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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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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0. 소장 김우진 >

8 월 19 일. 맑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태양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다. 한 여름답지 않은 신선함이다.

간만에 푹 숙면을 취해 상쾌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분재를 다듬었다.

요새 분재가 자라나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잘 쳐주지 않으면 예쁘게 자라지를 않는다.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오후에는 감옥을 순찰했다. 딱히 특이사항은 없었다.

8 월 20 일. 흐림.

어제와 달리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는데 결국 쏟아지지는 않았다.

습기가 가득해 끈쩍한 불쾌감이 있다.

그래도 덕구가 달려와 꼬리를 흔드니 기분이 나아졌다. 귀여운 자식.

내일은 춘식이한테나 가볼까.

8 월 25 일. 비.

비가 내렸다.

오늘은 밀린 빨래를 했다. 습기가 가득차 있긴 하지만 말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하도 안 빨아서 제복에서 썩은 내가 났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다.

8 월 31 일. 맑음.

오늘은 해가 떴다.

오늘은 딱히 별 일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하루, 평소와 같은 평온한 일상.

아, 내일이면 이 생활도 이제 20 년째다. 어쩌다 보니 이 짓을 20 년이나 하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는데.

9 월 1 일. 맑음.
급하게 연락이 왔다.

내일 새로운 죄수가 온단다. 얼마만의 죄수지? 한동안 안 와서 좀 편했는데 다시 바빠지게 생겼다.

이왕이면 좀 쉬운 놈들로 왔으면 좋겠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뭐, 인간이라니까 좀 쉽겠지.

* * *

“이것도 다 썼나.”

탁-

김우진은 일기장을 덮어 책장에 넣어 놓았다. 책장에는 그가 간수생활을 하며 매일 매일 써내려온 일기들이


빼곡했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밖을 보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침인가. 또 다시 지겨운 하루의 시작, 업무의
시작이다.

옷장에서 제복을 꺼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그 위로 검은 코트를 덮는다.

모자를 쓰고 출근했다. 집무실로 들어가 앉아 있으니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들긴다.

“들어와.”
“충성,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깔끔한 정장에 새하얀 장갑을 착용한 간수가 경례했다.

“소지 음식 솜씨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아.”


“예.”

몬스터들로도 요리를 쳐 만들던 놈이라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식재료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간밤에 문제는?”
“없습니다. 죄수들의 상태도 괜찮고 특이사항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가보자.”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도관이 뒤를 따랐다.

계단을 한 층 내려가자 쭉 뻗은 복도가 보인다. 복도를 따라 방들이 자리했다. 저것들이 모두 감옥이다.

“앗, 오셨습니까?”

카트를 끌고 다니며 음식을 배급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소지라고 써진 형광 조끼를 입고 있었다.

“아침 맛있던데.”
“감사합니다. 주신 재료가 워낙 좋아서 그렇습니다.”
“저녁은?”
“저녁에는 파스타를 생각중입니다.”
“회가 먹고 싶은데.”
“아, 그럼 바꾸겠습니다!”
“일 봐.”
“예.”

소지가 배급 카트를 끌고 다음 층으로 사라졌다.

김우진은 천천히 복도를 따라 감옥들을 훑었다.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 하나하나가 모두 감옥이다.

일반적인 감옥이었다면 한 방에 죄수들을 대여섯명씩 넣고 독방이 따로 있겠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감옥이 아니다.

전원 독방. 특출 난 자들을 가두는 만큼, 감옥 또한 특출 나다.

순찰을 끝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김우진은 집무실로 돌아와 모자를 벗었다.

의자를 뒤로 재끼고 반쯤 누웠다. 집무실에 설치된 TV 에서 감옥의 모습들이 송출되고 있었다.

불필요한 일이지만 굳이 돌아다닌 건 그냥 습관이다.

하암, 밥을 먹고 반쯤 누워 있어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몇 시야?”
“10 시 51 분입니다. 정확히 두 시간 주무셨습니다. 죄수들은 정신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자리 그대로 서 있던 교도관이 대답했다.

“새로 들어온다는 죄수는?”


“11 시 정각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9 분 남았나.

“가지.”

쉴 틈도 없군. 다시 모자를 썼다.

1 층의 로비로 내려가자 간수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허례허식을 딱히 반기지는 않아 그대로 받아 넘겼다.

감옥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평소와는 다르지만 낯선 것은 아니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
날이면 언제나 이러니까.

10 시 57 분. 딱딱한 호송관들은 시간을 칼 같이 맞추니 도착하기까지는 아무리 못해도 3 분이 남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간수 하나가 불을 붙여 주었다.

후우-
담배 하나를 피고 나니 시간이 딱 되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옷으로 뒤덮인 호송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죄수를 호송해 왔습니다.”

죄수의 모습은 언제나 같다.

발과 다리에는 족쇄를,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귀를 막고 목을 옥죈다. 사슬로
전신을 동여매 오감과 움직임 자체를 봉쇄한다.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이곳에 오는 죄수들이 누군지 알면 당연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름, 강민식.”
“나이, 35.”
“종족, 인간.”
“성별, 남···.”

호송대장이 기계적으로 죄수의 신상을 줄줄이 읊었다.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김우진은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빼앗았다.

“내가 알아서 보지.”


“이번 죄수는 여타 다른 죄수들보다 사납고 주의가 필요합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좋아.”
“인계 확인서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교도관들이 죄수를 인계 받았다. 낡아 빠진 종이에 사인을 했다. 서류를 잘 갈무리한 호송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이만.”
“앞으로 죄수가 얼마나 더 들어올 것 같나?”
“죄수가 생겨나는 빈도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고, 짓지 않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달린 일인데
말입니다.”
“말이나 못하면.”

김우진이 손을 흔들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봤으면 좋겠네.”
“죄수가 많아지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한텐 좋은 일이야.”
“노력해보겠습니다.”

무표정하게 대꾸한 호송대장이 호송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상담실로 데리고 가.”


“예.”
죄수가 들어오면 늘 하는 일이다. 어떤놈인지 직접 확인하는 일.

상담실은 밀실이었다. 있는 거라곤 두 개의 의자, 그리고 책상 하나 뿐. 하지만 그와 반대로 무척이나 넓은 빈


공간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의자에 죄수를 앉히고 다른 의자에 앉아 소리를 차단하고 있는 귀마개를 빼고 재갈을 풀었다.

죄수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

눈이 마주쳤다. 의외로 놈은 침착했다.

“떨지 마. 일반적인 교도소에서는 항문 검사도 하지만 여기는 그런 건 안하니까.”

호송관에게 건네받았던 서류를 꺼냈다.

“강민식. 맞나?”
“···여긴 어디지?”
“감옥이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강민식. 맞나?”
“내가 왜 감옥에 있는 거지?”
“죄를 지었으니까. 강민식. 맞나?”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

짜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민식의 고개가 돌아갔다.

“난 딱 세 번만 참아. 묻는 말에나 대답해.”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누구였든, 어떤 짓을 했든 여기 온 이상, 죄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까 눈 깔고 조용히 묻는
말에나 대답해.”
“닥쳐!”

강민식이 버럭 소리쳤다.

“감히! 이 구속구만 없으면 내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놈이!”


“네 때는 이렇게 큰 모양이야.”
“지금 많이 여유 부려둬라.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네 목을 부러트려 버릴 테니까.”
“그럼 해 봐.”
“···뭐?”

김우진이 책상을 내던졌다. 의자를 끌어 강민식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해보라고.”
“이 새끼가···!”
“네가 어떤 차원을 구했는지, 네가 어느 차원 출신인지 나는 관심이 없어.”

그런 것보다는 스스로의 임기를 무사히 끝마치는 것을 더 소망한다.

“네가 왜 여기로 온 건지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넌 여기로 왔고 내 통제 하에 놓였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네가 사고를 치면 그건 내 잘못이 된다는


거야.”

관리자란 그런 직책이다. 그래서 피곤하고 귀찮다.

“상담실이 왜 이렇게 극한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지 알아?”

500 평이 넘어가는 거대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문 앞의 의자와 책상이 전부다.

“원래 목적이 이거거든.”

김우진이 서류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철컥-

강민식의 손목을 묶은 수갑을 풀었다.

“···무슨?”
“여기 들어오는 죄수들은 하나 같이 똑같아.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발악하지.”

족쇄가 풀렸다.

“잃어버린 옛 과거를 부르짖으면서 지금도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뭐, 이해는 해. 그래도 나름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한 전적이 하나씩은 다들 있을 테니.

영웅 취급 받다가 갑자기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니 누가 쉽게 받아들이겠어.”

몸을 묶은 사슬이 떨어졌다.

“근데 그게 여기서는 디폴트라는 걸 몰라. 애초에 그런 놈들을 가둘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도소라는 것도.”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었어!”
“그런 놈들에게 현실을 주입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알아?”

마지막으로 목을 채운 구속구를 풀었다. 강민식은 움직이지 않던 마나가 다시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는 거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인정할 때까지 패는 거지. 강제로 현실을 주입해주는 거지.”

그래서 상담실은 크고 넓다. 책상과 의자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언어의 대화가 아니라 몸의 대화를 추구하는
곳이기에.

“···죽고 싶어 환장했군.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 이야, 영화 좀 봤나 봐. 대사가 찰지네.”
김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성난 강민식의 눈빛에도 빙긋이 웃었다.

“근데 그거 알아? 난 너 같은 놈들을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 번 만나봤거든.”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곳은 연옥.”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

“그리고 나는 김우진이야.”

이곳의 소장이지.

“일단 덤벼. 너 같은 놈들을 교화시키는 게 내 업무니까.”


“이 개자식이!”

강민식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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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1. 갇히는 이유 >

김우진이 서류를 넘겼다.

“강민식. 지구 출신이라.”

톡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이 생활을 얼마나 했더라. 지구 출신은 꽤 오랜만이었다.

하물며 같은 한국 출신은 더욱 더.

“상담실에서 전부 알아보신 것 아니셨습니까?”

교도관이 식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푹 고아진 삼계탕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러려고 했는데 전혀 협조하는 태도가 아니더라고.”

바로 기절시켜서 감방에 쳐 넣었다. 덕분에 알아낸 건 하나도 없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알고자 하는 것들 대부분은 서류에 적혀 있다. 상담실을 운영하는 목적의 90%정도는 죄수의 기강잡기
정도였다.

“깨어나면 밥만 가져다주고 말 섞지 마. 한 번 가져다 줘서 안 먹으면 이틀 굶겨.”


“예.”

마지막장을 넘긴 김우진은 서류를 책상 한 쪽으로 밀어놓았다.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이곳을 찾는 여타 다른 용사들과 마찬가지로.

호송대장의 말대로 조금 더 사납고, 조금 더 강할 뿐이다.


그건 조금 더 성가시다는 결과를 도출해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성가심은 얼마든지 잠재울 수 있다.

“죄수들은?”
“방금 점심 다 먹었습니다. 지금 출역을 하러 나갈 채비 중입니다.”
“무슨 출역?”
“풍경이 지루하다고 바꾸라고 하셨잖습니까.”

아참, 그랬지.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내일 같은 따분한 감옥의 생활에서 변하는 건 딱 두 가지다.

죄수, 그리고 풍경.

전자는 자연스럽게 교체가 되며 후자는 그가 죄수들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바꿔버린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매일 같이 똑같은 풍경을 보는 건 지루하니까.

“나가보자.”
“예.”

밖으로 나갔다.

연옥은 통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감옥이다.

건물은 본채 한 동이 전부며 감옥을 중심으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정원이 존재한다.

축구장 100 개 정도 되는 크기.

정원 한쪽에는 숲이 펼쳐진다.

쿵쿵-

숲 한쪽, 이십 여명의 죄수들이 마력을 구속하는 팔찌를 찬 채, 벌목을 하고 있었다.

“충성, 소장님 오셨습니까.”

죄수를 감독하는 교도관들이 경례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우지끈-

나무가 무너져 내리는 속도는 빨랐다. 팔찌를 통해 마력을 제어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용사였다. 신체적인
능력은 감히 일반인과 비빌 수준이 아니다.

교도관이 설계도를 가지고 왔다.

“이쪽에 있는 숲을 싹 밀어버리고 말씀하신···.”


“소장님!”

그때, 교도관 하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죄수들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속삭였다.

“큰일?”
“새로 들어온 죄수가 일어났습니다만, 상태를 확인하러 간 교도관의 멱살을 잡고 놔주지 않고 있습니다.”
“멱살을 잡혔어?”
“소지가 식판을 넣어놓고 갔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다시 챙기려다가 그만···.”

성질 나쁘다더니 진짜였군.

심지어 맷집도 좋다. 저항이 거세서 꽤나 거세게 팼는데 반나절도 안 돼서 깨어나다니.

김우진은 딱히 교도관을 탓하지 않았다. 대단한 일처럼 포장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왕왕 있는
일이었다.

“가자.”
“예.”

그러니 적당히 징벌을 주고 얌전히 만들면 그만이다.

언제나 그랬듯.

* * *

“당장 그 빌어먹을 놈 데리고 와! 이 새끼 목 분질러 버리기 전에!”

연옥의 모든 죄수들은 독방에서 생활한다.

당연히 새로 들어온 죄수, 강민식의 방 또한 독방이었다.

놈은 식판을 넣는 작은 문 사이로 교도관의 멱살을 붙잡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가관이군.

김우진이 성큼 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1177 번. 얌전히 교도관을 놔주는 게 어떨까?”


“뭐?”
“네 죄수 번호야. 숫자가 꽤 좋지 않아? 행운의 숫자인 7 이 두 번이나 들어갔어.”
“개소리 지껄이지 마!”

강민식이 버럭 소리쳤다.

7 이 별로 마음에 안 드나. 한국인 치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던데. 김우진이 중얼거렸다.

“일단 그 멱살은 좀 놓고 이야기 하는 게 어떨까? 교도관이 꽤나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아가리 닥쳐! 교도관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날 여기서 내보내줘.”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해.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내 마음이 아니거든.”

실제로 그렇다. 김우진은 이 교도소의 소장이기는 했으나 죄수를 임의로 들여오거나 내보낼 권한 같은 건 없었다.

으레 대부분의 교도소가 그러하듯.

아닌가, 사실 그는 일반적인 교도소의 시스템은 잘 몰랐다. 그냥 겉핥기로 비슷하게 해놓은 거지.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강민식이 이를 갈았다. 작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초점을 잃은 동공이 맹렬히 흔들렸다.

“나는 용사야. 나는 영웅이야. 나는 세계를 구했어. 목숨을 걸고 나아가 광룡의 목을 베었다고.”


“다 나를 칭송했어. 다 나를 우러러봤어. 모든 걸 이루었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어.”

남았었겠지. 김우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왜 갑자기 죄인이 되어야 하지? 감옥에 갇혀야 하지?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어.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줘!”
“그 심정 이해해.”
“네가 뭘 알아!”
“그렇게 말해버리면 할 말은 없고.”

하지만 이해가 간다는 건 진심이었다. 교도소장을 하면서 이런 놈을 한두 번 봤어야지.

“아까 말했지? 나는 너를 내보내줄 권한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 감옥을 나간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야.”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다.

“···나갈 수 있다고?”
“그래, 전부 네 마음가짐에 달려 있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소장을 향한 욕설, 벌점 1000 점. 그리고 교도관 폭행 100 점. 축하해. 벌써 벌점이 1100 점이네. 이왕 많이
받은 거 번호랑 맞춰서 1177 로 받는 게 나으려나?”
“지랄하지 마. 교도관의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언제?”

강민식이 텅 비어버린 제 손을 바라보았다. 교도관은 김우진의 뒤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은 머저리의 손에서 인질을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이 개···!”

콰앙!

두터운 철문이 요동쳤다. 작은 통로 밖으로 강민식의 손이 버둥거렸다.

“음, 77 점을 더 줄 명분으로는 충분하네. 죄수 번호 1177, 교도소장을 향한 폭행 미수로 벌점 77 점 부과.”

이제야 1177 점이 딱 맞다. 편안하다.

“괜찮나?”
“예. 감사합니다, 소장님.”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식 방 줄여. 최대치로. 벌점이 1177 점이니까 11 일 동안. 밥도 주지 말고.”
“예.”

교도관이 철문 옆의 벽면에 비치된 스크린을 매만졌다.

쿠그그그-

미약한 진동과 함께 독방의 벽들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당황한 강민식이 소리쳤지만 벽면은 딱 그가 몸 누울 공간까지 좁혀졌다. 지극히 좁고, 지극히 불편했다.

“그게 이곳의 징벌방이다. 11 일 동안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곱씹고 반성하도록.”

아, 이왕이면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는지도 고민해 보고.

‘그냥 다 듣게 되겠지만.’

김우진이 강민식의 옆방을 흘기며 사라졌다. 등 뒤에서 강민식의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 * *

목이 쉴 때까지 소리치던 강민식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좁아터진 징벌방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작은 마력 전등이 눈부셨다.

“불이라도 꺼주던가, 개새끼들아···!”

벽면을 뒤져봤으나 불을 끄는 스위치는 없었다. 깨트리기에는 너무 높았다.

“소리는 다 질렀나? 목청도 좋군.”


“···누구?”
“누구긴, 감방 동료지.”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민식은 그게 옆방에서 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감옥이 서로 방음이 완벽하게 되긴 하지만 배식구를 열어 놓으면 또 이야기가 다르거든.”

그는 그제야 교도관의 멱살을 잡았던 배식구가 아직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데르카인 알베트네. 자네는?”


“···강민식입니다.”
“지구 출신인가?”
“어떻게 아십니까?”
“예전에도 그런 이름의 죄수가 하나 들어왔었거든.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네.”

무엇보다 교도소장도 비슷한 형태의 이름이고 말이네.

“저 자가 한국인이라는 겁니까?”
“아마도. 자네의 심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너무 악만 쓰지 말게. 그래봐야 이득이 될 건 없으니.”
“대체, 대체 여긴 뭡니까? 저는 왜 여기 갇혀 있는 겁니까?”
“뭐긴, 감옥이지. 자네는 죄를 졌으니까 감옥에 갇힌 거고.”
“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네는 죄를 지었네. 그것도 아주 큰 죄를.”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용사입니다. 한 세상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알고 있네. 여기 갇힌 죄수들은 전부 용사지. 자네만 특별한 게 아니란 거네. 소장이 말 안 해주던가?”
“······.”

했다.

“···연옥,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


“맞네.”
“하지만 저는 아무런 죄를···.”
“잘 생각해보게.”
“···혹시 여기는 드래곤들이 만든 감옥입니까?”
“자네는 드래곤들로부터 세상을 구했나 보군. 아쉽게도 자네가 죽인 악당들이 만든 건 아니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자네를 용사로서 불러들이고 힘을 준 자들이 세운 곳이지.

“···그게 무슨? 그들이 왜 그런단 말입니까?”


“자네는 아마 드래곤과 싸워 세상을 구했을 거네. 동료들도 만들고 영웅으로 칭송도 받았겠지.”
“맞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 말입니까? 고향이 그리워 고향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세상을 구한 뒤에
원하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말이네. 자네가 돌아가기 전에, 정확히는 이곳에 오기 전이지. 그들이 한 가지 질문을
했을 거네.”
“질문이요?”

강민식이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아, 저를 소환한 신이 한 가지 묻기는 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신이 아니네.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고. 뭐라고 했나?”
“저를 소환하느라 모든 힘을 소모해서 당장은 온전한 상태로 역소환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지구에 가면 힘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는데 괜찮냐고 했습니다.

그 대신 다른 보상을 주겠다는 소리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떤 노력을, 어떤 고생을 해서 이룩한 힘인데 그것을 모두 상실한다니.

“그래서 괜찮지 않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더 기다릴 테니 온전하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그거네.”
“예?”
“거기서의 모범 답안은 ‘예, 괜찮습니다. 이런 힘보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네.
그러면 아마 신, 신은 아니지만.
그 자는 자네에게 부족하지만 보상이라면서 지구라는 차원의 돈을 꽤 주었을 거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돼는···!”
“여기서는 말이 되네.”

그게 이 감옥이 지어진 이유거든.

“내가 교도소장은 아니지만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 같으니 대신 정식으로 소개하겠네.”

이곳은 연옥.

“힘을 포기하지 않은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이네.”

데르카인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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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2. 납득 >

강민식을 징벌방에 넣은 후, 김우진은 집무실에 앉아 분재를 다듬기 시작했다.

톡-

기괴하게 꺾인 가지 하나를 잘라냈다. 분재가 크르릉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쓰읍, 작게 혀를 차자 곧 조용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교도관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소장님, 개인면담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창밖을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은 누구지?”
“죄수 번호 1152. 시에나 올름입니다.”
“들여보내.”

잠시 후, 붉은 장발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익숙하게 김우진의 앞에 앉았다. 뾰족한 귀가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시에나. 차는 뭐로?”


“커피로 부탁해. 원래 난 차만 마시는데 소장 때문에 커피에 맛 들렸어.”

교도관이 커피 두 잔을 내왔다.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소지 한 명 더 필요 없니? 감방에서 멍하니 있는 거 보다 뭐라도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 새로운 출역을 시작했죠. 할 일 많아지지 않았어요?”
“그건 너무 힘들어. 그리고 너무 불합리해. 소장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서 죄수들을 동원하는 법이 어디 있니?”
면담은 매일 일과가 끝난 저녁, 한 명씩 이루어진다.

“그럼 그냥 출소하면 되죠. 누가 못하게 말리기라도 합니까?”

표면적인 목적은 죄수들의 애로사항들을 접수하고 해결해주는 거지만 진짜 목적은 결국 하나였다.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죄수들의 수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번, 개인면담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김우진의


물음은 같았다.

“솔직히 이런 곳에서 썩으면서 힘들다고 난리치는 것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좋잖아요?”

그리고 대다수의 죄수들의 대답도 같았다.

“이제 와서 다 잃고 평범한 사람이 돼서 살아가라고? 소장이라면 그럴 수 있겠어?”


“못하죠. 근데 전 죄수가 아니잖아요.”
“내가 언젠가 꼭 탈옥하고 말 거란다.”
“제가 일단은 소장입니다만.”
“나는 죄수고.”
“그 이야기는 20 년 째 계속 되네요.”
“20 년? 소장이 오기 전부터 계속 됐지.”
“만약 그러면 집무실이 아니라 징벌방에서 대화하고 있을 겁니다.”
“안 잡히면 되는 거 아니겠니?”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죠. 그래서 출소할 생각은 전혀 없으시다?”
“당장은.”
“마음이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이 지독한 곳에서 71 년을 살았더니 조금 그렇긴 하네.”

김우진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71 년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경우일 뿐, 눈앞의 여인은 조금 달랐다.

물론 전체적인 범위에서 보자면 비교적 짧다는 것일 뿐, 71 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짧은 건 아니었다.

“언제고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는 날을 기대할게요.”


“당장 나를 풀어주면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는데.”
“그건 불가능. 저도 사정이 있어서. 언제든 마음 바뀌면 교도관에게 이야기해요.”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았어, 소장.”

시에나가 나갔다.

“오늘도 의미는 없군.”

개인 면담을 끝으로 오늘의 일과는 끝이 났다. 사실 소장인 그가 해야 할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죄수나 시설의 관리는 교도관들에게 일임하고 있으며 그것을 제외하면 할 일 자체가 없으니까.

일반적인 교도소처럼 여론의 눈치를 볼 것도, 무언가 보여주기식으로 해야 하는 것도 없다.

아, 같은 건가.
그가 식어버린 커피를 원샷했다.

“나 퇴근한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겉옷을 벗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고 해봐야 결국 연옥의 최상층일 뿐이지만.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룸서비스를 시켰다.

“아침에 분명 회가 드시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나? 마음이 변했어.”
“···주문하신 차돌 짬뽕과 유린기입니다.”

소지가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앉아. 같이 먹자. 일부러 2 인분 시켰다.”
“저 저녁 먹었습니다만.”
“용사 위장이 그렇게 작지는 않을 텐데.”

소지가 입을 다물고 얌전히 앞에 앉았다.

짬뽕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얼큰한 게 딱 김우진의 취향이었다.

“요리 실력이 점점 좋아진다?”


“환경이 좋지 않습니까. 제한 없이 온갖 재료들을 다 구해주시니 여러 가지를 만들어 볼 기회가 많습니다. 악당
옆에 미친 과학자가 붙어 있는 클리셰가 이해가 간다고 할까요.”
“그럼 내가 악당이다?”
“물론 소장님이 악당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소지가 능글맞게 웃었다.

“요리도 좋지만 이제는 여기서 나갈 생각을 해.”


“어, 그럼 탈옥해도 됩니까?”
“씨발, 여기 죄수 새끼들은 왜 죄다 소장 앞에서 선전포고를 하지?”
“시에나님이 그런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너 개인면담 순서도 다 외우고 다니냐?”
“죄수가 몇이나 된다고요. 저도 여기 8 년차입니다.”
“자랑이다.”

죄수번호 1176, 베르너 레트만. 오늘 들어온 강민식 바로 직전에 들어온 죄수였다.

난장판이 되었던 연옥을 복구하던 한창, 요리사라는 말에 당장 소지로 임명하고 모든 걸 맡겨버렸다.

다시 생각해도 그가 소장이 된 이래로 가장 잘한 일이었다.

“진짜 나갈 생각 없어?”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꽤나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김우진은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죄수들 중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건 소지뿐이니 그가 나간다면 다시금
맛대가리 없는 밥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출소자를 만드는 것 또한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조금 맛이 떨어지는 식사를 하더라도 한 명의


출소자를 더 내보내는 것이 당장은 더 중요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나갈 생각 없습니다. 전 차원의 재료들을 모두 주는, 그걸 마음껏 요리할 수 있는 환경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마음대로 해라.”

식사를 마친 소지가 빈 그릇을 챙겨 나갔다. 김우진은 침대에 누워 티비를 틀었다.

연결된 차원은 지구. 여러 나라의 방송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소장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교도관이었다.

“무슨 일이야?”
“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주일 뒤에 새로운 죄수가 하나 더 온답니다.”
“새로운 놈 들어온지 이제 겨우 이틀 됐는데?”

강민식과 소지의 시간 텀을 생각하면 빨라도 너무 빨랐다. 물론 죄수라는 텀을 정해서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평범한 죄수는 아니지 않은가.

용사가 흔할 리도, 그 용사가 감옥에 들어오는 게 흔할 리도 없다.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이례, 새로 받은 죄수가 이제 고작 셋이라는 점에서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뭐, 어쨌든 교화시킬 죄수가 많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인적사항은?”
“여기 있습니다.”

교도관이 서류를 내밀었다. 인계 당일 호송관이 넘기는 세세한 자료와는 다른, 아주 간단한 것들만 적힌 서류였다.

“이런 씹.”

첫 장을 확인한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 율리아 카르센.
- 엘프.

소장이 된 이후, 김우진은 이종족을 싫어했다. 특히, 시간관념이 인간과는 확고히 다를 정도로 오랜 삶을
살아가는 엘프들은 더욱 더.

71 년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붉은 머리 엘프가 엘프들의 디폴트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더 없이 길었던 20 년도 고작 2 년 정도로 치부하는, 한 번 들어오면 가장 오래 죽치고 있는 죽돌이들.


* * *

강민식은 잠에서 깨어났다.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

짓눌린 붕어빵처럼 억제되어 있던 팔과 다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징벌방의 징벌이 끝났다. 그의 감옥은 평범한 독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침 배식이요!”

때마침 소지가 배급구에 식판을 올려두고 사라졌다.

향긋하면서도 익숙한 냄새. 고향에서 수없이 먹었던 떡만둣국이었다.

꼬르륵-

며칠 만에 맡아보는 음식 냄새에 배가 요동쳤다. 본능적으로 손을 가져갔다.

11 일을 굶어서 그럴까. 맛있었다. 살면서 먹어온 어떤 떡국보다도 더.

“일어났군. 잘 잤나?”

불연 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밤에도 불을 켜놓는 건 대체 무슨 매너지?”


“웃기는 놈이군. 감옥에서 불 끄는 것 봤나?”
“난 감옥에 갈만한 일은 저질러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지금은 감옥에 있지.”

상대, 김우진이 픽 웃었다. 강민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야기는 다 들었을 테니 지금은 왜 이 감옥에 들어와 있는지 알겠지?”


“······.”
“혹시 듣지 못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양반이 오랫동안 여기 갇혀 있어서 그런지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 하는
게 취미거든.”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질문을 할지도 알겠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강민식이 뿌득, 이를 갈았다.

“무려 15 년이다. 15 년을 용사가 되기 위해, 미친 광룡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어. 죽을 만큼


아팠고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용사의 힘은 단순히 강하기에 잃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기적과도 같은 기연도 있었다. 동료들의 희생도 있었다. 그들의 희망과 염원, 소망이 내 노력과 어우러져 나는
영웅이 되었다!”

그가 용사로서 살았다는 증거. 그의 동료들의 피와 땀. 세계의 역사.


결코 잊어서도, 잃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건 난 모르겠고.”

하지만 김우진은 그러한 것들을 가볍게 무시했다.

“중요한 건 널 이곳에 보낸 놈들이 네가 힘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거지. 그리고 난 그들의
앞잡이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그러니 다시 묻겠다.

“나갈 테냐? 네가 원한다면 며칠 안에 나갈 수 있을 거다.”


“···나간다고 하면 나는 모든 힘을 잃겠지? 기껏 알량한 돈 몇 푼 쥐어주고.”
“알량한 돈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많을 텐데.”
“좆까.”
“대답으로는 너무 과해.”

퍼억, 폐부가 쥐어짜지는 고통에 강민식이 숨을 삼켰다. 뜨거운 열기에 이를 악물었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으로 김우진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 * *

“···괜찮나?”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강민식은 깨어났다.

복부는 여전히 화끈거리도록 아팠다.

“앞으로는 조심하게. 소장이 나쁜 인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대인배는 아니거든.”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한 시간 쯤?”

고작 한 대 맞고 한 시간? 구속구로 마력이 제어 당하지만 않았다면 결코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그가 입술을 짓이겼다.

“데르카인님은 저 말도 안 되는 말에 동의하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말? 모든 힘을 포기하고 나가라는 말?”
“예.”
“납득이 안 되니 여기 갇혀 있는 게 아니겠나. 이 감옥에 갇힌 모두가 그러하네. 애초에 포기했다면 여기 있지도
않았을 테니.”
“그렇습니까?”
“그거 아나? 마지막으로 이 감옥에서 누군가 출소한 게 벌써 5 년 전이네. 그 전에는 11 년이었고.”

텀이 길다. 그만큼 힘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자는 없다는 거다. 버티고 버티다 어쩔 수 없이 꺾일 뿐.

“모두 감옥의 삶에 만족하는 겁니까?”


“다른 죄수들 앞에서 그런 농담 하지 말게. 당장 멱살을 잡고 내던져 버릴 테니.”

데르카인이 끌끌 거리며 혀를 찼다.

“여기 좋아서 이러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으니 있는 거지.”


“···탈옥은요?”

배급구로 고개를 내밀어 교도관이 없음을 확인한 강민식이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탈옥? 여기 와서 한 번도 탈옥 시도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없네. 대답이 되었나?”


“···예. 충분합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포기하지는 않겠군.”
“저는 반드시 나가고 말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나가시죠.”
“그렇게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군.”

데르카인이 껄껄 거리며 웃었다.

뭐, 직접 부딪혀보고 깨지는 것도 좋은 경험이긴 하겠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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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3. 장생종 >

오늘의 아침이 밝았다.

김우진은 죄수들의 신상명세와 일정표를 뒤적였다.

“1177 번도 출역 내보내. 나갈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지.”

힘들고 의미 없어 보이는 출역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김우진의 변덕과 기분 전환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너무 힘들어 이 감옥을 벗어나고 싶게 하기 위해서.

김우진의 목적은 결국 보다 많은 죄수들을 정상적으로 출소 시키는 것이기에.

“어디로 내보낼까요?”
“당연히 환경조성반이지.”

출역은 세 가지가 있다.

식물을 기르고 관리하는 원예반.


동물을 기르고 관리하며 도축까지 하는 축사장.
그리고 김우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환경을 뒤집어 새로 조성하는 환경조성반까지.

가장 무식하고 힘든 건 당연히 환경조성반이다. 모두 한가락 하던 용사인 만큼 본래의 상태라면 쉽지만 마력을


제어하고 육체의 힘도 조금 약화시켜 놓은 상태니까.

“1177 번은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교화가 가장 어려운 게 엘프를 비롯한 장생종이라면, 반대로 교화가 가장 쉬운 건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특히, 첨단 문명의 혜택을 받다가 그렇지 않은 차원으로 간 인간들이라면 더욱 더.

지구에서 중세에 가까운 세계로 문명이 너프되어 버리면 누리던 혜택이 모두 사라진다. 대단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나간 자리는 안 다는 게 인간이다.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공허함은 다른 용사들보다 크고
깊었다.

그 인내의 시간을 버티고 버티다 모든 것을 해결하고 마침내 지구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비롯한 온갖 문명의 혜택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그 허탈함과 갈망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거기에 옆에 수십 년씩 나가지 못한 죄수들까지 있다면? 아무리 용사로서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그들에게 년


단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이 짧기에.

“일단은 한 번 나가 볼까.”
“굳이 직접 보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없지. 그냥 변덕이다. 일주일 뒤에 시간이 썩어나는 놈들이 들어오니 한 놈이라도 더 빨리 내보내고 싶어서.”

보다 많은 죄수를 출소시키고 싶은 그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

“그런 놈들 때문에 답답해서 복창이 터져 죽지 않으려면 그 전에 한 놈이라도 보내버려야지.”

때마침 들어온 죄수가 지구인이라는 건 꽤나 매력적인 요소였다.

이 감옥에 며칠 전 들어온 강민식을 제외한 지구인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 * *

김우진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감옥을 둘러싼 비교적 낮은 담을 가볍게 뛰어넘고 숲으로 나아간다.

이번에 갈아엎을 구역은 숲이다. 교도소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빽빽한 수림 아래 여러 동물들이 살아가는
그런 곳이다.

“오셨습니까, 소장님.”

숲에 도착하니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벌목하는 죄수들이 보였다. 간수 하나가 김우진을 발견하고 경례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봐.”
“예.”

김우진은 함께 온 교도관이 가지고 온 썬배드에 반쯤 누웠다. 썬글라스를 끼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구경났나?”
황당해하는 강민식과 눈이 마주쳤다. 강민식이 재빠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다른 죄수들은 익숙하게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이 대체 뭐하는 겁니까?”

강민식이 함께 출역을 나온 난쟁이, 데르카인에게 물었다.

“자네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그러는 거네. 열 받으면 출소하라 이거지.”


“악질이군요. 그런데 벌목은 왜 하는 겁니까?”
“숲을 갈아엎어서 새로운 걸 만들 생각이네.”
“죄수가 봉이군요. 애초에 제대로 된 죄도 아닌데. 건물이라도 세우는 겁니까?”
“아니, 그냥 또 다른 숲을 만들겠지. 땅을 파고 식물을 새로 심는 것도 다 우리가 해야 하네. 더럽게 힘들지.”
“···그런 무의미한 짓을 왜?”
“그래야 우리가 더 힘들 것 아닌가.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고 그러면 결국 꺾이기 마련이니까.”
“···하.”

강민식이 헛웃음을 지었다. 대놓고 저 따위 짓을 하니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누가 뜻대로 해줄 줄 안답니까?”


“꽤 효과적이긴 하네. 특히 자네 같은 인간들에게는 더욱 더.”
“왜죠?”
“수명이 짧으니까. 몇 십 년 동안 이 짓을 계속한다고 생각해보게.”
“용사가 되면서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를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자네에게 10 년이란 시간은 꽤나 길거야. 그렇지?”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네. 자네 나이를 정확히 모르나 많아야 40 이 안 됐겠지. 40 을 살아온 자들의 10
년과 수백 년을 살아온 자들의 10 년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부정할 수 없겠군요.”
“하물며 그게 끝도 아니지. 기약이 없네. 스스로 출소를 택하지 않는 이상.”
“······.”

강민식은 데르카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탈옥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1177 번. 누가 일과 중에 잡담 하라고 했지?”

고개를 들었다. 김우진은 여전히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분명히 그를 향해 있었다.

“1177 번. 떠들지 말라고 했지, 도끼질을 멈추라고는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네를 집중관리할 모양이군. 고생하게.”

데르카인이 혀를 차며 거리를 벌렸다. 강민식은 김우진을 한 번 쏘아보고는 도끼질에 집중했다.

쿵-
무거웠다.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고 땀이 난다.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구속구로 마력이 제어되고 육체의 힘 또한 일부 제한된다고 해도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육신이었다.

일반적인 도끼라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이것도 일부러···?’

무조건이다. 더 힘들라고, 무거운 놈으로 만들었겠지.

강민식이 빠득 이를 갈며 더욱 힘을 짜냈다. 그의 시선은 꾸준히 숲을, 그 너머를 살폈다.

어떻게든 탈출로를 찾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 * *

언제나처럼 일기를 쓰고 잠에 들었다 일어난 김우진은 우울함을 느꼈다.

오늘은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 날이다.

엘프.

장생종의 일족답게 시간 개념이 인간이라는 차원이 다른 종족.

연옥 안에서 그가 만나온 모든 엘프들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당연히 이번에 새로 들어오는 엘프도 그렇겠지. 빌어먹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인간 용사만 우르르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럼 소원이 없을 텐데.

“10 시 50 분입니다, 소장님.”

평소에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어쩐 일로 빠르게 흘러갔다. 강민식은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고 어느새 엘프가
들어오는 날이 되었다.

담배를 한 대 피고 있으니 호송부대가 죄수를 끌고 정문에 도착했다.

“이렇게 금방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소장님.”

호송대장이 전혀 반가운 기색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가 여인을 내밀었다.

쇠사슬, 안대, 재갈, 구속구 등으로 전신이 포박된 은발의 여인은 엘프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서류만 주고 가.”
“인계 확인서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교도관들이 죄수를 인계 받았다. 낡아 빠진 종이에 사인을 했다. 고작 이주일 만에 다시 사인을 하는 건 또


처음이다.

“그럼 이만.”
“이렇게 자주 자주 죄수들을 보내주면 좋기는 한데 다음에는 인간으로 데리고 와.”
“이전 죄수가 인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네. 인간‘만’ 데리고 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죄수에 관한 부분은 제 재량이 아닙니다.”

그런 건 알고 있다. 그 또한 해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손을 흔들자 호송대장이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교도관들이 익숙하게 그녀를 상담실로 데리고 갔다.

안대를 풀고 재갈을 치웠다.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엘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새하얀 피부는 백옥 같고 입술과 코는 또렷하고 오똑하다. 은빛 머리칼은 더 없이 윤이 나고 에메랄드 빛


눈동자에는 순수함이 엿보인다.

김우진이 호송대장에게 받은 서류를 뒤적였다.

“율리아 카르센, 맞나?”


“네.”
“대답이 빠르군?”

일반적으로 이 자리에 온 모든 용사들은 현실을 부정한다. 율리아와 같은 행동은 대수롭지 않지만 흔한 일도


아니었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까요.”


“종족은 엘프고.”
“잘못 됐네요.”
“엘프가 아니라고?”
“정확히는 하이엘프에요.”
“빌어먹을 놈. 특이사항 없다면서.”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이엘프는 일반적으로 엘프들의 배 이상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더
태평하다.

이번 죄수는 없는 셈 쳐야겠군. 낮게 중얼거린 그가 질문을 이어갔다.

“나이는?”
“257 살이요.”
“어리군.”
“하이엘프치고는 그렇죠.”
“아르반이라는 차원 출신이고.”
“네.”
“데이드람을 구했고.”
“광룡이 미쳐 날뛰던 차원이었어요. 꽤나 힘들었죠.”

아르반?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차원 이름이 비슷비슷한 게 한두 개도 아니고.

“여기가 어딘 줄 아나?”
“감옥이요.”
“왜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고?”
“대충 짐작은 해요.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알면서도 여길 왔다고?”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죠.”

그것도 그랬다.

“그렇다면 다시 묻지. 대답은?”


“여기 오게 된 걸로 대답이 되지 않았을까요?”
“오게 될 줄 몰랐다며?”
“어쨌든 왔잖아요. 나가고 싶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악다구니를 쓰지도 않고.”

눈이 마주쳤다. 흥미로움을 가득 담은 시선. 김우진은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엘프들의 특이함은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니었다. 하이엘프라면 당연히 더 특이하겠지.

“···잘 생각하는 게 좋아. 여기서 출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시체가 되어 나가는 거군요.”

그녀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알면서도 거절하겠다고?”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여기 처음 들어온 놈들은 모두 너와 같은 생각을 해. 그런데 몇 놈이나 탈옥했을 것 같아?”
“불가능하다는 거네요. 그래도 지금은 그렇네요. 아시잖아요? 하이엘프의 시간은 길어요.”
“···망할 엘프놈들.”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알았다. 1178.”
“1178? 그게 뭐죠?”
“네 죄수번호. 앞으로 번호로 부를 테니까 잘 기억해두도록.”
“아하, 3 이 하나도 없는 게 아쉽네요.”
“3?”
“다른 엘프들은 몰라도 저희 차원의 엘프들은 3 을 행운의 숫자로 여겼거든요.”
“그렇군.”

딱히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김우진이 문을 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교도관들에게 눈짓했다.


“데리고 가.”
“예.”
“감시 잘해. 유의해서.”
“예.”

···모르겠다.

김우진이 담배를 입에 물고 손가락에서 불꽃을 피워냈다.

후우-

진한 연기가 흩어졌다.

“인간을 원했더니 뭔 하이엔드 장생종 또라이가 들어왔어?”

20 년 동안 봐온 죄수가 샐 수도 없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맹세코 저런 용사는 처음이었다.

* * *

“···새 죄수?”

강민식은 자신의 옆방에 새로 자리를 차지한 죄수를 발견했다.

죄수번호 1178. 그의 다음 번호이자 더없이 아름다운 엘프였다.

하지만 미모보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녀가 이제 막 죄수로 들어온 자라는 거다.

오랜 수감생활을 하면서 수긍하고 패배감에 찌든 죄수가 아닌.

“이봐. 1178 번 엘프.”

늦은 밤, 기회를 엿보던 강민식이 배급구를 통해 조용히 속삭였다. 다행히 상대의 배급구 또한 열려 있었다.

“저 말인가요? 옆방이신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탈옥하고 싶지 않아? 설마 이 개 같은 곳에서 계속 있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아니겠지?”
“아직까지 그런 곳인지는 모르겠네요. 시설 자체는 나쁘지 않아서.”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으음.”

잠깐의 침묵.

“방법은 있고요?”

그것이 긍정의 대답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
# < 004. 경고 >
연옥에서 수감되고 지내온 몇 주의 시간은 감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무기력.

데르카인은 말했다.

연옥의 모든 죄수들은 탈옥을 시도해봤다고.

그럼에도 탈옥자는 없다. 모두 실패했고 반복된 실패는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탈옥? 그야 물론 하고 싶지. 그런데 가능할까?”


“글쎄, 의지는 좋다만 가능할까?”
“실패하고 징벌방에 들어갔다 와야 현실을 깨닫지.”
“아직 희망이 가득할 때긴 해.”
“뭐,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못할 것도 없긴 하구나.”

강민식의 탈옥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이유였다.

‘멍청이들.’

강민식은 스스로의 뇌리에 패배감과 무기력함을 각인시킨 죄수들을 비웃었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그렇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건가?

몇 번 실패했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 감옥에는 어차피 미래가 없다.

탈옥하지 않으면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용사의 힘을 모조리 상실하거나, 감옥에서 죽거나.

두 가지 선택지보다는 고난이 있어도 도전해보는 게 맞지 않겠나. 그게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방법은 있고요?”

때마침 새로 들어온 죄수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비록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엘프였으나 흥미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다른 죄수들처럼 패배감에 찌들어 있지 않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강민식이 배급구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전히 교도관들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속삭였다.

“아직까지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해결책도 없는 공허한 망상이군요?”
“그렇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그냥
시체입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엘프가 순순히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일단은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정보라면?”
“이 감옥의 구조나 교도관들의 일과 시간표,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을 비롯한 모든 것.”
“확실히, 그건 중요한 부분이죠.”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교도관에게서 얻어내거나, 죄수들에게서 얻어내거나. 전 둘 다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죄수들이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연옥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죄수들은 연옥의 많은 부분을 알 기회가 없었다.

“교도관이 순순히 털어 놓을까요?”


“그러니 협박을 해야지요. 아무리 소장에게 충성하더라도 살고 싶다면 사소한 것 하나라도 털어놓을 겁니다.”

그 대가로 징벌방에 가겠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소지라는 사람은요? 우리와 같은 사람이면서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해봤습니다만, 씨알도 안 먹힙니다. 그놈은 소장의 끄나풀입니다. 오히려 교도소가 좋다고 노래를 부르는
놈인지라.”

그래도 죄수끼리의 정은 있는지 탈옥 계획을 소장에게 이야기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 직접 소지가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지는 여러 가지 잡무를 해야하긴 하지만 죄수들 중 유일하게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자유와 넓은 운신의 폭을 보장받는 직책.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는 않았다.

“소장이 들어오고 20 년 동안 소지로 임명 된 게 지금의 소지 하나라더군요. 그것도 요리 때문에. 소장이 굳이


새로운 소지를 뽑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포기하면 되나요.”

목소리만 들리지만 강민식은 그녀가 웃고 있다고 느꼈다.

“뽑을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주면 그만이죠.”

* * *

아침부터 난리가 났다.

“죄수번호 1177 번이 또 다시 난동을 부렸습니다. 교도관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고


합니다.”
“탈옥이 하고 싶어 미치겠는 모양이군.”

김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감옥이란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억압하는 곳.

감옥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없으며, 감옥을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죄수는 없다.

강민식의 성격 상, 지금에서야 교도관에게 시비를 건 것이라면 오히려 오래 참은 거다.

“임의대로 일단 첫 번째 징벌방에 넣었습니다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탈옥은 옳지 않다. 적어도 그가 소장으로 근무하는 한, 연옥에서의 탈옥은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이 탈옥하지는 못하겠지만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법이다.

처음부터 제대로 잡지 않으면 점점 대범해진다.

“교도관 폭행, 스파이 명목으로 벌점 10 만점 주고 두 번째 징벌방에 쳐 넣어. 아, 그 전에 오전 정신교육은


그대로 진행하고.”

김우진이 소매를 접었다.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했다.

“모자 줘.”

교도관이 건네주는 모자를 썼다.

“오늘 정신교육은 내가 들어간다.”

* * *

연옥의 정신교육은 매체를 접하는 시간이다.

북한에서 남한의 드라마를 보고 남한을 선망하는 탈북민들이 생기는 것에서 김우진이 착안해낸 것으로 바깥을
그리워하는 죄수들에게 바깥을 보여주는 거다.

여러 차원의 생활을, 매체들을, 문명의 이기를.

그들은 누릴 수 없기에, 눈앞에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기에 더욱 간절한 것들을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자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명확하게 모른다.

김우진이 소장을 맡고 출소시킨 이들이 몇 있었지만 콕 찝어 한 가지라고 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유였으니까.

그렇다고 아예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거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한 번 경고를 받고 징벌방을 경험한 강민식이 또 다시 사고를 쳤다는 것.


탈옥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는 것.

그는 감옥의 소장이었고 탈옥자는 온전히 그의 책임이었다. 그에게는 완벽하게 감옥을 관리할 책임이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귀찮음을 덜기 위해서라도.

딸각-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얌전히 앉아 정신교육을 기다리던 죄수들의 눈이 커졌다.

“반갑습니다, 죄수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저는 연옥의 소장, 김우진입니다.”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모자를 벗어 단상 위에 올려놓았다. 담담히 죄수들을 훑었다.


흥미로움, 당황, 의아함. 죄수들마다 색다른 감정들이 느껴진다.

“오늘은 탈옥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 주제가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죄수는 없었다.

감옥은 넓으나 죄수는 적다. 강민식이 벌인 일을 지금까지 모르는 죄수는 없었다.

김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 상영구가 마나를 받아들이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건 9 년 전, 있었던 탈옥 사건입니다. 이 죄수는 2 단계 징벌방 이주일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수인 하나가 복도를 달렸다. 하지만 곧 교도관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았다.

“11 년 전. 이 죄수는 3 단계 징벌방에서 일주일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 죄수는 인간이었다. 그는 감옥 밖까지 나왔다. 하지만 사막에서 길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곧 교도관들의 손에 끌려갔다.

“이건 15 년 전. 징계는 3 단계 일주일.”

숲을 헤매던 죄수가 몬스터 무리를 만났다. 그녀는 분전했으나 구속구로 인해 제약된 육신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잡아먹히기 직전, 교도관들이 그녀를 구출했다.

“그리고 이건.”

화면이 바뀌었다.

그건 전장이었다.

대지가 불타고.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었으며.
폭음과 비명이 난무했다.

죄수들이 보였다.

‘데르카인.’

강민식에게 조언을 해주던 난쟁이도.

‘시에나.’

고혹적인 엘프도.

‘대부분 낯이 익어.’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죄수들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 구속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신의 힘을 되찾은 용사들은 모든 교도관들과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며 전진했다. 그리고 소장이 그 앞을 막아섰다.
“20 년 전, 대규모 탈옥 사태 때의 일입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영상 속의 죄수들은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폭발시켰다.

그 능숙함과 파괴력은 강민식이 감탄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저건 죽을 수밖에 없어.’

막을 수 없다. 강민식은 확신했다. 그래서 괴리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멀쩡히 앞에서 떠드는 소장은 뭘까.

폭발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뒤섞인 검은 빛이 세상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그 빛이 걷혔을 때.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소장은 살아있었다.

모든 죄수들을 짓밟은 채로.

“···미친.”

강민식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입을 막았다. 하지만 김우진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

소름이 돋았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단순히 구속구로 인해 육신이 제약 당해서일까? 방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의문이 들었다.

“이때는 징계가 따로 없었습니다. 본 소장이 막 전입 온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혼란스럽던 때거든요.”

소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강민식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운은 한 번으로 족하니.”

명백한 경고였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

“제가 살던 지구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를 잊은 탈옥수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알아서 잘 처신하시기 바랍니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울려 퍼진다.

“오늘 정신교육은 여기서 끝입니다.”

김우진이 다시 모자를 쓰고 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강의실 전체를 내리 깔았다.

* * *
“···뭡니까, 그 영상은? 조작이죠?”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데르카인의 대꾸에 강민식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용사들을 관리하는 감옥의 소장이, 그 용사들보다 약하다면 그게 문제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애초에 처음 들어왔을 때, 상담실에서 한 번 봤을 텐데.”
“그것도 그렇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보다 강한 것은 알았다. 이길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과 함께라면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구속구만 푼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죄수복을 입고 감옥에 갇혀 있지만 모두 용사 아닌가. 한 차원을 구한 영웅.

“뭐, 저 때는 여러 사정이 있어서 모두 지친 상태였네. 만전은 아니었지. 지금 다시 붙는다면 저렇게까지


허무하게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고.”
“역시!”
“그걸 감안하더라도 소장이 괴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말이네.”
“······.”
“이제 좀 이해하겠나?”

데르카인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죄수들이 탈옥에 의지가 없는지.”


“하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소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이건 그냥 산송장 아닙니까?”
“알고 있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냥 감옥에서 썩으며 그대로 죽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먹은
대로 쉽게 포기가 되면 그걸 미련이라고 부르겠나?”
“······.”

강민식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탈옥할 것 아닌가요?”

옆옆 방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율리아였다.

“그거야 당연한 소리지. 패배감에 찌들어 있다고 해서 희망 자체를 버린 건 아니네. 확실하게 나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다시 도전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렇다네요.”
“하지만.”

데르카인이 율리아의 말을 끊었다.

“이런 식으로 무분별하게 일을 벌이는 건 멍청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네.”


“제가 무분별하다는 말입니까?”
“그럼 무작정 교도관의 멱살을 잡는 게 옳다고 보는가?”
“그렇게라도 한걸음씩 나아가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패배감에 찌들어 있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으니···!”

그때,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교도관 하나가 강민식의 방 앞에 섰다.

“죄수번호 1177 번. 교도관 폭행 및 스파이 행위로 인한 벌점 10 만점이다. 따라서 제 2 징벌방 열흘이다.”


“뭐? 그게 무슨···!”

철컥-

배급구가 닫혔다. 강민식의 목소리는 더 이상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임무를 마친 교도관이 사라졌다.

“2 징벌방이 뭔가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것.”

쯧, 저기서 나오면 좀 얌전해지겠지. 데르카인이 혀를 차며 배급구를 닫았다.

───────────────
# < 005. 협상 >

배급구가 닫혔다.

미중유의 힘이 강민식의 육신을 강제로 끌어당긴다.

“이, 이게 뭐야!”

발버둥쳐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어느새 방의 중앙에 있었다.

쿠구구구-

전후좌우, 사방의 벽면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그의 몸에 밀착했다.

기이한 느낌. 맞춤 틀처럼 벽이 변형되었다. 새카만 어둠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입과 귀를 막았다.

그리고.

“······!”

─────!

끔찍한 고통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그가 예상한 것 이상의 통증.

하지만 꽉 막힌 몸은 움직이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이런 걸 열흘이나 버텨야 한다고?


어째서 죄수들이 징벌방이란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두려워하는지.

강민식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징벌방은 총 세 단계로 나뉜다.

운신의 폭을 줄이는 첫 번째 징벌방.


육신의 고통을 주는 두 번째 징벌방.
그리고 육체에 정신의 고통까지 주는 세 번째 징벌방.

두 번째 징벌방은 일종의 마나를 이용한 전기 자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눈을 가려 시간 감각을 없애고, 온 몸을 봉쇄해 움직임마저 막는다.

그리고 인위적인 통증을 주입한다. 마나로 만들어낸 아픔은 새롭다. 새롭게 아프고 괴롭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제발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빌고, 또 비는 것 뿐.

그것이 장시간 계속되면 인간은 피폐해진다.

아무리 용사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

때문에 죄수들은 징벌방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첫 번째야 백일이고 천일이고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결코
쉽지 않으니까.

“그 꼬맹이, 징벌방에 들어갔다면서?”


“그래.”

자연스레 징벌방에 들어간 죄수의 이야기는 죄수들 사이를 돌았다. 시에나의 물음에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열흘.”
“병신이 돼서 나오는 거 아니야?”
“상대적으로 정신이 나약한 인간이라고 해도 용사네.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네.”
“하긴, 2 징벌방이니까. 3 이면 답도 없지만.”

용사란 용사가 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대적과 싸워온 자들이다. 고난과 역경은, 고통은 더 없이 익숙한
존재들.

육체의 고통은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다.

징벌방의 강도 또한 용사임을 감안하고 만들어졌지만 고작 한 번, 열흘 만에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거다.

“알지? 다른 죄수들 술렁이고 있는 거.”


수년만에 징벌방에 들어간 죄수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정신교육 시간에 소장이 직접적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는 것에 죄수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알고 있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들어와서 분탕을 치고 있어. 기껏 느슨해진 소장의 경계심이 다시 올라가고 있다고.”
“아직은 괜찮네. 강민식에게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직은’이라는 단서가 붙잖아.”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으면 모든 게 어그러질 수 있다. 연옥이란 그런 곳이다.

“2 징벌방에 들어갔으니 정신이 바짝 들겠지. 나오고 나면 적어도 이전처럼 사리분별도 못하지는 않을 거네.”
“그건 그냥 당신 희망사항이잖아···라고 말하기에는 징벌방이 좀 끔찍하긴 하지.”

시에나가 동의했다. 하지만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그래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내가 그랬고 당신이 그랬지. 그리고 녀석은 이제 처음이야. 한 번 만으로 의지가 꺾이기에는 연옥에서 예정된
미래가 너무 암울하고.”
“하지만 인간이네. 그것도 지구의 인간이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만 지구 출신의 용사는 다른 용사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나약했다.

“언제나 예외는 있어.”


“그것도 그렇지.”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계획을 어그러트릴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거기 잡담 금지!”

교도관의 고함 소리에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하지만 교도관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시에나가 다시
접근했다.

“만약 징벌방에서 나온 강민식이 여전히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면 어떡할 생각이야?”


“셋 중 하나겠지.”
“세 개나 돼?”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3 징벌방에 갇혀 폐인이 되거나, 이쪽으로 끌어들여 진정시키거나.”
“마지막 하나는?”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미끼로 던져버려야지.”

쿵-

데르카인의 도끼에 힘이 들어갔다.

“죄수들을 잘 다독이게.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쩌적-

나무가 거칠게 쓰러졌다.


* * *

강민식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건 데르카인과 시에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직접 2 징벌방에 넣은 당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탈옥을 하려고 한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김우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음미했다. 커피 특유의 씁쓸함과 시원함이 일품이었다.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야밤에 어떻게든 문을 열고 도주한다거나, 출역 때 숨는다거나.”


“강민식이 택할 가장 유력한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놈 머릿속에 들어갔다 오지 않는 이상 알 리가 없지.”

차라리 다른 죄수들이었다면 모른다. 감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 패턴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강민식은 모른다. 놈은 백지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고민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교도관의 의문에 김우진이 반문했다.

“무슨 뜻이지?”
“어차피 어떤 죄수든 간에 탈옥은 불가능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대비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김우진도 그가 모든 경우의 수를 뚫고 탈옥에 성공할 것이라 여겨서 대비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생각됩니다.”
“아니, 틀린 말은 아니야. 솔직히 시간 낭비지.”

그런데 말이야.

“여기선 썩어나는 게 시간이야. 그걸 일부러 낭비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20 년은 길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긴 시간을 있어야만 한다.

김우진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었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 그의 무료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게 진짜로 죄수들이 탈옥했으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딱 그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굳이 정신교육 시간에 경고를 날린 이유였다.

똑똑-

“소장님, 베르너입니다.”
“들어와.”

그때, 소지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교도관이 나갔다.

“저녁 가지고 왔습니다. 꽤나 만족하실 겁니다.”


“기다리고 있었어. 뭐라고 했지?”
“크라켄의 다리로 만든 문어 찜입니다. 무랑 이것저것 넣고 푹 끓여 연합니다. 양념은 간장베이스고요.”

문어는 부드럽게 썰렸다.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의외로 괜찮네.”
“크라켄이 사실 문어보다 맛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김새랑 독 때문에 무서워서 먹을지 몰라서 그렇죠. 다
편견입니다, 편견.”
“독이 들어간 시점에서 편견은 아니지.”
“아니죠. 독 있는 복어도 먹는데 크라켄이라고 왜 못 먹습니까? 몬스터라는 편견 때문이라니까요?”

음, 생각보다 논리적이다. 김우진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크라켄과 복어 독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똑같이 죽음을 불러오는 극독일
뿐이니.

“그래서 독은?”
“제거 안 했습니다. 먹어도 죽지 않는 분인데 무엇 하러 제거합니까?”
“뒷맛에 톡톡 쏘는 게 그거였군.”
“독도 잘 이용하면 요리의 일부입니다. 그게 마지막에 크라켄 특유의 느끼함을 싸악 없애주면서 입안을 깔끔하게
해주지 않습니까?”
“음.”

김우진이 접시를 엎었다. 갈색으로 잘 조려진 크라켄 조각이 소지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나가.”
“아니, 이 귀한 걸···!”
“한 번만 더 소장 상대로 실험하면 너도 2 징벌방이다.”
“제가 미쳤다고 그 끔찍한 곳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겠습니까? 실험이 아니라 제가 다 먹어보고 오는 길입니다.
제가 멀쩡한데 소장님이 잘못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장 암살 시도, 벌점 10 만점.”
“한 번 만 더하면 징벌방이라면서요! 소장님! 제발 2 징벌방만은!”
“죄수들 분위기는?”
“소장님이 분노하신 걸 알고 자신들한테 불똥이 튈까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특별한 무언가는 없습니다. 진짜입니다!”
“좋아. 1 만점. 1 징벌방에 열흘 쳐 넣어.”
“감사합니다, 소장님!”
소지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2 징벌방에 비하면 1 징벌방은 어린애 장난이었다.

“그리고 축사장에 연락해서 이 새끼 손에 한 번만 더 독이 들어가면 모두 징벌방이라고 전해. 원예반도


마찬가지고.”
“예.”
“그것만은! 소장님! 죄송합니다! 소장님! 차라리 2 징벌방에 넣으십시오!”

마지막 말만 아니었다면 그랬다.

소지가 절규하며 사라졌다. 홀로 남은 김우진이 어지럽혀진 잔재를 깔끔하게 불태웠다.

문어도, 양념도, 깨진 접시 파편도. 모두 재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입맛을 다셨다.

“···맛은 있네.”

특히 뒷맛이 신선했다.

배가 부르니 자연스레 생각의 흐름이 원활해졌다.

‘죄수들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날리는 것에는 성공했고···.’

강민식을 2 징벌방에 넣은 것은 초반에 그의 기강을 잡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죄수들에게 주의하라는 경고를


날리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분위기가 해이해지면 언제든 탈옥을 계획하는 게 죄수들이니까.

똑똑-

“소장님.”

그때, 다른 교도관이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율리아 카르센. 최근 그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는 주범이
함께였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본래 개인면담을 가질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상담실에서 이미 대화를 나누었기에 굳이 지금 시점에서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본인이 먼저 면담을 요청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이제 막 들어온, 눈앞에서 옆방
죄수가 2 징벌방에 갇히는 것을 본 죄수라면?

김우진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왜 면담을 신청했지? 혹시 출소하고 싶어서?”


“아뇨.”

바로 끊어졌지만.
김우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앉아.”
“네.”
“차?”
“괜찮아요.”
“그럼 나만 먹지.”

김우진이 손수 커피 한 잔을 타왔다.

“감옥 생활은 할 만하고?”


“아뇨. 나빠요. 특히 제 손으로 벌목을 하는 부분이.”

엘프로 하여금 나무를 베어 죄책감을 들게 하는 것. 그건 김우진이 노린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효과는 있었다. 그의 임기동안 엘프 하나가 견디지 못하고 출소했으니. 그게 출소한 처음이자 마지막
엘프였지만.

시에나나 잘 적응한 다른 엘프들을 보고 있자면 아무런 의미가 없나 싶었지만 율리아의 반응을 보면 또 아예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출소하는 게 어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역시.

“엘프에게 있어 나무와 숲은 친구 아닌가?”


“친구에요.”
“그런데 괜찮다고?”
“인간들 중에서도 돼지나 소를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음.”

반박할 수가 없군. 오늘따라 유난히 팩트로 많이 맞는 느낌이다.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없나? 이걸 들어주면 출소하겠다거나.”

간혹 그런 죄수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들어줄 수 없어 기각된 사항들이었지만 한 명 정도는 그렇게 출소한 죄수가
있었다.

“힘을 잃지 않고 출소하고 싶어요.”


“기각.”
“나무를 심고 싶어요. 들어준다고 출소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나무?”
“어쩔 수 없이 베어버렸지만 마음이 아프거든요. 숲을 조금이라도 복구하고 싶어요.”
“그걸 못하게 하면 더 괴롭겠지?”
“아, 제 스스로 약점을 말한 거네요. 근데 엘프들도 몇 있던데 이미 아시지 않아요?”

맞다. 모든 엘프들은 김우진에게 그녀와 같은 제안을 했었다. 당연히 거부했고 생각보다 별 다른 일은 없었다.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왜 면담을 요청했지?”
“요청 사항이 있어서요. 부탁이라고 표현해도 되고요.”
“뭐지?”
“들어주실 건가요?”
“나가기만 하겠다면.”
“그것과는 상관없어요.”
“그럼 나도 곤란한데.”
“소지를 시켜주세요.”
“곤란하다는 말, 못 들었어?”

율리아는 딱히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고 싶어요.”
“소지가 뭔지는 알고?”
“교도관들을 도우면서 감옥의 일을 하는 죄수죠.”
“감옥에 들어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제법 잘 아네.”
“저는 배우는 게 빨라요.”
“빨리 배우고 빨리 익혀서 탈옥해보려고?”

탁탁, 김우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소지를 한다고 탈옥이 가능한가요?”


“그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이룰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럴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그럼 반대로 소장님께 물을게요. 죄수로 여기 들어와서 탈옥을 생각하지 않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이 안 되지. 그래서 소지를 안 시켜주겠다는 거고.”
“꼭 소지가 되어야겠다면요?”
“소지로 임명하는 건 내 권한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을 하고 있죠.”
“감옥의 소장에게 탈옥을 더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부탁을 한다고?”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인데.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전 탈옥한다고 한 적 없어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고 했죠.”


“그게 그거야. 평행선을 달리고 있으니 더 이상 대화를 할 이유가 없군.”

김우진이 남은 커피를 원샷했다.

“방으로 돌아가. 면담은 끝이야.”


“거래를 해요.”
“거래? 거래라는 건 서로에게 원하는 게 있을 때나 성립되는 말이야.”

죄수인 그녀에게 김우진을 만족시킬만한 무언가가 있을 리가 없다.

“오랜 감옥 생활에 지루해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죄수 같잖아?”
“늘 신선함을 찾고 계신다고, 그래서 숲도 뒤집어엎고 그런다고 들었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대답이 되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함을 드릴게요.”


“어떻게?”
“제게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있어요.”
“······?”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김우진이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걸 여기에 심어드릴게요. 어때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의 얼굴은 변함없이 해맑았다.

“···무슨 말도 안 돼는.”
“하이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죠?”
“하는 걸로 아는데.”
“그러면 어머니 나무에 걸고 맹세할게요.”
“···연옥에 들어오기 전에 소지품은 다 빼앗겼을 텐데?”
“모두에게 숨겨진 한 수 씩은 있잖아요?”

그 태평함을, 김우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뭐지?

세계수의 씨앗, 그리고 세계수. 흥미가 가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그렇기에 더 혼란스럽다. 대체 소지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아니, 소지가 문제가 아니다. 탈옥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다고 탈옥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더 소장님이 남는 장사 아닌가요? 아니면 소지 하나 맡는다고 탈옥이 가능할 만큼, 이곳은 허술한
곳인가요?”

가불기와 적절한 도발. 그리고 연옥에 대한 믿음.

그리고 김우진의 마음 속 한구석에 떠오른 한 가지 가설까지.

“좋아.”

그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했다.

───────────────
# < 006. 대체재 >

감옥의 열흘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2 징벌방에 들어간 당사자는 몰라도 바깥의 죄수들에게는 그랬다.


“더 이상 탈옥의 탈자도 꺼내지 못할 걸.”
“인간이잖아? 거기다 소장과 같은 지구인 출신. 거기 출신들은 대체로 허약해.”

2 징벌방이 가지는 의미를 아는 죄수들은 강민식이 180 도 달라져서 나올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강민식이 나왔다.

“여기 아침 식사요.”

풍성한 샌드위치 하나가 배급구 위에 놓여지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소지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더, 더 줘.”

소지는 샌드위치 다섯 개에 탄산음료까지 하나 얹어주었다. 징벌방에 들어간 이들은 오직 고통만을 되뇌며 식음을
전폐 당한다. 열흘을 굶었으니 배고픈 건 당연하다.

샌드위치를 일곱 개까지 해치우고 나서야 강민식은 만족스러운 트림을 했다.

“1177 번. 출역이다. 나와.”

식사 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언제나와 같은 환경 조성반으로의 출역.

“어땠나?”
“어땠나요?”

그리고 같은 죄수들의 물음이었다.

“끔찍했습니다.”

고통은 손과 발을 가리지 않았다. 외부와 내부를 가리지도 않았다.

“제 몸이 제 몸인지도, 멀쩡히 남아있는지도 모르겠고 도저히 끝이 보이지도 않고···.”

사각이 없는 완전한 고통.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흐려지는 감각까지. 지옥, 그 자체였다.

“그게 징벌방이네. 한계까지 죄수를 몰아붙이지. 그래서 죄수들 중 누구도 징벌방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네.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없지.”

어중간하면 그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생긴다. 그리고 연옥의 징벌방은 그런 죄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 어중간함을 뛰어넘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탈옥을 포기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연옥의 죄수들에게 탈옥이 어떤의미인지 더 없이 잘 알기에.

그저 마음이 조금 꺾여 신중하게 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의 무분별한 행동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허나 강민식의 대답은 그의 바람과는 달랐다.


“고작 그 정도에 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고작이라고···?”
“물론 징벌방은 괴로웠습니다. 2 말고 3 도 있는 걸 알았지요.”

하지만.

“솔직히 할만 했습니다.”
“할만 했다고···?”

데르카인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는 징벌방에 다녀온 이를 수도 없이 봐왔다.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붕괴하는 이도, 잘 견뎌내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곳이라고 말하지, 할만 하다고 하는 자는 없었다.

그 스스로 조차도.

시간이 흐려지고, 모든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오직 통증만이 극대화된 것은 단순히 아프다는 것 이상의
고통이었다.

“2 징벌방이라는 곳은 할만한 곳인가 보네요.”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돼는 소린가! 징벌방은 결코 할 만한 곳이 아니야!”
“다들 떨어지지 못해!”

교도관이 난입한 뒤에야 소란이 멈췄다. 데르카인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가렸지만 이미 주변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 * *

탁-
탁-

김우진이 야구공만한 작은 구체를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색감의 융합이었다. 마치 색들을 모조리 뒤섞어 버린 듯한, 하지만
완전히 섞이지 않은 듯한.

율리아 카르센이라는 하이엘프에게 거래의 대가로 받은 세계수의 씨앗이었다.

세계수.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 신목이라 불리는 나무.

품은 마나는 더 없이 정순하고 묵직하다. 그렇기에 진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있어 신과 같다. 어머니 나무라는 호칭에서부터 경외와 존경의 마음이 가득 드러난다.

그런데 그런 세계수의 씨앗을 거래의 대가로 넘겼다.


엘프들의 귀족이라는 하이엘프가 직접.

“어떻게 생각해?”
“그걸 어떻게 반입해왔는지부터···.”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해왔겠지.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고 했고 지금 내 손에 있지.”

하이엘프는 우주의 수많은 종족들 중에서도 특출난 자들이다. 한 수가 있다는 율리아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굳이 그 부분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씨앗에 특별한 장치를 해놓은 건···?”


“내가 씨앗의 중심까지 모든 것을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해를 끼칠만한 요소는 없어.”
“어쩌면 정말로 제대로 된 탈옥 계획이 있는 것 아닙니까?”
“연옥에서 말이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1178 번이 세계수의 씨앗을 건넬 필요가···.”
“그게 있어도 건네면 안 되지. 그게 하이엘프고, 세계수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세계수가 엘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이엘프에게는 또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탈옥을 위해서 세계수를?”

연옥의 탈옥은 고작이 아니다. 하지만 탈옥을 시켜준다는 것도 아니고 소지라는 직책 하나를 맡는 것뿐이다.

그 희박한 가능성에 세계수의 씨앗을 태운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더 큰 무언가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이엘프에게 세계수보다 중요한 게 있다?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나?”
“어쩌면 더 많은 세계수의 씨앗이라던가···.”
“···더 많은 세계수의 씨앗?”

번개가 내리치듯, 정신이 번쩍 맑아졌다.

“그래, 그거야.”

생각해보면 하이엘프라고 할지라도 세계수의 씨앗을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만약 세계수의 씨앗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던 중이었다면?

그리고 그게 세계수를 심는 역할이었다면? 그래서 보다 더 많은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수를 대체할 만한 건 세계수 밖에 없으니.

“···그냥 뇌피셜이지만.”

김우진이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그게 그나마 가장 현실성 있는 가능성이었다.

“보통은 용사 일을 마치고 모든 게 끝났다 생각할때 연옥으로 끌고 오지만 너무 커지면 중간에 강제로 끌고 오는


경우도 있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부소장이 김우진의 가정에 동의했다.

“진짜 탈옥이 목표일 수도 있으니까 유심히 살펴봐.”


“예. 근데 그렇게 수상하면 안 심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심어야 해. 잘만 되면 꽤나 즐거울 거야.”
“무슨 생각이십니까?”
“나중에 때가 되면 이야기 해주지. 근데 아까 뭐랬지?”
“죄수들 사이에서 강민식이 2 징벌방을 우습게 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고?”
“교도관이 들은 바로는 할 만하다 정도가 다였다고 합니다.”

데르카인의 격렬한 반응 덕분에 소문이 났다.

그리고 소문이란 본디 과장되고 와전되는 법이다.

“솔직히 놀랍네. 테스트긴 하지만 잠깐 해본 입장에서 나도 두 번은 경험해보기 싫은 걸 할 만하다고 했다고?”

모든 징벌방은 김우진이 직접 실험해보고 강도를 정했다. 상대가 용사들이기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강함의 유무가 아닌 엿 같음의 부류인지라 장난으로라도 할 만하다는 소리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텐데.

김우진이 강민식의 서류를 찾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특이점이 없었다.

“그냥 타고난 건가.”

가끔 있다. 한 가지 부분에서 특출나게 타고난 놈들이. 그런 놈들을 보통 천재라고 부른다.

“애초에 용사들은 전부 천재입니다.”

그리고 그 천재들 중에서도 선별한 것이 용사였다.


명검이라고 할지라도 어린 아이의 손에 들어가면 썩은 무 하나 벨 수 없는 것처럼, 용사의 힘이 부여되어도
쓰레기는 세상을 구할 수 없으니까.

“고통 인내는 거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가나 보지.”


“조치를 취할까요?”
“조치? 무슨 조치?”
“이대로 놔두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아는데 너무 앞서 나가지마.”

처음으로 징벌방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훼손시키는 자가 나타났다.


징벌이 징벌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징벌방의 존재 의의 또한 흐릿해진다.

부소장이 걱정하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그런 일은 안 생겨.”

하지만 너무 과하다.

징벌방이라는 시스템이 지금까지 빈틈을 보여주지 않아 놀라울 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한 죄수가 겪어보고 할 만하다고 했다. 그게 전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의외긴 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징벌방이 어떤 곳인 줄 알아. 강민식이 할 만하다고 했다고 다른 죄수들도
갑자기 그게 만만해보일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맞아. 안 그래.”

처음이라 그렇다. 처음으로 특이한 죄수가 나와서 조금 더 술렁일 뿐이다.

이게 계속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잠깐의 해프닝, 그게 전부다.

“그놈 하는 짓 보니까 조만간 진짜 탈옥 도전이라도 하겠던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벌을 받는다. 징벌방에 갇힌다.

“두 번째는 만만하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세 번째에 쳐 넣어 볼까? 내기할래? 그때도 할 만하다고 할지. 나는 내
돈 모두하고 내 손모가지를 걸지. 너는 무엇을 걸래?”
“···안 합니다. 너무 뻔 한 결과 아닙니까.”
“그러니까.”

김우진이 다시 세계수의 씨앗을 던졌다.

“그래도 죄수들 관리에는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언제나 싱숭생숭하니까.”
“예.”

인내심 좋은 인간 용사에 세계수의 씨앗을 넘긴 하이엘프.

고작 두 명의 죄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 * *

죄수번호 1176 번. 베르너 레트만은 처음으로 또 다른 소지를 맞이했다.

“어떻게 한 겁니까?”
“뭐가요?”
“대체 어떻게 소지가 된 겁니까?”

이유가 뭘까.
현 소장이 소지 제도를 만든 건 8 년 전, 베르너가 입소했을 때였고 오직 그 한 명만을 위한 제도였다.

그래서 한 번도 소지가 늘어나거나 줄어들 거라고 여기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시에나 누님이 소지를 시켜달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계속 거부하고 있기도 하고.

“시켜줘서 됐어요.”
“아니, 그건 당연한 거긴 합니다만.”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시켜줬다는 겁니까?”
“아니면 여기서 이 조끼를 입고 있을 이유는 없겠죠?”
“아닌데. 분명히 뭔가 있는데.”

베르너가 추궁하듯 재차 물었지만 율리아는 말없이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는 베르너님은 어떻게 다시 나왔나요? 징벌방에 들어가신 것 아니었어요?”


“유일한 소지니 밥을 할 때는 나오라는···.”

‘혹시···?’

번개처럼 무언가 감이 왔다.

유일한 소지. 하지만 율리아가 소지가 되면서 그는 더 이상 유일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에 먹인 독.’

그 일 때문에 소장이 그의 상상 이상으로 분노했다면?

그래서 그를 보다 원활히 징벌방에 쳐넣기 위해 대체재를 찾은 거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억울했다.

소장에게도 말했다 시피 오히려 실험자는 자신이었다. 먼저 먹었고 여러 번의 연구를 거친 요리였다. 독의 그 톡


쏘는 맛은 매운맛보다도,

탄산보다도 깔끔하게 느끼함을 없애버리고 독특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애초에 소장을 독살할 생각이었다면 고작 크라켄의 독 따위를 쓰지도 않았을 거다. 이 세상에 소장을 독살할 만한
독이 있는냐가 더 큰 난제지만.

‘정말로?’

변덕이 심한 소장의 성격 상, 이번 일을 빌미로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정말로 이 여자를 그대로 소지로 삼고 나를 쳐내려고 한다고?’

베르너의 시선이 율리아를 훑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가 순진한 눈을 깜빡였다.


‘안 돼. 절대 안 돼.’

소지가 된 것부터가 소장의 변덕이었지만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온 차원에서 오는 식재료와 몬스터들을 연구하고, 조리할 수 있는 환경이 어디 흔하겠나. 그가 평생을 꿈꿔왔고


여전히 꿈꾸고 있는 이상향 같은 곳이었다.

감옥이라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못해도 수백년은 여기서 더 썩고 싶었다.

하지만 소지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소지 자리는 무조건 내 거야. 절대 못 줘.’

미약한 시기와 분노의 감정에 율리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베르너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소장,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내 요리가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 몸으로 만들어주겠어···.’

그가 전의를 다졌다.

“걱정마세요.”
“예?”
“저 요리 못해요. 칼질은 조금 하지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얼굴에 저를 경계하는 게 다 드러나서요.”
“···요리를 못한다면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소지의 목적이 요리인데 요리를 못하는 엘프를 왜 소지로?

‘혹시 엘프한테 흑심이 있어서?’

솔직히 예쁘긴 더럽게 예뻤다. 소장이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니 그런 마음이 든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뭡니까?”
“소장님과의 비밀이라 이야기해드릴 수는 없어요.”

그렇다는데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 원예반도 있다면서요?”


“있습니다만, 꿈 깨세요.”
“왜요?”
“소장이 원예반에는 절대 엘프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엘프는 숲을 좋아한다. 식물을 사랑한다. 식물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숲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식물을 기르며 행복을 얻는다.

“그걸 순순히 하게 해줄 리가 없잖아요. 출소하라고 해도 안하는데.”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런데 당신은요? 요리가 좋다면서요.”
“저야 대체재가 없으니까 그런 거고.”
“아하, 대체재의 문제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를 대체할 만한 사람도 없거든요.”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있는데.”
“아, 실수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수상했지만 율리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엘프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안 돼요.”


“그건 또 왜요?”
“소지가 됐잖아요? 소지는 출역에서 제외됩니다.”
“그래도 대체재가 없으니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아뇨, 아무것도.”

율리아가 방긋 웃었다.

───────────────
# < 007. 같잖은 수 >

죄수들을 관리하는 교도관. 그리고 교도관을 관리하는 교도소장.

교도소가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 것. 그게 소장의 본질적인 업무다.

지구였다면 교도소의 평판을 생각해 외부 활동이나 압력 같은 것을 추가적으로 신경 써야 하겠지만 적어도


연옥에서는 아니었다.

그저 보다 많은 죄수를 비교적 무사히 출소시키기만 한다면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거기에 추가하자면 몇 가지 납품할 것들을 잘 납품하기만 하면 된다.

“오셨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순찰.

김우진은 감옥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그가 만들어놓은 광경을 구경했다.

모든 편의시설과 죄수들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이 존재하는 한 채의 건물. 그곳을 중심으로 정원이 펼쳐져 있다.

원예반을 통해 가꾸고 관리되는 정원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잘 깔린 길을 지나면 비닐하우스 같은 가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드넓은 정원의 4 분의 1 을
차지하는, 수많은 식물들을 기르는 식물원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식물들이 펼쳐져 있었다. 간수와 죄수들이 보였다.

“얌전히 좀 있으라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 죄수의 머리에 시커먼 독을 뿌리는 식물은 알트미히라는 식인식물이다. 인간과 동물은 물론 몬스터까지
잡아먹는 흉악한 놈. 놈의 독은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지독한 산성이다.

“이쪽은 제압했습니다!”
“그럼 바로 안정제 투입시켜!”
“그러니까 제때 비료 주라고 했잖아! 밥을 늦게 주니까 배고파서 이 지랄이 난 거 아니야!”

수십 개의 줄기를 뻗어 죄수들을 제압하려고 하는 식물은 아르니카. 마찬가지로 생명체를 잡아먹는 식인 식물이다.

언제나와 같은 평화로운 모습에 김우진은 굳이 자신이 왔음을 알리지 않았다.

식물원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주변에는 마력 결계가 쳐져 있어 식물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한참 후, 모든 소동이 종료 되었다. 교도관과 죄수들은 그제야 소장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소, 소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전에. 커피 한 잔 줘.”
“예.”

교도관이 아이스 커피를 타왔다. 죄수들이 김우진의 앞에 일렬로 섰다.

“영약 수확은 예정대로 되고 있나?”


“예. 11 종류의 영약이 각각 하나씩 수확되었습니다.”
“다행이군.”

영약은 기르기도 수확하기도 까다롭고 힘들다. 하지만 윗놈들의 요구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고 영약의 수확량을
맞추는 것은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아슬아슬하군. 10 개만 추리고 나머지는 저장고에 넣어놔. 저장고에 들어가는 건 가장 훌륭한 놈으로.”


“예.”
“사료 공급은?”
“문제없습니다.”
“다른 특이사항 있나?”
“설명초가 죽었습니다.”
“몇 뿌리나?”
“네 뿌리가···.”
“하나 남았군. 이유는?”
“온도입니다. 두 개는 얼었고 두 개는 말라 죽었습니다.”

설명초는 극한의 설원에서 자생하는 식물이었다. 추운 곳에서 살아가는 주제에 너무 추우면 얼고 조금이라도
온도가 높으면 말라 죽는다.

구하기 어렵고 키우기는 더 까다로운 놈. 그럼에도 유명한 건 만개한 설명초의 열매가 꽤나 정순한 영약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일단은 살아 있습니다. 온도를 찾은 것 같기도 하지만 미세하게 조금씩 변하는 놈인지라···.”
“계속 지켜봐. 씨앗을 몇 개 더 구해줄테니.”
“예.”
“더 없나?”
“더 이상은 없···아, 하나 있습니다.”
“만드라고라! 만드라고라가 싹을 피웠습니다.”

회색빛 귀를 가진 수인족이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그의 안내에 따라 식물원 심처로 들어가자 검은색의 흑토 위로


자그마한 싹 한 개가 올라와 있었다.

주변에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수십개의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진짜네?”

만드라고라는 식물이라기보다는 마물이다. 하지만 그 뿌리가 가지는 효용은 어지간한 영약들을 모조리 씹어먹는다.

“이걸 어떻게 길러냈지?”

김우진이 찬찬히 열 명의 죄수들을 훑었다. 키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 있다. 동물의 귀가 나 있다는
것.

저들은 모두 수인이다. 큰 이유는 아니다.

엘프에게 나무를 벌목하게 만들었듯, 수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식물을 맡긴 것이다.

처음에는 온갖 사고를 치고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던 그들이 지금은 어느 차원에서나 영약으로 친다는, 엘프도
피워내기 어렵다는 만드라고라를 피워냈다.

연옥이 아니라면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면 세계수를 맡겨도···.’

물론 세계수는 김우진이 직접 관리할 거다. 하지만 24 시간 모든 정신을 쏟을 수는 없었고 틈틈이 그를 대신해 잘


관리해줄 자가 필요했다.

씨앗을 준 당사자에게 맡기는 게 베스트겠지만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에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죄수들 중에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자란 존재하지 않다. 그저 파악이 된 자와 덜 파악이 된 자로 나누어질


뿐.

연옥이라는 감옥이 상실과 탈옥. 오직 두 가지의 선택지만 제공하는 한, 언제나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섣불리 수인족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맡기는 건 무리가 있어.’

아직은 더 신중해야 할 일이다.

식물원을 한 바퀴 돌며 마저 확인한 김우진이 밖으로 나왔다. 가볍게 발을 구르자 몸이 높이 떠올랐다.

감옥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앙의 감옥, 주변으로 넓은 정원, 그 내부에 존재하는 식물원과 도축장, 숲과 호수, 여러 풍취들. 그리고
정원을 감싸고 있는 낮은 담과 그 너머의 광활한 대지.

산이, 설원이, 숲이, 사막이, 바다가 펼쳐진 땅은 마치 행성 하나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았다.


“숲에 심는 게 낫겠지.”

세계수는 다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을 때 그 진정한 힘과 아름다움을 발한다. 숲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세계수는


쉽게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냥 심을 수는 없다.

김우진은 세계수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지만 많은 걸 알지도 못했다.

특히, 씨앗을 보는 건 처음이었고 세계수가 자라나면서 어떤 게 필요한지도 미지수였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전문가다.

* * *

“세계수는 숲에다 심으면 안 돼요.”

개인면담은 죄수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닌 소장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면 숲이 모조리 말라비틀어질 거예요. 그건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죠.”

세계수가 싹을 피우는데는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다. 자연스레 씨앗이 발아하면서 주변의 마나를 모조리
빨아들인다.

숲과 산이라면 나무들이 생명력을 잃고, 호수라면 물이 모두 마른다.

“그러면?”
“그래서 사막이나 황무지에 씨앗을 심는 게 일반적이에요.”

율리아의 말에 김우진이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세계수는 언제나 숲의 중심에 있지 않았어?”


“순서가 잘못 됐어요. 숲에 세계수를 심은 게 아니라 세계수가 성장한 뒤, 숲을 만든 거예요.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는 생명력을 주변으로 퍼트리거든요.”
“그렇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생각을 변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럼 숲 중앙에 심는 걸로.”


“제 말 이해하신 것 맞죠?”
“결국엔 다시 자라난다는 거잖아. 시간이 걸릴 뿐이지.”

나무들이 모조리 죽겠지만 다시 자라나면 결국 똑같다.

“하지만 굳이 나무들을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하이엘프에게는 아니겠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양분으로 삼을 마나가 필요할 뿐이에요. 부족하다면 보충해주면 되죠. 굳이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지 않아도 될
만큼.”

김우진은 율리아의 말뜻을 이해했다.

“싫어.”

그래서 거부했다.

“아까운 영약을 이런 곳에 쓸 수는 없지.”

영약을 키우는 건 어렵다. 굳이 구태여 수인들에게 그 역할을 맡겼기에 더 그렇다.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하나가 아쉬운 상황. 굳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를 영약으로 해결해줄 용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포기가 빠르군.”
“이미 마음을 굳히셨는데 제가 억지를 부린다고 들어주시진 않을 거잖아요?”

정확히 봤다.

김우진은 율리아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전 출소할 마음도 없고요.”

만약 격하게 달라붙는다면 출소를 거래 조건으로 삼으려고 하기도 했고.

“세계수를 심을 때 주의해야할 점 같은 게 있나?”


“아까 말씀드린 것만 조심하면 되요. 마나를 빨아들이는 것. 예외는 없어요.”
“참고하지.”

아, 한 가지 더.

“왜 순순히 다 대답해주지?”
“하이엘프니까요.”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넘기긴 했지만 어머니 나무가 무탈하게 싹을 피우고 자라나기를 바라니까요.”
“세계수의 씨앗을 거래의 대가로 넘긴 것부터가 하이엘프 실격 아닌가?”
“어머니 나무께서도 그 정도는 이해해주실 거예요.”

하이엘프는 뻔뻔한 게 종특인가.

김우진은 이전에 만났던 하이엘프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없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들만을 무성하게 들었을 뿐 하이엘프를 직접 보는 건 율리아가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소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탈옥이 아니라?”
“말씀드렸잖아요. 연옥의 죄수들 중, 탈옥을 원치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세계수의 씨앗에 이상한 짓을 해놓은 건가?”
“어머니 나무의 씨앗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해요. 그걸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마 없을 걸요. 어머니 나무께
맹세해요. 그 씨앗에는 어떠한 손길도 가미 되지 않았어요.”

엘프들의 맹세는 믿을 수 있었다. 여전히 꺼림칙했지만 김우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 고마우시면 원예반으로 보내주시는 게 어때요?”


“끌고 가.”

율리아가 사라졌다.

“교도관 한 명 더 붙여.”
“예.”
“···잠깐만.”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김우진의 뇌리를 스쳤다.

“애초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면?”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소지는 그저 더 중요한 것을 감추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면?

“···말이 돼.”

세계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대하다.

세계수가 품고 있는 힘은 무궁무진하다. 그 나무가 연옥에 뿌리를 내리고 제대로 가지를 뻗는다면.

어쩌면.

“감옥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탈옥을 한다? 세계수의 조력을 받는 하이엘프라면 불가능은 아닐 거다.

아무리 김우진이 막는다고 하더라도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조합의 끝이 어딘지 짐작할 수조차 없으니.

“하, 같잖은 수를 쓰시겠다.”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2 징벌방은 분명히 힘들었다. 초반에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중반부터는 익숙해졌다.


본디 고통이라는 게 그렇다. 처음에는 죽을 듯이 아프다가도 계속되면 인간의 육신은 결국 적응하고 만다.

때문에 강민식은 자신의 말이 그렇게 파란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게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은 어디서나 중심이 된다. 잘하면 이걸 빌미로 죄수들을 선동해 탈옥에 대한 의지를 불어 넣을 수도
있을 거다.

‘반드시 나간다. 반드시.’

평생 여기서 썩으라고? 그게 싫으면 개고생해서 얻은 힘을 전부 토해내라고?

그 따위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식사하세요.”

때마침 열린 배급구 사이로 들어오는 식판에 상념이 끊어졌다.

“어?”

하지만 그의 시선은 식판보다 그것을 내려놓는 손에, 귀는 목소리에 닿았다.

“···율리아?”
“맞아요.”

식판을 치우고 배급구로 고개를 내밀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율리아가 배식 카트를 밀고 있었다.

“···어떻게?”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요.”
“맙소사.”

강민식은 어딘가 이상해보이던 동료 죄수가 더 없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율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이대로 일단 연옥의 구조를 파악해볼게요.”


“네, 아, 잠시만요.”

그때, 교도관이 다가왔다.

“지금 뭐하는 거지? 배식을 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릴 필요가 있나?”


“죄송해요. 1177 번이 자꾸 부족하다고 더 달라고 하네요.”

교도관이 수상쩍은 시선을 보냈지만 율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더 달라고 하면 더 주면 된다. 음식은 항상 충분하니까.”


“아, 그래도 되는 건가요? 몰랐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새로운 식판에 음식을 가득 담아 배급구로 넣었다.


손이 다시 나왔을 때 자그마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지만 손에 가려져 교도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율리아는 몰랐지만 그건 카메라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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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8. 씨앗 >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목숨의 위협을 받아도 아무것도 불지 않는 교도관으로부터,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료가 된 엘프에게 몰래 반입해 온 카메라를 넘겼다.

더 이상 무언가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껏해야 다른 죄수들과 접촉하여 감옥에 대해 알아보고, 일과를 따르면서 감옥의 모습을 직접 확인해보고,
소지가 된 엘프가 찍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

제대로 된 탈옥 계획은 그 이후가 될 거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으니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날뛰는 건
미련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1177 번 나와라. 정신교육 시간이다.”

죄수들의 아침의 시작은 정신교육이다.

군대에서 지겹게 들었던 기상나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소지가, 아니 소지들이 식사를 배급해준다.

강민식이 생각하기에 이 감옥에서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식사였다.

감옥임에도, 죄수들을 혹사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실천하고 있음에도 식사만큼은 지구에서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 맛이 있었다.

음식이라는 건 큰 위안이 되기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식사 시간이 죄수들이 더 없이 기다리는 시간임을, 출소를 선택하지 않고 더 버틸 힘을 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어쨌든, 그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교도관의 인도에 따라 정신교육실로 들어간다.

정신교육이라고 명명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체들의 접촉.

돌아가면서 죄수들의 고향 행성의 전경을 보여준다. 어디는 중세고 어디는 늪이며 어디는 정글과 초원이다.
그리고 어떨 때는 한국의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한다.

강민식은 그것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무미건조한 감옥 생활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면서도,

저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지금의 처지가 비관적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소장의 의도는 반쯤 성공했다.

절반은 오히려 탈옥에 대한 열망을 더욱 크게 만들어 줬으니.

2 징벌방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 대부분의 죄수들은 강민식과 거리를 두었다.

이해는 한다. 그의 돌발행동으로 인한 불똥들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멍청이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저들의 겁이 저들을 평생 이곳에서 썩게 만들 거다.

“잘 잤나?”
“예.”

그나마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옆방의 드워프 한 명 뿐이었다.

“이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네.”


“징벌방 말입니까?”
“그래.”

정신교육 시간에는 죄수들을 크게 터치하지 않았기에 마침 강민식도 기다리던 주제였다.

“저도 묻고 싶었습니다. 2 징벌방을 할 만하다고 한 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대단하네. 자네가 2 징벌방에서 있을 때, 어땠나?”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런 통증을 어떻게 열흘이나 버틸까 앞이 막막하더군요.”
“그게 일반적이지.”
“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더군요.”
“익숙해져?”
“예, 원래 맞는 것도 계속 맞다보면 단련이 되어 익숙해지지 않습니까?”
“흠.”

데르카인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강민식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곧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난번에 저에게 그러셨죠. 무분별하게 일을 벌이는 건 멍청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맞네.”
“2 징벌방에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확실히 저는 감옥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행동을 해 소장의 분노를 샀죠. 그래서 당분간은 좀 얌전히 있을 생각입니다.”
“당분간이라는 건 탈옥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는 거군.”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응원하겠네.”
“좀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함께 준비해서 함께 나가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게 있으신 겁니까?”
“알고 있나? 여기 죄수들 중에서 탈옥을 가장 많이 시도해 본 게 나네.”

데르카인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쳤고 그래서 이제는 불확실한 계획에 움직이고 싶지 않아. 자네에게는 징벌방이 할만 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니까.”
“그 말씀은 확실하기만 하다면 협조해주시겠다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가는 걸 싫어하는 죄수는 없다고.”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어졌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정신교육을 계속되고 있었다. 초원과 정글, 날뛰는 몬스터들. 초원을 달리며
그들과 투쟁하는 수인들.

오늘 정신교육의 타겟은 수인족이었다.

흥분과 그리움으로 가늘게 떠는 수인족들을 뒤로 한 채, 교육은 한 시간 후에 끝났다.

“모두 나와라.”

죄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때?”

강민식이 먼저 빠져나갔다. 데르카인은 나가는 인파의 뒤쪽에 붙었다. 시에나가 작게 속삭였다.

“여전히 탈옥에 대한 의지가 충만하네. 그래도 당분간은 얌전히 상황을 보겠다는군.”


“컨트롤이 조금 된다면 끌어들여도 되지 않겠어?”
“단순히 그렇다기에는 조금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 말이네.”
“석연치 않은 점?”
“2 징벌방. 시간이 지나니 2 징벌방에 익숙해졌다는군.”
“그게 말이 돼?”
“안 되네.”

징벌방의 고통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죄수의 한계를 파악하고 익숙해질 만하면 그 이상으로
통증을 주니까.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걸 당당하게 행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는데?”
“징벌방의 고통을 임의대로 통제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네.”
“소장의 끄나풀이라고? 갑자기 왜?”

시에나가 의문을 표했다. 그간 잘 지내던 소장이 갑자기 죄수를 끄나풀로 심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왜겠나.”

데르카인이 입술을 씹었다.

“어디선가 세어나간 거겠지.”


“···그건 말도 안 돼.”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아주 천천히 준비했다. 탈이 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소장이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적어도 시에나의 생각은 그랬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알아차린 건 아니네. 단순한 짐작이겠지. 확실한 증좌가 있었다면 소장이 끄나풀을
심었겠나?”
“그냥 죄다 징벌방에 쳐 넣었겠지.”

시에나가 동의했다.

“어쩌면 비약일 수도 있네. 단순히 그동안 너무 풀어줬으니 혹시 몰라 대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진짜로 특이한 체질일 수도 있지.”

우주는 넓고 차원은 많다. 특이한 돌연변이들도 넘쳐나는 세상. 강민식이 특별하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단지 지금은 소장의 끄나풀이라는 생각에 더욱 확신이 가는 상황일 뿐.

“속단하긴 일러. 일단은 지켜봐야지.”


“당분간 준비를 멈추고 다 숨기라고 해야겠네.”
“그래야지. 아직 완벽하지 않으니.”

지금 시점에서 섣불리 실행하는 것은 최악의 수였다.

* * *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을 어루만졌다.

하이엘프의 속셈을 알고 나니 들끓던 열정이 팍 식었다.

세계수를 만개시켜 연옥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싶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하이엘프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려면 두 가지, 그에게 선택지가 존재했다.

하나는 하이엘프가 출소하거나 늙어죽은 뒤에 세계수의 씨앗을 심는다.

“소장님이 늙어 돌아가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부소장의 진실된 충언에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용사야. 인간의 수명 따위는 한참 전에 뛰어 넘었다고.”


“저쪽은 하이엘프에 용사입니다.”
“빌어먹을.”

그도 안다. 그래서 하이엘프가 싫다.

그렇지 않아도 긴 세월을 살아가는 하이엘프가 용사까지 되었으니 그 끝이 과연 어디일까.

“죽여 버릴까?”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운영에서는 더 없이 자유롭지만 용사의 죽음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부소장.”
“예.”
“세계수가 무엇인지 알아?”
“엘프들이 신성시 여기는 신목 아닙니까?”
“나는 그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야.”

세계수는 나무다. 하지만 단순한 나무라면 엘프들이 그렇게 신성시 여길 이유가 없다.
생명력을 퍼트리고 순수한 마나를 품고 있을 리도 없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계수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 엘프들의 섬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기지.”

이 또한 평범한 나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의지를 가진 나무.”
“정기를 가진 것들이 의지를 가지면 그걸 뭐라고 하지?”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부소장이 탄성을 내질렀다.

“정령!”
“그래, 맞아. 세계수는 정령이야.”

평범한 정령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위대한 정령.

정령계의 정령들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

“그리고 정령은 세뇌가 가능하지.”

이론적으로 의지를 가진 생명체라면 마법으로 세뇌가 가능하다.

“세계수의 정령이 일반적인 정령과 같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야 당연하지.”
“하이엘프는 세계수의 씨앗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근데 그걸 세뇌시키겠다고요?”
“응.”
“······.”
“······.”

잠깐의 침묵. 부소장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해보셨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만약 잘못 건드리면···.”
“기껏해야 폭주하기밖에 더 하겠어? 그래도 성체라면 모를까 아직 씨앗이니까 가능성은 있을 거야.”
“일단 하이엘프에게 물어보고 하는 게···.”
“당연히 말리겠지.”

김우진이 씨앗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허락받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파지직-

마나가 움직였다. 외부의 침입에 씨앗이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용사는 강자다.

그리고 하이엘프는 더 없이 마나에 민감하다.

구속구로 인해 힘의 일부가 제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폭발하듯 요동치는 세계수의 정기를 느끼지 못하는
하이엘프는 없었다.

“아.”

율리아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감옥에 당도한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세계수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무엇에?

광폭한 마나였다. 뜨거운 열기는 세계수의 씨앗을 강압적으로 간섭하고자 하고 있었다.

“···안 돼.”

세계수는 완전에 가까운 존재다.

세계수가 엘프들의 섬김을 받는 것은 그만한 힘을 가진,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위대한 정령이고 성체의 힘은 왕에 필적한다. 그리고 왕은 결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비록 덜 자랐다고 해서 그 본질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세계수는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공생하며 의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잘못 건드린다면 세계수의 분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리라.

“어? 어디 갑니까!”

양파를 썰던 율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1178 번! 지금 뭐하는 거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교도관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율리아는 저들과 자신의 격차를 가늠했다.

구속구를 찬 상태에서는 둘이나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도망치는 건 가능하다. 그들을 뛰어넘었다. 아슬아슬한 손길이 그녀의 몸을 스쳤다.

“죄송해요!”

사과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1178 번이 도주한다!”
“잡아!”

교도관들은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애애애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그녀의 탈옥을 알렸다.

결국 그녀는 붙잡히고 말았다. 소장실의 코앞에서.

쿵-

교도관들의 손에 붙잡힌 율리아의 육신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픈 통증에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1178 번. 이게 무슨 짓이지?”
“감히 탈옥을 하려고 하다니!”

분노한 교도관들의 음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눈에 집중되어 있었고 시선은 굳게 닫힌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만 놔주시면 안 될까요? 확인할 게 있어요.”


“개소리하지 마라.”

격렬하던 마나의 파동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문제는 이미 발생했다.

“진짜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소장님께 보고를···.”

끼익-

그때, 문이 열렸다.

“무슨 소란이지?”

소장이 나왔다.

율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조금, 그녀의 시선이 내려갔다.


소장의 손바닥 위.

우우웅-

씨앗은 그곳에 있었다.

스스로를 작게 진동시키며 마나를 퍼트리며, 소장의 마나와 공명시키며.

“말도 안 돼···.”

마치 애교라도 부리려는 듯이.

감옥에 당도한 이후, 처음으로 율리아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
# < 009. 계획 >

“아.”

율리아는 직감했다. 소장이 정확히 어떤 수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성공했다는 것을.

세계수의 씨앗에 간섭했고 성공했다.

씨앗이 누군가에게 저런 호감을 드러내다니. 하이엘프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한 거죠?”

세계수의 씨앗이다. 비록 성체에 비하면 미약할지라도 존재 자체만은 완벽에 가깝다. 그러한 씨앗에 간섭하고
조작하다니.

그런 게 가능할 거란 상상은 살면서 해본 적이 없었다.

연옥에 들어온 이후, 율리아는 지금처럼 당황한 적이 없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김우진이다.”

그녀를 경악하게 만든 인간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지구의 인간이고.”

마치 당연한 걸 해냈다는 듯이.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 연옥의 소장이지.”

담담하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너는 내가 관리해야하는 죄수번호 1178 번이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점심시간이 코앞인데 소지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죄. 교도관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교도소를 활보한
죄. 그리고 감히 소장의 방에 무력으로 침입하려고 한 죄까지. 벌점 10 만점.”

선고를 내렸다.

“이지만 1178 번의 행동에는 나름의 납득이 가는 타당한 이유가 있음으로 8 만점 삭감.”


“2 징벌방 이틀 형에 처한다.”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시선이 더욱 가까워졌다.

김우진이 하이엘프의 기다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드디어 그 태연한 얼굴에 금이 갔군. 아주 보기 좋아.”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란 것, 알잖아요.”
“내가 거기에 대답해 줄 의무가 없다는 것도 알 텐데.”

조금의 타협점도 없는 단호한 눈빛에 율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1177 번 죄수가 말하길, 할 만하다고 하는데 저도 그럴까요?”


“예외는 한 번으로 족할 것 같은데. 뭐. 직접 해봐야 알겠지.”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되겠죠?”
“감옥에 왔으면 감옥의 규칙을 따라야지. 소지가 하고 싶다고 해서 시켰는데 이러면 곤란하잖아?”
“그럼 나왔을 때 씨앗에 어떤 짓을 하신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내가 무슨 대답을 할 것 같아?”
“어떻게 하신 건지도요?”
“원한다면 난 네가 궁금해 하는 것 전부다 말해줄 수 있어. 기브 앤 테이크라고 대가가 따를 뿐이지.”
“···그냥 끌고 가세요.”
“끌고 가.”

율리아가 축 늘어진 낙지처럼 힘없이 교도관들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소장이 중얼거렸다.

“···하이엘프가 저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무언가 되긴 된 거군요.”


“아마도. 그러니까 이렇게 아양을 떨겠지.”

김우진이 제 손바닥 위에서 미약하게 진동하는 씨앗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직접 하시고 확신은 없는 겁니까?”


“씨앗이라도 세계수는 세계수인지 생각보다 더 단단해. 원하는 바를 완전히 이루지 못했어.”
“그럼 실패 아닙니까?”
“실패는 실패지. 하지만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고.”
“성과라면?”
“호감.”

아주 작은 호감.

“세계수가 좋아할만한 점을 부각시켜서 나에 대한 친근함을 새겨줬지. 그렇게 호감을 얻었어.”


“그것만으로 이런 반응을 일으킨다는 겁니까?”
“아마 하이엘프에게도 똑같이 할 걸.”

율리아가 나타났을 때, 씨앗의 진동은 보다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지자 다시 미약해졌다.

“그럼 부족한 것 아닙니까?”


“부족하지. 원래 목적을 생각해보면 한참이나.”

그래도 그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아예 아무 것도 못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야.”

적어도 출발선은 같아졌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세계수가 발아하고 난 뒤에나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김우진은 조금이라도 친근감을 더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나를 주입했다.

* * *

“사기꾼.”

언제나와 같이 배급을 받았다. 그런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함께 딸려 들어왔다.

강민식이 배급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할 만하다면서요. 익숙해진다면서요.”
“···아. 2 징벌방에 이틀 동안 들어가셨었죠?”
“당신, 혹시 변태에요?”
“예?”
“고통을 즐긴다거나, 고통을 성적 흥분으로 여긴다거나, 고통을···.”
“그만! 저 진짜 그런 놈 아닙니다.”
“글쎄요.”

그가 억울함을 토로해도 율리아의 눈빛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할 만 했기에, 익숙해지기에 그런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게 말이 안 되던데요.”

고작 이틀이었으나 율리아는 어째서 죄수들이 징벌방을 싫어하고 강민식을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이해했다.

징벌방은 단순한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마나로 이루어지는 통각 자극.


육체에 존재하는 모든 통각들을 건드리고 자극한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더 많은, 강한 마나를 퍼붓는다.

거기에 ‘익숙’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저는 진짜 그랬습니다.”
“음, 선천적으로 통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멀쩡합니···아악!”
“멀쩡하네요.”
“···그렇다고 꼬집으실 것까지야.”

강민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카메라는 어떻게 잘 찍고 계십니까?”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틀 동안 징벌방에 들어가 있어서 찍을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도 다행인건 부셔지진 않았네요.”

징벌방은 본래의 독방을 일시적으로 변형시킴으로서 만들어진다. 벽이 좁혀지고 구조가 변해 잘 숨겨놓은


카메라가 휩쓸려 망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방이 복구 되었을 때

그 자리에 그 대로 있었다.

“단순한 물리적 변형이 아니라 마법을 이용한 공간의 비틀림이라는 뜻이죠.”


“그렇군요.”
“한 번 노력해 볼게요.”
“부탁드립니다.”
“당신은요?”
“혼자보단 둘이 더 낫고, 둘 보단 셋이 더 낫습니다. 그래서 다른 죄수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오랫동안 시달리고 실패했다면 그럴만도 하죠. 천천히 가요.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급할 필요 없잖아요?”

율리아가 카트를 끌고 사라졌다. 저 멀리서 교도관들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시간이 많다고?”

홀로 남은 강민식이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한테? 자신한테? 아니면 엘프한테?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엘프들이 태평한 건 어느 차원이든 종특인가보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인간은 짧은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체감도 다르다. 비록 용사가 되어 수명이 아득히
늘어났다고 해도 몇 년을 우습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다른 죄수들을 설득해야 해···.”

지난 일주일간 꾸준히 무언가를 알아보고 해보려고 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폭동을 일으켜 아예 감옥 자체를 마비시키는 것. 탈옥을 막을 수 없게 하는 것.

30 명이 조금 넘는 죄수들 중 누군가 탈옥을 한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다.

All or Nothing. 연옥의 탈옥은 둘 중 하나다.


‘소장이 걸리긴 하지만···.’

아직도 그날, 정신교육 시간에 본 영상이 떠오른다.

홀로 죄수들을 막아서던 모습. 그리고 최종 승자가 되어 오만하게 죄수들을 내려다보던 그 눈빛.

물론 여러 가지 사족은 있다. 데르카인은 죄수들의 몸 상태가 최고가 아니라고 했고 영상 속의 죄수들은 열 명


남짓이었다.

지금은 무려 30 명이 넘어가고.

차이가 크다. 만전의 상태에서 그들이 모두 구속구를 풀고 한 번에 덤빈다면 아무리 소장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용사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한 세상을 구해낸 업적과 경험이, 그로 인해 축적된 힘이 있기에.

‘그러니까 설득만 하면 돼.’

데르카인은 말했다.

확실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면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그리고 강민식은 데르카인을 비롯한 죄수들을 설득할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의 손이 목을 옥죄고 있는 검은 초크에 향했다.


움직임 자체나 착용감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지만 마나 자체를 제어하고 있는 빌어먹을 물건.

“이것만 무리 없이 풀 수 있다면.”

죄수들은 기꺼이 탈옥을 선택하리라.

그가 내민 손을 잡으리라, 확신했다.

* * *

곤란해.

강민식에게는 여유롭게 말하긴 했지만 율리아는 처음으로 초조함을 느꼈다.

소장이 세계수 씨앗에 간섭하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애초에 염두에 두는 게 이상한 거다.

씨앗이 어떻게 변했는지, 소장이 어떤 짓을 해버린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장이 확인시켜줄리는 만무했다. 그녀가 출소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은.

드르륵-
그녀가 복도를 따라 카트를 밀었다.

“오늘 저녁은 모듬 초밥이에요.”


“궁금한 게 있네.”

방긋 웃으며 자리를 뜨려는데 진중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잡았다. 고개를 숙였다.

“뭔가요?”

죄수번호, 1077 이 물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파동, 자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아마 짐작하고 계신 게 맞을 거예요.”
“세계수의 씨앗인가?”
“민감하시네요.”
“내가 민감하기보다는 세계수가 가지는 마나가 워낙 특별한 거네.”

이해할 수가 없군. 데르카인이 중얼거렸다.

“하이엘프가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고? 고작 소지가 되기 위해서?”


“고작은 아니에요. 단 두 명뿐인 소지죠.”
“나는 드워프지만 세계수에 대해 나름 알고 있다고 자부하네.”

하이엘프가 듣기에 좋은 의미는 아니다. 세계수를 벌목하여 무구를 만들면 어떨까 연구했었던 거니까.

“그런데요?”
“세계수는 정령이자 신목이네. 신목이기에 자아가 생기고 정령이 되었는지, 정령이 깃든 나무이기에 신목이
되었는지 선후는 중요치 않네.”

중요한 건 세계수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

“모든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세계수도 마찬가지지만 일반적인 나무와는 조금 다르네. 세계수의 뿌리는
깊게, 아주 깊게 파고드니까.”

너무 깊은 나머지 그 일부는 공간을 비틀어 차원의 핵에까지 도달한다.

“차원의 핵에 간섭하고 관여하며 놀라운 일들을 해내지.”

그것이 세계수가 신목이라 불리는, 엘프들이 세계수를 신성시 여기는 이유다.

차원의 핵에까지 뿌리가 닿은, 감응하고 그 힘의 일부에 관여할 수 있게 된 세계수는 반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이런, 생각해보니 하이엘프인 자네 앞에서 세계수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해버렸군. 이거 부끄러워.”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이 뭔가요?”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주었다는 건, 씨앗을 심기를 바란다는 뜻이겠지. 심은 세계수는 땅속 깊숙이 들어가
이 차원의 핵에 도달하겠지.”

그러면 아주 작지만 세계수는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물론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 그랬다면 신목이 아니라 그냥 신이라고 불렸겠지.

이제 씨앗인만큼 그 힘은 더욱 약하다.

하지만.

“이 감옥을 감싸고 있는 힘에 간섭해 탈옥을 돕게 하려는 것 아닌가? 그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하이엘프가 고작


소지 자리를 위해 타인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길 리가 없지. 내 말이 틀렸나?”

수백 년을 갇혀 있던 노괴의 눈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
# < 010. 상상 >

“아니라면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나온 즉답. 율리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세계수에 걸고 맹세할 수 있나?”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어쩌면 내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나.”
“1177 번에게는 확실한 단서를 가지고 와야지만 협조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세계수를 통한 간섭은 더 없이 확실하지. 자네는 이미 충분해.”
“탈옥이 하고 싶으세요?”
“굳이 대답이 필요한가?”
“아니에요.”

뜬금없는 말. 데르카인은 그게 처음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라고?”
“네.”

율리아가 등을 돌렸다.

“이만 가볼게요. 교도관들이 눈치를 너무 주고 있어서요.”


“아닌데 맹세하지는 않는군.”
“어머니 나무에 대한 맹세를 그렇게 남발하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한 면피성으로 들리는 건 왜 일까.

“내가 알고 있네. 그런데 그걸 소장이라고 모를까?”


“알 수도, 모를 수도 있겠죠.”

대충 알고 있다는 것 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씨앗에 그렇게 환호했으면서 아직까지 심지 않았다는 것이, 씨앗에 간섭해 무슨 짓을 벌였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긴, 그녀가 생각해도 그녀의 행동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신물이 그 모든 의심을
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소장이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죠. 율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카트를 끌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데르카인이 배급구로 고개를 내밀었다.

양쪽의 배급구는 닫혀 있다. 교관들은 거리가 멀다. 아무도 이 대화를 듣지 못했다.

율리아가 오기 전에 이미 확인했지만 다시 한 번 안도한 그가 벽에 등을 기댔다.

“고작 죄수 둘이 더 들어왔을 뿐인데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나겠군.”

징벌방의 고통을 견디는 놈과 탈옥을 위해 세계수의 씨앗을 바쳐버린 하이엘프.

두 개의 거대한 태풍 같았다.

그 태풍이 절정에 달할 때, 교도소는 한차례 파란을 맞이할 거다.

그리고 그 난장판은 그와 다른 죄수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할 거다.

반드시.

그의 눈이 빛났다.

* * *

마력을 제어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 다수의 방법 중, 강민식의 목에 감긴 구속구는 더 없이 집요하고 지독했으며 복잡했다.

‘술식이 복잡하게 꼬여 있어. 그러면서도 유기적이고.’

방어 체계도 단단하다. 적어도 지금과 같이 마력을 제어 당하는 상황에서는 절대 풀 수 없다.

하지만 강민식은 낙담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어려움은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인간은 본디 도구를 사용하는
종이다.

마력이 부족하다면 마력을 보조해줄 무언가를 찾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감옥에는 그런 시설이 있었다.

‘원예반.’

식물을 길러내는 곳. 그곳에는 다수의 영약들 또한 있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데르카인이 그랬으니 틀리진 않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곳으로 가느냐다. 연옥에 갇힌 지 벌써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그 동안 나간 출역은 모두
환경 조성반이었다.

되도 않는, 의미 없는 벌목. 그가 베어 넘긴 나무가 몇 그루인지 샐 수도 없이 많다.

생각의 흐름이 막혔다. 강민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 위에 누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검은 천장이 보였다.

그냥 힘들다고,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줄까?

아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소장의 성격은 대충 감을 잡았다. 놈은 청개구리다. 죄수들이 원하는 것은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

반대로 한 번 꼬아서 이야기한다고 순순히 속아줄 만큼 어수룩하지도 않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였다. 소지가 된 조력자가 떠올랐다.

죄수번호 1178 번, 율리아 카르센.

모두가 부정적이었던 두 번째 소지 자리를 꿰찬 엘프.

뽑을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주면 된다고 했던 그녀라면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거래를 하면 되요.”
“거래 말입니까?”
“네.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소장님이 혹할만한 걸 주면 되죠.”
“하지만 제가 줄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카메라라는 거 신기하던데 소장님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요? 기능 자체는 기록구와 같지만 마나가 필요 없는데
작동하는 건 처음 봐요.”
“아니, 그게···.”

율리아나 근현대 문명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나 신기할 뿐이다. 특히 소장은 그와 같은 지구, 한국 출신.

놀라긴 커녕 코웃음치며 불법 반입으로 징벌방에 넣지 않을까. 징벌방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다른 건 어때요? 카메라라는 걸 숨겨 들어오신 걸 보면 다른 것도 더 있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 중에 과연 소장을 만족시킬만한 게 있을까?

“그럼 저는 이만 잘게요. 죄송해요. 오늘 유난히 피곤하네요.”


“아닙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끼익, 옆방의 배급구가 닫혔다. 강민식 또한 배급구를 닫았다.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하나가 있긴 한데.’
하나를 챙겨주긴 했지만 하나로는 부족하다. 한 번에 해제된다면 다행이지만 강민식은 자신의 실력을 잘 알았다.

이 복잡한 술식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해제하기 위해서는 수차례의 도전이 필요하고 당연히 필요한 마나도,
영약도 늘어난다.

‘소장이 혹할 만한 것.’

한국의 드라마를 구해서 정신교육 시간에 틀어줄 정도라면 지구의 문물을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닐 거다.

애초에 죄수도 아닌 소장이 감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강민식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그러니까 나랑 거래를 하고 싶다?”


“예.”

탁탁, 김우진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어느새 강민식이 연옥에 온지 한 달이 넘어갔고 그의 개인면담 시간이 되었다.

김우진의 첫 질문은 ‘출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냐?’였고 그의 대답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였다.

앞뒤가 맞지 않다. 질문에 전혀 다른 대답이 왔다.

“무슨 거래?”
“환경 조성반은 질렸습니다. 다른 곳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요구는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근 죄수들에게 너무 관대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물렀거나.

어쩌면 하이엘프를 너무 풀어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네가 보내달라고 하면 내가 보내줘야 하나?”


“아니라는 것 압니다. 그래서 거래를 말씀드린 겁니다.”
“거래? 죄수인 네가 나와 거래를 할 만한 요소가 있나?”
“있습니다.”
“무언가를 반입해 온 건가?”

강민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대답이 되었다.

“···호송대가 요즘 일을 개판으로 하는군.”

율리아도 그렇고 어떻게 자꾸 물건을 숨겨 들어오는 걸까. 김우진이 푹 한숨을 쉬었다.

“엄밀히 따지면 반입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지?”
“용사들이라고 다 같은 용사가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그래서?”
“같은 한국인이니 게임으로 비유하겠습니다. 직업으로 따지면 저는 도적입니다. 은신에 특화되어 있으며 빠르고
함정 같은 것도 잘 다루죠.”
“그래서?”
“하지만 도적하면 빠질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독.”

독과 도적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제 능력 중 하나가 피를 독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 피를 드리겠습니다. 어지간한 독은 전부 뛰어넘을 극독입니다.”

강민식이 스스로 손가락을 깨물었다. 모든 커피를 마시고 텅 비어버린 컵에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극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 다 좋아. 피를 다 빼고 가져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 반입도 안 했고, 네 피가 독인 것도 좋고, 독을


거래 물품으로 삼은 것도 좋은데 여기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있어.”

김우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이걸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해?”

독이란 건 그다지 쓸모 있는 물건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닙니까? 듣기로는 독을 좋아하신다고···.”


“누가? 내가?”
“크라켄의 독을 제거하지 않고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누가 알려줬는지는 알겠네.”

김우진이 콧노래를 불렀다. 검붉은 피가 가득한 찻잔을 들어 부소장에게 넘겼다.

“이거 유리병에 잘 보관해둬. 1176 번에게 먹여야 하니까.”


“예.”
“좋아. 1177 번. 일단 물건을 받았으니 네 요구는 들어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넌 축사장으로 가게 될 거야.”
“···아.”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닙니다. 좋습니다.”
“데리고 가.”
“예.”

강민식이 사라졌다. 독을 챙긴 부소장이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탈옥을 위한 단초를 잡았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라고 보낸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징벌방.”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2 징벌방을 버틴 건 꽤나 놀라운 일이다.

김우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가 있다는 게.

자신이 정해놓은 선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놀려고 한다는 게.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말이 있어. 굳이 시간 끌 것 없이 빨리 잘못하게 만들고 빨리 3 징벌방으로


보내버리려고.”

강민식이 3 징벌방까지 버틸 수 있을까? 버텨내지 못한다면 거기서 끝이다. 조금 특이한 죄수일 뿐.

하지만 만약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이게 맞다. 어차피 결과 값은 예정되어 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걸
빨리 확인하고 안도하고, 발생한다면 빨리 조치를 취하는 거다.

“그러면 그냥 징벌방에 넣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잘못을 해야 벌점을 주고 벌점을 받아야 징벌방으로 보내지.”

마음대로 하고자 한다면 마음대로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줘야지.”

저들은 진짜 죄인이 아니니까.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어, 그러니까.”

‘여기가 축사장이라는 겁니까?’ 강민식이 마지막 말을 삼켰다.

그가 생각한 축사장은 지구의 것이었다. 소와 돼지, 닭 등을 기르고 잡는 곳.

죄수들이 먹는 음식이 나오는 곳인 줄 알았다.

물론 죄수들이 먹는 고기가 나오는 곳은 맞았다. 그런데 지구의 것은 아니었다.

“축사장에 처음 오는 것들은 다 그렇게 놀란단다. 그리고 토를 하지.”


“···그럴 만도 하네요.”

축사장은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물이며 하나는 땅이다.

그리고 그 위를 살아가는 것은 동물이 아닌 괴물이었다.

해상의 몬스터들, 그리고 지상의 몬스터들.


자신들이 지금까지 먹어왔던 것이 짐승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것을 알아버린 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넌 의외로 침착하구나?”


“독성을 기르기 위해 독충이나 독이 많은 몬스터들을 먹기도 했습니다.”
“포식을 통해 능력이 올라가는 타입이구나. 그럼 비위는 좋겠네.”
“상대적으로 괜찮긴 합니다.”
“축사장에서 일할 때 가장 곤란한 게 비위가 약한 자들이란다. 온갖 해악들을 죽여 왔을 텐데 이거는 또 다르다고
얼마나 호들갑들을 떨던지.”

엘프, 시에나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쳤다.

그녀는 축사장의 반장으로서 신입인 강민식을 안내했다.

“적어도 넌 짐은 되지 않겠어.”
“그런데 시에나님. 환경 조성반 아니셨습니까?”
“원래는 여기란다. 숲을 벌목하는 게 내게 더 괴로울 거라 생각한 소장이 임시로 옮겨놓은 거고.”

하지만 이번에 강민식과 함께 다시 원상복귀 되었다. 아마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해서겠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로 2 징벌방이 견딜만 했니?”


“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과연, 데르카인의 말이 맞았구나.”
“네?”
“아무것도 아니란다.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라 모두 신기해서 그런 것이니.”
“네.”

엘프와 인간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럴수록 더욱 강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민식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가 원하는 건 원예반이었다. 축사장은 단순히 동물들을 잡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온갖 영약들을 길러내는 게 원예반이면 축사장도 특별한 게 당연한데.

‘몬스터뿐만 아니라 영물들도 있어.’

그리고 적당한 수준 이상의 몬스터는, 영물에게는.

‘내단이 있다.’

혹은 핵이.

비록 식물에서 나오는 영약에 비해 순도가 떨어지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했다.

강민식이 눈을 빛냈다.
* * *

김우진은 빈 정원에 섰다.

죄수들이 벌목을 하는 곳과는 정반대이며 교도소 건물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정원을 벗어나 떨어진 곳에 심으려 했지만 가까이서 보살피며 호감을 가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손가락을 튕기자 땅의 일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생겨난 구덩이는 대략 5m 정도.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을 꺼냈다. 여전히 그의 마나와 공명하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씨앗을 넣고 원예반에서 챙겨온 잉여 영약 29 개도 함께 넣었다.

한 달에 10 개라는 납품 양을 맞추는 것은 어렵다. 잉여 생산물이 남는 건 더욱 더.

20 년간 모아온 영약이 전부 합쳐 29 개뿐이라는 게 그것을 대변한다. 이로서 그가 소장이 된 이후 모아온 모든


영약이 소진되었다.

굳이 영약을 넣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지만 김우진은 인간이었다. 하이엘프처럼 시간의 여유를 즐길 마음은
없었다.

흙을 덮고 가볍게 다졌다.

“모든 엘프들이 추앙하는 존재로 자라나라. 너의 말이라면 모두 복종하도록.”

그리고 출소를 명하는 거다.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으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엘프가 6 명이니 다 나가면···.”

골칫덩어리 엘프들을 치워버리는 상상은 즐거웠다. 흐릿하게 보이는 희망에 김우진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 011. 가정 >

“소지 일은 할만 하고?”
“네. 적어도 나무를 벌목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괜찮네요.”
“축사장에 가는 것보다도 괜찮을 걸.”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동족애가 강하며 하이엘프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율리아 카르센이 어느 날 뚝 떨어진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한들, 엘프 다섯 명의 무리에 섞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짜 궁금한데 대체 어떻게 소장을 구워삶았니?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거래를 했어요.”
“거래?”
잠시 머뭇거리던 시에나가 재차 물었다.

“혹시 그 거래의 품목이 세계수와 관련된 건 아니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소장의 집무실에서 비롯되었던 숲의 마나를 느끼지 못한 엘프는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더 없이 친근하고 그리운 숲의 정기.

그렇기에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그 마나가 소장의 방에서 느껴졌는가. 왜 그날 율리아는 2 징벌방에 들어갔는가.

시에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애써 부정했다.

모든 종족이 세계수를 특별하게 여긴다. 하지만 다른 종족이 가지는 특별함과 엘프가 가지는 특별함은 또 다르다.

엘프에게 있어 세계수는 신성한 나무, 그 이상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이엘프라는 존재가 세계수와 연관된 무언가를 거래의 대가로 여겨
스스로 소장에게 바쳤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죠. 맞아요. 세계수와 연관이 있어요.”


“···나뭇잎이지?”

여지없이 깨지는 믿음. 하지만 아직 비빌 언덕은 남아있다.

나뭇잎일 거다. 세계수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 중에 그나마 가장 흔하고 덜 중요한.

하지만 그 장엄한 마나가 고작 나뭇잎 정도로 가능할까?

곧장 나오지 않는 대답은 그녀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나뭇잎이라고 말해. 나뭇잎이어야만 해. 나뭇잎일 수밖에 없어.”


“···짐작하고 계시잖아요.”
“···정말로?”

시에나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이 간신히 ‘흐그르’ 수준에서 그쳤다.

“씨앗? 열매?”

세계수의 씨앗, 세계수의 열매. 크게 보면 같다. 씨앗은 결국 열매 속에 있으니.

하지만 엘프들이 말하는 씨앗은 다르다. 맺힌 열매를 건드리지 않고 백년을 놔두면 씨앗이 과실을 모두 흡수하고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게 온전한 세계수의 씨앗이다.

“씨앗이요.”
“돌았니···!”
“거기, 경고다. 잡담 그만하고 얌전히 보도록.”
교도관의 지적에 시에나가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광활하게 펼쳐진 숲과 동족들의 영상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속삭였다.

“너 미쳤니?”
“미치진 않았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하이엘프가 세계수의 씨앗을 인간에게 넘겨? 그것도 고작 소지가 되려고?”

세계수가 어떤 존재인가. 하이엘프가 어떤 존재인가.

시에나는 격렬한 혼동을 느꼈다.

다른 차원의 엘프는, 하이엘프는 원래 이런 건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연옥에는 그녀까지 다섯 명의 엘프들이 있고 모두 각기 다른 차원에서 왔으나 성향과


종족적 특성은 같았다.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그냥 죄수번호 1178 번, 율리아 카르센이 미친 거다.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거나.

그녀는 후자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딱히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전자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서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응?”

시에나의 물음에 율리아는 고민했다.

솔직하게 답해야 할까? 그래도 같은 엘프이니 비밀을 지켜주지 않을까. 어쩌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게 아니라면?

모든 인간이 신용이 있고 착한 게 아니듯, 엘프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 달 남짓은 타차원의 엘프를 알아가기에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쭉 함께 있지 못하고 간간히 출역 때 만나기만 한 걸로는 더욱 더.

“어머니 나무께 맹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세계수에 대한 것은 모든 엘프가 같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

“어머니 나무에 맹세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 되니?”


“거기에 이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추가하면요.”
“어머니 나무께 맹세하는데 네가 하는 말을 절대 누구에게도 퍼트리지 않고 그걸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고도 하지
않을게.”

은은한 제약이 시에나의 심장을 옥죄었다.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의 맹세는 결코 말뿐인 허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신중해야 하며, 더욱 신성하고, 신뢰가 있다.


“소장은 어떤 사람인가요? 사람은 맞나요?”
“내가 질문을 한 걸로 아는데.”
“결과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일단은 그렇단다.”
“일단은?”
“근본이 인간이라는 건 맞지. 지구라는 고향 차원도 명확하게 있고.”

그렇다고 그를 단순한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살면서 저 인간보다 강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단다.”

소장은 인간을 초월했다.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쓴 무언가라면 모를까.

“강한 건 알아요. 그런 것 말고, 조금 더 근본적인?”


“과거나 그런 걸 이야기 하는 거니?”
“비슷하겠죠?”
“몰라.”
“몰라요?”
“소장이 처음 연옥에 온 건 20 년 전이란다. 그런데 그 20 년 동안 소장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애초에 하는 게 더 이상하다. 소장이 죄수에게 과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무도 그가 과거에 어떤 인간이었는지, 무엇을 하다왔고 어떻게 연옥의 소장이 되었는지 모른단다. 우리를
여기로 보낸 개새끼들과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긴 하는데

추정은 추정일 뿐이지.”


“그렇다면 세계수의 씨앗에 간섭을 성공하려면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할까요?”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들으신 그대로가 맞아요.”
“농담하는 거지?”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잠깐의 침묵. 시에나는 애써 할 말을 찾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저도 불가능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날 이전까지는요.”
“어머니 나무에 맹세하고 진실이야?”
“맹세하고 진실이에요.”

맙소사, 그게 그 파동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격렬했구나.

시에나가 얼굴을 쓸었다. 이제야 모든 전말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래서 더 놀라웠다.

그녀가 알기로 씨앗이라 한들 감히 세계수에 간섭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 딴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저도 이해할 수 없어서 묻는 거예요.”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알아?”
“몰라요.”
“이후에 반응은? 세계수의 반응 같은 것.”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소장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저를 대하는 것처럼.”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간섭을 통해 인간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그것도 하이엘프에 준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백 번 양보해서 가능성을 찾아보자면 아예 제로에
수렴하는 건 또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미 결과가 나왔으니 끼어 맞추는 수준이었지만.

“율리아, 넌 연옥의 교도관들에 대해서 얼마나 아니?”


“교도관이라는 것?”
“그리고?”
“좀 친근하다는 거요.”
“그거 아니? 모든 엘프들이 그렇게 느낀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마치 정령 같죠.”

엘프들에게는 더 없이 친숙한 친구들. 교도관들에게서는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정순한 마나가 느껴졌다. 하지만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확신을 내리지는 못했다.

“맞아. 정령이니까.”
“정령이라고요?”
“일반적인 정령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본질은 정령이 맞단다. 확실해. 아마 너도 조금 더 오래 감옥에
있다 보면 깨닫게 될 거란다.”
“잠깐만요. 간수들이 정령이면 소장은···.”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겠지.”

정령술사. 한 가지 가정이 율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째서 호감을 샀는지도 이해가 갔다.

정령술사란 정령친화력이 뛰어난 자들. 태생적으로 정령의 호감을 사는 자들.

그리고 정령이 먼저인지, 신목이 먼저인지 선후에 대한 의견이 갈리지만 그 본질이 나무이자 정령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령술사라고 씨앗에 간섭할 수 있는 건···.”


“그러니까 가정이라고 했잖니. 결과가 나왔으니 가장 그럴듯하게 과정을 끼워 맞추는 가정.”

시에나도 율리아도 그 가정에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엘프와 하이엘프는 왠지 모르게 그 가정이 맞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김우진이 둥글게 깎은 돌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던 게 얼마나 되었다고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역시 일반적인 돌은 씨앗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착 감기는 느낌부터 촉감, 충만한 마나와 은은한 피톤치드 향과 숲에 온 듯한 느낌을 일개 돌이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일반적인 돌은 아니고 마정석입니다.”


“세계수의 씨앗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이의 차이인 건 맞아.”
“그거야 비교 대상이 너무 대단하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부소장의 정론에 김우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강민식은?”
“아직까지는 무난히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끝?”
“특이사항으로는 생각보다 아주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인이랬지.”

그렇다면 마물을 기르고 잡아먹는다는 거부감이 적은 게 이해가 간다.

“그런데 괜찮은 겁니까?”


“뭐가?”
“이제 남은 영약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원예반에서 재배를 한다고 해도 영약이란 건 온전히 길러내기도, 수확하기도 힘든 물건이다.

특히나 그것들을 엘프가 아닌 수인들이 수확하면서 더욱 더.

한 달에 10 개라는 분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가끔 잉여 생산량이 남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부족하기도 하다.

그래서 잉여 생산물들을 창고에 잘 보관해두는 것 아닌가. 그런데 김우진이 모든 잉여물들을 써버렸다. 만약 10


개를 채우지 못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한 번쯤은 괜찮아.”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인들이 원예반을 맡기 시작한 초창기, 영약의 수확률이 급속도로 떨어졌었다.

“그 대신 출소자들이 많아졌지. 영약?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죄수들이 전부 출소하는


거야.”

그렇기에 윗놈들은 어지간해서 김우진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다. 결과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기에.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벼르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런 거 무서우면 이 일 못하지.”
김우진이 코웃음쳤다. 물론 그렇다고 가볍게 넘기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똑똑-

“소장님, 점심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소지가 들어왔다. 김우진이 돌을 던지고 받는 걸 멈췄다.

“부소장.”
“예.”
“내가 잘 보관해두라고 한 것, 어디있지?”
“선반 위에 있습니다.”
“가지고 와.”
“···소장님?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점심이 너무 반가워서. 부소장, 문 닫아.”
“예.”

끼익-

문이 닫혔다.

* * *

“···그러니까 제가 이놈을 도축해야 한다는 겁니까?”

강민식이 칼을 들고 섰다.

“맞아.”

저 멀리 마력 증폭기로 증폭시킨 대답이 들려온다. 축사장의 책임자, 시에나다.

“이걸 도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잡아서 족치면 도축이지.”
“마나가 제약되어 있는 상태에서 혼자 말이죠?”
“그게 소장이 바라는 거란다.”
“그러다 죽으면요?”
“죽진 않는단다. 위험하다 싶으면 교도관들이 널 도와줄 테니까.”

죽을 만큼 괴롭힌다. 하지만 죽이진 않는다. 그게 연옥의 법칙이었다.

“독살해도 됩니까?”
“소장을?”
“아뇨. 저놈이요.”
“해도 된단다. 베르너가 좋아하겠네. 베르너만. 넌 징벌방에 들어가고.”

후우. 강민식이 호흡을 골랐다.


놈을 바라보자 고르곤(Gorgon)도 하나 뿐인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전체적인 외형은 소와 비슷하나 5m 가 넘어가는 거구. 비늘은 잘 단련된 강철보다도 단단하고 발톱과 뿔은 어느
명검보다 날카롭다.

꼬리는 살아있는 뱀이며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다.

아무 차원에나 던져놔도 파란이 일어날 정도의 괴물이었다.

“고르곤도 먹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운동을 많이 한 소라 질기긴 하지만 소지가 적당히 쫄깃하게 만들어줘. 비늘은 여러 가지 가공을 거치면
육포처럼 은근한 맛이 있지.”
“맛있다면 농약도 삼킬 인간들···.”
“미안하지만 난 엘프란다.”

강민식이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마나는 더디지만 흐른다. 구속구는 마나를 제한하는 것이지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기에.

미약한 오러가 검을 감싸고 있다. 육체는 무겁지만 납덩이같지는 않다.

이길 수 있을까?

이겨야만 한다. 여기까지 와서 소장이 바라는대로 손바닥 위에서 놀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죽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독을 쓰지 않고?”


“그래, 딱히 영단이 있는 괴물은 아니니까.”
“영단이 있는 괴물과도 싸우게 됩니까?”
“아직은 꿈도 꾸지 말렴. 네가 조금 더 능숙해진다면 모를까. 이곳에서도 영약은 하나하나가 귀하거든.”

강민식은 희망을 보았다. 결국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기회가 온다는 뜻이었다.

온전히 하나를 홈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싸우는 도중 영단에 손상이 가해져 파편이 일부 쪼개지고 소실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두드드드-

그때, 고르곤이 거칠게 투레질하며 대지를 박찼다.

가로, 세로 100m 의 도축장이 진동한다. 도축장보다는 하나의 경기장에 더 가까운 곳.

시에나는 실제로 도축장에서 경기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무슨 경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딱히 좋은 건 아닐


거다.

그 베베 꼬인 소장이 죄수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리는 없으니.

강민식이 마주 달렸다.

콰아아아아!

전투는 한 시간을 이어졌다. 지루한 승부 끝에 강민식은 결국 피 몇 방울을 떨어트렸고 고르곤은 쓰러졌다.


그리고 2 징벌방 이틀형에 처해졌다.

───────────────
# < 012. 외출 >

10 월 15 일. 맑음.

오늘 세계수를 심었다.
마나가 풍족하면 더욱 빠르게 생장한다는 하이엘프의 말을 믿고 29 개의 영약을 함께 동봉했다.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10 월 17 일. 흐림.

고작 이틀이다. 그런데 마음은 온 통 세계수에 가 있다.

기대가 너무 큰 모양이다. 아니, 희망이라고 할까.

하지만 변명 거리는 있다. 여섯 명의 엘프들을 한 번에 치워버릴 수 있는 기회이니 연옥의 소장이라면 누구나


기다릴 수밖에 없다.

흐릿한 게 곧 비가 올 것 같다. 세계수도 나무니까 물주면 잘 자라나?

율리아가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세계수의 씨앗을 보여달라는 헛소리다. 바로 내쫓았다.

세계수를 심은 곳에 마나를 주입했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앞으로 매일 해야지.

10 월 25 일. 흐름.

축사장에 간 강민식이 아직까지 사고를 치지 않았다. 아마 때를 기다리는 거겠지.

목적이 뭘까. 대충 짐작은 간다. 마물과 마수의 부산물.

뼈, 이빨, 힘줄, 비늘 그리고 영단.

모든 무기나 장비를 압수당했으니 무엇이든 구해놓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놈의 목적을 더 특정 지을 수 있다.

강민식은 콕 찝어 축사장으로 보내달라고 한 게 아니다. 아무 곳이나 환경 조성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축사장이든, 원예반이든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축사장과 원예반에서 공통적으로 구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영단 혹은 영약.

넌 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강민식은 이렇게 쉬운데 율리아는 모르겠다. 자꾸 개인 면담을 신청한다. 전부 거절했다.

10 월 27 일. 강풍.

시에나가 따지고 들었다.

율리아는 소지를 시켜주면서 왜 자기는 안 시켜주냐고.

소지를 시켜줄 테니 출소하라고 하니까 출소하면 어떻게 소지를 하냐고 되물었다.

근데 가능은 하다. 출소를 한다고 바로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보통 사나흘의 텀이 있으니까. 그 시간 동안은


소지가 가능하지 않겠나.

“출소를 결정한 시점에서 이미 죄수가 아닌 것 아니니?”

하지만 이 물음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과연 수 백 년을 산 엘프는 현명하다.

“그래도 바라던 소지는 하실 수 있으니 서로 윈윈 아닙니까?”


“할 말을 잊게 만드는 헛소리구나.”

출소는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다시 엄포를 놓았다. 세계수가 출소하라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그날이 기대된다.

11 월 1 일. 단풍.

연옥의 모든 나무들에 단풍이 폈다. 사실 한 달 전부터 하나씩 물들기 시작했는데 11 월이 되니 거의 모든


나무들의 색이 변했다.

주황빛, 노랑빛, 그리고 가지각색의 나뭇잎들까지. 꽤나 장관이다.

아예 정원 전체를 나무로 가득 채울까.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세계수는 더 장관일 테니 나쁘지 않다.

고생이야 죄수들이 하는 거고.

씨발, 씨발 욕이야 하겠지만 그러면서 출소하겠다고 하면 남는 장사다. 욕한 놈은 징벌방에 넣어도 그만이고.

아니면 드워프들과 관련된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것도 좋다. 드워프들에게 엘프들의 세계수에 비견되는 무언가가
없을까?

그걸 알아내고 이용만 할 수 있다면 드워프 열 명의 드워프들을 모조리 내보낼 수 있을 텐데.

율리아가 또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계속 거절만 할 수는 없어서 만났다. 씨앗을 보여 달라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내보냈다.

11 월 11 일. 비.

빼빼로 데이다. 괜히 감상에 젖어 소지에게 빼빼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놈이 크라켄의 다리를 튀겨서 그 위에 초콜릿을 묻혀 왔다.

끔찍한 혼종이다.

열 받아 놈의 입에 쑤셔 넣었더니 맛있게 먹었다. 한 입 먹어 봤더니 생각보다 맛있었다.

크라켄 자체에 짭짤한 간을 강하게 해 단짠이 괜찮았다.

확실한 건 크라켄은 내가 먹어본 어떤 문어보다 맛있다는 거다.

덕분에 베르너는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 걸 피했다.

11 월 15 일. 맑음.

세계수를 심은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도 없다. 영약을 그렇게 때려 부었는데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율리아가 또 면담 신청을 했다. 거절했다.

11 월 20 일. 맑음.

간만에 문제가 생겼다.

연옥은 구조는 단순하다. 연옥의 건물을 중심으로 담이 둘러싸고 있다. 그 내부가 정원이며 외부는 또 다르다.

정원의 외부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마법처럼 사막, 설원, 산, 숲, 호수 등의 공존할 수 없는 여러
환경들이 펼쳐져 있다.

외부에는 몬스터들이 넘쳐난다. 일부러 풀어 적당히 통제하는 놈들이다.


자연스러운 생태계를 형성해주고 죄수들이 탈옥해 정원을 벗어났을 때, 2 차 방벽 역할을 해준다.

몬스터들의 관리는 교도관들의 몫인데 최근 놈들 사이에 대규모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놈들끼리 싸우는 거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만 한 교도관 말로는 이레귤러가 발생한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

같으면 같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같기도 하다니.

놈에겐 얼차려를 시켰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12 월 1 일. 눈.

달력상의 겨울이 되자마자 첫눈이 내렸다.

나쁘지 않다.

죄수들은 최근 들어 무척이나 얌전해졌다. 왜일까. 단순히 내게 당한 게 많다고 조용해지는 건 용사들답지 않았다.

특히, 가장 탈옥에 열성적이었던 데르카인이 얌전한 건 솔직히 폭풍전야와 같았다.


개인 면담으로 한 번 떠보니.

“늙어서 이제 더 할 힘도 없네.”
“그럼 출소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말인가?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탈옥을 할 계획은 없고 말이죠?”
“물론이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시죠.”
“발랐네.”
“하려면 잘하셔야 할 겁니다. 이번에 걸리면 그냥 안 넘어갑니다. 못해도 3 징벌방, 일주일 이상으로 갈 테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
“안한다니까. 내가 바본가? 그렇게 실패하고 또 하게?”

전혀 신뢰성이 없었다.

경계심이 한층 올라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데르카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쭉 이랬으면 좋겠다. 한 달 후면 간만에 휴가다.

세계수는 여전히 싹을 피우지 않았다.

12 월 15 일. 눈.

또 눈이 내렸다.

세계수를 심은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아직도 싹을 피우지 않았다.

제기랄. 설마 비료가 너무 많아도 죽을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마나과다 복용으로 뒤진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세계수인데.

* * *

김우진이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메마른 입 안을 적셨다. 쌉싸름한 커피 향이 좋았다.

창밖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지고 있는 노을이 눈에 반사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일견 평화롭다.

적어도 담으로 감싸진, 정원 내부는 그렇다.

“교도관이 당했다고?”

김우진이 일기장을 넘겼다. 놈이 처음 언급된 것은 11 월 20 일이다.

몬스터들간의 대규모 분쟁, 전투와 포식으로 인한 이레귤러의 탄생.

교도소 밖에는 워낙 몬스터들이 많은 지라 그리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도관이 당했다는 건 놈들의 수준이 김우진의 생각보다 조금 더 위라는 뜻이었다.

“어떤 놈이지?”
“타르스크가(Tarsque)입니다.”

늪지에 서식하는 거대한 악어 괴물이다.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두터운 비늘은 어지간한 오러로도 쉽게 뚫을 수 없을 만큼 두텁다.

엄니는 길고 날카로우며 악어 주제에 땅에서도 무척이나 빠르다. 꼴에 드래곤의 아종이라고 숨결의 권능이 있는데
독무가 토해져 나온다.

타르스크가의 거대한 주둥아리 속으로 교도관 하나가 들어갔다고 한다. 아마 지금쯤 놈의 위장에서 소화가 되도
열 번은 되었을 거다.

일개 교도관이라고 하나 연옥을 관리하는 자들이다. 그 무력은 결코 타르스크가 따위에게 한 입에 삼켜질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 놈이 정말로 이레귤러라 상정 이상의 힘을 가졌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런 놈은 바로 정리해 주지 않으면 기껏 조성해 놓은 외부의 생태계가 개판이 된다.

그리고 생태계가 망가지면 먹잇감을 잃어버린 놈들의 광기가 교도소로 향하게 된다. 오래 전에 한 번 그랬던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제가 가서 처리합니까?”
“아니, 내가 직접 가지.”

큰 이유는 없다. 연옥에서 가장 한가로운 자를 꼽자면 소장인 그였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세계수. 만약 그가 변종 타르스크가를 처리하러 갔을 때, 세계수가 발아한다면?

율리아를 두고 가기에는 꺼림칙하기 그지없다.

구속구를 찬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보여줬다 시피 작정한다면


교도관들을 요리조리 피해 목적지까지 도주할 수는 있다.

당도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교감이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교도관들을 더 붙이면 되긴 하겠지만 만약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한다.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아.”

율리아가 가진 꿍꿍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모든 죄수들에게는 탈옥이라는 공통된 목적이 존재하고
세계수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는 뻔하니까.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가 세계수에 대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것들 보다 모르는 것들이 더 많을 거다.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1178 번을 불러.”

잠시 후, 율리아가 올라왔다.

“드디어 저에게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보여줄 마음이 생기신 건가요?”


“질리지도 않는군.”
“그럴 리가요.”
“몬스터를 잡으러 갈 거다. 너도 동행해야 하고.”
“제가 왜요?”
“소지는 교도관들이 하는 일을 대신해주는 죄수다.”
“이해했어요. 소장님이 나설 정도면 꽤나 대단한 놈인가 봐요? 드래곤이라도 나왔나요?”

어차피 직접 보게 될 텐데 말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드래곤의 아종이다. 타르스크가. 알지?”


“연옥이라서 그런지 밖에 있는 몬스터도 흔하지 않은 놈이네요. 근데 소장님이 직접 나설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포식을 통해 변종이 됐어.”
“아하.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죠.”

율리아는 쉽게 납득했다. 이레귤러라는 게 쉽게 나타나는 종은 아니지만 용사들의 감옥이 있다는 것보다 놀라울까.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정확히 뭔가요?”


“그냥 잘 따라오기만 하면 돼.”
“그건 딱히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요.”
“의문을 가지지 마.”
“제가 잡으면 씨앗을 보여주시면 안 되요?”
“출발은 내일 오전이다.”
“씨앗을···.”
“데리고 가.”
“예.”

율리아가 사라졌다.

30 분 뒤, 베르너가 저녁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율리아가 말했나?”
“극상의 진미를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베르너가 자신했다.

“타르스크가의 외피는 어지간한 몬스터들을 다 씹어 먹을 정도로 단단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속살은
부드럽고 달콤하기 그지없죠. 몬스터들 중에서도 극상의 진미에 꼽히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그 몬스터가 변종이 되었다. 최상품 위에 극상품이 나타났으니 베르너로서는 반드시 잡고 싶었다.
“싫어.”

하지만 김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데려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반대로 말하면 굳이 데려갈 이유도 없다.

하이엘프에 대해 집중하고 싶은 상황에서 신경 써야 할 짐 덩어리가 하나 더 느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하, 하지만···!”
“시체는 최대한 챙겨서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소장님이 사냥하면 살이 다 망가지지 않습니까!”
“그럼 네가 소장 하던가.”

독도 버려 버리고! 타르스크가는 독이 생명인데!

탁-

문이 닫혔다.

교도관들의 손에 붙들려 질질 끌려 나가는 베르너의 아련한 절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김우진이 쟁반을 열었다. 따끈한 국밥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독도 챙겨 오실 겁니까?”
“대답해야 되나?”

다데기를 풀고 밥을 말았다.

지구에서 먹어본 어떤 국밥보다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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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3. 이게 뭐야 >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율리아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김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말하면 안 된다고 한 적은 없다. 그렇게까지 비밀인 이야기도 아니고.

단지, 베르너가 좀 성가셨을 뿐이다.

정문을 나서기 전, 씨앗을 심어둔 곳으로 슬쩍 시선을 옮긴다.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을 위해서 율리아를 데리고 가지만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쓸데없는 기우. 하지만 연옥의 소장이라는 자리가 기우라 할지라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자리긴 하다.

죄수들이 평범한 자들은 아니지 않은가.

끼익-
정문의 철문에 열쇠를 꽂아 넣은 김우진은 첫 발을 내딛었다.

붉은 모래가 그를 반긴다. 열을 빨아들이는 특성의 붉은 모래는 사람의 수분을 빼앗고 쉽게 지치게 만든다.

생명체가 다니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지만 그런 곳으로 정문을 만든 것은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뻔 한 의도다.

“상당히 덥네요. 불쾌하기도 하고.”

시선을 돌려봐도 보이는 건 지나치게 청명한 하늘과 건조하고 텁텁한 붉은 모래뿐이다.

“왜 소지가 되고 싶었는지 묻는다면 알려주나?”

슬며시 줄곧 가지고 있었던 의문을 묻는다.

“그냥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하이엘프는 땀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섣불리 자신의 본심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그냥은 없다는 거야.”


“왜 궁금하신지는 알겠는데요, 제가 순순히 말씀드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꿍꿍이는 있다는 거군.”
“제가 깨달은 건 세상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다는 거예요. 씨앗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조금 말씀드릴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할까.

김우진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씨앗은 심었다. 영약도 동봉했다. 그 상태로 두 달이 지났으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니, 정말 무방한가?

“세계수가 발아하는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갑자기 화제를 돌리시네요?”

율리아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그를 훑는다. 그럼에도 순순히 대답이 돌아왔다.

“소장님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자란다고 자신하실 수 있나요?”


“세계수도 개체마다 차이가 있다?”
“주변 환경, 마나의 유무, 엘프와의 교감 등에 따라 달라요.”

마지막 세 번째는 사심이 담겨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눈빛을 보낼 리가


없으니.

“평균은?”
“마나가 지나치게 풍부하지만 않았다면 보통은 10 년 정도면 발아해요.”

10 년. 그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에 비하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지나치게 길다.
“지나치게 풍부하다의 정의는 어느 정도지?”
“글쎄요. 지나치게 풍부하게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애초에 하이엘프라고 한들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기회는 몇 번 없어요.”

“왜 그렇게까지 씨앗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


“그러는 소장님은 왜 갑자기 어머니 나무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시죠? 설마 이미 심으신 건 아니죠?”

제법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게 중요한가?”
“당장은 씨앗에 무슨 짓을 해두셨는지가 더 중요하긴 하죠.”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데.”
“어머니 나무의 씨앗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해요. 그것을 뚫고 간섭하고 성공한다는 사례가 없어요. 그러니
하이엘프로서 궁금한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내가 씨앗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궁금하다는 거군.”
“직설적이고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되겠네요.”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두드드드-

막이 진동한다. 겉 표면이 아닌 내부. 땅속에서 올라오는 울림은 무언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샌드웜인가요?”
“아마도.”

김우진은 가볍게 몸을 띄웠다. 마나를 조작하자 율리아의 육신도 함께 떠올랐다.

콰아아아!

직후, 거대한 지렁이가 방금까지 그들이 있던 자리의 모래를 집어 삼키고 사라졌다.

땅 속을 기어 다니는 샌드웜들에게 안 물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지 말고 나는 거다.

“와.”

대지가 저 아래 작아 보일 정도로 올라갔을 때, 율리아는 저 멀리 보이는 풍경에 감탄했다.

“특이한 구조네요.”

건조한 사막의 바로 옆에 늪지와 설원이 붙어 있는 건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았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아니.”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김우진의 의도가 들어간 바가 맞다. 비록 죄수들의 손을 빌렸으나 그 계획과 설계는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지난 20 년 간 참 많이도 갈아엎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니었다. 기형적인 환경 구조를 띠고 있는 것도, 몬스터들이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도
그가 연옥의 소장이 되기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것들이었다.
둘은 빠르게 날았다. 사막을 지나 늪지대에 도착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착지하자 질퍽한 진흙이 달라붙는다. 끈적한 습기는 적절한 불쾌감을 양산한다.

“나쁘지 않네요.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맡으니 더 좋아요.”

허나 늪지라고 해도 주변을 가득 채운 건 나무요 식물이다. 하이엘프에게 있어 늪지 또한 숲이며 숲은 그들의


안방이었다.

숲에 도착한 김에 김우진은 다시 대화의 주제를 본래의 것으로 되돌렸다.

“마나에 따라 세계수의 발아 속도와 생장 속도가 달라진다고 했지?”


“맞아요.”
“만약 영약을 과잉으로 함께 심었다면?”
“어떤 영약을 얼마나요?”
“설명초의 뿌리를 예로 든다면?”
“최상급 영약이네요. 그게 다섯 개쯤이면 적어도 주변에 큰 피해는 없을 거예요.”
“29 개면?”
“그만큼 많은 영약을 심을 필···?”

그 시점에서 율리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모든 대화의 주제가 세계수를 향하고 있다. 세계수의 발아와
생장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영약의 개수가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이미 심으셨군요?”

힌트가 너무 많았다.

김우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심었고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이제 와서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것도 29 개의 영약을 함께 말이죠?”


“빨리 자랐으면 싶어서.”
“아무리 그래도···!”

9 개도, 19 개도 아니고 29 개?

미친 건가. 하이엘프는 자신이 살면서 이토록 놀란 게 얼마나 있었을까 고민해 보았다. 없었다.

“혹시 마나가 과도해서 죽은 건 아니겠지?”

그래놓고 태평하게 저런 질문이라니. 하나만 던져놔도 전쟁이 일어날 수준의 영약을 29 개나 때려 박아놓고.

“어머니 나무를 일반적인 식물과 비교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과생장했으면 과생장했지 죽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영약이 풍족하면 굳이 다른 마나에까지 손을 댈 필요가 없어서 준비를 끝마칠 때가지 알 수 없···심은지 두
달이나 됐다고요?”

다시 한 번 놀라는 율리아와 달리 김우진은 작은 안도를 얻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세계수는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앞으로 세계수가 발아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건 저도 모르죠! 최상급 영약을 29 개나 함께 심은 하이엘프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지끈-

율리아의 고함은 잔잔하게 습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습지의 주인들은 침입자들을 반기지 않았다.

질척이는 지에 깊은 족적을 남기며 나타난 건 거대한 바실리스크였다. 다섯 마리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그러면 내일이라도 발아할 수 있는 건가?”


“그 전에 저것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무기는 검이었나?”

검 하나가 율리아의 앞에 툭 떨어졌다.

“압수된 네 검에 비하면 품질이 떨어지지만 나름 상등품이니 쓸 만할 거다.”


“제가 싸우라고요?”
“소지의 역할은 교도관이 할 일을 대신해주는 거다.”
“구속구는 풀어주시는 거죠?”

쿵, 천천히 거리가 가까워졌다. 몬스터 특유의 악취와 진득한 살기에 율리아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찰칵-

언제 손을 쓴 것일까. 구속구는 해제되어 어느새 김우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율리아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서늘함과 함께 묶여 있던 마나가 용솟음 치는 것을 느꼈다.

힘이 돈다. 그녀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환희에 차올랐다.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나간 자리는 안다고 했다. 고귀한 하이엘프인 그녀가 언제 마나를 구속당할 일이 있었을까.

마나를 잃은 상실감과 박탈감은 상상 이상이었고 다시 되찾았을 때의 고양감과 충만함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검을 곧추세웠다.

그녀가 익숙하게 쓰던 애검과는 조금 다르지만 나쁘지 않았다. 예기가 느껴졌다.

아주 잠시, 세계수에 대한 것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푸하앗-

코앞까지 다가온 선두의 바실리스크가 입을 벌렸다. 푸학, 녹빛의 독무가 뿜어져 나왔다.

율리아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혼탁한 독무와는 다른, 보다 청명한 녹청빛의 오러가 산뜻한 기세를 발했다.


독무가 갈라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흐트러진 독무를 밀어냈다. 뒤이어 바실리스크가 당도했을 때,
율리아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하늘. 태양을 등진 검격이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쁘지 않아.”

전장이 한 번에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 김우진은 뒷짐을 진 채 모든 것을 관망했다.

율리아의 움직임은 가볍고 부드럽다. 동시에 날카로우면서 빠르다.

힘보다는 속도와 부드러움에 치중한, 결을 베는 전형적인 엘프들의 검술이다.

그녀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강철보다 단단한 바실리스크의 비늘들이 떨어져 나간다. 키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은
엘프의 고막을 충분히 타격하지 못하고, 독무는 여전히 닿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적이다.

“나쁘지 않아.”

어째서 하이엘프라는 작자가 아무리 몬스터라 한들 생명을 죽이면서 기쁜 듯이 웃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딱히


중요치는 않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보통 두 가지를 확인한다.

서류를 통해 신상명세를 비롯한 정보를, 상담실의 상담을 통해 무력의 수준을.

율리아는 지나치게 협조적이었던 탓에 후자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지금의 관찰은 당시 이루어지지 않은 상담의
일부였다.

그리고 결과는 그녀가 죄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라는 것.

그냥 타고난 재능일까, 하이엘프라는 이름값일까. 아마 둘 다일 거다.

용사들로 득실거리는 연옥에서도 손에 꼽히려면 노력 없는 재능으로는, 재능 없는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전투는 빠르게 끝이 났다. 다섯 마리의 바실리스크들은 모두 대지 위에 몸을 누였다. 연옥의 풍부한 마나로 인해


중간계의 어떤 바실리스크들 보다 강한 놈들임에도 그랬다.

“오랜만에 하니까 힘드네요.”

바위 위에 걸터 앉은 율리아가 숨을 헐떡였다. 그 순간, 원활히 흐르던 마나가 탁 막혔다.

어느새 목에는 다시금 구속구가 착용되어 있었다.

‘···언제?’

율리아의 동공이 커졌다.

풀 때는 마나가 제약되어 있어서라고 백 번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비록 전투 직전이고 오랜 제약으로 마나하트가 원활하지 않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력과 감각 자체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코앞까지 다가와 그녀의 목에 손을 댈 때까지 알지 못했다.

‘괴물이 한 마리 있다더니. 진짜 괴물이네.’

율리아가 혀를 내둘렀다. 은근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왔다.

“···무척이나 빠르시네요.”
“죄수들을 관리할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진짜로 29 개에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씨앗에는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건데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거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까지 이야기 해줄 생각은 없는데.”
“저는 순순히 다 이야기해드렸잖아요.”
“너도 왜 씨앗을 나로 하여금 심게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잖아.”

폐부를 찌르는 말에도 율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짐작하고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

바람이 분다.
나무가 흔들린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마나가 휘몰아친다.

김우진과 율리아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연옥 방향이었다.

청명함과 산뜻함에 율리아가 경악했다.

“세계수, 맙소사. 설마?”

대답은 김우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드드드드-

연옥과 늪지와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그럼에도 아주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범인을 초월한 인간과 하이엘프의
눈에 연옥 위로 피어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이게 되네?”
그건 나무였다. 무척이나 흐릿하고 작지만 분명히 나무였다.

그리고 이 정도의 파동, 이 정도의 거리에서 보일만한 나무는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고작 두 달 만에···.”

29 개면 그럴 만 할지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못해도 10 년···. 거기다 발아하자마자
저런 과생장은···.

율리아가 혼란을 느꼈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거의 평생을 세계수와 함께해왔으면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동시에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다.

김우진이 씨앗에 무슨 짓을 했는지, 저렇게 자라난 세계수에 별다른 문제는 없는지.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세계수를 확인하고 싶다.

그것은 하이엘프로서 가지는 갈망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쿵쿵 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세계수의 발아와는 완전히 달랐다.

무언가 오고 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타르스크가···!”

김우진과 함께 여기까지 온 목적. 과연 이레귤러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타르스크가는 보통 5m 를 넘지 않는다. 하지만 놈의 크기는 10m 에 육박했다. 다리는 10 개였고 꼬리는 세


개였다.

느껴지는 광폭함과 기세는 거의 드래곤에 필적했다.

놈의 눈에 깃든 광기를, 율리아는 눈치 챘다. 피 냄새다. 그녀가 죽인 바실리스크의 피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다.

율리아는 아무리 소장이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네놈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

하지만 그녀가 무어라 하기도 전, 김우진이 그녀를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율리아는 김우진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주먹을 쥐었다. 화륵, 붉은 빛의 화염이 넘실거렸다.

달려오는 타르스크가를 향해 마주 주먹을 뻗는 건 일견 미련해보였다.

────!
찢어질 듯한 굉음에 율리아가 귀를 막았다. 열기에 몇 걸음 물러났다.

미련한 건 타르스크가였다. 타르스크가의 거구가 일개 인간에게 밀려 허공에 붕 떠 있었다.

타오르는 염화는 순식간에 비늘을 집어 삼켰고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위로.

김우진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떨어졌다.

“···미쳤어.”

그 전율적인 광경에 하이엘프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세계수에 대한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 * *

세계수가 일반적인 나무와 다르다는 걸 김우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나가 풍부한 지역이나, 영약을 주입하면 생장속도가 더 빨라진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서 영약을 넣었다.

무려 스물 아홉 개. 하나만 떨어져도 그것을 갖기 위해 전쟁이 일어날 수준의 영약들을 스물 아홉 개나 넣었다.

그저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우람하게 자라나기를 바라서.

그 영약을 준 것을 생색내며 세계수의 호감을 조금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또 인정한다.

세계수가 연옥의 랜드마크가 되면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씨발, 이게 뭐야.”

한 순간에 건물을 타고 올라가 집어 삼키는 건 결코 바란 적 없었다.

거대한 나무가 연옥의 벽면을 타고 옥상 위로 우뚝 솟아나 있었다.

연옥의 일부가 무너졌음은 당연했다.

───────────────
# < 014. 대안 >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라고 할지라도 변수는 발생한다.


이번 일의 변수는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하이엘프이기에 당연한 믿음. 누구든지 감히 세계수에 간섭할 수 없을
거라는 시간과 존재가 쌓아온 믿음.

율리아는 스스로가 너무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연옥에 들어온 그녀가 순순히 소장의 말에 따른 것은, 어디까지나 구속구만 풀면 소장이라 한들 자신을 핍박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계획대로 모든 것이 흘러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만용이었다.

어째서 그가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의 소장인지, 조금 더 심오하게 고찰해봤어야 했다.

너무 우습게 보았다.

인정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갇혔고 연옥에 온 이상 별 다른 대안은 없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두 가지.

소장이 어머니 나무에게 해놓은 짓이 아무런 효과가 없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이미 한 번 깨어져버린 신뢰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소장의 자비를 구하거나.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리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

* * *

난장판.

가까이서 본 세계수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뿌리 전체가 연옥을 뒤덮고 있으며 울창한 나무 하나가 옥상에서 우뚝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연옥의 본래 형태는 사라진지 오래. 오랫동안 방치되어 넝쿨로 뒤덮인 폐교를 보는 것만 같다.

외관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김우진은 우선 세계수가 발아했고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생장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소장님!”

교도소 내부로 복귀하자 우왕좌왕하는 교도관들 사이로 부소장이 달려왔다.

“변종 타르스크가는 처리했어.”


“지금 그따위 도마뱀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수의 뿌리와 가지가 연옥을 감싸버렸습니다. 발아 과정에서 일어난
마나의 폭풍에 휘말린 마도 장비들이 일부 먹통이 되었습니다.”
“일부라면 어느 선까지?”
“다행히 죄수들의 독방 관리 시스템은 유지 중이라 출역 중인 죄수들을 전부 복귀시켰지만 그 외에는···.”

연옥에서 가장 신경을 쓴 게 독방 관리 시스템이다. 마지막까지 버틴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시스템 복구는 얼마나 걸리지?”


“마나 폭풍으로 잠시 먹통이 되었을 뿐, 고장 난 건 아니랍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죄수들 반응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뜬금없이 자라난 세계수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죄수는 없다.

“이걸 기회로 여기고 탈옥을 준비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어. 평소보다 경계를 늘리도록.”


“예.”
“그리고 1178 번도 방으로 돌려보내.”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때는 분명히···예? 뭐라고요?”

얌전히 김우진의 뒤를 따라오며 창밖으로 보이는 세계수의 면면을 살피던 율리아가 흠칫 놀랐다.

“방으로 돌아가라.”
“잠깐만, 잠깐만요. 조금만, 조금만 더 밖에 있으면 안 될까요? 독방에서는 어머니 나무를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한 시점에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알 텐데.”
“이곳에 어머니 나무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다 말씀드릴게요!”
“궁금한 게 생기면 부르도록 하지.”
“아니, 그래도! 제발! 이건 절 두 번 죽이는 거예요!”

율리아가 감옥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김우진은 집무실로 올라가는 대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세계수를 심어두었던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줄기가 보였다. 어지간한 장성 수십 명이 강강술래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줄기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흔히들 세계수에 대해 모르는 자들이 하는 착각이 세계수가 오직 하나의 줄기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틀렸다. 세계수란 거대한 여러 줄기들이 뒤엉키고 얽혀 하나의 나무를 형성한다.

뻗어나간 줄기들은 주변을 완전히 잠식하고 나아가 연옥으로 향했다. 연옥의 벽면을 타고 옥상까지.

줄기를 따라 김우진 또한 옥상 위로 올라왔다. 휘황찬란한 대지나 벽면과는 다르게 옥상에는 그저 큰 나무 하나만


있을 뿐이다.

하나의 줄기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여러 가지들. 수북한 나뭇잎.

풍성한 피톤치드 향은 싱그럽다. 그저 다가가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은은한 마나는 과연 세계수란 감탄이


나오게 한다.

김우진은 세계수의 줄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가만히 서서 마나를 탐닉했다.

세계수란 시간과 비례해 성장하지 않는 신목이자 정령이다.


나무로서의 정체성이 먼저인지, 정령으로서의 정체성이 먼저인지는 중요치 않다.

적당히 자란 세계수는 자신의 의지를 피력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성장이라면 충분히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정령체로서 현현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렇지 않니?”

- 삐이이이이!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진 반투명한 파랑새 한 마리가 김우진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 * *

영약이란 것은 어느 차원에서든 귀하다. 그게 식물에서 비롯되었든, 동물이나 몬스터에서 비롯되었든 그 정순함의


차이가 있을 뿐, 막대한 마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누군가 대신 쌓아준, 단숨에 경지를 올릴 수 있는 귀중한 물건.

당연히 귀중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철저해?’

영단의 갈취.

강민식이 축사장 혹은 원예반에 나가고자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억압된 마나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축사장이었기에 영단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축사장의 수많은 몬스터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을 도축하고자 두 달 동안 노력했으나 강민식은 여전히 자격을 얻지 못했다.

이유는 많았다.

아직은 신참이기 때문에, 영단은 귀중히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는 영단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아주 사소한 양을 조금씩 긁어내 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근처에도 못 가게 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영단에 문제가 생기면 소장이 난리를 치기 때문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조금 과하다. 어쩌면 저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행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시에나 올름. 축사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그녀가 거슬린다.

어쨌든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변이 발생했다.

연옥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나무.

‘저건 또 뭐지.’
엘프와 하이엘프들이 세계수의 전언이라며 강민식을 돕기는 했지만 세계수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연옥을 뒤덮은 나무가 세계수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저 세계수가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저것이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마나가 풍부해.’

강민식이 교도관 몰래 숨겨온 나뭇잎 여러 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무가 순식간에 성장하면서 낙엽들이 생겨났다. 일개 나뭇잎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풍부한


마나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두 달이 넘게 축사장에 출역을 나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영단을 빼돌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주변을 확인하고 끼익, 배급구를 닫았다. 주변의 소음과 마나가 모두 차단되었다.

한 손에는 나뭇잎을 하나 쥐고 다른 손으로는 구속구를 잡았다.

마나가 부족해 제대로 된 시도는 해보지 못했지만 술식을 파훼하기위한 조사는 매일 같이 행했다.

이제는 더 없이 익숙해진 마법진과 술식.

여러 가지 이론들을 만들어냈으니 이제는 실험을 해볼 시간이다.

강민식이 간섭을 시작했다.

* * *

하늘이 우중충하게 물들고 비와 낙뢰가 떨어지기만 해도 변하는 게 감옥의 일정이다.

세계수의 갑작스러운 발아는 연옥의 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정이 사라졌다. 정신교육도, 출역도 모두 없어졌다. 죄수들은 모두 자신의 방에 갇혀 지루한 나날들을


보냈으며 음식 배달 또한 소지가 아닌 교도관들이 직접 했다.

죄수들간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행태는 누가 봐도 세계수에 대해 의견을 교류하는 것조차 원천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행태가 오히려 일부 죄수들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왔다.

늙은 대장장이, 데르카인이 그러했고, 감옥 생활에 지친 엘프, 시에나가 그러했다.

[세계수. 결계. 영향.]

몰래 숨겨둔 통신기에 적힌 단편적인 정보에 데르카인은 자신의 가정에 확신을 더했다.


죄수들을 의도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율리아. 의도?]

데르카인이 응답했다. 교도관과 소장의 눈을 피해 간신히 만들어낸 통신기는 마나를 극도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
구형적인 체계를, 아주 단편적인 메시지만을 보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용중에는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흩뿌려 평소에는 잘 사용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주 유용하다.

세계수의 마나가 요동치는 판에 이런 티끌만한 마나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

그가 보낸 메시지는 오직 하나뿐인 통신기의 짝을 찾아 갔다. 그리고 다시 응답이 왔다.

[확실.]

통신기의 다른 주인은 시에나다. 같은 엘프로서 그녀는 율리아가 의도적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소장에게 넘겼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탈옥?]
[불확실.]

하지만 왜일까. 그 목적이 탈옥인지는 불분명하다 여긴다. 죄수의 최우선 목적이 탈옥이 아니면 무엇일까.

[이유.]
[어머니. 이런.]

어머니는 어머니 나무. 이런은 이런 일이다. 어머니 나무를 이런 일에 쉽게 소비하는 건 하이엘프 답지 않다는
뜻.

나름 납득이 가면서도 가지 않는다. 드워프이기에 하이엘프와 세계수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에,
탈옥보다 중요한 건 그가 생각하기에는 없기에.

일을 벌인 상대의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건 꽤나 큰 문제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해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목적이 비슷하기만 하더라도 서로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나는 율리아의 의도가 불분명하다고 했지만 데르카인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세계수는 발아했고 연옥은 스톱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다르게 말하면 자라난 세계수가 결코 연옥에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롭게 작용했다면 스톱될 리가 없으니.

“···때가 다가오고 있다.”


탈옥의 때가.

데르카인은 그 때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 * *

소장실 구석에는 반투명한 수정하나가 놓여 있다.

김우진의 얼굴만 한 수정은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다. 방치된 채 먼지만 쌓여간다.

하지만 가끔, 수정이 제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마나를 받아들이고 빛을 발하며 작동한다. 그리고 차원 너머
누군가의 통신을 받아들인다.

수정구가 일 할 때는 정해져 있다.

새로운 죄수의 입소를 알리거나, 연옥에 문제가 생겼을 때다.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는 김우진이 결코 달가워 할
일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소장님.”

빛을 발하며 미약한 진동을 발하는 숙정구를 그대로 둔 지도 10 분이 지났다. 그 동안 수정구에 도달한 통신은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탁탁, 가볍게 탁자를 두들기던 손가락이 결국 수정구로 향한다. 김우진의 마나에 반응하며 보다 격렬한 빛을
발한다.

[늦게도 받는군.]
[아아, 들리나?]

다소 경박한 어투의 목소리가 통신구를 통해 새어나왔다.

김우진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남자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연옥의 차원 결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건 우리 쪽에서 의도한 게 아니야. 그렇다는 건 네가 원인이라는


건데. 무슨 짓을 한 거지?]

“할 일이 더럽게 없나 보군.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것을 보니?”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불의의 변수는 딱히 선호하지 않아서 말이지. 나도, 다른 놈들도.]
[제대로 묻지. 연옥에 문제가 생겼나?]

“연옥은 언제나와 같다. 평화롭고 죄수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쓰고 있지. 문제는 없다.”

[그렇다면 연옥의 결계에 이변이 일어난 원인은?]

“글쎄. 명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 이쪽에서도 파악 중이다.”


[김우진.]

수정구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우리는 널 신뢰하고 있다. 네 능력, 네 성향, 그리고 네가 보여준 성과까지. 연옥의 소장으로서 너보다 적합한
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설이 길군.”

[하지만 그래서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으려는 자들이 넘쳐나지.]


[연옥의 결계에 이변이 발생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김우진에게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들이었다. 그 끝에 다가올 말이 무엇인지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거다.]

그래, 언제나와 같다.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연락이 온다. 하지만 뚜렷한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경고다.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잘하라는.

[죄수들만 잘 출소시켜준다면 다른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네가 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믿겠다.]


[사실 결계에 해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유의미한 사태로 번지지 않는 이상, 사소한 것들은 전부 넘길 수 있다.]

“고맙다고 해야 되나?”

하지만 그건 김우진에 대한 호의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좋은 건 이쪽이기에 그런 것뿐이다. 그게 너와 우리의 계약이니까.]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기 위해, 걷잡을 수 있는 문제가 일어나기를 바라며 방관하고 있을 뿐.

[그럼 행운을 빌지. 부디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끔찍한 소리하지 마.”

툭, 연락이 끊어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저놈들은 멍청한 선택을 했어.”

세계수로 인해 엘프들이 모두 자발적 출소를 선택해도 태연할 수 있을까?

그때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용사들의 출소를 바라면서도 김우진과의 계약으로 인해 또 너무 많이 나가는 것은 바라지 않는 모순적인 놈들이니.

“하지만 세계수가 자라난 것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결계에도 유의미한 변질이 일어났다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는 게 좋을 텐데 왜 가만히 그냥 넘기는 걸까요?”
“두 가지 중 하나겠지.”

정말 사소하다고 생각하거나.

“또 다른 대안이 있거나.”

김우진은 후자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었다. 저 음흉한 놈들의 말은 그대로 믿을 수 없으니.

───────────────
# < 015. 기름 >

똑딱 똑딱-

방 한 칸에 놓인 괘종시계의 추가 흔들린다.

탁탁-

잔잔한 소음은 김우진이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과 어우러진다.

세상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무엇이든 좋기만 한 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 이면에는 정체를 모를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있었을 거다.

지금의 상황 또한 그렇다.

연옥은 튼튼하다.

용사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인 만큼, 외벽부터 내부의 시설들 하나하나 단단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지구의 기술력으로 만든 방공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격의 주체가 세계수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세계수. 연옥을 감싼 신목은 그 과분한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가지와 뿌리가 연옥을 옥죄었고 외벽은 물론 내부까지 일부 손상되었다. 마나의 파동은 연옥의 관리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켜 거의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다행이라면 최후의 최후인 독방 관리 시스템까지는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


추가로 무언가 더 일을 낼 조짐은 없다는 것.

그렇다고 무너진 일부를 다시 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김우진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죄수들을 이용하면 역시 문제가 생기겠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겠지요.”

연옥은 외벽에도 마법진이 도배되어 있는 특수 감옥이다.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 없고 술식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복구 작업에 죄수들을 동원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들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잡일만 시키고 중요한 부분에서
배제한다고 해도 용사들인 만큼 최악을 가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죄수들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연옥의 수복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특별하게 지어진만큼 수복할 때도
그만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하다.

용사 드워프라는 고급 인력들이 추가되고 추가되지 않고의 차이는 꽤나 많은 시간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만 하는 건 옳지 않은 것이 부서진 부분들은 결국 탈옥을 용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빠르게 수복하느냐, 천천히 수복하고 그 동안 위험을 감수하느냐다.

역시 일장일단이다.

“죄수들을 이용하지 않고 독방에만 가두어두는 게 가장 확실합니다.”


“그리고 영초들도 다 죽겠네.”

먹이만 제때 주면 나름 괜찮은 축사장의 괴물들과는 달리 원예반의 식물들은 하나 같이 섬세하다.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으면 개복치마냥 죽어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영초라는 게 괜히 기르기 힘든 게 아니다.

교도관들은 불가능하다. 저들은 영초를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좋아, 결정했어.”

그러길 한참. 장고 끝에 김우진이 결론을 내렸다.

* * *

“오늘부터 출역을 다시 시작한다.”

교도소 1 층의 로비는 죄수들이 올 날이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입소한 첫 날, 호송대에 이끌려 교도관들에게 인계되는 날이 전부다.

그 외에 출역을 나가거나 할 때, 죄수들은 1 층의 정문이 아닌 뒤의 후문이나 쪽문을 통해 나간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죄수들은 이유를 모른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

하지만 그렇기에 평소 모이지 않던 로비에서 모인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일개 교도관이 아닌 부소장이 직접


나와 통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죄수들은 무언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죄수번호 1088 번, 1099 번, 1152 번, 1169 번, 1191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1178 번, 앞으로.”

여섯 개의 번호가 호령되었다. 모두 귀가 뾰족한 엘프들이었다.

“너희들은 전원 원예반으로 간다. 질문 있나?”


“우리한테 원예반을 맡기겠다고?”
시에나 올름의 물음에 부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띠는 성과가 있다면 충분히 포상하시겠다는 소장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저는 소지인데요.”
“죄수번호 1178 번, 율리아 카르센. 당분간 소지 업무는 중지다. 원예반으로 출역하도록.”
“그건 납득 못하겠는데요.”

율리아는 소지가 되기 위해 세계수의 씨앗을 바쳤다. 비록 그게 계획의 일부였다고 한들, 씨앗의 가치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런 씨앗의 가치를 벌써 끝내버리는 건 불합리한 폭리였다.

“당분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건 네 납득을 바라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감옥이란 게 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행되는 곳이며 소장의 말이 곧 법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부서진 감옥의 수복 작업에 투입된다. 따라오도록.”

33 명의 죄수들 중, 하이엘프와 엘프 6 명을 제외한 27 명의 죄수들이 부소장과 교도관들을 따라갔다.

위가 잘려나간 나무 밑동. 한 쪽에 쌓인 거대한 나무들.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파헤쳐진 구덩이와


평탄화가 이루어진 땅.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곳은 데르카인을 비롯한 죄수들이 수도 없이 출역을 나왔던 곳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벌목을 마친 곳은 땅을 파헤쳐 밑동을 뽑고 평탄화 작업을 한다. 때문 텅 빈 벌판이 된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곳에,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광석, 나무, 시약 등이 어우러져 이루고 있는 재료의 산.

그리고 그 정상에는 그들을 이곳으로 부른 장본인이 앉아 있었다. 어깨 위로 파랑새 한 마리를 대동한 채.

“재료다.”

탁, 김우진이 가볍게 착지했다.

죄수들의 시선이 재료의 산에서 김우진으로 옮겨갔다.

“너희들은 이것으로 공방을 만들어라. 재료들을 다듬고 나아가 연옥을 수리해라.”


“···우리보고 연옥을 수리하라는 건가?”
“그래.”
“농담하는 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데르카인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하라면 한다.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징벌방에 들어가고 싶지도, 그렇다고 용사의 힘을 잃고 출소하고 싶지도 않으니 소장이 하라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출역과 연옥의 수리는 엄연히 다르다.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뛰어난 장인이자 마도공학자다.
연옥이 어떤 구조인지, 얼마나 복잡한 체계로 얽혀 있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그곳에 새겨준 술식과 마법진 하나하나가 연옥을 지탱하고 죄수들을 압박하며 교도관들을 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부서진 연옥을 수리하는 일은 그 술식들에 접근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대놓고 중요한 부분을 죄수들에게 맡기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한 세상을 구한 경험이 있는 용사들이다. 슬쩍
보기만 해도 나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자들이다.

“왜, 하기 싫은가?”

되돌아오는 반문에 데르카인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개인면담에서는 나름의 예의를 차려주지만 모두가 함께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말을 툭툭 내뱉는 건방진 놈.

죄수들이 탈옥을 하는 건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심지어 공방도 만들고?”


“제대로 수리를 하려면 공방을 만들어야한다고 알고 있다만.”
“틀린 말은 아니네. 확실히 공방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네. 특히 연옥이라면 공방이 없으면 그냥 망가진 집에
진흙을 바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제대로 된 시설의 존재 유무는 크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나?”

다르게 말하면 공방은 연옥이 아니라 다른 상급 장비들을 만들 때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드워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것을 알기에 공방을 짓지 못하게 막아왔던 소장이었다.

“그래도 된다. 소장인 내가 허락하겠다는데 토를 달 놈은 없어.”

김우진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공방을 만들어라. 재료는 충분하고도 남을 거다. 대신 설계도를 비롯한 모든 제작에 교도관들을
포함시키고 보고해가며 하도록.”
“명심하지.”
“분명히 말하는데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무언가를 만들게 되었다고 해서 쉽게 나갈 수 있을
만큼, 연옥과 내가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김우진이 사라졌다.

“1077 번. 네가 작업반장이다. 죄수들을 이끌고 공방을 먼저 제작하도록. 필요하면 교도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좋다. 단, 모든 것들은 제대로 보고가 올라가야 한다.”
“그러겠네.”

데르카인이 커다란 종이를 하나를 들고 드워프들을 불러 모았다.

“일단 설계도부터 만들도록 하겠네. 이유야 어쨌든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지. 공방이 하나 쯤 있었으면 싶겠다고
모두 생각하지 않았나?”
“예.”
“물론입니다.”
“최대한 크고 넓고 좋게. 재료는 어차피 충분한 것 같으니.”
“예.”

데르카인이 교도관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기회네. 공방이 있고 없고는 우리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경거망동하지는 말게.
어쩌면 일부러 파놓는 함정일 수도 있으니.”
“···소장이 저희들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겁니까?”
“모르네. 하지만 조심해서 좋을 건 없지 않나.”

일단은 조심하는 게 옳다.

* * *

땅땅땅-

망치와 쇠가 부딪히면 불꽃이 튀고 충격을 발산한다.

한 번, 한 번이 쌓여 수십 번이 되고 그 수십 번이 쌓여 일정한 흐름이 된다.

일종의 박자감이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분노하며.

망치는 대장장이의 감정을 담는다. 그렇기에 아름답고, 그렇기에 일생이 담겨 있다.

땅-

데르카인의 망치질은 녹슬었다. 망치를 마지막으로 잡아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는 잊었을지언정 몸은 기억하고 있다. 평생을 해온 일을, 업으로 삼아왔던 일을 쉽게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움직임은 어느새 능숙하게 변했다. 불협화음처럼 끼긱 거리던 소음도 웅장한 악장이 되었다.

화로의 뜨거운 열기, 흐르는 땀과 어우러지면 데르카인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다시는 망치를 잡지 못할 줄 알았다. 다시는 공방에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았다.

어찌 잊고 살았을까. 이 즐거움을.
어찌 무시하고 살았을까. 육체의 비명을.

애써 외면하고 밀어두었던 욕망들이 팔팔 끓어올랐다.


공방의 일을 잠시 쉰 대장장이는 있어도 아예 끊어버린 대장장이는 없다.

드워프란 족속들이 그렇다. 한 번 망치를 잡으면 죽을 때까지 놓을 수 없다. 죽기 직전까지 공방에 출입하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즐기는 난쟁이들이다.

데르카인은 자신이 그런 흔하디 흔한 드워프 중 하나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것이었나.’

그러고 있으니 소장이 노리던 게 무엇인지 감이 왔다.

마약. 드워프에게 있어 공방의 일은 마약과도 같다. 간신히 외면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으니 드워프들은 본래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다.

성급한 일반화라고 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데르카인은 그랬다.

‘탈옥.’

언제든 하고자 했다. 때를 기다리며 차분히 준비했다.

20 년 전 그날. 연옥이 불타던 그날로부터, 지금의 소장을 처음 만난 순간으로부터 20 년이 지났다.

짓밟힌 희망에 절망했고 정신을 차리는데 5 년이 걸렸다. 그리고 15 년을 준비했다. 천천히, 성급하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몇 가지 도구만 만들면 보다 확실해진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없이 높다.

하지만 꺼져가던 심장에서 간신히 살아 오른 불씨는 다시 꺼지면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한다.

소장이 노린 것이 이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그에게 남은 미래는 그리 길지 않다.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데르카인님. 혹시 마력증폭기를 만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때 말씀하신 확실한 방법을 거의 찾은 것


같습니다.”

그의 불안감을 사던 신참 인간 죄수와의 만남은 그의 불꽃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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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6. 이유 >

구속구란 죄수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술식과 마법진은 착용자의 마나를 제한한다. 흐름을 막고 마나 자체를 통제한다.

죄수들에게 있어 더 없이 짜증나고 걸리적거리는, 당장 부숴버리고 싶은 1 순위의 물건.

강민식은 다시 한 번 그 물건을 붙잡았다.


마나가 흐른다. 구속구를 넘어 새겨진 술식과 마법진 사이를 파고든다.

파지직-

“크으윽···!”

신음을 삼켰다. 손과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프다. 미친 듯이 아프다.

몇 번째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에 주워온 세계수의 나뭇잎은 진즉에 동이 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출역을 나갈 때마다 나뭇잎들이 추가 된다는 것.

어째서인지 교도관들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찮은 일반 나무들과는 엄연히 다름에도.

어쩌면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고작 그 정도의 마나를 모아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는 자신감. 아니, 맞을 거다. 그
거지 같은 소장의 얼굴을 떠오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파삭-

새로운 나뭇잎을 하나 쥐고 마법을 발현시켰다. 제약된 마나 속에 서도 빛을 발하는 마나가 화상처럼 일그러진


상처들을 치유한다.

후우, 강민식이 비틀 거리며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힘들다, 미친 듯이 힘들다.

마나가 제약된 상태에서 외부의 마나를 끌어와 술식을 해제하는 과정이다. 쉽지 않다. 결코 쉬울 수가 없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강민식이 연옥의 죄수가 아닌 용사일 때, 그는 상대적으로 강한 무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용사이니 강하지만 아무리 적들은 더 강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훈련해도 점차 올라가는 적들의 수준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포기는 곧 죽음이었기에,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안 되기에 다른 길을 찾았다.

검을 버리지는 않았다. 마법을 버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더 강한 검술, 더 강한 마법을 찾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부족하다. 가진 것도 온전히 소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니 가진 것이라도 잘하자. 편법을 쓰자.

검술과 마법에 대한 재능 자체는 부족했을지언정, 마력 조작 능력과 감응력 만큼은 압도적이었다.

세세한 마력 조작으로 효율과 속도를, 그리고 정밀함을 높였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의 실력은 한 단계 진보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독이었다.

용사가 되면서 얻은 수많은 능력 중 하나였으나 비겁하다고 여겨 외면했던 능력.


잘 닫아 구석에 처박아둔 상자를 다시 열었고 그게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용사로 있던 차원, 아탈로스에서도,
이곳 연옥에서도.

구속구는 마력을 제어할지언정, 독을 제어하지 못한다.


구속구는 모든 마력을 완전 차폐시키는 게 아니다.
강민식이 가진 용사의 힘은 독을 마나 속에 섞을 수 있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찾았다.”

필요한 건 오직 두 가지다.

더 많은 마나와 더 많은 실험.

용사란 언제나 고난이 따른다. 아주 어렵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협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강민식은 모두 해쳐 나왔고 세상을 구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성공할 것이다. 반드시.

* * *

“···옳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부소장의 걱정을 김우진은 단순하게 일축했다.

쓸데없는 기우는 아니다. 분명히 리스크가 있는 행동이었으나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옥은 독립된 공간이다. 그런 연옥에 무언가를 들어오려면 반드시 상부를 거쳐야만 한다.

그들은 김우진이 무엇을 하든, 쉽사리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감시의 눈길을 거둔다는
뜻은 아니다.

무언가를 주문하면 모두 군말 없이 주지만 그 정보는 모두 상부의 눈과 귀로 들어간다. 자연스레 김우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감옥이 부셔진 게 문제가 아니야.”

사실 연옥이 부셔진 게 처음은 아니다. 김우진에 의해 무너지고 수복한 적이 있다.

“세계수지.”

세계수는 평범한 나무가 아니다. 신목이자 왕에 필적하는 정령이다.


저들은 김우진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세계수와 그가 함께 있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보다 쉽고 빠른 방법이 있음에도 죄수들을 동원하는 길을 택했다.

연옥을 수리하기 위해 반쯤 완성된 제품들이 아닌 기초적인 재료들을 마구잡이로 주문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이런 저런 재료가 뒤섞여 있으면 저들은 언제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데르카인을 비롯한 드워프들이 있기에 가능한 선택지였다.

“랜드마크를 바라신다더니?”
“말이 그렇지. 말이.”
“하지만 결국 잠깐의 유예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들킬 수밖에 없습니다.”

호송대는 상부의 앞잡이다. 세계수를 아예 뽑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들은 세계수를 발견할 것이고 보고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안도 일단 생각 중이야.”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일단 릴리와 더 친해지는 거야.”

부소장은 릴리라는 이름이 과거에 김우진이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태클 걸지 않았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확실히 친해졌다는 확신이 생기면 하이엘프를 부르는 거지.”

그 다음은 더 단순하다. 묻는 거다.

너도 세계수가 뽑혀나가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 아니냐고, 세계수를 감출 방법이 있으면 불라고.

그러면 불거다. 율리아의 목적이 무엇이든 세계수가 산 채로 뽑혀나가는 건 계획에 없을 테니.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합니까?”


“몰라.”
“모른다고요?”
“설마 이런 식으로 자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나마 최후의 방안이라면 드워프들한테 요구하면 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만들어 줄지도.”

드워프 장인들의 마공학물품은 어지간하게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 장인이 어느 차원에 내놔도 꿀리지
않으며, 용사라는 특수한 힘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못한다고 하면 다시 공방을 폐쇄해버리면 되는 거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방을 얻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놔야만 하는 법이다.

* * *

하이엘프로서 수많은 숲들을 거닐어 보았다.

숲의 축복을 받으며 숲의 정기 또한 받았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바쳐진 영약들도 적지 않았다.


하물며 용사로서 영약을 받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율리아 카르센도 이렇게나 많은 영초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뭐긴, 원예반이지.”

시에나 올름의 가벼운 대답은 율리아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저는 그냥 평범한 식물들을 기르는 곳인 줄 알았어요.”


“용사들이 평범한 식물들을 기를 리가 없잖니. 이것들은 모두 납품이 될 거란다.”
“납품이요?”
“용사가 되는 자에게.”
“설마 그 영약들이?”
“전부 여기서 재배되는 거란다. 신이라는 놈들한테 보내지고 필요한 용사들에게 전달되지.”

정확히 신은 아니지만.

“잡담은 거기까지다. 영초들을 돌봐라. 하이엘프이니 굳이 업무까지 설명해줄 필요는 없겠지.”

상황설명까지는 용인하고 있던 교도관들의 타박에 엘프들이 원예반 전체로 흩어졌다.

율리아는 아주 작게 싹이 올라온 식물 앞으로 갔다.

‘만드레이크?’

영초들 중의 영초라고 불리는 최상급의 영초였다. 키우기 어렵고 재배하기는 더 어려운, 하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순수한 마나를 얻을 수 있는 영초였다.

- 가면 놀랄 일이 꽤나 있을 거다. 전부 다 설명해주는 것보다 가서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더 낫겠지.


- 너무 다 알아가면 그것 또한 수상하니 말이다.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간다. 이런 곳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수상하다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찬찬히 만드라고라를 보듬고 있으니 시에나가 교도관들의 눈치를 보며 접근했다.

“알고 있니? 소장은 의도적으로 우리 엘프들만 배제했어.”

그 의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뻔하다.

엘프와 세계수. 그 당연한 관계가 접촉할 수 없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대화해도 되요?”
“옆에 식물에 나란히 작업하는 건 흔한 일이란다. 작업하면서 사소한 잡담 정도는 그냥 넘어가주고. 다시
본론으로. 네가 준 씨앗이지?”
“네.”
“네가 씨앗을 주고 어머니 나무가 자라나기까지 고작 두 달이야. 어떻게 두 달 만에 어머니 나무가 발아하고
과생장한 거니?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대체 무슨 짓을?”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정확히는 소장이 했다.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심을 때 영약 29 개를 함께 넣었다고 하더라고요.”


“···미쳤네.”

시에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연옥의 소장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을, 할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29 개면 재고를 모조리 갖다 박은 건데. 그래서 겸사겸사 우리를 여기에 넣은 건가?”

빈 곳간은 채워야 한다. 소장이 어째서 엘프를 원예반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깼는지 이해가 갔다.

“목적은 탈옥?”

당연하다면 당연한 물음이나 시에나의 표정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 봐요? 탈옥하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싶지. 여기 죄수들한테 물어보렴. 백이면 백 같은 대답을 할 테니.”

연옥의 죄수들에게 있어 가장 첫 번째 소망은 탈옥이다. 그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시에나는 엘프였다. 비록 하이엘프에 비해 세계수와의 교감이 떨어진다고 하나 그게 세계수에 대한


존귀함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고작 탈옥에 어머니 나무를 태우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어머니 나무를 불태운다니. 전 태우지 않았어요.”
“아, 이건 그냥 소장이 보여준 영화 때문에 입에 붙은 거란다. 맥락은 이해했잖니?”

이해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시에나의 말이 맞다. 세계수는 신성하다. 단순히 탈옥을 위해 한 번 쓰고 버릴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 엘프는, 하이엘프는 없다. 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다른 죄수들은 몰라도 엘프들은 안다. 세계수가 단순히 탈옥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씨앗을 주고
연옥에서 자라나게 했다면 무언가 더 큰 목적이 있음을.

하지만 연옥에서 탈옥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을 수 있을까?

시에나를 비롯한 엘프들이 가지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답이 없는데 답을 찾아야 한다.

혼동이 오고 율리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말씀드리면 절대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해주세요.”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시에나는 괜히 발을 담구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들으면 돌이킬 수 없는 느낌. 허나 세계수가 관련되어 있기에 그녀는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어머니 나무께 맹세해.”

굳게 다짐했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기다림,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에나님의 말대로예요. 전 탈옥을 하려고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준 게 아니에요.”

시에나는 역시라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옥을 부수려고 주었죠.”


“···어?”

하지만 역시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이야기였다.

───────────────
# < 017. 차별주의자 >

삶은 투쟁이다.

아주 사소한 무언가부터, 대단한 무언가까지.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쥐어지는 건 없다.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다면 쟁취해야 한다. 싸워고 이겨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울부 짖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타르칸은 최근 자신의 투쟁이 부족하지 않았나 의심이 들었다.

소장의 태도와 귀쟁이, 난쟁이들에 비해 자신들이 가져가는 것이 현저히 적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귀쟁이들에게는 세계수가 생겼고, 난쟁이들에게는 공방이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언가 쥐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연옥에 수감된 귀쟁이들은 고작 다섯이다. 새롭게 추가된 하이엘프를 붙여봐야 여섯.

난쟁이들은 위대한 무언가도 없고 그냥 여덟.

그에 비해 타르칸의 종족은 무려 열 다섯이다. 이 연옥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소장에게


협조적인데 비해 대우는 가장 나쁘다. 이게 과연 옳게 된 것일까.

틀리다.

강자에게 굴종하고 복종하는 것 또한 투쟁의 한 방식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쪽이다.

“맞은 지 조금 오래 됐지?”

허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툭툭, 탁자를 두들기며 다른 손으로는 커피 잔을 들어올린다.

한 모금 음미하며 음이라는 한가로운 소리나 낸다.


“나는 위대한 달의 일족이다! 감히 내게···!”
“말투.”
“···그러니까 제 말은 너무하신 것 아니냐는 겁니다.”

타르칸이 목소리를 낮추고 야성을 집어넣었다.

“소장님의 명령을 가장 잘 따르고 협조적인 건 저희들입니다. 그런데 대우가 가장 부족한 건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천대하시는 건 아닌지···.”
“너희들은 이미 다 잡힌 죄수들이야.”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나랑 말장난 하자고?”
“아니, 그게···.”

말장난은 소장님이 먼저 하신 것 아닙니까. 타르칸이 튀어나오려는 변명을 애써 삼켰다.

“수인들의 불만이 큽니다. 저도 면이 서야 무어라 말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불만이 크다면 탈옥이라도 하려고?”
“그게 아니라···.”

김우진은 떠듬 떠듬 변명하는 타르칸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해보나마나한 질문이다. 연옥의 죄수들의 머릿속에서 탈옥이라는 두 단어는 결코 지울 수 없으니.

김우진은 수인들을 싫어했다. 드워프보다 더, 엘프보다도 더.

수인은, 연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죄수들이다.

용사란, 능히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는 자들이기에 보다 재능이 넘쳐나고 전투에 특화된
자들이 용사가 되는 건 당연했다.

싸움에 죽고 싸움에 사는 수인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 또한 그런 관점을 대입해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정답은 그게 아니라는 걸, 김우진은 알고 있었다.

용사의 비중은 인간이 가장 높고 죄수 또한 인간이 가장 많다. 그럼에도 수인들의 비율이 높은 건 그들만큼 힘에


대한 갈망이 큰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수인은 문명화 된 오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조금 더 문명에 익숙해져 얌전하고 본성을 숨길 수 있을 뿐, 살짝만 건드려도 튀어나오는 야성은 쉽게 억제되지


않는다.

전투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싸워야지만, 강해야지만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온 그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힘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더 심했다.

그래서다.

연옥의 역사속에서 엘프도, 드워프도 모두 출소자들이 있다.


하지만 수인은 없다.

목숨과 자유를 잃을지언정 힘을 잃을 수는 없는 종족. 그들은 연옥이 만들어진 이래로 단 한 명도 살아서


출소하지 않았다.

드워프보다도, 엘프보다도 지독한 놈들.

하지만 그렇게 힘에 미쳐있기에 반대로 통제하기는 한결 수월하다.

강함을 숭상하기에 강자를 존중한다. 강자에게 굴종한다. 거기에는 종족도, 성별도 초월한다.

김우진은 모든 수인들보다도 압도적인 강자다. 상담을 통해 확실히 서열을 정리했고 수인들은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헌데 저렇게 다시금 이빨을 치켜드는 걸 보니 최근에 이것저것 일이 많아 너무 풀어주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무얼 원하는데?”

허나 김우진은 다시 기강을 잡는 대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수인들은 머릿속에서 ‘출소’라는 단어를 지우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꽤나 괜찮은 졸들이다.

강함에 대한 숭상이 종족을 따르지 않다보니 자신들을 꺾은 김우진에게 거의 무분별한 충성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이들을 이용해 꽤 재미를 봤었다. 자고로 감옥에 들어왔을 때, 다른 죄수들은 공포의 대상이고 김우진이
원할 때마다 그 역할을 잘 해줘왔으니까.

인간들을 상대로 특히나 효과가 있었다.

“들어주시는 겁니까?”
“들어는 보고.”

타르칸이 반색했다.

“저희들이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귀쟁이들이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세계수를 얻었고,


난쟁이들이 평생의 보금자리인 공방을 얻었듯,
저희 또한 고향 같은 곳을 얻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면 축사장으로 보내주면 되나?”

엘프들을 원예반으로 보내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수인들 또한 축사장으로 보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저들이 절대 출소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20 년쯤 해보니 전혀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지만.

“가끔가다 투기장도 열어주고.”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그래, 알았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출소할 생각은?”
“없습니다!”
히죽이죽 웃으며 해맑게 대꾸하는 모습이 상당히 짜증났다.

빠악, 갑작스레 얼굴을 얻어맞은 타르칸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원위치 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냥 짜증이 나서. 나가봐.”
“예, 감사합니다! 연옥 복구 작업에 더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 해놓겠습니다!”

죄수번호 1100 번, 타르칸 톨리스가 나갔다. 잠시 후, 부소장이 들어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세계수 사태 이후로 감옥이 예전보다 어수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저것 바꾸다가 저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아무것도 안할 거라는 걸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우진은 그 꽃밭과도 같은 희망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데르카인과 시에나, 타르칸을 유심히 살펴. 탈옥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셋이 중심이 될 테니.”
“예.”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십니까?”
“옥상.”

* * *

원예반에 온 이후, 율리아는 매일 매일을 불안감과 초조함 속에서 살았다.

“괜찮니?”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어느 식물을 보든 세계수가 떠올랐다. 세계수에 무슨 짓이든 하고 있을 소장의 모습이 상상되자 참을 수 없었다.

“나갈 수 없다.”
“제발, 제발요!”
“죄수번호 1178 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어머니 나무가 절 부르고 있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허나 김우진은 결코 율리아가 세계수와 만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난동부리지 마. 너만 손해야. 징벌방에 가고 싶니?”

옆에서 적절히 말려주는 시에나 올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즉에 사고를 쳐도 백 번은 쳤을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라고 그녀는 조금씩 차분해졌다.


이미 너무 적나라하다.

그녀가 꿍꿍이를 가지고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는 걸, 소장도 알고 죄수들도 안다.

비록 그 꿍꿍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를지라도 그런 상황에서 순순히 세계수를 보게 해주는 것은 미련한


곰이라도 하지 않을 짓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반드시 세계수를 봐야 한다. 그리고 세계수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소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마찬가지.

방법이 무엇일까.

사방이 꽉 막힌 곳에서 없는 해결책을 억지로 만들어 내야하는 만큼, 떠올리기는 그리 쉽지 않다.

먼저 구원의 손길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평생을 가도 ‘모든 속셈을 말하고 구차하게 빈다.’ 외의 선택지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1178 번. 넌 오늘 출역 끝이다. 나와라, 소장님 호출이다.”

엘프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주저하지 않고 곧장 뒤따랐다. 무조건 간다. 가서 무릎을 꿇든, 그냥 빌든
세계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허나 소장실로 향할 줄 알았던 발걸음이 더 위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짐작이 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면 알 거다.”

도착하지 않아도 안다. 점점 더 진하게 풍겨오는 세계수의 기운에 맞춰 그녀의 박동도 더욱 빨라졌다.

저곳에 있다. 만날 수 있다. 확인할 수 있다.

기대와 동시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어째서 소장이 순순히 자신을 세계수의 곁으로 인도하는가.


왜 갑자기? 이제까지 통제하던 과거들은 무엇일까.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복도와 계단을 걸으며 그녀의 머리는 터져버릴 것만 같이 맹렬히 회전했다.

최선과 최악을 가정했다.

최선은 이대로 세계수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은 옥상의 문 앞에서 세계수의 향만 맡게 하고 다시 독방으로 돌려보내는 거다.

진짜로 그렇게 악독할까 싶으면서도 그녀를 괴롭히기에는 가장 적절한 방법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렇기에 율리아는 간절히 빌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앞에 섰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그녀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뭐하는 거지?”

그 자리에 서서 호흡을 골랐다.

소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이 많아서 조금 힘드네요.”


“하이엘프가 말이지?”
“하이엘프라고 체력이 무한은 아니잖아요.”

율리아가 태연히 심장을 다독였다.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줄곧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시여.”

세계수는 거대한 나무다. 통틀어 하나의 신목이라고 말하지만 수많은 갈래의 가지들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잔가지가 있으면 보다 중요한 줄기가 있다. 율리아는 옥상에 우뚝 선 줄기야말로 세계수의 중심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 까끌거리는 나무를 어루만졌다.

김우진은 그녀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조용히 눈짓 해 교도관을 내보냈다. 넓은 옥상 위에는 한 명의 사람과
한 명의 하이엘프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만이 남았다.

“네가 보기에 세계수의 상태는 어때?”


“과생장을 한 터라 무언가 불안정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건강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을 텐데 눈에 띄는 이상한 점도 없고요.

율리아가 마지막 말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대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그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하지만 김우진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 챘다. 애초에 그녀를 불러온 것 또한 비슷한 의도였다.

“내가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네가 그랬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왜 세계수의 씨앗을 내게 줬지?”
“말씀해주실 건가요?”
“두 번은 안 통하네. 좋아. 네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면 나도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줄게.”
“어머니 나무에게 맹세하건데 진실만을 이야기 하겠어요.”

바로 옆에 세계수가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가슴을 옥죄는 제약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당신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준 건 당신이 씨앗을 심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목적은?”
“전 이미 한 가지를 말했어요.”
“정보에도 질이 있고 등급이 있지. 내가 가진 게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아?”
“죄수들을 탈옥시키기 위해서예요.”

김우진이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동시에 예상하지 못했기도 했다.

“죄수들이라는 것에 너는 포함되지 않은 것 같은데.”


“두 가지 모두 됐어요.”

이제는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라고, 율리아는 눈빛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지.”

김우진이 픽 웃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 율리아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이기도 했다.

세계수는 태어난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막 지났다.

과도한 영약으로 인해 벌써부터 성체에 가깝게 자라나고, 정령체로서 현신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속은 갓 태어난
아이와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김우진이 생각하기에 아이는 단순하다. 지극히 단순하기에 어렵기도 하지만 반대로 쉽기도 하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신호를 받아들인 파랑새 한 마리가 그들의 사이로 툭 떨어졌다.

“···어머니 나무의 정령? 어떻게 벌써···?”


“보통 나무 크기가 이 정도쯤 되면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그거야 일반적인 경우죠. 어머니 나무께서는 이제 고작 두 달이 조금 넘었는데···!”
“손을 뻗고 세계수를 불러라.”
“뭐라고요?”
“지금 세계수는 딱 너와 나 사이에 있다. 나와 하이엘프인 너. 누구의 부름에 반응할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인간과 하이엘프. 고민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김우진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찮은 장난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한 가지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점을 깨달았다.

김우진은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답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대답 대신 세계수의 정령을 불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하고자 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

‘어머니 나무가 내가 아닌 자신을 고를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럴 리가. 율리아는 부정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상식은 그러했다.

하이엘프와 세계수 간의 관계는 일개 인간 따위에게 쉽사리 끊어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좋아요. 한 번 해보죠.”
그렇기에 은근한 불안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도전을 받아들였다.

“어머니 나무시여. 제게 와 주시겠습니까?”

손을 뻗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삐익, 삑. 파랑새의 형태를 한 정령체가 날개를 퍼덕이며 반가운 소리를 냈다.

정령체가 율리아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자, 릴리야. 이쪽으로 와.”

김우진이 다정하게 정령체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삐익? 정령체가 주춤거렸다. 김우진과 율리아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릴리? 이름까지 지어줬어요?”


“당연하지.”
“어머니 나무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러면 그냥 계속 세계수라고 부르라고? 너도 율리아가 아니라 하이엘프라고 부르면 되겠군.”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율리아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당황시키는 건 그 이름 자체가 아니라
정령체가 릴리라는 이름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무에 이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 번도 본적도 없다. 어머니 나무는 그냥 어머니 나무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릴리야. 이리 온.”

삐익-

그리고 그녀가 혼동하는 사이, 연이은 부름을 견디지 못한 정령체는 갈 곳을 정했다.

김우진의 손가락 위에 앉아 뺨에 얼굴을 부빈다.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낸다.

“아···.”

그 모습에 율리아가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처음 경험했다. 거기에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세계수, 맙소사.”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기에 그녀는 현실을 부정했다.

“이, 인간 따위한테 밀리다니!”


“그거 종족차별적인 발언이야. 뻑킹 레이시스트 같으니.”
“인종이 아니라 종족이 다르잖아요! 전 하이엘프라고요! 아무리 정령술사라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요···!”
“그렇게 소문이 났나? 내가 정령술사라고?”
“아니라는 건가요?”
“아니, 맞다. 틀린 말은 아니지.”

세계수가 나를 고른 것도 맞는 현실이고.

“흠, 확실해졌으니 굳이 더 미룰 필요는 없겠지.”


“무엇을 말이죠?”
“율리아 카르센, 너는 세계수가 뿌리 채 뽑히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
“···어머니 나무를 뿌리 채 뽑아버리겠다는 건가요?”

릴리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고? 율리아가 경멸의 시선을 담아 김우진을 노려보았다.

작은 오해였으나 김우진은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그가 뽑든, 윗놈들이 뽑든 결국 뽑히는 건 똑같으니까.

그저 담담하게 재차 말했다.

“세계수를 옮길 방법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뿌리 채 뽑아버릴 테니까.”

뒷말이 조금 달라졌지만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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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8. 기회 >

“···어머니 나무를 옮길 방법이요?”

확실히 연옥을 뒤덮어버린 세계수의 모습은 그리 정상적이지 않다. 허나 율리아가 가진 의문은 그걸 왜 본인에게
물어보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 나무께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릴리라는 이름도 지었고 저보다 소장님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말이죠.”
“질투하나?”
“질투요? 누가요? 제가요?”

율리아가 코웃음쳤다. 그러는 사이에도 릴리는 김우진의 뺨에 부리를 비비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당신의 정신계 마법에 말려들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계시지만 어머니 나무께서는 언제고 제게
돌아오실 거예요.”
“그래, 그렇다고 해줄게.”
“그렇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거예요!”
“어쨌든, 나도 직접 이야기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단순한 대화로는 아직 고차원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지가 않아서
말이지.”

딱 이리와, 저리가 같은 간단한 수준인 전부다.

세계수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고 말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아무리 성체에 가깝게 자라났다고 한들 실질적으로 세계수는 발아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어린아이라기보다는 갓난아기와 같았다.

“내가 알기로 하이엘프들은 세계수와 소통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들었다.”
“누구한테요?”
“그것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고.”
“···가능은 해요. 그런데 제가 왜 그런 걸 해야 하죠?”
“말했잖아. 세계수를 숨기지 않고 이대로 방치하면 뿌리 채 뽑힌다. 세계수가 여기 있는 걸 원치 않는 놈들이
있거든.”

원치 않는 놈들.

율리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엘프들 중에서도 고귀하게 태어난 하이엘프는 많은 것을 보고 들어왔다.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느꼈다.

목적이 있어 연옥에 들어왔고, 하잘 것 없는 직책을 위해 거래를 명목으로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
세계수는 뿌리를 내리고 발아했으며 지금의 상황까지 왔다.

하지만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김우진은 그녀를 의심하고 있고 세계수는 생각보다 김우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틀어진 계획은 더 이상 혼자 진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틀어진 계획은 조력자가 필요했고 내부자일수록 좋았다.

소장 김우진은 거기에 더 없이 최적화된 인물이며 자신의 직책에 그렇게까지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선뜻 손을 내밀고 씨앗을 넘긴 목적을 밝히기에는 아직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결론을 내렸다.

“소장인 당신이 허락했는데 대체 누구에 의해서요?”

대충 짐작이 가지만 묻고.

“그것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다.”


“거짓말은 아닌가요?”

마지막까지 한 번 의심한다.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일부러 가상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거라면요?”
“네가 세계수와 대화를 나누도록 허용해서 말이지? 그거 참 멍청한 계획이군.”
“···좋아요. 어머니 나무와 대화를 해보겠어요. 저도 어머니 나무가 뽑히는 건 결코 바라지 않으니까요.”

아직은 유보하기로.

진실을 이야기하는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 될 것이다.

* * *
강민식은 자신의 손 위에 놓인 작은 구슬 하나를 바라보았다.

한 드워프를 통해 전달 받은 마력 증폭기다.

기껏해야 은행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아주 작은 크기. 그럼에도 거기에 집약된 마도 공학은 놀라운 수준이다.

‘역시 드워프.’

아니, 이건 그냥 데르카인이 대단한 거다. 그 또한 용사로서 살아가면서 수많은 드워프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


정도의 기술력은 보지 못했으니.

그것을 강민식은 자신의 이빨 안쪽에 넣었다. 본래는 비장의 독단을 숨겨 놓던 장소다. 연옥에는 불시 검방이라는
성가신 것이 있으니 잘 숨겨놓으라는 드워프의 말이 있었다.

이곳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다.

이빨 속에 잘 안착한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세계수의 나뭇잎을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구속구를 잡았다.

우우웅-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의 마나들이 그의 육신으로 들어온다. 마나로드를 타고 지나가 증폭기를 만난다.
그리고 한층 강화되어 전신을 노닌다.

증폭기의 확실한 성능에 강민식은 감탄했다. 그가 봐온 그 어떤 증폭기보다 작으면서 성능은 가장 뛰어났다.

마나가 구속구를 향해 몰려간다. 그의 마나에 뒤섞인 독기가 함께다.

파직-
치이이익-

미약한 스파크, 올라오는 연기.

연기는 지독한 독기였으나 이미 독인에 가까운 강민식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한다.

구속구의 방어 체계가 발동했고 그의 독기와 어우러진 세계수의 마나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강민식이 신음을 삼켰다.

아프다.

그가 소환되었던 차원, 크라프트를 마침내 구해냈을 때만 해도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겪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도 없이 돌아다녔다. 노숙은 일상이고 비박도 서슴지 않았다.


춥고, 덥고, 벌레에 물리고, 몬스터들과 싸우고, 상처입고, 동료를 잃고.

괴로웠다. 죽을 만큼 괴로웠다. 그럼에도 견뎌낸 것은 지구에 있는 가족을 보기 위해서였다.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였다.

일상이 그립다. 바깥이 그립다.


평범하게 자고, 평범하게 일어나고, 평범하게 식사를 하는 그런 삶.
하루 종일 컴퓨터도 해보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밤새 술을 마시는 그런 삶.

당연했으나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된 일상.

눈을 떴다. 통증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나간다.’

그가 겪어왔던 고통에 비하면, 나간 뒤의 자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반드시 나간다.’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모든 게 해결 된다고 그들이 말했다.

탈옥하고 지구로 돌아가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구속구가.

치이이익-

“······!”

그의 욕망에 응답했다.

* * *

드드드-

연옥이 진동한다.
대지가 진동한다.

카가각-

연옥의 외벽이 부서지고 파편들이 떨어진다.

우우웅-

뒤따르는 소음이 고막을 때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나의 파동이 주변을 어지럽힌다.

그것은 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가 만들어내는 현상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데.”

김우진이 신음을 삼켰다. 세계수는 그의 부탁에 응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다만, 느리다. 무척이나 느리고 시끄러우며 움직일 때마다 일으키는 미세한 마나의 파동은 주변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무엇을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이게 당연한 거예요.”


이 사태를 만들어놓은 하이엘프는 담담히 대꾸했다.

“어머니 나무가 근본이 정령이냐, 나무냐 말은 많지만 결국 그 몸체가 나무라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나무가 이동하는 게 빠를 리가 없죠.”

일반적인 나무를 옮기는 것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헌데 세계수다. 무려 세계를 지탱한다는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

“발아할 때는 엄청 빨랐잖아?”
“소장님이 29 개나 되는 영약을 심어놨으니까요.”

그 모든 영약을 씨앗은 흡수했다. 그리고 발아라는 일생일대의 진화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일반적으로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자라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돼요. 그 많은 영약들을 모두 소진했으니 이 정도가


된 거죠.”

이전의 모습들이 비정상적일 뿐, 지금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특히나 지금의 어머니 나무는 무척이나 어려요. 원래라면 지금의 반에 반에 반도 안 됐을 거예요.”

아니, 애초에 발아조차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본체를 옮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원래는 안 되나?”
“어느 정도 성숙한 어머니 나무나 가능한 일이죠. 나무를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면 대충 얼마나 걸리지?”


“북쪽 숲까지의 거리를 고려해 봤을 때, 대충 나흘에서 닷새? 그쯤 걸릴 것 같네요.”
“계속 이 상태로?”
“네.”
“좋지 않은데.”
“뭐가요?”

김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뭇잎들이 천천히 이동한다.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햇빛이 차츰차츰 영역을 넓혀 나간다.

햇빛이 적당한, 당분간은 적당할 자리.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톡톡, 손잡이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긴다.

- 삐이?

예상외의 반응에 릴리가 불안하게 그의 앞을 서성인다.

“이리 온.”
- 삐익.

손잡이에 앉은 릴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얼굴을 비비는 애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가서 부소장 불러와.”

나직한 목소리. 대화라기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깝다. 그러나 문 밖의 교도관은 즉시 알아듣고 사라진다.

잠시 후, 부소장이 나타난다.

“부소장.”
“예, 소장님.”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부소장이 주변을 확인한다. 미미하게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가지와 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다.

“뜻하는 바를 이루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세계수가 움직임으로서 일어나는 소음과 진동,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연옥의
손상.”
“그걸 그대로 죄수들의 방식으로 읊으면?”
“‘기다리던 때가 왔다.’입니다.”

하나만 있어도 민감한 감옥에 네 가지 문제가 한 번에 들이닥쳤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승냥이들이 기다리던
탈옥의 순간이다.

“때요? 무슨 때요?”

눈치 없는 하이엘프가 끼어들었으나 무시당했다.

“오늘 저녁에 바로 불시 검방 실시해.”


“예.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방에 숨겨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공방에도.”
“상관없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 역할만 해도 충분하다.

저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상황이라는 건, 모두에게 공평하다. 저들에게 기회는 연옥의 교도관들에게
위기며 보다 경각심을 가지게 만든다.

“당분간 모든 일정 취소시키고 방에서 꼼짝 못하게 해. 한 닷새 정도.”


“예.”

그리고 죄수로서 할 수 있는 것보다 소장으로서, 교도관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

움직인다면 지금이다.

허나, 그래봐야 그의 손바닥 안이다.

“어쩌면 드디어 강민식을 3 징벌방에 넣고 실험해볼 수 있겠군.”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삐이이이.

차가운 기세에 파랑새가 몸을 떨었다.

“미안해, 릴리. 나도 모르게 힘에 손이 들어갔구나.”

파랑새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 삐이?

아무것도 모른 채, 세계수는 해맑게 웃었다.

* * *

쿠구구구-

미약한 진동은 곧 거대한 떨림이 된다. 촉수처럼 퍼져나간 가지와 뿌리들이 하나, 둘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이게 무슨?”
“지진이다! 지진이 일어났어!”
“모두 대피해!”
“지진이 아니야! 세계수가 움직인다!”

세계수의 준동은 정원의 대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자연스레 그 위에서 각자의 업무를 하고 있던 죄수들 또한
이변을 눈치 챘다.

“살다 살다 세계수가 이동하는 걸 볼 줄은 몰랐군.”

흔들리는 대지에 연금술을 멈춘 데르카인이 밖으로 나왔다.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세계수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하이엘프가 연관되어 있겠죠?”


“무조건이네.”

동료 드워프의 물음에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과 거래를 통해 세계수의 씨앗을 준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협조를 하다니.”

세계수의 발아 이후, 하이엘프가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본인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새로운 소지를 임명한 적이 없는 소장이 그녀를 소지로 임명한 점,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자가 하이엘프말고 또 없다는 점에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진실이었다.
“생각이 다 있겠지.”
“물론 저희야 솔직히 어떻게 복구하나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놓기는 했습니다만.”

세계수의 뿌리는 연옥을 완전히 옥죄고 있었다. 부서진 부위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을 뒤덮은 뿌리와
가지를 제거해야 하는데 보통 나무가 아니라 세계수다.

드워프들 입장에서는 곤란하던 차였다.

우지직-
콰아앙!

그때, 뿌리와 가지가 건드린 연옥의 균열들이 더욱 커졌다.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고쳐야 할 게 많아지겠군.”
“그런데 생각보다 느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군. 무척이나 느리네.”

이 정도면 건물에서 뿌리가 완전히 걷히는데만 이틀이 꼬박 소요되겠군.

데르카인의 말이 천천히 느려졌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강민식에게 증폭기는 전달했나?”

주변을 살피고 동료 드워프를 공방 안으로 잡아끌며 목소리를 낮췄다.

세계수의 신비는 죄수들에게만 신기한 게 아니었다. 교도관들의 정신도 모두 다른 곳으로 팔려 있었다.

“예. 전달해줬습니다. 조만간 성과가 나올 거라고 자신했습니다.”


“조만간이 아니라 당장 필요하다고 전하게.”
“네?”
“아직도 모르겠나?”

진동은 신경을 분산시킨다.


소음은 모든 것을 잡음을 묻어버린다.
균열은 빠져나갈 구멍을 늘어나게 한다.
그리고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은 사소한 마나의 흐름 같은 것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진동과 소음 속에 행동을 숨기고.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 속에 미약한 마나의 흐름을 숨긴다.

“지금이 기회네.”

데르카인은 깨달았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때라고.”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
# < 019. 결행 >

진동과 소음, 균열과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

교도관들의 정신은 분산되고 소음과 불안정한 마나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탈옥을 하기 위해서 최고의 환경이 조성된 것은 맞다.

하지만 한 가지 맹점이 있다면 죄수들이 아는 것은 소장과 교도관들 또한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도관들은 죄수들에 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감옥은 통제된 곳이다. 죄수들은 통제된 삶을 산다.

그게 당연한 곳이 감옥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 뛰고 있으면 걷고 싶고, 걷고 있으면 서고 싶다.

감옥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고, 보다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한다.

불시 검방은 그러한 죄수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아무리 빡빡하게 통제한다 한들 죄수들을 완전히 통제 아래 둘 수는 없다. 일반 감옥도 그럴 진데 용사들로


이루어진 연옥은 어떨까.

나갈 날짜가 정해진 일반 감옥의 죄수들과 달리 연옥의 죄수들은 기약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 자유를 갈망하고,
탈옥을 준비한다.

“모두 나와!”

모든 독방의 문이 열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저녁을 먹고 있던 죄수들이 교도관들의 손에 이끌려나왔다.

“일렬로 서도록.”

강제로 벽을 짚고 고개를 파묻는다. 그 사이 교도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 문제가 있는 물건을 찾는다.

“크윽···! 이거 놔!”
“얌전히 있게.”

거친 몸부림으로 더욱 거세게 제압당한 강민식이 데르카인의 목소리에 조금 진정을 되찾았다.

“데르카인님? 이게 대체 뭡니까?”
“검방이네. 죄수들이 연옥에 허가되지 않은 물건을 들였는지, 들이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지.”
“그게 무슨···!”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은 했네.”

데르카인이 쓰게 웃었다.

드워프들에게 공방을 쥐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세계수의 이동이 갖가지 변수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소장은 소장의 자격이 없다.

만약 그가 소장이었다고 할지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예상이요?”
“소장이 공방을 지어주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대안도 있으신 겁니까. 물으려던 강민식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바로 뒤에 교도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저들의 앞에서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닌 거다.

그러는 사이 교도관들은 어느새 불법 반입물들을 찾아냈다.

불법 반입물들이 복도에 쌓여갔다. 그리 많지는 않았고 대부분이 정말 사소한 것들이었다.

부소장이 탐탁지 않은 눈빛을 했다. 딱히 탈옥을 위해 필요하다고 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정말 이게 전부입니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참작의 여지는 있습니다.”


“왜 날 보는지 모르겠군.”
“우연입니다.”

어깨를 으쓱인 부소장이 다시금 명령을 내렸다.

“죄수들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고 공방 쪽도 수색한다. 소장님이 요구하신 물건이 아닌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예!”

죄수들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고 감시를 위한 교도관 두 명을 제외하고 복도는 텅 비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을 때, 데르카인은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사입니다.”

소지, 베르너가 가져다주는 아침 식사까지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정신 교육 시간이 되지
않았다. 연옥을 수리하기 위해 공방으로 가지도 못했다.

“모든 일정이 취소된 건가?”


“세계수로 인해 불안정해서 당분간은 죄수들을 방에서 나오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언제까지?”
“글쎄요. 한 닷새 정도 이야기하던데.”

길다. 너무 길다. 닷새라면 세계수의 이동은 완전히 끝나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갈구하던 기회도 사라진다.

“소장은 뭘 하고 있나?”
“매일 같이 세계수한테 간다는 걸 제외하고는 딱히 모릅니다. 애초에 밥 먹을 때를 제외하면 저를 부르는 일도
거의 없어서.”

소장의 신경이 세계수에 쏠려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게 지금이 탈옥의 적기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소장은 필요 이상으로 세계수에 관심을 쏟고 있다. 아마 엘프들이 불안해서 더 그런 것이겠지만 그로 인해 정신이


팔려 있다면 이쪽은 좋다.
문제라면 이곳에 꼼짝 없이 갇힌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검방에 대비해 모든 것들을 치워놨기에 독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엘프들은 그대로 원예반에 나가고 있습니다.”


“엘프들이?”

대충 어떤 그림인지 예상이 갔다. 다른 것들과 달리 영초들은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 세계수가 불안정한 마나를
발산하고 있으니 더 그럴 거다.
엘프들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 소장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건 데르카인 입장에서 한 줄기 빛이었다.

* * *

늦은 밤, 바깥에는 달빛이 내려쬐어 있겠지만 꽉 막힌 독방에는 빛 한 점 새어나오지 않는다.

절대 꺼지지 않는 마법 전등만이 흐릿하게 쓸쓸한 독방을 비춘다.

데르카인은 조심스레 배급구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텅 빈, 복도는 을씨년스러웠다. 딱히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좌우를 살피니 배급구를 닫아놓지 않은 방은


딱 하나였다.

“자나?”
“안 잡니다.”

작은 속삭임에도 대답은 바로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열어놓으라고 했네.”


“무엇입니까?”
“검방 때 말이네. 자네는 용케 안 들켰다 싶어서.”

아무리 작다고 한들 교도관들의 수색은 제법 빡빡하다. 데르카인은 강민식이 그가 준 증폭기를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모든 용사들에게 나름의 한 수가 있겠지만 강민식은 검방의 존재 자체를 모르지 않았나.

“입 안에 넣어놨습니다.”
“입 안도 검사했을 텐데?”
“어금니 안쪽에 본래 독단을 숨기고 다니던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에 넣어놨습니다.
크기가 무척이나 작아 우겨넣으니 어떻게든 되더군요. 마력 차단 각인이 새겨져 있어서 마나가 새어나올 일은
없습니다.”

어금니에 독단이라. 데르카인이 쓰게 웃었다.

“자네도 험난한 삶을 살았군.”


“제가 살던 세계에는 초인이라 불릴 만한 자들이 없다보니 더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용사의 힘을 받았다고 한들, 처음부터 강한 게 아니다. 용사의 힘이란 결국 주어진 업을 뚫어낼 수 있도록
한계를 없애는 힘일 뿐이니.

재능이 있어 용사가 되었으나 막 소환되었을 때의 강민식은 너무 약했다.

“그렇다고 딱히 자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장의 한 수였죠.”


“그 말이 딱 맞군. 비장의 한 수로 용케 숨겨서 징벌방을 피했으니.”
“예, 맞습니다.”

강민식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더욱 목소리를 낮추고.

“덕분에 성공했습니다. 구속구를 풀 수 있습니다.”


“······!”

진짜 비장의 한 수를 이야기했다.

* * *

죄수들이 아는 건 소장도 안다.

데르카인이 세계수의 이동이 탈옥의 적기라고 여겼던 것처럼, 소장도 똑같이 생각했다.

소장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죄수들을 가두어 놓았다. 죄수들이 방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었다.

영초를 위해 엘프들은 원예반으로 출역에 나가야 했다. 소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영초란
개복치 같아서 신경을 써주지 않으면 금방 죽으니까.

데르카인이 통신기를 꺼냈다.

아주 작은 양의 마나를 소모하는 대신 보낼 수 있는 메시지도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구형.

교도관들이 마나에 민감해 어지간하면 쓸 수 없지만 세계수로 인해 마나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지금 같은


시기에는 아무리 이용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때. 당도.]

때가 다가왔다.

탈옥 계획은 드워프들만, 수인들만 새운 것이 아니었다. 드워프, 수인, 엘프를 비롯해 다크엘프, 거인족까지.
모든 죄수들이 동참했고 모두가 협력해야만 한다.

때문에 엘프들과의 계획 조율은 반드시 필요했다.

아니, 단순한 조율을 넘어 지금은 엘프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난. 그만.]

허나 돌아온 대답에 데르카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난, 굳이 해석할 필요 없이 시에나 본인을 이야기한다.

그만. 하지만 이건 무어라 해석해야 할까. 통신을 그만? 아니, 아니다. 짧은 한 단어지만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해하고 싶지 않을 뿐.

탈옥을 그만 두겠다.

“어째서?”

늙은 난쟁이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단순히 자기가 아니다. 시에나 올름은 엘프 죄수들을 대표한다. 그녀가 탈옥을 포기했다는 것은, 다른 엘프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변수다. 그것도 엄청나게 좋지 않은 변수.

엘프들에게 모든 것을 의존해야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더.

“대체 왜···?”

연옥의 탈옥은 혼자서 이룰 수 없다. 모든 죄수들이 하나가 되어 조금씩, 조금씩 쌓아나가야 하는 금자탑이다.

