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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II)

(엡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아래 있음을 성경을 통해 공부를
했습니다. 인생과 역사에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인간의
관점에서 인생과 역사와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던졌던 질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강의를 들으시고 여러분이
다음 주까지 더 고민해 보세요. 오늘의 성경공부는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스승님의 강의에서
상당부분 발췌를 한 것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이 인생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셔서 우리를 끌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거저 천국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정확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시119:105)
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세밀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시32:8)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 주마. 너를
눈여겨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
(잠16:9)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요리 조리 데리고 가셔서 목적지에다 편안하게 데려다
놓으실 것 같은 생각이 드시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이율배반 적인 진술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람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너희의 구원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을 공부한 우리에게 성경은 너무나 많은 곳에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요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갈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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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신30:15-20)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여기서는 모두 우리가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이러한 이율배반을 대하게 될 때 이것을 어떻게 종합하여 이해를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마세요. 그 각각의 내용이 모두 진리임을 인정하시고 겸허하게 그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신적인 진리를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할 때는 이렇게 밖에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책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때 우리는 내가 창세전에 너를 택하고
예정해서 너를 구원하였고 너의 구원을 영원히 완성시키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바라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방종에 빠지고 죄에 빠지고 게으름에 빠질 때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주 예수를 믿어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둘 다
맞아요.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역동성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 때 다른
각각의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조금씩 익숙해지실 거예요.

오늘은 제가 연역적인 방법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설명을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십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인생을 구원을 향해 다른 말로 하면 성숙을 향해, 거룩한 삶을 향해, 순종하는 삶을
향해 이끌어 가십니다. 분명 거기까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거기까지 가는 길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어주세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진짜 구체적으로 야곱에게 식구들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가라.
혹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애굽으로 피신해라”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가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주 드뭅니다. 그런 일은
구속사의 획을 긋는 큰 사건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주 드물기 때문에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여러분이 ”도대체 기도의 응답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궁금해 하시는 겁니다. 명쾌하게 대답을 안 하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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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도 때로는 잘 못된 선택으로 혼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느냐?”고 삿대질을 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하나님 어디에 취직할까요? 하면 하나님께서 “팬컴으로
가거라. 아니면 삼성전자로 가거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배우자 기도를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서 “요렇게 생긴 어느 집안 규수를 찾아
가거라“ 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내일도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 여러분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더러 “내일은 짬뽕을 먹어라 자장면을 먹어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 한 후에 여러분의 인격과 성품과 취향, 선호에
따라 여러분의 배우자를 여러분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의 연륜과 가치관을 총동원해서 최선을 다해서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선택해서) 인생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한 발 한발 이끌어 주시지 않고 이렇게 미련한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만드시는가?


우리가 잘 구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선택을 잘 해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면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분에 맞는 삶을 가르쳐서 우리에게 자유로운 사랑을 받고
싶으신 것이 목표입니다. 죄를 못 짓게 꽁꽁 묶어 놓고 하나님이 입력해 놓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닌 자기의 의지를 발동하고 인격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면 위험한지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선택을 해서 그들의 길을 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멋모르고
난로에 손을 댔다가 뜨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면 그 다음부터 아기는 그 난로에 손을 대지
않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하나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늘 옳은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대다수의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쪽을 향해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선택을 했는가하면 우리 안에 있는
“통제성향”과 “자기 보호”에 의해 선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을 집착과 중독이라고도
표현 한다고 했지요?
통제 성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내 기분에 맞도록 조절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성향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고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내고 주변 상황을 나한테 가장 살기 좋도록 만들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어도 역시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에 자기를 보호해 주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내 감정을, 내 자아를
내 환경을, 내 몸을 보호해야 합니다.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미움, 시기, 다툼, 증오, 살인 같은
것들입니다. 나를 해칠 수도 있는 것에 대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미움과 시기, 다툼
같은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유익하게 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가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선택을 할 리가
없지요?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그 통제성향과 자기 방어의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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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많은 잘 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낭패를 당하고 고통을 당할 것을 하나님은 아시지만
선택하게 놔두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잘 못된 선택을 통해서, 시행착오를 통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죄의 가공할 위력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서 선택을 했는데
이것은 정말 하나님과 이웃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구나, 이것은 아픔을 주는 죽음의
길이었구나.” 하고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게 되고 선한 것을 사모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인지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이 형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갑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


선택해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애굽으로 도망을 칩니다. 잘 못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잘 못된 선택이
그의 인생의 결론이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브라함의 삶은 그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아브라함은 얼마 있다가 또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또 잘 못된 선택으로 혼이 납니다. 그러면서 그는 애굽왕 바로도 벌벌
떠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분이신지 배웁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바른 선택과 그른
선택을 해 가면서 결국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아들을 바치는 성숙한 자로
만들어져 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한번 볼까요.
(창47:8-9)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원래 하나님께 예정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25장에 보면 리브가가 이들을 배었을 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세상에 태어나서 착한 일을
하기도 전에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도록 예정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의
꾀로 잘못된 선택을 해서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가만히 있어도 엄청 복을
받고 살 사람이었는데 잔머리 쓰다가 고행만 진탕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아도 그는 장자의
권리를 가지게 될 하나님의 택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야곱은 자기의 꾀로 부를 축적합니다.
(창30:37-39)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라반의 말대로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기로 하셨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 나무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양 떼가 먹는 물구유에다가 안 세워도 야곱은 거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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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꾀가 자기를 심히 고단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레아를 선택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레아의 아들인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레아보다는 라헬이 예뻤습니다.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였습니다. 그 말은 얼굴이 못 생겼다는 의미도 있지만 눈길이 부드럽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는 어구입니다. 레아는 눈길이 부드러웠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예쁜 라헬을
택했습니다. 결국 7년을 더 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30년 동안 꾀를 써서 부자가 되고 자
식이 많아지긴 했지만 심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노라고 자신이 시인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
습니다.
그러한 잘 못된 선택을 하는데 왜 하나님이 그냥 놔두셨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이 이 땅에서 몇
명의 자녀를 두고 얼마의 재산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세요. 하
나님은 사기꾼 야곱을 승리자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데에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
님께 참 복을 받은 자로 살기 위해서는 야곱이 그 잘 못된 선택들을 통해 배울 것이 있었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잘못된 선택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
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오늘도 여러분의 의지를 발동하여 선택을 하시면서 살아
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참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아이들이 자유롭게 선택을 훈련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선택을 잘 못해서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고 그
책임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자기 자식들의 문제를 대
신 선택을 해줍니다. 먹는 밥까지도 부모가 정해주는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자기의
선택과 관계없이 피아노, 바이올린, 발레를 해야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전공도 부모의 의견
에 따릅니다. 직장도 부모가 원하는 곳엘 갑니다. 배우자도 부모가 반대하면 이루어지지 않지
요? 아주 바람직한 부모 자식 관계처럼 보이지요? 천만에요.
자식을 로봇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가면 아이들을 얼마나 교육을 잘 시켜 놓
았는지 애들이 서너 살밖에 안 되었는데 부모가 시키는 대로 로봇처럼 움직이는 아이들 있습니
다. 그건 잘 못 키워도 한 참 잘 못 키운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합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 속에서 인격은 성숙하게 훈련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선택하
는 훈련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신 연령이 열 살에서 열두 살에 머문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체격만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받고 직장을 갖게 되고 남들에게 괄시(恝視)
받으면 안 되니까 껍데기만 교양 있는 척 하고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드디
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일단 서로에 대해서 체면치레나 위선적인 가면
같은 것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내면의 열 살짜리 미성숙한 인격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기의 앞길에 바른 선택을 내려주
기를 기대합니다. 자기 짐을 상대방이 맡아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대에 못 미치게 되니까
자꾸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이나 학교나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정말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 있지요? 너무 어려서. 그 사람들이 그런 미성숙한 인격에서 자라지 못한 사람입니
다. 선택을 하면서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자유롭게 선택을 하면서 살도록 훈련이
된 사람은 자기의 일에 반드시 책임을 질 줄 압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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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분명 잘 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고 다음에는 그런
결과를 초래한 잘 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굶기
세요. 그래서 “심통 부려봐야 배만 고프구나.”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선택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좇아다니면서 떠먹이지 마세요. 그건 자식을 사
회의 흉기요 애물단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란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
으려고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책임회피를 위해서 고통을 당
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선택을 하지 않고 충동에 의해서 습관에 의해서 시대의 조류에 의
해서 자기 방어와 통제 성향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러분이 무엇을 선택해서 한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
요. 학교에 왜 가셨습니까? 왜 직장에 가셨지요? 아이들 학교는 왜 보내셨어요?
밥은 왜 아침 점심 저녁에 드세요.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의식하던 하지 못하던 계속해서 선
택을 하시면서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선택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임을 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아니에요. 여러분은 끊임없이 여러분이 좋은 것을 선택하고 계십
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자각하시고 여러분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
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자각하고 바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때로
는 잘 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고배를 마셔 본 사람은 자기의 시행착오에 대해서 인정하고 분
명한 반성을 하며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 사람을 우리는 성숙한 사
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분 냄, 폭력 분명 우리가 선택한 것 들 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교회생활이 아닙니다.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러한 것을 기반으로 여러분의 생업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자유롭게 바른 선택을 하면서 성숙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너무 들 잘 못 가르쳐 가지고 나가서는 개판으로 살고 교회에 와서만 거룩한 척 하는
가짜들만 양산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30-40년씩 해서 집사 장로 권사들 되었는데
여전히 인격적으로 비 성숙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숙을 훈련하셔야 합니다. 바른 선택과 거기에 따른
책임을 지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지, 자유의지 하는데 거듭나기 전의 사람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들이지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의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지라는 것은 선택의 기능입니다. 사람은 의지를 발동해서 이러
저러한 행위를 선택해서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의지“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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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내가 이것보다 저것을 더 좋아한다.”라는 선호함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완벽한 중립의 상태에서는 선택과 결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지한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며 선택한다는 것은 그 선택을 결심시키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는 무언가에 예속된 예속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자유의지라는 단어 자체가 무리가 있는 말입니다. 무엇에 예속되어 있을까요?
자신의 이성의 논리나 양심의 목소리 또는 정서의 충동 즉, 한마디로 자신의 지식과 감정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그 것을 우리는 ‘마음, 생각‘이라고 하지요. 여러분의 의지는
마음과 생각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수요 성경공부를 갈까? 집에서 숙제를 할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숙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학생으로서의 의무감이요 뼈 빠지게 일하셔서
학비를 대주시는 부모에 대한 존경심 등이 작용을 해서 그 쪽으로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학교에서 인정받고 좋은 직장 얻어서 폼 한번 잡고 살아보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고 하늘 소망을 더욱 굳게 붙들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지어져
가는 것인가? 오늘 중요한 것을 한다고 하는데 잠을 조금 못 자더라도 오늘 밤 새기로 하고
교회에 가서 성경 공부하고 기도하고 오자” 이렇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여러분은 “교회 가자” 하고 선택을 해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분명 여러분의 지성이 동원이
됩니다. 추론이 동원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의지는 그 지성과 추론과 경험에 근거해서 선택을
내립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의지는 자유 합니까?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죄인들은 그들의 이성과 지성과 정서가 모두 타락되어 있습니다. 그 의지가 무엇을
선택할까요? 항상 통제성향과 자기방어에 근거해서 자신의 God illusion을 깨지 않을 수 있는
선택만을 합니다. 의지는 마음과 생각에 의해 예속되어 있고 그 마음은 더럽게 부패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렘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그러니까 타락한 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선택을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의지는 모든 방면으로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무죄 상태로 창조
되었지만 거룩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타락을 한 후 인간은 이제 한쪽 방향으로 편향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악의 방향으로만 자유롭습니다. 죄인은 이제 선과 악에 대한 자유가 없어졌습니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언제나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만류인력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을 1M 상공에 떠 있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들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자연스럽게 죄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요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엡2:2-3)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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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렇게 인간은 죄, 육신, 집착, 중독에 따라 자신의 God illusion을 지키기 위한 선택만을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늘 염려에 빠져 있습니다. 염려와 평안 중에서 왜 염려를 선택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없이 살도록 길들여진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앞일에 대해서 염려를 하게 되지요.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늘 두렵습니다.
