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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13

제1화 부러진 날개 17

제2화 기병(磯兵)의 본령(本匍 89

제3화 전사의 체통 163

에필로그 223

작가 후기 227

해설 가토우쇼우지 229

기체 . 무기 해설 232

역자 후기 237
프롤로그

나탈리아 이바노브나 야코블레바는 의무실 문을 뒷손으로 닫다


가 실짝 놀랐다.
‘‘. ..사장님?”

니사 기지의 비좁은 감이 있는 복도, 그 한구석에 어떤 사내가


서 있었다. 벽에 기댄 장신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엿들으시다니별로좋은취미는아니군요.,.
“그럴작정은아니었다만.,..'’
스테판 일리치 미하일로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탈리아에
게는 그 말이 변명처럼 들렸지만.
“돌아가자.''
‘‘예.”

비서는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내딛는 민간군사회사(PMC) D.O.


MS.(다나 오시 밀리터리 서비스) 현 사장의 뒤를 따랐다 조용한
복도에 나직한 발소리가 울린다.
“그 애오F리나와 이야기가 하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하시면 될
텐데요. ”

“이제와서얼굴을본다고뭐가달라지냐’'
미하일로프는돌아보지도않고대꾸했다.
‘‘진즉에끝난일이다.',
“그렇습니까?코아아.그렇지요.”

프롤로그 l 13
한 때 그 소녀와의 사이에 어느 정도 신뢰 관계가 있었다 해도
그것을 끊어낸 것은 자신들 쪽이다. 그리고 지금은 명백한 적으로
서 그녀와 싸우고 격추한 끝에 나포했다.
그렇게 보면 미련을 떨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나탈리아일지도
몰랐다.

“용태는어떻더냐'’
‘‘문제는 없을 겁니다. 부상 처치는 이미 끝났고 후유증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세한 보고를 원하시면 카르테를一.”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럼 내일이로군.”
“무엇이말입니까?”
그렇게물었지만나탈리이는대답을예상하고있었다.
“내일그계집애를가르나바쉬로보낼거다.'’
“알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싱을 벗어나지 않는 말에 놀라움도 반감도 들지 않


았다.
‘‘너도동행해라.”
오히려이어지는말이뜻밖이었다.
“제가,말입니까.,'
“너말고누가있나.’'
그짧은대답만으로는미하일로프의반응은엿볼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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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부러진 날개

각성은몽롱함과함께일어났다.
축 처진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모든 것이 애매모호한 정경. 그
는 눈을 힘겹게 깜빡거렸다.
.아,아아.. . . '
회색 세계 속에서 무엇인가-아니, 누군가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안 보인다,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그때 희미하게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 여자...?
‘.리나?”
갈라진 입술이 열리고 말이 새어나온다. 얼어붙는 여성의 그림
자.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뺨 위에서 뜨겁게 터진다.
그순간타츠야의 의식이 깨어났다‘
‘. ..키쿠노?”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 ..타츠야,씨?”
놀란 검은 머리 소녀의 앞에서 거칠게 어깨를 들썩거린다.
“괜찮,으세요?,'
“아.응.. ..”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필사적으로 가다듬는다. 뇌리를

제화 부러진 날개 l 17
스치는 온갖 영싱들-전투패주추락한 헬7F.
“여긴,어다...”
헐떡거리며타츠야는그렇게읊조렸다.
뺨을 어루만지는 눅눅한 바람과 다리를 찌르는 울퉁불퉁한 암반
의 단단한 감촉. 짙은 어둠 속에서 군용 램프 불빛이 두 사람의 주
위만을 간신히 비춘다.
‘철벽에서추락한것은기억하고계시지요?”
“일단은.”

욱신거리는두통을참으면서타츠야는고개를끄덕였다.
“그 지점에서 계곡을 따라 10킬로미터 정도 이동한 동굴이에요.
타츠야 씨의 구조와 치료를 우선하느라.”

‘동굴..,여기가?”
키쿠노의 말을 듣고 타츠야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용
램프를 들고 어둠 속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울퉁붙퉁한 바위 바닥
과 벽면이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안으로 이어져 있다. 너무 높아서
빛이 닿지 않는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하, 그러고 보니 동굴 같긴 하네.”
시야 끝에서 정체 모를 벌레 같은 것이 지나갔다. 인싱을 구긴
타츠야는 숨을 살짝 내쉬고 현 상태를 재확인했다.
그가 속한 D.O.MS.는 무인AS (켄투리이)의 개발계획을 추적
한 끝에 이곳 가르나스탄 공회국의 쿠데타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데타는 하루 만에 실패. 신생 D.OM.S는 국외로 탈출
을 꾀했지만 타츠야와 키쿠노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남겨지고 말았

18
蠟력두 사람. '
살며시 주변을 둘러본다. 주위에 이들 말고는 인기척이 없다.
“있잖아. 키쿠노..”
“예? ”

그는 주뼛거리며 키쿠노에게 물었다

“리나는, 어떻게 됐어?”

말문이 막힌 키쿠노가 어색하게 눈길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타츠야는 알았다. 알고 말았다.
“그렇구나.''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신음했다. 어깨를 떠는 그 모습을
키쿠노는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후타츠야는스스로고개를들었다.
“가자. 키쿠노.’'
충혈된눈을감추지도않고그는말했다.
“구조대가 올 가능성은 없는 거지? 그럼 우린 자력으로 이 나라
에서 탈출할 수밖에.”
“예. 그렇기는한데코괜찮겠어요, 타츠야씨?”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키쿠노를 타츠야는 빨개진 눈으로 쏘아
보았다.
“괜찮고말고가무슨소용이야. 하느냐마느냐, 그것뿐이라고.”
... ..예.그러네요.”
키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염려하는 뉘
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l화 부러진 날개 19
.‘(레이븐)은어찌됐지?”
“두 대 다 밖에 위장시켜 뒀어요. 손상이 심하지만 움직일 수는
있을 거예요.”

‘‘알았어. 가자.”
일어서는 타츠야에게 키쿠노가 다가간다. 아직 휘청거리는 그를
지탱해주며 동굴 밖으로 유도한다,
싱쾌한 바람이 뺨을 살짝 어루만진다. 머리 위로 펼쳐진 반짝거
리는 별하늘 같은 어둠 속이리도 동굴 속과는 해방감이 달랐다.
“기체는저기에있어요.''

키쿠노가 가리킨 방향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산악미채 시트 등


으로 꼼꼼하게 가려놓은 두 대의 AS가 주기자세를 취하고 있다.

AS-1호기 (블레이즈 레이븐 政)와 4호기 (이지스 레이븐)이


다.
“진짜심하네.”
라이트로기체상태를확인하고타츠야가말했다.
“아직 가르나스탄군이 근처에 남아 있을 테니 날이 새기 전에 이
동해야 해요. 서두르죠.,,
“알았어.”
타츠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기체를 기어올랐다. 콕핏 해
치를 열고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래갖고도정말로움직이려나?”
기체를 기동시킨다. 세차게 깜빡거리는 스크린과 줄줄이 나열되
는 알파벳 문자열 한눈에도 통상적인 기동 시퀀스가 아니다.
역시 안 되나력초조해진 순간 스크린이 암전. 몇 초 후 바깥의

20 l
야경을 비추어냈다 조심조심 조종 스틱을 잡아당기자 그에 동조하
여 기체의 오른팔도 움직였다.
“후우一.”
짙은 어둠 속에서 타츠야 본인의 거친 숨소리가 AS의 좁은 콕핏
에 울린다
r적도우리의 대략적인 위치는눈치 챈모양이에요낸
통신기에서 들리는 키쿠노의 목소리는한없이 냉정했다.
r숫자도 많고요. 포위를 뚫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을 것 같군요.J
어듬 속에서 스크린에 비친 그녀의 4호기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
었다.
중후한 실루엣을 뒤덮은 복합장갑 갑옷은 사방에 금이 가 있고
오른팔은 팔꿈치 아래가 없었다. 특징적인 서브 암도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리 외에는 가동되지 않았다.
타츠야의 (레이븐) 1호기도 엇비슷한 참상이었다. 비록 사지는
붙어 있지만 반응이 몹시 안 좋았다. 기체의 목숨이라고 불러야 할
애자일 스러스터도 모두 대파되었다.
겨우 기동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두 대 다 본래의 성능은 도저히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켄투리이)냐?’'
r아니요. 이 반응은(새비지)와 (섀도). 아마 가르나스탄 정규
군일 거예요낸

“그런가, 그놈들에 비하면 그나마 낫겠군”


그렇다 해도 궁지임은 변함없다. 지금의 (레이븐)에게 남겨진
길이리고는 도망가는 것뿐이다.

제1화 부러진 날개 l 21
“두 팀으로 갈라지자. 그 편이 도망치기 쉬울 거야.,'
r..예,듣고보니그게낫겠네요.J
타츠야의 제안에 잠시 생각한 후 키쿠노도 동의한다.
r저는 이쪽으로 직진할게요. 타츠야 씨는 북쪽으로 우회해주세
요. 합류 포인트는낸

기체 간 데이터링크 시스템을 통하여 4호기에서 보내진 정보를


확인한다. 문제는 없다.
때문에울화가치밀었다.

‘젠장, 이렇게 가까운거리는통신이 되는데.,


기체에 장치된 장거리 통신용 시스템은 두 기체 다 손 쓸 길이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평소라면 위성통신을 통하여 후퇴한 본
대와 연릭을 취했겠지만 현 상태로는 생존을 알리는 것조차 불가능
했다.

지금의 두 사람은 정보적으로도 적지에 고립되어 있었다.


r타츠야씨, 혹시나모르니 이걸낸
키쿠노의 4호기가 예비 무장인 핸드건과 소형 단분자 커터를 내
밀었다.
“고맙긴한데너는어쩌려고?”
r저에게는이게있거든요.J
4호기가 왼쪽 어깨의 서브 임을 움직여 보였다. 탑재된 기관포
와 격투용 클로도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럼감사히쓰도록할게.”
건네받은 무기를 부서진 1호기의 하드포인트에 수납한다. 현 상
태에서는 이러한 무기를 쓰는 사태에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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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나 다름없지만.
r서두르죠,타츠야씨코행운을빌어요.J
“그래.너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행운의 여신은 타츠야에게 먼지만큼도 웃어


주지 않았다.
‘첸장!”

낮은목소리로욕설을뱉는다.
그가 조종하는 (레이탐 1호기는 깎아지른 암벽에 달라붙어 있
었다. 그 발밑의 산길을 세 대의 (섀도)가 지나간다.
‘제발눈치 채지 말고그대로가줘,
숨을 죽이는 타츠야. 다행히도 1호기의 ECS(전자미채)는 아직
살아있다. 레이더나 적외선 등으로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나머지
는 밤의 어둠이 기체를 감춰주기를 기도하는 것뿐
천천히. 허나 분명히 아래를 지나가고 있는 세 대의 (섀도). 그
래, 잘 하고 있어. 이제 저 앞의 능선을 넘기만 하면一그렇게 기원
한 순간, 제일 뒷줄의 (섀도)가 돌아보았다.
1호기와 (섀도)의 광힉센서들. 다시 말해 ‘눈과 눈이, 부딪쳤다.
들켰다!
“에이씨!”
고함치며 타츠야는 페달을 힘껏 밟았다. 도약하는 1호기에게
(섀도)는 반응하지 못했다.
‘어쩌지?’
허를 찔리고 멈춰 선 (섀도). 망가진 (레이탐이리도 지금 이 순

제1화 부러진 날개 23
간이라면 무력화시킬 수는 있댜 그런 다음 도주할까?
혁몸을숙이고(섀도)의정면으로내려서는1호기.
‘어쩌지?어쩌지?'

아니, 무력화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섀도)의 오퍼레이터가 (레


이븐)의 손상 및 도주 루트를 적군에게 알릴 테니까.
단분자커터를뽑아드는1호기.
‘어쩌지?어쩌지?어쩌지?'

살아남기 위해서, 무사히 도망치기 위해서一답은하나.


죽일수밖에없다 .

심야 속에서 하얀 칼날이 희미한 빛을 번뜩였다. 내질러진 단분


자 커터의 끝부분이 적기의 흉부장갑을 꿰뚫는다.
일격으로 콕핏을 꿰뚫린 가르나스탄군의 (섀도)는 옆으로 쓰러
져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스크린에 비친 그 광경을 타츠야는 확인
했다.

오퍼레이터는틀림없이즉사했을것이다.
몇 번이고 갈등하고, 그리고 기피해 온 살인이리는 행위였지만
지금의 타츠야는 그 결과에 고민하기보다 페달부터 밟았다
1호기는 순식간에 몸을 돌렸다. 패시브식 암시장치가 포착한 두
대의 (섀도)를 확인.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던지는 회피기동을
취하면서 한손으로 핸드건을 겨냥한다.
‘‘칫.”

타츠야의 입에서 혀 자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1호기의 반응이 예


상 이상으로 둔했다.
어둠 속, 재빨리 죄우로 갈라진 (섀도)의 그림자는 마치 악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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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어딘지 현실감이 부족해 보였다 허나 타츠야가 트리거를 당기
는 것과 동시에 적기의 라이플도 불을 뿜었다.
황량한한밤중의 산과들에 단속적인 포성이 메아리쳤다.
거의 감에 맡긴 수동조준임에도 1호기의 사격은 (섀도) 한 대를
포착했다. 그러나 소구경 철갑탄은 흉부 장갑을 맞고 튕겨났다. 지
체 없이 연사. 두 발, 세 발, 네 발다섯 발째에 간신히 장갑을 뚫
었다.

흉부의 급소를 꿰뚫리고 무너지는 (섀도). 그때 또 다른 (섀도)


가 1호기에게 응사했다
피할수없다
한 발, 두 발혁적탄이 1호기를 스치고 장깁을 깎아낸다. 세찬 진
동에 노출된 콕핏. 균형을 잃고 잔걸음으로 겨우 균형을 집는 기체
를 노리는 (섀도)의 포문이 타츠야의 눈에 아로새겨진다.
r어림없습니다!핵

(섀도)의 뒤에서 거대한그림자가덮쳐들었다. 내리쳐진 강렬한


일격이 작렬한다.

키쿠노의 (레이븐) 4호기다. 왼쪽 어깨의 다목적 클로에 구속된


(섀도)가 세차게 바르작거렸다
“고마워!”
천재일우의찬스다.
1호기는 총알이 떨어져기는 핸드건을 내던지고 오른손을 대지에
쑤셔 박아 기체를 지탱했다.

짐승처럼 납작 엎드린 자세에서 땅을 구르듯이 질주. 적기에게


육박하는 1호기의 왼손에서 단분자 커터가 작동했다.

26
무언의 일섬. 낮은 자세에서 내질러진 칼날은 조금 전과 마찬가
지로 콕핏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한순간 단말마처럼 크게 움직인 (섀도)지만 금세 직동을 정지했
다. 4호기가 클로 구속을 해제하자 옆으로 쓰러졌다.
짧고 격렬했던 전투는 끝나고 가르나스탄 신속에 한밤의 정적이
돌아왔다.

눈앞의 전투에 키쿠노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r미안.덕분에살았어.J

“아, 아니요. 별 것 아니에요.'.


통신기에서 들리는 타츠야의 목소리는 몹시 태연한 것이, 평상
시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키쿠노의 마옳 불안하게 만들었다.
“타츠야 씨가 (섀도)를 맡아준 덕분에 저는 편하게 포위망을 돌
파할 수 있었으니끼요. ”
그 후 합류 포인트에서 타츠야를 원호하러 돌아온 덕분에 뜻하
지 않게 적을 협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문제는-.
키쿠노는 세 대의 (섀도)의 잔해를 확인했다. 모두 다 정확하게
콕핏이 부서져 있었다.
‘‘오퍼레이터를노리셨군요.. ..”
r그게왜?J
타츠야의목소리가살짝날카로워졌다.
r그 싱황에선 어쩔 수 없었어. 씨울 수밖에 없었다고. 안 그래?
그럼 당연히 이렇게 되잖겠어?!쾌
“타츠야씨,고정하시고-.”

제1화 부러진 날개 l 27
r놓칠 수 없어! 놓쳤다간 현재 상황을 전부 들켜버리잖아! 그리
되면 모든 게 끝장이리고! 내 말이 틀려 키쿠노?!백
키쿠노가달래지만타츠야는요지부동이었다.
r니는아직죽을수없단말이야!!J
그 고함소리는 흡사 비명과도 같았다. 키쿠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 말없는 콕핏에서, 통신기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사그라진다. 키쿠노는 조심조심 타츠야에게
말을 걸었다.
“코진정하셨나요?''
r그래, 길울서두르자.. . . 미안해낸

딴 사람처럼 냉정힘을 되찾은 타츠야의 목소리에 키쿠노는 형언


하기 힘든 불안김을 느꼈다.

소형 헬기의 캐빈은단속적인 진동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델리나 케렌스카야는 딱딱한 시트에 탱크톱으로 감싸인 등을
맡겼다. 두 손에 채워진 수깁을 멍하니 내려다본다.
“불만스럽나요?”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붉은 머리 여성이 말을 걸었다. 현 D.O.


MS의 사장 비서 나탈리아다.
평소와 똑같은 타이트한 양복 차림. 안경 속의 예리한 시선만 가
지고는 그녀의 속내를 엿볼 수 없다.

28
‘‘별로'’
쌀쌀맞은 목소리로 아델리나는 짧게 대꾸했다. 그 말을 끝으로
헬기의 캐빈에 침묵이 돌아왔다.
귀에거슬리는엔진소리만낮게울린다.
아델리나나나탈리아둘다말이많은타입이아니다.그렇지만
두 사람이 입을 다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타샤.. ..'

아델리나는속으로그녀의애칭을읊조렸다.
아델리나에게 있어 나탈리아는한때의 은인이자싱콴이며, 지금
은 수없이 포화를 겨누었던 적이다. 이번에 아델리나가 붙잡힌 직
접적인 원인 역시 바로 그녀였다. 아델리나와 (레이븐) 2호기가 탄
수송헬기가 나탈리아의 (레가투스)에게 저격당해 추락했던 것이
다.

그럼에도아델리나는나탈리아개인에게는분노를품지않았다.
그 이전에 그녀를 어찌 대해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차라리미워할수있다면편하련만.,
아델리나의 그러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탈리아는 헬기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읊조렸다.
“곧도착합니다.’'
“그런가.”

아델리나도 덩달아 등 뒤의 창문을 응시했다. 헬기는 이미 수도


가르나바쉬 상공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발밑으로 펼쳐진 어수선한 시가지에는 전투의 흔적이 아직도 생
생하게 남아 있었다. 포격으로 무너진 건물, 철거되지 않고 여전히

저ll화 부러진 날걔 l 29
방치되어 있는 파편더미, 길바닥에 새겨진 전차 바퀴자국 및 AS의
발자국, 힘없이 줄지어 서서 식량 배급을 받는 시민들.
“참혹하군.”
회피하려는 시선을 아델리나는 억지로 그 자리에 붙들어 매었
다.
그녀는 가르나바쉬 시가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가르나스탄 정규

군, 팔미슈 장군의 반란군, 어부지리를 노린 러시이군 특수부대(스


페츠나츠), 그리고 현 D.O.M.S.가 보낸 (켄투리이)들-이들이 벌
인 심파전. 사파전의 전투가 이 침상을 몰고 왔다.
그러나아델리나가속한신생D.O.MS.가쿠데타에가담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쿠데타 자체는 진압되었습니다. 주모자인 팔미슈 소장은
사망이 확인되었고, 참가한 공회국 방위대의 각 부대도 극히 일부
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투항했습니다.”
‘‘예외?”
“예. 이란과의 접경지대에서 AS1호기와 4호기가 아직 도주 중
입니다. '.
변함없이 담담한 나탈리아의 목소리. 아델리나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타츠야와키쿠노가?!”
저도 모르게 반쯤 몸을 일으킨 아델리나에게 나탈리아가 조용히
대꾸했다.
“가르나스탄군도 애먹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행여나 이란을 자
극할까봐 대규모 부대와 항공 전력은 투입하지 못하고 소규모 AS

3이
부대를 탐색과 추격에 내보냈다가 격퇴당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 ’,
다소 낮은 톤으로 대꾸하고 아델리나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순
간적인 놀라음이 사라진 지금 그녀의 단정한 얼굴은 언짢은 듯 일
그러져 있다.

타츠야와, 그에 더하여 키쿠노까지 건재하다는 소식은 아델리나


에게 낭보였다. 낭보여야 했다.
헌데도 그 두 사람이 단둘이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째선
지 순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묵직한 응어리가
얹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더러 두 사람의 정보를 털어놓으라는 건가. 흥. 어처
구니없긴. 누가 네놈들한테 협력 띠윌 .”
그렇게 쏘아붙이던 아델리나의 말이 불현듯 끊어졌다. 그녀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나탈리아의 입가가 슬며시 풀어진 것을 알아차
린 것이다.
“뭐가우습나.”
“그런점은변하지않았군요.',
그렇게말하고나탈리아는이번에는분명한미소를머금었다.
“흥.”
언짢은듯아델리나는눈길을돌렸다.

니사 기지에 설치된 조립식 AS격납고에 들어서서 미하일로프는


실눈을 떴다.
코를 찌르는 연료와 오일 냄새. 각종 엔진과 공구류가 마구 흩뿌

제1화 부러진 날개 31
리는 소음 사방에서 세찬 불꽃이 튀고 있다.
그 폭력적이기까지 한 분위기는 미하일로프에게 익숙한 것이었
다.
“싱횡은어때?”
말을 걸자 요나탄 크루핀스키가 돌아보았다. 늘 보던 흰 가운에
헬멧 치림으로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는그대로지,사장.''
변함없이 호들깁스러운 동작으로 크루핀스키는 흰 가운을 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워낙 심하게 혹사시키다보니 멀쩡해 뵈는 기체도 해체해서 검
사하지 않으면 위태로워서 써먹지를 못해 그래서 움직일 수 있는
기체는 우선적으로 그 장소로 보내고 있지. ''
“그런가. '’

예싱한대답이었다.
“다음임무가정해졌나?''
“동부 국경에 아직 러시아 쪽 부대가 남아 있다. 그걸 없애야
해”

“오호라,그전력만몰아내면한동안은평안할거다이거로군.”
D.O.MS.의 (켄투리에 부대는 가르나스탄군 비장의 카드다.
험준한 산악지대가 계속되는 동부 국경이라면 절대적인 전과를 올
릴 것이다.
미하일로프에게현안은다른곳에있었다.
“그보다는 도망친 (레이븐) 두 대의 추적을 고려하는 쪽이 낫지
않은가? 아직 잡히지 않았을 거 아냐.”

32 I
“...그렇군”
그 말에 미하일로프는 말문이 막혔다. 속내를 들켰다는 불쾌함
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키쿠노와 그 꼬맹이 말인데, 생각보다 잘 처신하고 있는 모양이


다. 뒤쫓던 가르나스탄군 패거리가 오히려 물어 뜯겨서 혼쭐이 났
다더군. ”
“그밀을들으니 까마귀들을끌어내기 위한사냥개 역으로서 (켄
투리이)를 쓰고 싶어지는데 . 흠 .”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크루핀스키는 생각에 잠기는 기색을 보였
다.
“손상이 심한 기체를 부품 수급용으로 해체하면 다섯 대 정도는
더 조달할 수 있으려나. 그러면 어때?”
“관둬,그런식으로돌려막기했다간좋은꼴못본다.”
‘‘그 말은 맞는 소리지만. 그러고 보니 그 애는 벌써 갔나?”
“그애...케렌스카야말인가?”
별안간화제가넘어가자미하일로프는약간딩황했다.
“o빠가르나바쉬로헬기를보냈다.헌데왜?”
“아니.그냥.저걸쓸수없을까싶어서.”
크루핀스키가 가리키는 방힝을 보고 미하일로프는 굵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곳에는 어떤 AS가 안치되어 있었다.
아니, 저것을 AS라 불러도 될까? 대파되어 원형을 거의 찾이볼
수 없는 저것은 잔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레이븐)2호기로군”
전날의 전투 후, 나탈리아가 격추한 미군 헬기에서 오퍼레이터

저ll화 부러진 날개 l 33
인 아델리나와 함께 회수한 기체다.
“예전에 유콘 연구소에서 해석했을 때 예비 부품을 한 세트 복제
했거든. 거의 새로 하나 조립하는 수준이지만 수리는 가능해.’'
ch "

“물론 지금의 포격용이 아니라 당시 그대로의 사양이 되어버리

겠지만 '.
그렇게떠들어대는크루핀스키를미하일로프가노려본다.

“이자식,무슨꿍꿍이냐...
‘‘아이고. 너무 그리 겁주지 말아줬으면 하는데一. 난 그냥. 맞
아. 그냥 든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다른 뜻은 없어 사장. 정말이라
니까. ”
식은땀을 흘리며 대꾸하는 크루핀스키. 예전에 미하일로프가 목

을 졸랐던 일이 생각났는지 목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 그렇지. 추가 기체라고 하니 이런 것도 도착할 예정이야 사
용법은 다소 까다롭지만 전력으로서는 괜찮지 않을까?,’

내밀어진태블릿PC화면을미하일로프가눈으로훑는다.
‘‘ ..(발리스트래?무슨뜻이지?”
“고대 로마군의 공성병기야. 굳이 설명하자면혁.’,
“또네놈의취향이냐.”
시작되려는 크루핀스키의 설명을 미하일로프가 단칼에 잘라버
렸다. 불만스러워 보이는 상대를 무시하고 태블릿의 도면을 확인한
다.
“이게뭐냐?”

34
소련에서 독립한 후로 가르나스탄 공화국은 아타예프 일족에 의
해 거의 완전한 독재체제가 확립되어 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종신제 발리쉬 아타예프 초대대통령의 사
후에는 딸인 무자 아타예프 현대통령이 97퍼센트의 지지율을 얻어
취임했다.

단원제인 의회는 가르나스탄 민주당소련 시절의 가르나스탄


공산당이 개명한 것이다에 의한 사실상의 일당독재체제다. 그
당수 또한 대통령 모자가 각각 맡고 있다.
그리고 현재 수도 가르나바쉬 중앙에 우뚝 선 공회국 궁전은 새
로운 주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력이상으로보고들마치겠습니다,각하.',
“응.수고했어.''

대통령궁 최싱층 집무실에서 오르칸 아타예프 대통령 대행은 외


무장관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줄근한 군복과, 긴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칠칠치 못한 모양새지만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남캅카스외는이야기가잘됐다이거지.”
“아. 예. 내달 1일에 발표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되었습니다.뻔
작은 덩치의 외무장관이 띰을 닦으며 대답했다. 손자 같은 나이
의 오르칸과 직접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손에 든 서류만 쳐디본
다.

‘‘그 나라들도 러시아한테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보니 . 특히


나 콜키스 같은 덴 더더욱.''
오르칸은 책상에 놓인 자그마한 지구본을 신발 끝으로 돌렸다.

제1화 부러진 날개 l 35
마침 가르나스탄이 발길질 당하는 장면을 본 외무장관의 표정이 굳
어졌 다
남 캅카스 각국은 기르나스탄과 혹해를 사이에 둔 맞은편에 위
치한다. 그러한 나리들과 공동으로 파이프라인을 설치하고, 천연
가스나 석유 등의 카스피해의 풍부한 자원을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럽에 수출한다그 원대한 계획이 마침내 현실의 것
이 되려하는 것이다.

“그럼 각하, 여기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오케이,어디보자辦.”
공손하게 내밀어진 서류를 아무렇게나 받아드는 오르칸. 볼썽
사납게 장식된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펜을 손에 든다
그러한그에게 외무장관이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물었다.

‘‘헌데,대행각하.무자각하말씀입니다만-.'’
‘‘엄마가왜?''
“요, 요양 중이리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어디가 어떻게 안 좋
으신지요?”
그 물음에 오르칸은 서명하던 손길을 멈췄다. 얼굴에 달리붙은
희미한 웃음기가 그 질감을 바꾼다.
“글쎄정무보기는아직어려운가보던데.”
“그건압니다.허나 .,'
결의한듯고개를들던외무장관은그자세그대로할말을잃었
다.
책상위에서오르칸이사인중이던서류를접고있었던것이다.
“대.대체무슨력.”

36
신음하는 외무징콴을 오르칸은 완전히 무시했댜 서류를 접었다
가 펴고, 또 다시 접고-어느새 서류는 종이비행기로 탈바꿈했다.
‘‘에잇.”

몹시 가벼운 동작으로 오르칸은 종이비행기를 던졌다. 창문으로


불어든 바림을 타고 두둥실 날아오르는 종이비행기.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균형을 잃고 순식간에 바닥에 추락했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 디음에 다시 외줄래?”
“하’하지만각呑卜,,
‘‘나는다음에와달라고했어.”
낮은목소리로말하자외무장관은허둥거리며뒤로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하고 장관은 마치 도망치듯 집무실에서 나
갔다.
“허혁.’,

코웃음 치는 오르칸. 그러다가 책상 위의 PC로 손을 뻗는다. 재


빨리 조작하여 모니터에 비친 영상을 응시한다.
그입가가유쾌함과만족스러움으로일그러졌다.
“야아, 얌전히 지내는 모양이야. 착하기도 하지.”
접속된 마이크의 스위치를 넣고 그렇게 말했다.
“이제 곧우리 친구가올때가됐어. 기대해달리구.”

아델리나 일행을 태운 헬기가 향한 곳은 수도 가르나바쉬의 중


심부에 펼쳐진 독립광장이었다.
“처참하군.'’

제1화 부러진 날개 l 37
헬리포트에 착륙한기체에서 내려서며 아델리나가읊조렸다.
쿠데타 때 시가전의 중심이었던 만큼 독립광징은 전화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다.
땅을 뒤덮은 깔끔한 타일 포장은 AS의 전투기동으로 산산이 부
서졌다. 유탄을 맞고 박살난 분수. 힘없이 쓰러진 사이프러스 나
무. 반파된 박물관은 천장과 벽의 큰 구멍을 통해 내부의 카펫이
드러나 보였다.
독립굉장 주변에는 공회국 궁전과 의회의 의사당. 주요관청 등
국정의 중심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러한 곳들조차 복구는 거의 손
도 못 대고 있었다.
이것이가르나스탄의현실이었다.
“흡사 이 나라의 축도(쎄혀Hl) 같군요.’'
“그럴지도.”
혼잣말하는 나탈리아에게 동의하는 아델리나. 예전 싱관의 뒤를
따라 그녀도 걸음을 내디텼다.
주위는 1개 분대 정도의 병사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는 곳은 공
회국 궁전 방향이다.
병사들이 총구를 겨누어도 아델리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뻔뻔스럽기까지 한 태도였다. 태연하게 걸을 뿐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도 있다.
광장에는 시민들 대신 무장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차
와 장갑차. 그리고 AS도.
‘저건(켄투리애력당연한가.,
늘어선 AS 중에는 수차례 싸웠던 무인 AS의 모습도 있었다. 무

38
기질적인 움직임으로 보초를 서던 (켄투리oD 중의 한 대가 불현
듯 아델리나를 응시했다.
“ ?!”

붉게 깜빡거리는 십자형 광학센서를 목도한 순간, 아델리나의


등줄기를 오한이 스쳤다.

오퍼레이터 없이 AI(인공지능)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무인병


71 그러나 (켄투리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델리나는 붉은 십자
눈 속에 존재할 리 없는 감정력혹은 그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느낀
것이다.

저도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어릴 적부터 소년병이었던 그녀는 전장에서 적 이군을 불문하고
다양한 어둠의 감정들에 노출된 적이 있다.
악의. 적의. 살의. 욕망.

지금 그녀가 (켄투리oH에게 받고 있는 것은 그것들에 가까운


듯하면서도 어딘지 달랐다. 좀 더 원시적이고도 이질적인 욕구-.
“왜 그러지요. 리나?”
의아해하는 나탈리아의 말에 아델리니는 정신을 차렸다.
“. ..아. 아나.,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켄투리이)를 관찰한다. 루틴워크로 계속
해서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단순한 무인 AS로만 보였다.
조금 전의 이질적이고도 으스스한 인싱은 온데간데없다.
‘착각인가. 아무래도 나도 약간 지친 모양이로군?
들키지 않게끔 숨을 살짝 돌리고 다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다
가 공화국 궁전 쪽이 어느샌가 소란스러워졌음을 알아차렸다.

저ll화 부러진 날개 l 39
“마중나온모양입니다.''
“마중?''
궁전 문 앞에 병사들이 급하게 모여들었다. 쿠데타 때 반란부대
AS의 공격을 받아 정문이 흔적도 없이 부서진 탓인지 병사들은 그
옆의 부엌문 같은 조그만 문 앞에 도열했다.
“야아,오랜만이야.아델리나양이라고부르면되려나?”
“허어.. ..”
그인물을보고아델리나는놀랐다.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것은 단 한 번뿐, 그것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한낱 포로를 보러 국가지도자께서 친히 왕림하시다니. 어지간
히 한가한가 보군?”

“하하하, 여전히 입이 거칠다니까 .”


병사들이웅성거리는가운데오르칸은즐거운표정으로웃었다.
서툰 연기자 같은 호들갑스러운 태도였다.
‘많이변했는걸’
날카로운눈매를가늘게뜨는아델리나.
“오늘은소중한친구에대해할말이좀있어서.”
“친구?누구말이냐.,,
“알면서.타츠야말이야,타츠야.”
뻔한 대답을 오르칸은 되풀이했다. 꾸며진 미소 밑으로 감출 길
없는 악의가 넘실거렸다.
‘이건?,
아델리나는 또 다시 오한에 몸을 떨었다. 지금의 오르칸에게서

4이
조금 전의 (켄투리oD와 비슷한 무엇인가를 느낀 것이다.
“어쨌든환영해”

“일단여기로와봐.”
아델리나와 나탈리아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오르칸의 뒤를 따
라 공화국 궁전 복도를 걸었다.
한걸음한걸음내디딜때마다폭신한카펫에군화발꿈치가파
묻혔다 빨깅을 베이스로 삼은 카펫에는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
등의 디자인이 추상화처럼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다.
아델리나와나탈리아를중심으로그주위를무장한병사1개소
대가 에워싸고 있다 궁전 복도는 이들이 횡대를 짤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장식 자체는 몹시 간소했다.
천장과 벽을 덮은 카펫과똑같은 양식의 천들 기둥에 새겨진 정
교한 기하학 무늬들 기껏해야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뜻밖인데.,
독재자가 거처하는 궁전이라기에 보나마나 역겨운 악취미와 졸
부 취미 덩어리일 것이 틀림없다혁그러한 편견을 품었었기에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복도 모퉁이에서 오르칸이 걸음을 멈
췄다. 문 앞에서 경비하는 병시들을 돌아본다.
‘‘이제됐어.너희들은그만가봐.”

“예?위험합니다’대통령대행각하.”
오르칸의 명령에 병사들은 당혹김을 김추지 못했다.
‘‘염려마.그냥친구랑이야기하는것뿐이니까.”

