀지 않아!’
“···케르베로스?”
“큭···!”
김우진이었다. 어느새 케르베로스와 카를로의 사이에 끼어든 김우진이 가볍게 불꽃을 소멸시켰다.
거친 손길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콰앙, 그대로 대지에 내리 꽂았다. 엄습하는 충격에 카를로가 피를 토했다.
“자, 말해봐라.”
“끄아아아아악!”
“오러홀은 살아가는데 크게 지장이 없지. 그렇지?”
“자, 잠깐만···!”
“말할 기분이 들었나?”
“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시, 신께서 금제를···!”
“걱정 마.”
“불어라.”
신의 직접적인 보호라.
케이룸이라는 차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에, 어째서 케이룸으로 카를로를 보내려고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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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9. 적당 >
당연히 연옥 밖이라고 한들 무조건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못한다. 하지만 서로의 권리가 충돌한다면, 신들은
당연히 본인들의 손을 든다.
소장으로서의 김우진은 보호를 받지만, 신의 권역을 침범한 김우진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차원 ‘케이룸’은.
스스로를 하늘의 신이라 일컫는 케이룸의, 아니 베른 오르티안의 권역이었다.
“베른의 수작인가.”
혼자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김우진을 죽이겠다는 건 아닐 거다. 적어도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신들은 김우진을 죽일 수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면.’
‘누구 마음대로.’
“덕구야. 가자.”
그 전에 다른 탈옥수들부터 잡고.
‘그런데 하필 케이룸이라···.’
* * *
“이게 뭐야!”
“씨발, 차원의 방벽? 이걸 어떻게 통과하라고!”
운이 좋아 구속구를 해제하고 정원을 통과했다고 한들, 차원의 방벽을 통과하는 건 권능에 가까운 힘이다.
다섯은 차원의 장벽에 도달하기 전에 잡혔다. 둘은 차원의 장벽을 두드리다 잡혔으며, 다른 하나는 아예 도망치지
않았다.
“나와.”
“왜 도망치지 않았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이곳이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을.”
“그것뿐?”
“카를로라는 자에게 방법이 있어 보여서 뒤따라가고 있었소. 헌데 소장이 순식간에 뭉개버리더군. 그래서
포기했소. 할아버님의 말이 맞았소. 이 빌어먹을 곳은 힘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나갈 수가 없소.”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라서 그리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전이었다면 율리아가 이겼겠지. 율리아의 수준이
생각 이상이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분명 다음 만남은 알베니우스와 함께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짧을지, 길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생명체인 드래곤의 시간관념은
인간과는 아득하게 다르니까.
“죄수들은 다시 감옥에 처넣고 카를로는 특별 감시가 필요해. 강민식과 같이 권한을 받았다면 구속구나 징벌방
같은 건 소용이 없을 테니.”
“1183 번을 강민식과 함께 특별관리대상에 넣겠습니다.”
그녀의 고향 차원은 벨레르가. 그리고 용사로서 구한 차원은 도이트른이다. 귀휴를 가고자 한다면 둘 중 하나일
터.
그리고 벨레르가는···
“어떻게냐고 묻는다면. 연옥의 엘프들 중에는 나와 같은 차원 출신의 엘프가 하나 있다고 말해줄 수 있겠구나.”
“거기 가봐야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죄수로서 행동에 많은 제약도 있을 겁니다. 시에나님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나는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단다. 신의 이름 아래, 짓밟힌 벨레르가가 어떻게 변했는지.”
“딱히 짓밟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신의 권역이 되었을 뿐이죠.”
“거기에 벨레르가 차원민들의 의지는?”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강압적으로 믿으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신은 세계수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차원에 수많은 엘프들이 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세계수를 섬긴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긴 하다. 어떻게 세계수를 보지도 못한 엘프도 세계수의 귀중함과 위대함을 알고 섬기는
건지.
어쨌든 그러한 엘프들의 성향 때문에 신들은 엘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권역의 엘프들은 눈에
가시이며 박해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때였다.
────.
- 침입자 발생!
- 침입자 발생!
“···이건.”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해야겠군요.”
* * *
“···맙소사.”
쩍 갈라진 균열은 시커멓고 악의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 악의는 끊임없이 마수들을 토해낸다.
“연옥이 침범 당하다니!”
그리고 300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드워프의 반응을 보아하니 최소한 300 년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 거니?”
“막아야죠.”
“부소장.”
“예!”
“신입 죄수들과 강민식을 독방에 수감하고 나머지 죄수들을 소집해. 연옥 방어 시스템 작동시키고 구간 모두
폐쇄해. 마수나 마물 한 새끼도 연옥 내부로 들어올 수 없게.”
애초에 신들의 관리 하에 있는 연옥에 대량의 마수들이 침입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용인이나 방관 없이는
불가능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차원의 방벽이 벌어지고 마기가 점점 더 잠식해 나가고 있다. 세계수의 힘으로 수복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꽤
많은 힘이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신들이 세계수의 존재를 눈치 챌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아이러니하게 김우진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김우진이 있으니 결코 이 정도 수준에 연옥이 붕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율리아로 인해 조금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는 계약을 종료할 때까지 관리자들과 직접적으로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적당해.”
적당하다.
지난 20 년 간 그가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음을 증명해 내기에는, 신들에게 줄 경고장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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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0. 원하는대로 >
어째서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는 걸까. 전지전능하다는 신이라는 작자들은 왜 그들을 멸종시키지 않는가.
왜 용사라는 대리인을 이용하는가.
그리고 신은 하위 차원에서 제약을 받는다. 함부로 강림할 수도, 강림한다고 해도 멋대로 힘을 사용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게 신들이 집행자를 하수인으로 두고, 용사들을 이용해 세상을 관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그것들은 무엇일까.
균형이다.
필요악이며, 흐름이자 법칙이다.
신이라는, 용사라는 세상을 가꾸는 존재가 있다면, 악의와 마라는 세상을 파괴하는 존재 또한 있어야 한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한 악의의 파도가 연옥을 덮쳤다는 것. 김우진, 그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것.
릴리는 새장 속에 들어갔다. 하늘구름은 릴리를 억압하는 구속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녀를 지키는
방호구이기도 하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한, 당분간은 안전할 거다.
신입 죄수들을 단단히 구속해 감옥에 처넣고 다른 죄수들을 풀어 놓은 이상, 정원 바깥은 몰라도 정원이 완전히
파괴될 일은 없다.
콰아아아아-
김우진의 몸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뒤덮는 재앙이었다.
* * *
뜨거운 열기.
붉게 물든 하늘.
마수와 마물들의 비명 소리.
“···장관이 따로 없군.”
저런 존재와 싸웠다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물론, 김우진이 손속에 사정을 둔 덕분이긴 하지만.
“공간?”
“강민식님을 잡으러 갔을 때, 집행자를 만났거든요?”
“집행자?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더니 신들의 사주를 받은 게 정말이었나.”
“그러게.”
“모르셨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네. 하지만 말은 안 해주지 않았나.”
“율리아, 너 그런 걸 숨겼다고?”
“···아. 제가 말 안 했어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데르카인도, 시에나도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김우진이 노는 판은 용사인 그들과도 아득하게 격이 다르다. 그들의 상식으로 김우진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물 좀 더 잡고 올게요.”
“같이 가지.”
율리아와 데르카인이 각자의 무기를 꼬냐쥐고 광견처럼 달려 나갔다. 이미 미친개가 된 타르칸과 합류했다.
홀로 남은 시에나는 시위를 당겼다.
파앗-
오러의 화살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작은 마수 하나를 저격했다. 머리가 터진 마수가 힘없이 추락한다.
“신.”
입술을 깨물었다.
* * *
균열은 거대하다.
크게 이상할 건 없다. ‘마’는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여전히 토악질이 나오도록 마수와 마물의 군단을 토해내고 있는 구멍을 보며 김우진은 과거를 회상했다.
누구는 그들을 천사라 불렀고, 누구는 그들을 신의 사자라 불렀으며, 누구는 그들을 집행자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자. 인류는 그를 신이라 불렀다.
신은 회유했고, 그는 거부했다.
마수의 출현은 엄연히 신들의 관리 잘못이고 이는 김우진이 억지로 우겨넣은 천재지변의 조항이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김우진이 손을 뻗었다.
────!
공간이 일그러진다. 벌어졌던 균열이 억지로 좁혀지며 비명을 지른다. 고개를 내밀던 마수들이 열기와 좁아지는
입구에 타격을 받아 그대로 소멸한다.
더 없이 비효율적이라 그냥 금을 사는 게 더 싸서 그렇지.
그들이 김우진에게 감탄하는 사이, 모든 작업이 끝났다. 벌어졌던 균열은 다시금 붙었고 하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맑아졌다.
수많은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와 소장이 일으킨 잔열만이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
“부소장!”
“부르셨습니까!”
“죄수들의 상태는?”
“모두 얌전히 독방에 있습니다.”
“카를로는 어디 있지?”
“1183 번은 4 층의 독방에···.”
“소, 소장님?”
“나가.”
“갑자기 그게 무슨···.”
“나가라.”
“예···?”
“지금 당장 탈옥해.”
케이룸으로 가 알려라.
“···예.”
───────────────
# < 051. 무조건 >
“죄수 하나가 탈옥했다. 신기하지 않나? 천재지변이 일어났다고 냉큼 탈옥을 강행하다니. 차원의 방벽은 자격이
없으면 넘을 수 없는데 말이야.”
-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군.
- 악의로 인해 벌어진 균열에 몸이라도 던진 모양이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 신의 권역이라.
-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군.
- 그것 또한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 허나, 무슨 일이 있든 죽을 일은 없지 않나.
- 백신전과 너의 계약에는 서로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조항 또한 있으니.
균열은 천재지변에 속해 김우진에게 책임을 물지 않지만 장시간 탈옥한 죄수를 다시 붙잡아 오지 않는 건 온전히
김우진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신이 자신의 권역으로 들어온 카를로를 순순히 연옥으로 돌려보낼 리도 만무하며, 데리러 간다고 순순히
내놓을 리도 없다.
“바라는 대로 해주지.”
* * *
남자가 턱을 괴었다.
신이라 불릴 만한 힘과 권위가 있기에 신이라고 불리는 거다. 신이라고 불리기에 힘과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라.
* * *
신의 권역이란 무엇인가.
하늘은 어두웠다. 새카만 먹구름이 가득했고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이 차가운 냉기와 만나 눈보라가 되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눈 덮인 설산이었다.
“드디어···.”
“마나가···.”
차원 이동의 후유증으로 어지러움을 참아낸 시에나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마나의 성질에 눈살을 찌푸렸다.
베른이 엘프들을 어떻게 대했고 대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성격상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을 터. 엘프라는 것은
끝까지 들키지 않는 게 좋다.
김우진과 시에나가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설산에서 거주하는 예티와 여러 몬스터들이 반겨주었으나 상대가 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의 속도를 따라올 수도 없었다.
산의 중턱쯤부터 눈이 그쳤다. 산 앞에는 요새에 가까운 도시가 있었고 둘은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해 성벽을
넘었다.
“어서오십시오!”
“이제 좀 알겠어요?”
“여기가 칼칸이면 대륙 북부 아스란 왕국의 영역이야. 엘프들의 숲은 남서쪽으로 내려가야 해.”
“잡화점에서 지도를 팔까요?”
“자세한 건 안 팔겠지만 대도시나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을 정도의 지도는 팔 걸.”
“멉니까?”
“왕국 세 개 정도는 지나야 해.”
“그렇게 멀지는 않군요.”
점원이 사라졌다.
“능숙하구나.”
“어색해하면 안 되요. 그냥 뒷말만 적당히 따라해주면 됩니다.”
“신을 섬겨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우리가 ‘어머니 나무의 가호가 함께하길’ 같은 소리는 하지 않잖니.”
“그건 또 그렇네요. 그래도 앞으로 염두에 두세요.”
차원이 신의 권역이 되었다는 것은 피조물들 중 절반 이상이 신도가 되었다는 뜻이니. 앞으로 지겹도록 볼 거다.
시에나의 시선 끝에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신 위대한 하늘게 감사합니다. 하늘의 자비가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하지만 케이룸이라는 이름이 들렸다는 것 자체가, 그의 신자들을 보았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과 시에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신전이 있군요.”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고 데면데면했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의 요새에 엘프가 없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번쩍-
“오오오!”
“신의 말씀이 내려온다!”
* * *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1 만 미터 위의 상공.
“···왔군.”
방벽이 열렸다. 그리고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 흔적은 빠르게 지워졌으나 들어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김우진이 왔어.”
베른이 웃었다.
“디아네.”
“예, 신이시여.”
“신탁을 내리고 김우진을 찾아라.”
“신명을 받듭니다.”
그의 명을 받은 집행자가 사라졌다.
놈은 신을 죽였다.
“인정한다. 놈은 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속사정이 있었고, 신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떠나
신살을 했다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
“허나, 그래 봤자다.”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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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2. 엘프 >
김우진에게는 제법 많은 능력들이 있다. 불을 다루는 힘, 공간을 다루는 힘, 그리고 모습을 바꾸는 힘까지.
외부의 마나가 마나하트를 통해 흡수되면 연공법과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마나의 성질도 달라진다.
시에나가 잡화점에서 구입한 지도의 한쪽을 콕 찝었다. 거기에는 엘븐이라고 쓰여진 거대한 숲이 있었다.
그들은 신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신도가 아닌 이를, 신도가 될 가능성이 한 없이 0 에 가까운 이들을
보살펴줄 의무가 없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눈이 두 개인 게 문제라고, 모두가 신을 섬기는 곳에서 홀로 나무를 섬기는 엘프들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아스란 왕국의 북부 요새 도시, 칼칸을 벗어나 남하했다. 다섯 개의 마을과 도시를 거쳤고 단 한 명의 엘프도
보지 못했다. 엘프에 대한 언급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최대한 마나를 감추면서 적당히 빠른 지금이 딱 좋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며칠 뒤, 둘은 발칸이라는 대도시에 들어섰다. 아스란 남부의 도시로 왕도와 비견될 정도의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신의 신탁이 내려왔고 성녀께서 직접 그 말씀을 전해주신답니다. 세상에, 성녀께서
이곳에 오시다니! 제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썰렁하군요. 술도 못 마시게.”
“바텐더가 제일 먼저 나가더구나.”
“어떻게, 한 번 보시겠습니까?”
“성녀를?”
“일단 어떤 자인지, 한 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죠. 필요하면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를 테면?”
“인질?”
“좋은 생각이군.”
신전은 굳이 찾을 필요가 없었다. 도시의 중앙, 거대하고 새하얀 지붕이 보였기 때문이다.
신전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어쩌면 도시의 모든 인구가 몰린 게 아닐까, 정도의 막대함이었다.
“성녀님께서 오신다!”
* * *
허리까지 내려오며 길게 하늘거리는 자수정 빛 머리카락, 신에게 선택 받은 듯 한 황금빛 동공과 새하얀 사제복.
초승달을 그리는 눈매와 입가에는 인자함이 가득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신성력은 모두에게 경건함을 심어주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김우진은 시에나와 함께 슬쩍,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베른을 경배하고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집행자?”
“집행자를 성녀로 삼았군요.”
일반적으로 신성 감응력이 뛰어난 인간을 성자나 성녀로 삼지만 권역이 되어 신의 힘이 충만한 곳에서는 집행자를
성녀로 삼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도 베른이 하위차원에서 대놓고 집행자들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남문으로 나가자구나.”
“예.”
“안녕하십니까. 두 분 다.”
골목길 한 가운데를 점유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방금까지 저 인파속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던 성녀였다.
“성녀?”
“저희에게 무슨 볼일 있으십니까?”
“못 보던 얼굴들이신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북부에서 활동하던 용병들입니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따뜻한 남부로 이동 중입니다.”
“그렇군요.”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물과 음식이 필요합니다. 헌데 거식증에 걸려 그것을 거부한다고 한들, 먹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단지 일깨워드리는 거지요.
“신을 섬기는 신도가 아니니 제가 함께하는 것이 불편하실 거라는 것은 압니다. 지금 저의 행동이 막무가내로
보인다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걸 알면서도 행해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틀린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신을 따르는 신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었다.
차라리 싸우자고 덤벼들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도 아닌데 먼저 사건을 만들어 위치를 들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거 완전 미···.”
성녀가 사라졌다.
“···저건 완전 미친년이잖니?”
“빨리 여길 뜨죠. 괜히 더 엮여서 좋을 건 없습니다.”
“동감이란다.”
김우진과 시에나가 급하게 자리를 떴다. 허나, 그들이 사라진 뒤 성녀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김우진이라는 악마를 찾아내야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수많은 신도들과 그녀 휘하의 집행자들이 행하고 있으니 당장
그녀가 해야 할 것은 이것이 맞았다.
* * *
“그러니까 뭐라고요?”
그러니까,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성녀와 만난 뒤 바로 도시를 떠났다.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해 일반인들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마을 몇 개를 그냥 지나쳤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군요.”
그녀는 반갑게 김우진과 시에나를 맞이했다.
“아.”
“···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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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3. 진짜 원수 >
“설마 신께서 내려주신 자비를 무시하고 사특한 나무나 섬기는 이교도 족속과 마주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행이라면 성녀를 본 순간, 즉시 도시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것. 불행이라면 그럼에도 굳이 쫓아와 이
사단을 냈다는 것이다.
“일단 좀 진정해보시죠.”
“신을 모욕하는 이교도를 눈앞에 두고 진정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도 이 이교도와 동료였죠.
당신은 이교도의 사특한 나무를 옹호하는 자입니까?”
“애초에 엘프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규율을 어긴 것을 처벌할 뿐.”
“규율이라니요?”
“모르는 척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사특한 나무를 섬기는 엘프들은 본디 모두 박멸해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신께서는 자비를 내려주어 그들을 다른 곳에서 신의 관리 하에 사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셨죠.”
“살던 곳에서 쫓아내고, 감시하면서 자비라고?”
“모두 죽었어야 할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자비로운 신의 은총입니다.”
“그래. 어디···.”
“···그 얼굴.”
콰아아아아앙!
김우진의 주먹과 도끼가 충돌했다. 충격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신께서 내려주신 행운입니다. 직접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
“아니야.”
훅 들어온 목소리는 어느새 그녀의 코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도끼가 가공할 기세로 내려왔으나 불의 검에 가로
막혔다.
“너는 운이 나쁜 거야.”
그럼에도 눈은 올곧았다.
──!
“천벌이 내릴 지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오십 번.
“···어떻게?”
“그러니까 싫다고 했을 때 그냥 꺼졌어야지.”
퍽, 성녀가 기절했다.
* * *
“으음···.”
“내가 왜···.”
신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무교인들에게 포교를 하고자 했으나 이교도인 엘프였다. 그리고 그 동료는
반역자 김우진이었다.
‘몸이···.’
여전히 붉은 눈과 머리였다.
그럴 수는 없다. 신께 짐이 될 수는.
오랫동안 느껴운 익숙한 힘이다. 어쩌면 노력하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속구가 전부라면.
주요 마나로드 곳곳을 틀어막은 이질적인 기운은 분명히 반역자의 그것이었다. 마나를 움직여도 단단한 철벽처럼
꼼작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허나, 죄송할 뿐, 신께서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실 거다.
“재미있네.”
성녀가 눈을 감았다.
김우진이 웃었다.
“원하는 건 이미 다 얻었거든.”
“······!”
* * *
탈옥한 카를로를 찾는 것.
엘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
하지만 이미 성녀와 전투를 벌이면서 모든 게 드러났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김우진과 시에나는 자리를
피하면서 급하게 발품을 팔았고 손쉽게 해답을 찾았다.
“발로란 섬? 엘프들이 유배된 섬 아닌가. 위대한 케이룸의 자비지. 사특한 나무나 섬기는 이교도들에게 삶이라는
희망을 주었으니. 그들에게는 과분해.”
“발로란이 어디냐고? 그야 당연히 남···.”
엘프들이 유배되었다는 것은, 엘프들의 유배지가 발로란 섬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다.
김우진과 시에나는 구속된 성녀와 함께 엘프들의 숲으로 날았다. 더 이상 거리낄게 없으니 전력을 다했다. 차원
남부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건···.”
“결계군.”
“위대한 신의 결계이니 당신들은 결코 들어가지 못할···.”
김우진이 단숨에 그것을 갈랐다.
섬은 울창했다. 허나 그 뿐이었다.
“······,”
“······.”
“···안 돼.”
김우진이 뒤따랐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아아아아아아악!”
김우진이 유골의 산을 살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엘프의 뼈였다. 엘프들의 무덤이었다.
얼굴이 굳은 성녀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다 죽여?”
“신께서 행한 일입니다. 그 뜻과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 개 쌍년이!”
쾅쾅쾅!
시에나의 발이 떨어질 때마다 대지가 진동했다. 성녀가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죽어! 죽으라고!”
“멈추세요.”
“놔.”
“분노는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다 잡은 벌레에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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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4. 상태이상 >
뇌쇄적인 눈빛이 김우진을 빠르게 훑는다.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끝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깊이에 드네르바가
경각심을 가졌다.
“네 말이 맞았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다.
“아쉽게 됐네.”
발로란 섬은 대륙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곳이다. 엘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되, 후환을 남기지
않고자 모두 처리하기 위해서 인류가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을 선정했으니.
그녀가 사라졌다.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섬으로 들어간 메이와는 반대로 섬에서부터 떠오른 존재가 있었다.
“김우진.”
파앗-
마력 칼날이 김우진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몸을 노리지 않았다. 그저 주의를 끌고자 하는 목적에
불과했다.
마나가 요동쳤다.
“소문대로 꽤나 건방지고.”
“죽으렴.”
집행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냈다. 각자의 공세가 천벌의 틈새로 들어가 김우진을 공격했다.
────!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진홍빛의 화염이 폭발을 집어 삼키며 확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는다.
꾸득, 대기의 마나가 강제로 일그러진다. 합병되어 하나의 마법을, 권능을 시전한다.
“그래서 더 끝을 봐야겠고.”
파지지지직-
파지지지지직-
콰르르르르릉-
푸른 섬광이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나간다. 긴 궤적의 끝에 압력에 저항하는 불꽃이 있다. 그 너머, 김우진이
존재한다.
─────!
충격파가 퍼진다. 불꽃이, 뇌전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김우진을 포위하며 방진을 형성하고 있는 집행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폭발은 대기를 먹고, 바다를 먹고, 마나를 먹었다. 점점 커지는 범위는 그 안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역시 신의 힘.”
“···굉장해.”
“신이시여.”
간신히 범위에서 벗어난 집행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럭 무럭 솟아나는 경외에 그들의 신앙이 더욱
신실해졌다.
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신으로서 보일 모습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큰 우환을 정리하였으니 나쁘지 않다.
죽었다면 계약을 어긴 것이고, 계약을 어기면 그들이 신이라고 할지라도 심연으로 끌려 갔을 테니.
“그럼 다행인···.”
그 순간이었다.
────!
그대로 무방비 상태의 베른과 부딪혔다. 베른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어떻게!”
당황한 드네르바가 급하게 마력을 조작했다. 한 순간에 조형된 마나의 칼날 수 백개가 김우진을 뒤덮었다.
허나, 그것은 불길에 먹혀 그의 본체에 상흔을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콰득-
“커헉···!”
아찔한 통증,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강인한 압박이 그녀의 육신을 뒤흔들었다. 그대로 증발한 심해로
내리 꽂았다.
콰아아아아아앙!
“···대체 어떻게?”
감히 두 명의 신을 상대로!
“그런데 그거 알아?”
“아아아아아아악!”
“쿨럭···!”
미리 대비하고 피한 그녀와 달리 메이라는 집행자는 시에나의 의도대로 정면으로 충격파를 얻어맞아야만 했으니.
“아···.”
“···대단하네.”
신 이상이다. 아니, 어쩌면 잘못된 게 아닐까. 저들은 그냥 관리자가 김우진이 진짜 신인 게 진실이 아닐까.
“너를 따라가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
“그래, 네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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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5. 진짜 >
‘대체 어떻게?’
김우진은 강하다.
안다.
김우진은 신을 죽인 신살자다.
안다.
김우진은 신 둘을 죽였다.
안다.
“그런데 어째서!”
“누가 그래? 따로 따로였다고.”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 해줬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이들은 김우진을 겪어보지 못했고 신의 자존심으로
인해 그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테니.
뿌득, 드네르바의 목이 꺾였다. 사지도 친절히 모조리 부러트렸다. 그럼에도 드네르바는 살아 있었다.
“사, 살려···!”
“아아아아아악!”
실제로 심장이 불타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의 육신에서 비롯되는 모든 마나를 불태우고 있을 뿐. 그 고통은
아마 신이 아니라면 쇼크사를 만 번 해도 부족할 정도로 끔찍할 거다.
손에 붙잡힌 뇌전의 창이 불꽃을 만나 소멸했다. 그의 시선이 괴성을 지르며 질주하는 번개에 향했다.
“김우지이이이이인!”
“그렇게 열렬하게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이 김우진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아.”
─!
불꽃과 뇌전이 충돌한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충격파에 잠시나마 잠잠해졌던 바다가 다시 요동친다.
“죽어어어어!”
─!
붉은 검기가 창을 쪼갠다. 부서진 권능의 여파가 베른을 덮친다.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삼키며 다시 창을
만든다.
검과 창이 연달아 부딪힌다.
“왜!”
“말은 똑바로 해야지.”
카가각, 불의 검이 창을 타고 미끄러진다. 불꽃을 튀기며 뇌전을 가르고 신의 살갗을 벤다. 지진다. 연기와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그래서 증명하고자 했다! 나는 신이니까! 지고하고 완전한 존재니까! 신을 모욕하고 신에 대한 예의를 잊어버린
네놈에게 천벌을 내리고 이 세상에 신위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지구의 한 철학자가 말했지. 신은 죽었다.”
“끝까지!”
“애새끼처럼 투정 부리지 마.”
김우진의 기도가 달라졌다. 불꽃이 드높게 치솟는다. 그 열기에 베른이 주춤거리고 검격이 그 위로 떨어진다.
─!
“가만히 있는 날 자극한 것도, 계약의 종료만을 바라는 날 굳이 건드린 것도,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도 모두
네놈이야.”
쩌엉, 창이 부서진다.
“커헉···!”
* * *
“···말도 안 돼.”
맹세코 신들의 승리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헌데 어째서일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이것이 과연 말이 되는 걸까?
과연 누가 지금 저들을 보고 신이라고 부르며 경외할까. 오히려 그들의 멱살을 움켜쥐고 천천히 떠오르는 반역자
김우진이 더욱 신에 어울렸다.
“···어떻게 합니까?”
“나한테 묻지 마.”
다른 집행자의 물음에 파른이 입술을 깨물었다. 신들도 당했는데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뭐해?”
“싸울 거야?”
“···아닙니다.”
“그럼 꿇어. 이 개새끼들아.”
* * *
“너희들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불꽃을 심장에 박아 넣고 혈도들을 틀어막는 직접적인 제약에 약해진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
“······.”
치밀어 오르는 치욕스러움에 두 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히 패배한다해도 치욕스럽기 그지없는데 하물며
휘하의 집행자들이 보는 앞이다.
사지가 부러지고 피부를 모두 벗기고, 수천, 수 만년을 감금해도, 신들의 근원을 부숴도 계약을 위반하지는
않는다.
“그건 억지야!”
“오만한 네놈들의 아둔함이지.”
신들이 언제 계약서라는 것을 써봤겠나. 감히 피조물 따위가 신을 상대로 계약의 맹점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드네르바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이들의 움직임은 결국 백신전 모두의 의지다. 백신전이 본격적으로 김우진을 견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앞으로 더 험난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신들은 김우진이 무사히 모든 죄수들을 출소시키기 전에 어떻게든 족쇄를 더욱 단단하게 조이려 할 것이다.
계약을 맺은 건, 신들이 죽음이라는 미지를 두려워하고 김우진을 경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김우진이
백신전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버티던가?”
“아니면 내 손을 잡던가.”
“···위대한 신이 내가 일개 피조물인 너 따위의 손을 잡을 것 같아?”
“아직도 주제나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김우진이 픽 웃었다.
“대체 뭘 할 생각인데?”
“가만히 앉아서 네놈들 뜻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아무리 네가 강하다고 해도 백신전을 이길 수는 없어! 우리를 이겼다고 기고만장하지 마.
우린 백신전의 신들 중 최약체라고!”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 * *
“···대체 뭐야.”
신은 완벽해야만 한다.
신은 지고해야만 한다.
신은 패배할 수 없다.
그렇기에.
패배한 저 패배자들은 신 아니다.
신은 패배자일 수 없으니까.
일개 반역자의 손에 쓰레기처럼 들려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되니까.
그렇다면?
신이라고 우쭐대던 저 가짜들에게 천벌을 내린 저자는?
과연 저자가 반역자일까?
아니면.
“저분, 저분이야말로···!”
나 무서워.
───────────────
# < 056. 집으로 >
“···알았어. 그전에 이 불꽃 좀 없애줬으면 좋겠는데. 개수작이 아니라 힘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거든.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을 빌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김우진이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느껴지는 우주의 기운은 그때와 같다. 결코 가짜가 아니다.
“풀 네임.”
“드네르바 아르사.”
“거짓말은 아니겠지?”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정도의 멍청이로 보여?”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원하는 조항들을 적었다. 아카식 레코드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계약 존재와 감응하는
고차원의 계약서다. 가짜를 적으면 진짜로 바뀌니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서명해라.”
“···잠깐만, 이건 불합리해! 완전 불공정 계약이잖아!”
“무조건적으로 내가 손해 보는 계약이잖아!”
“패자와 승자가 같은 조건에서 계약을 맺을 이유가 있나?”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채찍과 당근이 동반되어야 한다. 적절한 보상이 없이 강제하고 억압하기만
해서는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이건?”
“이 정도면 충분히 호의를 베풀어 준 거다. 서명해라.”
“···아까보다는 조금 낫네.”
일단 기한이 생겼다는 것이, 김우진의 승패에 상관없이 벗어날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 그리고 김우진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토사구팽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디 있어?”
* * *
전투는 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으나 신들의 대전은 섬에 영향을 끼쳐 섬의 대부분을 소멸시켰다.
그나마 그건 약과였다. 증발한 바닷물과 충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크레이터는 차원 전체의 해수면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으니까.
“신이시여!”
“나는 진짜 신이야!”
“진정한 신을 보았으니 더 이상 사특한 가짜에게 속지 않습니다.”
성녀는. 아니, 신앙을 잃어버린 집행자, 디아네 디트린은 그대로 김우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발에 입을 맞췄다.
눈앞의 김우진이!
그가 신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신일까.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과연 신께서는 자신을 용서해주실까. 감히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를 섬기며
모욕했는데.
“···재미있네.”
“허나, 나는 신이 아니야.”
“그게 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이들이 신이 아니라는 추론은 꽤나 억지 아닌가? 집행자로서, 성녀로서 이들을 섬겨온
네가 무엇보다 잘 알텐데?”
“예, 맞습니다.”
성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아실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고 진짜를 반역자로 만듭니다.”
이들은 찬탈자입니다!
“···뭐?”
“조심해. 저거 완전 미친년이야.”
* * *
그녀는 베른의 모든 것을 알았고 거기에는 당연히 탈옥수, 카를로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늘의 신전에 도착하자 신전을 지키는 경비들이 보였다. 집행자는 아니나 차원에서 제법 강자 축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성녀님, 이분들은?”
“위대한 분입니다. 카를로는 어디 있죠?”
“대지의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만, 케이룸님께서는 왜 저리···.”
“신경 끄고 비키세요.”
“···성녀님?”
“비키라는 말 안 들리나요?”
“이쪽입니다, 주신이시여.”
“그 주신이라는 말 좀 안하면 안 되나?”
“아직 정체를 숨기길 바라시는군요. 하긴, 찬탈자들이 득세하니 은연 자중해 힘을 숨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허면 무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애초에 찬탈 되서 힘을 뺏겼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신은 완벽한 존재라며?”
“허나, 찬탈자들에게 주신의 위엄을 보이셨죠.”
“내 말 뜻이 그게 아니란 걸 알 텐데.”
“···당신은 주신이십니다.”
“아하.”
광신은 신앙을 넘어선 신념이다. 평생을 믿어왔던 신념이 부서지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그녀는 그러한 세상을 복구해야만 했다. 자신의 신앙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그녀의 신앙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김우진이 패배하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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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7. 연락 >
드네르바가 질색했다.
디아네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시선은 여전히 드네르바를 향하고 있었다.
“···내, 내 위신은?”
“그냥 갈래, 맞고 갈래?”
“위신은 나중에 충분히 쌓으면 되겠다는 뜻이었어.”
“집행자들의 입단속은 알아서 잘 할 수 있겠지.”
“물론이야.”
신과 집행자 사이의 결속력이 약해졌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녀가 받은 거대한 충격이 추가적인
역할을 했을 거고.
“신들마저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데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신들의 힘을 알 텐데?”
“패배하신다면 어차피 죽을 거, 죽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좋아.”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베른에게 향하던 결속을 비틀어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
생각이니까. 그가 죽어 구속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배신할 수 없다. 이미 죽은 시점에서 배신은 그가 알 바
아니고.
“좋아. 야, 일어나.”
“아.”
마나가, 권능이 디아네의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그대로 심장으로 흘러 베른의 잔재를 지웠다. 베른을 향한
결속의 흐름을 비틀어 방향을 바꿨다.
“···주신이시여.”
“맙소사, 권능이···?”
“비틀렸어?”
“나머지도 와라.”
“어떻게 한 겁니까? 어떻게 신이 아니면서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에 개입을···?”
“내가 그걸 친절히 설명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건가?”
“···아닙니다.”
“디아네.”
“예. 주신이시여.”
“주신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허면 제가 무어라 존함을···.”
“그냥 소장이라고 불러.”
“예, 소장님.”
“대충 챙길 것 있으면 챙기고 이곳에서 마무리할 게 있으면 마무리해라. 전부 연옥으로 갈 테니. 한 시간
주겠다.”
“예.”
“괜찮아?”
“땀이···.”
“후우, 빡세네요.”
“괜찮은 거니?”
“괜찮습니다. 조금 쉬면 나아질 거예요. 그냥 무리를 조금 해서 그래요.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긴 하네요.”
신이 아니면서 신의 힘을 사용하는 자.
그리고 신을 죽였다.
“어떻게, 더 제 편이 되고 싶어졌습니까?”
“그래. 저 빌어먹을 놈에 의해 내 동족들이 모조리 죽었어. 헌데 우습게도 나는 저 놈을 죽일 힘이 없단다.”
신이라는 이름하에, 정의라는 대의 아래 세상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무르는 신들은 절멸되어야 한다. 신보다는
악마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기에.
시에나가 눈을 번뜩였다.
갈 때는 둘이었으나.
올 때는 열 셋이었다.
* * *
“오셨습···꽤나 많이 늘어났습니다만.”
“꽤나 많은 일이 있었거든.”
“맙소사. 저건 베른 아닙니까?”
“잡아왔어.”
“···계획에 있던 겁니까?”
“아마도?”
“뭡니까, 그 애매한 대답은.”
“이놈은 내가 특별 관리 할 거야. 그래도 명색이 관리자인 이상, 연옥의 시스템은 아무렇지 않게 해제할 테니.”
“나머지들은?”
“베른의 집행자들이다. 이제는 내 간수들이고. 그렇지 않아도 간수들의 파손이 심해서 수가 부족해졌잖아? 잘
됐지. 권능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배신은 걱정할 필요없다.”
“그럼 교육하겠습니다.”
“그래, 너희들 전부 부소장 따라가. 절대복종하고.”
“예.”
“명령에 따릅니다.”
김우진은 연옥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며 집무실에 도착했다. 드워프들에 의해 다시금 리모델링된 집무실은 꽤나
쾌적했다.
연옥에 가둔다고 데리고는 왔지만 명색이 관리자인 만큼 일반적인 독방으로는 감금할 수가 없다.
단순한 흐름을 트는 것과는 별개로 연옥은 여러 관리자들의 권능이 뒤섞인 복잡한 코딩과 같아서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튀어버리니까.
일단은 신목이라 불리는 나무다. 완전한 신은 아니지만 신에 가까운 존재. 김우진의 도움을 받는다면 약화된 신을
무난히 구속하는 것쯤은 가능할 거다.
묶어두고 세계수의 뿌리를 이용해 꾸준히 힘을 흡수하는 거다. 그러면 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며, 릴리는
관리자의 힘을 골수까지 빨아들여 보다 거대한 신목으로 성장할 거다.
‘일석이조군.’
“괜찮아.”
“정말입니까?”
“이번 일로 느낀 게 있어.”
그러니.
먼저 때리면 어떨까?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계약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들을 때리는 방법이라. 쉽지 않겠군요.”
“놈들이 흩어져 있을 때, 하나씩 사냥하는 건 어떨까? 죽이지만 않으면 계약 위반은 아니니까.”
“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역시 한둘 이상은 쉽지 않겠지.”
처음이야 뭣도 모르고 당한다 쳐도 그 다음부터는 대응할 거다. 다섯, 열 씩의 신들이 모여 있다면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열이나 돼야 무리인겁니까···.”
“내가 먹은 게 한둘이 아니잖아. 이 정도는 해줘야···.”
- 삐이이이!
어느새 집무실 내부로 들어온 자그마한 파랑새 한 마리가 김우진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릴리.”
- 삐이!
- 삐, 삐!
“율리아 불러와.”
“예.”
잠시 후, 율리아가 올라왔다.
- 삐삐삐삐! 삐이이삐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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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8. 봉인 >
당장은 알베니우스를 만나는 것보다 자칭 하늘의 신 케이룸, 베른 오르티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하다.
당장은 볼품없이 기절해 집무실 바닥을 뒹굴고 있지만 명색이 관리자다. 김우진이나 그에 준하는 자가 아니면
문제없이 관리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김우진이 항시 붙어 있을 수도 없다.
- 삐삐?
그들의 뿌리는 능히 아카식 레코드에 닿을 수 있으며 그들의 권능은 상황에 따라서는 관리자들에 필적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뿌리는 능히 약해진 신을 구속할 수 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봉인이 더 옳다.
“뿌리로 옭아매고 깊숙이 묻어. 움직임을 봉쇄하고 마나가 요동치면 흡수해서 힘을 줄여.”
그리고 그렇게 되면 봉인 상태인 이상, 베른은 세계수의 일부가 된다. 하늘구름으로 함께 기운을 감출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게 가능할까요?”
- 삐삐.
- 삐이이이?
- 삐이?
- 삐삐삐.
생각보다 무난한 방법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기쁨의 날개짓을 하며 김우진의 품에 안겼다.
- 삐삐.
그리고 잠시 후.
파지직, 관리자의 힘이 미약하게 저항했으나 세계수의 뿌리는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내려가는 지독한 녀석들이다.
베른의 육신에 자연스레 걸쳐져 있던 방어 기재가 모조리 뚫렸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놈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세계수···? 세계수라고?”
연옥에 어떻게 세계수가 심어져 있는지 의심도 잠시, 세계수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내가 말했지.”
“너는 앞으로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에 묶인 채 힘을 쭉쭉 빨려나갈 거야. 나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거름이 되는
거지.”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것보다 더한 일을 하고도 무사했어.”
감사하게 여겨.
“아무튼, 너는 거름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 적어도 내가 계약을 끝내고 연옥의 소장직을 벗어던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다음 일은 뻔하다.
콰득, 김우진의 손이 베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가해지는 압력에 베른이 신음을 삼켰다.
두 번을 했는데 세 번은 못할 것 같아?
물론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계약이 있는 한 김우진이 저들을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저들도 김우진을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건 내 전문이야.”
* * *
마나가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연옥과는 다른 공기와 마나의 분포. 데이드람에 오는 건 두 번째다.
“그러니까 이름이···.”
“발라크입니다. 김우진님.”
“아, 기억났어.”
“율리아님도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발라크님.”
“이번에는 새는 안 보이네.”
“기다리고 계신 모양이에요.”
- 어서 오렴.
참새가 웃었다.
- 성격이 급하구나.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으니까요.”
“무슨 뜻입니까?”
“우스운 소리군요.”
김우진이 픽 웃었다.
“어···, 소장님?”
“다치기 싫으면 물러서. 세계수께서도 물러나시지요.”
하지만 내 몸 하나를 지킬 수는 있지. 세계수의 강대한 마나가 율리아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강대한 마법
방어진이 주변을 감쌌다.
베어버리는 줄 알았다.
───!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알베니우스.”
정말 그였다.
“그래, 나다.”
새하얀 마나가 움직인다. 반투명한 비늘이 그의 전신을 뒤덮는다. 신의 공격도 견뎌내는 우주의 어떤 것보다
단단한 비늘, 용린.
─!
콰콰콰!
부서지는 대지와 흩날리는 나뭇잎, 부러지는 잔가지들에 세계수가 방어 마법진에 마나를 더 실었다.
또 다른 손톱이 다른 각도를 그린다. 허공에 상흔을 남기며 전진한다. 김우진 또한 쌍검으로 응수한다.
─!
──!
카가가각, 김우진의 검이 기묘한 각도를 그린다. 손톱을 쳐내고 측면을 파고든다. 하얀 오러가 방패를
만들어내지만 그대로 뚫어낸다.
“이런!”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하하.”
김우진이 그 손을 잡았다.
“굳이 한 번 싸우고 인사를 나누는 이유는 뭘까요?”
- 확인하는 거란다.
- 끌어들여도 되는지 안 되는지.
- 김우진은 신들을 죽이고 고초를 겪었거든. 그가 약해졌는지, 그대로인지, 아니면 더 강해졌는지 알아야 그에
맞춰 대응하지 않겠니?
“그것도 그렇네요.”
세계수를 이용해 연옥을 무너트리고 신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김우진을 설득하는 것까지.
- 그래, 정말 수고 많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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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9. 진화 >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안정적인 마나가, 그리고 방금의 전투로 인해 그가 어떤 상태인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망치면서 간신히 상처를 회복했다. 그리고 신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그들에게 적대감을 가진 자들을 규합했지.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군.”
“많은 것이 생략되었군요.”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기니까.”
“그러는 너는? 연옥의 소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 꽤나 놀랐어. 결국 신들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건가 싶다가도
내가 아는 너라면 절대 신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동료들을 잃어버린 게 처음인 백신전의 신들에게도, 모든 신들을 상대할 자신도 능력도 없는 김우진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신들은 죽음이라는 미지에, 피조물 주제에 신을 죽일 무력을 가진 김우진이라는 미지의 존재에 잠시 겁을 먹었을
뿐이다.
만나서 반가운 건 맞지만 둘 사이는 단순히 서로의 안부만 묻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려고 절 부른 것 아니었습니까?”
“···역시 넌 성격이 급해.”
알베니우스가 웃었다.
* * *
“딱히, 그런 건 신경 안 씁니다.”
알베니우스는 살아남고자 발버둥 쳐왔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감히 신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신이니까. 신이기에.
“저 때문입니까?”
“네 덕분이지. 네가 신을 죽였으니까.”
신들은 알베니우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도전자를 반기지 않기에.
때문에 알베니우스에게 평화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백신전이 무너져야 한다. 그가 죽든, 신들이 죽든 한쪽이
몰락해야 끝나는 판이니까.
* * *
“···이해를 못하겠어요.”
- 맞단다.
- 정확히는 아카식 레코드가 부여하는 우주의 힘이지.
아카식 레코드란 우주의 흐름과 법칙, 그 자체다. 인격체라기보다는 우주를 관장하는 거대한 의지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신들은 진짜 관리자들이었다. 단지, 그들을 고용한 고용주가 아카식 레코드라는 범우주적인 차원의 의지일
뿐이었다.
- 허나,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 받았기에 그들은 함부로 세상의 균형을 어지럽힐 수 없단다.
- 상위 차원이 아닌 곳에서는 제약이 따르고 자연스레 하위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었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빛으로서 어둠을 물리쳐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용사들이 탄생했다.
- 그래.
- 용사가 스스로 힘을 포기하면 다시 신에게 돌아가지만 허무하게 죽으면 신이 아닌 아카식 레코드에게
돌아가니까.
물론 그렇다고 신들의 힘이 용사를 만들수록 깎여나가는 건 아니다. 긴 시간이 필요할 뿐, 어떻게든 수복할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긴 시간을 감내하고자 하는 신은 없었다.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야 천년이고 그 안에
스스로 포기하게만 만들면 되는 것을 그 이상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 차원용.
* * *
“···제기랄. 내가 대체 왜.”
합당한 이유를 핑계로 김우진에게 맞은 자리였다. 그의 마나가 그녀의 육신을 파고들어 주요 지점들을 틀어막았다.
고통은 배가 되고 치유는 늦어졌다. 그녀가 신인 이상 결국 완치가 되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모습을 백신전의 신들 앞에서 보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졌다.
신 하나는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 다른 신은 이 추잡한 모습을 그대로 백신전의 신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패배의 증거로.
그녀의 분노가 무서워서이기도 했지만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우진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그 모습은 도저히 신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내가 신의 위신을 떨어트렸다고? 그렇다면 당신들이 해보지 그래? 거기 앉아서 주둥만 나불대지 말고 말이야.”
* * *
- 삐삐삐!
“으음.”
세계수는 김우진을 가장 좋아하지만 김우진이 없으면 율리아를 찾는다. 그리고 율리아마저 없으면 시에나를
찾는다.
파지직-
“······.”
“끄아아악!”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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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0. 고대종 >
백신전.
거대한 대전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카펫을 밟았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테이블들에는 각각의 신이 자리하고
있다.
총 100 개. 허나, 양 끝단의 말미가 비었다. 하나는 베른의 자리이며, 하나는 드네르바 그녀의 자리다.
“왔군.”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고작 피조물 따위에게 패배하다니. 심지어 하나는 아예 포로로 잡혔다지?”
“자신의 권역에서 패배할 정도니 얼마나 무능한 건지.”
“애초에 자격이 되지도 않는 자들에게 신격을 부여한 것이 실수였다.”
한 마디, 한 마디와 같잖은 시선들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폐부를 찌른다. 흡사 적으로 가득한 곳에서 청문회에
끌려나온 죄인과 같은 느낌이었다.
‘청문회라니.’
‘빌어먹을 것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저들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녀 또한 신이었다. 오만함과 자존심만큼은 다른
신에 뒤지지 않는다.
“···돌아왔습니다.”
푸른 알비츠.
붉은 칼카르.
백의 베리안.
“···한심하기 그지없군.”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권역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도망치다니. 신으로서의 자각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냐.”
같은 신이라고 해도 주신은 급이 다르다. 베른은 멍청하게 주신에게도 이빨을 내세우지만 그녀는 그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
“···저는.”
“너도 마찬가지다, 드네르바. 허나, 약속하지. 이번 일로 네게 큰 불이익이 가지는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넌 물러도 너무 물러.”
“무를 게 있나? 베른과 드네르바가 패배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미끼로 던진 것이 살아 돌아온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했으니 더 타박할 이유는 없다.”
“그건 나도 동감이군. 단순히 위엄이라는 건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칼카르.”
“아주 신사들 나셨군. 인간 하나에 백신전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다 못해 나락으로 처박히는데 말이야.”
“어디까지나 예정된 결과였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오히려 그 어떤 신보다 잘 알았다. 김우진이 어떻게 신을 죽이는지 보았고 싸웠으며 평화를 제안한
장본인들이니까.
그렇기에 더욱 더, 김우진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신을 던졌다. 대놓고 자신을 방해하는 신들에게 분노한 김우진이 이성을 잃고 계약을 깨트리기를,
그래서 심연에 떨어지기를 바랐다.
칼카르가 코웃음쳤다.
“말만 하지 말고 좋은 생각 있나?”
“부족한 거다.”
“두 신은 패배했고 탈옥수는 다시 연옥으로 잡혀갔다. 결국 김우진은 약간의 짜증을 얻었을 뿐, 아무것도 손해본
것이 없다.”
* * *
“얼마나 됩니까?”
“정확히 281 명.”
“많기도 하군요.”
그 정도의 집행자들이라면 백신전의 관리자들과 비교해도 상위 1%다.
그렇게 따지면 281 명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전원 용사라는 점에서 대단해보이지만
관리자들이 한 번 거른 자들이 대부분일 가능성이 높으니.
관리자들의 감시와 추적이 결코 느슨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차원용이라고 한들 그게 가능한 건가?
시간만 충분히 혹은 막대히 들인다면 용사나 집행자 수준의 강자는 얼마든지 수급할 수 있다. 알베니우스가
끌어들였다는 281 명의 전직 용사가 그 증거다.
신, 혹은 관리자.
예외는 예외이기에 예외다. 예외가 많다면 그건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평균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네가 필요하다.”
“저는 아직 함께 한다고 안 했습니다.”
“정말로?”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에 몸을 던지는 취미는 없어서.”
“신들에게 죽어나간 네 동료들을 잊었나? 너와 친하게 지내던, 결국 너에게 모든 것을 바쳤던 내 동족,
팔란크는?”
“그렇게 표현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무엇보다 애초에 저는 당장 관리자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계약 때문인가?”
“예.”
“50 명의 죄수들을 출소시킬 때까지라고 했나. 아직 많이 남았군. 하지만 고작 20 년 사이에 7 명이나 내보냈으니
신들이 조바심을 낼만도 해. 네가 소장을 맡기 전까지는 평균적으로 백 년에 한 명 꼴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들?
“최초의 신살자는 분명히 너다. 하지만 신들의 폭거에 그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아 백신전에 소속된 것이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우주의 힘을 품고 태어난 자들.
“타이탄(Titan).”
“거인족?”
“거인족과 비교하지 마라. 인간에 비하면 조금 덩치가 큰 거인족에 비해 타이탄은 진짜 세상을 덮는 거인이니까.
타이탄들이 네 말을 들으면 무덤에서 뛰쳐나와 차원을 쪼개버릴 거다.”
“그런 종족이 살아 있다는 겁니까?”
“그래. 신과 대적한 자들을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신들의 눈길조차 닿지 못하는 차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신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를 찾았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그렇다면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오랜 시간을 곱씹으며 불타던 유일한 생존자는 어떤 준비를 해놓았을지.
“···지금 가면 됩니까?”
“급하군. 뭐, 상관은 없다. 사실 이것 때문에 급하게 돌아와서 널 부른 것이기도 하니까.”
“···어? 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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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1. 증명 >
하지만 모든 건 상대적이다. 평범한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지만 우주의 축복을 받은 차원용에게도,
김우진에게도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기도 했다.
“······?”
차원과 차원은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광활한 우주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갈래들이 존재한다.
물론 차원과 차원을 잇는 길인만큼 일반적인 길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관념적인 형태인지라 피조물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김우진은 단순한 피조물을 넘어 권능을 손에 넣었고 알베니우스가 얼마나 수많은 차원들을 헤집고 다닌지
눈치 챘다.
수많은 차원들을 돌아다니고, 확인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런 상태의 차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멸망한 차원이군요.”
“그래. 다가오는 종말을 막아내지 못하고 끝끝내 멸망한 차원이지. 아르반도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었을
거야.”
신들은 이미 떠나버린 차원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멸망한 차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살리지 못한다. 그곳에는 오직 어둠의 파편들만이 꿈틀거리며 다음 종말을 위해 힘을 키울
뿐이다.
“이곳도 마찬가지야. 텔라스라 불리던 이곳은 신들의, 용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종말을 막지 못했다.
모든 생명이 말살됐고 차원은 빛을 잃었지.”
단순히 신의 이목을 피한다는 점에서는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멸망한 차원은 단순히 모든 생명체가 죽기만 한 게
아니다.
캬르르르-
카아아-
세상을 멸망시킨 어둠의 파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군세를 키워가는 종말의 구렁텅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물들에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물며 먹을 것도 없고 말입니다.”
“타이탄은 반신이야.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
“하지만 편안하게 숨어 있을 수는 없겠군요.”
자연스레 오래전의 일이 떠올렸다. 수만의 마물 군단과 마주했을 때. 숨 막히는 마기와 마물들이 내뱉는 광기,
살기는 전장의 공기를 턱턱 막히게 했다.
‘놈의 목은 내가 베겠다.’
‘딱히, 누가 베든 상관없는데.’
‘놈을 베고 반드시 돌아가겠다. 나에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 율리아님은 내게 자식이나 다름···.’
‘클리셰 멈춰! 죽고 싶다고 발악하는 거야, 뭐야?’
‘그게 무슨 소리지? 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하더군.’
“···공격하지 않는군요.”
“뭡니까? 이놈들?”
“말했잖아. 싸울 필요가 없다고.”
차원용의 말을 알아듣고 비켜주는 마물이라니? 알베니우스의 공이 아니다. 이건 김우진의 추측대로 저들의 본능을
억압하는 더 상위의 존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습지만 백신전이 빛이라는 거, 그 대척점에 선다는 것.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정도?”
“어둠이 백신전처럼 집단을 형성하고 무언가를 이룬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지?”
“예.”
“어둠은 그저 관념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존재?”
“어둠의 반대는 빛이나 빛은 백신전을 뜻하는 게 아니야. 아카식 레코드지.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아카식 레코드는 뚜렷한 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존재하며 세상에 빛을 실천하는 우주의 의지일 뿐이야.
어둠도 마찬가지.”
빛이 세상을 구하고 유지하려는 거대한 의지라면, 어둠 또한 세상을 멸망시키고 파괴하려는 거대한 의지다.
함께 균형을 맞춘다.
“여기서 의문이 있지. 빛은, 아카식 레코드는 백신전이라는 대리인을 선택해 세상을 구원한다. 그렇다면 어둠
또한 그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무엇일 것 같아?”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만.”
정답은 ‘그렇다’다.
때로는 마왕이, 때로는 광룡이, 때로는 악인이, 때로는 극단적인 종족주의자가, 때로는 타차원의 괴물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존재들을 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독할 정도로 짙은 마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
그게 종말의 시작이다.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혼자서는 도저히 백신전과 비벼볼 수가 없거든.”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마인이 되는 것을 자처했다. 마물의 군세를 틀어쥐고, 어둠의 사도가 되기로 했다.
“다 왔다.”
“보이지?”
“네놈인가.”
쿠그그그그그-
태산이 움직였다.
* * *
과거 신의 힘을 가진 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신의 힘을 가졌고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신들과 분란을
겪었다.
신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 거인, 티탄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들을 학살하여 분란의 씨앗을 완전히 즈려
밟았다.
쿠그그그-
거인이 움직인다.
단순하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려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 단순함에 대기가 찢어지고 거대한 충격이 엄습했다.
김우진이 주먹을 들어 마주 뻗었다.
─!
“과연.”
“미치긴 미쳤군요.”
사실 김우진 입장에서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전설속의 종족이라고 해도 신들과의 전쟁에서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붙어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
뒤섞인 화염과 마기가 화산처럼 퍼져나갔고 이전의 충격파를 버텨내던 마물들 일부가 쓸려나갔다.
“···전력을 다해야겠는데.”
“과연. 도마뱀 놈이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군.”
티탄이 산을 집어 들었다. 아니, 그건 산이 아니었다. 거인의 손길에 맞게 제작된, 산처럼 거대하고 묵직한
망치였다.
그대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기 직전, 한 자루의 검이 마중 나왔다.
───────!
“······!”
“···힘으로 나를?”
“저도 힘으로는 자신이 있거든요.”
“꽤 오래 살으셨다고 하고, 아군이 될지도 모르니 일단 예의는 차리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도마뱀의 말이 맞았구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폭사되는 마기에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격을 증명해라.”
“그걸 원한다면.”
김우진이 질주했다.
* * *
공간이 갈라졌다.
신들은 멸망한 차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매일 같이 새로운 종말이 일어나고 싸우는데 이미 끝나버린 곳에
미련을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그 순간이었다.
───────!
“이게 무···!”
───────────────
# < 062. 손 >
“충동질하는 건 여전하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만.”
“굳이 칼카르가 갈 필요 없는 일이다.”
“다른 신들을 믿을 수 없다고, 알베니우스를 직접 잡아와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한 건 칼카르다.”
“그렇게 부추긴 건 너도, 베리안.”
“결국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인 것을. 주신이라는 자가 아둔하게 자신의 성미를 이기지 못하니.”
“그 순리를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다. 칼카르는 다른 신들을 애증한다. 김우진에게 또 다른 신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니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일뿐.”
“베른과 드네르바를 미끼로 던지는 것에 동의한 건 다른 칼카르인가?”
“작은 피해로 더 큰 우환을 막는 거다.”
“농담이다. 나도 동의했으니 그걸 탓할 처지는 아니지.”
“어디 가는 거지?”
“남아 있을 이유가 있나?”
“없다.”
회의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
“김우진도 끝이다.”
무조건.
* * *
죽일 듯한 살기.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마기.
이게 얼마만일까.
자신보다 한참 부족한 하수들의 재롱을 보고 적당히 맞춰주는 게 아니라, 생사가 오가며 언제는 목을 물어 뜯거나
뜯길 수 있는 숨 막히는 곳.
──!
애꿎은 대지를 강타한 충격파가 등을 덮친다.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불꽃을 피어내자 거인과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진다.
“······!”
────!
불꽃과 마기가 뒤엉켰다. 단단하던 방패가 아주 잠깐 시간을 끌고 소멸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은 김우진이
몸을 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김우진은 어느새 거인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손으로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어정쩡한
자세.
빈틈투성이다.
────!
“간지럽다.”
콰아아앙, 김우진의 육신이 대지를 파고 들어갔다. 마나와 오러의 일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아리입니까?”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수많은 전투와 수라장을 헤쳐 나왔지만 저 정도로 단단한 육체는 본 적이 없었다.
“보여줄 건 방금 그게 끝인가?”
“도발을 잘못하는군요.”
똑같은 패턴이었다. 대지를 강타하는 망치, 폭풍처럼 일어나는 충격파, 저항하지 않고 나아가는 김우진, 마중
나오는 주먹.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검을 마주 뻗었다는 것이다.
──!
흡사 금강석을 때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마기와 화염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검날이 그대로 주먹을
파고들었다.
“크윽···?”
─────!
그것은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었다. 폭풍은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내며 태산과도 같은 거인마저 영향력에 넣었다.
─────!
“재미있는 광경이다···!”
“칼카르···.”
“왜 여기에?”
‘알베니우스···!’
설마 꼬리가 잡히다니.
신들의 능력을 고려해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알베니우스가 40 년 가까이 숨어 다닐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같은 불꽃이라고 한들, 그 순도와 질이 다르다. 모든 권능이 불꽃에 집중된 칼카스의 불꽃은 그야말로 신의
불꽃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놈의 불꽃은 다른 불꽃마저 불태우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모든 불꽃을 불태우고 먹어치우는 염화의 왕, 그것이
놈의 권능이다.
“김우진.”
“헌데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지?”