무려 15 년이다. 그 긴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이제 결실이 맺어지기 직전이다.

[상황. 변.]

상황이 변했다. 뭐가 어떻게 변한 걸까.

사실, 변한 건 많다. 하이엘프라는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가 들어왔고 세계수가 발아했다. 감옥이기 때문에
대놓고 표현하지 못할 뿐, 평범한 세계였다면 엘프들에게 있어 엄청나게 큰 대격변이다.

[율리아? 세계수?]

“율리아 카르센 때문인가? 아니면 세계수 때문인가?”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다.

[모두.]

역시. 대답은 데르카인의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허나 그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하이엘프와 세계수가 엘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모른다.

그는 드워프이고 세계수를 위대한 나무로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했다. 과연 그게 15 년을 준비한 탈옥을 포기할 정도인가.

함께한 죄수들을 버릴 정도인가.

[포기. 우리 모두.]

“절대 안 된다. 자네가 포기하면 우리 모두가 망해.”

[미안. 하지만.]

미안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이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뿌득, 데르카인은 엘프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연옥에서 길러낸 인내심은
간신히 그의 감정을 억제했다.

[모름. 세계수. 중요.]


[들어서. 짐작.]

“나는 자네들에게 세계수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네. 하지만 자네들이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는 들어서 짐작하고
있지.”

[세계수. 탈옥. 포기.]


[목적. 무엇?]

“대체 무엇인가. 율리아 카르센,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세계수까지 제물로 삼아가며, 자네들이 탈옥을
포기하면서까지 하이엘프가 이루려하는 것이 무엇이냔 말이야!”

단순한 탈옥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게 과연 탈옥보다 가치 있을까.

허나 곱씹은 그의 분노에 대한 대답은 지나치게 간단명료했다.

[말할 수.]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탈옥. 불가. 협조. 가능.]


[최대한. 가능한.]

탈옥은 불가하지만 협조는 가능하다.


최대한, 가능한 도와주겠다.

그제야 데르카인의 가슴속에 피어오르던 불꽃이 차갑게 식었다.

다행히 완전히 손을 놔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가능성은 있다.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것만 못하지만.

[더 이상. 사정.]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묻지 않겠네. 엘프들만의 사정이라는 게 있겠지.”

그 사정이 대체 무엇이기에 15 년을 함께 준비한 죄수들을 버리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참았다.

지금은 엘프들의 도움이 무엇보다 절실하기에.

[상황. 인지?]

“지금의 상황은 알고 있나?”

[인지.]

알고 있다.

[도움. 절실.]

“엘프들의 도움이 절실하네.”

[해방.]

“우리를 독방에서 해방시켜 주게.”

탈옥을 휘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독방에서 탈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구속구를 해제하는 것이다.

[언제?]

언제?

[세계수. 이동. 언제?]

“세계수의 이동은 언제까지 이어지나?”

[길면 닷새. 이제 나흘.]

길어야 닷새. 하루가 지났으니 이제 나흘이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세계수의 이동이 계속되는 와중에 결행하는 것과 끝난 직후에 하는 것.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소장이 세계수에 관심이 쏠리는 대신 교도관들의 감시가 심해졌다는 것,
후자는 소장이 풀려난 대신 지금에 비해 감시는 약해질 거라는 것. 그리고 그 허점을 찌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역시 맹점이 있다. 소장이 세계수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다. 소지의 말로는 세계수의 곁을
계속 지키고 있다는데 그것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다.

[소장. 세계수. 어떤?]

“소장에게 세계수는 어떤 의미인가?”

[잘.]
잘 모른다.

제한적인 정보. 그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탈옥은 결국 도박이다. 교도관들은 퇴근을 하지 않는다. 소장 또한 감옥을 벗어나지 않는다. 연옥은 언제든
죄수들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결국 때란 그나마 감시가 조금 느슨해지는 순간을 이야기할 뿐, 모든 것이 사라진 완벽한 순간이 될 수는 없다.

[내일. 저녁.]

“내일 저녁.”

그렇기에 데르카인은 선택했다.

조금이라도 소장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 있는 지금을.


죄수들을 독방에 가두어 서로 대화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안심하고 있을 교도관들의 빈틈을 찌르기로.

[결행.]

“우리는 이 거지같은 곳을 벗어나 있을 걸세.”

어차피 그에게는 뒤가 없었다.

───────────────
# < 020. 구속구 >

해가 떠오른다.

따스한 햇빛이 싸늘했던 밤공기를 덥힌다. 얇게 내려앉은 이슬들이 증발한다.

빛을 완전히 차단하던 잎과 줄기, 가지들은 어느새 연옥의 절반을 내줬다. 옥상에서 고고하게 존재감을 뽐내던
핵심 줄기 또한 그 위치가 변했다.

옥상을 벗어나 수많은 줄기들과 합류했다. 흡사 파도와도 같은 그 흐름에 김우진은 율리아와 함께 몸을 실었다.

“꼭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감시하셔야겠어요?”

세계수와 밀착한 채, 움직임을 인도하고 있던 율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전 하이엘프에요. 제가 어머니 나무께 감히 무슨 짓을 하겠어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 삐이?

김우진은 뻗어나가는 가지 사이에 몸을 뉘였다. 릴리가 자연스럽게 옆에 붙었다.

“소장이면 바쁘지 않아요? 여기서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시간이 있어요?”


“안 바빠. 근데 지금은 바쁘지.”
세계수의 이동은 세계수의 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본래라면 몰라도 지금의 릴리는 어리다. 많은 영약으로
과성장했을 뿐, 그 본질은 갓난아이와 같다.

율리아와의 교감이, 그녀의 이끌림이 아니라면 세계수는 원활히 이동조차 할 수 없다. 율리아가 세계수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며, 김우진이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하이엘프와 세계수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다.

김우진은 이미 세계수가 연옥에 뿌리를 내리면서 어떤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래서 더욱 둘 만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세계수라는 존재가 온전히 하이엘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탈옥


프리패스권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시겠죠.”

하이엘프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다시 본업에 집중했다.

청명한 하늘을 보며 김우진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공교롭다. 세계수의 씨앗을 건넨 후, 그것을 심고 길러낸 것은 분명히 김우진이다. 씨앗에 간섭했고
그 결과로 세계수의 정령은 분명하게 그에게 호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다.

세계수는 그가 심은 곳에서 제법 떨어진 연옥의 건물까지 왔다.

세계수를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것들은 결코 김우진이 바라던 것도,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율리아가 그린 그림이 아닐까.

물론 억측이다.

율리아가 어떻게 김우진을 알겠나. 그가 어떤 자인지 알고 이런 세세한 계획을 세웠겠나. 모든 것은 우연이다.


그녀가 씨앗을 넘긴 것을 제외하면.

그러니 씨앗을 넘긴 이유만 파악한다면 더 이상의 변수는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뭐지?”

툭 튀어나온 질문은 두서가 없었다.

“갑자기 무슨 뜻이에요?”
“나는 세계수가 너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래를 받아들였다.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건 그만큼 값진 것이기 때문,


세계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었지만 최후의 방벽은 있었다. 만약 간섭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더라면 심지


않았을 거다.
“생각해보면 넌 단 한 번도 목적이 탈옥이라고 하지 않았어.”
“하지 않았었나요?”
“탈옥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죄수도 있냐고 했었지. 그게 본인이라는 소리는 안 했고.”
“······.”
“네가 바라는 대로 씨앗을 심었어. 세계수가 발아했고 정령까지 형상화할 정도로 자라났지.”

하이엘프가 세계수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당연한 일이다. 너무 당연해서 그 이상을 모르겠다.

율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실 건가요?”


“난 소장이야. 죄수를 괴롭힐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알고 있고 실천할 수 있지.”
“감수하겠다면요?”
“네 선택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수상하다는 것만 알아두면 돼.”

사실, 큰 의미는 없다. 그녀는 세계수의 씨앗을 넘긴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율리아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나온 건 대답이 아니라 짧은 독백이었다.

“가능하면 확신을 가질 때까지 참으려고 했어요.”


“어떤?”
“저도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난 질문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알베니우스라는 드래곤을 아시나요?”
“뭐야, 너 글라크 출신이었냐?”
“아니요.”
“거짓말하고 있네. 글라크 출신도 아닌데 알베니우스에 대해 알 수 있을 리가···.”

아니, 잠깐만.

김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율리아 카르센이 처음 인계되었을 때,그녀의 인적정보가 담겨 있는 서류도 함께였다.

그녀는 차원, 아르반 출신이다. 차원, 데이드람을 구했다.

“···너 뭐야?”

차원, 글라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 * *

식물원 무수히 많은 영초들이 자생한다. 각자의 환경이 다르기에 그에 따른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있다.

“아리우스의 마법진이 흔들립니다!”


“재조정해!”
“설명초의 이파리가 시들고 있습니다!”
“숲의 정기를 흡수하게 만들어!”

어린 세계수는 아직 제 몸을 온전히 가눌 여력이 없다. 세계수의 이동 과정에서 마나가 흔들리고 여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식물원의 마법진들이 조금씩 문제를 일으켰고 이를 막기 위해 엘프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엘프들만으로는 부족해 단순 보조로나마 교도관들까지 합세했다.

“베르스의 꽃이 시들고 있단다. 가서 숲의 정기를 보충해주고 온도를 낮추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예.”
“아일라. 너는 나와 함께 만드라고라를 살피러 가자구나.”
“예.”

교도관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 시에나가 엘프 하나를 이끌고 만드라고라 쪽으로 갔다.

만드라고라는 다른 식물들보다도 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까다롭다.

때문에 다른 식물들과는 떨어진 외딴 곳에 심어져 있다.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더 없이 적합했다.

“어느 정도했니?”
“수인들이 묻어놓은 마력 잔해들은 절반 정도 수거했습니다. 아직까지 교도관들에게 들키지 않았습니다.”
“혹여나 놓치는 것은 없겠지?”
“예. 위치와 양을 모두 공유하고 있습니다. 수인들이 몰상식하기는 해도 탈옥에 관해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더 급한 쪽은 그쪽이라. 다만, 축사장 쪽으로는 현재 접근이 불가능해서···.”
“그건 내게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마렴.”
“예. 그런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무엇이 말이니?”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희 또한 징벌방을 면치 못하게 될 겁니다.”
“그럼 어떻니.”

안다. 실패와 성공을 떠나서 탈옥을 포기한 엘프들에게는 전혀 득이 될 게 없는 일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거나, 소장에게 탈옥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남는 장사다.

“하지만 15 년이잖니.”

15 년의 긴 기다림과 준비가 끝나는 순간이다. 그 결과가 모두가 바라던 것일지, 아니면 최악일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엘프라는 이유로, 세계수라는 이유로, 율리아라는 이유로 탈옥을 포기하고 남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들은 같은
죄수였다.

수십 년 간 부대끼며 함께 탈옥을 계획하고 나갈 날 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 기대를, 그들의 기대를 알기에 저버릴 수 없다.

“아니면 너는 소장에게 다 고할 거니?”


“까짓 것, 징벌방에 좀 들어갔다 나오고 말겠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죽기야 하겠습니까?”
“3 징벌방에 열흘을 넣으면?”
“···그건 조금.”
“농담이란다. 아마 그렇게까지는 안할 걸.”

너무 자주 행해지는 형벌은 아무리 대단해도 그 위엄과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다.

3 징벌방은 중차대한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탈옥은 중차대한 일 아닙니까?”


“탈옥에도 경중이 있지. 우리는 조금 도와주었을 뿐, 탈옥을 하지는 않을 거란다.”

죄에도 분명히 차등이 있다. 조력자와 탈옥자가 같을 수는 없다. 그들에게 같은 벌을 내려주는 것은 규율의
문제다.

“혹시 모르지. 소장이라면 우리를 3 징벌방에 넣고 새로운 4 징벌방을 만들지.”


“···그건 상상만해도 끔찍하군요.”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정이란다.”

가정이지만 현실성이 아예 없진 않은 게 제일 문제였다.

“뭐, 그거야 나중 일이지.”

시에나는 차분히 만드라고라의 근처를 팠다. 제법 깊은 곳, 얇은 비닐 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쨌든 상황은 좋구나.”

영초의 영약들을 일부나마 빼돌리는 건 어렵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건 마나를 품고 있는 물건을 숨기는
것이다.

교도관들은 더없이 마나에 민감하다. 영초를 빼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따로 챙기기 보다는 우선 숲에 나무를 숨기는 것을 택했다. 마나가 풍부한 영초 곁에 묻어두면 영초의
부산물들은 사소해진다.

식물원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어 전부 모으면 꽤 되겠지만 상관없다. 세계수가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이 모든 것을 숨겨줄 테니.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말 탈옥하기엔 최고의 상황이다.

그리고 숨겨놓은 건 영초의 부산물뿐만이 아니다.

비닐 속에서 기이한 문양을 띤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단해 보이지만 수백 개의 술식이 집약된 마도구였다.

오랜 세월 동안 연구했음에도 고작 4 개밖에 만들지 못한 것이며 목적은 구속구의 해제다.

마나를 일부 차단해주던 비닐을 완전히 걷어내자 마나가 용솟음쳤다. 교도관들이 그 기이함을 눈치 채기 직전.

마력구가 시에나의 구속구와 접촉했다.

* * *
탈옥에도 순서가 있다.

연옥의 탈옥은 특히나 그렇다.

구속구. 그 어떤 감옥에도 없는, 힘을 억제하는 기물은 죄수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구속구의 해제는 모든 조건들보다 우선시 되어야만 한다. 가능하면 전부, 그게 아니라면 수뇌부라도.

‘데르카인님이 전해달라네요. 내일이래요.’

어제 저녁, 소지를 통해 전해진 전언. 많은 것이 빠져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내일. 어제의 내일이니 오늘이다.

강민식은 조금 망설였다.

한 손에는 세계수의 나뭇잎을 쥔 채, 침대에 몸을 기댔다.

탈옥을 바라는 것은 맞다. 데르카인을 비롯한 기존 죄수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너무도 급작스럽다.

쿠구구구-

밀폐된 독방을 뚫고 들어오는 진동은 분명히 일반적이지 않다. 배급구를 열면 소음이 일어나고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이 전해진다.

기회, 기회라면 기회다. 오랜 시간 탈옥을 준비한 것 같은 다른 죄수들에게는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그게 강민식에게 또한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그는 이방인이다. 같은 죄수이나 섞여들기에는 너무 짧았다. 그들의 계획을 공유받기에는 더욱 더.

저들의 계획에 대해 명확히 아는 바가 없다. 그게 가능성이 높은지, 낮은지도.

그가 바라던 건 죄수들과 교류하며 저들의 계획에 숟가락을 얻고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 완벽하게 탈옥하는 것이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급류에 휩쓸리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이 미지다. 저들의 손을 잡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만약 실패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탈옥이 쉽다면 죄수들이 치를 떨 리가 없다.

실패한다면 소장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아마 3 징벌방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겠지.

솔직히 그건 겁나지 않는다. 2 징벌방을 통해 그들의 장담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3


징벌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나뭇잎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흘러들어오는 마나를, 이빨 속의 증폭기를 느끼며 다른 손으로 구속구를 잡았다.


실패한다면 실패하는대로 소장과 교도관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 수 있다. 탈옥을 위해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성공한다면 그저 좋다.

죄수들이 무서워하는 3 징벌방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그에게는 거리낄 게 없었다.

치이이이익-

마나에 뒤섞인 독기에 구속구의 술식이 일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툭-

이미 지속적인 실험으로 약해진 구속구는 순식간에 떨어졌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진동에 공명하듯, 심장이 거칠게 박동한다. 붙잡혀 있던 마나가 용솟음친다.

차오르는 충만감에 깊은 고양감을 느낀다.

방 안은 매케한 독연으로 가득했지만 배급구를 열지는 않았다. 독기가 빠져나가는 순간, 교도관들이 이변을 눈치
챈다.

그 순간.

철컥-

문이 열렸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독연이 신선한 공기를 만나 빠져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늙은 드워프가 들어왔다.

“풀었나?”
“풀었습니다.”
“···정말로 성공이군. 자네가 몇 년만 일찍 들어왔다면 우리는 벌써 탈옥을 했을 걸세.”
“따로 방법이 있는 겁니까?”
“있네. 하지만 공방까지 가야하지.”

공방으로 가야만 풀려날 수 있는 것을, 독방에서 바로 풀어버릴 수 있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풀어주게.”

데르카인이 스스로의 목을 맡겼다.

“지금이야 말로 이 거지같은 곳을 빠져 나갈 때네.”

* * *

애애애애애앵-
붉은 경고등이 반짝인다.

은은한 진동, 불안정한 파동과 소음에 뒤섞인 새로운 소리에 연옥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교도관들이 달려온다.

“무슨 일이야!”
“죄수들이 탈옥했습니다! 복도를 지키던 교도관들은 이미 당했습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가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는
교도관들이다.

활짝 열린 문들과 반쯤 파괴되어 기이한 소음, 마나를 발산하고 있는 각 방의 통제 시스템.

죄수들이 사라졌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런 미친···!”

열리지 않은 문은 일곱 개. 의심할 여지없이 엘프들과 소지의 것이다.

허나 그들은 탈옥하지 않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없다. 엘프들도 소지도 애초에 방 안에 없다.

[죄수들이 1 층 로비를 지나쳤습니다!]


[식물원과 축사장이 공격당했습니다!]
[식물원은 이미···.]

어지럽게 들려오는 소식들은 부소장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했다.

상황은 급박하다. 죄수들은 이미 본래의 자리를 벗어났고 실시간으로 교도관들이 당하고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

탈옥할 수는 있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으니. 의문은 두 가지다.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 그리고 교도관들이 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

연옥의 교도관들은 강하다.

용사라는 특별한 죄수들을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한 자들인 만큼, 그들의 무력은 어느 차원에서도 수준급에 들
정도다.

용사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적어도 구속구를 착용한 용사들에게까지 허탈하게 당할 정도는 아니다.

그때, 그의 시야에 활짝 열린 한 독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불쾌한 연기를 간혈적으로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건 분명히 구속구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반쯤 부식된 구속구는 이미 망가져 제 역할을 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구속구를 해제했어?”

어떻게? 라는 의문도 잠시.

[부소장님! 죄수들이 공방으로 향합니다! 마, 막을 수 없습니다! 모두 구속구가 해제되어 있습니다!]


[지원 요청합니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다급한 전언이 다시 한 번 현실을 확인시켜줬다.

“전부···?”

대체 어떻게? 다시 한 번 의문이 고개를 쳐들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정답 찾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소장님께 가서 죄수들의 탈옥 사실을 알려라. 너는 당장 긴급 방호 시스템을 작동시켜. 그리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온다.”
“예!”

침착함을 잃지는 않았다. 잃을 필요도 없었다.

구속구를 푼 것은 분명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의 역할은 소장을 보좌하는 것. 죄수들이 탈옥을 일으켰을 때 시간을 끄는 것.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막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것.

어차피 탈옥은 불가하다.

소장이 있는 한.

───────────────
# < 021. 멍멍 >

콰직-

독방 앞에 설치된 마도구가 맹렬한 스파크를 번쩍이며 기능이 정지되었다.

콰앙, 두터운 문이 열렸다. 수인이 나왔다.

“이걸로 끝이구나.”

시에나 올름이 탁탁, 손을 털었다. 이로서 모든 죄수들이 풀려났다.

층을 관리하던 교도관들은 모조리 기절해 구석에 처박혀 있다. 죄수들의 탈옥을 막을 만한 이는 당장 없었다.

“다 됐습니다.”

탱탱거리는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죄수의 목을 옥죄고 있던 구속구가 떨어졌다.

독방과 구속구. 죄수들을 제약하던 가장 큰 난제 두 개가 해결되었다. 더 이상 저들을 죄수라 부를 수 없다.


저들은 용사다.

“우리는 여기까지야.”

그쯤에서 시에나는 이별을 고했다.


식물원의 교도관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독방의 시스템을 망가트려 모조리 열어 재낀 것만으로도 충분한 징계
사유다.

그 이상은 엘프들의 무대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15 년간 함께 준비한 것에 대한 예우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고맙네. 충분하고도 남네.”

소장이 모든 출역을 막아버리면서 엘프들이 아니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이미 엘프들은


많은 것을 해주었다.

“받아. 축사장에서 가져온 핵의 부산물이니까.”


“꽤나 많군.”
“영초보다 모으기 쉬우니까.”

마수의 핵은 직접 싸워서 죽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의 손상은 무조건적이지는 않지만 아예 없을 수도


없다.

“어떻게 가져왔는지 대충 알겠군. 감옥 문을 열어줘서 다시 한 번 고맙네. 이제어디로 갈 생각인가?”


“식물원으로 다시 가야지. 아픈 교도관들 좀 보살펴 주러.”

시에나 올름이 엘프들과 함께 멀어졌다.

“우리는 공방으로 가야 하네.”

데르카인이 죄수들을 수습했다.

“여기는 아직 교도소 안이네. 방에서 벗어났다고, 구속구를 풀었다고 안심할 단계가 아니야.”

공방에는 지금까지 그들이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챙기고 난 다음에 감옥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정해진 계획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허나, 달의 은총을 받은 짐승이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기껏해야 4 명의 구속구를 풀 거라는 예상과 달리 모두가 풀려났는데?”

넷과 전부는 다르다. 엘프들 여섯하고 소지놈이 빠졌다고 한들 스물여섯이다. 스물여섯의 죄수들? 아니다.
스물여섯의 용사들이다.

막 용사가 된 새싹들이 아닌, 전원이 세상을 구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

도망갈 필요가 있을까? 시간에 쫓길 필요가 있을까?

투지가 넘치는 짐승들은 고개를 저었다.

“미쳤군. 소장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나?”


“아무렴, 모를까. 내가 가장 잘 알지.”
“그런데도 싸우겠다는 건가?”
“혼자로는 상대가 안 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니까.”

이 자리의 모든 용사들이 상담을 핑계로 소장과 부딪히고 깨졌다. 소장이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다.

하지만.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해.”

개인과 무리는 다르다. 그리고 원한을 잊지 않는다.

아예 가능성이 없다면 몰라도 가능하다면 당했던 것들을 돌려주고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당신이야 말로 너무 오래 갇혀 있다 보니 겁쟁이가 된 건가? 기껏 기회가 왔음에도 잡지 않고 도망치는


귀쟁이들처럼?”
“소장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네.”
“나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고.”
“20 년 전 그 날을 잊었나?”
“그때는 모두의 구속구가 풀리지 않았지. 만전도 아니었고.”
“대화가 안 통하는군.”
“누가 할 소리를.”
“마음대로 하게. 나는 가겠네.”

오지 않겠다면 버리는 게 맞다. 불필요한 논쟁을 벌일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이미 식물원과 축사장이 뒤집어졌으며 엘프들과 소지를 제외한 모든 독방들이 열렸다. 소장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나를 따라올 자들은 따라오게.”

드워프들이 데르카인의 곁에 붙었다. 슬금 슬금 눈치를 보던 다크엘프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복수하고 싶다.”

허나 거인족은 투지를 드러낸다.

“자네는 어쩔 텐가?”
“인간, 너 또한 소장에게 쌓인 게 있지 않나?”

순식간에 열여섯이 빠졌다. 모두의 시선이 아직 방향을 정하지 않은 강민식에게 향했다.

복수. 물론 하고 싶다. 솔직히 타르칸의 말에 틀린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무작정 그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데르카인의 선택 또한 걸렸다. 수백 살이 넘은 드워프가, 그가 보았던


어떤 장인보다 뛰어난 드워프가 아무런 근거 없이 싸움을 피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는 데르카인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난쟁이와 귀쟁이들이 수백 년 동안 고작 네 개 밖에 못한 걸 전부 풀어서 다를까 싶었는데 그냥 겁쟁이였군.”
“분명히 말하는데 구속구 해제는 내 능력 부족이 아니라 강민식이 특이한 능력을 지닌 거네.”
“변명이 추하군.”
“어쨌든 결정 났군. 살아서 볼 수 있기를 빌겠네.”

10 명이 떠나갔다. 16 명이 남았다.

“다크엘프를 저렇게 보내도 되는 겁니까?”


“무슨 상관이냐. 소장을 잡으면 어차피 방법이 나올 텐데.”
“그것도 그렇군요.”
“우리도 밖으로 나가자.”

비좁은 건물보다는 드넓은 들판이 짐승들에게는 더 맞다.

“소장을 성대하게 환영해줘야지.”

타르칸의 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황금빛 동공에서 야성과 살기가 일렁였다.

* * *

애애애앵-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사이렌은 김우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너, 뭐냐고 묻잖아.”

바짝 다가오는 살기에 피부가 쭈뼛 선다. 율리아는 스스로의 입을 자책했다. 역린을 건드린 걸까. 조금 더 유한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어야 했다.

“···저거 괜찮은 건가요?”


“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

애써 주제를 돌려보나 돌려지지 않는다. 김우진의 입가가 비틀렸다.

“자세히 말해줘야 알아들을까? 아르반 출신인 네가, 데이드람의 용사로 활동한 네가, 어떻게 글라크의 용을
아느냐고 물었어.”
“···만나봤으니까요.”
“만났다고?”

김우진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거야 말로 말이 되지 않는다. 차원이동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적어도 율리아 카르센은 차원 이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어떻게?”
“그게 중요한 가요?”
“중요하지. 중요하고 말고.”

아니, 사실 더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라 알베니우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다.

알베니우스는 공식적으로 죽었다. 그가 아무에게나 자신의 이름을 알릴 이유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너 설마···.”
“소장님!”

그때, 옥상의 문이 벌컥 열렸다. 교도관이 옥상의 난간에 기댄 채 소리쳤다.

“죄수들이 탈옥했습니다.”

알고 있다. 비상 상황임을 알리는 사이렌은 죄수들이 탈옥할 때가 아니면 울리지 않는다.

교도관이 꿀렁이는 세계수 위로 뛰어내렸다. 슬쩍, 율리아의 눈치를 살피다 보고를 시작했다.

“모든 방의 시스템이 망가졌습니다. 외부에서 파손해 문을 열었고 죄수들이 일제히 나왔습니다.”


“전원?”
“엘프들과 1176 번의 방은 제외되었습니다만···.”
“엘프들의 짓이군.”

애초에 외부로 나가 있던 것이 엘프들 뿐이었다. 문을 열어준다면 그들뿐이다.

소지인 베르너도 있긴 하지만 놈은 탈옥에 뜻이 없다. 만약 있다면 지금까지 속여 왔을 연기력에 경의를 표한다.

“···어, 엘프들이···?”

갑작스러운 탈옥 소식에 당황한 하이엘프는 무시했다.

그녀는 연관이 없다.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일을 벌일 리가 없으니.

‘아니, 정말 없나?’

죄수들을 탈옥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그 안에 율리아 본인은 없었다. 애시 당초 그리던 그림이 이런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교도관들은 뭘 하고 있었지?”

하지만 당장은 탈옥한 죄수들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엘프들이 구속구를 풀고 교도관들을 돌파했습니다. 이후, 모든 죄수들이 구속구를 풀었습니다.”


“구속구를 풀었다고?”

구속구는 마도공학의 집약체였다. 단순히 뛰어난 것을 넘어 상부의 권능까지 일부 들어간 물건이었다.

물론, 모두 한 가닥씩 했던 자들이니 오랜 시간동안 연구를 하면 어쩌면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일부지, 모든 구속구를 단숨에 풀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김우진이 예상한 것보다 더 상황이 심각했다.

“부소장은?”
“교도관들을 이끌고 공방으로 향한 죄수들을 막으러 갔습니다.”

생각은 뻔히 보인다.
죄수들이 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우진이 세계수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 기회라는 것도. 하지만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모든 전제는 김우진이 세계수에 지나치게 집착해 정신이 팔려 있어야지만 가능하다.

물론 세계수에 어느 정도 집착했던 것은 맞다. 세계수를 이동시키는 것이 저들의 탈옥을 용이하게 할 요소임에도


강행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하지만 그게 반드시 연속적으로 강행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릴리. 멈춰.”
- 삐이?

“율리아. 세계수를 멈추게 해라.”


“···어.”
“멈춰.”
“···알겠어요.”

쿠구구구-

진동이 잦아들었다. 소음이 사라졌다. 마나의 파동이 약해지고 세계수가 멈췄다.

- 삐익? 삑?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1178 번을 방으로 데려가라.”


“예.”
“방에서 기다려라. 잠깐 벗어났다고 끝난 줄 알면 오산이야.”

김우진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어느새 발걸음이 옥상 위에 닿았다.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철컥-

데르카인이 두툼한 갑옷을 착용했다. 공방이 생긴 뒤, 애용하던 망치를 어루만지자 양쪽으로 날이 튀어나왔다.
자루가 길어졌다.

거대한 배틀엑스가 만들어졌다.

드워프들 또한 공방 이곳저곳에 숨겨진 장비들을 하나 둘 챙겼다.

“10 명으로 되겠습니까?”


“차라리 잘 됐네. 수인들이 소장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줄 테니 우리에겐 여유가 더 생겼어.”
“···이미 수인들이 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자네도 의심이 드니 내 쪽으로 붙은 것 아닌가?”
“의심이라기보다는 데르카인님의 말이 뭔가 석연치 않아서.”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게 될 걸세. 이거 받게.”

검 한 자루가 강민식의 손에 던져졌다.

“검을 쓴다고 했지? 하나 만들어 놨네.”


“교도관들이 감시하지 않았습니까? 검방 때, 공방도 뒤졌던 걸로 아는데.”
“그래봐야 대장장이들이 작정하고 숨기는 걸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마법검도 아니고 그냥 검인데.”

데르카인이 코웃음쳤다.

“계획은 단순하네. 이대로 남하해 정문을 돌파하고 사막을 거쳐 차원의 경계에 다다를 거네. 그리고는 저 친구의
몫이지.”
“굳이 정문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까?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외곽으로 빠지는 게···.”
“아니, 정문이 제일 만만하네. 벽을 뚫는 건 결코 쉽지 않아.”

북쪽은 세계수가 있다. 김우진이 있다.

“그리고 서쪽은 덕구의, 동쪽은 춘식이의 영역이네.”


“···덕구랑 춘식이요?”

시골의 똥개들이 생각난 건 우연일까. 용사들을 가두는 연옥의 파수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일단은 그렇게만 알아 두게.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중요하니 나중에 설명해주겠네.”

데르카인이 도끼를 움켜쥐었다.

“가지.”

한가롭게 잡담할 여유 따위는 없다.

* * *

“···기다리고 있었나?”

교도관들을 수습해 죄수들을 쫓아나간 부소장이 마주한 것은 벌판 위의 짐승들과 거인이었다.

“이렇게 보니 더욱 반갑군. 그렇지 않나?”

은빛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웃음 속에 섞인 살기에 부소장이 신음을 삼켰다.

허나 눈은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열여섯, 모든 수인들과 거인족. 적은 숫자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제기랄, 역시 구속구는 모두 풀려있군.’

한 차원을 구한 용사들 열여섯과 구속구의 영향을 받는 그들을 상정한 수준의 교도관 스물. 승패는 굳이 붙어보지
않아도 명확할 만큼 극명한 격차가 있다.

그럼에도 물러날 수 없는 건 교도관이자, 부소장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굳이 승리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소장이 오면 모든 게 해결 된다.

“다른 죄수들은 어디 있지?”


“이미 멀리 떠났다. 잡고 싶으면 날 이기면 돼.”

물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물’이 시작할 때만해도 타르칸은 권태로이 바위에 앉아 있었다. 허나 그의 입에서 ‘만’이 나오는 순간,
부소장은 지독한 살기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올린 창 위로 손톱이 떨어졌다.

──!

막아냈음에도 몸이 흔들렸다. 창대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근육이 파열되며 비명을 질렀다.

까득, 악 문 이빨 사이로 한 줄기 핏물이 섞여 나왔다.

과연 달의 일족. 수인족 중에서도 특별하다고 일컫어지는 자다.

허나, 지금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타르칸의 공세와 함께 수인들이 움직였다. 그대로 교도관들을 덮쳐 일방적인 공세로 이어졌다.

끄아아악!
막아!

교도관들의 비명이 아른 거렸다.

“감히 날 앞에 두고 한 눈을 팔 여유가 있나 보군.”

연달아 참격이 쏟아졌다. 부소장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막는 것뿐이었다. 압도적인 속도는 피하는 것마저


저지했다. 압도적인 힘은 비껴 막음에도 몸이 비명을 지를 정도의 충격을 선사했다.

“네 사지를 부러트리고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게 만드는 것을 소장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즐겁군. 그간 괴롭혀온 원한들이 조금은 씻겨 나갈 것 같아.

쩌엉, 충격을 견디지 못한 부소장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교도관들이 정신을
잃어버렸다.

콰직, 죄수의 신발이 그의 등을 짓밟았다.

“고작 이 정도로 그렇게 뻗대고 다녔나?”

공기가 뜨거워진 것은 그때였다.

붉은 섬광이 타르칸의 등을 덮쳤다.


은빛 오러로 뒤덮인 손톱이 급하게 휘둘러졌다.

─!

그건 창이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화염의 창이 은빛 오러를 깨트렸다. 부서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생각 이상의 충격에 타르칸이 신음을 삼켰다.

“너네 뭐하냐.”

정면에는 어느새 그가 있었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이.

“탈옥을 했으면 꽁지 빠지도록 도망가는 예의라도 보여야지. 왜 마당에서 지랄이야?”


“널 기다렸다.”
“널? 말이 짧아졌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뭐, 괜찮아. 애초에 짐승놈한테 많은 걸 기대한 적은 없었어.”

애초에 말이야. 김우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예절교육을 시키는 건 내 전문이거든.”


“시건방진 건 여전하구나.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보겠···.”

김우진이 손을 내렸다.

타르칸의 등을 덮친 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하늘을 수놓은 수백 개의 염화의 창들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짐승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인이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허나 창은 두터운 가죽을 뚫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네···!”

그리고 그 사이, 김우진의 주먹이 타르칸의 얼굴을 강타했다.

───!

주먹과 살이 부딪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났다. 타르칸의 육신이 허공을 수십 번 굴렀다.

“멍멍하고 짖어야지.”

개가 왜 사람 말을 해.

“이 개새끼야.”

───────────────
# < 022. 대가 >

“노오오오옴!”

분노한 타르칸이 순식간에 일어나 공간을 도약한다.

아무런 징조 없이 화염이 폭주한다.


허공을 뜨겁게 달구며 폭발하듯, 튀어 오른다.
자신이 만들어낸 붉은 전경을 감상하며, 김우진이 손을 뻗는다.

솟아나는 화염의 검이 붉은 벽을 쪼개며 돌진하는 손톱과 부딪힌다.

─!

충격파가 퍼진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또 다른 손톱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

불의 검이 공간을 크게 가로지른다. 그려진 붉은 궤적이 모든 살기들을 쳐낸다.

궤적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똥을 토해낸다. 화염의 파도가 짐승들을 모조리 튕겨버린다.

그러나 상처 입은 짐승은 없다. 각기 다른 색의 오러들이 은은하게 육신을 감싼다.

수인들의 전투는 단순하다. 오러를 몸에 두르고 힘으로, 속도로, 본능으로 모든 것을 찍어 누른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기에 우스울 수 있지만, 그 한계가 범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라면 결코 가볍지 않다.

적어도 맨 몸으로 불꽃을 뚫고 달려드는 야수들을 목도한 자는 결코 수인들을 무시할 수 없다.

허나, 김우진은 웃었다. 비틀어진 입꼬리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으나 웃음이 나왔다.

─!

가볍게 발을 구른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의 파동이 원형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선두의 타르칸이 다시 한 번 오러를 믿고 몸으로 파동을 받아낸다. 하지만 열기를 이겨낸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공간을 가르는 검격이다.

쩌어엉, 오러가 산산이 부서지나 딱 거기까지. 오러를 희생한 타르칸은 김우진을 멈춰 세우는 것을 성공했다.

“나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힘들다면 혼자가 아니게 만들면 된다.

사방에서 김우진의 빈틈을 노리고 달려든다.

콰콰콰콰, 무자비한 손톱 아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나간다. 허나, 조각난 신체는 불꽃이 되어 허공으로
사그라든다.

어느 틈에? 뒤늦게 분신임을 파악한 수인들이 다급히 김우진을 찾았으나 그가 한 발 빨랐다.

불의 창.

수십 개의 불의 창들이 한 수인의 등을 노리고 날아든다. 포효하며 저항하나 모두 막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상처


입은 짐승 위로 거대한 붉은 검기가 떨어진다. 수직으로 빠르게. 무식한 힘을 싣고.

─────!
이전과는 다른 충격파가 터진다. 허나 붉은 섬광을 받아낸 것은 은빛 털로 완전히 뒤덮인 이족보행 늑대였다.

수인화. 완전한 짐승으로 변한 타르칸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은빛의 오러로 뒤덮인 손톱이 공간을 쇄도한다. 한층 강화된 육신은 힘과 속도 모든 면에서 벽을 돌파한다.

머리를 찢어발기기 직전, 화염의 검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

부딪힌 직후, 충격파를 비집고 또 다른 손이 날아든다. 생성된 불의 방패가 받아낸다.

─!

한 번은 두 번이 되었다.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세가 이어졌다. 공간이 찢어지고 대지가 박살난다. 그럼에도 야수들은 그대로 짐승으로
변해 참전한다.

그럼에도.

“멍청한 짐승 새끼들.”

손톱과 발톱, 주먹과 발, 오러와 이빨.

그 무엇 하나 김우진의 몸에 닿지 못한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수인의 전투 방식이기에, 변수가 없기에 더 없이 쉽다.

보다 강한 힘과 보다 빠른 속도와 보다 지독한 지구력만 있다면.

쩌엉, 세로로 그어진 참격이 타르칸을 덮친다. 강인한 오러와 가죽이 최악을 막았으나 그 충격파를 온전히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의 신형이 총알보다 빠르게 튕겨져 나간다.

김우진이 한순간에 비어버린 공간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 나간다. 당황하는 수인들을 향해 불꽃을 토해낸다.

불기둥.

대지를 뚫고 솟아난 마그마가 수십 개의 기둥을 형성한다. 아래에서 위로 수인들을 뒤덮는다.

불타는 가죽을 붙잡고 바둥거리는 수인들을 향해 검격이 떨어진다.

“이 개자식이!”

타르칸이 날아오고 돌아가는 그 짧은 시간, 절반의 수인들이 쓰러졌다.

콰앙,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타르칸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는다.

“더 짖어봐.”

성난 황금빛 동공을 내려다보는 김우진의 입가가 더욱 비틀렸다.


“끝장을 봐야지.”

* * *

정문을 지키는 교도관은 둘이다. 그뿐, 아무것도 없다.

평소에는 그랬다. 그래야만 했다.

“빌어먹을···.”

정문을 코앞에 둔 용사들이 주춤거렸다. 거대한 짐승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뭐라고요?”
“덕구와 춘식이네.”
“···아무리 봐도 덕구나 춘식이의 비쥬얼이 아닌데 말이죠.”

세 개의 머리와 두 개의 머리가, 여섯 개의 붉은 눈동자와 네 개의 푸른 눈동자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강민식은 지구의 인간들이 저것들을 무어라 부르는지 알았다.

“···케로베로스와 오르토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

뿌득, 이를 갈았다. 용사들을 가두는 연옥의 짐승들이 평범할 리가 없다는 것을 짐작했어야 했다.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쉽지 않았다. 구속구에서 해방 되었음에도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고민할 시간 없네. 소장이 나섰어.”

정문까지 나왔음에도 굉음과 열기가 느껴진다. 소장이 나섰다. 수인들이 싸우고 있다.

데르카인은 수인들이 그리 긴 시간을 끌어주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제가 나서서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때 빈틈을 노려서···.”

데르카인이 챙겨 왔던 마도구 하나를 던졌다. 검은빛으로 물든 작은 원반이었다. 그것은 드워프의 손을 벗어난


순간부터 점점 커졌다.

약 10m 의 지름으로 커진 원반은 케로베로스와 오르토스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그 순간, 두 짐승이 등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
“가지.”
“···뭡니까?”
“마물이라고 한들 사람의 손을 탄 개네. 개의 본성은 언제나 같지.”
“이런 미친 아무리 그래도 마물인데···.”
“혹시 몰라 만들어두기를 잘했군. 놈들이 좋아하는 마물의 피로 도배를 해놨으니 환장할 수밖에 없지.”
“저건 어디까지 날아가는 겁니까?”
“그전에 잡히지만 않는다면 마력을 전부 소모할 때까지 쭉 갈 거네. 적어도 5 분 정도는 끌어줄 걸세.”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정문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어.”
“순순히 비켜주겠나? 아니면 기절하고 비켜주겠나?”

두 짐승을 믿고 의기양양하던 교도관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채 꺼지지 않은 잔불들이 타닥 타닥 타오른다.

잘 관리된 잔디는 그 빛을 잃고 잿더미로 변한다. 용사에서 다시 죄수의 신분으로 되돌아온 자들의 육신이 그
위로 쓰러졌다.

철컥-

마지막으로 구속구가 채워진 짐승은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다. 가장 저항이 거셌던, 유일하게 그의 육신에
상처를 낸 수인족의 귀족.

“···괴, 괴물···!”

오만한 지배자였던 눈빛이 겁쟁이처럼 흔들린다.

반쯤 타오른 털은 은빛의 찬란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김우진은 말없이 그를 내던졌다. 열다섯 구의 죄수의 산 위에 늑대 하나가 더해졌다.

손을 타고 흐르는 피를 털어냈다. 팔을 따라 길게 찢어진 다섯 갈래의 상흔은 곧 재생되어 사라졌다.

“네놈이 그렇게 증오하는 윗놈들에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오늘 내 손에 다 뒤졌을 테니까.”

김우진이 치솟는 살심을 애써 억눌렀다.

상부는 죄수들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 그것이 짐승들과 거인의 목숨을 살렸다.

아직 잡지 못한 죄수들이 남아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미 잡힌 물고기는 그렇지 않은 것들에 비해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소장.”
“예!”

난장판 속에서도 용케 잘 피해 다녔던 부소장이 힘차게 대답했다.

“교도관들 더 불러서 이것들 모조리 다시 감옥에 넣어놔.”


“죄송합니다만, 교도관들은 전부 죽거나 기절했습니다.”
“그럼 혼자 해. 구속구까지 채웠는데 감당 못해?”
“4 층 감옥을 이용합니까?”
“감방들이 전부 박살났다고 했었지. 그렇게 해.”

죄수들을 수감하고 있던 독방은 전부 3 층이었다. 하지만 연옥은 애초에 크게 지어졌고 4 층 또한 독방임에도 전부


비어있었다.

“나머지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짐작 가나?”


“아까 싸우시는 와중에 정문에서 무전이 왔습니다. 정문에서 마주쳤다는 말을 끝으로 후속보고가 오지 않는 걸
보면 뚫린 것 같습니다.”
“덕구랑 춘식이는? 사이렌 울렸으니까 정문으로 갔을 텐데?”

죄수들은 두 괴수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들이 각각 서쪽과 동쪽을 지킨다는 것도.

열에 아홉은 그들을 피해 상대적으로 약한 정문으로 향한다. 그 점을 이용해 사이렌이 울리면 정문으로 향하도록
훈련을 시켜놨다.

“뚫린 것 같습니다.”
“하긴, 아무리 그놈들이라도 용사가 16 명인데.”

멍청한 수인과 거인들이 만용을 부렸지만 아직 그보다 많은 탈옥수들이 남았다. 구속구가 전부 해제되는 건
상정하지 못한 변수였고, 온전한 용사들에게 마수 두 마리 따위는 그렇게까지 큰 벽이 아니었다.

“16 명이 아니라 10 명입니다. 1176 번은 예상하신 대로 참여를 안 한 게 맞고 엘프들은 같이 탈옥한 게 아니라


식물원에 있다고 합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에 김우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죄수들을 전부 풀어주고, 교도관들도 때려눕혀놓고 다시 식물원으로 돌아갔다고?”


“예. 싸우실 때, 식물원을 관리하던 교도관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이 자수를 했다고···.”
“나를 호구등신으로 보네. 정상참작이라도 해달라는 거야?”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랬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을 우습게 본다는
반증이었다.

너무 풀어줬다. 너무 친근하게 대해줬다. 김우진은 스스로의 안일함을 반성했다.

“구속구 점검하고 다 독방에 쳐 넣어. 반항하면 사지를 부러트려.”


“예.”
“다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일단은 다른 탈옥수들을 잡는 게 우선이다.

김우진이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정문을 벗어나면 끝없는 사막이 펼쳐진다.


열기를 흡수하고 더 뜨겁게 달구어 발산하는 붉은 모래는 결코 인간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곳을 헤매다 죽는다. 운이 좋으면 기절해 교도관들에게 구조되거나.

허나, 어디까지나 일반인, 혹은 구속구를 착용한 인간의 경우였다. 완전히 자유가 된 용사들은 빠르게 사막을
주파했다.

특수한 붉은 모래의 열기는 감히 그들의 신체를 침범하지 못했다.

사막이 끝나자 숲이 펼쳐졌다. 숲이 끝나자 눈 덮인 설원이 나왔다.

간간히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용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기랄, 베르너놈의 음식이 그리워.”


“꼭꼭 씹어서 먹게. 하루이틀만에 끝나지는 않을 테니.”

데르카인의 말에 용사들이 독기가 가득한 몬스터들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연옥은 넓다. 보통은 한 채의 건물과 정원까지만 생각하지만 정원 밖의 자연까지도 전부 연옥의 일부라는 것을


데르카인은 잘 알고 있었다.

용사라고 한들 하루 이틀 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그건 용사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천혜의


감옥이었다.

허나, 모든 영역을 뚫고 간다고 해도 문제다.

“그란시스.”
“예.”
“몸은 괜찮나?”
“나쁘지 않습니다. 백 년만에 힘이 돌아오니 너무 좋군요.”

데르카인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연옥의 유일한 다크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나?”
“시에나님이 건네주신 마력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론대로만 된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역시 직접 부딪혀봐야
알겠지요. 그래도 15 년 간 연구를 하며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맛이 없군요.”

그란시스가 질겅이던 마수의 조각을 뱉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강민식이 데르카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화의 흐름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 혼자 동 떨어진 것 같았다.

“뭘 하려는 겁니까?”
“탈옥이네. 이 거지 같은 영역들을 벗어난다고 해도 아직 넘어야 할 벽이 하나 남아 있거든.”
“감옥을 진즉에 벗어났는데 뭐가 또 있다는 겁니까?”
“자네는 연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감옥이라는 거? 용사들을 가둔다는 것 정도죠. 아, 소장이 지랄 맞다는 것도.”
“탈옥을 위해서 연옥의 죄수들이 넘어야 할 벽은 총 네 개네.”
첫 번째, 죄수를 가두는 독방.
두 번째,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
세 번째, 하나하나가 살아남기 힘든 극한의 환경.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차원의 방벽이네.”


“차원의 방벽이라면 차원을 함부로 넘을 수 없게 하는 벽 아닙니까?”
“정확히는 차원이 스스로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 체계라고 보면 되네.”

허나, 그 방어 체계는 워낙 굳건해 들어오는 것 뿐 아니라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방벽을 유일하게 열었다 닫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용사들을 간택한 신이었다.

“자네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연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이네.”

연옥은 차원과 차원들 사이에 끼여 있는 틈새의 공간이다. 독립된 차원이며, 제대로 된 차원들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차원인 만큼 당연히 방벽 또한 존재한다.

완전한 탈옥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방벽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가야만 했다.

“···미친. 그게 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평생 연옥에서 살 텐가?”
“······.”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뒤가 없네.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봤으니 남은 건 믿는 수밖에.”

그리고 너무 걱정 말게.

“다크엘프들은 공간 마법의 대가들이니.”

차원 마법은 결국 공간 마법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
# < 023. 폭거 >

연옥은 넓다.

단순히 감옥의 건물과 정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원을 벗어나 펼쳐지는 모든 것이 연옥이다.

연옥이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자, 죄수들을 가두는 차원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차원에 비해 작지만 엄연히 하나의 차원이다. 드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는 오직 감옥


하나뿐이니, 그 밖의 공지가 얼마나 넓을 지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온다.

일반인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벗어날 수 없다. 구속구가 착용된 용사라면 몇 달도 헤맬 수 있다. 그리고
구속구가 풀려난 10 명의 용사들이라면.

···모르겠다.

전원이 구속구가 풀린 채 정원을 벗어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필사적으로 질주하고 있을 테니 속도도 만만치 않을
거다.
“어디로 향했을까.”

연옥이 넓은 것은 김우진에게도 해당이 된다. 강한 것과 작정하고 도망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또 다른 분야다.

“그만.”

끼잉-
낑-

머리를 박고 있던 다섯 개의 머리가 불쌍한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처음에는 싸우다 진 줄 알았다. 두 마리의 마수에게 열 명의 용사들을 상대로 승리하라는 건 무리라는 것을


알기에 수고 했다고 개껌이나 하나씩 주려고 했다.

하지만 상처 하나 없는 둘의 모습에, 마물의 피 냄새가 지독한 원반을 두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모습에 죄수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파악했다.

“일단은 탈옥수들을 찾는 게 우선이라 여기까지 한다. 덕구, 이리 온.”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짖으며 달려왔다. 김우진이 미리 챙겨온 반쯤 부식된 구속구를 들이밀었다.

“냄새 맡아봐.”

커헝?

코를 가져다 댔던 덕구가 구속구에서 느껴지는 독기에 주춤거렸다.

“어떻게, 쫓을 수 있겠어?”

멍멍멍!

세 개의 머리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기로 인해 코가 마비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역시 마수는 마수였다.

“춘식이는 돌아가. 덕구는 나랑 가자.”

김우진이 덕구 위에 올라탔다.

“탈옥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수많은 마수들 중, 그가 굳이 케르베로스와 오르토스를 키우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강민식이 나뭇잎을 대충 깐 바닥 위에 몸을 눕혔다. 덮을 건 없었으나 춥지는 않았다.

하늘 위로 별들이 보였다. 다른 세상임에도 밤하늘은 지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정말 나갈 수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모든 게 의문스럽기만 하다.

강민식은 딱히 본인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광란의 질주를 벌이던 스포츠카에 치이고 난 다음에야 조금 특별해졌다.

‘···신이라고요?’
‘맞아. 용사가 되어서 위기에 빠진 차원을 구원해주었으면 해.’

운전자가 신이라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면 무엇이 특별한가.

‘그런데 왜 트럭이 아니라···?’


‘트럭은 돈 없는 하급 놈들이나 타고 다니지. 대세는 고급 스포츠카야.’

어쨌든 받아들였다. 부지불식간에 환생 스포츠카에 치인 것 자체는 열이 받았지만 용사라는 특별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용사가 되었지만 용사생활은 생각만큼 순탄치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무기의 무자도 모르던 강민식이,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세계에서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왕국의 훈련, 몬스터와의 실전은, 미궁과 던전의 함정들은 그를 수 없이 다치게 했다. 생사를 넘나든 게 몇
번인지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결국 용사의 힘으로 부여받은 능력 중 독에 관한 것을 더욱 발전시켜 어떻게든 살아남고, 차원을 위험에 빠트리던


적을 죽이긴 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모든 힘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거나, 연옥으로 가···

“자나?”

데르카인의 목소리에 상념이 끊어졌다.

“아니요.”
“한 시간밖에 못 쉬는데 왜 자지 않고.”

도망치는 와중에 여유롭게 숙면을 취할 시간은 없었다. 최소한의 휴식을 취할 뿐, 휴식 시간은 10 분도 남지


않았다.

“그냥 정말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잘 안 오네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뭡니까?”
“구속구 말이네. 독으로 풀었다고 했나?”
“네.”
“나도 나름대로 구속구에 대해서 연구를 계속 했었네. 탈옥하고자 한다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게 구속구를
해제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막혔다. 막히고 또 막혔다. 그나마 시에나와 함께 구속구를 해제할 마도구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네 개가 전부였다.
헌데 강민식은 달랐다. 고작 몇 달 만에 손쉽게 모든 구속구를 해제해 버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운이라고 할 수는 없네.”
“저는 마나에 독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독으로 구속구에 각인된 술식의 취약점들을 찾아 연결점을
끊어냈습니다.”
“취약점이라고 한들 방호 마법진이 그렇게 약하지 않을 텐데?”

약하다면 데르카인은 진즉에 모든 구속구를 끊어냈을 거다.

“무슨 비밀이 있냐고 물으셔도 그냥 제 독에 녹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해보니 됐다라. 그렇군. 대답해줘서 고맙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소장 말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저희들의 탈옥을 막는 걸까요?”
“소장이니까네.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데르카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저희는 죄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소장도 제대로 된 소장이 아닌 무언가가 아닌가
싶어서요.”
“그래봐야 우릴 여기로 보낸 개놈들의 끄나풀에 불과하네.”
“그렇습니까?”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굳이 강민식에게 그런 요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탈옥하면 차원을 넘어서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절로 고개가 저어질 만큼 끔찍했다.

“잡설은 그만하고 이제 진짜 여기를 빠져나가 보세.”

남은 10 분이 모두 지났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날 때다.

* * *

잠깐의 휴식을 취한 용사들은 체력의 분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소장이 올 것을 대비해 체력을 분배하기 보다는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소장이 오기 전에 탈출하는 것이 나았다.

“애초에 소장이 우리를 못 찾는다는 생각은 버려야 하네. 이곳에서 몰래라는 건 없어.”

그저 극한의 환경이 펼쳐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늪지에서는 바실리스크들이 석화 브레스를 뿜어냈고


설원에서는 예티들이 마나로 눈을 뭉쳐 던졌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전투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여유가 없는 용사들은 그 흔적은 완벽하게 지울 수 없었다.

소장은 반드시 온다.

쟁점은 연옥을 벗어나기 전에 잡히느냐, 먼저 연옥을 벗어나느냐였다.

끝까지 체력을 보전하고 있어야 하는 건 그란시스 뿐이었기에 그는 여러 드워프들의 손에 번갈아가며 업혔다.

“발이 바닥에 끌리는 것 같습니다.”


“참게.”

체격의 차이로 사소한 문제가 있었으나 작은 해프닝이었다.

사막, 숲, 설원, 늪지, 산, 다시 숲.

그리고 뚝 떨어졌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네. 연옥이 그냥 평범한 차원에 있는 곳이지, 아예 다른 격리 차원이라는 것을
몰랐거든.”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푸르른 대지도 끝이 있었다.


칼날로 도려낸 듯이 절단되어 버린 균열,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과 심연이었다.

강민식이 그 경계에 섰다. 심연을 마주하자,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샘솟는다.

“허억···!”

울렁거리는 심장과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이게 무슨···!”
“보지 말게. 차원의 경계는 일개 피조물인 우리가 인지하기에는 너무도 고차원적이라 그렇네.”

데르카인이 천천히 절벽을 향해 나아갔다.

“떠, 떨어집니다!”

강민식의 비명에도 데르카인은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

그와 동시에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뒤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겠나?”

강민식은 그제야 그 존재를 인식했다.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차원의 방벽이네.”


“···차원의 방벽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가까이 존재하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20 년 전, 이 빌어먹을 벽 때문에 이곳을 탈출하지 못했네. 마침내 다시 오게 되었군.
그란시스.”
“예.”

다크엘프가 차분히 차원의 방벽 앞에 섰다. 식물원에서 모은 영초의 부산물, 축사장에서 모은 영단의 조각들을
하나로 뒤섞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동안 소장이 오지 않기를 빌어야겠군.”
“오게 되면요?”
“방벽을 뚫을 때까지 버텨야지. 모두 시작하게.”
“예!”

드워프들이 공방에서 챙겨 온 짐들을 모두 내려놨다. 하나둘 꺼내더니 여기저기 설치하기 시작했다.

“대포?”
“마력포네.”
“저건 부비트랩입니까?”
“비슷하네. 건드리면 내재된 마력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지.”
“몇 개나 있는 겁니까?”
“지난 번 검방 때 대부분 빼앗기고 5 개 밖에 없네.”

하지만 다섯 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장에게 제대로 통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단 1 초라도 시간을
끌어준다면 제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트랩들은 빠르게 설치가 완료 되었고 용사들은 잠시의 여유를 가졌다.

“그런데 탈옥하면 원하는 차원으로 갈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가능할거네.”
“아마도?”
“그란시스가 그랬거든. 연옥은 차원의 교차 틈새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차원이로든 갈 수 있다고. 해당
차원과의 연결점들이 있다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네.”

아마도가 붙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탈출하게 된다면 그 망할 놈들에게 큰 엿을 선사하는 거네. 일그러질 얼굴들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한이군.”

확실히, 가두어놓았던 용사들이 전부 풀려난다면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김우진은.

“그렇게 되면 소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자의 미래야 뻔하지 않은가.”
“만약에 말입니다. 탈옥한 뒤에 신들이 추격대를 보내면 어떡합니까?”
“그건···.”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마력 폭발이 주변을 휩쓸었다.


* * *

“같잖은 짓을 해놨네.”

크르르르-

세 개의 머리가 연달아 화염을 토해냈다. 쏘아진 붉은 염화가 마력 트랩과 반응하여 거대 폭발을 일으켰다.

덕구는 그대로 화염속으로 몸을 던졌다. 치솟는 연기를 뚫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열 명의 죄수들.

김우진이 찾아올 것에 대비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던 죄수들이 생각보다 더 빠른 그의 등장에 당황했다.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케로베로스의 후각은 한 번 맡은 냄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미약한 잔향만으로도 충분히 추적한다.

하물며 연옥은 드넓을지언정 한정된 공간이다. 탈옥수들을 잡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란 뜻이다.

“···소장.”
“죄수번호 1077 번. 멋진 도끼군요.”

여덟 명의 난쟁이들과 한 명의 인간이 침중한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저는 그런 걸 구해다준 기억이 없는데 말이죠.”


“드워프들은 원래 자급자족을 잘하네.”
“저 놈은 인간입니다만?”
“하는 김에 친구 것도 하나 만들어주는 건 일도 아니지. 드워프들은 의리가 있거든.”

모두의 손에는 각자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드워프제다.

그들의 뒤에는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다크엘프가 보였다. 그란시스 드라막. 공간마법이 특기인 그가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는 굳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여길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수인들은 어떻게 되었나?”
“같이 가서 확인해보시면 될 겁니다.”

김우진이 케르베로스에서 내렸다.

“덕구야. 다크엘프를 물어. 팔다리 정도는 떨어져도 상관없어. 살아만 있다면.”

멍-

덕구가 숲 사이로 들어가 숨었다. 노련한 사냥꾼인 덕구는 기회를 틈 타 다크엘프의 마법을 방해할 거다.

데르카인이 신중하게 드워프 둘에게 눈짓했다. 어떻게든 케르베로스를 막아보라는 신호였다. 그게 별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을 저들은 곧 알게 될 거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향해 투기를 드러내는 죄수들을 살피던 김우진의 고개가 강민식에서 멈췄다.

“해제된 모든 구속구에 독기가 섞여 있었지. 의도적으로 술식을 부식시켜서 약화시켰어.”

그리고 죄수들 중 독이 특기인 자는 한 명 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독이 있다고 가능할까?

아니다. 그렇게 쉬웠다면 죄수들은 진즉에 구속구를 풀었을 터. 용사의 힘이라고 한들 만능인 것도 아니다.

강민식에게는 무언가 있다. 그가 모르는, 무척이나 꺼림칙한.

“너한테도 궁금한 게 아주 많아.”

김우진이 살기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기랄, 검을 잡은 강민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 * *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강민식이었다.

나가고 싶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살기를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서.

보랏빛의 마나가 뒤얽혀 검을 타고 올라간다.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오러가 적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다.


뒤섞인 독기는 한 번만 스쳐도 모든 것을 썩어버리게 만든다.

“독기가 뒤섞인 오러라.”

허나,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빈손에 붉은 화염의 검이 생성된다.

───!

충격파가 튀었다. 절로 신음이 나오는 충격에 강민식은 이를 악물었다.

치이이익-

뜨거운 열기가 독기를 불태운다. 타버린 독기는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만 열기는 그마저도 삼켜버린다.

‘크윽!’

이미 상담을 빙자한 첫 만남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상성이 최악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엔 혼자서 괴물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후우웅-

강맹한 파공음과 함께 도끼가 소장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쩌엉, 불의 검이 김우진과 도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강민식과 부딪히는 것과는 다른 검이었다. 어느새
김우진의 두 손에는 쌍검이 들려 있었다.

“손이 두 개라 검도 두 개인가. 그렇다면 다른 건 어찌할 텐가.”

도끼의 주인, 데르카인이 물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아니었다. 단지, 대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그리고 김우진은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짧은 대답과 동시에 단순히 버티고 있던 검에 힘이 들어갔다.

카가각, 도끼가 튕겨졌다. 독을 머금은 대검이 비껴졌다. 일순간 자유로워진 두 자루의 검이 춤을 추었다.
김우진의 빈틈을 노리던 모든 무기들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검이 그린 궤적은 상흔을 남긴다. 공간을 좀 먹으며 타닥 타닥, 타오른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크아아악!
피해!

튀어 오르는 불길들은 쇄도하던 모든 용사들을 날려버렸다. 열화의 열기는 오러까지도 일부 녹여버릴 만큼


뜨거웠다.

용사들이 고통과 신음을 삼키며 오러를 키워 불길을 꺼트렸다.

김우진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고고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20 년 전에 그렇게 겪고 또 다시 탈옥을 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낮게 속삭이는 듯한 말이었으나 모두의 귀에 뚜렷이 박혔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옥상으로 따라와.”
“여기 옥상이 어디···.”

풉-

* * *

“···죄송합니다.”

싸늘한 시선에 강민식이 고개를 숙였다.


방심했다.

설마 김우진이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저런 드립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같은 지구, 한국 출신이기에 강민식만이 알아듣고 웃을 수 있었다.

허나 웃음이 끝난 뒤에는 서늘함만이 남았다.

일곱 명의 용사를 눈앞에 두고도 저 따위 농담이 나올 정도로 여유롭다는 뜻이 아닌가.

정말로 수인들을 뚫고 왔을 때부터 감이 잡히지 않긴 했지만 대체 김우진이라는 자는 얼마만큼의 괴물인 걸까.

‘데르카인님이 맞았어.’

김우진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된다. 피하고 도망치며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지금에 와서는 모두 무의미한 가정이 되었지만. 어쨌든 만났고 싸우게 되었다. 적어도 차원의 방벽이 열리는 그
순간까지는 버티고 또 버텨야만 했다.

‘버틸 수 있어.’

혼자라면 어림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자신까지 포함해 일곱 명의 용사들이 있다.

수인들과 거인으로 이루어진 16 명의 용사들도 뚫고 온 김우진이었으나 그들과 자신들은 달랐다.

‘다르지. 그놈들은 소장의 역량도 제대로 파악 못한 머저리들이고 데르카인님과 드워프들은 적어도 역량 파악은
제대로 하고 있으니.’

상대의 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스스로의 주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래, 그러니 희망이 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애초에 이기는 게 아니라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잡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크허허헝-

모두의 시선이 김우진에게 쏠린 틈을 타, 기회를 노리던 노련한 사냥꾼이 달려들었다.

세 개의 머리에서 일제히 불길을 뿜어냈다. 거대한 육신이 벼락처럼 대지를 박찼다.

주인에 이어 개까지 불을 다룬다니. 세상 말세다.

“막아!”

두 명의 드워프 용사가 재빠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그 짧은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이번엔
김우진이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불바다.

거대한 마나가 뒤틀렸다.


그건 거대한 파도였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들끓는 지옥의 해일.

“하하···. 씨발.”

할 만하기는, 버티기만 하면 되기는 개뿔.

불합리한 힘의 폭거 앞에.
강민식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024. 다른 길 >

불의 해일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이 진격했다.

불합리함의 결정체, 압도적인 폭력. 허나 용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뒤가


없어서였다.

“모두 버티게!”

데르카인이 온 몸에 오러를 둘렀다. 갈빛의 서기가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냈다. 그대로 파도를 받아냈다.

콰콰콰콰-

진짜 해일과는 달랐다. 뜨겁고 더욱 파괴적이다. 강한 충격에 한 줄기 선혈이 데르카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예 버티지 못하겠다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들은 썩어도 용사였기 때문이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정면, 데르카인이 도끼를 겨눴다. 철컥, 도끼자루 윗부분이 열렸다. 망치에서 도끼로 다시
마력포로 변한 무기가 주인의 마나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토해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섬광이 일렁였다. 불의 파도를, 공기를,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갈빛의 선.

콰아아아앙!

그대로 목표물에 당도해 폭발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파도가 사그라들었다. 용사들이 간신히 한숨 돌렸다.

“고작 이 정도로 죽을 리 없네. 긴장 놓지 말게.”


“예.”

강민식이 오러를 이용해 몸에 붙은 잔불을 털어냈다. 빌어먹을 불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오러까지 쉽게 뚫어버릴
만큼 뜨거웠다.

“독 말고 다른 장기는 없나?”
“검술?”
“없군.”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연기속에서 불꽃이 폭사되었다.

수 백 개로 갈라진 염화의 창이었다.

“내 뒤로 오게!”

데르카인이 도끼를 조작하자 날이 더욱 커지면서 방패의 형상을 띠었다. 오러를 둘러 한층 강화시키고 그 뒤에


몸을 숨겼다. 다른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콰콰콰-

홍수에 휩쓸리는 바위처럼, 드워프들은 견뎌냈다. 하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불꽃 창으로 이루어진 비가 끝나는
순간, 김우진은 어느새 한 드워프의 앞을 점했다.

쩌엉, 불꽃과 뒤섞인 오러의 크기는 5m 가 넘어갔다. 그대로 방패를 내리 찍었다.

─!

충격파가 퍼졌다. 부서진 오러의 파편과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데르카인이 마력포가 김우진의 배후를 노리지만 다시 한 번 떨어지는 검격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

“커헉···!”

방패가 부서졌다. 드워프가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김우진은 굳이 용사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화려한 불꽃으로 이목을 끌고 드워프들을 한 명, 한 명


정리해 나갔다.

“이놈!”

데르카인이 마력포를 쏘며 그 뒤를 쫓았으나 느렸다.

“제기랄!”

강민식이 김우진을 막아섰으나 그의 독기는 불꽃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게 다섯의 드워프들이 쓰러졌을 때.

────!

오러와 오러가 충돌하는, 불꽃이 폭발하는 것과는 다른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차원의 장벽 쪽이었다. 그란시스가 갑작스레 일어난 스파크와 함께 튕겨져 나갔다.

“그란시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케르베로스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던 드워프들이, 어떻게든 김우진을 붙잡고 있고자 발악하던 드워프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란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다시 장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길 잠시.

“···빌어먹을.”

욕을 입에 담았다.

“빌어먹을 세계수!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엘프 놈들!”

실패.

분노와 절규는 모두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선언이었다.

* * *

차원의 방벽이란 일종의 담이다.

차원이라는 집을 지키기 위해 세운 드높은 벽. 허나, 담이기에 출입구는 존재한다. 열쇠가 없을 뿐.

차원의 방벽을 통과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당당하게 열쇠를 통해 드나들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담벼락을 무너트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도둑처럼 문을 따고 들어가거나.

차원의 방벽을 열어 재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그란시스 드라막의 선택인 당연히 세 번째였다.

그에게는 열쇠도, 담벼락을 무너트릴 압도적인 힘도 없었다.


연옥에 갇힌 모든 용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파지지직-

눈을 감고 방벽 위에 손을 올렸다. 격렬하게 튀어 오르는 반탄력은 마법진이 빛을 발하면서 차츰 사그라들었다.

지금부터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나를 흘려보냈다. 견고한 방벽의 틈새를 파고드는 건 쉽지 않았다.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고 영초와 마물의 부산물로 그린 마법진이 부족함을 보태주었다.

“···아직 멀었소?!”

고통스러운 비명이 귓가를 스쳤다. 전투나 얼마나 고된지는 짐작이 가지만 재촉한다고 해서 빨리 되는 게
아니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 성공하는 것 뿐이다.


‘찾았다.’

마나는 차분히 벽면을 훑었다. 드넓은 벽에서 좁은 문 하나를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았으나 아예 못할 일도


아니었다.

방벽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틈새. 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것이 방벽의 문이다.

열쇠 구멍은 따로 없다. 편의상 열쇠라고 표현했지만 그 정확한 형태는 그란시스도 알지 못했다.

허나, 흐름이라는 게 있다. 방벽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딱딱한 고체가 아니다. 유유히 흐르는 마나의 흐름이자
집약체다.

그 속에서 잠금 장치처럼 보이는 것을 찾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란시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잠금 장치에 개입해 차원이 새겨놓은 법칙을 일그러트리고 방벽의 문을 열어야한다.

의지가 발하자 마법진이 더욱 빛을 발했다. 막대한 마나가 그의 몸을 통해 차원의 방벽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담을 지나 문으로. 문을 지나 잠금 장치로.

복잡하게 꼬인 우주의 법칙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완전히 해제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일개 피조물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비틀림이면 된다.

─!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접근에 방벽의 저항이 느껴졌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압박감에 그란시스가
신음을 삼켰다.

그의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허나, 웃었다.

되고 있다. 죽을 만큼 힘들지만 그가 15 년 간 해온 연구가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

그의 신형이 튕겨져 나갔다. 진탕된 마나 로드가 대차게 꼬였다. 시커먼 피가 왈칵 토해졌다.

“그란시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동료 용사들의 걱정스러운 외침이 귓가를 스쳤지만 거기에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는 없었다.

“대체 어디서 다른 마나가···!”

잠금장치가 거의 다 해제되고 문을 조금이나마 열려는 순간, 또 다른 마나가 개입해 방벽을 뒤틀어 버렸다.
문은 다시 닫혔고 반탄력이 그를 밀어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급하게 방벽 앞에 섰다. 얼마 남지 않은 마법진의 마나를 이용해 다시 진입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잠금장치를 구성하고 있던 흐름이 변했다. 보다 강화되었다.

그란시스의 마법을 어그러트렸던 마나의 짓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개입한 마나에서.


은은한 숲의 향내가 났다.

* * *

- 삐?

홀로 남은 릴리가 자신의 이파리를 야금야금 뜯었다.

‘이파리 좀 그만 뜯어 먹어.’
‘아니지, 인간이 손톱 뜯어 먹는 거랑 비슷한 건가?’
‘오구오구, 많이 먹어. 어차피 네 나뭇잎이야.’

평소 같았으면 바로 날아왔을 잔소리가 오늘은 없었다.

- 삐이?

태어난지 고작 몇 달이 지났지만 릴리는 그 몇 달 동안 혼자 남겨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김우진이 찾아와 주었고 간혹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잠깐이었다. 김우진이 없으면 교도관이라는 존재들이
찾아와 그녀를 보살폈다.

릴리는 처음으로 무료함과 허전함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파리를 뜯고, 벌레를 잡아먹고, 숲을 보살피고, 뿌리를 더 넓게, 깊게 퍼트리고.

‘얼씨구, 샌드웜을 가지로 꿰어 왔네?’


‘삐!’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그래, 못했다고 그러면 서운하니까 잘했다.’

그렇게 많은 일도 아니었다. 힘든 일도 아니었다. 그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일들이었다.

그 자연스러움에 녹아 옆에서 항상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마디씩 해주던 김우진의 부재는 제법 크게 다가왔다.

어째서인지 더 없이 친숙하던 하이엘프도 찾아오지 않았다.

김우진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아직 어린 세계수인 릴리는 본체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다. 조금 더 자라난다면


모를까.

그래도 하이엘프의 기운은 건물 안에서 느껴졌다. 그녀를 찾아가 볼까 고민하던 그때, 릴리의 감각에 무언가 툭
걸렸다.

- 삐?

뿌리쪽이었으나 직접적인 접촉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릴리의 뿌리가 파고든 이 세계의 심처다.

차원을 보호하고 있는 방벽. 그곳에 침입자가 생겼다.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한다.

- 삐이?

어떻게 해야 할까? 뿌리가 닿아 있어 조금 간섭할 수는 있지만 방벽의 주인은 릴리가 아니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간섭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 삐삐.

주인의 전언이 있었다.

‘문이 열릴 것 같으면 다시 닫아줘. 할 수 있어?’

릴리가 생각하기에 이곳의 주인은 김우진이었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근원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 김우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침입자들이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한다.

김우진의 당부는 필시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것일 터.

릴리가 뿌리를 더욱 뻗었다. 반쯤 열릴 기미가 보이던 문을 다시 닫고 더욱 강하게 옭아매었다.

- 삐이이이.

그 과정에서 막대한 힘이 소모한 릴리가 힘없이 가지 위로 떨어졌다. 나뭇잎 하나를 떨어트려 몸을 덮었다.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하이엘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삐···.

‘릴리가 그걸 막았다고? 잘했어, 너무 잘했어! 어유, 내 새끼.’


‘뭐 먹고 싶어? 영약 한 뿌리 줄까? 두 뿌리? 당연히 되지.’

영약을 양껏 먹는 행복한 단꿈에 빠져들었다.

* * *

“···세계수라고?”

짧은 몇 마디 외침이었으나 데르카인은 그 인과관계와 결과를 예측했다.


“···실패했나?”
“죄송합니다. 설마 세계수가 개입할 줄은···.”
“하하···.”

말도 안 돼.
실패라고?
그럼 우리는 왜···!
세계수? 그 망할 귀쟁이놈들이 통수를!

간신히 버티고 있던 드워프들이 허탈한 탄식을 내뱉었다.

‘미친, 실패라고? 세계수의 개입?’

강민식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언제나 확률이 존재한다.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단순히 능력 부족이나 준비 부족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수라는 돌발 변수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준 것이 제대로 작용할까?

의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또한 세계수를 염두에 두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전제 자체가 흔들렸다.

‘아니야, 의심하지 말자.’

강민식의 시선이 빠르게 방벽을 훑었다. 방벽으로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고. 손을 대고 몸을 밀어 넣으면 된다고
했다.

눈치를 보며 한 걸음,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건 최후의 방법이었다.

보다 많은 죄수들과 함께 나가기 위해서 그들의 계획에 탑승했으나 모두 어그러졌다. 그러니 그건 폐기다.

‘지금 나가지 못하면 앞으로 평생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경험을 쌓겠다는 안일한 생각은 진즉에 버렸다. 소장은 괴물이다. 세계수라는 돌발 변수로 인해 운 좋게 여기까지
왔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할 일은 없을 거다.

소장은 결코 두 번 당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나가려면 지금이다. 붙잡힌다면 더 이상의 희망은 없을 지도 모른다.

콰아앙!
그란시스가 실패했든, 성공했든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소장의 관심이 드워프들에게 쏠린 지금이 기회였다.

강민식이 방벽을 향해 내달렸다. 이왕이면 그란시스의 마법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약해진 쪽으로.

“어디가.”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갈랐다. 다시 방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방벽과 그 사이에는 김우진이라는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분명 드워프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어째서 방벽으로 달려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은 꽤나 꺼림칙해.”

2 징벌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부터, 놈들의 권능이 들어간 구속구를 쉽게 해제하는 것까지.

“널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거든.”
“아니, 나는 그냥···!”
“그냥 닥치고 얌전히 쓰러져 있어.”

불길이 그의 입을 막았다.

거대한 참격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발악하듯 퍼부은 독기는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씨발.”

강민식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하하···.”

실패 사실이 알려진 뒤, 용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차라리 김우진이 애매하게 강했더라면, 더욱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을 거다. 김우진이라면 반드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김우진은 너무 강했다. 1 대 7 임에도 일곱 명의 용사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작정하고 하나하나 격파를 시작하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길 수 없다는 공포와 희망이 없다는 절망이
그들을 엄습한 순간, 싸움은 이미 끝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 당신 하나 남았군요.”
모든 용사들이 쓰러졌다.

일곱 명의 드워프들도, 구속구를 모두 해제해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만들어준 강민식도, 뜻을 이루기 직전,


세계수가 개입했다며 패전보를 알린 그란시스도.

오직 한 명, 데르카인만이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서 있었다.

“···대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왜 여기에 갇혔는지는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죄가 없기에 나가려고 하는 게 그렇게 문제란 말인가!”
“그게 그렇게 억울하십니까?”
“그렇게 억울하냐고?”

크흐흐, 데르카인이 광인과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도끼가 화광에 반사되면서 빛을 발했다.

“자네는 모르겠지. 처음부터 용사가 되고 싶어서 용사가 된 자는 없네.”

용사란, 그저 재능이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재능이 뛰어나 신들의 눈에 띄어 소환된다.

“평소처럼 도끼로 미노타우르스의 대가리를 쪼개던 날이었지.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했네. 세상이 뒤집어졌지.
그리고 눈을 뜨니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더군.”

그를 소환한 신이 말했다.

재능이 뛰어나니 용사가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고 세계가 멸망한다고.

“웃기는 소리지.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생판 모르는 차원 같은 거 알 게 무엇인가!”

하지만 거기에 데르카인의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말투만 사근사근할 뿐, 강압이고 강제였어! 난 살기 위해 싸웠네! 모르는 세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내 목숨을
걸었어!”
“모든 용사가 그럽니다.”
“그러니까!”

데르카인이 눈을 부릅떴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분노가 세어 나왔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째서 우리는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하는 건가!”


“그건 저한테 따져봐야 해결책이 없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군.”

그럼에도 데르카인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모든 게 낯설고 원치 않는 용사행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라면 있었네. 동료가 생겼다는 것.”

그들은 험난한 여정 내내 큰 위안이, 힘이 되어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낯선 이세계 생활도 할만 했다.

“···하지만.”

데르카인이 눈물을 흘렸다.


“내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네. 고생 끝에 마왕을 죽이면, 세상을 구하면 뭐하는가. 날 지지해주고 지켜주던
이들이 모두 죽어버렸는데. 난 또 다시 혼자가 되었는데!”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돌아가고자 했다. 자신의 세계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신에게 부탁했다. 세상을 구했으니 돌려보내 달라고.

“그랬더니 뭐라는지 아는가?”


“힘을 포기하라고 했을 테죠.”
“맞네.”

거부했다. 거부했더니 연옥에 가뒀다.

“그놈들은!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을 가져가려고 했어!”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낯선 차원에서 그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동료들과 함께 쌓아올린 추억이었다.

“말해보게!”

그가 울분을 토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우리는 대체 무엇인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치고 절규했다. 오랜 세월 쌓인 분노는 활화산과 같았다.

“내가! 대체! 왜! 갇혀 있어야 하냔 말이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크흐흐, 힘, 힘. 그놈의 빌어먹을 힘.”

데르카인이 웃었다. 거의 울먹이다 시피하는 광소였다.

“용사들이 힘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것들이 신이라고 뻗대는 꼴이라니.”


“넋두리는 여기까지입니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정이 없는 자는 없다. 연옥의 죄수들에게도, 소장인 그에게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있다.

천천히 검을 겨눴다.

“당신의 사정을 일일이 다 봐주기에는 내 사정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당신들을 내보내면 상당히
곤란해지거든요.”
“이미 탈옥은 그른 것이겠지···?”

데르카인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셨습니까?”


“설마 세계수가 작용해서 차원 결계가 더 강화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빌어먹을 귀쟁이놈들이 이래서
포기했었군.”

그렇다고 배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만약 세계수 때문에 안 된다고 말렸다고 한들,
들었을 데르카인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이대로 잡히면 어떻게 되나?”
“당연히 3 징벌방에 갇히게 되실 겁니다.”
“그렇군.”

절로 상상되는 끔찍한 징벌방의 모습에 늙은 난쟁이는 진저리쳤다.

결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끔찍함을 견뎌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렇다면 나는 출소하겠네.”
“···예?”

또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길을.

───────────────
# < 025. 꼬우면 >

잘못 들었나.

김우진이 귀를 후볐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네가 그토록 바라는 용사로서 얻은 모든 힘을 포기하고 자발적인 출소를 하겠다고 했네.”
“갑자기 말입니까? 이거 꽤나 당황스러운데요.”
“나는 너무 늙었네. 사실상 이번 탈옥이 마지막 시도였지.”

죄수번호 1077. 그가 들어오고 난 뒤 백 명이 넘는 죄수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용사들은 흔하지 않고, 죄수가 되는 용사들은 더 흔하지 않다. 그가 감내해야 할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절로
상상이 된다.

“내 나이가 어언 600 살이 넘었네.”

드워프의 평균 수명이 500 안팎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 그것이 용사로서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죽을 때가 머지않았지. 이미 이 감옥에서 300 년을 썩었네. 더 이상 갇혀 있는 것도 지긋지긋해. 그래서


생각했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실패하면 미련 없이 출소하자고.”

최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거부합니다.”
“···뭐라고?”
“당신의 출소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연옥의 출소는 언제든 자유롭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출소를 관리하는
것 또한 김우진인 만큼, 김우진의 마음이 내키는 한 자유롭다는 것.

“양아치입니까? 주도해서 감옥을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혼자서 날름 빠져나가는 건 말이 안 되죠.”


“나, 나는 출소를 선택했네. 더 이상 죄인이 아니야.”
“저는 아직 당신의 출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리고 탈옥을 주도한 죄로
벌점 1000 만점 부여.”

1000 만점. 숨이 턱 막히는 숫자에 데르카인의 입이 벌어졌다.

“3 징벌방 100 일형에 처합니다. 징계를 모두 마치고 나면 출소 절차를 밟아보도록 하죠.”


“미친. 이건 폭거네! 애초에 벌점 시스템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같은 짓을 해도 자네의 기분에 따라
부여되는 벌점이 다른 게 말이 되는가!”
“말이 됩니다. 내가 소장이니까.”

꼬우면 아시죠?

“꼬와서 나가겠다니까!”
“제가 꼬와서 안 됩니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이 빌어먹을 놈아!”

김우진이 천천히 걸었다. 데르카인이 주춤거리며 대경했다.

“저도 곧 나간다는 분께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습니다만, 다른 일도 아니고 탈옥을 주도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어! 헛소리 그만하게!”
“뭐, 아예 방법이 없는 건 또 아닙니다.”
“···그게 뭔가.”

김우진이 슬쩍 내민 당근을, 데르카인은 주저 없이 잡았다.

탈옥이 실패하고 붙잡힌 이상, 애초에 그에게는 이렇다 할 선택지가 없었다.

말년에 3 징벌방에 100 일이나 들어 갔다온다면 미친 광인이 될 게 뻔했으니까.

“마나를 감추는 마도구. 만들 수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 수준이냐에 따라서 다르네.”
“재료는 최고로 공급해드리겠습니다. 시간도 넉넉하게 드리고. 일과도 다 빼드리겠습니다.”
“무엇을 감추려고?”
“세계수.”

율리아의 도움을 받아 세계수를 정원 북쪽 끝으로 옮겼지만 그 진한 마나는 여전히 정원 전체에 감돌고 있다.
거리가 있는 만큼 입구에서는 미약하지만 세계수가 성장할수록 더 진해질 거다.

호송대의 일원들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니 또 다른 조치가 필요했다.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최고의 장인인 당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글쎄요.”
“처음부터 끝까지 난 자네의 손바닥 위였군. 대체 언제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나?”
“그냥 아다리가 맞았을 뿐입니다.”
“내게 선택지는 없겠지?”
“있습니다. 만드느냐, 아니면 3 징벌방에 들어가느냐란 선택지.”
“없다는 소리군. 알겠네. 용사로서 만드는 마지막 작품이니 최선을 다해보지. 다만,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당신이 조건을 내밀 상황은 아닙니다만.”
“나 혼자서는 너무 오래 걸리네. 다른 드워프들의 도움이 필요해.”
“필요하다면야.”
“그 대가로 그들에게 징벌방 징계를 없는 걸로 해주면 안 되겠나?”
“출역과 징계는 별개입니다.”
“내가 나간다니까? 자네도 사망으로 인한 출소보다는 자발적인 출소 쪽이 더 좋지 않은가?”
“당신이 그들을 모두 데리고 출소한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끄응.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

탈옥을 꿈꾸던 늙은 난쟁이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 * *

“오셨습니까!”

부소장이 환하게 웃으며 김우진을 반겼다. 두둥실 떠 김우진을 따라오던 반시체들이 1 층 로비에 곱게 쌓였다.

“전부 구속구는 채워놨으니까 교도관들 시켜서 4 층에 집어넣어.”


“예.”
“교도관들은?”
“대부분은 어떻게든 수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곱 구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어떤 놈 짓이야?”
“전부 수인들과의 전투에서 찢어졌습니다.”
“하아, 이 개새끼들이 진짜.”

수인들은 악의적으로 교도관들을 찢어 발겼다. 그 과정에서 재생 불가 상태까지 손상된 것들이 무려 일곱 구였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죽이실 겁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열은 받지만 죽이진 않는다. 그거야 말로 상부가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바니까.

툭툭, 김우진이 집무실의 책상을 두들겼다.

3 층의 대부분 박살났고 교도관들이 여럿 다쳤으며 아예 복구 불능인 자들도 있다.

탈옥에 가담한 이들은 32 명. 율리아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들 엘프들이 나섰다면 연결 고리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소지를 제외한 모두가 한 손씩 보탰다고 봐도 무방했다.

“1176 번이 말을 전해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려면 반드시 대화를 이어줄 촉새가 필요하다. 베르너는 분명히 그
역할을 했을 거다.

“그 정도쯤은 일상이지. 탈옥 이야기가 도는 걸 이야기하지 않은 게 괘씸하긴 하지만 넘어가 줄 수 있어.”

결국 본인은 탈옥을 하려 하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진짜 죄수가 아닌 연옥의 특성상 그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다.

물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간의 공을 상쇄해 조금 유하게 대응할 뿐.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경쾌해졌다.

“풀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어. 정리를 좀 해야겠어.”


“이번 일에 관해서는 확실한 벌을 주어야 합니다. 탈옥은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진짜 죄수가 아니든, 맞든 어쨌든 수감자들이었다. 수감자가 교도관들을 때려눕히고 탈옥을 한 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수인들과 거인, 다크엘프까지 전부 3 징벌방에 처넣어.”


“이주입니까?”
“그래.”

이주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정신이 돌아버릴 가능성이 있어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관리가 힘들어지니까.

“문제는 엘프야.”
“그들은 교도관들을 기절시키고 죄수들을 풀어줬습니다.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식물원에 돌아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알아, 아는데···.”

그들은 김우진의 자비를 역이용했다. 그 괘씸함은 이미 도를 넘었다.

하지만 율리아 카르센이 걸린다.

“알베니우스를 알고 있었어.”
“알베니우스라면 설마 그···?”
“맞아.”

김우진이 낯익은 이름을 되뇌었다.

알베니우스는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타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명확하게 우호적인
끈이 있다는 뜻이다.

허나, 그 끈이 현재 율리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지, 끼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대놓고 알베니우스의 이름을 그에게 말한 것으로 봐서는 전자인 것 같지만 언제나 그렇듯 속단은 옳지 않다.

“알베니우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만나봤다는 거야. 헌데 율리아는 글라크 출신도, 글라크의 용사도
아니야.”
“알베니우스가 1178 번의 차원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알베니우스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아.

무언가를 깨달은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소장 짓을 시작한지도 벌써 20 년이 지났지. 여기에 있으니까 시간관념이 사라지는 것 같단 말이야.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빌어먹을 감옥에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더뎌지는 느낌이다.

엄청난 중상이었으나 수십 년의 세월이라면 충분히 회복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단 엘프들의 처우는 율리아와 대화를 더 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예. 드워프들은 어쩌시겠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아티펙트 제작에 투입시킬 거야. 단순히 옮기는 것만으로는 세계수를 완벽히 숨길 수 없으니.”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데르카인이라면 능히 신도 속일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겠죠. 헌데 순순히 만들겠습니까?”
“신이 아니라 관리자.”
“예, 관리자.”
“징계 받기 싫어서 출소할거라고 하길래 만들어주지 않으면 징계방에 먼저 넣어버리겠다고 했거든.”
“···출소하겠다고 했단 말입니까?”
“애초에 성공하면 탈옥하고 아니면 출소할 생각이었다더군.”
“합리적이군요.”
“약은 거지.”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어쩌면 다른 드워프들도 우르르 나갈 수도 있어. 데르카인은 그들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호재군요.”
“최악의 사태를 막았는데 호재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럼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놈들은 이후에 3 징벌방에 들어가게 될 거다. 원래 들어가야 했던 거니 불만을
토해낸다고 무를 생각도 없다.

“1177 번은 어쩌시겠습니까?”
“강민식이라.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2 징벌방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은 태도부터, 상부의 권능이 들어간 구속구를 손쉽게 부식시켜버리는
것까지.

무언가 숨기고 있다.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턱 하고 걸린다.

“일단은 3 징벌방에 처 넣어.”


불라고 한다고 순순히 불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3 징벌방도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게 먼저다.

“예.”
“나가면서 율리아 좀 불러오고.”
“예, 알겠습니다.”

부소장이 나갔다. 김우진이 소파 위에 푹 늘어졌다. 창문 사이로 따스한 햇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담벼락을 따라 올라온 줄기 하나와 나뭇잎이 보였다.

“···아, 맞다.”

릴리.

* * *

“죄수번호 1177 번. 널 3 징벌방 14 일 형에 처한다.”

끼익-

문이 닫혔다.

마나가 요동친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벽들은 폐쇄 공포증을 자극한다.

강민식은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시야가 차단되어 시각이 사라지고.


소리가 차단되어 청각이 사라진다.

새카만 어둠이 그를 뒤덮는다.

‘큭···!’

그리고 이어지는 자극은 평생 살면서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표현할 단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허나, 고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

어둠이 걷혔다. 어느새 그는 전장에 던져져 있었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고막을 흔들고, 비릿한 피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킨다.

“용사님! 괜찮으세요?”

푸른 로브의 마법사가 다가온다. 익숙한 얼굴의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 봤다.

“제가 치료해줄게요.”
“나는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아.”

복부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에 강민식은 그제야 자신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지지마. 독이···.”
“안 만져요. 마법을 쓰는 거지.”

그녀가 주문을 외웠다. 따스한 빛줄기가 상처를 보듬었다.

“제이니···.”

고마움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피가 튀었다.

“···아?”

단발마의 비명. 심장에 구멍이 뚫린 그녀의 육신이 허물어졌다. 서로의 몸이 포개어졌다. 흘러나오는 핏물이
강민식을 붉게 적셨다.

“제이니!”

강민식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를 부여잡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익숙한 장면. 익숙한 풍경.

이것은 과거였다. 그가 후회하고 또 후회하던, 목숨을 바쳐서라도 고치고 싶은 그런 과거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은은한 빛이 그의 몸에서부터 비롯되어 환상을 밀어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다시 한 번 그를 맞이했다.

허나, 은은한 빛은 어둠마저 밝혀냈다.

“···소장, 이 개새끼가···!”

어째서 죄수들이 3 징벌방을 그토록 꺼려하는지. 육체와 정신을 함께 자극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버렸다.

뿌득, 사람에게는 누구나 역린이라는 것이 있다.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도 발작을 일으키는.

강민식에게는 그녀가 그랬다. 언제나 약해서 상처입고, 무리하던 그를 치료해주던 연인이 눈앞에서 머리가
날아갔다.

자신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제이니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평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던 순간이었다.

“나간다. 반드시 나가서 널 꼭 좆되게 만들어줄게.”


어떻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적어도 징벌방에 갇히는 순간, 죄수는 완전히 노마크가 된다.

강민식이 징계방의 시스템에 개입했다. 징벌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그대로일 터.

입술을 짓이기며 기회를 엿보았다.

───────────────
# < 026. 하수인 >

탈옥의 흔적은 감옥 곳곳에 남아 있다.


환히 열려있는 문들, 바닥에 굴러다니는 부식된 구속구들, 벽 곳곳에 새겨진 상흔들과 불타버린 정원,

김우진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밖으로 나갔다.


정원 북쪽, 탈옥의 여파가 미치지 못한 곳에는 활동을 멈춘 세계수가 있었다.

릴리는 세계수의 가지 위에 누워 나뭇잎을 덮고 자고 있었다.

차원의 방벽에 간섭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게 틀림없었다. 김우진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을 때,
교도관이 율리아를 데리고 왔다.

“엘프들의 행위는 저와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대뜸 내뱉는 말은 꽤나 재미있었다.

엘프들의 귀족이라는 하이엘프가 엘프들과의 관계부터 부정하고 시작하는 것은.

“엘프들의 행위?”
“들었어요. 교도관들을 때려눕히고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준 게 엘프들이라는 걸요. 절대, 절대 제가 지시한 것이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지시한다고 해서 듣지도 않을 거고요.”

김우진이 알기로 하이엘프가 엘프를 버리는 경우는 하나다. 보다 큰 대의나 목표가 있을 때. 그것이 버려지는
엘프들도 납득 가능한 수준일 때.

그리고 이 경우, 그 대의는 김우진 본인과의 악감정을 쌓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쯤 되자 김우진은 슬슬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율리아 카르센이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는지, 알베니우스와 어떤 관계인지, 그녀의 계획이 무엇인지.

“변명은 그쯤하지. 이 난리를 처놓고 혼자서만 빠져나가려고?”

허나 티내지는 않았다.

“정말이에요. 저는 연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세세한 계획을 세웠겠어요?”


“엘프들이 함께 탈옥했다면 네 말이 맞았겠지. 하지만 엘프들은 죄를 짓고도 남았어. 왜? 너 때문에.”

그 이유가 세계수든, 하이엘프든, 둘 다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어쨌든 탈옥을 돕고도 남아있다는 건 그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니.

“···전 억울해요.”
“조사해보면 다 나와. 만약 엘프들의 입에서 네 이름이 나오면 너도 3 징벌방으로 가게 될 거야.”
“···그건.”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지?”

김우진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불안하게 떨리는 율리아를 관찰한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김우진은 이제 모든 내막이 이해가 되었다. 허나,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과 단순한
추정은 엄연히 다르다.

“알베니우스를 만났다고 했지. 어떻게?”


“···말씀드릴 이유는 없어요.”
“미안하지만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네가 죄수로 이곳에 들어온 이상, 철저하게 갑은 나거든.”

정보의 이점을 가지고 동등한 거래를 하고자 하겠지만 김우진이 그걸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소장과 죄수. 그것만으로도 김우진이 저자세로 나갈 이유는 하등 없었다.

세계수라도 제대로 피어올라 율리아의 통제에 들어갔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맞아요. 소장님이 어머니 나무의 씨앗에 간섭하는 순간, 다 어그러졌어요.”

율리아 또한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좋아요.”

침묵과 고민은 짧았다. 율리아가 교도관이 내어준 차를 단숨에 원샷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기대되는군.”
“저와 손을 잡아요.”
“소장인 나와 죄수인 네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재차 이어지는 물음에 율리아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어차피 망했다. 이미 망한 거, 빵이 되든, 숯이 되든 일단 가야할 때다.

“이 연옥이 죄수들에게 감옥이지만, 당신에게도 감옥이라는 것을 알아요.”


“터무니없는 소리군. 죄수도 아닌 내게 왜 이곳이 감옥이지?”
“저야 모르죠. 알베니우스가 그랬으니 그냥 믿는 거지.”
“이제 그냥 뻔뻔하게 나오기로 한 건가?”
“이미 글러 먹었으니까요. 조금 더 글러 먹는다고 뭐 달라지겠어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율리아가 스스로의 입을 때리며 다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제 손을 잡으신다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감옥을 제가 책임지고 부숴드릴게요.”


* * *

무모한 도박이다.

율리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에 간섭하고 성공한 시점부터, 세계수가 그녀보다 김우진을 더 잘 따르게 된 시점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연옥은 감옥이다. 김우진은 소장이고 율리아는 죄수다.

소장과 죄수라는 신분이 생겨버린 이상, 연옥 내에서 그녀가 앞서는 포인트는 오직 세계수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세계수를 통해 협상하고 설득하며 결국엔 바라는 걸 이루어 내겠노라고 세웠던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려 버렸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도박뿐이었다.

“······.”
“······.”

대답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율리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왜 그렇게 보세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더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생글 생글 웃었다.

“그러니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김우진의 입이 열렸다.

“내 직장을 없애줄 테니 손을 잡자는 거군.”


“직장이 아니라 감옥이죠.”
“너 같은 죄수에게나 감옥이지, 내게는 그냥 직장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네 손을 잡으라고?”
“저에 대한 서류를 다 보셨다고 들었어요.”
“네가 어디 출신인지, 용사가 되어 어떤 일을 했는지, 몇 살이고 어떤 성향인지도 다 알지만 알베니우스와의
관계까지 나와 있는 건 아니지.”
“제가 있던 차원에서 만났어요.”
“용사로서?”
“아니요.”
“그러면 데이드람이 아니라 아르반이군. 정확히 어떤 관계지?”
“협력 관계에요. 소장님이 제 손을 잡는다면 비슷한 관계가 되겠죠.”
“무엇을 위한?”
“말했잖아요. 소장님을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요.”
“그건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지. 하지만 네가 들어온 목적이기도 할 테고. 방법은 역시 세계수인가?
차원에 간섭해서 방벽을 박살내 버리려고?”
“너무 저만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요?”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나니까.”
“···분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네요.”

주도권이 없다는 건, 쓸 만한 카드가 없다는 건 이리도 뼈아팠다.

카드를 고작 한 장만 가지고 온 탓이었으나 딱히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이엘프를 상대로 세계수라는 카드를
찢어버릴 수 있는 상대가 이상한 거다.

“감옥을 부수고 싶어 한다는 건 죄수들을 모두 탈옥시키고 싶다는 건데 아무리 봐도 그게 최종 목표 같지는


않고···.”

톡톡, 그 다음은 대화가 아닌 생각에 잠긴 김우진의 중얼거림이었다.

“너.”
“네.”
“백번 양보해서 네가 성공했다고 치자. 내가 멍청해서 그냥 세계수를 심었고 주도권이 너한테 넘어갔으며 덕분에
죄수들이 죄다 탈옥을 했다고 치자고.”

실제로는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면 세계수는 네 말을 들을 테고, 방벽에 영향을 주어 죄수들이 모두 탈옥할 수 있게끔 만들겠지.”

한계를 벗어난 용사들의 탈주. 상부에서 결코 원치 않던 상황이 펼쳐지는 거다.

한둘이 아니라 33 명 모두의 탈옥인 만큼 아무리 숨는다고 해도 숨을 수는 없다. 낭중지추라고 그들은 어디에
던져 놓아도 특별하니까. 그러니까 용사다.

“그런데 말이야. 이 다음은?”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죄수들이 모두 사라진 연옥은 의미가 사라지고 김우진은 관리를 잘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율리아 카르센. 세계수의 씨앗을 주어 연옥을 망가트린 주범을, 자칭 신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

“운 좋게 숨는다면 평생을 숨어 다녀야 해. 매일 매일을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지.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무엇을 위해서?”

계기가 필요하다. 수 천 년을 사는 고귀한 하이엘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릴 만한 계기.

“세이드 델름.”
“···너와 어떤 관계지?”
“어렸을 때부터 저를 지켜준 호위 기사에요. 아버지 같은 존재죠.”
“···그렇군.”

그리고 그녀가 내뱉은 이름은 그 계기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알베니우스를 알고 세이드와 친분이 있다라.


톡톡, 김우진이 책상을 두들겼다. 짧은 침묵은 곧 사라졌다.

“···잠깐만. 율리아. 율리아라고?”


“갑자기 제 이름은 왜 부르시죠?”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절 아시나요?”
“아니, 됐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잠시 후, 그녀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사라졌다. 김우진이 손을 뻗어 나뭇잎 하나를 꺾어 손가락으로 비볐다.

의미있는 행동이라기보다 그냥 무의식적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릴리가 일어났다.

삐!

김우진을 발견한 그녀가 힘차게 얼굴을 부볐다.

“그래, 그래.”

김우진이 쓰다듬자 고렁거리며 다시 잠이 들었다.

“세이드 델름···.”

그리운 이름이다.

그와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던 동료이자 용사.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친우.

“설마 그 율리아가 이 율리아일 줄이야.”

우연이라면 참으로 기가 막히다.

* * *

3 징벌방에 들어간 죄수들, 율리아, 다음으로 처리해야할 것은 드워프들이었다.

김우진은 데르카인과 개인 면담을 실시했다.

율리아와 달리 집무실에서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면담이었다.

“당신이 만들 것을 정확히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적은 명확합니다. 세계수를 숨기는 것. 그
모습, 기운, 분위기 모든 것을 완벽히 차단하는 것.”
“세계수는 신의 나무네. 그러한 것을 완벽하게 감추는 게 가능할 것 같은가?”
“그러니 당신께 의뢰하는 겁니다. 여러 차원에서도 손에 꼽히는 드워프 장인인데 심지어 용사? 써 먹지 않을
이유가 없죠.”
“끄응.”
데르카인이 신음을 삼켰다.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을 만큼 어려운 요구였으나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나 혼자서는 안 되네.”


“모든 드워프들이 당신을 돕게 해주겠습니다. 그들이 징벌방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별개지만.”
“철저하군.”
“재료는 뭐가 필요합니까?”
“일단은 구상을 좀 해보고 이야기 해주겠네.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설계도를 만들 때 필요한 것들도 말씀해주시면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당분간 출역도 없고요.”
“이게 출역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죠.”

짝, 김우진이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럼 개인 면담은 끝입니다. 독방으로···.”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무엇입니까?”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네. 이 연옥의 주인이나 다름 없는 자네가 굳이 세계수를 숨길 필요가 있을까, 하는.”

대체 누구에게서?

이미 모든 교도관들과 죄수들은 세계수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존재들에게서 숨긴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다 제외하고 나니 하나가 남더군. 자네와 교도관, 그리고 죄수들을 제외하고 연옥을 드나드는 이들은
하나뿐이니.”

호송대. 용사를 붙잡아 죄수로 만들어버리는, 연옥으로 연행하는 존재들.

“생각이 너무 갔습니다. 제가 그걸 호송대에게 숨길 이유가 무어 있습니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호송대 따위 일리가 없지. 그 위라면 모를까.”

그 위. 호송대를 수족처럼 부리는 자들.

“신.”

용사들을, 데르카인을 실컷 이용해 먹고 이곳으로 보낸 자들.

“나는 말이네. 자네가 저들의 충실한 개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꼬리를 흔들며 최대한 애교를 떨고 있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차원의 방벽에 영향을 줄만큼 대단한 세계수를 숨긴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자네, 그들의 하수인이 아니지?”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고 말고. 난 그놈들을 증오하거든.”

데르카인이 웃었다.

꺼져가던 노장의 불꽃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모두가 잠이 든 교도소는 조용했다. 교도관이 복도를 순찰했다.

교도관이 한 방 앞을 지나가는 순간, 아무런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림자 하나가 빠져 나왔고 다시 닫혔다.

그럼에도 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
# < 027. 경고 >

‘생각보다 판이 너무 커졌는데.’

텅 비어버린 3 층, 완전히 난장판이 된 교도관 내부에 불타버린 정원까지.

죄수번호 1176 번, 베르너 레트만은 탈옥이 연옥에 미친 영향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탈옥이 실패할 것이라 여겼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별 다른 일 없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다.

죄수들이 오랫동안 탈옥을 준비해왔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지켜봐 온 연옥은, 소장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몇 개의 변수가 발생하면서 탈옥의 규모는 커졌다. 설마 전원의 구속구를 해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따.

‘내가 전령 노릇을 했다는 건 알겠지?’

탈옥에는 뜻이 없어 완전히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지내온 세월이 있기에 최소한의 도리를 했다. 결국 탈옥을
도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냥 징벌방에 며칠 넣어주시면 안 됩니까?”

허나 며칠이 지나도 김우진에게부터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 침묵은 더욱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그냥 징벌방 들어가는 게 더 속이 시원했다.

“왜.”
“저도 일조했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언제부터 모범수였다고 스스로 자백하고 있어? 이거 맛있네. 뭐라고 했지?”
“도르스라는 차원에 서식하는 아르크라는 해양 생선입니다.”
“쫄깃하고 기름기가 많아. 숙성도 잘 했고 산미도 적당해. 좋네.”

김우진이 회 위에 생와사비와 소금을 조금 올렸다.


전혀 다른 대답에 베르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길 한참.

“한 번이야.”
“예?”

김우진은 여전히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베르너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높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많아. 인간이라서, 요리사라서, 밥이 맛있어서, 요리를 잘해서, 신박한 미식을 추구해서···.”

그리고.

“용사라서. 진짜 죄인이 아니라서.”


“···그건.”
“근데 두 번은 없어. 내 인내심이 그렇게 넓지도 않고. 그때는 기대해도 좋아. 차라리 출소하겠다는 말이 나오게
해줄게.”

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안하는 것뿐이다. 그의 말대로 이들은 진짜 죄인이 아니라서. 김우진 또한 상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웃기는 짓이긴 했다. 누구보다 죄수들을 타박해 출소시켜야 하는 그가, 자비를 베풀고 있으니.

“···예! 감사합니다!”

말뜻을 알아들은 베르너의 얼굴이 확 펴졌다.

“저, 그러면 탈옥만 아니면 다른 건 해도 된다는 겁니까?”


“징벌방에 넣지 않겠다는 소리는 안했다.”
“제가 뭘 할 줄 알고요?”
“죄수들의 식사에 독을 넣는 순간, 3 징벌방 행이다.”
“그러면 소장님의 식사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자신한다면. 문제가 있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네가 져야겠지만.”
“예, 물론입니다! 체르타인에서 최고라 칭송받던 이 베르너 레트만입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갈라이는 아니고?”
“그때는 요리사로서 조금 미성숙할 때라···.”
“저번에 크라켄 때는 문제가 있었지.”
“크라켄의 독을 안 빼고 생으로 조리해보기는 또 처음이라···.”

탁-

김우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접시는 텅 비어 있었다.

“나가.”
“예!”

* * *

대규모 탈옥이라는 큰 사건이 연옥을 덮쳤고 큰 흔적을 남겼지만 감옥의 시간은 여전히 돌아갔다.
세계수가 발아해 연옥을 덮친 이후, 엘프들의 출역은 원예반으로 고정되었다.

설화초를 심은 대지의 온도를 조금 낮춘 시에나가 싹이 점점 커지는 만드라고라를 만지고 있는 율리아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갔다.

“어떻게 한 거야?”
“뭐가요?”
“징계. 우리만 쏙 빠졌잖니.”
“드워프들도 빠졌어요.”
“그치들은 할 일이 주어진 거고.”
“저희도 식물원을 지켜야 하잖아요.”
“말 안할 거니?”
“협상을 했어요.”

율리아의 대답에 시에나가 가진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어떻게?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씨알도 안 먹히던데 어떻게 너는 잘하는구나.”


“간단해요. 소장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면 되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그냥요.”
“말해주기 싫다 이거지?”
“말해드릴 수는 있는데 안 믿으실 것 같아서요.”
“내가 하이엘프의 말을 안 믿을 것 같다고?”

하이엘프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대로 정 원하시면 말씀드릴게요.”


“원한단다.”
“절대, 절대로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저 아이들한테도?”
“네. 어머니 나무에 맹세하셔야 되요.”
“그렇게까지?”
“아니면 말씀드릴 수 없어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시에나가 침중히 율리아의 눈을 살폈다. 하지만 올곧은 눈동자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좋아.”

결국 그녀는 맹세를 했다.

“사실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저번에 말씀드린 그걸 소장님한테 그대로 말했어요.”


“응? 저번에 말한 어떤 거?”
“어머니 나무에 걸고 맹세하신 그거요.”
“어머니 나무에 걸고 맹세한 그거라면···.”

시에나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그게 연옥을 파괴···

시에나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어머니 나무에 걸고 맹세해.”


“못 믿으시는 거예요?”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대뜸 말한다는 것도, 받아들였다는 것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니!”

고함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시에나가 다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율리아가 생글 생글 웃으며
교도관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맹세해.”
“모두가 쳐다봐요.”
“빨리 맹세나 해. 못하지? 역시 못하겠지? 역시, 그런 게 진짜일 리가···.”
“어머니 나무에 걸고 사실만을 이야기했음을 맹세할게요.”
“······.”

사람이 당황하면 자신도 힘이 풀리는 경우가 있다.

시에나가 그랬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봐. 세상이 미쳐 돌아가네. 하하.”

그녀가 기절했다.

* * *

감이라는 것은 불현 듯 찾아온다.

아침 보고에 축사장의 몬스터들이 서로 싸움을 일으켜 죽은 놈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간 산책에서 춘식이가 몬스터 고기를 뜯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불쾌한 감각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왔다.

“정원을 빠져나간 자는 없습니다.”

정문을 지키는 교도관들의 보고에는 이상이 없다.

“1176 번은 여전히 소지 일을 하고 있으며, 여섯의 엘프들은 모두 원예반에서 출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덟의


드워프들은 소장님의 명에 따라 정신교육실에서 함께 설계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3 징벌방에서 징계를 받고 있는 죄수는 18 명으로 수인 15 명, 거인 하나, 다크엘프 하나, 인간 하나입니다.
특이사항 없습니다.”

교도소 내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끈적하게 올라오는 불쾌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춘식이가 몬스터의 팔을 뜯고 있었어.”
“축사장의 몬스터들 간의 싸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걸 어느새?”
“말이 안 되잖아. 춘식이는 내가 부르지 않는 이상, 자기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아.”

그런 춘식이가 몬스터의 팔을 뜯고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누군가 주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구도 주지 않았다. 불쾌감이 확 치고 올라온다.

“···징벌방 다 열어.”
“징벌방을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부소장, 이미 구속구가 전부 해제된 전례가 있어. 더 이상 연옥의 시스템은 절대적이지 않아.”

징벌방의 문이 열렸다.

죄수들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열 다섯의 수인, 한 명의 거인, 한 명의 다크엘프. 그리고.

“···죄수번호 1177 번이 없습니다.”


“아주 개판이군.”
“죄송합니다.”

인간이 없었다.

텅 비어있는 독방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사방에 뿌려놓은 독기는 자신의 흔적을 찾지 못하게 하려는 기색이
엿보였다.

어떻게?라는 의문도 잠시, 우선은 강민식을 잡아 족쳐야 할 때다.

“덕구야. 저번에 그 냄새야. 기억하지?”

멍!

케르베로스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주일 전에 맡았던 냄새 따위를 잊어버릴 리는 없다.

“직접 가시는 겁니까?”


“그러면?”
“이건 이상합니다. 대체 어떻게 징벌방의 시스템을 뚫고···.”
“뚫은 게 아니라 권한을 가지고 끝낸 거야.”
“···그게 무슨.”
“이 개새끼들이 내가 오래 오래 보고 싶은가 봐.”

처음, 2 징벌방에 별 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을 때는 작은 의심이었다.


구속구를 모조리 풀었을 때는 단순한 의심을 넘어 확신에 가까워졌으며.
3 징벌방을 뚫고 탈옥하는 시점에서는 확고해졌다.

강민식은 상부의 끄나풀이다.


상부가 심어 놓은 암 덩어리다.

김우진이 완벽하게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따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 때면? 놈들이 순순히 ‘아, 미안’이라고 할 리가 없잖아.”

스스로 탈옥을 막지 못했다고 자백하는 꼴이며 그거야 말로 저들이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잡아야 한다. 놈이 달아나기 전에, 상부에서 그것으로 꼬투리를 잡고 계약 운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릴리를 만나 당부를 전한 김우진이 케르베로스를 타고 사라졌다.

* * *

처음 추적에 나선 곳은 동쪽이다. 춘식이의 영역. 강민식은 이곳에서 춘식이에게 몬스터의 팔을 던져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벽을 넘었단 말이지.”

30cm 안팎의 담이 정원 전체를 감싸고 있다. 언뜻 보면 낮아 보이지만 눈속임이다.


마나로 만들어진 투명한 벽은 수십 미터가 넘어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다. 닿는 것만으로도 반탄력과 충격을 준다.

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아예 박살을 내거나 합법적으로 통과하는 것뿐이다.

“망가진 곳은 어디에도 없고.”

하지만 벽면에는 아주 작은 일그러짐조차 없었다. 당연하다. 징벌방의 시스템을 조작한 놈이 벽의 시스템에


간섭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점점 더 윗놈들의 끄나풀이라는 것에 확신을 더해간다.

이제는 아예 숨길 생각도 없다는 거겠지. 하긴, 이미 구속구를 모두 풀어버린 시점에서 의미가 없긴 했다.

“가자, 덕구야.”

멍멍멍!

냄새를 쫓아 빠르게 전진했다.

“일직선으로 주파한다라. 데르카인한테 배운 건가.”

괜히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혼란을 주기 보다는 모든 힘을 다해 도망치는 게 낫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 이 개새끼가.”

연옥 동쪽에는 숲과 설원, 협곡 등의 갖가지 환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제법 큰 호수가 하나 있다.

근방 몬스터들이 목을 축이는 수원지.

그곳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물고기들이 배를 드러낸 채 떠오르고, 물을 마신 몬스터들의 시체가 사방에서
뒹군다.
독기와 몬스터들의 피, 썩어버린 사체 냄새가 뒤섞여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교란이었다.

호수에 몸을 담궈 최대한 냄새를 씻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독을 살포해 온갖 악취를 퍼트렸다.

명백하게 덕구를 의식하여 한 행동이었다.

“찾을 수 있겠어?”

덕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행동은 더 없이 적합했으나 맹점이 하나 있었다. 케르베로스의 후각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

아무리 물에 씻고, 호수 전체에 독을 풀고, 몬스터들의 사체 냄새와 뒤섞여도 케르베로스는 그 사이에서 원하는
냄새를 포착할 수 있다.

“가자.”

약간의 도움닫기, 덕구의 몸이 단숨에 거대한 호수를 뛰어 넘었다.

일직선으로 질주하던 강민식의 경로는 호수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살짝 꺾이며 지그재그를 그렸다.

꼴에 흔적을 지우고 혼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지만 케르베로스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그 이상의 방해물은 없었다. 몬스터들은 덕구를 따라오지도 못했고 곧 목적지에 도달했다.

숲이 끝나는 지점, 탁 트인 벌판과 그 끝에 펼쳐지는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투명한 차원의 방벽 너머로 보이는
우주.

강민식은 그곳에 서 있었다. 벽과의 거리는 불과 10m 도 되지 않았다.

늦었나. 서로의 거리를 가늠하고 빠르게 상황을 계산한 김진우가 덕구를 툭툭 건드렸다. 덕구가 멈춰 섰다.

“강민식.”
“소장.”

인기척에 강민식이 등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핏발 선 눈에는 독기와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행동력이 빨라. 설마 고작 일주일만에 다시 탈옥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완전히 한 방 맞았다고.”


“어떻게 벌써 눈치 챘지? 밖에서 봤을 때는 전혀 몰랐을 텐데.”
“네가 흔적을 남겨 줬으니까.”
“···오르토스인가.”
“춘식이는 내 명령이 없으면 절대 축사장으로 가지 않거든.”
“실수했군.”

하지만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다. 강민식이 중얼거렸다.

“내가 나가면 넌 꽤나 곤란할 거야. 그렇지?”


“아마도. 그래서 말인데. 그대로 등을 돌려서 다시 돌아올 생각 없어?”
“있을 리가.”

뿌득, 강민식이 이를 갈았다.

“너는 선을 넘었어.”
“선?”
“나한테 그딴 건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어.”
“3 징벌방에서 뭘 보고 왔는지는 몰라도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걸 만든 건 내가 아니거든. 그리고
애초에 잘못은 네가 했지. 누가 탈옥하래?”
“애초부터 따지면 난 감옥에 갇힐 이유가 없었어!”

강민식이 버럭 소리쳤다. 주인의 감정에 동화된 마나들이 폭주하듯 쏟아졌다.

“난 용사로서 세상을 구했다. 수십 번도 더 목숨을 걸었어. 이제 와서 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그건 다른 용사들의 이야기고.”
“뭐라고?”
“너는 이야기가 좀 다르잖아.”

김진우가 덕구의 등에서 내렸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 개새끼들이 너한테 뭘 약속했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밑천을 전부 까발려 놓고 이제와서 모른 척 하시겠다?”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거다.”
“그래, 그런 식으로 해. 괜찮아. 잡아서 족쳐보면 불지 않고는 못 베길 테니까.”

흥, 코웃음 친 강민식이 정확히 김우진이 다가온 만큼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장벽과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내가 탈출한다고 하면, 막을 수는 있고?”

없다.

강민식과 방벽의 거리는 10m 안팎이다. 무력의 차이가 극명하다고 한들, 강민식 또한 용사다. 그가 작정하고
방벽을 넘는다면 막을 방법 같은 건 없다.

방벽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또 모르지만 이미 신들로부터 권한을 받아온 그가 탈출하지 못할 리는 없다.

“선택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선택? 무슨 선택?”
“솔직히 말할게. 만약 네가 그 개새끼들의 도움을 받았고, 권한도 일부 양도 받았다면 방벽도 손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당연히 막을 수 없지. 네가 아무리 병신이라도 용사인데.”
“끝까지 주둥이는 걸작이군.”

강민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말이야. 도망친다고 모든 게 끝날 것 같아?”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 솔직히 네가 지금 탈출을 한다면 막을 방법은 없어.”

김우진이 그렇게 두지 않는다.

“그런데 나한텐 남다른 능력이 있어.”


“밥 먹고 해온 짓이 그런 거라 너 같은 놈은 치를 떨 거야.”

굳이 화를 내지 않았다.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

“포기하고 그대로 걸어 이쪽으로 온다면 적당히 끝내줄게.”

그저 담담하게.

“너를 징벌방에 넣지도.”


“다시 한 번 이어진 탈옥의 죄를 묻지도 않을게.”

회유하고.

“하지만 아니라면.”
“널 찾아낼 거야.”
“찾아내서.”

경고했다.

“오늘의 일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강민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대로 몇 걸음, 차원의 방벽 바로 앞에 섰다.

“좆까.”

몸을 뒤로 넘겼다.

차원의 방벽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

한 발 늦게 날아든 화염의 창이 방벽에 부딪혔다.

───────────────
# < 028. 추적 >

강민식이 탈옥에 성공했다.

차원의 방벽을 넘은 순간, 당장 그를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김우진은 아무런 수확도 없이 연옥으로 돌아왔다.


“세계수로 어떻게 안 됐던 겁니까?”
“그건 도둑놈처럼 창문 따고 들어가는 경우고, 당당히 열쇠 들고 정문으로 나가겠다는 걸 막을 순 없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물어. 좆된 거지.”

탈옥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연옥의 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신이라고 으스대는 윗대가리들이
더 없이 바라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김우진을 압박하고자 했으니.

다가올 후폭풍은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났다.

허나,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상황이 차악으로 가긴 했지만 아직 최악은 아니니 괜찮아.”


“탈옥에 성공한 것부터가 이미 최악 아닙니까?”
“잡으러 갔다가 허탕 치고 돌아와야 최악이지. 아직은 차악이야.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줄 알아?”
“탈옥에 성공한 건 처음입니다.”
“사소한 건 좀 넘어가. 웃고 있어도 상당히 열 받은 상태니까.”

톡톡톡,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예전보다 더욱 빠르고 힘이 있었다. 손가락 자국 그대로 구멍이 뚫릴 정도로.

“1177 번은 이미 차원을 넘었습니다. 별처럼 많은 차원들 속에서 어떻게 그를 찾습니까?”


“그래봐야 두 곳만 뒤지면 돼. 모든 생명체는 연어와 같아서 회귀 본능이라는 게 있거든.”

차원 이동이란 건 차원 마법에 정통해 목표 차원의 좌표를 알고 있지 않는 이상, 매개체를 따라가는 법이다.

그리고 생명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연옥은 수많은 차원들이 교차하는 곳이라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도망간 강민식이 갈 곳은 많아야 두 곳이다.

그가 태어나고 일생을 보낸 지구.


아니면 용사로서 십수 년을 활동했던 크라프트.

“고작 두 곳이야. 시간만 충분하다면 찾지 못할 것도 없어.”

그래,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 전제부터가 틀렸습니다. 놈은 명명백백하게 상부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탈옥하자마자 성공 사실을


알렸겠죠. 상부가 움직이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지.”
“방법이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휴가를 좀 가볼까 해.”

1 년에 딱 일주일. 휴가 혹은 일종의 연차를 쓸 수 있다고 상부와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연옥의 핵심이 김우진인만큼, 그 기간 동안은 만약을 대비해 연옥의 방벽을 완전히 닫고 외부의 출입을 통제한다.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김우진 본인이나, 그가 동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물론 상부에서 임의로 뚫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 경우, 그들이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 꽤 많아진다.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 기간 동안은 상부 또한 개입할 수 없다. 의심을 한다고 해도 휴가 중이라고 모두


씹어버리면 그만이다.

“일주일 가지고 되겠습니까?”


“이주. 작년에는 안 썼으니까.”
“그래도 그 큰 차원을 두 개나 뒤지는 일입니다.”
“덕구를 데리고 갈 거야.”

차원 이동의 여파로 후각이 당분간 저하되겠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낫다.

“여기서처럼 어디에 있든 쫓아갈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근처에 있으면 알 수 있겠지.”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죄수도 하나 데려갈까 해.”
“예?”

* * *

“그렇게 됐으니까 네가 함께 가줘야겠어.”


“···죄수가 탈옥을 했는데 그 죄수를 잡으로 다른 죄수와 함께 가겠다고요? 제가 들은 게 맞나요?”
“정확해. 참고로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야.”

율리아는 리자스 꽃차의 향을 음미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슨 숨겨진 뜻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죄수가 탈옥을 했다는 걸 죄수에게 알릴 이유도.


함께 가자고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저희가 협력 관계가 되었다고 하지만 벌써부터 저를 완전히 신뢰하실 만한 분은 아니잖아요. 소장님이.”
“맞아. 나는 너를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필요한 거야.”
“이유는요?”
“시간이 이주 밖에 없거든.”
“다른 차원으로 도망친 사람을 고작 이주일 만에 찾는다고요? 어느 차원인지도 모르면서?”
“두 개 중 하나야. 태어난 지구거나 용사로 살았던 크라프트거나. 왜 그런지는 알고 있겠지?”
“···차원을 찾아갈 때 가장 확실한 건 좌표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차원에 해당되는 무언가가 곧 길잡이 역할을
하니까요. 당연히 그 차원에서 지내온 생명체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길잡이죠.”
“그래. 차원 이동은 특별한 좌표가 없는 한 무조건 네비를 따라가게 되어 있지.”
“네비요?”
“대충 넘어가.”
“그러니까 시간은 이주밖에 없는데 찾아야 할 차원은 무려 두 개라는 거네요.”

“맞아.”
“제 역할은 1177 번을 찾는 사냥개 정도가 되겠고요.”
“하이엘프는 모든 식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잖아?”

차원이라는 드넓은 세상에서 작정하고 숨어버린 용사를 찾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극한의 후각을 가진 머리 세 개의 사냥개와 이 세상의 모든 식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하이엘프는
깜깜한 심연 속에서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다.

특히, 생명체가 살아갈만한 차원에서 식물이 없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막에서도 선인장은


자라난다.

어떤 오지로 숨어들었든 식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제가 소장님을 도와드려야 하는 이유는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가 협력하기로 한 사항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요.”
“연옥을 부수겠다며?”
“네.”
“놈을 잡지 못하면 내 임기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나는 충실하게 감옥을 지켜야만 하지.
그리고.”
“그리고요?”
“이 탈옥 자체가 날 여기 앉혀둔 개새끼들의 수작이야.”
“당장 가요. 어디를 먼저 가시나요?”
“크라프트. 조금 더 가능성이 높거든.”

살아온 시간은 지구가 더 길었으나 가장 최근까지 강렬한 흔적을 남긴 곳이 크라프트다.

연결점이라는 것은 멀어지면 조금씩 희미해지기 마련. 적어도 김우진이 보기에는 크라프트의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런데 구속구는 풀어주시는 거죠?”


“도망칠 생각만 없다면.”
“당연히 없죠.”

멍멍멍!

그렇게 한 명의 인간, 한 명의 하이엘프, 그리고 세 머리의 개가 차원의 방벽을 넘었다.

그들이 떠난 직후, 차원의 감옥, 연옥의 모든 문이 닫혔다.

* * *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차원들이 존재한다.

당연히 모든 차원은 같지 않다. 환경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며, 마나의 분포는 물론 살아가는 종족도 문명도
다르다.

“그런데 크라프트는 어떤 차원이에요?”


“나도 몰라.”

죄수로 들어온 용사의 서류에는 그간의 행적과 여러 가지 사항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지만 거기에 용사로서
활동했던 차원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적었다.

당연했다. 이미 연옥으로 들어와 죄수가 된 이상, 어느 차원에서 용사를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하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엘프가 주를 이루는 차원에는 엘프 용사를 보내는 상부의 패턴을 대입해보자면 크라프트의 주 종족은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강민식에게 압수한 물품들이 가죽 갑옷과 검이었음을 상기하면 중세의 문명을 가지고 있을 거다.
마법 또한 사용했으므로 마법 또한 발전했을 거고.
마법이 적당히 발전한 차원이면 마도 공학은 당연히 뒤따른다.

“대체로 아르반이나 데이드람하고 비슷하네요?”


“대부분의 차원이 그래.”

일반적으로 차원의 발전 방향성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마력의 농도다.

마나가 적당히 있는 곳은 대부분 마법이 발전하며, 그에 따라 마도 공학도 함께 융성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차원들은 적당한 수준의 마력 농도를 가지고 있다.

마나가 극히 희박하여 지구처럼 과학이나 또 다른 학문이 발전하거나, 마나가 너무 풍부해 융성한 문명보다는
개개인의 괴물들이 탄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면 잠깐만요.”

율리아가 근처의 나무에게 다가갔다. 손을 얹고 눈을 감아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길 잠깐.

“어쩌면 쉽게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안내할게요.”


“갑자기 자신감 넘치는 그 말투, 묘하게 거슬려. 이유는?”
“이 세계에도 엘프들이 있데요.”
“그리고?”
“어머니 나무도 있고요.”
“···썩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데.”
“왜요?”
“아니, 아무것도. 그래서 어쩌겠다고?”

김우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으나 곧 펴졌다.

“제가 어머니 나무께 여쭈어 볼게요. 최근에 차원의 방벽을 뚫고 들어온 누군가가 있는지. 그러면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엘프들은 서로 배척하지 않아? 다른 차원의 엘프라고 말이야.”
“연옥의 엘프들이 그러던가요?”
“그건 특수한 경우잖아.”
“저도 모든 엘프들을 장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하이엘프는 어느 차원에서든 특별해요. 특별하게 여겨지고요.”
“좋아, 일단 가보자고.”

불안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계수라면 누군가 차원을 넘어 왔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챘을 거다.


그렇다면 강민식이 크라프톤에 있는지, 지구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세계수가 희소식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율리아를 데리고 온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 * *

유난히 밝게 빛나며 밤하늘을 빛내는 별은 열에 다섯은 차원이다.

그 정도로 많은 세계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간다. 우주를 수놓으며 은하수를 그린다.

남자는 그런 하늘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법칙에 의해 원활하게 흘러갈 것 같은 세상도 완벽하지는 않다. 애초에 완벽한 세상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완벽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그의 손길에 따라 일어나던 불협화음이 다시금 부드러운 선율로 돌아간다는 건 참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다.

“신이시여.”

새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천천히 다가와 그를 경배했다.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귀에 속삭였다.

“성공했다는 말이군.”

기다리고 있던 소식에 남자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당히 궁금하군. 지금 당장 콕콕 쑤시는 심장을 들쑤셔···휴가? 그것도 붙여서?”

프흐흐흐, 남자의 시선이 찰랑이는 붉은 빛의 와인에 닿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군.”


“하명해주시옵소서.”
“집행자 다섯을 보내어 그 인간을 보호해 주거라. 하지만 결코 김우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고 일러라. 비루하게
도망치는 것을 도우면 되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도 고작 이주다. 그리 길지도 않다.

“외람된 말이오나, 하찮은 피조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멍청한 소리 하지 말아라. 일개 피조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위대한 우주의 이름으로 맺어진 계약은 더 없이
신성한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감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여인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하물며 김우진은 피조물이나 이미 피조물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는 존재.”

남은 포도주를 마저 삼켰다. 투명한 유리잔이 빛을 반사하며 그 자태를 뽐냈다.

“겨우 다섯으로는 정면 승부에 답이 없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야만 한다면 결코 신분을 노출시키는


일은 없게 하라 일러라.”

빈 잔을 던졌다. 쨍그랑, 수백 개의 조각들이 비산했다. 튀어 오른 조각들은 다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진짜 별처럼.

“그게 불가하다면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말라고도 이르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주동안 그 인간을 피신시켜야 할
것이다.”
“예! 모두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딱, 남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다시금 하나로 합쳐졌다.

“내가 직접 가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쉽구나.”

쯧, 혀를 찬 남자가 잔을 내밀었다.

“이번엔 다른 것이 마시고 싶구나.”


“예, 세계수의 수액으로 만든 백주를 대령하겠나이다.”

여인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
# < 029. 발견 >

쿠그그그그그-

소장이 사라졌어도 연옥의 시계는 돌아간다.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세계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굉음과 진동,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을 일으켰다.

“고작 이주일만에 하늘구름을 완성시키라고? 미친 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데르카인이 금이 간 외벽을 조금의 흠도 없이 매꾸면서 투덜거렸다.

“그쪽은 그나마 자기가 부숴놓은 거 수리하는 거지. 나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옆에서 불탄 잔디를 뽑고 새로운 잔디를 심어주고 있던 시에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 짓도 안 한 건 아니지 않나.”


“풀어달라고 해서 풀어줬더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크흠, 그런 뜻은 아니네.”

데르카인이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소장이 떠나버리면서 이주일이라는 시간제한이 생겨버렸다.

그는 드워프들에게는 부서진 연옥의 수복과 마도구 제작을 맡겼다.


엘프들에게는 불타버린 정원 복구와 세계수의 이동을 맡겼다.

갑작스럽게 과중한 업무를 떠안아 버린 두 죄수들은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늘구름이라면 그거지? 소장의 요구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마도구.”
“맞네.”
“세계수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는 그렇네.”
“용케 그런 걸 순순히 만드네. 소장이라면 치를 떨지 않았어?”
“치를 떨고 있네. 하지만 더 치를 떠는 상대가 있어서 잠시 참고 있는 거고. 그러는 자네야 말로 갑자기 왜
이렇게 협조적인가.”
“나도 그럴 일이 생겼거든.”

솔직히 시에나는 현재 돌아가는 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옥을 부수겠다고 말했다는 하이엘프와 그걸 받아들였다는 소장. 아무리 율리아가 세계수에 걸고 맹세했다고
한들, 믿을 수 있는 한계선이라는 게 있었다.

그럼에도 협조하는 것은 세계수 때문이었다. 함께 탈옥수를 잡으러 갈 정도가 된 율리아와 소장 때문이었다.

“나는 자네가 세계수를 옮길 줄 알았는데.”


“그건 다른 엘프들이 가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정원을 복원하는 건 마력이 풍부한 내가 가장 빠르고. 빨리
끝내고 쉬는 게 낫지. 그러는 그쪽은?”
“마찬가지네. 쉴 수는 없지만. 설계도는 나왔고 제작만 하면 되는데 두 가지 일에 몰두하기보다 빨리 하나라도
끝내놓고 작업하는 게 낫지.”

때문에 모든 드워프들이 연옥 곳곳으로 흩어져 부서진 상처들을 복구하고 있었다.

“이주만에 만들 수는 있고?”
“정확히는 12 일이네. 다행히 크게 부서진 건 없어서 이틀이면 이쪽은 모두 끝날 것 같거든.”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있어서 하겠나. 그냥 해보는 거지.”


“고생이 많네. 그런데 말이야. 탈옥한 게 강민식이라며?”
“그렇게 알고 있네.”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가. 3 징벌방에 갇혀 있던 인간이 대체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연구해도 네 개밖에 풀지 못한 구속구를 몇 달 만에 죄다 풀어버린 건 이해가 가고?”
“그럴 리가.”
“솔직히 처음부터 수상했지만 탈옥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네만 이제는 이해가 가네.
구속구와 감옥에 공통적인 게 하나 있네. 무엇일 것 같나?”
“되도 않는 퀴즈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우리를 이곳에 처박은 빌어먹을 놈들의 힘이네.”

연옥은 결국 신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감옥이다. 신이 쓸모가 다한 용사를, 말을 듣지 않는 용사를 가두는 감옥.

“강민식은 그놈들의 끄나풀이네.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첩자지.”


“무엇을 위해서?”
“뻔하네. 탈옥 아닌가.”
“더 이해가 안 가는데. 감옥을 만든 것도, 우리를 가두어 놓은 것도 저놈들이잖아? 그런데 왜?”
“만약 누군가 탈옥하면 누가 가장 큰 책임을 지게 될 것 같나?”
“당연히 소장이지.”
“그런 답이 나오지 않았나.”

아주 잠깐,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시에나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소장하고 개새끼들하고 한 편이 아니라고? 그게 말이 돼?”


“한 편이네.”
“뭐?”
“표면적으로는. 빌어먹을 놈들과 소장 사이에 무슨 계약이 있었던 게 아닌가 나는 생각하네. 이번 일은 그
계약을 토대로 소장에게 책임을 물려 기강을 잡으려는 거고.”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니까 내가 이렇게 태도를 바꾸고 소장에게 협조하고 있지 않나.”
“아니, 소장이 얼마나 충실하게 우리들을···잠깐만, 설마 그래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잠깐만 기다려봐.”

어째서 율리아의 그런 말도 안 돼는 소리를 했는데 소장이 받아들였는지.

그제야 시에나는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애초에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율리아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우연이라면 말이 안 된다. 율리아의 조건은 소장의 사정을 알아야지만 내걸 수 있는 제안이었다.

* * *

몬스터들이 넘실거리는 산맥을 가로 지르며 야영, 낡은 주점에서 용병들과의 만남, 도적 길드에게 소매치기를
당하고 참교육, 마법사 길드에 방문하여 마법사들과의 대담, 어느 귀족가와의 만남.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 주라는 시간은 두 개의 차원을 뒤지기에는 더 없이 짧았다.

김우진은 모든 잡다한 이벤트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세계수는 어느 쪽에 있지?”
“꽤나 멀어요. 일단 여기서 동북쪽이에요.”
“타.”

덕구를 타고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은신의 권능을 사용한 케르베로스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최소한 한 차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들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 자들이 흔할 리 없으니 질주하는 덕구를 가로 막는 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약 반나절을 달려 수 천 킬로미터를 지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광활한 수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엘프들이 사는 곳은 하나 같이 똑같군.”

나무가 우거진 숲. 그 정도의 차이와 나무의 차이만 있을 뿐, 대동소이했다.

“당연하죠. 숲이야 말로 엘프들의 고향이니까요. 그걸 따지는 건 인간에게 왜 집을 지어 사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요.”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그냥 평범한 감상이었을 뿐이다.

“결계가 있다.”
“알고 있어요. 숲 중앙에서 어머니 나무의 존재감이 느껴져요. 결계는 어머니 나무를 핵으로 삼아 펼쳐져 있어요.
허락받지 않은 자는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거예요.”
“너는?”

그녀는 하이엘프였으나 이 세계의 하이엘프는 아니었다. 세계수의 존재를 느끼고 왔으나 세계수가 초대장을
보내준 것은 아니었다.

“아마 기꺼이 반기실 걸요. 결계 앞으로 좀 가주세요.”


“들었지, 덕구야?”

멍멍멍!

하지만 율리아는 자신했다.

덕구의 등에서 내려 천천히 보이지 않는 결계를 향해 나아갔다. 손을 뻗어 투명한 막을 어루만졌다. 눈을 감고


교감했다.

“어머니 나무시여, 숲의 일족이···.”

곧, 결계의 일부가 열렸다.

“봤죠? 가요.”
“내가 가도 아무런 문제없는 거 맞지?”
“일행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어머니 나무께서 배척하지 않으실 거예요.”

과연, 결계는 김우진과 덕구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풍부한 숲의 정기···.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에요.”

단순한 막 하나를 넘었을 뿐이지만 밖과 안은 꽤나 큰 차이가 있었다. 정순하면서도 깨끗한 마나의 질과 농도가
달랐다.

“···생각보다 정기가 더 짙은데. 이러면 곤란한데.”


“네? 뭐가요?”
“정지.”

그때,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살의 끝이 김우진과 율리아, 그리고 덕구를 향해 겨눠졌다.

“어떻게 결계를 열었지?”


“너희들은 누구냐!”
“마수다! 마수가 함께한다!”
“움직이지 마라! 머리에 구멍이 뚫리기 싫으면!”

적개심이 가득한 음성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야기 잘 됐다며.”
“···잘 됐어요. 다만, 어머니 나무와 이야기한 걸 다이렉트로 외곽의 엘프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런 이유여야만 할 거야.”

분쟁은 최대한 피해야만 한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상부에게 알려주어서 좋을 게 없으니.

“그런 이유가 확실해요. 여러분, 잠시만요!”

율리아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팟, 화살 하나가 그녀의 발 앞에 꽂혔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희는 적이 아니에요.”
“저런 괴물과 함께 움직이면서? 어떻게 숲의 결계를 열었···?”

율리아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젖혔다.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로브가 작동을 멈췄다.
드러나지 않던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엘프?”
“아니, 이 기운은···.”
“하이엘프···?”
“하지만 처음 보는···.”
“마수와 함께하는데···?”

엘프들은 본능적으로 귀족들을 알아본다. 갑작스러운 하이엘프의 등장에 엘프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어머니 나무의 인도를 따라 왔어요. 저희를 어머니 나무께 인도해주시겠어요?”


“···그건.”

엘프들이 주저했다. 하이엘프는 엘프들에게 존중받고 신성시 여겨지는 귀족인 것은 맞다. 하지만 눈앞의
하이엘프는 처음 보는 존재였고 마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 걸렸다.

“당신이군요.”

그때, 엘프들의 뒤편에서 새로운 엘프가 나타났다.

“다이안님.”

건장한 체격,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자주빛 눈을 가진 엘프, 아니 하이엘프였다.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았군요. 어머니 나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세상의 하이엘프가 찾아올지니, 막지


말고 길을 열어라.”

하이엘프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이안 펠롬베그입니다.”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이쪽은···?”
“제 동료들이에요. 함께 어머니 나무를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일행이 함께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설마 마수가 함께 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세계수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일까, 다이안은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마수를 보고도 감상평은 그게 끝이었다.

“다이안입니다.”
“김우진입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들은 제가 인도할 테니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예!”

김우진과도 인사를 마친 다이안이 그들을 이끌고 수림의 내부로 들어갔다.

* * *

엘프들이 살아가는 숲속에 나타난 거대한 마수는 새하얀 백지 위에 찍어놓은 먹물 점 같았다.

수많은 관심과 이목을 끌었고 수많은 인파가 덕구를 경계했다.

“처음 보는 하이엘프야.”
“다이안님이 함께 하신다. 적이 아니라는 거야.”
“어째서 하이엘프가 마수와 함께 다니는 거지?”
“불길함이 가득해.”

하지만 하이엘프인 다이안이 함께 하기 때문일까, 그 이상의 소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어서 오시게.”

저 멀리 보이던 하늘을 꿰뚫은 나무가 더 없이 가까워질 무렵, 일단의 무리가 일행을 반겼다.

선두에는 나이가 지긋한 하이엘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갑네. 나는 크라프트의 엘프들을 책임지는 대족장, 젤리얀 케이드네이네.”


“아르반의 하이엘프,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어머니 나무의 전언이 있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로 다른 차원의 아이가 올 줄은 몰랐군. 어머니 나무께서
부르셨으니 목적은 묻지 않겠네. 다이안을 따라가게. 이 아이가 자네를 어머니 나무께 인도해 줄 거네.”
“호의에 감사드려요.”
“하이엘프를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네.”

예의상 나온 것 같은 대족장이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시 사라졌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엘프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 나무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엘프도 곁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 나무의 마나가 짙어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세계수가 품는 마나는 더 없이 정순해지고 풍부해진다. 그 정도는 경지가 부족한 엘프들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니, 과유불급이었다.

“마나가 너무 넘쳐서 감당을 못할 정도란 말입니까? 혹 세계수가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지만 어머니 나무께서는 약 만 이천 년전부터 뿌리를 내리시어 저희 엘프들을 보살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김우진의 표정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어머니 나무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같이 안가시나요?”
“어머니 나무께서 여러분들과의 독대를 원하셨습니다.”

다이안이 사라졌다.

“아까 그건 왜 물어보신 거예요?”


“골치 아프게 된 것 같아서. 만 년은 안 넘길 바랐는데.”
“만 년이 넘으면 뭐가 달라지나요?”
“보면 알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정면 돌파를 해야겠군.”

그리고 마침내, 김우진은 거대한 나무 앞에 섰다.

크릉.

순수한 마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덕구가 콧김을 내뱉었다.

- 만나게 되어 반갑구나. 다른 차원의 아이야.


- 크라프트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때, 세계수가 떨렸다.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은빛의 거대한 순록이 땅 아래에서부터 솟아났다.

세계수의 정령체였다.

“어머니 나무를 뵈어요.”

- 긴 삶을 살아왔지만 설마 다른 차원의 아이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율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 저런 상태의 인간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순록의 시선이 김우진에게 향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세계수는 겉모습만으로도 그 본질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 개인적인 호기심이다만, 혹 그대를 조금 더 살펴보아도 되겠느냐?

“아니.”
- 아쉽구나. 허나, 딱히 그대에게 해를 입히거나 위험한 것 같지는 않으니 그대의 말대로 하겠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알고 있는 듯한 말투에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릴리도 더 커지면 저렇게 되는 건가.

귀여운 맛이 없어서 별로인데.

저 세계수보다 작고 소중한 파랑새인 릴리가, 그가 좋아서 뺨을 부비는 릴리가 더 낫다.

- 다른 차원의 아이야.
- 네가 저 인간과 함께 날 찾은 것은, 얼마 전에 이곳으로 돌아온 용사 때문이겠지?

찾았다.

굳이 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강민식은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김우진은 웃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세계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 < 030. 세계수와 관리자 >

“돌아왔다는 용사가 혹시 강민식인가요?”

세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맞단다. 그 아이는 이 차원을 구한 영웅이지.


- 그 아이가 왜 다시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기운을 기억하고 있단다.
- 그래서 궁금하구나. 그 아이가 왜 돌아왔는지도, 너희들이 왜 그 아이를 찾는 지도.

율리아가 힐끔, 김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세계수의 말투에서부터 강민식에 대한 호의가 물씬 풍겨졌다.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요?’
‘이제부터는 입 닫고 있어라.’

김우진이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데리러 왔다.”

- 데리러 왔다니. 그게 무슨 뜻이니?

“말 그대로야. 우린 강민식을 데리러 왔어.”

- 이유는?
- 네 태도와 말투에서 보건데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세계수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굳이 알려줘야 하나?”

- 당연히.
- 다시 말하마. 그 아이는 이 차원의 영웅이란다.
-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 결코 그 아이를 데려갈 수 없음이야.
- 분명히 말하려무나. 데리러 온 것이니, 잡으러 온 것이니?

“음, 그게 아니라요···.”
“입 닫고 있으라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 헛소리 하지 마라, 세계수.”

김우진이 애써 변명을 하려는 율리아를 밀어냈다. 헛소리라는 말에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이건 저 위의 집행이다. 만 년을 살아왔다면, 강민식의 신변 권한이 이미 넘어갔음을 알고 있을 텐데?”

순록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높이가 맞춰졌다. 새하얀 백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 ···짐작은 했단다. 너 같은 인간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가 없지.


- 열쇠를 가지고 차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 헌데, 그 아이도 열쇠를 들고 있었는데 말이지.

“신경 꺼라. 이건 네 영역 밖의 일이다.”

- 역시 너는 집행자겠구나.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 불쌍한 아이. 어쩌다 집행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꼬.

“위선 떨지 마라. 그 녀석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 순순히 보내지 않았나?”

- 집행자들은 전부 딱딱하고 농담도 안 통하니 재미가 없구나.

순록의 눈매가 초승달을 그리며 휘어졌다.

- 어떻게. 도움이 필요하니?


- 그 아이를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을 텐데.
- 하지만 어떡한다. 내 도움은 조금 비싼데.
-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신들과 계약 관계일 뿐이라 네게 협조할 의무는 없단다.

가식을 치워버린 세계수의 말투는 한층 경박해졌다.

커진 율리아의 동공과 벌어진 입은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식물들과 무난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면 족해. 헌데 말하는 걸 보니 공짜는 아니겠군. 뭘
원하지?”
하이엘프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권능 중 하나이나 그것 또한 세계수의 용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있을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범위는 한 대륙을 가뿐히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이 대륙 위에서 세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식물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세계의 존재와의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었다.

- 되었단다.
- 그 정도쯤은 그냥 도와주마.

“갑자기?”

- 말했다시피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보는 지라.


- 나는 수많은 집행자들을 봐왔단다. 헌데 넌 확실히 다르구나. 단순한 집행자가 아니야. 너는 더 높이
올라가겠구나.

“투자라도 하겠다는 건가?”

- 투자라는 걸 인간들만 할 이유는 없지 않니.

무슨 생각일까. 김우진이 세계수를 뻔히 쳐다보았지만 순록의 표정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솔직히, 그냥 용인해주겠다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수라는 존재들은 그리 믿음직스러운 자들은 아니었다.

‘세계수는 용사들의 중요한 조력자지. 허나, 그건 상하 관계가 아니다. 이득이 되니까 돕는 것에 불과해.’

세계수는 신의 선택을 받아 소환된 용사를 도와주는 중요한 조력자 중 하나다. 아이템을 주거나, 동료를
쥐어주거나, 축복을 내리거나, 예언을 내려 용사를 돕는다.

모든 세계수가 용사를 돕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가 그렇다.

그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 또한 순수한 호의가 아니다.

“그 정도는 고맙게 받지.”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세계수의 도움이 없다면 이주일만에 강민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에 가까우니까.

무엇보다 크라프트는 수많은 차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강민식만 잡게 되면 다시 올 일도 없는 차원의 세계수에게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 호의를 거절하지 않아주니 기쁘구나.


-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도와주마.
- 나가면 나의 아이가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 그의 인도를 받거라.

순록이 모습을 감췄다.

* * *

“···어머니 나무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지 마. 세계수는 상부와 협력 관계야. 알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세계수 입장에서는 어지러운 차원을 안정시킬 수 있으니 좋고, 상부는 세계수를 통해 보다 원활히 용사들을
이용해 먹을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지.”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요.”
“저 세계수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의 뿌리는 조금이지만 세계의 법칙과 기억이라는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닿거든.”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은 세계수는 보다 우주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것까진 몰랐어요. 그래서 만 년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 거예요?”


“만 년 이전이라면 적당히 속이면서 이용해먹을 수 있지만 만년이 넘었다면 보다 그 이면을 알고 있을 테니까.
대화해보니 알겠어. 연옥의 존재를 알고 있고 강민식이 탈옥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어.”

결코 크라프트로 돌아올 일이 없는 강민식이 돌아왔고 집행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 가능성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께서 신들에게 모든 것을 말하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말했잖아. 세계수는 협력 관계지, 상하 관계가 아니라고.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 제대로 강민식을 잡아 연옥으로 데리고 간다면 큰 문제까지는 없어.”
“어째서요? 집행자를 사칭하고 강민식이 탈옥했었다는 것을 알렸잖아요.”
“내가 언제?”
“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집행자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제가 들었는데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둔다고 했지. 그렇다고는 안 했어. 나는 그냥 휴가 중에 우연히 세계수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거 눈 가리고 아옹이잖아요.”
“이 탈옥 자체가 상부의 눈 가리고 아옹이다.”
“그러면 강민식을 잡으러 왔다고 말한 건요?”
“잡으러 왔다고? 내가? 데리러 온 거겠지.”
“말이 안 되잖아요. 무엇에서부터?”
“너무 적응을 못해서 적당히 휴가를 보내줬다, 정도로 해주면 돼. 구속구는 계속 채워두고 있었다고 하고.”

진짜 채워두었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결국 이번 일은 이주일 안에 김우진이 강민식을 잡느냐, 못 잡느냐로


판가름이 날 테니.

“···사기꾼.”
“사기꾼은 너지.”
“제가 왜요?”
“소지가 되고 싶어서 세계수의 씨앗을 넘긴다고 했던가.”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애초에 속지도 않았지만 네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더 이상해. 널 사주한 게 알베니우스 아닌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든 걸 밝히는 게 나았을 텐데?”
“알베니우스가 확신할 수 없다고 했어요.”
“무엇을?”
“당신의 의중을. 신들의 개가 될만한 사람이 아닌데 개 노릇을 하고 있다고요.”
“개라. 그렇게 보이긴 하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묶여버린, 절대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계약.

때문에 김우진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약이 끝난 이후로 상정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등장과 알베니우스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뒤로 조금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요?”


“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신들이 연옥을 만들고 용사들을 가뒀는데 왜 탈옥을 하게 하는 거죠?”
“말했을 텐데. 나를 옭아매기 위해서라고.”

계약의 연장을 위해서. 김우진을 더 오래 연옥에 박아 두기 위해서. 이를 테면 독소조항이다.

“하지만 죄수들이 전부 탈옥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더 크지 않나요?”


“내가 결국 이런 식으로 잡아들일 거라는 걸 아니까.”
“아.”
“그러면 나도 묻지. 알베니우스가 노리는 것은 대체 뭐냐.”

연옥을 부순다는 것까지는 안다. 그리고 그 무기가 율리아고, 이후 그녀의 미래는 알베니우스의 손에 달렸다는
것까지.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

“뿌리부터 썩은 나무는 뽑아내지 않고는 도리가 없어요.”


“관리자들을 모조리 도려내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김우진은 그들을 관리자라 부르나 대부분의 인류는 그들을 신이라 부른다.

그건 그들 스스로가 자칭하는 것도 있지만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베니우스가 당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조용.”

김우진이 율리아의 입을 막았다. 저 앞에서 다이안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어머니 나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용사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둘은 다이안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그가 차를 내왔다.

“다만, 엘프들을 이용해 공개적으로 수색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김우진이 바라던 바였다. 대충 이유가 짐작이 갔지만 일단은 물었다.

“왜입니까?”
“강민식 용사님께서는 저희를 구원해준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용사란,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자다.

해당 차원의 인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처치하기 위해, 차원의 굴레에 종속되지 않은 타 차원의
인류를 데리고 오는 거다.

용사는 차원의 유일한 희망이다.

전 차원의 이목이 용사에게 쏠리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큰 화제가 된다.

차원의 모든 인류가 용사를 응원하고 지원하며 그를 보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리고 그렇게 온갖 고난 끝에 결국에는 세상을 구해낸 자다.

영웅이다.

그런 자를 어떤 의도에서든 찾는 다는 건, 결코 호의적인 눈빛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용사님의 귀환 사실조차 모를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희가 용사님을 찾고 있으면 이유를
묻고, 경우에 따라서는 먼저 용사님을 찾아 보호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의도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구한 용사는 이미 압도적인 비대칭 전력이다.

알아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 준다면 기쁘게 환송해주지만 돌아온다면, 각국에서 용사를 자신들의 품 안으로
들이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따로 방법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가 되었든 차원의 방벽을 통과하여 들어오면 흔적이 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나무께서는 그
흔적을 알고 계십니다.”

다이안이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 *

“···망할 놈들. 이야기가 다르잖아.”

낡은 주점. 벌컥 벌컥, 시원한 흑맥주를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넣은 강민식이 이를 갈았다.


탈옥만 하면 뒷일은 모두 책임져 준다고 했었다.

그걸 믿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말이 바뀌었다.

“이제 와서 이주를 버티라고?”

이주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하지만 자신을 찾는 상대가 십수 명의 용사들을 상대로도 압도하던 소장이라면 1 분, 1 초도 짧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괜스레 숨이 턱 막혀왔다.

“···아니, 괜찮아. 괜찮을 거야.”

차원은 많다. 무수히 많다.

그 수많은 차원들 중 소장이 그가 어느 차원으로 왔는지 어떻게 바로 알겠나.

케르베로스의 후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차원을 넘지는 못한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많은 차원들 중에서 고작 이주 만에 나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이주만 조용히, 죽은 듯이 숨어 지내면 된다.

“···어? 혹시 강민식 용사님 아니십니까?”


“···사람 잘못 봤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고 했지. 용사님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여기 계시겠냐?”
“그런가···?”

이 세계를 구한 그는 너무도 유명했지만 괜찮을 거다. 아마도.

강민식이 여전히 자신의 업적들을 찬양하고 있는 신문을 구겼다.

───────────────
# < 031. 없나? >

“어서오십시오!”

낡은 주점의 점원이 고개를 숙이며 반긴다.

썩은 나무의 미약한 악취, 사람들의 땀 냄새, 술과 담배 냄새, 낡아 빠져 불안하면서도 정겨운 내부.

루이네는 그리움을 느끼며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았다.

“흑맥주 하나에 안주는 아무 거나 어울리는 것으로.”


“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술과 안주는 정말 금방 나왔다. 뜨뜻미지근한 잔을 가볍게 두드리자 시원한 냉기가 흑맥주를 차갑게 식혔다.

그녀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두 가지 마법 중 하나. 술 마실 때 빼고는 쓸 일이 없는 간단한 냉기 마법이었다.

“크으, 이거야.”

시원한 탄산이 까끌거리며 목구멍을 두드리는 맛은 역시 언제 먹어도 환상적이다.

제국 아카데미라고 흑맥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냉장고라는 마도구가 있어 항상 시원하게 먹을 수 있지만


역시 용병들이 득실거리는 낡은 주점에서 먹는 것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본질이 용병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이네 얼리어스는 영웅이다.

위대한 용사, 강민식과 최후의 전장까지 함께했던 그녀는 그 공을 인정받아 제국 아카데미의 수석 교수가
되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녀에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천재과인 그녀에게 있어
검술이란 본능이었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풀어 설명하는 능력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되는 건데 왜 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눈을 깜빡이고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알려줄 수도 없으니.

결국 며칠 전, 교수직을 사임하고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그녀가 맡기에는 더 없이 사소한 의뢰 하나를 완수하고


바로 주점으로 왔다. 이 흑맥주를 맛보기 위해서.

역시 의뢰 후 마시는 시원한 흑맥주 한 잔은 특별했다.

“···어? 혹시 강민식 용사님 아니십니까?”


“···사람 잘못 봤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고 했지. 용사님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여기 계시겠냐?”
“그런가···?”

시끌벅적한 소음들 사이로 제법 흥미로운 대화가 들려왔다.

‘강민식이라.’

다른 차원에서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온 용사. 그리고는 결국 구해낸 영웅.

‘강민식일 리가 없지.’

차원 마법을 통해 자신의 본래 차원이라는 ‘지구’로 돌아가 버린 지 오래다.

차원 마법이라는 게 그리 간단하지도 않으며, 모든 것을 이룬, 혹은 잃은 강민식이 굳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제이니.’

여정의 중반까지 함께 했던 마법사이자 동료.

그녀는 죽었다. 나약하던 강민식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강민식은 변했다.

차가워지고, 집요해지고, 독해졌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이니는 강민식과 연인 관계였으니. 그 애틋함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는 질투가
날 정도였다.

아마 그래서일거다. 세상을 구한 뒤, 도망치듯 떠나버린 건.

‘아무리 그래도 우리한테는 너무 무관심했단 말이지.’

그래도 끝까지 함께 했었는데.

은근한 섭섭함을 되세기며 힐끔, 소란의 중심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어?”

무척이나 익숙한 뒷모습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긴 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여행 내내 로브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다크엘프의 예민한 기감은 미세하게 세어 나오는 상대의 마나는 더 없이 익숙하다.

루이네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의 달콤함에 유혹되는 나비처럼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누···루이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정은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말해주었다.

“내가 더 놀라운데. 지구로 돌아갔다는 분이 왜 여기 있을까? 스스로를 부정하면서까지.”


“···여긴 어떻게?”
“나야 원래 용병이잖아.”
“제국 아카데미의 교수 제안을 받았다고 했잖아.”
“때려 쳤어. 성미에 안 맞아서. 어떻게, 여기서 회포를 풀기에는 눈이 너무 많은데 다른 곳으로 갈까? 슬슬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거든.”

강민식만큼은 아니어도 강민식과 함께 했던 동료들은 모두 유명했다. 그들은 영웅이었고 강민식과는 달리 여전히


대륙에서 살아가며 활동하고 있었으니.

“···차라리 잘된 걸지도.”
“뭐가?”
“루이네, 너라면 비밀 은신처가 많겠지?”
“갑자기?”
“부탁이야. 나를 숨겨줘.”
“으응···?”

손을 붙잡고 고개를 바짝 내미는 모습에 루이네가 시선을 회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황빛의 모래는 연옥의 붉은 모래처럼 열기를 흡수하여 증폭시키지 못한다. 때문에 크라프트의 사막은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모래사막 한 가운데,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파인 구덩이. 그 안에서 진한 마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차원 이동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마력이 필요한 고위 마법이다. 자연스레 그 흔적은 진하게 남는다.

안타까운 건 그 흔적이 하필 사막이라는 것, 그래서 불어오는 바람과 모래에 대부분의 흔적이 지워졌다는 것이다.
어디로 떠났는지 그 발자국까지도.

그리고 다행인 것은 하이엘프가 둘이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도 식물은 있다.

그것이 선인장이든, 뜨거운 열사의 대지 위로 간신히 고개를 비집고 올라온 새싹이든.

“이쪽이에요.”
“이쪽입니다.”

율리아와 다이안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선인장 하나가 있었다.

다시 덕구를 타고 천천히 달렸다.

“어머니 나무께서 말씀하시길 두 분과 강민식 용사님의 차이는 사흘이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있다. 이 우주에서 시간은 절대적인 법칙 중 하나다. 아르반과 지구의 시간은, 지구와 크라프트의 시간은,
크라프트의 시간과 연옥의 시간은 같다.

“이 사막은 어느 나라의 영역입니까?”


“볼모지로 마적들이 자리 잡은 곳이긴 합니다만, 명목상으로는 제국의 영역입니다.”

크라프트에 제국은 하나뿐이었다. 전체적인 판도는 왕국 연합 대 제국이 힘의 균형을 맞추는 느낌이라 사람들은
제국을 그냥 제국이라 불렀다.

“이 방향대로 쭉 가면 뭐가 나옵니까?”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인 드와인이 나옵니다.”
“어쩌면 거기 숨어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사람이 많은 도시는 사람이 숨기에 가장 적합하다.


기실 덕구가 있고 하이엘프가 있는 이상, 어디에 숨든 큰 의미는 없지만.

“덕구야. 변신.”

멍!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다가가기 전, 덕구의
몸이 작아졌다.

아주 작은 소형견의 모습에 머리도 두 개나 없어졌다.

“이거 뭐예요? 되게 귀여운데.”


“귀여우면 네가 안고 있어라.”
“그래도 되요?”

끼이잉-

덕구가 싫다는 기색을 내비쳤으나 김우진의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율리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귀여워. 우쭈쭈.”

으르르르!

생각해보면 저게 당연하다. 마수가 상극에 가까운 순수한 마나를 품은 하이엘프를 선호할 리가 없으니. 개의치
않는 율리아가 특이한 거다.

“엘프님이시군요. 통과입니다.”
“감사합니다.”

일행은 무사히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전쟁의 화마에 모든 이종족들이 강민식을 중심으로 연합했고 살아남았다.

함께 싸웠던 전우애는 더 없이 끈끈했고 전쟁 뒤의 평화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왕국과 왕국은, 제국과 왕국은 전쟁과 분쟁을 자제하고, 인간과 이종족들은 화합을 이끌어 나간다.

태평성대. 대륙을 종말로 이끌 뻔 했던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례없는 평화를 만들어냈다.

드와인은 과연 제국에서 손에 꼽힐 대도시다웠다.

쭉 뻗은 대로와 적절히 나열된 건물들, 수많은 인파와 활기,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깨끗함, 정갈함, 화려함과
고풍스러움 그리고 그 사이를 나부끼는 수 많은 신문들까지.

“호외요! 호외! 강민식 용사님이 돌아오셨답니다!”

김우진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나부끼는 신문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충격, 세계를 구한 영웅, 강민식 용사님이 돌아오다? 드와르의 한 외곽 주점에서 포착된 강민식 용사님과 영웅,
루이네 얼리어스의 밀회···.】
【돌아온 뒤, 옛 동료와 만남을 가진 용사님. 이후, 곧장 루이네 얼리어스와 함께 사라져···.】
【용사님을 목격한 용병, 데이드 ‘한 눈에 딱 그 분 인줄 알았다. 세상을 구한 영웅을 어떻게 몰라보겠나.
용사의 품격이 느껴졌다.’ 발언 화제···.】
【강민식 용사님의 등장에 각국, 촉각을 곤두세우며 용사님 찾기에 돌입···.】

“···그, 없나?”

자기가 탈옥수라는, 숨어야 한다는 자각 자체가?

* * *

와작-

강민식이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구겼다. 한 번 퍼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만약 김우진이 크라프트에 있다면, 스스로 자신이 이곳에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었다.

“미안해, 내 탓이야.”

유명한 루이네가 아는척하는 순간부터 예정된 미래였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냥 아찔할 뿐이다. 제발 김우진이 크라프트가 아닌 지구로 먼저 갔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해?”

질척이는 오물을 밟으며, 강민식이 물었다.

지독한 악취는 코를 찌르고 지독한 어둠은 시야를 차단한다. 그래봐야 용사와 용사의 동료였던 둘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어.”

그들은 제국의 또 다른 대도시, 팔라이크의 지하수로 안에 있었다.

팔라이크는 제국이 작정하고 만든 계획도시다. 건물 하나, 대로의 돌 하나까지 전부 철저히 설계되어


만들어졌으며 특히나 유명한 것은 방대하고 복잡한 지하수로 시설이다.

“네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건 여기 뿐이야.”

강민식이 요구한 건 두 가지였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 그리고 마수의 후각까지 고려할 것.

“팔라이크의 지하수로는 어둡고 복잡하면서도 방대해 여러 번 출입했던 사람들도 쉽게 길을 잃어. 유령에 대한


소문도 있고 지하수로 특유의 지독한 악취까지 있어서 모두가 혐오하고 후각이 뛰어난 개들도 결코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는 장소지.”

‘다 왔다.’ 루이네가 수로 끝에 자리한 문고리를 잡았다.

벌컥, 문이 열렸다. 그 내부는 하수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안락했다.


침대, 책상, 카펫, 책과 온갖 먹거리까지. 더없이 편안한 안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는 냄새또한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강민식은 웃지 않았다.

“···마법의 흔적이 있으면 걸릴 가능성이 있어.”


“은신 마법진을 오중첩으로 깔아놨어.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는 팔라이크에서 수십 미터 지하야. 어지간한
곳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다고.”

아니, 그전에.

“대체 누구한테 쫓기는 거야? 너 용사야. 이 세상에 너보다 강한 놈은 없다고.”


“···이 세상에는 없지.”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해보면 절대 안 돌아올 것 같던 네가 도망치듯 몰래 숨는 것부터 수상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장은 말할 수 없어. 그냥 아무 말 말고 열흘만 숨겨줘. 부탁이야.”

강민식의 간절함에 루이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표정은 반칙이야.”

그녀가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리고 애초에 숨겨줄 마음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데리고 오지도 않았어.

“그래, 지금은 묻지 않을게. 하지만 때가 되면 꼭 말해줘.”


“그래.”

고개를 끄덕인 강민식이 침대 끄트머리에 파묻혔다.

“···그래, 여기면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만 한다.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곳에 숨은 자신을 찾기란 쉽지 않을 거다.

길게도 아니다. 이제 고작 열흘이다.

‘···근데 잠깐만.’

그 머리 세 개 달린 개새끼는 내 독기도 뚫고 찾아냈는데?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말 충분한가?”
“네 생각이 옳다. 충분하지 않다.”

그건 함께 싸워왔던 전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강민식이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갈라진 공간 사이로 처음 보는 자들이 서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기세가 그 못지 않았다. 쉽게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루이네!”

루이네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숨결은 느껴졌다.

“걱정 마라. 잠시 재웠을 뿐이니. 저 인간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서는 안 된다.”


“누구냐···!”
“적의를 집어넣어라. 우리는 널 도우러 왔다.”
“날 도우러 왔다고?”
“연옥의 소장이 왔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겠지.”

강민식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허나, 걱정마라. 너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께서 친히 우리를 보내셨으니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 집행자들이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 나와라. 이곳은 적합하지 않으니.”

* * *

마도구란, 마법이 깃든 혹은 마력이 깃든 물건을 뜻한다.

김우진이 만들어달라고 했던 것은 전자이며 세계수라는 신목을 숨기기 위해서는 그 능력이 독보적으로 특출나야만
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정말로?”
“아마도.”

용사가 되면 피조물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드물지만 강민식의 ‘독’과 같이 새로운 능력을
얻기도 한다.

데르카인은 설계의 권능이 있었다. 구속구를 해제할 수 있는 마도구를 만든 것도 이 권능 덕분이었다.

마도구의 마법진과 술식을 파악하는데 한참이 걸렸으나 파악한 이후에는 권능의 도움을 받아 결국 설계도를 그렸고
어떻게든 만들어냈다.

지금에 와서는 전부 의미 없는 짓이 되었지만.

어쨌든 권능의 도움을 받은 설계도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다.

하지만 언제나 이론을 현실로 구현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완벽하다고 한들, 그게 정말
완벽하다는 뜻도 아니다.

“만들 수는 있고?”
“일단 재료는 충분하네.”
탈옥수를 잡으러 떠나기 전, 김우진이 추가로 풀어놓은 재료의 산은 거의 모든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네.”


“음, 그럴 것 같아. 이거 아무리 봐도 새장이잖아.”

시에나가 혀를 찼다.

마도구는 크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정원 북부에 완전히 자리 잡은 세계수의 주변을 담처럼 둘러싸는


울타리가 하나이며, 누가 봐도 새를 집어넣기 위한 물건인 새장이 둘이다.

새가 새장으로 들어가면 울타리가 공명하며 발동하는 시스템이다.

“세계수는 신목이자 정령이네. 무엇이 먼저는 중요치 않아. 세계수를 완벽하게 가리기 위해선 결국 둘 모두를
가둬야하네.”
“말이야 쉽지.”

삐이이이이이이!

콰직-

세계수의 줄기가 설계도에 구멍을 뚫었다. 그대로 낚아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성난 파랑새가 부리로 데르카인을 쪼았다.

“끄악! 아프네! 이거 어떻게 좀 해보게!”


“미안하지만 엘프들은 어머니 나무한테 약해.”
“그럼 도끼로 베어버려도 되는가?”
“나랑 생사결을 벌일 거라면 그래도 되고.”

결국 데르카인은 세계수의 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설계도를 알아보는 거지. 새대가리 아닌가?”


“그 새장 같은 그림은 누가 봐도 알아보겠는데. 새까지 그려져 있잖아.”

드워프들의 쓸데없는 고증 정신 때문에 울타리에 갇힌 세계수의 모습과 새장에 들어간 릴리의 모습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러니 알 수밖에.

“뭐, 사실 상관없네. 나는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뒷일은 소장의 몫이다.

“그건 맞지.”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032. 집행자 >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환상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에 대한 선망일수도, 유토피아에 대한 망상일수도, 서로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다.

엘프들에게는 그 대상이 보다 명확하고 공통된다.

세계수, 어머니 나무.

율리아의 본래 세상, 아르반의 세계수는 환상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고고하고 고귀하며 푸근하고 자애롭다.

언제나 엘프들을 보살피며 세계 안정에 기여했다.

두 번째인 데이드람의 세계수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살아온 세월이 비례해 아르반의 세계수보다 훨씬 크고 강대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보다 장난스럽고, 신들을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세상을 향한 자애는 그대로였다.

헌데 크라프트는 달랐다. 짧은 만남이었기에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었다.

김우진의 설명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자.’

율리아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인간은 같지 않다. 모든 엘프도 같지 않다. 당연히 세계수 또한 개개인의 차이가 있는 거다.

결국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세계를 구했다는 대의는 모두 같았다.

‘그보다는.’

그녀의 시선이 김우진을 쫓았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는 모든 걸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감질나게, 그녀를 시험하듯 하나씩, 하나씩 툭툭 건네준다.

일종의 거래다. 그녀가 먼저 풀면, 김우진도 하나 푸는 식으로.

‘모든 걸 다 말해도 될까?’

연옥에 들어와서 겪어본 바로는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신들이 김우진을 대하는 방식이나, 김우진의 신들에 대한 적개심을 보면 신들의 개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알베니우스의 걱정도 기우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직···.’

확답을 받지는 못했다. 손을 잡았으나 진정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협력을 해줄 것인지, 말 것인지.

김우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그분께서는 저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강 주변의 새싹을 보듬던 다이안의 말에 생각이 끊어졌다.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겁니까?”


“그 뒤입니다.”
“지하수로네요.”

드와인에서 시작된 추격은 팔라이크까지 이어졌다.

대로의 작은 새싹들부터 제국 마탑의 분점 화분에서 기르는 식물들까지.

식물들은 강민식과 늘어난 일행의 행적으로 그대로 알려주었다. 가히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나 그래서 하이엘프가
특별한 것이다.

“확실히 숨기에는 더없이 적합하겠군요. 사람들도 거의 오지 않을 테고.”


“예.”

입구 근처에서도 악취가 조금씩 느껴진다. 입구가 그럴 진데 그 심처는 어떠할까. 제법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멍!

그때 덕구가 율리아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꼬리를 흔들며 김우진을 향해 짖었다. 냄새가 느껴진다는 신호다.

“여기 있는 게 확실하군.”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다.

“덕구야, 앞장서.”

멍!

덕구가 내달렸다. 만약에 대비해 입구에 다이안을 남겨둔 김우진과 율리아가 그 뒤를 따랐다.

지하수로의 내부는 무척이나 컸다. 천장은 약 5m, 가로는 약 20m 정도. 양쪽으로 길이 나 있고 중앙으로는
물이 흐른다. 또한 복잡한 미로와 같았으나 단 1 초도 멈출 필요가 없었다.

덕구의 후각은 권능에 가깝다. 어떤 악취가 있더라도, 아무리 멀어도 원하는 냄새를 포착해내고야 만다.

덕구가 가는 길이 놈을 향한 가장 빠른 길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일거다.

벌컥-

“뭐하냐, 쥐새끼들아?”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놈들이 미처 도망가지 못한 것은.

당황하는 강민식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명의 집행자. 그리고 기절한 다크엘프 하나.

그 단편의 모습은 김우진이 모든 상황을 납득하기에 충분했다.


* * *

“···김우진!”

강민식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집행자들이 등장할 때만 해도 안심이 되었다.

신이 날 버리지 않았구나. 이제 살았구나. 믿었다.

허나 김우진이 나타난 순간, 그 믿음은 플라스틱처럼 부러졌다.

집행자들은 강하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김우진이 그에게 남긴 전율은 그 이상이었다. 16 명의 용사들을 짓밟고 와 일곱 용사들의 합공마저 가뿐히
짓이겼다.

집행자들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심하지 마라. 알도.”


“예.”
“강민식을 데리고 가라. 절대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숨고 도망쳐라. 고작 며칠이다.”
“예.”

알도라는 집행자가 강민식의 손을 붙잡았다. 공간이동을 위한 마나가 움직였다.

파직, 마나의 간섭이 마법을 뒤틀었지만 집행자들이 끊어냈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너는 우리가 상대해주마.”


“비켜.”
“네 위명은 꽤나 들어왔다. 네가···.”

티딕, 화염이 일렁였다. 김우진의 곁에서부터 시작한 전이는 곧장 은신처 내부 전체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뒤덮었다.

거대한 폭발이 은신처를 통으로 날려버렸다.

허나 그 화염이 거친 자리에 남은 것은 고작 넷이었다.

용사와 영웅, 그리고 집행자 하나가 혼란 속에서도 기어이 사라졌다.

“공간의 권능을 가진 놈인가.”


“맞다. 넌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거다.”

다섯 집행자들의 수장, 베오르가 손에 묻은 잔불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말이 끝나는 그 순간, 베오르가 본능적으로 창을 들어올렸다. 쩌엉, 불꽃의 검이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이글거리는 화염의 열기가 뜨거웠다.

김우진의 이름은 지겹도록 들었다.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한 번의 부딪힘만으로 실감했다.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베오르는 집행자였다.

“인정하마. 혼자서는 널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다.”

만약을 위해서 알도와 강민식을 보냈으나 아직 셋의 집행자들이 남았다. 넷의 집행자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아니, 해볼 만하지 않아도 해야만 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하라는 신명이 있었다 한들, 진짜 무의미하게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집행자들 또한 기세를 드러냈다.

허나, 김우진은 웃었다.

“얼마 전에도 그렇게 말한 놈들이 있었지.”

힘겨루기가 끝났다. 카가각, 불의 검이 미끄러지듯 창대를 타고 올라갔다. 밀고 들어오는 검격을 간신히


쳐냈으나 검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전후좌우상하. 모든 곳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너무도 쉽게 그의 마나를 뚫고 들어왔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놈이 웃는다.

“미친···!”

베오르가 욕설을 내뱉었다. 육신이 단단해진다. 온갖 마법에, 열기에도 높은 저항력을 갖는다. 그의 권능,
철인이다.

콰앙, 강렬한 폭발, 격통에 육신이 출렁이나 버텨낸다.

철인으로 한층 강해진 힘이 창을 휘두른다. 김우진의 검을 붙잡고 늘어진다.

그 사이, 그의 의도를 눈치 챈 집행자들이 움직인다.

화살이 가장 먼저 포문을 연다. 수십 미터 지하의 어두운 통로에 강렬한 폭풍이 불어온다.

그 뒤로 검이 따른다. 모든 것을 베어내는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어둠을 밝히며 전진한다.


거대화된 권능의 주먹이 연달아 떨어진다.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저것들 앞에서 초연할 수는 없을 터. 일격을 맞고 주춤하는 사이 그의 창이 다시


한 번 급소를 노릴 것이다.
분명히 그래야만 할진데.

“···맙소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가 느껴진다. 세상을 붉게 물들인 불의 장벽이 그와 김우진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불길은 바람을 삼키며 화살을 불태운다.


오러를 녹이고 주먹을 먹어 치운다.

그 어떠한 것의 범접도 용인하지 않으니.


진짜 철벽이었다.

“내가 지금 너희랑 놀아줄 여유가 없어.”

벽의 불길이 번져나간다. 불의 칼날이 뒤섞인다. 집행자를 노린다.

크아아악!

오러를, 활을, 검을, 주먹을. 모든 무기를 불태우고 베어 버린다.

끄아아악!
크악!

비명 하나에 집행자 하나가 쓰러진다.

“···말도 안 돼.”

베오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동료들의 몸이 불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증거를 남기지 말라는 신의 명령은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것. 회로를 폭주시킬 필요도


없었다. 열화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있으니.

“···하하.”

이딴 게 위안이라고?

베오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흐으, 집행자 셋을 순식간에 처리한 김우진이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베오르에게 향했다.

“마지막은 네 몫이다.”

아니었다. 그가 아닌 엘프에 닿아 있었다.

“···저요?”
“나는 능력이 부족한 자를 협력자로 여기지 않아.”

약해빠진 자는 오히려 짐이 된다.


“제가 그래도 용사거든요?”
“데이드람을 구하고 다시 관리자와 만났을 때, 너는 세 가지 제안을 받았을 거다.”

일반적인 제안은 두 가지다. 힘을 포기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

하지만 아주 간혹, 특별한 세 번째 제안을 받는 자들이 존재한다.

[신을 섬길 생각이 있느냐.]

용사들 중에서도 극소수. 선택받은 용사들 중에서도 다시 또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떨어지는 제안.

그들의 강함이, 그들의 특출함이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아까워 수족으로 부리고자 하는 마음.

위대한 하이엘프라면 능히 세 번째 제안이 날아왔을 거다.

“그랬어요. 하지만 거절했죠.”


“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받아들였지.”
“···그 말은?”
“저들은 용사‘였’다.”

거기서 고개를 끄덕인 이들은 새 삶을 산다.

“허나, 지금은 집행자라 불린다.”

신들의 수족, 집행자로서.

“···몰랐어요.”
“너와 내가 바라는 그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가장 밑에서부터 마주할 적.”

그러니 증명해라.

“네가 쓸모 있음을.”
“···못할 것도 없죠. 고작 하나인데.”

율리아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래, 그럼 잘해봐. 이따 보자.”


“네. 이따···네? 뭐라고요?”

잘못 들었나? 율리아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말했잖아. 시간이 없다고. 도망친 놈을 찾는 게 우선이다. 공간 이동 마법이 발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김우진이 집행자와 강민식이 사라진 자리에 섰다. 마나를 더듬으며 공간에 손을 박아 넣고 찢었다.

“···어?”
“······!”

균열이 벌어졌다.
“추적할 수가 있거든. 이놈 죽이고 밖에서 기다리는 다이안과 함께 날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김우진이 사라졌다.

“······.”
“······.”

대부분 녹아내린 지하수로 안.

“···아니, 나도 일단은 죄수인데.”

한 명의 집행자와 하이엘프가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신뢰 받는 건가?

죄수가 아닌 협력자로서.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고 간 건가?

아니, 아니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가지기에는 아직 이르다.

몇 달 동안 김우진을 지켜봐온 감으로 짐작해 보자면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자신감이다. 어디로 도망쳐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니 이건 신뢰가 아니라 시험이다.

“그런데 저 능력은 또 뭐래.”

화염을 다루는 것이 끝이 아니었나.

공간을 찢어 추적하는 건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힘인데.

놀랐지만 그 놀라움은 눈앞의 집행자보다 크지는 않을 거다. 율리아의 시선이 멍하니 서 있는 집행자에게 닿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율리아 카르센이라고 해요. 용사였고 지금은 죄수에요.”

꾸벅, 인사를 했다. 멍한 시선이 그녀에게 온다.

“그런데 그렇게 가만히 있을 여유가 있어요? 왠지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쁜데요.”


“···그래, 그렇지.”

집행자의 눈에서 빛이 돌아왔다.

“나에게는 신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 예상 밖의 일이지만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창끝이 적을 향해 겨눠진다.

“김우진의 개, 너를 죽이고 김우진의 뒤를 쫓겠다.”


“개라는 말은 저보다는 당신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자칭 신들의 충성스러운 개새끼잖아요.”
“···엘프 아니, 하이엘프가 제법 더러운 입을 가지고 있구나.”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는 차리지 않는 편이에요.”

특히, 저는 신들을, 그 개들을 싫어하거든요.

“같잖구나. 신들이 아니었다면 네가 용사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이 세상이 온전할 것 같으냐?”

드드드-

“나 또한 용사였다. 따지고 보면 네 선배지. 네가 태어나기도 이전부터 나는 용사로서 세상을 구하고 위대한


신의 선택을 받았다.”
“우와, 그거 정말 대단하세요.”

짝짝짝, 영혼 없는 박수소리가 울렸다.

“선배 대접을 받고 싶으신 건가요? 해주면 목 내밀어주실 건가요?”


“건방지구나.”

창이 공간을 꿰뚫었다. 카앙, 율리아의 검이 그 진로를 가로 막았다. 튕겨져 나간 창은 어느새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 있었다.

허나.

“아니죠.”
“······!”

손은 주인에게 붙어 있지 않았다.

팍, 붉은 피가 튀었다. 잘려나간 손목이 창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건방진 건 선배죠. 예의도 없고요. 대화 도중에 기습이라니.”

율리아가 태연히 웃었다. 그녀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베오르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거대한 의문이 밀려드는 격통을 압도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나 대답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약하시네요. 집행자라고 해서 그래도 나름 긴장했는데.”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죠. 제가 강한 거겠죠?”

역시, 그녀가 중얼거렸다.

“맞아요. 제가 약할 리가 없죠. 소장님과 함께 있다 보니까 제가 너무 약자가 된 것 같다니까요.”

소장이 압도적인 무력 앞에 서는 그녀 또한 작아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 베오르에게는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속력이 소장에게는 그저 조금 빠를 뿐이라고 인식된다.

“그리고 솔직히 처음에 보여준 모습은 너무 실망스럽긴 했어요. 오랫동안 구속구를 차고 있다가 아주 잠깐 푼
거라서, 다른 제약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힘이 온전하지 않았거든요.”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라뇨. 물음에 대한 대답이잖아요.”

푹, 차가운 금속이 베오르의 폐부를 찔렀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권능, 철인은 너무도 쉽게 박살났다.

“당신이 나보다 약하다고요. 그래서 보지 못했을 뿐이고.”


“이 개···!”

베오르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율리아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마나를 이용해 흔적을 지웠다.

“위로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려나?”

지난 몇 달의 시간동안 율리아는 어째서 알베니우스가 소장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의 곁에 달라붙어


있으라고 한 건지 여실히 깨달았다.

당장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소장 김우진의 곁이다.

───────────────
# < 033. 숨바꼭질 >

마력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완벽은 없다. 완벽하게 보인다면 그 마력의 주인이 더 우월하다는 뜻이다.

없어서 읽지 못하는 게 아니라 능력이 부족해서 읽지 못하는 거다.

허나, 알도라는 집행자는 결코 김우진보다 격이 높지 않았다.


김우진의 감각을 속일 만큼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김우진에게는 공간을 찢어 탐험하는 능력이 있다.

그게 김우진이 저들을 추적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간 곳은 인적이 드문 몬스터는 넘쳐나는 늪지였다.

한쪽에는 수십의 리자드맨들이, 다른 쪽에는 다섯 마리의 거대한 크로커들이 살기를 드러낸다.

강민식과 알도, 기절한 루이네와 김우진이 도착한 것은 정확히 그 중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가던, 극히 가까워지던 충돌의 순간.

콰직, 공간이동의 여파에 휘말린 리자드맨 둘의 육신이 그대로 찢어졌다. 리자드맨들을 향하던 크로커의 두터운
이빨이 사이로 끼어든 김우진을 노렸다.
콰아앙!

화염이 크로커를 밀어냈다. 가죽을 녹이고 살을 익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잿더미가 되었으나 아주 짧은 틈은,
집행자가 다시 한 번 공간이동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서걱-

김우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걸려나온 옷가지와 미약한 핏물이 그대로 재가 되었다.

“쓸데없는 짓을.”

다시 한 번 공간 속으로 손을 비집었다.

“···이것 봐라?”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마치 미로처럼,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혼란을 주기 위해 공간을 비튼 거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불가해의 일이지만,


그 대상이 공간의 권능을 가진 집행자라면 아예 불가능도 아니다.

“마나소모가 컸겠군.”

허나, 아무리 집행자라고 해도 아무런 대가 없이 이런 짓을 하지는 못한다.

“조금 번거롭지만 찾아내지 못할 것도 없고.”

어차피 급조한 탓에 그리 복잡하지도 않았다. 아주 잠깐의 틈일 뿐이니 결국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김우진이 몸을 던졌다.

* * *

“···제기랄!”

알도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핏물에 새하얀 옷이 붉게 변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이럴 시간이 없다. 수를 써놓긴 했지만 김우진이라면 금방 온다. 설마 공간 조작 능력도 있을 줄이야···!”

길어야 몇 십초다. 그가 급하게 술식을 그렸다.

“···도망칠 수는 있는 겁니까?”
“그러면 그냥 순순히 붙잡혀서 다시 연옥에 갇힐 테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이 여자는 여기서 버린다.”

알도가 루이네를 수풀 속에 던졌다. 약자도 아니고 금방 깨어날 테니 별 문제는 없을 거다.

“설마 공간 관련 권능이 있을 줄이야.”


“···차원이동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김우진에게는 권한이 있으니.”

알도는 그 권한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다.”
“한 가지라면?”

파직-

흔들리는 공간에 알도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가서 설명해주마!”

마나가 요동쳤다. 공간이 뒤집어졌다.

거대한 도시였다. 와아아, 수많은 인파가 환호하는 도시, 카니발의 행진이 이어지는 대로.

대륙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대도시에서 건국 기념일을 맞아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제도···?”
“모른다. 그저 가장 사람이 많고 북적이는 곳으로 이동한 것이니.”

알도가 급하게 강민식을 끌고 인파 속에 섞여들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여라.”

한 발 늦게, 그들이 있던 자리에 김우진이 나타났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다행히 이건 예상대로군.”
“무슨 뜻입니까?”
“김우진은 이번 사태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의 과격 행동은 최대한 자제할
거다.”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이미 전 대륙에 제가 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만?”


“소문이 난 것과 네가 실제로 목격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문제가 촉발되는 건 다른 문제지. 네가 표면적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돌아다니다 잡히는 것과 누가 봐도 이상한 짓을 하다 잡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알도가 사족을 덧붙였다.

“네가 이대로 문제없이 잡힌다면 그냥 사람들이 누군가를 너로 착각한 해프닝으로 끝나던가, 네가 잠시 소장의
권한으로 귀휴를 나온 것으로 마무리 될 거다.”

지금까지 이용된 적이 없었으나 연옥의 소장인 김우진에게는 실제로 그런 권한이 있었다.

“귀휴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순식간에 우리를 쫓아온 김우진이다. 네 명의 집행자들을 쓸어버렸다는 뜻이고 그런 놈에게 말이 안 되는 건
없다.”
어쩌면 그 소문들이 진짜 한 치의 과정도 없는 사실일지도 모르지. 알도가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대체 왜 이래야 하는 겁니까? 신께서 나서신다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신께서는 우리를 보내주신 것으로 너에 대한 책임을 다하셨다.”
“아니, 그게 무슨···!”
“잘 들어라.”

알도가 화제를 돌렸다. 강민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인파에 숨는 건 임시방편이다.”

마법이란, 보다 많은 시간을 들일수록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다. 권능 또한 마찬가지다.

“내 권능은 집행자들 사이에서도 공간적으로는 독보적이다. 급조하느라 따라 잡혔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최대한
복잡하게 꼬아버린다면 충분히 숨을 수 있다.”

그러면 된다. 애초에 목적은 김우진과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강민식이 잡히지 않게끔 돕는 것이니.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황궁으로 간다.”


“예?”
“인간들이라면 당연히 너를 반기겠지. 그들을 방벽으로 삼아 시간을 끈다.”
“아. 사람들이 많으면 김우진도 소란을 일으키지는 못하겠군요?”
“최대한 자제는 하겠지.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 그러니···.”
“그러니 뭐?”

알도가 다급하게 몸을 굴렸다. 쩡, 미약한 진동과 함께 대지가 파열된다. 그 굉음은 카니발의 열기에 묻힌다.

“어, 어···?”

아니, 완벽하지는 않았다. 쯧, 김우진은 혀를 차며 그들을 전부 잠재워버렸다.

그 틈은 알도와 강민식에게 다시 한 번 도망칠 여유를 주었다.

김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방향은 황궁. 제국과 황제를 방패로 삼을 셈인가.

“재미있는 짓을 하네.”

나름의 발악인가.

꽤나 성가시긴 하다.

이주일 안에 아무런 문제없이 강민식을 잡아넣는 것이 베스트라면, 온갖 소란을 다 일으키며 잡는 게 워스트다.

강민식이 귀휴가 아니라 탈옥을 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게 되니.

다시 잡는 시점에서 내줄 건 아주 사소하겠지만 그것마저도 저들에게 내주기는 싫다.

그러니 그런 요소들은 사전에 배제한다.

“차라리 그냥 다시 공간이동을 하지.”


그게 더 쫓아가기 쉬운데.

김우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수백 개가 넘는 검은 불꽃들이 일렁였다. 그것은 뜨겁지도, 밝지도 않았다. 그러나 타올랐다.

사람들은 누구도 불꽃을 인지하지 못했다.

“집행자와 강민식을 찾아라.”

불꽃들이 날아갔다. 황도를 향해서.

“꼭꼭 숨어라.”

김우진이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순간이동처럼 거리가 삭제되었다.

“머리카락 보일라.”

황궁. 이 긴 숨바꼭질의 마지막 무대다.

* * *

건국 기념일은 제국의 가장 큰 축제다.

대륙의 절반 가까이 통치하는 거대한 국가의 탄생일, 위대한 시작.

모든 제국 민들은 스스로가 제국민이라는 것에 깊은 자부심을 가진다.

제국이 위대한 만큼, 위대한 제국의 지존인 황제에 대한 충성심 또한 높다.

특히, 현 황제는 용사, 강민식과 함께 멸망을 막은 위대한 전사였다.

강민식과 함께 최후의 전장에 섰던 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며 전장의 선두에서 대륙을 위해, 인류를 위해
싸운 영웅.

“폐하의 연설을 직접 들을 수 있다니.”


“용사, 강민식이 돌아왔다던데 그것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시려나?”
“당연한 소리를. 폐하께서는 강민식의 가장 절친한 동료 아닌가.”

자리에 모인 백성들 모두가 황제의 말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 연단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연단처럼 조성된 황궁의 테라스. 이제 곧 저 문을 열고 황제 폐하께서 나오실 거다. 그리고 고귀한 말씀을
시작하시겠지.

하지만 1 분.

“조금 늦으시나?”
“워낙 바쁘신 분이니 조금 늦으실 수도 있지.”
5 분.

“저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10 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폐하께서는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닌데.”

마침내 문이 열렸으나 그곳을 통해 나온 건 그들이 기다리던 위대한 황제 폐하가 아니었다.

“오늘의 연설은 사정이 있어 취소되었소! 모두 해산하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시오!”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었을 뿐.

* * *

“어디 있지?”

제국의 위대한 황제, 칼마스 칸 도이리안 베르폰이 체통을 잊고 성큼 성큼 복도를 걸었다.

백성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기껏 준비한 망토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들을 벗어 뒤따라오는 시종에게 넘겼다.

“방금 전, 접객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놈이 돌아오다니. 헛소문인 줄 알았더니 정말 사실이었나.”

세상을 구하고 떠난 용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고대 문헌에 남겨진 기록이었다.

그래서 신문을 봤음에도 믿지 않았다. 언론들은 언제나 관심을 받기 위해 사소한 가십거리들을 부풀린다.

감히 용사의 이름을 들먹인 건 괘씸해도 적당히 이용하다 선을 그어줄 생각이었건만.

“진짜였다니.”

어떻게 왔을까. 어째서 왔을까.

“폐하를 뵙습니다.”
“문을 열어라.”
“예.”

접객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접객실의 내부, 소의 가죽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의자에 그가
있었다.

대륙을 구한 영웅이, 그의 동료가, 용사가.

“황태자 전하, 아니 폐하를 뵙습니다.”

용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게 하는 예의로는 부족하나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적절하다.
황제라고 한들, 그는 용사이니.

“너무 퍽퍽하게 부르지 말지. 우리 사이에.”

황제는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 앉았다. 시종들이 차를 내왔다.

“모두 나가 있거라. 독대를 하고 싶구나.”


“하오나···.”
“강민식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대들이 있든, 없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 폐하.”

시종과 호위 기사들이 나갔다. 텅 비어버린 접객실 안에서 황제와 용사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솔직히 놀랐다. 그렇게 떠난 네가 다시 돌아올 줄이야.”


“제가 어떻게 떠났습니까?”
“연인을 잃고 빨리 잊고 싶다는 듯, 훅 가버렸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그건 그랬다. 세상을 구한 이후에는 나름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완전히 잊지 못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도 맞았다.

“피차 서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왜 날 찾아왔느냐.”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용사인 네가? 내게?”
“폐하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흠, 황제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용사가 타인에게 도움을 구할 만한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용사에게 도움을


준 이후 받아낼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무엇이든 나쁘지 않다. 용사가 타국이 아닌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용사의 동료라는 타이틀이 이럴 때는 좋군.

“도와주시겠습니까?”
“계약서도 안 보여주고 계약부터 강요하는 꼴이 악마들이 하던 제안 같구나.”
“저는 쫓기고 있습니다. 추격자를 막아주십시오.”
“재미있는 농담이다.”

황제 또한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자를 감히 누가 쫓을까. 통제 불능의 강자. 그가 순순히 돌아갔을 때, 기뻐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허나, 용사는 웃지 않았다. 황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 쫓기는지도 모르면서 막아 달라?”
“알게 되시면 감당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짐은 제국의 황제다. 짐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있습니다. 저 또한 감당하지 못할 대적입니다.”
“우스운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도와달라는 거지?”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시간?”
“황궁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아주 잠시의 시간을 벌어주신다···.”

용사의 말이 멈췄다.

“어딜 보는 거지?”

그의 시선은 황제를 향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미친.”

허나, 용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시커멓게 불타오르는 불꽃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소장의 것이었다.

불꽃은 곧 한 명의 사람으로 화했다.

“찾았다.”
“누···!”

퍽, 황제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기절했다.

“다행히 못 찾겠다, 꾀꼬리는 할 필요가 없네.”

김우진이 웃었다.

───────────────
# < 034. 용사가 옛 동료에게 남기는 편지 >

“···미친 새끼.”

강민식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따위 농담을 하겠다고?”


“심각한 건 너지, 내가 아니니까.”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럴 만하니까.”
“대체 어떻게 쫓아온 거지?”
“말했잖아. 이런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이라고. 넌 그때 내 말을 들었어야 했어.”

탈옥 직전의 이야기였다. 차원의 장벽을 눈앞에 두고 김우진은 강민식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줬었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하지만 그걸 어떤 멍청이가 받아들이겠나.

힘을 포기하느냐, 늙어 죽느냐의 악의적인 선택지밖에 없는 감옥에 순순히 남아있을 자는 없었다.


“개자식.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뿌득, 강민식이 이를 갈았다.

“말했잖아. 도망치면 쫓아가서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그 말을 거부하고 도망친 건 너야.

“그리고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에,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화를 내야 하는 건 나야.”
“닥···!”
“닥쳐야 할 것도 너고.”

가공할 마나가 강민식의 턱을 압박해 강제로 다물어버렸다.

“널 연옥에 가둔 것도, 네 발작버튼을 누른 환영 장치를 만든 것도 다 신들이야.”

그런데 넌 신들을 위해 탈옥했지.

“날 엿 먹이기 위해서.”

콱-

거친 손길이 강민식의 목을 움켜쥐었다. 콰앙,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강렬한 격통에 신음을 삼켰다.

“분노 표출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닥···쳐···!”
“그래. 순순히 굴복할 리가 없지. 그놈들의 개가 된 것부터가 네 싹수가 글러먹었다는 반증이니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그놈들에게 어떤 걸 약속 받았지?”
“내가 말할 것 같아···?”
“말하게 될 텐데.”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순순히 말한다와 고통스러워한 뒤 당한다로 과정이 나뉘어질 뿐. 김우진은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징벌방을 버티고 마음대로 벗어날 수 있는 건 놈들의 권한을 일부 받았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
“헛소리···!”
“그런데 말이야. 왜 하나만 생각하고 두 개는 생각을 안 할까? 징벌방은 그냥 내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야.”

김우진에게 편의성을 제공하면서도 무엇보다 확실해서 애용하고 있을 뿐, 연옥에는 징벌방만 있는 게 아니다.

“설마해서 묻는데 아직도 신이 널 구해줄거라는, 헛된 망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
“그래, 아예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신을 믿고 탈옥한 시점에서, 멍청이임은 변함이 없다.

김우진이 다른 손을 뻗었다. 쭉 솟아난 화염의 검이 충격파를 발산했다.

“대화중이잖아. 네가 섬기는 그 잘난 신은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안 가르치나?”

뒤를 노리던 바람의 칼날이 소멸했다. 그 여파로 은밀하게 숨어 기회를 엿보던 집행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른 집행자들은 어디 있지?”


“네가 생각하는 그곳에.”

저승.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쩌엉, 김우진의 칼날이 지팡이에 가로 막혔다.

“좋은 지팡이야. 본래의 용도로만 사용한다면.”

빠드득, 지팡이가 충격과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파열음을 냈다. 집행자는 당황했으나 다급하게 마법을 영창했다.

순식간에 완성된 것은 공간의 비틀림이었다. 공간 자체를 비틀어 상대의 육신을 일그러트리는 마법.

파직, 그것은 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파훼되었다. 그 순간, 무너진 천장의 일부가 김우진을 향해 떨어졌다.
애초에 정면은 눈속임이었다.

돌무더기가 김우진을 덮쳤고 집행자가 용사의 손을 낚아챘다.

준비해두었던 마법을 터트렸다.

마법의 빛줄기가 집행자와 용사를 감쌌다.

“어디가.”

파지직, 뜨거운 열기가 마법진에 간섭했다. 회로를 어그러트리며 발현을 방해했다.

빠르게 녹아내리는 술식에 집행자가 이를 악물었다.

“네 놈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아는지는 알겠으나 나 또한 용사였다.”

그 또한 용사로서 최강이라 칭송받던 자였다. 나아가 용사들 사이에서 뽑힌 용사들의 용사, 집행자가 될 정도로
우수했다.

자부심이 없다면 거짓이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장기인 공간 마법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도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술식과 마법진을 녹여버린다면 그것보다 빠르게 다시 써버리면 된다.

황성에 숨어든 시간은 짧았으나 그 짧은 틈새에 쓰여진 술식은 방대했다.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녹일 수는 없다.
그러니 녹는 것보다 빠르게 재구성한다면 갈 수 있다.

파지지지직-

마나와 마나가 충돌한다. 그로 인해 튀어 오른 파동들은 집무실의 기물들을 박살낸다.

공간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열기가 그것을 녹인다. 술식이 덧붙여져 다시 재구성된다. 다시 녹인다.

마법은 파훼되나 마나는 남는다.

마법진을 그린 마나가, 그것을 녹인 마나가, 술식으로 덧붙여진 마나가, 다시 녹여버린 마나가 쌓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쿠구구구구-

집행자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아, 안···!”
“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집행자의 비명이 김우진의 코웃음에 묻혔다.

마법이 발동 되었다. 집행자를, 용사를, 황제를 그리고 소장을 삼켰다.

텅 비어버린 접객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접객실마저도.

“폐하, 전령이 왔습니다.”


“폐하?”
“폐하, 송구합니다만, 잠시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폐하!”

딸각-

“···어?”

한참 후, 황제의 반응이 없자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벽지, 장식품들. 그리고 황제와 용사 대신 그들을 반기는 것은 접객실 밖에 펼쳐진 정원이었다.

“···폐, 폐하!”
“폐하, 어디 계십니까!”

기사들이 망연자실, 무기를 떨어트렸다.

* * *
공간 자체가 전이되었다.

접객실이 통으로 옮겨진 곳은 대륙 북부의 외딴 설원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도가 마나 역류로 진탕된 속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대체 어떻게 내 마법에 간섭한 거냐!”


“나도 공간 마법에는 소질이 있거든. 이 정도는 껌이지.”
“···단순히 소질이 있다고 해서 그딴 게 가능할 줄 알아!”
“그런데 해버렸네.”
“···이 괴물 같은!”
“알면 주제 파악 좀 해. 귀찮게 하지 말고.”

콰직, 뒷목을 얻어 맞은 알도가 쓰러졌다.

여파에 휘말린 강민식은 이미 기절해 있었다.

김우진이 둘 모두의 목에 구속구를 채웠다.

“한 놈은 이빨에 독단, 다른 한 놈은 자살용 술식이라. 가지가지하는군.”

강민식의 이빨에 숨겨진 독단을 빼고 알도의 몸에 간섭해 자살을 위한 모든 술식들을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
육신이 상했지만 자업자득이다.

“너희 둘 다 곱게 죽지 못할 거다.”

강민식은 당연하고, 다섯 명의 집행자들 또한 모두를 죽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신을 가까이서 모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분명히 김우진에게 큰 힘이 될 거다.

훗날, 계약을 어겼다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지.

“···근데 이놈은 또 뭐야?”

김우진의 시선이 접견실 한쪽에서 기절 한 채 쓰러져 있는 인영에게 향했다.

화려한 복장을 보아하니 일단은 황제 같은데.

“쓰읍, 귀찮게 됐네.”

마나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통제하긴 했는데 황제까지 데리고 와버렸으니 모를 수가 없겠지?

김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 * *

“황제 폐하께서 납치 당하셨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황제가 사라졌다.
용사도, 접객실도 통째로 사라졌다.

그 소식은 빠르게 황궁을 뒤흔들 뻔 했다.

황후가 급히 틀어막지 않았다면 더 큰 혼란을 야기했을 거다.

그녀의 분노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평소에는 조용히 황제를 보필하지만 그녀가 한 번 화를 내기 시작하면 황제가 아니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그녀가 용사의 동료였기 때문이다.


긴 여정을 함께하며 사랑을 속삭인, 무력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황제를 앞선다고 알려진 강자이기 때문이다.

“접객실에서 용사를 응대하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송구합니다. 독대를 원하신다고 문 밖에서 대기하라는 폐하의 명에···.”
“백 번 양보해서 그랬다고 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것으로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묻겠습니다.
졸았습니까?”
“아닙니다.”
“허면 불의의 사고에 휘말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무능을 증명하는 꼴이군요.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접객실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 하나
감지하지 못하였으니!”
“···죽여주시옵소서.”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호위 기사들이 머리를 처박았다.

무능했다. 무능했기에 황제가 납치당하는 것도 몰랐다. 상대가 용사라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황제가 조용히 납치되는 수준이 아닌, 접객실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시점에서 더욱 더.

“그대들의 처분은 내가 아니라 폐하께서 직접 하실 겁니다.”

싸늘한 눈빛에 기사들이 몸을 떨었다. 그녀가 대신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의 소재는 파악했습니까?”


“현재 추적 중에 있습니다만···.”
“찾지 못하였다는 거군요.”
“···송구합니다.”
“이리도 무능해서야 어찌 폐하께서 그대들을 믿고 정사를 나누겠습니까! 건국 기념일에 폐하가 납치되었으니,
백성들에게 무어라 말할 참입니까!”

말할 수 없다. 황제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며 그것이 소수의 고위 대신만이 은밀히 소집된
이유였다.

“···용사가 납치해간 것은 확실합니까?”


“예. 용사가 폐하를 찾아왔고 접객실에서 직접 대면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던 도중, 사라지신 겁니다.”
“그러면 확실히 용사밖에 없겠습니다.”
무능하다고 폄하했으나 무려 황제의 호위 기사다.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이었고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면, 그걸 이루어낼 수 있는 자는 이 대륙에서 오직 한 명뿐이다.

문제는 용사가 왜 그랬느냐다.

황후 또한 용사의 동료였다. 그가 갑작스레 돌아올 이유도, 황제를 납치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안다.

조금 또라이긴 했으나 이 정도로 막 나가는 등신은 아니니.

‘무엇보다 용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공간을 통째로 이동시키는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존재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분명히 조력자가···.”

있을 거다. 그런데 용사는 혼자라고 했다. 황궁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전부 등신도 아니고 숨어드는 침입자 하나
눈치 채지 못했을까?

무언가 떨어진 건 그때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냥 툭, 떨어졌다.

“폐, 폐하!”
“폐하!”

황제였다.

갑작스레 대전을 구르는 황제에게는 의식이 없었으나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숨도 잘 쉬었다.

황후가 재빠르게 천장을 살피자 팔랑거리는 쪽지 하나가 뒤늦게 따라오고 있었다.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을 뿐, 납치는 아님. 기절한 건 나약해서임. 운동 좀 시켜.
우리 사이에 이런 건 넘어가자.
용사 강민식]

“······.”

이게 갑자기 돌아버렸나.

빠득, 황후가 이를 갈았다.

* * *

그리고 그날, 황궁의 파발이 제국 전역으로 내달렸다.

용사 강민식을 찾는다는 포고문이었다.

───────────────
# < 035. 시찰 >
“이겼어요! 말씀하신 대로 제 쓸모를 증명했어요.”

황제를 던져주고온 뒤, 지하수로의 입구로 돌아오자 율리아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진?”

깊은 상처를 입고 죽어버린 집행자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이었다.

“이걸로 찍었어요.”
“카메라?”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소장님 차원에서는 흔하다면서요?”
“강민식이 준 건가?”
“이걸로 연옥의 구석구석을 찍어달라면서 줬어요. 근데 다시 달라는 말은 안해서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탈옥에 협조했다고?”
“죄수들간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조금 호의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죠.”
“요약하자면 ‘탈옥을 도왔다.’가 되는데 그걸 소장한테 직접 말해?”

혹시 바본가?

“지나간 과거는 잊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요. 어차피 알고 계시고 지금은 저희가 손을


잡았잖아요?”

아하, 그냥 뻔뻔한거군.

사실 그녀의 말대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사진에 조금 더 집중했다.

집행자의 표정이나 상처로 보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나?’

집행자가 될 정도의 용사라면 모든 용사들을 줄 세워도 앞쪽에 있을 텐데 율리아에게는 작은 상처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괜찮은 거예요?”


“뭐가.”
“쪽지에 이름을 남기셨다면서요. 그건 너무 명확한 증거 아니에요?”
“상관없어.”

가장 좋은 건 강민식이 애초에 크라프트에 왔었다는 증거 자체를 남기지 않는 거다.

하지만 놈이 황궁으로 기어들어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황제를 건드리고 수많은 목격자가 생겨난 이상,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아예 방향을 바꿨다.

“강민식은 귀휴를 나온 거야. 나와서 옛 동료인 황제를 만나고 조금 이야기를 나눈 거지. 근데 황제가 나약해서
공간 이동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한 거지.”

그래, 그게 이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니 쪽지에 이름 남기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강민식의 이름을 남겨야 다른 곳으로 의심의 화살이
날아들 여지가 줄어든다.

제 3 의 인물이 존재하고 그게 김우진이라는 씨앗이 싹트면 더욱 곤란해지니까.

“그게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없어. 적어도 나한테는.”

어차피 김우진은 다시 연옥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크라프트에는 굳이 다시 올 일이 없겠지.

만약에, 아주 만약에 강민식이 다시 크라프트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건 그가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억울하다면, 애초에 탈옥을 안 했어야 했다.

“일단 여기서 볼 일은 다 끝났군.”

김우진이 다시금 거대하진 덕구의 등 위에 두 개의 짐짝을 실었다. 다이안의 침중한 눈빛으로 강민식을 흘겼다.

“용사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신이 모시는 분이 답해줄 겁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없군요.”
“···예.”
“덕분에 쉽게 강민식을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이안이 떠나갔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일단은.”
“아직 남았어요?”
“네가 할 일은 아니고.”

강민식을 잡는 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다.

놈이 있어야, 놈을 보여줘야지만 탈옥을 막지 못했다는 오욕을 벗을 수 있으니까.

“일단은 가자.”

이제 당면한 과제는 놈들의 방문이다.

강민식이 잡혔다는 것을, 다시 연옥으로 연행되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텐데 그대로 강행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만약 강행한다면 아직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

‘세계수.’

데르카인에게 맡겨놓고 왔지만 솔직히 2 주안에 관리자들을 속일만한 아티팩트를 만들라는 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계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세계수는 그에게는 아주 큰 힘이, 저들에게는 비수가 되어줄 테니.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상황부터 파악하고.’


쩌적-

공간이 갈라졌다. 차원의 입구가 열렸다.

균열은 두 명의 인간, 한 명의 하이엘프, 한 명의 집행자, 한 마리의 마수를 삼킨 뒤에 닫혔다.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설마 한 명을 더 잡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둘 다 독방에 넣어. 이놈도 죄수야.”

연옥의 정문, 김우진은 자신을 반기는 부소장에게 축 늘어진 집행자와 강민식을 내밀었다. 교도관들이 인계
받았다.

“집행자 아닙니까?”
“집행자가 뭐지?”
“용사죠.”
“힘을 포기했나?”
“아닙니다.”
“그럼 죄수지.”
“···아?”

기적의 논리에 부소장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많이 바뀌었군.”
“세계수는 의도하신 자리에 제대로 안착했습니다. 드워프들의 솜씨는 여전히 명불허전이고 말입니다.”

크라프트에서 보낸 시간은 대략 일주일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처음 예상한 2 주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하다.

예상보다 훨씬 짧은 여정이었기에 김우진은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허나 그 일주일의 시간 동안, 연옥은 꽤나 바뀌어 있었다. 연옥 전체를 휘감고 있던 세계수의 뿌리와 가지가
사라지고 부서진 부분들이 복구되었다.

적어도 외형만큼은 세계수를 심기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있다고 못하겠어.”


“내부도 3 층을 제외하면 깔끔합니다.”

하지만 3 층은 예외였다. 연옥의 시스템을 만든 건 관리자들이었고 그들의 도움이 아니면 부서진 시스템은 복구할
수 없으니까.

드워프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권능에 가까운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별개였다.


“3 층은 폐쇄시키고 여차하면 대청소 중이라고 둘러대.”
“통하겠습니까?”
“통하든 말든, 내가 안 보여주겠다는데 어쩔 거야.”

죄수들도 다 그대로 있고 3 층을 제외하면 어떠한 문제도 없으니 꼬투리 잡힐 것은 없다.

“기껏 해야 크라프트의 일을 문제 삼겠지.”

애초에 저들이 설계하여 실행한 판이다. 집행자까지 보낸 시점에서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강민식을 무사히 잡은 시점에서 모든 문제는 종식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있다고 한들, 없게 만들 수 있다.

“별 다른 일은?”
“없습니다. 저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두 번은 못합니다.”
“깨어나긴 했나?”
“예, 죄수들은 모두 깨어났습니다.”
“구속구는?”
“여분으로 일단 채워놨습니다만, 강민식은 어떻게 합니까?”
“처음 호송관들에게 인계 받았을 때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 다 채워.”

손과 발이 묶이고, 시야가 가려지고, 귀가 막히고, 입이 봉해진 다음에도 탈옥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건 강민식의 능력이 아니다. 관리자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지.

“세계수는 어때?”
“특이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드워프들의 요구에 엘프들이 합류했습니다.”
“엘프들의 마나 운용은 확실히 뛰어나지. 그런데 순순히 협조하던가?”
“예.”

부소장의 시선이 율리아에게 향했다. 김우진은 어떻게 된 내막인지 대충 이해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지.”


“저도!”

얌전히 있던 율리아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 보고 싶어요! 어머니 나무!”

간절한 눈빛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른다. 수고에는 대가가 따른다.

율리아는 강민식을 잡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고 스스로의 무력 또한 증명해냈다. 세계수를 조금 보게 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제는 하이엘프 좀 만난다고 릴리가 홀딱 넘어갈 것 같지도 않고.’

씨앗을 통한 간섭과 몇 달 동안 쌓아온 친근감으로 인해 그럴 시기는 지났다.


율리아가 반색했다. 그녀의 목에 친히 구속구를 채워주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상관없어요!”
“소장님, 세계수 쪽에 특이 사항이 하나···.”
“가서 확인해볼게.”

기절한 강민식과 집행자를 부소장에게 넘긴 후, 율리아와 함께 정원 북쪽으로 향했다.

“···담장 같네요?”

세계수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는 거대한 담장이 있었다. 고개를 90 도 각도로 올려다봐야 하는, 딱 적당히 자란
세계수 정도의 높이의.

보다 가까이 다가가자 땅땅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자잘한 마나의 파동들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담장의 겉에는 온갖 술식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채워지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망치와 정을 들고 각인을 새기고 엘프들이 마나 회로를 덧붙여 활성화시킨다.

“···구속구까지 풀고 있네요?”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저도 아티팩트 만들래요.”
“방금까지 풀어줬잖아?”
“지금은 다시 착용하고 있잖아요. 모르시나본데 이게 얼마나 성가시고 불편하지 아세요?”
“알아야 하나?”
“이익···!”
“왔구나, 소장.”

둘의 말다툼을 들었는지 외곽 쪽의 술식을 보조하던 시에나가 다가왔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언제부터 합류했습니까?”


“드워프들이 만들기 시작한 날이니까 나흘 정도 됐구나.”
“성과는 있는 겁니까?”
“네가 요구한 게 어머니 나무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추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일단 설계도대로 완성만 된다면 완벽할 것 같구나.”

데르카인이 설계를 비롯해 제작을 총괄했다면, 시에나는 마나를 다루는 쪽을 총괄했다.

그녀는 벽면 전체에 새겨진 술식들을 파악했고, 확인했다. 그리고 그 효웅이 확실히 뛰어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어린 세계수를 감추기에는 확실하다는 거군요. 어린의 범주가 어디까지 입니까?”
“천 년이요.”

율리아가 대답했다.

“보통 천 년이 넘어가면 성체로 여겨요.”


“그럼 릴리는 몇 년이라고 봐야 하지?”
“음, 한 500 년 쯤?”
“영약 조금 먹였다고 500 년을 단축시켰다고?”
“영약 조금이 아니죠. 그리고 단순히 그것뿐이라기에는 무언가 더 있고요.”
“뭐지?”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짐작할 뿐이죠. 소장님의 간섭이 무언가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흐음.”

씨앗에 간섭하기 위해 막대한 마나와 권능을 퍼붓기는 했다. 그게 이렇게 영향을 준 걸까.

어쨌든 악영향은 아니니 나쁘지 않았다.

“완성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아니라 저 드워프한테 물어봐야지. 그리고 문제가 또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문제요?”
“직접 가봐.”

그때였다.

삐이이이이!

자그마한 파랑이 하나가 김우진의 품속으로 다이빙했다.

퍽, 제법 묵직한 느낌과 함께 릴리의 성난 울부짖음이 들렸다.

삐이이!
삐! 삐삐!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소리들에 김우진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릴리, 오랜만이야. 잘 있었···화가 난다고?”

삐삐삐!

“저것들이 짜증난다고?”

릴리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삐이이이이! 삐이이!

하지만 이건 모르겠다. 너무 열이 받아 말이 헛 나오는 것 같았다.

“난쟁이랑 귀쟁이가 자기를 감옥에 가두려고 한데요. 아니, 잠깐만. ···난쟁이랑 귀쟁이요? 아니, 어머니
나무님. 그런 못된 말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삐이이이이!

“귀쟁이 대장이라뇨! 일주일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입이 왜 이렇게 험해지셨어요?”

삐삐!
“자유 만세? 갑자기 무슨 자유에요?”
“···살다보니 이런 장면도 다 보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말다툼이라니.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왜 저런 겁니까?”
“데르카인한테 가면 다 알 수 있을 거야.”

김우진이 망치와 정으로 벽면에 마법진과 술식을 새기는 데르카인에게 다가갔다.

“···왔나?”

데르카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떻게, 일주일 안에 되겠습니까?”


“엘프들 덕분에 가능은 할 것 같네.”

일반적인 엘프와 드워프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차원의 최강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일찍 온 걸 보면 뜻하는 바를 이룬 모양이군.”


“기절시킨 채 감옥에 넣어놨습니다.”
“다행이군.”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하지만 자네가 요구한 사항 중에 미적 요소는 없었네.”


“상관없습니다. 디자인보다는 성능이 중요하니까요.”
“말이 통하는군. 엘프들은 내게 미적 감각이 없다고 난리를 치던데.”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면 고려할만 하지만 당장은 아닙니다.”
“내 말이 그 말이네.”
“그런데 릴리는 왜 저런 겁니까?”
“이걸 보면 알 걸세.”

데르카인이 품속에서 설계도를 꺼냈다.

“조심해서 보게. 저 망할 나무 정령한테 들키면 찢기니까.”


“망할 나무 정령?”

설계도를 훑은 김우진은 곧 그 의미를 파악했다.

“이 울타리가 전부가 아니군요. 새장?”


“나무도, 정령도 모두 본체네. 완벽하게 감추려면 둘 다 숨겨야지. 나무 정령이 발광하는 이유네.”

아, 그래서 자유 만세를 외친 거였나. 왜 잠깐 못본 사이에 릴리가 험악해졌는지 알겠다.

“괜찮겠나? 만들긴 하겠다만 나는 나무 정령을 새장에 가둘 수 없네.”


“걱정마세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기껏 쌓아놓은 호감이 뚝뚝 떨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편의를 봐주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데르카인님은 그저 일주일 안에 완성만 해주시면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말씀해주세요.”
“그러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소장님.”

평화로운 오후. 부소장이 김우진에게 전서 하나를 전달했다.

슥, 훑어본 김우진이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무슨 내용입니까?”
“예상한 그대로의 내용.”
“그 말씀은···.”
“내일 잘 나신 관리자께서 한 분 감옥을 시찰하러 오신다네.”

올 게 왔다.

───────────────
# < 036. 이 달러 >

김우진이 군대에 있을 때, 군단장이 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군단장에게 지저분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대대장은, 모든 병사와 간부들을 동원해 부대 전체를 청소했다.

생활관 내부부터 외부까지. 바닥을 닦고, 꽃을 심고 잔디를 깎고, 차가 들어오는 도로에 낙엽하나 없을 정도로
쓸고 또 쓸었다.

하지만 정작 군단장은 헬기를 타고 연병장에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버렸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하나다.

한 집단의 관리자가 되면 아무리 쓸데 없는 짓이라도 부하직원들을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다는 것.

김우진은 관리자의 신분이 되었고 부려먹을 교도관들과 죄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자칭 신이라 칭하는 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애쓰는 1 초도 아깝다. 그들은 대접받을 자격이 없다.

“누가 올 것 같아?”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발톱을 드러낼 자는 한 명 뿐입니다.”
“그래, 그렇지.”

관리자는 하나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차원을 홀로 관리할 능력이 없다.

허나 많지도 않다. 딱 백 명, 흔히들 백신전이라고 한다.

“내일이니까 오늘은 개인면담을 하자.”


겸사 겸사다. 탈옥 사태로 인해 꽤 오랫동안 면담을 못했기도 하고, 관리자가 오기 전에 죄수들을 한 번
단도리하는 역할도 할 거다.

“전원을 오늘 하루만에 보시겠다는 겁니까?”


“두 명은 못하겠지. 기절해 있으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소장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관이 죄수를 데리고 왔다.

찬란한 은빛의 머리카락과 황금의 눈동자를 가진 짐승, 타르칸 톨리스가 그 첫 번째였다.

“······.”

이전과 같은 당당함이 사라진 타르칸은 얌전히 김우진의 앞에 앉았다.

“탈옥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무엇이?”
“오만하여 소장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 차원을 뒤져보아도 수인만큼 철저하게 힘의 논리를 따르는 종족은 없다.

그들은 강함을 숭상하며, 보다 강한 힘 앞에 굴종하고 복종한다.

연옥의 수인들에게 김우진은 압도적인 강자였다. 타르칸은 수인들을 대표해 김우진의 수족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완벽한 굴종이라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가고도 싶었고, 이곳에 저희를 가둔 소장님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너희를 가둔 건 내가 아니다만.”
“하지만 언제나 곁에서 저희를 관리하는 것은 소장님이잖습니까.”
“그래서?”
“물론 소장님이 강한 것은 압니다. 저 혼자서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구속구가 풀린다면, 함께라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짐승은 무리 사냥을 한다. 짐승들을 이끄는 타르칸 톨리스는 김우진의 강함을 알고 있었으나 그 명확한 한계를
몰랐다.

혼자라면 무리라고 할지라도, 온전한 상태에서 함께라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미약하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희망이 있기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가두고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분노 어느 정도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란 것처럼 느껴지는군.”
“직접 몸으로 체득한 것마저 인정하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습니다.”

타르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아주 작은 가능성마저 완전히 차단당한, 절대적인 힘 앞에 더 이상의 희망을 보지 못한 짐승은 완전히 굴복했다.

“말로 만?”
“기회가 된다면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런다고 연옥에서 나가지는 못해.”
“그것이 소장님의 뜻이라면.”
“힘을 포기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건.”

하지만 이 부분에서 타르칸은 멈칫했다.

힘 앞에 굴복했기에 따라야 하나 스스로의 힘을 버린다는 것은 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힘을 숭상하기에 강자를 따르지만 힘을 빼앗기는 것은 가장 최악으로 여기는 종족.

김우진이 픽 웃었다. 애초에 그렇게 쉽게 수인들을 내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진즉에 50 명을 채우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겠지.

“수인들 잘 관리해.”
“예.”
“한 번만 더 이따위 짓거리를 벌이면 네가 어떻게 될 지는 기대해도 좋아.”
“꿈에서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가봐.”
“예!”

타르칸이 나갔다. 타르칸이 저런다면 다른 수인들도 마찬가지일 터. 15 마리의 충견이라. 큰 혼란을 겪고 얻은


보상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이후, 14 명의 수인들이 들어왔으나 모두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시에나가 들어왔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니?”


“뭡니까?”
“데르카인이 그러더구나. 네가 신들의 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맞다면 세계수를 숨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저는 제가 한 번도 신들의 개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만.”
“아니라고 한 적도 없지.”
“대답해야 됩니까?”
“충분히 대답이 되었단다.”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에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개인면담 시간에 묻는 질문입니다만, 출소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세계수가 있는데 엘프가 어딜 가겠니.”
“···세계수.”

톡톡,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그러고 보니 세계수의 씨앗을 심었을 때부터 계획했던 계획이 하나 있었다.

세계수의 입을 통해 엘프들의 출소를 강요하는 것. 엘프들과 세계수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애매해졌다. 율리아와 협조하기로 하고 엘프들이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인 시점에서 당장
내보내는 것보다 이용하는 것이 더 효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좀 두고 볼 필요가 있겠어.’

적어도 짧게 생각하고 바로 결정지을 문제는 아니었다.

“아티팩트는 완성됐습니까?”
“그건 나보다 다음에 상담할 죄수한테 묻는 게 더 확실하지 않겠니?”
“그것도 그렇네요.”
“추노는 어땠니?”
“노예가 아니라 죄수인데요?”
“뜻만 이해했으면 됐지.”

별 의미 없는 잡담이 짧게 이어진 뒤, 그녀가 나갔다. 이어 들어온 건 데르카인이었다.

“내일입니다.”
“내일 바로 온다던가?”
“이런 면에서는 또 칼 같은 면이 있어서 말입니다.”
“자네도 참 귀찮겠군.”
“아티팩트는 완성 됐습니까?”
“하늘구름이네.”
“하늘구름은 완성 됐습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완성되지는 않았네. 하지만 오늘 안에 완성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네.”
“믿고 있었습니다. 역시 최고의 장인답습니다.”

김우진이 반색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네.”


“릴리입니까?”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들어갈 생각을 하지를 않더군.”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가능한 건가? 억압적으로 한다고 들어먹을 나무는 아닌데?”
“어떻게든 해봐야죠.”
“이 악물고 세계수를 숨기려는 걸 보니 원만한 협조 관계가 아닌 건 확실하군.”
“언제까지 확인해보실 참입니까?”
“자네가 제대로 말해줄 때까지.”
“어차피 곧 나갈 양반이 무슨.”
“아, 그거 말이네.”

데르카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혹시 출소, 번복해도 되나?”
“······.”

* * *

모든 개인면담이 끝났다.

그리 어려울 것도, 딱히 문제도 없었다.

타르칸이 굴복한 시점에서 수인들이, 율리아와 시에나, 데르카인이 협조적인 시점에서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똑같이 변했기 때문이다.

남은 건 기껏해야 다크엘프와 거인족이었으나 오히려 그들은 더욱 긍정적이었다.

그들은 김우진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전례가 있었고 격의 차이는 본능에 각인 되었다.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발전하여 더 이상의 희망을 벗어 던지게 만들었다.

“출소하겠습니다.”

다크엘프 용사가 용사의 힘을 포기했다.

“···거부합니다.”

거인족은 아니었으나 반쯤 꺾인 의지가 여실히 엿보였다. 때문에 김우진은 기분이 좋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한 번 지랄을 하고 나니 그에 합당한 보상들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 릴리.”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인다.

높게 솟아난 가지 위에 엉덩이를 붙인다. 파랑새 한 마리가 무릎에 앉아 머리를 들이민다.

김우진은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릴리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내일 하루만 하늘구름에 들어가면 더 좋을 것 같아.”

- ···삐이!

릴리의 눈매가 굳어졌다.

“내일 하루만이야. 릴리. 딱 하루.”


- 삐삐!

“네가 들어가지 않으면 내가 꽤나 곤란해져. 나뿐만이 아니라 너도.”

- 삐삐삐! 삐이이이이!

“···이건 아직 모르겠는데.”
“새장은 더 없이 불쾌한 곳이라고 하시네요. 자신을 억압하고 제약해서 숨이 막힌데요.”

통역사로 끌려온 율리아가 밑에서 중얼거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힘을 가린다는 건 단순히 가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아무런 조치도 없이 세계수라는 나무를 완벽하게 가릴
수는 없다.

당연히 힘 자체를 억압하고 약화시키는 작업 또한 들어간다. 하늘구름은 내부의 기운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도록
차단함과 동시에 내부의 존재를 억압하는 역할도 함께 한다.

그게 불쾌하고 편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좋아, 릴리.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 삐?

“이 달러, 아니 두 개.”

김우진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약. 두 개를 주겠다는 거야.”

그제야 알아들은 릴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때?”

큰 출혈이지만 무작정 억압하여 기껏 쌓아올린 호감을 전부 깎아내릴 바에, 영약을 쥐어주는 게 나았다.

- 삐삐!

“알겠다고 하시네요.”
“굳이 해석해주지 않아도 알아. 그런데 이걸 바로 수락해?”
“그러게요. 대체 어머니 나무께서 왜 이렇게 속물이 되셨는지. 이건 전부 소장님의 영향이 아닐까요?”
“소장 비하, 벌점 1 만점. 2 징벌방 하루.”
“···씨앗에 간섭하셨잖아요. 가장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건데요.”
“사실적시 명예훼손. 벌점 1 만점 추가.”
“그건 대체 뭔데요!”

빽, 소리치는 율리아를 무시했다.

손을 내밀자 릴리의 날개가 그것을 붙잡았다.


“악수도 알고,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하지?”
“다른 어머니 나무를 닮았겠죠.”
“너 자꾸 태클 건다?”
“근데 괜찮은 거예요?”
“뭐가.”
“아니,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이런 저런 소란 때문에 영약 수량이 되게 적잖아요. 그런데 어머니 나무께 두 개나
줘버리면···.”
“네가 걱정할 건 아니야.”

영약의 납품은 분기에 열 개다. 허나, 아무리 용사들이 길러낸다고 해도 영초는 쉽고 빠르게 자라나는 식물이
아니다.

당연히 모으기가 힘들고 납품 수량을 못 맞출 때도 있다. 때문에 잉여분을 모두 비축해 놓아야 하는 건데


세계수를 심으면서 모두 탕진해버렸다.

“한 달 안에 나올 영약이 몇 개야?”
“하나요. 그 이상은 절대 안 나와요.”
“네가 하이엘프인데?”
“하이엘프라고 만능은 아니거든요?”
“그럼 부족한 게···.”
“어머니 나무한테 두 개를 드리면 세 개죠.”
“그럼 어차피 하나가 모자라잖아.”
“그렇다고 더 부족하게 해요?”
“지구에는 이런 말이 있어.”
“뭔데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대책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시네요.”
“급한 불을 끄는 게 먼저란 소리야.”

영약은 기한이 남았고 관리자가 오는 건 내일이니.

어쨌든, 내일을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김우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실패.

어째서 실패했을까.

마나가 제한되고, 시야가 가려지고, 손과 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려진다.

다시 돌아온 감옥. 강민식은 과정을 곱씹었다.

그를 연옥으로 보낸 신은 말했다.

‘탈옥은 쉽지 않겠지만 내 권능이 너를 도와줄 것이다.’


‘탈옥만 한다면 모든 게 끝이다.’
‘너는 다른 용사들처럼 아무 것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탈옥은 쉽지 않았다. 허나, 신의 권능은 큰 도움이 되었고 탈옥에 성공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모든 게 끝난다는 신의 말과는 달리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소장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구나. 2 주 만 버티렴. 그럼 약속했던 모든 게 이루어질 테니.’

짧은 전언을 끝으로 망망대해에 내쳐졌다.

김우진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2 주를 버티라는 건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였다. 아무리 차원을 넘어 도망쳤다고


해도, 아무리 그가 용사라고 해도 김우진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름의 배려라고 신은 다섯 명의 집행자를 보내주기는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불안감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김우진은 기어코 그를 찾아냈고 집행자들은 모조리 쓰러졌다. 그리고 강민식은 다시 연행되어 연옥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이라면.
‘전지전능한 신’이면.

당연히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안배해야하는 것 아닌가?


아니, 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째서 신은 김우진의 행보를 눈치 채지 못했는가.


어째서 돌발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김우진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행태를 보이는가.

정말 ‘신’인가?

“···관리자.”

김우진이 신을 어떻게 부르는지 떠올렸다.

과연 그들은 다시 연옥에 갇힌 강민식이 다시 한 번 나갈 수 있게 도와줄까?

아니면 그냥 버려버릴까.

강민식이 이를 갈았다.

───────────────
# < 037. 제안 >

교차 차원에서도 태양은 떠오른다.

따스한 햇빛이 새벽녘의 찬 공기를 덥힌다. 빛을 발하며 어둠을 밀어낸다.

