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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고려사」-
(가) 가 글을 지어 바쳤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외관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에 일이 번잡하여 미처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보건대 지방의
호족들이 항상 국가의 일이라고 속이고 백성을 수탈하니 백성이 그 명령을 견뎌내지 못하므로 외관을
두기를 청합니다. 비록 모든 지역에 한꺼번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10여주·현을 묶어 하나의
관청을 두고 관청마다 두세명의 관원을 두어 백성 다스리는 일을 맡기소서. …천하의 세속 풍습은 각각
그 지역의 성질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전부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비루한 풍속을 고쳐야 하지만, 그 밖의 거마·의복 제도는 그 나라의
풍속대로 하여 사치와 검소를 알맞게 하되 굳이 중국과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다음 생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지금의 할 일입니다. 오늘날은 지극히 가깝고 다음 생은 지극히 머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또한 그릇된 것이 아닙니까.
「고려사」
문하부는 나라의 온갖 사무를 관장한다. 문하부의 낭사는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다. 국초에 내의성이라 불렀는데 … 문종 15년
(1061) 중서문하성으로 고쳤다. 충렬와 원년(1275) 상서성을
합하여 첨의부로 하였으며, … 공민왕 5년(1356) 다시
중서문하성이라 부르고 별도로 상서성을 세웠으며, 11년에 다시
도첨의부로 고쳤고, 18년에는 문하부로 고쳤다.
「고려사」
「익재집」
삼한이 처음 평정되고 통일되어 아직 행정구역을
정리할 여유가 없었다. …성종이 다시 주·부·군·현과
관방(關防)·역참(驛站)·강하(江河)·포구(浦口)의
명칭을 고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12주에 각각
절도사를 두었다. …이후 전국을 5도 양계로 정하여
양광·경상·전라·교주·서해도와 동계·북계라 하였다.
고려사
고려사
국초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개경에서 인질을 삼고 또 해당 지방의 일과 그에
대한 고문에 대비토록했는데 , 이를 기인이라 하였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국시대 이전에는 과거법이 없었고 고려 태조가 먼저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이 쌍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과거로
인재를 뽑자, 이때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비록 이름 있는 경대부라도
반드시 과거를 거쳐 벼슬에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과거 외에도 숨은 인재의 추천, 문음에 의한 서용,
성중애마(궁궐과 관청을 지키는 관리)의 선발 배치,
남반·잡로 등이 있어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한
가지만은 아니었다.
고려사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
왔다.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를
넘어 송을 섬겼으므로 이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통교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이자겸은 중서령 이자연의 손자요 경원백 이호의 아들인데, 문음으로 합문지후가 되었다. …예종이 이자겸의 둘째
딸을 왕비로 삼은 후 급속히 벼슬이 올라 참지정사·상서복야 관직과 주국 훈위를 받고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태위로 승진하고 익성공신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자겸은 십팔자
(이씨)가 왕이 된다는 비기를 듣고는 왕위를 빼앗으려고 계획하여 떡에 독을 넣어 왕(인종)에게 먹게 하려 했다. 왕비가
몰래 왕에게 알리고 그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었더니 까마귀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고 왕비를 시켜
왕에게 드리게 하였는데 왕비가 그릇을 들고 일부러 넘어져 엎질러 버렸다. 그 왕비는 바로 이자겸의 넷째
딸이다.…척준경과 이공수가 협의하여 이자겸과 그 처자들을 팔관보에 가두고 …이자겸은 얼마 후 영광에서 죽었다.
고려사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묘청은 서경의 승려로… 일관 백수한이 검교소감으로 서경 분사에 있으면서 묘청을 스승이라 불렀다. …묘청 등이
왕에게 건의하기를 “우리가 보건대 서경 임원역의 땅은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이니 만약 이곳에 궁궐을 세우고
도읍을 옮기면 국가의 혼란을 막을 수 있으며, 금이 공물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개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드디어 서경으로 가서 수행한 재상 재추들에게 명령하여 묘청과 백수한을 데리고
임원역으로 가서 지세를 보게 하고 김안을 시켜 궁궐을 새로 짓게 하였다.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는 천개라
하였으며,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하였다. 그리고 관속을 배치하였는데 양부에서 각 주군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경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동문선
내시 김돈중이 나이는 어리지만 기백이 대단하여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니 정중부가 그를 치고 모욕을 주었다.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노하여
왕께 아뢰어 정중부를 곤장 치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중부의
사람됨을 남다르게 여겨 몰래 도망시켜 피하도록 하였는데, 정중부는 이로
말미암아 김돈중을 싫어하였다.… 대장군 이소응은 무인이기는 하나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여 어떤 사람과 수박희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때리자 이소응이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왕과 모든 신하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과 이복기도
이소응을 모욕하였다.
고려사
최충헌의 노비 만적 등 6명이 북산으로 나무하러 가서 노비들을
모아놓고 “우리나라에서는 무신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 왕후장 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가! 시기만 잘 만나 면 될
수 있다. 우리만 어찌 뼈 빠지게 일하겠는가! …… 최충헌과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 워 이 땅의 천민을 없애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대몽항전
원의 간섭과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신진사대부의 분화
온건파 사대부
혁명파 사대부
고려 왕조를
새로운 왕조의
유지하며 개혁할
개창을 주장
것을 주장
(정도전, 남은)
(이색, 정몽주)
유교의 발전과 역사서 편찬
불교, 도교, 풍수지리설의 유행
짐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 군 신이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이다.
- 「훈요 10조」, 『고려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