“내가 할 소리다. 도마뱀을 잡으러 왔더니 마기에 점철된 타이탄이 있질 않나, 김우진 네놈이 있질 않나.”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신의 이름으로 어둠에 몸을 맡긴 악마를 처단하고 백신전에 반기를 든 도마뱀을 잡아갈 생각이다. 네
목적이 무엇이든 무엇 하나 이룰 수 없을 거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대항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는다는 것과
같은.”
칼카르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최초의 신이자, 백신전의 주인이다. 네놈이 백신전의 신들을 여럿 상대해 봤다는 건 알지만 내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누가 보면 40 년 전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은 줄 알겠군.”
“신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감내였다. 허나, 두 번의 기회가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마라.”
“그러면서 신 둘을 미끼로 던져? 그 버러지 둘로는 안 된다는 걸 네가 정말 몰랐을까?”
“네게 대답해줄 이유는 없다. 마지막 경고다. 가라.”
“그렇다는데 말입니다.”
김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시선은 칼카르를 향하지 않았다. 그 뒤, 거대한 망치를 든 타이탄에게 물었다.
망치가 떨어졌다.
“네 놈···!”
“이런 짓을 하지.”
“계약을 잊었나!”
───────────────
# < 063. 불꽃 >
따로 따로 놓고 보면 그저 우연이다.
칼카르는 강하다. 그와 마주한 것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위기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네놈이 끝까지···!”
“망치를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데 그만 푹 쉬는 게 어때?”
“같잖은 소리!”
괴성과 함께 칼카르의 전신에서 화염이 폭사된다. 열기는 김우진의 염화를 잡아먹고 망치를 밀어낸다. 반동에
밀린 거인이 뒤로 넘어간다.
능히 신을 죽일 수 있는, 신의 대적자가.
“노오오오옴!”
─!
─!
막아냈음에도 폭발이 일어난다. 넘실거리는 화마가 김우진의 불꽃을 집어삼키며 영역을 넓힌다.
역시 상성이 나빠. 김우진이 급하게 두 발바닥에 불꽃을 터트린다. 한 순간에 수 킬로를 후퇴하며 자세를
다잡는다.
“어딜.”
───!
골프공을 후려치는 골프채처럼 경쾌한 스윙이 신을 후려친다. 칼카르의 몸이 통제를 잃고 하늘로 치솟는다.
“···뭡니까, 그 모습은?”
“타이탄은 자신의 신체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걱정 마라. 크기는 줄어들었어도 힘과 견고함은
그대로니.”
콰콰콰-
까앙!
주인의 덩치에 맞게 함께 줄어든 망치가 강제로 각도를 틀어낸다. 애꿎은 마물들이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신의
주먹이 거인을 후려친다. 거인의 발이 신을 강타한다.
그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불꽃을 배제했다. 그의 가장 큰 힘이 불꽃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불꽃만이 그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
그건 시작이었다.
김우진은 수 십, 수 백 개의 칼날을 제련하고 권능을 부여했다. 공간을 가르고 균열을 만들고 검을 찌른다.
공간을 비틀어 보호수단을 우회하는 공격. 꽤나 난해하고 격의 차이를 많이 타 평소라면 결코 통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개새끼가!”
─────!
신의 분노에 감응한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공간의 간섭을 불태우고 마왕이 된 거인을 튕겨낸다. 그리고
주인을 위한 길을 마련한다.
신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을 격한다. 김우진이 급하게 검을 휘두른다. 쩌엉, 주먹에 검이 부서진다.
권능의 불꽃을 두르면 버틸 수는 있다. 하지만 더 정순한 불꽃에 잡아먹혀 오히려 주인을 물게 된다.
콰앙, 거인의 망치가 연이어 신의 후방을 후려쳤지만 칼카스의 눈은 오로지 김우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다. 김우진.”
하지만 두리쉬마의 망치질을 맨 몸으로 받아낸 칼카스 상태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부서진 한 쪽 어깨는 꽤나
심각해 보였다.
“허튼 수작을···!”
그리고 그 위로.
“이 따위 것···!”
“너 이 개새끼가···!”
────!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차원을 뒤흔들었다. 갈라지고 찢겨나간 차원의 형태가 모조리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신은 살아 있었다.
모든 불꽃이 사라졌음에도.
가호가 사라졌음에도.
망치를 받아낸 팔이 완전히 소멸하고 머리가 일부 뭉개졌음에도.
오러의 검이 신의 목을 꿰뚫었다.
그 또한 초월자였기에.
“쿨럭···너···!”
“신도 피를 흘리는군.”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그래, 내 이름이 김우진인 건 나도 잘 알아.”
“네 힘은 내가 잘 써주마.”
“개···!”
“두리쉬마님! 여기입니다! 죽기 전에 빨리!”
그리고.
“아.”
신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그림자가 졌다.
────!
* * *
“···죽겠네, 진짜.”
“···마침내.”
주신, 무려 주신이다.
이미 메말라버린 눈에서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허나, 마왕의 마기에 감응한 세계가 요동쳤다.
“뭐, 뭡니까?”
“당황할 것 없다. 용사들과 같으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사도인 두리쉬마는 빛의 사도인 칼카르를 죽이고 막대한 업을 쌓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그의 새로운
힘이 되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아니었으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거다.”
“간단합니다.”
포식이다.
───────────────
# < 064. 열매 >
콰르르르릉-
“여기도 이제 끝이군.”
두리쉬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과 마왕의 격전 덕분에 반쯤 갈라지고 쪼개졌던 차원은 완전 넝마가 되었다.
“어떻게 합니까?”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두리쉬마는 신들의 눈을 피해 변방의 차원만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변방의 차원들은 전부 종말을 맞이하고 마지막
운명을 기다리는 곳들이었다.
“문제는 이 다음이군.”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일반 신이 죽어도 난리가 나는 게 백신전인데 주신이 차원 외곽에 들렀다가 실종되었다.
대부분의 차원의 장벽을 관리하는 건 백신전이지만 차원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는 그것에 간섭할 수 있다.
릴리가 김우진이 연옥을 나섰다는 것을 숨겨주었고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데이드람에 방문하고 나왔다는 것을
숨겼다.
소멸에 가까운 종말 차원의 방벽은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졌으며 신들의 관심 밖이다. 즉, 누구도 김우진이 연옥에
있지 않다는 걸 모른다.
만약 칼카르의 실종에 백신전에서 변방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들키고 만다.
“차원은 많다. 당연히 용사들에게 구해진 만큼, 멸망한 차원도 많다. 백신전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모든 차원을 확인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말된 차원은 생겨나고 있다. 도망칠 곳이 무수히 많으니 두리쉬마는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자의로 어둠의 사도가 되어 차원을 멸망시켜야 하는 숙명을 얻었으나 노리는 건 단 하나다.”
백신전이라는 차원.
솔직히 지금도 좀 거북하긴 하다. 주신이 괜히 주신이 아닌지 요동치려는 기운을 억제하는 것도 꽤나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거다.
“이곳이 멀쩡한 차원이고, 신들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면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을 텐데.”
“연옥에 오면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허나, 지금은 그만 가봐야 할 때다.”
두리쉬마가 가볍게 망치를 휘둘러 공간을 찢었다. 거대한 균열과 함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따라와라!”
* * *
─!
검격이 코앞까지 다가온 줄기의 진로를 비틀었다. 간신히 자세를 다잡으니 수 백 개의 나뭇잎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율리아가 호흡을 가다듬고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그녀의 편이니, 부드럽게 나뭇잎들을 비껴내며 전진했다.
“파하아아···!”
- 수고했구나.
“별 말씀을요.”
언제나 자연의 도움을 받아왔던 하이엘프에게는 더 없이 가혹한 전투였으나 해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녀가 만약 신에 필적하는 강자였다면 김우진이 그녀를 놓고 갔을까? 아니다. 그녀가 약하기에 두고 간 거다.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잖아요.”
- 이제는 때가 되었어.
하지만 그만큼 열매는 농익게 되고 마나는 보다 풍부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은
여파로 우주의 힘이 깃든다.
허나, 그 바탕이 탄탄하고 재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용사로서 신의 힘을 다루어 봤기에 신의 힘에도
익숙하다.
- 그래, 그랬지.
- 아니.
- 그 아이는 정말 괴물이란다.
“···같이 설 수 있을 거라면서요?”
- 그래서 안 먹을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
# < 065. 첩자 >
“······?”
“···어?”
데이드람에 다시 복귀했을 때, 김우진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율리아였다.
“너, 무슨 일이 있었냐?”
“그러는 소장님이야 말로 뭐죠?”
외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내부는 달랐다. 마나가 보다 정순해지고 풍부해졌으며 깊고 방대해졌다.
“···뭘 한 거야?”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먹었어요.”
“만 년이 지난 세계수의 열매?”
“뭘 해요?”
“저 양반이 꼬리를 잡혀서 신이 쫓아왔거든. 그래서 죽였어.”
“어···. 그렇군요.”
물론 김우진이 신살자라 불리며 이미 신을 죽인 경험이 있고, 이번에도 새로운 신을 포로로 잡아왔다는 것을 안다.
“그런 것 같더군.”
타이탄과 마물의 군단은 확실히 큰 힘이었다. 특히, 주신인 칼카르를 죽여 버렸으니 백신전의 전력이 감소한
시점에서 더 크게 작용한다.
주신이 하나 죽었다고 해도 백신전은 여전히 백신전이다. 가능하면 최대한 전력을 깎아먹고 판을 조율해야만
승산이 있다.
“그냥 직접 하면 되지 않습니까?”
- 가능은 하지만 시간이 몇 배는 걸리겠지.
- 너도 칼카르를 흡수하고 아직 완전히 갈무리 하지 못했잖니? 만약 여기서 함께 완전히 흡수하고 가는 게
어떻겠니?
- 만약 칼카르가 실종된 것을 문제로 연옥에 다시 감찰관이 오면 조금 곤란하잖아?
그리고 알베니우스는 김우진, 그와 친분이 있다. 만약 칼카르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가 나섰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좋습니다.”
* * *
“하암.”
연옥의 아침이 밝았다. 난쟁이들을 이끄는 난쟁이 중에 난쟁이, 데르카인은 소지가 가져다주는 통닭을 뜯었다.
풍부한 육즙과 기름기가 절로 맥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맥주는 없나?”
“술은 안 되는 거 아시잖습니까.”
“고작 맥주 한 잔에 취하지는 않지 않나. 소장도 없는데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랬다가 걸리면 저 큰 일 납니다.”
“자네, 정말 이럴 건가? 내가 만들어준 게 몇 개인데!”
“끄응, 알겠습니다. 딱 한 캔입니다. 들키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말게.”
치익, 소지가 가져온 시원한 흑맥주와 통닭을 함께 흡입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계약이라는 거 때문이겠지.
요즘의 분위기나 긴장감을 고려하면 어쩌면 백신전과 김우진이 충돌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야 수백년간 나를 이곳에 가둔 머저리들에게 원한이 생겨서 있다지만 자네는 아니지 않나? 여기 계속 있다가는
진짜 위험해질 거네.”
“충고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뭐, 마음대로 하게. 자네가 있는 편이 나야 좋기는 하지. 이제는 자네가 없을 때의 식사는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야.”
잡담과 식사를 마친 후, 데르카인은 출역을 나갔다. 하지만 출역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땅땅땅-
“데르카인님.”
“강민식인가?”
“예.”
“찾았나?”
“찾았습니다.”
“누군가?”
“놀라지 마십시오. 무려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습니다.”
“카를로를 포함해서?”
“제외하고.”
“미쳤군. 탈옥하라고 밀어 넣은 놈들이 한 놈이 아니라 네 놈이나 된다고?”
300 년이 넘게 연옥에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강민식 이전에는 의도적으로 탈옥수를
투입한 경우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하다. 적어도 죄수들은 신에게 한 번 저항을 했던 이들이나 집행자들은 충실한 신들의
개니까.
하지만 대우가 극과 극이었다. 그들을 대하는 교도관들의 태도가 조금 유해지긴 했지만 죄수와 교도관, 이 말로
모든 게 정리가 가능하다.
“가게.”
“예.”
“앞으로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주의해주시길.”
“명심하지.”
* * *
김우진은 이곳이 자신의 영역이라고 한 적이 없었고 디아네 또한 연옥의 마나 농도가 짙은 이유가 교차 차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교도관의 지도를 따라 축사장으로 출역을 나가는 죄수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하체가 말인 죄수.
그리고는 곧 깨달았다.
“···페트로 코페르크?”
어째서 털과 머리카락의 색이 바뀌었는지, 기운을 감췄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얼굴 자체와 기운의 느낌은 그녀가
알던 것과 같았다.
───────────────
# < 066. 선택 >
“뭐라고?”
잘못 들었나. 김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예, 그렇습니다.
- 잡지 않는 겁니까?
“자기 주인한테 연락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기만 해라. 그놈만 특별히 감시가 더해지면 의심을 살 테니 다른
죄수들 모두.”
지금은 신들의 모든 계획들이 어그러진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들은 모르지만 기둥 하나가 뽑힌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집어넣었다고 여겨지는 첩자를 굳이 색출해 경계심을 더 올리기 보다는 당장은 두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쪽이 낫다.
- 예.
카를로를 잡았지만 아직 첩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김우진이 차원을 나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예 독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었다.
“큰 문제는 없겠지?”
- 예, 물론입니다.
- 예.
‘무슨 수를 쓴거지?’
기운을 온전하게 흡수하는데 집중하고 세계수의 도움을 받다보니 정도 이상의 힘을 사용할 때가 아니면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율리아는 더했다. 애초에 하이엘프인 그녀에게 세계수의 열매는 더 없이 적합한 영약이었고 세계수의 조력까지
있으니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열매의 기운을 완벽하게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제대로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닌, 세계수의 열매로부터 우주의 힘을 조금 공급받은 것이기에
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집행자의 최상위권 정도는 되었다.
────!
데이드람의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미중유의 힘은 자연스레 방벽을 통과해 일직선으로 내리 꽂혔다.
“···어?”
- 어?
“어···?”
신들조차 경계하는 연옥의 소장도, 만 년을 넘게 살아온 세계수도, 신들에 의해 추살령이 내려진 차원용도. 그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비어버린 공석은.
채워야만 하니까.
* * *
탈옥 사태를 기점으로 죄수들과 김우진의 관계는 변했고 그건 부소장이나 교도관들과의 관계도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부터 제대로 된 죄수가 아니었고 이제는 완전한 협력자로 돌아섰는데 계속해서 죄수로 둘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교도관으로 들어온 집행자들은 애초에 소장님의 적이었던 자들이 아닙니까. 저들보다는
저희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듣자면 이것 또한 맞다. 하지만 부소장은 소장님이 어째서 그러한 결정을 하셨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김우진은 강자를 아꼈다. 그리고 죄수들 중에서도 특별한 율리아 카르센, 시에나 올름, 데르카인 알베트, 타르칸
톨리스를 제외하면 객관적으로 집행자들보다 강한 이들은 없었다.
죄수들은 신들의 인계를 받아 죄수로 등록이 되어 있다. 그들의 신분을 김우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중에 독방에서 나왔을 때, 그리고 다른 죄수들과 교류 했을 때, 강민식이 그하고만 접촉을 안 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놈은 주신의 집행자다. 강민식이 베른에 의한 첩자라는 것을 알 터. 강민식의 접촉을 피하지는 않을 거다.’
소장님이 없을 때, 연옥의 총책임자는 그다.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문제가 생긴다면 조용히 처리하는 게
그의 사명.
* * *
백신전. 누군가는 신계라고 불리는 그곳은 모든 차원들 중, 가장 우주의 중심에 가까운 상위 차원이다.
그리고 가장 우주의 중심에 가깝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우주의 기록, 아카식 레코드와 가장 근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카식 레코드. 세상은 빛, 아카식 레코드와 어둠에 의해서 균형을 맞추어 간다.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는 세계의 의지이며 백신전의 신들은 그 의지를 받들어 우주의 균형을 수호한다.
항상 살피며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려고 애쓴다.
쩌적, 균열이 열렸다. 백신전의 신들에게 주신이라 불리는 알비츠가 조심스레 우주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아카식 레코드여.”
그가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기 시작했다. 방대한 우주의 도서관은 주신이라 자부하는 그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단편적인, 파편적인 부분들을 얻을 수 있을 경우도 있었다.
“···이건?”
- 새로운 신.
“···새로운 신이 탄생?”
백신전이 백신전인 이유는 신이 백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이 백명뿐인 것은 아카식 레코드가 그 이상의
신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고.
“···신이 한 명 죽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높은 확률로···
“···다른 신이겠지.”
───────────────
# < 067. 새로운 신 >
그것은.
신의 힘이었다.
우주의 힘이었다.
‘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샘솟았다. 그녀는 그것을 처음 보았으나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그 의지가 전해졌다.
‘힘을 받아들이겠냐고요?’
‘신.’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아.”
어느새 우주는 사라져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차원용과 어머니 나무의 정령, 그리고 감옥의
소장만이 있을 뿐.
하지만 온 몸에 넘쳐나는 고양감과 전능감, 우주의 힘, 그리고 보다 정순해진, 단단해진 육신은 방금의 경험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했다.
“···어.”
“···제가 신이 된 건가요?”
* * *
“······.”
“······.”
“······.”
“칼카르가 죽었다.”
“···주신께서.”
“···말도 안 됩니다! 베른, 베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같은 신이라고 한들 주신과 말단의 신은 그 의미가 다르다. 그들은 차라리 베른이 죽은 것이기를 바랐다.
신이 죽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지만 주신은 그중에서도 의미가 남달랐다. 최초의 3 신. 백신전의 시초.
그들의 격은 일반적인 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 중의 신이었다.
그런 주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들의 관심과 관리에서 멀어지고 마기가 가득하게 되니 자연스레 마물의 군단들이 똬리를 튼 험지.
“옳은 소리다.”
그 또한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안 시점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변방의 차원들은 시간이 지나 차차 소멸된다. 칼카르에게 위치를 발각당한 알베니우스가 여러 변방의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도주극을 찍다가 우연찮게 소멸 직전의 차원으로 들어가 함께 소멸했을 가능성.”
“알베니우스가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위험한 변방 차원으로 갈 이유가 없다. 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며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대응하기 위해 마물들의 손을 잡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둠과 마는 백신전에 대적하는 절대적인 세력이다. 그들은 어둠의 의지에 이끌린 파편으로 백신전처럼 이렇다 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베니우스가 복수심에 미쳐 자의적으로 어둠에 귀의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것이 두 번째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았다. 왜냐하면 김우진과 맺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 번째.
신들의 반박에 알비츠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울려퍼지는 소리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애초에 가정을 생각해낸 당사자인 알비츠조차 스스로 뱉으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베리안, 네 생각은?”
“네 가정들이 그나마 현실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그나마지만. 어이가 없군.”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데 적합한가.
신의 힘을 받아들일만큼 강한가.
그걸 감안해 신들은 집행자를 기른다. 만약에 대비해 새로운 신이 탄생할 때, 통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쉽지 않겠군.”
“어쩌면 쉬울 수도 있다.”
“김우진인가.”
설사 김우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김우진의 감옥에 존재하는 죄수들 중, 규격외의 존재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 중
하나가 신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신들은 오만했다. 그래서 계약에 맹점을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알비츠의 눈이 가라앉았다.
“감찰관으로는 내가 직접 가겠다.”
그가 선언했다.
* * *
씨부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백신전의 백은 신들이 아닌 아카식 레코드가 정한 수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데 백 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아카식 레코드라고 할지라도 신들을 만드는 건 백 명이 한계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백신전은
항상 정원을 유지했다.
주신 칼카르가 죽어버린 이상, 하나의 공석이 생겼고 아카식 레코드가 인원을 충원시키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게 하필 율리아라니.
“이건 신들의,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를 아는 모두의 짐작이지만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지. 아카식
레코드는 공석이 생기면 피조물들 중 가장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를 다음 신으로 선정해.”
“신들이 집행자를 굴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수족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도 있다.”
“그런데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먹고 어머니 나무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흡수한 제가 지금 존재하는 어떤
집행자들보다 강하다는 거군요?”
“그렇게 되겠지.”
“그런가요?”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은 강제가 아니라 선택이다. 다만, 지금까지 그걸 거부한 이들이 오직 김우진과 알베니우스
뿐이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빨리 돌아가야겠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대가로 다른 걸 내줘야겠지만.”
- 음, 혹시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그 방법이니?
- 불쌍한 아이.
- 네 권속이 되었다는 집행자들은 좋아하겠구나.
- 어쩌면 릴리도.
“시간은?”
“8 시 55 분입니다.”
“적당하군.”
계약에 의거하여 백신전에서 연옥으로 죄수나 감찰관을 내려보내려면 반드시 하루 전에 통보를 해야 한다.
“···엇, 충성!”
“비켜라.”
“예!”
문이 열렸다.
정문에서부터 건물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정원은 꽤나 넓었으나 베리안과 그의 집행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다.
···역시.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빨리 왔음에도 미흡한 부분은 없었다. 허나, 베리안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 가벼운
수작에도 대응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거의 최상위 집행자들에게 맞먹는 수준에 혹시나 새로운 신이 있나 확인했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베리안이 천천히 감옥을 거닐기 시작했다. 김우진과 교도관들이, 그리고 베리안이 이끌고온 집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느껴지는 죄수들의 기운에 베리안이 조용히 기감을 퍼트렸다. 배식구를 열고 그 내부의 죄수들을 확인했다.
하이엘프 율리아 카르센, 엘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에나 올름,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 그리고 차원의 명장,
데르카인 알베트까지.
아, 그리고 하나 묻겠다만.
감찰이 끝났다.
* * *
어떻게 세계수를 얻었고 심었는지는 모른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김우진이라면 어떤 수라도 냈겠지.
마나의 농도가 무척이나 짙은 교차 차원의 특성. 그렇기에 세계수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빠르게 발아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런 놈에게 김우진을 상대하라고 맡겨 놓았으니 지금의 결과는 어찌 보면 예정된 미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허면···.”
“몰랐으면 모르되, 알았는데 가만히 둘 수 있나.”
“가능하시겠습···!”
“네 신을 의심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공식적으로 세계수를 뽑을 권한은 없다. 연옥을 어떻게 가꾸든, 그건 우진의 자율이자 권한이다. 세계수도 그저
나무 한 그루일 뿐이라고 우기면 백신전에서는 간섭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전해라.”
* * *
“속았군.”
- 삐.
- 삐이.
“···다행이네요.”
초췌한 안색의 율리아가 힘겹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세계수의 잎을 우린 차를
마셨다.
“괜찮나?”
“죽을 것 같아요.”
힘들 법도 했다.
이미 시험해 보았다. 하늘구름은 일반적인 신이라면 모를까 김우진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김우진이 알아챈다면,
주신도 알아챈다.
세계수가 드러나는 것은 최대한 늦추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틀어진 이상, 세계수의 존재 자체를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있는 곳에서 세계수를 부수려면 적어도 그에 준하는 강자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할 거야.”
“나쁘지 않은데.”
“그러다 백신전이 화나서 다 보내버리면요?”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
# < 069. 무한동력 >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에 의거하여 백신전은 공식적으로 연옥의 정원을 어떻게 꾸미든 관여할 권리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을 뽑기 위해 김우진을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는 건,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이며 계약
위반은 곧 심연행을 뜻한다.
감히 신들을 상대로 머리를 굴려 계약의 맹점을 노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김우진이었기
그는 빈틈을 노려 꽤나 많은 이득을 보았다.
첫 번째, 죄수들 속에 심어 놓은 첩자를 이용해 세계수를 불태운다. 그리고 그들 개인의 일탈로 만든다.
두 번째, 마물들을 연옥으로 유도해 거대한 혼란을 야기한다. 지난 번 카를로의 탈옥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 삐삐삐!
“노리신 건가요?”
“당연하지. 애초에 네 힘을 릴리로 다 빼먹기만 하면 되는 걸 굳이 집행자들에게 준 이유가 그건데.”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스스로를 주신이라 칭하는 사이비마저 손 위에서 가지고 노는 그 위대함! 이 디아네,
다시 한 번 감동했습니다.”
세계수를 들키지 않으려고 했던 건, 지금의 가정들처럼 신들이 작정하고 공세를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다.
물론 백신전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결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백신전은 모른다. 저들이 김우진의 뒷배가
되었다는 것을.
“방법은 있나?”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시나요? 소장님께서 대안이 없으실 리가 없잖아요.”
“있으니까 우리를 부른 거 아니겠어?”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소장님께서는···.”
“디아네, 좀 닥쳐.”
“네, 명하신대로.”
신들이 사용할 가장 유력한 방법은 마물들을 연옥으로 유도하는 거다. 하지만 그건 두리쉬마처럼 마물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유도하는 것이기에 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잠시 뜸을 들인 김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삐!
“어우, 귀여워.”
“으엑, 어머니 나무님, 체통을 좀 지켜주세요.”
- 삐이이이, 삐이.
율리아가 어깨를 으쓱이자 파랑새가 부리로 머리를 쪼았다. 율리아가 아악, 죄송해요!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부여잡고 쭈그러졌다.
“···세계수를 핵으로.”
- ···삐삐삐?
- 삐이이!
“안 돼, 안 돼. 릴리. 낙장불입이라는 말을 알아?”
- 삐삐!
“안 돼, 못 물러줘. 돌아가.”
* * *
디아네가 켄타우로스의 정체를 파악한 만큼, 베리안도 디아네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디아네가 켄타우로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는 것 또한 짐작할 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처리해야지.”
하지만 문제는 죄수의 신분으로 정식으로 연옥에 들어온 이상, 자진 출소를 선언하지 않는 이상 죽여버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사지를 끊어버리고 숨만 붙여놓은 채 내장을 반쯤 녹여버릴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괜히 두리쉬마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으니 위험부담이 크다면 무리겠지만 그렇지 않은 선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
* *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이시여!”
“위험합니다!”
집행자들의 만류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를 빨아들이려는 어둠의 인력에 저항하며 간신히 빛을 수습했다.
그리고 그 미약한 끈은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평범한 이라면 결코 알아볼 수 없지만 주신 바로 아래라는 10
명의 신 중 하나였기에 찾아낼 수 있었다.
무려 주신이다. 그분께서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기셨을지언정, 누군가 그 기운을 따라해 함정을 팠으리라는 가정은
있을 수 없었다.
“아, 이해했습니다.”
“흔적을 쫓는다. 주신께서 분명히 무언가를 남겨주셨을 것이다.”
델라푸스는 십여개의 종말 차원들을 헤쳐 나갔다. 마나가 고갈되고 강인한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종말 차원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으나 그뿐이었다.
“여기다.”
지금까지 지내온 종말 차원들보다 마기가 더욱 진한, 차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진한 불길함이 엄습하는 곳이었다.
“···김우진?”
“델라푸스?”
“네놈이 왜 여기에···?”
“그건 내가 할 소린데?”
“그렇구나. 역시 네놈이 주신의 죽음에 관여를···!”
“아하, 왜 왔는지 알겠네. 근데 혼자야?”
“뭐?”
“그렇답니다!”
“여럿이다만.”
“원래 신들을 셀 때는 집행자들은 카운트하지 않습니다. 도구로 여기거든요.”
“그렇군. 역시 신이라는 것들은 모조리 말살시켜야한다.”
“이게 무슨···!”
거대한 망치가.
떨어졌다.
“내게 감사해라.”
“무···!”
──────!
───────────────
# < 070. 더 오래가는 배터리 >
“더 강해지셨군요.”
“너도 마찬가지다.”
마로서 빛을 죽여 업을 쌓는 두리쉬마.
그리고 신의 힘을 흡수하는 김우진.
두리쉬마가 눈을 치켜떴다.
광신도의 태도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그녀의 능력은 집행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나름 잘 키운다면 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신은 신으로 막는다.
혹은 그처럼 신을 먹어버릴 수 있거나, 두리쉬마처럼 어둠의 사도가 되면 되지만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쉽지 않다.
“다섯, 다섯이라···.”
이야기가 길어졌다.
* * *
- 삐삐!
- 삐!
릴리가 기쁘게 날개를 흔들었다. 김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엘프들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던 어머니 나무의 모습이 아니야. 신을 배터리 취급하다니. 대체 어디서 또 잡아온
거야? 저래도 괜찮은 거야?”
“저도 마찬가지에요. 다 소장님 때문이에요. 소장님이 어머니 나무를 이상하게 물들였어요.”
“평소 소장의 모습과 조금 닮긴 했지만 단순히 소장의 행동만으로 저렇게 역변하는 게 가능한 걸까?”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 세계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하이엘프잖아.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저 때문이라는 건가요? 저는 억울해요! 제가 저렇게 탐욕스러울 리가 없잖···악악, 어머니 나무님! 릴리님!
그만, 그만!”
- 삐삐삐.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설계도를 제작 중이고 어머니 나무 근처로 재료들을 가져다 놓고 있단다.”
“영약은요?”
“영약? 얼마 전에 보내고, 어머니 나무께 드린 것 제외하면 다섯 개란다.”
“생각보다 많네요?”
“어머니 나무께서 배터리, 아니 신을 봉인시킨 이후에 마나가 풍부해져서 성장이 빨라졌거든.”
“그건 호재네요. 그럼 일단 그거 다섯 개를 나눠서 먹죠.”
“갑자기?”
“신에게 대응하려면 모두 강해질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다섯 명이라면?”
“그나마 신들에게 대응할만한 떡잎이 보이는 사람들이죠. 시에나님, 데르카인님, 타르칸, 그리고 소지랑
디에나.”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이해가 되는데 소지가 싸우려고 할까? 애초에 그 녀석은 신에 대한 증오도,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없잖니?”
용사의 힘에도 큰 미련이 없다. 처음에는 가졌을지언정 이곳에서 얻는 게 많다고 여기는 거다.
“그 녀석은 쉽습니다.”
“어떻게?”
“백신전에는 신들만 먹는 특별한 것들이 다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건 중요치 않죠.”
“···율리아한테 실례를 했네. 율리아의 영향이 아니라 온전히 너의 영향이 맞는 것 같아.”
마물들 때문에 농사가 망했다고 하면 저들도 할 말은 없을 거다. 베리안이 식물원까지 들어와서 전부 확인하고 간
건 아니니까.
* * *
“강민식.”
“예, 소장님.”
어둠의 군단인 마물도 마찬가지. 마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기를 가진 생명체나 다름이 없다.
강민식은 균열 사태 때, 마물들의 독기를 흡수해 자신의 권능을 키웠다. 균열을 넘어 연옥으로 침입했던 마물들의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꽤나 큰 힘이 되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안 됩니까?”
강민식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서명해.”
“이건···.”
“나는 아직 너를 못 믿어. 근데 여기에 서명하면 최선을 다해서 네가 신위를 얻을 수 있게 해줄게.”
“···제가 신이 된다는 겁니까? 그런 게 가능합니까?”
“불가능을 이야기하지는 않아. 신이 된 율리아는 너도 봤을 텐데.”
“···내가 신.”
“물론 그 대가로 너는 백신전과의 전쟁에서 활약을 해줘야 해. 어떡할래?”
“잘 생각했어.”
계약서가 빛으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김우진에게, 일부는 강민식에게, 일부는 자신이 나온 뿌리인
아카식 레코드로.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 * *
“소장이 그랬다고?”
“예.”
“나쁘지는 않은 생각이긴 한데 과연 신들에게 통할지 모르겠군.”
“그건 신위를 얻으면 해결이 될 테니 우선 집행자들에게 통할 놈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신위? 신위가 누구 집 개 이름인가?”
“소장님이 그랬으니 제게 뭐라고 하셔도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소장이면 또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데르카인이 투덜거렸다.
빛과 어둠은 상극이다.
신과 마물도 상극이다.
“마력포네.”
“구스타프 열차포?”
“그건 또 뭔가.”
“아니, 마력포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보여서 말입니다.”
“크고 단단하고 파괴적이지.”
‘음.’
───────────────
# < 071. 반역자 >
“고맙군.”
“고마워요.”
“별말씀을.”
확실하게 소장의 편이 되어버린 죄수들은 더 이상 구속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죄수로서 죄수의 대우를 받지도
않는다.
이유는 안다. 다른 죄수들과 크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모를 만큼 둔하거나 멍청이는 아니었다.
‘신과의 전쟁이라.’
스케일이 너무 커지니 무어라 반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전부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좋은 게 좋은 거겠지.
* * *
“뿌리를 뽑아야합니다.”
“저희가 세계수와 협력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세상을 위하는 마음이 기껍기 때문이 아닙니까? 헌데 연옥에
씨앗을 뿌리다니요!”
세계수의 씨앗은 결코 가볍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체가 된 세계수가 작정하고 만들어내는 것. 우연히 연옥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해서 마물들을 이용해 연옥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다. 그 과정에서 세계수가 불타는 것쯤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되겠군요!”
“하지만 세계수는 부차적인 문제다.”
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못해도 천년이 걸리는 나무다. 아무리 김우진이 무슨 짓을 해서 단축시킨다고 해도 100
년은 걸릴 거다.
“연옥에는 신위를 가진 자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집행자들과 피조물들을 이용해 모든 차원들을 뒤지고 있지만
신위를 가진 자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알베니우스.”
“하지만 놈은 이미 신격을 얻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거부하리라고 장담하나?”
“그건···.”
아카식 레코드가 다시 한 번 권유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신격이 아니더라도 놈은 칼카르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
“알베니우스가···!”
“김우진과 그 도마뱀이 이미 접촉했군요.”
“더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베니우스를 찾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허나, 알베니우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신을 따르는 피조물들과 집행자들을 동원해 가능한 모든 차원을 수색중임에도 만족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
“···그런!”
“하지만 세계수들이 구태여 저희를 배신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애초에 우리와 단순한 협력 관계라고 여기는 자들이다.”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 대우와 자비도 이제는 끝이다. 알베니우스를 숨겨주는 세계수가 있다면, 김우진에게 씨앗을 넘긴
세계수가 있다면.
“가라.”
* * *
“생각보다 잘 풀린 거겠지?”
- 그런 거겠죠.
- 열 명이 뭐야. 백 명도 안 될 것 같던데.
“두리쉬마도 나보다는 김우진과 관계가 돈독해진 것 같고, 죄수들도, 율리아도 김우진을 중심으로 돌아가니 어쩔
수 없지.”
그는 분명히 강하다. 드래곤 중에서도 특별한 차원용이고 오랜 세월 살면서 높은 격을 쌓았다. 아카식 레코드에게
신위를 제안 받은 것이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백신전의 신들과 김우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백신전의 신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김우진을 찾았다. 그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두 신을 죽이고 자신을 도망치게 해주었던 그
절대자의 위엄을.
“다시 가봐야겠어.”
비록 신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신들과 싸울 때, 집행자들이 끼어들지 못하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였다.
- 멈춰.
“흔적을 쫓아왔다.”
- 흔적?
- 반역자?
- 우리가 반역자를 숨겨주고 있다고?
“그래.”
도인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허니, 세계수. 그대가 놈을 숨기지 않았다면 순순히 협조하도록. 그렇지 않다면 백신전에서 너희들에게
내려주던 자비는 끝이니.”
───────────────
# < 072. 연옥의 알베니우스 >
- 조자
“뭐?”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숲의 향기, 은은한 숲의 정기까지.
- 조자.
그런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중, 릴리의 입에서 평소처럼 ‘삐삐’가 아니라 부정확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나왔다.
“···릴리야, 방금 네가 말한 거니?”
- 삐.
“뭐라고 한 거야?”
- 조자.
“조자?”
- 조자.
- 조자니.
그때였다.
- 삐!
- 기재이.
- 기재이.
“꺄아아악! 이건 꿈이야!”
- 조자, 여라.
“소장님한테 연락이 왔다고요?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이신가요? 어머니 나무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거기서부터는 김우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다. 실시간으로 굳어가는
율리아의 얼굴과 눈빛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신이 차원을 방문했대요. 반역자를 찾는···.”
“나 좀 숨겨줘.”
알베니우스였다.
* * *
“드세요.”
“고마워.”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숨겨주었다. 덕분에 놈의 이목을 피했고 다행히 물러갔지.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장기적으로 몸을 숨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놈들이 작정을 했어.”
오랜세월 이어져온 존중을 깨트리고 들이닥칠 정도라면, 저들이 세계수와 알베니우스의 유착을 눈치 챘다고 봐도
무방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신이란 게 단순히 운이 좋다고 잡을 수 있는 건 아닌데.”
“설명하자면 깁니다.”
“그럼 나중에 듣지. 잠깐 연옥 좀 구경하고 있어도 되겠지?”
“괜히 사고치지 마십쇼. 신들이 언제 수작을 부려올지 모르니까 더욱 더.”
“넌 누굴 사고뭉치로 아는 거냐. 누가 보면 내 보모인 줄 알겠어. 내가 너보다 수백배는 더 오래 살았다.”
“사고뭉치지.”
당시 차원용은 신들의 눈을 피해 여러 차원을 도망치고 있었다. 우연히 김우진과 만났고 신들의 이면과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알베니우스가 있으니 은밀하게 신들의 권역을 공격해 신들을 납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차원용인 그의 권능은 공간과 차원에 한정하면 주신 이상이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차원과 차원을 은밀히
오가는데 알베니우스보다 능숙한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잠깐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기회인데?”
* * *
“알베니우스는 어떤 분인가?”
“음, 그냥 알베니우스님인데요.”
“드래곤다운 위엄이 있다거나, 탐욕이 많다거나 하는 건?”
“딱히 위엄 같은 건 없어요.”
“드래곤이?”
“드래곤보다는 친구 같다고 할까요···?”
“그래, 옳은 소리다.”
“당신이 알베니우스입니까?”
“맞다. 너는 드워프로군.”
“예. 그렇습니다.”
“연옥에 갇힌 최장수 죄수가 드워프라더니. 너인가 보군.”
“맞습니다. 300 년을 갇혀 있었지요.”
“드워프에게 300 년은···.”
“차원용이 나타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추릅, 베르너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섬뜩한 시선에 알베니우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죠? 방금 무슨 일이···?”
“드래곤을 잡아서 조리해 먹었다더니 진짜였나.”
“미식에 미친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궁금하긴 하군.”
“하물며 소장은 신도 때려잡는 괴물이지. 신들과 대적한 계획을 짜고 소장과 친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뿐,
차원용이라는 이름이 주는 대단함은 딱히 없네.”
데르카인이 혀를 찼다.
* * *
“저게 차원룡.”
새로운 신격의 탄생에 대비해 제거해야 할 종족 중 하나. 아니,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거 종족 중 하나.
그렇다니 다 이해가 갔다. 소장께서 보살펴 주시니 가짜들이 기를 쓰고 발악을 해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신이라.”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영약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차원용과 추격전을 벌이는 소지라는 자가
준 것이었다.
소장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신으로···!”
베른은 오히려 그녀를 경계했었다. 아낄지언정, 신격을 얻어 자신의 경쟁자가 될까, 적당한 선을 지켰었다.
“신이시여.”
그리고 그 이후에.
“당신의 곁에서 새로운 백신전을 만들겠나이다.”
그녀는 확신했다.
그녀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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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73. 순리 >
신의 힘이란, 무엇일까.
용사의 힘? 우주의 힘?
율리아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단순한 용사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샘솟는 힘에 전능감이 느껴진다.
“저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뭐를?”
“소장 나와!”
알베니우스가 억울한 표정으로 침몰했다. 율리아는 검을 뽑고 다부진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김우진이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
“네, 소장님.”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맞아요. 신격을 훈련하는데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럴 듯한 추론이야.”
“상대를 잘못 고른 것만 빼면.”
─!
쾅쾅쾅!
몇 번의 충돌, 율리아는 속절없이 밀리기만 했다. 신의 힘을 끌어올려도 뜨거운 열기에 모조리 녹아내렸다.
대련은 금방 끝이 났다.
“나쁘지 않아.”
“전력을 다했는데 옷소매 조금···. 아니죠. 좋게 생각할게요. 원래는 머리카락도 못 건드릴 수준인데
건드렸잖아요.”
“긍정적인 마인드야.”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일단 실전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앞으로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씩 대련을 하는 거로 하지.”
“···어, 세 번이나요?”
“상황이 상황이니까.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아.”
“저 지금 완전 탈진인데? 도저히 세 번은 무리인데요?”
“마른 오징어도 쥐어짜면 즙이 나와.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그런 이상한 근성론은 세상을 좀 먹어요! 저를 조금 더 살살 대해주세요!”
“그럼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지.”
“예?”
율리아가 눈을 껌뻑였다.
율리아가 좌절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 * *
‘그럼 끝이야!’
계약서대로라면 굳이 김우진의 편에서 백신전을 무너트리지 않아도 된다. 김우진이 백신전에 의해 죽어도 계약은
아무런 문제없이 종료되니.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런 명령이 내려오지 않고 있기에, 김우진과의 작은 접점조차 없으니
새로운 접점이 만들어지기 전에 김우진이 죽는 건.
“드네르바님.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잠깐만 기다려.”
우우웅-
“···김우진?”
하필 이 타이밍에?
- 연락은 처음이군.
* * *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었다.
“저놈들은 마물들을 이용해 세계수를 습격할 거고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저놈들도 알고 있겠죠.”
그런 상황에서 마물들이 조금의 변수를 일으켜봐야 두리쉬마가 개입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저들이 알 도리가 없다.
작정하고 김우진의 가드를 뚫어내고 세계수를 뽑으려고 할 거다. 그렇게 모인 마물들이 적을까? 그 수준이 낮을까?
그들이 분산되어 신의 권역을, 사방으로 흩어진 신들을 습격하는 동안 우연한 사고로 신 한두 명 쯤은 사라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의심을 산다. 신이 자의적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할리는 없으니 백신전은 누군가 개입했다고
여길 거다.
“높은 확률로 너를 찝을 거고, 그럼에도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어둠의 사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둠의 사도가 지성을 가진 존재인 것은, 두리쉬마인 것은 모르겠지만 특별히 강한 마물이 등장했다고는 여길 수
있다. 최대한 빨리 토벌해야 한다고도.
“어차피 들킬 거, 감수하고 이쪽에 적극 협조해주기로 했습니다. 저쪽의 신을 빼앗아 이쪽의 신으로 만드는 것에
꽤나 흥미를 느끼셨다고 할까요?”
“···그렇군. 그래도 아직 하나가 남았어.”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알리바이입니다.”
부소장이다.
“부소장?”
“도플갱어입니다.”
“···도플갱어였다고?”
“말했잖습니까. 저도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이론상으로는 신들도 가능한데 일단은 어디까지 속일 수
있나 확인해 볼 기회입니다.”
어쨌든.
* * *
허나, 그들이 자신의 차원 내에서 신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되고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순수한 협력자가 노련한 정치꾼이 되고 감히 백신전을 상대로 거래를 제안한다. 우호적으로 대하니 머리를 밟고
기어오르려 한다.
단순히 종말을 막는데 협조하는 차원이 아니다. 세계수는 차원의 마나의 농도가 짙고 순수하게 만들며 이는
태생적으로 강한 피조물들이 나올 수 있게 한다.
아무리 세계수가 강하다고 한들 결국 한 차원에 하나뿐이며 움직일 수도 없다. 백신전이 작정하면 세계수를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었다.
“알비츠는 어디 있지?”
“마물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저 녀석도 작정했군.”
“김우진이 그만큼 문제를 일으켰다는 뜻이겠지요.”
“옳은 소리다. 놈은 지나치게 설쳤어.”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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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74. 시작 >
“무기들은 이미 만들고 있네. 세계수를 중심으로 연결하여 에너지를 공급하기만 하면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고.”
“알아서 하세요. 제가 뭐, 본다고 알겠습니까.”
“뭐,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릴리의 말로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하니. 최대한 채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좋군. 아주 좋아.”
“네. 면담은 여기까지하죠. 시간이 되서.”
“알겠네, 최대한 자네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보도록 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르카인이 나갔다.
“딱 됐네.”
신, 율리아 카르센.
엘프, 시에나 올름.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
인간, 강민식.
광신도, 디아네 디트린.
소지, 베르너 레트만까지.
“모두 다 모였군.”
“율리아가 네가 훈련을 시켜준다고 해서 모이긴 했는데 무슨 훈련이니?”
“응? 율리아가 말 안했습니까?”
“안했는데.”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소장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싸우는 겁니까? 그럼 환영입니다.”
“정확해.”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기겁하고, 누군가는 절망하며, 누군가는 투지를 끌어올리고, 누군가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누군가는 신앙을 시험받았다.
그리고 김우진은.
그러니.
* * *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신격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의 훈련을 봐주고 릴리와 놀아준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언제 균열이 열리고 마물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연옥을 나갈 수도, 신들을 상대로 당장 무언가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좀 익숙해졌나?”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자신감을 가져. 이번 일을 위해서 꽤 많은 준비를 해왔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김우진의 모습을 한 부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그들을 감시해왔기에 김우진은 누구보다 죄수들의 포텐을 알았다. 율리아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신격을
얻지 못한 연옥 상위 여섯 명은 어지간한 집행자들을 씹어 먹는 강자들이다.
“그렇지, 릴리?”
- 삐익.
“그리고 베르너도 잘 써먹어. 그놈은 싸움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스팩만큼은 신이 된 율리아 빼고 이길
놈이 없을 걸.”
“그 정도입니까?”
“기본 능력 자체가 사기거든.”
‘그것도 이제 끝인 것 같지만.’
김우진과 함께하는 훈련에서 능력이 얼핏얼핏 드러나면서 그를 바라보는 타르칸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때였다.
- 삐삐!
릴리의 눈이 커졌다. 날개를 퍼덕이는 온 몸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말 뜻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의미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왔구나, 그렇지?”
- 삐이!
- 삐이.
- 하노도 사리지마.
“그래, 정확해. 감히 널 노린 놈들이야. 절대 자비를 베풀지마.”
- 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소장, 네가 뭐라고?”
“소장입니다.”
“내 말투는 그러지 않아.”
“소장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만. 어차피 다 죽여 버릴거면 제가 굳이 소장님인 척을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맞아. 그러니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
“예행연습 말입니까?”
“언젠가 진짜 나 대신 신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할수도 있으니까.”
“······.”
“알베니우스는?”
“식당에 계십니다.”
“계십니다?”
“···계신다.”
“갑자기 식당? 왜?”
“오마카세를 한다고 하더군.”
“베르너 놈,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나 보지?”
“당연하지. 그놈이 쉽게 미련을 버릴 놈은 아니니까.”
하긴 음식에 대한 열정이 단순한 열정을 넘어선 광신의 영역이니 그럴만 하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베르너의 주장을 듣고 나니 차원용의 꼬리가 무슨 맛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데리러 가야겠군.”
* * *
달그락 달그락-
알베니우스가 우아하게 고기를 썰었다. 칼이 부드럽게 파고들고 핑크빛으로 잘 구워진 고기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씹는 순간, 육즙이 터지고 향신료의 향이 함께 폭발한다. 적당히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쫄깃하고 녹진한 소스는 더
없이 잘 어우러진다.
“이게 무슨 고기라고?”
“코크리라는 몬스터입니다.”
“코크리는 나도 아는데 전혀 맛있어 보이는 놈이 아니었는데.”
“몬스터답게 질기고 독이 있지만 잘만 요리하면 그게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아무리 푹 익혀도 적당히 씹는 맛이
남아있고 중화된 독이 오묘한 향을 남겨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죠.”
“확실히···. 인정하지. 네 실력은 내가 만나보았던 그 어떤 요리사보다 뛰어난 것 같군.”
당연히 지금 먹고 있는 요리도 마찬가지. 혀를 사정없이 유린하는 극상의 진미를 알베니우스가 정신없이 흡입했다.
알베니우스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고한 드래곤의 자아로 인해 거짓말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제게 꼬리를 조금만 때어주신다면 이곳에 머무시는 매일 제가 삼시세끼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극상의
진미로만!”
“···으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kg 만 주시면 됩니다. 본체로 변하시면 그 정도는 발톱에 낀 때 수준 아닙니까?”
“네놈 발톱의 때는 10kg 이냐?”
물론 그리 대단치 않은 건 맞다. 그의 본체는 50m 가 넘어가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거기서 꼬리 끝부분을
10kg 땐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자라나기도 하고.
“잠시만요!”
베르너가 급하게 뒤따라 뛰어내렸지만 알베니우스는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소장님?”
“이거···.”
“예, 알베니우스님, 때가 되었습니다.”
“때요?”
끼기기기긱-
“···정말로 왔다.”
습격이 시작되었다.
───────────────
# < 075. 전투 >
하늘을 가득 채운 검은 덩어리들.
마물들이 몰려온다.
“크흐흐흐.”
결코 원치 않았다.
“우리가 누구냐! 명색이 싸움을 업으로 살아온 수인인데 귀쟁이와 난쟁이들에게 밀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전장이다! 날뛰지 않을 이유가 없어!”
“옳습니다!”
“가자!”
“마물의 피로 포식하자!”
“하아아아···!”
타르칸이 돌진했다.
애초에 강민식의 전투 방식은 스타일리쉬하다. 힘이 아닌 속도와 독으로 승부를 보기에 마물의 군단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건 자충수다.
후퇴를 모르는 짐승들. 그들의 돌진은 해일과 같고, 그 해일에 휩쓸린 이들은 은밀하게 스치는 독과 검을
의식하지 못할 테니.
그리고 신이 된다.
‘내가 신이라니.’
* * *
마물들이 밀려온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다.
“평소처럼 하렴.”
집행자들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마물의 군단에 율리아가 나선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녀가 신위를 받았다는 것을
누구도 몰라야 하기에, 목격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알고 있다.
“소장이 성격이 좀 그렇고 문제가 많긴 하지만 적어도 불가능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단 걸. 하물며 여기에는 너만
있는 게 아니야. 굳이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단다.”
소장과 알베니우스가 없지만 시에나가 있다. 타르칸이 있고 데르카인이 있으며 광신도와 강민식, 소지가 있다.
“그냥 가서 날뛰렴. 신으로서 처음 맛보는 신의 힘을 마음껏 방출해. 모두 쓸어버리는 거야. 뒤처리는 우리에게
맡기고. 저 미친 짐승들처럼.”
율리아의 시선이 시에나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마물들을 향해 질주하는 열다섯의 짐승들이 있었다.
율리아의 장기는 바람이었고 신위를 얻으면서 그 힘이 더욱 강화되었다. 바람은 그녀의 친구이며, 그녀의 검이
되었다.
율리아가 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폭풍 사이로.
“쏴라!”
“모조리 박멸해!”
쾅쾅쾅쾅!
* * *
마물들이 밀려온다.
두려움? 공포?
아니, 이건 그딴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마침내···!”
“마침내 실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위력이 어떨지, 마력포를 제작한 드워프들조차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미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고
이제는 그 결과를 확인할 때다.
“프흐흐흐.”
드워프들이 광소했다.
“조준!”
“조준!”
하늘을 새카맣게 메운 덕분에 세세한 조절은 필요 없었다. 저 시커먼 덩어리 어디에 쏘든 맞을 테니까.
“응집!”
“응집!”
- 삐이···.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에 릴리가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례해 마력포에 응집된 마나들이 점점 많아졌다.
마나를 모으고.
그대로 압축하여.
폭발시켜 쏘아낸다.
그것이 지금.
“발포!”
이 자리에서.
“발포오오오!”
실현되려 하고 있었다.
─────!
그것은 단순한 포탄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광선. 번개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힘으로 뒤섞인 수십 줄기의
광선이었다.
────!
연달아 일어나는 폭발이 마물들을 집어 삼켰다. 비명도 시체도 없었다. 그대로 소멸시키는 압도적인 파괴력은
전율, 그 자체였다.
“···아아!”
“대박입니다!”
“데르카인님! 이걸 정말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겁니까!”
“그래, 우리 손으로 만들었···?”
그 순간.
치이이익-
쩌적, 붉게 과열된 포신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 불길한 징조에 드워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피해!”
“도망쳐라!”
“마력포가 터진다아아아!”
콰아아아아앙!
* * *
디아네가 코웃음쳤다.
그녀가 일직선으로 날았다. 마물들이 넘쳐나는 어두운 하늘이 아닌,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집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디아네 디트린?”
“본디 생명이란 어리석어서 진리를 알려주어도 쉽게 믿지를 못합니다. 이해합니다. 당신들의 마음을.”
콰아아아앙!
사방에서 공세가 쏟아졌다. 아군마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거친 파도였으나 디아네는 태연히 도끼를 휘둘렀다.
“불쌍한 자들.”
신이 함께하고 계신다.
그러니 나는 무적이다.
김우진은 주신이고.
신에게 훈련을 받은 디아네는 분명히 강했다. 본래도 집행자들 중에서도 상위에 꼽히는 그녀는 여럿의 집행자들을
홀로 상대할만한 능력자였다.
그녀는 분투했다. 여덟 명을 죽이고 다섯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아직도 29 명이나 되는 집행자들이
남았으니 중과부족이었다.
집행자들이 검을 뻗는 순간이었다.
파캉, 검이 부러졌다.
“···넌 또 뭐냐.”
디아네는 그럴 수 있다. 그녀는 애초에 집행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의 강자로 왜 베른 같은 자를 섬기는지 의문인
자였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난 소지야.”
“소지? 그게 뭐지?”
“교도관을 돕는 죄수 아닌가?”
“맞아. 연옥의 밥을 책임지고 있지.”
“물론 감히 소장님을 노리고 이곳에 온 이상, 글렀지만. 아니지, 새로운 죄수들이 될지도?”
소지가 움직였다. 서늘한 참격이 집행자 하나를 덮쳤다.
“크윽···!”
집행자가 서둘러 방패를 들어올렸다. 검격이 그대로 방패를 쪼개고 전진했다. 깊은 상흔이 새겨졌고 집행자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무기가 무엇인지 눈치 챘다.
“···식칼?”
“말했잖아. 요리사라고.”
더 두텁고, 더 날카롭지.
“어떻게 신의 힘까지?”
“이것저것 많이 주워 먹어서 그렇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짐작하시다시피 제 권능이 소장님과 조금 비슷하거든요.”
───────────────
# < 076. 비보 >
거짓은 아니었다. 그가 품고 있는 막대한 가능성과는 별개로 전투 실력은 이곳의 죄수들에 비하면 명백한
하수니까.
그것이 그의 권능. 비록 하나하나는 미약하지만 용사로서 수없이 만들고 먹어온 것들이 지금의 그를 이루었다.
김우진을 제외하면, 신이 되어버린 율리아를 제외하면 품고 있는 마력은 가장 막대한 괴물로.
그것이 그의 업이니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권능들에 베르너가 마력을 방출했다. 그건 방어막도 오러도 아닌 그저 마력의 덩어리였으나 그
압도적인 양은 충분히 주인이 빠져나갈 시간을 주었다.
“제기랄!”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리와 미식이었고 연옥은 전 차원의 식재료들이 모이는 천국이었다.
딱 그 정도.
베르너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과연 그것들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을까?
고민은 1 초 만에 끝났다.
“당연히 있지!”
그런 것들을 보지도, 먹지도, 요리하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는 거다.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와라!”
그는 검술에 조예가 없었다. 용사로서 나름의 검술을 연마했지만 결코 집행자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어어···?”
“어는 무슨 어!”
그걸로 충분했다.
서걱-
“이런 미친!”
“그 짧은 시간에 아예 포를 떠놨어?”
* * *
“딱 예상대로군요.”
허나, 그 모든 것들이 막힌다. 엘프들에 의해, 드워프들에 의해, 광신도와 집행자들에 의해.
“마력포가 폭발하는 것도?”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시죠?”
“전혀 사소해보이지 않는데. 저거 괜찮은 거냐?”
“괜찮을 겁니다.”
푼수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데르카인과 드워프들은 용사다. 마력포를 정면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모조리
해소한 뒤, 그 여파로 일어난 폭발로는 죽지 않을 거다.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뭐, 네 말이 맞겠지.”
연옥에서 시작된 길은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나가며 시커먼 어둠이 연옥의 일부를 물들이고 있다.
허나 그 어둠은 하나가 아니니 수십 개의 덩어리들이 수많은 차원에 흩어져 차원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아무리 율리아가 신격을 얻었다고 한들, 아무리 죄수들이 강하다고 한들 물량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물론 패배를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율리아가 신격을 얻은 이상, 동급의 존재가 아니면 그녀를 죽일 수 없으니.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신의 끄나풀들을 모조리 죽일 거라는 보장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율리아가 신격을 얻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건 정말 최악의 예상.
“어디부터 갈 테냐.”
“어디부터가 아니라 누굴 찾아갈 거냐고 되어야지요. 목표는 차원이 아니라 신이니.”
* * *
“재앙, 재앙이다!”
“종말이 도래했다!”
“신이시여, 저희들을 굽어살펴주시옵소서!”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하늘이 갈라졌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균열들이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불길한 마기와 함께 마물들을 토해냈다.
“끄아아악!”
“막아라!”
“신께서 함께 하신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성으로 도망쳐라!”
“신이시여!”
“신의 천사께서 오셨다!”
그리고.
콰르르르릉-
“신이시여···!”
“신께서 함께 하신다! 두려울 것이 그 무엇이랴!”
균열은 여전히 마물을 토해내고 있지만 그 수도 처음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다. 이제 이 정도라면 별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크윽···!”
“백염···?”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마, 말도 안 돼!”
“왜 일 것 같아?”
“계약을 어기려 하다니! 백신전이 두렵지 않느냐!”
악마의 속삭임.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
전혀 예상치 못한 일. 마물들은 연옥 뿐 아니라 주변의 차원들을 침공했고 교차 차원인 연옥의 주변에는 신들의
권역 또한 다수 존재했다.
“정확히 몇 곳이냐.”
“열 두 곳의 차원들이 습격당했습니다. 그 중 권역은 다섯이며 해당 차원의 신들이 우선 방어를 위해
나섰습니다.”
하위 차원이기에 신들은 마음대로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 정석적인 루트인 용사 소환도 지금 써먹을 수도,
소환해도 너무 많은 마물들을 감당할 수도 없으니 결국 집행자들을 보내야 한다.
반대로 기회이기도 했다. 아직 권역이 아니기에 자신의 이름을 퍼트리고 권역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고로 신앙은 위기에서 더 피어나는 법이다.
“어떻게 된 거지?”
“···부끄럽지만 실수했다. 마물들의 수가 생각 이상으로 불어났고 유도하는 것만으로 통제하는 것에 버거움이
있었다.”
“실수? 네가 말인가?”
“과욕을 부렸다. 칼카르가 죽은 것부터,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신이 탄생한 것까지. 여러 문제가 동시에
터졌고 그 모든 시작은 알베니우스와 김우진이었다.”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덕분에 연옥으로 간 마물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론 모든 차원들 중 가장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곳에는 김우진과 배교한 집행자들이 있다.
그때였다.
“주신들이시여!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지?”
“드라스코의 종적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아예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마물들에 의해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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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77. 최종병기 릴리 >
벌어진 균열.
쏟아지는 마물들.
세계수를 향한 위협.
