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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리들의 시간
안녕, 우리들의 시간
八月長安
옮긴이 강은혜
책이 좋아 번역을 하는 사람이다.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번역학과를 졸업했다. 번
역한 책으로는 『이공계의 뇌로 산다』, 『그가 사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테무친 그리고 칭기즈
칸』,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인생이 두근거리는 노트의 마법』, 『죽음 미학』, 『최호적아
문』, 『하이생소묵』, 『너를 부르는 시간』 등이 있다.
HAPPILY EVER BEFORE vol 1 (你好,舊時光)
* 무술에서 공격이나 방어 시 취하는 각각의 동작을 초(招), 이를 연결한 연속 동작을 하나의 초식(招
式)이라 한다.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처마를 넘고 벽을 타는 사람!
정情은 어떤 정인가? 미인이 영웅을 사랑하는 것!
으하하하하하하하…….”
…… 〈백미대협〉*의 오프닝곡.
*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의 만화 잡지 『소년 점프』에 연재된 만화. 〈성투사 성시〉라는 제목으
로도 알려졌다.
작은 벌레
*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NHK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헤이! 붐부〉의 주인공 붐부. 한국에서
는 〈꼬마 자동차 붕붕〉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으며, 중국 방영 시에는 ‘번번’이라는 이름으로 현지
화되었다.
블루 워터
“아니.”
그가 대답했다.
위저우저우는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 순간의
직감은 자신이 처음으로 진지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알려주었다. 왜냐하
면 상대방의 대답이 진실하면서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넌?”
위저우저우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주 진지하게. 그녀의 사
고 수준으로는 천안처럼 이해득실 면에서 이 문제를 따져볼 수 없었기에
가장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자신이 아까 본
만화영화 장면 속에 있다고 상상한 다음, 그 안경 쓴 남자아이가 총성이
들린 후 슬로모션으로 조금씩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다만 이번에는 안경 쓴 남자아이의 얼굴이 번번의 얼굴로 바뀌었을 따
름이었다. 위저우저우는 이 안경 쓴 남자아이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
만, 나디아의 친한 친구이니 차라리 번번으로 상상하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 그녀는 눈을 뜨고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천안을 보며 말
했다. “난 구할 거야.”
천안은 그녀의 대답을 예상한 듯이 웃었다. “착한 아가씨네.”
위저우저우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변명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면
구할 거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면 안 구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천안은 폭소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힘껏 흐트러뜨렸다. 위저우저우는
천안의 눈에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사랑이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우습
게 보이는지 알 턱이 없었으니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위저우저우가
말한 사랑은 대부분 만화영화에서 배운 거여서, 그녀 기준으로 만화영화
속 친한 친구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자신과 번번도 서로
사랑했고, 사랑을 위해 ‘블루 워터’를 희생하는 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만약 죽은 사람이 딱히 정들지 않은 차오 오빠라면, 그녀는 결코 신을 만
날 기회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나 단순했다. 아이의 지극히 단순하고 극단적인 세계관이었다.
삶은 다른 곳에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안녕, 사황비
* 四皇妃, 네 번째 황비.
“…….”
위저우저우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 아이들은 줄곧 황궁놀이
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 린양은 늘 황제였고, 양 갈래 꼬마 아가씨는 황후
였다. 주변의 다른 여자아이들은 황귀비 또는 공주를 맡았고, 남자아이들
은 각각 왕야, 시위, 대신 역할을 맡고 있었다. 놀이 과정이 좀 혼란스럽
긴 했지만, 어쨌거나 ‘공주와 강도’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다.
꼬마 아가씨의 분노가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전염되었는지, 아무도 ‘사
황비’ 위저우저우 친구를 상대해주지 않았고, 황후마마는 곧장 조서를 내
려 그녀를 냉궁에 가둬버렸다. 위저우저우는 달력 종이를 들고 그네에 앉
아 다른 아이들이 바람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흩어지는 모습을 구경
했다. 각자 손에 든 달력 종이가 뛸 때마다 펄럭펄럭 소리가 났다.
