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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모니터의 환상 (Soul Monitor Fantasy)

2020년 5월 1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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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스런 이야기 ~~ 나의 80년 인생에 관한 영적동영상 2020년 5월18일 밤 12
시를 지나 새벽 3시경 즉 5월 19일 새벽까지의 환상

1. 1940년 5월14일 내가 태어나던 장면:

어머님의 사촌동생 김순옥은 일제시대에 제대로 교육받은 자격증소유의 조산원이


었습니다. 내 탄생을 전적으로 책임진 조산원이었어요 그리고 그분이 내가 다섯
살에 죽어서 나를 고목나무아래 어머님과 함께 묻었어요. 내게는 외사촌이모가
되지요. 나는 그 김순옥이모님을 어머님보다 더 좋아했어요. 1950년 6.25 동란직
전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외할아버님 김민철목사님은 선교사 마포삼
열 Samuel Moffet 에게 안수 받으신 한국교회사초기의 목사님이었어요. 김순옥이
모가 외할아버님을 존경해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지요. 내가 다시 살아났을
때에 김순옥이모님이 예수님처럼 부활했으니 영생할 것이라 하여 어머님도 똑같
이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해요

2. 38선을 넘어서....

아버님이 일본 센다이에서 귀국하셔서 당시 김일성대학교수가 되셨어요. 세계제2


차대전사 강의에서 "미소연합군이 독일을 이긴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이
렇게 강의하신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김일성측근의 고위 공산당원이 "왜 당연히
이긴 게 아니라 다행히 이겼는가? 동지 사상이 의심 되는구만! 모스코바에 가서
특수공산주의 사상을 배워야 되겠는데...." 그날로 아버님은 평양에서 밤기차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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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아버님의 누님 내게는 큰고모님이지요 그집은 삼각지에
서 한약방을 운영하였는데 아버님은 일단 거기 머무셨어요 그러자 38선이 생기고
평양~서울 기차노선이 단절되었어요. 우리식구는 어머님 누님 형님두분 나 여동
생 남동생 거기에 김순옥이모님까지 합하여 8명이 함께 38선을 넘어서 서울로
왔어요. 내 남동생은 갖난아기였어요. 울음소리를 내면 따발총사격을 피할 수 없
었지요. 그래서 나를 업고 산을 넘던 청년이 소주병에서 우유통에 술 한 모금 타
서 갖난아기에게 먹였어요. 그래서 그 아기는 녹아 떨어져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무사히 38선을 넘었어요.

3. 6.25동란 전야:

1950년 5월달 김순옥이모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식후에 영구차에 이모님


유해의 관이 실릴 때에 내가 그 관에 매달려 싣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에 생각했어요. 죽은 사람을 그냥 옆에 두고 생활 할 수는 없는가? 왜 땅속에다
가 파묻어야 하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던 중 6.25동란
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 김기석교수님은 서울중학교교사를 거쳐서 서울
사범대학교수가 되셨습니다. 우리가족은 용두동 서울사범대학 교수관사에서 안정
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아버님은 김일성대학에서 도망쳐 서울로 온 공산주의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서 블랙리스트 1번으로 등재되셨어요. 그래서 가족을 서
울에 내버려둔 채 홀로 피신해 대구로 내려가셨습니다. 가족을 버려두고 피신하
신 두 번째 사건이었어요. 인민군들은 서울을 점령하였고 서울사범대학강당과 교
실을 다 점령했어요. 어느덧 추운 겨울철이 되었습니다.

강당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어요. Cincinati 라는 미제 피아노였습니다. 내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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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싶어했던 좋은 그랜드피아노였지요. 어느 날 창문에 기어올라 강당의 신시
나티 그랜드피아노를 보려고 했습니다. 인민군 두 명이 도끼를 들고 들어와 피아
노다리를 찍으면서 "야 이거로 불 피우면 따뜻하게 지내갔구나!" 하는 겁니다. 한
쪽 다리를 잃은 그랜드피아노는 바닥에 비스듬히 주저 앉으면서 현들이 울려났습
니다. 내게는 그것이 피아노의 신음소리로 들렸어요. 그때에 나는 피아노라는 악
기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어요. 지금도 그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있
지요. 피아노라는 악기와 피아노소리에 대한 집착이 80평생 없어지지 않고 있습

니다.

1951년 1월 4일 일명 1 4 후퇴 때에 우리가족은 부산으로 피난 갔습니다. 대구에


서 아버님도 부산으로 오셨습니다. 부산 구덕산아래 경남상업고등학교에서 아버
님은 서울사범대학을 시작하고 학장이 되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11세로 서울사범
대학부속국민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교실이 없었기 때문에 보수산기슭에서 야외
수업을 하였지요. 맨땅에 아니면 바윗돌 위에 앉아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책상이
없었기 때문에 마분지라는 딱딱한 판대기에 구멍을 내어서 대각선으로 끈을 매어
등에 걸고 다녔고 책과 노트 필기구는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동여매고 다녔습니
다. 그러던 어느 날 보수산기슭에서 맨땅에 앉을 자리를 준비하던 중 아주 평평
한 물체가 땅밑에서 나와서 나는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편히 앉아서 한
동안 수업을 받았지요. 그런데 그 의자 판대기 같은 게 아래로 푹 꺼지면서 해골
뼈가 그 안에 들어있던 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2~3일간 관 뚜껑 위에 앉아서 수
업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때에는 기분이 오싹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두 명
의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한동일이라는 피아니스트와 정명근이라는 바이올리니스
트였습니다. 정명근은 맏아들 그 아래에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이지요. 한동일과
정명근 둘이서는 자주 연주를 하였습니다. 아주 부러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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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면서.....

부산에서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1953년 휴전협정이 있은후


우리가족은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청구동의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연립주택 일명
적산가옥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나는 서울중학교 1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지요. 나
의 건강상태가 안 좋아 몸은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아버님은 가죽으로 만
들어진 축구공을 사주시고 축구선수유니폼과 축구화와 스타킹을 사주셨는데 외모
로는 전문축구선수처럼 보였을 겁니다. 가슴과 등에는 12번이라는 번호표까지 부
착되어 있었습니다. 정신상태가 신체의 건강여부를 결정 짖는다는 것을 나는 그
때에 처음 느꼈지요. 축구선수라는 자신감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보아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건강상태는 급격히 호전되었습니다. 자식에 대
한 아버님의 사랑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소망의 근원.... 이러한 매우 구체적
인 부모님의 사랑이 내 영혼의 자양분이 되었지요. 서울중학교 3년을 졸업하고
나는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로 학적을 옮겼습니다. 그럴만한 이유는 당시 아버님
께서 서울사범대학의 학장님이셨기에 아버님의 각별하신 제안에 따라 서울중학교
를 졸업하고 서울사대부고로 학적을 옮겼던 것입니다.

5. 나의 사춘기에 생겨난 신앙생활.....

우리가족식구가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던 청구동 근처에는 천막교회로 신당동중앙


교회라고 있었습니다. 우리 온 가족이 다 함께 그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하였습니
다. 그때부터 나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어요. 내게는 교회생활이 학교생활보다도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생활이 온 가족과 더불어 신앙의 공동
체로서 우리가정 내에 색다른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갈 무렵. 나는 학습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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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쳐서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당동중앙교회는 박형순목사님이 담임목사
로 시무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로 곽선희라는 신학생이 열심히 교회운영
에 일하며 노력하였습니다. 그분이 오늘날 유명해지신 곽선희목사님입니다. 어느
덧 신당동중앙교회는 돌집으로 아담하게 단장된 청구동과 신당동 일대에서는 기
독교신앙의 등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의 수효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사대부고 1학년이었기에 신당동중앙교회고등부에 회원으로 등


록하였습니다. 신당동중앙교회고등부에는 지도교사로서 유제춘이라는 대학생이
임명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그분은 숭실대학교 영문학과에 재학하고 있었고 나중
에는 연세대학교에 처음으로 도서관학과가 개설되었을 때에 도서관학을 정식으로
공부하여서 사서가 되셨습니다. 그 당시 사춘기에 접어든 나에게는 유제춘이라는
대학생지도교사가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제춘장로님은 현존해 계십니다. 영혼의 문제 우리는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되어서 지구촌에 현존하고 있으며 또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지구촌에 던져진 내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작고 미미하고 하염
없는 것일까? 이러한 인간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회의에 몰입했던 내 자신에게 올
바른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신 분이 곧 유제춘 선생님이었습니다. 현존에 대한
회의에 붙잡히지 말고 현존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여라! 내가 이 세상
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할 수 있으며 그 일을 왜 해야만 하는가를 생
각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인생의 보람을 찾아 나서라!
이렇게 유제춘 선생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오호라! 그렇구나 인생의 보람을 찾아나서는 것이 현존에 대한 회의보다 더 나은


것이겠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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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슈베르트의 피아노음악 "방랑자의 환상곡 Wanderer Fantasie"과의
만남

인간의 현존은 한낮 방랑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방랑자인가? 환상을


가진 방랑자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때에 나는 서울사대부고 3학년이었습니
다. 독일 뷔르츠부르그 음대교수 율리안 폰 카롤리 Julian von Caroly가 연주한 방
랑자의 환상곡의 음반이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 곡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피아노음악이 곧 내 마음의 노래가 되었지요. 음악 속에 깊은 인생관이
들어있음을 나는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을 듣고 터득하였습니다. 음악에 대
한 이해가 없이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내가 가야 할 인생행로는
결국에는 방랑자의 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길 위에는 환상이라는 조약돌들이 깔
려있는 게 아닐까? 환상이 동반되는 순간 내 방랑자로서의 인생은 보람으로 채워
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방랑자로서의 인생은 외로
운 길일 것입니다. 그런데 외로운 길을 혼자서 예는 나에게 친구가 있음을 발견
하였습니다. 그것은 내 그림자입니다. 언제나 그림자는 나를 따릅니다. 그림자가
보이는 한 나는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햇빛이 내려쬐는 한 그림자는 나
와 함께 합니다. 햇빛이 없는 밤이 되면 작별인사 한마디 없이 그림자는 내 곁에
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림자처럼 가까이에서 나를 따르는 인간친구가 있다고 하
십시다. 그는 내가 돈이 있기 때문에 나를 그림자처럼 동행하였을 겁니다. 햇빛이
없으면 내 곁에서 사라져버리는 그림자처럼 내게 돈이 없으면 그도 내 곁에서 사
라져버리고 말 겁니다.

