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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스런 이야기 ~~ 나의 80년 인생에 관한 영적동영상 2020년 5월18일 밤 12
시를 지나 새벽 3시경 즉 5월 19일 새벽까지의 환상
2. 38선을 넘어서....
3. 6.25동란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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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싶어했던 좋은 그랜드피아노였지요. 어느 날 창문에 기어올라 강당의 신시
나티 그랜드피아노를 보려고 했습니다. 인민군 두 명이 도끼를 들고 들어와 피아
노다리를 찍으면서 "야 이거로 불 피우면 따뜻하게 지내갔구나!" 하는 겁니다. 한
쪽 다리를 잃은 그랜드피아노는 바닥에 비스듬히 주저 앉으면서 현들이 울려났습
니다. 내게는 그것이 피아노의 신음소리로 들렸어요. 그때에 나는 피아노라는 악
기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어요. 지금도 그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있
지요. 피아노라는 악기와 피아노소리에 대한 집착이 80평생 없어지지 않고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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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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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쳐서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당동중앙교회는 박형순목사님이 담임목사
로 시무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로 곽선희라는 신학생이 열심히 교회운영
에 일하며 노력하였습니다. 그분이 오늘날 유명해지신 곽선희목사님입니다. 어느
덧 신당동중앙교회는 돌집으로 아담하게 단장된 청구동과 신당동 일대에서는 기
독교신앙의 등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의 수효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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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슈베르트의 피아노음악 "방랑자의 환상곡 Wanderer Fantasie"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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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서 속에 가장 많은 답이 존재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로 인해 독서와 음
악감상이 내 몸과 마음을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독서는 주로 성서를 읽었구요 그
리고는 명동에 나아가 디쇄네 (Die Schoene), 필하모니 (Philharmony) 와 같은 음
악감상실에서 클래식음악을 많이 감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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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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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온몸에 경련증세가 일어나게 되면 흡사 간질병자로 보이는 증상은 없어지
지 않고 있었지요. 아마도 뇌진탕으로 인한 후유증인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주로
다리에 쥐가나는 상태로 연결되어 통증이 격심해 일어나 걷는 거동이 힘들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2~3개월마다 거의 주기적으로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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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대 후 독일유학을 계획한 나에게 그 책자들은 매우 중요
하였습니다. 그 20여권의 책자들은 거의 다 나치독일의 역사가 서술된 내용들이
었습니다. 히틀러 밑에서 활동한 나치독일의 수뇌들의 사진과 인적사항들이 아주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책자들로부터 나치독일에 관하여 매우 자
세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는 나치독일에 대한 연구로 평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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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22일 나는 신혼신부를 데리고 독일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공항은 여의도 군비행장 하나뿐이었습니다. 서울과 동
경간 여행구간도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으로만 가능하였습니다. 동경에서는 독일
의 루프트한자 항공편으로 알라스카 앵커리지 경유 북극을 넘어서 코폔하겐에 도
착한 다음 거기서 함부르그로 가면 독일 땅에 도착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서이념
분쟁의 냉전시대라서 자유진영의 항공기들은 소련상공은 지나칠 수가 없었지요.