제1회 부러진 날개 l 41
‘‘친구라니요-.''
여전히 물고 늘어지는 병사들 그야 그럴 태지. 오르칸이 말한
친구혁다시 말해 아델리나는 포로이므로
덧붙이자면나탈리아도신용할수없는용병이다.
‘그건그렇고친구라니원.’
다소 지겨워진 아델리나지만 그 말에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친구, 발언은 아델리나와 오르칸이 짧게 접촉한 그 만남
을 비꼬는 말이리라. 그 자리에 있던 자는 두 사람 외에 타츠야와
또 한 명-.
‘소라야는어찌됐을까?’
가르나스탄 육군 소위인 소라야 팔미슈. 반란 주모자인 팔미슈
장군의 외동딸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오르칸의 심복이면서도
그를 배신하고 반란에 투신한 여자.
팔미슈 장군이 어지러운 전투 속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은 가르나
스탄 정부가 이미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소라야에 대해서는 아무
런 언급도 없었다.

이미 잡혔거나, 간신히 도망쳤거나, 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있잖oF’아직못알아들었나본데一.,,
찌증섞인오르칸의목소리가아델리니를상념에서이끌어냈다.
“난이미명령했거든”
“..실례하겠습니다.”
오르칸이말을거듭하자병사들도마지못해물러섰다.

42
“아이고혁, 많이 기다렸지 케렌스카야양. 들어와. 들어와.”
딴 사람처럼 발랄한 표정과 태도로 바뀌는 오르칸. 직접 문을 열
고 두 여자에게 권유한다.

‘‘이럴경우엔죽기아니면까무러치기획라고하던가.,'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전에 배운 동양 속담을 읊조리면
서 아델리나는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복도와마찬가지로실내또한몹시간소했다.
“일단편하게앉아.”
솔선해서 소파에 앉은 오르칸의 눈길이 아델리나의 수갑에 멎는
다.

“하긴그런걸자고있으면편하진않으려나?”
‘‘편하지않다고하면풀어줄거냐?''
“그건코.'’

‘‘一당연히안되지않겠습니까.’.
오르칸의 대답을 가로막듯 나탈리아가 단언했다. 평소의 그녀답
지 않은 성급한 말투였다.
어쩌면 오르칸이 ‘수갑을 풀어도 좋아, 리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꺼낼 것을 우려하여 기선을 제압한 것인지도 모른다.
“별문제없다.”
아델리니는 그렇게 대꾸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취향에 비
하면 지나치게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불평할 입장이 아니었다.
넉실좋게 소파에 몸을 턱 버티고 앉는 아델리나를 보고 오르칸
은 어깨를 실짝 떨고는 리모컨을 집었다.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방
이 살짝 흔들렸다.

제1화 부러진 날개 l 43
‘‘이건?',

“지진? 아니.”
“뭘까?”
당황하는 아델리나와 나탈리아를 오르칸이 히죽거리며 쳐다본
다. 바르르 떨리는 방과 어지럼증과도 비슷한 희미한 감각. 설마
이것은 .
“방자체가하강하고있는겁니까?완전히엘리베이터군요.”
“정답이셔.”
나탈리아의 말을 오르칸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긍정했다.
“...어이없군.”
기가막힌나머지아델리니는넌더리가나고말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만들게 시켰다나봐. 이 지경까지 오면 완전 에
도가와 란포의 세계 아냐?”
“시대극도 그렇지만 일본의 서브컬처에 관심이 지대한 모양이
야. ”
“그런셈이지.죽은아빠가그런걸좋아했거든어이쿠.”
약간 큼직한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변한 방이 하강을 멈추
었다. 연극 같은 태도로 오르칸이 몸을 일으킨다.
“란포 선생의 작품이라면 보나마나 퇴폐와 배덕의 지하욍국이
펼쳐지기 마련일 텐데 어떡할래? 숙녀분들께는 약간 자극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보시렵니까? 강요는 안 할 거야. ”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 데려온 걸 테지. 씨구려 연극 같은
태도는 집어치우고 얼른 가기나 해.''
협박 같기도 하고 부채질 같기도 한 오르칸의 말에 아델리나는

44
털끝만큼도 동요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나탈리아는 말없이 안경 너머로 씨늘한 시선을 오르칸에게 보냈
다.
“재미없게스리一.”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오르칸이 직접 문을 연다. 그 너머로 펼쳐
진 광경을 보고 아델리니는 눈썹을 꿈틀했다.
“이건.. . . ’'
휑뎅그렁한 거대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천장도 벽도
바닥도 회색 콘크리트 일색인 것이 지독하게 살풍경했다.
“할아버지가 말년에 지은 자랑스러운 핵 셸터지. 아무튼 이쪽으
로 와봐. ',

앞서 가는 오르칸을 따라 아델리나와 나탈리아도 걸음을 내딛었


다.
발소리만이 차기운 통로에 타박타박 울린다. 침묵을 견디지 못
한 눈치는 아니지만 나탈리아가 불쑥 읊조렸다.
“관저 지하의 대규모 셸터라. 완전 나치스 독일의 히틀러 벙커군
요 '’

‘‘헤에, 러시아 군인나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구나. 좀 무서운


걸一. ”

보아하니 콘크리트 내벽으로 칸막이 된 블록들의 주위를 통로가


둘러씨는 구조 같았다. 이따금 통로에 설치된 묵직한 철문이 보였
지만 오르칸은 무시하고 길을 서둘렀다.
“지하어, 그게 몇십 미터였더라? 아무튼 핵전쟁이 벌어져도
꿈쩍도 안 하는 구조라나 봐. 시험한 적은 없지만”

제1화 부러진 날개 l 45
“그날은세상이멸망하는날이겠지.”

“내말이.”
아델리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으나 오르칸은 재미있다는
듯 맞징구쳤다.
따로 노는 대화에 울화가 치미는 동시에 희미한 불안감도 솟았
다.

“여기까지 지어놓고 할아버지가 뒈지는 바람에 엄마는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방치. 그걸 손자인 내가 유효하게 활용혁하고 있는
거려나?''
“활용이라고?”
“그런셈이지뭐.”

통로 막다른 곳에 튼튼해 보이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 옆의


콘솔에 오르칸이 재빨리 일련의 숫x彊 입력했댜
삐걱거리며 문이 x馬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전기가살아있는곳은엘리베이터부터이블록까지야.,'
그가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하는 사이에 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
너머에 도사린 새까만 어둠.

아델리나가눈에힘울주는순간전등이한꺼번에켜졌다.
“코!”

“아하하하, 미안미안. 약간의 장난이었어.,’


일시적으로 시야를 빼앗긴 탓에 눈을 감고 물러서는 아델리나.
그러한 소녀를 오르칸이 가차 없이 비웃었다.
‘. ..이자식.'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구속된 양손으로 눈을 가리

46
며 눈을 세차게 깜빡거린다. 서서히 회복되는 시야에 문 너머가 비
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었다. 너비도 높이도 돔 구장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
“(켄투리아).. ..”
주기자세를 취한 십여 대의 무인 AS.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아
델리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AS격납고냐?셸터속에?”
‘‘본래 계획으로는 AS용 공창까지 만들 예정이었나 보더라. 대단
하지? 이게 바로 할아버지의 원대한 꿈이라고.''
66 ”

이쯤되자아델리나는할말이없어졌다.
“루마니아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차우셰스크의 퀸콤 지하요새 말인가”
나탈리아의 말에 아델리나는 예전에 카이시르 프로젝트를 좇아
잠입했던 루마니아를 떠올렸다. 그녀와 재회했던 그 장소 또한 미
완성 지하시설이 무대였었다.
‘아하, 듣고보니 비슷하네.'
마찬가지로 구 공산권 진영의 독재자가 건설한 거대한 지하요새
다. 어긋난 야심과 몸보신이 만들어낸 장대하고도 공허한 미궁.
권력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몰락에 대한 병적이기까지 한 수준
의 공포 그런 것들이 한데 섞인 심리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아델리나는알지도못할뿐더러알고싶지도않았다.
‘그렇다면'

제화 부러진 날개 l 47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그러한 집칙을 강요당한 소년의 심리는
대체 어떠할7W
“어디보자一.”

마침 그 타이밍에 오르칸이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의속내를 읽


힌 것 같아서 아델리니는 홈칫 놀랐다.
“케렌스카야 양. 니는 너에게 딱히 원한이나 앙갚음을 하려는 게
아니야. 믿어줘.,'

입에 발린 소리에 아델리나의 뇌 속에서 경보가울렸다.


‘‘헌데저자가좀말이지.”
‘‘저자?”

‘‘응, 저자”
오르칸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웅크리고 있던 AS 한 대가 일어섰
다.
“저건?”

(켄투리oD가 아니다. 그 무인 AS나 (레가투스)와 같은 계열 기


체이긴 하지만 처음 보는 기종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에게 선보이는 건 처음이로군 이건 (투리
누스)혁내 찍꿍이야. ”

“보다시피 지오트론에서 보낸 카이시르 프로젝트의 신기종입니


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나탈리아도 의아한눈치였다. 인기척 없는 지하공동에서 말없이
다가오는 무인 AS의 모습에는 형언할 길 없는 섬뜩함과 박력이 있
었다.
‘이건?’

48
독립광장에서 본 (켄투리애에게서 느껴졌던 위화감. 그와 같으
면서도 훨씬 밀도 높은 감각이었다.
머리의카메라아이가아델리나에게초점을맞춘다.
‘이 녀석, 니를-?'

등줄기를 스치는 오한, 동시에 (투리누스)가 걸음을 멈춘 아델


리나에게 머니퓰레이터를 뻗었다.
“뭡니까?!”
니탈리아도놀라움의소리를지른다.
“큭.''
순간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 움직임에는 평소의 민첩함이 완전
히 결여되어 있었다. 다리가 엉켜서 넘어지는 소녀에게 AS의 거대
한 손이코.
“멈춰.”

오르칸의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투리누스)가 동작을 정지했다


거의 눈앞까지 뻗어온 손가릭을 올려다보고 아델리나는 숨을 삼켰
다.
‘이녀석은대체뭘하려한거야?'
오싹해지는싱상들이뇌리를스쳤다.
“아이고력, 미안미안. 놀랐어?”
혼자서만 쾌활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오르칸이 다가왔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각하?”
의심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나탈리아를 무시하고 젊은 독재자
는 아델리나를 내려다보았다.
“단단히 잘 일러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말귀를

제'화 부러진 날개 l 49
못 알아먹은 모양이야. 저자도 너한테 집착이 장난이 아닌가본데.
아니, 정확하게는 너와 우리. 그 공통의 친구에거F라고 해야 하
나. '’
의미심장한말투는숨은의도를알아차리기에충분했다.
“타츠야말인가.”
‘‘정답이셔. ''
내밀어진 오르칸의 오른손이 아델리나의 뺨에 닿았다. 미지근한
살갗의 감촉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너도이것저것협력해줘야겠어,이것저것말이지,'
허리를 살짝 숙여서, 넘어진 아델리나에게 손을 내미는 오르칸
그 자세는 기묘할 만큼 정지한 (투리누스)와 흡사했다.

q
RJ

어슴푸레한 방 한가운데에서 클라라 마오는 홀로 무릎을 끌어안


고 웅크리고 있었다.
“리나.. . .”
갈라진 입술에서 이름이 불쑥홀러나온다.
“..타츠야. 키쿠노.,'
신생 D.O.M.S의 시장으로서 클라라가 직접 결정한 가르나스탄
분쟁 참가-그 때문에 잃고만 소중한 동료의 이름들이.
“나때문에一.”
힘을 잃은 소녀의 눈길이 바닥에 놓인 검게 빛니는 총신에 멎었
다.

50 I
아버지인 쿠르츠가 보내온 볼트액션식 라이플이다. 그 자신이
가진, 아끼는 오래된 총의 복제판이라고 했다.
클라리는 지금껏 그 총구를 사람에게 겨눈 적이 없다. 그러기는
커녕 신생 D.O.MS의 사장이 된 후로는 손에 들 기회조차 멀리해
왔었다.
타츠야와 아델리나, 베르트랑이 보여주는 애정과 배려를 알기
에.

자신은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싸울 필요 따위는 없다고.


그러나력.
r총이 사림을 죽이는 게 아니다. 사람이 사립을 죽이는 거다라
는 말은 궤변이지. 처음부터 총만 없었으면 안 일어났을 사건들은
얼마든지 있어.J
“파파...”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r하지만 그래도 네가 총을힘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난 막지 않
을게낸
클라라는작은목소리로공상속의아버지에게물었다.
“지금이그때인가?”

라이플은 아무 말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


다.

“있잖아, 나는력.',
“...실례하마.”
클라라의 말은 나직한 목소리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노크도 없이 열린 문으로 들어온 자는 정장 차림의 청년과 메이드

저l화 부러진 날개 51
차림의 처녀였다
라시드욍국제3왕자유스프알케트리와그메이드로있는사미
라 빈트 하산이다.
“유스프와사미라냐.”
“그러하다.”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는 클라라에 비해서 유스프의 태도는
의젓함 그 자체였댜 신생 D.O.M.S의 사장과 스폰서의 대면치고
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난부른적없다만,,
“. ..사장이늦기에조식올가져왔다.”
어두운 방을 보고 메이드사미라 빈트 하산은 슬며시 눈실을
찌푸렸다. 그러나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든쟁반을조그만테이블위에놓는다.
‘필요없다.”
쌀쌀맞은 클라라의 반응을 낑그리 무시하고 사미리는 칭문에 걸
린 두터운 커튼을 걷었다.
“얌마,뮐멋대로一으악?!”
쏟아지는 강한 햇살을 뒤집어쓰고 클라리는 얼굴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유스프는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동굴에들어박힌구울도아닐터인데.”
‘‘. ..나리.여자에게그런밀은지독한실례야.”
진즉에 떠오른 사막의 태양이 강렬한 열과 빛을 발산하고 있었
다. 칭문으로 보이는 구름 한 점 없는 선명한 푸른 히늘과 말린 벽
돌로 지어진 중동의 거리,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메마른 대지.

52
이곳은쿠르디스탄공회국의오아시스도시아론드에위치한‘알
아이유브.리는 호텔이며, UN이 지은 후 쿠르디스탄에 주류하는 평
회유지부대의 사령부로 쓰이는 곳이다.
가르나스탄 작전에 실패한 클라라의 신생 D.O.MS.는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탈출했다. 예전부터 ‘보험으로서 비밀리에 연릭을
취해둔 미해군 특수부대 NAVY SEALs에게 구조된 것이다.
그렇게 쿠르디스탄으로 철수한 후로 계속 이 호텔에 머물고 있
는 것인더F.

“조식은하루활력의근원.필히섭취해야해.',
“너네들이무슨우리엄마냐.안먹고싶다고했 . ''
뾰로통해진 클라라가 반항적으로 입을 연 순간 소녀의 배가 사
랑스럽게 꾸르륵 울렸다.
아무래도소녀의위장은주인의의지를배신한모양이었다.

. . . . . . .... ..풉”
민망한상횡으로인해굳어진클라리틀사미라가사정없이비웃
었다. 입가를 가린 조심스러운 동작이 더 괘씸했다.
시족으로 유스프는 예의 바르게 무시해주었지만 이것은 이것대
로 성질을 긁었다.
“이’이자식들 .',
움켜쥔 조그만 주먹을 바르르 떠는 클라라. 허나 이내 단념한 듯
고개를 떨군다.

“그래, 알았다. 먹으면 되잖아, 먹으면.”


‘‘그만큼 그대의 몸이 건강하고 영양을 원한다는 증거다. 그럼 나
도 함께 하기로 하지. 괜찮은가.’'

저ll회 부러진 날개 l 53
“그러거나말거나.”
새빨간 얼굴로 자리에 앉은 소녀의 맞은편에 유스프도 살짝 앉
았다. 사미라는 묵묵히 식사 접시를 옮겼다.
영국과 미국의, 볼륨이 풍부한 메뉴다. 알맞게 구워진 두툼한 토
스트에 바삭바삭한 베이컨, 말랑말랑한 스크램블 에그, 베이크드
빈즈 등이 잔뜩 곁들여져 있다.
“..커피와홍차중에어떤걸로할래?”

“응-’우유없냐?있으면그걸로줘.”
‘‘. ..알았음.”

사미라에게 그렇게 대답하고 클라리는 아침 식사로 사납게 달려


들었다. 버터를 잔똑 바른 토스트 위에 베이컨, 달걀, 콩을 마찬가
지로 진뜩 쌓아올린다.
‘칼먹겠습니다~.”

턱이 빠질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소녀는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힘차게 씹어 삼키는 소리. 순식간에 입가와 손가락, 잠옷 가슴께까
지 더럽혀지기는 했지만 클라라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비할 데 없이 먹성 좋은 그 모습에 유스프는 호의적인 미소를 머
금었다.
“...기가막혀.”
컵에 찬 우유를 따르면서 사미라가 웅얼거렸다. 그러나 목소리
나 표정에 불쾌한 뉘앙스는 없다.
그러한사미리를클라라가올려다보았다.
‘‘이건 두 명한테도 많으니 너도 먹어. 사람을 세워놓고 나만 먹
는 것도 그러니깐”

54
“.........그래.”
자신의 주인에게 시선만으로 묻는 사미라. 유스프는 선선히 고
개를 끄덕였다.
“. ..그럼기꺼이.”
사미라가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물론 그녀와 유스프가 먹은 것
은 빵과 커피뿐이었지만
“나름대로이것저것생각해봤어.,’
삥을 먹던 손길을 멈추고 클라라는 유스프와 사미라에게 말했
다. 아니 . 정확하게는 두 사람에게 말하는 것과는 약간 달랐다.
그보다는 자신의 애매한 생각을 어느 정도 명확한 상태로 정리
하고자 억지로 말로 해본디는 느낌에 가까웠다.
“있잖아,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거나, 해야
만 하는 일이라거나, 뭐 그런 게 집탕이 돼서 .”
“중요한것울하나잊고있나보군.”
‘‘엉?”

그 말은 생각에 몰두해 있던 클라라에게도 들렸다. 고개를 든 소


녀에게 유스프가 말을 잇는다.
“그대자신의의지다.”
“그러니까..뭐?”
“..할 수 있는 일이나 해야만 하는 일만이 아냐. 사장이당신
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뭐지?”
“내가하고싶은거?',
반쯤멍하니읊조리는클라라.
허를 찔린 것인지. 아니면 본심을 들킨 것인지 클라라 자신도 알

제1화 부러진 날개 l 55
수 없었다.
“그건코그말은.. .’,

소녀의눈이벽에걸린라이플로향했다.
“나는“나도-.”
“..실례.',

다시 자신의 내부에 틀어박히려는 클라라에게 사미라가 손을 뻗


었댜 냅킨으로 클라라의 찐득찐득하게 더러워진 입가를 닦는다.
‘‘아.미안.''
클라라는허둥지둥자신의냅킨으로손을닦았다.
“. ..내일이니신경쓰지마.”
“내가널메이드로고용한것도아닌데뭘 .'’
다소거북한표정으로소녀는유스프와사미리를번갈아응시했
다. 그러자 유스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흣.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는 D.O.MS의 일원으로서 그대에
게 검을 바친 몸이니.’'
“..즉내주인의주인은내주인이나마찬가지.”
어째선지 주먹을 쥐고 역설하는 사미라. 클라라는 눈살을 찌푸
렸다.
“옛날일본애니메이션같은소릴하긴.”
“으흠? 그거 뜻밖이로군. ‘주인이 있음을 알고 주인에게 주인이
있음을 모른다'가 재패니즈 사무라이 아닌가?'’
“너네들의편중된일본지식은대체어디서튀어나온거냐?”
클라라는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의 주인'의 기분
잡친 표정을 무시하고 사미리는 고풍스럽게 장식된 휴대단말기를

56 l
꺼냈다.
“그렇게괴상망측한장식은처음봤다.”
“. ..이또한전통과격식.나리 .”
“음.지금은해야히는일부터해결해야겠지.”
재빨리단말기의스케줄을훑어보는유스프.
“오후에는그손님이올터그대도옷을갈아입고준비하도록”
“안다니까. 사장으로서 빠릿하거F.’.
기운차게 대답하던 클라라의 말이 문득 끊어졌다.
“그때까진 아직 시간이 있잖아? 밥 다 먹으면 나랑 잠시 어디 좀
가줄래?”
“. ..그건. ,’

클라라의 제안에 사미리는 유스프를 응시했다. 잠시 생각한 후


유스프가 고개를 실짝 끄덕인다.
“싱관없다.”
“고마워. 그럼 얼른해치워볼까.”

살짝식어버린토스트에클라라가재차달려들었다.

드넓은사격장에 메마른총성이 울려 퍼진다.


“훌륭하다.”
쌍안경을 들여다보며 유스프는 그렇게 말했다.
‘‘능○ ',
중F.

크게 숨을 내쉬며 클라리는 엎드려 쏴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열 발 쏴서 1000야드 너머의 표적을 모두 맞히다니. 여전히 대
단한 솜씨로군 ”

제1화 부러진 날개 l 57
“..솔직히안믿어져.’'
사미라의 목소리는 평소대로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감출 길 없
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이딴건별거아냐.”
말로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클라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
다. 장거리 사격도 이쯤 되면 집중력과 체력의 소모가 많은 모양이
었다.
‘‘우리 파파는 같은 거리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1센트 동전을 도넛
으로 만들 수 있다구. 나 같은 건 아직 멀었어. 그건 그렇고력.”
클라라는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황량하고 메마른 들판이 저 끝
까지 펼쳐져 있다.
“왜 도시 안에 이토록 휑뎅그렁한 사격장이 있는 거냐? AS 일개
소대도 충분히 훈련하겠네”
‘‘. ..여기전에는호텔골프장.”
‘골프장?그런것치곤엉망인데.,'
‘‘사실 이 호텔은 쿠르디스탄이 이라크에서 독립하기 전에 세워
진 것이라.”
“아항.,'
유스프의설명에클라리는납득했다.
사족으로 당시의 이라크를 지배하던 군시독재정권은 20세기말
에 벌어진 걸프전쟁 때 붕괴. 그것을 계기로 발생한 제5차 중동전
쟁의 혼란 속에서 쿠르디스탄一쿠르드인은 염원하던 독립을 손에
넣었다.
물론클라라가태어나기전의이야기다.

58 l
“이 호텔은 본디 이라크 정부요인의 건깅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
다. 당시에는 최신 관개설비로 골프장을 유지했었고. ”
“독립후에는보다시피이꼬락서니”
‘‘사막 한복판에서 이토록 넓은 골프장의 잔디에 물을 줬었단 말
이야?”

기가막힌클라리는새심스레주위를응시했다.
“뭐그런쓰잘머리없는낭비를,'
“나라가멸망할만하잖느냐.”
“M ..신은내리시고,또다시뺏어가셨도다.',
어째선지사미리는대단히엄숙한표정과목소리와몸짓으로나
직하게 읊조렸다.
“뭐, 됐어. 모처럼 간만에 쏴서 감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 여기다
불평을 했다간 천벌을 받겠지. ”
손에 든 라이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클라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 귀여운 얼굴에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맞아, 나한테도확실한힘이 있어. 그러니까, 분명혁.”
“. ..그건무리.”
사미라가딱잘라말했다.
“야,난아직한마디도코..’
“보나마나 나도 사징z으로서 AS를 타고 싸우고 싶다. 그 말이겠
지?”
“윽.. .”

이번 역시 속내를 쉽게 들키자 클라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 그래도, 나도 AS 움직이는 법 정도는 안다고! 타츠야한테

제1화 부러진 날개 l 59
배웠어! 너네들도 알잖아?!”
“알다마다. 그대가 아직 (섀도)의 사지를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
한다는 것쯤은.”
‘‘타츠야와의 모의전에서 허를 찔러서 한 번 이겼을 뿐이라는
것도. ''
주종의지적에클라리는반론하지못했다.
“. ..네 저격 실력은 인정해 진짜 천재. 나 같은 건 고사하고 나리
나 리나도 너에게는 못 미칠 거야.’'
“어,응.”
담담한 칭찬을 듣고 클라라는 눈을 깜빡거렸다. 180도 다른 태
도에 어찌 반응해이할지 몰랐던 것이다.
“허나 그것뿐이다. 설령 지금의 그대가 (섀도)를 타고 전장에 나
선들 단순한 표적에 불과해. ”

“내가그냥과녁이라고?',
고개를 숙인 클라라가 조그만 어깨를 떤다. 그녀를 깨우치듯 사
미라가 말을 이었다.
“. ..지금의 너에게는 사격 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전술과 경험이
없어. 그것을 보충하지 않는 한-.’,
불현듯말이끊어진다.
“왜,사미라.”
의아하게 여긴 클라라가 고개를 들자 사미라는 몹시 진지한 표
정으로 흔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 ..전술,경험..보충한다?
“야.사미라?왜그러는거냐?”

6이

3
“ ,.지금은아직 아무것도아냐.,,
뒷말을흐린사미라가시계를확인한다.
“...벌써손님이올시간.”
“이크, 서둘러야겠네. 베르한테 또 야단맞겠다.',
클라리는 급히 호텔 본관으로 뛰어갔다. 그 뒤를 따르며 유스프
가 사미리룰 돌아보았다.
“사장의시중은내게맡기거라.”
‘‘. ..나리?”
‘‘그러고 보니하산이 예배 차 거리에 나간다고 했다. 그대도
따라가 봄이 어떠한가. ',
“...그래도.”
망설이는사미라에게 유스프가살며시 웃는다.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을 살릴 시
간이 필요할 터.,’
66 "

유스프가 슬쩍 운을 떼자 사미라는 금세 납득했다.


“. ..감사해.”

클라라와 유스프가 호텔로 돌아온 것은 약속 시각 3분 전이었


다 현관 입구의 귀찮은 체크 때문에 시간을 뺏긴 것이다.
“저기,장소가어디였더라?”
“3층의제2소회의실이었다.”
“그렇담엘리베이터보다달리는편이빠르겠다!”
“동의하마.”

62
클라라와 유스프는 고개를 미주 끄덕인 다음 단숨에 로비를 가
로질러 계단을 뛰어올랐다.
폭주하는롤리타펑크와곁을따르는귀공자에게사방에서기이
하다는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들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좋아’도차-.”
“기다리게!”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회의실 문을 발로 차려는 클라라. 그 뒷덜
미를 유스프가 붙든다.
“므흡?!”

급제동이 걸린 조그만 몸이 관성의 법칙을 따라 크게 뒤로 젖혀


졌다.

“무슨짓이야?목돌아갈뻔했잖아.',
울싱을짓는클라리를달래듯유스프가손가릭을세웠다.
‘급할수록 돌아갈 필요가 있다. 교섭상대에게 이쪽의 초조힘을
보이는 사태는 피해야하느니.”
“그’그런가.알았어.”
깊이심호흡하고클라라는시계를확인했다.
“지금이다.''
“오케이!”

유스프가 조용히 문을 열자 몸을 한껏 뒤로 젖힌 클라라가 당당


하게 입실했다.
“오래 기다리셨소. 내가 .”

몹시 고풍스러운 태도로 인사하려는 클리리를 착석해 있던 젊


은 남성이 돌아보았다. 사장보좌 자격으로 D.O.M.S를 실질적으

저ll화 부러진 날개 l 63
로 이끌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트랑이다.
“웬만담이십니까.사장님은그렇다치고유스프전하까지.''
“아혁, 이건 .”
“내불찰이다.”
보아하니 복도에서 나눈 대화가 실내까지 들렸던 모양이었다.
클라리와 유스프는 겸연쩍게 눈길을 피했다.
“손님께서오신지가언제인데 .”
“아뇨아뇨,저는싱콴없습니다.'.
‘뭐야. 말이 통하는 양반이네, 아저씨.’,
히죽 웃은 클라라는 ‘손님’의 맞은편에 힘차게 걸터앉았다. 무슨
말을 꺼내려던 베르트랑이 단념한 듯 입을 다문다.
‘‘오랜만입니다. 지금은당신이 ‘마오사장님'이시지요.”
일본육상자위대의시모무라사토루대령은의젓한태도로말했
다. 물론 그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우선은이걸뵈주게”
비좁은회의실에시모무라대령은가져온모바일PC를조작하며
말했다. 모니터에 비친 동영싱을 클라라 일행이 들여다본다.
동영싱은 상당히 거칠고 정신없이 흔들렸다. 보아하니 헬기에서
지상을 촬영한 것 같았다.
“이거혹시.”

클라라가 읊조리며 사랑스러운 얼굴을 살짝 찡그린다 그만큼


기묘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철근콘크리트와조립식 건물이 10채 정도늘어서 있는데, 그주

64
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포장된 아스팔
트 도로도 난데없이 끊어져 있다.
문제는 이곳이 D.QM.S. 멤버들에게 눈에 익은 풍경이리는 것
이었다.
‘‘시가지 훈련장이군요. 일본입니까?”
베르트랑이묻자시모무라가고개를끄덕였다
‘‘여기서부터다.”
카메라 시점이 화면 위아래로 이동했다. 훈련장에 드리워진 그
림자의 방향과 모니터 한구석에 표시된 촬영시각으로 보건대 북쪽
일 것이다.

화면에서 시가지(를 본뜬 훈련시설)가 사라지고 들판이 비친다.


그리고 카메리는 그것을 포착했다.
무시무시한속도로훈련장을남하하는한대의AS.
쌍안형 광학센서와 좌우의 안테나가 특징적인 머리, 그리고 튼
튼한 프레임이 가져오는 중후하면서도 민첩한 실루엣혁그러한 것
들을 목도한 클라라가 딩혹한 듯 읊조렸다.
“저거혁. (레이븐)蝨, 아냐.”
짙은 녹색으로 칠해지기는 했지만 장비나 사잉은 타츠야의 1호
기와 똑같은 (블레이즈)형인 듯했다. 양 어깨와 허리 양쪽의 애자
일 스러스터에서 플라스마 격류를 단속적으로 내뿜으며 육전병기
의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로 흔련장을 질주한다.
그러나그모습에서클라라는위화감을느꼈다.
“잠깐멈춰봐!’,
“알았다.”

제화 부러진 날개 65
클라라가 그렇게 말하자 시모무리는 동영싱을 일시정지 시켰다.
정지한 모니터를 클라라가 가만히 노려본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D.O.MS가 맡아온 (레이
븐) 1호기부터 4호기까지와는 무엇인가 다르디는 느낌이 든 것이
다.
‘‘5호기인가?”
“아니야.”
고개를 가로저은 것은 AS1 개빌주임인 미조로기 카츠로였다.
‘‘D.O.M.S.에서 쓰는AS-1은 개발계획이 동결되기 전에 완성된
부품을 모아 만든 거다. 예비 부품이나 추가 무장 패키지는 둘째치
고 기체 자체는 네 대밖에 없어.',
본래는 일본 쪽 인간이어야 할 미조로기가 지금은 옵저버 자격

으로 클라라의 옆에 앉아 있다. 늘 보던 흰 가운 차림으로 담배 연


기를 왕창 내뿜는 그를 클라리는 찌증스럽게 쳐다보았지만 입으로
는 아무 소리 않았다.
“결국어찌된일이리는건가.”
나직한 밀투로 유스프가 물었다. 정지한 (레이븐)의 영싱을 흥
미진진하게 관찰하면서.
“동결해제후에새로만든기체리는소리지.”
시시하디는 듯 대꾸하며 미조로기는 선글라스 너머로 시모무라
를쏘아보았다.언짢은기색이었다.
“시모무라 이 사람아혁. 제2로드-선행양산형이 완성됐다는 말
을 나는 아직 못 들었는데?”
“그거 실례 주임이 바쁜 모양이라 알아서 진행시킨 거다. EHI

66 l
사의 하야카와 군이 아직 젊은데도 어찌나 우수한지”
“하야카와라고오?!''
거칠고 웅얼거리는 미조로기의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시모무라
의 말투는 또렷했다 허나 그 내용은 몹시 무례한 것이었다.
이무리 해외에 나가있다 해도 기술주임을 무시하고 계획을 진행
시켰음을 당당하게 인정했으므로
“그록임포새끼가.. . . ,’
“계속하마.”
불온한분위기를무시하고시모무리는동영싱을재생했다.클라
라 일행이 모니터를 보는 가운데 미조로기도 마지못해 따랐다.
“어디꼬락서니나보자.”
부스트 가속으로 질주하던 (레이븐)은 스피드를 떨어뜨리지 않
고 시가지훈련장으로 직진했다.

“이, 이봐, 위험한거 아냐?,’


녹화임을알면서도클라리는저도모르게그렇게말했다.
D.O.M.S.에서의운용덕분에지금은애자일스러스터가시가전
에서 진가를 발휘하기는 어렵다는 결과가 나와 있다. 밀집된 건물
들 속에서는 부스트에 의한 고속기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나저(레이븐)은달랐다.
시가지 북쪽의 병원(을 본뜬 건축물)에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레이뵘의두어깨에서애자일스러스터가움직였다.
유연한가동으로노즐을오른쪽으로돌리고재분사.
‘‘헤에에.”
그것을 본 클라라가 탄성을 질렀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

제'화 부러진 날개 l 67
다. 물론 미조로기만은 시시하다는 듯 화면을 노려보았지만.
(레이븐)은감속하며왼쪽방향으로점프했다.
몹시 짧은 거리를 도약하면서 다시 스러스터를 뒤쪽으로 돌린
다. 착지. 대로의 아스팔트를 박차는 것과 동시에 스러스터가 동작
하여 전방으로 재기속한다.
지싱을 부스트 기동으로 이동하면서 (레이븐)은 시가지로 돌입
했다.
“허어,제법인걸.''
자신도 (레이븐) 3호기를 모는 몸이지만 유스프는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레이븐)은 부드러운 부스트 기동으로 시가지를 누


볐다.
“타츠야정도는아니라해도제법이잖아.”
살며시 읊조리는 클라라. 아닌 게 아니라 TAROS를 통하여 사고
제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타츠야라면 이 정도 재주도 가능할 것이
다.
만약이 (레이븐)의오퍼레이터도 .
‘‘아냐,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임?”

토라진듯턱을괴고미조로기가끼어들었다.
“본디 양산형 (레이븐)에는 TAROS가 아니라 간이형 스러스터
조종 시스템을 실을 예정이었어. 우리가 모은 실전 데이터를 기초
로 세미오토 방식으로 움직이는 물건인데 말이야.”
“아하, M9 (인핸스트)의 테이머 시스템 방식이군요''

68
베르트랑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올시다. 외형은그럴싸한모양이다만...”
대조적으로 미조로기의 표정은 벌레 씹은 듯 씁쓸했다.
‘‘이래선 못 써먹어. 소울이리곤 먼지만큼도 없잖아. 악보 그대로
연주만 하다니, 엿 먹으라지.”
“그런가?이건이것대로제법펑크하다싶은더F.”
미조로기와 클라라의 몹시 감상적인 평가를 시모무라의 헛기침
이 가로막는다.
“DO.M.S. 제군들에게는 감사하고 있다 자네들의 협력이 있었
기에 AS-1을 여기까지 완성할 수 있었어.”
그렇게 말한 시모무리는 책상에 손을 대고 고개를 깊이 조아렸
다.
“보다시피 자네들에게 의뢰한 AS1의 운용 데이터 수집은 완료
되었다. 나머지는 우리가 할 일이지.”
“그말은력.”