이러한 상념에 잡혀있는 때에 유제춘 선생님은 내게 또 다른 가르침을 주셨습니


다. "이세상에는 문제보다는 해답이 더 많은 것이다. 네가 무슨 문제 때문에 고민
하느냐? 해답을 찾아 나서면 틀림없이 너의 문제의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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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서 속에 가장 많은 답이 존재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로 인해 독서와 음
악감상이 내 몸과 마음을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독서는 주로 성서를 읽었구요 그
리고는 명동에 나아가 디쇄네 (Die Schoene), 필하모니 (Philharmony) 와 같은 음
악감상실에서 클래식음악을 많이 감상하였습니다.

7.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하면서....

구약성서는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책으로 생각되었지요.


문제가 있다고 고민하지 말고. 해답을 찾아 나서라! 이렇게 유제춘 선생님은 내게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신학과에 진학하게 된 큰 동기가 된 것이었습니다.
연세대 신학과에서 나는 주로 성서신학에 몰입하였고 초대교회사 기독교교리 연
구 등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아버님을 통하여서 플라톤 철학과 임마뉴엘 칸트 사
상에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 내 나이 20세때에 나는 연세대신학과 2학년
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매주 화요일은 신학회라 하여 외래강사들을 모시고 특강
을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의 가장 존경하였던 한태동교수님은 아버님 김기
석교수님을 화요신학회 특강강사로 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1960년 4월19
일 화요강좌에 아버님께서 오셔서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셨
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419 학생의거사건이 일어나 어깨동무 스크램형태로 신촌
에서 광화문으로 질주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발포사건이 있어서 많은

대학생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나도 그때에 죽을 번 하였습니다.

8. ROTC 제1기생으로 최전방 화천 제15사단 소대장근무 도중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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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이 이끈 쿠데타 일명 "516군사혁명"이라는 사건이 일


어났습니다. 장면내각은 물러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군사혁명정부가 새로
탄생되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 연세대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때에
군사정부에서는 미국식 장교양성제도인 ROTC (Reserved Officers Training Corps)
를 도입하여서 대학교 3학년과 4학년 2년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육군소위에 임관
시키는 특수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나는 제1기생으로 ROTC에 지원하여서 군복
무의 기본의무를 완수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대학졸업과 함께 육군소위에 임관되
면 최전선군사분계선에서 소대장근무로 2년간 복무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대하고 나면 나는 독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였지요.

1963년 3월에 연세대신학과 졸업과 동시에 나는 육군소위에 임관되었습니다.


233724가 나의 육군소위임관의 고유번호였습니다. 광주상무대에서의 OJT

Officers Job Training 12주간의 강훈련을 마치고 나면 전방군사분계선에서 소대장


근무에 임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소대장으로 배속받은 장소는 화천의 비
무장지대근처 제15사단 제3연대 제2중대 제1소대였습니다. 바로 그 1소대의 소대
장이었습니다. 부임된 그날부터 군사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주간공격 야간공격
여명공격 등의 매우 강한 기동훈련이 계속되던 중 여명공격훈련을 마치고 귀영하
던 도중 운전병의 졸음운전으로 인한 차량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산길에서 이탈하
여서 전복사고가 난 것입니다. 소대원들 대부분이 부상당하였습니다. 그러한 중에
3명이 무의식상태였습니다. 그 중에 내가 포함되었습니다. 약 30시간후에 의식을
되찾았는데 한 명은 사고 후 일주일 지나 사망하였고, 두 번째 경우는 의병제대
후 한 달만에 사망하고 나는 서울수도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서 치료를 받았습니
다. 내 주변에서는 의병제대신청을 권유했으나 나는 반대하고 수도육군병원에서
의 6개월 입원가료 후 제15사단 소대장근무 원대복귀를 신청하였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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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온몸에 경련증세가 일어나게 되면 흡사 간질병자로 보이는 증상은 없어지
지 않고 있었지요. 아마도 뇌진탕으로 인한 후유증인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주로
다리에 쥐가나는 상태로 연결되어 통증이 격심해 일어나 걷는 거동이 힘들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2~3개월마다 거의 주기적으로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9. 제2군사령부 원주하사관학교 교관근무시절

제2군사령부에는 한신소장이 사령관이었습니다. 제2군사령부보충대에서 제15사단


으로의 원대복귀의 발령을 기다리던 중 사령관 한신장군의 호출명령이 내게 전달
되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한신사령관
앞에 불려가자 내 앞에서 서류봉투를 내어 보이면서 아버님이 김기석교수님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 서류는 아버님의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군!"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의병제대신청이 당연한 경우인데 원대복귀를
신청한 아들이고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당분간 한직을 맡끼고 건강회복후
에 원대복귀를 시켜달라는 아버지의 분부인데.... 이러한 소상한 말씀과 함께 나를
아주 하사관학교교관으로 발령을 낼 터이니 그렇게 병역의무를 원주에서 끝내도
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나는 원주하사관학교교관으로 출퇴
근하게 되었습니다.

원주하사관학교에는 독일어로 된 책자들이 20여권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독일


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처음으로 그 책자들을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서
독대사관에 무관으로 나가 근무한 사람이 받아가지고 왔는데 육군사관학교에서
독일어책자를 읽을 사람이 없다고 하여서 원주하사관학교로 가져오게 된 것이라
들었습니다.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웠기 때문에 그 책자들을 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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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대 후 독일유학을 계획한 나에게 그 책자들은 매우 중요
하였습니다. 그 20여권의 책자들은 거의 다 나치독일의 역사가 서술된 내용들이
었습니다. 히틀러 밑에서 활동한 나치독일의 수뇌들의 사진과 인적사항들이 아주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책자들로부터 나치독일에 관하여 매우 자
세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는 나치독일에 대한 연구로 평

생을 보내야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결심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10. 한영중고등학교교목으로 봉직: 1965년 3월 ~ 1966년 7월

1965년 2월 ROTC 만기제대 직후에 나는 한영중고등학교에 교목으로 봉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독유학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건강상태는 양호하였는데
가끔씩 일어나는 간질병과 유사한 시한적인 전신마비증세는 가시지 않고 있었습
니다. 나는 그때에 받은 월급을 고스란히 저축하여서 독일유학 시 항공료를 준비
하고 있었습니다. 1966년 6월말에 한영중고등학교 교목직을 사임하고 서울음대출
신 피아니스트 김XX와 그 해 7월2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독일유학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내 나름대로 피아노음악에 대한 이해와 소신을 가지고 있
었기에 유학생활에서 피아니스트를 돌보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또 한편
부모님은 내 곁에 누군가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어서 건강문제를 덜 근심하시게
된 점도 사랑하는 아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면서 안심되어진다고 믿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11. 독일유학의 장도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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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22일 나는 신혼신부를 데리고 독일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공항은 여의도 군비행장 하나뿐이었습니다. 서울과 동
경간 여행구간도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으로만 가능하였습니다. 동경에서는 독일
의 루프트한자 항공편으로 알라스카 앵커리지 경유 북극을 넘어서 코폔하겐에 도
착한 다음 거기서 함부르그로 가면 독일 땅에 도착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서이념
분쟁의 냉전시대라서 자유진영의 항공기들은 소련상공은 지나칠 수가 없었지요.
이렇게 하여 나의 독일유학의 꿈은 실현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수중에는 유학생에
게 허락된 환전금액 400불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00불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400불은 가난한 우리나라로서는 거금이었습니다. 서독
아헨 Aachen 에 도착해 알아보니 원룸아파트 방세가 월 500마르크였습니다. 당
시 환율은 1$ = 4DM 이었습니다. 내 수중의 400불은 1600마르크였습니다. 3개월
방세 밖에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이제 독일 땅에서 어떤 방법으로 연명해갈수가
있을까 막막하여 잠이 오지 않았지요.

아헨에는 내가 아는 지인이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서 우리는 외국학생을 위한 하기독일어코스에 등록하였습니다. 당시 서독에는 파
독광부가 100여명 간호사들이 4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학생들이
서독에 30여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Iserlon 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서독거주
한인회의 모임이 있다는 소식에 접해 우리는 참석의 뜻을 알렸습니다. 중요한 이
유중 하나가 일주일간 숙식이 제공된다는 뉴스였습니다. 독일어도 부족하고 지리
도 잘 모르는데 용감히 Iserlon엘 찾아갔습니다. 거기에는 약 20여명의 재독한국
인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그 중에 서독에서 인정을 받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
던 이를테면 유지인사들 세 명이 있었습니다. 작곡가 윤이상, 뮌헨공과대학교목
이영빈목사, 서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한국어와 역사를 강의하시는 전희수교수등이
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베를린 베다니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미스 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윤이상선생에게 새로 결혼한 사이인데 아내가 피아니스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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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겠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Iserlon 한인회모임에서


피아노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요. 연주곡목은 슈만의 아베그 변주
곡 모챠르트의 론도 그리고 베토벤의 열정소나타였습니다. 서베를린에 거주하시
는 윤이상선생 전희수교수 그리고 간호사 미스 정은 한결같이 우리 두 사람이 서
베를린에 체류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음악대학입학문제는 윤이상선생님이 나서
서 도웁고 거주문제는 간호사 미스 정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베다니병원 간호사기
숙사에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헨의 주소를 알려드리고
Iserlon을 떠나서 아헨으로 돌아왔습니다.

