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3

2023.7.

14 이하민
제목: 따라갈 수 있는 발자취

7월 14일 처음으로 프놈펜에 있는 보육원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보육원에는 처음 가보는


것이었기에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했다. 프놈펜에서 좁은 차에 타 꽤 오랜 시간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보육원에 도착했다. 보육원에 도착해 들어간 건물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건물로
들어가자, 원장님처럼 보이시는 분들이 계셨다. 원장님들의 서로 장난치듯이
티격태격하시는 모습, 다른 봉사 하러 오신 분들을 챙겨주시려는 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함께 차를 타고 오신 분들은 다양한 단체에서 오신 분들이었다.
나와 다른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전에 보육원 봉사를 오셨던 분들이었던 것 같다.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이 있었고 파트를 나누어 봉사를 시작하셨다. 나는 중국어 수업 또는 미술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들과 함께 축구하게 되었다. 마땅한 공이 없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보육원장님께서는 곧바로 차를 타고 나가셔서 공을 사 오셨다. 공이 도착하자 아이들은
아주 신나 보였다. 공을 뜯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공에 정신이 팔려 정신없이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함께 봉사를 온 형이 아이들을 데리고 조금 넓은 공터로 이끌고 가서 축구를
시작했다. 잔디는커녕 울퉁불퉁 물에 젖은 흙바닥이었고, 골대는 그물도 없이 철로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라인 역시 존재하지 않았고, 오토바이나 주변 건물들로 인해서
누가 보더라고 축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배경이었다. 하지만 공이 있었기에 아이들은
앞다투어 자기 몸만 한 골대들을 낑낑대며 옮기기 시작했다. 대충 팀을 짜서 축구를
시작했다.
처음 나는 조용히 아이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학교에 있는 아이들도 축구를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기 아이들은 말 그대로 공을 차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제대로 된 공도 없었던 상황에서 이상한 것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을 차는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공을 차는 그 순간에는 슬픈 아이들도, 아픈 아이들도 아닌,
즐거워하는 아이들만이 보였다.
선뜻 함께 공을 차며 달리기 어려웠다. 대부분 맨발이고 작고 마른 아이들이었기에 같이
공을 차는 것이 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 생각은 점점 변화되어 갔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 어린 눈빛과
어정쩡한 배려가 아니라 좋은 추억과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그리고 함께하는 사랑과 관심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하는 축구에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했다. 공을 주고받고, 골을 넣을 수 있게 공을 패스하기도 하고, 골
넣은 친구를 다 같이 축하해 주기도 했다. 학교에 있던 아이들과는 달리 보육원의 아이들은
마냥 살갑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조금은 경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축구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자, 아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조용히 다가와 옆에 가만히 앉아있는 친구, 놀이터로 데려가 신기한 것을
보여주며 해맑게 웃는 친구까지, 착하고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축구를 마친 후, 같이 축구했던 형의 권유로 함께 기타를 치며 찬양하게 되었다. 기타를
가지고 의자가 있는 곳에 둘러앉아 다른 악기 없이 오직 기타와 목소리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기타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찬양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육원에서 본 모습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모습 중 하나였다. 좋은 시설, 좋은 악기,
좋은 실력은 없었지만, 아이들은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다른 어느 곳에서의 찬양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찬양을 불렀다.
아이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찬양 인도자로 섬기며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처음의 다짐과는 다르게 언제부턴가
찬양의 완성도에 집중하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찬양하는
것을 볼 때는 찬양의 가사를 묵상하고 찬양하는 중심과 찬양받는 대상을 묵상하기보단
실력을 평가하고, 얼마나 훌륭하게 찬양하는지를 지켜보았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꿈의 학교의 예배를 돌아보게 되었다. 보육원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좋은 시설, 좋은
악기,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는 꿈의학교였지만 우리의 예배에는, 우리의 찬양에는
보육원의 아이들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함이 없었던 것 같다. 예배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보육원의 원장님이라고 할 수 있는 노부부 전도사님과 한 여자아이가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캄보디아어와 한국어를 섞어 사용하고 있었기에 전체적인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전도사님이 자신을 엄마라고 스스로 칭하며
여자아이와 대화하는 것만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적어도 70~80명은 되는 아이들이
시설에 있었다. 그 모든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를 자처하신 것은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돌보시는 두 분을 보며 어떠한 것이
그분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이러한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다. 경제를 배우며
인간은 모두 자본을 추구하고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라고 배웠다.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행동하게 하는 원리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분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가만히 그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신의 모습을 버리시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익을 추구하시지도, 명예를
추구하시지도, 권력을 추구하시지도 않으셨다. 말 그대로 신에서 인간으로,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축에 속했던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은 앞서 언급된 그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복잡한
이유로만 설명이 가능한 행동이었다. 노부부 전도사님과 나는 아직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분들이 무슨 일을 하고 계셨는지, 어떠한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되셨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그분들을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돌보시는 그분들의 모습에서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분들의 모습과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추운 곳에서, 어두운 곳에서 매일 사랑을 가르쳤대 "

예수님을 표현한 찬양 가사 중 한 부분이 떠오른다. 예수님은 가장 추운 곳, 가장 어두운


곳에서 아픈 이들을 고치시던 분, 차별받고 억압받든 이들을 위로하시든 분이었다. 높은
산들이 낮아지게, 험한 길이 평탄해지게, 골짜기가 메워지게 하셨던 분이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국가인 캄보디아에서, 거기에서도 가장 어렵고 힘든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알려주시는 분들을 보며 이것이 정말 추운 곳에서, 어두운 곳에서 매일
사랑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말한다. 높은 곳을 보라고, 더 높게 올라가라고 말한다. 높은 산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은 말한다. 추운 곳을 보라고, 어두운 곳을 보라고 말한다. 골짜기를 메우라고
말한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 어떠한 말을 들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세상의 말은 매혹적이다. 세상의 말은 성공을 보장하는 듯하다. 사랑의 말은 불리해 보인다.
사랑의 말은 성공과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사랑의 말도 듣는다고, 따른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말을 듣는 것이고 세상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단지 사랑의 말을 듣는 척, 따르는
척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두렵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라야 할 길인지
알면서도 세상의 말이 너무나 달콤하게 들리고, 사랑의 말은 너무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얻는다. 나보다 훨씬 앞서가셨던 예수님을 보며, 프놈펜 보육원의
노부부 전도사님 같은 분을 보며 나는 사랑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어간다. 사랑의
길을 먼저 걷고 계신 분들을 보며 용기를 얻어가고 확신을 얻어간다.
사랑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라갔던, 따라가고 있는 믿음의
선배님들의 발자취는 오늘날 삶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많은 청년에게, 나에게 용기를 준다.
옳은 것을 선택할 힘을 준다.
각자의 사역 가운데서 치열하게 사랑의 길을 살아내고 계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사랑의 길에 발자취를 남겨주셔서 감사하다고,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한발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발자국을 찍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보여주셔서, 살아주고 계셔서 감사하다고 말이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나에게도 분명 삶의 갈림길은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 삶의 갈림길에 설 때,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삶의
갈림길에 설 때, 한 치의 고민 없이 사랑의 길을, 예수님의 제자다운 길을 선택하는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언젠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인해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그날을 기대한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