공기가 무겁다.
소장님은 그를 믿고 떠나갔다.
마물들 사이를 헤집으며 날뛰는 수인들과 그 그림자에 숨은 암살자. 뒤늦게 합류한 거인.
돌진하는 신격과 그녀를 엄호하는 엘프들.
부서진 마력포를 수리하려다 코앞까지 다가온 마물들에 결국 도끼를 들고 마물의 대가리를 쪼개버리는 드워프들.
은밀히 숨어든 집행자들을 상대하는 광신도와 소지, 그리고 집행자들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소장!”
짧은 비명들이 토해졌다.
* * *
헌데 일이 틀어졌다.
허나, 무엇보다 문제는 배신자들이었다. 특히 베른을 섬기던 집행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디아네 디트린.
주신의 권유조차 거부하고 베른의 집행자로 남은 자. 그녀의 능력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뛰어났고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때문에 진즉에 끝내고 세계수를 뽑으러 갔어야 할 계획이 틀어졌다.
그리고.
그가 왔다.
이길 수 있을까?
“알고 있느냐?”
“긴말 필요 없겠지.”
죽어라.
불꽃이 폭사되었다.
“흩어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세계수. 목숨을 잃더라도 세계수를 없애야만 한다. 이곳에서 김우진과 싸우면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쫓아라.”
“예!”
디아네와 소지라는 자가, 그리고 배신자들이 그들을 추격했다. 김우진의 불길이 넘실거리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크악!”
“도망쳐라!”
“아까는 잘도 합공했겠다!”
“이번엔 네놈들이 죽을 차례다!”
혼타스가 눈물을 머금고 세계수를 찾았다. 세계수란 신목이라 불리는 나무. 그건 그들이 신의 힘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우진과 집행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농밀한 신의 기운을 찾으면 된···다···?
“···뭐냐, 저게.”
신이었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의 기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백신전에서 주신을 모셔온 그의 경험이 틀리지 않았다면.
“···맙소사.”
어째서 신이 이 자리에?
어째서 신이 마물들과?
어째서, 어째서···!
“···율리아 카르센?”
기억에 있다. 불과 얼마 전에 세계를 구하고 집행자가 되기를 거부해 연옥에 가두어버린 죄수다.
“···새로운 신.”
혼타스는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
직접 감찰하신 주신께서는 이곳에 새로운 신은 없다고 했는데?
새로운 신격의 탄생을, 그 신격이 김우진의 죄수임을 위대한 주신께 알려야만 한다.
다행히 다른 집행자들이 미끼가 되어준 덕분에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전력을 다해 날았다. 무조건 여기서
벗어나야 된다는 일념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
“······!”
- 삐삐!
“정령?”
“신?”
- 삐삐삐!
- 너 모나가.
“뭐라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
‘뽑을 수는 있을까?’
“하하···.”
* * *
“저건···.”
거대한 마물이었다. 크기는 대략 20m. 다른 마물들과 비교해 엄청나게 크다의 느낌은 아니었으나 느껴지는
기운은 비교를 불가했다.
마물이란 이지가 없으나 본능적으로 집단을 이룬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자가 자연스레 무리를 이끈다.
허나, 율리아 앞에 선 마물은 그 갈래의 하나가 아니었다. 무리가 갈라지기 이전부터 우두머리를 자처하며 무리를
이끌던 괴물이었다.
상대는 수많은 마물의 군단을 이끄는 만큼 강하다. 저 마물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며 연옥의 죄수들도 함부로 덤빌
수준이 아니다.
* * *
- 조아.
순조롭다. 소장의 뜻대로 감히 자신의 차원을 침범한 벌레들은 결코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 마무, 커.
연옥으로 향하던 모든 마물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의 마기침식은 없다. 릴리가 방벽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 지해자. 커.
집행자들의 대장을 그녀가 손수 막았다. 다른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사냥을 당하고 있다. 균열을 닫는 것과
함께 방벽의 방비를 더욱 단단히 굳히고 있으니 저들이 자력으로 나갈 수단은 없다.
- 기재이.
소장 다음으로 아끼는 하이엘프가 상대하고 있으니까. 신격을 얻었다고 갑자기 콧대가 우뚝 솟아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는 확실히 강자였다. 거기에 타르칸이라는 짐승도 합류했으니 결코 지지 않으리.
- 그러 끄.
율리아와 타르칸이 마물을 죽이면, 나머지는 지휘관을 잃고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봐야 연옥의
안이며, 도망치는 적들을 사냥하는 건 쉽다.
- 조자.
“빨리 빨리 고쳐!”
“지금 말고 나중에! 마물들이 달려드는데 마력포를 고칠 여유가 어디 있느냐! 도끼로 머리부터 쪼개!”
쯧쯧, 그녀가 혀를 차며 번개를 일으켰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세계수의 본체에 접근하는 마물들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
# < 078. 양아치 >
주신, 알비츠께서 행하신 마물의 유도가 실패하여 주변으로 번지고, 신이 자신의 권역에서 실종되다니.
차원으로 들어가는 마물들을 최대한 줄여주고자 했다. 주신께서 작정하셨는지 마물의 수가 정말 어마어마했지만
어떻게든 되긴 됐다.
“난장판이긴 하군.”
“들어가겠다.”
“그래.”
“별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세 명의 신이 권역에 발을 들였다. 권역의 주인인 드라스코만큼은 아니지만 일단은 신의 기운이 충만한 만큼,
그들 또한 일반적인 하위 차원에 비해 제약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
─────!
방벽을 넘어가는 순간, 밀려드는 새하얀 불꽃이 그들을 덮쳤다. 급하게 끌어올린 신의 힘이 저항했으나 불꽃은
그것마저 잡아먹었다.
“이게 무슨!”
한참을 밀려난 발레리안느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의 힘마저 불태우는 불꽃에 저항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허나,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새하얀 불꽃의 벽이었다. 신임에도 그것을 꿰뚫어볼 수 없었다.
“···칼카르님?”
“아쉽지만 틀렸어.”
──!
방패가 찌르르 울렸다. 방패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전신이 흔들렸다. 이를 악물고 창을 내질렀다.
“김우진!”
대장장이의 신이 단조한 방패를 이리도 쉽게 망가트리다니. 김우진은 그녀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짐작하고 있잖아?
“대체 어떻게···?”
“놈이 나보다 약했다. 그게 전부야.”
“헛소리 하지 마라! 칼카르님이 네놈 따위에게 패배하실 리가 없다!”
애초에 김우진이 칼카르를 죽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김우진과 백신전은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계약에
묶여 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미 늦었어.”
콰아아아앙!
* * *
“좋네요.”
릴리는 만능이니까.
김우진이 능숙하게 기절한 신들의 목과 사지에 구속구를 채웠다. 신이 만들었기에 신마저 구속할 능력이 있는
기물.
김우진이 흔적을 마저 지웠다. 그리고 마물들의 시체와 함께 뭉쳐진 마기 덩어리를 사방에 던졌다. 은은하게 남아
있던 신의 힘이 마기에 잡아먹히도록.
“두리쉬마한테 받은 건가?”
“예.”
* * *
“제가 목을 베었어요!”
“내 손톱이 놈의 심장을 찌르는 게 더 빨랐다!”
“타르칸님은 계속 당하기만 했잖아요! 이 상처들, 전부 제가 입힌 거거든요?”
“웃기는 소리! 내 손톱과 발톱은 그 어떤 것이라도 찢고 가른다!”
“무모하게 달려가셔서 그것까지 막아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네가 아니었어도 나는 버티고 승리했을 거다!”
“아, 정말!”
어쨌든 자신들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했다. 저들이 잡은 게 대장인지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토벌 당한 상태였으니까.
- 조자!
- 저부 자바.
“전부 잡았어?”
- 으.
“잘했어, 정말 잘했어.”
릴리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해달라는 뉘앙스에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그거?
릴리의 시선이 김우진의 뒤를 따라 둥둥 떠다니는 네 구의 신들에게 향했다.
- 이거 저부?
- 아니.
- 마나.
- 너므.
“어?”
그럴 리가 없는데.
- 아대.
- 마나.
- 모해.
- 아대!
- 그러 대.
“······.”
이런 양아치 같은.
누구 자식인지, 참 잘 컸다.
* * *
네 명의 신을 릴리에게 넘겼다.
가지와 뿌리들이 신들을 감싸며 세계수 안으로 끌어들였다.
- 끄억, 배.
- 더, 아대. 저대.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
- 마나.
- 지주해야 해.
“···괜찮으려나.”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저는 릴리를 믿습니다.”
“오셨습니까.”
김우진이 부소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에게 주었던 신의 힘을 다시 회수했다. 부소장이 모습이 다시 변했다.
“상황은?”
“세계수가 균열들을 모두 닫았고 마물들을 이끌던 대장은 율리아와 타르칸의 손에 죽었습니다.”
“집행자들은?”
“총 51 명의 집행자들이 마물들이 벌려 놓은 균열을 통해 연옥으로 들어왔고 베르너와 디아네를 비롯한
집행자들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많군.”
“다른 이들은?”
“흩어진 마물과 집행자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세계수가 자신했으니 그들이 빠져 나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잘 됐군.”
───────────────
# < 079. 투자 >
신들이 직접 나서 통로에서 추가 유입을 끊어내고 권역인 곳에는 신들이, 그렇지 않은 곳에는 집행자들이 다수
투입되었다.
재앙은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고, 눈앞에서 재앙과 신의 이적을 함께 목격한 12 개 차원의 피조물들은 더욱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하지만 좋은 건 딱 여기까지였다.
그래, 세계수가 발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연옥의 방벽이 흔들려 김우진에게 경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세계수의 존재를 눈치 챘어야 했다. 하지만 설마 세계수를 심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김우진이 이상한 짓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통한의 실수였다.
“역시 마물이 분산된 게 크다. 김우진을 뚫어내려면 모든 마물들이 연옥으로 향했어야 하는데 13 갈래로 분산되어
버렸으니···.”
“신, 드라스코는 물론이고 드라스코의 실종에 그를 찾으러 차원, 드라스코로 향했던 발레리안느를 비롯한
나이아린, 콜키트의 흔적도 사라졌습니다.”
“···신 넷이 한꺼번에?”
“그런 게 가능한 건가?”
“······.”
“그렇다면 무엇이지? 그들은 사망이 아니라 실종되었다. 마물들이 신을 납치해서 마계로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하나?”
“확실히 그건 좀 의외이긴 하다.”
적어도 백신전이 생긴 이래로 마물들이 신을 잡아간 역사는 없었다. 애초에 신이 마물에게 당한 경우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들의 죽음이 생각보다 늦어 아직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하는데 텀이 있었거나, 어둠이
그들을 타락시키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거나.
“그 마물들은 우리가 평소에 상대하던 자들과는 다르다. 감히 신들을 상대로 승리하고, 신들을 납치했지. 상대가
상대인만큼 이쪽에서도 주신이 나서야 한다.”
“자.”
“기탄없이 말해보아라.”
* * *
- 끄어.
- 꺼꺼.
큰일 났다.
김우진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하지만 세계수에서 틈틈이 새어나오는 신의 힘은 릴리가 명백한 소화불량에 걸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힘을 모두 소진시켜 버리는 건 어떤가? 그렇지 않아도 첫 마력포가 실패하면서 개조를 잔뜩 했네. 이번 포신이
얼마나 에너지를 버틸 수 있을지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는데 말이네.”
“그것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죠.”
“그렇다면 구속구 전부 채워서 봉인시키면 어떤가?”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겠군요.”
“구속구를 내가 개조해보는 건? 요지는 신들의 힘을 줄이면 되는 것 아닌가.”
“음.”
“제게 기대하시는 게 어떤 건지는 알지만 어머니 나무를 급성장 시키는 물건이나 영약, 마법 같은 건 없어요.”
“···저 말입니까?”
* * *
“어머니 나무시여.”
- 어째서일까.
- 저들은 우리들에게는 늘 호의적인 자세를 취해왔는데.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것도 백신전의 신들이 이렇게 다급하게 움직일 정도의 문제가.
-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 같으냐.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대충 짐작이 가는 건 있다. 백신전이 저렇게 발작을 일으킨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으니.
- 타이탄들이 그러했고.
- 가루다들이 그러했으며.
- 포이닉스들이 그러했고.
- 차원용이 그러했지.
- 더 없이 오만한 놈들이지.
순록이 웃었다. 아카식 레코드더 깊숙한 곳에 뿌리를 뻗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대한 지식은 그녀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파편만으로도 큰 진리로 다가오니까.
- 다이안.
그렇다면.
“씨앗을 넘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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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80. 소금 >
맺힌 열매를 건드리지 않고 백년을 놔두면 씨앗이 과실을 모두 흡수하고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게 온전한
세계수의 씨앗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만으로 해결이 되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쩌면 세계수는 모든 차원에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
세계수는 열매가 완전한 씨앗이 되는 백여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정기를 주입한다. 그것인 어찌보면 세계수의
정수라고 할 수도, 세계수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게 율리아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만년을 산 어머니 나무라면 반드시 씨앗 하나 정도는 여분으로 만들어두셨을 거예요.”
세계수가 아무리 위대해도 결국 만능은 아니다. 세계수가 있음에도 종말을 맡이한 차원도 있는 만큼, 세계수들은
마약에 대비해 항상 씨앗 하나를 움켜쥐고 있는 다고 한다.
데이드람의 경우 그게 릴리였고.
“···제기랄. 좋아. 씨앗을 얻어온다고 치지. 그리고 그 다음은? 씨앗이 발아하는 게 하루 이틀만에 될 리가
없잖아? 백신전 놈들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51 명의 집행자들이 뒤졌는데 몇 달 동안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제가 신격을 얻었잖아요? 바람과 자연에 대한 권능이 더 강화 되었어요. 제가 보살피면 발아하는 시간이 대폭
단축될 거예요. 그리고 릴리 어머니 나무께서도 함께 하신다고 했어요.”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한 차원에 세계수가 둘이나 있는 게 말이 돼? 그걸 용납한다고?”
세계수의 뿌리는 차원 전체로 뻗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차원의 마나를 양분으로 삼고 다시 환원하여 마나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그게 두 그루가 되면 서로의 마나를 삼키기만을 반복하여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인 거다.
차원이라는 영역은 정원이 한 명으로 정해져 있는데 인원이 많아지는.
- 배브러.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여유가 좀 있습니다. 신을 넷이나 잡아온 지 일주일이나 됐는데도 백신전놈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건 제가 던져놓은 수가 통했다는 뜻이니까요.”
자신들의 경쟁자를 병적으로 파멸시키는 백신전의 행적을 비추어보았을 때, 율리아의 존재는 그들에게 차원이
다르게 다가간다.
그녀가 신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백신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죽이려고 할 거다. 김우진 그와는
다르게 계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으니 더욱 거리낄 것도 없다.
율리아의 신격을 감추기 위해서는 구속구만 있어서는 안 된다. 집행자들의 신의 힘을 주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 위에 세계수의 정기를 덮어씌워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주신을 속일 수 있다. 삼박자 중 하나라도 어그러진다면
무의미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수가 뽑히면 안 되고 신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으려면 신들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 다
이어지는 이야기다.
“문제는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순순히 씨앗을 주느냐, 마느냐인데.”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뭐라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올 테니까요. 뿌리를 뽑아서라도.”
“세계수의 정령과 하이엘프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는 말은 제가 아니라 그 하이엘프가 먼저 했습니다만.”
“···제가! 제가 노력해볼게요. 뿌리를 뽑기 전에 순순히 주시도록.”
* * *
-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씨앗을 넘기라고?
“제대로 들었다.”
- 미쳤구나?
쿠그그그, 세계수의 분노에 나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엔트. 세계수의 정기를 오랫동안 받아온 식물들에서
비롯되는 정령들.
“거절인가?”
“잠깐, 잠깐만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나무님. 오랜만이에요. 정식으로 요청 드릴게요. 부탁드려요. 저희는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필요해요.”
- 어째서?
- 나는 너희들이 정확히 누군지도, 왜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는데.
- 그런데도 그냥 씨앗을 주는 건 이상하지 않니?
-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지.
“그럼 알고 계시네요. 어머니 나무 같은 분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짐작한다고 하시진 않으실 거 아니에요?”
- 흐음.
정곡이었다.
- 제법 당돌하구나.
-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니. 너희가 오기 얼마 전에 백신전의 신들이 다섯이나 왔단다. 반역자를 찾는다는구나.
단순히 나뿐 아니라 전 차원의 세계수들을 들쑤시고 있지.
-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 너희가 왔고.
- 그건 투자자의 마음 아니겠니?
“아니에요.”
- 아니라고?
- 내가 양아치라고?
순록이 눈을 치켜떴다.
“아무튼, 씨앗만 주신다면 원하는 것들을 다 알려드릴 수 있어요. 물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맹세도
하셔야 하지만요.”
“겁박이 아니라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정체를 짐작하신다면서요? 정보를 먹튀하시면 저분이 어떻게 나올지
아시잖아요?”
- 헛소리는 그쯤하려무나.
- 너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아니라면?”
-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 나도 다 보고 들은 것이 있단다. 이건 물음이 아니라 확신이야.
“그래.”
사실 크라프트에 오면서 대충 이렇게 될 거라는 예상은 했다. 세계수는 자신의 씨앗을 절대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으니까.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더욱 더.
“···그러니까.”
율리아가 감추고 있던 기운을 일거에 폭사시켰다. 그 광활한 마나와 신의 힘에 엔트들이 뭉개졌다. 순록이 튕겨져
나갔다.
- ···너. 어떻게?
나무들이 세계수의 통제를 벗어나 율리아를 따랐다. 나무가 나무의 대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잘나신 권역에서 제가 어떤 존재인지 눈치도 못 챘으면서 어떻게 소장님을 상대할 생각을 하세요?”
“권역에서도!”
“저보다도 약한데!”
“어머니 나무께서는 겨우 이 정도인데!”
율리아가 으르렁거렸다.
- ······.
* * *
“다행이에요. 말이 통해서.”
“···말이 통한 건가?”
그럴 생각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맞아요.”
“그리고 틀린 게 있어.”
“뭐가요?”
“너 같은 건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 와도 이길 자신이 있거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말이.”
───────────────
# < 081. 경고 >
“다른 이들은?”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겠다.”
주신 알비츠가 여러 신들과 함께 떠나고 연옥에 투입한 51 명의 집행자들이 실패해버린 상황에서 백신전은 전략을
바꾸었다.
죄수를 넣어서 탈옥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수는 연옥의 방벽에 간섭할 수 있으니까.
신들이 직접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계약에 묶여 있으니까. 김우진을 죽이는 것도, 연옥에서 싸우는 것도 문제다.
베리안의 말에 한 신이 물었다.
“정공법이라 하심은?”
“김우진을 연옥의 소장으로 묶어둔 것 자체가 나의, 우리의 실수였다.”
백신전은 김우진이라는 폭탄을 연옥에 영원히 묶어둘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오히려 김우진보다 이쪽에
가해지는 부담이 더 컸다.
김우진은 계약의 빈틈을 노려 신들을 엿 먹이고 다녔고 어느새 그 칼이 신들의 턱 밑까지 들어왔다.
“하물며 갑작스레 마물들까지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비록 알비츠의 실수라고 한들, 신을 능욕하고
납치할 수준의 강대한 마물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변방 차원은 많다. 당연히 마물또한 많지. 그리고 마물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카식 레코드와 함께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어둠의 법칙이다. 빛이 존재하는 한, 어둠이 있다. 백신전과
생을 영위하는 피조물들이 있는 한, 죽음을 쫓는 마물들은 어디서든 탄생한다.
“어디냐.”
“크라프트입니다.”
“크라프트? 크라프트라면 세계수가 있는···.”
“그놈이구나.”
“그놈이 확실합니다!”
“크라프트의 세계수라면 1 만 2 천년 가까이 살아온 노목입니다. 놈의 뿌리는 아카식 레코드에 닿아 있습니다.”
“헌데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 만년을 넘게 살았다면 우리의 존재에 대해 보다 명확히 알고 있을 텐데 김우진에게
붙었다고?”
만년이 되지 않은 세계수는 그저 신들이, 백신전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지만 만년이 넘어간 세계수는 아카식
레코드로 말미암아 백신전의 저력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는다.
“메이린.”
“예, 주신이시여.”
“뿌리를 뽑아라. 다시는 이런 종자가 나오지 않도록 확실하게. 감히 백신전에 반기를 든 자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모두에게 알려주어라.”
“예. 명을 따릅니다.”
* * *
- 뭐냐, 대체 뭐냔 말이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 신···?
- ···이거.
- 알베니우스?
들어본 적 있다. 신들이 멸종시킨 차원용의 마지막 후예라고 했던가. 수십년 전에 죽은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까지 살아 있었나.
- 나는 그런 자를 모른다.
- 얼마 전에 다섯 명의 신들이 와서 차원 전체를 뒤집어 놓고 가지 않았느냐.
“허나 신들이라고 한들, 세계수의 권역에서 세계수가 작정하고 속이려고 한다면 속을 수밖에 없다.”
- ···지금 그게 무슨 뜻이지?
김우진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기운으로 덮어 알베니우스를 감추기까지 했다. 덕분에 김우진에게,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율리아라는 신격에 당황한 그녀는 알베니우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 얼마 전에 알았다.
“그 연옥에서 세계수가 발아했다. 뿌리는 연옥을 덮었고 차원 전체에 간섭을 시작해 우리를 꽤나 곤란하게
했지.”
- ···뭐라고?
- ···그건.
차라리 전자라면 당당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씨앗을 주기는 했으나 씨앗이 1 초 만에 자랄 수는 없으니 그게
자신이 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후자는 맞았다. 협박일지언정 그녀는 김우진에게 씨앗을 주었고 김우진과 율리아에 대해 무엇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왜 대답을 못하지?”
- ···하하. 이런 빌어먹을.
“역시 네놈이었구나.”
말투가 변했다. 그대라며 그나마 해주던 존중이 사라졌다. 열 명의 신들이 일제히 살기를 폭발시켰다. 나무들이
시커멓게 시들어 죽어갔다.
- 나는 억울하다!
“그렇다면 말하라! 김우진에게 혹은 알베니우스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주지 않았다고!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에
명확히 쓸 수 있다면!”
쓸 수 있을 리가.
아무리 만년을 살아와 차원을 완전히 자신의 권역으로 삼은 세계수라고 한들, 그녀는 혼자였다.
그리고 신은 무려 열 명이었고.
신들은 만년 이상을 살아온 세계수들은 만약에 대비해 하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로 이어지지?”
“그게···.”
“빨리 말해라.”
“연옥입니다.”
“···하.”
메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마기도, 신의 기운도.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다. 그렇다면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지성체의 개입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우진?’
그리고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마물들을, 마기를 다루지는 못한다. 알비츠는 어둠의 사도들이 새롭게 탄생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해졌다.
“델라푸스는 어디 있지?”
변방 차원에서 먼저 죽어버린 칼카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김우진이 아닌, 단순히 알베니우스를 쫓다가 어둠의 사도를 만난 걸지도.
“얼마 전에 칼카르님이 남기신 마지막 흔적을 찾았다는 연락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습니다.”
“마지막 통신이 언제냐.”
불길함이 치솟았다.
“21 일 전입니다.”
삼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신 하나가 연락이 없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다.
“···델라푸스는 죽지 않았다.”
신들을 이끌고 나오기 전, 아카식 레코드를 확인했다. 그때까지 새로운 신의 탄생은 없었다.
“같은 놈이구나.”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그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다. 델라푸스가 남긴 흔적들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으나 주신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수십만의 마물 군단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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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82. 기강 잡기 >
“주신께서는 아키식 레코드를 확인하러 가셨네. 아카식 레코드는 주신께서만 접근할 수 있는 바, 당장 주신께
만남을 요청하는 것을 불가능 해.”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어디냐.”
“연옥입니다.”
“···재미있군.”
미소가 지워졌다.
이전이었으면 뚜렷한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 이상,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아직은.
베리안이 사라졌다.
* * *
세계수란 본디 자아가 강하다.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면 차원 안에서는 신에 필적하는 존재라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때문에 세계수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것은 중요했다. 기껏 길러놨더니 사춘기 어린애처럼 막나가다가
어떻게 계획이 틀어질지 모르니까.
간섭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웠다.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한 씨앗이지만 김우진은 주신을 완전히
포식해버린지 오래였으니까.
- 아냐!
- 타라, 아냐.
- 나브 기재이!
- 하이기재이.
“서로 거리를 주는 거보다 가깝게 하는 게 좋아요. 처음부터 릴리 어머니 나무의 폼 안에 들이는 거죠.”
“가까이서 기강을 잡는다는 걸로 들리는데.”
“좀 속된 표현이긴 해도 틀리진 않아요. 신들 덕분에 여러 어머니 나무가 자라나도 문제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 도새!
“···생매장하는 느낌인데요.”
“신이라 이 정도로 죽지 않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중간에 깨어나진 않겠지?”
“아마도요. 그 전에 씨앗이 발아할 테니까요.”
“아마도?”
“어쩔 수 없잖아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걸요.”
- 삐이.
그러길 한참.
쿠그그그그그-
씨앗이 발아했다.
* * *
콰르르르,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가지와 줄기,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허나, 릴리와는 다르게 연옥의 건물까지 침범하지는 못했다. 김우진이 불꽃의 벽을 세워 막았기 때문이다.
- 끼잉.
그 모습이 썩 귀여웠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묘하게 납득이 된다. 애초에 본체가 나무인 시점에서 정령체가 무슨 소용이겠다만은.
- 낑.
- 으!
빠악-
- 꾸러! 이마!
“······.”
“······.”
- 끼이이이이이잉!
나르가 정말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 *
김우진은 스스로 나름 괜찮은 육아를 해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저렇게 거친 사춘기를 맞이할 정도로 막하지는
않았다고.
“난 딱히 못된 걸 가르친 적은 없는데.”
“직접 하라고는 안했지만 많이 보여주셨죠. 그리고 어머니 나무께서 물드실 때 가만히 방관하셨고요.”
“귀쟁이를 귀쟁이라고 부르는 게 못된 짓은 아니잖아?”
“그 안이함이 어머니 나무를 저렇게 만들었다고요!”
- 으.
- 으. 이우 이으며?
“그럼 뭐···.”
“잠깐만요! 이유가 있으면 괜찮다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기강을 잡아야 한다며?”
“···그렇긴 한데.”
“나르. 너도 릴리 말 잘 들어.”
- 끼잉.
“착하네.”
다짜고짜 뚝배기를 후려치는 바람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자기 잘못을 사과하고 얌전해진 걸 보면 본성이 나쁘지는
않다.
“데르카인님, 저건···.”
“또 다른 세계수라니.”
“그렇다는 건?”
혐오가 잠깐 스치긴 했으나 굳이 나서서 드워프들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감옥에서 동고동락하고 마물들과 함께
싸우면서 정이 든 탓이다.
“세계수에는 독이 없습니까?”
“신성한 어머니 나무에는 어떤 독기도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거 아쉽네요.”
“안 가보십니까?”
“나무 하나 더 자라난 게 뭐 대수라고. 계속 들어와라.”
지났다고 생각했다.
- 새무하저그 어마!
릴리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김우진 앞으로 날아왔다.
“통신이 왔다고?”
- 으!
- 그보!
“급보요?”
- 그라브드.
“크라프트.”
- 에게스.
“어머니 나무.”
- 소며.
“···소멸이요?”
“···신들이 알베니우스님을 찾아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왔는데 어머니 나무께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시다가 전투가 일어났대요.”
“그리고 죽었다?”
“···네. 컷, 아니 그대로 불태웠다고 하네요.”
- 시아! 시아 주거.
세계수가 택한 건 전자였다.
“작정했군.”
“차라리 잘 됐습니다.”
“잘 됐다고?”
“이걸로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의심을 받지는 않을 테니까요.”
“적어도 저들이 다시 감찰을 보내기 전까지는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감찰이 와도 숨기려면 최대한 숨길 수는
있죠.”
김우진은 데르카인에게 하늘구름을 옮겨 설치할 것은 부탁했다. 릴리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나르의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나르에 비해 릴리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바, 나르가 더 성장하지 않는다면 속일 수 있을 거다. 좀 나중에 온다면
모르겠지만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참지 못하고 바로 올 거다.
“···김우진.”
“두리쉬마님?”
대신 다른 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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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83. 떡 >
“···미안하다, 김우진.”
“일단 차 한 잔 드시죠.”
“고맙다.”
타이탄은 애초에 공간 계열의 권능이 없다. 거의 다루어 보지 않은 힘을 다루는 것은 어렵고 빈틈이 많다.
“내가 은신하고 있는 차원으로 놈들이 왔다. 처음에는 기꺼웠으나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신들이 무려 35 명이었다.”
미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미 멸망을 맞이한 종말 차원은 마기로 인해 신력의 흐름이 원활하지는 않지만 하위 차원처럼 힘 자체가
제약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변방 차원 백 여 개를 넘나들며 추격전을 벌였다. 차원마다 존재하는 모든 마물들을 이용해 그들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허무하게 이대로 끝이구나 싶을 때, 네가 생각났다.”
두리쉬마는 어둠에게 받은 권능을 이용했다. 어둠의 분신. 자신의 모든 힘을 투영시킨 분신으로 하여금 신들에게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본체는 현장을 벗어났다.
두리쉬마는 10cm 정도의 작은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거인이라기보다는 인형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형태.
“헌데 무사히 탈출하고 나서도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이곳 연옥을 중심으로 꽤 탄탄한 포위망이 구성되어
있던데.”
“포위망이요?”
“그래. 신과 집행자들이 연옥 안으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더군. 몰랐나?”
“몰랐습니다.”
왜?
- 으!
아무래도 지난번에 두리쉬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두리쉬마가 건네준 물건을 보여준 것 덕분에 알아본 모양이다.
“잘했어.”
- 리리, 자해어?
* * *
그리고 그 끝에서.
타이탄은 신들에 의해 멸종한 종족이었다. 태생적으로 신의 힘을 타고나 신들에게 배척받고 탄압 받다가 종국에는
반기를 들었던 자들.
“어둠의 사도가 되어 있었다. 변방의 차원에서 수십 만 마물들을 이끌고 있더군. 그 차원에서만 그러했으니 다른
차원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마물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놈이구나.”
“놈은 죽였겠지?”
“죽이지 못했다.”
“그런 말을 참으로 당당하게도 하는구나. 타이탄이라면 덩치가 산만한 놈들일 테고 어둠의 사도라면 마기를 풀풀
풍길 텐데 그걸 놓쳤다는 거냐?”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거대한 거인과, 마기가 진득한 어둠의 사도와 싸웠다. 그리고 놈을 죽였다. 허나
시체를 확인했을 때, 정작 알맹이가 없었다.”
그러길 한참.
“이틀 전에 이미 신이 선택되었다고?”
“그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무슨 헛소리냐.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신이 죽었다는 소리를 너에게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반응이었지. 잠깐만 설마?”
“그래.”
베리안의 이를 악 물었다.
벌써 두 번 째였다.
* * *
주신께서 말씀하셨다.
주신을 모시는 상위 집행자 페트로 코페르크는 기꺼이 과업을 위해 스스로의 신분을 버렸다.
집행자 당시의 말투와 습관 때문인지 김우진의 경계심을 사기도 했지만 다른 죄수들 덕분에 잘 넘겨왔다.
얼굴을 감추어도 본질적인 기운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그의 정체는 순식간에 들통났고 김우진은 자비를
배풀지 않았다.
맞다. 백신전과 김우진 사이에 맺어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은 집행자들의 안위까지 신경써주지 않는다.
“···주신이시여.”
메마른 입술에서는 갈라진 목소리가 나온다. 부러진 육지에서는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은 여전히 뇌리를 찌른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그 순간이었다.
번쩍-
빛이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신.
“···내가 진짜로!”
신이 되었다.
각성의 빛의 영향인지 구속구는 전부 먹통이 되었다. 부러진 육지가 저절로 맞춰졌고 상처들은 모두 회복되었다.
철컥-
신들이 만든 기능이 삭제된 구속구는 그저 하찮은 금속에 불과했다. 페트로 코프르크가 가볍게 그것들을 끊어냈다.
“마, 맙소사···!”
───!
집행자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섬광이 모든 것을 꿰뚫었다. 그대로 교도관의 몸까지 뚫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엉, 격렬한 파공음이 지하 감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페트로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었다.
“···김우진!”
죽일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살려두고 있던 놈이 신이 되다니.
“이게 웬 떡이야.”
김우진이 웃었다.
───────────────
# < 084. 연옥의 작은 아이들 >
신들은 그를 엿 먹이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으나 연달아 실패했다. 신의 자존심은 구겨졌고 반드시 성공할 한
방이 필요했을 거다.
주신의 최측근 집행자는, 다음 신에 가장 근접한 자는 어떻게 보면 가장 믿음직스러운 적임자였다.
“백신전이 또 다시 뒤집어졌겠군.”
세계수들의 거름으로 삼는 것.
신들의 입장에서 율리아는 정말 갑자기 솟아난 불청객이다. 때문에 그녀가 신이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도,
그녀라고 특정할 수도 없다.
“소장님.”
* * *
출소.
탈옥하거나.
자연사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들이 내려준 용사의 힘, 즉 신의 힘을 포기하고 자진 출소하거나.
“나가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신이 됨으로서 안색이 훨씬 나아진 페트로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 먹어서 그런지 신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공손했다.
후룩,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적당한 초콜릿이 뒤섞인 모카는 언제나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신이 되기 전에는 네 주인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서였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않으니까 이곳에 붙어
있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네 주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래, 책임이다.
의무와 책임은 둘 다 해야만 하는 일임에는 같지만 연옥에서의 의무와 책임은 아주 간단하게 구분이 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돼. 여기서는 내가 왕이고 법이거든. 죄수들 중에 너 같은 양반이 하나 있지. 탈옥을 하려고 했다가
수틀리니까 자진 출소를 하겠다고 했거든.”
탁, 김우진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지하 감옥에 있습니까?”
“아니, 신들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루 종일 공방에서 무기를 만들고 있어. 여기서 요지가 뭔 것 같아?”
“···출소는 불가능하다?”
“아니지. 너도 항복하면 행복한 연옥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주신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세계수들의 포용 한계가 이미 차버렸다는 점이, 그리고 백신전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빼내갈 것이라는 점이 김우진의 마음을 돌렸다.
“네가 할 건 간단해.”
집행자의 상태라면 모를까, 그는 지금 신이었다. 분명히 주신께서는 그를 구해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그게 맞긴 해.”
그래서 김우진은 페트로와 베리안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페트로와 베리안을 이어주는 권속의 결속.
“끄아아아아악!”
“어, 어떻게···?”
권속 쪽에서 결속을 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결 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괜히 주신이고, 괜히
권속이겠는가. 한 번 묶여 버린 영혼을 쉽게 해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헌데 김우진은 해냈다.
그럼에도 이전이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칼카르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고 그의 불꽃과 융합하면서 그의 능력을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불가능한데 풀렸다.
“자, 다시 물을게.”
* * *
- 새 도새?
10cm 의 두리쉬마가 릴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릴리는 새로운 식구가 반가운지 끊임없이 주변을 서성였다.
- 끼잉?
“···신세가 처량하군.”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두리쉬마의 정체를 모른다. 그만큼 그가 완벽하게 기운을 감추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신들과의 전투에서 모든 마기를 소모해 전력이 급감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두리쉬마는 세상을 벌벌 떨게 하는 어둠의 사도이자 타이탄이 아니라 귀여운 소인족이 되었다.
이 천진난만한 악동들은 그를 자신들의 동지라 여기고 있었다. 세계수가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단순히 크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 노자.
“놀지 않는다. 난 잃어버린 마기를 모아야 한다.”
- 마기?
- 끼잉?
물론 신들에게서 그나마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이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빛과 신의 힘이 충만한 이곳에서 마기를
모은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고난이었다.
“마기가 많은 곳을 안다고?”
- 으!
- 여노 아네.
“연옥 안에 마기가 넘쳐나는 공간이 있다니? 그랬다면 김우진이 내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 아려주며 치구?
- 나 리리.
- 낑 끼잉.
- 아려져?
- 끼잉?
- 아라. 조자 치구.
- 다라아.
- 끼깅!
공기 중에 떠도는 마기와 독기가 그대로 두리쉬마에게 빨려 들어왔다. 어둠의 사도에게 반응한 마기들이 스스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 으!
- 낑!
“강민식.”
“제, 제 꺼!”
“비켜라.”
“이건 제겁니다! 제가 노력해서 만든 제 독입니다!”
- 어디?
- 조자!
───────────────
# < 085. 판 >
“무슨 일입니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 하마!
- 끼잉!
- 아냐?
- 낑?
고개를 갸웃거리는 릴리와 나르의 모습이 썩 귀여웠다. 김우진은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렸다.
- 치구!
- 끼잉!
“차를 드시겠습니까?”
“커피인지 뭔지, 그게 맛있더군.”
- 나!
당연히 중앙에 근접하고 신들의 기운이 충만한 연옥에는 마기가 없었다. 그나마 현재 잔재가 남은 건 얼마 전
있었던 마물 침공 덕분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두리쉬마는 굴욕을 감수하고 연옥으로 왔다. 백신전을 부수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기에.
강민식은 두 번의 마물 침공에 연이어 막대한 마기를 흡수했다. 마기는 마물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중독시키고
파괴하는 독기이기 때문이다.
신 후보자들의 성장을 위해 김우진은 습격 이후, 마물들의 시체를 모아 강민식이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막대한 마기와 독기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정수를 만들었다.
- 아이다!
- 끼이끼!
마기와 마나는 상극이다. 자연스레 강민식에 의해 응축된 마기의 독은 신과 집행자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마력포에 담아 쏘아내려고 했던 건데···.
어째서? 왜?
“그게 무엇일까요?”
“글쎄, 여러 가지를 생가해 볼 수는 있을 거다. 신들이 너를 이곳에 더 오래 붙잡아두기 위해 꽤 많은 짓을
했다고 했었지?”
“예.”
강민식이나 강민식처럼 작업을 해놓은 죄수들을 넣거나, 마물들을 보내거나, 집행자를 넣거나.
“다 실패했고.”
“네.”
“그때마다 신들은 꽤 큰 피해를 입었고.”
“그렇죠. 일단 드네르바가 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도망쳤고 베른은 실종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알베니우스를 쫓아왔던 칼카르가 죽었고 델라푸스마저 실종됐지. 저들은 알베니우스와 네가 이미
만났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거다.”
“그렇겠죠.”
해봤다. 그래서 놈들이 반드시 두 번째, 세 번째 수작을 벌여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김우진과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으로 묶여 있다. 계약이 완수되지 않는 이상, 그를 죽일 수 없다. 연옥
내에서는 아예 공격할 수도.
“신들이 너를 연옥에 묶어둔 이유는 그게 더 이득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너의 행보가
저들에게 크나 큰 경각심을 주기 충분했다.”
“···확실히.”
“50 명의 용사들을 출소시킬 때까지 계약이 유지된다고 했었나? 나라면 50 명의 용사들을 죄수로 보내 모두 자진
출소하게 만들 거다.”
“바로 그거예요.”
지금은 준비 기간이다. 새로운 죄수들을 모을 시간. 새로운 용사들을 발탁하든, 집행자들을 죄수로 만들든
시간이 필요한 거다.
“만약 그렇다면 그 경각심은 너뿐만이 아니라 나의 영향도 있을 거다. 나라는 존재가 들켜버려서 너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어졌다는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확신이 생기네요.”
“···잠깐만.”
계약?
김우진이 눈을 빛냈다.
* * *
“저 때문일까요?”
비록 세계수를 협박하기 했지만 실제로 그건 세계수를 위해서였다. 김우진에게 본체가 반쯤 불타는 것보다는
그녀에게 한 소리 듣는 게 나으니까.
신들은 반드시 씨앗을 건넨 세계수를 찾고자 했으니까. 그 의지는 크라프트의 세계수를 불태움으로서 드러났다.
복수심을 불태워야지.
“맞아요.”
그만큼 신들의 소환에는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하긴, 모두 자신들의 체스말로 여기는 족속들인데
피조물 따위를 배려할 리가 없다.
그제야 시에나는 글라크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소장은 자신이 용사였다는 것을 죄수들에게
밝히지 않았었다.
율리아가 침울해졌다.
“···미친.”
엄청나게.
───────────────
# < 086. 방안 >
“그래.”
“김우진을 묶어두기 위해서 계약을 맺었다. 더 묶어두기 위해서 죄수들을 구슬리고 투입시켰다. 헌데 이제와서
계약을 우리의 손으로 끝내버리겠다고?”
“그러면 너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나? 우리는 그날, 그 자리에서 김우진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건 더 큰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주신들이 나선다면 피해는 줄어들겠지만 김우진은 영약한 자다. 작정하고 도망치며 다른 신들을 노린다면
추가적인 피해는 반드시 있었다.
때마침 연옥의 새로운 소장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계약을 어긴다는 빌미로 잘하면 김우진을 평생 묶어 둘 수도
있었다.
힘이 없어서 김우진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다. 김우진을 옭아맬 그물이 아니라 놈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버린
계약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지면 신들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
신 한두 명의 피해만 감수한다면.
“김우진이 쉽게 당할 것 같나?”
“물론 순순히 당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놈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차원은 많지만 종말 위기에 처한 차원은 흔하지 않고, 그런 차원을 구원한 용사는 더욱 희소하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차원은 종말을 맞이하고, 용사들이 발탁되며, 차원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또 다시 집행자를 밀어 넣지 않고?”
집행자는 엄연히 차원을 구했던 용사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연옥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했다.
“디아네가 있으니까.”
출소와는 별개로 김우진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사지로 걸어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는 없다.
물론 명령하면 가기야 하겠지만 그냥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다. 어차피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니까.
페트로가 아니면 없다. 집행자들이란 신들의 손과 발이기도 하지만 만약을 대비한 예비 신이기도 하다.
“데리고 오지 않을 생각인가?”
“데리고 오려면 데리고 올 수는 있겠지. 허나, 김우진이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다.”
어차피 죄수들을 모두 보내고 전쟁이 벌어지면 김우진은 죽는다. 자연스레 페트로는 백신전의 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리가.
그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베리안이 중얼거렸다.
권속이 주신과의 연결을 끊었다는 것은 주신에게 더 없는 수치다. 때문에 베리안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 * *
“음.”
“···죽겠지.”
패배한다. 반드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세계수의 뿌리는 차원의 핵에 닿아 있고 세계에 간섭할 수 있다. 당연히 차원의 방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문을
아예 폐쇄해 버릴 수도 있다.
“다른 방법 없습니까?”
“네가 원하면 이주일인가 닫을 수 있지 않니?”
“됩니다. 딱 이주지만 그것도 일단 써먹죠.”
타르칸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희 부족에서 다른 부족을 뜯어먹을 때 많이 쓰던 방법인데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러 오라고 해놓고 오면
족장님이 아프다고 만나주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한 기한이 지나면 그걸 명분으로 전쟁을···.”
“딱 당신 같은 짐승이랑 어울리는 추한 방법입니다.”
“뭐라고?”
“소장님,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최곤데요.”
김우진도 마찬가지였다.
꽤 많이.
* * *
“내, 내 피와 땀이···.”
마물에게서 흡수한 마기와 독기를 정제한 것. 신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비밀 병기로 생각하고 열심히 뽑아냈더니
그게 애먼 불청객의 입 속으로 다 들어가고 있었다.
“···두리쉬마.”
“음? 불렀나?”
“아니, 아닙니다.”
쨍그랑, 두리쉬마가 마지막 빈 병을 내던졌다. 끄억, 거칠게 트름을 하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가볍게 손을 뻗자
어딘가에 있던 자그마한 망치가 날아와 안착했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
만전일 때에 비하면 역시나 한참 부족하다. 특히나 최근에는 칼카르를 죽이고 그 업을 흡수했기에 느껴지는
괴리감은 더 컸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어?”
강민식이 당황하며 눈을 몇 번 껌뻑였을 때, 자그마한 10cm 의 소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2m 에 가까운 근육질의
남자가 서 있을 뿐.
“따라와라.”
“크하하하, 타이탄이라더니 화끈하구나! 좋다!”
“너한테 예의와 존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마.”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타이탄.’
소장님이 엄청난 강자라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잃은 상태라고. 그럼에도 자신과 좋은 상대가 될 거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과거에 얼마나 대단했든, 지금은 그냥 작은 소인에 불과했다. 힘을 얼마나 잃어버렸든, 당장 느껴지는 기운은
약해 빠졌다.
그런데 적수라고?
“선공은 양보하겠다.”
“고맙군.”
그와 동시에.
“······!”
────!
그 한 방으로 상대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깨달았다. 허나, 타르칸은 본능적으로 대응했다.
무릎을 굽히며 한 걸음 물러나 최대한 충격을 흘리고 욱신거리는 팔에 힘을 주며 힘을 토해낸 망치를 밀어낸다.
가볍게 열리는 상대의 상체에 손톱을 들이민다.
카각!
손톱이 빠질 것 같은 아픔에 타르칸이 신음을 흘린다. 상대의 피부는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었다.
“과연···!”
상대는 강하나 그렇기에 더욱 싸울 가치가 있다. 짐승의 투지는 꺾이기는 커녕 더욱 세차게 타오른다.
─!
──!
주먹은 할 만하다. 허나 망치는 너무도 무겁다. 망치에 담긴 거력은 너무도 쉽게 그의 오러를 깨부수며 전진한다.
충격이 누적된 근육이 파열하며 더욱 큰 고통을 선사한다.
하지만 최근,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장님과의 실전은 그를 잘 벼려진 한 자루의 칼날로 만들었다.
그 증거로 상처의 비율은 타르칸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상대에게도 분명히 새겨지고 있다.
통한다.
감각을 곧추세우고 아픔을 잊는다. 마기에 저항하느라 비명을 지르는 심장을 쥐어짜내며 더욱 마력을 끌어 올린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 삼켰던 충격파가 사라진 자리에는 기절한 짐승과 그를 내려다보는 두리쉬마가 있었다.
“···재미있군.”
강하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적어도 지금 당장 타르칸을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의 탄생은 곧 기존 신의
죽음을 뜻하니.
“찾았다.”
───────────────
# < 087. 경계 중 이상 무 >
수인들이 원래 그렇다.
아주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그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 실전으로 육체가 단련되고, 경험이 축적된다.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 짐승들은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언뜻 보면 그렇게 단순하다.
만약 연옥에 들어온 처음부터 수인들과 매일 같이 대련을 해줬다면 어느 수준까지 올랐을까하는 가정도 들었지만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신을 죽여 업을 쌓는다.’
그것으로 힘을 회복한다.
신들을 세계수의 배터리로 써 먹는 건 여전히 효과적이지만 하나 정도가 빠진다고 큰 문제가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김우진은 타르칸을 비롯한 죄수들의 수준이 어지간한 집행자들을 씹어먹을 정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은 또
다르다.
신들을 제외하고 가장 신에 근접한 자. 율리아는 세계수의 열매라는 기적까지 따라주어 그 자격을 갖추었으나
타르칸은 아니었다.
어쨌든 수인에게 있어 실전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 김우진과 두리쉬마,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강자가 번갈아
가며 실전처럼 붙어준다면 과연 신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최대한 종식시킬 수 있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났다.
* * *
그리고 수인은 때릴수록 강해진다. 어느 만화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수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그래, 바로 이거다.”
번쩍, 한 줄기 빛이 차원을 그대로 관통하여 타르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빛 줄기가 사그라진 자리에는 한
마리의 짐승이 신이 된 채 서 있었다.
“이게 신의 힘···!”
그래서일거다.
“어, 어째서···?”
그렇게 신이 하나 늘었다.
* * *
“···음?”
이번에도.
“또 없다는 말입니까?”
“미치겠군.”
그 망할 타이탄 놈.
“선을 넘지 마라, 알비츠.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은 방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더 많다.
너라도 마찬가지일 터.”
“우리는 계속해서 농락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명확한 주체도 모르지. 그런 상황에서 너는 여전히 아카식
레코드랑 허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우스운 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주신 중 하나인 베리안이 생각보다 태평해 보인다는 것이다.
아카식 레코드? 좋다. 그 기록에는 모든 게 있으니 당연히 뒤지다 보면 답이 나온다. 하지만 그 방대함은
주신이라 해도 몇 백년, 몇 천년이 걸릴지 모른다.
‘칼카르만 있었어도.’
같은 주신이라고 한들 균형이 완전히 딱 떨어지지 않는다. 셋이서 맞추고 있던 균형이 깨어지자 베리안이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기색이 늘어났다.
허나 가장 그럴듯하다.
무엇보다.
“때마침 준비도 끝났다.”
죄수들이 모두 모였다.
* * *
“더 많아졌군.”
정면승부는 답이 없다. 김우진의 말대로 잘 되어 시간이 끌리고 이쪽의 전력을 올려야 한다.
이미 신이 된 율리아 카르센, 그리고 신 후보로 만들고자 하는 타르칸 톨리스, 시에나 올름, 데르카인 알베트,
강민식, 베르너 레트만, 디아네 디트린까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일곱의 신이 아군이 된다. 일곱의 신에 김우진을 포함하면 정말 더 없이 강력한 전력이 된다.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종말 차원에 던져놔서 전원이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꽤나 업을 쌓았을 거다.
- 뭐?
- 가?
- 근무.
“근무?”
- 소장. 경계.
- 응.
두 그루의 세계수가 연옥에 뿌리를 박았지만 차원 전체에 뿌리를 퍼트린 건 릴리였다. 연옥 전체는 릴리의 손
안에 있었고 차원에 누군가 접근한다면 가장 먼저 반응할 수 있었다.
- 저!
그때 릴리가 날개를 뻗었다. 그녀의 날개 끝에는 연옥으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저건···.’
- 발견. 적.
“빨리, 빨리!”
“마침내 때가 왔다!”
릴리의 날개가 향하는 방향으로 수십개의 마력포대들이 자리했다. 엘프들이 세계수와의 연결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응집!”
“응집!”
- 거리. 약 100km.
“거리 약 100km!”
“방향은 동북!”
- 끼잉, 낑!
- 쏴!
“발포!”
“발포하라!”
─────!
- 처리!
- 이상! 경계 무!
───────────────
# < 088. 유예 >
수차례의 실패와 개량을 거듭하며 완성된 마력포들은 생각 이상의 준수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죄수들은 모조리 쓸려나갔고 호송관 역할을 하는 집행자들도 정면으로 맞은 놈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베리안의 반응을 보니 더욱 더.
“물론이다. 죄수를 맞이할 준비를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허나, 너도 알다시피 최근 들어 마물들이 연옥을
침범하는 사태가 한두 번 벌어진 게 아니다 보니 모두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착각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심심한 사과를 건네지.”
“내가? 그럴 리가.”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일단 계약의 문제는 없는데. 그들은 죄수(진)이었지 아직 죄수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죽은 자들 중에 신이 있었나?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기대되네.”
- 잘했어. 나?
“그래. 너무 잘했어.”
그런데 세 달 동안 드워프들은 개량과 보강을 반복하며 쓸만한 마력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쓸만함의 기준은
신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아주 만족할 만한 성과다.
- 응. 이상 무. 경계.
“그럼 이제 가서 쉬어.”
저렇게 보니 역시 아이는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있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둘이서 알아서 잘
논다나.
똑똑-
“들어오십시오.”
“신들의 반응이 어땠지?”
“손님입니까?”
“네가 불렀으니까 손님이지.”
딴에는 맞는 말이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지?”
“만약 릴리가 신을 완전히 빨아먹어버리면 남은 미라는 신입니까, 아닙니까?”
“갑자기?”
“마력포를 보니 조금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개량에 개량을 거쳤고 지금도 거치고 있는 마력포의 화력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세계수들에게서 받는 에너지가 많아진다는 소리였다.
“아직 멀었다만.”
“아직이 언제 이제가 될지 모르는 겁니다.”
“뭐, 그렇긴 하지. 아마도 신일 거다.”
“뭡니까, 그 모호한 대답은.”
“내가 신이 되어본 것도 아니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 않느냐.”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알베니우스님이 알고 있는 선에서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하트가 파괴 되어도 격을
잃지는 않는 겁니까?”
“내가 알기론 그래. 신의 격은 단순히 강하다는 차원을 넘어선 무언가니까.”
제법 납득이 갔다.
“그리고 애초에 쓸데없는 걱정이야. 세계수가 단순히 신들의 힘을 통과하고 정제하는 통로라고 생각해?
세계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걸 보고도 모르겠어?”
“물론 그건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드워프들의 집착이 점점 더 심해지는 꼴을 보니···.”
“통신구?”
“···백신전 직통입니다.”
갑자기 왜 다시?
“무슨 일이지?”
“죄수들이 온 답니다.”
“다시 온다고?”
“예. 내일 바로 온다네요.”
“김우진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아무리 그렇다고 진짜로 죄수들을 몰살 시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죄수가 아니다. 죄수가 되기 직전의 용사지. 놈의 말대로 계약서상의 문제는 없다.”
“넌 누구의 편이냐, 베리안.”
“당연히 백신전의 편이다. 그러니 이런 일을 대비해서 대안을 만들어놓지 않았느냐.”
“내일 바로 가라.”
“그러지.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직접 가보겠다.”
굳이 86 명이 아닌 93 명을 모은 건 또 다른 수작에 대한 대비였다.
“놈의 반응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김우진은 은근히 표정 관리가 잘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황했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죄수들을 몰살시키고 백신전에 큰 엿을 선사했던 그 광선이다. 느껴지는 신력으로 미루어 보아 동력은 아마도
세계수겠지.
─────!
“과연.”
포격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신력을 머금은 포격이 100km 를 주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였다.
─────!
문은 잠겨 있었다. 주신으로서 가진 권능도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안다. 세계수를 이용해 출입을 통제해버린
거다. 아무리 그가 주신이라고 할지라도 차원 하나에 대한 간섭은 차원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만 못하다.
베리안이 힘을 끌어 모았다. 빛이 환하게 일렁였다. 내리 치려는 순간, 차원의 방벽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하하···!”
이주 뒤가 김우진의 마지막이다.
그는 확신했다.
* * *
하지만 주신의 위엄과 신앙을 퍼트리는 것은 당연한 건데···. 디아네가 구석으로 쪼그라들었다.
맨 처음이 율리아였고 타르칸까지 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직이다. 지난 3 개월간 꾸준히 훈련을 거듭해
모두 성장하긴 했지만 타르칸만큼의 확신은 없었다.
주로 타르칸에게 집중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때 놈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설마 그런 상황에서 공격당할 줄은, 이곳에 여섯의 신이 있을 줄은 모를 겁니다.”
“불가능하다고 본다. 상대는 주신이고 저놈들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어. 전투가 벌어지면 신들이 달려올 거다.”
“그럼 바로 튀어야죠. 일단 해보고 아니면 마는 겁니다.”
“신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싸움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의미가 없어져서요.”
───────────────
# < 089. 억울함 >
교도관과 죄수, 그리고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자들까지. 연옥의 구성원들은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김우진은 여섯 명 모두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박차를 가했고 두 그루의 세계수를 심으면서 쑥쑥 자라나는 영약은
거기에 도움을 주었다.
“훈련? 물론 훈련도 좋네만, 일단은 마력포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게 먼저 아니겠나? 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신에게 확실하게 통하게끔···!”
“신이 되시는 게 우선입니다. 신이 되고 마력포를 만들면 마력포의 성능도 올라갈 겁니다.”
“정말인가?”
아마도 그럴 거다. 김우진이 신이 되어보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도구는 제작자의 마력이 깃든다.
당연히 용사인 데르카인보다는 신 데르카인의 신력이 마력포의 성능을 올린다에 손모가지를 걸 수도 있었다.
하긴, 이곳의 용사들 치고 신들을 좋아하는 자는 없다. 그들의 요청으로 세상을 구원했더니 자유를 박탈당하고
선택을 강요당했다.
“알베니우스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신들이 죽어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세계수들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고 그만큼 세계수들은 성장했다고.”
“그럼 준 무한동력 정도는 되겠군?”
“세계수를 무한동력 취급하는 것도 그만두세요. 그러니까 릴리가 데르카인님을 난쟁이라고 부르면서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미움 좀 받으면 어떤가. 나는 그 어떤 드워프도 해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을 하고 있는데!”
“뭐, 마력포를 부탁한 입장에서 저도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긴 하죠.”
영약을 먹이고.
물론 고작 이주만에 그렇다고 신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의문이지만 다른 자들에 비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틈틈이
노력을 해왔으니 최선을 다해볼 수밖에.
죽기 싫으면 하겠지.
“···잠깐만! 훈련을 할 때, 하더라도 밥은 먹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시간 없어.”
“이번에 도축장에서 페이그람을 잡았습니다.”
페이그람은 돼지를 닮은 몬스터로 몬스터답지 않게 육질이 부드럽고 단백질과 지방의 조화가 좋은 놈이었다.
몬스터 특유의 독기와 악취가 문제지만 베르너의 손길을 만나면 천상의 진미로 바뀐다.
“···좋아.”
“꾸에에엑!”
* * *
그렇기에 그녀의 걱정은 승패 따위가 아니다.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을지.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그분의 곁에
자신이 서 있을 수 있을지.
“끝까지 그 뒤를 따르겠나이다.”
설마 스스로를 신이라고 말하는 날이 올 줄이야. 백신전 놈들은 이 부끄러운 말을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드디어.”
“뭐라고?”
“드디어···! 드디어 스스로를 신이라고 하셨군요!”
“······.”
“···조용.”
“명하신다면.”
“일어나라.”
“예.”
“도끼 들고.”
“예.”
“견뎌.”
콰아아앙!
검이 떨어졌다. 도끼가 간신히 버텼으나 디아네의 두 다리가 종아리까지 대지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혈관이
도드라졌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지난 3 개월간의 훈련이 효과가 있는지 그녀의 마력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정순해졌다. 자연스레 방어하는 불꽃의
소모가 더 커졌다.
미친.
“너.”
“예. 신이시여.”
“신이라고 부르지 말고.”
“하지만 신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른다는 말입니까?”
“소장이라고, 소장.”
“···자각을 하셨음에도 아직 숨기길 원하신다면 이 또한 종의 입장에서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됐고.”
“너 이제 신해도 되겠다.”
때가 되었다는 것.
“소장신이시여! 제가 신이 되었음에도 소장님을 향한 신앙이 굳건하니, 소장님은 신마저 섬기는 신이시니 진정한
주신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 소장신은 또 뭐야.
돌아버리겠네, 진짜.
* * *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이 날을 바라오기는 했다. 세상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주무르는 백신전을 무너트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지인의 복수였으나 이제는 그냥 대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백신전의 방법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계약에 기대어 허점을 이용해 나름 몇 방 먹였다지만 전면전으로 간다면 과연 승산이 있을까.
“역시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건 없단다. 어쩌면 승리할 수도, 어쩌면 패배할 수도 있지.”