그리고 황제는 계속해서 불퉁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마치 사황
비가 아닌 자객을 보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대신들과 시위들이 연합해 황실 정변을 일으켰다. 위저우저
우는 황후와 후궁들이 흐느껴 우는 것과 린양이 두 남자아이에게 좌우로
붙들려 감옥으로 이송되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이 미움받는 냉궁마마에게로 쏟아졌고, 위저우
저우는 웃음이 쏙 들어갔다.
무리 중에서 시위 두 명이 그녀를 잡으려고 달려오자 위저우저우의 몸
안에 줄곧 억눌려 있던 여협 정신이 다시금 폭발했다. ‘성정부 유치원’ 마
교 무리가 감히 날 박해하다니, 어찌 두고 볼쏘냐! 그녀는 곧장 ‘페가수스
유성권’을 써서 시위들을 밀치고는 린양의 팔을 잡고 냅다 달렸다!
“쫓아라!” 황후가 날카롭게 외치자 한 무리의 후궁과 대신들이 한꺼번
에 덤벼들었다.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쿵쾅쿵쾅 울렸고, 달력 종이 십
여 장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지 속까지 내려가다
시간축 위 빨리 감기 버튼
도망칠 곳 없는
난 크리미 마미가 아냐
* 뼈를 침식하는 가루.
Lonely Walk
악몽의 화요일
가라앉은 물고기
나비는 몇 마리 남았을까
아는 사람 1
죽다 살아나다
“저우저우?”
눈을 뜨니 천안이 앞에 서 있었다.
“너 정말 잘하더라.”
위저우저우는 얼른 일어나 겸손하게 몇 마디 하려다가, 생각해보니 또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천안이 커튼 틈새로 밖을 내다봤다. “엄마, 아빠는 오셨어?”
“아니. 엄마는…… 다들 일이 있어서.”
“어, 너의 이런 근사한 발표를 못 보셨다니 정말 아쉽다.”
천안은 여전히 그 모습이었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상투적인 말을 하는
데도 더없이 진실해 보였다.
위저우저우는 문득 그들은 일반적인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
다. 그들이 서로 알게 된 건 천안의 할머니가 엄마의 고객이었기 때문이
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위저우저우는 고개를 숙이고 불쑥 한마디 내뱉
었다. “엄마는 직업을 바꿨어. 지금은…… 무역 회사에 다녀.”
어렴풋이 무역 회사가 아주 좋은 회사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무
역’이라는 두 글자가 붙으면 뭐든지 고급스럽게 변하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는지는 뭐라고 확실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자신
의 허영 때문일까, 아니면 엄마의 체면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어린아이
의 무의식적인 뽐내기일까? 그러나 그 대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입 밖으
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후회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원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던 자신의 열등감을 확대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위저우저우는 고개를 저으며 난처한 듯 웃었다. 감히 고개를 들어 천안
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별안간 따스한 손이 머리 위를 덮는 게 느껴지자
그녀의 마음도 비로소 천천히 안정되었다.
“그렇구나, 정말 잘됐다. 우리 고모도 무역 일을 하는데 아주 바쁘셔.”
천안이 반쯤 쭈그려 앉아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저우저우도
꼭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걱정시켜 드리지 말고.”
위저우저우는 무척 감격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의 난처함을 이
렇게 풀어주었다. 비록 철없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방식이었지만. 물론 그
와 비교하면 그녀는 확실히 철없는 어린아이이긴 했다.
“알았어, 난 말 잘 들을 거야.” 그리고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고마워.”
“응, 저우저우는 이렇게나 얘기를 잘하고 예의도 바르니까 엄마를 힘들
게 하지 않을 거야, 난 알아.”
그가 일어나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모님이 안 오셨
는데, 그럼 대회 끝나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
“외삼촌한테 대회가 12시 반쯤 끝난다고 말해놨으니까, 그때 소년궁
정문 앞으로 데리러 올 거야.”