마른 침을 삼키는 클라라. 두려워하던, 그리고 예상하던 사태가


눈앞까지 와 있었다.
“잃어버린 세 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 생긱은 없다. 무사
한 3호기만이라도 반환해주었으면 한다.”

아담한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현관에서 사미라는 햇살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예배를 마친 신도들이 우르르 모스크에서 빠져나온다. 인파 속
에서 눈에 띄지 않으려는지 사미라도 평소의 복장이 아니었다. 헐

제1회 부러진 날개 69
거운 옷으로 몸 선을 감추고 머리에는 히집을 썼다.
“많이기다렸느냐’사미라.”
‘‘. ..아버지.늦어.”
진땀을 닦으며 현관에서 나타난 통통한 아랍인 남성-하산 빈
자심을 사미라가 부루퉁하게 쳐다본다.
“미안하다. 놀랍게도 이맘(교새이 옛 친구였지 뭐냐. 이것도 알
라의 인도하심이다 싶어서 나도 모르게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우느
라 그만. ”

“...그럴줄알았어.”
“어쩔까,택시라도탈vW”
LE 9)

시간과혼잡스러운인피를확인한사미리는고개를가로저었다.
“. .아마걷는편이빠를거야.”
“하긴.',
그말에하산도동의했다.
중심가를부녀가나란히걷는다.
“...그러고보니아버지.”
“응?”

“. ..예전에 아버지는 쿠르드에 출정한 적이 있는데, 혹시 그때


의?''
“음. 벌써 10년도 더 된 옛날이다만. 그 무렵은 유스프 전하도 너
도 아직 어린아이였지.”
제5차 중동전쟁 후반의 일이다. 당시 무정부 상태이던 이라크에
UN이 PKO부대를 파견했을 때 라시드 욍국도 참가했었는데. 그때

7이
하산도 라시드 왕국의 육군 장교 자격으로 파병부대에 종군했던 것
이다.

“그 무렵엔 이 도시도 몹시 황폐했었지. 헌데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했는지. ”
본디 작은 눈을 더 작게 뜨고 하산은 활기로 넘치는 거리를 둘러
보았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사미리도 눈을 빛냈다.
라시드의 출병은 어느 정도 성괴를 거두었다 약 1년 후에 이라
크 통일정권이 탄생. 또한 북부에 쿠르드인이 거주하던 지역은 쿠
르디스탄 공회국으로 독립했다.
냉전의 종결도 겹쳐지면서 제5차 중동전쟁은 거기서 막을 내렸
다.
그로부터약10년이홀렀다.

“왜그러느냐’사미라.”
문득 걸음을 멈춘 딸을 하산이 돌아본다. 사미리는 거리 한 구석
에 선 AS를 보고 있었다.
약간각진외견의제2세대형AS다.
“M6아니냐 .”
“.육상자위대(JGSDF)의96식Bjl(Tjpe96i)”
그녀가불쑥대답했다.
“ .일본밖에서는약간레어.”
‘‘음.”
여전히 전쟁의 불씨가 움트고 있는 중동에서 현재의 쿠르디스
탄은 치안이 대단히 안정되어 있으며, 태풍의 눈 같은 고요함 속
에 있었다. UN과 미국이 독립의 뒷배였던 까닭에 국민들 대다수가

저l'화 부러진 날개 I 71
PKO를 환영한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때문에 정치적 사정으로 인하여 해외활동이 비전투지역으로 한
정된 자위대라도 쿠르디스탄에는 적극적으로 부대를 파견할 수 있
었다. 여담이지만 시모무라 대령이 쿠르디스탄을 찾이온 것도 명목
상으로는 현지부대 시찰로 되어 있다.

현재의 쿠르디스탄에는 안전과 유전개발에 띠른 경제적인 윤택


힘을 노리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길을 가는 사람들
도 대부분 쿠르드인이지만 사미라 부녀 같은 아랍인이나 터키계’
페르시아계 사람들의 모습도 결코 드물지 않았다
“전하도 하다못해 금요일 예배 정도는 모스크에 나와 주시면 좋
을 것을 물론 입장 상 잠행하셔야겠지만''

“ 어쩔 수 없어. 지금은 나리에게 있어 전시, 그것도 큰 승부처


니까. ''

‘‘그래전하께서도그리생각하시겠지.’,
“. . . . . .?,'

의미심장한 말투였지만 사미라는 이내 눈길을 돌렸다. 또 다시


96식成의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한다.
‘. ..저AS,아마도一.,

“야아, 여기에 있었냐.”


오후의 호텔 로비, 소파에서 무료하게 다리를 까딱거리던 클라
라에게 먈을 거는 이가 있었다.
‘‘뮈야 로니냐”
I I I당 l I●

야전복을 입은 빨강머리 청년의 모습에 클라리는 기운없이 코웃

72
음을 쳤다.

로니 제멜바이스 하사, 미해군 특수부대(NAVY SEALs)의 병사


다. 그리고 클라라에게는 어릴 적부터 한 지붕 밑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기저귀까지 갈아준 오빠 같은 존재이기도 했댜
“여기앉아도돼?”
로니는 그렇게 물어놓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클라라의 옆에

앉았다. 그만큼 허물없기 때문이다.


“마실래?,’
“응.”

로니가 내민 스포츠음료 병을 받아드는 클라라. 양손으로 안아


들고 맥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리 기운이 없냐?”
“신경쓸거없어.',
“나라도괜찮으면이야기정도는들어줄게.’'
“. ..뭐?”
클라리는 미심쩍을 만큼 싱큼한 미소를 짓는 오빠의 얼굴을 물
끄러미 쳐다보았다.
“특수부대군인은시간이남이도나보지?',
“지금은 대기 중이거든 휴식도 임무의 일부리구. 무엇보다 귀여
운 동생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내버려두겠냐.'.
“바~~~보아냐?”
사랑스러운 얼굴을 클라라는 있는 힘껏 찌푸렸다. 그러더니 소
파에서 흘쩍 뛰어내린다.
“자리를바꾸자. 내 방으로와”

제화 부러진 날개 l 73
“받들어모십죠,공주님.'’
쓰게 웃으며 로니는 클라라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클라라는 힘차게 침대로 뛰어들었
다.
“얍!’'

신발과 양밀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는 소녀. 폭 엎어져서 삠을


괴고는 로니를 슬며시 올려다본다. 새하얀 다리가 흔들흔들 흔들린
다. 조그맣고 하얀 손가락과 핑크색 손톱. 빈틈 없을 정도로 완벽
하게 꾸민 듯한 모습과 태도였다.
“여자애답게좀조신하게굴어.”
이쪽 역시 알기 쉽게 기막혀하며 로니는 클라라의 신발과 양말
을 주워 모았다.
“그래서문제가뭐야?”

“일본이(레이븐)을돌려달래.”
“아아,역시그거구나.''
“알고있었냐.''
“그정도야당연히알지.”
어깨를으쓱하고로니가대꾸했다.
“너는어쩌고싶은데?”
“몰라,’
다리를내리고클라리는침대에납작달리붙었다.
‘‘이대론우린더이상못씨우게돼'’
“나개인으로서는그편이좋은데말이지.,'
“뭐?''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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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든클라라에게로니가웃음짓는다
“당연하잖아. 만약 네가 다치기라도 해봐 보나마나 디들 날 목
졸라 죽이려들걸?”
‘‘야.”
‘‘뭐 농담은둘째 치고혁.”
“정말농담이냐?내눈울보고밀해.’'

“네가 안전한 곳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은 진찌야.”


목소리 톤이 별안간바뀌었다.
“지오트론사 일이 있는 이상, 미국으로 돌아가는 건 위험해. 허
나 동시에 너희들은 지오사 플랜의 산증인이기도 하지. 이 일이 해
결될 때까지 안전한 은신처 정도는 제공해줄 수 있어.”
로니는 신중한 말로 클라리를 설득했지만 정작 그 상대는 고개
만 홱 돌릴 뿐이다.
‘‘. ..이제와서웬오빠행세람.”
입을삐죽거리는클라라.
“멋대로 가출해서 군인이 된 주제에. 파파도, 마마도 그렇게 말
렸는데. ”
‘‘별 수 없지. 나도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거든.”
“뭐를?AS를쪼물락대고싶으면D.O.MS.로도충분하잖아.”
“그럼 의미가없잖니..’
이때만은로니도딱잘라대꾸했다.
“나스스로결정한일이어야해,’

그 말에 클라라는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76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 나도 그래.”
소녀는 꼬물꼬물 몸을 일으키고는 침대 위에 정좌했다.
“내가 결정한 일이야. 내가 가르니스탄과 붙겠다고 결정했고, 그
래서 타츠야와 리나가 그렇게 됐어.”
지금까지외는 180도 디른 침통한 목소리. 로니는 팔짱을 꼈다.
“이치노세 타츠야. AS1 1호기의 오퍼레이터군 루마니아 작전
때 딱 한 번 봤었지.”
‘‘내탓이야.헌데도나만도망치다니...”
고개를 숙인 클라라의 어깨를 로니가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 시간은 있어. 아까한 말, 숙고해줘.''

가르나스탄 산속을 헤매는 타츠야와 키쿠노가 목표 지점에 도착


한 것은 날도 어슴푸레해진 오후 4시였다.
“버텨줘.. . . ',
이미 한계에 달한 1호기를 어르고 달래어 아슬아슬하게 혹사하
면서 좁은 산길을 내려간다. 밸런서까지 상태불량을 일으켰는지 걸
음을 내디딜 적마다 기체가 흔들렸다.
산길을다내려왔을때에는진심으로안도했다.
r여기군요.J
“그런가.”
키쿠노의 통신을 듣고 타츠야의 1호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
간의 좁은 평지에 밀집한 폐허. 반쯤 삭은 이 콘크리트 시설들은

저ll화 부러진 날개 l 77
구 소련군 시절의 정찰기지다.
냉전 시대에 국경의 감시용으로 설치된 것이나, 독립과 국제정
세의 변화 때문에 방치된 지 오래다. 적어도 가르나스탄 측 서류상
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격납고로군.”
r예.꽤

동력이 끊어진 셔터를 두 대의 (레이븐)이 억지로 연다. 열린 틈


을 통하여 격납고 내부로 들어간다. 그 뒤에서 셔터가 닫혔다.
격납고에 도사린 어둠 속을 타츠야의 1호기가 암시장치로 주사
했다. 반응 있음, 확인-틀림없다.
‘‘저거다.’,

격납고구석에쌓인것은AS용보급물자였다.
머슬 패키지와 충격흡수제 등의 소모품에 무기, 탄약뿐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움직이기 위한 긱종 작업차량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물자들은 쿠데타의 주모자인 팔미슈 소장이 준비해둔 것
이다. 반란의 장기화에 대비한 그는 이렇게 폐기된 기지를 복구시
켜서 거점이나 물자 집적지로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기자세를 취한 (레이븐)에서 타츠야가 내려섰다. 이제는 목숨
줄이 된 보급물자를 확인하면서 신생 D.O.M.S를 초대한 노장군
의 풍모를 떠올려본다.
“팔미슈소장에게감사해야겠네요.”
“그건그렇겠지만문제는코.”
산더미 같은 물자를 응시하며 타츠야가 인싱을 썼다.

78 l
“우리에게는 일제 AS밖에 없는데 저기에 갖춰진 것은 러시아제
보급물자. 분명 난감하기는 하네요.,'
키쿠노또한눈실을찌푸렸다.
구 서빙측 기체와 구 공산권 부품의 조합. 설계 사싱부터 규격까
지 완전히 디른 것이다.
“그래도할수있는데까지는해뵈야지.”
“예.그렇기는하지요.’,
불안해 보이는 키쿠노를 무시하고 타츠야는 작업차량으로 성큼
성큼 다가갔다.
“시작하자.”

“이그.알았어요,타츠야씨”

그후의작업은싱장이싱으로힘들었다.
이미 날이 밝을 시간이지만 창과 셔터가 닫힌 탓에 격납고는 여
전히 어두웠다. 눅눅한 공기가 뺨을 어루만지고 금이 간 바닥 때문
에 발이 걸린다. 어디에선가 시큼한 냄새까지 떠돌았다.
그 속에서 타츠야와 키쿠노는 쓸데없는 생각을 않고 눈앞의 일
에만 집중했다.
예를들면 .
“이 머슬 패키지는 크기는 딱 맞지만 길이가 약간 모자란걸 이
걸 어쩐다?”
“여기에 소켓이 있네요. 이걸로 연장하면 될 거예요.”
“아하, 이리 줘봐”
호으-
퀴느 o

제1회 부러진 날개 l 79
“콘덴서상태가안좋아서바꾸고싶은데기체와규격이안맞네
요 ?'

“어디 봐이거라면 사이에 변압기를 끼우면 괜찮아. 다만 기체


를 움직일 때 중량과 균형아...”

“그 정도라면 소프트웨어로 대응할 수 있어요. 나중에 모션 매니


저를 조정해둘게요. ”
그리고 .

‘‘충격흡수제로 이걸 써도 되려나. 다니엘라 씨가 이것만은 순정


품을 쓰리코 했었는데. ''
“영향이 바로 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일단락되면 기체를 반쯤
해체해서 세척해야겠지요.”
어둠 속에서 끝없이 작업이 되풀이된다. 그러한 흐름이 일단락
되었을 때 시각은 이미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닫힌 격납고 안은 여전히 어두운 탓에 오후라는
실감은 안 들었지만
“지쳤다.”

그렇게밀하며두사람은차가운콘크리트바닥에앉았다.
“커피마실래요?”
‘‘응.부탁해.”
키쿠노의물음에타츠야가고개를끄덕인다.
“잠시만기다려주세요.”
살며시 웃고 키쿠노는 소형 군용 스토브를 꺼냈다. 타츠야도 군
용 코펠을 준비하고 폴리에틸렌 용기에서 물을 따랐다. 어둠 속에
고형연료 위의 불이 춤을 춘다.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중기

8이
를 타츠야는 멍하니 응시했다.
“앞으로 낮에는 쉬도록 하죠. 그러다가 해가 지면 행동을 재개하
고요 ”

맞은편에서는 키쿠노가 그렇게 말하며 알루미늄 머그컵에 인스

턴트 커피가루를 넣고 있었다.
“설탕과프림은어떻게할까요?,’
.‘음.설탕은반스푼.프림은두스푼넣어줘,'

타츠야가그렇게대답하자마자키쿠노가손을멈추었다
‘‘왜그래?”
“아.아뇨혁약간놀라서요.”
당혹한듯,혹은쓸쓸한듯키쿠노는웃었다.
‘‘타츠야씨의취향이그애와-아키리와똑같거든요.''
v9

키쿠노가 언급한 소년의 이름. 지금은 죽고 없는 그녀의 동생의


이름이 타츠야의 마蹇 어지럽혔다.
타츠야와 키쿠노가 방아쇠를 함께 당겨 목숨을 빼앗은 첫 살인
상대一한때 그가 죽는 꿈을 꾸느라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아.’,
키쿠노도 타츠야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작게 소리를 질렀다.
타츠야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전 전투에서 이
손이 조종한 (레이뵘이 또 다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이다.
“죄,죄송해요.제가그만무신경한소리를...”
‘‘아.아냐-괜찮아,'’

제1화 부러진 날개 81
거북한 침묵이 찾아온다. 어둡고 답답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타츠야는 들으리는 양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보다그커피나줘.”

“예?아아력예”
억지웃음을 지은 키쿠노가 김을 피워 올리는 머그컵을 내밀었

다. 허나 아직 동요가 남아 있었는지 동작이 매우 어색했다.


“꺅?!”
“위험해!”
콘크리트 바닥에 쏟아지는 커피. 반사적으로 뻗은 두 사람의 손
이 그 위에서 겹쳐진다.
“-아.”

명주처럼 새하얀 소녀의 손가락, 그 가늘고 니긋니긋한 감촉이


타츠야의 손에 전해졌댜 그 순간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세차게
고동쳤다.

“타츠야씨..,왜,그러세요?”
“ 99

의아해하는 키쿠노의 손을 타츠야가 세게 잡아당겼다. 자신의


뺨에 그녀의 섬섬옥수를 갖다댄다.
“가. 간지러워요. 아이. 참코아얏?!”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농담으로 얼버무리려던 키쿠노의 어여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벌어진 장미꽃 봉오리 같은 입술에서
애절한 숨소리가 흘러니온다.
그 순간 타츠야의 내부에 딱 한 번 그녀와 나눈 입맞춤혁그 달콤
함과 따뜻함이 지금 이 순간 되살아났다.

82 I
몸속 깊은 곳이 단숨에 뜨거워진다.
“타츠야씨...안돼요一.”

과연 그 말은 긍정이었을까 부정이었을까. 어찌되었든 타츠야의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녀린 어깨에 손을 대고 단숨에 체중을 싣는다. 키쿠노의 몸이
단단히 굳어지지만 저힝은 어디까지나 형태만일 뿐. ,
그때 열에 들뜬 타츠야의 뇌리를 금발소녀의 그림자가 스쳤다.
‘리나.'
허상 속의 아델리나는 타츠야를 나무라지 않고 쓸쓸하게 응시
했다. 눈을 감자 눈꺼풀에 떠오르는 지난날의 잔영. 때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때로는 등을 맞대어 수많은 위기를 극복했었다.
그 기억을 타츠야는 잊었다. 이때만큼은 잊으려 했다.
‘이제그녀석은어디에도없으니까.,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타츠야는 키쿠노를 바닥에 밀어 넘어뜨렸
다. 옆구리에 손을 대고 그녀를 뜨거운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세찬
맥동.
가늘게떠는그몸으로손을뻗다가 .
코?!''
그제야타츠야는알아차렸다.
촉촉한 키쿠노의 검은 눈동자, 그 속에서 흔들리는 두려움의 감
정을.
“아 .”
타츠야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던 것이 순식간에 식었다. 먼지 가
득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물러난다.

제1화부러진날걔l83
‘내가무슨짓을한거야 ,
열에 들떴던 머리가 간신히 진정되었다. 자신의 행위를 반추해
본다.
그의 내부에서 다 타지 못한 장작불처럼 부지직거리던, 전투에
서 쌓인 고양감과 초조함. 그것을 키쿠노에게 터트리려 했다.
유린하고짓밟으려했다.
키쿠노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수치심에 몸 둘 비를 모르게
된 타츠야는 그대로 웅크리고 앉았다.
그등을나긋나긋한손가락이상냥하게어루만진다.

“미안,키쿠노.”
고개를들지도못하고타츠야는쉰목소리로신음했다.
“난뭐가뭔자”나도모르겠어혁미안해,정말미안해”
“괜찮아요”
띄엄띄엄하게 되풀이하는 타츠야에게 키쿠노가 살며시 속삭였
다.
“저는괜찮야요.”
부드러운 목소리는 타츠야의 울음소리가 쌔근거리는 숨소리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중앙아시아 산속에 또 다시 밤이 찾아왔다.


“타츠야 씨, 앞으로 갈 루트 말인데.”
“응. ''
타츠야는 키쿠노가 펼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가리킨 곳은 가르나스탄 남부 국경 산악지대의 한 구석, 현재 이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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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있는 곳이다.

“우선은 여기서 어디로 이동하느냐인데 북쪽은 논외겠지. 산을


내려가면 가르나스탄 한복판이니까. '’
“그렇겠지.”
“듣기로 아군이 향한 곳은 서쪽와聃 쿠르디스탄이랬던가? 우리
도 거기로 갈꺄7”
타츠야의제안에키쿠노가고개를가로저었다.
“카스피해때문에안돼육로로는쿠르디스탄에못가.”
“그렇다면동쪽이나님쪽인가一.’,
다시 지도를 찾이본다. 그쪽에서 가르나스탄과 국경을 마주한
곳은 님쪽의 이란과 동쪽의-.
“이란은역시위험하겠지.’'
“당연하지.그리되면남은길은동쪽.”
“아프가니스탄이라.’'
키쿠노의손가락이지도상의국경지대를동쪽으로이동했다.
“냉전종식과 소련의 후퇴 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은 친미 세력
이 정권을 잡고 있어. 잘하면 보호를 요청할 수 있을지도”
“먼데 괜찮을까? 가르나스탄군도 바보는 아냐. 어제는 요란하게
치고 박기도 했고.”
“그러게.하지만다른선택의여지가없잖아.”
“그렇겠지.헌더F.”
그렇게신음하던타츠야가키쿠노를뚫어져라쳐다보았다.
‘‘있잖아, 키쿠노. 말투가좀 변하지 않았어?”
“예?''

86 I
그말에키쿠노는눈을휘둥그레떴다.
“아니, 저기, 평소 같으면 아가씨 말투라고 하나, 엄청 정중한 경
어를 썼잖아? 근데 지금은 꽤 평범한 허물없는 밀투다 싶어서.”
“그건-.'’

입을가리고눈을낌빡거리는키쿠노.
“혹시 그게 네 본디 밀투야?”
“실은그렇사외요아니,그래.”
당혹스러운듯,혹은부끄러워하듯키쿠노는실짝웃었다.
“딱히 의식한 적 없지만 듣고 보니 아키라와는 곧잘 이런 식으로
말을 했던 것 같아. ',
“그렇구나.”

“정말나리는애는허세에만정신이팔려서 .”
자조적으로웃는키쿠노.타츠야도쓰게웃는다.
“난어느쪽이든상관없는데.”
“그럴 꺄요혁아니, 그럴까?',
“태도나 외견을 꾸미지 않는 사림은 없는걸. 게다가 나도 .”
말문이막힌듯타츠야는뒷말을흐렸다.
‘봬?”

“아니,아무것도아냐.”
‘어제그런추태를드러내기도했고.라는말은못하겠군.’
솔직히 키쿠노가 그 일을 잊은 사람처럼 행동해주는 것은 고맙
기도 했지만 약간 무섭기도 했다.
그러한 타츠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쿠노는 살랑거리는
몸짓으로 일어섰다.

제1화 부러진 날개 l 87
“그럼슬슬가볼까요,타츠야씨.”
“결국그말투로가는거냐.”
“예.그러도록하겠사와요.”
그녀는풍만한가슴께를살며시눌렀다.

“타츠야 씨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후로 당신에게 쭉 보o 온 것


쪽 보여
도 이 모습이니까요.”

“어,응.”
타츠야도고개를끄덕이고자리에서 일어났다.
‘칼까.,’
“예.'
짧은 대회를 나누고 타츠야는 1호기 밑으로 다가갔다.
“이제얼마안남았어.',
만신창이가 된 애기에게 말하며 기체에 주먹을 갖다 댄다
‘‘한번만더 힘내줘 파트너..'

88
제2화 기병W幾묫)의 본령(本윤퇴

조그만방에아델리나의거친숨소리가울린다.
‘‘49, 50, 51 .”
오른손 하나로 필굽혀펴기. 금색 머리에서 빙울져 떨어진 땀이
딱딱한 마릇바닥에 스며든다.
지하 셸터에서 돌아온 그녀는 공회국 궁전의 어떤 방에 연금되
었다. 6평 가량의 칭문 없는 빙과 기울어진 조악한 침대, 한쪽 구석
에는 변기와 세면대가 칸막이도 없이 설치되어 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아델리나는 묵묵히 트레이닝을 뱐복했다.
오른팔 다음은 왼팔 그것도 끝나면 복근 .
r수고가많네혁벤
천장 스피커에서 울리는 일그러진 목소리는 오르칸의 것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아델리니는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듣고싶지 않은목소리였다.
r이제 곧 저녁시간이라 같이 먹을까 싶어서. 마침 할 말도 있고
말이지낸

일방적으로 고하는 말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거부할 수 있는 입


장도 아니었다. 그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지 약 1시간 후 .

제2화 기병(機長)의 본령(水頒) l 89


“이것이만찬인가”

아델리나가안내받은‘식당'은지하셸터의AS격납고였다.
“아이고-, 왔다갔다하게 만들어서 미안해혁.”
격납고로 운반된 흑단으로 만든 만찬 테이블. 그 호스트석에서
오르칸이 쾌활하게 웃으며 아델리니를 맞이했다.
“상관없다..'
입으로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사실은 긴장했다. 오르칸의 뒤에
(투리누스)가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 이 셸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몸이 살짝 굳어졌다. 그

감각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고 트레이닝에 몰두했었는데.


“편히앉아.”

오르칸이 손가락을 튀기자 아델리니를 연행해온 병사가 수갑을


풀어주었다. 자유로워진 손목을 살짝 문지르며 그녀는 오르칸의 맞
은편에 앉았다.
실풍경한 격납고에서 살벌한 AS에 둘러싸인 회식 갖춰진 식기
가 호회롭고 식탁에 오른 음식도 고급스러운 만큼 비현실적인 느낌
이 더 크게 도드라졌다.
“혹시이것도네조부의취향인가.”
“비슷할지도. 우리 할아버지는 만날 완전무장한 호위병사 일개
중대에 둘러싸여서 빕을 먹었었거든”
“네 조부가 어떠한 인간이었는지 조금씩 알게 될 것 같군.”
“흐음혁, 네 상상보다 훨씬 못한 인간일 텐데. 내 짐작이지만.”
할아버지를 태연하게 깎아내리면서 오르칸은 와인글라스를 입
에 갖다 댔다.

90
“너도마실래?”
‘됐다.알코올은뇌세포를파괴한다.”
그렇게대답하면서아델리니는주의깊게오르칸을관찰했다.
낮에 셸터에서 보여준 태도는 아직까지는 자취도 보이지 않았
다.

‘‘모처럼콜키스의포도주를골라봤는데말이야코.”
벌써취기가도는지흐릿한눈으로오르칸이말했다.
“솔직히그런방에집어넣어서미안하다싶기는해그래도보안
상의 문제 같은 게 골치 아파서 말이지.”
“상관없다.공항에서의하룻밤에비하면훨씬낫다.''
은 나이프와 포크로 구운 연어를 잘게 썰면서 대꾸하는 아델리

나. 기름기가 가득한 생선은 매우 맛있었다.


“식사도나쁘지않고.”
그렇게말을이으며그녀는손아래를확인했다.
쥔나이프와포크는식기에불과하지만사용법에따라서는무기
로 바뀐다. 그녀의 기술이라면 사림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차라리여기서저자를인질로심으면,
눈을 살짝 내리뜨고 오르칸의 거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관찰한
다. 솔직히 말해서 빈틈투성이였다. 아델리나의 반격을 전혀 예상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시험해볼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아델리나가 순간적인
폭발을 준비하는 순간, 오르칸의 뒤에서 (투리누스)가 움직였다.
들릴락말락한 작동소리와 함께 머리가 아델리나 쪽을 향한다.
광학센서가 자신의 손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아델리나는 예민하

제2화 기병(機드)의 본령(中額) l 91


게 감지해냈다.

‘들켰어?!'
전율과 놀라움 때문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았다. 오르칸이 느
긋한 목소리로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손이 멈췄는데 무슨 일 있어? 혹시 곁들인 피클이 입에 안 맞았
나? 신맛이 좀 세긴 하지, 특히 순무가 말이야.',
“ .아니,아무것도아니다.,,
오르칸의 이 행동거지가 본성인지, 아니면 연기인지조차 아델리
나로서는 일쏭달쏭했다.
“그런가. 원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웬만한 건 해줄 테니
까一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의말투가슬며시바뀌었다.
‘지금부터가본론이라는건가.,
미네랄워터로입술을적시고아델리나는디음말에대비했다.
“동쪽 국경은 아직 좀 어수선하거든. 그래서 약간 진지하게 대처
하기로했어.”
“병력울동쪽으로보낼작정인가?”
“그게 곤란하단 말이야. 국내의 말썽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
라. ”
쓰게 웃는 오르칸의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에서는 그 내심과
본심을 읽어낼 수 없었다.
“웬만하면너도협력해줬으면하는데,어때?”
“협력?나에게뭘하리는거냐.”
“실은우리친구도그쪽으로가고있는모양이더라고.”

92
“타츠야가?”
오르칸의 말에 아델리니는 무의식중에 몸을 일으키려다가 간신
히 자제했다. 설령 뻔히 들여다보였다 해도 이 이싱은 약점을 드러
낼 수 없다.
‘‘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암튼 어떡할래?''
“그건-.”

다시 고쳐 앉고 아델리나는생각에 잠겼다.
‘나를인질로써먹을심산인가.'
고민하는아델리나를지켜보던오르칸은,
“임튼생각좀해봐.,'

그렇게중얼거리고치켜든와인글라스를실짝흔들었다.
‘‘그럼 아름디운우정에 건배력아하하하하.”
무엇이 우스운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오르칸을 아델리나
가 시들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아아, 친구라고 하니혁.
문득그녀의 마음에 어떤 의문이 되살아났다.
‘‘왜그러지?''
“...아니.”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소라야는-.'.
“응?뭐라고?”
“소라야팔미슈소위는어찌됐나?''
그렇게 묻자마자 오르칸의 손이 딱 멈추었다. 잠시 후 질문을 질
문으로 받아친다.
“궁금해?”

제2화 기병(後長)의 본령(本領) l 93


“당연하지.”
소리야는 반란군과의 연락책으로서 신생 D.O.M.S.와 상딩부분
관련된 존재였다. 또한 아델리나는 어쩌다 보니 소리야와 오르칸의
미묘한 관계를 알게 되기도 했었다.
자연히그녀의현상태를확인해두고싶었다.
‘‘흐음-,네가소라야한테말이자...”
니른하게 뻠을 괴면서 오르칸이 읊조렸다. 데이블크로스의 자수
를 훑던 시선이 올라가면서 아델리나를 아래쪽에서 쏘아본다.
그순간아델리나의등줄기를오한이꿰뚫었다.
오르칸의 안색이나 표정이 노골적으로 변한 것도 아니며, 목소
리가 거칠어진 것도 아니다.
허나맞은편의아델리나는그에게서위태로운느낌을받았던것
이다.

“OK,알았어.라저.''
과장스러울만큼밝은말투로오르칸은군복주머니에서휴대단
말기를 꺼냈다.
“그래도 있지이, 아무리 너라도아니, 너니까. 려나?-지금의
소라야랑 직접 대면시킬 수는 없어. 미안해.”
그렇게 늘어놓으며 오르칸은 단말기를 조작했다. 만찬 중에 참
으로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아델리나로서는 나무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뭐 염려스러우면 소라야의 활발한 모습은 보여줄게.
자. ”
오르칸이몸을내밀고단말기를보여준다.그화면을보고아델

94
리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곳에 비친 것은 휑뎅그렁한 방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독립
굉장의 야경으로 미루어보아 이 공회국 궁전의 어느 방이리라. 그
거의 중앙에 설치된 덮개 달린 침대에 소라야가 앉아 있었다.
빙은 아델리나가 연금된 곳괴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었고, 또한
지나칠 만큼 호회롭게 꾸며져 있었다. 아델리나가 편견을 품었던
독재자의 역겨운 졸부 취향 그 자체였다.
그곳에 홀로 남겨진 소라야의 모습은 흡사 고풍스러운 미니어처
하우스에 방치된 인형괴도 같았다.
‘‘리얼타임 영상이야.”
그렇게 말하며 오르칸은 단말기 화면을 수없이 손가락으로 긁었
다. 그때마다 실내 영상이 정신없이 바뀐다.
위에서, 밑에서, 옆에서, 대각선으로 온갖 시점과 시야로 송신
된 영싱은 모든 구도와 각도로 실내를혁정확하게는 그 속의 인물
을 비춰주었다.
‘대체카메리를몇대나설치한거야?'
편집적인 숫자의 영상 속에는 방에 딸린 욕실과 화장실도 섞여
있었다. 아델리나는 할 밀을 잃었다.
이것은이미감시도도촬도아니다.관찰이다.
“어때,이제안심해줬으려나.”
오르칸의 공허한웃음소리가끝없이 울려 퍼졌다.

나탈리아가 현 D.O.MS.의 니사 기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


둑어둑해진 뒤였다. 가르나바쉬에서 아델리니를 넘겨주고 정부 및

96
군대와 연락을 취하는데 시간을 뺏긴 것이다.
“력이상으로보고를마칩니다.’,
“그래''

너저분한 사장용 사무실에서 미하일로프는 나탈리아의 보고를


받았다.

‘‘동부국경으로전력을이동한다라,또어지러워지겠군”
그는서류를대충홅으면서중얼거렸다.
“어찌됐든 수고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질 테지. 오늘은 이만
일찌감치 쉬어둬.''
그렇게 말하고 미하일로프는 다시 서류 작업으로 돌아가려 했
다. 그러나 나탈리아는 퇴실하지 않았다.
“사장님一아뇨.대위님.”
.‘왜”

러시아군 시절의 계급으로 불리자 미하일로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나라와 어디까지 같이 가실 작정이십니까?”
굳은목소리와표정으로나탈리아가물었다.
“우문이군'.
서류를테이블에내던지고나탈리이를응시하는미하일로프.
“일개 하청회사 사장에 불과한 니는 돈을 내는 스폰서지오트
론사의 의향을 거역 못해 자본주의리는 것도 정말이지 골치 아프
다니까. ”
천연덕스럽게 본심을 감추지만 나탈리아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이 나라는 너무나도 위태롭습니다. 깊이 개입했다가는 돌이킬

제2화 기병(耭兵)의 본령(木頒) l 97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손을떼라?”
‘‘예.,’
그녀는딱잘라말했다
“저로서는 대위님이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설
마 D.O.M.S.의 사장자리에 애착이 생긴 것은 아닐 테지요.”
“당연하지.”

“그렇다면왜죠?설마그(켄투리oH리는AS를“.,’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는 장난감이긴 하다만. 애당초 사람이 죽
지 않는 군대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는 개그 아니냐.”
“농담하지마십시오.''
웬일로농을던지는미하일로프.니탈리아가인상을찌푸린다.
“애당초 그런 것을 운용할 수 있는 곳은 극히 일부의 선진국뿐입
니다. 제3세계의 내전과 분쟁으로 흐르는 피의 양은 거의 변함없을
겁니댜”
‘과연 그럴까? 지금은 그렇다 치고 그 카이사르 프로젝트라는
것이 현대전이 다다를 미래의 모습이리는 것은 맞는 말일 거다. 그
렇게 되면 우리 같은 인간은 전장에서조차 있을 곳이 없어질지 몰
라. ''
“대위남...”
나탈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가 분위기를 바꾸려는듯 말을 이었
다.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오트론에 협
력하시는 겁니까? 대위님은 그걸로 만족스러우십니까?”

98l
‘클쎄다.”

무책임하게 대꾸하는 미하일로프 그 입가에 슬며시력아주 슬며


시 웃음기가 감돈다.
‘즐겨라’중위”
“예?”

“어쩌면 이 전쟁이 우리에게는 최후의 축제가 될지도 모르니까..’

저녁식사 후 아델리나는 일찌감치 방으로 끌려 돌아갔다. 홀로


셸터에 남은 오르칸은 붉은 와인글리스를 흔들고 있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뒤에서 움직인 인기척을 예민하게 감지하
고 (투리누스)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식사는끝났나.',
오르칸도그쪽을돌아본다.
“좀기다렸나보네, 미안해, 박사.”
“아냐’뭐딱히.”
나타난 흰 가운의 사내-크루핀스키는 오르칸의 상태를 알아차
리고는 노골적으로 인싱을 찌푸렸다.
‘‘뭐야. 취했나.”
“하하하, 염려 마. 나는 아직 안 취했답니다..'
빨개진얼굴로오르칸은웃었다.
“주정쟁이는 다들 그러더군 됐다, 오늘의 정신접속실험은 중지
하자. 행여나 일이 생겼다간 곤란해’,
“어라라, 혹시 날 걱정해주는 거려나? 약간 의외인걸’,
“네가 아니라 (투리누스)를 염려하는 거다만. 주정뱅이의 노이

제2회 기병(耭兵)의 본령(牢顎) l 99


즈를 AI에 옮겼다간 곤란해. 어떤 악영향이 생길지 모르니까.’'