12. 동독땅의 자유의 도시 서베를린에서의 12년

Iserlon 재서독한인회모임이 있은 후 두 주일이 지났습니다. 서베를린 베다니병원


에 근무하는 미스 정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기숙사의 빈방 두 개를 마
련했으니 서베를린으로 이주하라는 기쁜 내용의 서신이었습니다. 한달 방세를 내
어놓았는데 두주일 만에 우리는 아헨을 떠나서 서베를린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1966년 9월 25일로 기억됩니다. 윤이상선생님은 서베를린 국립음악대학에다 입학
인정오디션의 날짜를 받아놓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베다니병원에는 거의 사용하
지 아니하는 강당이 있었고 낡은 그랜드피아노가 한대 무대 위에 있었습니다. 그
피아노로 대충 입학오디션을 준비하고 정해진 날짜에 학교에서의 입학오디션에
합격하여 본격적인 유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서베를린 자유대학 신학과
에 등록하였습니다. 서베를린에는 Daniel Barenboim, Christoph Eschenbach,
Maurizio Pollini, Martha Argerich 등이 자주 방문해 연주를 하였습니다. 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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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동년배의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피아니스트들이었지요.

1966년 12월초로 기억됩니다. 윤이상선생님이 당시 최고봉의 피아니스트로 알려


진 Wilhelm Kempff가 서베를린 예술원홀에서 연주하는 피아노독주회의 초청장을
두 장 주시면서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바하의 골드베르그변주곡 전부를 연주하는
독주회였습니다. 그는 파킨스병을 앓고 있어 고생하다가 2년만에 연주를 하는 그
러한 아주 귀한 음악회였지요. 그 음악회에서 아내 김XX는 나에게 스타인웨이 피
아노를 가지고 싶다고 신중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서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를 새것을 살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내 능력으로는 부족하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가
능하리라 믿었습니다. 약 한 달후인 1967년 1월 중순경에 사업하는 사람편에 아
버님께서 미화1000불과 금반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
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환율에 의하면 미화1000불은 4000마르
크였습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 상점에 가서 Puchelt 사장을 만나서 4000마르크
선불을 내고 나머지를 매월 할부로 지불하겠다고 사정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푸헬트사장은 어느 덕망있는 사람이 보증을 서야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길
로 나는 윤이상선생님을 찾아가 보증서 주실 것을 부탁 드렸습니다. 대개 부잣
집 자녀들이 유학 오면 벤츠자동차를 사려고 하는데 피아니스트인 아내를 위하여
피아노를 사겠다는 생각이 훌륭해 기꺼이 보증인이 되겠다 하시며 함께 푸헬트사
장을 찾아가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1966년 12월24일 갑자기 온몸에 전신마비증세

가 일어나 베다니병원에 입원하였다가 10일만에 퇴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1967년 2월 7일날 베다니병원 강당에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모델 B-211이


새것으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가격은 17500마르크인데 4000마르크를 선불로
냈고 13500마르크를 매달 200마르크씩 5년간에 다 해결하기로 계약서를 작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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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인과 함께 서명하였습니다. 이제 내게는 먹고 사는 문제 그리고 매달 200마
르크씩 할부금을 마련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나는 학생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습
니다. 1967년말까지 27가지의 다른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 200마르크의
할부금을 꾸준히 갚아냈습니다. 1968년이 되었습니다. 서베를린 자유대학 계시판
에 큰 글씨로 "필수과목 EDV "라고 쓰여진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것이
기독교사상교양과목으로 이해하였습니다. E = Evangelisch, D = Doktrin, V =
Verlauf 번역하면 "복음적인 교리의 전개"입니다. 나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고 수
강신청을 하였습니다. 한달 동안 결석이나 지각하지 않고 성실히 수강했는데 도
저히 이해가 안 되는 수학시간으로 일관되었습니다. 교수님은 Joachim Zerulla 였
습니다. 나는 별도로 그 교수님을 찾아가서 모르고 수강신청을 하였는데 취소하
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체룰라교수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
니다. "당신만 모르고 신청한 게 아니고 아무도 알고 신청한 사람이 없습니다. 강
의하는 내자신도 모르면서 강의하는데 최첨단 컴퓨터강의이니만큼 그냥 수강을
계속하세요. 다 알아두면 앞으로 좋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상스런 강의를

계속해 열심히 수강하였습니다.

학기말이 되어서 종강하게 되었습니다. 그 최첨단의 컴퓨터강의 역시 종강하였습


니다. 모두 15명이 강의를 들었는데 나 혼자만 Stuttgart의 IBM Deutschland로 보
내졌습니다. 여름방학 3개월간 나는 그곳에서 IBM360 을 가지고 프로그래밍 하
는 과정을 마스터하였습니다. 컴퓨터의 모국어라고 하는 Assembler coding
language를 습득 완전히 마스터 하기도 하였습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서베를린 자유대학내의 전산실에 전문전산요원 프로그래머로 일자리를 얻었습니
다. 월급이 2000마르크였는데 그 당시로는 박사학위소지자의 월급에 준하는 높은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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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YY 는 김XX의 오빠로서 역시 피아니스트인데 미국 쉬카고에 유학하고 있었습
니다. 거기에서 김XX에게로 편지가 왔습니다. 한국유학생 한 사람이 버스운전사
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흑인이 쏜 권총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하다는 이
야기와 함께 유럽은 어떠한가 문의하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오빠를 서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유학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강당에서 좋은 피아노로
무제한 연습이 가능하고 또 내가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기에 그렇게 제안한 것이
었습니다. 베다니병원의 간호사기숙사에 방 하나를 다시 얻고 나는 오빠인 김YY
를 서베를린 국립음악대학에 유학하도록 주선하였습니다. 1969년 3월에 김YY는
서베를린 국립음악대학에서 입학오디션을 인정받아 정식 입학이 되었습니다.

이제 두 피아니스트가 번갈아 가면서 강당에서 피아노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1971년에 김YY는 서베를린 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음대교수로 부임되어
금의환향 하였습니다. 2년후에는 김XX 도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간에 나의 독일유학의 숙원이었던 나치독일에 관한 연구는 어떻게 되었는


가..... 당시 승전연합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였는
데 독일국적을 소지한자로서 나치독일의 역사나 히틀러연구를 하게 되면 재판과
정이 없이 구속되어 형집행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치독일연구를 위
한 장학금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나라 측에
다 지원금이나 연구비를 청구하는 일도 불가한 형편이었습니다. 내 스스로의 경
제력이 확보되지 않고서는 그러한 연구는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두 피아
니스트들이 다 졸업을 하고 난 1973년에서부터 나는 뮌헨공과대학의 Werner
Heisenberg 교수의 강의를 수강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에 히틀러
의 총애를 받아 핵물리학자로 라이프치히대학교수의 신분으로 가장 많은 연구업
적을 발표하여서 양자물리학과 양자역학에 아주 혁혁한 공적을 쌓은 학자였습니
다. 그리고도 그는 대 피아니스트로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바이올리니스트인
딸과 함께 음악회도 개최하는 사람이었지요. 나는 매주 금요일 아침일찍 서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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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을 출발하여서 뮌헨으로 자동차를 몰고가서는 하이젠베르그교수의 강의를 듣고
뮌헨에서 자고 토요일 음악회에 참석하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1973년부터 매주 반복되다 보니 항간의 소문은 뮌헨에 애인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으로 번져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내 소신대로 주말마
다. Werner Heisenberg 교수의 강의와 함께 그의 피아노연주에 깊은 관심을 가지
고 감상하면서 행복에 젖곤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과학자 핵물리학자 양자물
리학자 노벨상수상자 등의 영광스런 하이젠베르그박사 보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음예술의 세계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서베를린 자유대학 전자계산소 즉 컴퓨터센터의 소장은 요아킴 체룰라교수였습니


다. 나는 그 교수님의 진두지휘아래서 성실히 일에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출장근무를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함부르그시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
니다. 동료 프로그래머 두 명도 함께 함부르그로 동행하였습니다. 거기에 가보니
우리 외에도 20여명이 모였는데 서독 전 지역에서 온 전문전산요원들이었습니다.
시의 행정을 전산화하는데 있어서 고급인력의 확보 및 경비절감을 위하여서 전국
전산경연대회 콘테스트가 열린 것입니다. 5등까지 포상메달과 함께 소정의 상금
이 주어지는 그러한 특수행사에 참가하게 된 겁니다. 3일동안의 예선경연에서 10
명이 선정되는데 서베를린에서는 나 혼자 통과하여서 본선진출 5명을 뽑는데 올
라갔고 다른 친구들은 그냥 서베를린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실력이 6등으로 인
정받아 5명의 포상대상자에 들지 못한 채 돌아와서는 낙심도 되고 창피하게 느껴
져서 자유대학 전산소에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체룰라교수님이 나를
급히 찾는다 하셔서 마지못해 출근하였습니다. 체룰라교수님방에는 낯선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소개에 의하면 그들은 지멘스회사의 중역직원들이었
습니다. 그들은 나를 지멘스 전산실로 초대하려고 하는데 고용계약을 맺고자 한
다는 이야기를 제안하였습니다. 나는 함부르그 전산경연대회에서 등외의 실력이
없는 전산요원일 뿐인데 경우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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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내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서독 전 지역에서 여섯 번째의 실력을 가진 전문전
산요원이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체룰라교수님은 좋은 기회이
니 마음에 결정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년봉 5만마르크에다가 5명의 전산요원팀을
이끌고 일하는 팀장의 자리가 보장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멘스 전산소
로 직장을 옮긴 것이1971년 김YY가 서울음대교수로 부임되어서 귀국한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두 사람밖에 없으니 우리는 베다니병원 간
호사기숙사에서 나와서 방이 세 개가 있는 비교적 넓은 아파트로 피아노를 가지

고 나와 이사하였습니다.