“잘됐다. 혼자 무대 뒤에 있지 말고 나랑 객석으로 가자. 방금 깜빡했는
데, 우리 고모네 그 사촌 여동생이 널 안다고 그러더라.”
“어?”
“걔 이름이 산제제야.”
“아, 그렇구나. 오빠네 여동생이었어? 나도 걔 알아.”
“응, 우리 고모네 식구들 다 무대 아래에 있어. 같이 가자. 괜찮아?”
위저우저우는 살짝 불안했다. 그녀는 마음속에 가득 넘치는 감정이 뭔
지 알 수 없었는데, 사실 그것은 기쁨이었다. 또 다른 종류의 감춰진 기쁨
이었다.
“좋아.”
넌 걔네들이랑 뭐가 달라?
넌 물고기가 아냐
조요경照妖鏡
너의 그림, 나의 동화
호르몬이 호르몬인 이유
*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사랑의 이유
그 여자의 생사
못 지나갈 게 뭐 있어
첫눈
눈 다 녹겠다
악역
상전벽해
“저우저우, 무슨 생각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던 위저우저우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구 선생님도 곁
에 서서 난방기 위에 손을 녹이고 있었다.
“아…… 예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이 생각나서요. 첼로 소리는 마
치…… 헤헤, 그 고리키가 했던 말이요.”
“그래, 그래. 기억나는구나.”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는 구 선생님도 여
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침묵했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하얗고 커다란 등불은 마치 거
대한 버튼처럼 한 번 누르면 시간이 정지할 것만 같았다.
“저우저우도 이제 곧 6학년이 되는구나.”
“네, 반년 남았어요.”
“내년 여름에 첼로 9급 시험 보지?”
“네, 선 선생님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구 선생님은 2년 전 마지막 제자인 위저우저우를 소년궁에서 명성이
자자한 선 선생님에게 맡겼다. 위저우저우의 학비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
보다 저렴했다. 선 선생님은 구 선생님의 제자였기에 위저우저우에게도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상하이음악대학 부속중학교에 갈 생각이 있니?”
“네?” 위저우저우가 고개를 들었다.
“계속 이 길로 나아가고 싶냐는 거야.”
위저우저우는 구 선생님이 결코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끌지 않을 거라
고 말한 적 있었지만, 방금 그 말을 듣고는 무슨 상황인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요.” 거의 생각할 새도 없이 대답이 불쑥 나왔다. 이유는 없었다.
구 선생님은 놀라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창문 위에 두껍게 낀 서
리꽃을 바라봤다.
“넌 정말 천안과 똑 닮았구나.” 구 선생님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고려해보렴.” 구 선생님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연습실
을 가로질러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위저우저우는 조용히 이 할아버지 선생님의 구부러진 뒷모습을 바라봤
다. 문득 두려움이 아무 이유도 없이 마음속에 흘러넘쳤다. 마치 운명이
귓속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1.
집에 오는 길
나도 일부러 이런 게 아냐
문어
좋은 사람
왼쪽
거짓말쟁이
시간축 위 일시 정지 버튼
미로의 갈림길
“집에 같이 가자.”
그렇게나 가볍고 자연스러운 한마디였다. 마치 어제, 그제, 작년, 재작
년…… 줄곧 함께 집에 같이 가던 그들이 오늘도 그저 늘 하던 대로 인사
를 나눈 것처럼 말이다.
오늘 집에 같이 가는 거 잊지 마.
위저우저우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눈을 밟았다. 남들이 밟은 부분 말
고 아무도 밟지 않은 조용하고 평평한 곳만 골라서 밟았다.
“…… 저우저우?”
“응?”
“방금 너네 담임선생님이 네 진학에 대해 얘기하던데…….”
“별거 아냐.” 위저우저우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몇 초간 침묵하다가 불
쑥 물었다. “린양, 넌 크면 뭘 하고 싶어?”
린양은 얼떨떨했다. 위저우저우가 철봉 위에서 했던 질문을 또 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그의 아빠, 엄마, 삼촌, 이모 그리고 담임선생님들만
묻는 거였고, 더구나 아주 어릴 때에만 국한된 거였다.