날이 밝았다. 김우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든 채, 마지막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하늘구름은 완성 되었다. 세계수의 나무는 완전히 가려졌고 영약을 세 개나 쥐어준 릴리 또한 새장으로 들어갔다.

연옥에서 세계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계수의 지척까지 가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옥의 건물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능이다.

“죄수들은?”
“모두 얌전히 독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집행자는?”
“말씀하신대로 폐쇄한 3 층의 멀쩡한 독방에 가둬 놓았습니다.”
“강민식은 어떻게 하고 있지?”
“얌전합니다. 사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말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시야와 청각을 막고, 움직임을 봉쇄한 뒤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1 징벌방에 집어넣었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몇 시야?”
“8 시 51 분입니다.”

9 분 남았나.

“좋아.”

김우진이 모자를 썼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관리자는 9 시 정각에 오겠다고 전언을 남겼다. 시간은 칼 같이 지키는 놈이니 정확히 올 거다.

“가자.”

1 층 로비로 내려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은 차분히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폈다.

탈옥 사건으로 난장판이 되었던 벽면과 바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했다. 억지를 부리지 않는 이상, 꼬투리
잡힐 건 없다.

“긴장할 것 없다.”

김우진이 긴장한 교도관들을 다독였다.

“관리자가 직접 연옥을 찾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너무 과민반응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놈이 무슨 지랄을


하든 그걸 받아내는 건 나니까.”
“예!”
교도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1 분이 남았다.

“각자 위치로.”
“위치로!”

정문을 중심으로 교도관들이 양 옆으로 섰다. 그 끝에 김우진이 자리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은 상부이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한다. 김우진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정확히 50 초 후, 문이 열렸다.

끼익-

열 명의 집행자들이 먼저였다. 그들은 자연스레 들어와 교도관들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은은한 푸른 빛 머리카락, 보석과도 같은 황금빛 눈, 새하얀 피부와 조각 같은 얼굴과 비율.

온갖 미사여구가 붙여지지만 김우진은 간단하게 놈을 평했다.

기생오라비 같은 놈.

언제고 저 얼굴을 뭉개버리고 말 거다.

발걸음은 김우진의 앞에서 멈췄다.

“오랜만에 보는군, 연옥의 소장 김우진.”


“그러네, 베른 오르티안.”

베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건방지군. 나는 상급자로서 그대의 감옥을 시찰하러 온 것이다.”


“관리자가 소장의 상급자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는데. 백신전이 상부일 뿐이지.”
“말장난을 하는군. 뭐, 좋다. 하찮은 피조물들이 하는 짓거리가 항상 그렇지. 다만, 이번에도 그게 끝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군.”

베른이 김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우선 그동안의 연옥 관리에 대한 보고를 듣고 싶은데.”


“집무실로 가지.”

김우진이 베른을 이끌고 집무실로 향했다. 두 명의 집행자들만이 베른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로 가는 내내, 그는 복도 곳곳을 살폈다.

“그래봤자 문제없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다.”

아무리 그래도 용사였던 드워프들의 솜씨가 워낙 귀신같아서 진짜 없다.


“졸개들은 들어오지 마.”
“밖에서 대기하도록.”

곧 집무실에 도착했다. 베른이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에 앉았다. 김우진은 픽 웃으며 그 앞에 자리했다.

“어떻게, 커피라도 줄까?”


“그딴 구정물을 들이밀지 마라. 누가 하찮은 피조물 아니랄까봐 입맛도 거지같군.”
“명색이 신이라는 네 주둥이는 걸레를 문 것 같고.”
“언제고 네 건방짐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다.”

김우진이 베른을 무시했다. 짝, 가볍게 박수를 치자 교도관들이 커피와 서류더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지난 11 년간의 운영 보고서다.”


“왜 11 년이지? 나머지 9 년은?”
“그건 다른 놈이 와서 그때 보고 갔으니까 그놈한테 물어보고.”
“나는 네가 소장으로 부임한 20 년 치, 모두를 볼 권리가 있다. 가져와.”

눈이 마주쳤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연옥의 감찰관으로서 나는 분명히 가져오라고 말했다.”

황금빛 동공에 서기가 일렁인다.

톡톡,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가져와.”


“세 번.”

김우진이 손가락을 폈다.

“세 번 말했어, 너.”
“가져와.”
“그래, 그렇게까지 보고 싶다면 봐야지.”

김우진이 교도관을 불렀다. 잠시 후, 또 다른 서류더미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근데 지구에는 그런 말이 있어.”


“딱히 궁금하지 않군.”
“너무 센 척 하지 마. 더 없어 보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네놈의 위세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지?”

베른이 미간을 찌푸리며 보고서의 첫 장을 넘겼다.

째깍, 째깍 집무실 한 켠에 놓인 시계의 소리만이 고요한 집무실의 침묵을 깨트렸다.

김우진은 팔짱을 끼고 베른을 지켜보았다.

“의문점이 꽤 많군.”
관리자의 정독은 인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대략 30 분. 방대한 보고서를 모두 읽어 내린 베른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정확히 27 일 전,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냥 평범한 하루였는데.”
“그날은 연옥의 차원의 장벽이 요동친 날이다. 그런데 평범? 심지어 보고서에는 그것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의도적으로 은폐한 것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차원의 장벽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특별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실수로 장벽을 조금 건드렸을 뿐이야. 그런 것까지 적을 필요는 없잖아?”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오면서 장벽을 확인해봤을 텐데 서로 피곤하게 이러지 말지.”

세계수는 장벽과 차원에 개입할 수 있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는 릴리에게 부탁해
장벽에 닿아있던 마나를 모두 거둔 상태였다.

베른이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냈으나 표면으로 드러난 문제는 없었다.

“17 일 전에는 차원의 장벽이 열렸다.”


“죄수 하나가 고향을 너무 그리워하다 향수병에 걸렸다. 그래서 귀휴 보냈고. 너희들도 죄수가 죽는 건 바라지
않잖아?”
“강민식의 고향이 크라프트는 아닐 텐데.”

베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2 의 고향이지. 수십년을 있었으니.”


“강민식은 크라프트에서 황제를 납치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황제랑 원한이라도 있었나 보지.”
“황제를 납치한 수단은 공간전이. 강민식에게는 공간 계열의 능력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도 용사였는데 동료가 한둘이었겠어?”
“그 이후에 장벽은 두 번 더 열렸다. 귀휴라면 한 번으로 족할 텐데?”
“혼자서는 못 돌아오니 직접 데리고 온 거지.”
“고작 귀휴를 나간 죄수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네놈이 직접 말이지.”
“그래.”
“···적어도 보고서 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군.”

쫘악, 베른이 서류를 찢어버렸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가고.”


“그거 꽤나 공들여서 쓴 건데.”
“강민식이 탈옥이 아니라 귀휴였다면 지금 당연히 연옥에 있겠지?”
“당연한 소리를.”
“죄수들의 상태를 확인하겠다.”

베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데르카인이 조심스레 배급구를 열었다.

막혔던 소음들이 멀리서부터 들려온다.

“왔군.”

마침내 관리자가 왔다. 데르카인이 어제의 면담을 떠올렸다.

‘나가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어쩔 수 없이 나간다고 했지. 나가고 싶다고는 한 적 없네.’
‘안 나가면 징벌방에 들어가셔야 할 텐데요.’
‘내가 도움이 될 거네. 이번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나?’
‘왜 이렇게 협조적으로 변했습니까?’
‘나는 늙었네.’
‘그 말은 지난번에도 했습니다.’
‘용사로서 너무 오래 살았어. 고향으로 돌아가봐야 내 가족들이 날 알아볼까? 내가 아는 가족들이 살아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가 연옥에 갇힌 시간만 300 년이 넘었다.

일반적인 드워프가 태어나고 일생을 마감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의 가족들은 이미 모두 죽었을 거다. 자식의 자식 정도가 남아 있겠지만 만나보지도 못한 손주와 증손주에 대한


애착은 그다지 없다.

‘솔직히 말하겠네. 내게 남은 건 복수심이네.’

잃어버린 300 년은 데르카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모든 것을 잃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증오와 독기뿐이었다.

요구대로 세상을 구했음에도 원수로 갚은 신들에 대한 분노.

‘그건 데르카인님의 선택이 아닙니까. 나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가둬놓고 강요하는 게? 가둔 신들의 잘못이지, 그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은 내 잘못은 아니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습니까?’
‘변했으니까. 세계수가 발아하고 난 뒤 자네도, 상황도. 자신하네. 나는 도움이 될 거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죠.’

김우진은 확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뒤로 미루고 고민한다는 것만으로도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신.”

아니, 관리자.

데르카인이 직접 본 관리자는 오직 한 명이다. 스스로를 발로스라고 하던 자.

그는 데르카인에게 용사 제안을 했으며 집행자 제안까지 했다. 그리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데르카인을
연옥에 처박은 당사자였다.
처음에는 그 신이기에 유일한 존재인 줄 알았다.

허나, 여기서 알았다.

관리자는 무수히 많다는 것을.

“백신전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증거다.”

전능하고 전지하다면 여럿이 있을 필요가 무엇인가. 소장의 말이 맞다. 그들은 신이 아닌 관리자다.

그저 이 우주를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분에 넘치는 힘과 권능을 얻었고 그것을 이용해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 개새끼들이다.

“다른 관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 한 번 보고 싶군.”

훗날 다시 마주쳤을 때, 잊지 않고 면상을 뭉개버리기 위해서.


다른 관리자는 어떤지 궁금해서.

데르카인은 관리자가 부디 4 층으로 올라와주기를 바랐다.

* * *

“신···.”

율리아가 초조하게 손톱을 물었다.

용사가 되는 과정에서, 세계를 구하고 난 뒤에 당연히 신을 보았다.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용사로서가 아닌 죄수로서 신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대답해 줄리는 없겠지만 신은 과연 죄수가 된 용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왜 용사들을 가두는지
궁금했다.

소장과 신들의 관계가 명확히 어떠한지, 그리고 연옥에 보다 본질적인 목적이 없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놈이 연옥의 소장이라고? 그놈들한테 죽은 게 아니라?’


‘목숨을 구걸한 건가? 그럴만한 인간은 아닌데.’

김우진이 어떻게 연옥의 소장이 되었는지도.

“설마 나에 대해 다 말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의 모습은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신뢰는 없었다.

아마 김우진도 그녀를 완전히 믿지는 않을 거다.

만약 김우진이 마음을 바꿔 율리아와 알베니우스에 대해서 관리자에게 고한다면···


“···에이, 설마.”

율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손톱을 물어뜯는 입놀림은 더욱 격해졌다.

“믿자.”

김우진을 믿는 알베니우스를.
그리고 세계수를 숨긴 김우진의 행동을.
자신의 요구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김우진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끼익-

감옥의 문이 열렸다.

의문도 잠시.

“너로군. 연옥의 하이엘프가.”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났다.

“자비로운 내가, 너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하지만 율리아는 상대가 누군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집행자가 될 생각이 있느냐?”

신이다.

───────────────
# < 038. 물어뜯기 >

강민식이 붙잡혔다.

작전이 실패했다.

“역시 무능한 피조물은 어쩔 수가 없군.”

그 시점에서 모든 게 틀어졌다. 김우진은 완벽하게 진실을 숨길 것이고 그들은 깊게 파고들 수 없다.

어떻게 진실을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집행자의 파견을 말해야 한다. 강민식의 탈옥에 관여했음을 밝혀야 한다.

그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오히려 김우진을 이롭게 하는 행위. 때문에 모든 관리자들은 이번 일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아무 것도 얻을 건 없다고 판단했다. 당연히 감찰에도 의미는 없었다. 김우진이라는 짜증나면서도 하찮은


피조물을 봐야한다는 불이익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베른 오르티안은 모두가 포기한 감찰관의 자리를 자원했다.

일부 용사들은 죄수로서 연옥에 썩기 아까워서.


그리고 그 어떤 신보다 김우진의 몰락을 바라기에 만에 하나 아주 작은 건덕지라도 건질 수 있을까 하고.

쫘악-

보고서를 찢었다.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 알고 왔음에도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깔끔하기 그지없다. 문제가 없다.

딱히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김우진이라면 당연히 이럴 것이라고 예상 했기에.

“안내해라.”

김우진은 그를 4 층으로 안내했다.

“죄수들이 갇혀 있는 건 3 층으로 알고 있다.”


“리모델링 중. 전원 4 층으로 옮겼어. 보고서에도 써 있고.”
“그걸 어떻게 믿지?”
“확인해 봐. 원한다면 얼마든지.”

확실히, 교도관들 몇몇이 돌아다니며 뚱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무언가 구린 냄새가 났다.

감이었으나 무시했다. 김우진은 그렇게 쉽게 단서를 내어줄 멍청이가 아니었다. 진짜 리모델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완벽하게 위장해 놓았거나.

어쨌든 괜히 꼬투리를 잡아 김우진에게 건수를 내어주는 건 좋지 않다.

“가지.”

4 층까지 올라가는 내부는 깨끗했다. 탈옥사태가 있었다면 분명히 여파가 있었을 터인데. 아니, 있다고 들었는데.

‘드워프들의 솜씨겠군.’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깔끔하게 복구할 수 있는 건 드워프들 뿐이다. 하지만 신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이용했느냐다.

예전부터 의문인 것들은 많았다.

특히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른 죄수들의 출소 간격.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하고 20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출소한 죄수가 무려 여섯이다.

무난하게 오랜 세월 김우진을 제약할 수 있을 거라 여기던 신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된, 직접적으로 조치를 취하게
만든 계기였다.

그 첫 시도가 허무하게 끝났지만 시작일 뿐이다. 신들은 위대하고 결국 김우진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문을 열어라.”
마침내 4 층에 당도했다.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중앙이 텅 빈 갈림길의 형태다.

양 옆의 복도를 따라 독방의 문들이 쭉 보였다.

“문을?”
“죄수들 개개인의 상태를 확인해 보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하겠다고 했다.”
“난 널 걱정해주는 거야. 연옥의 죄수들은 좀 거칠거든. 알다시피 신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같잖은 소리를 하는군.”

베른이 코웃음쳤다.

“네놈의 더러운 주둥이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 깨끗해진 모양이구나. 나는 신이다. 하찮은 피조물들 따위가
아무리 모여 봐야 내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열어.”

교도관들이 시스템을 조작했다. 철컥, 끼익. 독방의 문들이 일제히 열렸다.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죄수들은 그 누구도 갑자기 열려버린 문에 섣불리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베른이 그 사이를 걸었다. 성큼 성큼, 열린 방들을 흘기며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는 곧 한 독방 앞에 멈춰 섰다.

“너로군.”

넓은 독방의 침대에 앉아 멍하니 문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빛의 머리칼, 백옥 같은 피부,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눈. 죄수복을 입었음에도 그녀의
아성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다.

“연옥의 하이엘프가.”

우주가 빚어낸 하나의 작품과도 같은 종족. 하이엘프, 율리아 카르센.

이따위 감옥에 처박아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다.

베른이 굳이 의미 없는 감찰관을 자처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보필할 우수한 인재에 목말라 있기에.

“자비로운 내가.”

불안한 동공이 그를 올려다 본다.

죄수복과 비교적 초췌해진 얼굴은 그녀가 연옥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려준다.

당연하다. 연옥은 용사들의 의지를 꺾는 곳. 용사로서 인류의 떠받듬을 받던 자가 한 순간에 죄수가 되었으니
마음고생이 없을 리가 없다.
“너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베른이 노리는 것이 그 부분이었다.

하찮은 피조물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을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은 더 없이 실감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시금 동아줄이 내려온다면.

“집행자가 될 생각이 있느냐?”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 카르센, 고귀한 하이엘프이나 지금은 한낱 날개가 꺾인 죄수인 그녀가 잡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다.

“···아뇨.”
“···뭐라고?”
“여기 가둬 놓고 선심 쓰듯이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양심이 터진 것 아닌가요?”
“······!”

그렇기에 이런 경우는 조금도 예상해 본적이 없었다.

* * *

“그게 네 목적이었군. 죄수를 집행자로 만들어서 써먹으려고.”


“이런 곳에 처박혀 있기에는 조금 아까웠을 뿐이다.”
“그러면 그것도 출소로 되나?”
“만약 집행자가 된다면 그건 네 공과는 상관없다.”

베른은 김우진의 조롱을 애써 무시했다.

여전히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왜, 거부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썩어빠진 감옥보다는 집행자로서, 위대한 자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백 배, 천 배 나을 터인데.

“신 체면이 구겨져서 어떡해?”


“아둔한 피조물이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설마 김우진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럴 리는 없다. 지고한 신을 눈앞에 두고 고작 감옥의 소장 따위가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어대지는 않을 거다.

그냥 너무 성급했을 뿐이다. 조금 더 차분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베른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냈다.

“집무실을 비워라.”
“갑자기?”
“감옥의 관리를 확인하기 위해 온 감찰관으로서 죄수들의 상태 또한 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신경질적으로 읊조리며 집무실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러니 내가 명령하면 잠자코 따라라. 토 달지 말고.”

김우진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집무실에 자리했다. 마나를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특별히 수상해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죄수들과 독대를 나누기에는 더 없이 적합한 곳이다.

“한 명씩 모든 죄수들을 들여보내라.”

집무실 안에서의 외침에 부소장이 물었다. 집행자 둘이 호위 기사처럼 문을 지키고 섰다.

“어떻게 합니까?”
“원하는 대로 해줘.”

솔직히 말하면 김우진도 궁금하긴 했다.

율리아야 당연히 거부하겠지만 다른 죄수들도 과연 그럴까?

거인에게, 다크엘프에게, 수인들에게 베른의 제안이 좋은 기회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타르칸 톨리스.’

힘을 숭상하는 자들의 정상. 김우진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으나 신은 누가 봐도 그 이상이었다.

타르칸이 신 앞에 자신의 충성을 번복할지, 흥미가 돋았다.

* * *

“죄수번호, 1100 번. 타르칸 톨리스.”

베른이 은빛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이엘프가 최우선 목표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오직 그녀만을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연옥은 오랜 세월 수많은 죄수들을 수용해왔고 그 중에 집행자가 되어도 부족하지 않은 능력자들이 몇 있었다.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


차원의 명장, 데르카인 알베트.

하이엘프인 율리아 카르센까지 목표한 이들은 셋이었으나 그녀가 거부한 이상, 나머지 둘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연옥의 생활은 할 만한가.”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적의. 하지만 대놓고 야성을 드러내지 않는 건 베른의 존재감을 인식해서다.

정확히 베른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아무리 대단한 용사라고 할지라도 결국엔 일개 피조물이다. 신을 위해
존재하는, 신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

어떤 마음을 품었든 신께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 앞에서 보여야 할 태도로 적합하지 않은가.

“알고 있다. 김우진 밑에서 제법 힘들었겠지.”


“나를 여기서 내보내주십시오.”
“원한다면 얼마든지.”
“힘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베른이 손가락을 폈다.

“내가 네게 하나의 기회를 주겠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신을 모실 영광스러운 기회를.”

집행자가 되어라.

“집행자가 되어 나를 섬겨라. 그리하면 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힘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언제고 널
괴롭혀온 소장을 물어뜯을 수도 있을 거다.”

손을 내밀었다.

“잡아라. 잡는 순간, 너의 생은 달라질 터이니. 위대한 나와 함께 비상하는 거다.”

타르칸은 멍하니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랄하고 있네.”

베른이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타르칸은 나갔다.

“···뭐, 이런.”

대체 왜?

무려 신을 모실 수 있는 기회다. 더 없이 영광스러운 자리다.


그들을 억압하는 김우진으로부터, 연옥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율리아도, 타르칸도 어째서 거부하는 것일까.

“···하찮은 피조물 주제에.”

너무 유하게 나간 모양이다. 그러니 신의 위대함을 모르는 어리석은 것들이 마음대로 제단하고 멍청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아니면 짐승이라 감히 신이란 존재에 대해서 파악할 머리 자체가 없는 것이거나.

그래, 그런 게 틀림없다.
그러니 감히 신 앞에 저 따위 태도를 보이겠지.

그러니 데르카인이라면 조금 다를 거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수인과 달리 드워프는 고도로 문명화된 지성체니까.

“어이가 없구려.”
“뭐라?”
“명색이 신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감옥까지 와서 죄수들을 회유하는 꼴이라니. 당신, 정말로 신이 맞소?”
“감히 신을 의심하는 것은 불경이다. 하찮은 피조물이여, 네 주제를 알아라.”
“소장은 당신들을 다르게 부르던데. 관···.”
“그만.”

거대한 힘이 데르카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이상 내 자비를 기대하지 말아라. 어리석은 난쟁아.”


“내가 살던 차원에는 이런 말이 있소. ‘방귀 뀐 놈이 성낸다.’라고.”
“하나 같이 마음에 드는 놈이 없구나.”

쿠그그그그, 마나가 요동쳤다. 분노한 신의 기분에 따라 난쟁이를 압박했다. 데르카인의 무릎이 강제로 굽혀졌다.

“신을 향한 존경과 신앙이 없다. 마치 김우진, 그놈처럼.”

베른의 서늘한 시선이 데르카인을 내려다보았다.

“그거 아느냐? 나는 지금 손가락 하나만으로 네게 천벌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이 신이 가진 힘이다.

하찮은 피조물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감히 신의 자비를 거부하고 신성을 모욕한 죄.”

죽어라.

베른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끼긱, 권능이 덧씌워진 마나가 데르카인을 눌렀다. 아니, 누르려 했다.

작은 불씨가 신의 권능을 가로 막았다.

힘과 힘의 충돌, 견디지 못한 공간이 일그러졌다. 균열이 벌어지며 폭발이 일어났다.

────!

집무실이 통째로 소멸했다. 허나, 데르카인은 멀쩡했다.

“···누구 마음대로 내 죄수를 죽여.”


“김우진.”
“감찰관한테 즉결 처형의 권한은 없는데?”
“명시하지 않았을 뿐이다. 신에게는 언제나 피조물들의 운명을 좌우할 권한이 있다.”
“어쩌나, 내 감옥에서는 그런 법이 없는데.”
“비켜라.”
“싫다면?”
“베른님!”
“움직이지 마.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대가리 날아가니까.”

문을 지키던 집행자들이 멈춰 섰다. 그들을 압박하는 힘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김우진. 네놈은 언제나 마음에 안 드는군.”


“피차 마찬가지야.”
“죄수들에게 신들을 향한 증오라도 가르치나?”
“웬 걸, 그 증오는 네놈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 같은데. 멀쩡한 용사들을 죄수로 만든 게 누구인지 잊었어?
인간들은 그걸 자업자득이라고 해.”
“······.”
“······.”

침묵을 깨트린 건 베른이었다.

“접객실을 준비해라.”
“갑자기?”
“네놈으로 인해 집무실이 이렇게 되었으니 면담을 이어갈 다른 장소가 필요하다.”
“집무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계속 하겠다고?”
“난입하여 집무실을 부순 건 너다. 그리고 난 분명히 모든 죄수들을 면담하겠다고 말했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명령에 따라라.”
“따라와.”

김우진이 코웃음치며 등을 돌렸다.

“그런데 부서진 건 전부 청구할 거다?”

* * *

베른을 접객실로 안내한 김우진이 타르칸을 호출했다.

“왜 거부했지? 네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을 텐데.”

솔직히 의외였다. 헌데 타르칸은 오히려 반문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수인은 힘을 숭상하지. 신만큼 강한 자들은 이 세상에 없다.”
“힘도 힘 나름입니다. 소장님 말씀대로라면 모든 수인들은 광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랬다.

신들은 의심할 여지없는 최고의 존재들이었고 수인들이 숭배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존재였다.

하지만 신을 믿는 수인은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을 믿을 뿐.

“직접 목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너무 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둘 모두, 지금의 너에겐 해당 사항이 없지 않나?”
“저희들에게도 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저희를 이곳에 처박아 놓은 당사자가 같잖은 위선을 떨고 있으면 오히려
뭉개버리고 싶어집니다.”

김우진은 그제야 수인들이 힘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를 떠올렸다. 은원이다.

“물론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입니다.”

탈옥에 실패하고 모든 가능성을 차단당했다. 격의 차이를 느끼고 김우진을 섬기기로 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놈이 그러더군요. 소장님을 물어뜯을 기회가 생길 거라고.”

크흐흐, 타르칸이 웃었다.

“놈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소장님 곁에 있으면 우리를 이곳에 가둔 신들을 물어뜯을
기회가 생긴다는 것 아닙니까?”

단순히 감옥의 관리자인 김우진과 그들을 직접 연옥으로 쳐 넣은 신들. 어느 쪽이 더 물어뜯고 싶은 가는


당연하지 않은가.

“음.”

그게 그렇게 되나?

김우진은 자신이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고맙다, 베른.’

역시 혼란스러운 내부를 하나로 뭉치는데 외부의 적 만한 것이 없었다.

* * *

한편.

강민식은 신과 마주했다.

“지고한 신이시여.”

지고한 존재감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너에게 신의 권능을 주겠다. 내가 너를 지켜볼 것이니.”

그러니.

“연옥을 무너트려라.”
강민식이 마른 침을 삼켰다.

───────────────
# < 039. 출생의 비밀 >

“복구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는데.”

김우진이 혀를 찼다.

고작 손가락 하나 까딱였고 그것을 막아냈을 뿐이지만 일단은 신이다. 신의 권능은 집무실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버러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겠어.”

베른은 대놓고 단서를 남겼다. 신의 제안이니 당연히 피조물들이 따를 것이라고, 김우진이 알고도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약 이루어졌다면 김우진이 그를 막을 당위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연옥이었고 죄수들은 모두 크던 작든 신에 대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다.

잃어버린 자유와 시간만큼 곱씹은 증오가 있는데 개가 되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겠나.

신들은 그걸 모른다.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피조물의 감정 따위 보다는 신들의 권위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신이고 그러니까 쓸모가 다한 용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토사구팽하는 거다.

“그리고 자존심을 한껏 구기고도 굳이 구태여 면담을 계속하겠다고 한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강민식입니까?”
“그래.”

강민식은 신들이 만든 비수다. 김우진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어 더 강한 올가미를 던질 단초였다.

실패했으나 얻어낼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의 증언, 탈옥의 과정과 김우진의 대응, 그리고 감옥의 분위기와 정보들.

“강민식이 자신이 탈옥했었다고 자백하지는 않겠지요?”


“그건 상관없어. 놈들이 더 원치 않을 테니.”

강민식의 탈옥 과정은 명백하게 신들의 힘 덕분이었다. 과정이 완전히 밝혀진다면 자연스래 그들의 개입 또한
밝혀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

“잡히지 않았다면 탈옥수가 발생했다는 것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강민식이 잡힌 시점에서 그건 물 건너 가버렸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세계수인데.”
죄수들 중 누구도 세계수에 대해 말하지 않을 거다. 그것만큼은 자신한다.

하지만 과연 강민식도 그럴까?

솔직히 말하면 개인면담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놈이 세계수의 존재를 알고 한 행동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존재가 까발려지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강민식의 면담을 막는 건?”


“강민식을 보려고 왔는데 그걸 막으면 잘도 순순히 돌아가겠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몰라 어젯밤에 강민식한테 협박을 하긴 했는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에게 모든 것을 말해봤자 너에게도 좋을 건 없을 거라고. 신이 널 지켜줄 거라는 착각 같은 건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 * *

“뭐지. 대체 뭐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잘못 되도 단단히 잘못됐다.

위대한 신, 베른 오르티안은 연옥에 온 이후 마음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의 난항은 예상했으나 이건 도를 넘어섰다.

신이다. 무려 신의 자비다.

더럽고 괴로운 감옥에서 구제하여 신을 모실 영광을 주겠다는 것을 어찌 저 무지몽매한 것들은 거부할까.

스스로의 주제를 알지 못함이다.

하긴, 애초에 신의 위대함을 알고 스스로의 하찮음을 제대로 인지했더라면 연옥에 갇히는 일도 없었을 거다.

죄수들을 집행자로 쓰겠다는 전제부터가 글러먹었다.

베른은 스스로의 실책을 인정했다.

피조물들의 멍청함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그의 실수. 결국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괜찮다.

어차피 집행자는 부가적인 일이다.

하이엘프도.
달의 늑대도.
차원의 장인도 남 주기는 아깝고 집행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은 있지만 반드시 행해져야 할 일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저런 무식한 벌레들보다 신의 위대함을 알고, 신을 섬기는 신실한 자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 감옥에도 그런 존재가 한 명 있다.

신을 모심에 부족함이 없고, 신의 뜻에 따라 순례자를 자처한 자.

비록 실패한 버러지이나 그 의기만큼은 높히 사줄만 하며, 지금은 김우진을 찌를 비수가 되어줄 거다.

“반갑구나, 강민식.”

다리와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들이 결박된 강민식이 들어왔다.

신을 영접한 그의 눈이 커졌다.

“신실한 종에게 감히 이따위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놨구나.”

딱,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강민식을 구속하고 있던 모든 제약장치들이 해제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앉아라. 내가 누구인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신이십니까?”
“그래.”
“···신이시여.”

강민식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신앙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이거다. 이것야말로 하찮은 피조물이 신께 보여야하는 당연한 경배와 찬양이다.

이 썩어빠진 감옥에도 아직 쓸만한 피조물이 하나는 있구나. 베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 너의 노고를 알고 있다. 과업을 수행하다 실패하여 고초를 겪고 있지.”


“···맞습니다.”
“허나,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왔으니.”
“정말이십니까?”
“의심하지 말라. 나는 네 신이다.”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과업을 수행한 너의 과정과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예.”

강민식은 자신이 탈옥을 위해 했던 일들을, 겪었던 일들을 모두 고했다.

독과 신들이 부여한 관리자의 권한을 이용해 구속구를 해제하고.


죄수들의 신뢰를 얻고 대규모 탈옥 사태로 발전시켰으며.
한 번의 실패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아가 결국에는 연옥을 탈출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붙잡히기까지.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으나 너의 공이 높다. 그러니 내 네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노라.”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 함은···?”
“한 번 더, 탈옥을 시도하거라.”
“···예?”
“왜 놀라느냐.”
“···한 번 더 말씀이십니까?”
“너는 실패자다. 신의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하지. 많은 신들이 너의 부족함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관대한 내가, 네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는 거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너의 신이 네게 은총을 내리니, 네게 불가능은 없다.”
“저는 지쳤습니다.”
“허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
“저를 연옥으로 보내신 신께서는 고향을 약속하셨습니다.”

계속되는 거부에 베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힘을 환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기회를 이야기했다. 헌데 다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너의 의도가 무엇이냐.”

베른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저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무사히 탈옥하게 된다면 그 이후의 일을.”


“걱정 말아라. 너는 그 공을 인정받아 집행자가 될 것이다.”
“···고향은?”
“네가 원한다면 돌려보내줄 것이다. 허나, 힘은 환원해야만 할 것이다.”

그제야 강민식은 깨달았다.

애초부터 저들은 그를 순순히 돌려보내줄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 * *

치솟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고, 강민식은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이번에는 꼭 과업을 완하겠습니다. 집행자가 되어 신을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대함은 신의 덕목 중 하나다.”

흡족한 베른은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받아라, 이것이 부족한 네 능력을 조금이라도 보조해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신의 권능이 깃든 것이니 네가 대놓고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김우진 따위에게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예.”
그렇게 베른은 흡족해하며 강민식을 내보냈다. 다음 죄수의 면담이 이어졌다.

강민식은 자신을 다시 독방으로 인도하는 교도관들에게 말했다.

“소장을 만나고 싶다.”


“소장님께서 널 만나 줄 이유가 없다.”
“어젯밤, 소장이 그랬다! 면담은 언제든 받아주겠다고!”

그런 적은 없었으나 소장이라는 존재들은 교도관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좋다. 소장님께 여쭈어보도록 하지. 하지만 독방에 다시 들어가는 게 우선이다.”

다시 독방에 갇혀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시야가 밝아졌다. 소리가 들려왔다.

강민식이 고개를 들었다. 김우진이 눈앞에 서 있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저놈들은 애초에 나를 순순히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이제와서 나한테 한탄해봤자···.”
“나는 신에게 세계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놈은 내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지. 연옥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이전보다 더한 관리자의


권한도. 마음만 먹으면 구속구를 0.1 초 만에 풀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놈은 나에게 연옥 자체를 붕괴시키라고 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연옥에는 핵이 있다면서? 그 핵을 손상시켜서 연옥 자체를 무너트리라고 했다. 관리자의 권한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하더군.”
“···이 새끼가 미쳤나.”

연옥은 결국 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 곳을 아예 무너트려 버리자는 건,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악바리로 살을 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소리였다.

다른 신들과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에 김우진은 자신이 가진 돈 모두와 손모가지를 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널 잡아 족칠 거라고 했다. 다른 신들과 함께.”


“한 번 실패하더니 돌아버렸군. 그래서 네 대답은?”
“지금 너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는 걸 보면 모르겠나? 보아하니 너와 신들은 같은 하늘 아래 못사는 모양인데.”

내가 도와주겠다.

“신을 유인해서 없앨 수 있게 도와주마. 내 조건은 하나다. 나를 힘을 포기하지 않아도 지구로 돌려보내줘.”

처음부터 강민식이 원하던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다지 나쁜 제안은 아니군.”

사적인 감정을 때고 본다면 아주 좋은 제안이다. 이중첩자라는 건 그만큼 위험하지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

허나, 김우진은 사적인 감정을 때어놓고 생각하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 전에 우리가 정산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


“···정산이라고?”
“내가 너 때문에 개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이가 갈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분골착근 좀하고 사지만 부러트릴게.”
“머, 멈춰!”
“너는 내가 멈추라고 할 때 멈췄나?”
“그때는 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 편할 대로 생각하면 안 돼지. 내가 만만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난 다시 신께···!”
“방금 네가 말한 걸 그 잘난 신에게 다 이야기하고 네가 배신했다고 해야겠군.”
“······!”
“고마워, 별 다른 대안도 없이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줘서.”

김우진이 웃었다.

“걱정 마. 다시 붙여주긴 할게.”

이빨 꽉 깨물어라.

뿌득-

* * *

삐-

높게 세워진 울타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차단한다.

앙상한 새장은 릴리의 모든 것을 봉쇄한다.

답답하다. 릴리가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퍼덕였다. 툭, 날개에 얻어 맞은 새장이 휘청였다.

하지만 그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루해.
심심해.
괴로워.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뱃속으로 들어가버린 두 개의 영약이 그 행동을 막았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루. 딱 하루야, 릴리. 힘들겠지만 하루만 얌전히 있어줘.’

더 없이 좋아하는 김우진이 부탁했고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소중한 것. 그리고 김우진은 더 소중한 것. 릴리는 소중한 것들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 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릴리가 물 맞은 지점토처럼 축 늘어졌다.

[아아, 들리니?]

어디선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담장과 새장 안에는 그녀뿐이었다.

[나는 네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니?]

착각이었나, 생각할 때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보다 명확하게.

- 삐삐!

[누구냐고?]
[음, 그러는 너는 누구니.]

장난끼가 다분한 목소리에 릴리가 힘차게 대답했다.

- 삐!

[릴리라. 누가 지어줬는지 예쁜 이름이구나. 율리아, 그 아이가 지어준거니?]

율리아라면 김우진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하이엘프였다.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 삐삐.

[아니라고? 이상하네. 그곳에서 네 이름을 지어줄만한 존재가 율리아 말고 또 있다는 뜻이니?]

- 삐이!

[김우진? 그건 연옥의 소장인데···.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구나.]

- 삐삐삐?

[아, 이런 내 소개도 제대로 안해줬구나.]


[나는 데이드람의 세계수란다. 이름은 딱히 없고. 애초에 세계수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말이지.]

음, 그리고.

[인간들의 말을 빌리자면, 너의 생물학적 부모가 되겠구나.]

- ···삐이?
[그래, 부모. 그 뜻을 모르지는 않겠지?]

- ······!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릴리가 경악했다.

[반갑구나. 나의 아이야.]
[어찌 되었든, 무사히 싹을 틔운 것을 보니 기쁘구나.]
[예상보다 훨씬 빠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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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0. 목표 >

“죄수들의 관리 상태가 엉망이다. 조금 더 죄수들의 처우에 신경 쓰도록. 그리고 죄수들에게 신에 대한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지 마라.”
“그런 적 없어.”

김우진이 코웃음쳤다.

“됐고, 면담을 했으니 죄수 하나가 출소 의사를 밝힌 건 알고 있겠지? 바로 내보낼 거니까 알아서 처리해.”
“···앵무새처럼 더 이상 연옥에서 버틸 자신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더군. 무슨 수를 쓴 거지?”
“다 능력이지.”
“헛소리하지 마라. 죄수들을 협박했겠지. 역겨운 방식으로.”
“그 역겨운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네놈들이 날 여기에 앉혀놓은 거야.”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김우진은 코웃음으로 답했다.

“조만간 새 죄수가 들어올 거다.”


“벌써? 1177 번이랑 1178 번이 들어온지 얼마나 됐다고?”
“많아진다면 네놈 입장에서는 좋은 것 아니냐.”
“죄수도 죄수 나름이지. 네놈들도 참 징글징글해. 부려먹고 팽하고, 부려먹고 팽하고.”
“피조물들이 우매하여 주제를 모를 뿐이다.”

베른은 떠나갔다.

원하는 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지만 본인은 그걸 몰랐다.

그의 태도를 비추어 보았을 때, 세계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강민식의 말은 진짜일 것이다. 알았다면 결코
순순히 떠나가지 않았을 테니.

집무실 하나가 통으로 날아갔지만 이번 감찰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았다.

짐승들의 완전한 충성, 데르카인과 율리아의 신뢰, 그리고 강민식의 신에 대한 불신까지.

베른 오르티안의 존재로 인해 죄수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으니 더 없이 좋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새로운 죄수다.


죄수가 들어오는 건 언제나 좋다. 수인이고, 엘프고, 드워프고, 인간이고를 떠나 결국 죄수들이 많이 들어오고
그들이 자발적인 출소를 선택해야지만 김우진은 묶여진 계약을 벗어날 수 있다.

허나,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

하필 강민식이 탈옥을 실패하고, 관리자가 감찰관으로 내려온 뒤.

그를 향한 새로운 마수라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바로 새로운


수단을 강구할 리가 없지만 그게 또 맹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뭐든 일단 인간이 들어왔으면 좋겠군.”

우주를 이루는 수많은 종족들 중 가장 많으며, 가장 출소시키기 쉬운 자들.

새로 오는 죄수가 인간이라면, 더 두고 볼 것도 없다. 관리자들의 스파이든 말든 그전에 출소시켜버리면 그만이다.

* * *

급한 불은 껐다.

김우진은 릴리를 찾았다.

하늘구름의 첫 번째, 울타리의 작동을 중지시켰다. 울타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울타리 너머로 거대한 새장이 보였다. 그 안에 축 늘어진 릴리가 안쓰러워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 삐!

마침내 자신을 억압하던 감옥에서 벗어난 릴리가 김우진을 반겼다.

“괜찮아?”

- 삐!

맹렬하게 끄덕이는 고개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당분간은 하늘구름에 들어갈 필요가 없을 거야.”

- 삐?

“왜 당분간이냐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는 장담을 못하거든.”

언제 또 저들이 감찰을 계획할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듯, 릴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토라진 듯한 행색에 김우진이 픽 웃었다.

역시 지금이 낫다. 어느 차원의 순록처럼 흉측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삐삐.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릴리는 곧 화를 풀고 뺨을 부볐다. 그리고는 뜻밖의 이야기를 건넸다.

- 삐삐삐.
- 삐삐이이이, 삐삐.

다만, 그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 천천히 말해줘.”

친근감이 높아진 탓에 더 잘 이해가 되긴 하지만 아직은 한계가 있었다.

- 삐.

답답하다는 듯, 릴리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편린에 불과하지만 뜨문뜨문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락?”

- 삐!

“···누가 연락을 해왔다고? 너한테?”

- 삐!

김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차원의 세계수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세계수에게 누군가가 연락을 했다라.

“누가?”

- 삐삐삐, 삐이이.

“······.”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 *

‘신.’

살면서 세 번째로 보는 신이었다. 그리고 그 셋 중 가장 떨어졌다.

적어도 율리아가 보기에는 그랬다. 품위를 찾으나 가장 품위가 없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집행자가 되라고? 자비를 내려준다고?’

조삼모사도 아니고 단순히 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둬놓고 이제 와서 집행자로 삼는 자비라니.

신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용사는 그저 신의 말을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거다. 그게


당연한 거다.
그리고 그게 신들이 몰락해야 하는 이유다. 무너트려야만 하는 이유다.

다른 생명체들을 모두 체스판 위의 졸로 보기에.

끼익-

그때, 문이 열렸다. 김우진이었다.

“신은 돌아갔···.”
“나와라. 급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 삐이!

릴리가 퍼득 율리아에게 안겼다. 세계수의 정령이 감옥 내부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빨리 릴리의 말을 통역해라.”


“갑자기요?”
“급하니까 빨리.”
“알았어요. 어머니 나무님, 제게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 삐삐삐.
- 삐삐이이이, 삐삐.

“네, 그러니까 어머니 나무께 누군가 연락을 했다는 말씀이세요? 네? 누가 연락을 했다고요?”
“거기까지는 나도 이해했으니까 그 다음.”
“음.”

하지만 율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하나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서였다.

슬쩍, 김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그대로 통역해도 되는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손을 잡기로 했고 어차피
들킨 거 감출 수는 없으니.

“누군지 말씀해주시겠어요?”

- 삐삐이이.

“네, 생물학적 어머니요?”

율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릴리가 혼자서 이런 단어를 터특할리는 없다. 말하는 느낌이 딱 세계수 하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네. 아무래도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께서 연락을 보내신 것 같아요.”

율리아가 용사로 있던 차원이었다.

* * *
“드워프들에게 내 집무실을 새로 만들라고 말해놨으니 알아서 잘 관리하도록.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다.”
“또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이제는 휴가도 없지 않습니까.”
“경우가 다르니까 상관없어.”

휴가를 써야만 하는 이유는 세계수가 완전히 가려질 때까지, 강민식을 잡을 때까지 관리자가 연옥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과는 경우가 다르다. 관리자가 올때는 보통 하루의 텀을 준다. 그게 계약의 내용이기에, 어지간하면 어기지
않는다. 그러니 그 전에만 연옥에 돌아와 있으면 문제는 없다.

“죄수들도 그렇고,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연옥은 김우진에 의해 운영되는 감옥이다.

김우진이 빠진 연옥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죄수들이 탈옥을 하고자 한다면 최고의 적기다.

하지만 지금의 죄수들에게는 탈옥의 의지가 없다. 하이엘프와 세계수에 의해 엘프들이, 최고의 명장에 의헤
드워프들이, 달의 늑대에 의해 수인들이 얌전해졌다.

다크엘프는 출소를 택했으며 거인은 그냥 죽은 듯이 있기로 했다. 그리고 한 인간은 소지에 만족하고, 다른
인간은 신에 대한 원한을 가졌다.

적어도 당분간은, 탈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 오래 걸릴 것도 없어. 최대한 빨리 돌아오지.”


“새로운 죄수는 어떡합니까?”
“연락이 오면 나한테 연락해.”

연옥에는 차원을 건너 연락할 수 있는 비상 통신구가 있었다.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어 어지간한 자들은 사용할
수도 없지만 김우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소장님을 적대한다면···.”


“적어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단순한 감이 아니다. 율리아, 알베니우스의 존재들과 그의 지식들을 토대로 내려진 판단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데이드람이 아니더라도 어딘가로 가긴 가야해.”

구할 게 있기에.

* * *

김우진은 떠날 채비를 했다. 세계수를 통한 연락은 반드시 그 원인과 진상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잘 들어. 우리의 첫 번째 목적은 영약이야.”

잘못 들었나? 율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 나무를 만나는 게 아니라요?”
“물론 그것도 해야지. 하지만 당장 급한 건 영약이야. 영약을 사야해.”
“사요?”
“그래. 릴리에게 영약을 두 개나 쥐어주면서 할당량을 채우기 어려워졌으니까.”

영약을 보충하려면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그건 알고 있지만···.”

율리아 또한 통역사로서 그 거래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 나무를 만나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은데요.”


“아니. 영약이다.”

세계수들 간의 연락, 그건 서로 연관이 있는 부모 세계수들만이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알베니우스와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계획하고 율리아가 실행한.

원인을 알았다면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없다. 그들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더욱 더.

그러니 당장은 영약이라는 급한 불이 더 급하다.

“못하면 세계수의 열매라도 따와야지. 하나쯤은 주지 않을까?”


“···세계수의 열매가 그냥 달라고하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영약을 산다뇨? 직접 구하는 게
아니라요?”
“영약은 귀해. 관리자들이 괜히 연옥의 죄수들을 이용해 납품 받는 게 아니야.”

영약이라는 건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다. 마나가 풍부한 지역이어야 하며, 마나를 감당할 식물이 있어야하고,
오랜 세월 동안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때문에 영약은 귀하다. 만약 귀하지 않다면 영약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연옥은 확실히 좋은 장소야.”

교차 차원이라는 건 여러 차원들이 교차한다는, 각 차원의 마나들이 뒤섞인다는 뜻이다.

더 없이 풍부한 마나에 신들의 권능이 뒤섞이고 그것들을 관리하는 건 용사다.

연옥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곳이니까 관리자들이 선점해 연옥을 세운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괜히 영약을 찾겠다고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기한을 맞출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야. 그냥 돈을 주고 사는


게 빠르고 확실해.”

아무리 못해도 차원 하나 당, 영약 한두 개쯤은 시장에 나오니까. 더럽게 비싸서 문제지만 김우진은 돈이 많았다.

“차원마다 화폐 단위가 다르지 않아요?”


“데이드람에 금이 통용되지 않나?”
“통용돼요.”
“그럼 됐어.”

사실 금이 통용되는 차원보다 되지 않는 차원을 찾는 게 더 힘들다. 금의 가치는 대부분의 차원을 관통하니까.

김우진과 율리아가 차원의 방벽 앞에 섰다.

천천히 벽을 어루만졌다.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다는 것은 신들에게 전해질 거다. 하지만 그들은 김우진이 어떤 차원으로 갔는지 모를 거다.

차원의 방벽을 넘으면 관리자들에 의해 감지된다. 그건 방벽 자체에 내제된 방어 체계 중 하나라 김우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허나 거기서 자유로운 자들이 있으니 차원의 근원에까지 뿌리를 내린 세계수다.

만 년을 살아온 데이드람의 세계수라면 김우진과 율리아의 방문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터.

“가자.”
“네.”

인간과 하이엘프가 차원을 넘었다.

───────────────
# < 041. 당근 종 >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차원에는 마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모든 마나는 각각의 차원의 향취를 가진다. 큰 의미는 없다. 도시의 공기보다 숲의 공기가 더
산뜻하듯이, 겨울의 공기가 여름의 공기보다 차갑듯이, 그냥 그런 거다.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의 미세함. 하지만 하이엘프에게는 고향에 온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데이드람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최소 백 년 이상이었겠지.”

정상적인 루트대로 세계수가 발아하여 통신이 가능할 정도까지 큰다면 그정도 시간은 걸릴 테니.

그것도 연옥이 교차차원으로서 마나가 풍부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차원이었다면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세계수들을 연결시켜서 연옥을 침공하기라도 하려고 했나?”


“···하늘이 참 맑네요.”
“관리자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면 저도 혼자서는 안 죽어요. 모든 걸 다 이야기할 거예요.”
“너랑 네 뒤에 있는 자들까지 다 피해가 갈 텐데?”
“···무조건 소장님이 시켰다고 하면 안 믿겠죠?”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바로 안내해드리면 되나요?”


“아는 상단이 있나? 용사였으니 콩고물이라도 먹으려고 달려드는 상단들이 제법 많았을 텐데.”
“상단이요?”
“영약부터 구해야지.”
“알고 있는 인간 상단이 하나 있긴 해요.”
“규모는?”
“커요. 제가 떠나기 전에 나라 전체에 지부가 있는 수준이었어요.”

그 정도라면 꽤나 규모가 있는 대상단이다. 운이 좋아 바로 영약을 가지고 있거나 대륙 전역에 끈이 있어 영약


경매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을 거다.

“바로 가자.”
“잠깐만요. 그냥 가도 괜찮을까요? 제가 크라프트를 보고 좀 느낀 게 있거든요?”
“네 동료가 믿음직스러운 자라면.”
“눈치 채셨어요?”
“엘프들의 빈약한 인간관계가 뻔하지.”
“빈약하지는 않거든요?”
“다른 종족과 개인적인 교류가 거의 없는 건 맞잖아.”

개인차가 조금 있겠지만 대채로 그렇다. 엘프들은 그렇게 개방적이지 않다.

그 정점인 하이엘프가 주저없이 소개해줄 인간이라면, 그만큼 믿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용사의 동료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믿을 만하긴 해요.”


“그럼 됐군.”

하이엘프의 신뢰라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을 테니.

* * *

세상을 어지롭히던 광룡이 죽었다.

위대한 용사, 율리아 카르센 칼 아래 목이 잘렸다. 광룡의 시체는 산과 같았고 그 피는 강을 이루었다.

무려 17 개의 왕국을 멸망시켰던 광룡의 군단은 와해되었다.

너무 많은 나라가 멸망했고, 너무 많은 토지가 황폐화 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럼에도 승리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일주일동안 축제가 이어졌다.

대륙은 종족과 나라를 초월해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 함께 연합을 이루고 광룡과 싸웠기에, 살아남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저의 과업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모두가 기뻐하던 그때, 광룡의 목을 벤 영웅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제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겠어요.’

떠나겠다고.

갑작스러운 선언에 모두가 경악했다. 승리의 달콤함에 취하기도 전에 그 주역이 빠진다는 말에 모두가 말렸다.

‘저에게도 고향이 있어요.’

하지만 그 말에 모두가 순수하게 영웅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꼭 가야만 해? 정을 붙이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잖아. 여기서 그냥 함께하면 안 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용사를 말렸던, 그럼에도 끝내 말리지 못했던 동료들이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는 모양이네. 요새 조금 무리하긴 했지.”

일이 밀려 이주일 째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을 하고 있으니.

에드먼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비볐다. 기지개를 펴 찌뿌둥한 어깨와 허리를 풀어주고 손수 차를 탔다.

후룩, 마르지의 꽃잎을 말린 차를 한 모금 머금자 산뜻함이 멍한 정신을 풀어주었다.

“벌써 밤이네.”

창밖은 새카만 어둠이 가득했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지.”
“내가 추천해 준 차, 아직도 먹고 있네?”
“응, 피로 회복에 꽤나 좋더라고.”
“일이 엄청 많아 보이고.”
“상단의 규모가 커졌거든. 네가 떠날 때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짜악, 거친 손길이 에드먼드의 뺨을 후려쳤다. 스스로의 오른손이었다.

“···아픈데.”

짜악, 이번엔 왼손이 반대쪽 뺨을 때렸다.

“뭐하는 거지?”
“아무래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해해주세요. 원래 조금 맹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착해요.”
“그건 도저히 칭찬해줄 구석이 없을 때 하는 말 아닌가?”
“그럴 리가요. 그래도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법사였어요.”
“마법사라는 놈이 저 따위라고?”
“지금은 가업을 이어 받아서 상인의 역할이 더 크지만요. 하지만 마법사의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결국 그냥 조금 녹슨 마법사라는 건데···용사의 동료였다는 놈의 반응으로는 한심하기 그지없어.”

남자의 경멸의 시선을 인지할 때쯤, 에드먼드의 기행이 끝이 났다.

마침내, 그는 현실을 인지했다.

“···율리아?”
“안녕, 에드먼드. 오랜만이야.”
“···정말 율리아야? 진짜 그 율리아 카르센이야?”
“네가 아는 게 함께 광룡과 싸운 하이엘프가 맞다면.”
“말이 안 되잖아! 율리아는 떠났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데이지한테 어떻게 고백했는지 알고 있는 걸. 죽은 마수의···.”
“···율리아 맞네.”
“아직 다 이야기 안 했는데.”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이 너 말고 어디 있어.”
“그런식으로 고백하는 사람도 너 말고 없어.”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돌아간 것 아니었어?”
“돌아갔었어.”

비록 본래의 세계인 아르반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다시 왔다고? 왜? 아니, 물론 널 다시 보니 기쁘긴 하지만···차원 이동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거였어?”
“당연히 아니라는 걸 알잖아.”

에드몬드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떠난 지 반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율리아가 돌아오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 그리고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부탁이 있어서 왔어.”


“부탁?”
“응, 영약을···.”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에드먼드! 내가 직접 쿠키를 구웠···는데···.”

새카맣게 탄 쿠키를 들고 활기차게 들어온 금발의 여인이 불청객들의 존재에 멈칫했다.

“···율리아?”

쨍그랑, 접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파편들과 함께 쿠키조각이 비산했다. 그중 하나가 김우진의 손에 안착했다.

까득, 자연스레 입 안으로 들어갔다. 김우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딴 게 쿠키?”

퉤, 입으로 들어갔던 쿠키 조각이 다시 바닥으로 돌아갔다.


* * *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용사, 율리아 카르센과 함께 세상을 구했던 네 명의 동료들이 있었다.

대마법사, 에드먼드 프로인과 광전사, 데이지 호크네는 그들의 일원이었다.

“그러니까 영약을 구하러 왔다고?”

감정을 숨기는데 미흡한 광전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응, 구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에드먼드가 나름 잘나가는 상인이야. 분명히 구해줄 걸.”
“아니, 그 영약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확답은 조금···.”
“안 해줄 거야? 율리아인데?”
“노력은 해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어떻게든 구해야지. 율리아인데.”

그녀의 말에 김우진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가 쌓아놓은 인맥 덕분에 어쩌면 생각보다 더 쉽게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필요한 건 최상급 영약이다. 설명초나 드와이그의 뿌리 같은.”


“그런 건 부르는 게 값이고 백 년에 하나가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희귀합니다만.”
“그 이하는 필요 없다. 굳이 똑같은 것을 구해줄 필요는 없지만 급은 맞아야 한다.”
“일단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하던 김우진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데이지의 파란 벽안이 줄곧 그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뭐지?”
“율리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내 쿠키를 뱉은 이 개, 아니 이 분은 대체 뭐야? 인간이니까 연인일 리는 없고.”
“동료다. 일단은.”
“일단은? 그 애매한 대답은 뭐야?”
“같은 목표로 힘을 합치기로 했으니 일단은 동료지.”
“하지만 일단이라는 건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건 율리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고.”
“뭐야, 아무리 봐도 평범한 동료 관계는 아닌데?”
“···아하하, 그냥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데이지가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냈으나 곧 거두었다. 율리아를 믿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영초를 구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율리아, 너의 생환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거야.”

용사는 영웅이다. 세계를 구한 영웅의 귀환을 알리고 무언가를 원한다고 한다면 쌍수를 들고 찾아올 이들이
넘쳐났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여러 국가들이 그걸 빌미로 너를 포섭하려고 하겠지만.”


“내가 귀환했다는 건 드러나지 않았으면 해. 어차피 오래 있지 못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에드먼드의 시선이 아주 잠깐, 김우진에게 닿았다.

광룡의 목을 베어버린 율리아 만큼은 아니지만 에드먼드 또한 강자였다. 그는 여덟 개의 각인을 새긴


대마법사로서 대륙 제일의 마법사였다.

그런데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마법, 지혜의 눈이 김우진이라는 인간을 상대로 아무 것도 간파해내지


못했다. 마치 율리아처럼.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강자다. 그를 압도하는 미친 수준의 강자.

어디서 저런 인간을 데리고 왔는지 의문이었다. 다른 차원의 용사라도 되는 건가.

‘···꽤 그럴 듯해.’

우연히 나온 것 치고는 제법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의 상식에서 용사와 비등한 건 용사뿐이니까.

“최대한 노력해볼게. 여차하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걸 전부 동원해서라도.”


“고마워.”
“숙소는 있어?”
“아니.”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묵어. 별채를 하나 내어줄테니.”
“내가 안내해 줄게.”

데이지가 율리아와 김우진을 데리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에드먼드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지?”

세상을 구하고 사라진 용사가 또 다른 용사와 함께 영약을 구하러 왔다라.

율리아의 부탁이니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범차원적인 위기가 닥쳤다면 또 모를···까···?”

범차원적인 위기?

그래서 용사들이 연합을 한다?

한 가지 가정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한편, 김우진과 율리아는 별채에 도착했다.

“여기서 묵으면 돼.”


“나쁘지 않군.”

거대한 별채는 대상단의 것이라는 것을 외치듯, 호화스럽게 그지없었다.


“고마워, 그러면 내일···.”

김우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율리아가 뒤따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데이지의 손이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왜?”
“저 남자 대체 뭐야?”
“음, 아까 말했듯이 일단은 동료?”
“그게 뭐야? 혹시 협박이라도 받고 있는 거야?”
“나 그래도 용사인데.”
“저 사람도 용사 같던데. 너랑 똑같이 읽을 수가 없어.”

그건 용사의 동료였던 데이지를 아득하게 뛰어넘었다는 소리였다.

“혹시 협박을 받고 있는 거면 별채에 있는 당근 종을 쳐.”


“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부탁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도와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너무 부담가지지 마. 네 덕분에 모두가 살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데이지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 * *

- 그 아이가 왔구나.

차원의 장벽이 열렸다. 열어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방문자의 존재를, 그녀를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빨리···.”

세계수를 모시는 하이엘프가 고개를 숙였다.

-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씨앗이 벌써 발아해 정령체가 형성되었더구나.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

“괜찮은 겁니까?”

- 일단은 무사히 이곳으로 왔으니 어떻게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봐야겠지.

죄수로서 연옥에 갇혔던 율리아가 그곳을 벗어나 차원을 넘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뜻이었다.

완전히 계획대로 되지는 않아도 적어도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다는.

- 무엇보다 그 소장이라는 자도 함께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 과연, 알베니우스가 그렇게 자랑한 이유가 있었음이야.


- 괴물이 따로 없더구나.

세계수의 정령체, 작은 참새가 웃음을 흘렸다.

- 그런데 바로 올 생각은 없나 보구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으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요?”

-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모르겠지.
- 일단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려무나.
- 소문이 나서는 안 되니.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이엘프가 물러났다. 홀로 남은 참새가 팔짱을 꼈다.

- 아카식 레코드에 의한 우주의 계약. 지금의 연옥은 용사들보다 소장을 묶어둔다는 느낌이 더 크다지.
- 신들이 두려워하여 계약으로 묶어둔 존재라. 연옥의 소장, 김우진.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구나.
- 알베니우스가 말한 그대로일까?

후후, 참새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
# < 042. 제안 >

“가자.”

효율은 중요한 문제다.

김우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다. 죄수가 오기 전까지, 그 전에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만 한다.

본래 김우진의 계획은 스스로 발품을 파는 것이었다. 대상단이나 경매장을 직접 찾아 의뢰를 넣거나 구입하는
쪽으로.

하지만 율리아의 동료 중 대상단의 상단주가 있음으로 그 과정이 생략되었다.

최상급 영약이라는 게 그리 흔하지도,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닌 만큼 그동안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김우진은 그 사이 세계수를 만나고 오기로 했다.

“벌써가?”
“다시 올게.”
“혹시 문제 있으면 꼭 연락해. 아무리 봐도 저거 괴물이야.”
“근데 왜 당근이야?”
“상단의 상징이 당근이야.”

조심스레 율리아에게 당근 모양의 통신구를 건네는 데이지의 배웅을 받으며 둘은 상단을 떠났다.
율리아가 지도를 펼쳤다.

“데이드람의 엘프들은 왕국을 세웠어요. 하이엘프이신 필립스님이 왕으로 계시죠. 지금 있는 바르간 왕국과는
거리가 꽤 되요.”
“왕국이라.”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엘프들은 세계수를 중심으로 뭉치고, 세계수는 보통 차원에 하나씩 밖에 없으니.

여러 세계수가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듯이 세계수도 마찬가지니까.

“이동마법진은 활성화 되어 있는 세계인가?”

차원의 마법적 발전에 따라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존재했다.

“있어요. 엘프들 쪽으로는 원래 없었는데 제가 용사로 있을 때,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설치했거든요.”

연합을 위해서는 교류가 필요했고 율리아가 떠날 때쯤에는 작은 마을이 대도시로 발전했다.

부르테인이 바로 그곳이다.

“엄청 커졌네요. 제가 떠나기 전과 비교했을 때, 1.5 배 이상은 커진 것 같아요.”


“어디로 가야할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겠군.”

창밖, 도시의 성벽 저 멀리 숲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는 가히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다. 하늘을 관통한 줄기는 쉽게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굳이 그걸 찾을 필요도 없었다. 공간이동마법진이 설치된 제국 마탑 지부를 벗어나자 엘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흔하디 흔한 엘프였다.

“어머니 나무께서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세계수의 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발라크님.”
“오랜만입니다, 율리아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변을 의식한 것인지, 엘프의 음성은 더 없이 작았으나 두 초인이 듣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위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난 드래곤이 아닌데.”
“하지만 드래곤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은 압니다. 그 이상은, 제 능력이 미천하여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말은 청산유수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발라크는 둘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갔다. 숲과 가까워지자 쭉 늘어선 인파가 보였다.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자들입니다. 연합과 교류를 시작한 이후, 매일 같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은 다양하다. 단순히 엘프들을 보고 싶어서, 정기가 넘치는 숲에서 쉬거나 수련을 하고 싶어서, 엘프들과
교역을 하고 싶어서.

엘프들은 숲의 몇몇 구역을 타 종족에게 허락했고 그곳에서 주로 만남이 이루어졌다.

“여긴 샛길이네요.”
“네. 오신 게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든 곳이 개방된 곳은 아니었다. 엘프의 숲은 개방된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았다.

“이곳은 숲의 파수꾼들도 잘 순찰을 돌지 않는 곳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인도해주고 계시니 설사 돈다고 해도


저희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숲의 나무들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김우진과 율리아를 숨겨주고 있었다.

“적어도 배타적인 건 아닌 것 같군.”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께서는 다르다고요.”
“그건 네 생각이고.”

세계수들이 세상을 구하는데 적극적인 것은 본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결코 선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적당히 믿을 수는 있어도 완전한 신뢰는 아직 시기상조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쭉 가시면 어머니 나무께서 기다리고 계실겁니다.”


“왜 같이 안가고요?”
“어머니 나무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감사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발라크가 사라졌다. 나무들이 일직선으로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마치 레드카펫이 깔린 것 같았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어떤 느낌이지?”


“위대하신 분이에요.”
“크라프트와 비교하면?”
“장난끼가 좀 있으시지만 그런 속물적인 느낌은 없었어요.”
“네가 속은 건 아니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래요.”
“알베니우스와는 어떻게 만난 거지?”
“음···. 여기까지 와서 숨길 이유도 없으니 상관없겠죠. 알베니우스님과 어머니 나무께서 이미 연이
있으셨어요.”
“이미 계획이 있었고 거기에 너를 끌어들인 거군.”
“맞아요.”
“그게 맞습니까?”

김우진의 시선은 율리아를 향하지 않았다. 하늘. 그 위에는 숲에 들어온 직후부터 꾸준히 뒤를 쫓던 자그마한
참새가 있었다.

김우진도, 율리아도 그것이 평범한 참새가 아니라는 것을 진즉에 눈치 챘다.

- 맞단다.

참새가 율리아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어머니 나무님, 오랜만에 뵈어요.”

- 숲의 아이야, 다시 보니 좋구나. 너를 그런 사지로 몰아놓고 하루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단다.

“직접 몰아놓은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군요.”

- 당사자이니 하는 거란다. 설사 위선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위선도 선이니.

참새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크라프트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정령체가 작군요. 정령체는 살아온 세월에 비례해서 커지는 게 아닙니까?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거대하던데?”

- 정령체의 크기는 세계수가 내키는 대로란다. 자신의 한계 내에서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아니면 마는 거지.
-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다른 이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딱히, 그 정도에 위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냥 흉측하게 생겨서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 그래서 너구나.

목을 반쯤 돌린 참새가 김우진과 눈을 맞췄다.

- 연옥의 소장, 그리고 내 아이에게 릴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인간이.

“예, 접니다. 초대장은 잘 받았습니다.”

- 꼭 한 번 보고 싶었단다.
- 저 오만한 신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인간이 어떤 자인지.

“소감은 어떻습니까?”

- 그럴만 하구나.

참새가 다시 날아올랐다. 천천히 걸어가는 김우진의 앞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우리의 계획에 동참할 생각은 있다는 거겠지?

“악마나 그런 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 이야기를 전부 들은 것 아니었니? 그래서 납득하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보낸 첩자의 경계심이 생각보다 두텁습니다. 연옥을 부수기 위해 세계수를 심었다라는 것과 알베니우스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아, 이번에 세계수끼리 연동해 통신을 주고 받을 생각이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 숲의 아이들이 원래 경계심이 많단다. 허나, 그래서 이번 일에는 더 없이 적격이었지. 섣불리 모든 걸


털어놓고 네게 이용당할 수는 없으니.
- 어쨌든, 다 왔단다.

반투명한 결계를 통과하자, 세계수의 기운이 보다 크게 다가왔다.

어마어마한 마나의 밀도는 과연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다웠다. 데이드람의 그녀는 크라프트의 세계수보다도 한 수


위였다.

- 그렇다면 보다 확실하게 설명을 해줘야겠지.


- 율리아의 말이 맞단다.
- 우리는 연옥을 부술 생각이란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연옥을 부숴 죄수들을 보내고 심어놓은 세계수로 교차 차원, 연옥을 탈취한다.

- 그게 첫 번째.
- 그리고 연옥의 탈취 소식을 듣고 당황하는 신들을 연옥으로 끌어 들인다.
- 그게 두 번째.
- 그 다음은 무엇일 것 같니?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군요.”

- 농담처럼 들리니?

“명색이 신입니다. 그리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그러니까 네가 필요한 거란다.


- 너는 다른 용사들과 달리 진짜 죄를 짓고 연옥에 수감된 죄수 아니니.

세계수의 음성에 마나가 공명한다.

- 신을 죽인 자.

찌르르 울리는 압박감은 어느새 참새는 어느새 봉황이 되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 신살자, 김우진.

봉황이 또박 또박 이름 석 자를 내뱉었다.

- 우리와 함께 하는 게 어떻겠니.

* *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는 이제 그냥 시종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소멸된 집무실을 리모델링하던 드워프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근데 뭐 딱히 새삼스럽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래.”

업무가 벌목이나 호수 만들기 같은 환경조성 출역에서 리모델링으로 바뀌었을 뿐, 드워프들은 꾸준히 소장에게
부려먹어져 왔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네. 무슨 천하제일 노예 대회도 아니고.”


“맞습니다. 저희가 진짜 죄수도 아니고.”

연옥에 갇혔고 죄수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죄수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진짜 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그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의미가 다르네.”

불평하긴 했지만 데르카인이 순순히 김우진의 말을 듣는 건 그 이유가 가장 크다.

김우진의 숨겨진 비밀을 알았기에, 그가 단순한 신의 개가 아닌 무언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그리고 신을 향한 적의가 느껴졌기에.

어째서 신들에 의해 임명된 연옥의 소장이 신들을 적대하고 그들의 눈을 속이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나.

예로부터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전 조금 불안합니다. 연기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연기? 굳이?”

데르카인 또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장에게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함정을 파봐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징벌방에 넣는 것뿐이다. 그리고 소장은 아무런 이유 없이 넣을 수도,


저번 탈옥을 핑계로 그들을 완전히 나락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장은 그러지 않았다.

“연기도 다 얻을 게 있으니까 하는 거네. 그런데 소장이 그걸 연기해서, 우리를 속여서 얻는 게 뭐지?”


“···없네요?”
“그래, 없네. 그래서 내가 주저 없이 소장의 손을 잡기로 한 거고. 내 촉이 말하고 있네. 소장과 함께하면
우리를 여기 가둔 개자식들한테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라고.”

데르카인의 발언에 드워프들이 흥분했다. 데르카인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또한 연옥에서 버린 시간들이 적지


않았고 그만큼 신에 대한 분노를 쌓아왔다.

“···근데 저것들은 뭐하는 겁니까?”


와아아아!
막아!
죽여!

드워프들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축사장이었다. 풀려난 축사장의 몬스터들이 수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장이 이제는 수인들에게 축사장을 맡겼다고 했네.”


“수인들도 소장과 손을 잡은 겁니까?”
“16 대 1 을 하고 의지가 팍 꺾인 것 같더군.”
“소장이 진짜 괴물이긴 하군요. 저 같아도 꺾일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

대충 대꾸해준 데르카인이 집무실의 설계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한 장 더 넘기자, 또 다른 종이가


드러났다.

집무실 리모델링과 더불어 소장의 또 다른 명령.

[투기장 건설.]

투기장이라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끄응, 데르카인이 신음을 사켰다.

* * *

“그러게 가지 말라고 했지 않나. 김우진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우주가 보이는 신전.

연옥에서 복귀한 베른 오르티안은 신전의 정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바라던 대로 무언가 얻은 것이라도 있나?”


“···신경 끄십시오.”
“조급한 건 알고 있지만 신이라는 자가 그리도 권위가 없어서야.”
“크게 보면 실패한 건 당신 때문이 아닙니까?”
“그건 또 재미난 추론이군.”

후후, 남자가 느긋하게 술을 음미했다.

“당신이 보낸 집행자들의 수준이 부족해 고작 이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강민식이 붙잡혔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을 겁니다.”
“이야기는 똑바로 해야지.”

남자가 다리를 꼬았다.

“너희들이 도움을 요청해 그 조잡한 계획에 조금 도움을 준 것 아니더냐. 나는 애초부터 그 따위 조잡한 계획에
찬성한 적이 없었다.”
신들의 위신을 깎아먹는 한심한 놈 같으니.

“네놈들이 바라는 대로 한 번의 기회를 주었고 실패했다.”


“···아직 한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 심어놓고 왔습니다.”
“그래 봤자겠지. 한 번 더 주제를 모르고 설치면 더 이상의 자비를 보여줄 수 없음이다.”

아무리 관대한 신이라도 그 자비는 무한하지 않으니.

“그러니.”

쨍그랑, 잔이 깨어졌다. 유리 조각들과 술 방울들이 허공에 체공했다.

“얌전히 있거라. 가만히, 죽은 듯이. 괜히 김우진이 경계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다.”


“······.”
“꺼져라.”

그의 축객령에 베른이 이를 악물고 사라졌다.

“신이시여.”

그를 모시는 여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인원을 추렸습니다. 전부 다섯입니다.”


“적당하구나.”
“예, 목숨을 바쳐서 반드시 과업을 완수할 겁니다.”
“그래. 이후 김우진의 반응이 궁금하군.”

딱, 조각들을 다시 하나로 합친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술이 씁쓸했다. 하지만 과업이 완수되는 날이면 다시 달아질 것이다.

아마도.

───────────────
# < 043. 당부 >

“···신을 죽였다고요? 누가요? 소장님이요?”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창백하게 질린 율리아와는 반대로 김우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을 만큼 태연했다.

“저는 연옥의 소장입니다. 가두어진 죄수가 아닌, 가두기 위한 간수. 그 누구도 간수를 죄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넌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고.


- 신들도 알고 있단다. 다른 용사들처럼 너를 가두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신입니다. 신이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관리자라고 모욕하고 폄하하긴 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진짜다. 백신전의 신들은 모두 신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지.


- 네가 그들이 잊고 있던 ‘공포’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에.

“···알베니우스입니까?”

- 알베니우스가 너의 필요성을 가장 부르짖기는 했지.

“알베니우스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당장은 이 차원에 없단다. 워낙 자유로운 존재이니.

김우진은 스스로가 조금 당황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알베니우스와 함께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는 것도.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대체 당신과 알베니우스가 노리는 것이 뭡니까?”

아니, 그 전에.

“승산은 있습니까?”

백신전은 전 우주를 다스린다. 그들의 손에 쥐락펴락되는 차원이 한두 개가 아니며 그들 밑의 군단은 결코 약하지


않다.

세상이 탄생한지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탄생한 용사가, 집행자가 된 용사가 몇이겠나.

신의 군단은 전원 전직 용사들이다. 그들이 개떼같이 몰린다면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김우진이 가진 가장 큰 의문은 그것이었다.

신은 신이다. 그들이 가진 힘이, 세력이 강하기에 신으로서의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거다.

그가 굳이 그들과 합의하여 억지로나마 소장을 맡은 이유이기도 했다.

- 신들의 치세는 오래되었고 시간은 그들을 더 없이 오만하게 만들었지.


- 이 우주에 그들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개미들이 여럿 모여 봐야 인간 하나한테 안 된다는 것, 아시잖습니까?”

- 개미들만 모인다면 그렇겠지.


- 대부분은 개미겠지만 호랑이도 있단다. 알베니우스나 나와 같은.
- 그리고 용사들도 많단다.

“용사‘였’던 이들이겠지요.”
사실, 용사의 힘을 빼앗겼다고 해서 용사가 완전한 약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용사의 권능이란 결국 한계를 넘게 해주는 힘. 피조물의 벽을 부수게 해주는 신의 힘이다.

그것을 빼앗긴 용사는 그저 평범한 강자로 돌아갈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한 차원에서 최강이라 불리겠지만 용사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연옥에 있지 않으면서 신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이런 자들을 의미한다.

-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안단다.


- 하지만 우리도 나름의 방책이 있어. 연옥이 무너지고 그 분노가 우리를 향하겠지만 비틀어 낼 수 있단다.

“그 방법이 뭡니까?”

- 그건 네가 확실하게 우리에게 동조하겠다는 맹세를 해야지만 알려줄 수 있단다.

“맹세합니다.”

- 살아온 세월이 세월인만큼, 그런 말뿐인 맹세를 믿을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지.

“제가 신들과 맺은 계약을 원하시는군요.”

- 그것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불가합니다. 적어도 지금의 상태로는. 저는 보다 확실한 것을 원합니다. 당신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와 같은.”

- 그래도 일단은 호기심은 있다는 뜻이구나.


- 무작정 신의 졸개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한 알베니우스의 말이 맞았어.

참새가 웃었다.

- 허면, 보다 진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구나.

“다음에 말입니까?”

- 아마 그때는, 알베니우스가 함께할 것이란다. 너도 그쪽이 더 낫지 않겠니?

“···알베니우스.”

김우진이 그리운 이름을 되뇌었다.

“확실히 그게 낫겠군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많든, 적든.

* * *

···신을 죽였다고?
신을?
돌아가는 대화를,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해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범주였다.

물론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와 알베니우스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신살은 아득한 미래의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일, 하지만 언제 이룰지는 알 수
없는 미지.

그런데 김우진은 이미 이루었단다. 그럼에도 멀쩡히 신들과 거래를 해 살아있단다.

그런 게 가능한 건가?

‘가능하지. 그러니까 눈앞에 있지.’

율리아는 스스로의 멍청한 생각을 접었다.

- 혼란스럽니?

김우진은 이미 사라졌다. 세계수가 율리아와의 독대를 바랐기 때문이다.

“···네, 조금. 아니, 많이요.”

- 달라지는 건 없단다. 넌 연옥에서 네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 돼.

“정말로 소장님이 신을 죽였나요?”

- 굳이 거짓말을 말할 필요가 있니?

“···알베니우스님이 왜 소장님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알겠어요.”

- 조금 과장이 섞였을지언정, 거짓은 없지.

“그런데 왜 신들은 소장님을 소장으로 만든 건가요? 신을 죽였다면 양립할 수 없는 대적 아닌가요?”

- 신을 죽였기 때문이란다.

신은 지고한 존재다.
완전무결한 존재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껴본 적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최초의 신들이 생겨난 이례로 그들의 숫자는 평생 늘어가기만 했다. 그것을 부순 게 김우진이다.

피조물이 신에게 도전했다. 그리고 신을 죽였다.

신들은 아흔아홉이 남았고 함께 싸운다면 분명히 김우진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를 죽이기 위한 과정에서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죽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누구도 그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은 합의했다. 관대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용서라는 이름으로 피했다.


세계수의 설명에 율리아는 납득했다. 솔직히 신들의 태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었다.

“그런데 왜 완전히 손을 잡지 않고 여지를 두나요? 어머니 나무의 말씀대로라면 반드시 잡아야할 존재가
아닌가요?”

-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

이유야 어떻든, 그는 연옥의 소장이 되었다.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무려 20 년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20 년은 티끌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20 년은 결코 짧지 않다, 그 시간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어떻게 짐작하겠나.

- 일말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해.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이니까.

“···이해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한 가지 의문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겼다.

“어머니 나무께서는 그걸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시는 거예요?”

신과 김우진, 백신전과 김우진의 일이다.

거기에 설마 세계수들이 개입한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신들이 세계수를 가만히 둘리가 없으니.

표면적으로는 서로 필요에 의한 협력 관계지만 그 상하관계는 명확했다. 단순히 백신전의 배려로 상하로 구분짓지
않을 뿐.

알베니우스도 아니다. 그는 율리아에게 신들로부터 도망쳤다고 했으니. 결코 마지막 전장까지 함께 하지 않았다.

- ···역시 율리아, 날카롭구나.

세계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 너에게만 알려주마.

참새가 속삭였다.

- 사실.
- 신들 중에는.

“······!”

율리아가 경악했다.

“정말로요?”

- 그래. 그러니 절대 김우진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그가 확실하게 우리와 함께하기 전까지는.


- 이건 단순한 부탁이 아니니 명심하고.

세계수의 마지막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왜? 라는 의문만이 그녀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 * *

“가자.”

김우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짐을 털어내려 왔던 데이드람에서 오히려 짐을 얻어 버렸다.

물론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 내가 길러낸 영약들이란다.
- 릴리에게 주렴.
- 생물학적 부모가 되어서 그런 험지로 보냈으니 마음이 하루도 편하지 않구나.

참새가 있지도 않는 눈물을 닦아내며 최상급 영약 꾸러미를 건넸다.

무려 다섯 개. 과연 세계수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러면 레이먼드나 데이지에게 굳이 영약을 구할 필요 없다고 말해줘도 되겠는데요?”


“아니. 그거야 말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영약이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세계수가 다섯 개를 줬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둘은 다시 상단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장님!]

통신구가 울렸다.

그건 평범한 통신구가 아니었다. 차원을 뛰어넘어 통신할 수 있는 권능의 통신구였다.

당연히 그 발신자는 김우진을 대신해 현재 연옥을 관리하고 있는 부소장이었다.

“무슨 일이지?”

[상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 새로운 죄수들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 일단의 문장에서 김우진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죄수‘들’이라고?”

용사는 흔하지 않다. 신의 제안을 거부한 용사는 더욱 많지 않다.

당연히 죄수는 드물고 적어도 김우진이 연옥을 맡아온 20 년 동안 여러 명의 죄수들이 한 번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예, 열 명의 죄수들이 내일 한꺼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걸 좋아해야해, 말아야해?”

무언가 벌어지고 있었다.

* * *

“신이시여.”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주인이 권태로운 눈빛을 보냈다.

“김우진이 연옥을 벗어났습니다.”


“또 다시?”
“헌데 이상합니다. 그 어느 차원에서도 김우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모든 차원을 관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부 버려진 차원을 제외한 모든 곳을 관리한다.

김우진이 소장으로 있는 연옥부터, 아주 작은 차원까지 전부 신들의 손바닥 위에 있다.

차원의 방벽에 대한 권한 또한 당연히 신들에게 있다. 헌데 김우진이 연옥을 나간 흔적이 포착되었으나 어디론가
들어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돌아왔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갔다 들어왔다면, 그 흔적이 남을 테니.

둘 중 하나다.

김우진이 몇 안 되는 버려진 차원을 찾아 갔거나.

“어느 나무가 김우진에게 협조하고 있는 모양이군.”

지고의 경지에 오른 세계수가 차원의 방벽에 새겨진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거나.

남자의 눈매가 휘어졌다.

“찾아내겠습니다.”
“찾아? 찾아서 무엇을 하려고?”
“당연히 김우진을 도운 죄를 물어 대가를 치르게···.”
“아서라. 들쑤신다고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세계수는 결코 많지 않다. 그들은 꾸준히 그 영향력을 높이고자 씨앗을 퍼트려왔으나 애초에 세계수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별처럼 많은 차원들 중 세계수가 있는 비율을 따지자면 대략 1%정도. 허나 그것만으로도 적다고 할 수는 없다.


1%도 1%나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 세계수란 분명히 경시할 수 없는 존재들. 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줄타기를 하는 모습은 분명히 언젠가 치워야 할 버러지 같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굳이 그런 일에 내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 김우진을 싫어하는 자들에게 슬며시 흘려라.”

그들이 알아서 어떤 수라도 낼 테니. 특히, 베른과 같은 놈들이.

“예. 신이시여.”

여인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날뛰는 신들의 행동에, 과연 김우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흥미로웠다.

───────────────
# < 044. 감 >

김우진은 급하게 연옥으로 복귀했다.

10 명의 죄수들.

적어도 그가 연옥의 소장이 된 20 년 동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이전의 과거는 잘 모르나 데르카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소 300 년간은 마찬가지였다.

당연하다.

차원이 아무리 우주의 별처럼 많다고 해도 멸망의 위기에 닥친 차원이 몇이며, 간택된 용사가 그 세상을 수호할
가능성이 몇이며, 신의 말에 따르지 않고 힘을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은 또 몇인가.

“열 명, 열 명이라.”

관리자 놈들의 수작질이 분명하다. 과연 무엇일까.

저것들이 과연 진짜 용사일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갔다. 설마 신들이 집행자를 용사로 둔갑시켜서 넣었겠나.

아마도 그저 유보했을 뿐일 거다. 그를 엿 먹이기 위해 마땅히 연옥에 가야할 죄수들을 보내지 않고 억류해 두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한 번에 보내는 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받아야지.”

신들이 보내는 죄수를 받는다. 그건 결코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열 명의 용사들 중에 관리자들이 보낸 개가 얼마나 되는지, 꿍꿍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파악하는 거다.

“아예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어찌 되었든 감옥에 들어온 이상 죄수고 김우진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그들을 잘 다져서 출소하게 만든다면
순식간에 10 명을 클리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김우진과 신들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날도 그만큼 당겨질 거고.

“열 명 전부 내보낸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열 명의 용사들을 한 번에 보내는 지는 결국 중요하지 않다.

신들은 스스로의 멍청한 자충수에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조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들과의 대면은 상담실에서 이루어질 테니.

“···데이드람의 세계수한테 영약을 넉넉하게 받아와서 다행이네.”

그전에 릴리를 다시 하늘구름에 넣어야 한다.

* * *

날이 밝았다.

모자를 쓰고 담배를 한 대 태운 뒤, 죄수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11 시 정각. 1 초의 오차도 없이 정문이 벌컥 열렸다.

익숙한 시커먼 호송관들이 고개를 내민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지만 이질적인 것은 갖가지 구속 도구들을 착용한 채, 따라오는 죄수가 하나가 아닌 열


명이라는 것.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장님.”

호송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죄수들에 대한 서류를 건넸다.

서류에 등록된 사진들과 실물들을 대조해보며 죄수들 한 명, 한 명을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특이한 죄수를 발견했다.

“본 적은 있지만 연옥에서 보는 건 또 처음이군.”

말과 같은 하체에 붙여진 인간의 상체. 켄타우로스다. 켄타우로스 용사라니.

켄타우로스 엄연한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이종족이다. 하지만 그 수가 극히 적고 용사로서 활약할 수 있는 차원도


적다.

대부분의 차원의 주 종족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용사의 과업은 그들의 편에 서서 종말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켄타우로스가 익숙하기보다는 생소한 차원이 더 많고 용사로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는 차원들도 많았다.


때문에 켄타우로스 용사는 드물었다. 거인족보다 더.

“인간 여섯에 엘프 하나, 드워프 하나에 수인 하나라. 골고루군. 특이사항은 있나?”

절반 이상이 인간이라는 건 좋은 일이다. 심지어 여섯 중 둘은 지구 출신이었다.

“딱히 없습니다.”
“어째서 용사들이 한 번에 열 명이나 들어온 거지?”
“우연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용사가 생겨나고 그들이 죄수가 되는 건 결코 계획적인 일이 아닙니다.”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군.”
“저는 지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제게 물으신다 한들 원하시는 대답을 들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호송대장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대꾸했다.

“출소자는 잘 도착했겠지?”
“그는 신께서 부여해준 신의 힘을 자진하여 반납하고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온전히 소장님의 과업에
추가되었습니다.”
“가봐.”
“예,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열 명의 죄수들을 남긴 집행자들이 사라졌다.

“차례대로 한놈씩 상담실로 넣어라.”


“예.”

상담을 시작했다.

“너희들이 용사로서 얼마나 떠받듬을 받고 살았는지, 어떤 존재인지 나는 티끌만큼도 궁금하지 않아. 얌전히
있을래? 아니면 일단 한 대 맞을래?”

똑같은 시작, 거기에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용사는 없다.

“널 죽여 버리고 여기서 벗어나겠어!”

인간 용사 1179 번.

“지구인? 나도 지구인이야! 지구인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날 제발 내보내 줘!”

지구인 인간 용사 1180 번.

“오냐, 다르멘을 구한 전설의 용사가 나야, 이 개새끼야!”

지구인 용사 1181 번.

“나는 용사다! 죄수 취급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죽어!”
“대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용사라고! 세계를 구한 영웅!”

인간 용사 1182 번, 1183 번, 1184 번은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처음엔 현실을 부정하고 분노했으나 힘 앞에


굴복하고 비탄했다. 그리고 굴복했다.
그중에서 1184 번은 유난히 강했다. 단순히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집행자 제안까지 받았을 것이 분명한 실력이다.

“그러니까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개소리도 정성껏 하는군. 감히 나를 가둘 수 있는 놈은 없다! 사지를


뽑아 씹어 먹어주마!”

1185 번, 수인 용사. 짐승은 역시 그 특성에 맞게 끈질겼고 그만큼 더 맞았다. 기절시킨 후, 독방에 던져놓았다.

“···용사로서 정점에 오른 입장에서 말하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저는 당신을 이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허나,
이 황당한 감옥에 그대로 갇힐 수도 없는 노릇.”

1186 번, 엘프 용사. 역시 엘프는 모든 용사들을 통틀어 가장 침착하고 전투를 지양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패배를 인지했으나 싸웠고 김우진에게 굴복하여 죄수로 안착했다.

“내가 직접 제련한 도끼가 열기에 녹아? 제기랄, 넌 대체 뭐야?”

1187 번, 드워프 용사는 무기를 녹여버리자 손쉽게 굴복했다.

“···그렇군. 이곳이 연옥이라는 곳인가. 힘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갇히다니. 신이라는 자들이 옹졸하기
그지없군. 난 그대와 싸울 마음이 없소.”

그리고 대망의 1188 번, 켄타우로스. 그는 무척이나 건장한 전사였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오늘 들어온 열 명의
용사들 중 가장 강인했다.

그리고 김우진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연옥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오래 전에 연옥에서 돌아온 자가 있었소. 내 할아버지셨고 그분은 위대한 전사셨지.”
“그자가 너한테 말해주었다?”
“맞소.”
“그럴 리가.”

신들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피조물들의 차원에 연옥에 대한 정보가 퍼지는 건 결코 그들에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김우진이 알기로 힘을 반납한 용사는 맹세를 한다. 김우진과 신들의 계약처럼 신조차 어길 수 없는 맹세를.

연옥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놈이 관리자가 보낸 첩자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수백년만에 돌아오셨다고 했소. 그분은 늘 분노하셨지. 허나, 어렸을 때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몰랐소. 할아버지는 그 대상에 대해서는, 분노의 이유에 대해서는 항상 함구하셨으니까.”
“그런데?”
“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이 연옥에 대해 이야기하셨소. 그리고 갑자기 일어난 균열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셨고 그 이후, 본적이 없소.”

맹약을 어긴 대가로 심연으로 굴러 떨어진 거다. 심연은 맹약을 어긴 자들이 가는, 신조차 나올 수 없는 지옥.
신들에 대한 분노가 너무 깊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실을 이야기 했다면 나름의 이해는 간다.

고작 삭히지 못한 분노 때문에 연옥에 굴러 떨어졌다는 건 개연성이 조금 부족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니까. 적어도 켄타우로스의 이야기만 듣자면 틀린 부분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내가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구려. 졸렬한 신 같으니. 어찌 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용사들이 두려워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지.”

그에 따른 신에 대한 적개심도 적절하다. 하지만 너무 적절해서 오히려 의심이 간다.

김우진은 어쩌면 이 켄타우로스가 신들이 심은 첩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일단은 내가 여기 소장인데.”


“그게 중요하오? 하든, 하지 않든 내가 힘을 포기 하지 않는다면 풀어주지 안을 텐데. 나는 힘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말이오.”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앞에 한 글자가 빠졌어.”

뻐억, 상담실을 울리는 타격음과 함께 켄타우로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굳건한 네 개의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볼품없이 뒹굴었다.

“크헉, 이게 무슨 짓인가!”
“너는 죄수고, 나는 소장이야. 어디서 반말을 찍찍 내뱉어, 말 새끼야.”

김우진이 수많은 죄수들 중 반말을 허용해 준 죄수는 딱 둘이었다. 죄수번호 1077 번, 연옥 최고의 장기수
데르카인. 그리고 죄수번호 1152 번, 엘프들의 대장이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켄타우로스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나는 반말을 한 적이 없소!”

켄타우로스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의 말이 맞다. 하오체는 반말이 아니니까. 하지만 애초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켄타우로스. 하이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수가 적고 특별한 종족이다. 하지만 그게 다른 죄수들과 차별점을 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그들은 수인들만큼이나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종족. 초반에 기강을 잡아놔야 편하다.

전투를 원치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싸워서 굴복을 시켜야 한다. 그래야 관리가 편하다.

“짐승이 인간과 겸상을 하며 하오체를 쓰는 것 자체가 문제야.”


“···그대 같이 무도한 인간은 본적이 없소! 과연 졸렬하기 그지없는 신의 하수인인가!”

네 개의 다리가 충격을 최소화하며 빠르게 몸을 바로잡았다. 상체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마나로 만들어진 창을
내던졌다.

────!
허나, 그것은 김우진의 가벼운 손길에 튕겨져 나갔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신의 하수인도 말이지.”

화륵, 불꽃이 피어오른다.

“능력이 되야 할 수 있는 거거든.”

너 같은 인간 상체에 말 하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지.

“나를 무시하지 마시오! 나는 위대한 칸의 일족이오!”

히히힝, 실제로 말의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질 만큼, 켄타우로스는 거칠게 투레질했다.
마나로 만들어진 거대한 랜스를 손에 들고 돌진했다.

검은 빛의 오러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하나의 거대한 창이 되었다.

켄타우로스들이 자랑하는 랜스 차징. 그 수가 많아질수록, 그 규모가 커질수록 파괴력은 극대화된다.

허나, 불행하게도 그의 상대는 김우진이었다.

불꽃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거대한 주먹의 형상은 창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주먹과 창, 부서진 것은 창이었다.

“크아아악!”

콰아아앙, 집무실이 흔들리는 거대한 충격과 함께 켄타우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콰직, 바닥을 기며 꿈틀거리는 그의 육신을 김우진의 다리가 짓밟았다.

그리고는 다른 아홉 명의 죄수들에게 했던 사상검증을 끝으로 상담을 마쳤다.

“신, 개새끼 해봐.”

* * *

“···10 명 모두 했어.”
“···예?”

무엇을 말이지.

부소장은 잠시 대화의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에 잠겼다.

“10 명 모두 사상 검증을 통과했다고.”


“사상검증이라면?”
“신 개새끼 해보라니까 잘하더라고.”
“···고작 그게 통하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욕도 시켰는데 다 하던데.”
“아니, 애초에 그런 건 효과가 없지 않습니까.”
“지구에서는 잘 통했는데. 대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신실한 신자라면 신을 모욕하면 안 돼는 거 아니야?”
“저들은 신자가 아닙니다. 강민식처럼 단순히 대가를 약속 받고 신의 사주를 받은 거라면 신을 모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맞네.”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가정, 집행자를 죄수로 속여서 집어넣는다는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설마 신실한 신자인 집행자들이 임무라고 할지라도 신을 모욕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골치 아파졌어. 어떤 놈이 첩자인지 감이 안 잡혀. 있다며 몇 놈인지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맞아. 그리고 다행히 이쪽에는 아직 방법이 있어.”
“무엇입니까?”
“엘프는 엘프에게, 드워프는 드워프에게, 수인은 수인에게 맡기는 거야.”

시에나, 데르카인, 타르칸이 알아서 온갖 검증을 거칠 거다. 그들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러면 셋을 제외할
수 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합니까?”


“강민식에게 맡겨야지.”
“강민식 말입니까?”
“그래.”

강민식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신의 개다. 베른이 그렇게 알고 사라졌으니 다른 신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쓸 수 있는 카드를 쓰지 않을 놈은 없다.

“같은 신의 끄나풀로서 접근하면 살살 나올 가능성이 높아. 저놈들을 보낸 신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나를 엿


먹이는데는 이놈저놈 가리지를 않거든.”

그러니 첩자놈들도 강민식에 대해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강민식을 완전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안 믿어.”

강민식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김우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때 당시에는 진심이 느껴졌으나 인간의
마음이란 더 없이 간사한 법이니까.

그가 믿는 건 상황이다.

“놈의 마음이 어떻든, 지금은 협력하는 척이라도 할 수밖에 없어.”

그럼 누군가와 반드시 접촉을 하긴 할 거다.

그대로 김우진과 협력하는 사이가 되고자 한다면 진짜 첩자들과.


신에게 다시 마음이 돌아섰다면 가짜 첩자들과.

놈의 태도를 보고 결정하면 된다. 거짓말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내가 또 기가 막히게 잘 알거든.”


단순한 감이 아니라, 권능의 일종이라.

───────────────
# < 045. 무슨 짓 >

모든 일에는 상황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

단순히 교도관과 죄수들, 둘 만의 관계라면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하며 함께할 일이 없다.

하지만 거기에 관리자라는 공통의 적이 생기고 관리자가 감옥 내부로 첩자를 들여보낸 것이 확실시 된다면 거기에
맞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첩자를 찾아내라는 거네.”

엘프들을 대표하는 시에나 올름이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감히 소장님을···! 전부 다 찾아서 사지를 찢어버리면 되겠습니까?”

타르칸은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열 명이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하긴 했어. 300 년 동안 이 빌어먹을 곳에 있으면서 처음 겪는 일이니까. 신들이


첩자를 보내기 위해 일부러 섞어놨다는 의심은 합리적이네. 다만, 너무 티가 나지 않나?”

데르카인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확실히 전례가 없을 만큼 많은 죄수를 한 번에 보낸 건 오히려 너무 대놓고


첩자를 보낸다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죠.”

그리고 그 다음을 노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을 노리든, 다음을 노리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것도 그렇군.”
“그런데 그전에 말이야.”

시에나가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우리가 한 편인 거니? 아니, 솔직히 난 지금 상황 변화가 너무 빨라서 적응이 안 되거든. 그렇다고 네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언급을 한 것도 아니고.”

확실히 시에나는 그랬다.

타르칸은 아예 김우진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데르카인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스스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시에나와 엘프들은 달랐다. 율리아가 김우진과 교섭하여 협력하기로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율리아
개인의 문제였다.

그녀가 하이엘프이기에 엘프들이 그녀의 의도를 어느 정도 따라줄 뿐, 엘프들에게, 시에나에게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신이 싫습니까? 제가 싫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전자겠지?”
“이번 일은 신을 엿 먹이는 일입니다.”
“부족해. 네가 맹목적인 신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했단다. 하지만 그게 네가 신을 적대한다는 증거가
될까? 네가 우리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소장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데.”
“그렇긴 하죠.”
“애초에 갑자기 이렇게 신들을 적대하는 일에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릴리가 절 좋아합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좋아하는 건 확실히 가산점이긴 한데 부족해.”
“사실 시에나님을 제외하면 딱히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뭐?”
“율리아 카르센은 이미 저와 협력하기로 했고.”
“맞아요.”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칸 톨리스는 제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맞습니다. 저는 영원히 소장님을 섬길 것입니다!”

타르칸이 힘차게 대답했다.

“데르카인님은 마찬가지로 저와 함께하기로 했죠.”


“맞네. 다른 드워프들도 나와 함께 하기로 했으니 우리들은 소장의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저기 저 인간은?”

시에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구석에 앉아 있는 강민식을 가리켰다.

“강민식과도 거래를 했습니다. 신을 적대하는 일에는 당분간 함께할 겁니다.”


“그러니까 나 빼고 이미 이야기가 끝나 있었던 거구나.”
“원치 않으신다면 빠지셔도 됩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초를 친다면 그만한 대가를 받으실 겁니다.”

툭툭, 김우진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일정한 박자가 집무실을 흔들었다.

“···하, 누굴 바보로 아는 거니?”

이미 모든 죄수들이 돌아섰다. 심지어 하이엘프인 율리아 카르센마저 돌아선 상황에서 그녀 혼자 버틴다면 그저


고립될 뿐이다.

“신을 엿 먹이는 짓인 건 확실해?”


“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어그러트리는 일이면 엿 먹이는 짓이 맞지 않습니까?”
“맞아.”

그리고 그녀 또한 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만약 이 길이 신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길이라면 기꺼이


걸어갈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된다고?”

* * *
“반가워요.”
“고귀한 분이시여.”

율리아가 새로 들어온 엘프 죄수에게 접근했다.

본래 연옥에는 공식적으로 죄수들이 교류할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죄수들 대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김우진이 새롭게 신설했다. 일명 ‘운동 시간.’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죄수들을 한 시간 동안 연병장에 풀어 놓는 것이다.

정원 한 구석에 만들어진 연병장은 또 다른 담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구조였다. 물론 드워프들이 만들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자르 클테라고 합니다.”
“저는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고귀한 하이엘프께서 이런 감옥에 갇히다니. 어찌 세상을 구한 용사를 이리 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서워하는 거죠. 힘을 포기하지 않은 우리를.”
“···저들은 신이 아닙니까?”
“하지만 용사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반푼이들이기도 해요.”
“···잘못 들었습니다?”
“맞잖아요? 신이라면 전지하고 전능해야 해요. 적어도 제가 아는 신은 그래요. 그런데 세상을 구하는데는 용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우고, 수고한 용사가 힘을 포기 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어 버리죠. 그게 반푼이가 아니면
뭘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맞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죠?”

아자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가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살폈다.

‘가장 중요한 건 엘프야. 엘프는 누구보다 세계수의 기운에 민감하지.’

엘프가 첩자라면, 릴리는 하늘구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엘프는 반드시 이쪽의 편이 되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다행히 엘프에게는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그럼 아자르님은 신들을 미워하겠군요.”


“···함부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해해요. 신들의 편협함이 죄 없는 저희들을 이곳에 가두어 버렸으니.”

그래서 말인데요.

“한 가지 맹세를 해주실 수 있나요?”


“맹세 말입니까?”

아자르가 경계했다. 아무리 하이엘프라고 해도 처음 만난 자가 갑자기 맹세를 강요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아자르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에요. 그냥 단순하게 연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맹세면 충분해요.”
“···왜 그래야 합니까?”
“이곳의 죄수들은 아자르님과 마찬가지로 신을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가 신에게 꼬치꼬치 일러 바치는 걸
좋게 보지 않아요.”
“···저는 그런 박쥐같은 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렵지 않겠네요.”

율리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 그리고 그를 다그치는 하이엘프의 존재감.

두 박자가 딱 맞아 떨어졌다.

“···그냥 맹세하면 됩니까?”


“당연히 어머니 나무께 맹세해야죠.”
“어머니 나무께 맹세하건데 이곳에서 보고 듣고, 있었던 모든 일들을 그 누구에게도 고하지 않겠습니다.”

마나의 구속이 아자르의 심장을 옥죄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왜 이렇게 구속이 단단···.”


“아,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도 맹세해주세요.”
“그건···.”
“아니면 아자르님은 신에게 이용당하고 감옥에 갇혔음에도 여전히 신을 믿고 따르고 있나요?”
“···저는.”

엘프 컷.

* * *

사실 엘프를 첩자로 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엘프가 존재하는 모든 차원에 세계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엘프가 세계수를 믿고 따른다. 세계수에
대한 맹세는 그들로서는 결코 어길 수 없는 절대 법칙이다.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에 엘프는 거짓말을 잘하지 않는다. 맹세로 증명할 수 없으면 거짓이라는 게
쉽게 들통 나 버리니까.

그래도 확실한 게 좋기에 율리아로 하여금 맹세를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야 왔어. 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니까?”

- 삐.

새장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을 한창 오버한 나머지 토라진 릴리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뒷모습도 참 귀엽다. 이 맛에 사람들이 새를 기르는 건가.


시커먼 덕구나 춘식이보다 훨씬 힐링 된다.

“그래도 덕분에 당분간은 이제 들어갈 필요가 없어.”

- 삐?

“새장에는.”

김우진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 삐이이이! 삐삐! 삐이이이이익!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어조와 의도는 충분히 통했다.

억울하다, 약속을 어기는 게 어딨냐, 뭐 이런 거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네 성장은 생각보다 빨라.”

영약을 추가로 섭취한 세계수의 기운은 상상이상으로 충만했다. 연옥에 갇힌 게 모두 머저리들이면 모를까,
용사들인 이상 세계수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엘프라면 세계수의 하늘구름을 완전히 가동해야만 감출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담장 안에는 들어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첩자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그래야만 한다.

“대신 내가 매일 올게.”

- 삐이?

저건 ‘진짜지?’ 정도의 느낌이다. 고작 그 정도에 풀어지려고 하다니. 김우진은 반성했다.

처음 세계수가 발아하고 율리아에게 친밀도 시험을 하기 전까지는 매일 같이 함께 했으나 그 뒤로는 탈옥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소홀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아무리 바빠도 릴리는 꼭 봐야지.”

- 삐!

릴리가 김우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일반적인 새와는 완전히 다른 포근함과 상쾌함이 느껴졌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던 릴리가 기쁜 얼굴로 날개를 내밀었다.

- 삐삐. 삐삐삐, 삐이이이, 삐삐.

“손잡자고?”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 삐삐삐이이이이, 삐삑!
음, 이제 제법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도저히 모르겠다. 릴리는 언제쯤 다른 세계수들처럼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될까.

“뭐라고 하는 거야?”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던 율리아가 대꾸했다.

“아주 눈물 없이는 못 보겠네요. 어머니 나무님, 저는 아예 보이지도 않으시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 삐.

“죽이 잘 맞으시네요. 좋은 건 좋은 거고 거래는 거래니까 초과한 시간만큼의 영약을 달라고 하세요.”


“마음에 안 든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안 배웠어?”
“제가 거짓말을 왜 해요? 그리고 그런 법은 대체 누가 가르쳐 주는데요?”

율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 나무님, 제가 어머니 나무님의 말을 왜곡했나요?”

- 삐이.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미친.”

이렇게 계산적이고 세속적인 세계수라고?

“말이 안 되잖아. 세계수가 왜 이래?”


“자업자득이죠.”
“자업자득?”
“한 가지로 밖에 설명이 안 되잖아요. 어머니 나무의 씨앗에 누가 강제로 간섭하는 바람에 시전자의 성향에까지
영향을 받았다는.”
“그러니까 내 탓이다?”
“일반적인 어머니 나무께서는 그러지 않으시니까요.”
“크라프트의 세계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정정할게요. 만년이 넘지 않은 일반적인 어머니 나무께서는 그러지 않으시니까요.”
“···어디 가서 눈탱이 맞지는 않겠네.”

누가 키웠는지 참 잘 키웠다.

“하지만 네가 요구한 영약은 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없기 때문이지.”

하루 있는 대가로 영약 세 개를 받아갔다. 얼마나 오래 하늘구름을 발동시켜놔야 할지 모르는데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리가.

김우진은 그대로 달아났다.

- 삐이이이이!
* * *

“릴리는 진정했어?”

김우진은 저녁을 먹은 뒤, 율리아를 호출했다.

“간신히 달랬어요. 잘 말씀드리니 이해해주시더라고요.”


“다행이네.”
“그 대신 내일 아침에 바로 찾아와달라고 하셨어요.”
“물론이지. 앉아.”
“어머니 나무 때문에 부르신 것 아니었어요?”
“겸사겸사.”

율리아가 자리에 앉았다. 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고민을 뜻한다. 아주 잠깐의 침묵, 김우진이 입을 연다.

“엘프는 어때?”
“확신할 수 있어요. 첩자가 아니에요.”
“다른 죄수들은?”
“다른 죄수들이 다방면에서 접촉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럴 것 같았어. 그래서 말인데 너를 비롯한 죄수들의 협조가 필요해.”
“무슨 일인데요?”

김우진이 손가락을 폈다. 세 개였다.

“조만간 연옥에는 세 가지 우연이 발생할 거야.”


“우연이요?”
“우연히 감옥의 시스템이 마비되어 독방의 문이 열리고.”

손가락 하나가 접힌다.

“우연히 대부분의 교도관들이 자리를 비웠으며.”

손가락 두 개가 접힌다.

“우연히 구속구를 풀 수 있는 죄수가 나타나는.”

마지막 손가락이 접힌다.

“탈옥을 유도하실 생각인가요?”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본성이 나와. 아무리 생각해도 관리자들이 나를 엿 먹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탈옥이고.”
“하지만 신들의 첩자라면 강민식님처럼 나갈 수단이 있을 거예요. 굳이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야만 하니까.”

김우진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신들이 수작을 부렸고 실패했어. 과연 그게 끝일까?”

오만한 신들은 수작을 부렸다가 실패했다고 순순히 ‘죄송합니다’하고 물러나지 않는다.

실패를 묻을 더 큰 성공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고 패턴이다.

찬란한 광영을 통해 더러운 그림자를 없애는 건 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열 명의 죄수들은 그 전초일 터.

“그러니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움직임이 있기 전, 첩자를 골라내고 가능한 많이 출소시킨다.

김우진은 저들의 뜻대로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 * *

남자가 천천히 걸었다. 거대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넓은 대전, 아흔 아홉의 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늦으셨습니다.”
“딱 맞춰서 들어왔을 뿐이다.”

남자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대회의라. 30 년만이군.”

딸각,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안건은 뭐지?”
“김우진에 관한 것. 네가 오기 전에 이미 합의를 끝냈다.”
“결론은?”
“한 번의 실패로 기껏 눌러놓았던 적대감이 다시 폭발했을 공산이 크다. 때문에 김우진을 이대로 방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연옥에, 세 가지 ‘우연’이 벌어질 거다.”

대회의를 주도하는 집정관이 손가락을 튕겼다. 세 개의 빛줄기가 일어났다.

“우연히 세상을 멸망시키는 악의가 연옥에까지 스며들었고.”

하나의 빛줄기가 테이블 중앙으로 나아갔다.

“우연히 그 혼란 속에서 죄수들이 탈옥했으며.”

두 번째 빛줄기가 중앙의 빛과 합쳐졌다.


“우연히 그들이 도망친 차원이 신의 권역이 될 거다.”

마지막 빛줄기가 더해졌다. 환한 빛줄기가 회의장 전체를 밝혔다.

허나,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없앤 건, 집정관이 아니다. 남자다.

“이제 와서 다시 전쟁이라도 하자고?”


“신을 잃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신은 완벽해야 하고, 온전해야 한다. 백신전에 더 이상의 흠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따악, 집정관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긴다. 빛이 일렁이나 이전과는 다르다.

빛은 하나의 형태를 만든다. 계약서.

“그를 압박해 계약을 수정할 거다.”

김우진의 목에 걸린 목줄을 더욱 튼튼하게, 그리고 유통기한이 없게 만드는 것.

“응하지 않는다면?”
“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그것이 이번 계획의 목적이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046. 귀휴 >

“죄수들의 식사에 이걸 섞으라고요?”

죄수번호 1176 번, 베르너 레트만은 교도관이 건네주는 작은 알약 열 개를 받았다.

“이번에 들어온 죄수들 중 엘프를 제외한 이들의 식사에 섞으면 된다. 국에 넣으면 자연스레 녹아들 거다.”
“열 개입니다만?”
“다른 하나는 1177 번의 것이다.”
“이게 대체 뭡니까?”
“소장님의 지시니 그냥 따라라.”
“소장님의 지시라면 그래야죠.”

베르너가 알약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특별한 마나의 느낌도 없었다.

“진짜 그냥 약인가?”

그렇다면 새로 들어온 죄수들과 요주의 인물인 강민식만 콕 찝어서 넣을 리가 없다.

“무언가 꾸미시는 모양이네.”

베르너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미 한 번의 기회를 얻었고 두 번은 없다고 경고를 받았다.

까라면 까고 모른 척 하라면 모른 척 하면서 연옥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붙어 있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아직 다루어보지 못한 식재료가 많으니 말이야.”

전 차원의 식재료들이 몰려드는 연옥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다지였다.

* * *

고의적으로 사건을 일으켜 죄수들을 궁지에 몬다.

김우진은 지난 20 년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려면 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좋아서 연옥의 소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저들이 진짜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강민식의 탈옥 사태를 기점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

첫 시도이자 첫 실패는 신들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김우진이 알고 있는 신들이라면 결코 그 모욕감을 감내하고,


그냥 넘기는 족속들이 아니다.

신이라고 불리기에 오만한 자들. 그들에게 체면과 자존심은 스스로의 목숨을 제외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하니, 김우진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역시 열 명의 죄수들 중 첩자를 골라내는 일이다. 아예 없다면 없는 대로 좋다.


하지만 김우진은 첩자가 없을 일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수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투기장이 완성 되었다.”

김우진은 죄수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투기장이라고 해봐야 딱히 대단한 것도 없었다.

몬스터들을 기르는 축사장, 그리고 그 내부에서 몬스터를 도축하는 도축장을 일부 개조했다.

크기를 조금 더 늘리는 확장공사와 함께 5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중석을 만들었다.

“참가자 접수를 받겠다. 참가자들은 손을 들어라.”

따로 특별한 시설도, 장치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판만 깔아준다면 당장 달려들 놈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소장님! 약속을 지켜주실 줄 알았습니다!”

달의 늑대가 가장 먼저 손을 들어올렸다. 뒤이어 모든 수인들과 거인족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허나, 정작 참가하기를 바라는 신입들은 얌전했다. 아마, 눈치를 살피느라 그런 것이겠지. 아직 연옥에 들어온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니.
때문에 김우진은 기름을 부었다.

“참고로 우승자에게 내려지는 보상은 최상급 영약과 귀휴다.”


“영약?”
“···귀휴?”
“귀휴라면···잠깐이라도 감옥을 나갈 수 있다는 겁니까?”
“감옥을 나간다고?”
“이 거지같은 곳을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은 예상외의 파급력을 발휘했다.

“내가! 내가 나가겠네!”

무언가를 만드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던 난쟁이들을 이끄는 자가 간만에 도끼를 잡았다.

“···무조건 참가할게.”

엘프들을 이끌며 탈옥을 입에 달고 살던 엘프 또한 눈을 빛냈다.

“저요! 저요! 저도 나갈래요!”


“넌 이미 나갔다 왔잖아?”
“그거랑은 다른 이야기죠.”
“아니···.”

고귀한 엘프들의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출전하겠습니다!”
“귀휴! 귀휴!”
“단 하루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아아!”
“고향의 어머니 나무를 뵙고 싶습니다.”
“내 고향에는 어머니 나무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 땅을 밟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난쟁이들과 귀쟁이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귀휴라고? 잘만 하면 그대로 탈옥을···.”


“일단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모든 신입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총 40 명의 죄수들이 참가를 신청했다.

귀휴에 혹해 참가 신청을 하려다가 김우진의 눈빛에 슬그머니 손을 내린 강민식과 연옥에 만족하고 있는 소지를
제외한 전부였다.

* * *

“강민식님은 참여 안하십니까?”
이름이 뭐랬더라. 스페인 출신의 카를로라고 했다. 지구 출신이라는 것에 어찌나 반갑던지.

강민식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흥미가 없습니다.”


“귀휴가 말입니까?”
“···뭐, 나름의 사정이 있는지라.”

차마 김우진이 막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는 카를로님은 왜 신청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휴입니다, 귀휴.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나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말이 귀휴지, 나갔다고 그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애초에 그는 감옥에 있어야 할 죄수가 아니라 칭송 받아야 할 용사였다.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 소장이라는 괴물에게 당했지만 그런 괴물이 이 세상에 넘쳐날 리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소장이 강한 건 당연했다. 신이 연옥을 관리하라고 소장직을 준 자가 아닌가. 신의 대리인이 약할


리가 없다.

하지만 다른 용사들이라면?

카를로는 자신이 구원한 차원에서 더 없이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 받았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수십 번도 더


사선을 넘어왔다.

아무리 상대가 용사라고 할지라도 지지 않는다. 꺾고 우승하여 감옥을 나가는 거다.

“다른 용사들도 다 그런 마음이군요.”


“그래봤자 저를 이길 수는 없을 겁니다. 귀휴를 나갔다가 곧장 이 거지같은 곳을 벗어날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강민식의 입을 통해 그 이야기는 그대로 김우진에게 전해졌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뻔하지.”

그래, 너무 뻔하다. 그러니 일부러 귀휴라는 달콤한 과실을 던져준 것이 아니겠나.

“그런데 귀휴를 내보내주겠다는 게 거짓은 아니겠지?”


“절대 거짓이면 안 되네.”
“맞아요. 거짓말은 나쁜 거랬어요.”
“나가면 좋겠지만 저는 일단 싸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 효과가 너무 좋은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어쨌든 좋았다. 고작 귀휴 정도야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든지


내보내 줄 수 있다.

“귀휴도 계획이 제대로 실행된 뒤의 일입니다.”

김우진이 대진표를 펼쳤다. 40 명의 죄수들이 둘씩 짝지어진 토너먼트 형식이었다.


“신입들은 강자들과 붙게 대진표를 짰습니다.”

율리아, 시에나, 타르칸 그리고 데르카인. 그리고 죄수들 중 비교적 강자라고 여겨지는 자들까지.

데르카인의 장기는 장비 제작이지만 그 또한 세상을 구한 용사다. 그의 무력은 연옥의 죄수들 사이에도 손에


꼽힌다.

“최대한 빨리 기절시켜주면 됩니다. 그럼 뒤는 교도관들이 알아서 그들을 독방으로 실어줄 겁니다.”

확실한 카드인 네 명과 붙지 않는 자들은 설사 승리하더라도 2 차전에서 네 명과 붙게 만들었다. 안된다면 3


차전에서라도.

결국 모두 기절해 독방으로 실려갈 운명이다.

“그 다음은?”
“그 잘난 권능을 이용한 강민식이 알아서 할 겁니다.”

감옥 층에는 그들과 극소수의 교도관들만 남게 될 거고 그 틈새로 강민식이 접촉하여 탈옥을 종용하게 된다.

교도관과 소장은 전부 다른 곳에 가 있고 구속구는 풀어졌으며 함께 탈옥하고자 하는 죄수들이 있다.

그 상황에서 탈옥을 하지 않을 죄수가 어디 있을까.

거기서 김우진이 할 일은 간단하다.

찾는 거다.

방벽과 접촉하여 나갈 수 있는 자를, 신에게 열쇠를 받은 첩자를.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고 보네만. 자네는 강민식을 믿나?”


“믿지 않습니다.”

데르카인의 물음에 김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믿지 않는다. 그저 상황을 믿을 뿐이다.

강민식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그리고 나름의 대비도 해놨다. 그가 차원의 방벽까지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중간까지 죄수들을 인도하는
것, 그게 그의 역할이고 전부다.

그 선을 넘는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그의 가치는 현재 이중첩자라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투기장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 * *
“크흐흐.”

타르칸 톨리스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콰앙, 가벼운 발길질에 대지가 우그러졌다. 가벼운 손짓에 밀려난 공기가
나무를 베어 넘겼다.

그의 몸 풀기에 주변의 용사들이 경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새로 들어온 열 명의 용사들. 허나, 타르칸의 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에나 올름, 율리아 카르센, 그리고 데르카인 알베트. 잘만하면 전부와 싸워 볼 기회가 있을 지도.’

수십 년간 엘프들을 이끌어 온 자와 엘프들의 귀족. 그리고 300 년간 연옥에서 머물러온 노괴.

다른 죄수들은 영약과 귀휴에 혹해 눈이 돌아갔지만 타르칸은 싸움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투쟁은 수인의 본능이다. 수인들의 귀족, 달의 늑대인 타르칸은 그 본능이 더 강했다. 강자와의 피 터지는, 모든
것을 내던져야지만 하는 전투는 언제나 심장을 두근 거리게 만든다.

하물며 김우진을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신들과도 붙게 될 터, 오늘의 투기장은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초반에는 최대한 힘을 비축해야겠군.’

떨거지들에게는 관심이 없으나 소장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들을 빨리 처리하고 힘을 비축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모두 대진표는 확인했겠지?”

부소장의 외침에 몸을 풀던 용사들이 행동을 멈추고 집중했다.

“타르칸 톨리스, 카를로 디아고 앞으로.”

첫 번째 순사넌 타르칸. 상대는 카를로 디아고라는 스페인 인간이었다. 모든 이들이 물러나고 거대한 투기장
안에는 오직 둘 만이 남았다.

‘자신 있다는 건가?’

혹시나 했지만 진짜로 구속 장치를 모두 풀어버린 행태에 카를로는 조금 당황했다.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언뜻 보면 허술해 보이지만 사방에 마법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뚫으려면 뚫을 수는
있지만 단숨에 찢어발기지는 못하는 수준.

‘잠깐 머뭇거리는 순간, 교도관들이 달려들겠지.’

허나 진짜 문제는 상석에 앉아 오만하게 투기장을 내려다보는 소장이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다는 자신감. 아마 그게 구속 장치를 모두 풀어준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 좋아. 여기서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어.’

카를로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까. 토너먼트에서 승리하고 귀휴를 나가게 되어도 그럴까?
만약을 대비한 안전장치들이 있겠지만 소장이 직접 따라오지는 않을 거다. 그거면 된다. 그러면 무조건 탈옥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우선 네놈부터 죽여버려야겠군.”

카를로의 시선이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는 짐승에게 돌아갔다.

“구경은 끝났나?”
“신사인척 하지 마라, 더러운 짐승아.”
“···뭐라고?”
“너희들의 추악함은 수도 없이 겪어 왔다.”

카를로가 용사로 있던 세계에도 수인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만족이었다.

이성은 있으나 야성을 이기지 못하고 본능에 몸을 맡긴 짐승들. 그들은 하나의 왕국을 이루었으나 말만
왕국이었지 늘 인간의 국가들을 약탈하기 위한 도적때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마물화가 되어 진짜 적이 되기도 했다. 그에게 수인은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은빛의 짐승이 웃었다.

“내 앞에서 그 따위 말을 한 놈은 한 명 밖에 없다. 왜인 줄 아나?”


“알아야 하나?”
“알아야지.”

야성이 드러났다. 살기가 폭사되었다.

동시에 바람이 일었다.

───!

카를로가 본능적으로 권능을 발현시켰다. 오러로 이루어진 갑옷과 창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게 네 미래니까.”

공간을 격하여 날아드는 손톱과 충돌한다.

“크윽···!”

창이 부서진다. 갑옷이 찌그러진다.

카를로가 신음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지만 상대는 그가 재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

“···어떻게 수인 따위가!”

이어지는 충격.
산산이 부서져 소멸하는 갑옷.
숨 막힐 듯 한 살기와 광기.

그것이 카를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약해 빠졌네. 저런 능력으로 타르칸을 도발한 거야? 밖에서 만났으면 바로 머리가 뜯겨졌겠네.”
“저 짐승 놈. 신났군.”

관중석에 앉은 난쟁이가 자신의 애병을 어루만졌다.

“그토록 싸우기를 바랐는데 이루어졌으니 신날 수밖에.”


“귀휴는 내거네.”
“어머, 그건 날 이기고 이야기하지?”
“이길 거니까 하는 말이네.”

대진표 상, 서로 승리가 이어지면 데르카인은 시에나와 부딪히게 되어 있었다.

“어이가 없네. 누구 마음대로?”


“포기하게. 만약 자네가 날 이긴다고 해도 만약 율리아와 싸우게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겠나?”

율리아는 타르칸과 부딪힌다. 그리고 승자는 결승에서 데르카인 혹은 시에나와 만나게 된다.

“못 싸울 건 또 뭐야?”
“이길 순 있고?”
“날 너무 얕보는 것 아니야?”

애초에 하이엘프는 고귀한 것이지, 강한 것이 아니다.

“전 안 봐드릴 건데요.”
“네가 무조건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애초에 넌 타르칸이나 이기고 오렴.”
“그냥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에요.”
“나도 마찬가지란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엘프에 대한 예우 같은 걸 찾는 건 아니겠지?”
“아무렴요. 필요 없어요.”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네.”

두 엘프가 처음으로 반목하며 으르렁거렸다.

“엘프들의 동족애는 우주 최고라더니 아주 콩가루가 따로 없군.”


“그런 그쪽이야 말로 들어가서 잠이나 자지 그래? 실력도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누가 말인가? 내가? 내 도끼는 아직 녹슬지 않았네. 저 따위 짐승 놈은 단숨에 쪼개 버리지.”
“도끼는 아니어도 관절은 녹슨 것 같던데.”
“아직 팔팔하네! 500 년은 더 살 수 있어!”
“늙고 힘들어서 그냥 출소하겠다며?”
“심신미약과 감정에 호소한 선처 모르나!”
“아주 노괴가 따로 없네. 누가 이걸 드워프라고 해?”

김우진은 그 모든 대화를 들으며 강민식을 향해 눈짓했다.


미리 가서 이것저것 준비를 해놓으라는 뜻이며 그 뜻을 알아들은 강민식이 다른 죄수들의 눈을 피해 자리를 비웠다.

교도관 둘이 그 뒤를 따랐다.

───────────────
# < 047. 사냥 >

“으음···.”

눈을 떴을 때, 카를로는 독방 안에 있었다.

“···투기장은?”

마지막을 떠올렸다. 짐승의 성난 눈동자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커다란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말도 안 돼.”

상대가 용사라고 한들 그 또한 용사였다. 헌데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패배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나는 선택을 받았는데···!”

이건 무언가 잘못 되었다.

카를로가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기랄.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깜깜함이 눈앞을 지배했다.

자신의 오러를 단숨에 으깨던 그 괴물도 감히 탈옥을 하지 못했는데 과연 자신이라고 가능할지, 자괴감이 들었다.

물론 신들께서 기회를 만들어 주신다 하셨···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배급구를 연 것은 그때였다.

“···강민식님?”
“다행히 일어나 계셨군요. 깨우는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입니다.”
“강민식님이 어떻게?”

연옥에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대충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소지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은 통제된다. 무엇보다 교도관을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다닐
수는 없다.

헌데 지금은 정해진 시간도, 강민식의 곁에 교도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민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탈출했습니다.”

마치 마실을 나간다는 듯한 평이한 어조였다. 그래서 더 괴리감이 있었다.

“···예?”
“구속구를 부수고 감옥의 문을 따고 탈출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건 또 뭡니까?”

치익, 강민식이 반쯤 부식된 구속구를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저는 독의 권능이 있습니다. 마나와 섞어 술식 자체를 부식시켰습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물론 사명을 부여 받은 그 또한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소장과 대부분의 교도관들은 여전히 투기장에 있습니다. 지금 이 층은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탈옥 하기 딱 좋은···.”
“맞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만, 함께 하시겠습니까?”
“···방법은 있습니까?”
“제가 왜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직 이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아.”

귀휴라는 큰 보상이 걸려 있음에도 왜 참가하지 않는지 의아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이야. 더 없이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카를로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콰앙, 그 순간 문이 부서졌다. 강민식이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예!”

강민식의 손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신이 내려준 동아줄 같았다. 잡아야 한다고, 이 기회를 놓치면 결코 두 번은
없을 거라고 본능이 소리쳤다.

손을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엘프를 제외한 아홉 명의 신입 죄수들이 함께였다.

* * *

“나갈 수 있다.”

마지막 도전이 실패한 이후, 데르카인은 탈옥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김우진이 신들과 한 배를 탄 게 아니라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오히려 적대감이 있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신에게 복수하는 것에 남은 인생을 바치고자 했다.

거기에 당연히 고향으로의 귀향은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하단다.
귀휴를 내보내 준단다.

이걸 어떻게 참겠는가.
그 보상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단 하루라도 좋다. 나갈 수만 있다면. 고향으로 가서 가족들의 안위를 살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기꺼이 도끼를 잡으리라.

싸우고 투쟁하여 승리하리라. 귀휴를 쟁취하리라!

그의 도끼가 빛을 발했다. 두툼하고 예리한 도끼는 이미 세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설사 상대가 70 년을 넘게 함께한 엘프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까아아앙! 공간을 꿰뚫으며 날아온 섬광은 더 없이 빨랐다. 도끼로 쳐냈으나 오러가 튀어 오르며 충격이 엄습했다.

‘진심이군···!’

그야 당연했다. 연옥의 죄수치고 귀휴를 싫어하는 이는 없으니.

그가 도끼를 휘둘렀다. 다시 한 번, 날아들던 화살이 튕겨졌다. 빠르게 발원지를 찾았다. 짧으나 근육으로
가득한 두 다리가 대지를 박찼다.

콰앙,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는다. 도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허나, 상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측면을 파고드는 두 대의 섬광에 허공에서 도끼를 비튼다.

허나 화살들은 의지라도 달린 듯 허공을 유영하며 위아래로 도끼를 지나친다.

“큽!”

온 몸을 감싼 오러를 폭발시키며 사각을 노리는 화살들과 상쇄시킨다.

데르카인이 도끼 자루를 열었다. 김우진을 상대로도 쏘아졌던 마력포가 모습을 드러내며 다섯 발을 연달아
쏘아낸다.

허나, 포탄들은 화살들과 부딪혀 모조리 상쇄되었다. 끝이 아니었다. 그보다 많은 화살들이 데르카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제기랄.”

활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말은 들었는데 직접 겪는 건 또 처음이었다.

하물며 저 화살은 하나하나가 모두 오러였다.

데르카인이 도끼를 정면을 향해 곧추세웠다. 찰칵, 도끼의 날이 방패처럼 커졌다.

하지만 화살들은 또 다시 방향을 틀었다.

“하, 자네 능력 말이네. 직접 겪으니 더 성가시군.”

시에나 올름이 각성한 권능. 마력 조작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조형한 마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최고의 궁수에게 들어갔으니 더 없이 위협적이었다.

데르카인이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거대한 참격이 정면의 화살들을 쓸어냈다. 그리고는 도끼와 함께 몸을
회전시켰다. 오러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사방을 가격했다.

모조리 소멸하는 화살들에 시에나가 다시금 시위를 당겼다. 빈 활대 위로 오러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이전보다 훨씬 크고 강맹했다. 그대로 쏘아냈다. 도끼와 충돌했다.

파괴되었다.
다시 쏘아냈다. 더 크고 파괴적이었다.
다시 파괴되었다.
다시 다시 쏘아냈다.

시에나는 멈추지 않았다. 데르카인도 멈추지 않았다.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의 싸움이었다.

바스라진 오러의 파편들로 대지가 들썩였다.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들이 투기장 벽면을 두들겼다. 방호 마법
각인들이 빛을 발하며 저항했다.

“난 나가야 해.”
“나도 나가야 하네!”
“내가 더 급해. 난 72 년을 참았어.”
“난 300 년을 참았네!”
“이왕 300 년 참은 거, 조금 더 참아도 되겠네.”
“이런 미친 깐프 같으니!”

화살의 폭격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데르카인이었다.

“허억, 허억···! 제기랄, 늙으면 죽어야지.”

아무리 용사라고 한들 육체가 노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육신은 용사치고는 노화했고 체력적인 한계를
맞이했다.
결국 도끼를 거두고 주저앉았다.

“항복, 항···!”

퍼억-

두터운 발길질에 데르카인의 몸이 허공을 몇 바퀴 돌았다.

“내가 나가.”

시에나가 따라붙어 다시 한 번 복부를 후려쳤다.

“항복! 항복 했잖은가!”

데르카인이 피를 토하며 소리친 이후에야 전투는 끝이 났다.

시에나 올름의 승리였다.

“···피가 끓어오르는군. 역시 전투란 저래야지. 이성이 뜨겁게 타오를 정도로 격렬하게!”


“···음, 싸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나약한 소리! 전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저 모습이 아름답지 않나!”
“···무서운 집념이 느껴져요.”

항상 차분하고 조곤조곤하던 시에나의 평소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면 결승의 한 자리는 시에나인가.”

상상 이상으로 격렬한 시에나의 반응은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였지만 연옥에 갇힌 용사치고 사연 없는 이들은
없었다.

또한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아니었다.

“잡으러 가자.”

때가 되었다.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죄수들은 연옥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만나지 못했다. 교도관과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있나 의문이 들 정도로 간단했다.

‘분명 연옥의 탈옥은 만만치 않을 거라고 했는데.’

아무리 투기장에 모든 소장과 교도관들이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한들, 이게 맞나 싶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쉽다면 좋은 거다. 이걸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그 이유가 명확하니까.

‘강민식.’

카를로의 시선이 탈옥을 주도하는 강민식에게 향했다.

그는 죄수들을 정원의 서쪽으로 이끌었다. 한참을 달린 서쪽에는 숲과 일부 식충 식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식충 식물은 구속구가 풀린 용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곧 그들은 거대한 벽과 마주했다.

강민식은 능숙하게 벽면의 술식을 해제했다. 문이 생기면서 통로가 만들어졌다.

“가시죠.”

그리고 거기서 카를로는 확신했다.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강민식의 곁으로 접근했다.

“강민식님.”
“왜 그러시죠?”
“···강민식님께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레 운을 땠다.

“저는 사실 신께서 보내신 과업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강민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되물었다.

“과업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연옥을 탈옥하는 것입니다. 신께서 저에게 내려주신 사명입니다.”
“이곳에 저희를 가둔 자들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겁니까?”
“신께서는 큰 뜻이 있으시니까요. 그리고 강민식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신께서 말씀하시길, 어려움이 가득하겠지만 가면 조력자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게 저라는 겁니까?”
“신께서 말씀하시길, 조력자는 독의 권능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벽의 술식을
해제하는 것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연옥은 권능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신의 힘만이 그것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강민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수 없겠군요. 맞습니다, 저 또한 신께서 내려주신 과업을 수행중입니다.”


“역시···!”
“저는 과업을 받고 오늘의 탈옥을 계획했습니다. 카를로님이 저와 같은 사명을 받았다면 오히려 좋습니다. 함께
나가시는 겁니다.”
“예.”

그때였다.
애애애앵-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교도소 전체가 흔들렸다.

“···저들이 눈치 챘다!”
“더 빨리 움직이자!”

들켰다는 것을 깨달은 죄수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컹컹!
멍멍멍!

멀지 않아 짐승의 울부짖음이 뒤를 쫓아왔다. 강민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장이 기르는 마수입니다. 후각이 뛰어나 한 번 추적을 시작하면 쉽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싸워서 죽여 버리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놈이 혼자 다니겠습니까? 교도관들이 함께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끌리면 반드시 소장이 온다. 굳이 강민식이 말하지 않아도 용사들은 그 사실을 인지했다.

“모두 먼저 가십시오. 제가 독으로 후각을 교란시키겠습니다.”


“···강민식님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아뇨, 가십시오.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지리를 조금이라도 더 잘 아는 제가 아니면 다른 분들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방향으로 가든 차원의 끝으로 가면 됩니다. 그러면 차원의 방벽이 나올 거고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차원의 방벽이라는 말에 일부 용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급박한 상황은 그들에게 궁금증을 해소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빨리 가세요!”
“감사합니다!”
“나가면 반드시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꼭 오십시오!”

강민식의 비장함에 모든 용사들이 감사 인사를 하며 떠났다.

그러길 잠시, 덕구를 대동한 김우진이 나타났다.

“의외군. 기회다 싶어서 도망칠 줄 알았는데.”


“말했을 텐데. 네게 전폭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신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행동이 곁들여지니 조금은 믿음이 가는군. 헌데.”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자신의 처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최선을 다해서 따르겠습니다.”
“나는 소장이고 넌 죄수야. 그 태도를 잊지 말도록.”
“예.”
“특별히 나온 게 있나?”
“카를로가 첩자입니다. 제게 직접 신의 사주를 받았고, 제가 조력자라는 신의 당부를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이는?”
“제게 추가적으로 접근한 이는 없었습니다.”
“일단은 한 명인가.”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짓에 뒤따라오던 교도관들이 강민식에게 구속구를 채우고 인계해갔다.

“자.”

김우진이 덕구를 쓰다듬었다.

“덕구야, 사냥을 시작해보자.”

아우우우우-

세 개의 머리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
# < 048. 호구 >

“후우.”

율리아 카르센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치켜뜨자 상대가 보인다.

“준비는 끝났나?”

더 없이 강대한 광기와 살기를 머금은, 오직 만전의 상대와 싸우기 위해 들끓어 오르는 본능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존재.

강하다. 신이나 소장을 제외하면 바로 아래 단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나 그녀는 패배해서는 안 된다. 질 수 없다.

귀휴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연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따지고 보면 자발적인 입소에 가까웠다.

심지어 소장과 함께 데이드람에도 다녀온 전력이 있었다. 귀휴는 그녀에게 그다지 큰 메리트가 아니었다.

율리아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승리, 그 자체였다.

신. 그녀의, 알베니우스의,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의, 그밖에 수많은 조력자들의 최종 목표.

신과 싸워야 한다. 신에게 대적해야만 한다.

그러니 고작 죄수 하나에 무너질 수는 없다. 비록 그 죄수가 용사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라고 할지라도.
신은 더 강하니까.

율리아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연옥에 들어올 때 압수당했던 애검은 오랜만에 만난 주인의 손길이 반가운지
파르르 공명한다.

“끝났어요.”

호흡을 가다듬고 그대로 검을 뻗는다. 쩌엉, 질주하던 짐승의 손톱과 충돌한다.

엄습하는 충격을 대지로 흘려보낸다. 몸을 비틀어 또 다른 손톱을 피하고 검을 긋는다.

허나, 오러를 머금은 은빛 늑대의 가죽을 베기에는 예기가 부족하다. 율리아는 오러를 더욱 날카롭게 벼려냈다.

쾅쾅쾅!

이어지는 건 힘과 기술의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힘이라는 장점을 이용해 폭격해대는 타르칸과 그것을 비껴내고
흘려내며 빈틈을 향해 검을 찌르는 율리아.

“내 속도를 온전히 따라오는 건 네가 세 번째다!”

신난 타르칸의 외침이 굉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율리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누가 누굴 따라와요.”

적어도 속도는 그녀가 장기로 삼는 무기였다. 아무리 특별한 짐승이라고 한들, 뒤진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 소장, 그 괴물은 별개다.

율리아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마나에 의지를 실었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용사의 힘을 받은 용사 중, 특별한 이들은 권능을 각성한다.

강민식의 독처럼, 시에나의 마력 조작처럼.

율리아는 바람의 힘을 각성했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지배하는 힘.

집행자라 불리던 이를 상대로는 사용할 필요도 없었지만 타르칸 톨리스는 아니었다. 듣기로는 권능을 각성하지
못한 용사라던데 육체적인 힘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괴물이다.

율리아가 검을 뻗었다. 바람이 일었다. 폭풍이 되었다.

콰콰콰콰, 그대로 타르칸을 덮친다.

율리아가 움직인다. 바람에 몸을 싣고 더욱 빠르게.

바람의 정령들이 그녀에게 힘을 보탰다. 정령의 가호가 검에 깃들었다. 오러와 뒤섞인 바람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콰앙, 타르칸과 충돌한다. 버텨내나 율리아의 검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날파리 같은 방법이다.”

타르칸 톨리스가 그 모든 것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율리아를 따라갈 속도가 없다.


허나, 율리아가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는 무식한 힘과 단단한 육신이 있다. 짐승의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

튕겨낼 것은 튕겨내고 받아낼 것은 오러와 육신으로 받아내며 바람의 결을 뜯어낸다.

흐름을 어그러트리고 파괴한다. 강제로 뚫고 전진한다.

“전사라면! 당당히 맞서라!”

그가 포효한다. 권능에 가까운 사자후에 바람이 진동하며 약해진다.

“찾았다.”

두 다리가 급격히 팽창한다. 콰앙, 대지를 박살내며 박차고 일직선으로 쏘아진다.

“흡!”

율리아가 다급히 바람을 딛고 몸을 비튼다.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손톱 너머로 또 다른 손톱이 서성인다.

카가각, 검이 가까스로 손톱을 비껴낸다. 그 충격에 몸이 휘청이지만 바람이 율리아를 받쳐준다.

그리고 정령의 바람이 무방비 상태가 된 타르칸을 사방에서 덮친다.

콰콰쾅!

거대한 폭발이 투기장 전체를 휩쓸었다.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타르칸이 바람을 찢으며 뛰쳐나왔다. 그럼에도 야성과 투기는 전혀 죽지 않았으며 율리아 또한 이번
한 방으로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검이 마중 나갔다.

콰득, 예리한 검격을 타르칸이 이빨로 낚아채듯 받아냈다.

“고작 이 정도냐? 소장에 비하면 어린 아이나 다름없군.”


“그런 모습으로 이야기 해봤자, 별로 멋있지도 않거든요.”

그리고.

“당신도 소장님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에요.”

검에 깃든 오러가 폭발했다. 타르칸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이빨이 검을 놓쳤고 검은 춤을 추었다.

허나 고작 이 정도로는 소장을 이길 수 없다.

당연히 신도 넘지 못한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더욱 마나를 쥐어짰다.

속도를 올리고, 바람을 더욱 거세게 만들고, 검격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낸다.

피하고 부딪힌다. 막고 부딪힌다. 비껴내고 부딪힌다.

격렬한 힘의 파도 앞에 버티고 또 버티며 검을 내지른다.

그리고 결국 승리를 쟁취해낸다.

“···증명해냈어요.”

그녀의 검에 타르칸이 쓰러진다. 일어서고 또 일어서며 좀비처럼 그녀를 힘들게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의지는
있을지언정 상처투성이의 육신에는 한계가 찾아왔다.

힘든 상대였다. 오러도 거의 고갈되었고 온 몸이 욱신거린다.

그럼에도 그녀는 승리했다. 여전히 김우진이나 신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적어도 바로 아래인 용사들
중에서는 최상위급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제 한 걸음.”

시에나 올름을 이긴다면, 적어도 이 안에서는 최강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녀에게 그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히, 힘이 하나도 없어요.”

타르칸 톨리스와의 사투에 모든 힘을 쏟아낸 율리아 카르센은.

“귀휴는 내 거야.”
“잠깐만요, 잠깐 타임! 휴식 시간 같은 건 없어요? 공평성과 선수 보호를 위해서 최소한의 휴식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감옥에서 그런 걸 따지니?”
“아니, 잠깐만요! 아악! 뼈, 뼈 맞았어요!”
“맞으라고 쏜 거야.”
“전 하이엘프에요!”
“그래, 끝나고 대우해줄게.”

이어지는 시에나와의 결승전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

* * *

“···율리아 카르센. 생각 이상의 괴물이었군.”

모두가 대놓고 증명하거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죄수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죄수들 중 최강이 타르칸 톨리스라는 것을. 그는 수인족의 귀족, 달의 늑대였고 투쟁하며 살아왔다.
그의 무력은 다른 수인들과는 궤를 달리했고 시에나도, 데르카인도 쉽사리 넘볼 수 없었다.

헌데 율리아가 이겼다.

비록 그 다음 대전에서 시에나에게 허무하게 지긴 했지만 그건 모든 힘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지, 그녀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소히 말하는 대진빨. 타르칸의 상대가 율리아가 아닌 시에나였다면 아마 타르칸이 올라갔을 거다.

헌데 율리아는 그 타르칸을 이겼다.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체 소장은?”

그런 죄수들이 한 번에 덤벼도 모조리 쓸어버리던 소장의 한계가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신은 신인가.”

그리고 그런 소장조차도 당장 함부로 하지 못하고 저자세로 나가는 신들의 위용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데르카인이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 * *

투기장의 죄수들이 우승자를 정하고 있을 무렵, 탈옥자들은 연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마수의 후각을 이용해 쫓아온다면 결국 따라 잡힐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아예 산개해서 일부라도 사는 게


어떻습니까?”

강민식을 뒤로한 채 나아간 용사들은 카를로가 낸 의견에 수긍했다.

그리고 아홉 명의 용사들은 아홉 갈래로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허억, 허억···!”

카를로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용사가 된 이후, 단순히 달리기만으로 이렇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늦으면 소장이 온다. 그 괴물은 못 막아!’

소장의 힘은 이곳에 들어온 순간 뼈져리게 느꼈다. 부딪히면 필패다. 그 전에 빠져나가야만 한다.

‘제발 나 말고 다른 놈들부터!’

어차피 신에게 열쇠를 받은 자신이 아니면 다른 놈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 그를 위한
미끼라도 되어주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나.

‘이곳 자체가 하나의 차원이야.’

연옥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은 결국 차원의 방벽에 가로 막히리라.

오직 그만이 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그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조력자가 있어서 다행이야···!’

마나를 완전히 통제하는 구속구, 압도적인 힘의 소장.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막막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신께서 상황을 만들어주신다 하셨지만 소장이 주는 충격은 그만큼 컸다.

하지만 강민식의 조력으로 생각보다 쉽게 감옥을 벗어났다. 너무 쉬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는 신이 이야기한


조력자였다.

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강민식의 말대로 그가 오랫동안 오늘만을 기다리며 준비한 덕이겠지.

그러니까 강민식은 신의 안배다. 신의 안배가 잘못될 리는 없으니 이대로 달리기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제기랄, 투기장인지 토너먼트인지 그걸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옥의 용사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같은 용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네놈들은 여기서 평생 썩어라! 나는 간다!”

하지만 결국 신의 과업을 받고 나가는 건 카를로다.

죄수 주제에 소장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멍청이들은 평생 여기서 살라지.

“아쉽게도 여기서 썩는 건 너도 포함이다.”

불쑥,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아무런 고조가 없는 담담한 목소리.

“······.”

카를로가 고장 난 로봇처럼 끼긱거리며 멈췄다. 필사적으로 기감을 퍼트렸으나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겠지?’

잘못 들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장이 있었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하하.”

사방으로 흩어진 죄수들이 아홉이었는데. 왜 하필.

“왜 하필 나야!”
“걱정마라. 다른 탈옥수들도 모두 잡혀서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그딴 말이 듣고 싶은 줄 알아!”

카를로가 은밀히 모아두었던 오러를 일거에 방출했다. 콰콰콰, 세상을 구한 용사가 작정하고 토해낸 기운은 그야
말로 막대했다. 오러의 폭풍이 김우진을 덮쳤다.

카를로는 그 반동을 이용하여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멀지 않아!’

싸우는 건 필패다. 그러니 도망친다. 다행히 방벽이 멀지 않···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카를로를 덮쳤다.

“···케르베로스?”

머리가 세 개 달린 마수였다. 용사라고 할지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괴물.

케르베로스의 세 입이 벌어졌다. 검은 불꽃이 토해졌다.

“큭···!”

카를로가 다급하게 오러를 몸을 둘렀다. 하지만 예정된 열기는 다가오지 않았다.

김우진이었다. 어느새 케르베로스와 카를로의 사이에 끼어든 김우진이 가볍게 불꽃을 소멸시켰다.

거친 손길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콰앙, 그대로 대지에 내리 꽂았다. 엄습하는 충격에 카를로가 피를 토했다.

“자, 말해봐라.”

김우진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신이 널 이곳에 보낸 목적이 뭐지?”


“나, 나는 그냥···!”
“그래, 처음부터 말하면 재미가 없지. 걱정 마. 나한테는 네 입을 열게 만들 무궁무진한 수단이 있어.”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마나가 침투했다. 카를로의 사지가 뒤틀렸다.

“끄아아아아악!”
“오러홀은 살아가는데 크게 지장이 없지. 그렇지?”
“자, 잠깐만···!”
“말할 기분이 들었나?”
“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시, 신께서 금제를···!”
“걱정 마.”

마나가 다시 한 번 카를로의 몸속을 침투했다. 허나, 이전과는 달랐다. 그의 심장과 뇌에 침입해 신이 새긴


금제를 벗겨냈다.

자신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깨달은 카를로가 경악했다.


“미, 미친! 신의 금제를 깨트려?”
“나도 20 년 동안 놀고 있던 건 아니라서 말이지.”

당연히 카를로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불어라.”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신들이 단순하게 똑같은 계획을 준비할 리가 없다.

김우진은 확신했고 그 확신은 정답이었다.

“신께서 연옥을 탈출해 ‘케이룸’이라는 차원으로 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케이룸? 케이룸은 너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고향이 케이룸인 것도, 용사로서 활동했던 곳이 케이룸인 것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케이룸은···

“신께서 케이룸으로 인도할 각인을 새겨주셨습니다. 감옥 안에 조력자가 있을 테니 도움을 받아 탈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조력자?”
“가, 강민식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신께서 직접 보호해주신다고···.”

신의 직접적인 보호라.

“···이 새끼들 봐라.”

케이룸이라는 차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에, 어째서 케이룸으로 카를로를 보내려고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굴 개 호구로 보나.”

뿌득, 김우진의 안광이 붉게 물들었다.

───────────────
# < 049. 적당 >

이후, 카를로는 몇 개를 더 불었다.

“강민식 덕분에 쉽게 탈옥했지만 사실 신들께서 탈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따로 마련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회?”
“연옥에 아주 큰 혼란이 찾아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큰 혼란이라. 신들이 자신이 나섰다는 명백한 증거 없이 연옥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일까.

짐작 가는 게 하나있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으니 속단은 금물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카를로를 탈옥시키려는 신들의 목적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대부분의 계약은 연옥에 한정된다.’

때문에 연옥에서는 김우진이 계약을 위반하는 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 그를 공격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연옥 밖에서는 아니란 뜻이다.

당연히 연옥 밖이라고 한들 무조건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못한다. 하지만 서로의 권리가 충돌한다면, 신들은
당연히 본인들의 손을 든다.

소장으로서의 김우진은 보호를 받지만, 신의 권역을 침범한 김우진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권역을 침범 당한 신은, 침입자를 격퇴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차원 ‘케이룸’은.
스스로를 하늘의 신이라 일컫는 케이룸의, 아니 베른 오르티안의 권역이었다.

“베른의 수작인가.”

하긴, 생각해보면 굳이 찾아와 경고를 날린 것도, 새로운 죄수들의 입소를 알린 것도 베른이다.

김우진에 대한 놈의 적개심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직접 붙어보고자 함인가?

혼자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신은 오만하다. 오만한 만큼 자존심이 높고 낮잡아 보이고 무시당하는 것을 혐오한다. 설사 상대가 같은 신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같은 신이기에 더욱 더.

백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백 명의 다른 인물이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또한 케이룸은 완벽한 베른의 영역. 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먹고 들어간다고, 신이라고 다르지 않다.

저들이 굳이 용사들을 이용해 멸망 위기에 처한 차원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것이 관리자로서, 그들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신도를 받고 숭배를 받아 신앙을 드높이기 위해서.

피조물들의 찬양과 신앙은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 관리자들이 자신들을 진짜 신이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곳이면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신은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받지만 권역에서는 또 다르니.

그렇다고 김우진을 죽이겠다는 건 아닐 거다. 적어도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신들은 김우진을 죽일 수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면.’

힘으로 굴복시키고 계약의 수정이 가장 그럴듯한 추론이다.

‘누구 마음대로.’

당연히 그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덕구야. 가자.”

그 전에 다른 탈옥수들부터 잡고.

‘그런데 하필 케이룸이라···.’

시에나 올름의 고향이 어디였더라.

* * *

“이게 뭐야!”
“씨발, 차원의 방벽? 이걸 어떻게 통과하라고!”

탈옥수들을 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죄수들을 가로 막는 연옥의 세 가지, 장벽.

구속구, 정원, 그리고 차원의 방벽.

운이 좋아 구속구를 해제하고 정원을 통과했다고 한들, 차원의 방벽을 통과하는 건 권능에 가까운 힘이다.

신이거나 신에 준하는 힘이 없는 이상, 혹은 공간 마법에 능력을 몰빵 해 간신히 틈새를 조금 벌리는 게 아니면


불가능에 가깝다.

다섯은 차원의 장벽에 도달하기 전에 잡혔다. 둘은 차원의 장벽을 두드리다 잡혔으며, 다른 하나는 아예 도망치지
않았다.

“나와.”

처음에는 카를로를, 그 이후에는 김우진을 따라다니던 켄타우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도망치지 않았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이곳이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을.”
“그것뿐?”
“카를로라는 자에게 방법이 있어 보여서 뒤따라가고 있었소. 헌데 소장이 순식간에 뭉개버리더군. 그래서
포기했소. 할아버님의 말이 맞았소. 이 빌어먹을 곳은 힘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나갈 수가 없소.”

네 다리의 켄타우로스가 절망에 차 중얼거렸다.


객관화가 잘되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놈보다는 주제를 알고 얌전히 감옥에 붙어 있는
놈이 관리하기 편하니까.

켄타우로스를 제외한 죄수들을 모조리 기절시키고 허공에 둥둥 띄워 연옥으로 돌아갔다.

“내가 이겼단다! 내가 우승자야! 귀휴! 귀휴를 나가도록 해주렴!”


“···억울해요. 한 경기 이후에 시간을 주는 건 상식이잖아요.”

복귀하니 환희에 찬 시에나와 하얗게 불태운 율리아가 그를 반겨주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라서 그리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전이었다면 율리아가 이겼겠지. 율리아의 수준이
생각 이상이다.

과연 알베니우스가 키워낸 재목이라고 해야 될까.

‘알베니우스의 연락은 언제 오는 거지.’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분명 다음 만남은 알베니우스와 함께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짧을지, 길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생명체인 드래곤의 시간관념은
인간과는 아득하게 다르니까.

어쨌든 당장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죄수들은 다시 감옥에 처넣고 카를로는 특별 감시가 필요해. 강민식과 같이 권한을 받았다면 구속구나 징벌방
같은 건 소용이 없을 테니.”
“1183 번을 강민식과 함께 특별관리대상에 넣겠습니다.”

특별관리대상이라고 한들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없다. 구속구나 여러 연옥의 시스템들이 제 역할을 못하는 만큼


그저 더 많은 교도관들이 붙어 감시한다는 뜻이니.

“일단은 그렇게 하고 시에나를 불러와.”


“예.”

잠시 후, 시에나가 왔다.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

“귀휴. 귀휴를 주렴.”


“약속은 지킵니다.”

김우진은 시에나에 대한 서류를 살폈다.

그녀의 고향 차원은 벨레르가. 그리고 용사로서 구한 차원은 도이트른이다. 귀휴를 가고자 한다면 둘 중 하나일
터.

그리고 벨레르가는···

“가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고향인 벨레르가? 아니면 용사로서 있던 도이트른?”


“둘 다 아니란다.”
“허면?”
“케이룸.”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어떻게?”


“얼마 되지 않았단다. 22 년쯤.”

김우진이 소장으로 연옥에 부임하기도 전의 이야기다.

케이룸이 생겨난 게 30 년이 조금 넘었으니 시기도 얼추 맞는다.

“어떻게냐고 묻는다면. 연옥의 엘프들 중에는 나와 같은 차원 출신의 엘프가 하나 있다고 말해줄 수 있겠구나.”
“거기 가봐야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죄수로서 행동에 많은 제약도 있을 겁니다. 시에나님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나는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단다. 신의 이름 아래, 짓밟힌 벨레르가가 어떻게 변했는지.”
“딱히 짓밟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신의 권역이 되었을 뿐이죠.”
“거기에 벨레르가 차원민들의 의지는?”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강압적으로 믿으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습니다.”

윽박지른다고 한들 쉽게 믿는 인간도 아니다. 믿는 척은 할 수 있겠지만 신앙이라는 게 척만으로는 신에게 힘을


주지 않는다.

진실한 믿음이 필요하고 그걸 판단하는 건 위대한 우주의 법칙, 아카식 레코드다.

때문에 관리자들은 포교활동에 적극적이다. 뺀질나게 신의 이름으로 용사를 내려 보내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권역이 되었다면 어떤 방법을 썼든 결국 절반 이상의 인류가 신을 섬긴다는 겁니다.”


“나도 가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단다. 이미 신의 권역이 되어버린 곳에서 기껏해야 죄수 하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다행히 시에나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 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니겠니?”

엘프들은 태생적으로 신과 함께할 수 없다.

그들의 신은 세계수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차원에 수많은 엘프들이 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세계수를 섬긴다.

그들의 차원에 세계수가 있든, 없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긴 하다. 어떻게 세계수를 보지도 못한 엘프도 세계수의 귀중함과 위대함을 알고 섬기는
건지.

칼라로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그러한 엘프들의 성향 때문에 신들은 엘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권역의 엘프들은 눈에
가시이며 박해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시에나의 걱정은 당연했다.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때였다.

────.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함.


지독한 불쾌함과 적대감.

- 침입자 발생!
- 침입자 발생!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김우진. 그 다음은 연옥의 관리 시스템이었으며 마지막은 시에나였다.

“···이건.”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해야겠군요.”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맙소사.”

부소장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쩍 갈라진 균열은 시커멓고 악의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 악의는 끊임없이 마수들을 토해낸다.

연옥이 생겨난 이례로 이런 일이 있었나?

적어도 그가 소장과 함께 연옥으로 부임한 20 년 동안은 없었다.

“연옥이 침범 당하다니!”

그리고 300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드워프의 반응을 보아하니 최소한 300 년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 거니?”
“막아야죠.”

김우진은 시에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일그러진 하늘을 보며 담담히 대꾸했다.

“부소장.”
“예!”
“신입 죄수들과 강민식을 독방에 수감하고 나머지 죄수들을 소집해. 연옥 방어 시스템 작동시키고 구간 모두
폐쇄해. 마수나 마물 한 새끼도 연옥 내부로 들어올 수 없게.”

하늘을 점점 채워가는 마수들은 교도관들만으로 막을 수 없다. 김우진이 나선다면 쓸어버리지 못할 것도 없지만


연옥에 피해가 없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죄수들을 이용한다. 수인들만 있어도 저것들은 감히 연옥을 넘볼 수 없다.


“예.”
“나는 잠깐 릴리한테 다녀올 테니까.”

김우진은 이것이 카를로가 말했던 신들이 준비한 소동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애초에 신들의 관리 하에 있는 연옥에 대량의 마수들이 침입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용인이나 방관 없이는
불가능했다.

물론 그래봐야 우연이고 실수라고 변명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적들의 침입에 놀란 릴리가 나서지 않도록 해야한다.

차원의 방벽이 벌어지고 마기가 점점 더 잠식해 나가고 있다. 세계수의 힘으로 수복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꽤
많은 힘이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신들이 세계수의 존재를 눈치 챌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러지 않는다.

어차피 막아내기만 하면 신들이 알아서 복구할 테니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떻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지?”

거기에는 아이러니하게 김우진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김우진이 있으니 결코 이 정도 수준에 연옥이 붕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의 역린을 툭툭 건드렸다.

애초에 강민식을 보내 먼저 시비를 건 것도, 그걸 수습하겠다고 이 따위 짓거리를 하는 것도 관리자들이다.

율리아로 인해 조금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는 계약을 종료할 때까지 관리자들과 직접적으로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도 참을 이유가 없다.

“탈옥, 케이룸, 베른, 시에나, 귀휴.”

김우진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춰 돌아간다. 마치 우주의 흐름이 그를 내몰 듯이.

“많아야 셋, 아니면 둘. 그것도 아니면 혼자.”

신은 절대 다수가 함께하지 않는다. 백신전은 그저 신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겉포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둘이나 셋이라면.

“적당해.”

적당하다.
지난 20 년 간 그가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음을 증명해 내기에는, 신들에게 줄 경고장으로는.

───────────────
# < 050. 원하는대로 >

언젠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대체 마기는, 마수와 마물들은, 마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째서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는 걸까. 전지전능하다는 신이라는 작자들은 왜 그들을 멸종시키지 않는가.
왜 용사라는 대리인을 이용하는가.

마지막 두 개의 궁금증은 그들이 진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해소되었다.

이 세상에는 상위 차원과 하위 차원이라는 게 있다.

신이 살아가는 차원과 몇몇 특수한 차원들이 상위 차원이며, 다른 대다수의 차원이 하위차원이다.

그리고 신은 하위 차원에서 제약을 받는다. 함부로 강림할 수도, 강림한다고 해도 멋대로 힘을 사용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게 신들이 집행자를 하수인으로 두고, 용사들을 이용해 세상을 관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그렇다면 마기는? 마수는? 마물은? 마족은?

그것들은 무엇일까.

균형이다.
필요악이며, 흐름이자 법칙이다.

동전의 이면처럼, 선이 있으면 악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신이라는, 용사라는 세상을 가꾸는 존재가 있다면, 악의와 마라는 세상을 파괴하는 존재 또한 있어야 한다.

···라고 알베니우스가 그랬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한 악의의 파도가 연옥을 덮쳤다는 것. 김우진, 그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것.

릴리는 새장 속에 들어갔다. 하늘구름은 릴리를 억압하는 구속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녀를 지키는
방호구이기도 하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한, 당분간은 안전할 거다.

애초에 세계수인만큼 그리 약하지도 않고.

신입 죄수들을 단단히 구속해 감옥에 처넣고 다른 죄수들을 풀어 놓은 이상, 정원 바깥은 몰라도 정원이 완전히
파괴될 일은 없다.

그러니 김우진이 당장 신경써야 할 일은 없다.

연옥을 향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저 쓰레기를 치우는 것 외에는.


김우진이 주먹을 쥐고, 가볍게 뻗었다.

단순한 정권 찌르기. 하지만 그 결과는 단순하지 않다.

콰아아아아-

주먹으로부터 비롯된 화염의 폭풍이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운다.

균열 속에서 몸을 던져 연옥으로 떨어지던 마수들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잿더미가 된다.

김우진의 몸이 떠오른다.

홍염의 파도가 하늘을 유영한다.

모든 것을 뒤덮는 재앙이었다.

* * *

뜨거운 열기.
붉게 물든 하늘.
마수와 마물들의 비명 소리.

그 모든 것이 오직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장관이 따로 없군.”

불길의 파도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마수가 데르카인의 도끼에 반으로 갈라졌다.

반쯤 녹아내린 마수를 죽이는 건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도살에 가깝다. 그 정도로 싱거웠다.

“대체 한계가 어디인지···.”

전율적인 광경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저런 존재와 싸웠다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물론, 김우진이 손속에 사정을 둔 덕분이긴 하지만.

“능력은 역시 불에 관련된 것이겠지?”


“아마도. 정령의 느낌도 살짝 나네.”
“그럼 불의 정령과 계약이라도 한 건가?”
“정령마법이라면 정령왕이 아니고서야 이런 건 불가능해.”

글쎄, 과연 정령왕이라고 한들 가능할지 의문이다. 불의 신이라면 모를까.

“공간 관련 능력도 있으세요.”

다리 여덟 개 달린 마수의 육신을 스무 조각 낸 율리아가 검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내며 합류했다.

“공간?”
“강민식님을 잡으러 갔을 때, 집행자를 만났거든요?”
“집행자?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더니 신들의 사주를 받은 게 정말이었나.”
“그러게.”
“모르셨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네. 하지만 말은 안 해주지 않았나.”
“율리아, 너 그런 걸 숨겼다고?”
“···아. 제가 말 안 했어요?”

율리아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소장님이 공간 관련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거죠.”


“그게 정말인가?”
“네. 집행자가 강민식님을 데리고 공간이동마법으로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서 맨손으로 공간을 찢어 균열을 만들고
쫓아갔다니까요?”
“···그게 가능하다고?”
“율리아, 아무리 소장이라고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김우진이 아예 공간 특화 권능을 가졌다면 모를까, 완전 경우가 다른 힘이 아닌가.

“차라리 공간 마법을 사용해서 추적했다면 믿겠네. 저런 괴물이 마법적 소양이 없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맨 손으로 공간을 찢고 들어간다니. 그게 말인가, 방귀인가.

“정말이에요. 어머니 나무에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정말이라고?”
“어머니 나무는 그렇게 함부로 거는 게 아니야.”
“진짜에요! 저 혼자 봤으면 제가 거짓말 한다고 했을 거예요.”
“누구랑 같이 봤는데?”
“집행자요.”
“그 집행자는 어디 있나?”
“···죽었죠.”

율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데르카인도, 시에나도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신이 견제하는 인간이니 그 정도 능력이 되지 않고는 말이 안 되긴 하네.”

김우진이 노는 판은 용사인 그들과도 아득하게 격이 다르다. 그들의 상식으로 김우진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암담해졌다.

“···그러니까 신들에게 대항하려면 적어도 저 정도 수준까지는 올라가야 한다는 거군.”

일단 같은 선상에 올라야 대항을 하든, 전쟁을 하든 할 것 아닌가.

“···마물 좀 더 잡고 올게요.”
“같이 가지.”

율리아와 데르카인이 각자의 무기를 꼬냐쥐고 광견처럼 달려 나갔다. 이미 미친개가 된 타르칸과 합류했다.
홀로 남은 시에나는 시위를 당겼다.

파앗-

오러의 화살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작은 마수 하나를 저격했다. 머리가 터진 마수가 힘없이 추락한다.

“신.”

시에나 또한 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를 이곳에 가둔 장본인들. 그리고 그녀의 고향을 멋대로 바꾸어버린 개자식들.

어째서 벨레르가는 케이룸이 되어야 하는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가서, 확인해 보겠어.”

만약 엘프들이 모두 사라졌거나, 박해를 받고 있다면.

입술을 깨물었다.

기꺼이 데르카인과 같은 길을 걸으리라.

단순히 마음속에 삭히는 저주와 원망이 아닌, 실질적인 적대로.

화살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 * *

균열은 거대하다.

수천의 마수와 마물들을 떨어트린 만큼 역겨운 마기로 점철되어 있기도 하다.

김우진은 혐오감을 느꼈다.

크게 이상할 건 없다. ‘마’는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여전히 토악질이 나오도록 마수와 마물의 군단을 토해내고 있는 구멍을 보며 김우진은 과거를 회상했다.

오래 전의 일.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된 건 아니다.

기껏해야 연옥의 소장이 되기 이전에서 10 년 정도를 더 되돌린 정도.

적이 있었으나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고작 일백 정도.

하지만 그 면면은 이따위 마수와 마물들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수치다.

누구는 그들을 천사라 불렀고, 누구는 그들을 신의 사자라 불렀으며, 누구는 그들을 집행자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자. 인류는 그를 신이라 불렀다.

‘김우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얌전히 내 집행자가 된다면 모든 죄를 덮고 없던 일로 해주겠다. 말해라.


놈은 어디 있지?’
‘좆까.’
‘넌 속고 있는 거다. 놈은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다.’
‘용사를 개처럼 부리고 토사구팽하는, 속이 시커먼 네놈들만 할까.’

신은 회유했고, 그는 거부했다.

싸웠고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결과 연옥의 소장이 되어 용사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을 테니.

지금의 상황을 보라.

신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무럭무럭 자라난다. 과거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위대한 계약을 맺어 놓고도 전전긍긍하며 비겁한 수작을 부리는 꼴이라니.

이러니 더욱 저들의 생각이 확실해진다.

마수의 출현은 엄연히 신들의 관리 잘못이고 이는 김우진이 억지로 우겨넣은 천재지변의 조항이다.

즉, 탈옥수가 생겨도 김우진의 책임은 없다. 그저 잡아오는 수고로움만 있을 뿐.

신들 또한 그걸 알고 있으니 케이룸으로 유도하는 것은 엄연히 그를 힘으로 굴복시키겠다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허나, 그 결과까지 너희들이 원하는 형태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김우진이 손을 뻗었다.

손을 타고 화염이 자라난다. 그것은 거대한 손이 된다. 한 손은 균열의 끝에, 다른 손은 반대쪽에 자리한다.

김우진은 균열의 양 끝을 붙잡은 뒤, 그대로 잡아 당겼다.

────!

공간이 일그러진다. 벌어졌던 균열이 억지로 좁혀지며 비명을 지른다. 고개를 내밀던 마수들이 열기와 좁아지는
입구에 타격을 받아 그대로 소멸한다.

“···균열을 맨 손으로 잡아서 닫는다고?”


“···미쳤군.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모양이야.”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어요? 지금 닫고 계시잖아요! 반대도 가능하다니까요?”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죄수들의 경악과 환호가 뒤섞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균열은 빠르게 좁아졌다.

이윽고, 완전히 서로의 면이 입술처럼 부딪혔다.

김우진은 그대로 열기를 더했다. 마치 용접하듯, 공간을 이어 붙였다.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닫힌 건 닫힌 거다.

완벽하게 복구하지 않으면 다시 벌어지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넘어오지 못한다.

“···내가 알던 상식이 박살나는군.”


“당신은 저런 건 못해? 명색이 우주 제일의 대장장이 아니야?”
“차라리 강철로 금을 만들어 달라고 하게.”
“못 해?”
“···가능은 하네.”

더 없이 비효율적이라 그냥 금을 사는 게 더 싸서 그렇지.

그들이 김우진에게 감탄하는 사이, 모든 작업이 끝났다. 벌어졌던 균열은 다시금 붙었고 하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맑아졌다.

수많은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와 소장이 일으킨 잔열만이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

소장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소장님, 역시 굉장하십니다! 소장님을 따르기로 한 결정이 제가 살면서 가장 잘한 결정인 것 같습니다!”


“굉장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군. 혹시 연금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면 자네처럼 공간도 용접할 수 있나?”
“역시···.”
“상황이 이러니 귀휴는 당장 나가지 못하겠지?”
“아니요. 나갈 수 있습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수많은 소음들 중, 김우진은 시에나의 물음에만 답했다.

“부소장!”

그의 고함이 연옥 전체를 뒤흔들었다. 곧 부소장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죄수들의 상태는?”
“모두 얌전히 독방에 있습니다.”
“카를로는 어디 있지?”
“1183 번은 4 층의 독방에···.”

김우진이 성큼 성큼 연옥 안으로 들어갔다. 4 층으로 올라가 카를로의 독방을 열었다.

얌전히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를로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했다.

“소, 소장님?”
“나가.”
“갑자기 그게 무슨···.”
“나가라.”
“예···?”
“지금 당장 탈옥해.”

케이룸으로 가 알려라.

“마수의 침입이란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강민식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했다고.”

어째서 기껏 붙잡아 놓고 다시 탈옥하라고 하는지, 카를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늘한 김우진의 눈빛에 물어볼 용기 또한 없었다.

“···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
# < 051. 무조건 >

- 악의의 잠식은 일정한 규칙이나 정해진 방향이 없다.


- 완벽하게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균열 사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부에서 연락이 왔다.

틀에 박힌, 김우진의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신이라는 작자들이 참으로 무능하군.”

- 넌 우리를 관리자라고 부르지.


- 관리자들이 실책을 저지르는 경우가 뭐 대수라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수정구를 타고 전해진다. 김우진 또한 마주 웃어주었다.

- 연옥의 피해 상황은 네가 좋아하는 보고서로 잘 써서 올리도록 해라.


- 허면 거기에 맞춰서 보상과 필요한 것들을 줄 터이니.
- 혹시 균열 사태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이 있나?
- 딱히 문제 삼을 수도 없으니 숨기지 않아도 된다. 네가 계약서에 추가한 대로 천재지변에 가까운 일이니까.

“죄수 하나가 탈옥했다. 신기하지 않나? 천재지변이 일어났다고 냉큼 탈옥을 강행하다니. 차원의 방벽은 자격이
없으면 넘을 수 없는데 말이야.”

-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군.
- 악의로 인해 벌어진 균열에 몸이라도 던진 모양이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놈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했다.

- 균열 사태만 아니었다면 참 기꺼운 일이었을 텐데 안타깝구나.


- 잡아서 돌려놓아라. 허면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테니.
- 기한은 두 달 정도면 충분하려나?

모든 것을 알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꽤나 가증스러웠다. 물론 김우진도 카를로를 일부러 탈옥시켰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 탈옥자가 신의 권역에 있다면?”

- 신의 권역이라.
-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군.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건가. 1 초의 텀이 있었다.

- 신은 권역에 침입한 침입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건 너라고 해도 다르지 않지.


- 허나,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해결할 문제다. 해당 권역의 신과 잘 이야기해보도록.

“네놈들이 잘도 나에게 협조하겠군.”

- 그것 또한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 허나, 무슨 일이 있든 죽을 일은 없지 않나.
- 백신전과 너의 계약에는 서로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조항 또한 있으니.

김우진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수정구를 꺼트렸다.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 있으면 넘어 와봐라, 이거군.”

카를로를 탈옥시킨 시점에서 어차피 갈 수밖에 없다.

균열은 천재지변에 속해 김우진에게 책임을 물지 않지만 장시간 탈옥한 죄수를 다시 붙잡아 오지 않는 건 온전히
김우진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신이 자신의 권역으로 들어온 카를로를 순순히 연옥으로 돌려보낼 리도 만무하며, 데리러 간다고 순순히
내놓을 리도 없다.

“바라는 대로 해주지.”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연기하느라 고생이 많군.”

빛을 잃어버린 수정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비쳤다.

“분노가 연기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모든 것이 신들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연기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권역에서의
신은 절대적입니다.”
“일반적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김우진은 일반적이지 않다. 신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다. 짐작은 하면서도 김우진의 진짜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균열 따위가 일어났다고 김우진이 죄수가 탈옥하게 놔둘 것 같으냐.”

아니다. 고작 그 정도의 사태는 김우진에게 침을 뱉는 것 마냥 간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탈옥수가 발생했다는 것은 김우진이 고의적으로 놓아줬다는 뜻이다.

“이쪽의 계획을 전부 눈치 챘다는 것이겠지.”


“허면 당장 다른 신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옳지 않다.”

남자가 턱을 괴었다.

“너는 신이 왜 신이라 불리는지 아느냐.”


“···신이기 때문 아닙니까?”
“원론적인 답변이구나. 허나 틀렸다. 신은 신으로 불릴 자격이 있기에 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고고하고 고귀하며, 품격 있고 권위롭다.

신이라 불릴 만한 힘과 권위가 있기에 신이라고 불리는 거다. 신이라고 불리기에 힘과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라.

“허나, 요즘 몇몇 자들은 그 순서를 잊어버렸다.”

그러니 김우진에게 관리자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신이 신답지 않으니 어찌 신이라 불릴 수 있을까.

“베른은 증명해야할 것이다.”

자신들에게 신의 자격이 있음을.

신들마저 경각심을 품게 하고, 신을 죽여 버린 처음이자 마지막 신살자에게서부터.

* * *

신의 권역이란 무엇인가.

신을 섬기는 자들이 넘쳐나는 곳을 뜻한다. 피조물들의 믿음과 신앙이 신에게 힘을 주어 차원 전체에 신의 힘이


넘쳐나는 곳.

때문에 하위 차원임에도 신에게 가해지는 제약이 더 없이 약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

이를 테면 신의 앞마당이라고 표현하면 된다.

하늘이 열렸다. 벌어진 균열 사이로 두 인영이 떨어졌다.

급격한 하강 후에 사뿐히 착지했고 균열은 순식간에 닫혔다.

하늘은 어두웠다. 새카만 먹구름이 가득했고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이 차가운 냉기와 만나 눈보라가 되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눈 덮인 설산이었다.

“드디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엘프가 무릎을 꿇고 대지에 입을 맞췄다.

“마나가···.”

차원 이동의 후유증으로 어지러움을 참아낸 시에나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마나의 성질에 눈살을 찌푸렸다.

큰 차이는 아니었으나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권역이 된 차원은 그 신을 닮아 갑니다.”

때문에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보다 쉽게 힘을 내려줄 수 있으며, 신의 이적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없던 신앙도


생겨난다. 신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좋은 선순환이다.

“일단 여기서 좀 벗어나죠. 놈이 저희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겁니다. 여기가 어딘지는 짐작가십니까?”


“일단 내려가봐야 알 것 같구나.”
“일단은 마을을 찾아서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는 게 좋겠군요. 폴리모프 마법은 모르시죠?”
“난 마법사가 아니란다.”
“어쩔 수 없죠. 로브 뒤집어쓰고 귀 잘 가리세요.”

베른이 엘프들을 어떻게 대했고 대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성격상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을 터. 엘프라는 것은
끝까지 들키지 않는 게 좋다.

김우진과 시에나가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설산에서 거주하는 예티와 여러 몬스터들이 반겨주었으나 상대가 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의 속도를 따라올 수도 없었다.

산의 중턱쯤부터 눈이 그쳤다. 산 앞에는 요새에 가까운 도시가 있었고 둘은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해 성벽을
넘었다.

“어서오십시오!”

사람들이 북적이는 주점을 찾아 들어가자 무기를 든 인간들이 가득했다. 용병들이었다.

빈자리에 앉은 김우진과 시에나가 간단한 음식을 시켰다.

“이제 좀 알겠어요?”
“여기가 칼칸이면 대륙 북부 아스란 왕국의 영역이야. 엘프들의 숲은 남서쪽으로 내려가야 해.”
“잡화점에서 지도를 팔까요?”
“자세한 건 안 팔겠지만 대도시나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을 정도의 지도는 팔 걸.”

그 정도면 된다. 대략적인 위치를 잡고 길을 잃지만 않으면 되니까.

“멉니까?”
“왕국 세 개 정도는 지나야 해.”
“그렇게 멀지는 않군요.”

가면서 엘프들에 대해 알아보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음식 나왔습니다. 용병분들 같은데 다른 곳으로 가시나 봅니다.”

따끈한 스프와 두툼한 고깃덩어리였다.

“예, 여기서는 벌만큼 벌었고 남쪽으로 좀 가려고 합니다. 추위는 이제 질색이라.”


“여기 오셨던 분들은 전부 질색을 하면서 떠나시더라고요. 익숙해지면 나쁘지 않은데 말이죠.”
“그럼 맛있게 드세요.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점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시에나가 잠시 머뭇거렸고 김우진이 뒷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점원이 사라졌다.

“능숙하구나.”
“어색해하면 안 되요. 그냥 뒷말만 적당히 따라해주면 됩니다.”
“신을 섬겨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우리가 ‘어머니 나무의 가호가 함께하길’ 같은 소리는 하지 않잖니.”
“그건 또 그렇네요. 그래도 앞으로 염두에 두세요.”

차원이 신의 권역이 되었다는 것은 피조물들 중 절반 이상이 신도가 되었다는 뜻이니. 앞으로 지겹도록 볼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저 꼴을 봐야한다는 거, 맞지?”


“예.”

시에나의 시선 끝에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신 위대한 하늘게 감사합니다. 하늘의 자비가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는 더 없이 신실한 용병들이 있었다.

사실 용병들이 신도들인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용병이란 하루하루 목숨으로 돈을 버는 족속들이고 운과 우연, 그리고 신앙과 징크스 같은 것에 기대는


하루살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신 케이룸이라. 내가 용사가 되어 이 차원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케이룸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단다.”

하지만 케이룸이라는 이름이 들렸다는 것 자체가, 그의 신자들을 보았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과 시에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신전이 있군요.”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대로 한복판에 새하얀 신전이 보였다.


예배를 드리기 위함인지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어떻게 예배라도 드리겠니?”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마시죠.”

김우진과 시에나는 행렬을 지나쳐 도시를 돌아다녔다. 혹시나 있을 엘프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요새에는 단 한 명의 엘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차원을 몇 개 다녀봤는데 인간과 엘프 사이가 좋은 것 보다는 나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 우리들도 인간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단다.”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고 데면데면했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의 요새에 엘프가 없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조금, 아주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시에나는 그것을 애써 묻어두었다.

“엘프들의 숲까지 가다보면 엘프 하나쯤은 찾을 수 있겠지.”


“네, 그럼 바로 가죠. 딱히 휴식을 취할 필요는 없으···.”

그때였다.

번쩍-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져 신전을 강타했다.

폭음도 충격도 없었다. 빛은 따스하게 신전을 감쌌다.

“오오오!”
“신의 말씀이 내려온다!”

신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신을 경배했다.

잠시 후, 신전의 사제가 밖으로 나왔다.

“새로운 신탁이 내려왔도다! 감히 신께 대적하는 악의가, 인간의 탈을 쓴 검은 눈과 검은 머리의 악마가


내려왔으니, 찾으라! 찾아서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천하라!”
“신명을 받듭니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눈앞에서 신탁을 목격한 신도들이 신을 찬양하고 경배했다.

“저거 아무래도 너 같은데.”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악마는 그저 가볍게 혀를 찼다.

* * *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1 만 미터 위의 상공.

구름 위에 지어진 신전에서 지상을 굽어 살피던 베른 오르티안이 작은 이변을 감지했다.

“···왔군.”

방벽이 열렸다. 그리고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 흔적은 빠르게 지워졌으나 들어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김우진이 왔어.”

베른이 웃었다.

“디아네.”
“예, 신이시여.”
“신탁을 내리고 김우진을 찾아라.”
“신명을 받듭니다.”

그의 명을 받은 집행자가 사라졌다.

“간도 크네. 진짜로 올 줄이야.”

함께 자리하고 있던 녹빛 머리의 여인, 드네르바가 비웃었다.

“놈은 올 수밖에 없다. 천재지변이든, 뭐든 결국 죄수를 잡아서 돌아가야 하니까.”


“여기가 당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자신감이겠지.”

놈은 신을 죽였다.

그래서 신살자라 불리고, 그래서 신들의 경계를 받는다.

가당찮은 일이다. 일개 피조물 따위가 감히 신을 죽였다며 으스대고 다른 신들을 무시하다니.

“인정한다. 놈은 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속사정이 있었고, 신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떠나
신살을 했다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

“허나, 그래 봤자다.”

김우진과 싸웠던 신은 자신의 권역에서 그를 맞이하지 못했다.


덕분에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을 죽였다는 것은 대단하지만 베른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마음이 없었다.

김우진을 권역으로 유인했다.


부끄럽지만 다른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권속들까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김우진은 끝이다.


“죽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영원히 연옥에 처박아 놓는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겠지.”

무조건.

───────────────
# < 052. 엘프 >

김우진에게는 제법 많은 능력들이 있다. 불을 다루는 힘, 공간을 다루는 힘, 그리고 모습을 바꾸는 힘까지.

김우진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붉게 변했다.

“···대체 가진 능력이 몇 개니?”


“이건 권능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냥 제 성향의 마나를 외부로 표출시키는 거죠.”

외부의 마나가 마나하트를 통해 흡수되면 연공법과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마나의 성질도 달라진다.

김우진의 마나는 불과 같이 뜨겁고 붉다. 모습을 바꾼 것은 대단한 권능이라기보다는 그 붉은 마나를 외부로


표출시켰을 뿐이다. 항시 운용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성가시지만 김우진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기.”

시에나가 잡화점에서 구입한 지도의 한쪽을 콕 찝었다. 거기에는 엘븐이라고 쓰여진 거대한 숲이 있었다.

“적어도 지도상으로는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과 큰 차이가 없구나.”


“의도했을 겁니다. 신의 입장에서는 신도가 줄어들면 그만큼의 신앙이 줄어드는 것이니. 신들의 권역이 된
세상에서 같은 신앙 간의 분쟁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들을 섬기지 않는 엘프들은?”
“그걸 지금 알아보러 가는 중이죠.”

김우진은 시에나의 불안을 이해했다.

모든 신들이 엘프들을 적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들의 권역에서는 엘프들이 기를 피고 살 수 없다.

그들은 신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신도가 아닌 이를, 신도가 될 가능성이 한 없이 0 에 가까운 이들을
보살펴줄 의무가 없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눈이 두 개인 게 문제라고, 모두가 신을 섬기는 곳에서 홀로 나무를 섬기는 엘프들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드물지만 아예 대놓고 엘프들을 박해하는 관리자놈도 있다.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속시원하겠구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조심할 수밖에 없죠.”

아스란 왕국의 북부 요새 도시, 칼칸을 벗어나 남하했다. 다섯 개의 마을과 도시를 거쳤고 단 한 명의 엘프도
보지 못했다. 엘프에 대한 언급도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그게 특별히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엘프란 대체로 폐쇄적이고 인간과 뒤섞이지 못한 건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게 단순히 엘프들이 폐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단으로 몰려 박멸당한 거라면 그들을 언급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김우진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키는 베른이 좋다고 하겠지.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곳이 베른의 권역인 이상, 모든 걸 조심하는 게 좋다.

“여기저기에 신전이 넘쳐나는구나.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자주 돌아다니셨나 봅니다.”
“엘프치고는 방랑벽이 있었지. 그래서 장로들한테 별종이라는 말도 종종 들었단다. 근데 그냥 전력으로 질주하는
게 낫지 않니?”
“그러면 반드시 마나가 드러납니다. 이질적인 마나는 눈에 불을 키고 저희를 찾는 베른에게 들키기 딱 좋죠.”

그러니 최대한 마나를 감추면서 적당히 빠른 지금이 딱 좋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며칠 뒤, 둘은 발칸이라는 대도시에 들어섰다. 아스란 남부의 도시로 왕도와 비견될 정도의 규모가 큰 곳이었다.

“여기라면 엘프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내 생각도 같단다.”

둘은 일단 주점을 찾아 이런 저런 소문들을 들어보기로 했다.

“들었나? 신탁이 내려왔다네.”


“성녀님께서 직접 오신다는군!”
“빨리 가세!”

그들이 들어서기 무섭게 모두가 빠져나가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신의 신탁이 내려왔고 성녀께서 직접 그 말씀을 전해주신답니다. 세상에, 성녀께서
이곳에 오시다니! 제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점원이 손님을 버려두고 달려 나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던 거대한 주점 안에는 오직 둘 만이 남아 있었다.

“썰렁하군요. 술도 못 마시게.”
“바텐더가 제일 먼저 나가더구나.”
“어떻게, 한 번 보시겠습니까?”
“성녀를?”
“일단 어떤 자인지, 한 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죠. 필요하면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를 테면?”
“인질?”
“좋은 생각이군.”

신전은 굳이 찾을 필요가 없었다. 도시의 중앙, 거대하고 새하얀 지붕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가장 노른자 땅을 신전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니. 과연 권역이라고 불릴 만한 차원이다.

신전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어쩌면 도시의 모든 인구가 몰린 게 아닐까, 정도의 막대함이었다.
“성녀님께서 오신다!”

그리고 성녀가 도착했다.

* * *

성녀는 김우진과 시에나의 예상을 깨트렸다.

그들의 시선이 대로로 향할 때, 다른 모두의 고개는 위로 들렸다.

“성녀님이다! 성녀님께서 오셨다!”


“오오! 하늘이시여!”

허리까지 내려오며 길게 하늘거리는 자수정 빛 머리카락, 신에게 선택 받은 듯 한 황금빛 동공과 새하얀 사제복.

그리고 더 없이 찬란한 빛의 날개까지.

그 자태는 더 없이 우아하고, 고귀했다.

초승달을 그리는 눈매와 입가에는 인자함이 가득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신성력은 모두에게 경건함을 심어주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부드럽게 땅을 디뎠다. 날개가 사라졌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고운 미성이 잔잔하게 퍼졌다.

“신을 섬기는 첫 번째 종, 디아네 디트린입니다.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신전을 중심으로 빽빽한 인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은 시에나와 함께 슬쩍,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베른을 경배하고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집행자?”
“집행자를 성녀로 삼았군요.”

일반적으로 신성 감응력이 뛰어난 인간을 성자나 성녀로 삼지만 권역이 되어 신의 힘이 충만한 곳에서는 집행자를
성녀로 삼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위 차원에 집행자를 내려 보내려면 신이 그 업을 감당해야하지만 권역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위대한 대지에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악마가···타락을 경계하고···.”


“네가 순진한 신도들을 타락시키는 악마가 되었구나.”
“뭐, 저놈들 입장에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허나 신께서 그대들을 굽어 살피시니 어둠은 결코 빛과 하늘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말이 안 되는구나. 이미 너와 내가 차원의 방벽을 뚫고 넘어왔는데 말이지.”
“원래 관측되기 전까지는 다 그런 겁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는 걸 관측이라. 재미있는 표현이야.”

피조물들 대부분은 모르지만 신이라고 피조물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단지 격이 높고 강하며 권능을 가졌다는


것뿐.

“···땅과 대지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성녀의 이야기가 끝났다. 신도들은 더욱 경건하게 입을 다물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봤군요.”


“저 정도 수준의 집행자라면 납치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예, 이런 곳에서는 들키지 않을 수 없죠. 일단 가죠.”

그래도 베른이 하위차원에서 대놓고 집행자들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남문으로 나가자구나.”
“예.”

김우진과 시에나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춰 섰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 다.”

골목길 한 가운데를 점유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방금까지 저 인파속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던 성녀였다.

둘은 어느 틈에 이곳까지 왔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성녀?”
“저희에게 무슨 볼일 있으십니까?”
“못 보던 얼굴들이신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북부에서 활동하던 용병들입니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따뜻한 남부로 이동 중입니다.”
“그렇군요.”

성녀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여정에 저 또한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성녀께서 함께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만,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신께서 내려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라면?”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진실 되게 하늘을 섬길 기회를 주는 것.”

그녀의 눈이 사명감으로 빛났다.

“그게 저희와 함께 하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신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말씀을 받들었습니다. 단 두 명만 빼고 말이지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신의 은혜가 이 세상에 내려진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모두에게 신의 말씀을 경청하라
강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께서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오직 자비로만 모두를 대하시는
분이시니.”
“그래서요?”
“허나, 사명을 받은 종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비록 여러분이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들,
이 세상에서 신의 말씀만큼 귀한 것이 없으니.”

황금색 동공이 일렁인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물과 음식이 필요합니다. 헌데 거식증에 걸려 그것을 거부한다고 한들, 먹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김우진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 챘다.

“성녀님께서 친히 말씀을 전해주시겠다는 겁니까?”


“말씀이랄 것도 없습니다. 신의 자비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단지 모를 뿐이지요. 너무도
당연한 것에 쉽게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지 일깨워드리는 거지요.

“그렇다고 믿음을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믿음이란 본디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그저


여러분을 따라다니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싫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의외로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을 섬기는 신도가 아니니 제가 함께하는 것이 불편하실 거라는 것은 압니다. 지금 저의 행동이 막무가내로
보인다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걸 알면서도 행해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틀린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신을 따르는 신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었다.

김우진은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미친년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싸우자고 덤벼들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도 아닌데 먼저 사건을 만들어 위치를 들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성녀는 김우진이 베른이 찾는 그 악마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으니.

“이거 완전 미···.”

김우진이 시에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성녀가 빙긋 웃었다.

“이해합니다. 원래 신을 믿는 신자들은 욕을 먹기도 하죠.”


“그래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렇게까지 싫으십니까?”
“예.”
“이 세상에 위대한 하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은 신의 첫 번째 사도인 저와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희는 아니군요.”
“그렇게까지 거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괜한 무례는 오히려 신에 대한 반감을 불러올 뿐이니. 오늘은 한 발
물러나겠습니다.”

그녀가 성호를 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하늘의 자비가 함께하길. 그대들의 앞에 자비와 은총이 가득하길,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길 신께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녀가 사라졌다.

“···저건 완전 미친년이잖니?”
“빨리 여길 뜨죠. 괜히 더 엮여서 좋을 건 없습니다.”
“동감이란다.”

김우진과 시에나가 급하게 자리를 떴다. 허나, 그들이 사라진 뒤 성녀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자비로운 신이시여. 여전히 당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넘쳐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온 세상에 신의 자비와 은혜가 어려 있거늘, 그것을 부정하고 신을 믿지 않는다니. 어찌 저리도 무지몽매할까.

“허나, 그런 그들을 계도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러기에 그녀는 성녀다. 집행자이기 전에 성녀. 성녀이기 전에 그의 첫 번째 사도.

“반드시 저들을 귀의시키겠습니다.”

김우진이라는 악마를 찾아내야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수많은 신도들과 그녀 휘하의 집행자들이 행하고 있으니 당장
그녀가 해야 할 것은 이것이 맞았다.

그녀의 눈이 사명감으로 불탔다.

* * *

“그러니까 뭐라고요?”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그러니까,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성녀와 만난 뒤 바로 도시를 떠났다.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해 일반인들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마을 몇 개를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 다음 도시에 들어왔더니 성녀가 있었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군요.”
그녀는 반갑게 김우진과 시에나를 맞이했다.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두 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글쎄요.”
“설마 기다리고 있던 거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또한 신의 사명을 받들어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허나, 이렇게 만난 것은 신의
이끌림이 아니겠습니까?”
“스토커처럼 따라온 건 아니고?”
“저는 신을 모시는 종입니다. 그런 추잡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추잡하다는 건 아는 모양이네.”

시에나가 툭툭 쏘아내자 성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런데 서로 간에 대화를 할 때는 로브를 벗고 이야기 하는 게 예의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딱히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아니라서. 그냥 달라붙는···.”

순간, 성녀의 손이 움직였다.

“신 앞에서는 모두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시에나가 반응했으나 작정하고 일으킨 광풍에 그녀의 로브가 벗겨졌다.

“아.”
“···엘프?”

성녀의 시선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시에나의 귀로 향했다.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야, 그럼 지금까지 엘프가 말대꾸?”

───────────────
# < 053. 진짜 원수 >

“어째서인지 저를 향한 불온한 감정이 느껴진다 했습니다. 이러면 모든 게 이해가 되는군요.”

귀쟁이 엘프가 아직도 멀쩡히 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니. 케이룸님, 맙소사.

성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신께서 내려주신 자비를 무시하고 사특한 나무나 섬기는 이교도 족속과 마주할 줄은 몰랐습니다.”

눈빛에 서린 경멸에 시에나가 발끈했다.

“사특한 나무? 지금 말 다했니?”


“완전한 신도, 완전한 나무도, 완전한 정령도 아니니 그게 사특한 나무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나무를
믿는 엘프들 또한 진정한 신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민한 이교도들에 불과하지요.”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참 빙빙 돌려서 잘도 말하는구나.”
“역시 진정한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특한 나무를 섬기는 족속입니다. 감히 신의 사도인 제게 그런 망발을
내뱉다니.”

끓어오르는 살기에 김우진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다행이라면 성녀를 본 순간, 즉시 도시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것. 불행이라면 그럼에도 굳이 쫓아와 이
사단을 냈다는 것이다.

“일단 좀 진정해보시죠.”
“신을 모욕하는 이교도를 눈앞에 두고 진정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도 이 이교도와 동료였죠.
당신은 이교도의 사특한 나무를 옹호하는 자입니까?”

성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김우진에게 향한다.

“옹호하지도 그렇다고 적대하지도 않는다면 문제가 됩니까?”


“이교도의 사특한 나무를 적대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들을 옹호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극히 이분법적인 가치관이었다.

“애초에 엘프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규율을 어긴 것을 처벌할 뿐.”

마나가 움직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규율이라니요?”
“모르는 척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사특한 나무를 섬기는 엘프들은 본디 모두 박멸해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신께서는 자비를 내려주어 그들을 다른 곳에서 신의 관리 하에 사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셨죠.”
“살던 곳에서 쫓아내고, 감시하면서 자비라고?”
“모두 죽었어야 할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자비로운 신의 은총입니다.”
“그래. 어디···.”

으르렁거리는 시에나를 제지했다.

“그럼 엘프들은 그 곳에 격리되어 있겠군요. 그곳이 어디 입니까?”


“그거야 발로란 섬···당신들, 그걸 왜 모르죠? 신을 섬기든, 섬기지 않든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성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 얼굴.”

성녀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김우진의 얼굴과 대조했다.

같았다. 비록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달랐으나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같았다.

“···반역자, 김우진. 맞습니까?”


“결론을 내려놓고 질문을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정말로!”

확 바뀐 말투와 분위기에 그녀가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김우진의 주먹과 도끼가 충돌했다. 충격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성녀가 충격을 이용해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신께서 내려주신 행운입니다. 직접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펄럭, 빛의 날개가 솟아났다. 가공할 신성력이 도끼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신의 이름으로, 당신들을 처단합···!”

──!

그 순간, 날아든 섬광에 성녀가 급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비겁한 짓을 하다니. 과연 사특한 나무를 섬기는 이교도와 반역자입니다. 더욱 더 당신들을


처단해야겠습니다.”
“행운이라고 했지?”

허나, 성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야.”

훅 들어온 목소리는 어느새 그녀의 코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도끼가 가공할 기세로 내려왔으나 불의 검에 가로
막혔다.

우악스러운 손이 성녀의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내리 꽂았다.

콰앙, 그녀가 울컥 피를 토했다.

“너는 운이 나쁜 거야.”

두터운 신발이 그녀의 복부를 지려 밟았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과연 신께서도 경계하시는 반역자···!”

그럼에도 눈은 올곧았다.

“허나, 고난이 있을지언정 악은 결국 신 앞에 무릎을 꿇을지니···!”

──!

성녀가 간신히 주먹을 쥐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거대한 낙뢰가 내리 꽂혔다.

“천벌이 내릴 지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오십 번.

쉴 세 없이, 끊임없이 김우진을 두들겼다.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가 불타고, 대지가 무너질 때까지.


“다 끝났냐?”

그럼에도 김우진은 멀쩡했다.

“···어떻게?”
“그러니까 싫다고 했을 때 그냥 꺼졌어야지.”

퍽, 성녀가 기절했다.

* * *

“으음···.”

성녀가 눈을 떴다. 온 몸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내가 왜···.”

망막을 가득 채우던 주먹이 떠올랐다. 한 발 늦게, 기억이 났다.

신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무교인들에게 포교를 하고자 했으나 이교도인 엘프였다. 그리고 그 동료는
반역자 김우진이었다.

싸웠고, 패배했다. 압도적인 차이였다.

어떻게 신도 아닌 존재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몸이···.’

손과 발이 억압되어 있고 무슨 짓을 했는지 마나로드가 죄다 막혀 있어 마나의 운용도 불가능했다. 나약해진 몸


뚱아리에 성녀는 기도했다.

“신이시여, 미천한 종을 굽어 살피옵소서. 이 어둠속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어둠이 찾아와 그녀를 뒤덮었으나 신께서는 결국 그녀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지랄 났다. 아주.”

김우진이었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 턱을 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얼음이 둥둥 떠 있는 검정


물이 들려 있었다.

여전히 붉은 눈과 머리였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기도? 광신도 나셨군.”


“저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는 의외로 침착했다.

“살아 있는 시점에서 너무 뻔 한 것 아닌가.”


“저를 인질로 잡으실 생각이시군요. 신을 압박할 수단으로.”
“정답이야.”

그럴 수는 없다. 신께 짐이 될 수는.

성녀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손과 발을 묶은 구속구로 인해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하다.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느껴운 익숙한 힘이다. 어쩌면 노력하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속구가 전부라면.

주요 마나로드 곳곳을 틀어막은 이질적인 기운은 분명히 반역자의 그것이었다. 마나를 움직여도 단단한 철벽처럼
꼼작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살도 불가능하다. 고작 혀를 깨문다고 죽을 만큼 그녀의 육신이 나약한 것도 아니고.

외통수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신이시여, 불민한 종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정말로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허나, 죄송할 뿐, 신께서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실 거다.

“저를 인질로 사용하셔도 뜻하는 바를 이루시지는 못할 겁니다.”


“어째서?”
“신께서는 결국 저를 구원해주실 것이며, 당신께 천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쎼, 설사 그놈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그전에 네가 먼저 나한테 죽을 텐데.”
“허나 영혼은 구제 받겠지요.”
“내가 이긴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어.”
“당신 같은 피조물에게는 존재하겠으나 신께서는 아닙니다.”

완벽하고 지고한 존재. 그것이 신이다. 신이 패배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이고, 그렇기에 절대자이다.

“당신이 저보다 강하고 신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지언정 결국 모든 건 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단지,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티끌만큼이라도 짐이 된다는 것이 안타깝고 죄송할 뿐.

흔들림 없는 눈빛에 김우진은 설득이나 협박 같은 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있네.”

허나, 그렇기에 갑자기 궁금해졌다.

만약, 그 믿음이 깨어진다면.


베른 따위는 결코 그런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을 받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신앙을 잃어버린 광신도는 어떻게 될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으면 죽었지,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도 협조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광신도라니요. 신을 믿고 섬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추잡한 호칭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성녀가 눈을 감았다.

“뭐, 딱히 협조는 필요없어.”

김우진이 웃었다.

“원하는 건 이미 다 얻었거든.”
“······!”

* * *

김우진과 시에나가 케이룸에 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탈옥한 카를로를 찾는 것.
엘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

사실 전자는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베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직접 보호하고 있을 터, 어차피 부딪혀야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해야 할 건 엘프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엘프라는 약점을 만드는 건 옳지 않으니까.

이곳의 엘프들이 전부 뒤지든 말든 상관 없지만 시에나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엘프에 대해서 묻지 못한 건, 위치를 최대한 발각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성녀와 전투를 벌이면서 모든 게 드러났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김우진과 시에나는 자리를
피하면서 급하게 발품을 팔았고 손쉽게 해답을 찾았다.

성녀가 발로란 섬이라는 단서를 남겼기에 더욱 쉬웠다.

“발로란 섬? 엘프들이 유배된 섬 아닌가. 위대한 케이룸의 자비지. 사특한 나무나 섬기는 이교도들에게 삶이라는
희망을 주었으니. 그들에게는 과분해.”
“발로란이 어디냐고? 그야 당연히 남···.”

엘프들이 유배되었다는 것은, 엘프들의 유배지가 발로란 섬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다.

김우진과 시에나는 구속된 성녀와 함께 엘프들의 숲으로 날았다. 더 이상 거리낄게 없으니 전력을 다했다. 차원
남부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곳에 섬은 보이지 않았으나 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계가 느껴졌다.

“이건···.”
“결계군.”
“위대한 신의 결계이니 당신들은 결코 들어가지 못할···.”
김우진이 단숨에 그것을 갈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작은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섬은 울창했다. 허나 그 뿐이었다.

“······,”
“······.”

김우진도, 시에나도 그곳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생명의 기운이 없었다.

“···안 돼.”

시에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급하게 섬으로 들어갔다.

김우진이 뒤따랐다.

숲 중앙에 보이는 것은 거대하면서도 새하얀 산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썩은 내 나는 악취와 검게 굳다 못해 말리 비틀어진 핏자국들이었다. 숲 전체를 뒤덮지 않았을까할 정도로 많은.

“아아아아아아악!”

시에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붉게 물들었다.

김우진이 유골의 산을 살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엘프의 뼈였다. 엘프들의 무덤이었다.

죽은 지 꽤 되었다. 아마도 이곳에 들어온 순간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

“이게 네가 믿는 신의 정의인가? 살려준다고 선동한 뒤, 남몰래 다 죽여 버리는 게?”


“···신께서는 이미 수차례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회를 잡히 못한 것은 엘프들입니다.”

얼굴이 굳은 성녀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다 죽여?”
“신께서 행한 일입니다. 그 뜻과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개 쌍년이!”

시에나의 발길질이 성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성녀가 볼품없이 뒹굴었다.

분노에 찬 살기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지금 그 따위 걸 말이라고 지껄여?”


“반역자들은 살려둘 수 없는 법. 신께서는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누가 반역자야! 사이비 새끼가!”

쾅쾅쾅!

시에나의 발이 떨어질 때마다 대지가 진동했다. 성녀가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죽어! 죽으라고!”

그때, 김우진이 시에나를 붙잡았다.

“멈추세요.”
“놔.”
“분노는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다 잡은 벌레에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김우진의 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하늘, 그곳에는 신이 있었다.

신들이 있었다.

“진짜 원수가 왔습니다.”


“···저 개자식들!”

신을 향한 시에나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
# < 054. 상태이상 >

“왜 여기로 왔나 했더니 엘프가 있었나.”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엘프. 꽤나 낯이 익다.

“강한데. 어지간한 집행자들 이상이야. 내 집행자로 삼고 싶네.”

드네르바가 입술을 핥았다.

“죄수다. 연옥에 오래 갇혀 있던 죄수지.”


“흐음, 감옥에 간 떨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제법이네.”
“그래봐야 죄수다.”

신의 뜻을 거역하고 반역자 김우진에게 붙은 얼간이.


원래 목표했던 셋은 아니었으나 쓸만해보여서 자비를 베풀어줬건만 감히 신의 제안을 발로 차버린 머저리.

“저런 우매한 년에게 쓸 시간 같은 건 없다.”


“과연, 저 자가 김우진이네.”

뇌쇄적인 눈빛이 김우진을 빠르게 훑는다.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끝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깊이에 드네르바가
경각심을 가졌다.

“네 말이 맞았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다.
“아쉽게 됐네.”

발로란 섬은 대륙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곳이다. 엘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되, 후환을 남기지
않고자 모두 처리하기 위해서 인류가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을 선정했으니.

덕분에 본래의 계획대로 모든 인류를 이용한다는 계획은 폐기다.

허나, 그렇다고 김우진이 대륙으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않나. 그 안에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약간의 덤일 뿐이다. 없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아.”


“같은 생각이야. 메이.”
“예, 신이시여.”

드네르바가 이끌고 온 집행자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감히 무도한 눈빛으로 신을 노려보는 저 어리석은 엘프를 잡으렴.”


“명을 받듭니다.”

그녀가 사라졌다.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섬으로 들어간 메이와는 반대로 섬에서부터 떠오른 존재가 있었다.

“김우진.”

베른이 상대의 이름을 읊조렸다.

삼십의 집행자들이 김우진을 포위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어째서 내 영역을 침범했지?”


“귀찮게 그러지 말자.”

김우진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후, 미세한 귀지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굳이 같잖은 명분 쌓기를 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군.”

베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까지 온 이상 그런 건 의미 없었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뿐,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누가 패배하고 누가 모든 것을 잃을지, 그 결과는 정해져 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하고 대가를 치를 생각은 없나?”

파지지지직, 새파란 뇌전의 창이 베른의 손에 잡혔다.

“잘못이 없는데 무슨 대가를 치러.”

화륵, 김우진의 불의 검을 움켜쥐었다.


“오히려 탈옥수를 감싸준 네놈이 내 앞에서 석고대죄를 해야지. 나도 기회를 줄게. 도망친 새끼, 어딨어?”
“그 건방짐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보겠다.”
“평생 갈 거야. 평생.”
“상황이 달라졌음을 인지하지 못하는군. 아니면 인정하지 못하는 건가. 네놈이 무엇이라 지껄여도 참아야만 했던
연옥과 달리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그래서?”
“그래서···.”

파앗-

마력 칼날이 김우진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몸을 노리지 않았다. 그저 주의를 끌고자 하는 목적에
불과했다.

“그래서 둘 다 나를 잊은 것 같은데. 그러면 꽤나 섭섭해.”

그제야 둘의 시선을 받은 드네르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 김우진. 난 드네르바라고 해.”


“그래서?”
“내 집행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어? 너라면 많이 예뻐해 줄 자신이 있는데.”
“연옥으로 와. 내가 특별대우를 약속해주지.”
“신을 감옥에 가둘 생각을 하다니. 과연 반역자네.”

마나가 요동쳤다.

“소문대로 꽤나 건방지고.”

그저 의지만으로 발현된 마법이 김우진을 덮쳤다. 바닷물을 끌어들인 거대한 용오름이었다.

“죽으렴.”

베른이 번개의 창을 던졌다. 낙뢰가 내리 꽂혔다. 용오름과 어우러져 천벌이 쏟아졌다.

집행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냈다. 각자의 공세가 천벌의 틈새로 들어가 김우진을 공격했다.

────!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깊은 바닷물이 증발해 일시적으로 바닥이 드러났다.

아니, 그건 폭발의 여파가 아니었다.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진홍빛의 화염이 폭발을 집어 삼키며 확장하고 있었다.

불길은 그대로 모든 것을 불태우며 전진한다.

대기에, 바다에, 마나에. 모든 것에 들러붙으며 전진한다.

신에 필적하는 권능. 그 모습에 드네르바가 헛웃음을 지었다.


“말로만 들었지, 이건 정말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네.”

그녀가 손을 뻗는다.

꾸득, 대기의 마나가 강제로 일그러진다. 합병되어 하나의 마법을, 권능을 시전한다.

거대한 압력. 중력의 강화.

행성이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인력이 몇 배, 몇 십 배, 몇 백 배로 강해진다.

“그래서 더 끝을 봐야겠고.”

모든 것을 찍어 누르고 움직임을 강제한다. 그 속에서 번개가 일렁인다.

처음부터 둘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드네르바가 김우진을 붙잡고, 베른이 끝을 낸다.

파지지지직-

베른은 방심하지도, 김우진을 얕보지도 않았다.

김우진을 싫어하고 놈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우진의 힘을 인정했다.

놈은 신에 필적하는 피조물이고 신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자존심을 굽히고 다른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의 권역으로 끌어들였다.
수십의 집행자들을 덧붙였다.

반드시 이기기 위한 수. 그 과정에 간을 보는 행위 같은 건 없다.

처음부터 끝장을 낼 각오로.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파지지지지직-

수 억, 수 십 억 마리의 새들이 지저귀는 것과 같은 소음과.

콰르르르르릉-

천둥의 굉음이 모든 소리를 먹어 치운다.

세상을 푸르게 물들인다.

푸른 섬광이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나간다. 긴 궤적의 끝에 압력에 저항하는 불꽃이 있다. 그 너머, 김우진이
존재한다.

─────!

충격파가 퍼진다. 불꽃이, 뇌전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김우진을 포위하며 방진을 형성하고 있는 집행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베른은 해치웠나? 같은 진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신으로서 쌓아온 모든 마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폭발은 대기를 먹고, 바다를 먹고, 마나를 먹었다. 점점 커지는 범위는 그 안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역시 신의 힘.”
“···굉장해.”
“신이시여.”

간신히 범위에서 벗어난 집행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럭 무럭 솟아나는 경외에 그들의 신앙이 더욱
신실해졌다.

“신살자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시시하네.”

말과는 달리 드네르바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김우진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을 묶어두기 위해서, 베른이 작정하고 쏟아내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어그러트리는


곳에서 끊임없이 권능을 시전하고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이었으나 베른 또한 신이었으니.

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신으로서 보일 모습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큰 우환을 정리하였으니 나쁘지 않다.

“···그런데 김우진이 죽으면 어떡하지? 그건 문제 아니야?”


“걱정 마라. 죽지는 않을 테니.”

진한 탈력감에 호흡을 고른 베른이 대꾸했다.

죽일 각오로 퍼붓기는 했으나 신을 죽인 신살자다. 미약하게나마 목숨은 붙어 있을 터.

드네르바와 베른이 지금 멀쩡히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죽었다면 계약을 어긴 것이고, 계약을 어기면 그들이 신이라고 할지라도 심연으로 끌려 갔을 테니.

“그럼 다행인···.”

그 순간이었다.

────!

아무런 징조도 없이.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그대로 무방비 상태의 베른과 부딪혔다. 베른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어떻게!”

당황한 드네르바가 급하게 마력을 조작했다. 한 순간에 조형된 마나의 칼날 수 백개가 김우진을 뒤덮었다.
허나, 그것은 불길에 먹혀 그의 본체에 상흔을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콰득-

거친 손길이 그녀의 목을 강타했다.

“커헉···!”

아찔한 통증,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강인한 압박이 그녀의 육신을 뒤흔들었다. 그대로 증발한 심해로
내리 꽂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쿨럭, 드네르바가 피를 토했다.

“···대체 어떻게?”

허나, 통증보다 먼저 밀려오는 것은 궁금증이었다.

드네르바가 전력을 다해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모든 권능을 쏟아부은 만큼 도망치지 못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 상황에서 베른의 전력을 정통으로 맞아놓고 멀쩡하다니?

아무리 신을 죽인 신살자라고 할지라도,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결국 신은 아니다.

그런데 신의 권능을 이렇게 쉽게 버텨내다니.

“이번엔 조금 위험하기는 했어.”

김우진의 말대로 그도 정상은 아니었다. 머리와 옷은 일부 불타고, 상처도 새겨졌다.

허나 그것은 결코 깊지 않았다. 치명상도 아니었으며 견뎌내느라 모든 마나를 소모하지도 않았다.

감히 두 명의 신을 상대로!

“그런데 그거 알아?”

꽈득, 손아귀의 힘이 강해졌다.

드네르바의 얼굴이 더욱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애초에 내가 죽인 관리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이 쌍년아.”

화륵, 불길이 그녀를 덮었다.

“아아아아아아악!”

뜨거운 열기에 그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 * *

“쿨럭···!”

시에나가 잔해를 치우며 일어났다. 손발이 미약한 경련을 일으켰다.

마나나 오러도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대는 더욱 좋지 않았다.

미리 대비하고 피한 그녀와 달리 메이라는 집행자는 시에나의 의도대로 정면으로 충격파를 얻어맞아야만 했으니.

이미 그녀의 화살이 몸에 몇 대 박혀 있는 상황에서 신의 힘이 발생시킨 충격파는 쐐기와 다를 바 없었다.

“아···.”

상처투성이의 집행자가 멍한 눈으로 시에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상황은 끝났다.

“먼저 가서 기다리렴. 네가 그렇게 모시는 신도 그 뒤를 따라가게 해줄 테니.”

화살이 심장을 꿰뚫었다. 집행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대단하네.”

피를 털어낸 시에나가 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바다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영역과도 같이 푹 파인 구멍.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신들이었다, 김우진이었다.

“살아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오히려 반격을 해?”

김우진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강자였다. 신을 상대로 자신하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째서 신들이 그를 경계하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대체 얼마만큼의 괴물인거니.”

신 이상이다. 아니, 어쩌면 잘못된 게 아닐까. 저들은 그냥 관리자가 김우진이 진짜 신인 게 진실이 아닐까.

그녀가 픽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억측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너를 따라가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뿌득, 시에나가 이를 갈았다. 동족들이 모두 죽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는 뒤가 없었다.


“···위대한 신이시여.”

그때, 그녀의 귓가에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래, 네가 있었지.”

케이룸을 섬기는 성녀였다. 그녀의 적.

성녀는 충격파 속에서도 간신히 몸을 숨겨 살아 있었다.

“···신의 힘을 견뎌내? 신께서 패배하셨어? 말도 안 돼. 신이 패배할 리가 없어. 신은 완전하기에 신이야.


신에게 패배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 그런데 저건? 어떻게 버텨낸 거지? 신이 아니잖아. 저 자는 반역자일
뿐인데···? 어떻게? 어째서? 왜? 설마 진짜로 패배한 건 아니겠지?”
“······?”

다만, 이상하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
# < 055. 진짜 >

‘대체 어떻게?’

의문에 의문에 의문에 의문. 꼬리를 무는 의혹들은 드네르바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김우진은 강하다.
안다.
김우진은 신을 죽인 신살자다.
안다.
김우진은 신 둘을 죽였다.
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는 전제가 붙어 있다.

그 신들은 하위 차원에서 싸웠다.


그 신들의 권역이 아니었다.
그 신들은 따로 따로였다.

“그런데 어째서!”
“누가 그래? 따로 따로였다고.”

프흐흐흐, 김우진이 웃었다.

“다른 신들이 제대로 이야기 해주지 않았나 보지?”

하긴, 그러니까 주제도 모르고 이렇게 설치고 덤비지.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 해줬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이들은 김우진을 겪어보지 못했고 신의 자존심으로
인해 그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테니.

“넌 다른 신들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


계약으로 인해 김우진은 신인 드네르바를 죽일 수 없으니.

뿌득, 드네르바의 목이 꺾였다. 사지도 친절히 모조리 부러트렸다. 그럼에도 드네르바는 살아 있었다.

당연하다. 신이 고작 이 정도에 죽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사, 살려···!”

허나, 목이 꺾인다는 건 상상 이상의 공포를 자극한다. 설사 신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직접적인 고통이다.

드네르바가 울먹이며 빌었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는다니까?”

김우진의 불꽃이 드네르바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아아아악!”

심장이 불타는 고통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실제로 심장이 불타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의 육신에서 비롯되는 모든 마나를 불태우고 있을 뿐. 그 고통은
아마 신이 아니라면 쇼크사를 만 번 해도 부족할 정도로 끔찍할 거다.

하지만 신이기에 고통스럽기만 할 뿐, 그녀는 살아 있다. 앞으로도 살아 있을 거다.

“얌전히 있어. 날 더 빡치게 하지 말고.”

김우진은 온 몸을 뒤트는 드네르바를 내버려 둔 채, 구덩이를 빠져 나왔다.

파직, 푸른 섬광이 김우진을 저격했다.

손에 붙잡힌 뇌전의 창이 불꽃을 만나 소멸했다. 그의 시선이 괴성을 지르며 질주하는 번개에 향했다.

“김우지이이이이인!”
“그렇게 열렬하게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이 김우진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아.”

─!

불꽃과 뇌전이 충돌한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충격파에 잠시나마 잠잠해졌던 바다가 다시 요동친다.

“죽어어어어!”

10m 가 넘어가는 거대한 창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

붉은 검기가 창을 쪼갠다. 부서진 권능의 여파가 베른을 덮친다.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삼키며 다시 창을
만든다.

김우진을 쪼갤 듯이 찌른다. 허나, 역시나 가로 막힌다. 반탄력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크다.


“대체!”

창이 수 십 개의 그림자를 그리며 덮쳐온다.

“대체 왜 이렇게 내 앞을 막는 거냐!”

검과 창이 연달아 부딪힌다.

“왜!”
“말은 똑바로 해야지.”

카가각, 불의 검이 창을 타고 미끄러진다. 불꽃을 튀기며 뇌전을 가르고 신의 살갗을 벤다. 지진다. 연기와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네가 날 방해하는 거야.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는 거라고.”


“모든 신이 말한다. 네놈에 비하면 발끝만도 못하다고! 자격도 부족한 놈이 신이 되었다고!”
“내가 그런 건 아니잖아? 우리는 그런 걸 자격지심에 피해망상이라고 해.”
“닥쳐라!”

창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진다. 연달아 터지는 충격파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래서 증명하고자 했다! 나는 신이니까! 지고하고 완전한 존재니까! 신을 모욕하고 신에 대한 예의를 잊어버린
네놈에게 천벌을 내리고 이 세상에 신위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지구의 한 철학자가 말했지. 신은 죽었다.”
“끝까지!”
“애새끼처럼 투정 부리지 마.”

김우진의 기도가 달라졌다. 불꽃이 드높게 치솟는다. 그 열기에 베른이 주춤거리고 검격이 그 위로 떨어진다.

─!

베른의 신형이 뒤로 튕겨져 나간다.

“가만히 있는 날 자극한 것도, 계약의 종료만을 바라는 날 굳이 건드린 것도,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도 모두
네놈이야.”

어째서 신이라는 작자들은 하나 같이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까? 감사함이라는 것을 모를까?

“오히려 넌 나한테 절을 해야지. 고맙다고 밥이라도 한 번 사줘야지.”


“내가 왜 네놈 따위에게···!”

쩌엉, 창이 부서진다.

그대로 번개를 자르고 신의 육신을 가른다.

“커헉···!”

베른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흩뿌리는 피는 광신도들이 보면 좋아할 신혈이다.

놈의 육신이 김우진에 의해 만들어진, 드네르바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구덩이로 떨어진다.


“남 덕분에 한 자리 얻었으면, 한국에서는 밥이라도 한 번 사주는 게 예의야, 이 씨발놈아.”

그런데 밥은 못 사줄망정 지랄 염병을 해?


하여간, 신이란 것들은.

김우진이 뿌득, 이를 갈았다.

* * *

“···말도 안 돼.”

드네르바를 섬기는 집행자, 파른이 경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집행자들이 그랬다.

무려 ‘신들’과 일개 피조물의 싸움이다.

맹세코 신들의 승리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헌데 어째서일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들이 밀렸다. 신들이 압도당했다. 신들이 패배했다.

이것이 과연 말이 되는 걸까?

말이 된다. 그 결과가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심장을 부여잡고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드네르바, 기절한 채, 축 늘어져 있는 베른.

과연 누가 지금 저들을 보고 신이라고 부르며 경외할까. 오히려 그들의 멱살을 움켜쥐고 천천히 떠오르는 반역자
김우진이 더욱 신에 어울렸다.

“···어떻게 합니까?”
“나한테 묻지 마.”

다른 집행자의 물음에 파른이 입술을 깨물었다. 신들도 당했는데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저항도, 도망도 불가능하다.

“뭐해?”

그렇기에 신들을 압살한 반역자의 시선에 눈을 깔았다.

“싸울 거야?”
“···아닙니다.”
“그럼 꿇어. 이 개새끼들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 * *
“너희들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자칭 하늘의 신 케이룸, 베른.


그리고 그의 조력자이자 또 다른 관리자 드네르바.

불꽃을 심장에 박아 넣고 혈도들을 틀어막는 직접적인 제약에 약해진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
“······.”

치밀어 오르는 치욕스러움에 두 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히 패배한다해도 치욕스럽기 그지없는데 하물며
휘하의 집행자들이 보는 앞이다.

신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다. 아니, 체면뿐일까?

다시없을 굴욕이다. 그럼에도 드네르바는 살고 싶었다.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질문할 처지라고 생각하나?”
“계약의 의거하여 너는 우리를 죽일 수 없어.”
“죽일 수는 없지. 다르게 말하면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사지가 부러지고 피부를 모두 벗기고, 수천, 수 만년을 감금해도, 신들의 근원을 부숴도 계약을 위반하지는
않는다.

“그건 억지야!”
“오만한 네놈들의 아둔함이지.”

신들이 언제 계약서라는 것을 써봤겠나. 감히 피조물 따위가 신을 상대로 계약의 맹점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그렇기에 신과의 계약서에는 전문 변호사라면 충분히 찾을 수 있는 맹점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연옥에 가둬두면 그것도 재밌겠군.”

신을 가두는 감옥이라니. 명실상부한 우주 최고의 감옥이다.

“나는 신이야! 그 따위 감옥에 있을 수 없어!”


“그건 내가 정해. 너희들이 만든 징벌방에 들어가 있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그런 짓을 벌이고도 네 놈이 무사할 줄 알아?”
“무사할 것 같은데. 지금처럼.”

드네르바가 입을 다물었다.

“너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그쯤에서 김우진은 당근을 내밀었다.


“처음 말한 대로 연옥에 갇혀 죽지만 않는 상태로 수 천 년, 수 만 년을 버티던가.”

김우진에게 힘으로 족쇄를 채우려고 했던 버러지들이나 이들은 결국 앞잡이에 불과하다.

이들의 움직임을 다른 신들이 모를까?

아니다.

이들의 움직임은 결국 백신전 모두의 의지다. 백신전이 본격적으로 김우진을 견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앞으로 더 험난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신들은 김우진이 무사히 모든 죄수들을 출소시키기 전에 어떻게든 족쇄를 더욱 단단하게 조이려 할 것이다.

그건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부담스럽다.

계약을 맺은 건, 신들이 죽음이라는 미지를 두려워하고 김우진을 경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김우진이
백신전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100 이고 김우진은 하나니까.

그렇기에 무작정 오는 것들을 다 부술 수는 없다. 반드시 한계를 맞이하니까.

“···버티던가?”
“아니면 내 손을 잡던가.”
“···위대한 신이 내가 일개 피조물인 너 따위의 손을 잡을 것 같아?”
“아직도 주제나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뚜둑, 김우진이 주먹을 쥐었다.

“손을 내밀어야 잡던가, 말던가 하지!”


“신 치고는 꽤나 신박한 캐릭터네.”

김우진이 픽 웃었다.

“대체 뭘 할 생각인데?”
“가만히 앉아서 네놈들 뜻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아무리 네가 강하다고 해도 백신전을 이길 수는 없어! 우리를 이겼다고 기고만장하지 마.
우린 백신전의 신들 중 최약체라고!”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김우진은 이들이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신으로 만들었는데.”

저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그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능력으로 신이 됐어.”


“이미 꽉 차 있던 백 개의 자리에 공석을 만들어 준 건 나지. 그게 저 버러지가 나만 보면 발작하는 이유고.”

일개 피조물 덕분에 신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베른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얼룩과도 같기에.


베른이 대답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정말 백신전이랑 한 판 붙겠다고?”


“네놈들이 날 가만히 두지 않으니 끝장을 봐야지.”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그건 네 생각이고.”
“네 편을 들었다 들키면 나는 배신자로 낙인 찍혀 소멸 당할 거야.”
“그럼 지금 당장 연옥으로 갈래?”
“그러니까 안 들키게 잘해야 한다는 거지!”

드네르바가 어느새 김우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쪽은 됐고. 네 대답은?”


“드네르바, 신으로서의 위신을 지켜라.”
“패배한 상황에서 위신이고 나발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다른 놈들이 우리를 무시하는 거다!”

버럭, 소리친 베른이 김우진을 노려 보았다.

“꿈깨라. 내가 네놈의 종이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러든 말든, 상관없어.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감당하는 건 온전히 네 몫이니까. 그리고 너한테 딱히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뭐라고?”
“난 백신전을 무너트릴 거다. 그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신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렇게 신들이 줄어든다면.

“네 위치가 어떻게 변할까?”


“같잖은 설득이군. 전제가 글러먹었다. 넌 절대 백신전을 이길 수 없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사실 나도 네놈은 손수 조져주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거든.”
“후회하게 될 거다.”
“한숨 자둬. 다음에 만났을 때는 연옥일 테니까.”

콰직, 김우진이 베른을 기절시켰다.

* * *

한편, 시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였다.

“···대체 뭐야.”

집행자들이 내뱉던 말과 같았으나 그 주체가 달랐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온 몸을 파르르 떠는 성녀가 있었다.

“아아···! 그래, 그래서였어!”


성녀는 깨달았다.

신은 완벽해야만 한다.
신은 지고해야만 한다.
신은 패배할 수 없다.

그래야 신이다. 그러니 신이다.

“애초에 거짓된 신이었던 거야! 진짜가 아닌 가짜!”

그렇기에.
패배한 저 패배자들은 신 아니다.

신은 패배자일 수 없으니까.
일개 반역자의 손에 쓰레기처럼 들려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되니까.

그렇다면?
신이라고 우쭐대던 저 가짜들에게 천벌을 내린 저자는?

과연 저자가 반역자일까?

아니면.

가짜들이 숨기고자 했던 ‘진짜’인가.

“저분, 저분이야말로···!”

성녀가 김우진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 빨리 이쪽으로 좀 와줘.”

나 무서워.

시에나가 불안에 떨었다.

───────────────
# < 056. 집으로 >

구두뿐인 맹세는 믿지 않는다.

신의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지만 신이기에 어느 정도 감당할 여력이 있다.

때문에 김우진이 믿는 건 하나, 그를 연옥에 묶어둔 우주의 법칙이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

결코 어길 수도, 어겨서도 안 되는, 신조차 피해갈 수 없는 맹약.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만들어라.”


“나, 나는 말단 신이라서 아카식 레코드에 접근할 권한이 없어.”
“허튼 수작을 부리면 베른과 똑같이 될 거다.”

애초에 신이 특별한 이유는 아카식 레코드에게 권능과 권한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김우진이 그들을 관리자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모든 신들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빌려 계약을 할 수 있다.

“···알았어. 그전에 이 불꽃 좀 없애줬으면 좋겠는데. 개수작이 아니라 힘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거든.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을 빌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잠깐 노려보자 드네르바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알고 있었기에 불꽃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힘이


회복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러길 한참, 신의 권능이 요동쳤다. 새하얀 빛의 계약서가 드네르바의 손에 들렸다.

김우진이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느껴지는 우주의 기운은 그때와 같다. 결코 가짜가 아니다.

“풀 네임.”
“드네르바 아르사.”
“거짓말은 아니겠지?”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정도의 멍청이로 보여?”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원하는 조항들을 적었다. 아카식 레코드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계약 존재와 감응하는
고차원의 계약서다. 가짜를 적으면 진짜로 바뀌니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서명해라.”
“···잠깐만, 이건 불합리해! 완전 불공정 계약이잖아!”

[연옥의 소장, 김우진을 ‘갑’이라 칭한다.


백신전의 일원, 드네르바 아르사를 ‘을’이라 칭한다.

1.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2.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3.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이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알려준다.
4. 단, 갑이 원할 경우, 모든 조항에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
5. 위 조항들을 어길 시, 을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심연으로 끌려간다.]

“무조건적으로 내가 손해 보는 계약이잖아!”
“패자와 승자가 같은 조건에서 계약을 맺을 이유가 있나?”
“···그건.”

맞다. 드네르바는 패배자였고 승자의 자비를 구걸해야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명색이 신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채찍과 당근이 동반되어야 한다. 적절한 보상이 없이 강제하고 억압하기만
해서는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김우진이 계약서에 항목을 세 개 추가했다.

[6. 갑은 을이 계약 사항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도록 협력한다.


7. 갑은 을의 정체를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8. 백신전이 붕괴되었을 때, 혹은 백신전에 의해 갑이 사망하였을 때 이 계약은 종료된다.]

“···이건?”
“이 정도면 충분히 호의를 베풀어 준 거다. 서명해라.”
“···아까보다는 조금 낫네.”

일단 기한이 생겼다는 것이, 김우진의 승패에 상관없이 벗어날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 그리고 김우진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토사구팽 할 수 없다는 것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확인한 드네르바가 어쩔 수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김우진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그 순간, 계약서가 빛으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김우진과 드네르바의 몸속으로, 일부는 저 차원 너머의 우주 속으로.

간단해 보여도 우주의 법칙인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빌린 권능이다. 설사 신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어길 수 없는


계약이 두 사람을 옳아 매었다.

“그럼 마무리를 지어볼까?”


“마무리? 끝난 거 아니야?”
“내가 너희들이랑 드잡이질 하러 여기 온 줄 알아?”

어디까지나 연옥의 소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다.

“어디 있어?”

집 나간 탈옥수를 찾으러 갈 시간이다.

* * *

김우진은 기절한 베른을 드네르바가 짊어지게 했다.

“집행자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싫다고?”
“누가 싫다고 했어? 그냥 그렇다는 거지.”

김우진은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전투는 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으나 신들의 대전은 섬에 영향을 끼쳐 섬의 대부분을 소멸시켰다.

그나마 그건 약과였다. 증발한 바닷물과 충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크레이터는 차원 전체의 해수면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으니까.

아마 케이룸의 인류는 갑작스러운 현상에 꽤나 당황스러워할 거다.

“신이시여!”

그때, 누군가가 달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성녀?”

성녀였다. 어째서 그녀가 무릎을 꿇는가. 김우진은 잠시 생각했다.

“네 신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 내 어깨 위에 있거든?”


“사이비 가짜는 닥쳐주셨으면 합니다.”
“···사이비 가짜? 지금 나한테 한 소리는 아니지?”
“당신한테 한 소리가 맞습니다. 정확히는 당신과 당신 어깨 위에 있는 기생충들에게 한 소리입니다.”
“···기, 기생충?”

드네르바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베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일개 집행자 주제에 감히 신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녀의 분노에 감응한 주변의 마나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신에게 그러면 그러하겠죠.”


“그게 지금 무슨 뜻일까?”
“신이 아니면서 신인 척 하는 가짜들에게는 이 정도도 과분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그거 내가 가짜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아직도 아니라고 말할 참입니까?”
“뭐라고?!”
“신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완벽하기에 신입니다! 헌데 그런 신이 패배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허나, 당신들은 패배했습니다. 그럼 결론은 간단합니다. 당신들은 애초에 신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람을 속이는 이 가짜들.

성녀가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진짜 신이야!”
“진정한 신을 보았으니 더 이상 사특한 가짜에게 속지 않습니다.”

광신도와 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이 무어라 하든 이미 등을 돌린 광신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성녀는. 아니, 신앙을 잃어버린 집행자, 디아네 디트린은 그대로 김우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머리를 조아리고.

“디아네 디트린이라고 합니다.”

발에 입을 맞췄다.

극도의 경배에 김우진이 움찔했다.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린가?”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나는 신이 아니다만.”
“더 이상 저를 시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불민하고 믿음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당신을 의심했으나, 이제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지?”


“신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신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한 점의 티끌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이다. 그렇기에 숭배 받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다.

그렇기에 패배한 이들은 신이 아니다. 신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저 가짜들은 비록 가짜이나 가히 신이라 불릴 정도의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착각하고


진심으로 믿을 만큼.”

헌데 그런 자들이 꺾였다. 압도적인, 진짜 신의 힘을 보여주었다.

“오직, 오직 당신만이,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신이십니다!”

눈앞의 김우진이!

그가 신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신일까.

디아네가 더욱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부디 불민한 종의 믿음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과연 신께서는 자신을 용서해주실까. 감히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를 섬기며
모욕했는데.

아무리 가짜들에게 속았다고는 하나 신을 욕한 입은 그녀의 입이었고 신을 공격한 손은 그녀의 손이었다.