지멘스회사는 나와 내가 이끄는 전산팀 5명에게 매우 특이한 과제를 부여하였습


니다. 회사의운영을 위한 총체적인 정보처리인데 회계년도의 정보는 월별로 처리
하고 제1차 과거년도와 제2차 과거년도는 분기별 즉 3개월분씩 제1분기 제2분기
제3분기 제4분기로 집약한 통계정보를 제각기 검색해 처리하는 매우 방대한 통계
정보처리의 신속정확한 시스템 디자인이었습니다. 회사정보를 2년전에서부터 현
재까지 총괄해 검색 비교해보는 정보인식의 체계를 합리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급
변하는 주변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업기획과 신속정확한 대책수립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971년부터 시스템디자인이 시작되었는데 만 3년이 걸려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러한 정보체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이해하지 못했
습니다. 그저 부질없는 시간낭비 정력낭비로만 이해하였는데 1973년도에 오일쇼
크가 발생하여 국제유가가 폭등하고 엄청난 경제공항사태가 돌발적으로 휘몰아쳤
습니다. 그때에 지멘스에서는 돌발적인 방대한 규모의 주변정세의 변화의 물결에
대하여 용이주도한 대책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대기업경영에서의 유토
피아인 "유동성기업기획 (Flexible Planning Enterprise FPE)"이 신속정확히 이루어
져 국제대공항사태에서 지멘스만이 독야청청할수가 있었습니다. 그 시스템은 "에
버스-김 (Evers-Kim)" 으로 명명되었는데 당시 지멘스 최고경영인 에버스박사 (Dr
Evers)의 이름과 내 이름을 합성한 유토피아적인 기업경영시스템이었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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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지금도 가동되고 있습니다.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국제경제공항이 지구촌에 편만해 갈 때에 회사마다 감


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노동허가를 득해야 하는 외국고용자들은 노
동허가를 득하기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경우는 지멘스에서
예외로 처리하겠지만 나는 용감히 국가기관으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서베를린
노동사회청 (Senat fuer Arbeit und Soziales) 에서 95만명 공무원의 년금계산 그리
고 새로운 복지시스템개발의 업무를 맡게 되었고 따라서 준공무원대우를 받게 되
었지요. 물론 지멘스보다 대우는 못했지만 안정된 분위기에서 독일에 체류할 수
가 있게 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김XX는 서베를린 국립음악대학
을 졸업하였습니다. 나는 그 정도면 유학생활에서 만족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
데 자기는 피아니스트로서 국제활동을 더하고 싶다면서 런던에 가서 Alfred
Brendel 에게 사사받고 싶다고 자신의 결심이라고 내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
하라고 하고 경제적으로 계속해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영국은 생활비
가 비싸고 파운드와의 환차가 커서 내게는 부담이 아닐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나는 나의 생활공간을 좁혀 원룸아파트로 거처를 옮겨서 차액을 런던으로 보내줄
생각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김XX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런던으로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원룸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갑자기 방안에 피아노가 없으니 마음이
아주 허탈해졌습니다. 나는 피아노가게에 가서 Puchelt 사장에게 말했습니다. 마
누라가 없이는 살수 있는데 피아노가 없으니 못살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중고
그랜드 피아노 한대를 무상으로 대여해 주었습니다. 그 원룸아파트로 이사를 가
자마자 나는 매주 금요일이 되면 그날은 직장상관에게 양해를 얻어서 오전근무만
마치고 자동차로 뭔헨으로 향하였습니다. 공과대학에서 하이젠베르그교수의 양자
물리학강의를 듣고 또 나치독일 때의 이야기도 듣기 위해서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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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내가 새로 직장을 옮긴 서베를린 노동사회청 전산부서에는 아주 미모가
출중한 여인이 총책임을 맡은 부서장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Gerda Jarius 였
습니다. 서베를린 남부지역으로 알려진 Lichterfelde 라는 곳에 큰 독채집을 가지
고 살면서 같은 부서 직원인 Stossun 부부에게 2층을 세로 들게 하여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층이 비었으니 나도 들어와 한집에서 함께 살자고 야리우스
여사는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룸아파트에서 나와서 야리우스씨 독채집
3층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때가 1974년초였습니다. 내가 피아노를 친다고 하
니 야리우스여사는 야마하 그랜드피아노를 일층 거실에 세로 빌려다 놓았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 직장에 근무
하는 직장동료들로서 한집에서 함께 사는 사회적인 면모로 인해 내게는 인간답게
사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야리우스여사는 하이젠베르그교수님 강의수강을 수요
일로 옮기고 주말에는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거의
예외없이 조촐한 분위기에서나마 하우스뮤직이 자연스럽게 생겨나 우리의 정서적
인 분위기는 인생을 더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1973년 9월부터 서베
를린자유대학 Weischedel/Gollwitzer의 후기 니체사상 세미나에 등록하고 저녁에
는 니체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방 세개를 나 혼자 다 사용할 수 있었던 야리우
스여사의 저택은 매우 조용하여 공부에 몰입하기에 좋은 분위기였지요. 나는 니
체연구에 심취하였는데 "니체의 허무주의 이해"라는 연구논문을 기독교사상 월간
지에 기고 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1974년 4월호에 계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974년 12월호에는 "신의 죽음과 인간의 축제"라는 나의 두 번째 니체연구논
문이 실렸습니다. 1975년 9월호에는 "선과 악의 피안으로서의 신지론"이라는 논
문이 계속해 기독교사상지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또 1976년 2월호에는 "나사렛예
수와 새예루살렘"이라는 기독론에 해당하는 논문이 계속해 기독교사상지에 발표
되었습니다.

1975년 3월부터 나는 서베를린의 루터교신학교에서의 독일루터교 목화자양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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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1976년 말에 제1차 국가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2차 국가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서독루터교연합회로부터 정식으로 목
사안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2차 국가시험에는 독일국적을 보유해야
만 응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제2차 국가시험응시를 포기하고 서베를린 자유
대학 철학과에 재등록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에 니체연구와 함께 독일관념론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4년초부터는 Heisenberg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뮌헨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뻐졌습니다. 나는 1976
년도에 Heisenberg 교수님 강의를 다시 수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
럽게도 1976년초에 하이젠베르그 교수님은 신장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셨습니
다. 그래서 나는 1977년과 1978년은 완전히 독일관념론 Kant-Fichte-Schelling-

Hegel 그리고 니체를 깊이 연구하는 일에만 몰입하였습니다.

1977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야리우스여사님이 서베를린 노동사회청의 직원들 약


100여명을 초대하여 음악회를 개최하려고 하는데 한 시간동안 내가 피아노독주
를 할 수 있겠는가 문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나는 흔쾌
히 승락 하였습니다. 연주곡목은 모챠르트의변주곡 론도와 베토벤 후기소나타 31
번 제1악장과 슈베르트의 즉흥곡 두 곡 등으로 약 한 시간 정도를 준비하겠다 제
안하였습니다. 야리우스여사는 내가 연습할 때에 자주 들어둔 곡들이라 좋다고
동의하였습니다. 공연장은 Urania 라는 약 400석 정도 규모의 아담한 노동사회청
전용행사장이었습니다. 120여명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약 80명 정도가 참석한다
고 연락이 왔습니다. 야리우스여사님은 손수 치즈 소세지 샐러드 빵 그리고 콜라
사이다 쥬스등의 부페음식을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날 음악회에는 100명이
넘는 인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비록 악보를 보면서 연주했으나 서베를린 노동사
회청에는 컴퓨터프로그래머로 근무하는 사람이 피아노독주회를 열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번져나갔습니다. 그런데 1978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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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베를린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향상중에 귀국 결정

1978년은 동독내에 들어있는 자유의 도시 서베를린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사


회적으로 크게 향상된 면모를 보였습니다. 흐루시쵸프가 한때에 서베를린을 "독
안에 들어있는 한마리의 쥐"와 같다고 표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8년부
터는 서베를린이 외형적으로는 동독의 수도인 것처럼 보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사적으로 상처받은 도시에서 올림픽경기 같은 대규모 국제행사는 기대하기
어려운 때에 "세계 수중스포츠 경기대회 (World Aquatics Championship)"가 서베
를린에서 처음 열렸습니다. 각종 수영경기코스 다이빙 수중발레 등에서 미국이
가장 많은 메달을 받았고 그 다음으로 소련 동독 카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첵코슬로바키아 일본 등 순서였습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동독
내의 서베를린에서 거행된 대규모 국제행사였습니다. 서베를린 국제음악제 또한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렇게하여 서베를린은 거대한 문화도시로 알려지기 시
작하였습니다. 도위치오페라에서의 공연들은 영국로얄오페라 소련볼쇼이극장 미
국뉴욕메트로폴리탄 등과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에 Jarius 여사와 동료 Stossun은 나의 독일국적 신청을 권유하였습니다. 나는 생
각해본다고 말하였습니다.