이렇게 하여 나의 독일유학의 꿈은 실현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수중에는 유학생에
게 허락된 환전금액 400불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00불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400불은 가난한 우리나라로서는 거금이었습니다. 서독
아헨 Aachen 에 도착해 알아보니 원룸아파트 방세가 월 500마르크였습니다. 당
시 환율은 1$ = 4DM 이었습니다. 내 수중의 400불은 1600마르크였습니다. 3개월
방세 밖에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이제 독일 땅에서 어떤 방법으로 연명해갈수가
있을까 막막하여 잠이 오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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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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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동년배의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피아니스트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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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인과 함께 서명하였습니다. 이제 내게는 먹고 사는 문제 그리고 매달 200마
르크씩 할부금을 마련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나는 학생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습
니다. 1967년말까지 27가지의 다른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 200마르크의
할부금을 꾸준히 갚아냈습니다. 1968년이 되었습니다. 서베를린 자유대학 계시판
에 큰 글씨로 "필수과목 EDV "라고 쓰여진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것이
기독교사상교양과목으로 이해하였습니다. E = Evangelisch, D = Doktrin, V =
Verlauf 번역하면 "복음적인 교리의 전개"입니다. 나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고 수
강신청을 하였습니다. 한달 동안 결석이나 지각하지 않고 성실히 수강했는데 도
저히 이해가 안 되는 수학시간으로 일관되었습니다. 교수님은 Joachim Zerulla 였
습니다. 나는 별도로 그 교수님을 찾아가서 모르고 수강신청을 하였는데 취소하
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체룰라교수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
니다. "당신만 모르고 신청한 게 아니고 아무도 알고 신청한 사람이 없습니다. 강
의하는 내자신도 모르면서 강의하는데 최첨단 컴퓨터강의이니만큼 그냥 수강을
계속하세요. 다 알아두면 앞으로 좋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상스런 강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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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YY 는 김XX의 오빠로서 역시 피아니스트인데 미국 쉬카고에 유학하고 있었습
니다. 거기에서 김XX에게로 편지가 왔습니다. 한국유학생 한 사람이 버스운전사
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흑인이 쏜 권총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하다는 이
야기와 함께 유럽은 어떠한가 문의하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오빠를 서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유학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강당에서 좋은 피아노로
무제한 연습이 가능하고 또 내가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기에 그렇게 제안한 것이
었습니다. 베다니병원의 간호사기숙사에 방 하나를 다시 얻고 나는 오빠인 김YY
를 서베를린 국립음악대학에 유학하도록 주선하였습니다. 1969년 3월에 김YY는
서베를린 국립음악대학에서 입학오디션을 인정받아 정식 입학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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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내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서독 전 지역에서 여섯 번째의 실력을 가진 전문전
산요원이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체룰라교수님은 좋은 기회이
니 마음에 결정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년봉 5만마르크에다가 5명의 전산요원팀을
이끌고 일하는 팀장의 자리가 보장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멘스 전산소
로 직장을 옮긴 것이1971년 김YY가 서울음대교수로 부임되어서 귀국한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두 사람밖에 없으니 우리는 베다니병원 간
호사기숙사에서 나와서 방이 세 개가 있는 비교적 넓은 아파트로 피아노를 가지
고 나와 이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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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지금도 가동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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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내가 새로 직장을 옮긴 서베를린 노동사회청 전산부서에는 아주 미모가
출중한 여인이 총책임을 맡은 부서장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Gerda Jarius 였
습니다. 서베를린 남부지역으로 알려진 Lichterfelde 라는 곳에 큰 독채집을 가지
고 살면서 같은 부서 직원인 Stossun 부부에게 2층을 세로 들게 하여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층이 비었으니 나도 들어와 한집에서 함께 살자고 야리우스