그 시절 그는 큰 소리로 대답했었다. “저는 천문학자가 될 거예요!”
옆에 있던 장촨은 콧물을 훌쩍이며 조그맣게 말했었다. “전 유엔 사무
총장이요.”
유엔 사무총장은 장촨이 생각해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
었다. 그러나 나중에 크고 나서야 그게 실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관
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위저우저우의 질문 앞에서 린양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
어.” 말을 마치고는 무척 부끄럽다는 듯이 한마디 더 보탰다. “그치만 계
속 앞으로만 가면 될 거 같아.”
“계속 앞으로 간다고?”
“응.” 린양의 얼굴에 자신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빠가 그러셨어. 만
약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계속 앞으로만 가면 된다고. 가장 잘
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고, 가장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가장 많은 재
주를 배우고, 가장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가장 많은 책을 보고, 가장 많
은 지식을 배우는 거야. 아빠 말로는 이런 게 다…… 밑천이래.” 린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밑천’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지 않았음을 확신
하곤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땐 내 손에 충분한 능력이 갖춰져 있을 테니까 그 방향으로 노력하면 될
거고 후회하지도 않게 될 거야.”
위저우저우가 눈을 들어 린양을 바라봤다. 해맑게 웃는 얼굴은 마치 눈
밭에 우뚝 선 백양나무의 연두색 나뭇가지가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것처
럼, 봄이 일찌감치 다가온 것만 같았다.
“그거 참 좋네.” 그녀가 웃었다.
“저우저우, 넌?”
“나?” 위저우저우는 그를 보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주변 1미터 안에 새
로 쌓인 눈을 모조리 밟은 다음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몰라.”
“그럼 나랑 똑같네!” 린양은 아주 기쁜 듯이 위저우저우의 늘어진 책가
방 끈을 잡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위저우저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린양. 우린 달라.”
12.
살려줘
“뭐가 다른데?”
위저우저우는 딱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 세계 이면에 흐르는 맥을 짚어보고자 시도했지만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운명선 앞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린양은 더는 묻지 않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쌓인 눈을 툭 차더니 막
연하게 물었다. “저우저우, 넌 어른이 되고 싶어?”
위저우저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전에는 무척 그러길 바랐다.
“너도 설마 잔옌페이처럼…….”
“아니.” 위저우저우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난…… 어릴 때로 돌아
가고 싶어.”
“어릴 때?” 린양이 손을 뻗어 위저우저우의 꽁지머리를 살짝 잡아당겼
다. 예전처럼 위저우저우의 말총머리를 잡아당기지 않은 지도 아주 오래
되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위저우저우의 머리카락이 장난기 많은 물고기
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린양은 위저우저우의 약간 울적해진 표
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손을 뻗어 재미있다는 듯 계속해서 만지작거
렸다.
“왜냐하면 어릴 땐 아무것도 모르고 아주 즐거웠거든.” 위저우저우는
눈을 감았다가 유감스럽게도 그리그리 공작과 크리크리 자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너희는 여왕 폐하를 원하지 않는 거야? 아니면 비행기 수리가 끝나서
너희 별로 돌아간 거야?
그녀는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위저우저우는 살짝 흠칫하더니 재빨리 방향을 돌려
내달렸다. 두껍게 눈이 쌓인 길 위로 그녀의 살짝 굼뜬 뒷모습이 린양을
멀리 따돌렸다. 린양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 까만 잉어는 그렇게 그의
손에서 훌쩍 떠나 다시는 잡히지 않았다.
“저우…….” 갑작스런 상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린양은 위저우저우가
달려간 방향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다가 비로소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부
르는 걸 들었다.
“린양!”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몇십 미터 떨어진 모퉁이에 장촨의 왜
소한 그림자가 보였다. 장촨이 린양을 향해 달려왔고, 그 뒤에는 링샹첸
이 따라오고 있었다.