그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더 미루어둘 게 무엇인가.
* * *
- 바빠. 다들.
- 끼잉?
- 전쟁. 한대.
- 낑?
- 안 돼.
용납할 수 없다.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미친 짓을 벌이는 난쟁이도, 매일 같이 찾아와 함께 김우진을 신으로 섬기자는 광신도도,
열매를 달라고 징징거리는 인간도, 매일 김우진이나 두리쉬마에게 덤볐다가 기절해있는 시간이 더 많은 짐승도
좋지는 않지만 썩 나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잃고 싶지 않았다.
백신전이 무엇인지, 어째서 전쟁이 벌어지는지 그녀는 몰랐다. 딱히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하나.
그렇기에 그 누구도.
- 못 해. 용납.
- 그렇지?
- 끼잉!
───────────────
# < 090. 하나 더 >
“그거 사망플래그다.”
“사망플래그요? 그게 뭔데요?”
“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세이드에 대해서 듣고 싶다고?”
“네.”
“호위였다고 그랬나?”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세이드라.”
김우진을 제외하면 가장 강했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결국 죽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서로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으니.
“여기까지.”
“···뭘 말하기는 한 건가요?”
“내 마음이야. 나머지는 백신전을 무너트린 뒤에 들어.”
“그런···!”
“억울하면 너도 그때 같이 있던가.”
“그건 완전 억지잖아요.”
“신을 둘 죽이면 알려주지.”
“···좋아요. 정 그러시겠다면.”
“제가 꼭 듣고 말거예요!”
율리아가 사라졌다.
쯧, 김우진이 혀를 찼다.
허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믿고 있는 용사들이 쓰레기처럼 죽어나가는 그런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남았다면, 살아남으려면 누구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 * *
“또 새로운 신이 발탁되었다.”
이제 갓 자란 세계수가?
억압 받는 죄수들이?
고작 항복한 집행자 열 명으로?
신이 괜히 신이라 불리겠는가.
알비츠는 분명히 타이탄을 극한으로 몰아붙였고 놈은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신 여럿을
납치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정말로 김우진이 한 짓이 맞는지 아닌지, 놈을 족치면 확인할 수 있다. 맞다면 정확한 판단이었고 아니라고
할지라도 뒤에 후환을 남겨두고 마물들과 싸울 수는 없다.
때문에 이주일 간의 유예기간이 지났을 때, 알비츠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알비츠는 그의 손으로 확실하게 김우진을 끝내고 싶었다. 그로 인해 손상된 백신전의 위신과 직접적인 피해들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다.
“갔다 오지.”
* * *
───!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강화시켜놨구나.”
“들어···.”
“이건?”
다르다.
카앙, 얼음이 뒤덮인 손이 불의 칼날을 붙잡는다. 얼굴을 마주하고 알비츠가 으득, 이를 갈았다.
밖이지.
“···신이라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신, 신, 신, 신, 신.
“···너구나.”
“너였어···!”
김우진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계하던, 백신전의 위신을 손상시켰던 김우진이 그 난리 속에서 신들을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연옥을 지켜냈다.
하지만 어떻게?
“설마 처음 그 신이···?”
“그래, 저 하이엘프다.”
그래, 그랬다. 처음부터 신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 그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거다. 하물며 하이엘프이니
세계수와의 공조가 얼마나 좋겠는가.
“···이거 설마?”
처음 마주했을 때,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정순하고 뜨겁다. 마치 주신의 불꽃처럼.
포식.
“네놈 설마 칼카르를!”
“그래, 먹었다.”
김우진이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붙잡는 불꽃이 더욱 맹렬히 타올랐고 위기감을 느낀 알비츠 또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김우진이 작정하고 쏟아내는 불꽃은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주신이시여!”
“도우겠나이다!”
칼카르를 먹어치운 김우진이 변수지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연옥을 중심으로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다. 전투
사실을 알면 그 즉시 포위망을 좁히고 김우진을 징죄하려 할 터.
잠깐이면···
“···되는데.”
그림자가 졌다.
알비츠가 절규했다.
김우진이 백신전의 위신에 손상을 입힌 만큼, 그만한 상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맹세코.
이렇게까지 대단하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망치가 떨어진다.
작은 실수일 뿐이다. 조그만 버티면 신들이 온다. 1 대 1 이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죽인다.
찰나의 순간, 알비츠의 눈이 활로를 찾았다. 신들을 토해내고 여전히 닫히지 않는 연옥의 방벽.
저기만 통과하면 된다. 연옥 내에서의 전투는 금지이니 들어가고 지원군이 올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모든 힘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빙정의 폭풍이 일순간 화염을 밀어냈다. 김우진이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신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거대한 얼음의 방패가 어둠의 사도의 망치를 비껴냈다.
넣는 듯 싶었다.
- 너. 못 가.
“···세계수?”
파랑새가 무방비한 그의 싸대기를 후려쳤다. 신의 힘이 농밀한 세계수의 날개는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버텨냈다. 그는 주신이었으니까. 여기서 김우진 따위에게 죽을 자가 아니니까.
- 끼이이잉!
“···세계수가 둘?”
다시 한 번 망치가 떨어졌다.
─────!
우주가 요동쳤다.
───────────────
# < 091. 이야기 >
포위망이 순식간에 좁혀졌고, 수십의 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물량공세에 김우진과 죄수들은
재빠르게 연옥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음.”
“···큰일 난 거 아닌가요?”
“큰일 났지.”
놓쳤다. 어깨를 자르고 중상을 입히긴 했지만 놈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때마침 도착한 신과
집행자들을 방패삼아서.
신들도 두려워하는 그곳의 정체는 모르지만 모두가 기피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굳이 궁금증을
해소하러 갈 필요는 없다.
주신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호송대원으로 따라온 집행자들을 전멸시키고 41 명의 죄수들을 모조리 잡았다.
“비록 감히 소장신님을 사칭하는 악마를 징죄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에게 주신의 저력을 보여주셨으니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입니다.”
정확하다.
전력이 약하다고 평가 받는 것은 김우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저들의 오만함과 어우러져 방심을 유도할
수 있는.
- 응.
- 낑.
전투의 여파로 손상된 차원의 방벽 복구를 부탁하고 교도관과 죄수들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집무실에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아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저.”
“말해.”
“신을 한 명도 죽이진 못했지만 전투는 끝났으니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오염된 차원은 순식간에 종말을 향해 치달았고 신들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용사를 소환했다.
어둠은 인간에게 해츨링을 잃어버린 드래곤을, 분노에 차 인간들의 왕국을 멸망시키다가 죽음 직전까지 몰린
드래곤로드를 사도로 선택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심장은 이미 꿰뚫려 있었고 어둠의 가호를 받았다고 한들 멀쩡히 살아날 수는 없었다.
죽음에서부터 돌아올 수는 있었어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신들은 계속해서 용사를 소환했어.”
그렇게 수십 번, 수 백 번이 반복되고.
용사 ‘김우진’이 소환되었다.
“세이드도 함께.”
* * *
“하아, 하아···!”
알비츠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주신이시여. 상처를···.”
“피해는?”
“그게···.”
“피해를 물었다.”
“모든 죄수들이 죽거나 저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호송대로 나섰던 집행자 열이 죽었으나 다행히 신들의 피해는
없습니다.”
“저들의 피해는?”
“···그게.”
“없구나.”
“자잘한 부상은 있겠지만 유의미한 타격은 없었습니다.”
알비츠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이자 자신의 팔을 자른 김우진에 대한 분노였다.
흘러나오던 피는 멈췄고 도마뱀처럼 솟아난 팔이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주신의 권능은 잃어버린 팔 하나
재생하는 것쯤은 쉬웠다.
“···백신전. 백신전으로 간다.”
“예.”
배신.
대체 왜?
베리안은 알비츠와 함께 그런 구도의 정점이다. 배신할 이유도, 당위성도 없다. 그렇기에 알비츠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백신전 몰래 두 그루의 세계수를 심었다. 칼카르를 죽이고 흡수했으며 여섯의 신들을 만들어냈다.
“주신이시여?”
“가자.”
“예.”
대부분의 신들이 연옥의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참여하고 있었고 전투 이후, 복귀하는 중이었다.
“주신이시여, 괜찮으십니까?”
“김우진 그 놈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습니다!”
“어둠의 사도와 손을 잡다니! 용사라는 자가 자각이 없단 말입니까!”
“칼카르님의 죽음에 김우진이 관여하다니! 놈을 결코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김우진을 죽여야 합니다!”
김우진이 백신전의 위신을 깎아먹으며 여러 문제를 양산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관계의 주도권은 백신전에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 예상이 무참히 깨어졌다. 하물며 김우진은 주신 칼카르를 먹어 주신에 필적하는 강자가 되어버렸다.
자그마한 위기, 위험하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가 턱 밑까지 올라와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베리안은 어디 있지?”
* * *
새하얀 세상, 거대한 기둥. 기둥 바로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베리안이 있었다.
“베리안.”
“왔느냐.”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정말로 몰랐느냐?”
“서두가 빠졌다만.”
“율리아 카르센. 그녀가 신이 되어 있었다. 김우진이 그러더군. 집행자가 아닌 다른 자가 신이 된 첫
번째라고.”
“그걸 믿나?”
“믿고 싶지 않았으나 김우진은 마물 사태 때 신들을 납치했다. 신이 아니라면 연옥에서 놈의 공석을···지금
뭐하는 거지?”
알비츠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곳이 아카식 레코드의 앞이 아니었다면 그의 권능이 베리안을 덮쳐을
지도 모른다.
“네가 끌고 간 죄수들도 전부 죽거나 붙잡혔다. 어둠의 사도는 주신인 우리와 필적하는 강자가 되었고 김우진
또한 칼카르를 먹음으로서 그 정도 수준이 되었지. 시간이 지나면 놈은 더 강해질 거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계약으로 인해 우리는 그 기회를 붙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백신전이다. 조금 흔들릴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물론 패배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한 명의 피해로 막을 것을 열 명, 백 명의 피해로 막게 될 거다.”
그 과정에서 백신전의 치세는 흔들리고 마물들이 범람할 거다. 악순환이 계속되며 이 우주 전체가 흔들린다.
“백신전은 신들의 집합체다. 그리고 우리는 주신이다. 신이 무엇이냐. 전지전능한 존재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자를 진정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신격을 아카식 레코드가 준 것이다.”
“그래서 더 문제라는 거다.”
명색이 주신이라면서 아카식 레코드의 눈치나 보며 살살 기어야 한다니.
선택되는 신. 그것 또한 옳지 않다.
“네가 아주 돌아버렸구나!”
“그래서 한편으로는 김우진에게 감사하고 있다. 버러지 하나를 치워준 것에. 도구 주제에 적당한 쓰임을 모르고
그 이상으로 설치고 있지만 말이다.”
“···네놈 설마.”
알비츠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 순간.
───!
아카식 레코드의 주변은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으로 점철되어 있다. 더 없이 신성한 곳.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
“물론 단순히 이곳에서 힘을 사용하는 것과 계약서를 무효로 돌리는 건 꽤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네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나를 따르거나.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거나.”
선택해라.
───────────────
# < 092. 용사 김우진(1) >
수도 없이 죽어나간 용사들, 멸망한 왕국들, 인류의 시체를 양분삼아 더욱 커지는 언데드 군단.
그럼에도 인류가 버티고 또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신들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용사들이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퉤, 김우진이 입 안에 뭉친 핏덩이를 뱉어냈다. 새카만 핏덩이가 마물의 시체들 사이에 떨어진다. 대부분은 피가
존재하지 않는 언데드들이다.
콰직-
“그만 가시죠.”
“예!”
불꽃은 순식간에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을 태워냈고 시체들을 한 곳에 모은 병사들이 재정비를 마치고 김우진의
명령에 따랐다.
인류 연합군. 수십 개가 넘는 왕국과 제국들은 대부분 멸망하고 이제 고작 10 개의 왕국들만이 남았다. 그들은
살기 위해 뭉쳤고 용사들과 함께 나름의 성과를 내며 악착 같이 버텨내고 있었다.
왕도로 돌아오자 그들의 승전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김우진과 세이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움직였던 여덟
명의 용사들은 왕 앞에 섰다.
성대한 연회가 이어졌다. 몇 몇 용사들은 명성에 이끌려 다가온 자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현재 존재하는
용사들의 최고참인 김우진과 세이드는 구석에 앉아 멍하니 연회장을 지켜볼 뿐이었다.
“예쁘냐?”
“꺼져라. 이제 200 을 갓 넘은 어린 아이다.”
“그게 어린 거면 나는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해.”
“···인간과 엘프는 다르다.”
“그러시겠지.”
“지쳤나?”
“조금.”
“승전이기에 그렇습니다.”
누군가 다가왔다. 푸른 머리의 중년 여인. 비른델이라는 글라크 출신의 마법사였다. 겉모습은 40 언저리로
보이지만 실상은 80 이 넘는 대마법사였다.
피난민이 줄을 이었고 어디를 가든 마물과 죽음이 가득했다. 신들이 소환한 용사들도 속절없이 패퇴했고
희망이라는 불꽃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조금 더 특별한 용사.
버틴다. 적어도 버텨낼 수라도 있다. 항상 죽음과 멸망의 공포에 싸워야 했던 인류는 처음으로 희망을 맛보았다.
“이해를 바라지도, 저희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들 입장에서 저희는 천하의 악마겠지요.”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세이드의 즉답에 김우진이 토를 달았지만 별 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다가온 종말이 문제지, 살기 위해 발악하는 이들이 문제겠는가.
“어디 가십니까?”
“따분해서 좀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실례가 된 건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김우진이 사라졌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 혹시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아직이군요. 뭐, 어차피 곧 듣게 되실 테니 큰 문제는 없겠지요.”
“조만간···.”
* * *
“용사님!”
“김우진 용사님이다!”
“용사님 만세!”
“용사님 사랑해요!”
왕도 전체가 축제로 떠들썩하다. 작은 승리로 일구어낸 짧은 평화. 사람들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꽃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만들면서도 더욱 무거운 책임감으로 그를 억누른다.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허나, 이들 앞에서는 드러낼 수 없었다. 김우진은 사람들의 환호를 적절히 받아
넘기며 마음 편히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왕도는 아니다. 왕도 전체가 축제이니 밖으로 나갔다. 말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조금이나마 답답함이 가셨다.
불꽃이 넘실거리며 주변을 뒤덮는다. 열기가 치솟고 하늘이 붉게 물든다. 허나 불꽃은 그 어느 것 하나 태우지
않는다.
“···굉장하군.”
‘어느 틈에?’
등 뒤에서 나타날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용사가 되고 영웅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런 경우는
없었다.
“누굽니까.”
새하얀 백발의 남자였다. 겉보기에는 대략 30 세 초반쯤의 미남이었으나 어쩐지 병약해보였다.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떠돌이?”
강자다. 그러나 김우진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였다. 연합의 영웅이 되면서 인류에서 한가닥하는 놈들은 다
만나봤으나 저런 자는 없었다.
“당신, 누구지?”
“말해줘야 하나?”
“내 검이 당신의 목을 가르는 게 싫다면.”
“그럴 수는 있고?”
“더 없이 자연에 가까운 순수한 불꽃. 내가 알기로 그런 불꽃을 사용하는 족속들은 하나뿐이야. 아, 계약을
한다고 치면 인간들도 가능하긴 하지. 어디까지나 빌리는 거지만.”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시선이 부딪혔다. 김우진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의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침묵을
깨트린 건 남자쪽이었다.
“뭐, 그렇긴 해. 싫으면 말아라. 말했다시피 굳이 싸울 생각은 없거든. 그냥 궁금해서 홀리듯이 온 것뿐이라.”
“멈춰.”
정체가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마물이 아닌 이상, 이 대륙을 밟고 살아가는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 종말에
맞서 싸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 이곳의 사람들은 그저 전선이 고착화되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보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시간을 조금 더 끌 뿐, 멸망을 막을 수는 없어. 용사들 조금으로는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그래 보이더군.”
“그런데 너 만한 강자가 여태까지 숨어 있었고 지금도 발을 빼겠다고?”
사악-
그 순간.
“어···?”
“커헉···!”
‘뭐지···?’
“어떻게···?”
“잘. 이제 좀 가도 될까?”
“어떻게 했냐고 물었어···!”
“별 것 없어. 그냥 힘으로 네 불꽃도 오러도 모두 찍어 누른 거야.”
“그런 게 가능할리가···!”
“왜 없어. 여기 있는데.”
남자가 웃었다.
또박 또박 다시 한 번 말했다.
───────────────
# < 093. 용사 김우진(2) >
차원, 클라크의 종말이 시작된 이후, 인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평화를 만끽한 적이 없었다.
전투 이후의 짧은 연회나 축제는 말 그대로 틈새의 안식에 불과했다. 언데드가 주축이 된 마물들은 언제나 인류의
영역을 침공했고 인류는 그것들을 막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 대륙 전체를 아우르던 인류는 동남쪽 끝까지 밀렸고, 수십 개가 넘어가던 제국과 왕국들은 이제
고작 10 개밖에 남지 않았다.
‘알베니우스.’
역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고 역사서에도 없다. 왕도의 도서관에서 역사서를 뒤적이던 김우진이 책을 덮었다.
그건 더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알베니우스는 용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에게 부여받은 용사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
‘대체 뭐지?’
이게 가능한 건가?
그의 불꽃은 정령왕의 것이었다. 정령왕과 합일했던 하이엘프의 유지에 따라 정수를 흡수했다. 더 없이 순수한
불꽃. 쉽게 깨어지지도, 깨어질 수도 없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마하르 왕국 서부 이스텐 영지 방면으로 대규모 언데드 군단이 진군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마하르 왕국은
연합에 정식으로 김우진의 출정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이틀 후, 김우진은 세이드를 비롯한 열 명의 용사들, 그리고 일천의 병사들과 함께 마하르 왕국으로 떠나야 했다.
“오래 안 걸려.”
아마도?
“국왕이 널 보고 싶어 하던데.”
“알아서 잘 둘러대 줘. 보나마나 또 왕녀와 만찬을 하라는 거겠지.”
이곳, 비엔데르크 왕국만 특별한 건 아니었다. 세상은 빠르게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강자에게 의탁하는
것은, 강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생존 본능이다.
김우진은 글라크 최고, 최강의 용사이자 유일한 희망이며 누구든 손에 넣고, 품에 쥐고 싶어 하는 최고의 인재다.
공주나 왕녀가 존재하는 모든 왕국에서 매파를 보냈으며 직계 공주가 없는 자들은 방계를 찾아서라도 보냈다.
“기한 내에 돌아온다면 상관은 없다만, 적어도 어디 가는지는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왕도 외곽.”
“무얼 하러?”
“그냥 산책.”
“그렇게 말해두지.”
똑똑-
“들어오십시오.”
아이닌은 비엔데르크 왕국의 왕녀였다. 선왕의 늦둥이이자, 현 국왕의 동생으로 국왕이 김우진과 혼인을 시키고자
애를 쓰는 여인.
김우진이라는 하나뿐인 용사를 사이에 두고 치정을 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물론 세이드가 보기에
김우진은 둘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우정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허나 저희가 안지도 꽤 되었는데 용사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정도는
말씀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김우진은 제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알리나가 힘없이 문을 닫았다. 그 직후,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김우진을 찾아 드레스를 들고 달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를 믿고 따르던 자식 같은 아이.
“율리아.”
김우진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세이드에게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종말을 막고 돌아갈
것이다. 반드시.
그가 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똑똑-
* * *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일대. 알베니우스에게 저항하느라 조절하지 못한 불꽃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김우진은 은은하게 느껴지는 잔열을 식히며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알베니우스의 존재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떠났나?’
떠났든, 떠나지 않았든 김우진보다 강자다. 작정하고 숨기면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정령왕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말미암아 탄생한 불의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왜 또 온 거냐.”
“생각보다 일찍 나타났군요.”
“갑자기 말투가 착해졌다?”
“막나가도 되는 놈과 그렇지 않은 놈은 구분하는 편이라.”
“아주 막무가내군. 인류의 용사, 다른 용사들의 유지를 받은 진정한 영웅. 거리에 조금만 나가봐도 네 이야기로
떠들썩한데 모를 수가 있나.”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였군요. 음, 좋습니다.”
“어째 네가 나를 취조하는 것 같은데.”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
알베니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어떠한 기세도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피부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정령왕을 현신시킨 하이엘프 용사의 희생 덕분에 사룡, 티타니아드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다.
쯧, 알베니우스가 혀를 찼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어차피 저도 이판사판입니다.
“···따라와라.”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아니, 입구는 작았으나 내부는 엄청나게 큰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내 보금자리다.”
“말했다시피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걱정 마라.
아마도.
───────────────
# < 094. 용사 김우진(3) >
“이전보다 더 능숙해졌다.”
“갑자기 뭐가?”
“네 놈 말이다. 이미 정순한 정령왕의 불꽃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꽃 또한 더 정순해지고 밀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불꽃에 담긴 용사의 힘도 농밀해졌고.”
허나, 그에게도 한계란 있다. 인간인 이상 체력이, 마나가, 권능이 끝이 없이 샘솟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두 번의 전투와 이전의 전투에서 김우진은 달랐다. 더 힘이 넘쳤고 더 장시간, 더 큰 활약을 했다.
“갑자기 이런 게 가능하다고?”
“나는 용사니까. 마물을 잡을수록 업을 쌓고 성장하지.”
“나도 용사다. 나도 성장하지만 너는 정도를 넘었다.”
“그러니까 내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거야.”
“헛소리.”
세이드가 앞으로 내달렸다. 에메랄드 빛의 오러가 싱그러움을 내뱉으며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
그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소름끼치는 괴음이 들렸다. 세이드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고 묵빛의 검기가
공간을 격하고 날아들었다.
쩌엉, 세이드가 힘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불의 파도가 주춤하는 그를 지나쳐 상대를 덮쳤다.
상대를 녹여냈다.
죽음의 군단장이라는 데스 나이트는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물이지만 적어도 김우진과 세이드에게는 아니었다.
고작 데스 나이트 정도에서 고전했다면 그들은 결코 인류의 희망이라고, 영웅이라고 불리지 못했을 거다.
그건 그렇다.
김우진은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알베니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아 더욱 정순해진, 더욱 뜨거워진 순수한 불꽃을
일으키며 언데드 군단을 갈랐다.
* * *
그럼에도 간신히 목표물 - 자그마한 마나석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 코앞에서 마나석이 흩뿌리는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또 실패군.”
“젠장, 뭐가 이렇게 빡셉니까?”
“우주의 힘을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충분히 맞출 수 있다.”
사방에 퍼져 있는 알베니우스의 영역의 권능은 용사의 힘 자체를 빠르게 소모시켰으며, 공간의 권능은 불길의
방향성을 틀어버리고, 마나석에 심어진 힘은 용사의 힘을 상쇄시켜버린다.
세 가지 장애물을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용사의 힘과 마나의 결속력을 높여야 한다. 권능으로 비틀린 각도를
즉각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는 항시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며, 마나석에 심어진 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나를 방출해야 한다.
용사의 힘은 용사의 힘으로 대응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더 많은 용사의 힘을 더 견고하게, 더 세밀하게
컨트롤해야 한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처음에는 마나석 근처는 커녕 스스로의 엉덩이에 불을 쏘더니 이제는
근처까지 가잖아?”
“언젠가 그 엉덩이에 맞춰드리겠습니다.”
김우진이 이를 악물며 훈련을 재개했다. 그렇게 모든 힘을 소모하자 바닥이 난 마나 하트를, 정령왕의 정수가
신의 힘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령은 더 없이 자연에 가까운 존재야. 흐름을 따라가며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많은 곳이 있으면 물러가고 빈
곳이 있으면 채우지. 마나 하트가 바닥나면 네 온 몸에 퍼져 있는 정령왕의 기운이 자연스레 마나 하트를
채운다.”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우주의 힘이 김우진의 몸속으로 넘어가 몸을 두들이기 시작했다.
울컥, 피를 토했다. 그의 육신이 빠르게 죽음의 사신을 찾기 시작했으나 그 순간, 몸 곳곳에 잠들어 있던
정령왕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령은 자연의 기운이다. 그리고 자연의 생의 성향을 강하게 띤다. 죽어가는 육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살리기
위해 흘러나온 정령의 기운들이 알베니우스의 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진행이 빠르군. 확실히 넌 재능이 있어, 포식의 권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용사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강한 건 이유가 있는 법이지.”
“칭찬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네 몸에 잠들어 있는 모든 정령왕의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거다.”
“예. 덕분입니다.”
“알긴 아는군.”
“한 잔 할 테냐?”
“커피 없습니까? 고급 초콜릿을 듬뿍 넣은 달달한 카페 모카로.”
“그게 뭐지?”
“그럼 됐습니다.”
종말은 단순한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도 왕조만 바뀌는 게 아니다. 차원 자체가 멸망한다.
생명체가 말살 당한다.
그런데 어째서.
김우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널 돕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돕고 있는 거죠. 본래는 그럴 마음이 없으셨잖습니까?”
“하지만 알려주고 있고 그 대가로 더는 묻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긴 했죠.”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너도 약조한 것을 최선을 다해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명심하죠.”
* * *
그리고 연합의 수장들은 그 마지막 기한이 사룡, 티타니아드가 부상을 완전히 떨쳐내는 순간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때문에 인류는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것보다 최후의 반격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연합의 선두에서 가장 많은 공세를 받아 많이 쇠하긴 했으나 한 때는 제국의 자리를 넘보던 비엔데르크 왕국의
체급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공세를 펼치자는 의견에는 동의하네. 하지만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우리는 사룡이 영웅, 하이든의 희생으로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만 알뿐, 놈의 위치도 놈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수색대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왕국의 영역 밖은 대부분 죽음의 대지가 되었고 마물과
언데드들이 넘쳐난다.
“새롭게 저희 왕국에 소환된 용사들 중, 마기를 수색하는 권능을 가진 용사가 있습니다. 그 자의 권능이면 능히
사룡의 위치를 특정해낼 수 있을 겁니다.”
“천운이구려. 꼭 필요할 때에 그런 용사가 나타나다니.”
“신들께서 아직 저희를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뜻이겠지요.”
종말이 이어진 지난 수십년 간 신들은 끊임없이 용사들을 소환했다. 그들의 희생과 활약이 아니었다면 글라크는
진작에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신들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차원. 글라크의 모든 인간들이 백신전의 신들을 믿고 따르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이곳에 올 때, 그 용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곳에 온 직후부터 가장 강력한 마기를 수색하고 있으니 사룡의
위치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이 넓은 대륙 전역을 수색할 수 있다는 뜻인가?”
“괜히 권능이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신께 감사하네.”
“찾는다고 한들, 무작정 토벌대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보네. 어떤 마물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른 대처가 필요하니.”
“지난 5 년간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저들은 1 년에 한 번씩 거대한 공세를 합니다. 그것을 받아낸 뒤에 토벌대를
출정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물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용사들은 전원 포함시켜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
“하지만 용사들이 전부 빠지면 오염된 땅에 근접한 왕국들의 피해가 커집니다.”
“감수해야겠지. 어차피 사룡을 죽이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네.”
“아무리 그래도···!”
의견이 맞는 부분도,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왕들은 타협을 하기도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다.
김우진의 눈이 빛을 찾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물었네. 모든 용사들을 토벌대에 포함시켜 조금이라도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게
나은지, 아니면 최소한의 용사들을 두어 연합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게 나은지.”
“음.”
“편하게 이야기 하게. 결국 용사들을 이끌고 사룡의 목에 칼날을 들이미는 당사자는 그대가 아닌가.”
사룡은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워 불의 정령왕과 합일한 하이엘프마저도 죽이지 못한 괴물이다. 그를 죽일 유일한
희망은 그런 정령왕의 정수를 권능으로 흡수한 김우진뿐이었다.
다만.
“그러면 둘 다 하지 말죠.”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용사 김우진?”
“병사들이 많아지면 행렬이 늘어지고 느려집니다. 그러면 오히려 마물과 언데드들의 포적이 되어 실패 확률이
올라갑니다. 소수 정예로 가는 게 맞습니다. 연합을 지키는 문제도 있고요.”
“그건 물이 무서워서 마시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멍청한 짓이네! 상대해야 할 마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설사 기적적으로 당도한다해도 지치고 피폐해진 상태로 사룡을···.”
“제가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자리의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가장 많은 마물과 언데드들을 죽였고 사룡의 어금니를 부러트린 게
접니다. 놈들의 무서움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럼에도 가능하다. 멍청한 아집 같은 게 아니다.
결국 문제는 사룡을 벨 칼이다. 그것이 없어 인류는 속절없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단. 두 달 뒤에.”
곧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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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5. 용사 김우진(4) >
“말해라.”
“뭐를?”
“너와 나는 비록 종족이 다르지만 지난 십수 년 간 함께 종말을 막아왔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종말을 막아야
한다는 기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사족이 그렇게 길어?”
“매일 같이 나가서 무엇을 하는 거냐. 만드라고라 밭이라도 찾은 거냐?”
당연히 아니다.
“사룡을 막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너도 동의했을 텐데? 이제와서 독식하는 이유가
뭐지?”
“분명히 말하는데 영약 같은 건 없어.”
“그럼 대체 뭐지?”
“아이닌 전하.”
겉보기에는 연약해보이지만 뛰어난 기사로서 맨 손으로 오크가 아니라 트롤 열 마리 정도는 가볍게 뚜드려 패는
실력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희 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말아주세요. 섭섭해요.”
김우진이 고개를 숙이려하자 아이닌이 그를 말렸다.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빈 옆 자리에 앉았다.
“연회의 주인공들께서 한쪽 구석에 앉아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모두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죄송합니다. 사룡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룡···이라면 두 분이서 그런 표정을 지으실만 하네요. 최근의 회담 때문인가요?”
정령왕의 힘을 완전히 일깨우면 가능성이 생긴다. 김우진은 자신이 있지만 확답은 주지 않았다. 종말이란 언제나
이변이 발생한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무조건적인 희망을 주는 건 옳지 않았다.
세이드와 김우진의 무거운 분위기는 주변에서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무형의 힘이 있었으나 아이닌 왕녀가
물꼬를 트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공주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용사님, 저와 한 곡 추실까요?”
“그러지 말고 저와 함께 하시죠. 아바마마께서 용사님께 전해달라고 했던···.”
“순서를 좀 지켜주시겠습니까? 제가 먼저 용사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데 순서랄 게 있나요? 서로 마음에 들었으면 되는 거죠.”
“용사님, 시끄러운 둘은 내버려 두고 저쪽으로 가서 함께 한 잔 하시겠습니까?”
“멈추세요!”
“멈춰요!”
“재밌군.”
이전에는 딱히 흥미가 없었다. 애초에 엘프인 그는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이성들의 다툼을
질색하기까지 했다.
특히, 왕녀와 공주들의 치정극은 우아하기에 특별한 묘미가 있었다. 서로의 체면 때문에 직접적인 힘 싸움으로
가지 못하기에 말로 상대를 죽이려 한다.
왕족의 입에서 천박한 단어 또한 나오면 안 되기에 고상하게.
“넬리아 전하.”
“오랜만이에요, 세이드. 잘 있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딱딱한 말투는 집어 치우자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전하는 공주시고 저는 일개 이방인입니다.”
“차원을 구하고 있고, 구할 영웅이죠.”
“영웅은 김우진입니다.”
“영웅은 결코 혼자서 될 수 없어요. 조력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죠.”
“저는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갈 겁니다.”
“대체 그곳에 무엇을 두고 온 거죠?”
“고향입니다. 엘프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용사님?”
“용사님 어디계세요!”
“김우진 용사님!”
* * *
알베니우스를 만나고 그 두려움이 조금 사라지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가능이 가능이 되었다는 뜻이다.
가능이 무조건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됐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알베니우스는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미약한
희망조차 없었다.
“알베니우스님.”
‘해제되었다.’
알베니우스의 동굴에는 외부인을 거부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우진은 항상 입구에서 서서 그의
허락을 기다려야만 했다.
어째서?
동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미약한 피 냄새와 거친 기운들이 김우진의 피부를 곤두세웠다.
‘추격자?’
‘진짜로 있었다고?’
“알베니우스님?”
기척을 죽이고 호흡을 골랐다.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격전의 진동과 어렴풋이 들리는 외침이 사태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강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강자들이 튀어나오는 건지. 세상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왜
이제야.
그리고 다행히도 저들은 강했으나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것 또한 알베니우스 덕분이었다.
“누구냐!”
“용사?”
그들이 김우진을 발견했을 때, 김우진의 불꽃은 이미 한 명을 덮었다. 칼날은 상대의 무기를 쳐내며 전진했다.
쩌어어엉!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그들의 전신을 감싼 보호막이 칼날을 막았다. 화염이 보호막을 녹였으나 잠깐의 틈은,
그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대응할 여유를 주었다.
“이 하찮은 놈이!”
남자가 일거에 힘을 터트렸다. 불꽃을 꺼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캉캉캉, 무자비한 참격에 김우진이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잠깐만! 이놈 김우진이다!”
“김우진이라고?”
그때였다.
────!
김우진은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
“김우진!”
그 사이로.
김우진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굳이 알베니우스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공간이 비틀려 있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세상이 급변했다. 그럼에도 수련으로 다져진 감각은 어떻게든 적응을
하려고 했다.
“어떻게?”
“역시 알베니우스, 네놈의 마수를 뻗친 게 맞구나!”
“그건 네가 먼저···.”
“헛소리 하지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며? 그럼 내가 선공을 하지 않았어도 죽였을 거라는 거잖아? 신의
사자가 고작 그런 이유로 용사를 죽이려고 해?”
“······.”
“그리고 이 차원을 버린다는 건 무슨 뜻이지?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전부 다 설명해주겠다. 대신 알베니우스를 죽여라. 저 놈은 반역자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나는 신의 사자다.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아. 신께 맹세하건데 진실이다.”
“김우진!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남자가 공간의 비틀림을 이겨내고 억지로 힘을 방출했다. 용사의 힘이, 신의 힘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콰직-
“···어째서?”
“구라를 치고 싶으면 눈깔에서 살기라도 없애던가. 그 따위로 하는데 누가 속냐?”
“살려준다는 말이 없잖아.”
무엇보다.
“원수는 네가 먼저···!”
“이제와서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서걱-
머리 하나가 또 떨어졌다.
───────────────
# < 096. 용사 김우진(5) >
“···정말로요?”
포식.
상대의 정수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기성이 짙은 권능.
“···맙소사.”
알베니우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우진에게 포식 당한 두 집행자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지만 전투의
여파로 공동은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여긴?”
“이 차원에 만들어 놓은 내 여러 안가 중 한 곳이야.”
“이렇게 된 이상, 궁금한 건 다 알려줄게. 일단은 생명의 은인이니까. 뭐든 물어봐. 나도 은혜는 무조건 갚는
편이거든.”
“정말로 신의 사자들이었습니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그들은 신의 사자, 아니 집행자가 맞아.”
“···그렇다면 제가 그들을 죽였음에도 반역자가 아니라는 건 뭡니까?”
“그들은 나를 쫓아왔고 나와 싸웠지. 내가 놈들을 죽인 거야.”
“그런다고 속아줍니까? 신들인데?”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신들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딱 거기까지야.
저들은 집행자들이 내 손에 죽었는지, 너의 개입으로 죽었는지 네 스스로 실토하지 않는 이상 알 방법이 없어.”
“그게 무슨···.”
신들이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고? 그렇다면 왜 그들을 신이라고 부르는가. 모순이다.
“···너무 혼란스러운데요.”
“하지만 결국엔 믿을 수밖에 없을 걸.”
“어째서죠?”
“증거가 사방에 넘쳐나니까.”
“증거?”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네가 왜 용사가 되어 여기서 구르고 있어야 하지? 그냥 신이 사라져라, 명하면 마물들이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니야? 아니지. 애초에 저런 게 생겨나면 안 되는 것 아니야?”
“아.”
너무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워낙 지구에서 소설과 만화, 영화 등으로 접한 클리셰였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던 의문들이기도 했다.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종말이 생겨.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막기 위해 대리인인 용사들을 소환하고,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그럼에도 멸망하는 차원이 나와.”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믿고 싶지 않지만 모든 정황과 증거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신은 결코 김우진이 생각하는 신만큼 완전하지 않았다.
그딴 게 신?
“너희들이 신이라 믿는 백신전은 오래 전부터 이 우주를 다스려왔어. 그리고 자신들의 세력을 넘볼 만한 자들을
경계하고 미리 대처해왔지.”
“신들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알베니우스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백신전이 무엇인지.
“그건 아무도 몰라. 아카식 레코드만이 알고 있겠지. 단지 신들은 우주의 힘을 가진 모두를 경계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차원은 하위 차원이다. 아카식 레코드에 의해 상위의 존재인 신들은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집행자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신이 아니니까 정확한 속사정은 몰라. 하지만 정황이라는 게 있지. 신들은 이미 글라크에 미련을 버릴
만큼 버렸어. 수십 년간 수백의 용사를 투입했는데 안 되면 안 되는 거니까.”
김우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수백의 용사들을 만났지만 같은 고향 차원의 용사들은 드물었다. 그렇게 많은
차원들이 존재한다. 알베니우스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을 거다.
“글라크는 차원의 힘이 강하고 세계수도 존재한다. 그래서 종말이 더 크게 다가왔고, 그래서 신들이 보다 미련을
가져 보았지만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너에게나, 글라크의 인류에게나 특별한 거다. 신들에게 글라크는
널리고 널린 차원 중 하나일뿐이다.”
“···그럼.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들에 의해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끌려온 사람들은?”
“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어.”
“···다 죽는다고요?”
“종말을 맞이한 차원에서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 또한 종말의 일부니까.
“···하.”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하하···!”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하면서 부려먹다가 안 될 것 같으니 그냥 다 버린다는 겁니까? 명색이 신이라는
작자들이!”
그것도 그렇군.
“···조금 흥분했습니다.”
“이해해.”
* * *
“하위 차원인 이상 신들이 직접 나서지 못해. 기껏해야 지금처럼 집행자들을 보내는 건데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당분간은 괜찮아.”
“그런데 신들이 당신이 신이 될 것이 두려워했다면서 사도 둘한테 왜 쩔쩔맸던 겁니까?”
“난 지금 부상 중이야. 이전에 신들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 크거든.”
“어떻게 다치면 신 후보라는 자가 고작 신의 사자 둘 한테···.”
“뭐, 임마?”
“아닙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자리로 돌려보내주마. 다음에는 찾아오지 마. 흔적을 최대한 지워 찾을 수도 없을 테니. 필요하면 내가
찾아가지.”
“예.”
“어디 갔다 온···너.”
“나중에 설명해주마. 누가 날 찾거든 한 일주일 정도, 나 바쁘다고 해줘.”
“···나중에 물을 거다.”
“그래.”
‘집행자들이 지금의 너를 본다면 반드시 이상함을 눈치 챌 거다. 포식으로 흡수한 기운들을 다스리는 게
먼저다.’
굳이 알베니우스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두 집행자를 흡수한 이후, 계속되는 더부룩함을 김우진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집행자들은 용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던 강자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정령왕의 기운에 그들의 힘까지
완벽하게 다스린다면 사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급하게 하다보면 기운이 폭주해서 네가 죽을 수도 있어.’
* * *
“오늘도 인가요?”
“예,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에요. 세이드 용사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김우진 용사님.’
김우진은 영웅이다. 암울해지는 세상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빛이며, 아이닌은 그가 세상을 구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
오라버니는 그의 마음을 얻어야지만 왕국이 살 수 있다고 했으나 글쎄. 그녀가 보기에는 조금의 가망도 없는
일이었다.
김우진은 잡아야 할 규격 외의 전력이 아니다. 떠날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을 잡는 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어?”
진득한 불길함. 그녀의 피부가 갑자기 곤두섰다. 무언가가 감각 안으로 들어왔다. 소름끼치는 섬뜩함에 숨을
삼켰다.
──────!
세상이 뒤집어졌다.
“아···.”
그리고 목격했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폐허가 되어버린 왕도를.
사방에서 부르짖는 죽음의 비명소리를.
비명을 사냥하는 죽음의 군단을.
“···맙소사.”
“스, 습격···!”
어떻게 이런 일이.
경악도 잠시, 왕도 외곽의 거대한 존재에 압도당한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아···!”
거대한 압박감과 숨 막힐 듯한 마기, 모든 것을 찍어누르는 살기와 광기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었다.
사룡, 티타니아드.
─────!
───────────────
# < 097. 용사 김우진(6) >
종말이 시작된 이래로 숱하게 경험해온 것들이었으나 인류는 설마 종말의 주체가 직접 군단을 이끌고 연합의
왕도로 강습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모두 대피해!
적이다! 적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어떻게 왕도를! 왕도의 수호부대는 뭐하고 있는 거야!
끄아아악!
살려줘!
“이런 빌어먹을···!”
용사, 세이드가 반쯤 부서진 별궁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목격한 왕도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사룡의 강림은 왕도 전역에 펼쳐진 방어 마법진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왕도의 대부분을 집어
삼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궁은 이중, 삼중으로 마법진이 중첩되어 피해가 덜했다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 ‘덜’
일뿐이다.
“가, 감사합니다!”
“당장 동문으로 도망쳐라.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동문으로 도망치고 이르고.”
“예, 예!”
왕도 전체가 아비규환에 빠진 시점에서, 왕국군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왕도를
벗어나는 게 답이며 왕도 서부에서 꿈틀거리는 사룡을 피하는 게 최우선이다.
무엇보다 왕도 서쪽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는 사룡은 이전보다 더 전율스러운 마기를 품고 있었다.
“···다 나았군.”
“제기랄.”
“전하?”
그때 그의 시야에 아이닌 비엔데베르크 왕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언데드들과 싸우며 사람을 모으고 있었다.
그때.
“···설마?”
“전하!”
외침과 동시에 숨결이 토해졌다. 모든 것을 녹이는 지독한 독기와 마기는 세이드보다 빨리 왕녀에게 당도했다.
그 순간.
────!
“···김우진?”
아니, 다르다.
마치.
“···신?”
* * *
“······.”
주먹을 쥐었다 폈다. 넘쳐나는 힘은, 가벼운 몸과 원활한 기운의 흐름은 그가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였음을
증명한다.
“···지금이라면.”
물론 진짜 그렇지는 않겠지만.
“···마기.”
김우진이 잔해를 헤치며 밖으로 나왔다. 생각 이상으로 더 처참한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붕괴한 건물들, 사람들의 비명, 그들을 학살하는 언데드들. 그리고 저 멀리 고고하게 존재하는 사룡, 티타니아드.
왕국군은 어디 있지?
기사들은?
왕도에 모였던 각국의 왕족들은?
왕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역부족으로 보였다. 결국 모든 건 사룡을 끝장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아이닌 전하?”
하지만 사룡과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아이닌 비엔데르크는 아니었다. 김우진이 달렸다. 어느새 그는 사룡의
숨결과 아이닌 사이에 끼어들었다.
────!
“···김우진 용사님?”
“아이닌 전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생존자들을 찾아 왕도를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전하를 지키면서 싸울 여유가 없습니다. 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왕도의 사람들을 최대한 멀리
대피시켜주십시오.”
“···네.”
- 김우진.
“티타니아드.”
- 달라졌구나.
- 도망친 건 네놈이겠지.
- 많이 달라졌구나. 역시 네놈을 살려서 보내면 아니 됐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이지. 그리고 네가 자비를 베풀어서 살려준 것처럼 말하지 마. 내가 알아서
살아남은 거니까.”
그녀는 인간들에게 해츨링을 잃고 스스로 어둠에게 몸을 맡긴 드래곤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인류를 멸하겠다고
다짐한 광룡.
드래곤답게 분노는 차갑고 냉철하다. 이성을 유지하며 항상 보다 많은 인류를 효과적으로 절멸시킬 방법을 찾는다.
퍼져 나오는 마기가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본래부터 그녀를 따르던 군단이 보다 넘쳐나는 사기에 괴성을
내질렀다.
* * *
──!
─!
───!
“빨리 나오세요!”
“왕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마물을 죽여라!”
“사람들을 구조해라!”
“이쪽에도 마물들이!”
그럼에도 왕도였다.
중첩된 마법진들은 피해를 최소화했고 살아남은 기사와 병사들은 피해를 수습하고자 했다.
병단은 차츰 무리를 갖추고 효과적으로 언데드들을 격퇴하기 시작했으며 용사들이 가세하자 속절없이 밀리던
인간들은 반격의 시작을 알렸다.
“일부는 나를 따라라.”
“명령을 받듭니다!”
“나머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와 함께 사람들을 구조합니다!”
“예!”
기사단과 병사들이 세이드와 아이닌 비엔데르크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원활하게 병력들을 지휘하며 상황을
수습해 나갔다.
“어떻게든 해야 해요!”
“일단 왕궁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성에는 폐하와 귀빈들을 비롯한 왕실의 정예들이 있으니 한결 나을
겁니다.”
“하지만 왕궁은 전투의 여파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 오라버니께서도 이미 왕궁을 벗어나셨을 거예요.”
“그렇다면 역시 서문을 통해서···.”
그때였다.
마하르 왕국의 지휘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왕녀에게 저지른 무례였으나 아이닌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정말 굉장해요.”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우진은 자신이 장담한 대로 사룡과 대등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대체 한 달 만에 어떻게···.”
“아니, 저건 대등한 전투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
# < 098. 용사 김우진(7) >
─!
──!
─!
그리고 그 두 번의 전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압도. 누군가 상대를 압도한다. 첫 전투에서 티타니아드가
김우진을 비롯한 용사들을 압도했으며 지금은 그 반대로 김우진이 티타니아드를 압도 하고 있다.
- 참담하기 그지없구나.
모든 면에서 논리적이었다면 사룡은 사룡이 되지 않았을 거다. 아이를 죽인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만족하고 더
나아가지 않았겠지.
김우진은 그녀를 감정적으로는 동정했으나 그 이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분노로 인해 죽은 이들이
수억이다. 차원은 멸망 직전까지 갔고 김우진이 알베니우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번 습격으로 멸망했을 거다.
“할 말은 그게 끝이지?”
패배를 직감한 사룡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콰콰콰콰-
자폭. 흔한 클리셰다. 마지막까지 지저분하게 가는, 그래서 희생자를 양산하고 신파를 찍는 전형적인 고구마
클리셰.
“웃기지 마.”
콰직-
검날이 핵을 관통했다.
- 베니실르···. 이제 널 볼 수 있···.
권능, 포식.
폭주하여 폭발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김우진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러길 한참.
그게 시작이었다.
“이, 이겼다!”
“언데드들이 모두 소멸하고 있다!”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사룡의 존재감은 너무도 거대했기에 그 소멸을 왕도의 모두가 목격했으니까.
“사룡이 쓰러졌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용사, 김우진이 사룡을 쓰러트렸다!”
“김우진 만세!”
와아아아아!
“···정말로 이긴 거야?”
“종말이 끝났다고?”
종말이 끝났다.
김우진에 의해서.
* * *
인류를 수십년 간 괴롭히던 종말이 끝난 것은 분명 거국적인 일이었으나 왕도의 피해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대는 영웅이네. 이 나라를, 이 대륙을, 나아가 인류를 지켰네. 그대가 아니었다면 사룡이 쳐들어 온 어제가
내 마지막 날이었겠지.”
“혼란이 수습되면 반드시 더 큰 보상을 하겠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니 잘
생각해보게.”
“이제 말해라.”
“뭐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별 일 없었다.”
“별 일이 없었는데 전력을 다해도 뼈에 기스를 내는 게 전부였던 네가 놈을 압도했다고?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역시 안 믿기겠지?”
“스스로 자각은 있어서 다행이군.”
“알베니우스님?”
“쿨럭···제기랄!”
“뭐지? 아는 사이인가?”
세이드가 알베니우스를 경계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자가···.”
“나중에 다 이야기 할테니까 일단은 치유 마법사 좀 불러줘.”
“알겠다.”
“제기랄, 내가 신들의 집념을 얕봤어. 너와 헤어진 후,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 다녔지. 그런데도 기어코
찾아내더군.”
평소라면 알베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이들이지만 신들에게 입은 부상을 회복중인 현재의 알베니우스는
그들을 감당해낼 여력이 없었다.
그보다 더 위라.
알베니우스 덕분에 사룡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신들과 대적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지만
알베니우스가 아니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용사 그 이상의 강자들.
“용사, 김우진?”
“김우진과 알베니우스가 붙어먹은 건가.”
“어쩐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던 김우진이 사룡을 쓰러트린 게 이상하다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신들의 명을 지켜야지. 우리의 목표는 알베니우스를 죽이는 것.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
“차원의 종말을 막은 뒤니 거리낄 것도 없겠군.”
─!
콰앙, 집행자의 신형이 별궁의 벽을 부수고 튕겨져 나갔다. 김우진이 따라붙었다. 당황한 집행자들이 달려들었다.
“···뭐지?”
“막아라!”
“김우진의 수준이 상상 이상이다. 방심하지 말도록!”
“이 빌어먹을 놈이···!”
──!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크윽···!”
“멈춰라, 김우진!”
“개소리하고 있네.”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거 알아?”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정령왕의 정수와 두 집행자를 집어삼키고 완전히 체득하여 새로운 경지로 나아간 김우진은.
우득-
집행자의 목이 꺾였다.
“이 개자식이!”
“노오오오옴!”
전투가 재개되었다.
───────────────
# < 099. 용사 김우진(8) >
제약이라는 건 꽤나 골치 아프다.
종말을 집행하는 종말의 사도들은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사룡, 티타니아드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그렇기에 사룡은 수백 명의 용사들을 잡아먹으며 차원 글라크를 종말의 벼락 끝까지 밀어 붙이던 최악의 광룡이
되었다.
아니다. 김우진은 사룡이라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일반적인 용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생을 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그 이상의 업을 쌓았다.
김우진은 이미 어지간한 용사는 물론 집행자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다만, 집행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글라크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저 알베니우스를 쫓는 추격대였으며, 우연히 글라크에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명령에 따라 온 것일 뿐이었다.
그게 그들의 불행이었다.
“커헉···!”
“큭···?”
“이건···!”
“알베니우스!”
공간이 뒤틀리며 도망치는 자들의 육신을 낚아챘다. 단순히 움직임을 구속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봉쇄했다.
“김우진!”
“말 안 해도 압니다!”
“이 빌어먹을 놈들!”
“신께서 결코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신이시여! 이들에게 천벌을!”
* * *
그럴 리가 없다.
글라크라니.
유례없을 정도로 막대한 마기를 품어 신들조차 희망을 버려버렸던 곳이다. 세계수가 자라나던 대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결정은 훨씬 더 빨랐을 거다.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된 차원에서 집행자 열둘이 죽고 용사 김우진은 불가능할거라고 판단했던 종말을
막아냈다. 이게 과연 우연인가?”
“두 개를 함께 섞어놓으면 그럴듯하지. 알베니우스가 용사 김우진과 붙어먹었다.”
“반대한다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반역자는 죽어야지. 다만, 쉬운 길을 두고 어렵게 갈 필요가 없잖느냐.”
* * *
그 사이 무너진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고 인류는 마침내 더 이상 마물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비엔데르크 왕국은 왕도를 옮겼고 그곳에서 연합의 모든 수장들이 모여 공식적인 승전과 종말의 종말을 고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지만 인간의 기쁨을 온전히 막지는 못했다. 도시마다 존재하는 모든 마법 전등이 빛을
발했고 닿지 않는 곳에 화롯불이 지펴졌다.
“정말로 막은 거지.”
살아남았으니 다 된 것 아니겠나.
“신이시여.”
우아하게 앉아 티타임을 즐기는 남자가 있었다. 스스로를 바티온이라 칭하던, 김우진을 글라크로 보내버린
신이었다.
“차는 카페모카?”
“예.”
“네 활약을 지켜보았다.”
“그러셨습니까?”
“놀랍더군. 너의 활약으로 글라크는 종말을 피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으로서, 너를 용사로 만든 당사자로서
감사를 표하마.”
“예.”
“해서 용사로서 너의 임무는 끝이 났다. 넌 누구보다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니 이제는 너의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지구로 갈 수 있다는 겁니까?”
“당연히. 그것이 처음부터 내가 네게 약조한 것이지 않았느냐.”
“예, 그랬지요. 그랬습니다.”
김우진이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일까, 아니만 감싸주기로 한걸까. 아니면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서 김우진이 개입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걸까.
“허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네 힘은 너무도 강대해 본래 세계의 균형을 헤친다. 허니, 그 힘을 모두 있어야 할 곳에 되돌려놓고 가거라.”
“···예?”
김우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다. 그것이 순리다.”
“순리? 왜 제가 십수 년 간 쌓아온 힘을 포기하는 게 순리입니까? 지구의 균형? 걱정 마십시오. 거기서 사고 칠
생각 없습니다. 사고를 친다면 그때 제 힘을 거두어 가셔도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분명히 포기하라고 일렀다.”
“싫습니다.”
“싫다?”
“이건 제가 쌓은 제 힘입니다. 신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왈가불가 할 자격은 없습니다.”
“역시 반역자란···.”
바리온이 쯧, 혀를 찼다.
“김우진, 감히 신에게 반역을 들었음에도 자비를 베풀려 했다. 헌데 역시 반역자의 심성은 꼬일대로 꼬여 갱생이
불가능하구나.”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그러면서 아닌 척 하고 다가온 건 무슨 의도입니까? 내가 순순히 힘을
포기하면 쉽게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까?”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1 초의 텀이 있는데 주둥이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시죠.”
“놈! 누구 앞이라고 감히 그 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누구 앞이긴. 양심이 터질 대로 터진 개새끼 앞이지.”
“개새끼? 정녕 죽고 싶으냐!”
“어차피 네놈들, 날 살려둘 생각도 없을 것 아니야. 반역자라며. 이 세상에 반역자를 살려두는 새끼들이 어디
있어.”
“주제도 모르고 정도도 모르는군.”
“하위 차원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도 없다며? 집행자인지 심부름꾼이지 또 보내봐. 모조리 씹어 먹어줄게.”
“기가 차는구나. 감히 신에게 반역을 하는 네가 믿는 것이 고작 그 알량한 하위 차원이더냐?”
따악-
“···씨발.”
목이 탔다. 테이블에 올려진 물병을 집는 순간, 김우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리고 목격했다.
“···맙소사.”
───────────────
# < 100. 용사 김우진(9) >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다.
땡땡땡땡-
“이게 대체 무슨···!”
“이미 종말을 막아낸 차원에 대규모 마물의 군단이 기습을 가해온다니.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어!”
“효과적이라는 겁니까?”
“저들이 나를, 그리고 나를 돕는 너를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제약 때문이다.”
아카식 레코드에게 힘을 받은 자들은 우주의 균형을 위해서 제약을 받는다. 신도, 신의 힘을 받은 집행자들도
마찬가지다.
“···이건 막을 수 없다.”
알베니우스가 단언했다. 이전의 종말과는 다르다. 신들이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마물의 군단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있다.
그 규모도 수준도 미상이다. 하지만 신들이 차원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작정하고 쏟아내는 마물의 군단이 결코
수준 낮을 리가 없다.
“도망쳐야 해···!”
“도망치라고요? 대체 어디로요?”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곳까지 왔다. 고작 열 개의 왕국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종말을 막아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이들에게 마침내 평화를 안겨주었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 끝이 더 무자비한 종말이라니.
“도망치려거든 혼자 가세요.”
“김우진. 감정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저는 지금 굉장히 냉철합니다.”
“저 군단에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다.”
“저는 죽고 싶은 마음도, 죽을 생각도 없습니다.”
막는다.
오랜 시간을 바쳐서 직접 지켜온 세상이다. 그 세상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고 싶지 않다. 신
같지도 않은 자들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가망이 없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아니다. 이전의 김우진과 지금의 김우진은 다르니까.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술기운을 날려버린 세이드가 뒤늦게 나왔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마물의 군단에 경악했다.
─────!
* * *
하늘이 붉게 물든다.
“···용사님이다!”
“김우진 용사님이다!”
“김우진 용사님 만세!”
“저희를 구원해주세요!”
“마물들을 물리쳐라!”
아주 잠시 맛보았던 희망을 꺼트린 거대한 어둠에 절망하던 인류가 세상을 밝히는 불빛에 환호했다.
─!
──!
─!
───!
끝임 없이 들리는 폭음과 하늘을 달구는 열기. 잿가루가 흩날려 하늘을 검게 물들였고 반쯤 녹아내린 마물의
시체가 폭탄처럼 떨어졌다.
크워어어어-
죽이고 또 죽였다.
포식은 피아를, 종족을, 마기와 마나를 가리지 않았고 사방에 넘쳐나는 게 마물이었다.
무분별하게 흡수한 마기는 누구에게나 해로 다가온다. 하지만 굳이 필요 이상의 마기를 계속 담아둘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건 그의 정신력 뿐.
* * *
때문에 신들은 만약에 사태에 대비했다. 김우진이 거부할 경우.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들 경우.
단순한 감옥으로 다스리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다. 알베니우스가 감옥의 존재를 아는 만큼, 거부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위 차원이기에 신들이, 집행자들이 제대로 나서지 못한다면 하위 차원이 아니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글라크의 피조물들 따위야 몇이나 죽든 상관없었다. 수많은 차원 중 하나일 뿐이다. 피조물들 또한 신들을 위해
죽는다는 걸 기쁘게 여길 것이다.
문제는 김우진이었다.
백신전은 글라크의 종말이 순식간에 이루어날 것이라 여겼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인류는 그 이상의 군단을 막아낼 여유가 없다. 헌데 김우진, 그놈의 김우진이 홀로 몇 달을
버텨냈다.
대부분 멸망해버린 인류는 대륙 구석에 뭉쳐서 함께 버티고 있으며 김우진은 마물들을 말 그대로 찢어발기고 있다.
“기가 차는군.”
“김우진, 난 놈은 난놈이군. 아무리 알베니우스가 도와줬다고 해도 이건 일개 용사는 물론 집행자의 수준도
아득히 뛰어 넘었다.”
하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마물 군단을 보낸 목적은 결국 차원을 하위 차원이 아닌 종말 차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제약을 없애기 위해서. 직접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잡기 위해서.
비록 마물 군단은 차원을 온전히 멸망 시키지 못했지만 차원의 장벽을 대부분 허물고 차원 자체를 약화시켰다.
종말 차원에 더 없이 가깝게 만들었다.
“바리온.”
“예, 주신이시여.”
“네가 직접 가라. 가서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에게 그 대가가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게 해주어라.”
“명을 받듭니다.”
“아스트마.”
“예.”
또 다른 신이 무릎을 꿇었다.
“네가 함께 가라. 김우진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으니 만약에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명을 받듭니다.”
“너무하는군. 아예 살아날 구멍 자체를 안 만들어주는 건가.”
“반역자에게 자비는 필요 없다.”