“···재미있네.”

잠깐의 침묵. 한참 후 들려오는 신의 고귀한 음성에서는 권태와 흥미가 느껴졌다.

“허나, 나는 신이 아니야.”
“그게 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이들이 신이 아니라는 추론은 꽤나 억지 아닌가? 집행자로서, 성녀로서 이들을 섬겨온
네가 무엇보다 잘 알텐데?”
“예, 맞습니다.”

성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부끄럽지만 저는 저들의 하수인으로 꽤 오랜 세월을 일해 왔습니다.”

충성을 다하며 믿음을 바쳐왔다.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허나, 그렇기에 저들에 대해서 잘 알았다.

“백신전과 백 명의 신들. 그들이 모두 가짜가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그들이 보여준 힘과 권위는, 권능은 신이 아니라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다.

백신전의 신들 중에 분명 신들은 있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신은 아니겠지요.”


“그건 또 무슨 뜻이지?”
“백신전은 당신을 반역자라고 부릅니다. 하찮은 가짜들이 감히 진짜인 당신에게···!”

뿌득, 디아네가 이를 갈았다.

“아실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고 진짜를 반역자로 만듭니다.”

빈번하게,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왕이 되기 위해.

“백신전의 신들 또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신을 반역자라 부를 이유가 없으니!”

이들은 찬탈자입니다!

“제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당신의 종이 되어 당신의 신앙을 널리 퍼트리겠습니다!”

잘못된 세상을 되돌리겠습니다!

“신 중의 신, 오직 하나뿐인 진짜 신. 이 세상의 주신이시여!”

성녀가 다시 한 번 신발에 입을 맞추고 김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무조건 옳다는 확신에 찬 눈동자에 김우진이 당황했다.

“···뭐?”
“조심해. 저거 완전 미친년이야.”

어느새 다가온 시에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 * *

성녀, 아니 디아네는 베른의 첫 번째 집행자이자 종이었다.

그녀는 베른의 모든 것을 알았고 거기에는 당연히 탈옥수, 카를로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감히 신의 관리를 거부하고 탈옥한 버러지는 하늘의 신전에 있습니다.”


“하늘의 신전?”
“저 찬탈자가 구름 위에 권능으로 만든 신전입니다.”

하늘의 신전에 도착하자 신전을 지키는 경비들이 보였다. 집행자는 아니나 차원에서 제법 강자 축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성녀님, 이분들은?”
“위대한 분입니다. 카를로는 어디 있죠?”
“대지의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만, 케이룸님께서는 왜 저리···.”
“신경 끄고 비키세요.”
“···성녀님?”
“비키라는 말 안 들리나요?”

성녀가 도끼를 꺼내며 살기를 드러내자 경비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이쪽입니다, 주신이시여.”
“그 주신이라는 말 좀 안하면 안 되나?”
“아직 정체를 숨기길 바라시는군요. 하긴, 찬탈자들이 득세하니 은연 자중해 힘을 숨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허면 무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애초에 찬탈 되서 힘을 뺏겼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신은 완벽한 존재라며?”
“허나, 찬탈자들에게 주신의 위엄을 보이셨죠.”
“내 말 뜻이 그게 아니란 걸 알 텐데.”
“···당신은 주신이십니다.”
“아하.”

김우진은 디아네의 상태를 보다 명확히 파악했다.

광신은 신앙을 넘어선 신념이다. 평생을 믿어왔던 신념이 부서지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그녀는 그러한 세상을 복구해야만 했다. 자신의 신앙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김우진은 그러한 대체재였다.

자신이 믿던 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렇기에 맹목적으로 믿고, 주신이어야만 하는.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그녀의 신앙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김우진이 패배하지만 않는다면.

“이해했다. 안내를 계속해.”


“예.”

잠시 후, 디아네가 한 문을 열었다. 호화스러운 내부의 침대 위,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누···, 히이익! 어떻게?”


“오랜만이야, 카를로. 일탈은 끝났어.”

무형의 힘이 누워서 포도를 먹고 있던 카를로의 육신을 강제로 일으켰다.

“다시 집으로 갈 시간이야.”

아, 참고로 스페인은 아니야.

───────────────
# < 057. 연락 >

신들의 수작을 분쇄했고 연옥을 빠져나갔던 탈옥수를 붙잡았다.

안타깝지만 엘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두 확인했다.

케이룸에 온 목적은 모두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패배자가 되어 도망가라고?”

드네르바가 질색했다.

“나는 신이야! 내 위엄과 위신은···!”


“닥치세요. 찬탈자 주제에 어디 주신께 함부로 지껄이는 겁니까?”
“너나 닥쳐! 누가 주신이야! 주신들은 백신전에 있어!”
“그들도 가짜지요.”
“디아네.”
“예, 신이시여.”

디아네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시선은 여전히 드네르바를 향하고 있었다.

“저거 좀 아예 치워주면 안 돼?”


“나는 무사히 탈옥수를 잡았고 베른은 나와 함께 연옥으로 갈 거다. 그런 상황에서 네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멀쩡히 돌아가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너희들은 나에게 패배한 거야. 그리고 넌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서 도망친 거지. 걱정
마. 이미 신 두 명을 죽여 봐서 개연성은 충분해. 놈들도 납득할 거야.”

아마, 그럴 줄 알았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내, 내 위신은?”
“그냥 갈래, 맞고 갈래?”
“위신은 나중에 충분히 쌓으면 되겠다는 뜻이었어.”
“집행자들의 입단속은 알아서 잘 할 수 있겠지.”
“물론이야.”

집행자는 결국 신들과 계약을 맺은 강한 용사다. 그들은 신들과 연결되어 있어 배신이 불가능했다.

“그럼 저 미친년은 어떻게 저러는 거니?”


“제가 베른의 몸에 제약을 걸고 기절까지 시켰으니까요.”

신과 집행자 사이의 결속력이 약해졌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녀가 받은 거대한 충격이 추가적인
역할을 했을 거고.

김우진은 베른의 집행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너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집행자란 결국 보다 특출 난 용사들이다. 그들이 신의 가호를 받아 더 오랜 세월 동안 성장해왔다.

그들은 아주 훌륭한 병사다.

“나와 함께 연옥으로 가 죄수 혹은 간수가 되거나.”

허나, 그렇기에 품 안에 들이지 못한다면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신앙을 지키고 지금 이 자리에서 죽거나. 너희는 순교라고 하던가?”


“당연히 주신을 섬길 것입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아네를 비롯한 집행자들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베른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건 없나?”


“진정한 신을 만났으니 찬탈자들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디아네, 너한테 물은 게 아니야.”
“···죄송합니다.”

잠시 주저하던 집행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신들마저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데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신들의 힘을 알 텐데?”
“패배하신다면 어차피 죽을 거, 죽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좋아.”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베른에게 향하던 결속을 비틀어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
생각이니까. 그가 죽어 구속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배신할 수 없다. 이미 죽은 시점에서 배신은 그가 알 바
아니고.

“좋아. 야, 일어나.”

김우진이 기절한 베른을 깨웠다.

신의 권속이라고 할 수 있는 집행자를 강탈하는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은 역시 당사자에게 직접 인계 받는


것이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내가 그럴 것 같나?”

물론 베른이 순순히 자신의 집행자들을 넘겨줄 리는 없었다. 김우진도 그저 한 번 물어봐 본 것뿐이었다.

콰앙, 김우진이 베른을 다시 기절시켰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 집행자가 불안하게 떨었다. 집행자와 신의 결속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빌린 것. 신이 아니라면 만들 수도,


끊어낼 수도 없다.
“의심하지 마세요. 이 분은 주신. 모든 신들의 위에 계신 신 중에 신입니다.”
“아니, 하지만···.”

성녀가 김우진을 두둔했으나 사실 그가 주신이라는 것을 믿는 집행자는 없었다. 그들에게 김우진은 그냥 강자였다.


신을 압도할만큼의 괴물이지만 신의 권능과는 또 의미가 달랐다.

김우진은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대신 디아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아.”

마나가, 권능이 디아네의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그대로 심장으로 흘러 베른의 잔재를 지웠다. 베른을 향한
결속의 흐름을 비틀어 방향을 바꿨다.

권능에 개입해, 권능을 변환시켰다.

“···주신이시여.”
“맙소사, 권능이···?”
“비틀렸어?”

그 이적에 디아네가 더욱 경건해졌다. 변화를 눈치 챈 집행자들이 경악했다.

“나머지도 와라.”
“어떻게 한 겁니까? 어떻게 신이 아니면서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에 개입을···?”
“내가 그걸 친절히 설명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건가?”
“···아닙니다.”

집행자들이 하나둘, 김우진과 결속되었다.

“디아네.”
“예. 주신이시여.”
“주신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허면 제가 무어라 존함을···.”
“그냥 소장이라고 불러.”
“예, 소장님.”
“대충 챙길 것 있으면 챙기고 이곳에서 마무리할 게 있으면 마무리해라. 전부 연옥으로 갈 테니. 한 시간
주겠다.”
“예.”

성녀와 집행자들이 흩어졌다. 그제야 꿋꿋이 서 있던 김우진이 비틀거렸다.

“괜찮아?”

시에나가 다급히 김우진을 부축했다.

“땀이···.”
“후우, 빡세네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에 간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미 신의 이름으로 이어진 결속을 비트는 건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받은 것이 아닌, 그 힘을 강탈한 거니까.

“괜찮은 거니?”
“괜찮습니다. 조금 쉬면 나아질 거예요. 그냥 무리를 조금 해서 그래요.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긴 하네요.”

그만큼 아카식 레코드란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이래서 신들이 널 경계했구나. 신의 힘에 간섭하다니.”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신이 아니면서 신의 힘을 사용하는 자.

그렇기에 김우진은 모든 신의 경계를 샀고 싸웠다.

그리고 신을 죽였다.

“어떻게, 더 제 편이 되고 싶어졌습니까?”
“그래. 저 빌어먹을 놈에 의해 내 동족들이 모조리 죽었어. 헌데 우습게도 나는 저 놈을 죽일 힘이 없단다.”

기절해있다고 해도 마찬가지. 평범한 용사인 그녀에게는 신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 계약이라는 것 때문에 너가 죽이지는 않겠지.”


“적어도 당장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훗날이 되면 언젠가 싸울 거고.”
“그렇게 되겠죠.”
“그럼.”

연달아 벌어진 일들에 잠시 잊었을 뿐, 분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이라는 이름하에, 정의라는 대의 아래 세상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무르는 신들은 절멸되어야 한다. 신보다는
악마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기에.

“그럼 내가 너와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니.”

시에나가 눈을 번뜩였다.

김우진이 연옥으로 복귀했다.

갈 때는 둘이었으나.
올 때는 열 셋이었다.

* * *

“오셨습···꽤나 많이 늘어났습니다만.”
“꽤나 많은 일이 있었거든.”
“맙소사. 저건 베른 아닙니까?”
“잡아왔어.”
“···계획에 있던 겁니까?”
“아마도?”
“뭡니까, 그 애매한 대답은.”
“이놈은 내가 특별 관리 할 거야. 그래도 명색이 관리자인 이상, 연옥의 시스템은 아무렇지 않게 해제할 테니.”

제약을 걸어 대부분의 힘을 구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관리자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나머지들은?”
“베른의 집행자들이다. 이제는 내 간수들이고. 그렇지 않아도 간수들의 파손이 심해서 수가 부족해졌잖아? 잘
됐지. 권능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배신은 걱정할 필요없다.”
“그럼 교육하겠습니다.”
“그래, 너희들 전부 부소장 따라가. 절대복종하고.”
“예.”
“명령에 따릅니다.”

집행자들이 부소장의 뒤를 따라갔다.

김우진은 교도관들에게 카를로를 넘겼다.

“독방에 넣고 관리 잘 해. 또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예.”
“시에나님. 시에나님도 그만 돌아가시죠.”
“그래야겠지.”

카를로와 시에나를 인계 받은 교도관들이 전부 떠났다.

김우진은 연옥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며 집무실에 도착했다. 드워프들에 의해 다시금 리모델링된 집무실은 꽤나
쾌적했다.

온도와 습도, 그리고 빛의 밝기를 조절하는 마법진이 깔린 덕분이었다.

“카펫이나 가구들은 하나 같이 고급이고.”

드워프들의 손길이 닿았으니 고급이 아닐 수가 없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김우진이 베른을 구석에 던져 놨다.

당장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베른이었다.

연옥에 가둔다고 데리고는 왔지만 명색이 관리자인 만큼 일반적인 독방으로는 감금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연옥의 시스템에 개입할 수도 없다.

단순한 흐름을 트는 것과는 별개로 연옥은 여러 관리자들의 권능이 뒤섞인 복잡한 코딩과 같아서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튀어버리니까.

직접 만든 신들이 아니면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인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른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릴리를 이용해 볼까.’

일단은 신목이라 불리는 나무다. 완전한 신은 아니지만 신에 가까운 존재. 김우진의 도움을 받는다면 약화된 신을
무난히 구속하는 것쯤은 가능할 거다.

‘결국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신이라고 해도 조금 신체능력이 뛰어난 초인에 불과하니까.’

묶어두고 세계수의 뿌리를 이용해 꾸준히 힘을 흡수하는 거다. 그러면 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며, 릴리는
관리자의 힘을 골수까지 빨아들여 보다 거대한 신목으로 성장할 거다.

‘일석이조군.’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니 부소장이 들어왔다.

“일단 기본적인 교육은 끝냈습니다.”


“숙소로 안내해줬나?”
“예. 과연 집행자들인지 이해가 빨라서 쉬웠습니다. 내일부터 교도관 일에 들어갈 겁니다.”
“좋군.”
“헌데 괜찮은 겁니까?”
“뭐가?”
“저거 말입니다. 저거.”

부소장의 시선이 집무실 한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베른에게 향했다.

“괜찮아.”
“정말입니까?”
“이번 일로 느낀 게 있어.”

어차피 전쟁은 시작되었다.

계약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백신전은 계속해서 김우진을 건드릴 거다.

가만히 있으면 맞는다. 쓰러질 때까지 맞는다.

그러니.
먼저 때리면 어떨까?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계약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들을 때리는 방법이라. 쉽지 않겠군요.”
“놈들이 흩어져 있을 때, 하나씩 사냥하는 건 어떨까? 죽이지만 않으면 계약 위반은 아니니까.”
“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역시 한둘 이상은 쉽지 않겠지.”

처음이야 뭣도 모르고 당한다 쳐도 그 다음부터는 대응할 거다. 다섯, 열 씩의 신들이 모여 있다면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열이나 돼야 무리인겁니까···.”
“내가 먹은 게 한둘이 아니잖아. 이 정도는 해줘야···.”
- 삐이이이!

요란한 울음소리가 김우진의 말을 끊었다.

어느새 집무실 내부로 들어온 자그마한 파랑새 한 마리가 김우진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릴리.”

- 삐이!

파랑새가 김우진의 얼굴에 뺨을 부볐다.

“릴리,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부탁할 일이···.”

- 삐, 삐!

그리고는 곧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다.

“율리아 불러와.”
“예.”

잠시 후, 율리아가 올라왔다.

“갔던 일은 잘 해결하셨다고 들었어요.”


“맞아. 이런 저런 사건들이 조금 있었지만 무사히 탈옥수를 잡아왔지. 관리자도 하나 잡아왔고.”
“다행이···네? 뭘 잡아와요?”
“들었으면서 다시 묻지 마. 그것보다는 릴리의 말이나 좀 통역해 줘.”
“아니, 잠시만요, 관리자라면 신 아니에요? 신을 어떻게···!”

- 삐이이이! 삐삐, 삐이익!

“아뇨, 어머니 나무님. 어머니 나무님의 말이 급한 게 아니에요.”

- 삐삐삐삐! 삐이이삐이이!

“아니, 그러니까. 아무리 알베니우스님이 데이드람에 오셨다고 해도 지금은 다른 게 더 급하다니까요? 신을


잡아왔다잖아요. 신을···어?”
“···뭐라고?”

김우진과 율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알베니우스님이 데이드람에 오셨다는데요.”

알베니우스. 마침내 그를 만날 시간이다.

───────────────
# < 058. 봉인 >

당장이라도 달려가 묻고 싶은 게 많다.


그날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신들을 상대로 어떤 계획을 짰는지, 정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당장은 알베니우스를 만나는 것보다 자칭 하늘의 신 케이룸, 베른 오르티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하다.

당장은 볼품없이 기절해 집무실 바닥을 뒹굴고 있지만 명색이 관리자다. 김우진이나 그에 준하는 자가 아니면
문제없이 관리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김우진이 항시 붙어 있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신목에서 방안을 찾았다.

- 삐삐?

“그래. 네가 맡아 줬으면 해.”

세계수는 신목이다. 누가 붙였든, 세계수는 신이라는 이름이 전혀 아깝지 않은 나무다.

그들의 뿌리는 능히 아카식 레코드에 닿을 수 있으며 그들의 권능은 상황에 따라서는 관리자들에 필적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뿌리는 능히 약해진 신을 구속할 수 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봉인이 더 옳다.

“뿌리로 옭아매고 깊숙이 묻어. 움직임을 봉쇄하고 마나가 요동치면 흡수해서 힘을 줄여.”

절대로 깨어나지 못하도록. 세계수로 하여금 봉인하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봉인 상태인 이상, 베른은 세계수의 일부가 된다. 하늘구름으로 함께 기운을 감출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힘이 증폭된 릴리를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최선의 방법이다.

“···이게 가능할까요?”

율리아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의심은 타당하다. 세계수로 신을 봉인하는 건,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그렇기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미지였으니까.

그래서 릴리의 의중이 중요하다. 결국 모든 건 릴리에게 달렸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 삐삐.

“···정말요? 가능은 할 것 같다고 하세요.”

- 삐이이이?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네요. 정말, 왜 이렇게 속물이 되신 건지···. 이건 다···.”

가늘게 뜬 율리아의 시선이 김우진에게 향했다.


“릴리, 신의 힘이야. 그것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한 것 같은데?”

- 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하시는데요.”


“뭘 원하는데?”

- 삐삐삐.

“앞으로 자리를 자주 비우지 말고 매일 찾아오라는···쳇, 눈꼴 시려서 정말. 어머니 나무님! 제가 매일


찾아왔잖아요!”
“그 정도라면야.”

생각보다 무난한 방법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기쁨의 날개짓을 하며 김우진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데이드람은 갔다 와야 하는 거 알지?”

- 삐삐.

“생물학적 어머니한테 안부 인사 전해주라네요.”

그리고 잠시 후.

릴리가 베른을 인계 받았다.

수 십, 수 백 개의 가지와 뿌리들이 천천히 베른을 감쌌다.

파지직, 관리자의 힘이 미약하게 저항했으나 세계수의 뿌리는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내려가는 지독한 녀석들이다.

베른의 육신에 자연스레 걸쳐져 있던 방어 기재가 모조리 뚫렸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놈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자신을 옥죄는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에 그가 당황했다.

“세계수···? 세계수라고?”

연옥에 어떻게 세계수가 심어져 있는지 의심도 잠시, 세계수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이 따위 나무로 나를 억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김우진을 발견한 베른이 분노했다. 허나, 그것은 겁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말했지.”

김우진이 이를 악문 베른과 눈을 맞췄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넌 마지막 기회를 놓쳤어.”


“이 반역자 놈! 네놈, 대체 어떻게 연옥에 세계수를 들인 거냐! 대체 언제부터!”
“얼마 되지는 않았어. 물론 네가 오기 전이었지만.”
“그럴 리가···. 내가 세계수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황하는 놈의 모습을 보니 꽤나 즐거웠다. 김우진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앞으로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에 묶인 채 힘을 쭉쭉 빨려나갈 거야. 나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거름이 되는
거지.”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것보다 더한 일을 하고도 무사했어.”

감사하게 여겨.

“계약 때문에 관리자들을 죽이지 못해서 목숨이라도 붙여놓는 거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베른은 이미 진즉에 죽었다.

“아무튼, 너는 거름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 적어도 내가 계약을 끝내고 연옥의 소장직을 벗어던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다음 일은 뻔하다.

“그러니까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반성하고 있어.”


“넌 결코 백신전을 이기지 못한다! 나와 드네르바는 제대로 된 신도 아니었어!”
“이제와서? 그리고 자꾸 잊어먹나 본데.”

콰득, 김우진의 손이 베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가해지는 압력에 베른이 신음을 삼켰다.

“너희들이 관리자가 될 수 있도록 전임자를 죽여 버린 게 나야.”

두 번을 했는데 세 번은 못할 것 같아?

“앞으로 98 번만 반복하면 돼.”

물론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계약이 있는 한 김우진이 저들을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저들도 김우진을 죽이지 못한다.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또 생긴다.

“그리고 그런 건 내 전문이야.”

그건 연옥의 소장이 되기 전에 수도 없이 반복했던, 가장 자신 있고 잘하는 일이었다.

* * *

세상이 뒤집어지면서 바뀌었다.

마나가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연옥과는 다른 공기와 마나의 분포. 데이드람에 오는 건 두 번째다.

“역시 데이드람은 뛰어난 차원이야.”


세계수가 있는 차원들은 대부분 그렇다. 부화할 때는 막대한 마나를 잡아먹는 세계수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반대로 마나를 보다 정순하고, 풍부하게 만드니까.

어린 세계수들은 그 범위가 한정적이지만 만 년을 넘게 살아온 세계수라면 능히 차원 전체로 퍼트릴 수 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우진과 율리아가 떨어진 곳은 엘프들의 숲이었다. 세계수가 그리 멀지 않은 곳.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이름이···.”
“발라크입니다. 김우진님.”
“아, 기억났어.”
“율리아님도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발라크님.”

발라크와 엘프들의 인도에 따라 숲의 내부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두 분만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전과 똑같이 세계수가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그들은 사라졌다.

“이번에는 새는 안 보이네.”
“기다리고 계신 모양이에요.”

길은 짧았고 세계수는 멀지 않았다.

- 어서 오렴.

거대한 나무 앞, 이전과는 다르게 꽤나 거대해진 새 한 마리가 오연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님,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 숲의 아이야. 나도 마찬가지란다. 생각보다 빨리 너를 볼 수 있게 되어 더 기쁘단다.

“이번에는 참새가 아니군요.”

- 그 모습이 좋다면 다시 바꿔줄 수도 있단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형태가 작은 참새로 줄어들었다.

“딱히,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 후후, 겉모습 같은 게 무엇이 중요하겠니. 내가 너희들을 불렀고, 너희들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참새가 웃었다.

“그래서 알베니우스는 어디 있습니까?”

- 성격이 급하구나.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으니까요.”

- 허나, 그는 너를 바로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무슨 뜻입니까?”

- 너를 끌어들여도 될지, 안 될지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우스운 소리군요.”

김우진이 픽 웃었다.

율리아를 보내 그를 끌어들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알베니우스를 잘 아는 김우진은 그 말 뜻을 이해했다.

화륵, 불꽃의 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어···, 소장님?”
“다치기 싫으면 물러서. 세계수께서도 물러나시지요.”

- 나는 뿌리가 차원의 중심까지 내려져 움직일 수가 없단다.

하지만 내 몸 하나를 지킬 수는 있지. 세계수의 강대한 마나가 율리아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강대한 마법
방어진이 주변을 감쌌다.

그 직후, 김우진이 움직였다. 불꽃이 잔불을 흘리며 세계수의 옆에 있던 바위를 베었다.

베어버리는 줄 알았다.

───!

검이 바위에 닿기 직전, 수십 개로 중첩된 마법진이 검을 흘려냈다. 불꽃을 튕겨냈다.

미미한 떨림, 바위는 곧 인간의 형태가 되었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새하얀 백발에 하얀 눈.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행색의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흩어지는 마법에서 느껴지는 마나, 낯익은 목소리, 익숙한 얼굴.

“알베니우스.”

정말 그였다.

“그래, 나다.”

새하얀 마나가 움직인다. 반투명한 비늘이 그의 전신을 뒤덮는다. 신의 공격도 견뎌내는 우주의 어떤 것보다
단단한 비늘, 용린.

“오랜만이다, 김우진. 그때 내가 죽을 뻔한 걸 구해준 이후로 처음이니, 대략 40 년 만인가?”


“아마도 그 쯤 되었을 겁니다.”

─!

검과 손톱이 충돌한다. 으깨지는 불꽃과 마나가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를 발산한다.

콰콰콰!

부서지는 대지와 흩날리는 나뭇잎, 부러지는 잔가지들에 세계수가 방어 마법진에 마나를 더 실었다.

또 다른 손톱이 다른 각도를 그린다. 허공에 상흔을 남기며 전진한다. 김우진 또한 쌍검으로 응수한다.

─!
──!

한 순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이어진다. 붉은 파도와 하얀 파도가 뒤섞여 엉킨다.

“···엄청나게 성장했군. 그 애송이가 이렇게까지 되다니.”


“그거 아십니까?”

카가가각, 김우진의 검이 기묘한 각도를 그린다. 손톱을 쳐내고 측면을 파고든다. 하얀 오러가 방패를
만들어내지만 그대로 뚫어낸다.

“이런!”

급하게 영창된 마법 수 백개가 연달아 쏟아진다. 허나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불꽃이 모든 것을 상쇄시킨다.

그 폭발의 범람 속에서 붉은 검이 틈새를 꿰뚫는다.

남자를 지키는 모든 마법을 부수고, 용린을 찢는다.

그리고.

“당신을 뛰어 넘은지는 이미 오래 됐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구해줬죠.”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하하.”

본능적으로 양손을 들어올린 남자,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신들에게 붙잡혀 수십 년간 고초를 겪었다길래 약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군.”


“딱히 고초랄 것도 없습니다.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솔직히 놀랐어. 신들을 증오하던 네가 신들의 개가 되었다고 해서.”
“훗날을 위한 계약일 뿐입니다. 자살폭탄 테러는 취미가 아니라서.”

알베니우스가 손을 내렸다. 김우진이 검을 소멸시켰다. 알베니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


“마찬가지입니다.”

김우진이 그 손을 잡았다.
“굳이 한 번 싸우고 인사를 나누는 이유는 뭘까요?”

율리아의 궁금증에 대답한 건 세계수였다.

- 확인하는 거란다.
- 끌어들여도 되는지 안 되는지.

“소장님을 끌어들이라고 한 건 알베니우스님인데요.”

- 김우진은 신들을 죽이고 고초를 겪었거든. 그가 약해졌는지, 그대로인지, 아니면 더 강해졌는지 알아야 그에
맞춰 대응하지 않겠니?

“그것도 그렇네요.”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신 둘을 상대해서 한 명을 포로로 잡아온 김우진이었으니까.

‘이게 약해진 거라면 그것 나름대로 소름이···.’

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나름 자신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격이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됐으니 제 임무는 끝났네요.”

알베니우스와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율리아에게 부탁했던 것은 세계수의 씨앗을 연옥에 심는 것.

세계수를 이용해 연옥을 무너트리고 신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김우진을 설득하는 것까지.

비록 연옥을 무너트리진 않았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을 완수했다. 율리아가 할 일은 더 없었다.

- 그래, 정말 수고 많았단다.

작은 참새의 날개가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예상보다 더한 성과를 얻었으니.


- 이제.
-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지.

그러기 위한 알베니우스와 김우진의 상봉이기도 하니.

───────────────
# < 059. 진화 >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알베니우스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허나, 정작 마주하고 나니 가장 먼저 나오는 건 간단한 안부였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안정적인 마나가, 그리고 방금의 전투로 인해 그가 어떤 상태인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내내 도망자 신세였지.”

과연. 김우진이 알베니우스를 알기 전부터 그는 도망자 신세였다.

추격자는 당연히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의 앞잡이, 집행자들이었다.

“도망치면서 간신히 상처를 회복했다. 그리고 신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그들에게 적대감을 가진 자들을 규합했지.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군.”
“많은 것이 생략되었군요.”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기니까.”

헤어지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 전부 이야기하려면 몇 달도 부족했다.

“그러는 너는? 연옥의 소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 꽤나 놀랐어. 결국 신들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건가 싶다가도
내가 아는 너라면 절대 신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되지 않았다.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거래였다.

동료들을 잃어버린 게 처음인 백신전의 신들에게도, 모든 신들을 상대할 자신도 능력도 없는 김우진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솔직히 그건 김우진에게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은 결코 두 번 오지 않을 것이다.

신들은 죽음이라는 미지에, 피조물 주제에 신을 죽일 무력을 가진 김우진이라는 미지의 존재에 잠시 겁을 먹었을
뿐이다.

김우진도 죽음도 더 이상 미지가 아니게 되었으니 신들의 양보는 더 이상 없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
“관리자들에게 적대감을 가진 존재들을 규합하고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만나서 반가운 건 맞지만 둘 사이는 단순히 서로의 안부만 묻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려고 절 부른 것 아니었습니까?”
“···역시 넌 성격이 급해.”

알베니우스가 웃었다.

* * *

- 자, 이야기를 나눌 때 음료가 없으면 섭하지. 한 잔씩 마시렴.

세계수의 가지들이 음료 세 잔을 내왔다.

산뜻함과 달콤함을 비롯한 여러 복합적인 풍미가 넘쳐나는 술이었다.


“뭡니까?”

- 만 년 넘은 세계수의 수액을 발효시킨 술.


- 신들도 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지만 쉽게 구하지 못하는 보물이란다.

“그러니까 당신의 수액이라는 거 아닙니까.”

- 그래서 갑자기 마시기 싫어지니?

“딱히, 그런 건 신경 안 씁니다.”

벌컥, 김우진이 술을 들이켰다. 세계수의 수액이 발효된 술은 과연 맛과 풍미가 남다르다. 특히 만 년이 넘은


세계수의 수액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약이 따로 없다.

“감사해요, 어머니 나무님!”

알베니우스와 율리아도 차례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일단 당신의 목적부터 들어봅시다. 무엇이 하고 싶은 겁니까?”


“세계수가 말하지 않았나?”
“말했습니다.”
“세계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군.”
“교차 검증하고 싶을 뿐입니다.”

목을 축인 알베니우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와 내 동족들은 아주 오랜 세월, 신들의 미움을 받고 탄압 당했다. 지금은 오직 나밖에 남지


않았지.”

알베니우스는 살아남고자 발버둥 쳐왔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감히 신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신이니까. 신이기에.

하지만 40 년 전, 그 일이 있고 난 후 알베니우스는 마음을 바꿨다.

“저 때문입니까?”
“네 덕분이지. 네가 신을 죽였으니까.”

우주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이었다. 신은 오직 생겨나기만 했지, 죽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절대불변의 법칙이 깨졌다. 신 또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도망친 곳에 해답은 없어.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신들은 알베니우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도전자를 반기지 않기에.

때문에 알베니우스에게 평화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백신전이 무너져야 한다. 그가 죽든, 신들이 죽든 한쪽이
몰락해야 끝나는 판이니까.

“그러니까 결국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거군요.”


“어쩔 수 없지만 대책이 없는 건 아니야. 40 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으니까.”
신들의 눈을 피해 신에게 적대감을 가진 자들을 모아왔다.

“대부분 용사였던 이들이지.”

이용만 당하고 토사구팽된 자들. 신을 향한 적대감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반대로 말하면 더 이상은 용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을 천 명, 만 명 모아봤자 신 하나 못


잡습니다.”

상대가 신과 집행자들인만큼 벽을 넘은 자들이 필요하다. 일개 피조물들은 아무리 모아봐야 피조물일 뿐이다.

인간 앞에서 개미는 결국 개미니까.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힘을 주면 다시 전성기를 되찾을 자들이란 뜻이지.”


“힘을 준···. 설마?”
“맞아. 사실 너한테 볼품없이 밀린 것도 다 그 때문이지.”
“한 둘이 아닐 텐데요?”
“그러니 더 좋지.”

알베니우스의 눈이 희열로 가득찼다.

* * *

“···이해를 못하겠어요.”

율리아는 둘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기본 바탕이 달랐기 때문이다.

- 율리아, 너는 용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음,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 신의 힘을 받은 자들?”

- 정확하구나. 그렇다면 그 신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전의 율리아라면 전혀 감을 잡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용사로서 활동하고, 연옥에 갇혀 김우진과 함께 하다


보니 그녀는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카식 레코드와 연관이 된 것 아닌가요?”

- 맞단다.
- 정확히는 아카식 레코드가 부여하는 우주의 힘이지.

아카식 레코드란 우주의 흐름과 법칙, 그 자체다. 인격체라기보다는 우주를 관장하는 거대한 의지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신이란, 그 의지에게 우주의 힘을 부여 받은 자들을 뜻한다.

혼란스러운 우주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래서 소장님이 관리자라고.”

그제야 율리아는 어째서 소장이 신들을 관리자라고 부르는지 보다 명확히 깨달았다.

신들은 진짜 관리자들이었다. 단지, 그들을 고용한 고용주가 아카식 레코드라는 범우주적인 차원의 의지일
뿐이었다.

-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란다.


- 신들이란, 아카식 레코드가 선택한 ‘빛’이고.

그 능력은 신이라는 이름에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 허나,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 받았기에 그들은 함부로 세상의 균형을 어지럽힐 수 없단다.
- 상위 차원이 아닌 곳에서는 제약이 따르고 자연스레 하위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었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빛으로서 어둠을 물리쳐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용사들이 탄생했다.

- 자신들이 부여 받은 우주의 힘 일부를 용사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란다.

우주의 힘이란 피조물을 뛰어넘는 힘. 피조물로 하여금 악을 멸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쯤 되자 율리아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신들이 용사들을 핍박하고, 토사구팽하는지.

“그 나누어줬던 힘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서군요!”

- 그래.
- 용사가 스스로 힘을 포기하면 다시 신에게 돌아가지만 허무하게 죽으면 신이 아닌 아카식 레코드에게
돌아가니까.

물론 그렇다고 신들의 힘이 용사를 만들수록 깎여나가는 건 아니다. 긴 시간이 필요할 뿐, 어떻게든 수복할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긴 시간을 감내하고자 하는 신은 없었다.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야 천년이고 그 안에
스스로 포기하게만 만들면 되는 것을 그 이상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들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 효율을 위해서.

- 물론 그들이 힘을 가지고 돌아갔을 때, 다른 차원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도 있긴 할 거란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앞선 두 개 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라 세계수는 단언했다.

“그러면 알베니우스님이 용사들의 힘을 돌려준다는 것은?”

- 이 세상에는 몇 가지, 특별한 종족들이 있단다.

어째서인지 탄생과 함께 우주의 힘을 쥐고 태어난 자들.

신들의 전유물이라는 차원이동을 너무도 쉽게하는 자들.


- 그렇기에 자신들이 남들보다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신들에게는 더 없이 눈에 가시와 같은 자들.

그래서 신들에게 핍박과 박해를 받고 오직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종족이 멸족한 자들.

- 차원용.

알베니우스는 그 유일한 생존자였다.

* * *

“···제기랄. 내가 대체 왜.”

드네르바가 욱신거리는 팔과 다리를 부여잡았다.

합당한 이유를 핑계로 김우진에게 맞은 자리였다. 그의 마나가 그녀의 육신을 파고들어 주요 지점들을 틀어막았다.

고통은 배가 되고 치유는 늦어졌다. 그녀가 신인 이상 결국 완치가 되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모습을 백신전의 신들 앞에서 보여야만 했다.

김우진의 제안은 어디로 보나 합리적이었다.

베른을 잃고 유일하게 도망친 그녀의 입장에서 다른 신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하지만 그건 그녀의 위신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두 명의 신이 한 명의 필멸자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다. 수십의 집행자들이 함께였으며 신의 권역이었다.

그럼에도 졌다.

단순히 패배가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짓눌렸다.

신 하나는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 다른 신은 이 추잡한 모습을 그대로 백신전의 신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패배의 증거로.

“···하하. 내 꼴이 참 우스워. 그렇지 않아?”


“신이시여.”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부르지 마. 더 열 받으니까.”

그녀를 보필하는 집행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분노가 무서워서이기도 했지만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우진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그 모습은 도저히 신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차라리 김우진이 신이라면 모를까.

때문에 그는 화제를 돌렸다.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 그래.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으러 가야지.”
목숨을 구걸한 대가는 컸다. 하지만 드네르바는 치솟는 분노보다, 앞으로 감당해야할 수치심과 모욕감보다 목숨이
더 소중했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니까.

‘적어도 김우진은 쉽게 죽을 놈이 아니야.’

백신전의 승리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우진 또한 쉽게 당할 인간은 아니었다.

최소한 몇 이상의 신들은 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이용하는 게 옳다. 목줄이 씌워졌지만 목줄을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는 법 아니겠나.

‘그 공석만큼 내가 올라갈 수 있어.’

그래, 이건 기회다. 김우진의 끄나풀이 되어 위험 부담이 생겼지만 반대로 다른 이들보다 먼저 김우진에 대한


정보들을 알 수 있다. 그걸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신의 위신을 떨어트렸다고? 그렇다면 당신들이 해보지 그래? 거기 앉아서 주둥만 나불대지 말고 말이야.”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모욕하는 신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 * *

- 삐삐삐!

“으음.”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다.

세계수는 김우진을 가장 좋아하지만 김우진이 없으면 율리아를 찾는다. 그리고 율리아마저 없으면 시에나를
찾는다.

세계수의 정령체, 파랑새가 그녀의 앞에서 아른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이 정령체가 과연 그녀가 알던 정령체가 맞는지, 시에나는 의문이었다.

파지직-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튀어나오는 스파크라니.

“······.”

세계수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게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았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해부해봐도 되나?”


“미쳤어?”
“크흠, 아니, 번개를 내뿜는 세계수라니 이건 아주 귀한 연구 자료···.”
- 삐이이이!

“끄아아악!”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에 맞은 데르카인이 바닥을 굴렀다.

“···소장이 빨리 와줬으면 좋겠는데.”

분명히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세계수가 이상할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으음. 그래도 문제없는 거겠지?

아마도.

───────────────
# < 060. 고대종 >

백신전.

백 명의 신들이 모인, 상위 차원이자 신들의 집단.

드네르바는 새하얗고 고풍스러운 신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늘의 백신전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보다 무겁고, 차갑다.

신이면서 피조물에게 패배한, 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실패자를 추궁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드네르바가 대전의 문을 열었다.

거대한 대전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카펫을 밟았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테이블들에는 각각의 신이 자리하고
있다.

총 100 개. 허나, 양 끝단의 말미가 비었다. 하나는 베른의 자리이며, 하나는 드네르바 그녀의 자리다.

98 개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왔군.”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고작 피조물 따위에게 패배하다니. 심지어 하나는 아예 포로로 잡혔다지?”
“자신의 권역에서 패배할 정도니 얼마나 무능한 건지.”
“애초에 자격이 되지도 않는 자들에게 신격을 부여한 것이 실수였다.”

한 마디, 한 마디와 같잖은 시선들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폐부를 찌른다. 흡사 적으로 가득한 곳에서 청문회에
끌려나온 죄인과 같은 느낌이었다.

‘청문회라니.’

명색이 신이면서 하는 짓은 피조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빌어먹을 것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저들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녀 또한 신이었다. 오만함과 자존심만큼은 다른
신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드네르바는 그들의 말에 발끈하고, 반박하는 대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수많은 신들을 지나쳐 대전의 중앙에 도착했다.

“···돌아왔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표면적으로 백신전의 모든 신은 평등하다. 신이란 존재 자체가 완전하고 지고하니 높고 낮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일 뿐, 백신전에도 고저는 있다.

은연중에 모든 신들이 인정하는 고귀함과 고결함, 그리고 위대함.

신 중의 신. 아카식 레코드에게 가장 먼저 선택을 받은 세 명의 신들.

푸른 알비츠.
붉은 칼카르.
백의 베리안.

최초의 삼신을 그들은 주신이라 불렀다.

“···한심하기 그지없군.”

가장 좌측에 앉은 주신, 칼카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차가운 음성에 백신전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권역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도망치다니. 신으로서의 자각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냐.”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무형의 압박에 드네르바가 숨을 삼켰다.

같은 신이라고 해도 주신은 급이 다르다. 베른은 멍청하게 주신에게도 이빨을 내세우지만 그녀는 그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지.”

중앙의 주신이자 회의의 의장 역할을 자처하는 알비츠가 칼카르의 타박을 막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떻게 부딪혔고, 어떻게 패배했으며, 어떻게 도망쳤느냐.”


“놈이 케이룸에 왔습니다. 베른이 엘프들을 처형한···.”
드네르바는 대부분의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었다. 김우진에게 항복해 목숨을 구걸한 것이 아닌, 베른과 함께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도망친 것으로.

“그러니까 다른 신을 미끼로 남기고 자기만 도망쳤다는 거잖아?”


“합공을 펼치고도 그렇게 추하게 도망쳤다고? 신의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군. 아무리 공석이 생겼다고 해도 너무
급하게 올렸어.”

신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들려왔으나 세 주신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짧은 침묵이 드네르바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김우진의 격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높군.”


“시간은 공평하지. 놈에게도 성장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비루하게 도망치다니! 신위를 박탈해도 모자라지 않다!”
“그만해라. 드네르바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은 그녀를 탓하는 게 아니라 김우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다.”

알비츠가 다시 한 번 칼카르를 막았다.

“회의는 잠시 휴정에 들어가겠다. 모두 잠시 나가 있도록. 앞으로 김우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각자 대안을


생각해 보아라.”

그의 선언에 신들이 썰물 빠지도록 빠져나갔다.

“···저는.”
“너도 마찬가지다, 드네르바. 허나, 약속하지. 이번 일로 네게 큰 불이익이 가지는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드네르바가 사라졌다. 세 명의 주신만이 남았다.

“넌 물러도 너무 물러.”

칼카츠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무를 게 있나? 베른과 드네르바가 패배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미끼로 던진 것이 살아 돌아온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했으니 더 타박할 이유는 없다.”
“그건 나도 동감이군. 단순히 위엄이라는 건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칼카르.”
“아주 신사들 나셨군. 인간 하나에 백신전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다 못해 나락으로 처박히는데 말이야.”
“어디까지나 예정된 결과였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알비츠가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 베른과 드네르바는 애초에 미끼였다.

김우진으로 하여금 계약을 어기게 만들 미끼.

그들이라고 김우진이 강하다는 것을 왜 모르겠나.

오히려 그 어떤 신보다 잘 알았다. 김우진이 어떻게 신을 죽이는지 보았고 싸웠으며 평화를 제안한
장본인들이니까.
그렇기에 더욱 더, 김우진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신을 던졌다. 대놓고 자신을 방해하는 신들에게 분노한 김우진이 이성을 잃고 계약을 깨트리기를,
그래서 심연에 떨어지기를 바랐다.

김우진을 심연으로 떨어트린 대가로 지불할게 신 둘의 목숨이라면 더 없이 싸니까.

“역시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다는 거겠지.”


“두 신을 죽이고 분노한 상태에서도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놈이다. 그렇게 쉽게 이성을 잃을 리가 없지.”

칼카르가 코웃음쳤다.

“말만 하지 말고 좋은 생각 있나?”
“부족한 거다.”

그의 물음에 베리안이 대답했다.

“두 신은 패배했고 탈옥수는 다시 연옥으로 잡혀갔다. 결국 김우진은 약간의 짜증을 얻었을 뿐, 아무것도 손해본
것이 없다.”

그러니 김우진이 굳이 이성을 잃을 이유도 없다.

“동기가 불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충분한 동기를 채워주어야지.”

반대로 말하면 만약 그 동기가 충분하다면?

“그만 뜸들이고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해라.”


“김우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을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지금 놈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건 두 가지지. 하나는 연옥.”
“연옥을 날려버리자고? 나보다 더 미친 소리를 하는군.”
“연옥은 계약으로 묶여 있다. 연옥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우리 또한 계약을 어기는 꼴이 된다. 본론을
말해라.”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놈이 신살을 하게 된 계기.”
“···알베니우스?”
“그래.”

베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침내 놈의 흔적을 찾았다.”

* * *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

무려 40 년이나 지났는데 그때에 비해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얼마나 됩니까?”
“정확히 281 명.”
“많기도 하군요.”
그 정도의 집행자들이라면 백신전의 관리자들과 비교해도 상위 1%다.

애초에 용사란 그리 흔하지 않고 그 중에서도 특출 난 집행자는 더 흔하지 않으며 권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


나름대로의 손해를 감수해야하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관리자들이 용사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르는 거고.

그렇게 따지면 281 명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전원 용사라는 점에서 대단해보이지만
관리자들이 한 번 거른 자들이 대부분일 가능성이 높으니.

물론 물량이라는 건 어디서나 힘이 되긴 하지만.

“용케 그들을 모을 때까지 들키지 않았습니다?”

관리자들의 감시와 추적이 결코 느슨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차원용이라고 한들 그게 가능한 건가?

“들켰었지. 그래서 죽을 뻔 했고.”

하지만 결국 살았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신들을 이길 수 없어.”

그래,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

시간만 충분히 혹은 막대히 들인다면 용사나 집행자 수준의 강자는 얼마든지 수급할 수 있다. 알베니우스가
끌어들였다는 281 명의 전직 용사가 그 증거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신, 혹은 관리자.

직접적으로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초월자들은 같은 초월자들로 밖에 상대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이 아닌 초월자들은 없다.

김우진이라는 예외가 아니고서는.


차원룡의 마지막 생존자인 알베니우스가 아니고서는.
뿌리를 내려 그 차원에서만큼은 신에 준하는 힘을 발휘하는 세계수들을 제외하고서는.

예외는 예외이기에 예외다. 예외가 많다면 그건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평균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네가 필요하다.”
“저는 아직 함께 한다고 안 했습니다.”
“정말로?”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에 몸을 던지는 취미는 없어서.”
“신들에게 죽어나간 네 동료들을 잊었나? 너와 친하게 지내던, 결국 너에게 모든 것을 바쳤던 내 동족,
팔란크는?”
“그렇게 표현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무엇보다 애초에 저는 당장 관리자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계약 때문인가?”
“예.”

김우진은 백신전과 계약으로 묶여있다. 계약이 종료되지 않는 한, 서로는 서로를 죽일 수 없다.

“50 명의 죄수들을 출소시킬 때까지라고 했나. 아직 많이 남았군. 하지만 고작 20 년 사이에 7 명이나 내보냈으니
신들이 조바심을 낼만도 해. 네가 소장을 맡기 전까지는 평균적으로 백 년에 한 명 꼴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의 계약이나 연옥의 생활, 그리고 능히 신을 상대할 만한 강자가 있는 차원도.”


“···신이 아니면서 신을 상대할 만한 강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겁니까? 나나 당신 말고?”
“그래. 정확히는 존재‘들’이다. 아니, 들이었지.”

들?

“최초의 신살자는 분명히 너다. 하지만 신들의 폭거에 그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아주 오래 전, 신들의 탄압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난 자들이 있었다.

신체는 산보다 크고 단단했으며, 권능이 깃들어 신조차 무시할 수 없던 자들.

“그리고 우주의 힘을 가진 종족이 오로지 차원용뿐이라고도.”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아 백신전에 소속된 것이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우주의 힘을 품고 태어난 자들.

그렇기에 신들의 미움을 받아 차원용들보다 먼저 척살된 자들.

“타이탄(Titan).”

신이 아니면서 신의 힘을 가진 위대한 종족.

“거인족?”
“거인족과 비교하지 마라. 인간에 비하면 조금 덩치가 큰 거인족에 비해 타이탄은 진짜 세상을 덮는 거인이니까.
타이탄들이 네 말을 들으면 무덤에서 뛰쳐나와 차원을 쪼개버릴 거다.”
“그런 종족이 살아 있다는 겁니까?”
“그래. 신과 대적한 자들을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신들의 눈길조차 닿지 못하는 차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신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를 찾았다.”

신들을 향한 복수심으로 넘쳐나는.

“그래봐야 신들에게 패배한 자들 아닙니까.”


“그러나 신들이 경계하여 멸족시켰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하물며 유일한 생존자다.

“그 생존자가 신들의 눈을 피해 어떤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복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알베니우스의 물음에 김우진은 부정하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알베니우스가 지난 40 년간 281 명의 전직 용사들을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오랜 시간을 곱씹으며 불타던 유일한 생존자는 어떤 준비를 해놓았을지.

그것이 과연 신들에게 유효한지, 그렇지 않은지.

“···지금 가면 됩니까?”
“급하군. 뭐, 상관은 없다. 사실 이것 때문에 급하게 돌아와서 널 부른 것이기도 하니까.”

알베니우스가 내민 손을 김우진이 맞잡았다.

그 순간, 차원이 갈라졌다.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저는요?”

홀로 남은 율리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
# < 061. 증명 >

차원이동은 우주의 힘이 없는 자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차원적인 권능이다.

하지만 모든 건 상대적이다. 평범한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지만 우주의 축복을 받은 차원용에게도,
김우진에게도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기도 했다.

“······?”

하지만 알베니우스가 이끄는 대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모든 차원은 장벽으로 막혀 있다. 그리고 길이 있다.

차원과 차원은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광활한 우주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갈래들이 존재한다.

물론 차원과 차원을 잇는 길인만큼 일반적인 길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관념적인 형태인지라 피조물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김우진은 단순한 피조물을 넘어 권능을 손에 넣었고 알베니우스가 얼마나 수많은 차원들을 헤집고 다닌지
눈치 챘다.

그만큼 지금의 차원은 무척이나 멀었고, 외진 곳에 있으며 절대 일반적으로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차원의 풍경 또한 일반적이지 않았다.

잿빛 사이로 여기저기 균열이 벌어진 하늘.


메마르고 갈라진 대지.
느껴지지 않는 생명의 기운, 진득한 사기와 마기까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턱턱 느껴지는 불쾌함에 김우진이 눈살을 찡그렸다.

수많은 차원들을 돌아다니고, 확인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런 상태의 차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멸망한 차원이군요.”
“그래. 다가오는 종말을 막아내지 못하고 끝끝내 멸망한 차원이지. 아르반도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었을
거야.”

모든 생명체가 말살하고, 모든 문명의 흔적이 지워지며, 모든 것이 붕괴한다.

그것이 멸망. 빛이라는 백신전의 대척점에 선, 어둠이 행하는 일.

“···여기에 타이탄이 있다는 겁니까?”


“맞아. 이곳에 숨어 있지. 신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멸망한 차원에서는 눈을 떼버리거든.”

신들은 이미 떠나버린 차원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멸망한 차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살리지 못한다. 그곳에는 오직 어둠의 파편들만이 꿈틀거리며 다음 종말을 위해 힘을 키울
뿐이다.

“이곳도 마찬가지야. 텔라스라 불리던 이곳은 신들의, 용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종말을 막지 못했다.
모든 생명이 말살됐고 차원은 빛을 잃었지.”

신은 눈을 땠고, 신에게 쫓기던 자는 그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우주의 지도를 알고 있지?”


“대충은. 아카식 레코드가 중심에 있고 그 주변에 백신전과 같은 상위 차원들이 그 주변으로 하위 차원들이 있는
것 아닙니까.”
“원래는 이 차원도 그 자리 중 하나에 있었어. 하지만 멸망 하는 순간, 빛의 가호가 사라졌지.”

가호가 사라진 차원은 자연스레 아카식 레코드에게서 멀어진다. 점점 변방으로, 외진 곳으로.

멀어진 거리만큼 차원은 점차 형태를 잃어가고.

종국에는 소멸하고 만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 하나의 차원이 사라지는 과정.

“하지만 그렇기에 도망자가 몸을 숨기기에는 더 없이 훌륭한 곳이지.”


“그 말에는 동의 못하겠습니다만.”

단순히 신의 이목을 피한다는 점에서는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멸망한 차원은 단순히 모든 생명체가 죽기만 한 게
아니다.

캬르르르-
카아아-

세상을 멸망시킨 어둠의 파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군세를 키워가는 종말의 구렁텅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물들에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물며 먹을 것도 없고 말입니다.”
“타이탄은 반신이야.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
“하지만 편안하게 숨어 있을 수는 없겠군요.”

김우진이 불꽃을 일으켰다.

“멈춰. 굳이 상대할 필요 없어.”


“무슨 뜻입니까?”
“지켜보면 알 거다.”

주변은 순식간에 수백, 수천, 수만의 군세로 뒤덮였다.

자연스레 오래전의 일이 떠올렸다. 수만의 마물 군단과 마주했을 때. 숨 막히는 마기와 마물들이 내뱉는 광기,
살기는 전장의 공기를 턱턱 막히게 했다.

‘놈의 목은 내가 베겠다.’
‘딱히, 누가 베든 상관없는데.’
‘놈을 베고 반드시 돌아가겠다. 나에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 율리아님은 내게 자식이나 다름···.’
‘클리셰 멈춰! 죽고 싶다고 발악하는 거야, 뭐야?’
‘그게 무슨 소리지? 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하더군.’

하지만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있었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인류가 있었다. 연합군이 함께였다.

“···공격하지 않는군요.”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포위한 채, 움직이지 않는 행태에 그의 상념이 끊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마기와 살기는 여전했으나 무언가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마물이 이성으로 본능을 제어하다니. 꽤나 흥미로운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그냥 더 큰 본능에 눌린 것일 수도 있다.

“뭡니까? 이놈들?”
“말했잖아. 싸울 필요가 없다고.”

알베니우스가 가장 거대해 보이는 마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기 너. 우리를 네 주인에게 인도해라.”

말이 통할까 싶었는데 마물이 순순히 몸을 돌렸다. 포위망이 쫙 갈라지더니 길이 만들어졌다.

“···제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지구에서 벗어나 마물과 용사들, 그리고 관리자들과 엮인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차원용의 말을 알아듣고 비켜주는 마물이라니? 알베니우스의 공이 아니다. 이건 김우진의 추측대로 저들의 본능을
억압하는 더 상위의 존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우진. 너는 어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알베니우스가 갈라진 길을 걸었다. 김우진이 그 뒤를 따랐다.

“우습지만 백신전이 빛이라는 거, 그 대척점에 선다는 것.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정도?”
“어둠이 백신전처럼 집단을 형성하고 무언가를 이룬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지?”
“예.”
“어둠은 그저 관념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존재?”
“어둠의 반대는 빛이나 빛은 백신전을 뜻하는 게 아니야. 아카식 레코드지.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빛 또한, 아카식 레코드 또한 관념적인 존재다.

“아카식 레코드는 뚜렷한 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존재하며 세상에 빛을 실천하는 우주의 의지일 뿐이야.
어둠도 마찬가지.”

빛이 세상을 구하고 유지하려는 거대한 의지라면, 어둠 또한 세상을 멸망시키고 파괴하려는 거대한 의지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창조가 있으면 파괴가 있듯이.

아카식 레코드와 어둠은 모두 세상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우주의 의지다.

함께 균형을 맞춘다.

“여기서 의문이 있지. 빛은, 아카식 레코드는 백신전이라는 대리인을 선택해 세상을 구원한다. 그렇다면 어둠
또한 그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무엇일 것 같아?”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만.”

정답은 ‘그렇다’다.

이미 멸망을 겪은 수많은 차원들이 증명하고 있다.

때로는 마왕이, 때로는 광룡이, 때로는 악인이, 때로는 극단적인 종족주의자가, 때로는 타차원의 괴물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존재들을 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독할 정도로 짙은 마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

마왕도 광룡도 악인도 갑자기 솟아나는 게 아니다.

조금 많이 나쁜 생각을 하던 친절한 이웃이 어둠의 선택을 받아 종말의 사도로 거듭나는 것.

그게 종말의 시작이다.

“그래, 맞아. 그게 종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혼자서는 도저히 백신전과 비벼볼 수가 없거든.”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마인이 되는 것을 자처했다. 마물의 군세를 틀어쥐고, 어둠의 사도가 되기로 했다.

“다 왔다.”

마물의 길이 끝났다. 알베니우스가 멈춰 섰다.

“보이지?”

알베니우스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산이 있었다.

하늘을 꿰뚫을 정도로 거대한 동체가.


지금까지 느꼈던 어떤 마기보다도 짙고 농후한 마기가.
투박하면서도 광폭한 기세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거대한 위압감이.

“네놈인가.”

쿠그그그그그-

태산이 움직였다.

* * *

과거 신의 힘을 가진 거인들이 있었다.

덩치는 태산과 같으며 손짓 한 번에 태풍이, 발걸음에 지진이 일어나는 초월자들이었다.

그들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신의 힘을 가졌고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신들과 분란을
겪었다.

신들은 본인들 외의 초월자를, 도전자를 원치 않았다.


거인들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신들의 탄압에 분개했다.

전쟁이 일어났고 거인들은 패배했다.

신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 거인, 티탄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들을 학살하여 분란의 씨앗을 완전히 즈려
밟았다.

허나, 그들은 몰랐다.

티탄들의 모든 분노와 절망을 짊어진, 생존자가 남아 있음을.

쿠그그그-

거인이 움직인다.

단순하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려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 단순함에 대기가 찢어지고 거대한 충격이 엄습했다.
김우진이 주먹을 들어 마주 뻗었다.

─!

터져 나온 충격파에 마물들이 비틀거렸다. 두 발이 대지를 파고들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형성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과연.”

산이 몸을 일으킨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붉은 동공이 더욱 높아진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뻗는다. 이전과는 다른 제대로 된 주먹질.

“미치긴 미쳤군요.”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주먹질에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나, 그의 말에 화답해줄 알베니우스는 이미 저 멀리 도망쳐 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거겠지.

사실 김우진 입장에서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전설속의 종족이라고 해도 신들과의 전쟁에서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붙어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화륵, 불꽃이 김우진의 전신을 휘감았다.

붉은 궤적을 그리며 주먹을 마중나갔다.

──────!

뒤섞인 화염과 마기가 화산처럼 퍼져나갔고 이전의 충격파를 버텨내던 마물들 일부가 쓸려나갔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충돌로 김우진은 깨달았다.

“알베니우스님이 자신할만 하군요.”

눈앞의 타이탄은 어지간한 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전력을 다해야겠는데.”
“과연. 도마뱀 놈이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군.”

그리고 호승심을 느낀 건 김우진만이 아니었다.

“어디 이것도 받아 봐라.”

티탄이 산을 집어 들었다. 아니, 그건 산이 아니었다. 거인의 손길에 맞게 제작된, 산처럼 거대하고 묵직한
망치였다.

망치가 하늘을 가렸다.

그대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기 직전, 한 자루의 검이 마중 나왔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

───────!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에 세상이 흔들렸다.

공간이 붕괴하고 마기와 화염이 범람했다.

그리고 그 폭풍에 밀린 거대한 망치가 왔던 길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인의 자세가 무너졌다.

콰아아아앙, 거인의 거구에 깔린 마물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압사 당했다.

거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힘으로 나를?”
“저도 힘으로는 자신이 있거든요.”

김우진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꽤 오래 살으셨다고 하고, 아군이 될지도 모르니 일단 예의는 차리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도마뱀의 말이 맞았구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폭사되는 마기에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인정하마. 넌 가벼운 마음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강자만의 특권이 있다. 내 이름을 아는 것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자격을 증명해라.”
“그걸 원한다면.”

김우진이 질주했다.

* * *

공간이 갈라졌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차원으로 떨어졌다.

“그 도마뱀이 있다는 곳이 여긴가. 쓰레기 같은 곳으로 멀리도 왔군.”


지독할 정도로 넘쳐나는 마기, 여기저기 보이는 균열은 차원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긴, 이런 곳에 숨었으니 찾기가 힘들지.”

신들은 멸망한 차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매일 같이 새로운 종말이 일어나고 싸우는데 이미 끝나버린 곳에
미련을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들.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다니.”

어쩔 수 없다.

명색이 신이라는 놈들이 전혀 믿음이 가지 않으니.

“김우진이 차라리 더 신 같군.”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엔 그랬다. 오랜 권태 때문인지 신의 위엄을 잃어버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김우진을 처리해야만 한다.

김우진은 반드시 백신전에 큰 위험이 되어 돌아올테니.

“그 쥐새끼 같은 도마뱀을 잡아서···.”

그 순간이었다.

───────!

“이게 무···!”

차원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이 그를 휩쓸었다.

───────────────
# < 062. 손 >

“충동질하는 건 여전하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만.”
“굳이 칼카르가 갈 필요 없는 일이다.”
“다른 신들을 믿을 수 없다고, 알베니우스를 직접 잡아와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한 건 칼카르다.”
“그렇게 부추긴 건 너도, 베리안.”

회색빛 동공과 푸른 눈이 마주쳤다.

“놈이 불안해하고 있으니 그저 긍정해준 것뿐이다.”

베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인 것을. 주신이라는 자가 아둔하게 자신의 성미를 이기지 못하니.”
“그 순리를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다. 칼카르는 다른 신들을 애증한다. 김우진에게 또 다른 신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니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일뿐.”
“베른과 드네르바를 미끼로 던지는 것에 동의한 건 다른 칼카르인가?”
“작은 피해로 더 큰 우환을 막는 거다.”
“농담이다. 나도 동의했으니 그걸 탓할 처지는 아니지.”
“어디 가는 거지?”
“남아 있을 이유가 있나?”
“없다.”

베리안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텅 빈 대전에 홀로 남은 알비츠가 무표정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회의는 끝났다.

모든 신들은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갔고 칼카르는 직접 알베니우스를 쫓아 차원의 변방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건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신들 중 누구도 칼카르의 실패를 예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는 주신이다. 태초에 선택을 받은 절대자이자 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

“···그때 끝냈어야 했거늘.”

신의 죽음이라는 미지에 주신들마저 신들을 살리기 위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들의 희생을 감안하더라도


김우진을 끝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적어도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는다.

칼카르가 알베니우스를 잡아온다면.

“김우진도 끝이다.”

무조건.

* * *

죽일 듯한 살기.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마기.

이게 얼마만일까.

김우진은 비로소 자신이 전장에 서 있다는 실감이 났다.

자신보다 한참 부족한 하수들의 재롱을 보고 적당히 맞춰주는 게 아니라, 생사가 오가며 언제는 목을 물어 뜯거나
뜯길 수 있는 숨 막히는 곳.

무엇보다 넘실거리는 마기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결코 좋은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으며 그때의 일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김우진은


있을 수 없었을 거다.
그 모든 것이 쌓여 지금의 그가 되었으니.

김우진이 파르르 경련하는 주먹으로 검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몸이 비명을 지르다니, 이것 역시 수십 년만의


일이다.

허나, 수십 년 전에는 수도 없이 겪었던 일. 당황할 이유는 없다.

그림자가 진다. 망치가 다시 떨어지고 있다.

이전의 것이 단순히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가벼운 손놀림이라면 이번에는 격이 다르다.

망치에 뭉친 마기는 권능에 가깝다. 능히 공간을 찢고 대지를 박살낼 힘을 품고 있다.

그러니 굳이 정면으로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

김우진이 몸을 날린다. 공간을 격하며 거인을 향해 질주한다.

허나, 그림자는 김우진의 머리 위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내리 찍는 상황에서 각도를 꺾어 나를 쫓아와?’

조금 놀랐으나 그뿐, 신과 대적할 위대한 종족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염두에 두고 있긴 했다.

허공에 널린 마기를 박차며 속력을 더한다. 아슬아슬하게 망치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

애꿎은 대지를 강타한 충격파가 등을 덮친다.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불꽃을 피어내자 거인과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진다.

“······!”

거대한 주먹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빠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불의 방패가 주먹과 김우진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

────!

불꽃과 마기가 뒤엉켰다. 단단하던 방패가 아주 잠깐 시간을 끌고 소멸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은 김우진이
몸을 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타이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김우진은 어느새 거인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손으로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어정쩡한
자세.

빈틈투성이다.

김우진이 검을 뻗었다. 그의 손에 딱 맞은 크기의 검이 화염을 머금으며 더 크게 타올랐다.


흡사 거인의 망치처럼. 그 끝이 목적지에 닿기 직전, 거인의 피부가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

그대로 받아냈다. 화염이 폭발했다. 막대한 반탄력에 김우진의 팔이 찌르르 울렸다.

“간지럽다.”

비웃음이 뒤섞인 음성과 함께 어느새 회수된 주먹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김우진의 육신이 대지를 파고 들어갔다. 마나와 오러의 일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아리입니까?”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수많은 전투와 수라장을 헤쳐 나왔지만 저 정도로 단단한 육체는 본 적이 없었다.

그와 싸웠던, 그의 손에 죽었던 혹은 그저 만나기만 했던 모든 신들도 저렇지는 않았다.

구덩이 속으로 그림자가 졌다.

“보여줄 건 방금 그게 끝인가?”
“도발을 잘못하는군요.”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인의 동공에 김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마나와 오러를 끌어올렸다.

머리와 눈이 붉게 물들었다. 피부 곳곳에서 잔불이 피어올랐다.

“이제 보니 그 힘, 꽤나 익숙하군. 정령술사인가?”


“아니요.”
“그럴 리가.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더 없이 자연에 가까운 정순함은 오직 정령만이 가능하다. 그건
틀림없는 정령왕의 불꽃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칼날을, 불꽃을 압축시켰다. 더욱 날카롭게, 더욱 뜨겁게.

“반대로 돌려드리죠. 알고 싶으면 자격을 증명하세요.”


“···재미있는 놈이군.”

그대로 대지를 박찼다. 달아오른 대기를 짓밟으며 발밑의 화염을 폭발시켰다.

한순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망치. 공간을 격하며 피해냈다.

똑같은 패턴이었다. 대지를 강타하는 망치, 폭풍처럼 일어나는 충격파, 저항하지 않고 나아가는 김우진, 마중
나오는 주먹.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검을 마주 뻗었다는 것이다.

주먹이 묵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달랐다.

──!

흡사 금강석을 때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마기와 화염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검날이 그대로 주먹을
파고들었다.

“크윽···?”

거인의 비명도 잠시, 극도로 압축된 불꽃이 일거에 방출되었다.

─────!

그것은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었다. 폭풍은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내며 태산과도 같은 거인마저 영향력에 넣었다.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동체가 허공을 날았다. 한참을 체공한 뒤, 대지에 처박혔다.

아니, 처박힌 거라고 생각했다.

─────!

날아가던 거인의 몸이 멈췄다. 폭발이 일어났다. 열기가 치솟았다.

추락하던 육신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다시 올라갔다.

“재미있는 광경이다···!”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 거기에 뒤섞인 열기와 신의 힘에 김우진의 얼굴이 굳었다.

“도마뱀을 잡으러 온 곳에서 멸족한 줄 알았던 타이탄과 연옥의 소장을 보게 될 줄이야···!”

불꽃이 피어났다. 김우진 것보다 더 색이 짙은 홍염이었다.

“더불어 환영 인사도 아주 거칠고···!”

거리는 멀었으나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 그리고 이미 멸망해 마기가 넘쳐나는 세상속에서도 고고히 흘러나오는 신의 힘까지.

“칼카르···.”

백신전을 주도하는 세 명의 주신 중 하나.

“왜 여기에?”

멍청한 질문이다. 놈은 이미 스스로 이유를 뱉었다.

‘알베니우스···!’

설마 꼬리가 잡히다니.
신들의 능력을 고려해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알베니우스가 40 년 가까이 숨어 다닐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문제는 하필이면 지금이라는 것.


하필이면 칼카르라는 것.

‘차라리 알비츠가 나은데.’

같은 불꽃이라고 한들, 그 순도와 질이 다르다. 모든 권능이 불꽃에 집중된 칼카스의 불꽃은 그야말로 신의
불꽃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놈의 불꽃은 다른 불꽃마저 불태우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모든 불꽃을 불태우고 먹어치우는 염화의 왕, 그것이
놈의 권능이다.

“김우진.”

눈 깜짝할 사이, 칼카르는 김우진의 앞에 서 있었다.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군.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칼카르.”
“백신전의 일원들이 네게 신세를 졌다더군. 베른은 잘 있나?”
“드네르바와 함께 잘 도망가던데. 백신전에 돌아간 게 아니었나?”
“딱히 상관은 없다. 어차피 계약이 유지중인 걸 보면 살아는 있을 테니까.”

칼카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헌데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지?”
“내가 할 소리다. 도마뱀을 잡으러 왔더니 마기에 점철된 타이탄이 있질 않나, 김우진 네놈이 있질 않나.”

다른 신들을 보내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계약으로 묶여 있으니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주마. 떠나라. 연옥으로 돌아가서 네 본분을 다해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의미 없을 테니까.”

화륵, 미약한 화염이 그의 육신을 감쌌다. 김우진의 것에 비해 더욱 짙은 붉은 빛의 염화는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신의 이름으로 어둠에 몸을 맡긴 악마를 처단하고 백신전에 반기를 든 도마뱀을 잡아갈 생각이다. 네
목적이 무엇이든 무엇 하나 이룰 수 없을 거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대항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는다는 것과
같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에 김우진이 표정을 굳혔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칼카르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최초의 신이자, 백신전의 주인이다. 네놈이 백신전의 신들을 여럿 상대해 봤다는 건 알지만 내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누가 보면 40 년 전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은 줄 알겠군.”
“신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감내였다. 허나, 두 번의 기회가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마라.”
“그러면서 신 둘을 미끼로 던져? 그 버러지 둘로는 안 된다는 걸 네가 정말 몰랐을까?”
“네게 대답해줄 이유는 없다. 마지막 경고다. 가라.”
“그렇다는데 말입니다.”

김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시선은 칼카르를 향하지 않았다. 그 뒤, 거대한 망치를 든 타이탄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제는 저와 함께할 마음이 생겼습니까? 아무래도 혼자서는 버거우실 것 같은데.”


“두리쉬마다.”
“이제 이름을 알려주시는군요.”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정령술사는 아니고 정령왕을 좀 삼켰습니다.”
“그런데도 살아 있다라, 용한 인간이군.”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죠.”
“지금 뭐하는 거지?”
“뭐하긴.”

망치가 떨어졌다.

칼카스가 주먹을 마주 뻗었으나 그 충격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육신이 대지 깊숙이 틀어박혔다.

충격에 몸이 경직된 잠깐의 틈.

김우진의 칼날이 사각을 노렸다.

“네 놈···!”

불꽃이 갈라지고 신력이 밀려난다. 칼카스가 급하게 다른 손을 내밀어 칼날을 붙잡는다.

“이런 짓을 하지.”
“계약을 잊었나!”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 걸음, 전진한다. 칼날 또한 전진한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애초에 먼저 계약의 허점을 노리고 시비를 건건 네놈들이야.”


“명색이 용사였던 놈이 마왕과 손을 잡겠다는 거냐!”
“그게 어때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검 끝이 칼카스의 복부에 닿았다.

“난 백신전을 무너트릴 수만 있으면 그 무엇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어.”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니까.

───────────────
# < 063. 불꽃 >

모든 일에는 연관이 있다.

김우진이 케이룸에 가 있을 때, 알베니우스가 연락을 한 것도.


직접 만난 그가 타이탄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타이탄이 어둠을 받아들이고 그 사도가 된 것도.
백신전에서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한 것도.
주신, 칼카르가 직접 나선 것도.

따로 따로 놓고 보면 그저 우연이다.

하필 이 타이밍에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된 것도, 하필 이 타이밍에 칼카르가 직접 온 것도.

하지만 그 우연이 모이면 필연이다.

김우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칼카르는 강하다. 그와 마주한 것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위기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이 아니면 칼카르가 집행자나 다른 백신전의 신들 없이 혼자 다닐 리가 없다.


지금이 아니면 마기가 넘쳐나는, 신들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제약하는 멸망한 차원을 전장으로 삼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이 아니면 위대한 타이탄, 두리쉬마와 함께 칼카르를 합공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확신했다.

지금이다. 바로 지금이 칼카르를 잡을 적기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검 끝이 칼카르의 육신을 파고든다. 검날을 붙잡은 그의 손바닥에 미약한 핏물이 흐른다.

“네놈이 끝까지···!”
“망치를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데 그만 푹 쉬는 게 어때?”
“같잖은 소리!”

괴성과 함께 칼카르의 전신에서 화염이 폭사된다. 열기는 김우진의 염화를 잡아먹고 망치를 밀어낸다. 반동에
밀린 거인이 뒤로 넘어간다.

“자비를 베풀어 주었더니 감히 내게 칼을 들이밀어?”


“자비가 아니라 무서워서겠지. 연옥에 갈까봐.”
“네놈 또한 계약에 묶여 있다. 무슨 자신감이지?”
“내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평소라면 전혀 소용이 없다. 아카식 레코드의 가호를 받는 신을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초월자들 뿐이니.

김우진이 하지 않는다면 김우진 대신 손을 더럽혀줄 사람이 연옥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지금은 다르다.


김우진과 대등한 수준의 괴물이 있다. 오랜 세월, 신을 향한 증오를 곱씹으며 힘을 길러온 거인이 있다.

능히 신을 죽일 수 있는, 신의 대적자가.

“노오오오옴!”

칼카르가 돌진한다. 화염을 머금은 주먹이 붉은 궤적을 그린다. 빠르고 강맹하다.

─!

주먹과 검이 부딪혔으나 밀려난 건 검이다. 김우진이 한 걸음 물러난다. 칼카르가 곧장 따라 붙는다.

극도로 압축된 불의 주먹이 김우진을 향해 날아온다. 폭주기관차처럼.

─!

막아냈음에도 폭발이 일어난다. 넘실거리는 화마가 김우진의 불꽃을 집어삼키며 영역을 넓힌다.

역시 상성이 나빠. 김우진이 급하게 두 발바닥에 불꽃을 터트린다. 한 순간에 수 킬로를 후퇴하며 자세를
다잡는다.

“어딜.”

고개를 드는 순간, 주먹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보다 망치가 더 빠르다.

───!

골프공을 후려치는 골프채처럼 경쾌한 스윙이 신을 후려친다. 칼카르의 몸이 통제를 잃고 하늘로 치솟는다.

“···뭡니까, 그 모습은?”
“타이탄은 자신의 신체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걱정 마라. 크기는 줄어들었어도 힘과 견고함은
그대로니.”

전신이 검게 물든 두리쉬마가 무릎을 굽혔다. 다시 폈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 칼카르를 쫓고 있었다.

콰콰콰-

불꽃의 섬광이 그를 마중 나온다.

까앙!

주인의 덩치에 맞게 함께 줄어든 망치가 강제로 각도를 틀어낸다. 애꿎은 마물들이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신의
주먹이 거인을 후려친다. 거인의 발이 신을 강타한다.

신과 신을 증오하며 마왕이 된 거인은 그렇게 순식간에 백여 합을 주고받는다. 한 수 한 수에 대지가 붕괴하고


하늘이 갈라진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김우진은 격랑 속으로 몸을 던진다.

피조물 따위는 감히 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격전이지만 김우진은 아니다.

그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불꽃을 배제했다. 그의 가장 큰 힘이 불꽃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불꽃만이 그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감히 신에게 통할 정도의 권능이 많은 것도 아니기에 불꽃이 없다면 남은 건 하나다.

순수한 오러로 칼날을 벼르고 허공을 가른다.

쫙 갈라진 균열 사이로 검을 찌른다. 신의 등을 찌른다.

“······!”

한순간 느려지는 움직임에 망치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강타한다.

그건 시작이었다.

김우진은 수 십, 수 백 개의 칼날을 제련하고 권능을 부여했다. 공간을 가르고 균열을 만들고 검을 찌른다.

검을 빨아드린 균열은 신의 근처에서 먹은 것을 토해낸다. 그리고 신을 보호하는 불의 권능을 비틀고 들어간 검은


그대로 신의 살을 뚫는다.

“···김우진, 네놈! 이건 아스트마의 권능이구나!”

신의 분노에 김우진이 히죽 웃었다.

“맞아. 네 동료의 권능에 당하는 기분이 어때?”

공간을 비틀어 보호수단을 우회하는 공격. 꽤나 난해하고 격의 차이를 많이 타 평소라면 결코 통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두리쉬마라는 적수가 칼카르를 잡아두고 있는 이상, 빈틈은 수 없이 많다. 수 없이 많이 만들 수 있다.

“이 개새끼가!”

─────!

신의 분노에 감응한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공간의 간섭을 불태우고 마왕이 된 거인을 튕겨낸다. 그리고
주인을 위한 길을 마련한다.

“오냐, 네놈부터 죽여주마!”

신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을 격한다. 김우진이 급하게 검을 휘두른다. 쩌엉, 주먹에 검이 부서진다.

‘빌어먹을, 역시 상성이 안 좋아!’

권능의 불꽃을 두르면 버틸 수는 있다. 하지만 더 정순한 불꽃에 잡아먹혀 오히려 주인을 물게 된다.

급하게 새로운 검을 만들어내며 수십 합을 받아낸다. 김우진의 몸이 정신없이 뒤로 밀려난다.

콰앙, 거인의 망치가 연이어 신의 후방을 후려쳤지만 칼카스의 눈은 오로지 김우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쩌정, 연달아 검이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보다 놈의 손이 더 빨랐다.


콱, 목을 움켜쥐는 거친 손아귀에 김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다. 김우진.”

하지만 두리쉬마의 망치질을 맨 몸으로 받아낸 칼카스 상태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부서진 한 쪽 어깨는 꽤나
심각해 보였다.

“그 상태로 두리쉬마를 이길 수는 있고?”


“나는 주신이다. 누구한테도 지지 않아.”
“근데 날 죽이면 심연에 떨이지게 될 텐데? 괜찮겠어?”
“······.”

분노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자각한 칼카르가 멈칫했다.

그리고 그 짧은 틈이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을 불러왔다.

김우진이 공간을 조작했다. 비틀고 왜곡하여 잠시나마 칼카르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허튼 수작을···!”

그리고 그 위로.

두리쉬마의 망치가 떨어졌다.

주인의 모든 마기를 잡아먹어 덩치를 키우고 살기를 극대화시킨.

“이 따위 것···!”

신이 급하게 불꽃을 피워 올렸으나 공간의 권능은 그것마저 일부 왜곡시켰다.

“너 이 개새끼가···!”

부실한 불꽃이 모조리 잡아먹혔다.


신을 보호하는 권능 또한 소멸했다.

그리고 망치는 모든 껍질이 벗겨진 속살을 향해 돌진했다.

────!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차원을 뒤흔들었다. 갈라지고 찢겨나간 차원의 형태가 모조리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신은 살아 있었다.

모든 불꽃이 사라졌음에도.
가호가 사라졌음에도.
망치를 받아낸 팔이 완전히 소멸하고 머리가 일부 뭉개졌음에도.

“내가 이따위 것에 당할 것 같으냐···! 나는 백신전의 삼 주신, 칼카르다···!”

신이 포효했다. 초토화된 차원을 내려다보며 다시금 불꽃을 피워내려 애썼다.


콰직-

허나 세상은, 아니 김우진은 그의 재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러의 검이 신의 목을 꿰뚫었다.

불꽃이 소멸한, 가호가 벗겨진 속살 따위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 또한 초월자였기에.

“쿨럭···너···!”
“신도 피를 흘리는군.”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그래, 내 이름이 김우진인 건 나도 잘 알아.”

김우진이 검을 비틀었다.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네 힘은 내가 잘 써주마.”
“개···!”
“두리쉬마님! 여기입니다! 죽기 전에 빨리!”

김우진이 황급히 검을 빼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

신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그림자가 졌다.

────!

* * *

“···죽겠네, 진짜.”

김우진이 크레이터 속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는 신의 시체가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머리가 완전히 터져버린 상태에서 부활할 수는 없으니.

“···마침내.”

두리쉬마가 덜덜 떨리는 몸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주신, 무려 주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백신전을 지탱하는 세 기둥 중 하나.

두리쉬마가 널브러진 신의 머리였던 것을 들었다. 완전히 잔해가 되어버린 흔적들을 높이 들어 올렸다.


“위대한 거인의 영혼들이시여! 이 두리쉬마가 마침내 복수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미 메말라버린 눈에서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허나, 마왕의 마기에 감응한 세계가 요동쳤다.

그 순간, 거대한 마기가 샘솟았다.

두리쉬마는 눈을 감고 조용히 마기를 곱씹었다.

“뭐, 뭡니까?”
“당황할 것 없다. 용사들과 같으니.”

신의 선택을, 나아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용사들은 악을 처단함으로서 업을 쌓고 그에 따른 힘을 얻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사도인 두리쉬마는 빛의 사도인 칼카르를 죽이고 막대한 업을 쌓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그의 새로운
힘이 되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아니었으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거다.”

칼카르는 주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리쉬마와 김우진. 둘 중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목숨을 잃는 건 이쪽이 되었을 거다.

“이제 시작이다. 칼카르를 시작으로 모든 백신전의 신들을 무너트리겠다.”


“그건 그거고 시체는 제가 가져도 됩니까?”
“딱히 시체는 필요 없다만 무엇을 할 생각이지?”
“아까 물으셨지요? 정령술사가 아니면서 어떻게 정령왕의 힘을 사용하냐고.”

김우진이 칼카르의 시체로 다가갔다.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간단합니다.”

김우진의 마나가 시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정령왕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진짜 먹는다는 건 아니다. 흡수. 김우진은 그 근원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용사로서 우주의 힘을 부여받고.


아카식 레코드에게 인정받은 그의 권능.

포식이다.

“···그렇게 된 거였군. 용사인가?”


“용사였습니다.”

칼카르의 육신이 소멸했다. 김우진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허나, 그것은 더 이상 붉지 않았다.


백염.

신의 불꽃을 먹어치운 불꽃은 한층 진화했다.


눈과 같이 하얀 불꽃의 결정들이 김우진을 감쌌다.

“지금은 감옥의 소장이지만. 원하시면 초대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진 열기와 농도에 김우진이 전율했다.

지금이라면 그 누구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거절한다. 딱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군.”


“아쉽군요. 볼게 많은 곳인데.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곳에 온 용건은 이루지도 못했네요.”
“하겠다. 이미 함께 주신을 잡은 마당에 네 능력을 의심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소장과 거인이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
# < 064. 열매 >

콰르르르릉-

낙뢰가 내리친다. 마기에서 비롯된 검은 번개는 이미 난장판이 된 대지에 상처를 하나 추가한다.

“여기도 이제 끝이군.”

두리쉬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과 마왕의 격전 덕분에 반쯤 갈라지고 쪼개졌던 차원은 완전 넝마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원의 균열들은 커지고 있으니 차원의 수명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어떻게 합니까?”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두리쉬마는 신들의 눈을 피해 변방의 차원만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변방의 차원들은 전부 종말을 맞이하고 마지막
운명을 기다리는 곳들이었다.

소멸이 예정된 차원은 그리 오래 있을 수 없었고 두리쉬마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차원을 옮겨왔다.

“문제는 이 다음이군.”

분노에 취해 주신인 칼라르를 죽인 것까지는 좋았다. 그 대가로 두리쉬마도, 김우진도 얻은 게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일반 신이 죽어도 난리가 나는 게 백신전인데 주신이 차원 외곽에 들렀다가 실종되었다.

차원이 곧 붕괴하여 소멸하게 생겼으니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저들은


신이 아니라 머저리다.
“일단 저는 나름 숨길 수 있습니다만.”

애초에 현재 김우진은 연옥에서 나오지 않은 상태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차원의 장벽을 관리하는 건 백신전이지만 차원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는 그것에 간섭할 수 있다.

릴리가 김우진이 연옥을 나섰다는 것을 숨겨주었고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데이드람에 방문하고 나왔다는 것을
숨겼다.

소멸에 가까운 종말 차원의 방벽은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졌으며 신들의 관심 밖이다. 즉, 누구도 김우진이 연옥에
있지 않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두리쉬마는 다르다.

그가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차원의 변방에 숨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들이 그의 생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 칼카르의 실종에 백신전에서 변방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들키고 만다.

“차원은 많다. 당연히 용사들에게 구해진 만큼, 멸망한 차원도 많다. 백신전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모든 차원을 확인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말된 차원은 생겨나고 있다. 도망칠 곳이 무수히 많으니 두리쉬마는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다가 신에게 들킬 수도 있다. 하지만 두리쉬마는 어둠의 사도이자 마왕이었다.

“칼카르와의 전투로 인해 꽤 많은 마물들이 죽었다. 다른 종말 차원들을 돌며 그들을 수복하고 군단을 만들


거다.”

그들은 백신전의 몰락을 위한 선봉이 될 거다.

“나는 자의로 어둠의 사도가 되어 차원을 멸망시켜야 하는 숙명을 얻었으나 노리는 건 단 하나다.”

백신전이라는 차원.

“그곳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

하물며 주신을 죽인 대가로 쌓은 업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가요. 그래도 혹시 진짜 위험해지면 연옥으로 오세요.”


“연옥? 네가 소장으로 있다는 감옥인가.”
“여러 차원이 교차되는 교차차원에 세워진 감옥입니다. 주로 하는 일은 용사들을 가두는 것.”

두리쉬마의 미간이 구겨졌다.

“신들의 개 노릇을 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계약이 끝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죠.”
“계약이라. 아까 칼카르가 이야기했던 그것이군.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건가?”
“그밖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은 그렇죠.”
“신들이 어째서 너와 그런 계약을 맺었지?”
“왜냐하면 제가 신들을 죽였거든요.”
“···신을 죽였다고?”

프흐흐흐, 고개를 갸웃거리던 두리쉬마가 폭소를 터트렸다.

“하긴, 그 정도 실력이면 그럴 만도 하지. 과거 그 어떤 타이탄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을 네가 이루었군.


그래서인가. 공간과 불, 전혀 다른 권능을 다루고 칼카르가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예, 신의 힘도 하나 먹었죠. 흡수하느라 꽤나 고생했지만요.”

솔직히 지금도 좀 거북하긴 하다. 주신이 괜히 주신이 아닌지 요동치려는 기운을 억제하는 것도 꽤나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거다.

“이곳이 멀쩡한 차원이고, 신들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면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을 텐데.”
“연옥에 오면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허나, 지금은 그만 가봐야 할 때다.”

콰르르르, 차원의 붕괴가 조금씩 가속화되고 있었다. 차원의 수명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모조리 소멸한다. 신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끔찍하군요.”
“받아라.”

두리쉬마가 건틀렛 하나를 건넸다.

“내가 쓰던 건틀렛이다. 다음에 나를 찾으러 올 때 나침반 역할을 해줄 거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걸 드리겠습니다. 언제든 위험해지면 연옥으로 오세요.”

김우진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건넸다. 큰 의미는 없는 물건이지만 꽤 오랫동안 착용하고 다녔으니 그를 찾는


나침반 역할로는 더 없이 적합할 거다.

“내가 갑자기 가면 네가 위험해지는 것 아닌가?”


“아뇨, 나름대로 차원에 들어왔다는 것을 숨길 방안은 있어서.”
“알겠다.”

두리쉬마가 가볍게 망치를 휘둘러 공간을 찢었다. 거대한 균열과 함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따라와라!”

그의 외침에 살아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어떻게 가나 했더니, 이런 것도 가능하십니까?”


“어둠의 사도가 된 이후로 종말을 맞이한 차원 간의 이동이 좀 자유로워졌을 뿐이다. 그럼 다음에 보지.
타이탄에게 함께 싸운 전우는 이미 동지다. 넌 내 동지이니 언제든 위험하면 내게 와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가 떠나갔다. 수만의 마물들이 함께였다.

칼카르와의 전투에서 꽤 많은 마물들이 죽었는데 아직도 저 정도라니. 적어도 한 차원에서 모은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잘 됐으니 다행이군.”
“어디 숨어 있다 이제야 나타나는 겁니까?”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좀 약해서.”

알베니우스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가지. 여기 더 있다가는 정말로 소멸해버릴 것 같으니.”


“예.”

알베니우스가 차원의 방벽을 열었다.

* * *

율리아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넘었다.

허나, 자연은 더 이상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밟고 선 가지들이 휘청이며 그녀를 떨쳐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향해 줄기들이 쏟아졌다.

─!

검격이 코앞까지 다가온 줄기의 진로를 비틀었다. 간신히 자세를 다잡으니 수 백 개의 나뭇잎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율리아가 호흡을 가다듬고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그녀의 편이니, 부드럽게 나뭇잎들을 비껴내며 전진했다.

사방의 나무가, 바닥의 잔디가, 낙엽이 모든 적들 사이를 고고히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신목 앞에 섰을 때.

“파하아아···!”

율리아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사라졌던 자연의 가호가 다시금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 수고했구나.

“별 말씀을요.”

작은 참새가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았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지만 평생 친구로 알고 지냈던 자연이 적이 되는 건 정말 끔찍하네요.”

김우진과 알베니우스가 떠난 뒤, 율리아는 데이드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기약 없는 시간들을 그녀는 허투루 쓰지 않기로 했다.

세계수에게 부탁을 했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훈련을 시작했다.


숲의 가호를 없애고, 우주의 힘으로 강화된 자연을 상대한다.

언제나 자연의 도움을 받아왔던 하이엘프에게는 더 없이 가혹한 전투였으나 해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 신들은 자신의 권역을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지.


- 그곳의 자연이 네 편이 아닐 경우가 더 많을 거란다.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신인 이상,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녀가 만약 신에 필적하는 강자였다면 김우진이 그녀를 놓고 갔을까? 아니다. 그녀가 약하기에 두고 간 거다.

“저는 나름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연옥에 들어간 이후로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지네요.”

- 넌 충분히 강하단다. 다만, 상대가 나쁠 뿐이야.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잖아요.”

신에게 대적하기로 한 모든 이들이 그렇듯, 율리아 또한 신에게 맞설 이유가 있다.

복수. 그녀에게 있어 부모나 다름없던 자의 복수.

그때, 열매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손 안에 안착했다.

- 걱정마렴. 너는 충분히 그들과 함께 설 수 있을 테니.

그건 세계수의 열매였다. 아무리 하이엘프라고 한들 쉽게 접할 수 없는 보물.

- 이제는 때가 되었어.

하물며 만년을 살아온 세계수의 열매라면 그 값어치는 수십 배 이상 뛴다.

- 그거 아니? 만 년이 넘어간 세계수는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를 내려 보다 많은 권능을 손에 넣지만 반대로


열매를 맺는 주기는 늦어진단다.

본디 백 년에 하나씩 열리던 열매가 천 년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그만큼 열매는 농익게 되고 마나는 보다 풍부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은
여파로 우주의 힘이 깃든다.

- 알베니우스와 나는 백신전에 대항하기로 한 이후, 끊임없이 아군을 끌어모았단다.

하지만 신에게 대항할 수 있을 만한 초월자들이 많을 리가 없었다.

이제야 김우진과 접촉했고, 우연찮게 멸망한 종족의 후예를 찾았다.

때문에 둘은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다.

찾을 수 없으면 최소한 한 명이라도 만들어 내자고.


신이란 결국 아카식 레코드에게 우주의 힘을 받은 자. 그들과 대적하려면 굳이 신이 되지 않아도 된다. 우주의
힘을 다룰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가장 바탕이 신들에게 직접 그 힘을 부여 받은 용사들이나 신에게 직접 받은 만큼 신을 공격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허나, 그 바탕이 탄탄하고 재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용사로서 신의 힘을 다루어 봤기에 신의 힘에도
익숙하다.

때문에 애초부터 용사를 생각했고 그렇게 고른 게 율리아 카르센이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준비한 칼.


아직 완전히 갈아내지 못했지만 반드시 명검이 될.

“이미 다 이야기 하셨잖아요. 하지만 연옥에 가야했기 때문에 열매를 먹는 건 뒤로 미뤘고.”

- 그래, 그랬지.

세계수의 열매를 먹은 상태에서 연옥에 가게 되면 신들에게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이걸 먹으면 소장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 아니.
- 그 아이는 정말 괴물이란다.

“···같이 설 수 있을 거라면서요?”

- 설 수는 있겠지. 적어도 가장 가까운 전장에서 싸우는 것 정도는?

참새가 샐쭉한 율리아의 시선을 회피했다.

- 그래서 안 먹을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율리아가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

막대한 마나와 이질적인 힘이 그녀의 몸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눈을 감았다. 세계수의 가지와 나뭇잎들이 그녀를 감쌌다.

- 김우진이 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참새가 율리아의 머리 위에 앉아 마나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
# < 065. 첩자 >

“······?”
“···어?”
데이드람에 다시 복귀했을 때, 김우진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율리아였다.

그리고 하이엘프와 인간은 서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 무슨 일이 있었냐?”
“그러는 소장님이야 말로 뭐죠?”

달라진 분위기, 달라진 기도. 김우진은 빠르게 율리아를 탐색했다.

외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내부는 달랐다. 마나가 보다 정순해지고 풍부해졌으며 깊고 방대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지고 있던 용사의 힘 이상의 신의 힘이 느껴졌다.

“···뭘 한 거야?”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먹었어요.”
“만 년이 지난 세계수의 열매?”

들은 적이 있다. 만 년을 살아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은 세계수는 열매를 맺는 주기가 길어지지만 그만큼


농후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지.

“네. 그러는 소장님은요?”


“신을 죽였어.”
“아하···예?”

아침 티타임을 가졌다는 것 같은 평온한 어조에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해요?”
“저 양반이 꼬리를 잡혀서 신이 쫓아왔거든. 그래서 죽였어.”
“어···. 그렇군요.”

신을 죽이셨군요···. 멍하니 끄덕거리던 고개가 삐걱, 멈췄다.

“잠깐, 잠깐만요. 뭐라고요?”


“신을 죽였다고.”
“신을 죽였다니요?”
“그렇게 놀랄 일인가? 처음이 아니라는 건 알 텐데.”
“아니, 그걸 안다고 신을 죽인 일이 사소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김우진이 신살자라 불리며 이미 신을 죽인 경험이 있고, 이번에도 새로운 신을 포로로 잡아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래서 김우진이 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계약으로 묶여 있다고 했다.

“내가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그러면 알베니우스님이?”
“아니.”

김우진과 율리아가 서로의 이변을 눈치 챘다면 알베니우스와 세계수는 서로의 일을 이야기했다.

“성공했어. 타이탄의 마지막 생존자가 우리의 아군이 되었다.”


- 계획대로 되었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리아에게 열매를 먹였어요.

“그런 것 같더군.”

- 주신을 죽였다는 말입니까?

“그래. 내가 한 건 아니지만. 덕분에 김우진도, 타이탄도 더욱 강해졌고 백신전의 기둥 중 하나를 뽑아버렸으니


엄청난 이득이다.”

비록 백신전의 대응을 봐야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더 없이 이로운 결과물들이다.

수만의 마물 군단과 주신에 필적하는 타이탄이 아군으로도 모자라 주신을 죽이다니.

알베니우스와 세계수는 터져 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마물 군단은 모든 것을 갉아 먹는 악의 군단이지만 그게 아군이 된다면 더 없이 든든해진다. 하물며 백신전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보이는 이상,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김우진. 이제는 좀 함께할 마음이 들었나? 타이탄과 이야기를 나눈 걸 들어보니 거의 된 것 같긴


하지만.”
“예.”

타이탄과 마물의 군단은 확실히 큰 힘이었다. 특히, 주신인 칼카르를 죽여 버렸으니 백신전의 전력이 감소한
시점에서 더 크게 작용한다.

어쩌면 정말로 백신전을 무너트리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가 나서는 건 무조건 계약이 끝나는 뒤입니다.”


“나도 네가 심연에 끌려가는 걸 바라지는 않아. 타이탄을 끌어들였다고 해서 바로 백신전과 맞붙을 것도
아니고.”

주신이 하나 죽었다고 해도 백신전은 여전히 백신전이다. 가능하면 최대한 전력을 깎아먹고 판을 조율해야만
승산이 있다.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행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예. 그럼 일단은 다시 연옥으로 가겠습니다. 릴리를 통해 필요할 때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그래.”

김우진이 공간을 열었다.

참새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 잠깐만, 율리아는 아직 이대로 가면 안 된단다.


- 열매를 흡수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불안정해. 며칠 여유를 가지고 내가 직접 조율해줄 필요가 있단다.

“그냥 직접 하면 되지 않습니까?”
- 가능은 하지만 시간이 몇 배는 걸리겠지.
- 너도 칼카르를 흡수하고 아직 완전히 갈무리 하지 못했잖니? 만약 여기서 함께 완전히 흡수하고 가는 게
어떻겠니?
- 만약 칼카르가 실종된 것을 문제로 연옥에 다시 감찰관이 오면 조금 곤란하잖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군요.”

백신전의 입장에서 칼카르는 알베니우스를 찾으러 갔다가 실종되었다.

그리고 알베니우스는 김우진, 그와 친분이 있다. 만약 칼카르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가 나섰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적어도 오래 전에 멸족시킨 타이탄이 살아남아 마왕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좋습니다.”

며칠의 체류가 더 결정되었다.

* * *

“하암.”

연옥의 아침이 밝았다. 난쟁이들을 이끄는 난쟁이 중에 난쟁이, 데르카인은 소지가 가져다주는 통닭을 뜯었다.
풍부한 육즙과 기름기가 절로 맥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맥주는 없나?”
“술은 안 되는 거 아시잖습니까.”
“고작 맥주 한 잔에 취하지는 않지 않나. 소장도 없는데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랬다가 걸리면 저 큰 일 납니다.”
“자네, 정말 이럴 건가? 내가 만들어준 게 몇 개인데!”
“끄응, 알겠습니다. 딱 한 캔입니다. 들키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말게.”

치익, 소지가 가져온 시원한 흑맥주와 통닭을 함께 흡입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자네는 언제까지 연옥에 있을 건가?”


“무슨 소리십니까?”
“자네는 용사의 힘에 별다른 미련이 없잖나. 그렇지 않나?”
“대신 다른 것에 관심이 있죠. 연옥은 천국입니다. 연옥만큼 다양한 차원의 재료를 접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야 교차차원이고 백신전의 신들이 소장이 요구하는 걸 나름 잘 가져다주니까.”

그 계약이라는 거 때문이겠지.

“자네도 요즘 분위기 알고 있지 않나.”

감찰관이 나와 연옥을 확인하고, 소장이 그 감찰관이자 신을 붙잡아 세계수에 봉인시키고.


소장과 신들의 관계가 결코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사이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요즘의 분위기나 긴장감을 고려하면 어쩌면 백신전과 김우진이 충돌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율리아를 데리고 다른 차원에 간 것도 또 다른 아군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라고 했으니.

“나야 수백년간 나를 이곳에 가둔 머저리들에게 원한이 생겨서 있다지만 자네는 아니지 않나? 여기 계속 있다가는
진짜 위험해질 거네.”
“충고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뭐, 마음대로 하게. 자네가 있는 편이 나야 좋기는 하지. 이제는 자네가 없을 때의 식사는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야.”

잡담과 식사를 마친 후, 데르카인은 출역을 나갔다. 하지만 출역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본래 그냥 굴리기 위해서 나무를 베었다 다시 심는 것 같은 쓸모없는 짓을 시키는 게 출역이었다면 이제는 아예


공방에다 그를 풀어 놓았다.

자연스레 데르카인과 드워프들은 마음껏 신들과 싸울 무기와 장비들을 제작했고.

땅땅땅-

한창 망치질을 하고 있으니 누군가 다가왔다.

“데르카인님.”
“강민식인가?”
“예.”
“찾았나?”
“찾았습니다.”

데르카인이 망치질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누군가?”
“놀라지 마십시오. 무려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습니다.”
“카를로를 포함해서?”
“제외하고.”
“미쳤군. 탈옥하라고 밀어 넣은 놈들이 한 놈이 아니라 네 놈이나 된다고?”

300 년이 넘게 연옥에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강민식 이전에는 의도적으로 탈옥수를
투입한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서로가 같은 사명을 받았다는 걸 모릅니다. 아마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일단은 그들 모두 저를 조력자로 여기고 있습니다만,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소장한테 말해야지. 신의 뜻대로 되면 모든 게 끝장이네.”
“그냥 말입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대가를 요구하는 게 어떻습니까?”
“대가?”
“죄수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대가. 저희들도 결국 신과 싸우기 위해 남아서 소장에게 협력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함께 싸우기도 했는데 저희는 여전히 죄수입니다.”

평소에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교도관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변했다.

김우진이 베른을 잡아올 때, 함께 왔던 열 명의 집행자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적이었으나 아군으로 돌아선


경우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하다. 적어도 죄수들은 신에게 한 번 저항을 했던 이들이나 집행자들은 충실한 신들의
개니까.

하지만 대우가 극과 극이었다. 그들을 대하는 교도관들의 태도가 조금 유해지긴 했지만 죄수와 교도관, 이 말로
모든 게 정리가 가능하다.

“자네 말이 맞네. 이걸 빌미로 우리도 더 이상 죄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거기 모여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뾰족한 목소리에 데르카인과 강민식이 입을 다물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자수정빛의 머리카락과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황금의 눈. 절로 느껴지는 신성함은 스스로를


성녀라 자칭하는 디아네 디트린이었다.

“출역 시간에 사사로운 잡담은 금지입니다.”


“아니, 그건 예전 일이고 요즘은 널널하게···.”
“저는 전달 받은 사항이 없습니다. 소장님께서 정하신 원칙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눈빛에 데르카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가게.”
“예.”
“앞으로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주의해주시길.”
“명심하지.”

데르카인은 강민식의 제안에 더욱 혹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장비를 다듬기 시작했다.

* * *

공방을 빠져나온 디아네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차원보다 더욱 짙은 마나의 농도에 몸이 절로 반응했다.

“역시 주신의 권역···!”

김우진은 이곳이 자신의 영역이라고 한 적이 없었고 디아네 또한 연옥의 마나 농도가 짙은 이유가 교차 차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주신, 아니 소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이때야 말로 더욱 더 이곳을 무사히 지켜야만 해.”

그것이 주신께서 그녀에게 내려주신 사명이니.


그때 그녀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교도관의 지도를 따라 축사장으로 출역을 나가는 죄수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하체가 말인 죄수.

그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그리고는 곧 깨달았다.

백신전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는 것을.

“···페트로 코페르크?”

그녀가 급하게 부소장을 찾았다.

“페트로 코페르크가 연옥에 왜 있는 것입니까?”


“페트로 코페르크? 그게 누굽니까?”
“켄타우로스 있지 않습니까? 하체가 검은.”
“그자는 바라하 칸입니다. 얼마 전에 연옥에 들어온···.”
“페트로가 아니라는 겁니까?”
“페트로라는 그자가 대체 누굽니까?”
“집행자입니다.”
“집행자?”
“어쩌면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같이 가시죠.”

부소장과 디아네가 바리하 칸이 출역을 나가 있는 축사장으로 향했다.

둘은 도축장이 훤히 보이는 관람석에서 미노타우르스를 도축하고 있는 그를 내려다 보았다.

“정말로 집행자가 맞습니까?”


“···조금 달라졌습니다만, 제 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자는 분명히 페트로 코페르크입니다.”

어째서 털과 머리카락의 색이 바뀌었는지, 기운을 감췄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얼굴 자체와 기운의 느낌은 그녀가
알던 것과 같았다.

“맞다 치고, 페트로 코페르크가 누굽니까?”


“집행자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집행자가 아니라 백신전에서 주신이라고 꺼드럭거리는 자들의 집행자.”
“······!”
“만약 제 우려가 맞다면, 가만히 놔두면 큰 우환이 될 게 분명합니다.”

감히 주신의 권역을 어지럽히려 하다니.

디아네의 눈에서 귀기가 흘렀다.

───────────────
# < 066. 선택 >

“뭐라고?”
잘못 들었나. 김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머리색과 동공의 색이 다르고 기운도 작아졌지만 본질 자체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기가 차는군. 만약에 정말로 그 켄타우로스 놈이 주신의 집행자라면 분명 베리안의 짓이겠군.”

알비츠와 베리안. 남은 두 주신 중 그런 음습한 짓을 할 놈은 베리안밖에 없다.

- 예, 그렇습니다.

“알았다. 일단은 그대로 두도록.”

- 잡지 않는 겁니까?

“자기 주인한테 연락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기만 해라. 그놈만 특별히 감시가 더해지면 의심을 살 테니 다른
죄수들 모두.”

지금은 신들의 모든 계획들이 어그러진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들은 모르지만 기둥 하나가 뽑힌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집어넣었다고 여겨지는 첩자를 굳이 색출해 경계심을 더 올리기 보다는 당장은 두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쪽이 낫다.

- 예.

“아, 지금 놈은 어떻게 하고 있지?”

- 떠나신 그날부터 엘프를 제외한 아홉 명 모두 독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카를로를 잡았지만 아직 첩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김우진이 차원을 나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예 독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었다.

“큰 문제는 없겠지?”

- 예, 물론입니다.

“알았다. 최대한 빨리 복귀하지.”

- 예.

연락이 끊어졌다. 김우진이 혀를 찼다.

단순히 탈옥을 위해 죄수들을 매수한 것을 넘어 자신의 집행자를 넣어버리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

디아네가 잘못 봤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아주 낮을 거다. 아마도.

‘무슨 수를 쓴거지?’

물론 주신이니까 나름의 한 수는 있겠지만 김우진 스스로가 집행자의 격을 눈치 채지 못할 줄이야.

‘나도 아직 부족하군. 어쨌든 디아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놈을 절대로 연옥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놈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시체가 되는 것뿐이다.

카를로 사태 이후, 릴리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풀어놔서 놈이 느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세계수의 존재가 언젠가는 들킬 수밖에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늦추는 게 좋다.

‘일단은 돌아가서 상황을 좀 파악해봐야겠군.’

칼카르를 죽이고 데이드람에 돌아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기운을 온전하게 흡수하는데 집중하고 세계수의 도움을 받다보니 정도 이상의 힘을 사용할 때가 아니면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상대가 설사 신이라고 해도.

율리아는 더했다. 애초에 하이엘프인 그녀에게 세계수의 열매는 더 없이 적합한 영약이었고 세계수의 조력까지
있으니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열매의 기운을 완벽하게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김우진은 숲의 정기를 빼앗긴 채, 훈련에 임하는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능숙해진 그녀는 이제 단순한 용사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제대로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닌, 세계수의 열매로부터 우주의 힘을 조금 공급받은 것이기에
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집행자의 최상위권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만약 가장 신에 근접한 자를 고르라면 율리아가 맞긴 해.’

알베니우스와 데이드람 세계수의 계획은 들었다. 들었을 때도 그럴 듯 했고 진행되고 있는 현재도 그럴 듯 했다.

만약 율리아에게 특별한 계기가 더 주어진다면 신에 필적하는 초월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장은 힘들···.”

────!

데이드람의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미중유의 힘은 자연스레 방벽을 통과해 일직선으로 내리 꽂혔다.

“···어?”

- 어?

“어···?”

신들조차 경계하는 연옥의 소장도, 만 년을 넘게 살아온 세계수도, 신들에 의해 추살령이 내려진 차원용도. 그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허나, 예견된 미래였다.

김우진이 두리쉬마와 함께 주신, 칼카르를 죽인 순간부터.

비어버린 공석은.
채워야만 하니까.

* * *

“···그러니까 더 이상, 죄수가 아닌 협력자로 대우를 해달라는 거군.”


“맞습니다.”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은 강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은 소장님과 완전한 협력 관계가 된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죄수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죄수로 연옥에 들어왔다.”
“그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부소장은 섣불리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소장님이 강민식을 예의주시하라고 한 것과는 별개로 강민식의 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탈옥 사태를 기점으로 죄수들과 김우진의 관계는 변했고 그건 부소장이나 교도관들과의 관계도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부터 제대로 된 죄수가 아니었고 이제는 완전한 협력자로 돌아섰는데 계속해서 죄수로 둘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교도관으로 들어온 집행자들은 애초에 소장님의 적이었던 자들이 아닙니까. 저들보다는
저희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듣자면 이것 또한 맞다. 하지만 부소장은 소장님이 어째서 그러한 결정을 하셨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게 불만이면 네가 그들보다 강해지면 된다.”


“···그건 좀.”

김우진은 강자를 아꼈다. 그리고 죄수들 중에서도 특별한 율리아 카르센, 시에나 올름, 데르카인 알베트, 타르칸
톨리스를 제외하면 객관적으로 집행자들보다 강한 이들은 없었다.

‘아, 소지도 포함인가.’

하지만 그는 다른 죄수들과는 또 다른 케이스다.

그리고 그런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행자들과 너희는 경우가 다르다.”

죄수들은 신들의 인계를 받아 죄수로 등록이 되어 있다. 그들의 신분을 김우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다.

“그건 알지만 그럼 신들의 감찰관을 보낼 때만 연기를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네 의견도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하지만 결국 내게는 결정권이 없다.”
“아, 저도 당장 그런 게 아닙니다. 단지, 소장님게 말씀 좀 잘 해주셨으면 합니다. 예전에야 제가 신들의
개였지만, 개과천선해서 소장님을 도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염두에 두지.”
“감사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예?”
“요즘 들어 죄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있다지?”
“···알고 계셨습니까? 최대한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하하, 강민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독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접촉하는 것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하하···.”
“첩자는 찾았나?”
“그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카를로를 제외한 세 명을 찾았습니다. 모두 카를로와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 말씀을 안 드리려고 한
건 아닙니다. 단지 조금 더 확실해지면···.”
“크게 터치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도 계속하도록.”
“···예?”
“아직 1188 번과는 접촉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1188 번이라면 켄타우로스···?”
“그자와 접촉해라. 다른 죄수들에게 했던 것처럼.”

독방에 갇혀 있는 바라하 칸, 아니 페트로 코페르크가 강민식의 행동을 알고 있을지, 모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중에 독방에서 나왔을 때, 그리고 다른 죄수들과 교류 했을 때, 강민식이 그하고만 접촉을 안 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정보들을 알아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하도록 소장님께 말씀드려 보지.”
“원하는 정보가 무엇인지는 알려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네 능력을 시험해보도록 하지.”
“···좋습니다. 다 털다보면 하나쯤은 걸리겠죠.”

잠시 고민하던 강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주신의 집행자다. 강민식이 베른에 의한 첩자라는 것을 알 터. 강민식의 접촉을 피하지는 않을 거다.’

몇 번 조심하겠지만 괜찮다 싶으면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다.

‘소장님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기를.’

소장님이 없을 때, 연옥의 총책임자는 그다.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문제가 생긴다면 조용히 처리하는 게
그의 사명.

강민식을 내보낸 그가 생각에 잠겼다.

* * *

백신전. 누군가는 신계라고 불리는 그곳은 모든 차원들 중, 가장 우주의 중심에 가까운 상위 차원이다.
그리고 가장 우주의 중심에 가깝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우주의 기록, 아카식 레코드와 가장 근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카식 레코드. 세상은 빛, 아카식 레코드와 어둠에 의해서 균형을 맞추어 간다.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는 세계의 의지이며 백신전의 신들은 그 의지를 받들어 우주의 균형을 수호한다.

때문에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은 신들에게 있어 아카식 레코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항상 살피며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려고 애쓴다.

쩌적, 균열이 열렸다. 백신전의 신들에게 주신이라 불리는 알비츠가 조심스레 우주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시커먼 우주를 관통하며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뻗은 아카식 레코드는 언제 보아도 영광스러웠다.

신이라고 자부하지만 그 앞에만 서면 인간 앞에 선 개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여.”

그가 짧게 목례하며 아카식 레코드를 살폈다.

알비츠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알베니우스를 잡으러 떠난 칼카르가 몇 주가 지나도 소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잘못되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잘못되었어도 충분히 헤쳐 나올 수 있는 능력 또한 있기에.

괜히 백신전의 신이고, 괜히 주신이겠는가.

그럼에도 온 것은 무언가 며칠 째 묘한 불안감이 알비츠의 마음을 간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직감은


권능과도 같다.

단순한 기우가 아니기에 불안감의 원인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가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기 시작했다. 방대한 우주의 도서관은 주신이라 자부하는 그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단편적인, 파편적인 부분들을 얻을 수 있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파편들만으로도 꽤나 도움이 됐다.

“···이건?”

그리고 알비츠는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진 새로운 기억을 읽어냈다.

- 새로운 신.

그리 길지 않은, 많은 정보를 담지도 않은 짧은 파편.

“···새로운 신이 탄생?”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알비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신전이 백신전인 이유는 신이 백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이 백명뿐인 것은 아카식 레코드가 그 이상의
신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신이 한 명 죽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높은 확률로···

“아니, 칼카르는 주신이다. 상식적으로 그가 죽을 리는 없다.”

백신전의 가장 위협적인 적인 김우진보다 격이 높은 게 칼카르다. 그가 고작 신의 힘을 조금 받은 도마뱀을


잡으러 갔다가 죽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른 신이겠지.”

아마 백신전의 하위 신들 중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리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알비츠가 닫히기 직전의 균열에 다시금 손을 넣고 되돌아갔다.

모든 백신전의 신들을 소집해야만 한다.

───────────────
# < 067. 새로운 신 >

그것은.
신의 힘이었다.
우주의 힘이었다.

율리아는 부유감을 느꼈다.

그녀의 영혼이 차원을 넘어 우주 곳곳을 누볐고 엄청난 고양감이 전신에 가득했다.

‘아.’

수많은 별들이, 수많은 우주들이 보였다. 그것들이 빠르게 지나쳐졌다.

그녀의 의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이끌림이 그녀를 인도했다.

왜 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당도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우주의 중앙에, 우주를 관통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빛의 기둥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샘솟았다. 그녀는 그것을 처음 보았으나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카식 레코드. 이 세상을 이끄는 거대한 의지.

그녀를 이곳으로 인도한 주체였으며.

‘아.’

그녀에게 막대한 힘을 부여하고 있는 주체이기도 했다.

그 의지가 전해졌다.

‘힘을 받아들이겠냐고요?’

아카식 레코드에게 힘을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전이면 아무 것도 몰랐겠지만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와, 알베니우스와, 김우진과 엮이면서 보다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아니, 굳이 그들과의 경험이 없어도 되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가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해주고 있었으니까.

‘신.’

율리아는 그 달콤한 과실에 혹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아.”

어느새 우주는 사라져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차원용과 어머니 나무의 정령, 그리고 감옥의
소장만이 있을 뿐.

하지만 온 몸에 넘쳐나는 고양감과 전능감, 우주의 힘, 그리고 보다 정순해진, 단단해진 육신은 방금의 경험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했다.

“···어.”

그럼에도 쉽게 믿을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제가 신이 된 건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 * *

아흔 여덟의 신들이 모였다.

아흔 여덟. 그 숫자가 주는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특히나 그 공석 중 하나가 백신전의 가장 상석에 위치한 세 자리 중 하나라면.

“······.”
“······.”
“······.”

살을 애는 듯한 무거운 침묵에, 자리한 신들 중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칼카르가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쫓아 사라진 지도 벌써 3 주가 다 되어 간다.

상식적으로 주신인 그가 도망치는 것 외에 별 다른 능력이 없는 도마뱀을 3 주 동안 잡아오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모든 신이 살아 있는데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을 리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알비츠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칼카르가 죽었다.”
“···주신께서.”
“···말도 안 됩니다! 베른, 베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같은 신이라고 한들 주신과 말단의 신은 그 의미가 다르다. 그들은 차라리 베른이 죽은 것이기를 바랐다.

“김우진이 이제와서 그런 짓을 한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어떻게?”
“대체 누가 주신을 죽인다는 겁니까?”

단순히 짐작하는 것과 주신이 확답을 내려주는 것은 다르다. 신들이 경악했다.

신이 죽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지만 주신은 그중에서도 의미가 남달랐다. 최초의 3 신. 백신전의 시초.
그들의 격은 일반적인 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 중의 신이었다.
그런 주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칼카르는 18 일 전,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쫓아 차원의 변방으로 향했다.”

차원의 변방. 종말을 막는데 실패하여 모든 생명체가 죽고 소멸을 맞이하는 차원들.

아카식 레코드의 가호가 사라진 차원들은 점차 중앙에서 멀어지고 소멸해간다.

신들의 관심과 관리에서 멀어지고 마기가 가득하게 되니 자연스레 마물의 군단들이 똬리를 튼 험지.

“아무리 변방이라고 할지라도 주신께서 문제가 생기실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알베니우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차원이동을 어지간한 신보다 더 잘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출 난 능력이 없는
그놈이 주신을 죽일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신들의 말에 알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소리다.”
그 또한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안 시점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101 번째 신을 선택한 게 아닐까? 하는 가정을 세웠다. 하지만 고작 알베니우스를 잡으러 간


칼카르가 죽지 않고서는 18 일이 지나도 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연락이 안 될 리도.

결국 그가 죽었다는 것을 간신히 납득하고 난 뒤, 어떻게 죽었는지 최대한 말이 되는 가정들을 덧붙였다.

“그렇게 나온 가능성은 세 가지다.”

알비츠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변방의 차원들은 시간이 지나 차차 소멸된다. 칼카르에게 위치를 발각당한 알베니우스가 여러 변방의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도주극을 찍다가 우연찮게 소멸 직전의 차원으로 들어가 함께 소멸했을 가능성.”

그게 하나다. 차원의 소멸은 신인 그들조차 어쩔 수 없는 우주의 법칙 중 하나니까.

“알베니우스가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위험한 변방 차원으로 갈 이유가 없다. 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며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대응하기 위해 마물들의 손을 잡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둠과 마는 백신전에 대적하는 절대적인 세력이다. 그들은 어둠의 의지에 이끌린 파편으로 백신전처럼 이렇다 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베니우스가 복수심에 미쳐 자의적으로 어둠에 귀의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것이 두 번째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았다. 왜냐하면 김우진과 맺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알베니우스는 김우진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김우진을 불러 함정을 판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세 번째.

“하지만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주신을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합니다.”


“도마뱀놈이 어둠의 사도가 되었다고 주신을 이기는 그림 또한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신들의 반박에 알비츠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울려퍼지는 소리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다 가정이라고. 애초에 칼카르가 죽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가정들 또한 믿기 쉬울 것 같으냐.”

애초에 가정을 생각해낸 당사자인 알비츠조차 스스로 뱉으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주신의 언성이 높아지자 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베리안, 네 생각은?”
“네 가정들이 그나마 현실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그나마지만. 어이가 없군.”

베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가정들이 현실성이 있다니.


“원인을 명확하게 찾아내야 한다. 만약 칼카르가 살해당한 거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 한다.”
“당연한 소리를. 그리고 칼카르가 죽은 원인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신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는데 집행자가 신이 되지 않았다.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하는데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힘이다.”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데 적합한가.
신의 힘을 받아들일만큼 강한가.

그걸 감안해 신들은 집행자를 기른다. 만약에 대비해 새로운 신이 탄생할 때, 통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게 들어맞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변이 일어났다.

“신을 찾아야 한다. 찾아서 끌어들이든, 죽이든 해야 한다.”

백신전의 시스템에 순응한다면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추살한다.

과거 우주의 힘을 가진 수많은 종족들을 그랬듯이.

“쉽지 않겠군.”
“어쩌면 쉬울 수도 있다.”
“김우진인가.”

알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신전의 집행자들이 아니라면 가능성이 있는 건 역시 연옥의 소장 김우진이다.

“하지만 놈은 과거, 신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아카식 레코드가 이미 한 번 거부한 놈에게 다시 제안했을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우리는 신이지만 아카식 레코드는 아직 완전히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고차원적이다.
그 깊은 뜻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설사 김우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김우진의 감옥에 존재하는 죄수들 중, 규격외의 존재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 중
하나가 신이 된 것일 수도 있다.

“연옥에 감찰관을 보내야겠군.”


“그것으로 한 번에 두 가지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신과 김우진이 칼카르를 죽이는데 함께 했는지,
아닌지.”
“계약의 제약이 발동하지 않았다. 가정은 했지만 김우진이 범인일 가능성은 낮다.”
“계약에 맹점이 많다는 걸 알 텐데?”

당시 신들은 오만했다. 그래서 계약에 맹점을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하지만 김우진이 여러 번 맹점을 이용하면서 생각은 변했다.

“단순히 도움만 주고 마무리는 다른 자에게 맡겼을 수도 있다는 거냐?”


“난 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봐도 김우진이 아니면 칼카르에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없다.”
“확실히. 좋다. 내가 직접 연옥으로 가겠다.”

알비츠의 눈이 가라앉았다.

“만약 칼카르를 죽인 게 김우진이라면 놈은 선을 넘었다. 내가 직접 확실하게 파악하겠다.”


“아니. 너는 백신전을 지켜라.”

베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감찰관으로는 내가 직접 가겠다.”

그가 선언했다.

“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 * *

“···골치 아프게 됐네.”

씨부랄.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방금의 일이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다.

율리아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신이 되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백신전의 백은 신들이 아닌 아카식 레코드가 정한 수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데 백 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아카식 레코드라고 할지라도 신들을 만드는 건 백 명이 한계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백신전은
항상 정원을 유지했다.

정확히는 오래전부터 하나둘 늘어가다가 백 명이 되면서 증가가 멈췄다.

그래서 백신전이 되었고 줄어들면 충원되었을 뿐, 지금까지 그 이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짐작했어야 했다.

주신 칼카르가 죽어버린 이상, 하나의 공석이 생겼고 아카식 레코드가 인원을 충원시키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게 하필 율리아라니.

물론 그녀가 신이된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적들의 전력은 줄어들고, 이쪽은 늘어난 것이니.

하지만 역시나 시기가 문제다.

“대체 왜 제가 선택 받은 거죠? 백신전의 신들이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 것 아니었나요?”


“해 먹게 판을 짜고 있긴 하지. 하지만 네가 세계수의 열매를 먹고 한층 진보하면서 판을 엎어버렸지만.”
“네?”
“아카식 레코드가 힘을 부여하는 건 오직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다. 거기에 백신전의 의견 따위는 없어.”
“그래. 맞다.”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우진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건 신들의,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를 아는 모두의 짐작이지만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지. 아카식
레코드는 공석이 생기면 피조물들 중 가장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를 다음 신으로 선정해.”

백신전의 신들은 모두 그렇게 신이 되었다. 그리고 김우진에 의해 두 명의 신이 죽었을 때, 정확히 그대로


되었다.

신들을 제외하고 가장 빛에 가깝고 강한 자들. 그게 당시 최고의 집행자라 일컫어지던 드네르바와 베른이었다.

그들은 곧장 신이 되었고 신들은 자신들의 가설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신들이 집행자를 굴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수족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도 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신위를 독점하기 위해서.

상식적으로 집행자들보다 강한 자들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먹고 어머니 나무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흡수한 제가 지금 존재하는 어떤
집행자들보다 강하다는 거군요?”
“그렇게 되겠지.”

- 단순히 열매를 먹어서는 아니란다. 너는 애초에 뛰어난 아이였으니까.

“그런가요?”

율리아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러면 저보다 소장님이나 알베니우스님이 신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거부했다.”
“네?”
“나도 김우진도 김우진의 손에 두 명의 신이 죽었을 때, 드네르바와 베른보다 먼저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은 강제가 아니라 선택이다. 다만, 지금까지 그걸 거부한 이들이 오직 김우진과 알베니우스
뿐이었다.

상식적으로 신이 될 수 있다는데 그걸 거부할 만한 이는 없었다.

“왜···아, 그럴만 하네요.”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죽이며 싸우던 자들이 한순간에 한 팀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백신전 쪽에서도 결코 원치 않았을


거다.

“···잠깐만요, 그러면···.”

그러다 문득, 율리아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용사들에게 힘을 포기하게 하고 그러지 않으면 연옥에 가두는 이유가···.”


“네 짐작이 맞아.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신의 힘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신위에 대한 모든 것을 통제에 두기 위해서.”

그 세 가지가 신들이 연옥을 만들고, 죄수들을 가두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주신이 죽고 율리아가 신이 되었다.


- 백신전이 뒤집어지겠구나.

그래, 다르게 말하면 이건 진짜 큰일 이다.

“···빨리 돌아가야겠어.”

율리아를, 세계수를 숨겨야 한다.

- 율리아를 숨길 방법이 있니?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을 율리아를 숨길 수 있을지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의문이었다.

저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이상 결코 허투루 확인하지 않을 텐데.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행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집행자. 그들을 이용한다면 설사 주신이라 해도 숨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대가로 다른 걸 내줘야겠지만.”

베른의 집행자들을 권속으로 들였다는 것.

뭐, 그 정도야 율리아가 신이 되었다는 것을 숨기는 것에 비하면 싸다.

‘릴리도 확실하지는 않군.’

상황의 심각성을 반추해봤을 때, 주신이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과연 하늘구름이 주신까지 속일 수 있을까?

- 음, 혹시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그 방법이니?

“그 방법이 율리아가 미라가 되는 거라면 맞습니다.”

- 불쌍한 아이.
- 네 권속이 되었다는 집행자들은 좋아하겠구나.
- 어쩌면 릴리도.

“···뭐죠. 갑자기 오한이 드는데요.”


“착각이야.”

김우진이 차원의 통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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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8. 감찰 >

푸른 하늘, 풍부한 마나.

연옥의 공기는 무척이나 상쾌하고 맑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건물이 보인다. 차원 ‘연옥’의 중심에 위치한 감옥, ‘연옥’.

“시간은?”
“8 시 55 분입니다.”
“적당하군.”

계약에 의거하여 백신전에서 연옥으로 죄수나 감찰관을 내려보내려면 반드시 하루 전에 통보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굳이 시간까지 맞출 필요는 없다.

항상 모든 시간을 11 시로 맞췄던 것은 그저 그게 편해서일 뿐,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엇, 충성!”

정문 앞에 당도하자 얼빠진 표정의 교도관들이 보였다. 말이 교도관이지, 그저 김우진의 꼭두각시들에 불과했다.

“비켜라.”
“예!”

문이 열렸다.

정문에서부터 건물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정원은 꽤나 넓었으나 베리안과 그의 집행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베리안의 눈짓에, 집행자가 문을 열어 재꼈다.

···역시.

깔끔한 내부, 잘 사열된 교도관들, 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우진까지.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빨리 왔음에도 미흡한 부분은 없었다. 허나, 베리안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 가벼운
수작에도 대응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신을 죽인 신살자가 그리 한심하면 신의 위신 자체도 떨어지니.

“김우진. 통신만 나누다가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인가?”


“베리안. 설마 네놈이 직접 올 줄이야.”

그것까지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김우진의 동공이 미약하게 커졌다.

“헌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베른이 감찰을 하고 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감찰은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다. 굳이 이유가 있어야지만 올 수 있는 건···아니지. 못 보던 얼굴들이 있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신의 힘이 느껴졌다. 그래, 정말 멀지 않았다. 바로 옆이었으니까.


사열된 교도관들 중 열.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헌데 내 눈에는 낯이 익고.”


“주신을 뵙습니다.”

신의 시선을 받은 집행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있는 장소와 태도, 입고 있는 복장이 베리안의 심기를 거슬렸다.

“이게 과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김우진.”


“자발적으로 내 권속이 되겠다하여 들인 권속이다.”
“자발적으로? 베른의 집행자들인 너희들이 어째서 김우진의 교도관이 되었지?”
“······.”
“대답해라, 디아네 디트린.”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재미있군.”

짝짝. 베리안이 박수를 두어번 쳤다.

“베른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그 집행자들은 전부 네 품 안에 있으니.”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주인에게 분노한 개의 한이지.”
“내가 데리고 가겠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나?”
“이들은 신의 집행자다. 집행자를 네가 수족으로 삼을 권리는 없다.”
“그렇지 않아야만 하는 의무도 없지.”
“선을 넘지 마라. 이미 나는 많은 것을 봐주고 있다.”
“하루 종일도 넘을 수 있다만.”

베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김우진이 속삭였다.

“그냥 볼 것만 보고 가. 남의 것에 눈독 들이지 말고.”


“집행자는 백신전의 것이다.”
“정확히는 베른의 것이지. 허나 베른은 어디 있지? 놈이 직접 내게 와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돌려줄
마음도 있다. 헌데 넌 베른이 아니지.”
“그래서 신의 힘 또한 넘겨줬나?”

집행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신의 힘은 저들이 베른을 따라다니던 것을 훨씬 상회했다.

거의 최상위 집행자들에게 맞먹는 수준에 혹시나 새로운 신이 있나 확인했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이왕 권속으로 삼은 거, 잘해줘야지.”


“아주 막나가는군.”
“그게 내 장기라.”
“좋다, 지금부터 감찰을 시작하지.”
“목적은?”
“네놈이 그렇게 좋아하는 권리와 의무로 이야기해볼까. 감찰의 목적을 네게 알려줄 의무는 없다.”

베리안이 천천히 감옥을 거닐기 시작했다. 김우진과 교도관들이, 그리고 베리안이 이끌고온 집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제법 깔끔하군. 마치 얼마 전에 수복한 것처럼.”


“포스타가 내려올 때, 부대 전체를 쓸고 닦는 건 유구한 전통이지.”
“3 층은 왜 폐쇄되어 있지?”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문제가 조금 생겨서 복구중이다.”
“확인하겠다.”
“볼 게 없을 텐데?”

베리안은 두 번 말하는 대신 그대로 3 층으로 진입했다.

“시스템이 일부 파손되었군. 이런 보고는 없었는데.”


“천재지변으로 집나간 죄수를 잡아 오느라 좀 바빴거든. 그때 이런저런 일이 좀 많았어서.”
“나중에 시스템을 복구할 담당자를 내려 보내주지. 앞으로는 사소한 것이라도 보고를 빼먹지 마라. 이건
경고다.”
“노력해보지.”

3 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3 층을 지나 4 층으로 넘어갔다.

느껴지는 죄수들의 기운에 베리안이 조용히 기감을 퍼트렸다. 배식구를 열고 그 내부의 죄수들을 확인했다.

거기에 신위를 가졌다고 판단되는 자는 없었다.

“왜 수갑을 두 개씩 차고 있는 죄수들이 있지?”


“특별히 위험한 놈들이니까.”

과연, 구속구가 두 개씩 차고 있는 자들은 모두 그럴만 했다.

하이엘프 율리아 카르센, 엘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에나 올름,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 그리고 차원의 명장,
데르카인 알베트까지.

베른이 이들을 집행자로 만들려다가 전부 거부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 하이엘프, 꽤나 초췌해보이는데. 가혹행위라도 한 건가?”


“무엇을 하든 그건 내 자유다. 출소를 하고 싶게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 중 하나라고 해두지.”
“그렇군.”

혹시나 싶어 다시 확인했으나 하이엘프에게 신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숲의 정기만이 가득할 뿐.

이후, 연옥의 나머지 부분들을 둘러보며 감찰을 마쳤다.

“정원 끝에는 뭐가 있지?”


“그냥 숲이 있다. 딱히 특별한 건 없어.”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 됐다. 감옥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군. 죄수들의 상태가 엉망이지만 전부 네게 일임했으니 죽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

아, 그리고 하나 묻겠다만.

“최근에 연옥을 나간 적이 있나?”


“그건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태를 제외하면 연옥의 방벽이 열린 적은 없다. 허나, 정말로 나간 적이 없나?”
“없다.”
“그렇게 알고 있지.”

감찰이 끝났다.

* * *

베리안은 연옥의 사막을 걸었다.

“백신전에 돌아가거든, 곧장 신들을 소집해라.”


“신위를 얻은 자를 찾으신 겁니까?”
“아니, 신위를 얻은 자는 없었다.”

율리아 카르센이라는 자가 조금 의심되기는 했지만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명백한 신의 기운이이기는 했으나 그보다 진한 것은 세계수의 농밀함이었다.

세계수의 열매와 가호를 받은 것인 분명하다.

“김우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급하게 숨긴 티가 나지만 하이엘프에게서 느껴지는 진득한 세계수의 힘을, 은은하게 연옥 전체에 퍼져 있는


세계수의 기운을 주신인 그가 정말로 느끼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연옥에 세계수가 있다.”


“···세계수 말씀이십니까?”

그래, 베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 세계수를 들여온 것은 칭찬해주마.”

어떻게 세계수를 얻었고 심었는지는 모른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김우진이라면 어떤 수라도 냈겠지.

“씨앗을 심고 아무리 길어도 20 년이다. 그럼에도 세계수가 발아했다는 것은 연옥의 특성 때문이겠지.”

마나의 농도가 무척이나 짙은 교차 차원의 특성. 그렇기에 세계수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빠르게 발아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정도의 농밀함을 알아내지 못한 베른의 아둔함과 무능력함이었다.

그런 놈에게 김우진을 상대하라고 맡겨 놓았으니 지금의 결과는 어찌 보면 예정된 미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허면···.”
“몰랐으면 모르되, 알았는데 가만히 둘 수 있나.”

세계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완전해지는 존재다. 차원에 뿌리를 내려 핵이 닿게 되면 그 차원에서는 거의 신과 같은


힘을 발휘하는 자들.
연옥에 심은 세계수가 김우진의 아군이라면,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난다면 차원의 방벽에도 간섭할 터.

그러면 김우진이 어디를 가든 알 수 없게 된다. 그건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세계수는 반드시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한다.

“가능하시겠습···!”

콱, 베리안이 집행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네 신을 의심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집행자를 풀어준 그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공식적으로 세계수를 뽑을 권한은 없다. 연옥을 어떻게 가꾸든, 그건 우진의 자율이자 권한이다. 세계수도 그저
나무 한 그루일 뿐이라고 우기면 백신전에서는 간섭할 여지가 없다.

허나, 방법이란 건 여러 갈래다.

“아무래도 천재지변이 한 번 더 일어나야겠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거센 태풍에 거목이 부러질 정도로.

“그리고 전해라.”

김우진은 공식적으로 연옥을 나간 적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세계수의 성장이 그가 생각한 것 이상이라면.

“김우진이 칼카르의 죽음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베리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속았군.”

김우진이 멀어지는 베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커피를 음미했다.

통신으로나마 신들 중 가장 많이 부딪힌 게 베리안이었다.

김우진은 그가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확신했다.

율리아가 신위를 얻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이렇게 순순히 가지 않았을 거다.

- 삐.

“그래, 릴리. 덕분에 수월했어. 고마워.”


파직, 번개를 내뿜는 파랑새가 김우진의 어깨에 앉았다.

“하나 더 들어간 건 어때?”

- 삐이.

“먼저 것보다 쉽다고? 그야 당연하지. 그놈은 집행자고 먼저 번은 신이니까.”

강민식을 잡으러 갔을 때, 잡아온 알도라는 놈을 감옥에 그대로 둘 수 없어 릴리에게 맡겨 둔 상태였다.

“···다행이네요.”

초췌한 안색의 율리아가 힘겹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세계수의 잎을 우린 차를
마셨다.

“괜찮나?”
“죽을 것 같아요.”

힘들 법도 했다.

신이 아닌 척 속이기 위해서는 우선 신의 힘을 모두 없애야 했다. 그리고 연옥에는 신의 힘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은 집행자가 열이나 있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모든 신의 힘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녀가 신위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여서 가능했다.

거기에 의도적으로 릴리의 힘을 덧칠했고 구속구도 두 개나 착용해 힘을 억제했다.

아주 미약한 뿌리만 남긴 신위는 흔적도 없이 감춰졌다. 신이 만든 구속구 두 개는 신위마저 억제하는데 성공했고


율리아는 지금 한 줌의 신의 힘도 남지 않았다.

덕분에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무사히 넘긴 게 맞을까요? 릴리가 들켰는데요?”


“놈이 나선 이상, 어차피 들킬 일이었다.”

이미 시험해 보았다. 하늘구름은 일반적인 신이라면 모를까 김우진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김우진이 알아챈다면,
주신도 알아챈다.

“베른을 넣어주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글렀어.”

신을 쭉쭉 빨아먹고 있는 릴리의 성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미 숨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어차피 들킬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릴리를 이용해 율리아를 감췄다.

집행자와 세계수, 둘을 내주고 하나를 감췄으니 완전 손해는 아니다.

“하지만 이제 릴리를 뽑아버리려고 하겠지.”


“왜 그렇게까지?”
“세계수가 내게 힘이 되니까.”
“그럼 막을 방법은 없는 건가요?”
“딱히.”

애초에 계약으로 묶여있는 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휘몰아치지는 않을 거다.

아마 또 다시 마물들을 이용하지 않을까.

“혼란을 틈타 집행자들이 잠입한다거나 할 가능성이 높겠지.”

세계수는 그 정도의 사안이니.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어차피 늦었어. 기차는 폭주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멈출 수 없어.”

세계수가 드러나는 것은 최대한 늦추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틀어진 이상, 세계수의 존재 자체를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있는 곳에서 세계수를 부수려면 적어도 그에 준하는 강자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할 거야.”

그리고 그것들은 높은 확률로 신이 될 거다. 공식적으로 보낼 수 없으니 숫자는 적을 거고.

“그러니까 그것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릴리에게 봉인시킨다.”

세계수를 미끼로 신들을 유혹한다.

그렇게 백신전의 전력을 줄인다.

“나쁘지 않은데.”
“그러다 백신전이 화나서 다 보내버리면요?”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칼카르가 죽어서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전력이 뚝 쪼개질 테니.

“두리쉬마님께 연락이라도 해볼까···.”

아무래도 양동작전이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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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9. 무한동력 >

세계수를, 릴리를 지켜야한다.

릴리의 가치는 단순하게 환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 본질적인 가치든, 그간 쌓인 정이든.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에 의거하여 백신전은 공식적으로 연옥의 정원을 어떻게 꾸미든 관여할 권리가 없다.

정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것이 잡초든, 세계수든 그건 김우진의 권한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을 뽑기 위해 김우진을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는 건,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이며 계약
위반은 곧 심연행을 뜻한다.

심연. 신조차 거부할 수 없는 무저갱.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신은 없다.

물론 신들과 맺은 계약은 무척이나 포괄적이고 범위가 넓다.

계약의 모든 주체는 백신전의 신들과 김우진이다.

연옥에서 신이 김우진을 적대하는 것은 계약 위반이다.


연옥의 관리는 김우진의 소관이다. 이는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부하들을 이용해 세계수를 뽑는 건 계약 위반이 아니다.


신이 직접 행한 적대 행위가 아니니까. 계약서에는 명확히 ‘신’과 ‘김우진’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불의의 사고로 세계수가 불타는 것도 계약 위반이 아니다.


우연한 사고일 뿐이니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지만 맹점이 많은 건 신들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감히 신들을 상대로 머리를 굴려 계약의 맹점을 노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김우진이었기
그는 빈틈을 노려 꽤나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리고 김우진을 상대해온 20 년, 신들 또한 강해졌다.

어쨌든 그것들을 감안하고 생각한다면 백신전에서 취할 행동은 몇 가지로 추려진다.

첫 번째, 죄수들 속에 심어 놓은 첩자를 이용해 세계수를 불태운다. 그리고 그들 개인의 일탈로 만든다.

두 번째, 마물들을 연옥으로 유도해 거대한 혼란을 야기한다. 지난 번 카를로의 탈옥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세 번째, 집행자들이 대놓고 나무 뿌리를 뽑아버린다.

- 삐삐삐!

김우진의 가정들을 들은 릴리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김우진이 릴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 마,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세 번째는 못하겠군.”
“그러네요.”

데르카인의 말에 율리아가 동의했다.

“노리신 건가요?”
“당연하지. 애초에 네 힘을 릴리로 다 빼먹기만 하면 되는 걸 굳이 집행자들에게 준 이유가 그건데.”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스스로를 주신이라 칭하는 사이비마저 손 위에서 가지고 노는 그 위대함! 이 디아네,
다시 한 번 감동했습니다.”

디아네가 감격의 기도를 올렸다.

“확실히, 집행자를 뺏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시점에서 신들은 함부로 집행자를 보낼 수 없게 됐구나.”


“맞습니다. 물론, 그걸 감안하고 그 이상을 보낼 수도 있지만요.”

그들이 세계수의 가치를 얼마나 쳐주느냐에 따라 다르다.

“어쨌든, 결코 오지 않았으면 했던 위기인 것은 맞습니다.”

세계수를 들키지 않으려고 했던 건, 지금의 가정들처럼 신들이 작정하고 공세를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 릴리를 심었을 때와 지금은 꽤나 상황이 다르니 어떻게든 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다.

그때의 김우진은 혼자였다.

알베니우스와도 데이드람의 세계수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두리쉬마와의 연도 없었다.

김우진은 강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 손 하나하나가 신이었기에 더욱 더.

그러나 더 이상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죄수들이 완전히 그의 수족으로 돌아섰으며.


광신도와 집행자들을 얻었고.
알베니우스,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함께하기로 했으며.
두리쉬마와 함께 주신, 칼카르를 죽였다. 그는 필요하면 언제든 연을 쌓을 수 있도록 매개체를 주기도 했다.

그들이 있다면 계약의 맹점을 노려 해볼만하다.

물론 백신전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결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백신전은 모른다. 저들이 김우진의 뒷배가
되었다는 것을.

“방법은 있나?”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시나요? 소장님께서 대안이 없으실 리가 없잖아요.”
“있으니까 우리를 부른 거 아니겠어?”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소장님께서는···.”
“디아네, 좀 닥쳐.”
“네, 명하신대로.”

광신도가 조용해지자 회의가 다시 이어졌다.

“데르카인님, 지원은 아끼지 않을 테니 세계수를 중심으로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게 가능합니까?”


“어느 정도 수준이느냐에 따라, 시간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가장 확실하고 완벽하게를 원합니다.”
“여유가 있는 건가? 주신이 벼르고 간 것 같았는데.”
“많지는 않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신들이 사용할 가장 유력한 방법은 마물들을 연옥으로 유도하는 거다. 하지만 그건 두리쉬마처럼 마물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유도하는 것이기에 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단 되는대로 해봐야겠군.”


“엘프들과 집행자들도 함께할 겁니다.”
“우리가?”
“아닙니까?”
“···뭐, 그래야지.”
“소장님이 명하신다면 기꺼이!”

광신도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건 릴리한테 허락을 받았습니다만.”

잠시 뜸을 들인 김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릴리를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할 때, 필요하면 릴리를 핵으로 삼아도 됩니다.”


“···세계수를 핵으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데르카인이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정말로 그래도 되는 건가?”


“물론입니다. 결국 릴리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죠. 릴리도 한 손 보태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릴리?”

- 삐!

그렇다는 듯, 릴리가 날개를 퍼덕였다.

“어우, 귀여워.”
“으엑, 어머니 나무님, 체통을 좀 지켜주세요.”

- 삐이이이, 삐이.

“제가 불경하다고요? 흥, 아직도 제가 평범한 하이엘프인 줄 아세요? 저는 이제 신이라고요!”

율리아가 어깨를 으쓱이자 파랑새가 부리로 머리를 쪼았다. 율리아가 아악, 죄송해요!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부여잡고 쭈그러졌다.

“···세계수를 핵으로.”

그 난장판 속에서도 큰일을 앞둔 난쟁이의 눈은 올곧이 세계수의 정령에게 고정되었다.

“마나가 넘쳐나는 교차 차원의 세계수···.”


“신을 봉인해 그 힘을 뽑아 쓰는 세계수···.”
“무한동력···!”
“무한히 뽑아다가 무한히 쏴대는 마도공학을···!”

끓기 시작하는 열기에 이상함을 눈치 챈 릴리가 행동을 멈췄다.

- ···삐삐삐?

“취소할 수 있냐고? 당연히 안 되지. 그걸 질문이라고 해?”

- 삐이이!
“안 돼, 안 돼. 릴리. 낙장불입이라는 말을 알아?”

- 삐삐!

“안 돼, 못 물러줘. 돌아가.”

와장창, 릴리가 창문을 깨고 도망쳤다.

* * *

“이렇게 되면 켄타우로스 놈은 쓸모가 없군.”

디아네가 켄타우로스의 정체를 파악한 만큼, 베리안도 디아네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디아네가 켄타우로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는 것 또한 짐작할 거다.

거짓 정보를 흘려 적당히 써먹으려고 했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처리해야지.”

이용가치가 없는 폭탄을 그대로 품고 있는 건 위험 부담이 상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죄수의 신분으로 정식으로 연옥에 들어온 이상, 자진 출소를 선언하지 않는 이상 죽여버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죄수의 신분으로 죽으면 내 임기가 늘어나.”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50 명과 100 명은 꽤나 차이가 크다.

“허나, 베리안의 집행자라면 자진 출소할리도 없습니다.”


“할 수도 있지.”
“무슨 뜻입니까?”
“용사들의 힘을 다시 회수하는 건 어디까지나 관리자들이야. 그러니 힘을 포기하겠다고 나가서 진짜로 힘을 회수
당할지, 안할지는 관리자 마음대로 아니겠어?”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출소를 종용하시겠습니까?”
“알지? 지금까지는 내가 좀 예의를 차렸어.”

모두 다 끌려와서, 이용을 실컷 당하다가 들어와서, 진짜 죄수라는 생각을 안 해서.

죄수들의 입장은 또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김우진은 최후의 선은 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사지를 끊어버리고 숨만 붙여놓은 채 내장을 반쯤 녹여버릴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바리하 칸, 아니 페트로 뭐시기를 상대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놈은 끌려온 것도, 진짜 죄인이 아닌 것도 아니니까.

“진짜 죄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 적이면 나한테는 다 죄인이야.”
“그 친구가 무척이나 불쌍해지는군요.”
“주인을 잘못 섬긴 죄지. 아, 그전에 우선 두리쉬마를 좀 만나봐야겠군.”
“그 타이탄 말씀이십니까?”
“그래. 신들의 공격 방법 중 하나가 마물들을 이용하는 것일 테니 이걸 역으로 이용해봐야지.”

괜히 두리쉬마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으니 위험부담이 크다면 무리겠지만 그렇지 않은 선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칼카르님의 흔적은 여기서 끊어졌다. 완전히 소멸해버렸군.”

백신전의 상위 10 신 중 하나인 델라푸스가 산산이 부셔져 어둠 속으로 삼켜져 버린 차원을 바라보았다.

이미 소멸했다면 아무리 신이라고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건 없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누굴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기에 주신께서 목숨을 잃으셨을까. 차원과 함께 소멸되셨을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집행자들의 물음에 델라푸스가 고개를 저었다.

“차원과 함께 소멸해버린 이상 찾을 방법은 없다.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는 알베니우스를 찾아서···.”

그때였다. 신조차도 꿰뚫어볼 수 없는 짙은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더 없이 미약해 그냥 지나칠 뻔 했지만, 신이기에 감응할 수 있는 기운이었다.

그가 급하게 어둠속으로 발을 디뎠다.

“신이시여!”
“위험합니다!”

집행자들의 만류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를 빨아들이려는 어둠의 인력에 저항하며 간신히 빛을 수습했다.

그것은 그토록 찾던 흔적이었다. 주신의 기운이었다.

“아직, 아직 하나가 남아 있구나.”

그리고 그 미약한 끈은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평범한 이라면 결코 알아볼 수 없지만 주신 바로 아래라는 10
명의 신 중 하나였기에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쉽게 소멸하실 분이 아니실 줄 알았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하면 실례인 건 알지만 주신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주신의 기운은 감히 흉내낼 수 없으니. 이건 주신께서 남기신 게 맞다.”

기다렸다는 듯이 적절하게 나온 흔적에 미약한 의문이 생겼으나 곧 사라졌다.

무려 주신이다. 그분께서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기셨을지언정, 누군가 그 기운을 따라해 함정을 팠으리라는 가정은
있을 수 없었다.

“아, 이해했습니다.”
“흔적을 쫓는다. 주신께서 분명히 무언가를 남겨주셨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분께서도 죽을 수밖에 없던 강인한 적의 정체 같은.

델라푸스는 십여개의 종말 차원들을 헤쳐 나갔다. 마나가 고갈되고 강인한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종말 차원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으나 그뿐이었다.

주신을 찾겠다는, 흔적을 찾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도 막지도 못했다.

“여기다.”

그렇게 마침내 흔적의 종착역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지내온 종말 차원들보다 마기가 더욱 진한, 차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진한 불길함이 엄습하는 곳이었다.

“···정말 신께서 이곳에.”


“너무 불길합니다.”
“다른 분들과 함께 다시 오는 것이···.”
“흔적은 미약하다. 지금이 아니면 금세 소멸할 터, 무조건 찾는다.”

델라푸스의 단호함에 집행자들이 의지를 꺾었다. 그리고.

“···김우진?”
“델라푸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만났다.

“네놈이 왜 여기에···?”
“그건 내가 할 소린데?”
“그렇구나. 역시 네놈이 주신의 죽음에 관여를···!”
“아하, 왜 왔는지 알겠네. 근데 혼자야?”
“뭐?”
“그렇답니다!”

김우진이 소리쳤다. 델라푸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여럿이다만.”
“원래 신들을 셀 때는 집행자들은 카운트하지 않습니다. 도구로 여기거든요.”
“그렇군. 역시 신이라는 것들은 모조리 말살시켜야한다.”
“이게 무슨···!”

델라푸스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따르는 신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온, 너희들의 그 의지만큼은 칭찬해주마.”

거대한 망치가.

“너무 기꺼워서 너희들이 그리 따르는 주신의 곁으로 보내주리니.”

떨어졌다.

“내게 감사해라.”
“무···!”

──────!

───────────────
# < 070. 더 오래가는 배터리 >

“더 강해지셨군요.”
“너도 마찬가지다.”

김우진이 피떡이 되어 버린 신이었던 것을 확인했다. 여전히 생명의 기운은 느껴진다.

집행자들은 모두 죽었을지언정, 델라푸스는 살아있다. 당연하다. 마무리를 지으려던 두리쉬마를 막은 것이


그니까.

“제 의견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멸한 차원에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겨 이곳으로 유인했다. 여러 종말 차원을 거쳐 복잡하게 꼬아놓아 다른
놈들이 와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거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죽여서 놈들의 전력을 깎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라.”
“불확실성입니다.”
“불확실성?”
“확실한 죽음과 실종은 다릅니다.”

델라푸스가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마로서 빛을 죽여 업을 쌓는 두리쉬마.
그리고 신의 힘을 흡수하는 김우진.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이점이 있다.

“델라푸스가 이대로 죽으면 두리쉬마님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백신전에 공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아직까지 칼카르의 죽음은 저들에게 미지입니다. 그 미지에 대한 해답을 빠르게 제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더 불안해하고, 궁금해하다가 헛손질을 몇 번 더 하는 것이 저희 입장에서 이득 아니겠습니까?”
“···옳은 생각이다. 하마터면 복수심에 눈이 멀어 우를 범할 뻔했군.”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물며 살림으로서 남기는 이득은 한 가지가 아니다.


“델라푸스가 살아 있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는 그저 델라푸스가 수색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을 겁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추가적인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시간은 많을수록 좋긴 하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만.”
“뭐지?”
“얼마 전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알베니우스와 세계수가 신에게 대적하기 위해 키우고 있는 하이엘프가
있습니다. 헌데 그 아이가 갑자기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신이 되었다고?”

두리쉬마가 눈을 치켜떴다.

“그건 칼카르의 빈자리냐?”


“아마도 그렇겠죠.”
“헌데 백신전의 집행자가 아니라 도마뱀 녀석이 키우는 하이엘프라. 놈들의 표정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크흐흐흐, 두리쉬마가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누구보다 백신전의 집착을 잘 아는 거인이었다.

그들이 왜 조금이라도 신의 힘을 가진 종족을 말살하려고 했는가. 그들이 왜 용사들을 연옥에 가두고 힘을


회수하려고 하는가.

모두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신이 탄생할 가능성을.

그것이 틀어졌으니 백신전이 뒤집어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 그래서 얼마 전에 베리안이 연옥을 찾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이 될만한 강자들이 가장 많은 곳은 연옥이니


말입니다.”
“들킨 건가? 아니지, 그랬으면 네가 태연히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을 리가 없군.”
“예, 들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세계수가 들켰지만.”
“감옥에다 세계수를 심었나? 신들에게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다더니 그것이었군.”
“맞습니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신을 잡아두고 살려두는 것은 결과적으로 저희가 원할 때 아카식
레코드로 하여금 새로운 신을 선택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다르게 말하면.

“저쪽의 신을 줄이고, 이쪽의 신을 늘릴 수 있습니다.”


“···네 말대로만 된다면 최고의 작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게 가능한가? 저놈들이 준비한 집행자들보다
강해야하는데 그런만한 자가 흔할 리가 없다.”
“예, 흔하지는 않죠. 하지만 연옥은 수많은 차원의 용사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신이 될만한 자질이 보이는
자들이 최소 넷, 아니 다섯이 더 있습니다.”

수인, 엘프, 드워프, 소지 그리고 광신도.

광신도의 태도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그녀의 능력은 집행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나름 잘 키운다면 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신은 신으로 막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과 대적할 자는 신뿐이다.

혹은 그처럼 신을 먹어버릴 수 있거나, 두리쉬마처럼 어둠의 사도가 되면 되지만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쉽지 않다.

“다섯, 다섯이라···.”

백 명에 비하면 적지만 결코 무의미한 숫자는 아니다.

스스로의 턱을 쓸며 고민하던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해볼만 하군. 좋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놈은 제가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관리가 쉽지 않을 텐데?”
“세계수에 봉인시키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건전지가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세계수는 오래전부터 유용한 봉인목이었지.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헌데 건전지라는 건 뭐지?”
“아, 별거 아닙니다. 이놈을 이용해 세계수를 더 키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힘을 이용해 세계수를 공격할 놈들을
방어하기도 하고요.”

김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해라. 그 정도면 놈들의 수작으로부터 세계수를 지키기에 충분한가?”


“아, 사실 그거 때문에 온 건데···.”

이야기가 길어졌다.

* * *

“릴리! 내가 배터리 하나 더 구해왔어!”

- 삐삐!

쭉 뻗어 나온 가지들이 델라푸스를 붙잡아 끌었다.

“이, 이게 무슨? 세계수? 김우진, 이 빌어먹을 놈! 백신전이 두렵지 않느냐!”


“두려우면 이런 짓도 안 하겠지.”
“노오오옴!”
“조용히 해. 너 납치된 거야.”

세계수의 잎사귀가 당황하여 미쳐버린 델라푸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버둥거리는 놈의 몸을 붙잡고 뿌리 깊숙한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베른 놈보다 한참 오래가는 배터리야. 충전도 더 빠르게 될 걸.”

- 삐!
릴리가 기쁘게 날개를 흔들었다. 김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엘프들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던 어머니 나무의 모습이 아니야. 신을 배터리 취급하다니. 대체 어디서 또 잡아온
거야? 저래도 괜찮은 거야?”
“저도 마찬가지에요. 다 소장님 때문이에요. 소장님이 어머니 나무를 이상하게 물들였어요.”
“평소 소장의 모습과 조금 닮긴 했지만 단순히 소장의 행동만으로 저렇게 역변하는 게 가능한 걸까?”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 세계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하이엘프잖아.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저 때문이라는 건가요? 저는 억울해요! 제가 저렇게 탐욕스러울 리가 없잖···악악, 어머니 나무님! 릴리님!
그만, 그만!”

- 삐삐삐.

“꺄악! 솔직히 탐욕스러운 건 맞잖아요! 저희 솔직해지자고요!”


“요즘 둘이 많이 투닥거리는 것 같은데.”
“그만큼 편안해졌다는 뜻이겠지. 이전과 같았으면 저럴 수 있을 리가 없잖니.”
“그렇습니까. 이제는 명색이 신인데 참 한결 같군요.”
“그만큼 변함이 없다는 뜻이겠지. 난 오히려 저 아이가 변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되는구나.”

김우진이 시에나의 옆에 앉았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설계도를 제작 중이고 어머니 나무 근처로 재료들을 가져다 놓고 있단다.”
“영약은요?”
“영약? 얼마 전에 보내고, 어머니 나무께 드린 것 제외하면 다섯 개란다.”
“생각보다 많네요?”
“어머니 나무께서 배터리, 아니 신을 봉인시킨 이후에 마나가 풍부해져서 성장이 빨라졌거든.”
“그건 호재네요. 그럼 일단 그거 다섯 개를 나눠서 먹죠.”
“갑자기?”
“신에게 대응하려면 모두 강해질 필요가 있으니까요.”

여차하면 신위를 얻기 위해서는 신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존재들이 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다섯 명을 최대한 어화둥둥하면서 키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다섯 명이라면?”
“그나마 신들에게 대응할만한 떡잎이 보이는 사람들이죠. 시에나님, 데르카인님, 타르칸, 그리고 소지랑
디에나.”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이해가 되는데 소지가 싸우려고 할까? 애초에 그 녀석은 신에 대한 증오도,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없잖니?”

용사의 힘에도 큰 미련이 없다. 처음에는 가졌을지언정 이곳에서 얻는 게 많다고 여기는 거다.

“그 녀석은 쉽습니다.”
“어떻게?”
“백신전에는 신들만 먹는 특별한 것들이 다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건 중요치 않죠.”
“···율리아한테 실례를 했네. 율리아의 영향이 아니라 온전히 너의 영향이 맞는 것 같아.”

헛웃음을 짓던 시에나가 물었다.

“그런데 영약을 다 먹어버리면 백신전에 보낼 게 없을 텐데?”


“적당한 핑계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핑계?”
“지들이 관리 잘못해서 마물들이 들이닥치지 않았습니까.”

마물들 때문에 농사가 망했다고 하면 저들도 할 말은 없을 거다. 베리안이 식물원까지 들어와서 전부 확인하고 간
건 아니니까.

“묘수구나. 헌데 상황이 이러니 어떻게든 걸고 넘어 지지 않겠니?”


“상황이 이러니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죠. 지금 녀석들이 신경 써야 할 건 릴리 하나가
아니거든요.”
“네가 잡아온 그 신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예.”

그럼 네가 알아서 하겠지. 김우진에 대한 신뢰가 생긴 시에나는 그를 믿었다.

“아참, 그리고 영약 말인데 조만간 하나 더 나올 거란다.”


“좋네요. 신 하나를 더 먹였으니 더 많이 나올까요?”
“아마도. 개인적으로 그건 다른 사람한테 줬으면 좋겠구나. 보다 강자가 많아야 좋은 것 아니겠니?”
“누구 적당한 사람 있습니까?”
“아직은 조금 애매하긴 한데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을 제외하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아이가 하나 있긴 하구나.”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강민식.”
“예, 소장님.”

과연, 시에나의 말대로였다.

그동안 워낙 사건 사고가 많아 강민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처음 연옥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 꽤나


장족의 성장을 이루어냈다.

“너, 균열이 벌어졌을 때 마물들을 먹었구나.”

빛에는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다. 반대로 어둠에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다.

어둠의 군단인 마물도 마찬가지. 마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기를 가진 생명체나 다름이 없다.

강민식은 균열 사태 때, 마물들의 독기를 흡수해 자신의 권능을 키웠다. 균열을 넘어 연옥으로 침입했던 마물들의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꽤나 큰 힘이 되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안 됩니까?”
강민식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물론 그게 나쁘단 건 아니다. 신을 상대할 강자들이 늘어난다는 건 언제나 환영이니까.

‘조만간 또 다시 균열이 일어나고 마물들이 넘어올 텐데 그걸 전부 먹여버리면?’

꽤나 성장할 거다. 거기에 영약까지 먹는다면 확실히 다른 다섯 명 급이 된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강민식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할게.”


“제안 말입니까?”
“계약서 하나 쓰자.”

김우진이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점을 찾아 계약서를 만들어냈다.

본래는 불가능했으나 주신, 칼카르를 흡수한 뒤 그 또한 아카식 레코드에 일부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을 ‘갑’이라 칭한다.


연옥의 죄수, 강민식을 ‘을’이라 칭한다.

1.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2.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3.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이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알려준다.
4. 단, 갑이 원할 경우, 모든 조항에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
5. 그 대가로 갑은 을이 신위를 얻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6. 백신전이 무너지면 을이 원할 경우, 아무런 조건 없이 원하는 곳으로 돌려보내주며 조건 없이 계약도
파기한다.
7. 위 조항들을 어길 시, 을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심연으로 끌려간다.]

전체적인 내용은 드네르바와 썼던 계약서와 비슷했다.

“서명해.”
“이건···.”
“나는 아직 너를 못 믿어. 근데 여기에 서명하면 최선을 다해서 네가 신위를 얻을 수 있게 해줄게.”
“···제가 신이 된다는 겁니까? 그런 게 가능합니까?”
“불가능을 이야기하지는 않아. 신이 된 율리아는 너도 봤을 텐데.”
“···내가 신.”
“물론 그 대가로 너는 백신전과의 전쟁에서 활약을 해줘야 해. 어떡할래?”

잠시 고민하던 강민식이 물었다.

“어차피 지금 이대로는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지 않습니까?”


“백신전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아무런 조건 없이 귀환하는 건 불가능하지.”

하물며 그의 이용가치도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강민식의 가장 큰 가치는 신들 사이에서의 이중첩자인데


그의 끈이 베른이고 베른이 현재 어디 있는지 생각하면 무의미했다.

“그렇다면 할만 하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무조건 복종이라니. 이건 너무 불공정계약 아닙니까?”


“너와 나 사이에 공정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도 좀 우습지 않아?”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군요. 하겠습니다.”

강민식이 제 이름을 적어 넣었다.

“잘 생각했어.”

계약서가 빛으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김우진에게, 일부는 강민식에게, 일부는 자신이 나온 뿌리인
아카식 레코드로.

“아참, 더 이상 죄수 취급을 받지 않고 싶다고?”


“그게 그러니까 저희도 나름 협력자의 입장인데 대우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첩자들을 네가 알아냈다지?”
“예.”
“좋아. 감찰관이 내려오는 경우가 아니면 내게 협력하는 죄수들에 한해 더 이상 구속구를 채우고 죄수처럼
대우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그 대신.”

톡톡,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 * *

“소장이 그랬다고?”
“예.”
“나쁘지는 않은 생각이긴 한데 과연 신들에게 통할지 모르겠군.”
“그건 신위를 얻으면 해결이 될 테니 우선 집행자들에게 통할 놈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신위? 신위가 누구 집 개 이름인가?”
“소장님이 그랬으니 제게 뭐라고 하셔도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소장이면 또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데르카인이 투덜거렸다.

“뭐, 이론적으로는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빛과 어둠은 상극이다.

신과 마물도 상극이다.

때문에 신의 힘은 마물에게 치명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마물의 힘은 신에게 치명상이다.

그러니 만약 마물의 독을 이용해 마력포를 만든다면, 다른 마력포보다 더 신과 집행자들에게 치명적인 무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게 김우진의 요구였다.

“제기랄, 안 그래도 할 게 많은데 일 거리가 늘었군.”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뭘 하긴, 마기 부분을 뽑아서 정제하게. 최대한 많이, 최대한 독하게.”

확실히 재밌긴 하겠구만.

“자네 독에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신들을 보면.”


“근데 저건 뭡니까?”

강민식이 공방 한쪽에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무언가를 가리켰다.

“마력포네.”
“구스타프 열차포?”
“그건 또 뭔가.”
“아니, 마력포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보여서 말입니다.”
“크고 단단하고 파괴적이지.”

크흐흐, 데르카인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세계수와 두 신이라는 무한동력이 생겼는데 무한히 쏴댈 수 있는 마력포를 만드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나.”

‘음.’

강민식은 조용히 짹짹거리는 파랑새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
# < 071. 반역자 >

“오늘 아침은 가벼운 빵식입니다! 빵이랑 따끈따끈한 스프!”

드르륵, 베르너는 카트리지를 밀며 죄수들에게 음식을 보급했다.

“고맙군.”
“고마워요.”
“별말씀을.”

죄수들의 인사를 받으며 돌아다니니 새삼 연옥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가장 간단한 분위기부터, 그들의 비어버린 목까지.

확실하게 소장의 편이 되어버린 죄수들은 더 이상 구속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죄수로서 죄수의 대우를 받지도
않는다.

‘그럼 여긴 감옥이 아니라 여관 같은 건가.’

이유는 안다. 다른 죄수들과 크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모를 만큼 둔하거나 멍청이는 아니었다.

‘신과의 전쟁이라.’
스케일이 너무 커지니 무어라 반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에게도 신에 대한 증오는 있었다.

기껏 차원을 구했더니 힘을 포기하라고 토사구팽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분노는 금세 무뎌졌다. 온 차원의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이 감옥이 얼마나 천국 같은 곳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른 죄수들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그에게는 그랬다. 전투, 용사의 힘 이런 것에는 크게 관심 없었다.

그저 보다 맛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 먹고 싶다. 보다 많은 식재료와 여러 조리 방법을 연구하여 궁극의 맛을


추구하고 싶다.

그게 전부다.

굳이 신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도, 그들을 이겨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소장님과의 면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말로 백신전에는 그런 게 있다는 겁니까?”


“그래. 내가 아는 것만 몇 가지가 되는데 반도 복숭아라고 반도원이라는 특별한 곳에서 자라는 복숭아, 신들만
먹고 마신다는 암브로시아와 넥타르, 영생을 주는 청춘의 황금 사과 같은 것들.”
“황금 사과···.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당연하지. 신들이 자신들만 먹는 건데 일개 피조물인 네가 알 턱이 있나.”
“과연···!”
“그 맛은 천상의 진미라는군. 한 번 맛 보면 다른 음식은 못 먹게 될 정도로.”
“그 정도입니까···?”

꿀꺽, 베르너가 마른 침을 삼켰다.

“소장님은 드셔보신 적 있으십니까?”


“놈들이 어찌나 까다롭게 굴던지 직접 먹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보고 향을 맡아본 적은 있지.”
“어, 어땠습니까?”
“반도 복숭아는 탐스러운 분홍빛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과일이라기보다 보석에 가까웠지. 그만큼 아름다우면서도
달큰한 향을 풍겼다.”
“보석과도 같은 복숭아···.”
“넥타르는 놈들이 먹는 음료다. 신비한 벌의 꿀과 여러 가지를 섞는데···.”
“단순히 희귀한 재료로 만든 음료가 아니라 아예 신들의 요리 제조법이라는 겁니까? 하겠습니다!”

베르너가 덥썩, 김우진의 손을 잡았다.

“백신전을 무너트리면 그것들을 전부 취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신이라는 이름으로 놈들이 독점하고 있으나 난 그럴 마음이 없다. 네가 충분한 도움을 준다면 네게 주지 못할
것도 없지.”
“합니다. 무조건 하겠습니다. 아니, 하게 해주십시오! 제발 저를 그 거사에 끼어주십시오!”

베르너가 무릎을 꿇었다.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널 끌어들인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백신전과의 전쟁은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식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입니다. 고래를 먹기 위해 폭풍우를 헤치고, 새로운
맛을 위해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는 건 평범합니다.”
“상대는 신이다만.”
“상대만 다를 뿐, 과정과 결과는 같습니다. 신의 미식을 위해 상대의 수준이 올랐을 뿐.”

흡사 디아네를 보는 것 같아 김우진은 데자뷰를 느꼈다.

‘이놈도 따지고 보면 광신도긴 하지.’

그 대상이 신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미식이라는 건 소수가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모두가 그 맛을 알아 그 위대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굳이?”
“적어도 제게 미식이란 건 혼자서만 즐기기 위한 게 아닙니다. 요리사는 결국 타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들만 독점하는 신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아니, 모두가
먹게 해야지요!”
“···뭐, 알아서 해라.”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네가 할 것이 있다.”


“뭡니까?”

김우진이 영약들을 내밀었다.

“이것들을 영단으로 만들어라. 사람에 따라서 더욱 흡수가 잘되도록 맞춤으로.”


“영단을 제작하는 것 또한 요리의 일종. 그건 제 전문 분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권능을 써.”
“그래도 됩니까?”
“이제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알겠습니다.”

베르너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 *

“뿌리를 뽑아야합니다.”

백신전의 신 하나가 소리쳤다.

“저희가 세계수와 협력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세상을 위하는 마음이 기껍기 때문이 아닙니까? 헌데 연옥에
씨앗을 뿌리다니요!”
세계수의 씨앗은 결코 가볍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체가 된 세계수가 작정하고 만들어내는 것. 우연히 연옥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백신전은 분노했다. 세계수 중 누군가가 김우진과 협력하고 있다는 게 아니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세계수들을 추궁하고 연옥 세계수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맞습니다!”

신들이 하나둘 동조했다. 알비츠가 탁자를 두들겨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김우진이나 연옥의 죄수 중에 신위를 얻은 자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나 세계수는 확실히 큰 문제다. 허나,


김우진 또한 세계수가 들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며 공식적으로 우리에게는 세계수를 뽑을 권한이 없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을 상기한 신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수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김우진이 세계수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생각만 해도 무궁무진 했다.

“해서 마물들을 이용해 연옥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다. 그 과정에서 세계수가 불타는 것쯤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되겠군요!”
“하지만 세계수는 부차적인 문제다.”

자라난 세계수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세계수라는 게 어디 하루이틀만에 자라나는 식물이던가.

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못해도 천년이 걸리는 나무다. 아무리 김우진이 무슨 짓을 해서 단축시킨다고 해도 100
년은 걸릴 거다.

그러니 뽑는 건 뽑는 거고 당장의 우선순위는 아니다.

“연옥에는 신위를 가진 자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집행자들과 피조물들을 이용해 모든 차원들을 뒤지고 있지만
신위를 가진 자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애초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신위를 가진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연옥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하나다.”

신들의 손아귀에서 잘도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같은 놈.

“알베니우스.”
“하지만 놈은 이미 신격을 얻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거부하리라고 장담하나?”
“그건···.”

아카식 레코드가 다시 한 번 권유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신격이 아니더라도 놈은 칼카르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

알베니우스를 찾아 떠난 칼카르가 죽어버렸으니까.

“그뿐일까.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을 어디서 얻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게 그리 흔한 물건일까? 절대 아니다. 세계수가 작정하고 만들어낸 정수가 씨앗이다.


연옥에 가만히 있어서는 절대 그걸 구할 수 없다. 누가 가져다 주지 않고서는.

“알베니우스가···!”
“김우진과 그 도마뱀이 이미 접촉했군요.”
“더 있다.”

그때, 베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베니우스를 찾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허나, 알베니우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신을 따르는 피조물들과 집행자들을 동원해 가능한 모든 차원을 수색중임에도 만족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당연하다. 정작 놈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수색을 시작했으니.”


“그 말씀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다. 연옥에 세계수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을 넘겨 준 세계수가 있겠지. 알베니우스는 중간
연락책일 뿐, 놈들의 편에 가담한 세계수가 있을 거다. 아니, 반드시 있다.”

세계수 중에 백신전을 배신한 자가 있다.

“······!”
“···그런!”
“하지만 세계수들이 구태여 저희를 배신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애초에 우리와 단순한 협력 관계라고 여기는 자들이다.”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우를 해주는 것임에도 주제를 모르지.”

허나, 그 대우와 자비도 이제는 끝이다. 알베니우스를 숨겨주는 세계수가 있다면, 김우진에게 씨앗을 넘긴
세계수가 있다면.

“반드시 뿌리를 뽑아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지.”

감히 백신전에게 반기를 든 값은 비싸다.

“가라.”

지금부터 알베니우스를 찾아라.

“목표는 세계수들의 차원이다.”

* * *
“생각보다 잘 풀린 거겠지?”

- 그런 거겠죠.

차원 데이드람. 세계수의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알베니우스가 턱을 괴었다.

“김우진, 내 생각보다 더 강해졌어. 이제는 나 같은 놈은 열 명이 있어도 안 될 것 같던데.”

- 열 명이 뭐야. 백 명도 안 될 것 같던데.

“아무리 그래도 나도 차원용이다.”

- 그래서 아예 김우진에게 다 맡겨 놓을 생각?

“두리쉬마도 나보다는 김우진과 관계가 돈독해진 것 같고, 죄수들도, 율리아도 김우진을 중심으로 돌아가니 어쩔
수 없지.”

- 다 당신이 준비해온 거잖아?

“시작은 내가 했지만 내게는 끝마칠 능력이 없어.”

알베니우스는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용이었다.

그는 분명히 강하다. 드래곤 중에서도 특별한 차원용이고 오랜 세월 살면서 높은 격을 쌓았다. 아카식 레코드에게
신위를 제안 받은 것이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백신전의 신들과 김우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백신전의 신들이다.

“나는 내 주제를 잘 알아. 김우진의 뒤를 받쳐주는 게 내 역할이야.”

그러기 위해서 김우진을 찾았다. 그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두 신을 죽이고 자신을 도망치게 해주었던 그
절대자의 위엄을.

“애초에 내가 왜 이 짓을 하는데? 좀 편하게 살고 싶어 서지.”

신에게 더 이상 쫓기기 싫어서. 누구 한 쪽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불꽃을 태우는 거다.

그에게 그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신위고 나발이고 그런 거창한 꿈같은 건 없는 소박한 드래곤이었으니까.

- 차원용이 지나치게 소박한 거 아니야?


- 벌인 일에 비례해서도 그렇고.

“수천년을 쫓겨 봐. 자연스럽게 이렇게 돼.”

복수고 나발이고 그냥 평안한 삶을 꿈꾸게 된다.


- 그렇게 되면 김우진을 이용하는 거잖아?

“어차피 김우진도 나랑 같아. 백신전과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거지.”

그러니 둘은 손을 잡을 수밖에 없고, 손을 잡았다.

“다시 가봐야겠어.”

끄응, 알베니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신에게 원한을 가진 전직 용사들은 넘쳐나니까.”

비록 신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신들과 싸울 때, 집행자들이 끼어들지 못하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였다.

- 멈춰.

참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차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어.


- 이건 신···!
- 당장 숨어!

가지와 뿌리가 알베니우스를 삼켰다.

세계수가 차원의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여. 정식으로 인사하지, 백신전의 도인크라고 한다.”

- 데이드람의 세계수. 이름은 딱히 없단다.


- 백신전의 높으신 분이 왜 이런 변방까지?

“흔적을 쫓아왔다.”

- 흔적?

“백신전이 오랫동안 쫒던 반역자가 있다. 헌데 너희 세계수들이 그 반역자를 감싸주고 있는 정황을 발견했다.”

- 반역자?
- 우리가 반역자를 숨겨주고 있다고?

“그래.”

도인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허니, 세계수. 그대가 놈을 숨기지 않았다면 순순히 협조하도록. 그렇지 않다면 백신전에서 너희들에게
내려주던 자비는 끝이니.”
───────────────
# < 072. 연옥의 알베니우스 >

- 조자

“뭐?”

평소처럼 릴리를 쓰다듬으며 힐링하고 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숲의 향기, 은은한 숲의 정기까지.

릴리는 김우진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특효약과 같았다.

- 조자.

그런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중, 릴리의 입에서 평소처럼 ‘삐삐’가 아니라 부정확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나왔다.

잘못 들었나, 귀를 후볐으나 릴리는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김우진이 다급히 양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눈을


맞췄다.

“···릴리야, 방금 네가 말한 거니?”

- 삐.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나온 말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으나 그녀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뭐라고 한 거야?”

- 조자.

“조자?”

- 조자.

릴리의 날개가 김우진을 가리킨다. 무슨 뜻일까.

“내가 조자라고? 설마 고자는 아니지?”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 조자니.

한 글자가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때였다.

“앗, 어머니 나무님! 너무하세요!”

구속구가 풀려 자유로워진 하이엘프가 방정맞은 목소리로 달려왔다.

“처음으로 내뱉은 인간의 말이 율리아가 아니라 소장님이라니!”


“···소장?”
“네. 이걸 이해 못하셨어요? 누가 들어도 소장님인데?”
“정말이야?”

- 삐!

자식이 처음으로 엄빠를 외쳤을 때 부모님의 감정이 이러할까.

밀려오는 감동에 김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릴리를 끌어 앉았다.

“어머니 나무님! 저도, 저도! 제 이름도 불러주세요!”

- 기재이.

“귀쟁이라뇨! 그런 엘프차별적인 발언은 옳지 않아요! 대체 세상에 어떤 세계수가 하이엘프한테 그런 말을


해요!”

- 기재이.

“꺄아아악! 이건 꿈이야!”

정신 사납군. 율리아가 나뭇가지 위에서 귀를 막고 버둥거리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 조자, 여라.

“소장님한테 연락이 왔다고요?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이신가요? 어머니 나무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 삐삐삐, 삐삐이이이, 삐삐.

거기서부터는 김우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다. 실시간으로 굳어가는
율리아의 얼굴과 눈빛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드람에 문제가 생겼나?


지금 알베니우스가 거기 있을 텐데?

“무슨 일이지?”
“···신이 차원을 방문했대요. 반역자를 찾는···.”

번쩍, 공간이 갈라지면서 누군가 툭 떨어졌다.

“나 좀 숨겨줘.”

알베니우스였다.

* * *

“드세요.”
“고마워.”

알베니우스가 김이 모락모락나는 차를 한 모금 삼켰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새로운 전직 용사들을 찾기 위해 데이드람을 떠나려는 순간, 신이 나타났어. 반역자를 찾고 있다고 했지.”
“반역자라면 당신?”
“특정지어 나라고 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누구 봐도 나였지.”
“잡혔습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잡혔으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알베니우스가 인상을 구겼다.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숨겨주었다. 덕분에 놈의 이목을 피했고 다행히 물러갔지.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장기적으로 몸을 숨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놈들이 작정을 했어.”

세계수와 백신전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다.

오랜세월 이어져온 존중을 깨트리고 들이닥칠 정도라면, 저들이 세계수와 알베니우스의 유착을 눈치 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 건덕지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아무래도 릴리를 들킨 게 문제가 된 것 같군요.”


“그렇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세계수의 씨앗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할 리는 없으니.”
“그래서 여기로 왔다는 겁니까?”
“데이드람의 세계수와 다른 세계수들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신들이 세계수가 있는 차원들을 본격적으로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는군. 몸을 숨길만한데가 마땅치 않아.”
“그리고요?”
“감찰관이 오지 않는 이상, 이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으니까. 하물며 감찰관이 오려면 반드시 하루 전에 통보를
해야하니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여유도 생기고.”
“한 가지 전제가 틀렸죠. 제가 무조건 당신을 머물게 해줄거라는 착각.”
“···날 쫓아내겠다고? 널 위해 281 명의 전직 용사들을 준비해놨는데?”
“그게 왜 저를 위해서입니까?”
“내 일이 네 일이니까. 어차피 너나 나나 백신전과는 한 우주 아래 살 수 없는 몸이잖냐.”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양심이란 걸 가지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더 문제였다.

“근데 그자들은 들키지 않는 겁니까?”


“아마도.”
“아마도?”
“모두 종말 차원에 있어. 종말 차원에서 마물이나 잡으면서 격을 쌓으라고 했지. 신들이 거기까지 수색한다면 또
모를까 아니라면 괜찮을 걸?”
“두리쉬마님에게 말씀을 드려놔야겠군요.”
“말은 이미 했으니 걱정 마.”
“일단은 알겠습니다만, 잘 숨어다니셔야 합니다. 죄수들 중에서는 관리자놈들의 첩자들도 있어서.”
“첩자가 있는데 저렇게 자유롭게 풀어놓는다고?”

알베니우스의 시선이 닿은 창문 너머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죄수들이 보였다.


“저들은 알베니우스님처럼 관리자들과 같은 우주 아래 있을 수 없는 이들입니다.”
“율리아에 비견될만한 자들이 몇 보이는데.”
“그래서 저들이 신격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두리쉬마님과 함께.”
“신을 잡아두었다고 원하는 시기에 죽이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그게 쉬울까?”
“이미 두 놈 잡아놨습니다.”
“···두 놈? 한 놈이 아니라?”

베른을 잡은 것까지는 알베니우스도 알았다. 그런데 어느 틈에 한 놈이 늘었지?

“운이 좋았습니다.”
“신이란 게 단순히 운이 좋다고 잡을 수 있는 건 아닌데.”
“설명하자면 깁니다.”
“그럼 나중에 듣지. 잠깐 연옥 좀 구경하고 있어도 되겠지?”
“괜히 사고치지 마십쇼. 신들이 언제 수작을 부려올지 모르니까 더욱 더.”
“넌 누굴 사고뭉치로 아는 거냐. 누가 보면 내 보모인 줄 알겠어. 내가 너보다 수백배는 더 오래 살았다.”

알베니우스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사고뭉치지.”

김우진이 커피를 음미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차원용을 등 뒤에 두고 신들과 대적하던 그때.

당시 차원용은 신들의 눈을 피해 여러 차원을 도망치고 있었다. 우연히 김우진과 만났고 신들의 이면과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용사로서 소환되었던 최악의 차원, 글라크를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숨기고 있던 힘이 드러나 신들에게 포착되었고.

그러니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 배로 갚는 게 그의 철칙이니까.

“의도한 건 아닌데 점점 연옥이 본거지처럼 되어가는군.”

언제 또 다시 감찰이 올지 모르니 미리미리 대비를 해놔야겠지.

“알베니우스가 있으니 은밀하게 신들의 권역을 공격해 신들을 납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차원용인 그의 권능은 공간과 차원에 한정하면 주신 이상이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차원과 차원을 은밀히
오가는데 알베니우스보다 능숙한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잠깐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러고 보니 신들이 알베니우스를 잡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했잖아?

“기회인데?”
* * *

“알베니우스? 그 자가 네가 그렇게 말한 알베니우스라는 차원용이라고?”


“네, 맞아요.”
“신에 필적하는 자였다.”
“알베니우스님은 신의 힘을 다룰 수 있으니까요.”
“차원용이라. 싸워보고 싶군.”
“짐승처럼 굴지 마세요.”
“나는 짐승인데?”
“혹시 독룡입니까?”
“차원용은 독을 다루지 못해요.”

알베니우스의 등장은 연옥의 죄수들에게도 화제였다.

율리아를 이곳으로 집어넣고 세계수를 심게 한 장본인. 신들에게 대적하는 대적자.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신을 증오하는 만큼, 그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알베니우스는 어떤 분인가?”
“음, 그냥 알베니우스님인데요.”
“드래곤다운 위엄이 있다거나, 탐욕이 많다거나 하는 건?”
“딱히 위엄 같은 건 없어요.”
“드래곤이?”
“드래곤보다는 친구 같다고 할까요···?”
“그래, 옳은 소리다.”

공간이 갈라졌다. 집무실에 있어야 할 알베니우스가 걸어나왔다.

“차원용이라고 해서 딱히 권위를 세울 생각은 없다. 어차피 신과 같은 우주 아래 살 수 없는 건 다 마찬가지인


처지니까.”

그의 등장에 시끄럽던 죄수들이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풍겨오는 위압감과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당신이 알베니우스입니까?”

데르카인이 대표로 앞으로 나섰다.

“맞다. 너는 드워프로군.”
“예. 그렇습니다.”
“연옥에 갇힌 최장수 죄수가 드워프라더니. 너인가 보군.”
“맞습니다. 300 년을 갇혀 있었지요.”
“드워프에게 300 년은···.”
“차원용이 나타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복도로 뛰쳐나왔다. 소지, 베르너였다.


“너는?”
“당신이군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연옥의 소지, 베르너 레트만이라고 합니다. 소장님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들과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렇다면 아군이군.”
“맞습니다! 저는 아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소한, 아주 사소한 부탁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같은
아군으로서.”
“부탁?”
“도마뱀은 꼬리가 잘려도 재생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감히 위대한 차원용인 나를 도마뱀 따위와 비교하는 거냐!”
“물론 그건 아닙니다. 감히 비교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냥 제 말은···.”

추릅, 베르너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섬뜩한 시선에 알베니우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꼬리를 조금만 잘라주셨으면 하고···.”


“미, 미친 건가?”
“드래곤은 한 번 요리해 봤습니다만, 극상의 진미였습니다. 헌데 일반적인 드래곤보다 상위 존재라는 차원용은
어떨지 너무 궁금해서···.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내 꼬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닳는 거다!”
“다시 재생하지 않습니까. 도마뱀처럼.”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에게 꼬리를 때어줄 이유는 없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꺼져라! 뭐, 이런 개 같은 인간이!”

알베니우스가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벌렸다. 베르만이 그 뒤를 따랐다. 둘의 인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죠? 방금 무슨 일이···?”
“드래곤을 잡아서 조리해 먹었다더니 진짜였나.”
“미식에 미친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궁금하긴 하군.”

크흠, 타르칸이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 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건 확실히.”
“독까지 있으면 더 좋긴 할 텐데 말입니다.”
“지금 다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분은 고귀한 차원용이라고요!”
“그러는 자네는 신격을 얻은 신 아닌가. 차원용보다는 신이 더 고귀하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데르카인의 말에 율리아는 반박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하물며 소장은 신도 때려잡는 괴물이지. 신들과 대적한 계획을 짜고 소장과 친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뿐,
차원용이라는 이름이 주는 대단함은 딱히 없네.”

연옥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위대한 차원룡조차 일개 도마뱀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베르너가 미친 줄은 알았지만 저건 좀 심하긴 하군. 꼬리를 잘라달라니.”

데르카인이 혀를 찼다.

누구드 그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 한 방울을 지적하지 않았다.

* * *

“저게 차원룡.”

디아네가 집행자로 있을 때, 자주 들었던 이름이다.

새로운 신격의 탄생에 대비해 제거해야 할 종족 중 하나. 아니,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거 종족 중 하나.

“주신과, 아니 소장님과 친분이 있다니.”

그렇다니 다 이해가 갔다. 소장께서 보살펴 주시니 가짜들이 기를 쓰고 발악을 해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디아네의 신앙이 더 깊어졌다.

“신이라.”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영약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차원용과 추격전을 벌이는 소지라는 자가
준 것이었다.

영초를 정제해 극한의 효율을 뽑아낸 영단.

소장께서 말씀하셨다.

그녀가 신격을 얻도록 할 테니 함께 노력하자고.

“나를 신으로···!”

베른은 오히려 그녀를 경계했었다. 아낄지언정, 신격을 얻어 자신의 경쟁자가 될까, 적당한 선을 지켰었다.

그런데 주신께서는 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신이시여.”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기꺼이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나이다.

당신의 방패가 되어 당신을 지키고.


당신의 창이 되어 저 오만한 가짜들을 찢어발기겠나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당신의 곁에서 새로운 백신전을 만들겠나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허나, 그것 또한 신께서 바라시는 일이니.

그녀는 확신했다.

김우진은 반드시 저 우주의 정상에 설 것이라고.

그녀는 바랐다.

그때,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이 되기를.


가장 가까이서 신을 모실 수 있기를.

꿀꺽, 영단을 삼켰다.

───────────────
# < 073. 순리 >

신의 힘이란, 무엇일까.

용사의 힘? 우주의 힘?

용사의 힘도 결국 우주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을 신들이 신의 힘이라 부르고 있을 뿐.

“어때? 그렇게 이해하니 조금 더 쉽지?”


“네. 알베니우스님의 말대로예요.”

용사에게 있어 신의 힘은 미지가 아니라는 것. 율리아는 알베니우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보다 능숙하게 힘을


다루게 되었다.

율리아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단순한 용사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샘솟는 힘에 전능감이 느껴진다.

“저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뭐를?”

율리아가 대답 대신 감옥을 향해 소리쳤다.

“소장 나와!”

알베니우스가 먹던 어포를 떨어트렸다. 베르너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져다 바친 크라켄 어포였다.

“율리아, 신의 힘을 얻었다고 자살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보는데.”


“제가 소장님한테 얼마나 기나긴 억압과 핍박의 시간을 견뎌왔는지 알베니우스님은···.”
“너 연옥에 온지 2 년도 안 됐어.”
“···농담이고요. 조금 능숙해졌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실전 아니겠어요?”
“실전? 그걸 굳이 김우진을 상대로 할 필요는 없잖아. 나도 있고.”
“알베니우스님이요?”

하이엘프의 시선이 차원용의 전신을 훑었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쉬울 것 같아서···.”
“뭐, 임마? 야! 내가 이래 뵈도 차원용이야! 너희 세계수랑 밥도 먹고 작당모의도 하고! 다했어!”
“근데 신격을 얻으니까 알겠어요. 생각보다 더 약하시네요.”
“전직 용사들을 다시 용사로 만들었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쉬울 것 같은 건 맞잖아요.”
“···예전부터 알았지만 너도 정상은 아니야. 그렇다고 김우진한테 시비를 걸어?”

알베니우스가 억울한 표정으로 침몰했다. 율리아는 검을 뽑고 다부진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김우진이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
“네, 소장님.”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맞아요. 신격을 훈련하는데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럴 듯한 추론이야.”

무엇이든 실전이 가장 좋다. 그만큼 힘들지만, 힘든 만큼 빠르다. 물론 살아남는다면.

“상대를 잘못 고른 것만 빼면.”

불꽃이 튀어올랐다. 율리아가 급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

상상 이상의 충격에 신음을 삼키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김우진이 따라붙었다.

“자신의 수준을 객관화해서 상대를 봐가며 시비를 거는 것도 능력이야.”

쾅쾅쾅!
몇 번의 충돌, 율리아는 속절없이 밀리기만 했다. 신의 힘을 끌어올려도 뜨거운 열기에 모조리 녹아내렸다.

대련은 금방 끝이 났다.

상처투성이가 된 율리아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알베니우스의 조롱이 율리아를 괴롭혔다.

“거, 대련해서 아픈 사람을 놀리고 싶습니까? 하여간.”


“어이가 없네. 김우진, 네놈이 때린 거다!”
“뭐, 율리아. 그래도 태도는 나쁘지 않았어. 그런 자세, 좋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신인데 너무 차이나는 거 아니에요?”
“난 신이 아닌데.”
“그게 더 억울해요!”
“그래도 넌 떡잎이 보여.”

김우진이 자신의 옷소매를 들어올렸다. 미약하지만 잘려나간 조각이 있었다.

“나쁘지 않아.”
“전력을 다했는데 옷소매 조금···. 아니죠. 좋게 생각할게요. 원래는 머리카락도 못 건드릴 수준인데
건드렸잖아요.”
“긍정적인 마인드야.”

김우진이 불꽃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일단 실전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앞으로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씩 대련을 하는 거로 하지.”
“···어, 세 번이나요?”
“상황이 상황이니까.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아.”
“저 지금 완전 탈진인데? 도저히 세 번은 무리인데요?”
“마른 오징어도 쥐어짜면 즙이 나와.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그런 이상한 근성론은 세상을 좀 먹어요! 저를 조금 더 살살 대해주세요!”
“그럼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지.”
“예?”

율리아가 눈을 껌뻑였다.

“네가 선택한 훈련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잠깐만요, 하루에 세 번을 선택한 적은 없어요···!”
“다음부터는 다른 놈들도 네가 알아서 모아 와. 누구를 이야기하는 지는 알지?”
“제 말을 아예 안듣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김우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러지 말랬잖아.”

알베니우스가 클클 거리며 웃었다.

“···죽을 거예요. 전 죽고 말거라고요.”

율리아가 좌절했다.

“그래도 지금 맞는 게 나중에 목숨을 살려주긴 할 걸.”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 * *

“···이거 괜찮은 거겠지?”

드네르바가 잘근 잘근 손톱을 씹었다.

알베니우스를 찾고자 하는 대대적인 수색은 결국 세계수의 차원들로 번졌다.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알베니우스가 잡히고 나아가 김우진이 잡힌다면?’


그리고 김우진과 그녀의 관계가 들통난다면?

‘그럼 끝이야!’

신으로서도 생명으로서도. 단순히 신격을 잃는 게 아니라 소멸하거나 심연으로 끌려들어갈 게 분명했다.

‘아니야, 괜찮아. 괜히 그러지 말자.’

계약은 분명히 불공정 계약이지만 적어도 비밀 보장만큼은 확실했다. 김우진이 그런 어리석은 우를 범할 리는


없다.

‘잡히면 잡히는 대로 좋은 거잖아?’

계약서대로라면 굳이 김우진의 편에서 백신전을 무너트리지 않아도 된다. 김우진이 백신전에 의해 죽어도 계약은
아무런 문제없이 종료되니.

‘그래, 그냥 얌전히, 조용히 있으면 돼.’

그럼 아무도 모른다. 들킬 일도 없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런 명령이 내려오지 않고 있기에, 김우진과의 작은 접점조차 없으니
새로운 접점이 만들어지기 전에 김우진이 죽는 건.

“드네르바님.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잠깐만 기다려.”

주신들은 백신전의 모든 신들을 출격시켰고 드네르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비교적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지 얼마 되지 않은 차원 ‘제이드’에 가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

우우웅-

그때, 그녀의 아공간에 들어있던 마력구가 신호를 보냈다.

“···김우진?”

하필 이 타이밍에?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고 통신구를 받았다.

- 연락은 처음이군.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함부로 통신하면 들키는 거 몰라?”

- 백신전의 신들은 대부분 밖으로 나갔다고 들었는데?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설마 나 말고 또 누구 심어놓은 거 아니야?”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백신전이 아니라 제이드로 가기 위한 중간지였다. 주변에 신이라고는


그녀뿐이었다.
- 네가 알 필요 없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 * *

“차원을 수색하는 신들을 습격하자고?”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었다.

“그건 너무 무리수가 아닐까? 지금의 백신전을 표현하자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고슴도치나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러니 더욱 더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습격할 거란 생각은 못할 겁니다.”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만큼 예민해서 자칫 잘못하면 들키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들이 지금까지 알베니우스를 잡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간과 차원 이동에 한정하면 그의 능력이 주신


이상이기 때문이다.

알베니우스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은밀하게 행할 수 있다.

“저놈들은 마물들을 이용해 세계수를 습격할 거고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저놈들도 알고 있겠죠.”

하지만 결코 이쪽에서 선제공격을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 못할 거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랬을 경우 반드시 연옥에 다시 한 번 감찰관이 들이닥친다는 뜻이잖아? 그럼 나는?”


“릴리의 품속으로 들어가 있으시겠습니까?”
“세계수는 만능이 아니야! 특히 저 어린 세계수에게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농담입니다. 나름의 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대비? 무슨 대비?”
“다른 신을 어떻게 잡아왔느냐고 물으셨었죠?”
“그랬지.”
“두리쉬마님을 만나고 왔었습니다.”

두리쉬마를 만나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백신전이 연옥을 습격하기 위해 마물들을 이쪽으로 이끌 때, 그들을 폭주시켜버릴 수 없냐고.

그들을 단순히 연옥으로만이 아닌, 신들의 권역으로 보내버릴 수는 없냐고.

저들의 수를 역이용해 저들의 살을 깎아먹는 방법이었다.

“그럴 듯 하군. 두리쉬마의 대답은?”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단순히 폭주시키는 것이라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백신전은 마물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게 아니다. 빛인 아카식 레코드의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어둠을 지배할 권능 같은 건 없다.
그저 그들의 본성을 조금 이용하여 유도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물들이 조금의 변수를 일으켜봐야 두리쉬마가 개입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저들이 알 도리가 없다.

“그 과정에서 마물들은 수많은 차원들을 덮치게 될 겁니다.”

작정하고 김우진의 가드를 뚫어내고 세계수를 뽑으려고 할 거다. 그렇게 모인 마물들이 적을까? 그 수준이 낮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러니 기회다.

그들이 분산되어 신의 권역을, 사방으로 흩어진 신들을 습격하는 동안 우연한 사고로 신 한두 명 쯤은 사라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특히 보다 강한 마물들을 포함시켜 당위성을 만들어주겠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두리쉬마가 있음을 드러내게 될 텐데?”

마물 사태로 신이 실종되었으나 죽지는 않는다. 김우진은 당장 신을 죽일 생각이 없으니.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의심을 산다. 신이 자의적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할리는 없으니 백신전은 누군가 개입했다고
여길 거다.

“높은 확률로 너를 찝을 거고, 그럼에도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어둠의 사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둠의 사도가 지성을 가진 존재인 것은, 두리쉬마인 것은 모르겠지만 특별히 강한 마물이 등장했다고는 여길 수
있다. 최대한 빨리 토벌해야 한다고도.

“어차피 두리쉬마님은 들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신들이 칼카르의 죽음을 쫓고 있다. 신 하나가 더 실종되었으니 두리쉬마는 들킬 수밖에 없다.

“어차피 들킬 거, 감수하고 이쪽에 적극 협조해주기로 했습니다. 저쪽의 신을 빼앗아 이쪽의 신으로 만드는 것에
꽤나 흥미를 느끼셨다고 할까요?”
“···그렇군. 그래도 아직 하나가 남았어.”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알리바이입니다.”

김우진이 아니라면 단 한 명도 살아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은 못할 테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긴 한데.”


“좋은 기회입니다. 때마침 실험해 볼게 있으니 겸사 겸사 일을 벌려보죠.”
“실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별 필요가 없지만 훗날 신들을 속이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게 있거든요.”

부소장이다.

“부소장?”
“도플갱어입니다.”
“···도플갱어였다고?”
“말했잖습니까. 저도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이론상으로는 신들도 가능한데 일단은 어디까지 속일 수
있나 확인해 볼 기회입니다.”

어쨌든.

“연옥의 대비는 그쯤하고, 균열이 벌어지는 순간이 저희가 움직여야하는 순간입니다.”

세계수를 끝장내기 위해 준비한 신들의 한 수가, 자신들의 발목을 자를 것이다.

* * *

“백신전이 이렇게 고요한 게 얼마만인지.”

우주를 보며, 베리안은 술잔을 기울였다.

빈 잔을 내밀자 다시금 채워졌다.

“향이 좋군. 세계수의 수액으로 만든 건가?”


“예, 그렇습니다.”
“세계수, 세계수라. 참 계륵이야.”

세계수는 분명히 잘 이용만하면 쓸만한 놈들이다.

자신이 뿌리 내린 차원을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발악하는 나무들은 결코 어둠이 될 수 없으며 좋든 싫든 백신전에


협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이 자신의 차원 내에서 신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되고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순수한 협력자가 노련한 정치꾼이 되고 감히 백신전을 상대로 거래를 제안한다. 우호적으로 대하니 머리를 밟고
기어오르려 한다.

“주제를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필요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기에 놈들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종말을 막는데 협조하는 차원이 아니다. 세계수는 차원의 마나의 농도가 짙고 순수하게 만들며 이는
태생적으로 강한 피조물들이 나올 수 있게 한다.

그래서다. 용사들 중 태반의 출신이 세계수가 있는 차원인 것은.

세계수는 아주 훌륭한 용사 공급원이다. 그들을 자르는 것은 자충수를 두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를 넘었습니다. 감히 김우진에게 씨앗을 넘기다니.”


“본보기를 보여야겠지.”

아무리 세계수가 강하다고 한들 결국 한 차원에 하나뿐이며 움직일 수도 없다. 백신전이 작정하면 세계수를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었다.

애초에 세계수들은 백신전을 이길 수 없다.


베리안이 술을 한 모금 음미했다. 잠시 우주를 감상하다 입을 열었다.

“알비츠는 어디 있지?”
“마물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저 녀석도 작정했군.”
“김우진이 그만큼 문제를 일으켰다는 뜻이겠지요.”
“옳은 소리다. 놈은 지나치게 설쳤어.”

허나, 아무리 그래도 신으로서의 체통조차 지키지 않다니.

“알비츠. 꽤나 조급한 것 같군.”

칼카르가 죽었으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백신전은 이 우주에서 우뚝 설 것이다.

반드시.

───────────────
# < 074. 시작 >

탁탁,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데르카인이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 있게 만든 설계도였지만 괜스레 검사 받는 입장이 되자 긴장이 되었다.

“그러니까 세계수를 아예 둘러싼 돔을 만드는 거군요?”


“맞네. 신들의 수작인만큼 만약이라는 가능성이 있으니 최대한 세계수는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도록 하려고
하네.”

돔을 중심으로 온갖 방어 마법들과 공격 마법, 그리고 마도공학 무기들이 빼곡하게 존재했다.

“무기들은 이미 만들고 있네. 세계수를 중심으로 연결하여 에너지를 공급하기만 하면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고.”
“알아서 하세요. 제가 뭐, 본다고 알겠습니까.”

이런 일은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최고다.

“완성까지는 어느 정도를 예상하십니까?”


“아무리 못해도 두 달은 걸리네.”
“드워프들은 물론 엘프들, 집행자들까지 다 도와주는데 말입니까?”
“그래서 그나마 두 달이네. 신들의 공격에도 어느 정도는 버티게 만들려면 그만한 노고가 필요하지 않겠나.
마법진에 마력포에 해야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긴 한다. 김우진이 예상하기로 신들의 수작은 결코 두 달이나 시간을 끌지 않을
테니까.

멀지 않았다. 그의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일단 완성된 무기들만이라도 릴리 주변에 배치해두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일은 두 번 해야 하네.”
“두 번 하는 게 릴리가 불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군. 알겠네.”
“미리 말씀드리자면, 균열이 열리고 습격이 이어지면 저는 연옥에 없을 겁니다.”
“그 중요할 때 어딜 가려는 건가?”
“맞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위기는 곧 기회라고, 반대로 한 방 먹여야죠.”
“혹시나 해서 묻는 거네만, 배터리가 늘어나는 건가?”
“이제는 아예 신이라고도 안 합니까?”
“자네 때문이네. 무한동력을 알아버린 뒤로 신이 아니라 전부 배터리로 보여.”

미약한 광기가 데르카인의 눈가를 스쳤다.

“뭐,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릴리의 말로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하니. 최대한 채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좋군. 아주 좋아.”
“네. 면담은 여기까지하죠. 시간이 되서.”
“알겠네, 최대한 자네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보도록 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르카인이 나갔다.

“딱 됐네.”

김우진이 밖으로 나갔다. 정원 한쪽에 마련된 텅 빈 공터, 그곳에 여섯 명의 인영들이 있었다.

신, 율리아 카르센.
엘프, 시에나 올름.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
인간, 강민식.
광신도, 디아네 디트린.
소지, 베르너 레트만까지.

모두 죄수들 중 신위를 얻을 만한 능력이 되는 자들이다.

“모두 다 모였군.”
“율리아가 네가 훈련을 시켜준다고 해서 모이긴 했는데 무슨 훈련이니?”
“응? 율리아가 말 안했습니까?”
“안했는데.”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소장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싸우는 겁니까? 그럼 환영입니다.”
“정확해.”

타르칸의 물음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격을 얻으려면 그만큼 강해질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실전만큼 좋은 게 없지. 용사란, 위기를
극복하는 순간 더 강해지니까.”
“그건···.”
“반박은 받지 않습니다. 경험담이니까요.”
“율리아!”
“죄송해요! 하지만 미리 말했으면 안오려고 하셨을 거잖아요!”
“이건 훈련이 아니라 고문이니까!”
“소장님하고 마음놓고 싸울 수 있다니. 저는 기쁩니다.”
“훈련이고 뭐고 다 받을 테니 알베니우스님께 꼬리 좀 잘라달라고 부탁해주시면 안됩니까? 아니면 가장 오래
버티면 부상으로 준다거나?”
“제기랄, 완전 상극인데 또 싸워야 한다고?”
“아아, 어찌 종이 된 입장에서 소장께 검을 들이댈 수 있겠습니까!”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기겁하고, 누군가는 절망하며, 누군가는 투지를 끌어올리고, 누군가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누군가는 신앙을 시험받았다.

“그런데 데르카인은 안 오는 거니?”


“제작을 총괄하는 바쁜 양반이라 지금은 안 됩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으니까요.”
“그건 나중에는 더 험하게 굴린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건 그때가 봐야죠.”

그리고 김우진은.

“참고로 훈련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매일 3 번이니까.”

그러니.

“다들 알아서 잘 살아남길.”

그들 사이로 공평하게 불꽃을 밀어 넣었다.

* * *

최근 들어 김우진의 일과는 지극히 단순해졌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신격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의 훈련을 봐주고 릴리와 놀아준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언제 균열이 열리고 마물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연옥을 나갈 수도, 신들을 상대로 당장 무언가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이주가 지났다.

“이제 좀 익숙해졌나?”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자신감을 가져. 이번 일을 위해서 꽤 많은 준비를 해왔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김우진의 모습을 한 부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어지간한 자들은 상관없습니다만, 신들이 작정하고 보낸 집행자들을 상대로 안 들키고 잘할 수 있을


지는···.”
“적당히 여유 있는 척하면서 적당히 상대해주면 된다.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

오랜 시간 그들을 감시해왔기에 김우진은 누구보다 죄수들의 포텐을 알았다. 율리아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신격을
얻지 못한 연옥 상위 여섯 명은 어지간한 집행자들을 씹어 먹는 강자들이다.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난다해도 충분히 수습할 능력들도 있고.

신이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무조건 막는다.


설사 신이 직접 오더라도 한둘이라면 충분히.

“그렇지, 릴리?”

연옥에는 신격을 얻은 율리아뿐 아니라 두 신을 삼키고 급성장 중인 세계수, 릴리가 존재하니까.

- 삐익.

릴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날개로 가슴을 탕탕쳤다.

번개를 방출하고 있는 그 모습이 썩 믿음직스러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베르너도 잘 써먹어. 그놈은 싸움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스팩만큼은 신이 된 율리아 빼고 이길
놈이 없을 걸.”
“그 정도입니까?”
“기본 능력 자체가 사기거든.”

권능이 그쪽이라 그렇다. 타르칸이 알았다면 매일 같이 싸우자고 달라들었을 텐데 여태까지는 잘 숨겨왔다.

‘그것도 이제 끝인 것 같지만.’

김우진과 함께하는 훈련에서 능력이 얼핏얼핏 드러나면서 그를 바라보는 타르칸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때였다.

- 삐삐!

릴리의 눈이 커졌다. 날개를 퍼덕이는 온 몸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말 뜻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의미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왔구나, 그렇지?”

- 삐이!

“좋아. 릴리, 내가 한 말 잘 기억하고 있지?”

- 삐이.
- 하노도 사리지마.
“그래, 정확해. 감히 널 노린 놈들이야. 절대 자비를 베풀지마.”

- 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소장, 네가 뭐라고?”
“소장입니다.”
“내 말투는 그러지 않아.”
“소장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만. 어차피 다 죽여 버릴거면 제가 굳이 소장님인 척을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맞아. 그러니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
“예행연습 말입니까?”
“언젠가 진짜 나 대신 신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할수도 있으니까.”
“······.”
“알베니우스는?”
“식당에 계십니다.”
“계십니다?”
“···계신다.”
“갑자기 식당? 왜?”
“오마카세를 한다고 하더군.”
“베르너 놈,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나 보지?”
“당연하지. 그놈이 쉽게 미련을 버릴 놈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겠다는 작정인가.

하긴 음식에 대한 열정이 단순한 열정을 넘어선 광신의 영역이니 그럴만 하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베르너의 주장을 듣고 나니 차원용의 꼬리가 무슨 맛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드래곤이 진미긴 했는데 말이지.”

베르너가 요리한 드래곤은 그가 먹었던 어떤 고기보다 진미였다.

김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베르너를 응원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데리러 가야겠군.”

* * *

달그락 달그락-

알베니우스가 우아하게 고기를 썰었다. 칼이 부드럽게 파고들고 핑크빛으로 잘 구워진 고기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음, 나쁘지 않군.”

씹는 순간, 육즙이 터지고 향신료의 향이 함께 폭발한다. 적당히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쫄깃하고 녹진한 소스는 더
없이 잘 어우러진다.

“이게 무슨 고기라고?”
“코크리라는 몬스터입니다.”
“코크리는 나도 아는데 전혀 맛있어 보이는 놈이 아니었는데.”

코크리는 5m 가 넘어가는 거구에 근육질로 뒤덮인 황소를 닮은 몬스터였다.

“몬스터답게 질기고 독이 있지만 잘만 요리하면 그게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아무리 푹 익혀도 적당히 씹는 맛이
남아있고 중화된 독이 오묘한 향을 남겨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죠.”
“확실히···. 인정하지. 네 실력은 내가 만나보았던 그 어떤 요리사보다 뛰어난 것 같군.”

당연히 지금 먹고 있는 요리도 마찬가지. 혀를 사정없이 유린하는 극상의 진미를 알베니우스가 정신없이 흡입했다.

“그러면 주시는 겁니까?”


“안 돼.”
“왜 안 됩니까? 맛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놈 같으면 네 엉덩이를 때서 먹으라고 남에게 줄 거냐?”
“저는 재생이 안 되는 인간입니다.”
“만약 재생이 되면 주고?”
“미식을 진보시킬 수만 있다면···!”
“미친 놈! 이건 인간이고, 드래곤이고 같은 종족의 문제가 아니야. 어떤 미친 놈이 자신의 살을 남에게 먹으라고
손수 주냔 말이야!”
“저는···.”
“닥쳐라! 넌 애초에 비교할 수 없는 놈이고!”
“하지만 맛있으셨죠?”
“그거야···.”

알베니우스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고한 드래곤의 자아로 인해 거짓말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제게 꼬리를 조금만 때어주신다면 이곳에 머무시는 매일 제가 삼시세끼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극상의
진미로만!”
“···으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kg 만 주시면 됩니다. 본체로 변하시면 그 정도는 발톱에 낀 때 수준 아닙니까?”
“네놈 발톱의 때는 10kg 이냐?”

물론 그리 대단치 않은 건 맞다. 그의 본체는 50m 가 넘어가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거기서 꼬리 끝부분을
10kg 땐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자라나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차라리 무기로 만든다고 하면 뼈나 비늘을 조금 줄지언정 먹기 위해 살을


달라니.

“비늘이라면 몇 조각 때어줄 수 있는데.”


“비늘도 주시겠습니까? 비늘을 잘 구워 고기 위에 뿌리면 괜찮은 크러스트가 되겠군요.”
“···꺼, 꺼져라!”

와장창, 알베니우스가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창문을 깨고 도망쳤다.

“잠시만요!”
베르너가 급하게 뒤따라 뛰어내렸지만 알베니우스는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장님?”

그리고 그의 앞에는 소장이 있었다.

“이거···.”
“예, 알베니우스님, 때가 되었습니다.”
“때요?”

그의 시선을 따라 베르너의 고개 또한 올라갔다.

“무슨 때가 됐다는 겁니까?”


“베르너.”
“예. 소장님.”
“지금 당장 네 위치로 돌아가서 싸울 준비를 하도록.”
“···설마?”

그제서야 베르너는 보았다.

끼기기기긱-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시커먼 균열과 쏟아지는 마물들을.

“···정말로 왔다.”

습격이 시작되었다.

───────────────
# < 075. 전투 >

마침내 침공이 시작되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검은 덩어리들.

마물들이 몰려온다.

느껴지는 가공할 마기에 타르칸 톨리스가 전율했다.

“크흐흐흐.”

싸움은 수인들의 본능이다.


강함을 추구하고, 보다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최고. 그것이 타르칸 톨리스가 추구하는 투쟁이었다.

언제나 그가 밟고 선 대지 위에, 그보다 강한 자가 없어야 했다. 적어도 연옥에 오기 전까지는 항상 그랬다.


하지만 소장을 만나면서 진짜 벽이라는 게 뭔지 깨달았다.

그 강인함, 그 강대함, 그 위압감.

모든 면에서 타르칸은 꺾였다. 완벽하게 패배했고 완벽하게 굴복했다.

하지만 그건 오직 김우진 한정이었다.

시에나에게 패배하는 것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율리아가 먼저 신격을 얻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분하고 억울했으나 굴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누구냐! 명색이 싸움을 업으로 살아온 수인인데 귀쟁이와 난쟁이들에게 밀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전장이다! 날뛰지 않을 이유가 없어!”
“옳습니다!”

조금 뒤쳐졌다면, 다시 따라잡으면 그만이다. 넘어버리면 된다.

“가자!”
“마물의 피로 포식하자!”

마물과의 전투는 그 발판이 될 것이다. 용사는 마물을 죽임으로서 업을 쌓을 수 있으니까.


수인들은 실전을 통해 더욱 빠르게 성장하니까.

“하아아아···!”

고향에 온 것 같은 친숙한 전장의 향기를 맡으며.

타르칸이 돌진했다.

‘굳이 무식하게 싸울 필요는 없지.’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사람 하나가 은밀히 그 뒤를 따랐다.

애초에 강민식의 전투 방식은 스타일리쉬하다. 힘이 아닌 속도와 독으로 승부를 보기에 마물의 군단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건 자충수다.

암살자에게는 암살자만의 전장이 있는 법.

다행히 이곳에는 암살자가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후퇴를 모르는 짐승들. 그들의 돌진은 해일과 같고, 그 해일에 휩쓸린 이들은 은밀하게 스치는 독과 검을
의식하지 못할 테니.

‘이번에 최대한 많은 독기를 흡수한다.’


그래서 힘을 쌓고 김우진이 만족할 만한 강자가 된다.

그리고 신이 된다.

‘내가 신이라니.’

꿈같은 미래에 강민식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마물들이 밀려온다.

율리아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검을 다잡았다.

마물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다.

하이엘프로서, 율리아로서는 많이 싸워왔다. 하지만 신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신으로서 마물들과 대적하고, 신으로서 신과, 집행자들과 대적하는 것은.

“평소처럼 하렴.”

시에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의 떨림이 멈췄다.

“넌 강하단다. 소장을 제외하면 이곳의 그 누구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한 거지? 네 실수로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네. 소장님이 안 계시니까요.”

소장은 신들에게 맞고만 있을 수 없다며 알베니우스와 함께 잠시 연옥을 벗어난다.

자연스레 이곳의 최강자는 율리아, 그녀가 되었다.

그리고 힘에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뒤 따른다.

“만약 한 명이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어떡하죠?”

집행자들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마물의 군단에 율리아가 나선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녀가 신위를 받았다는 것을
누구도 몰라야 하기에, 목격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단다. 나는 70 년이 넘도록 연옥에 있었어. 그만큼 소장과 많이 부딪혔지.”

그래서 알고 있다.

“소장이 성격이 좀 그렇고 문제가 많긴 하지만 적어도 불가능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단 걸. 하물며 여기에는 너만
있는 게 아니야. 굳이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단다.”
소장과 알베니우스가 없지만 시에나가 있다. 타르칸이 있고 데르카인이 있으며 광신도와 강민식, 소지가 있다.

그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의존할 자들도 아니다.

“그냥 가서 날뛰렴. 신으로서 처음 맛보는 신의 힘을 마음껏 방출해. 모두 쓸어버리는 거야. 뒤처리는 우리에게
맡기고. 저 미친 짐승들처럼.”

율리아의 시선이 시에나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마물들을 향해 질주하는 열다섯의 짐승들이 있었다.

선두에서 은빛 털을 휘날리며 마물들을 찢어발기는 달의 늑대는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 뒤에 이상한 인간 하나가 따라 붙었지만 그건 별개였다.

“너도 저래도 돼.”


“···정말 그래도 되겠죠?”
“그럼. 당연하지.”
“좋아요.”

검을 움켜쥔 율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처음부터 그러고 싶긴 했어요.”

은은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산들바람은 곧 폭풍이 되었다. 거대한 풍랑을 일으키며 주변을 할퀴었다.

율리아의 장기는 바람이었고 신위를 얻으면서 그 힘이 더욱 강화되었다. 바람은 그녀의 친구이며, 그녀의 검이
되었다.

율리아가 검을 내질렀다.

폭풍이 군단을 덮쳤다.

그리고 폭풍 사이로.

“쏴라!”
“모조리 박멸해!”

쾅쾅쾅쾅!

무한동력을 핵으로 삼은 마력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 * *

마물들이 밀려온다.

데르카인은 심장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 공포?
아니, 이건 그딴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고양감이며 투지이고, 호승심과 광기다.

“마침내···!”
“마침내 실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워프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 명의 신을 흡수한 세계수의 무한동력.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수 십 개의 마력포.

그 위력이 어떨지, 마력포를 제작한 드워프들조차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미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고
이제는 그 결과를 확인할 때다.

신과 세계수의 힘을 그대로 받은 마력포가 얼마나 강한지.


포대가 버틸 수는 있는지.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작정하고 쏘아대면 저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지.

“프흐흐흐.”

드워프들이 광소했다.

“조준!”
“조준!”

마력포들이 일제히 각도를 조준했다. 목표는 하늘. 쏟아지고 있는 마물의 파도다.

하늘을 새카맣게 메운 덕분에 세세한 조절은 필요 없었다. 저 시커먼 덩어리 어디에 쏘든 맞을 테니까.

“응집!”
“응집!”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 삐이···.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에 릴리가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례해 마력포에 응집된 마나들이 점점 많아졌다.

마나를 모으고.
그대로 압축하여.
폭발시켜 쏘아낸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마력포의 원리.

허나 마력이 신의 힘으로 대체되었을 경우는 그 누구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이 지금.

“발포!”
이 자리에서.

“발포오오오!”

실현되려 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손에 의해.

─────!

고막이 찢어질듯한 굉음과 함게 마력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것은 단순한 포탄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광선. 번개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힘으로 뒤섞인 수십 줄기의
광선이었다.

섬광은 그대로 마물의 군단을 휩쓸었다.

────!

연달아 일어나는 폭발이 마물들을 집어 삼켰다. 비명도 시체도 없었다. 그대로 소멸시키는 압도적인 파괴력은
전율, 그 자체였다.

“···아아!”

드워프들이 감탄했다. 자신들이 일구어낸 걸작에 눈물을 흘렸다.

“대박입니다!”
“데르카인님! 이걸 정말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겁니까!”
“그래, 우리 손으로 만들었···?”

그 순간.

치이이익-

포신에서 불안한 신호가 왔다.

쩌적, 붉게 과열된 포신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 불길한 징조에 드워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피해!”
“도망쳐라!”
“마력포가 터진다아아아!”

콰아아아아앙!

폭발이 드워프 무리를 덮쳤다.

* * *

“···저런 아둔한 난쟁이들 같으니라고.”


하찮은 피조물 주제에 감히 신의 힘을 다루려고 한 죄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신의 힘을 탐하다니.

소장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모조리 목을 베었을 거다.

디아네가 코웃음쳤다.

“그래도 파괴력은 쓸만합니다. 꽤 많은 마물들이 휩쓸렸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그것을 이용한 것들은 난쟁이들이지만 그 본질은 결국 신의 힘이니까요.”

저것은 난쟁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신의 힘이 행한 마땅한 이적이다.

비록 그것이 본래의 주신에게서 앗아간 가짜들의 힘이지만 신의 힘은 신의 힘이니까.

“저희도 슬슬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서야지요.”

디아네가 날개를 펼쳤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던 손님들이 왔습니다.”

그녀가 일직선으로 날았다. 마물들이 넘쳐나는 어두운 하늘이 아닌,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집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디아네 디트린?”

그리고 마물들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균열을 통해 은밀히 잠입하던 집행자들과 마주했다.

“오랜만입니다. 발라스님. 이렇게 뵈니 느낌이 새롭군요.”


“어째서 네가 여기에? 죽은 게 아니었나?”
“가짜들이 그렇게 말한 모양이군요. 제가 죽었다고.”
“가짜들이라고?”
“자신들을 신이라고 말하며 백신전에서 한 자리씩 해먹고 있는 가짜들 말입니다.”
“···너, 갑자기 돌아버린 거냐?”
“원래 돌아있다가 이제야 제 정신을 찾은 것입니다.”

디아네가 집행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51 명이라. 많이도 왔습니다.”


“다시 묻겠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베른님은 어디 가시고?”
“그 가짜는 진짜 주신을 위한 거름이 되었습니다. 가짜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니 영광된
길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가짜는 뭐고, 진짜는 또 뭐야!”
“가짜는 여러분이 섬기는 백신전의 무도한 반역자들입니다. 그리고 진짜는 이 감옥의 주인, 반역자들에게 찬탈
당한 진짜 주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연옥의 주인? 김우진을 이야기하는 거냐?”
“김우진이 주신이라고? 미쳐버렸군.”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더 심각해졌군.”
“베른님이 김우진에게 당하고 나서 아예 돌아버린 건가.”
“헛소리 집어치워라. 죽기 싫어서 감히 신들을 배신하고 김우진을 섬긴 버러지 주제에.”
“네놈들 모두 마찬가지다. 위대한 신들을 대신하여 천벌을 내려주겠다.”

집행자들이 그녀를 조롱했다. 허나, 디아네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본디 생명이란 어리석어서 진리를 알려주어도 쉽게 믿지를 못합니다. 이해합니다. 당신들의 마음을.”

찢어지는 듯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허나, 디아네는 태연히 배틀엑스를 들었다.

“허나, 선구자들은 본디 의심을 받는 것. 그것은 진리와 진정한 신을 구하는 자의 마땅한 시련입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가짜들을 잊고 진정한 신을 섬길 마음이 있으십니까?”
“널 죽이고 나무를 뽑아버릴 마음은 있···!”

콰아아아앙!

도끼가 떨어졌다. 급하게 들어 올린 집행자의 검이 반으로 부서졌다. 팔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그렇군요. 더 이상 대화의 여지가 없는 듯 합니다.”

신의 자비를 조롱과 모독으로 되돌린 불신자들에게는 천벌이 내릴 지니.

“제가 주신을 대신해 당신들을 벌하겠습니다.”


“이 빌어먹을 년이!”
“너만 집행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미친 광신도를 죽여라!”

사방에서 공세가 쏟아졌다. 아군마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거친 파도였으나 디아네는 태연히 도끼를 휘둘렀다.

공세의 파도를 갈랐다. 속이 진탕되었으나 할만 했다.

애초에 이 정도는 이제 익숙했다.

“불쌍한 자들.”

진정한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자비조차 받지 못하고.
그분의 은총조차 얻지 못했으니.

“당신들에게 질 이유는 없습니다.”

그분의 불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니.

김우진에게 실전 훈련을 받고, 릴리로 하여금 신을 힘을 주입받은 디아네는 충만함을 느꼈다.

신이 함께하고 계신다.

그러니 나는 무적이다.

김우진은 주신이고.

배틀엑스가 세상을 찢었다.


* * *

···라고 생각했던 적이 디아네에게도 있었다.

신에게 훈련을 받은 디아네는 분명히 강했다. 본래도 집행자들 중에서도 상위에 꼽히는 그녀는 여럿의 집행자들을
홀로 상대할만한 능력자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라는 게 있다. 집행자들이 50 이 넘어가니 답이 없었다.

그녀의 부하들이 한 명씩 맡았고 홀로 42 명과 부딪혔다.

그녀는 분투했다. 여덟 명을 죽이고 다섯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아직도 29 명이나 되는 집행자들이
남았으니 중과부족이었다.

“이 괴물 같은 년···!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진정한 신의 은총을 받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분의 은총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당신들
따위를 모조리 쓸어버리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미친 년. 아예 돌아버렸구나.”
“설득할 마음도 들지 않는군. 그냥 죽여라. 반역자에게는 반역자의 말로가 무엇인지 보여주어라.”

집행자들이 검을 뻗는 순간이었다.

파캉, 검이 부러졌다.

거대한 등이 그녀와 집행자들 사이를 가로 막았다.

“···넌 또 뭐냐.”

단숨에 부러진 검에 집행자들이 그를 경계했다.

디아네는 그럴 수 있다. 그녀는 애초에 집행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의 강자로 왜 베른 같은 자를 섬기는지 의문인
자였으니.

하지만 정체불명의 피조물이 일격에 집행자의 검을 부러트리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난 소지야.”

소지, 베르너가 가볍게 자기소개를 했다.

“소지? 그게 뭐지?”
“교도관을 돕는 죄수 아닌가?”
“맞아. 연옥의 밥을 책임지고 있지.”

맛있는 것이 먹고 싶으면 나중에 연옥으로 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한 차원 높은 미식을 맛보여 줄 테니.

“물론 감히 소장님을 노리고 이곳에 온 이상, 글렀지만. 아니지, 새로운 죄수들이 될지도?”
소지가 움직였다. 서늘한 참격이 집행자 하나를 덮쳤다.

“크윽···!”

집행자가 서둘러 방패를 들어올렸다. 검격이 그대로 방패를 쪼개고 전진했다. 깊은 상흔이 새겨졌고 집행자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무기가 무엇인지 눈치 챘다.

“···식칼?”
“말했잖아. 요리사라고.”

소지가 양손에 식칼을 빙빙 돌렸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식칼이 아니라 회칼이야.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특별 제작한.”

더 두텁고, 더 날카롭지.

“너희들의 뼈와 살을 부드럽게 분리해줄 만큼.”


“···당신, 이 정도였습니까?”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행자들을 이렇게 가볍게 유린하다니. 디아네의 상상 이상이었다.

“어떻게 신의 힘까지?”
“이것저것 많이 주워 먹어서 그렇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짐작하시다시피 제 권능이 소장님과 조금 비슷하거든요.”

하위호환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
# < 076. 비보 >

“···그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소장님과 싸울 때도 함께 했는데요?”
“솔직히 실력 자체는 형편이 없어서···.”
“크흠.”

베르너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칼을 어루만졌다.

회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뼈도 갈라버리는 예리한 칼날이 살기를 드러낸다.

거짓은 아니었다. 그가 품고 있는 막대한 가능성과는 별개로 전투 실력은 이곳의 죄수들에 비하면 명백한
하수니까.

지금도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검을 끊어낸 것일 뿐, 특별한 기교가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권능, 요리,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죄수번호 1176 번, 베르너 레트만.


차원, 갈라이 출신으로 차원, 체르타인을 구원한 용사.

신들에게 토사구팽 당해 연옥으로 들어왔으나 다른 죄수들과 달리 스스로 만족하고 적응한 케이스.

그의 권능은 ‘요리’였다. 식재료를 요리해 그 재료가 품고 있는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는 권능.

재료가 좋을수록, 더 뛰어날수록 얻어내는 것이 많아진다.

오크를 요리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지만, 오우거를 요리하면 오우거의 체력과 힘이 신체에 깃든다.


드래곤을 요리하면 드래곤의 마력과 감지 능력이 깃든다.

그것이 그의 권능. 비록 하나하나는 미약하지만 용사로서 수없이 만들고 먹어온 것들이 지금의 그를 이루었다.
김우진을 제외하면, 신이 되어버린 율리아를 제외하면 품고 있는 마력은 가장 막대한 괴물로.

“뭐, 그래도 싸움은 못하지만 해체는 잘합니다.”

그것이 그의 업이니까.

그 사이 눈치를 살핀 집행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마력에 놀랐지만 그들 또한 강자였다. 하물며


수가 훨씬 많으니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멍청하긴. 스스로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주는구나.”


“마력만 많고 별 볼일 없는 놈이다. 죽여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권능들에 베르너가 마력을 방출했다. 그건 방어막도 오러도 아닌 그저 마력의 덩어리였으나 그
압도적인 양은 충분히 주인이 빠져나갈 시간을 주었다.

허나, 그것 또한 예상한 듯, 집행자들의 화살이 예상 경로를 막았다.

카앙, 회칼에서 불꽃이 튀었다.

“제기랄!”

그는 싸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강한 힘을 가진다거나 신에게 복수한다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리와 미식이었고 연옥은 전 차원의 식재료들이 모이는 천국이었다.

힘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다. 그나마 용사의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하는 욕심이라면 위험한 재료를 다룰 때,


용사의 힘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딱 그 정도.

때문에 소장과 백신전의 격전은 그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신들만 먹는다는 과육과 음식들. 그래, 그게 문제였다. 고작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베르너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과연 그것들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을까?

고민은 1 초 만에 끝났다.

“당연히 있지!”

미식이야말로 그가 살아온 인생이 아니던가.

그런 것들을 보지도, 먹지도, 요리하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는 거다.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와라!”

그는 검술에 조예가 없었다. 용사로서 나름의 검술을 연마했지만 결코 집행자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고 날카로운 창이 그의 마나를 뚫고 들어왔다. 그 순간, 손으로 창을 잡아챘다. 손에 두른


마력이 짧게나마 그의 손을 보호해주었다. 집행자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어어···?”
“어는 무슨 어!”

그걸로 충분했다.

검술이 부족할 뿐, 칼을 쓰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장기는 해체. 모든 생명체는 크게 보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니 칼이 닿기만 한다면.

서걱-

그의 칼이 유려하게 춤을 췄다. 집행자가 비명을 질렀고 다른 집행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갔지만 이미


그의 오른 팔은 뼈와 살이 분리되어 새하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이런 미친!”
“그 짧은 시간에 아예 포를 떠놨어?”

집행자들이 분노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베르너가 다급히 소리쳤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실 겁니까! 좀 도와주세요!”


“아, 물론입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벌어졌던 입을 다시 닫은 디아네가 황급히 가세했다.

* * *

“딱 예상대로군요.”

마물들이 밀려온다. 집행자들이 그 혼란을 틈타 고개를 들이민다.

허나, 그 모든 것들이 막힌다. 엘프들에 의해, 드워프들에 의해, 광신도와 집행자들에 의해.
“마력포가 폭발하는 것도?”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시죠?”
“전혀 사소해보이지 않는데. 저거 괜찮은 거냐?”
“괜찮을 겁니다.”

푼수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데르카인과 드워프들은 용사다. 마력포를 정면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모조리
해소한 뒤, 그 여파로 일어난 폭발로는 죽지 않을 거다.

뭐,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릴리도 있고 부소장도 있다. 연옥은 결코 저 정도에 무너지지 않는다.

마물들이 모조리 다 연옥으로 투입되었다면 모를까, 분산되었으니까.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뭐, 네 말이 맞겠지.”

알베니우스가 공간을 열었다. 그 속으로 길이 보였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길.

우주의 힘이 없는 자들은 결코 인식할 수 없는, 하지만 둘에게는 명백히 보이는.

연옥에서 시작된 길은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나가며 시커먼 어둠이 연옥의 일부를 물들이고 있다.