자신을 지켜 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죄책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얼굴이 철면피라서 죄책감을 안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죄인들은 죄책감을 아주 강하게 갖습니다. 그게 뭐가 나쁜가요? 이렇게 질문하실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우리는 분명 죄에 대한 인식을 하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정죄를 하는 것은 죄입니다. 죄책감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벌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정죄 하시고 벌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인간이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자기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완전히 한쪽으로 편향이 된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자유 의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계속해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만류인력을 거스리고 공중에 머물도록 꼭 붙들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들의
실존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불가항력적으로 저절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의 얼마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져 올리신 것이 바로 성도들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만져서 의지를 발동케
하십니다.
(빌2:13)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스1:1-5)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4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바사 왕 고레스 왕이 성전을 재건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을 했는데도 그냥 거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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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해서 안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수의 땅에 머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켜 준 사람들만 일어서서 성전을 재건하러, 고생하러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자유 한 의지를 소유한 성도들은
바로 그 육신과 성령의 요구 사이에서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갈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식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습관에 따라 죄 만을 선택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 나는 이렇게 불가능한 존재구나. 난 이렇게 매일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됐습니다. 이제 한발 더 나가셔야 합니다. 그 사실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계속 출발
지점에서 텐트치고 야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그 신앙의 출발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죄인이고 불가능하고 실패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이제 서머나 교회 2년 차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여러분에게 조금 당황스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 이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삶의 매 순간에 그 사실을 인식하시고 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물론 여러분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의로운 삶에 대한 소원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 성령을 좇아 행하셔야 합니다.

“난 안 돼, 난 못 해“”난 이상하게 죄가 좋아“ 여전히 이 상태에서 머물고 계신 분들 있지요?


여러분 확실하게 알아두세요. 게리 토마스에 의하면 그것은 거짓된 욕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우리의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열망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죄를 사랑하는 자라고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죽을 몸(사륵스) 육신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경향 습관이 마치 우리인양 우리를 속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이제 우리는 완전하게 새롭게 지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자꾸
확인하고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속임수에서 한 발 한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속으시면 안 돼요.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군대에 있을 때 제 바로 위의 고참이 저보다 나이가 세 살이 어렸습니다. 애가 어려서 그런지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덩치도 작고 하니까 “제대하면 마음껏
조롱해 줘야지“ 그러고 제대를 했는데 제 동생하고 부산에 갔다가 우연히 그 고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갑자기 경례를 하면서 ”충성“ 했습니다.
습관입니다. 그러고는 자기도 겸연쩍은지 반말도 못 하고 서먹서먹하게 헤어졌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링컨에 의해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흑인들은 자기 옛 주인을
만나면 그렇게 쩔쩔 매고 오히려 다시 그 집에 노예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조르던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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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고 하지요? 그런 것들이 바로 육신(사륵스)라고 하는 것이고 집착이요 중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우리에게 훈련되어지고 힘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인생동안에 잘라내고 새롭게 창조된 영이 열망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향한 성숙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그 힘을 더 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 서울대학 가게 해 주세요. 하고 백일기도합니다. 출세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부자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정확하게 통역을 하면 “하나님 저
하나님 없이 살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져야 하고 내가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그런 것만이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라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런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안수 해주면서 도와주는 목사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러분이 바른 선택을 위해 확인해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바른 선택을 해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냈을 때 사람들은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바른 선택에는 생명력과 기쁨과 힘이 실리기 때문입니다.
바른 선택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것을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선택을 하게 되면 거기에는 힘이
실리게 됩니다. 여러분, 왜 학생 운동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자기 몸에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
불을 켤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학생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 덩치 좋고 힘 센 사람 보셨어요?
다들 비리비리 하지요?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옳던 그르던 자기가
무엇을 선택했고 자기가 그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 사람은 생명력과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른 길을 선택했을 때 거기서 나오는 생명력과 힘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해보신 분들만 알아요.
예전에 800만원이 수중에 생겼습니다. 그런데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당시 타고 다니던
차가 별로 낡지 않았었는데 ,이 돈을 조금 보태서 차를 바꿀까? 동시에 “동철이 어머님 위암
수술 비” 둘 중에서 갈등하다가 수술비에 보탰습니다. 수술비가 넘치게 모아졌고 저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돈을 버려보는
연습을 통해 결코 그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란 것을 배우고 충만한 기쁨을
느껴 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른 선택이 왜 성도의 삶에 중요한지도 배우며 또 다시
바른 선택을 하고픈 열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신앙의 사상성이 형성이 됩니다. 그것을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세계관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죄인들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세월 종교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다른 말로 하면 “정확한 성도의
목표지점 설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제가 지난 1년 동안 서머나 교회에서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 강조한 부분입니다. 목표지점이 정확하게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 종교는
혼합주의라고 합니다.(syncretism) 한국의 기독교는 유교와 무속신앙이 합쳐져서 어떤 게
무속신앙의 부분이고 어떤 게 유교의 부분이고 어떤 게 기독교의 부분인지 구별이 안 가는
이상한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계관의 변화 없이 그냥 무작정 무속신앙의 기복만 좇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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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잡교가 된 것입니다.
세계관은 세상과 사물을 보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의 틀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모두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세계관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능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나는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설명은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사물을 인식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성되고 지금도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경험이 또 다시 나에게 닥칠 때를 대비해서 그 경험을 해석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험한
것이구나. 어, 아프네. 조심해야지” 그러면서 어느 정도의 방어를 준비합니다. 그런 경험을
자주 하면서 경험과 이성의 합리와 작용에 의해서 저 내면에 하나의 틀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은 아주 강하고 공격적인 세계관이 생기게 되고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방어적이고 거칠게 됩니다. 자기의 경험이 “세상은 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고 내면에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사람은 나약하고 이기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경험과 이성의 합리화 작용에 의해
인간의 세계관이 생기게 되고 자기 세계관이야말로 무조건 옳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고 자기의 세계관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고집불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한번 형성이 되면 견고한 성처럼
깨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 것이 깨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손을 대셔야 그 세계관이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고 그것이
“정도”라고 믿었던 그 인간의 삶에 그 것을 뒤집는 사건들과 경험들이 들이닥치게 되면 인간의
견고한 세계관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어, 이거 아니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면
처음에는 잃어버린 지갑도 기도만 하면 척 찾아지고, 택시가 필요하면 어디선가 택시가 탁
나타나고 하다가 곧 기도 응답도 안 들어지고 인생에 어려움들이 닥치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잘 못 쌓아진 세계관을 조금씩, 조금씩 붕괴 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무슨 신비한 체험하게 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의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세계관 즉, 바른 신앙관을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가 왜 여러분의 인생에 필요했으며 그 예수는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주셨는지 그러한
경험들을 동원해서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모든 일이 잘 되고
잘 풀리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예수를 알아가고
바른 선택을 하며 성숙한 자로 만들어져 가는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동양식이나 가치체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이
바뀌어야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신앙인들의 올바른 세계관이냐?
(골3:1-10)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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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날 기독교의 세계관은 어떻습니까? 땅의 것으로 배 터지게 먹자. “하늘의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나중에 생각하자“ ”천국은 무슨 얼어 죽을 천국이냐? 거기가 뭐 좋다고 벌써 가,
이리와 병 낫게 해 줄게. 복채만 두둑이 줘“ 이게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세우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성경 적인 경험을 자꾸 하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신자의 삶을 자꾸 살아 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경 적인 삶이 경험되어지면서 이성의 합리화
작용으로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왜 성경에는 그렇게 실천하라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받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우기 위해 말씀대로 살아내는 버릇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지 못한 선택을 했을 때
오는 좌절감, 부끄러움, 죄스러움 그래서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기쁨을 주는 삶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으며 바른 선택을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과 기쁨과 평안을 맛
보며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주는 삶이구나.” 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여러분은
말씀대로 성경대로 선택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바른 선택을 했을 때
즐거움과 기쁨을 주십니다. 예수를 믿고도 늘 우울하다면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뻐야 합니다. 예수 믿는 즐거움을 느끼셔야
합니다. 무슨 우울한 게 매력 있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바른 선택을 하시면서 기뻐하세요.
즐거워하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기를 힘써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장사를 해?”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목표는 이 땅에서 손해를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배우고 하늘나라를 배워 성숙하게 되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도록 선택하세요. 미움대신에 사랑을 선택해 보세요. 남을 위해
나를 내어 주기를 선택해 보세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들, 우리가 집착하고
중독하고 있었던 것들을 포기하고 버리는 선택을 해 보세요.
(눅17:33)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여러분이 여러분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 대신으로 대체하고
있던 것들을 끊어버리셔야 합니다. 훈련하고 연습하셔야 합니다. 돈, 가끔 손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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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거기다 목숨 걸어서는 안 되겠구나. 다른 중요한 것이 있구나.
우리에게는 이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자유” 하면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립니다.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하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개 같은 인생“ 이라고 부릅니다. 그건 자유가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안전하게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됨의 조건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자유에는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요8:32-34)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성경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를 즐겁게 만족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들을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의해 거기서 벗어나서 진리를 따르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는 자들을 “자유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죄는 죄인들을 실컷 부려먹고 월급으로 사망을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에서 삯은 헬라어로 ‘옵소니온’입니다. 그 말은 로마시대 때
용병들에게 주던 월급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열심히 용병으로 써 먹고 나서
월급으로 사망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자유 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5: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3)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예를 들어 물고기가 가장 자유로울 때는 물 안에서 열심히 헤엄칠 때입니다.
물고기가 물이 지겹다고 밖으로 튀어나오면 우리는 그것을 굴비라고 합니다.
농구 선수가 “왜 우리는 손으로만 공을 집어야 하나? 발로도 차자” 우리는 그것을 반칙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가장 자유로운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지으신 가장 이상적인 삶을
그대로 따라 살 때 가장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면서 “요렇게 살면 너희는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 단다.“
하고 인간에게 주신 삶의 원리가 바로 율법입니다. 물론 죄인이었을 때는 그것을 절대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정 죄의 칼날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able not to sin,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정말
복되고 기쁜 삶이구나.“ 라는 것을 경험으로 자꾸 배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바른 선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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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말 복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노력하시고 최선을 다해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이 이해가 가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삶이라는 것이 인식이 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바른 선택을 내리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선악간의 문제가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도 선택이 요구될 때가 있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선택을 하는가? 가령 선교 지를 정할 때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음성을
들려주소서.“하고 기도하는 큰 선교 단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그렇게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도 대부분의 선교 여행을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할 때는 열심히 기도한 후에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 신앙 관, 인격을 총 동원해서 선택을 하고 선택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배우자를 잘 못 선택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후회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선택을 한 이상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교환 안 돼요. 결혼 전에는 몰랐는데 화장을 지우고 자는 모습을 보니까
“완전 속았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성격이 좋은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성질이 너무 못됐어요. 그래도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교환은 안 됩니다. 그런 것은 after
service도 안 됩니다. 사용자 부주의로 고장 난 것은 사용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이 성숙한 삶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라이프스타일도 바르게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신8:11020)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여러분이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배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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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God Illusion의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것을
자극시켜 줄 부나 명예가 찾아오면 얼른 제 자리로 복귀를 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축복입니다. 그러면 전부 가난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아니죠. 부와 명예를 쥔 사람은 다 구원 못 받습니까? 아닙니다. 부와 명예 속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힘듭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따로 그 속에서 광야의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늘 기도와 말씀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님 이외의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으실 수 있도록 훈련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소한 삶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내 능력으로는 100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서 70정도만 누리고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는 그 부와 명예가 여러분에게 끊어졌을 때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그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매일 매일
고민하세요.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계속해서 여러분이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검소한 삶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삶의 규모를 늘려가면서 자꾸 그 편안함에 중독되시면 안 됩니다. 검소하게 나누면서
그 것이 자기를 교만하게 만들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로 사는 게 더 힘든 거예요.