여사는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룸아파트에서 나와서 야리우스씨 독채집
3층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때가 1974년초였습니다. 내가 피아노를 친다고 하
니 야리우스여사는 야마하 그랜드피아노를 일층 거실에 세로 빌려다 놓았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 직장에 근무
하는 직장동료들로서 한집에서 함께 사는 사회적인 면모로 인해 내게는 인간답게
사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야리우스여사는 하이젠베르그교수님 강의수강을 수요
일로 옮기고 주말에는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거의
예외없이 조촐한 분위기에서나마 하우스뮤직이 자연스럽게 생겨나 우리의 정서적
인 분위기는 인생을 더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1973년 9월부터 서베
를린자유대학 Weischedel/Gollwitzer의 후기 니체사상 세미나에 등록하고 저녁에
는 니체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방 세개를 나 혼자 다 사용할 수 있었던 야리우
스여사의 저택은 매우 조용하여 공부에 몰입하기에 좋은 분위기였지요. 나는 니
체연구에 심취하였는데 "니체의 허무주의 이해"라는 연구논문을 기독교사상 월간
지에 기고 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1974년 4월호에 계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974년 12월호에는 "신의 죽음과 인간의 축제"라는 나의 두 번째 니체연구논
문이 실렸습니다. 1975년 9월호에는 "선과 악의 피안으로서의 신지론"이라는 논
문이 계속해 기독교사상지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또 1976년 2월호에는 "나사렛예
수와 새예루살렘"이라는 기독론에 해당하는 논문이 계속해 기독교사상지에 발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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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1976년 말에 제1차 국가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2차 국가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서독루터교연합회로부터 정식으로 목
사안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2차 국가시험에는 독일국적을 보유해야
만 응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제2차 국가시험응시를 포기하고 서베를린 자유
대학 철학과에 재등록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에 니체연구와 함께 독일관념론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4년초부터는 Heisenberg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뮌헨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뻐졌습니다. 나는 1976
년도에 Heisenberg 교수님 강의를 다시 수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
럽게도 1976년초에 하이젠베르그 교수님은 신장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셨습니
다. 그래서 나는 1977년과 1978년은 완전히 독일관념론 Kant-Fichte-Sche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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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베를린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향상중에 귀국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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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습니다. 당시 국제통화는 엄청나게 비싸서 야리우스여사님께 폐가 될까하여
우체국으로 나가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민경배목사님이 전화를 받으셨습
니다. 다음주 즉 5월중에 한국엘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다 하시며 연세대교목으로
초청코자 한다는 내용인데 동의하는가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 초청에 대하여 동
의하며 일시 귀국하는 일자를 전화로 통보 드린다고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습니
다. 그리고나서 나는 야리우스여사와 의논하였습니다. 모국에서 또 모교에서 조교
수대우로 부르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야리우스
여사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라고 하면서 일단은 약 2주 정도 특별휴가를 주선할
터이니 한국에 다녀오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서베를린에 유학한지
12년만에 귀국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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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항공편으로 독일로 갔는데 지금은 대한항공편으로 한국어 안내방송을 들으면
서 귀국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음날
금요일 오전 9시에 민경배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독일제 피스통만년필 펠리
칸세트 볼펜과 만년필 한 쌍이 들어있는 것을 선물로 내어놓았습니다. 몇 가지
교목발령과 조교수대우 호봉문제 등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백낙준박사님을 찾아 뵈었지요. 선물로는 몽블랑만년필세트를 드렸습니다.
학위문제보다도 실력이 더 중요한데 독일유학에서 올바로 공부하였다고 칭찬하셨
습니다. 그리고는 이우주총장님과 김명선부총장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그 두 분께
는 민경배목사님께 드린 동일한 펠리칸 만년필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7월말에 영구 귀국하여서 1978년 9월학기부터 교목업무와 기독교개론 강의를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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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서베를린 노동사회청에 사표를 내고 영구귀국을 결심하였습니다. 사당