“아하하하하. 딱 잘라 말해주는군. 박사의 그런 점은 맘에 들어.


진짜거든?”
“맙소사. 나는 네 그런 점이 거북하다만.”

크루핀스키는 가식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오르칸은 이


기발한 과학자의 무례힘을 넘나드는 언동이 어째선지 그렇게 싫지
않았다.
물론취기의효과도있었지만.

‘‘이래 봬도 너에게는 감사하고 있어. 이 (투리누스)를 이렇게까


지 잘 다뤄줬으니까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뜻밖이었어.”
“얼라리. 그쪽 입장으로는 너무나 바라던 바가 아니었나?’,
‘‘물론이지.”
크루핀스키는더없이진지하게긍정했다.
“그렇기에기대안하려고하고있었고'’
“흐응.”
“원하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기대하면 배신당한다. 꿈은 이루
어지지 않는 법혁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니까.”
“엄청부정적인데?”
오르칸은 쓰게 웃으려다 실패했다. 소꿉친구 소녀의 모습이 뇌
리를 스친다. 그것도 잃어버린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그속내를자신에게조차숨기고자오르칸은억지웃음을지었다.
목소리를 떨지 않고 말하는 데만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하긴그런기분은모르는바도아니지만.',
“허허. 예를 들면 소라야 아가씨처럼 말인가?,'

100
66 "

이 발언은 약간이지만 효과가 있었다. 숨기려던 본심을 들킨 탓


에 오르칸의 얼굴에서 억지웃음이 살며시 빠져나갔다.

“저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례하잖아?''


마치 그 낮은 목소리에 따르는 것처럼 (투리누스)가 움직였다.
머리가 부드럽게 가동하면서 크루핀스키를 응시한다.
두부기관포의 안전장치를 해제, 총구가 말없이 위협한다.
“이쯤되니화가약간니는데.”
“이. 이거 미안해. 시괴할게.''
(투리누스)의 두부기관포는 50구경, 인간의 육체를 단숨에 잘게
다질 만한 위력이 있다. 눈앞으로 쇄도한 폭력 앞에서는 아무리 크
루핀스키라도 허둥거릴 수밖에 없다.
“자네와그녀에게무례를사과하지.정말이야.”
식은땀을흘리며뒷걸음질치고는죄우를둘러본다.
그 동작이 어찌나 우스꾕스러운지 오르칸은 그만 웃고 말았다.
“아하하. 너무무서워하지 마. 그냥농담이었다구.”
“저.정말인가.”
“헌데도 그렇게 멋진 반응을 보여주면 진찌로 쏴버리고 싶어지
잖겠어?''
“ ?!”
크루핀스키가 눈을 부릅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오르칸이 손을
실짝 들었다. 그 동작에 맞추어력(투리누스)가 작동을 정지했다.
“마... 맙소사, 무슨농담이 그렇게 지독해,,
식은땀을닦으며크루핀스키가작은소리로중얼거린다.

제2화 기병(接토)의 본령(本顥) l 101


“나도 그런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야. 내 바로 곁에 있다고 믿
었던 사람이 늘 나 이외의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러한 마
음을 오랫동안 계속 품어왔던 것이니까.”
“허어.’.
약간이지만놀랐다.

말 내용도 그렇지만, 크루핀스키가 자신의 개인이야기를 입에


담은 것 자체가 오르칸으로서는 뜻밖이었던 것이다.
“박사한테도그런 경험이 있었어?',
호색한 근성을 숨기지 않는 오르칸이지만 크루핀스키의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기대시켜서 미안하지만 그런 요염한 이야기는 아냐. 내 사랑은


죄다 과학의 여신에게 바친 뒤니까. '’
“.;무슨소리야?”

‘‘요약하면 연구 분야에서 도저히 못 이기는 상대가 있었다는 이


야기지. 물론 저쪽은 나를 경쟁상대로조차 여기지 않았겠지만,'
‘뭐야 , 정말시시하네.,’
완전히 흥이 식은 오르칸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철수하길 바랐던 새 D.O.M.S.의 높은 양반들 말이야,


중동으로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친 모양인데 어떡할래? 웬만하면
손을 쓰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손은 그렇게까지 길지가 않아서.',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는 건지. 난 이래 봬도 기술자라고. 준비한
전력을 어찌 운용할지는 그쪽 문제 아닌가.”
“아니, 물론 알고는 있지. 그래도 박사라면 비장의 무기 하나나
들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102
“그게,음.''
잠시 생각하던 크루핀스키가 휴대단말기를 꺼낸다.
“홈, 그러면 이런 수는 어떨까.'’
“이건 .”
표시된데이터를보고오르칸이 휘파림을불었다
‘‘멋진데一, 멋져一. 엄청 어이없고 훌륭하잖아. 좋고 말고, 얼마
든지 하자구.”
“좋았어. 실제 계획은너에게 맡기마”
“그래, 알아.”
완전히 취기가 가신 머리로 다음 수단을 생각하던 오르칸이 문
득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인심이 후한걸 뭐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


지만. ”
‘‘20년 넘게 끙끙 앓던 구애를 마침내 할 때가 왔는데 이제 와서
뭘 아끼겠어. 안 그래?”
“늉 궁-으-. . . ”
-9-○ ,

크루핀스키의 말에 점차 열기가 담기는 것을 보고 오르칸은 약


간 기가 죽었다.
“이번만큼은 꼭 그 괴물 놈들의 망령을 능가하고 말거다. 나와
카이사르로 말이야. ”
‘‘..그러시든가.”

제2화 기병(機툐)의 본령(中領) l 103


미조로기카츠로는시모무라사토루대령과함께한기간이상
당히긴편이다.
지난세기말부터시작된차세대형주종기사개발계획혁AS~1
프로젝트의 거의 초입부터이니 벌써 10년 이상지난셈이다.
사업상의관계이기는하지만사생활에서함께마시러가는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나이 차이는 어느 정도 나지만 두 사람 다 술
울좋아하는편이었던것이다.한번씩미조로기가시모무라의고직
식한 성격을 인주 삼거나, 반대로 시모무라가 취기를 빌려 미조로
기의근무태도를설교하는일은있어도대개는좋은술자리를가졌
다.
그러나이날만은평소와양상이달랐다.
“이걸로끝이란소리냐.”

잔의내용물을단숨에비우고미조로기는신음했다.약간딱딱
한소파등받이에칠칠치못하게몸을기댄다
“아직아무것도끝나지않았어.오히려이제부터라고.”
맞은편에앉은시모무리는제복깃을풀면서대꾸했다.
‘‘AS1프로젝트도최종단계다.실기조달과부대배치.자네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어. 한시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그렇게말하며시모무리는사이드테이블로손을뻗었다.
와인쿨러에서차가워지고있는것은시모무라가가져온일본주
시고빙(주'), 미조로기가좋아하는호쿠리쿠의 명주(”뼙)다.
사족으로안주는자위대의전투식량I형다시말해통조림이었
다. 쇠고기 간장조림. 참치. 닭 내장 채소찜. 단무지 등이다.
주,)시고빙:凶숨姬일본술의병단위1고(合)(약1데ml)가네번들어가는악720ml의병이다.

104 l
일본주는 일본식 음식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시모무라의 집착인
지, 아니면 미조로기에게 오랜만에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
다는 일종의 배려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그가 귀찮았던 것뿐인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채 미조로기는 시모무라의
잔을 받았다. 병을 든 시모무라도, 잔을 든 미조로기도 둘 다 한손
이리는 격식 없는 모습이다.
“다음은됐어.혼자멋대로자작할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차갑고 시큼한 술을 끌꺽 마신다. 역시 맛있다.
맛있긴 한데 뇌의 이상한 부분에 취기가 돌았다.
에이.무슨상관이람.
“3호기만이라도 실전에서 좀 더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실은 미
국님들의 특수부대에서 은근슬쩍 오퍼를 받았거든’'
“SEALs말인가?.'
“그렇지. 놈들은 앞으로도 무인기를 상대로 싸우려나 보더라고
3호기의 전자전 능력이 (켄투리애를 상대할 비장의 카드가 된다
나. 괜찮은 이야기잖아 미국님들한테 빚을 지워주고 그 김에 실전
테스트도 할 수 있으니까. ”
농담처럼 운을 떼어본다. 시모무리는 가볍게 술잔을 입에 대고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3호기에 눈독을들였군 대단해”
표면상으로는 상대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진의를 미조로기는 알아차렸다.
“안되나?”
그말에시모무라는말없이고개를끄덕였다.

제2화 기병(饑兵)의 본령(本額) l 105


“정보유출을염려하는거냐?새삼스럽게무슨.”
“AS-1을 D.O.M.S.에 대여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의 기술누출
은 각오한 바였다. 한 때나마 지오트론에 접수된 것은 예상 밖이었
지만 그쪽은 키리가야 의원이 손을 써뒀지. 하지만 이 이싱은 곤란
해. ''

그 말에 이맛실을 찌푸리고 미조로기는 잔의 술을 홀라당 마셨


다.
‘특히나 3호기는 일본 정보기술의 정수가 집약된 보물산인 만큼
이 이상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전에 귀국시키고 싶다.”
‘‘알았어.”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히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언짢다는 듯이 신
음한 미조로기는 선언대로 빈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그리고D.O.MS.놈들은볼장다봤으니해고라이거지.”
“그럴생각은없다.마시는속도가너무빠른거아니냐?”
시모무라는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어쨌거나 시모무라는 아직
첫 잔이 절반 가까이 남았는데 미조로기는 석 잔째이므로.
시고빙은거의비어있었다.
“시끄러워’술정돈맘껏마시게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시모무리를 노려보았지만 결국은 페이스를 떨어
뜨리는 미조로기.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찌르면서 홀짝홀짝 핥듯이
술을 마신다 이 또한 점잖게 취했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숨을 쉬고 시모무라는 이야기를 마저 했
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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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S.에서 얻은AS-1의 운용 데이터는 대단히 귀중해 나
개인적으로는 국내의 교도 때문에라도 계약을 연장하고 싶을 정도
야. ”
“흥.,,
시시하다는듯미조로기가콧방귀를뀌자시모무라도자신의잔
에 입을 댔다.
‘‘미음에걸리는건이치노세군이려나.”

“자네에게는 책임이 없어. 책임을 질 입장도 아니고 그의 가족


과는 내가 만날 거다.”
담담하게. 그러나묵직하게 말하는 시모무리를 미조로기가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예전에 시모무라가 자위대의 AS 오퍼레이터였다는 것을
안다. 대규모 AS테러사건 때 상식을 벗어난 적기에게 꼼짝없이 당
한 경험 때문에 AS-, 개발에 매진해왔다는 것도.
어쩌면 지금의 시모무라는 그 전투에서 잃은 부하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조로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
“그렇게훈훈한이야기가아니야”
“뭐?”
또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르는 미조로기. 그래봤자 술잔이 반도
차기 전에 병은 비어버렸지만
빈 병을 미련이 남은 듯 흔들면서 미조로기는 본론으로 돌아왔
다.

108
“난 그냥 13년 전에 주운 물건그 분실물 소유자에게 도달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울 뿐이리구.”
‘‘TAROS말인가.”
13년 전의 AS 테러사건 때 노획한 소속불명의 하얀 AS에 탑재
되어 있던 TAROS리고 불리는 신비한 장치. 오퍼레이터의 정신활
동을 특수한 전기신호로 바꾸는 그 시스템은 미조로기 본인의 손으
로 해석 복제되어 AS-1의 기체제어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미조로기는 자신이 TAROS의 전모를 해석했다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오히려 TAROS를 연구하면 할수록 개발자의 의도조
차 모르겠다는 답답함만이 쌓여갔다
그렇기에 그가 이는 어느 누구보다도 TAROS를 잘 다루는 타츠
야와 1호기에 그가 바라던 대답의 일부가 있지 않을까 추측정확
하게는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타츠야와 1호기를 잃음으로써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딱히 나는 타츠야가 뒈진 걸 슬퍼하는 것도, 억울해하는 것도,


책임을 통감하는 것도 아냐. ”
술을기울이며 미조로기는자조했다.
“나는그냥인간쓰레기라고.''
‘‘그래.’'

시모무리는 회도 내지 않고 고개만 조용히 끄덕였다.


‘‘그럼 그런 걸로 해두지.”
“뭘 아는 척하고 앉았어. 젠장. 열 받네.”
혀를 차는 미조로기의 앞에서 시모무리는 몸을 일으켰다.

제2화 기병(磯兵)의 본령(卒韻) l 109


“한 병 더 있다만, 마실 테냐?”
“어엉? 그야 당연히 마셔야지”
타츠야를 기리는 밤샘 술자리一리고는 하지 않는다.
“알라 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실컷 마시고픈 기분이니까.'

당연하게도 경건한 알라의 신도에게 음주는 계율상 금지되어 있


다. 나라나 지역에 따라서는 지켜지지 않는 일도 많지만.
적어도 유스프 빈 무함마드 빈 카림 알 케트리 왕자가 술을 마시
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 ..뭐라고했느냐’하산.”
정좌한 충실한 시종에게 유스프는 의젓힘을 가장하고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비록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중하지만 하산의 말은 터무니없
는 것이었다.
“D.O.M.S.에 대한 이 이상의 협력은 라시드로서도 힘들다. 참
으로 외람되오나 베르트랑 님께 그 뜻을 전해 올렸사옵니다.'.
“뭐라 .’’
“ "

말없이 서 있는 사미라도 표정은 그대로이나 안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무엄하다,하산!누가그같은일을명령했단말이냐!?”
“물론소인의판단이옵니다.”
“무례한놈!”

110
격분한 유스프가 테이블 위의 물병을 집어 들었다가 복잡한 심
경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전하-.”

박살난 물병 조각을 사미라가 말없이 치우기 시작한다. 그 모습


을 응시하며 유스프도 의자에 다시 앉았다.
‘‘미안하다, 잠시 머리에 피가쏠렸었느니라”
얼굴울 손으로 가리는 유스프 주인이 진정했음을 감지한 하산
이 말을 이었다.
“베르트랑 님도 이미 물러날 때를 고르고 계셨던 듯 납득하셨습
니다. ”
“뭐라?”

하산의 말은 또 다시 유스프의 의표를 찌른 모양이었다.


“사실이냐.. .. 아니, 그대의 판단이라면 틀림없을 터.”
고개를숙인유스프는두주먹을움켜쥐었다.
“여기서 물러나라는 것인가. 벗을 잃고 그 원한조차 갚지 못했거

일울시작하기도어렵지만끝맺기도어렵다.
신생 D.O.MS의 사장보죄로서 실무를 홀로 떠맡아 온 베르트
랑은 지금 그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었다.
r흐응-’그냥이렇게끝나버리는구나.레
“예,그렇게됩니다.”
전화에서 들리는 요염한 여성의 목소리에 베르트링은 고개를 숙

제2화 기병(後트)의 본령(本頓) 111


였다. 산차 발렌티나, 신생 D.O.MS.의 이동거점인 위장양륙함
(신드바드) 호의 선장이다.

물론 내륙에서 작전행동아 계속되는 지금은 (신드바드) 호와 함


께 라시드 욍국의 아람 항에 대기 중이지만.
“그래서 여러분의 처신 말입니다만一.”

r아一, 괜찮아괜잖아, 염려 말리구. 실은 넋 놓고 집만 지키는 것


도 지겨워서 (신드바드) 호로 라시드에서 일을 몇 개 부탁받았었
어. 불법적인 면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이니 그 점은 안심하고J
“또위험한다리를...”
두통을느끼고베르트랑은관자놀이를문질렀다.
실제로 (신드바드) 호의 외견은 컨테이너 회물선이므로 상선으
로 얼마든지 운용이 가능하지만 알맹이는 엄연한 양륙함이다. 헬기
발착용 비행갑판에다 선내의 다목적격납고, 배 밑창의 AS발진용
독 등 흉흉한 설비가 완비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다른 나라의 임
시점검이리도 받는 날에는 얼마나 골치 아픈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r그러한 고로 라시드와 연줄은 이어뒀다구. 그야 DOMS.가 해
산하면 (신드바드) 호는 당연히 돌려줘야겠지만 한동안은 라시드
의 선박회사에 고용될 수 있어. 그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핵
“오호라”
산차의 완벽한 처신에 베르트랑으로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본디 그녀는 그 젊은 나이로 구 D.O.MS. 시절부터 해운

과를 이끌어온 고참 사원이다. 이만한 흥정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


“자위대 분들과 그쪽으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

112
는 그때 하지요.’,
'오케이혁낸
산차의 목소리에서 지금까지의 활기가사라졌다.
r리나네일은안됐어낸
“예.''

r클라라코사장은괜찮아?풀많이죽었지?J
‘‘그건.. ..”

베르트랑은 소파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 화제에 오른 클라라


가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
‘바꿀까요?’
말없이 그렇게 물었지만 클라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운 없
는 그 동작 역시 그녀답지 않았다.
r무슨일있어?백
“아닙니다.그럼이만실례하겠습니다.''
통회는 끝났다. 전화기를 집어넣는 베르트랑에게 클라라가 말을
걸었다.
‘‘이렇게끝나버리는걸까.”
“아직 아닙니다. 다니엘라 쪽 AS 요원이 남았으니까요. 한동안
은 일본에서 AS1 배치에 협력하게 될 테니 아직은 D.O.M.S의
간판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결국은그리될거잖아?그때랑똑같이말이야.”
.‘그때요?”
“우리 집 말이야. 옛날에 뉴욕에 살았을 적에. 센트럴파크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었어.”

제2화 기병(磯兵)의 본령(本頒) 113


베르트랑이 아직 DO.MS.에 들어오기 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클라라나 그 엄마인 DO.M.S.의 전 사장인 멜리사 마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고작해야 임원 출신인 쿠르츠 웨
버와 세 번에 걸친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는 사실 정도일까.
지금은 사장보좌로서 클라라를 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알 기회
가 늘었지만.
“그렇게 비좁고 시끄러운 집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한 명이 사라
지고, 두 명이 사라지고력정신이 들고 보니 휑뎅그렁하고 조용한
집에 나랑 미마만 남아 있더리고. . . . ”
“가족은 원래 그런 법입니다. 언젠가는 집을 떠나야 하는 데다’
그것이 의도치 않은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본인에게든, 가족에
게든요. ',
베르트랑 본인도 프랑스군에서 불명예제대한 뒤로는 파리의 집
과 절연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외교관 출신의 아버지나 내무부에
근무하는 형과는 편지조차 주고받지 않고 있다.
“나도알아. 알지만...’’
클라리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베르트랑은 밀을 걸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애써 말하려 할 때였다.
클라라의 주머니에서 휴대단말기의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뭐야대체.''
버릇없이혀를차면서클라라가단말기를꺼내고 .
“베. 베르!! 이리 와뵈!”
“왜그러십니까?”
생각도못한고함소리에베르트랑도놀랐다.

114 l
“여기,여기-이걸봐봐!얼른얼른얼른!!”
“알겠습니다.그러니진정하세요.”
완전히 흥분한 소녀를 의아하게 여기며 베르트랑도 단말기 화면
을 들여다보았다.
“위성사진이군요”

아마도 군사용 정찰위성으로 촬영한 것이리라. 사진 상태를 보


고 베르트랑은 그렇게 추측했다.
야간의 산악지대였다. 해상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지 회싱은 다
소 거칠었다.

허나그럼에도전장8미터짜리인간형을식별하기에는충분하고
도 남았다.
“이’이건.. . . ''
산속을 바짝 달리붙어 나아가는 두 대의 AS. 파랑과 연지색 기
체는 베르트랑이 잘 이는 것이었다.
“(레이븐) 1호기와4호기?!”
자신의 PC로 위성화상의 세계지도를 검색한다. 가르나스탄 남
부 국경의 산악지대를 확대하여 송출된 위성사진과 조합한다.
이러한 해석 작업은 그의 특기였다. 이윽고 일치히는 지형이 검
출되었다.

‘‘전장이 된 가르나바쉬 남쪽에서 산을 타고 동쪽으로 100킬로미


터. 그러고 보니 팔미슈 장군이 만일에 대비한 거점으로 지정한 부
근이군요 ''

“어때, 이거 보라구 베르 타츠야와 키쿠노가 살아 있었잖아. 어


쩌면 리나도',

제2화 기병(耭트)의 본렁(本領) l 115


“예, 예.. . . 하긴, 이건.”
동요를 감추며 다시 한 번 그 영상을 확인한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죠? 게다가송신인은누구입니까?”
“내 변덕쟁이 수호천시야. 정말 힘들 때는 예전부터 이런저런 장
난으로 도와줬었어. ”
들뜬 클라라의 귀여운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봐봐, 베르. 우린 아직 끝날 때가 아닌 모양이야.''


“진정하세요, 시장님. 아직 진위가 확인된 것도 아닌데다 설령
이게 진짜라 해도 이 카드를 어찌 써먹느냐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베르트랑 본인도 자신의 목소리가 커졌음을 알아
차렸다. 헛기침을 한 번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일단은 일본 쪽에 연락을 해야겠다 싶어서 시모무라에게 전회를
걸었지만 전혀 받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미조로기를 호출해보니 이
쪽은 혀 꼬부라진 소리만 늘어놓을 뿐. 아무래도 둘 다 곤드레만드
레가 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미군쪽에 이야기를 먼저 해놓겠습니다.”


“그래, 로니를불러서 그 녀석의 보스한테 밀을코.”
그때 단말기 화면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클라라가 신음했
다.
“PIanl551뢰이게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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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치안이 비교적 안정된 쿠르디스탄 공회국이지만 외국과의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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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 :짢k례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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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문제에 있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을 안고 있었다
애당초 쿠르드인은 나리를 갖지 못한 민족으로, 터키 동부나 이
란 남부, 이라크 북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5차 중동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인이 거주하
던 지역이 쿠르디스탄 공회국으로서 염원하던 독립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터키와 이란에는 여전히 다수의 쿠르드인이 소수민족으
로 살고 있다. 두 나리는 쿠르디스탄 공화국의 존재가 국내의 쿠르
드인 문제를 자극하고 있다고 보고 독립 이래로 온갖 압력을 가했
다.
터키와 이란은 중동의 대국이다. NATO 가맹국인 터키는 그렇
다 쳐도 만약 이란이 ‘그럴 마음을 품었을, 경우 쿠르디스탄은 잠시
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쿠르디스탄 국내의 mv PKo부대는 주로 북부의 국경
지대에 주둔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육군이주둔하는소란기지도그중하나였다.
‘‘후아아코아앙?”
시각은새벽.짙은아침안개가주변에자욱했다.
초계 임무를 맡은, M6의 콕핏에서 하품을 집어삼키던 오퍼레이
터 스미스 상사는 별안간 이맛실을 찌푸렸다.
r왜그러십니까,상시님.J
“아아,아니一아무것도아니다중사.',
다른 M6의 통신에 스미스는 거만하게 대꾸했다. 불과 30미터
떨어진 아군기는 우유빛 안개 때문에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어쩐지발소리가들린것같아서.그것도AS말이다.”

118
r헤에, 미아가 된 M9놈들이 이제야 돌아왔나 보군요.J
최근 일주일 동안 소란 기지에서는 야간에 M9부대를 출격시켜
서 이란과의 국경 코앞에서 정보수집 및 경계라인 구축 등을 실시
해왔다.
가르나스탄 분쟁으로 인한 긴장을 이유로 들기는 했지만 실싱은
스릴감 있는 야간훈련이었다. 한 시간 전에 M9부대의 통신이 끊어
진 지금도 기지에 별다른 긴장감은 없다.
사족으로 오스트레일리아는 영연방 가맹국이지만 전차와 헬기.
AS등의 중장비들은 태반이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그렇다면좋겠다만”
r도대체가 제3세대를 타는 엘리트님들 주제에 뭘 하는 건지 모르
겠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교대시간이 늦어지고 있는데 말이죠.J
국경지대 근처답게 기지사령부에서는 M9으로 수색대를 편성하
게 되었다. 그 전력추출 때문에 통상임무 로테이션이 새로 짜이면
서 초계 임무 교대시간이 2시간 정도 늦어진 것이다.
r하여튼지들만잘났지.J
“그쯤해두 .”
결국 부하를 나무라려던 순간 이번에는 정말로 발소리가 울렸
다.
“뭐야혁?!',
r. ..상사님.저걸보십쇼.백
묘하게 낮은 목소리로 밀하며 아군기의 실루엣이 전방을 가리켰
다. 스미스 상사는 그쪽을 보다가 말문이 막혔다.

제2화 기병(磯冥)의 본령(초韻) l 119


산이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보였다
이제야 흩어지기 시작한 안개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때마다 대지가 떨린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마침내거체가그전모를드러냈다.
“어FAS? 아니, 그럴 리가.. ..”
그것은분명 인간형이었다.
기체를 지탱하는 두 개의 다리. 일종의 유인원을 연상시키는 굵
고 길게 뻗은 팔 몸통에 비해 작은 머리혁약간 언밸런스한 실루엣
이기는 하지만 AS의 범주에는 들어갔다.
그규격외의거대한기체사이즈만아니라면.
굳어지는 M6를 향하여 정체불명의 거대 AS가 오른손을 내밀었
다. 그곳에 잡혀 있는 부서진 인형-아니.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파괴된 M9의 잔해를 스미스는 보았다.
“지저스.. ..',

스미스상시의 보고는즉시 기지 사령부에 전해졌다.


“이 사령부 건물보다도 큰 초대형 AS라고? 이 새끼들이 잠꼬대
하나? ! ”
당직 장교 대위는 통신기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r노. 농담이 아닙니다, 대위남 정말로一으아아악!!J
비명을남기고통신이뚝끊어졌다.
“상사?왜그러나상사?!'’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통신기는 불길한 침묵만을 지켰다.

120 l
“전고수십미터짜리AS리고?무슨말도안되는%,’
그러나대위의당혹김은금세날아갔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 두 쪽으로 갈라지는 안개 커튼. 사령부 창


문에 비치는, 이쪽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그림자.
“괴,괴물?''
그 그림자가 오른팔을 드높이 쳐들었다. 그 오른손에 쥔 커다란
손도끼가 사령부 요원의 눈에 아로새겨진다.
반응은다양했다.
멍하니 멈춰선 자.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는 자. 등을 돌리고 달
아나려는 자. 그러나 결국 찾이온 운명은 하나뿐
단두대 칼날로 변한 손도끼의 일격이 사령부 건물과 그 속의 모
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날아간 사령부를 오르칸은 PC의 모니터를 통하여 구경하고 있


었다.
“제법인데. (발리스트래라고했던가?”
읊조리며주위를둘러본다.
그가 완전히 눌러 살게 된 지하 셸터의 AS 격납고, 그 한구석에
수많은 정보장치가 잡다하게 널려서 직동하고 있었다.
“그런가, 마음에 드셨다니 기쁘구만.’’
임시 작전실로 변한 그곳에서 크루핀스키가 바쁘게 키보드를 두
드리며 대꾸했다.
다양한 기기에서 뻗어 나온 케이블은 그 모두가 웅크린 (투리누
스)의 개방된 콕핏 속과 이어져 있다.

제2화 기병(磯兵)의 본령(卒顎) l 121


“힘들겠다혁.,,
남 일처럼 말하고 오르칸은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야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기지의 전체 모습을 한 번에 내디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젠어떡해?단숨에쳐들어가?”

‘‘아니, 지금은 신중하게 가자. 이 프로젝트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니까. ”
오르칸의 물음에 크루핀스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 방금 쿠르디스탄의 소란 기지를 습격한 초대형 AS (발
리스트리)는 기르나스탄에서 보낸 카이시르 프로젝트의 무인기였
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기하단 말이야. 저렇게 멀리 있는 무인AS를 여
기 있으면서 조종하다니 원”
“하하하,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미군의 무인항공기도 본토의 기
지에서 지구 반대쪽의 기체를 조작하는 건데 뮐 그에 비하면 여기
서 쿠르디스탄 따위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아닌가.”
“아하, 그럼 이게 미제국주의자님들이 말하는 최첨단 전쟁이라
는 거로군?”
덩달아웃던 오르칸의 얼굴에서 별안간모든표정이 사라졌다.
“그딴건선물이나.’'
그렇게 내뱉는 청던에게서 크루핀스키는 허겁지겁 눈길을 돌렸
다.

그날 아침. 시모무리는 최악의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122
“으..음...끅혁.”
머리 가운데에 둔중한 아픔이 똬리를 들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초점이 흔들리고 끊임없이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띠끔따끔한목
은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을 호소했다.
한마디로완전한숙취상태였다.
.이런’나잇값도못하고폭음했네.'
가져온 시고빙 두 병과 잇쇼빙(주2) 한 병이 하룻밤 만에 동나고
말았다 자기혐오의 감정이 스멀스멀 밀려들었지만 지금은 생각하
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이대로 침대 속으로 도로 파고들어서 하루
종일 나른하게 늘어져 있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그 달콤한 유혹과
망상에 시모무리는 약 1분간 심신을 맡겼다.
그로부터약10분후 .
“좋은아침이야, D.O.MS. 제군들. 늦어서 미안하네.,'
평소처럼 말끔하게 제복을 입은 그는 어제의 클라라처럼 회의실
에 3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안색은 안 좋지만 거동만은 여
느 때와 똑같았다.

‘‘시모무라아저씨가지각하다니별일도다있네.,’
“하하, 어젯밤에는약간괴음을해서. 면목이 없구만''
클라라의 말에 쓴웃음으로 답한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코끼리와 하마가 탭댄스를 추고 ‘술이리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
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러한 시모무리를 보고 미조로기는 히죽 웃었다. 숙취의 악영
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대주가리는 것은 시모무리도 알지
만 오늘만큼은 그 불공평함에 화가 치밀었다.
주2) 잇쇼빙: 升姬 버(쇼)는 10고(合)로 약 18L의 병을 의미한다.

제2화 기병(機只)의 본령(本韻) l 123


그런감정은내버려두고-.
“실례,시모무라대령.’'
회의실에는 D.O.MS. 측과 일본 측 말고도 두 명의 군인이 대기
하고 있었다. 화려한 군복을 착용한 장년의 장교와 젊은 병사. 시
모무리도 아는 얼굴이었다.
“티운젠트대위와제멜바이스하사. 여러분도?”
미 해군 특수부대 SEALs팀 9대장 리처드 타운젠트 대위와 그
부하 로니 제멜바이스 하사.
SEALs가 D‘OM.S.와 마찬가지로 지오트론의 무인AS 개발계
획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아는 사실이다. 가르나스탄에
서 함께 싸운 것도 알고, 쿠르디스탄에 도착한 후로는 실제로 얼굴
을 맞대고 정보도 교환했다.
문제는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였다.
“(레이뵘관련으로오신겁니까?”
미조로기가 받았다는 대 (켄투리에 전에 대한 (레이븐) 3호기
참가요청. 오늘 이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해야 한다. 시모무라의
내부에서 경계심이 고개를 쳐들고 뇌의 회전을 활성화시켰다.
숙취의 오한을 이때의 시모무리는완전히 잊었다.
그러나타운젠트대위는고개를가로저었다.
“분명(레이뷘관련은맞습니다만3호기는아닙니다”
“예?”
‘‘일단은이걸보아주시지요.”
의아해하는 시모무라에게 베르트랑이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그 화면을 보자마자 시모무리는 할 밀을 잃었다.

124
1호기와 4호기를 찍은 위성사진. (레이븐) 1호기와 4호기가 찍
힌 단말기 화면을 구멍이 뚫릴 정도로 사납게 노려보던 그가 마침
내 고개를 들었다.
“이걸믿으란말씀이신지?”

‘‘거짓말 아냐. 자세한 말은 못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선에서 나


온 정보리구. ”
자신만만하게 조그만 가슴을 펴는 클라라. 시모무리는 이맛실을
찌푸렸다.
“자세한말은못한다라.”
‘‘우리가이미확인했으니그건염려않으셔도됩니다.”
시모무라의표정을읽었는지타운젠트가끼어들었다.
“이 영싱은 해상도 및 분해능을 통하여 인도군의 정찰위성이 촬
영한 것임을 알아냈습니다. 어떠한 농간을 부렸는지까지는 알아내
지 못했지만 인도군은 시스템이 뚫린 것조차 모르고 있더군요”
“아하’이미확인이되었단말이지요.”
슬며시 머리를 누른다. 이미 숙취의 불쾌김은 가신 지 오래였다.
“우리에게힘올빌려줘.’,
시모무라의면전에서클라라가고개를깊이숙였다.
‘‘우리는 타츠야와 리나를 구하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선 3호기
가 필요해.”
“그건一.''

시모무라는 말문이 막혔다. 잃어버렸다고 믿은 (레이븐)이 돌아


온다면 그건 분명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하
게 남은 귀중한 3호기가 위험에 처해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제2회 기병(襪具)의 본령(中嶺) l 125


어쨌거나 그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됐지만력.'
그렇게거절하려던때였다.
타운젠트의 품에서 착신음이 나직하게 울렸다.
“실례”
양해를 구하고 타운젠트가 군용 휴대단말기를 꺼냈다. 전회를
받는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알았다-하사!”
‘‘예!”

이름을 불린 로니가 상관에게 달려갔다. 한두 마디 대회를 나누


던 로니의 얼굴에도 경악이 서렸다.
타운젠트가시모무라와클라라를돌아보았다.
“긴급사태입니다. 여러분도뵈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우리와도관련있는이야기입니까?'’
“예. 이란 국경의 디국적군 기지가 소속불명의 AS에게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타운젠트의목소리는여전히나직했다. .