허나 그 어둠은 하나가 아니니 수십 개의 덩어리들이 수많은 차원에 흩어져 차원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저게 다 왔으면 난리 났을 것 같긴 하군요.”

아무리 율리아가 신격을 얻었다고 한들, 아무리 죄수들이 강하다고 한들 물량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물론 패배를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율리아가 신격을 얻은 이상, 동급의 존재가 아니면 그녀를 죽일 수 없으니.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신의 끄나풀들을 모조리 죽일 거라는 보장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율리아가 신격을 얻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건 정말 최악의 예상.

두리쉬마 덕분에 일어나지 않은 미래다.

“어디부터 갈 테냐.”
“어디부터가 아니라 누굴 찾아갈 거냐고 되어야지요. 목표는 차원이 아니라 신이니.”

권역을 뭉개는 것도 즐겁지만 역시 그 주체가 되는 신을 직접 잡는 게 베스트다.

“일단 저기부터 가볼까.”

가장 거대한 덩어리가 뒤덮은 차원. 그곳에서 느껴지는 우주의 기운은 누가 봐도 신의 권역이었다.

* * *

“재앙, 재앙이다!”
“종말이 도래했다!”
“신이시여, 저희들을 굽어살펴주시옵소서!”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하늘이 갈라졌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균열들이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불길한 마기와 함께 마물들을 토해냈다.

차원 어디에서든 균열들이 존재했다. 보였다. 마물들이 떨어졌다.

“끄아아악!”
“막아라!”
“신께서 함께 하신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성으로 도망쳐라!”

전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마물들은 땅을 밟고 선 모든 생명체들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용사가 없었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게는 용사 대신 신과 집행자들이 있었다.

“신께서 너희들을 보살피시니 두려워 말라!”


“맞서 싸워라! 신의 이름으로 어둠을 토벌하라!”

날개를 단 천사들이 대륙 곳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찬란한 광휘를 뿜어내며 마물들을 베어냈다.

“신이시여!”
“신의 천사께서 오셨다!”

그들의 등장은 절망에 물들던 대륙에 비추는 한 줄기 서광이었다.

그리고.

콰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일거에 쓸려나가는 마물들은 신의 이적이었다.

“신이시여···!”
“신께서 함께 하신다! 두려울 것이 그 무엇이랴!”

그들의 찬양에도 정작 그들의 신, 드라스코의 얼굴은 펴질 줄은 몰랐다.

그의 시선은 벌어진 균열들에서, 끊임없이 토해지는 마물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김우진과 연옥을 노리던 마물들이 자신의 차원을 덮치다니.

주신께서 행하시던 일인지라 실패가 더욱 의외였다.


“···다행히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하군.”

이곳은 그의 권역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하위 차원과는 달리 그의 힘을 투사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마물들이 아무리 모여 봐야 결국 마물. 감히 신의 위엄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다.

신이 된 이래 간만에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니 마물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균열은 여전히 마물을 토해내고 있지만 그 수도 처음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다. 이제 이 정도라면 별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제부터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할 건데 벌써 안심하면 재미없지.”


“···누구?”

낯익은 목소리가 불쑥 그의 귓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열기가 그를 덮쳤다.

“크윽···!”

다급히 힘을 끌어올렸다. 찬란한 광휘가 불길을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는 줄 알았다.

“백염···?”

붉은 염화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그의 신의 힘마저 녹여버리며 새하얗게 변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마, 말도 안 돼!”

불길 사이로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김우진. 김우진이었다.

“연옥에 있어야 할 네가 어떻게?”

아니, 어떻게 이런 불꽃을?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일 것 같아?”
“계약을 어기려 하다니! 백신전이 두렵지 않느냐!”

드라스코가 모든 힘을 일거에 방출하며 반동을 이용해 뒤로 도망쳤다. 꺼지지 않은 불길들이 달라붙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우주의 힘으로도 쉽게 꺼지지 않는 불이라니.’

대체 어떻게 김우진이 이런 힘을!

하지만 그의 도주는 몇 걸음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복부를 후려치는 열기와 충격에 드라스코의 몸이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그 위로 불길이 떨어졌다. 뜨거운 열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걱정 마. 넌 죽지 않을 테니. 넌 배터리 넘버 3 다.”

악마의 속삭임.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

대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 마물들은 연옥 뿐 아니라 주변의 차원들을 침공했고 교차 차원인 연옥의 주변에는 신들의
권역 또한 다수 존재했다.

“정확히 몇 곳이냐.”
“열 두 곳의 차원들이 습격당했습니다. 그 중 권역은 다섯이며 해당 차원의 신들이 우선 방어를 위해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일단 안심이다.

권역은 신의 앞마당과 같은 곳, 신력이 넘쳐나고 신과 집행자들이 다른 차원보다 무난하게 힘을 투사할 수 있으니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

문제는 다른 차원이었다. 권역이 아닌 곳들. 그곳들 또한 모두 백신전의 영역이었고 피조물들이 살아간다.


갑작스러운 마물들의 침공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하위 차원이기에 신들은 마음대로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 정석적인 루트인 용사 소환도 지금 써먹을 수도,
소환해도 너무 많은 마물들을 감당할 수도 없으니 결국 집행자들을 보내야 한다.

“집행자들을 차출해라. 각 차원에 못해도 서른씩 보내도록.”


“예.”

허나, 집행자들이 신은 아니라고 해도 결국 신의 권속이다. 신만큼은 아니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데 업이 필요하니


집행자의 주인들이 감당해야할 몫이다.

그리고 어떤 신도 업을 감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건 스스로의 약화를 뜻하니까.

반대로 기회이기도 했다. 아직 권역이 아니기에 자신의 이름을 퍼트리고 권역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고로 신앙은 위기에서 더 피어나는 법이다.

그걸로 회의가 끝났다. 모든 신들이 나갔다. 두 명의 주신이 남았다.

“어떻게 된 거지?”
“···부끄럽지만 실수했다. 마물들의 수가 생각 이상으로 불어났고 유도하는 것만으로 통제하는 것에 버거움이
있었다.”
“실수? 네가 말인가?”
“과욕을 부렸다. 칼카르가 죽은 것부터,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신이 탄생한 것까지. 여러 문제가 동시에
터졌고 그 모든 시작은 알베니우스와 김우진이었다.”

헌데 이번엔 세계수였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고 확실하게 끝장내고자 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마물들을 유혹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마물들이 모여들었고 아카식 레코드에게 힘을 부여


받은 ‘빛’으로는 ‘어둠’인 마물들을 통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덕분에 세계수도 뽑을 수 있을지 미지수군.”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덕분에 연옥으로 간 마물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론 모든 차원들 중 가장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곳에는 김우진과 배교한 집행자들이 있다.

“아니, 세계수는 반드시 뽑는다. 내 실수는 내가 만회하지. 내 집행자들을 추가로 보내겠다.”


“네가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도 조금 더 손을···.”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신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주신들이시여!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지?”
“드라스코의 종적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아예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마물들에 의해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

또 하나의 비보가 백신전을 덮쳤다.

───────────────
# < 077. 최종병기 릴리 >

벌어진 균열.
쏟아지는 마물들.
세계수를 향한 위협.

그가 오랫동안 지내온 곳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공기가 무겁다.

‘도플갱어? 너, 어디까지 카피할 수 있냐?’


‘오, 내 기운을 흡수할 수 있네? 언뜻 보면 모르겠는데?’
‘재밌네.’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감히 소장님을 따라했다가 참교육을 당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소장님의 곁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소장님은 그를 믿고 떠나갔다.

그러니 완벽해야 한다. 소장님은 이 연옥을 나간 적이 없는 거다.

그가 차분히 상황을 살폈다.

마물들 사이를 헤집으며 날뛰는 수인들과 그 그림자에 숨은 암살자. 뒤늦게 합류한 거인.
돌진하는 신격과 그녀를 엄호하는 엘프들.
부서진 마력포를 수리하려다 코앞까지 다가온 마물들에 결국 도끼를 들고 마물의 대가리를 쪼개버리는 드워프들.
은밀히 숨어든 집행자들을 상대하는 광신도와 소지, 그리고 집행자들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연옥 전체가 전장이었고 모두가 병사였다.

대부분은 앞선에서 막히지만 일부 마물들이 연옥까지 도달했고 교도관들이 분투했다.

그는 그 혼돈 속에서 자신이 가장 필요한 곳을 확인했다.

가볍게 발을 굴렀다. 공간을 격하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소장!”

짧은 비명들이 토해졌다.

* * *

주신, 알비츠를 섬기는 집행자 혼타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능히 차원 몇 개를 소멸시킬만한 거대한 마물의 군단이 연옥을 덮칠 것이라고 했다.

소장이 거기에 온 신경이 쏠릴 때, 은밀히 숨어 들어가 세계수를 소멸시키면 끝이라고 했다.

헌데 일이 틀어졌다.

마물들은 갑자기 날뛰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연옥의 전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마땅히 가두어야 할 죄수들을 전력으로 동원하다니.’

김우진은 역시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허나, 무엇보다 문제는 배신자들이었다. 특히 베른을 섬기던 집행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디아네 디트린.

주신의 권유조차 거부하고 베른의 집행자로 남은 자. 그녀의 능력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뛰어났고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때문에 진즉에 끝내고 세계수를 뽑으러 갔어야 할 계획이 틀어졌다.

그리고.
그가 왔다.

“충실한 개새끼들이 왔군.”


“···김우진!”

그저 존재함으로도 느껴지는 열기와 위압감에 그가 이를 악 물었다.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신을 죽인 자다. 신을 숨긴 자다. 아무리 주신을 섬긴다고 한들, 일개 집행자인 그가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다.

“알고 있느냐?”

그의 목소리에 서린 위압감에 혼타스의 피부가 쭈뼛섰다.

“나는 너희들에게까지 계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 너희는 대상자가 아니거든.”

그것쯤은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자리의 모두는 위대한 신명을 받아 목숨을 걸고 온 거다.

“긴말 필요 없겠지.”

죽어라.

불꽃이 폭사되었다.

그 순간, 혼타스가 소리쳤다.

“흩어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세계수. 목숨을 잃더라도 세계수를 없애야만 한다. 이곳에서 김우진과 싸우면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집행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쫓아라.”
“예!”

디아네와 소지라는 자가, 그리고 배신자들이 그들을 추격했다. 김우진의 불길이 넘실거리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크악!”
“도망쳐라!”

전투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볼 때는 도망칠 때다. 가장 쉽게 적을 도살할 수 있을 때는 도망치는 적의 등을 치는


거다.

숫자의 우위로 밀어붙이던 관계가 역전되었다.


“목숨으로 회개하십시오! 감히 신의 권역을 더럽힌 가짜의 사도들!”

광신도의 도끼가 집행자의 등을 쪼개고.

“아까는 잘도 합공했겠다!”
“이번엔 네놈들이 죽을 차례다!”

배신자들의 합공에 집행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김우진의 불꽃에 집행자의 몸이 녹아내린다.

일방적인 학살극. 그럼에도 그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세계수를 뽑는다!’

혼타스가 눈물을 머금고 세계수를 찾았다. 세계수란 신목이라 불리는 나무. 그건 그들이 신의 힘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우진과 집행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농밀한 신의 기운을 찾으면 된···다···?

“···뭐냐, 저게.”

허나 그의 감각에 걸린 것은 결코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와 비슷한 형태도 아니었다.

엘프였다. 아니, 하이엘프였다. 아니.

신이었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의 기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백신전에서 주신을 모셔온 그의 경험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분명 신이었다. 신일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어째서 신이 이 자리에?
어째서 신이 마물들과?
어째서,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에 그의 사고가 일순간 멈췄다.

“···율리아 카르센?”

기억에 있다. 불과 얼마 전에 세계를 구하고 집행자가 되기를 거부해 연옥에 가두어버린 죄수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신이 되어 김우진을 위해 싸우는 걸까.

“···새로운 신.”
혼타스는 깨달았다.

주신께서 말씀하신,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탄생한 신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하지만 어떻게?
직접 감찰하신 주신께서는 이곳에 새로운 신은 없다고 했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신격의 탄생을, 그 신격이 김우진의 죄수임을 위대한 주신께 알려야만 한다.

판단한 순간, 진로를 틀었다. 세계수가 아닌 하늘을 향해, 균열을 향해.

더 이상 세계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 다른 집행자들이 미끼가 되어준 덕분에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전력을 다해 날았다. 무조건 여기서
벗어나야 된다는 일념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렇게 간신히 균열에 도착해 넘으려는 순간.

───!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장벽이 그를 튕겨냈다.

“······!”

마물들에게 갉아 먹힌 장벽이 이렇게 빨리 수복되었다고?

- 삐삐!
“정령?”

파랑새 한 마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

이렇게 농후한 신의 힘이라니.

“네놈, 네놈이구나. 네놈이 바로 세계수의 정령체야!”

- 삐삐삐!

세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정도면 어지간한 성체 이상인···.”

- 너 모나가.

“뭐라고?”

- 드러오 대 마으대로, 나가 대 아냐.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파랑새가 부리를 벌렸다. 번개가 토해졌다.


“···이런 미친!”

혼타스가 다급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쩌엉, 가공할 충격에 그의 몸이 밀려났다.

“어떻게 세계수가 번개의 힘을!”

하물며 단순한 번개가 아니라 신의 힘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괴사에 그의 동공이 맹렬히 흔들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지직, 번개로 휩싸인 파랑새가 긴 궤적을 그리며 돌진했다.

──!

혼타스의 마력이 단숨에 소멸했다. 자그마한 파랑새의 몸통 박치기가 그의 내장을 진탕시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세계수의 힘이 이 정도라니!

순간 혼란이 왔다. 이게 정말 세계수일까? 이게 태어난지 얼마 안 됀 세계수가 맞다면, 이걸 뽑아버리는 게


중요할까, 새로운 신격의 정체를 알리는 게 중요할까.

아니.

‘뽑을 수는 있을까?’

우습게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주신을 섬기는 집행자인 그가, 기껏해야 싹을 틔운 지 2 년도 채 안된 세계수의 정령체를 상대로.

‘2 년도 안 됐는데 정령체도 만들어졌어?’

“하하···.”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순간, 아찔한 충격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조자, 브타. 다 모가.


- 마 아 드러. 나바.
- 대지. 대지.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이렇게 많은 마물들과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또 죽여도 밀려드는 마물들은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율리아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싸우면 싸울수록 힘이 넘쳐났고 전능감과 고양감이 그녀의 감정을 지배했다.

압도적인 힘으로 마물들을 쓸어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것을 더 없이 실감했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

검은 마기가 그녀를 덮쳤다. 바람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그녀의 본체를 두들겼다.

“저건···.”

검이 유료하게 움직였다. 갈라지는 바람의 틈새를 다시 닫고 풍랑을 일으켜 마기를 조각냈다.

거대한 마물이었다. 크기는 대략 20m. 다른 마물들과 비교해 엄청나게 크다의 느낌은 아니었으나 느껴지는
기운은 비교를 불가했다.

“당신이 이 마물의 대장이군요.”

마물이란 이지가 없으나 본능적으로 집단을 이룬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자가 자연스레 무리를 이끈다.

두리쉬마에 의해 여러 갈래로 쪼개진만큼, 여러 갈래의 새로운 우두머리들이 나왔다.

허나, 율리아 앞에 선 마물은 그 갈래의 하나가 아니었다. 무리가 갈라지기 이전부터 우두머리를 자처하며 무리를
이끌던 괴물이었다.

일반적인 차원 세 네 개 정도는 순식간에 멸망시켜버렸을.


어지간한 신들도 쉽게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당신을 죽이면 끝나겠군요.”

그렇기에 마땅히 그녀의 상대다.

김우진이 없는 지금, 연옥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율리아니까.

상대는 수많은 마물의 군단을 이끄는 만큼 강하다. 저 마물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며 연옥의 죄수들도 함부로 덤빌
수준이 아니다.

그녀가 상대를 죽여야지만 연옥의 피해가 커지지 않는···

“네놈이 여기서 제일 강하구나! 내가 상대해주겠다!”

은빛의 늑대가 마물의 무리를 뚫어내며 질주했다.

“앗, 기다려요! 저 자는 제 상대에요!”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마물에 니꺼 내꺼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저건 제가 맡아야 한다니까요!”
“웃기는 소리! 강자와 싸우는 것이 내 숙명이다! 수인은 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아!”
“오는 게 아니라 타르칸님이 가고 있잖아요!”
짐승과 하이엘프가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 * *

콰직, 가지 하나가 릴리에게 달려드는 마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 조아.

순조롭다. 소장의 뜻대로 감히 자신의 차원을 침범한 벌레들은 결코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 마무, 커.

연옥으로 향하던 모든 마물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의 마기침식은 없다. 릴리가 방벽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 지해자. 커.

집행자들의 대장을 그녀가 손수 막았다. 다른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사냥을 당하고 있다. 균열을 닫는 것과
함께 방벽의 방비를 더욱 단단히 굳히고 있으니 저들이 자력으로 나갈 수단은 없다.

남은 건 들어온 마물과 집행자들을 박멸하는 것.

마물들 중 꽤나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강자가 있긴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 기재이.

소장 다음으로 아끼는 하이엘프가 상대하고 있으니까. 신격을 얻었다고 갑자기 콧대가 우뚝 솟아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는 확실히 강자였다. 거기에 타르칸이라는 짐승도 합류했으니 결코 지지 않으리.

- 그러 끄.

그녀의 눈에는 마물들 간의 연결 고리가 보였다. 가장 강한 마물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지휘 체계는 놈이 죽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리아와 타르칸이 마물을 죽이면, 나머지는 지휘관을 잃고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봐야 연옥의
안이며, 도망치는 적들을 사냥하는 건 쉽다.

- 조자.

소장이 오면 칭찬해줄 거다. 부탁을 완벽하게 수행했으니 대가를 요구해도 될 테고.

무엇을 달라고 할까.

음흉한 미소가 피어났다.

“빨리 빨리 고쳐!”
“지금 말고 나중에! 마물들이 달려드는데 마력포를 고칠 여유가 어디 있느냐! 도끼로 머리부터 쪼개!”

거친 고함소리에 입가의 미소가 지워졌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에흐. 바부가트 나재이.

기껏 힘을 나누어주었음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자폭을 해버리다니.

이래서 세계수들이 드워프가 아닌 엘프들을 선택한 게 아닐까.

쯧쯧, 그녀가 혀를 차며 번개를 일으켰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세계수의 본체에 접근하는 마물들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
# < 078. 양아치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발레리안느는 주신을 제외한 백신전 상위 열 명에 꼽히는 대신이다. 오랜 세월 신으로서 살아왔고 군림해왔다.

그런 그녀의 신생에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주신, 알비츠께서 행하신 마물의 유도가 실패하여 주변으로 번지고, 신이 자신의 권역에서 실종되다니.

발레리안느는 주신의 명령을 받고 다른 신들과 함께 차원, 갈라스로 집행자들을 내려 보내고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차원에서는 업으로 인해 제약되지만 차원과 차원 사이의 통로에서는 그렇지 않으니까.

차원으로 들어가는 마물들을 최대한 줄여주고자 했다. 주신께서 작정하셨는지 마물의 수가 정말 어마어마했지만
어떻게든 되긴 됐다.

그런데 갑자기 신이 실종되다니.

‘네가 가주었으면 한다.’


‘예.’

알비츠의 명령에 차원, 드라스코로 향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백신전 소속인 신, 드라스코가 자신의 권역으로 삼은 곳.

어째서 그가 실종되었는지, 마물의 수준과 양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고 단순히


상황이 급박해 연락만 못하는 것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난장판이긴 하군.”

두 명의 신들과 함께 차원의 지척에 도달한 그녀가 목격한 것은 방벽에 수백 개의 균열이 생긴 드라스코였다.

꾸역 꾸역 밀려들어가는 마물들은 신의 힘이 아니라면 결코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들어가겠다.”
“그래.”
“별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세 명의 신이 권역에 발을 들였다. 권역의 주인인 드라스코만큼은 아니지만 일단은 신의 기운이 충만한 만큼,
그들 또한 일반적인 하위 차원에 비해 제약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세 명의 신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것이 그들의 패착이었다.

─────!

방벽을 넘어가는 순간, 밀려드는 새하얀 불꽃이 그들을 덮쳤다. 급하게 끌어올린 신의 힘이 저항했으나 불꽃은
그것마저 잡아먹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신들을 휩쓸고, 마물들을 집어 삼켰다.

“이게 무슨!”

한참을 밀려난 발레리안느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의 힘마저 불태우는 불꽃에 저항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허나,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새하얀 불꽃의 벽이었다. 신임에도 그것을 꿰뚫어볼 수 없었다.

당연했다. 새하얀 백염에는 농밀한 신의 힘이 가득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익숙한, 하지만 어떻게 보면 낯선 불꽃이었다.

“···칼카르님?”
“아쉽지만 틀렸어.”

대답을 바라고 한 물음이 아니었으나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제법 낯이 익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애병을 꺼냈다. 두터운 방패가 머리 위를 틀어막았다.

──!

방패가 찌르르 울렸다. 방패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전신이 흔들렸다. 이를 악물고 창을 내질렀다.

카앙, 불꽃의 검이 창과 부딪혔다. 신력과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김우진!”

발레리안느가 소리쳤다. 그녀의 분노에 상대가 웃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계약을 어길 셈이냐!”


“그럴 리가.”
“백신전이 두렵지도 않느냐!”
“너희 신년놈들을 하는 말이 하나 같이 똑같아. 계약을 어길 셈이냐? 혹은 신이 두렵지 않느냐. 분명히
말해주지.”
콰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에 방패가 움푹 들어갔다. 발레리안느는 애병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대장장이의 신이 단조한 방패를 이리도 쉽게 망가트리다니. 김우진은 그녀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나는 계약을 어길 생각이 없다.”

콰앙, 방패가 결국 반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백신전이 두렵지도 않아.”

쩌엉, 창이 날아갔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녀의 신력은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너 같으면 너보다 약한 놈들이 두렵겠나?”


“네놈···! 칼카르님을 어떻게 한 거냐!”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짐작하고 있잖아?

“내 권능이 무엇인지를. 어째서 네가 내 불꽃에서 칼카르를 떠올렸는지를.”


“···맙소사.”

정말로 김우진 따위에게 칼카르님께서 죽었단 말인가.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허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김우진의 불꽃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의 힘이 느껴지기에. 칼카르님과 비슷한 느낌이 나기에.


그의 무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했기에.
그리고 하필 칼카르가 알베니우스를 찾으러 갔다가 죽었기에.

“대체 어떻게···?”
“놈이 나보다 약했다. 그게 전부야.”
“헛소리 하지 마라! 칼카르님이 네놈 따위에게 패배하실 리가 없다!”

애초에 김우진이 칼카르를 죽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김우진과 백신전은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계약에
묶여 있···

“조력자! 네놈 조력자가 있구나!”

그 조력자는 결코 알베니우스가 아니다. 알베니우스 따위가 김우진과 힘을 합친다고 한들 칼카르님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김우진에게는 알베니우스와 세계수를 제외하고도 함께 칼카르님을 죽일 만한 조력자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마, 맙소사.”
“깨달은 모양인데.”

패닉에 빠진 발레리안느는 차마 대응하지 못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새하얀 주먹에.

“이미 늦었어.”

콰아아아앙!

* * *

“좋네요.”

드라스코를 제외하고도 신을 셋이나 더 잡았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생각 이상의,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힘을 확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정도면 주신 둘이 와도 해볼만 할 것 같은데.’

그 정도의 자신감과 충만감이 있었다.

물론 그건 만용일 거다. 칼카르가 그랬듯이 주신은 다른 신들과는 격이 다른 수준이니까. 하지만 한 명을


두리쉬마에게 맡기고 시간만 끌어준다면 다른 한 명은 반드시 끝장낼 수 있다.

백신전의 기둥을 상대할 수 있는 힘. 백신전을 무너트리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손에 넣은 느낌이다.

“더 문제가 생기기전에 가시죠.”


“아무리 그래도 넷은 너무 많은 것 아니야?”
“이 넷을 합치면 딱 여섯입니다. 시에나, 데르카인, 타르칸, 강민식, 소지 그리고 디아네까지. 적당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것들을 숨길 수 있느냐다.”
“걱정 마세요. 릴리가 다 알아서 해줄 겁니다.”

릴리는 만능이니까.

김우진이 능숙하게 기절한 신들의 목과 사지에 구속구를 채웠다. 신이 만들었기에 신마저 구속할 능력이 있는
기물.

물론 신이 깨어나 작정하고 풀어내면 막을 수 없지만 기절한 상태에서 힘을 감추기에는 더 없이 적합하다.

“들키기 전에 빠져 나가죠. 저희는 애초부터 연옥에 있었던 겁니다.”


“무려 넷. 상황이 이런데 저것들이 연옥에 감찰관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보낼까요?”
“무조건 보내지!”
“하긴, 저라도 저를 먼저 의심했을 것 같긴 하군요.”

하지만 그건 결국 나중의 문제다.


“일단은 빨리 가시죠. 저들이 눈치 채고 또 다른 신들을, 더 많은 신들을 보내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김우진이 흔적을 마저 지웠다. 그리고 마물들의 시체와 함께 뭉쳐진 마기 덩어리를 사방에 던졌다. 은은하게 남아
있던 신의 힘이 마기에 잡아먹히도록.

“두리쉬마한테 받은 건가?”
“예.”

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돌아온 연옥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제가 목을 베었어요!”
“내 손톱이 놈의 심장을 찌르는 게 더 빨랐다!”
“타르칸님은 계속 당하기만 했잖아요! 이 상처들, 전부 제가 입힌 거거든요?”
“웃기는 소리! 내 손톱과 발톱은 그 어떤 것이라도 찢고 가른다!”
“무모하게 달려가셔서 그것까지 막아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네가 아니었어도 나는 버티고 승리했을 거다!”
“아, 정말!”

거대한 마물의 시체 위에서 사이좋게 다투는 하이엘프와 달의 늑대.

누가 저들을 엘프들의 귀족과 수인들의 귀족이라고 한지 의문이다. 그냥 팔푼이들인데.

어쨌든 자신들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했다. 저들이 잡은 게 대장인지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토벌 당한 상태였으니까.

- 조자!

“역시 날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릴리뿐이야!”

저 멀리서부터 날아온 파랑새가 김우진의 품에 안겼다.

- 저부 자바.

“전부 잡았어?”

- 으.

“잘했어, 정말 잘했어.”

릴리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해달라는 뉘앙스에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했다니. 릴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 그거?
릴리의 시선이 김우진의 뒤를 따라 둥둥 떠다니는 네 구의 신들에게 향했다.

“선물이야. 배터리 3, 4, 5, 6. 어때? 마음에 들어?”

- 이거 저부?

“응. 전부 품어서 숨겨줄 수 있지?”

- 아니.

릴리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 마나.
- 너므.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든 다 우겨 넣으면 되지 않을까?”

- 아대.
- 마나.

“아니야, 릴리. 넌 할 수 있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더 가져.”

- 모해.
- 아대!

“거봐, 아무리 릴리가 만년 정도 산 세계수도 아니고 신 여섯을 한 번에 품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잖아.”

알베니우스가 한 마디 보탰지만 김우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네 부탁을 무조건 적으로 하나 들어준다고 하면?”

잠시 고민하던 릴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러 대.

“······.”

이런 양아치 같은.

누구 자식인지, 참 잘 컸다.

* * *

네 명의 신을 릴리에게 넘겼다.
가지와 뿌리들이 신들을 감싸며 세계수 안으로 끌어들였다.

막대한 신력이 세계수를 감쌌다.

- 끄억, 배.

릴리의 거북한 트름을 했다. 어째서인지 조금 통통해진 것 같았다.

- 더, 아대. 저대.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

“그래, 나도 더 잡아올 생각은 없어.”

잡아올 수도 없다. 백신전도 바보가 아닌 이상, 더 이상 잡아오게 만들지도 않을 거다.

- 마나.
- 지주해야 해.

릴리가 술 취한 것 마냥 비틀거리며 떠나갔다.

“···괜찮으려나.”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저는 릴리를 믿습니다.”

저래 보여도 릴리는 은근히 칼 같다. 정말 안 되는 거였으면 끝까지 거부했을 거다.

“오셨습니까.”

신들을 넣어두고 집무실로 오니 부소장이 그들을 반겼다.

“씨발, 깜짝이야! 정말 너랑 똑같이 생겼어!”


“꼭 그렇게 욕을 해야 합니까?”
“너 같은 놈이 둘이나 있는데 욕이 안 나오고 배겨?”
“그대로 돌려드리죠. 부소장, 이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도 돼.”
“예.”

김우진이 부소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에게 주었던 신의 힘을 다시 회수했다. 부소장이 모습이 다시 변했다.

“상황은?”
“세계수가 균열들을 모두 닫았고 마물들을 이끌던 대장은 율리아와 타르칸의 손에 죽었습니다.”
“집행자들은?”
“총 51 명의 집행자들이 마물들이 벌려 놓은 균열을 통해 연옥으로 들어왔고 베르너와 디아네를 비롯한
집행자들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많군.”

집행자를 51 명이나 보내다니. 확실히 놈들이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을 텐데?”


“저와 교도관 일부가 소장님을 연기하며 합류했습니다. 그들이 지레 겁먹은 덕분에 한결 편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들키지는 않았고?”
“마지막까지 제가 소장님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신들을 상대로는?”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소장님께 받은 힘을 사용할 때마다 변신이 풀릴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무엇보다
제 몸이 소장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결국 네놈도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군.”

서늘한 눈빛에 부소장이 움찔했다.

“다른 이들은?”
“흩어진 마물과 집행자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세계수가 자신했으니 그들이 빠져 나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잘 됐군.”

적어도 여기까지는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다.

백신전의 의도를 어그러트리고 거하게 한 방을 먹였다.

과연 지금 백신전 놈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직접 보지 못하는 게 한이다.

김우진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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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79. 투자 >

마물을 통제하지 못해 일어난 재앙은 종식되었다.

신들이 직접 나서 통로에서 추가 유입을 끊어내고 권역인 곳에는 신들이, 그렇지 않은 곳에는 집행자들이 다수
투입되었다.

그 결과, 범람한 12 개의 차원들 모두 무사했다.

재앙은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고, 눈앞에서 재앙과 신의 이적을 함께 목격한 12 개 차원의 피조물들은 더욱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하지만 좋은 건 딱 여기까지였다.

모든 신들의 이목이 집중된 무거운 분위기 아래 집행자가 보고를 시작했다.

“···연옥의 균열이 모두 닫혔습니다. 연옥으로 들어간 51 명의 집행자들의 소식이 전부 끊어졌습니다.”


“성공했을 가능성은?”
“뿌리를 내린 세계수가 죽는다면 방벽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연옥의 방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 세계수가 발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연옥의 방벽이 흔들려 김우진에게 경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세계수의 존재를 눈치 챘어야 했다. 하지만 설마 세계수를 심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김우진이 이상한 짓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통한의 실수였다.

“역시 마물이 분산된 게 크다. 김우진을 뚫어내려면 모든 마물들이 연옥으로 향했어야 하는데 13 갈래로 분산되어
버렸으니···.”

물론 그것만으로도 능히 차원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으나 신조차 죽이는 김우진에게 한 방 먹이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다.

“신, 드라스코는 물론이고 드라스코의 실종에 그를 찾으러 차원, 드라스코로 향했던 발레리안느를 비롯한
나이아린, 콜키트의 흔적도 사라졌습니다.”
“···신 넷이 한꺼번에?”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신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나?”


“강대한 마기가 느껴지는 마물의 시체가 다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꽤나 격전을 벌인 듯 한 흔적 또한···.”
“마물의 수준은?”
“시체에서 느껴지는 마기와 전투의 흔적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집행자들을 뛰어넘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
“그럴 리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집행자들을 뛰어넘는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한다.

신. 마물들 중 신에 필적하는 강자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물론 마물들은 결국 빛으로 대표되는 아카식 레코드의 대척점에 선 어둠의 사도들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신급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알비츠. 이걸 네가 몰랐을 리는 없다고 본다만.”


“알고 있었다. 평소보다 강한 마물들이 포함되긴 했지만 김우진을 끝장낼 작정으로 오히려 더 끌어들였으니까.”

그게 설마 신의 권역으로 흘러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네 유도가 어그러진 것은 그놈들 때문일 가능성이 높군.”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무슨 뜻이지?”
“회의가 소집되기 직전, 아카식 레코드를 살폈다. 그 어디에도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새로운 신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존의 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겁니까?”


“아마도.”
“하지만 마물들과 싸우고 실종되었는데 어떻게···?”

마물은 무조건적으로 빛을 파괴하는 대적이다. 거기에 협상과 여지 같은 게 끼어들 공간은 없다.


“누군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네 실수를 조금이라도 덮기 위해서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냐? 마물 사태에 누가 개입되어 있다고?”
“아니, 마물이 아니라 신들의 실종을 이야기하는 거다.”
“또 김우진이 문제라고 이야기 하고 싶은 거냐?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51 명의 집행자들 중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세계수마저 멀쩡한 게 그 증거다.”

김우진이 없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김우진은 연옥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발레리안느를 비롯한 세 명의 신을 흔적도 없이 납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곳에는 김우진의 흔적 대신 마물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김우진이 마기에 먹혔다는 건 더욱 우스운 말이고.”

물론 김우진이 강한 것은 이 자리의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김우진이 신을 죽일 만큼, 신에 필적하는 강자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의 권역에서 신 셋을 한꺼번에, 그것도


그들이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찍어 누를 정도의 괴물까지는 아니니까.

백신전에서도 그건 주신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발레리안느는 주신들을 제외하면 백신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가 아니던가.

“······.”

그 사실을 알기에 알비츠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지? 그들은 사망이 아니라 실종되었다. 마물들이 신을 납치해서 마계로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하나?”
“확실히 그건 좀 의외이긴 하다.”

적어도 백신전이 생긴 이래로 마물들이 신을 잡아간 역사는 없었다. 애초에 신이 마물에게 당한 경우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둠은 생명체들을 타락시킵니다. 어쩌면 잡아간 신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히 신을?”
“어둠 또한 아카식 레코드에 준하는 세계의 법칙이 아닙니까.”

한 신의 말에 베리안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이 마물 따위에게 당한 적이 처음이라 혼란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피조물에서 신으로 격상되었을 뿐이다. 신이 된 입장에서 결코 믿을 수 없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 신들인


그들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넘쳐난다.

“일단은 그 가능성이 가장 높군. 상대가 신이기에 더욱 공을 들여야 하고 그래서 납치했다고 하면 그럴 듯해.”

피조물들의 타락에는 그런 시간과 노력이 필요 없지만 그들은 빛의 가호를 받은 신이니까.

“하지만 타락하게 되면 신격을 박탈당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받은 저희가 어둠의 힘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가능성은 세 가지겠지.”

단순히 그들의 죽음이 생각보다 늦어 아직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하는데 텀이 있었거나, 어둠이
그들을 타락시키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제 3 의 세력이 있거나.

“제 3 의 세력이 아니라 김우진이다. 만약 마물의 짓이 아니라면 김우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김우진도 할 수 없다고 보는데.”
“넌 대체 누구의 편인거냐, 베리안.”
“상식적으로 이야기하자는 거다. 이번 사태는 너의 실수로 이루어졌다는 것과고 함께.”
“알고 있다. 아무리 주신이라 한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는 것도.”

본래 주신은 모든 책임에서 자유롭다. 허나, 아무리 백신전의 법도가 그렇다고 한들 진짜 무책임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를 따르는 신들의 믿음이 약해진다.

주신이 그, 한 명뿐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마물들은 우리가 평소에 상대하던 자들과는 다르다. 감히 신들을 상대로 승리하고, 신들을 납치했지. 상대가
상대인만큼 이쪽에서도 주신이 나서야 한다.”

알비츠가 무표정하게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가 직접 나서겠다. 사라진 네 명의 신을 반드시 찾아오지. 죽었다면 시체라도 들고 돌아오마.”


“···직접 나서겠다고?”
“문제 있나?”
“아니, 없다. 백신전은 내가 잘 지키고 있도록 하지.”
“대신 다른 것은 맡기겠다. 특히, 김우진.”
“얼마든지.”

알비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35 명의 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자.”

베리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계수를 뽑아버리고 김우진에게 죽은 51 명의 집행자들의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지.”

두 번의 실패는 용납하지 않으니.

“기탄없이 말해보아라.”

* * *

- 끄어.
- 꺼꺼.

큰일 났다.
김우진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릴리의 덩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세계수에서 틈틈이 새어나오는 신의 힘은 릴리가 명백한 소화불량에 걸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넷은 너무 많다고 했지?”


“그런 말보다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시죠.”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그렇다고 먹은 걸 다시 토해내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애초에 릴리가 아니면 신들을 보관할 다른 대안이 없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자니 반드시 신에게 들킨다. 무언가 대안이 필요했다.

결국 김우진은 죄수들을 대표하는 여섯 죄수들을 소집했다.

“힘을 모두 소진시켜 버리는 건 어떤가? 그렇지 않아도 첫 마력포가 실패하면서 개조를 잔뜩 했네. 이번 포신이
얼마나 에너지를 버틸 수 있을지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는데 말이네.”
“그것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죠.”
“그렇다면 구속구 전부 채워서 봉인시키면 어떤가?”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겠군요.”
“구속구를 내가 개조해보는 건? 요지는 신들의 힘을 줄이면 되는 것 아닌가.”

데르카인의 제안은 제법 그럴 듯 했다. 문제는 신이 만든 구속구를 그가 개조할 수 있을까였지만 그의 실력은


꽤나 정평이 나 있는 만큼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일단 그건 그대로 해보죠. 하지만 역시 확실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우진이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의견을 구했으나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신을 포기하는 건 어떻니?”


“이제 와서 몇 개를 포기하면 그게 더 문제입니다. 저들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도 없으니.”
“죄송합니다, 소장님. 저 또한 뚜렷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불민한 종을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할 테니까 책상에 머리 박지 마. 율리아, 넌 뭐 없어?”
“저요?”
“난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왜 저죠?”
“네가 하이엘프니까.”
“하이엘프라고 어머니 나무에 대해서 잘 알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편견이에요.”
“징계방에 들어갈래?”
“그러니까 제 말은 그 편견이 사실이라는 거죠. 편견이 나쁜 건가요? 때론 옳은 편견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해요.”
“말로만?”
“지금의 상황은 결국 어머니 나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신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답은 두 개 중 하나네요. 신을 빼거나, 어머니 나무를 더욱 성장시키거나.”

맞다. 하지만 전자는 어려우니 후자를 택해야 하는데 후자라고 쉬운 게 아니었다.


오랜 세월 천천히 자라는 세계수를 급성장 시키는 게 어디 쉽겠나. 발아하면서 급성장한 것 자체가 연옥이라는
특수성과 수많은 영약들, 그리고 씨앗 상태일 때 이루어진 김우진의 간섭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이적이었다.

“음.”

김우진의 기대어린 표정에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게 기대하시는 게 어떤 건지는 알지만 어머니 나무를 급성장 시키는 물건이나 영약, 마법 같은 건 없어요.”

애초에 엘프들에게 세계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성한 나무다. 그러한 나무를 가지고 이런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 정말 방법이 없다는 건가?”


“아뇨, 방법이 없다고는 안 했는데요.”
“방법이 없다며?”
“어머니 나무를 급성장 시키는 방법이 없다고 했죠, 해결책이 없다고는 안 했어요.”
“······?”

모두의 의아한 시선에 율리아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 더 심어버리죠.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야? 세계수의 씨앗을 어디서 구하고?”
“저기서요.”

율리아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지목 당한 강민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

“어머니 나무시여.”

- 무언가 일어나고 있구나.

거대한 노루가 사라지는 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십의 집행자들과 함께 동행한 그들은 제 멋대로 차원을 이 잡듯이 뒤졌다.

저항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하나라면 모를까, 신이 무려 다섯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뿌리를 내린


차원이라고 한들, 신들의 힘이 제약된다고 한들 한계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저들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 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세계수이며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여러 차원의 세계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백신전의 무분별한 작태가 전 차원의 세계수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어째서일까.
- 저들은 우리들에게는 늘 호의적인 자세를 취해왔는데.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것도 백신전의 신들이 이렇게 다급하게 움직일 정도의 문제가.

- 신이 다섯이나 뭉쳐서 다니는 것 부터가 정상은 아니긴 하다만.

그 오만하고 독선적인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다섯이서 뭉쳐 다니다니.

아무리 세계수를 윽박지르기 위해서라지만 너무 과하다.

-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 같으냐.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 죄송할 필요 없다. 나 또한 모르니.

허나, 대충 짐작이 가는 건 있다. 백신전이 저렇게 발작을 일으킨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으니.

- 타이탄들이 그러했고.

물론 타이탄들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그녀가 직접 겪은 건 아니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에서 읽었다.

- 가루다들이 그러했으며.
- 포이닉스들이 그러했고.
- 차원용이 그러했지.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태생적으로 우주의 힘을, 신의 힘을 품고 있다는 것.

백신전은 자신들 외의 도전자를 용납하지 않으니.

- 더 없이 오만한 놈들이지.

허나, 그 오만을 징죄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건 오만이 아니라 절대자의 마땅한 지배다.

- 헌데 우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씨를 말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던 건가.

순록이 웃었다. 아카식 레코드더 깊숙한 곳에 뿌리를 뻗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대한 지식은 그녀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파편만으로도 큰 진리로 다가오니까.

차원의 방벽이 열리고 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계수의 가지가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갔다. 신들의 흔적을 지워냈다.

- 다이안.

“예, 어머니 나무시여.”

- 소금을 뿌리렴. 저들이 있던 자리에 모두. 꼴도 보기 싫구나.


“예, 그리하겠습···.”

그때였다. 차원이 다시 열렸다. 다이안이 경계했으나 순록은 달랐다.

다가오는 기운은 제법 낯이 익었다. 동시에 낯설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기에.

그렇기에 그녀는 깨달았다. 상대가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었다는 것을.

- 참으로 공교롭구나. 하필 이 시점에 네가 나타나다니.


- 아직도 스스로를 집행자라고 소개할 참이냐?

“글쎄, 딱히 중요한 건 아니라서. 역시 릴리가 더 귀여워.”

불청객, 김우진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크라프트의 세계수. 나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씨앗을 넘겨라.”

───────────────
# < 080. 소금 >

세계수의 씨앗이란 무엇인가.

씨앗은 열매에서 비롯되지만 열매와는 또 다르다.

맺힌 열매를 건드리지 않고 백년을 놔두면 씨앗이 과실을 모두 흡수하고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게 온전한
세계수의 씨앗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만으로 해결이 되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쩌면 세계수는 모든 차원에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

열매 안에 자리한 씨앗이 흡수하는 건 단순한 과육만이 아니다.

과육의 영향만으로는 씨앗은 발아하지 못한다. 주변의 마나만으로도 마찬가지.

세계수는 열매가 완전한 씨앗이 되는 백여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정기를 주입한다. 그것인 어찌보면 세계수의
정수라고 할 수도, 세계수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백년은 세계수에게 있어 무척이나 고된 시간이고 맺은 뒤에도 한동안은 죽은 듯이 지내야 한다고


한다. 때문에 많은 세계수들이 씨앗을 잘 맺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다.

그래서 세계수들은 평생에 적게는 한 개, 많게는 세 개 정도의 씨앗 밖에 만들지 않는다.

그게 율리아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만년을 산 어머니 나무라면 반드시 씨앗 하나 정도는 여분으로 만들어두셨을 거예요.”

세계수가 아무리 위대해도 결국 만능은 아니다. 세계수가 있음에도 종말을 맡이한 차원도 있는 만큼, 세계수들은
마약에 대비해 항상 씨앗 하나를 움켜쥐고 있는 다고 한다.

데이드람의 경우 그게 릴리였고.

“하지만 준다고 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날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께서 소장님한테 투자를 하신다고 했잖아요? 씨앗을 투자하라고 하세요.”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내야죠.”
“너 하이엘프 맞냐?”
“어머니 나무를 존중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니까요. 백신전에서 어머니 나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더 깨달았어요. 백신전은 사라져야 해요.”

지극히 하이엘프다운 발상으로 이어지는 걸 보니 하이엘프가 맞았다.

“결국엔 또 나보고 기사 노릇을 하라는 거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백신전은 가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 같으니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요.”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고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돌아다녔다가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걸려!”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으면 걸리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신들을 들키게 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두리쉬마가 기껏 자신을 일부 드러낸 의미도 사라지고.

“···제기랄. 좋아. 씨앗을 얻어온다고 치지. 그리고 그 다음은? 씨앗이 발아하는 게 하루 이틀만에 될 리가
없잖아? 백신전 놈들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51 명의 집행자들이 뒤졌는데 몇 달 동안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율리아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어떻게?”
“제가 신격을 얻었잖아요? 바람과 자연에 대한 권능이 더 강화 되었어요. 제가 보살피면 발아하는 시간이 대폭
단축될 거예요. 그리고 릴리 어머니 나무께서도 함께 하신다고 했어요.”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한 차원에 세계수가 둘이나 있는 게 말이 돼? 그걸 용납한다고?”

알베니우스의 또 다른 반론은 릴리에 의해 격침되었다.

- 도새. 조아. 나. 보사펴.

살찐 릴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요, 알베니우스님. 어머니 나무가 한 차원에 하나만 있는 건 서로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세계수의 뿌리는 차원 전체로 뻗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차원의 마나를 양분으로 삼고 다시 환원하여 마나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그게 두 그루가 되면 서로의 마나를 삼키기만을 반복하여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인 거다.
차원이라는 영역은 정원이 한 명으로 정해져 있는데 인원이 많아지는.

하지만 그것 또한 한 그루로는 감당 못할 수준으로 마나가 풍부하면 해결이 된다.

“저희에게는 신들이 있으니까요.”

무려 여섯의 신들과 교차 차원이라는 이점으로 인해 원래부터 풍부한 마나까지.

두 그루가 아니라 세 그루를 심어도 문제가 없게 되었다.

- 배브러.

릴리가 빨리 털어내고 싶다는 듯 알베니우스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여유가 좀 있습니다. 신을 넷이나 잡아온 지 일주일이나 됐는데도 백신전놈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건 제가 던져놓은 수가 통했다는 뜻이니까요.”

놈들은 미끼를 물었다.

아마 지금쯤 마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게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거다.

그 시간은 두리쉬마의 역량에 달려 있다.

“저희한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거죠.”


“단순한 추측 아니야?”
“물론 여전히 제게 시선을 때지 않고 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알베니우스를 찾기 위한 행보가 계속되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경쟁자를 병적으로 파멸시키는 백신전의 행적을 비추어보았을 때, 율리아의 존재는 그들에게 차원이
다르게 다가간다.

그녀가 신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백신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죽이려고 할 거다. 김우진 그와는
다르게 계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으니 더욱 거리낄 것도 없다.

“···어쩔 수 없군. 가야지.”

그 산증인인 알베니우스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구하러 가는 것과 저는 다른 이야기 아닌가요?”


“결국 같은 이야기야. 결국 신들을 잡아두고 있는 목적이 새로운 신격들을 이쪽에서 탄생시키려고 하는 거니까.”

율리아의 신격을 감추기 위해서는 구속구만 있어서는 안 된다. 집행자들의 신의 힘을 주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 위에 세계수의 정기를 덮어씌워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주신을 속일 수 있다. 삼박자 중 하나라도 어그러진다면
무의미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수가 뽑히면 안 되고 신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으려면 신들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 다
이어지는 이야기다.
“문제는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순순히 씨앗을 주느냐, 마느냐인데.”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뭐라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올 테니까요. 뿌리를 뽑아서라도.”
“세계수의 정령과 하이엘프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는 말은 제가 아니라 그 하이엘프가 먼저 했습니다만.”
“···제가! 제가 노력해볼게요. 뿌리를 뽑기 전에 순순히 주시도록.”

김우진의 눈빛에서 설득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율리아가 다부진 각오를 세웠다.

물론 그 어머니 나무는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 나무가 죽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 * *

-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씨앗을 넘기라고?

“제대로 들었다.”

- 아하, 그러니까 진짜로 너에게 씨앗을 넘기라고?

순록이 헛웃음을 지었다.

- 미쳤구나?

그래 미친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감히 세계수에게 씨앗을 강탈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 아까 전에는 백신전놈들이 나의 영역을 이 잡듯이 뒤지더니 이제는 집행자놈이 씨앗을 탐내?

쿠그그그, 세계수의 분노에 나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엔트. 세계수의 정기를 오랫동안 받아온 식물들에서
비롯되는 정령들.

“거절인가?”

- 그럼 그 헛소리를 받아 들일거라고 생각했니?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 투자와 강탈은 엄연히 다른 법이란다. 넌 조금 더 예의를 배울 필요가 있겠구나.

“잠깐, 잠깐만요!”

그때, 율리아가 김우진과 세계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번 일은 저에게 맡기신다고 했잖아요?”


“···뭐, 그러도록 하지. 아, 그리고 거칠었던 언사는 사과하지. 조금 상황이 급해서 나도 모르게 툭 뱉고
말았군.”
김우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어이가 없지만 사과는 받아들이도록 하지.


- 너는 그때 보았던 다른 차원의 아이구나.

“안녕하세요, 어머니 나무님. 오랜만이에요. 정식으로 요청 드릴게요. 부탁드려요. 저희는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필요해요.”

- 어째서?
- 나는 너희들이 정확히 누군지도, 왜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는데.
- 그런데도 그냥 씨앗을 주는 건 이상하지 않니?

옳은 소리다. 하지만 율리아는 거기에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세요?”

-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지.

“그럼 알고 계시네요. 어머니 나무 같은 분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짐작한다고 하시진 않으실 거 아니에요?”

- 흐음.

정곡이었다.

- 제법 당돌하구나.
-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니. 너희가 오기 얼마 전에 백신전의 신들이 다섯이나 왔단다. 반역자를 찾는다는구나.
단순히 나뿐 아니라 전 차원의 세계수들을 들쑤시고 있지.
-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 너희가 왔고.

“투자의 대가로 원하시는 게 정보인가요?”

- 투자를 해달라고 했지? 이건 투자를 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전정보에 불과하단다. 대가가 될 수는


없지.

“하지만 정보만 듣고 투자를 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오히려 저희가 곤란하잖아요?”

- 그건 투자자의 마음 아니겠니?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율리아와 김우진은 일반적인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다.

“아니에요.”

- 아니라고?

“어머니 나무께서 원하시는 건 여러 신들이 얽힌 복잡한 우주의 비밀이에요. 그런 걸 공짜로 듣는 게 더 양아치


같지 않아요?”

- 내가 양아치라고?

“아, 죄송해요. 말이 헛 나왔어요.”


- 너···!

순록이 눈을 치켜떴다.

“아무튼, 씨앗만 주신다면 원하는 것들을 다 알려드릴 수 있어요. 물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맹세도
하셔야 하지만요.”

-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감히 하이엘프가 나를 겁박하다니.

“겁박이 아니라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정체를 짐작하신다면서요? 정보를 먹튀하시면 저분이 어떻게 나올지
아시잖아요?”

- 나는 세계수다. 내 뿌리는 차원 전체를 뒤덮었고 그 끝은 아카식 레코드에 맞닿아 있어.


- 헌데 감히 네가 나의 영역에서 나를 협박하는 거냐?

순록의 눈에서 광채가 일렁였다. 가지의 파도가 일어났다.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제발 이번 한 번만 부탁을 들어주세요. 다 어머니 나무님을 위해서예요.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해요. 저는 하이엘프에요. 절대 어머니 나무께 해로운 일은 하지 않아요.”

- 헛소리는 그쯤하려무나.
- 너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순록이 율리아를 밀어냈다.

- 넌 아마도 연옥의 소장, 김우진이 맞을 거다. 그렇지?

“아니라면?”

-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 나도 다 보고 들은 것이 있단다. 이건 물음이 아니라 확신이야.

“내가 김우진인 걸 알면서도 그렇게 나오는 건가?”

- 그러는 너야 말로 세계수를 너무 얕보는구나.


-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너,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군.”

- 네가 백신전의 신이나 집행자라면 모를까, 그들의 적인 이상 내가 너의 손을 잡아서 득 될게 있을까?

“그래.”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불태워버리고 아직 남은 마물의 흔적을 던져버려야지.

사실 크라프트에 오면서 대충 이렇게 될 거라는 예상은 했다. 세계수는 자신의 씨앗을 절대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으니까.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더욱 더.

그래서 초반부터 세게 나간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결과는 네가 자초한 거다. 그러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봐.”

김우진이 불꽃을 피워냈다.

- 신에게 패배해 묶인 개 주제에 입이 살았구나!

“···그러니까.”

세계수가 요동쳤다. 불꽃과 나무가 충돌하려는 순간, 율리아가 그 사이를 다시 가로 막았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율리아가 감추고 있던 기운을 일거에 폭사시켰다. 그 광활한 마나와 신의 힘에 엔트들이 뭉개졌다. 순록이 튕겨져
나갔다.

- ···너. 어떻게?

나무들이 세계수의 통제를 벗어나 율리아를 따랐다. 나무가 나무의 대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순록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잘나신 권역에서 제가 어떤 존재인지 눈치도 못 챘으면서 어떻게 소장님을 상대할 생각을 하세요?”

율리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순록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권역에서도!”
“저보다도 약한데!”
“어머니 나무께서는 겨우 이 정도인데!”

나무들이 일제히 물러나 길을 만들어주었다.

“소장님은 저 같은 거 열 명이 덤벼도 못 이기니까 제발 그냥 씨앗 좀 주시라고요.”

율리아가 으르렁거렸다.

“제가 직접 씨앗을 뺏어서 어머니 나무의 자리를 계승시키는 게 싫으시다면요.”

- ······.

순록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행이에요. 말이 통해서.”

율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세계수의 씨앗을 폼 속에 넣었다.

“···말이 통한 건가?”

이럴 거면 그냥 내가 협박해도 똑같지 않았나. 김우진이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의심이 깊어지시니까요. 무엇보다 소장님의 정체를 알고
협상할 의지 자체가 없다는데 어떡해요? 협박이라도 해야죠.”
“누가 너를 하이엘프라고 생각할까.”
“다 어머니 나무를 위해서였어요. 소장님은 일단 가지 몇 개는 불태우고 시작하셨을 거잖아요?”
“······.”

그럴 생각이었다.

직접 힘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찍어 누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으니까.

“하지만 제가 했으니까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죠.”


“뭐, 그렇다고 해두지.”
“계약서도 썼으니 비밀은 지키시겠죠?”
“지킬 수밖에. 아키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아 있는 만큼, 계약서의 법칙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을 테니.”

씨앗을 받고 떠나기 전, 김우진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꺼내 비밀유지계약서를 작성했다.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앙심을 품고 김우진에 대한 정보를 백신전에 발설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맞아요.”
“그리고 틀린 게 있어.”
“뭐가요?”
“너 같은 건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 와도 이길 자신이 있거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말이.”

율리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든 확실한 게 좋은 법이야. 저 세계수도 애매모호하게 선을 타니까 이 사단이 났잖아?”


“그건 그렇네요. ···근데 정말 100 명도 안 돼요? 저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데?”
“아직 백 년은 일러.”
“소장님은 아직 백 년도 못사시지 않았어요?”
“알베니우스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다고 했더라.”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소장님 몇 살이에요?”
“신들이 눈치 채기 전에 빨리 떠나자. 급해.”
“소장님!”

율리아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김우진을 다급히 따라갔다.

- 다이안! 저 녀석들이 밟은 모든 땅에 소금을 뿌리렴!

“예, 어머니 나무시여.”

- 다신 오지 마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

창피를 당한 세계수가 학을 땠다.

───────────────
# < 081. 경고 >

“주신이시여. 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고 백신전으로 돌아온 베리안에게 기다렸다는 듯, 전령이 다가왔다.

“다른 이들은?”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겠다.”

주신 알비츠가 여러 신들과 함께 떠나고 연옥에 투입한 51 명의 집행자들이 실패해버린 상황에서 백신전은 전략을
바꾸었다.

“더 이상 꼼수를 부린다고 통할 것 같지가 않군.”

죄수를 넣어서 탈옥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수는 연옥의 방벽에 간섭할 수 있으니까.

집행자들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로는 절대 김우진을 잡을 수 없으니까.

신들이 직접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계약에 묶여 있으니까. 김우진을 죽이는 것도, 연옥에서 싸우는 것도 문제다.

마물들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작금의 사태가 일어났는데 또 다시 마물들을 이용할 수 있을 리가.

“인정하겠다. 김우진을 잡을 방법은 정공법 밖에 없음을.”

베리안의 말에 한 신이 물었다.

“정공법이라 하심은?”
“김우진을 연옥의 소장으로 묶어둔 것 자체가 나의, 우리의 실수였다.”

백신전은 김우진이라는 폭탄을 연옥에 영원히 묶어둘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오히려 김우진보다 이쪽에
가해지는 부담이 더 컸다.

가진 것의 차이다. 백신전은 이 세상을 가지고 있고, 김우진은 아무 것도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계약의 빈틈을 노려 신들을 엿 먹이고 다녔고 어느새 그 칼이 신들의 턱 밑까지 들어왔다.

놈을 묶어두고자 했던 계약이 오히려 반대로 신들을 구속하는 구속구가 되었음이다.

“놈은 벌써 알베니우스와 접촉했고 세계수와도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차근 차근, 이후를 대비하고 있다.

50 명의 죄수들을 출소 시키고 연옥의 굴레에서 벗어난 김우진이 할 일이 과연 무엇일까.

뻔하다. 복수. 그의 불꽃은 반드시 백신전을 불태우기 위해 타오를 것이다.

그에게 복수의 마음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 언제든 신을 죽일 수 있는 부외자는 백신전에게 크나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가 죽든, 백신전이 망하든 같은 우주 아래 함께 살 수 없게 된 것은 명확했다.

“하물며 갑작스레 마물들까지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비록 알비츠의 실수라고 한들, 신을 능욕하고
납치할 수준의 강대한 마물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이 한둘일까. 백신전은 이미 멸망해 소멸을 기다리는 변방 차원에서 눈을 땐지 오래고 그 덕분에


마물들은 아무런 견제 없이 무럭 무럭 세력을 길러왔음이 분명하다.

마물과 김우진. 백신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둘 모두 토벌해야만 한다.

“변방 차원은 많다. 당연히 마물또한 많지. 그리고 마물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카식 레코드와 함께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어둠의 법칙이다. 빛이 존재하는 한, 어둠이 있다. 백신전과
생을 영위하는 피조물들이 있는 한, 죽음을 쫓는 마물들은 어디서든 탄생한다.

백신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수를 줄여 백신에게까지 큰 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허나 그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긴 싸움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치워버려야 할 것은 명확하다.”

김우진. 결국에는 또 김우진이다.

“놈에게 씨앗을 넘긴 세계수는 찾았느냐.”


“···죄송합니다, 아직. 하지만 짐작이 가는 게 있습니다.”
“짐작?”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집행자의 보고에 신들이 반색했다.

“어디냐.”
“크라프트입니다.”
“크라프트? 크라프트라면 세계수가 있는···.”

베리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른 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우진은 알베니우스와 접촉했다.


알베니우스는 김우진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고 김우진은 그것을 연옥에 심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크라프트에서 발견되었다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놈이구나.”
“그놈이 확실합니다!”
“크라프트의 세계수라면 1 만 2 천년 가까이 살아온 노목입니다. 놈의 뿌리는 아카식 레코드에 닿아 있습니다.”
“헌데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 만년을 넘게 살았다면 우리의 존재에 대해 보다 명확히 알고 있을 텐데 김우진에게
붙었다고?”

만년이 되지 않은 세계수는 그저 신들이, 백신전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지만 만년이 넘어간 세계수는 아카식
레코드로 말미암아 백신전의 저력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이다?”
“세계수들은 언제나 저희를 동업자로 여깁니다. 저희의 자비 하에 동등한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헌데 진실을 알고, 그 격차를 깨달았으며, 저희가 백신전에 대항하는 자들을 어떻게 처벌했는지
알았다면 오히려 백신전을 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신은 ‘대항하는 자들을 토벌’이라고 했지만 그게 ‘신력을 가진 종족의 멸종’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신의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신의 힘을 가진 한 종족이 토벌 당하자 덩달아 들고 일어난 종족도 있었으니까. 가루다들을 먼저


멸종시키자 참고 있던 타이탄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처럼.

“그렇다면 더욱 빨리 본때를 보여줘야하는 것 아닙니까?”

만년이 넘은 세계수가 크라프트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 보면 그저 해프닝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다수를 이끄는 것은 소수다. 다수를 감염시키는 것도 소수다.

그리고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씨앗을 넘김으로서 백신전은 분명한 타격을 받았다.

“메이린.”
“예, 주신이시여.”

검은 머리의 여신이 앞으로 나섰다.

“신 아홉을 뽑아 함께 크라프트로 가라.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에 대해 묻고 만약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와장창, 베리안이 들고 있던 술잔을 깨트렸다.

“뿌리를 뽑아라. 다시는 이런 종자가 나오지 않도록 확실하게. 감히 백신전에 반기를 든 자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모두에게 알려주어라.”
“예. 명을 따릅니다.”

열 명의 신들이 백신전을 떠났다.

* * *

- 뭐냐, 대체 뭐냔 말이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불청객들의 방문에 세계수의 정령, 순록은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 신···?

김우진과 그 개 같은 하이엘프를 보낸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시 신들이 오는 걸까.

하물며 한둘도 아니었다. 무려 열. 이전의 다섯보다도 두 배가 더 많다.

- ···이거.

불안하다. 순록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열 명의 신들이 수십의 집행자들과 함께 세계수의 영역을 침범했다. 나무들이 저항하지 않고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곧 순록의 앞에 섰다.

“반갑다, 크라프트의 세계수여.”

이전에 왔던 신들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강하고 격이 높다.

주신이 직접 이곳까지 올리는 없으니 주신을 제외한 상위 10 명의 신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백신전의 신, 메이린이다.”

- 크라프트의 세계수다. 헌데, 또 무슨 일이지?

“이곳에서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 알베니우스?

들어본 적 있다. 신들이 멸종시킨 차원용의 마지막 후예라고 했던가. 수십년 전에 죽은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까지 살아 있었나.

- 나는 그런 자를 모른다.
- 얼마 전에 다섯 명의 신들이 와서 차원 전체를 뒤집어 놓고 가지 않았느냐.

“물론 그렇긴 했지.”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신들이라고 한들, 세계수의 권역에서 세계수가 작정하고 속이려고 한다면 속을 수밖에 없다.”

- ···지금 그게 무슨 뜻이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순록이 주춤, 그녀를 경계했다.

“다섯 신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럴 경우는 두 가지지.”

그대가 처음부터 알베니우스를 감추어주고 있었거나, 신들이 떠난 후에 이제는 안전하다고 불러들였거나.

“어느 쪽이든 그대는 백신전을 배신했다.”

- 아니, 잠깐만. 나는 억울하다! 난 알베니우스라는 드래곤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단 말이다!

사실이었다. 괜히 세계수의 신경을 더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알베니우스는 차원에는 함께 들어왔으나 세계수를 함께


만나지는 않았으니까.

김우진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기운으로 덮어 알베니우스를 감추기까지 했다. 덕분에 김우진에게,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율리아라는 신격에 당황한 그녀는 알베니우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본 적은 없지만 숨겨주기는 했군.”

- 억울하단 말이다! 내가 왜 백신전을 놔두고 멸망 직전의 종족의 편을 드냔 말이다!


그녀의 진심이 와 닿았는지 메이린의 기세가 조금 옅어졌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겠다.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 얼마 전에 알았다.

“그 연옥에서 세계수가 발아했다. 뿌리는 연옥을 덮었고 차원 전체에 간섭을 시작해 우리를 꽤나 곤란하게
했지.”

- ···뭐라고?

“그 씨앗을 준 게 그대가 아닌가? 아니, 다시 묻지. 김우진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준 적이 있나?”

- ···그건.

차라리 전자라면 당당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씨앗을 주기는 했으나 씨앗이 1 초 만에 자랄 수는 없으니 그게
자신이 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후자는 맞았다. 협박일지언정 그녀는 김우진에게 씨앗을 주었고 김우진과 율리아에 대해 무엇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무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에 걸고.

“왜 대답을 못하지?”

- ···하하. 이런 빌어먹을.

순록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외통수다. 무려 열 명의 신들이다. 그녀를 범인으로 확정 짓고 온 게 아니라면 저렇게 많이 몰려올 수가 없다.

잠시 고민했다. 그냥 죽는 게 나을까, 아니면 심연으로 끌려들어가는 게 나을까.

그리고 그 고민이 신들에게는 대답이 되었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말투가 변했다. 그대라며 그나마 해주던 존중이 사라졌다. 열 명의 신들이 일제히 살기를 폭발시켰다. 나무들이
시커멓게 시들어 죽어갔다.

“감히 백신전의 존중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반역자의 편을 들다니.”

- 나는 억울하다!

“그렇다면 말하라! 김우진에게 혹은 알베니우스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주지 않았다고!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에
명확히 쓸 수 있다면!”

쓸 수 있을 리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넌 반역자다.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히는 쓰레기.”


메이린이 공간을 가르고 창을 뽑았다.

“백신전의 자비 아래 삶을 영위하면서도 감히 백신전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버러지.”

거대한 성창이 순록을 겨눴다.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소각된다. 그리고 너의 죽음은 우리 백신전이 모든 세계수들에게 보내는 경고가 될


것이다.”

- 누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알고!


- 세계수들이 언제까지 네놈들의 종노릇을 할 줄 아느냐!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엔트들이 일어났다. 나무의 파도가 신들을 덮쳤다.

허나, 신력이 폭발해 그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아무리 만년을 살아와 차원을 완전히 자신의 권역으로 삼은 세계수라고 한들, 그녀는 혼자였다.

그리고 신은 무려 열 명이었고.

- 김우진!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종자 같으니!


- 지옥에서도 네놈을 저주하리라!

그날, 세계수 한 그루가 불타 소멸했다.

“역시 이놈이 확실합니다. 씨앗이 없습니다.”

신들은 만년 이상을 살아온 세계수들은 만약에 대비해 하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씨앗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확신을 더욱 심어주었다.

드디어 김우진의 끄나풀 하나를 끝장냈다. 백신전이 간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하지만 결국 알베니우스는 놓쳤군.”


“흔적을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항상 꼼꼼한 도마뱀이 이번에는 조금 조급했나 봅니다. 미약하지만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럴 만도 하긴 하지.”

현재 신들이 전 차원을 뒤지며 눈에 불을 키고 알베니우스를 찾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쉽게 시선을 피하기 어려우리라.

실제로 크라프트에서 찾아냈고 또 다시 이어지는 흔적도 찾아냈으니.

“어디로 이어지지?”
“그게···.”
“빨리 말해라.”
“연옥입니다.”
“···하.”

메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나 혼자 판단할 수 없겠구나. 백신전으로 복귀한다.”


“예!”
“엘프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 둬라. 세계수의 잔해도 마찬가지다. 이 차원의 피조물들에게 신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좋은 상징이 되겠지.”

거대한 신목의 잔해를 남긴 채, 신들이 떠나갔다.

* * *

신들의 흔적은 길게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드라스코에서 얼마 가지 못하고 뚝 끊어졌다.

마기도, 신의 기운도.

신들은 당황했으나 알비츠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다. 그렇다면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지성체의 개입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우진?’

역시 가장 큰 의문은 그쪽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마물들을, 마기를 다루지는 못한다. 알비츠는 어둠의 사도들이 새롭게 탄생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해졌다.

‘어둠의 사도가 지성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건 정말 큰 위기다. 그래봤자 백신전이 무너진다는 생각은 없지만 꽤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김우진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겠지.

“델라푸스는 어디 있지?”

변방 차원에서 먼저 죽어버린 칼카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김우진이 아닌, 단순히 알베니우스를 쫓다가 어둠의 사도를 만난 걸지도.

“얼마 전에 칼카르님이 남기신 마지막 흔적을 찾았다는 연락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습니다.”
“마지막 통신이 언제냐.”

불길함이 치솟았다.

“21 일 전입니다.”

삼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신 하나가 연락이 없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다.
“···델라푸스는 죽지 않았다.”

신들을 이끌고 나오기 전, 아카식 레코드를 확인했다. 그때까지 새로운 신의 탄생은 없었다.

“같은 놈이구나.”

납치해서 끌고 갔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 행동 패턴이 똑같다.

알비츠는 깨달았다. 칼카르를 죽인 놈도, 델라푸스나 다른 신들을 납치한 놈도 모두 같은 놈이라는 것을.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델라푸스가 마지막으로 연락한 곳부터 가자.”


“예.”

그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다. 델라푸스가 남긴 흔적들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으나 주신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수십 개의 종말 차원을 넘었다. 수천, 수만의 마물들을 죽였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혈로를 그린 끝에 마침내 마주할 수 있었다.

수십만의 마물 군단과.
그리고.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는데. 주신의 감각을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었던 건가.”


“타이탄?”

백신전에 의해 멸종한 종족의 유일한 생존자를.

───────────────
# < 082. 기강 잡기 >

“주신께서는 아키식 레코드를 확인하러 가셨네. 아카식 레코드는 주신께서만 접근할 수 있는 바, 당장 주신께
만남을 요청하는 것을 불가능 해.”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메이린이 텅 빈 백신전의 대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신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러길 바라야지. 아카식 레코드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편린만 이해해도 어쩌면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행적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녀와 같은 상위 열 명의 신 중 하나인 제라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 지나고 베리안이 백신전으로 돌아왔다.

“왔구나, 메이린. 그 나무가 맞더냐.”


“예, 주신이시여.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김우진에게 씨앗을 건네준 자가 맞았습니다.”
“확실한가?”
“처음에는 알베니우스를 모른다고 발뺌을 했습니다만,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와 함께 김우진에게 씨앗을 건네지
않았다는 확답을 요구하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을 향해 먼저 살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군. 놈을 어떻게 했느냐.”
“완전히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 흔적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으니 모든 세계수와 크라프트의
피조물들에게 더 없이 확실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역시 씨앗은 없었습니다.”
“잘했다.”
“과찬이십니다.”

메이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 외에 특이사항은 없나? 김우진이나 알베니우스에 대한 흔적을 찾았다거나.”


“예.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그 미꾸라지 같은 도마뱀놈이 드디어 죽을 때가 되었구나.”

프흐흐, 베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냐.”
“연옥입니다.”
“···재미있군.”

미소가 지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베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연옥에 있다면 어차피 김우진을 치울 때 한 번에 같이 치우면 그만이다. 지금 필요한 건 괜히 더 김우진을
자극하는 것보다 한 번에 몰아치는 것이다.”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할 이유는 없겠지. 다른 신들과 함께 연옥을 완전히 틀어 막아라. 누구도 차원을 빠져나올
수 없도록.”
“예.”
“가보도록.”

주신의 축객령에 메이린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환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 됐다고 봅니다.”

이전이었으면 뚜렷한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 이상,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가보도록. 다시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러 가겠다.”


“원하는 바를 못 찾으셨습니까?”
“그래.”

아직은.
베리안이 사라졌다.

* * *

두 번째 세계수의 씨앗에도 간섭은 필요했다.

“아니요! 이번 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내 맘이야.”

세계수란 본디 자아가 강하다.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면 차원 안에서는 신에 필적하는 존재라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때문에 세계수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것은 중요했다. 기껏 길러놨더니 사춘기 어린애처럼 막나가다가
어떻게 계획이 틀어질지 모르니까.

간섭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웠다.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한 씨앗이지만 김우진은 주신을 완전히
포식해버린지 오래였으니까.

“이렇게 되면 이번에도 타락한 어머니 나무께서···.”

- 아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릴리의 날개가 율리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타라, 아냐.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폭력부터 휘두르는 게 타락하셨다는 증거에요!”

- 나브 기재이!

“또 귀쟁이! 전 하이엘프에요! 귀쟁이가 아니라고요! 어머니 나무께서 그러시는게 바로 타락의 증거에요!”

- 하이기재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만담을 뒤로한 채 릴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씨앗을 심었다.

이는 릴리와 율리아의 의견이었다.

“서로 거리를 주는 거보다 가깝게 하는 게 좋아요. 처음부터 릴리 어머니 나무의 폼 안에 들이는 거죠.”
“가까이서 기강을 잡는다는 걸로 들리는데.”
“좀 속된 표현이긴 해도 틀리진 않아요. 신들 덕분에 여러 어머니 나무가 자라나도 문제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 도새!

깊숙이 땅을 파고 그 안에 영약 대신 신 둘을 넣고 씨앗을 심었다.

“···생매장하는 느낌인데요.”
“신이라 이 정도로 죽지 않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중간에 깨어나진 않겠지?”
“아마도요. 그 전에 씨앗이 발아할 테니까요.”
“아마도?”
“어쩔 수 없잖아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걸요.”

율리아가 씨앗을 덮은 땅을 토닥였다.

“릴리 어머니 나무님.”

- 삐이.

릴리가 그녀의 손등에 앉았다.

김우진이 조심스레 거리를 벌렸고 율리아가 힘을 개방했다. 막대한 신의 힘이 땅을 타고 씨앗으로 흘러들어갔다.

율리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 세계수의 정수가 씨앗에 스며들어 생명활동을 촉진시켰다.

그러길 한참.

쿠그그그그그-

씨앗이 발아했다.

* * *

세계수는 릴리와 마찬가지로 급속도로 자라났다. 아니, 신력 덕분인지 오히려 더 빨랐다.

콰르르르,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가지와 줄기,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허나, 릴리와는 다르게 연옥의 건물까지 침범하지는 못했다. 김우진이 불꽃의 벽을 세워 막았기 때문이다.

불꽃을 본능적으로 회피한 세계수는 마침내 생장을 멈췄다.

신을 마음껏 착취하고 한껏 성장한 릴리의 절반정도 되는 크기. 릴리가 워낙 거대해졌을 뿐, 결코 작지 않았다.


처음 발아했을 때의 릴리와 비교하면 확실히 크고.

무엇보다 이번 세계수는 모든지 빨랐다.

발아도, 생장 속도도 그리고 정령체의 탄생도.

- 끼잉.

반투명하고 작은 하얀빛의 아기 호랑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김우진에게


달려와 다리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그 모습이 썩 귀여웠다.

“순록의 밑에서 백호가 나오다니. 생물학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참새 밑에서 파랑새가 나오는 건 말이 되고요?”
“···그러네?”

그렇게 이야기하니 묘하게 납득이 된다. 애초에 본체가 나무인 시점에서 정령체가 무슨 소용이겠다만은.

“네 이름은 나르야. 알겠지?”

- 낑.

나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호랑이한테 나르라는 이름을 붙여줘요?”


“호랑이가 아니고 세계수인데.”
“···이름을 붙여주는 것 자체에 태클을 걸었어야 했는데!”

김우진이 나르를 끌어 앉았다. 기분 좋은지 나르가 울음을 토해냈다.

“릴리, 잘 가르쳐줄 수 있지?”

- 으!

릴리가 김우진의 어깨 위에 앉아 그런 나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나르가 고개를 들었다.

두 세계수의 정령체의 눈이 마주쳤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빠악-

그 순간, 릴리의 날개가 나르의 이마를 후려쳤다.

- 꾸러! 이마!

“······.”
“······.”

- 끼이이이이이잉!
나르가 정말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 *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김우진은 스스로 나름 괜찮은 육아를 해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저렇게 거친 사춘기를 맞이할 정도로 막하지는
않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율리아가 샐쭉한 눈빛으로 김우진을 노려보았다.

“난 딱히 못된 걸 가르친 적은 없는데.”
“직접 하라고는 안했지만 많이 보여주셨죠. 그리고 어머니 나무께서 물드실 때 가만히 방관하셨고요.”
“귀쟁이를 귀쟁이라고 부르는 게 못된 짓은 아니잖아?”
“그 안이함이 어머니 나무를 저렇게 만들었다고요!”

김우진이 릴리를 확인했다. 그녀는 김우진에게 한 번 혼이 나고 나서 울고 있는 나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마음이 포근해져 웃고 말았다.

“릴리, 다음부터는 안 그럴 거지?”

- 으.

“이유 없이 때리면 안 돼.”

- 으. 이우 이으며?

“그럼 뭐···.”
“잠깐만요! 이유가 있으면 괜찮다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기강을 잡아야 한다며?”
“···그렇긴 한데.”
“나르. 너도 릴리 말 잘 들어.”

- 끼잉.

나르가 서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김우진은 애써 무시했다.

“착하네.”

다짜고짜 뚝배기를 후려치는 바람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자기 잘못을 사과하고 얌전해진 걸 보면 본성이 나쁘지는
않다.

“그야 물론 어머니 나무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요···.”


“뭐, 그럼 된 거지.”

김우진은 그냥 잠깐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고로 어린 애들 일은 어른이 끼어들면 망하는 법이다. 세계수도 마찬가지. 세계수들 간의 일에 괜히 인간인


그가 간섭할 필요는 없겠지.

한편 지진과 함께 생겨난 또 다른 세계수에 죄수들이 몰려 있었다.

“데르카인님, 저건···.”
“또 다른 세계수라니.”
“그렇다는 건?”

동족들의 기대 어린 눈빛에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이제부터 배터리가 두 개다!”


“배터리가 두 배!”
“출력도 두 배!”
엘프들이 경멸의 시선을 보냈지만 이미 광기에 휩싸인 드워프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어머니 나무를 배터리로 여기다니. 저 꼴을 대체 언제까지 봐야합니까?”


“품위와 자연 사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난쟁이들.”

혐오가 잠깐 스치긴 했으나 굳이 나서서 드워프들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감옥에서 동고동락하고 마물들과 함께
싸우면서 정이 든 탓이다.

신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도 있고.

“세계수를 단숨에 자라나게 하시다니.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어, 저건 제가 했는데요?”
“당신도 결국 소장님을 따르는 하위 신이니 모든 건 소장님이 일구어내신 이적입니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장님이 하시면 무엇이든 말이 됩니다!”

한 광신도는 소장의 이적에 감격하며 그를 찬양했다.

“두 그루나 되니까 열매가 하나 정도는 열리지 않을까요?”


“어머니 나무의 열매는 그리 쉽게 열리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쉽게 자라나게 했잖아요?”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요.”
“그럼 수액을 조금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제가 아니라 어머니 나무께 여쭈어 봐야 될 것 같네요.”
“그러죠!”

한 소지는 릴리에게 수액을 달라고 했다가 날개로 뺨을 맞았으며.

“세계수에는 독이 없습니까?”
“신성한 어머니 나무에는 어떤 독기도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거 아쉽네요.”

한 독인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안 가보십니까?”
“나무 하나 더 자라난 게 뭐 대수라고. 계속 들어와라.”

짐승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데 세계수가 두 그루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어차피 한 그루나 두 그루나 거기서 거깁니다. 세계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가 지났다.

지났다고 생각했다.

- 새무하저그 어마!
릴리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김우진 앞으로 날아왔다.

“통신이 왔다고?”

- 으!
- 그보!

“급보요?”

죄수들이 둘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 그라브드.

“크라프트.”

- 에게스.

“어머니 나무.”

- 소며.

율리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멸이요?”

- 시드리 아르베. 차자. 아니. 커!

“···신들이 알베니우스님을 찾아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왔는데 어머니 나무께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시다가 전투가 일어났대요.”
“그리고 죽었다?”
“···네. 컷, 아니 그대로 불태웠다고 하네요.”

- 시아! 시아 주거.

“씨앗. 세계수의 씨앗을 소장님한테 줬는지 주지 않았는지를 물었데요.”


“···외통수군.”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에 서명한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세계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죽거나, 심연에 가거나.

세계수가 택한 건 전자였다.

“작정했군.”

그래, 이래야 백신전이지.

사실 지금까지 너무 바보 같이 당하고만 있어서 예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기는 했다.


“알베니우스님, 혹시 일부러 흔적을 남겼습니까?”
“그런 짓은 절대 안 해. 단지, 차원의 통로에 신과 집행자들이 쫙 깔려 있어서 급하게 나오긴 했는데 설마···.”
“그거군요.”
“내 실수군.”
“그렇다면 그 흔적이 연옥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눈치 챘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지도.”

행적이 명확하게 들켰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알베니우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잘 됐다고?”
“이걸로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의심을 받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들 입장에서는 나름 제대로 날린 한방이었지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너무 공교로워서 김우진이라고 해도 같은 실수를 했을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저들이 다시 감찰을 보내기 전까지는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감찰이 와도 숨기려면 최대한 숨길 수는
있죠.”

김우진은 데르카인에게 하늘구름을 옮겨 설치할 것은 부탁했다. 릴리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나르의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나르에 비해 릴리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바, 나르가 더 성장하지 않는다면 속일 수 있을 거다. 좀 나중에 온다면
모르겠지만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참지 못하고 바로 올 거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신들은 잠잠했다.

“···김우진.”
“두리쉬마님?”

대신 다른 게 왔다.

───────────────
# < 083. 떡 >

두리쉬마가 나타난 것은 무척이나 갑작스러웠다.

“···미안하다, 김우진.”

마기는 현저히 줄어들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대신 온 몸에 신의 힘으로 인한 상처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일단 차 한 잔 드시죠.”
“고맙다.”

두리쉬마가 따스한 세계수의 잎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놈들이 결국 찾아온 겁니까?”
“주신. 주신이 나섰다.”
“어떤 주신입니까?”
“물과 얼음의 권능을 사용하는 놈이었다.”

알비츠다. 백신전의 세 명의 주신 중 하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신과 신들이 델라푸스의 흔적을 추격해왔다. 지운다고 지웠는데 주신의 감각을 완전히 숨기는 건 미흡했던
모양이야.”

타이탄은 애초에 공간 계열의 권능이 없다. 거의 다루어 보지 않은 힘을 다루는 것은 어렵고 빈틈이 많다.

스스로를 숨기는 거라면 몰라도 공간의 흔적 자체를 지우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은신하고 있는 차원으로 놈들이 왔다. 처음에는 기꺼웠으나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신들이 무려 35 명이었다.”

그것도 주신을 제외하고.

미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리 마물과 마기가 넘쳐나는 변방 차원이라고 한들 35 명의 신들은 수준이 다르다.

수십만의 마물이 달려들어도 결국 쓸려버릴 수밖에 없다.

이미 멸망을 맞이한 종말 차원은 마기로 인해 신력의 흐름이 원활하지는 않지만 하위 차원처럼 힘 자체가
제약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리쉬마는 패배했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분하지만 도망칠 수밖에.”

피를 삼키며 도망쳤다. 하지만 신들의 추격은 끈질겼다.

“김우진, 델라푸스 말고 추가로 신들을 납치했나?”


“그랬습니다.”
“그 범인을 나로 생각하고 있더군. 납치한 신들을 내놓으라고 하기에 어둠의 사도가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큰 소리 쳐줬지.”

두리쉬마도 보통이 아니다. 그가 크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변방 차원 백 여 개를 넘나들며 추격전을 벌였다. 차원마다 존재하는 모든 마물들을 이용해 그들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허무하게 이대로 끝이구나 싶을 때, 네가 생각났다.”

두리쉬마는 어둠에게 받은 권능을 이용했다. 어둠의 분신. 자신의 모든 힘을 투영시킨 분신으로 하여금 신들에게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본체는 현장을 벗어났다.

아주 미약해진 힘과 마기는 작정하고 숨기면 신조차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작아진 겁니까?”
“그래.”

두리쉬마는 10cm 정도의 작은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거인이라기보다는 인형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형태.

“타이탄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형태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죽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낫습니다. 복수를 하셔야죠.”
“그래, 옳은 소리다.”

뿌득, 두리쉬마가 이를 갈았다.

“헌데 무사히 탈출하고 나서도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이곳 연옥을 중심으로 꽤 탄탄한 포위망이 구성되어
있던데.”
“포위망이요?”
“그래. 신과 집행자들이 연옥 안으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더군. 몰랐나?”
“몰랐습니다.”

크라프트에 다녀온 이후로 연옥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이상했는데 설마 포위망을 만들고 있었나?

왜?

‘당장 나를 건드리지 못하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정말 그뿐일까? 베리안 그놈이 고작 그 정도에서 만족할까?

아니다. 김우진은 확신했다. 놈들이 노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더불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헌데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혹시 들키신 건 아니겠죠?”

마왕인 두리쉬마를 숨겨줬다가는 계약이고 나발이고 다 의미가 없어진다.

“들키지 않았다. 이 상태의 나는 작정하면 주신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렇군. 더 없이 미약한 존재감에 나름 납득이 갔다. 잘 숨겼다기 보다는 숨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원의 문은 알아서 열어줬다만.”


“릴리, 네가 문을 열어준 거야?”

- 으!

아무래도 지난번에 두리쉬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두리쉬마가 건네준 물건을 보여준 것 덕분에 알아본 모양이다.

“잘했어.”

- 리리, 자해어?

“잘했어. 동생도 괴롭히지 말고 잘 지내야 돼.”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신, 알비츠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백신전의 대전, 불가피하게 올 수 없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신들이 자리했다.

베리안은 상석에 앉아 알비츠와 그를 따르는 34 명의 신들을 반겼다.

“그들을 찾기 전에는 오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을 찾아낸 것이겠지?”

허나, 실종되었던 네 명의 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베리안 또한 그걸 모르지 않았다.

“변방 차원 수 백 개를 뒤졌으나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신들은 왜 34 명뿐이고?”
“위대한 아카식 레코드의 품으로 돌아갔다.”
“죽었다고?”

신들이 경악했다. 무려 35 명의 신들이, 주신을 포함하면 36 명의 신들이 함께 했음에도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건가?”


“믿을 수밖에. 사실이니까. 우리는 너무 평화에 찌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신 넷을 납치한 마물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칼카르나 델라푸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칼카르가 마물들의 영역에서 죽었고, 델라푸스는 몇 주 째 연락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럴듯하군.”
“델라푸스의 마지막 연락 장소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 누군가 강제로 지운 기색이 역력했지. 그것을 추적해
나갔다.”

수십 개의 차원을 넘었다. 어쩌면 백 개가 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우리는 타이탄과 마주했다.”


“타이탄?”
“타이탄은 멸족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 마지막 타이탄은 그때 죽었는데···!”

타이탄은 신들에 의해 멸종한 종족이었다. 태생적으로 신의 힘을 타고나 신들에게 배척받고 탄압 받다가 종국에는
반기를 들었던 자들.

허나, 신들의 위세는 우주를 찔렀고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그들을 멸족시켰다.

어린 아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박멸했다. 때문에 알비츠의 말은 믿기 힘들었으나, 반대로 알비츠이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생존자가 있었다고?”

베르안도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허리를 폈다.

“어둠의 사도가 되어 있었다. 변방의 차원에서 수십 만 마물들을 이끌고 있더군. 그 차원에서만 그러했으니 다른
차원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마물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놈이구나.”

신들이 직감했다. 마물들을 어그러트리고 신들을 납치핸 간 범인이 틀림 없다고.

“놈은 죽였겠지?”
“죽이지 못했다.”
“그런 말을 참으로 당당하게도 하는구나. 타이탄이라면 덩치가 산만한 놈들일 테고 어둠의 사도라면 마기를 풀풀
풍길 텐데 그걸 놓쳤다는 거냐?”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거대한 거인과, 마기가 진득한 어둠의 사도와 싸웠다. 그리고 놈을 죽였다. 허나
시체를 확인했을 때, 정작 알맹이가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을 감행했다는 뜻이다.

“이후, 주변의 변방 차원 수십 개를 뒤졌으나 놈을 찾지 못했다. 당연히 다른 네 신의 흔적도 마찬가지였다.”


“죽었다는 건가?”
“그건 이제부터 아카식 레코드를 확인해봐야겠지. 그게 최우선이다.”
“···같이 가도록 하지.”

회의가 잠시 멈췄다. 두 주신이 아카식 레코드로 향했다.

우주를 밝히는 거대한 빛의 기둥 앞에선 둘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차분히 기록을 살폈다.

그러길 한참.

“···네 신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변방 차원에 숨겨 두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그곳에서 그들을 어둠의 사도로 만들려고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군.”

허나 쉽지 않을 것이다. 변방 차원은 정말 무수히 많으니까.

알비츠가 또 다른 기록을 찾았다.

“새로운 신이 선택되었다. 타이탄에게 죽은 벨가의 후계다. 이틀전이군. 어떤 집행자가 신이 되었지?”


“···뭐라고?”
“왜 그러지?”
“잠깐, 잠깐만.”

베리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틀 전에 이미 신이 선택되었다고?”
“그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무슨 헛소리냐.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신이 죽었다는 소리를 너에게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반응이었지. 잠깐만 설마?”
“그래.”

베리안의 이를 악 물었다.

“집행자들 중 그 누구도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

벌써 두 번 째였다.

* * *

주신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연옥으로 들어가라. 김우진의 신뢰를 얻고 놈의 속셈을 모두 알아내라.’


‘괜히 무언가 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그것을 최우선으로 해라.’
‘네가 들키지 않도록 다른 놈들을 뒤섞을 테니 조심하기만 하면 된다.’

주신을 모시는 상위 집행자 페트로 코페르크는 기꺼이 과업을 위해 스스로의 신분을 버렸다.

그는 바리하 칸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 차원의 용사가 되었고 연옥으로 들어왔다.

집행자 당시의 말투와 습관 때문인지 김우진의 경계심을 사기도 했지만 다른 죄수들 덕분에 잘 넘겨왔다.

헌데 하필 그와 만나고 싸워보기도 했던 집행자가 김우진의 개가 되어 연옥으로 들어왔다.

얼굴을 감추어도 본질적인 기운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그의 정체는 순식간에 들통났고 김우진은 자비를
배풀지 않았다.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건 네 주인들뿐이야. 그게 계약이거든.’

맞다. 백신전과 김우진 사이에 맺어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은 집행자들의 안위까지 신경써주지 않는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게.’

하지만 죄수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졌다. 목숨‘만’ 건졌다.

육지가 부러졌고 강도 높은 고문이 이루어졌다. 치료는 딱 죽지 않을 정도.

아는 모든 것을 불라는 김우진의 협박에 굴복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참았다.

언젠가 신께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주신이시여.”
메마른 입술에서는 갈라진 목소리가 나온다. 부러진 육지에서는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은 여전히 뇌리를 찌른다.

아무 것도 없는 어둠. 고통과 지루함.

페트로 코페르크는 하루하루 초췌해져갔다. 정신은 마모되고 육체는 피폐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그래, 그게 오히려 신을 위하는 길이다. 그가 죄수의 신분인 한, 김우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되니까.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겨우 혀를 깨물었다고 죽을 만큼 집행자의 신체는 나약하지 않다. 구속된 구속구들을


끊어낼만큼의 여력이 남아 있지도 않으며, 설상가상으로 철창 밖에는 교도관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그를
감시하고 있다.

‘신이시여, 대체 언제쯤 저를···.’

그 순간이었다.

번쩍-

빛이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감옥의 구조물들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페트로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환한 빛줄기에 어둠이 사라졌다.

그리고 페트로는 충만감을 느꼈다. 힘과 전능감을 인지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단숨에 깨달았다.

주신을 모시면서 수도 없이 봐왔기에, 자신도 그러기를 바랐기에.

신.

“···내가 진짜로!”

신이 되었다.

각성의 빛의 영향인지 구속구는 전부 먹통이 되었다. 부러진 육지가 저절로 맞춰졌고 상처들은 모두 회복되었다.

완전히 말라 바닥을 드러내던 마나 또한 폭포수처럼 샘솟았으며 신의 힘이 충만했다.

철컥-

신들이 만든 기능이 삭제된 구속구는 그저 하찮은 금속에 불과했다. 페트로 코프르크가 가볍게 그것들을 끊어냈다.

“마, 맙소사···!”

당황하여 도망치는 교도관의 뒷모습이 보였다.


페트로는 그가 도망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분노를 담아 신력을 이용해 창을 생성했다. 그대로 던졌다.

───!

집행자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섬광이 모든 것을 꿰뚫었다. 그대로 교도관의 몸까지 뚫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붉은 장벽이 교도관과 창 사이를 가로 막았다.

쩌어어엉, 격렬한 파공음이 지하 감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페트로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었다.

소멸한 창과 그대로 남아서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김우진!”

검은 머리의 남자가 걸어왔다.

“두리쉬마님에게 신 하나를 죽였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건 또 예상 밖인데.”

죽일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살려두고 있던 놈이 신이 되다니.

“이게 웬 떡이야.”

김우진이 웃었다.

그리고 신이 된 페트로 코페르크는 깨달았다.

신이 되었음에도 김우진을 상대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
# < 084. 연옥의 작은 아이들 >

“미친놈 아니야? 갑자기 왜 각성해?”

갑작스레 방대한 신의 힘이 느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두리쉬마가 그래도 분투 끝에 신 하나를 죽였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렇다고 지하 감옥에 따로 가두어두었던


죄수가 갑자기 신이 되어버리는 일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집행자들 사이에서 페트로 코페르크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지?”


“최상위권이었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주신을 모셔온 자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입니다. 저 또한
버틸 수 있을지언정 승리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럼 최측근이라는 건데 그런 놈을 왜 여기다 집어넣은 거야?”
“최측근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음.”

김우진은 어쩌면 디아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들은 그를 엿 먹이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으나 연달아 실패했다. 신의 자존심은 구겨졌고 반드시 성공할 한
방이 필요했을 거다.
주신의 최측근 집행자는, 다음 신에 가장 근접한 자는 어떻게 보면 가장 믿음직스러운 적임자였다.

디아네가 김우진의 광신도가 되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았을 지도 모르고.

“백신전이 또 다시 뒤집어졌겠군.”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결국 저쪽의 신 하나를 더 이쪽에서 납치해온 거나 다름없으니까.

“패트로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굴러들어온 신을 처리할 방법은 하나뿐이지.”

세계수들의 거름으로 삼는 것.

“하지만 페트로는 율리아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르긴 해.”

신들의 입장에서 율리아는 정말 갑자기 솟아난 불청객이다. 때문에 그녀가 신이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도,
그녀라고 특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페트로 코페르크는 다르다.

오래전부터 주신의 집행자로서 생활을 영위해온 바, 주신이 직접 키운 다음 대 신 후보 중 하나다.

만약 백신전의 집행자들 사이에 신이 된 자가 없다면 자연스레 페트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율리아 같은 자가 둘이나 존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테니 더욱 더.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빼내려고 하겠지.

“소장님.”

똑똑, 그때 부소장이 문을 두들겼다.

“놈이 깨어났습니다만, 자진 출소를 하겠다고 합니다.”

* * *

출소.

연옥을 나가는 방법은 오직 세 가지다.

탈옥하거나.
자연사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들이 내려준 용사의 힘, 즉 신의 힘을 포기하고 자진 출소하거나.

연옥에 갇힌 수많은 죄수들이 힘을 포기하기 싫어 그대로 갇혀 있는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쁜 걸로 따지면 오히려 부려먹기만 잔뜩 부려먹고 쓸모가 다해 토사구팽하는 신들이


개새끼지.
어쨌든, 김우진은 연옥의 소장으로 죄수가 자진 출소를 택하면 백신전에 보고하고 무사히 호송대에 인계할 책임이
있다.

“나가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신이 됨으로서 안색이 훨씬 나아진 페트로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 먹어서 그런지 신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공손했다.

“연옥의 죄수들은 용사의 힘을 포기하면 출소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의 세계로 가고


싶습니다.”
“원래의 세계가 아니라 백신전이겠지.”
“그건···.”
“바리하 칸이라고 불러줄까, 아니면 페트로 코페르크라고 불러줄까.”
“···후자로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아예 숨길 생각도 안하는군.”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김우진이 티스푼으로 커피 잔을 휘저었다.

“근데 왜 지금일까. 네가 자진 출소를 택할 기회는 꽤나 많았는데.”


“그건···.”
“내가 맞춰볼까?”

후룩,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적당한 초콜릿이 뒤섞인 모카는 언제나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신이 되기 전에는 네 주인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서였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않으니까 이곳에 붙어
있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네 주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 고문과 고초를 겪고도 자진 출소를 끝내 입에 담지 않았었다.

“물론 내가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페트로가 자진 출소라는 카드를 내민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 모든 것보다 네가 신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니까. 집행자와 신은 다르지. 집행자가 내 손에 있는


것과 신이 내 손에 있는 건 다르니까. 그렇지?”
“···아닙니다.”
“아니긴.”

김우진이 픽 웃었다.

“나는 연옥의 소장으로서 죄수가 자진 출소를 원하면 내보내줄 책임이 있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건 의무가 아니잖아.”

그래, 책임이다.

“···그게 다르다는 겁니까?”


“다르지.”

의무와 책임은 둘 다 해야만 하는 일임에는 같지만 연옥에서의 의무와 책임은 아주 간단하게 구분이 된다.

“죄수가 출소를 원할 때 반드시 내보내야만 한다는 조항은 계약서에 없어.”


“······!”

페트로를 내보내면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직에서 벗어나기 위한 할당량이 일부 채워지지만 고작 한 명을 늘리자고


백신전에게 신을 다시 가져다 바치는 미련한 짓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돼. 여기서는 내가 왕이고 법이거든. 죄수들 중에 너 같은 양반이 하나 있지. 탈옥을 하려고 했다가
수틀리니까 자진 출소를 하겠다고 했거든.”

탁, 김우진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지하 감옥에 있습니까?”
“아니, 신들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루 종일 공방에서 무기를 만들고 있어. 여기서 요지가 뭔 것 같아?”
“···출소는 불가능하다?”
“아니지. 너도 항복하면 행복한 연옥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지.”

평소라면 회유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주신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세계수들의 포용 한계가 이미 차버렸다는 점이, 그리고 백신전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빼내갈 것이라는 점이 김우진의 마음을 돌렸다.

최측근이라는 페트로를 회유한다면 백신전에게 얼마나 큰 한 방을 먹일 수 있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네가 할 건 간단해.”

김우진이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꺼냈다.

“여기에 사인하는 거야.”


“어떻게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그런 건 궁금해 할 필요 없고.”
“···나는 주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배신하는 게 아니야. 그냥 두 주인을 섬기는 거지.”
“궤변입니다.”
“그렇다면 너도 베른과 똑같은 신세가 되는 거야. 연옥에 세계수가 심어진 건 알지?”

모를 리가 없다. 연옥 전체에 이렇게 진하게 세계수의 기운이 남아 있는데.

“평생 세계수 뿌리에 봉인 되어 마나와 신력을 쭉쭉 빨리고 싶어?”


“당신은 결국 패배할 것이고 주신께서는 저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예.”

집행자의 상태라면 모를까, 그는 지금 신이었다. 분명히 주신께서는 그를 구해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그게 맞긴 해.”

그리고 김우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백신전에서 착오가 있었다며 죄수를 다시 데려가려고 한다면, 김우진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회유하고 싶었는데 역시 주신의 최측근의 심지는 굳었다.

하긴, 쉽게 넘어오면 주신이 최측근으로 삼았겠나.

그래서 김우진은 페트로와 베리안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페트로와 베리안을 이어주는 권속의 결속.

“끄아아아아악!”

영혼이 찢어 발겨지는 듯한 충격에 페트로가 비명을 질렀다.

“어, 어떻게···?”

한참 후, 엄청난 공허함이 페트로를 강타했다.

권속의 결속은 결코 쉽게 깨트릴 수 없다. 특히 주신이 직접 맺은 결속은 같은 주신이라고 해도 쉽지 않다.

권속 쪽에서 결속을 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결 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괜히 주신이고, 괜히
권속이겠는가. 한 번 묶여 버린 영혼을 쉽게 해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헌데 김우진은 해냈다.

아무리 구속구로 인해 그의 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고 해도 그 또한 신이거늘. 주신의 결속이거늘.

“내가 능력이 조금 돼.”

온 몸이 땀으로 젖은 김우진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결속이 얼마나 단단한지 마나가 완전 바닥이 났다. 결코 두 번 할만한 짓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전이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칼카르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고 그의 불꽃과 융합하면서 그의 능력을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자, 이제 마음이 좀 바뀌어?”


“결속을 푼 건 놀랍지만 결속이 풀렸다고 해서 그분을 향해 내 충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넌 그렇겠지만 베리안도 그럴까?”
“···뭐라고?”
“상식적으로 주신이 맺은 권속의 결속을 푼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특히, 베리안은 김우진이 칼카르를 먹어치운 것을 모르기에 더욱 더.

불가능한데 풀렸다.

그렇다면 베리안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쪽을 생각할 거다.

“페트로가 신이 되더니 딴 마음을 먹고 김우진에게 붙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지. 근데 또 말이 아예 안 되지는 않거든. 내가 베리안을 좀 알거든? 그놈은 의심이 많아.”

가장 최측근에서 놈을 모셔온 네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자, 다시 물을게.”

페트로의 동공이 흔들렸다.

“항복할래, 이대로 다시 갔다가 의심받으면서 처리 당할래?”

* * *

- 새 도새?

“웃기지 마라, 세계수여. 나는 네 동생 따위가 아니다.”

10cm 의 두리쉬마가 릴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릴리는 새로운 식구가 반가운지 끊임없이 주변을 서성였다.

- 끼잉?

나르도 마찬가지였다. 나르는 누나가 하는 걸 무엇이든 다 따라하려는 듯, 릴리를 졸졸 따라다녔다.

“···신세가 처량하군.”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두리쉬마의 정체를 모른다. 그만큼 그가 완벽하게 기운을 감추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신들과의 전투에서 모든 마기를 소모해 전력이 급감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두리쉬마는 세상을 벌벌 떨게 하는 어둠의 사도이자 타이탄이 아니라 귀여운 소인족이 되었다.

타이탄 생 최대의 굴욕이었다.

“감히 나를 애 취급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내 망치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쪼그만 게 성질이 사납네요.”
“뭐, 김우진하고 아는 사이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자네, 변종 드워프인가? 드워프들 중에서 특별히 작게 태어난 이들이 있긴 한데.”
“당신의 세상에는 작은 식재료들만 있습니까?”
“소장님이 데리고 오셨다면 당연히 동지입니다. 저와 함께 소장님의 교리를 배우러 가시겠습니까?”
“다 꺼져라! 죽여버리기 전에!”

이후, 김우진에게 부탁해서인지 더 이상 죄수들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계수들은 예외였다.

이 천진난만한 악동들은 그를 자신들의 동지라 여기고 있었다. 세계수가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단순히 크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 노자.
“놀지 않는다. 난 잃어버린 마기를 모아야 한다.”

- 마기?
- 끼잉?

“그래. 여기로 온 게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군.”

물론 신들에게서 그나마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이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빛과 신의 힘이 충만한 이곳에서 마기를
모은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고난이었다.

- 나 아라. 마기. 마나.

“마기가 많은 곳을 안다고?”

- 으!

“연옥을 벗어나면 안 된다.”

- 여노 아네.

“연옥 안에 마기가 넘쳐나는 공간이 있다니? 그랬다면 김우진이 내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 아려주며 치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핏덩어리가 감히 누구에게 친구라고 하는 거냐. 나는 수 만 년을 살아온 위대한


타이탄이다.”

- 나 리리.
- 낑 끼잉.

“너희들의 이름은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마기가 있다는 곳은 궁금하군.”

- 아려져?
- 끼잉?

“알려줘라. 난 너의 적이 아니다. 세계수.”

- 아라. 조자 치구.

“그녀석과도 친구는 아니다만, 뭐 그렇다고 해두지.”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진이라면 능히 그의 친구라고 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 다라아.
- 끼깅!

릴리가 앞장섰다. 나르가 꼬리를 흔들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어. 세계수님? 두리쉬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물에게 흡수한 독을 짜내는 강민식이 있었다.

쓰으읍, 숨을 크게 들이키자 익숙한 향취가 느껴졌다.

막대하게 담긴 검은 독기와 강민식이 품은 마기에 두리쉬마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기와 독기가 그대로 두리쉬마에게 빨려 들어왔다. 어둠의 사도에게 반응한 마기들이 스스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사방에서 튀어오르는 병들에 강민식이 당황했다.

“너희들의 말이 맞았다. 이 연옥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 으!
- 낑!

“강민식.”
“제, 제 꺼!”
“비켜라.”
“이건 제겁니다! 제가 노력해서 만든 제 독입니다!”

강민식이 본능적으로 두리쉬마와 독기 병들을 가로 막았다.

그의 결연한 눈빛에 두리쉬마가 곧 힘을 거두었다.

“하긴, 주인에게 허락도 없이 막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맞습니다! 그리고 주인인 저는 절대 허락을···응?”

하지만 두리쉬마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어디?

“연옥의 주인이 누구냐.”

- 조자!

“그래, 김우진을 만나러 간다. 저것들을 취해야겠다.”

두리쉬마가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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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85. 판 >

집무실로 돌아오니 세 개의 작은 형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파랑새, 새끼 호랑이 그리고 그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은 초소형 소인까지.


그 모습이 꽤나 이질적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 하마!
- 끼잉!

초소형 소인과 파랑새, 새끼 호랑이가 연달아 대답했다.

“조용히 해라. 너희들의 일이 아니다.”

- 아냐?
- 낑?

고개를 갸웃거리는 릴리와 나르의 모습이 썩 귀여웠다. 김우진은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렸다.

“두리쉬마님이 릴리와 나르랑 그렇게 친해지신 줄 몰랐습니다.”


“친하지 않다.”

- 치구!
- 끼잉!

“친구 아니다. 저 막무가내 녀석들은 믿지 마라.”

두리쉬마는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양 옆에서 조잘거리는 두 세계수들로 인해 근엄함은 물 건너 간


상태였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차를 드시겠습니까?”
“커피인지 뭔지, 그게 맛있더군.”

김우진이 손수 커피를 타왔다. 위에 휘핑크림까지 올린 카페 모카였다.

릴리와 나르에게는 하르인이라는 꽃잎을 우린 차를 주었다. 율리아가 좋아하는 꽃차 중 하나인데 한 번 줘보니


정령체인 릴리도 꽤나 좋아했다.

“어떻게, 연옥은 좀 지낼만 하십니까?”


“마기가 거의 없다는 것과 이 두 나뭇가지들만 아니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적응을 잘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 나!

“그래, 네 덕분이야. 릴리. 잘했어.”


“그놈 덕분 아니다. 그리고 잘 적응했다고도 안 했다.”

두리쉬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으나 릴리와 나르는 개의치 않았다.

“마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연옥 자체가 아카식 레코드와 꽤나 근접한 교차 차원이다 보니.”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 아카식 레코드로 다가갈수록 마나가, 멀어질수록 마기가 풍부해진다.

당연히 중앙에 근접하고 신들의 기운이 충만한 연옥에는 마기가 없었다. 그나마 현재 잔재가 남은 건 얼마 전
있었던 마물 침공 덕분이었다.

그들이 죽으면서 남긴 마기의 잔재가 차원 곳곳에 스며들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힘을 잃어버린


두리쉬마의 성에는 차지 않겠지만.

“알고 있다.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온 것이니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두리쉬마는 굴욕을 감수하고 연옥으로 왔다. 백신전을 부수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기에.

다만, 재기의 발판이 생각보다 더 미약해 곤란한 부분은 있었다.

“널 찾아온 건 그걸 어느 정도는 해결할 방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연옥을 나가는 건 안 됩니다.”
“포위망을 네게 알려준 게 나다. 그런 짓을 할 리가.”
“연옥 안에서 마기를 모을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그래.”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식이라는 인간 말이다. 공방 한쪽에서 독을 짜내고 있더군.”


“그놈은 독에 관련된 권능을···아. 설마?”

강민식은 두 번의 마물 침공에 연이어 막대한 마기를 흡수했다. 마기는 마물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중독시키고
파괴하는 독기이기 때문이다.

신 후보자들의 성장을 위해 김우진은 습격 이후, 마물들의 시체를 모아 강민식이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막대한 마기와 독기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정수를 만들었다.

“그래. 놈이 뽑아낸 독들은 전부 막대한 마기를 품고 있다. 그것들을 내가 좀 마셨으면 한다.”


“···아, 그 이야기였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강민식 몸에 만들어진 정수를 뽑아 먹으려시는 줄 알았죠.”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이런 상황이 되긴 했지만 아군의 심장을 뜯어먹을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다.”

두리쉬마가 인상을 구겼다.

- 아이다!
- 끼이끼!

릴리와 나르가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 말투를 따라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독이라···.”

마기와 마나는 상극이다. 자연스레 강민식에 의해 응축된 마기의 독은 신과 집행자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마력포에 담아 쏘아내려고 했던 건데···.

김우진은 잠시 저울질을 해보았다.

독기의 마력포와 힘을 되찾고 다시금 마물의 군단장이 되어 백신전을 습격하는 두리쉬마.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훨씬 낫다.

“좋습니다. 헌데 겨우 그걸로 충분하겠습니까?”

아무리 강민식이 먹어 치운 마물의 독기가 방대하다고 한들, 두리쉬마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다.

“당연히 부족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당장은 그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앞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군요.”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지. 놈들의 감시가 심하니.”
“그게 이상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터졌음에도 신들은 방관하고 있다. 그저 연옥을 포위하고 지켜보고 있다.

어째서? 왜?

처음에는 단순히 김우진이 딴 짓을 못하도록 그냥 원천봉쇄를 하려는 줄 알았다.

헌데 슬그머니 차원 밖으로 나갔을 때, 더욱 많아진 신과 집행자들을 볼 수 있었다.

늘어나고 있다는, 포위망이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겨우 포위망을 구축하기에는 지나치게 과하다. 김우진이 은신에 특화된 자도 아니기에 저 정도까지는 절대 필요


없었다.

무언가 노리는 게 있다.

드네르바한테 통신을 하고 싶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적발되는 순간 함께 나락이다.

“그게 무엇일까요?”
“글쎄, 여러 가지를 생가해 볼 수는 있을 거다. 신들이 너를 이곳에 더 오래 붙잡아두기 위해 꽤 많은 짓을
했다고 했었지?”
“예.”

강민식이나 강민식처럼 작업을 해놓은 죄수들을 넣거나, 마물들을 보내거나, 집행자를 넣거나.

“다 실패했고.”
“네.”
“그때마다 신들은 꽤 큰 피해를 입었고.”
“그렇죠. 일단 드네르바가 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도망쳤고 베른은 실종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알베니우스를 쫓아왔던 칼카르가 죽었고 델라푸스마저 실종됐지. 저들은 알베니우스와 네가 이미
만났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거다.”
“그렇겠죠.”

그러니까 주신도, 델라푸스도 김우진과 연관이 있게 된다.


“거기에 세계수까지. 저들은 크라프트의 세계수를 불태우면서까지 분노를 표출했다. 헌데 정작 너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지.”
“그랬죠.”
“저 오만하고 고고한 놈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구겨졌을지 상상해 보았느냐.”

해봤다. 그래서 놈들이 반드시 두 번째, 세 번째 수작을 벌여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헌데 그 두 번째, 세 번째도 실패했지. 내가 아는 놈들이라면 방법을 바꿀 거다.”


“방법을 바꾼다면?”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정공법으로.”
“그건 불가능합니다.”

김우진과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으로 묶여 있다. 계약이 완수되지 않는 이상, 그를 죽일 수 없다. 연옥
내에서는 아예 공격할 수도.

“신들이 너를 연옥에 묶어둔 이유는 그게 더 이득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너의 행보가
저들에게 크나 큰 경각심을 주기 충분했다.”

필요성보다 경각심이 더 커졌다.

“신들의 전력은 차츰 깎여나가는데 넌 더 강해지고 있다. 내가 신이라면 그 관계가 역전되기 전에 널 칠 거다.


무조건.”
“역전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나 할까요?”
“그야 모르지. 난 신이 아니니까. 허나, 신이 될 만한 싹들을 모조리 잘라버린 걸 보면 신들의 조심성은 알지
않느냐.”

가루다도 포이닉스도 타이탄도 고작 그런 이유로 멸망했다.

“···확실히.”
“50 명의 용사들을 출소시킬 때까지 계약이 유지된다고 했었나? 나라면 50 명의 용사들을 죄수로 보내 모두 자진
출소하게 만들 거다.”

그리고 계약이 끝나는 순간.

“연옥을 덮치는 거지. 미리 준비를 해놓다가 대비하지 못할 타이밍에.”

두리쉬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고 저 오만한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니, 아닙니다. 무조건 그겁니다.”

감이 왔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김우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바로 그거예요.”

지금은 준비 기간이다. 새로운 죄수들을 모을 시간. 새로운 용사들을 발탁하든, 집행자들을 죄수로 만들든
시간이 필요한 거다.
“만약 그렇다면 그 경각심은 너뿐만이 아니라 나의 영향도 있을 거다. 나라는 존재가 들켜버려서 너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어졌다는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확신이 생기네요.”

빌어먹을, 왜 이 생각을 못했지?

평화에 너무 안일해졌나 보다.

김우진이 계약의 허점을 이용해 신들을 농락한 만큼 신들 또한 계약에 능숙해졌거늘.

“···잠깐만.”

계약?

계약이 끝나는 조건이 50 명의 죄수들을 자진 출소시키는 거라면.

“애초에 죄수를 안 받으면 출소시킬 수도 없는 거잖아?”

김우진이 눈을 빛냈다.

* * *

“저 때문일까요?”

크라프트 세계수의 비보를 접한 이후, 율리아는 침울해했다.

비록 세계수를 협박하기 했지만 실제로 그건 세계수를 위해서였다. 김우진에게 본체가 반쯤 불타는 것보다는
그녀에게 한 소리 듣는 게 나으니까.

실제로 김우진은 그러려고 했으나 율리아로 인해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씨앗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세계수는 소멸했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율리아.”

시에나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를 불태운 건 네가 아니라 신들이야.”


“만약 씨앗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돌아가시지 않았겠죠?”
“그러면 네가 따르는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께서 불타고 계셨을 지도 모르지.”

신들은 반드시 씨앗을 건넨 세계수를 찾고자 했으니까. 그 의지는 크라프트의 세계수를 불태움으로서 드러났다.

“하지만 차라리 그분이 죽어서 다행이다라고 할 수는 없어요.”


“애초에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야. 모든 원인은 백신전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복수심을 불태워야지.

엘프들을, 세계수들을 우습게 보는.


세상을 자신들의 체스판으로 여기는 백신전에게.

“맞아요.”

율리아가 처음 용사가 되었을 때를 떠올랐다. 데이드람에서 세계수를 만났고 알베니우스를 만났다.

용사로서 점점 성장하다가 진실을 들었다. 그리고 세이드 델름의 유품을 받았다.

“세이드 델름이라는 엘프는 정확히 누구니? 네 가족? 연인?”


“가족이죠.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호위 기사니까요. 아버지 같은 존재였어요.”
“그렇구나.”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되서 애타게 찾았었어요. 끝내 못 찾았지만 설마 글라크로 소환되어 용사가 되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소환된 거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실종된 거지.”

그만큼 신들의 소환에는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하긴, 모두 자신들의 체스말로 여기는 족속들인데
피조물 따위를 배려할 리가 없다.

“그런데 잠깐만 글라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차원인데.”


“알베니우스님이 소장님이 있던 차원이라고 했어요.”
“소장은 지구 출신이잖아?”
“소환된 차원이요.”
“···아.”

그제야 시에나는 글라크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소장은 자신이 용사였다는 것을 죄수들에게
밝히지 않았었다.

어쩌다 한편이 되었으니 알게 된 거지.

허나, 종종 글라크라는 이름을 입에 담기는 했다.

“소장이란 같은 차원이라···. 잠깐만? 한 차원에 용사가 두 명이었다고?”


“아뇨.”
“그럼 어떻게 같은 차원이야?”
“두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이었다고 했어요.”
“···뭐?”
“그곳의 멸망은 너무도 강력해서 용사 한둘 가지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데요. 그래서 신들은 무차별적으로
용사들을 소환했다고 해요.”
“그런 끔찍한 곳이 있었다고?”
“세이드는 소장님과 함께 마지막 결전까지 갔다고 했어요.”

율리아가 침울해졌다.

“···미친.”

시에나는 그제야 같은 용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던 의문을 납득할 수 있었다.

같은 용사인데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가.


그냥 노는 판이 달라서 그랬다.

엄청나게.

───────────────
# < 086. 방안 >

“김우진과의 계약을 끝내겠다고?”

오직 주신에게만 허락된 공간. 새하얀 빛의 기둥을 살피던 베리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래.”
“김우진을 묶어두기 위해서 계약을 맺었다. 더 묶어두기 위해서 죄수들을 구슬리고 투입시켰다. 헌데 이제와서
계약을 우리의 손으로 끝내버리겠다고?”
“그러면 너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나? 우리는 그날, 그 자리에서 김우진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건 더 큰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강했고 신 둘을 죽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한 둘을 더 죽일 여력이 있었다.

주신들이 나선다면 피해는 줄어들겠지만 김우진은 영약한 자다. 작정하고 도망치며 다른 신들을 노린다면
추가적인 피해는 반드시 있었다.

신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을 처음 목격했기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하거나 패닉이 온 자도 있었다.

그런 버러지들을 과연 신이라고 해줄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일단은 신이었고 더 큰 피해는 막아야 했다.

신은 그들의 권속인 집행자나 피조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존재들이었으니. 하나하나가 귀했다.

그래서 김우진과의 추가적인 전투를 회피했다. 신의 뜻에 반하는, 힘을 포기 하지 않는 용사들을 가두어 둔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시켜 묶어두고자 했다.

때마침 연옥의 새로운 소장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계약을 어긴다는 빌미로 잘하면 김우진을 평생 묶어 둘 수도
있었다.

헌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계약은 오히려 김우진이 아닌 신들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해가 되어 버린 계약은 파기해야 마땅하다. 파기할 수 없다면 당장 끝이라도 내야지.”

그리고 미루어두었던, 김우진이라는 숙제를 해치우는 거다.

“계약으로 인해 김우진이 연옥에서 무엇을 하든 관여할 수 없었다.”


“계약으로 인해 김우진이 신들을 농락하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으로 인해 김우진을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계약이 파기 되면.


“놈도 끝이다.”

힘이 없어서 김우진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다. 김우진을 옭아맬 그물이 아니라 놈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버린
계약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지면 신들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

애초에 백 명의 신들이 작정하고 싸운다면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신 한두 명의 피해만 감수한다면.

“이전이면 모든 신들이 기피했겠으나 이제는 아니다. 한 둘의 피해로 김우진을 막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미 여럿이 죽었다. 백신전의 질서가 더 어그러지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다.

“김우진이 쉽게 당할 것 같나?”
“물론 순순히 당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놈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없다. 정당하게 끝나는 계약 앞에 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이미 용사들 대부분을 모았다. 곧이다.”

연옥에 들어가는 죄수는 ‘반드시 한 차원 이상을 구한 용사’라고 명시되어 있다.

김우진을 보다 확실하게 옭아매기 위해 설정해놓은 조건이 오히려 이쪽을 번거롭게 하고 있다.

차원은 많지만 종말 위기에 처한 차원은 흔하지 않고, 그런 차원을 구원한 용사는 더욱 희소하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차원은 종말을 맞이하고, 용사들이 발탁되며, 차원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렇게 준비된 용사가 스물 한 명. 계속 추가되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았다.

“또 다시 집행자를 밀어 넣지 않고?”

집행자는 엄연히 차원을 구했던 용사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연옥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했다.

“디아네가 있으니까.”

디아네는 모든 집행자들의 얼굴을 안다. 그리고 집행자들도 그 사실을 안다.

출소와는 별개로 김우진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사지로 걸어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는 없다.

물론 명령하면 가기야 하겠지만 그냥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다. 어차피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니까.

“페트로 코페르크는? 페트로가 신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페트로가 아니면 없다. 집행자들이란 신들의 손과 발이기도 하지만 만약을 대비한 예비 신이기도 하다.

우주는 넓다. 신들이 잘 키워놓은 예비 신을 뛰어넘을 자가 하나 정도는 있을 수 있다. 김우진처럼. 하지만 둘은


아니다.
“알고 있다.”
“왜 하필 그를 연옥으로 보냈지?”
“가장 신에 근접하다는 것은 가장 믿을 만 한 집행자라는 뜻이다. 김우진을 상대로 믿을 만 한 자를 보내는 게
잘못인가?”
“···그건 그렇군.”

알비츠가 손가락을 튕겼다. 새하얀 공간에 생성된 의자에 앉았다.

“데리고 오지 않을 생각인가?”
“데리고 오려면 데리고 올 수는 있겠지. 허나, 김우진이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다.”

반드시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무언가를 얻어내려 할 것이다.

“신이 된 이상, 죄수가 아니더라도 김우진이 페트로를 죽일 수는 없다.”

애초부터 백신전 소속의 집행자였고 이제는 백신전 소속의 신이니까.

“그러니 조금 늦게 구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지.”

어차피 죄수들을 모두 보내고 전쟁이 벌어지면 김우진은 죽는다. 자연스레 페트로는 백신전의 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리가.

“헌데 아까부터 아카식 레코드에서 눈을 때지 않는군.”


“네가 놓쳤다는 어둠의 사도를 찾고 있다. 더불어 새로운 신이 탄생했는지도 확인하고 있고.”
“의외군. 평소에 넌 아카식 레코드에 자주 오지 않았잖나?”
“상황이 이러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알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잡히는 게 있다면 알려줘라. 나는 김우진을 끝낼 준비를 마저 할 테니.”

그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베리안이 중얼거렸다.

“권속의 끈이 끊어졌으니 내가 놈을 돌봐줄 필요는 없다.”

권속이 주신과의 연결을 끊었다는 것은 주신에게 더 없는 수치다. 때문에 베리안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김우진에게 어떤 일을 당했든, 주신과의 연결이다. 그 끈을 끊어내고자 한다면 권속 본인의 의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

놈은 고통에 못 이겨 주신을 버렸다.

그런 놈을 신경써줄 필요는 없다.

베리안이 상념을 지우고 다시 아카식 레코드에 집중했다.

“어둠의 사도를 찾는다라.”


틀린 말은 아니다. 겸사겸사 찾고는 있으니.

* * *

“음.”

김우진은 계약이 종료된 이후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일로 독기가 바짝 오른 신들이 계약이 끝났다고 순순히 보내줄까? 차원 밖에 병력을 모으고 있는 것만


봐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력으로 부딪혀 올 거다. 지금의 그라면 신 몇 십 놈은 씹어 먹을 자신이 있지만 주신 둘이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죽겠지.”

패배한다. 반드시.

설사 기적적으로 이긴다고 해도 그 뒤에 남은 신들을 상대할 여력이 남지 않는다.

죄수들을 이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전면전은 필패다.

“일단 막긴 막아야 하는데.”

방법이 뭐가 있을까.

“페트로처럼 출소를 한다고 해도 내보내지 않는 건요?”


“그건 당연한 거고.”
“차원 자체를 닫아버리는 건 어떨까요?”
“차원을 닫는다?”
“어머니 나무님들의 힘이면 가능해요.”

세계수의 뿌리는 차원의 핵에 닿아 있고 세계에 간섭할 수 있다. 당연히 차원의 방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문을
아예 폐쇄해 버릴 수도 있다.

“아무리 신들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뚫어낼 수 없을 걸요.”


“주신은?”
“···창문을 여는 정도?”
“강화 유리야?”
“그게 뭐죠?”

유리창을 깨부수고 들어오는 건 생각보다 쉽다.

“상황에 따라서 고려는 해보겠지만 일단은 기각.”

율리아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 없습니까?”
“네가 원하면 이주일인가 닫을 수 있지 않니?”
“됩니다. 딱 이주지만 그것도 일단 써먹죠.”

일 년에 딱 이주일의 휴가. 작년에 강민식을 잡으러 썼으나 일 년이 지났으니 리셋 됐다.

“병가를 핑계로 손님을 안 받는다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타르칸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희 부족에서 다른 부족을 뜯어먹을 때 많이 쓰던 방법인데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러 오라고 해놓고 오면
족장님이 아프다고 만나주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한 기한이 지나면 그걸 명분으로 전쟁을···.”
“딱 당신 같은 짐승이랑 어울리는 추한 방법입니다.”
“뭐라고?”
“소장님,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디아네가 경건하게 입을 열었다.

“다 받아 들이 되, 출소라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전부 봉해버리는 겁니다. 애초에 출소의 권한은


소장님에게 있으니 못 들었다고 내보내지 않으면 신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게 내가 말한 거랑 뭐가 다르냐!”
“소장님이 가짜들 앞에서 아프다는 거짓말을 해야 하잖습니까. 소장님의 위신을 깎는 일은 결코 허용되서는 안
됩니다.”
“미친 광신도 같으니!”
“냄새나는 짐승이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짐승과 광신도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고 그 사이, 데르카인이 의견을 제시했다.

“그냥 마력포로 쏴버리는 거네. 호송대가 차원에 오기 전에 소탕해버리는 거지.”


“너무 대놓고 적대하는 건 안 됩니다.”
“적대할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되네.”
“마력포를 쏘고요?”
“최근 들어 균열이 벌어지고 마물들이 연옥에 침범한 게 한두 번인가. 그걸 핑계로 마물인 줄 알고 사전에
격퇴하려고 쏴버렸다고 하면 되지 않나.”

진실이 어떤지 지들이 알 바인가. 어차피 대충 짐작하고는 있겠지만.

데르카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최곤데요.”

김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제부터 들어오는 죄수들은 신들의 편에 서서 시키는 대로 하고 떡고물을 받아먹으려는 놈들일 터.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다.

“좋았어. 전부 다 하도록 하죠.”

그러면서 두리쉬마가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고 죄수들이 능히 신이 될 수 있는 수준까지 키우는 것.

당장 직면한 최우선 과제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꽤 많이.

* * *

“끄억, 나쁘지 않군.”

벌컥 벌컥, 빠르게 사라지는 독기들에 강민식은 피눈물을 삼켰다.

“내, 내 피와 땀이···.”

물론 그의 피와 땀에도 독기가 섞여 나오긴 하지만 실제 피와 땀은 아니다.

마물에게서 흡수한 마기와 독기를 정제한 것. 신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비밀 병기로 생각하고 열심히 뽑아냈더니
그게 애먼 불청객의 입 속으로 다 들어가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두리쉬마.”

듣기로는 타이탄이라는 고대 종족의, 한 때는 신조차 위협했던 위대한 거인 종족의 마지막 후예라는데 저게 어딜


봐서 거인족인가.

기껏해야 10cm. 한 대 때리면 날아갈 것 같은 놈. 그러면서 어떻게 생겨먹은 위장인지 그의 독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있긴 하다.

“음? 불렀나?”
“아니, 아닙니다.”

강민식이 고개를 저었다. 신들에게 한 방 먹이고 공을 인정 받을 자신의 독이 저렇게 소모 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쩌겠나. 김우진의 명령인 것을.

“독들이 꽤나 훌륭하군. 마기도 꽤나 순수하게 잘 정제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더 회복이 될 것 같다.”


“별 말씀을.”
“허나 역시 한참 부족하다.”

쨍그랑, 두리쉬마가 마지막 빈 병을 내던졌다. 끄억, 거칠게 트름을 하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가볍게 손을 뻗자
어딘가에 있던 자그마한 망치가 날아와 안착했다.

“충돌이 멀지않았으니 최대한 빨리 힘을 되찾아야 하는데 연옥을 벗어날 수 없는 게 너무 안타깝군.”


“포위 되었다고 하셨죠.”
“이제는 이 상태로도 나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하게 되었다.”

솔직히 강민식은 잘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신격을 얻지 못한 그에게 차원 이동이란 그저 눈을 감았다


뜨면 세상이 바뀌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

은빛의 짐승이 땀내와 피 냄새를 진득하게 풍기며 다가왔다.

“소장님에게 들었다. 네가 타이탄이라는 엄청난 종족이라지?”


“너는?”
“나는 위대한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다.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짐승들은 변하는 게 없군. 싸울 상대만 보면 발정난 개처럼 달려드는 게.”

음. 두리쉬마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자그마한 망치를 가볍게 휘둘렀다.

만전일 때에 비하면 역시나 한참 부족하다. 특히나 최근에는 칼카르를 죽이고 그 업을 흡수했기에 느껴지는
괴리감은 더 컸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앞뒤 분간 못하고 날뛰는 짐승 하나를 참교육 하기에는.

우드득, 두리쉬마의 몸이 기괴하게 꺾였다.

“어?”

강민식이 당황하며 눈을 몇 번 껌뻑였을 때, 자그마한 10cm 의 소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2m 에 가까운 근육질의
남자가 서 있을 뿐.

“따라와라.”
“크하하하, 타이탄이라더니 화끈하구나! 좋다!”
“너한테 예의와 존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마.”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둘은 한 때는 도축장이라 불렸던, 그러나 지금은 투기장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 했다.

관중은 수인들과 타이탄에 호기심을 가진 거인족 하나가 전부다.

‘타이탄.’

소장님이 엄청난 강자라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잃은 상태라고. 그럼에도 자신과 좋은 상대가 될 거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과거에 얼마나 대단했든, 지금은 그냥 작은 소인에 불과했다. 힘을 얼마나 잃어버렸든, 당장 느껴지는 기운은
약해 빠졌다.

그런데 적수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결투를 신청했다. 소장님께 보여주기 위해서, 율리아 카르센보다 먼저 신이 되지 못해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선공은 양보하겠다.”
“고맙군.”

그와 동시에.

“······!”

타르칸 톨리스는 섬짓함을 느꼈다.


서늘해지는 동골, 확장되는 동공, 경고를 보내는 감각들.

피한다. 아니, 늦었다.

본능적으로 오러를 끌어 올리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

그 직후, 망치가 떨어진다. 소장님의 검격보다도 한층 묵직한 충격에 숨이 턱 막혀온다.

그 한 방으로 상대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깨달았다. 허나, 타르칸은 본능적으로 대응했다.

무릎을 굽히며 한 걸음 물러나 최대한 충격을 흘리고 욱신거리는 팔에 힘을 주며 힘을 토해낸 망치를 밀어낸다.
가볍게 열리는 상대의 상체에 손톱을 들이민다.

카각!

손톱과 살이 부딪혔음에도 흡사 금속과 금속이 부딪힌 것 같은 파격음이 난다.

손톱이 빠질 것 같은 아픔에 타르칸이 신음을 흘린다. 상대의 피부는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었다.

“과연···!”

역시 소장님이 허언을 할 분은 아니었다. 잠시 소장님을 의심한 스스로를 타박하며 전의를 불태운다.

상대는 강하나 그렇기에 더욱 싸울 가치가 있다. 짐승의 투지는 꺾이기는 커녕 더욱 세차게 타오른다.

전신의 털이 바짝 선다. 온 몸을 휘감는 은빛의 오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궤적을 그린다.

순식간에 공간을 격한다.

─!
──!

손톱과 주먹이, 손톱과 망치가 부딪힌다.

주먹은 할 만하다. 허나 망치는 너무도 무겁다. 망치에 담긴 거력은 너무도 쉽게 그의 오러를 깨부수며 전진한다.
충격이 누적된 근육이 파열하며 더욱 큰 고통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타르칸의 정신을 더욱 맑아진다.


상대는 빠르다, 그리고 힘이 세다. 예전의 타르칸이었다면 순식간에 당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장님과의 실전은 그를 잘 벼려진 한 자루의 칼날로 만들었다.

그 증거로 상처의 비율은 타르칸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상대에게도 분명히 새겨지고 있다.

통한다.

감각을 곧추세우고 아픔을 잊는다. 마기에 저항하느라 비명을 지르는 심장을 쥐어짜내며 더욱 마력을 끌어 올린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힘을 대부분 잃었다면 지금의 상태를 장기적으로 끌고 갈 수는 없을 터.

그건 안 된다. 이런 상대가 만전이 아닐 때 승부를 내는 건 수인의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전력을 다한다.

황금빛 동공이 찬란한 서기를 발한다.


상대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진다.

손톱이 궤적을 그린다.


망치가 주인과 공명하며 힘을 방출한다.

──────!

거대한 충격에 세상이 흔들린다.

관람석을 지키는 방어 마법진들이 깨어진다. 관람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급히 자신들의 몸을 지켜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 삼켰던 충격파가 사라진 자리에는 기절한 짐승과 그를 내려다보는 두리쉬마가 있었다.

“···재미있군.”

두리쉬마가 욱신거리는 상처들을 매만졌다.

과연 김우진이 자신할 만하다.

아무리 그의 힘이 약해졌다 한들 격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 신들에게 대적하고 간신히 살아남아 어둠의 사도가 되어 격을 올렸다. 주신 칼카르를 죽이고 업을


쌓았다.

헌데 저 은빛 짐승은 그런 그의 육신에 제법 많은 상처를 남겼다.

김우진이 훈련을 시킨다 뭐한다 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냥 스스로의 재능이다.

강하다.

만약 신격을 얻기만 한다면 분명히 어지간한 신들보다 더 강할 거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적어도 지금 당장 타르칸을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의 탄생은 곧 기존 신의
죽음을 뜻하니.

“찾았다.”

어둠의 사도에게 신은 아주 좋은 경험치였다.

───────────────
# < 087. 경계 중 이상 무 >

“타르칸의 수준이 신에 필적하게 올랐다는 겁니까?”


“내 생각은 그렇다.”
“두리쉬마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수인들이 원래 그렇다.

아주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그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 실전으로 육체가 단련되고, 경험이 축적된다.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 짐승들은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언뜻 보면 그렇게 단순하다.

뭐,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환영이지.

만약 연옥에 들어온 처음부터 수인들과 매일 같이 대련을 해줬다면 어느 수준까지 올랐을까하는 가정도 들었지만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신을 죽여 업을 쌓는다.’

그것으로 힘을 회복한다.

상대가 신인만큼 무조건적으로 효과가 있을 거다. 거부할 이유가 없다.

신들을 세계수의 배터리로 써 먹는 건 여전히 효과적이지만 하나 정도가 빠진다고 큰 문제가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문제는 타르칸 톨리스가 정말로 신이 될 자격을 갖추었느냐다.

김우진은 타르칸을 비롯한 죄수들의 수준이 어지간한 집행자들을 씹어먹을 정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은 또
다르다.

신들을 제외하고 가장 신에 근접한 자. 율리아는 세계수의 열매라는 기적까지 따라주어 그 자격을 갖추었으나
타르칸은 아니었다.

페트로가 신이 된 게 그 증거다. 타르칸보다 신에 가까운 자가 몇이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다.

“일단 당장은 말고 유예기간을 좀 가져보도록 하죠.”

자칫 잘못하면 기껏 잡은 신을 다시 돌려주는 꼴이니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신중은 곧 확실한 대비다.


“당분간 저만 따로 봐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두리쉬마님과 번갈아가며 네 수준을 끌어 올릴 거다.”
“두리쉬마님도 말씀이십니까?”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강약약강의 전형과도 같은 수인족답게 타르칸은 두리쉬마에게 한 번


패배한 이후 예의를 주입 당했다. 김우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어쨌든 수인에게 있어 실전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 김우진과 두리쉬마,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강자가 번갈아
가며 실전처럼 붙어준다면 과연 신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최대한 종식시킬 수 있다.

“앞으로는 개인 교습이다.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빌 정도로 격할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도록.”


“살다 살다 수인의 훈련을 도와주게 될 줄은 몰랐다만, 백신전에 한 방 먹일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 허나,
나는 정말 실전처럼 할 것이다.”

김우진과 두리쉬마는 적당히라는 것이 없었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수인들의 귀족이라는 달의 늑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났다.

* * *

금속은 때릴수록 단단해진다.

그리고 수인은 때릴수록 강해진다. 어느 만화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수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확신이 생겼을 때, 두리쉬마는 신 하나를 죽였다.

콜카트라는, 김우진이 잘 모르는 자였다.

신을 죽인 업이 두리쉬마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업은 막대한 마기를 함께 제공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풍족한 마기에 두리쉬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변은 두리쉬마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번쩍, 한 줄기 빛이 차원을 그대로 관통하여 타르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빛 줄기가 사그라진 자리에는 한
마리의 짐승이 신이 된 채 서 있었다.

“이게 신의 힘···!”

느껴지는 전능감에 타르칸 톨리스가 포효했다.


“크하하하하하!”

용사로서 신의 힘을 다루는 것과 신이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당연히 그 고양감과 충만감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는 수준의 것이다.

그래서일거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리쉬마 덤벼라!”

그의 투지가 다시 샘솟고, 말이 다시 짧아진 것은.

그나마 뼛속 깊이 각인된 공포로 김우진에게는 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역시 짐승은 짐승이군. 주기적으로 매가 필요하니.”

망치가 춤을 추었고 짐승은 복날에 개 맞듯이 맞았다.

“어, 어째서···?”

쪽도 못쓰고 당한 타르칸이 신음을 흘렸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신이 하나 늘었다.

* * *

“···음?”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던 베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금 전, 이 우주에 이변이 일어났다.

다급하게 백신전의 신들이 소집되었다. 그들 휘하의 모든 집행자들도 마찬가지.

“방금 전,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

허나, 집행자들 중에는 신이 된 자가 없었다.

이번에도.

“또 없다는 말입니까?”
“미치겠군.”

신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이 하나 늘었다는 것은 신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행자가 신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백신전의 눈 밖에 벗어난 존재가 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둘 다 백신전 입장에서는 최악이다.

“죽은 건 이 자리에 없는 여섯 명 중 하나겠군.”

알비츠가 뿌득, 이를 갈았다.


그날 이후, 한 달이 지났고 알비츠는 꾸준히 변방 차원을 수색하며 사라진 신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무엇 하나
나오지 않았다.

헌데 갑자기 신이 죽었다고? 완전히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망할 타이탄 놈.

“그들의 위치는 찾았나?”


“찾지 못했다.”
“우리를 벗어난 신의 존재는?”
“그것 또한.”
“타이탄은?”
“마찬가지다.”
“아카식 레코드를 종종 살피면서 찾아내는 게 없군. 정말로 그들을 찾기 위해 살피고 있는 게 맞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직접 발품을 팔고 있는 그와 달리 베리안은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선을 넘지 마라, 알비츠.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은 방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더 많다.
너라도 마찬가지일 터.”
“우리는 계속해서 농락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명확한 주체도 모르지. 그런 상황에서 너는 여전히 아카식
레코드랑 허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알비츠는 최근의 상황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우진도, 타이탄도, 새로운 신도. 모든 게 어그러지고 백신전이 만들어 놓은 판이 엎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스운 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주신 중 하나인 베리안이 생각보다 태평해 보인다는 것이다.

아카식 레코드? 좋다. 그 기록에는 모든 게 있으니 당연히 뒤지다 보면 답이 나온다. 하지만 그 방대함은
주신이라 해도 몇 백년, 몇 천년이 걸릴지 모른다.

지금처럼 시간이 중요한 일에는 직접 나서는 게 차라리 낫다.

‘칼카르만 있었어도.’

같은 주신이라고 한들 균형이 완전히 딱 떨어지지 않는다. 셋이서 맞추고 있던 균형이 깨어지자 베리안이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기색이 늘어났다.

“조만간 그러도록 하지. 허나 지금 이 자리는 그런 사소한 것을 논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신의 죽음과 탄생을 알지 못했을 거다.”
“···그건 인정하지.”
“해서 나는 이번에는 반드시 연옥의 죄수가 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없다. 직감이다.

허나 가장 그럴듯하다.

무엇보다.
“때마침 준비도 끝났다.”

죄수들이 모두 모였다.

총 43 명의 죄수들. 김우진이 내보낸 7 명을 포함하면 50 이다. 계약을 끝내기에 충분한 숫자다.

“죄수들을 연옥으로 보내 계약을 끝내고 김우진을 친다. 그럼 우선 신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찬성입니다.”

신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진 신들을 찾는 것이나 타이탄을 찾는 건 이 일을 해결한 뒤에 해도 되지 않나?”


“···좋다. 허나, 김우진을 처리한 뒤에는 반드시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약속하지.”

마침내 계획이 실행되었다.

* * *

“더 많아졌군.”

신들이 죽이고 싶어 하는 대상 2 위로 꼽히는 알베니우스는 틈틈이 릴리의 용인 아래 차원의 틈새를 벌려 외부를


살폈다.

점점 촘촘해지는 포위망에 그리 멀리 나갈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저걸 뚫어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김우진의 방법들이 통했으면 좋겠는데.”

정면승부는 답이 없다. 김우진의 말대로 잘 되어 시간이 끌리고 이쪽의 전력을 올려야 한다.

문제는 올린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답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미 신이 된 율리아 카르센, 그리고 신 후보로 만들고자 하는 타르칸 톨리스, 시에나 올름, 데르카인 알베트,
강민식, 베르너 레트만, 디아네 디트린까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일곱의 신이 아군이 된다. 일곱의 신에 김우진을 포함하면 정말 더 없이 강력한 전력이 된다.

상대가 백신전만 아니라면 그렇다.

주신 하나가 죽었다고 한들, 아직 둘이나 남았다. 수많은 신들이 죽고 납치 되었다고 한들 아직 수십 단위의


신들이 남아있다.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집행자들은 훨씬 많고.”

집행자들 또한 신들에 비하면 약할 뿐, 모두 초월자들이다.

“두리쉬마가 있다고 한들, 두리쉬마가 회복하려면 시간이 엄청나게 필요하고.”


애초에 연옥을 벗어나지 않고는 크게 방법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깜깜한 앞날에 알베니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해결책이 필요한데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용사들을 끌고 오면 집행자들이라도 덜 상대하게 될 텐데.’

281 명의 전직 용사들이다. 알베니우스가 직접 우주의 힘을 넘겨줬으니 이제 전직 용사란 이름을 때버려야겠지만.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종말 차원에 던져놔서 전원이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꽤나 업을 쌓았을 거다.

‘그러고 보니 두리쉬마가 없으니 더 이상 차원을 이동할 수도 없을 텐데.’

설마 다 죽은 건 아니겠지. 아니면 두리쉬마를 찾는 신들의 수색에 걸렸다거나.

- 뭐?

그때, 파랑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왔다.

신력을 꾸준히 흡수해서인지 릴리의 언어 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혀 짧은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에 생략된 게 많았다. 알아서 파악하려면 머리가 아픈 건


이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신들을 살피고 있다. 포위망이 더 두터워졌어.”

- 가?

“가고 싶냐고? 지금 가면 죽는다. 그러는 너야 말로 여기까지 뭐하는 거냐?”

- 근무.

“근무?”

- 소장. 경계.

“소장이 경계 근무를 서라고 했다고?”

- 응.

두 그루의 세계수가 연옥에 뿌리를 박았지만 차원 전체에 뿌리를 퍼트린 건 릴리였다. 연옥 전체는 릴리의 손
안에 있었고 차원에 누군가 접근한다면 가장 먼저 반응할 수 있었다.

- 저!

그때 릴리가 날개를 뻗었다. 그녀의 날개 끝에는 연옥으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저건···.’

신은 아니다. 그리고 저 복장은 김우진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호송대다.


‘죄수들이다!’

과연 김우진과 두리쉬마의 예상대로다. 죄수들을 보내 계약을 끝내려는 거다.

“빨리 김우진에게 알려야···!”

하지만 그보다 릴리가 더욱 빨랐다.

- 발견. 적.

릴리가 눈을 샐쭉하게 떴다. 삐이이이, 맹렬한 울음소리가 연옥 전체에 퍼져 나갔다.

경고음이었고 준비를 알리는 시작음이었다.

엘프와 드워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빨리, 빨리!”
“마침내 때가 왔다!”

- 저쪽! 각도. 조금 위로. 더!

릴리의 날개가 향하는 방향으로 수십개의 마력포대들이 자리했다. 엘프들이 세계수와의 연결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응집!”
“응집!”

- 거리. 약 100km.

“거리 약 100km!”
“방향은 동북!”

- 끼잉, 낑!

기운이 빨려나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르가 신음을 내뱉는다.

한 번 해보았던 릴리는 의연한 표정으로 적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 쏴!

“발포!”
“발포하라!”

─────!

광활한 신력이 요동친다.

수십 줄기의 섬광이 전진한다. 차원의 방벽을 통과해 그대로 뻗어나간다.

100km 의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지나치고.


죄수들을 이끌고 오는 호송대를 덮친다.

비명도, 저항도 없다. 광활한 폭발이 그저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뿐.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폭발이 소멸한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아니, 조금 남긴 했으나 적어도 죄수들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 처리!
- 이상! 경계 무!

릴리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088. 유예 >

[드디어 미쳐버린 거냐, 김우진!]

수차례의 실패와 개량을 거듭하며 완성된 마력포들은 생각 이상의 준수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죄수들은 모조리 쓸려나갔고 호송관 역할을 하는 집행자들도 정면으로 맞은 놈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신을 상대로 유효타를 주기 위해서는 더욱 개량을 거쳐야겠지만 일단은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베리안의 반응을 보니 더욱 더.

“미안하군. 내 밑에 애들이 적인 줄 알고 포격을 해버린 모양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어제 분명히 죄수가 간다고 연락을 주었을 텐데?]

“물론이다. 죄수를 맞이할 준비를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허나, 너도 알다시피 최근 들어 마물들이 연옥을
침범하는 사태가 한두 번 벌어진 게 아니다 보니 모두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따위 것을 변명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착각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심심한 사과를 건네지.”

[김우진, 넌 계약을 어겼다.]

“내가? 그럴 리가.”

김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일단 계약의 문제는 없는데. 그들은 죄수(진)이었지 아직 죄수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죽은 자들 중에 신이 있었나?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내가 지금 심연에 끌려가지 않고 멀쩡히 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프흐흐, 김우진이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고의가 다분했다는 것을 김우진도 알고 베리안도 안다. 아니, 백신전의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계약에 묶여 함부로 이빨을 드러낼 수 없으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김우진을 묶어두기 위한 올가미에 스스로 발이 묶인 꼴이라니.

[네놈.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냐.]

“적어도 지금 당장은 꿀릴 게 없긴 하지.”

[네 휘하의 교도관들이 마력포를 발포했다고 했느냐? 그들의 죄를 백신전에서 직접 묻겠다. 백신전으로


압송하도록.]

“그건 안 되지. 내가 책임자인데 밑에 애들 커버 하나 못 쳐주면 어디 가서 명함 내밀고 살겠어?”

허나, 김우진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실수 한 번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 우리가 하루 이틀 안 사이도 아니잖아?”

김우진이 비실비실 웃었다.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 의미는 사뭇 달랐다.

[다음 번에는 꽤 기대해도 좋을 거다.]

“기대되네.”

연락이 끊어졌다. 김우진이 대소했다.

“통신구가 언제 4d 가 됐지? 빡침이 전해지네.”

신들이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크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 잘했어. 나?

“그래. 너무 잘했어.”

데르카인에게 이 작전에 대해 들었을 때만해도 그저 죄수들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물들이 쳐들어 왔을 때, 자폭하던 드워프들의 모습이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달 동안 드워프들은 개량과 보강을 반복하며 쓸만한 마력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쓸만함의 기준은
신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당연히 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용사 혹은 죄수들 따위는 단숨에 지워버릴 수 있다.

아주 만족할 만한 성과다.

- 응. 이상 무. 경계.

릴리가 날개를 이마에 가져다 대며 경례 자세를 취했다.

“군인 놀이에 빠졌네.”


딱히 경계 근무를 하라고 한 적은 없다. 죄수들이 오면 모조리 쏴버리라고는 했지만.

굳이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얼마 전에 보았던 군대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봐서다. 요즘 들어 지친 릴리에게 휴식


겸 티비를 보여줬더니 영화나 드라마 마니아가 되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

“그럼 이제 가서 쉬어.”

- 응! 이병, 나르! 앞으로!


- 끼잉!

호랑이의 머리 위에 앉은 릴리가 위풍당당 사라진다.

저렇게 보니 역시 아이는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있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둘이서 알아서 잘
논다나.

똑똑-

“들어오십시오.”
“신들의 반응이 어땠지?”

알베니우스가 들어오자마자 제 집마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예상대로입니다. 화는 내지만 딱히 무언가 할 수는 없죠. 계약이 존재하는 한.”


“한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로 해버릴 줄이야. 김우진, 넌 정말 미친놈이다.”
“욕입니까, 칭찬입니까?”
“보통은 욕이지만 이 경우에는 칭찬이겠지. 커피는 안 주나?”
“알아서 타 먹으세요.”
“여기는 손님 대접이 꽝이야.”

알베니우스가 궁시렁 거리면서도 알아서 커피를 탔다. 딱히 무언가를 추가하지 않은 에스프레소였다.

“손님입니까?”
“네가 불렀으니까 손님이지.”

딴에는 맞는 말이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지?”
“만약 릴리가 신을 완전히 빨아먹어버리면 남은 미라는 신입니까, 아닙니까?”
“갑자기?”
“마력포를 보니 조금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개량에 개량을 거쳤고 지금도 거치고 있는 마력포의 화력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세계수들에게서 받는 에너지가 많아진다는 소리였다.

“아직 멀었다만.”
“아직이 언제 이제가 될지 모르는 겁니다.”
“뭐, 그렇긴 하지. 아마도 신일 거다.”
“뭡니까, 그 모호한 대답은.”
“내가 신이 되어본 것도 아니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 않느냐.”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알베니우스님이 알고 있는 선에서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하트가 파괴 되어도 격을
잃지는 않는 겁니까?”
“내가 알기론 그래. 신의 격은 단순히 강하다는 차원을 넘어선 무언가니까.”

제법 납득이 갔다.

신이 단순히 더 강한 집행자라면 신이라 불릴 이유도, 아카식 레코드가 딱 백 명만 고를 이유도 없겠지.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는 건가.

“역시 새로운 신을 잡아야 되나?”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후보들을 신으로 만들려면 지금 잡은 놈들은 다 죽여야 합니다. 그 이후에는 배터리가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잡을 수는 있고?”
“음, 당장은 역시 무리겠죠?”

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마물의 범람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애초에 쓸데없는 걱정이야. 세계수가 단순히 신들의 힘을 통과하고 정제하는 통로라고 생각해?
세계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걸 보고도 모르겠어?”
“물론 그건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드워프들의 집착이 점점 더 심해지는 꼴을 보니···.”

골치아프다는 듯, 김우진이 이마를 짚었다.

“뭘 걱정하는 지는 알겠는데 한 그루면 몰라도 두 그루면 그럴 일 없어.”


“하긴, 그렇겠죠?”
“그래.”

김우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통신구가 신호를 잡았다.

“통신구?”
“···백신전 직통입니다.”

갑자기 왜 다시?

묘한 불안감을 애써 눌러두며, 김우진이 통신을 받았다.

그리고 통신이 끝났을 때 김우진의 안색은 더 없이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죄수들이 온 답니다.”
“다시 온다고?”
“예. 내일 바로 온다네요.”

아무래도 죄수들을 모두 죽여버린다는 경우의 수를 생각했던 것은 김우진과 데르카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 *

“미친놈이구나. 제대로 미친놈이야!”

알비츠가 대소했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이 이름 세 자가 이렇게까지 그의 마음을 박박 긁게 될 줄, 과거의 알비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러지 않았느냐.”

김우진에게는 분노를 여실히 표출하던 베리안은 꽤나 평온한 안색이었다.

“김우진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아무리 그렇다고 진짜로 죄수들을 몰살 시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죄수가 아니다. 죄수가 되기 직전의 용사지. 놈의 말대로 계약서상의 문제는 없다.”
“넌 누구의 편이냐, 베리안.”
“당연히 백신전의 편이다. 그러니 이런 일을 대비해서 대안을 만들어놓지 않았느냐.”

프흐흐, 베리안이 웃었다. 김우진에게는 분노한 척 했지만 사실 그는 별로 화나지 않았다.

김우진에게 더 없이 당해왔던 백신전이었다.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내일 바로 가라.”
“그러지.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직접 가보겠다.”

그래서 용사들을 모았다. 43 명이 아닌, 93 명을.

진짜 죄수들을 모으는 것에 비해서 훨씬 쉬웠다. 그저 적당한 딜을 해주면 신의 과업이라고 좋아하며 개처럼


꼬리를 흔들어 댔으니까.

일을 무사히 마치면 집으로 잘 보내주거나 집행자로 삼아주겠다는 것을 싫어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설사 약속했다 한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가 아니라면 굳이 지킬 필요도 없다.

굳이 86 명이 아닌 93 명을 모은 건 또 다른 수작에 대한 대비였다.

계약서에 따라 다시 한 번 죄수들이 간다는 고지를 내렸다.

“놈의 반응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김우진은 은근히 표정 관리가 잘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황했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음 날, 베리안이 직접 50 명의 죄수들을 이끌고 연옥으로 향했다.

저 멀리, 차원의 방벽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오는군.”

죄수들을 몰살시키고 백신전에 큰 엿을 선사했던 그 광선이다. 느껴지는 신력으로 미루어 보아 동력은 아마도
세계수겠지.

─────!

섬광이 번쩍인다. 무식한 기운을 품은 채, 죄수들을 쓸어버리려 한다.

“과연.”

베리안이 없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었을 거다.

헌데 그가 있는데도 마력포를 쏘다니. 신이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함인가, 아니면 쏴도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마음 놓고 쏘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겠지. 김우진이 그리 허술할 리가 없으니.

포격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신력을 머금은 포격이 100km 를 주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였다.

그리고 베리안이 거대한 빛의 방패를 만들어내는 것도 찰나였다.

─────!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부스러진 파편과 충격파가 사방을 덮쳤다.

허나 방패의 뒤로는 그 무엇 하나 넘어오지 않았다. 포격 따위로는 감히 주신의 권능을 넘을 수 없었다.

“어디 더 해봐라, 김우진.”

하지만 추가적인 공격은 없었다.

베리안은 느긋하게 죄수들을 이끌고 연옥에 당도했다. 그리고 문을 열려고 했다.

“···이런 건 헛수고라는 걸 알 텐데.”

문은 잠겨 있었다. 주신으로서 가진 권능도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안다. 세계수를 이용해 출입을 통제해버린
거다. 아무리 그가 주신이라고 할지라도 차원 하나에 대한 간섭은 차원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만 못하다.

물론 그게 강제로 부수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베리안이 힘을 끌어 모았다. 빛이 환하게 일렁였다. 내리 치려는 순간, 차원의 방벽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주신을 뵙습니다. 저는 연옥의 부소장입니다.”


“네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다. 왜 문을 열지 않지? 감히 계약을 어기겠다는 뜻인가?”
“방금 백신전에 통신을 했는데 듣지 못하셨습니까?”
“무슨 뜻이냐.”
“소장님이 개인적인 일이 생겨 휴가를 신청하셨습니다.”
“···뭐?”
“해서 이주일간 연옥을 출입을 통제하고 누구도 들이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시길.”
구멍이 사라졌다.

“하하···!”

베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없어서도,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생각해낸 게 고작 이주일의 유예라니. 네 꼼수도 다 떨어진 모양이구나.”

김우진이 보여주는 하찮은 수가 그가 어떤 상태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서였다.

이주 뒤가 김우진의 마지막이다.

그는 확신했다.

* * *

“자, 일단 이주 벌었고 이 다음은 뭐라고 했지?”


“죄수들을 받아놓고 입을 봉하는 겁니다. 소장님. 출소하고 싶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전부
진실한 신이 누군지 깨닫고 소장님의 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한다고는 안 했어.”

하지만 주신의 위엄과 신앙을 퍼트리는 것은 당연한 건데···. 디아네가 구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일단 이주 안에 모두 신으로 만들 겁니다.”

맨 처음이 율리아였고 타르칸까지 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직이다. 지난 3 개월간 꾸준히 훈련을 거듭해
모두 성장하긴 했지만 타르칸만큼의 확신은 없었다.

주로 타르칸에게 집중했었으니까.

“가장 유력한 건 저 광신도다. 그 다음은 소지라는 인간과 엘프고. 제일 떨어지는 건 독인간이군.”

두리쉬마가 죄수들의 수준을 확인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신의 대적자인 그였기에 반대로 누가 가장 신에


근접한지 알 수 있었다.

“이주동안 강민식을 가장 집중적으로 가르쳐야겠군요.”


“내가 하지. 저 독 인간의 독기에는 마기가 섞여 있으니.”
“만약 이들이 전부 신이 된다면 주신을 잡을 수 있을까요?”
“주신을? 조건이 어떻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일단 네가 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또 뭘 꾸미는 거야, 김우진. 연옥 안에서 백신전과의 전투는 불가능하잖아.”
“연옥 밖에서 하면 되죠.”

정확히는 연옥에 들어오기 전.

“베리안이 온 걸 보고 생각났습니다. 놈은 오만해서 혼자였고 나머지는 죄수나 집행자였죠.”

그렇다면 그 때 놈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설마 그런 상황에서 공격당할 줄은, 이곳에 여섯의 신이 있을 줄은 모를 겁니다.”
“불가능하다고 본다. 상대는 주신이고 저놈들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어. 전투가 벌어지면 신들이 달려올 거다.”
“그럼 바로 튀어야죠. 일단 해보고 아니면 마는 겁니다.”
“신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싸움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의미가 없어져서요.”

어차피 서로 뒤가 없이 끝을 보고자하고 있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

“만약 모두가 신이 되고 그래서 내가 여섯 신을 죽이고 본래의 힘을 되찾는다면. 그래서 너와, 이들과 함께


합공한다면.”

잠시 고민하던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할 것도 없다고 본다.”

이미 칼카르를 잡은 경험이 있으니 더욱 더.

───────────────
# < 089. 억울함 >

교도관과 죄수, 그리고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자들까지. 연옥의 구성원들은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백신전과 격돌할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김우진은 여섯 명 모두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박차를 가했고 두 그루의 세계수를 심으면서 쑥쑥 자라나는 영약은
거기에 도움을 주었다.

“훈련? 물론 훈련도 좋네만, 일단은 마력포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게 먼저 아니겠나? 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신에게 확실하게 통하게끔···!”
“신이 되시는 게 우선입니다. 신이 되고 마력포를 만들면 마력포의 성능도 올라갈 겁니다.”
“정말인가?”

난쟁이의 반색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거다. 김우진이 신이 되어보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도구는 제작자의 마력이 깃든다.
당연히 용사인 데르카인보다는 신 데르카인의 신력이 마력포의 성능을 올린다에 손모가지를 걸 수도 있었다.

“크흠, 그렇다면야. 그런데 잠깐만.”

무언가를 깨달은 데르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이 되려면 기존의 신이 없어져야 하지 않나?”


“그렇죠.”
“그럼 배터리는?”
“신을 언제까지 일개 배터리로 여기실 겁니까?”
“그놈들이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배터리 취급도 과분하다는 걸 알아야 할 거네.”

하긴, 이곳의 용사들 치고 신들을 좋아하는 자는 없다. 그들의 요청으로 세상을 구원했더니 자유를 박탈당하고
선택을 강요당했다.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할 수가 없다.

“알베니우스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신들이 죽어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세계수들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고 그만큼 세계수들은 성장했다고.”
“그럼 준 무한동력 정도는 되겠군?”
“세계수를 무한동력 취급하는 것도 그만두세요. 그러니까 릴리가 데르카인님을 난쟁이라고 부르면서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미움 좀 받으면 어떤가. 나는 그 어떤 드워프도 해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을 하고 있는데!”
“뭐, 마력포를 부탁한 입장에서 저도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긴 하죠.”

아무튼 그렇게 데르카인 또한 신이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역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영약을 백신전 놈들에게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 아시잖습니까.”

영약을 먹이고.

“도끼! 도끼가 부서졌네!”


“바로 여분을 꺼내시죠.”

실전과 같은 대련을 했다.

데르카인은 이미 거의 완성된 용사였고 굳이 추가적인 깨달음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고작 이주만에 그렇다고 신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의문이지만 다른 자들에 비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틈틈이
노력을 해왔으니 최선을 다해볼 수밖에.

“···이제는 망치를 휘두르지도 못하겠군.”

데르카인을 녹초로 만들고 나면 그 다음은 소지였다.

“너는 특히 문제가 많아.”


“제가 말입니까?”
“먹은 게 워낙 많아서 마력은 가장 넘쳐나지만 그걸 제대로 쓸 줄을 모르니까.”

설사 신이 된다고 해도 과연 다른 신들과 비등한 전투를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린아이에게 명검을 쥐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피조물을 상대로는 총이지만 같은 신을 상대로는 칼이다.

“그래도 좀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그 동안 꽤 빡세게 했는데.”


“나아지긴 했지.”

하지만 역시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부족하니 비교가 된다.

“걱정 마, 인간은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죽기 싫으면 하겠지.
“···잠깐만! 훈련을 할 때, 하더라도 밥은 먹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시간 없어.”
“이번에 도축장에서 페이그람을 잡았습니다.”

페이그람은 돼지를 닮은 몬스터로 몬스터답지 않게 육질이 부드럽고 단백질과 지방의 조화가 좋은 놈이었다.
몬스터 특유의 독기와 악취가 문제지만 베르너의 손길을 만나면 천상의 진미로 바뀐다.

“···좋아.”

김우진은 베르너와 함께 그가 준비한 만찬을 먹었다.

“꾸에에엑!”

그리고 베르너는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냈다.

* * *

날이 밝았다. 동쪽에서부터 해가 떠오른다.

“제게 어둠을 해쳐나갈 용기를 주시옵고.”

디아네가 경건히 기도를 드린다.

신앙과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어떤 악에도 굴복하지 않은 담대함을.”

결전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연옥을 감싼 긴장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진해졌다.

“어느 순간에도 바래지지 않을 믿음을.”

누군가는 긴장하고, 누군가는 투지를 불태우며, 누군가는 두려워하지만 디아네는 평온했다.

적들의 세력이 강하다고 겁을 먹을 필요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타락한 이 땅에 신의 뜻과 말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을.”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지니.

위대한 소장, 아니 주신께서는 결국 찬탈자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모든 것을 순리대로 되돌리실 것이다.

승리는 당연한 거다.

그렇기에 그녀의 걱정은 승패 따위가 아니다.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을지.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그분의 곁에
자신이 서 있을 수 있을지.

“끝까지 그 뒤를 따르겠나이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눈을 뜬다. 그리고 무기를 다잡는다.


“끝났냐?”

그녀의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걸 기다리고 있던 김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예,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싸우기 전과 후에 기도를 하는 거, 그거 꼭 해야 되나?”
“신께 기도를 드리는 건 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신이 너한테 하지 말라고 한다면?”

후우, 김우진이 온 몸에 일어나는 두드러기를 긁으며 간신히 내뱉었다.

설마 스스로를 신이라고 말하는 날이 올 줄이야. 백신전 놈들은 이 부끄러운 말을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의 말에 디아네의 눈가가 묘하게 호선을 그렸다.

“···드디어.”
“뭐라고?”
“드디어···! 드디어 스스로를 신이라고 하셨군요!”
“······.”

김우진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디아네가 환하게 웃었다. 기쁘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기다려?”
“모든 이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지고한 이름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께서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지 않는데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무지몽매한 자들이 어찌 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겠습니까.”

허나, 이제는 다릅니다.

“신께서 스스로 자각 하셨으니 마땅히 모두가 신을 섬길 것입니다!”

환희에 찬 눈빛은 거의 광기였다.

“전 우주가 주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스스로 섬길 것입니다!”


“······.”

김우진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결국 정정을 포기했다.

“···조용.”
“명하신다면.”
“일어나라.”
“예.”
“도끼 들고.”
“예.”
“견뎌.”
콰아아앙!

검이 떨어졌다. 도끼가 간신히 버텼으나 디아네의 두 다리가 종아리까지 대지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혈관이
도드라졌다.

“···신께서 견디라고 하신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견디겠습니다.”

믿고 따르는 자에게 은총이 있나니.

그렇지 않아도 충만한 믿음에, 신께서는 그녀에게 신위를 약속하셨다.

“신께서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으니!”

따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설마 그게 신을 후드려 패라는 명령일지라도.

신성력으로 뒤덮인 배틀엑스가 불꽃을 갈랐다. 그대로 김우진을 강타했다.

───!

충격파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김우진은 도끼날을 잡고 잠시 멈칫했다.

지난 3 개월간의 훈련이 효과가 있는지 그녀의 마력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정순해졌다. 자연스레 방어하는 불꽃의
소모가 더 커졌다.

‘언제 이렇게까지 됐지?’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그녀는 집행자였다. 집행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였다.

‘아니. 그럴 거였으면 진즉에 됐겠지.’

디아네의 성장은 단순히 그런 것을 뛰어넘었다. 이건 믿을 수 없지만 신앙이다. 그의 권속이 됨으로서 힘을


부여받고, 그를 충실히 따름으로서 그 힘에 대한 감응력이 올라가고 있다.

미친.

믿을수록 강해진다니. 어디 만화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광신도다.

그 신앙의 대상이 자신인 것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며 두려워해야 할지 김우진은 혼란스러웠다.

“너.”
“예. 신이시여.”
“신이라고 부르지 말고.”
“하지만 신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른다는 말입니까?”
“소장이라고, 소장.”
“···자각을 하셨음에도 아직 숨기길 원하신다면 이 또한 종의 입장에서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됐고.”

어째 대화를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프다.

괜히 들였나 싶다가도 손에 꼽히는 전력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너 이제 신해도 되겠다.”

때가 되었다는 것.

그날, 두리쉬마는 이전의 힘을 한층 되찾았고, 새로운 신이 탄생했다.

“소장신이시여! 제가 신이 되었음에도 소장님을 향한 신앙이 굳건하니, 소장님은 신마저 섬기는 신이시니 진정한
주신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 소장신은 또 뭐야.

돌아버리겠네, 진짜.

* * *

신이 된 하이엘프가 세계수가 가지 위에 앉아 바람을 즐겼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이 날을 바라오기는 했다. 세상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주무르는 백신전을 무너트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지인의 복수였으나 이제는 그냥 대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백신전의 방법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과연 승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녀가 신이 되었고, 신들 조차 농락하는 김우진이라는 괴물이 있긴 하지만 백신전은 백신전이다.

주신들이 있고 그 휘하의 신들과 무수히 많은 집행자들이 있다.

지금까지는 계약에 기대어 허점을 이용해 나름 몇 방 먹였다지만 전면전으로 간다면 과연 승산이 있을까.

이쪽의 전력이 다 신이 된다고 한들 여섯인데.

물론 어머니 나무도 둘이나 있고 죄수들과 집행자들도 있긴 하지만 역시 상대가 상대다.

“역시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건 없단다. 어쩌면 승리할 수도, 어쩌면 패배할 수도 있지.”

중요한 건 승리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과 백신전과는 더 이상 같은 우주 아래 살 수 없다는 거다.

“이겨야만 하는 거란다. 그래야 미래가 있어.”

시에나는 동족들의 몰살을 떠올렸다. 엘프들의 뼈로 쌓아 올린 산은 결코 잊혀 지지 않는 절망적인 기억이다.


신이란 그런 것들이다. 인류를 위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쳐내 버리는 독재자들.

“하지만 누군가는 죽겠죠. 그게 연옥의 누가 될지 모르고요.”


“두려운 거니?”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에요. 그리고 만약 죽는 게 제가 된다면 억울할 거예요.”
“억울?”
“세이드님에 대해서 듣지 못한 거요.”

그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더 미루어둘 게 무엇인가.

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이 된 그녀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백신전과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는 아직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 * *

- 바빠. 다들.
- 끼잉?

가장 높은 가지. 그 위에 앉은 두 정령이 연옥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차례대로 죄수들을 훈련시키는 김우진.만찬을 즐기고 다 게워내는 베르너.


율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시에나.
곤죽이 되고도 마력포를 보강하겠다고 공방에 들어가는 데르카인.
김우진을 찬양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디아네.
두리쉬마에게 흠씬 얻어맞고 기절한 강민식.
그 틈을 타 지치지도 않고 두리쉬마에게 달려드는 타르칸까지.

이제는 익숙하다면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풍경이기도 했다.

- 전쟁. 한대.
- 낑?

신들이 쳐들어온다고 했다. 김우진을 죽이기 위해서, 연옥을 망가트리기 위해.

- 안 돼.

용납할 수 없다.

이곳은 그녀의 보금자리였다.


그녀가 살아 숨 쉬는 고향이자, 그녀의 세상이었다.

김우진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며 율리아는 그녀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둘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사람들과는 어느새 정이 들었다.


자신을 애정해주는 소장도, 놀리는 맛이 있는 하이엘프도, 푸근하게 그녀를 쓰다듬어주는 엘프도, 자신과 나르를
놀아주는 초소형 소인도 좋았다.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미친 짓을 벌이는 난쟁이도, 매일 같이 찾아와 함께 김우진을 신으로 섬기자는 광신도도,
열매를 달라고 징징거리는 인간도, 매일 김우진이나 두리쉬마에게 덤볐다가 기절해있는 시간이 더 많은 짐승도
좋지는 않지만 썩 나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잃고 싶지 않았다.

백신전이 무엇인지, 어째서 전쟁이 벌어지는지 그녀는 몰랐다. 딱히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하나.

이곳은 그녀의 영역이다.


저들은 그녀가 지키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 못 해. 용납.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품 안에 든 자들을 죽일 수 없다.

- 그렇지?
- 끼잉!

릴리가 결연하게 각오를 다졌다.


나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세계수들 또한 전쟁을 준비했다.

세계수의 권능이 더욱 단단하게 방벽을 감쌌다.

───────────────
# < 090. 하나 더 >

“그거 사망플래그다.”

전투에 나서기 전에 모든 것을 들으려고 하다니. 이제 이야기를 듣고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다짐을 하면 꼭 죽는다.

아니지, 반대도 마찬가지인가?

꼭 전투가 끝나면 뭘 하겠다고 하면 죽던데.

똑같은 결말에 김우진이 잠시 고뇌했다.

“사망플래그요? 그게 뭔데요?”
“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세이드에 대해서 듣고 싶다고?”
“네.”
“호위였다고 그랬나?”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세이드라.”

그리운 이름이다. 등을 맞대고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함께 싸웠던 용사.

김우진을 제외하면 가장 강했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결국 죽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서로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으니.

“꽤 수다스러운 놈이었지. 재미없는 농담도 치고.”


“거짓말.”
“거짓말?”
“세이드는 수다스럽지 않아요.”
“처음에는 과묵하긴 했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 끔찍한 세상 속에서 과묵한 엘프가 수다스럽게 변한 것은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뭘 말하기는 한 건가요?”
“내 마음이야. 나머지는 백신전을 무너트린 뒤에 들어.”
“그런···!”
“억울하면 너도 그때 같이 있던가.”
“그건 완전 억지잖아요.”
“신을 둘 죽이면 알려주지.”
“···좋아요. 정 그러시겠다면.”

김우진이 손을 흔들며 축객령을 내렸다.

“제가 꼭 듣고 말거예요!”

율리아가 사라졌다.

김우진의 시선이 그녀가 나간 문에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군.”

쯧, 김우진이 혀를 찼다.

누군가는 그를 괴물이라 부른다.

허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믿고 있는 용사들이 쓰레기처럼 죽어나가는 그런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남았다면, 살아남으려면 누구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고, 그들의 부탁과 함께 흡수했다.

신에 대한 증오는 자연스레 생겨났다.


하물며 신들은 마지막에 그들을 버리려고까지 했으니.

김우진이 아공간을 열었다.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수많은 편지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김우진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달한 카페 모카가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 * *

“또 새로운 신이 발탁되었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다섯 번? 여섯 번? 이번에도 백신전의 집행자들은 손가락만 빨았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이 사태가 왜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다.

마물이 납치를 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한 명씩 차근차근 간을 보듯이 신을 죽인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제 3 의 인물이 신들을 납치해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제 3 의 인물이라고 해봐야 김우진 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우진은 아니야.”


“이주일의 유예 기간동안 죽은 신이 몇이냐! 누가 봐도 수상하잖느냐!”
“하지만 그들을 죽인다고 김우진에게 득 될 게 있나? 애초에 김우진은 계약에 묶여 죽일 수도 없다.”

죄수들 따위는 감히 신들을 죽일 권능도 없다.

무엇보다 신들이 납치당했을 때, 김우진은 분명히 연옥에 있었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 마물의 파도와 51 명의 집행자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할 수가 있나.

이제 갓 자란 세계수가?
억압 받는 죄수들이?
고작 항복한 집행자 열 명으로?

김우진이 없다면 그건 무리다. 연옥은 그 파도를 견뎌낼 힘이 없다.

그렇다고 김우진이 아니면 신들을 납치할 자가 있느냐면 그것 또한 의문이다.

신이 괜히 신이라 불리겠는가.

결국 의심할 수 있는 건 마물뿐이다. 주신 알비츠와 그를 따르던 수많은 신들이 목격했던 괴물.

주신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며 악착같이 신 하나를 죽였던 놈.

하지만 의문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비츠는 분명히 타이탄을 극한으로 몰아붙였고 놈은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신 여럿을
납치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허나, 그 의문은 결국 김우진을 끝장내면 해소 된다.

정말로 김우진이 한 짓이 맞는지 아닌지, 놈을 족치면 확인할 수 있다. 맞다면 정확한 판단이었고 아니라고
할지라도 뒤에 후환을 남겨두고 마물들과 싸울 수는 없다.
때문에 이주일 간의 유예기간이 지났을 때, 알비츠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직접 호송관으로 들어가 내부 또한 살펴보고 오겠다. 대체 김우진이 무얼 믿고 그리 막 나가는지.”

그게 무엇이든 이제는 끝이겠지만.

알비츠는 그의 손으로 확실하게 김우진을 끝내고 싶었다. 그로 인해 손상된 백신전의 위신과 직접적인 피해들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다.

그 모든 수치와 굴욕을 되돌려주기 위해 반드시 스스로의 손으로 김우진의 끝을 장식하고 싶었다.

감히 신에게 도전한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갔다 오지.”

알비츠가 호송관의 모자를 썼다.

“내가 돌아오는 그 순간, 진격할 준비를 해라.”


“기다리고 있겠다.”
“가자.”
“예!”

50 명의 죄수들을 이끌고, 알비츠가 연옥으로 떠났다.

* * *

───!

섬광이 일렁였다. 알비츠가 손을 휘젓자 생성된 얼음의 벽이 그것을 온전히 받아냈다.

“그 건방짐도 오늘로 끝이다, 김우진.”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입술을 짓이기며 이를 갈았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연옥의 앞에 당도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죄수들을 호송해온 호송대다! 문을 열어라!”

호송대원을 맡은 집행자가 소리쳤다. 허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알비츠가 방벽을 확인했다.

“강화시켜놨구나.”

물씬 풍겨나는 신의 기운과 세계수의 기운은 차원의 방벽을 한 단계 진화시켰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주신인 그 앞에서는 결국 조금 단단해진 가벽일 뿐, 부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김우진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머리가
돌아버렸나?

그렇다면 실망이다. 백신전에 그리 큰 피해를 입힌 개자식이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지는 버러지라는 건 백신전이


그만큼 별 볼일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알비츠는 김우진이 대적에 걸 맞는 최후를 보여주기를 바랐다.

“마지막 경고다. 문을 열어라!”

호송대원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 직후, 문이 열렸다.

“들어···.”

하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들어오라고 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가기 위해서.

화륵, 새하얀 백염이 알비츠의 눈앞을 가득 채운다.

본능적으로 힘을 끌어 올렸다. 차가운 냉기가 불꽃이 만나 격한 수증기가 끓어오른다.

“이건?”

불꽃의 기이함을, 알비츠는 눈치 챘다.

다르다.

지금까지 봐왔던 김우진의 불꽃이 아니다. 더 정순하고, 더 새하야며, 더 신력이 풍부하다.

김우진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허나, 수증기를 뚫고 들어오는 건 김우진의 검이다.

카앙, 얼음이 뒤덮인 손이 불의 칼날을 붙잡는다. 얼굴을 마주하고 알비츠가 으득, 이를 갈았다.

“네놈, 대체 뭐냐. 어떻게 이런 힘을?”


“대답해줄 의무가 있나?”
“감히 나를 공격하다니. 계약을 어길 셈이냐?”
“여긴 연옥이 아니야.”

밖이지.

김우진의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된다. 집행자들이 그 불꽃을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열린 차원의 입구들 사이로 또 다른 자들이 나타난다.

콰콰콰콰, 폭풍을 머금은 채 돌진하는 하이엘프, 아니 신.

“···신이라고?”

은빛의 털이 찬란한 은광으로 뒤덮인 짐승, 아니 신.


“······!”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침내 가짜들이 따르는 악마를 처단하노니, 이 땅에 정의가 바로 서리라!”

베른을 섬기던 집행자 또한 신이었다.

“드디어 내 손으로 신의 명줄을 끊을 기회를 얻었구나!”


“가까이만 가면 제가 뼈와 살을 분리해버릴 수 있습니다!”

화살을 날리는 엘프 또한, 식칼을 들고 덤비는 자 또한 신이었다.

신, 신, 신, 신, 신.

넘쳐나는 신들에 알비츠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너구나.”

애초부터 가정이 잘못 되어 있었다.

“너였어···!”

신들을 납치한 건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패퇴시킨 어둠의 사도도 아니었다.

김우진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계하던, 백신전의 위신을 손상시켰던 김우진이 그 난리 속에서 신들을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연옥을 지켜냈다.

하지만 어떻게?

“설마 처음 그 신이···?”
“그래, 저 하이엘프다.”

프흐흐, 김우진이 웃었다.

그래, 그랬다. 처음부터 신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 그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거다. 하물며 하이엘프이니
세계수와의 공조가 얼마나 좋겠는가.

“그럴 리가! 베리안이 죄수들을 확인했다! 저 년이 신이 되었다면 못 찾아냈을 리가 없다!”


“그건 베리안에게 가서 물어보고.”
“설마 거짓말을···?”

주신인 베리안이 신격을 알아보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념은 거기서 끊어졌다.

불꽃들이 그를 붙잡았다. 더 가까이서 새하얀 백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거 설마?”
처음 마주했을 때,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정순하고 뜨겁다. 마치 주신의 불꽃처럼.

알비츠는 뒤늦게 김우진의 권능을 떠올렸다. 신의 힘을 받아 각성된 그에게 내재된 힘.

포식.

“네놈 설마 칼카르를!”
“그래, 먹었다.”

꺼억, 김우진이 트름을 했다.

“너무 화내지 마라. 너도 곧 그 뒤를 따라가게 해줄 테니.”

“어떻게? 너 따위 놈이 칼카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칼카르를 먹어 버린 지금은 그와 비등한 존재지만 그 이전에는 분명 아니었다. 김우진이 아무리 대단해도 결코


칼카르를 죽일 수는 없다.

김우진이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붙잡는 불꽃이 더욱 맹렬히 타올랐고 위기감을 느낀 알비츠 또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김우진이 작정하고 쏟아내는 불꽃은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힘겨루기 속에서 신들의, 백신전이 아닌 신들의 공세가 주신을 향해 쏟아진다.

“주신이시여!”
“도우겠나이다!”

집행자들이 기겁하며 달려왔으나 김우진의 불꽃을 넘을 수는 없었다.

“감히 그 정도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칼카르를 먹어치운 김우진이 변수지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연옥을 중심으로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다. 전투
사실을 알면 그 즉시 포위망을 좁히고 김우진을 징죄하려 할 터.

잠깐이면···

“···되는데.”

그림자가 졌다.

그리고 알비츠는 김우진이 어떻게 칼카르를 죽였는지 깨달았다.

종말 차원에서 만났던 그 망치가 그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으니.

“네놈들! 애초에 전부 한패였구나아아아아!”

알비츠가 절규했다.

“지금 와서 알아봤자 늦었다.”


“명색이 용사였던 자가 어둠의 사도와 손을 잡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용사를 지들 체스말로 써먹고 마음대로 토사구팽하는 네놈들이 할 소리는 아니지.”
“계약, 계약을···!”
“다시 말하지. 여긴 연옥의 내부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널 직접 죽이지도 않을 거고.”
“노오오오오옴!”
“주신의 마지막 한 마디 치고는 별 것 없군.”
“···하하.”

김우진이 백신전의 위신에 손상을 입힌 만큼, 그만한 상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찮은 자에게 패배했다는 게 알려지면 그만큼 백신전도 하찮아 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맹세코.
이렇게까지 대단하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저 마굴을 누가 봐서 연옥이라고,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하겠는가.

새로운 백신전이면 몰라도.

망치가 떨어진다.

‘웃기지 마라. 나는 주신이다. 위대한 백신전의 주인.’

고작 김우진 따위에게, 버러지 같은 어둠의 사도 따위에게 죽지 않는다.

작은 실수일 뿐이다. 조그만 버티면 신들이 온다. 1 대 1 이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죽인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찰나의 순간, 알비츠의 눈이 활로를 찾았다. 신들을 토해내고 여전히 닫히지 않는 연옥의 방벽.

저기만 통과하면 된다. 연옥 내에서의 전투는 금지이니 들어가고 지원군이 올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게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모든 힘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빙정의 폭풍이 일순간 화염을 밀어냈다. 김우진이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신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거대한 얼음의 방패가 어둠의 사도의 망치를 비껴냈다.

그리고 그 짧은 틈, 알비츠는 진한 탈력감을 느끼며 연옥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넣는 듯 싶었다.

- 너. 못 가.

“···세계수?”

파랑새가 무방비한 그의 싸대기를 후려쳤다. 신의 힘이 농밀한 세계수의 날개는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버텨냈다. 그는 주신이었으니까. 여기서 김우진 따위에게 죽을 자가 아니니까.

신이 된 죄수들, 그리고 세계수. 이제 나올 건 다 나왔다.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감히 주신에게 유효타를


먹일 무언가가 더 있지는 않을···

- 끼이이잉!

작은 호랑이의 몸통 박치기에 그의 신형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튕겨져 나갔다.

“···세계수가 둘?”

허무한 단발마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망치가 떨어졌다.

─────!

우주가 요동쳤다.

───────────────
# < 091. 이야기 >

전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포위망이 순식간에 좁혀졌고, 수십의 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물량공세에 김우진과 죄수들은
재빠르게 연옥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음.”

김우진이 팔딱 거리는 알비츠의 팔을 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 난 거 아닌가요?”
“큰일 났지.”

놓쳤다. 어깨를 자르고 중상을 입히긴 했지만 놈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때마침 도착한 신과
집행자들을 방패삼아서.

그 과정에서 어깨를 하나 내주긴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그걸 뚫고 도망칠 줄이야. 과연 주신인가.

물론 김우진이 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김우진이 놈을 죽여 버리면 계약을 어긴 게 되어


심연으로 끌려가 버리니까.

신들도 두려워하는 그곳의 정체는 모르지만 모두가 기피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굳이 궁금증을
해소하러 갈 필요는 없다.

“죽이지 못해서 아쉽지만 일단은 최선의 결과야.”

주신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호송대원으로 따라온 집행자들을 전멸시키고 41 명의 죄수들을 모조리 잡았다.

“입을 막고 연옥에 쳐 박아 놔. 내가 원할 때가 아니면 나갈 수 없게.”


죄수들은 좋은 카드다. 이전에 10 명의 죄수들과 이들, 그리고 이전에 내보냈던 자들을 합하면 50 명이 넘는다.

저들이 원할 때 계약이 끝나는 건 원치 않지만 김우진이 원할 때 계약을 끝내는 건 또 다르다.

죄수들은 아주 좋은 카드가 될 것이다.

“비록 감히 소장신님을 사칭하는 악마를 징죄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에게 주신의 저력을 보여주셨으니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입니다.”

정확하다.

김우진의 칼카르를 먹었다는 것을, 두리쉬마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아 분노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함부로 할 수 없다. 둘의 전력이 각각 주신에 필적하기 때문이다.

일곱의 신들도 있고.

그나저나 데르카인도 들켰으려나?

“그래, 일단은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아.”

전력이 약하다고 평가 받는 것은 김우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저들의 오만함과 어우러져 방심을 유도할
수 있는.

그렇기에 이번에 반드시 알비츠를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쩝, 김우진이 아쉬움에 입을 다셨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알비츠를 얕보지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저 주신이


주신의 이름에 걸 맞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뿐이다.

“일단은 재정비를 좀 하자.”

말은 그랬지만 크게 재정비라고 할 건 없었다.

전투는 연옥 밖에서 이루어졌고 소수의 신들이 나선 게 전부였다.

“릴리, 나르. 연옥의 방벽 강화에 힘 좀 더 써줘.”

- 응.
- 낑.

전투의 여파로 손상된 차원의 방벽 복구를 부탁하고 교도관과 죄수들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집무실에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아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저.”
“말해.”
“신을 한 명도 죽이진 못했지만 전투는 끝났으니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쭈뼛거리는 율리아의 모습에 김우진이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좋아. 너도 당사자니까 아는 게 좋겠지.”


“당사자요?”
“뭐가 궁금하다고?”
“···세이드의 마지막이요.”
“세이드는 아크 리치 드래곤의 입속에서 씹어 먹혔어.”
“네?”
“그래도 그 정도면 꽤나 괜찮은 죽음이었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죠.”
“세상에 차원은 많아.”

뜬금없는 소리지만 율리아는 아무 말 없이 경청했다. 김우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종말은 그 차원의 수만큼 다르지.”

그 중에서도 다른 차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의가 덮친 차원도 있었다.

오염된 차원은 순식간에 종말을 향해 치달았고 신들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용사를 소환했다.

허나, 용사는 큰 이변을 일으키지 못하고 죽었다.

애초에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된 차원이었다.

어둠은 인간에게 해츨링을 잃어버린 드래곤을, 분노에 차 인간들의 왕국을 멸망시키다가 죽음 직전까지 몰린
드래곤로드를 사도로 선택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심장은 이미 꿰뚫려 있었고 어둠의 가호를 받았다고 한들 멀쩡히 살아날 수는 없었다.
죽음에서부터 돌아올 수는 있었어도.

“그렇게 아크 리치 드래곤이라는 끔찍한 혼종이 탄생했다.”

평범한 아크 리치도, 아크 리치를 평범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저 그런 아크 리치도 능히


재앙에 가까운 존재다. 헌데 드래곤이, 그곳도 고룡급의 드래곤이 그렇게 되었으니 어찌 되었겠나.

하물며 놈은 인류를 사냥하며 더욱 힘을 축적해나갔으니.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신들은 계속해서 용사를 소환했어.”

그럼에도 종말을 막는 것은 요원해보였다.

다음 용사도. 그 다음 용사도. 그 다음 다음 용사도.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마물의 군단은 빠르게 대륙을 황폐화시켰고 인류는 내몰렸다.

위기를 느낀 신들은 용사‘들’을 소환했다.


하지만 수많은 용사들을 먹어 치운 악의는 더욱 힘을 키웠고 신들은 더 많은 힘을 부여해야만 했다.

그렇게 수십 번, 수 백 번이 반복되고.

용사 ‘김우진’이 소환되었다.

“세이드도 함께.”

이것은 한 인간과 엘프가 글라크라는 세상을 종말로부터 구하기 위한 이야기다.

* * *

“하아, 하아···!”

알비츠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온 몸이 욱신거린다. 오른 팔이 공허하다. 이런 상처를 입어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주신이시여. 상처를···.”
“피해는?”
“그게···.”
“피해를 물었다.”
“모든 죄수들이 죽거나 저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호송대로 나섰던 집행자 열이 죽었으나 다행히 신들의 피해는
없습니다.”
“저들의 피해는?”
“···그게.”
“없구나.”
“자잘한 부상은 있겠지만 유의미한 타격은 없었습니다.”

알비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당해버렸다. 설마 입구 바로 앞에서 칼을 뽑아들 줄이야.

“칼카르를 김우진 놈이 죽였을 줄이야.”


“김우진이 칼카르를 먹었을 줄이야!”
“김우진이 어둠의 사도와 손을 잡았을 줄도!”
“여섯의 신들을 육성했을 줄도!”
“세계수가 둘이나 있을 줄도 몰랐다!”

알비츠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이자 자신의 팔을 자른 김우진에 대한 분노였다.

응어리진 열기는 사방에 냉기를 퍼부어대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단 상처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이미 다 회복 되었다.”

흘러나오던 피는 멈췄고 도마뱀처럼 솟아난 팔이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주신의 권능은 잃어버린 팔 하나
재생하는 것쯤은 쉬웠다.
“···백신전. 백신전으로 간다.”
“예.”

칼카르를 먹은 김우진, 어둠의 사도와의 공조, 여섯의 신들.

수많은 혼란들이 알비츠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역시 하이엘프가 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온 신. 용납할 수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백신전이 아니라면 가장 유력한 건 연옥의 죄수들이었고 베리안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호송관이 되었다.

그리고 베리안은 연옥에서는 새로운 신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주신인 그가 신격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가능성은 하나만 남는다.

배신.

베리안이 백신전을 배신했다.

하지만 의문은 또 남는다.

대체 왜?

아카식 레코드에게 처음 선택되어 주신이 된 이후 지금까지 세상은 백신전이 만든 판 아래 순리대로 흘러갔다.

베리안은 알비츠와 함께 그런 구도의 정점이다. 배신할 이유도, 당위성도 없다. 그렇기에 알비츠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배신할 이유가 없는 이가 배신을 했다.

‘아니, 잠깐만. 설마 진짜로 속여 넘긴 거라면?’

이전이라면 조금도 믿을 수 없는 개소리다.

하지만 김우진의 진면목을 본 지금은 조금은 달랐다.

백신전 몰래 두 그루의 세계수를 심었다. 칼카르를 죽이고 흡수했으며 여섯의 신들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주신이라고 한들 결국 조금 더 강한 신일 뿐, 만능은 아니다.

‘김우진은 신이 된 게 하이엘프라고 했다.’

그리고 세계수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신력이 느껴졌었다. 하이엘프의 힘을 세계수에게 준 거라면?

대신 세계수의 정기를 채우고 구속구를 채운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구속구는 신들이 만든 만큼 그 성능은 확실하다. 상황만 잘 맞아 떨어진다면 어지간한 하위


신들까지 속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자 또 다른 가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백신전의 내분을 일으키기 위한 수작일
수도 있다는 가정.

허나, 무엇이든 속단은 이르다.

“주신이시여?”

분노에 차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던 알비츠가 멈춰 섰다. 심호흡하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가자.”
“예.”

백신전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대부분의 신들이 연옥의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참여하고 있었고 전투 이후, 복귀하는 중이었다.

“주신이시여, 괜찮으십니까?”
“김우진 그 놈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습니다!”
“어둠의 사도와 손을 잡다니! 용사라는 자가 자각이 없단 말입니까!”
“칼카르님의 죽음에 김우진이 관여하다니! 놈을 결코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김우진을 죽여야 합니다!”

신들 중 그 누구도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김우진이 백신전의 위신을 깎아먹으며 여러 문제를 양산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관계의 주도권은 백신전에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그 누구도 신을 상대로 주도권을 가질 수는 없으니.

허나, 그 예상이 무참히 깨어졌다. 하물며 김우진은 주신 칼카르를 먹어 주신에 필적하는 강자가 되어버렸다.

자그마한 위기, 위험하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가 턱 밑까지 올라와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베리안은 어디 있지?”

알비츠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베리안을 찾았다. 하지만 베리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방금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러 가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말이냐?”
“이런 상황이니 더욱 확인해 볼 게 있으시다고···.”
“아카식 레코드로 가겠다.”

베리안을 만나 확인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

알비츠가 표정을 굳힌 채 백신전을 벗어났다.

* * *
새하얀 세상, 거대한 기둥. 기둥 바로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베리안이 있었다.

“베리안.”
“왔느냐.”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정말로 몰랐느냐?”
“서두가 빠졌다만.”
“율리아 카르센. 그녀가 신이 되어 있었다. 김우진이 그러더군. 집행자가 아닌 다른 자가 신이 된 첫
번째라고.”
“그걸 믿나?”
“믿고 싶지 않았으나 김우진은 마물 사태 때 신들을 납치했다. 신이 아니라면 연옥에서 놈의 공석을···지금
뭐하는 거지?”

파지직, 미약한 스파크. 아카식 레코드가 흔들렸다. 그 이변에 알비츠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베리안은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김우진를 끝장낼 해결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


“뭐라고?”
“너의 전투를 보았다. 어둠의 사도와 김우진의 불꽃. 그리고 여섯 신들. 김우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숨겼다.”
“그래서?”
“주신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무조건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른 대안과
대처가 필요하다.”

대안? 좋다. 대처법을 찾겠다? 그것 또한 좋다.

“그게 네가 이 상황에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와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우리가 김우진을 상대로 계속 당하는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지?”
“계약.”

김우진을 옭아매려고 만들었던 계약이 반대로 백신전을 옭아매고 있다.

“그래, 계약이다. 계약으로 인해 김우진을 죽이지 못하고, 계약으로 인해 연옥 내부로 숨어들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계약은 사라져야만 한다.

“나는 계약을 없애버릴 생각이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그래서 죄수들을···.”
“나는 계약을 없애버린다고 했다. 끝내는 게 아니라.”
“···뭐라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란 건 결국 아카식 레코드가 보증을 선다는 거다. 위대한 우주의 의지는 자신이 보증 선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지.”

때문에 계약을 어긴 자는 심연으로 들어간다.

심연이 정확히 어딘지, 어떤 곳인지 가본 자는 없다. 간다고 돌아올 수 있을 지도 모르고.


허나, 신들은 심연을 두려워한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단편적으로 심연에 대한 기록을 찾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어둠. 공허한 어둠.

간결하지만 그렇기에 더 섬뜩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용납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우리가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긴 했지만 서로 정답게 말장난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 따위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이도 아니지.”

알비츠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냐?”


“모를 리가. 네 생각이 맞다.”

베리안이 몸을 돌렸다. 서로의 시선이 부딪혔다.

“나는 지금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네 놈!”

알비츠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곳이 아카식 레코드의 앞이 아니었다면 그의 권능이 베리안을 덮쳐을
지도 모른다.

“감히 위대한 우주의 법칙에 간섭을 하겠다고!”


“허면 네게는 다른 방법이 있나?”

알비츠와는 반대로 베리안의 얼굴은 태연했다.

“네가 끌고 간 죄수들도 전부 죽거나 붙잡혔다. 어둠의 사도는 주신인 우리와 필적하는 강자가 되었고 김우진
또한 칼카르를 먹음으로서 그 정도 수준이 되었지. 시간이 지나면 놈은 더 강해질 거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계약으로 인해 우리는 그 기회를 붙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백신전이다. 조금 흔들릴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물론 패배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한 명의 피해로 막을 것을 열 명, 백 명의 피해로 막게 될 거다.”

그 과정에서 백신전의 치세는 흔들리고 마물들이 범람할 거다. 악순환이 계속되며 이 우주 전체가 흔들린다.

“너는 그런 미래를 바라나?”


“그렇다고 위대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것이 옳다고 정당화 시키지 마라.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법칙이다.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글쎄.”

베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백신전은 신들의 집합체다. 그리고 우리는 주신이다. 신이 무엇이냐. 전지전능한 존재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자를 진정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신격을 아카식 레코드가 준 것이다.”
“그래서 더 문제라는 거다.”
명색이 주신이라면서 아카식 레코드의 눈치나 보며 살살 기어야 한다니.

“그러니까 김우진이 우리를 관리자라 불러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김우진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못한다!”
“김우진이 부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네놈부터가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기는데 누가 널 신으로 보지?”

선택되는 신. 그것 또한 옳지 않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어찌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네가 아주 돌아버렸구나!”
“그래서 한편으로는 김우진에게 감사하고 있다. 버러지 하나를 치워준 것에. 도구 주제에 적당한 쓰임을 모르고
그 이상으로 설치고 있지만 말이다.”
“···네놈 설마.”

알비츠의 눈이 커졌다.

“백신전을 배신한 거냐!”


“틀렸다. 장애물을 치운 거지. 진정한 신이 되기 위한 길을 막는 장애물을.”
“어찌 주신의 이름을 달고 그 따위 짓거리를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신이라면 마땅히 법칙 위에 서야 한다. 법칙 아래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 위에서 군림해야 한다. 그것이
신이다. 올바른 신.”

나는.

“백신전을 진정한 백신전으로 만들 거다.”


“궤변이다! 아카식 레코드가 네놈을 용납할 것 같으냐, 아니 네놈 따위가 감히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느냐!”

그 순간.

───!

섬광이 알비츠를 스쳤다. 타오르는 피부에 알비츠가 신음을 삼켰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 하군.”


“···어떻게?”

아카식 레코드의 주변은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으로 점철되어 있다. 더 없이 신성한 곳.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 그래야만 하는데.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 왔는지.”

얼마나 신이면서 신이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했는지.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계약서를 무효로 돌려버릴 수 있는지, 없는지.

“물론 단순히 이곳에서 힘을 사용하는 것과 계약서를 무효로 돌리는 건 꽤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네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나를 따르거나.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거나.”

선택해라.

───────────────
# < 092. 용사 김우진(1) >

김우진이 글라크에 소환되었을 때, 인류는 이미 코너에 몰려 있었다.

수도 없이 죽어나간 용사들, 멸망한 왕국들, 인류의 시체를 양분삼아 더욱 커지는 언데드 군단.

희망은 조금도 없는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인류가 버티고 또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신들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용사들이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정작 갑작스레 내던져진 용사들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황당한 일도 없었지만.

“씨발,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그냥 뒤지라고 던져놓은 거잖아.”


“그렇게 투덜거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랄.”

퉤, 김우진이 입 안에 뭉친 핏덩이를 뱉어냈다. 새카만 핏덩이가 마물의 시체들 사이에 떨어진다. 대부분은 피가
존재하지 않는 언데드들이다.

“어차피 똑같은데 욕이라도 한 번 더 해야지.”

엘프는 대꾸하지 않았다. 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털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직-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검기가 바닥을 기며 접근하던 언데드를 반으로 쪼갠다.

“이놈이 마지막이다. 더는 없는 것 같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정리할 건데.”

김우진이 불꽃을 피워냈다. 순수한 불의 정기가 시체들 사이로 옮겨 붙었다.

“그만 가시죠.”
“예!”

불꽃은 순식간에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을 태워냈고 시체들을 한 곳에 모은 병사들이 재정비를 마치고 김우진의
명령에 따랐다.
인류 연합군. 수십 개가 넘는 왕국과 제국들은 대부분 멸망하고 이제 고작 10 개의 왕국들만이 남았다. 그들은
살기 위해 뭉쳤고 용사들과 함께 나름의 성과를 내며 악착 같이 버텨내고 있었다.

“용사 김우진과 세이드가 돌아왔다!”


“데이논 지역의 언데드들이 몰살당했다!”

왕도로 돌아오자 그들의 승전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김우진과 세이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움직였던 여덟
명의 용사들은 왕 앞에 섰다.

“폐하,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수고했네. 그대들의 활약은 이미 보고를 들었네. 오늘은 그대들을 위한 연회를 준비했으니 마음껏 즐기시게.”

성대한 연회가 이어졌다. 몇 몇 용사들은 명성에 이끌려 다가온 자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현재 존재하는
용사들의 최고참인 김우진과 세이드는 구석에 앉아 멍하니 연회장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럴 시간에 마물을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이득일 텐데.”


“보여 지는 건 중요한 거야. 인간은 시체가 아니라서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지거든.”

시종이 건네주는 샴페인으로 목을 축인 김우진이 세이드에게도 한 잔 건네려다 멈칫했다.

“참, 상처에는 술 들어가면 안 좋지. 상처는 괜찮냐?”


“멀쩡하다.”
“너, 그렇게 막무가내로 싸우다가는 훅 간다. 명색이 엘프라는 놈이 싸우는 건 무슨 짐승놈들이랑 똑같아?”
“나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
“여기 소환된 용사들 중에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놈도 있어? 왜, 고향에 연인이라도 놓고 온
연인이라도 있어?”
“연인 같은 건 없다.”
“그러면?”
“율리아라는 아이가 있다.”
“율리아? 뭐야, 너 결혼 했냐?”
“하지 않았다.”
“혼외자식?”
“헛소리 하지 마라.”

세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모시던 분의 딸이다. 십수년간 호위로 지냈고 내게도 딸 같은 존재가 되었다.”


“뭐, 그리 드문 이야기는 아니네.”

적어도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대를 이은 충성은 꽤나 많았다.

“예쁘냐?”
“꺼져라. 이제 200 을 갓 넘은 어린 아이다.”
“그게 어린 거면 나는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해.”
“···인간과 엘프는 다르다.”
“그러시겠지.”

김우진이 턱을 괴고 화려한 연회의 풍경을 훑었다.


“연회는 질렸나?”
“아니.”
“그러면 왜 나가서 놀지 않지? 예전에는 항상 주인공이 되는 걸 즐겼잖나.”
“그러는 너는?”
“나는 원래 이런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딱히 질렸다기보다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보여 지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고 어떤 인간이 그러던데.”
“나는 예외야.”
“뻔뻔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군.”

세이드가 술잔을 기울였다.

“지쳤나?”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막아도 막아도 끝이 없다. 지켜내는 게 고작일 뿐, 더 전진하지 못한다. 나아지지 않는다.

수십 년간 이어진 종말은 인류에게 힘을 앗아가 버렸다.

그런데도 뭐가 저리 좋을까. 뭐가 그리 좋다고 작은 승전 하나에 연회를 열고 웃고 떠들까.

“승전이기에 그렇습니다.”

누군가 다가왔다. 푸른 머리의 중년 여인. 비른델이라는 글라크 출신의 마법사였다. 겉모습은 40 언저리로
보이지만 실상은 80 이 넘는 대마법사였다.

꽤 많은 용사들이 글라크에 적응할 때 그녀의 도움을 받았고 김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승전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대세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죠.”


“그럼에도 버텨냈습니다. 막아도 막아도 진전이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당신들이 소환되기 이전에,
당신들이 활약하기 이전의 인류는 밀려났습니다.”

계속, 계속, 또 계속.

“소국들이 무너지고 왕국들이 무너지고 가장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제국들마저도 무너졌습니다.”

피난민이 줄을 이었고 어디를 가든 마물과 죽음이 가득했다. 신들이 소환한 용사들도 속절없이 패퇴했고
희망이라는 불꽃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런 상황에서 김우진과 세이드가 소환되었다.

조금 더 특별한 용사.

먼저 간 용사들의 의기를 품으며 점점 강해지는 용사.

그의 활약에 인류는 희망을 보았다.


“더 이상 밀리지 않고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빛을 보았습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의
영웅입니다.”

버틴다. 적어도 버텨낼 수라도 있다. 항상 죽음과 멸망의 공포에 싸워야 했던 인류는 처음으로 희망을 맛보았다.

“딱히 영웅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김우진도 살기 위해서 발악할 뿐이다.

“당신들에게는 늘 죄송합니다. 저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니.”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해를 바라지도, 저희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들 입장에서 저희는 천하의 악마겠지요.”

용사들에게 미안하고 그들의 희생을 당연시 여겨야 하는 자신들이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저는 당신들을 내려 보내 준, 저희를 포기하지 않아준 신들께 너무도 감사할 뿐입니다.”


“이해합니다.”
“성자나셨군.”

세이드의 즉답에 김우진이 토를 달았지만 별 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다가온 종말이 문제지, 살기 위해 발악하는 이들이 문제겠는가.

말없이 술을 들이키다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따분해서 좀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실례가 된 건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김우진이 사라졌다.

“저래 보여도 착한 친구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늘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 혹시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아직이군요. 뭐, 어차피 곧 듣게 되실 테니 큰 문제는 없겠지요.”

비른델이 주변에 차음막을 쳤다.

“조만간···.”

* * *
“용사님!”
“김우진 용사님이다!”
“용사님 만세!”
“용사님 사랑해요!”

왕도 전체가 축제로 떠들썩하다. 작은 승리로 일구어낸 짧은 평화. 사람들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꽃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만들면서도 더욱 무거운 책임감으로 그를 억누른다.

저 웃음과 행복들은 그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질 찰나의 것들이다.

처음에는 용사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상대해야 할 적이 얼마나 강대한 괴물인지 안 순간부터, 부딪히고 압도적인 패배를 한 순간부터 그
즐거움은 절망이 되었다.

답답했다. 내가 저들을 지킬 수 있을까? 승리할 수 있을까? 그 광룡을 죽일 수 있을까?

아니, 싸움이 끝나기는 할까?


그 끝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허나, 이들 앞에서는 드러낼 수 없었다. 김우진은 사람들의 환호를 적절히 받아
넘기며 마음 편히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왕도는 아니다. 왕도 전체가 축제이니 밖으로 나갔다. 말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조금이나마 답답함이 가셨다.

인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 산 속. 김우진은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았다.

호흡을 가다듬자 열기가 올라온다.

검을 휘두른다. 붉은 궤적이 허공을 가른다.

불꽃이 넘실거리며 주변을 뒤덮는다. 열기가 치솟고 하늘이 붉게 물든다. 허나 불꽃은 그 어느 것 하나 태우지
않는다.

“···굉장하군.”

불쑥,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김우진이 흠칫, 검을 겨눴다.

‘어느 틈에?’

등 뒤에서 나타날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용사가 되고 영웅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런 경우는
없었다.

“누굽니까.”

그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강자다. 김우진이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냥 떠돌이다.”

새하얀 백발의 남자였다. 겉보기에는 대략 30 세 초반쯤의 미남이었으나 어쩐지 병약해보였다.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떠돌이?”

김우진이 코웃음쳤다. 단순한 떠돌이가 그의 기감을 완벽하게 속이다니.

강자다. 그러나 김우진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였다. 연합의 영웅이 되면서 인류에서 한가닥하는 놈들은 다
만나봤으나 저런 자는 없었다.

“검은 조금 치워줬으면 좋겠는데. 난 싸울 의사가 없어서.”

남자가 장난스럽게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럼에도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신, 누구지?”
“말해줘야 하나?”
“내 검이 당신의 목을 가르는 게 싫다면.”
“그럴 수는 있고?”

모르겠다. 광룡 이후에 이렇게까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이런 존재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튀어 나왔지?

“나는 그저 불꽃에 이끌려 왔을 뿐이야. 대화를 조금 나누고 싶달까.”


“불꽃?”
“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없이 자연에 가까운 순수한 불꽃. 내가 알기로 그런 불꽃을 사용하는 족속들은 하나뿐이야. 아, 계약을
한다고 치면 인간들도 가능하긴 하지. 어디까지나 빌리는 거지만.”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넌 정령도, 정령술사도 아니지.”


“나 또한 그걸 알려줄 이유는 없다.”

시선이 부딪혔다. 김우진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의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침묵을
깨트린 건 남자쪽이었다.

“뭐, 그렇긴 해. 싫으면 말아라. 말했다시피 굳이 싸울 생각은 없거든. 그냥 궁금해서 홀리듯이 온 것뿐이라.”
“멈춰.”

남자가 등을 돌렸다. 하지만 김우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이상의 강자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종말 속에서 그 이상의 강자는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마물이 아닌 이상, 이 대륙을 밟고 살아가는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 종말에
맞서 싸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궁금하다면 알려줄 수 있어.”


“방금은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 대신 나와 함께 가줘야 할 곳이 있어.”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 해.”
“뭐?”
“인간들의 연합으로 가 함께 종말을 막자라는 소리를 하려던 것 아닌가? 표정을 보니 정곡을 찔렀나 보군.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수 없는 몸이야.”
“그게 무슨 헛소리지? 너도 이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면 살기 위해서라도 함께 종말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니야?”
“안타깝게도 아니야.”

전혀 안타까운 표정이 아니었다. 김우진은 열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곳 출신이 아니야.”

김우진은 어느 날 갑자기 용사가 되어 이 세상에 던져졌다.

“알아. 타 차원에서 소환된 용사지?”


“그런데도 이를 악물고 싸우고 있다.”

살기 위해 발악하고 또 발악해 여기까지 왔고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 이곳의 사람들은 그저 전선이 고착화되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보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시간을 조금 더 끌 뿐, 멸망을 막을 수는 없어. 용사들 조금으로는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그래 보이더군.”
“그런데 너 만한 강자가 여태까지 숨어 있었고 지금도 발을 빼겠다고?”

씨발, 지구인인 내가 이 지랄을 떨고 있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김우진의 살기 어린 질문에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나는 너처럼 이 차원의 생명체가 아니거든.”


“너 같은 용사는 들어본 적 없어.”
“용사도 아니니까.”
“뭐라고?”
“대화는 여기까지. 그럼 이제 진짜로···.”

사악-

붉은 궤적이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코앞을 스쳤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갔다.

“누가 곱게 보내준다고 했지?”


“하···. 이러면 좀 많이 곤란한데.”

새하얀 손이 검을 붙잡았다. 김우진이 더욱 불꽃을 피워냈으나 손을 태우지 못했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도망치는 거냐! 인류가 멸망하면 결국 너도 끝이라는 걸 모르는 거냐!”
“그러니까 난 이곳의 인류가 아니라니까.”

김우진이 온 몸에 불꽃을 둘렀다. 검을 비틀어 손아귀에서 빼내고 유려한 궤적을 그렸다.

그 순간.

김우진의 세상이 반전되었다.

“어···?”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그의 불꽃들이 모조리 사그라들었다. 거대한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커헉···!”

‘뭐지···?’

순식간에 불꽃과 오러가 으깨졌다. 처음 당해보는 현상에 김우진이 당황했다.

“어떻게···?”
“잘. 이제 좀 가도 될까?”
“어떻게 했냐고 물었어···!”
“별 것 없어. 그냥 힘으로 네 불꽃도 오러도 모두 찍어 누른 거야.”
“그런 게 가능할리가···!”
“왜 없어. 여기 있는데.”

남자가 웃었다.

“이제 간다. 또 막을 생각은 아니겠지?”


“···왜 이런 힘이 있으면서 종말을 막지 않는 거지?”
“말했잖아. 내게 그런 의무는 없다고.”
“···너. 대체 누구야.”
“이름을 말해줄 이유도 없고.”
“정령왕.”

김우진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불꽃의 정령왕의 핵을 삼켰다. 내 용사로서의 권능은 포식이고.”


“정령계로 갔을 리는 없을 텐데.”
“하이엘프 용사가 있었다. 모든 생명력을 불태워 정령왕과 하나가 되어 싸우다가 내게 마지막을 부탁하고
떠났다.”
“그렇군.”
“이름.”
“뭐라고?”
“이름을 말해라.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궁금한 걸 알려줬으니 너도 정당한 대가를 알려줘야 맞아.”
“이건 그냥 네가 지껄인 거다만.”

남자가 코웃음 쳤다. 그대로 등을 돌렸으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누구에게도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라.”
“난 입이 싸지 않아.”
“알베니우스.”

또박 또박 다시 한 번 말했다.

“내 이름은 알베니우스다. 지구의 용사, 김우진.”


“···어떻게 내 이름을?”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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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3. 용사 김우진(2) >

차원, 클라크의 종말이 시작된 이후, 인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평화를 만끽한 적이 없었다.

전투 이후의 짧은 연회나 축제는 말 그대로 틈새의 안식에 불과했다. 언데드가 주축이 된 마물들은 언제나 인류의
영역을 침공했고 인류는 그것들을 막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 대륙 전체를 아우르던 인류는 동남쪽 끝까지 밀렸고, 수십 개가 넘어가던 제국과 왕국들은 이제
고작 10 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간신히 버티는 게 고작이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알베니우스.’

역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고 역사서에도 없다. 왕도의 도서관에서 역사서를 뒤적이던 김우진이 책을 덮었다.

물론 역사서는 주로 이 나라의 역사를 다루지만 큰 정세 같은 것은 모두 적혀 있다. 알베니우스 정도의 인물이


나타났다면 기록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조금의 언급도 없다.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고?’

그건 더 믿을 수 없다.

그는 용사가 아니었다. 용사끼리는 그냥 보는 순간 알 수 있다. 상대가 용사라는 걸.

하지만 알베니우스는 용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에게 부여받은 용사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

‘대체 뭐지?’

용사가 아니면서 용사의 힘을 다루다니.


수백 명의 용사들이 죽어나간 이곳에서 가장 강한 용사로 꼽히는 그가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니.

이게 가능한 건가?

혼란스러웠다. 김우진이 자신의 오러와 불꽃을 깨부수던 그 가공할 힘을 떠올렸다.

그의 불꽃은 정령왕의 것이었다. 정령왕과 합일했던 하이엘프의 유지에 따라 정수를 흡수했다. 더 없이 순수한
불꽃. 쉽게 깨어지지도, 깨어질 수도 없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리고 김우진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아니, 아무것도.”
“그런 것 치고는 어딘가를 가고 싶은 생각이 다분해.”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출정이 내일 모래다.”

마하르 왕국 서부 이스텐 영지 방면으로 대규모 언데드 군단이 진군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마하르 왕국은
연합에 정식으로 김우진의 출정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이틀 후, 김우진은 세이드를 비롯한 열 명의 용사들, 그리고 일천의 병사들과 함께 마하르 왕국으로 떠나야 했다.

“오래 안 걸려.”

아마도?

“국왕이 널 보고 싶어 하던데.”
“알아서 잘 둘러대 줘. 보나마나 또 왕녀와 만찬을 하라는 거겠지.”

맨 손으로 오크 열 마리는 때려잡을 것 같은 왕녀 보고 세상에서 제일 연약하다며 지켜줄 강한 용사가 필요하다고


했나.

이곳, 비엔데르크 왕국만 특별한 건 아니었다. 세상은 빠르게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강자에게 의탁하는
것은, 강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생존 본능이다.

김우진은 글라크 최고, 최강의 용사이자 유일한 희망이며 누구든 손에 넣고, 품에 쥐고 싶어 하는 최고의 인재다.

공주나 왕녀가 존재하는 모든 왕국에서 매파를 보냈으며 직계 공주가 없는 자들은 방계를 찾아서라도 보냈다.

그 수많은 공주들 중 누구 한 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지만 오랜 전투로 피폐해지고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 본능을 가진 지금의 김우진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구였다면 엎드려 절이라도 했을 텐데 말이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한 내에 돌아온다면 상관은 없다만, 적어도 어디 가는지는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왕도 외곽.”
“무얼 하러?”
“그냥 산책.”
“그렇게 말해두지.”

김우진도 세이드도 그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전장에서 쌓인 신뢰가


있었다.
“갔다 온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데인 왕국의 왕족들이 왔다고 들었다만.”
“그래서?”
“왕국의 1 공주도 함께라더군.”
“그게 끝이지?”
“헬카르스 왕국도 조만간 도착한다고 한다.”
“그럼 더 빨리 떠나야지. 알아서 잘 둘러대 줘.”

질색한 김우진이 별궁을 빠져나갔다.

똑똑-

김우진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렸다. 화려한 금발에 푸른 눈,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인이 우아하게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이드 용사님.”


“오랜만입니다. 알리나 전하.”
“두 분이 함께 별궁에 기거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김우진 용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조금 늦으셨군요. 김우진은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책이라면 이곳, 왕궁 정원입니까?”
“정원으로 가신다 한들 찾지 못하실 겁니다.”

세이드가 당장 달려 나가려는 모션을 취하는 데인의 1 공주를 말렸다.

“그러면 왕도입니까? 왕도 어디로 가셨죠?”


“저라고 해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희가 전우이긴 해도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는 또
아닌지라.”
“···혹시 누굴 만나러 간 건 아니겠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이드 용사님, 제대로 말씀해주세요. 설마 아이닌, 그 오크로 태어나야 하나 신의 실수로 인간으로 태어난
여자를 만나러 가신 건 아니겠죠?”

아이닌은 비엔데르크 왕국의 왕녀였다. 선왕의 늦둥이이자, 현 국왕의 동생으로 국왕이 김우진과 혼인을 시키고자
애를 쓰는 여인.

알리나 데인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김우진이라는 하나뿐인 용사를 사이에 두고 치정을 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물론 세이드가 보기에
김우진은 둘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우정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허나 저희가 안지도 꽤 되었는데 용사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정도는
말씀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김우진은 제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알리나가 힘없이 문을 닫았다. 그 직후,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김우진을 찾아 드레스를 들고 달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 모습에 세이드가 실소했다.

“김우진, 너를 만난 뒤로는 꽤 재미난 일들만 생겨나는군.”

김우진을 찾는 여인들을 보고 있자니 고향 차원에 남은 자가 떠올랐다.

그를 믿고 따르던 자식 같은 아이.

“율리아.”

김우진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세이드에게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종말을 막고 돌아갈
것이다. 반드시.

그가 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똑똑-

“김우진 용사님 계신가요?”


“김우진은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이닌 전하.”

다시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읽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 * *

말을 타고 달렸다. 그때, 그곳은 무작정 달리다 도착한 곳이지만 한 번 갔던 길을 되짚어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일대. 알베니우스에게 저항하느라 조절하지 못한 불꽃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김우진은 은은하게 느껴지는 잔열을 식히며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알베니우스의 존재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떠났나?’

떠났든, 떠나지 않았든 김우진보다 강자다. 작정하고 숨기면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가는 게 아니라 오게 만들어야 한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정령왕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말미암아 탄생한 불의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저 일직선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알베니우스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 또 온 거냐.”
“생각보다 일찍 나타났군요.”
“갑자기 말투가 착해졌다?”
“막나가도 되는 놈과 그렇지 않은 놈은 구분하는 편이라.”

김우진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평평한 바위에 앉아 손가락으로 옆의 것을 가리켰다.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궁금하고 묻고 싶은 게 참 많습니다.”


“궁금한 것? 그걸 왜 내가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일단 첫 번째는···. 절 아십니까?”

잠시 김우진을 응시하던 알베니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아주 막무가내군. 인류의 용사, 다른 용사들의 유지를 받은 진정한 영웅. 거리에 조금만 나가봐도 네 이야기로
떠들썩한데 모를 수가 있나.”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였군요. 음, 좋습니다.”
“어째 네가 나를 취조하는 것 같은데.”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

능글맞은 김우진의 표정에 알베니우스가 혀를 찼다.

“잘못 걸렸군. 괜히 모습을 드러냈어.”


“그러게 말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흥미가 가서.”
“흥미?”
“나는 이곳이···. 아니, 됐다.”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
“···하. 이거군.”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이제 찾아오지 마라. 나는 이곳을 떠날 거고 너도 나와 엮여서 좋을 건 없을 테니.”


“싫습니다.”
“내가 숨으면 넌 어차피 날 찾지 못해.”
“그렇겠지만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베니우스라는 이름을 알릴 수는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이름이
알려지면 좀 곤란한 상황에 처하신 것 같은데.”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그렇게 들리셨다면 정답입니다.”

알베니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어떠한 기세도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피부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협박이라는 건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것이다.”


“아니죠. 절박한 사람이 필요한 걸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겁니다.”

하지만 김우진은 지지 않고 응대했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냐.”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멸망을 막는데 손을 보태지 않습니까?”
“그 이유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다.”
“이유는 딱히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저나 지금의 용사들로는 도저히 종말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이야 현상 유지가 고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상 유지도 끝이다.

정령왕을 현신시킨 하이엘프 용사의 희생 덕분에 사룡, 티타니아드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다.

놈이 부상을 회복하고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 인류의 종언이다.

그전에 놈을 끝내야 한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놈에게 닿을 만한 칼이 없다. 가장 강한 용사라는 김우진 또한


마찬가지. 수십, 수백 만의 언데드 군단을 뚫고 아크 리치 드래곤의 핵에 불태울 자신이 없었다.

조력자가 필요하다. 더 많은 강자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우진 이상의 격을 가진 자, 알베니우스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존재였다.

“···네 절박함은 이해해. 하지만 나 또한 사정이 있다. 난 직접 나설 수 없어.”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겁니까? 당신 같은 자가?”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지. 너한테는 내가 신으로 보이겠지만 나보다 강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신으로 보인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군. 역시 인간이란.”

쯧, 알베니우스가 혀를 찼다.

“그건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신경 꺼라.”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도망친다면 저는 이 대륙의 모든 이가 당신의 이름을 알게 할 겁니다.”
“방금 내 이야기는 무엇으로 들었지?”
“저 또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정을 용납해줄 만큼 넉넉한 상황도 아니라서요. 제 코가
석 자라.”
“영웅이라더니 순 날강도였군.”
“이곳의 인간들에게 저도 똑같이 당했습니다. 그대로 돌려줄 뿐입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인다면?”
“저는 이를 악물고 도망칠 겁니다. 만약 도망치는데 실패하면 죽겠지만 제 계획은 성공할 겁니다. 제 동료에게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퍼트려달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어차피 저도 이판사판입니다.

독기 찬 눈빛에 알베니우스가 이마를 짚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군. 괜한 호기심 때문에.”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알베니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그의 손짓에 김우진이 뒤따랐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나설 수 없다.”
“대체 어떤 죄를 저지르신 겁니까? 아니, 누구에게 쫓기시는 겁니까? 당신 정도의 강자가 두려워할 정도라면
엄청난 강자인데 종말을 막지도 않고.”
“그들은 종말을 막는데 애쓰고 있다.”
“딱히 들어본 적 없습니다만.”
“더 묻지 마라. 한 번만 더 내 신상을 캐물으면 그냥 가겠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아니, 입구는 작았으나 내부는 엄청나게 큰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내 보금자리다.”

중앙에 선 알베니우스가 가볍게 목을 스트레칭했다.

“말했다시피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하지만 네 사정이 안타깝고, 이 세상의 종말을 바라지도 않으니.

“네게 조금 가르침을 내려주마.”


“가르침이라면?”
“우주의 힘, 너희가 용사의 힘, 혹은 신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다 원활하게 컨트롤 하는 법.”
“용사의 힘을 말입니까?”
“너는 네 몸에 잠자고 있는 우주의 힘의 편린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럴 리가···. 설마 모든 용사들이 그렇다는 겁니까?”
“아니, 너만이다.”

그래, 그래서 조금 호기심이 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정령왕은 반신의 존재거든. 진짜 신에 비하면 부족할지언정 일개 용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우주의 힘을 품고


있다.”

그리고 넌 단순히 불꽃만 다를 뿐, 아직 그 힘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했고.

“희망이 없다고 했지?”

걱정 마라.

“아직 너에게는 희망이 있으니.”

시간은 촉박하지만 재능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아마도.

───────────────
# < 094. 용사 김우진(3) >

세이드는 최근 이상함을 느꼈다.


대상은 김우진이다. 십수 년을 함께 해온 그가 최근 들어 달라졌다.

행동도, 말투도, 태도도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본질적인 것.

“이전보다 더 능숙해졌다.”
“갑자기 뭐가?”
“네 놈 말이다. 이미 정순한 정령왕의 불꽃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꽃 또한 더 정순해지고 밀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불꽃에 담긴 용사의 힘도 농밀해졌고.”

처음에는 착각인줄 알았다.

“지난 번, 이스텐 수호전도 그렇고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다.”

김우진의 활약은 늘 눈부시다.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가장 많은 적을 주살한다.

허나, 그에게도 한계란 있다. 인간인 이상 체력이, 마나가, 권능이 끝이 없이 샘솟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두 번의 전투와 이전의 전투에서 김우진은 달랐다. 더 힘이 넘쳤고 더 장시간, 더 큰 활약을 했다.

“갑자기 이런 게 가능하다고?”
“나는 용사니까. 마물을 잡을수록 업을 쌓고 성장하지.”
“나도 용사다. 나도 성장하지만 너는 정도를 넘었다.”
“그러니까 내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거야.”
“헛소리.”

세이드가 앞으로 내달렸다. 에메랄드 빛의 오러가 싱그러움을 내뱉으며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

그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소름끼치는 괴음이 들렸다. 세이드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고 묵빛의 검기가
공간을 격하고 날아들었다.

쩌엉, 세이드가 힘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불의 파도가 주춤하는 그를 지나쳐 상대를 덮쳤다.

상대를 녹여냈다.

“이것 봐라! 데스 나이트를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어놓고 평소 그대로라고?”


“데스 나이트는 원래 쉬운 상대야. 너한테도 마찬가지면서 새삼스럽긴.”

죽음의 군단장이라는 데스 나이트는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물이지만 적어도 김우진과 세이드에게는 아니었다.

고작 데스 나이트 정도에서 고전했다면 그들은 결코 인류의 희망이라고, 영웅이라고 불리지 못했을 거다.

“지난 번 이스텐 수호전 이후, 매일 같이 어딜 갔었지?”


“산책.”
“너는 산책을 하루 종일 하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똥 폼 잡는 엘프가 할 소리는 아닌데.”
“숲의 정기를 다스리는 거다. 그리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우리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털어놓는 사이는 아니잖아. 지킬 건 지켜야지.”

알베니우스의 당부 때문이었다. 그는 용사의 힘을 더 제대로 다루는 법을, 정령왕의 힘을 더 원활하게 끌어내는


법을 알려주는 대신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비록 김우진의 협박으로 인해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상대의 호의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널 위해 애써줄 필요가 없겠군.”


“네가 언제 날 위해 애써줬다고?”
“네가 산책을 떠나면 널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기껏해야 셋이겠지. 아이닌, 알리나, 레아.”
“하나 더 있다. 마하르의 3 공주.”
“하나가 더 늘었다고?”
“앞으로 더 늘겠지. 비엔데르크 왕국으로 연합의 왕족들이 모이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지는 너도 알고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가망이 없는데.”
“그렇다고 말라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더 늦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건 그렇다.

김우진은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알베니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아 더욱 정순해진, 더욱 뜨거워진 순수한 불꽃을
일으키며 언데드 군단을 갈랐다.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세이드가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붉은 빛의 화염이 어두운 공동을 밝힌다.

화살처럼 뻗어나가는 화염이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꺾인다.

그럼에도 간신히 목표물 - 자그마한 마나석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 코앞에서 마나석이 흩뿌리는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또 실패군.”
“젠장, 뭐가 이렇게 빡셉니까?”
“우주의 힘을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충분히 맞출 수 있다.”

간단해 보이는 훈련이나 꽤나 큰 심력을 소모했다.

사방에 퍼져 있는 알베니우스의 영역의 권능은 용사의 힘 자체를 빠르게 소모시켰으며, 공간의 권능은 불길의
방향성을 틀어버리고, 마나석에 심어진 힘은 용사의 힘을 상쇄시켜버린다.

세 가지 장애물을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용사의 힘과 마나의 결속력을 높여야 한다. 권능으로 비틀린 각도를
즉각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는 항시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며, 마나석에 심어진 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나를 방출해야 한다.
용사의 힘은 용사의 힘으로 대응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더 많은 용사의 힘을 더 견고하게, 더 세밀하게
컨트롤해야 한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처음에는 마나석 근처는 커녕 스스로의 엉덩이에 불을 쏘더니 이제는
근처까지 가잖아?”
“언젠가 그 엉덩이에 맞춰드리겠습니다.”

김우진이 이를 악물며 훈련을 재개했다. 그렇게 모든 힘을 소모하자 바닥이 난 마나 하트를, 정령왕의 정수가
신의 힘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령은 더 없이 자연에 가까운 존재야. 흐름을 따라가며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많은 곳이 있으면 물러가고 빈
곳이 있으면 채우지. 마나 하트가 바닥나면 네 온 몸에 퍼져 있는 정령왕의 기운이 자연스레 마나 하트를
채운다.”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우주의 힘이 김우진의 몸속으로 넘어가 몸을 두들이기 시작했다.

끔찍한 고통에 김우진이 신음을 삼켰다.

울컥, 피를 토했다. 그의 육신이 빠르게 죽음의 사신을 찾기 시작했으나 그 순간, 몸 곳곳에 잠들어 있던
정령왕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령은 자연의 기운이다. 그리고 자연의 생의 성향을 강하게 띤다. 죽어가는 육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살리기
위해 흘러나온 정령의 기운들이 알베니우스의 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김우진이 드러누운 채, 거친 숨을 헐떡였다.

“생각보다 더 진행이 빠르군. 확실히 넌 재능이 있어, 포식의 권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용사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강한 건 이유가 있는 법이지.”
“칭찬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네 몸에 잠들어 있는 모든 정령왕의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거다.”
“예. 덕분입니다.”
“알긴 아는군.”

알베니우스가 아공간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따스한 차 한 잔을 내렸다.

“한 잔 할 테냐?”
“커피 없습니까? 고급 초콜릿을 듬뿍 넣은 달달한 카페 모카로.”
“그게 뭐지?”
“그럼 됐습니다.”

김우진이 눈을 감았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욱신거리는 게 그냥 푹 자고 싶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대체 누구한테 쫓기시는 겁니까?”
“내 개인적인 일은 궁금해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갑니다. 납득이.”

김우진이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당신도,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들도 어째서 이 차원의 종말을 지켜만 보고 있는지. 대륙이 멸망 직전까지
몰렸는데 왜 가만히 있는지. 세상이 멸망하면 모두가 다 죽는 겁니다. 모든 게 끝이라고요.”

종말은 단순한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도 왕조만 바뀌는 게 아니다. 차원 자체가 멸망한다.
생명체가 말살 당한다.

그런데 어째서.
김우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는 이 세상의 존재도 아닌데 필사적으로 발악하는데, 누구는 이런 힘을 가지고도 방관한다니.

“나는 널 돕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돕고 있는 거죠. 본래는 그럴 마음이 없으셨잖습니까?”
“하지만 알려주고 있고 그 대가로 더는 묻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긴 했죠.”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너도 약조한 것을 최선을 다해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명심하죠.”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평화.