(엡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6:4)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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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III)
(엡2:10)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의 문제 중에서 인간의 선택에 관한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여전히 여러분들의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조금 더 우리
인간의 행함, 즉 선택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습을 조금 하겠습니다.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행복하게 자기의 존재를


확장해 가며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복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복 “바라크”는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했지요?
복“바라크”는 인간이 행복하게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생명력을 “복”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바로 그 생명력으로부터 파생되는 아주 작은 결과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그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복으로서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분명 이 세상의 부나 명예나 쾌락 같은 것은 복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제가
“복”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그러한 “복”의 결과물들이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흉기가 되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언약의 관계 속에 있을 때에
비로소 “복”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원리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 율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 조항이나 금기
사항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원리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살다 가신 분이 꼭 한 분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되어 그 분의 뜻에 맞게
살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복한 삶의 모델, 정답의 삶이었습니다. 고통과 배반과 아픔과
슬픔의 사건들이 닥쳤을 때도 그 마음속에 변치 않고 존재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 바로 그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회복되어야 할 궁극의 행복이라는 것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할 “복”이 차단이 되었습니다. 분명 모든


인간은 “복”을 받고 태어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 먹고사는 것 모두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복은 제한된 복입니다. 언젠가 완전히
소진되어 버릴 제한된 분량의 복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 제한된 복, 제한된 생명력, 언젠가
다 소멸되어져 버릴 그 소멸로 가는 상태를 “죽었다”라고 표현을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었다“라고 표현을 한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우리에게 영원히 복을 부어주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고 스스로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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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두려워합니다. 이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두려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창4:13-14)
13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습니다.
(창4:17)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자기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집착하고 몰두하는 것을 우리가 ‘우상숭배, 중독, 자기방어, 통제성향, 육신, 사륵스, 죄’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그 개념들을 잘 숙지해 두고 계셔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에 해당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아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관심을 주고 배려를 하고 섬겨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배타적이 되어 가고 심지어
적대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끼리 엘리베이터를 타면 전부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애꿎은 숫자판만 쳐다
봅니다. 그거 쳐다보고 있으면 좀 더 빨리 갑니까? 아니면 자기가 눌러 놓은 곳에 안 섭니까?
왜 그렇게 서먹서먹하지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자기와 의견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인간은 상대방을 미워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인데 나를 반대한다는 것은 나의
안전에 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움이라는 것은 죄인들의
극도의 자기 방어와 자기 보호에서 나온 아주 악한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인간 상호 관계에 치명적인 적대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어 이제 차단되었던 복이
공급이 되어 이제 내가 스스로 나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그러한 자들은 다른 이들을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적대시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모이면 헤어지기 싫고 오래 오래 함께
있고 싶고 그런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서로에 대해서 적대감이 아닌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롬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5: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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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율법이 뭐라 그랬죠?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원리라고 했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제 율법이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삶의
원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율법의 마침인 사랑을 하는 자들이 되어
드디어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율법을 즐거워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22:36-40)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복과 생명력을 다시 풍성하게 받게 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겠다고 했던 집착과 중독과 탐욕과 미움과 통제성향과 자기방어를
다 내려놓고 이웃과도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 자리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이웃을 완전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의롭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우리를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깨달은 성도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그들의 삶 속에서 열매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아요?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아는데 열심히(다른 말로 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진지하게) 그 삶을 살아내지 않겠습니까?
(약1:22-25)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롬7:10)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렇게 율법은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best way of
life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사회법과 같이 여겼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등’그것들이 오늘날까지 오해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야
할 법조문이 아니며 우리를 제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정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게
풍성하게 천국의 삶을 누리기 위해 바른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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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마태복음22장을 보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이니까요. 그러면 세 가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다른 것 다 필요 없어요.
지름길을 알려 드릴게요. 네 몸을 사랑하고 그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고 그 것처럼 네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롭게 회복된 자들을 말한다고 했지요?
“의롭다”라는 말의 개념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의롭다”는 것은 justice나correctness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의롭다”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 의로움이라는 것은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혹은 어떠한 모습일지라도 자기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언약의 관계에서 떠나있을 때에 자기가
수고를 하더라도 상대방을 다시 언약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 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승인하고 그 명예를 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배신을 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을 들었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 분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인정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의 명예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자리에, 의로운 자리에 데려다
놓으시며 우리의 정신적인 물질적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왕 적인 미덕(kingly virtue)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로운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곧 사랑입니다.
(요일4:7-2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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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나타났다고 하십니까?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그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롬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신
것이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사건이 요한 일서 에서는 사랑이라고 하고
로마서에서는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sentimental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감상적이며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보다는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에는 분명 감정 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접촉하고 싶고.. 여러 가지 감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핵심적인 요소이며 본질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사랑은 감성이라기보다 의로운 자세, 의로운 태도, 의로운 생각과 의무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로움의 표현이며 언약 적인 행위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뭐라고 했지요? 언약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사랑은 그런 면에서 의무입니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로운 의무와 더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15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고기를 쪼개놓고 그 사이로 홀로
지나가심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언약을 지킬 수 없음을
아시면서도 홀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내가 쪼개짐을 감수하고라도 이 언약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관계 속에서의 의무를 수행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단순히 감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로 풀어버리면 너무 가난한 해석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표현이며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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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고통이라든지 탐욕이라든지 두려움이라든지 염려라든지 우울함 분노 같은 감성, 감정의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감정이 올라올 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에 자기를 내 던집니다. 화가 나는 것을 어쩔 수 없고,
누가 미운 것을 참을 수 없고, 욕심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운 것을
염려가 되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러나 여러분도 경험하셔서 아시다시피 과격하고
어두운 감성에 오래 잡혀 있게 되면 우리는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해를
입게 됩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성경에서는 감정에 명령을 합니다.
(빌4:4)
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마6:31-34)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엡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롬12:14-15)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시37:4)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보이지요? 감정은 내 안에서 우러나오거나 솟아나는 것이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지 않으세요?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나의
인격의 주체로서 내 영혼이나 나의 감정에 대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시42:3-5)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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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편 기자는 낙심해 있고 우울증에 빠져있고 불안해하고 심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영혼에게 명령을 합니다. “내 영혼아 불안해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오히려 그 상황에서 찬송하라“ 그럽니다.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노만
빈센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의 positive thinking이나 번영의 신학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다 잘 될 거야“ 이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속고 있는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우리의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인격의 자유로움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셨지요? “의아해 하시네요?” 여러분은 성경을 믿으십니까? 성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우리의 감정을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분노와 우울’에 싸일 수 있고 ,어찌할 수 없는 질투와 시기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쁜 감정은 왜 생긴다고 했지요? 자기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자기 방어,
통제성향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통제
성향 자기방어 집착 중독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고 아울러 그 것들로부터 오는 그러한 어둡고
무거운 감정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그러한 나쁜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은 여러분을 속이고 있는
여러분의 육신, 과거의 습관, 경향, 마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그러한 나쁜
감정이 솟구쳐 올라올 때 여러분은 거기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빨리 자각하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힘들죠? 교회 잘못 왔다는 생각 안 드세요? 옛날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그냥 쉽게, 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너무 복잡하고 힘들지요? 누가 예수 믿는 것을
쉽다고 했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 살아가는 것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싸움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미움과 분노와 질투와 시기와 우울함과 슬픈 감정이 일어날 때 이러한 감정은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절로 해결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
감정이 삭아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럼에도 그게 안 되면 오랫동안 그 분노와 미움과
증오와 우울함과 슬픔을 버리지 못 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파괴하면서 살곤 합니다. 그것을
소위 상처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래서 내적 치유니 뭐니 해서 그 나쁜 감정들을 버려 보려고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헛수고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명확하게 알고
우리의 신분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우리는 거기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이 성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어줍지 않은 심리학의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랑과 기쁨과 활기와 생명 같은 것들을 이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하늘나라 사람들입니다. 제발 여러분의 신분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계세요.
(요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진리를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하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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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런 악하고 나쁘고 어두운 감정에 잡혀 있는
것은 여러분은 마귀나 육신이나 습관의 도움으로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여러분은 숨은 동기에
의해 자기 방어와 통제 성향을 따라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여전히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습관에 속아서 그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니 우울하고 분노하고 미워하는 게 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냐?
(민14:6-11)
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열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탐하고 나왔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이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사는 아낙 사람들은 거인이며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메뚜기 같아서 도저히 우리는 싸울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
통곡을 하고 두려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강한 적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언제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하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냥 감정에 붙들려서 어쩔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 우리를 보호하거나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러한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미움과 분노 대신에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우울에서 벗어나 기쁨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불평과 불만에서
감사를 선택할 수 있고, 염려와 불안에서 확신과 평안을 선택할 수 있고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고 안전감과 행복감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후6:9-10)
9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과 제자들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기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파괴하고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나쁜 감정을 버리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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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자유롭게, 의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하고 싶을 때가 있고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을 때가
있고 가기 싫을 때가 있지요? 찬양을 하고 싶을 때가 있고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고 기도가 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예배하기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 여러분은 기도하기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찬양을 할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그게
위선이지 무슨 예배냐?” 이렇게 반문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103)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0 천사들아, 주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능력이 있는 용사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21 주의 군대들아, 그의 뜻을 실행하는 종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2 주님께 지음 받은 사람들아, 주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곳에서 주님을 찬송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다윗은 자기 영혼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가 꼴도 보기 싫고 찬양을 하는 찬양 팀이 갑자기 막무가내 보이스처럼
엉망으로 보이고 성가대의 찬양도 시끄럽고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선택을 하고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사랑이며 의로운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대의 반응과 상대의 외모나 모양에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무슨 신비한 기적이나 신기한
현상을 보거나 감정적으로 감격과 감사가 솟아나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아도, 주관적인
체험이나 감정의 변화가 없어도 여러분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기로 선택을
하셔야하고 그러한 자유로운 능력이 있으신 분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유롭고 의로운 사랑을 가르쳐서 천국에 데리고
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도 자신들이 “영혼의 밤”이라고 불렀던 길고 긴 영혼의 메마름을
겪었습니다. 우울증에 신경 쇠약까지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놔두셨는지 아세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사랑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기간인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일수록
주관적인 체험이나 신비한 경험이 없어집니다. 점점 높은 단계의 자유로운 사랑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런 감정적인 복받침이 없어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체험이나 감격 같은 것을 많이 주세요. 안 그러면 삐지니까.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내 기도 받아야 일이 풀리고 복 받는다”고 떠벌리며 다니는 사람들은
지금 유아기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옹알옹알” 옹알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완전히
가짜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진짜 성숙한 신앙인은 그러지 못 합니다. 점점 갈수록
하나님께서 반응이 없으실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자유로운 사랑을 배우시고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기를 선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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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가 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 몸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던 간에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 주는 것을 “의”라고 한다고 했고 “사랑”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죠? 아니면
가짜라고 하십니다.
(요일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롬12)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마5:44)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게 됩니까? 우리가 가진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는 아마 죽는 날까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씀드린 성경에서의 사랑의 개념으로는 가능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기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아서 공부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그 목사님의 마음속에 우리가 생각하는
안 보면 보고 싶고, 없으면 허전하고 한 그런 사랑을 했겠습니까? 언제 봤다고 그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그렇게 사랑스럽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가 회복이 되신
성도로서, 한 죄인을 그 하나님과의 의로운 언약의 관계 속으로 인도 하셨던 것이고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상대방에게 걸게
되면 상대방이 나를 충분히 만족시켜주거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 때 다툼이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납니다.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상대방이 어떤 추한 모습을 보이던 내가 그 배우자를 향해서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는 것을 의로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사랑이고 의로운
사랑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대상이 자기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들이 결혼을 결심할 때 “이러 저러한 면이 믿음직스러워서 내가 나의 인생을 이 남자에게
걸어도 되겠다 싶어서 결혼했다”고 합니다. 여성 여러분, 남자는 보호해 줘야 할 존재이지 믿고
의지할 존재가 아닙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여러분의 안전과 행복을
거셔야 합니다. 그 분께 의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자기를 만족시켜주지
않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아도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중독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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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야 할 에너지를 그 대상에게 쏟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던 것을 기억하세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배반하고 욕하고 모욕한 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 주신 것을 기억하세요.