해가 완전히 뜬 소란 기지를 (발리스트라)의 거대한 실루엣이


활보한다.
r배저3로부터 베어1에. 목표인 거대 AS-T(탱고)1이 포인트C-1
을 통과했습니다. J
분쇄된 사령부 건물의 폐허. 그 그늘에 몸을 숨긴 M6의 오퍼레

126
이터가 숨을 죽이고 보고했다
r베어1라저.레

보고를받은대장기M9이답신한다.
r베어1으로부터각기에.TI은포인트D-2에서공격한다.J
r베어3라저낸
r배저7라저J
r배저2一.핵
소란 기지의 AS는 M9과 M6를 합쳐서 20대 정도. 그들은 병영
및 격납고 그늘에 몸을 숨기며 산개, (발리스트리)의 침공에 맞서
포위망을 펼쳤다.
그러한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발리스트리)의 발걸음은
여유로웠다. 킬존으로 설정한 곳으로 침입하기를 오스트레일리아
군 병사들이 숨을 죽이며 기다린다.
r발사아아아눼!핵
명령을 받고 라이풀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20대 남짓한AS에
서 쏟아지는 농도 짙은 탄막이 (발리스트리)에 집중되고 그 태반
이 명중했다.
그리고그모든것이튕겨났다.
r아니-.J
r이럴수가?!핵
r젠장,저거체에는역시!뾔
통신회선을 흐르는 경악 어린 비명. (발리스트라)의 전신을 뒤
덮은 복합장갑의 방어력은 전차의 그것에 필적했다. 40밀리미터
AS라이플 갖고는 모기에 물린 것이나 다름없다. (발리스트래는

제2화 기병(後묫)의 본령(木頓) 127


꿈쩍도 않고 사빙을 흘겨보았다.
허나여기까지는예상한바였다.
뒷줄의 M6가 대형 런처를 어깨에 멘다, 그제야 알아차린 (발리
스트래가 둔중한 움직임으로 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런처 뒤쪽에서 하얀 연기가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대전차 미
사일 일제발사. 대장갑목표용 HEAT(성형작약탄)가 장맛비처럼
(발리스트래에 쇄도했다.
폭발-.
부풀어 오르는 폭염과 시커먼 연기가 거대한 (발리스트래를 뒤
덮었다.
r해치웠나!?백

r아니,아직멀었어!J
검은 연기 저편에서 (발리스트래가 태연자약하게 나타난다. 손
상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M9의 우수한 센서는 잡아냈다. 미사일이 명중하기 직전에 (발
리스트라)의 거체에서 발사된 비상체가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요
격했다는 것을.
능동방어 시스템 미사일이나 로켓탄 등의 공격을 종래처럼 장
갑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명중하기 전에 파괴할 것을 목적으로
개발된 방어용 병기다.
r이런-낸

다음 순간, (발리스트래의 전신에 엄청난 숫자의 총안"尺)이


열렸다. 기체의 곳곳에서 장갑이 열리면서 그 속에서 기관포가, 속
사포가. 다목적 런처가 셀 수 없을 만큼의 포문을 드러낸다.

128
r대.대피!!대-낸
폭포수 같은 화력이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
렸다. 공간 그 자체를 메워버릴 듯한 압도적인 탄막이 무시무시한
정확성과 함께 AS 각 기에 쇄도했다.
기관포를 뒤집어쓰고 벌집이 되는 M6 속사포의 철갑탄으로 상
반신과 하반신이 생이별한 M9AI (아머드 건즈)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린 M9은 대전차 미사일의 직격으로 가루가 되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한 기지에서 한 대의 AS만이 냉정힘을
잃지 않았다. M9A2 (인핸스트 건즈). 아군기가 차례로 격추되는
가운데, 특기인 기동성과 스텔스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파편으
로 변하고 있는 건축물들의 그늘을 누비고 (발리스트래의 뒤로
돌아 들어갔다.
손에 든 것은 단분자 커터와 대전차 대거. 동귀어진할 각오로 저
괴물을 해치우려는 것이다.
음향센서가 여유롭게 걷는 (발리스트래의 발소리를 포착했다.
(인핸스트)가 몸을 숨긴 병영의 잔해 옆을 통과一지금이다!
차폐물에서 튀어나오는 (인핸스트). 무방비하게 노출된 (발리
스트래의 등을 향해 총알 같은 기세로 드높이 도약했댜
그러나 디음 순간, 뒤에서 날이온 포탄이 (인핸스트)를 꿰뚫었
다. 격추당하고 닉하하는 M9.
r이럴 수가, 대체 어디서 .백
땅에 내동댕이쳐진 (인핸스트)의 뒤에서 공간이 꾸불텅 일그러
졌다. 나타난 것은 십자 모양 광힉젠서를 번뜩이는 AS의 모습.
r불가시형 ECS? 적기가 또 있었단 말인가!핵

제2화 기병(耭兵)의 본령(中領) l 129


땅을 기는 (인핸스트)에게 (발리스트래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
리웠다. 뻗어 니온 오른손이 기체를 덥석 붙든다.
(발리스트래는 (인핸스트)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기체는 포
물선을 그리며 기지의 연료 탱크에 떨어졌다.
지금까지의 몇 배는 되는 폭음이 기지를 뒤흔들고 거대한 불기
둥이 하늘을 불태웠다.
(tra=unt0234;conf-remove EUa2(유닛0234로부터 전달, 적
M9 제거 확인))
모니터 위를 막힘없이 호르는 문자열을 보고 오르칸은 눈살을
찌푸렸다.
(tra三untO452;fin=EU/N(유닛0452로부터 전달, 적기수색 중
이나 발견 안 됨))
(sam=untOO93;cha-planC-1(유닛OO93도 마찬가지, 플랜C-1
으로 이행할 것을 제언))
(aH=untOO43(유닛0043동의),
(발리스트래와동시에 소란 기지에 침입한 (켄투리op 부대가
보낸 정보다. 모든 기체가 불가시형 ECS로 몸을 감추고 주변 전황
과 적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이쪽에 전해주고 있었다.
임페리엄 네트워크를 오가는 정보는 고도로 암호화된 기계언어
였다. (투리누스)의 AI가 어느 정도 번역해서 표시해주기는 하지
만 오르칸으로서는 당최 못 알이들을 소리였다.
‘‘무슨뜻이야?”
“한마디로 이 기지의 전력은 거의 정리했다. 작전을 다음 단계로
이행하리는 제안이지 어럽쇼. ”

13이
‘봬?’,

“(발리스트래의 센서가 남쪽에서 접근하는 항공기를 발견했다


는군 속도나 루트로 보건대 민간기는 아니겠구만''
“어디 보여줘 봐. 아니 애초에 이 거리까지 (발리스트리)의 레이
더에 안 걸리고 접근한 거잖아? 그것만 뵈도 스텔스군용기가 분명
하네 뭐''

오르칸이 딴지를 거는 사이에도 현지의 (발리스트래는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각종 센서와 레이더를 사용하여 접근하는 기체를
해석한다.
바로 결과가 나왔댜 미군의 다목적(멀티됩 전투기 F-16이다.
주익 아래의 파일론에는 외장식 ECS포드와 유도폭탄이 탑재되어
있다.

“빠른걸. 쿠르디스탄국내 기지에서 긴급발진한건가.,,


장난이 지나쳤던 모양이라며 오르칸은 반성했다 물론 그렇다고
장난을 삼갈 생긱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어쩔래?”

“오히려 생각도 못한 기회야. (발리스트래의 대공 성능을 시험


해보자. '’

육박하는 F16은 폭격에 대비하여 고도를 떨어뜨리는 중이었


다. 투하된 유도폭탄에 직격을 당하면 아무리 (발리스트라)라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직격을당한다면혁.
(발리스트래의 ECCS(대ECS) 센서가 대공모드로 작동했다. 보
이지 않는 전자의 손길이 방해되는 ECS를 회피하고 지금 막 유도

제2화 기병(耭트)의 본령(本領) l 131


폭탄을 투하한 F-16 두 대를 포착한다.
F-16의 기동이 흐트러졌다. 자신이 록 온 당했음을 알아차리고
기체를 죄우로 꺾어서 산개했다.
그러나이미늦었다.
(발리스트래의 등 부분 런처가 열리고 지대공미사일을 차례로
사출했다. 목표는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유도폭탄, 그리고 F-16이
다.
격추되어 허무하게 폭발하는 유도폭탄. 그 검은 연기를 가로지
르고 대공미사일이 F-16을 쫓았다. 발사된 플레어와 채프를 피하
고 마침내 한 대를 물어뜯었다
공중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선명한 진홍색 꽃 .
“잡았다아!”
어린아이처럼환성을지르는오르칸
간신히 미사일 추격을 떨쳐낸 또 다른 F-16은 그대로 남쪽으로
이탈했다. 보아하니 재공격할 여유는 없는 듯했다.
오르칸이 앙천대소했다.
‘‘장난칠시간을버는데성공한것같아.'’

“앗 !!”
무인AS (켄투리애와 함께 나타난 규격외의 초대형 AS. 디국적
군기지를 일방적으로 유린하고 전투기마저 격추하는 그 맹위를 목
도하고 클라리는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왜그래,클라라혁사장.''
난데없는 큰소리에 놀란 로니의 눈앞에서 클라리는 자신의 태블

132
릿PC를 꺼냈다.
“나, 이 녀석 알아!’'
“뭐?”
‘‘진짜야! 이거 봐로니, 그리고 대장님도!'’
말하기가 무섭게 소녀는 태블릿Pc를 로니와 그 상사인 티운젠
트 대위에게 내밀었다.

“아, 알았어-이건”

클라라의 기세에 눌리듯 Pc화면을 쳐다보던 로니의 눈이 즉시


날카로워졌다.
“대위님.”
“음.''
고개를끄덕이는타운젠트역시매우진지한표정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모니터에 비친 것은 저 대형 AS의 것으로 추
정되는 도면들이었던 것이다.
“PIanl551-(베히모스)라.”
‘‘실례지만 마오 사장, 이 정보도 그 ‘수호천사’가 보내준 겁니
까? ”

“응,그래.틀림없어.”
타운젠트의 물음에 클라라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끄덕였다. 한
편 로니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그러나.. . ''
다시금그도면을응시하면서베르트랑이읊조렸다.
“이만한 크기의 AS를 정말로 운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솔직
히 말하면 실제로 보아도 안 믿깁니다. 보행은 고사하고 직립조차

제2화 기병(機吳)의 본령(中領) l 133


위태로워 보이는데요”
“허나움직였단말이다!!’'
느닷없이 터져 니온 고함소리와 책싱을 내리치는 둔중한 소리에
모든 이가 놀라며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시모무라였다.
흙빛 얼굴에 진땀을 흘리며 책상 위의 한 곳을 노려보고 있다.
거칠게 헐떡이는 두 어깨 평소의 그답지 않을 만큼 흐트러진 모습
이었다.

“왜그래,시모무라아저씨?',
“실례지만대령님.상태가안좋으신듯합니다만”
사림들이 말을 걸자 시모무라는 생기가 결여된 눈으로 돌아보았

“아니.아무것도아니다.. ..”
힘없이대꾸하고는고개를픽숙인다.
“가능하고못하고로따지면불가능은아니겠구만.’,
도면을확인하던미조로기가그렇게말했다.
“요즘의 재료공학은 엄청난 속도로 진보하는 중이야● 저 크기의
AS라도 보다시피 직립까지는 가능할 거라고. 문제는 힝공모함 한
척에 맞먹을 만큼 황당하게 많은 돈이 들 거리는 거지● 저런 최전
선에서 AS사냥에 쓰기엔 수지가 전혀 안 맞아.”
“즉 그러한 비용 대 효과를 도외시하면 운용 자체는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10년 전이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
힘축성 담긴 발언과 함께 미조로기는 시모무라 쪽을 흘끔 보았
다. 그는 초췌해진 표정으로 힘없이 끙끙거리고 있었다●

134 I
그것을본클라라가이상하다는듯두사람에게물었다
‘‘저기, 혹시 두 사람도 저 덩치를 알고 있어?”
“일단은.”

담배를문미조로기는떨떠름한얼굴로고개를끄덕였다.
“그래봤자별로대단한걸아는건 .”
‘‘. ..나는.봤다.”
별안간시모무라가낮은소리로말했다.
“14년 전이다. 당시의 나는 AS 오퍼레이터로서 96식의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6월 26일 심야. 우리
부대는 도쿄에서 벌어진 AS테러를 수습하리는 명령을 받았다.”
소곤거리는 낮은 목소리였다. 일동은 얼굴을 마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니만은 다소 험악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했지만 타운젠트가
슬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간단한 임무라고 믿었다. 테러리스트의 본거지는 오다이바의
부두에 정박 중인 회물선으로 판명되었고 그 전력도 Rk92 한 대
우리도 나와 부하 두 명의 기체밖에는 출동하지 못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헌데, 거기어F거기어F.”
“저것과똑같은거대AS가나타났다는밀씀입니까.,'
말을 못 잇는 시모무라에게 베르트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
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시모무리는 잠시 후에 이야기를 계속했
다.
“뭐가 뭔지 모르겠더군. 갑판을 잡아 찢고 저 녀석이 일어섰다.
어찌나 큰지 처음에는 그게 AS리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지. 오른

제2화 기병(磯트)의 본령(卒韻) l 135


손으로 들고 있던 M9이 마치 장난감 인형 같았어 .”
“왜그런곳에M9이있었는데?”
클라라의의문은지금의시모무라에게는닿지않았다.
“흡사 악몽 같았다. 라이플도, 대전차로켓도, 아무것도 소용없었
어. 우리로는 그 괴물을 막을 수 없었고 내혁내 부하는.. . ''
말문이막힌시모무라는양손으로얼굴을가렸다.
“카외카마..’안도.. .’미안하다.. ..”
띄엄띄엄 부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마치 흐느껴 우는 것
같았다.

어색한침묵속에서가장먼저입을연사람은타운젠트였다.
“귀중한정보감사드립니다’대령님.그러나이대로는14년전과
똑같은 일이 이 나라에서 반복될 테지요. 제멜바이스 하사..'
“옙.”

로니가 펼친 쿠르디스탄 북부의 지도를 타운젠트가 척척 가리킨


다.

“소란 기지를 돌파한 거대 AS (베히모스)라고 했었지요一는


산악지대를 남서쪽으로 직진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약 2시간 사
이에 평야지대에 도칙할 테고 추정 목적지는 이곳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가르나스탄 북부의 오아시스 도시 아론드, 다
시 말해 클라라 일행이 있는 바로 이 장소였다.
“이도시를노리고있어?설마이녀석의목표는.. . ,'
전에없는진지한표정으로클라라가생각에잠긴다.
“시민들이 피난하기에는 이미 늦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
SEALs팀 9에는 산악지대에서 (베히모스)를 요격하라는 명령이

136
내려왔습니다 ”
“제 분야가 아니라고는 하나 군용기의 폭격을 되받아치는 녀석
이 상대라면 타당한 판단이기는 할 터.”
팔찡을 낀 유스프가 조용히 동의했다. 뒤이어 로니가 재차 (베히
모스)의 화면을 불러낸다.
“이 도면이 정확하다면 (베히모스)라는 녀석도 (켄투리이)와마
찬가지로 무인기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역시一.”
“우리의 조력을 얻고 싶다는 말이렷다. 알겠노라.’'
약간 성급한 태도로 유스프가 대꾸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
는 타운젠트를 확인하고 하산을 쳐다본다.
‘들은 대로다. 무슬림 동포에게 강압적인 위기가 도래하는 이때,
좌시하는 것은 내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니.”
“그야,음코.”
하산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
“시모무라 대령, 다시 한 번 (레이븐) 3호기를 우리에게 맡겨주
실 수 없겠소? 저 간악한 무리에게는 천벌을 내려야만 하오.”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유스프를 시모무라가 느릿느릿 돌이본
다.

“ .AS-1이 저 괴물에게?”
“그렇소. 3호기에는 그것을 이룰 만한 힘이 있지. 실제로 그 기
체를 다뤄본 나는 그리 확신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러는 것이오.''
말하기가무섭게유스프는고개를깊이조아렸다.
“위기에 처한 무고한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리고 목숨을
잃은 귀관의 부하들의 영흔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도.”

제2화 기병(耭트)의 본령(本領) l 137


㉢L

시모무리는 눈을 감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잠시 후, 이


번에는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수락히는 그의 얼굴에 약간씩이지만 핏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확실히 그 말이 맞군요.”
“그러면협력해주시는겁니까?”
빈틈없이 기회를 살피던 타운젠트에게 시모무라가 벌레 씹은 얼
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싱황이니 어쩌겠소. AS13호기를맡기도록합시다”
“감사합니다’대령님.”
인시하는타운젠트에게베르트랑이의문을표시했다.
“헌데 저 (베히모스)에게 어찌 대적하실 셈이십니까? 공수에서
빈틈이 안 보이는 데다 따라붙은 (켄투리에만으로도 힘겨운 상대
인데요. ”
그때였다.
‘‘ . .,나에게좋은생각이있어.”
지금까지잠자코있던사미라가몸을일으켰다.
“허어, 그대에게 계책이 있다는 말인가. 어디 기탄없이 말해 보
거라. ”
“. ,.알았음.그러면시모무라대령님.''
사미리는시모무라에게시선을주었다.
‘‘말하게.”
‘‘. ..(레이븐)을 주는 김에 이 도시에 주둔 중인 96식政도 한 대
빌려줘. ”

138
“96식2j틀?허나그기체는_.”
“두말하면잔소리.,,
시모무라의 대딥을 기다리지 않고 사미라가 밀을 가로막았다.
그 조용한 시선이 클라리를 향한다.
‘, ..나?’
고개를 갸웃히는 클라라에게서 의식을 떼고 사미리는 놀리운 장
광설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 ..우선은一.”

그녀가제안한아이디어는그대로작전에채용되었다.
“그럼 출격 시간은1O30입니다. 서두르십시오.”
그렇게 고하고 티운젠트와 로니는 잰걸음으로 회의실에서 나갔
다. 남은 SEALS대원과 의논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서두르죠. 현장까지는 미군이 이동수단을 준비해줄 모
양이지만 그래도 . ”
“이번에는나도동행하고싶다.,'
그말에모두가놀랐다.
“시모무라대령님.왜당신이?,'
“작전에 참견할 생각은 없다. 허나 이번만은 내가 지켜뵈야 해.”
‘‘후, 그 미음가짐에 반드시 부응해 보이리다.”
“그렇지?!그럼니는-.,'
“당신은집을지켜야죠.사장님.”
“엥一.”
그 선언에 클라리는 입을 삐죽이며 항의했지만 베르트랑은 상대

제2화 기병(襪兵)의 본령(中頒) l 139


하지 않았다.
“쳇, 시시하게스리 .”
D.O.M.S. 멤버도 움직이기 시작하는 가운데 홀로 부루퉁한 클
라라.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 ..나리, 그리고 사장님. 실은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더 있어.”


디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은 소리로 사미라가 말했다.

로터가대기를잡아찢는소음과터보샤프트엔진이웅웅거리는
소리 등이 군용헬기의 캐빈에 울렸다. 베르트랑은 작업하던 손길을
멈추고 캐빈 칭문으로 바깥 경치를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을 대형 수송헬기들이 선행하고 있었다. 이들이 탄 중
형 범용헬기보다도 한 둘레 이상 크다.
그때 수송혤기가 일렁이더니 대기로 녹아들듯 모습을 감추었다.
불가시형 ECS를 전개한 것이다. 이쪽의 범용헬기도 ECS를 직동시
킨 탓에 창밖 풍경이 보라색을 띤 세피아색으로 물든다.
“시작되는군요.”
“예.”
맞은편에 앉은 시모무라의 말에 베르트링은 가볍게 대꾸했다.
선행하는 수송헬기에는 AS가 한 대씩 탑재되어 있다. SEALS의

M9A2SOP(시그마 엘리트) 여섯 대, 유스프의 (레이븐) 3호기, 그


리고 사미라가 타는 96식政다.
베르트랑 일행이 탄 이 헬기는 통신과 정보처리 시스템을 증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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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체로. 전선에서 (베히모스)와 맞서 씨우는 AS를 백업하게 된
다. 물론 SEALs의 대장인 타운젠트가 M9 (시그매에 탑승하고
있는 데다 지휘통제기인 (레이븐) 3호기도 함께 하는 고로 만약을
대비한 것이기는 했지만.

‘쩍 목표. (베히모스)의 방어력은 대단히 높아. AS라이플 따


위는 튕겨날 테고 미사일이나 로켓은 요격되겠xl AS가 운용 가능
한 화력으로 이 방어를 돌파할 방법은 하나.'
사미라가입안한작전을떠올리는베르트랑.
‘“.고초속(高捌逮) 저격포 능동방어시스템의 반응을 웃도는 탄
속의 장거리 포격으로 목표의 급소를 일격에 뚫는 것. 이것밖엔 없
어. '
‘..도면에 의하면 노려야 할 급소는 이곳혁후두부의 통신 안테
나. 무인기인 이상 외부와 단절되면 행동이 불가능해지겠지.'
‘ SEALs의 M9이 (켄투리애를 없애면서 (베히모스)를 묶고
견제. 그 틈에 나리의 3호기한테 데이터를 받아서 내가 96식EjL로
저격할거야.,
‘...어디까지나저격용플랫폼이니까필요이상의고성능기가아
니어도 돼. ECS를 장비하고 무음구둥이 가능한 제2세대형 AS면
충분. '
사미라치고는 드물게 말이 많았지만 그 주장은 그럴 듯했다. 그
녀가 타던 (섀도)는 가르니스탄 전투 때 손싱을 입어서 지금은 수
리 중이다. 그러므로 반쯤 관련된 시모무리를 통하여 예비 AS(그것
도 조달이 비교적 쉬운 제2세대형)를 빌렸다.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무엇인가이상하디는느낌이들었다.

142 I
r각 대원 들어라. 이제 곧 피크닉 시간이다낸
티운젠트의 통신이 베르트링을 현실로 되돌렸다.
r외출 준비는 다 됐겠지, 보이즈. 게스트 여러분들도.J
r셉템버2,문제없을J
r여기는셉템버6, 언제든갈수있습니다.J
r오시라5,잘부틱드리오낸
r. .오시라7,알았음.J
대답들을확인하던베르트링은작은의문에사로잡혔다.
“시모무라대령님.”
‘봬그러나?”
“아까 96식던jr를 대여해 주십사 부탁드렸을 때 말씀을 머뭇거리
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렇게물어보자시모무리는의외로선선히 인정했다.
“아아, 그거. 별 것 아니네. 그 기체도 포함해서 쿠르디스탄에 파
견된 96식EjK에는 이번 작전엔 필요 없는 장비가 탑재되어 있어서.'’
‘‘그게뭡냐7W''
“우리나라가독자개발한시가지경비용내비게이트시스템이다.
성능 자체는 괜찮은 편이지만 조작이 복잡한 것이 옥에 티랄까. 덕
분에 조종사 이외에 전용 내비게이터도 태울 필요가 있더라고',
그말에베르트랑은이맛실을찌푸렸다.
“그럼 저 96식레K는복좌식이란말입니까?,,
“그렇지. AS치고는 드물지 않나? 원래는 훈련용 기체였던 것을
쓴 거다 보니, 중량이나 작전행동시간이왜 그러는가?..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뇌를 풀가동시키는 베르트랑. 무엇인가가

제2회 기병(耭묫)의 본령(本領) l 143


그에게 세차게 경고하고 있었다 허나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 감
도 잡히지 않았다.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이제곧시작될거야.'’

수송헬기에 고정된 96식政. 그 콕핏에서 사미리는 뒷좌석의 동


승자에게 고했다.

“어,응,얼른빨리시작했으면.”
뒷좌석의 클라라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떤다● 조그만
그 몸은 마스터 슈트에 쏙 들어가 있었다.
“..한 번 더 확인할게. 작전대로 지정된 포인트까지는 내가 이
96식旼를 조종. 도착 후에는 조종계통을 바꾸어 사장님이 조종해
서 적 목표를 저격.”
그것이사미라가제안한진짜작전이었다.
이 96식歆의 뒷좌석에는 본디 정보해석용 내비게이터가 타게 되
어 있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뒷좌석에서도 조종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여전히 미숙한 클라라의 AS조
종기술을 보완하고자 기본적인 기체 조직은 사미라가 담당. 그리고
저격 때만 조종을 클라라에게 맡긴다.
클라라가 지닌 천부적인 저격 스킬(기프트)一그것을AS의 실전
에서 살리기 위한 방책이었다.

뒷좌석의 마스터 슈트는 충전물로 소녀의 사이즈에 딱 맞춰놓은


데다 조종스틱 대신에 데이터 글러브 형태의 컨트롤러를 접속해두
었다. AS 전체의 조종은 어렵지만 저격에 필요한 완부 조작이라면

144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사족으로 이 ‘작전'의 진짜 내용을 알고 있는
자는 두 사람 외에는 유스프뿐이다.
“...칙륙 후에는 셉템버6-제멜바이스 하사의 호위 하에 저격 포
인트까지 갈 거야. 그에게 들키지 않게끔 통신시에 주의해.”
“염려 말라니까. 로니 녀석은완전둔하다고.”
“..그래'.
경솔한 클라리를 사미라는 의미심장하게 응시했다. 그러나 뒷말
을 입에 올리기 전에 수송헬기의 후부해치가 삐걱거리며 열렸다.
밀려드는 난기류 그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메마른 대지를
사미리는 확인했다.

“오시라7, 지금부터 강하를 개시하겠다.'’


r라저,행운을빈다.J
기장의 목소리와 함께 96식레틀 수송기에 고정해둔 전자록이 해

제되었다. 기체는 바닥의 레일 위를 따라 공중으로 내던져졌다.


한순간의 부유감 후 96식2X를 보이지 않는 중력이 붙들었다. 자
유낙하 때 아랫배가 차갑게 식는 감각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
지 않았다.
그렇다, 수없이 강하를 경험한 사미라조차도 그러한 것이다. 그
렇다면 그것을 처음 경험한 인간은 과연혁.
r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J
. . . . . . . . . ..?!이런',
뒤에서 터져 니온 처절한 비명소리. 사미라는 드물게 당횡하면
서 통신을 끊었다.

제2화 기병(耭兵)의 본령(木領) 145


다용도 헬기의 캐빈에서 베르트랑은 또 다시 이맛실을 찌푸렸
다.
r플어어어.J
통신기에서 소녀의 갈라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문
득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 ..이게무슨소리지?”
‘‘왜그래?”

미조로기가 의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목소


리는 자신에게만 들렸던 모양이다.
“아뇨,잘못들었나봅니다.''
베르트링은 그렇게 결론지었댜 애당초 AS 강히를 수도 없이 경
험한 사미라가 이제 와서 그런 비명을 지를 리 없으므로.
‘설마一?’
뇌리를스치는어떤가능성을그는무시했다.

뒤에서 터지는 처절한 비명을 무시하면서 사미라는 발밑으로 펼


쳐진 바위산 지형을 확인했다.
‘멸어져떨어져떨어져어어어어!!”
자유낙하 중에 96식레K는 세차게 흔들렸다. 복좌식 뒷자리에 갇
힌 클라리는 조금 전까지의 지나칠 정도로 의욕을 발산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온갖 비명을 질러대는 중이다.
“잘못했어요!!그만용서해주세요하느님!제발요!!”
귀를찢는소음을의식에서떼어내고사미리는빠릿빠릿하고시
원시원한 동작으로 강하 절치를 밟았다. 1차 개산(闊$). 급감속하

146
는 기체. 2차 개산 자세제어.
디지털식 고도계의 수치가 삽시간에 줄어들면서 스크린에 비치
는 바위산의 광경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살려줘어어어!!살려줘마마아아아!!”
착지.

96식2jK의 전신에서 관절댐퍼가 쪼그리들고, 기화하여 흩뿌려진


충격흡수제가 낙하 에너지를 받아낸다.
그럼에도 채 죽이지 못한 충격이 콕핏을 밑에서 찔렀다.
“끄읍코.'’

눈이 완전히 풀린 클라리를 무시하고 사미리는 각종 센서로 기


체 주위를 살폈다. 분리되어 땅에 니동그라진 낙하산. 주위에 적
없음.

아니혁.
r이게 어찌된 일이지?J
통신기에서 들리는 험악하게 굳은 목소리.
이내 96식旼의 뒤에서 공간이 일렁거리며 배어나오듯 AS의 날
렵한 기체가 나타난다.
셉템버6로니가탄(시그매다.
r방금 그 목소리, 클라라지? 왜 그 애가 거기 있는 거야?핵
‘..들켰네.’
역시 조금 전의 통신이 새어나갔던 모양이었다.
다시 확인하자 로니의 통신은 두 기체에만 통하는 회선이었다.
보아하니 부대 전체에 흘러나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클라라의 입징을고려한조치이리라.

제2화 기병(襪兵)의 본령(率領) 147


‘ .그렇다면 설득할 여지가 있어
r설명해주실까?봬
‘‘ . . . 알았음 ”
사미리는 신중하게 밀을 골랐다

r...이상낸
사미라의짧고간결한설명을듣고로니는한숨을쉬었다.
“오호라. 그렇게 된 거로군.”
하지만내용자체는예싱한그대로였다.
미숙한AS오퍼레이터의저격기술올최대한으로활용코자복좌
식으로 운용한다. 그 발상 자체는 괜찮았다.
탑승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의 민간인이고, 거기다 그의 동
생 같은 존재만 아니었다면야.
“너는-너희들은 헬기에게 회수하러 오리고 해. 이유는 기체 트
러블이든 뭐든 상관없고 저격임무는 내가 맡을게.”
r. ..당신이할수있겠어?백

저격포를 넘기라고 (시그미)의 팔을 뻗었지만 사미라의 답신은


이러했다.
명백한도발이지만이정도로는화도안난다.
“SEALs를얕보지말아줬으면좋겠는데.”
특수부대병시는 만능을 요구받는다. 물론 통상적인 수준을 까마
득하게 넘어선 정도에서는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이 저격임무라면 로니는 해낼 자신이 있었다. 지정한 포인트에
서는 어렵지만 그만큼 더 접근하면 그만이댜

148 l
P.그래선안돼.다가가면의미가없어.J
“그건 너희들괴는 상관없는 일이야. 만약 후퇴하지 않겠다면 내
가 대장에게 보고할 거다.',
r. ..잠깐만.겔

“그만됐어,타임오버다-.”
이야기를 끊고 로니가 타운젠트의 (시그매에 통신을 넣으려던
찰나였다.

r잠깐만..,로니력.래
통신기에서 흘러나온 가날픈 소녀의 목소리. 로니는 조종 스틱
의 통신 다이얼을 조작하던 손길을 멈추었다.
‘클라라.니.'.
r. ..시장님,몸은어때?백
r응,괜찮아낸
사미라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클라리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러
한 것은 그도 알 수 있었다. 클라라가 지금의 D.O.MS.에서 얼마
나 소중하게 다뤄지는지도.
그렇기에분노가더컸다.
‘그런데 왜 클라리를 전장에 끌고 나온 거야!? 저런 어린애를 이
렇게 위험한 장소에! 기가 막혀서 원 . '
인종적이고도종교적인욕설은되도록삼간다.
r사미리한테 화내지 마. 내가 억지를 부린 거니까. 얘는 그 억지
를 어떻게든 해주려고 고생한 것뿐이야낸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자, 이제 됐으니 돌아가, 클라라.”
r안돼.로니.내가시작한일이니까내가끝내야해.'..J

제2화 기병(耭늦)의 본령(水頗) l 149


‘‘너는바보냐!그런하찮은이유로전장에니오다니一.,,
r히찮지않단말이야!!J
r. ..시장님?J

별안간 터져 나온 클라라의 고함소리에 사미라도 놀란 것 같았


다.

r아무리 시시한 고집이나 자존심이라 해도 이건 내가 결정한 일


이야. 내가 해야 하는 일이란 말이야.J

그말에로니는말문이막혔다.

문득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의 자신이 생각났다. 주변의 반대


를 무릅쓰고 해군 입대를 결심했었던 그때
크게 씨운 후 마오와 쿠르츠와 술판을 거나하게 벌이고 곤드레
만드레 취해서는, 술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속을 털어놓았었다
그녀에게걸맞은사내가되고싶다.
그녀가좋아했던사내를뛰어넘고싶다.

‘아아’그런가.'
하찮은,시시한고집과자존심.
허나어떻게든관철하고싶은고집과자존심.
결국지금의클라리는그때의 .
r로니?J
클라라의 불안한 듯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로니는 타운젠트에게
통신을 넣었다.
“여기는셉템버6.셈템버1,응답하라.''
r무슨 일인가셉템버6. 정시 연락시간에서 한참늦었다낸

150 l
“죄송합니다, 약간문제가있어서一.”
96식레r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해결됐습니다. 현재 오시라7과 지정한 포인트로 이동
중. 이상.”
r알았다.핵
그 보고를 끝으로 통신을 끊고 로니의 (시그매는 달려 나갔다.
그러다가 멍하니 서 있는 96식레r를 돌아본다.
“뭐해,서두르자.’,
r어,응.J
r..알았음.핵

완전히닙득한것은아니다.
웬만하면인정하고싶지도않았다.
허나그럼에도지금싱황에서로니가할수있는일은단하나.
‘저애를지키는것,그것뿐이다.’
(시그마)와96식레I는전진을개시했다.

“드디어시작되는군”
헬기 캐빈에서 미조로기가말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릴랙스한 태도로 연기를 내뿜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전이리는 도박판이나 헬기를 타는 기분에는 완전히 익
숙해지고 말았다.
“그래.. ..”
옆자리의시모무리는그와대조적이었다.
깍지 낀 두 손을 얼굴에 대고 손톱을 깨물고 있다. 거기다 두 다

제2화 기병(襪兵)의 본령(本頒) l 151


리는 채신머리없이 사납게 바르르 떨어서 불협화음을 사방에 흗뿌
렸다
“진정해,대령.”
보다못한미조로기가입을열었다
“아. 어어. 미안하네.”
고개를 끄덕이고 시모무리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았다.
이번에는 목에서 이마의 발모선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편집증
환자처럼.
어느샌가다리도다시떤다.
‘이거안되겠는데.’
에라 모르겠다며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 AS-1이 실제로 주먹질하는 건 처음 보지? 틀림없이 죽이
는 연주를 볼 수 있을 거야.”

일부러 거친 태도로 시모무라의 어깨를 거침없이 두드린다.


“게다가 합동 공연 상대는 천하의 SEALs팀 아니겠어. 그러니 얼
마든지 안심하고 즐기라구.'.
“..나도안다,,
낮은목소리로시모무라가신음했다.
“알고있다고,그정도는.하지만.. .”
‘‘하지만?”
되묻는 미조로기에게 시모무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깊이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무리도아닌가.,

152
14던 전의 AS테러에 대해서 시모무라의 입으로 직접 듣기는 처
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건의 관계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AS-1 프로젝트에 대한 열의의 원동력이 그곳에 있다는 것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AS-1프로젝트가최종단계로접어든바로지금(베히모
스)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지금의그로서는14년전의망령과대면한심정이리라.
“..당신의AS-1을믿어봐.”
미조로기는나지막한목소리로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대장. 이럴 때를 위해서 AS1을 만들려고
한 거 아냐? 내 말이 들렸나?”
시모무리는미조로기를멍하니올려다보았다.
“어.어어-그랬지.'’
끄덕이는시모무라. 그 얼굴에 조금씩 핏기가돌아왔다.
“분명그랬어.”