* * *
몇 달에 걸친 사투가 끝났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정말로 끝난 거지?”
“또 오는 건 아니지?”
종말은 끝났으나 인류는 기계적으로 다음 종말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미 찾아온 절망을 떨쳐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번의 종말을 막는데 인류의 90%가 죽었네. 두 번의 종말에 그 절반이 죽었지. 또 다시 종말이 찾아온다면
우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탄 섞인 외침에 김우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 때문이라고, 자신이 순순히 신에게 목을 내놓지 않아서라고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이게 최선이었다.
왕을 알현하고 나온 김우진이 복도를 걸었다.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사룡의 습격 이후 새로운 도시로 선정되었지만
두 번째 종말로 그마저도 파괴되었다. 남은 도시들 중 그나마 멀쩡한 곳을 임시 왕도로 정했으나 멀쩡한 도시보다
그렇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쉬웠다.
“용사님.”
1 왕녀 아이닌 비엔데르크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은 없어요. 용사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정말 다 죽었을 거예요.”
“···최대한 노력했는데 전부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해요. 이번 종말은 사룡보다 더 강대했어요. 막아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죠.”
‘아니, 아니지.’
그때였다.
번쩍-
“···저게 뭐죠?”
“설마 또?”
“···저들은.”
“김우진! 최악의 상황이다!”
두 명의 절대자였다.
- 불쌍한 아이들아.
신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
# < 101. 용사 김우진(10) >
저들이 신임을.
저들을 경배해야 마땅함을.
누구도 저들이 신이라고 알려주지 않았으나 그들은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예의를 차리고 존경과 신앙을 바쳤다.
‘반역자 김우진이라니?’
‘김우진 용사님을 말씀하시는 건가?’
‘두 번이나 망할 뻔 한 세상을 구원해준 용사님이 어째서 반역자란 말이야?’
‘신께서 잘못 말하신 것이겠지요. 아니면 저희가 잘못 들었거나.’
그들에게 김우진은 영웅이었다. 그것도 신들이 직접 내려준 용사. 그런 그가 반역자라 불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이 명했다.
“그저 따르라.”
그럼에도 국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신의 절대적인 명령을, 그들은 거부했다.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엄청난 대역죄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두 번째 종말이 김우진으로 인해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은 없었다. 바리온의 분노에 대기가 진동했다. 기사와 병사들이 마나를 일으켜 저항했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눈을 뒤집고 쓰러졌다.
“······.”
“반역자라면···?”
“그 이상은 우리의 자비 이상이다. 이제 그만 반역자 김우진을 데리고 와라.”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 피조물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등한 존재들이었다. 명령하면 그저 따르고 자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
그게 당연하다. 그게 진리다.
거대한 압력이 국왕을 찍어 눌렀다. 국왕의 무릎이 대지를 파고 들어갔다. 그가 신음을 삼켰다.
“자비는 더 이상 없다.”
“···어째서 이렇게 오실 수 있음에도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뜻이냐.”
“신께서 직접 강림하실 수 있으셨다면, 굳이 용사들이 아니어도 종말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헌데 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말해 줄 이유는 없다.”
“모두가 신을 부르짖었습니다. 신의 자비에 기대어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헌데 어째서 신들께서는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에나 와서 저희들을 구원해준 영웅을 반역자라 칭하시는 겁니까?”
“···너는 신들의 자비를 농락하는구나.”
“마지막 경고다. 당장 반역자 김우진을 데리고 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왕국과 너의 백성들은 더 이상 이 땅
위에 살아 숨 쉬지 못할 것이니.”
“그렇게 하시죠.”
“김우진!”
“김우진.”
“반역자 김우진,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든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었느냐?”
바리온이 주먹을 뻗었다. 공간을 격하고 날아든 파동이 김우진을 강타했다. 김우진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피떡이 되었다.
끄아아악!
신이 사람을 죽였다!
장내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불신과 경악이 신들을 향해 쏟아졌으며 김우진은 눈을 치켜뜨며 적의를
드러냈다.
바리온이 으르렁거렸다.
─!
“놈!”
“아트마 경.”
“예, 폐하.”
“당장 왕도에서 백성들을 전부 피난시키도록. 왕도를 벗어난다.”
“···하오나.”
“시간이 없다. 저 여파에 휘말로 모두 죽게 내버려 둘 셈인가?”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김우진이 나서기 직전, 메시지 마법을 통해 조언을 전달 받은 국왕은 곧장 행동에 나섰다.
“김우진···.”
김우진이 진짜로 신들에게 반역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김우진은 세상을 구해준
용사이며,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이다.
“서둘러라!”
* * *
의문은 길게 끌어지지 못했다. 하늘을 붕괴시키는 신들의 전쟁은 차원의 누구라도 목격할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어째서 신이 김우진을?”
“김우진이 왜 반역자라는 거지? 김우진이 아니었으면 이 세상은 멸망했어! 그놈이 아니었으면 우린 다
뒤졌다고!”
“하지만 신의 뜻이니 무언가 깊은 뜻이···.”
“지랄, 다 끝나니까 이제와서 나타나놓고 뜻은 무슨 뜻? 듣자 하니 나타나자마자 여기 사람들을 벌레처럼
죽였다며?”
“우리가 피똥싸면서 종말 막을 땐 어디 있다가 이제와서 주역을 반역자라고?”
“그 김우진을 반역자로 몰았으면 우리라고 몰지 않을까?”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거야! 신의 뜻이야! 김우진이 잘못한 거라고!”
“대체 뭘 잘못 했는데!”
“사룡을 죽이는 과정에서 반역자와 손을 잡았다잖아!”
“살려고 반역자의 힘이라도 빌린 게 뭐가 문젠데?”
“아니, 애초에 신 맞아? 진짜 신이라면 김우진과 잠깐이라도 대등한 전투를 펼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인류를 도구로 여기는 언행, 실제로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정말 어이없게도 김우진을
압도하지 못하는 신들.
“그래.”
“이제 어쩌실 겁니까? 김우진이 이길 수는 있는 겁니까?”
신들의 수준이 생각만큼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세이드는 감히 저 전투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2 명의 집행자를 먹었고 어지간한 종말의 사도와는 궤를 달리하는 사룡, 티타니아드를 죽이고 그 업을 쌓았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흡수했어.”
어디 그뿐일까. 신들 딴에는 김우진을 없애버리기 위해 준비한 수백만의 마물의 대부분이 김우진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소멸되었다.
능히 다수의 차원을 멸망시킬 정도의 거대한 마를 홀로 토벌한 업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아무리 마물들을 이용해 차원을 물어뜯어 제약을 비교적 약하게 해놓았다고 한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
차이는 컸다.
크워어어어어어!
* * *
“···대체 어떻게?”
그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아무리 제약을 받는다고 한들 신이다. 적당한 업을 소모하여 건방진 김우진을 단숨에
처리하고 신의 위엄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막대한 신력과 업이 김우진을 감싸고 있으니 그 위엄은 능히 신과 맘먹었다. 아니, 적어도 바리온보다도,
아스트마보다도 위였다.
그리고 김우진은.
대단한 방어를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둘렀다.
─!
콰콰콰콰-
“오, 오지 마라!”
수십 번, 수백 번.
콰앙!
떨어지는 유성처럼, 바리온의 신형이 대지에 틀어박혔다. 쿨럭, 신음도 잠시김우진의 발이 바리온의 복부를
짓밟았다. 섬뜩한 눈빛에 바리온이 신음을 삼켰다.
콰득-
“이 씨발 새끼야.”
───────────────
# < 102. 용사 김우진(11) >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비루하게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손에 죽어버리긴 했지만 신들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정점이었다.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 도망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건 그냥 자기만족이다.
그건 김우진의 지난 수십년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곳이 멸망해버린다면, 이곳의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 죽어간 용사들의 희생은? 그의 노력은?
애초에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끝장내기 위해 간신히 종말을 막은 차원에 수백만의 마물들을 풀어놓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정 그렇다면 일단은 준비를 해보긴 하지. 넌 흡수한 신들의 힘을 다스리는데 최선을 다해.”
“예.”
* * *
“김우진은 반역자입니다. 모든 신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탁이 내려왔어요!”
“그는 신이 공인한 반역자입니다. 그를 감싸줄 필요가 없습니다!”
“헛소리! 그는 세계를 구한 영웅입니다. 두 번이나! 그가 아니었으면 당신들이 여기 멀쩡히 살아서 그딴
헛소리를 내뱉을 수 있을 줄 압니까?”
“그리고 신? 인간은 도구로 여기고 마음대로 죽이는 것들이 신입니까? 신이라는 것들이 왜 김우진 용사에게
죽었습니까?”
“심지어 두 번째 종말은 그 잘난 신이라는 것들이 유도한 거라는 이야기도 못 들었습니까? 저게 악마지,
신입니까!”
신들이 공인한 반역자 김우진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
김우진이 그들에게 준 것이 너무 크기도 했으며, 신들이 행한 행동과 종말을 유도했다는 것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글라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다. 없는 곳에선 왕도 욕하는 게 사람이라고, 자신들을 죽이려한
신들이라고 욕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합의 했네. 신들이 다시 한 번 자네를 죽이려 한다면 연합은 자네의 편에서 끝까지 싸우기로.”
“괜찮은 겁니까? 신들인데?”
“자네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글라크를 멸망시키려고 한 자들이네. 이미 한 번 명령을 거부한 우리를 과연 멀쩡히
살려두겠는가?”
“···부정할 수가 없네요. 제 편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가 우리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네.”
그때였다.
────!
하늘이 열렸다.
“이건···!”
또 다른 신이 강림했다.
‘저기 있다.’
“···아.”
만나기만 하면 김우진과 함께 저항하리라 생각했던 비엔데르크의 왕은 자신도 모르게 의지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입이 열린다.
“···예.”
‘김우진, 미안하다···!’
왕이 신음을 삼켰다.
* * *
끼익-
“네가 김우진이구나.”
“재미있는 놈이구나. 하긴, 그러니 우리의 예상을 깨트리고 여기까지 왔지. 왜냐고 물었느냐?”
남자가 술을 음미했다.
“충분한가?”
“그러니까 신이라는 놈들이 나한테 겁을 먹었다, 이건가?”
“그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나는 조금 다르다. 일개 신 따위가 아니거든.”
“뭐, 주신이라도 되나?”
“···씨발이네, 진짜.”
“그들에게는 위기감이 없었다. 그저 누리기만 해서 신으로서의 자각도, 위엄도 부족하지.”
“그러니까 나를 신들에게 경각심을 새기고 위엄을 만들 도구로 쓰겠다고?”
“거절하면?”
“죽는다. 나를 네가 죽인 떨거지들과 같다 생각하지 말거라.”
“···빌어먹을.”
“네게 나쁘기만 한 제안은 아니다. 인간은 보상이 있어야 열의를 보이지. 조건은 간단하다. 50 명. 50 명의
죄수들을 자발적으로 출소시킨다면 너의 죄도, 너에게 얽매여진 굴레도 모두 풀어주마.”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 말이 곧 법칙이다.”
“지랄하고 있네.”
신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김우진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빛으로 이루어진 종이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눈에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냐는 듯한 느낌이
깃들어 있었다.
약 한 시간, 김우진은 계약서에 원하는 사항이나 이상한 사항들을 수정했다. 베리안은 턱을 괸 채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시간은 20 년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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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3. 아무것도 >
이야기가 끝났다.
따악-
“···되게 많은 일이 있으셨네요.”
“많은 일이 있었지.”
“신들을 싫어하실만 해요.”
“뭐, 자비를 받은 것도 사실이긴 해.”
목적이야 어찌되었든 그 알량한 자비가 없었다면 김우진은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잠깐만요.”
“왜?”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게 끝났는데요?”
“이상하다고? 이 다음 이야기는 그냥 20 년 동안 고문 당하다가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게 끝인데?”
“아뇨, 소장님 이야기 말고요.”
아크 리치 드래곤이 토벌되고 신들과 싸울 때까지도 세이드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 그거···.”
“그거?”
“뻥이야.”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거기서 나는 끌려갔고 여기까지 왔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글쎄.”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다 알려주신다면서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알려줬잖아.”
“아니, 그건 맞지만···.”
“알베니우스가 알 텐데. 말 안 했어?”
“자세한 사항은 소장님이 알고 있으니까 소장님한테 들으라고 했어요. 그냥 유품을 주면서요!”
“유품이라면 그 목걸이? 오랜만이네. 그거.”
베리안이 용인하고 김우진이 추가한 여러 조항들 중 글라크와 글라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안위도 있었다.
“이 사기꾼 도마뱀!”
“왜 살아 있다고 말 안 해줬어요?”
“죽었다고도 안했잖아.”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죠!”
“그 부분은 인정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세이드가 안부를 전해달라면서 절대로 자기가 처한 상황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걱정할 거라고. 그래서 그냥 김우진에게 떠넘겼지.”
“평생 갇혀 있는 걸 알리기 싫어서 죽은 것처럼 느끼게 했다고요? 그게 말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무책임한 건 여전하네요.”
김우진이 혀를 찼다.
“···이길 수 있겠죠?”
“이겨야지.”
* * *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쪽에는 주신들을 상대할 적절한 상대들이 있다는
것.
랜섬웨어는 김우진, 방화벽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이다. 그것을 포맷해 없던 일로 하겠다는 걸 결국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해 계약을 무효화시킨다는 건데 그런 게 말처럼 쉽다면 신들은 진즉에 그렇게 했을 거다.
정말 만약에 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이렇다 할 대처 방법이 없다. 그저 지금처럼 전력을 모으고 무기를 개발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하지만 연옥은 하위 차원 따위가 아니었다. 당연히 신들은 힘을 투사하는데 어떠한 제약도 없다. 계약만 아니라면.
세계수들에게 성장촉진제를 놓고, 데르카인을 닦달해 신에게도 통하는 무기를 만들고, 신이 된 이들이 보다
원활하고 능숙하게 신력을 다룰 수 있도록 조율하고.
그리고···
“···두리쉬마를 내보내자.”
“가능하겠습니까?”
“주신이 그 고초를 겪었으니 저놈들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거야. 포위망이 멀쩡할 리가 없어 무조건.”
두리쉬마는 이곳에 있는 것보다 종말 차원으로 돌아가 마물들을 모으는 게 베스트다. 더불어 알베니우스도 함께
보내 숨겨 두었다는 용사들까지 끌고 온다면 더 좋고.
“일단 확인해보겠습니다.”
“확실하게 내가 직접 확인하지.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어.”
* * *
- 커.
- 줄여. 다시.
- 어흥!
“꺼져라.”
- 친구!
- 낑!
- 크기?
김우진과 합의가 끝났고 이미 외부 또한 확인했다. 주신이 죽을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저들의 포위망이 훨씬
느슨해졌다.
알베니우스의 능력이라면 빈틈을 노려 은밀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가능하겠지? 도마뱀?”
“···끄응, 불가능은 아니긴 한데. 가다가 걸리면 어떡하지?”
- 가?
- 끼이?
“그래, 간다.”
“살아서 또 보자, 세계수들아.”
* * *
이 세상에 완벽은 없다. 차원룡은 스스로를 숨기는데는 성공했지만 두리쉬마가 가진 마기를 온전히 감추는데는
실패했다.
“···추격합니까?”
“······.”
“주신이시여.”
“···추격하지 마라. 그놈들을 잡든, 죽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상석에 앉은 알비츠가 공허한 눈으로 대답했다.
“···하하하.”
콰득, 의자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새하얀 냉기가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신들이 황급히 신력을 끌어
올리며 거리를 벌렸다.
“···괜찮으십니까?”
알비츠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상체의 절반이 뜯겨져 나갔다. 왼 어깨와 가슴은 말 그대로 소멸했다.
“괜찮을 리가 있겠느냐.”
알비츠는 베리안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카식 레코드의 성역에서 권능을 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거부하고
싸웠다.
차가운 한기에 신들이 몸을 떨었다. 아무리 제약을 당했다고 해도 주신은 주신이었다. 일반 신 몇 정도는
가뿐하게 얼려버릴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
# < 104. 이미 다 >
조용하다.
“릴리.”
- 왜.
- 응.
순수하게 정제하여 깎아낸 마력석에 세계수의 정기가 깃들었다.
- 뭐?
그가 선택하는 무기는 당연히 하나다. 마력포. 자고로 마력포하면 드워프, 드워프하면 마력포 아니겠나.
그리고 마력포는 단순히 주변의 힘을 빨아들여 방출하는 방식은 안 된다. 그런 수준에서는 결코 신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
마력포의 파괴력은 결국 포탄이 결정한다. 포탄에 얼마나 강대한 술식과 마력을 담았는지에 따라서. 어떻게
가공했는지에 따라서.
방향성이 정해졌다.
“다시 불어넣어주게.”
- 줄었어?
- 안전?
- 터지면?
“위험하겠지.”
- ······.
“걱정 말게. 원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거네. 그때도 마력포가 터졌지만 결국 더
발전시키지 않았나!”
콕콕콕-
- 여기. 내 본체 앞.
- 양심, 어디?
- 가.
- 저 앞. 괜찮.
- 낑낑! 낑!
* * *
“맨날 저러시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왜요?”
“어머니 나무들과 가장 많이 문제를 일으키는 게 너라는 자각이 없니?”
“저는 언제나 하이엘프답게 맑고 깨끗하죠.”
“···케이룸에 하이엘프가 있었다면 비교할 수 있었을 텐데.”
“의심하지 마세요. 저는 하이엘프입니다.”
율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와 등은 세계수와 맞닿아 있었고 접촉부를 통해 정기가
순환했다.
시에나가 픽 웃었다.
* * *
두리쉬마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알베니우스와 두리쉬마는 수백의 마물에게 둘러싸여 전투를 벌이는 수백의 용사 무리를 발견했다.
알베니우스가 자세히 살피고는 감탄했다. 이곳에 방목되어 업을 쌓은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용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알베니우스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어?”
어쩐지 용사들의 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단순히 마물들과 싸우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
# < 105. 세계수를 써먹는 방법 >
이상하다.
몇 달이 지났다. 평화는 좋지만 지나치게 평화가 길다.
두리쉬마는 알베니우스와 함께 포위망을 뚫고 사라졌다. 알베니우스의 권능과 허술해진 포위망을 비추어 보았을
때, 무사히 도망쳤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이곳에서 알 턱이 없다.
“그렇게 되면 큰일 아니에요?”
“큰일이지.”
“뭐, 일단 마력포들은 언제든 대기상태이긴 하네. 실전에서 위력을 확인해봐야 하기도 하고.”
“싸우는 거라면 전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크흐흐.”
“가능할까요?”
“만약 두리쉬마님쪽으로 전력이 가 있다면 이쪽도 확실히 줄어 있겠지.”
“그건 그렇지만 함정일 가능성도 있잖니?”
“물론 그렇죠.”
“포위망은 어떻지?”
“매일 같이 살피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이전보다 덜해진 게 맞긴 한데 이게 다른 쪽으로 돌려서 그런 건지,
아직도 주신이 공격당한 게 혼란스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함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가보지.”
다만, 문제는 함정일 경우인데 김우진은 아무리 못해도 빠져나올 자신은 있었다.
그는 주신과 필적하는 강자며, 저들은 신이다. 상대 또한 신이긴 하지만 멍청이처럼 죽지는 않을 거다.
차기 신 후보들 대부분이 상위 집행자들이기 때문에 신들을 죽이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그들을 붙잡아 텅
비어버린 세계수에게 다시 거름을 공급한다.
- 좋아!
- 낑!
두 정령체가 눈을 반짝였다.
* * *
백신전의 말이 곧 법칙이자 정의였다. 백신전은 이 세상 정상에 우뚝 서 우주를 다스렸고 누구도 거기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백신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신들이 줄어들었다. 하위 신도, 상위 신도, 심지어 주신도 있었다.
줄어든 자리는 전부 채워지지 않았으며 백 개의 자리에 일곱 개의 공석이 생겨버렸다.
세 명의 주신이 균형을 이루던 것은 칼카르의 죽음으로 둘이 되었고, 베리안이 알비츠를 권속으로 삼으면서
완전히 독재가 되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입장에서는 말이 되는 건가 싶다. 아무리 그들이 신이라고 한들, 아카식 레코드는
신 위에 존재하는 절대 법칙이니까.
허나, 베리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건 또 아니다. 그 또한 백신전의 신들이 결코 완전한 신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강한 용사로 여기던 그는 어느새 주신마저 위협하는 거물이 되었다. 허나, 그것도 베리안께서 뜻을
이루고 나오신다면 끝이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김우진이 먼저 나올 일은 없었다. 솔직히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과 연옥이라는 보금자리가
아니라면 일개 피조물인 그가 여기까지 올 수라도 있었겠나.
“역시 그래도 명색이 신인지라 보는 눈이 있습니다. 환영합니다, 형제님. 진정한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신
것을.”
“저와 함께 소장주신을 찬양합시다! 신의 자비가 하해와 같으니, 폭압을 일삼는 거짓 신들은 결국 가면을 벗고
천벌을 받을 지니!”
김우진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김우진에게 부족한 것은 세력이고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화고
주신으로 섬기라고 했을 수도 있다.
과연 칼카르를 죽이고 백신전의 신들을 잡아먹은 괴물답다. 프로티마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김우진이 혀를 찼다. 디아네는 누가 봐도 진심이었지만 프로티마라는 저놈은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다 들렸다.
하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헛소리! 주신께서 나오시는 날! 그날이 네가 소멸하는 날이다, 김우진! 지금의 승리를 마음껏 즐···!”
“백신전은 영원하리라!”
“네놈들도, 저놈도. 그리고 이 자리의 누구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어.”
허술하던 포위망은 완전히 붕괴되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도망친 신과 집행자들은 김우진의 습격을 알릴 거다.
이미 몇 달이나 시간을 지체했다. 베리안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시작하지는 않았을 터, 어느 정도의
성과는 무조건 낸다고 생각하고 대비해야한다.
“두리쉬마를 찾아야겠어.”
백신전을 친다.
* * *
“사, 살려줘!”
“세계수의 뿌리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는 신이다! 김우진! 신을 이렇게 대우하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소장주신이시여! 저는 충실한 개가 되겠나이다!”
“끝까지 발악해봐라! 결국 주신께서 네놈을 벌하실 테니!”
빠악-
- 조용.
- 어흥!
신들은 각양각색의 반응들을 보여주며 두 그루의 세계수에 나눠서 봉인되었다. 릴리와 나르는 저항이 심한 신들의
싸대기를 때려가며 직접 집어넣었다.
“어땠어?”
“할 만 했어요.”
“저는 오히려 아쉬웠습니다. 신이라는 것들이 저리 허약해서야.”
“소장주신님의 자비가 함께하니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신이라는 자들이 생각보다 크게 대단할 건 없다는 걸 느꼈단다. 네가 어째서 관리자라고 부르는지도.”
“율리아.”
“네.”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생각해봤는데요?”
“저놈들이 짜놓은 판이 아니라 우리의 판에서 전쟁을 하면 어떨까하는 그런?”
“백신전을 연옥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건가요?”
“아니.”
“그건 불가능하고 어머니 나무를 이용해 차원을 움직이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세계수의 뿌리는 차원의 핵에 닿아. 그리고 차원에 간섭할 수 있게 되지. 그러면 차원 내에서 세계수는 반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어. 그게 세계수가 신의 나무라고 불리는 이유지.”
“어디 더 해보렴.”
“···잠깐만요. 그건 불가능해요.”
“어째서?”
“아카식 레코드와 차원의 핵은 완전이 차원이 달라요. 차원은 그저 세계의 의지라면 아카식 레코드는 전 우주의
의지에요.”
“그건 결국 그냥 크기만 커졌고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 말은.
“릴리와 나르가 뿌리를 아카식 레코드까지 뻗어서 연옥을 백신전과 붙여버리는 거야.”
- 미쳐. 내가.
네가 내 엄마야?
───────────────
# < 106. 시작 >
“안 돼?”
- 안 돼! 못 해!
- 낑낑! 깡깡!
깡깡은 또 뭐야.
“세계수인데 안 돼?”
“소장님? 어머니 나무가 만능은 아니거든요?”
“신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물론 다른 어머니 나무들보다 두 분이서 대단하게 성장한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완전 달라요.”
“어···. 그건 좀 제가 봐도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 ······.
- 뭐 줘?
- 몰라. 근데.
- 이미. 내렸어. 뿌리.
“언제?”
- 한 달.
- 근데. 안 돼. 혼자는.
- 확실. 아니.
릴리도, 나르도 결코 평범한 세계수가 아니었다. 그들이 잡아먹었고 잡아먹고 있는 신들이 한둘이 아니다.
신의 힘이란 결국 아카식 레코드가 부여한 것. 근원을 따지면 아카식 레코드라는 거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으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뭘 원해?”
- 아니. 됐어.
“농담?”
“···애들아!”
* * *
시에나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엘프들은 지금까지 세계수의 진면목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근데 정말 가능하세요?”
- 아마도?
“···아마도? 뭐예요, 그 무책임한 의문문은. 점점 소장님 닮아가시면 안 돼요!”
- 귀쟁이. 잔소리.
- 내가?
- 증거?
“제가 지난 번에···.”
- 응, 아니야.
- 집중.
그나마 릴리와 나르가 신들을 잔뜩 집어 삼킨 특별한 세계수이기에, 한 차원에 같이 심어졌고 협동할 수 있기에
그나마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거다.
신이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신들과 권속들이 이어져 있듯이, 신들 또한 아카식 레코드와
이어져 있다.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수가 차원이라는 배를 움직이는 엔진과 네비게이션이 되고, 아카식
레코드와 이어진 신들이 선장이 되어 전체적인 총괄을 더한다면.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무엇보다 엘프와 세계수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 그게 아니더라도 신인 엘프가 옆에서 보좌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효율이 올라간다.
- 시작.
“네.”
“나도 준비 됐단다.”
────!
* * *
“확실히 멀긴 멀어.”
연옥은 하위차원과 상위차원의 중간쯤 걸쳐있다. 그건 그만큼 아카식 레코드, 우주의 중심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며
반대로 종말 차원은 우주의 가장 변두리니 거의 극과 극의 거리였다.
얼마나 멀리 갔는지 백 개가 넘는 차원을 넘었다. 그런데 도착한 곳에는 두리쉬마가 없었다. 대신 알베니우스와
용사들이 있었다.
“두리쉬마님은요?”
“다른 곳으로 갔어. 여기는 저것들이 마물을 대부분 쓸어버렸거든.”
“다들 눈에 독기가 가득하네요? 느껴지는 기운도 어지간한 용사들 이상이고. 저 정도라면 집행자들과 싸워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김우진은 용사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김우진에 의아함을 품었으나 은은히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얌전히 모여들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만나서 반갑다. 나는 너희들을 이끌고 백신전을 들이 받을 사람이다. 이 양반을 통해서 내가 너희들을 모았다고
보면 된다.”
“···저건 내가 알아서 모은 거거든?”
“가슴에 손을 얹고 저한테 다 맡기려고 모은 게 아니라고 말씀해보시죠.”
“······.”
“네 이름은?”
“테론입니다. 부족하지만 일단은 이들의 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김우진이다.”
─!
“크윽···!”
“커헉···!”
김우진이 기운을 폭사시켰다. 거대한 압박과 마주한 용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약한 일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테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 자신감에 용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도 깨닫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을.
따라와라.
마물이 지겹다고?
싸워서 죽은 게 아니라?
* * *
번쩍-
새로운 차원이 김우진의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낸 산이 보였다. 김우진은 그 앞에 섰다. 숨어
있던 수만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리쉬마님.”
산이 눈을 떴다.
“만족할만큼 모으셨습니까?”
“몇 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어둠의 사도가 된 이후, 이렇게까지 바쁘게 움직인 건 처음인 것 같군.”
“때가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하다. 수만 급하게 부풀렸지 질적으로는 이전과 차원이 다르다.”
“시간이 없습니다. 베리안이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절대 신인지 뭔지가 되겠다고.”
“아주 돌아버렸구나.”
쿠그그그그-
“그렇다면 가야겠군.”
“가자.”
───────────────
# < 107. 직전 >
한 차원에 어둠의 사도가 선택되고 멸망이 어느 궤도에 올라 차원에 마기가 흩뿌려지기 시작하면 마물들은
그곳으로 자연스레 이끌린다.
허나, 세상은 언제나 섭리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멸망이 진행 중인 세계가 꿀벌을 유혹하는 꽃처럼, 마물들을
유혹하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 모든 과정을 무시할 수 있다.
“가자.”
크르르르-
크워어어어어!
* * *
그들중에는 김우진 이전의 소장 시대에 연옥에 갇혔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은퇴 용사라는 게 그렇다. 집행자가
되거나, 그냥 힘을 포기하거나, 연옥에 갇혔다가 포기하거나.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으니까.
두 그루의 세계수와 일곱의 신들, 넘쳐나는 마력포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죄수와 집행자들까지.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두 세계수는 차원을 움직일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두 그루의 세계수 사이에 가지와 뿌리에 묶여 얼굴만
내밀고 있는 두 엘프신들은 꽤나 우스웠다.
김우진은 발끈하는 율리아와 시에나를 내버려두고 양손을 뻗었다. 한 손에는 릴리가 날아와 앉았고 다른 손에는
나르가 얼굴을 부볐다.
“될 것 같아?”
- 응.
- 낑!
- 응.
“상관없어.”
이미 전례가 있다.
알베니우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종말 차원들은 변방으로 밀려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혀 합쳐지기도 한다고 했다.
- 가능. 아마도?
“그거면 됐어.”
“딱 좋네.”
마물의 군단도 아마 그쯤 걸릴 거다. 주신을 초월한 김우진이 혼자 움직이는 것과 수백만의 마물들이 움직이는 건
다르니까.
- 응!
- 끼잉!
────!
차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마물은 필연적으로 마기를 방출한다. 그들의 대규모 준동은 우주를 관장하는 신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대규모 군단이 차원과 차원을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종말 차원에 그치고 있습니다만, 이대로는 종말
차원이 아닌 하위 차원에 발을 들이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로를 예상해 보건데···.”
“백신전이구나.”
“그자가 분명합니다. 김우진을 돕던 어둠의 사도.”
“어둠에게 영혼을 판 타이탄입니다.”
어둠의 사도가 연옥에 숨어 김우진과 함께 알비츠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포위망을 뚫고 변방으로
도망쳤다.
“연옥 쪽은?”
감각과 관련된 권능을 가져 주신을 제외하고 그 어떤 신보다 예민한 신, 파라트가 보고를 올리던 집행자 대신
앞으로 나섰다.
“연옥의 차원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이한 파동을 흩뿌리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인다니? 무엇이 말이냐?”
“차원입니다.”
“······!”
“······!”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옳은 소리! 차원이 움직인다니. 차원의 이동은 오직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차원이 움직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종말을 막지 못한 차원은 자연스레 변방으로 밀려난다. 그것은 태초부터
내려온 우주의 순리다.
“조용.”
“직접 확인해보겠다.”
“모시겠습니다.”
백신전을 벗어나 연옥이 보이는 차원의 경계까지 다다른 알비츠는 파라트의 말이 맞다는 것을 느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들처럼 신으로 오랫동안 군림한 것도 아니다. 아카식 레코드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것도, 살핀 것도 아니다.
“집행자들을 모두 소집해라.”
알비츠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일개 인간 대 주신임에도.
최초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성공한 신임에도.
‘···대체 어떻게.’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마물과 함께 연옥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김우진이 전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지만 연옥을 움직일 정도라면 충분히 우리를 짓뭉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거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고작, 고작 40 년 남짓이었다. 정체되어 있는 신들의 아성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주었던 한 번의 기회가 지금의
사태까지 왔다.
외부에서 연옥의 차원의 방벽을 찢어도 문제다. 방벽을 부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방벽을 부순다고
차원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면.”
“상관없다.”
“······!”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베리안이 동등한 상대였던 알비츠를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성공했다는 것.
간섭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주신은 그조차 베리안에게서 무엇 하나 읽어낼 수 없는
시점에서 감히 그가 평가할 수준이 아니었다.
“···상관이 없다고?”
“그래.”
신들 또한 베리안의 각성을 눈치 채고 무릎을 꿇었다. 베리안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경배를 받으며 기운을 끌어
모았다.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순간.
세상이 요동쳤다.
번쩍!
저 멀리, 세상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솟구쳤다. 빛들은 신들을 감쌌다. 연옥을 감쌌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하던 이미 늦었다.
베리안이 웃었다.
───────────────
# < 108. 대답 >
────!
새하야면서 신성한 빛줄기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차원의 방벽을 통과해 연옥 전체를 휘감았다.
김우진을 감쌌다.
철컹-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우진은 그렇게 느꼈다. 그를 속박하던 제약이 끊어졌다.
“아.”
“···계약이 사라졌다.”
정식으로 서로 조건을 완수해서 종결된 것도, 누군가 어겨서 파기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성공했구나. 베리안.”
“모두 전투 준비!”
김우진이 소리쳤다. 그의 고함이 갑작스러운 빛줄기에 당황하던 연옥의 구성원들을 일깨웠다.
- 없어?
- 낑?
“소장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방금의 빛과 관련이 있니? 신의 힘 같았는데.”
“신들이 계약을 지워버렸습니다.”
“···간섭한다고 했던 그거구나.”
“네.”
“그러니까 그말은···.”
“우리를 먼저 치겠다는 거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벌어진 한 방이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되면 굳이 연옥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저들이 직접 이곳에 발을 들일 테니.
- 전투 준비?
- 응!
- 낑!
두 엘프 신들을 감쌌던 세계수의 가지들이 회수되었다. 김우진의 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력포를 장전하고 각자의 무기와 갑옷을 챙겼다. 세계수의 뿌리들이 연옥 전체를 휘감으며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러길 잠시.
쩌저저저저적-
“···맙소사.”
“세상이 무너진다···!”
- 적···!
- 끼이이이잉!
방벽 자체를 무너트리는 거대한 힘 앞에, 두 세계수의 경계심이 올라갔다. 차원의 핵을 넘어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은 두 세계수에게 있어 연옥은 완벽한 자신들의 영역이었다. 그게 너무도 쉽게 침범 당했다.
적들이 나타났다.
수천 명의 집행자들.
수십의 신들.
그리고 그 너머.
두 명의 주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고한다!
집행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신의 힘은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데르카인님. 화답 부탁드립니다.”
“아주 거하게 해주지.”
─!
그 순간, 신 하나가 권능을 발현한다. 신성한 방패가 백신전과 섬광의 사이를 가로 막는다.
─────!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멸한 집행자들이었던 가루의 잔재가, 중상을 입고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신들의 무리가, 예상 못한 파괴력에 당황한 또 다른 신들의 무리가 있었다.
“이게.”
“내 대답이다. 씨발놈아.”
* * *
전쟁을 하는데 사족이 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언어의 대화가 아니라면 그만둘 이유도 없다.
“쏴라!”
마력포의 파괴력을, 그 마력포가 신들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광분에 휩싸이게 했다.
“저 반역자들을 죽여라!”
“감히 백신전에 대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줘라!”
와아아아아!
- 적! 죽여!
- 어흥!
세계수의 권능이 적들을 공격했다. 나뭇잎은 하나하나가 신조차 베어 넘기는 칼날이 되어 쏟아지고 수천 줄기의
가지와 뿌리들은 집행자들을 유린한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가시죠.”
“네. 드디어···!”
“정말 많긴 많구나.”
“소장주신이시여, 당신의 검이 되어 저 간악한 자들을 주살하겠나이다.”
“내 장기는 요리인데, 쓰읍.”
“내 독이 통할까? 그래도 같은 신이니까 통하겠죠?”
“모조리 찢어버리겠습니다!”
신들이 움직인다.
차원룡도 움직인다.
‘가만히 있어라.’
베리안의 웃음이 그리 속삭인다. 한쪽이 움직이면 다른 쪽도 움직인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으면 일단은
지금의 상태가 계속된다.
그리고 그 협의는.
───!
백신전의 신들은 주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김우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결국 대장만 잡으면 끝난다. 대장을
잡아야 끝난다.
시간을 끌면 두리쉬마가 당도하겠지만 그 전에 아군이 전멸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니 싸워야 한다.
물론 불안감은 있다.
물론 김우진 또한 믿는 게 있다.
주신이 두 명이라고?
한 명은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해 그 권능의 일부를 얻었다고?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김우진이 포효했다. 불꽃이 터져 나왔다. 알비츠의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베리안의 눈에 이체가 떠올랐다.
* * *
허나, 김우진의 불꽃은 달랐다. 기존의 적염보다도, 칼카르의 홍염보다도 뜨겁고 신성한 백염은 모든 것을
불태웠다.
알비츠는 깨달았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쩌저저적-
냉기가 공간마저 얼리며 용사들을 휩쓸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스라지는 모습은 신에게 대항한
반역자들에게 마땅히 펼쳐져야 할 모습이다.
“···세계수.”
그의 시야에 거대한 가지를 휘두르며 신들을 공격하는 세계수들이 보였다. 단숨에 밀어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수차이에도 생각보다 시간이 끌리는 것은 저들 때문이었다.
───!
“어떻게···?”
마물들을 이끌고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의문은 놈이 뒤에서 기습을
하기 직전까지,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주신인 그가.
두리쉬마가 웃었다.
어차피 네놈은.
───────────────
# < 109. 세계수는 신이고 김우진은 무적이다 >
권능.
콰콰콰콰-
콰콰콰콰!
범람하는 불꽃이 공기마저 불태우며 전진한다. 주신을 뒤덮기 직전, 새하얀 빛의 구가 주인을 지켜낸다.
- 뜨거···!
- 끼이이이잉!
권능과 권능이 부딪히니 대지가 무너지고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 여파는 그대로 차원을 직격하며 차원의 온도를
올렸다.
연옥의 중심에서 싸우는 두 신들의 전투는, 그 여파는 같은 신이라고 할 지라도 쉽게 견디어 낼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으며 그 휘하의 집행자나 용사들은 더욱 그랬다.
“모두 물러나라!”
“연옥을 벗어난다!”
“···이 정도 수준이라니.”
“아카식 레코드에 정말로 간섭을 성공하셨구나.”
“아니,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은 주신께서 강한 것은 당연히 알겠소. 헌데 거기에 밀리지 않는 김우진은 대체
뭐란 말이오!”
그제야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신들이 경악했다. 연옥을 지키는 차원의 방벽은 이미 소멸했기에 경계는
흐릿해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태양과도 같은 열기는 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능이었다.
하지만 저 태양은 베리안과 김우진이 만들어내는 권능의 충돌이었다. 차원 전체를 뒤덮고 차원을 삼켜버리는 진짜
이적이었다.
“···타이탄?”
“어둠의 사도···!”
“어느 틈에?”
* * *
─!
──!
─!
알비츠는 속절 없이 밀려났다.
최악이다.
알비츠가 이를 악물었다.
평소라면 이럴 이유가 없었다. 두리쉬마는 단순히 마기를 몸에 두르고 휘두를 뿐이다. 그 강맹함은 능히 권능이라
불릴 만큼 파괴적이지만 그뿐이다.
신들과 차원마저 녹여버리는 가공할 열기가 그의 권능을 방해했다. 주신이기에 그 여파속에서도 버텨내며 권능을
발현시킬 수 있었지만 그게 한계였다.
“···이런 말도 안 돼는!”
약해서, 혹은 팔이 뜯겨서도 아니었다. 베리안이 그를 구속해서도 아니었다.
“꼴이 우습구나.”
도망치고 싶었다. 적어도 이 거지 같은 곳에서 조금만 멀어진다면, 그래서 권능을 좀 더 원활하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온 몸으로 열기를 받아내며 피부가 벌겋게 익고 살갗이 벗겨지고 있음에도 놈은 그것을 감내했다.
───!
거대한 망치가 알비츠를 강타했다. 반쯤 녹아내린 얼음의 방패는 재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매일 같이 곱씹었다.
매일 같이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을!”
“아깝구나. 저 빌어먹을 열기만 아니었다면 우리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을 텐데.”
망치가 떨어졌다.
* * *
“모두 도망쳐라!”
“세계수의 곁으로!”
부소장 또한 교도관과 용사들을 이끌고 세계수의 본체로 달렸다. 그들의 품 안으로 들어가자 몸을 녹일 것 같았던
열기가 그나마 줄어들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뭐예요?”
- 아니.
- 끼이이이잉···.
릴리와 나르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방어막을 만들었으나 열기는 그마저도 녹여버리고 있었다.
그마저도 신들을 흡수한 릴리와 나르라는 특별한 세계수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불타 사라졌을 거다.
- 조금.
- 안 돼.
- 도움.
- 낑?
- 보여? 저거.
- 낑.
* * *
밀린다.
베리안이 웃었다.
“김우진. 넌 꽤나 힘겨운 상대였다. 자칫하면 백신전이 사라질 뻔했어. 인정하지. 내가 신으로서 살아온 그
수많은 세월 중 너만큼 나를 애먹인 자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이게 무슨?”
- 내가!
- 했어.
“릴리?”
“···세계수?”
- 힘. 톡.
간단한 삼단논법이다.
- 영역! 내!
하지만 연옥은 릴리의 영역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뿌리를 내렸고 차원의 핵을 넘어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았다.
십 단위의 신들을 삼키며 다른 세계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녀의 영역에서 만큼은 그녀가 주신이었다.
그럼에도.
“잘했어, 릴리.”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까짓 것 따위···!”
베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 애썼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잘 안 되나 봐?”
“닥쳐라! 나는 절대신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건 없어!”
“절대신이라니. 와,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네.”
잘 키운 세계수, 일곱 신 안 부럽다니까.
김우진이 남아 있던 모든 힘을 쥐어짜냈다.
“판 뒤집혔다, 이 개새끼야.”
불꽃이 신을 덮쳤다.
───────────────
# < 110. 청출어람 >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카식 레코드.
그게 어떻게 신인가.
그게 어떻게 절대자인가.
그러니 김우진 같은 피조물이 관리자라고 불러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완전히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함이다.
백신전에 혼란을 주고, 그 틈에 아카식 레코드를 흡수해 진정한 절대신으로 거듭날 생각으로.
생각 이상으로 날뛰어 칼카르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이 당했으나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
백신전의 반역자, 김우진을 참살하고 그 무리를 소탕한다. 그리고 신들의 떠받듬을 받으며 절대신으로 군림하고,
동시에 아카식 레코드를 완전히 그의 것으로 만든다.
어째서.
빛이 폭발한다.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끊어진 빛은 한층 바래져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소멸시킬 정도로 거대하다.
화륵-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그래. 세계수.”
────!
- 했어?
- 멍청이.
불꽃이 빛을 따라 번져온다.
“이건 말도 안 돼···!”
“말이 안 된단 말이다!”
“말이 안 되긴.”
그게 상식이다. 그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순리잖아?”
- 상식. 순리!
- 뜨거, 안 순리.
- 안 뜨거, 순리!
패배자에게는 죽음을.
* * *
불꽃이 사그라든다.
열기가 식는다.
“말도 안 된다···!”
반쯤 녹아내린 육신.
“말도 안 된다고···!”
비록 일부긴 하나 아카식 레코드까지 얻었으니 더욱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자신은 추레한
꼴로 바닥을 기고, 저 놈은 저리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 볼 수 있는가.
“신이 약골이군.”
“감히,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내려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 따위가 아니지.”
콰득-
- 거지!
“네가 졌어.”
“닥쳐라!”
“칼카르도, 알비츠도, 너도. 전부 끝났다고.”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나는 아카식 레코드를 손에 넣은 지고지순한 절대 신이다!”
“그럼 나는.”
화륵-
“그 위인가 보지.”
절대 신을 죽일 테니까.
없다.
“나는 너처럼 세상을 다스리는 걸 원하지도, 아카식 레코드를 먹길 바라지도, 절대 신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아.”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결국 신이다.
“이제 난 자유야.”
“고작,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 고작을 지켜주지 않은 게 네놈들이었어.”
“네놈 때문에 백신전이 붕괴했다! 이 우주의 균형이 어그러졌단 말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놈이 날 죽이려고 그 지랄을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저주하겠다! 죽어서도 너를···!”
“그래, 열심히 해봐.”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흐릿해지지만 않았어도···! 저 세계수만 아니었어도!”
한참이나.
* * *
“···정말로 이겼군.”
열기를 견뎌내며 주신과 싸웠던 탓에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숨을 쉬고 있는 건 타이탄의 끈질긴 생명력과 어둠으로부터 받은 힘 덕분이었다.
“···정말로 이겼다.”
“후련하나?”
“후련하지. 후련하고 말고.”
흔히들 말한다. 복수는 허무한 것이라고. 적어도 복수를 이룬 지금의 두리쉬마는 그것이 개소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차원용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다지 큰 유대감이 없다. 때문에 알베니우스와 복수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다.
“드디어.”
그가 포효했다.
───────────────
# < 111. 날 잊어? >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신들이 죽었다.
‘주’신들이 죽었다.
백번 양보해서 알비츠는 패배할 수 있다. 그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니까. 저 어둠의 사도는 칼카르를 죽인
전례가 있으니까.
아무리 김우진이 여러 신들을 죽인 괴물이라고 해도, 신들인 그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해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그들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현실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말을 버벅이며
눈을 깜빡였고 쉴 새 없이 현실을 부정했다.
“도망치자.”
“베리안도 이기지 못한 놈을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하지만 어디로? 백신전에는 마물들이 오고 있다.”
“어디로든! 그렇다고 이대로 김우진에게 죽을 수는···!”
하지만 너무 늦었다.
───!
번개가 내리쳤다.
“이적을 목도했다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신께 참배를 올려야 마땅합니다. 헌데 도망칠 궁리를 하다니. 아직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까?”
“디아네!”
“이 배신자가!”
“배신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을 영접하고 제대로 된 분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신들이 경악했다. 반응을 하지 못했기에,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드네르바···? 어째서?”
“드네르바?”
“···설마.”
“표정 볼만하네. 그 특유의 오만한 얼굴을 유지해야지. 그게 신으로서의 위엄이잖아?”
어느샌가 다가온 여섯의 신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고작 여섯이고 이쪽은 수십이었다. 뚫으려면 얼마든지 뚫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베리안이 아주 좋아하겠군.”
“···진정한 신을 배알합니다.”
“···항복하겠습니다.”
“아.”
김우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 보니 너가 있었지.”
“···날 잊었어?”
명색이 신인데?
* * *
“···이겼나?”
내가? 정말로?
그 오만한 신들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 승리!
- 끼잉!
“···정말로 이겼다.”
“자유다!”
복수에 성공한 거인이 환희에 젖고 더 이상 도망자 신세가 아니게 된 도마뱀이 기쁘게 포효했다.
무엇보다.
김우진이 눈을 감았다. 그에게 패배를 선사하기 직전까지 갔던 베리안의 잔재가 그의 심장 속에서 꿈틀 거린다.
- 괜찮?
“···하하.”
40 년이다. 무려 40 년.
그때부터 신들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것이 한 순간에 끝났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던 수십의 신 뒤에는 어느새 천 단위의 집행자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김우진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잘 처분했다고 소문이 날까.”
“이런 게 업보지.”
중요한 건 김우진이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독단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서도
안 되고.
“모두 얌전히 백신전으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려라. 조만간 직접 가서 네놈들을 어떻게 할지 알려줄 테니.”
“···예.”
“아, 나 같은 놈에게 고개를 숙이기 싫은 놈은 도망쳐도 좋다. 우주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낼 테니. 변방의 종말
차원도 결코 안전한 도피처가 되지 못할 거다.”
“···그런 무모한 자는 없을 겁니다.”
패배자다운 모습이었다.
* * *
만족한 알베니우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쫓겨 다녔음에도 초탈한 신선 같았다.
그냥 단순한 건가.
“···뭐, 내가 살인귀도 아니고. 학살을 주도한 케이룸 아니, 베른도 그 위의 주신들도 모두 죽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해.”
“다행이네요.”
“···제가 필요 했었는지 솔직히 의문입니다만, 일단은 싸웠으니 평생 전 차원의 식재료들을 주셔야 합니다.”
“노력해보지.”
“그리고 강민식도 제 조수로 주십시오.”
“갑자기 저를요?”
“왜지?”
“강민식의 독은 아주 귀중한 식재료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 독은 신조차 죽이는 극독! 감히 음식 따위로 쓸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내 손에 걸리면 극독이고 나발이고 다 식재료야!”
“제 독이면 당신이라도 죽습니다!”
“어디 해볼까?”
“얼마든지요!”
“···너희 둘의 문제는 너희 둘이 알아서 해결해라.”
김우진 다음으로 큰 역할을 했던 두리쉬마는 복수의 화신 그 자체였다. 때문에 백신전의 모든 신들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할 거라 여겼는데 의외였다.
“정말로요?”
“아니.”
아니었다.
그들이 없으면 어둠은 끊임없이 증식하며 세상을 물들여 갈 것이다. 좆같은 놈들이지만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우주의 법칙이자 균형이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사도인 이상, 나는 군단을 이끌고 차원들을 침공해야만 한다. 힘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지게 된 숙명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 싸울 바에는 반쯤 부스러진 백신전과 싸우는 게 백 번 낫단
말이지.”
“감사합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두리쉬마의 말대로였다.
백신전을 멸망시키면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필연적으로 혼란이 일어나는데 그 혼란을 수습할만한 사람은 결국
김우진뿐이다.
이미 백신전의 세 기둥이 죽었고 제외하고도 30 가량이 죽었다. 백신전은 거의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니 충분하고도 남는 전과였다.
- 나는?
- 낑?
- 차원. 더 크게!
- 끼이이이!
- 응!
- 낑!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 사라졌다. 당연히 글라크를 감싸던 방벽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세이드 보러 가야지.”
───────────────
# < 112. 이렇게까지 >
차원, 글라크.
수많은 차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악의 종말을 맞이한 차원이자, 김우진이 용사로 있던 차원.
“역시 아직 멀었군.”
대륙의 90%이상이 마기로 침식되어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차차 정화해 나간다고 한들 40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딱-
“뭐하시는 거예요?”
“마기를 태워버리는 거야.”
흔히들 정화라고 한다.
“그런 것도 가능하세요?”
“쉬운 일이다.”
불꽃을 통하지는 않지만 율리아도 신인 이상 가능은 하다. 다만, 김우진처럼 손쉽게 전 대륙을 정화할 수는
없겠지.
신들이 권능까지 써가며 차원 자체를 봉쇄했기에 추가적인 마물의 유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마물들은
본능적으로 생명에 이끌린다.
40 년이라는 세월은 대륙에 남아 있던 모든 마물들이 마지막 인류의 생존자들에게 이끌려 토벌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거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방향은···저쪽이네.”
“꽤 머네요.”
“네가 평범한 엘프라면 멀겠지.”
“잘 살아있네.”
적어도 글라크에 관해서는 백신전은 약속을 지켰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인지라 당연히 지킬 수밖에 없었겠지만
단순히 계약서를 믿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또 다르니까.
대륙은 평화로웠다.
“세이드는 어디 있을까요?”
“글쎄.”
김우진과 율리아는 단순히 도시 하나가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인류의 모습을 확인했다.
비엔데르크의 국왕도.
비엔데레크의 젊은 왕은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다. 김우진과 용사들의 희생과 활약을 인정하고 최대한 대우를
해주려고 했었지.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자기 동생을 김우진과 어떻게든 엮으려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따라와.”
“네. 그런데 왕궁 안에도 소장님의 조각상이 있겠죠? 황금? 아니죠. 왕궁이니까 다이아로 만들어놓지
않았을까요?”
“매를 버는 주둥이군.”
* * *
정오가 지났다.
딸각-
바이른은 씁쓸한 커피를 음미했다. 달달한 다과와 함께 하니 제법 잘 어울렸다.
“다 그분 덕분이죠.”
“그래.”
그날 차원을 침공한 수백만의 마물의 파도는, 그리고 그 마물들을 홀로 막아내는 영웅의 모습은 평생이 가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이 각인되었다.
“···살아계시겠죠?”
“모르겠구나.”
하지만 감사함과는 별개로 당시 신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김우진 하나를 잡기 위해 마물들을 이용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군요.”
“많이 늙으셨군요.”
‘암살자?’
대체 누가?
“···김우진?”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김우진이었다. 글라크를 구원하고 신들에게 잡혀간 인류의 영웅.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사약 같은 구정물을 왜 먹냐고 하시더니 이제는 커피를 즐기시는 것 같군요.”
“···누구 덕분에 먹기 시작했는데 향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따악-
김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듯, 부서진 조각과 차들이 다시 떠올라 온전히 아이닌의 손에
들렸다.
“···맙소사.”
“···재주가 늘었군. 자네, 진짜인가?”
“그 누구도 저를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이 글라크에 그런 간 큰 놈은 없긴 하다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신들에게 잡혀간 것이
아니었나?”
“잡혀갔었습니다만, 다 때려 눕혀주고 왔습니다.”
“신들을 말인가?”
“신들을 말이죠.”
“···말투로는 김우진이 맞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미치겠군.”
바이른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터질 것만 같았다. 확실한 건 진짜든 가짜든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그와 아이닌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솔직히 무슨 짓을 해도 못 믿기 힘드네. 자네 같으면 신에게 잡혀갔던 인간이 40 여년 만에 돌아와서 신들을 다
때려눕히고 왔다는 말을 하면 믿겠나?”
“폐하와 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해도 말입니까? 보름달이 뜬 밤이었습니다. 그때 폐하께서는 왕실의
정원에서···.”
“믿겠네!”
“더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 사실을 자네와 나 말고 누가 알고 있단 말인가!”
김우진이 능글맞게 웃었다.
* * *
김우진은 그들과 회포를 풀었다. 호화로운 만찬과 술이 함께였고 오직 네 명만이 참가한 작은 연회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바이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점점 더 풍성해졌다. 김우진이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도.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절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세이드 공이 절대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는 목걸이 사진의 주인공이잖아요?”
“···그걸 계속 착용하고 다녔어요?”
“물론이에요. 반드시 돌아가서 돌봐줘야한다고 얼마나 아끼던지. 아, 김우진 용사님이 그 사진을 보고 예쁘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네?”
“뭐, 그냥 두 분이서 매일 주고받는 장난 같은 느낌이었지만요. 어쨌든 설마 그분이 직접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네요. 세이드님이 보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사실 그것 때문에 이곳에 먼저 왔어요. 세이드는 어디 있나요? 살아있는 거 맞죠?”
“걱정 마세요. 아주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세이드님은···.”
* * *
해가 떴다.
“일어났어요?”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한참 전에?”
“왜 깨우시지 않고.”
“곤히 자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요. 매일 같이 고생하는 걸 아는데.”
“몇 시입니까?”
“왕국의 기사단장이 곧 출근할 시간이죠.”
여인이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밍기적 거리는 세이드의 이마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시종들이 곧 오는데.”
“그럼 오기 직전까지만 이대로 있죠.”
“···아니에요!”
율리아가 부정했다.
결코.
───────────────
# < 113. 살아있다! >
“좋은 아침이다.”
글라크의 인류는 차원의 방벽을 뚫고 들어오는 마물의 파도를 경험했다. 신을 목격하고 그들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인류가 내린 결론이었고 적지만 일천의 최정예 기사단을 이그라실 왕국에서 머물고 있는 세이드에게 맡긴 이유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훈련은 단순히 너희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다. 항상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예!”
“질문 있습니다!”
“말해라.”
“공주 전하와는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아지셨던 겁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뜻이지? 질문은 훈련과 관련된 것만···.”
“오늘 아침에 꽤나 재밌는 걸 보았습니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한참 전에?”
“왜 깨우시지 않고.”
“곤히 자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요. 매일 같이 고생하는 걸 아는데.”
“······.”
“몇 시입니까?”
“왕국의 기사단장이 곧 출근할 시간이죠. 어서 일어나요. 곧 시종들이 올 테니.”
“···한 번만 더.”
“이럴 때 보면 애랑 다를 바가 없네요.”
“전하 앞에서만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오늘은 더 사랑스럽군요. 전하는 모든 인류 중에 가장 아름다우니, 그
누구의 미모도 전하 앞에 선다면 빛이 바래질 겁니다. 제 심장을 꺼내줘도 아깝지 않고 저 하늘의 별도 따다 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 감동이에요. 달링.”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스릉, 검을 뽑아 겨눴다.
설마?
“그게 누굽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저 깐죽거리는 목소리와 말투는, 그리고 특이한 단어들은 김우진이 아니면 맹세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세이드의 검이 기사의 코앞에서 멈췄다. 폭발 하듯, 터져 나오는 충격파에 주변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네가 어떻게?
세이드의 눈이 더 없이 커졌다.
* * *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 뒤에 신들과의 전쟁이 있었고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했으며 율리아가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겠는가.
“···그렇군. 믿겠다.”
“어떻게 한 게 없어요! 릴리 어머니 나무도 제가 가져왔고, 도망친 죄수를 잡을 때도 돕고, 신들과의 전투에도
참가했는데요!”
“심부름꾼에, 기껏해야 집행자고, 다른 하나는 싸우다가 결국 김우진이 결판을 냈다고 하지 않았나?”
“···이익! 세이드는 누구 편이에요!”
“아르반의 그 착한 아이라면 몰라도 공주 전하와 나를 조롱한 네 편은 아닌 것 같군.”
“그건 어디까지나 소장님이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고 해서 한 것 뿐이에요. 주신마저 죽이신 분이 하자고 했는데
따라야죠.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당연히 김우진이 주도했겠지만 율리아. 안 본 사이에 많이 영악해졌구나.”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전하.”
“솔직히 용사님이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제 생각보다 더 대단해지셔서 돌아오셨네요? 놀랐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뭐가 말이죠?”
“설마 저 목석같은 놈을 냉큼 꼬셔서 결혼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이드가 목석같기는 하죠.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도 봐요. 꽤나 말이 많지 않아요?”
“뭐, 그렇긴 합니다. 사랑의 힘이 놀랍군요.”
단순히 그뿐만은 아닐 거다. 율리아도, 세이드도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가 점점 더 익숙하고 편안해지고
있으니까.
진짜 가족이라는 거겠지.
“차원은 어떻습니까?”
“안정적이에요. 마물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요. 몬스터는 원래 그전부터 부대끼며 살아온 필요악 같은 느낌이고요.
한 가지 문제라면 죽어버린 대지네요.”
“죽어버린 땅이요?”
“정화가 쉽지 않아요. 신들도 이 세상에 관심을 꺼버렸고 저희를 가호하던 어머니 나무도 사룡에게
뽑혀버렸으니까요.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조금씩이라도 정화를 하고 있긴 한데.”
오면서 보았다. 정화된 대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마 이대로라면 수천년이 지나도 그대로겠지.
하지만 수천 년이 걸릴 일은 더 이상 없다.
* * *
“···밤이 사라졌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지고 여름에는 길어진다. 대륙의 남부는 현재 여름이었고 그걸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해가 좀 많이 기네.”