동 숭실대학교 바로 정문 앞 연립주택을 전세를 얻고 모교인 연세대학교교목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님
께서는 우리가 꼭 찾아 뵙고 인사 드려야 할 분이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집 앞 숭실대학교에 총장님이신 고범서 박사님이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국한지 얼마 안되어서 나는 어머님과 함께 숭실대학
교 고범서 총장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여러 말씀을 나누다가 총장님께서 숭실대
학교 채플시간에 와서 설교해달라 분부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먼
저 독일에서 공부를 마친 사람으로 김영한박사가 이미 교목으로 새로 부임한 직
후였습니다. 총장님은 김영한박사를 총장실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범서
총장님 앞에서 독일이야기로 꽃을 피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자주 숭실대학교 채플시간에 초대되곤 하였습니다. 그때에 나는 중앙도서관
을 찾아가 유제춘 선생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숭실대학교에는 나와 연세대 동창
인 유호귀 장로가 학원선교문제에서 열심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의미로는
연세대학교 보다도 숭실대학교가 더 내게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연세
대학교로는 계속해서 독일에서 학위를 마친 사람들이 귀국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예외없이 연세캠퍼스에는 기도만 시키기에는 아까운 사람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양교목은 독일서 인정받은 전산요원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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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혹여 다른 업무들 때문에 교목일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
리스도인의 노력은 기도만 하고 설교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모
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라고 나를 많이 변호해 주셨습니다. 세브란스병
원의 전산화는 내게는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고 또 큰 보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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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하였습니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당시 박정희정권에서는 용공주의자로
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크리스챤 아카데미 고위직원 3명이 구속된 사건
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서독 루터교 연합회의 지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강원용목사님은 서독 루터교회 연합회 총감독 샤프목사님
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샤프감독님이 내한하셔서 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을 만나 그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설득시키고자 한 것
입니다. 연세대 교목실장님이신 민경배목사님께서 독일에 연락하여서 채플시간에
설교해주실 것을 부탁 드리라 하셨습니다. 1979년 6월 1일 금요일에 샤프감독님
은 서울에 도착하셨습니다. 당시 새로 선출된 제5대 서독대통령 카르스텐스
(Carstens) 와 샤프감독님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6월 1일과 2일은 크리스
챤 아카데미 강원용목사님을 만나고 수감된 3명 직원 면회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는 6월 3일 성령강림주일에 영락교회 대 예배 때에 설교하시게 되어 있었고 6월
4일 월요일에는 연세대 채플시간에 설교하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샤프감
독님 설교를 통역할만한 사람은 독문학과 교수나 신학대학 내에 독일부인을 둔
교수가 적임자라 그러한 몇 분을 교섭하였는데 샤프감독님이 반한인사로서 박정
희정권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모두 통역을 거절하였습니다.
교목실내에서는 불가불 통역을 맡을 사람은 김정양교목 뿐이라 하였습니다. 영락
교회 성령강림절예배의 설교에서 샤프감독님은 케니아의 이디 아민 (Idi Amin) 과
박정희대통령이 같은 차원의 독재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신랄히 비난하였습니다.
나는 그대로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 예배에는 기관원들이 여러 명이 나왔는데 나
의 통역한 내용을 문제 삼아 월요일 채플설교를 통역한 이후에 또다시 남산으로
연행되어가 문책을 당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나를 문책하는
가? 샤프감독님께 항변하신다면 내가 기꺼이 독일어로 통역해 드리겠습니다. 이
렇게 말하고서 풀려났습니다. 점차로 박정희정권의 나에 대한 탄압이 노골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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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운명의 날 1979년 10월 26일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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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나는 연세대 교목직에 있으면서 바로 그 운명의 날의 현장인 궁정동 안가
와 가까운 교황청대사관저에 자주 초대되어서 안젤로니 (Angeloni) 대사와 시국
에 관한 많은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 캠퍼스내에는 대학생
선교회 (Campus Christian Crusade, CCC)라는 단체가 있었고 김준곤목사님이 창시