유스프의 (레이븐) 3호기는 침묵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불가시형 ECS로 숨을 죽이고 적의 습격을 조용히 기다린다.
‘아직멀었나.. . . ’
그의 3호기는 정찰과 전자전, 지휘관제 기능을 혼자 힘으로 해
낼 것을 상정하고 개발된 기체다. 부대에 있어서는 눈이며, 귀이
며, 두뇌인 동시에 적절하게 운용하면 그 전력을 몇 배로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3호기는 그 능력이 반쯤 봉인된 상태였다. 등 부

제2화 기병(磯토)의 본령(木頒) l 153


분의 레이돔을 수납한 재, 전피를 발산하지 않고 패시브 센서만을
시용하여 적기의 존재를 탐색하는 중이다.
‘못견디겠군.'
콕핏 속 목소리가 외부로 샐 리는 없겠지만 유스프는 무의식중
에 목소리마저 죽이고 있었다.
본래 목표인 (베히모스)는 몸을 감추지도 않고 당당하게 다가오
고 있다. 문제는 그 추종자혁불가시형 ECS로 몸을 감춘 (켄투리
op 부대였다.
일단은 그들을 없애거나. 하다못해 구속하지 못하면 작전을 다
음 단계로 이행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선수를 칠
필요가 있었다.
‘이미와있을터.’
3호기의 집음 마이크는 (베히모스)의 발소리를 진즉에 포착한
상태다. 그렇다면 전위를 맡은 (켄투리에도 이미 이 부근까지 나
와 있을 터. 지금의 3호기와 마찬가지로 ECS를 전개하고서 숨을
죽인 재
그러나 지금껏 3호기의 패시브 센서는 (켄투리oH의 반응올 잡
아내지 못했다. 어쩌지? 차라리 레이돔의 액티브 센서를 직동시킬
刀w 3호기의 ECCS라면 확실하게 적기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켄투리아)가 이미 이쪽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그
렇기에 숨을 죽이고 .
쳇바퀴돌던사고가서서히나쁜방향으로굴러갔다.이미(베히
모스)는 코앞까지 와 있댜 이렇게 된 이상 .
바로그순간3호기의적외선센서가희미한반응을잡아냈다.

154
“이건?!”
2시방향에몹시작지만부자연스러운열분포가존재했다.ECS
범위 밖으로 홀러나온 팔리듐 리액터의 열이다. 거리는불과 100
미터 미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다.
이 위치, 이 타이밍. (켄투리아)가 들림없으리라. 적도 예측된
교전에 대비하여 출력을 순항 레벨에서 전투 레벨로 올린 결과 기
체의 발열이 ECS 처리능력을 웃돈 것이다.
한순간의기회를유스프는놓치지않았다.
패시브센서에서홀러나오는희미한정보를토대로3호기의AI
는 (켄투리이)의 가상 이미지를 스크린 상에 표시했다. 애자일 스
러스터를 작동시키지 않고 도약하여 바로 위에서 소리도 없이 뛰어
내린다.
소리 없는기습을적기는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수로 쥔 사브르 모양의 단분자 커터를 (켄투리아)와 몸과 일
체화한 경부 뒷부분에 내리꽂는다. 일반적인 AS라면 콕핏이 존재
할 위치에 (켄투리oD는 고성능의 통신용 안테나가 달려있었다.
허공에 보라색 스피크가 번뜩였다. 손싱을 입고 ECS 기능이 해
제되면서 (켄투리애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테나를 파괴당함으로
써 네트워크와 물리적으로 분리된 무인기는 크게 한 번 꿈틀거리고
는 멈췄다.

그러나 3호기는 멈추지 않았다. (켄투리이)의 뒤에 달라붙은 재


왼쪽 옆구리에 필꿈치를 쑤셔 박았다. 장갑으로 가려진 정비용 패
널이 박살나고 정보전달용 커넥터가 노출된다. 지체 없이 왼손을
갖다 대고 3호기는 그 커넥터에 손가락 끝의 플러그를 삽입했다.

제2화 기병(後兵)의 본령(木額) 155


“연결됐다!,,

회심의고힘을지르는유스프
3호기의 강력한 연산기능은 시체가 된 (켄투리이)의 전 기능을
재빨리 장악. 그곳부터 거슬러 올라가 (켄투리아)들을 연결하는
데이터링크혁임페리엄 네트워크를 덥석 물었다.
제로 콤마 이하의 초고속으로 이루어지는 격렬한 전자전의 응

수. 아무리 3호기라도 네트워크 너머로 시스템이나 적기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기능의 일부에 간섭히는 정도라면-.
3호기와 한 몸이 된 (켄투리이). 그 주변의 공간이 아지랑이처
럼 일렁거렸다. 수없이 수없이 수없이. ECS리는 엄폐물이 강제로
벗겨지면서 차례로 나타나는 (켄투리이)들의 모습.

다음 순간, 쏟아진 총탄이 그 대열을 잡아 찢었다. 3호기의 관제


에 있던 M9 (시그마)의 기습이었다.
“해치웠다.''

유스프가 그렇게 읊조렸을 때 3호기의 콕핏에 경보가 울렸다.


고도의 대지 탐색능력을 가진 레이더가 지체 없이 이 전역에서 이
탈하려는 적기를 포착한 것이다. 적은 한 대, 방향은~.
“이런’사미라와클라라가一,”
기체를 돌리고 달려나가려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대지를
뒤흔들며 거수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큭...,'

전황의 격변은 클라라에게도 전해졌다.


'‘ . . .알았음 ”

156 I
복좌식으로 꾸며진 96식孜의 앞좌석에서 사미라가 조용히 대답
했다.

“어,어떡해-?!''
초조힘을 감추지 못하는 클라라. 그때 나란히 달리던 로니의 (시
그마)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r당분간은 예정대로 전진한다. 스케줄이 밀리긴 했지만 주변 경
계는 게을리 하지 않도록J
“..알았一.,'

사미라가그렇게대답하려했을때였다.
r멈춰!J

딴사람처럼험악한목소리와함께(시그매가96식Ejl의오른쪽
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면서 기체의 죄측 반신을 드러낸다.
거의동시에오른쪽에서뻗어온불길이(시그마)를덮쳤다.
“헉?!”
“. ..기습?불찰!”

그제야 클라라도 알아차렸다. 3시 방향의 기습을 감지한 로니의


(시그마)가 96식成를 감싼 것이다.
‘조준시킬 틈을 주지 않는다. 발사할 틈을 주지 않는다'가 제3세

대형AS의 기본이다. 그중에서도 특수부대용인 (시그마)는 기동성


올 극한까지 끌어올리고자 장깁을 최저한도까지 깎아낸 기체다.
그 (시그마)가 클라리를 감씨느라 평소 같으면 피할 수 있는 포
화에 몸을 노출시킨 것이다. 세련되고 날렵한 기체의 죄측 반신이
지독한 손싱을 입었다.
왼쪽 어깨와 왼쪽 팔의 실드를 드러냄으로써 상반신의 기체 중

제2화 기병(襪長)의 본령(本領) l 157


추는 간신히 지켜냈지만 특히 왼쪽 다리의 손상이 심했다. 이래서
는 특기인 기동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r맙소사. 예정을변경해야겠군.뾔
바위산 그늘 틈으로 흘끗 보이는 붉은 십자 눈을 응시하면서 로
니가 평소처럼 말했다.

“잠깐,로니,그게무슨소리야?”
r무슨 소리긴. 적 무인기가 저기 와 있어. 본대는 덩치를 상대하

느라 꼼짝 못하고, 너희들의 96식으론 무인기 상대는 죽었다 깨어


나도 무리고.J

마치 농담하듯 (시그마)는 어깨를으쓱해 보였다.


r그럼 나랑 이 (시그nD로 놈들의 발을 묶을 수밖에 없잖겠어J
“그,그래도一.''
““감사한댜’'
흥분한 클라리를 무시하고 사미라는 페달을 힘껏 밟았다. 96식
收는 뜻밖일 만큼 가뿐한 몸놀림으로 경사면을 뛰어올랐다.

“자,잠깐,로니 .”
r그렇게까지 큰 소리를 쳐놨으니 맡은 임무 열심히 하리구!J
고함과 함께 끊어지는 통신. 그리고 전투의 소음이 뒤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도착했다. ”
“ . . .그러게. ',
지정된 포인트를 확보하고 클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길을 내려다보는 꺾c}지른 봉우리의 그림자. 광학센서를 최

158
대로 높이자 (베히모스)와 SEALS가 교전하는 모습이 작게 보였
다. 그 속에는 유스프의 3호기도 있었다.
전횡은 SEALs의 열세로 짐작되었다. 결코 그들이 익한 것이 아
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시격을 견디고 피해내면서 과감하게 응
전 중이었다.

3호기가 전송해준 데이터도 그 탁월한 기링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전에 있었다.
일반 전자를 능가하는 (베히모스)의 장갑은 (시그매의 공격을
모조리 퉁겨냈다.
그러한고로노릴곳은단한곳 .
“유해브컨트를,'
‘‘아이해브컨트롤.”

복창과 동시에 기체의 조종이 클라라에게로 넘어간다. 양손의


컨트롤러를 조작하고 그 감각을 확인한다. 문제없다
등 부분의 록볼트가 해제되고 매달려 있던 케이스가 열렸다. 접
이식의 기다란 포신을 클라라가 조종히는 96식政가 잡아당겨 꺼낸
다.

76밀리미터 저격포. 표준적인 AS라이플의 두 배에 가까운 구경


을 자랑하는 강력한 화기지만 그럼에도 저 괴물을 싱대하기에는 불
안했다.
따라서노릴곳은한곳.
“여기는울즈2, 준비는끝났다혁경치 좋구만.'’
r오시라5, 알았다.J
유스프의 대답과 거의 동시에 (시그매 부대의 움직임이 바뀌었

제2화 기병(機具)의 본령(츠領) l 159


다. 포위망 밖에서 끊임없이 포화를 뒤집어 씌우던 손길을 멈추고
후퇴를 되풀이한다.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견제공격을 걸어서 (베히모스)가 진로를
잘못 집도록 유도했다.
그렇다. 클라라에게 등을 돌리는 형태로
‘조금만더, 조금만, 조금만력지금이다!'
‘그에게 전해들은 이 (베히모스)의 약점. 정확히 뒷덜미 부근,
목깃 형태의 장갑에 가려진 부위가 단 한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극한까지 쥐어짜이는 의식. 그 한순간을 놓


치지 않고 클라리는 트리거를 당겼다
엎드려 쏴 자세의 기체에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 포문에서 튀어
나간 철갑탄은 초음속으로 피아의 거리를 정복하고는, 목표를 놓치
지 않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임페리엄네트워크와접속한복합안테나로
(켄투리에라면 굳이 노릴 필요가 없는 부위다. 등 뒤로 돌아들
어 노리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해치우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베히모스)인 이상 그 일격은 그야말로 아킬레스
의 발꿈치를 꿰뚫는 회실과도 같았던 것이다.
(베히모스)의 거체가 크게 흠칫 떨렸다. 두 번. 세 번, 주위를 둘
러보고 당황한 듯이 걸음을 내딛는다.
r멀었나?핵
r실패?J
의구심이 오가는 통신 속에서 적어도 클라라만은 그 결괴를 확

160
신했다.
“별것도아닌목각인형주제에.’,
내뱉는 것과 동시에 (베히모스)가 쓰러졌다. 그 거체는 두 번 디
시 일어나지 못했다.

“해냈구나.클라라.”
데이터링크를 통하여 (베히모스)가 격파되었음을 알고 로니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허리의 밸런서가 손상되어 웅크리고 앉은 그의 애기(愛1썲 그
앞에 거의 동귀어진 상태로 격파한 (켄투리이)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다.
클라리를 감싸느라 손싱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실전에서 이토록
궁지에 몰린 적은 처음이었다. 승부의 천칭이 조금만 더 저쪽으로
기울어졌더라면 격파당한 것은 자신과 (시그nD였을 것이다.
도저히 예전에 루마니아에서 교전했을 때와 같은 기체라고는 생
각할 수 없었다.
‘‘경험을통해성장하는전투AI라.,.
새삼스럽게 그 무서움을 실감했지만 로니의 마음속에 공포는 없
다. 자신들은 SEALs.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이므로
‘이렇게우쭐대는건나답지않지.'
쓰게웃으며로니는통신을넣었다.
‘‘여기는 셉템버6. 기체가 대파되어 자력 귀환이 어렵다. 아군의
회수를 바란다.''
r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로니!J

제2회 기병(機토)의 본령(牢領) l 161


가장먼저들어온통신은하필이면클라라였다.
rM9이 박살나버린 거냐? 그럼 내가 데리고 돌아갈 테니 거기 얌
전히 앉아 있어! 다친 데는 없지?봬

“부드럽게부탁해.”
아무래도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 대원보다는 그녀의 오빠로 계속
있을 수 있는 길이 훨씬 어려울 듯했다.

“하하,저것들이해냈구만!”
그광경을확인하고미조로기는주먹을불끈쥐었다.
“말했잖아, 대령 나리. 저놈들이라면틀림없이 ”
곁의시모무리를돌아보다가밀문이막힌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시모무라가 눈가를 손으로 닦고 있었다. 코


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캐빈 안에 울린다.

“..울고있었냐,,
“이거-볼썽사나운꼴울”

띄엄띄엄 대답하며 시모무라는 고개를 들었다. 충혈되어 새빨개


진 눈 그러나 미조로기는 이상하게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
았다.

162
제3화 전사의 체통

한밤의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포성과 끊임없이 쏟아지는 포탄.


바야흐로 가르나스탄의 들판은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어지러이 날리는 예광탄 아래 두 (레이븐)의 그림자가 마치 망
령처럼 일렁거렸다.
“끈질긴녀석들같으니.',
1호기의콕핏에서타츠야가말했다.
대낮의 짐복과 야간의 이동을 반복하며 길 없는 신속을 답파한
끝에 간신히 도달한 가르나스탄의 동부 국경지대 그러나 목표인
아프가니스탄을 목전에 두고서 타츠야와 키쿠노는 가르나스탄군에
발견되고 말았다.
‘‘여기까지와서당할수는없지.”
매달리는 적의 (새비지)를 요격하고 회피기동으로 정신없이 달
아난다.

규격이 다른 러시아제 머슬 패키지로 구동하고 있음에도 (레이


븐)들의 기동에 불안함은 없었다. 지금 현재까지는.
r조금만 더 가면 국경입니다. 단념하지 마세요!백
‘‘그래, 니도 알아.”
나란히 달리는 키쿠노의 4호기에게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타츠

제3화 전사의 체통 l 163


야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있잖아, 키쿠노.”
r왜요?짧게말씀하세요.J
“이렇게 요란하게 싸워대면서 억지로 국경을 뚫어도 괜찮을까?!
잘못하면 저쪽 양반들한데도 적으로 오인받고 격추되는 거 아냐?”
r아아, 그런 거라면-낸

키쿠노가 대답하려 했을 때, 그 목소리를 누르고 '호기의 콕핏에


경보가 울려 퍼졌다. 오른쪽 3시 방향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반응.
“이속도와움직임.헬기인가혁젠장!''
순간적으로 조종페딜을 힘차게 밟는다. 동시에 헬기에서 빔눈에
도 선명한 폭염이 솟아오르면서 하얀 연기가 터져 나왔다. 탑재한
로켓포를 한꺼번에 발사한 것이다.
r타츠야씨?!J

“괜찮아,버틸수있어!’'
먼저 도약한 (레이븐)은 흗뿌려진 로켓탄의 산포 범위에서 간신
히 벗어났다. 공격이 무유도 로켓탄이어서 살았다.
도약한 최고 높이에서 ,호기는 적의 전투헬기에 BK 라이플一보
급기지 물자에서 조달한 것이다력의 포문을 겨누었다. 스크린에
허둥지둥 회피기동을 취하는 혤기와 레티클이 겹쳐진다.
반격의 찬스를 놓치지 않고 트리거에 건 손가락에 힘을 담는 타
츠야. 그러나 그 직전에 전날의 전투가 뇌리를 스쳤다.
“큭!”

정확하게 콕핏이 파괴당한 (섀도). 오퍼레이터와 함께 시체로


변한 AS의 모습. 그러한 모습들이 헬기와 겹쳐졌다.

1여
또똑같은일을반복할것인가?
축이지않으면내가죽어.,
타츠야는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죽일수밖에없어.”
트리거를 당긴다. 풀오토 포성이 귀를 찔렀다. 흩뿌려진 37밀리
미터탄 중 한 발이 멋지게 헬기를 맞혔다
균형을 잃은 헬기는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불시착. 탑승자의 생
명은. . . .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신경 써.'
자신의 정신이 놀라울 만큼 삭막해졌음을 실감했다. 그것을 깨
달은들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착지. 충격흡수장치로도 부담을 다 죽이지 못해서 혹사를 계속
해온 오른쪽 다리의 프레임이 살며시 삐걱거렸다.

r괜찮으세요, 타츠야씨?쾌
“그래, 오른쪽 혤기는 격추했어. 이제 문제없지?”
r예낸

그렇게 대답히는 키쿠노의 4호기가 돌야보지도 않고 서브 암을


뒤쪽으로 내밀었다. 기괸포 사격이 쫓이오는 (새비지) 한 대를 덮
쳤다. 다리를 잃은 적기는 그대로 쓰러져서 탈락했다.
그러나 적의 숫자는 여전히 줄어들 낌새가 없었다. 그러기는커
녕 또다시 경보가 콕핏 안에 시끄럽게 울렸다. 그것도 이번에는-.
“정면?!따라잡혔나!''
콕핏의 정면 스크린에 실루엣들이 여럿 비쳤다. 암시장치 너머
인데다 아직 거리가 있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AS가 틀림없

제3화 전사의 체동 l 165


었다.

“젠장, 누가 단념할 줄 알고!! 어디 해보자, 이거야!”


스스로를 고무하고자 타츠야는 고힘을 질렀다. 정신이 뜨겁게
고양됨과 동시에 뇌수의 중심 부분은 차갑게 식었다.
불확실한 전황을 가급적 파악하려 애쓴다. 적 AS부대에 앞뒤로
둘러싸였다. 포위가 완성되기 전에 전방의 적기를 해치우고 탈출해
야 한다. 조종스틱을 움켜쥐자 달려가던 (레이븐) 1호기도 손에 든
라이플을 고쳐 쥐었다.

아니, 잠깐혁빨라지는 타츠야의 뇌리에 불현듯 위화감이 끼어들


었다. 전방에 전개한AS부대, 혹시 저것은.. ..
r안돼요,타츠야씨!쏘면안돼요!핵
키쿠노의 통신. 거의 동시에 타츠야도 그것을 깨달았다

전방에 전개한 AS는 가르나스탄 정규군의 (새비지)도, (섀도)


도, 하물며 (켄투리이)도 아니었다.
“저건-M6인가?!”
미국제 AS가 열 대 가량 나란히 서 있다.
“그렇단건-.”

r예.아마그럴거예요낸
키쿠노가그렇게대꾸하는것과거의동시였다.
r전투행동 중인 AS 각 기에 경고한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육
군이다낸
현지어와 억양이 강한 영어로 두 번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M6
들이 기관포를 일제히 겨누었다.
r네놈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영토와 주권을 침범 중이다! 즉시 기

l66 l
체를 세우고 투항하라!J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기세외는 달리 그것은 (레이븐)이나 (새
비지)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 착탄했다
일단은위협사격인모양이었다.

“아, 알았다, 알았다!! 쏘지 마. 쏘지 마, 쏘지 마!’'


타츠야의 1호기는 급히 라이플을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군의 살기 어린 태도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어쩌지, 키쿠노一.”
그렇게 묻다가 타츠야는 입을 떡 벌렸다. 포화가 오가는 전장 한
복판에서 키쿠노의 4호기가 무릎을 꿇고 주기자세를 취한 것이다.
등의 해치가 열리고 키쿠노가 몸을 내민다. 긴 검은 머리가 바람
에 나부꼈다.

“뭐뭐히는거야너?!”
r타츠야 씨도 얼른 기체에서 내려외요! 기체를 세우리는 것이 저
쪽의 요구니까요.J
그 말에 타츠야는 기억해냈다. AS 오퍼레이터에게 있어서, 기체
에서 내려와 맨몸을 드러내는 행위는 적의가 없음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사인이라는 것을.
“그, 그래도 뒤에서 총알이 날아오는데!”
r이대로는앞에서도맞아요낸
하긴 그랬다. 망설일 여유는 없다.
“에잇,될대로되라지!”
반쯤 포기한 고힘을 지르고 타츠야도 주기자세를 취하고 해치를
열었다. 강렬한 전장의 소음이 그의 맨몸을 두들겼다.

제3화 전사의 체동 l 167


‘이제 가르나스탄 패거리는 어찌 니올까?'
전방의 아프가니스탄군을 자극하지 않게끔 세심한 주의를 기울
이면서 그는 후방의 가르나스탄군의 동향을 살폈다.
(새비지) 부대는 전진을 멈춘 상태였다 라이플은 들었지만 발
포는 않는다. 움직임에 망설임이 서려 있음이 확실했다
숨막히는침묵을깬것은아프가니스탄군이었다.
M6대열 중 오른쪽 제일 끝의 한 대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오
른쪽 어깨에 대구경 유탄포를 장비한 화력지원기, M6A2E2 (부시
마스터)다.
가르나스탄군 (새비지)들 사이에 동요가 나타났다. (부시마스
터)는 오른쪽 어깨의 유탄포를 여봐란 듯 선보이면서 허리의 보조
다리와 두 다리의 이우트리거를 전개. 동요히는 가르나스탄군에게
105밀리미터 포틴을 발사했다.
앙각"n魚)을 취하지 않고 직접 조준한 수평사격. 귀 따가운 포
성을 흩뿌리며 착탄하고는 포연을 뿜어 올린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표적을 피한 경고사격이다. 그러나 그 착
탄점은 아까보다 가르나스탄군에 가까워져 있었다.
선두의 (새비지)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가르나스탄
부대가 조금씩 후퇴를 개시했다. 아프간 측도 굳이 추격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끝난모양이네..'
안도의 숨을 내쉬는 타츠야. 키쿠노에게서 통신이 들어왔다.

r아니에요. 이제부터가시작이지요, 타츠야씨.J


“. ..하긴”

168
아프가니스탄군의 AS가 (레이븐)을 포위했다. 그것도 몹시 비
우호적인 태도로

‘그도그렇겠지.,
납득한 타츠야는 다시금 무선통신 회선을 열고는 아프가니스탄
군에게 말했다.
“나는 민간군사회사(PMC) D.O.MS에 소속된 AS 오퍼레이터
이치노세 타츠야다. 보다시피 저항할 의사는 없다. 귀국의 지원
이 아니라 보호-도 아니고, 망명코은 더욱 아니고... , 아 씨! 아무
튼 그런 걸 요구한다.”
엉뚱하기 짝이 없는 타츠야의 요구에 M6부대는 당혹스러운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r타츠야 씨, 그래서는 뭘 원하는지 전혀 못 알아들을 거예요4
키쿠노의목소리도어이없다는뉘앙스로가득했다.

“가르나스탄에서 탈출해온 PMC소속 AS파일럿이라고? 게다가


일본인? 대체 뭔 소리야?”
부하의 보고를 받고 아프가니스탄군 대장 사야프 소령은 당황했
다.

‘‘본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젊은 동양인 남녀


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
“또골치이픈일이.”
현재의 가르나스탄 분쟁은 구 소련의 구성국들에 의한 것이며,
아프가니스틴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관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나리들과 인접한 북부 국경은 현재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

제3화 전사의 체통 l 169


었다.
‘이 분쟁이 언제 우리나라에 불똥을 튀길지 어떻게 아느냐고.’
사야프 소령의 불안은 정부와 군의 싱층부와도 일맥싱통하는 것

이었다. 소련이 붕괴함으로써 그 위성국에서 해방된 지 불과 '0년


소련의 지배와 그에 앞선 전쟁의 상흔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대지
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렇기에 오늘 밤의 전투에도 행여나 싶어서 AS부대를 출동시
킨 것이었는데, 그 결과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둘은어쩌고있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AS부대 쪽에서 보호라고 할지 구속이라고
할지一이무튼 타고 온 AS와 함께 이 기지로 연행하는 중입니다.”
“여기로말인가?”
당연한소리지만시야프소령은인싱을썼다.
“잘못판단한겁니까?”
“아니.싱콴없다.”
고개를 내젓고 기분을 바꾼다. 불평이나 불만을 터트릴 때가 아
니다.
어찌되었든 헤라트 기지에 보고해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카
불 사령부에 직접 보고해야 할지도 모른다.
‘‘AS부대가 돌아오면 바로 알려라. 내가 직접 이야기를 듣겠다.”
“알겠습니다.”
삐른 걸음으로 빙을 나가는 부하를 쳐다본 후 사야프 소령은 창
문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긴하루가될것같군.. ..”

170 I
직은 읊조림은 본인 이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산길을 아프가니스탄군이 나아간다.


(레이븐)에서 내려온 타츠야와 키쿠노는 군용차량의 뒷좌석에 구
속되어 있었다.

칭문으로 뒤쪽을 보자 M6의 손으로 운반되는 (레이봔이 보였


다. 1호기와 4호기에 M6가 각기 두 대씩 붙어서 겨드랑이를 떠받
치는 형태로 기체를 들어 올리고 있다. 마치 부상자를 옮길 때 같
은 요령이었다.
“당연히이렇겠지.”
수갑이 채워진 양손을 보면서 타츠야가 중얼거렸다. 누적된 긴
장과 피로가 심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r얼마안남았어,형야J
통신기에서 흐르는 쾌활한 영어는 차량 바로 앞을 나아가는 포
전형 M6 (부시마스터)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r저 앞의 고개를 넘으면 우리 기지야. 그럼 조금은 쉴 수 있을 거
라구. J
“그렇담좋겠는데.”
타츠야의 대답은 몹시 무뚝뚝한 것이었다.
연일 계속되던 전투에서 간신히 해방된 육체가 충분한 휴식을
갈구하는 한편으로 정신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 것을 요
구했다. 그러한 심신의 괴리가 타츠야의 언동을 날카롭게 만들었
다.

그러나 (부시마스터)의 오퍼레이터는 개의치 않고 호쾌하게 웃

제3화 전사의 체동 l 171


었다.

r우리 대장도 익마는 아닐 테니 어떻게든 되잖겠어아.J


고갯길에 접어들었을 무렵 별안간 (부시마스터)가 오른쪽 방향
을 가리켰다.
r...저쪽이야낸
“저쪽?”

r잠시만오른쪽을봐, 형아.J
(부시마스터)의 오퍼레이터가 채근하자 타츠야는 마지못해 오
른쪽을 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건...”
고갯길에서 내려다보이는 깊은 계곡. 동쪽에서 비쳐 든 햇실을
받고 자욱하게 낀 안개가 스르륵 걷힌다.
짙은 안개의 베일 밑에서 나타난 것은 자그마한 농촌의 풍경이
었다.
꺾c}지른 산들의 선명한 녹색과 계곡 밑 시냇물의 짙은 파랑색
그 틈새에 달리붙듯 농지가 펼쳐져 있다.
논밭의 보리가, 말린 벽돌로 지은 농가가 태양 밑에서 황금색으
로 빛난다.
“어머나,멋져라..’
지금까지잠자코있던키쿠노가탄성을질렀다.
r어때형아,볼만하지?봬
“응,그러네.,,
(부시마스터)의 득의양양한 통신에 타츠야도 수긍했다. 날카로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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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져 있던 마음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스며들었다
보아하니 이 앞길은 고개를 따라 저 마을과 연결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바로 북쪽, 계곡의 입구를 딱 막는 형태로 소규모
기지가 세워져 있다.
“저기가댁들의기지인가?
r일톤기지라고해. 얼마안남았다고했잖아셈
대열은계곡사이로내려갔다.

공교롭게도 (부시마스터)의 오퍼레이터가 생각한 것만큼 그의


상관은 친절하지 못했다.
기지에 도착하기 무섭게 타츠야와 키쿠노는 사령부혁조립식 단
층집이었다력로 연행되었다. 어떠한 휴식도, 식사도 제공받지 못
한 채.
“내가이부대를맡은사야프소령이다.”
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40대로 보이는 장교였다. 사
시 기운이 있는 오른쪽 눈이 타츠야를 뒤룩거리며 노려본다.
“나는-.”
“이치노세타츠야와산조키쿠노.맞는가.,'
“아,예.”
“그렇습니다.”
기선을 제압당한 형태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착실하게 대답했
다. 세卜프 소령은 냔폭한 몸짓으로 두 사람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기르나스탄에서도망쳐왔다고했는데자세한이야기를들어볼

174
까. 거짓말이나 눈속임은 도움이 안 될 거다.,
“알고있습니다.”
타츠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련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팔미슈 징군의 반란군에 고용되어 가르나스탄 국내로 잠입했던
것. 러시아의 개입 등의 사고가 겹쳐지면서 쿠데타가 실패한 것.
동료들은 철수에 성공했지만 자신들은 남겨지고 말았기에 자력으
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것.

물론 (레이븐)과 지오트론, SEALs 등의 기밀사항은 덮어두었


다.
“그밀을믿으란거냐?”
팔짱을낀사야프소령이무거운어조로말했다.
‘‘가령 너희들의 이야기가 진실이라 치고, 앞으로 어쩔 작정이
냐? 이 나라에 뭘 바라는 거지?.'

“아一,그건一.,’
타츠야는 질문을 듣고 약간 당황했다. 바로 이 순간까지 가르나
스탄을 탈출히는 데만 신경 쓰느라 그 뒤의 구체적인 방책은 생각
하지 않았던 것이다.
탈출한 신생 D.O.M.S.의 본대, 다시 말해 클라라와 유스프 일행
과 합류하고 싶다 쳐도 그에 필요한 수단은 .
“통신입니다.',
대답한것은키쿠노였다.
“본대와 연릭을 취히고 싶지만 지금의 저희들에게는 장거리 통
신을 할 만한 기재가 없습니다. 우선은 그 설비를 빌릴 수 없을지
요”

제3화 전사의 체통 l 175


“오호라, 듣고보니 그러네.''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타츠야를 사야프 소령이 노려본다.
“일단앞뒤는맞는것같군”
“그럼.. ..”

“코이리는말이리도할줄알았나?”
낮고 험악한 목소리로 깠k샤프 소령이 말했다.
“네놈들에게 얼마나 많은 혐의가 걸려있는지 아나? 지작극을 벌
여서 이 나라에 잠입하려는 가르나스탄의 척후일지도 모른다. 아니
면 러시아의 스파이일 가능성도 있지.”
소령이 턱짓하자 타츠야를 데려온 병사가 움직였다. 뒤에서 두
사람의 어깨를 난폭하게 붙잡고는 일으켜 세우려 한다.
“설령 너희들의 말이 맞다 해도 가르나스탄에서 인도를 요구하
면 응해야만 한다. 가르나스탄에 트집 잡을 구실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
순순히 일어선 두 사림을 사야프 소령이 노려보았다.
“어찌됐든 그런 쪽 판단은 내 소관이 아니다. 얌전히 있으면 당
분간은 안전울 보장할 테니 안심해라. 아마도 말이지만.”
그 말에는 일종의 유머가 담겨 있었지만 타츠야와 키쿠노는 전
혀 웃을 수 없었다.

두사람이 끌려간곳은반지하식 영창이었다.


‘‘어쩐지 최근들어 이런 일이 잦은 것 같아.”
들이서 한 독방에 처넣어진 후 타츠야가 투덜거렸다. 구석에서
는 키쿠노가 수갑이 벗겨진 손목을 문지르고 있다.

176
“그렇게 비관적인 싱황은 아니에요, 타츠야 씨. 이만한 경비라면
탈출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
‘‘. ..일을벌일생각으로가득늉규만’.
이런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키쿠노에게 타츠야가 낮은 소리로
태클을 건다.
“당분간은 적의 공격과 추적x든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뵈니 일단
은 몸을 쉬어두도록 하죠. ”
“믿음직한걸 하긴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그렇게 읊조리고 타츠야는 독방 안을 둘러보았다. 살풍경한 콘

크리트 구조로, 쇠칭살 너머로 복도가 보였다. 벽의 높은 장소에도


채광창이 있는데 이쪽에도 쇠창살이 끼워져 있었다.
그는 크게 발돋움을 하여 창밖을 살폈다. 아무래도 채광창은 바

깥의 땅바닥과 거의 같은 높이에 위치하는지, 쇠창살 너머에는 기


지의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눈에 힘을 준 순간 돌풍이 불어 닥쳤다. 사정없이 들이친 흙먼지
탓에 타츠야는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세요. 타츠야씨?”
“응, 걱정 마, 걱정 마.”
인상을 찡그리고 눈가를 닦는다. 그때 쇠창살 너머의 복도에서
가차 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파수꾼으로 보이는 소년병이 웃고 있었다. 나이는 아
마 타츠야보다 두세 살 아래일까.
“운이 없네, 형아.,'
억양강한그영어는타츠야의기억에있었다.

제3화 전사의 체통 l 177


“너, 아까그 (부시마스터)의 오퍼레이터냐?'’
“하리리라고 해 이래 봬도 일단은 하사리구.”
“어 어으- ,,
lT l O o

그 붙임성 넘치는 미소에 타츠야는당황했다.


그렇지만 남이 자신을 소개한 이상 자신도 이름을 밝히는 것이
만국공통의 규칙이기 마련.
“저기’나는一.’,
“알아, 타츠야지? 그리고 그쪽의 미인 아가씨가 키쿠노고. 만나
서 반가워.”
보아하니 사전에 조사하고 온 모양이었다. 임무에 열심이다 싶
어서 타츠야는 감탄했다. 하긴 파수병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
르지만

“영어잘하시네요”
“고마워. 요즘 세상에 이 나라에서 출세하려면 역시 영어를 할
줄 알아야겠다 싶어서 필사적으로 공부한 거야. 그 덕분에 형아들
의 감시를 억지로 떠맡게 되었지만.”
“그거.. .,미안하게됐다.”
“아력아냐一거짓말이야, 거짓말. 빙금 한 말은 취소. 사실은 형
이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거야.”
하리리의말에타츠야와키쿠노는서로마주보았다.
“우리하고요?”
“그건또왜’'
“아니一. 그게 있지, 형아들이 타고 온 AS가 죽여주게 멋지더라
고. 저것 좀 봐.''

178
하리리가 창밖을 가리킨다. 다시 발돋움을 하여 창밖을 보는 타
츠야와 키쿠노.

마당에서는 마침 AS부대가 전진 중이었다. 조금 전에 본 M6와,


그 뒤는 .

“(새비지)군요”
키쿠노가이상하디는듯읊조렸다.

M6와 (새비지), 동서양의 대표적인 제2세대형 AS가 어깨를 나


란히 하고 행진히는 모습은 분명 보기 드문 광경이기는 했다.

“M6는 미국한테 받은 거고 (새비지)는 이반 녀석들이 놓고 간


거야. 우리나리는 가난해서, 그런 식이 아니면 AS를 못 얻거든. 최
신형인 제3세대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어.”
눈을 빛내며 AS 이야기를 하는 소년병. 타츠야는 약간 겁을 먹
었다.

‘‘혹시, 그래서 (레이븐)을-.',


“오오, (레이뵘이라고 하는구나 저 기체는! 크아. 끝내주게 멋
지다. ''
타츠야가흘린말을하리리가입에덥석문다.
‘‘AS를좋아하시는군요.”
“응, 엄청 좋아해. 지금 내가 타는 건 낡아빠진 대포돌이지만 언
젠가는 저 (레이봔같은 신형어F.”
“관둬.”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타츠야는 우두커니 내뱉었다. AS에 대
해 낙천적으로 지껄이는 하리리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이 눈에 거슬
렸다.