여덟시.
“···이거 좀 이상한데?”
아홉시.
열시.
열한시.
그리고 새벽 3 시.
“···불꽃?”
“새하얀 불꽃?”
“불꽃이 대지를 태운다!”
“불꽃이 넘어온다!”
새하얀 불길은 모든 대륙을 가리지 않았고 마기로 인해 저주 받은 땅들을 불태우며 빠르게 인류의 영역 근처로
다가왔다.
“···꺼지지 않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땅이?”
“정화되었다! 땅이 정화됐어!”
시커멓게 죽어버린 대지가 잿더미로 변했으나 생명력이 느껴졌다. 검게 물들었던 토양이 본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기적이다···! 기적이야!”
“김우진 용사님이 우리를 보우하신다!”
그의 이야기는 부풀리고 부풀려 이미 전설이 되었다. 신들에게 탄압당해 끌려갔지만 언젠가 돌아온다는 신화까지
있을 지경이었으니.
백염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 정체와 목적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우진이 드러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 * *
“그래, 튀는 걸로 하자.”
“어딜 마음대로.”
“회포도 다 풀었고 너나 다른 용사들의 앞으로의 일도 끝냈으니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40 여년의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부외자 같던 용사들이 뿌리를 내리고 가족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
살아남은 용사들은 전부 가족을 만들었고 이곳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원한다면 본래의 세계로
돌려보내주겠다는 김우진의 호의를 거절했다.
세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정론이다.
그리고 솔직히 어느 정도는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40 여년은 인간에게 특히 길지만 다른 이종족이라고
결코 짧은 건 아니니까.
번쩍-
“크윽!”
“···제기랄.”
“···뭐라고 변명하지?”
“아니지.”
절대 김우진이 자신의 동상을 보고 질색하는 모습을 보여서, 자신의 부탁을 저버리고 도망쳐서 그런 게 아니었다.
* * *
백신전은 패배했다.
“······.”
신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백신전은 빛으로 대변되는 아카식 레코드의 사도로서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핵심
세력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결국 김우진이 감당해야만 한다.
김우진이 과연 그걸 감당하려고 할까? 아니면 차라리 백신전을 휘하에 두고 부려먹으려고 할까? 누가 봐도 후자가
더욱 가능성이 높았다.
김우진이 일반적이었다면 애초에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김우진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괴물이다.
제이드가 혀를 찼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네. 이미 살겠다고 김우진한테 무릎도 꿇어놓고 이제와서 위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지 그랬나?”
“우리는 졌네. 완벽하게 졌어. 다시 싸워도 승산이 없고 도망도 불가능하네. 절대신에 가까워진 김우진에게서
도망친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러면 승복해야지. 죽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더 있나?”
“하지만···.”
“그게 싫은 자들은 마음대로 하게. 도망치던, 김우진에게 저항하던. 김우진이 살려줄 지는 모르겠군.”
자, 어서 일어나서 나가게.
“그럼 다시는 이번 일에 대해서 논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네. 이미 살고 싶어서 구걸이란 구걸은 다해놓고
이제와서 고고한 척은.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김우진에게 백신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게 옳다고
생각···.”
그때였다.
“신이시여!”
십여 명의 집행자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신들이 순간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집행자란 그들의 권속이었다. 권속이 도주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들이 분노를 드러내며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집행자들의 대답은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게···.”
“빨리 말해라!”
“2 천명 정도가 전부 도주했습니다.”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몇 명이 도망쳐?”
* * *
차원 봉인은 허물어졌고 마기로 오염된 대지들은 모두 정화되었다. 용사들도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글라크는 다시
발전할 것이다.
단순히 두 그루만 있어도 대단한 세계수가 잡아먹은 신만 수십이다. 그 권능은 능히 차원 안에서는 주신에
필적하니 소멸해버린 차원의 방벽을 다시 복구하는 건 조금 성가신 일에 불과했다.
“···저건 뭐죠?”
“집행자 같은데.”
일단은.
“저것들이 왜 여기 있지?”
“설마 다시 전쟁을?”
“그런 것치고는 신이 한 놈도 없군.”
신들이 바보도 아니고 불의의 기습으로 반전을 꾀했다면 절대 집행자들만 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자, 모두 어머니 나무님들의 말씀에 따르세요. 절대신님은 그 위용에 걸맞게 관대하고 품이 넓으신 분입니다.
오는 신도를 거부하지 않으니···.”
“···디아네님도 있네요?”
“···불길한데.”
- 왔어!
릴리가 소리쳤고.
“오셨다!”
“진정한 절대신이시여!”
“불쌍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소서!”
“저희는 가짜들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방황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절대신이시여!”
───────────────
# < 115. 소장절대신 >
멀리 갈 것도 없다.
“···디아네.”
“예, 절대신님!”
“절대신이라고 부르지 마라.”
“소장절대신님?”
“······.”
빌어먹을.
자, 잠시 생각해보자.
간단하다. 침몰하는 배는 버리는 게 당연하듯이, 우주의 판도가 백신전에서 김우진으로 옮겨왔다고 생각한 이들이
살기 위해 도망친 거다.
단순히 백신전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그들을 휘하로 받아들인다는 유일무이한 선택지에서 또 다른 방향성이
제시된 거니까.
기존의 신들을 싸그리 박멸하고 집행자들을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 새로운 백신전을 꾸린다는 선택지가.
“타르칸.”
“예, 소장님!”
“오늘부터 디아네와 무기한 대련을 허락한다.”
“정말입니까?”
“저, 절대신님? 갑자기 그게 무슨···?”
“명령이다. 너는 오늘부터 투기장에 들어가서 타르칸과 대련을 해라.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나오지 말고.”
“···따르겠습니다.”
“빨리 가자! 오랜만에 지칠 때까지 싸울 수 있겠군!”
“릴리.”
- 응.
- 응!
- 낑!
“릴리.”
- 응.
모두 김우진의 권속이 되겠다는 마음은 진심일 거다. 하지만 그 중에 불순한 마음을 섞은 놈들이 있겠지. 그런
놈들에게 이곳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기선제압이다.
- 어떻게?
- 맡겨.
“그래.”
- 조용! 모두!
그녀의 외침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자그마한 파랑새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정체가 세계수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 정렬!
- 조용!
마력 통제.
“···힘이?”
“···내 마나가!”
- 기준.
“기준!”
- 집합. 정렬.
“집합, 정렬!”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 기절. 절반.
- 시작.
쿠그그그-
퍼억!
“이, 이게 무슨···커헉!”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지금 같은 집행자를···!”
- 총 2214. 절반 1107. 하나 컷.
- 절반까지 1106.
“······.”
“······.”
“뒤져!”
그게 시작이었다. 힘을 잃어버린 집행자들 사이의 난투가 벌어졌고 기절한 자들은 나르에 의해 밖으로 치워졌다.
- 절반까지 0.
“이, 이겼다!”
“살아남았다!”
“나는 내 자격을 증명했어요! 나를 받아주세요!”
1107 명의 상처투성이 생존자들이 기쁨의 환호를 내질렀다. 율리아는 날개로 박수를 치며 그들을 축하해주었다.
- 아니.
하지만 승리를 만끽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 나 공격.
- 너희 피해.
쿠그그그-
* * *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은 패배하고 수십의 신들과 주신들이 모두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집행자들 대다수가 패배를
도망쳤다.
신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을. 김우진에게 순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힘이 없으면 빼앗기고 강탈당하는 게 이 우주의 순리 아닌가. 우리가 다른 종족들을 탄압했듯이. 이제는 우리가
힘이 없으니 이렇게 되는 거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제 신으로서의 생각은 버려야 하네. 우리는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야.”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내버려 둬야지. 달리 방법이 있나?”
없다.
“김우진이 그랬지. 얌전히 백신전에서 기다리라고. 알아서 오겠다고. 우리가 할 건 하나네. 더 이상 눈밖에 날
짓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최대한 그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잘들 있었나?”
김우진이 왔다.
* * *
신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김우진은 혼자였으나 그 누구도 감히 그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위압감도 위압감이었지만 베리안과의 격전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극도의 저자세로 몸을 낮추고 있던 신들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김우진을 걱정하느라 초췌하게 변한 신들은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김우진의 대화에 말리면 안 된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설마 잘못 짚은 건가?’
───────────────
# < 116. 새로운 백신전 >
간단한 문제다.
이들을 신으로 만든 것도 아카식 레코드이며, 베리안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일부 취했기에 주신을 포함한 열
명의 신을 포식한 김우진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없습니다!”
“결단코 그런 자는 없습니다!”
“좋아.”
목숨.
일반적으로 김우진이 있던 글라크의 경우, 풍부한 마나로 인해 초인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그 초인들이 지구에는
단 한 명도 없다.
글라크에서 적당한 힘을 쓰면 평범한 것이지만, 지구에서 적당한 힘을 쓰면 괴물이다.
“걸 맞는 부분은 어떻게?”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고려해라.”
“···예.”
“아, 계약을 어기게 되면 심연이 아니라 연옥으로 보내게끔 계약서를 작성해라.”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는 디폴트가 심연이지만 조항을 넣는다면 다른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다.
“연옥 말입니까?”
“그래, 연옥은 감옥이잖느냐.”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옳습니다!”
“그럼 끝났군. 내 휘하의 신들도 곧 보낼 테니 그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라. 그들이 내 대리인이다.”
“···예.”
“아, 그리고···.”
차원을 삥 뜯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 * *
“아카식 레코드 주변에는 방어막이 있습니다. 주신들이 다른 신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건데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을 빌린 것이기 때문에 죽은 지금도 유지가 될 겁니다.”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아, 아닙니다.”
김우진은 백신전을 벗어났다.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와 가장 가까운 차원. 저 멀리 거대한 빛의 기둥이 보였다.
“흡수할 수 있으려나?”
이유는 단순하다. 굳이 대단한 무언가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를 통치하는 것에도 큰 관심은 없다.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했다는 것, 그리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성공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것.
그게 문제다.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겨 그저 섬기고 따르던 백신전의 신들에게 역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심어 줘버린 거다.
“그러니까 그 전에 내가 먹어버려야지.”
아카식 레코드 자체를 흡수하는 게 아니다. 목표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도록 그 통제권을 완벽하게 가져오는 것.
겸사 겸사 힘을 취할 수 있으면 좀 취하고.
* * *
그간 백신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 방 빼!
- 빼!
“부딪힌다!”
쿠그그그-
두 개의 차원이 맞부딪히며 거대한 충돌했으나 예상했던 충격은 없었다. 마치 도킹하듯, 자연스레 곁에 안착하여
맞닿았다.
콰콰콰콰-
연옥에서 시작되는 세계수의 뿌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백신전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차원의 방벽을
허물고 들어가 대지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차원이라는 옷감을 세계수의 뿌리라는 실로 옭아매고 있었다. 차원과 차원이 맞닿는 부분이 점점 늘어났다.
- 멀어.
물론 말은 쉽지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백신전에서 쫓겨나다니.”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자, 다들 따라 오세요!”
백신전이라는 본래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신들은 율리아와 일곱 신들의 인도에 따라 인근의 한 상위 차원에
안착했다.
“···여기는.”
“베리안님, 아니 베리안의 차원이군.”
아카식 레코드에게 부여받은 힘이 철 덩어리라면 신앙은 그것을 가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열과 망치다. 신앙이
없어도 신들은 신에 걸맞은 위엄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이 있는 신들은 그 이상이 된다.
신들이 단순히 용사들로 종말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퍼트리고 권역을 만들려는 이유다.
“신앙을 퍼트리는 것 자체를 막지는 않으신다고 하셨어요. 한 신이 독점하는 권역을 막는다고 하셨지.”
율리아가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크흠, 목을 가다듬고 당근을 던졌다. 채찍과 당근은 어디서나 중요하다.
신들이라고 다를까.
“10 주신?”
“7 명이 아닌가?”
“잘 보셨어요. 아직 세 자리는 공석이에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실 거라고 믿어요.”
신들이 눈을 빛냈다.
비록 신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전과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진 것이 맞다. 그들 중
다시 찬란했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자는 없었다.
본래 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균형을 맞추는 거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어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것.
* * *
───────────────
# < 117. 귀환 >
흔히들 말한다.
빠르게 과부하 되어가는 뇌와 정신은 아무리 김우진이라 하여도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다분해
보였다.
“···난 놈은 난 놈이네.”
김우진은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오면서부터 자연스레 연결되어 버린 정신의 통로를 닫았다. 타기 직전까지 갔던
정신이 조금이지만 안정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워 이마를 매만졌다.
‘취할 수 있나?’
주신들을 죽이고 그들을 포식하면서 스스로가 무척이나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딱히 우주를 지배하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스스로 어느 정도 대단한 사람이 됐다는 것은 인지했다.
뭐, 그렇다고 스스로 초라해진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결국 가능성은 있다. 베리안이 했으니까
그도 할 수 있다.
────!
조심스레 매만지는 순간, 그것이 비명을 질렀다. 세상이 떠나가라 요동치며 의지가 김우진을 적대했다.
“씨발···?”
이런 소리는 없었는데?
재해와 같았다.
대지를 뒤집어엎는 지진이자, 휩쓸고 지나가는 해일이며, 모든 걸 분쇄하는 폭풍이다. 하늘을 쪼개는 벼락이자,
세상을 잿더미로 만드는 불꽃이다.
김우진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몰려오지만 극도의 악의가, 살기가 없다. 세세하고 정밀하지도 않다.
김우진은 베리안이 어떻게 이 난관을 견뎌냈는지 이해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자신 정도의
수준이라면.
아카식 레코드가 난리를 치는 것은 그만큼 급박하다는 소리며, 김우진이 맞게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
말 그대로 의지.
우주를 관장하는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
* * *
“이게 연옥이라고?”
- 응. 어때?
“환상적이야.”
차원의 크기가 거의 3 배 가까이 늘었다. 그래봐야 어지간한 하위차원만한 게 전부지만 애초에 연옥도, 백신전도
크기 자체가 큰 건 아니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압도적인 마력.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에 가장 가까운 차원으로 우주의 힘이 가장 풍부한 차원이었다.
연옥은 여러 차원들의 교차 차원으로 마나가 더 없이 많은 곳이었다. 거기에 두 그루의 세계수가 신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퍼트리니 거의 백신전에 준하는 차원이 되어 있었다.
그 상태에서 두 차원을 뒤섞어 버리니 아카식 레코드만큼은 아니지만 그 턱 밑까지 쫓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 응!
- 응!
차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용사들은 끊임없이 발탁될 거다. 용사들을 쓰지 않으려면 신들이 자신들의 업을
소모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지나친 악수다. 제 살을 깎아 먹다 보면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마법과 오러가 존재하는 차원에서는 적당한 최강자 수준까지, 지구에서는 그냥 이종격투기 챔피언이나 산전수전
다 겪은 특수요원 수준까지.
그게 딱 적당하다.
건물은 있지만 이곳의 연옥은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차원을 합병하면서 그득해진 마력은 일개 용사 따위가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 백신전!
- 맞아, 백신전!
“새로운?”
- 응!
- 응!
‘나쁘지 않은데?’
신들은 지금까지 많은 걸 누려왔고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래서일까, 권리는 좋아하면서 의무와 책임은
싫어한다. 누군들 안 그렇겠냐만은 우주 최고의 특권층이었던 터라 특히 심하다.
* * *
신들의 공간 백신전.
신들이 머무는 곳, 하늘 도시.
집행자들이 머무는 땅의 도시.
그리고 죄수들을 가두는 연옥까지.
백신전은 다시 백신전이 되었고 무너진 체계와 시스템을 완벽하게, 그 본래의 것 이상으로 복구해냈다.
신들은 추락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렇다고 주신이 되고 싶지 않은 자들은 없었다. 말 안 듣는
용사를 관리하는 소장이 되기를 원하거나, 김우진에게 대항할 자신도.
신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며 뛰어난 용사를 구하기 위해 차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좋은 경쟁이었다.
그런 존재였다.
그거면 족하다. 어차피 김우진이 무언가 할 생각은 없었고, 신들이 갑자기 딴 마음을 먹는 것만 방지하면 되는
거니까.
“길었어.”
“···뭐죠? 그 세상 다산 것 같은 대사는?”
“그동안 신들 때문에 못 갔으니까 이제 가야지.”
“어디를요?”
“어디긴, 내가 돌아갈 때가 한군데 밖에 더 있어?”
고향.
“지구.”
* * *
“저기···.”
“뭐야?”
“저도 그래야 합니까?”
뭐야, 이 멍청이는.
“안 꺼져?”
“감사합니다!”
───────────────
# < 118. 지구인 김우진(본편 完) >
짹짹-
참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언제나 밝고 따스하다.
- 일어나.
햇빛을 등진 채, 날개로 코를 건드리는 릴리의 행동에 절로 눈이 떠진다.
“졸려.”
- 게을러.
“몇 시야?”
- 10 시.
“나르는?”
- 옆에.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볍게 사과 하나를 들고 소파에 앉는다. 릴리와 나르가
자연스럽게 양 옆에 착석한다.
삑-
짜악!
크림소스들이 남자의 뺨과 정장을 하얗게 물들인다. 미약하게 핑크빛을 띠는게 단순한 크림이 아니라 로제다.
- 좋아.
- 좋아!
습관적으로 베르너를 부르려던 김우진이 멈칫했다. 이곳은 연옥이 아니고 베르너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개인
셰프로 만들고 싶지만 큰 도움을 줘왔던 그를 그렇게까지 억압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적, 사과를 조각 내 일부는 자신의 입으로, 일부는 두 정령체의 입으로 넣어주었다. 소파에 몸을 누였다.
“···이거야.”
평온한 일상.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티비를 틀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하는
지구의 삶.
이 문명의 이기를 갈망해왔다.
- 홍어?
- 맛있어?
- 연옥은 내 구역이야!
- 내 것도!
[들어와, 들어와!]
- 들어가?
- 왜 안 돼?
- 폐인 귀쟁이.
- 이상한 귀쟁이.
“야.”
“왜요?”
“밥 안 먹냐?”
“방금 컵라면 먹었어요.”
“대단하다, 진짜. 너 안 돌아가냐?”
“제가 어디로 돌아가요?”
“어디든. 세이드를 만나던, 고향으로 돌아가던.”
“세이드는 며칠 전에 만나고 왔어요. 그리고 고향에 가봤자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요.”
이게 미쳤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을 말지.
괜히 신의 육체가 아니다.
하지만 맛있는 게 넘쳐나는 세상에서 굳이 먹는다는 즐거운 행위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근데 왜 너 뿐이냐.”
“데르카인님은 새벽부터 나가셨어요.”
“하긴, 미국까지 대학원 다니려면 고생이 많지.”
데르카인은 함께 지구로 넘어온 뒤, 공돌이가 되었다. 권능으로 가상의 인물을 만든 뒤,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마법과 공학, 그리고 과학을 점목시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에나님은?”
“더 이상 못참겠다면서 연옥으로 넘어가셨어요. 지구는 숲의 정기가 너무 부족해서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면서요.”
“세계수의 가지들 가지고 왔잖아?”
[얼마 전, 새롭게 나타난 종교, 절대신교는 절대신을 위시로 한 여러 주신들과 신들을 섬기는 교단입니다.]
[사이비에 가까운 이 집단의 교주는 디아네···.]
[여러분, 진정한 신을 섬겨야 합니다! 진정한 주신! 위대한 그분께서는 모두를 굽어 살피고 계십니다!]
[그분을 믿으면 은총이 내려옵니다! 자비를 주십니다!]
[믿습니다!]
[절대신님이시여!]
보다 못해 티비를 껐다.
포교를 하겠다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주긴 했다. 하지만 절대 김우진의 이름을 이용하지 말라고 했더니
절대신이라고 못을 박고 저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다 먹었지.”
사러 나가야하나.
대충 겉옷을 걸쳤다.
- 나도!
- 나도!
- 심심해.
- 맞아.
“그 대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올게.”
그때였다.
부아아아앙-
“···저거.”
그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스포츠카는 횡단보다 지척까지 다가왔다.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건너던 남자가 뒤늦게 이변을 눈치 챘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피하라는 외침이 들렸다. 남자가 창백한 안색으로 피하고자 했지만 스포츠카가 유도
미사일처럼 그를 따라갔다.
────!
“차원을 구하지 못하고 죽는 용사들도, 일부는 아예 그 차원에 남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고. 그러니까 아예
시작할 때 데려간 다음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만들어. 그 편이 남겨진 사람들한테도 더 나을
테니까.”
“그럼 돌아왔을 때는요?”
“원하는 대로. 아예 잊게 해주거나, 변하지 않은 상태에도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게 하거나. 나름 AS 는 철저하게
해주는 것 같던데.”
“그럼 더 차로 치여 죽일 필요가 없는 거 아니에요?”
“저거 하나도 안 아파. 박기 전에 방호 마법을 걸어줘서 고통이 아예 없거든.”
“······?”
“말했잖아. 그냥 쇼라고. 지구 소설이나 만화 같은 곳에서 환생 트럭 이야기가 퍼지니까 그냥 따라하는 거야.
재밌다고.”
“···정신적 충격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요?”
“정신 방호 마법도 걸려.”
“···미쳤네요.”
‘잘 갔다 와.’
언제나처럼.
完
───────────────
# < 외전. 소장(진) 김우진(1) >
그, 김우진이 눈을 떴다.
“베리안.”
지독한 갈증에 목이 타고, 허기가 몸을 축내며, 온 몸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정신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우진은 웃었다.
그럼 뭐해.
“풀어, 이 새끼야.”
* * *
끼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붉은 카펫이 깔리고, 신들이 자리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자가 김우진···.”
“20 년을 갇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눈에 독기가 살아있군.”
“바리온이 저놈에게 죽었다고?”
알비츠.
칼카르.
그리고 베리안.
“조용.”
이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신들과 달리 주신들은 김우진의 태도에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콰직-
테이블이 부서졌다. 이전과는 다른 압력이 김우진을 찍어 눌렀다. 김우진이 터져 나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의심하지 마라. 그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은 네게 주는 순수한 호의니까. 우리는 뛰어난 자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차원을 아예 멸망시키려고 들어?”
“그 자들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니까.”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었고 너에게는 자격이 있다. 거부하고자 한다면 거부해도 된다. 하지만 한 번 연옥의
소장이 되면 네가 명시한 잠깐의 휴가를 제외하고 언제 연옥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잘 생각했다.”
“도망치려면 도망쳐도 좋다. 그 대가는 온전히 네가 감당할 테니.”
“엿 먹어.”
베리안의 첨언에 김우진이 중지를 들어올렸다. 신들의 표정이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지만 주신들의 눈치로
인해 분노를 삭혔다.
“베른.”
“예, 주신이시여.”
“이제 모두 알았겠지. 김우진은 한 번 쓰고 버릴 패로는 아깝다. 신이랍시고 뻗대고 있으나 한참 부족한 저것들
보다 훌륭하다.”
“동감이다. 고작 인간 주제에 내 호승심을 자극할 줄이야.”
“···인정하지. 솔직히 난 베리안 네가 미친 줄 알았다. 신을 둘이나 죽인 반역자 놈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가자니.”
“놈을 우리들의 권속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네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놈이 그럴지는 의문이군.”
말투, 행동, 그리고 눈동자. 눈은 마음의 창이다. 사람의 감정은 눈에 그대로 깃든다.
가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서 그 고초를 겪고도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회유를 한다 한들 넘어올까?
신들은 누리는 것에는 익숙하나 의무에는 익숙하지 않다. 연옥의 소장 자리는 신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였다.
“필요할 때마다 계약을 적당히 어기게 만들면 된다. 죄수들이 탈옥했을 경우, 출소시켜야 하는 죄수들이 두 배씩
늘어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연옥의 소장직을 20 년이 아니라 200 년, 2000 년을 맡아도 과연 처음의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정신은 풍화되고 마모되어 자신이 왜 여기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게 될 거다. 그리고는 결국 유일한 동아줄을
잡아당기겠지.
“확실히. 저 정도의 인간이라면 나는 2 천년이 아니라 200 만년도 기다릴 수 있다. 관리자라는 언사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지만. 권속이 되면 제대로 교육시켜주지.”
“알비츠, 너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김우진이 오래 버틴다고 한들, 우리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감히 신을
관리자라고 칭한 놈에게 아주 적절한 징벌이다.”
끝까지 저항을 하던, 그렇지 않던 시간이라는 감옥은 놈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 거다.
* * *
바로 우주가 보이고 저 멀리 새하얀 기둥이 보인다. 저게 아마 알베니우스가 말했던 아카식 레코드라는 거겠지.
‘안 돼.’
결코 넘어가지 않을 거다.
“어이.”
대답은 없었다.
“베른이라고 했었나?”
“···경고다. 감히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렇게 발작버튼처럼 바로 튀어 오르면 더 눌러지고 싶어지잖아.”
김우진이 베른의 손등을 붙잡았다. 우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렸다. 베른이 신음을 토해냈다.
“베른님!”
“가만히 있어. 조금만 더 움직이면 이새끼 목 꺾인다.”
그러니까.
“···괜찮으십니까?”
“손 치워.”
“예, 예···!”
───────────────
# < 외전. 소장(진) 김우진(2) >
‘어디로 가볼까.’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지구다.
그의 고향, 용사가 된 순간부터 돌아가기를 소망했던 곳. 지구의 평온한 일상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한 달은 짧다. 앞으로 소장으로 얼마나 묶여 있어야 할지 모르지만 신들의 태도를 보아
결코 짧지 않을 터.
그렇다면 남는 곳은 하나다.
그가 지켜낸 차원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정말로 종말에서 벗어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김우진이 으르렁거리자 베른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백신전에 남아 넘쳐나는 우주의 힘을 흡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신들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만큼, 대비할 수 있는 만큼 대비하는 게 옳았다.
김우진은 고민했다.
* * *
주변의 왕국들을 집어 삼키며 수를 불려나간 죽음의 군단은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나선 다음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건가?”
“뭐가 말이지?”
“종말 말이야. 들어보면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복수심에 미친 놈 하나가 등장하면 되는
거 아니야?”
“틀리다. 종말은 세상의 법칙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차원이 있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차원이 있는 거다. 어둠은
그 때에 맞춰 적당한 인물을 종말의 사도로 삼는 거고.”
“사룡이나 미친 왕이 아니었어도 결국 다른 놈이 했을 거다?”
“그게 균형이니까.”
“그렇다면 그걸 막는 게 의미가 있나? 당연한 균형이잖아. 종말이 이루어지게 놔둬야 하는 거 아니야?”
“종말이라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다.”
그대로 멸망하는 것 또한 균형의 일부다. 하지만 저항하고 또 저항한 끝에 종말을 막고 유예 기간을 가지는 것
또한 균형이다.
“종말은 아무런 피해 없이 막을 수 없다. 죽음과 피, 생명력은 그대로 노쇠한 차원의 힘이 된다. 죽어간 자들로
인해 차원의 수명이 연장되는 거다.”
“인간에게 차원이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차원에게도 인간이 필요하다는 거군.”
김우진은 베른의 말에서 그 맹점을 찾았다. 고작 피조물의 생명력과 피가 차원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우주의 힘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일반유라면 신들은 고급유겠지.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일단 신이니까 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김우진이 죽인 두 명의 신보다 강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묻잖아.”
“······.”
베른이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으나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신이 움직이지 않으니 집행자들도
마찬가지였다.
“······.”
“······.”
“야.”
“···예, 예!”
“베른하고 연락 되냐?”
“무, 물론입니다. 모든 집행자는 모시는 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렀을 때 바로 튀어오지 않으면 그 잘난 주신한테 어떻게 이야기할지 알아서 잘 판단하라고 해.”
“예, 전하겠습니다!”
“내가 널 부를 만한 수단은?”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계속 널 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이, 이거. 이 반지에 언제든 마나를 주입하시면 차원 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어디보자. 이제 뭘 해야 할까.”
“일단 좀 자자.”
기분 좋은 정적이 흘렀다.
“······.”
* * *
“허억, 허억···!”
“더 빨리! 더 빨리 뛰어!”
“제기랄, 그러니까 이딴 의뢰는 받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진짜 괴물이 있을 줄 누가 알았냐고! 보상이 짭짤해서 너도 수긍 했잖아!”
“대장이 하도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우웩···!”
“넌 또 뭐야! 빨리 일어나! 토할 시간이 어딨어! 이러다 다 죽어!”
작은 용병대의 대장, 콕스가 아침에 먹은 것을 쏟아내는 부하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불안하게 숲 너머를
끊임없이 살폈다.
역시 이딴 수상쩍은 의뢰는 받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콕스는 용병이 되었다. 용병의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 예상은 적중했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는 게 힘들어진 만큼 호위 병력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귀족들이야 기사와 병사들을
이용하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나 상인들은 용병 길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흔하디흔한 호송 의뢰였다.
엘라임 숲을 지나갈 것.
간단하다. 엘라임 숲으로 들어간 이들 중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많고, 몇몇은 아예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엘라임 숲에 달맞이 꽃이라는 식충 식물이 자라나는데 꽃가루에 환각 성분이 있다. 바람에 날려 꽃가루를 접촉한
이들이 환각을 보았다고 결론이 나왔다.
“단순한 헛소문이라기에는 당한 용병들이 꽤 있어서 말이죠. 그걸 아니까 당신도 보수를 넉넉하게 준비한 것
아닙니까?”
“돈을 두 배로 드릴게요. 선금으로 절반, 도착해서 또 절반. 그런 만약 때문에 기회를 놓치시겠어요?”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시간은 금이니까요. 그게 최대한 빨리 제 친구에게 도착하는 게 참 중요하거든요. 그래도 안하시겠다면 다른
용병단을 찾아보는 수밖에요.”
“···받아들이겠습니다.”
“대, 대장!”
“살았다!”
“머레이? 알렌?”
“맙소사, 머레이! 알렌! 너희들 살아 있었구나!”
“잠깐만!”
콕스가 검을 치켜세웠다.
“거기서 기다려.”
“왜, 왜 그래, 대장?”
“너희도 봤잖아? 이 숲에 산다는 그 마물의 정체가 뭔지···!”
“마, 맞아!”
“너희들이 머레이와 알렌이 맞다는 증거를 내밀어 봐.”
“내가 머레이라서 머레이인데 증거가 어디 있어!”
“나도!”
“고향이 어디야!”
“벤덴부르크.”
“도리아.”
“몇 살에 용병이 됐지?”
“21 살.”
“26 살.”
“나랑 어떻게 만났어?”
“검은 꽃 용병단에서 활동하다가 용병단이 망하고 루덴 지역에서 대장과 처음 만났지.”
“대장이 루덴에 있는 ‘바람에 날리는 화살’ 술집에서 술 먹고 난동 부릴 때 시비가 붙어서 처음 만났어.”
“···맞나?”
“맞다니까!”
“어떻게 우릴 의심해? 함께한 세월이 10 년인데!”
“잠깐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너희···.”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네.”
콕스와 용병들이 목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나무 위였다. 언제부터인지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느 틈에?’
‘이 자가 아까 그 마물?’
“나라면 그런 짓 안 해.”
“오래 살고 싶으면.”
“······.”
“누, 누구십니까?”
“재미있는 놈이 있네.”
“예?”
───!
“이게 무슨 짓···!”
콕스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그의 부하 용병이어야 할 놈이, 방금까지 그가 등을 두드려주던 놈이, 검은 액체로 변해 구렁이처럼
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히, 히익···!”
“얀델이 마물이 됐다!”
“멍청아! 아까 그 놈이 얀델로 변한 거잖아!”
그리고.
“신기하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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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소장(진) 김우진(3) >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들은 마물이라고 했지만 딱히 마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물이라기보다는 몬스터에 가깝다.
배척받지만 엄연히 차원의 일원인 몬스터와 어둠의 파편인 마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어,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말을 하네? 구강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사, 살려줘···!”
김우진이 갈라진 두 육체를 서로에게 붙였다. 양 육체에서 뻗어 나온 가는 촉수들이 서로를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재생 되냐?”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검은 액체들에 김우진이 불꽃을 꺼트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재생해 봐.”
“하, 하겠습니다!”
도플갱어가 필사적으로 몸을 수복했다. 하지만 시커멓게 타버린 자국과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끝이야?”
“이, 이게 최선입니다!”
“불에는 약하다는 건···응?”
* * *
“이름.”
그래서 답할 이름도 없었다.
공포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인류에게 박해받는 몬스터로서 오랜 시간을 살아남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변신과 모방, 그리고 기감 파악이었다.
“이름도 없어?”
“마물이라던지, 괴물, 도플갱어로는 불렸습니다만, 딱히 이름은···.”
“그래, 그럴 수 있지. 안내해.”
“예?”
“네가 머물고 있는 거처가 있을 것 아니야. 안내하라고.”
“예, 예···!”
“저···.”
“왜?”
“혹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가도 되겠습니까? 이 모습은 아무래도 속도가 조금···.”
“마음대로 해.”
“예.”
남자, 김우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어떻게 된 매커니즘인지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네가 만든 거냐?”
“아닙니다. 제가 직접 인간들의 도시에 내려가 구입하기도 하고, 수족처럼 부리는 인간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인간에게 부탁해서 구해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의뢰를 넣어서 사람들을 꼬이게 하는 건가?”
“그게···.”
“다 알고 있으니까 괜히 수 쓰지 말고.”
“···예. 제가 직접 변신해서 의뢰를 넣기도 하고 제 수족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꼬리가 걸리면?”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그러다가도 잡히면?”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다 이거군.
“변신에 제약 같은 건 있나?”
“접촉하고 이해한 상대에 대해서만 가능합니다.”
“접촉은 이해했는데 이해라면?”
“머리카락이나 살점, 피 같은 걸 먹으면 좋고, 마나를 흡수해도 좋습니다. 그 양과 질이 뛰어날수록 변신의
효과도 상승합니다.”
“그럼 변신하면 변신한 당사자의 능력도 쓸 수 있다는 건가?”
“진짜에 비하면 조약하지만 조금은···.”
과연, 왜 도플갱어가 전설속의 존재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이 도플갱어의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면 어쩌면
김우진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커피 있냐?”
“있습니다.”
톡톡, 김우진이 팔걸이를 두들겼다. 비록 미약하지만 특별히 제거하지 않는 이상, 그의 불꽃에는 언제나 우주의
힘이 깃들어 있다.
“야.”
“예, 예!”
“혹시 나라도 변할 수 있냐?”
“격이 높으신 분은 어렵습니다.”
“먹어.”
“···예.”
“크허어어어억!”
“뭐야, 무슨 일이야!”
“제,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그의 육신이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다시 슬라임처럼 변했다. 그리고 수백 줄기로 갈라져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너, 너무···!”
김우진은 말없이 그것을 기다렸다. 자신 쪽으로 날아드는 촉수를 쳐내며 직접 새로운 잔에 커피를 리필했다.
“허억, 허억···!”
“어때?”
“주, 죽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았지.”
“대, 대체 뭐하시는 분이십니까? 어떻게 이런···?”
“변신이나 해봐.”
“불가능합니다.”
“납득이 되게.”
“격이 너무 높으십니다. 고작 피 한 컵 먹고 복사해내기에는···.”
“피가 더 있으면 된다는 거네.”
“먹어.”
“······.”
이번에는 이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플갱어는 김우진의 외형을 복제할 수 있었다.
“···야.”
“예···!”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거부권은 없었다.
* * *
“평온하네.”
이들은 일상을 되찾았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부터, 도시의 상인, 왕국의 귀족들까지.
청명한 하늘, 쨍쨍한 태양,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벽과 건물, 그리고 농후한 밀도의
마나까지.
“가자.”
“예.”
내부는 평범했다. 딱히 아름답지도, 무언가 대단한 게 있지도 않았다. 텅 빈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대한
건물 하나가 전부.
소장의 집무실도 평범했다. 책상과 의자, 몇 개의 책장. 그게 전부였다. 김우진은 소파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던
소장과 눈이 마주쳤다.
“반가워. 네가 김우진이지?”
“맞아.”
“말투가 건방지지만 뭐, 무슨 상관이야. 최초로 신을 죽인 인간에 나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인데.”
소장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정령왕의 정수를 흡수했다고 했었지? 좋아, 이해했어. 주신들게 여쭤보지. 아마 허락해 주실
거야.”
하지만 괜찮겠어?
“집행자들이 아니면 여기 죄수들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신의 뜻을 거역하고 반기를 든 반골들이라
좀 드세거든. 그깟 정령들로는 조금 힘들 텐데?”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하긴, 이제 내 손을 떠났지.”
그가 과장된 모션으로 손을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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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소장(진) 김우진(4) >
권능 같은 거 없나?
“아, 그리고.”
“예.”
“넌 오늘부터 부소장이야.”
“잘못 들었습니다?”
“더미가 오면 정령들을 집어넣어서 교도관으로 만들 거야. 네가 교도관들을 관리해.”
“제가 말입니까?”
“그러면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했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일을 해야지.”
“예···.”
“드세다고 했지.”
이런 경우에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분위기와 위압감 조성도. 그러니 혼자서 죄수를 만나러 가지는 않겠다.
어차피 그가 직접 공표하지 않는 이상, 죄수들은 소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모를 테니까.
“불쌍하긴 하군.”
죄수들이 자발적으로 나가게 만들겠다는 놈이 이런 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지금의 김우진 입장에서야
나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났다.
‘어떻게하는 거더라.’
언젠가 정령왕과 합일하여 사룡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그러함으로서 모두에게 시간을 주고 김우진에게
정수를 내어줘 뒷일을 맡긴 하이엘프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니 굳이 정령술사들의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의지만 있다면 정령들은 언제든 그의 명령에 따를 테니.
‘나와라.’
이왕이면 보다 강한 놈들로.
그래도 용사들을 관리하는 감옥이니만큼 최상급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상급 정도는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
- 정령왕님을 뵙습니다.
- 뵙습니다!
“안녕.”
- 새로운 정령왕님이 탄생하고, 언제 불러주실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그럼 들어가.”
- 예!
- 들어가라!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 *
“내가 생각해봤거든?”
여러 방법들을 고민해봤다.
“결론은 나오셨습니까?”
“탈옥 시키자.”
“예? 무엇을 말입니까?”
“당연히 죄수지.”
“···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전 소장이 그랬잖아. 여기 죄수들이 드세서 관리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자고로 드센 놈들을 상대로는 초장에 기세를 잡아 놔야한다. 감히 함부로 뻗댈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에
때려 박아줘야지만 꼬리를 만다.
그럼 가릴 수 있다.
정말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공간 마법에 특화된 용사가 있다고 치자. 실제로 수감된 죄수들 중 하나는
다크엘프고 공간 마법에 권능이 있다고 나와 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신이 권한을 가지고 장벽을 넘는 것과 용사가 장벽을 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열쇠를 가지고 현관을
넘는 것과 열쇠 없이 현관을 넘는 것 정도의 차이다.
“불을 지르자.”
“···예?”
“연옥 전체를 불태우는 거야.”
“···혹시 미치셨습니까?”
“내가 너무 풀어줬나?”
“아,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잖아. 어차피 리모델링하려면 한 번은 싹 밀어야 돼. 겸사 겸사 불장난이나 하자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금 부탁하는 것 같아?”
“······.”
“교도관들.”
“예, 소장님!”
“잘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불 지르고, 시스템다운 시키고, 비상종 울리고, 감방 문 다 열고, 최대한 혼란스럽다는 뜻이 악을 지르며
뛰어다녀.”
“예!”
“만약 죄수들이 도망치면 적당히 막는 척하다 놓아주고. 패배해서 기절해도 좋아. 더미 구하려고 다시 신들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으니까 몸을 아껴. 하지만 너무 티 나게 나가떨어지지는 말고.”
“예!”
“출발.”
“출발!”
잠시 후.
애애애애애앵-
순식간에 작동 모의를 한 죄수들이 교도관들을 기습했다. 죄수들이 구속구로 제약을 받고 있어도 모두 차원을
구한 용사였다. 그들은 유기적인 합동술로 몇 없는 교도관들을 눕히고 탈옥을 계시했다.
김우진은 빠르게 각 종족의 리더들을 파악했다. 저들을 잡으면 죄수들을 통제하는 게 한결 편해지겠지.
“죄수들이 모두 탈옥했습니다.”
“모두?”
“예.”
“그럼 전부 드센 놈들이네.”
희망을 주었다 뺏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역시 김우진은 스스로의 사정이 제일 중요했다.
소장(진) 김우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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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1) >
용사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용사와 영웅들의 분투로 종말은 끝이 났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은, 죽어버린 동족들을 돌아오지 않았다.
“···세이드.”
잃어버린 부모님들을 대신해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주던 호위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에 더욱 그랬다.
“···용사가 되겠어요.”
* * *
세상이 몇 번이나 뒤집히는 느낌 끝에 도착한 율리아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황족과 귀족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들로 보이는 인간들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인간들이 마중을 나왔고 그들이 데려가 성심성의껏 가르쳤다고 들었다. 아르반의 용사는 재능은 넘치나 그 바탕은
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용사였다.
“네. 부탁드려요.”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용사님을 모셔라!”
“예!”
‘너무 부담스러운데.’
이해는 갔다. 상식적으로 신의 신탁을 받고 종말을 막기 위해 내려온 용사를 허투루 대접하겠다는 멍청한 인간은
없을 테니까.
용사는 단순한 강자가 아니라 신의 힘을 받은 사도이자 희망이다. 용사가 없으면 종말을 막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만큼 인류는 언제나 용사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모신다.
제국의 황제는 50 쯤으로 보이는 중년이었다. 딱히 수준급의 기사나 마법사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배자로서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녀를 안내해준 기사와 시종이 사라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시종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법도라면 따르는 게 맞다. 율리아가 침대에 누웠다. 높고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잘 할 수 있을까?’
보답이기도 하다. 그녀의 차원을 구해준 용사에 대한 보답. 그가 그랬듯이, 그녀도 이들을 구하는 거다.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
“···어?”
휘이이이이-
“이게···.”
권능이구나.
하이엘프는 종족 자체가 특별하다고 그랬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차원에서도 하이엘프는 몇 없었고 항상
우수했으며 모든 엘프들의 존중을 받았으니까.
“저기요.”
“예,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연무장은 개인 연무장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주변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시야를 막고 있었으나 뻥
뚫린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종을 내보낸 율리아가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검을 뽑기보다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바람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딱히 마나를 움직이지도, 정령이나 마법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신기하네···.”
스스로 행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없다. 아무리 하이엘프라고 한들 정령이나 마법도 없이 바람을 이렇게까지
다룰 수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거면 좀 더···.”
* * *
“···정말 완벽하군.”
“용사라면 당연히 그래야죠.”
“무척이나 든든하네.”
“종말을 막기 위해서 인류는 반드시 하나로 뭉쳐야 해요. 반목한다면 자멸을 향해 달려갈 뿐이에요.”
“물론 그건 용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국이 연합의 수장이 되는 건···.”
“우리 아르칸 왕국 또한 반대합니다. 제국의 폭거에 멸망한 왕국들이 몇 개 인지 아십니까? 저들이 수장이
된다면 자국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병력을 사지로 밀어 넣을 겁니다!”
“아르칸 왕국이라고 뭐 다른지 아시오? 10 년 전에 당신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멸망한 도리아 왕국을 벌써
잊었소이까!”
광룡은 수십만의 마물들을 소환했고 주변 다섯 개의 왕국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대륙 북부는 순식간에 죽음의
땅이 되었다.
“인류를 죽일수록 저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방어로 틀어 막기만 했습니다만, 용사님이 오신
이상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광룡과 마물이란 미지였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칠 전력은 남아있었으나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와아아아아!
용사님 만세!
인류 연합 만세!
카발론 제국 만세!
* * *
“···맙소사.”
“연합군이 지다니.”
“용사님이 어떻게···!”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소규모로 마주치는 마물들을 토벌하며 거칠게 없을 때까지만 해도.
인류 연합의 목적은 율리아를 광룡에게 데려다 주는 것, 그리고 율리아가 광룡을 죽일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왜 기사단을 보내주지 않는 겁니까! 3 군단이 무너졌습니다. 기사단이 지원을 오지 않으면 2 군단마저 무너진단
말입니다!”
“마법 지원! 마법 지원을 보내주십시오!”
“방패 병단! 방패 병단은 어디 있느냐!”
“제니아 왕국이 병력을 뒤로 물린다!”
“도망치지 마, 이 개새끼들아!”
“전열을 유지해라! 대열이 무너지면 연합이 무너진다!”
“기사단을 왜 후방으로 빼는 겁니까! 당신들 병력만 사람이고 우리는 아닙니까?”
“이 미친 새끼들이! 아군이 있는데 마법 포격을 퍼부어!”
“마물을 죽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서로 간의 지원이 원활하지 않았고 자국의 병력을 살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를 쓰면서 오히려 연합의 피해가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용사님!”
율리아가 패배했다.
연합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60 만 대군은 약 17 만의 사상자를 냈다.
대패였다.
* * *
“······.”
율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콰콰콰-
더, 더, 더.
───!
“허억, 허억···!”
그럼에도 부족하다.
연합군은 패배했다.
“···강했어.”
그녀의 칼날은 광룡의 육체를 꿰뚫기에 충분히 날카롭지 않았다. 바람의 권능은 충분히 거세지 못했다.
“···어째서.”
확신이 없다.
그때였다.
“과연 하이엘프야. 잠재력이 뛰어나.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해봤자 갑자기 광룡을 잡을 수는
없을 텐데.”
“···당신은 누구시죠? 못 보던 얼굴인데.”
피부가 곤두섰다. 아무리 한심한 스스로에 매몰되어 검을 휘둘렀다고 한들 상대가 지척에 당도할 때까지, 먼저
말을 걸때까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강자다.
그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2) >
“···알베니우스? 희망전도사?”
“아니면 일타 강사? 족집게처럼 네게 필요한 부분들을 콕콕 찝어주마.”
“그러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너 광룡한테 졌다며? 그것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압도적으로.”
“···하나도 못 입히지는 않았어요!”
“그럼 생채기 정도?”
“당신은 누군데 저를 모욕하는 거죠?”
“말했잖아. 알베니우스라고.”
“정체를 묻는 거예요. 전 당신 같은 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지. 내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저보다 강해 보이는데 왜 나서지 않았죠? 그랬으면 광룡한테···.”
율리아가 눈을 껌뻑였다.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고? 그럼 용사? 하지만 용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신? 아니, 저런 신이 존재할
리가. 애초에 신이 나설 수 있다면 굳이 용사들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이곳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길 바라기는 해. 친구가 있으니까. 그래서 널 찾아온 거기도 하고.”
“···무슨 뜻이죠?”
“하이엘프 용사, 난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왔다.”
“제 이름은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그래, 율리아 카르센, 잠깐만, 율리아? 이름이 얼굴보다 더 낯이 익은데.”
“절 아시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뭐죠? 그런 애매한 대답은?”
“밑밥을 깔아두는 거지. 이 세상에 무조건이란 건 없거든.”
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심각한 그녀와 달리 진지하지 않아 보였다.
종말이라는 엄청난 일을 앞두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유일한 희망이라며 치켜 받는 용사인 자신이 광룡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적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어. 당장은. 하지만 너를 가르쳐 줄 수는 있지.”
“···저를 가르친다고요?”
“광룡을 잡을 수 있도록. 그 조건은 이후에 내게 협력하는 것. 어때?”
“···당신에게 배우면 광룡을 이길 수는 있고요?”
“장담하지. 넌 영웅이 될 거야. 광룡의 목을 벤 영웅.”
“······.”
누군지, 왜 돕는지 모른다. 하지만 광룡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그녀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서광이 보인다면 그것을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좋아요.”
“꽤나 결연한데. 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아니, 오히려 네가 내가 생각한 율리아가 맞다면 오히려
환영하겠지.”
“당신이 아는 율리아가 대체 누군데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받아들인 걸로 알고 이만 가보지.”
“간다고요? 절 가르쳐 준다면서요?”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걱정 마.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엘븐에서 보자.”
“···엘븐?”
“어딘지는 알려주셔야죠!”
“너도 느끼고 있잖아? 존재한다는 걸.”
알베니우스가 사라졌다.
* * *
“다들 한 번 읽어보시오.”
흔한 정치 싸움이었다.
‘엘븐?’
“엘븐이 어디죠?”
“크흠, 그게···.”
“엘프들의 왕국입니다. 용사님.”
마르덴 왕국의 대표, 돌베스 후작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율리아가 하이엘프인지라 엘븐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던 탓이다.
어째서 엘프들이 합류하지 않았는지 의문이었으나 대충 예상해 넘겼다. 그녀가 있던 차원에서도 엘프와 인간은 잘
섞이지 못했다.
충돌이 있었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힘을 합쳤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겨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자 했다.
‘이름이···.’
“서신에는 용사님이 하이엘프인 이상, 엘븐에 방법이 있다고 써 있습니다. 이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용사님을···음,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소?”
“물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저들에게는 세계수가 있습니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관계를 아시지
않습니까? 또한 엘프들이 이런 상황에서 의미없는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아무 진실일 겁니다.”
하지만 율리아를 보낸다는 건 용사에 대한 통제권을 넘긴다는 거다. 율리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율리아가 자리에
있기에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엘프들의 생각인가?’
솔직히 모르겠다. 아르반의 엘프들은 순수하고 정치에 능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알베니우스라는 그 자의
수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엘븐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쪽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왕국들이었다.
북부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잠잠하던 마물들이 일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 수가 연합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연합 실패의 대가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인류는 마물의 남하를 막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이 오셨다!”
“용사님 만세!”
단순한 광풍에 그치던 바람은 폭풍이 되었고 바람과 어우러진 검술을 새롭게 개량해냈다.
“크아아악!”
“성벽이 무너졌다! 모두 내성으로 후퇴해라!”
마물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드세졌고 인류는 끊임없이 밀려났다. 왕국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 * *
“여기가 엘븐···.”
“어서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율리아 카르센 용사님. 저는 어머니 나무를 모시고 있는 필립스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흔히 왕국이라 부르지만 엘븐의 체계는 왕국과는 달랐고 엘프들은 그를 대족장이라 불렀다.
“꼭 그래야만 했나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엘프들이 도왔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을 거예요.”
엘븐에 와서 느꼈다. 이곳의 세계수는 아르반의 세계수 이상으로 거대하고 정기가 넘쳤다. 자연스레 엘프들의
수준 또한 높았다.
“···보호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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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3) >
“······.”
“······.”
- ······.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예측보다는 엘븐이 의도했다는 게 옳았기에. 엘프들이, 세계수가 종말을 앞두고
인간들을 반목시키고 의도적으로 불화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불만이 많은 표정이구나.
- 이해한단다. 알베니우스의 방법이 어린 하이엘프에게는 조금 많이 과격하긴 했지.
연합이 율리아를 엘븐으로 보내기까지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엘프들이 나섰다면 그
피해는 확실하게 줄일 수 있었다. 알베니우스가 나섰다면 반드시 마왕을 처치할 수도 있었다.
- 그래야만 했단다.
- 마음이 고운 아이구나.
-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긍정이란다.
“···그게 무슨!”
세계수는 자애롭다. 엘프들과 어울리고 살아 주로 엘프들에게 적용되긴 하지만 사실 세계수의 자애는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
종말의 군세가 숲까지 당도했을 때, 세계수는 모든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을 보호했다.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 그게 옳으니까.
“그걸 왜 저한···?”
‘율리아.’
‘설마 용사?’
하지만 용사가 된 이후, 어쩌면 용사가 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이드는 강자였고 충분히 신의 눈에 들어
용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르반 또한 그랬다.
딸각-
알베니우스가 팬던트를 조작하자 앞면이 열렸다. 그리고 사진이 드러났다. 환하게 웃음짓고 있는, 어린 시절의
율리아였다.
“내가 율리아라는 하이엘프를 안다고 했었지? 나이를 조금 먹어서 긴가민가 했다만, 딱 이 아이가 성장하면 너가
되겠더군.”
“어떻게···. 어떻게 그걸 당신이 들고 있는 거죠? 설마···?”
“살기 집어넣어라. 세이드를 죽이고 취한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세이드는 어디 있죠?”
“···만날 수 없는 곳에 있다.”
“그게 무슨···!”
“···아.”
정말로 죽었구나.
율리아가 쓰러졌다.
* * *
- 안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 그런데 왜 그렇게?
- 뭐, 이런···.
- 그건 너무 비약이 아닐까?
“여기서 마왕이라고 불리는 놈, 꽤나 강해. 김우진이 처치한 사룡만큼은 아니지만 이대로 있으면 율리아는
반드시 죽어.”
지금의 율리아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그녀가 죽으면 신들은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둘 다 내게는 좋지 않아.”
그는 함부로 나설 수 없었고 데이드람의 세계수 덕분에 얻은 비교적 안전한 은신처가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 어떻게 하려고?
- 열매를 준다고 해도 그 김우진이라는 용사처럼은 못할 텐데?
하지만 하이엘프 율리아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하이엘프가 특별한 종족이긴 하지만 태생부터 우주의 힘을 타고난
차원룡 같은 존재는 아니었고, 정령왕을 먹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열매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세계수 또한 반신의 존재. 그 열매에는 미약하게나마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
- 아직 오 년은 더 있어야 해.
본래 세계수는 백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지만 만년을 살아온 세계수는 그 주기가 천년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열매가 품은 힘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열매였다면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다만, 일반적인 세계수의 열매도 귀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힘을 일깨워준다면 율리아는 충분히 마왕을 이길 수 있다.
“열매 줘봐.”
- 지금 바로 하게?
“어떤 저항도 없는 편이 좋아. 기절해 있을 때, 열매를 흡수시키고 네가 품어서 최대한 육체에 안착하게 하는 게
낫지.”
“······.”
* * *
“으음.”
- 그렇단다.
- 몸 상태는 어떻니?
“···알베니우스.”
“···알베니우스님을 뵙고 싶어요.”
- 얼마든지.
가지들이 움직여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세계수의 그늘에 기대 차를 마시고 있던 알베니우스가 그녀를 반겼다.
“일어났군. 와서 앉아.”
“···그건 뭔가요? 처음 보는 차인데.”
“커피. 마실래?”
“네.”
나만 믿어라.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상당히 엇비슷했다. 마주치자마자 검부터 휘둘렀던 매운맛이냐, 그나마 대화로 진행시키는
순한맛이냐의 차이일 뿐.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이럴 때, 김우진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
분명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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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4) >
“한 걸음도 못 움직이겠어요!”
“견뎌. 김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녔어.”
- 괜찮니?
“아니요.”
- 솔직하구나.
“···그런 게 인간?”
그럼 나는 뭐지. 잡초인가?
- 그래.
“···아쉽네요.”
어쨌든 더욱 열심히 배워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알베니우스의 말이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세이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그녀를 길러준 부모나 다름없었다. 살아있다면 찾아내고, 죽었다면 그
마지막이라도 듣고 싶었다.
* * *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갑자기 말투가 이상하신데요.”
“역시 엘프에게 무협은 이른 건가.”
“···네?”
율리아가 엘븐에 있는 사이, 전황은 급변했다. 남하하던 마물들이 갑자기 진군을 멈추고 오염된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맴돌았다.
“동면에 든 드래곤의 가디언들은 드래곤의 레어만을 지키고 활동 반경이 급격히 줄어드오. 가능성이 있소.”
“그렇다면 한시름 놨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반대로 생각하면 동면이 끝나면 광룡이 더 강해진다는 거요.”
“그전에 광룡을 처치해야 하오.”
“하지만 무슨 수로? 모든 마물들이 광룡의 보금자리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을 텐데.”
“총력을 다하면 뚫지 못할 것도 없잖습니까?”
“허면 광룡은? 동면중이라 한들 위험하면 결국 일어날 텐데 놈을 죽일 수 있소?”
없었다. 용사는 강했으나 광룡은 더 강했다. 이미 한 번의 전투로 인류는 크나큰 손실을 입었고 다시 붙는다고
한들, 승리할 거란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가능성과 확신은 또 다르다.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분노한 광룡이 다시 남하한다면 기껏 얻은
아슬아슬한 평화마저 사라져 버릴 수 있으니.
* * *
“동료들?”
“지난번의 전쟁은 너무 성급했어요. 저는 마물에 대해서도, 광룡에 대해서도 아는 게 적었고 권능에 익숙하지도
않았어요. 제 힘이 얼마나, 어디까지 통하는지도요.”
“급했었다는 것은 인정하네. 허면,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
“마물들에게 오염된 점령지의 외곽을 돌다가 점점 안으로 들어가며 마물들에 대한 조사를 할 겁니다. 잠든 광룡이
깨어나지 않는 선에서.”
“실력이 어느 수준까지 통하나 확인해보겠다는 것으로 보이는군.”
“지난번처럼 우를 범하면 안 되니까요.”
“소수정예를 원하는 건가?”
“네.”
“알겠네.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원하는 대로.”
에드먼드 프로인은 30 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천재라 불리는 자였으며, 어렸을 때 제국 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가 유래없이 재능을 폭발시켜 최연소 대마법사의 경지를 이루었다.
“데이지 호크네입니다.”
데이지 호크네는 제국 다음으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는 아르칸 왕국의 기사였다. 기사 명가인 호크네 가문에서
태어나 오라비와 아버지를, 나아가 이전의 왕국 제일검을 꺾고 그 칭호를 이어 받았다.
성자, 갈라스 콜먼. 그는 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신의 총애를 받는 자였다. 막대한 신성력은 다른 사제들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 농밀했다.
“맞아요. 부정하지 않을게요. 광룡은 강했고 저는 패배했어요. 엘븐에서의 시간들로 인해 그때와는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광룡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에요.”
“걱정하지 마시길. 당신은 신께서 선택하신 용사입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신다면 신께서 당신을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해주실 겁니다. 그 어떤 어둠도 신의 빛을 막지 못할 겁니다.”
데이지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인간상은 아니었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제법 강했다. 그거면 된다.
이 자리는 인성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함께 싸울 동료를 구하는 자리니까.
용사 일행은 곧장 북상했다. 인간들이 쌓아올린 거대한 방벽을 통과해 죽음의 땅으로 발을 들였다.
* * *
“케트라입니다.”
“후우···.”
“도와줄까?”
“됐어요.”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광룡하고 나름 대등하게 싸웠다고 들었는데 케트라 따위로 긴장할 필요가 있나?”
“가정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탁, 그녀가 대지를 박찼다. 바람이 육신을 밀어주었다. 순식간에 케트라의 코앞에 당도한다.
───!
하지만 세차게 불어오는 광풍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당황한 케트라가 뼈로 뒤덮인 양팔을 들어 올렸지만.
─!
“···뭐야. 한 방?”
“걱정이 무색하군요.”
“신께서 인도하시니 그 길에 거침이 없을 것입니다.”
강해졌다. 달라졌다.
“···이번에는.”
물론 케트라는 강한 마물이다. 하지만 최강의 마물이라고 한다면 모두 고개를 젓는다. 마물은 무궁무진하고
케트라보다 강한 마물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봐요.”