“그건 스데반이니까, 예수님이니까 그렇죠?” 그렇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게 되는 최선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 분의 삶이되기 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세요. 우리 죄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까지


멸시했습니까? 틈만 나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우상을 섬기고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먹이고 입히시며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예수 님 앞에서 외치던 자 들입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언약을 박살을 내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그런 말을
들으시면서 “참 유대인들 나쁜 놈들이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위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그 언약을 십자가에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모든
사랑은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내가 이러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점수를 따고, 내가 행해 놓은 여러 가지 선한 행위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돋보이게
하고 더 나은 구원의 조건 속에 들어 있게 된다.“라고 믿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의무는 구원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하게
하늘의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살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무입니다.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 이상,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갈5:13)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너희들에게 주어진 그 자유로 무엇을 하라고요?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종노릇이라는
것은 의무를 다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누가 너의 이웃인지를 묻지 말고 네가 모든
이의 선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쓰나미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을 여러분이 보시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그들에게 보여 주세요. 한국 강원도에서 큰 화재가 났습니다.
낙산사가 홀랑 탔고 이재민이 생겼습니다. 불쌍합니까? 그러면 그들에게 여러분의 의무를
다하세요. 한국에 와 있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딱한 사연을 가끔 봅니다. 불쌍합니까? 그러면
관심을 가지세요. 인터넷 앞에 앉아서 “한국이 썩었다느니 사회가 왜 그 모양이냐”느니 그렇게
입으로만 사회정화 밝은 사회 외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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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시판에는 그렇게 애국자가 많은데 왜 나아지는 것이 없어요? 팔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입만 살아서 그래요.
정말 그런 사회를 원하시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을 쏟아 부으세요. 여러분의 돈, 여러분의 힘,
여러분의 시간을 들여서 섬기세요. 어떻게 불쌍한 자들을 위해 밥 한 끼 굶어 보지 않고
그들을 위해 뺨 한 번 맞아보지 않고 어떻게 그러한 좋은 사회를 만들겠습니까? 입으로만
사랑, 사랑 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다하세요. 바른 선택을 하세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이웃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세계 인구가 먹는 한 끼 식사의 양과 가치를 조사해 보았더니
미국에 사는 사람이 아주 못 먹고사는 사람의 50배를 한 끼에 먹더라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샤워 하고 싶을 때 더운물을 틀어서 샤워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 인구의 3%에 불과
하다고요. 그러면 여기 계신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나눌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 배만 채우고 자기의 만족과 행복만을 추구하며 산다면 그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행17:26)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여기서 쓰인 “헤노스 하이마토스“는 ”한 피를 나눈 형제“ 라고 할 때 그 ”한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한 혈통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으로, 죄로
왜곡이 되어서 서로 미워하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왜곡된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안 했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개의치
않는 사랑을 하도록 노력 해야죠. 우리와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편 갈라서 저들은 적군 우리는
아군 이러면 안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강단에서 여러분이
다른 길에 미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지만 여러분까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의무만 다 하세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오지에 나가 있는 진짜 선교사들은 의로운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 대회에 가보면 선교사님들이 가끔 “나는 그들을 진정 사랑하지 못
합니다” 하고 말씀들 하십니다. 진정 마음속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슴을 치시면서 자책을 하십니다. 굉장히 솔직하신 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사랑의 의미를 잘 못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감정적인 사랑의 마음이 솟구쳐 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이 의로운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사랑은 감정과 감성이전에 언약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사랑이라 한다.“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가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 내는 것이 진짜 의롭고 자유로운 사랑인 것입니다. 절대 위선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 바른 선택을 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창조물이 되신 거예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롬6:6-11)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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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길 지어다“”reckon“ "로기조마이“는 아직 완전하게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여김으로써
점점 그 목적지로 가게 되는 것을 “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세요.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보시고 실망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된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여기세요. 그리고 그러한 신분에 맞게 바른 길을 선택하세요.
우리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억지로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요10:18)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그런데 목숨을 내 놓으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그렇게 곰 살 맞고
사랑스럽게 굴어서 우리가 너무 좋아서 그러신 것입니까? 우리는 아직 주님의 원수이었을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언약의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마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죽을 몸, 육신을 따라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입니다. 그 길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의무입니다.
여러분 아까 이런 찬양 하셨죠?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이것은 하나님 말고 다른
어떤 유형의 무형의 것들을 이제 구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하나님께만 맡기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집착을 끊어 내세요. 여러분은 하나님께도 사랑이 아닌
집착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나 신비적인
체험 같은 것만을 예배당에서 구하고 계시다면 그것은 집착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에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건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이제 하나님 한 분에게만 나의 전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걸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여러분은 그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늘처럼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삶이 나오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죄의 종으로, 자기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스스로 책임지면서 무거운 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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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평생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그들은 핑계치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들이 지옥에 떨어집니까? 여러분처럼 자유로운 사랑을 선택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말 못하고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아시겠지요? 이래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여러분에게 짐이며 부담입니까? 행복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냈을 때 오는 희열과 감격을 맛보세요.
정리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율법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
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이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 사랑은 언약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행하며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사시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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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IV)
(엡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우리의 악하고 어두운 감정의 정체와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정말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오늘도 “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바른 선택, 바른 행함이 나와야 하며 나올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하고 전체적으로 10절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사탄, 마귀, 악령, 귀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세요? 뭔가


막연하시지요? 원시적인 아이디어 같지 않으세요?
그러나 여러분이 확실하게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탄, 마귀, 귀신, 악령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는 24시간 그들과의 영적 전투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영적
전쟁 spiritual warfare 라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우리에게 대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대적도 없는데 무슨 전쟁을 합니까? 실제로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습니다.
(엡6:11)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약4:7)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8 바짝 정신을 차리고 철저하게 경계하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대적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세 개의 영적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마귀 그리고 인간입니다. 하나님 마귀
인간은 모두 인격적이며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는 그래도
관심이 있는데 마귀에 대해서는 너무나 알지 못합니다. 손자가 쓴 유명한 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우리는 마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 마귀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마귀의 세력은 위계질서가 잘 잡혀 있고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서 세상을 다스립니다.
(엡6:12)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막3:23-26)
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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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마귀는 절대 자기들끼리 분쟁하지 않고 통일성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거기서 예수님께서 그 귀신 들린 사람에게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그 귀신이 “내 이름은 군대”라고 단수로
이야기합니다. “군대” “레기온”은 보통 로마시대 때는 6,000명 정도의 연대와 사단 병력 중간
정도 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신약에서도 아주 많은 수를 가리키는 데 쓰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라고 복수로 이야기합니다.
(막5:9)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마귀들도 그들을 대표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천 마리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후에도 돼지들이 이리저리 발광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달려가 지들이 무슨 삼천
궁녀라고 바다로 들어가 떼죽음을 당합니다. 그것은 귀신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리더의 명령에 따라 통제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마귀에 대해서 개괄적인 것을 좀 알아보고, 왜 그 마귀의 존재가 우리의 행함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마귀는 원래 천사였지요?
물론 성경에 어떻게 그 마귀가 생겨났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이 이사야14장과 에스겔 서 28장, 그리고 신약의 유다서
정도입니다.
(사14:12-17)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16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17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겔28:12-19)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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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 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유1:6)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그렇게 하늘의 천사였던 천사 장 루시퍼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타락을 했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리는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인간들에게
내려와서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의 통치권을 고스란히 빼앗아 버렸습니다.
(창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천”은 히브리어“솨마임”입니다. “하늘들”이라는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늘들인가? 우리가 삼층 천 이라고 할 때 하늘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배웠죠?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하늘, 그리고 우리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저
우주,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진짜 하나님 나라,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고 했지요?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지요? 그런데 그 중 땅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이 다스리시지만 agent를 세워 대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게 아담과 하와입니다.
일제(日帝)시대 때 히로히토가 일본 천황이었지만 조선은 이토 히로부미가 대권을 위임받아
다스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조선은 일본 천황 만세를 외쳐야 하는 그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였지만 실제적인 통치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 것처럼 그렇게 인간은 이 땅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통치권을 가진 인간이 그 통치권을 소유한 채로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아주 불법적인 방법으로 그 땅의 통치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눅4:5-6)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이렇게 마귀는 세상의 권세를 넘겨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 세상은 그의 통치
아래 들어가 그가 시키는 대로 아주 즐겁게 죄를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엡2:1-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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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시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누군가가 장악하고 죄를 사주하고 있다고
나오지요? 그렇게 마귀는 현재를 살아가는 믿지 않는 죄인들의 왕이요 그들을 장악하고
사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이 세상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2:31)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그리고 조금 전에 우리가 읽었던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는 말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하늘 아래 영역을 지배하는 자” 여기서 하늘은 sky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아래를 다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그 마귀의 결정적인 권세인 사망을 부수시고
승리를 하시고 그 통치권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행2:36)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요일3:8)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막강한 사탄의 사망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꺾였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효력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통치권에서
풀려나서 이제 자유로운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들은 사탄을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귀신들린 자“라고 하면 엑소시스트나 오멘 같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입에 거품 물고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고 눈에 흰자만 남아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고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 (demon possession)이라는 것은 예수와 관계없는
모든 죄인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외의 모든 인간들은
(demon possession)입니다. ”귀신들린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마귀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
귀신들린 자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꼭 귀신이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아도 마귀의
통제권 아래 있으면 그것을 (demon possess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잘 보세요.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거짓말, 속임수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가 통치하고 있는 마귀의 나라에서 몇 명을 건져내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골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나라의 개념은 “통치권”이라고 했지요? 누구의 통치 아래 있느냐?
이제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여전히 마귀가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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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존재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탄은 자기의 백성이었던 어떤 무리를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단을
묶어버리시고 그의 세간을 늑탈 하시는 것입니다. 성수야, 경호야, 석진아 이렇게 부르시니까
그 사탄의 세간들이 막 하나님 나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탄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사탄이 결박당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냥 순순히 빼앗기고만
있겠습니까? 얼마 전까지 자기 세간이었던 것들을 그냥 보내겠습니까? 방해를 하겠지요?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울로 두르고 계시기 때문에 직접 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속임수를 써서 겁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가리켜 예수님께서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 믿는 자들에게 붙어서 우리로 하여금 정말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게끔 속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주일에 살펴보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주님께서 보내시는 편지도 역시 사탄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는지
경고하신 것 아닙니까?
아주 훌륭한 교회처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회로 만들어 자만하게 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게 해서 교만하게 하고 교회를 부자로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줘서 그게 정말 부흥인지
잘 못 오해하게 하고 그렇게 아주 기가 막히게 속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라사 광인처럼 무덤가에서 난리를 피우는 그런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사탄도 머리가
있는데 그렇게 정체를 백일 하게 드러내놓고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아주 드뭅니다. 그런
귀신은 아이큐가 아주 낮은 귀신일겁니다. 사탄은 아주 달콤한 것으로 속입니다.
그럼 그렇게 위험한데 왜 하나님이 그 사탄을 그냥 놔 두시는가? 왜 그런다고 했습니까?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는데 사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탄도 마귀도 귀신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왕상22:20-22)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하나님께서 아합을 이제 땅에서 불러들이려고 하십니다. 그 때 누구를 씁니까? 사탄을 씁니다.
그래서 사탄이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 영을 불어넣어 아합을 속입니다. 아합은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듣고 올라가 죽습니다.