제3화 전사의 체통 l 179


‘‘AS같은건아무짝에도쓸모없어.”
“또 겸손 떠신다. 형아의 움직임 정말끝내줬어. 내가똑똑히 봤

다구. ”
타츠야가 쌀쌀맞게 외면하자 하리리는 쇠칭살에 매달린 재 그렇
게 호소했다. 제3자가 보면 누가 죄수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이렇게 폴짝 점프해서 헬기의 공격을 피하고 두다다다! 코하고
반격. 바로 격추해버리더라. 그렇게 멋진 AS의 움직임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니까. 실은 형은 알고 보면 에이스 .”
“그만해!”
완전히흥분한하리리를큰소리로야단치는타츠야.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안다 진심으로 (레이븐)과 그것울


조종하는 타츠야의 기술을 칭찬한 것이다.
그렇기에타츠야는그순수한칭찬을견딜수없었다.

“어.저가...”
험악한 상대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하리리는 붙임성 좋게 웃으려
했다. 그러한 소년병을 무시하고 타츠야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르나스탄을 탈출하기까지 벌인 전투들을● 자신이 쏜 (섀도)와


전투 헬기를 그리고 그것들에 타고 있었던 얼굴도 모르는 병사를
떠올린다. 자신은 그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일종의 자비심에서 비롯되었던 아키라 때와는 다르다. 그 싸움
에서 타츠야는 명확한 살의와 적의를 갖고서 트리거를 당겼었다.
당황한눈치의하리리가별안간손뼉을쳤다.
“아, 그렇구나. 잠을 못 자서 언짢은 거야. 좋았어, 모포랑 시트

180
를 골리올 테니 한숨 푹 자고 개운해지거든 이야기를 들려줘,'
멋대로 해석하고 소년은 쇠뿔도 단김에 뺄 기세로 달려 나갔다.
타츠야와 키쿠노를 영창에 단둘이 남겨두고.
‘‘저 애, 자신이 파수병이라는 자각은 있는 걸까요?',
그렇게중얼거린키쿠노가타츠야를돌아본다.
“타츠야 씨,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애쓴
다는 것은 타츠야도 잘 알고 있다.
“그건 전쟁이었어요. 타츠야 씨의 말처럼 그때 쏘지 않았다면 죽
은 것은 우리였겠지요. ”
“고마워, 키쿠노.”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의 심금을 전혀 울리지 못했다.
“하리리의 말마따나 지친 것 같아. 쉬어도 될까.'.
“. ..예.”
웅크린 타츠야에게서 키쿠노는 시선을돌렸다.

n

최근 며칠간 오르칸은 공회국 궁전의 지하 셸터에서 기거했다.


거의 두문불출한 그의 모습에 이맛실을 찌푸리는 자도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주위의 반응을 지금의 오르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히와 지상의 집무실만 오갔다.
예를들어그날도 .
“이제야발견된모양이야.''

제3화 전사의 체통 l 181


집무실 책상 위에서 한 장의 보고서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오르
칸은 웃었다.
“그, 그렇습니다, 각하.”
참모본부소속의 대령이 진땀을닦으며 설명한다.
“아프간으로도망쳤었구나코.그도참열심이라니까.’'
“하지만그와같은사소한일을각하께서직접.. . . ''
“그걸 결정하는 건 나야. 됐으니 이 안건은 내가 처리해둘게. 자
네는 이만 돌아가도 돼.”

오르칸은 손을 흔들어서 이야기를 끝내려 했다 그러나 대령은


그 말을 따르려하지 않았다.

‘‘실례지만어떻게처리하실생각이십니까?”
“으응?”
“설마쿠르디스탄에서있었던일을되풀이하시려는건....”
“무슨소린xF.”
노골적으로 시치미를 떼는 오르칸의 태도에 대령은 삠을 붉혔
다.
“그, 그 일로 우리나라가 얼마나 곤경에 처했는지 아십니까?! 이
이싱은코.” ,
저도 모르게 힐문하려던 대령. 오르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
진다.
“자네,시끄러워.,'
딱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그는 책상 서립을 열었다. 그 속에
든 것을 꺼내어 대령에게 겨눈다.
“가.각하..?,'

182
오르칸이 손에 든 구식 리볼버. 그 총구 앞에서 대령은 멍해졌
다.
‘‘분명이만돌아가도된다고했을텐데?''
“하’하지만.. . .”
“계속할거야?”

“시.실례하겠습니다.”
오르칸의 깨나른한 표정에서 진심을 감지했는지, 대령은 헐떡이
면서 재빨리 퇴실했다.
‘‘흥.”
코웃음을 치고 오르칸은 리볼버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었다. 정
면으로 보이는 실린더에 총알은 한 발도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눈치못챌거리도아니잖아?하여튼.. .”
고시랑고시랑 투덜거리며 그는 책상 위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
다.
“미하일로프 사장? 싱황에 변회카 약간 생겨서 말야. 실은一.”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미하일로프의 모습은 니사 기지에서 출발


한 수송 헬기 속에 있었다.
“역시동부로출병하는걸까요?”
“모르지.”
헬기의캐빈.비서인나탈리아의의문에딱잘라대꾸한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저게 마음
에 걸려.”
그렇게 말하며 미하일로프는 뒤쪽헬기 뒤쪽 격납고에 고정된

제3화 전사의 체통 183


빨간 적재물을 돌아보았다.
“굳이궁전의지하셸터까지가져오리는지시를내린걸보면용
도가 생각난 거겠지. ”

그 때문에 헬기의 목적지는 공회국 궁전 앞의 헬리포트가 아니


었다 가르나바쉬 교외의 게이트 앞에 착륙하여 그곳에서 적재물을
옮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크루핀스키가 저것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것 같았
습니다만. ''
“그래’,

“그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아예 가르나바쉬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고요.”
불만스러운표정을나탈리아는감추려하지도않았다.
‘‘본디 그 자는 내 부하가 아니라 지오트론 쪽 인간이댜 일은 하
고 있으니 내가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입장이 아니지. 무엇보다-.'’
별안간말올멈추는미하일로프를나탈리아가의아한듯응시했
다.

“왜그러십니까,사장님.”
“아니,아무것도아니다.”
마음속의구심을그는입에올리지않았다.
‘크루핀스키는 대체 누구의 지시로 움직이는 거지? 지오트론의
모건인가? 가르니스탄의 오르칸? 아니면-. '

그때, 화제에 오른 크루핀스키는 지구 반대쪽에 있는 고용주와


오랜만에 연락을 취하는 중이었다.

184
r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크루핀스키 박사낸
휴대전화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표면상으로는 냉정함을 가장하
고 있지만 숨길 수 없는 찌증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물으면 일이라고 밖에는 대답할 말이 없는데. 굳이 그런
질문에 시간을 할애할 만큼 회장직은 한가한가 보네.”
전화 상대는 지오트론 일렉트로닉스의 로버트 모건 회장. 세계
에서 손꼽히는 거대 콩글로머릿의 CEO가 상대여도 크루핀스키의
말투는 평소의 시건방진 태도 그대로였다.
어떻게보면수미일관적인거물이라할수있겠다.
r허어, 일이라. 그런 것치고는 꽤 쓸데없는 데까지 손을 뻗치고
있나 본데 누가 그렇게까지 하라고 했을까?왜
“우린 전쟁을 하고 있는 거리구. 당신의 명령으로 말이야. 예상
외의 사태는 당연히 일어니는 법이고 그런 사태에 임기응변으로 대
처할 필요도 있어야지”
r.... . ..J
“통신이나 정보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머나먼 미국 본토에서
전화 한 통으로 이쪽 사정을 관리한다는 건 억지스러워. 그 부분은
현지의 판단에 맡겨주지 않으면 우리로서도 힘든 일 천지리구.”
세치 혀로 궤변을 늘어놓는 크루핀스키에게 모건은 침묵으로 답
했다. 얼마 후, 다시 말을 잇는다.
r...이제그쯤해둬.J
무엇을, 이리고는크루핀스키도묻지 않았다.
r빅사, 자네는 ‘카이사르 프로젝트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다소의 장난은 눈감아 준 것이고.J

제3화 전사의 체통 l 185


“그렇게칭찬하니몸둘바를모르겠구만”
r허나 그것에도 한도가 있어. 프로젝트는 자네의 장난감이 아니
며 자네가 물 쓰듯 낭비하는 무인AS는 우리 회사의 자산이댜 나
도 회사도 횡금을 한없이 낳아대는 반지 따윈 안 갖고 있단 말이
다. 겐
“다행 아닌가? 니벨룽겐의 반지는 주인에게 불행과 파멸만 가져
다준다니까. '’
뗘“디음은없다.J
크루핀스키의 농담에도 모건은 동요하지 않았다.
r다음은 없다는 내 밀을 절대 잊지 말도록, 박사.핵
그러한 선언과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침묵한 휴대전화기를 집
어넣고 크루핀스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맙소사, 여전히 소심한양반이라니까.''


물론 그에게도 행동이 지나쳤다는 자각은 있었다. 조금 더 교묘
하게 처신할 작정이었으나 그 자신도 급변하는 상황에 끌려기는 바
람에 꽤 위험한 외줄을 타고 말았다.
모조리자업자득이긴하지만.
‘슬슬물러나야할때인지도.'
넙데데한파충류를연상시키는얼굴에희미한미소가떠올랐다●

‘‘이상인데무슨질문있나.”
‘‘이건...진심입니까?”
공회국 궁전 지하 셸터의 격납고, 오르칸이 직접 말한 ‘작전’ 내
용을 듣고 나탈리아의 안색이 바뀌었다.

186
“일단은 그런데? 사장한테는 익숙한 일일 테니 꼭 받아들여줬으
면 해..'
“..동부로출병하는것이확실한가.”
“사장님!”
나탈리아의목소리를무시하고미하일로프는고개를끄덕였다.
“그렇게대답해줄줄알았어.,'

슬며시 웃으며 내미는 오르칸의 오른손을 미하일로프는 무시했


다.
“사람참”

별로 아쉽지도 않은 듯 말하면서 오르칸은 오른손을 거두었다.


“헌데 아델리나 양이링은 어쩔 거야?”
“어쩌다니?''
“안 만나도 돼? 이대로 작전이 시작되면 이야기하기 어려워질
텐데. ”
“그럴필요없댜'’
미하일로프는 딱 잘라 말했다. 지체 없는 대답에 오르칸은 시시
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뭔데?”
“왜 그토록 이치노세 타츠야에게 집착히는 거냐?’'
“어?”
그 물음에 허를 찔렸는지 오르칸은 눈을 빛냈다.
“아아, 그거코하긴 그렇게 보이겠네. 응. 그렇게 보여도 이상할
것 없겠다.”

제3화 전사의 체통 l 187


낮은소리로반복해서중얼거린다.
“그게 말이지. . 난 딱히 그렇게까지 그에게 집착하는 건 아냐.
다만 ‘저 자'가 좀 말이지.',
등 뒤의 (투리누스)를 돌아보며 말하는 오르칸. 설명이 안 되는
대답에 미하일로프는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저자?”

“응’ ‘저자’.”
뜸을들이며오르칸은미하일로프의표정을살폈다
“그러고 보니 시장도 타츠야에게 이래저래 집착하는 눈치던데.
역시 마음에 걸리나 봐? 자신이 찍은 먹잇감을 남이 가로채는 건
싫다코같은 느낌이거든 ”

“상관없다,하고싶은대로해.”
하지만미하일로프의대답도여느때와다름없이쌀쌀맞았다.
“이치노세 타츠야가 그 정도로 사냥당할 자라면 내 눈이 삐었다
는 소리일 뿐이니까.”

“흐응 ,아그러셔.’'
대답이쉽게나오자오르칸은흥미를잃고등을돌렸다.
“정말시시한사람이라니까.미하일로프사장.”
그 말을 남기고 오르칸이 떠난 후, 남겨진 나탈리아가 미하일로
프에게 말했다.
“이런비겁한작전을진심으로받아들일작정이십니까.'’
‘‘분명 정당한 군사행동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제 와서 우리에게
불평할 자격은 없을 텐데.”
내뱉는밀투에나탈리아는눈올내리깔았다.

188
“역시대위님은변하셨군요.”

“예전의 당신은 그 애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책임을 지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군대를 버릴 만큼 긍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一.”
“착각하지 마라, 나타샤. 그때 나는 그 계집애를 구한 게 아니
다. ''
나탈리아의중얼거림을미하일로프가가로막았다.
“나는 그저 못 본 척해줬을 뿐이다. 그 계집애를 구한 건 그 애
본인이다. 나나 네가 아니다.',
“대위남...”
“나는대위가아니다.”
설득하듯 그는 되풀이했다. 나탈리아에게, 혹은 자신 스스로에
게 .

“대위가,아니란말이다.,'

o

타츠야는AS의 콕핏 블록에 갇혀 있었다.


‘이게뭐야.'
콕핏의 레이이웃은 (섀도) M형이다. 그가 처음 탄AS이며, 어
떻게 보면 (레이븐) 이상의 파트너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섀도)리는 이름은 불길한 인상만 주는
존재였다. 전날의 전투에서 오퍼레이터와 함께 숨통을 끊은 가르나
스탄군의 기체

제3화 전사의 체통 l 189


‘젠장,내려줘!내려달리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타츠야. 그러나 전신을 감싼 마스터 슈
트가 억압복으로 변하여 몸을 묶는 바람에 자신도, (섀도)도 손가
락 하나 끼딱할 수 없었다.

그때 콕핏에 경보가 울렸다. 동시에 정면 스크린에 일렁거리며


나타니는 AS의 실루엣 그 모습을 보고 타츠야는 숨을 삼켰다.
‘저건I (레이봔?!'
놀랄 새도 없이 파란 AS는 이쪽으로 돌진했다. 그 손에서 포효
하는 단분자 커터. 내질러지는 찌르기의 궤도는 그 전투에서 자신
이 (섀도)를 해치웠을 때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아아아 . '
번뜩이는칼날끝이 스크린 가득히 퍼지고력.
“아아아아아악!!”
자신의비명소리에놀라그는눈을떴다.
‘‘아, 하, 하학.”
영창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타츠야는 세차게 숨을 헐떡였다. 그
때 진땀이 흐르는 그의 얼굴을 서늘하게 적신 천이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형언할 길 없을 만큼 부드럽고 기분 좋은 감
촉. 그리고 그를 염려스럽게 내려다보는 검은 머리 소녀一.
‘‘키쿠노,구나.. ..”
‘‘가위에 심하게 눌리시더군요, 타츠야씨.,'
자신을 간호해주는 키쿠노의 모습. 멋쩍음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든 나머지 타츠야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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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몽을꿨어.. . . ’'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키쿠노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것을.
“미’미안!”
허둥지둥몸을일으키는타츠야.
“요, 요즘, 계속 이러네. 폐, 폐만 끼쳐서, 미안해''
“아뇨, 신경 쓰지 마세요.’'
온회한 미소를 머금으며 키쿠노는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졌다.
“괜찮으시면 조금 더 누워 계실래요?''

“이’이제됐어.’'
초조해진 타츠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콤한. 그러나 어색한
분위기를 쇠창살 너머의 발소리가 깨뜨린다.
‘‘이봐륙물가져왔어一어어?!’,
물통을 들고 헐떡이며 달려온 소년병 하리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타츠야와 키쿠노 두 사람을 번갈아 쳐
다본다.
“우와, 타츠야 형아도, 키쿠노 누나도 어른이구나.”
“얌마,뭘오해하고앉았냐?!”
타츠야가 초조한 나머지 소리쳤을 때 기지 전체에 경보가 울려
퍼졌다.
‘‘뭐야?”

아직 잠이 덜 깬 타츠야의 머리에 급변하는 상황이 기운을 불어


넣었다. 키쿠노도 날카로운 눈으로 창밖을 응시한다.
동시에 쇠창살 너머에서 하리리가 달려 나갔다.

192
“싱황을보고올테니기다리고있어.”
‘‘야 .”

복도 모퉁이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하리리. 타츠야는 키쿠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생각해?”
“모르겠어요 하지만주의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일톤기지는불타고있었다.
차례로 폭염을 내뿜는 병영. 붉은 불꽃을 받고 서 있는 세 대의
낯선 AS를 아프간군 병사들이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다.
r기,기습이다!!J
r가르나스탄인가?!J
허를찔려당황하는외중에도병사들의대처는신속했다.
AS 오퍼레이터들은 격납고에서 자신의 기체에 올라타고. 디른
병사들도 그것을 원호하려고 잡다한 병기를 손에 들었다.
“진정해라, 이 자식들아!!”
기지사령부에서사야프소령이통신기에대고고함쳤다.
“아무리 신형이라 해도 적은 세 대력알겠냐’ 고작 세 대다! 우리

에게는 M6와 (새비지)를 합치면 10대 이상의 AS가 있다! 숫자로


시간을 버는 거다!”
결국 사수하라는 명령이었지만 부하들에게서 불만의 소리는 나
오지 않았다.
“이미 헤리트 본대에도 상횡을 보고해뒀다! 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텨라!”

제3화 전사의 체통 l 193


그렇게 명령한 후 사야프는 뒤에 선 부괸을 돌아보았다.
“나도 나갈 테니 뒤를 부탁한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제2소
대 보병들을 마을로 보내서 주민들을 피난시켜둬.”
“알겠습니다..'

경례를붙이는부관을남기고사야프는사령부에서튀어나갔다.
잰걸음으로 격납고로 서두르며 십자 굉학센서를 빛내는 적 AS를
증오스럽다는 듯 노려본다.
“가르니스탄의비밀무기였구니-흥!”
혹시 그 두 포로를 탈환하러 온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들은 터무
니없는 역귀를 떠맡고 만 셈이다.
타츠야와키쿠노의모습을떠올리고시야프는신음했다.
‘도대체가 그렇게 어린 계집애가 그런 차림으로 군인이라니 발칙
하게. 여자라면 여자답거F.'

머릿속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던 불평이 묘한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분명 일본인이라고 했었지. 이러니 다신교도리는 것들은혁응?'
사야프의 눈이 가늘어진다. 허둥거리며 뛰어다니는 소년병을 발
견했기 때문이다.

“이봐, 거기 너. 분명 하리리 하사였지.”


“아,소령님.실은-.”
안도한눈치의하리리를사야프가큰소리로호통쳤다.
‘‘이 비상시에 뭘 하고 있나! 그러고도 네놈이 AS 파일럿 나부랭
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아직 지하어▷.”

194
“변명은됐다!나갈테니따라와!,’
“잠깐만요,포로가-꾸웹?!”
A뺘프는 하리리의 목깃을 잡아끌고 거지반 질질 끌다시피 하며
뛰어갔다. 그의 머리에서 포로 두 사람의 싱황은 잊혀진 지 오래였
다.

“야’이거위험하잖아?!'’
별안간전투가시작되자타츠야는초조해졌다.
“하리리! 누구 없어?! 도망 안 칠 테니 꺼내줘! 이대론 깔려죽는
다고! ”

목청껏외치지만달려오는자도,대답하는목소리도없다.
창밖의 포성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어쩔수없군요,자력으로탈출하지요.''
진지한표정으로키쿠노가말했다.
“어떻게?”
‘‘이걸',

그녀가손에든것을보고타츠야는아연해졌다.
“프플리스틱폭탄?!”
예전에 D.O.M.S.에서 아델리나가 쓰는 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
었다. 조그만 튜브에 채워진 찰흙 모양의 그것은 군용 C-4폭약이
분명했다.

‘‘이런흉흉한걸용케갖고들어왔네.''
“그야감출곳은많이 있으니까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키쿠노는 낡은 쇠칭살의 열쇠 구멍에 찰

제3화 전사의 체통 l 195


흙 모양 폭약을 솜씨 좋게 발랐다. 뒤이어 도화선이 붙은 뇌관을
집어넣는다.
“폭파할테니물러나계세요.”
“오케이.'’
도회선에 점화하는 것과 동시에 타츠야는 귀를 막고 입을 반쯤
벌렸다. 이러한 사태에도 어느 정도라면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
슬프다리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폭발
영창의 공기가 흔들리고 폭음과 함께 솟구친 조그만 불꽃이 천
징을 비췄다. 하얀 연기가 퍼지는 가운데 자물쇠가 부서진 쇠창살
이 끼익 흔들린다.
성공이다.

“가요,타츠야씨.”
“그래.,'
폭파를 알아차린 아프간군이 달려올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은
없었다. 습격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도없는감옥을뒤로하고두사림은달려나갔다.

전횡은적에게압도적으로유리하게홀러갔다.
침공한 여러 대의 ‘십자 눈들은 아프가니스탄군의 AS부대를 마
음껏 휘젓고 돌아다녔다.
“뭐야, 저 녀석들?”
기지가 내려다 보이는 계곡 위에 서서 (부시마스터)의 하리리는
놀라움을 김추지 못했다.
‘십자 눈'은 이미 불가시형 ECS의 위징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안

1“ l
방처럼 마구 날뛰고 있었다.
r끄어어어억!!J
“소령님?!”

아군기가 하나 더 쓰러졌다. 함께 출격한 人舛프 소령의 (새비


지)다. 고립된 부하의 M6를 원호하려고 너무 깊이 들어가는 바람
에 적의 집중사격을 받은 것이다.
‘진정해.,

자신에게 그렇게 되뇌면서 하리리는 ‘십자 눈' 한 대에게 유탄포


를 겨누었다 적은 아직 이 (부시마스터)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
았다. 그렇다면 선제공격으로 한 대는 확실하게 없애야 한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혁자신에게 그렇게 되뇌면서 하리리는


트리거를 당겼다.
그러나 그 순간 ‘십자 눈,이 드높이 도약했다. 조준이 빗나간 (부
시마스터)의 포탄은 엉뚱한 곳에 떨어져서 허무하게 폭발했다
“알고있었어?!”
놀라는 하리리의 (부시마스터)에게 ‘십자 눈’의 포화가 집중된
다. 좁은 암석 지대에 자리 집은 (부시마스터)에게는 그것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으아악!”
(부시마스터)의 오른쪽 무릎 아래가 날아갔다. 균형을 잃은 기
체는 꼼짝없이 고지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
콕핏까지 흔들리는 세찬 충격에 하리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
다. 혀를 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제3화 전사의 체통 l 197


최대의 충격. 땅에 격돌한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게 된 기체를
끝장내려고 ‘십자 눈’ 한 대가 다가왔다.
“아-아아oF.’,
그 모습에 하리리는 격심한 공포를 느꼈다. 침묵한 기체를 움직
여 보려고 조종스틱을 허무하게 잡아당겼다. 반쯤 마비된 머리에
기체를 버리고 달아난다는 판단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한 소년병을 비웃기라도 하듯 ‘십자 눈'은 (부시미스터)에게
라이플을 겨누었고다음 순간 재차 도약하여 회피기동을 취했다.
‘‘어?”
죽다 살아난 하리리는 멍한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친, 이쪽으로 달려오는 두 대의 AS. 파랑과 연지색으로 칠해진
그 기체의 이름을 하리리는 알고 있었다.
“저건... (레이븐)?''
r그포로놈들의기체인가.J
통신기에서 들리는 사야프 소령의 목소리도 의아함으로 흔들리
고 있었다.
r대체누가타고있는거지?J
‘..설마!,

“다행이다. 늦지 않았어.”
하리리와 (부시마스터)가 무사힘을 확인하고 타츠야는 안도했

“놈들이 여기까지 쫓이왔을 줄이야.''


(레이븐) 1호기의 콕핏에서 중얼거리는 타츠야. 그는 파괴되어

198
가는 기지를 침통하게 둘러보았다.
r타츠야씨. 지금은적에게 집중하세요.4
“응,그럴게.”

키쿠노의 지적에 타츠야는 다시금 (켄투리이) 부대로 몸을 돌렸


다.

“자아, 지금부터가진짜다. 덤벼보라이거야!”

포효하는 타츠야 허나 그 눈앞에서 (켄투리아)들은 마치 썰물


빠지듯 후퇴했다.
“도망치는건가?,'
“아뇨, 타츠야 씨, 저길 보세요코.,'
교대하듯전진한빨간AS를목도하고타츠야는놀랐다.

“(레이븐) 2호기?”

‘T

빨간 실루엣과 플라스마의 격류가 4호기의 스크린에 아로새겨졌


다.
“(레이븐) 2호기?! 아델리나씨의? 어떻게 여기에?!”
경악하는키쿠노에게대답하는자는없었다.
애자일 스러스터를 내뿜은 2호기가 키쿠노와 4호기에게 돌진했
다. 낮은 자세로 땅 위를 이동하여 등 뒤로 돌아들어 가려는 전술
기동. 4호기의 현 상태로는 그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한다.
4호기의 텅 빈 등에 2호기의 라이플이 부딪쳤다. 급변하는 전황
에 대처하지 못하고 키쿠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제3화 전사의 체통 I 199


r어딜.J

옆에서 날아든 풀오토 사격. 타츠야의 '호기가 발사한 원호사격


이다. 회피기동을 강요받은 2호기는 그 상태로 순순히 이탈했다.
r다친 데 없지, 키쿠노?핵
“예, 덕분에요. '’
달려온 1호기는 4호기와 등을 맞댔다. 2호기는 일단 후퇴했다
가, 등을 맞댄 두 대를 중심으로 단속적인 부스트 기동을 되풀이하
며 그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움직임을키쿠노는주의깊게관찰했다.
“타츠야씨,저건 .”
r그래,무인기야.J
애자일 스러스터에 의한 부스트는 AS에게 파격적인 속력을 가
져다주지만 동시에 콘덴서 전력소비가 대단히 심했다. 함부로 뿜어
대다간 눈 낌짝할 사이에 ‘숨이 차버리고' 마는 것이다.

키쿠노도 알래스카의 유콘 연구소에서 수령한 (블레이즈) 사양


의 2호기를 테스트한 적이 있기에 그것이 얼마나 다루기 까다로운
지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2호기는 단속적인 부스트 분사의 틈을 통상 주행


과 도약으로 메움으로써 장시간 동안 스러스터 기동 속도를 유지하
고 있었다. 이토록 애자일 스러스터의 ‘호흡을 교묘하게 유지할 수

있는 오퍼레이터는 타츠야 외에는 그 조종기술을 복사한 (켄투리


oD의 무인 AI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답은 하나다. 지금의 2호기가 (켄투리애와 마찬가


지로 임페리엄 네트워크를 통하여 조작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20이
r가르나스탄이 격추된 2호기의 잔해를 회수해서 수리했다는 뜻
인가. J
“예, 그런 다음 (켄투리이)와 마찬가지로 무인기로 만든 걸 테
죠”

타츠야와 의견을 니누던 키쿠노는 어떤 의문에 도달했다


자신조차 2호기의 모습을 보고 동요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치명
싱을 입을 뻔했다. 아델리나의 망령이 나타났다는 착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타츠야씨는나보다더크게놀랐을텐데’
가르나스탄에서 단둘이 피신히는 동안 그가 보여준 아델리나에
대한 마음과 회한의 몸부림을 떠올려본댜 그 기억이 마음을 갈기
갈기 찢었지만 키쿠노는 개의치 않고 타츠야에게 물었다.
“저어침착하시네요,타츠야씨.”
r침착해?누가?젠
담담한타츠야의목소리가별안간낮아졌다.
r나는뚜껑 열렸어.센
그말에키쿠노는오한에사로잡혔다.
r리나를죽였을뿐만아니라그녀석의2호기를빌어먹을인형으
로 만들어서 나한테 보내? 미친 거 아니야?겐
“타츠야싸...”
2호기의 새까만 악의와, 그것마저 웃도는 타츠야의 고요한 분노
와 격정. 키쿠노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느꼈다.
r없애버릴테다오른쪽이야, 키쿠노!J
“아.옙!”

제3화 전사의 체통 l 201


타츠야의 지시대로 키쿠노는 콕핏의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잽
싸게 좌우로 갈라지는 두 대의 (레이봔. 그러나 착지한 1호기의
기체가 살짝 흔들렸다.
냉정힘을 잃은 타츠야의 조종 실수얄7w 아니면 가동한계의 극
한까지 혹사당한 기체가 마침내 두 손을 든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
러한 사소한 틈조차 2호기의 AI는 놓치지 않았다.
애자일 스러스터 전력가동. 플리스마를 끌면서 2호기가 맹금류
처럼 삐르고 날카롭게 1호기를 덮쳤다.
아니.저것은력.

‘타츠야씨,조금전에는일부러?’
누적된 키쿠노의 경험과 직김은 1호기가 보여준 빈틈이 타츠야
의 낚시임을 알려주었다 그것에 낚이듯 돌진하는 2호기.
그 오른손이 등에 멘 10식 단분자 커터를 잡아 뽑는다. 라이플로
견제하면서 단숨에 몰아치는 발도 돌격. 스러스터의 속도를 최대한
으로 살린 공격법이었다.

겹쳐지는(레이븐)들의그림자.그직전에1호기가움직였다.
2호기의 기동을 완전히 꿰뚫어보고 칼날이 내질러지는 바로 그
타이밍에 몸을 내준 것이다. 2호기의 참격을 오른쪽 어깨로 받아내
면서 왼쪽 다리를 축으로 우측 반신을 뒤로 당긴다.
세찬 파쇄음과 불꽃, 깎여나간 오른쪽 어깨의 장갑. 그러나 결코
치명싱은 아니다. 1호기는 원의 움직임으로 2호기의 돌격을 받아넘
기면서 그 한 번의 동작으로 상대의 등 뒤를 뺏었다.
“멋져요!”
키쿠노는저도모르게찬사를보냈다.

202
2호기의 등 뒤에서 1호기의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지근거리에
서 발사된 풀오토 사격을, 키쿠노도 4호기의 기관포발사로 원호했
다.

두 대의 (레이탑에게 십자포회를 뒤집어 쓴 2호기는 최대 부스


트 기동으로 이탈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회피하지 못하고 기관포
탄들이 명중. 비록 소구경탄이지만 2호기의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
r一이대로해치울수있을까?J
‘‘방심은금물이에요,타츠야씨.’,
그렇게 나무리는 키쿠노도 조금 전의 광경에서 확실한 반응을
느꼈다. 아무리 자신들의 기체가 만신창이여도 같은 (레이븐)끼리
2대 1로 붙은 전투인 것이다.
‘나와타츠야씨라면질리없어요.'
다시 거리를 벌린 2호기와 대치하면서 키쿠노는 생각했다. 바로
그때 2호기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r밉소사, 제법이잖아 타츠야. 그리고 키쿠노 씨랬나?백
비아냥거리는젊은남자의목소리.타츠야는신음했다.
r그목소리-너.오르칸이냐?!꿱

두 대의 (레이븐)은 오르칸의 눈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비로소 밝아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한눈에도 동요한 눈치의 적
기는 흡사 서둘기 짝이 없는 인형 연극 같았다. 마치 꿈속처럼 기
분이 어찌나 둥실거리는지 오르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r그쪽상태는어때?백

제3화 전사의 체동 l 203


통신기에서 들리는 크루핀스키의 목소리가 오르칸을 현실로 도
로 끌어냈다.

“아라?’'
두세 차례 눈을 깜빡거린다. 딱딱한 시트에 고정되어 있던 감각

이 순식간에 돌이왔다. 눈을 뜨자 그곳은 이미 (투리누스)의 콕핏


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와 대치 중이던 (레이븐)의 모습이 정면 스


크린에 비치고 있다.
“. ..나쁘지는않네.’'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면서 오르칸은 대답했다. 취기 같은 느
낌은 남아 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r그래? 처음 겪는 사례인 만큼 지금은 신중하게 가자고. 어쨌거
나 ,000킬로미터 바낄까지 자네를 날린 거나 마찬가지니까.J
그렇다. 아프가니스탄에보낸 (레이븐) 2호기는 디른 (켄투리
이)처럼 x愷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투리누스)와 그
A,를 매개로 오르칸이 직접 원격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r왜네가?설마네가2호기에타고있는거냐.J
뒤이어 통신기에서 흘러나온 것은 타츠야의 목소리였다. 임페리
엄 네트워크를 통한 장거리 통신은 딜레이 없이 오르칸과 타츠야를
연결해주었다.
r그 녀석이 (켄투리oH의 A,로 움직인다는 건 안다. 너. 텅 빈 콕
핏에서 조종도 하지 않고 거만하게 버티고 앉아 있는 거냐.J
“입도참거칠지.”
여봐란 듯 기막혀 하며 오르칸은 타츠야에게 대꾸했다. 물론 타

204
츠야의 말은 빗나갔지만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투리누스)는 TAROS에 의한 사고제어를 실현한 AS지만, 오퍼
레이터인 오르칸이 기체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머릿속으로 하나하
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략적인 이미지를 TAROS가 읽어내
고 그것을 AI가 실현시키는 것이다.
r어디 그 낯찍을 보여 봐, 치킨 자식아! 그럴 배짱이 있다면 말이
야!J
티츠야의 서투른 도발이 오르칸의 심술궂은 마體 지극했다.
“좋아, 타츠야. 얼굴을 내밀면 되잖아.''
r뭐?J
“눈깔똑똑히뜨고자알보라고.”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오르칸의 의지는 다시금 멀리 떨어진 (레
이뵘 2호기로 빨려 들었다.

‘‘저게뭐야?”

스크린에 비치는광경에 타츠야는놀라고당황했다.


1호기와 4호기의 눈앞에서 2호기가 별안간 주저앉은 것이다. 그
대로 두 손과 두 다리를 땅에 대고는 무방비한 강착자세를 취한다.
“저 자식이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설마 진심으로 얼굴을 보여
주려고?'’

r모르겠지만지금은신중해야해요낸
키쿠노와 통신을 니누는 사이에 2호기의 등 부분에서 해치가 열
렸다. 훤히 드러나는 콕핏 내부.
r저건혁.J

206 l
확대되는 1호기의 스크린, 그곳에 비치는 모습을 보고 타츠야는
숨을 삼켰다.
초췌해진표정혁.

흐트러진금빛머리카락-.
마스터슈트에구속된몸-.
“라..리나?,'

헐떡이는듯한목소리로타츠야가신음했다.
r어때, 김동의 대면 아냐?핵
악의로 가득한 오르칸의 목소리와 함께 2호기가 또다시 몸을 일
으켰다.

기계음과 함께 (레이븐) 2호기의 해치가 닫힘으로써 콕핏의 아


델리나를 외부와 차단했다
r그럼이제부터가진짜야낸
‘큭 . '’

조롱하는 오르칸의 목소리. 아델리나는 신음했다.