“그러다 못 나···올 것 같지는 않긴 한데. 혹시나 광룡이 깨어나면 전부 끝이야.”
“걱정마세요. 그 정도까지는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외곽을 돌면서 이번처럼 간혹 나타나는 마물들을 노리는
게···.”
“광룡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잖아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 시간을 저희들의 목숨을 담보로 으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물들은 군단을 형성하고 있다기 보다는 벌판에 풀어놓은 야생동물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율리아는 한 마리의 사자가 되었다. 마물이 초식동물들로 보일 정도로 휩쓸고 다녔다.
성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지만 그렇다고 낙담하고 죽어 있을 그녀도 아니었다.
검을 뽑고 전장에 끼어들었다.
동료라고 함께하는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밤에 마물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은신 마법진을 설치하거나, 뒤지기
싫다면 뛰어 나가 검을 휘두르거나, 지친 체력을 보존해주기 위해 신성 마법을 걸어주는 것뿐이었다.
타닥 타닥-
밤이 되었다. 일행은 한때는 숲이었던 곳의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은신 마법진을 설치하고 모닥불을 지폈다.
‘확실히 달라.’
그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광룡에게도 통할지는 의문이다. 알베니우스와 어머니 나무께서는 장담하셨지만
글쎄. 그때의 패배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다.
그녀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그만한 대가를 동반하며 수많은 인류가 지워진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안전주의 마법사, 에드먼드였다. 데이지와 성자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가 꺼져가는 불씨에 마력을 더해
살려냈다.
“그런가요?”
“실패 때문입니까?”
“맞아요. 한 번의 실패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런 경험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아요.”
“광룡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으신 것입니까?”
“맞아요.”
“하지만 마물들이 아무리 강한들, 광룡에 비하면 약합니다. 그들을 아무리 죽인다 한들, 광룡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정론이었다.
율리아의 집착은 결국 풀리지 않을 허기와 같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그걸 토대로 새롭게 태어나고 모이고 성장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먹을 피와 생명력이
없다면?
“···잠깐만요.”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었다.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5) >
미친 짓이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애초에 신이라는 미지의 존재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의탁하는 성자와 진리를 탐구하는 대마법사는 그 궤가
달랐다.
“감정에 치우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마법사란 항상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냉철하게
현실을 보십시오.”
에드먼드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광룡이 아니라면 율리아가 쓰러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피해를 줄이고자, 보다 확실하게 하고자 하는 건 좋지만 솔직히 마물들을 상대로 하는 실험은 무의미했다.
율리아는 이미 마물 수준에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용사 일행은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다. 조용히 오염된 대지의 동태를 살피고 실력을 확인하려는
이전과는 달랐다.
* * *
마물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콰득-
율리아의 검이 거대한 지네 형상의 마물의 목을 갈랐다. 뚝 떨어지는 머리. 의지를 잃은 육신이 힘없이 쓰러진다.
하지만 마물들에게는 학습이란 게 없다. 다른 마물의 죽음에도 배우는 것 없이 무지성으로 달려든다. 수백, 수천,
수만.
─!
콰콰콰콰-
태산과 같은 용이 발톱을 할퀴듯, 거대한 상흔이 대지에 새겨진다. 그 사이에 존재하던 모든 마물들이 갈려나간다.
────!
성자의 기도로 신성한 빛이 깃들고 난장판이 된 마물들 사이로 용사와 기사가 질주한다.
전투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까지 계속된다. 마물에게는 공포가 없기에 한쪽이 죽어야지만 끝난다. 그리고
먼저 전멸한 쪽은 마물들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마력까지 쥐어짠 마법사가 탈진하여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급하게 포션을 삼켰다.
“벌써 밤이 되가네. 빨리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마물들이 더 몰려오겠어. 찝찝해 죽겠네. 나 클린 마법 좀.”
대충 클린 마법으로 피와 냄새를 지운 일행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의 흔적을 쫓아온
마물들이 들이닥쳤다.
“이대로는 진짜 안 됩니다.”
일행은 오염된 대지 외곽에 굴을 파 은신처를 마련했다. 마법으로 모든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주변에 알람 마법을
설치했다.
지나친 강행군이긴 했다. 지난 한 달동안 무려 백에 가까운 크고 작은 전투를 겪었고 수십만에 달하는 마물들을
토벌했다.
단, 네 명으로 이루어낸 성과. 율리아의 지분이 무척이나 크긴 하지만 그게 다른 일행들이 아무런 활약도 하지
않았거나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아.”
그녀의 무리한 강행군을 따라오려다 입은 피해들이었다. 이미 그들은 한계에 다다랐다. 여기서 그녀가 억지를
부린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터.
결정이 내려지자 일행은 빠르게 오염된 대지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모든 게 아공간에 들어있어 딱히 챙길 짐은
없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운기를 통해 소모한 마력을 보충한다. 오염된 대지에는 마나가 희박하기 때문에 챙겨온 영약들의 도움을
받는다.
“너희들이구나.”
무겁고 섬뜩한, 소름끼치게 더럽고, 역겹고 혐오감이 피어나는 그런 목소리였다.
기사가 검을 뽑았다.
마법사가 방어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다.
성자가 신성력을 뿜어냈다.
─────!
크르르르-
태산과 같은 거구.
빛마저도 흡수해버리는 짙고 어두운 비늘.
모든 것을 압도하는 특유의 위압감과 그 사이에서 사납게 일렁이는 황금빛 동공.
광룡, 발바르였다.
“신의 개. 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것을 쫒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주었더니. 살았으면 감사하고 찌그러질 것이지.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나?”
“딱히 당신이 자비를 베풀어주어서 살아난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때와는 많이 다를 거예요.”
“조금 달라지긴 했군. 나무에게 도와달라고 울면서 빌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허나, 그래봤자다.”
마나가 모였다.
“죽어라.”
“피해!”
“도망쳐야 합니다!”
“신이시여!”
──────!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6) >
광룡의 숨결.
마기로 점철된 독무가 쏟아졌고 그녀의 바람은 독기를 몰아낼만큼 충분히 거세지 못했다.
오러가 녹아내렸다. 갑옷이 부식되었다. 정령의 가호가 박살나고, 검이 녹슬었다. 많은 전력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악몽과도 같은 공격이었다.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베니우스님은 말했다.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그리고.
휘두른다.
─!
─────!
일거에 터져 나온다.
“큭!”
“모두 이쪽으로!”
마법사가 방어 마법진 마력을, 성자가 가호를 두른다. 율리아를 제외한 일행들이 그 뒤에 몸을 숨긴다.
“···어?”
“응?”
“······?”
흔적도 없이.
* * *
“······?”
그렇다면 결과도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숨결은 바람을 밀어내고 그대로 하이엘프 용사를, 그 뒤에 있는
인간들을 덮쳐야만 했다.
“통했어요···!”
하이엘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희에 차 온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용사.
“통했다고요!”
“흥, 고작 간신히 한 번 막아냈다고 너무 기뻐하지 마라!”
“하지만 나는 열 번도 넘게 쏠 수 있다!”
본래는 연속으로 한두 번이면 마력이 바닥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어둠의 가호를 받은 그는 일반적인 드래곤들과는
달랐다.
“죽어라!”
───!
다시 한 번 숨결을 토해냈다.
하이엘프가 검을 휘둘렀다.
“···어?”
“······.”
“그래, 두 번! 두 번이 최선이겠지! 이제 네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
하지만.
서걱-
발바르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하이엘프가 검을 휘두르니 바람이 불었다. 극도로 압축된 칼날 같은 바람이 그대로
숨결을 반토막 내버린다.
거센 광풍들이 힘을 잃은 잔재들은 저 멀리 날려버린다.
“쿨럭···!”
발바르가 무릎을 꿇었다.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쥐어짠 나머지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 온 몸의 마력이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드래곤이기에 결국 수복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에게는 그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말했잖아요.”
“통한다고요.”
“내 힘이! 당신한테!”
“통한다고.”
서걱-
날개가 잘렸다. 항상 두르고 있던 보호 마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끔찍한 고통에 발바르가 비명을 질렀다.
“대체,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의지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마력이 반응한다. 복잡한 술식도, 마법진도 필요 없다.
─!
낙뢰가 내리친다.
─!
─!
─!
“어떻게요? 간단해요.”
뭐, 그게 중요한가요.
그리고 마침내 율리아가 발바르 앞에 섰다. 거대한 드래곤과 작은 하이엘프. 분명히 그 차이는 명확했음에도
크기가 반대로 역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 당신이 제게 뭐라고 했죠? 하찮은 하이엘프 주제에 발악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하셨죠.”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그냥 곱게 가시지.
서걱-
“아···.”
단발마의 비명.
용의 머리가 떨어졌다.
* * *
“···이겼어.”
율리아가 환희했다.
“정말로 제가 이겼···!”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승리로 인한 고취, 환희가 아니었다. 뒤늦게 들이닥친 부하가 온 몸의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용사님!”
“용사님!”
“어디를 다친 거야!”
“그냥 조금 무리해서 그래요.”
알베니우스에게 배웠다고 한들, 상대는 광룡이었다. 그녀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 숨결과 마법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게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기껏 잡은 승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광룡이 희망을 가지고 반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지 않네요.”
성자가 일어서려는 율리아를 다시 눕히고 상처를 치유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율리아는 완전히 정상적인 몸
상태를 되찾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진짜로 율리아가 광룡을 죽인 거지?”
“···그렇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쉽게.”
“쉽지는 않았어요. 무리했다니까요? 방금 피 토한 것 잊으셨어요?”
“모든 것은 신의 뜻입니다. 신께서 내리신 가호를 어찌 광룡 따위가 넘볼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졌는데요.”
“이겼다···! 이겼어!”
“맞습니다. 종말이 끝났습니다!”
“내가 살았다! 살아남았어!”
“넌 정말 최고야, 용사님!”
“감사해요.”
“그런데 이럴 거면 굳이 외곽을 돌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니야?”
“아하하···. 그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광룡이 죽었습니다! 종말이 끝났습니다! 저희는 살았고 이 세상은 더 이상 멸망하지
않습니다! 제 삶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게 됐다고요!”
* * *
연합의 일원들은 그들이 숟가락을 올릴 겨를도 없이 광룡을 처치한 율리아에게 미약한 불만을 가지면서도 종말을
막았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기뻐했다.
와아아아아아!
연합은 공식적으로 종말의 종식을 선언했고 승전기념일로 정하고 모든 도시에서 축제를 시작했다.
“용사님, 제 아들이···.”
“용사님! 종말을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용···!”
율리아는 황제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행들과 함께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을 독차지했고 몰려드는 인파에 기겁하며 용사의 힘을 사용해 테라스로 피신했다.
그리고.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7) >
딱-
알베니우스가 픽 웃었다.
“그래서 네가 가장 묻고 싶은 게 뭐지?”
“알베니우스님이 늘 말씀하시던 김우진이란 분이요. 그분 살아 있다고 하셨죠?”
“그래.”
“신을 죽였고요.”
“신‘들’을 죽였지.”
“···예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어요.”
“감옥.”
“네?”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적였다.
* * *
“그래.”
“진짜 영웅이네요.”
“영웅이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짓을 했던, 김우진이 한 행동은 차원의 모두를 살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연옥은 신들의 오만과 욕심의 결정체. 그곳을 부수고 용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방법은 있나요?”
“신이 아닌 자가 연옥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야. 용사가 되어 차원을 구한 뒤, 힘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
“죄수로 들어가는 거군요.”
“그래. 이미 염두에 둔 자가 있다.”
“발라크님이군요?”
“맞아.”
“하지만 죄수로 들어가는데 연옥을 부술 수 있을까요? 아, 김우진이라는 분을 알베니우스님의 이름을 대고
설득하면 되겠군요.”
“그건 안 돼.”
“왜요?”
“김우진은 지난 20 년 동안 격리 차원에서 고문을 받았으니까.”
“김우진을 설득해 아군으로 만드는 게 목표이긴 하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어. 김우진이 신들의 개가 되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런 대단한 분이 신들에게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놈은 애초에 의심이 많아. 설사 신에게 넘어가지 않았다고 해도 섣불리 내 이름을 대면 오히려
의심부터 할 거다.”
“그러면 그걸 해결할 방법은요?”
“세계수의 씨앗.”
“씨앗이요?”
“씨앗을 연옥에 심게 만들어서 데이드람의 세계수를 통해 연락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직접 설득하는 게 가장
베스트야.”
“그럴 듯 하네요.”
“아무렴, 누가 세운 계획인데.”
세계수가 자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오래 걸리겠지만 애초에 신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럼 그거 제가 가도 될까요?”
“뭐?”
“아니, 그게 훨씬 빠르잖아요. 굳이 발라크님이 용사가 되고 종말을 막는 걸기다리는 것보다. 언제 될지,
기약이 없는 일이잖아요? 그에 비해 저는 이미 차원을 구했고 곧 신들이 저를 만나러 오겠죠. 얼마나 걸릴까요?”
“···통상적으로 나흘 뒤에 오긴 한다만.”
“그럼 내일이네요.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심고 자라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위험한 일이야.”
“살면서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전 그분을 직접 만나서 묻고 싶어요. 세이드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그리고 세이드의 복수도 하고 싶고요.”
진짜 가족을 잃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세이드까지 신에게 잃었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했다.
알베니우스가 사라졌다.
“아름다운 밤이네요.”
* * *
새하얀 공간.
“신을 뵈어요.”
고개를 숙였다. 오연하게 서 있던 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율리아를 선택하고 데이드람으로 보냈던 신이다.
신이 세 개의 손가락을 폈다.
“세 가지요?”
“하나는 힘을 포기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힘을 포기하라고요?”
“끝까지 들어라.”
“···네. 죄송해요.”
“두 번째는 힘을 포기하지 않고 대가 없이 그대로 돌아가는 것.”
율리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저게 그거구나.’
알베니우스는 신들이 능력이 뛰어난 용사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녀 수준이라면 능히 제안이 올 것이라고도.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그래. 넌 세계를 구한 영웅이다. 그 정도의 선택지 정도는 얼마든지.”
호의로 가득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알베니우스의 말대로라면 두 번째를 고르는 순간이 시작이라고 했다.
“눈을 감아라.”
“네.”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본래 네가 있어야 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감사했어요.”
“나야 말로.”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쯧, 아깝군.”
“따라와라.”
‘이 자가···.’
김우진.
“네.”
“···대답이 빠르군. 종족은 엘프고.”
하지만 참았다.
지금의 김우진이 알베니우스가 말해주었던 그 영웅,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
“잘못 됐네요.”
“엘프가 아니라고?”
별 의미 없는 트집.
“정확히는 하이엘프에요.”
“빌어먹을. 나이는?”
“237 살이요.”
“어리군.”
“하이엘프치고는 그렇죠.”
“아르반이라는 차원 출신이고.”
“네.”
“데이드람을 구했고.”
“광룡이 미쳐 날뛰던 차원이었어요. 꽤나 힘들었죠.”
“여기가 어딘 줄 아나?”
“감옥이요.”
“그렇다면 대답은?”
“여기 오게 된 걸로 대답이 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출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시체가 되어 나가는 거군요.”
“그걸 알면서도 거절하겠다고?”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여기 처음 들어온 놈들은 모두 너와 같은 생각을 해. 그런데 몇 놈이나 탈옥했을 것 같아?”
“불가능하다는 거네요. 그래도 지금은 그렇네요. 아시잖아요? 하이엘프의 시간은 길어요.”
“···망할 엘프놈들.”
“알았다. 1178.”
“1178? 그게 뭐죠?”
“네 죄수번호.”
“아하, 3 이 하나도 없는 게 아쉽네요.”
“3?”
“다른 엘프들은 몰라도 저희 차원의 엘프들은 3 을 행운의 숫자로 여겼거든요.”
“그렇군.”
알베니우스가 그랬다. 김우진의 나라에서는 3 이 행운의 숫자라고. 슬쩍 던져봤는데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데리고 가.”
“얌전히 있어라.”
“···여기가 독방.”
계획을 정리했다. 김우진이 신들의 개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그리고 세계수의 씨앗을 심게 만들기.
“와. 여기 밥이 엄청 맛있네.”
탈옥이라. 딱히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죄수들과 친해지고 연옥의 사정을 파악하는 게 낫겠지.
“방법은 있고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 >
박상준은 용사다.
사람들은 그를 마왕이라 불렀고 마왕은 언데드와 마물 군단을 이용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
박상준은 번개 속성에 극한의 친화력이 있었다. 창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 두 가지를 조합하고 용사 버프까지
받아 몇 년 만에 대륙 최강의 반열에 올랐고 종말을 막기 위한 대서시시가 시작되었다.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용사의 힘은 그가 이곳에서 용사로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네 선택을 존중한다. 지구로 돌아가면 곧장 로또를 사라. 번호는 1, 3, 11, 28, 39, 40 이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번호는 22, 36, 37, 41, 44, 45 다. 혹시 모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주에 하나씩 사도록. 그리고
그걸로 사야할 주식은 동화전자이며 3 만원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사고 11 만원 이상이 되면 다 팔아라. 그
다음에는 미국 주식 중에 리얼 망고라는 종목을 9$ 아래에 사서···.”
델라임 인류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렇게 그는 지구로 돌아와 수천억의 자산가가 되었다. 평생 병에 걸리지 않는,
이종격투기 챔피언이 될 만한 몸을 손에 넣었다.
“격투기 선수가 되도 재밌을 것 같은데.”
“어?”
“어?”
“당신···.”
“당신도···?”
Ready, Fight!
대화는 짧았다. 래프리가 경기 시작을 선언했고 서로의 주먹을 터치하는 즉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후욱-
─!
─!
박상준이 위빙으로 상대의 주먹을 피하며 카운터를 날린다. 챔피언의 목이 급격히 꺾이면서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곧 바로 이어지는 반격. 카운터의 카운터가 나왔지만 박상준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뒤로 재치며 피해낸다.
와아아아아아!
상준박! 상준박!
킬리언 패럴!
킬리언! 죽여 버려!
‘오랜만이야.’
다시금 주먹이 교차했다. 피하고 날리고, 피하고 날리고. 종이 한 장 차이로 서로에게 닿지 않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속도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빨라졌다.
‘어쩌면 조금 따분했을지도.’
그래서 평화로운 지구의 삶을 소망했다. 하지만 이미 용사로서의 경험은 그의 몸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평온한 일상은 너무 멀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애써 부정하던 진실을 깨달은 순간, 박상준을
제약하던 리미트가 조금씩 풀려갔다.
왜 참아야 하지?
자신도, 상대도 이 정도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데.
주먹이 아니라 창을 들고, 공기가 아니라 오러를 가르며, 힘을 제약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폭발시켜야 한다.
‘너도 마찬가지였구나.’
‘야, 너도?’
‘나도.’
평온한 삶을 바라면서도 이미 용사로서 살아온 삶이 길기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 그리고 힘을 드러내고
싶은 갈증.
‘이 정도는 괜찮잖아.’
아마도.
파직-
미약한 번개가 박상준의 주먹에 맺혔다. 이에 호응하듯, 챔피언의 주먹에 오러가 뭉글거렸다.
─!
와아아아아-
옥타곤 위에는 챔피언과 도전자가 피 튀기는 난타전을 벌인다. 서로의 주먹을 모두 피하던 이전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즐거웠다.
충돌하기 직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가 반응해 둘을 연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신의 더미들이 그들을
대신했다.
멸망 직전의 차원에는 무리지만 조금 여유가 있는 차원에는 지구인을 용사로 삼는 것을 선호하는 신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소장님이나 저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지구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레 재능이 많은 자들이 늘어났어요.”
“연옥으로 가자.”
그 개새끼들은 내가 직접 관리한다.
“아직 경기 안 끝났는데요?”
“어차피 더미 싸움이잖아. 누가 이기게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 한국인이 더 친숙해요.”
퍽-
그 순간, 도전자의 더미가 챔피언 더미의 턱을 갈겼다. 극적인 카운터였고 챔피언이 쓰러졌다.
“이제 가자.”
“네.”
* * *
“절대신님을 뵙습니다!”
“방금 전에 죄수 둘 새로 들어왔지?”
“예. 지구 출신의 전직 용사 둘이 왔습니다.”
“그 새끼들 전부 상담실에 집어넣어.”
“예?”
“내가 직접 상담을 좀 해보려고 해.”
“예? 직접 말···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김우진의 눈짓에 교도관들이 모든 구속 장치를 풀었다. 죄수들이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
“들어와, 이 씨발놈들아.”
*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너희들은 신이 우습냐?”
“힘은 물론이고 용사행의 대가로 받았던 모든 보상들까지 반납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이라면···?”
“돈, 육체, 그 밖에 용사가 된 후 얻었떤 모든 것. 너희들은 용사로서 소환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거야.”
“그, 그건 너무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잘못을 했다지만 모든 걸 다 앗아가는 건···!”
“그럼 계약을 준수 했어야지.”
두 죄수는 섣불리 선택하지 못했다. 감옥에서 평생 썩는 것도, 단순히 힘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장님!”
“무슨 일이야.”
“큰일 났습니다!”
“큰일?”
“종말, 종말이 시작됐습니다.”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지구! 지구입니다!”
“뭐라고?”
“방금 지구에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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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지구의 종말(2) >
“···저게 뭐야?”
“숫자?”
어느 날, 지구의 하늘에는 숫자가 떠올랐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 *
“종말은 각 차원의 주 인류의 익숙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지구의 인류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만화와 게임,
그리고 영화입니다. 그 방식 그대로 전개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럼 카운트가 끝나면 진짜로 게이트가 열리고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거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게 피조물과 마물들의 생명력과 피가 차원의 수명을 늘리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건 아니다.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실제로 신들이 권역으로 삼은 차원은 종말이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하니까.
종말이 일어난다는 건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종말은 반드시 평화를 해친다. 문명을 파괴한다.
평화롭게, 문명을 즐기고 싶어 차원 연옥이 아닌 지구에서 생활하는 김우진이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신들이 굳이 다른 차원에서 용사들을 소환하는 것은 그들이 해당 차원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원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기에 한계까지 용사의 힘을 남발할 수 있었다.
일곱 명의 신들이 손을 들었다.
일부는 김우진에게 죽은 신들을 대신해 새롭게 신이 된 자들, 또 일부는 기존부터 신이었지만 최하위에 가까운
신이었다. 상위권의 신들은 굳이 김우진의 차원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 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딱히 신경 안 쓰는데 말이지.’
두 명의 신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 * *
박상준과 킬리언 패럴이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어필했다. 지구의 종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데리고 가라.”
“예!”
“···내 죄수들.”
어떤 심정인지는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피해 없이 지구의 종말을 막는 게, 그래서 일상을 최대한 빠르게
되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율리아가 물었다.
그래,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와 이런저런 타협을 하면서 아카식 레코드는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제는
김우진 또한 균형을 위해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받기로 했다.
신들을 평정한 시점에서 딱히 하위 차원에서 난장을 필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수긍한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종말이 있다면 종말의 사도 또한 존재할 테지. 사도를 찾아. 찾아서 용사들한테 알려줘.”
“네. 최선을 다할게요. 저도 지구의 평온한 삶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망하면 게임을 못하니까?”
“그것도 물론 있죠.”
“아. 사도 찾는 건 강민식한테 맡겨.”
“확실히 적임자긴 하겠네요.”
“어디 가시게요?”
“무슨 일인지 가장 확실하게 알 만한 거인한테 물어보러.”
* * *
“저 카운트가 끝나면 게이트가 열리면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거다. 절대신께서는 지구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라신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최고의 성과를 내라. 절대신께서 베푸신 자비와 은총을 매 시간마다 곱씹으며.
명심해라. 너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죽다 살아난 박상준과 킬리언 패럴이 멍하니 집행자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 * *
“이것도 먹통이고···.”
매개체가 있으면 네비처럼 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두리쉬마의 물건을 가지고도 쉽게 찾기가
힘들었다.
“음.”
이 두 개가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 걸까.
“설마 배신?”
그리고.
- 친구!- 친구!
20cm. 그토록 오매불망 찾고 있던 거인이 인형에 가까운 자그마한 소인이 되어 두 정령들과 투닥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지 않아!”
- 한심해.
- 한심.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놈이 널 노리고 있다, 김우진.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해. 지구의 종말은 너에게 날리는 경고장이다.”
···씨발, 진짜.
───────────────
# < 외전. 지구의 종말(3) >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두리쉬마는 경고장이라고 했지만 김우진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이건 선전포고다. 김우진이 만들어놓은 같잖은
판을 뒤집어버리겠다는 광기.
구 백신전에 의해.
“생존자가 있었다.”
“뭡니까?”
“차원룡.”
“···그 말은.”
“그래.”
“차원룡의 생존자는 알베니우스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둠의 사도가 되어 백신전을 무너트리기 위해 돌아왔다.
짐작이 가나?”
타이탄들은 차원룡보다 훨씬 먼저 신들의 공격을 받았다. 두리쉬마가 인내하며 분노를 곱씹은 시간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그야 말로 분노의 화신이었다.
신도, 드래곤도 모두 기억을 망각하고 무뎌진다. 단지, 인간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백신전의 신들.
신들의 개, 집행자.
그들의 선택을 받은 용사.
백신전이 짜 놓은 판 아래서 삶을 영위하는 피조물들.
그리고 백신전을 백신전으로 만든 아카식 레코드까지.
“···완전 미친 새끼군요?”
“종족이 몰살당했는데 뒤를 생각할 만한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하아, 빌어먹을.”
* * *
청명한 하늘.
─!
거대한 백룡의 날개짓에 폭풍이 일어난다.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에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고 부러진
나무들이 휘날렸다.
────!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즐거우셨습니까?”
“그래. 매일 매일 해도 질리지가 않네. 그 동안 어떻게 참았지, 나?”
“별일 없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김우진?”
“아닙니다. 항상 찾아오시던 분들이 아니라 처음 보는 분입니다만, 알베니우스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처음 보는데 나를 알고 있다고?”
누구지?
백신전이나 거기에 연관된 이들이 아니면 굳이 알베니우스를 찾을 자들은 없다. 애초에 알베니우스가 어느 차원에
머물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가디언은 용사나 집행자가 아닌 일개 피조물이지만 적어도 이 차원의 최강자 수준이었다. 가디언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면 신이나 집행자다.
“가보지.”
“예.”
생명체라면 누구나 기척을 낸다. 그런데 집무실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적인가?’
‘도망쳐?’
하지만 늦었다. 그의 기감을 완벽하게 속이는 자를 상대로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차라리 정원에서 방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로 튀어야 했다.
“왔구나, 알베니우스.”
“······?”
모르겠군. 너무 오래 돼서.
운이 좋았지.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종말 차원에 숨었고 벌레처럼 숨죽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견디다 못해 하위 차원에 들어갔을 때, 네
소문을 들었다.”
프로니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프로니우스가 으르렁거렸다.
“주신과 신, 그리고 집행자까지! 백신전의 모든 일원들이 하나가 되어 우리를 죽였다. 울부짖는 내 어머니를,
저항하는 내 아버지를! 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놈들도 반드시 똑같은 고통을 맛보아야만 한다.”
“···너 설마!”
“그래. 난 어둠의 사도가 되었다. 어둠의 뜻을 받아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다.”
“그건 미친 짓이다···!”
“내 손을 잡지 않겠다는 거군.”
“어째서지?”
“어째서라니, 그야 당연한 것 아니야!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미친 소리를 누가 받아들인다는 거지?”
“신들에게 동족들이 멸망했다. 동족들이 없는 세상에 미련이라도 있다는 건가?”
“···너 완전히 미쳤구나?”
“내가 널 잘못 봤군.”
콱-
“어둠께서 정녕 모르셨을 것이라고 보는 거냐? 스스로를 절대신이라 치켜세우는 버러지 김우진과 두리쉬마의
연극은 이미 모두 들통 났다.”
“네가 김우진과 작당 모의하며 백신전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신들은 오만해서 고작 경고장 정도로 여기겠지. 하지만 네가 직접 내 말을 전한다면 확실히 알아들을 거다.”
가라.
내가.
백신전을.
“무너트리겠다고.”
프로니우스가 몸을 돌렸다.
“같은 동족이기에 주는 자비는 오늘 널 살려서 보내는 것으로 끝이다. 다음에 만나면 가장 먼저 네 목부터
뜯어주마.”
“쿨럭, 쿨럭···!”
* * *
“와.”
“와.”
이종격투기 채널이 틀어진 티비에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때죠?”
“저 때다.”
“그런데 도저히 모르겠네요. 기가 막히네.”
“괜히 신이 아닌 거지.”
옥타곤 위에는 챔피언 킬리언과 박상준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서로에게 한 대도 맞추지 못하는
스피드 전이었다면 한 순간을 기점으로 어마어마한 난타전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교체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서로가 당사자라 그 타이밍을 알지 못했다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정말 죽다 살아났네요. 돈도 돈이지만 이 몸이랑 이것저것 다 빼앗기며 진짜 꽝이잖아요.”
“그렇지. 그렇다고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썩는 것도 말도 안 되니 한시름 놨다.”
“그런데 말이죠.”
“······?”
“종말을 막으면 또 다른 보상을 줄까요?”
───────────────
# < 외전. 지구의 종말(4) >
카운트가 모두 끝났다.
시작은 서울이었다.
[약혐) 이거 뭐냐]
[농사짓는 농붕이 실시간 좆됐다.
내 쌀 밭에 게이트 열려서 몬스터 쏟아졌다. ㅅㅂ 수확이 코앞인데 벼가 다 검은 색으로 변함.]
↳벼가 문제임? 니 목숨이 검게 될 것 같은데.
↳몬스터들이 쫓아와서 차타고 도망치는 중.
↳ㅅㅂ도망치는데 커뮤를 하고 있네.
↳상남자
↳상ㅂㅅ이 아니고?
↳ㄹㅇ미친새끼네ㅋㅋㅋ
↳살았다. 다행히 5km 정도 멀어지니까 안 옴
↳어디임?
↳김해. 다행히 근처 다 내 논밭이라 사람은 안 다쳤을 듯.
↳다행인거지?
↳다행(눈물)
↳상태창!
[크아아아아]
[jpg]
[겁나 센 오크가 울부지졌따! 이상하다 내가 아는 오크는 이러지 않았는데.]
↳저딴 게 오크?
↳존나 무섭게 생겼네 ㄷㄷ
↳3 대 5000 은 칠 듯
↳언더아머 10 장 쌉가능
↳어디임?
↳설악산 중턱에 게이트 열림
↳전국 곳곳에 다 열리는구나. 어디로 튀어야 되냐
↳왜 cg 아님? 왜 cg 아님? 왜 cg 아님? 왜 cg 아님?
↳이게 영화가 아니라고? ㅅㅂ
↳상태창!
↳ㅅㅂ상태창 빌런 모든 글에 다 있네
[실시간 재평가]
[jpg]
[카운트 끝나는 순간, 게이트 열리고 몬스터 튀어나올 거라고 예언한 현자.
씹덕 망상이라고 지랄하던 댓글들 다 삭제 중.]
↳ㄷㄷ종말 진행 중인데 커뮤에서 댓삭을 하고 있네
↳커뮤에서 댓글 달고 있는 너는?
↳아앗
↳아앗, ㅇㅈㄹㅋㅋㅋㅋ
아시아, 유럽, 북미,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지구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고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졌고 각국의 군대가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나타났다.
* * *
[실시간 L 타워]
[동영상]
[번개 쓰는 각성자 나타남. 가면 쓰고 나타나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몬스터들 전부 튀겨버림.]
↳??
↳뭐임?
↳진짜 각성자라고?
↳와, 몬스터들 다 터져나가네
↳상태창! 상태창!
↳나는 왜 각성 안 해? 나는 왜 각성 안 해? 나는 왜 각성 안 해? 나는 왜 각성 안 해?
↳하회탈 ㅎㄷㄷ
↳이걸 하회탈을 쓰네 ㅋㅋ
↳ㄹㅇ각시탈이 근본인데
↳정보)각시탈도 하회탈이다. 저건 하회탈 중 하나인 양반탈이다.
[각시탈 떴다!]
[동영상]
[김해에 각시탈 떴다! 주먹으로 다 때려 부수고 다님. ㄹㅇ상남자.]
↳이걸 각시탈이?
↳이왜진?
↳양반탈 하남자네 비겁하게 창이나 들고 ㅋㅋ
↳ㄹㅇㅋㅋ
↳양반탈보다 각시탈 떡대가 더 미쳤는데? 가면 바뀐 거 아니냐?
↳10m 넘어가는 몬스터 그냥 던져버리는 거 보면 3 대 50000 은 칠 듯 ㄷㄷ
- 상태창!
그들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단숨에 처리하고 몬스터들의 영역이 된 게이트 반경 5km, 일명
던전을 파괴했다.
다섯 명 뿐인 용사들의 활약은 한 국가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신들에게 받은 사명은 지구의 종말을 막는 것.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지구의 게이트들을 막기 위해 국경을 넘어 다녔다.
“네 말을 듣기를 잘했다.”
“그렇죠?”
“그나저나 신들이 엄포를 놔서 기대 많이 했었는데 생각보다 약해서 아쉽네요. 손맛이 부족해요, 손맛이.”
“이제 시작이겠지.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간다면 앞으로 열리는 게이트들은 점점 많아질 거다. 당연히 거기서
나오는 마물들도 강해질 거고.”
“알죠, 알죠. 그런데 그래봤자잖아요?”
“소문으로는 드물게 용사들이 소환되는 차원도 있고 그곳의 난이도는 일반적인 차원과는 상당히 다르다는데 지구도
그런 걸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 근데 그 사실을 누구한테 들었지?”
“미국에서 활약하는 사람한테요. 이미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은 세 명의 용사가 소환되었던 차원에서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이라면 카일리 로퍼?”
“네. 형님은 같은 나라 사람인데 안 만나 보셨어요?”
“나는 샌프란시스코고 카일리는 플로리다다. 대륙과 대륙 끝에 있지.”
“하긴, 미국이 워낙 크긴 하죠.”
어쨌든.
“갑자기 어딜 가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좆 될 것 같아서 태평양 한가운데로 가서 훈련이라도 하려고요.”
“같이 가자. 그렇지 않아도 한 판 붙기로 했었잖아?”
“저야 좋죠.”
* * *
“재미있는 놈이네.”
그리고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복수심이 우주 끝까지 차올랐으니 이쪽이 최대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겠다는 거겠지.
고요한 정적 사이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백신전의 신들이 무겁게 침묵하며 김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율리아.”
“네.”
“그 두 놈은 뭘 하고 있지?”
“태평양 한 가운데서 서로 싸우고 있어요. 말릴까요?”
“내비 둬. 알아서 훈련을 하겠다는 걸 말릴 필요는 없어.”
“네.”
“지금 문제는 지구 정부들과 용사들 간의 관계에요. 죄수 두 분은 처음부터 가면을 써서 정체를 숨겼지만 나머지
세 분은 얼굴을 드러냈거든요. 정부가 접촉을 시작했어요.”
“당연한 수순이지. 알아서 하라고 해.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단, 잘못된 선택으로 지구의 피해가
커지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해.”
“네. 지구에 관한 건 이걸로 끝이에요.”
“프로니우스의 행방은?”
“최선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폴로이드에서의 흔적은?”
폴로이드는 알베니우스가 별장을 지어놓고 생활하던 차원이었다. 프로니우스가 알베니우스에게 경고를 날렸던 곳.
“완벽하게 지워져서 찾을 수 없습니다.”
김우진은 신들을 탓하지 않았다. 상대는 차원룡이다. 공간의 권능만큼은 신에 필적하는, 그 이상인 놈들. 그런
놈이 어둠의 사도까지 되었으니 신들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도 당연했다.
프로니우스는 대놓고 세 번이나 선전포고를 날린 놈이다. 과연 그놈이 이대로 지구의 종말을 지켜보며 가만히
있을까?
그럴 리가.
자고로 공격하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어둠과 프로니우스는 공격자고 아카식 레코드와 백신전은
수비자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다. 하물며 지구를 비추어 보았을 때, 종말에 들어선 차원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용사들을 늘려라.”
“놈이 다른 차원들을 공격할 가능성을 보시는 겁니까?”
“놈의 목적은 백신전과 백신전이 짜놓은 판 자체의 괴멸이다. 그건 이 우주의 종말이고 앞뒤 가릴 것 없지. 종말
차원들과 가장 가까운 외곽 차원들에 대한 경계와 감시를 강화해라. 집행자들 있는 대로 다 동원하고 필요하면
너희들이 직접 나서. 차원 내에서던, 밖에서던. 업 아끼다가 판 자체가 엎어진다.”
하위 차원은 처음 탄생했을 때, 아카식 레코드와 가깝다가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종말 차원과 적당히 가까워지면
종말이 찾아온다.
거기서 종말을 막으면 다시 중앙으로 이끌리고, 막지 못하면 그대로 종말 차원들 중 하나가 되어 더 멀어진다.
디아네가 으르렁거렸다.
“안 돼. 넌 사고 칠 것 같아.”
짐승 싸움광도 마찬가지다.
“음.”
* * *
김우진은 오랜만에 차원. 연옥을 찾았다.
‘그게 문제인가.’
문제긴 문제다. 차라리 대놓고 나타나주면 속 시원하게 잡으러 갈 텐데, 알베니우스에게 경고를 전달하고 나서
행적이 묘연해졌다.
- 당연하지.
- 당연히.
그래, 세계수가 차원 어딘가에 숨은 어둠의 사도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래도 세계수의 도움을 워낙
많이 받은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세계수를 만능으로 생각했다.
구 백신전 차원과 연옥이 합쳐져 새롭게 탄생한 연옥은 현 백신전처럼 이것저것 무언가를 많이 하지 않았다.
차원의 중심에 우뚝 선 두 그루의 세계수와 광활한 원시림, 사막, 호수, 설원, 초원에 산맥까지. 상위
차원이지만 연옥도 백신전도 그리 큰 차원은 아니었다.
대부분 지구나 백신전에서 시간을 보내는 만큼 거주지보다는 별장에 더 가깝지만 주신들만 올 수 있다는 상징성과
두 세계수와 놀 수 있다는 것이 차원 연옥의 매력이다.
- 귀쟁이!
- 귀쟁이!
“어떻게 찾아왔어?”
“지구 아니면 백신전, 아니면 여기잖아요.”
“단순하긴 하네.”
“지구에서 새로운 소식이에요. 뉴스 보셨어요?”
“뉴스?”
김우진이 거대한 105 인치 티비를 틀었다. 김우진의 권능과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결합해 지구와 연결해 놓은
티비였다.
“예상했던 바잖아?”
“마물의 움직임은?”
“없어요.”
“없다고?”
“지구를 중심으로 집행자들을 쫘악 깔아놨는데 아직까지는 잡히는 마물이 없어요. 변방의 종말 차원과 가까운
곳들도 마찬가지고요. 마물이 아예 보이질 않아요.”
이상했다.
그래, 이 부분이.
여차하면 차원으로 들어가는 마물들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차원으로 직배송을 꽂아버리면 하나의
방법이 막혀버린다.
일주일이 지났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5) >
00:00:01
00:00:00
두 번째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속보! L 타워 또 야랄났다!]
[L 타워에서 또 게이트 열렸다. 그나마 첫 게이트 이후 통제 구역 되서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다행인데 이게
열렸던 곳에 그대로 다시 열리네 ㅁㅊ]
↳김해랑 강원도도 똑같음
↳그나마 다행인 듯?
↳ㅇㄱㄹㅇ통제구역이라 민간인 없었음
↳지금 전투 벌어짐. 군인들이 총 쏘는 중.
↳총으로 뒤짐?
↳박격포도 쏨
↳전차도 왔음
↳ㄹㅇ전쟁이네
↳서울 작살나는 거임?
↳서울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작살날 판
특히, 한국은 포방부라는 이름답게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화려한 화력쇼를 통해 마물들을 깡그리 박멸했다.
[아니]
[송파구랑 강남구, 강동구랑 광진구 일부가 초토화 됐는데 이거 맞냐?]
↳ㄹㅇ저게 다 얼마냐
↳그럼 그 비싼 집에서 괴물이랑 손잡고 뒤지시던가
↳ㄴㄴ어차피 게이트 열려서 거기 똥 값됨
↳ㄹㅇㅋㅋ
↳ㅅㅂ괴물이 나오는데 돈타령 오지네
↳이게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그건가?
↳초토화된 나라가 한둘이 아닌데 대응 잘해서 잘 막아줬더니 ㅈㄹ하는 새끼들이 있네ㅅㅂ
그 과정에서 송파구 대부분이, 강동구, 강남구, 광진구 일부가 희생양이 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잘했다는
칭찬이 가득했다.
게이트 사태와 괴물들의 출현은 그들에게 미지의 공포를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피해가 있더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안도감을 주었다.
김해는 오히려 더 쉬웠다. 넓은 평원에 게이트가 열렸기 때문에 무차별 포격으로 순식간에 정리 되었다.
* * *
파직-
스파크가 폭발하며 머리를 통으로 날려버렸다. 은밀히 뒤로 접근하던 마물이 연쇄하는 뇌전에 감전되어 그대로
타버렸다.
“와.”
20m 가 넘어가는 멀대같은 마수였다. 부풀어 오른 근육은 로이드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지나쳤다.
─!
하지만 킬리언과 부딪히자 오히려 휘청이며 쓰러졌다. 놈의 팔을 꺾어버린 킬리언이 그대로 위에 올라타 머리를
난타했다.
“게이트는?”
“닫았습니다.”
“그럼 끝났군. 다른 나라로 움직이지.”
“그런데 마왕도 그렇게 죽이셨습니까?”
“마기로 기이하게 변한 거인족이었다. 크기가 15m 에 더럽게 강하더군.”
“그래서요?”
“서로 맨주먹으로 치고 박고 싸우다 힘겨루기를 했지. 팔을 그대로 꺾어버린 다음에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진짜 무식할 정도로 세시네요.”
“너는?”
종말의 사도는 어비스 나이트라는 데스 나이트의 상위종이었다. 수십만의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남하하는데
싸우면 싸울수록 수가 늘어가는 혐오스러운 놈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바쁘지 않을 것 같던데요. 송파구랑 김해 쪽은 군대가 알아서 처리했고 일본쪽도 자위대가
움직여서 피해가 별로 없답니다.”
다른 나라들도 대동소이했다.
* * *
김우진이 지구의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서울의 게이트는 두 번 다 송파구를 비롯한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고
당연히 용인에 위치한 김우진의 집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집 앞의 마당에 땅을 파고 옮겨 심었다.
본래라면 굳이 지구에 세계수를 심어야 되냐는 생각이 있어 화분에 만족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이쪽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할 수 있겠어?”
- 음, 쉽진 않아.
- 그래도 해볼게!
본체가 아닌 분신을 이용해 또 다른 차원에 뿌리를 내리는 세계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리고 신을 먹어치운
릴리와 나르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고마워.”
신이라는 이름의.
“용사들 수십 명을 투입시키면···아니지?”
신은 아니나 신의 힘을 쓸 수 있는 자.
그럼에도 신이 아니기에, 태생적으로 타고 났기에 어느 차원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 자.
* * *
“음.”
“한심하군.”
그는 위대한 타이탄이고 마기의 빈자리에 신력을 채울 수 있다. 비록 어둠의 사도 일때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겠지만.
역시 이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지금의 두리쉬마가 백 명이 넘게 모인다 한들, 과거의 두리쉬마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 처음?
- 처음부터 뭘?
“여기 계셨습니까?”
“김우진.”
“뭐하고 계십니까?”
“마기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빈자리를 신력과 마력으로 보충해볼까 한다. 오랜만이라 익숙하지 않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다행히 불가능까지는 아니더군.”
“그런 의미에서 이 차원은 최고군. 신을 먹은 세계수가 둘에, 본래 백신전의 차원이 합쳐져서 그런건가?”
“네, 맞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지?”
“힘을 되찾고 싶으신 것이겠죠?”
“당연한 소리를. 나는 이렇게 약해빠진 스스로가 한심해서 버틸 수가 없다.”
“단순히 명상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좋은 방법?”
“업을 쌓는 거죠.”
용사가 강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수련을 통해 능력 자체를 올리거나, 마물을 죽이고 종말을 막으며 업을
쌓거나.
권능을 통해서 마물들을 쏟았다는 것 자체가 프로니우스가 지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김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맡겨둬라.”
두리쉬마가 손을 맞잡았다.
- 잘 부탁해!
- 맡겨줘!
───────────────
# < 외전. 지구의 종말(6) >
“여기가 지구인가.”
높은 산이었다.
“탁하군.”
“희박하고.”
마나 또한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혹시 두리쉬마님이십니까?”
박상준과 킬리언 패럴. 이종격투기 대회에서 대놓고 힘을 쓰려다가 연옥으로 끌려갔던 이들이었다.
살면서 봐온 용사라고는 킬리언 패럴과 카일리 로퍼가 전부였기에 다른 차원의 용사가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거리가 좁혀진다. 마수를 두부처럼 으깨는 주먹 위로 단단한 오러가 맺힌다.
─!
충격파가 퍼졌다. 부서진 오러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검은, 그리고 푸른 오러의 파편들이 뒤엉킨다. 근처의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진다.
“이것도 막아봐라!”
킬리언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후속타를 날린다. 이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맺혀 팽창한 오러는 흡사 거인의 주먹과
같다.
─!
“뭣···?!”
그럼 이제.
“맷집을 확인해볼까.”
“···어?”
“···세상에.”
그 사이로.
“이빨 꽉 깨물어라.”
──────!
세상이 붕괴한다.
단 일권에 일대가 진공이 되고 킬리언의 육신이 대지 깊숙이 처박혔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산 전체가
흔들렸다.
“크으으으···.”
“어떻게 너도 해볼테냐?”
“···헤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랑 두리쉬마님이랑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통하는 부분?”
“저도 저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열 정리가 끝났다.
* * *
김우진이 보여준 영상으로 보거나 들은 게 전부였다. 확실히 여러 차원들을 다녔지만 지구는 지금까지 차원들과는
꽤 달랐다.
전부 마나가 없기 때문이겠지.
“차 좀 드시겠습니까?”
“커피로.”
“예.”
박상준이 컴퓨터를 켜고 두리쉬마에게 RPG 게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기절해 있던 킬리언 패럴이 눈을 떴다.
“이것도 약하군.”
“마우스가 다섯 개나···! 제발 힘 조절 좀 부탁드립니다!”
“이것도 약하고.”
“내 무접점 키보드가···!”
“크윽···!”
“아, 일어났어요?”
“내가 왜···?”
“기억 안 나세요? 두리쉬마님한테 까불다가 한 대 맞고 기절했잖아요.”
“······.”
“···아, 아니.”
“아니?”
“아, 아닙니다.”
“앞으로는 내 말에 복종해라. 물론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내도 좋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좋군.”
“또 부서졌다.”
“···제발, 이제 마우스도 없단 말입니다.”
“약해빠졌군.”
“두리쉬마님의 힘이 너무 센 겁니다.”
울상을 짓던 박상준이 두리쉬마를 컴퓨터에서 때어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선물입니다. 두리쉬마님.”
“선물?”
“두리쉬마님을 위해 준비한 겁니다. 앞으로 싸우실 때는 무조건 이걸 착용하셨으면 합니다.”
“가면?”
“저희는 탈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이 세상은 대중의 앞에 나설 때는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는 게
이롭거든요.”
“못생겼군.”
“못생기긴 했지만 얼굴은 확실하게 가려줍니다.”
“쓰고 싶지 않다만.”
“그러면 사람들이 두리쉬마님을 가십거리로 삼을 겁니다.”
“모두 죽이면 그만이다.”
“안 됩니다! 그건 범죄입니다!”
“남을 험담할 거라면 목숨을 걸어야지.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지구에서는 절대, 절대 당연하지 않습니다!”
“나를 모욕했는데 그냥 참으라고?”
“그게 지구입니다, 두리쉬마님.”
“만약 죽이면 문제가 되나?”
“크게 됩니다.”
“고문은?”
“그것도 안 됩니다!”
“사지만 부러트리는 건?”
“고문하고 뭐가 다른 겁니까?”
“최대한 아프게 부러트리느냐와 그렇지 않느냐?”
“···안 됩니다.”
“···짜증나는 차원이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김우진의 당부를 떠올린 두리쉬마가 마지 못 해 수긍했다. 박상준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 *
일부는 지금의 사태를 하나의 게임으로 여겼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었다.
[두 탈쟁이 덕분에]
[쉽게 막았다고 김칫국 오지게 마시네.
첫 웨이브 때 죽은 사람이 몇인데]
↳ㄹㅇ전 세계적으로 웨이브로 인한 사망자가 50 만명이 넘는다더라
↳운 좋게 각성자 두 명 있어서 살아놓고 쉽네 ㅇㅈㄹ
[갑자기]
[그런데 갑자기 하회탈들 떠나는 거 아님? 그럼 우리 좆 되는 거 아님?]
↳ㅅㅂ그런 불길한 소리를 왜하누
↳그래도 군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ㄹㅇ화력쇼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던데
↳불꽃놀이에 눈이 멀어서 그럼
↳황천놀이
[근데 진짜 행운이네]
[각성자가 꼴랑 다섯인데 우리나라에만 둘 있는 거 실화?]
↳대신 게이트도 3 개 드립니다
↳아, 필요 없어요ㅡㅡ
↳쓰읍, 넣어둬, 넣어둬. 어른이 주는 건 거절하는 거 아니야.
↳나도 어른이야
↳밸런스 패치 오지네. 한 국가에서 세 개나 나온 건 우리나라뿐이라며?
↳땅덩어리 넓은 중국이랑 러시아도 두 개 뿐이라더라 ㅋㅋㅋ
↳근데 한국인은 맞음? 한 명 머리 노랗던데?
↳염색한 거 아님?
↳탈 써서 국적은 모름. 근데 한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거 보면 일단 한국에 살고 있는 건 맞을 듯
[이거 봄?]
[jpg]
[일본에서 양반탈이랑 각시탈 팬클럽 만들어짐]
↳일본에 와달라고 제사를 지네네
↳이왜진?
↳일본은 한국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우욱
↳부끄러운 자화상
↳두유 노우 양반탈? 두유 노우 각시탈?
↳벌써 두유 노우 시리즈에 들어갔누ㅋㅋ
[뭐임?]
[얘네 왜 트리오 됨?]
↳ㅅㅂ말뚝이탈ㅋㅋㅋㅋㅋ
↳한 명 더 늘었네ㅋㅋ이번엔 말뚝이탈이냨ㅋㅋ
↳왜 백정탈 아님? 왜 이매탈 아님? 왜 선비탈 아님? 왜 초랭이탈 아님?
↳ㄹㅇ하회탈들 사이에 봉산탈이 난입하네
↳넌씨눈 새끼
↳ㄴㄴ양반이랑 각시, 말 끌어주는 하인까지. 완벽하잖아
↳부정부패 고발하는 게 아니라?
↳귀양 가는 거 끌어주는 포졸이었고요
↳엌ㅋㅋㅋ
↳근데 어째 갈수록 떡대가 커짐? 각시탈보다 1.5 배는 더 있어 보이는데?
↳ㄹㅇ한 대 치면 머리 터질 듯ㄷㄷ
↳1 게이트 1 각성자 할당제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걱정했더니 오히려 증식을 했네 ㅋㅋㅋ
───────────────
# < 외전. 지구의 종말(7) >
‘나와라.’
“크으, 이거지.”
- 이거야?
- 이거야!
“역시 두리쉬마님이십니다.”
두리쉬마를 지구에 떨어트리는 것은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비슷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본바탕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긴 세월을 살아온 타이탄의 본바탕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기기 때문이다.
“어떠셨습니까?”
“별로였다.”
“약해 빠졌더군.”
프로니우스의 권능으로 열린 만큼, 원한다면 언제든지 닫을 수 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어중간한 병력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나올 것이다.
신들이 나서면 억지로 균열을 벌려놓을 수는 있겠지만 프로니우스는 두리쉬마마저 손도 제대로 못쓰고 당한 강자다.
어둠의 비호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만큼 비호를 받고 있으니 김우진 본인과 비슷한 강자로 여기고
대응하는 게 옳다.
“불안감 조성?”
“아마도. 당시의 나를 대입해보자면 나는 신들을 결코 쉽게 죽일 마음이 없었다. 내가 받은 괴로움과 고통을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싶었으니까.”
“그게 적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까?”
“복수라는 것에 한 번 미치면 이성적인 생각을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프로니우스의 경우, 그렇게 시간을 줘도
이길 자신이 있는 거겠지.”
“저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내 힘을 모두 흡수하기 전에는 네가 필승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까?”
“모른다는 거다. 놈은 과거의 나 이상의 괴물이 되었지만 그 한계가 어딘지 모르니까. 너도 마찬가지고.”
“유의하도록 하죠.”
“나쁘지 않았다.”
“별 다른 트러블은 없었습니까?”
“있었지만 없게 만들었다.”
“알만하군요. 그래도 두리쉬마님을 믿습니다만, 살살 부탁드립니다.”
“더 문제 날 것도 없다. 다 해결 했으니. 그런데 난 왜 이걸 주고 넌 그걸 먹지?”
“모히또는 저번에 드셨잖습니까. 새로운 거 먹어보라고 만들어 드린 거죠.”
“그게 더 맛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만들어드려요?”
“아니, 그것도 별로긴 하다. 보다 독한 놈으로 줘라.”
“B-52 를 만들어드리죠.”
“여기 있습니다.”
타이탄은 공들여 제조한 폭격기의 아름다운 단층과 그 위의 불꽃을 감상하지도 않고 그대로 원샷을 때렸다.
“나쁘지 않군.”
그리고 처음으로 거인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강민식한테 독을 구해봐?’
* * *
송파구에 열린 세 번의 게이트.
처음에는 송파구, 그 다음은 강남과 강동, 광진. 그 다음은 서울, 그리고 경기도 전역이었다.
아직 경기도권의 이동은 크지 않지만 경기 북부의 인원들은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갔고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 아예
지방까지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깔끔한 방법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거주지나 직장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김해에도 게이트가 있어
충청도와 전라도 쪽으로 몰리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타국의 각성자들은 모두 얼굴을 드러내고 각국의 정부와, 세계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의 각성자들만이 탈이라는 익명성에 몸을 기대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겁니까?”
“시민들은 각성자들이 언제 갑자기 사라질지, 혹여 익명성에 기대어 칼날을 반대로 돌리는 게 아닐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당당히 얼굴을 밝히고 정부에 협조하십시오! 시민들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공화당 김민석 의원은 탈 아래 정체를 숨기고 막무가내로 활동하는 각성자들에 대해···.】
【“각성자들은 인류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정부와, 세계와 협조해야 합니다. 힘을 가졌다면 그만한
책임이 따릅니다. 어찌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ㅂㅅ들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네
↳근데 맞말 아님?
↳ㄹㅇㅋㅋ언제 수틀린다고 이쪽으로 무기 돌릴지 누가 암? 그러려고 탈 쓴 걸 수도 있는데
↳ㅂㅅ들 많네. 저분들이 안 나섰으면 니들은 그전에 다 뒤졌어
↳하지만 살았쥬. 살아 있으니 뭐라도 해야지.
↳그게 분조장이냐 ㅅㅂㅋㅋㅋ
↳막말로 쟤들이 다 때려죽이면 나라 개판나는 거 아님?
↳그럴 의도가 있으면 진즉에 했겠지
↳사람 마음이란 걸 어떻게 확신함?
↳양반탈, 각시탈, 말뚝이탈 탈 벗기 운동(1/100000)
↳가만히 냅둬라 좀ㅡㅡ가만히 있다가도 좆같아서 한국 뜨겠다
↳ㄹㅇ생각이란 게 없는 놈들인가
이렇게.
공화당이고 민주당이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용사들의 탈을 벗기려고 한다. 신문과 뉴스는 그들의 발언을 연일
옮겨 적으며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다.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탈 아래 정체를 숨긴 양반탈, 각시탈, 말뚝이탈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그들이 어떤 마음을 풀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게 없었다.
“뭐냐.”
“제가 좋은 해결책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혀를 뽑아버리는 것보다 좋은 해결책은 죽이는 것뿐인데?”
“지구에서는 그렇게 안 합니다. 자고로 국회의원은 정치적으로 죽여야지요.”
“쉽게 말해라.”
“방금 네 번째 카운트다운이 떴습니다.”
어차피 한국의 화력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힌다. 게이트의 위치를 알고 군대를 미리 대기시켜 놓는다면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다. 굳이 당장 용사들이 필요하지는 않는 거다.
다만, 용사들이 필요 없는 것과 진짜 용사들이 없는 건 다르다.
“너희들도 전부.”
“예!”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여론이 악화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 * *
[실화냐?]
[양반탈 인도에 떴다. 뭐임?]
↳갑분인도?
↳뭐임?
↳ㅅㅂ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 같아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 ㅋㅋ
↳매국노새끼네
↳매국노ㅇㅈㄹ 열심히 싸워준 사람들한테 ㅈㄹ할때는 언제고
↳와 이거 ㄹㅇ이냐?
[각시탈도 등장]
[남아공에 떴다 ㅅㅂ 이거 맞냐?]
↳와 설마 다 탈주한 거임? 그거 조금 뭐라고 했다고?
↳그거 조금?
↳아예 묻을 기세로 정부고 언론이고 다 쌍으로 지랄 해놓고 이제와서 그거 조금? 개역겹네
↳국회의원 몇 명이 했지. 그게 어떻게 정부임
↳정부가 허락 안하면 대놓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음? 너튜브고 커뮤고 다 같이 물어뜯더만
↳설마 말뚝이탈까지 간 건 아니겠지?
↳ㄹㅇ제발 하나만이라도 남아주라
↳우리가 미안해
↳ㅅㅂ말뚝이탈 뉴질랜드에 떴다...
↳영상 보고 옴. 여전히 존나 호쾌하네. 근데 왜 한국 아님 ㅅㅂ
↳우리 ㅈ된 거임?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양반탈, 각시탈, 말뚝이탈 돌아오기 서명운동(1/50000000)
↳꽃이 지고 나서야 보인 걸 알았습니다...(2/50000000)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3/50000000)
* * *
“절대소장신님. 큰일 났습니다.”
“응?”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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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지구의 종말(8) >
두리쉬마가 패드를 내려 커뮤니티를 살폈다. 그에게 호의적인 글과 댓글들을 살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단순히 다른 나라에서 시작하는 게 효과가 있냐는 두리쉬마의 물음에 태블릿을 건네준 덕분이었다.
“그래, 지성체라면 고마운 것에는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이 몸을 당연하게 여기다니.”
물론.
콰직-
* * *
박상준이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양반탈을 썼다.
“정말 그런 이유입니까?”
“나만 맞을 순 없지···. 자고로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고 했다.”
“슬픔이 아니라요?”
“고통을 슬픔으로 승화시켰지.”