사탄 마귀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쓰이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 한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서로 미워하게 하고 시기 질투하게 하고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잡힌 사람들은 그러한 시험을 통과하고 더 굳건한 사랑과 용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용서를 배우기 위해서는 용서하지 못하게 속이는
사탄과 싸우면서 우리가 용서의 소중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2:10-11)
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 350 -
아니로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것은 사탄에게 속는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진리를 깨닫고 사단의 속임수를 깨고 용서를 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사탄을 이용하고 계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고는 우리에게 거짓 죄책감으로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도 그놈의 죄책감 때문에 “난 가짜일거야” 이렇게
우울해 하고 괴로워합니다. 실제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짓고 그 죄의 삯인 사망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사망과 방불한 고통을 겪습니다. 괴롭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기서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사탄의 꼬임으로 죄를 지어놓고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에서 삯이라는
말이 ”옵소니온“이라고 했지요? 로마 용병들에게 주는 월급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는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공격이 거세면 거셀수록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명확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거짓 죄책감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가게 만들지 않습니다.
(계12:10)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이제 사탄은 우리를 참소 하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습관을 따라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죄를 짓고도 이 성경의 진리를 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오히려 감사 속에서 차츰 차츰 그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를 통제성향과 자기 방어, 집착과 중독, 습관, 경향 등으로 하나님께 쏟아야
할 사랑의 에너지를 다른 것들에 쏟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러한 사탄의 속임수에 의한 집착과 중독의 해악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더욱 더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하나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제 그러한 사탄 마귀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세력을 쫓아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막16:17)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여러분, 이 구절을 요즘 흔히 축귀의 은사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 이렇게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신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뿜어내는
선포는 힘이 있지요. 그러나 무조건 “예수 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이건 안 됩니다.
(행19:12-16)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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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 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 하면 우리가 사탄의 속임수에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베레아 에서는 감기 귀신, 치질 귀신, 섭섭 귀신 온갖 귀신을 그렇게 쫓아내더라고요. 심지어
귀신은 인격적인 존재라 욕을 하고 모욕을 주면 모욕감을 느끼고 나간다고 욕을 하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귀신이 어머, 어떻게 나한테 그런 심한 말을...” 이러면서
나가나요?
믿는 자가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사탄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말씀을
이해 할 수 있는 자가 되었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 우리에게 계속 의에 대한 행함과
소원을 주셔서 우리가 속고 있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하셔서 더 이상 속지 않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잡고 휘두를 수 있는 foot holder가 뭐겠습니까? 무엇을 타고
넘어 들어오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을 때 그 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코를 꿰어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아무 죄도 안
짓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탄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바른 선택을 훈련하고 연습하여 죄로부터
점점 멀어지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을 멸하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이런 의미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전적으로 죄를 향해서만 달리던 자들이었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죄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향한 소원과 행함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임으로 그들을 통치하려 드는 사탄을 발 디딜 수 없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있는 죄 된 욕망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억제시키고 바른 길을 조명하심으로 사탄이 타고 넘어 들어 올 foot holder를 자꾸 부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성령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셔야 하고 바른 선택을 하도록
노력하셔야 하고 늘 기도하며 회개에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자가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의 진의입니다.
여러분 왜 음란 비디오, 포르노 사이트 같은 것이 왜 중독성이 있는지 아세요? foot holder를
내 주기 때문입니다. 도박, 마약 같이 중독성이 있는 것들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잘 참다가
한번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지는지 아세요? 마귀에게 foot holder를 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
foot holder를 타고 침투하는 마귀의 세력에 하릴 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깨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만큼 속임수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진리의 말씀이 적혀있는 성경을 많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 352 -
그 진리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으면 여러분은 사탄의 속임수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속지요? 몰라서 속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하는 탐욕이 왜 일어납니까? 사탄이 물질주의 효율성, 합리주의
이런 것들로 우리의 가치관을 엉터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 줄
물질과 권력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탐욕이라는 속임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진리를 많이 공부하시고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회를 택하실 때 priority를 말씀을 잘 가르치는 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무슨 아이들 교육시설, 재미있는 프로그램, 구성진 목소리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곳,
목사가 청렴결백한 곳, 생활수준이 훌륭한 교인들, 이런 것 좇아 다니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곳을 택하셔야 합니다.
신자라는 사람들이 행위가 나오지 않는 것은 말씀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약1:22-24)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그 것이 행함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말씀을 대충 대충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본 자와
같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은 당시는 동경(구리거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의 윤곽 정도만
보였지 자세하게 얼굴이 안 보였습니다. 그 구절은 말씀을 자세하게 연구하고 바르게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이 온유함“프라우테스”는 “짐승을
길들이다“라는 뜻도 있지만 ”약을 제대로 처방해서 정량을 먹고 그 약효가 제대로 나타나서
치료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이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바로
나의 환부를 다 수술해 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말씀을 대하셔야 합니다. 그게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런 확신이 있는 사람이 어찌 말씀을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해 알게 되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저속하고 사악하며 신실하지 못하며 불가능하며 추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 지게 되는 것입니다.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에 올라가는 사람이 부끄럽다고 옷을 입고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수술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적나라한 죄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게 되어 수술 준비를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더러운 죄인들을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세 시제가 있는 것 잊지 마세요. 여러분은 구원받았지만 지금 구원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조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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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계신 것입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계십니다.
그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삼강오륜이나 도덕경 같은 좋은
책들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책들이 여러분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서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를 바꿉니다.
말씀이 우리의 이성에 들어와서 깊은 사고를 하게 되고 그 깊은 사고와 함께 선택이
이루어지면 행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는 우리 안의 인격의, 마음의 가시적인
나타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 인격을 송두리째 좌우에 날선 검으로 수술해 버릴 수 있는
성경 말씀 말고는 절대 우리의 바른 선택, 바른 행위가 나올 수 없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을 행하고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의지를 발동해서 바른 선택을 하시기를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사탄은 맥을 못 추게 됩니다.
여러분, 죄는 사탄과 우리의 죄 성의 합작품입니다. 아주 선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을 사탄이
억지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우리의 죄 성을 사탄이 유혹해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약1:13-16)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잠19:3)
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사탄이 죄를 짓기 싫은 우리를 억지로 끌어다가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의 타락한 죄 성을 자극해서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인 양 속이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죄 성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 자발적으로 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유기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탄이 그렇게 끌고 가도록
놔두십니다. 결국 죄인들은 사탄의 유혹과 자신들의 죄 성의 합작품으로 죄를 지어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 안에
욕심이 있다는 것은 “난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죄의 근원입니다. 그 욕심이 인간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사탄은 그것을 자극해서 열
달 뒤에 아기가 태어나듯이 죄를 낳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낳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도 분명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사탄의 유혹에 빠져 예수님을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책임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사탄이 foot holder로 쓸 수
있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창45:4-8)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 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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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 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50:18-21)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하나님은 사탄이 요셉의 형들의 악함을 자극해서 요셉을 죽일 음모를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도모를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의 이 말을 듣고 형들이 “거봐 우리한테 고맙다고 해”그러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형들은 그들의 욕심과 사악함에 의해 사탄에게 foot holder를 내 준 것이고 그 세상 주관자는
그것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탄과 형들을
하나님의 작정에 불러들여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행4:26-28)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을 행하려고 성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의도가 전혀 없던 자들을 모아서 십자가에 못 박게 시키신 것이
아니라 원래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작정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행2:23)
23 이 예수가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무법자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아노모스”는 “사악한”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원래 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 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착한 유다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려고 엉뚱하게 마귀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원래
처음부터 악한 자였습니다.
(요6:70)
7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다."
그 사악한 유다가 하나님의 작정에 그의 사악함과 함께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그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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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7:3-4)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래서 아더 핑크는 하나님의 작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람들이 지은
죄의 필수적인 원인이 아니라 죄악 된 행위들에 대한 미리 결정되고 규정된 한계들이며 안내
점 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사탄에게 여러분을 타고 넘을 수 있는 foot
holder를 주지 마세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비슷한 질문을 하나 더 해결하고 가자고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은 유기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왜 그들이
지옥에 가야 하는가?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선을 향해서는 완전하게 무능해 졌습니다.
그러면 그 무능은 누구 책임입니까?
(창37:4)
4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할 수 없었다.
요셉의 형들이 왜 요셉에게 다정한 말을 할 수 없었습니까? 그들에게 자연적인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까? 원래 친절한 말을 할 수 없게 태어난 자들입니까? “요셉을 미워했기 때문에 다정한
말을 할 수 없었다.”라고 성경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은 자신의 죄
때문이지 결코 다른 이유를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바디메오와 자신들의 죄와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둘 다 소경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핑계 댈 수 없는 죄 책이 부과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해 놓고 나는 원래 도둑놈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러니 용서해 달라고
하면 그게 용서가 되는 것입니까? 남을 흠씬 패놓고 나는 우리 부모에게서 그런 기질을 물려
받아서 그래, 그러면 용서가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자연적 능력은 여전히 있으나 죄로
말미암아 도덕적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인간들은 아담의 죄가 자기에게 전가되었다고 자꾸 생각하니까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성경의
대표의 원리라는 것은 연합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표로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아담이었습니다.” 아담은 원래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버렸기 때문에 책임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그렇게 타락을 했고 자발적으로 악을 좋아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순진한
양들을 낳기도 전에 모조리 지옥에 넣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시면 안 됩니다.
왜 구약에서 계속해서 “율법을 지켜라, 안 지키면 죽는다.“라고 강조하십니까? 바로 우리의
실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영원의 문제를 숙고할 수 있는 이성적
피조물이며 인간이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와 맺고 있는 관계와 그 창조주에 대하여 이행해야할
명확한 의무를 규정한 하나님이 주신 기록된 계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29:29)
29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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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분명 하나님은 작정을 하십니다. 수단과 방법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그 수단과
방법을 이행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반드시 우리의 행위가 수단과 방법으로 동원이
되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행27:22)
22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31 바울은 백부장과 병사들에게 "만일 이 사람들이 배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으면, 당신들은
무사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하20:6-7)
6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여서,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내가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7 그리고 이사야가 왕의 신하들에게, 무화과 반죽을 가져 오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그것을
가져 와서 왕의 상처 위에 붙이니, 왕의 병이 나았다.
(요일2:27-28)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meno 거하게 될 것이다, 직설법 미래)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menete 직설법 현재)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도 분명 거하게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해놓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우리보고
“거하라”고 요구합니다.
여러분, 개혁주의 신앙을 오해하셔서 무기력한 숙명론으로 빠지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세요.
(눅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왕 기도하실 거 아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게 기도해 주시면 안 됩니까?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베드로는 두려움과 염려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은 것입니다. 속게 놔두십니다.
그러나 그 것은 베드로에게는 유익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마치자 예수님은 이제
베드로가 사도로서 굳게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며 궁극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자신의
몸을 던져 사랑할 수 있게 이끌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옛 습관을 자꾸 죽이세요. 우리 육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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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꾸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워서 자기
힘으로 해내려 하지 마시고 자꾸 죽으세요. 끊으세요. 그러면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그게 성화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 우리의 옛 사람을
드러내어 보여 주시고 그 것이 바로 우리가 끊어 내야 할 것이란 것도 아울러 보여 주십니다.
그 때 아프지만 끊어 내십시오. 그게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른 선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인류를 거기를 향해
끌고 가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역사는 그리로 흘러 갈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죄인들은 자기의 죄
성을 따라 마귀의 유혹에 이끌려 마음껏 죄를 지을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용인
하에 그들의 훈련을 위해 마귀에게 미혹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모든 유혹과 시험을 거치면서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안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시면서 “잘 했다 내 아들아. 잘했다 내 딸아”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도움의 손길을 깨달아 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릴 것입니다. 거기에 진리를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노력과 분투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싸우십시오. 분투하세요.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예수 님 곁에서 함께 죽은 강도는 그런 행위도 없지


않았습니까?’ 정말 꼭 행위가 있어야 한다면 그 강도는 뭡니까?
여러분 성경을 읽으실 때는 그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시고 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쪽 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저주하며 욕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왜 누가만 예수 님 곁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음을 기록했을까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책입니다. 누가가 그 책을 썼을 때 어떤 주제로 쓴 것입니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방인 전도에 대한 사상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들과 죄인들, 사마리아인들, 여성에 대해서도 커다란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는 책입니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죽는 날까지 죄만 짓다 간 강도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는 것을 누가는 강조한 것입니다. 절대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을 약화시키는 구절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로마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야고보서가 함께 있습니다.