“볼일은 다 끝났어? 네가 우리보고 먼저 가라고 하긴 했는데, 링샹첸이
우리가 천천히 걸어가면 네가 나중에 뒤따라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
더라고. 봐, 과연 이렇게 만났네.”
“어, 어…….” 린양은 넋 나간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저우저우는 삼륜차와 잔토 더미 뒤에 숨어 있다가 한참 후에야 슬그
머니 고개를 내밀어 그들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린양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보니 바닥에는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어서
어떤 게 린양의 발자국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위저우저우는 어째서 도망쳤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단지 그가 엄마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후 눈을 붉힌 채 더
없이 낭패스러워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단지 그뿐이었다.
Fly away
넌 대체 누굴 믿는 거야
주인공 게임
넌 다른 사람과 달라
“미안, 내가 지금 바로 써줄게.”
린양은 화가 나서 콧김을 뿜을 지경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나한
테 다시 써줘!”
“다시 쓰라고?” 위저우저우는 자신이 써준 종이를 내려다보며 난처하
기 짝이 없었다. 린양의 동창 노트는 무척이나 컸다. 위저우저우는 그 메
시지 쓰는 부분이 너무 텅 비어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글자를 큼직큼직하
게 세로로 썼기 때문에 지금은 어떻게 보충해서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내가 종이 새걸로 줄 테니까 처음부터 다시 써!” 린양은 말을 마치고는
책가방 안을 뒤적거리며 샅샅이 뒤졌지만, 새 종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내일 줘.” 위저우저우는 손으로 이마 위를 받치며 서서히 뜨거
워지기 시작한 초여름의 태양빛을 가렸다.
“안 돼, 넌 질질 끌잖아. 이것도 열 몇 자밖에 안 되는데 넌 2주나 걸렸
어. 내일? 어쩌면 졸업한 후에도 나한테 못 줄걸!”
위저우저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풀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
고?”
린양은 제자리에 서서 한참 생각하다가 별안간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
듬 어색하게 말했다. “…… 우리 집에 같이 가자.”
부모님은 출근해서 집에 없으니 모를 것이다. 위저우저우를 집으로 데
려와 제대로 쓰게 하고, 제대로 쓰지 않으면 다시 쓰게 해야지. 린양은 잽
싸게 계획을 세우면서 순간 교실로 달려가 장 선생님에게 교편을 빌려오
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난 안 가.” 위저우저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일부러 다른 사람과 똑같은 졸업 기념 메시지를 적은 거였다. 그
꼬마 여우가 그려진, 짙푸른 청보리 물결 같은 린양의 동창 노트를 마주
하곤 어쩔 줄 몰라서 계속 시일을 끌다가 겨우겨우 써 내려간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문구를 쓴 건, 그가 남들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위저우저우도 자신이 왜 당황하는 건지, 어쩌다 한 구절을 빠트릴 정도
로 당황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 가면 안 돼!” 린양은 위저우저우의 태도에 격분했다. 혹은 무척이나
고대하던 일에 찬물이 끼얹어진 사실이 부끄러워 도리어 벌컥 화를 내느
라 부모님에 대한 두려움도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아예 그녀
의 손을 잡아채 교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작별 인사부터
* 良好, 중국의 성적 등급은 우수, 양호, 중등, 통과, 낙제, 다섯 단계로 나뉜다.
“천안 오빠,”
위저우저우는 새로 산 베이지색 책상 앞에 앉아 연한 빨간 격자가 인쇄
된 원고지를 평평하게 펼쳐 영웅 만년필* 뚜껑을 열어 이 두 글자와 쉼표
하나를 적었다. 그리고 펜 끝은 한참 동안 허공에 머물렀다.
* Hero, 중국의 대표적인 만년필 브랜드.
새로운 생활
* 제3직업학교.
작아서 깨진 유리 구두
영웅은 다시 오지 않는다
재회
지은이 바웨창안
옮긴이 강은혜
펴낸이 조미현
책임편집 황정원
디자인 나윤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