1978년 5월중순 어느주말로 기억됩니다. 나는 목욕하다가 욕조에서 잠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야리우스여사가 들어와 나를 깨우면서 종이쪽지를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일 생긴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괜챦다고 말
하고 옷을 갈아입고 서베를린 중앙우체국으로 나갔습니다. 참 그 종이쪽지는 한
국에서 온 전보였습니다. "WIRE ME YONSEI UNIV 822-33-45146 MIN" 이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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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습니다. 당시 국제통화는 엄청나게 비싸서 야리우스여사님께 폐가 될까하여
우체국으로 나가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민경배목사님이 전화를 받으셨습
니다. 다음주 즉 5월중에 한국엘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다 하시며 연세대교목으로
초청코자 한다는 내용인데 동의하는가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 초청에 대하여 동
의하며 일시 귀국하는 일자를 전화로 통보 드린다고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습니
다. 그리고나서 나는 야리우스여사와 의논하였습니다. 모국에서 또 모교에서 조교
수대우로 부르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야리우스
여사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라고 하면서 일단은 약 2주 정도 특별휴가를 주선할
터이니 한국에 다녀오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서베를린에 유학한지
12년만에 귀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민경배목사님이 어떻게 내 주소를 알고 있었는가 하


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중앙우체국으로 나아가서 민경배목사님께 내 주소를
어떻게 하여 알고 전보를 보내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일시 귀국일자를 5
월 25일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날은 목요일인데 다음날 금요일 오전9시 정각에 루
스채플 교목실장실로 찾아 뵙겠다고 정확한 귀국일정을 알리면서 내 서베를린 주
소를 어떻게 알아 전보를 보내었는가 물었습니다. 당시 연세대 캠퍼스에는 백낙
준박사님이 명예총장님으로 계셨는데 월간 기독교사상지에 계재된 내 논문들을
다 읽으시고 감동을 받으셨는데 속히 교섭해 교목으로 초대하라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서회의 월간기독교사상 편집부에 연락하여 내 서베를린 주거지주소

를 정확히 알아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978년 5월 24일은 내 생애에서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날이 되었습니다. 12년만


의 귀국인데 대한항공편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인 5월 25일 오전 11시
경에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12년전 유학 당시에는 동경을 경유하여 루프트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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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항공편으로 독일로 갔는데 지금은 대한항공편으로 한국어 안내방송을 들으면
서 귀국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음날
금요일 오전 9시에 민경배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독일제 피스통만년필 펠리
칸세트 볼펜과 만년필 한 쌍이 들어있는 것을 선물로 내어놓았습니다. 몇 가지
교목발령과 조교수대우 호봉문제 등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백낙준박사님을 찾아 뵈었지요. 선물로는 몽블랑만년필세트를 드렸습니다.
학위문제보다도 실력이 더 중요한데 독일유학에서 올바로 공부하였다고 칭찬하셨
습니다. 그리고는 이우주총장님과 김명선부총장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그 두 분께
는 민경배목사님께 드린 동일한 펠리칸 만년필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7월말에 영구 귀국하여서 1978년 9월학기부터 교목업무와 기독교개론 강의를 맡

기로 하였습니다. 그 후 일주일 만에 나는 다시 서베를린으로 돌아갔습니다.

서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영국 런던으로 가서 김XX에게 소상히 보고하고


함께 연세대로 영구 귀국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김XX는 나의 제안을 단호히 거
절하면서 왜 그런 조잡스런 생각을 하는가? 당신은 독일에서 준공무원대우를 받
고 있는데 서베를린이 지금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성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독일국적을 얻고 독일에 영주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인데... 이러한 강
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굳이 한국으로 귀국한다면 자기는 이혼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다시 서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도 런
던의 김XX 체류비를 내가 매달 보내주고 있었습니다. 내게는 “김XX 좀 괘씸하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 그리스도인의 노력: 연세대교목으로서의 삶과 캠퍼스 인생의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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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서베를린 노동사회청에 사표를 내고 영구귀국을 결심하였습니다. 사당
동 숭실대학교 바로 정문 앞 연립주택을 전세를 얻고 모교인 연세대학교교목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님
께서는 우리가 꼭 찾아 뵙고 인사 드려야 할 분이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집 앞 숭실대학교에 총장님이신 고범서 박사님이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국한지 얼마 안되어서 나는 어머님과 함께 숭실대학
교 고범서 총장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여러 말씀을 나누다가 총장님께서 숭실대
학교 채플시간에 와서 설교해달라 분부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먼
저 독일에서 공부를 마친 사람으로 김영한박사가 이미 교목으로 새로 부임한 직
후였습니다. 총장님은 김영한박사를 총장실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범서
총장님 앞에서 독일이야기로 꽃을 피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자주 숭실대학교 채플시간에 초대되곤 하였습니다. 그때에 나는 중앙도서관
을 찾아가 유제춘 선생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숭실대학교에는 나와 연세대 동창
인 유호귀 장로가 학원선교문제에서 열심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의미로는
연세대학교 보다도 숭실대학교가 더 내게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연세
대학교로는 계속해서 독일에서 학위를 마친 사람들이 귀국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예외없이 연세캠퍼스에는 기도만 시키기에는 아까운 사람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양교목은 독일서 인정받은 전산요원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우주총장님이 나를 불러서 다 확인하신 다음 김명선 의무부총장을 다시 불러


나를 필두로 하여 세브란스병원 전산화를 시작하라 당부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여의도의 전경연 (전국경제인연합회)로부터 행정효율화를 위한 전산작업
의 필요성에 대한 특강의 요청문의가 연세대 교목실로 왔습니다. 여의도 전경연
강의에는 약 200명이 참가하였습니다. 그 전경연 산하에는 "정보산업"이라는 월
간지가 출간되고 있었는데 나의 강의원고는 그 월간지에 실렸습니다. 민경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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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혹여 다른 업무들 때문에 교목일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
리스도인의 노력은 기도만 하고 설교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모
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라고 나를 많이 변호해 주셨습니다. 세브란스병
원의 전산화는 내게는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고 또 큰 보람이었습니다.

그때에는 학생들 데모가 한창이라 캠퍼스에는 기관원들이 파견 나와 있어서 학생


들과 교수들의 동태가 심각히 파악되고 있었고 반정부강의는 여지없는 탄압의 대
상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내가 강의도중에 임마뉴엘 칸트의 자유와 평화에 관
한 언급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 한 사람이 그러한 자유와 평화가 과연 지
금 우리의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에 나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나서 소대장 중대장
의 지휘관이 많이 필요한데 마지막에는 군사교육도 받지 않은 목사님이 지휘관
노릇을 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때에 부하들이 이 무모한 목사지휘관을
제대로 따르겠습니까? 그런 경우보다 더 우스운 것은 평생 군복만 입고 군인노릇
이외에는 모르는 사람이 군복 벗고 정치한다고 뛰어다니는 게 내게는 더 우스광
스럽습니다. 정치가 얼마나 어렵고 순발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또 설득
력도 있어야 하구요. 이때에 학생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강의가 끝나
자 검은 옷 입은 사람 두 명이 내방에 와서 나를 남산 모처로 연행해갔습니다.
나는 이른바 "독일방"이라는데 갇혀서 한 주일 동안 모진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고난을 겪는 것 임도 그때에 나는 다시 터득하였습니다

15. 서독 루터교연합회 Kurt Scharf 감독님 내한

1979년초에는 강원용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수유리의 크리스챤 아카데미사건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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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하였습니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당시 박정희정권에서는 용공주의자로
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크리스챤 아카데미 고위직원 3명이 구속된 사건
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서독 루터교 연합회의 지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강원용목사님은 서독 루터교회 연합회 총감독 샤프목사님
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샤프감독님이 내한하셔서 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을 만나 그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설득시키고자 한 것
입니다. 연세대 교목실장님이신 민경배목사님께서 독일에 연락하여서 채플시간에
설교해주실 것을 부탁 드리라 하셨습니다. 1979년 6월 1일 금요일에 샤프감독님
은 서울에 도착하셨습니다. 당시 새로 선출된 제5대 서독대통령 카르스텐스
(Carstens) 와 샤프감독님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6월 1일과 2일은 크리스
챤 아카데미 강원용목사님을 만나고 수감된 3명 직원 면회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는 6월 3일 성령강림주일에 영락교회 대 예배 때에 설교하시게 되어 있었고 6월
4일 월요일에는 연세대 채플시간에 설교하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샤프감
독님 설교를 통역할만한 사람은 독문학과 교수나 신학대학 내에 독일부인을 둔
교수가 적임자라 그러한 몇 분을 교섭하였는데 샤프감독님이 반한인사로서 박정
희정권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모두 통역을 거절하였습니다.
교목실내에서는 불가불 통역을 맡을 사람은 김정양교목 뿐이라 하였습니다. 영락
교회 성령강림절예배의 설교에서 샤프감독님은 케니아의 이디 아민 (Idi Amin) 과
박정희대통령이 같은 차원의 독재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신랄히 비난하였습니다.
나는 그대로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 예배에는 기관원들이 여러 명이 나왔는데 나
의 통역한 내용을 문제 삼아 월요일 채플설교를 통역한 이후에 또다시 남산으로
연행되어가 문책을 당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나를 문책하는
가? 샤프감독님께 항변하신다면 내가 기꺼이 독일어로 통역해 드리겠습니다. 이
렇게 말하고서 풀려났습니다. 점차로 박정희정권의 나에 대한 탄압이 노골적인

국면으로 그 면모가 드러나 그들에게 나는 요주의 인물로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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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운명의 날 1979년 10월 26일과 그 이후…