(롬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약2:21-24)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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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예를 아브라함으로 듭니다. 야고보도 믿음 뿐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 하는 성도의 삶의 예로 아브라함을 듭니다. 분명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두 저자가 공히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리가 여러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으니까 그냥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목적지도
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그를 의롭다 여기십니다.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많은 후사를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믿으니 그를
의롭다 칭하십니다. 그러나 22장에 가보면
(창22:16-17)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똑같은 축복을 22장에서는 네가 이같이 “행하였기 때문에“ 내가 네게
복을 준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분명 믿음으로 거저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
지만 아브라함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100세에 낳은 이삭이라는 집착을 끊어버리는
자’로 만들고야 마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로마서만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생애에
야고보서만 있나요? 둘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잘 한 일과 못한 일 모두
를 선용하셔서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대
목인지 아세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 구원을 유지해야 했더라면 우리 중에 단 한 명도 천국
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세요. 사랑의 주도권을 하나님
께서 쥐고 계십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자유로운 사랑을 우
리에게 퍼붓고 계세요. 그래서 우리는 안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노력하라 분투하라 요구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죄에 눌려 고통당하지 말고 조금 더 기쁘고 자유롭고
행복하시기를 원하시기에 여러분에게 그러한 선한 행위를 향해 달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달
려가세요. 힘을 냅시다.
히브리서11장을 보세요. 거기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누구하나 제대로 된 사람이 있
었습니까? 아브라함, 사라, 모세 다 하나님이 끌어 가셔놓고 그들에게 공로를 다 돌리시지 않
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역사와 인생을 경륜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감사합시다.

(벧전5: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바짝 정신을 차리고 철저하게 경계하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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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유대인과 율법
(엡2:11-19)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오늘부터 2장11절부터의 내용을 공부하겠습니다. 2장11절부터 22절까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12절의 “그 때에” 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11,12절 부분과 13절의
“이제는”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13-18절까지, 그리고 세 번째로는 19절의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는 구절로 대표되는 19-22절까지입니다. 각 부분을 대표하는 단어들을 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이 부분은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죄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기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앞서 공부한 1절에서 10절까지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3절까지는 예수 믿기 이전에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었다는 과거의 내용을 담고 있고 4-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걸작품을 만들어 놓으신 현재의 모습을 담고 있지요?
그리고 7절에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1절부터 22절까지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을 예로 들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카고 무디 기념교회의 담임 목사이셨던 해리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이 캘리포니아에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어떤 집시 여인이 25센트만 내면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운세를 봐 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25센트를 그 여인에게 주면서 “나는 이미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확하게 알고 있소“ ”한번 들어 보실래요?“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신약 성경을 꺼내셔서 오늘 우리가 함께 보았던 에베소서 2장을 읽어 주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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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장 1-3절을 읽어주시면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고 불순종의 자녀였던 이 부분이
나의 과거요” 그리고 4-6절을 읽어 주시면서 “이게 나의 현재요” 그리고 7절을 읽어 주시면서
“이게 나의 미래요“ 하셨답니다. 화가 나서 자리를 뜨려는 그 여인에게 ”잠깐 앉아보시오, 내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알려 드리리다“ 그러면서 11절부터 22절까지를 읽어
주셨다지요?
여러분이 11절부터 잘 보시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무너져 버렸고 이제 둘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대다수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던 교회였습니다. 당연히 둘은 하나가 되기
힘들었고 분열의 조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대다수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에베소 교회에게
이방인들이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인지를 다시 확인시켜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 이방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인들보다 더 구원으로부터 멀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무 할례 당이라 불릴 만큼 율법도 몰랐고 하나님도
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12절에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말은 ”아떼오스“라는 말인데 그 말은
”하나님도 모르는”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도 받았고
제사도 지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계시해 주던 유대인들과
비교해서 이방인들은 얼마나 무지했고 불가능했던 존재였는가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율법과
제사를 가지고 있었고 아브라함 때부터 수많은 언약들을 받았던 유대인들도 실패했다면 하물며
너희 이방인들은 어떠한 지경이 될 뻔했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가 유대인과 하나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재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화평 하라“고 바울은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당시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소외를 당했습니다. 성전에도 이방인의 뜰이 따로
있었습니다. 성전 둘레에는 제사장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뜰이
있었고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성전과 같은 높이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19계단을 아래로 내려오면 커다란 벽이 있었는데 바로 그 벽 너머가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가도 그 벽 너머의 이방인의 뜰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너비가 1m정도 되는 성전에 붙어 있던 사인 판이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 너머로 들어올 수 없다. 그같이 하다가 잡힌 사람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런 이방인들이 지금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로 적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서로를 미워했던 이방인과 유대인도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 사람끼리 모인 교회가 왜 이 모양입니까? 참,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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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파벌을 만들고...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라고 하는데, 워낙 가짜가 많아서 그런지 놀 때만 하나지, 다른 일을 할 때는 정말 하나가
되기가 힘들지요? 우리 교회는 아직 무슨 일을 도모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별로
다르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이 뭐할 때 서로 안 싸웁니까? 어떠한 유익을 얻어내기 위해 한
편이 되어서 동일한 목적을 향해 갈 때, 안 싸웁니다. 극장에서 영화 보다가 괜히 싸우는 사람
보셨나요? 저 주인공이 왜 우리 와이프보다 예쁜 거야, 그러면서 옆 사람 막 패는 사람
보셨나요? 한편이 되어서 한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승승장구가 나에게 전혀 질투를
내게 만들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영화를 보면서 나보다 더 깊은
감동을 느껴서 나보다 더 많이 울었다고 해서 여러분 화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목적을 향해서 한 편이 되어 서로 도와주고 일으켜 주며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더 잘 되고 못 되고의 차이가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똑같은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그런데 뭘 서로 질투할게 있나요? 그런데 왜 싸우죠? 목적이 다르거나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언제 우리는 다투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무덤 안에서 시체들이 싸우는 거
보셨어요? “넌 왜 그렇게 무덤이 커?” 이런 거 보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싸우죠? 살아있으니까 싸우지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었다면서요? 그런데 안 죽은 거지요? 그러니까 남 땅덩어리 보면서 배 아프고 질투 나고
그렇지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가 되신 분들입니다. 벽이 다
헐어졌다고 하는데 왜 여전히 그렇게 두텁고 높은 벽을 치고 계세요?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여러분은 속고 계신 거예요. 다 허물어 버리세요. 여러분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그렇게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음을 천명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왜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쓰기 3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로 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모습을 유대인들이 보고
“더러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다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로마 천부장이
백부장들과 로마 군인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소동을 진압하러 왔다가 바울을 붙들어서 감옥에
넣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차별을 했던 견원지간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십자가로 한
권속이 된 것입니다. 19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 “오이케이오스”는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가족이 되었습니다. 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럼 왜 유대인들이 그렇게 이방인들을 차별 대우했는지 공부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그렇게 개 취급한 것은 자기들은 율법과 제사를 가지고 있었고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킬 때 우상이나 섬기고 열심히 죄를 짓던
자들이었다는 선민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자존 을 심어주었던 율법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알고 또 유대인들은 어떻게 그 율법을 오해했는가를 공부해보면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율법에 대해서 제대로 잘 공부해 놓으시면 성경 전체의 맥을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정리해 놓자고요.
우리는 공부하기를 율법은 지켜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적어놓은 법조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조에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이 그렇게 살면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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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라고 정해 주신 삶의 원리요 방법을 최소한으로 의문으로 적어놓은 것을 율법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살면 신적 성품에 참여하게 되어
행복하고 기쁜 하늘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마치 어떤 기계의 매뉴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계를 사서 그 매뉴얼대로 잘 쓰면 아주 오래 고장 없이 잘 씁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막
쓰게 되면 금방 고장 날 뿐 아니라 그 기계가 갖고 있는 훌륭한 기능들을 제대로 발휘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쁘고 자기 능력을 잘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인간 매뉴얼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스스로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인간들을 지으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법, 통치를 상징하는 선악과만 통과했다면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서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사시려고 했습니다. 그게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어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도록 사탄이 유혹할 때 어떻게 유혹을 합니까?
(창3:5)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은 인간들에게 거짓 약속을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힘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너희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 지상낙원도 만들어 봐“
지금도 하나님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 앞에 선악과를 두십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그대로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들으세요, 분명 행위 언약은 파기된 것이 아니란 것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합니다. 자, 그리스도인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성경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어떻게 그 법을 알려 주십니까? 양심에다가
그 율법을 새겨 놓으십니다.
(롬2:12-15)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양심이라는 형태로 집어넣으십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 율법이 언제 주어졌습니까? BC1,500년 경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주십니다. 그런데 BC1,700년 경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마치 모세의 율법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2.2m의 원통형 비석에 적혀 있는 함무라비 법전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수백 년 전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282개 조항의 소송법, 절도 법, 유괴, 강도, 병사에
관한 규정이라든지 상법, 채권 채무 법, 가족 법 등이 적혀 있는데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라, 물건을 훔친 자는 노예로 만들어라, 폭력을 휘두른 자는 곡물로 배상하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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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땅과는 거리가 먼 우리 고조선 의 한서지리지 팔조법금에도 똑같은 법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갈비를 부러뜨리면 똑같은 갈비를 부러뜨린다.“ 이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모세 율법이 비슷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 율법이나 함무라비 법전이나
팔조법금이나 그 맥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심어두신 양심이라는 것에 새겨두신 법이 총화 되어져서 사회법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심판대에서 핑계를 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법은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은 모든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인간 매뉴얼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able to sin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제 인간은 타락을 하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죄만 지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저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지킬 수가 없으니까? 그 법은 저주일 수밖에요.
인간의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주 뛰어난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 율법을 의문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지켜봐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약속까지 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지키면 너희에게 내가 태초에 주려 했던 그 복된 삶을 ,
하늘의 풍요를 누리게 해 주겠다”
(신5:28-33)
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복된 삶의 조건이 뭡니까? “법을 잘 지키고 도를 행하면“입니다.
(신28:1-14)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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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 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면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중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비슷한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막10:28-29)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 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백배나 받게 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목사들이 헌금을 짜낼 때 많이 드는
구절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께 투자하면 백배로 돌려받을 수 있는 건가요?
이 구절도 역시 거듭난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핍박 속에서도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평안과
하늘의 풍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아들을 바치면 100배로 주세요? 아내를 바치면 아내가
100명이 됩니까?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해 보지 않고 “집과 전토를 바치면 백배로 준다.“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잘 보시면 29절에 나열된 것들 중에 30절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아비”입니다. 왜 아비는 빠졌을까요? 아비는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어떤
것에도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걸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사랑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은 아비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풍성함을 이
땅에서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우리도 이 땅에서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28:15-)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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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이렇게 엄청난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없다? 지킬 수 없다고 했지요?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적인 타락 상태인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신 오셔서 하나님의 요구사항인 그 율법을 다 지켜내시고 그것을 통째로
우리 것으로 여겨 주셔서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킨 자가 되는 것이고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과대평가해서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전체 인간의 대표인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은 그 율법을
거울삼아 자신들의 추악한 모습을 보라고 율법을 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거울로 직접 몸을
닦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롬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이 율법을 지켜 낼 수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과 함께 희생 제사를 주셨겠습니까?
못 지킬 것을 뻔히 아시고 그것을 못 지켰을 때 속죄의 방법을 함께 주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이 주어지면 정확하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위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정말 눈을 뜨게 해놓으신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반응은 “정직”입니다. 다른
말로 “회개”라고도 합니다.