김우진에 의해 일시적인 평화를 맞이했으나 인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점점 늘어나는 마물과 언데드들의 수, 잦아지는 습격 빈도, 검게 물들어가는 대지의 확장.

김우진 덕분에 인류는 잠시의 유예 기간을 얻었을 뿐이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인류는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연합의 수장들은 그 마지막 기한이 사룡, 티타니아드가 부상을 완전히 떨쳐내는 순간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마물과 언데드들은 티타니아드가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때문에 인류는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것보다 최후의 반격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연합국의 왕들이, 왕이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제 1 후계자가, 왕국의 중추를 책임지는 대귀족이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엔데르크 왕국의 왕도에 모인 이유였다.

“더 이상 뒤는 없습니다. 백성들의 안위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총공세로 나서야 합니다.”

데스 나이트의 손에 선왕을 떠나보낸 비엔데르크의 젊은 왕이 의장역을 맡아 회의를 주도했다.

연합의 선두에서 가장 많은 공세를 받아 많이 쇠하긴 했으나 한 때는 제국의 자리를 넘보던 비엔데르크 왕국의
체급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공세를 펼치자는 의견에는 동의하네. 하지만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우리는 사룡이 영웅, 하이든의 희생으로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만 알뿐, 놈의 위치도 놈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수색대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왕국의 영역 밖은 대부분 죽음의 대지가 되었고 마물과
언데드들이 넘쳐난다.

말 그대로 사지인 곳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한 명, 한 명의 전력이 소중한


연합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막대한 손실을 감내할 여력이 없었다.

“다행히 그 부분은 저희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

헬카르스의 여왕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새롭게 저희 왕국에 소환된 용사들 중, 마기를 수색하는 권능을 가진 용사가 있습니다. 그 자의 권능이면 능히
사룡의 위치를 특정해낼 수 있을 겁니다.”
“천운이구려. 꼭 필요할 때에 그런 용사가 나타나다니.”
“신들께서 아직 저희를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뜻이겠지요.”

여왕의 말에 왕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호를 그었다.

종말이 이어진 지난 수십년 간 신들은 끊임없이 용사들을 소환했다. 그들의 희생과 활약이 아니었다면 글라크는
진작에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신들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차원. 글라크의 모든 인간들이 백신전의 신들을 믿고 따르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이곳에 올 때, 그 용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곳에 온 직후부터 가장 강력한 마기를 수색하고 있으니 사룡의
위치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이 넓은 대륙 전역을 수색할 수 있다는 뜻인가?”
“괜히 권능이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신께 감사하네.”

작은 희망에 왕들의 얼굴에 웃음 꽃이 피었다. 하지만 사룡을 토벌하기 위한 회의는 이제 시작이었다.

“찾는다고 한들, 무작정 토벌대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보네. 어떤 마물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른 대처가 필요하니.”
“지난 5 년간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저들은 1 년에 한 번씩 거대한 공세를 합니다. 그것을 받아낸 뒤에 토벌대를
출정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물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용사들은 전원 포함시켜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
“하지만 용사들이 전부 빠지면 오염된 땅에 근접한 왕국들의 피해가 커집니다.”
“감수해야겠지. 어차피 사룡을 죽이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네.”
“아무리 그래도···!”

의견이 맞는 부분도,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왕들은 타협을 하기도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다.

그러길 한참, 헬카르스의 여왕이 회담장의 의자 하나를 차지 한 채 멍을 때리고 있는 김우진에게 물었다.

“용사 김우진.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예?”

김우진의 눈이 빛을 찾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물었네. 모든 용사들을 토벌대에 포함시켜 조금이라도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게
나은지, 아니면 최소한의 용사들을 두어 연합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게 나은지.”
“음.”
“편하게 이야기 하게. 결국 용사들을 이끌고 사룡의 목에 칼날을 들이미는 당사자는 그대가 아닌가.”

모든 왕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대가 아니면 대안이 없으니.”

사룡은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워 불의 정령왕과 합일한 하이엘프마저도 죽이지 못한 괴물이다. 그를 죽일 유일한
희망은 그런 정령왕의 정수를 권능으로 흡수한 김우진뿐이었다.

김우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딱히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막지 않으면 다 죽으니까.

다만.

“그러면 둘 다 하지 말죠.”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용사 김우진?”

지금의 김우진의 머릿속에는 왕들이 고민한 방법들보다 좋은 방안이 있었다.

“용사들만 이끌고 가겠습니다.”

단 한 명의 병사와 기사들도 포함시키지 않는 방법.

“그러면 근접 왕국의 방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겠죠?”


“용사들은 기껏해야 80 이네. 그들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들만으로는 사룡 앞에 당도하는 것도 힘들어!”
“만용이다! 그대가 강한 것은 알지만 이건 불가능해!”
“나도 같은 생각이네. 그건 그냥 자살행위에 불과해!”
“아뇨.”

김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병사들이 많아지면 행렬이 늘어지고 느려집니다. 그러면 오히려 마물과 언데드들의 포적이 되어 실패 확률이
올라갑니다. 소수 정예로 가는 게 맞습니다. 연합을 지키는 문제도 있고요.”
“그건 물이 무서워서 마시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멍청한 짓이네! 상대해야 할 마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설사 기적적으로 당도한다해도 지치고 피폐해진 상태로 사룡을···.”
“제가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우진이 왕들의 말을 끊었다.

“이 자리의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가장 많은 마물과 언데드들을 죽였고 사룡의 어금니를 부러트린 게
접니다. 놈들의 무서움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럼에도 가능하다. 멍청한 아집 같은 게 아니다.

결국 문제는 사룡을 벨 칼이다. 그것이 없어 인류는 속절없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단. 두 달 뒤에.”

곧 달라진다.

알베니우스가 그랬다. 앞으로 두 달이면 능히 불의 정령왕의 정수를 완전히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때가 된다면 상대가 아무리 사룡이라고 해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김우진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왕들이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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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5. 용사 김우진(4) >

“말해라.”
“뭐를?”
“너와 나는 비록 종족이 다르지만 지난 십수 년 간 함께 종말을 막아왔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종말을 막아야
한다는 기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사족이 그렇게 길어?”
“매일 같이 나가서 무엇을 하는 거냐. 만드라고라 밭이라도 찾은 거냐?”

당연히 아니다.

김우진은 도무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 세이드를 어떻게 설득시킬까 고민했다.

“사룡을 막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너도 동의했을 텐데? 이제와서 독식하는 이유가
뭐지?”
“분명히 말하는데 영약 같은 건 없어.”
“그럼 대체 뭐지?”

솔직히 말하고 함께 알베니우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베스트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알베니우스에 관한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김우진은 알베니우스에 대한 스스로의 요구가 협박으로 인한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저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열심히 훈련 할 뿐이다. 사룡의 심장을 불태우기 위해서.”


“네 성장 속도는 단순한 훈련을 넘어섰다.”
“나한테는 포식이 있으니까. 더 묻지 마라. 아무리 너라고 해도 모든 걸 말해줄 수 없어.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인류를 지키고 종말을 막고자 한다는 네 의지가 변질된 건 아니라 믿겠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취미라도 생겼나?”

그때,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로 인해 대화가 끊어졌다.


“두 분은 무슨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계신 건가요?”

아름다운 푸른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여인이 다가왔다. 주황빛의 단발머리는 보석과도 같은 청녹빛의 눈과 잘


어울렸다.

“아이닌 전하.”

비엔데르크 왕국의 1 왕녀, 아이닌 베인데르크였다.

겉보기에는 연약해보이지만 뛰어난 기사로서 맨 손으로 오크가 아니라 트롤 열 마리 정도는 가볍게 뚜드려 패는
실력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희 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말아주세요. 섭섭해요.”

김우진이 고개를 숙이려하자 아이닌이 그를 말렸다.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빈 옆 자리에 앉았다.

“연회의 주인공들께서 한쪽 구석에 앉아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모두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죄송합니다. 사룡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룡···이라면 두 분이서 그런 표정을 지으실만 하네요. 최근의 회담 때문인가요?”

아이닌의 물음에 김우진을 흘긴 세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김우진 용사님께서 원정을 두 달 뒤로 미루자고 건의하셨다고 들었어요.”

말은 건의였으나 김우진에게 의존하는 연합의 형편상 그의 의견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주장했다면 원정은 두 달


뒤에 이루어질 것이다.

“맞습니다. 아직 준비가 조금 필요합니다.”


“두 달이면 충분한 건가요? 제가 직접 사룡을 상대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드래곤이 얼마만큼의 괴물인지는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어요.”
“충분한지, 하지 않은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령왕의 힘을 완전히 일깨우면 가능성이 생긴다. 김우진은 자신이 있지만 확답은 주지 않았다. 종말이란 언제나
이변이 발생한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무조건적인 희망을 주는 건 옳지 않았다.

“역시 김우진 용사님은···.”

아이닌의 눈이 선망으로 변해갈 때 쯤, 새로운 불청객이 하나 둘 나타났다.

“익숙하지 않은 인원 구성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우진 용사님.”


“알리나 전하.”
“어머, 용사님, 여기 계셨네요?”
“오랜만에 뵈어요.”
“레아 전하. 세이지 전하.”

세이드와 김우진의 무거운 분위기는 주변에서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무형의 힘이 있었으나 아이닌 왕녀가
물꼬를 트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공주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공주들이 시작하자 귀족 영애들까지 함께하면서 주변은 영애들로 북적였다.


세이드는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빠졌다.

“용사님, 저와 한 곡 추실까요?”
“그러지 말고 저와 함께 하시죠. 아바마마께서 용사님께 전해달라고 했던···.”
“순서를 좀 지켜주시겠습니까? 제가 먼저 용사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데 순서랄 게 있나요? 서로 마음에 들었으면 되는 거죠.”
“용사님, 시끄러운 둘은 내버려 두고 저쪽으로 가서 함께 한 잔 하시겠습니까?”
“멈추세요!”
“멈춰요!”

안주로 놓인 가벼운 과일을 집어먹으며 치정극을 직관했다.

“재밌군.”

이전에는 딱히 흥미가 없었다. 애초에 엘프인 그는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이성들의 다툼을
질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당사자만 아니라면 그 광경이 썩 유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특히, 왕녀와 공주들의 치정극은 우아하기에 특별한 묘미가 있었다. 서로의 체면 때문에 직접적인 힘 싸움으로
가지 못하기에 말로 상대를 죽이려 한다.
왕족의 입에서 천박한 단어 또한 나오면 안 되기에 고상하게.

“인간들은 참 특이해요. 그렇죠?”

코앞에서 느껴지는 달뜬 시선에 세이드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붉은 머리칼의 엘프가 싱긋 웃고 있었다. 엘프들의 왕국, 이그라실의 공주였다.

“넬리아 전하.”
“오랜만이에요, 세이드. 잘 있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딱딱한 말투는 집어 치우자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전하는 공주시고 저는 일개 이방인입니다.”
“차원을 구하고 있고, 구할 영웅이죠.”
“영웅은 김우진입니다.”
“영웅은 결코 혼자서 될 수 없어요. 조력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죠.”
“저는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갈 겁니다.”
“대체 그곳에 무엇을 두고 온 거죠?”
“고향입니다. 엘프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고향의 그리움뿐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율리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이전에는 의무감이었다면 이제는 유대감이다. 그녀는 단순히 지켜야 할 호위 대상이 아닌 가족이었다.

인간들에게 노예로 팔려 고아가 된 그를 구해준 은인의 딸이자, 이제는 자신의 딸과 같은 가족.

“하아. 안타깝네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죠.”


“이해해줘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저 혼자 차인 건 아니라는 거죠. 김우진 용사님도 같은 생각이죠?”
“저보다 더 절실합니다.”
“이후에 저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유쾌하네요.”
“악취미입니다.”
“사소한 유흥거리죠.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가질 유일한 희망.”

김우진이 떠나고 저들이 참담하게 차인다는 건, 세상이 구해졌다는 뜻이니까.

넬리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세이드는 다시 관람을 시작했으나 극은 이미 끝나 있었다.

“용사님?”
“용사님 어디계세요!”
“김우진 용사님!”

결국 참지 못한 김우진이 권능을 이용해 도망친 모양이었다.

* * *

“이래서 연회는 싫어.”

김우진이 구겨진 옷을 피며 투덜거렸다.

공주들이 싫은 건 아니다. 어지간한 연예인들보다 더 아름다운 공주들이 싫을 리가 있겠는가.

다만, 정이 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글라크의 용사로 십수 년을 지냈지만 지구와는 모든 면에서 다른 글라크에서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언제나 지구가 그립다. 문명의 이기가 그립다. 가족이 그립다.

하지만 그것들보다는 저들을 지키지 못할까 두렵다. 모든 게 끝날까봐 두렵다.

알베니우스를 만나고 그 두려움이 조금 사라지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가능이 가능이 되었다는 뜻이다.
가능이 무조건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베니우스가 나서면 무조건 막을 수 있을 텐데.’

아니, 됐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알베니우스는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미약한
희망조차 없었다.

연회장을 나온 김에 그대로 말을 타고 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이지만 초인인 그는 하루 이틀 자지 않는다고


무리가 되지 않는다. 착잡한 마음을 달래고자 알베니우스를 찾아 수련을 더 할 생각이었다.

“알베니우스님.”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동굴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알았다.

‘해제되었다.’
알베니우스의 동굴에는 외부인을 거부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우진은 항상 입구에서 서서 그의
허락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동굴의 입구가 활짝 열려 있다.

어째서?

동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미약한 피 냄새와 거친 기운들이 김우진의 피부를 곤두세웠다.

‘추격자?’

알베니우스는 스스로 자신이 쫓기고 있다고 말했다.

‘진짜로 있었다고?’

“알베니우스님?”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오늘 따라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기척을 죽이고 호흡을 골랐다.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격전의 진동과 어렴풋이 들리는 외침이 사태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오랜 도망자 생활도 끝이다, 알베니우스.”


“이곳에서 널 발견할 줄이야. 운이 좋군.”
“약해 빠졌군. 역시 상처를 다 회복한 건 아닌가.”
“내가 뭐라고 그랬어? 굳이 보고를 올리지 않아도 우리들만으로 충분하다고 했잖아.”

공동의 중앙에는 반쯤 주저앉은 알베니우스가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그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강하다.’

피부가 저릿할 정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정령왕의 기운을 거의 내 것으로 만들었는데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강자들이 튀어나오는 건지. 세상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왜
이제야.

어쨌든 적이다. 알베니우스는 그를 도와주었고 저들은 그런 알베니우스를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그리고 다행히도 저들은 강했으나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것 또한 알베니우스 덕분이었다.

“누구냐!”
“용사?”

김우진이 살기를 드러내자 그들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김우진이 더 빨랐다.


기습은 은밀하게,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면 확실하게.

그들이 김우진을 발견했을 때, 김우진의 불꽃은 이미 한 명을 덮었다. 칼날은 상대의 무기를 쳐내며 전진했다.

쩌어어엉!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그들의 전신을 감싼 보호막이 칼날을 막았다. 화염이 보호막을 녹였으나 잠깐의 틈은,
그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대응할 여유를 주었다.

“이 하찮은 놈이!”

남자가 일거에 힘을 터트렸다. 불꽃을 꺼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캉캉캉, 무자비한 참격에 김우진이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때,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잠깐만! 이놈 김우진이다!”
“김우진이라고?”

공세가 멈췄다. 그가 뒤로 물러났고 김우진 또한 멈춰 서서 호흡을 골랐다.

짧은 충돌이었지만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했다.

“진짜잖아. 김우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날 알아? 난 너희들을 모르는데?”

김우진이 반문했다. 허나 그들의 화답은 김우진의 물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알베니우스! 김우진에게 손을 뻗친 거냐? 무슨 속셈이냐!”


“김우진이라면 골치 아파지는데. 이놈, 글라크의 종말을 막을 유일한 희망이잖아?”
“상관없어. 어차피 이곳은 포기하기로 결정 났으니까.”
“포기라고? 용사들을 그렇게 쏟아 부으시지 않았나?”
“그렇게 쏟아 부었는데 가망이 없으니까. 차라리 다른 차원들을 구원하는 게 더 수지가 맞다고 판단들 하신
모양이야.”
“그렇다면 거리낄 게 없지.”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놈들은 누구고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왜 종말을 막지 않는 거지?”

김우진의 외침에 그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야 막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불쌍한 놈. 거지같은 차원에서 꽤 대단한 놈이 나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냥 버림 패가 되겠군.”
“아까부터 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끝까지 모른 채 죽어라. 그게 네 입장에서도 훨씬 나을 테니.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본 죄라고 생각해라.”
“알베니우스하고 붙어먹은 네놈의 잘못이다.”

놈들이 살기를 드러냈다.

그때였다.

────!
김우진은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뒤집어진다. 감각이 흐트러진다. 공감각이 이상해진다. 무겁게 다가오는 용사의 힘에 몸이 한층


무거워진다.

“알베니우스 이 빌어먹을 도마뱀이!”


“크윽! 아직도 이 정도의 힘을 남기고 있었나?”

허나, 그것은 저 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김우진보다 더 충격이 큰지 한 층 일그러진 얼굴로 피를 토했다.

“김우진!”

그 사이로.

“내 훈련을 견뎌낸 너라면 능히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저 둘을 죽여!”

알베니우스의 외침이 들렸다.

“어서! 난 이걸 오래 유지하지 못해!”

김우진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굳이 알베니우스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공간이 비틀려 있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세상이 급변했다. 그럼에도 수련으로 다져진 감각은 어떻게든 적응을
하려고 했다.

“어떻게?”
“역시 알베니우스, 네놈의 마수를 뻗친 게 맞구나!”

그들은 분노했으나 김우진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멈춰라! 우리는 신의 사자들이다! 우리를 죽이면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될 거다!”


“멈춰라, 김우진! 신의 분노가 두렵지 않느냐!”
“신?”
“그래! 알베니우스를 죽여라! 저 놈은 신께 반역한 반역자다!”
“신들의 총애를 받고 있다지? 그 총애가 계속되길 바란다면 우리의 말을 들어라.”
“이상한데.”

김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의 사자라면 왜 나를 죽이려고 했지? 나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용사는 신에 의해 소환되어 종말을 막는 자다. 그런데 신의 사자라는 자가 용사를 죽이려 하는 게 맞는 걸까?

“그건 네가 먼저···.”
“헛소리 하지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며? 그럼 내가 선공을 하지 않았어도 죽였을 거라는 거잖아? 신의
사자가 고작 그런 이유로 용사를 죽이려고 해?”
“······.”
“그리고 이 차원을 버린다는 건 무슨 뜻이지?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전부 다 설명해주겠다. 대신 알베니우스를 죽여라. 저 놈은 반역자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나는 신의 사자다.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아. 신께 맹세하건데 진실이다.”
“김우진!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남자가 공간의 비틀림을 이겨내고 억지로 힘을 방출했다. 용사의 힘이, 신의 힘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신의 사자가 아니라면 내가 이 힘을 다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나를 믿어라. 넌 지금 저 간악한


도마뱀에게 속고 있는 거다.”
“그래, 약속하마. 당장 저 도마뱀을 죽인다면 신께 너의 활약에 대해서···.”

콰직-

김우진의 칼날이 긴 궤적을 그렸다. 단숨에 무방비 상태의 목을 반으로 갈랐다.

“···어째서?”
“구라를 치고 싶으면 눈깔에서 살기라도 없애던가. 그 따위로 하는데 누가 속냐?”

홀로 남은 남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살려준다는 말이 없잖아.”

무엇보다.

“난 은혜랑 원수는 반드시 갚아.”

알베니우스는 김우진을 도왔다.


그리고 자칭 신의 사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원수는 네가 먼저···!”
“이제와서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서걱-

머리 하나가 또 떨어졌다.

───────────────
# < 096. 용사 김우진(5) >

“···정말로요?”

두 남자의 정수를 권능으로 흡수하던 김우진이 멈칫했다.

“정말로 이놈들이 신의 사자가 맞다고요?”


“정확히는 집행자다.”

포식.
상대의 정수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기성이 짙은 권능.

“···맙소사.”

김우진이 두 남자의 힘을 꾸역꾸역 흡수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부다 흡수했으나 몸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방대했다. 소화불량에 걸린 것 마냥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럼 이놈들의 말이 진짜라고요? 알베니우스 당신, 신들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입니까?”


“신들에게 쫓기는 것은 맞다. 하지만 딱히 반역을 한 적은 없다.”
“어쩐지, 그 정도의 강자가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게 이상했어. 생각해보면 신이 아니면 저런 괴물을···.”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냐?”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났다.

“···뭡니까, 대체?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건 네가 선택해야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당신을 돕다가 같이 반역자가 되었는데?”
“누가 그래? 네가 반역자라고.”
“아닙니까?”
“아니야.”

알베니우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우진에게 포식 당한 두 집행자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지만 전투의
여파로 공동은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일단은 자리를 좀 옮기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장소가 변했다.

“여긴?”
“이 차원에 만들어 놓은 내 여러 안가 중 한 곳이야.”

알베니우스가 차를 내왔다. 커피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궁금한 건 다 알려줄게. 일단은 생명의 은인이니까. 뭐든 물어봐. 나도 은혜는 무조건 갚는
편이거든.”
“정말로 신의 사자들이었습니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그들은 신의 사자, 아니 집행자가 맞아.”
“···그렇다면 제가 그들을 죽였음에도 반역자가 아니라는 건 뭡니까?”
“그들은 나를 쫓아왔고 나와 싸웠지. 내가 놈들을 죽인 거야.”
“그런다고 속아줍니까? 신들인데?”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알베니우스가 픽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신들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딱 거기까지야.
저들은 집행자들이 내 손에 죽었는지, 너의 개입으로 죽었는지 네 스스로 실토하지 않는 이상 알 방법이 없어.”
“그게 무슨···.”
신들이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고? 그렇다면 왜 그들을 신이라고 부르는가. 모순이다.

“네가 생각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만 실제 신은 그래.”

결코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너무 혼란스러운데요.”
“하지만 결국엔 믿을 수밖에 없을 걸.”
“어째서죠?”
“증거가 사방에 넘쳐나니까.”
“증거?”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네가 왜 용사가 되어 여기서 구르고 있어야 하지? 그냥 신이 사라져라, 명하면 마물들이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니야? 아니지. 애초에 저런 게 생겨나면 안 되는 것 아니야?”
“아.”

너무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워낙 지구에서 소설과 만화, 영화 등으로 접한 클리셰였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던 의문들이기도 했다.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종말이 생겨.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막기 위해 대리인인 용사들을 소환하고,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그럼에도 멸망하는 차원이 나와.”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믿고 싶지 않지만 모든 정황과 증거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신은 결코 김우진이 생각하는 신만큼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들이 진정으로 신의 사도라면 당신은 왜 신들에게 쫓기는 겁니까?”


“그건 앞서 말한 이야기가 도움이 되겠군.”

알베니우스의 설명은 꽤나 길고 복잡했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짧았다.

“···당신이 신이 되는 게 두려워 죽이려고 한다고요?”

그딴 게 신?

“너희들이 신이라 믿는 백신전은 오래 전부터 이 우주를 다스려왔어. 그리고 자신들의 세력을 넘볼 만한 자들을
경계하고 미리 대처해왔지.”

대처란 크기 전에 사전에 박멸하는 것을 뜻했다.

“신들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과 선하다 믿고 있던 자들이 이 세상에 다시없을 악신이라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믿기 힘들었다.

“믿든, 믿지 않든 네 자유야. 나는 다만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뿐이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이유가 있나?”
“반역자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해. 점점 겪어보면 알겠지.”

알베니우스는 그의 불신을 개의치 않았고 그게 더 믿음이 가게 만들었다.


질문과 대답은 계속되었다.

알베니우스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백신전은 신들의 집합체다. 말 그대로 백 명이 소속되어 있지.”

백신전이 무엇인지.

“그건 아무도 몰라. 아카식 레코드만이 알고 있겠지. 단지 신들은 우주의 힘을 가진 모두를 경계할 뿐이다.”

정말로 신이 될 수 있는지, 된다면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지.

“아카식 레코드는 이 우주의 거대한 의지다. 빛의···.”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종말은 차원의 죽음···.”

어째서 종말이 일어나는지.

“일반적으로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차원은 하위 차원이다. 아카식 레코드에 의해 상위의 존재인 신들은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신들이 왜 용사들을 소환하는지.

“종말을 막아낸 쓸만한 용사다.”

집행자들이 무엇인지.

“···그럼 저 버러지들이 이야기하던 게 정말이란 겁니까? 신들이 글라크를 버린다는 게?”

그리고.

“나는 신이 아니니까 정확한 속사정은 몰라. 하지만 정황이라는 게 있지. 신들은 이미 글라크에 미련을 버릴
만큼 버렸어. 수십 년간 수백의 용사를 투입했는데 안 되면 안 되는 거니까.”

정말로 글라크가 버려지는지.

“글라크의 사람들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이곳에서 신을 찬양하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고요.”


“이 우주가 탄생한지, 신들이 생겨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지? 그 중 멸망을 맞이한 차원이 한두 개일까?
과연 멸망한 차원이 하나도 없을까?”
“······.”

김우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수백의 용사들을 만났지만 같은 고향 차원의 용사들은 드물었다. 그렇게 많은
차원들이 존재한다. 알베니우스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을 거다.

“글라크는 차원의 힘이 강하고 세계수도 존재한다. 그래서 종말이 더 크게 다가왔고, 그래서 신들이 보다 미련을
가져 보았지만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너에게나, 글라크의 인류에게나 특별한 거다. 신들에게 글라크는
널리고 널린 차원 중 하나일뿐이다.”
“···그럼.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들에 의해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끌려온 사람들은?”
“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어.”
“···다 죽는다고요?”
“종말을 맞이한 차원에서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 또한 종말의 일부니까.

“···하.”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하하···!”

아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김우진은 웃었다.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역겹고, 분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하면서 부려먹다가 안 될 것 같으니 그냥 다 버린다는 겁니까? 명색이 신이라는
작자들이!”

십수년을 개처럼 구른 대가가 고작 이거라고?

“네 분노는 이해해. 하지만 아직 속단하기는 일러.”


“신들이 버렸다면서요! 용사가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가호를 뺀다는 건데 이르긴 뭐가 이릅니까!”
“네가 막아버리면 그만 아니야?”
“···뭐라고요?”
“신들이 글라크를 버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네 격이 지금의 수준에 다다랐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야. 아니,
애초에 그건 상관없지. 네가 그냥 종말을 막아버리면 모두 의미 없어지니까.”
“······.”

그것도 그렇군.

“···조금 흥분했습니다.”
“이해해.”

알베니우스가 느긋하게 차를 홀짝였다.

* * *

“헌데 아무리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아도 자신의 사도가 죽은 걸 모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권속이 죽은 걸 모르지는 않지. 이미 눈치 챘을 거야.”

그럼에도 알베니우스는 여유가 있다고 했다.

“하위 차원인 이상 신들이 직접 나서지 못해. 기껏해야 지금처럼 집행자들을 보내는 건데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당분간은 괜찮아.”
“그런데 신들이 당신이 신이 될 것이 두려워했다면서 사도 둘한테 왜 쩔쩔맸던 겁니까?”
“난 지금 부상 중이야. 이전에 신들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 크거든.”
“어떻게 다치면 신 후보라는 자가 고작 신의 사자 둘 한테···.”
“뭐, 임마?”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그놈들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자리로 돌려보내주마. 다음에는 찾아오지 마. 흔적을 최대한 지워 찾을 수도 없을 테니. 필요하면 내가
찾아가지.”
“예.”

종말을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이유가 더 늘었다.

김우진은 우선 왕도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온···너.”
“나중에 설명해주마. 누가 날 찾거든 한 일주일 정도, 나 바쁘다고 해줘.”
“···나중에 물을 거다.”
“그래.”

별궁에 존재하는 개인 연무실로 들어간 김우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집행자들이 지금의 너를 본다면 반드시 이상함을 눈치 챌 거다. 포식으로 흡수한 기운들을 다스리는 게
먼저다.’

굳이 알베니우스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두 집행자를 흡수한 이후, 계속되는 더부룩함을 김우진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기운의 통제가 원활하지 않고 자꾸만 새어 나온다.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집행자들은 용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던 강자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정령왕의 기운에 그들의 힘까지
완벽하게 다스린다면 사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급하게 하다보면 기운이 폭주해서 네가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시간이 없다. 종말은 다가오고 있고 신들은 글라크를 버리려고 하고 있으니.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 *

“오늘도 인가요?”
“예,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에요. 세이드 용사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애초에 사과할 일이 아니기도 했다.

김우진은 두 달의 유예기간을 제안한 뒤, 폐관에 들어갔다. 사룡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무어라 할 수는


없다.
비록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하지만 여러 번 찾아왔음에도 허탕을 치고 심란해지는 마음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왕녀, 아이닌 비엔데르크가 한숨을 쉬었다.

‘김우진 용사님.’

김우진은 영웅이다. 암울해지는 세상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빛이며, 아이닌은 그가 세상을 구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이후의 일.

용사 김우진은 글라크에 별 관심이 없다. 그에게 글라크는 그저 막아야만 하는 차원인 뿐인 걸까.

용사 세이드를 제외하면 그 누구와도 친분을 유지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반증했다.

“······,”

오라버니는 그의 마음을 얻어야지만 왕국이 살 수 있다고 했으나 글쎄. 그녀가 보기에는 조금의 가망도 없는
일이었다.

마하르, 헬카르스, 데인 등 여러 왕국의 공주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아예 관심이 없으니.

“애초에 잘못 판단하고 계셔.”

김우진은 잡아야 할 규격 외의 전력이 아니다. 떠날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을 잡는 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해야 하는 건 그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주는 게 아닐까?

오라버니께 말씀을 드려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어?”

진득한 불길함. 그녀의 피부가 갑자기 곤두섰다. 무언가가 감각 안으로 들어왔다. 소름끼치는 섬뜩함에 숨을
삼켰다.

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들려고 했다.

──────!

세상이 뒤집어졌다.

“아···.”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닐은 스스로가 정신을 잃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드레스는 반쯤 찢어지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사방에 널브러졌다.

운이 좋았다. 돌과 돌 사이에 끼어 깔려 죽지 않았으니.


그녀가 한 순간에 바닥난 마나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간신히 틈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목격했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폐허가 되어버린 왕도를.
사방에서 부르짖는 죽음의 비명소리를.
비명을 사냥하는 죽음의 군단을.

“···맙소사.”

지옥이었다. 현세의 지옥이 강림해있었다.

“스, 습격···!”

마물들의 습격이었다. 언데드들이 하늘에서부터 강습하여 비엔데르크의 왕도를 습격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경악도 잠시, 왕도 외곽의 거대한 존재에 압도당한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아···!”

나오는 건 절망에 가득 찬 비명뿐이었다.

왕도 외곽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동체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거대한 압박감과 숨 막힐 듯한 마기, 모든 것을 찍어누르는 살기와 광기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었다.

사룡, 티타니아드.

인류가 반드시 멸절해야할 대적이 강림했다.

눈이 마주쳤다. 아이닌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티타니아드의 입이 벌어졌다.

─────!

독기로 가득한 숨결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
# < 097. 용사 김우진(6) >

마물들은 빠르게 영역을 넓혀온다.

모든 인류를 죽이고 대지를 황폐화시킨다.

마물의 습격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언데드는 어디서든 나타난다.

종말이 시작된 이래로 숱하게 경험해온 것들이었으나 인류는 설마 종말의 주체가 직접 군단을 이끌고 연합의
왕도로 강습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모두 대피해!
적이다! 적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어떻게 왕도를! 왕도의 수호부대는 뭐하고 있는 거야!
끄아아악!
살려줘!

비명과 괴성이 난무한다. 화마가 올라오고 진득한 독기가 모든 것을 중독시킨다.

짙은 혈향은 엘프의 후각을 곤두세운다.

“이런 빌어먹을···!”

용사, 세이드가 반쯤 부서진 별궁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목격한 왕도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사룡의 강림은 왕도 전역에 펼쳐진 방어 마법진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왕도의 대부분을 집어
삼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궁은 이중, 삼중으로 마법진이 중첩되어 피해가 덜했다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 ‘덜’
일뿐이다.

세이드가 기운을 끌어 모아 돌진했다. 도망치던 일가족을 기습하려던 듀라한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가, 감사합니다!”
“당장 동문으로 도망쳐라.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동문으로 도망치고 이르고.”
“예, 예!”

왕도 전체가 아비규환에 빠진 시점에서, 왕국군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왕도를
벗어나는 게 답이며 왕도 서부에서 꿈틀거리는 사룡을 피하는 게 최우선이다.

일가족을 보낸 세이드가 열 마리의 구울들을 베었다. 허나, 여전히 언데드들은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왕도 서쪽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는 사룡은 이전보다 더 전율스러운 마기를 품고 있었다.

“···다 나았군.”

인류가 상정하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김우진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전에 기습을 했어야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승률이 있었을까?

“제기랄.”

무엇이 옳든, 이미 상황은 글러 먹었다.

“전하?”
그때 그의 시야에 아이닌 비엔데베르크 왕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언데드들과 싸우며 사람을 모으고 있었다.

그때.

“···설마?”

사룡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주둥이가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목표물은 아이닌 왕녀. 세이드 델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전하!”

외침과 동시에 숨결이 토해졌다. 모든 것을 녹이는 지독한 독기와 마기는 세이드보다 빨리 왕녀에게 당도했다.

그 순간.

────!

포탄처럼 튀어오르는 불꽃이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사룡의 독기를 받아냈다.

“···김우진?”

아니, 다르다.

김우진의 불꽃이나 김우진의 불꽃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떠한 것보다 더 순수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용사의 힘이 넘쳐났다.

마치.

“···신?”

그래, 그가 처음 이 세계에 소환되었을 때 만났던 신처럼.

* * *

집행자란, 보다 우수한 용사가 신의 선택을 받아 용사의 힘을 더욱 보강 받고 반신이 된 자들이다.

그들의 힘은 일반적인 용사와는 궤를 달리하나 신의 권속이기에 아카식 레코드의 제약에 묶인다.

하위 차원에서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제약. 원한다면 그만한 업을 소모해야한다는 제약.

하지만 그런 대가가 있기에 그만큼 그들이 품은 신의 힘은 막대하다.

그것들이 정령왕의 힘과 어우러지면서 김우진은 새로운 벽을 넘어섰다.

온 몸 가득 채워지는 고양감은 처음 용사가 될 때보다 더 강렬하다.


김우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달뜬 호흡을 내뱉었다.

“······.”

주먹을 쥐었다 폈다. 넘쳐나는 힘은, 가벼운 몸과 원활한 기운의 흐름은 그가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였음을
증명한다.

“···지금이라면.”

사룡도 두렵지 않았다. 전지전능한 힘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 그렇지는 않겠지만.

김우진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무너져 내리던 별궁의 천장이 그의 주먹질에 박살났다.

“···마기.”

참으로 공교롭다. 수련을 끝내자마자 지독한 마기와 비명 소리가 느껴지다니.

습격이다. 그것도 사룡이 직접 왕도를 기습했다.

김우진이 잔해를 헤치며 밖으로 나왔다. 생각 이상으로 더 처참한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붕괴한 건물들, 사람들의 비명, 그들을 학살하는 언데드들. 그리고 저 멀리 고고하게 존재하는 사룡, 티타니아드.

왕국군은 어디 있지?
기사들은?
왕도에 모였던 각국의 왕족들은?

왕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역부족으로 보였다. 결국 모든 건 사룡을 끝장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소름끼치는 언데드 특유의 붉은 동공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놈의 주둥이가 벌려졌다. 숨결이다. 이전이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피하려고 했을 드래곤의 권능.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아이닌 전하?”

하지만 사룡과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아이닌 비엔데르크는 아니었다. 김우진이 달렸다. 어느새 그는 사룡의
숨결과 아이닌 사이에 끼어들었다.

볼꽃을 피워 장벽을 만들었다.

────!

거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이전이었으면 이 한 방에 화염은 소멸하고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버틸 만 하다. 아니, 오히려 반격을 할 여유가 넘쳤다.

드높아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이 그저 자그마한 울타리로 보였다. 발로 툭 차면 쓰러질 것 같이 낡은.

“···김우진 용사님?”
“아이닌 전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생존자들을 찾아 왕도를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전하를 지키면서 싸울 여유가 없습니다. 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왕도의 사람들을 최대한 멀리
대피시켜주십시오.”
“···네.”

아이닌이 사라졌다. 사룡은 그때까지 김우진에게 고정된 시선을 때지 않았다.

- 김우진.

성대가 없는 뼈에서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티타니아드.”

- 달라졌구나.

“상처는 다 회복했나 보지? 앗, 뜨거하고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친 게 엊그제 같은데.”

- 도망친 건 네놈이겠지.
- 많이 달라졌구나. 역시 네놈을 살려서 보내면 아니 됐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이지. 그리고 네가 자비를 베풀어서 살려준 것처럼 말하지 마. 내가 알아서
살아남은 거니까.”

사람들은 티타니아드를 피도 눈물도 없는 광룡으로 생각한다.

이미 죽은 시체인지라 피도 눈물도 없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이지가 없는, 파괴 본성만 존재하는 괴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들에게 해츨링을 잃고 스스로 어둠에게 몸을 맡긴 드래곤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인류를 멸하겠다고
다짐한 광룡.

드래곤답게 분노는 차갑고 냉철하다. 이성을 유지하며 항상 보다 많은 인류를 효과적으로 절멸시킬 방법을 찾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두려운 존재다.

- 저 가증스러운 신들의 가호를 잔뜩 받은 모양이구나.

그녀가 날개를 펼쳤다.

퍼져 나오는 마기가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본래부터 그녀를 따르던 군단이 보다 넘쳐나는 사기에 괴성을
내질렀다.

- 너와 나 사이의 결판이 나는 게 빠를까.


- 아니면 네가 지키는 자들이 모두 죽는 게 빠를까.
“나를 초조하게 만들 생각인가 본데. 그게 오히려 내 사기를 올려주고 있다는 건 모르나 보네.”

아무런 수작 없이 싸우던 자가, 굳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통한다. 그의 수준이 사룡, 티타니아드가 경계할 만큼 올라갔다.

“얌전히 땅속으로 기어들어갈 시간이야.”

- 너만 죽이면 인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김우진이 돌진했다. 사룡이 숨결을 토해냈다.

* * *

──!
─!
───!

마기가 폭발하고 불길이 넘실거린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충격파에 반쯤 바스라진 건물들이 완전히 허물어진다.

“빨리 나오세요!”
“왕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마물을 죽여라!”
“사람들을 구조해라!”
“이쪽에도 마물들이!”

기습적인 공세에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크나 큰 피해를 입었다.

성벽은 무너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들이 다시 언데드가 되어 살기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왕도였다.

중첩된 마법진들은 피해를 최소화했고 살아남은 기사와 병사들은 피해를 수습하고자 했다.

병단은 차츰 무리를 갖추고 효과적으로 언데드들을 격퇴하기 시작했으며 용사들이 가세하자 속절없이 밀리던
인간들은 반격의 시작을 알렸다.

그 선봉에는 세이드 델름이 있었다.

김우진에 의해 빛이 바래지긴 했으나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이듯, 김우진이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가 최고의 용사였다.

“일부는 나를 따라라.”
“명령을 받듭니다!”
“나머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와 함께 사람들을 구조합니다!”
“예!”
기사단과 병사들이 세이드와 아이닌 비엔데르크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원활하게 병력들을 지휘하며 상황을
수습해 나갔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끝이 없었고 왕도는 넓었으며 초기의 피해가 너무 컸다.

왕도 곳곳에서 합류하는 병력들은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그들은 빠르게 지쳐갔고


피해가 증식되어갔다.

“어떻게든 해야 해요!”
“일단 왕궁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성에는 폐하와 귀빈들을 비롯한 왕실의 정예들이 있으니 한결 나을
겁니다.”
“하지만 왕궁은 전투의 여파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 오라버니께서도 이미 왕궁을 벗어나셨을 거예요.”
“그렇다면 역시 서문을 통해서···.”

그때였다.

“용사님들과 전하를 도와라!”


“마물들을 물리쳐라!”

왕족들을 따라와 왕도 밖에 주둔지를 만들고 지내고 있던 각국의 정예병들이 왕도로 진입했다.

그들은 마물들을 토벌하며 빠르게 전진했다.

덕분에 세이드와 아이닌은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용사님, 왕녀님, 괜찮으십니까?”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헌데 저건···.”
“김우진 용사님과 사룡입니다. 병사들에게 절대 곁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일러두세요.”
“예. 굳이 그게 아니라도 다가갈 간 큰 놈은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마하르 왕국의 지휘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왕녀에게 저지른 무례였으나 아이닌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정말 굉장해요.”

김우진을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믿음이었다.

김우진이 아니면 대안이 없으니까. 제발 이겨달라고 억지로라도 믿는 거다. 희망이 없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우진은 자신이 장담한 대로 사룡과 대등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대체 한 달 만에 어떻게···.”
“아니, 저건 대등한 전투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세이드가 멍하니 전장을 살폈다.


여전히 뜨거운 열기와 섬뜩한 마기를 방출하고 있으며 그조차 함부로 다가갈 수 없다.

누가 승기를 잡고 있는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그럼에도 엘프의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불길이 마기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김우진이 이기고 있다고.

도저히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희망이 보이고 있다고.

───────────────
# < 098. 용사 김우진(7) >

─!

열기가 독기를 밀어낸다.

──!

염화가 마기를 집어 삼킨다.

─!

화염의 검이 사룡의 뼈를 자른다.

김우진은 사룡, 티타니아드와 오늘로서 두 번 만났고, 두 번 싸웠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전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압도. 누군가 상대를 압도한다. 첫 전투에서 티타니아드가
김우진을 비롯한 용사들을 압도했으며 지금은 그 반대로 김우진이 티타니아드를 압도 하고 있다.

고작 2 년 남짓한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버렸다.

- 참담하기 그지없구나.

사룡의 날개가 찢겼다.

- 그 하이엘프 때문에 너희에게 시간을 준게 문제였다.

갈비가 부러지고 다리가 끊어졌다.

“말은 똑바로 해. 네가 준게 아니라 그분이 만들어주신 거지.”

- 그때 네놈들의 전부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


- 인간은 감히 이 땅위에 살아 숨 쉬어서는 안 될 생물이거늘.
- 세상을 좀 먹는 해충 같은 놈들.

“네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해츨링이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야. 그런데 이미 씨발 그 인간들 다 네 손에


뒤졌다며? 그 왕국도 그 주변 왕국도 전부 멸망했다며. 아직도 성이 안 풀려?”
- 그래서? 그런다고 죽은 내 아이가 살아 돌아오느냐?

“그럼 이런다고 다시 살아 돌아와?”

- 적어도 그 아이의 넋을 기릴 수는 있겠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해충을 박멸함으로서.

“그래, 대화가 안 통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모든 면에서 논리적이었다면 사룡은 사룡이 되지 않았을 거다. 아이를 죽인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만족하고 더
나아가지 않았겠지.

김우진은 그녀를 감정적으로는 동정했으나 그 이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분노로 인해 죽은 이들이
수억이다. 차원은 멸망 직전까지 갔고 김우진이 알베니우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번 습격으로 멸망했을 거다.

“할 말은 그게 끝이지?”

- 내 아이의 복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패배를 직감한 사룡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콰콰콰콰-

막대한 마기가 응집하기 시작했다.

- 갈 때 가더라도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


- 이 몸을 불살라서라도.

사룡의 마나 핵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자폭. 흔한 클리셰다. 마지막까지 지저분하게 가는, 그래서 희생자를 양산하고 신파를 찍는 전형적인 고구마
클리셰.

“웃기지 마.”

김우진은 그 클리셰를 용납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불꽃이 사룡의 마기를 불태웠다.


그의 검날이 핵을 지키는 방어 마법진을 갈랐으며 종국에는 그 끝이 핵이 닿았다.

콰직-

검날이 핵을 관통했다.

- 베니실르···. 이제 널 볼 수 있···.

사룡의 아련한 유언과 함께 충격을 받은 핵이 폭발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김우진이 한 발 빨랐다. 그의 손이 사룡의 핵에 닿았다. 박동하는 그것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권능, 포식.
폭주하여 폭발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김우진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러길 한참.

파스스, 거대한 괴물의 동체가 먼지로 화해 바람에 흩날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사룡이 죽자 사룡의 힘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죽음의 군단 또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나 둘 쓰러져가는 시체들에 칼을 맞대던 기사와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이겼다!”
“언데드들이 모두 소멸하고 있다!”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사룡의 존재감은 너무도 거대했기에 그 소멸을 왕도의 모두가 목격했으니까.

“사룡이 쓰러졌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용사, 김우진이 사룡을 쓰러트렸다!”
“김우진 만세!”

와아아아아!

“···정말로 이긴 거야?”
“종말이 끝났다고?”

믿기지 않는 현실에 힘이 풀린 사람들이 하나 둘 주저앉았다.

종말이 끝났다.

김우진에 의해서.

* * *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성벽은 죄다 무너지고 멀쩡한 건물보다 그렇지 않은 건물을 찾는 게 더 쉬웠다.


사방에 넘쳐나는 시체는 시산혈해를 이루었으며 잃어버린 자식과 부모를 찾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있었다.

사룡이 죽었기에,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 수는 없었다.

인류를 수십년 간 괴롭히던 종말이 끝난 것은 분명 거국적인 일이었으나 왕도의 피해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미안하네. 마음 같아서는 성대하게 축제라도 열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닙니다, 폐하.”

승전을 선언한 국왕은 그나마 멀쩡한 별궁으로 거주지를 옮긴 김우진을 따로 만나 술 한 잔을 내렸다.

“그대는 영웅이네. 이 나라를, 이 대륙을, 나아가 인류를 지켰네. 그대가 아니었다면 사룡이 쳐들어 온 어제가
내 마지막 날이었겠지.”

국왕이 스스로의 목을 어루만졌다.

“혼란이 수습되면 반드시 더 큰 보상을 하겠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니 잘
생각해보게.”

김우진의 어깨를 토닥여준 국왕이 나갔다. 밖에 나가있던 세이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말해라.”
“뭐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별 일 없었다.”
“별 일이 없었는데 전력을 다해도 뼈에 기스를 내는 게 전부였던 네가 놈을 압도했다고?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역시 안 믿기겠지?”
“스스로 자각은 있어서 다행이군.”

확실히 개도 안 믿을 개소리기는 했다.

“하지만 나한테도 다 사정이···.”


“김우진!”

그 순간, 창문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공간이 뒤틀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알베니우스님?”
“쿨럭···제기랄!”

상처투성이의 알베니우스가 김우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백한 안색은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뭐지? 아는 사이인가?”

세이드가 알베니우스를 경계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 치워, 세이드. 아군이야.”


“아군?”
“네가 물었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하지 않기로 했으나 이 상황을 납득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자가···.”
“나중에 다 이야기 할테니까 일단은 치유 마법사 좀 불러줘.”
“알겠다.”

세이드가 나갔다. 김우진이 다급히 알베니우스의 상세를 살폈다.


“뭡니까? 왜 또 이 꼴이 됐어요? 설마?”
“그 설마가 맞다.”

하하,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기랄, 내가 신들의 집념을 얕봤어. 너와 헤어진 후,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 다녔지. 그런데도 기어코
찾아내더군.”

알베니우스가 글라크에 있다는 확신이 생긴 신들은 무려 열 명의 집행자들을 투입했다.

평소라면 알베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이들이지만 신들에게 입은 부상을 회복중인 현재의 알베니우스는
그들을 감당해낼 여력이 없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어. 이 몸 상태로 차원 이동은 무리이다 보니 생각나는 게 너밖에 없더군.”


“차원 이동도 가능하십니까?”
“말했잖아. 나는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고. 용사도 아닌 내가 어떻게 왔을 것 같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신 후보라는 말이 쏙 와 닿기는 하네요.”
“가르침은 다 받아 놓고 이제야?”

알베니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를 좀 도와다오.”


“쫓기고 있는 겁니까?”
“그래. 집행자가 무려 열 명이야. 지금의 나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집행자라면 그때 그 수준이라는 건데.”
“더 강해. 더 상위의 집행자들을 보냈어.”

그보다 더 위라.

그렇다면 어쩌면 사룡급일 수도 있다. 그런 수준의 강자들이 열 명이라.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도와줄 테냐?”


“말했잖습니까. 은혜도 원수도 모두 갚는 주의라고.”

알베니우스 덕분에 사룡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신들과 대적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지만
알베니우스가 아니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리고 신들에 대한 불신도 쌓여가고 있었고.

“고맙다. 이 은혜는 꼭 갚지.”


“제가 지금 은혜 갚는 중입니다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해. 여기서 놈들을 맞이하는 건···.”
“안타깝게도 그건 이미 그른 것 같습니다.”

김우진의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갔다. 알베니우스가 다급히 김우진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를 열 명의 존재들이 있었다.

용사 그 이상의 강자들.
“용사, 김우진?”
“김우진과 알베니우스가 붙어먹은 건가.”
“어쩐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던 김우진이 사룡을 쓰러트린 게 이상하다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신들의 명을 지켜야지. 우리의 목표는 알베니우스를 죽이는 것.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
“차원의 종말을 막은 뒤니 거리낄 것도 없겠군.”

열 개의 시선이 김우진을 훑는다. 김우진이 눈에 힘을 주고 그것들을 받아 쳤다.

“명색이 신의 사자라는 양반들이 우르르 몰려와 양아치처럼 한 명을 줘 패는 건 좀 추하지 않습니까?”


“입담 하나는 쓸만하다더니 정말이구나.”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 그냥 죽여라.”
“감히 신을 모욕한 반역자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크나 큰 죄인지 깨닫게 해주어라.”

집행자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김우진이 더 빨랐다.

─!

주먹이 집행자 하나의 머리를 강타했다.

콰앙, 집행자의 신형이 별궁의 벽을 부수고 튕겨져 나갔다. 김우진이 따라붙었다. 당황한 집행자들이 달려들었다.

“···뭐지?”
“막아라!”
“김우진의 수준이 상상 이상이다. 방심하지 말도록!”
“이 빌어먹을 놈이···!”

김우진에게 얻어맞은 집행자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치켜드는 그가 마주해야 할 것은 불의 검이었다.

──!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충격에 집행자가 비틀거렸다.

“어떻게?!”

의문을 해소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동료 집행자들보다 김우진의 다음 수가 더 빨랐다. 불길이 그의 바닥을


녹였다. 균형을 잃은 육신이 비틀거리는 사이 칼날이 틈새를 노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콰득, 거친 손아귀가 집행자의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내리 꽂았다.

“크윽···!”

그가 신음을 삼켰다. 목이 잡히자 모든 기운이 김우진에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런 힘도 낼 수 없었다.

“멈춰라, 김우진!”

뒤늦게 당도한 집행자들이 김우진을 둘러 쌌다.


“멈추라고? 내가 왜?”
“감히 신들을 적대하겠다는 뜻이냐?”
“내가 여기서 이놈을 그냥 풀어주면 살려줄 생각은 있고? 너희들, 이미 나를 반역자라며?”
“놈···!”
“살려주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사족이 붙은 약속은 절대 좋은 약속이 아니야. 왜, 목숨은 살려주고 사지라도 자르게?”
“······.”
“정곡을 찔렸나 보네.”
“후회할 짓 하지 마라. 그 녀석을 죽이면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비록 네 수준이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이라
당황하긴 했지만 우리는 집행자다. 결국 넌 파멸할 수밖에 없어.”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당장 녀석을 놓아주고 무릎을 꿇어라.

“개소리하고 있네.”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거 알아?”

불꽃이 집행자 하나를 집어 삼킨다.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정령왕의 정수와 두 집행자를 집어삼키고 완전히 체득하여 새로운 경지로 나아간 김우진은.

사룡, 티타니아드라는 최악의 어둠의 사도마저 참살하여 업을 쌓고 그 정수를 취했으니.

“나는 질 것 같지가 않아.”

신들의 권속이 된 대가로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당하는 집행자들 따위에게 질 자신이 없었다.

우득-

집행자의 목이 꺾였다.

“이 개자식이!”
“노오오오옴!”

전투가 재개되었다.

───────────────
# < 099. 용사 김우진(8) >

제약이라는 건 꽤나 골치 아프다.

제약을 당하는 당사자에게만. 제약된 자와 싸우는 상대에게 있어 적의 제약은 꽤나 즐거운 이점이다.

김우진과 싸우는 열명의 집행자들이 그러했고, 김우진이 그랬다.

“말도 안 돼! 일개 용사가 어떻게 이 정도의 격을···!”


“용사 수백을 잡아먹은 미친 괴물을 잡았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종말을 집행하는 종말의 사도들은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사룡, 티타니아드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타고난 강함을.


로드라는 직함은 그녀가 그 중에서도 압도적이었음을.
처절한 복수심으로 단순한 리치 드래곤이 아닌 아크 리치 드래곤이 되었음은 그녀가 어둠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마기를 부여받았는지 증명했다.

그렇기에 사룡은 수백 명의 용사들을 잡아먹으며 차원 글라크를 종말의 벼락 끝까지 밀어 붙이던 최악의 광룡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죽이는 자가 평범할까?


그런 그녀를 죽이고 그 정수를 취한 자가 평범할까?

아니다. 김우진은 사룡이라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일반적인 용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생을 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그 이상의 업을 쌓았다.

김우진은 이미 어지간한 용사는 물론 집행자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다만, 집행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글라크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저 알베니우스를 쫓는 추격대였으며, 우연히 글라크에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명령에 따라 온 것일 뿐이었다.

그게 그들의 불행이었다.

“커헉···!”

첫 번째 집행자가 죽었을 때부터, 아니 첫 충돌부터 전투는 시종일관 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도저히 열 명의 집행자와 한 명의 용사가 싸운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일방적인 전투.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냐!”


“어떻게 용사 따위가!”
“도망쳐라!”
“제약만 없었어도!”

뒤늦은 후회해였고 뒤늦은 후퇴였다.

이미 다섯 명의 집행자들이 김우진의 손에 목이 꺾였다. 그들이 간신히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고 할 때 쯤,


그들은 잊고 있었던 본래 목적의 존재를 깨달았다.

“큭···?”
“이건···!”
“알베니우스!”

공간이 뒤틀리며 도망치는 자들의 육신을 낚아챘다. 단순히 움직임을 구속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봉쇄했다.

“김우진!”
“말 안 해도 압니다!”
“이 빌어먹을 놈들!”
“신께서 결코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신이시여! 이들에게 천벌을!”

그날, 알베니우스를 잡으러 왔던 열 명의 집행자들이 모두 실종되었다.

그리고 김우진은 또 다시 소화불량에 걸렸다.

* * *

백신전. 신들의 머무는 신성한 곳에 비보가 전해졌다.

“글라크에 보냈던 모든 집행자들이 죽었습니다!”


“알베니우스에게 그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위대한 주신, 알비츠가 고개를 저었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열 명의 집행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에게 부여한 신의 힘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정말입니다. 집행자들을 보냈던 신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연결이 끊어졌다고.”

알비츠의 표정이 굳었다.

권속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죽었거나, 신을 속일 정도로 강대한 적이 수작을 부렸거나.

허나, 이 우주에 후자가 가능할리는 없으니 전자다.

“···믿을 수가 없군. 칼카르. 알베니우스가 중상을 입은 게 확실한 건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냐? 내 손속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하지만 살아서 도망쳤군.”
“뭐냐, 베리안. 한 번 해보자고?”
“그만.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알비츠가 이마를 짚었다.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 글라크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글라크라니.

유례없을 정도로 막대한 마기를 품어 신들조차 희망을 버려버렸던 곳이다. 세계수가 자라나던 대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결정은 훨씬 더 빨랐을 거다.

“그런데 버리기로 결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룡이 죽어버렸지.”


용사 김우진이 사룡을 죽였다. 의아한 구석이 많았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김우진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룡을 죽일
수 없었으니까.

포식이라는 권능은 분명 무척이나 좋은 게 사실이지만 사룡은 그저 좋은 정도로는 상대할 수 없는 자였다.

신들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서는 막는 게 불가능하며 신들은 굳이 차원 하나 때문에 업의 손해를 감수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버렸는데.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된 차원에서 집행자 열둘이 죽고 용사 김우진은 불가능할거라고 판단했던 종말을
막아냈다. 이게 과연 우연인가?”
“두 개를 함께 섞어놓으면 그럴듯하지. 알베니우스가 용사 김우진과 붙어먹었다.”

알베니우스가 종말을 막는 김우진을 도왔다면 사룡 티타니아드가 쓰러진 것도 납득이 간다.

알베니우스는 비록 신도 집행자도 용사도 아니지만 신의 힘을 타고난 차원용이니까.

“그렇다면 김우진도 반역자군.”


“제 딴에는 종말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겠지만 감히 신의 뜻에 반기를 든 자를 살려둘 수는 없지.”
“그러면 죽이는 걸로.”
“기다려라.”

얌전히 듣고 있던 베리안이 제재를 걸었다.

“반대한다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반역자는 죽어야지. 다만, 쉬운 길을 두고 어렵게 갈 필요가 없잖느냐.”

베리안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놈은 용사고 세상을 구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한 용사에게는 새로운 길이 주어지지.”


“그렇군.”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주신들이 동의했다. 신들 또한 그의 계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글라크를 담당하는 신이 누구냐.”

* * *

사룡을 죽인지 삼주가, 알베니우스를 구한지 삼주 하고도 하루가 더 지났다.

그 사이 무너진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고 인류는 마침내 더 이상 마물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삼주간의 평화,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이어질 평화.

“22 일 전인 5 월 22 일을 전 인류의 승전기념일로 선포하겠다!”


“비엔데르크 국왕 폐하 만세!”
“헬카르스 왕국 만세!”
“인류 연합 만세!”
“김우진 용사님 만세!”
“우리가 승리했다!”

비엔데르크 왕국은 왕도를 옮겼고 그곳에서 연합의 모든 수장들이 모여 공식적인 승전과 종말의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인류는 전 연합적인 축제를 열었다.

“가보지 않아도 돼? 모두 널 찾고 있는데.”


“원래 그런 놈입니다.”
“조용한 게 좋습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지만 인간의 기쁨을 온전히 막지는 못했다. 도시마다 존재하는 모든 마법 전등이 빛을
발했고 닿지 않는 곳에 화롯불이 지펴졌다.

술과 음식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졌고 인류는 먹고 마시며 생존의 기쁨을 누렸다.

김우진은 그 모든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임시 왕궁의 지붕에서 알베니우스, 세이드와 함께 대작했다.

“뭐, 알아서 해라.”

꺼억, 알베니우스의 입속에서 진한 알콜향이 났다.

“이렇게 여유로운 게 얼마만인지.”


“헌데 괜찮은 것 맞습니까? 집행자가 열이나 죽었는데 왜 아직도 아무런 대응도 없는 겁니까?”
“말했잖아. 신과 집행자들은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받는다. 집행자 몇 내려보내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뚜렷한 방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알베니우스는 아마 당분간은 안전할 거라고 어울리지 않게 껄껄


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세이드. 사진 좀 그만 봐라. 닳겠다.”


“죄송합니다.”
“율리아라고 했나?”
“예.”
“아마 곧 신들이 네게 접근할 거다. 그럼 그때 돌아갈 수 있을 거고 만날 수도 있겠지. 신들이 너까지 나와
엮여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저 혼자 가버려도 괜찮은 겁니까?”
“그러면?”
“맞아. 그러면?”

태연한 김우진의 태도에 세이드가 픽 웃었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절대 돌아갈 수 없었을 거다.”


“널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살려고 막은 거야. 고마워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애초에 너 혼자라니? 내가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보장은 없어. 신들이 빡대가리라서 내가 개입했다는 걸 모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술잔이 몇 번 더 오고 갔고 밤이 더 깊어졌다. 김우진은 세이드와 함께 자신의 별궁으로 돌아왔다.


“알베니우스님은 어디서 주무십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마라. 하루 자지 않는다고 죽으면 그게 도마뱀이지, 드래곤이냐?”
“하긴.”

취해 잠이든 세이드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여전히 기분이 묘했다.

“정말로 막은 거지.”

최근 일어난 일들은 마치 꿈같았다. 알베니우스를 만나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하더니 결코 막지 못했을 것 같은


종말을 막아냈다. 신들의 사자라는 집행자들을 죽이게 된 건 옥의 티지만 일단은 좋았다.

살아남았으니 다 된 것 아니겠나.

김우진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자신이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완전 낯선 곳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김우진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공간. 심상세계.

“신이시여.”

우아하게 앉아 티타임을 즐기는 남자가 있었다. 스스로를 바티온이라 칭하던, 김우진을 글라크로 보내버린
신이었다.

“오랜만이구나, 김우진. 앉겠느냐?”


“예.”

그의 앞에 의자가 생겼다. 김우진이 앉았다.

“차는 카페모카?”
“예.”

달달한 아이스 카페모카가 그의 손에 들렸다.

“네 활약을 지켜보았다.”
“그러셨습니까?”
“놀랍더군. 너의 활약으로 글라크는 종말을 피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으로서, 너를 용사로 만든 당사자로서
감사를 표하마.”
“예.”

김우진은 순순히 그 감사를 받았다. 바리온의 표정이 잠시 묘해졌지만 곧 안색을 되찾았다.

“해서 용사로서 너의 임무는 끝이 났다. 넌 누구보다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니 이제는 너의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지구로 갈 수 있다는 겁니까?”
“당연히. 그것이 처음부터 내가 네게 약조한 것이지 않았느냐.”
“예, 그랬지요. 그랬습니다.”
김우진이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니우스의 편에서 집행자를 죽여 최악의 상황에서는 신들이 그를 적대하리라 여겼으나 아닌 모양이었다.

우연일까, 아니만 감싸주기로 한걸까. 아니면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서 김우진이 개입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걸까.

어떤 것이든 좋았다. 지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허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네 힘은 너무도 강대해 본래 세계의 균형을 헤친다. 허니, 그 힘을 모두 있어야 할 곳에 되돌려놓고 가거라.”
“···예?”

김우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다. 그것이 순리다.”
“순리? 왜 제가 십수 년 간 쌓아온 힘을 포기하는 게 순리입니까? 지구의 균형? 걱정 마십시오. 거기서 사고 칠
생각 없습니다. 사고를 친다면 그때 제 힘을 거두어 가셔도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분명히 포기하라고 일렀다.”

바리온이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다시 한 번 고지했다. 허나, 그것이 오히려 더욱 김우진을 열 받게


만들었다.

“싫습니다.”
“싫다?”
“이건 제가 쌓은 제 힘입니다. 신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왈가불가 할 자격은 없습니다.”
“역시 반역자란···.”

바리온이 쯧, 혀를 찼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네게 자비를 베풀었으나 너는 그것을 거부하는구나.”
“그게 어떻게 자비입니까? 십수년을 이 거지 같은 곳에서 개처럼 굴렀는데 이제 다 끝났으니 다 내놓고 가라고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용사로서 마땅한 마지막이다.”
“거부합니다. 이 힘은 저의 것입니다. 제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노력입니다.”
“끝내 악수를 두겠다는 말이군.”

바리온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김우진, 감히 신에게 반역을 들었음에도 자비를 베풀려 했다. 헌데 역시 반역자의 심성은 꼬일대로 꼬여 갱생이
불가능하구나.”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그러면서 아닌 척 하고 다가온 건 무슨 의도입니까? 내가 순순히 힘을
포기하면 쉽게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까?”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1 초의 텀이 있는데 주둥이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시죠.”
“놈! 누구 앞이라고 감히 그 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누구 앞이긴. 양심이 터질 대로 터진 개새끼 앞이지.”

김우진의 눈을 똑바로 뜨고 으르렁거렸다.

“개새끼? 정녕 죽고 싶으냐!”
“어차피 네놈들, 날 살려둘 생각도 없을 것 아니야. 반역자라며. 이 세상에 반역자를 살려두는 새끼들이 어디
있어.”
“주제도 모르고 정도도 모르는군.”
“하위 차원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도 없다며? 집행자인지 심부름꾼이지 또 보내봐. 모조리 씹어 먹어줄게.”
“기가 차는구나. 감히 신에게 반역을 하는 네가 믿는 것이 고작 그 알량한 하위 차원이더냐?”

바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기운이 김우진을 찍어 눌렀다. 누르려 했다.

그러나 김우진은 견뎌냈다. 바리온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깝구나. 반역자만 아니라면 집행자의 재목인 것을.”


“누가 너 같은 새끼를 섬길 줄 알고?”
“끝까지 건방지구나. 넌 신이 내리는 마지막 자비를 차버렸다. 후회하며 죽거라.”

따악-

바리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김우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씨발.”

꿈이었으나 꿈이 아니었다. 신과의 만남. 김우진은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목이 탔다. 테이블에 올려진 물병을 집는 순간, 김우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리고 목격했다.

“···맙소사.”

하늘을 가득 생기고 있는 거대한 갈라짐들을.

차원 곳곳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시커먼 마수들이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반역자를 징죄하기 위해 신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마물들의 대규모 침공이었다.

───────────────
# < 100. 용사 김우진(9) >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다.

그것보다 더 이 현상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었다.


“저게 뭐야?”
“세상에···!”
“하늘이···! 마물들이 내려온다!”
“습격이다!”
“종말은 끝난 거 아니었어?”

잠을 자지 않고 승리의 축배를 들던 이들이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했고 경악했다.

땡땡땡땡-

모든 도시에 요란한 경종이 울렸다.

“이게 대체 무슨···!”

당황하는 김우진의 옆으로 알베니우스가 나타났다.

“이미 종말을 막아낸 차원에 대규모 마물의 군단이 기습을 가해온다니.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어!”

수많은 차원을 떠돌아다니던 차원룡 또한 보지 못한 전례가 없던 일.

“알베니우스님. 하나 짚이는 게 있습니다.”


“짚이는 게 있다고?”
“방금 신을 만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이야기의 전반을 들은 알베니우스는 분노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들이야! 나와 너를 잡기 위해서 간신히 종말을 벗어난 차원에 마물 군단을 쏟아


붓는다고?”

기가 차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게도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효과적이라는 겁니까?”
“저들이 나를, 그리고 나를 돕는 너를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제약 때문이다.”

아카식 레코드에게 힘을 받은 자들은 우주의 균형을 위해서 제약을 받는다. 신도, 신의 힘을 받은 집행자들도
마찬가지다.

용사들은 경우가 좀 달랐다. 제약이란 건, 벽을 넘어 초월의 격을 얻은 자들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용사란,


신의 힘을 받아 그 벽을 넘기 직전의 상태인 자들이었다.

“하위 차원에서는 힘이 제약되기에, 그걸 해소하려면 막대한 업이 필요하기에 잠시 방관했지.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하위 차원이 아니면 되는 거야.”

이를 테면 종말 차원 같은. 이미 종말을 맞이해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고, 균형을 이룰 필요가 없는 차원에는


제약도 없었다.

“···미친. 그런 저와 알베니우스님을 잡기 위해서 간신히 종말에서 벗어난 차원을 직접 멸망시키려고 한다는


겁니까?”
“일단 상황은 그렇군.”
“완전 미친 새끼들이네? 저딴 게 신이라고요?”

김우진이 뿌득, 이를 갈았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그 고난을 헤쳐온 차원을 직접 멸망시켜버린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김우진이, 수백의 용사들이, 이곳의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대체 무엇인가.

신들의 손가락질 한 번에, 저들의 변덕에 그냥 무너져 버리는 모래성이었나.

“···이건 막을 수 없다.”

알베니우스가 단언했다. 이전의 종말과는 다르다. 신들이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마물의 군단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있다.

그 규모도 수준도 미상이다. 하지만 신들이 차원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작정하고 쏟아내는 마물의 군단이 결코
수준 낮을 리가 없다.

“도망쳐야 해···!”
“도망치라고요? 대체 어디로요?”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곳까지 왔다. 고작 열 개의 왕국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종말을 막아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이들에게 마침내 평화를 안겨주었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 끝이 더 무자비한 종말이라니.

“도망치려거든 혼자 가세요.”
“김우진. 감정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저는 지금 굉장히 냉철합니다.”
“저 군단에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다.”
“저는 죽고 싶은 마음도, 죽을 생각도 없습니다.”

막는다.

“차원의 종말을 막는 것이 용사의 사명이잖아요?”

오랜 시간을 바쳐서 직접 지켜온 세상이다. 그 세상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고 싶지 않다. 신
같지도 않은 자들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가망이 없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아니다. 이전의 김우진과 지금의 김우진은 다르니까.

불꽃이 김우진을 감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술기운을 날려버린 세이드가 뒤늦게 나왔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마물의 군단에 경악했다.

“세이드, 혼란을 수습하고 사람들을 지켜.”


“너는? 뭘 하려는 거냐?”
“나는 저것들을 쓸어버려야지.”
김우진이 날아올랐다. 붉은 홍염이 유성처럼 솟아올랐다.

─────!

* * *

하늘이 붉게 물든다.

차원을 좀 먹는 어둠들을 밝히며 모든 것을 태우고 녹인다.

“···용사님이다!”
“김우진 용사님이다!”
“김우진 용사님 만세!”
“저희를 구원해주세요!”
“마물들을 물리쳐라!”

아주 잠시 맛보았던 희망을 꺼트린 거대한 어둠에 절망하던 인류가 세상을 밝히는 불빛에 환호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어오르는 하나의 촛불은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불꽃이었다.

해줄 거다. 김우진이라면 어떻게든.


수십년간 수백명의 용사들이 하지 못할 걸 해준 위대한 영웅이니까.

그리고 위대한 용사는 그들의 희망에 부응하기 시작했다.

─!
──!
─!
───!

끝임 없이 들리는 폭음과 하늘을 달구는 열기. 잿가루가 흩날려 하늘을 검게 물들였고 반쯤 녹아내린 마물의
시체가 폭탄처럼 떨어졌다.

김우진은 싸우고 또 싸웠다. 전투는 몇날 며칠을, 몇 주를, 몇 달을 넘어갔다.

크워어어어-

수십 미터가 넘어가는 괴물을 불태우고.


개 때처럼 몰려드는 소형 마물들을 집어 삼켰다.

죽이고 또 죽였다.

마물을 죽인 업을 쌓아 에너지를 보충하고, 그 마저도 고갈되면 마물의 기운을 흡수했다.

포식은 피아를, 종족을, 마기와 마나를 가리지 않았고 사방에 넘쳐나는 게 마물이었다.

그에게 막대한 업을, 막대한 기를 주었다.

무분별하게 흡수한 마기는 누구에게나 해로 다가온다. 하지만 굳이 필요 이상의 마기를 계속 담아둘 필요는
없었다.

적이 넘쳐나니 모조리 불꽃과 함께 폭발하듯 쏟아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필요한 건 그의 정신력 뿐.

사룡을 죽이기 위해 수십 년을 싸웠다.

고작 이 정도에 마모될 정신은 이미 마모될 만큼 되었다. 장기전은 그의 장기였다.

절대 저들을 죽게, 세상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알베니우스가 죽는 것도, 신들에게 죽을 생각도 없다.

그러니 끝까지 간다.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전투속에서 김우진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대한 양의 업과 마기가 쌓여 스스로의 격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음을.

* * *

“아직도 버티고 있다고?”

백신전은 두 개의 계획을 냈다.

김우진이 스스로 힘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

전자처럼만 된다면 모든 게 깔끔하지만 신들은 무수히 많은 용사들을 부려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멍청한 피조물들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만용을 부릴 때가 있다. 본래 신의 준 힘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멍청한 아집을 부릴 때가 있다.

신이 준 힘을 다시 회수해주는 것은 당연한 건데.

때문에 신들은 만약에 사태에 대비했다. 김우진이 거부할 경우.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들 경우.

단순한 감옥으로 다스리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다. 알베니우스가 감옥의 존재를 아는 만큼, 거부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서 아예 차원을 멸망시키고자 했다.

하위 차원이기에 신들이, 집행자들이 제대로 나서지 못한다면 하위 차원이 아니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글라크의 피조물들 따위야 몇이나 죽든 상관없었다. 수많은 차원 중 하나일 뿐이다. 피조물들 또한 신들을 위해
죽는다는 걸 기쁘게 여길 것이다.

문제는 김우진이었다.
백신전은 글라크의 종말이 순식간에 이루어날 것이라 여겼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인류는 그 이상의 군단을 막아낼 여유가 없다. 헌데 김우진, 그놈의 김우진이 홀로 몇 달을
버텨냈다.

대부분 멸망해버린 인류는 대륙 구석에 뭉쳐서 함께 버티고 있으며 김우진은 마물들을 말 그대로 찢어발기고 있다.

오직 김우진의 힘으로 마물 군단의 대부분을 물리쳤다.

“기가 차는군.”
“김우진, 난 놈은 난놈이군. 아무리 알베니우스가 도와줬다고 해도 이건 일개 용사는 물론 집행자의 수준도
아득히 뛰어 넘었다.”

칼카르가 순수하게 김우진의 전투 능력에 감탄했다.

“일개 용사로 그 수준까지 이르다니. 마음 같아서는 내 집행자로 삼고 싶군.”


“허튼 소리 하지 마라. 놈은 반역자다. 모두의 본보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냥 해본 말이다.”

칼카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다른 방안이 있나?”


“있다.”
“뭐지?”
“수백만의 마물들이 대부분 쓸려 나갔다. 글라크의 인류는 왕국 다섯 개 정도가 더 멸망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고작 그 정도지.”

하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마물 군단을 보낸 목적은 결국 차원을 하위 차원이 아닌 종말 차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제약을 없애기 위해서. 직접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잡기 위해서.

비록 마물 군단은 차원을 온전히 멸망 시키지 못했지만 차원의 장벽을 대부분 허물고 차원 자체를 약화시켰다.
종말 차원에 더 없이 가깝게 만들었다.

비록 신이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신의 위용에 걸맞는 힘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바리온.”
“예, 주신이시여.”

글라크를 담당하는 신이 무릎을 꿇었다.

“네가 직접 가라. 가서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에게 그 대가가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게 해주어라.”
“명을 받듭니다.”
“아스트마.”
“예.”

또 다른 신이 무릎을 꿇었다.

“네가 함께 가라. 김우진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으니 만약에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명을 받듭니다.”
“너무하는군. 아예 살아날 구멍 자체를 안 만들어주는 건가.”
“반역자에게 자비는 필요 없다.”

두 명의 신이 백신전을 떠났고 백신전의 그 누구도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죽음을 의심치 않았다.

* * *

종말이! 종말이 끝났다!


이번에는 진짜로 끝이다!
용사, 김우진 만세!

몇 달에 걸친 사투가 끝났다.

수백 만의 마물 군단은 차원의 모든 것을 짓밟고 파괴했다. 차원의 힘을 갉아 먹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인류의 절반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그들은 살아남았다.

사룡에게서 버티기 위해 열 개의 왕국이 대륙 구석에 뭉쳐 연합을 이루고 버틴 게 행운이었다. 그들은 단단하게


결의했고 김우진을 믿고 의지하며 투쟁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정말로 끝난 거지?”
“또 오는 건 아니지?”

인류는 불안해하면서도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처음처럼 기쁘지도, 축하하지도 않았다.

두 번 일어난 건 세 번 일어날 수도 있다. 깊은 불안감이 인류를 휘감고 있었다.

“···고맙네. 용사, 김우진. 백번을 고맙다고 이야기해도 모자라군.”

몇 달 사이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비엔데르크의 국왕이 김우진을 치하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인류를 멸망했을 거네.”


“아닙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대체 그 마물의 군단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 피해가 너무 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건가?”
“있습니다. 있게 하겠습니다.”
“자네에게 너무 의존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종말은 끝났으나 인류는 기계적으로 다음 종말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미 찾아온 절망을 떨쳐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번의 종말을 막는데 인류의 90%가 죽었네. 두 번의 종말에 그 절반이 죽었지. 또 다시 종말이 찾아온다면
우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신께서는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건가.”

한탄 섞인 외침에 김우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 때문이라고, 자신이 순순히 신에게 목을 내놓지 않아서라고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또 다시 종말이 온다면 최선을 다해서 막겠습니다.”

그저 이게 최선이었다.

왕을 알현하고 나온 김우진이 복도를 걸었다.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사룡의 습격 이후 새로운 도시로 선정되었지만
두 번째 종말로 그마저도 파괴되었다. 남은 도시들 중 그나마 멀쩡한 곳을 임시 왕도로 정했으나 멀쩡한 도시보다
그렇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쉬웠다.

“용사님.”

1 왕녀 아이닌 비엔데르크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은 없어요. 용사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정말 다 죽었을 거예요.”
“···최대한 노력했는데 전부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해요. 이번 종말은 사룡보다 더 강대했어요. 막아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죠.”

김우진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애초에 그가 아니었으면···.

‘아니, 아니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국 잘못한 건 신이다. 마물을 보낸 것도, 이유 없이 알베니우스와 김우진을


죽이려고 한 것도, 애초부터 차원을 버릴 생각으로 가득했던 것도.

그들은 김우진을 이유로 들지만 모든 것을 행한 주체는 신들이다.

그때였다.

번쩍-

새하얀 빛이 하늘을 가득 매웠다.

“···저게 뭐죠?”
“설마 또?”

간신히 닫힌 균열이 다시금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경악하며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저들은.”
“김우진! 최악의 상황이다!”

어느샌가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곁에 있었다.


“당신은 누구···?”

아이닌의 물음은 알베니우스의 고함에 먹혔다.

“저들은 신이다! 차원의 방벽이 약해진 탓에 신들이 강림할 여유가 생긴 모양이야!”


“···신이라고요?”
“신···?”

두 명의 절대자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위압감에 김우진은 피부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 불쌍한 아이들아.

신이 입을 열었다.

신성함과 거룩함이 느껴졌다.


뇌에 직접 주입하듯, 생생하게 울렸다.

- 너희들의 불행을 끝내러 왔으니.

인류는 그들이 누군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 반역자, 김우진을 우리의 앞에 데리고 오거라.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
# < 101. 용사 김우진(10) >

위대한 신들의 강림.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대사건이었으며 역사에 기록될 순간이었다.

신들이 강림한 순간, 인류는 깨달았다.

저들이 신임을.
저들을 경배해야 마땅함을.

누구도 저들이 신이라고 알려주지 않았으나 그들은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예의를 차리고 존경과 신앙을 바쳤다.

신들은 담담히 그들을 받아 넘겼다.

“위대한 신들을 뵙습니다.”

신들이 강림한 곳은 비엔데르크 왕국이었다.

국왕은 근위기사단을 이끌고 그들을 맞이했다. 신이 인간 세계에 강림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으나 그저 온


몸이 느끼는 거룩함은 그들이 신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물며 글라크는 신들이 꾸준히 용사들을 내려보내준 덕분에 버틸 수 있었고 살아남았다.

신들을 향한 경외가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왕이여. 반역자, 김우진을 데리고 오라.”

허나, 이 말 앞에서는 역시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반역자 김우진이라니?’
‘김우진 용사님을 말씀하시는 건가?’
‘두 번이나 망할 뻔 한 세상을 구원해준 용사님이 어째서 반역자란 말이야?’
‘신께서 잘못 말하신 것이겠지요. 아니면 저희가 잘못 들었거나.’

그들에게 김우진은 영웅이었다. 그것도 신들이 직접 내려준 용사. 그런 그가 반역자라 불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이시여, 외람된 말씀이오나 감히 질문을 한 가지만 해도 되겠습니까?”


“하지 말라. 나는 네게 질문 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신이 명했다.

“그저 따르라.”

그것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 같은 절대성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신의 절대적인 명령을, 그들은 거부했다.

“···지금 무엇하는 거지?”


“신이시여, 어째서 김우진이 반역자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했을 텐데.”
“여쭙고 싶습니다!”

기사들이, 병사들이, 그리고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엄청난 대역죄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김우진은 평범한 용사가 아니었다.

누구도 잡지 못한 사룡을 죽여 세계를 구한 자다. 두 번의 종말을 막은 자다. 글라크의 모든 인류가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마물을 박멸하던 김우진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 희생과 처절함을, 그들은 잊을 수 없었다.

“···감히.”
“두 번째 종말이 김우진으로 인해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아스트마가 분노하는 바리온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종말이 김우진으로 인해 비롯되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우습게 들리느냐? 하찮은 인간들의 왕이여, 너의 그 알량한 직위가 너와 네
왕국을 지켜줄 성 싶더냐.”

하지만 두 번은 없었다. 바리온의 분노에 대기가 진동했다. 기사와 병사들이 마나를 일으켜 저항했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눈을 뒤집고 쓰러졌다.

“······.”

비엔데르크의 국왕은 이를 악물고 그것을 견뎌냈다.

“···용사 김우진은 신들께서 직접 보내신 자입니다. 어째서 두 번째 종말이 그로 인해 비롯되었고, 그가


반역자로 불려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놈이 그래도···!”
“김우진은 백신전의 반역자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아스트마!”
“이들은 그 고진 종말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다.”

아스트마의 일갈에 바리온이 인상을 구기며 한 걸음 물러났다.

“반역자라면···?”
“그 이상은 우리의 자비 이상이다. 이제 그만 반역자 김우진을 데리고 와라.”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신들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일개 피조물 따위가 신명을 거부하는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신들은 자기객관화가 부족했다.

그들에게 있어 피조물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등한 존재들이었다. 명령하면 그저 따르고 자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

말하면 듣는 것이 당연했다. 그 어떤 불합리한 요구라도 신의 명령이라면 그들을 당연히 따라야 했다.

그게 당연하다. 그게 진리다.

하지만 그 진리는 어디까지나 신들만의 생각이었다.

“용사 김우진은 저희들을 구원해주었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모든 걸 바쳐서 자신들을 구원해준 자를 어찌 쉽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너희를 구원한 것은 우리다. 우리가 용사들을 내려 보내줬음이다. 그리고 주제를 알아라.”

거대한 압력이 국왕을 찍어 눌렀다. 국왕의 무릎이 대지를 파고 들어갔다. 그가 신음을 삼켰다.

“자비는 더 이상 없다.”
“···어째서 이렇게 오실 수 있음에도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뜻이냐.”
“신께서 직접 강림하실 수 있으셨다면, 굳이 용사들이 아니어도 종말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헌데 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말해 줄 이유는 없다.”
“모두가 신을 부르짖었습니다. 신의 자비에 기대어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헌데 어째서 신들께서는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에나 와서 저희들을 구원해준 영웅을 반역자라 칭하시는 겁니까?”
“···너는 신들의 자비를 농락하는구나.”

아스트마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마지막 경고다. 당장 반역자 김우진을 데리고 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왕국과 너의 백성들은 더 이상 이 땅
위에 살아 숨 쉬지 못할 것이니.”
“그렇게 하시죠.”
“김우진!”

인파가 갈라졌다. 저 멀리 김우진이 나타났다. 그와 신들 사이를 잇는 거대한 길이 만들어졌다.

“김우진.”
“반역자 김우진,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든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었느냐?”

아스트마가 그의 이름을 되네이고 바리온이 으르렁거리며 분노를 드러냈다.

“알베니우스님의 말이 진짜였습니다. 마물을 보내어 차원을 파괴하고 제약을 줄인 뒤에 직접 강림할 거라고


하더니.”
“뭐라고?”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그 마물들을 보낸 게 신들이라고?”

백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김우진. 역시 네놈은 알베니우스와 붙어먹었구나.”


“붙어먹지 않을 수가 있나. 가망이 없다고 글라크를 포기한 당신들보다 사룡을 죽일 방법을 알려주는
알베니우스가 더 옳은데.”
“···신들께서 글라크를 포기하셨다고?”
“그러면 김우진 용사가 갑자기 강해진 게 반역자인지 누구인지 한테 배워서 그런 거야?”
“덕분에 살았는데 반역자고 뭐고 뭐가 중요해.”
“그건 그래.”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 끊임없이 용사들을 소환했다. 우리는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하지만 상황이 다 끝나니까 이렇게 친히 강림하셨지. 영화 속의 경찰처럼.”
“이 건방진 놈이!”

바리온이 주먹을 뻗었다. 공간을 격하고 날아든 파동이 김우진을 강타했다. 김우진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피떡이 되었다.

끄아아악!
신이 사람을 죽였다!

장내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불신과 경악이 신들을 향해 쏟아졌으며 김우진은 눈을 치켜뜨며 적의를
드러냈다.

“바로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고작 인간 몇 놈 죽인 것 가지고 본색이랄 것까지도 없다. 신을 위해 죽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래서 기껏 종말을 막아낸 차원을 멸망시키려고 마물들을 보냈나?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신을 위해 희생할 수 있으니 순교지.”
“바리온!”
“시끄럽다, 아스트마. 내가 틀린 말을 했나! 피조물들은 오로지 신을 위해 존재하는 법.”

바리온이 으르렁거렸다.

“인간들을 인질로 잡아 회피하려고 했다면 어불성설이다. 네놈을 죽여 백신전의 위엄을 바로 세우겠···.”

갑작스레 날아든 김우진의 주먹에, 바리온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놈!”

바리온의 신형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김우진이 그 뒤를 따랐으며 아스트마가 꽁무니를 쫓았다.

“아트마 경.”
“예, 폐하.”
“당장 왕도에서 백성들을 전부 피난시키도록. 왕도를 벗어난다.”
“···하오나.”
“시간이 없다. 저 여파에 휘말로 모두 죽게 내버려 둘 셈인가?”
“명을 받듭니다.”

‘당장 사람들을 대피시키십시오.’

그리고 김우진이 나서기 직전, 메시지 마법을 통해 조언을 전달 받은 국왕은 곧장 행동에 나섰다.

“김우진···.”

김우진이 진짜로 신들에게 반역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김우진은 세상을 구해준
용사이며,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이다.

그에 비해 신이라는 자들은 비록 그 거룩함과 신성함은 진짜였지만 말투와 행동은 도저히 믿고 따를 만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둘러라!”

* * *

신들의 강림은 글라크에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들이 인지했다.

세이드도, 알베니우스도, 그 밖의 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들과 김우진이 싸운다고?”


“신이잖아. 그게 가능해? 어떻게 신에게 대항하는 거야?”

의문은 길게 끌어지지 못했다. 하늘을 붕괴시키는 신들의 전쟁은 차원의 누구라도 목격할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어째서 신이 김우진을?”
“김우진이 왜 반역자라는 거지? 김우진이 아니었으면 이 세상은 멸망했어! 그놈이 아니었으면 우린 다
뒤졌다고!”
“하지만 신의 뜻이니 무언가 깊은 뜻이···.”
“지랄, 다 끝나니까 이제와서 나타나놓고 뜻은 무슨 뜻? 듣자 하니 나타나자마자 여기 사람들을 벌레처럼
죽였다며?”
“우리가 피똥싸면서 종말 막을 땐 어디 있다가 이제와서 주역을 반역자라고?”
“그 김우진을 반역자로 몰았으면 우리라고 몰지 않을까?”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거야! 신의 뜻이야! 김우진이 잘못한 거라고!”
“대체 뭘 잘못 했는데!”
“사룡을 죽이는 과정에서 반역자와 손을 잡았다잖아!”
“살려고 반역자의 힘이라도 빌린 게 뭐가 문젠데?”
“아니, 애초에 신 맞아? 진짜 신이라면 김우진과 잠깐이라도 대등한 전투를 펼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모든 인류에게 신이란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였다. 그런 그들이 1 대 1 도 아니고 2 대 1 로 김우진을 상대로


전투를 펼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일이었다.

“저 거룩함과 신성함을 느끼고도 신이 아니라고? 우리가 용사가 되었을 때와 똑같잖아!”


“근데 왜 김우진하고 싸우고 있냐고. 김우진이 싸울 수 있냐고!”
“······.”
“셋 중 하나겠지! 신들이 생각보다 더 약하거나, 김우진이 생각보다 더 강하거나, 저 빌어먹을 놈들이 신이
아니거나!”

용사들 대다수가 혼란에 휩싸이고 있을 때, 세이드는 보다 사실을 검증했다.

“정말 알베니우스님 말대로입니다. 절대 제가 생각했던 신은 아니군요.”

인류를 도구로 여기는 언행, 실제로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정말 어이없게도 김우진을
압도하지 못하는 신들.

“그래.”
“이제 어쩌실 겁니까? 김우진이 이길 수는 있는 겁니까?”

신들의 수준이 생각만큼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세이드는 감히 저 전투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김우진을 도와야지. 나 때문에 저러고 있는데.”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인생의 절반을 바쳐서 싸웠는데 그 힘들을 모두 포기하라는 건 어느 집
개소리입니까.”
“그것도 그렇군. 솔직히 나도 김우진이 저 정도로 잘 싸울 줄은 몰랐어.”

하지만 그러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12 명의 집행자를 먹었고 어지간한 종말의 사도와는 궤를 달리하는 사룡, 티타니아드를 죽이고 그 업을 쌓았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흡수했어.”

어디 그뿐일까. 신들 딴에는 김우진을 없애버리기 위해 준비한 수백만의 마물의 대부분이 김우진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소멸되었다.
능히 다수의 차원을 멸망시킬 정도의 거대한 마를 홀로 토벌한 업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김우진은 신에 필적하는 강자가 되었다. 아마 백신전에 공석이 생긴다면 곧장 신이 될


수준일 거다.

“그리고 반대로 저놈들은 약화된 상태지.”

아무리 마물들을 이용해 차원을 물어뜯어 제약을 비교적 약하게 해놓았다고 한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
차이는 컸다.

“···어쩌면 진짜로 승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

문제는 그 다음이지만 어쨌든 당장은 눈앞에 당도한 문제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알베니우스가 날아올랐다. 새하얀 빛이 그를 감쌌다.

크워어어어어어!

세상을 진동시키는 거대한 포효.

신들조차 경계하여 반역자로 몰아붙인 위대한 차원룡이 그 본체를 드러냈다.

숨결이 신들을 향해 토해졌다.

* * *

바리온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그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아무리 제약을 받는다고 한들 신이다. 적당한 업을 소모하여 건방진 김우진을 단숨에
처리하고 신의 위엄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런데 김우진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했다.

신인 그의 주먹이 오히려 밀려났다. 김우진의 검날은 감히 신의 옥체에 상처를 입혔다.

막대한 신력과 업이 김우진을 감싸고 있으니 그 위엄은 능히 신과 맘먹었다. 아니, 적어도 바리온보다도,
아스트마보다도 위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다!”

김우진의 칼이 춤을 출 때마다 바리온의 신력을 왕창 깎여나간다. 대단한 방법도 아니다. 그저 더 거대한, 더


정순한, 저 격이 높은 업과 불꽃에 의해 그의 신력이 견디지 못하고 소멸하는 거다.

일개 용사 따위가, 위대한 신인 그 보다 격이 높다니.

“나는 신이다! 위대한 백신전의 신! 이런 건 말이 되지 않아!”


바리온이 이를 악물고 힘을 방출한다. 있는 힘껏, 창을 던진다. 거대한 섬광이 공간을 격하고 날아든다.

카가각, 창을 비껴낸 김우진이 그대로 날아든다. 허나 창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김우진의 등을 노린다.

“어디 이것도 피해봐라!”

또 다른 창이 연달아 던져진다. 전후좌우. 사각은 없다.

그리고 김우진은.
대단한 방어를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둘렀다.

─!

그 단순한 동작에 창들이 일거에 튕겨져 나간다. 바리온이 권능을 발현시켰다.

콰콰콰콰-

신의 의지를 받아든 거대한 폭풍이 김우진을 뒤덮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광풍은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도시가 순식간에 와해되고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폭풍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꽃이 바람을 잡아먹었다.

“오, 오지 마라!”

수십 번, 수백 번.

“죽어, 죽으란 말이야!”

둘 사이의 거리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나는 신이다! 너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곧이어 김우진이 바리온을 낚아챘다.

콰앙!

폭음과 함께 바리온의 몸이 휘청였다. 연달아 쏟아지는 불꽃에 그를 가호하던 모든 권능이 소멸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바리온의 신형이 대지에 틀어박혔다. 쿨럭, 신음도 잠시김우진의 발이 바리온의 복부를
짓밟았다. 섬뜩한 눈빛에 바리온이 신음을 삼켰다.

“아스트마! 아스트마 나를 도와라! 지금 대체 뭘 하는 거···!”


“네 친구도 바빠.”
“···알베니우스!”

아스트마는 본체로 화한 거대한 용과 싸우고 있었다. 아스트마가 승기를 잡긴 했지만 지금 당장 그를 도우러 올


수는 없었다.

하필 둘 모두 같은 공간의 권능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첨예했다.

“대체 어떻게 네놈이 이 정도의···!”


“네놈들이 보내준 마물들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지. 고마워. 이제 뒤져.”
“···기, 기다려라! 나는 신이다.”
“나는 용사야.”
“나를! 나를 죽이면 너는 백신전의 적이 된다! 나는 이길 수 있을지언정 넌 결코 백신전을···!”

콰득-

불꽃의 칼날이 바리온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미 죽이려고 온 거잖아.”

불꽃이 신력을 태운다.

“천하의 신이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남을 죽이려 했으면 너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이 씨발 새끼야.”

그날, 백신전의 자리에 두 개의 공석이 생겼다.

───────────────
# < 102. 용사 김우진(11) >

“···정말로 신들을 죽였군.”


“이제 알베니우스님 정도는 눈 감고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신을 둘이나 잡아먹었으니 당연하지. 포식. 정말 미친 권능이야.”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김우진은 무려 두 명의 신을 포식한 막대한 기운에 또 다시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트림을 해댔다.

하지만 성장한 만큼 그릇도 넓어졌는지 신을 먹었음에도 이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튀어야지.”
“튀어요?”
“고작 신 둘 죽였다고 백신전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물론 신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놀랍긴 하지만
놈들은 말 그대로 백신전이야.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아직 98 명의 신들이 남아 있다는 뜻이지.”
“튈 수는 있습니까? 여기 사람들 다 데리고.”
“······.”
“충분한 대답이 됐네요.”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비루하게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손에 죽어버리긴 했지만 신들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정점이었다.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 도망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예 불가능까지는 아니야. 일단은 내가 명색이 차원룡이거든.”


“혼자서만 가능하면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습니다만.”
“···정말로 저들 전부를 살리겠다고?”
“딱히 동정심이나 연민 같은 건 아닙니다.”

김우진은 그렇게 대인배도, 선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건 그냥 자기만족이다.

“내 인생을 바쳐서, 내 손으로, 내가 구한 사람들이 고작 그 개새끼들의 농간에 죽어나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거든요.”

그건 김우진의 지난 수십년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곳이 멸망해버린다면, 이곳의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 죽어간 용사들의 희생은? 그의 노력은?

신들에게는 우습겠지만 그에게는, 이 차원을 위해 애쓴 모든 용사에게는 아니었다.

“잠깐만. 전제가 너무 신들이 이 차원을 멸망시킨다 쪽으로 기운 거 아니야?”


“그럼 멸망 안 시킵니까? 제 입장에서는 고맙지만 여기 인류는 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크흠. 확실히 신들의 옹졸함이라면 그럴 만 하긴 해.”

애초에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끝장내기 위해 간신히 종말을 막은 차원에 수백만의 마물들을 풀어놓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저 새끼들은 버러지고, 자신들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애새끼다. 자기들을 거역하면 때를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다


멸망시켜버리는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되는 유형이 권력을 쥔 자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방법이 있을 리가.”
“그냥 버티고 버티다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신들을 너무 무능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야? 이미 신들이 두 명이나 죽었는데 멍청하게
지금까지처럼 대응하지는 않겠지.”
“그렇겠죠?”
“그렇지.”

썩어도 오랜 시간 이 우주를 관장하던, 지금도 관장하고 있는 자들이다. 오만할지언정 아둔하지는 않을 거다.

“···정 그렇다면 일단은 준비를 해보긴 하지. 넌 흡수한 신들의 힘을 다스리는데 최선을 다해.”

그래야 그나마 도망칠 가능성이라도 생길 테니까.

“예.”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김우진은 반역자입니다. 모든 신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탁이 내려왔어요!”
“그는 신이 공인한 반역자입니다. 그를 감싸줄 필요가 없습니다!”
“헛소리! 그는 세계를 구한 영웅입니다. 두 번이나! 그가 아니었으면 당신들이 여기 멀쩡히 살아서 그딴
헛소리를 내뱉을 수 있을 줄 압니까?”
“그리고 신? 인간은 도구로 여기고 마음대로 죽이는 것들이 신입니까? 신이라는 것들이 왜 김우진 용사에게
죽었습니까?”
“심지어 두 번째 종말은 그 잘난 신이라는 것들이 유도한 거라는 이야기도 못 들었습니까? 저게 악마지,
신입니까!”

인류는 매일 같이 뜨거운 열전을 벌였다.

신들이 공인한 반역자 김우진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

신이라는 이름값에 일부는 지레 겁을 먹었지만 대다수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다.

김우진이 그들에게 준 것이 너무 크기도 했으며, 신들이 행한 행동과 종말을 유도했다는 것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한 신들을 과연 신으로 섬겨야 하는가.

글라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다. 없는 곳에선 왕도 욕하는 게 사람이라고, 자신들을 죽이려한
신들이라고 욕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합의 했네. 신들이 다시 한 번 자네를 죽이려 한다면 연합은 자네의 편에서 끝까지 싸우기로.”
“괜찮은 겁니까? 신들인데?”
“자네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글라크를 멸망시키려고 한 자들이네. 이미 한 번 명령을 거부한 우리를 과연 멀쩡히
살려두겠는가?”
“···부정할 수가 없네요. 제 편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가 우리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네.”

비엔데르크의 왕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신들의 오만함과 태도를 보았다. 뿌리 깊게 박힌 불신과 혐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김우진이 어느 정도 의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나와 주니 제법 감동적이었다.

그때였다.

────!

하늘이 열렸다.

“이건···!”

익숙한, 하지만 이전보다 더 진한 느낌에 왕과 김우진이 신음을 삼켰다.

또 다른 신이 강림했다.

“김우진. 숨어 있어라. 내가 먼저 신들을 맞이하겠다.”


“하지만···.”
왕은 대꾸하지 않고 채비를 마쳤다. 곧장 병력을 이끌고 신이 강림한 곳으로 갔다. 하늘을 꿰뚫는 새하얀 빛의
기둥 덕분에 헤매는 일은 없었다.

‘저기 있다.’

그렇게 신과 마주한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만나기만 하면 김우진과 함께 저항하리라 생각했던 비엔데르크의 왕은 자신도 모르게 의지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본능이었다.

신이 무릎을 꿇은 인류는 천천히 내려 보았다.

입이 열린다.

“용사, 김우진을 데리고 오라.”

그 명령에 왕은 거부할 수 없었다.

“···예.”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직감했다. 차원이 다른 진짜 신이 강림했다고.

감히 저항할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김우진, 미안하다···!’

왕이 신음을 삼켰다.

* * *

비엔데르크의 왕이 머물던 화려한 궁전의 대전. 그곳을 불청객들이 차지하고 앉았다.

끼익-

김우진의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금 옥좌에 앉은 남자와 그를 수행하듯 나란히 선 자들이 수십이다.

김우진은 그들 모두가 신이라는 것들을 깨달았다. 일개 수행원조차도.

“네가 김우진이구나.”

남자는 눈처럼 새하얀 백발을 가지고 있었다. 탁한 은빛의 눈은 조금 공허해 보였다.

지금까지 봐온 신이 단 둘이지만 그들과 눈앞의 남자를 비교하면 태양과 반딧불이의 차이였다.


마른 침을 삼켰다.

이길 수 있을까? 없다. 필패다. 같은 신임에도 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굽히긴 싫었다. 어차피 뒤질 것, 굽힐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탐색하듯, 김우진을 훑던 남자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놀랐다.”


“놀라?”
“천박하구나. 신을 상대로 할 언행에는 조금 더 예의가 깃들어 있어야 하거늘.”
“헛소리하고 있네.”

남자의 눈에 깃든 경멸을 김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겼다.

“살기를 집어넣어라. 나는 너와 드잡이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니.”


“뭐라고?”
“거래. 그래, 거래를 하러 왔다.”
“거래라고? 갑자기 왜?”
“행운이 오면 의심하지 말고 그저 받아라. 위대한 신이 네게 베푸는 자비이니.”
“너무 자비로워서 마물들을 보냈나 보지?”
“그건 작은 사고일뿐이다. 모든 일에는 만약이라는 게 존재하지.”
“신이라는 작자에게 만약이 존재한다면 그건 신이 아니지 않을까?”
“이 건방진 놈이 어디서!”
“감히!”
“멈춰라.”

수행원들이 발끈했지만 남자가 손을 들자 조용해졌다. 그가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구나. 하긴, 그러니 우리의 예상을 깨트리고 여기까지 왔지. 왜냐고 물었느냐?”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원하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백신전의 신이 누군가의 손에 죽은 것은 우주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이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다.

“넌 처음으로 백신전의 명예에 흠집을 냈으며, 최초로 신을 죽인 인간이 되었다.”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당연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없을 행운이니.”

남자가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수행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고급스러운 와인글라스에 술을 따라주었다.

“해서 나는 네게 한 번의 기회를 주어볼까 한다.”


“기회?”
“살고 싶으냐?”
“죽고 싶은 사람도 있나?”
“본래라면 넌 죽어야 한다.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도 모자라 신을 둘이나 죽였으니. 아, 알베니우스는 잘
있나?”
“본론만 이야기 해.”
“재미없는 놈이었군.”

남자가 술을 음미했다.

“이 세상에는 너 같은 놈들이 많다.”


“무슨 뜻이지?”
“신에게 부여 받은 힘을 자신의 것이라 착각해 마땅히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리지 않으려는 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토사구팽을 순순히 당해주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허나, 우리는 자비롭기에 주제를 망각한 그러한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지.”


“기회?”
“스스로 주제를 알고 부여 받은 것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 할때까지 자유를 잠시 억압한다.”
“···감옥이잖아?”
“감옥이라. 너희 인간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
“나도 거기 가두겠다고?”
“아니, 그럴 리가. 어떻게 일개 피조물들과 신을 죽인 자를 같은 선상에 둘 수 있겠느냐.”

얼마 후면 그곳의 책임자 자리가 공석이다.

“어떻게, 책임자가 되어볼 생각이 있느냐?”


“감옥의 소장이 되라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우리는 그곳을 연옥이라 부른다.”
“대체 왜?”
“말했잖느냐. 신이 죽은 건 최초다. 그리고 신 또한 미지의 것에는 두려움을 가지지.”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너와 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충분한가?”
“그러니까 신이라는 놈들이 나한테 겁을 먹었다, 이건가?”
“그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나는 조금 다르다. 일개 신 따위가 아니거든.”
“뭐, 주신이라도 되나?”

남자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게 대답이 되었다.

“···씨발이네, 진짜.”
“그들에게는 위기감이 없었다. 그저 누리기만 해서 신으로서의 자각도, 위엄도 부족하지.”
“그러니까 나를 신들에게 경각심을 새기고 위엄을 만들 도구로 쓰겠다고?”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 둘을 죽였는데 이런 취급이라니. 우스운 건 눈앞의 상대에게 차마 반박할 수가


없다는 거다.

“거절하면?”
“죽는다. 나를 네가 죽인 떨거지들과 같다 생각하지 말거라.”
“···빌어먹을.”
“네게 나쁘기만 한 제안은 아니다. 인간은 보상이 있어야 열의를 보이지. 조건은 간단하다. 50 명. 50 명의
죄수들을 자발적으로 출소시킨다면 너의 죄도, 너에게 얽매여진 굴레도 모두 풀어주마.”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 말이 곧 법칙이다.”
“지랄하고 있네.”

김우진이 한 소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알베니우스가 그의 뒤에 있었다.

“김우진, 신들의 말을 믿지 마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놈들이 저놈들이다.”


“알베니우스. 신수가 좀 핀 것 같구나.”
“닥쳐라, 베리안. 그 역겨운 낯짝을 보고 있으니 끔찍하기 그지없군.”
“어떻게, 난 너보다는 알베니우스님의 말에 더욱 신뢰가 가는데.”

남자, 베리안이 쯧, 혀를 찼다.

“내 앞에 그 낯짝을 들이밀다니. 간이 커졌구나. 자리가 너를 살렸다, 알베니우스.”


“헛소···!”

따악, 베리안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무형의 힘이 알베니우스의 입을 봉했다.

“허나 자비는 여기까지다.”


“지금 뭐하는 거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믿을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하마.”

신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김우진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빛으로 이루어진 종이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하찮은 도마뱀아. 아무리 너라고 해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는 들어보았겠지.”


“···그게 무슨?”
“우주의 절대 법칙이 보장하는, 신조차 결코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계약이다.”
“맞습니까?”

말을 하지 못하는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눈에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냐는 듯한 느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면 정말로 나를 감옥의 소장으로 만들겠다고?”


“연옥이다.”
“고작 나태한 신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고작이 아니다, 김우진. 신들이란 위대한 존재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나태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경각심을 줄 존재가 다시 나올 수 있을 것 같더냐?”

어둠이라는 적이 존재하나 이미 세를 공고히 하고 있는 신들에게 위기감을 줄만큼 거대하지 않다. 사전에 싹을


미리 다 잘라두었기 때문이다.

신일 될 만한 자들도, 위협이 될 만한 자들도 오래 전에 모두 박멸 당했다.

그래서다. 고작 신 둘 죽었다고 지레 겁먹고 겁쟁이들이 된 것은. 때문에 주신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합의했다.

베리안은 아주 조금의 사심이 더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묻겠다. 받아들일 테냐?”
“···조건이 있다.”
“끝까지 건방지구나.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들어는 보지.”
“이 차원을 더 이상 건드리지 마.”
“참으로 선량한 용사로군. 자신들이 구원한 이들을 끝까지 책임지려 하다니. 위대한 용사의 표본 아닌가!”

베리안이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한 편의 연극 같은 그 모습이었다. 뚝, 웃음이 한순간에 그쳤다.

“그러도록 하지. 끝인가?”


“계약서를 조율하는데 한 가지로 끝날 턱이 없지. 당분간 알베니우스도 건드리지 마. 그리고···.”

약 한 시간, 김우진은 계약서에 원하는 사항이나 이상한 사항들을 수정했다. 베리안은 턱을 괸 채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좋군. 네가 바라는 것을 다 들어주었으니 그럼 이번에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한 가지 추가하겠다.”


“뭐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연옥의 소장이 되기 전에 넌 감히 신을 죽인 책임을 물어 감금될 것이다. 끔직한
고통을 받으며 매일 매일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겠지.”

시간은 20 년이 좋겠군.

“네가 용사로서 활동한 기간과 비슷하지 않느냐.”


“···끝까지 추잡하군.”
“네 요구들을 모두 들어 주었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협상은 끝이다.”
“···좋아.”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조항이 추가되었고 신과 김우진이 서명했다.

“어떤 수를 써서든 자발적으로 50 명만 출소시키면 된다는 거지···.”

그렇게 최초로 신과 인간이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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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3. 아무것도 >

“···그리고 지금이 되었지.”

이야기가 끝났다.

김우진은 이야기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율리아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최면에서 풀리듯, 그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되게 많은 일이 있으셨네요.”
“많은 일이 있었지.”
“신들을 싫어하실만 해요.”
“뭐, 자비를 받은 것도 사실이긴 해.”
목적이야 어찌되었든 그 알량한 자비가 없었다면 김우진은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잠깐만요.”
“왜?”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게 끝났는데요?”
“이상하다고? 이 다음 이야기는 그냥 20 년 동안 고문 당하다가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게 끝인데?”
“아뇨, 소장님 이야기 말고요.”

뭐가 부족하지?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가 곧 해답을 찾아냈다.

“세이드! 그래서 세이드는 어떻게 된 건데요! 아크 리치 드래곤한테 씹혀 먹혔다면서요!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아크 리치 드래곤이 토벌되고 신들과 싸울 때까지도 세이드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 그거···.”
“그거?”
“뻥이야.”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거기서 나는 끌려갔고 여기까지 왔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글쎄.”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다 알려주신다면서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알려줬잖아.”
“아니, 그건 맞지만···.”
“알베니우스가 알 텐데. 말 안 했어?”
“자세한 사항은 소장님이 알고 있으니까 소장님한테 들으라고 했어요. 그냥 유품을 주면서요!”
“유품이라면 그 목걸이? 오랜만이네. 그거.”

유품을 건네받은 김우진이 목걸이를 열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율리아의 어릴 적 사진이 있었다.

“근데 계약을 맺고 나는 곧장 붙잡혔는데 세이드가 어떻게 됐는지 어떻게 알아?”


“···사기 당했어요.”
“그래도 아마 살아는 있을 거야. 앞으로 평생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아, 상황이 이렇게 돼서 그건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에요?”
“계약 조건 중 하나거든.”

베리안이 용인하고 김우진이 추가한 여러 조항들 중 글라크와 글라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안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조건은 신들의 입장에서 절대 무조건적으로 들어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추악한 모습을 봐버린 자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그들은 신이 일개 피조물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다. 반드시 잊혀져야 할 진실.

신들은 김우진의 요구에 사족을 달았다.

“건드리지 않는 대신 차원 전체에 권능을 건다고 했었지, 아마.”


차원 자체를 봉인시켜 신들이 아니면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게 한다고 했다.

“놈들이 약속을 지켰습니까?”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을 맺었으니 지킬 수밖에. 나는 그 직전에 빠져 나왔고.”

어느새 왔는지 알베니우스는 소파에 앉아 태연히 다리를 꼬고 있었다.

“이 사기꾼 도마뱀!”

그를 발견한 율리아가 냅다 소리쳤다.

하이엘프가 드래곤한테 도마뱀이라고 부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김우진이 교도관을 시켜 팝콘을 주문했다.

“왜 살아 있다고 말 안 해줬어요?”
“죽었다고도 안했잖아.”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죠!”
“그 부분은 인정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세이드가 안부를 전해달라면서 절대로 자기가 처한 상황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걱정할 거라고. 그래서 그냥 김우진에게 떠넘겼지.”
“평생 갇혀 있는 걸 알리기 싫어서 죽은 것처럼 느끼게 했다고요? 그게 말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무책임한 건 여전하네요.”

김우진이 혀를 찼다.

“저를 연옥에 투입시키려고 속인 건 아니고요?”


“물론 네가 적임자이긴 했지. 하지만 네가 오기 전부터 원래 갈 사람이 있었어. 너도 알잖아?”
“···알죠.”

지금은 데이드람의 세계수를 모시고 있는 하이엘프가 있다. 본래 연옥으로 갈 당사자는 그였다.

율리아는 그 대신 연옥으로 가겠다고 스스로 자청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세이드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물론 죽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신들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만나지 못하는 건 똑같으니.

“···이길 수 있겠죠?”
“이겨야지.”

이길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생존의 문제이며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다.

“···어쨌든 속은 기분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낫네요.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또 생겼어요.”

율리아가 의기를 다졌다.

“제가 말씀드렸나요? 세이드가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그래. 세이드는 너보고 딸 같다고 했고.”
“처음부터 절 알고 계셨으면서 왜 모르는 척하셨어요?”
“긴가민가하기도 했고 굳이 아는 척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긴.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세이드가 절 키워줬어요. 부모님은 차원 종말 전쟁 때 돌아가셨거든요. 한 2
백년 쯤 됐나?”
원래는 그 부분은 아무 생각 없었거든요?

“근데 소장님 이야기를 들으니 이것도 신들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건 조금 억측이 아닐까 싶은데.

김우진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 * *

알베니우스도, 율리아도 나갔다. 김우진은 창밖을 보며 커피를 기울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여기까지오는데 율리아의 공이 컸다. 이 정도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는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 말고 말입니다. 주신을 놓친 것 말입니다.”


“그건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고 말고.”

모든 패를 깠음에도 놓쳐다는 건 꽤나 쓰디쓴 실책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쪽에는 주신들을 상대할 적절한 상대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저들은 오만하지만 바보가 아니며, 그 오만함도 김우진으로 인해 많이 사라졌으니까.

“만약 네가 신이라면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 같지?”


“제가 신이라면 말입니까?”
“그래. 거만해진 새끼들의 교육용 인강을 결제했는데 그 인강이 알고 보니 랜섬웨어였다면?”
“그거 바이러스 아닙니까?”
“비슷한 악성 프로그램이지. 심지어 방화벽이 랜섬웨어를 오히려 백신으로 인식해서 지워지지도 않아.”
“그럼 포맷해야죠.”
“포맷이라···.”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컴퓨터에 대입해 보았을 경우고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랜섬웨어는 김우진, 방화벽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이다. 그것을 포맷해 없던 일로 하겠다는 걸 결국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해 계약을 무효화시킨다는 건데 그런 게 말처럼 쉽다면 신들은 진즉에 그렇게 했을 거다.

정말 만약에 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이렇다 할 대처 방법이 없다. 그저 지금처럼 전력을 모으고 무기를 개발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차라리 이곳도 하위차원이면 좋겠는데.”


하위 차원이 된다면 율리아를 비롯한 여러 신들도 힘이 제약되겠지만 적어도 두리쉬마와 김우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옥은 하위 차원 따위가 아니었다. 당연히 신들은 힘을 투사하는데 어떠한 제약도 없다. 계약만 아니라면.

“그래도 일단 최대한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세계수들에게 성장촉진제를 놓고, 데르카인을 닦달해 신에게도 통하는 무기를 만들고, 신이 된 이들이 보다
원활하고 능숙하게 신력을 다룰 수 있도록 조율하고.

그리고···

“···두리쉬마를 내보내자.”
“가능하겠습니까?”
“주신이 그 고초를 겪었으니 저놈들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거야. 포위망이 멀쩡할 리가 없어 무조건.”

두리쉬마는 이곳에 있는 것보다 종말 차원으로 돌아가 마물들을 모으는 게 베스트다. 더불어 알베니우스도 함께
보내 숨겨 두었다는 용사들까지 끌고 온다면 더 좋고.

“일단 확인해보겠습니다.”
“확실하게 내가 직접 확인하지.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어.”

그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신들과의 마지막 결전이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리고 베리안의 그 제안도 뒤가 구린 냄새가 나고.”

애초부터 단순히 신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라는 건 믿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긴 하겠지만 분명 다른 게


있겠지.

그게 뭔지 이제 곧 밝혀질 거다. 좋든, 싫든.

* * *

- 커.

릴리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 줄여. 다시.

함께 다니던 그 즐거운 나날들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달라진 모습으로 다닌다니.

- 어흥!

나르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짧은 투정을 부렸다.

“꺼져라.”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어둠의 사도, 두리쉬마는 귀찮음에 손을 휘저었다.


그는 신들을 잡아먹은 뒤 그 업으로 대부분의 힘을 되찾았다. 자그마한 인형 같던 체구는 평범한 트롤의 크기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본모습 형태로 있고 싶었지만 차원에 부담을 주는 일이기에 그것만큼은 자제하고 있었다.

- 친구!
- 낑!

“내가 왜 새파랗게 어린 네놈들이랑 친구냐.”

- 크기?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대꾸해야할지 감도 안 잡히는군.”

어쨌든 이 꼬맹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 답답한 생활도 이제 끝이다.

김우진과 합의가 끝났고 이미 외부 또한 확인했다. 주신이 죽을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저들의 포위망이 훨씬
느슨해졌다.

알베니우스의 능력이라면 빈틈을 노려 은밀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가능하겠지? 도마뱀?”
“···끄응, 불가능은 아니긴 한데. 가다가 걸리면 어떡하지?”

제기랄, 어느새 그의 옆에 자리한 알베니우스가 투덜거렸다.

“안전만 추구해서는 신들을 이길 수 없다.”


“알아, 안다고.”

- 가?
- 끼이?

“그래, 간다.”
“살아서 또 보자, 세계수들아.”

거인과 차원룡이 사라졌다.

* * *

“···어둠의 사도가 연옥을 빠져나갔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은 없다. 차원룡은 스스로를 숨기는데는 성공했지만 두리쉬마가 가진 마기를 온전히 감추는데는
실패했다.

작은 전투가 있었고 집행자 다섯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을 놓쳤다.

“···추격합니까?”
“······.”
“주신이시여.”
“···추격하지 마라. 그놈들을 잡든, 죽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상석에 앉은 알비츠가 공허한 눈으로 대답했다.

“···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조용한 대전을 울렸다.

“베리안, 베리안, 베리안, 베리안···!”

콰득, 의자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새하얀 냉기가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신들이 황급히 신력을 끌어
올리며 거리를 벌렸다.

“···괜찮으십니까?”

알비츠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상체의 절반이 뜯겨져 나갔다. 왼 어깨와 가슴은 말 그대로 소멸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신력의 힘이었다. 주신의 권능이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느냐.”

알비츠는 베리안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카식 레코드의 성역에서 권능을 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거부하고
싸웠다.

결과는 당연히 패배. 그럼에도 베리안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선택이다만,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널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네 헛된 망상은 우주의 거대한 혼란을 야기할 거다. 그리고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우주를 파멸로 이끌겠지.’
‘아니, 더 안정적으로 변하는 거다. 단순한 의지 덩어리가 아니라 진짜 신이 이 세상을 다스릴 테니까.’
‘죽여라, 내 눈으로 그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으니.’
‘그럼 안 되지. 넌 주신이고 주신으로서 절대신이 될 나를 보필할 의무가 있다.’
‘절대신? 아주 염병하고 있군.’

베리안은 그의 상체 일부를 뜯어내고 신으로서의 권능을 제약했다.

‘우선은 이 정도로 해두지. 내가 아카식 레코드를 온전히 흡수하면 더 확실하게 해주마.’


‘이 개자식이···!’

그 제약은 알비츠를 죽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의 생각까지는 지배하지 못했다.

“아무 것도 하지 마라. 김우진이 무엇을 하든지.”


“하지만···.”
“이런 꼴이 되니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가 보지?”
“아, 아닙니다!”

차가운 한기에 신들이 몸을 떨었다. 아무리 제약을 당했다고 해도 주신은 주신이었다. 일반 신 몇 정도는
가뿐하게 얼려버릴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살면서 이런 생각이 들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김우진이 베리안을 죽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만약 베리안이 아카식 레코드를 흡수하는데 성공한다면 김우진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을 테니까.

사나운 눈으로 그들을 흘긴 알비츠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깔끔하게 뜯겨나간 어깨가 욱신거렸다.

───────────────
# < 104. 이미 다 >

조용하다.

주신을 죽이려 했음에도 백신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무기를 개발해야지.”

데르카인은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신이 되었기 때문일까, 요즘 들어 회춘한 것 마냥 몸 상태가 최고였다. 망치질에는 힘이 있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 설계나 조립이 훨씬 빠르고 능숙해졌다. 움직임 자체가 빨라진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신격 그 자체였다.

신격은 모두 동일하지 않다. 신이 된 자의 인생과 특성을 고려해 합당한 힘으로 발전한다.

율리아의 신의 힘이 폭풍인 것처럼, 시에나의 신의 힘이 활과 관련된 것처럼.

그의 신격은 대장장이였다. 그가 만든 모든 장비에 자연스럽게 우주의 힘을 깃들게 할 수 있으며 강화할 수 있다.

그가 만든 모든 물건들이 흔히들 말하는 성유물이 되는 것이다.

대장장이라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가 만든 무기가 이제는 확실하게 신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없이 만족스러웠다.

비록 직접적인 전투는 다른 신들에 비해서 한 발자국 뒤떨어지게 되었지만 세상일이란 게 본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 아니겠나.

무엇보다 부족한 힘은 다른 것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릴리.”

- 왜.

“여기에 신력을 좀 부여해주겠나.”

- 응.
순수하게 정제하여 깎아낸 마력석에 세계수의 정기가 깃들었다.

여러 신의 기운을 흡수했음에도 기운은 더 없이 정순했으니 이는 세계수의 권능 중 하나였다.

맑고 투명하던 마력석이 은은한 에메랄드빛을 띠었다.

데르카인이 가공을 시작했다.

- 뭐?

“이걸로 포탄을 만들 거네. 지난 번 전투에서 느낀 게 많아.”

좋은 무기, 좋은 방어구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신들을 위한 무기와 방어구는 이미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가 직접 사용할 무기.

그가 선택하는 무기는 당연히 하나다. 마력포. 자고로 마력포하면 드워프, 드워프하면 마력포 아니겠나.

그리고 마력포는 단순히 주변의 힘을 빨아들여 방출하는 방식은 안 된다. 그런 수준에서는 결코 신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

“몸체 자체는 이미 확실하게 보강했네.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절대 깨지지 않겠지.”

첫 실전에서 폭발하던 그 충격은 그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몸체가 버틸 수 있다면 그 한계까지 포탄을 강화하는 거네.”

마력포의 파괴력은 결국 포탄이 결정한다. 포탄에 얼마나 강대한 술식과 마력을 담았는지에 따라서. 어떻게
가공했는지에 따라서.

“조무래기들을 쓸어버리는 수십, 수백 발보다는 신의 숨통을 끊어버릴 확실한 한 방.”

방향성이 정해졌다.

“다시 불어넣어주게.”

데르카인이 한참동안 매만지던 마력석을 다시 내밀었다.

- 줄었어?

“압축시켰네.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최대한 해볼 생각이네.”

- 안전?

“나도 처음해보는 거라 정확히 모르네만.”

- 터지면?

“위험하겠지.”

- ······.
“걱정 말게. 원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거네. 그때도 마력포가 터졌지만 결국 더
발전시키지 않았나!”

콕콕콕-

릴리가 데르카인의 머리를 쪼기 시작했다. 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

- 여기. 내 본체 앞.
- 양심, 어디?

“···그야 자네에게 정수를 받으려면 최대한 가까이서···.”

- 가.
- 저 앞. 괜찮.
- 낑낑! 낑!

릴리의 날개 끝이 가리키는 곳은 나르의 본체 앞이었다. 가만히 있다 봉변을 맞은 나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 * *

“맨날 저러시네.”

난리를 치는 세계수들과 데르카인을 보며, 율리아는 절레 절레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왜요?”
“어머니 나무들과 가장 많이 문제를 일으키는 게 너라는 자각이 없니?”
“저는 언제나 하이엘프답게 맑고 깨끗하죠.”
“···케이룸에 하이엘프가 있었다면 비교할 수 있었을 텐데.”
“의심하지 마세요. 저는 하이엘프입니다.”

율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와 등은 세계수와 맞닿아 있었고 접촉부를 통해 정기가
순환했다.

신이 되었다고 한들, 엘프는 엘프다.

더 없이 숲에 친숙한 종족. 숲의 정기를 받아들이고 기운을 복돋는 종족.

신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평범한 엘프가 평범한 숲과 나무로부터 순환시키던 정수가 신과 신을 여럿 삼킨 세계수로 변했을 뿐이다.

주변에는 그녀들 뿐 아니라 다른 엘프들도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이드가 살아 있데요.”


“죽었다면서?”
“죽은 것처럼 이야기했었는데 사실은 살아 있다네요.”
“그럼 기뻐해야지, 표정이 왜 그렇게 복잡하니?”
“복잡해서요.”

살아 있다고 좋아해야 하나, 아니며 속았다고 화를 내야 하나.

물론 어쨌든 살아 있는 거니 기쁘고 그게 더 좋다. 다만, 더욱 무거운 책임감이 생겼다.

“결국 백신전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고 했거든요.”


“왜?”
“계약에 묶여 있데요. 자세한 건 소장님의 개인 사정이라 말씀을 못 드릴 것 같아요.”
“됐어. 나중에 한 번 물어보면 되겠지.”

시에나가 픽 웃었다.

“그럼 너도 반드시 백신전에게 복수할 이유가 생겼네.”


“이걸 복수라고 해야 할지···.”
“지인이 감금당해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으니 복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또 맞네요?”

보다 명쾌해진 해답에 율리아가 쾌활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저 짐승들은 하루를 빼먹지를 않네.”

쾅쾅쾅, 저 멀리서 연달아 들려오는 폭음에 시에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투기장으로 변형된 축사장에서 수인들이 서로 싸우며 만들어내는 소음이었다.

“그게 수인들의 방법이니까요.”


“근데 오늘은 좀 더 소리가 큰데?”
“타르칸님이 화풀이 중이거든요.”
“갑자기?”
“두리쉬마님하고 싸워보질 못했다고 성질이 나서···.”
“···진짜 단순한 놈이구나.”

시에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세계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집행자였으나 교도관이 된 자들은 정기 예배를 드렸다.

“오늘 하루도 저희를 보듬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우진이 머물고 있는 집무실을 향해 기도를 드리고 고개를 숙인다.

“짐승들에게 격의 차이라는 것을 알려주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몬스터와 마물들, 그리고 수인들이 뒤섞인 투기장에 난입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광신도들아!”


“마땅히 섬겨야할 신을 섬기는 것을 광신으로 매도하는 걸 보니 역시 천박한 짐승의 본성은 어디가지 않는군요.
오늘 제가 그대에게 예의와 신앙이라는 것을 새겨드리겠습니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나보다 강하다면 얼마든지!”
“신의 자비가 가득한 개 목줄을 채워드리죠. 당신은 잠시 후에 소장주신님의 집무실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타르칸과 디아네가 충돌했다.

집행자와 수인들이 서로를 물어 뜯기 시작했다.

전원이 김우진의 권속인 집행자들에게 필요한 건 신의 힘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기르는데는 동등한 상대와의 전투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었다.

“망할 놈들, 상태 좀 멀쩡하게 보존 좀 해달라니까 아주 난도질을 해놨네.”


“진짜 그걸 먹는 겁니까?”
“뭘 놀랍니까. 수도 없이 먹어 놓고. 심지어 마물의 독기까지 다루는 인간이.”
“아니, 독을 다루는 것과 마물을 먹는 건 아무 관계가···.”
“이미 당신 뱃속으로 들어가서 소화된 양만 톤이 넘는 다니까요?”

투기장의 구석, 걸레짝이 된 마물의 시체를 수습하며 각자 요리 재료와 독기를 얻고 있는 두 명의 신들까지.

감옥의 모든 구성원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백신전에 대비했다.

* * *

“이거다. 간만에 정말로 상쾌하군.”


“···제기랄, 내가 이런 기분 나쁜 곳을 다시 오게 되다니.”

새카맣게 죽어버린 하늘, 정상적인 생명체라고 느껴지지 않는 어둠의 땅.

이미 멸망을 맞이하고 아카식 레코드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는 종말 차원에 두 명의 인영이 발을 들였다.

서로 극과 극의 반응을 보여주며 들어왔던 흔적을 지웠다.

“그만 투덜거려라. 도마뱀이라는 놈이 위엄이 눈꼽만큼도 없어서야.”


“위엄이 밥 먹여 주냐? 난 너랑 달리 어둠의 사도가 아니라고.”
“그렇게 질색하면서 잘도 용사들을 종말 차원에 밀어넣었군.”
“크흠, 그건 그놈들의 성장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겉으로는 틀린 말이 없다만 글쎄.”

두리쉬마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래서 도착한 건가?”


“그래, 여기다.”

연옥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알베니우스와 두리쉬마는 여러 변방 차원을 거치며 추격을 방지했다. 거의 50 개에


달하는 차원을 지나오고 나서야 본래의 목적지에 당도했다.
성장이라는, 신들의 눈길을 피한다는 명목아래 알베니우스가 용사들을 풀어놓은 곳.

그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종말 차원에게 있어 용사란 바이러스나 다를 바가 없다. 종말 차원의 주 에너지는 마기고, 살아가는 피조물들은


마물이니까.

바이러스는 언제나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티가 나기 마련이다.

굉음과 폭발이, 비명과 괴성, 전투가 일어나는 곳.

알베니우스와 두리쉬마는 수백의 마물에게 둘러싸여 전투를 벌이는 수백의 용사 무리를 발견했다.

“후우, 다행히 잘 살아있네.”

수가 좀 줄긴 했지만 이런 곳에 용사들을 떨어트린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한 바다. 저들도 각오를 다지고


알면서도 넘어왔고.

“단순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다. 느끼지 못했나? 이 차원의 마물들이 극히 희박하다.”

저들의 손에 차원 하나의 마물이 대부분 잡혔다는 것을 뜻했다.

알베니우스가 자세히 살피고는 감탄했다. 이곳에 방목되어 업을 쌓은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용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상위 10%정도는 집행자들과 싸워도 크게 꿀리지 않을 거다.

“역시 김우진처럼은 안 되나.”

하긴, 혼자 여러 차원을 멸망시킬만큼의 무리를 쓸어버린 것과 수백명이서 고작 차원 하나의 마물들을 쓸어버린


건 격이 다르지.

“차원 하나의 마물은 결코 고작이 아니다만, 이번만큼은 도마뱀 네 의견에 동의하지.”

두리쉬마가 공간의 균열을 열었다.

“네가 저들을 이끌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라.”


“너는?”
“용사들이 설치는 차원에서 마물들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네.”
“그럼 나중에 보지. 무너진 백신전에서 재회의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
“동감이야.”

두리쉬마가 사라졌다. 알베니우스는 용사들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대략 두 시간에 걸친 전투가 끝나자 그들 앞에 나섰다.

“모두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
“······.”
그리고 퀭한, 앙상하고 피골이 상접한 좀비들과 마주했다.

“알베니우스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어?”

그들은 마물의 시체를 정리하고 불을 피워 그것들을 구워먹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밥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미친, 마물을 먹는다고?”

마물의 육신에는 마기와 함께 지독한 독기가 들어 있어 절대 먹을 수 없다. 연옥의 죄수 중 한 명이 기이할


정도로 특이해 어떻게든 맛있게 만들지만 보통은 그게 일반적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식량을 얼마나 줬더라.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생각보다 이들을 다시 만나러 오는 게 늦어졌다.

“그런다고 마물을 먹으면서 버텨? 그러다 다 죽으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우적, 마물의 고기를 한 웅큼 베어 문 용사들의 대장, 테론이 대꾸했다.

“이미 죽을 놈은 다 죽었으니까. 지금 남은 놈들은 모두 적응했습니다. 이제 와서 걱정해주시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뭐라고?”

어쩐지 용사들의 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단순히 마물들과 싸우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런데 저희를 이렇게 만드신 당사자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조금 불편합니다만?”


“옳소.”
“드래곤 고기는 어떤 맛일까 궁금합니다. 조금 때어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 시궁창 같은 마물 고기보다는 낫겠죠.”
“······.”

독기 가득한 용사들의 시선에 알베니우스가 뒷걸음질 쳤다.

“···사람은 화가 나면 앞뒤 분간을 못하고 일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결국 후회하게 되지. 너희들에게는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오겠다.”
“잡아, 저 개새끼!”
“이 씨발, 도마뱀!”
“드래곤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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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 세계수를 써먹는 방법 >

이상하다.
몇 달이 지났다. 평화는 좋지만 지나치게 평화가 길다.

무려 주신이 공격당했음에도 어째서 백신전은 조용할까. 그 흔하디흔한 항의 한 번 없이 그냥 없던 일인 것처럼


조용히 묻어간다.

그 기이함에 김우진은 연옥 내의 신들을 소집했다.

“···백신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소장님이 아니면 뭐 큰 일 생길 게 있나요?”
“예전이었으면 그럴지 모르지만 지금은 하나가 더 있지.”
“두리쉬마님 말씀이시군요?”

두리쉬마는 알베니우스와 함께 포위망을 뚫고 사라졌다. 알베니우스의 권능과 허술해진 포위망을 비추어 보았을
때, 무사히 도망쳤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이곳에서 알 턱이 없다.

신들이 그들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추적과 전투를 반복하고 있는지.

어쩌면 지금의 고요함이 그들을 먼저 처리하기 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큰일 아니에요?”
“큰일이지.”

만약 정말로 두리쉬마와 알베니우스를 먼저 정리하기 위해 조용한 거라면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일


거다.

“아예 선제타격을 한다면 어떨까?”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당해왔으니 이쪽에서 오히려 공세로 전환해 허를 찌르는 것도 좋다.

주신을 공격한 건 어디까지나 연옥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것과는 또 경우가 다르다.

“뭐, 일단 마력포들은 언제든 대기상태이긴 하네. 실전에서 위력을 확인해봐야 하기도 하고.”
“싸우는 거라면 전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크흐흐.”

마력포를 쏠 기대감과 싸울 생각에 데르카인과 타르칸은 조금 신이 나 보였다.

“가능할까요?”
“만약 두리쉬마님쪽으로 전력이 가 있다면 이쪽도 확실히 줄어 있겠지.”
“그건 그렇지만 함정일 가능성도 있잖니?”
“물론 그렇죠.”

엘프들은 조금 부정적이었다. 김우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설사 함정이라 할지라도 감히 소장주신님을 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소장주신께서 행하신다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다부진 디아네의 포부를 들으며 면면들을 살폈다.

율리아, 시에나, 타르칸, 베르너, 강민식, 디아네 그리고 데르카인까지.


처음 이곳의 소장으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혼자였는데 어느새 일곱 명의 신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은 전투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그 이상의 일들을 해주고 있고.

그와 함께 여섯의 신들이 직접 나선다면 어지간한 건 전부 뚫어버릴 수 있다.

“포위망은 어떻지?”
“매일 같이 살피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이전보다 덜해진 게 맞긴 한데 이게 다른 쪽으로 돌려서 그런 건지,
아직도 주신이 공격당한 게 혼란스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함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두 개는 상관이 없다만, 만약 함정이라면 꽤나 곤란해질 거다. 이미 크게 데인 신들이 호락호락하게


준비하지 않을 테니.

“···한 번 가보지.”

그럼에도 김우진은 결정을 내렸다.

만약 두리쉬마를 먼저 정리하는 거라면 절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며, 그저 혼란스러운 것일 뿐이더라도 기회를


굳이 놓칠 필요는 없다.

다만, 문제는 함정일 경우인데 김우진은 아무리 못해도 빠져나올 자신은 있었다.

그는 주신과 필적하는 강자며, 저들은 신이다. 상대 또한 신이긴 하지만 멍청이처럼 죽지는 않을 거다.

“신을 잡아서 릴리와 나르에게 준다.”

차기 신 후보들 대부분이 상위 집행자들이기 때문에 신들을 죽이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그들을 붙잡아 텅
비어버린 세계수에게 다시 거름을 공급한다.

- 좋아!
- 낑!

두 정령체가 눈을 반짝였다.

* * *

“대체 어쩌다 백신전의 신세가 이렇게 처량해진건지···.”

백신전의 신, 프로티마가 저 멀리 보이는 연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

백신전의 말이 곧 법칙이자 정의였다. 백신전은 이 세상 정상에 우뚝 서 우주를 다스렸고 누구도 거기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김우진이라는 이물질로 인해 상황이 변했다.

백신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신들이 줄어들었다. 하위 신도, 상위 신도, 심지어 주신도 있었다.
줄어든 자리는 전부 채워지지 않았으며 백 개의 자리에 일곱 개의 공석이 생겨버렸다.

“신격을 얻은 자들이 여섯이나 반역자의 품에···.”

아니, 일곱이다. 한 명의 공석 또한 김우진의 품속에 있을 거라는 게 알비츠 주신의 판단이니.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했을 끔찍한 일이다. 그럼에도 백신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에 묶여 있기에, 주신간의 전투로 인해 백신전의 판도가 달라졌기에.

세 명의 주신이 균형을 이루던 것은 칼카르의 죽음으로 둘이 되었고, 베리안이 알비츠를 권속으로 삼으면서
완전히 독재가 되었다.

그는 곧장 아카식 레코드로 들어갔고 여전히 나오고 있지 않다.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해 발 아래 두겠다니.’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입장에서는 말이 되는 건가 싶다. 아무리 그들이 신이라고 한들, 아카식 레코드는
신 위에 존재하는 절대 법칙이니까.

허나, 베리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건 또 아니다. 그 또한 백신전의 신들이 결코 완전한 신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법칙마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 그게 진짜 신이 아니겠나. 그래서 프로티마는 은연중에 베리안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신전은 현재 둘로 나눠졌다. 알비츠에게 동조하는 자와 베리안에게 동조하는 자. 베리안이 알비츠를


권속으로 삼은 시점에서 큰 의미는 없지만.

‘최대한 빨리 목표를 이루고 나오시기를. 다행히 아직까지는 김우진이 잠잠하기는 한데···.’

주신을 공격할 때만 해도 얼마나 놀랬던지. 하물며 연옥 안에 무려 여섯의 신이 들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조금 강한 용사로 여기던 그는 어느새 주신마저 위협하는 거물이 되었다. 허나, 그것도 베리안께서 뜻을
이루고 나오신다면 끝이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김우진이 먼저 나올 일은 없었다. 솔직히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과 연옥이라는 보금자리가
아니라면 일개 피조물인 그가 여기까지 올 수라도 있었겠나.

스스로 아늑한 집을 벗어던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하하.”

무릎을 꿇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모아 빈다.

콰직, 두터운 신발이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찔한 통증에 신음을 삼켰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김우진님에게 상대로 밍기적거리고 얕보는 백신전의 신들은 모두 버러지들입니다.”

살기 위한 과장된 표현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기도 했다.


‘미친놈, 완전 미친놈 아니야!’

습격은 예고 없이 일어났다. 김우진과 여섯 신들이 진격했고 백신전의 집행자들이 우수수 쓸려나갔다.

신들도 마찬가지. 김우진이 앞장서자 그를 막을 수 있는 신은 없었다.

포위망을 지키는 스무 명의 신들 중, 절반은 도망가고 절반은 붙잡혔다. 프로티마는 하필 김우진이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을 지키고 있던 자신의 운을 한탄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김우진님을 주신으로 섬기겠습니다!”

김우진은 공식적으로 주신은 물론 신도 아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신을 모기처럼 때려잡는 놈이 신이


아니라면 그는 일개 벌레였다. 백신전은 벌레들의 집합소고.

“역시 그래도 명색이 신인지라 보는 눈이 있습니다. 환영합니다, 형제님. 진정한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신
것을.”

황금 동공이 부담스럽게 가까이 다가왔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베른의 집행자였다가 김우진으로 갈아타고 신이 된 인물.

“저와 함께 소장주신을 찬양합시다! 신의 자비가 하해와 같으니, 폭압을 일삼는 거짓 신들은 결국 가면을 벗고
천벌을 받을 지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목숨이 아까워 김우진에게 갈아탔다는 건 이해할 수


있어도 굳이 저렇게까지?

‘설마 일부러 시키는 건가?’

김우진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김우진에게 부족한 것은 세력이고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화고
주신으로 섬기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애초부터 계획된···?’

과연 칼카르를 죽이고 백신전의 신들을 잡아먹은 괴물답다. 프로티마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물론이다! 사실 나도 백신전의 거짓과 위선에 진저리가 나던 참이었다! 김우진님이야 말로 진정한 신이시니


부디 저를 거두어 진실된 세계로 이끌어주십시오!”
“오오오, 진정한 형제를 찾았으니 저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디아네!”
“프로티마님!”
“···지랄들을 하는군.”

김우진이 혀를 찼다. 디아네는 누가 봐도 진심이었지만 프로티마라는 저놈은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다 들렸다.
하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헛소리! 주신께서 나오시는 날! 그날이 네가 소멸하는 날이다, 김우진! 지금의 승리를 마음껏 즐···!”
“백신전은 영원하리라!”
“네놈들도, 저놈도. 그리고 이 자리의 누구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모두 공평한 대우를 받게 될 거니까.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당신을 주신으로···!”


“그냥 주신이 아니라 소장주신입니다!”
“···소장주신으로 섬기겠습니다!”
“섬겨라. 말리지 않으니.”

말린다고 되는 거였다면 디아네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걱정마라. 죽이지는 않을 거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김우진의 눈짓에 신들이 그들을 구속해 연옥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허술하던 포위망은 완전히 붕괴되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도망친 신과 집행자들은 김우진의 습격을 알릴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김우진 또한 진실을 알았으니까.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이라···.”

베리안이 미친놈 같다고 생각을 했지만 아예 정신이 나가있을 줄은 몰랐다.

우주의 법칙에 간섭?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적어도 김우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신들은 오래전에 관리자가 아닌 진짜 신이 되었을


테니까.

“그래도 알아버린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이미 몇 달이나 시간을 지체했다. 베리안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시작하지는 않았을 터, 어느 정도의
성과는 무조건 낸다고 생각하고 대비해야한다.

“두리쉬마를 찾아야겠어.”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백신전을 친다.

* * *

“사, 살려줘!”
“세계수의 뿌리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는 신이다! 김우진! 신을 이렇게 대우하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소장주신이시여! 저는 충실한 개가 되겠나이다!”
“끝까지 발악해봐라! 결국 주신께서 네놈을 벌하실 테니!”

빠악-

- 조용.
- 어흥!

신들은 각양각색의 반응들을 보여주며 두 그루의 세계수에 나눠서 봉인되었다. 릴리와 나르는 저항이 심한 신들의
싸대기를 때려가며 직접 집어넣었다.

“어땠어?”
“할 만 했어요.”
“저는 오히려 아쉬웠습니다. 신이라는 것들이 저리 허약해서야.”
“소장주신님의 자비가 함께하니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신이라는 자들이 생각보다 크게 대단할 건 없다는 걸 느꼈단다. 네가 어째서 관리자라고 부르는지도.”

닳고 닳은 그들과 신의 차이는 결국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힘을 부여 받았느냐 마느냐였다.

그 차이는 신이 되고 김우진으로부터 직접 신력을 다루는 법을 제대로 배우자 급격히 좁혀졌다.

물량전도 마찬가지. 열 명의 신들을 포로로 잡았으니 그만큼 저들의 전력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 부족하다.

여전히 신들의 수 차이는 압도적이다.


집행자들 또한 마찬가지이며 두리쉬마가 마물을 모으겠다고 떠난 건 고작 몇 달 전이다.

이걸 해결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율리아.”
“네.”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생각해봤는데요?”
“저놈들이 짜놓은 판이 아니라 우리의 판에서 전쟁을 하면 어떨까하는 그런?”
“백신전을 연옥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건가요?”
“아니.”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차원은 종말을 맞이하면 힘을 잃고 마나가 빠르게 소실 돼. 마기가 대신 그 빈자리를 채워나가지.”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그 과정에서 차원은 점차 변방으로 밀려나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차원이 움직인다는 거야.”
“···제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죠?”
“맞을 것 같은데.”
“연옥을 멸망차원으로 만들자고요? 어떻게요? 두리쉬마님이라도 이용하시게요?”
“아니, 그럴 리가. 그건 최악의 방법이지.”
“의심하지 마십시오. 소장주신이시라면 분명 무슨 방법이 있으실 겁니다. 전능하신 분이시니 말입니다!”
“조용히 해, 디아네.”
“예. 명하신대로.”
“그러면요?”
“우리에게는···.”

김우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집중했다.

“릴리랑 나르가 있잖아.”


“역시 소장주신이십니다! 방법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예?”
“···그게 무슨 미친 소리니?”
“음, 차라리 대지에 마나 추진 로켓을 만들어서 발진시킨다고 하지 그러나?”
“되는 겁니까?”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은가!”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마나 추진 로켓 같은 건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그런 비현실적인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그건 불가능하고 어머니 나무를 이용해 차원을 움직이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율리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한심하게 보는 건가?

“세계수의 뿌리는 차원의 핵에 닿아. 그리고 차원에 간섭할 수 있게 되지. 그러면 차원 내에서 세계수는 반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어. 그게 세계수가 신의 나무라고 불리는 이유지.”
“어디 더 해보렴.”

시에나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어디까지 하나 한 번 지켜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원에 간섭해서 차원을 움직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단순히 차원에 간섭해서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만년이 넘은 세계수의 뿌리는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닿아.”
“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상관이 있지.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법칙이야. 그렇다면 멸망한 차원이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 또한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라는 거야. 그건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이니까.”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그렇다면 다르게 말하면 아카식 레코드가 인위적으로 차원을 밀어내고 있다고 해도 되겠지?”
“네.”
“자, 다시 돌아와서 세계수는 아카식 레코드에 연결될 수 있어.”
“···그···렇죠?”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는 차원을 움직일 수 있고. 세계수는 뿌리를 내리면 거기에 간섭할 수 있어.”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율리아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잠깐만요. 그건 불가능해요.”
“어째서?”
“아카식 레코드와 차원의 핵은 완전이 차원이 달라요. 차원은 그저 세계의 의지라면 아카식 레코드는 전 우주의
의지에요.”
“그건 결국 그냥 크기만 커졌고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 말은.

“릴리와 나르가 뿌리를 아카식 레코드까지 뻗어서 연옥을 백신전과 붙여버리는 거야.”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인데 두 그루의 세계수라는 엄청난 자원을 방치해둘 수는 없지 않은가.

“어때, 릴리? 나르? 할 수 있지?”

김우진의 머리 위에 앉아 꾸벅 꾸벅 졸던 릴리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 미쳐. 내가.

···뭐야, 그 한심하다는 눈빛은.

네가 내 엄마야?

───────────────
# < 106. 시작 >

“안 돼?”

- 안 돼! 못 해!
- 낑낑! 깡깡!

깡깡은 또 뭐야.

“세계수인데 안 돼?”
“소장님? 어머니 나무가 만능은 아니거든요?”
“신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물론 다른 어머니 나무들보다 두 분이서 대단하게 성장한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완전 달라요.”
“어···. 그건 좀 제가 봐도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우진의 파괴적인 의견은 디아네마저도 아주 잠깐이지만, 광신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신들을 섬겨왔기에 알고 있습니다만, 신들은 은연중에 두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파벌?”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기는 신들,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마저도 간섭하여 그 위에 서야한다는 자들.”
“전자는 칼카르와 알비츠고 후자는 베리안이겠군.”
“예, 맞습니다. 역시 소장주신님이십니다. 모르는 게···.”
“이야기나 계속해.”
“물론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입장에서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기는 자들이 훨씬 많았습니다만, 아무튼
그럼에도 신들은 그 누구도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지 못했습니다.”
“해보지 않은 건 아니고?”
“오래 전, 베리안이 시도했었다고 실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주신들과 크게 싸운 적이
있었고요.”
“지금 다시 하고 있다던데.”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져.”
김우진이 릴리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맞췄다.

“릴리. 똑바로 대답해. 할 수 있어, 없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

- ······.

릴리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릴리가 입을 열었다.

- 뭐 줘?

“···맙소사. 어머니 나무님.”

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김우진은 오히려 웃었다.

“그건 가능은 하다는 뜻?”

- 몰라. 근데.
- 이미. 내렸어. 뿌리.

“언제?”

- 한 달.
- 근데. 안 돼. 혼자는.

“그럼 나르하고 하면 되겠네?”

- 확실. 아니.

확실하지는 않다지만 릴리가 이렇게 말했다면 가능성이 0 은 아니라는 뜻이다.

“말도 안 돼. 어머니 나무님,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해요?”


“···세계수가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한다고? 단순히 겉을 읽는 게 아니라?”
“···역시 소장주신님의 세계수는 다릅니다. 저는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붕괴되는 상식에 신들이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김우진도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건 아니었다.

릴리도, 나르도 결코 평범한 세계수가 아니었다. 그들이 잡아먹었고 잡아먹고 있는 신들이 한둘이 아니다.

신의 힘이란 결국 아카식 레코드가 부여한 것. 근원을 따지면 아카식 레코드라는 거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으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랬다면 베리안은 시도조차 못했을 테니.

“뭘 원해?”

- 아니. 됐어.

탐욕스럽던 릴리의 눈이 장난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 농담.

“농담?”

- 나. 이렇게. 덕분. 소장.


- 보답.
- 낑낑!

“···애들아!”

전혀 예상치 못한 감격스러운 말이었다.

김우진이 릴리와 나르를 격하게 끌어 안았다.

이 맛에 사람들이 자식을 키우는 건가.

잘 키운 세계수 열 신 부럽지 않다더니. 과연 그렇다.

* * *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뭐니?”
“어머니 나무에게 다수의 신을 봉인시키면 차원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

대체 수많은 엘프들은 왜 지금까지 이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엘프들은 다 무능해요. 그 오랜 시간동안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알아내지 못하다니. 그렇죠?”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나도 허탈해서 말이 나오질 않네.”

시에나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엘프들은 지금까지 세계수의 진면목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근데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니?”

세상에 그 누가 막대한 수의 신들을 세계수의 뿌리에 봉인시키느냔 말이다. 한 차원에 두 개의 세계수를 심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그건 그렇죠. 연옥에 온 뒤로 정말 놀라기만 하네요.”


“정확히는 소장을 만난 뒤지.”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근데 정말 가능하세요?”

그녀의 시선이 코앞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릴리와 나르에게 향했다.

정확히 두 세계수의 중심에서, 두 엘프는 가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 아마도?
“···아마도? 뭐예요, 그 무책임한 의문문은. 점점 소장님 닮아가시면 안 돼요!”

- 귀쟁이. 잔소리.

“또 귀쟁이! 그거 고치시기로 했잖아요!”

- 내가?
- 증거?

“제가 지난 번에···.”

- 응, 아니야.
- 집중.

릴리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지들이 더욱 촘촘하게 두 엘프를 옭아매었다.

차원을 임의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릴리와 나르가 신들을 잔뜩 집어 삼킨 특별한 세계수이기에, 한 차원에 같이 심어졌고 협동할 수 있기에
그나마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거다.

그나마도 아주 작아 릴리와 나르는 두 엘프 신들을 이용해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

신이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신들과 권속들이 이어져 있듯이, 신들 또한 아카식 레코드와
이어져 있다.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수가 차원이라는 배를 움직이는 엔진과 네비게이션이 되고, 아카식
레코드와 이어진 신들이 선장이 되어 전체적인 총괄을 더한다면.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무엇보다 엘프와 세계수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 그게 아니더라도 신인 엘프가 옆에서 보좌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효율이 올라간다.

- 시작.

“네.”
“나도 준비 됐단다.”

────!

세계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막대한 신력이 차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 * *

세계수들에게 대업을 맡긴 김우진은 연옥을 빠져나왔다.

차원을 움직여 백신전을 치는 건 치는 거고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신들의 아성을 무너트리기 쉽지 않았다.

첫 번째가 연옥이라면 두 번째가 어둠이다. 어둠의 사도 두리쉬마가 이끄는 마물의 군단.


이미 붕괴한 포위망은 의미가 없었고 두리쉬마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김우진에게는 그를 찾을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멀긴 멀어.”

연옥은 하위차원과 상위차원의 중간쯤 걸쳐있다. 그건 그만큼 아카식 레코드, 우주의 중심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며
반대로 종말 차원은 우주의 가장 변두리니 거의 극과 극의 거리였다.

얼마나 멀리 갔는지 백 개가 넘는 차원을 넘었다. 그런데 도착한 곳에는 두리쉬마가 없었다. 대신 알베니우스와
용사들이 있었다.

“두리쉬마님은요?”
“다른 곳으로 갔어. 여기는 저것들이 마물을 대부분 쓸어버렸거든.”

백 여 명의 용사들이 마물의 무리와 격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충 훑어 봐도 전황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백명이 넘는다고 알고 있는데 역시 종말 차원이 저들에게 견디기 힘든 곳이긴 한가 보군요.”


“···그렇지. 다 싸우다 죽은 거야. 종말 차원은 용사들에게 최악의 환경이잖아?”
“두리쉬마님이 적당히 상황을···아. 함께 연옥에 있었죠.”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눈에 독기가 가득하네요? 느껴지는 기운도 어지간한 용사들 이상이고. 저 정도라면 집행자들과 싸워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집행자에 준하는 백 명의 용사들. 무척이나 큰 전력이다.

“전부 연옥으로 데리고 가죠.”


“벌써?”
“벌써가 아닙니다. 베리안이 미친 짓을 계획하고 있어서 생각보다 여유가 없거든요.”
“미친 짓? 뭐,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하기라도 하나?”
“네.”
“···미친 새끼군.”
“모두 집합!”

전투가 끝나고, 김우진은 용사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김우진에 의아함을 품었으나 은은히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얌전히 모여들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만나서 반갑다. 나는 너희들을 이끌고 백신전을 들이 받을 사람이다. 이 양반을 통해서 내가 너희들을 모았다고
보면 된다.”
“···저건 내가 알아서 모은 거거든?”
“가슴에 손을 얹고 저한테 다 맡기려고 모은 게 아니라고 말씀해보시죠.”
“······.”

알베니우스가 얌전히 쭈그러졌다.

“신에게 대적한 강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당신입니까?”


회색 머리의 중후한 용사가 손을 들었다.

“네 이름은?”
“테론입니다. 부족하지만 일단은 이들의 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김우진이다.”

김우진이 전직 용사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내가 아는 얼굴이 없군. 하지만 연옥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옥?”
“용사들의 감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나는 22 년 전 새로 부임한 연옥의 소장이다.”
“···신들의 개?”
“예전이었으면 틀린 말은 아니니 한 번은 봐주겠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

“크윽···!”
“커헉···!”

김우진이 기운을 폭사시켰다. 거대한 압박과 마주한 용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약한 일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테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신들이 임명한 연옥의 소장이 어째서 신들과 적대하려는 겁니까?”


“연옥은 내 감옥이기도 하니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간단하다. 나는 이미 수십의 신들을 죽였고 그로 인해 신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수십의 신들을 이미 죽였다고요?”
“그게 가능한 건가?”
“말도 안 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희들한테 그럴 이유도 없고. 나를 따라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굳이?”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 자신감에 용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도 깨닫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을.

“그 정도의 강자면서 왜 저희가 필요로 한 겁니까?”


“전쟁은 장수만으로 할 수 없으니까.”

따라와라.

“그러면 너희들이 그토록 바라던 신의 몰락을 보여주마.”


“···한 가지만 더.”
“말해라.”
“···밥은 잘 줍니까?”
“밥?”

김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베니우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 양반 갑자기 왜 이래?


“자고로 사람은 밥심이라고 했다.”
“굶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내 수중에는 꽤나 뛰어난 요리사가 있다. 너희가 먹어본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 밥을
해준다고 자부할 수 있지.”
“···정말입니까?”
“심지어 그놈은 마물도 요리할 줄 안다. 별미인지라 꽤나 마음에 들 거다.”
“마물?”
“마물이라고?”
“마물을 먹인다고?”

용사들이 경악하여 웅성거렸다.

“물론 마물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줄은 알지만 다르다. 독을 전부 빼고 어지간한 음식보다 맛있게 조리하는


실력자지.”
“아무리 그래도 마물은 싫습니다!”
“맞습니다! 마물은 이미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마물은 지겨워요!”

마물이 지겹다고?

“꼭 마물을 먹어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먹었습니다. 배 터지도록.”
“먹어? 마물은 독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힘들 텐데?”

하물며 종말 차원의 마물들이다. 아무리 용사들이라고 해도 내성을 기르긴 쉽지 않을 거다.

“예. 그래서 이 정도만 살아남았습니다.”


“···응?”

싸워서 죽은 게 아니라?

“누구 덕분에 말입니다.”

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김우진이 상황을 이해하는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알베니우스님이 하는 게 다 그렇죠, 뭐.”


“이게 왜 내 탓이야! 신들이 갑자기 공격해서 그런 것 아니야!”
“예, 예.”
“난 억울해!”
“저들 앞에서도 똑같이 말씀해보시죠.”
“······.”

* * *

번쩍-
새로운 차원이 김우진의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낸 산이 보였다. 김우진은 그 앞에 섰다. 숨어
있던 수만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리쉬마님.”

산이 눈을 떴다.

“만족할만큼 모으셨습니까?”
“몇 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어둠의 사도가 된 이후, 이렇게까지 바쁘게 움직인 건 처음인 것 같군.”

거인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래도 여러 차원의 마물들을 무작정 쓸어왔으니 질은 몰라도 양은 쓸만하다.”


“그거 좋군요.”
“이렇게 왔다는 것은···.”
“예.”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하다. 수만 급하게 부풀렸지 질적으로는 이전과 차원이 다르다.”
“시간이 없습니다. 베리안이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절대 신인지 뭔지가 되겠다고.”
“아주 돌아버렸구나.”

쿠그그그그-

세상이 떨리기 시작했다. 산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가야겠군.”

거대한 망치가 휘둘러졌다. 긴 궤적에 따라 거대한 균열이 발생했다.

“가자.”

수백만 마물의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107. 직전 >

마물은 본능적으로 차원을 넘어 다닌다.

한 차원에 어둠의 사도가 선택되고 멸망이 어느 궤도에 올라 차원에 마기가 흩뿌려지기 시작하면 마물들은
그곳으로 자연스레 이끌린다.

차원의 방벽을 갉아 먹으며 균열을 일으키고 차원을 침범해 멸망을 부른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섭리다.

허나, 세상은 언제나 섭리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멸망이 진행 중인 세계가 꿀벌을 유혹하는 꽃처럼, 마물들을
유혹하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 모든 과정을 무시할 수 있다.

“가자.”

크르르르-
크워어어어어!

마물들이 포효했다. 갈라진 균열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거인이 권능을 발휘하자 차원과 차원을 잇는 길이 펼쳐졌다.

그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카식 레코드와 더 없이 가까운 백신전이었다.

마물의 파도가 백신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두리쉬마를 움직인 김우진은 다시 연옥으로 돌아왔다.

알베니우스, 그리고 백 여명의 용사들이 함께였다.

“···내가 살아생전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이···여기가 연옥이라고? 내가 알던 연옥과는 너무 다른데?”


“맙소사, 세계수가 두 개나?”
“신! 신들이다!”

그들은 연옥의 모든 부분에서 경악했다.

그들중에는 김우진 이전의 소장 시대에 연옥에 갇혔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은퇴 용사라는 게 그렇다. 집행자가
되거나, 그냥 힘을 포기하거나, 연옥에 갇혔다가 포기하거나.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현재의 연옥은 그들이 알던 연옥과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두 그루의 세계수와 일곱의 신들, 넘쳐나는 마력포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죄수와 집행자들까지.

연옥보다는 차라리 백신전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신들이 백신전을 배신한 겁니까?”


“아니, 저들도 본래는 죄수였다. 하지만 내가 직접 가르치고, 신들을 죽여 새로운 신으로 만들었지.”
“그런 게 가능···하군요.”

테론이 헛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증거가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테론을 시작으로 용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환영한다. 교도관들이 널 안내해줄 거다. 따라가도록. 백신전과의 전쟁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놓고.”
“예!”

집행자들에게 용사들을 맡긴 김우진이 세계수들을 찾았다.

두 세계수는 차원을 움직일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두 그루의 세계수 사이에 가지와 뿌리에 묶여 얼굴만
내밀고 있는 두 엘프신들은 꽤나 우스웠다.

“···웃지 마세요!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세이드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고 있지.”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가시죠!”
“릴리한테 소장을 닮으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너부터 조심해야 할 것 같지 않니?”
“네? 제가 왜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너도 이미 글러먹은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김우진은 발끈하는 율리아와 시에나를 내버려두고 양손을 뻗었다. 한 손에는 릴리가 날아와 앉았고 다른 손에는
나르가 얼굴을 부볐다.

“될 것 같아?”

- 응.
- 낑!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에 성공한거야?”

- 응.

“수고했어. 릴리, 나르. 정말 자랑스러워.”

- 헤헤. 느려. 근데.


- 어흥!

“상관없어.”

갈 수 있다는 게, 세계수들의 힘과 권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백신전에 당도하면 차원의 방벽을 해제하고 두 차원을 섞어야 해.”

이미 전례가 있다.

알베니우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종말 차원들은 변방으로 밀려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혀 합쳐지기도 한다고 했다.

- 가능. 아마도?

“그거면 됐어.”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출발하면 백신전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일주일 정도.

“딱 좋네.”

마물의 군단도 아마 그쯤 걸릴 거다. 주신을 초월한 김우진이 혼자 움직이는 것과 수백만의 마물들이 움직이는 건
다르니까.

비슷한 시기에 백신전을 합공할 수 있다.

“출발하자, 릴리, 나르.”

- 응!
- 끼잉!

────!

차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마물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마물은 필연적으로 마기를 방출한다. 그들의 대규모 준동은 우주를 관장하는 신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대규모 군단이 차원과 차원을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종말 차원에 그치고 있습니다만, 이대로는 종말
차원이 아닌 하위 차원에 발을 들이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로를 예상해 보건데···.”

백신전 중앙에 떠 있는 홀로그램이 가상의 선을 하나 그었다.

마물들이 발호하기 시작한 이름 모를 종말 차원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로. 그것의 끝은 신들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백신전이구나.”
“그자가 분명합니다. 김우진을 돕던 어둠의 사도.”
“어둠에게 영혼을 판 타이탄입니다.”

어둠의 사도가 연옥에 숨어 김우진과 함께 알비츠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포위망을 뚫고 변방으로
도망쳤다.

그때부터 지금의 일은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연옥 쪽은?”

그리고 어둠의 사도가 단독으로 움직일 리도 만무했다.

“포위망을 완전히 걷어 열 명의 신들을 붙잡은 이후,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만?”
“무언가 이상합니다.”
“그건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각과 관련된 권능을 가져 주신을 제외하고 그 어떤 신보다 예민한 신, 파라트가 보고를 올리던 집행자 대신
앞으로 나섰다.

“연옥의 차원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이한 파동을 흩뿌리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인다니? 무엇이 말이냐?”
“차원입니다.”
“······!”
“······!”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옳은 소리! 차원이 움직인다니. 차원의 이동은 오직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차원이 움직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종말을 막지 못한 차원은 자연스레 변방으로 밀려난다. 그것은 태초부터
내려온 우주의 순리다.

하지만 연옥은 종말 차원이 아니었고 움직일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용.”

알비츠의 말에 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파라트, 네가 허언을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 미세하긴 하나 틀림없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로는 이곳 백신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능한 것인지, 나 또한 의문이 든다.”

감히 신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 차원을 움직인다는 건 그런 일이다.

하물며 본래의 순리대로 변방이 아닌, 오히려 차원의 중심으로 온다니.

“직접 확인해보겠다.”

자포자기하여 몇 달 동안 침거하던 알비츠가 마침내 무거운 엉덩이를 때었다.

“모시겠습니다.”

수십의 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백신전을 벗어나 연옥이 보이는 차원의 경계까지 다다른 알비츠는 파라트의 말이 맞다는 것을 느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감히 신조차, 나조차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실현하다니···.”

너무 엄청난 일인지라 분노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경외가 일었다.

그는 백신전의 최고라는 주신임에도, 일개 피조물인 김우진 따위에게.


동시에 잃어버렸던 투지가 되살아났다.

“···김우진을. 김우진을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아니, 그건 투지가 아니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나는 반발심이었다.

그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는 김우진에 대한 두려움. 이대로 두면 정말로 백신전의 세상이 끝날 수도 있는


공포.

그들처럼 신으로 오랫동안 군림한 것도 아니다. 아카식 레코드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것도, 살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집행자들을 모두 소집해라.”

죽여야만 한다. 더 커지기 전에.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기 전에.

알비츠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었다.

‘···베리안이 김우진을 이길 수 있을까?’

일개 인간 대 주신임에도.
최초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성공한 신임에도.

‘···대체 어떻게.’

그 또한 짐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두렵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마물과 함께 연옥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김우진이 전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연옥을 굳이 끌고 오는 것은 아마 세계수라는 이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일 거다. 생각을 할수록 기가 찬다.


세계수를 이용하기 위해 차원을 움직이다니.

“믿기지 않지만 연옥을 움직일 정도라면 충분히 우리를 짓뭉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거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알비츠가 반발하는 신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눈앞의 저걸 보고도 아직도 김우진이 하찮은 피조물로 보이느냐?”


“···아, 아닙니다.”
“우리조차 차원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헌데 놈은 하고 있지. 놈은 충분히 백신전과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고작, 고작 40 년 남짓이었다. 정체되어 있는 신들의 아성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주었던 한 번의 기회가 지금의
사태까지 왔다.

‘베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됐다···!’

뒤늦은 후회고 베리안을 탓할 것도 없다. 그때는 그도, 칼카르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둠의 사도는 능히 주신과 맘먹는 강자다. 어둠의 사도와 김우진이 동시에 우리를 공격한다면 큰 문제다.”
“허면···.”
“그러니 그전에 우리가 연옥을 친다.”

마물들이 당도하기 전에.

“어둠의 사도보다는 김우진 쪽이 더욱 난적이다. 그러니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때 김우진을 끝장내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김우진이 연옥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외부에서 연옥의 차원의 방벽을 찢어도 문제다. 방벽을 부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방벽을 부순다고
차원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면.”
“상관없다.”

불쑥,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

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언제부터일까, 그곳엔 베리안이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자연스럽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알비츠가 경악했다. 주신인 그조차 베리안의 기척을 아예 감지하지 못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베리안이 동등한 상대였던 알비츠를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성공했다는 것.

간섭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주신은 그조차 베리안에게서 무엇 하나 읽어낼 수 없는
시점에서 감히 그가 평가할 수준이 아니었다.

“···상관이 없다고?”
“그래.”

베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바를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주신이시여!”

신들 또한 베리안의 각성을 눈치 채고 무릎을 꿇었다. 베리안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경배를 받으며 기운을 끌어
모았다.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순간.

세상이 요동쳤다.
번쩍!

저 멀리, 세상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솟구쳤다. 빛들은 신들을 감쌌다. 연옥을 감쌌다.

알비츠는 심장 언저리에 머물고 있던 구속이 풀려나가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신들이 같은 걸 느꼈다.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이었다.

“김우진. 아주 재미난 짓을 하고 있구나.”

그조차도 대체 어떻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하던 이미 늦었다.

베리안이 웃었다.

───────────────
# < 108. 대답 >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

새하야면서 신성한 빛줄기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차원의 방벽을 통과해 연옥 전체를 휘감았다.

김우진을 감쌌다.

철컹-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우진은 그렇게 느꼈다. 그를 속박하던 제약이 끊어졌다.

“아.”

신 둘을 죽이고 주신 베리안과 처음 만난 그날.


빛으로 이루어진 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그때부터 김우진의 심장과 영혼을 옥죄던 계약이 사라졌다.

“···계약이 사라졌다.”

정식으로 서로 조건을 완수해서 종결된 것도, 누군가 어겨서 파기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성공했구나. 베리안.”

연옥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마물들이 진격하고 있다는 것도.

연옥이 당도하기까지 계산이 섰을 텐데 그럼에도 하필 이 타이밍에 계약을 없애버렸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모두 전투 준비!”
김우진이 소리쳤다. 그의 고함이 갑작스러운 빛줄기에 당황하던 연옥의 구성원들을 일깨웠다.

“릴리! 나르! 그만! 더 이상 의미가 없어.”

- 없어?
- 낑?

“소장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방금의 빛과 관련이 있니? 신의 힘 같았는데.”
“신들이 계약을 지워버렸습니다.”
“···간섭한다고 했던 그거구나.”
“네.”
“그러니까 그말은···.”
“우리를 먼저 치겠다는 거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벌어진 한 방이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되면 굳이 연옥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저들이 직접 이곳에 발을 들일 테니.

- 전투 준비?

“그래, 릴리, 나르. 신들이 공격해올 거야. 대비해줘.”

- 응!
- 낑!

두 엘프 신들을 감쌌던 세계수의 가지들이 회수되었다. 김우진의 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마력포를 언제든 쏠 수 있도록 준비해 놔!”


“특제탄은 조심해서 다뤄라! 자칫 잘못해서 터지면 네 목숨이 날아가!”
“신들이 온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도록!”
“성전! 마침내 성전의 순간입니다! 소장주신님을 따라 악마들을 토벌합시다!”

마력포를 장전하고 각자의 무기와 갑옷을 챙겼다. 세계수의 뿌리들이 연옥 전체를 휘감으며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러길 잠시.

쩌저저저저적-

균열이 일어났다. 아니, 방벽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맙소사.”
“세상이 무너진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재앙은 마치 세상의 종말과 같았다.

- 적···!
- 끼이이이잉!
방벽 자체를 무너트리는 거대한 힘 앞에, 두 세계수의 경계심이 올라갔다. 차원의 핵을 넘어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은 두 세계수에게 있어 연옥은 완벽한 자신들의 영역이었다. 그게 너무도 쉽게 침범 당했다.

그리고 붕괴한 균열들 사이로.

적들이 나타났다.

수천 명의 집행자들.
수십의 신들.

그리고 그 너머.

두 명의 주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역자 김우진과 그를 따르는 반역자 무리에게 전한다!”

신 하나가 권능을 담아 소리쳤다. 연옥의 일원들 중 나약한 이들이 귀를 잡고 비틀거렸다.

“백신전은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너희들은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을 능멸하고, 신을 죽이며, 백신전의 위엄을 깎아내렸다.”
“멸해야 할 악과 손을 잡고 우주의 균형을 어그러트렸다.”
“이에, 백신전은 김우진과 그 무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선고한다!

집행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신의 힘은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그 모습은 각오를 다지고 신들에게 복수하겠다며 모인 용사들마저도 주춤하게 만들었다.

“데르카인님. 화답 부탁드립니다.”
“아주 거하게 해주지.”

데르카인이 직접 움직였다. 신력을 담아 가장 거대한 마력포를 발포했다.

─!

고막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모든 소음을 잡아 먹는다.

거대한 섬광이 공간을 일그러트린다.

권능에 가까운 그 힘은 순식간에 목표물의 코앞에 당도한다.

그 순간, 신 하나가 권능을 발현한다. 신성한 방패가 백신전과 섬광의 사이를 가로 막는다.

그 직후, 섬광이 폭발을 일으킨다.

─────!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일순간 증발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멸한 집행자들이었던 가루의 잔재가, 중상을 입고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신들의 무리가, 예상 못한 파괴력에 당황한 또 다른 신들의 무리가 있었다.

“이게.”

반역자, 김우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직한 중얼거림에도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먼 거리였으나 김우진은 정확히 베리안을 찾았다. 베리안도 김우진을 마주보았다.

“내 대답이다. 씨발놈아.”

* * *

대답은, 대화는 한 번이면 족하다.

전쟁을 하는데 사족이 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언어의 대화가 아니라면 그만둘 이유도 없다.

“쏴라!”

모든 마력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멍청한 놈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이 우주를 다스리는 백신전이냐!”


“다 같이 모여서 오면 ‘맞춰주세요!’하고 비는 것 밖에 더 돼?”
“다 죽여 버려!”
“신이고 나발이고 위대한 마력포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라!”
“마력포의 신, 데르카인 만세!”

드워프들에게는 전쟁의 승패보다 자신들이 만든 마력포의 위력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마력포의 파괴력을, 그 마력포가 신들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광분에 휩싸이게 했다.

설명은 길었으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예상치 못한 한 방에 신들의 대응은 늦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백의 집행자들이 쓸려나간 뒤였다.

“저 반역자들을 죽여라!”
“감히 백신전에 대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줘라!”

와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집행자들이 진격을 시작했다. 그들 사이로 마력포들이 다시 한 번 불을 뿜었으나 여전히 수천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뒤로 신들 또한 움직였다.

- 적! 죽여!
- 어흥!

세계수의 권능이 적들을 공격했다. 나뭇잎은 하나하나가 신조차 베어 넘기는 칼날이 되어 쏟아지고 수천 줄기의
가지와 뿌리들은 집행자들을 유린한다.

그 뒤로 죄수들이, 용사들이 적들을 맞이한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가시죠.”
“네. 드디어···!”
“정말 많긴 많구나.”
“소장주신이시여, 당신의 검이 되어 저 간악한 자들을 주살하겠나이다.”
“내 장기는 요리인데, 쓰읍.”
“내 독이 통할까? 그래도 같은 신이니까 통하겠죠?”
“모조리 찢어버리겠습니다!”

신들이 움직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리쉬마랑 함께 있는 건데.”

차원룡도 움직인다.

하지만 김우진은 본래의 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그의 시선이 알비츠에게, 그 너머 베리안에게 닿았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형의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

베리안의 웃음이 그리 속삭인다. 한쪽이 움직이면 다른 쪽도 움직인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으면 일단은
지금의 상태가 계속된다.

무언의 협의가 오고 간다.

그리고 그 협의는.

───!

새하얀 백염이 주신들을 직격하면서 끝이 났다.

주신 둘이 있으니 불리하긴 하다. 하지만 불리한 건 김우진뿐 아니라 휘하 병력들도 마찬가지다.

백신전의 신들은 주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김우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결국 대장만 잡으면 끝난다. 대장을
잡아야 끝난다.

시간을 끌면 두리쉬마가 당도하겠지만 그 전에 아군이 전멸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니 싸워야 한다.
물론 불안감은 있다.

상대는 두 명의 주신이다. 그 중 한 명은 무려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겠다고 몇 달 동안 칩거를 했던 놈이다.

무려 차원의 방벽 자체를 허문 것으로 보아 그 칩거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놈이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얼마나 흡수했고 그 권능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자신 있게 나온 것을 보면 결코 만만하지 않을
터.

물론 김우진 또한 믿는 게 있다.

어째서인지 외팔이가 되어버린 알비츠.

그리고 일곱 신을 만들기 위해 죽은 신들이다. 그들은 두리쉬마의 업이 되었으나 그 힘은 김우진의 권능에


포식되었다.

무려 일곱의 신. 주신 칼카르와 이전에 흡수한 두 명을 합하면 딱 열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열 명의 신을


흡수하지 못했다. 그 중 한 명이 주신인 건 더욱 말도 안 된다.

주신이 두 명이라고?
한 명은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해 그 권능의 일부를 얻었다고?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김우진이 포효했다. 불꽃이 터져 나왔다. 알비츠의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베리안의 눈에 이체가 떠올랐다.

섬광이 불꽃과 충돌했다.

* * *

칼카르의 불꽃은 알비츠의 얼음을 완전히 녹이지 못했다.

둘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신이었고 누구도 쉽게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허나, 김우진의 불꽃은 달랐다. 기존의 적염보다도, 칼카르의 홍염보다도 뜨겁고 신성한 백염은 모든 것을
불태웠다.

얼음을 녹이고 증기마저도 완전히 말살한다.

알비츠는 깨달았다.

주신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그는 김우진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베른이 잡혔을 때부터? 칼카르가 죽었을 때부터?


모르겠다. 중요한 건 주신인 알비츠마저도 감히 저 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새하얀 백염과 더 새하얀 백광이 부딪히는 전장터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아무리 김우진이 칼카르를 먹었어도.


아무리 김우진이 수많은 신들을 삼켰어도.
아무리 베리안이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했어도.

그 또한 주신이었다. 저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서야만 했다.

“감히 백신전에 대항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굴욕과 무능함, 그리고 수치는 분노가 되어 또 다른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쩌저저적-

냉기가 공간마저 얼리며 용사들을 휩쓸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스라지는 모습은 신에게 대항한
반역자들에게 마땅히 펼쳐져야 할 모습이다.

그래, 이거다. 이게 신으로서 천벌을 내리는 바른 모습.

“···세계수.”

그의 시야에 거대한 가지를 휘두르며 신들을 공격하는 세계수들이 보였다. 단숨에 밀어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수차이에도 생각보다 시간이 끌리는 것은 저들 때문이었다.

연옥 자체가 저들의 권역이기에.

“저걸 뽑으면 끝···.”

───!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떨어졌고 급하게 만든 얼음의 방패는 그것을 완벽하게 방어해내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튕겨져 나갔다. 무거운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그건 망치였다. 본래는 산과 같으나 임의대로 크기를 줄인 거인이었다.

마물들을 이끌고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의문은 놈이 뒤에서 기습을
하기 직전까지,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주신인 그가.

“명령을 내려놓으면 굳이 내가 직접 있을 필요 없지.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역시나군.”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어떻게 네놈의 감각을 속였느냐, 이 말인가?”

두리쉬마가 웃었다.

“네 덕분이다. 알비츠. 네 덕분에 힘을 완전히 잃고 다시 얻는 과정에서 기척을 더욱 완벽하게 숨길 수 있게


되었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네가 납득하든, 하지 않든 그건 딱히 중요치 않다.”

어차피 네놈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두리쉬마가 망치를 휘둘렀다.

───────────────
# < 109. 세계수는 신이고 김우진은 무적이다 >

신들의 전투란, 권능의 싸움이다.

권능.

단순히 마나를 끌어 올려 힘을 표출하는 것과는 다른, 한 차원 이상의 이적.

평범하지 않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기에 권능이라 불린다.

빛이 형태를 가지고, 불꽃이 얼음을 태우며, 차원과 공간을 찢고 세상을 무너트리는 힘.

그 힘의 정도가 주신마저도 아득히 뛰어넘으니 전투는 일반적인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을 일부 손에 넣은 베리안도.


수백의 용사들의 유지를 잇고, 수십의 집행자들을 삼켰으며, 열의 신들을 먹은 김우진도.

서로를 마주보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의지대로 권능을 발현시켰다.

콰콰콰콰-

신성한 섬광이 불꽃을 소멸시킨다.


극한의 열기가 빛마저 녹인다.

콰콰콰콰!

범람하는 불꽃이 공기마저 불태우며 전진한다. 주신을 뒤덮기 직전, 새하얀 빛의 구가 주인을 지켜낸다.

들끓는 불꽃은 모든 것을 부순다. 빛은 수호한다.


폭발하듯 쏟아지는 빛줄기가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다. 김우진의 의지에 이끌린 백염이 빛마저도 삼키며 전진한다.

김우진이 한 수를 두면, 베리안이 받아친다. 빛과 불꽃이 뒤엉키며 주변을 집어 삼킨다.

붕괴한 하늘의 조각들이 떨어져 내린다.

- 뜨거···!
- 끼이이이잉!

다급히 본체를 보호하는 방어막을 형성한 릴리와 나르가 비명을 질렀다.

주신마저 초월한 신들의 싸움은 단순히 대단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권능과 권능이 부딪히니 대지가 무너지고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 여파는 그대로 차원을 직격하며 차원의 온도를
올렸다.

그 여파로 인해 전투는 이미 소강 상태가 된지 오래였다.

연옥의 중심에서 싸우는 두 신들의 전투는, 그 여파는 같은 신이라고 할 지라도 쉽게 견디어 낼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으며 그 휘하의 집행자나 용사들은 더욱 그랬다.

불꽃과 섬광은 점점 범위를 늘려나갔고 신들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닌 생존을 택했다.

“모두 물러나라!”
“연옥을 벗어난다!”

집행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 정도 수준이라니.”
“아카식 레코드에 정말로 간섭을 성공하셨구나.”
“아니,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은 주신께서 강한 것은 당연히 알겠소. 헌데 거기에 밀리지 않는 김우진은 대체
뭐란 말이오!”

그제야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신들이 경악했다. 연옥을 지키는 차원의 방벽은 이미 소멸했기에 경계는
흐릿해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태양과도 같은 열기는 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능이었다.

단순히 베리안이 그것을 만들어 냈다면 이해했을 거다.

하지만 저 태양은 베리안과 김우진이 만들어내는 권능의 충돌이었다. 차원 전체를 뒤덮고 차원을 삼켜버리는 진짜
이적이었다.

“···대체 김우진이 왜 저렇게까지 강한 거냔 말이오!”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베리안님이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해 힘을 부여 받은 게 다행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시체가 되어 있는 건 우리였을 테니.”
“······.”
“···다 지난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다.”
“알비츠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김우진은 절대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 놈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김우진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알비츠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어?”

신들이 그제야 잊어버린 주신을 찾았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타이탄?”
“어둠의 사도···!”
“어느 틈에?”

태양의 여파가 흠씬 미치는 곳에서 타이탄과 격전을 벌이는 알비츠를.

* * *

─!
──!
─!

쉴 새 없이 충격파가 터진다. 망치가 휘둘러질 때마다 마기와 얼음들이 바스라진다.

알비츠는 속절 없이 밀려났다.

“명색이 주신이라는 놈이 고작 이 정도인가?”


“닥쳐라···!”
“칼카르놈에 비하면 우습기 그지 없구나!”
“반역자 따위가 감히!”

최악이다.

알비츠가 이를 악물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그를 뒤덮었다.

평소라면 이럴 이유가 없었다. 두리쉬마는 단순히 마기를 몸에 두르고 휘두를 뿐이다. 그 강맹함은 능히 권능이라
불릴 만큼 파괴적이지만 그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베리안과 김우진의 권능이 뒤엉키면서 만들어낸 여파가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신들과 차원마저 녹여버리는 가공할 열기가 그의 권능을 방해했다. 주신이기에 그 여파속에서도 버텨내며 권능을
발현시킬 수 있었지만 그게 한계였다.

얼음은 반쯤 녹아 흐물흐물했고 냉기는 아주 잠깐 반짝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남은 것은 결국 육체적인 능력이었으나 타이탄이라는 족속들은 애초에 육체적 능력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족속들이었다.

“···이런 말도 안 돼는!”
약해서, 혹은 팔이 뜯겨서도 아니었다. 베리안이 그를 구속해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베리안과 김우진의 전투 여파로 인해, 알비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꼴이 우습구나.”

도망치고 싶었다. 적어도 이 거지 같은 곳에서 조금만 멀어진다면, 그래서 권능을 좀 더 원활하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럼 저 멍청한 거인놈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의 위기에 놓이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거인은 조금 둔해보일지언정 둔하지 않았다. 멍청해보임에도 멍청하지 않았다.

온 몸으로 열기를 받아내며 피부가 벌겋게 익고 살갗이 벗겨지고 있음에도 놈은 그것을 감내했다.

알비츠가 도망치는 것을 막으며 어떻게는 열기의 중앙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놈에게도 열기는 해악지만 알비츠만큼은 아니기에.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

거대한 망치가 알비츠를 강타했다. 반쯤 녹아내린 얼음의 방패는 재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과 함께 그의 신형이 흐물거리는 대지 깊숙이 처박혔다.

“매일 같이 악몽을 꿨다.”


“번개에 잿더미가 된 내 동생의 모습을.”
“사지가 찢겨나간 아버지의 모습을.”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한 어머니의 모습을.”
“네놈들이 쌓아올린, 동족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산을!”

마기가 폭주했다. 적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네놈들은 죽어 마땅했다! 감히 백신전의 질서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던 반역자들! 먼저 백신전에 반기를 든 건


네놈들이었다!”
“가만히 있던 우리가 일어나게 만든 것이 누구냐! 가루다들을, 포이닉스들을 멸종시킨 게 누구냐!”
“그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신들의 칼날이 너희에게 향했느냐? 지레 겁먹고 반기를 든 것을 우리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반기를 들었다는 것 자체가 네놈들의 오만이다! 이 세상은 모두의 것이다! 네놈들의 것이 아니라!”
“그건 백신전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반역도들의 망상이지. 이 세상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

설사 백신전의 패권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세력 간의 충돌로 인한 자연스러운 도태다. 패배자는 죽고 멸망한다. 그것이 섭리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네놈들이 멸망할 차례군.”
“아니, 베리안은 승리할 거다.”
두리쉬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김우진이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저 전투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가 있다.

“놈의 승패를 떠나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내 손에. 내 손으로!”

두리쉬마가 망치를 들어올렸다.

“네놈들에 의해 고향이 불탔고!”


“모든 동족을 잃었다!”
“나는 피눈물을 삼키며 벌레처럼 도망쳐야만 했다!”

고작 네놈들이 만들어 놓은 그 잘난 판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매일 같이 곱씹었다.

“네놈들의 사지를 찢고!”


“목을 꺾고!”
“짓밟는!”
“백신전을 무너트리는 그 순간을!”

매일 같이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을!”
“아깝구나. 저 빌어먹을 열기만 아니었다면 우리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을 텐데.”

망치가 떨어졌다.

* * *

“모두 도망쳐라!”
“세계수의 곁으로!”

부소장 또한 교도관과 용사들을 이끌고 세계수의 본체로 달렸다. 그들의 품 안으로 들어가자 몸을 녹일 것 같았던
열기가 그나마 줄어들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뭐예요?”

율리아가 혀를 내둘렀다. 같은 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역시 소장주신님이십니다. 이 뜨거운 열기가 저 악적들을 모두 정화할지니···!”


“제기랄, 싸우고 싶은데 털이 탈까봐 나가지를 못한다니···.”
“독이 모두 타버려서 쓸모가 없습니다.”
“마력포가 열기에 잡아먹히는군. 지금까지 많은 신들을 보았지만 처음으로 진짜 신을 보는 기분이네.”
“저 열기로 요리를 하면 고기도 0.0000000001 초만에 익지 않을까요?”
“익는 게 아니라 소멸할 것 같은데요.”
헛웃음을 짓던 율리아의 시선이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릴리에게 닿았다.

“어머니 나무님, 괜찮으세요?”

- 아니.
- 끼이이이잉···.

릴리와 나르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방어막을 만들었으나 열기는 그마저도 녹여버리고 있었다.

파괴와 재생의 반복.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모두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마저도 신들을 흡수한 릴리와 나르라는 특별한 세계수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불타 사라졌을 거다.

“얼마나 버틸 수 있으실 것 같아요?”

- 조금.

율리아가 신음을 삼켰다. 그렇다고 릴리와 나르를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일단 최대한 힘을 보태드릴게요.”


“나도.”

두 엘프 신들이 세계수의 본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되었지만 그뿐이었다.

- 안 돼.

릴리가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대로는 안 된다.

릴리의 시선이 태양의 중앙으로 향했다. 두 신들의 격돌이 이루어지는 곳.

- 도움.
- 낑?

릴리가 나르를 불렀다. 끔찍한 더위에 힘들어하던 나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보여? 저거.
- 낑.

세계수들이 눈을 감았다. 차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밀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다. 실제로도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작게라도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꽤나 크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놀랍다.”

여전히 권능과 권능이 부딪힌다. 주변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그럼에도 베리안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땀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김우진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폭발과 충돌이 일어나는 소음 속에서도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은 나와 잠시나마 대등한 전투를 펼치다니. 백신전의 신을 얼마나 먹은 거지?”


“알 빠야?”
“허나, 거기까지다.”

베리안이 웃었다.

“넌 결국 신들을 먹어 치운 괴물일 뿐이지. 진정한 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관리자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집주인을 문 개새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쉽구나. 네놈의 그 입담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씩, 빛이 불꽃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김우진. 넌 꽤나 힘겨운 상대였다. 자칫하면 백신전이 사라질 뻔했어. 인정하지. 내가 신으로서 살아온 그
수많은 세월 중 너만큼 나를 애먹인 자는 없었다.”

빛이 강해진 것도 있었지만 불꽃이 약해진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너에게는 조금이지만 감사한다. 내 의도보다 더 골칫덩어리가 되기는 했지만.”


“뭐라고?”
“난 네가 백신전을 혼란스럽게 만들길 바랐다. 그 상황에서 다른 주신들을 정리하고 아카식 레코드를 손에 넣을
생각이었지.”

그런데 설마 네가 칼카르를 죽일 줄이야.

“좀 많이 어그러지긴 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다 싶더라니.”
“고작 신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신을 죽인 죄인을 살려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덕분에 다른
주신들을 설득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었다.”
“그래서 참 좋으시겠네.”
“좋다마다.”

베리안이 대소했다. 그의 감정에 따라 빛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김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 이 세상은 나의 것이다. 백신전은 내 아래 보다 확실한 지배자로 우뚝 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진정한 신이 되었다.”


“관리자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나? 그러면 주인을 문 개새끼는 어때?”
“마음껏 지껄여라. 오늘로 듣는 것도 마지막이···.”
그 순간이었다.

─────!

불꽃이 강해졌다. 빛을 녹이며 전진했다. 빛이 바래졌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베리안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 내가!

동시에 릴리가 김우진의 어깨에 앉았다.

- 했어.

“릴리?”
“···세계수?”

- 힘. 톡.

릴리의 말은 간단했으나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간단한 삼단논법이다.

릴리는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할 수 있다.


베리안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었다.
릴리는 베리안에게 간섭할 수 있다.

- 영역! 내!

물론 릴리의 간섭은 결코 절대적인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연옥은 릴리의 영역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뿌리를 내렸고 차원의 핵을 넘어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았다.

십 단위의 신들을 삼키며 다른 세계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녀의 영역에서 만큼은 그녀가 주신이었다.

그래. 모든 것을 그녀의 뜻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하거나 엄청나지는 않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한


주신과 아카식 레코드의 연결을 잠시지만 흐릿하게 만들 만큼 대단했다.

비록 그 대가로 다른 곳에 신경을 못 쓰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전장에서 이탈하고 전체적인 전황이 기울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잘했어, 릴리.”
“···이런 말도 안 되는···!”

김우진에게 ‘승리를 맛볼 기회’로서는 충분했다.

“이까짓 것 따위···!”
베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 애썼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잘 안 되나 봐?”
“닥쳐라! 나는 절대신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건 없어!”
“절대신이라니. 와,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네.”

풉, 여유를 되찾은 김우진이 웃었다.

“이래서 자식, 자식 하나 봐.”

잘 키운 세계수, 일곱 신 안 부럽다니까.

신이 일곱이나 되는데 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세계수지?

김우진이 남아 있던 모든 힘을 쥐어짜냈다.

“판 뒤집혔다, 이 개새끼야.”

불꽃이 신을 덮쳤다.

───────────────
# < 110. 청출어람 >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베리안은 태초에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았다.

그는 최초의 초월자였고 최초의 신이었으며 주신이자 절대신이다.

세 명의 주신 아래 이루어진 백신전의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관리자라고 불림에도 마음한구석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싫었다.

아카식 레코드.

우주의 의지가 그를 선택해준 것은 감사한 일이었으나 목줄을 찬 개와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임에도 하위 차원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신임에도 다른 자들의 눈치를 봐야한다.
신임에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군상들을 봐야 한다.
신임에도, 신임에도, 신임에도!

그게 어떻게 신인가.
그게 어떻게 절대자인가.

신이란 지고한 존재다.


신이란 위대한 존재다.
신이란 유일무이한 존재다.

한 단계 아래라고 한들 신이라 불리는 이들이 97 명이 존재하며, 같은 선상의 주신이 2 명이나 더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신 위에 아카식 레코드라는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김우진 같은 피조물이 관리자라고 불러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완전히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함이다.

그래서 김우진을 이용했다.

백신전에 혼란을 주고, 그 틈에 아카식 레코드를 흡수해 진정한 절대신으로 거듭날 생각으로.

“네 역할은 거기서 끝이다! 여기까지야. 이 앞은 네가 설 자리가 없단 말이다!”

생각 이상으로 날뛰어 칼카르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이 당했으나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아카식 레코드의 일부를 취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명확했다.

백신전의 반역자, 김우진을 참살하고 그 무리를 소탕한다. 그리고 신들의 떠받듬을 받으며 절대신으로 군림하고,
동시에 아카식 레코드를 완전히 그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되었을 텐데···

어째서.

“네까짓 놈이 끝까지 내 앞으로 가로 막으려 하냔 말이다!”

빛이 폭발한다.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끊어진 빛은 한층 바래져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소멸시킬 정도로 거대하다.

문제는 빛에 대응하는 염화는 바래진 빛으로는 잡기 힘들다는 거다.

화륵-

불꽃이 빛마저 불태운다. 빛을 재물 삼아 더더욱 화려하게 불꽃을 피워낸다.

“나는 절대신이다!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해! 너도 예외는 아니다, 김우진!”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초라한 절대신이군. 그럼 나는 아카식 레코드쯤 되려나?”

여유가 있을 때는 듣기 좋았던 김우진의 입담이 지금은 더 없이 그의 분노를 자극했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입술을 짓이기며 김우진을 노려보았다, 그의 어깨 위에 앉은 세계수의 정령이 보였다.

“···그래. 세계수.”

모든 원흉이 저것이었다. 저것만, 저놈만 죽여 버린다면 모든 게 원래의 순리대로 돌아온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다시 사용할 수 있으며, 김우진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니 나무를 불태우면 된다. 나무를.

이를 악문다. 눈에 핏발이 선다. 바닥까지 긁어낸 신의 힘이 토해진다.

────!

신이 만들어낸 마지막 섬광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김우진을 넘어 간신히 열기에 저항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로 향한다.

“감히 신에게 대항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죽어라! 멍청한 나뭇가지여!”


“멍청한 건 네가 아닐까?”

하지만 빛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불꽃이 나무와 빛 사이를 가로 막는다.

“내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지금 가만히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어?”

- 했어?

“신이라는 새끼가 참 멍청하네.”

- 멍청이.

릴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따라온다.

불꽃이 빛을 따라 번져온다.

빠르게, 하지만 확실하게. 빛을 좀 먹으며 전진한다.

“이건 말도 안 돼···!”

어째서 저런 버러지 따위에게?


어째서 고작 이따위 불꽃에 그의 빛이?
겨우 세계수가 조금 도와줬다고?
어째서, 어째서···!

“말이 안 된단 말이다!”

핏발이 선 베리안이 발악하듯 외쳤다. 일시적을 빛이 더욱 밝아졌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불꽃이 그의 주변을 완전히 잠식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본신을 보호하는 아주 미약한 일부.

한 때는 주신이었고 스스로를 절대 신이라 자부하는 자의 권능치고는 더 없이 초라했다.

“말이 안 되긴.”

권능은 더 큰 권능에 먹힌다.

그게 상식이다. 그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순리잖아?”

그러니 릴리로 인해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잠시 끊어진 베리안이.


그로 인해 열 명의 신을 먹은 김우진보다 권능의 힘이 약한 베리안의 빛이.

김우진의 불꽃에 잡아먹히는 것은.


더 없이 당연한 상식이다.

- 상식. 순리!
- 뜨거, 안 순리.
- 안 뜨거, 순리!

릴리가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니 곱게 가. 네가 좋아하는 순리대로.”

패배자에게는 죽음을.

그것보다 확실하고 명확한 순리가 어디 있어?

불꽃이 베리안을 집어 삼켰다.

* * *

불꽃이 사그라든다.
열기가 식는다.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렬한 빛이 함께 사라지고, 가려져 있던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말도 안 된다···!”

반쯤 녹아내린 육신.

“말도 안 된다고···!”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나머지 부위가 모두 불타 오직 상반신의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베리안은 죽지 않았다.

스스로를 절대 신이라 칭할 만큼의 힘을 가졌기에 그랬다.

“나는, 나는 신이다! 아카식 레코드마저 내 발아래 둔 절대적인 신!”

그럼에도 이 꼴은 무엇인가. 온 몸이 불타는 듯한 이 끔찍한 고통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가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신이었고 신은 당연히 승리해야만 한다.

비록 일부긴 하나 아카식 레코드까지 얻었으니 더욱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자신은 추레한
꼴로 바닥을 기고, 저 놈은 저리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 볼 수 있는가.

“신이 약골이군.”
“감히,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내려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 따위가 아니지.”

콰득-

김우진이 베리안의 가슴을 짓밟았다. 그가 거친 비명을 토해냈다.

“너의 그 신념자체는 인정하지. 그 상태가 돼서도 절대 신이라고? 물론, 작명 센스는 거지같지만.”

- 거지!

릴리의 부리가 베리안의 이마를 쪼았다.

“하찮은 나뭇가지 따위가 감히···!”


“그러면 그 나뭇가지 때문에 패배한 너는 하찮은 수준도 못 되는 거 아닌가?”
“김우···!”

커헉, 목이 밟힌 베리안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다 끝났다, 베리안. 그 상태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주지.”


“김우진!”
“내가 김우진이라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도 있나?”
“김우진!”
“너도 알고 있잖아.”

발의 힘이 더욱 강해진다. 가해지는 압력이 증가하자 베리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네가 졌어.”
“닥쳐라!”
“칼카르도, 알비츠도, 너도. 전부 끝났다고.”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나는 아카식 레코드를 손에 넣은 지고지순한 절대 신이다!”
“그럼 나는.”

화륵-

불꽃이 다시금 열기를 발했다.

천천히 베리안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 위인가 보지.”

절대 신을 죽일 테니까.

“···넌 결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거다!”


“내가 원하는 게 뭔데?”

없다.
“나는 너처럼 세상을 다스리는 걸 원하지도, 아카식 레코드를 먹길 바라지도, 절대 신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아.”

그냥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차원을 구하고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나를 막은 게 누구였지?”


“나를 연옥에 가두어 둔 건?”
“그리고 이제 와서 날 죽이려고 한 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결국 신이다.

“네놈들이 나를 용사로 소환했기에 싸웠고.”


“네놈들이 글라크를 버리려고 했기에 난 살기 위해 발악했고.”
“네놈들이 내 노력과 삶을 없던 것으로 만들려고 했기에 거부했으며.”
“네놈들이 날 이곳에 가두어두고 결국에는 죽이려고 했기에 맞서 싸웠다.”

세 주신이 죽고 백신전이 붕괴한 시점에서 김우진의 목표는 이루어졌다.

“이제 난 자유야.”
“고작,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 고작을 지켜주지 않은 게 네놈들이었어.”
“네놈 때문에 백신전이 붕괴했다! 이 우주의 균형이 어그러졌단 말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놈이 날 죽이려고 그 지랄을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저주하겠다! 죽어서도 너를···!”
“그래, 열심히 해봐.”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흐릿해지지만 않았어도···! 저 세계수만 아니었어도!”

절규와 함께 백염이 베리안을 완전히 뒤덮었다.

불꽃은 한참이나 타올랐다.

한참이나.

* * *

“···정말로 이겼군.”

두리쉬마가 반쯤 녹아내린 연옥의 대지에 몸을 누였다.

열기를 견뎌내며 주신과 싸웠던 탓에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숨을 쉬고 있는 건 타이탄의 끈질긴 생명력과 어둠으로부터 받은 힘 덕분이었다.

“···정말로 이겼다.”

복수에 성공했다. 두 주신을 그의 손으로 직접 죽였으며 하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결국 소멸했다.

타이탄을 멸족시킨 주체들이 모두 사라졌다.

“후련하나?”
“후련하지. 후련하고 말고.”

알베니우스의 물음에 두리쉬마가 대소했다.

흔히들 말한다. 복수는 허무한 것이라고. 적어도 복수를 이룬 지금의 두리쉬마는 그것이 개소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이 후련함을, 오랜 시간 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일거에 해소되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허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는 네놈도 입꼬리가 비실비실하군.”


“그야 당연하지. 나도 후련하니까.”

알베니우스가 팔짱을 낀 채 잔해 위에 걸터앉았다.

“네가 복수를 꿈꿔왔던 시간만큼 나도 신들을 죽이고 싶었거든.”

차원용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다지 큰 유대감이 없다. 때문에 알베니우스와 복수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다.

“드디어.”

그가 신들을 저주하고 그들에게 분노한 것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였다.

“드디어 도망치지 않아도 되게 됐어···!”

자유. 그리고 평화.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진한 해방감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나는 자유다! 이 빌어먹을 신 새끼들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내가 승자라고!”

그가 포효했다.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감사해야 해.”


“무슨 소리지?”
“43 년쯤 전에 내가 김우진에게 투자를 안했으면 오늘 이 순간은 오지 않았을 거거든.”
“투자?”
“저놈이 처음부터 강했었는지 알아? 다 내가 가르친 거야. 내가 김우진이랑 같이 밥 먹고, 훈련도 같이 하고,
다 했어! 내가 키운 거라고!”
“그런 것치고는 스승이 너무 볼품없는데.”
“···원래 청출어람이라는 건 그런 거야. 반드시 스승이 제자보다 뛰어나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청출어람을 한 만 번은 했나 보군.”

두리쉬마가 코웃음치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다. 진한 탈력감과 수마가 그를 잡아 끌었다.

“아니, 그 정도까지로 나약하지는 않지 않나? 백 번 양보해서 한 열 번, 아니 백 번 정도!”


알베니우스의 헛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 < 111. 날 잊어? >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신들이 죽었다.
‘주’신들이 죽었다.

그 어떠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완벽한 소멸.

주신들의 승리를 자신하던 신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신들이 졌다. 정말로?

백번 양보해서 알비츠는 패배할 수 있다. 그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니까. 저 어둠의 사도는 칼카르를 죽인
전례가 있으니까.

하지만 베리안은, 김우진은 아니었다.

아무리 김우진이 여러 신들을 죽인 괴물이라고 해도, 신들인 그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해도.

베리안은 주신이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과 권능을 얻어 주신을 초월한 자였다.

그들의 상식선으로 베리안이 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다.

“···이제 어떻게 하지?”


“······.”
“···정말로 베리안님이 졌다고?”
“······.”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그들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현실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말을 버벅이며
눈을 깜빡였고 쉴 새 없이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길 한참, 뒤늦게나마 현실을 자각한 신들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도망치자.”
“베리안도 이기지 못한 놈을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하지만 어디로? 백신전에는 마물들이 오고 있다.”
“어디로든! 그렇다고 이대로 김우진에게 죽을 수는···!”

하지만 너무 늦었다.

───!

번개가 내리쳤다.

“가짜들이 모여서 작당모의를 하는 모습을 보니 귀가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한때는 백신전을 섬기는 집행자였으나 진짜 신을 목도하고 개종한, 종국에는 본인조차 신이 된 광신도가 신들의
진로를 가로 막았다.

“이적을 목도했다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신께 참배를 올려야 마땅합니다. 헌데 도망칠 궁리를 하다니. 아직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까?”
“디아네!”
“이 배신자가!”
“배신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을 영접하고 제대로 된 분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소장주신께서는 제 믿음에 보답해주셨습니다.

“당신들이 가짜고 저분이 진짜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셨죠.”

신은 전지전능하다. 그렇기에 패배를 모른다. 패배한 신은 신이 아니다. 겁을 먹고 꼬리를 마는 자들도 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늦지 않았습니다. 신께서는 자비가 넘치시니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십시오.”


“닥쳐라! 집행자 따위가 신이 되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감히 주제도 모르···!”

발끈하여 소리치던 신의 얼굴에 주먹이 떨어졌다.

콰앙,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사방으로 굴렀다.

신들이 경악했다. 반응을 하지 못했기에,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는 건 네놈들이지.”

주먹의 주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드네르바···? 어째서?”
“드네르바?”
“···설마.”
“표정 볼만하네. 그 특유의 오만한 얼굴을 유지해야지. 그게 신으로서의 위엄이잖아?”

아군이라 여겼던 백신전의 신, 드네르바가 그 주인이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손을 탁탁 털었다.

“드네르바! 네 년, 설마 백신전을 배신한 거냐!”


“이쪽의 말을 빌리자면 진정한 신앙을 찾은 거지.”
“백신전에도 진실된 눈을 가진 분이 계셨군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래 전부터 김우진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그 종을 자처한 자!”
“네 년! 신으로서의 자각이 없는 거냐!”
“자각은 지랄. 그 잘난 위엄 가지고 뒤지시던가. 알비츠는 고사하고 베리안까지 뒤졌는데 정말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이익···!”
“오냐, 널 먼저···!”

신들이 살기를 드러냈으나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직까지도 싸울 의지가 있으신 분들이 많네요.”

어느샌가 다가온 여섯의 신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고작 여섯이고 이쪽은 수십이었다. 뚫으려면 얼마든지 뚫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베리안이 아주 좋아하겠군.”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의 존재감이 모두를 압도하기 때문에.

신들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먼저 간 자기를 따라가겠다는 충직한 놈들이 이렇게 많으니.”


“···그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꿇어, 이 새끼들아!”

빠악, 드네르바의 거친 손길이 한 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엎어졌고 그게 시작이었다.

신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알비츠가 죽고, 스스로를 절대신이라 칭하던 베리안이 신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전투 끝에 죽은 시점에서


그들에게 저항 의지라는 것은 아주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정한 신을 배알합니다.”
“···항복하겠습니다.”

김우진은 말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아.”

김우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 보니 너가 있었지.”
“···날 잊었어?”

명색이 신인데?

“내가 안에서 줄 수 있는 정보는 다 줬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 드네르바가 털썩, 주저앉았다.

* * *

“···이겼나?”

내가? 정말로?
그 오만한 신들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 승리!
- 끼잉!

릴리와 나르가 양 옆에서 승리를 외치며 기뻐하고.

“소장주신이시여, 마침내 가짜들을 토벌하고 진짜 주신의 위엄을 바로 세우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진짜로 이겼어요!”
“진짜로 주신을···!”

그가 직접 신으로 만든 이들이 그가 진정으로 승리했음을 알려준다.

“···정말로 이겼다.”
“자유다!”

복수에 성공한 거인이 환희에 젖고 더 이상 도망자 신세가 아니게 된 도마뱀이 기쁘게 포효했다.

무엇보다.

김우진이 눈을 감았다. 그에게 패배를 선사하기 직전까지 갔던 베리안의 잔재가 그의 심장 속에서 꿈틀 거린다.

지금까지 흡수했던 어떤 신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거대한 힘은 막대한 충만감을 준다.

모든 사실들이 그가 승리했음을 알려준다.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김우진에게 현실로 자각시킨다.

이겼다. 정말로 이겼다.

- 괜찮?

“그래, 고마워, 릴리.”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으나 눈치 빠른 릴리가 가지를 뻗어 의자를 만들어주었다.

“···하하.”

모든 요소들이 승리를 확신해주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현실감이 없다.

40 년이다. 무려 40 년.

그때부터 신들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것이 한 순간에 끝났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소장님.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율리아의 속삭임에 김우진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던 수십의 신 뒤에는 어느새 천 단위의 집행자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김우진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잘 처분했다고 소문이 날까.”

김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신과 집행자들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 아직도 내가 하찮은 피조물로 보이나?”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건 네놈들이 그렇게 낮잡아 보단 피조물들과 똑같고.”
“······.”
“네놈들에게 원한을 가진 놈들이 한 둘이 아니야. 사실 여기까지오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신들의 행태에 반발감을 가지지 않았다면.


알베니우스가 살기 위해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두리쉬마가 저들을 백신전에 복수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율리아와 릴리는 김우진의 품으로 오지 못했다.


신들을 봉인하여 연옥의 힘 자체를 강화하지도.
두리쉬마와 함께 칼카르를 죽이지도 못했다.

“이런 게 업보지.”

결국 백신전의 멸망은 전부 백신전이 뿌려놓은 똥들이 역류한 꼴이었다.

본인들은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이미 결판이 난 상황에서 저들의 납득 같은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김우진이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독단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서도
안 되고.

“모두 얌전히 백신전으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려라. 조만간 직접 가서 네놈들을 어떻게 할지 알려줄 테니.”
“···예.”
“아, 나 같은 놈에게 고개를 숙이기 싫은 놈은 도망쳐도 좋다. 우주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낼 테니. 변방의 종말
차원도 결코 안전한 도피처가 되지 못할 거다.”
“···그런 무모한 자는 없을 겁니다.”

반발은 없었다. 모든 신과 집행자들이 추레하게 물러났다.

패배자다운 모습이었다.

* * *

“나는 이제 저놈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가장 거지같았던 주신 놈들은 싹 다 뒤졌고 나는 더 이상 쫓기는


몸이 아니게 됐으니까.”

만족한 알베니우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쫓겨 다녔음에도 초탈한 신선 같았다.

그냥 단순한 건가.

“저도 크게 상관없어요. 사실 세이드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살아 있고 복수도 할 만큼


했으니까요.”

율리아는 복수의 의미가 퇴색 됐고.

“소장주신께서 소장주신이 아니라 진정한 주신으로 우뚝 서셨으니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광신도는 김우진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크흠, 복수? 그것보다는 그러면 이제 마력포는 더 못 만드는 건가?”


“만들어서 쓸 곳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준비하라.”
“그냥 전쟁 준비가 하고 싶은 건 아닙니까?”
“날 뭘로 보고!”

난쟁이는 더 달콤한 꿀단지에 관심을 빼앗겼으며.

“아직 신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싸우게 해줄게.”
“그럼 좋습니다!”

짐승은 싸울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고.

“···뭐, 내가 살인귀도 아니고. 학살을 주도한 케이룸 아니, 베른도 그 위의 주신들도 모두 죽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해.”
“다행이네요.”

엘프는 엘프답게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제가 필요 했었는지 솔직히 의문입니다만, 일단은 싸웠으니 평생 전 차원의 식재료들을 주셔야 합니다.”
“노력해보지.”
“그리고 강민식도 제 조수로 주십시오.”
“갑자기 저를요?”
“왜지?”
“강민식의 독은 아주 귀중한 식재료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 독은 신조차 죽이는 극독! 감히 음식 따위로 쓸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내 손에 걸리면 극독이고 나발이고 다 식재료야!”
“제 독이면 당신이라도 죽습니다!”
“어디 해볼까?”
“얼마든지요!”
“···너희 둘의 문제는 너희 둘이 알아서 해결해라.”

두 인간은 복수고 나발이고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마음 같아서는 전부 죽이고 싶다만, 주신놈들을 죽이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거인은 드래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우진 다음으로 큰 역할을 했던 두리쉬마는 복수의 화신 그 자체였다. 때문에 백신전의 모든 신들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할 거라 여겼는데 의외였다.
“정말로요?”
“아니.”

아니었다.

“그놈들이 내 동족들에게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다 죽여 버리고 싶다. 그런데 네가 그걸 원치 않지.


그렇지 않나?”
“제 마음은 또 어떻게 아시고?”
“뻔하지 않느냐. 너는 패권이나 우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 하나의 일신에만 신경이 가 있지. 저
도마뱀처럼.”
“비교 대상이 알베니우스님이면 좀 심한데요.”
“사과하지.”
“···저기? 나 앞에 있는데?”
“아무튼 내가 널 오래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건 넌 귀찮은 걸 싫어한다. 당연히 백신전이 무너지고 무주공산이
되는 세상은 원치 않을 테지. 만행은 만행이나 백신전이 우주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

정확했다. 막나가기는 했지만 백신전은 빛으로 대변되는 아카식 레코드의 한 축이다.

그들이 없으면 어둠은 끊임없이 증식하며 세상을 물들여 갈 것이다. 좆같은 놈들이지만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우주의 법칙이자 균형이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사도인 이상, 나는 군단을 이끌고 차원들을 침공해야만 한다. 힘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지게 된 숙명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 싸울 바에는 반쯤 부스러진 백신전과 싸우는 게 백 번 낫단
말이지.”
“감사합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두리쉬마의 말대로였다.

백신전을 멸망시키면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필연적으로 혼란이 일어나는데 그 혼란을 수습할만한 사람은 결국
김우진뿐이다.

그리고 김우진은 그런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백신전의 세 기둥이 죽었고 제외하고도 30 가량이 죽었다. 백신전은 거의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니 충분하고도 남는 전과였다.

“···그러면 다 동의한걸로 알고 백신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네.”

- 나는?
- 낑?

두 세계수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김우진을 바라보았다.

김우진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희는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 차원. 더 크게!
- 끼이이이!

“차원을 합치고 싶다고?”

- 응!
- 낑!

“좋아. 그렇지 않아도 딱 적당한 차원이 하나 있거든.”

곧 공석이 될 아주 마나가 풍부한 백신전이라는 차원이.

신들이야 뭐, 살고 싶으면 방이라도 빼야지.

“아, 그리고 율리아. 넌 나랑 갈 곳이 있어.”


“어디요?”
“세이드.”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 사라졌다. 당연히 글라크를 감싸던 방벽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세이드 보러 가야지.”

───────────────
# < 112. 이렇게까지 >

차원, 글라크.

수많은 차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악의 종말을 맞이한 차원이자, 김우진이 용사로 있던 차원.

수백의 용사들이 종말을 막기 위해 스러져 갔고 종말 이후에는 신들의 수작에까지 말려 대륙 대부분이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곳.

“역시 아직 멀었군.”

대륙의 90%이상이 마기로 침식되어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차차 정화해 나간다고 한들 40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김우진과 율리아가 떨어진 곳은 그런 곳이었다.

대지가 마기로 물들어 죽어버린 땅. 어떤 생명체도 살아가지 않는 볼모지.

딱-

김우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백염이 대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뭐하시는 거예요?”
“마기를 태워버리는 거야.”
흔히들 정화라고 한다.

“그런 것도 가능하세요?”
“쉬운 일이다.”

불꽃을 통하지는 않지만 율리아도 신인 이상 가능은 하다. 다만, 김우진처럼 손쉽게 전 대륙을 정화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이상해요. 마물도 한 마리도 느껴지지 않아요.”


“전부 처리했을 테니까.”

신들이 권능까지 써가며 차원 자체를 봉쇄했기에 추가적인 마물의 유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마물들은
본능적으로 생명에 이끌린다.

40 년이라는 세월은 대륙에 남아 있던 모든 마물들이 마지막 인류의 생존자들에게 이끌려 토벌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거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마물이 없다는 건 그들을 토벌한 이들이 있다는 거고 그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

“방향은···저쪽이네.”

예상대로 모든 게 죽어버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꽤 머네요.”
“네가 평범한 엘프라면 멀겠지.”

하지만 차원과 차원을 넘나드는 신에게 있어 한 차원의 거리는 아주 작은 편린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우진과 율리아가 한 걸음 걸었다.

공간이 뒤틀렸다. 시커멓게 죽어버린 대지는 사라지고 저 아래 인류의 흔적이 보였다.

번성한 도시와 가득한 사람들.

“잘 살아있네.”

적어도 글라크에 관해서는 백신전은 약속을 지켰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인지라 당연히 지킬 수밖에 없었겠지만
단순히 계약서를 믿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또 다르니까.

대륙은 평화로웠다.

마물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를 공격하는 다른 위협도 없다.

생명력이 남아 있는 땅의 절반가량이 인간의 손에 정복되지 않은 몬스터들의 대지이긴 하지만 글라크라는 차원이


몬스터들과 공생하는 차원이다 보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세이드는 어디 있을까요?”
“글쎄.”
김우진과 율리아는 단순히 도시 하나가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인류의 모습을 확인했다.

네 개의 인간 왕국과 하나의 엘프 왕국.

“여전히 종말이 진행 중이라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겠지만 보다 시피 종말은 끝난 지 오래라.”


“익숙한 엘프 왕국에 있지 않을까요?”
“그거야 물어보면 그만이지.”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널리고 널렸어.”

수십년 간 인류의 희망으로 활약해왔던 김우진이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있는 왕국의 왕만 찾아가도


김우진을 알아볼 거다.

“하긴, 그래 보이긴 해요. 저렇게 사방에 얼굴이 있으니 못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하겠네요.”

율리아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글라크의 영웅! 좀 크다 싶은 도시마다 황금 동상이 하나씩 세워져 있으니 좋으시겠···아악!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니까 당연하지.”

김우진이 혀를 찼다. 솔직히 저 동상은 좀 낯부끄럽긴 했다.

어쨌든 지금의 위치가 좋았다.

“비엔데르크라. 그리운 이름이군.”

비엔데르크의 국왕도.

비엔데레크의 젊은 왕은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다. 김우진과 용사들의 희생과 활약을 인정하고 최대한 대우를
해주려고 했었지.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자기 동생을 김우진과 어떻게든 엮으려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물론 이해는 한다. 상황이 워낙 암울하니 어떻게든 잡고 싶었겠지. 그에 대한 악감정은 딱히 없다.

“따라와.”
“네. 그런데 왕궁 안에도 소장님의 조각상이 있겠죠? 황금? 아니죠. 왕궁이니까 다이아로 만들어놓지
않았을까요?”
“매를 버는 주둥이군.”

김우진과 율리아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정오가 지났다.

하늘은 청명하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딸각-
바이른은 씁쓸한 커피를 음미했다. 달달한 다과와 함께 하니 제법 잘 어울렸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폐하.”


“둘이 있을 때는 오라버니라 불러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왕실의 법도가 있는데 어찌 그러겠어요.”
“평화롭구나.”

산들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이렇게 여유로운 티타임이라니. 40 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다 그분 덕분이죠.”
“그래.”

동생의 말에 바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을 때도, 편안하게 잠을 잘 때도, 단순히 살아서 숨을 쉬는 것에도 언제나 감사함을 느낀다.

그날 차원을 침공한 수백만의 마물의 파도는, 그리고 그 마물들을 홀로 막아내는 영웅의 모습은 평생이 가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이 각인되었다.

지금의 인류는 그의 희생 위에 만들어졌으니 평생이 가도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살아계시겠죠?”
“모르겠구나.”

신과의 거래를 한 간이 큰 인간이었다. 바이른은 김우진에게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나 설마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들을 지켜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하지만 감사함과는 별개로 당시 신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김우진 하나를 잡기 위해 마물들을 이용할
정도였으니까.

아마 살아 있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군요.”

동생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늙으셨군요.”

그때, 불연 듯 끼어드는 목소리에 바이른의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늙긴 했으나 종말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그도 수준급의 검술을 익힌 기사였다. 바로 옆에 누군가 다가오는데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암살자?’

대체 누가?

설마 종말이 끝났다고 다시 패권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쓰레기가 있었나?


아니, 지금의 왕들은 그렇게 아둔하지 않았다. 결코 그럴 만한 인간은 없을 터인데.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거늘, 누가 감히···.”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김우진?”

검은 머리, 검은 눈. 특유의 익살스러운 눈매와 분위기까지.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김우진이었다. 글라크를 구원하고 신들에게 잡혀간 인류의 영웅.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사약 같은 구정물을 왜 먹냐고 하시더니 이제는 커피를 즐기시는 것 같군요.”
“···누구 덕분에 먹기 시작했는데 향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진짜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마법인가?

“아이닌 전하도 오랜만입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대체 어떻게?”

쨍그랑, 아이닌이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과 찐한 만남을 가지고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따악-

김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듯, 부서진 조각과 차들이 다시 떠올라 온전히 아이닌의 손에
들렸다.

“···맙소사.”
“···재주가 늘었군. 자네, 진짜인가?”
“그 누구도 저를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이 글라크에 그런 간 큰 놈은 없긴 하다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신들에게 잡혀간 것이
아니었나?”
“잡혀갔었습니다만, 다 때려 눕혀주고 왔습니다.”
“신들을 말인가?”
“신들을 말이죠.”
“···말투로는 김우진이 맞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미치겠군.”

바이른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터질 것만 같았다. 확실한 건 진짜든 가짜든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그와 아이닌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솔직히 무슨 짓을 해도 못 믿기 힘드네. 자네 같으면 신에게 잡혀갔던 인간이 40 여년 만에 돌아와서 신들을 다
때려눕히고 왔다는 말을 하면 믿겠나?”
“폐하와 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해도 말입니까? 보름달이 뜬 밤이었습니다. 그때 폐하께서는 왕실의
정원에서···.”
“믿겠네!”
“더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 사실을 자네와 나 말고 누가 알고 있단 말인가!”
김우진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럼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자네가 살아 돌아온 걸 알면 대륙의 뒤집어지겠군.”
“고작 저의 생환으로 뒤집어지면 큰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일을 가지고 왔으니.”
“···자네가 큰일이라고 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니 제발 그런 농담은 말게.”
“그런데 정말 자네 맞나?”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시니 증명할 수밖에 없군요. 그날 폐하께서는 탈로스 후작가의 여식이던···.”
“난 이미 믿음이 충만하네!”

황급히 김우진의 입을 막은 바이른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 엘프는 누군가? 혹시 자네의 연인인가?”


“신입니다.”
“···뭐라고?”
“저도 신이 됐고요.”

정확히 신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김우진이 감추고 있던 힘을 드러냈다.

“어떻게, 믿음에 조금 더 확신이 가십니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압감과 신성함, 경외감에 왕과 왕녀가 경악했다.

* * *

김우진은 그들과 회포를 풀었다. 호화로운 만찬과 술이 함께였고 오직 네 명만이 참가한 작은 연회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포식으로 신들의 힘을 흡수해서 다른 신들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는 건가?”


“네.”
“우주의 운명을 건 대전쟁이 있었고 자네가 그 승자가 되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상대가 자네가 아니었다면 감히 왕을 능멸한다고 벌을 줬을 거네.”


“이해합니다. 저도 사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거든요.”
“···신이라니. 경어를 해야 하나.”
“아닙니다. 신이라고 제가 달라진 건 아니니까요. 그냥 예전처럼이면 족합니다.”
“영광이군. 아마 나 같은 인간은 또 없겠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평생 없을 겁니다.”
“크흐흐흐, 이게 인맥의 힘인가.”

바이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점점 더 풍성해졌다. 김우진이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도.

“프하하하, 그러니까 그때 나를 협박하고 자네를 끌고 갔던 그자가 그렇게 추하게 죽었단 말인가?”


“신이라고 해봐야 결국 좀 강한 지성체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죠.”
“신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건 자네 뿐일 거네.”
“뭐, 그만큼 많이 겪어봤으니까요.”
“결국 그놈이 우리를 절망을 밀어 넣은 주체라는 건데 그 꼴을 내가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쉽군. 마물들로 죽은
자들 또한 통쾌해 할 거네.”

바이른이 글라크의 지난 40 여년을 풀기도 했다.

“여기는 별 다른 일이 없었네. 그냥 일상을 되찾고 살아가고 있었지. 인구가 워낙 줄어들고 활동 반경도 턱 없이


적어졌지만 살아남았음에 다들 감사하고 있었네. 황금 동상? 그야 당연히 자네를 기리기 위한 것이지. 영웅
아닌가, 영웅!”
“아무리 제가 낯짝이 두꺼워도 도시마다 하나씩 세워놓으면 무슨 독재자 같잖습니까.”
“뭐, 이곳 비엔데르크 왕국에 비엔데르크 역대 왕과 영웅들을 다 합친 것보다 자네 동상이 더 많긴 하네. 근데
다 자발적으로 세운 거네. 자네 덕에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까. 우리에겐 자네가 신이거든. 근데
진짜 신이 되었다니 신앙을 퍼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제발 그것만은···.”

연옥에 있는 광신도가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질색하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김우진이군!”

김우진과 바이른이 회포를 풀고 있을 때, 율리아는 아이닌 왕녀와 함께였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절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세이드 공이 절대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는 목걸이 사진의 주인공이잖아요?”
“···그걸 계속 착용하고 다녔어요?”
“물론이에요. 반드시 돌아가서 돌봐줘야한다고 얼마나 아끼던지. 아, 김우진 용사님이 그 사진을 보고 예쁘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네?”
“뭐, 그냥 두 분이서 매일 주고받는 장난 같은 느낌이었지만요. 어쨌든 설마 그분이 직접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네요. 세이드님이 보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사실 그것 때문에 이곳에 먼저 왔어요. 세이드는 어디 있나요? 살아있는 거 맞죠?”
“걱정 마세요. 아주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세이드님은···.”

* * *

해가 떴다.

“일어났어요?”

눈을 뜨자 보석과도 같은 녹빛의 눈동자가 코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글거리는 입가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한참 전에?”
“왜 깨우시지 않고.”
“곤히 자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요. 매일 같이 고생하는 걸 아는데.”
“몇 시입니까?”
“왕국의 기사단장이 곧 출근할 시간이죠.”

여인이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밍기적 거리는 세이드의 이마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서 일어나요. 곧 시종들이 올 테니.”


“···한 번만 더.”
“이럴 때 보면 애랑 다를 바가 없네요.”
“전하 앞에서만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오늘은 더 사랑스럽군요. 그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어머.”

세이드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시종들이 곧 오는데.”
“그럼 오기 직전까지만 이대로 있죠.”

세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 5 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아니에요!”

율리아가 부정했다.

“세이드가 죽지 않기를 바랐고 세이드가 괜찮기를 바랐지만···!”

결코.

“이렇게까지 행복하기를 바란 건 아니라고요!”


“뭐냐, 그 놀부 심보는? 가족이라며?”
“가족이니까 이러죠! 가족의 연애를 지켜보는 제 입장도 생각해주세요! 그 무뚝뚝한 세이드가 저런 애교라니! 못
볼꼴을 봤어요!”
“···그건 동감이다.”

우엑, 김우진과 율리아가 헛구역질을 했다.

───────────────
# < 113. 살아있다! >

아침식사를 마친 세이드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착용했다.

“좋은 아침이다.”

연병장으로 나가자 일천의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렬해 있었다.

인간과 엘프가 다양하게 섞인 이들은 남은 다섯 개의 왕국에서 추리고 추린 정예 기사들이었으며 세이드는 그들을


이끄는 단장이었다.

“종말은 끝났다. 하지만 언제 다시 시작할지 모른다.”


언제나처럼 연설로 아침을 시작했다.

글라크의 인류는 차원의 방벽을 뚫고 들어오는 마물의 파도를 경험했다. 신을 목격하고 그들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그리고 김우진의 희생을 지켜보았다. 지금의 평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깨달았다.

신은 결코 선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신은 무조건적인 아군이 아니다.

“우리는 신들의 진면목을 보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렇기에 종말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신에게 대항할 힘을 길러야 한다.

인류가 내린 결론이었고 적지만 일천의 최정예 기사단을 이그라실 왕국에서 머물고 있는 세이드에게 맡긴 이유였다.

세이드는 김우진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용사였고, 지금도 가장 강한 용사니까.

“그렇기에 지금의 훈련은 단순히 너희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다. 항상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예!”
“질문 있습니다!”

우렁찬 대답 사이로 바이저를 내린 기사 하나가 손을 들었다.

“말해라.”
“공주 전하와는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아지셨던 겁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뜻이지? 질문은 훈련과 관련된 것만···.”
“오늘 아침에 꽤나 재밌는 걸 보았습니다.”

크흠, 기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목소리를 자연스레 대꾸했다.

“한참 전에?”
“왜 깨우시지 않고.”
“곤히 자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요. 매일 같이 고생하는 걸 아는데.”
“······.”

세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아침에 그와 넬리아가 나누었던 대화였다.

“···지금 뭐하는 거지?”

은은한 분노를 드러냈음에도 두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행위를 이어갔다.

“몇 시입니까?”
“왕국의 기사단장이 곧 출근할 시간이죠. 어서 일어나요. 곧 시종들이 올 테니.”
“···한 번만 더.”
“이럴 때 보면 애랑 다를 바가 없네요.”
“전하 앞에서만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오늘은 더 사랑스럽군요. 전하는 모든 인류 중에 가장 아름다우니, 그
누구의 미모도 전하 앞에 선다면 빛이 바래질 겁니다. 제 심장을 꺼내줘도 아깝지 않고 저 하늘의 별도 따다 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 감동이에요. 달링.”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참지 못한 세이드가 버럭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그건 넬리아 전하께서 가장 아름답지 않으시다는 겁니까? 심장도, 별도 못 따주고? 사랑이 식으신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느냐!”
“정확히 이야기 해주시죠. 오백만 이그라실의 백성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천만 비엔데르크의 백성들도요.”
“닥쳐라! 감히 왕실과 나를 능멸하다니. 네놈들은 누구냐···!”

스릉, 검을 뽑아 겨눴다.

기사들이 두 기사를 포위했다.

“순간적인 팩트 폭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해버리시는 겁니까?”


“무슨 헛소리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세이드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익숙한 말투인데.”

설마?

“그게 누굽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김우진은 신들에게 잡혀갔다. 상식적으로 신들이 신을 죽인 김우진을 살려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저 깐죽거리는 목소리와 말투는, 그리고 특이한 단어들은 김우진이 아니면 맹세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까? 세이드님이 넬리아 전하께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 것 말입니까?”


“···투구를 벗어라.”
“벗기 싫다면요?”

───!

세이드의 검이 기사의 코앞에서 멈췄다. 폭발 하듯, 터져 나오는 충격파에 주변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세이드님의 검을 맨손으로 막았어?”


“어떻게 저런···?”

기사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세이드는 오히려 웃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뭐가 말입니까?”
“연기는 그만 집어 치워라. 어떻게 돌아온 거냐.”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
“이걸 눈치 채지 못하면 병신 아닌가?”
“그것도 그래. 날 붙잡은 신 새끼들을 전부 족치고 당당히 왔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불가능할 건 또 뭐야?”

철컥, 김우진이 바이저를 올렸다. 더 없이 익숙한 얼굴에 세이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신들을 전부 족쳤다는 건 의외지만 솔직히 살아 있을 줄은 알았다.”


“정말로?”
“너 같은 바퀴벌레가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욕이냐, 칭찬이냐?”
“칭찬이다. 적어도 지금의 경우에는.”
“두 분이서 너무 다정해보여서 저는 질투가 조금 나네요.”
“너는 누구···율리아···?”

···네가 어떻게?

세이드의 눈이 더 없이 커졌다.

“오랜만이에요. 세이드. 잘 지냈···아, 엄청 잘 지내고 있던 것 같으니 묻는 의미가 없나요? 결혼


축하드려요.”

율리아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 * *

“···그런 일이 있었다고?”

세이드는 쉽사리 믿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기억은 김우진이 신들에게 잡혀가는 것에서 멈췄다.

그런데 그 뒤에 신들과의 전쟁이 있었고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했으며 율리아가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겠는가.

하지만 세이드는 멍청한 엘프가 아니다. 직접 보고 겪는다면 믿지 못할 수가 없다.

“···그렇군. 믿겠다.”

율리아의 손에 직접 제압 당하는 것으로 세이드는 진실을 이해했다.

“···나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율리아한테 지다니.”


“이게 바로 세이드와 내가 헤쳐나온 고난과 역경의 차이죠.”
에헴, 율리아가 콧대를 으쓱였다.

“네가 한창 때의 글라크에 떨어졌다면 바로 죽었을 거다.”