나는 1979년 9월초에 학생지도위원으로 위촉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시위는 절정에 달해 부마사태가 일어났고 야당국회위원 김영
삼은 국회의원직 제명이란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시
위가 격해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경영대학원 졸업생들의 특별수련회가 원주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나는 학생지도위원이었기에 필히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 해 10월
22일 월요일 나는 대학원졸업예정자들 20여명과 함께 원주로 갔습니다. 그날 저
녁식사 후에 나는 부마사태와 같은 극단의 데모는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습
니다. 박정희는 지금 스스로 넘어지고 있는데 그런 사람을 등 뒤에서 걷어차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거기 모인 학생들은 나를 이상스런 눈빛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정희는 스스로 멸망할 수
밖에 없다. 신, 인간, 역사 이 세가지중에서 한가지만 알고 있어도 망하지 않을
수 있다. 우선 박정희는 신을 모른다. 지금이라도 신을 알고 두려워 한다면 살길
이 있다. 부마사태를 진압하는데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인식치 못함이 들어났다.
세계사 속에 이러한 존재의 말로가 어떠했는가에도 관심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
스스로 멸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과 인간과 역사...... 이 세가지중 한가지만 알고 있어도 자신을 파멸의 경지에서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쥴리어스 씨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아돌프 히틀러
등이 그래서 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원주에서 떠나서 서울에 다 도착했
을 때에 박정희대통령 서거 소식이 뉴스에서 전해졌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그
운명의 날에 유신체제는 스스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 해 12월 12일 신군
부 세력이 새로 등장하여 전두환소장을 중심으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가 출범되어 위기에 처한 정변을 점차로 정비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그날이 자행된 궁정동 그 가까이에는 바티칸교황청의 대사관저가 있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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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나는 연세대 교목직에 있으면서 바로 그 운명의 날의 현장인 궁정동 안가
와 가까운 교황청대사관저에 자주 초대되어서 안젤로니 (Angeloni) 대사와 시국
에 관한 많은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 캠퍼스내에는 대학생
선교회 (Campus Christian Crusade, CCC)라는 단체가 있었고 김준곤목사님이 창시
자로서 아주 유명하셨습니다. 1980년 4월 5일은 이른 바 식목일 공휴일이었습니
다. 그래도 나는 오전 9시에 출근을 하였습니다. 바로 내 뒤를 따라 들어오신 분
이 김준곤 목사님이셨는데 중요한데 방문갈 일이 있다 하시면서 함께 동행하자고
하셨습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냥 따라 나섰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은 용인의
어느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픈식이 있는데 기독교예배순서를 인
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바로 그 골프장이 명성컨트리
클럽이라는 곳이었는데 클럽하우스를 새로 아름답게 짖고 단장하여 새로 오픈하
는데 김준곤목사님께서 예배인도를 해달라는 분부가 사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명성그룹의 김철호회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7. 명성그룹 전산실 오픈 및 운영

1980년 4월에는 나는 연세대교목의 중요한 대학목회와 세브란스병원 전산화 그


리고 전국 경제인연합회에서의 컴퓨터 전산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한 강의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중에 명성그룹의 김철호회장은 명성그룹내에
전산화 부분의 업무를 좀 맡아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당시 컴퓨터를 보유한 회
사는 삼성, 대우 그리고 정부전자계산소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컴퓨터라는 기계가
귀하다기 보다는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인력이 귀하던 때였습니다. 은행에도
전산화가 되어있지 아니하였고, 동회나 주민센타 구청 시청 등에도 컴퓨터는 구
경조차 할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러한 중에 하챦은 관광회사라고 하는 명성그
룹에서 전산화를 도모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여겨졌습니다. 회사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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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중역임원들이 관광회사에서 무슨 대형컴퓨터가 필요한가 하면서 명성그룹의
전산화 작업을 반대하고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김철호회장은 콘도미
니엄과 골프장 회원권을 모집하고 예약하고 운용하는 제반 시스템을 전산화 하려
는 매우 앞서가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컴퓨터는 IBM 기종이 표준이었는
데 제1세대가 IBM 1401이었고, 제2세대가 IBM360이었고, 제3세대가 IBM370이었
습니다. 당시의 IBM370은 최첨단의 컴퓨터로서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
니다. 그런데 그만한 기술수준의 DEC (Digital Equipment Company) 의 VAX780이
라는 컴퓨터가 새로 제작되어서 국제시장에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정보에
접한 나는 김철호회장에게 컴퓨터에 관한 내용을 소상히 보고하고 VAX780을 설
치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1980년말에 운니동 삼환빌딩 2층에 자그마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최첨단의 슈퍼컴퓨터 DEC-VAX780을 설치하고 아담한 전산실
을 꾸몄습니다. 플라자호텔, 코오롱그룹, 한빛은행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하
여 새로 발족한 은행)에서 명성그룹의 전산실을 견학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나에게
전산화를 의뢰하겠다는 부탁들이 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즈음하여서 정부
전자계산소 (GCC, Government Computer Center)가 총무처산하에 발족되었습니다.
당시 김용휘총무처장관은 나에게 정부전자계산소의 전산화 일체를 맡아 공무행정
의 완만한 전산처리를 가능케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정부전자계산소 기초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정부로부터 임명장을 수여 받게 되었
습니다. 이에 김철호회장은 정식으로 나에게 명성그룹의 이사로 발령을 내고 집
무실 독방을 주선하고 아랫층의 전산실을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매주 월요일마다 직원들을 위한 아침예배를 주관하였습니다. 시간이 갈
수록 나는 연세대교목의 일은 등한히 하고 전산화와 이와 연관된 강의로 인해 바
쁜 일정으로 하루의 일과가 채워지게 되면서 결국에는 연세대학교 교목직을 사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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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관광입국한 스위스와의 연계

1980년도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건은 스위스의 관광개발지들을 방문하여서 국


내로 관광개발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김철호회장과 함께 스위스를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또 당시의 건설본부장이었던 김기중부회장과는 스위스의
관광개발 전문회사인 엘렉트로와트(Electrowatt)와 체파스(Cepas)라는 회사와 연계
를 맺은 일들이었습니다. 스위스에는 월 2 – 3 회에 걸쳐서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초의 대단위 관광 및 휴양시설을 건설한 것은 스위스 취리히 근교의 렌
처하이데(Lenzerheide)의 모습을 확대하여 건설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때부터
불철주야 쉬지 않고 일에만 몰입하였습니다. 결국 나는 연세대학교교목은 사임하
고 명성그룹에 전력투구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또 당시에는 서독에서 트랜스
래피드 (Transrapid)라고 하는 자력부상열차를 암암리에 개발하여 북부독일 라텐
(Lathen)이라는 곳에서 테스트 운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속초의 대단위 관광
도시와 서울과를 자력부상열차로 연결하려는 생각으로 김철호회장, 김기중부회장
과 함께 라텐의 테스트필드를 방문하여서 트랜스래피드 자력부상열차를 시승하기
도 하였습니다. 무성으로 시속 500km/h 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최첨단의 교통수
단을 보고서 직접 시승도 해본 우리는 명성그룹이 세계적인 관광개발회사가 되려
면 이러한 최첨단 자력부상열차를 건설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명성그룹에서 지리산 노고단 정상까지 케이블카를 건설하는 사업을


계획한 것입니다. 화엄사에서 출발하여서 중간스테이션을 거쳐서 노고단까지는
6.5km 의 구간이었습니다. 나는 스위스의 본롤 (Von Roll)이라는 케이블카 전문회
사와 하베거 (Habegger)라는 모노레일 전문회사와 접촉하여서 스위스의 장기차관
과 함께 국내에 케이블카와 모노레일을 건설할 사업을 계획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나와 스위스와의 관계로 인하여서 명성그룹에서 나의 입지는 매우
중차대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또 나는 도심지
내의 종합병원시설을 관광휴양지로 옮겨야겠다는 신념으로 속초의 관광지와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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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레저타운에다 1500베드 규모의 종합병원을 두 개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서독에는 전세계적으로 병원만을 건립하는 전문회사로서 호스
피탈리아 인터내셔날 (Hospitalia International) 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그 회
사의 본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었습니다. 나는 수 차례 호스피탈리아 인터내셔날
의 본사를 방문하여서 전문인력들을 초대하여서 관광개발지역에 장기체류시켜 종
합병원 설계를 지시한 일도 있었습니다. 숙박문제는 호텔시설과 함께 콘도미니엄
그리고 교통시설로는 케이블카와 모노레일 또 장거리 운행은 최첨단의 자력부상
열차를 설치할 계획도 세워놓았습니다. 자력부상열차는 30년 차관을 독일의 드레
스덴은행에서 보장하기로 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력부상열차의 궤도를 정하
기 위하여서 서울에서부터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등을 거쳐서 속초까지 항공사진
을 준비하여서 독일의 트랜스래피드회사에게 기본궤도 설정계획을 의뢰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나의 눈부신 활동은 복합적인 관광개발의 거대한 사업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갑작스런 회사의 발전과 시설규모 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명성그룹이 국내에 뿐만 아니라 국외에까

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 알라스카의 원주민협회로부터 쥬노일대의 관광개발의 위촉문의

미국의 알라스카의 원주민협회 (Native Corporation) 으로부터 쥬노 (Juneau) 지역


일대를 관광개발지역으로 정하고 우리 명성그룹에게로 개발의 위촉문의가 들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로 인하여서 나는 알라스카의 앵커리지엘 자주 방문
하였습니다. 그리고 앵커리지대학에서 알라스카 원주민언어인 엽착어 (Yeupchak)
즉 에스키모언어를 한 학기 동안 공부한 일도 있었습니다. 알라스카의 남단지역
은 과거 러시아에서 아주 아름다운 러시아풍의 건축물들을 지어놓았습니다. 그
인근에다 콘도미니엄과 호텔과 골프장 등을 지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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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는 속초의 대단위 레저시설을 완공하였고, 1500동의 콘도미니엄을 완공해 분
양하였습니다. 그리고 18홀의 골프장도 완성하여 오픈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양평에다 340만평의 대지를 확보하여서 올림픽레저타운을 건설할 마스터플랜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산정호수에다가는 약 200객실의 콘도미니엄을 건
설하여서 분양하고 있었습니다. 산정호수 안시의 콘도미니엄은 주변의 경관이 너
무나 아름다워서 환상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알라스카의 원주민협회 임원들과 건
설요원들이 대거 귀국하여서 제일 먼저 찾아본 장소가 산정호수 안시의 콘도미니
엄시설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경관이 알라스카의 쥬노일대라고 하면서 산정호
수의 레저시설을 그대로 알라스카의 쥬노에다 옮겨놓았으면 좋겠다고 야단들이었
습니다. 명성그룹에서는 그 당시에 백암 온천지에다가도 약 200객실의 콘도미니
엄의 건설을 거의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속초, 용인, 산정호수, 백암, 지리산 일대
에는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명성레저타운의 모습들이 미국과 스위스와 호주와 뉴
질랜드 그리고 피지섬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2 – 3년 동안에
이루어진 꿈과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관광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나에게는 해외여행이 빈번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영국, 스위스, 독일,
호주, 뉴질랜드, 피지,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 등을 수 차례 방문하는 가운데에 나
는 명성그룹의 관광개발사업이 오대양 육대주로 번져나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
었지요. 내 자신 필생의 사업으로 명성그룹을 세계적인 관광개발회사로 키우고자
하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명성
그룹에게 갑작스레 난관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제5공화국의 비리사건들 중에 연
루되어서 세무조사를 받게 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국내의 사업은 물론 해
외와 연관된 사업까지 일단은 중단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운과 마주치게 된 것입
니다. 아무도 이러한 일이 우리 앞에 생겨나게 되리라고는 예측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45일간의 세무조사와 함께 김철호회장은 5공비리로 알려진 장명동
(장영자/명성그룹/영동개발)사건으로 강력한 세무조사와 함께 재판이 시작되어서
김철호회장은 결국 1066억의 회사부채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업만 늘려놓았다는
평가로 구속기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중역간부사원들이 모두 다 구속수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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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고 다시 출소되면서 명성그룹의 그 많은 부동산들은 다 정부로부터 몰수 당하
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대로 추징금 2억정도로 가장 작은 문제를 안고
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사전에 예비대책 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명성그룹의 재산과 사업일체는 한화그룹으로 이전되
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이름이 명성리조트에서 한화리조트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 아름답던 산정호수의 명성리조트도 한화리조트로 명명되었습니다.