“순순히 협조할 수도 있잖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마음대로 하세요.”
다섯이 있으면 다섯 모두가 대장이 되려고 하는 게 용사니까. 용사들 모두 자신이 특별하다는 자각이 있다.
“가자.”
박상준이 혀를 찼다.
마법을 이용해서 기척과 모습, 흔적을 숨기고 바다를 질주하며 달려가니 호주까지는 금방이었다.
“늦었군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주황빛 머리카락, 푸른 눈, 그리고 함께 어우러지는 새하얀 피부. 용사들의 만남을 주도한
미국의 용사, 카일리 로퍼였다.
“문제 있습니까?”
“서로 간에 대화를 하자고 나온 자리에 가면을 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나?”
“그럼 그쪽도 쓰시면 됩니다.”
“뭐라고?”
“저희는 얼굴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사생활을 빼앗기고 싶지 않거든요. 저희가 가면을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벗길 생각을 하지 말고 다 함께 쓰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는 우리밖에 없어.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제 철칙이라.”
“서로 견제하는 건 거기까지 하죠. 가면을 쓰던 말던 우리는 지구를 지켜야 하고, 종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협력해야죠.”
“니콜라 뒤리스. 위대한 프랑스고 메르데이나를 구해 영웅이 되었다. 특별한 권능은 딱히 없다. 검을 쓰는
기사다.”
“브루노 모라. 브라질 상파울로 출신이고 상파울로 FC 의 열렬한 팬이지. 카로스라는 차원을 구했고.”
“보시다시피 마법사.”
“저는 그냥 박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국인입니다. 델라임이라는 차원을 구했고 창과 번개를 다룹니다.”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건가요?”
“정체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다니까요?”
“킬리언. 미국인이고 아른이라는 차원을 구했다. 특기는 강체술이다.”
“···미국인?”
“미국인이 왜 한국에서?”
용사들이 의문을 표했으나 킬리언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앉았다. 카일리의 시선이 각시탈에 꽂혔다.
“내 차례인가.”
“큭···!”
“이게 무슨!”
“뭐하는 짓이에요!”
그가 선언했다.
“뒤지기 싫으면.”
* * *
“저는 지금의 판이 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지구의 평화가. 그래서 프로니우스가 지구에 종말을 일으켰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용사들이 그랬고, 지구를 중심으로 집행자들을 이용해 감시망을 형성한 것이 그렇다.
아무리 신이라고 할지라도 전체적인 평균이 비슷하다면 공간 마법에 대한 권능은 결코 그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김우진이 잔을 건넸다.
절대신이라고 불리는 게 오글거려 싫어할 뿐, 김우진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보고 신이 되라고?”
“어둠의 사도와 맞서려면 빛의 사도가 되어야죠.”
“나는 이미 한 번 거절했는데. 그 이후에는 소식이 없어.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 * *
“공간 권능이었습니다.”
김우진은 영역의 방어를 명령했고 신들은 흩어져 있었다. 프로니우스는 그 빈틈을 노렸다.
아무리 퍼져 있다고 해도 신들이고 백신전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락하고 도움을 줄 수단은 당연히 있었다.
아니, 30 초 만에.
그럼 그 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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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지구의 종말(9) >
“···뭐라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돌아버린 건가요?”
용사들이 발끈했다.
21 세기 정보화 시대다.
두리쉬마가 턱을 긁적였다.
“나를 이겨봐라.”
─!
─!
* * *
“···말도 안 돼.”
“···미친 괴물 같으니.”
“와, 진짜 세네. 형님으로 모셔도 될까요?”
카일리 로퍼의 권능은 두리쉬마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해도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
브루노 모라의 마법들은 치명타는 아니었으나 두리쉬마에게 충분한 타격을 주었으며.
니콜라 뒤리스의 검은 그 빈틈을 찌르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니면.
“내게 복종하거나.”
“···대체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종말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거라면 서로 잘 협력해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네놈들이 서로 이권을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면 내가 귀찮아진다. 이게 깔끔하다.”
“······.”
“자, 선택해라.”
첫 번째냐, 두 번째냐.
* * *
어떻게 운동을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냐는 킬리언의 물음에 두리쉬마는 타고 났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도 가자.”
“예!”
마지막 용사들이 떠났다. 마법과 권능으로 복구된 사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다.
* * *
하지만 신들이 불안해한다고 경계 태세를 줄이고 다시 신들을 백신전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프로니우스가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명색이 신이라는 것들이, 태초부터 우주를 지배해왔다는 것들이 신 하나가 죽었다고 지레 겁을 먹어? 그렇다면
이제 종말을 막지 않을 거냐?”
“······.”
“한심한 것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심한 것들은 아니다. 일단은 그의 말대로 태초부터 우주를 지배해온 지배자들이니까.
단지, 해답이 없는 함정에 서서 무의미한 희생을 하기 싫을 뿐이다. 적절한 광명을 보여준다면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도 않을 거다.
“방법은 있다.”
“그러니까···.”
“오.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알베니우스의 공간 권능은 백신전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새롭게 신이 됐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역시 절대신님이십니다!”
* * *
대회의가 끝났다.
“넌 안 가냐?”
“사기네요.”
“난 애초에 당장 된다고 한 적이 없어.”
“···지금 몇 분 걸리는데요?”
“지구에서 연옥까지 2 분.”
“···생각보다 되게 빠르네요? 이제 막 신이 되셨는데 그 거리를 2 분만에 끝내요?”
신들의 질긴 추격을 모두 벗겨내고 도망칠 정도면 공간 권능에 관해서는 거의 세계관 원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단지, 아직 제대로 된 신의 힘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야.”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세상에 공간 권능에 관련해서 알베니우스를 가르칠 만한 자들이 있었나?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으로?
* * *
찰칵-
스톱워치가 멈춘다.
- 실패. 다시.
- 다시!
알베니우스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대자로 누웠다. 쥐어짜다시피한 드래곤 하트에는 더 이상, 어떠한 기운도 남이
있지 않았다.
- 못하는 건 없어!
- 없어!
- 안 하는 거야!
- 안 하는 거야!
찰싹, 릴리의 날개가 알베니우스의 이마를 두드렸다. 나르가 그의 옷을 물고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 빨리!
- 빨리!
- 먹어.
릴리가 영약 하나를 건넸다. 동 난 드래곤 하트를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하지만 사막에 단비 정도는 되리라.
“김우진 같은 놈들.”
- 칭찬 고마워!
- 나도 소장 같아? 헤헤.
“···말을 말자.”
하지만 그 장소가 두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연옥이라면 이야기는 달리진다. 각각 수십의 신들을 섭취한 그들이
가진 신력은 거의 폭거에 가까운 수준이다.
강제로 알베니우스의 기운을 일그러트리고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을 피해 권능을 사용하려면 엄청난 정신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방대한 우주의 기운은 기본 값이고.
“···그래, 다시 해보자.”
때문에 알베니우스는 복수를 잊었다. 증오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거짓이지만 거의 흐릿해졌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막아!
- 막아!
───────────────
# < 외전. 지구의 종말(10) >
지구는 평화롭다.
게이트와 괴물이라는 재앙이 터지긴 했지만 지구의 인류에게는 현대 군대와 각성자라는 비빌 언덕이 있었다.
게이트는 군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각성자들에 의해 빠르게 정리되었으며 첫 게이트의 피해를 제외하고 인류가
얻은 피해는 생각보다 적었다.
슬픔을 떠나보내고 상황이 안정되자 인류는 미지에 대한 공포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으로 눈을 돌렸다.
[신재생에너지]
[만화 같은데 보면 막 괴물 사체가 새로운 자원이 되고 그러는데 현실은 그런 거 없음?]
↳없음
↳왜?
↳죽으면 사체가 남긴 하는데 독기로 가득해서 어디 써먹질 못한다더라.
↳독은 만들 수 있겠네
↳왜 마정석 없음?
↳대신 독으로 황폐화된 대지를 드리겠습니다!
↳아 필요 없다고ㅡㅡ
[각성자 티어 정리]
[어디까지나 작성자 임의대로 나눈 것이니 ㅈㄹㄴㄴ
*2 티어
카일리 로퍼(미국), 브루노 모라(브라질), 니콜라 뒤리스(프랑스)
*1 티어
양반탈(한국), 각시탈(한국)
*********************************************************넘사
*초월티어
말뚝이탈(한국)
반박시 매국노]
↳ㅉㅉ한국 상대로 같잖은 짓 한 새끼들 빨아주는 꼬라지하고는. 한국 상대로 기 싸움해서 사람들 기강 잡으려고
한 새끼들을 왜 빨아줌?
↳첫댓 조졌네
↳어휴
↳그럼 다 쫓아내고 괴물한테 뒤져야 함?
↳ㅂㅅ
↳ㅋㅋㅋㅋㅋㅋㅁㅊ국뽕 거하게 들이 마시네
↳국뽕 빼고 말뚝이탈은 ㅇㅈ
↳ㄹㅇ말뚝이탈은 확실히 클라스가 다른 것 같긴 하더라
↳각시탈이 양반탈보다 1.5 배 정도 덩치가 큰데 말뚝이탈이 각시탈보다 2 배는 큰 거 같음
↳거의 고릴라ㄷㄷ
[이독제독]
[파화 바이오에서 마물의 사체를 연구해 마물에게 통하는 독극물을 만들겠다고 1 천억 투자함]
↳이독제독ㄷㄷ
↳너의 독으로 너를 죽여주겠다!
↳과연 될까?
↳되면 대박이긴 할 듯
↳가스 가스 가스!
↳미국은 이미 하고 있다는 듯
[각성자들 근황]
[근데 각성자는 더 안 나오는 거임? 말뚝이탈이 추가된 걸 보면 킹능성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각성자임
↳ㅈㄹㄴ
↳상태창! 상태창! 상태창!
↳양반탈보다 강한 각시탈, 각시탈 보다 강한 말뚝이탈. 어쩌면 각성은 늦게 할수록 더 강한 걸지도?
↳그래서 내가 아직 각성을 안 했구나
↳각성을 안 했구나 X 각성을 못 하는 구나 O
【각성자들은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이들이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생겨났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들의 수준은 저희가 상상할 수 없는 이상의 것입니다. 그런 게 하루아침에 그냥 뚝
떨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전제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존재했고 단지 기회가 되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존재를 드러낸···.】
“지구 같이 마력이 없다시피한 차원에서 마나를 다룰 능력자가 애초부터 있었을 거라고? 대가리에 똥만 찼군.”
삑-
“말도 안 되는 망상이군.”
삑-
‘프로니우스. 대체 무슨 꿍꿍이냐.’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프로니우스는 간을 보고 있다.
다만, 그것 때문에 김우진이 제대로 빡쳤다. 두리쉬마가 보기에 좋은 한 수라기 보다는 오히려 잠자는 사자의
수염을 뽑은 꼴이었다.
어쩌면 김우진과 신들에게 분노를 심어주는 것 자체가, 너희들도 그렇게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을 수 있다.
“두리쉬마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자.”
“······.”
하지만 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진득한 불길함과 섬뜩함이 은은하게 새어나온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신이 아니기에 업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집행자 이상으로 강하지. 일반적인
종말 따위는 우습겠어.”
프로니우스가 손을 뻗었다.
“널 그냥 보내준 건 내 실책이다. 동족을 잊고 신들에게 굴복한 머저리가 다시 신들에게 복종하는 건 당연한 건데.
지금이라도 되돌려야겠다.”
망치를 휘둘렀다.
─────!
거대한 반탄력이 두리쉬마를 덮친다. 절로 신음이 튀어나오지만 덕분에 잠깐이나마 인력을 끊어낸다.
다급하게 등을 돌렸다.
프로니우스가 게이트 사이로 한 걸음, 내딛었다. 차원 간의 방벽이 사라지자 감춰져 있던 괴물의 기세가 드러났다.
─!
손아귀가 찢어진 두리쉬마가 주먹질을 했다. 허나 가볍게 붙잡힌 주먹은 악력에 으스러졌다. 그가 신음을
내뱉었다.
“투지는 인정하지. 과연 타이탄이다. 허나, 평화에 찌들어 복수를 잊어버리고 신들과 타협하고 굴복한 시점에서
넌 쓰레기에 불과하다.”
프로니우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때였다.
─────!
대놓고 게이트 열고, 대놓고 지구에 발을 들어와 두리쉬마를 잡으려고 해놓고 무사히 갈 줄 알았어?
김우진이 질주했다.
* * *
사실 찾아도 문제다. 종말 차원에서 지구까지 마물들을 그대로 배송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본거지를 옮기는 것쯤은
손쉬운 일일 테니.
“음, 알베니우스님은···.”
그때였다.
─!
“드디어 해냈다!”
더 없이 창백하고 퀭한 폐인 하나를.
“김우진 어딨어! 김우진 나와! 내가 해냈다, 개자식아! 30 초도 아니고 무려 20 초! 20 초를 끊었다고!”
알베니우스가 포효했다.
“···와.”
율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이게 되네요?”
역시 김우진은 틀린 말은 하지 않는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1) >
운이 좋았다.
좋은 기회였다.
가장 먼저 달라붙어 있는 두리쉬마와 프로니우스를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게이트와 프로니우스 사이를 점했다.
불꽃이 외부의 영향으로 기이하게 굴절했다. 그러나 빠르게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
프로니우스의 권능이 강화된다. 제자리를 찾아갔던 불꽃이 다시 흔들리지만 이미 김우진은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
불꽃이 비늘을 불태운다. 프로니우스가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
──!
코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불꽃을 밀어낸다. 김우진이 마력을 뚫고 다시 전진하나 그 순간, 분위기가
뒤바뀐다.
새하얀 마나가 시커멓게 돌변한다. 불길한 마기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인의 머리와 눈을 검게 물들인다.
─!
“그래.”
“어쩐지 어둠의 사도치고는 더럽게 약하다 했어. 날 상대로 힘을 숨길 여유가 있었다는 거지?”
“없으니까 꺼낸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이제와서 약자 코스프레 하지 마. 신도 죽인 새끼가.”
프로니우스는 대답대신 다시 한 번 마력을 쏘아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브레스가 김우진을 덮쳤다.
콰득, 검이 숨결을 가른다. 양 옆으로 흩어지며 마기가 폭발한다. 그 사이로 김우진이 다시 질주한다.
“역시 너와는 지금 만나선 안 되었다. 우리의 전투는 지금이 아니야. 기다려라. 내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웃긴 새끼네. 누가 도망치게 놔둘 줄 알고?”
김우진이 공간을 비튼다. 차원룡들에 비하면 못할지언정, 그 또한 공간의 권능을 가진 신을 삼킨 전적이 있었다.
최선은 아니지만 적어도 열린 균열을 비틀어 방해할 수준은 되었다.
균열이 순식간에 닫혔다. 하지만 프로니우스는 코웃음치며 다시 균열을 만들었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 수백 개.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나는 균열들은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없애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
새하얀 백염이 모든 게이트를 뒤덮었다.
“두리쉬마님, 괜찮으십니까?”
“···죽을 것 같다. 역시 괴물 같은 놈이다. 너무 강하군.”
“확실히 두리쉬마님이 당할 만 했습니다. 이전 주신들보다 더 강합니다.”
“어둠이 작정하고 키워낸 사도다. 대체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모르겠군.”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어둠이 힘을 부여했다고 해도 저 정도 수준이 하루아침에 될 리는 없다는 거다.”
“어둠이 두리쉬마님을 미끼로 이용했다는 겁니까?”
“···말이 이상하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다. 다만, 어둠이 아니라 프로니우스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고 나를
이용한 거겠지. 난 멍청하게 놈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고.”
“그러네요. 두리쉬마님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
“농담입니다.”
“···빌어먹을 놈.”
“일단 백신전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시죠 그리고···.”
[됐어요. 소장님.]
“됐다고? 뭐가?”
“···그래?”
“···갑자기 왜 웃는 거지?”
“판이 뒤집혔습니다.”
* * *
[송파구에서 화산 터짐]
[jpg]
↳욕하려고 들어왔는데 이왜진?
↳뭐임? 네이팜 터트림?
↳와 땅이 다 녹아내렸네. 저 불꽃 뭐냐
↳이게 송파구라고?
↳탈총사들 중에 누구 불 쓰는 놈 있냐?
↳괴물이 쓴 듯?
↳근데 여기 군사지역인데 어케 찍음?
↳내가 군사임
↳군사 기밀 유출 신고 ㅅㄱ
↳ㅅㅂ 이거 ㅁㅊ새끼네ㅋㅋㅋ
[뭔 일이냐]
[성동구 사는데 송파구에서 불기둥 올라오는 거 여기까지 보임. 갑자기 날이 밝아져서 깜짝 놀람]
↳불기둥?
↳ㅇㅇ하얀 불기둥이었음
↳왜 청색아님? 덜 뜨겁네
↳근데 네이팜 터트린다고 성동구에서 보일 정도로 불기둥이 올라옴?
↳그러게ㄷㄷ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이러다가 율리아랑 같이 게임도 하겠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구의 종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당사자가 게임 폐인이 되는 건 곤란하다.
가볍게 식사를 마쳤다. 신들과의 동석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흡입한 두 용사는
잠시 나가 있으라는 김우진의 말에 그대로 사라졌다.
아무리 프로니우스가 강하다고 한들, 20 초를 버티지 못할 무능한 놈들은 없다. 그들은 신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어차피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뒤가 없다. 신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따로 없나?”
“지구의 종말만 잘 막아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지구를 미끼로 이용해서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르니까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이해했다. 걱정 마라. 놈이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내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
“믿겠습니다.”
“아. 미끼라고 하셔서 그런가, 방금 기발한 생각이 하나 났어요.”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뭔데?”
“굳이 기다릴 것 없이 함정을 파는 거요. 이쪽에서 미끼를 던지는 거죠.”
“함정?”
“함정을 어떻게 판다는 거지?”
“프로니우스가 저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차원과 공간의 권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저희한테도 이제 알베니우스님이라는 동등한, 동등하지 못해도 적어도 턱 밑까지 쫒아간 존재가
있잖아요?”
“최소한의 수비 병력을 제외하고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종말 차원을 순회하듯 쓸어버리는 거예요.”
프로니우스는 알베니우스가 자신의 턱 밑가지 쫓아왔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알베니우스는 숨겨진 비수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몇 가지 손만 보면 확실한 한 수가 되겠어.
프로니우스가 특별할 뿐, 마물들은 결코 신들을 이길 수 없다. 어쩌다 신에 준하는 마물이 한두 마리씩 나오긴
했지만 그뿐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간다.”
* * *
차원은 언제나 탄생하고 멸망하기를 반복한다. 신들은 용사라는 대행자를 통해 차원의 수명을 늘리고자 하지만
모든 것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지간한 차원에서도 국가 단위의 군대가 한 번 모이면 만은 기본이다. 하지만 그게 백신전이 약하다는 건 아니다.
“없네요.”
“텅 비었습니다.”
“절대소장신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모두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간 것이지요. 역시 절대소장신님이십니다.”
누가 봐도 이상했고 수상했다.
“네 예상대로 되고 있는 것 같은데.”
“물지 않고는 못 베기는 달콤한 미끼잖아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치지직-
[마물···습···! 대···규모···!]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못하고 통신이 끊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신전과의 직통 통신구였으니.
“드디어 왔네요.”
“알베니우스님.”
“그래.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와서 20 초는 무리지만 1 분 안에 끊어보지.”
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차원 전체가 일그러졌다.
“···이건.”
“온다.”
순간, 균열이 벌어졌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샐 수도 없이 많은 게이트들이 차원 전체를 뒤덮었다.
모두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 프로니우스가 보였다. 담담한 중얼거림이 모두의 귓가에 아른 거렸다.
“···맙소사.”
“저게 다 몇이지?”
“아직도 나옵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끝도 없이.
아카식 레코드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마력이 진해진다. 반대로 변방으로 갈수록 마기가 진해진다.
그리고 이곳은 변방 중에서도 변방. 어둠의 힘이 더없이 짙은, 마나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종말 차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마저 감안하고 보냈으니 상관없다. 내가 어둠의 사도가 된 게 언제인지 아느냐? 두리쉬마를 앞세우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복수를 곱씹었다.”
프로니우스는 두리쉬마에게도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깊숙이 숨었다. 그리고 조금씩 마물들을 빼돌려 모아왔다.
그게 몇 만 년이다.
“···이거 웃긴 놈이네.”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게 중요한 거다.
“백신전과 그들이 이룩한 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종착점에 다다르기
직전이다!”
“그런 건 날 이기고 난 다음에 해.”
그리고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종족 전체가 아무런 이유 없이 멸족
당했다면 그 분노가 어떨지 김우진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그의 시선이 알베니우스에 닿았다. 김우진의 방법은 프로니우스가 직접 오지 않았떠라면 충분히 먹혔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프로니우스가 존재하는 한, 알베니우스의 권능은 사용되지 못한다.
김우진이 검을 소환했다.
“들어와, 이 개새끼야.”
한 걸음, 내딛는다.
────!
그리고.
“공격하라!”
“절대신님을 도와라!”
“절대소장신님을 따라 악들을 토벌하라!”
신과 집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다급히 차원 밖으로 나가 균열을 관측했다. 우주를 가득 메운 균열들 틈으로 마물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준비!”
“준비!”
위이잉, 철컥-
“···이걸 진짜 쓰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나. 공격은 최선의 방어! 마력포는 최고의 방어 시설이라고 했잖은가!”
“아무리 그래도 마력포 백만 제작설이라니···. 그걸 제안하고, 결국 해낸 것도 놀라운데 그걸 쓰는 날이 올
줄이야.”
“말했잖나. 언젠가 반드시 쓸 날이 올 거라고. 그게 무기의 숙명이니.”
“충전!”
“충전!”
“장전!”
“장전!”
우우우웅-
마력포들이 주변의 신력을 빨아들이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리고 특제 제작된 포탄들이 장전되었다.
그리고.
“발포하라!”
“발포하라!”
──────────────!
그것은 단순히 마력포 여러 개가 발사된 게 아니었다. 모든 마력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로 결집되며
나아갔다.
──────────────!
미리 비워 놓은 게 다행이었다.
* * *
- 멍청이들.
- 멍청이들.
- 당연히.
- 응.
- 전부 죽여. 내 영역을 침범한 대가를.
- 전부 다!
나르가 거대한 백호가 되었다. 호랑이 정령체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 간다!
- 간다!
“든든하네.”
그게 신호였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3) >
절대자들의 전쟁이란 어떤 걸까.
“모두 도망쳐요!”
김우진을 따라 돌진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던 군단은 율리아의 지휘아래 일사분란하게 차원을 벗어났다.
“진짜 다시 봐도 대단하네요!”
난 저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율리아가 신음을 삼키며 바람을 일으킨다. 시원한 광풍이 열기를 밀어내며 아군을
보호한다.
“무슨 뜻이냐.”
“소장님 혼자서 충분히 상대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알베니우스님이 여기 있으니 저희는 그냥 백신전이나
연옥으로 복귀해서 그 마물들을 쓸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소장님한테 정신이 팔려 있는데 이럴 때는 권능을
쓰실 수 있지 않아요?”
“···그건.”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김우진이 없다면 어림도 없겠지만 김우진으로 인해 흔들리는 놈의 권능을 방해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잘 타네요.”
“장작이 좋으니까.”
* * *
정령이라는.
본래라면 불가능 하나 신들을 먹고 차원들을 합치며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 나무가 된 두 그루의 세계수이기에
일어난 이적.
그리고 왕은.
자신의 신하와 영지에서 한 없이 강해진다.
- 여긴!
- 내 영역이야!
10m 가 넘어가는 파란 비조가 숨결을 토해낸다.
번쩍-
번개가 뒤섞인 섬광이 일직선으로 마물들을 찢어발긴다. 하지만 물밀 듯이 밀려오는 막대한 물량에 구멍은
순식간에 메워진다.
- 가!
콰직!
파지지직-
허나 모든 마물들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철퍽, 땅에 떨어진 마물들이 형태를 갖춰가며 야성을 드러냈다.
크허허허헝!
- 죽여!
나르가 가장 먼저 흡수한 신은 얼음의 권능을 가진 신이었다. 백호들이 흩뿌리는 냉기에 마물들이 얼어붙었다. 그
채로 짐승들의 이빨에 산산히 부서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가지와 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 마물들을 꼬치처럼 꿰어버린다. 찢어버린다.
일련의 과정들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차원의 방벽을 넘어 들어오는 마물들이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순차적으로 갈려 나갔다.
“음.”
“하암.”
* * *
────!
“대기.”
“아직 대기다.”
파랗던 하늘이 마물들로 인해 새카맣게 물든다. 오래 전, 그의 차원에서 곡식들을 쓸어버렸던 황충들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지독하다.
“발포하라!”
데르카인이 소리쳤다.
─!
──!
─!
“더 쏴!”
“와아아아아!”
결국 데르카인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늘어가던 마력포는 백만 개에서 멈췄고 모조리 땅으로 보금
자리를 옮기는 작업이 개시되었다.
“돌격하라!”
* * *
“음.”
“···카운트가?”
“···배속으로 줄어들어?”
───────────────
# < 외전. 지구의 종말(14) >
이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평소보다 빠르게 떠오른 카운트다운은,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배속하며 순식간에 0 을 향해 다가가는
카운트다운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하늘 봄?]
[ㅅㅂ카운트 왜 배속해서 줄어듬?]
↳이왜진?
↳뭐임? 벌써 최종장임?
↳존나 불길한데
↳이번에도 막을 수 있겠지?
“있었다.”
“역시! 혹시 이번 사태에 대한 대안이라던가···.”
그게 무언가 불길한 징조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용사들, 사람들, 그리고 인터넷 상의 커뮤까지. 지구의
긴장도는 최고치에 도달했다.
얼마 전, 김우진이 말했다.
그래, 김우진은 이미 이 사태를 예견했다.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두리쉬마는 걱정 말라고 했었다. 지구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그 도마뱀 새끼를 찢어버리라고.
번쩍-
“두리쉬마님을 뵙습니다!”
“나를 아나?”
“예. 뵌 적이 있습니다.”
“나를?”
“종말 차원에서, 그리고 신들과의 전쟁 때, 먼 발치에서 나마 두리쉬마님의 활약을 지켜보았습니다.”
“종말 차원과 신들과의 전쟁에 있었다고? 그렇다면 너희들···.”
“예. 신들과의 전쟁에 손을 보탰던 용사들입니다. 저는 이들을 이끄는 대장, 테론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전부 은퇴한 것 아니었나?”
알베니우스가 끌어 모은 전직 용사들은 281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훈련을 명목으로 종말 차원에 풀어놨던
알베니우스가 제때 오지 못하는 덕분에 절반 가량이 굶어 죽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은 마물과 전투라면 신물이 나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율리아는 최대한 빠른 시간에 확실한 전력을 모으길 바랐고 과거 신들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더 없이
적격이었다.
김우진과 율리아는 그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고,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수락했다.
“전부 탈을 지급해라. 이 차원의 존재들이 아니니 지구의 특성상 얼굴을 가리는 게 좋다.”
“···이렇게 많이는 없습니다만?”
“그럼 구해와라, 당장.”
그리고.
00:00
쩌저저저적-
한 개도, 두 개도 아니었다.
수십 개도, 수백 개도 아니었다.
수천 개, 어쩌면 수만 개, 수십만 개.
“그래.”
프흐흐흐, 테론과 용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지옥과도 같은 곳에 비하면 이곳에는 아군이 넘쳐난다. 마나가
희박할지언정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직후.
* * *
인류는 깨달았다.
“···맙소사.”
“저걸 어떻게···.”
“도, 도망을···.”
“대체 어디로?”
“다 끝났어. 다 죽을 거야···.”
[근데 왜 전부 백정임?]
[탈 많은데 왜 다 백정임?]
↳그러게
↳양반탈이 플랙스 좀 했나보지
↳엌ㅋㅋㅋ
↳역시 양반이네
↳근데 백정은 노비 아니지 않음?
↳사소한 건 넘어가셈ㅡㅡ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괴물 때문에 집 무너졌는데 백정탈이 부위별로 해체쇼하고 감. 간신히 살았다. 질문 받는다
ps. 앞으로는 백정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기 먹을 때 더 감사하며 먹겠습니다]
↳더 마스터 백정
↳백정이라 역시 도축을 잘하네
↳탈값하네ㄷㄷ
↳근데 집 무너지고 뒤질 뻔했는데 커뮤를 함?
↳ㄹㅇㅁㅊ놈이네ㅋㅋㅋ
↳사방에서 괴물들이 날뛰는데 커뮤하는 니들은?
↳커뮤에 미친 종족
↳그것이 한국인이니까.
↳끄덕
[백정탈 남하함]
[제주도인데 백정탈들 대규모로 남쪽 바다로 넘어감. 일본이나 호주, 동남아 쪽으로 가는 듯?]
↳백정이 세상을 구한다
↳Jungle save the world
↳그거 정글 혐오야ㅡㅡ
[북쪽으로도 감]
[북한으로 가는 듯?]
↳그거 패턴임. 북한 넘어서 만주로 가더라
↳진짜 백정 만세네
↳동쪽으로도 갔음. 일본, 미국이나 남미 가는 듯
한국의 게이트들을 모조리 닫은 용사들은 박상준에게 각자의 지역을 할당받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류는 갑자기 한국에 대규모로 등장한 각성자 무리에 당황했으나 기뿐 당황이었다.
속절없이 밀리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는 간신히 기사회생했으며, 용사가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유럽과 북미, 남미는 간신히 숨 돌릴 틈을 얻었다.
[혼자 다른 탈 쓰고 나온 이유]
[같은 하회탈로 묶기에는 수준이 다르니까!]
↳ㄹㅇㅋㅋ
↳말뚝이>>>넘사벽>>>>기타 하회탈들
↳말뚝이탈 싸우는 거 보면 누가 괴수인지 모르겠더라. 망치로 괴수들 뚝배기 깨고 다니는데 존나 무서움
↳괴수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피 묻은 말뚝이탈을 본 일이 있는가
↳킬리만자로의 말뚝이탈ㄷㄷ
“좋군.”
지구를 멸망시켜야 할 마물들은 용사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두리쉬마는 빠르게 돌아오는 힘을 느꼈다.
“신위를 얻을 수 있다.”
“두 번의.”
망치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번의 패배는 없다.”
그것이 타이탄일지니.
─!
* * *
공간이 비틀어진다.
불꽃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튄다.
손과 발이 꺾이고.
뒤틀린 공간에 감각이 교란된다.
공간을 자유자제로 통제하는 차원룡의 권능. 그것이 어둠의 사도가 되면서 더욱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쌓아올린 억겁의 시간이 그대로 김우진의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절대신이 되었다.
─!
불꽃이 타오른다. 공간의 권능이 불꽃을 비튼다. 불꽃이 더 크고 뜨겁게 타오른다. 권능마저도 녹이고 태운다.
김우진이 성장하는 만큼, 불꽃도 성장했다. 그의 불꽃이 태우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
──!
김우진은 속도전에서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방향성이 다르다. 그의 불꽃은 뜨겁고 빠르지만, 그가
비행기라면 프로니우스는 제트기다.
하지만 기관총을 단 제트기와 핵미사일이 달린 비행기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앞으로 뻗어나간다.
파직, 공간의 권능이 손의 방향을 비튼다. 튀어 오른 불꽃이 권능을 녹이고 본래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
그럼에도 손은 전진한다. 기어코 프로니우스의 팔목을 낚아채고 검이 목표물을 놓치지 않게끔 해준다.
“···크윽!”
깊게 새겨지는 상흔, 하지만 한 번의 실수를 끝으로 차원룡은 기어코 김우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살아 있는 의미조차 없을 테니.
“넌 절대 날 잡을 수 없다, 김우진.”
그렇게 보였다.
파지지지직-
“그래도 동족이라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봤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여기서 죽는 게 맞아. 넌 동족이
아니라 미친 도마뱀이니까.”
그러니.
“갈 때 가더라도 그 목은 여기 놓고 떠나라.”
“나이스샷, 알베니우스님!”
“알베니우스!”
─────!
───────────────
# < 외전. 지구의 종말(15) >
“흐하하하하하···!”
“김우진.”
분노, 슬픔, 자괴감, 억울함, 증오, 허탈함까지. 무어라 콕 찝어서 형언할 수 없는 한이 놈의 눈에 맺혔다.
“프로니우스.”
“알베니우스.”
네가 아니었다면.
네가 아니었다면.
네가 아니었다면!
“동족의 한 또한 풀었을 거란 말이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아. 네 복수에는 내 미래가 없었으니까.”
“동족을 위한 복수였다!”
“나는 네 동족이 아닌가? 결코 나를 위한 복수는 아니었지.”
“동족을 위한 것이 너를 위한 것이었다. 동족이 없는 세상에 미련이라도 있다는 거냐!”
“다시 만났을 때도 그 소리를 했었지.”
“동족은 동족이고 나는 나다. 이미 죽은지 한참 된 동족을 따라가기 위해 자살하기도 싫고, 그 복수에 휘말려
아무 의미없이 미래를 잃어버리기도 싫다. 드래곤들이 언제부터 동족애, 가족애가 들끓었다고.”
“아무리 가족애가 부족하다고 한들 동족애는 있다. 해츨링 하나가 당하면 모든 성룡이 나서는 게 우리였다. 헌데
수백의 해츨링들까지 모두 죽었다.”
“그래서 이미 수만 년 전에 죽어버린 자들을 위해 이 세상 전체를 부수자고? 그러면 가만히 살고 있는 다른
종족들은? 그들은 무슨 죄가 있지?”
“왜 죄가 없지? 백신전의 치하 아래 복종하며 살고 있는 대죄가 있는데.”
“뭐라고?”
“왕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책임은 그 나라에 전체에 있다.”
김우진이 픽 웃었다.
“넌 그냥 남탓을 하고 싶은 거네.”
“내 복수의 정당함을 말하는 거다.”
“나도 정당해. 난 이 세상을 지킬 의무가 있어서 널 막을 의무도 있거든.”
이 무슨 궤변인가.
그 말을 끝으로.
프로니우스가 눈을 감았다.
“심란해 보이십니다?”
“심란하지.”
어둠의 사도가 죽었다고 한들 마물의 정신에 새겨진 파괴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물들은 여전히 살아 신과
집행자들을 공격했다.
율리아가 소리쳤다.
* * *
프라니우스와의 격전이 끝난 군단이 백신전으로 귀환했을 때, 백신전의 전투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력포로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마물들을 박멸하고 시작한 전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네.
그나마 두 전장 모두 김우진의 불꽃과 마력포라는, 마물들의 물량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단이 있어서 이 정도에
불과했다.
- 먹어! 다 먹어!
- 먹어!
마물들로 인해 균열이 일어난 차원의 방벽은 빠르게 수복 중이었고 산처럼 쌓인 마물들의 시체는 정령들이
달라붙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다.
- 소장!
- 소장!
- 막았어!
- 완벽하게!
“잘했어.”
두 세계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김우진이 두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부스스한 얼굴의 시에나가 나무
위에서 툭 떨어졌다.
“하암, 왔니?”
“···주무셨어요?”
“내가 나설 필요가 전혀 없어 보여서.”
“그래 보이긴 하네요.”
- 에헴.
- 에헴.
- 어디가?
- 아직 전투 중.
- 음. 아직 부족해.
“그러지 말고. 뿌리 적당히 내렸을 거 아니야? 나르랑 같이 방벽 강화해서 더 못 들어오게 만 해주면 돼. 어차피
프로니우스는 죽어서 더 이상 진행되지는 않을 거거든.”
- 그 정도라면.
- 가능해!
그리고 그 순간.
───────────────
# < 외전. 지구의 종말(16) >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피조물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마물 한 마리, 한 마리가 버거운 상대고 수천 만의 마물들은 재앙, 그
자체였다.
* * *
하지만 지구의 종말은 달랐다. 지구인에게 더 없이 친숙한 게임의 방식을 차용한 만큼 스테이지와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게이트는 한 곳에서만 열리는 게 아니었다. 50 개가 넘어가는 게이트들이 전 세계에 퍼져 다수의 전장을
형성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을 때, 격랑이 밀려왔다.
107 명의 용사들은 한 차원을 지키기 위해 있기에는 지나치게 많았지만 지구가 맡이한 특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부족해보일 지경이었다.
대체 프로니우스가 안배해 놓은 마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전히 균열들에서는 마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 응.
- 응.
김우진의 집 정원에 심어진 두 개의 가지가 뻗어나가 거목으로 성장했다. 마법과 권능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계수들의 분신은 금세 뿌리를 내려 지구의 핵에 도달했다.
이번 일로 무수히 많은 마물과 피들을 삼킨 지구의 수명이 대폭 늘어났으니. 지구의 종말은 적어도 꽤 오랫동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다.
“흠.”
[십년감수한 사람]
[그건 바로 오늘 아침에만 해도 괴물한테 잡아먹힐 뻔한 나. 하지만 정의의 말뚝이 가면이 구해줘서 삼.
ㄹㅇ십년 감수]
↳다행이네
↳괴물들 거의 다 정리 되가는 듯?
↳괴물 입 냄새 심함?
↳산속에 방치된 이동형 화장실 냄새 남. 똥 찌들고 썩은 내
↳존나 디테일 하네 ㅋㅋ
↳밥 먹는데 똥 이야기를 하네ㅡㅡ
[세계 구원 99%]
[미국, 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에 있는 모든 균열 닫혔다고 함. 아프리카도 거의 완료. 에티오피아
밀림쪽에 조금 남은 듯?]
↳ㄴㄴ에티오피아가 아니라 나이지리아임.
↳와, 그럼 진짜 끝이네?
↳ㅈㄹ이 새끼 구라임 나 지금 모나코인데 균열 있잖아 ㅅㅂ
↳균열이 있는데 커뮤를 한다?
↳믿겠다. 넌 한국인이 맞군
↳한국인이라면 그럴 수 있지
[??:크와아아아]
[존나 쌘 말뚝이탈이 울부지졌따! 다 주겄따!]
[동영상]
↳와 존나 살벌하네
↳망치질 한 방에 다 뚝배기가 깨지네
↳망치가 왜 커졌다 작아졌다 함? 무슨 원리임?
↳팜입자
↳개미망치임?
↳다른 각성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듯
↳근데 어떻게 한 방을 못 버티냐
↳버틸 줄 아는 괴물들은 두 방에 죽었기 때문에
↳ㅇㄱㄹㅇ
↳와 그걸 몰랐네
[101 명의 백정들]
[백정탈들도 ㄹㅇ미쳤는데? 조직적으로 연계하면서 괴물들 휩쓸고 다님.]
[동영상]
↳말뚝이탈이 힘으로 다부수고 다니면 얘네들은 빠르게 약점만 공략하는 느낌이네
↳ㅇㄱㄹㅇ픽 하니까 그냥 죽네 약점을 어케 알았지
↳쟤네 마물 퇴치의 스페셜리스트임. 쟤네들보다 상대 잘하는 놈 없음
↳그걸 남궁형이 어찌 아시오?
“···강민식이군.”
적당히 커뮤를 살피던 김우진이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시 기감을 느끼고 다시 떴다.
“상황 어때요?”
“거의 끝났다.”
완벽한 마무리 단계다. 지구에 열린 거의 모든 균열들은 닫혔고 튀어나온 마물들은 용사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다.
쿵-
그때 집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집이 요동치고 곧 현관이 열렸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말뚝이탈과 양반탈,
각시탈이 들어왔다.
“끝났다.”
“세계수들 덕분에 모든 균열이 완벽하게 닫혔고 침입해 들어온 마물들을 모조리 박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원 없이 마물들을 때려잡아 보는군.”
“그래 보이십니다.”
“다시 한 번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긴 했지. 이런식으로 싸워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더군.”
“두리쉬마님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난장판이 됐을 겁니다.”
그가 아니어도 막기는 막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은 피해로 막기는 힘들었을 거다.
“한 잔 더 있나?”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걸 보니 잘 끝난 모양이군.”
“예. 프로니우스는 죽었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연옥도, 백신전도, 지구도 모두 안전합니다.”
“다행이군.”
“그 차원룡은 어땠나?”
“마지막까지 복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습니다.”
“···그렇군.”
두리쉬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프로니우스는 과거의 두리쉬마였다. 두리쉬마는 그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누군가 그를 이해한다면, 오직 이 세상에 두리쉬마만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 바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혹시 죽은 신 있나?”
“없습니다.”
“아쉽군.”
“굳이 신이 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리고 김우진이 보기에 더 이상 프로니우스 같은 사태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그가 새로운 업보를 쌓거나 신들이
쌓아올린 업보가 또 있지 않는 이상.
“···없겠죠?”
“포이닉스나 가루다들의 생존자가 남아 있지 않는 이상은 그럴 거다. 어쩌면 생존자가 남았어도 나처럼 해탈했을
지도 모른다.”
“하긴, 그것들이 죽은지는 두리쉬마님보다도 한참 됐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저도 명심하겠습니다!”
‘그게 지군가?’
물론 그전에.
따악-
외전. 지구의 종말 完
───────────────
# < 외전. 율리아의 하루 >
인류는 갑자기 시작된 종말처럼, 그것이 갑자기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김우진의 선언에 그것이
종말이었음을, 그리고 끝났음을 인지했다.
[이거 나만 보임?]
[jpg]
[끝이 끝났다? 이개 뭔 개소리임?]
↳빡대가리임?
↳이 무슨 어머니 같은···.
↳end 가 끝이 아니라 종말이란 뜻도 있음
↳그럼 종말이 끝났다네.
↳···진짜 종말이었다고?
[ㄹㅇ]
[ㄹㅇ로 종말이었네? ㅁㅊ]
↳종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긴 함
↳ㄹㅇ세상 멸망하는 줄 알았음
↳전 세계에 괴물이 나타났는데 그게 종말이 아니면 뭐임
[이딴 게 종말?]
[내가 아는 종말은 이렇지 않았는데...]
↳니가 아는 종말은 어떤데
↳괴물들 막 나오고, 각성자들 등장하고, 세상 피폐해지고 나도 각성하는?
↳괴물들 막 나오고(나옴), 각성자들 등장하고(등장함), 세상 피폐해지고(원래 피폐함), 나도 각성하는(꿈깨)?
↳꿈깨ㅋㅋㅋ
↳왜! 나도 각성자 좀 되면 안 되냐! 나도 각성자 될 수도 있잖아! 그래 안 그래!
↳안 그래
↳되고 싶다고 말해!
↳되고 싶어!
↳응, 안 돼.
↳ㅅㅂ
↳ㅋㅋㅋㅋ이새끼들 잘 노네
↳근데 왜 원래 피폐한데ㅋㅋㅋ
↳세상은 아직 살만 하다고!
“흐음.”
커뮤를 살피던 율리아가 손을 펴고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구를 구하고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간 용사가
썼던 백정탈도 하나 같이 찍었다. 스마트폰으로 찍어 글 하나를 썼다.
[나는 각성자인데]
[난 각성자임.]
↳ㅈㄹㄴ
↳나는 신이다 임마
↳인증 없는 글은 뭐다?
↳먹이를 주지 마시오
↳요즘 이런 놈들이 많네ㅋㅋ
↳ㄹㅇ근데 인증하는 놈은 못 봄 ㅋㅋ
↳ㅈㄹ하네 진짜. 니가 각성자면 도게자 박고 명동 한복판에서 여장하고 돌아다닌다
[인증]
[jpg]
[ㅇㅇ인증함
도게자 박고 여장도 해라]
↳···?
↳포샵 아님?
↳방구석 ㅈ문가들 나와주세요
↳아닌 것 같은데?
↳주작이지ㅡㅡ 사람 손에서 어케 바람이 나옴
↳팩트)각성자면 나온다
↳ㅇㄱㄹㅇ?
↳근데 저 백정탈 찐아님?
↳백정탈이 한두 개인가
↳도게자 박아라
커뮤는 조작 증거를 찾겠다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희희낙락 웃다가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와, 백정 차이 끝내주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판 돌리고 계셨습니까?]
[그게 게임이죠.]
[네.]
“···뭐지?”
두리쉬마님의 이름이 나온 걸 보면 무언가가 습격을 당한 건 아니다. 아무래도 두리쉬마님이 강민식이 필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아쉬운데.”
“맛있네요.”
“비싼 거니까. 커뮤에 인증 샷 올린 거 너지.”
“그걸 벌써 보셨어요? 저한테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소장님도 커뮤 중독이네요.”
“온 커뮤에 다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와, 역시 인터넷.”
종말이 일어나고 용사들이 활약한 시점에서 그 정도의 일탈은 허용 범위였다. 율리아도 그걸 알기에 적당히
장난친 거고.
세이드는 여전히 글라크에서 잘 살고 있다. 이그라실의 여왕과 결혼하면서 가정과 새로운 고향이 생겼고 아르반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갈 때 선물 사가.”
“선물이요?”
“남의 집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서 구할 수 없는 것들 좀 몇 개 가져가려고요.”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거 가져가서 문명 망치지 마라.”
“에이, 당연하죠.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덜렁이.”
“저도 명색이 주신이거든요?”
“잘 먹었어요!”
“세이드한테 안부 전해줘.”
“네.”
“가볼까.”
* * *
용사 김우진에 의해 종말을 막았고, 절대신 김우진에 의해 마기가 완전히 정화되었지만 한 번 피폐해진 대지의
기운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드넓은 대지는 그야 말로 그림의 떡이었고 인류는 어떻게든 지기를 회복시키고자 했지만 대륙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감사합니다. 신께서 은혜를 내리지 않았다면 저희는 다시 어머니 나무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에요. 굳이 제가 아니어도 어머니 나무의 씨앗은 글라크에 돌아왔을 거예요.”
그것이 세계수들이 번식하는 방법이며 율리아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세계수의 씨앗을 단 하이엘프가 당도했을 거다.
“씨앗과 함께 영약들을 가져왔어요. 글라크의 사정상, 아무런 방비 없이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발아하면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세계수는 발아하면서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긴다. 그 한 차례의 폭풍을 견뎌내야지만 선순환이 시작된다.
“감사합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여왕님도 저한테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하지만 주신께 어찌···.”
“음, 너무 강요하는 것도 오히려 이상해지네요. 그럼 그냥 편하실대로 하세요.”
“예.”
씨앗은 대륙의 정중앙에 심어졌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대륙을 복구하기 위한 최적의 위치였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수림이 형성될 거고 나아가 대지 전역에 뿌리를 내릴 거다. 그리고 엘프들은 이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겠지.
“고맙다.”
“당연한 거를 가지고 뭘.”
세이드가 다가왔다.
“행복해 보이네.”
“나쁘지 않다.”
“나랑 아르반은 다 잊어버리고.”
“뭐냐, 그 허접한 멘트는?”
“아니, 그냥 적당히 행복한 걸 바랐는데 너무 행복해보여서.”
“뭐라고?”
“둘이 사랑을 속삭이는 걸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너와 김우진 놈이 본 거지, 내가 보여준 거냐?”
“선물 가져왔어.”
“선물?”
그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르-
“···미친. 이거 맞는 거냐?”
“맞아.”
- 끼잉
“···정령체가 벌써?”
“뭘 그렇게 놀라. 신이 개입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이게 당연하다고?”
“마음에 드세요?”
- 낑낑!
세이드의 눈이 커졌다.
“난 이 결혼 반대다!”
“뭐래,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우진 데려와! 이 개 같은 놈을 내 손으로···!”
“세이드가 질 것 같은데.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주신들 전부 그 집에 사니까 오버하지 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잘 들어라. 김우진은 늑대다. 그놈은 탐욕스러운···.”
“···뭐예요?”
“또 사고쳤다. 진짜 저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저는 오직 절대소장신님의 신앙을 퍼트리기 위한 충심과 믿음으로···.”
“닥쳐.”
“네! 명하신다면!”
───────────────
# < 외전. 광신도와 귀쟁이 그리고 요리사 >
디아네가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주신이자 김우진의 최측근이다 보니 백정탈들은 그녀가 언급한 교인들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 중 하나로 두었다.
“저는 절대소장신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가득한 절대소장신님의 신도들이 다치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용히 하라니까?”
“예!”
신도들은 대부분 무사했고 교세는 확장되었다. 일반적인 신이라면 무조건 좋아했을 최고의 결과였다.
“읍읍읍!”
“그런데 단순히 포교를 하지 말라고 하면 쟤는 분명히 이상한 꼼수를 쓸 거란 말이지.”
“지구로의 출입을 통제하실 생각이세요?”
“그래.”
“읍읍읍읍!”
“그건 너무하지 않아요?”
“아니, 쟤는 이 정도는 해야 돼.”
“으으으으읍!”
“그래, 말해 봐.”
“그건 저를 두 번, 스무 번, 이백 번, 이천 번 죽이시는 겁니다! 전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소장절대신님을 섬기며 이 지구에 오직 소장절대신님을 믿는 인간만 가득한 낙원을 건설···.”
“금지해야겠네요.”
“그렇지?”
“그렇다고 아예 그러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기한을 두는 게 어떨까요? 다 소장님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럼 한 달.”
* * *
“이건 옳지 않습니다.”
- 한심해.
- 한심!
차원, 연옥. 자기 집에서 세계수들과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던 시에나는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한숨을 쉬었다.
“차나 한 잔 하렴.”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제 뭐하려고?”
“모르겠습니다.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한 달 동안 뭘 해야할지.”
“굳이 지구에 얽맹리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다른 곳에서 절대소장신님을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아시다시피 피조물들에 대한 포교 또한 금지된
상태라.”
“거기에는 딱히 강제성이 없잖아?”
“강제성이 없다니요? 절대신님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할까.”
- 고향!
- 케이룸!
“아.”
“굳이?”
“저도 사과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베른을 섬기는 집행자에 불과했다한들, 그들을 핍박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훨씬 보기 좋네.”
개나 소나 전부 그 빌어먹을 베른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보다 훨씬.
시에나가 디아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첫 만남은 아니었다. 첫 만남은 별 일이 없었다.
두 번째는 ‘엘프가 말대꾸?’였고 가장 강렬했던 건 역시 그 다음 만남이었다.
“일단 가자.”
“그 섬으로 가십니까?”
“그래.”
베른이 엘프들을 학살하고 방치해두었던 차원 남쪽의 섬. 시에나는 신이 된 이후에 그곳에 결계를 쳐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죽은 영혼은 윤회한다. 그들이 새로운 삶에서는 지금과 같은 비극이 없기를 빌어주었다. 괜스레 차오르는
그리움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복수의 덧없음을 깨닫고 마음의 공허함, 사무치는 그리움이 채워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채워진다고?”
“복수의 덧없음을 알려주고, 공허함을 충만하게 채워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해주는 그 이름은 바로
절대소장신님입니다.”
“아니란다.”
시에나가 즉답했다.
“그건?”
“제가 태초부터 절대소장신께서 탄생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집필한 경전입니다.”
“···김우진은 태초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도 됩니다.”
“완전 사이비잖아!”
“절대소장신께서는 실제로 존재하시니 그것은 불경입니다. 하지만 시에나님이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첫 번째 구절부터 읽어드리겠습니다. 경전을 듣다 보면 경건함이, 그리고 신앙심이 생길 겁니다.”
“꺼져!”
“어디 가십니까!”
“어디로 가던 무슨 상관이야!”
“마저 들으셔야지요. 이제부터 재밌는 구간입니다!”
“지구, 지구로 가야해.”
* * *
“디아네는 점점 더 미쳐가는군. 김우진이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네. 그대로 뒀다면 지구의 인간들이 죄다
김우진을 섬기는 신도로 변했을 거네.”
“그게 나쁜 겁니까?”
“정정하지. 김우진을 맹목적으로 섬기는 광신도로 변했을 거네.”
“통신구군?”
“예. 스마트폰으로 보이게 해놓은 겁니다. 디아네한테 전화 좀 해봐야겠네요.”
“잘 생각했네. 제발 나한테는 신앙을 전파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김우진과 몇 십 년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이제와서 신으로 섬기라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그렇죠.”
“왜 그러십니까?”
“토가 나올 것 같아서 그렇네.”
“나도 그렇단다.”
“두 분이서 사귀어 보시는 건?”
“끔찍한 소리 말게! 누가 이런 귀쟁이랑!”
“누가 이런 난쟁이랑!”
───────────────
# < 외전. 소인과 거인 그리고 독인 >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나?”
“뉴욕쪽에 맛집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놈의 맛, 맛.”
“그놈의 마력포, 마력포랑 뭐가 다릅니까?”
“다르네. 난 더 이상 마력포를 입에 담지 않으니까.”
“마력 미사일이나, 마력포나.”
“엄연히 다르네!”
데르카인이 버럭 소리쳤으나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았다. 권능으로 소리를 차단한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원 랩실에서 노예처럼 살 생각은 없었다. 권능을 이용해 알맹이만 쏙 빼먹을 생각이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지.”
“오늘 강의가···.”
우주에 마력위성을 배치하고 지상으로 쏘아내는, 혹은 우주의 적들을 향해 쏘아내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이곳의 인간들은 태양에너지를 받는다고 하지만 태양이 아니라 아카식 레코드의 빛을 통해 에너지를
수급하면···.”
그 파괴력은 태양빛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한 위성으로 행성 위를 도배한다면 철벽의 요새가 된다.
인공지능은 정령으로 대체하고, 장갑이나 부품을 만드는 건 애초에 드워프들이 최고다. 설계는 그의 장기이며
과학이 부족한 부분들은 마법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상상만해도 좋군.”
───!
사람, 아니 신이었다.
* * *
“일단 진정하게.”
강민식이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더니 두리쉬마의 손을 이끌고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음습한 곳으로 향했다.
* * *
쿠웅-
“두리쉬마는 이미 와버렸고.”
“···아아.”
“강민식. 간이 크구나. 감히 도망을 가다니.”
“오랜만이네, 두리쉬마.”
“데르카인이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난 원래부터 여기 있었네. 강민식이 내게 온 거지.”
“너한테?”
“여기 있다.”
벌컥 벌컥-
───────────────
# < 외전. 파랑새와 호랑이의 밤(完) >
“얘들아, 잘자.”
- 잘자.
- 잘자.
- 가?
- 가자.
- 시끄러.
밝은 조명들, 북적이는 사람들. 밤이 되면 조용해지는 과거의 연옥과도 사람이 없어 조용한 지금의 연옥과도
다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 나도, 나도.
- 따라와.
- 응.
릴리와 나르가 허공을 유영했다. 소장은 인간들에게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사실 들킬 일은 없다. 마법적
능력이 없는 인간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쯤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우니까.
- 오늘은 뭐해?
- 구경.
첫 번째 목적지는 부평의 한 고급 펜트하우스였다.
- 어디 갔지?
- 몰라.
일곱 주신 중 하나인 독쟁이의 집이었으나 사람의 온기보다는 차가운 냉기가 느껴진다. 자리를 비운지 꽤 오래
되었다는 것을 릴리는 인지했다.
- 다른 곳으로.
- 응.
- 찾았다.
- 먹깨비.
- 또 먹어?
- 또 먹어?
- 구경?
“먹어볼래?”
- 응.
릴리와 나르가 핫도그를 한입씩 베어물었다. 팡 터지는 육즙과 육향, 그리고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소스가 썩
괜찮았다.
- 응.
- 응!
“음식이라는 게 반드시 비싸다고 맛있는 게 아니거다. 재료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걸 어떻게 맛있게 만드느냐는
요리사의 능력이지. 내가 마물들을 이용해 진미를 만드는 것처럼.”
“물론 대부분은 싼 만큼 딱 그 정도의 값어치를 하겠지만 이 세계에는 은근히 숨은 명인들이 많거든. 뛰어난
능력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능력이 아주···.”
- 말이 너무 많아.
- 맞아.
릴리와 나르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 가자.
- 이번에는 여기!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역시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독쟁이의 집과는 달랐다. 밑에서부터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연구실이 비교적 조용했다. 평소라면 이런 저런 기계를 돌리고 실험하면서 시끌벅적했어야 했는데.
- 뭐 먹어?
- 뭐야?
- 방금.
- 방금.
- 나 어려?
- 안 어려.
“어리지. 아직 백 년도 못 산 핏덩이들인데.”
- 릴리, 어른.
- 나르도 어른.
- 나도 먹어볼래.
- 나도.
“이걸? 안 되네.”
- 왜?
- 그런 게 어딨어!
- 어딨어!
- 그래도 한 방울!
- 한 방울!
- 가지 조금 잘라 줄게.
- 나도.
“···으음, 그렇다면야.”
푸우우웁-
그리고 뱉어냈다.
- 맛없어! 독이야!
- 으엑!
- 우릴 독살하려고!
- 맞아!
- 흥.
- 갈 거야!
- 이제 어디로?
- 음, 백신전으로!
연옥을 제외하고는 가장 우주의 힘이 풍부한 차원. 마물들의 침략이 있었을 때 모습을 드러냈던 마력포들은
다시금 지하로 사라져 있었다.
- 광신도!
- 광신도!
“세계수님들이군요. 오랜만입니다.”
- 쫓겨났다며?
- 났다며?
아니었다.
- 이상해.
- 도망가자.
짐승은 백신전에 없었다. 늘 종말 차원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갈망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 연옥으로 가자.
- 응.
- 활쟁이!
- 활쟁이!
- 입에 착착 감겨.
- 잘 감겨.
- 릴리, 그런 거 몰라.
- 나르도 그런 거 몰라.
- 몰라.
- 훨씬 맛있어.
- 맞아.
“훨씬? 아까 뭘 먹었니?”
- 난쟁이가 독 줬어.
- 난쟁이가 먹고 얼굴 빨개졌어.
“강민식으로 만든 술이 있다더니 그걸 먹은 모양이구나. 오랜만에 신났겠네.”
활쟁이가 픽 웃었다.
- 이상한 난쟁이.
- 더 이상한 활쟁이.
- 광신도 봤어.
- 또 이상한 거 전파해.
- 왜?
- 소장 자.
- 이상해. 안자도 되는데 매일 자.
“육체는 괜찮아도 정신적 피로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수면은 정신적 피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란다.”
- 몰라, 그런 거.
- 나도.
- 나 뛰어나?
- 나도 뛰어나. 에헴.
- ···돌아갈래.
- 나도.
“잘 가렴. 내일 또 오고.”
- 응.
- 응.
- 에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 걷어?
- 응. 걷어.
- 일어나!
- 잠꾸러기!
- 일어나.
- 맞아.
“···몇 시야?”
- 10 시 1 분!
- 1 초 지나서 이제 10 시 2 분!
“아직 더 자도 되잖아···.”
-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
- 잡아.
- ···나 먹혀?
나르가 울먹였다.
- 아니, 넌 호랑이야.
- 맞아, 난 호랑이야.
- 그리고 난 새야.
“아니, 넌 나무야.”
- ···그러네?
- 나도 나무야.
소장이 다시 눈을 감았다.
- 아이 같아. 어리광부려.
- 맞아.
포근하고 따스했다.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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