위선으로 가는 사람들은 율법을 받으면 지킬 수 있을 만큼 지킵니다. 남들에게 “선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만큼 지켜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포하기를 “인간은 법을 지킬 수
없다“ 고 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처럼 하고 있다는 것은 뭡니까?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법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의 부정직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
정직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위선, 외식, 부 정직의 죄“
(마23:28-33)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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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열심히 지킨다고 지킨 유대인들에게 아주 지독한 욕을 퍼부으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뱀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창세기를 줄줄 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뱀이 얼마나 철천지원수로 여겨졌겠습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뱀은 곧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던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더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저주를 퍼부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왜 똑같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세리와 창녀들은 받아주셨습니까?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악하게 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난 세리입니다. 맞습니다. 전 죄인입니다. 난 창녀입니다. 당연히 저는 죄인입니다“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부정직함과 사악함과 추악함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가 회개라
한다고 했지요?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라 한다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죄인이라 찍힌 이들은 적어도 부 정직의 죄, 외식의 죄는 짓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신 자들은 반드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자기들은 절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구원자로 등장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완벽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에서 율법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원리로 과거에도 죄를 짓고 현재에도 죄를 짓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지금도
겉으로 보면 율법 아래 놓여 있는 자들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지고
죄를 지음에도 결코 정죄를 받지 않게 되는지, 그리고 유대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오해했던
것인지 로마서를 가지고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롬5:20-21)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20절에 율법이 “가입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은 헬라어 ”파레이 셀코마이“입니다. 그
뜻은 ”나란히 들어오다“라는 뜻이거든요? 율법이 무엇과 나란히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롬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가 ”에이 셀코마이”입니다. 거기에 “함께”라는“파라”가 붙어서 그
“죄와 함께 들어 왔다“라는 의미의 ”파레이 셀코마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 올 때 율법이 함께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죄와 함께
들어와서 한 일이 죄를 더 증가시켰다고 합니다.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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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율법이 죄와 함께 들어와서 범죄를 더하게 했다“라고 표현을 하는가?
“더하게 했다” “플레오 나조”는 “명확하게 하다. 많게 하다”의 뜻입니다.
1.율법은 타락한 인간에게 죄에 대한 명확한 분별 지식을 줍니다.
(롬7:7)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탐심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뒤메오”는 단순히 남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원하고 원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눅22:15)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이 단어하고 같은 단어라고 설명 드렸지요?
그런데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합니다.
이 탐심은 율법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이지요.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출20:17)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해놓고
열 번째에서 전부 종합해서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열 번째
계명은 ”네가 행위로 저지르지 않았을지라도 네 마음속에 간절히 원하고 원하는 그 것도
율법을 범한 것이다.“ 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10계명에서 그렇게 ”내가 행위로
저지르지 않았어도 내 속에 그 것을 하고 싶은 원하고 원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죄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 것이 죄인 줄 몰랐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유치원에 가서 친구의 장난감을 집어오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나 어머니가 그 것이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이는 절대 그 것이 잘
못된 것인 줄 알지 못합니다.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나는 무지하게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율법이 죄와 함께 들어와서 인간의
죄를 더욱 명확하게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롬7:8-9)8절 후반부부터 보겠습니다.
8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 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장발 단속법이 있었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면 법에 걸렸습니다. 양담배를 피우면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남자가 리마리오처럼 머리를 길러도 됩니다. 전인권 씨처럼 평생을 파마를 하고 다녀도
괜찮습니다. 미니스커트가 아니라 수영복을 입고 다녀도 누가 뭐라 안 그럽니다. 양담배를
TV에서 판촉을 합니다. 죄는 법이 있어야 비로소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함께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영원히 죄가 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계속 그 죄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찌꺼기가 가라앉은 겉으로 보기에만 맑은 물 컵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더러운 찌꺼기가 가라 앉아있는 물 컵은 젓가락으로 한 번만 휘저어 보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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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물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인간의 삶에 율법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게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리고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빌3:4-6)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을 깨닫지 못 했을 때에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펄펄 살아서 날 뛰었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깨달아지자 그렇게 펄펄 살아서 날 뛰던 자기가 죽고 젓가락으로 찌꺼기가 든
물 컵을 휘저은 것처럼 더러운 죄가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옵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요한이 밧모 섬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하지요? 다니엘도 에스겔도 하나님을 보자 모두 죽은 것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깨닫고 나서 그 의미를 알고 나니까 펄펄 뛰던 자신이 정작은
죽어있던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7:9)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은 이렇게 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율법은 타락한 인간이 죄를 더 짓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롬7:8)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기회를 타서 “압홀메”라는 말은 “지렛대를 삼아서”라는 뜻입니다. 죄가 율법을 지렛대로
이용해서 죄인의 마음속에 “에피뒤메오” 탐심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이 필라델피아에서 elementary school 6학년 때 학교에서 폭죽을
가져오지 말라-그 목사님은 그 때가지 폭죽이 뭔지 관심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폭죽을 절대 가져오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게 뭔지 되게 궁금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것을 갖고
있는 친구를 물어, 물어 찾아내서 그 친구 집에 가서 그 폭죽을 얻어다가 학교에 가지고 가서
터뜨렸다고 합니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죄를 더 짓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전에 읽은 로마서 5장 20절에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기록이 된 것입니다. 율법은 죄와 함께 들어와서 그러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 율법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그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들에게는 율법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롬7:1-6)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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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자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설명을 해 드리는데 율법에 대해서 또 가물가물
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 타락한 인간은 율법 아래 태어납니다. 율법은 원래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며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인간이 살게 되면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되는 이상적인
삶의 원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을 상실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부담이 되고 저주가 되어 우리를 옭아매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원히 그 율법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
이런 죄 졌어, 너 저런 죄 졌어” 계속 율법이 우리를 고소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히 율법을 지킬 수도 없으면서, 율법으로부터 정 죄만 받는 인간들 중에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만 골라 내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으셔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종이었던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지금 로마서 7장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법적으로 그 남편에게 매여서 다른 이와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자유롭게 되어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과 이혼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관계가 끝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으면 그
관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 넣어서 죽여 버리시고 다시
창조하셔서 예수님과 결혼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망명(亡命)이라는 말이 있지요? 과거에 독재 정권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국가 보안법에 걸리면 다른 나라로 망명(亡命)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죽을 망(亡),
목숨 명(命) 자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부터는 죽고 다른 나라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대한민국 법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사람으로서의 그 사람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에 대해서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율법에 대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율법이 여러분을 붙들고 죄를 더 짓게 만들거나
고소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불쌍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노예는 아주 포악한 왕 밑에서 고생,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포악한 왕은 언제나 자기의 뜻대로 그 노예를 부렸습니다.
그 노예는 틈만 나면 탈출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실패를 하고 그 포악한 군주에게
걸려서 매만 흠씬 맞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나라의 선한 왕이 그 노예의 사정을 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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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습니다. 그 선한 왕은 그 노예를 구출해 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포악한 왕이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란 것을 그 선한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한 왕은 그 노예를
죽여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 선한 왕은 그 죽은 자를 무덤에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선한 왕은 그 노예를 십자가에 달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포악한 왕이 와서 보니 자기가 수족처럼 부리던 노예가 죽어있었습니다. 그 포악한 왕은 아주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어쩔 수없이 그는 노예를 내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그 선한 왕이 그 노예의 무덤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노예를
무덤에서 살려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폭군의 나라에서 그 노예는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나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선한 왕의 나라에서 그는 이제 자유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자가 된 것뿐만 아니라 선한 왕은 그 노예를 그 나라의 왕자로 삼아
주었습니다. 평생 더럽고 지저분하게 그 폭군이 시키는 온갖 악한 일을 하던 그 노예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거절도 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고 말이지요. 나는 정말
왕의 궁전에서 문지기를 시켜주시더라도 감사하게 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선한 왕은
그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노예라 신발도 신지 못 하고 있었던 그의 발에 신을 신기고 왕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7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이며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차고 넘치는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까 읽었던 로마서 5장 20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롬5:20-21)
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죄가 “더한“ 곳이라는 구절의 ”더한“은 ”플레오나조“ ”아주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죄가
그렇게 아주 많은 곳에 은혜는 넘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넘쳤다“는 단어”휘페르 페릿수오“는
”차고 흘러넘치다”라는 뜻입니다.
망가지고 훼손된 것을 고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상쇄하고 없애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는 다른 새것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수해로 경기도 청북면 삼계리 옹포라는 마을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그 마을을 다시 원상 복귀 시켜 주는 것도 정말 큰 은혜요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황폐해진 마을에 뉴욕 시티 같은 도시를 세워 주는 것이 바로
“은혜가 넘쳤다, 은혜의 왕 노릇이다“ ”휘페르 페릿수오“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은혜는 로만 카톨릭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행동을 보조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은혜는 능력입니다. 우리를 장악하고 이끌고 가는 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러한 율법을 잘 못 이해하고 그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 이방인들을 갈라내서 개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을 통렬하게 비난하십니다.
마태복음을 비롯한 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 전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 바리새인을 나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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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고 했지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에서 이른 아침에 온 “왜 난 이렇게 일을 많이 했는데
나도 한 데나리온 밖에 안주냐?”고 불평을 했던 일군이 누구라고요? 유대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자를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인이 누구를 상징합니까?
열심히 율법을 수행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킨다고
하지만 정작 자들이었다고 합니까?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때려죽인 자들이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초청하러 온 왕의 종들을 때려죽인 자들이며 한 달란트를 받아서
자기의 방법대로 땅에다 묻어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마25:30)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율법은 이렇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입니다. 절대 그 율법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그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고 옭아매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는 하늘나라 백성들의 삶의
표준이며 행복한 삶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그렇게 차별을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새사람이 되신 분들 맞습니까?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이 여러분과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아니라면 기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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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나
(엡2:11-16)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 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2장 후반부 전체를 교회론 적으로 접근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11절부터 22절까지를 몇 부분으로 끊어서 구절구절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늘 공부할 부분을 잘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생겼으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택하셨는가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곳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팔던 그 아비 데라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는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머물다가 데라는 205세에 죽었고
그 때 아브라함이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이건 사족입니다만 혹시 여러분이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 드리고 넘어 가겠습니다. 11장26절에 보면 데라가 아브라함을
70에 낳았다고 나와 있거든요?
(창11:26)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창11:32)
32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12:4)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계산이 안 맞지요? 70에 낳은 아들이 75세가 되었으면 아버지는 145세가 되어야 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205세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에서 나왔습니다.
(행7:4)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계산이 안 맞습니다. 이 말씀은 26절을 잘 풀어야 합니다. 26절 말씀에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한 해에 세 명을 낳습니까? 그 표현은 데라가
아브라함을 70세에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 방법으로 데라가 70세부터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절은 데라가 70세부터 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와
있습니다. 그게 또 걸리지요? 그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나이 순서대로 이름을 쓰지 않고 중요한
사람부터 이름을 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셈, 함, 야벳 도 원래 ‘함’이 막내인데 셈, 함,
야벳으로 기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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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족은 거기까지 하고요. 아무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12:2-3)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리고 실제로 이삭이 태어나고 야곱이 태어나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태어나면서 12지파가
준비되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가게 되고 거기서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아이를 낳아
200만이 넘는 하나의 민족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들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 나라를 택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한 나라를 택하셨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를 설명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디스플레이 모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boundary를 만드시고 그들을 모델로 써서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조건 없이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완성해 가신다.“”그리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스라엘, 교회라는 울타리에 속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즉, ”창세전에 택해져서
교회라는 boundary안에 들어 있지 않은 자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표식으로 할례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고, 그렇게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율법을 잘 지켜 행복하고 기쁘게 하늘의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며 그 법을 지키지 못하면 심판과 저주에 던져지게 된다.”는 구속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구속사의 모델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복음을 주시고 그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은 자들의 모델로 그 복음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해 줘야 하는 대 제사장
나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시면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너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너를 인해 다른 이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5장에서 “하나님을 믿었다“고 나오고 하나님은 믿은 그를 의롭다 칭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내용이 뭔지 한번
보자고요.