자로서 아주 유명하셨습니다. 1980년 4월 5일은 이른 바 식목일 공휴일이었습니
다. 그래도 나는 오전 9시에 출근을 하였습니다. 바로 내 뒤를 따라 들어오신 분
이 김준곤 목사님이셨는데 중요한데 방문갈 일이 있다 하시면서 함께 동행하자고
하셨습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냥 따라 나섰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은 용인의
어느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픈식이 있는데 기독교예배순서를 인
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바로 그 골프장이 명성컨트리
클럽이라는 곳이었는데 클럽하우스를 새로 아름답게 짖고 단장하여 새로 오픈하
는데 김준곤목사님께서 예배인도를 해달라는 분부가 사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명성그룹의 김철호회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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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관광입국한 스위스와의 연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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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레저타운에다 1500베드 규모의 종합병원을 두 개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서독에는 전세계적으로 병원만을 건립하는 전문회사로서 호스
피탈리아 인터내셔날 (Hospitalia International) 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그 회
사의 본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었습니다. 나는 수 차례 호스피탈리아 인터내셔날
의 본사를 방문하여서 전문인력들을 초대하여서 관광개발지역에 장기체류시켜 종
합병원 설계를 지시한 일도 있었습니다. 숙박문제는 호텔시설과 함께 콘도미니엄
그리고 교통시설로는 케이블카와 모노레일 또 장거리 운행은 최첨단의 자력부상
열차를 설치할 계획도 세워놓았습니다. 자력부상열차는 30년 차관을 독일의 드레
스덴은행에서 보장하기로 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력부상열차의 궤도를 정하
기 위하여서 서울에서부터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등을 거쳐서 속초까지 항공사진
을 준비하여서 독일의 트랜스래피드회사에게 기본궤도 설정계획을 의뢰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나의 눈부신 활동은 복합적인 관광개발의 거대한 사업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갑작스런 회사의 발전과 시설규모 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명성그룹이 국내에 뿐만 아니라 국외에까
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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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는 속초의 대단위 레저시설을 완공하였고, 1500동의 콘도미니엄을 완공해 분
양하였습니다. 그리고 18홀의 골프장도 완성하여 오픈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양평에다 340만평의 대지를 확보하여서 올림픽레저타운을 건설할 마스터플랜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산정호수에다가는 약 200객실의 콘도미니엄을 건
설하여서 분양하고 있었습니다. 산정호수 안시의 콘도미니엄은 주변의 경관이 너
무나 아름다워서 환상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알라스카의 원주민협회 임원들과 건
설요원들이 대거 귀국하여서 제일 먼저 찾아본 장소가 산정호수 안시의 콘도미니
엄시설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경관이 알라스카의 쥬노일대라고 하면서 산정호
수의 레저시설을 그대로 알라스카의 쥬노에다 옮겨놓았으면 좋겠다고 야단들이었
습니다. 명성그룹에서는 그 당시에 백암 온천지에다가도 약 200객실의 콘도미니
엄의 건설을 거의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속초, 용인, 산정호수, 백암, 지리산 일대
에는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명성레저타운의 모습들이 미국과 스위스와 호주와 뉴
질랜드 그리고 피지섬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2 – 3년 동안에
이루어진 꿈과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관광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나에게는 해외여행이 빈번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영국, 스위스, 독일,
호주, 뉴질랜드, 피지,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 등을 수 차례 방문하는 가운데에 나
는 명성그룹의 관광개발사업이 오대양 육대주로 번져나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
었지요. 내 자신 필생의 사업으로 명성그룹을 세계적인 관광개발회사로 키우고자
하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명성
그룹에게 갑작스레 난관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제5공화국의 비리사건들 중에 연
루되어서 세무조사를 받게 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국내의 사업은 물론 해
외와 연관된 사업까지 일단은 중단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운과 마주치게 된 것입
니다. 아무도 이러한 일이 우리 앞에 생겨나게 되리라고는 예측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45일간의 세무조사와 함께 김철호회장은 5공비리로 알려진 장명동
(장영자/명성그룹/영동개발)사건으로 강력한 세무조사와 함께 재판이 시작되어서
김철호회장은 결국 1066억의 회사부채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업만 늘려놓았다는
평가로 구속기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중역간부사원들이 모두 다 구속수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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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고 다시 출소되면서 명성그룹의 그 많은 부동산들은 다 정부로부터 몰수 당하