마스터 슈트가 억압복처럼 그녀의 몸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기
에, 그녀로서는 스크린에 비치는 전횡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이자식 .”

r너무 화내지 마, 아델리나 양. 모처럼 소중한 친구가 있는 곳까


지 데려와줬잖아낸
아델리나의 어여쁜 얼굴에 초조함이 감돈다.
가르나바쉬에서 2호기에 갇힌 후 기체의 컨트롤을 되찾을 수 없
을까 싶어서 갖은 수단을 시험해보았지만 모조리 헛수고였다. 지금

제3화 전사의 체통 l 207


의 2호기는 임페리엄 네트워크를 통하여 (투리누스)가 원격조작하
고 있기에 콕핏에서는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싱황에서 자신을 굳이 2호기에 태운 이유는 하나밖에 없
다.
“나를인질로쓸작정이냐.그런짓을해봤자소용없댜”
r그럴까?효과만점인것같은데.J
오르칸의 말대로였다. 스크린에 비친 타츠야의 1호기는 그저 멍
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1호기에게2호기가칼을내지르며덤벼들었다.
“위험해,타츠야력.’,

r피해줘!핵
아델리나의절규가타츠야를제정신으로되돌렸다.
“어,어어어?!''
2호기가 내지른 검의 번뜩임이 스크린에 이로새겨진다. 타츠야
는 순간적으로 조종스틱을 잡아당겨 1호기를 뒤로 물렸다.
1호기의 머리 위를 단분자 커터의 칼날이 아슬이슬하게 통과했
다.
부러진 라이플이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균형을 잃고 꼴사납게
엉덩방아 찧는 1호기. 조금 전처럼 일부러 보여준 꾐수가 아니다.
“리나어떻게...너,어떻거F.”
흔란에 빠진 타츠야. 조금만 생각해도 알 만한 대답이 나올 생각
을 않는다. 마비된 것 같은 뇌로 멍하니 2호기를 올려다본다.
아니, 그러한 타츠야에게도 이 상황에서 단 하나 이해할 수 있는

208 l
점이 있었다.
r뭐 하는 거냐. 타츠야?! 얼른 일어나!J
눈앞의아델리나가의심할여지없는본인이라는것 .

“으.으아아아악!”
r이해되셨나?핵
통신기의 목소리가 아델리나에서 오르칸으로 전환된다. 동시에

내리쳐지는 2호기의 단분자 커터.


r어이쿠 맙소사. 그 꼬락서니는 뭐지? 제대로 서서 싸우지 않으

면 죽어버릴 텐데, 타츠야?J


차례로 내질러지는 참격 앞에서 1호기는 땅을 납작 기며 후퇴했
다. 이쪽을 부채질하는 오르칸의 목소리가 콕핏에 울렸다.
r아니면 소중한 동료외는 못 싸운다는 뜻일까? 그것도 이상한
걸 우리나라 병人튼 세 명이나 죽여 놓고서.J
아니야속으로타츠야는절규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만약 적병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죽은 것은 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을 타츠야는 입에 담지 못했다.
r그런데도 이제 와서 그녀를 다치게 만드는 건 싫단 말이지. 그
건 차별 아닌가?J
간신히 거리를 벌리고 한쪽 무릎을 꿇은 1호기에게 숨 돌릴 틈도
없이 라이플이 무자비하게 겨누어진다. 스크린에 비치는 새까만 포
문.

내가리나에게죽어?!말도안돼-.
r어림없어요!봬

제3회 전사의 체통 l 209


통신기에서 들린 고함소리와함께 스크린이 크게 흔들렸다.

거대한 질량의 강철들이 부딪치면서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옆


에서 치고 들어온 4호기가 2호기와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이다.
한데 얽힌 채 대지에 쓰러지는 두 대의 (레이븐). 타츠야는 그
모습에서 맨손 격투를 벌이는 두 소녀의 환영을 보았다.

r얼씨구, 남자의 승부에 끼어들다니 촌스럽기는백


“닥치세요.”
도발하는 오르칸에게 키쿠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때 별안간 통
신이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r4호기一키쿠노냐?!겔

귀에 익은 소녀의 목소리에 키쿠노는 그리움을 느꼈다. 아아, 그


러고 보니 그녀와 AS의 통신기로 대회를 나눌 때는 언제나 목숨을
건 결투 중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오늘또한 .
‘‘어머나,아델리나씨.오랜만이네요.’,
생각도 못한 재회를 나눈 연적에게 키쿠노는 평소처럼 밀을 걸
었다.
“잘지내시는듯하여기뻐요.”
r이런꼬락서니다미는.J

절박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아델리나. 그녀의 2호기를 키쿠노의


4호기가 깔고 앉았다. 설령 4호기의 상태가 말이 아니라 해도 완력
과 중량은 이쪽이 위였다.
“조금만얌전히계셔주실수없나요?”

21이
r그러고싶은마음은굴뚝같지만기체가내조종을안듣는다낸
“어쩔수없군요.',
어깨의 서브 암을 꺼내어 크게 휘두른다. 그 끝에서 열렸다 닫히
는 격투용 클로.
“이대로 콕핏을 찌부러뜨리면 타츠야 씨는 저만의 것이 되겠네

r야!뾔
일쏭달쏭한 익살에 아델리나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물론 어디까
지나 농담이다.
‘‘갑니다.”
후려쳐진 클로가 노리는 곳은 2호기의 콕핏이 아니라 머리였다.
목의 이음매를 비들어버리면 AS는 그 구조상 확실하게 작동을 멈
춘다.
그러나력.
r비켜,키쿠노!!J
“예?!”
그순간2호기가폭발했다.
4호기에게 깔린 채 애자일 스러스터를 최대출력으로 가동. 막대
한 추력을 견디지 못하고 4호기의 거대한 몸이 퉁겨 날아갔다.
‘‘꺄악!!,’

r하하하하하, 싱당히 괜찮은 성격인데. 아가씨.백


오르칸의 홍소와 함께 단분자 커터가 4호기의 허리를 깊숙이 후
벼 팠다. 단숨에 다리의 밸런서가 파괴당하면서 4호기가 넘어졌다.
“,.실수했네요.”

제3화 전사의 체통 l 211


r아냐아냐, 꽤 괜찮은 선이었어. 아까웠디구낸
일어나지 못하고 바르작거리는 4호기를 2호기가 내려다본다. 그
모습에서 키쿠노는 시선을 돌렸다.
“숙녀를 인질로 심는다는 촌스러운 방법을 쓰는 분께 칭찬 들어

봤자 하나도 안 기뻐요. ''


r통렬하신걸. 하지만 말야, 사실은 니도 이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어. ‘그 자'는 다른 모양이지만쉔
‘...그자?,
의미심장한 말투에 키쿠노는 이맛실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
나 오르칸은 먈을 이었다.
r그래도 역시 안 되겠어. 저 녀석한테는 나도 진짜 화가 나기 시
작했거든 J
돌아보는 2호기의 건너편에서 1호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r타츠야, 너는 언제까지 멀쩡한 척하고 있을 거냐?핵


오르칸의 통신이 1호기의 콕핏에 울렸다. 타츠야는 잠지코 그 말
에 귀를 기울였다.
r너 역시 전쟁의 진흙탕에 진즉에 어깨까지 빠진 몸이면서. 헌데
도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하다니. 바보 같아. 그런 어중간한 점을 보
고 있자니 화가 치밀지 뭐야낸
‘하긴그래.’
놀리는 음성 뒤에 숨겨진 진심어린 분노. 그것을 감지하고서 타
츠야는 말없이 동의했다.
어떠한 이유가 있든, 타츠야는 일본의 평회로운 일싱을 벗어나

212 I
전장에 설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목숨을 이 손으로
뺏었다. 그래놓고서 지금의 그는 결별했다고 믿은 일상의 논리와
윤리관을 여태껏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중간한 것이 아
니고 무엇이랴.
“이봐.오르칸.”
r왜?J
“너는이미안멀쩡한거냐?”
r. .... . . . . . . . . . .하하낸
긴침묵후.오르칸에게서돌아온것은웃음소리였다.
r하하,하하하하하.. ..J
낮고 은은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마치 우는 것 같기도 했다.
r하하하하효f당연하잖아셈
웃음이끊어짐과동시에어조가180도바뀌었다.
r이런 싱황에서 어떻게 멀쩡하게 있을 수 있겠어낸
그가감정 없이 말하는것과동시에 2호기가움직였다.
손에 든 10식 단분자 커터를 약간 높은 위치에서 고쳐든다. 그
칼끝은 1호기의 콕핏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r이제 됐다. 뒈져버려, 이 어중간한자식아낸
‘어중간한자식이라-그래.그말이맞아.’
결국 지금의 타츠야는 평회로운 나날과도. 가혹한 전징괴도 진
정한 의미에서 익숙해질 수 없었다. 양도 늑대도 되지 못한 채 양
쪽의 경계선에서 벌벌 떨며 돌아다닐 뿐인 어중간한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그 어중간한 녀석은 지금 이 전장에서 무엇을 해야 할
까.

제3화 전사의 체통 l 213


버티고 서 있는 (레이븐) 2호기와 그 내부에 사로잡힌 아델리나
를 타츠야는 말없이 응시했다.
양의논리에따라2호기에게실해당해야할까?그건싫다.
늑대의논리에따라아델리나를죽여서라도살아남을까?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해답은하나밖에없다.
‘내손으로리나를구할테다.’
할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 아니, 해야만 한다.
타츠야는숨을깊이들이마셨다.
r이제야할마음이들었나?핵
오르칸의 도발도, 엎어진 키쿠노의 4호기도, 사로잡힌 아델리나
의 존재도 전부 머리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타츠야가 보고 있는 것은 스크린에 비친 빨간 2호기의 모
습, 오직 그것뿐이었다.
r그런거라면一죽어라.책

동시에 2호기의 스러스터에 불이 깃들었다. 플라스마제트의 굉


음이 귀를 찢는다.

부스트 기동으로 돌진하는 2호기와 그 손에 들린 10식 단분자


커터의 칼날을 타츠야는 지켜보았다.
그 모습과 움직임은 악몽 속에서 본 1호기의 그것과 놀랍도록 똑
같았다.
‘당연하겠지.,

가르나스탄의 (섀도)를 해치운 1호기도, 눈앞에서 쇄도하는 2호


기도 둘 다 같은 (레이븐)이고, 게다가 조종하는 사람도 똑같이 타

214
츠야인 것이다.

본인이냐복제된AI냐하는차이는있어도.
‘. ..그렇다면!'
집중코.

육박하는 단분자 커터의 칼끝. 그 무시무시한 궤도를 타츠야는


예측했다.
집중一.

읽어! 생각해! 내가 2호기라면 어떻게 공격할까? 어떻게 죽일


까?
집중 .

r끝이다!겐

다음 순간, 2호기의 찌르기가 1호기의 흉부를혁콕핏을 깊숙이


꿰뚫었다.
r타츠야씨?!핵
r타츠야!M
절규하는두소녀.그러나력.
“아니, 아직 멀었어.’,
반파된 1호기의 콕핏에서 타츠야가 신음했다.
단분자 커터의 칼날은 콕핏의 천장 바로 밑을 통과했다. 타츠야
의 머리 위, 불과 몇 센티미터 부분을.
내질러진 칼의 궤도를 완벽하게 읽어낸 다음, 명중 직전에 기체
를 이주 살짝 움직여서 치명싱을 피해낸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기술이었다.
칼날이 콕핏을 관통했을 때 산산이 튄 파편이 왼쪽 어깨 부근을

제3화 전사의 체통 l 215


깊이 베었다. 지근거리에서 굉음이 터진 탓에 오른쪽 귀의 고막도
찢어졌다. 새빨갛게 물드는 시야와 멀어져가는 소음.
그러나 타츠야는 아직 살아 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다. 아직一
씨울 수 있다!

r무,무모하긴一죽을생각이냐?!책
“뭔소리야.이건전쟁이라고.”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다. 차례로 다운되는 스크린 너머로 2호
기를 노려보며 조종스틱을 쥔 양팔에 힘을 담는다.
거의 시체 상태에 가까운 1호기는, 그럼에도 오퍼레이터의 의지
에 부응해 주었다. 그 양팔이 2호기에 얽혀든다.
“이렇게된이상끝까지무모해야살아남겠지!”
2호기를 단단히 압박한 채 1호기가 단분자 커터를 뽑았다. 역수
로 쥔 공격이 2호기의 콘덴서를 꿰뚫는다.
r타一타츠야아아아!!J
일그러진오르칸의목소리가뚝끊어졌다.
아델리나의 2호기는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가 이내 정지했다.
주저앉으려는 기체를 1호기가 상냥하게, 그리고 힘차게 떠받친다.
한데 얽힌 두 대의 (레이븐)은 흡사 재회의 포옹을 나누는 것 같
기도 했다.

둔중한 기계음과 함께 (레이븐) 1호기의 콕핏 해치가 외부에서


열렸다.
“아코.”
비쳐드는 일몰의 잔광에 타츠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아하니

216
그 짧은 시간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타츠야. M .,타츠야....”
그 목소리를 듣고 그는 정신을 차렸다. 역광 속에서 소녀의 그림
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씬하고 균형 잡힌 몸매와 춤추는 금빛 포니테일. 예리하고 단
정한 이목구비가 눈물로 얼룩져 있다.
가르나스탄에서 생이별을 한 지 보름도 안 지났음에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너였구나.리나.”
‘‘타츠야.... '’
낙천적으로 웃는 타츠야. 아델리나는 당황했다. 마스터 슈트를
벗고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서와.”
“..응.'’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아델리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고동
이, 온기가 하나로 녹이든다.
“미안하다’타츠oF고맙다.”
“됐어.게다가인사해야할사림은나야.”
“뭐?''
온화한미소를머금고타츠야는아델리나와맞잡은오른손을물
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난 AS에 대한 내 재능을 시시한 것이라 여겨왔어. 파
괴와 살육 밖에 못하는 재능이라며 꺼렸었지. '
“. ..알아.”

제3화 전사의 체동 l 217


“하지만 오늘 비로소 안 것 같아. 이 힘으로 니는 너를 구할 수
있었어. 그것만이 아냐. 이 힘은 지금까지 계속 니를 지켜줬던 거
야. ”
‘재삼스럽군.”

“응, 정말새삼스러워 하지만 그걸 가르쳐준 건 너야. 고마워”


진지한 목소리로 타츠야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아델리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
“헌데네놈은뭘하고있는거냐?,.
아델리나가 험악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곳력타츠야의 왼팔에 키
쿠노가 떡하니 매달려 있었다.

“너무하세요,타츠야씨”
고개를 숙이고 알기 쉬운 거짓울음을 터트리면서 키쿠노는 타츠
야에게 몸을 기댔다.
“아델리나 씨가 돌아오니 저는 이제 쓸모없다는 건가요?! 그 날
一저를 그토록 격렬하게 갈구하신 그날 밤의 일은 전부 거짓이었
단 말인가요? ! ”

“야,키쿠노一.”
“이게무슨소리냐,타츠야?”
초조해하는타츠야를보고아델리나가쌍심지를돋운다.
“내가없는사이에키쿠노와무슨일이있었던거냐?”

‘‘아니,그게...난네가죽은줄만알고그러다보니,그만-.',
‘축어?!내가죽어서뭘했다는거냐너는!oF.”
“그,그러니까.그거F아얏?!''

218 I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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횻솖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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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윤:
珏 身


羲 艱

옳즈三- -~三
타츠야의 오른손에 엄청난 힘이 담긴다. 쌍심지를 켠 아델리나
가 혼신의 힘으로 움켜쥔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키쿠노도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을 닦더니
이번에는 엷은 미소를 짓는다.

아델리나와 키쿠노, 두 소녀는 타츠야의 머리 너머로 시선을 나


누었다.
“. ..이번뿐이다.”
땅밑에서울리는듯한목소리로아델리나가신음했다.
“너에게도빚이생겼다그러니이번만은넘어가주마”
“어머나,무슨말씀울하시는건지.''
그러자키쿠노는낭링한목소리로웃었다.

“저는언제까지고이래도싱관없는데요.물론우리셋이서요.''

bb

소녀들 사이에 끼인 재 타츠야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막이 찢어진 탓에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지독히 멀게 느껴졌
다.
사실다투는소리조차잘들리지않았다.
‘아-, 죽겠다. 이제 그만뵈주라.’
바로그때였다.

“타츠야,통신이들어왔다.”
“어?아아’정말이네.,,
아델리나의 지적에, 타츠야는 1호기의 통신기에 무사한 왼쪽 귀
를 갖다 댔다. 오른쪽 귀가 안 들려서 지금까지 몰랐는데 자세히

220 l
들어보니 소년의 목소리가 홀러나오고 있었다.
r이보F,들려,형아?J
“그목소리’하리리냐.”
활짝 열린 해치를 통해 바깥을 보자, 뒤집어진 (부시마스터)가
뒤집어진 자세 그대로 오른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야너,살아있었냐.”
r우와.너무해낸
큰소리로불평하는하리리.
r뭐 됐고, 것보다 형아한테 통신이 들어와 있어.J
“..통신?니한데?”

r응, 잘모르겠지만중요코드래 지금그쪽으로돌릴게낸


“이’이보F.''
자세한 이야기를 묻기도 전에 음성이 끊어졌다. 집음이 섞인 일
그러진 통신. 허나 그것을 듣자마자 타츠야의 안색이 바뀌었다.
r들..라..나타츠.야..키,쿠노코.J
띄엄띄엄끊어지는목소리는이들이잘이는것이었다.
‘클라라?!”
왜 여기에? 리는 의문을 품을 여유도 없었다. 허겁지겁 콕핏으
로 기어들어가 통신기를 집어 든다.
“나다! 타츠야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어딨어?!’.
r지금-당장..도망코가르나..스탄군이’국경을넘어획낸
“야.야코.”
r
.J

불길한 말만을 남기고 끊어지는 통신

제3화 전사의 체통 l 221


“가르나스탄군이국경을넘었대.”

마주보는 세 사람. 그 순간 북서쪽 방향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몇번이고,몇번이고혁.
‘‘정말.인가 .’'

“시작됐나.,'

고갯길에 자리한 외눈박이 AS (레가투스)에서 미하일로프는


낮게 읊조렸다.

발밑의 국경을 넘어 가르나스탄군이 진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지휘 하에 있는 (켄투리에만이 아니다. (섀도)와 (새비
지)등의 AS를 선두로 가르나스탄 정규군이 뒤를 잇고 있다.
그렇다, 20년 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처럼.
“흥, 시시하게.”
감상에 젖는 일도 없이 미하일로프는 남동쪽 방향을 응시했다.
“이만한 일로 뒈지지 마라, 이치노세 타츠야.”

이날 가르나스탄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222 l
에필로그

그방은횡금으로만들어진새장이었다.
호사스럽고화려하게 장식된 실내. 그러나그림도, 조각도, 세간
도 그 어느 것도 이 방의 주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방의 모든 것은 그 주인까지 포함해서 단 한 사람의 인간을
위한 것이므로.
그러한공허한세계의주민혁소라야팔미슈는덮개달린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간을 새기는 벽시계. 달력이 없는 실내에서는 손을 꼽아 뵈도
날짜가 지나가는 감각이 흐릿해질 뿐 그저 낮과 밤만이 조용히 흘
러갔다.
그때 방문이 난폭하게 열어 젖혀졌다. 누구냐고 물을 필요조차
없다. 정확한 시각에 운반되는 식사를 제외하고 이 방을 찾을 인간
은 단 한 명뿐이므로.
“...오르칸?”

휘청거리며 방에 들어온 소꿉친구를 소리야가 응시했다. 부드러


운 카펫에 칠칠치 못하게 엉덩방아를 찧은 오르칸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안녕,소라야.”
몸을 일으킨 오르칸이 비들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다가 카펫에
발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진다.

에필로그 l 223
“위험해!”

반사적으로 일어선 소라야. 그러나 오르칸을 받치려던 순간 공


포와 혐오의 감정이 그녀의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몸을 움츠린 그녀의 눈앞에서 오르칸은 바닥에 넘어졌다.
“. ..너무하네.''

그는 큰 대자로 누워서 소라야를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눈길을


피히는 소라야의 모습을 보고 오르칸은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었댜
“내가그렇게무섭니?”
소라야의어깨가홈칫떨린다.
“미안미안, 하필 오늘 따라 게임에 져버렸지 뭐야. 에이 참, 지
든 말든 상관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분이 언짢더라
고,. . ''

불안한말투로오르칸은나불니불지껄였다.
“그만해... . ',

가녀리게 호소하는 소라야의 목소리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게임 내용이 무엇인지 소라야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이제그만해,오르칸.,’
“뭘그만하리는건지.”
“이전쟁을”
“ 99

느릿느릿 일어나면서 그는 말없이 들었다.


“생각해봐!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쟁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리 없
잖아! 지금이라면 아직 되돌릴 수 있어! 죽은 아버지도 틀림없이
네가 그러기를 바라시 .”

224
“아’그건아냐.''
그는손을살량살랑흔들어서소라야의말을가로막았다.
“절대그건아냐.아마팔미슈아저씨는내가지옥에떨어지기를
거기서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걸.”
“그럴리없어!아버지는-.,,
“왜냐면아저씨를쏴죽인게나니까.”
아무렇지도않게튀어나온평범한말투였다.
“코뭐'’

팔미슈 소장의 사인은 그저 전사라고만 발표되었다. 소라야 또


한 그러한 정보 밖에는 얻지 못했다.
“그러니까내가권총으로쏴죽였다고.삥야코하고말이야.”
오르칸은그진싱을매우선선히밝혔다.
“아-.”

소라야로서는처음안사실이었다.
그리고어렴풋이예상하던사실이었다.
또한믿고싶지않은사실이었다.
‘‘아아크.

그녀의 내부에서 간신히 지탱되던 정신의 균형이 마침내 무너졌


다.

“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오르칸에게 달려가 치켜든 오른 손바닥을 내리치
려 한다.
그러나 .
‘‘위험하잖아크.”

에필로그 225
내리쳐진오른손목을오르칸은간단하게잡아냈다.
“있잖oF, 이래 봬도 니는 남자거든? 마음만 먹으면 여자인 너
는 죽어도 못 이긴다구. ”

‘‘나쁜놈, 나쁜놈 니쁜놈!”


그러나 소리야는 물러나지 않았댜 연이어 휘둘러지는 왼쪽 손
바닥을 이번에는 막지 않고 뺨으로 받아내는 오르칸.
“하하하, 아프너F.”
가차 없이 반격의 따귀를 올려붙인다. 소라야의 오른 손목을 붙
든 재 두 번, 세 번. 그때마다 살이 실을 때리는 묵직한 소리가 실
내에 울렸다.
“그렇지. 여자답게 얌전히 굴어야지-.”
축 늘어진 소리야를 침대에 눕힌다. 얇은 옷 위로 봉긋하게 부푼
가슴이 또렷이 드러났다.
힘을 잃은 처녀의 몸을 오르칸이 올라탄다.
“그만해-제발一.”
가녀린 저항을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오르칸은 소라야를 깔아
눕혔다.
“안돼..안돼..안돼애.. ..',
띄엄띄엄한비명은이윽고흐느껴우는소리로바뀌었다.

다음 권에 계속 一

226
작가 후기

전날 일과인 조깅 중에 다리를 삐는 바람에 고생 좀 했습니다.


인기척 없는 코스였던 데다 지갑이고 휴대전화고 아무것도 없어
서 쑤시는 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는 처지에 놓였지요. 발은 아프
죠, 날은 춥죠, 몸은 힘들죠. 그냥 모두 내팽개치고 주저앉고픈 심
정이었습니다.
이번권의타츠야도그런심경이었을지도.. .

이러한 고로 타츠야에게 있어서도 시련이 되었을 가르나스탄 도


망편입니다.
지나친 리얼층 모습에 뚜껑 열린 오르칸 군이 “나가 뒈져라 하렘
새끼야” 라며 덤벼들었습니다. 끔찍할 만큼 인기 없는 사내의 질투
군요.

..말난 김에 이 후기를 쓰고 있는 것은 12월 25일 심야입니다.


어제는 집에서 홀로 하루 종일 대청소를 했습니다.
어라,뭐지?눈에먼지가-.

자. 이제 이 r풀 메탈 패닉! 어나더-굳 최종단계입니디

작가 후기 l 227
그렇다고는 하나 r풀 메탈 패닉!J이라는 작품 자체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계속될 겁니다.
r슈퍼로봇대전J에는 마침내 대망의 원작 직품이 참전하게 되었

습니다. 그 장면과 그 대회와 그 전투가 어찌 재현될지, 그 작품과


그 캐릭터와 그 로봇과 어찌 엮일지 너무너무 기대됩니다.
TRPG에서는 리플레이가 발매 중! 뿐만 아니라 r메탈릭 가디언
RPG밝 콜라보플레이까지 발매됩니다. PL 참가한 가토우 선생님
에게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그 카오스함에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습
니다.

이제 슬슬 페이지도 다 되었습니다. 늘 그렇듯 송구하오나 끝까


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며 붓을 이만 놓을까 합니
다.
감사합니다.

2014년12월
오오쿠로 나오토

228 l
해설

마침내 r풀 메탈 패닉! 어나더J도 10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


빨라요!

.그런데 ‘해설'이라는 이 코너의 제목 말입니다만, 사실 1권 무


렵부터 떨떠름했었습니다. 보통 소설 문고에 붙는 ‘해설'하면, 그
작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선생님 같은 양반이 “이 작품은 멋
져요!” 라거나 “이러한 부분이 필견입니다!” 같은 굉고를 써놓는 자
리거든요. 그런데 이 r어나더J에 대해서는 저도 제작 책임을 상당부
분 지고 있는 입장인지라 표제가 이래서는 자회자찬틱하달까, 가족
을 편든달까, 뭐 그런 꼴사나운 기분이 들고 마는 겁니다.
그럼 표제가 무엇이면 좋으냐력, 라고 생각해도 도무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제일 고생하며 쓰는 사람은
호세 겸 오오쿠로 군이므로 ‘작가 후기(가토우),리는 제목은 지나친
실례겠지요. ‘가토우의 코멘트’라고 쓰기에는 볼륨이 지나치게 많
은 편이고, ‘원작자의 메시지' 같은 걸 쓴다면 이번에는 진지한 분
위기가 감돌아서 숨이 턱턱 막힐 테고. 애당초 1권에 ‘해설’ 같은 걸
써놓고 2권부터 바꿔버리는 것도 이상하고요.
. ..이러한 고로 여전히 씰쌀맞게 ‘해설'이리는 두 글자만으로 끝

해설 l 229
내고 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계속 떨떠름하단 말이xF.
사족으로 권말과 핀업의 ‘AS해설'은 1권부터 전부 가토우가 쓰고
있습니다. 한 번씩 돌아보다가 스펙 등에서 뼈아픈 실수를 알아차
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전부 가토우의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뛔.

그러고보니!
이 책이 나올 무렵에 같은 F.E.A.R.사의 로봇물 TRPG r메탈릭
가디언J에서 풀메탈 RPG와 콜라보한 리플레이책이 나올 예정인가
봅니다.
아, 사족으로 r메탈릭 가디언J이란 간단히 말해 슈퍼로봇 비스무
리한 잡탕 로봇월드에서 한바탕 날뛰어보자! 라는 기치의 게임입니

다만, 그곳에 풀메탈 세계의 캐릭터와 메카가 참전하게 되었습죠.


예.
캐릭터는 본가 풀메탈이 완결된 후 도쿄의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했다는 설정의 베르팡강 클루조 씨입니다. 담당 임무는 제작
진행이므로 애기(愛掛의 색깔도 한몫해서 rKUROBAKO!J 상태입
니다. 메카는 이(昊)세계 기술로 엉망이 된 M9팔케고요(거의 가토
우의 착상입니다. 기대해주세요! 리고 썼지만 성실한 사람은 보지
마십쇼!). 그리고 그 플레이어는(라기 보다 그 설정을 꺼낸 지는)
다름 아닌 불초 소생, 가토우 쇼우지입니다(아혁, 화내지 마십쇼!).
그러니까-. 한마디로.. . 범인은원작자입니다.
그래도 오피셜이 아니니까요! 어차피 할 거라면 여러분이 낌짝
놀랄 정도의 서비스를 하자고요! 리는 취지에서 있는 힘껏 까불고

230
말았습니다.
괜찮으시면부디뵈주세요!
그리고 이미발매 중인 풀메탈 RPG의 리플레이책 r언더커버J에
는 플레이어로서 시키 씨와, 세상에! 텟사의 목소리를 들려주셨던
유카나 씨가 출연했습니다! 이쪽도 아직 안 보셨으면 부디 뵈주세
요I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책의 최대 볼거리는 싸나이 시모무라 씨


의 눈물일까요. 본가 풀메탈 2권에 꼼지락 나왔다가 바로 당해버린
자위대 AS에 시모무라 씨가 타고 있었디는 설정은 오오쿠로 군의
소소한 놀이 설정이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살이 붙었을 줄이야. 십
여 년이리는 시간을 넘어 보답벋은 수수한 아저씨의 뜨거운 마음!
긴 시리즈는 이러한 김동도 맛볼 수 있디는 점이 재미있네요.

어나더의 스토리도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두세


차례 고비가 남은 줄로 압니다만 부디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오쿠로 군도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

2015년1월
가토우 쇼우지

해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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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핀스키가 설계한
곌계한 (켄투리아) 시리즈의 상위기체. i 전투에서 학습한 경험을 즉석에서 공유하여, 전투 중
크루핀스키 씨에게는
ll게는 로마제국 취미가 있는지, 이 기 l 에 보다 강력한 부대로 진화할 수 있다.
체는 로마군의 켄투리아(백인대)와 레가투스(군단장) , 이러한 (켄투리아) 부대의 중핵이자 의사결정을 내리
체 n!으슬그人트人ol 71조며은 뜨⊇매큰
를 통솔하는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가족명을 유래로
아우구스투스의 lI 는 황제의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이 (투리누스)다‘
삼고 있다. ,l 유인기로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할 뿐 아니라, TAROS
(켄투리아)나 미하일로프가 탑승하는 (레가투스)에서 !I. 의 원용(援用)에 의한 ‘탑승자와 네트워크와의 완전한
확인된 성능을 고려하면, 이 기체는 아마도 M9A2SOP , ,결합,을 실현시키고 있다. 최고지휘관인탑승자가 ‘이
(시그마 엘리트)룔 읏도는 운동성, 공격력 스텔스성
l 러고 싶다고 생각한 전술을 (켄투리아) 부대는충실
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최첨단 콘셉트에 맞추어 설계 I 하게 이행한다. 그때문에 (투리누스)에 탑재된 AI에는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르!.
l 한정적이지만 유체금속소재알의 본체와 같은 기술)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어난 부분은 병기유닛의 네트워크 I 사용되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독립된 개인처럼 행동
화와 지능화다. (켄투리아)는 .단순한 독립된 무인AS l 할 수 있다
가 아니라 전장에‘ 배치된 모든 기체가 한 개의 유기적 I 그 AI의 소체로 다른 기체의 TAROS에서 수집한 ‘천재
인 머신으로서 기능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예롤 들어 l 적인 소질을 지닌. AS 조종자의 데이터가 쓰이고 있
한 대를 희생하여 적 두 대를 확실하게 섬멸한다는 어 I 다.
려운 판단을 이 기종의 (임페리엄 네트워크)는 순식간

에 내릴 수 있다. 또한 (켄투리아) 시리즈는 적기와의

▶가료우뺘쀼폐폐벎籬F槪뺨I
이 r어나더J에는 신유국가의 왕자님이나독재국가의 왕자님 등의 기체가 나오
는 까닭에 본가 풀메탈의 상식으로는 거의 상싱도 못할 AS가 등징합니다. 말은
그렇지만
~='☜I느 말리터리성과
르느I느H트Uo솔i 대중성의
느IH⊂⊂→ 양립은
◎브Z 워낙에
힘귀터니에 어려워서 에비카와 씨의
밀l드]R'니.UII닌III똑I 사I뤼 밸런
큰뉼

스 감각에는 늘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말 어렵단 말입니다! 아슬아슬한 라


인이라고요! 대단해!
득 국 D 뉩

두오溫 4.뼙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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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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卜론

§

역자 후기

도움안되는역자후기입니다.
돌아보니 어느새 10권이군요. 뭔가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계속된
건 알겠는데 언제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진행됐는지. 세월 참 빠릅
니다(더불어 흐려져 가는 제 기억력도 한몫하겠고요)
클라이맥스로 접어드는 스토리는 스포일러가 되니 넘어가고, 라
이트노벨에서 기장 기본적인 이야기인 “누가 진짜 여주인공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자면, 당연히 진짜 여주인공은
금발소녀 A일 것입니다. 포지션적으로나 뭘로 보나 그쪽이 진짜 여
주인공이 맞을 것이며, 저로서도 별다른 이견은 없습니다(라고 해
놓고 은근슬쩍 A가 진짜 여주인공일 것이라고 주징).
허나 처음엔 적 포지션인 줄만 알았던 흑발소녀 K말인데,권수
를 거듭할수록 귀여워지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분명 팜므파탈적
인 캐릭터일 거라고만 생각해서 신경을 안 썼는데, 어느샌가 이러
저러한 경위를 거친 끝에 주인공을 정신적으로 케어해주는 흘륭한
아가씨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입죠. ..좋지 아니한가.
다만 본가의 경우도 그렇고 이번 권의 흐름을 뵈도 그렇고, 이무
래도 이런 쪽 아가씨한데 승리의 미주가 돌아갈 일은 드물겠지요.

역자 후기 l 237
그러다가 얼마 전에 G로 시작되는 유명 로봇 애니메이션의 최신
회를 시청하던 중 일부다처제를 몹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에피
소드를 보자마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거다.. ! 이거라면 모든 것이 문제없이 해결돼 현실이라면 문


제가 되겠지만 어차피 판타진데 어떠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해
피엔딩일세. 왓하하하.. 리는 생긱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더리는
겁니다
나눠먹을수있는고기보단독점할수있는빵이어쩌고저쩌고.
밍장이었지만잠시나마즐거웠었습니다.크흑

중간에 사미라가 말한 “주인의 주인은 내 주인이나 마찬가지'.라


는 대시는 8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군 제 청춘의 바이블 r세○트
세◆oh리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명대사인 것으로 추측됩니다(아
니면 말고요). 하아.. , 백조변기 붕어군 정말 귀여웠는데▽

. . .리는 도움 안 되는 후기였습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6년 1월
민유선

238
리 턴
풀 머l탈 패닉! 어나더 10
2016년 2월 8일 초판 인쇄
2016년 2월 15일 초판 발행

원안&감수.ShoujlGatou
저자.NaotoOkulD
일러스트.Shikidouji,KanetakeEbikawa
역자.민유선
발행인안현동
편집인.황민호
출판사업본부장.박종규
책암편집.성명신신우미김지연이수현장연지
마케팅본부장.김구회
마케팅 . 이싱훈 김학관 김종국 반재완 이수정 정승환
국제업무 . 이주은 김준혜 장희정 오선주 박경진 위지명
제작.심싱운최택순성시원
한국판디자인.디자인우리
발행처.대원씨아이(주)

서울특별시용산구한강로3가4아456
대표전화:02言2071-2패FAX:02-797녹1야3
편집부벎02-2071 2104FAX:02-794-2105
영업부:O22071-2061 F켜X:02-794-7771
1992년5월11일등록앉563호

http://www.dwci.co.kr/
원제FULI_MEKL熙NICIANOTHER10
ⓒSmuliGatouNaotoOkulo,Shkidoul .KanetakeEbkawa1bshiakj hara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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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sI이d떼輯Edin竭俚nin㉴15미KAmK“COR內RArPN. Tbk”.
l●由錞1Ir리-“lnWUhE리TarP“빼mKA따씨“①刊킨RArpN.Td<yO.
한국어판권은대원씨아이(주)의독점소유입니다.

이 작품은 KADOK싸씨A CORPORATON파 독짐게악힌 작품이므로 무딘 복제템 경우 법의 제재를 랠습니


잘못만들어진책은구입하신곳에서교환해드1 다.
정기는표지에명시되어있습니다

ISBN97와11-334-1蝨-2여버O
ISBN97389-672옮838-2(세트)
혀 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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