20. 대한항공 KAL007 격추사건과 나의 알라스카여행

1983년 8월 31일에 나는 미국 뉴욕에서 대한항공 KAL007기 편으로 알라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하여서 서울로 오는 항공편을 예약하여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알라스카 원주민협회에서 1억불 차관승인한 서류를 형님의 책상
위에 놓아둔 채 공항으로 나온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나는 형님에게 다음날
떠나겠다고 하였는데 형님은 지금 예약한 KAL007편으로 귀국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류야 내일 DHL로 발송해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건 안 된
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서류를 가지고 내일 다시 공항에 나와서 대
한항공기편을 이용해 귀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회사의 부채 1066
억원은 미화로 환산하게 되면 정확히 1억불이었기 때문에 알라스카 원주민협회로
부터 차관을 도입하는 문제로 알라스카를 방문하고 뉴욕을 들러서 형님과 좋은
소식이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떠나오는 길이었습니다. 김포공항에는 명성그룹 임
원들이 학수고대하면서 나의 차관협정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차관승인서류를 직접 가지고 공항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님의 분부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 그 다음날 떠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오니 내가 예약하고 탑승하려 했던 그 비행기가
실종되었다는 것입니다. 며칠 있으니 소련으로부터 미사엘공격을 받아서 추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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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뉴스였습니다. 내가 만일에 그
서류를 그냥 가지고 아니면 형님 말씀대로 다음날 DHL 발송키로 하고 예약된
KAL007기에 탑승했더면 나는 지금 이 세상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1억불의 차관도
입이 가능하다고 하는데도 전두환정부는 감정적인 문제라고 하면서 김철호회장을
출소시키지 않고 재판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철호회장은 안양교도소에서
10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 어간에 나는 뉴욕을 경유하여서
스위스로 가서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공부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의 생업의 터전으로 생각하였던 명성그룹이 부도가 나고 완전이 공중분해가 되면
서 나의 20세기의 풍운아로서의 인생은 시작된 것입니다.

21.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 20세기의 풍운아

1983년도 KAL007기 격추사건에서 살아남은 나는 내 인생이 과연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하는 많은 의심과 더불어서 덧없는 방랑자의 신세로 인생을 보내야 하는
처지로 돌변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외롭지 않은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것은 나를 항상 동반해주는 그림자이지요.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나는 이러한
극한의 외로움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20세기의 풍운아의 비정상적인 삶을 시작하
였습니다. 나에게 추징금 7억원이 부과되었는데 5억이 감해지고 2억만 남았었습
니다. 은마아파트가 그 당시 그만한 값을 지니고 있어서 매각처리하여서 2억원의
추징금문제를 말끔히 해결을 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내게는 해외여행이 자유로워
졌습니다. 어린 두 딸을 엄마에게 맡끼고서 나는 혼자서 주머니에 단 450불을 마
련한 채 스위스로 떠났습니다. 스위스의 본롤회사에서는 명성그룹이 5공비리와
무슨 연유로 관련이 되었는가? 지리산 케이블카를 현실화 하는 것이 불가한가?
명성레저타운내의 모노레일 가설하는 시스템은 아주 포기해야만 하는가? 여러가
지 질문의 텔렉스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팩스기기가 처음 등장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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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나는 팩스로 간단히 스위스에 도착하는 일자를 알리고는 서울을 떠나기로 작
심하였습니다. 취리히대학에는 당시에 조직신학으로 유명한 게오르그 에벨링
(Georg Ebeling)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백과사전으로서의 신학
(Theologie als Enzyklopaedia)”라는 강의에 청강생으로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말시간을 택하여서 본롤회사의 직원들을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브란덴베르거(Brandenberger) 씨와 그뤼터(Gruetter)씨였습니다. 그들을 주
말에 만나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명성그룹에서 일어난 돌발사건과 함께 나의
입지 등에 관한 소상한 보고를 마치고는 나는 당분간 스위스대학에 머물면서 신
학연구를 하고자 한다고 내 앞으로 스위스에 장기체류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
러자 브란덴베르거씨가 매월 500프랑씩 2년간 지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
서 나는 스위스에 적어도 2년간은 머물 수 있는 경제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습
니다. 나는 신학공부 보다도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공부가 더 하고 싶어
졌습니다. 원래 음악을 좋아 하였고 피아노도 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보고 싶
은 간절한 생각도 있고 하여서 우선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의 상임지휘자 넬로 산
티 (Nello Santi)에게 사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서 목사님이면서 지휘자가 되신 피터 막 (Peter Maag)에게 본격적인 지휘자의 수
업을 사사 받게 되었습니다. 피터 막 선생님은 쌍모리츠 (St. Moritz) 에 있는 별
장에 내가 관리인처럼 일하면서 머물러 있는 일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폰트레
지나 (Pontresina) 라는 해발 850미터나 되는 높은 산지의 작은 성처럼 생긴 3층
건물 집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나의 인생에서 최고봉을 이루는 인생의
체험기간이었습니다. 명성그룹사건에 무슨 의미가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의 인생이 음악가 곧 지휘자가 되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나
를 따르는 충실한 반려자 나의 그림자는 폰트레지나의 산언덕에서도 나와 동행하
고 밤에는 밝은 달빛 아래서 계속해 나를 뒤따르면서 보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2년간 머물면서 나는 거의 기본적인 지휘법, 오케스트라의 구성, 지휘자
총보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 등으로 매우 값진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밤이
되면 밤하늘에는 별들이 빛나는데 마치도 손을 들어서 그 별들을 만질 수가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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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보이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또한 나의 친구가 되고 있었지요. 매우 행복하
였습니다. 방랑자의 신세가 된 내 자신을 나는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으로
동일시하였습니다. 폰트레지나 카사 막 (Pontresina Casa Maag: 폰트레지나의 막
의 집이라는 뜻)에는 Bluettner 라는 아주 좋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져 있었습니
다. 원래 피터 막 선생님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하루에 6시간씩
쉬지 않고 피아노를 연습하였습니다. 우선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
(Wanderer Fantasie)” 을 열심히 연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쇼팽에튀드, 모챠르트
소나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 등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음악을 마음껏 쳐볼 수가
있었지요. 오밤중에도 잠이 안오면 피아노를 쳤습니다. 어느 인생의 방랑자가 이
러한 호강을 하고 피아노음 예술에 심취해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새롭게 나에게
생겨난 인생의 예견해 보지 못한 커다란 변모이기도 하였습니다. “알에서 애벌레
로 애벌레가 고치를 짖고 그 안에서 번데기로 변모하고 그리고 나중에는 나방이
가 되는 그러한 곤충의 변모와 매우 유사한 나의 인생의 변모 내지는 변신이구나”
이러한 생각도 들었지요.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님과 함께 양잠일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누에를 잘 길러본 경험이 있었지요. 뽕나무 잎사귀를 싱싱한 것을 잘
씻어서 누에게 가져다 줍니다. 사그락 사그란 누에는 열심히 뽕나무 잎사귀를 씹
어 먹습니다. 그리고 잠자는 동안에 몸이 커지면서 자라나지요. 그래서는 다 자라
나게 되면 더 이상 먹지도 아니하고 잠도 자지 아니하고 고치를 짓습니다. 자기
몸에서 뿜어내는 한오라기의 비단실을 가지고 고치를 짓습니다. 그 안에서 번데
기로 변신하고 나중에는 나방이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번데기로 변한 누에들
의 고치의 껍데기 비단실을 풀어서 헌겁을 짜내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인생이
돌변한 것이 이와 유사한 것이겠구나 이러한 생각으로 하루종일 나는 피아노연습
과 지휘자총보를 연구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가 제
일 첫번으로 장기간 머물렀던 장소가 스위스의 쌍모리츠 근교 폰트레지나 고산지
대였습니다. 거기에서 밤마다 머리위에 총총히 떠 있는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
면서 방랑하는 내 영혼이 여기서는 별들의 축복아래에 있구나! 참으로 멋진 방랑
자와 그의 그림자…. 여기에서 2년후에 나는 다시 독일로 떠났습니다. 198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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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내 생일날 나는 폰트레지나에서 하강하였습니다. 나는 스위스의 쌍모리츠
(St. Moritz)의 니체하우스 (Nietzsche Haus)엘 들러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살아 생
전에 이곳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였던 때를 상상해 보면서 기념홀로 지정된 넓은
방에서 니체의 사진들을 둘러보고나서 잠시 그를 위하여서 묵상기도를 하였습니
다. 그리고는 독일의 뷔르츠부르그로 향하였습니다. 그곳 음악대학에는 명 피아니
스트 율리앙 폰 카롤리이 (Julian von Karolyi) 살아계셔 교수로 일하면서 활동하고
있을 때여서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나로 하여금 독일로 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독일유학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율리앙 폰 카롤리이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 (Wanderer Fantasie)”의 레코드판을 가지고 있었고
많이 감상하였습니다. 이제 내 스스로 방랑자의 신세가 되어서 오직 하나의 신실
된 친구인 나의 그림자와 벗하면서 그 옛날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에 심취
하던 때가 생각이 나서 직접 율리앙 폰 카롤리이 교수를 만나보고 싶었었지요.
그리고나서 뷔르츠부르그대학에서 한 학기동안 한국실학사상의 역사를 독어로 강
의를 하였습니다. 뷔르츠부르그대학에 체류하는 동안에 한국에서는 두 딸 현성과
혜성을 데리고 엄마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에 7,000마르크를 내어 놓으면
서 혼자서 고생하는 방랑자의 생활을 이제 그만두고 뷔르츠부르그대학 초청강의
만 마치고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나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
기는 한국에서 사업하고 있으니 곧 귀국을 해야겠고 아이들만 좀 독일에서 학교
에 보내서 언어도 익히고 또 높은 수준의 독일학교의 교육을 받도록 하였으면 좋
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딸들을 데리고 나는 뷔르츠부르그에 2년간 체류하
였지요. 아이들은 뷔르츠부르그의 모챠르트 김나지움 (우리나라 중고등학교과정)
에 보내서 독일식의 학교교육과 함께 독일어를 습득하는 일에 아버지로서 지성을
다하려고 하였습니다. 모챠르트 김나지움은 클래식음악을 강조하는 교과과정이라
서 피아노교유과 함께 간단한 현악앙상블 등의 연주활동도 상당수준에 달해 있었
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두 딸의 아버지로서 학부형의 입장에 있었지만 음악합주
단들을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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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기체류를 생각하여서 뷔르츠부르그 외곽지대의 에스텐펠트 (Estenfeld)
라는 곳의 독채집에 거하면서 나는 계속하여서 뷔르츠부르그 대학에서 초빙교수
로 연구하고 한국실학사상에 관한 강의도 하고 또 가끔씩 모챠르트 김나지움의
현악앙상블 (작은 그룹의 현악오케스트라)을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스위스의 알
프스산맥에 파묻혀서 2년간 혼자서 시간을 보냈는데 독일에서는 두 아이들과 함
께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외롭지 않게 또 2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2년후에 큰
딸 현성은 귀국하고 작은 딸 혜성이만 데리고 하는 서베를린으로 갔습니다.