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대로 추징금 2억정도로 가장 작은 문제를 안고
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사전에 예비대책 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명성그룹의 재산과 사업일체는 한화그룹으로 이전되
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이름이 명성리조트에서 한화리조트로 바뀌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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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뉴스였습니다. 내가 만일에 그
서류를 그냥 가지고 아니면 형님 말씀대로 다음날 DHL 발송키로 하고 예약된
KAL007기에 탑승했더면 나는 지금 이 세상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1억불의 차관도
입이 가능하다고 하는데도 전두환정부는 감정적인 문제라고 하면서 김철호회장을
출소시키지 않고 재판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철호회장은 안양교도소에서
10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 어간에 나는 뉴욕을 경유하여서
스위스로 가서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공부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의 생업의 터전으로 생각하였던 명성그룹이 부도가 나고 완전이 공중분해가 되면
서 나의 20세기의 풍운아로서의 인생은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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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나는 팩스로 간단히 스위스에 도착하는 일자를 알리고는 서울을 떠나기로 작
심하였습니다. 취리히대학에는 당시에 조직신학으로 유명한 게오르그 에벨링
(Georg Ebeling)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백과사전으로서의 신학
(Theologie als Enzyklopaedia)”라는 강의에 청강생으로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말시간을 택하여서 본롤회사의 직원들을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브란덴베르거(Brandenberger) 씨와 그뤼터(Gruetter)씨였습니다. 그들을 주
말에 만나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명성그룹에서 일어난 돌발사건과 함께 나의
입지 등에 관한 소상한 보고를 마치고는 나는 당분간 스위스대학에 머물면서 신
학연구를 하고자 한다고 내 앞으로 스위스에 장기체류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
러자 브란덴베르거씨가 매월 500프랑씩 2년간 지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
서 나는 스위스에 적어도 2년간은 머물 수 있는 경제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습
니다. 나는 신학공부 보다도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공부가 더 하고 싶어
졌습니다. 원래 음악을 좋아 하였고 피아노도 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보고 싶
은 간절한 생각도 있고 하여서 우선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의 상임지휘자 넬로 산
티 (Nello Santi)에게 사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서 목사님이면서 지휘자가 되신 피터 막 (Peter Maag)에게 본격적인 지휘자의 수
업을 사사 받게 되었습니다. 피터 막 선생님은 쌍모리츠 (St. Moritz) 에 있는 별
장에 내가 관리인처럼 일하면서 머물러 있는 일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폰트레
지나 (Pontresina) 라는 해발 850미터나 되는 높은 산지의 작은 성처럼 생긴 3층
건물 집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나의 인생에서 최고봉을 이루는 인생의
체험기간이었습니다. 명성그룹사건에 무슨 의미가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의 인생이 음악가 곧 지휘자가 되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나
를 따르는 충실한 반려자 나의 그림자는 폰트레지나의 산언덕에서도 나와 동행하
고 밤에는 밝은 달빛 아래서 계속해 나를 뒤따르면서 보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2년간 머물면서 나는 거의 기본적인 지휘법, 오케스트라의 구성, 지휘자
총보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 등으로 매우 값진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밤이
되면 밤하늘에는 별들이 빛나는데 마치도 손을 들어서 그 별들을 만질 수가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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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보이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또한 나의 친구가 되고 있었지요. 매우 행복하
였습니다. 방랑자의 신세가 된 내 자신을 나는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으로
동일시하였습니다. 폰트레지나 카사 막 (Pontresina Casa Maag: 폰트레지나의 막
의 집이라는 뜻)에는 Bluettner 라는 아주 좋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져 있었습니
다. 원래 피터 막 선생님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하루에 6시간씩
쉬지 않고 피아노를 연습하였습니다. 우선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
(Wanderer Fantasie)” 을 열심히 연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쇼팽에튀드, 모챠르트
소나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 등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음악을 마음껏 쳐볼 수가
있었지요. 오밤중에도 잠이 안오면 피아노를 쳤습니다. 어느 인생의 방랑자가 이