“아니요.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남았겠죠. 신들과의 전쟁에서도 아득 바득 살아서 신이 되었으니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김우진과 두리쉬마라는 어둠의 사도가 처리하고 넌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아주 정확한 관측이다. 역시 세이드는 엘프다.

“어떻게 한 게 없어요! 릴리 어머니 나무도 제가 가져왔고, 도망친 죄수를 잡을 때도 돕고, 신들과의 전투에도
참가했는데요!”
“심부름꾼에, 기껏해야 집행자고, 다른 하나는 싸우다가 결국 김우진이 결판을 냈다고 하지 않았나?”
“···이익! 세이드는 누구 편이에요!”
“아르반의 그 착한 아이라면 몰라도 공주 전하와 나를 조롱한 네 편은 아닌 것 같군.”
“그건 어디까지나 소장님이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고 해서 한 것 뿐이에요. 주신마저 죽이신 분이 하자고 했는데
따라야죠.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당연히 김우진이 주도했겠지만 율리아. 안 본 사이에 많이 영악해졌구나.”

음, 내가 주도했다는 부분은 디폴트로 깔고 가는군.

역시 엘프의 날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우진은 구석에 앉아 얌전히 넬리아가 건네주는 다과를 씹었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전하.”
“솔직히 용사님이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제 생각보다 더 대단해지셔서 돌아오셨네요? 놀랐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뭐가 말이죠?”
“설마 저 목석같은 놈을 냉큼 꼬셔서 결혼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이드가 목석같기는 하죠.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도 봐요. 꽤나 말이 많지 않아요?”
“뭐, 그렇긴 합니다. 사랑의 힘이 놀랍군요.”

단순히 그뿐만은 아닐 거다. 율리아도, 세이드도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가 점점 더 익숙하고 편안해지고
있으니까.

진짜 가족이라는 거겠지.

“저 아이가 그 율리아라는 아이군요. 예쁜 아이네요.”

넬리아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엄마가 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엘프가 처음 보는 하이엘프를 딸처럼 느낄 정도라면 얼마나 지겹도록 이야기해야 하는 거지?’

세이드에게 팔불출 기질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인 듯 싶었다.

“차원은 어떻습니까?”
“안정적이에요. 마물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요. 몬스터는 원래 그전부터 부대끼며 살아온 필요악 같은 느낌이고요.
한 가지 문제라면 죽어버린 대지네요.”
“죽어버린 땅이요?”
“정화가 쉽지 않아요. 신들도 이 세상에 관심을 꺼버렸고 저희를 가호하던 어머니 나무도 사룡에게
뽑혀버렸으니까요.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조금씩이라도 정화를 하고 있긴 한데.”

오면서 보았다. 정화된 대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마 이대로라면 수천년이 지나도 그대로겠지.

하지만 수천 년이 걸릴 일은 더 이상 없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슨 뜻이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녀석은 신이 되었고, 저는 그 이상이 되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현실감이 없어서요.”
“곧 현실감이 있게 될 겁니다. 이미 조치를 취해놨거든요.”
“···조치요?”

김우진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넬리아는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 * *

“···밤이 사라졌다!”

처음 이변을 발견한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오후 다섯시 치고는 대낮처럼 밝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지고 여름에는 길어진다. 대륙의 남부는 현재 여름이었고 그걸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여섯시, 일곱시.

“오늘은 해가 좀 많이 기네.”

여덟시.

“···이거 좀 이상한데?”

아홉시.

“태양은 이미 없잖아. 뭐야, 이거! 왜 밤이 오질 않는 거야?”

열시.

전 대륙의 밤이 사라졌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열한시.

새하얀 백야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열두시.

“···이거 괜찮은 겁니까?”


“···종말이다! 또 다시 종말이 오는 거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 3 시.

마침내 사람들은 어째서 세상의 어둠이 사라졌는지, 그 원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불꽃?”
“새하얀 불꽃?”
“불꽃이 대지를 태운다!”
“불꽃이 넘어온다!”

새하얀 불길은 모든 대륙을 가리지 않았고 마기로 인해 저주 받은 땅들을 불태우며 빠르게 인류의 영역 근처로
다가왔다.

경비병들이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했고 이미 비상이 걸린 각국의 수뇌부는 경악했다.

황급히 마법사들을 소집해 물 마법과 방어 마법을 준비했다.

“···꺼지지 않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수 계열과 빙 계열 마법은 불길을 아주 조금도 약화시키지 못하고 소멸했다.

“마법적 힘이 가미된 불길입니다!”


“대체 시전자가 누구기에 이렇게 광범위한 마법을?”
“저희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끌 수가 없습니다.”
“당장 대피령을 내려야 합니다!”

끌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불. 인류는 공포에 떨었다.

각국의 왕도로 한 통의 통신들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대대적인 대피령이 떨어졌을 거다.

“···용사, 김우진이 살아 있다고?”


“이게 김우진의 권능?”
“마기만을 태워서 대지를 정화시키는 거라고?”
“전 대륙의 대지를? 그게 가능한 건가?”
“아니, 잠깐만. 김우진이 살아 있다고? 돌아왔다고?”
“김우진이 살아 있다!”
“김우진은 지금 어디 있나!”

대륙이 다른 의미로 뒤집어졌다.

각 국의 왕들이 일제히 이그라실로 향했다.


───────────────
# < 114. 새로운 신도들 >

무슨 짓을 해도 꺼지지 않던 백염은 오염된 땅과 멀쩡한 땅의 경계에서 멈추고 스스로 사그라들었다.

“···땅이?”
“정화되었다! 땅이 정화됐어!”

그리고 인류는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 챘다.

시커멓게 죽어버린 대지가 잿더미로 변했으나 생명력이 느껴졌다. 검게 물들었던 토양이 본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기적이다···! 기적이야!”
“김우진 용사님이 우리를 보우하신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김우진을 찾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신들에게 버림받은 그들이 다시 신을 찾아 섬길 이유가 없으니까. 신들 대신 의지할


존재가 필요했고 김우진이 더 없이 적합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 글라크를 구한 위대한 영웅이니까.

그의 이야기는 부풀리고 부풀려 이미 전설이 되었다. 신들에게 탄압당해 끌려갔지만 언젠가 돌아온다는 신화까지
있을 지경이었으니.

인류가 갑작스러운 기적에 난리가 났을 때, 각국의 수뇌부들은 다른 의미로 뒤집어졌다.

“김우진이 돌아왔다고? 정말로?”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신들에게 잡혀간 김우진이 어떻게···.”
“···저 불꽃이 진짜 김우진의 권능이라고? 대륙 전체를 뒤덮은 화마가?”
“땅을 정화? 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김우진을 만나봐야겠다!”
“김우진은 지금 어디 있나!”

백염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 정체와 목적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우진이 드러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왕들이 일제히 무거운 엉덩이를 때고 김우진을 만나고자 하는 것도.

왕들의 행렬이 이그라실로 몰려들었다.

* * *

“그래, 튀는 걸로 하자.”
“어딜 마음대로.”
“회포도 다 풀었고 너나 다른 용사들의 앞으로의 일도 끝냈으니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40 여년의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부외자 같던 용사들이 뿌리를 내리고 가족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
살아남은 용사들은 전부 가족을 만들었고 이곳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원한다면 본래의 세계로
돌려보내주겠다는 김우진의 호의를 거절했다.

세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돌아갈 생각은 없다며.”


“넬리아를 두고 갈 수는 없다.”
“율리아는? 딸 같다며?”
“율리아는 신이 되었으니 차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 않느냐.”

정론이다.

그리고 솔직히 어느 정도는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40 여년은 인간에게 특히 길지만 다른 이종족이라고
결코 짧은 건 아니니까.

드래곤이나 타이탄 같이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가는 놈들이 아니고서야.

“뭐,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해. 그러니까 이번 만남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을 기약하···.”


“그러니까 넌 못 간다니까? 천하의 김우진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지?”

세이드가 도망치려는 김우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렇게 일을 내놓고 널 찾아오는 손님들이 가득한데 도망치겠다니. 신으로서 책임감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응. 난 신이 아니거든.”

신의 정의는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 받아 힘을 부여받은 자다.

그리고 김우진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선택 받은 자들을 포식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메마른 가뭄에 비가 오면 그냥 ‘와, 드디어 비가 온다!’하고 기뻐하고 말지 누가 비를 뿌려줬는지


찾아오지는 않잖아?”
“그거랑은 경우가 다르다.”
“너 많이 변했다? 왜 이렇게까지 날 붙잡아두려는 건데?”
“다른 자들도 아니고 왕들이 오고 있다.”
“왕들 좀 모인다고 뭐가 달라져?”
“넬리아가 곤란해진다.”
“···아하?”
“······.”
“그러니까 네 연애 사업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라?”
“그런 말이 아니라···.”

번쩍-

“크윽!”

새하얀 빛이 세이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세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김우진은


없었다.
“···음. 저도 이만 가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세이드. 다음에 또 봐요!”

율리아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다 사라졌다.

“···제기랄.”

홀로 남은 세이드가 허탈하게 웃었다.

도망 못치게 꼭 붙잡아 두고 있겠다고 넬리아에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뭐라고 변명하지?”

아니, 굳이 변명할 필요가 있나.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넬리아니까. 넬리아는 김우진이 얼마나 막나가던 인간인지 잘 아니까.

“아니지.”

그렇게 그냥 무난하게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신이라서 이곳에 오래 못 있고 상위 차원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본인은 부정했지만 실제로 신이고 은총을 내려 대륙을 정화시켜준 게 맞으니까.

김우진이 진짜 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대륙 전체에 퍼진 기적에 대해 설파한다면 신앙이 자라나는 것도


순식간일 거다.

이미 글라크의 사람들에게 있어 김우진은 반신이니까.

절대 김우진이 자신의 동상을 보고 질색하는 모습을 보여서, 자신의 부탁을 저버리고 도망쳐서 그런 게 아니었다.

* * *

백신전은 패배했다.

세 명의 주신은 모두 죽었으며, 수십의 신들이, 수백의 집행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신과 집행자들은 김우진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다.

모든 주신들이 죽은 상황에서 주신들을 대신해 백신전을 통제할 자는 상위 10 신들이었다.

그나마도 전부 살아남은 건 고작 7 명뿐이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우리 모두를 죽이고 백신전 자체를 없애지는 못할 거네.”

살아남은 일곱 상위 신 중 가장 연장자인 제이드가 회의를 주도했다.


“백신전은 단순한 신들의 집단이 아니네.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을 받은 균형을 유지하는 하나의 기둥이지.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한다면 김우진은 결코 우리를 없애지 못할 거네.”

정론이었다. 김우진에게 백신전이 어떤 짓을 했고, 어떤 분쟁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느껴지든


상관없었다.

신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백신전은 빛으로 대변되는 아카식 레코드의 사도로서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핵심
세력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결국 김우진이 감당해야만 한다.

김우진이 과연 그걸 감당하려고 할까? 아니면 차라리 백신전을 휘하에 두고 부려먹으려고 할까? 누가 봐도 후자가
더욱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김우진은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김우진이 일반적이었다면 애초에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김우진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괴물이다.

“그래도 일단은 최대한 자비를 구하는 쪽이 낫지 않겠나?”


“저희는 신입니다. 신의 위엄이 있지, 어찌 김우진에게 자비를 구걸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허면 죽을 텐가?”
“······.”

제이드가 혀를 찼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네. 이미 살겠다고 김우진한테 무릎도 꿇어놓고 이제와서 위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지 그랬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우리는 졌네. 완벽하게 졌어. 다시 싸워도 승산이 없고 도망도 불가능하네. 절대신에 가까워진 김우진에게서
도망친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러면 승복해야지. 죽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더 있나?”
“하지만···.”
“그게 싫은 자들은 마음대로 하게. 도망치던, 김우진에게 저항하던. 김우진이 살려줄 지는 모르겠군.”

자, 어서 일어나서 나가게.

“김우진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게 싫은 자는 말이야.”

제이드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하며 기다려 줬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다시는 이번 일에 대해서 논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네. 이미 살고 싶어서 구걸이란 구걸은 다해놓고
이제와서 고고한 척은.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김우진에게 백신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게 옳다고
생각···.”

그때였다.

“신이시여!”
십여 명의 집행자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회의 중에는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큰일 났습니다!”
“큰일?”
“집행자들이 전부 도주했습니다!”
“···뭐라고?”

신들이 순간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집행자란 그들의 권속이었다. 권속이 도주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똑바로 말해라! 집행자들이 도망갔다는 게 무슨 뜻이냐!”


“대, 대부분의 집행자들이 백신전을 벗어났습니다!”
“대부분? 한둘이 아니라?”
“이런 괘씸한 놈들이···!”
“어디냐. 내가 직접 잡으러 가겠다!”
“누구의 집행자냐!”

신들이 분노를 드러내며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집행자들의 대답은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게···.”
“빨리 말해라!”
“2 천명 정도가 전부 도주했습니다.”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몇 명이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른 집행자가 쐐기를 박았다.

“2 천이 넘는 집행자들이 진정한 신에게 귀의하겠다며 모두 연옥으로 향했습니다!”


“······!”
“······!”

* * *

“아주 깔끔하게 해결됐어.”


“깔끔하게 해결 된 것 맞죠?”
“굳이 나를 만나지 않아도 결과는 좋잖아?”

차원 봉인은 허물어졌고 마기로 오염된 대지들은 모두 정화되었다. 용사들도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글라크는 다시
발전할 것이다.

“앞으로 네가 원할 때마다 가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연옥으로 향했다.


“벌써 다 복구했네요?”
“릴리와 나르는 평범한 세계수가 아니니까.”

단순히 두 그루만 있어도 대단한 세계수가 잡아먹은 신만 수십이다. 그 권능은 능히 차원 안에서는 주신에
필적하니 소멸해버린 차원의 방벽을 다시 복구하는 건 조금 성가신 일에 불과했다.

“저 정도면 세계수가 아니라 우주수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왜요?”
“아니, 다시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면 해서.”
“···소장님도 그렇게 작명 센스가 대단하지는 않거든요?”
“그렇다고 해두지.”
“그렇다고 해두는 게 아니라···어?”

버럭, 소리치던 율리아가 멈칫했다. 김우진 또한 걸음이 멈췄다.

“···저건 뭐죠?”
“집행자 같은데.”

일단은.

단단하게 연옥을 감싼 차원의 방벽 앞. 거기에 상당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저것들이 왜 여기 있지?”

신들과 함께 백신전으로 돌아갔을 텐데?

“설마 다시 전쟁을?”
“그런 것치고는 신이 한 놈도 없군.”

신들이 바보도 아니고 불의의 기습으로 반전을 꾀했다면 절대 집행자들만 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미끼일 수도 있잖아요? 집행자들을 정면에 세우고 뒤에서 치는.”


“그런 것치고 신의 기척이 아예 없다.”
“그럼 뭐죠?”
“글쎄.”
“릴리랑 나르 어머니 나무도 있네요?”

율리아의 말대로 릴리와 나르가 차원의 문을 열고 나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입장. 한 줄로. 차례 차례.


- 낑낑!

“자, 모두 어머니 나무님들의 말씀에 따르세요. 절대신님은 그 위용에 걸맞게 관대하고 품이 넓으신 분입니다.
오는 신도를 거부하지 않으니···.”

“···디아네님도 있네요?”
“···불길한데.”

한 줄로 입장? 관대하고 품이 넓어? 거부하지 않아?


불길한 촉이 딱 왔다.

그 순간, 릴리의 고개가 팍 돌아갔다. 시선이 정확히 김우진에게 꽂혔다.

- 왔어!

릴리가 소리쳤고.

“여러분! 저기 이 우주의 유일무이한 신! 더 없이 찬란하고 고귀하시며 아름답고 우월하신 절대신께서


오셨습니다!”

디아네가 김우진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집행자들의 이목이 일제히 쏠림과 동시에.

“오셨다!”
“진정한 절대신이시여!”
“불쌍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소서!”
“저희는 가짜들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방황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절대신이시여!”

이천의 광신도들이 돌격했다.

───────────────
# < 115. 소장절대신 >

“신들은 위대하기에 신입니다! 절대적이기에 신입니다! 헌데 그저 오만하기만 하고, 스스로를 과신하며,


패배하고 또 패배하기만 하는, 결국에는 도망까지 치는 자들을 어찌 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속고 있었습니다! 저 가짜들을 신이라 믿고 따르며 거짓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절대신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저희를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절대신께 충성을!”
“충성을!”

음.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래파토리인데.

“···진정한 신앙을 찾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연옥의 광신도가 광기에 찬 눈을 희번뜩이며 환희에 차올라 있었으니까.

“···디아네.”
“예, 절대신님!”
“절대신이라고 부르지 마라.”
“소장절대신님?”
“······.”
빌어먹을.

김우진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 잠시 생각해보자.

이천이 넘는 집행자들이 신들의 패배에 그들의 품에서 벗어났다.


말로는 진정한 신앙을 찾겠다는 거겠지만 그건 극소수. 디아네처럼 광신이 느껴지는 자들은 10%정도다.

간단하다. 침몰하는 배는 버리는 게 당연하듯이, 우주의 판도가 백신전에서 김우진으로 옮겨왔다고 생각한 이들이
살기 위해 도망친 거다.

‘하지만 우리는 신들의 권속이잖아?’


‘무슨 상관이야. 디아네 이야기 못 들었어? 김우진이 기존의 권속 계약을 끊어버리고 김우진의 권속이
되었다고.’
‘그 소문이 진짜라고?’
‘그러니까 도망쳐. 이 새끼들은 글렀어. 뭐가 신이야. 다 겁먹고 목숨이나 구걸한 주제에. 우리랑 다를 바 없어.
김우진이 모든 걸 쥐고 있다고.’
‘김우진이 우리를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주면 이놈들 밑에 있을 필요도 없어!’
‘최대한 빨리 가서 선점해야 해!’

이런 대화를 나누며 왔겠지.

합리적인 판단이고 김우진 입장에서도 그리 나쁠 건 없다.

단순히 백신전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그들을 휘하로 받아들인다는 유일무이한 선택지에서 또 다른 방향성이
제시된 거니까.

기존의 신들을 싸그리 박멸하고 집행자들을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 새로운 백신전을 꾸린다는 선택지가.

디아네가 저것들을 전부 자신과 똑같은 복제품으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딱히 그런 쪽으로 취미는 없다고.’

디아네를 격리시켜야 한다. 저것들과 마주해서 이상한 교리를 설파할 수 없도록.

“타르칸.”
“예, 소장님!”
“오늘부터 디아네와 무기한 대련을 허락한다.”
“정말입니까?”
“저, 절대신님? 갑자기 그게 무슨···?”
“명령이다. 너는 오늘부터 투기장에 들어가서 타르칸과 대련을 해라.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나오지 말고.”
“···따르겠습니다.”
“빨리 가자! 오랜만에 지칠 때까지 싸울 수 있겠군!”

투기를 끌어올린 짐승이 어깨가 축 늘어진 광신도를 질질 끌고 투기장으로 향했다.

“저들을 전부 받아주실 생각이십니까?”


“받아주지 않을 이유도 없다.”
백신전의 신들에게 크게 경각심과 위기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신들과 비교하면 부족해서 그렇지 저들은 한 명 한 명이 차원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강자들이다.


그렇기에 신들의 심부름꾼역할을 할 수 있는 거고.

“릴리.”

- 응.

“정원 한쪽에 공터를 만들어줘라. 그리고 저놈들을 전부 그곳에 몰아넣어.”

- 응!
- 낑!

세계수의 힘이 거대한 연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내부로 집행자들이 쏟아졌다.

“절대신께서 우리를 받아주셨다!”


“김우진 만세!”
“그때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다 복구한 건가?”
“역시 절대신의 차원인가···.”
“두 그루의 세계수···. 다시 봐도 적응이 안 되는군.”
“그때와는 느낌이 완전 달라.”

김우진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기뻐하며 연옥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들이 가장 놀란 것은 신들의 전투로 초토화된 연옥의 대부분이 복구되어 있다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건 권능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냥 공돌이들을 갈아 넣었을 뿐. 공돌이들의 신이라면 이 정도는 가능한 법.


달리 신이겠나.

“릴리.”

- 응.

“일단은 좀 거를 필요가 있어.”

모두 김우진의 권속이 되겠다는 마음은 진심일 거다. 하지만 그 중에 불순한 마음을 섞은 놈들이 있겠지. 그런
놈들에게 이곳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다.

물론 김우진과 베리안의 전투를 목격한 놈치고 감히 그런 겁대가리를 상실한 생각을 할 놈이 존재하겠냐만은


언제나 철저한 게 좋으니까.

쉽게 말해 기선제압이다.

- 어떻게?

“굴려. 욕도 못할 정도로 지독하게.”

- 맡겨.
“그래.”

김우진은 릴리와 나르를 쓰다듬어주고 다른 신들을 소집해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행자들의 집단행동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이에 따른 백신전의 대응이 어떨지 이야기해보기 위함이었다.

- 조용! 모두!

그리고 릴리는 연병장으로 날아가 정신 교육을 시작했다.

그녀의 외침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자그마한 파랑새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정체가 세계수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 정렬!

“우리는 김우진님을 보고 싶소!”


“절대신님을 만나게 해주시오!”

- 조용!

하지만 웅성거림은 작아지지 않았고 릴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권능을 발휘했다.

마력 통제.

“···힘이?”
“···내 마나가!”

마력의 흐름 자체를 막아버리는, 그래서 그 일대에서 어떠한 힘도 쓸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기술.

권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뭐했다. 그냥 압도적인 격과 힘으로 찍어눌러버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세계수에 의해 힘이 통제된다는 것을 깨달은 집행자들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김우진에게 힘의 판도가 옮겨간다는 것을 깨닫고 곧장 연옥에 투항할 만큼 눈치가 빠른 이들이었으니.

- 기준.

“기준!”

릴리에게 선택받은 집행자 하나가 손을 들고 소리쳤다.

- 집합. 정렬.

“집합, 정렬!”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 너희들. 정신. 썩어.

김우진이 그랬다. 썩어빠진 정신 상태를 바로 잡으려면 굴리라고.


욕이 나올 정도로, 아니 욕도 못할 정도로 힘들게.

- 기절. 절반.
- 시작.

쿠그그그-

나무뿌리들이 사방에 밀려와 연병장 전체를 감쌌다.

그 모습에 당황한 대부분의 집행자들이 얼을 타고 있을 때, 눈치 빠른 집행자 하나가 옆에 있던 집행자의 면상을


후려쳤다.

퍼억!

“이, 이게 무슨···커헉!”

비명을 지르는 자의 몸 위로 올라가 무한 파운딩을 해 기절시켰다. 주변의 집행자들이 경악하며 그를 나무랐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지금 같은 집행자를···!”

- 총 2214. 절반 1107. 하나 컷.
- 절반까지 1106.

“······.”
“······.”

릴리의 카운트만 아니었다면.

그제야 세계수가 요구하는 것을 깨달은 집행자들이 눈알을 굴렸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받아준다는 건가?’


‘자격 증명?’
‘이 새끼들을 다 족쳐야···.’

“뒤져!”

그게 시작이었다. 힘을 잃어버린 집행자들 사이의 난투가 벌어졌고 기절한 자들은 나르에 의해 밖으로 치워졌다.

- 절반까지 0.

“이, 이겼다!”
“살아남았다!”
“나는 내 자격을 증명했어요! 나를 받아주세요!”

1107 명의 상처투성이 생존자들이 기쁨의 환호를 내질렀다. 율리아는 날개로 박수를 치며 그들을 축하해주었다.

“그럼 이제 절대신님의 권속이···?”

- 아니.
하지만 승리를 만끽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 나 공격.
- 너희 피해.

쿠그그그-

수 천 개의 나무뿌리들이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 * *

“···남은 집행자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든 막고 있기는 한데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백신전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은 패배하고 수십의 신들과 주신들이 모두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집행자들 대다수가 패배를
도망쳤다.

신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을. 김우진에게 순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쥐새끼 같은 놈들. 지금까지 우리에게 붙어 콩고물을 그렇게 얻어 먹고는···.”


“업보겠지.”

제이슨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힘이 없으면 빼앗기고 강탈당하는 게 이 우주의 순리 아닌가. 우리가 다른 종족들을 탄압했듯이. 이제는 우리가
힘이 없으니 이렇게 되는 거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제 신으로서의 생각은 버려야 하네. 우리는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야.”

신들이 침묵했다. 부정할 수 없다는 그 진실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내버려 둬야지. 달리 방법이 있나?”

없다.

“김우진이 그랬지. 얌전히 백신전에서 기다리라고. 알아서 오겠다고. 우리가 할 건 하나네. 더 이상 눈밖에 날
짓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최대한 그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것.”

백신전은 방향을 결정하고 차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언제든 김우진이 원할 때 올 수 있도록.

그리고 마침내.

“잘들 있었나?”

김우진이 왔다.
* * *

신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김우진은 혼자였으나 그 누구도 감히 그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위압감도 위압감이었지만 베리안과의 격전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극도의 저자세로 몸을 낮추고 있던 신들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 동안 잘 있었던 것 같군. 얼굴에 기름들이 반들반들한 걸 보니.”


“······.”

김우진을 걱정하느라 초췌하게 변한 신들은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김우진의 대화에 말리면 안 된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저희는 결코 김우진님에게 대항할 의사가 없습니다.”


“네 이름은?”
“제이슨입니다. 부끄럽지만 현재의 백신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신전이 바라는 건 뭐지?”
“감히 말씀드려도 되는 것입니까?”
“말해 봐라.”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느낀 제이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김우진님의 귀찮은 일을 맡아서 하길 바랍니다.”


“살고 싶다는 거군.”
“···예.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무 섣부른 판단 아닌가? 내가 차원들을 관리하는 것을 귀찮아 한다고 누가 그러지?”
“···그건.”

명확히 나온 건 없었다. 그저 그간 김우진의 행보와 언사, 성격을 비추어 그렇게 추정했을 뿐.

‘설마 잘못 짚은 건가?’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다. 만약 김우진이 오히려 권력 잡는 걸 좋아하고, 귀찮더라도 오점이 있는 자신들보다


새로운 백신전을 만들길 원한다면 전멸을 피할 수가 없다.

제이슨이 곧장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결단코 백신전이 김우진님을 다시 적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박았다.

“너희들의 처우는 너희들의 대답 여하에 따라 결정하겠다.”

톡톡, 김우진이 의자의 팔걸이를 두들겼다.


“대답이라 하면?”
“너희들 중에.”

김우진의 시선이 천천히 신들을 훑는다.

“아카식 레코드에 손을 댄 자가 있을 거야. 그렇지?”


“······!”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그는 또 다른 화근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
# < 116. 새로운 백신전 >

간단한 문제다.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의지이자 진짜 전지전능에 가까운 힘, 그 자체다.

이들을 신으로 만든 것도 아카식 레코드이며, 베리안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일부 취했기에 주신을 포함한 열
명의 신을 포식한 김우진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들이 만약 딴 마음을 먹는다면 그 시작은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없습니다!”
“결단코 그런 자는 없습니다!”

신들이 대경하며 대답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취한 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으니.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그냥 경고다. 감히 허튼 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

“좋아.”

돌 맞은 개구리처럼 격렬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은 원하는 걸 얻게 될 거다.”

목숨.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며 종말을 맞이하는 차원들을 구해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감사합니다!”
“다만, 용사들을 이용하고 버리지 마라. 그들에게 선택지를 줘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힘을 가지고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보낼 때, 계약서를 써라.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로. 힘을 가지고 돌아가 되, 차원의 사정에 걸맞지 않은 힘을
사용하게 되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차원의 사정이란 차원이 받아들이는 한계다.

일반적으로 김우진이 있던 글라크의 경우, 풍부한 마나로 인해 초인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그 초인들이 지구에는
단 한 명도 없다.
글라크에서 적당한 힘을 쓰면 평범한 것이지만, 지구에서 적당한 힘을 쓰면 괴물이다.

“걸 맞는 부분은 어떻게?”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고려해라.”
“···예.”
“아, 계약을 어기게 되면 심연이 아니라 연옥으로 보내게끔 계약서를 작성해라.”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는 디폴트가 심연이지만 조항을 넣는다면 다른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다.

“연옥 말입니까?”
“그래, 연옥은 감옥이잖느냐.”

감옥에는 진짜 죄수들이 들어오는 게 당연하지.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옳습니다!”
“그럼 끝났군. 내 휘하의 신들도 곧 보낼 테니 그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라. 그들이 내 대리인이다.”
“···예.”

노골적인 낙하산이었지만 신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아, 그리고···.”

대전 밖으로 나가던 김우진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백신전 차원을 비워 놔라. 연옥이랑 합칠 거니까.”


“···예?”
“귀가 먹었나? 방 빼라고.”
“그, 그럼 저희는 어디로···?”
“빈 차원 많은데 아무거나 하나 잡고 살아라. 내가 그것까지 이야기 해줘야 하나?”
“···예.”

차원을 삥 뜯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 * *

“아카식 레코드 주변에는 방어막이 있습니다. 주신들이 다른 신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건데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을 빌린 것이기 때문에 죽은 지금도 유지가 될 겁니다.”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아, 아닙니다.”

제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은 백신전을 벗어났다.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와 가장 가까운 차원. 저 멀리 거대한 빛의 기둥이 보였다.

위, 그리고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게 쭉 뻗어 나간 아카식 레코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을 자아낸다.


“아카식 레코드···.”

이 우주를 유지하는 중추. 생김새처럼 우주를 떠받드는 기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흡수할 수 있으려나?”

김우진은 그것을 삼킬 작정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굳이 대단한 무언가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를 통치하는 것에도 큰 관심은 없다.

아카식 레코드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베리안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겨버렸다.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했다는 것, 그리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성공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것.

그게 문제다.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겨 그저 섬기고 따르던 백신전의 신들에게 역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심어 줘버린 거다.

물론 베리안은 주신이었고 신들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가 성공했다고 다른 신들 또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언제고 김우진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김우진은 후환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 내가 먹어버려야지.”

새하얀 기둥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아카식 레코드 자체를 흡수하는 게 아니다. 목표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도록 그 통제권을 완벽하게 가져오는 것.
겸사 겸사 힘을 취할 수 있으면 좀 취하고.

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베리안이 했으니까. 그보다 약한 놈이 했으니 그가 하지 못할 리가 없다.

환한 빛줄기가 김우진을 감쌌다.

* * *

김우진이 아카식 레코드로 들어간지도 몇 달이 지났다.

그간 백신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 방 빼!
- 빼!

“···연옥을 아예 가지고 오다니.”


“혹시 했지만 정말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차원을 합친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릴리라는 선장의 항해 끝에 연옥이라는 차원은 마침내 백신전과 맞닿았다.

신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었고 릴리와 나르는 합심하여 차원 병합 작전을 시작했다.

“부딪힌다!”

쿠그그그-

두 개의 차원이 맞부딪히며 거대한 충돌했으나 예상했던 충격은 없었다. 마치 도킹하듯, 자연스레 곁에 안착하여
맞닿았다.

그리고 연결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콰-

연옥에서 시작되는 세계수의 뿌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백신전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차원의 방벽을
허물고 들어가 대지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신기하네요. 마치 조각난 옷을 맞추는 것 같아요.”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
“일반적인 세계수라면 당연히 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절대신의 세계수이기에 가능한 일이죠.”

차원이라는 옷감을 세계수의 뿌리라는 실로 옭아매고 있었다. 차원과 차원이 맞닿는 부분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게 1 차적인 작업이 끝났다.

- 멀어.

“아직 멀었다는 건가요?”

- 응. 차원. 하나로. 시간 필요.

뿌리는 곧 백신전이라는 차원의 핵에까지 내려간다. 이후 핵에 간섭하여 핵과 핵을 합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다.

이후 핵을 합치게 되면 둘은 서로를 같은 차원으로 인식하게 되어 자연스레 차원의 합일이 일어난다.

물론 말은 쉽지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릴리와 나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을, 하지 못했을 일이다.

“···백신전에서 쫓겨나다니.”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자, 다들 따라 오세요!”

백신전이라는 본래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신들은 율리아와 일곱 신들의 인도에 따라 인근의 한 상위 차원에
안착했다.

“···여기는.”
“베리안님, 아니 베리안의 차원이군.”

신앙은 신들에게 힘이 된다. 그렇기에 나름 힘이 있는 신들은 자신만의 권역이 하나씩 있었다.

주신들도 마찬가지였고 주신들의 권역은 당연히 다른 신들의 차원들보다 알토란 같은 곳이었다.

그 중 베리안은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하위 차원은 물론 상위 차원도 하나 점거 하고 있었다.

가장 아카식 레코드와 가까운 백신전과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결코 부족하지는 않은 곳.

“오늘부터 여기가 새로운 백신전이에요.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지내시게 될 거예요.”


“허허벌판이네만?”
“지금부터 개발해야죠.”

새로운 백신전이라고 하나 차원은 허허벌판이었다. 상위 차원이기에 피조물들이 살아가지도 않았고 조용하고


자연을 좋아하던 베리안의 취향에 맞춰 아무 것도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장님의 전언이 있으세요. 오늘부터 신들의 개인 권역은 모두 폐기에요.”


“뭐라고?”
“잠깐만, 그건···!”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소장님이 결정하세요. 말씀드렸잖아요? 소장님의 전언이라고.”
“······.”
“······.”

김우진을 언급하자 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 않나?”

유일하게 제이드가 총대를 매고 반발했다.

신앙은 신들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아카식 레코드에게 부여받은 힘이 철 덩어리라면 신앙은 그것을 가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열과 망치다. 신앙이
없어도 신들은 신에 걸맞은 위엄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이 있는 신들은 그 이상이 된다.

신들이 단순히 용사들로 종말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퍼트리고 권역을 만들려는 이유다.

“신앙을 퍼트리는 것 자체를 막지는 않으신다고 하셨어요. 한 신이 독점하는 권역을 막는다고 하셨지.”

그렇기에 권역은 김우진에게 이로울 게 없었다.

“소장님이 그러시더군요. 독과점은 시장 경제를 어지럽힌다고. 자유경쟁으로 가시래요.”


“···그게 무슨?”
“저도 잘 몰라요. 그냥 그러래요.”

율리아가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크흠, 목을 가다듬고 당근을 던졌다. 채찍과 당근은 어디서나 중요하다.
신들이라고 다를까.

“그래도 여러분에게 좋지 않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에요. 저희들이 새로운 백신전의 10 주신이니까요.”


율리아 카르센을 비롯한 일곱 명의 신들이 모두의 앞에 섰다.

“10 주신?”
“7 명이 아닌가?”
“잘 보셨어요. 아직 세 자리는 공석이에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실 거라고 믿어요.”

신들이 눈을 빛냈다.

비록 신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전과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진 것이 맞다. 그들 중
다시 찬란했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자는 없었다.

김우진이 주도하는 백신전의 열 명뿐인 주신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

“···주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성과요.”
“성과?”
“누구보다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자가 원하는 걸 얻게 될 거예요.”
“본분이라면···.”
“차원을 구하는 것?”

본래 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균형을 맞추는 거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어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것.

“용사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소장님이 미리 말씀해주셨을 테고.”

율리아가 생글 생글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 *

새로운 백신전은 데르카인의 주도 하에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부터 거대한 대도시를 설계했다.

“신들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위용이 있어야 하네.”


“그냥 그런 도시를 만들어보고 싶으신 건 아니죠?”
“당연히 맞지. 언제 또 신과 집행자들을 일꾼으로 부려 먹으며 도시를 만들어 보겠나. 최대한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야지!”

신들이, 집행자들이 일꾼이었고 재료는 전 차원에서 수급되었다. 속도는 유례없이 빨랐다.

“이거 높이가 얼마나 된다고요?”


“정확히 333333 층으로 맞췄네. 소장이 말하길 자기가 살던 나라에서는 3 이 행운의 숫자라고 하더군.”
“어···.”
“정확히 차원의 방벽과 맞닿아 있지. 역시 신들이네.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있게 될 줄이야.”
“그야 모두가 이런 건물은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네.”
“저건 뭔데요?”
“마력포네. 유사시에 신들의 힘을 뽑아서 동력으로 삼는.”
“저런 걸 만들 필요가 있나요?”
“모든 일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네. 신들의 차원이라고 한들 공격당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그야 마력포는 많아야 그 멋이···아니, 마물은 한두 마리가 아니지 않나.”
“욕망이 뚝뚝 흘러넘치네요.”

데르카인은 차원 전체를 뒤집어엎었고 고작 두 달 만에 차원 도시 ‘백신전’이 완성되었다.

“일단 더 이상 신전은 아닌데 말이죠.”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상징성이 중요하지.”

신과 집행자들이 입주를 시작했다. 일곱 주신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백신전의 시작이었다.

───────────────
# < 117. 귀환 >

아카식 레코드란 무엇인가.

흔히들 말한다.

우주의 의지, 빛, 생명의 근원, 균형의 수호자, 그리고 차운의 도서관.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가 탄생한 이래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방대한 기록이다.

김우진은 그 사실을 이번에 실감했다.

아카식 레코드와 접촉하는 순간, 막대한 정보들이 밀려들어온다.

태초부터 저장해온 우주의 기억과 파편들.

빠르게 과부하 되어가는 뇌와 정신은 아무리 김우진이라 하여도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다분해
보였다.

“···난 놈은 난 놈이네.”

이걸 뚫고 들어가서 일부지만 권능을 가져왔다는 거지?

괜히 최초로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되어 주신이 된 게 아니었다.

김우진은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오면서부터 자연스레 연결되어 버린 정신의 통로를 닫았다. 타기 직전까지 갔던
정신이 조금이지만 안정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워 이마를 매만졌다.

‘취할 수 있나?’

너무 방대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주신들을 죽이고 그들을 포식하면서 스스로가 무척이나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딱히 우주를 지배하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스스로 어느 정도 대단한 사람이 됐다는 것은 인지했다.

그럼에도 아카식 레코드 내부에 있으니 작아보였다. 우주 앞의 먼지랄까.

뭐, 그렇다고 스스로 초라해진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결국 가능성은 있다. 베리안이 했으니까
그도 할 수 있다.

한 달. 한 달 만에 김우진은 아카식 레코드의 핵심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아카식 레코드의 핵은 형태가 딱 드러난 무언가가 아니었다. 빛의 기둥 내부의 또 다른 기둥이었다. 보다


정순하고 우주의 힘이 넘쳐나는, 평범한 이들은 결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심처에 위치한.

────!

조심스레 매만지는 순간, 그것이 비명을 질렀다. 세상이 떠나가라 요동치며 의지가 김우진을 적대했다.

“씨발···?”

이런 소리는 없었는데?

우주의 힘이 의지를 가지고 사방에서 덮쳐온다.

재해와 같았다.

대지를 뒤집어엎는 지진이자, 휩쓸고 지나가는 해일이며, 모든 걸 분쇄하는 폭풍이다. 하늘을 쪼개는 벼락이자,
세상을 잿더미로 만드는 불꽃이다.

그것은 더 없이 거대하고 방대하며 위압적이다. 자연이, 우주가 그러하듯 끝이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저 흐를 뿐이다.

김우진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몰려오지만 극도의 악의가, 살기가 없다. 세세하고 정밀하지도 않다.

김우진은 베리안이 어떻게 이 난관을 견뎌냈는지 이해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자신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저 굳건히 버티며 받아냈다. 무분별한 자연 재해는 그의 불꽃을 뚫어내지 못했다.

“그런 속담이 있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아카식 레코드가 난리를 치는 것은 그만큼 급박하다는 소리며, 김우진이 맞게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손을 뻗어 핵을 잡는다. 비명과 재해는 커지나 김우진은 닫았던 정신을 열었다.

───!
─!

비명처럼 들리는 괴성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릴리나 나르처럼 또렷하게 이지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의지.
우주를 관장하는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키만 잘 잡으면 그 의지를 어느 정도는 컨트롤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리고 그게 김우진의 최종 목표였다.

누구에게도 스스로의 영역을 내주지 않게 하는 것.


그래서 김우진이 또 다른 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너랑 합의할 게 참 많아.”

─────!

백의 공간 속에서 백염이 피어올랐다.

* * *

김우진이 몇 달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때, 릴리는 연옥과 구 백신전의 합병을 마무리한 상태였다.

“이게 연옥이라고?”

- 응. 어때?

“환상적이야.”

차원의 크기가 거의 3 배 가까이 늘었다. 그래봐야 어지간한 하위차원만한 게 전부지만 애초에 연옥도, 백신전도
크기 자체가 큰 건 아니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압도적인 마력.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에 가장 가까운 차원으로 우주의 힘이 가장 풍부한 차원이었다.
연옥은 여러 차원들의 교차 차원으로 마나가 더 없이 많은 곳이었다. 거기에 두 그루의 세계수가 신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퍼트리니 거의 백신전에 준하는 차원이 되어 있었다.

그 상태에서 두 차원을 뒤섞어 버리니 아카식 레코드만큼은 아니지만 그 턱 밑까지 쫓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릴리와 나르의 본체도 훨씬 커져 차원의 하늘을 덮고 있었다.

“잘했어, 릴리, 나르.”

- 응!
- 응!

제법 성장한 두 세계수들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김우진의 양 어깨에 올라탔다.

김우진은 새롭게 바뀐 차원의 모습을 보다 세세하게 살폈다.

두 그루의 세계수는 차원의 중심에 자리했고 연옥의 건물은 그 앞에 있다.


‘그러고 보니 연옥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차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용사들은 끊임없이 발탁될 거다. 용사들을 쓰지 않으려면 신들이 자신들의 업을
소모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지나친 악수다. 제 살을 깎아 먹다 보면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신들에게도 이미 고지했지만 그렇다고 본래의 방식대로 운용할 생각은 없다.

용사들은 세상을 구하면서 그만한 희생을 했고, 대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돈이든 뭐든, 해당 차원에서 가치 있는 걸로 보상을 주고.’


‘힘?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게 두고.’

물론 스스로 포기하면 더 많은 보상을 주며,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반드시 써야 한다.

용사의 힘은 규격 외의 힘이다. 자연스레 귀환하는 용사는 최강자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게 깽판으로 이어지면 큰


문제가 일어난다.

계약서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차원 이상의 힘을 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법과 오러가 존재하는 차원에서는 적당한 최강자 수준까지, 지구에서는 그냥 이종격투기 챔피언이나 산전수전
다 겪은 특수요원 수준까지.

그게 딱 적당하다.

‘문제는 이제 연옥이 사라져 버렸다는 건데.’

건물은 있지만 이곳의 연옥은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차원을 합병하면서 그득해진 마력은 일개 용사 따위가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신이나 집행자에게는 천국이지만 피조물이나 용사에게는 지옥이 될 거다.

“어디가 좋을 것 같아, 릴리? 혹시 좋은 생각 있어?”

- 백신전!
- 맞아, 백신전!

“새로운?”

- 응!
- 응!

‘나쁘지 않은데?’

신들은 지금까지 많은 걸 누려왔고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래서일까, 권리는 좋아하면서 의무와 책임은
싫어한다. 누군들 안 그렇겠냐만은 우주 최고의 특권층이었던 터라 특히 심하다.

그러니까 백신전 한켠에 연옥을 만들어놓고 말을 안 듣는 놈들을 소장으로 만드는 거다.

여기를 상위 신들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말 좀 잘 듣는 놈들은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집행자들도 마찬가지다. 집행자들 중 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은 없다. 그리고 이곳의 환경은 그 어느
차원보다 우주의 힘이 넘치니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 *

“드디어 나왔군, 자네! 그런데 그다지 바뀐 건 없어 보이는데?”


“딱히 아카식 레코드를 흡수하거나 한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남들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약을 좀 걸고 왔죠. 겸사겸사 아카식 레코드랑 합의도 좀 하고.”
“합의? 그런 게 통하는 거였나? 아카식 레코드도 세계수 같이 정령체가 있나?”
“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나저나 꽤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수고는. 드워프에게 무언가를 만드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다고.”

단 몇 개월만에 차원 단위의 대도시가 형성된 모습은 신의 이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신들이 만들었으니 사실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건물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어떤 건가?”
“연옥입니다.”
“응?”
“본래의 연옥은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하긴, 그 정도 농도면 용사라고 해도 과부하가 걸려 죽겠지.”
“맞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백신전에 연옥을 추가하려는 건가?”
“신들을 부려먹으려고요. 적절한 채찍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바로 만들지.”
“구속구 같은 것도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게. 연옥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경험을 한껏 발휘해서 모든 걸 완벽하게 만들어주지.”
“어째 신나 보이십니다?”
“아무렴. 연옥에 갇힐 줄만 알았지, 내가 연옥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겠나?”

데르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 같아서는 소장도 한 번 해보고 싶군.”


“시켜드릴까요?”
“농담이네. 아무리 소장 직위라지만 연옥 쪽으로는 오줌도 싸고 싶지 않아.”

연옥이 만들어지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차원 ‘새로운 백신전’이 완성되었다.

신들의 공간 백신전.
신들이 머무는 곳, 하늘 도시.
집행자들이 머무는 땅의 도시.
그리고 죄수들을 가두는 연옥까지.

모든 기반시설이 마련되어 입주민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김우진이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가 있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신들의 공석 또한 채워졌다.

백신전은 다시 백신전이 되었고 무너진 체계와 시스템을 완벽하게, 그 본래의 것 이상으로 복구해냈다.

김우진은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모든 신들을 소집해 포고를 내렸다.

【하나. 새로운 백신전은 열 명의 주신과 아흔 명의 신들로 구성된다.】


【둘. 오직 주신들과 그들을 섬기는 집행자들만이 차원 ‘연옥’에 출입할 수 있다.】
【셋. 신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종말로부터 세상을 구한다.】
【넷. 성과가 가장 적은 신은 새롭게 만들어진 감옥 ‘연옥’의 소장이 된다. 이는 스무 명의 죄수들을 출소시킬
때까지 유지된다.】
【다섯. 앞으로 천년마다 가장 성과가 좋은 신을 선택해 주신으로 발탁한다. 이는 세 번까지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가장 성과가 떨어지는 자는 연옥의 소장에 박아놓고, 가장 뛰어난 자는 주신으로 삼겠다는거군.”


“···하. 누굴 조련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그쪽은 하지 마시오. 나는 주신이 되고 말 거니.”
“누가 하지 않겠다고 했소?”

신들은 추락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렇다고 주신이 되고 싶지 않은 자들은 없었다. 말 안 듣는
용사를 관리하는 소장이 되기를 원하거나, 김우진에게 대항할 자신도.

신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며 뛰어난 용사를 구하기 위해 차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좋은 경쟁이었다.

“그러면 아카식 레코드의 힘은 완전하게 손에 넣으신 건가요?”


“아니.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더라고.”

베리안이 일부 파편을 손에 넣긴 했으나 그건 정말 파편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강해진다는 게


대단하긴 하지만 그만큼 아카식 레코드가 품고 있는 힘은 방대했다.

당연하다. 우주의 탄생과 함께 힘의 균형을 맞춰온 우주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아카식 레코드가 사라지면 차원이 아닌 우주가 멸망한다.


아카식 레코드는 누군가 독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 존재였다.

“그냥 적당히 간섭만 해서 누구도 아카식 레코드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해놨지.”

그거면 족하다. 어차피 김우진이 무언가 할 생각은 없었고, 신들이 갑자기 딴 마음을 먹는 것만 방지하면 되는
거니까.

어쨌든 모든 게 정리되었다. 이제 그가 없어도 우주는 유지될 것이며, 그를 쫓는 적도 없다.

“길었어.”
“···뭐죠? 그 세상 다산 것 같은 대사는?”
“그동안 신들 때문에 못 갔으니까 이제 가야지.”
“어디를요?”
“어디긴, 내가 돌아갈 때가 한군데 밖에 더 있어?”

고향.

“지구.”

* * *

잘 깔린 도로, 드높은 빌딩숲, 북적이는 사람들과 인위적으로 조성해놓은 조경들.

여러 차원들을 오고 갔지만 오직 지구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꽉 막힌 차들과 메케한 매연, 뿌연 미세먼지까지.

한 때는 참 더럽고, 짜증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 자체에는 변함이 없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반가웠다.

지구라는 행성이자 차원,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 모든 게 좋다.

다만, 예상과는 다르게 김우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콜록, 콜록. 여기 공기가 너무 안 좋아요.”


“그렇겠지.”
“···숲의 정기도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구나. 세계수는 당연히 없고.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니.”
“마나도 거의 없는 차원입니다. 숲의 정기도 희박하죠.”
“오, 저게 그 자동차라는 건가? 하늘을 나는 강철이라니! 저게 비행기? 혹시 신의 마력포와 비견될 수도 있다는
그 핵이라는 것도 볼 수 있나?”
“핵은 꿈도 꾸지 마십쇼.”
“이 차원의 식문화는 얼마나 발달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전 세계에 음식점들마다 별을 줘 점수를 매기는 시스템이 있으니까 알아서 찾아다녀.”
“절대신이시여. 제가 기필코 이곳에 절대신님의 신앙을 널리 퍼트려 저 우매한 자들을 깨우치겠습니다.”
“아니, 제발 그러지 마. 내 이름 팔기만 해봐.”
“드디어 지구···. 드디어 한국···.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앞으로 뭘하고 지내든 상관없는데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사고치지 마라.”

강자가 없다는 것에 실망한 타르칸을 제외한 여섯 신들이 모두 따라왔다.

솔직히 강민식은 예상했다. 그는 한국인이었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다른 다섯은 의외였다.

“대체 왜 따라온 겁니까?”


“마나나 마법, 마도공학 없이 발전된 기술이라는 걸 경험해 보고 싶네. 컴퓨터라는 것도.”
“···너무 납득이 가네요. 다른 분들은?”
“그냥 궁금하잖니? 너 같은 용사가 나온 차원이 대체 어떤 차원일지.”
“그럼 이제 가시는 겁니까?”
“첫 인상이 딱히 좋지는 않지만 잠깐 본 것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짧지 않니?”
“저는 그냥 따라왔어요! 어차피 딱히 갈데도 없거든요.”
“그래, 넌 그런 걸로 치자.”
“저는 모든 차원의 모든 식도락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그래, 그러던가. 디아네, 너는?”
“보다 많은 차원에 절대신님의 신앙을 퍼트려 이롭게 하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내가 사명을 준 적이 없는데?”
“지금이라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가.”
“안 됩니다! 절대신께서 태어나고 자라신 성지를 어떻게 순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신이시여, 제발 불쌍한
종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렇게까지 나오니 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다 조용히 해봐.”

김우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들을 그냥 지구에 풀어놓았을 때를 생각해보았다.

1 초 만에 절대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평범한 소시민 김우진으로서 지구의 삶을 살고 싶은 거지, 난장판이 된 지구를 바라지 않았다.

“···일단 집을 구할 테니까 얌전히 다 따라와. 어차피 지구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잠시 교육 기간을


거쳐야겠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뭐야?”
“저도 그래야 합니까?”

뭐야, 이 멍청이는.

“안 꺼져?”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강민식이 사라졌다.

───────────────
# < 118. 지구인 김우진(본편 完) >

짹짹-

참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언제나 밝고 따스하다.

- 일어나.
햇빛을 등진 채, 날개로 코를 건드리는 릴리의 행동에 절로 눈이 떠진다.

“졸려.”

- 게을러.

“몇 시야?”

- 10 시.

“나르는?”

- 옆에.

언제 왔는지 김우진의 가슴 위에 또아리를 튼 채 자고 있었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볍게 사과 하나를 들고 소파에 앉는다. 릴리와 나르가
자연스럽게 양 옆에 착석한다.

삑-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마누라를 넘봐!]

짜악!

“아침 드라마도 갈 때까지 갔네.”

김치와 미역, 된장을 넘어 이제는 파스타로 때리다니.

크림소스들이 남자의 뺨과 정장을 하얗게 물들인다. 미약하게 핑크빛을 띠는게 단순한 크림이 아니라 로제다.

“오늘 점심은 파스타나 먹을까?”

- 좋아.
- 좋아!

습관적으로 베르너를 부르려던 김우진이 멈칫했다. 이곳은 연옥이 아니고 베르너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개인
셰프로 만들고 싶지만 큰 도움을 줘왔던 그를 그렇게까지 억압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적, 사과를 조각 내 일부는 자신의 입으로, 일부는 두 정령체의 입으로 넣어주었다. 소파에 몸을 누였다.

시간은 오전 11 시 11 분. 다시 잠을 자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좋다.

“···이거야.”

평온한 일상.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티비를 틀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하는
지구의 삶.
이 문명의 이기를 갈망해왔다.

OTT 를 틀어 그간 나온 영화나 드라마들을 찾았다. 60 년이 넘게 이어진 공백은 몇 년간 쉬지 않고 영상들을 봐도


다 보지 못 할 정도로 방대했다.

비록 간간히 휴가 때마다 틈틈이 보긴 했지만 조족지혈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좋았다. 어차피 지금의 김우진에게는 남는 것이 시간이었으니까.

[홍어는 하나님의 것이다.]

- 홍어?
- 맛있어?

[여긴 내 구역이야! 내가 만든 내 세상이야! 이 새끼들아!]

- 연옥은 내 구역이야!
- 내 것도!

[들어와, 들어와!]

- 들어가?

“티비 안으로는 못 들어가.”

- 왜 안 돼?

세계수들의 첨언을 들으며 영화 세편을 내리 보고 나니 점심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김우진이 어깨를 긁적이며


방문을 열었다.

“들어가요! 들어가! 아니, 들어가라고요! 하체가 뱀인 캐릭터라고 정말 기어가시는 건가요?”


“거기서 궁을 써야죠! 궁! 궁!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R 키만 없는 키보드 사셨나요?”
“맵 안 보세요? 핑을 찍어 줬는데 왜 죽어요? 혹시 시력이 0.000001 이신가요?”

일주일은 묵은 듯한 컵라면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헤드셋을 낀 채 컴퓨터에 집중하고 있는 하이엘프의 분노


섞인 음성들이 들려온다.

“현지인 패치가 너무 빠른데?”

- 폐인 귀쟁이.
- 이상한 귀쟁이.

세계수들에게 이상한 엘프로 단단히 낙인이 찍혀도 찍혔다는 건 알까 모르겠네.

“야.”
“왜요?”

김우진이 톡톡 어개를 두들기자 율리아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밥 안 먹냐?”
“방금 컵라면 먹었어요.”
“대단하다, 진짜. 너 안 돌아가냐?”
“제가 어디로 돌아가요?”
“어디든. 세이드를 만나던, 고향으로 돌아가던.”
“세이드는 며칠 전에 만나고 왔어요. 그리고 고향에 가봤자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요.”

콰작, 율리아가 양파 맛 감자칩을 씹으며 대꾸했다.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손이 다시 키보드를 메만졌다.

“아, 소장님이 말 시켜서 죽었잖아요. 다섯 명이 전부 몰려왔네.”

이게 미쳤나.

“그냥 네가 못하는 걸 누굴 탓해?”


“저 이 게임 랭킹 1 위인데요.”
“언제 챌린저 찍었어?”
“쉽던데요? 다들 게임을 너무 못해서요. 반응속도가 너무 느려요.”
“신이랑 인간이랑 반응 속도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를 매개로 하는데 이 정도면 제법 공평하죠.”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불꽃이 있는 것 같아요. 화를 참지 못해요.”


“그거 극찬이야. 그리고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왜요?”
“···아니다. 됐어.”

말을 말지.

“아, 그런데 프로팀에서 제의가 몇 번 왔어요.”


“프로게이머? 해보려고?”
“아뇨, 딱히. 듣자하니 합숙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게 많더라고요. 그런 건 딱 질색이라서요.”

하긴, 자유로운 엘프들은 규율과 규칙속에 억압되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나와, 밥이나 먹게.”


“배 안 고픈데요.”
“우리는 원래 평생 안 먹어도 안 고파.”

괜히 신의 육체가 아니다.

하지만 맛있는 게 넘쳐나는 세상에서 굳이 먹는다는 즐거운 행위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근데 왜 너 뿐이냐.”
“데르카인님은 새벽부터 나가셨어요.”
“하긴, 미국까지 대학원 다니려면 고생이 많지.”

데르카인은 함께 지구로 넘어온 뒤, 공돌이가 되었다. 권능으로 가상의 인물을 만든 뒤,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마법과 공학, 그리고 과학을 점목시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키나 생김새는 권능으로 인간처럼 바꾸었기에 딱히 문제가 없었다.

“시에나님은?”
“더 이상 못참겠다면서 연옥으로 넘어가셨어요. 지구는 숲의 정기가 너무 부족해서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면서요.”
“세계수의 가지들 가지고 왔잖아?”

가지라고 하지만 사실 분신이나 다름 없는 줄기를 뜯어 왔다. 그대로 화분에 심어 지구로 들고 왔고 덕분에


릴리와 나르가 지구에서도 정령체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산소 호흡기 꼈다고 바다속에 평생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 정도야?”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엘프마다 느끼는 개인차는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래?”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태평하게 여기 있을 수 있는 걸까.

하이엘프면 숲의 정기에 더 민감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강민식님은 아까 저랑 같이 게임했어요. 강민식님 말고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걔는 알아서 잘 살겠지. 수틀린다고 사고만 치지 말라고 해라.”
“네.”

원래 한국인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가족도 있기 때문에 따로 살고 있다.

베르너는 별 받은 식당들을 모두 돌아보겠다며 미식 여행을 떠났고 디아네는 요즘 티비에 많이 나온다.

“어, 디아네님이네요. 몇 번을 봐도 카메라를 잘 받으세요. 예쁘다고 소장님이 아니라 디아네님을 따라다니는


신도들도 있다면서요?”

틀어놓은 티비에서 때마침 디아네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 전, 새롭게 나타난 종교, 절대신교는 절대신을 위시로 한 여러 주신들과 신들을 섬기는 교단입니다.]
[사이비에 가까운 이 집단의 교주는 디아네···.]

연설을 하는 디아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인다.

[여러분, 진정한 신을 섬겨야 합니다! 진정한 주신! 위대한 그분께서는 모두를 굽어 살피고 계십니다!]
[그분을 믿으면 은총이 내려옵니다! 자비를 주십니다!]
[믿습니다!]
[절대신님이시여!]

광신도들이 일제히 예배를 드리며 절대신을 찬양한다.

[진짜라니까? 내가 말기 암이라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절대신님을 믿고 완치가 됐다니까! 의사도


포기하라고 한 걸 절대신님이 은총을 주셨다고!]
[관절염이 씻은 듯이 나았어.]
[저희 아이가 너무 아팠거든요? 그런데 절대신님을 믿고 나서···.]
기자가 딴 신도들의 인터뷰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이 즐비했다.

[절대신님을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절대신님을 믿으면 건강해집니다!]
[절대신님을 믿으면 웃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절대신님을 믿으면 시험에도 합격합니다!]
[여러분! 절대신님을 믿으세요!]

뭐야, 저 사이비성 멘트는.

[새롭게 폭풍처럼 나타난 절대신교. 과연 이들은 사이비일까요? 진짜 신을 섬기는 자들일···.]

보다 못해 티비를 껐다.

“아무리 봐도 천직이시네요. 궁금해서 그런데 일부러 시키신 건 아니죠?”


“내가 그럴 것 같아?”

포교를 하겠다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주긴 했다. 하지만 절대 김우진의 이름을 이용하지 말라고 했더니
절대신이라고 못을 박고 저러고 있다.

진성 광신도라 말린다고 말려질 인간도 아니었다.

“그냥 하지 말라고 하면 안 되나요? 말 잘 들을 것 같은데요. 신의 명령이잖아요.”


“말이야 잘 듣지. 햇빛을 못 받는 식물처럼 시들시들해져서 문제지.”
“···뭐예요, 그게?”
“그런 걸 나한테 물어도 내가 알 턱이 있나.”

광신도의 정신 매커니즘은 알 도리,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근데 저 이적들 문제없는 거예요?”


“권능이나 이능은 절대 쓰지 말라고 했어. 저건 그냥 자연스러운 거야.”

모든 능력을 제한했다고 한들 신이다. 신의 육신이 인간의 육신과 같을 수가 없다. 그들은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이로운 기운들을 자연스레 발하니 인간의 병들을 낫게 하는 것 정도는 가뿐했다.

미세한 수준이니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불치병이 낫는 것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됐고, 파스타 먹을 거야, 말 거야.”


“먹을게요. 감사해요.”

김우진이 냉장고를 뒤적였다. 하지만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다 먹었지.”

사러 나가야하나.

대충 겉옷을 걸쳤다.

“저도 같이 가요. 며칠 밤낮으로 앉아서 게임만 했더니 몸이 찌뿌둥해요. 산책 할 필요가 있겠어요.”


“게임 좀 작작해라.”
“저희 세계에는 이런 게 없었단 말이에요.”
“후우.”

한숨을 쉬며 신발을 신자 두 동물들이 따라나섰다.

- 나도!
- 나도!

“너희들은 안 돼. 얌전히 집에 있어.”

- 심심해.
- 맞아.

“그 대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올게.”

- 새우살! 미디움 레어로!


- 제비추리! 블루 레어로!
- 그리고 홍어!
- 하나님의 홍어!

주문을 받고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나무들과 건물들이라니. 지구는 언제 봐도 신기하네요.”

참새 한 마리가 율리아의 손가락 위에 앉았다. 그녀가 참새를 쓰다듬어주었다.

“사람도 다른 차원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고요.”


“그래서 좋은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천천히 산책하듯 걸었다.

“연옥은 어때? 아직도 한 명도 없어?”


“이번에 한 명 들어왔어요. 아카르라는 차원인데 거기서 용사의 힘으로 대량 학살을 벌이려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미친놈이네.”
“다행히 그 직후에 계약서가 반응해서 연옥에 소환됐어요. 들어오자마자 당장 꺼내달라고 난리를 쳤는데 연옥의
소장님이, 아, 소장님 말고 지금 소장님이요. 아무튼 소장님이 참교육을 해서 조용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소장님
벤치마킹을 잘하셨더라고요. 이번엔 소장님 맞아요.”
“옛날부터 원래 매가 약이었어.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하는 순간부터 잘 써먹었지.”
“덕분에 그쪽 소장님이 지금 아주 희희낙락이에요.”
“왜?”
“소장님이 스무 명 출소해야지만 소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몇 개월 동안 죄수가 한 명도 없다고
드디어 한 명이 들어왔으니 희망을 본 거죠. 몇 개월에 한 명이면 20 명 금방이라고요.”
“그렇겠네.”

몇 년은 걸리겠지만 신에게 몇 년은 찰나에 불과했다. 물론 이번에는 몇 개월이지만 그게 몇 년, 몇 십년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옥의 소장으로 있을 때가 떠올려 김우진이 웃었다. 그때는 그도 그랬다. 50 명이라는 제한이 걸려 있어 최대한
많은 죄수가 들어오기를 바랐지.

그때였다.

부아아아앙-

귀청을 때리는 거친 배기음이 들렸다.

저 멀리 거칠게 질주하는 노란색 스포츠카가 보였다.

목적지는 횡단보도. 목표물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횡단보도를 건너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저거.”

율리아가 신기한 듯 물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평범한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김우진과 율리아에게는 아니었다.

“여기는 저걸로 데려가요?”


“원래는 트럭이었는데 요즘 스포츠카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고.”
“그럼 소장님은 트럭?”
“맞아.”
“신기하네요. 전 그냥 벼락 맞고 끌려갔는데.”
“마차가 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 재능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갈 텐데 그 사람들은 마차에 치여서 죽지는 않잖아요.”
“하긴, 마법이랑 오러가 없는 지구에서나 통하지.”
“저 분, 벨리스님이네요. 아카프네 차원의 담당자.”
“눈이 돌아가 있는데.”
“소장님 때문이잖아요.”
“나?”
“소장님이 성과에 따라서 주신으로 올려줄 수도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요즘 신분들 전부 다 성과를 올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자리가 3 개뿐이니까요. 최하위는 다음 연옥의 소장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스포츠카는 횡단보다 지척까지 다가왔다.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건너던 남자가 뒤늦게 이변을 눈치 챘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피하라는 외침이 들렸다. 남자가 창백한 안색으로 피하고자 했지만 스포츠카가 유도
미사일처럼 그를 따라갔다.

“왠지 불쌍하네요. 그냥 번개 맞고 끝나는 게 나을지도···.”

────!

남자의 신형이 높게 떠올랐다.

슬픔, 억울함. 그리고 의아함.


복합적인 감정들이 동공에 떠올랐다.

“그런데 굳이 저렇게 공개적으로 죽일 필요가 있어요?”


“아, 저거 그냥 쇼야.”
“쇼요?”
“저러고 그냥 다 잊혀지거든.”
“네?”
“차원 하나를 구하는데 평균적으로 20~30 년의 시간이 걸려. 그런데 용사들은 전혀 늙지를 않아.”

그 시간이 지나고 그대로 넘어오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

“차원을 구하지 못하고 죽는 용사들도, 일부는 아예 그 차원에 남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고. 그러니까 아예
시작할 때 데려간 다음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만들어. 그 편이 남겨진 사람들한테도 더 나을
테니까.”
“그럼 돌아왔을 때는요?”
“원하는 대로. 아예 잊게 해주거나, 변하지 않은 상태에도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게 하거나. 나름 AS 는 철저하게
해주는 것 같던데.”
“그럼 더 차로 치여 죽일 필요가 없는 거 아니에요?”
“저거 하나도 안 아파. 박기 전에 방호 마법을 걸어줘서 고통이 아예 없거든.”
“······?”
“말했잖아. 그냥 쇼라고. 지구 소설이나 만화 같은 곳에서 환생 트럭 이야기가 퍼지니까 그냥 따라하는 거야.
재밌다고.”
“···정신적 충격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요?”
“정신 방호 마법도 걸려.”
“···미쳤네요.”

스포츠카에 치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김우진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갔다 와.’

감이 나쁘지 않았다. 재능이 뛰어나니 권능 하나쯤은 개안하고 충분히 종말을 막고 올 거다.

‘돌아와서 사고만 치지 마라.’

고생한 대가는 충분히 쥐어줄 테니.

공간이 갈라지면서 남자와 스포츠카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을 살아갔다.

“구경꾼 입장이 돼서 보니까 신기하네. 장이나 보러 가자.”


“네.”

용사들이 있는 한, 우주는 평화롭다.

언제나처럼.


───────────────
# < 외전. 소장(진) 김우진(1) >

임시로 만들어진 백색의 공간은 오직 한 명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차원.

남자는 그 사이를 걸었다.

육신의 자유를 구속하고, 통각을 자극하며, 정신을 어지럽히는. 악의로만 가득한 곳.

그 중앙, 그가 있었다. 차원 곳곳에서 뻗어 나온 사슬에 묶여 온 몸이 구속된 인간.

육신은 상처투성이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고르게 느껴지는 숨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남자가 무릎을 굽히고 얼굴을 마주했다.

“김우진. 생각보다 더 독한 놈이구나.”

그, 김우진이 눈을 떴다.

“베리안.”

여전히 독기가 죽지 않는 눈은 남자, 베리안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설마 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못해도 10 년이면 두손 두발 다 들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네 생각대로 안 돼서 참 기쁘네.”

퉤, 김우진의 침이 베리안의 얼굴을 때렸다. 베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침을 닦아냈다.

“난 능력 있는 자를 좋아한다. 넌 이미 차고 넘치게 네 자격을 증명했지. 20 년의 시간을 버텨냈음은 화룡정점과


같다.”
“20 년?”
“···설마 몇 년이 지난지도 모른 거냐?”
“그럼 여기서 내가 시간을 어떻게 알아? 너 바보냐?”

확실히 새하얀 공간은 결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을만한 공간이 아니다.

“1 년마다 오겠다고 했을 텐데.”


“그랬나? 그런 사소한 건 딱히 기억하는 취미가 없어서.”
“과연, 그 태연함 하나 만큼은 신조차 본 받아야 할 정도구나.”
“딱히 너에게 칭찬 받는다고 기쁘지는 않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권속이 되어라.”
“지랄하고 있네.”

김우진이 입술을 핥았다. 쩍쩍 갈라지고 메마른 껍질 같이 느껴졌다.

지독한 갈증에 목이 타고, 허기가 몸을 축내며, 온 몸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정신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우진은 웃었다.

“어쨌든 그러니까 20 년이 지났다는 거잖아?”

그럼 뭐해.

“풀어, 이 새끼야.”

* * *

신들의 성지, 백신전.

백신전이 생기고 처음으로 신도, 집행자도 아닌 이가 발을 들였다.

“인간으로서 이곳에 온 것은 네가 처음이다. 평생의 영광으로 알아도 좋다.”


“헛소리 하지 마. 내가 들어오게 해달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
“넌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다. 다른 인간이 감히 내게 그 따위 말을 했으면 바로 머리통을 날려버렸을 텐데 너는
그러고 싶지가 않단 말이지.”

베리안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붉은 카펫이 깔리고, 신들이 자리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미중유의 힘이, 시선이 느껴졌다.

신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내뿜고,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압박을 준다.

그렇기에 신이고, 그들이 모였기에 이곳이 백신전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둘이나 죽인 게 김우진이다. 꿀릴 것은 하나도 없다.

“저 자가 김우진···.”
“20 년을 갇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눈에 독기가 살아있군.”
“바리온이 저놈에게 죽었다고?”

적의와 살의가 가득한 기운의 파도를 천천히 헤쳐 나갔다.

신들의 눈에 이채가 떠오르고 김우진은 세 개의 상석 앞에 섰다.

알비츠.
칼카르.
그리고 베리안.

저들이 이 백신전을 주무르는 주신이자 김우진에게 계약을 제의한 당사자들이다.

“감옥의 소장을 하면 된다고 들었는데 확정된 것 아니었나? 이제 와서 압박 면접이라도 보려고?”


“입 닥쳐라! 어디 감히 주신들께!”
“방자하기 짝이 없군.”
“어디 인간 따위가 감히···!”
터져나오는 분노와 함께 잔잔하게 깔려있던 기운이 폭발하듯 김우진을 찔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니 용사라 할지라도 단숨에 죽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기세였다.

“조용.”

하지만 알비츠가 가볍게 손을 들자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신들에게 주신이 어떤 의미인지,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김우진. 너는 감히 신을 죽이고도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잘못이 아니니까. 지구에서는 이런 걸 정당방위라고 해.”
“과연 베리안의 말대로다. 죽어서도 입만 둥둥 뜰 놈이구나.”
“듣던 대로 화끈해서 좋군. 어떻게, 나랑 한 판 붙을 생각 없나?”
“아서라, 칼카르. 계약을 맺은 이상,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
“농담이야, 농담. 내 앞에서 저 따위 말을 지껄이는 놈은 처음이라.”

이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신들과 달리 주신들은 김우진의 태도에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네가 무난하게 20 년을 버틸 줄은 몰랐다.”

김우진을 위해 마련된 임시 차원은 육체를, 정신을 갉아 먹는 극한의 고문실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끝끝내 20 년을 인고해냈다.

덕분에 계획자체는 틀어졌지만 주신들은 김우진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신을 둘이나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정신력도 신과 필적한다.

“대놓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조건으로 걸었다는 말을 잘도 하는군.”

김우진이 코웃음쳤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우리를 위해 일할 생각은 없느냐?”


“아까 대답했던 것 같은데. 좆까라고.”
“입이 험하군.”
“일개 관리자한테 존칭을 해줄 필요가 있을까?”
“관리자?”
“너희도 전부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을 받았을 뿐이라며?”

콰직-

테이블이 부서졌다. 이전과는 다른 압력이 김우진을 찍어 눌렀다. 김우진이 터져 나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자비에도 한계가 있다. 선을 넘지 마라, 김우진.”


“죽일 수는 있고? 이제 와서 계약대로 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하.”
“정말 끝까지 입은 산 놈이군!”
“관리자라. 어처구니가 없구나.”
주신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으나 공통된 사항이 있다면 분노였다. 김우진은 계약이 아니었다면 방금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신의 말은 무겁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그게 네가 그 따위 말을 지껄이고도 아직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유다.”
“심연이란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인가 봐?”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를 않는군.”
“져줄까?”
“필요 없다.”
“그만 해라. 쓸데없이 시간 낭비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지.”

알비츠가 김우진과 베리안의 말을 끊어냈다.

“김우진, 우리는 네게 아주 자그마한 호의를 베풀고자 한다.”


“호의?”
“한 달. 한 달의 여유를 주마. 연옥의 소장이 되기 전에 마음 놓고 마지막 휴가를 즐겨라.”

뜬금없는 호의에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일까 고민해보았지만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의심하지 마라. 그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은 네게 주는 순수한 호의니까. 우리는 뛰어난 자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차원을 아예 멸망시키려고 들어?”
“그 자들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니까.”

알비츠가 담담히 말했다.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었고 너에게는 자격이 있다. 거부하고자 한다면 거부해도 된다. 하지만 한 번 연옥의
소장이 되면 네가 명시한 잠깐의 휴가를 제외하고 언제 연옥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연옥의 죄수들은 그렇게 자주 오지 않거든.

“어떻게 할 테냐. 아, 의심이 많은 인간이라고 했나. 신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건데 결코 네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거다.”
“···좋아. 보내준다면 가야지.”

어차피 이렇다 할 선택지도 없었다.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도망치려면 도망쳐도 좋다. 그 대가는 온전히 네가 감당할 테니.”
“엿 먹어.”

베리안의 첨언에 김우진이 중지를 들어올렸다. 신들의 표정이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지만 주신들의 눈치로
인해 분노를 삭혔다.

“베른.”
“예, 주신이시여.”

베리안의 부름에 푸른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네가 김우진을 안내해줘라. 한 달 동안 따라다니면서 원하는 차원으로 옮겨주어라.”


“예?”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느냐?”
“···아닙니다.”
“덕분에 신이 되지 않았느냐. 신이 되어서 보은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서 되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따라와라.”

베른이 집행자들과 함께 김우진을 데리고 사라졌다.

“회의는 여기까지다. 모두 나가도록.”


“예.”

대전에는 오직 세 명의 주신만이 남았다. 잠시간의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리안이었다.

“이제 모두 알았겠지. 김우진은 한 번 쓰고 버릴 패로는 아깝다. 신이랍시고 뻗대고 있으나 한참 부족한 저것들
보다 훌륭하다.”
“동감이다. 고작 인간 주제에 내 호승심을 자극할 줄이야.”
“···인정하지. 솔직히 난 베리안 네가 미친 줄 알았다. 신을 둘이나 죽인 반역자 놈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가자니.”

하지만 김우진을 직접 보고 나니 왜 베리안이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깨달았다.

아까웠다. 김우진의 잠재력은, 재능은, 능력은 결코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수준이었다.

“놈을 우리들의 권속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네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놈이 그럴지는 의문이군.”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말투, 행동, 그리고 눈동자. 눈은 마음의 창이다. 사람의 감정은 눈에 그대로 깃든다.

“우리를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 안달났더군.”


“그래, 아주 건방진 놈이다.”

가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서 그 고초를 겪고도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회유를 한다 한들 넘어올까?

“네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굳이 권속으로 들여야만 부려먹을 수 있는 건 아니지.”


“계약을 이야기하는 거냐?”
“그래. 어차피 연옥을 관리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신들에게 있어 연옥은 귀양지나 다름 없었고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으니까. 김우진을 연옥의 소장으로 평생 박아놓을 수 있다면 좋지 않으냐.”
“확실히.”

신들은 누리는 것에는 익숙하나 의무에는 익숙하지 않다. 연옥의 소장 자리는 신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였다.

거기에 김우진을 영원토록 박아둘 수 있다면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계약을 적당히 어기게 만들면 된다. 죄수들이 탈옥했을 경우, 출소시켜야 하는 죄수들이 두 배씩
늘어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그러다 보면 결국 김우진도 백신전에 항복할 수밖에 없을 거다.


“20 년간 버틴 놈이?”
“고작 20 년이다. 인간에게는 긴 시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20 년은 찰나지.”

연옥의 소장직을 20 년이 아니라 200 년, 2000 년을 맡아도 과연 처음의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만.”

정신은 풍화되고 마모되어 자신이 왜 여기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게 될 거다. 그리고는 결국 유일한 동아줄을
잡아당기겠지.

“확실히. 저 정도의 인간이라면 나는 2 천년이 아니라 200 만년도 기다릴 수 있다. 관리자라는 언사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지만. 권속이 되면 제대로 교육시켜주지.”

칼카르가 살의를 드러냈다.

“알비츠, 너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김우진이 오래 버틴다고 한들, 우리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감히 신을
관리자라고 칭한 놈에게 아주 적절한 징벌이다.”

끝까지 저항을 하던, 그렇지 않던 시간이라는 감옥은 놈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 거다.

그렇게 김우진에 대한 처우가 결정되었다.

* * *

백신전이라는 차원은 확실히 남달랐다.

바로 우주가 보이고 저 멀리 새하얀 기둥이 보인다. 저게 아마 알베니우스가 말했던 아카식 레코드라는 거겠지.

아카식 레코드에 가깝기 때문일까, 차원 전체에 우주의 힘이 넘쳐났다.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차오르는


폐부는, 김우진으로 하여금 계속 여기 있고 싶은 충동감이 들게 만들었다.

‘안 돼.’

어쩌면 이것 또한 백신전의 수작일지도 모른다. 김우진이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개가 되기를 바라는.

결코 넘어가지 않을 거다.

미욕을 떨쳐낸 김우진이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이.”

대답은 없었다.

“베른이라고 했었나?”
“···경고다. 감히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렇게 발작버튼처럼 바로 튀어 오르면 더 눌러지고 싶어지잖아.”

베른이 걸음을 멈췄다.


“김우진.”
“그래.”
“네놈이 과거에 어떤 짓을 했던, 어떤 성격이던 난 전혀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내 덕분에 신이 됐다며? 주신이 개소리를 할 리는 없잖아?”

콰악, 거친 손아귀가 김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닥쳐라. 감히 주신을 모욕하지 마라. 주신의 명이 아니면 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었다.”


“할 수는 있고?”

김우진이 웃었다. 눈이 마주쳤다. 베른이 몸을 움츠렸다.

“백신전이라면 신도 백 명일테고, 당연히 공석이 없으면 새로운 신도 없을 테지. 그러니까 베리안 놈의


말대로라면 넌 내가 신을 죽여서 그 자리를 먹은 거잖아?”
“헛소리···!”
“그럼 씨발놈아.”

김우진이 베른의 손등을 붙잡았다. 우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렸다. 베른이 신음을 토해냈다.

“베른님!”
“가만히 있어. 조금만 더 움직이면 이새끼 목 꺾인다.”

집행자들이 무기를 빼어들었으나 날선 경고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절을 하고 풀코스로 대접을 해도 모자란데 왜 겁먹은 개처럼 짖어대고 지랄이야. 상황파악이 안


돼?”

김우진이 손을 풀었다. 베른이 자신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김우진 구겨진 옷을 펴고 생긋 웃었다.

“그리고 어차피 계약 때문에 우리 둘 다 서로 못 죽여.”

그러니까.

“얌전히 여행이나 다니자고. 지금은 네가 내 가이드잖아? 이 개새끼야? 아, 이건 실수.”

김우진이 휘파람을 불며 앞서나갔다.

“···괜찮으십니까?”
“손 치워.”
“예, 예···!”

뿌득, 베른의 눈이 김우진의 등에서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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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소장(진) 김우진(2) >

신들이 어떤 의도로 한 달이라는 휴가를 주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김우진은 20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통 받았고, 연옥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여유를 가지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 차원이나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된다고?”


“······.”
“묻잖아.”
“···그래.”

베른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계속해서 벌겋게 달아오른 목을 매만졌다.

‘어디로 가볼까.’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지구다.

그의 고향, 용사가 된 순간부터 돌아가기를 소망했던 곳. 지구의 평온한 일상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한 달은 짧다. 앞으로 소장으로 얼마나 묶여 있어야 할지 모르지만 신들의 태도를 보아
결코 짧지 않을 터.

한 방울의 물은 오히려 갈증을 심하게 할 뿐이다. 아예 처음부터 가지 않아야한다.

그렇다면 남는 곳은 하나다.

김우진이 알고, 직접 겪어본 두 개의 차원 중 하나.

그가 지켜낸 차원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정말로 종말에서 벗어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글라크. 글라크로 가고 싶다.”


“불가하다.”
“정확히 10 초 전이랑 말이 달라졌네?”
“···어쩔 수 없다. 글라크는 계약에 묶여 있으니까. 주신께서 차원 자체를 봉인시켰다.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하지만 신들은 들어갈 수 있을 것 아니야.”
“오직 주신들만이 가능하다. 내 권한 밖이다.”
“하···!”

김우진이 으르렁거리자 베른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다시 가서 글라크를 보고 싶다고 한들 주신놈들이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계약 핑계를 대겠지. 빌어먹을 놈들.

김우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구와 글라크를 배제하고 나니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 새끼들이 순순히 나 좋게 해줄 리가 없지.’

수틀린다고 차원 하나를 멸망시켜보려고 했던 자들이다. 김우진은 다시 한 번 신들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다.


“그럼 그냥 여기 있는 건?”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백신전에 남아 넘쳐나는 우주의 힘을 흡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신들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만큼, 대비할 수 있는 만큼 대비하는 게 옳았다.

애초에 이놈들과 손을 잡는 다는 건 상상만해도 끔직하고.

“헛소리하지 마라. 감히 인간 따위가 신들의 성역에 발을 들이려 하느냐. 여기까지 오게 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자비를 베풀었음이다.”
“지랄 염병을 해라.”
“···뭐라고?”
“아니, 아무 것도. 이곳도 안 된다, 저곳도 안 된다. 그러면 내가 갈 곳이 없잖아, 갈 곳이!”
“난 한 곳밖에 이야기 하지 않았다!”
“여기에도 있을 수 없다는 게 두 개지, 한 개야?”
“여긴 떠나는 게 아니잖느냐!”
“변명하지 마. 신이라는 새끼가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아니···!”

김우진은 고민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종말을 막아낸 차원으로 갈 수도 없다면.

“종말을 구해내고 용사가 사라진 차원으로 나를 안내해. 단, 종말이 끝난 지 20 년 안팎의 차원으로.”

비슷한 차원에서 유유자적 쉬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게 곧 글라카의 상황일 테니.

* * *

“여기는 베라푸스라는 차원이다.”


“한 미친 인간이 자신의 왕국 백성 수 백만을 모조리 제물로 바쳐 종말의 사도가 되었다.”
“제물이 된 백성들은 모두 언데드가 되었고 그 피와 생명력에 이끌린 마물들이 몰려들었다.”

주변의 왕국들을 집어 삼키며 수를 불려나간 죽음의 군단은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나선 다음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건가?”
“뭐가 말이지?”
“종말 말이야. 들어보면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복수심에 미친 놈 하나가 등장하면 되는
거 아니야?”

글라크의 사룡이 그랬고 베라푸스의 왕이 그랬다.

“틀리다. 종말은 세상의 법칙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차원이 있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차원이 있는 거다. 어둠은
그 때에 맞춰 적당한 인물을 종말의 사도로 삼는 거고.”
“사룡이나 미친 왕이 아니었어도 결국 다른 놈이 했을 거다?”
“그게 균형이니까.”
“그렇다면 그걸 막는 게 의미가 있나? 당연한 균형이잖아. 종말이 이루어지게 놔둬야 하는 거 아니야?”
“종말이라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다.”

그대로 멸망하는 것 또한 균형의 일부다. 하지만 저항하고 또 저항한 끝에 종말을 막고 유예 기간을 가지는 것
또한 균형이다.

“종말은 아무런 피해 없이 막을 수 없다. 죽음과 피, 생명력은 그대로 노쇠한 차원의 힘이 된다. 죽어간 자들로
인해 차원의 수명이 연장되는 거다.”
“인간에게 차원이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차원에게도 인간이 필요하다는 거군.”

하지만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을 리는 없다.

김우진은 베른의 말에서 그 맹점을 찾았다. 고작 피조물의 생명력과 피가 차원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우주의 힘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일반유라면 신들은 고급유겠지.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여기는 종말이 끝난 지 얼마나 됐지?”


“15 년이다.”
“적당하군.”

김우진의 시선이 저 아래를 향했다. 드넓은 대지는 절반 가까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마기에 오염된 대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연스레 정화될 거다.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신을 섬기는 신도들의 믿음이 충만하면 더 단축될 거고.”
“안 믿으면 정화를 안 시켜주겠다는 말이군.”
“···나도 참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안 참으면?”

김우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득한 살기가 베른과 집행자들을 덮쳤다.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일단 신이니까 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김우진이 죽인 두 명의 신보다 강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묻잖아.”
“······.”

베른이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으나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신이 움직이지 않으니 집행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차원을 옮기고 싶으면 집행자를 통해 나를 불러라.”


“뭐야, 네가 가이드 해주는 거 아니었어?”
“나는 신이다. 내가 하찮은 인간의 가이드나 하고 있을 것 같더냐.”
“주신이 시켰잖아.”
“그러니까 집행자를 붙여놓는 거다. 더 붙어 있다가는 주신의 명을 어기고 네놈을 죽일 것 같으니까.”
“죽을 것 같으니까가 아니고?”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놈.”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베른이 집행자 하나만을 남겨 둔 채 사라졌다.

“······.”
“······.”
“야.”
“···예, 예!”
“베른하고 연락 되냐?”
“무, 물론입니다. 모든 집행자는 모시는 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렀을 때 바로 튀어오지 않으면 그 잘난 주신한테 어떻게 이야기할지 알아서 잘 판단하라고 해.”
“예, 전하겠습니다!”
“내가 널 부를 만한 수단은?”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계속 널 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이, 이거. 이 반지에 언제든 마나를 주입하시면 차원 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반지를 받아든 김우진이 손을 휘저었다. 집행자가 사라졌다.

“어디보자. 이제 뭘 해야 할까.”

딱히 정해진 것도,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정한 것도 없었다.

“일단 좀 자자.”

참새들이 지저귀는 숲속에서,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지난 20 년 동안 숙면이란 걸 취해본 적이 없으니까.

김우진이 인근의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 가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기분 좋은 정적이 흘렀다.

“······.”

하지만 그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 *

네 명의 용병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숲을 질주했다.

“허억, 허억···!”
“더 빨리! 더 빨리 뛰어!”
“제기랄, 그러니까 이딴 의뢰는 받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진짜 괴물이 있을 줄 누가 알았냐고! 보상이 짭짤해서 너도 수긍 했잖아!”
“대장이 하도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우웩···!”
“넌 또 뭐야! 빨리 일어나! 토할 시간이 어딨어! 이러다 다 죽어!”

작은 용병대의 대장, 콕스가 아침에 먹은 것을 쏟아내는 부하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불안하게 숲 너머를
끊임없이 살폈다.
역시 이딴 수상쩍은 의뢰는 받는 게 아니었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종말은 대륙의 절반을 쓸어버린 뒤에야 끝이 났고 인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연히 치안은 개판이 되었고 몬스터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콕스는 용병이 되었다. 용병의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 예상은 적중했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는 게 힘들어진 만큼 호위 병력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귀족들이야 기사와 병사들을
이용하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나 상인들은 용병 길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일거리는 넘쳐났고 콕스와 그의 용병대는 꽤나 많은 돈을 벌었다.

“그 여자, 애초부터 뭔가 이상했어···!”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용병대의 명성이 쌓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용병대에게 의뢰서를 접수했다.

콕스는 그중 고르고 골라 의뢰를 수행하는데 어제 아침, 구미가 당기는 의뢰서를 발견했다.

흔하디흔한 호송 의뢰였다.

하지만 보상이 평범한 호송 임무치고는 지나치게 많았고 조건이 하나 있었다.

엘라임 숲을 지나갈 것.

“엘라임 숲? 우리보고 전부 뒤지라는 소립니까?”

직접 만난 의뢰인은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온 몸에 치장한 금붙이들이 척 보기에도 돈이 많은 졸부의 느낌.

“시간이 생명이라서요. 도리스 시에 사는 친구한테 최대한 빨리 그걸 가져다 줘야 하는데 엘라임 숲을 우회하면


족히 일주일이 더 걸리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엘라임 숲은 위험한 곳입니다.”

엘라임 숲에 존재하는 몬스터는 기껏해야 고블린 정도지만 엘라임 숲의 악명은 그 이상이다.

간단하다. 엘라임 숲으로 들어간 이들 중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많고, 몇몇은 아예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마녀가 산다느니, 정체 모를 마물이 있다느니,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보았다느니 말이 많았다.

“그거 다 헛소문이라고 밝혀지지 않았나요?”

얼마 전, 엘라임 숲의 정체 모를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백 단위의 대형 용병단이 움직인 적이 있었다. 몇날 며칠


동안 숲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마물의 흔적은 조금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밝혀진 바로는 마물이 원인이 아니었다.

엘라임 숲에 달맞이 꽃이라는 식충 식물이 자라나는데 꽃가루에 환각 성분이 있다. 바람에 날려 꽃가루를 접촉한
이들이 환각을 보았다고 결론이 나왔다.
“단순한 헛소문이라기에는 당한 용병들이 꽤 있어서 말이죠. 그걸 아니까 당신도 보수를 넉넉하게 준비한 것
아닙니까?”
“돈을 두 배로 드릴게요. 선금으로 절반, 도착해서 또 절반. 그런 만약 때문에 기회를 놓치시겠어요?”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시간은 금이니까요. 그게 최대한 빨리 제 친구에게 도착하는 게 참 중요하거든요. 그래도 안하시겠다면 다른
용병단을 찾아보는 수밖에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놈의 돈이 뭔지. 동료들도 불안하다고 했지만 의뢰금을 보고 납득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다. 스무 명의 용병대 중 그의 곁에 남은 건 고작 셋이다. 나머지는 죽거나 숲을 헤매고


있겠지.

빌어먹을. 역시 헛소문을 그냥 헛소문으로 치부하면 안 됐는데.

“대, 대장!”
“살았다!”

그때, 상처투성이의 용병 둘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머레이? 알렌?”
“맙소사, 머레이! 알렌! 너희들 살아 있었구나!”
“잠깐만!”

콕스가 검을 치켜세웠다.

“거기서 기다려.”
“왜, 왜 그래, 대장?”
“너희도 봤잖아? 이 숲에 산다는 그 마물의 정체가 뭔지···!”
“마, 맞아!”
“너희들이 머레이와 알렌이 맞다는 증거를 내밀어 봐.”
“내가 머레이라서 머레이인데 증거가 어디 있어!”
“나도!”
“고향이 어디야!”

콕스의 채근에 두 용병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벤덴부르크.”
“도리아.”
“몇 살에 용병이 됐지?”
“21 살.”
“26 살.”
“나랑 어떻게 만났어?”
“검은 꽃 용병단에서 활동하다가 용병단이 망하고 루덴 지역에서 대장과 처음 만났지.”
“대장이 루덴에 있는 ‘바람에 날리는 화살’ 술집에서 술 먹고 난동 부릴 때 시비가 붙어서 처음 만났어.”
“···맞나?”
“맞다니까!”
“어떻게 우릴 의심해? 함께한 세월이 10 년인데!”
“잠깐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콕스가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용병들과 그만의 이야기 거리들.

“너희···.”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네.”

불쑥,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콕스와 용병들이 목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나무 위였다. 언제부터인지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느 틈에?’

아무리 도망치는 와중이라고 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다니?

콕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자가 아까 그 마물?’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콕스가 검의 방향을 돌리려했다.

“나라면 그런 짓 안 해.”

나직한 경고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다.

“오래 살고 싶으면.”
“······.”

목소리에 담긴 미중유의 힘은 그가 저항하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누, 누구십니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자는 그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격이 달랐다.

“그냥 시끄러워서 일어난 사람?”

탁, 남자가 가볍게 착지했다. 천천히 그의 일행들을 훑더니 입꼬리가 비틀렸다.

“재미있는 놈이 있네.”
“예?”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누군가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 찍었다.

───!

토를 하던 용병이 영문도 모른 채 땅바닥에 머리가 쳐박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짓···!”

콕스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그의 부하 용병이어야 할 놈이, 방금까지 그가 등을 두드려주던 놈이, 검은 액체로 변해 구렁이처럼
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히, 히익···!”
“얀델이 마물이 됐다!”
“멍청아! 아까 그 놈이 얀델로 변한 거잖아!”

콕스가 멍하니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용병들이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신기하네.”

콰득, 남자의 손이 검은 구렁이를 낚아챘다. 아니, 저건 구렁이보다는 슬라임에 가까웠다.

─!
──!

놈이 고막이 찢어지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발버둥쳤다.

“네가 말로만 듣던 도플갱어냐?”

남자가 눈이 짙은 흥미를 띠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아이처럼.

───────────────
# < 외전. 소장(진) 김우진(3) >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검은 액체.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들은 마물이라고 했지만 딱히 마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물이라기보다는 몬스터에 가깝다.

배척받지만 엄연히 차원의 일원인 몬스터와 어둠의 파편인 마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어둠에 쉽게 물들어 종말이 일어나면 마물들과 함께 움직이는 탓에 인간들은 동급으로 여기지만.

“어,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말을 하네? 구강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김우진이 도플갱어의 몸을 반으로 찢었다.

“사, 살려줘···!”

그럼에도 육성이 나오고 살아있었다. 가공할 정도의 생명력이다.

“변신도 할 수 있다는 거지?”


꽤 재미있는 능력이었다. 도플갱어라는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지구의 소설에서나 보았지, 실제로 존재할 줄은
몰랐다.

“변할 때는 겉모습만? 아니면 그 사람의 힘도 어느 정도?”


“······.”
“아, 너무 찢어놨나.”

김우진이 갈라진 두 육체를 서로에게 붙였다. 양 육체에서 뻗어 나온 가는 촉수들이 서로를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어떻게 되먹은 몸이야?”

화륵, 김우진이 작은 불꽃을 만들었다.

“이것도 재생 되냐?”

끼에에에에엑! 도플갱어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사, 살려! 살려주십시오! 제발! 너무, 너무 아픕니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검은 액체들에 김우진이 불꽃을 꺼트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재생해 봐.”
“하, 하겠습니다!”

도플갱어가 필사적으로 몸을 수복했다. 하지만 시커멓게 타버린 자국과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끝이야?”
“이, 이게 최선입니다!”
“불에는 약하다는 건···응?”

도플갱어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던 김우진이 뒤늦게 구경꾼들이 있었음을 인지했다.

“뭐야, 니들 아직도 안 갔어?”


“그, 그게···.”
“곱게 보내줄 때 가. 어디 가서 날 봤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무, 물론입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용병들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 * *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냥 괴물, 마물, 도플갱어 등, 그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많았지만 이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이름.”
그래서 답할 이름도 없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잖아.”


“···어, 없다.”
“없다?”
“어, 없습니다···!”

공포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인류에게 박해받는 몬스터로서 오랜 시간을 살아남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변신과 모방, 그리고 기감 파악이었다.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는 것. 강자를 알아봐야지만 도망치고 오래 살 수 있다.

오랫동안 그를 살려준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결코 그 따위 감당할 수 없는 진짜 괴물이라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 감히 도망쳐서도 안 된다.

남자가 손아귀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음에도 오히려 스스로의 힘으로 붙어 있는 이유였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불탄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그저 바들바들 떨며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름도 없어?”
“마물이라던지, 괴물, 도플갱어로는 불렸습니다만, 딱히 이름은···.”
“그래, 그럴 수 있지. 안내해.”
“예?”
“네가 머물고 있는 거처가 있을 것 아니야. 안내하라고.”
“예, 예···!”

남자가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욱신거렸으나 신음을 참아냈다.

“저···.”
“왜?”
“혹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가도 되겠습니까? 이 모습은 아무래도 속도가 조금···.”
“마음대로 해.”
“예.”

그의 시커먼 동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형태를 갖추고, 색과 옷을 모방한다.

“아까 그 토하던 놈이군.”


“예, 그렇습니다.”

남자, 김우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어떻게 된 매커니즘인지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


“저···그게···존귀하신 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제가 변신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건 너보다 수준 떨어지는 놈들한테나 그런 거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왼쪽 팔은 아까 불꽃 때문인가?”
“예.”

반쯤 타버린 왼팔은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플갱어의 거처는 숲 한 칸에 마련된 동굴이었다.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가구나 식탁,


편의도구 등,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 다소 있었다.

“네가 만든 거냐?”
“아닙니다. 제가 직접 인간들의 도시에 내려가 구입하기도 하고, 수족처럼 부리는 인간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인간에게 부탁해서 구해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의뢰를 넣어서 사람들을 꼬이게 하는 건가?”
“그게···.”
“다 알고 있으니까 괜히 수 쓰지 말고.”
“···예. 제가 직접 변신해서 의뢰를 넣기도 하고 제 수족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꼬리가 걸리면?”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그러다가도 잡히면?”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다 이거군.

확실히 쓸만한 능력이다.

“변신에 제약 같은 건 있나?”
“접촉하고 이해한 상대에 대해서만 가능합니다.”
“접촉은 이해했는데 이해라면?”
“머리카락이나 살점, 피 같은 걸 먹으면 좋고, 마나를 흡수해도 좋습니다. 그 양과 질이 뛰어날수록 변신의
효과도 상승합니다.”
“그럼 변신하면 변신한 당사자의 능력도 쓸 수 있다는 건가?”
“진짜에 비하면 조약하지만 조금은···.”

그 말에 김우진이 반색했다. 이거 완전 열화판이긴 하지만 권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과연, 왜 도플갱어가 전설속의 존재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이 도플갱어의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면 어쩌면
김우진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존재함에도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커피 있냐?”
“있습니다.”

도플갱어가 커피를 내왔다. 김우진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 재생이 됐네?”


“아, 네, 그렇습니다.”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왼팔이 아주 조금 다시 자라나 있었다.

톡톡, 김우진이 팔걸이를 두들겼다. 비록 미약하지만 특별히 제거하지 않는 이상, 그의 불꽃에는 언제나 우주의
힘이 깃들어 있다.

우주의 힘은 일반적인 마나와는 격이 다른 기운이었다. 아무리 조금이라고 한들 생각보다 빠르게 그걸 이겨내고


재생이 된다라.

모든 도플갱어가 그런지, 아니면 이 도플갱어가 특별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특별했다.

“야.”
“예, 예!”
“혹시 나라도 변할 수 있냐?”
“격이 높으신 분은 어렵습니다.”

김우진이 손가락에 피를 냈다. 커피를 다 먹고 빈 잔에 피를 쏟아냈다.

“먹어.”
“···예.”

도플갱어가 피를 섭취했다. 그리고 발작을 일으켰다.

“크허어어어억!”
“뭐야, 무슨 일이야!”
“제,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그의 육신이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다시 슬라임처럼 변했다. 그리고 수백 줄기로 갈라져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너, 너무···!”

김우진은 말없이 그것을 기다렸다. 자신 쪽으로 날아드는 촉수를 쳐내며 직접 새로운 잔에 커피를 리필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허억, 허억···!”

끊임없이 파괴와 재생을 반복한 도플갱어가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어때?”
“주, 죽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았지.”
“대, 대체 뭐하시는 분이십니까? 어떻게 이런···?”
“변신이나 해봐.”
“불가능합니다.”
“납득이 되게.”
“격이 너무 높으십니다. 고작 피 한 컵 먹고 복사해내기에는···.”
“피가 더 있으면 된다는 거네.”

김우진이 피가 가득한 잔을 건넸다.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불꽃이 맺혀 있었다.

“먹어.”
“······.”
이번에는 이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플갱어는 김우진의 외형을 복제할 수 있었다.

아직 불꽃을 흉내내지는 못하지만 외형만으로는 거의 완벽하다.

그 시점에서 김우진은 도플갱어를 놔줄 생각을 버렸다.

‘신들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나도 보험 하나 정도는 들어주는 게 좋겠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꽤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주기적으로 피와 마나를 먹여주면 차차 나아지겠지.

“···야.”
“예···!”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거부권은 없었다.

* * *

도플갱어에게 3 주를 썼기에 남은 시간은 일주일밖에 없었다.

김우진은 그 동안 도플갱어와 함께 대륙 여행을 떠났다. 대단할 건 없었다. 그저 구원 받은 차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인류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평온하네.”

몬스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지구와는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차원은 평온했다.

이들은 일상을 되찾았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부터, 도시의 상인, 왕국의 귀족들까지.

더 이상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김우진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피해는 더 컸으나 글라크 또한


이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그렇게 약속된 한 달이 지났다.

“김우진, 데리러 왔다. 그놈은 뭐지?”


“감옥의 소장이 될 거면 나도 수족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뭐, 됐다. 감옥의 인원들을 어떻게 채우던, 그건 네 마음이니.”

베른이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김우진은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청명한 하늘, 쨍쨍한 태양,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벽과 건물, 그리고 농후한 밀도의
마나까지.

“여기가 앞으로 네가 있어야 할 곳, 연옥이다.”


“마나 밀도가 생각 이상인데?”
“아무렴, 신들이 만든 감옥이 인간 따위가 만든 곳들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그냥 들어가면 되나?”
“들어가서 현재의 소장에게 임무를 인수인계 받으면 된다.”
“넌 같이 안 가고?”
“여기까지 데려다주는 것으로 난 할 일을 다했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베른이 사라졌다.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자.”
“예.”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크로시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문을 지키던 집행자들이 김우진을 안내했다.

내부는 평범했다. 딱히 아름답지도, 무언가 대단한 게 있지도 않았다. 텅 빈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대한
건물 하나가 전부.

“여기 소장의 미적 감각이 거지 같다는 건 알겠네.”

소장의 모욕에 집행자들이 움찔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잠시 후, 김우진은 소장실로 안내되었다.

“동행은 같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소장님이 독대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소장의 집무실도 평범했다. 책상과 의자, 몇 개의 책장. 그게 전부였다. 김우진은 소파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던
소장과 눈이 마주쳤다.

소장이 빙그레 웃었다.

“반가워. 네가 김우진이지?”
“맞아.”
“말투가 건방지지만 뭐, 무슨 상관이야. 최초로 신을 죽인 인간에 나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인데.”

소장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위대한 백신전의 신이자, 연옥의 소장, 크로시스야.”


“김우진.”
“사람 무안하게.”
“딱히 네놈들과 악수를 할 정도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뭐, 좋아. 나도 인수인계만 끝내고 여길 벗어나면 그걸로 족하니까.”

크로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 연옥이 뭐하는 곳인지는 이미 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용할 대로 이용해 놓고 말을 안 듣는 용사들을 토사구팽하는 곳.”
“틀려. 감히 주제를 모르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욕심 많은 자들을 뉘우치게 하는 곳이지.”
“그건 네 생각이고.”
“신의 뜻이 곧 세상의 뜻이지.”

뭐,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은 없어.

“어차피 네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곳의 죄수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포기하고 출소하게 하는


것.”

크로시스가 본격적인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사실 별로 할 것도 없어. 모든 감옥은 독방으로 이루어져있고 우리가 만든 시스템으로 관리되지.”


“현재 죄수는 34 명이야.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 거인까지. 아주 다양하지.”
“간수들은 50 명. 모두 집행자들이야.”
“각 독방에는 징벌방이라는 시스템이 있어.”
“죄수들을 구속하는 건 구속구라고 주신께서 만드신 것이지. 효과가 아주 탁월해서 절대 풀릴 일은 없을 거야.”

크로시스가 두터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세세한 것들은 직접 확인해보고.”


“간수들은 그대로 두고 가는 건가?”
“그래. 한 명 데려온 것 같지만 둘이서는 감옥을 관리할 수가 없잖아?”
“어떻게 믿고?”
“다른 대책은 있고?”
“신들이 유희를 떠날 때 쓰는 더미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알베니우스한테 들었다. 이번에 주신의 명령으로 베른이 어쩔 수 없이 직접 김우진을 안내했지만 사실 신은 하위


차원에 내려가는 것 자체를 꺼린다고 했다.

제약 때문에 전능감이 사라지니까. 때문에 가끔 직접 나서야 할 때 더미를 쓴다. 일종의 분신 같은 거다.

“그걸 넘겨. 간수 수대로.”


“그걸 넘긴다고 해서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아.”

크로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정령왕의 정수를 흡수했다고 했었지? 좋아, 이해했어. 주신들게 여쭤보지. 아마 허락해 주실
거야.”

하지만 괜찮겠어?

크로시스의 입가가 비틀렸다.

“집행자들이 아니면 여기 죄수들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신의 뜻을 거역하고 반기를 든 반골들이라
좀 드세거든. 그깟 정령들로는 조금 힘들 텐데?”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하긴, 이제 내 손을 떠났지.”
그가 과장된 모션으로 손을 털었다.

잠시 후, 그가 집행자들과 연옥을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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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소장(진) 김우진(4) >

“명색이 신이라는 새끼들이 종이를 쓰네.”

권능 같은 거 없나?

크로시스가 떠나고 김우진은 그 자리에서 서류들을 정독했다.

“앞으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란 말이지.”

칙칙하다. 몇 년만 있어도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아무래도 인테리어부터 싹 다 갈아엎어야겠어.”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아, 그리고.”
“예.”
“넌 오늘부터 부소장이야.”
“잘못 들었습니다?”
“더미가 오면 정령들을 집어넣어서 교도관으로 만들 거야. 네가 교도관들을 관리해.”
“제가 말입니까?”
“그러면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했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일을 해야지.”
“예···.”

지난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본 도플갱어는 굳이 자신의 종족을 밝혀 김우진의 화를 돋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죄수들을 살펴야 하는데···.”

김우진이 죄수들의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를 펼쳤다.

“드세다고 했지.”

김우진을 조롱하기 위해 꺼낸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여기에 갇힌 이들은 모두 차원을 구한 용사들이자 영웅이다. 세상을 구했다는,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이 없을


리가 없다.

“데르카인? 이놈은 조금만 더 채우면 300 년이네. 최장기수? 와, 진짜 독한 놈이네.”


“50 년짜리 엘프도 있고···.”
“거인에, 다크엘프에, 인간에···. 진짜 별에 별 놈이 다 있네.”

그런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죄수로 추락했으니 악과 깡이 남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런 경우에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분위기와 위압감 조성도. 그러니 혼자서 죄수를 만나러 가지는 않겠다.
어차피 그가 직접 공표하지 않는 이상, 죄수들은 소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모를 테니까.

“불쌍하긴 하군.”

열심히 차원의 종말을 막았는데 신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사정을 봐줄 수는 없다. 김우진에게도 김우진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

“딱히 정해진 일과는 없고.”

크로시스 놈은 죄수들을 말 그대로 방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죄수들이 자발적으로 나가게 만들겠다는 놈이 이런 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지금의 김우진 입장에서야
나쁘지 않았다.

“일단은 감옥 좀 돌아다니면서 시설들 좀 파악해 보자. 따라와.”


“예.”

사흘이 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죄수들을 소장님께 인도할 호송대의 장, 펠런입니다.”


“집행자지?”
“예.”
“새로운 죄수가 들어온 건가?”
“아닙니다. 소장님께서 전 소장님께 부탁하신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호송관들이 아공간을 열어 거대한 짐 더미들을 꺼냈다.

“말씀하신 인체 더미 정확히 50 개입니다.”

김우진이 더미들을 확인했다. 얕은 수는 안 부렸는지 전부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확인 하셨으면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굳이?”
“신들께서 반드시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까탈스럽긴.”

서명을 받은 호송대장이 서류를 챙기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때는 새로운 죄수를 데리고 왔을 때가 되겠군요.”


“만약 출소자가 나오면 네가 데리러 오는 건가?”
“예. 집무실에 있는 통신구로 연락하시면 최대한 빠르게 오겠습니다.”
“집행자인데 인간에게 존댓말을 잘도 하는군.”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앞으로 서로 오래 볼 것 같은데 괜히 미움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들보다 낫네.”
“칭찬 감사드립니다.”

호송대가 떠났다. 김우진은 50 개의 더미들을 나란히 세워놓았다.


“이제 여기다가 정령을 집어 넣으시는 겁니까?”
“그래. 이론상으로는.”
“이론상이라면?”
“한 번도 소환해본 적이 없거든.”

정령왕의 핵을 섭취한지는 20 년이 훌쩍 넘었지만 정령을 소환한 적은 없었다. 신들과 싸우다가 바로 격리 차원에


갇혔으니 당연했다.

‘어떻게하는 거더라.’

방법을 모르지는 않는다. 글라크에 있던 정령술사들이 정령을 소환하는 걸 지켜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정석적인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

‘정령왕은 모든 정령들을 다스리는 지고한 존재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군림하며 의지만으로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그래서 정령왕의 계약자는 같은 속성의 모든 정령들을 계약할 수 있는 거네.’
‘왕의 계약자는 곧 모든 정령의 계약자거든.’

언젠가 정령왕과 합일하여 사룡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그러함으로서 모두에게 시간을 주고 김우진에게
정수를 내어줘 뒷일을 맡긴 하이엘프가 했던 말이었다.

지금의 김우진은 정령왕, 그 자체였다.

그러니 굳이 정령술사들의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의지만 있다면 정령들은 언제든 그의 명령에 따를 테니.

‘나와라.’

불꽃의 정령을 떠올렸다.

이왕이면 보다 강한 놈들로.

그래도 용사들을 관리하는 감옥이니만큼 최상급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상급 정도는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

심장의 마력이 쭉 빠져 나가면서 백 여 개의 불꽃들이 그 앞에 떠올랐다.

느껴지는 기운이 전부 상급 정령 이상이었다.

그들이 김우진 앞에 정연하게 정렬했다.

- 정령왕님을 뵙습니다.
- 뵙습니다!

흡사 충성스러운 군인 같은 모습에 김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 새로운 정령왕님이 탄생하고, 언제 불러주실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강렬한 열기가 느껴지는 정령이 앞으로 나섰다.

“이름이?”

- 최상급 불의 정령, 알무스입니다!

“그래, 알무스. 내가 너희들을 저기 안에 넣으려고 하는데 될까?”

- 신들이 사용하는 더미군요.


- 정령들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들어가.”

- 예!
- 들어가라!

정령들이 일제히 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50 개의 더미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그들이 다시 김우진 앞에 정렬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연옥의 교도관들이다. 나는 소장이고 이놈은 부소장이다. 내가 뭐라고?”


“소장님이십니다!”
“이놈은?”
“부소장님이십니다!”
“부소장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해라. 내가 없으면 부소장이 너희 대장이다.”
“예, 소장님!”
“부소장을 따라 나가서 너희들이 근무할 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 봐. 아, 죄수들하고는 아직 접촉하지 말고.”
“예!”
“따라와라.”

부소장이 교도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김우진이 생각에 잠겼다.

일이 차차 진행되는 걸 보니 이제 진자로 기약 없이 썩어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처음 용사가 되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하필 소환된 차원이 이미 수백의 용사를 잡아먹은 최악의 차원이란 것도.


알베니우스를 만날지도.
신들과 싸우게 될지도.
격리 차원에서 20 년을 버틸지도.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의 소장이 될지도.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

불가능할 거라는 종말을 막고.


최초로 신을 죽이고.
20 년의 고난을 견디며.
살기 위해 발악해놓고 여기까지 와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이기나 해보자.”

반드시 50 명을 채워서 연옥을 나간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 *

“내가 생각해봤거든?”

어떤 만남이 죄수들과의 최고의 만남일까.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까.

여러 방법들을 고민해봤다.

“결론은 나오셨습니까?”
“탈옥 시키자.”
“예? 무엇을 말입니까?”
“당연히 죄수지.”
“···예?”

이제 조금 김우진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도플갱어의 눈이 커졌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전 소장이 그랬잖아. 여기 죄수들이 드세서 관리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자고로 드센 놈들을 상대로는 초장에 기세를 잡아 놔야한다. 감히 함부로 뻗댈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에
때려 박아줘야지만 꼬리를 만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죄수도 아닌 죄수들을 후드려 팰 수는 없잖아? 그래도 진짜 죄수도 아닌데. 그러니까


명분을 만들자고.”

명분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

“비상 신호 전부 켜고 시스템다운 시켜서 감옥 문 전부 개방시켜.”

그럼 가릴 수 있다.

“드센 놈인지, 아닌지. 드센 놈은 탈옥을 하겠고 아닌 놈은 가만히 있겠지.”


“···전부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전부 드센 놈인 거고. 교정이 필요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응. 간편하잖아.”
“···그러다 진짜로 탈옥하면 큰일 아닙니까?”
“못 해.”
“예?”
“못한다고. 이놈들이 아무리 한 가닥 하던 용사들이라고 해도 차원 이동은 아예 격이 다르거든.”
연옥은 작은 차원이다. 때문에 차원의 끝까지는 갈 수 있을지언정, 결코 차원의 장벽을 넘어갈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게 있어도 마찬가지야.”

정말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공간 마법에 특화된 용사가 있다고 치자. 실제로 수감된 죄수들 중 하나는
다크엘프고 공간 마법에 권능이 있다고 나와 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신이 권한을 가지고 장벽을 넘는 것과 용사가 장벽을 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열쇠를 가지고 현관을
넘는 것과 열쇠 없이 현관을 넘는 것 정도의 차이다.

“도구를 가지고 이것저것 지랄을 해야겠지. 그게 빨리 끝날까?”


“아니겠죠.”
“그러니까. 그런 놈이 있다고 해도 그 전에 다 잡을 수 있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명도 탈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한 명도?”
“예.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가능성이 있어.”

산전수전 다 겪은 용사들이니 의심이 많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불을 지르자.”

그러니 의심을 완전히 지워줄 포인트를 하나 추가한다.

“···예?”
“연옥 전체를 불태우는 거야.”
“···혹시 미치셨습니까?”
“내가 너무 풀어줬나?”
“아,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잖아. 어차피 리모델링하려면 한 번은 싹 밀어야 돼. 겸사 겸사 불장난이나 하자고.”

건물과 시스템이 무너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신이 만든 게 그 정도로 나약할 리가 없으니. 이미 어느 정도


확인은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금 부탁하는 것 같아?”
“······.”
“교도관들.”
“예, 소장님!”
“잘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불 지르고, 시스템다운 시키고, 비상종 울리고, 감방 문 다 열고, 최대한 혼란스럽다는 뜻이 악을 지르며
뛰어다녀.”
“예!”
“만약 죄수들이 도망치면 적당히 막는 척하다 놓아주고. 패배해서 기절해도 좋아. 더미 구하려고 다시 신들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으니까 몸을 아껴. 하지만 너무 티 나게 나가떨어지지는 말고.”
“예!”
“출발.”
“출발!”

신의 더미를 얻게 된 불의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애애애애애앵-

사이렌이 맹렬히 울리기 시작했다.


교도관들이 의미 없이 사방에서 뛰어다니며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시스템이 다운된 연옥의 등들이 모두 꺼지고 감옥의 문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붉은 불꽃이 연옥 전체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김우진은 느긋하게 집무실에 설치된 감시 시스템으로 각 방의 상황을 살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죄수들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누구도 열린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교도관들의 소란이 들려오자 차츰 몸이 쏠리더니 문 밖에서 서로 시선을 부딪혔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작동 모의를 한 죄수들이 교도관들을 기습했다. 죄수들이 구속구로 제약을 받고 있어도 모두 차원을
구한 용사였다. 그들은 유기적인 합동술로 몇 없는 교도관들을 눕히고 탈옥을 계시했다.

“드워프들은 저 데르카인이라는 놈을 따르고 있고···.”


“엘프는 시에나 올름.”

김우진은 빠르게 각 종족의 리더들을 파악했다. 저들을 잡으면 죄수들을 통제하는 게 한결 편해지겠지.

“죄수들이 모두 탈옥했습니다.”
“모두?”
“예.”
“그럼 전부 드센 놈들이네.”

빡세게 교정할 필요가 있겠어.

희망을 주었다 뺏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역시 김우진은 스스로의 사정이 제일 중요했다.

“그럼 탈옥수들을 잡으러 가볼까.”

김우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연옥의 소장으로서 첫 업무 시작이다.

소장(진) 김우진 完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1) >
용사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적어도 율리아 카르센에게는 기꺼운 일이었다.

오래 전, 그녀의 차원에도 종말이 찾아왔다. 많은 것을 앗아갔고 그 중에는 그녀의 부모도 있었다.

용사와 영웅들의 분투로 종말은 끝이 났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은, 죽어버린 동족들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율리아는 강해져야만 했다.

남은 마물들을 처치하며 조금이라도 분노를 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세이드.”

잃어버린 부모님들을 대신해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주던 호위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에 더욱 그랬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더욱 마물들에게 집착했다.

“···용사가 되겠어요.”

그런 상황에서 번개를 맞았다.

그것이 신의 부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율리아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더 많은 마물들을 죽일 수 있다.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그거면 충분했다. 어차피 아르반에 그녀가 기댈 공간은 없었다.

하이엘프, 율리아 카르센은 그렇게 용사가 되어 데이드람에 소환되었다.

* * *

“하이엘프 용사라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데이드람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몇 번이나 뒤집히는 느낌 끝에 도착한 율리아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황족과 귀족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들로 보이는 인간들이었다.

신의 신탁을 받아 용사가 올 것이라 예견된 땅에 미리 마중을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격렬한 환대에 율리아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용사님. 데이드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카발론 제국의 1 황자, 노이드 카발론입니다.”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국의 황도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음.”

율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용사는 처음이었고 솔직히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다.


‘아르반을 구한 용사는 어떻게 했더라···?’

인간들이 마중을 나왔고 그들이 데려가 성심성의껏 가르쳤다고 들었다. 아르반의 용사는 재능은 넘치나 그 바탕은
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용사였다.

때문에 성장하는데 제법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대륙의 피해는 제법 컸었지.

딱히 용사를 탓하는 건 아니다. 그가 최선을 다한 영웅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고 감사하고 있으니까.

그냥 조금 아쉬울 뿐이다. 처음부터 강했던 용사가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리고 다행스럽게 그녀는 스스로가 선망하던 용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부탁드려요.”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용사님을 모셔라!”
“예!”

율리아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황도로 향했다.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 정도가 심해 율리아에게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아르반도 이랬다고 들었다.

이해는 갔다. 상식적으로 신의 신탁을 받고 종말을 막기 위해 내려온 용사를 허투루 대접하겠다는 멍청한 인간은
없을 테니까.

용사는 단순한 강자가 아니라 신의 힘을 받은 사도이자 희망이다. 용사가 없으면 종말을 막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만큼 인류는 언제나 용사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모신다.

“오오, 용사여. 만나서 반갑네. 짐은 제국의 황제, 발로인 카발론이네.”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제국의 황제는 50 쯤으로 보이는 중년이었다. 딱히 수준급의 기사나 마법사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배자로서의
위엄이 느껴졌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쉬고 내일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떤가?”


“배려에 감사드려요.”

율리아는 황궁의 별궁으로 안내되었다. 더 없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곳이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녀를 안내해준 기사와 시종이 사라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시종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법도라면 따르는 게 맞다. 율리아가 침대에 누웠다. 높고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이제부터 여기서 살아야 해.’


단순히 사는 게 아니라 차원을 종말로부터 구해야한다.

‘잘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한다. 그것이 용사로서 그녀가 짊어져야 할 사명이니까.

보답이기도 하다. 그녀의 차원을 구해준 용사에 대한 보답. 그가 그랬듯이, 그녀도 이들을 구하는 거다.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

미약한 바람이 손끝을 타고 일렁였다.

“···어?”

그녀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어떻게 한 거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손을 펴고 바람을 상상했다.

휘이이이이-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손 위에서. 작은 회오리가 용솟음쳤다.

“이게···.”

권능이구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그녀에게 정령도 없이 바람을 다루는 능력 같은 건 없었으니까.

‘네 재능이 출중하니 능히 용사로서의 권능 또한 각성할 거다.’


‘권능이요?’
‘용사의 힘을 받아 잠재능력이 각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건 일반적인 마법이나 오러와는 한 차원 다른 힘이다.’
‘아하. 그럼 바로 가능한 건가요?’
‘재능이 없다면 아예 각성하지 못할 수도, 재능이 있다 해도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걱정 마라. 하이엘프가
권능을 각성하지 못한 적은 없으니. 시간의 문제다.’

그녀를 이곳으로 보낸 신이 했던 말이었다.

하이엘프는 종족 자체가 특별하다고 그랬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차원에서도 하이엘프는 몇 없었고 항상
우수했으며 모든 엘프들의 존중을 받았으니까.

바람 정령과의 친화력이 유독 높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루게 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빠른 건가, 느린 건가?’

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그녀가 용사의 힘을 받고 데이드람에 온지는 고작 5 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늦던, 빠르던 당장은 중요치 않았다. 각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래서 힘을
사용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으니까.

“저기요.”
“예,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물었다.

“여기 연무장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용사님을 위해 마련된 개인 연무장이 있습니다. 안내해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연무장은 개인 연무장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주변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시야를 막고 있었으나 뻥
뚫린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훈련이 끝나면 나오시면 됩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시종을 내보낸 율리아가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검을 뽑기보다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바람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딱히 마나를 움직이지도, 정령이나 마법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신기하네···.”

스스로 행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없다. 아무리 하이엘프라고 한들 정령이나 마법도 없이 바람을 이렇게까지
다룰 수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그래서 권능이다.

“이거면 좀 더···.”

조금 더 익숙해지고 발전시켜야겠지만 종말을 막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용사가 된 첫날이 지나갔다.

* * *

“···제가 가르쳐드릴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법은···배우지 않으시고 권능을 더욱 발전시키시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제국은 용사를 위한 교육 매커니즘을 준비한 상태였다. 대륙 각지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을 수배해 용사 전용


교사로 대기시켜 놓았다.

하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율리아의 검술은 대륙 제 1 기사이자 제국의 근위 기사단장을 뛰어 넘은지 오래였다.


마법에는 재능이 있으나 마법 보다는 권능을 익히는 게 더 효과적이었으며.
궁술을 비롯한 각종 무기술 또한 율리아가 한 걸음 위에 있었다.
완성형 용사, 그게 바로 율리아였다.

“···정말 완벽하군.”
“용사라면 당연히 그래야죠.”
“무척이나 든든하네.”

별 다른 준비가 필요 없음을 느낀 제국은 곧장 대륙 각지에 사신을 보내 왕족과 귀족들을 비롯한 귀빈들을


황궁으로 초청하고 연회를 열었다.

“차원을 구원해주기 위해 신께서 보내주신 용사님이십니다!”

율리아라는 용사를 세상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며 인류 연합을 발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종말을 막기 위해서 인류는 반드시 하나로 뭉쳐야 해요. 반목한다면 자멸을 향해 달려갈 뿐이에요.”
“물론 그건 용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국이 연합의 수장이 되는 건···.”
“우리 아르칸 왕국 또한 반대합니다. 제국의 폭거에 멸망한 왕국들이 몇 개 인지 아십니까? 저들이 수장이
된다면 자국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병력을 사지로 밀어 넣을 겁니다!”
“아르칸 왕국이라고 뭐 다른지 아시오? 10 년 전에 당신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멸망한 도리아 왕국을 벌써
잊었소이까!”

하지만 인간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나로 뭉치는 걸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국이 쌓아온 업보와 이해관계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신의 신탁, 종말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 어쩔 수 없이


가장 세력이 강대한, 그리고 용사를 선점한 제국이 수장이 되기는 했지만 연합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저희는 광룡, 발바르를 죽여야 합니다.”

광룡, 발바르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돌아버린 고룡이었다.

동족들을 죽이고 삼키며 힘을 기르더니 인간 세상에 강림했다.

광룡은 수십만의 마물들을 소환했고 주변 다섯 개의 왕국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대륙 북부는 순식간에 죽음의
땅이 되었다.

“인류를 죽일수록 저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방어로 틀어 막기만 했습니다만, 용사님이 오신
이상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광룡과 마물이란 미지였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칠 전력은 남아있었으나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완벽에 가까운 용사라는 칼이 도착했다. 조금 삐걱대긴 하나 연합이 결성되기까지 했으니 더 미룰


것도 없었다.

“반드시 광룡 발바르를 토벌하여 평화를 되찾겠어요.”

와아아아아!
용사님 만세!
인류 연합 만세!
카발론 제국 만세!

각국의 정예들만 모인 60 만의 연합군이 북방으로 진격했다.


단단히 틀어막던 장벽들의 문을 열어 재끼고 위풍당당하게.

* * *

“···맙소사.”
“연합군이 지다니.”
“용사님이 어떻게···!”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소규모로 마주치는 마물들을 토벌하며 거칠게 없을 때까지만 해도.

하지만 문제는 광룡을 만나는 순간 일어났다.

광룡은 자신의 왕궁에서 수백만 마물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고 힘 대 힘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율리아는 기사단과 함께 광룡에게 향하는 혈로를 열었고 전투를 시작했다.

인류 연합의 목적은 율리아를 광룡에게 데려다 주는 것, 그리고 율리아가 광룡을 죽일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물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그리고 많았다.

“미, 미친···! 이걸 어떻게 막아!”

시체와 피는 마물에게 힘이 된다. 그래서 추리고 추린 60 만 대군이었으나 숫적으로 너무도 불리했다.

마물들은 천천히 연합군을 갉아먹었고 용사만 믿고 있던 연합군은 점차 공포에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아니, 자국의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정치 싸움이 시작됐다.

“왜 기사단을 보내주지 않는 겁니까! 3 군단이 무너졌습니다. 기사단이 지원을 오지 않으면 2 군단마저 무너진단
말입니다!”
“마법 지원! 마법 지원을 보내주십시오!”
“방패 병단! 방패 병단은 어디 있느냐!”
“제니아 왕국이 병력을 뒤로 물린다!”
“도망치지 마, 이 개새끼들아!”
“전열을 유지해라! 대열이 무너지면 연합이 무너진다!”
“기사단을 왜 후방으로 빼는 겁니까! 당신들 병력만 사람이고 우리는 아닙니까?”
“이 미친 새끼들이! 아군이 있는데 마법 포격을 퍼부어!”
“마물을 죽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서로 간의 지원이 원활하지 않았고 자국의 병력을 살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를 쓰면서 오히려 연합의 피해가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용사님!”

율리아가 패배했다.
연합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60 만 대군은 약 17 만의 사상자를 냈다.

대패였다.

* * *

“······.”

율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콰콰콰-

검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춤을 춘다. 연무장에 설치된 마법진들이 요동친다.

검이 빨라진다. 바람이 거세진다.

더, 더, 더.

율리아가 갈망한다. 마력이 폭주한다.

───!

폭발하듯 터져 나온 광풍은 연무장 자체를 날려버린다.

“허억, 허억···!”

그럼에도 부족하다.

연합군은 패배했다.

광룡은 도망치는 연합군의 등을 물어뜯었고 그대로 남하해 왕국 두 개를 더 멸망시켰다.

뒤늦게 지원군이 합류하면서 왕국 두 개 수준에서 틀어막았지만 그뿐이었다.

인류는 막대한 전력을 잃었고 희망을 잃어버렸다.

“···강했어.”

용사 율리아가 광룡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용사라는 희망이 꺾여버렸기에.

광룡은 강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싸워왔던 그 어떤 적보다 더.

그녀의 칼날은 광룡의 육체를 꿰뚫기에 충분히 날카롭지 않았다. 바람의 권능은 충분히 거세지 못했다.

꽤 긴 시간 싸웠지만 그녀가 광룡에게 준 건 작은 생채기가 고작이었다. 그 대가로 율리아는 마력 탈진과 한 팔이


부러져 간신히 후퇴했다.

“···어째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배의 충격이 더 컸다.


콰콰콰-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 것 말고 또렷한 방법이 없다는 것.

검을 더 휘두른다고 광룡을 이길 수 있을까?


권능에 조금 더 능숙해진다고 이길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

용사가 되었음에도, 용사의 힘을 각성했음에도.

암울했지만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답답함이 풀려나가지도 않는 무의미한 짓.

그때였다.

“너구나. 이번에 소환되었다는 용사가.”

거의 박살이 난 연무장의 담 위였다.

“과연 하이엘프야. 잠재력이 뛰어나.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해봤자 갑자기 광룡을 잡을 수는
없을 텐데.”
“···당신은 누구시죠? 못 보던 얼굴인데.”

피부가 곤두섰다. 아무리 한심한 스스로에 매몰되어 검을 휘둘렀다고 한들 상대가 지척에 당도할 때까지, 먼저
말을 걸때까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강자다.

그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황궁의 연무장에 그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내 맘이지. 근데 음? 얼굴이 조금 낯이 익은데.”
“누구신지 여쭤봤어요.”
“알베니우스.”

은발의 남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게 희망을 선사해줄 희망 전도사지.”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2) >

“···알베니우스? 희망전도사?”
“아니면 일타 강사? 족집게처럼 네게 필요한 부분들을 콕콕 찝어주마.”
“그러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너 광룡한테 졌다며? 그것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압도적으로.”
“···하나도 못 입히지는 않았어요!”
“그럼 생채기 정도?”
“당신은 누군데 저를 모욕하는 거죠?”
“말했잖아. 알베니우스라고.”
“정체를 묻는 거예요. 전 당신 같은 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지. 내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저보다 강해 보이는데 왜 나서지 않았죠? 그랬으면 광룡한테···.”

패배하지 않았을 텐데.

율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번 들어본 듯 한 익숙한 말이야. 그랬으면 광룡을 잡았을 거라고?”


“···네. 대체 왜 방관하신 거죠?”
“그럼 반대로 묻지. 내가 왜 나서야 하지?”
“종말을 막아야하니까요. 그게 당연하잖아요.”
“내가 왜 종말을 막아야 하지?”
“저랑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요?”
“내가? 너랑?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이 망하면 당신도 터전이 사라져요. 그 이유만으로는 부족한가요?”


“미안하지만 난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해당 사항이 없어.”
“···뭐라고요?”

율리아가 눈을 껌뻑였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다.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고? 그럼 용사? 하지만 용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신? 아니, 저런 신이 존재할
리가. 애초에 신이 나설 수 있다면 굳이 용사들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이곳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길 바라기는 해. 친구가 있으니까. 그래서 널 찾아온 거기도 하고.”
“···무슨 뜻이죠?”
“하이엘프 용사, 난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왔다.”
“제 이름은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그래, 율리아 카르센, 잠깐만, 율리아? 이름이 얼굴보다 더 낯이 익은데.”
“절 아시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뭐죠? 그런 애매한 대답은?”
“밑밥을 깔아두는 거지. 이 세상에 무조건이란 건 없거든.”

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심각한 그녀와 달리 진지하지 않아 보였다.

종말이라는 엄청난 일을 앞두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유일한 희망이라며 치켜 받는 용사인 자신이 광룡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용사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는 걸지도.’

일단 그녀보다 강한 건 확실하다.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도저히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상대가 입을 다물고 그녀가 눈을 감으면 아예 존재감 자체가 없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너에게 제안을, 희망을 주러왔어.”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광룡과 싸울 마음이 생기셨다는 건가요?”
“아쉽게도 난 싸울 수 없어. 직접적으로 내가 드러나면 안 되거든. 이 대화도 기시감이 있단 말이지.”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적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어. 당장은. 하지만 너를 가르쳐 줄 수는 있지.”
“···저를 가르친다고요?”
“광룡을 잡을 수 있도록. 그 조건은 이후에 내게 협력하는 것. 어때?”
“···당신에게 배우면 광룡을 이길 수는 있고요?”
“장담하지. 넌 영웅이 될 거야. 광룡의 목을 벤 영웅.”
“······.”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 왜 돕는지 모른다. 하지만 광룡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그녀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서광이 보인다면 그것을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설사 그 끝의 요구 조건이 파멸이라고 한들, 따라가지 않으면 지금 당장 파멸하니까.

“···좋아요.”
“꽤나 결연한데. 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아니, 오히려 네가 내가 생각한 율리아가 맞다면 오히려
환영하겠지.”
“당신이 아는 율리아가 대체 누군데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받아들인 걸로 알고 이만 가보지.”
“간다고요? 절 가르쳐 준다면서요?”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걱정 마.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냥 흘러가는 흐름을 거부하지 말고 따라와.

“엘븐에서 보자.”
“···엘븐?”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다. 거기가 대체 어딘 줄 알고 보자는 거지?

“어딘지는 알려주셔야죠!”
“너도 느끼고 있잖아? 존재한다는 걸.”

알베니우스가 사라졌다.

* * *

“엘븐에서 사신을 보냈소.”

연합군의 첫 원정은 실패했고 용사 또한 패배했으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연합은 제국의 황도에 모여 앞으로의 대책 회의를 시작했다.

무너진 왕국의 난민들의 처우, 마물들의 동태, 2 차 연합군 결성 등 여러 가지 안건이 논의 되었지만 가장 큰


떡밥은 이것이었다.

“다들 한 번 읽어보시오.”

엘븐의 서신이 차례 차례 돌아갔다.

“···이런 건방진 놈들이!”


“우리를 감히 무엇으로 보고···!”
“노골적이군요.”
“연합을 결성하자고 그렇게 대화를 요청해도 묵묵부답이더니 이러려고 그랬던 건가?”

전권을 쥐고 제도에 온 각국의 대표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서신이 율리아에게까지 당도했을 때, 율리아는 어째서 이들이 화를 내는지 이해했다.

“용사님을 보내야지만 협력하겠다니. 용사님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너무 오만방자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엘븐이 강대하다 한들, 우리가 없이 종말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흔한 정치 싸움이었다.

‘엘븐?’

하지만 율리아의 눈에는 그 내용보다 엘븐이라는 이름이 더 들어왔다.

알베니우스라는 자가 말했던 곳이 분명 엘븐이었다.

“엘븐이 어디죠?”
“크흠, 그게···.”
“엘프들의 왕국입니다. 용사님.”

마르덴 왕국의 대표, 돌베스 후작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율리아가 하이엘프인지라 엘븐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던 탓이다.

“데이드람에도 엘프들의 왕국이 있었군요? 그들은 왜 처음부터 합류하지 않았죠?”


“연합을 창설할 때, 함께 하고자 사실을 여러 번 보냈습니다만, 끝까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사실 엘프들이 있다는 것쯤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엘프였고 데이드람에 소환되자마자 이 땅에 세계수가 뿌리를 내렸음을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어째서 엘프들이 합류하지 않았는지 의문이었으나 대충 예상해 넘겼다. 그녀가 있던 차원에서도 엘프와 인간은 잘
섞이지 못했다.
충돌이 있었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힘을 합쳤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겨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자 했다.

알베니우스라는 자의 전언이 아니었다면.


‘흘러가는 대로?’

이 서신에 적힌 대로 진행된다는 건가? 그녀를 엘븐으로 보내라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자가 허언을 할 리는 없을 테고.

“왜 묵묵부답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종말을 막는데 인간과 엘프가 따로이지는 않을 텐데.”


“맞습니다.”

어쨌든 흘러가는대로 따라오라 했으니 굳이 그녀가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엘븐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광룡의 힘이 생각보다 강한 바, 이대로는 가능성이 낮지


않습니까?”

‘이름이···.’

아르칸 왕국의 1 왕자, 볼프 아르칸이었다.

“서신에는 용사님이 하이엘프인 이상, 엘븐에 방법이 있다고 써 있습니다. 이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용사님을···음,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소?”

귀족 하나가 율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삼켰다. 허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저들에게는 세계수가 있습니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관계를 아시지
않습니까? 또한 엘프들이 이런 상황에서 의미없는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아무 진실일 겁니다.”

[용사님을 엘븐으로 보내신다면 보다 원활히 광룡을 막을 방법이 있습니다.]

서신에 적힌 내용 중 일부였다. 율리아가 광룡에게 패배한 상황이기에 연합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를 보낸다는 건 용사에 대한 통제권을 넘긴다는 거다. 율리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율리아가 자리에
있기에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종말을 막는데 종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엘븐의 엘프들이 용사님의 마음을 조금 배워야 하는데···.”

회의는 더욱 길어졌다.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자기들이 제일 안전하다고 버티는 것 아닙니까! 치졸한 놈들!”


“치졸하지만 영리하긴 합니다. 타이밍도 절묘해요.”
“아무리 그래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는 건 너무 수상하오!”

엘븐은 대륙 남부 끝자락의 숲에 위치해 있었다. 종말이 북방에서부터 시작했기에 위치상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금 치졸하긴 하네.’


같은 엘프였지만 조금 그랬다.

‘엘프들의 생각인가?’

솔직히 모르겠다. 아르반의 엘프들은 순수하고 정치에 능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알베니우스라는 그 자의
수작일지도 모른다.

‘쉽게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알베니우스의 말처럼 되는 걸까?

“하지만 엘프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용사님께는 죄송하지만 우리는 패배했소. 지금의 상황으로는 답이 없단 말이오!”

하지만 의외로 엘븐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쪽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왕국들이었다.

‘제국이 주도권을 쥘 바에는 엘프들이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기 종족의,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건 모두가 같다. 다만, 종말을 앞둔


상황에서까지 이런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긴 회의의 끝은 결국 ‘엘븐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 협상을 해야 한다.’였다.

연합의 사신들이 엘븐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북부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잠잠하던 마물들이 일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 수가 연합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연합군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마물들은 생명체의 생명력과 피를 먹습니다.”


“우리가 연합군을 보낸 덕분에 그 시체를 먹고 무럭 무럭 수를 불려나갔다는 거요?”

연합 실패의 대가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인류는 마물의 남하를 막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는 최전선에서 검을 휘둘렀다.

“용사님이 오셨다!”
“용사님 만세!”

이름 모를, 흉측한, 기괴한, 역겨운 마물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검은 날카로워졌다. 권능은 더욱 익숙해지고 마물을 사냥함으로서 용사의 힘이 성장했다.

단순한 광풍에 그치던 바람은 폭풍이 되었고 바람과 어우러진 검술을 새롭게 개량해냈다.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막고 막고 또 막다보면 언젠가 광룡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 또한 생겼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성벽이 무너졌다! 모두 내성으로 후퇴해라!”

마물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드세졌고 인류는 끊임없이 밀려났다. 왕국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용사님. 죄송하지만 엘븐으로 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고 연합은 결국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다.

* * *

“여기가 엘븐···.”

율리아는 제국의 극진한 호위와 함께 엘븐에 발을 들였다.

우거진 숲, 넘치는 정기, 더욱 진한 어머니 나무의 기운.

더 없이 정겨웠다. 멸망을 맞이하기 전 그녀가 살던 숲처럼 아름답고 푸근했다.

“어서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율리아 카르센 용사님. 저는 어머니 나무를 모시고 있는 필립스라고 합니다.”

필립스는 엘븐의 유일한 하이엘프이자 실질적인 엘븐의 지도자였다.

인간들은 흔히 왕국이라 부르지만 엘븐의 체계는 왕국과는 달랐고 엘프들은 그를 대족장이라 불렀다.

“어머니 나무께서 당신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모시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필립스는 율리아를 세계수로 이끌었다.

“꼭 그래야만 했나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엘프들이 도왔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을 거예요.”

엘븐에 와서 느꼈다. 이곳의 세계수는 아르반의 세계수 이상으로 거대하고 정기가 넘쳤다. 자연스레 엘프들의
수준 또한 높았다.

“저는 그저 어머니 나무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건가요?”
“궁금하신 부분들은 직접 설명해주실 겁니다.”

율리아는 곧 세계수 앞에 당도했다.

“···보호막?”

세계수를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내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율리아는 깨달았다.

세계수가 아닌 엘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농후한 정기는 어린 엘프들에게는 너무 과해


오히려 독일 될 수준이었으니까.

- 반갑구나. 다른 차원의 하이엘프야.


어머니 나무의 정령, 작은 참새 하나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또 만나게 될 거라고 했지?”

그리고 그 참새가 앉은 손가락의 주인이 세계수의 가지 위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3) >

“······.”
“······.”

- ······.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의 상황을, 율리아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야 당연하다. 알베니우스는 엘븐에서 만나자고 했고 자연스레


만날 것이라 했다.

그게 이루어졌다. 예언이라기보다는 종말의 정세와 인간들의 반목을 알고 한 예측에 가깝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예측보다는 엘븐이 의도했다는 게 옳았기에. 엘프들이, 세계수가 종말을 앞두고
인간들을 반목시키고 의도적으로 불화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목적이 그녀를 품에 넣기 위해서라면 더욱 더.

- 불만이 많은 표정이구나.
- 이해한단다. 알베니우스의 방법이 어린 하이엘프에게는 조금 많이 과격하긴 했지.

“잠깐만, 세계수. 너도 동의해놓고 이제 와서 내 탓을 한다고?”

- 나는 하이엘프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참새가 장난스래 웃는다.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건 서로 싸운다기보다는 그저 다정해보일


뿐이다.

“처음뵙는 어머니 나무님.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될까요?”

- 그래. 내게 궁금한 게 참 많을 거야. 무엇을 알고 싶니?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나요?”

연합이 율리아를 엘븐으로 보내기까지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엘프들이 나섰다면 그
피해는 확실하게 줄일 수 있었다. 알베니우스가 나섰다면 반드시 마왕을 처치할 수도 있었다.

- 그래야만 했단다.

“어째서죠? 저를 통해 주도권을 잡는 게 인간들의 목숨보다 중요했나요?”

- 마음이 고운 아이구나.
-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긍정이란다.
“···그게 무슨!”

세계수는 자애롭다. 엘프들과 어울리고 살아 주로 엘프들에게 적용되긴 하지만 사실 세계수의 자애는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수란 그런 존재다. 그녀가 살던 아르반의 세계수 또한 그랬다.

인간들과 엘프들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세계수는 엘프들을 연합에 합류시켰다.

더 많은 피해를 줄이고 종말을 막고자 하는 대의를 위해서.

종말의 군세가 숲까지 당도했을 때, 세계수는 모든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을 보호했다.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수란 그런 존재다. 적어도 그녀가 보고 느낀 건 그랬다.

그런데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어째서···. 세계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흔들렸다.

- 그게 옳으니까.

“인간들을 희생시켜서 엘프들이 주도권을 잡는 게 옳다는 건가요?”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지.”

탁, 알베니우스가 줄기 위에서 내려왔다.

“율리아 카르센. 이게 뭔지 아나?”

알베니우스가 목걸이 하나를 흔들었다. 끝에 장식이 달린 팬던트였다.

“그걸 왜 저한···?”

율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되나, 이상하게 팬던트가 낯이 익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묘하게


정감이 갔다.

‘율리아.’

아련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세이드가 실종된 게 벌써 수십년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불쑥 사라져 죽었다고 생각한지 오래였다. 살아 있다면


그녀에게 아무 말 없이 떠날 이가 아니었으니까.

‘설마 용사?’

하지만 용사가 된 이후, 어쩌면 용사가 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이드는 강자였고 충분히 신의 눈에 들어
용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이곳에서 세이드의 흔적과 마주할 줄은 몰랐다.

카발론의 황도에서 그녀가 첫 번째로 소환된 용사라고 했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용사는 한 차원에 한 명이야.’

아르반 또한 그랬다.

‘그냥 비슷해 보이는 팬던트일 거야.’

그게 맞을 거다. 여기에 세이드가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이건 세이드 델름의 팬던트다.”


“······!”

하지만 알베니우스의 다음 말은 그녀의 가정을 무참히 깨부셨다.

“···그게 세이드의 것이라고요?”

우연히 닮은 팬던트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어도 본래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딸각-

알베니우스가 팬던트를 조작하자 앞면이 열렸다. 그리고 사진이 드러났다. 환하게 웃음짓고 있는, 어린 시절의
율리아였다.

“내가 율리아라는 하이엘프를 안다고 했었지? 나이를 조금 먹어서 긴가민가 했다만, 딱 이 아이가 성장하면 너가
되겠더군.”
“어떻게···. 어떻게 그걸 당신이 들고 있는 거죠? 설마···?”
“살기 집어넣어라. 세이드를 죽이고 취한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세이드는 어디 있죠?”
“···만날 수 없는 곳에 있다.”

알베니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그건 죽었다는 거잖아?

“정확하게 말씀해주세요!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죠?”

알베니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

“···아.”

정말로 죽었구나.

단순히 죽었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는 것과 죽었다는 확답을 듣는 건 또 달랐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율리아가 쓰러졌다.

* * *
- 안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죽지 않았어. 차원에 갇혀 있긴 하지만 멀쩡히 잘 살아 있지.”

- 그런데 왜 그렇게?

“세이드가 그랬거든. 혹시 만나게 되면 자기가 이런 상황인 걸 알려주지 말라고. 걱정할 거라고.”

- 걱정을 하지 말라고 아예 죽었다고 하는 건 더 문제 아니야?

“죽었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얘 혼자서 착각하고 쓰러진 거지.”

- 뭐, 이런···.

참새가 이마를 짚었다.

- 알베니우스, 당신도 참 희한한 드래곤이야.

“신들에게 오랫동안 쫓기다 보면 다 이렇게 돼.”

- 그건 너무 비약이 아닐까?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화의 주제를 돌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마왕이라고 불리는 놈, 꽤나 강해. 김우진이 처치한 사룡만큼은 아니지만 이대로 있으면 율리아는
반드시 죽어.”

지금의 율리아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그녀가 죽으면 신들은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차원을 포기하거나, 글라크처럼 또 다른 용사를 소환하거나.

“둘 다 내게는 좋지 않아.”

차원을 포기하면 멸망한다. 그렇다고 용사를 계속 소환하다보면 그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원치 않았고 베스트는 율리아 선에서 종말을 끝내는 거다.

알베니우스가 율리아에게 손을 내민 것은 그래서였다.

그는 함부로 나설 수 없었고 데이드람의 세계수 덕분에 얻은 비교적 안전한 은신처가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하이엘프 용사가 등장했으니 최고의 상황이었다.

“하이엘프인게 다행이지. 하이엘프들은 네 말을 잘 듣잖아?”

엘프들과 세계수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비밀 엄수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더불어 하이엘프이기에 가능성을 보았다.

- 어떻게 하려고?
- 열매를 준다고 해도 그 김우진이라는 용사처럼은 못할 텐데?

“김우진 때와는 사정이 조금 달라.”

당시 김우진은 정령왕의 핵을 취한 상태였다. 정령왕은 반신의 존재였고 풍부한 신의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일깨워주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하이엘프 율리아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하이엘프가 특별한 종족이긴 하지만 태생부터 우주의 힘을 타고난
차원룡 같은 존재는 아니었고, 정령왕을 먹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열매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세계수 또한 반신의 존재. 그 열매에는 미약하게나마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

“천 년 열매는 몇 년이나 남았다고 했지?”

- 아직 오 년은 더 있어야 해.

본래 세계수는 백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지만 만년을 살아온 세계수는 그 주기가 천년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열매가 품은 힘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쉽네. 5 년이면 인류가 멸망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라는 게.”

그 열매였다면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다만, 일반적인 세계수의 열매도 귀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힘을 일깨워준다면 율리아는 충분히 마왕을 이길 수 있다.

세계수와의 궁합이 그 어떤 자들보다 좋은 하이엘프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데이드람의 마왕이 강하다 한들


글라크의 사룡에 비하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열매 줘봐.”

- 지금 바로 하게?

“어떤 저항도 없는 편이 좋아. 기절해 있을 때, 열매를 흡수시키고 네가 품어서 최대한 육체에 안착하게 하는 게
낫지.”

- 일어나면 깜짝 놀라겠네. 근데 세이드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로 그렇게 끝낼 거야?

“···난 세이드의 마지막 전언을 지키려고 하는 거야.”

- 그냥 다른 좋은 변명이 안 떠오르는 거지?

“······.”

알베니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으음.”

율리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코앞에는 참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계수의 정령이다.


‘내가 왜···?’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어머니 나무의 내부?”

- 그렇단다.

참새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몸 상태는 어떻니?

“···좋아요. 살면서 지금보다 좋은 적이 없을 정도로.”

몸이 가볍다. 감각이 곤두서고 마력이 넘쳐난다. 한 단계 진화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 열매를 먹였단다. 알베니우스가 네가 잘 흡수하도록 도와줬고.

“···알베니우스.”

뒤늦게 자신이 왜 기절했었는지 깨달은 율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알베니우스님을 뵙고 싶어요.”

- 얼마든지.

가지들이 움직여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세계수의 그늘에 기대 차를 마시고 있던 알베니우스가 그녀를 반겼다.

“일어났군. 와서 앉아.”
“···그건 뭔가요? 처음 보는 차인데.”
“커피. 마실래?”
“네.”

꽤 쓴 차였다. 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쓰면 설탕이나 물을 타서 먹어도 돼.”


“아뇨, 괜찮아요.”
“묻고 싶은 게 많지?”
“네.”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다 대답해주지.”
“한 차원의 용사는 한 명 뿐이라고 들었어요. 어떻게 세이드를 만난 거죠?”
“한 차원의 용사는 한 명 뿐이라. 일단 그것부터 어폐가 있어. 그렇다고 데이드람의 용사가 너 말고 더 있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용사가 다르듯, 모든 차원의 사정도 달라.”
“용사가 여럿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래. 실제로 그런 차원이 있었지. 그리고 세이드는 거기에서 만났다.”
“···다른 차원에서 세이드를 만났다고요?”
“글라크라는 차원이야. 사룡에 의해 대륙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곳이지.”

그나저나 사룡과 광룡이라. 그때랑 참 엇비슷해.


“세이드는 용사로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다.”
“······.”

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세이드가 어떤 용사의 삶을 살았는지, 팬던트를 어떻게 건네 받았는지. 알베니우스의


정체, 그리고 알베니우스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난 네가 종말을 막길 원해. 세계수가 뽑히길 원치 않거든.”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어요.”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말했잖아? 희망전도사라고. 난 이미 너 같이 가망 없는 놈
하나를 가망 있게 키운 전력이 있거든. 그리고 놈은 가능성이 0 에 가깝던 글라크의 종말을 막아냈지.”

알베니우스가 가슴을 폈다.

“배우기만 하면···잠깐만요. 글라크?”


“그래, 세이드가 있던 차원이다. 놈은 세이드의 동료였다.”
“······!”
“그분은 살아계신가요?”
“멀쩡히 살아 있더군.”
“끝이 이상한데요?”
“못 만난지 꽤 됐거든.”
“그럼 그분은 세이드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만나게 해주세요!”
“종말이 우선이다.”

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알베니우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배우기만 하면 가능은 한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 너도 느끼고 있을 텐데? 네가 잠든 사이 네게 세계수의 열매를 먹였다.”
“···역시. 세계수의 열매였군요.”
“세계수의 열매에는 미약하게나마 우주의 힘, 그러니까 네가 용사의 힘이라 불리는 것이 들어 있다. 나는 네가
보다 원활하게 그것을 채득하고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줄 거다.”

나만 믿어라.

“너는 반드시 종말을 막게 될 테니.”


“···그런데 왜 직접 나서시지는 않는 거죠?”
“···그럴 상황이 아니니까.”
“쫓기기라도 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알베니우스님 같은 강자를 누가 쫓을 수 있다는 거죠?”
“···이 대화도 기시감이 들어.”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상당히 엇비슷했다. 마주치자마자 검부터 휘둘렀던 매운맛이냐, 그나마 대화로 진행시키는
순한맛이냐의 차이일 뿐.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이럴 때, 김우진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는다.”


“···네?”
“대답을 듣고 싶다면 광룡을 처치한 후에 다시 물어라. 왜 나서지 못하는지도, 세이드의 동료에 대해서도 알려줄
테니.”

분명 이랬다.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4) >

훈련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용사의 힘을 보다 원활하게, 각성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일반적일 수 없었다.

“한 걸음도 못 움직이겠어요!”
“견뎌. 김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녔어.”

우주의 힘으로 율리아를 압박하고.

“···제 의도랑은 완전히 다르게 움직이는데 이거 성공할 수 있는 건 맞죠?”


“한참 부족하네. 김우진은 그냥 바로 감으로 권능의 규칙과 틈새를 찾아냈는데.”

비틀린 공간에서 용사의 힘을 이용해 바람을 컨트롤 하며.

“가까이 가기만 해도 힘이 상쇄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상으로 결속을 다지거나 총량을 늘리라고!”
“그게 말처럼 쉬우면 진즉에 했죠!”
“김우진은 매번 할 때마다 나아졌는데 넌 왜 그 모양이냐!”
“그러니까 대체 그 김우진이 대체 누구냐고요!”

용사의 힘을 상쇄시키는 마나석까지.

알베니우스는 김우진을 가르쳤던 방법 그대로 율리아를 가르쳤다. 그게 가장 효율적이니까.

그래서일까,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우진은 금방 금방 했는데 하이엘프라는 작자가 이렇게 무능하다니.

거친 훈련 끝에 율리아가 탈진해 쓰러졌다. 세계수가 정령체를 통해 그녀에게 숲의 정기를 보충해주었다.

- 괜찮니?

“아니요.”

- 솔직하구나.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요. 특히, 대체 그 김우진이 누군지 궁금해 죽겠어요.”


- 인간이란다. 신을 죽인.

“···그런 게 인간?”

그럼 나는 뭐지. 잡초인가?

- 나도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알베니우스가 말했던 세이드의 동료기도 하단다.

“···불가능에 가깝던 종말을 막았다던 그?”

- 그래.

“그럼 저도 알베니우스님한테 배우면 신과 같은 힘을 얻는 건가요?”

- 그건 아니란다. 그때는 상황도, 김우진도 워낙 특수했다고 하더구나.

“···아쉽네요.”

어쨌든 더욱 열심히 배워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알베니우스의 말이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반드시 김우진을 찾아내리라.

세이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그녀를 길러준 부모나 다름없었다. 살아있다면 찾아내고, 죽었다면 그
마지막이라도 듣고 싶었다.

“휴식은 끝났어. 다시 간다.”


“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 * *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갑자기 말투가 이상하신데요.”
“역시 엘프에게 무협은 이른 건가.”
“···네?”

율리아가 엘븐에 있는 사이, 전황은 급변했다. 남하하던 마물들이 갑자기 진군을 멈추고 오염된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맴돌았다.

연합은 이것이 광룡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했다.

“광룡이 잠을 자기 시작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드래곤은 반드시 주기적으로 긴 동면에 들어야 한다. 단순히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몸을 한층 진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동면에 든 드래곤의 가디언들은 드래곤의 레어만을 지키고 활동 반경이 급격히 줄어드오. 가능성이 있소.”
“그렇다면 한시름 놨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반대로 생각하면 동면이 끝나면 광룡이 더 강해진다는 거요.”
“그전에 광룡을 처치해야 하오.”
“하지만 무슨 수로? 모든 마물들이 광룡의 보금자리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을 텐데.”
“총력을 다하면 뚫지 못할 것도 없잖습니까?”
“허면 광룡은? 동면중이라 한들 위험하면 결국 일어날 텐데 놈을 죽일 수 있소?”

없었다. 용사는 강했으나 광룡은 더 강했다. 이미 한 번의 전투로 인류는 크나큰 손실을 입었고 다시 붙는다고
한들, 승리할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엘븐에서 자신하고 데려갔으니.”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가능성이 아예 전무한 것도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가능성과 확신은 또 다르다.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분노한 광룡이 다시 남하한다면 기껏 얻은
아슬아슬한 평화마저 사라져 버릴 수 있으니.

율리아가 패배했다는 것이 참으로 크게 다가왔다.

“···엘프들의 장담이 사실이기만을 빌어야겠구려.”


“적어도 엘프들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니 믿어볼 수밖에 없겠소.”
“하지만 대체 언제 준비가 되고, 언제 온다는 겁니까? 광룡이 일어난 다음이면 다 말짱 꽝이 아닙니까.”
“엘븐에 사신을 보내 독촉하는 한 편, 2 차 원정군을 준비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그런 상황에서 마침내 용사가 엘프들과 함께 출발했다.

* * *

“곧장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반대해요. 동료로 믿을 만한 자들을 제게 내어주셨으면 해요.”

연합의 핵심이자 제국의 황도로 돌아온 율리아는 연합에 요구했다.

“동료들?”
“지난번의 전쟁은 너무 성급했어요. 저는 마물에 대해서도, 광룡에 대해서도 아는 게 적었고 권능에 익숙하지도
않았어요. 제 힘이 얼마나, 어디까지 통하는지도요.”
“급했었다는 것은 인정하네. 허면,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

황제의 물음에 율리아가 답했다.

“마물들에게 오염된 점령지의 외곽을 돌다가 점점 안으로 들어가며 마물들에 대한 조사를 할 겁니다. 잠든 광룡이
깨어나지 않는 선에서.”
“실력이 어느 수준까지 통하나 확인해보겠다는 것으로 보이는군.”
“지난번처럼 우를 범하면 안 되니까요.”
“소수정예를 원하는 건가?”
“네.”
“알겠네.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원하는 대로.”

연합은 각 분야 최고의 인재, 세 명을 끌어 모았다.

대마법사, 에드먼드 프로인.


아르칸 왕국 최고의 기사, 데이지 호크네.
그리고 성자, 갈라스 콜먼까지.

한 명의 용사와 그 동료가 될 운명을 가진 셋은 황도의 별궁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반가워요. 부족하지만 용사라고 불리고 있는 율리아 카르센이라고 해요.”


“에드먼드 프로인입니다, 용사님.”

에드먼드 프로인은 30 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천재라 불리는 자였으며, 어렸을 때 제국 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가 유래없이 재능을 폭발시켜 최연소 대마법사의 경지를 이루었다.

“데이지 호크네입니다.”

데이지 호크네는 제국 다음으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는 아르칸 왕국의 기사였다. 기사 명가인 호크네 가문에서
태어나 오라비와 아버지를, 나아가 이전의 왕국 제일검을 꺾고 그 칭호를 이어 받았다.

“갈라스 콜먼입니다. 용사님의 앞길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성자, 갈라스 콜먼. 그는 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신의 총애를 받는 자였다. 막대한 신성력은 다른 사제들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 농밀했다.

“이야기는 다 들으셨죠? 저희는 함께 북방으로 올라갈 거예요.”


“듣긴 했습니다만, 정확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설마 저희들만으로 잠자는 광룡을 요격한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작전은 아니겠지요?”

생각만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에드먼드가 몸을 떨었다.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요. 그저 확인해보려는 거예요.”


“무엇을 말입니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도 되는지.”
“···용사님, 한 번 패배해서 겁을 먹었구나?”

데이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율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부정하지 않을게요. 광룡은 강했고 저는 패배했어요. 엘븐에서의 시간들로 인해 그때와는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광룡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에요.”

그래서 확인이 필요하다.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인류를 위해서.

한 번 더 실패한다면 이번 피해는 지난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테니까.

“···반드시,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막아내고 알베니우스에게 들어야만 하는 게 있다.

“걱정하지 마시길. 당신은 신께서 선택하신 용사입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신다면 신께서 당신을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해주실 겁니다. 그 어떤 어둠도 신의 빛을 막지 못할 겁니다.”

성자가 축복을 빌어주었으나 율리아에게 필요한 건 말뿐인 축복이 아닌 경험이었다.


“그래서 가실건가요?”
“용사님이 가시는 길이 어디든 함께 하겠습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니.”
“그러려고 모였으니 가긴 가야겠지요. 제발 무리하게 심부로 향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좋아. 용사님. 솔직해서 좋네. 아, 말 편하게 해도 되려나?”
“이미 너무 편해보이시네요.”
“내가 좀 적응이 빨라.”

데이지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인간상은 아니었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제법 강했다. 그거면 된다.
이 자리는 인성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함께 싸울 동료를 구하는 자리니까.

용사 일행은 곧장 북상했다. 인간들이 쌓아올린 거대한 방벽을 통과해 죽음의 땅으로 발을 들였다.

* * *

“케트라입니다.”

케트라. 데이드람에 뿌리를 내린 마물 중 하나로 10m 의 덩치를 가지고 오우거도 씹어 먹는 괴물이었다.


어지간한 기사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후우···.”

율리아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을 곧추세우고 바람을 일으킨다.

“도와줄까?”
“됐어요.”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광룡하고 나름 대등하게 싸웠다고 들었는데 케트라 따위로 긴장할 필요가 있나?”
“가정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케트라가 강하다 한들 율리아는 용사다. 연합군의 첫 번째 진격 때 수도 없이 잡아 보았다.

그래, 잡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탁, 그녀가 대지를 박찼다. 바람이 육신을 밀어주었다. 순식간에 케트라의 코앞에 당도한다.

───!

케트라가 괴성을 지른다. 함께 터져 나온 독무가 율리아를 덮친다.

하지만 세차게 불어오는 광풍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당황한 케트라가 뼈로 뒤덮인 양팔을 들어 올렸지만.

─!

그 채로 잘려나간다. 두 동강 난 상체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뭐야. 한 방?”
“걱정이 무색하군요.”
“신께서 인도하시니 그 길에 거침이 없을 것입니다.”

율리아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거칠게 호흡하며 애써 숨을 골랐다.


‘됐다.’

한 방에 케트라를 죽였다. 그리 많은 힘을 쏟지도 않았다. 못해도 1 분 이상 격전을 해야 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강해졌다. 달라졌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음, 케트라를 한 방에 죽일 정도면 더 이상의 확인은 필요 없는 것 같은데.”


“케트라는 오우거 이상의 괴물입니다. 그런 놈을 가볍게 죽인다면 용사님에게 고난을 줄만한 마물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아뇨, 그런 걸로는 확신할 수 없어요.”

물론 케트라는 강한 마물이다. 하지만 최강의 마물이라고 한다면 모두 고개를 젓는다. 마물은 무궁무진하고
케트라보다 강한 마물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류가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봐요.”
“그러다 못 나···올 것 같지는 않긴 한데. 혹시나 광룡이 깨어나면 전부 끝이야.”
“걱정마세요. 그 정도까지는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외곽을 돌면서 이번처럼 간혹 나타나는 마물들을 노리는
게···.”
“광룡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잖아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 시간을 저희들의 목숨을 담보로 으음.”

안전지향주의 마법사가 신음을 삼켰다.

“위기가 온다면 제가 어떻게든 여러분은 도망칠 수 있도록 해볼게요.”


“저희가 살고 용사님이 죽으신다면 결국 광룡을 막지 못해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만.”
“뭐야, 마법사. 너 용사님 못 믿어? 케트라를 단 칼에 베어버렸는데?”
“물론 용사님이 강하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저희는 고작 넷이고 마물은 얼마나 많을지 모릅니다.”
“문제없을 겁니다. 신께서 길을 비추어주시니 용사님이 가는 그 길에는 항상 광명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자님이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마법사는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방어 마법을 몇 겹이나 두르는 거야?”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대마법사가 됐어?”
“겁이 많으니까 철저하게 마법진과 마법, 술식들은 분해해서 낱낱이 파악한 뒤에야 마법을 썼죠. 그랬더니
깨달음이 왔습니다.”
“···나는 마법을 잘 모르지만 네가 이상한 놈이라는 건 알겠어.”
“매사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당신들이 안전불감증에 걸린 겁니다.”
일단은 광룡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 외곽을 따라 천천히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물들은 군단을 형성하고 있다기 보다는 벌판에 풀어놓은 야생동물 같은 느낌이었다.

오염된 땅이라는 한정된 땅에 마물들만의 생태계가 펼쳐져 있었다.

“굳이 우리가 필요할까 싶은 수준이네.”

그리고 율리아는 한 마리의 사자가 되었다. 마물이 초식동물들로 보일 정도로 휩쓸고 다녔다.

과연 용사라고 해야 할지, 데이지는 스스로에 대한 미약한 자괴감을 느꼈다.

“나 그래도 나름 왕국 최고의 기사인데.”


“일개 피조물이 스스로를 신의 선택을 받으신 용사님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괜히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마시길.”
“하···. 그럼 더 억울한 거 아니야? 단순히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강해지는 거잖아.”
“선후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럴 자격이 있기에 선택받은 겁니다.”
“그럼 그냥 처음에 내가 말한 게 맞잖아?”
“···그렇게 되겠군요.”

성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지만 그렇다고 낙담하고 죽어 있을 그녀도 아니었다.

검을 뽑고 전장에 끼어들었다.

“잘못하면 바람에 휩쓸립니다!”

저렇게 앞뒤 분간을 못해서야! 에드먼드가 마법을 영창했다. 다섯 개의 방호 마법들이 순식간에 데이지의 몸에


깃들었다.

그녀가 율리아에게 돌격하는 마물 몇과 드잡이질을 시작했다.

“확실히 실력이 있긴 합니다. 비교 대상이 용사님이기에 부족해보일 뿐.”


“그건 데이지 양에게 위로가 안 될 것 같으니까 굳이 말하지는 마세요.”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전투는 빠르게 끝났다. 율리아가 모든 마물을 일격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용사 일행의 전투는 늘 이런식이었다. 오염된 땅을 돌며 천천히 중심부로 이동하고 마물과 조우한다.


그리고 율리아가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보겠다며 모조리 일격에 끝낸다.

동료라고 함께하는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밤에 마물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은신 마법진을 설치하거나, 뒤지기
싫다면 뛰어 나가 검을 휘두르거나, 지친 체력을 보존해주기 위해 신성 마법을 걸어주는 것뿐이었다.

타닥 타닥-

밤이 되었다. 일행은 한때는 숲이었던 곳의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은신 마법진을 설치하고 모닥불을 지폈다.

율리아는 멍하니 불꽃을 응시했다.

‘확실히 달라.’
그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광룡에게도 통할지는 의문이다. 알베니우스와 어머니 나무께서는 장담하셨지만
글쎄. 그때의 패배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다.

‘안전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가는 거야.’

그녀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그만한 대가를 동반하며 수많은 인류가 지워진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저보다 더 안전지향주의적인 분은 처음 봤습니다.”

안전주의 마법사, 에드먼드였다. 데이지와 성자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가 꺼져가는 불씨에 마력을 더해
살려냈다.

“그런가요?”
“실패 때문입니까?”
“맞아요. 한 번의 실패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런 경험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아요.”
“광룡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으신 것입니까?”
“맞아요.”
“하지만 마물들이 아무리 강한들, 광룡에 비하면 약합니다. 그들을 아무리 죽인다 한들, 광룡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정론이었다.

율리아의 집착은 결국 풀리지 않을 허기와 같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직전까지 가려고요.”


“그 직전이라고 하신다면?”
“마물들은 피와 생명력을 먹고 자라나요.”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그걸 토대로 새롭게 태어나고 모이고 성장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먹을 피와 생명력이
없다면?

“그래서 소수 정예로 들어왔죠.”

어지간한 일에는 죽지 않을 수 있는 강자들로.

“···잠깐만요.”

순간, 에드먼드는 진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법사로서의 직감이기도 했다.

“분명히 단순한 확인을 위해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겸사 겸사죠. 확인 겸, 최악의 사태에 대한 대비.”

율리아가 생글 거리며 웃었다.

“군단을 이끄는 광룡과 그냥 광룡 혼자. 뭐가 더 상대하기 편한지는 아시잖아요?”


“중심부로는 안 가신다고···.”
“실수로 중심부에 발을 들일 수는 있는 거잖아요.”
“지금 그 말을 제게 하는 시점에서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늦었어요.”

눈이 마주쳤다. 에드먼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못 돌아가요. 끝까지 잘 부탁드려요.”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었다.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5) >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광룡을 제외한 모든 마물들을 고작 네 명이서 전멸시키겠다니.

미친 짓이었다.

“나도 마법사, 네 의견에 동의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하지만 그 미친 짓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럴 듯하게 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특히, 어지간한 마물들을 전부


일격에 썰고 다니는 하이엘프라면 더욱 더.

“···하지만 용사님이 한다니까 또 그렇게까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소란에 일어난 왕국 제일의 기사가 용사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북부 대부분이 광룡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마물들의 단위가 다릅니다. 최소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입니다! 단 칼에 다 죽인다고 해도 수백만번의 칼질이 필요하다고요!”
“그렇긴 하지만 어중간한 놈들은 또 수십마리씩 한 번에 쓸어버리잖아.”
“···그건.”
“거기에 우리가 도와주면 더 빠를 테고.”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옳은 말도 아니었다.

“성자님. 정말로 성자님도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만 이상한 거 아니죠?”


“용사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신의 빛이 함께하시니, 결국 모두 옳게 될 겁니다. 그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저는 처음 봤을 때부터 성자님이 싫었습니다.”

애초에 신이라는 미지의 존재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의탁하는 성자와 진리를 탐구하는 대마법사는 그 궤가
달랐다.

“감정에 치우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마법사란 항상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냉철하게
현실을 보십시오.”

마법사의 이니시에서 성자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예 불가능할 것 같으십니까?”
“······.”

에드먼드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광룡이 아니라면 율리아가 쓰러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피해를 줄이고자, 보다 확실하게 하고자 하는 건 좋지만 솔직히 마물들을 상대로 하는 실험은 무의미했다.
율리아는 이미 마물 수준에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용사님은 고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잠시 방황하고 있으니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는 것도


동료로서 할 수 있는 있지 않습니까?”
“저 눈을 보세요! 저게 어떻게 용사의 눈입니까! 그냥 돌아버린 광인이지!”
“용사님한테 광인이라니.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맞아요. 그러면 저도 상처 받아요.”
“···당신들은 다 미쳤어.”

결국 마법사도 동료들의 설득에 수용하고 말았다.

“감사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볼게요.”

그리고 다음 날, 용사 일행은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다. 조용히 오염된 대지의 동태를 살피고 실력을 확인하려는
이전과는 달랐다.

마물의 전멸. 완전한 몰살.

온갖 어그로를 끌며 의도적인 혈로를 그리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 * *

수백만에 달하는 모든 마물들을 고작 넷이서 토벌하겠다는 건 사실 미친 짓이다. 그걸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약 없는 미래에 기댄다.

누군가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누군가는 용사님이니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누군가는 용사가 가는 길이 곧 신의 뜻이기에.
누군가는 그저 동료들의 등쌀에 밀려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각자의 생각이야 어떻던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같다.

마물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콰득-

율리아의 검이 거대한 지네 형상의 마물의 목을 갈랐다. 뚝 떨어지는 머리. 의지를 잃은 육신이 힘없이 쓰러진다.
하지만 마물들에게는 학습이란 게 없다. 다른 마물의 죽음에도 배우는 것 없이 무지성으로 달려든다. 수백, 수천,
수만.

율리아가 숨을 고른다. 기운을 담는다.

─!

명장이 만든 검이 거대한 마력을 받아 검명을 일으킨다. 검을 휘두른다. 광풍이 분다.

콰콰콰콰-

태산과 같은 용이 발톱을 할퀴듯, 거대한 상흔이 대지에 새겨진다. 그 사이에 존재하던 모든 마물들이 갈려나간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물들은 순식간에 빈자리를 메우고 연이어 마법이 떨어진다.

────!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불의 비가 폭발을 일으킨다. 수십 줄기의 낙뢰가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마물들을


튀겨버린다.

성자의 기도로 신성한 빛이 깃들고 난장판이 된 마물들 사이로 용사와 기사가 질주한다.

전투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까지 계속된다. 마물에게는 공포가 없기에 한쪽이 죽어야지만 끝난다. 그리고
먼저 전멸한 쪽은 마물들이었다.

“허억, 허억···. 이대로 가다간 분명히 죽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마지막 한 방울의 마력까지 쥐어짠 마법사가 탈진하여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급하게 포션을 삼켰다.

“벌써 밤이 되가네. 빨리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마물들이 더 몰려오겠어. 찝찝해 죽겠네. 나 클린 마법 좀.”

마물들의 피를 뒤집어써 혈인이 된 기사가 몸을 털었다.

“마력이 하나도 없어서 당장은 안 됩니다.”


“제가 조금 도와드리겠습니다.”

성자의 가호가 마법사의 몸에 깃들었다. 마력의 수복이 더 빨라졌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죠. 피 냄새를 맡은 다른 마물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예.”

대충 클린 마법으로 피와 냄새를 지운 일행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의 흔적을 쫓아온
마물들이 들이닥쳤다.

“이대로는 진짜 안 됩니다.”

일행은 오염된 대지 외곽에 굴을 파 은신처를 마련했다. 마법으로 모든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주변에 알람 마법을
설치했다.

간신히 회복했던 모든 마력을 사용해 탈진한 에드먼드가 외쳤다.


“이번에도 위태로웠던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마력 탈진 상태에서 억지로 마법을 쓰다가 역류할 뻔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 데이지님은 부상의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자님, 성자님도 멀쩡하지는
않잖습니까!”
“···솔직히 조금 버겁기는 합니다. 허나, 신께서 내려주신 고행이시니 믿음으로 헤쳐나간다면···.”
“믿음 찾다가 다 죽게 생겼으니 문제 아닙니까.”
“나는 괜찮은데. 큰 부상은 아직 없고···.”
“아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데이지님도 이대로 가다간 큰 부상을 입을 거라는 걸 아시기 때문이잖습니까.”
“······.”

데이지가 입을 다물고 율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지나친 강행군이긴 했다. 지난 한 달동안 무려 백에 가까운 크고 작은 전투를 겪었고 수십만에 달하는 마물들을
토벌했다.

단, 네 명으로 이루어낸 성과. 율리아의 지분이 무척이나 크긴 하지만 그게 다른 일행들이 아무런 활약도 하지
않았거나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아직 부족해요. 겨우 이 정도로는 광룡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어요.”

율리아가 피 묻은 검을 닦으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이건 미친 짓입니다. 이러다 저희 다 죽어요! 전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 결혼도


못했다고요!”
“그럼 그냥 둘이서 하면 되겠네요.”
“예?”
“응?”

기사와 마법사가 서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하고 하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


“두 분이서 호흡 좋았잖아요.”
“호흡이 좋았다고 해서 연인이 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호흡만 좋은 게 아니니까요. 서로한테 눈웃음 짓고, 손도 잡고, 부끄러워하고 그러는 거 다 봤거든요. 정든 것
아니었어요?”
“저기 용사님? 아무래도 용사님도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전 멀쩡해요. 얼마 전에 마물로···.”
“잠깐만, 용사님!”

성자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신성한 빛이 율리아를 감쌌다.

“···아.”

썩은 생선 눈알 같던 동공에 생기가 돌아왔다.

“···죄송해요. 조금 피곤해서 말이 헛 나왔네요.”


“아니야,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용사님.”
“그래도 방금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며칠 전에 에드먼드님이 마물의···.”
“그것보다! 아무래도 이대로 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
“맞습니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됩니다. 후퇴했다가 재정비를 하던 해야 합니다. 무조건.”
“저도 이번에는 이 두 분과 의견이 같습니다. 신께서 이끄시는 고행 또한 좋지만 자칫 용사님이 여기서
스러지시면 이 대륙에는 미래가 없어집니다.”
“음.”

율리아가 천천히 일행들을 살폈다.

초췌한 안색, 피곤한 눈, 자잘한 상처투성이의 육신과 찢어지고 손상된 장비들.

그녀의 무리한 강행군을 따라오려다 입은 피해들이었다. 이미 그들은 한계에 다다랐다. 여기서 그녀가 억지를
부린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터.

‘나 때문에 이분들이 피해를 입게 할 수는 없어.’

알베니우스님도, 어머니 나무님께서도 그랬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보내는 거라고.

그럼에도 불안한 건 한 번의 패배가 너무 압도적이었던 탓이다. 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그냥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거다.

“네. 그게 좋겠네요. 감사해요, 제 억지에 따라줘서. 그리고 죄송해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아니, 괜찮아. 좋은 뜻이었잖아?”
“···이제라도 말이 통하시니 다행입니다. 후우.”
“용사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신께서도 기꺼워하실 것입니다.”

결정이 내려지자 일행은 빠르게 오염된 대지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모든 게 아공간에 들어있어 딱히 챙길 짐은
없었다.

“조금만 휴식을 취하고 가는 걸로 하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운기를 통해 소모한 마력을 보충한다. 오염된 대지에는 마나가 희박하기 때문에 챙겨온 영약들의 도움을
받는다.

기사는 칼날에 묻은 피를 닦은 후, 눈을 감고 육체의 긴장상태를 풀어준다.

성자는 신께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보다 풍부한 신성력을 받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일행은 마침내 밖으로 나간다.

“남쪽으로 일직선으로 내려가는 게 가장 빠릅니다. 조금 돌아가면 마물들을 만나는 빈도가 줄어들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도를 펼친 마법사가 루트를 짜고, 일행은 출발했다. 하려고 했다.

“너희들이구나.”
무겁고 섬뜩한, 소름끼치게 더럽고, 역겹고 혐오감이 피어나는 그런 목소리였다.

기사가 검을 뽑았다.
마법사가 방어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다.
성자가 신성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용사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내 영역에서, 내 가디언들을 죽이고 다니는 벌레 새끼들이.”

그림자가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

거대한 동체가 지상과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일행들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으나 균형을 잡으며 다시 착지했다.

크르르르-

진한 악취가 흐른다. 괴물의 울음소리가 몸의 긴장을 깨운다.

태산과 같은 거구.
빛마저도 흡수해버리는 짙고 어두운 비늘.
모든 것을 압도하는 특유의 위압감과 그 사이에서 사납게 일렁이는 황금빛 동공.

한 때는 용, 드래곤, 괴물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제는 그냥 ‘광룡’이라고만 불리는 존재.

어둠의 힘을 받아 미쳐버린, 인류와 대륙을 멸망시키기 위해 강림한 악룡, 데이드람의 적.

광룡, 발바르였다.

“웬 벌레들이 영역에서 설치고 있다고 해서 억지로 깨어났더니. 과연, 네년이었구나.”

일행을 훑던 눈이 한 곳에 멈춘다. 천천히 검을 뽑는 율리아와 마주친다.

“신의 개. 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것을 쫒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주었더니. 살았으면 감사하고 찌그러질 것이지.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나?”
“딱히 당신이 자비를 베풀어주어서 살아난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때와는 많이 다를 거예요.”
“조금 달라지긴 했군. 나무에게 도와달라고 울면서 빌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광룡의 입가기 비틀려 올라갔다.

“허나, 그래봤자다.”

광룡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간 크게 고작 넷이라. 차라리 잘 됐군. 네놈들을 모두 죽이면 더 이상 귀찮게 할 것들이 없겠지.”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들. 용사라는 게 고작 그 인원으로 내 아가리 속으로 들어오다니.

마나가 모였다.

“죽어라.”
“피해!”
“도망쳐야 합니다!”
“신이시여!”

──────!

독기로 가득한 광룡의 숨결이 토해졌다.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6) >

광룡의 숨결.

율리아는 그 절망적인 상황을 기억한다.

마기로 점철된 독무가 쏟아졌고 그녀의 바람은 독기를 몰아낼만큼 충분히 거세지 못했다.

숨결은 그대로 그녀를, 그녀를 넘어 연합군을 직격했다.

오러가 녹아내렸다. 갑옷이 부식되었다. 정령의 가호가 박살나고, 검이 녹슬었다. 많은 전력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악몽과도 같은 공격이었다.

아니, 그녀에게 지금의 트라우마와 지금의 강박을 심어준 원인, 그 자체였다.

그녀를 패배하게 만든 결정적 한 방.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베니우스님은 말했다.

‘지금의 너라면 광룡을 잡을 수 있어. 장담하지. 놈보다 상위종인 차원룡의 말을 믿어.’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 번에 딱딱 고쳐질 수는 없다.

패배는 진한 상처를 남겼고 율리아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했다.

‘다른 확인은 다 했어.’

이번이 마지막이다. 실전을 통한 진짜 확인. 미루고 싶어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오러를 두르고, 바람을 감싼다.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진공을 만든다.

그리고.
휘두른다.

─!

압축되고 억제되던 바람이 일거에 폭발한다. 폭풍을 넘어 광풍이 되어 용의 숨결과 부딪힌다.

─────!

고막이 찢어질듯한 굉음이.


흔들리는 대지가.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가.

일거에 터져 나온다.

“큭!”
“모두 이쪽으로!”

마법사가 방어 마법진 마력을, 성자가 가호를 두른다. 율리아를 제외한 일행들이 그 뒤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모든 것을 휩쓸던 폭풍이 거쳤을 때.

“···어?”
“응?”
“······?”

광룡의 숨결은 소멸해 있었다.

흔적도 없이.

* * *

“······?”

광룡, 발바르가 닥쳐온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숨결을 토해냈고 하이엘프가 검을 휘둘렀다.

바람이 불었고 숨결과 충돌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렇다면 결과도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숨결은 바람을 밀어내고 그대로 하이엘프 용사를, 그 뒤에 있는
인간들을 덮쳐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숨결이 중간에 사라졌을까.

“통했어요···!”
하이엘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희에 차 온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용사.

“통했다고요!”
“흥, 고작 간신히 한 번 막아냈다고 너무 기뻐하지 마라!”

그제야 이 모든 현상이 하이엘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 당황했을지언정,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저 숨결을 한 번 막아냈을 뿐이다. 숨결이 드래곤들의 권능이었지만 상대는 용사였다. 신이 힘을 내려주었기에


전력을 다하면 한 번쯤은 막아낼 수도 있다.

괜히 용사가 종말의 대적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결국 한 번에 불과할 것이다. 그녀가 조금 더 강하다면 모를까, 이미 잠들기 전에 그 수준을 확인했다.


조금 더 강해졌을지언정, 한두 번 막아내는 게 고작일 거다.

“하지만 나는 열 번도 넘게 쏠 수 있다!”

본래는 연속으로 한두 번이면 마력이 바닥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어둠의 가호를 받은 그는 일반적인 드래곤들과는
달랐다.

“죽어라!”

───!

다시 한 번 숨결을 토해냈다.

하이엘프가 검을 휘둘렀다.

“···어?”
“······.”
“그래, 두 번! 두 번이 최선이겠지! 이제 네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

또 다시 숨결이 공간을 격하고 날아갔다. 이전보다 더욱 마력을 집중시켜 더 거대하고 독했다.

하지만.

서걱-

발바르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하이엘프가 검을 휘두르니 바람이 불었다. 극도로 압축된 칼날 같은 바람이 그대로
숨결을 반토막 내버린다.
거센 광풍들이 힘을 잃은 잔재들은 저 멀리 날려버린다.

드래곤의 권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쿨럭···!”

발바르가 무릎을 꿇었다.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쥐어짠 나머지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 온 몸의 마력이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드래곤이기에 결국 수복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에게는 그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말했잖아요.”

내내 방어만을 일삼던 하이엘프가 처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통한다고요.”

검을 휘두른다. 바람의 칼날이 발바르를 덮친다.

“더 이상 당신이 알던 한심한 하이엘프가 아니에요.”


“크아아악!”

비늘이 일부 뜯겨져 나갔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이 절로 튀어 나온다.

“내 힘이! 당신한테!”

율리아가 땅을 박찼다. 그녀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쏘아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통한다고.”

서걱-

날개가 잘렸다. 항상 두르고 있던 보호 마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끔찍한 고통에 발바르가 비명을 질렀다.

“대체,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이엘프가 특별한 종족임은 안다. 용사로 선택 받고 신에게 힘까지 받았으니 더 특별해졌겠지.

하지만 그럼에도다. 그녀가 하이엘프라면 발바르는 드래곤이었다. 모든 종족 위에 군림하는 최상위 포식자. 그런


그가 어둠의 선택을 받아 종말의 사도가 되었다.

이미 한 번 붙어봤고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고작 6 개월이라는 차이로 좁혀질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난 6 개월간 발바르는 잠에 빠져들었다. 드래곤에게 동면은 힘을 흡수하고 안정화시키는 과정이고 본래


예정보다 빠르게 깨어나긴 했지만 그 또한 반년 전에 비해 강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대체.

“대체 왜 내가 지느냔 말이다!”

발바르가 역류하는 마나들을 억지로 붙들었다.

숨결이라는 종족의 권능은 더 이상 불가능했지만 다른 건 아니었다.

드래곤에게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순히 의지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마력이 반응한다. 복잡한 술식도, 마법진도 필요 없다.

─!

낙뢰가 내리친다.

─!

불꽃이 폭발을 일으킨다.

─!

대지가 갈라져 지진이 일어나고.

─!

해일이 일어나 율리아를 덮친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그저 검을 휘두르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드래곤의 마법은


한낱 마나의 흔적이 되어 소멸한다.

“어떻게요? 간단해요.”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뚫고 다가온다. 나직이 속삭인다.

“당신보다 강한 드래곤한테 배웠거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돼는···!”
“저라도 안 믿을 것 같은 말이긴 하네요.”

뭐, 그게 중요한가요.

“이제는 제가 당신을 이길 수 있다는 게 중요하죠. 당신은 모를 거예요.”


“오, 오지 마···!”

하이엘프가 한 걸음 전진할 때, 발바르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얼마나 간절히 이기고 싶었는지.”


“오지 마!”
“얼마나 이 순간을 바라왔는지.”

다시 마법 폭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애꿎은 대지만 손상될 뿐, 율리아는 그대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냥 순수하게 믿을 걸 그랬어요.”

드래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

“괜히 죄 없는 동료들을 고생시키고 말았어요. 제 불안 때문에.”


“오지 말라고!”

억지로 숨결을 토해내려던 발바르가 피를 토했다.

그리고 마침내 율리아가 발바르 앞에 섰다. 거대한 드래곤과 작은 하이엘프. 분명히 그 차이는 명확했음에도
크기가 반대로 역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발바르가 발악하듯 외쳤다.

“나는 위대한 드래곤이다! 고작 하이엘프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는 건가요? 반년 전의 저를 보는 것 같네요.”
“닥쳐라!”

파캉, 번개가 부서졌다.

“그때 당신이 제게 뭐라고 했죠? 하찮은 하이엘프 주제에 발악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하셨죠.”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소용없는데 더 발악해서 뭐해요.”

그냥 곱게 가시지.

율리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승에 가서는 당신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한테 사죄하세요.”


“나,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

서걱-

햇빛에 반사된 검이 반짝였다.

길게 뻗어나간 바람의 칼날이 그대로 용의 목을 베었다.

“아···.”

단발마의 비명.

용의 머리가 떨어졌다.

* * *
“···이겼어.”

율리아가 환희했다.

“정말로 제가 이겼···!”

그리고 곧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승리로 인한 고취, 환희가 아니었다. 뒤늦게 들이닥친 부하가 온 몸의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용사님!”
“용사님!”

동료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마법사가 치유 마법을 발현시키고, 성자가 신성력을 쏟아냈다.

“어디를 다친 거야!”
“그냥 조금 무리해서 그래요.”

알베니우스에게 배웠다고 한들, 상대는 광룡이었다. 그녀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 숨결과 마법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게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기껏 잡은 승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광룡이 희망을 가지고 반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김우진이란 분은 이것보다 더 대단한 용을 죽여버렸다는데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진짜 죽을 것 같이 아프···.”

그때, 광룡의 업이 그대로 율리아에게 흡수되었다. 업은 율리아의 격을 한층 상승시켰다.

“···지 않네요.”

그 여파로 육체가 최상의 상태를 찾아가 일부 상처가 회복된 건 덤이었다.

“광룡의 업을 흡수하셨군요. 그래도 아직 부족합니다.”

성자가 일어서려는 율리아를 다시 눕히고 상처를 치유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율리아는 완전히 정상적인 몸
상태를 되찾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진짜로 율리아가 광룡을 죽인 거지?”
“···그렇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쉽게.”
“쉽지는 않았어요. 무리했다니까요? 방금 피 토한 것 잊으셨어요?”
“모든 것은 신의 뜻입니다. 신께서 내리신 가호를 어찌 광룡 따위가 넘볼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졌는데요.”

신의 가호라기보다는 알베니우스와 세계수의 도움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굳이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신이 결코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했기에.

“이겼다···! 이겼어!”
“맞습니다. 종말이 끝났습니다!”
“내가 살았다! 살아남았어!”

그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거의 악다구니를 썼지만 주변에 마물은 없었다.

“넌 정말 최고야, 용사님!”
“감사해요.”
“그런데 이럴 거면 굳이 외곽을 돌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니야?”
“아하하···. 그건···.”

데이지의 물음에 율리아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광룡이 죽었습니다! 종말이 끝났습니다! 저희는 살았고 이 세상은 더 이상 멸망하지
않습니다! 제 삶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게 됐다고요!”

마법사가 폭죽처럼 불꽃 마법을 터트렸다.

“전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용사님!”


“아니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은총입니다. 용사님을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신께서 보우하시니 이 땅의
어둠이 물러갔고···.”

성자는 자신의 기쁨을 신에게 바쳤다.

그들이 진정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광룡의 머리를 챙겨 위풍당당 귀환했다.

* * *

“용사님이 광룡의 목을 베셨다!”


“종말이 끝났다!”
“단 네 명이서 광룡을 죽였다!”
“율리아 카르센 용사님 만세!”
“에드먼드 프로인 대마법사 만세!”
“데지어 호크네 경 만세!”
“성자 갈라스 콜먼 만세!”

광룡의 머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승전의 증거였다.

그들이 귀환하는 순간, 인류는 정말로 종말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일행은 연합이 모여 있는 제국의 황도로 돌아왔다.

“맙소사, 설마 그 인원으로 광룡의 목을 베다니···.”


“확인만 해본다고 하지 않았나?”
“엘프들의 자신감이 진짜였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어쨌든 그 지긋지긋한 광룡놈이 드디어 죽었군.”
“감사합니다, 용사님. 덕분에 세상이 구원받았습니다.”

연합의 일원들은 그들이 숟가락을 올릴 겨를도 없이 광룡을 처치한 율리아에게 미약한 불만을 가지면서도 종말을
막았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기뻐했다.

반 년 전, 율리아가 패배하고 마물 군단이 남하하면서 지하까지 기어들어가던 분위기가 단숨에 반전되었다.

“용사님께서 광룡을 처치하셨다!”


“종말이 끝났다!”

와아아아아아!

연합은 공식적으로 종말의 종식을 선언했고 승전기념일로 정하고 모든 도시에서 축제를 시작했다.

“용사님, 제 아들이···.”
“용사님! 종말을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용···!”

율리아는 황제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행들과 함께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을 독차지했고 몰려드는 인파에 기겁하며 용사의 힘을 사용해 테라스로 피신했다.

“하아, 역시 이런 건 성미에 맞지 않는데···.”

그리고.

“축하해. 마침내 종말을 막았군.”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제가 여기로 올 줄은 어떻게 아시고?”
“뻔하지.”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베니우스와 마주쳤다.

───────────────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7) >

알베니우스가 샴페인을 건넸다.

“수고 많았어. 이제 데이드람은 종말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감사해요. 알베니우스님 덕분이에요.”
“그런데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는데 무슨 일 있었나?”
“···아뇨. 아무것도요.”

율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알베니우스의 장담에도 불안이 도져 뻘 짓을 하고 다녔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다 이야기해주시는 거죠?”


“그러려고 온 거니까.”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무형의 기막이 주변을 감쌌다.

“힘을 막 써도 되요? 신들에게 쫓기고 계신 것 아니었어요?”


“내가 너한테 신들한테 쫓긴다고 말 했었나?”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반 년 동안 그걸 눈치 못 채면 멍청이에요.”
“하긴.”

알베니우스가 픽 웃었다.

“이 정도는 상관없어. 이 정도 수준으로 들킬 거였다면 진즉에 신들에게 잡혀가 죽었겠지.”


“신들도 전지전능하지는 않네요.”
“대충 짐작하고 있잖아?”

알베니우스가 얼마 남지 않은 술잔을 마저 비웠다. 테라스에 몸을 기대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가 가장 묻고 싶은 게 뭐지?”
“알베니우스님이 늘 말씀하시던 김우진이란 분이요. 그분 살아 있다고 하셨죠?”
“그래.”
“신을 죽였고요.”
“신‘들’을 죽였지.”
“···예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어요.”
“감옥.”
“네?”

알베니우스는 오래 전부터 신들이 만들고 운영해온 감옥, 연옥에 대해 이야기했다.

“···힘을 포기 하지 않으면 용사들을 감옥에 가둔다고요? 실컷 이용해 먹고 토사구팽한다는 건가요?”


“그래. 정확해.”
“어떻게 신이라는 자들이 그럴 수 있죠?”
“신이니까 그럴 수 있지. 놈들은 모든 게 자기들 마음대로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종족들을 사전에 쓸어버리기도 했다.

“그럼 그분을 만나지는 못하겠군요.”


“당분간은 그렇겠지.”
“당분간은 이라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신들과 같은 우주 아래 살 수 없는 몸이야. 놈들이 망하던, 내가 망하던 둘 중 하나가
끝장나야 하지.”

물론 알베니우스가 끝장날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당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백신전을 무너트리기로 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나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고.”


지난 40 년 동안 틈틈이 신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가진 자들을 모아왔다.

“김우진. 그분을 감옥에서 구출하시려는 거군요?”


“구···출···이라고 해야 할지···.”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적였다.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이거든.”


“···네?”

율리아가 정확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 *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신들과 거래를 하셨다는 거군요.”

자신이 구한 글라크라는 차원을 구하기 위해서.

“그래.”
“진짜 영웅이네요.”
“영웅이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짓을 했던, 김우진이 한 행동은 차원의 모두를 살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었다.

“신들도 악질이네요. 전직 용사에게 용사들의 관리를 맡기다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이기적인 놈들이지.”

이야기의 흐름은 알베니우스의 목표까지 이어졌다.

“해서 가장 중요한 건 김우진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연옥을 없애버리는 거다.”

김우진은 최초로 신을 죽인 신살자다. 그가 함께하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은 꽤 차이가 크다.

실질적인 무력으로던, 상징성으로던.

그리고 연옥은 신들의 오만과 욕심의 결정체. 그곳을 부수고 용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방법은 있나요?”
“신이 아닌 자가 연옥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야. 용사가 되어 차원을 구한 뒤, 힘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
“죄수로 들어가는 거군요.”
“그래. 이미 염두에 둔 자가 있다.”
“발라크님이군요?”

엘븐에서 만나본 엘프들 중 가장 강했던 자. 그건 다른 말로 용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맞아.”
“하지만 죄수로 들어가는데 연옥을 부술 수 있을까요? 아, 김우진이라는 분을 알베니우스님의 이름을 대고
설득하면 되겠군요.”
“그건 안 돼.”
“왜요?”
“김우진은 지난 20 년 동안 격리 차원에서 고문을 받았으니까.”

알베니우스는 김우진을 믿는다. 40 년 전의 김우진을. 신들의 고문을 받은 김우진까지 믿지는 못한다.

그가 강하다고 해도 정신력은 결국 인간이었다. 드래곤들도 견디기 힘든 고문을 그가 무난히 버텨냈을까?

물론 최초로 신을 죽인 특별한 인간인 만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신들을 상대하는 일인


만큼 사소한 변수도 조심하는 게 좋다.

“김우진을 설득해 아군으로 만드는 게 목표이긴 하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어. 김우진이 신들의 개가 되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런 대단한 분이 신들에게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놈은 애초에 의심이 많아. 설사 신에게 넘어가지 않았다고 해도 섣불리 내 이름을 대면 오히려
의심부터 할 거다.”
“그러면 그걸 해결할 방법은요?”
“세계수의 씨앗.”
“씨앗이요?”
“씨앗을 연옥에 심게 만들어서 데이드람의 세계수를 통해 연락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직접 설득하는 게 가장
베스트야.”
“그럴 듯 하네요.”
“아무렴, 누가 세운 계획인데.”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계수가 자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오래 걸리겠지만 애초에 신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아직 준비도 완벽하지 않아서 그것까지 시간과 함께 고려했다.

“근데 씨앗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공간에 관련해서는 신들보다 내가 우위야. 신들도 속일 수 있는 아공간을 만드는 게 가능해. 물론 하고 나면 몇
달은 앓아누워야겠지만 주신 급이 아니고서야 눈치 채지 못할 거야.”

음, 율리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그거 제가 가도 될까요?”
“뭐?”
“아니, 그게 훨씬 빠르잖아요. 굳이 발라크님이 용사가 되고 종말을 막는 걸기다리는 것보다. 언제 될지,
기약이 없는 일이잖아요? 그에 비해 저는 이미 차원을 구했고 곧 신들이 저를 만나러 오겠죠. 얼마나 걸릴까요?”
“···통상적으로 나흘 뒤에 오긴 한다만.”
“그럼 내일이네요.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심고 자라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위험한 일이야.”
“살면서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전 그분을 직접 만나서 묻고 싶어요. 세이드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그리고 세이드의 복수도 하고 싶고요.”
진짜 가족을 잃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세이드까지 신에게 잃었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했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신들의 개가 되었던, 그렇지 않던 영웅이었던 분이니 한 번은 봐주시지 않을까요?”
“그렇게 너그러운 놈은 아니야.”
“그럼 최선을 다해서 조심해봐야죠.”
“···이건 계획 밖인데. 괜히 세이드 때문에 너한테 사소한 것까지 주절거렸군.”
“물어본 것도, 자원하는 것도 전데요, 뭐.”

잠시 고민하던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 판단할 문제는 아니야. 세계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올 테니 연회를 즐기고 있어라.”


“얼마든지요.”
“금방 다시 오지.”

알베니우스가 사라졌다.

기막이 사라졌는지 음악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아름다운 밤이네요.”

율리아가 당분간 보지 못할 환할 보름달을 한참 동안 구경했다.

* * *

새하얀 공간.

율리아는 이곳이 어디인지 눈치 챘다. 이미 한 번 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을 뵈어요.”

고개를 숙였다. 오연하게 서 있던 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율리아를 선택하고 데이드람으로 보냈던 신이다.

“훌륭하군. 그대는 너무도 훌륭하게 종말을 막고 세상을 구했다. 그대는 영웅이다.”


“감사합니다.”
“해서 그대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신이 세 개의 손가락을 폈다.

“세 가지요?”
“하나는 힘을 포기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힘을 포기하라고요?”
“끝까지 들어라.”
“···네. 죄송해요.”
“두 번째는 힘을 포기하지 않고 대가 없이 그대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나를 섬겨볼 생각이 없느냐?”

율리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저게 그거구나.’

알베니우스는 신들이 능력이 뛰어난 용사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녀 수준이라면 능히 제안이 올 것이라고도.

하지만 율리아가 택할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요. 저는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너무 지쳤거든요.”


“그렇군. 네 의견을 존중하마.”

다행히 신은 담담히 수긍했다.

“허면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힘을 포기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힘을 포기하지 않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그래. 넌 세계를 구한 영웅이다. 그 정도의 선택지 정도는 얼마든지.”

율리아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는 척을 했다.

호의로 가득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알베니우스의 말대로라면 두 번째를 고르는 순간이 시작이라고 했다.

“···역시 힘을 포기하지는 못하겠어요. 제가 데이드람에 있었다는 증거고, 제 노력이자, 종말을 막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노력이에요.”
“이해한다. 아무리 우리가 힘을 내려준다고 한들, 그것을 성장시키고 종말을 막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지. 그
노력과 고난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시 한 번만 물으마. 정말로 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냐?”
“네.”
“좋아. 네 선택을 존중해주마.”

신의 손이 율리아의 머리를 짚었다.

“눈을 감아라.”
“네.”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본래 네가 있어야 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감사했어요.”
“나야 말로.”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쯧, 아깝군.”

신의 혀 차는 소리가 스치듯 들려왔다.


율리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것은 아르반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힘은 제약당해 아무런 마나나 용사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따라와라.”

온 몸이 구속된 채, 그녀는 끌려갔다.

그리고 모든 구속이 해제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율리아 카르센, 맞나?”

검은 머리의 남자가 짜증 가득 담긴 얼굴로 앞에 앉아 있었다.

‘이 자가···.’

김우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세이드의 동료.


연옥의 소장.

“네.”
“···대답이 빠르군. 종족은 엘프고.”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당장이라도 입술을 때면 알베니우스에 대해, 세이드에 대해 물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의 김우진이 알베니우스가 말해주었던 그 영웅,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욕구를 간신히 억제하고 혀가 가는 대로 말을 뱉어냈다.

“잘못 됐네요.”
“엘프가 아니라고?”

별 의미 없는 트집.

하지만 그 잠깐의 트집 덕분에 율리아는 간신히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정확히는 하이엘프에요.”

그녀가 담담히 대답했다.

“빌어먹을. 나이는?”
“237 살이요.”
“어리군.”
“하이엘프치고는 그렇죠.”
“아르반이라는 차원 출신이고.”
“네.”
“데이드람을 구했고.”
“광룡이 미쳐 날뛰던 차원이었어요. 꽤나 힘들었죠.”

당신은 사룡을 막았다면서요?

“여기가 어딘 줄 아나?”
“감옥이요.”

아무렴, 그녀만큼 연옥에 대해 상세히 아는 죄수는 드물 것이다.

“왜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고?”


“대충 짐작은 해요.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여기 오게 된 걸로 대답이 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출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시체가 되어 나가는 거군요.”
“그걸 알면서도 거절하겠다고?”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여기 처음 들어온 놈들은 모두 너와 같은 생각을 해. 그런데 몇 놈이나 탈옥했을 것 같아?”
“불가능하다는 거네요. 그래도 지금은 그렇네요. 아시잖아요? 하이엘프의 시간은 길어요.”
“···망할 엘프놈들.”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는다.

신경질적인 표정이 알베니우스의 상세한 설명 그대로라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알았다. 1178.”
“1178? 그게 뭐죠?”
“네 죄수번호.”
“아하, 3 이 하나도 없는 게 아쉽네요.”
“3?”
“다른 엘프들은 몰라도 저희 차원의 엘프들은 3 을 행운의 숫자로 여겼거든요.”
“그렇군.”

알베니우스가 그랬다. 김우진의 나라에서는 3 이 행운의 숫자라고. 슬쩍 던져봤는데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데리고 가.”

교도관들이 그녀를 데리고 독방으로 이끌었다.

“얌전히 있어라.”
“···여기가 독방.”

제법 넓었으나 이렇다 할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계획을 정리했다. 김우진이 신들의 개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그리고 세계수의 씨앗을 심게 만들기.

고민하고 있으니 저녁이 나왔다.

“와. 여기 밥이 엄청 맛있네.”

살면서 먹어본 그 무엇보다 맛있었다. 연옥에서의 삶이 마냥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곧 밤이 되었다.

“이봐. 1178 번 엘프.”

열린 배급구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말인가요? 옆방이신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탈옥하고 싶지 않아? 설마 이 개 같은 곳에서 계속 있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아니겠지?”
“아직까지 그런 곳인지는 모르겠네요. 시설 자체는 나쁘지 않아서.”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으음.”

탈옥이라. 딱히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죄수들과 친해지고 연옥의 사정을 파악하는 게 낫겠지.

“방법은 있고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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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지구의 종말(1) >

박상준은 용사다.

스포츠카에 치여 이세계로 전송되었고 신을 만나 용사로 발탁되었다.

“차원, 델라임이 너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델라임에는 자신의 백성들을 통째로 제물로 바쳐 악마의 힘을 손에 넣은 미친 왕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마왕이라 불렀고 마왕은 언데드와 마물 군단을 이용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

그 전장의 한복판에 용사 박상준이 떨어졌다.

“용사님! 부디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해주십시오!”

왕국들이 연합한 연합군은 박상준을 극진히 대접하며 기반을 다져주었다.


검술, 마법, 정령술 등 모든 것을 배웠고 그의 재능은 창술에서 빛을 발했다.

박상준은 번개 속성에 극한의 친화력이 있었다. 창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 두 가지를 조합하고 용사 버프까지
받아 몇 년 만에 대륙 최강의 반열에 올랐고 종말을 막기 위한 대서시시가 시작되었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죽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동료들과 함께였기에, 용사라는 자부심


덕분에 버텨냈다.

그리고 종말을 막아냈다.

“너에게는 네 가지 선택지가 있다.”


“힘을 포기하고 지구로 귀환하거나.”
“그냥 지구로 귀환하거나.”
“힘을 포기하고 델라임에 남거나.”
“그냥 남거나.”

신은 그에게 네 가지 제안을 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사실 상 두 가지였다.

“힘을 포기하지 않으면 제게 무슨 불이익이 있습니까?”


“없다. 네게 약속된 보상은 그대로 갈 것이니. 하지만 세계의 한계 이상으로 힘을 사용한다면 그에 따른
불이익이 갈 것이다. 용사의 힘은 일반적이지 않고, 남용할 경우 세상에 혼란을 야기하니까.”
“세계선의 한계라면?”
“델라임이라면 대륙 최고의 기사 수준까지. 지구라면 최고의 이종격투기 선수 수준까지.”
“아하, 이해했습니다. 근데 그러면 용사의 힘은 그냥 장식 아닙니까?”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하겠느냐.”
“힘을 포기하지 않고 지구로 귀환하겠습니다.”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용사의 힘은 그가 이곳에서 용사로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단순히 장식용 트로피로 전락한다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았다.

“네 선택을 존중한다. 지구로 돌아가면 곧장 로또를 사라. 번호는 1, 3, 11, 28, 39, 40 이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번호는 22, 36, 37, 41, 44, 45 다. 혹시 모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주에 하나씩 사도록. 그리고
그걸로 사야할 주식은 동화전자이며 3 만원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사고 11 만원 이상이 되면 다 팔아라. 그
다음에는 미국 주식 중에 리얼 망고라는 종목을 9$ 아래에 사서···.”

신이 알려주는 지식들을 모두 실행할 경우 박상준은 수천억 대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세상 하나를 구한 것치고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결코 작지 않은 대가다.

그리고 이것을 택한 것 또한 박상준이었다.

델라임에 남으면 왕이 될 수 있지만 지구의 문명이 그리워 귀환을 택했으니까.

“용사님,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세상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델라임 인류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렇게 그는 지구로 돌아와 수천억의 자산가가 되었다. 평생 병에 걸리지 않는,
이종격투기 챔피언이 될 만한 몸을 손에 넣었다.
“격투기 선수가 되도 재밌을 것 같은데.”

무언가를 가졌다면 써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박상준은 곧장 이종격투기 세계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한국을 재패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자리에서.

“어?”
“어?”

전직 용사들은 옥타곤 위에서 서로를 인지했다.

“당신···.”
“당신도···?”

Ready, Fight!

대화는 짧았다. 래프리가 경기 시작을 선언했고 서로의 주먹을 터치하는 즉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후욱-

가벼운 잽들이 서로를 교차하며 먼저 탐색한다.

하지만 곧 움직임이 빨라진다.

─!
─!

주먹이 서로의 피부를 스친다. 뒤이어 불어오는 풍압이 긴장감을 더한다.

박상준이 위빙으로 상대의 주먹을 피하며 카운터를 날린다. 챔피언의 목이 급격히 꺾이면서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곧 바로 이어지는 반격. 카운터의 카운터가 나왔지만 박상준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뒤로 재치며 피해낸다.

와아아아아아!
상준박! 상준박!
킬리언 패럴!
킬리언! 죽여 버려!

누구도 맞지 않았지만 눈으로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수준 높은 공방에 관객들의 환호성이 커진다.

잠깐의 여유. 박상준과 킬리언은 서로를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동질감일까, 아니면 호승심일까.

‘오랜만이야.’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싸워보는 건. 절로 피가 끓어올랐다.

다시금 주먹이 교차했다. 피하고 날리고, 피하고 날리고. 종이 한 장 차이로 서로에게 닿지 않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속도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빨라졌다.

‘어쩌면 조금 따분했을지도.’

용사가 되어 차원을 구하기 위해 지겹게 싸워왔다. 다치기도 많이 다쳤고 죽을 뻔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 평화로운 지구의 삶을 소망했다. 하지만 이미 용사로서의 경험은 그의 몸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수천억의 자산을 가지고 편히 쉴 수 있음에도 굳이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었다.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전장이 그리웠다는 반증.

어쩌면 그에게 평온한 일상은 너무 멀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애써 부정하던 진실을 깨달은 순간, 박상준을
제약하던 리미트가 조금씩 풀려갔다.

‘힘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같은 용사를 상대로라면 괜찮지 않을까?’

답답한 갈증이 일었다.

고작 이 정도 수준이 아니라 전력으로 날뛰고 싶었다.

왜 참아야 하지?
자신도, 상대도 이 정도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데.
주먹이 아니라 창을 들고, 공기가 아니라 오러를 가르며, 힘을 제약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폭발시켜야 한다.

우드득, 근육이 팽창하고 피가 빠르게 돈다. 간만에 만난 적수에 아드레날린이 폭주했다.

그 순간, 챔피언과 눈이 마주쳤다.

‘너도 마찬가지였구나.’
‘야, 너도?’
‘나도.’

평온한 삶을 바라면서도 이미 용사로서 살아온 삶이 길기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 그리고 힘을 드러내고
싶은 갈증.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래,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민간인이 아니라 같은 용사를 상대로 하는 거니까.

아마도.

파직-

미약한 번개가 박상준의 주먹에 맺혔다. 이에 호응하듯, 챔피언의 주먹에 오러가 뭉글거렸다.

지구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그 힘이 서로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

그들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 * *

와아아아아-

옥타곤 위에는 챔피언과 도전자가 피 튀기는 난타전을 벌인다. 서로의 주먹을 모두 피하던 이전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즐거웠다.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열기를 더해간다.

그리고 관객석에 앉아 한 명의 관중으로 있던 김우진은 이마를 짚었다.

“뭐야, 저 또라이 새끼들은.”


“호승심이 동한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용사가 용사랑 싸울 일은 거의 없잖아요?”
“그렇다고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고를 쳐?”

충돌하기 직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가 반응해 둘을 연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신의 더미들이 그들을
대신했다.

인간들은 결코 눈치 채지 못할 찰나, 덕분에 경기는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 새끼들, 이름이 뭐야?”


“챔피언쪽은 킬리언 패럴이에요. 구한 차원은 세트라. 용사로서 세트라에서 지낸 시간은 15 년이요. 본래 나이는
49 이지만 본인의 희망대로 모두가 지구를 떠나기 전의 34 살로 인식해요.”
“반대는?”
“도전자쪽은 박상준이에요. 구한 차원은 델라임. 용사로서 지낸 시간은 16 년이고요. 나이는 본인 희망대로
떠나기 전인 28 살.”
“신이랑 맺은 계약이 우스워 보였나?”
“그렇다기 보다는 서로 흥을 못 이긴 것 같던데요.”
“그럴 거면 그냥 따로 만나서 하라고. 왜 공개적인 자리에서 지랄인데.”
“어디서 하던 연옥으로 끌려가는 건 똑같지 않나요?”
“적어도 숨기려는 노력이라도 하잖아. 저건 그냥 대놓고 엿 먹으라는 거고.”

김우진이 팔걸이를 두들겼다.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구에 귀환한 용사가 몇이지?”


“방금 사라진 둘을 포함하면 다섯이죠.”
“용사로 활약하고 있는 놈들은?”
“21 명이죠.”
“빌어먹게도 많네.”
“신들이 지구를 선호하거든요. 용사가 되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게 빨라서요.”

멸망 직전의 차원에는 무리지만 조금 여유가 있는 차원에는 지구인을 용사로 삼는 것을 선호하는 신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소장님이나 저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지구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레 재능이 많은 자들이 늘어났어요.”

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럼 앞으로 지구에 귀환한 용사들이 훨씬 많아진다는 건데.”


그놈들이 힘을 포기할 리가 없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 확실한 일벌백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옥으로 가자.”

그 개새끼들은 내가 직접 관리한다.

“아직 경기 안 끝났는데요?”
“어차피 더미 싸움이잖아. 누가 이기게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 한국인이 더 친숙해요.”

퍽-

그 순간, 도전자의 더미가 챔피언 더미의 턱을 갈겼다. 극적인 카운터였고 챔피언이 쓰러졌다.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했다.

“이제 가자.”
“네.”

* * *

“절대신님을 뵙습니다!”

연옥이 새롭게 지어진 이후, 직접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현 연옥의 소장, 백신전 소속의 신, 카르딘이 급하게 나왔다.

“미, 미리 말씀하셨으면 준비를 했을 텐데···.”


“신경 쓰지 마. 갑자기 온 건 나니까. 그리고 절대신이라고 부르지 마.”
“그러면 뭐라고···?”
“소장님이라고 불러.”
“하지만 소장은 저입니다만?”
“······.”
“···소장님!”

잠시 눈치를 보던 카르딘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이 본론을 꺼냈다.

“방금 전에 죄수 둘 새로 들어왔지?”
“예. 지구 출신의 전직 용사 둘이 왔습니다.”
“그 새끼들 전부 상담실에 집어넣어.”
“예?”
“내가 직접 상담을 좀 해보려고 해.”
“예? 직접 말···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김우진은 상담실에 들어갔다. 이전의 연옥의 상담실보다 배 이상 컸다. 마음 놓고 싸우기에는 적절한


무대.
내부에는 눈과 귀, 입, 손과 발, 그리고 마나까지 완전히 구속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명의 죄수들이 있었다.

시합을 뛰다가 흥과 호승심을 못 이겨 인생 망친 멍청이들.

김우진의 눈짓에 교도관들이 모든 구속 장치를 풀었다. 죄수들이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

그리고 김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니들이 그렇게 싸움을 잘해?”

김우진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들어와, 이 씨발놈들아.”

*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박상준이 팅팅 부은 머리를 깊게 숙였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발악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의, 아니 총 든 어른과


아기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호승심이고 나발이고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희들은 신이 우습냐?”

탁탁,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힘을 안 뺏고, 최대한 편의 봐주면 그냥 넙죽 받아 가면 그만이지, 왜 씨발 정도를 모르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약서 썼어, 안 썼어?”
“썼습니다.”
“저도 썼습니다.”
“그럼 이런 상황이 될 거라는 걸 예상 못했어?”
“······.”
“흥이···.”
“박상준? 말을 하기 전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생각하고 이야기 해.”
“···죄송합니다.”

김우진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이제 너희한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이대로 연옥에서 평생 썩거나.”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힘은 물론이고 용사행의 대가로 받았던 모든 보상들까지 반납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이라면···?”
“돈, 육체, 그 밖에 용사가 된 후 얻었떤 모든 것. 너희들은 용사로서 소환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거야.”
“그, 그건 너무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잘못을 했다지만 모든 걸 다 앗아가는 건···!”
“그럼 계약을 준수 했어야지.”

김우진이 살기를 뿜어냈다. 두 죄수가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 신들과 맺은 계약이 우스워?”


“하, 하지만···.”
“선택 해.”

두 죄수는 섣불리 선택하지 못했다. 감옥에서 평생 썩는 것도, 단순히 힘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다 못 해 돈이라도 조금만 남겨준다면···

“소장님!”

그때,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연옥의 진짜 소장, 카이딘이었다.

“무슨 일이야.”

좋지 않은 직감에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도관들을 시켜도 될 일에 소장인 그가 직접 나섰다? 물론 그에게


잘보이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표정이 그것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종말, 종말이 시작됐습니다.”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지구! 지구입니다!”
“뭐라고?”
“방금 지구에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
# < 외전. 지구의 종말(2) >

“···저게 뭐야?”
“숫자?”

어느 날, 지구의 하늘에는 숫자가 떠올랐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속보입니다! 전 세계의 하늘에 갑자기 기이한 숫자가 떠올라···!】


【정부, 전투기를 통해 숫자 확인···. 그대로 숫자를 통과하는 전투기들. 무슨 원리?】
【전문가들은 이 숫자가 무언가의 끝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이 카운트다운이 무엇을 위한 카운트다운일지···.】
【성천교의 교주, 카운트다운은 종말의 카운트다운, 신께서 내리신 종말의 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신을 믿어야
천국을 가···.】
【“신께서 무지한 인간에게 천벌을 내린다!” 종말론자들의 대두.】
【의외로 조용한 절대신교. “그저 절대신님을 믿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갑자기 얌전해진 절대신교의 교주.】
【“완전 만화 같지 않아요? 카운트가 끝나면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쏟아지고, 각성자들이 각성하는 거죠.
아, 내가 각성자가 됐으면 좋겠다.” 종말을 반기는 사람들?】
【“검술. 검술을 배워야 해요. 몬스터 잡으려면.” 갑작스러운 검도 열풍. 종말에 반기는 사람들?】
【“뭐든 간에 북한이 핵 쏘는 것보다는 나을 것 아니에요.” 난리 난 세계, 유독 시큰둥한 한국.】
【남은 시간은 엿새. 각 국 정부, 숫자에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뉴욕에서 UN 정상회담 개최, 가장 첫 번째 문제는 하늘 위의 숫자.】

카운트다운의 시작은 열흘이었다. 고작 나흘이 지났지만 인류가 패닉에 빠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김우진은 신들을 소집했다.

* * *

“종말은 각 차원의 주 인류의 익숙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지구의 인류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만화와 게임,
그리고 영화입니다. 그 방식 그대로 전개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럼 카운트가 끝나면 진짜로 게이트가 열리고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거군.”
“예, 그렇습니다.”

하하,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구에 종말이 일어난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건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데.”

종말이란 수명을 다한 차원을, 어둠이 수거하는 것과 같은 일. 종말은 어느 차원에서 찾아올 수 있다.

당연히 지구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오게 되어 있고,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타이밍이 이상했다.

“한 몇 만 년 뒤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지.”

종말이란 차원이 가진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면서 폐기처리 되는 거다.

종말을 통해 완전히 폐기 되던, 재활용을 잘해서 조금 더 수명을 연장하던 하나다.

하지만 그게 피조물과 마물들의 생명력과 피가 차원의 수명을 늘리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건 아니다.

생명력과 피는 결국 기운이다. 이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인 기운 중 하나.

우주의 힘, 신의 힘, 용사의 힘, 차원의 힘. 모두 같은 힘이다.


그리고 신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주의 힘을 은은하게 흘린다.

그 양은 무척 적어 차원 자체에 영향력을 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신이 아닌 김우진이, 그리고 다른


일곱 신들이 자주 지구에 들락날락하며 살다시피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젠가는 종말이 찾아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실제로 신들이 권역으로 삼은 차원은 종말이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하니까.

“저희도 그게 이상합니다. 아무리 권역이 아니더라도 절대신님이···아니, 소장님이 다른 주신들과 함께 머무르고


계신데 종말이 나타난다는 게···.”
“원인은 아예 모르겠고?”
“죄송합니다. 백신전이 생긴 이래로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신들의 보고에 김우진이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종말이 일어난다는 건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종말은 반드시 평화를 해친다. 문명을 파괴한다.
평화롭게, 문명을 즐기고 싶어 차원 연옥이 아닌 지구에서 생활하는 김우진이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한 번 시작한 종말을 중단시키는 법 같은 건 없겠지?”


“예. 종말은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합니다.”
“아예 종말을 시작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구 전체를 차단해서 마물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가능은 합니다만, 그리 추천해드리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차원의 수명이 끝에 다다랐다는 겁니다. 지구를
유지하고 싶으시다면 마물을 유입해서 그 기운을 차원이 흡수하게끔 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들이 있음에도 종말이 일어났지만 그렇기에 마물의 기운이라도 더 부어보는 게 나았다.

납득이 가는 이유였기에 김우진이 수긍했다.

“지구의 용사들을 이용하는 건?”


“용사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제약이 따릅니다.”

신들이 굳이 다른 차원에서 용사들을 소환하는 것은 그들이 해당 차원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원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기에 한계까지 용사의 힘을 남발할 수 있었다.

“지구의 전직 용사들 담당했던 신들 손들어.”

일곱 명의 신들이 손을 들었다.

“너희들이 용사들의 업을 감당한다.”


“그건···!”
“대신, 그에 합당한 보상을 약속하지. 마침 너희들 전부 교세가 미약하군.”

일부는 김우진에게 죽은 신들을 대신해 새롭게 신이 된 자들, 또 일부는 기존부터 신이었지만 최하위에 가까운
신이었다. 상위권의 신들은 굳이 김우진의 차원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 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딱히 신경 안 쓰는데 말이지.’

하지만 이 상황은 기꺼웠다.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교세 확장에 도움을 주겠다. 어떻게 하겠나?”


“···하겠습니다!”
“저도!”

이미 기존 신들이 자리 잡은 곳에서 새롭게 종교를 퍼트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절대신 김우진이 도와준다는 것은 아주 큰 기회였다.

“각자 용사들을 찾아가서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구해라.”


“예!”
“저기 제 용사는 연옥에 있습니다만.”
“제 용사도···.”

두 명의 신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 * *

“···지구에 종말이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구에···.”
“물론입니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종말을 막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고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멸망을 막아본 저희가 훨씬 잘 막지 않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종말을 막는 건 자신 있습니다!”

박상준과 킬리언 패럴이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어필했다. 지구의 종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데리고 가라.”
“예!”
“···내 죄수들.”

두 죄수가 집행자들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카르딘이 울상을 지었으나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어떤 심정인지는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피해 없이 지구의 종말을 막는 게, 그래서 일상을 최대한 빠르게
되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율리아가 물었다.

“직접 나서실 생각은 역시 없으신 거죠?”


“못 나서.”

아카식 레코드는 균형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이 선택한 신들이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받게 만들었다.


때문에 신들은 용사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아카식 레코드의 입장이고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 받은 게 아닌 김우진에게는 굳이 그럴 의무가


없었다.

그래,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와 이런저런 타협을 하면서 아카식 레코드는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제는
김우진 또한 균형을 위해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받기로 했다.

신들을 평정한 시점에서 딱히 하위 차원에서 난장을 필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수긍한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안락하고 편안한 지구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종말이 있다면 종말의 사도 또한 존재할 테지. 사도를 찾아. 찾아서 용사들한테 알려줘.”
“네. 최선을 다할게요. 저도 지구의 평온한 삶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망하면 게임을 못하니까?”
“그것도 물론 있죠.”
“아. 사도 찾는 건 강민식한테 맡겨.”
“확실히 적임자긴 하겠네요.”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무슨 일인지 가장 확실하게 알 만한 거인한테 물어보러.”

오랜만에 두리쉬마를 볼 시간이다.

* * *

“저 카운트가 끝나면 게이트가 열리면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거다. 절대신께서는 지구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라신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최고의 성과를 내라. 절대신께서 베푸신 자비와 은총을 매 시간마다 곱씹으며.
명심해라. 너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집행자는 그들을 한국의 한 야산에 떨어트리고 사라졌다.

죽다 살아난 박상준과 킬리언 패럴이 멍하니 집행자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용사 처지가 어쩌다가···.”


“무릎을 꿇고 빌다니···.”
“······.”
“······.”
“···갈까요?”
“···가지.”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날이 어두웠지만 어둠은 그들에게 별 다른 제약이 되지 못했다.


“저거군.”
“진짜로 숫자가 떠 있네.”

지구 어디에서나 보이는 하늘 위의 숫자. 두 전직 용사는 지구의 종말이 시작되기 직전임을 실감했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고국으로 돌아가야지. 여기가 어딘 줄 아나?”
“한국입니다. 다행히 제 집에서 멀지 않네요.”
“···불법 채류자가 되어버렸군.”
“······.”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일단 저희 집에서 머무실래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보겠습니다.”


“···고맙군. 그럼 염치 불구하고···.”

두 남자가 초호화 펜트하우스로 들어갔다.

* * *

“···이 양반, 대체 어디 간 거야?”

반쯤 헤진 차원의 장벽을 찢고 종말 차원에 진입했다. 항상 두리쉬마가 있던 차원 중 하나였으나 보이지 않았다.

여기뿐 만이 아니었다. 두리쉬마의 흔적이 가장 진한 12 개의 종말 차원에 방문했음에도 정작 두리쉬마는 없었다.

“이것도 먹통이고···.”

매개체가 있으면 네비처럼 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두리쉬마의 물건을 가지고도 쉽게 찾기가
힘들었다.

“음.”

묘한 불길함이 뒷목을 콕콕 찌른다.

그가 아는 두리쉬마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질 위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구의 종말 또한 이렇게 갑자기 열릴


타이밍이 아니었다.

이 두 개가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 걸까.

“설마 배신?”

가장 유력한 건 두리쉬마가 김우진을 배신하고 어떤 수를 써서 지구의 종말을 가속화시켰다는 것.

하지만 그래봐야 두리쉬마가 얻는 게 없다. 특히나 김우진과 현 백신전의 힘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지 의문이었다.

“그럼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수십 개의 차원을 더 뒤졌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모든 차원들을 확인해볼 수는 없으니 김우진은
결국 차원, 연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 친구!- 친구!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하느냐! 난 너희들의 친구가 아니라고!”


“···뭐야, 왜 여깄어.”

20cm. 그토록 오매불망 찾고 있던 거인이 인형에 가까운 자그마한 소인이 되어 두 정령들과 투닥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소장! 친구 왔어! 더 작아져서!


- 소장! 작은 친구!

“작지 않아!”

두리쉬마가 버럭 소리쳤다. 김우진이 성큼 성큼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여기 있습니까? 왜 또 난쟁이가 되어 있고?”


“···이런 저런 사정이 있었다.”
“종말 차원을 아무리 찾아도 없던데요.”
“···서로 엇갈렸군.”
“지구에 종말이 일어나기 직전인 건 아십니까?”
“······.”

눈치를 보아하니 모르는 것 같진 않았다. 김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뒷목을 콕콕 찌르던 불길함은 점차 현실이 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새로운 어둠의 사도가 탄생했다.”
“어둠의 사도야 널리고 널리지 않았습니까.”
“틀리다. 그들은 종말의 사도지.”

종말의 사도는 말 그대로 한 차원에 종말을 일으키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어둠의 사도는 어둠의 직속 부하 같은 느낌이다.

아카식 레코드로 따지자면 용사와 신의 차이다.

“그놈이 두리쉬마님의 말을 안 듣는 겁니까?”


“말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다. 나는 모든 힘을 빼앗겼다.”
“···예?”
“이 모습을 보면 모르겠느냐?”
“아니, 힘이 쭉 빠진 모습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로 새로운 사도한테 다 뜯겼다고요? 두리쉬마님이 훨씬
전부터 사도이지 않았습니까?”

- 한심해.
- 한심.

세계수들이 김우진의 황당함에 동조했다.

“···그냥 붙었으면 당연히 이겼을 거다.”


“그런데요?”
“어둠이 내게 뜻을 거두었다.”
“그 말은 사도직을 박탈 당했다는 겁니까?”
“그래.”
“왜요?”
“내게 분노했으니까.”

두리쉬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와 합을 맞춰가는 그런 행위를 못마땅해 했다. 가짜 종말을 바라지 않는 거지.”


“어둠이라고 해봐야 관념적인 존재잖아요? 릴리나 나르처럼 의지를 가진 정령체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어둠과 빛은 이 세상의 근원이자 뿌리다. 적어도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는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런
어둠의 뜻을 이어 받은 새로운 사도는 가짜 종말을 행하는 모든 이들을 증오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숙청
당했다.”

김우진이 톡톡 허벅지를 두들겼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놈이 널 노리고 있다, 김우진.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해. 지구의 종말은 너에게 날리는 경고장이다.”

···씨발, 진짜.

───────────────
# < 외전. 지구의 종말(3) >

어둠이 짜고 치는 듯 한 연극에 분노했다니.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결코 좋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연극 좀 했다고 선전포고를 날렸다는 겁니까?”

두리쉬마는 경고장이라고 했지만 김우진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이건 선전포고다. 김우진이 만들어놓은 같잖은
판을 뒤집어버리겠다는 광기.

“새로운 어둠의 사도라는 놈, 정체가 뭡니까?”


“고대 종족이다. 나와 비슷한.”
“두리쉬마님과 알베니우스님 빼고 고대종들은 다 멸종한 거 아니었습니까?”

구 백신전에 의해.

“생존자가 있었다.”
“뭡니까?”
“차원룡.”
“···그 말은.”
“그래.”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룡의 생존자는 알베니우스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둠의 사도가 되어 백신전을 무너트리기 위해 돌아왔다.
짐작이 가나?”

신들에게 종족이 말살당한 생존자의 분노를.

“저는 모릅니다만, 두리쉬마님은 알고 계시겠죠.”


“알다마다. 놈은 마치 처음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 훨씬 이전이다.”

타이탄들은 차원룡보다 훨씬 먼저 신들의 공격을 받았다. 두리쉬마가 인내하며 분노를 곱씹은 시간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그때의 내 심정을 표현하자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두리쉬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신전은 물론 세상 전체를 몰살시키고 싶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잖습니까.”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지금의 우주 자체가 백신전이 의도하고, 백신전이 만들어 놓은 질서 아래 있으니까.
백신전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었다. 아카식 레코드까지도.”

그야 말로 분노의 화신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잖습니까?”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해주지. 망각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다.”

신도, 드래곤도 모두 기억을 망각하고 무뎌진다. 단지, 인간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두리쉬마는 그 긴 시간을 지내왔다.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몇 살이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놈도 분명히 단순히 너와 백신전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백신전의 신들.
신들의 개, 집행자.
그들의 선택을 받은 용사.
백신전이 짜 놓은 판 아래서 삶을 영위하는 피조물들.
그리고 백신전을 백신전으로 만든 아카식 레코드까지.
“···완전 미친 새끼군요?”
“종족이 몰살당했는데 뒤를 생각할 만한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두리쉬마처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두리쉬마와 놈이 다른 점이라면 생각보다 빨리 놈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아, 빌어먹을.”

김우진이 이마를 짚었다.

* * *

청명한 하늘.

바람도 구름도 없다.

─!

거대한 백룡의 날개짓에 폭풍이 일어난다.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에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고 부러진
나무들이 휘날렸다.