22. 동서독이 통일이 되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1988년도 우리나라 제24회 국제올림픽대회때에는 귀국하여서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1989년 7월28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모챠르
트의 곡들만 가지고 서울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습니다. 독일문화원 원장
한스 위르겐 나겔 (Hans Juergen Nagel)씨가 갑자기 뮌헨의 중대한 회의에 참석
해야 하는 일로 미리 계획된 예술의 전당의 음악회를 내가 지휘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토벤 심포니 제3번도 공연프로그램에 들어 있었으나 나는 모챠르트
의 심포니로 바꾸고 또 소프라노 독창자 헬룬 가르도 (Helrun Gardow)씨는 모챠
르트의 “찬양하라 기뻐하라 (Exsultate Jubilate)”를 나의 지휘와 함께 연주하였습
니다. 두 딸 아이들은 아버지인 내가 오케스트라 앞에 서서 지휘하는 모습을 처
음으로 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이 틀림이 없었지요. 자기네들
도 아버지처럼 음악을 공부하고 나중에는 오케스트라 앞에 서서 지휘도 해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스위스 취리히와 베른 그리고 쌍 모리츠에 거하면서 열
심히 지휘공부를 한 것이 현실적으로 눈에 들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형님
네들 누님네들 모두 다 놀랐다고 하면서 20세기의 풍운아라고 자칭하는 것을 삼
가라고 경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다른 인생의 행로가 전개된 것일 뿐 절대로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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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아가 되어서 우왕주왕하는 덧없는 인생살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님을 본인 스스
로 철저히 깨우치기를 바란다고 나에게 별도로 충언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이듬해에 나는 둘째 딸 혜성만 데리고 다시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서베를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나를 잘 알고 있는 한국교포들이 여
러명이 있었습니다. 한국식당을 경영하는 “김치집”과 “아리랑”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런대로 외딸진데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데
서 외로운 인생길을 가는 것보다는 서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은
지극히 자연적인 충동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둘째 딸을 데리고 옛날에 살
았던 Lichterfelde 야리우스여사님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무척도 반가워하는 가운
데에 노동사회청에 그 당시에 나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이 몇 명 남아 있어 사
무실에 둘째 딸을 데리고 방문간 일도 있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았던 담벽이 헐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나 역시 혜성이를 데리고
밤중에 그 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로 몰렸는데 유
명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첼로를 들고 와서는 막 헐리고 있는 담벽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 현장이 전세계 뉴스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기자들에게 로
스트로포비치는 동서독이 통일된 것은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여건이 있기도 하였
겠지만 무엇보다도 음악의 힘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자기의 신념을 말하
였습니다. 분단된 동서독에서 분단이 되지 아니한 것이 음악예술분야였다고 이야
기 하면서 동서독에서 한가지로 바하와 모챠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숭상하였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브란덴부르그 문의 통로가 활짝 열리면서 제일 먼저 동독시민들
이 걸어서 서베를린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동독에서 한 가족이 서 베를린으로 왔는데 내가 그들과 만나서 잠시 담화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도 분단국가에서 왔는데 독일의 통일되는 분위기가 세계사의
축복의 현장으로 느껴진다고 내 생각을 독어로 말하자 그 동독인 아버지가 가족
을 일일히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즉흥적으로 100마르크 짜리를 세 가족식구들에
게 한장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즉석에서 우리 다 함께
독일풍의 음식 커리부르스트 (Curry Wurst)를 사서 먹었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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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에서 동서독이 통일이 되는 그 순간에 그 역사적인 현장에 나는 내 둘째딸
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평생에 잊혀지지 아니하는 감동의 순간을 체험한 것입
니다. 나는 그날밤 딸 혜성이를 데리고 브란덴부르그문을 걸어서 통과하여 동베
를린 샤우슈필하우스의 광장앞까지 가본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계무량한 그
날 밤이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이 동서베를린의 담벼락이 헐리기 시작한 날이
었고 그해 10월 3일은 정식으로 동서독이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개천절날 동서독은 통일이 되었고 그날이 통일의
날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걸어서 서베를린으로 와서는 잠자리에 들
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남북간의 분단이 이처럼 행복하게 통일의 현장
으로 변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동서독이 통일되는 현장에 있으면서 통일직후에는 베를린-브란덴부르그 학


술원 일명 라이브니츠 학술협회에 연구교수로 재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라
이프니츠와 중국철학과의 관계를 연구하여 발표하였고, 또 비단길 실크로드를 통
한 동양과 서양과의 학술적, 문화적, 상업적인 교역활동의 역사를 연구하여 논문
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때에 연구발표된 논문들은 현재 베를린의 훔볼트대학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994, 1996, 1997년 이렇게 3년에 걸친 학술지에 나의 논문들
이 다수 계재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상에 떠 있는 독일어로 기록된 학술연
구논문들 입니다. 두 딸들은 서울에서 고등학교과정을 졸업하고 큰 딸은 고등학
교 교사가 되었고 둘째 딸은 독일 프라이부르그 근교에서 독일인 사업가와 결혼
하여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원래 독일에서 수간호
사로 프라이부르그 대학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현재 년금을 받고 독일에 체류
중에 있습니다. 나는 1998년 이후로 홀로 귀국하여서 서울에 거주하면서 음악활
동에 몰입하였습니다. 그래서 2003년도 이라크 전쟁 피해자 특히 어린이들을 도
웁는 자선음악회 (유니세프 후원)과 쓰나미 재해인 돕기 자선음악회 등에서 오케
스트라를 지휘하였습니다. 본격적인 음악활동이 전개되었지요. 주로 예술의 전당,
일산 고양 아람누리 대공연장에서 연주를 하였고, 성남아트센터에서도 수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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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를 개최하고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러던중에 2013년 12월 24일 나는 삼성
서울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대장암으로 인한 대장절단의 수술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2015년 예술의 전당에서 베토벤, 모챠르트, 슈베르트의 곡들을 지휘한
바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음악에 대한 관심사와 또 음악회에서의 간과될 수 없
는 정도의 활동도 내 인생의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드높여 준 좋은 분위기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의 모니터에 비쳐진 영상들은 대략 이와 같은 내용
들로 일관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내 인생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이 모니터
에 보여지지 아니한 경우가 있습니다. 왜 많은 이야기들이 내 앞에 보여지지 아
니하였을까? 이 영혼모니터의 내용은 과연 누가 편집한 것인가? 나에게 비몽사몽
간에 보여진 그 연유와 의미와 경과에 대하여서 나는 아직도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2020년 5월 18일 밤 12시경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번개빛이 번쩍
일 때에 나는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모니터에 비친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 자신의
인생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너무나도 생생한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기억에
서 사라지기 전에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하여서 작
업한 것을 여기에서 마칩니다. 신비한 사건은 우리들 인생에서 적지 않습니다. 그
런데 나에게 80년간의 인생이야기가 생생한 모습으로 모니터에 상영된 체험이 귀
하게 여겨집니다. 앞으로 계속될 나의 남은 여생에서 이러한 인생정보가 어떤 의
미를 차지하게 될지는 아직은 내가 알 수도 없고 또 설명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으로 영혼모니터의 환상에 대한 기록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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