러한 호강을 하고 피아노음 예술에 심취해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새롭게 나에게
생겨난 인생의 예견해 보지 못한 커다란 변모이기도 하였습니다. “알에서 애벌레
로 애벌레가 고치를 짖고 그 안에서 번데기로 변모하고 그리고 나중에는 나방이
가 되는 그러한 곤충의 변모와 매우 유사한 나의 인생의 변모 내지는 변신이구나”
이러한 생각도 들었지요.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님과 함께 양잠일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누에를 잘 길러본 경험이 있었지요. 뽕나무 잎사귀를 싱싱한 것을 잘
씻어서 누에게 가져다 줍니다. 사그락 사그란 누에는 열심히 뽕나무 잎사귀를 씹
어 먹습니다. 그리고 잠자는 동안에 몸이 커지면서 자라나지요. 그래서는 다 자라
나게 되면 더 이상 먹지도 아니하고 잠도 자지 아니하고 고치를 짓습니다. 자기
몸에서 뿜어내는 한오라기의 비단실을 가지고 고치를 짓습니다. 그 안에서 번데
기로 변신하고 나중에는 나방이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번데기로 변한 누에들
의 고치의 껍데기 비단실을 풀어서 헌겁을 짜내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인생이
돌변한 것이 이와 유사한 것이겠구나 이러한 생각으로 하루종일 나는 피아노연습
과 지휘자총보를 연구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가 제
일 첫번으로 장기간 머물렀던 장소가 스위스의 쌍모리츠 근교 폰트레지나 고산지
대였습니다. 거기에서 밤마다 머리위에 총총히 떠 있는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
면서 방랑하는 내 영혼이 여기서는 별들의 축복아래에 있구나! 참으로 멋진 방랑
자와 그의 그림자…. 여기에서 2년후에 나는 다시 독일로 떠났습니다. 198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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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내 생일날 나는 폰트레지나에서 하강하였습니다. 나는 스위스의 쌍모리츠
(St. Moritz)의 니체하우스 (Nietzsche Haus)엘 들러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살아 생
전에 이곳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였던 때를 상상해 보면서 기념홀로 지정된 넓은
방에서 니체의 사진들을 둘러보고나서 잠시 그를 위하여서 묵상기도를 하였습니
다. 그리고는 독일의 뷔르츠부르그로 향하였습니다. 그곳 음악대학에는 명 피아니
스트 율리앙 폰 카롤리이 (Julian von Karolyi) 살아계셔 교수로 일하면서 활동하고
있을 때여서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나로 하여금 독일로 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독일유학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율리앙 폰 카롤리이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 (Wanderer Fantasie)”의 레코드판을 가지고 있었고
많이 감상하였습니다. 이제 내 스스로 방랑자의 신세가 되어서 오직 하나의 신실
된 친구인 나의 그림자와 벗하면서 그 옛날 슈베르트의 방랑자의 환상곡에 심취
하던 때가 생각이 나서 직접 율리앙 폰 카롤리이 교수를 만나보고 싶었었지요.
그리고나서 뷔르츠부르그대학에서 한 학기동안 한국실학사상의 역사를 독어로 강
의를 하였습니다. 뷔르츠부르그대학에 체류하는 동안에 한국에서는 두 딸 현성과
혜성을 데리고 엄마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에 7,000마르크를 내어 놓으면
서 혼자서 고생하는 방랑자의 생활을 이제 그만두고 뷔르츠부르그대학 초청강의
만 마치고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나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
기는 한국에서 사업하고 있으니 곧 귀국을 해야겠고 아이들만 좀 독일에서 학교
에 보내서 언어도 익히고 또 높은 수준의 독일학교의 교육을 받도록 하였으면 좋
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딸들을 데리고 나는 뷔르츠부르그에 2년간 체류하
였지요. 아이들은 뷔르츠부르그의 모챠르트 김나지움 (우리나라 중고등학교과정)
에 보내서 독일식의 학교교육과 함께 독일어를 습득하는 일에 아버지로서 지성을
다하려고 하였습니다. 모챠르트 김나지움은 클래식음악을 강조하는 교과과정이라
서 피아노교유과 함께 간단한 현악앙상블 등의 연주활동도 상당수준에 달해 있었
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두 딸의 아버지로서 학부형의 입장에 있었지만 음악합주
단들을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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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기체류를 생각하여서 뷔르츠부르그 외곽지대의 에스텐펠트 (Estenfeld)
라는 곳의 독채집에 거하면서 나는 계속하여서 뷔르츠부르그 대학에서 초빙교수
로 연구하고 한국실학사상에 관한 강의도 하고 또 가끔씩 모챠르트 김나지움의
현악앙상블 (작은 그룹의 현악오케스트라)을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스위스의 알
프스산맥에 파묻혀서 2년간 혼자서 시간을 보냈는데 독일에서는 두 아이들과 함
께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외롭지 않게 또 2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2년후에 큰
딸 현성은 귀국하고 작은 딸 혜성이만 데리고 하는 서베를린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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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아가 되어서 우왕주왕하는 덧없는 인생살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님을 본인 스스
로 철저히 깨우치기를 바란다고 나에게 별도로 충언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이듬해에 나는 둘째 딸 혜성만 데리고 다시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서베를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나를 잘 알고 있는 한국교포들이 여
러명이 있었습니다. 한국식당을 경영하는 “김치집”과 “아리랑”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런대로 외딸진데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데