────!

백룡이 포효했다. 드래곤 피어에 몬스터들이 기절했다.

날개가 더욱 힘차게 펄럭였고 거체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 인간의 도시가 개미보다 작게 보일 때 쯤, 속도가 더


올라갔다.

그렇게 차원 전체를 한 바퀴 돌고난 뒤, 인적이 드문 산속에 지어진 거대한 저택 안에 안착했다.

번쩍, 새하얀 빛이 감싸고 남자, 알베니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드래곤 레어를 수호하는 가디언 집사가 수건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즐거우셨습니까?”
“그래. 매일 매일 해도 질리지가 않네. 그 동안 어떻게 참았지, 나?”

차원룡이 백신전에 의해 박멸당하고 난 뒤, 알베니우스의 삶은 도주와 은신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본체는 꿈도


꾸지 못했고 억압 속에서 불만이 쌓여갔다.

그래서일까. 제약이 풀리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본체로 차원을 누볐다.

인간들이 존재하는 차원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즐거웠다. 그가 본래 살아가던 곳에도 인간들은 있었으니까.

“별일 없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김우진?”
“아닙니다. 항상 찾아오시던 분들이 아니라 처음 보는 분입니다만, 알베니우스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처음 보는데 나를 알고 있다고?”

누구지?

알베니우스의 인간관계는 좁았다. 쫓기는 기간만 만 년이 넘었으니 당연했다.

백신전이나 거기에 연관된 이들이 아니면 굳이 알베니우스를 찾을 자들은 없다. 애초에 알베니우스가 어느 차원에
머물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알베니우스님이 외출중이라고 해도 기다리겠다고 해서 일단은 접객실로 안내해드렸습니다.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름은?”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안 밝히는 놈을 그냥 들여보내줬다고?”
“죄송합니다. 제 수준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가디언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차원의 존재인가?’

가디언은 용사나 집행자가 아닌 일개 피조물이지만 적어도 이 차원의 최강자 수준이었다. 가디언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면 신이나 집행자다.

하지만 김우진 휘하의 신과 집행자들이 굳이 알베니우스를 찾아올 이유가 있을까?

묘한 불길함이 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가보지.”
“예.”

집무실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알베니우스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기척이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기척을 낸다. 그런데 집무실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 중 하나다. 사람이 없거나, 있음에도 알베니우스가 알아 채지 못했거나.

전자는 말이 되지 않는다. 권속 계약이 되어 있는 가디언이 그를 속일 리가 없으니까.

‘내가 파악하지 못해?’

등골이 서늘해졌다.

‘적인가?’

아군이라면 굳이 힘을 숨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알베니우스보다 강한 아군 중에 가디언이 모르는 이는 없다.

‘도망쳐?’

하지만 늦었다. 그의 기감을 완벽하게 속이는 자를 상대로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차라리 정원에서 방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로 튀어야 했다.

‘제기랄, 누구지? 나한테 악감정을 가진 놈이 있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하지만 결국 돌리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내 뒤에는 김우진이 있어. 어떤 놈이든 김우진을 상대로 간 큰 행동을 할 놈은 없겠지.’

든든한 뒷배를 상기하며.

“왔구나, 알베니우스.”
“······?”

그의 예상대로 집무실에는 사람이 있었다.

가디언이 내준 다과와 차를 음미하고 있는 남자. 그와 같은 새하얀 머리에 황금의 눈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군. 이 만 년, 아니, 삼 만 년 만인가?”

모르겠군. 너무 오래 돼서.

“하긴, 우리에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
“못 본 사이에 벙어리가 되었나?”
“···프로니우스?”
“그래, 나다.”
“···어떻게?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나도 내가 죽을 줄 알았다.”

운이 좋았지.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간신히 신들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정말로 프로니우스라고?”
“그 누구도 나를 흉내 내지는 못 해.”

광오했으나 차원룡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살아 있었다면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숨어 있었다. 너처럼. 처음에는 모두 죽어버린 줄 알았어. 내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차원룡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종말 차원에 숨었고 벌레처럼 숨죽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견디다 못해 하위 차원에 들어갔을 때, 네
소문을 들었다.”

신에게 반역을 한 차원룡이 있다!

“알베니우스라는 차원룡이 말이지.”


“어느 차원?”
“부르데이크.”

한때 알베니우스의 은신처였던 곳이었다. 제법 오랜 시간 숨으며 도망칠 때 입었던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끈질긴 신들의 추적자들에게 걸려 결국 격전을 벌이고 다시 도망쳤던 곳이다.

“나는 너를 찾고 싶었다. 너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내 처지가 그럴 수가 없더군.”

신들에게 쫓기는 건 알베니우스만이 아니었다. 알베니우스와는 다르게 그는 완벽하게 은폐했지만 다시 나타나는


순간, 신들의 추적이 시작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힘을 기르기로 했다. 복수를 위해서.”

비루하게 도망치다 언젠가 잡혀서 죽는 것과 종족을 말살한 신들에게 복수하는 것.

선택지는 애초부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마침내 신들을 말살할 힘을 손에 넣었다.”


“뭐라고?”

프로니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알베니우스. 같이 우리 동족들을 찢어죽이고 평화에 찌든 벌레들을 쓸어버리는 거다.”


“······.”
“어서 잡아라.”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학살을 주도하던 주신들은 모두 죽었다. 세상은 바뀌었어.”
“알고 있다. 확신을 가진 뒤에 가장 먼저 한 것은 돌아가는 판도를 알아보는 것이었으니까.”
“그걸 알면서 복수를 하겠다고?”
“오히려 묻고 싶군.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학살을 주신들만 행했나? 신들만 행했나? 아니.”

프로니우스가 으르렁거렸다.

“주신과 신, 그리고 집행자까지! 백신전의 모든 일원들이 하나가 되어 우리를 죽였다. 울부짖는 내 어머니를,
저항하는 내 아버지를! 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놈들도 반드시 똑같은 고통을 맛보아야만 한다.”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알베니우스가 숨을 삼켰다.

“···그때의 백신전과 지금의 백신전은 다르다.”


“상관없다. 백신전이라는 이름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내게 같으니.”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했잖느냐. 종말 차원에 있었다고.”

감춰져 있던 기운이 일거에 방출되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지독한 마기였다.

“···너 설마!”
“그래. 난 어둠의 사도가 되었다. 어둠의 뜻을 받아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다.”

신들이 우리의 종족을 멸망시켰으니 저들의 세상이 멸망해야 공평하지 않느냐.

“그건 미친 짓이다···!”
“내 손을 잡지 않겠다는 거군.”

프로니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어째서지?”
“어째서라니, 그야 당연한 것 아니야!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미친 소리를 누가 받아들인다는 거지?”
“신들에게 동족들이 멸망했다. 동족들이 없는 세상에 미련이라도 있다는 건가?”
“···너 완전히 미쳤구나?”
“내가 널 잘못 봤군.”

콰득, 의자 팔걸이가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났다.

“신들에게 쫓기다가 정이라도 든 거냐?”


“그때의 주도자들은 다 죽었다. 더 이상의 복수는 무의미해.”
“내 실수군. 신들에게 물들어 종족을 잊어버린 멍청한 두리쉬마와 똑같은 놈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다니.”
“···뭐?”
“왜, 내 입에서 두리쉬마의 이름이 나온 게 의외인가?”

콱-

거친 손아귀가 알베니우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큭,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거대한 힘 앞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어둠께서 정녕 모르셨을 것이라고 보는 거냐? 스스로를 절대신이라 치켜세우는 버러지 김우진과 두리쉬마의
연극은 이미 모두 들통 났다.”
“네가 김우진과 작당 모의하며 백신전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해서 널 찾아왔다.

“동족이라서, 동족이기에, 동족이니까!”


“그 긴 시간 동안 신들에게 억압받고 핍박받은 너라면 나와 같은 감정일 거라고 믿었다!”
“유일하게 이 우주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복수의 때를 노리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진심이라고? 어떻게 고작 몇 년 만에 신들을 용서할 수 있는 거지? 동족이 너에게는 고작 그런
의미였나!”

억겁의 시간 동안 신들에게 핍박 받아온 차원룡이 차곡 차곡 쌓아온 울분과 증오가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미친 새끼. 그렇다고 세상을 전부 멸망시키자고?”


“말했을 텐데 동족이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베니우스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던 프로니우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작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는 것 정도로는 약하지.”


“뭐···?”

그가 알베니우스를 바닥에 내던졌다.

“신들은 오만해서 고작 경고장 정도로 여기겠지. 하지만 네가 직접 내 말을 전한다면 확실히 알아들을 거다.”
가라.

“가서 김우진에게 전해라.”

내가.

“차원룡의 진정한 마지막 생존자, 이 프로니우스가.”

백신전을.

“무너트리겠다고.”

프로니우스가 몸을 돌렸다.

“같은 동족이기에 주는 자비는 오늘 널 살려서 보내는 것으로 끝이다. 다음에 만나면 가장 먼저 네 목부터
뜯어주마.”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쿨럭, 쿨럭···!”

알베니우스가 연신 기침을 하며 목을 매만졌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우진, 김우진한테 가야 해.”

이건 절대 알베니우스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와.”
“와.”

박상준과 킬리언이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았다.

이종격투기 채널이 틀어진 티비에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때죠?”
“저 때다.”
“그런데 도저히 모르겠네요. 기가 막히네.”
“괜히 신이 아닌 거지.”

옥타곤 위에는 챔피언 킬리언과 박상준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서로에게 한 대도 맞추지 못하는
스피드 전이었다면 한 순간을 기점으로 어마어마한 난타전이 되었다.

그 잠깐의 타이밍. 진짜와 더미가 교체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교체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서로가 당사자라 그 타이밍을 알지 못했다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정말 죽다 살아났네요. 돈도 돈이지만 이 몸이랑 이것저것 다 빼앗기며 진짜 꽝이잖아요.”
“그렇지. 그렇다고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썩는 것도 말도 안 되니 한시름 놨다.”

지구의 종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두 용사는 종말이 일어나서 정말 감사했다.

덕분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것을 막았으니.

“그런데 말이죠.”
“······?”
“종말을 막으면 또 다른 보상을 줄까요?”

킬리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일그러진 눈빛은 ‘이 새끼, 미친 새낀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차원의 종말을 구한 용사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는 것. 그게 상식이잖아요?”


“신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해보시지.”
“···크흠. 그건 좀.”
“괜히 나한테 불똥 튀게 하지 말고 명심해라. 우리는 평범한 용사가 아니다.”
“그러면요?”
“형벌부대다.”
“······.”
“······.”
“저 근데···.”
“또 뭐지?”
“어차피 이제 다시 용사가 되었으니 마음 놓고 싸워 봐도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
“······.”
“종말이 며칠 남았지?”
“사흘이죠.”
“사흘 뒤에.”
“훌륭한 판단이네요. 커피 드실래요?”
“에스프레소로 부탁하지.”

한참 후, 둘은 티비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4) >

카운트가 모두 끝났다.

지구의 인간들이 결코 바라지 않는 미래, 지구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실시간 잠실에 게이트 열림]

시작은 서울이었다.

[술 마시고 있는데 L 타워 위에 게이트 열림. 시커먼 덩어리들이 우수수 쏟아지더니 이상한 촉수 같은 게 L 타워


먹어버림.]
↳와 ㅁㅊ 정상에 저거 뭐냐 ㄷㄷ
↳ㄹㅇ 사우론의 눈이 되버렸네
↳일단 L 타워 근처 5km 까지 퍼졌고 그 이후에는 잠잠함.
↳사람들은?
↳모름
↳왜 모름?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볼 수는 없잖아...
↳왜 없음?
↳사탄 : 절레절레
↳상태창!
↳상태창!

[약혐) 이거 뭐냐]
[농사짓는 농붕이 실시간 좆됐다.
내 쌀 밭에 게이트 열려서 몬스터 쏟아졌다. ㅅㅂ 수확이 코앞인데 벼가 다 검은 색으로 변함.]
↳벼가 문제임? 니 목숨이 검게 될 것 같은데.
↳몬스터들이 쫓아와서 차타고 도망치는 중.
↳ㅅㅂ도망치는데 커뮤를 하고 있네.
↳상남자
↳상ㅂㅅ이 아니고?
↳ㄹㅇ미친새끼네ㅋㅋㅋ
↳살았다. 다행히 5km 정도 멀어지니까 안 옴
↳어디임?
↳김해. 다행히 근처 다 내 논밭이라 사람은 안 다쳤을 듯.
↳다행인거지?
↳다행(눈물)
↳상태창!

[크아아아아]
[jpg]
[겁나 센 오크가 울부지졌따! 이상하다 내가 아는 오크는 이러지 않았는데.]
↳저딴 게 오크?
↳존나 무섭게 생겼네 ㄷㄷ
↳3 대 5000 은 칠 듯
↳언더아머 10 장 쌉가능
↳어디임?
↳설악산 중턱에 게이트 열림
↳전국 곳곳에 다 열리는구나. 어디로 튀어야 되냐
↳왜 cg 아님? 왜 cg 아님? 왜 cg 아님? 왜 cg 아님?
↳이게 영화가 아니라고? ㅅㅂ
↳상태창!
↳ㅅㅂ상태창 빌런 모든 글에 다 있네

[실시간 재평가]
[jpg]
[카운트 끝나는 순간, 게이트 열리고 몬스터 튀어나올 거라고 예언한 현자.
씹덕 망상이라고 지랄하던 댓글들 다 삭제 중.]
↳ㄷㄷ종말 진행 중인데 커뮤에서 댓삭을 하고 있네
↳커뮤에서 댓글 달고 있는 너는?
↳아앗
↳아앗, ㅇㅈㄹㅋㅋㅋㅋ

게이트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시아, 유럽, 북미,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지구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고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게이트가 열린 지역을 장악하고 던전을 형성했다.

그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졌고 각국의 군대가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나타났다.

* * *

[실시간 L 타워]
[동영상]
[번개 쓰는 각성자 나타남. 가면 쓰고 나타나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몬스터들 전부 튀겨버림.]
↳??
↳뭐임?
↳진짜 각성자라고?
↳와, 몬스터들 다 터져나가네
↳상태창! 상태창!
↳나는 왜 각성 안 해? 나는 왜 각성 안 해? 나는 왜 각성 안 해? 나는 왜 각성 안 해?
↳하회탈 ㅎㄷㄷ
↳이걸 하회탈을 쓰네 ㅋㅋ
↳ㄹㅇ각시탈이 근본인데
↳정보)각시탈도 하회탈이다. 저건 하회탈 중 하나인 양반탈이다.

[각시탈 떴다!]
[동영상]
[김해에 각시탈 떴다! 주먹으로 다 때려 부수고 다님. ㄹㅇ상남자.]
↳이걸 각시탈이?
↳이왜진?
↳양반탈 하남자네 비겁하게 창이나 들고 ㅋㅋ
↳ㄹㅇㅋㅋ
↳양반탈보다 각시탈 떡대가 더 미쳤는데? 가면 바뀐 거 아니냐?
↳10m 넘어가는 몬스터 그냥 던져버리는 거 보면 3 대 50000 은 칠 듯 ㄷㄷ
- 상태창!

한국, 미국, 프랑스, 브라질. 네 개의 국가에 다섯 명의 각성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단숨에 처리하고 몬스터들의 영역이 된 게이트 반경 5km, 일명
던전을 파괴했다.

그들의 활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L 타워 게이트를 닫은 양반탈, 강릉의 게이트에 이어 만주 게이트까지···!】
【각시탈, 김해 게이트에 이어 나고야 게이트까지 닫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세요?
↳와 각시탈 미쳤다. 맨손으로 게이트를 잡아서 붙여 버리네? 이게 가능한 일이냐?
↳김해에 있던 놈이 10 분 만에 나고야 나타나는 건 말이 되고?
↳근데 비자는 있는 거냐?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할 판
↳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진짜 필요 없음)

다섯 명 뿐인 용사들의 활약은 한 국가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신들에게 받은 사명은 지구의 종말을 막는 것.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지구의 게이트들을 막기 위해 국경을 넘어 다녔다.

지구인들에게 다행인 것은 그들이 이미 차원을 막은 경험이 있는 강자이자, 그들을 용사로 만든 신들이 업을


감당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인류는 피와 생명으로 경험을 쌓고 나서야 제대로 된 대항이 가능했을 테니.

그렇게 종말이 시작되고 사흘. 용사들은 모든 게이트를 닫았다.

【다섯 명의 영웅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갑자기 시작된 게이트 사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각성자들? 퍼지는 음모론.】
↳한국만 가면 씀. 다른 나라들은 맨 얼굴로 돌아다니더라.
↳가면 X 탈 O
↳현명한 거지. 그놈들 신상 털리더라.

“네 말을 듣기를 잘했다.”
“그렇죠?”

스마트폰을 하고 있던 킬리언의 말에 샤워를 하고 나온 박상준이 머리를 털며 대답했다.

“얼굴 팔리면 바로 신상 털린다니까요? 특히 저희들은 공인이잖아요?”

세계에서 제일 권위 있는 이종격투기 대회의 구 챔피언과 새로운 챔피언이니 얼굴이 팔리는 순간 그 신상은 바로


전 세계에 퍼질 것이다.

“그러면 형님이 불법체류자인 사실도 드러나겠죠.”


“그건 이미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그렇긴 하죠.”

박상준이 낄낄 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신들이 엄포를 놔서 기대 많이 했었는데 생각보다 약해서 아쉽네요. 손맛이 부족해요, 손맛이.”
“이제 시작이겠지.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간다면 앞으로 열리는 게이트들은 점점 많아질 거다. 당연히 거기서
나오는 마물들도 강해질 거고.”
“알죠, 알죠. 그런데 그래봤자잖아요?”

용사가 어떤 존재인가. 한 명 만으로도 판도를 바꾸는 자다. 그런 용사가 무려 다섯이다.


“그것도 막 시작하는 용사가 이날 이미 차원을 구한 전적이 있는 용사들이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지구의 종말을 막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거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종말은 종말이다. 방심해서는 안 돼. 우리가 아니어도 이미 세 명의


용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신들은 우리를 용서하면서까지 내려 보냈지. 과연 아무린 의미 없이 그럴까?”
“···그것도 그렇네요?”

으음, 박상준이 웃음기를 지웠다.

“소문으로는 드물게 용사들이 소환되는 차원도 있고 그곳의 난이도는 일반적인 차원과는 상당히 다르다는데 지구도
그런 걸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 근데 그 사실을 누구한테 들었지?”
“미국에서 활약하는 사람한테요. 이미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은 세 명의 용사가 소환되었던 차원에서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이라면 카일리 로퍼?”
“네. 형님은 같은 나라 사람인데 안 만나 보셨어요?”
“나는 샌프란시스코고 카일리는 플로리다다. 대륙과 대륙 끝에 있지.”
“하긴, 미국이 워낙 크긴 하죠.”

어쨌든.

“지구의 멸망이 그만큼 끔찍한 수준으로 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요.”


“신들이 굳이 다섯 명이나 쓸 일은 없을 테니까.”
“혹시 그냥 편하게 막으라고 그런 건 아닐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그렇죠. 이미 차원을 구해본 다섯 명의 용사를 한꺼번에 내려보내야 할 정도라···.”

박상준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옷을 갈아입었다.

“갑자기 어딜 가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좆 될 것 같아서 태평양 한가운데로 가서 훈련이라도 하려고요.”
“같이 가자. 그렇지 않아도 한 판 붙기로 했었잖아?”
“저야 좋죠.”

두 용사가 태평양으로 날아갔다.

* * *

“재미있는 놈이네.”

지구, 두리쉬마에 이어 알베니우스까지.

더 없이 노골적인 도전장에 김우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함에도 세 개나 날렸다는 건 반드시 이쪽을 죽여버리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다만, 그렇게 똑똑한 방식은 아니었다.


‘경고가 아니라 기습을 했어야지.’

가능성은 두 가지다. 기습을 생각 못할 정도로 멍청하거나, 대놓고 알려주고도 이길 자신이 있거나.

그리고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복수심이 우주 끝까지 차올랐으니 이쪽이 최대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겠다는 거겠지.

톡톡, 김우진이 옥좌에 앉아 팔걸이를 두들겼다.

고요한 정적 사이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백신전의 신들이 무겁게 침묵하며 김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율리아.”
“네.”

율리아가 보고를 시작했다.

“지구의 종말이 시작됐어요.”


“그래. 방향성은?”
“예상대로에요. 게이트가 열리고 마수들이 쏟아져 나와요. 51 개의 게이트가 열렸고 다섯 용사들이 최대한
처리했어요. 한국에는 3 개가 열렸고요.”
“피해는?”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크지는 않아요. 확실히 종말을 막아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모두 능숙하게 할 일을 찾아서
처리했거든요.”
“좋아.”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이었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거다. 역시 죄수들을 다시 돌려보낸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 두 놈은 뭘 하고 있지?”
“태평양 한 가운데서 서로 싸우고 있어요. 말릴까요?”
“내비 둬. 알아서 훈련을 하겠다는 걸 말릴 필요는 없어.”
“네.”

율리아가 서류를 넘겼다.

“지금 문제는 지구 정부들과 용사들 간의 관계에요. 죄수 두 분은 처음부터 가면을 써서 정체를 숨겼지만 나머지
세 분은 얼굴을 드러냈거든요. 정부가 접촉을 시작했어요.”
“당연한 수순이지. 알아서 하라고 해.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단, 잘못된 선택으로 지구의 피해가
커지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해.”
“네. 지구에 관한 건 이걸로 끝이에요.”

율리아가 다시 앉았다. 김우진의 시선이 돌아갔다.

“프로니우스의 행방은?”
“최선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폴로이드에서의 흔적은?”

폴로이드는 알베니우스가 별장을 지어놓고 생활하던 차원이었다. 프로니우스가 알베니우스에게 경고를 날렸던 곳.
“완벽하게 지워져서 찾을 수 없습니다.”

김우진은 신들을 탓하지 않았다. 상대는 차원룡이다. 공간의 권능만큼은 신에 필적하는, 그 이상인 놈들. 그런
놈이 어둠의 사도까지 되었으니 신들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도 당연했다.

“알베니우스님. 혹시 프로니우스를 찾을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없어.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하지만 나도 마지막으로 봤던 게 신들에게 종족들이 몰살당하던 수 만 년
전이라.”
“······.”
“······.”

그의 발언에 몇몇 신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생각해보니 그냥 니들 업보잖아? 이걸 왜 내가 감당해야하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우진의 짜증에 주신들과 함께 차원룡 박멸에 한 손 보탰던 신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두리쉬마님,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대로 가만히 두면 문제가 생겨도 백번은 더 생길 것


같거든요.”
“음, 없다. 아카식 레코드와 달리 어둠은 뚜렷한 형체가 없고 당연히 어둠에 가까운 특별한 차원도 없다.”
“그럼 어떻게 사도가 되셨습니까?”
“의지가 전해진다.”
“세계수처럼 정령체라도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의지가 전해질 뿐이다. 설명이 힘들군.”
“아뇨, 이해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처럼 대놓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비슷하기는 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군요.”


“그렇겠지.”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군. 김우진이 잠시 생각했다.

프로니우스는 대놓고 세 번이나 선전포고를 날린 놈이다. 과연 그놈이 이대로 지구의 종말을 지켜보며 가만히
있을까?

‘만약 내가 그놈이라면 그랬을까?’

그럴 리가.

자고로 공격하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어둠과 프로니우스는 공격자고 아카식 레코드와 백신전은
수비자다.

지켜야 할 것들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빈틈이 가득한 표적.

‘내가 프로니우스라면 모든 차원을 동시다발적으로 휩쓴다.’

예상 밖의 마물 군단이 폭증하면 차원들은 버티지 못한다. 대부분의 차원들이 고작 용사 하나로 해결이 되는 건


균형이라는 명목 아래 어둠이 적당선을 지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지구의 종말을 앞당긴 미친놈에게 그런 리미트가 있을 리는 없다.

“지금 종말에 들어선 차원이 몇 개지?”


“61 개입니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다. 하물며 지구를 비추어 보았을 때, 종말에 들어선 차원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용사들을 늘려라.”
“놈이 다른 차원들을 공격할 가능성을 보시는 겁니까?”
“놈의 목적은 백신전과 백신전이 짜놓은 판 자체의 괴멸이다. 그건 이 우주의 종말이고 앞뒤 가릴 것 없지. 종말
차원들과 가장 가까운 외곽 차원들에 대한 경계와 감시를 강화해라. 집행자들 있는 대로 다 동원하고 필요하면
너희들이 직접 나서. 차원 내에서던, 밖에서던. 업 아끼다가 판 자체가 엎어진다.”

하위 차원은 처음 탄생했을 때, 아카식 레코드와 가깝다가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종말 차원과 적당히 가까워지면
종말이 찾아온다.

거기서 종말을 막으면 다시 중앙으로 이끌리고, 막지 못하면 그대로 종말 차원들 중 하나가 되어 더 멀어진다.

프로니우스가 노를 가장 손쉬운 차원들은 당연히 종말 중이거나, 종말이 코앞까지 당도한 차원일 터.

“당장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시면 감히 소장절대신님께 도전장을 내민 그 건방진 놈의 머리를 쪼개 버리겠습니다!”

디아네가 으르렁거렸다.

“안 돼. 넌 사고 칠 것 같아.”

뒤가 없는 광신도들은 눈에 보이는 곳에 둬야지만 그나마 안심이 된다.

“그럼 저를 보내주십시오. 제가 다 때려 잡겠습니다!”


“너도 안 돼.”

짐승 싸움광도 마찬가지다.

“본거지가 없으니 결국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뿐이네.”

어쩌겠나. 일단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신과 집행자들이 대거 움직였고 몇 주가 지났다.

“음.”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김우진은 오랜만에 차원. 연옥을 찾았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우주는 평화로웠다.


지구의 종말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지구가 김우진의 고향이고, 그가 조금 머물렀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그게 어둠의 사도라는 놈이 의도적으로 앞당긴 종말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종말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그게 문제인가.’

문제긴 문제다. 차라리 대놓고 나타나주면 속 시원하게 잡으러 갈 텐데, 알베니우스에게 경고를 전달하고 나서
행적이 묘연해졌다.

“릴리, 나르. 너희들도 어떻게 안 되겠지?”

- 당연하지.
- 당연히.

두 정령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세계수가 차원 어딘가에 숨은 어둠의 사도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래도 세계수의 도움을 워낙
많이 받은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세계수를 만능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릴리라면 무언가 해줄 것 같단 말이지.’

김우진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달달한 카페 모카 한 잔을 마시며 경치를 살폈다.

구 백신전 차원과 연옥이 합쳐져 새롭게 탄생한 연옥은 현 백신전처럼 이것저것 무언가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저 릴리와 나르가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연옥이었다.

차원의 중심에 우뚝 선 두 그루의 세계수와 광활한 원시림, 사막, 호수, 설원, 초원에 산맥까지. 상위
차원이지만 연옥도 백신전도 그리 큰 차원은 아니었다.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접경부마다 칼로 자른 듯 전혀 다른 환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김우진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예전의 연옥처럼.

다른 거라곤 감옥 대신 나무로 자연스레 엮어진 집이 여러 채 있다는 것 정도? 저 하나 하나가 주신들의 거주지다.

대부분 지구나 백신전에서 시간을 보내는 만큼 거주지보다는 별장에 더 가깝지만 주신들만 올 수 있다는 상징성과
두 세계수와 놀 수 있다는 것이 차원 연옥의 매력이다.

- 이게 좋아. 그때랑 똑같이.


- 맞아!

“니들이 좋으면 좋은 거지.”


“역시 여기 계셨네요?”

- 귀쟁이!
- 귀쟁이!

“네네, 이젠 익숙해요. 아무런 타격도 없다고요.”

율리아가 제 집처럼 자연스레 차를 내리고 김우진의 옆에 앉았다.

“어떻게 찾아왔어?”
“지구 아니면 백신전, 아니면 여기잖아요.”
“단순하긴 하네.”
“지구에서 새로운 소식이에요. 뉴스 보셨어요?”
“뉴스?”

김우진이 거대한 105 인치 티비를 틀었다. 김우진의 권능과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결합해 지구와 연결해 놓은
티비였다.

【속보입니다! 어제 새벽, 두 번째 카운트다운이 전 세계의 상공에 떠올랐습니다! 한 번의 종말을 막아내


안도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상했던 바잖아?”

프로니우스라는 놈이 작정하고 준비한 종말이 겨우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다.

예상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어쨌든 예정된 결과였다.

“마물의 움직임은?”
“없어요.”
“없다고?”
“지구를 중심으로 집행자들을 쫘악 깔아놨는데 아직까지는 잡히는 마물이 없어요. 변방의 종말 차원과 가까운
곳들도 마찬가지고요. 마물이 아예 보이질 않아요.”

이상했다.

“카운트다운은 일주일이에요. 지구는 강제로 종말 상태에 들어간 거라 변방 차원과 그리 가깝지 않단 말이죠.


지구까지 대규모 마물 군단이 변방 차원에서 지구로 향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지금은 출발을 해야 해요.”

그래, 이 부분이.

“우리가 막아놔서 조심하는 건가?”


“어쩌면요.”
“넌 다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차원룡이잖아요.”
“퀵으로 직배송을 한다고?”
“제 예상이 맞다면요.”
“아니, 가능성은 있어. 차원룡이 어둠의 사도까지 됐으니.”

씨발,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러면 상당히 곤란한데?”

여차하면 차원으로 들어가는 마물들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차원으로 직배송을 꽂아버리면 하나의
방법이 막혀버린다.

죽으나 사나 신들이나 집행자가 나서려면 업을 소모해야만 한다. 그리고 업은 무한이 아니다.

“···임무 완수하고 잘 쉬고 있는 용사들 수배해 봐. 최대한 많이.”


“지구로 보내시게요?”
“지구도 그렇고 다른 곳도 그렇고.”
“여차하면 진짜 사방에서 밀고 들어올 수 있으니 확실히 대비가 필요하긴 해요. 알겠어요.”

일주일이 지났다.

게이트가 열리고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상이 맞았어요. 정확히 어떤 변방 차원인지는 몰라도 저 진득한 마기는 변방 차원이 확실해요.”

마물들이 퀵으로 배송되고 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5) >

00:00:01
00:00:00

두 번째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지구의 두 번째, 종말이 시작되었다.

[속보! L 타워 또 야랄났다!]
[L 타워에서 또 게이트 열렸다. 그나마 첫 게이트 이후 통제 구역 되서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다행인데 이게
열렸던 곳에 그대로 다시 열리네 ㅁㅊ]
↳김해랑 강원도도 똑같음
↳그나마 다행인 듯?
↳ㅇㄱㄹㅇ통제구역이라 민간인 없었음
↳지금 전투 벌어짐. 군인들이 총 쏘는 중.
↳총으로 뒤짐?
↳박격포도 쏨
↳전차도 왔음
↳ㄹㅇ전쟁이네
↳서울 작살나는 거임?
↳서울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작살날 판

그 자리 그대로 게이트가 열리고 마물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과는 조금 달랐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게이트가 열렸던 곳을 경계 지역으로 삼고 군인들을 배치시킨 덕이었다.

마수들은 지구의 인간들이 처음 보는 괴수들이었으나 총과 대포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국은 포방부라는 이름답게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화려한 화력쇼를 통해 마물들을 깡그리 박멸했다.
[아니]
[송파구랑 강남구, 강동구랑 광진구 일부가 초토화 됐는데 이거 맞냐?]
↳ㄹㅇ저게 다 얼마냐
↳그럼 그 비싼 집에서 괴물이랑 손잡고 뒤지시던가
↳ㄴㄴ어차피 게이트 열려서 거기 똥 값됨
↳ㄹㅇㅋㅋ
↳ㅅㅂ괴물이 나오는데 돈타령 오지네
↳이게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그건가?
↳초토화된 나라가 한둘이 아닌데 대응 잘해서 잘 막아줬더니 ㅈㄹ하는 새끼들이 있네ㅅㅂ

그 과정에서 송파구 대부분이, 강동구, 강남구, 광진구 일부가 희생양이 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잘했다는
칭찬이 가득했다.

게이트 사태와 괴물들의 출현은 그들에게 미지의 공포를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피해가 있더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안도감을 주었다.

김해는 오히려 더 쉬웠다. 넓은 평원에 게이트가 열렸기 때문에 무차별 포격으로 순식간에 정리 되었다.

문제는 강원도였다. 설악산에 열린 나머지 제대로 된 화력 투사가 어려웠다.

공군에서 급하게 헬기와 전투기를 띄웠지만 그보다 먼저 두 개의 가면이 움직였다.

[양반탈이랑 각시탈 떴다!]


[설악산임. 군인들이 산 진입로 죄다 통제하고 헬기랑 전투기 날아오는데 그보다 먼저 양반탈이랑 각시탈이
난입함.]
↳저기가 제일 안전할 듯
↳근데 쟤들 진짜 누구냐. 한국에 있는 거 보면 한국인이겠지?
↳각시탈은 실존한다!
↳그러니까 쟤들은 상태창이 보인다는 거지?
↳나만 상태창 없어! 나만 상태창 없어! 나만 상태창 없어! 나만 상태창 없어! 나만 상태창 없어!

* * *

박상준이 거대 마수의 머리에 창을 찔러 넣었다.

파직-

스파크가 폭발하며 머리를 통으로 날려버렸다. 은밀히 뒤로 접근하던 마물이 연쇄하는 뇌전에 감전되어 그대로
타버렸다.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은데.”

저 멀리 헬기가 보이지만 한 발 늦었다.

킬리언이 상대하고 있는 마수가 마지막이었으니.

“와.”
20m 가 넘어가는 멀대같은 마수였다. 부풀어 오른 근육은 로이드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지나쳤다.

─!

하지만 킬리언과 부딪히자 오히려 휘청이며 쓰러졌다. 놈의 팔을 꺾어버린 킬리언이 그대로 위에 올라타 머리를
난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의 머리가 박살났다. 몸이 축 늘어졌다.

오러로 몸에 묻은 피를 태워버린 킬리언이 물었다.

“게이트는?”
“닫았습니다.”
“그럼 끝났군. 다른 나라로 움직이지.”
“그런데 마왕도 그렇게 죽이셨습니까?”
“마기로 기이하게 변한 거인족이었다. 크기가 15m 에 더럽게 강하더군.”
“그래서요?”
“서로 맨주먹으로 치고 박고 싸우다 힘겨루기를 했지. 팔을 그대로 꺾어버린 다음에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진짜 무식할 정도로 세시네요.”
“너는?”

“저 같은 경우에는 언데드였습니다. 번개라서 다행이었죠. 불만큼 언데드에 효과가 있는 힘이라. 다


튀겨버렸습니다.”

종말의 사도는 어비스 나이트라는 데스 나이트의 상위종이었다. 수십만의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남하하는데
싸우면 싸울수록 수가 늘어가는 혐오스러운 놈이었다.

박상준이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바쁘지 않을 것 같던데요. 송파구랑 김해 쪽은 군대가 알아서 처리했고 일본쪽도 자위대가
움직여서 피해가 별로 없답니다.”

다른 나라들도 대동소이했다.

“칼과 활로 무장한 군대들만 보다가 화력전을 보니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나요?”


“확실히 한결 편하긴 하군.”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움직여야하는 건 똑같다. 게이트를 닫아야 하니까.”

맞다. 차라리 타 차원이었다면 마법으로 게이트를 닫았겠지만 지구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뭐, 그 정도야. 그럼 저는 송파구로 가겠습니다.”


“네가 가까운 쪽으로 가겠다고?”
“왜 이러십니까? 갔다가 북한, 만주로 넘어갈 겁니다. 만주타고 러시아로 넘어가나 일본타고 오세아니아로 가나
바쁜 건 마찬가지인데.”
“···알았다.”
“아, 그리고 카일리한테 연락 왔는데 한 번 보자는데요?”
“나를?”
“아뇨. 용사들 전부. 사태가 심각하니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자고요.”
“이번 종말이 끝나고.”
“예. 그럼 이번 일이 끝난 다음에.”

두 용사가 각각 서쪽과 남쪽으로 갈라졌다.

* * *

김우진이 지구의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서울의 게이트는 두 번 다 송파구를 비롯한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고
당연히 용인에 위치한 김우진의 집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물론 불안감이 증폭되어 서울과 경기 쪽의 집값이 전체적으로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게이트가 열리지 않은 충청도나 전라도, 제주도 쪽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지금까지는 잘 막아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진짜 게임이라도 하자는 건가.”

두 번의 카운트다운이 있었고 두 번의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첫 번째 게이트와 두 번째 게이트의 차이는


마물의 수와 질이 조금 더 올랐다는 것뿐이었다.

진짜 스테이지별로 올라가는 게임처럼.

아직까지는 용사들이 잘 막아내고 있지만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게 더럽게 나오겠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지.”

김우진이 두 개의 화분을 집어 들었다.

집 앞의 마당에 땅을 파고 옮겨 심었다.

세계수의 분신과도 같은 가지 두 개가 지구의 지기를 먹고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굳이 지구에 세계수를 심어야 되냐는 생각이 있어 화분에 만족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이쪽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할 수 있겠어?”

- 음, 쉽진 않아.
- 그래도 해볼게!

본체가 아닌 분신을 이용해 또 다른 차원에 뿌리를 내리는 세계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리고 신을 먹어치운
릴리와 나르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고마워.”

그렇다고 큰 걸 바라지는 않는다.


무사히 자라날 지도 의문이고 자란난다고 해도 분신인 만큼 당연히 본체에 비해 한없이 약하다. 지구에는 마나
자체가 희박하니 성장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다른 차원에 비해 훨씬 더 걸리겠지.

뭐, 마나 부분은 신력을 먹은 세계수들인만큼 어느 정도 논외긴 하지만.

어쨌든 세계수들이 프로니우스라는 버러지가 무슨 짓을 꾸밀 때 한 방을 먹여줄 카드가 되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마나를 퍼트리지도, 크기를 키우지도 마. 알겠지?”

카드라는 건 뒤집혀져 있을 때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 하지만 그러면 약해. 크기는 품을 수 있는 힘과 비례.


- 맞아.

“그러면 마법진을 짜야겠네.”

인식 저해랑 은신, 마나 은신, 마나가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통제 마법진에···.

수백 개의 마법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법진과 권능을 결합해 기능을 강화한다.


지구인을 상대로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만 프로니우스를 속이려면 철저해야 한다.

물론 김우진이 할 생각은 없었다. 마법은 그의 적성이 아니니까.

“디아네랑 시에나님, 그리고 데이드랑 카르네이, 홀스라···.”

다행히 적임자들이 있었다.

신이라는 이름의.

그리고 또 다른 수가 없을까. 어디 보자.

“용사들 수십 명을 투입시키면···아니지?”

잠시 고민하던 김우진이 누군가를 떠올렸다.

신은 아니나 신의 힘을 쓸 수 있는 자.
그럼에도 신이 아니기에, 태생적으로 타고 났기에 어느 차원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 자.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 * *

“음.”

두리쉬마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본래라면 마기가 철철 넘쳐 흘러야 할 손에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둠이 그를 사도직에서 박탈했다.


그리고 그의 육신에 남아 있던 마기의 잔재를 새로운 사도를 통해 모조리 앗아갔다.

“한심하군.”

물론 마기가 없다고 그가 약하지는 않다.

그는 위대한 타이탄이고 마기의 빈자리에 신력을 채울 수 있다. 비록 어둠의 사도 일때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겠지만.

“힘을 길러야 한다.”

역시 이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지금의 두리쉬마가 백 명이 넘게 모인다 한들, 과거의 두리쉬마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단순히 어둠의 사도일뿐만 아니라 주신들을 사냥해 그 업도 쌓았으니.

어둠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그 업도 모두 흩어져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현재의 그는 비록 신에 비빌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집행자들에는 비빌 수준이 된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 처음?
- 처음부터 뭘?

두 마리의 정령체들이 그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주변의 마력을 채우던 두리쉬마가 눈을


떴다.

“여기 계셨습니까?”
“김우진.”
“뭐하고 계십니까?”
“마기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빈자리를 신력과 마력으로 보충해볼까 한다. 오랜만이라 익숙하지 않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다행히 불가능까지는 아니더군.”

타이탄은 본디 신력을 타고난 종족이니.

“그런 의미에서 이 차원은 최고군. 신을 먹은 세계수가 둘에, 본래 백신전의 차원이 합쳐져서 그런건가?”
“네, 맞습니다.”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무슨 일이지?”
“힘을 되찾고 싶으신 것이겠죠?”
“당연한 소리를. 나는 이렇게 약해빠진 스스로가 한심해서 버틸 수가 없다.”
“단순히 명상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좋은 방법?”
“업을 쌓는 거죠.”
용사가 강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수련을 통해 능력 자체를 올리거나, 마물을 죽이고 종말을 막으며 업을
쌓거나.

여기서 중요한 건 용사를 예로 들었지만 업은 누구나 쌓을 수 있다는 거다.

빛의 사도라면 어둠의 마물들을 죽여서.


어둠의 사도라면 빛의 생명체들을 죽여서.

서로가 서로의 적임과 동시에 서로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먹이다.

“심지어 두리쉬마님의 힘을 앗아간 프로니우스 놈에게 복수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말해봐라.”

복수라는 말에 두리쉬마가 흥미를 보였다.

“지구에 종말이 일어났습니다. 본래 일어나면 안 되는 종말이죠. 저는 이걸 프로니우스의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나보고 지구의 종말을 막으라는 거냐?”
“예.”
“네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물론 그런 것도 있죠. 저는 지구가 최대한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거든요.”

김우진은 굳이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내가 가기엔 너무 수준이 낮은 것 아닌가?”


“낮지 않습니다.”
“그래봐야 일개 차원의 종말이다. 하물며 네가 종말 차원들과의 경계에 병력을 배치했다고 들었는데?”
“그랬는데 일반 택배가 아니라 퀵 배송이더라고요.”
“퀵, 뭐?”
“공간 권능을 통해 종말 차원에서 지구로 마물들을 스트레이트로 배달했습니다.”
“······!”
“어떻게, 구미가 좀 당기십니까?”
“확실히 그렇군.”

두리쉬마가 입가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권능을 통해서 마물들을 쏟았다는 것 자체가 프로니우스가 지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건 지구의 종말이 일반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지구로 가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2m 정도만 유지해주시면 됩니다.”
“그거야 답답하긴 하지만 어렵진 않다. 하지만 나는 지구의 생리나 사회, 규범에 대해서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붙여드릴 생각입니다.”
“짐더미는 사양이다.”
“용사들입니다. 차원들을 이미 구한. 본래는 전직인데 이번에 복귀시켰습니다.”
“차원을 구한 용사라면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겠군. 좋다.”
“지구를 잘 부탁드립니다.”

김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맡겨둬라.”

두리쉬마가 손을 맞잡았다.

- 잘 부탁해!
- 맡겨줘!

릴리와 나르가 서로의 날개와 앞발을 붙잡고 흔들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6) >

“여기가 지구인가.”

번쩍, 작은 빛줄기와 함께 지구에 떨어진 두리쉬마가 눈을 떴다.

높은 산이었다.

“탁하군.”

산임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썩 좋지 않았다. 도시라는 곳은 더 심하겠지. 종말이 일어난 것만 아니라면 힘을


되찾기에 결코 좋은 차원이 아니다.

“희박하고.”

마나 또한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마법이란 학문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과학이라는 이상한 게 발전했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혹시 두리쉬마님이십니까?”

두리쉬마가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용사가 있었다.

박상준과 킬리언 패럴. 이종격투기 대회에서 대놓고 힘을 쓰려다가 연옥으로 끌려갔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어제 집행자의 방문을 받았다.

‘새로운 용사가 내려온다. 지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니 너희들이 잘 알려주도록.’

다른 차원의 용사라. 박상준은 기대감을 가졌다.

살면서 봐온 용사라고는 킬리언 패럴과 카일리 로퍼가 전부였기에 다른 차원의 용사가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다섯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차원의 용사를 보낼 정도라면 지구의 종말이 과연 어느


수준까지 올라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맞다. 너희가 박상준과 킬리언이군.”


“예, 그렇습니다. 덩치가 상당하시네요.”

두리쉬마의 첫 인상은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은 마치 어둠을 보는 것처럼 햇빛마저 빨아들일 정도로 시커멓다. 2m 가 넘어가는 큰 키와
거의 예술에 가까운 근육들은 그가 육체 무투파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가 박상준과 킬리언을 훑었다.

“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얼간이 수준까지는 아니군.”


“예?”
“···지금 우리를 품평하는 건가?”
“그렇다. 짐덩어리 같은 아군은 적보다 더 짜증나는 법이니까.”
“우리가 짐이 될 거라고?”
“방금 한 이야기 못 들었나? 적어도 얼간이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킬리언의 얼굴이 굳었다.

“똑같은 처지에 같잖군.”


“똑같은 처지?”
“너 또한 계약을 어기고 죄수가 되었다가 다시 끌려온 것 아닌가?”
“흐음, 네놈들은 그렇게 돌아온건가? 김우진놈이 용케 이놈들을 살려뒀군.”
“뭐라고?”
“그럼 굳이 적당한 예의를 차려줄 필요도 없겠군. 계약을 어긴 버러지들이니.”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참지 않는다면?”

프흐흐흐, 두리쉬마가 웃었다.

“무서워서 오줌을 지리겠군. 어디 한 번 해봐라. 네가 만약 날 이긴다면 네 말대로 해주지. 이럴 때 뭐라고


하더라.”

김우진이 뭐라고 했더라.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는다.”


“이 개새끼가···! 좋다, 후회하게 해주마!”

킬리언이 뿌득, 이를 갈았다.

주먹을 쥐고 거칠게 숨을 뱉어낸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거리가 좁혀진다. 마수를 두부처럼 으깨는 주먹 위로 단단한 오러가 맺힌다.

그 목적은 두리쉬마의 머리다. 머리였으나 두터운 손이 마중 나온다.

─!

충격파가 퍼졌다. 부서진 오러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검은, 그리고 푸른 오러의 파편들이 뒤엉킨다. 근처의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진다.

“이것도 막아봐라!”

킬리언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후속타를 날린다. 이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맺혀 팽창한 오러는 흡사 거인의 주먹과
같다.

─!

허나, 그것마저 가로 막힌다.

“뭣···?!”

그 어떤 적이라도 단숨에 으깨버리는 거인의 주먹이 자그마한 손에 붙잡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그래. 공격은 이 정도군. 썩 나쁘지 않다. 어지간한 마물들은 한 대도 견디지 못하겠군.”

그럼 이제.

“맷집을 확인해볼까.”

콰드득, 악력에 오러의 주먹이 부서졌다.

“···어?”
“···세상에.”

킬리언과 박상준의 얼굴이 동시에 멍해졌다.

그 사이로.

“이빨 꽉 깨물어라.”

두리쉬마가 일권을 날렸다.

──────!

세상이 붕괴한다.

박상준은 그런 착각이 들었다.

단 일권에 일대가 진공이 되고 킬리언의 육신이 대지 깊숙이 처박혔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산 전체가
흔들렸다.

“아직 싸울 수 있으면 일어나라.”

거의 100m 가까이 파여진 구덩이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크으으으···.”

고통 어린 신음만 대답을 대신할 뿐.

“기절하지 않았나. 맷집도 꽤나 쓸만하군.”

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린 두리쉬마가 피떡이 된 킬리언의 멱살을 잡고 다시 올라왔다.

“어떻게 너도 해볼테냐?”
“···헤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랑 두리쉬마님이랑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통하는 부분?”
“저도 저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강한 자의 말은 맹목적으로 믿고 따를 자신이 있습니다!”

박상준이 무릎을 꿇었다.

서열 정리가 끝났다.

* * *

“이건 티비라는 겁니다. 영상을 보여주는 거죠. 아, 영상이라는 건···.”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정말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김우진이 지구의 문물들을 몇 개 연옥에 들여놓은 덕분에 구 연옥 시절에 전부 익혔다.

“그나저나 직접 보니 신기하긴 하군. 유리 건물 숲이라니.”

김우진이 보여준 영상으로 보거나 들은 게 전부였다. 확실히 여러 차원들을 다녔지만 지구는 지금까지 차원들과는
꽤 달랐다.

유리 건물 숲과 저절로 굴러다니는 강철 마차들.

전부 마나가 없기 때문이겠지.

“차 좀 드시겠습니까?”
“커피로.”
“예.”

두리쉬마가 고급 소파에 앉았다. 따스한 커피를 음미하며 티비를 켰다.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 그였지만 김우진과 지내면서 생긴 고풍스러운 취미 중 하나다.

티비에서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정부는 양반탈과 각시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추가적인 각성자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여부를···.】
【미국의 각성자, 카일리 로퍼가 모든 국가가 힘을 합쳐 이 난관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각성자인
그녀의 발언에 사람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이며···.】
【프랑스와 독일이 국방비를 GDP 의 5%까지 증액할 것이라 공언하며 재무장을 선언했습니다. 특히 각성자가 없는
독일은 강력한 군대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 주장하며···】
【전 세계에 열린 게이트는 총 51 개로 다행히 바다에 열린 건 없었습니다. 때문에 해운업에는 큰 피해가
없···.】
【두 번째 게이트를 막은 지 일주일, 하늘에는 세 번째 카운트다운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오후 12 시 정각.
갑자기 생겨난 카운트다운은 언제나처럼 일주일을···.】
“카운트다운?”

두리쉬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과연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저게 0 이 되면 균열이 열리고 몬스터들이 나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신기한 방식의 종말이군.”
“종말은 차원의 구성원들에게 친숙한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이 아닐까요? 게임은 지구인들에게
더 없이 친숙하거든요.”
“게임?”
“예, 그게 뭐냐면···.”

박상준이 컴퓨터를 켜고 두리쉬마에게 RPG 게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기절해 있던 킬리언 패럴이 눈을 떴다.

“이것도 약하군.”
“마우스가 다섯 개나···! 제발 힘 조절 좀 부탁드립니다!”
“이것도 약하고.”
“내 무접점 키보드가···!”
“크윽···!”

가슴을 부여잡으며 일어나는 그의 신음에 박상준이 고개를 돌렸다.

“아, 일어났어요?”
“내가 왜···?”
“기억 안 나세요? 두리쉬마님한테 까불다가 한 대 맞고 기절했잖아요.”
“······.”

기억났다. 킬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조심스레 두리쉬마를 살폈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어떻게, 아직도 내게 도전해볼 마음이 있나?”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본능에 각인된 공포에 킬리언이 숨을 삼켰다.

“···아, 아니.”
“아니?”
“아, 아닙니다.”
“앞으로는 내 말에 복종해라. 물론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내도 좋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좋군.”

두리쉬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빠각, 그 순간 마우스가 박살났다.

“또 부서졌다.”
“···제발, 이제 마우스도 없단 말입니다.”
“약해빠졌군.”
“두리쉬마님의 힘이 너무 센 겁니다.”
울상을 짓던 박상준이 두리쉬마를 컴퓨터에서 때어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선물입니다. 두리쉬마님.”
“선물?”
“두리쉬마님을 위해 준비한 겁니다. 앞으로 싸우실 때는 무조건 이걸 착용하셨으면 합니다.”
“가면?”
“저희는 탈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이 세상은 대중의 앞에 나설 때는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는 게
이롭거든요.”
“못생겼군.”
“못생기긴 했지만 얼굴은 확실하게 가려줍니다.”
“쓰고 싶지 않다만.”
“그러면 사람들이 두리쉬마님을 가십거리로 삼을 겁니다.”
“모두 죽이면 그만이다.”
“안 됩니다! 그건 범죄입니다!”
“남을 험담할 거라면 목숨을 걸어야지.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지구에서는 절대, 절대 당연하지 않습니다!”
“나를 모욕했는데 그냥 참으라고?”
“그게 지구입니다, 두리쉬마님.”
“만약 죽이면 문제가 되나?”
“크게 됩니다.”
“고문은?”
“그것도 안 됩니다!”
“사지만 부러트리는 건?”
“고문하고 뭐가 다른 겁니까?”
“최대한 아프게 부러트리느냐와 그렇지 않느냐?”
“···안 됩니다.”
“···짜증나는 차원이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김우진의 당부를 떠올린 두리쉬마가 마지 못 해 수긍했다. 박상준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빨리 저 시간이 0 이 됐으면 좋겠군.”

어중간하게 몸을 푸니까 몸이 근질거렸다.

* * *

종말이란, 세계의 명운을 건 대전쟁이다.

성공한다 한들 많은 국가가 멸망한다. 대지가 초토화되고 많은 이가 죽는다.


실패한다면 조금도 남는 것이 없다. 차원 자체가 멸망한다.

그것이 일반적인 종말이다.

하지만 지구의 종말은 일반적인 것과는 꽤나 달랐다.

우주를 다스리는 절대신, 김우진의 의지였다.


자신의 고향이 종말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 지구의 평화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려 보낸 다섯 명의 용사들이 종말을 꽉 틀어 막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구의 인류는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호들갑 오지게 떨더니]


[종말이네, 뭐네 호들갑은 있는 대로 다 떨더니 그냥 괴수 좀 나오고 마네. 세상 멸망한다고 ㅈㄹ하던 새끼들 다
어디감?]
↳ㄹㅇㅋㅋ그나마도 양반탈이랑 각시탈선에서 컷
↳군대가 포격하면 다 쓸림
↳종말 희망편(현실판)
↳한국만 그나마 괜찮은 거지 다른 나라들은 개판이라던데
↳처음엔 그랬는데 거기도 군대로 적당히 잘 막는다더라
↳역시 화력이 짱인가
↳나도 각성하고 싶다. 각성자들 부럽다
↳상태창! 상태창!

일부는 지금의 사태를 하나의 게임으로 여겼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었다.

[두 탈쟁이 덕분에]
[쉽게 막았다고 김칫국 오지게 마시네.
첫 웨이브 때 죽은 사람이 몇인데]
↳ㄹㅇ전 세계적으로 웨이브로 인한 사망자가 50 만명이 넘는다더라
↳운 좋게 각성자 두 명 있어서 살아놓고 쉽네 ㅇㅈㄹ

일부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걱정했으며.

[갑자기]
[그런데 갑자기 하회탈들 떠나는 거 아님? 그럼 우리 좆 되는 거 아님?]
↳ㅅㅂ그런 불길한 소리를 왜하누
↳그래도 군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ㄹㅇ화력쇼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던데
↳불꽃놀이에 눈이 멀어서 그럼
↳황천놀이

일부는 지금의 행운이 언제 끝날지 걱정했다.

[근데 진짜 행운이네]
[각성자가 꼴랑 다섯인데 우리나라에만 둘 있는 거 실화?]
↳대신 게이트도 3 개 드립니다
↳아, 필요 없어요ㅡㅡ
↳쓰읍, 넣어둬, 넣어둬. 어른이 주는 건 거절하는 거 아니야.
↳나도 어른이야
↳밸런스 패치 오지네. 한 국가에서 세 개나 나온 건 우리나라뿐이라며?
↳땅덩어리 넓은 중국이랑 러시아도 두 개 뿐이라더라 ㅋㅋㅋ
↳근데 한국인은 맞음? 한 명 머리 노랗던데?
↳염색한 거 아님?
↳탈 써서 국적은 모름. 근데 한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거 보면 일단 한국에 살고 있는 건 맞을 듯

수십억의 지구 인구에서 각성자는 고작 다섯이다. 그들 중 둘이 한국인이라는 건 정말 행운 중에 행운이었다.

[이거 봄?]
[jpg]
[일본에서 양반탈이랑 각시탈 팬클럽 만들어짐]
↳일본에 와달라고 제사를 지네네
↳이왜진?
↳일본은 한국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우욱
↳부끄러운 자화상
↳두유 노우 양반탈? 두유 노우 각시탈?
↳벌써 두유 노우 시리즈에 들어갔누ㅋㅋ

하지만 마침내 세 번째 카운트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그 작은 불안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임?]
[얘네 왜 트리오 됨?]
↳ㅅㅂ말뚝이탈ㅋㅋㅋㅋㅋ
↳한 명 더 늘었네ㅋㅋ이번엔 말뚝이탈이냨ㅋㅋ
↳왜 백정탈 아님? 왜 이매탈 아님? 왜 선비탈 아님? 왜 초랭이탈 아님?
↳ㄹㅇ하회탈들 사이에 봉산탈이 난입하네
↳넌씨눈 새끼
↳ㄴㄴ양반이랑 각시, 말 끌어주는 하인까지. 완벽하잖아
↳부정부패 고발하는 게 아니라?
↳귀양 가는 거 끌어주는 포졸이었고요
↳엌ㅋㅋㅋ
↳근데 어째 갈수록 떡대가 커짐? 각시탈보다 1.5 배는 더 있어 보이는데?
↳ㄹㅇ한 대 치면 머리 터질 듯ㄷㄷ
↳1 게이트 1 각성자 할당제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걱정했더니 오히려 증식을 했네 ㅋㅋㅋ

새로운 각성자가 추가되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7) >

김우진이 쉐이커를 흔들며 티비를 틀었다.

말뚝이탈을 쓰고 미쳐 날뛰는 두리쉬마의 영상이 뉴스를 통해 송출되고 있었다.

망치를 들고 마물의 몸을 으깨버리는데 거의 공성 전차와도 같은 파괴력이었다.


한 방, 한 방에 대지가 흔들리며 수십의 마물들이 쓸려 나간다.

‘나와라.’

게이트를 통해 튀어나온 모든 마물들을 쓸어버리고 게이트 너머, 아직 채 나오지 못한 놈들에게 손가락을


까딱인다.

김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크으, 이거지.”

- 이거야?
- 이거야!

릴리와 나르가 양 옆에서 따라했다.

“역시 두리쉬마님이십니다.”

두리쉬마를 지구에 떨어트리는 것은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비슷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본바탕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긴 세월을 살아온 타이탄의 본바탕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기기 때문이다.

“어떠셨습니까?”
“별로였다.”

바깥을 돌아다니기 위해 덩치를 더욱 줄인 두리쉬마가 볼멘소리를 냈다.

“약해 빠졌더군.”

김우진이 잘 섞인 칵테일이 잔에 따랐다.

“초반이니까요. 프로니우스도 간을 보고 있는 거겠죠.”


“그래도 게이트가 종말 차원과 연결된 것은 맞다. 비록 힘을 다 잃었지만 평생을 살아온 세상을 알아보지
못하지는 않는다.”
“그럼 역으로 이쪽에서 밀고 들어갈 수는 있을까요? 이건 준벅이라는 칵테일입니다.”

술을 한 모금 받아든 두리쉬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불가능은 아니다만 추천하지는 않는다. ···달기만 하고 술기운이 없다만?”


“있기는 있습니다. 미미해서 그렇지. 그리고 그 달달한 맛에 먹는 겁니다. 고립될 가능성이 있어서요?”
“그래. 취향도 특이하군.”

프로니우스의 권능으로 열린 만큼, 원한다면 언제든지 닫을 수 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어중간한 병력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나올 것이다.

신들이 나서면 억지로 균열을 벌려놓을 수는 있겠지만 프로니우스는 두리쉬마마저 손도 제대로 못쓰고 당한 강자다.

어둠의 비호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만큼 비호를 받고 있으니 김우진 본인과 비슷한 강자로 여기고
대응하는 게 옳다.

“그럼 놈은 지금 뭘하고 있는 걸까요? 왜 이렇게 지구에서만 깔짝거리는 거죠?”


“지구에 대한 네 애착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신들의 우두머리고. 이건 맛있군.”

두리쉬마가 크래커에 스모크 치즈와 하몽, 초콜릿을 올린 치즈 플래터를 마음에 들어 했다.

“불안감 조성?”
“아마도. 당시의 나를 대입해보자면 나는 신들을 결코 쉽게 죽일 마음이 없었다. 내가 받은 괴로움과 고통을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싶었으니까.”
“그게 적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까?”
“복수라는 것에 한 번 미치면 이성적인 생각을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프로니우스의 경우, 그렇게 시간을 줘도
이길 자신이 있는 거겠지.”
“저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내 힘을 모두 흡수하기 전에는 네가 필승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까?”
“모른다는 거다. 놈은 과거의 나 이상의 괴물이 되었지만 그 한계가 어딘지 모르니까. 너도 마찬가지고.”
“유의하도록 하죠.”

김우진이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었다.

“아, 제가 붙여 드린 용사들은 어땠습니까?”

톡 쏘는 탄산에 상큼함, 은은한 알콜이 느껴지는 모히또는 썩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별 다른 트러블은 없었습니까?”
“있었지만 없게 만들었다.”
“알만하군요. 그래도 두리쉬마님을 믿습니다만, 살살 부탁드립니다.”
“더 문제 날 것도 없다. 다 해결 했으니. 그런데 난 왜 이걸 주고 넌 그걸 먹지?”
“모히또는 저번에 드셨잖습니까. 새로운 거 먹어보라고 만들어 드린 거죠.”
“그게 더 맛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만들어드려요?”
“아니, 그것도 별로긴 하다. 보다 독한 놈으로 줘라.”
“B-52 를 만들어드리죠.”

플로팅 기법을 통해 깔루아, 베일리스, 꼬잉트로, 론디아즈 151 로 단층을 쌓고 그 위에 불을 붙였다. 독한


것을 찾는 거인을 위해 특별히 론디아즈 151 의 비율을 늘렸다.

“여기 있습니다.”

타이탄은 공들여 제조한 폭격기의 아름다운 단층과 그 위의 불꽃을 감상하지도 않고 그대로 원샷을 때렸다.

원래 원샷으로 마시는 게 맞긴 하지만 영 탐탁지 않다.

“···흠, 여전히 약하긴 하지만 저것보다는 낫군. 더 독한 것 없나?”


“···만들어 드리죠. 아주 독한 놈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는 두리쉬마를 위해 열 받은 김우진은 압생트와 스피리타스를 섞었다.

“나쁘지 않군.”
그리고 처음으로 거인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그냥 스피리타스를 통으로 줄 걸 그랬나.’

쩝, 김우진이 아쉬움에 입을 다셨다.

‘강민식한테 독을 구해봐?’

애초에 인간의 술 따위로 타이탄을 보내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 * *

송파구에 열린 세 번의 게이트.

세 번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게이트가 같은 곳에서만 열린다는 것을 파악했고 그에 따른 변화가 일어났다.

송파구 일대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소개 되었고 그 주변의 사람들도 차츰차츰 남쪽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송파구, 그 다음은 강남과 강동, 광진. 그 다음은 서울, 그리고 경기도 전역이었다.

아직 경기도권의 이동은 크지 않지만 경기 북부의 인원들은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갔고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 아예
지방까지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부가 그렇게 바라던 인구 분산을 종말이 해주고 있었다.

깔끔한 방법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거주지나 직장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김해에도 게이트가 있어
충청도와 전라도 쪽으로 몰리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프로니우스가 의도적으로 약한 마물들을 보내며 간을 보기 때문인지, 김우진이 보낸 용사들 덕분인지, 아니면


현대 문명이 쌓아올린 화력 덕분인지 게이트 사태가 세 번째까지 이어지자 인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본래 인간은 미지에 대한 공포를 가장 크게 느낀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죽음이 무엇인지 산 자는 알 수


없으니까.

게이트도 마물도 지구의 인간들에게 미지였으나 세 번을 겪으면서 더 이상 미지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살만해지면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린다. 욕심을 부린다.

【“타국의 각성자들은 모두 얼굴을 드러내고 각국의 정부와, 세계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의 각성자들만이 탈이라는 익명성에 몸을 기대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겁니까?”
“시민들은 각성자들이 언제 갑자기 사라질지, 혹여 익명성에 기대어 칼날을 반대로 돌리는 게 아닐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당당히 얼굴을 밝히고 정부에 협조하십시오! 시민들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공화당 김민석 의원은 탈 아래 정체를 숨기고 막무가내로 활동하는 각성자들에 대해···.】
【“각성자들은 인류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정부와, 세계와 협조해야 합니다. 힘을 가졌다면 그만한
책임이 따릅니다. 어찌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ㅂㅅ들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네
↳근데 맞말 아님?
↳ㄹㅇㅋㅋ언제 수틀린다고 이쪽으로 무기 돌릴지 누가 암? 그러려고 탈 쓴 걸 수도 있는데
↳ㅂㅅ들 많네. 저분들이 안 나섰으면 니들은 그전에 다 뒤졌어
↳하지만 살았쥬. 살아 있으니 뭐라도 해야지.
↳그게 분조장이냐 ㅅㅂㅋㅋㅋ
↳막말로 쟤들이 다 때려죽이면 나라 개판나는 거 아님?
↳그럴 의도가 있으면 진즉에 했겠지
↳사람 마음이란 걸 어떻게 확신함?
↳양반탈, 각시탈, 말뚝이탈 탈 벗기 운동(1/100000)
↳가만히 냅둬라 좀ㅡㅡ가만히 있다가도 좆같아서 한국 뜨겠다
↳ㄹㅇ생각이란 게 없는 놈들인가

이렇게.

공화당이고 민주당이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용사들의 탈을 벗기려고 한다. 신문과 뉴스는 그들의 발언을 연일
옮겨 적으며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다.

당연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탈 아래 정체를 숨긴 양반탈, 각시탈, 말뚝이탈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그들이 어떤 마음을 풀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게 없었다.

그 무지가 언제든 정부를 향해 칼을 돌릴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낳았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욕심을 가진다.

정부의 높으신 양반들은 세 명의 각성자들을 자신들의 발아래 두고 통제하고자 했다.

그게 현재의 상황을 낳았다.

“···어디 가십니까? 두리쉬마님?”

두리쉬마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현관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박상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을 보여주러 간다.”


“예?”
“보고 싶다니 보여줘야지. 그리고 감히 날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아니, 잠깐만요!”

박상준이 두리쉬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안 됩니다, 진짜 안 됩니다! 저 사람들 죽으면 한국이 뒤집어집니다!”


“안 죽인다. 나도 그렇게 경우 없지는 않다.”
“정말입니까?”
“그래. 함부로 나불거리는 혓바닥만 뽑고 올 거다.”
“두리쉬마님!”

박상준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럼에도 질질 끌리자 다급히 킬리언에게 눈짓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킬리언까지 매달렸음에도 두리쉬마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두리쉬마가 두 용사를 끌고 현관 앞까지 당도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혹시 몰라 와보길 잘했군요. 두리쉬마님,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안 됩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사람들을 죽이는 거 말입니다.”

두리쉬마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너도 그렇고 이것들도 그렇고 나를 무어라 알고 있는 거냐. 안 죽인다!”


“그러면?”
“혀만 뽑을 거란 말이다!”

남자, 김우진이 혀를 찼다.

“털끝하나 건드려선 안 됩니다.”


“대체 왜? 이 세계는 왜 모욕 결투가 없는 거지? 왜 이렇게 관대하냔 말이다!”
“그래야 사회가 돌아가니까요.”
“타이탄의 사회는 그러지 않아도 잘 돌아간다.”
“여긴 지구입니다.”

김우진의 단호함에 두리쉬마가 결국 포기하고 등을 돌렸다.

“시, 신님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연옥에서 김우진을 본 전적이 있는 박상준과 킬리언이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두리쉬마님을 말리도록.”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

그들을 지나친 김우진이 두리쉬마의 앞에 앉았다.

“뭐냐.”
“제가 좋은 해결책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혀를 뽑아버리는 것보다 좋은 해결책은 죽이는 것뿐인데?”
“지구에서는 그렇게 안 합니다. 자고로 국회의원은 정치적으로 죽여야지요.”
“쉽게 말해라.”
“방금 네 번째 카운트다운이 떴습니다.”

기한은 일주일. 예상대로다.

“곧 네 번째 게이트가 열립니다. 이번만 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막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고작 그걸로 해결이 된다고?”
“물론입니다.”

어차피 한국의 화력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힌다. 게이트의 위치를 알고 군대를 미리 대기시켜 놓는다면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다. 굳이 당장 용사들이 필요하지는 않는 거다.
다만, 용사들이 필요 없는 것과 진짜 용사들이 없는 건 다르다.

특히나 그 시점이 여론이 용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한 상황이라면 더욱 더.

“너희들도 전부.”
“예!”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여론이 악화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감히 정부를 상대로 협박하는 것이냐고 오히려 괘씸하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없다. 처음에는 그런다고 해도 결국에 여론을 돌아설 테니.

용사들은 대체가 불가능한 전력이기 때문이다.

이미 새로운 게이트가 생길수록 마물의 수준과 양이 올라간다는 것이 밝혀진 상황이다.

그런데 든든하게 버텨주던 세 명의 각성자들이 정부와 여론 때문에 돌아섰다?

일을 주도한 놈들은 단숨에 매국노가 되어 매장될 거다.

“···음, 완전히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확실히 이해한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번째 게이트가 열렸다.

* * *

[실화냐?]
[양반탈 인도에 떴다. 뭐임?]
↳갑분인도?
↳뭐임?
↳ㅅㅂ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 같아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 ㅋㅋ
↳매국노새끼네
↳매국노ㅇㅈㄹ 열심히 싸워준 사람들한테 ㅈㄹ할때는 언제고
↳와 이거 ㄹㅇ이냐?

[각시탈도 등장]
[남아공에 떴다 ㅅㅂ 이거 맞냐?]
↳와 설마 다 탈주한 거임? 그거 조금 뭐라고 했다고?
↳그거 조금?
↳아예 묻을 기세로 정부고 언론이고 다 쌍으로 지랄 해놓고 이제와서 그거 조금? 개역겹네
↳국회의원 몇 명이 했지. 그게 어떻게 정부임
↳정부가 허락 안하면 대놓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음? 너튜브고 커뮤고 다 같이 물어뜯더만
↳설마 말뚝이탈까지 간 건 아니겠지?
↳ㄹㅇ제발 하나만이라도 남아주라
↳우리가 미안해
↳ㅅㅂ말뚝이탈 뉴질랜드에 떴다...
↳영상 보고 옴. 여전히 존나 호쾌하네. 근데 왜 한국 아님 ㅅㅂ
↳우리 ㅈ된 거임?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양반탈, 각시탈, 말뚝이탈 돌아오기 서명운동(1/50000000)
↳꽃이 지고 나서야 보인 걸 알았습니다...(2/50000000)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 제발 돌아와(3/50000000)

* * *

“절대소장신님. 큰일 났습니다.”
“응?”

그리고 한국의 여론이 요동치고 있을 때, 김우진은 한 가지 급보를 받았다.

“···가자.”

김우진이 균열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8) >

“음, 나쁘지 않은 반응이구나.”

두리쉬마가 패드를 내려 커뮤니티를 살폈다. 그에게 호의적인 글과 댓글들을 살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국회의원의 혀를 뽑겠다고 난리치던 타이탄은 박상준에 의해 커뮤니티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단순히 다른 나라에서 시작하는 게 효과가 있냐는 두리쉬마의 물음에 태블릿을 건네준 덕분이었다.

“그래, 지성체라면 고마운 것에는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이 몸을 당연하게 여기다니.”

물론.

“이 벌레 같은 놈이 뭐라고? 매국노? 난 애초에 이 차원의 존재도 아니다!”

콰직-

타블렛의 희생이 조금 많이 필요했다.

“···100 개정도 주문해놔야겠네.”

다행히 박상준은 돈이 많았다.

“나도 100 개 추가로 주문하겠다.”


킬리언도.

* * *

“두리쉬마님, 그만 보시고 준비하시죠. 시간이 됐습니다.”

박상준이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양반탈을 썼다.

“굳이 내가 가야하는 건가?”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가셔야 합니다.”

킬리언이 단호하게 외쳤다.

“그래야 저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괜히 두리쉬마님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두리쉬마님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꽤나 성가시지 않습니까?”
“그럴듯하군.”

그럴 듯한 이유에 두리쉬마가 납득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

“정말 그런 이유입니까?”
“나만 맞을 순 없지···. 자고로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고 했다.”
“슬픔이 아니라요?”
“고통을 슬픔으로 승화시켰지.”
“순순히 협조할 수도 있잖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마음대로 하세요.”

사실 어느 정도 필요하긴 했다. 모두 차원을 구할 정도로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다 보니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니까, 그리고 신들이 요구해서 막고는 있지만 남 밑에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거다.

다섯이 있으면 다섯 모두가 대장이 되려고 하는 게 용사니까. 용사들 모두 자신이 특별하다는 자각이 있다.

두리쉬마의 주먹은 그들에게 특효약이 될 것이다.

“가자.”

가면을 쓴 세 사람이 호주로 향했다.

한국과 호주, 미국과 호주, 브라질과 호주, 프랑스와 호주.


거리도 제각각이고 차라리 네 국가 중 한 곳에서 만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호주를 택한 것은
어떤 용사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싸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같잖았다.

‘어차피 전부 두리쉬마님한테 한 대씩 맞으면 끝날 것들이.’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사소한 것으로 싸운다는 걸 알면 신께서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생각이란 게 없는지.

박상준이 혀를 찼다.

마법을 이용해서 기척과 모습, 흔적을 숨기고 바다를 질주하며 달려가니 호주까지는 금방이었다.

호주, 그레이트샌디 사막 한 가운데. 세 사람이 도착했다.

황량한 사막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여섯 개의 의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세 명의 선객이 있었다.

“늦었군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주황빛 머리카락, 푸른 눈, 그리고 함께 어우러지는 새하얀 피부. 용사들의 만남을 주도한
미국의 용사, 카일리 로퍼였다.

“죄송해요. 준비에 좀 시간이 걸려서요.”

셋은 태연히 빈자리에 앉았다. 용사들의 시선이 꽂혔다.

“저 자가 새로운 용사인가? 크군.”


“한국인이 아닌 것 같은데 왜 한국에 있는 거지?”

무의식에 가까운 혼잣말들 사이로 질문이 날아왔다.

“그런데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지?”

검은 머리에 푸른 눈에 덥수룩한 수염의 남자, 프랑스의 용사, 니콜라 뒤리스였다.

“문제 있습니까?”
“서로 간에 대화를 하자고 나온 자리에 가면을 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나?”
“그럼 그쪽도 쓰시면 됩니다.”
“뭐라고?”
“저희는 얼굴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사생활을 빼앗기고 싶지 않거든요. 저희가 가면을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벗길 생각을 하지 말고 다 함께 쓰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는 우리밖에 없어.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제 철칙이라.”

박상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니콜라가 인상을 구겼다.

“서로 견제하는 건 거기까지 하죠. 가면을 쓰던 말던 우리는 지구를 지켜야 하고, 종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협력해야죠.”

카일리 로퍼가 그들을 중재했다. 험악해지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일단 서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인 분들도 있을 테니 자기소개부터 하도록 하죠. 저부터 할게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리 로퍼에요. 아시다시피 미국인이고 아르딩이라는 차원을 구했죠. 중력을 다룰 수 있어요.”


다음은 니콜라 뒤리스였다.

“니콜라 뒤리스. 위대한 프랑스고 메르데이나를 구해 영웅이 되었다. 특별한 권능은 딱히 없다. 검을 쓰는
기사다.”
“브루노 모라. 브라질 상파울로 출신이고 상파울로 FC 의 열렬한 팬이지. 카로스라는 차원을 구했고.”

따악, 브루노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진들이 떠올랐다.

“보시다시피 마법사.”
“저는 그냥 박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국인입니다. 델라임이라는 차원을 구했고 창과 번개를 다룹니다.”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건가요?”
“정체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다니까요?”
“킬리언. 미국인이고 아른이라는 차원을 구했다. 특기는 강체술이다.”
“···미국인?”
“미국인이 왜 한국에서?”

용사들이 의문을 표했으나 킬리언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앉았다. 카일리의 시선이 각시탈에 꽂혔다.

“내 차례인가.”

그리고 그 때, 두리쉬마가 일어났다.

“내 이름은 두리쉬마다. 딱히 구한 차원은 없고···.”

순간, 두리쉬마가 기세를 폭발시켰다.

“큭···!”
“이게 무슨!”
“뭐하는 짓이에요!”

용사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앞으로는 네놈들이 한국으로 와라. 감히 이 몸에게 오라 마라 지껄이지 말고.”

그가 선언했다.

“뒤지기 싫으면.”

* * *

얼마 전에는 두리쉬마가, 오늘은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집을 방문했다.

얼마 전에는 두리쉬마에게 용무가, 오늘은 알베니우스에게 용무가 있기 때문이다.

달그락, 김우진이 냉장고에서 칠링한 잔을 꺼내고 쉐이커에 술들을 부어 흔들었다.

“저는 지금의 판이 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지구의 평화가. 그래서 프로니우스가 지구에 종말을 일으켰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용사들이 그랬고, 지구를 중심으로 집행자들을 이용해 감시망을 형성한 것이 그렇다.

“하지만 퀵 배송 사태를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필요하다는 걸요.”

검은 검으로 막아야하고 총은 총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차원룡은 차원룡으로 막아야 한다.

아무리 신이라고 할지라도 전체적인 평균이 비슷하다면 공간 마법에 대한 권능은 결코 그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놈의 평균은 아무리 못해도 주신급 이상이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알베니우스님이 계시죠.”

김우진이 잔을 건넸다.

“···난 프로니우스한테 상대가 되지 않아.”


“상대가 되지 않으면 되게 만들면 되죠.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절대신이라고 불리는 게 오글거려 싫어할 뿐, 김우진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보고 신이 되라고?”
“어둠의 사도와 맞서려면 빛의 사도가 되어야죠.”
“나는 이미 한 번 거절했는데. 그 이후에는 소식이 없어.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사실 그게 제일 문제다. 덕분에 아카식 레코드는 다시는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에게 신이 될 것이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신들을 잡아먹고 스스로 더 위대해졌지만 알베니우스는 아니었다.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카식 레코드라도 설득하려고?”
“예.”
“···그게 되는 건가?”
“관념적인 의지라는 게 그렇다고 의지가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라서요. 그 방향성이 같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아카식 레코드는 그저 맹목적으로 균형을 맞추고 우주를 수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거기에 특별히 뭐 할 것도 없다.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기록이자 도서관이고 이미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다.

거기에 알베니우스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왜 필요한지 추가로 새겨 넣으면 그만이다.

그럼 알아서 알베니우스가 우주의 평화와 균형을 위해 필요하다가 판단하겠지.

평소라면 어림도 없지만 위기의 상황이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좋아, 백 번 양보해서 네 말대로 된다고 치자.”

하지만 모든 난관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직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다.

“백신전은 이미 정원이 찾잖아?”

우주가 생기고 아카식 레코드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신들을 선택하기 시작하면서 단 한 번도 백 명이 넘은 적이


없다.

그래서 백신전이고, 그래서 신들이 더 특별하다. 유한하기에 그 가치가 더 빛을 낸다.

“사실 그건 이미 해결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알베니우스님을 부른 것이기도 하고요.”


“해결 돼?”
“이틀 전, 신이 한 명 죽었습니다.”
“······!”

콰직, 김우진이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이 산산조각 났다. 칵테일이 그의 손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프로니우스, 그 개새끼 손에.”

* * *

방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방심하고 있었다.

프로니우스가 공간 부분에서는 독보적인 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지구로 마물들을 퀵배송 하는 것에서


그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상, 그 놈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여겼다.

이런 저런 대비를 해놓았지만 대부분 지구에 한정되었다. 놈이 무슨 짓을 하면 지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기에.

함정에 빠졌다. 놈이 만든 판에서 인형 마냥 그대로 움직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의 실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명하자면 변명할 거리가 아예 없지는 않다.

“공간 권능이었습니다.”

우주는 넓고 백신전의 커버하는 영역도 넓다.

김우진은 영역의 방어를 명령했고 신들은 흩어져 있었다. 프로니우스는 그 빈틈을 노렸다.

“신 앞에 직통으로 통로를 딱, 열었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퍼져 있다고 해도 신들이고 백신전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락하고 도움을 줄 수단은 당연히 있었다.

문제는 프로니우스의 권능이 그 모든 것을 앞섰다는 것.


“다른 신들이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분입니다.”

하지만 프로니우스와 마주친 신은 그 몇 분을 버티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해당 신이 김우진 사태로 인해 새롭게 신이 된 말단에 가까운 자라서.


예상치 못한 기습이라서.
프로니우스가 생각보다 더 강해서.

“정확히 나한테 바라는 게 뭐지? 내가 신이 된다고 해도 놈을 이길 수는 없어.”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알베니우스님에게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김우진이 손가락 하나를 폈다.

“놈이 또 다시 통로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10 초.”

아니, 30 초 만에.

“그저 통로를 열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언제나 그렇듯, 결국 대장을 잡으면 끝나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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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지구의 종말(9) >

“···뭐라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돌아버린 건가요?”

용사들이 발끈했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압니다.”

카일리 로퍼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21 세기 정보화 시대다.

스마트폰이 카메라가 되고 인터넷만 되면 어디든지 세계의 일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고 용사들에 대한 전투 장면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다.

수많은 용사들이 특별하지만 두리쉬마는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맨 주먹으로 모든 것을 으깨버리는 압도적인


힘은 이 자리의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서 강짜를 부리는 것에 숙이고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그들 또한 하나의
차원을 구한 전적이 있는 용사였으니.

“하지만 우리 또한 용사입니다. 당신은 조금 더 동종업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존중이라.”

두리쉬마가 턱을 긁적였다.

“거기에는 어폐가 있다.”


“무슨 뜻이죠?”
“일단 말했다시피 나는 용사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용사가 아닌데 어찌.”
“그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두 번째.”

두리쉬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한 킬리언이 함께 웃었다.

“나는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듣지 않는다.”


“···뭐라고요?”
“너희 셋 모두 다.”

내게 무언가 요구를 하고 싶다면.

“나를 이겨봐라.”

그럼 너희들이 바라는 모든 걸 해줄 테니까.

“쫄린다면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이놈들은 날 돕지 않을 테니.”


“···오만하군요.”
“아니, 나는 오만한 게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거다.”

그럴 힘이 있는 자는 오만한 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것이니.

“그러니까 지금 우리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래.”

니콜라 뒤리스가 검을 뽑았다.

“다들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참을 건가? 용사라는 작자들이?”


“···난 평화주의자인데 어쩔 수 없지. 도발에는 또 응해주는 스타일이라.”

브루노 모라가 천천히 마나를 끌어 모았다.

“···좋아요. 그렇게 자신하신다면 한 번 증명해보시죠.”

하지만 후회하지 마세요.

“저는 적당히라는 걸 모르니까.”

무거운 중력이 두리쉬마를 찍어 눌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두리쉬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니콜라가 오러를 두르며 돌진하고.

─!

마법 번개들이 두리쉬마를 덮치고, 중력이 가중되는 것으로.


그리고 박상준과 킬리언이 거리를 벌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말도 안 돼.”
“···미친 괴물 같으니.”
“와, 진짜 세네. 형님으로 모셔도 될까요?”

카일리 로퍼의 중력 권능은 두리쉬마를 붙잡아 두지 못했다.


브루노 모라의 마법들은 두리쉬마에게 치명타라고 할 만한 것을 입히지 못했으며.
니콜라 뒤리스의 검이 오러와 함께 부러졌다.

압도적인 전투는 아니었다.

카일리 로퍼의 권능은 두리쉬마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해도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
브루노 모라의 마법들은 치명타는 아니었으나 두리쉬마에게 충분한 타격을 주었으며.
니콜라 뒤리스의 검은 그 빈틈을 찌르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모든 건 다 한 끝 차이였으나 한 끝 차이라고 해서 승패가 결정 나지 않는 건 아니다.

결국 그들은 쓰러졌고 두리쉬마는 굳건히 서 있다.

결과가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모든 일의 과정은 중요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더 하고 싶은 놈 있나? 얼마든지 받아주겠다.”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카일리의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신이나 집행자이십니까?”


“아니다.”
“···그럼 대체?”

신이나 집행자가 아님에도 용사들 셋을 압도하다니. 이런 게 가능한 일인가?


“알고 싶다며 날 이겨라.”
“······.”
“너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다시 도전해서 나를 이기고 원하는 걸 쟁취하거나.”

아니면.

“내게 복종하거나.”
“···대체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종말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거라면 서로 잘 협력해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네놈들이 서로 이권을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면 내가 귀찮아진다. 이게 깔끔하다.”
“······.”
“자, 선택해라.”

첫 번째냐, 두 번째냐.

모든 용사들이 두 번째를 선택했다.

“바로 이거야. 역시 고통을 나누니 즐거움이 되는군.”


“킬리언님, 방금 되게 간사해보였습니다.”
“내 롤 모델로 삼겠다.”
“예?”
“역시 세상에는 힘이면 안 되는 일이 없어.”

힘으로 안 된다면 그저 힘이 부족할 뿐이다.

두리쉬마가 그것을 보여줬다. 그를 바라보는 킬리언의 눈에 열망이 깃들었다.

* * *

“세상은 불공평하다. 썩어버린 게 틀림없어.”

어떻게 운동을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냐는 킬리언의 물음에 두리쉬마는 타고 났다고 이야기했다.

“근육도 역시 재능이다. 나 같은 범재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갈 수 없었어.”


“그 발언은 논란이 좀 될 것 같은데요.”
“딱히 신경 안 쓴다.”

두리쉬마는 다섯 용사들을 모두 규합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용사들은 이제 두리쉬마의 명령을 따를 수족이


되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한국에 있는 내 집에서 한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오지 마라. 괜히 내 얼굴이 팔리는 걸 원치 않으니까.”
“예.”
“그리고 앞으로 각자 영역을 보다 확실하게 할당한다. 각자···.”
몇 가지 사항들을 알려준 두리쉬마가 회담을 파했다.

“연락 잘 받아라. 괜히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예!”
“예써!”

용사들이 각자의 나라로 사라졌다.

“우리도 가자.”
“예!”

마지막 용사들이 떠났다. 마법과 권능으로 복구된 사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다.

* * *

현재의 백신전은 구 백신전과는 다르다.

백신전을 이루는 많은 이들이 물갈이가 되었고 그 원인은 죽음이다.

더 이상 신들에게는 죽음이 낯설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신의 죽음에는 직간접적으로 김우진이 연관되어 있었다. 오직 김우진과 그 측근들만이 신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외부에 의해 신이 죽었다.

그것도 백신전의 경계 태세가 날선 고슴도치와 같은 상황에서.

신들의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신들은 불안해했다.

아무리 말단이라고 한들 신은 신. 그런 신이 고작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지원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과연 어떤 신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그 자가 자신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경계태세를 유지한다. 번복은 없다.”

하지만 신들이 불안해한다고 경계 태세를 줄이고 다시 신들을 백신전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프로니우스가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김우진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신이라는 것들이, 태초부터 우주를 지배해왔다는 것들이 신 하나가 죽었다고 지레 겁을 먹어? 그렇다면
이제 종말을 막지 않을 거냐?”
“······.”
“한심한 것들.”

김우진이 혀를 찼다. 몇몇 신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심한 것들은 아니다. 일단은 그의 말대로 태초부터 우주를 지배해온 지배자들이니까.

단지, 해답이 없는 함정에 서서 무의미한 희생을 하기 싫을 뿐이다. 적절한 광명을 보여준다면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도 않을 거다.

“방법은 있다.”

때문에 김우진은 당근을 던졌다.

“그러니까···.”
“오.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알베니우스의 공간 권능은 백신전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새롭게 신이 됐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역시 절대신님이십니다!”

그리고 신들이 환호했다.

* * *

대회의가 끝났다.

“넌 안 가냐?”

모든 신들이 떠난 자리, 김우진과 율리아만 남았다.

“정말이에요? 알베니우스님이 차원문을 바로 열 수 있다는 게?”


“아마도.”
“···대답이 되에에에에에에게 모호하네요?”
“언젠가는 되겠지. 신이 된 것도 맞고, 공간의 권능이 강화된 것도 맞으니까.”

신들을 안심시킨 달콤한 속삭임들은 전부 진실이었다.

“사기네요.”
“난 애초에 당장 된다고 한 적이 없어.”
“···지금 몇 분 걸리는데요?”
“지구에서 연옥까지 2 분.”
“···생각보다 되게 빠르네요? 이제 막 신이 되셨는데 그 거리를 2 분만에 끝내요?”

지구와 연옥 사이에는 족히 수십 개의 차원들이 존재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말했잖아. 알베니우스가 생각보다 능력이 있다고.”

겉보기에 좀 허술하고 푼수 같아서 그렇지 오랜 시간 신들을 상대로 도주해온 능력자다.

신들의 질긴 추격을 모두 벗겨내고 도망칠 정도면 공간 권능에 관해서는 거의 세계관 원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단지, 아직 제대로 된 신의 힘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야.”

만약 적응하고 보다 능숙해지면 그곳이 어디든, 차원문을 여는 걸 10 초로 끊는 것도 꿈은 아니다.

“문제는 그 기간이군요. 신들에게 장담하신 30 초에 비하면 훨씬 길어요. 물론 신들이 그 몇 분도 못 버틸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도 어떤 신보다 가장 빠르기는 해.”

우주의 중심인 연옥에서 종말 차원들과의 경계까지는 단 5 분이 걸렸으니까.

“그리고 갈구면 어떻게든 해내긴 하더라고.”


“갈궈요? 지금 알베니우스님은 연습하고 계신 건가요?”
“맞아. 훌륭한 스승들 밑에서 훈련 중이야.”
“훌륭한 스승들이요?”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세상에 공간 권능에 관련해서 알베니우스를 가르칠 만한 자들이 있었나?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으로?

“그래, 엄청 훌륭한 스승들이지.”

프흐, 김우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혼자만 웃지 말고 저도 같이 알자고요.”

* * *

찰칵-

스톱워치가 멈춘다.

- 실패. 다시.
- 다시!

파랑새와 호랑이 정령이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차원룡을 압박한다.

- 시간 한참 오버!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 한심해!

“못 해. 때려 죽여도 지금은 안 돼.”

알베니우스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대자로 누웠다. 쥐어짜다시피한 드래곤 하트에는 더 이상, 어떠한 기운도 남이
있지 않았다.

- 못하는 건 없어!
- 없어!
- 안 하는 거야!
- 안 하는 거야!
찰싹, 릴리의 날개가 알베니우스의 이마를 두드렸다. 나르가 그의 옷을 물고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이것들이 쌍으로···! 나 좀 내버려 둬!”

- 안 돼! 소장이 그랬어! 30 초만에 할 수 있을 때까지 갈구라고!


- 맞아!

“갈구라고는 안 했잖아! 그 자리에 나도 있었거든?”

- 받아들이는 건 내 마음이라고 했어.


- 했어!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악덕도 이런 악덕이 없었다.

- 빨리!
- 빨리!

계속되는 채근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 먹어.

릴리가 영약 하나를 건넸다. 동 난 드래곤 하트를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하지만 사막에 단비 정도는 되리라.

“김우진 같은 놈들.”

- 칭찬 고마워!
- 나도 소장 같아? 헤헤.

“···말을 말자.”

설마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알베니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훈련 방법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가 김우진에게, 그리고 율리아에게 행했던 것을 다시 그에 맞게 조금


개조했을 뿐 큰 틀을 같다.

그는 공간의 권능을 사용하고 두 세계수는 막는다.

다른 곳이라면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세계수에게는 공간 관련의 권능이 아예 없으니까.

하지만 그 장소가 두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연옥이라면 이야기는 달리진다. 각각 수십의 신들을 섭취한 그들이
가진 신력은 거의 폭거에 가까운 수준이다.
강제로 알베니우스의 기운을 일그러트리고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을 피해 권능을 사용하려면 엄청난 정신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방대한 우주의 기운은 기본 값이고.

김우진과 율리아를 윽박지르며 가르칠 때는 재밌었는데 직접 당해보니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선생을 자처하는 것들이 너무 시끄럽고 성가셨다.

“···그래, 다시 해보자.”

알베니우스가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이 모든 원인은 신들이지만 그때 일을 주도한 자들은 대부분 죽었다.

그리고 김우진의 주도 아래 새롭게 판이 짜졌다.

때문에 알베니우스는 복수를 잊었다. 증오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거짓이지만 거의 흐릿해졌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지금의 평화를, 평온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그간 쫓겨다니며 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기에.

‘네 심정은 이해해. 그러니 너도 내 심정을 이해해라.’

프로니우스. 그러니 나는 너를 막겠다.

나는 지금이 너무 마음에 들거든.

그리고 너 때문에 이런 좆같은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열 받아.

알베니우스가 권능을 발현시켰다.

- 막아!
- 막아!

세계수들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0) >

지구는 평화롭다.

게이트와 괴물이라는 재앙이 터지긴 했지만 지구의 인류에게는 현대 군대와 각성자라는 비빌 언덕이 있었다.

게이트는 군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각성자들에 의해 빠르게 정리되었으며 첫 게이트의 피해를 제외하고 인류가
얻은 피해는 생각보다 적었다.

슬픔을 떠나보내고 상황이 안정되자 인류는 미지에 대한 공포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으로 눈을 돌렸다.

[신재생에너지]
[만화 같은데 보면 막 괴물 사체가 새로운 자원이 되고 그러는데 현실은 그런 거 없음?]
↳없음
↳왜?
↳죽으면 사체가 남긴 하는데 독기로 가득해서 어디 써먹질 못한다더라.
↳독은 만들 수 있겠네
↳왜 마정석 없음?
↳대신 독으로 황폐화된 대지를 드리겠습니다!
↳아 필요 없다고ㅡㅡ

[각성자 티어 정리]
[어디까지나 작성자 임의대로 나눈 것이니 ㅈㄹㄴㄴ
*2 티어
카일리 로퍼(미국), 브루노 모라(브라질), 니콜라 뒤리스(프랑스)
*1 티어
양반탈(한국), 각시탈(한국)
*********************************************************넘사
*초월티어
말뚝이탈(한국)
반박시 매국노]
↳ㅉㅉ한국 상대로 같잖은 짓 한 새끼들 빨아주는 꼬라지하고는. 한국 상대로 기 싸움해서 사람들 기강 잡으려고
한 새끼들을 왜 빨아줌?
↳첫댓 조졌네
↳어휴
↳그럼 다 쫓아내고 괴물한테 뒤져야 함?
↳ㅂㅅ
↳ㅋㅋㅋㅋㅋㅋㅁㅊ국뽕 거하게 들이 마시네
↳국뽕 빼고 말뚝이탈은 ㅇㅈ
↳ㄹㅇ말뚝이탈은 확실히 클라스가 다른 것 같긴 하더라
↳각시탈이 양반탈보다 1.5 배 정도 덩치가 큰데 말뚝이탈이 각시탈보다 2 배는 큰 거 같음
↳거의 고릴라ㄷㄷ

[요즘 국방비 상황.jpg]


[전 세계적으로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올라가는 중. 이러다 전쟁나는 거 아니냐 ㄷㄷ]
↳팩트. 이미 났다.
↳이미 다 때려 부수는 중이다.
↳아 ㅋㅋ 3 차 대전이 인간 대 인간이 아닐 줄은 몰랐지
↳ㄹㅇㅋㅋ

[UN, 한국에 협조 요청.jpg]


[jpg]
[3 줄 요약
각성자의 중요성이 대두됨
한국에 각성자 세 명. 각성자 강국
UN 한국에 협조 요청]
↳한국: 강국이요? 제가요?
↳누군지도 모르는데ㅋㅋㅋㅋ
↳아무튼 강국 펄럭-
↳근데 진짜 탈쟁이들 정체가 뭐냐
↳한국을 너무 잘 아는 한국인
↳ㄹㅇㅋㅋ얼굴 안 깐 게 신의 한수임

[이독제독]
[파화 바이오에서 마물의 사체를 연구해 마물에게 통하는 독극물을 만들겠다고 1 천억 투자함]
↳이독제독ㄷㄷ
↳너의 독으로 너를 죽여주겠다!
↳과연 될까?
↳되면 대박이긴 할 듯
↳가스 가스 가스!
↳미국은 이미 하고 있다는 듯

[각성자들 근황]
[근데 각성자는 더 안 나오는 거임? 말뚝이탈이 추가된 걸 보면 킹능성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각성자임
↳ㅈㄹㄴ
↳상태창! 상태창! 상태창!
↳양반탈보다 강한 각시탈, 각시탈 보다 강한 말뚝이탈. 어쩌면 각성은 늦게 할수록 더 강한 걸지도?
↳그래서 내가 아직 각성을 안 했구나
↳각성을 안 했구나 X 각성을 못 하는 구나 O

마물에 대한 연구, 각성자들에 대한 탐구. 사람들은 더 이상 마물과 게이트를 지구와 따로 때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성자들은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이들이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생겨났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들의 수준은 저희가 상상할 수 없는 이상의 것입니다. 그런 게 하루아침에 그냥 뚝
떨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전제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존재했고 단지 기회가 되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존재를 드러낸···.】

“지구 같이 마력이 없다시피한 차원에서 마나를 다룰 능력자가 애초부터 있었을 거라고? 대가리에 똥만 찼군.”

삑-

【각성자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각성자가 되는 걸까요?】


【얼마 전, 한국의 연구진들은 게이트가 열릴 때, 특수한 기운이 폭발하듯 생성된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특이한···】
【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게이트가 생성될 때,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이 그 에너지의 파동에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말도 안 되는 망상이군.”

삑-

【국회는 오늘 오전 11 시, 각성자 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각성자들의···.】


【정부는 각성자들이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되니 자발적으로 정부와 협조 관계를 구축하기를···.】

뉴스와 커뮤니티에서는 하루 종일 각성자와 게이트, 그리고 마물에 대해 떠들어댔다.

볼만큼 본 두리쉬마가 티비를 껐다.

“이렇게 태평한 종말은 난생 처음 본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번이 두 번 째에 불과하지만요.”
“저도입니다.”

물론 그건 지구가 특별히 잘 막아내서가 아니다. 김우진이라는 우주의 지배자가 지구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용사들과 두리쉬마를 지구에 풀어놨기에 헬 모드로 진행됐어야 할 종말이 이지 모드로 개편되었다.


물론 이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른다.

지금은 쉽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한계가 올테니까.

‘프로니우스. 대체 무슨 꿍꿍이냐.’

두리쉬마는 프로니우스와 직접 마주쳤고 싸운 전적이 있다.

그가 살면서 벽과 마주한 느낌은 딱 세 번이었다. 아직 어릴 때, 약하던 그가 복수는 꿈도 못 꾸고 도주할 때


스친 주신, 칼카르.
주신들까지 섭취하여 절대신이 된 김우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둠의 사도가 된 프로니우스.

첫 번째는 어디까지나 그가 너무 약했기에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만 다른 두 개는 달랐다. 최고의 상태에서


만전을 다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대적.

두리쉬마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권능을 이용해 백신전을 급습했을 것이다.

결국 김우진만 잡으면 끝나는 대장전이니 이런 무의미한 소모전은 의미가 없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프로니우스는 간을 보고 있다.

물론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지구의 종말은 잘 막아내고 있지만 신 하나를 죽였다고 했으니.

다만, 그것 때문에 김우진이 제대로 빡쳤다. 두리쉬마가 보기에 좋은 한 수라기 보다는 오히려 잠자는 사자의
수염을 뽑은 꼴이었다.

‘아니지, 너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는 복수귀다. 감정이 이성을 먹고 이 세상 전체를 불태우고 싶어하는 미친놈.

어쩌면 김우진과 신들에게 분노를 심어주는 것 자체가, 너희들도 그렇게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을 수 있다.

“두리쉬마님.”

박상준의 부름에 두리쉬마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다시 시작되었던 네 번째 게이트의 카운트다운이 고작 10 분 남았다.

“가자.”

셋은 가면을 썼다. 두리쉬마는 송파구로, 박상준과 킬리언은 각각 강원도와 김해로 향했다.

그리고 시간이 0 이 되자 게이트가 열렸다.

“······.”
하지만 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진득한 불길함과 섬뜩함이 은은하게 새어나온다.

두리쉬마가 망치를 소환했다. 마른 침을 삼켰다.

“쉽게 보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쉽게 막아내고 있다고 했더니···.”

게이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김우진의 개 노릇을 하고 있었군.”


“···프로니우스.”

새하얀 백발에 황금의 눈. 차원룡들의 상징과도 같은 색은 그가 누구인지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짝짝, 프로니우스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신이 아니기에 업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집행자 이상으로 강하지. 일반적인
종말 따위는 우습겠어.”

하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지.

프로니우스가 손을 뻗었다.

“널 그냥 보내준 건 내 실책이다. 동족을 잊고 신들에게 굴복한 머저리가 다시 신들에게 복종하는 건 당연한 건데.
지금이라도 되돌려야겠다.”

강력한 인력이 그를 잡아끌었다. 두리쉬마가 다급하게 힘을 주고 버텼으나 빠르게 끌려들어갔다.

꽈악, 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망치를 휘둘렀다.

─────!

거대한 반탄력이 두리쉬마를 덮친다. 절로 신음이 튀어나오지만 덕분에 잠깐이나마 인력을 끊어낸다.

다급하게 등을 돌렸다.

“···귀찮게 하는군. 어차피 도망쳐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프로니우스가 게이트 사이로 한 걸음, 내딛었다. 차원 간의 방벽이 사라지자 감춰져 있던 괴물의 기세가 드러났다.

인력이 강해진다. 두리쉬마의 육신이 순식간에 프로니우스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간다.

─!

타이밍 좋게 다시 한 번 망치가 빛을 발하지만 주먹이 마중 나온다.

두리쉬마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진다. 프로니우스가 빠르게 따라 붙는다.

“걱정 마라. 그간 어둠의 사도로 있었던 정을 생각해서 죽이지는 않으마.”

주먹이 연달아 꽂힌다. 두리쉬마의 강철 같은 육신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헛소리···!”

망치가 주먹과 충돌한다. 허나 튕겨져 나가는 것은 망치 쪽이었다.

“만전일 때도 이기지 못했는데 힘을 다 잃고 껍데기만 남은 지금에는 승산이 있을 것 같나?”

손아귀가 찢어진 두리쉬마가 주먹질을 했다. 허나 가볍게 붙잡힌 주먹은 악력에 으스러졌다. 그가 신음을
내뱉었다.

“투지는 인정하지. 과연 타이탄이다. 허나, 평화에 찌들어 복수를 잊어버리고 신들과 타협하고 굴복한 시점에서
넌 쓰레기에 불과하다.”

프로니우스가 으르렁거렸다.

“신들에게 죽은 타이탄들이 저승에서 너를 저주하고 있을 것이다.”


“복수는 무사히 이루었다.”
“대체 어딜 봐서? 신들이 남아 있다. 백신전이 존재한다. 놈들이 만든 이 세상이 아직 굴러가고 있다.”

그게 어떻게 복수를 이룬 거지?

“넌 그냥 덩치 값도 못하고 굴복한 거다. 무서워서, 끝도 없는 전쟁에 팔이 부러지면 발로 차고, 발이 잘리면


입으로 물고, 이빨이 뽑히면 박치기를 할 용기가 없···!”

그때였다.

─────!

굉음이 일었다. 유성이 떨어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두리쉬마와 프로니우스가 튕겨져 나갔다.

프로니우스가 자세를 다잡았다.

“···설마 지구에 있었나?”


“바로 코앞에 있었지, 개새끼야.”

대놓고 게이트 열고, 대놓고 지구에 발을 들어와 두리쉬마를 잡으려고 해놓고 무사히 갈 줄 알았어?

“내가 개호구로 보이니?”

화륵, 화염이 타올랐다.

김우진이 질주했다.

* * *

김우진이 지구를 살피러 잠시 떠났고 율리아는 그를 대신해 정기 보고를 주도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주를 유영하는 마물이 단 한 마리도 없는 게 불안합니다.”


종말이 일어나지 않아도 가끔 종말 차원을 벗어난 마물들이 우주를 유영하다 멀쩡한 차원 근처까지 오기도 한다.
그것들을 처리하는 것도 신과 집행자들의 임무였다.

그런데 지구의 종말이 일어난 이후, 그러한 마물들까지도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구의 종말이 시작된 이후, 새로운 종말 또한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때가 됐는 되도요?”
“예, 종말 차원들과 더 없이 가까워진 차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폭풍전야. 전 우주가 아주 고요했으나 불안감만큼은 배 이상이었다.

“어둠의 사도, 아니 프로니우스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인가요?”


“···예. 작정하고 숨어 찾기가 힘듭니다. 무엇보다 마물의 수가 너무 많아져 섣불리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본거지를 찾는 건 무리라고 봐야겠네요.”

사실 찾아도 문제다. 종말 차원에서 지구까지 마물들을 그대로 배송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본거지를 옮기는 것쯤은
손쉬운 일일 테니.

결국 들어오는 걸 받아치는 방법 밖에 없다.

빗장을 단단하게 조이고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워낙 지켜야 하는 범위가 넓으니 완벽할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한다.

“지키는 입장이 되니 또 어렵네요.”


“······.”

반대의 공격하는 입장이 어떤 건지 아는 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저 그런데 알베니우스는 어디 있습니까? 이미 신이 되었다면 그도 회의에 참석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

차원, 연옥에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애쓰고 있죠.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신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알베니우스가 1 분 안에 차원 어디로든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줄 알고 있고, 그게


두려움에 떨면서도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이유였으니까.

“음, 알베니우스님은···.”

그때였다.

─!

신전 내부의 허공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균열은 빠르게 벌어지더니 곧 사람 하나를 토해냈다.

“드디어 해냈다!”

더 없이 창백하고 퀭한 폐인 하나를.
“김우진 어딨어! 김우진 나와! 내가 해냈다, 개자식아! 30 초도 아니고 무려 20 초! 20 초를 끊었다고!”

알베니우스가 포효했다.

“···와.”

율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이게 되네요?”

알베니우스님은 갈구면 어떻게든 해낸다.

역시 김우진은 틀린 말은 하지 않는다.

율리아의 머릿속에 정보 하나가 입력되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1) >

운이 좋았다.

지구의 집에서 쉬기 위해 지구로 왔고 그 타이밍에 게이트가 열렸다. 마물이 아닌 프로니우스가 직접 등장했다.

놈이 게이트 너머, 지구까지 힘을 투사하는 순간, 김우진은 그 존재를 눈치 챘다.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만나고자 했던 어둠의 사도를 죽이고 이 거지 같은 전쟁을 끝내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

가장 먼저 달라붙어 있는 두리쉬마와 프로니우스를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게이트와 프로니우스 사이를 점했다.

불꽃을 일으키며 질주한다.

프로니우스가 권능을 발현한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기묘한 감각과 함께 감각을 교란시킨다.

처음 당한 자들은 난해할 수밖에 없는 힘이었다. 하지만 김우진에게는 더 없이 익숙한 환경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적응하고 버텨낸 전적이 있으니까.

불꽃이 외부의 영향으로 기이하게 굴절했다. 그러나 빠르게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

프로니우스의 권능이 강화된다. 제자리를 찾아갔던 불꽃이 다시 흔들리지만 이미 김우진은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불의 검이 공간을 가른다. 궤적의 끝에 차원룡의 목이 놓여 있다. 새하얀 비늘로 뒤덮인 손이 마중 나온다. 불쑥


튀어나온 손톱이 검과 부딪힌다.

─!
불꽃이 비늘을 불태운다. 프로니우스가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궤적을 그리며 힘을 받은 불의 검이 재차 떨어진다.

─!

마력의 파편이 비산한다. 부서진 비늘들이 떨어져 나간다.

프로니우스가 숨을 들이킨다. 공기와 함께 응축된 마력을 그대로 쏘아낸다.

──!

코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불꽃을 밀어낸다. 김우진이 마력을 뚫고 다시 전진하나 그 순간, 분위기가
뒤바뀐다.

새하얀 마나가 시커멓게 돌변한다. 불길한 마기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인의 머리와 눈을 검게 물들인다.

─!

다시 한 번 검과 손톱이 부딪힌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래.”

눈이 마주친다. 똑같이 검으나 두 쌍의 눈동자가 가진 의미는 전혀 달랐다.

“어쩐지 어둠의 사도치고는 더럽게 약하다 했어. 날 상대로 힘을 숨길 여유가 있었다는 거지?”
“없으니까 꺼낸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이제와서 약자 코스프레 하지 마. 신도 죽인 새끼가.”

프로니우스는 대답대신 다시 한 번 마력을 쏘아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브레스가 김우진을 덮쳤다.

콰득, 검이 숨결을 가른다. 양 옆으로 흩어지며 마기가 폭발한다. 그 사이로 김우진이 다시 질주한다.

“역시 너와는 지금 만나선 안 되었다. 우리의 전투는 지금이 아니야. 기다려라. 내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웃긴 새끼네. 누가 도망치게 놔둘 줄 알고?”

치열한 접전 속에서도 김우진은 여전히 게이트를 등지고 있었다.

허나, 프로니우스는 담담히 웃었다. 그대로 공간을 찢었다.

“어디 가려고. 네 목숨은 여기 놓고 떠나야지.”

김우진이 공간을 비튼다. 차원룡들에 비하면 못할지언정, 그 또한 공간의 권능을 가진 신을 삼킨 전적이 있었다.
최선은 아니지만 적어도 열린 균열을 비틀어 방해할 수준은 되었다.

균열이 순식간에 닫혔다. 하지만 프로니우스는 코웃음치며 다시 균열을 만들었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 수백 개.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나는 균열들은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없애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

그렇기에 공간 자체에 간섭하기 보다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
새하얀 백염이 모든 게이트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 불꽃이 완전히 꺼졌을 때.

“···이렇게 농락당한 건 좀 오랜만인데.”

녹아내린 게이트들 속에 프로니우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간만에 속이 끓어올랐다. 과연 차원룡인지 정확히 어떤 차원으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이


세상에 완벽은 없다. 있긴 있겠지만 김우진의 수준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거겠지.

김우진이 폐허가 된 대지 위에 쓰러진 두리쉬마의 상세를 살폈다.

“두리쉬마님, 괜찮으십니까?”
“···죽을 것 같다. 역시 괴물 같은 놈이다. 너무 강하군.”
“확실히 두리쉬마님이 당할 만 했습니다. 이전 주신들보다 더 강합니다.”
“어둠이 작정하고 키워낸 사도다. 대체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모르겠군.”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어둠이 힘을 부여했다고 해도 저 정도 수준이 하루아침에 될 리는 없다는 거다.”
“어둠이 두리쉬마님을 미끼로 이용했다는 겁니까?”
“···말이 이상하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다. 다만, 어둠이 아니라 프로니우스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고 나를
이용한 거겠지. 난 멍청하게 놈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고.”
“그러네요. 두리쉬마님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
“농담입니다.”
“···빌어먹을 놈.”
“일단 백신전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시죠 그리고···.”

그때 차원을 뚫고 메시지가 날아왔다.

[됐어요. 소장님.]

“됐다고? 뭐가?”

[알베니우스님이 20 초만에 차원 이동을 할 수 있게 되셨어요.]

“···그래?”
“···갑자기 왜 웃는 거지?”
“판이 뒤집혔습니다.”

이 개새끼. 곧 만나러 간다.

* * *

[송파구에서 화산 터짐]
[jpg]
↳욕하려고 들어왔는데 이왜진?
↳뭐임? 네이팜 터트림?
↳와 땅이 다 녹아내렸네. 저 불꽃 뭐냐
↳이게 송파구라고?
↳탈총사들 중에 누구 불 쓰는 놈 있냐?
↳괴물이 쓴 듯?
↳근데 여기 군사지역인데 어케 찍음?
↳내가 군사임
↳군사 기밀 유출 신고 ㅅㄱ
↳ㅅㅂ 이거 ㅁㅊ새끼네ㅋㅋㅋ

[뭔 일이냐]
[성동구 사는데 송파구에서 불기둥 올라오는 거 여기까지 보임. 갑자기 날이 밝아져서 깜짝 놀람]
↳불기둥?
↳ㅇㅇ하얀 불기둥이었음
↳왜 청색아님? 덜 뜨겁네
↳근데 네이팜 터트린다고 성동구에서 보일 정도로 불기둥이 올라옴?
↳그러게ㄷㄷ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너무 화려하게 터트렸다.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군.”


“이제 커뮤도 보십니까?”
“보다보니 볼만하더군.”

백신전에서 치료를 받고 온 두리쉬마가 소파에 누워 태블릿을 만졌다.

“적당히 상대할 놈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구를 전장으로 삼으면 안 되겠군.”
“동감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놈이 도망쳐줘서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지구, 아무리 못해도 동아시아 정도는
날려 먹을 뻔 했으니.”

담담히 주고받는 끔찍한 소리에 집 주인들이 흠칫 놀랐다.

‘저희가 게이트를 막는 동안 지구가 멸망할 뻔 했다는 거 아닙니까?’


‘미친···.’

그것도 종말이 아니라 신들의 싸움의 여파로.

“괜찮아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예요.”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율리아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소파에 누워 과자 먹으면서 커뮤를 하는 걸 보면 지구에 다 적응하셨군요.”


“네가 붙여준 이놈들이 꽤 도움이 됐다.”
“감자칩은 지금 드시는 것보다 초록색 포장지의 양파 맛이 더 맛있어요! 단짠단짠이에요!”
“참고하지.”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적응을 하게 도와주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러다가 율리아랑 같이 게임도 하겠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구의 종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당사자가 게임 폐인이 되는 건 곤란하다.

김우진이 두 용사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절대 게임은 알려주지 마라. 종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네, 네.”
“알겠습니다.”
“지금처럼만 해라. 그러면 약속한 건 지켜질 테니.”
“예,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식사를 마쳤다. 신들과의 동석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흡입한 두 용사는
잠시 나가 있으라는 김우진의 말에 그대로 사라졌다.

“그래서 알베니우스가 놈을 따라가는 게 가능해졌다고?”


“정확히는 연옥에서 외곽 차원까지 단 20 초만에 차원문을 열 수 있게 된 겁니다.”
“프로니우스놈, 더 이상 게릴라전은 못하겠군.”
“그렇게 되겠죠.”

아무리 프로니우스가 강하다고 한들, 20 초를 버티지 못할 무능한 놈들은 없다. 그들은 신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더 이상 프로니우스의 게릴라전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과연 놈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이것 하나일까?

물론 아니다. 허나, 그리 많지는 않고 그 모든 것들이 김우진이 생각하는 범주를 뛰어넘지는 못할 거다.

“놈이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습니다. 차원들의 종말을 일으키거나, 꿍쳐두었던 마물들의 웨이브를


진격시키거나, 계속 게릴라전을 하거나.”

종말을 일으키면 지금처럼 신들을 이용해 막는다. 상황에 따라 집행자들까지 막는다.


업을 대규모로 소모하게 생겼으나 그런 걸 따질 대가 아니었다.
웨이브를 진격시키면 오히려 전면전이기에 속이 편하다.
그리고 게릴라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놈은 그걸 모를 터. 처음의 한 번에 반드시 놈을 잡아야만 한다.

“미친척하고 총력전을 벌이면 피해가 클 텐데?”


“감수해야죠.”

어차피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뒤가 없다. 신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따로 없나?”
“지구의 종말만 잘 막아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지구를 미끼로 이용해서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르니까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이해했다. 걱정 마라. 놈이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내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
“믿겠습니다.”
“아. 미끼라고 하셔서 그런가, 방금 기발한 생각이 하나 났어요.”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뭔데?”
“굳이 기다릴 것 없이 함정을 파는 거요. 이쪽에서 미끼를 던지는 거죠.”
“함정?”
“함정을 어떻게 판다는 거지?”
“프로니우스가 저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차원과 공간의 권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저희한테도 이제 알베니우스님이라는 동등한, 동등하지 못해도 적어도 턱 밑까지 쫒아간 존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역으로 이쪽에서 침공을 하는 거죠.

“최소한의 수비 병력을 제외하고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종말 차원을 순회하듯 쓸어버리는 거예요.”

마물들이 아무리 숨어 있다고 해도 결국 종말 차원이니 찾다보면 무조건 나오겠죠.

“그러면 놈은 우리의 빈집을 노리겠지. 그럴 때···.”

김우진이 탄성을 내질렀다.

“알베니우스를 이용해 회군하자?”


“맞아요.”
“···내가 보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에요.”

프로니우스는 알베니우스가 자신의 턱 밑가지 쫓아왔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알베니우스는 숨겨진 비수다.

딱 한 번,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최대한 효율을 뽑아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율리아가 말한 한 수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소수를 데리고 차원 이동을 하는 것과 군단을 데리고 하는 건 또 달라.”

차원 간의 균열을 열려면 꽤나 막대한 권능이 소모된다. 그것을 장시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더욱 더.

“음,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면 못하는 걸까요?”


“아니. 그렇다고 불가능은 아니고.”

몇 가지 손만 보면 확실한 한 수가 되겠어.

“만약 놈이 끝까지 숨어 있는다면 마물의 수를 줄이니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고.”


“그렇다면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은 뒤에 다시 공격할 수도 있겠지.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좋아, 율리아.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김우진이 눈을 번뜩였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2) >

마물이 싫다. 마물이 좆같다.

용사가 되었을 때, 아주 지겹도록 잡았다. 토악질이 나올 만큼 죽이고 또 죽였다.

그걸 신이 되어서도 해야 한다고 하니 참 엿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해야만 하니 한다. 그리 위안하며 원정대를 꾸렸다.

60 의 신들과 2 천의 집행자들이 포함되었다. 명실상부한 우주 최강의 전력.

김우진은 프로니우스가 아니라 프로니우스 할아버지가 와도 결코 이 전력을 막을 수 없다고 자신했다.

프로니우스가 특별할 뿐, 마물들은 결코 신들을 이길 수 없다. 어쩌다 신에 준하는 마물이 한두 마리씩 나오긴
했지만 그뿐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김우진은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간다.”

우주가 탄생한 이래 처음으로 신들로 이루어진 군단이 출정했다.

* * *

종말 차원이란 멸망을 막지 못한 차원들이다.

차원의 피조물들은 모두 죽고, 차원은 황폐화되며, 마물이라는 불법 거주자들이 머무는 곳.

마나 대신 마기가 흐르고,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죽음의 땅.

이 우주에는 그런 차원들이 무수히 많이 널려 있다.

차원은 언제나 탄생하고 멸망하기를 반복한다. 신들은 용사라는 대행자를 통해 차원의 수명을 늘리고자 하지만
모든 것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비록 실패 확률이 성공 확률보다 낮다고 해도 그게 우주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쌓였다면, 종말 차원은 정말


샐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일부 종말 차원들이 시간이 흘러 완전히 소멸했다는 부분들을 감안 하더라도.

그렇기에 종말 차원에 작정하고 숨어버린 프로니우스를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 일은 반드시 프로니우스를 찾겠다기보다는 미끼의 느낌이 강하니까. 찾으면 좋고, 아님 말고다.

“그런데 알베니우스님이 아직 대규모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2 천명 정도는 대규모도 아니라더라.”

백신전의 전력은 물량이 아니라 질이다.


50 의 신과 2 천의 집행자들. 알베니우스는 그들이 넘어갈 여유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수적으로는 백신전이 참 적긴 하네요.”


“그렇지.”

어지간한 차원에서도 국가 단위의 군대가 한 번 모이면 만은 기본이다. 하지만 그게 백신전이 약하다는 건 아니다.

2 천명밖에 없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진격은 빨랐다. 백신전에 집결한 신의 군단은 곧장 종말 차원과의 접경지역으로 향했다.

알베니우스의 능력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러 차례 신들의 공간의 권능을 이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종말 차원에 발을 들였다.

“없네요.”
“텅 비었습니다.”
“절대소장신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모두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간 것이지요. 역시 절대소장신님이십니다.”

며칠에 걸쳐 수 십 개의 종말 차원을 살폈다. 하지만 차원에는 마땅히 존재해야 할 마물 한 마리도 없었다.

누가 봐도 이상했고 수상했다.

“네 예상대로 되고 있는 것 같은데.”
“물지 않고는 못 베기는 달콤한 미끼잖아요.”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났다. 또 다시 수십 개의 종말 차원을 확인했다. 여전히 마물은 없었다.

그들은 점점 우주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치지직-

통신구가 신호를 받아들였다. 거리가 워낙 멀고 마나가 없어 노이즈가 잔뜩 끼었다.

[마물···습···! 대···규모···!]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못하고 통신이 끊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신전과의 직통 통신구였으니.

“드디어 왔네요.”
“알베니우스님.”
“그래.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와서 20 초는 무리지만 1 분 안에 끊어보지.”

알베니우스가 권능을 발휘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차원 전체가 일그러졌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침식이 김우진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건.”
“온다.”

신들과 집행자들이 본능적으로 투기를 일깨웠다.

순간, 균열이 벌어졌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샐 수도 없이 많은 게이트들이 차원 전체를 뒤덮었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권능.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은 한 명뿐이다.

“함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 프로니우스가 보였다. 담담한 중얼거림이 모두의 귓가에 아른 거렸다.

“당연히 함정이어야만 했다.”

우주를 지배하는 백신전의 1 인자가 멍청하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열이 받으니까.

“그런데 설마 네가 직접 오다니. 정말 멍청한 건가?”


“똑똑한 거지. 이렇게 네가 직접 마중 나오게 만들었으니까.”

김우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예상보다 반응이 더 격하네? 직접 나온 거 보니 이쪽 방향에 네 본거지가 있는 모양이지?”


“내게 본거지라는 건 의미가 없다. 너도 그래서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벌어진 균열들을 통해 마물들이 튀어나온다.

“···맙소사.”
“저게 다 몇이지?”
“아직도 나옵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끝도 없이.

신과 집행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오랜 세월 어둠과 싸워왔으나 이렇게 많은 마물들을, 여전히 증식하는


마물들을 한 자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멍청하지 않다면 예상대로 한 번 더 꼬은 것이겠군.”


“꼬아?”
“이쪽을 미끼로 던져주고 내가 네놈들의 본거지를 빈집으로 알고 치게 하려는 속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게 아니다?”
“네가 여기 있으니···그렇군.”

김우진을 마주보던 프로니우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믿고 있는 게 신격을 얻은 알베니우스였나.”


아무리 잘 숨겼다고 한들 직접 마주친 이상, 서로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멍청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노림수였구나. 내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


“아니지, 네가 이쪽으로 와서 더 큰일이 난거지.”
“넌 날 죽일 수 없다. 이곳은 종말 차원이고, 어둠의 앞마당이다.”

아카식 레코드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마력이 진해진다. 반대로 변방으로 갈수록 마기가 진해진다.

그리고 이곳은 변방 중에서도 변방. 어둠의 힘이 더없이 짙은, 마나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종말 차원이다.

프로니우스와 마물들에게는 홈그라운드이며, 김우진과 신들에게는 최악의 환경.

“오늘 넌 반드시 네 소중한 것들을 잃는다.”

네 목숨이던, 아니면 백신전이던, 차원 연옥이던.

“백신전과 연옥을 치겠다고? 네가 여기 있는 시점에서 가능할 것 같아?”


“전력을 꽤나 남겨 뒀겠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마저 감안하고 보냈으니 상관없다. 내가 어둠의 사도가 된 게 언제인지 아느냐? 두리쉬마를 앞세우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복수를 곱씹었다.”

그가 어둠의 사도가 되었을 때, 이미 두리쉬마라는 또 다른 사도가 존재했다.

프로니우스는 두리쉬마에게도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깊숙이 숨었다. 그리고 조금씩 마물들을 빼돌려 모아왔다.

그게 몇 만 년이다.

“그게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나?”


“몇 만 년을 살아보지 않아서.”
“너희들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떤 최악의 종말을 목도할 것이다.”

백신전과 연옥을 시작으로 모든 차원을 무너트릴 거다.

“그리고 더 이상 균형을 맞추게 될 수 없는 아카식 레코드 또한 어둠에 삼켜지리라.”

더 이상 생명체가,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가 된다.

그것이 완전한 종말.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행복해서는 안 되는 완벽한 세계.

“···이거 웃긴 놈이네.”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렇게 하면 너한테 뭐가 남는데?”


“아무것도.”
“그런데 그렇게까지 한다고?”
“너희한테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니까.”

그게 중요한 거다.

“내게 얼마만큼 남느냐고 아니라, 너희들에게 얼마만큼 남지 않느냐가.”


“그냥 미친 새끼 아니야?”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신들에 의해 종족이 멸족당하는 그날 이후,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으니까.”

가족을 잃고, 종족을 잃은 그를 지탱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백신전과 그들이 이룩한 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종착점에 다다르기
직전이다!”
“그런 건 날 이기고 난 다음에 해.”

김우진은 굳이 네 복수 때문에 다른 이들을 다 죽이겠다느니, 거기에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지


않았다.

눈이 돌아간 이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종족 전체가 아무런 이유 없이 멸족
당했다면 그 분노가 어떨지 김우진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은 이전 주신들과 백신전의 업보다.

그것을 김우진과 다른 신들, 그리고 차원 전체에 전가하여 모두를 죽이겠다고 하는 건 그냥 또라이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그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의 목적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적이다. 누구 한 명이 죽어야지만 끝이 나는.

“넌 오늘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너야 말로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다.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신들에게 죽어간 차원룡들의 비통함을,
그리고 남겨진 나의 고통을.”
“헛소리 하지 마.”

백신전과 연옥이 무너진다고?

“내가 아무런 대비도 안 하고 왔을 것 같냐?”


“신이 된 알베니우스를 믿고 있나 본데 소용없다. 이곳에 온 이상, 내 앞에 선 이상 너희들은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해.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그의 시선이 알베니우스에 닿았다. 김우진의 방법은 프로니우스가 직접 오지 않았떠라면 충분히 먹혔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프로니우스가 존재하는 한, 알베니우스의 권능은 사용되지 못한다.

“누가 그래? 이곳에서 벗어날 거라고.”

김우진이 검을 소환했다.

“널 눈앞에 두고 내가 도망칠 리가 없잖아.”


오늘 이 자리는 우리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끝나는 거야.

“들어와, 이 개새끼야.”

김우진이 검을 쥐고 호흡을 내뱉었다. 불꽃이 질주한다.

한 걸음, 내딛는다.

────!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퍼진다. 불꽃과 마기가 뒤섞인다.

그리고.

“공격하라!”
“절대신님을 도와라!”
“절대소장신님을 따라 악들을 토벌하라!”

신과 집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신이시여. 백신전 근방에 균열이 벌어졌습니다.”


“예상대로군.”
“예, 근데 조금 많습니다.”
“몇 개나 되나?”
“샐 수도 없습니다. 족히 수만 개가···.”
“작정했군.”

집행자가 말끝을 흐렸다.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불안감에 데르카인이 혀를 찼다.

다급히 차원 밖으로 나가 균열을 관측했다. 우주를 가득 메운 균열들 틈으로 마물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데르카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김우진과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저들의 기습은 예정된 바, 모든 신들과 집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멍청한 놈. 하긴, 도마뱀들 대가리가 다 그렇긴 하지.”


“그건 드래곤 혐오 발언입니다만?”
“드워프가 드래곤을 혐오하는 게 뭐 어때서 그런가. 놈들이 뜯어가는 금은보화가 얼마나 많은데! 드워프
사회에서는 도마뱀 혐오가 없으면 진정한 드워프로 처주지 않네.”

그런가? 강민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비!”
“준비!”
위이잉, 철컥-

데르카인의 명령에 차원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원 전체에 깔린 백만 개의 마력포들이


늘름한 포신을 드러냈다.

“···이걸 진짜 쓰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나. 공격은 최선의 방어! 마력포는 최고의 방어 시설이라고 했잖은가!”
“아무리 그래도 마력포 백만 제작설이라니···. 그걸 제안하고, 결국 해낸 것도 놀라운데 그걸 쓰는 날이 올
줄이야.”
“말했잖나. 언젠가 반드시 쓸 날이 올 거라고. 그게 무기의 숙명이니.”

차원 대부분을 뒤덮은 거대한 마력포들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충전!”
“충전!”
“장전!”
“장전!”

우우우웅-

마력포들이 주변의 신력을 빨아들이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리고 특제 제작된 포탄들이 장전되었다.

그리고.

“발포하라!”
“발포하라!”

──────────────!

백 만 개의 거대 마력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것은 단순히 마력포 여러 개가 발사된 게 아니었다. 모든 마력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로 결집되며
나아갔다.

마치 마력포 그 자체로 이루어진 차원에서 쏘아내듯, 거대한 빛줄기가 되어 우주를 가로질렀다.

그대로 균열과 마물을 덮쳤다.

──────────────!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비명도 굉음도 없었다.

소멸. 마력포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균열의 사분의 일이 날아갔다. 억에 달하는 마물의 반의 반이 소멸했다.

데르카인의 주도 아래, 드워프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만든 요새 차원 백신전이 진정한 위용을 드러냈다.


“···도르크스가!”

그 여파로 제 2 의 백신전으로 삼으려고 여러 시설들을 만들던 상위 차원 하나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지만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미리 비워 놓은 게 다행이었다.

* * *

“정말 여기까지 오다니.”

시에나 올름이 한숨을 쉬었다. 저 멀리 균열이, 마물의 무리가 보인다.

어림잡아 수천만. 정말 지독할 정도로 많은 무리는 군단이 아니라 파도다.

- 멍청이들.
- 멍청이들.

“어머니 나무님들? 할 수 있지?”

- 당연히.
- 응.
- 전부 죽여. 내 영역을 침범한 대가를.

거대한 신력이 꿈틀거렸다.

릴리의 육신이 커졌다. 번개로 몸을 감싼 거대한 비조가 포효했다.

그녀의 곁에 정령체들이 떠올랐다. 차원 전체를 뒤덮은 세계수의 나뭇잎만큼, 샐 수도 없이 많았다.

- 전부 다!

나르가 거대한 백호가 되었다. 호랑이 정령체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 간다!
- 간다!

“든든하네.”

시에나가 화살을 쏘았다. 하나로 시작된 화살은 곧 수 만 개로 증식했다.

그게 신호였다.

마물들이, 정령체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3) >
절대자들의 전쟁이란 어떤 걸까.

단순히 땅을 뒤집고 도시를 파괴하는 수준이 아니다.

차원 그 자체를 붕괴시킬 정도의 장엄함.

“모두 도망쳐요!”

신들은 모두 경험이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일부 얻은 베리안과 김우진의 대결을 통해 절대자들의 전투는 신들인 그들조차도 쉽게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김우진을 따라 돌진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던 군단은 율리아의 지휘아래 일사분란하게 차원을 벗어났다.

달려드는 마물들은 신들이 막으며 집행자들의 탈출이 먼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직후, 격전이 시작되었다.

화염이 폭발한다. 화산 수만 개가 한 번에 터지는 듯한 굉음과 열기가 휘몰아친다.

“진짜 다시 봐도 대단하네요!”

난 저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율리아가 신음을 삼키며 바람을 일으킨다. 시원한 광풍이 열기를 밀어내며 아군을
보호한다.

열기에 반쯤 녹아내리면서도 적의를 드러내는 마물들을 마저 썰어버린다.

“절대소장신이시여, 당신의 종들을 보호하소서.”

디아네의 신성한 가호가 한층 더 강화한다.

신들의 후퇴는 빨랐고, 마물들은 후퇴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마물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군단을 향해 진격했고 김우진과 프로니우스의 전투 여파를 직격으로 맞았다. 맞고


있다.

“이러면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될 지도···? 이거 처음부터 소장님만 오셨어도 되는 것 아니었을까요?”


“물론 절대소장신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지만 그분을 섬기는 자로서 당연히 그분이 가는 길을 함께해야
마땅합니다.”
“···아니, 됐어요. 디아네님한테 말한 제 잘못이죠.”
“김우진만 보냈으면 그건 대놓고 함정이란 느낌이 강했을 거야.”
“어차피 들켰잖아요.”
“더 이상했겠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알베니우스의 말에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긴장을 놓지 마세요!”


그녀가 바람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차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마물들을 목숨과 부상을 도외시한 채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두 절대자들이 일으키는 충격파에 큰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아 살아남아 돌격하는 마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진다.

“그런데 저희가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신이고, 상대는 수가 좀 많을 뿐이지, 멍청하게 스스로를


깎아먹고 있는 마물들 아닌가.

그래서 율리아에게는 대화할 여유가 있었다.

“무슨 뜻이냐.”
“소장님 혼자서 충분히 상대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알베니우스님이 여기 있으니 저희는 그냥 백신전이나
연옥으로 복귀해서 그 마물들을 쓸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소장님한테 정신이 팔려 있는데 이럴 때는 권능을
쓰실 수 있지 않아요?”
“···그건.”

알베니우스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상대가 프로니우스만 아니라면.

“놈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면 내가 남을 필요가 있거든.”

프로니우스는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틀어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김우진이 없다면 어림도 없겠지만 김우진으로 인해 흔들리는 놈의 권능을 방해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의 경우에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거든.”


“그러면 저희만 보내주시면 되겠네요.”
“미쳤어?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저 흉측한 것들이 게걸스럽게 밀려오는데? 날 지켜! 너희들은 아무대도
못가!”
“신까지 되셨으면서 어린 애처럼 왜 그래요?”
“목숨이 걸려 있는데 이게 당연하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은 있으시잖아요.”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안 돼! 못 돌아가!”

알베니우스의 단호함에 율리아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에도 대비 해야지. 김우진이 질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요.”

김우진이 지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여기


남아 있는 의미가 없다.
“소장님이 졌는데 저희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리가 만무하잖아요.”
“···그것도 그렇네.”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잘 타네요.”
“장작이 좋으니까.”

차원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 * *

기존의 연옥과 기존의 백신전이 합쳐져 탄생한 차원 연옥은 단순하다.

차원 중심부에 두 그루의 세계수와 몇 개의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고 나머지는 그냥 자연이다.

숲이, 계곡이, 절벽이, 바위가, 사막이, 설원이, 호수가, 바다가.

릴리와 나르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그냥 자연.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할지 몰라도 그 속은 아니었다.

여러 자연들이 혼합된 인위적인 환경 밑에는 세계수의 뿌리와 가지들이 뒤엉켜 있다.

차원의 핵은 물론 차원 전역으로 뿌리와 줄기를 뻗고 잎을 피운다. 차원의 마력과 신력들을 순환시켜 더 없이


농후한 차원을 만든다.

그리고 그 힘을 말미암아 선순환을, 차원의 거주민들이 탄생한다.

정령이라는.

본래라면 불가능 하나 신들을 먹고 차원들을 합치며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 나무가 된 두 그루의 세계수이기에
일어난 이적.

세계수의 잎사귀 하나하나에, 가지에, 뿌리에, 줄기에 깃들어 탄생한 정령들.

샐 수도 없이 많으며 그 개체 하나하나가 상급 정령에 준한다.

어마어마한 정령들을 탄생시킨 두 세계수들을 보고 김우진은 정령왕이라 칭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령왕이란 정령들의 왕이고, 이런 식으로 정령들이 탄생한 적은 처음이었으나 세계수들은


그들의 왕이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신하와 영지에서 한 없이 강해진다.

- 여긴!
- 내 영역이야!
10m 가 넘어가는 파란 비조가 숨결을 토해낸다.

번쩍-

번개가 뒤섞인 섬광이 일직선으로 마물들을 찢어발긴다. 하지만 물밀 듯이 밀려오는 막대한 물량에 구멍은
순식간에 메워진다.

하지만 물량이라면 이쪽도 지지 않는다.

- 가!

그녀의 날개짓에 수천만 마리의 정령들이 날아오른다.

괴성을 지르며 낙하하는 마물들과 부딪힌다.

콰직!
파지지직-

정령은 왕을 닮는다. 나무이면서도 흡수한 첫 번째 신, 베른의 기운을 가장 먼저 각인한 릴리를 닳은 정령들은


나무의 정령임과 동시에 번개의 정령이었다.

사방에서 튀어오르는 스파크들이 마물들을 팝콘처럼 튀겨버린다.

허나 모든 마물들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철퍽, 땅에 떨어진 마물들이 형태를 갖춰가며 야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

크허허허헝!

- 죽여!

차원 연옥에 뿌리 내린 또 다른 세계수와 그 세계수가 탄생시킨 정령들.

거대한 백호와 나르를 닮은 호랑이 정령들이 마물들을 물어 뜯었다.

나르가 가장 먼저 흡수한 신은 얼음의 권능을 가진 신이었다. 백호들이 흩뿌리는 냉기에 마물들이 얼어붙었다. 그
채로 짐승들의 이빨에 산산히 부서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가지와 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 마물들을 꼬치처럼 꿰어버린다. 찢어버린다.

일련의 과정들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차원의 방벽을 넘어 들어오는 마물들이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순차적으로 갈려 나갔다.

“음.”

화살을 쏘아낸 시에나가 뺨을 긁적였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세계수를 도와줄 목적으로 함께 하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지구식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공장이었다.

가장 효율적으로 마물들을 갈아버리는 공장.

관건은 마물들이 먼저 전멸하느냐, 두 세계수의 마력이 떨어지고 지치느냐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후자는 가능성이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와 가장 가까운 차원인 연옥으로 스며드는 우주의 힘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우니까.

“하암.”

시에나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왠지 졸음이 쏟아졌다.

* * *

────!

행성 전역에서 뻗어 나온 섬광이 차원을 넘어 우주를 관통한다.

빛줄기에 휘말린 마물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소멸한다.

일순간 정적이 일었다. 파도와도 같은 무리에 공백지가 생겼다.

하지만 그 공백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대기.”

전력의 4 분의 1 이 소멸한 일격이었으나 마물들에게 겁을 먹을 이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빈 곳을 채우고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아직 대기다.”

데르카인이 신중히 하늘을 살핀다.

파랗던 하늘이 마물들로 인해 새카맣게 물든다. 오래 전, 그의 차원에서 곡식들을 쓸어버렸던 황충들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지독하다.

황충보다 강하고 끔찍한 마물들이 수까지 더 많으니.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피조물이 아닌 신과 집행자들.

마물의 무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발포하라!”

데르카인이 소리쳤다.

급속 충전된 마력포들이 불을 뿜은 건 마물의 웨이브가 아슬아슬하게 코앞까지 당도했을 때였다.


딱히 노린 건 아니었다.

모아왔던 마력과 우주의 힘을 일거에 방출하고 방전되었던 마력포들이 딱 그때 충전 완료 되었던 것이니.

─!
──!
─!

하지만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마력포는 이전처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포격을 이어갔으나 그 수가 백 만 개가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포격이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마물들이 포격에 맞고 쓸려 나간다.

“더 쏴!”
“와아아아아!”

마력포는 마물들의 수를 착실히 줄여나갔다.

“김우진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구만.”

데르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지 않은 상황임이 분명하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자리의 누구나 그랬다.

하늘을 가득 채우던 저 검은 파도에 구멍이 숭숭 뚤렸다. 금방 금방 채워지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더 이상


메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구멍은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다.

“거지의 거적때기도 저것보다는 구멍이 적을 겁니다.”


“맞네. 정확히 봤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마물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는 뜻이며, 마력포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는 뜻이다.

“김우진이 내게 그랬지. 대체 마력포를 그렇게 많이 만들 필요가 있냐고.”


“그리고 데르카인님은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를 대비해야한다고 하셨죠.”
“맞네. 그리고 김우진은 이 세상에 백신전까지 쳐들어 올 적들이 어디 있냐고 했었지. 그리고 나를 구박했어!”

처음에는 김우진도 데르카인과 드워프들이 무슨 짓을 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마력포들이 차원 전체를 뒤덮자 말을 바꿨다.

‘이거 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어딜 가도 마력포 밖에 안 보여요! 이 흉물 좀 치워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크기도


적당해야지! 하나 같이 10m 가 넘어가니 차지하는 공간도 엄청나고.’
‘흉물이라니! 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다른 건 몰라도 드워프들에게 미적 감각이 전무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 그런 모욕을!’
‘이게 병기창이지 어딜 봐서 백신전입니까? 아니, 병기창도 이런 식으로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네! 마물들이 이곳까지 진격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마물들이 백신전까지 진격했다는 건 세상이 멸망했다는 겁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어째 전쟁 나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
‘됐고, 만드는 건 뭐라고 안할 테니까 이것들 전부 땅속에 짚어 넣으십쇼. 너무 흉하잖아요.’
‘···알겠네.’

결국 데르카인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늘어가던 마력포는 백만 개에서 멈췄고 모조리 땅으로 보금
자리를 옮기는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로니우스가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이 되었다.

“결국에는 내가 옳았던 거지! 난 이럴 줄 알고 있었네! 마력포는 항상 옳으니까!”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데르카인이 괴랄한 웃음을 흘리며 배틀엑스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력포들은 너무 가까워져 더 이상 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다시 자신이 있던 땅속으로 돌아갔다.

“돌격하라!”

마침내 신들이, 집행자들이 나섰다.

절반 이상 줄어버린 마물들을 향해 돌격했다.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음.”

두리쉬마가 신음을 삼켰다.

“···카운트가?”
“···배속으로 줄어들어?”

침략은 신들의 세계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4) >
이변이 일어났다.

지구의 하늘에 카운트다운이 떠오르는 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구는 이미 다섯 번의 카운트다운을 겪었고 모든 게이트 웨이브를 준수하게 막아냈다.

“두, 두리쉬마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신분들께서 무슨 말씀 없으셨습니까?”

하지만 평소보다 빠르게 떠오른 카운트다운은,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배속하며 순식간에 0 을 향해 다가가는
카운트다운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하늘 봄?]
[ㅅㅂ카운트 왜 배속해서 줄어듬?]
↳이왜진?
↳뭐임? 벌써 최종장임?
↳존나 불길한데
↳이번에도 막을 수 있겠지?

“있었다.”
“역시! 혹시 이번 사태에 대한 대안이라던가···.”

그게 무언가 불길한 징조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용사들, 사람들, 그리고 인터넷 상의 커뮤까지. 지구의
긴장도는 최고치에 도달했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더군.”


“···예?”

두리쉬마가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 전, 김우진이 말했다.

‘미끼를 던질 겁니다. 저와 백신전의 절반이 미끼가 되어 종말 차원을 헤집어 놓을 겁니다.’


‘놈은 빈집을 털려고 할 겁니다. 높은 확률로 연옥, 아니면 백신전인데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지구에 개수작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래, 김우진은 이미 이 사태를 예견했다.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두리쉬마는 걱정 말라고 했었다. 지구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그 도마뱀 새끼를 찢어버리라고.

그리고 그 예상대로 됐다.

아마 지금쯤, 김우진은 프로니우스와 싸우고 있을 거다. 본래라면 그도 그 무대에 서야 했지만 비루하게 힘을


빼앗겨 이런 무대에 서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라도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 자신을 믿어준 김우진을 위해서라도.

“그럼 저희끼리 막아야 한다는 겁니까?”


“우리끼리는 아니다.”
“예? 그게 무슨?”
그때였다.

번쩍-

두리쉬마의 양 옆으로 균열이 벌어졌다. 균열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정확히 101 명의 용사들이었다.

“여기군요. 신께서 말하신 곳이.”


“불길함이 가득합니다.”
“마물이라면 진저리가 난다. 놈들이 설치는 꼴을 못 보지.”
“마나가 지독할 정도로 희박하군.”
“공기가 최악이야.”

그들은 두런두런 지구의 환경을 살피다 두리쉬마에게 시선이 멈췄다.

아주 잠깐의 시선 교환, 그들은 서로의 격을 눈치 챘다.

“두리쉬마님을 뵙습니다!”

101 명의 용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나를 아나?”
“예. 뵌 적이 있습니다.”
“나를?”
“종말 차원에서, 그리고 신들과의 전쟁 때, 먼 발치에서 나마 두리쉬마님의 활약을 지켜보았습니다.”
“종말 차원과 신들과의 전쟁에 있었다고? 그렇다면 너희들···.”
“예. 신들과의 전쟁에 손을 보탰던 용사들입니다. 저는 이들을 이끄는 대장, 테론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전부 은퇴한 것 아니었나?”

알베니우스가 끌어 모은 전직 용사들은 281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훈련을 명목으로 종말 차원에 풀어놨던
알베니우스가 제때 오지 못하는 덕분에 절반 가량이 굶어 죽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은 마물과 전투라면 신물이 나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은퇴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신의 사자가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지구를 위해 쓸만한 용사들을 모아달라는 김우진의 부탁을 받은 율리아가 보낸 사자들이었다.

율리아는 최대한 빠른 시간에 확실한 전력을 모으길 바랐고 과거 신들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더 없이
적격이었다.

용사들 중 그들만큼 마물과 많은 전투를 치러본 자들은 없을 테니.

김우진과 율리아는 그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고,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수락했다.

다시 한 번 힘을 써보고 싶은 자, 마물이라면 다 죽여 버리고 싶은 자, 전혀 연관이 없지만 차원과 생명을


지키고 싶은 이타적인 자, 신들의 보상에 혹한 자, 긴 평화가 지루했던 자. 이유는 제각각이었으나 목적은
같았다.
마물 박멸. 그렇게 101 명의 전직 용사들이 다시 현역이 되어 테론 아래 모였다.

“···확실히. 너희들이라면 믿을 만 하지.”


“감사합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박상준.”
“예, 예!”

101 명이라는 대군의 등장에 얼빠진 표정을 하던 박상준이 손을 들었다.

“전부 탈을 지급해라. 이 차원의 존재들이 아니니 지구의 특성상 얼굴을 가리는 게 좋다.”
“···이렇게 많이는 없습니다만?”
“그럼 구해와라, 당장.”

잠시 후, 시장을 돌며 구한 101 개의 백정탈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00:00

카운트가 제로가 되었다.

쩌저저저적-

균열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 개도, 두 개도 아니었다.
수십 개도, 수백 개도 아니었다.
수천 개, 어쩌면 수만 개, 수십만 개.

무수히 많은 균열들이 지구의 하늘을 뒤덮었다.

“···왜 고작 차원 하나 구하는데 두리쉬마님도 있고 저희까지 다 보내는가 했더니 그럴 만 하군요.”

테론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두리쉬마가 망치를 소환했다.

“그래도 이제 돌아가기엔 늦었다.”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좀 끔찍하긴 하지만 종말 차원에 있을 때보다는 덜 해서.”
“저것들은 무슨 맛일까요?”
“간만에 마물 좀 먹어 보겠군요.”
“그리웠습니다. 이제는 마물의 독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돼서.”

프흐흐흐, 테론과 용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지옥과도 같은 곳에 비하면 이곳에는 아군이 넘쳐난다. 마나가
희박할지언정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이곳이 절대신님의 차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마물들이 조금이라도 더 내려오기 전에
균열들을 최대한 많이 닫아야겠군요.”
“전 차원에 흩어져 있으니 너희들도 적당히 흩어져라. 우선 여기 한국부터 처리하고.”
“예.”

두리쉬마와 두 용사가, 그리고 101 명의 전직 용사들이 출진했다.

그리고 그 직후.

[101 명의 백정부대 떴다!]

종말과 함께 커뮤니티가 불타올랐다.

* * *

배속해서 줄어드는 타이머.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의 엄청난 양의 균열.
그 속에서 뛰쳐 나오기 시작하는 샐 수도 없이 많은 마물들.

인류는 깨달았다.

“···맙소사.”
“저걸 어떻게···.”
“도, 도망을···.”
“대체 어디로?”
“다 끝났어. 다 죽을 거야···.”

그나마 막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종말이 그들의 오만에 불과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은 그저 파편에 불과하고 진정한 종말은 겪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을.

인류는 공포에 떨었다.

절대적인 멸망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항도, 도망도 무의미했다. 균열은, 마물은 지구의 모든 부분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모든 인류가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한국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101 명의 백정탈 떴다!]


[ㅅㅂ게이트 보고 진짜 끝이구나 생각해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는데 백정탈 쓴 각성자 무리가 다 쓸고 다님.]
↳ㅇㄱㄹㅇ나도 도움 받음
↳6 명 뿐이던 각성자가 갑자기 101 명이 됐다고? 그것도 전부 한국에?
↳ㄴㄴ그 6 은 또 따로임
↳??
↳한국에 뭐 있냐?
↳뭐냐, 대체

[??:한국인 각성자 강국]


[한국은 각성자 강국이 맞다!]
↳ㄹㅇㅋㅋ
↳101 명이 추가 됐으면 강국 맞지!
↳종말 전에는 동네북이었던 내가 종말 후에는 최강대국?
↳아니, 대체 뭐지? 전 세계에 107 명인데 왜 한국에만 104 명임?
↳그것이 한국이니까
↳한국은 초강대국이 맞다!

[근데 왜 전부 백정임?]
[탈 많은데 왜 다 백정임?]
↳그러게
↳양반탈이 플랙스 좀 했나보지
↳엌ㅋㅋㅋ
↳역시 양반이네
↳근데 백정은 노비 아니지 않음?
↳사소한 건 넘어가셈ㅡㅡ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괴물 때문에 집 무너졌는데 백정탈이 부위별로 해체쇼하고 감. 간신히 살았다. 질문 받는다
ps. 앞으로는 백정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기 먹을 때 더 감사하며 먹겠습니다]
↳더 마스터 백정
↳백정이라 역시 도축을 잘하네
↳탈값하네ㄷㄷ
↳근데 집 무너지고 뒤질 뻔했는데 커뮤를 함?
↳ㄹㅇㅁㅊ놈이네ㅋㅋㅋ
↳사방에서 괴물들이 날뛰는데 커뮤하는 니들은?
↳커뮤에 미친 종족
↳그것이 한국인이니까.
↳끄덕

단 30 분 만에 한국 상공에 열린 모든 게이트들이 닫혔다. 사람들의 피해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거의 티끌만한 수준이었다.

[백정탈 남하함]
[제주도인데 백정탈들 대규모로 남쪽 바다로 넘어감. 일본이나 호주, 동남아 쪽으로 가는 듯?]
↳백정이 세상을 구한다
↳Jungle save the world
↳그거 정글 혐오야ㅡㅡ

[북쪽으로도 감]
[북한으로 가는 듯?]
↳그거 패턴임. 북한 넘어서 만주로 가더라
↳진짜 백정 만세네
↳동쪽으로도 갔음. 일본, 미국이나 남미 가는 듯

아시아, 오세아니아, 유럽, 북미, 남미, 아프리카까지.

한국의 게이트들을 모조리 닫은 용사들은 박상준에게 각자의 지역을 할당받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류는 갑자기 한국에 대규모로 등장한 각성자 무리에 당황했으나 기뿐 당황이었다.

속절없이 밀리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는 간신히 기사회생했으며, 용사가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유럽과 북미, 남미는 간신히 숨 돌릴 틈을 얻었다.

[혼자 다른 탈 쓰고 나온 이유]
[같은 하회탈로 묶기에는 수준이 다르니까!]
↳ㄹㅇㅋㅋ
↳말뚝이>>>넘사벽>>>>기타 하회탈들
↳말뚝이탈 싸우는 거 보면 누가 괴수인지 모르겠더라. 망치로 괴수들 뚝배기 깨고 다니는데 존나 무서움
↳괴수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피 묻은 말뚝이탈을 본 일이 있는가
↳킬리만자로의 말뚝이탈ㄷㄷ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건 망치를 들고 전전하는 두리쉬마였다.

한국을 끝내고 일본으로 와 일본의 게이트를 거의 혼자 다 닫은 뒤 미국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몰살시킨


마물로 쌓아올린 산이 수십 개였다.

“좋군.”

피로 범벅된 두리쉬마가 웃음을 지었다. 프로니우스 딴에는 제법 그럴 듯한 노림수였지만 김우진이 한 발 앞서


있었다.

지구를 멸망시켜야 할 마물들은 용사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두리쉬마는 빠르게 돌아오는 힘을 느꼈다.

비록 예전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신위를 얻을 수 있다.”

자격을 얻을 만큼의 힘을 쌓을 수 있다. 비록 빈 자리가 생기지 않으면 신위를 얻을 수 없지만 그는 타이탄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우주의 힘을 타고난 종족. 그래서 신에게 탄압 받던 종족.

굳이 신이 되지 않아도 신에 준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두 번의.”

망치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번의 패배는 없다.”

그것이 타이탄일지니.

─!

그의 망치가 마물의 머리를 으깼다.

* * *
공간이 비틀어진다.
불꽃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튄다.

손과 발이 꺾이고.
뒤틀린 공간에 감각이 교란된다.

공간을 자유자제로 통제하는 차원룡의 권능. 그것이 어둠의 사도가 되면서 더욱 더 강화되었다.

김우진은 어째서 신이 단 몇 분도 버티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프로니우스는 강하다. 김우진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상대보다 더. 그래, 칼카르보다도, 알비츠보다도,


그리고 베리안보다 더.

인정했다. 차원룡이 분노를 곱씹으며 쌓아올린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만히 있냐? 이 새끼야?”

김우진과 프로니우스의 시간은 다르다.

프로니우스가 어둠의 사도가 되어 몇 만 년 동안 분노와 증오를 쌓아올릴 때, 김우진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불과 몇 십년이라는 시간은 프그런 프로니우스를 따라 잡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신들을 흡수하고.


주신 칼카르를.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은 또 다른 주신 베리안을.

그들이 쌓아올린 억겁의 시간이 그대로 김우진의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절대신이 되었다.

─!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불꽃이 타오른다. 공간의 권능이 불꽃을 비튼다. 불꽃이 더 크고 뜨겁게 타오른다. 권능마저도 녹이고 태운다.

김우진이 성장하는 만큼, 불꽃도 성장했다. 그의 불꽃이 태우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권능 대결에서 패배를 직감한 프로니우스가 직접 움직였다.

공간의 권능을 가진 차원룡이 날개를 펼친다.

─!
──!

용의 손톱이 연신 김우진을 두들긴다.


숨결이 불꽃을 뚫고 들어온다.

김우진은 속도전에서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방향성이 다르다. 그의 불꽃은 뜨겁고 빠르지만, 그가
비행기라면 프로니우스는 제트기다.
하지만 기관총을 단 제트기와 핵미사일이 달린 비행기다.

몸을 웅크리고 불꽃을 두른다. 그렇게 공격을 감내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앞으로 뻗어나간다.

프로니우스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비껴난다. 손이 속도 그대로 방향을 전환한다.

파직, 공간의 권능이 손의 방향을 비튼다. 튀어 오른 불꽃이 권능을 녹이고 본래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

코앞에서 터지는 숨결이 불꽃을 벗겨낸다. 신력을 뚫고 피부를 침투한다.

그럼에도 손은 전진한다. 기어코 프로니우스의 팔목을 낚아채고 검이 목표물을 놓치지 않게끔 해준다.

“···크윽!”

불꽃이 권능을 파쇄하며 기어코 차원룡의 피륙을 찌른다.

깊게 새겨지는 상흔, 하지만 한 번의 실수를 끝으로 차원룡은 기어코 김우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짧게 연달아 쏘아진 숨결이 김우진을 밀어낸다.

잠시 숨을 돌린 프로니우스가 상처를 부여잡았다.

“지금쯤이면 백신전이던, 연옥이던, 아니면 지구던. 한 곳은 끝장났겠지.”


“지구?”
“우리의 결판이 날 곳은 지금 이곳이 아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지.”
“누구 마음대로!”
“우리의 끝은 이 세상 모두가 끝장난 다음이다.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그때라면 기쁘게 이 목을 네게
주마.”

더 이상 살아 있는 의미조차 없을 테니.

“넌 절대 날 잡을 수 없다, 김우진.”

균열이, 균열들이 벌어졌다. 그때와 같았다. 모든 균열을 막을 수 없게끔 수도 없이 많은 균열들이


프로니우스에게 길을 인도했다.

김우진이 불꽃을 토해냈으나 한 발 늦는 듯 싶었다.

그렇게 보였다.

파지지지직-

권능과 권능이 충돌했다.

균열들이 일제히 닫혔다.


“어딜 가려고.”

내내 기회를 엿보고 있던 또 다른 차원룡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가면 안 되지.”


“···알베니우스!”
“네 심정은 다 이해해. 그런데 그걸 나한테 강요하고 네 복수에 내 미래까지 지워버리려고 하면 안 되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냐!”
“은혜? 목 조르고 다음에 만나면 뒤질 거라고 협박한 게 은혜냐?”

아무리 동족이라도 그러면 내가 삐 뚫어지잖아.

“나는 지금의 세상이 좋아. 복수고 나발이고 그런 건 모른다고.”

복수를 위해서 세상 전체를 멸망시키겠다니. 돌아도 단단히 돌았잖아.

“그래도 동족이라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봤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여기서 죽는 게 맞아. 넌 동족이
아니라 미친 도마뱀이니까.”

그러니.

“갈 때 가더라도 그 목은 여기 놓고 떠나라.”
“나이스샷, 알베니우스님!”
“알베니우스!”

프로니우스의 고함과 함께.

─────!

새하얀 백염이 세상을 불태웠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5) >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화염을 견딜 만큼의 초인 정도.

프로니우스는 화염을 완전히 견딜 만큼 육체가 단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번에 휩쓸릴 만큼 나약하지도


않았다.

비록 그 불의 파도가 그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해도.

화염의 파도가 사그라든 그 자리에, 프로니우스는 살아 있었다.

육신이 반쯤 녹아내린 모습은 아무리 좋게 말할래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살아만 있을 뿐,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회광반조. 놈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저 드높은 격으로 간신히 떠나가려는 영혼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김우진이 다가갔다. 눈이 마주쳤다.

“흐하하하하하···!”

프로니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듯이,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김우진.”

그리고 한 순간, 웃음이 뚝 그쳤다. 놈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반쯤 녹아내려 더욱 흉측했다.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갈라진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네가 백신전을 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어야 했다. 씨앗부터 널 밟았어야 했어!”

분노, 슬픔, 자괴감, 억울함, 증오, 허탈함까지. 무어라 콕 찝어서 형언할 수 없는 한이 놈의 눈에 맺혔다.

“너를 죽이고 백신전의 세 멍청이들과 싸워야 했다. 그랬다면···!”


“이제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래, 그렇겠지.”

프흐흐흐, 그렇게 기다려온 결말이 고작 이건가. 프로니우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프로니우스.”
“알베니우스.”

프로니우스가 입술을 짓이겼다.

“너는 종족의 배신자다.”


“······.”
“동족을 몰살시킨 신들과 손을 잡고 종족의 대의를 막아섰다. 그리고는 결국 실패하게 만들었지.”

마지막 동족이라는 정이 너를 살렸다.

“그 어리석은 판단이 지금 날 죽이는군.”

뿌드득, 프로니우스가 이를 갈았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여 알베니우스의 피부를 찔렀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서 쓰러지지 않았을 거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끝끝내 백신전을 무너트렸을 것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동족의 한 또한 풀었을 거란 말이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아. 네 복수에는 내 미래가 없었으니까.”
“동족을 위한 복수였다!”
“나는 네 동족이 아닌가? 결코 나를 위한 복수는 아니었지.”
“동족을 위한 것이 너를 위한 것이었다. 동족이 없는 세상에 미련이라도 있다는 거냐!”
“다시 만났을 때도 그 소리를 했었지.”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족은 동족이고 나는 나다. 이미 죽은지 한참 된 동족을 따라가기 위해 자살하기도 싫고, 그 복수에 휘말려
아무 의미없이 미래를 잃어버리기도 싫다. 드래곤들이 언제부터 동족애, 가족애가 들끓었다고.”
“아무리 가족애가 부족하다고 한들 동족애는 있다. 해츨링 하나가 당하면 모든 성룡이 나서는 게 우리였다. 헌데
수백의 해츨링들까지 모두 죽었다.”
“그래서 이미 수만 년 전에 죽어버린 자들을 위해 이 세상 전체를 부수자고? 그러면 가만히 살고 있는 다른
종족들은? 그들은 무슨 죄가 있지?”
“왜 죄가 없지? 백신전의 치하 아래 복종하며 살고 있는 대죄가 있는데.”
“뭐라고?”
“왕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책임은 그 나라에 전체에 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우가 좀 달랐다.

“궤변이군. 신들의 존재도 모르고, 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피조물들이 태반인데.”

김우진이 픽 웃었다.

“넌 그냥 남탓을 하고 싶은 거네.”
“내 복수의 정당함을 말하는 거다.”
“나도 정당해. 난 이 세상을 지킬 의무가 있어서 널 막을 의무도 있거든.”

프로니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사나운 눈빛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김우진, 그리고 알베니우스. 죽어서도 너희들을 저주하겠다.”

놈의 시선이 다시 알베니우스에게 닿았다.

“동족을 위해서 복수를 다짐했건만, 동족으로 인해 복수를 이루지 못하다니.”

이 무슨 궤변인가.

그 말을 끝으로.
프로니우스가 눈을 감았다.

그에게 쌓인 업이 그대로 김우진에게 흡수되었다.

“심란해 보이십니다?”
“심란하지.”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놈과는 그냥 가는 길이 달랐던 거고 난 지금의 우주가 마음에 드니까.”


“좋은 마인드네요. 근데 용케 도망 안 치셨습니다? 평소였다면 진즉에 빤스런 했을 텐데.”
“내가 언제 도망을 쳤다고?”
“한 번 나열해 봐요?”
“나 덕분에 프로니우스를 잡은 걸 잊었나 보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아닌 건 아닌거죠.”
“이런 양아치 같은 놈이!”

김우진과 알베니우스가 투닥거리며 낄낄거렸다.

“저기요? 두 분?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거든요? 왜 둘이서 청춘영화 마지막 장면을 찍고 계시죠?”

마물 수백을 한 수에 갈라버린 율리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의 사도가 죽었다고 한들 마물의 정신에 새겨진 파괴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물들은 여전히 살아 신과
집행자들을 공격했다.

“알베니우스님을 부려먹어. 난 완전히 탈진이야. 전력을 다했다고.”


“나도 마찬가지다.”
“알베니우스님은 도주로 차단 말고 한 게 없잖아요.”
“프로니우스의 도주로를 차단하는 게 어디 쉬운지 아나?”
“쉬워보이던데요.”
“근데 왜 넌 하지 못했지?”
“전문가가 있는데 제가 왜 합니까?”
“뭐, 임마?”
“그럼 알베니우스님이 직접 싸우시지 그랬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나선 거다.”
“와, 말이나 못하면.”
“뚫린 게 입인데 말을 못하면···.”
“그러니까 두 분! 전투 아직 안 끝났다고요! 엔딩 크레딧 내리지 말라고요!”

율리아가 소리쳤다.

“쟤도 지구에서 살더니 영화랑 드라마를 너무 오래 봤군.”


“게임에 더 미쳤습니다.”
“어쩐지, 눈이 퀭하더니.”

결국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는 모든 마물들이 토벌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 * *

프라니우스와의 격전이 끝난 군단이 백신전으로 귀환했을 때, 백신전의 전투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력포로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마물들을 박멸하고 시작한 전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나!”

마력포의 화력 앞에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마물들이 많았다.


데르카인은 그런 흔적들을 마저 정리하며 자화자찬했다.

“아무리 백신전이라고 해도 언젠가 침략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유비무환! 마력포로 대비를 해놓으니까


이렇게 적은 피해로 적들을 막았지 않나.”
“이번에는 부정할 수 없겠군요.”
“이번에는 이라니? 쓸데없는 사족 달지 말게. 기면 긴거고 아니면 아닌 거네.”

그런 의미에서 말이네.

“이번 사태로 무언가 느끼는 게 없나?”


“느끼는 거요?”
“자네가 그랬지. 절대 백신전까지 침공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어떻게 됐나?”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그러니까 축약하자면 더 강한 화력이 필요하다는 거네. 백신전을 지키기 위해서! 들어보게. 내가 이번에 지구의
양자공학과 물리학, 기계공학, 항공우주공학, 신소재공학, 반도체, 화학을 배우면서···.”
“뭘 그렇게 많이 배우셨습니까?”
“쓸만하다 싶은 건 다 배웠네. 자고로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새로운 경지에
눈을 떴네.”
“새로운 경지라면?”
“단순히 쏘고 나가는 마력포가 아니라 쏜 뒤에도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마력 미사일! 정령지능을
탑재해서 실시간으로 정보와 좌표를 계산하고···.”
“안됩니다.”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이번 마력미사일은 기존의 마력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연옥에 깔린 마력포만 백만 개입니다. 그 이상으로 늘리고 싶으면 기존의 마력포를 철거하고 만드세요.”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자식을 내치라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나!”
“자식도 아니고 이미 지나치게 많습니다.”
“마물들이 쳐들어 온다니까!”
“오늘 같은 일은 또 없을 겁니다.”
“있으면?”
“있어도 마력포가 백만 개니 어떻게든 되겠죠.”
“이런 무책임한! 자네 같은 마인드가 방산업계를 병들게 하는 거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불경입니다! 절대소장신님의 말에 따르세요!”
“광신도는 좀 닥치고 있게.”
“마땅히 섬겨야할 분을 최선을 다해 섬기는 일이 광신도라 불리는 일이라면 저는 기꺼이···.”
“자네랑 할 말 없으니 비키게.”
“아뇨, 저랑 이야기하시죠. 절대소장신님께서는 바쁘십니다.”

김우진은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데르카인을 디아네에게 떠넘기고 나니 이번에는 달의 늑대가 푸념했다.

“저도 소장님을 따라갈 걸 그랬습니다. 저 빌어먹을 쇳덩이들이 대부분을 해결할 줄이야.”


“이쪽으로 오셨으면 실컷 싸우시긴 했을 거예요. 마물들이 진짜 많았거든요.”
“끄응, 소장님이 직접 싸우면 지난번처럼 나설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남은 건데···.”
“동감입니다. 마물들이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요리용으로 쓸만한 게 희박하네요. 아, 우울해.”

김우진은 여러 신들을 상대해주며 차원을 살폈다.


“죽은 신들은 있습니까?”
“죽을 뻔한 놈들은 있어도 죽은 신은 없네. 자네는?”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집행자는 177 명이 죽었네.”
“저희 쪽은 278 명이요.”

신들은 격이 달라 어찌 어찌 목숨을 보살폈다고 해도 집행자들은 달랐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물들은 결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두 전장 모두 김우진의 불꽃과 마력포라는, 마물들의 물량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단이 있어서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마무리 좀 해주세요.”


“연옥에 갈 생각인가?”

김우진이 율리아와 함께 연옥으로 향했다. 연옥 또한 전투가 끝나 있었다.

- 먹어! 다 먹어!
- 먹어!

마물들로 인해 균열이 일어난 차원의 방벽은 빠르게 수복 중이었고 산처럼 쌓인 마물들의 시체는 정령들이
달라붙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다.

- 소장!
- 소장!

정령들을 지휘하던 두 세계수가 김우진을 발견하고 날아왔다.

- 막았어!
- 완벽하게!

“잘했어.”

두 세계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김우진이 두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부스스한 얼굴의 시에나가 나무
위에서 툭 떨어졌다.

“하암, 왔니?”
“···주무셨어요?”
“내가 나설 필요가 전혀 없어 보여서.”
“그래 보이긴 하네요.”

정령들의 수가 김우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와, 역시 어머니 나무님들이네요.”

- 에헴.
- 에헴.

두 정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는 더 볼 것도 없겠는데요?”
“릴리, 나르. 뒤처리 확실하게 부탁해.”

- 어디가?

“지구. 지구도 한 번 확인해봐야지.”

혹시나 해서 대비를 해놓긴 했지만 반드시 올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 프로니우스가 했던 말을 들어보면 이미 지구는 침략 당하고 있었다.

“율리아, 거기에 용사를 얼마나 보냈다고 했지?”


“101 명이요. 전부 이전 백신전과의 전투에 참가했던 분들이에요.”
“아, 알베니우스님 때문에 종말 차원에서 떠돌던?”
“네.”
“그놈들이라면 믿을 만 하지.”

어떤 용사보다 마물에 대해 해박하고 많이 죽여본 스페셜리스트들. 지구 출신도 아니기에 감당해야 할 업도 없다.


그렇기에 딱 적절했다.

“릴리, 지금 지구는 어때?”

- 아직 전투 중.

“그러면 네가 좀 도와줄 수 있겠어?”

- 음. 아직 부족해.

“그러지 말고. 뿌리 적당히 내렸을 거 아니야? 나르랑 같이 방벽 강화해서 더 못 들어오게 만 해주면 돼. 어차피
프로니우스는 죽어서 더 이상 진행되지는 않을 거거든.”

- 그 정도라면.
- 가능해!

그리고 그 순간.

지구에 옮겨 심었던 두 개의 나뭇가지가 개화를 시작했다.

───────────────
# < 외전. 지구의 종말(16) >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당연히 종말에도 마찬가지다. 종말 자체가 차원의 끝을 의미하지만 그 종말에도 마지막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구의 종말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종말 차원으로 넘어온 신들의 군단.


연옥.
백신전.
그리고 지구.

프로니우스는 네 개 중 하나라도 확실하게 박살내기를 바랐고 그에 따라 지구를 찾아온 마물들의 질과 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신들에게 있어 몇 만, 몇 십 만의 마물은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다. 몇 백 만, 몇 천만이 몰려 있어도 어찌 어찌


막아낼 수 있고, 막아냈다.

하지만 피조물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마물 한 마리, 한 마리가 버거운 상대고 수천 만의 마물들은 재앙, 그
자체였다.

“···하, 프로니우스를 너무 쉽게 죽였어.”

다른 세 개의 수작을 막고 마지막을 끝내기 위해 지구에 온 김우진이 왔을 때, 지구는 난장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일반적인 차원의 종말들은 한쪽에서 한쪽으로 이어진다.

북부에서 마왕이 일어나 남하한다거나, 서부에서 광룡이 미쳐 동진한다거나.

하지만 지구의 종말은 달랐다. 지구인에게 더 없이 친숙한 게임의 방식을 차용한 만큼 스테이지와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게이트는 한 곳에서만 열리는 게 아니었다. 50 개가 넘어가는 게이트들이 전 세계에 퍼져 다수의 전장을
형성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을 때, 격랑이 밀려왔다.

지구 전체를 뒤덮다 시피한 균열들.

수십 개, 수백 개 수준이 아니었다. 수만 개. 그 모든 균열에서 마물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107 명의 용사들은 한 차원을 지키기 위해 있기에는 지나치게 많았지만 지구가 맡이한 특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부족해보일 지경이었다.

대체 프로니우스가 안배해 놓은 마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전히 균열들에서는 마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릴리, 나르. 되겠어?”

- 응.
- 응.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김우진의 집 정원에 심어진 두 개의 가지가 뻗어나가 거목으로 성장했다. 마법과 권능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계수들의 분신은 금세 뿌리를 내려 지구의 핵에 도달했다.

그리고 간섭을 시작했다.


세계수를 세계수라 불리게 만든 권능. 부족한 지구의 마력을 본체로부터 충당하며 빠르게 방벽 수복에 들어갔다.

어차피 프로니우스의 권능을 만든 균열들이다. 한 번 벌어진 균열을 다시 닫으면 다시 벌어질 일은 없다.

두리쉬마와 106 명의 용사들이 날뛰고 있는 이상, 피해는 다소 있겠지만 종말을 막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기만한 상황은 또 아니다.

이번 일로 무수히 많은 마물과 피들을 삼킨 지구의 수명이 대폭 늘어났으니. 지구의 종말은 적어도 꽤 오랫동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다.

“흠.”

김우진은 지구의 집으로 돌아왔다. 스마트폰을 켜고 커뮤니티를 살폈다.

[십년감수한 사람]
[그건 바로 오늘 아침에만 해도 괴물한테 잡아먹힐 뻔한 나. 하지만 정의의 말뚝이 가면이 구해줘서 삼.
ㄹㅇ십년 감수]
↳다행이네
↳괴물들 거의 다 정리 되가는 듯?
↳괴물 입 냄새 심함?
↳산속에 방치된 이동형 화장실 냄새 남. 똥 찌들고 썩은 내
↳존나 디테일 하네 ㅋㅋ
↳밥 먹는데 똥 이야기를 하네ㅡㅡ

[세계 구원 99%]
[미국, 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에 있는 모든 균열 닫혔다고 함. 아프리카도 거의 완료. 에티오피아
밀림쪽에 조금 남은 듯?]
↳ㄴㄴ에티오피아가 아니라 나이지리아임.
↳와, 그럼 진짜 끝이네?
↳ㅈㄹ이 새끼 구라임 나 지금 모나코인데 균열 있잖아 ㅅㅂ
↳균열이 있는데 커뮤를 한다?
↳믿겠다. 넌 한국인이 맞군
↳한국인이라면 그럴 수 있지

[??:크와아아아]
[존나 쌘 말뚝이탈이 울부지졌따! 다 주겄따!]
[동영상]
↳와 존나 살벌하네
↳망치질 한 방에 다 뚝배기가 깨지네
↳망치가 왜 커졌다 작아졌다 함? 무슨 원리임?
↳팜입자
↳개미망치임?
↳다른 각성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듯
↳근데 어떻게 한 방을 못 버티냐
↳버틸 줄 아는 괴물들은 두 방에 죽었기 때문에
↳ㅇㄱㄹㅇ
↳와 그걸 몰랐네
[101 명의 백정들]
[백정탈들도 ㄹㅇ미쳤는데? 조직적으로 연계하면서 괴물들 휩쓸고 다님.]
[동영상]
↳말뚝이탈이 힘으로 다부수고 다니면 얘네들은 빠르게 약점만 공략하는 느낌이네
↳ㅇㄱㄹㅇ픽 하니까 그냥 죽네 약점을 어케 알았지
↳쟤네 마물 퇴치의 스페셜리스트임. 쟤네들보다 상대 잘하는 놈 없음
↳그걸 남궁형이 어찌 아시오?

“···강민식이군.”

적당히 커뮤를 살피던 김우진이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시 기감을 느끼고 다시 떴다.

“상황 어때요?”
“거의 끝났다.”

완벽한 마무리 단계다. 지구에 열린 거의 모든 균열들은 닫혔고 튀어나온 마물들은 용사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다.

107 명의 용사들을 동원한 만큼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였으니 제법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김우진이 부엌으로 가 술들을 꺼냈다. 능숙하게 여러 술과 얼음을 넣고 쉐이커를 흔들었다.

검은 빛의 액체가 유리잔을 가득 채웠다.

“엑, 냄새가 이상한데요?”


“냄새만 이상할까.”

코를 들이밀고 킁킁 거리던 율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독이잖아요! 그것도 진짜 지독한 독. 강민식님한테 얻은 거죠?”


“맞아. 스피리타스에 놈이 정제한 독을 한 방울 떨어트렸지.”
“···설마 저를 암살하시려고? 토사구팽?”
“헛소리 하지 마.”
“그럼 제건 어딨는데요?”
“만들어 먹어.”
“할줄 모르는데요?”
“귀찮은 거겠지.”

쿵-

그때 집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집이 요동치고 곧 현관이 열렸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말뚝이탈과 양반탈,
각시탈이 들어왔다.

“끝났다.”

말뚝이탈의 망치가 자연스레 사라졌다.

“세계수들 덕분에 모든 균열이 완벽하게 닫혔고 침입해 들어온 마물들을 모조리 박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원 없이 마물들을 때려잡아 보는군.”
“그래 보이십니다.”

김우진이 딱 맞춰 만들어 놓은 칵테일을 내밀었다. 시커먼 색깔에도 두리쉬마가 별 의심 없이 들이켰다.

“···좋군. 지금까지 네가 만들어주었던 그 어떤 술보다 낫다.”


“네, 그러시겠죠.”

역시 술이 아니라 독을 먹인다는 게 좋은 선택지였다.

“다시 한 번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긴 했지. 이런식으로 싸워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더군.”
“두리쉬마님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난장판이 됐을 겁니다.”

그가 아니어도 막기는 막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은 피해로 막기는 힘들었을 거다.

두리쉬마 홀로 활약한 것이 다른 용사들의 모든 활약과 비견될 정도니.

“한 잔 더 있나?”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김우진이 스피리타스를 꺼내 쉐이크에 넣고 강민식의 독을 섞었다.

“기다리고 있던 걸 보니 잘 끝난 모양이군.”
“예. 프로니우스는 죽었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연옥도, 백신전도, 지구도 모두 안전합니다.”
“다행이군.”

쪼르르, 김우진이 빈 술잔을 채웠다. 두리쉬마가 단숨에 들이켰다.

“그 차원룡은 어땠나?”
“마지막까지 복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습니다.”
“···그렇군.”

두리쉬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프로니우스는 과거의 두리쉬마였다. 두리쉬마는 그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누군가 그를 이해한다면, 오직 이 세상에 두리쉬마만이 가능할 것이다.

태초부터 글러 먹은 알베니우스는 논외로 치고.

“내가 미쳐 날 뛸 때는 네가 없어서 다행이다.”


“미쳐 날뛰시긴 하셨습니까?”
“···사소한 건 넘어가는 게 이로운 법이다.”
“저기, 말씀중에 죄송한데 전혀 사소하지 않은데요?”
“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엘프.”

두리쉬마가 율리아의 말을 일축했다.

빙글, 빈 술잔을 돌리며 물었다.

“지금 바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혹시 죽은 신 있나?”
“없습니다.”
“아쉽군.”
“굳이 신이 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용사가, 집행자가, 신이 되어야지만 신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일반적인 자들과 달리 두리쉬마는 태생부터


우주의 힘을 품은 타이탄이었다.

굳이 신이 되지 않아도 신 이상이 될 수 있으니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물론보다 험하고 오래 걸리는 길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쉬운 길이 있다면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지.”


“그건 그렇죠.”
“어쨌든 공석은 없다는 거군.”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그리고 김우진이 보기에 더 이상 프로니우스 같은 사태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그가 새로운 업보를 쌓거나 신들이
쌓아올린 업보가 또 있지 않는 이상.

“···없겠죠?”
“포이닉스나 가루다들의 생존자가 남아 있지 않는 이상은 그럴 거다. 어쩌면 생존자가 남았어도 나처럼 해탈했을
지도 모른다.”
“하긴, 그것들이 죽은지는 두리쉬마님보다도 한참 됐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망각과 감정의 풍화는 모든 종족에게 동일하니.

“어쨌든 한시름 놨군요.”


“그래. 나는 앞으로 종말이 일어나는 차원들을 좀 찾아다녀야겠다.”
“종말을 맞이하는 차원들이 좋아하겠네요.”

김우진의 시선이 두리쉬마 뒤에 쭈구리처럼 서 있는 두 용사에게 향했다.

“고개 아프다. 앉아라.”


“예!”
“예!”

두 용사가 자리에 앉았다.

“술은 많으니까 먹고 싶은 걸로 알아서 따라 먹고.”


“예!”
“예!”
“두리쉬마님, 이녀석들 어땠습니까?”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지구에 잘 적응하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괘씸하긴 해.”

두 용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한 번 뱉은 약속은 지킨다. 약속대로 연옥에 가두지도, 모든 것을 앗아가지도 않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탁, 김우진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용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저도 명심하겠습니다!”

김우진이 휘휘 손을 저었다. 두 용사들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어지간하면 앞으로 다시 볼 일 없겠지.

“연옥의 소장님이 아쉬워하겠네요. 굴러들어온 죄수들이 사라져버렸으니.”


“두 명 쳐줘.”
“정말요?”
“이건 특별한 경우니까. 일종의 천재지변이지. 원래 천재지변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야.”
“알겠어요.”

김우진이 티비를 틀었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 분 전인 오늘 오후 8 시 29 분경을 끝으로 모나코의 마지막 게이트가 닫혔습니다.】


【이로서 다섯 번째 게이트 사태가 끝났습니다.】
【이번 사태는 이전과는 다른 전 세계적인 재앙이었으나 각성자들의 활약과 각 국가의 유연한 대처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101 명의 새로운 각성자들은 모두 백정탈을 쓰고 있어 일명 101 명의 백정부대로
불리며···.】
【···마지막 게이트를 닫음과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도움에 감사하며 또 다시 재발할 게이트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이들의 신원을···.】
【예상보다 피해가 적을 뿐, 전 세계적인 피해는 어마어마합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입니다. 파리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괴물들로 인해···.】
【교토의 목재 건물들은 불을 뿜는 마물의 등장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더 큰 피해를···.】
【대다수의 게이트가 사막에 열렸던 호주는 비교적 도시의 피해가 적어···.】
【UN 은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더 이상 개인적인 대처가 아니라 범지구적인 협력 체계로···.】

종말은 완전히 끝났다. 인류는 앞으로 재건을 위해 애쓸 것이다.

피해가 생각보다 적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피해가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니까. 김우진은 마음속으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저승이란 건 없다. 그들은 우주의 어느 차원인가로 넘어가 환생하게 될 거다.

그곳은 종말이 한참 남은 곳이길.

‘그게 지군가?’

당장 지구보다 종말이 늦게 오는 차원은 없을 것 같은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려나?”
“힘들 걸요.”

마물과 종말을 맞은 차원이 이전과 완전히 같게 회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난 예전의 평온한 지구가 좋은데.”


“그래도 더 이상 종말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 평화롭겠죠. 아마 한동안 떠들다가 게이트가 다시 안 열리면
서서히 조용해지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겠지.”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종말도, 마물도, 각성자들도.

모두 잊혀지고 교과서나 역사서에 좀 실리고 말겠지.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을 살 거다.

물론 그전에.

“조금 더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보채야지.”


“어떻게요?”
“이렇게.”

따악-

김우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프로니우스가 만들었던 타이머가 떠오르던 그 자리에 새로운 글씨가 새겨졌다.

[Final Stage Clear]


[End Is Over]

종말의 종료를 선언했다.

외전. 지구의 종말 完

───────────────
# < 외전. 율리아의 하루 >

지구의 종말이 끝났다.

인류는 갑자기 시작된 종말처럼, 그것이 갑자기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김우진의 선언에 그것이
종말이었음을, 그리고 끝났음을 인지했다.

[이거 나만 보임?]
[jpg]
[끝이 끝났다? 이개 뭔 개소리임?]
↳빡대가리임?
↳이 무슨 어머니 같은···.
↳end 가 끝이 아니라 종말이란 뜻도 있음
↳그럼 종말이 끝났다네.
↳···진짜 종말이었다고?

[ㄹㅇ]
[ㄹㅇ로 종말이었네? ㅁㅊ]
↳종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긴 함
↳ㄹㅇ세상 멸망하는 줄 알았음
↳전 세계에 괴물이 나타났는데 그게 종말이 아니면 뭐임

[이딴 게 종말?]
[내가 아는 종말은 이렇지 않았는데...]
↳니가 아는 종말은 어떤데
↳괴물들 막 나오고, 각성자들 등장하고, 세상 피폐해지고 나도 각성하는?
↳괴물들 막 나오고(나옴), 각성자들 등장하고(등장함), 세상 피폐해지고(원래 피폐함), 나도 각성하는(꿈깨)?
↳꿈깨ㅋㅋㅋ
↳왜! 나도 각성자 좀 되면 안 되냐! 나도 각성자 될 수도 있잖아! 그래 안 그래!
↳안 그래
↳되고 싶다고 말해!
↳되고 싶어!
↳응, 안 돼.
↳ㅅㅂ
↳ㅋㅋㅋㅋ이새끼들 잘 노네
↳근데 왜 원래 피폐한데ㅋㅋㅋ
↳세상은 아직 살만 하다고!

“흐음.”

커뮤를 살피던 율리아가 손을 펴고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구를 구하고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간 용사가
썼던 백정탈도 하나 같이 찍었다. 스마트폰으로 찍어 글 하나를 썼다.

[나는 각성자인데]
[난 각성자임.]
↳ㅈㄹㄴ
↳나는 신이다 임마
↳인증 없는 글은 뭐다?
↳먹이를 주지 마시오
↳요즘 이런 놈들이 많네ㅋㅋ
↳ㄹㅇ근데 인증하는 놈은 못 봄 ㅋㅋ
↳ㅈㄹ하네 진짜. 니가 각성자면 도게자 박고 명동 한복판에서 여장하고 돌아다닌다

역시나 댓글들이 불탔다. 특히 급발진 하는 댓글 하나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증]
[jpg]
[ㅇㅇ인증함
도게자 박고 여장도 해라]
↳···?
↳포샵 아님?
↳방구석 ㅈ문가들 나와주세요
↳아닌 것 같은데?
↳주작이지ㅡㅡ 사람 손에서 어케 바람이 나옴
↳팩트)각성자면 나온다
↳ㅇㄱㄹㅇ?
↳근데 저 백정탈 찐아님?
↳백정탈이 한두 개인가
↳도게자 박아라

커뮤는 조작 증거를 찾겠다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희희낙락 웃다가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아, 이러면 안 되지.”

원래는 이러지 않는데 커뮤를 하다 보니 왠지 조금씩 물드는 것 같았다.

게임을 켰다. 종말이 언제 있었냐는 듯, 게임 속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콰작, 익숙하게 감자칩을 먹으며 게임을 돌렸다.

“와, 백정 차이 끝내주네.”

답이 없는 팀원들을 한탄하며 게임을 하드 캐리했다. 판이 끝나자마자 보이스를 켰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판 돌리고 계셨습니까?]

“암 걸릴 것 같아요. 믿을 만한 팀원이 필요해요. 방금도 질 뻔 했어요. 말이 되요? 21 킬에 딜량 1 등을 하고


질뻔 했다니까요?”

[그게 게임이죠.]

“빨리 들어와요. 듀오나 돌리게.”

[네.]

최상위권 랭크인지라 큐가 잘 잡히지 않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압도적인 게임으로 1 승을 챙겼다.

“이거죠. 팀에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게임 할 맛이 나네요. 바로 다음 큐를 잡을까요?”

[네. 바로···두리쉬마님? 갑자기 왜? 예? 잠깐만요. 그게 무슨···?]

“강민식님? 무슨 일이에요? 강민식님?”

연결이 끊어졌다. 율리아가 강민식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뭐지?”
두리쉬마님의 이름이 나온 걸 보면 무언가가 습격을 당한 건 아니다. 아무래도 두리쉬마님이 강민식이 필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아쉬운데.”

쩝, 홀로 큐 한 판을 더 돌린 그녀가 깔끔하게 승리를 챙기고 거실로 나왔다. 김우진이 초밥을 먹고 있었다.

“앗! 치사하게 혼자 드세요? 제 거는요?”


“아까 물어봤는데 안 먹는다며.”
“···제가 그랬다고요?”
“컴퓨터 압수.”
“아, 왜 그러세요.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적당히 좀 해라, 적당히 좀.”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요.”

율리아가 익숙하게 김우진의 앞에 앉아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네요.”
“비싼 거니까. 커뮤에 인증 샷 올린 거 너지.”
“그걸 벌써 보셨어요? 저한테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소장님도 커뮤 중독이네요.”
“온 커뮤에 다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와, 역시 인터넷.”

능청스럽게 감탄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우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터치하지 않았다.

종말이 일어나고 용사들이 활약한 시점에서 그 정도의 일탈은 허용 범위였다. 율리아도 그걸 알기에 적당히
장난친 거고.

“그런데 그놈, 정말로 여장 시킬 거냐?”


“본인이 알아서 하겠죠. 딱히 생각은 없어요. 보고 싶지도 않고.”
“오늘 어디 간다며?”
“오랜만에 세이드를 보러 가려고요.”

세이드는 여전히 글라크에서 잘 살고 있다. 이그라실의 여왕과 결혼하면서 가정과 새로운 고향이 생겼고 아르반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신이 아니고, 신이 될 가능성도 당장은 없으며 본인 또한 딱히 희망하지 않았기에 가끔가다 김우진이나 율리아,


알베니우스가 만나러 가고 있었다.

“갈 때 선물 사가.”
“선물이요?”
“남의 집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서 구할 수 없는 것들 좀 몇 개 가져가려고요.”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거 가져가서 문명 망치지 마라.”
“에이, 당연하죠.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덜렁이.”
“저도 명색이 주신이거든요?”

초밥을 마저 삼킨 율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뭐.”
“칵테일이요. 밥을 먹었으면 한 잔 해야죠.”
“맡겨놨냐?”
“에이, 저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 앞에 있거든요?”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김우진이 투덜거리면서 칵테일을 만들어주었다. 신선한 라임과 애플 민트를 섞은 모히또였다.

“아, 그러고 보니 강민식님이 두리쉬마님한테 잡혀간 것 같던데요.”


“빠르네. 강민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알아서 하라고 하긴 했는데.”
“그게 언젠데요?”
“두 시간 전?”
“타이탄의 행동력은 역시 대단하네요.”

그 정도면 김우진에게 말하고 곧장 강민식에게 달려간 수준이었다.

“잘 먹었어요!”
“세이드한테 안부 전해줘.”
“네.”

식사를 마친 율리아가 짐을 챙겼다. 아공간에 이것저것 넣은 뒤, 오랜만에 지구의 옷이 아닌 아르반의 옷을


꺼냈다.

“가볼까.”

차원의 방벽을 열었다.

* * *

“정말로 세계수의 씨앗이군요.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그라실의 여왕, 넬리아 이그라실이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글라크에는 세계수가 없다.

본래는 존재했으나 종말의 겁화를 피하지 못하고 불타 사라졌다.

엘프들에게도, 글라크의 모든 인류에게도 재앙이었다.

종말의 불길은 대륙 전 차원을 휩쓸었고 대륙 대부분을 집어 삼켰다.


마기가 대지를 침식했고 인류에게 허용된 공간은 더 없이 작고 초라해졌다.

용사 김우진에 의해 종말을 막았고, 절대신 김우진에 의해 마기가 완전히 정화되었지만 한 번 피폐해진 대지의
기운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드넓은 대지는 그야 말로 그림의 떡이었고 인류는 어떻게든 지기를 회복시키고자 했지만 대륙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그런 상황에서 율리아가 가지고 온 세계수의 씨앗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고 대지를 살피면 메말랐던 토지가 다시 비옥해지는 건 시간문제니까.

당연히 엘프로서 다시 세계수를 모실 수 있다는 행복도 함께였다.

“감사합니다. 신께서 은혜를 내리지 않았다면 저희는 다시 어머니 나무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에요. 굳이 제가 아니어도 어머니 나무의 씨앗은 글라크에 돌아왔을 거예요.”

세계수는 차원의 방벽에 간섭할 수 있다. 때가 되면 방벽을 열고 하이엘프에게 씨앗을 들려 내보낸다.

그것이 세계수들이 번식하는 방법이며 율리아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세계수의 씨앗을 단 하이엘프가 당도했을 거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씨앗과 함께 영약들을 가져왔어요. 글라크의 사정상, 아무런 방비 없이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발아하면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세계수는 발아하면서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긴다. 그 한 차례의 폭풍을 견뎌내야지만 선순환이 시작된다.

하지만 피폐해진 글라크에게 있어 첫 폭풍은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감사합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여왕님도 저한테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하지만 주신께 어찌···.”
“음, 너무 강요하는 것도 오히려 이상해지네요. 그럼 그냥 편하실대로 하세요.”
“예.”

씨앗은 대륙의 정중앙에 심어졌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대륙을 복구하기 위한 최적의 위치였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수림이 형성될 거고 나아가 대지 전역에 뿌리를 내릴 거다. 그리고 엘프들은 이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겠지.

세계수를 심은 율리아가 신력을 주입해 더욱 발아를 가속화한 뒤, 근처에 앉았다.

“고맙다.”
“당연한 거를 가지고 뭘.”

세이드가 다가왔다.

“행복해 보이네.”
“나쁘지 않다.”
“나랑 아르반은 다 잊어버리고.”
“뭐냐, 그 허접한 멘트는?”
“아니, 그냥 적당히 행복한 걸 바랐는데 너무 행복해보여서.”
“뭐라고?”
“둘이 사랑을 속삭이는 걸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너와 김우진 놈이 본 거지, 내가 보여준 거냐?”

세이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율리아카 쿡쿡거리며 웃었다.

“선물 가져왔어.”
“선물?”

율리아가 아공간에서 상자를 꺼냈다.

“이게 감자칩이라는 건데···.”


“맛있군.”
“끝내주지?”
“그 정도까지는···.”
“이건 컵라면이라는 거야.”
“신기한데.”
“맛은 더 신기할걸.”
“···환상적이군. 그 지구라는 곳의 음식인가?”
“응.”
“김우진이 그렇게 그립다고 했던 라면이란 것의 맛이 이랬었군.”

확실히 그리워할만 하다. 세이드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들썩였다. 자라난 싹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솟아났다.

“···미친. 이거 맞는 거냐?”
“맞아.”

결코 평범하지 않은 발아였으나 릴리와 나르에 익숙해진 율리아에게는 이제는 당연한 과정이었다.

세계수는 흡사 천년을 산 거목만큼 자라났다.

- 끼잉

그리고 자그마한 다람쥐가 나타났다. 율리아의 어깨 위로 올라가 뺨을 부볐다.

“···정령체가 벌써?”
“뭘 그렇게 놀라. 신이 개입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이게 당연하다고?”

세이드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율리아가 픽 웃었다.

그녀가 다람쥐를 쓰다듬었다.

“어머니 나무님, 당신의 이름은 레니에요.”


- 낑?

“마음에 드세요?”

- 낑낑!

다람쥐 레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


“세이드는 이곳에 갇혀 있어서 잘 모르나 본데 이게 요즘 트렌드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대체 어떤 엘프가 감히 어머니 나무께 이름을 붙이는 거냐!”
“나.”
“······.”
“그리고 소장님? 세이드도 뒤쳐졌네. 세상과 접촉할 필요가 있어 보여.”
“···김우진이 널 버려놨군.”

제기랄, 이래서 둘이 만나게 두면 안 되는 건데.

“김우진과 좀 떨어져라. 놈은 썩은 생선과 같아서 함께 하면 악취가 벤다.”


“이미 동거하는데?”
“동거?”

세이드의 눈이 커졌다.

“난 이 결혼 반대다!”
“뭐래,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우진 데려와! 이 개 같은 놈을 내 손으로···!”
“세이드가 질 것 같은데.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주신들 전부 그 집에 사니까 오버하지 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잘 들어라. 김우진은 늑대다. 그놈은 탐욕스러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의 정에 율리아가 웃고 말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머물던 율리아가 지구로 돌아갔다.

【종말 이후, 신흥 종교 절대신교의 교세가 더욱 폭발적으로···.】


【절대신교의 교주는 각성자들이 절대신의 가호라고 주장하며···실제로 마지막 종말에 죽은 절대신교의 교인들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뭐예요?”
“또 사고쳤다. 진짜 저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저는 오직 절대소장신님의 신앙을 퍼트리기 위한 충심과 믿음으로···.”
“닥쳐.”
“네! 명하신다면!”

그리고 집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양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디아네를 발견했다.

───────────────
# < 외전. 광신도와 귀쟁이 그리고 요리사 >
디아네가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다섯 번째 종말이 시작되자 주요 교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한 곳에 모아두고 지구에 파견되는 용사들에게 슬며시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주신이자 김우진의 최측근이다 보니 백정탈들은 그녀가 언급한 교인들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 중 하나로 두었다.

그리고 그게 절대신교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당연한 일이다. 거의 노골적으로 백정탈들이 절대신교를 감싸고 도는 느낌이었으니.

“저는 절대소장신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가득한 절대소장신님의 신도들이 다치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용히 하라니까?”
“예!”

의도는 좋았다. 그 결과도 좋았다.

신도들은 대부분 무사했고 교세는 확장되었다. 일반적인 신이라면 무조건 좋아했을 최고의 결과였다.

문제는 김우진이 일반적인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신이다. 이미 압도적인 힘과 권능을 가진 존재이기에 굳이 신도와 신앙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김우진은 스스로가 떠받들여지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았다.

“저걸 저대로 두면 이 지구가 절대신교로 뒤덮일 거야.”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 않아요?”
“응, 괜찮지 않아.”
“절대소장신님! 그것이야말로 제가 그리는 이상향입니다! 절대소장신님의 고향이 절대소장신님의 권역이 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닥치라니까!”
“죄송합니다!”
“손 더 높이 들어!”
“네!”

촌극과도 같은 그 모습에 율리아가 픽 웃었다.

“그러면 아예 포교를 막는 건 어떨까요?”


“그러려고.”
“읍읍!”
“한 번은 봐줬는데 이건 정도가 심해. 이대로 가다간 진짜 지구가 이상해진다고.”

광신도는 무섭다. 전염되기에 무섭고 앞뒤가 없기에 더 무섭다.

신과 종교를 앞세워 자유와 대의를 억압하고 법 위에 서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신앙이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김우진이 바라는 지구는 절대 그런 게 아니었다.

“읍읍읍!”
“그런데 단순히 포교를 하지 말라고 하면 쟤는 분명히 이상한 꼼수를 쓸 거란 말이지.”
“지구로의 출입을 통제하실 생각이세요?”
“그래.”
“읍읍읍읍!”
“그건 너무하지 않아요?”
“아니, 쟤는 이 정도는 해야 돼.”
“으으으으읍!”
“그래, 말해 봐.”
“그건 저를 두 번, 스무 번, 이백 번, 이천 번 죽이시는 겁니다! 전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소장절대신님을 섬기며 이 지구에 오직 소장절대신님을 믿는 인간만 가득한 낙원을 건설···.”
“금지해야겠네요.”
“그렇지?”
“그렇다고 아예 그러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기한을 두는 게 어떨까요? 다 소장님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럼 한 달.”

그렇게 디아네의 지구 출입이 금지되었다.

* * *

“이건 옳지 않습니다.”

디아네는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으나 거부할 수도 없었다.

불공평한 벽이 생겼으나 그 벽을 세운 게 그녀가 절대적으로 믿고 섬기는 김우진이었으니.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절대소장신님의 신도로서 너무 충실히 섬긴 것 뿐입니다!”


“그래, 정확히 알고 있네. 거기서 제발 너무 좀 빼. 그 전까지는 지구에 올 생각하지 말고.”
“절대소장신님! 안 됩니다! 절대소장신님! 부디 자비를!”
“그리고 피조물들한테 포교도 좀 그만해. 평생 하지 말라고는 안할 테니까 한 달 동안은.”

주신이다 뭐다 추켜 세워주지만 김우진의 힘은 다른 모든 신들보다 압도적이다. 그의 권능 앞에 디아네는


지구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울고 있다고? 주신이라는 작자가?”

- 한심해.
- 한심!

“주신도 결국 절대신님의 신도일 뿐입니다.”

차원, 연옥. 자기 집에서 세계수들과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던 시에나는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한숨을 쉬었다.

“차나 한 잔 하렴.”
“감사합니다.”

따스한 세계수의 잎차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래서 이제 뭐하려고?”
“모르겠습니다.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한 달 동안 뭘 해야할지.”
“굳이 지구에 얽맹리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다른 곳에서 절대소장신님을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아시다시피 피조물들에 대한 포교 또한 금지된
상태라.”
“거기에는 딱히 강제성이 없잖아?”
“강제성이 없다니요? 절대신님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할까.”

시에나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손을 휘저었다.

“다 마시고 나가보렴. 나도 가봐야할 곳이 있으니까.”


“어디를 가십니까?”

- 고향!
- 케이룸!

“아.”

세계수들의 외침에 디아네가 숨을 삼켰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디아네와 시에나는 지독한 악연이었다. 물론 디아네가 직접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고 스스로를


케이룸이라 칭하던 베른의 명령을 받았을 뿐이지만 거기에 조금이라도 관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차원, 케이룸. 베른의 고향이자, 시에나의 고향, 그리고 디아네의 고향이기도 한 곳.

“괜찮아. 복수도 했고 너한테 더 이상 악감정은 없으니까.”


“···뭐하러 가시는 겁니까?”
“죽은 동족들이 묻힌 곳을 관리하러?”
“···아직 안 잊었잖습니까.”
“동족들을 잊으면 안 되지.”

시에나는 티타임을 끝내고 곧장 연옥을 나섰다. 디아네는 끝끝내 그녀를 따라갔다.

“굳이?”
“저도 사과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베른을 섬기는 집행자에 불과했다한들, 그들을 핍박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케이룸은 본래 베른이 자신의 권역으로 만든 차원이었다. 하지만 베른이 죽어버린 후, 신의 힘이 사라지면서


믿음은 사라졌고 새로운 백신전이 들어서면서 그 자리는 여러 신들이 대체되었다.

“자애의 신, 알티마님께서는 모두와 함께 하십니다!”


“이리드님의 자비가 함께하길.”
“숲의 주신, 시에나님의 은총이 언제나 여러분을 보듬을 것입니다.”

무한 경쟁 신앙. 현재의 케이룸은 수십 개의 종교가 난립하는 대혼돈의 시기였다.

“훨씬 보기 좋네.”
개나 소나 전부 그 빌어먹을 베른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보다 훨씬.

“···언제 여기다가 신앙을 퍼트리셨습니까?”


“틈틈이? 나름 꾸준히 무덤 살피로 오고 갔거든.”

그래도 고향에 내 이름과 신앙이 있는 게 나쁘지는 않네.

“절대소장신님이 시에나님만 같으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소장은 조금 유별나잖아? 근데 네 신앙은 없던데.”
“제 신앙은 퍼트린 적이 없습니다. 항상 절대소장신님의 신앙을 퍼트렸죠.”
“···너 진짜구나.”

하긴, 그때 그 모습을 생각하면···

시에나가 디아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첫 만남은 아니었다. 첫 만남은 별 일이 없었다.
두 번째는 ‘엘프가 말대꾸?’였고 가장 강렬했던 건 역시 그 다음 만남이었다.

엘프들이 묻힌 그 섬에서 디아네는 패배했다.


그녀가 섬기던 신 또한 패배했다.

그리고 그날, 디아네에게는 새로운 종교가, 새로운 신이 생겼다.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앙을 찾아가던 그 광기어린 모습을, 시에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일단 가자.”
“그 섬으로 가십니까?”
“그래.”

베른이 엘프들을 학살하고 방치해두었던 차원 남쪽의 섬. 시에나는 신이 된 이후에 그곳에 결계를 쳐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엘프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시에나가 무덤 앞에 섰다. 수만 개의 무덤. 시에나가 직접 하나하나 매장하고 명복을 빈 것들이었다.

“모두 새로운 곳에서는 행복하길.”

죽은 영혼은 윤회한다. 그들이 새로운 삶에서는 지금과 같은 비극이 없기를 빌어주었다. 괜스레 차오르는
그리움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여전히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동족이고, 가족이니까.”
“죄송합니다.”
“말했잖니. 네가 죄송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는 왜 가짜들에게 미쳐 있어서.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디아네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무언가를 깨닫고 곧 다시 들었다.

“···생각해보니 절대소장신께서 말씀하시길, 피조물들에게 포교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는 건 피조물이 아니면 괜찮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피조물이 아니면 된다고?”

김우진으로서는 디아네가 워낙 지구인들을 상대로 포교를 하다 보니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꽉 막힌 어둠 속을 비추는 한 줄기 서광이었다.

“예. 이 세상에 신을 섬길 만큼 이지를 가진 생명체가 피조물들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왜 날 보니?”

디아네는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을 올곧이 뜨고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눈을 보는 것이 예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동족들을 모두 잃고 많이 슬프신 것 압니다. 이번 사태만 봐도 그렇지요. 프로니우스, 그 불쌍한 차원룡은 모든
동족을 잃고 미쳐버린 겁니다. 복수심을, 마음의 공허함을, 사무치는 그리움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렇지?”

주춤, 시에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디아네가 그만큼 나아갔다.

“하지만 복수의 덧없음을 깨닫고 마음의 공허함, 사무치는 그리움이 채워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채워진다고?”

왠지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시에나는 본능적으로 물었다.

“복수의 덧없음을 알려주고, 공허함을 충만하게 채워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해주는 그 이름은 바로
절대소장신님입니다.”
“아니란다.”

시에나가 즉답했다.

“아닙니다. 아직 그 아름다움을 모르셔서 그런 겁니다. 제가 비록 슬퍼하시는 시에나님께 가족과 동족을


돌려드릴 수는 없지만 신앙의 충만함과 아름다움으로 슬픔을 잊게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필요 없다니까?”
“그러지 마시고···.”
“저리 꺼져!”
“한 번만 믿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절대소장신님께서는 언제나 저희를 굽어 살피시니···.”
“그거 김우진이잖아! 김우진을 어떻게 믿어!”
“절대소장신께서는 절대신의 위엄을 떨치시니 믿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잊은 것 같은데 나도 신이란다? 그것도 일반 신이 아닌 주신.”
“저도 신입니다. 주신.”

디아네가 아공간을 열고 책을 꺼냈다.

“그건?”
“제가 태초부터 절대소장신께서 탄생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집필한 경전입니다.”
“···김우진은 태초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도 됩니다.”
“완전 사이비잖아!”
“절대소장신께서는 실제로 존재하시니 그것은 불경입니다. 하지만 시에나님이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첫 번째 구절부터 읽어드리겠습니다. 경전을 듣다 보면 경건함이, 그리고 신앙심이 생길 겁니다.”

태초에 빛과 어둠뿐이던 이 세상에 절대신께서 눈을 뜨셨다.


절대신께서는 빛과 어둠, 어둠과 빛 모든 것의 균형을 이루는 존재였으니···

“꺼져!”

시에나가 차원을 탈주했다.

“어디 가십니까!”
“어디로 가던 무슨 상관이야!”
“마저 들으셔야지요. 이제부터 재밌는 구간입니다!”
“지구, 지구로 가야해.”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저 미친년이 따라오지 못할 테니까.

* * *

“그래서 여기로 오셨다는 겁니까?”


“그래.”

창백한 안색의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네는 점점 더 미쳐가는군. 김우진이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네. 그대로 뒀다면 지구의 인간들이 죄다
김우진을 섬기는 신도로 변했을 거네.”
“그게 나쁜 겁니까?”
“정정하지. 김우진을 맹목적으로 섬기는 광신도로 변했을 거네.”

옆에 앉은 데르카인의 말에 베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심각하긴 하군요.”


“자네는 대체 디아네가 뭐가 좋다고 만나는 건가?”
“생각보다 착한 사람입니다. 신앙을 전파하는 걸 제외하면 다 좋은데 신들에게는 신앙을 전파하지 않으니까요.”
“근데 이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네요.”

음, 베르너가 포크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신구군?”
“예. 스마트폰으로 보이게 해놓은 겁니다. 디아네한테 전화 좀 해봐야겠네요.”
“잘 생각했네. 제발 나한테는 신앙을 전파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김우진과 몇 십 년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이제와서 신으로 섬기라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그렇죠.”

차원의 방벽마저 통과하는 통신구가 우주 저편의 광신도와 연결되었다.


“디아네? 지금 뭐하고 있어?”
“시에나님 여기 있냐고? 계셔. 응.”
“너무 그러지 마. 믿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와야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미안해서 그런다고? 본인이 싫다고 하시잖아.”
“그래. 아, 데르카인님이 자기한테는 절대 전파하지 말아 달라는데.”
“응, 나도. 사랑해. 이따 연옥에서 저녁 해줄게.”
“응, 이따 봐.”

탁, 통신이 끊어졌다. 베르너가 일그러진 두 신의 얼굴들과 마주했다.

“왜 그러십니까?”
“토가 나올 것 같아서 그렇네.”
“나도 그렇단다.”
“두 분이서 사귀어 보시는 건?”
“끔찍한 소리 말게! 누가 이런 귀쟁이랑!”
“누가 이런 난쟁이랑!”

씩씩 거리는 두 주신을 보며 베르너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앞으로 안 그러겠답니다. 나름 생각해서 한 건데 안타깝다네요.”


“두 번만 생각했다간 내가 죽고 말 거란다.”
“안 한다고 하면 확실하게 안 하는 사람이니 문제없을 겁니다.”
“고맙구나.”

안도의 한숨을 쉰 시에나가 사라졌다.

“자, 그럼 다음 음식을 먹어 볼까요?”


“시에나 때문에 묻지 못했네만 대체 왜 여기서 먹는 건가? 내가 공부하는 걸 보고자 하는 건 아닐 테고.”
“그야, 여기 학식이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으니까요?”
“그놈의 맛집 여행, 아직도 안 끝났나?”
“지구에는 다른 차원들보다 훨씬 맛집이 많더라고요.”

베르너가 다시 식권을 뽑았다.

───────────────
# < 외전. 소인과 거인 그리고 독인 >

“학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고?”


“예. 소문대로 어지간한 맛집보다 괜찮습니다.”
“이게?”
“이래서 맛알못들이란···.”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베르너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나?”
“뉴욕쪽에 맛집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놈의 맛, 맛.”
“그놈의 마력포, 마력포랑 뭐가 다릅니까?”
“다르네. 난 더 이상 마력포를 입에 담지 않으니까.”
“마력 미사일이나, 마력포나.”
“엄연히 다르네!”

데르카인이 버럭 소리쳤으나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았다. 권능으로 소리를 차단한 덕분이었다.

“예, 예. 열심히 만드시길 바랍니다.”


“가기나 하게.”
“근데 안질리십니까? 전 세계 대학들 돌아다니면서 전부 강의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것을 배우는게 지겨울 리가 없잖은가. 자네는 미식을 하는 게 지겹나?”
“이해가 확되네요. 그게 미식과 동급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솔직히 중복되는 것도
많잖습니까?”
“사람마다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네. 그리고 큰 틀을 같아도 대학마다, 교수마다 세세함이 다르지.
그 모든 것을 종합할 것이네.”

아마 대학 생활이 엄청나게 길어지겠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으니.

‘나중에는 대학원에 진학도 하고 학회에도 나가야지.’

그렇다고 대학원 랩실에서 노예처럼 살 생각은 없었다. 권능을 이용해 알맹이만 쏙 빼먹을 생각이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지.”

베르너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데르카인이 텅 빈 식판을 치우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강의가···.”

스마트폰으로 강의시간표를 꺼내 확인했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공강이라고는 거의 없는 빽빽한 시간표였다.

“우주항공이군. 마력위성이라. 이것도 나쁘지 않단 말이지.”

우주에 마력위성을 배치하고 지상으로 쏘아내는, 혹은 우주의 적들을 향해 쏘아내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이곳의 인간들은 태양에너지를 받는다고 하지만 태양이 아니라 아카식 레코드의 빛을 통해 에너지를
수급하면···.”

그 파괴력은 태양빛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한 위성으로 행성 위를 도배한다면 철벽의 요새가 된다.

“1 차적으로 위성, 2 차적으로 미사일, 마지막 3 차로 마력포.”

우주에서 한 번 요격, 들어오는 대기권에서 두 번 요격, 그리고 지상에서 세 번 포격.

그 압도적인 화망을 견뎌낼 적들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다.

“아니지. 그것도 좋지만 역시 그 우주 전함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단 말이야.”


지구인들은 과학 기술이 부족해 만들 수 없고 공상이나 이론적으로만 존재하지만 데르카인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인공지능은 정령으로 대체하고, 장갑이나 부품을 만드는 건 애초에 드워프들이 최고다. 설계는 그의 장기이며
과학이 부족한 부분들은 마법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상상만해도 좋군.”

김우진은 과유불급이라고 하지만 옛 말에도 그랬다. 평화를 원하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그게 아니더라도 수키로가 넘어가는 거대한 우주전함은, 수천문의 거함 거포들은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함을 자아낸다.

그것만으로도 우주전함을 만들 이유는 충분하다.

“빨리 가야지. 이러다 강의에 늦겠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늦깎이 대학생이 서둘러 강의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

굉음과 함께 무언가 그의 앞에 떨어졌다.

“사, 살려주세요! 데르카인님!”

사람, 아니 신이었다.

* * *

“일단 진정하게.”

따악, 데르카인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권능을 펼쳤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무언가에 놀란 사람들에게 암시를 걸어 아무 일 없던 것으로 만들고, 아무도 없는 멀쩡한


환상을 보여주며, 소리를 차단에 말이 세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가벼워 보이지만 무려 세 가지 권능이 종합된 콤비네이션이었다.

“자네 얼굴이 왜 그렇게 초췌하나? 무슨 일 있나?”


“데르카인님···!”

눈이 퀭한 강민식이 데르카인의 손을 붙잡았다.

“깜짝이야. 이 뼈다귀 같은 손은 뭔가? 어디 흡혈귀놈한테 피라도 빨렸나?”


“흡혈귀보다 지독한 사람한테 피가 빨렸습니다···.”
“자네 피를 빨아갔다고? 설마 김우진이?”
“아닙니다. 소장님이 제 피를 가져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두리쉬마님입니다. 아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강민식이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더니 두리쉬마의 손을 이끌고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음습한 곳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강의를 들어야 하네.”


“그깟 강의가 저보다 더 중요합니까!”
“도끼를 부르는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제가 들어도 이상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티팩트! 아티팩트 좀
주십시오!”
“아티팩트? 갑자기 무슨 아티팩트?”
“그거 있잖습니까. 세계수를 신에게서 감췄던 아티팩트! 구름하늘인가 뭐시기!”
“구름하늘이 아니라 하늘구름이네. 뭐시기가 아니라 내 걸작 중 하나고.”
“예, 아무튼 그거. 그거 어디 있습니까?”
“아공간 어딘가에서 썩고 있을 거네. 그런데 갑자기 하늘구름은 왜?”
“숨어야 합니다!”
“자네가?”
“예, 제가!”

데르카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자네는 사용할 수 없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세계수를 위해서 맞춤 제작한 물건이라 자네가 숨는다고 한들 큰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네. 일개 피조물들이라면
당연히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고작 피조물들에게 도망치려고 한다면 내게 아티팩트를 부탁할 필요가 없겠지.”

수염을 어루만지던 데르카인이 물었다.

“말해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제대로 말을 해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지 않겠나?”


“···두리쉬마.”
“두리쉬마?”
“예. 두리쉬마 그 개새끼가 저를 휴대용 비어텐더로 여기고 있습니다!”
“···으응?”

* * *

쌓인 게 많은지 강민식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김우진이 자네를 두리쉬마에게 넘겨서 납치를 당했다?”


“예.”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종말을 맞이한 차원들과 종말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업을 쌓는 두리쉬마를 쫓아다닌다?”
“예.”
“그런데 두리쉬마가 술에 맛을 들리더니 계속해서 술에 독을 요구한다?”
“예.”
“그런데 내성이 생겨서 요구치가 늘어났고 결국 일반 독으로는 감당이 안 돼서 자네의 피를 요구한다?”
“예. 제 피가 제가 가진 모든 독중에 가장 독합니다.”
“그런데 그 빈도가 점점 늘어나서···.”
“피가 빨려서 다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어쩐지 안색이 창백하고 온 몸이 뼈다귀 같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자네 피로 술을 만드는 게 가능한 건가? 독과 알콜은 엄연히 다른데.”


“제 권능입니다. 피로 제가 먹어본 거라면 어떤 종류의 독기로도, 약물로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군. 피로 알콜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군.”
“예. 아무튼 그 무식한 거인놈은 만족이라는 걸 모릅니다. 물 먹는 하마도 아니고 하루에도 수십 잔씩 술을
요구합니다!”
“그야 당연하지 않나. 거인족들은 우리 드워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을 술을 물처럼 퍼마시네. 그 조상격인
타이탄은 어떻겠나?”
“······.”

강민식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아, 아티팩트. 아티팩트 정말 안 됩니까?”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네만은···.”
“그럼 어서···!”
“하루이틀 사이에 될 일이 아니네. 그리고 안타깝게도.”

쿠웅-

대지에 거대한 족적이 새겨졌다.

“두리쉬마는 이미 와버렸고.”
“···아아.”
“강민식. 간이 크구나. 감히 도망을 가다니.”

2m 가 넘어가는 거인이 으르렁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강민식이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이네, 두리쉬마.”
“데르카인이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난 원래부터 여기 있었네. 강민식이 내게 온 거지.”
“너한테?”

데르카인이 슬쩍 강민식을 흘겨봤다. 그 시선에 강민식은 진한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하는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자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내게 아티팩트를 만들어달라더군.”


“데르카인님!”
“아주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그렇다고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그런 게 아니라···.”
“헌데 그걸 나한테 말해주는 이유가 뭐지?”
“흥미가 돋아서네.”
“흥미?”
“나는 자네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많이 본 적이 없네. 타이탄이 어째서 술을 마시지 않을까, 조금 유별나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더군.”
“그것들은 술이 아니라 물이니까.”
“다르게 말하면 강민식의 피가 들어간 술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아티팩트 같은 건 절대 만들어주지 않겠네. 그 술을 나도 좀 공급 받을 수 있겠나?”
“···데르카인님?”

진한 배신감에 강민식의 입이 벌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어버버 말이 입 안에서 계속 헛돌 뿐이었다.

“아티팩트 따위를 만들어봐야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그건 자네가 잘 알지 않나?”
“···좋다.”
“좋은 거래네.”

거인과 소인이 서로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거래의 대상이 된 독인의 의견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거 아나? 거인만큼은 아니지만 드워프들도 술을 좋아하네.”

그리고 데르카인은 그런 드워프들 중에서도 특히 술을 좋아했다.

“그런데 용사가 되고, 신이 되고 나서 술에 제대로 취해본 적이 없네. 나는 취하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데 취한


적이 없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여겼다.

“그런데 타이탄이 만족해하며 계속 찾을 정도의 술이라니. 구미가 당기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이 배신자!”
“미안하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드워프네.”

쩝쩝, 데르카인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 있다.”

두리쉬마가 아공간에서 큰 오크통 다섯 개를 꺼냈다.

“나중에 더 필요하면 이야기해라.”


“고맙군. 좋은 거래였네.”
“마찬가지다.”

독인과 술들이 거래되었다.

“아아아아악! 이거 놔! 난 인간이야! 난 비어텐더가 아니야!”

강민식이 발악했으나 거인에게 끌려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거인과 독인이 사라졌다.

“···조금 불쌍하긴 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용사가 되어 감옥에 갇힌 이후,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는데 다시 취할 수 있다니.

드워프가 되어 이 유혹을 어찌 참을 수 있을까.

데르카인이 강의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 자리에서 술통을 까 들이켰다.

벌컥 벌컥-

“크어어어어어어! 이거 죽이는구만! 다섯 통이 아니라 백 통이 있어도 모자라겠어!”

그날 데르카인은 3 개의 강의에 자체 휴강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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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전. 파랑새와 호랑이의 밤(完) >

“얘들아, 잘자.”

- 잘자.
- 잘자.

소장이 눈을 감는다. 숨소리가 균열해지자 릴리와 나르가 눈을 떴다.

- 가?
- 가자.

세계수에게 낮과 밤은 큰 차이가 없다.

거대한 신목에게 잠이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장이 잠에 들면 두 세계수의 또 다른 일과가 시작된다.

모두가 잠든 지구의 밤. 릴리는 날개를 펼치고 밤하늘을 날았다.

- 시끄러.

밝은 조명들, 북적이는 사람들. 밤이 되면 조용해지는 과거의 연옥과도 사람이 없어 조용한 지금의 연옥과도
다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 나도, 나도.
- 따라와.
- 응.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버둥거리던 나르가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릴리와 나르가 허공을 유영했다. 소장은 인간들에게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사실 들킬 일은 없다. 마법적
능력이 없는 인간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쯤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우니까.

- 오늘은 뭐해?
- 구경.
첫 번째 목적지는 부평의 한 고급 펜트하우스였다.

익숙하게 창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 어디 갔지?
- 몰라.

일곱 주신 중 하나인 독쟁이의 집이었으나 사람의 온기보다는 차가운 냉기가 느껴진다. 자리를 비운지 꽤 오래
되었다는 것을 릴리는 인지했다.

- 다른 곳으로.
- 응.

곧장 한국을 벗어나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구경할 사람은 둘이었다.

- 찾았다.
- 먹깨비.

릴리가 눈을 빛냈다. 저 멀리 길거리 식당에서 핫도그를 사 먹는 남자가 보였다.

- 또 먹어?
- 또 먹어?

“응? 너희들이 여기는 어쩐 일이야?”

먹깨비가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구경?

“먹어볼래?”

- 응.

릴리와 나르가 핫도그를 한입씩 베어물었다. 팡 터지는 육즙과 육향, 그리고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소스가 썩
괜찮았다.

“어때, 나쁘지 않지?”

- 응.
- 응!

“음식이라는 게 반드시 비싸다고 맛있는 게 아니거다. 재료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걸 어떻게 맛있게 만드느냐는
요리사의 능력이지. 내가 마물들을 이용해 진미를 만드는 것처럼.”
“물론 대부분은 싼 만큼 딱 그 정도의 값어치를 하겠지만 이 세계에는 은근히 숨은 명인들이 많거든. 뛰어난
능력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능력이 아주···.”

- 말이 너무 많아.
- 맞아.
릴리와 나르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먹깨비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평소에는 조용조용하다가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술 취한 난쟁이보다 더


시끄러워진다.

릴리는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벗어나는 게 좋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 가자.

릴리가 나르에게 눈짓했고 먹깨비가 눈치 채기 전에 멀어졌다.

지루한 설명을 조금 들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 이번에는 여기!

다음으로 간 곳은 보스턴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역시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독쟁이의 집과는 달랐다. 밑에서부터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두 정령체가 지하로 들어갔다. 백미터쯤 들어갔을까, 거대한 지하 연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으, 이거지. 정말 끝내주는군!”

수많은 기계와 마법진들, 여기저기에 서린 신의 권능들까지.

난쟁이가 대학이라는 곳을 다니며 만들어 놓은 개인 연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연구실이 비교적 조용했다. 평소라면 이런 저런 기계를 돌리고 실험하면서 시끌벅적했어야 했는데.

- 뭐 먹어?
- 뭐야?

“응? 세계수들이구만. 언제 왔나?”

- 방금.
- 방금.

얼굴이 붉어진 난쟁이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뭘 먹냐면, 어린 그대들은 아직 잘 모르는 끝내주는 걸 먹고 있지.”

- 나 어려?
- 안 어려.

“어리지. 아직 백 년도 못 산 핏덩이들인데.”

- 릴리, 어른.
- 나르도 어른.

릴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역시 난쟁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새장에 가둔 그날부터.


“크흠, 내가 실언을 했군.”

그녀의 눈빛이 묘해지는 것을 본 난쟁이가 냉큼 말을 주워담았다. 그녀의 시선이 난쟁이가 들고 있는 술잔에


닿았다.

- 나도 먹어볼래.
- 나도.

“이걸? 안 되네.”

- 왜?

“얼마 없으니까. 나 혼자 먹기도 부족하네.”

- 그런 게 어딨어!
- 어딨어!

“그렇다면 그런 줄 알게. 이건 줄 수 없어! 두리쉬마가 언제 강민식을 데리고 지구로 다시 올줄 모른단 말이네!”

- 그래도 한 방울!
- 한 방울!

술이라는 것은 알았다. 평소에 술에 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난쟁이가 취한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마력포가 아닌 다른 것을 이렇게까지 아끼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 가지 조금 잘라 줄게.
- 나도.

“···으음, 그렇다면야.”

난쟁이가 술잔을 내밀었다. 릴리와 나르가 잔 안으로 주둥이를 파묻었다.

푸우우웁-

그리고 뱉어냈다.

- 맛없어! 독이야!
- 으엑!

“프흐흐, 독이 아니라 술이네. 이 맛을 모른다니 아쉽구만.”

- 우릴 독살하려고!
- 맞아!

“독살이라니. 나는 이렇게 잘 먹지 않나?”

난쟁이가 벌컥 벌컥 술을 들이켰다. 릴 리와 나르의 눈이 샐쭉해졌다.


- 이상한 난쟁이.
- 독 먹는 난쟁이.
- 키 작은 난쟁이.
- 괴짜 난쟁이.
- 술 취한 난쟁이.
- 빨간 난쟁이.

“거참, 술 마시는데 옆에서 자꾸 그럴 건가?”

- 흥.
- 갈 거야!

릴리와 나르가 난쟁이의 집을 벗어났다.

- 이제 어디로?
- 음, 백신전으로!

나르와 릴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백신전에 있었다.

두 세계수의 본체와 가지가 심어진 세 개의 차원 중 하나.

연옥을 제외하고는 가장 우주의 힘이 풍부한 차원. 마물들의 침략이 있었을 때 모습을 드러냈던 마력포들은
다시금 지하로 사라져 있었다.

“태초에 절대신께서 존재했고···.”

- 광신도!
- 광신도!

릴리는 백신전을 돌아다니다 집행자들을 상대로 경전을 전파하는 광신도를 찾았다.

“세계수님들이군요. 오랜만입니다.”

- 쫓겨났다며?
- 났다며?

“···세계수님들의 직설적이 화법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신을 섬기는데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소장신께서 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내리시는 시련입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버텨낼 것입니다.”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던 광신도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예. 버텨낼 것입니다.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아니었다.

- 이상해.
- 도망가자.

소장이 그랬다. 미친것들하고는 상종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릴리와 나르는 소장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세계수였다.
- 짐승. 없어.
- 없어?
- 또 싸우러 나간 거 같아.
- 맨날 싸워, 짐승.
- 정상이 아냐.

짐승은 백신전에 없었다. 늘 종말 차원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갈망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 연옥으로 가자.
- 응.

릴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가 나르와 함께 직접 조성한 차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 활쟁이!
- 활쟁이!

“···그렇게는 부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니? 정말 말 안 듣는구나.”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활쟁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짐승이 가장 만나기 힘든 주신이라면 활쟁이는 가장 만나기 쉬운 주신이었다. 종말 차원을 싸돌아다니는 짐승과


달리 활쟁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백신전이나 연옥에서 휴식하며 보내니까.

- 입에 착착 감겨.
- 잘 감겨.

“잘 감긴다고 그렇게 부르는 건 옳지 않는단다.”

- 릴리, 그런 거 몰라.
- 나르도 그런 거 몰라.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은데.”

- 몰라.

릴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활쟁이의 어깨에 앉아 부리를 찻잔에 가져갔다. 콕, 상큼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아까 먹었던 독극물보다는 나았다.

- 훨씬 맛있어.
- 맞아.

“훨씬? 아까 뭘 먹었니?”

- 난쟁이가 독 줬어.
- 난쟁이가 먹고 얼굴 빨개졌어.
“강민식으로 만든 술이 있다더니 그걸 먹은 모양이구나. 오랜만에 신났겠네.”

활쟁이가 픽 웃었다.

- 이상한 난쟁이.
- 더 이상한 활쟁이.

“아, 혹시 디아네를 만나고 왔니?”

- 광신도 봤어.
- 또 이상한 거 전파해.

“역시 당분간은 곁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

- 왜?

“아무것도 아니란다. 김우진은?”

- 소장 자.
- 이상해. 안자도 되는데 매일 자.

“육체는 괜찮아도 정신적 피로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수면은 정신적 피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란다.”

- 몰라, 그런 거.
- 나도.

“그야 어머니 나무의 정신력은 모든 신을 통틀어도 가장 뛰어나니까.”

- 나 뛰어나?
- 나도 뛰어나. 에헴.

릴리는 활쟁이와 함께 짧은 티타임을 마쳤다.

역시 본체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편안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연옥보다 더 익숙해져버린 그곳이 그리웠다.

- ···돌아갈래.
- 나도.

“잘 가렴. 내일 또 오고.”

- 응.
- 응.

릴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니! 간다고 핑을 찍었는데 대체 갱을 왜 당해주는 거죠? 맵 안보세요? 혹시 그 부분만 모니터가 맛이


갔나요?”
“제발 솔킬 좀 그만 따여요! 못하면, 망했으면 좀 사리라고요! 그게 어려워요? 타워 좀 허깅하고 있으라고!
나가지 말고!”

방문 너머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미세하게 열린 틈 사이로 수북이 쌓인 감자칩이 보였다.

- 에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원조 귀쟁이. 아직도 게임해.


- 원조 귀쟁이. 언제 철들어.

하루 종일 잠도 안자고 게임만 하다니.

지구의 종말이 일어났을 때는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더니 종말이 끝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여튼 문제가 많은 귀쟁이다.

따끔하게 한 마디 해야하는데 소장이 원조 귀쟁이한테는 유독 너그러운 게 문제다. 정이 너무 많다. 그래서 더


좋은 거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릴리가 자고 있는 소장에게로 되돌아왔다.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소장이 잠결에 그녀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게 손길을 느꼈다.

그러길 한참. 날이 밝아왔다.

- 걷어?
- 응. 걷어.

햇빛을 거의 대부분 차단하는 암막 커튼을 걷었다.

- 일어나!
- 잠꾸러기!

날개로 뺨을 툭툭 두드리며 소리치자 나르가 그녀의 행동에 호응했다.

양옆에서 건드리자 소장은 눈을 뜨는 대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절로 포근해지는 느낌에 손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아, 이러면 안 되지. 깨워야 하는데.

- 일어나.
- 맞아.

“···몇 시야?”

- 10 시 1 분!
- 1 초 지나서 이제 10 시 2 분!

“아직 더 자도 되잖아···.”
-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
- 잡아.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새한테 먹혀.”

- ···나 먹혀?

나르가 울먹였다.

- 아니, 넌 호랑이야.
- 맞아, 난 호랑이야.
- 그리고 난 새야.

“아니, 넌 나무야.”

- ···그러네?
- 나도 나무야.

“그래, 그러니까 5 분만 더 자자.”

소장이 다시 눈을 감았다.

- 아이 같아. 어리광부려.
- 맞아.

푹 한숨을 쉰 릴리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포근하고 따스했다.

평온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다.

릴리가 눈을 감고 김우진의 온기를 느꼈다.

햇빛이 비춰온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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