서 외로운 인생길을 가는 것보다는 서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은
지극히 자연적인 충동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둘째 딸을 데리고 옛날에 살
았던 Lichterfelde 야리우스여사님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무척도 반가워하는 가운
데에 노동사회청에 그 당시에 나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이 몇 명 남아 있어 사
무실에 둘째 딸을 데리고 방문간 일도 있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았던 담벽이 헐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나 역시 혜성이를 데리고
밤중에 그 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로 몰렸는데 유
명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첼로를 들고 와서는 막 헐리고 있는 담벽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 현장이 전세계 뉴스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기자들에게 로
스트로포비치는 동서독이 통일된 것은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여건이 있기도 하였
겠지만 무엇보다도 음악의 힘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자기의 신념을 말하
였습니다. 분단된 동서독에서 분단이 되지 아니한 것이 음악예술분야였다고 이야
기 하면서 동서독에서 한가지로 바하와 모챠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숭상하였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브란덴부르그 문의 통로가 활짝 열리면서 제일 먼저 동독시민들
이 걸어서 서베를린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동독에서 한 가족이 서 베를린으로 왔는데 내가 그들과 만나서 잠시 담화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도 분단국가에서 왔는데 독일의 통일되는 분위기가 세계사의
축복의 현장으로 느껴진다고 내 생각을 독어로 말하자 그 동독인 아버지가 가족
을 일일히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즉흥적으로 100마르크 짜리를 세 가족식구들에
게 한장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즉석에서 우리 다 함께
독일풍의 음식 커리부르스트 (Curry Wurst)를 사서 먹었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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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에서 동서독이 통일이 되는 그 순간에 그 역사적인 현장에 나는 내 둘째딸
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평생에 잊혀지지 아니하는 감동의 순간을 체험한 것입
니다. 나는 그날밤 딸 혜성이를 데리고 브란덴부르그문을 걸어서 통과하여 동베
를린 샤우슈필하우스의 광장앞까지 가본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계무량한 그
날 밤이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이 동서베를린의 담벼락이 헐리기 시작한 날이
었고 그해 10월 3일은 정식으로 동서독이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개천절날 동서독은 통일이 되었고 그날이 통일의
날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걸어서 서베를린으로 와서는 잠자리에 들
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남북간의 분단이 이처럼 행복하게 통일의 현장
으로 변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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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를 개최하고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러던중에 2013년 12월 24일 나는 삼성
서울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대장암으로 인한 대장절단의 수술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2015년 예술의 전당에서 베토벤, 모챠르트, 슈베르트의 곡들을 지휘한
바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음악에 대한 관심사와 또 음악회에서의 간과될 수 없
는 정도의 활동도 내 인생의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드높여 준 좋은 분위기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의 모니터에 비쳐진 영상들은 대략 이와 같은 내용
들로 일관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내 인생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이 모니터
에 보여지지 아니한 경우가 있습니다. 왜 많은 이야기들이 내 앞에 보여지지 아
니하였을까? 이 영혼모니터의 내용은 과연 누가 편집한 것인가? 나에게 비몽사몽
간에 보여진 그 연유와 의미와 경과에 대하여서 나는 아직도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2020년 5월 18일 밤 12시경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번개빛이 번쩍
일 때에 나는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모니터에 비친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 자신의
인생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너무나도 생생한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기억에
서 사라지기 전에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하여서 작
업한 것을 여기에서 마칩니다. 신비한 사건은 우리들 인생에서 적지 않습니다. 그
런데 나에게 80년간의 인생이야기가 생생한 모습으로 모니터에 상영된 체험이 귀
하게 여겨집니다. 앞으로 계속될 나의 남은 여생에서 이러한 인생정보가 어떤 의
미를 차지하게 될지는 아직은 내가 알 수도 없고 또 설명도 할 수 없는 입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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