(갈3:6-9)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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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내용에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내용과 아울러“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까지 들어 있습니다. 복음에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복이 나로부터
다른 이에게 전파된다는 것”까지가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이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는 삶을 살고 있거나 여러분
안에서 그 구원에 대한 감격이 솟구쳐 올라 그것이 전도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복음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분일지도 모릅니다. 분명 복음은 우리로 이방이 복을 받게 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무엇인지 히브리서로 가서 한번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히11:8-1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자기의 본향을 나와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을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다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모했다는 것은 처음 불림을
받은 자기로부터 정말 수많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말미암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가 믿음입니다. 여러분도 정말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죽어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믿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면 정말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고 싶어 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거나,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option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 필연적인 것들입니다.
(고후5:18)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스라엘은 이렇게 자기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족속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분의 율법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다른 민족은 개 같은 이방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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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겼습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율법도 제사도 할례도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하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3:23-26)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율법은 우리에게 믿음이 오기까지 믿음의 때까지, 오히려 우리를 가둬 두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율법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들이니 예수께로 가야한다”고
외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몽학 선생이라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만이 구원을 얻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너희들은 죄의 종이다, 회개해라” 하고 말씀하시니까 그들이 내가 왜
“회개해야 하나?“ 하고 되레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8:33)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참 의미를 오해했기 때문에 진짜 이스라엘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러
오신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말라기의 진술대로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나뭇잎만
무성한 외식을 만들어 냈고 십일조를 낸다고 하면서 저는 것, 병든 것, 못 쓸것들만 가져와서
눈먼 희생을 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세 등등 했을 만큼 “이스라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아무 유익이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19세기 아일랜드 정치가인 다니엘 오코넬이라는 사람이 영국의 대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걸어서 하원에 탄핵안을 제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디즈레일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난 유대인이요. 바로 이 존경하는 신사 오코넬의
조상이 아일랜드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을 때 내 조상들은 솔로몬의 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였고 세상을 향하여 율법과 종교를 주고 있었소.”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엉터리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을 때에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성품인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롬3:1-2)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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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런데도 메시야를 못 박아 죽여 버렸지요? 결과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유리한 고지에
올라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너희는 그렇게 실패한
유대인들한테 무 할례 당이라 조롱을 받던 자들이었고 구약 시대 내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었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자들이었다. 너희들이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고
“교회”가 되었는지 잊지 말아라“ 하고 확인시키는 대목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1절,12절에서 이방인들의 구원받기 전의 처지에 대해 기술을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그러나 이젠”의 부분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엡2:11)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 하고 시작이 됩니다. ”생각하라”는 “므네모뉴오” “기억하라“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기억하라”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 10절까지 ”인간은
얼마나 죄인이었으며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혜와 능력으로 그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이루셨음을 설명하고 11절에서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 교회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기억하라” 라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들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기술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너희는 육체로 이방인이었고, 너희는 유대인들에게 “무 할례
당이라고 조롱을 받던 이방인 들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도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들이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러나 이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니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냐?“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육체로 이방인이었던 자들은 어떤 자들이었는가? 11절부터
기술된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무 할례
당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무지하고 가련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고 있었지만 할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었지요? 비록 몰랐었지만
그들은 그래도 하나님으로부터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은 받았었다는 말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에다가 할례를 받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진짜 할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육신에다가 행하는 자기들의 전통이나 형식을 신봉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표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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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무 할례 당이라고 조롱하듯 부른 것입니다.
11절에 “손으로 육체에 행한” 이라는 말은 “사륵스 케이로 포이에토스“입니다.
‘사륵스’는 “육신“”옛 몸“”죄 된 몸“라고 했지요? 케이로 포이에토스는 ”손으로 만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옛 몸에 인간의 전통이나 형식을 따라 인간의 손으로 행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엉터리 할례를 행한 자들이 자기들은 “할례 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3:3)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예수를 믿는 자들이 참 할례 당이지 너희들은 진짜 할례 당이 아니라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할례 당이라는 단어를 인용해서 풍자하는 것입니다.
(롬2:28-29)
28 대저 표면적 유대 인이 유대 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준 새 번역)
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육신의 껍데기에다가 형식적으로 전통에 따라서 하는 행위가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의 예레미야서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진짜라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유대인들은 그 선민사상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렘9:25-26)
25 "나 주의 말이다. 그 날이 이르면, 몸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내가 모두 벌을
내리겠다.
26 이집트와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광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도 내가 벌을 내리겠다. 이 모든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던 이방인이던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 이외에는 모두 벌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받는 진짜 할례가 뭐길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롬2:25-27)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김받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은 사람이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손으로 양피를 많이 베었다고 해도 그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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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 같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할례를 받는 것이다“라고 바울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말씀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내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17:9-14)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 하였음이니라
14절에 “내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내가 저주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언약이 어떤
언약입니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창15:11-17)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언약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 홀로 지나가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쪼개지실 지라도 언약은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저주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바로 다음 장인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언약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쪼개지심으로 하늘의 뭇별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 가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양피를 쪼개야 합니까? 왜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자신이
쪼개진 그 저주의 자리에 “너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네 몸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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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지신 자리에 우리도 연합되어 함께 있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바로 할례인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나는 저주받아 죽은 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뭐겠습니까? 똑 같아요. “나는 저주의 물에 빠져 죽은 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고전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를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 장면은 출애굽기 14장에
나오지요?
(출14:21)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성경에서 “물, 바다“하면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저주“를 상징한다고 했지요?
왜 하나님은 많은 길을 놔두시고 굳이 홍해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을 까요? 모세는 한번
가봤던 길이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홍해를 굳이 건너게 하십니까? 바로 그 저주의
쪼개짐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저주의 바다가 쪼개집니다. 그 쪼개짐 사이로 누가 지나갑니까? 모세가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물에 빠져 죽은 모세 안에 들어가 다 같이 쪼개진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고 다시 살아 올라오는 것을 우리는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셨을 때 하나님은 그 품안에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어 안고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저주받아 죽은 자라는 표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과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쪼개져서
죽고 다시 살아난 거듭난 자들의 믿음을 우리는 할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님
안에서 율법을 다 지킨 자들로 여겨지는 의의 옷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다 지킨 자들이 되는 것이고 아까 읽었던 로마서 2:25절 이하의 말씀처럼 할례를 받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롬2:25-27)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김 받지 않겠습니까?
(골2:11-12)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갈6:15)
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 380 -
(표준 새 번역)
15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례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오해하여 이방인들을 가리켜 “무 할례 당” “할례도 못 받은 놈들“이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 할례가 뭔지 조차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더 한심한
거죠?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는 그러한 육체에 손으로 행하는 할례조차도 몰랐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오해하고 있었지만 할례를
행하던 자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너희는 그나마도 모르고 있었던 자들 아니냐?

두 번째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과 밖에 있는 자들의 차이가 뭡니까? 천국과 지옥이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롬16:7)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기의 동역 자들을 소개하면서 전부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고
시작합니다. 먼저 들어갈 수도 있고 나중에 들어 갈 수도 있는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갈3:26)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고후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전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지요? 이방인들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제사, 율법, 할례)을 알지도 못했고
접하지도 못했던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 안에서 받아야 하는
구원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이 100년 전입니다.
그 전에는 어땠나요? 우리 조상들이 예수를 알았나요? 우리 조상들이 율법을 알았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예배를 알았나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예수를 알 수 있는 여러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인 너희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이냐“ 하고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외인이었던 것을 “기억하라“


고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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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되기 전인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나야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물음에 “오직 구원은
유대인에게서만 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4:20-22)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만 난다는 것은 단순히 민족적 차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비록 오해하고 실패하기는 했지만 예수를 가리키는 여러 가지 율법이나
제사 할례 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구원자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잡혀갔다 온 뒤 남 유대에게
홀대를 받자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율법에 근거하지 않은 성전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 주신 그 율법과 제사 즉, 예수 그리스도로만
오는 것이지 너희들 마음대로 하는 열심에 근거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어느 종교 , 인간의 이상을 기초한 어느 종교도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이 뭐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택하셔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놓으셨기 때문에 구원은 유대인에게서만 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러한 예를 세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나오미가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어 모압에 갔다가 아들들이 다 죽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려
할 때 며느리 룻이 좇아가려 했습니다. 나오미는 룻더러 모압에 남아 있으라고 했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가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룻1:16)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서 하나님을 진실로 경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 전에 무슨 말을 합니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여인인 룻이 유대인이 되기로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유대인 소녀가 노예로 잡혀와 있었습니다. 그 소녀로부터 엘리사를 소개받고 나아만이 유대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온 후 문둥병이 낫자
노새 두 마리에 유대 땅의 흙을 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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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5:17)
17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왜냐하면)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히브리어 “키”가 생략(왜냐하면) 흙을 좀 주세요. “왜냐하면” 하고 이유를 밝힙니다. 왜 흙을
실어 갔습니까? 이제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하여 유대의
흙을 실어 간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그 흙을 바닥에 붓고 그 위에 앉아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 유대의 흙에 앉아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에스더서에 보면 바사의 대신인 하만이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장대를 세웠는데 하만이 거기에 달려 죽습니다. 그 때 바사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되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합니다. 그것을 에스더서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에8:17)
17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바사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것을 성경은 바사 사람들이 “유다인이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배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야
너희는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고 사도 바울은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이방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음을 기억하라“ 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전부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히11:31-33)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롬9:4)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하나님은 맹세하여 그 약속을 지켜 나가십니다.
(히6:13-18)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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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그 약속이 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지금 그 유대인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어 있느냐? “감사하지 않니?” 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가끔 만일 제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을 해 봅니다. 생각하기도 싫지요.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나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이 제 안에 계시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어느덧 그 문제는 사라지고 하나님과 저만 남습니다.
우리 청년 중에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서 더
어려우시지요. 그런데 그 어머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목사님, 제가 우리 딸하고 전화만 하면 너무 힘이 납니다.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우리 딸이 “엄마, 하나님이 계신데 왜 걱정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는 분이시니까,
이 어려움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일거야, 엄마 걱정하지 마.“ 하고 굳건한 반석 같은 신앙
위에서 어머니를 격려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라고 왜 안 힘들겠어요?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겁니다. 그래서 그 폭풍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의 삶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당장 목매달지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있는 자들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맹세하여 약속해 주셨거든요.
(딤후1:12)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러니까 여러분, 힘을 내세요.
우리가 아까 부른 찬양을 기억하십니까?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왜 견디다 못 해 쓰러질 때까지 놔두십니까? 필요하니까요. 그렇지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멸망의 자리로 끌고 가시겠어요?
결론을 짓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렇게
(엡2:11-12)
11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었던 자들이었는데
(엡2:13)
13 (그러나)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through the blood of Christ.
“누니 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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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면 여러분의 오늘도 그 하나님께 맡겨 볼 만 하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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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아버지께 나아감
(엡2:14-18)
14 (왜냐하면)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 수개월 동안 1장 후반부부터 “믿는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서 사도의 진술을 따라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절대 살아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면서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도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있었던 높디높은 담을 하나님께서 그 분의 능력으로
허물어 버리셨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합니다.
지난주에 공부했던 부분이지요?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도 없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었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자들이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다” 고 진술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14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거기에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르”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13절까지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술하고 거기에 대한 원인, 이유를 14절부터
기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이시기 때문이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잘난 자와 못난 자,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을 없애버리시고
그들 사이에 있는 긴장감과 두터운 벽을 헐어버리시고 화평과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 13절까지에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었고 그렇게 죄 속에
묻혀있는 자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분열이 있게 마련인데 14절, 화평의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그 둘 사이의 분열을 종식시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열시켰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분열시켰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원수 관계에
놓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적인 국면입니다.
오늘 날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자주 만나고 회담을 하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4자
회담, 6자 회담 이런 것을 왜 하는 것이죠? “평화롭게 살기”위해서입니다.
평화를 지키자는 것이죠. 서로 화해하고 전쟁을 없애고 사이좋게 살자는 것입니다. 왜 그런
회담을 일부러 해야 하지요? 인간은 생래적으로 자기와 다른 자들을 좋아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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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입니다.
온 세계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입니다. 여러분, 전쟁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영화나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전쟁이야기를 많이 들 보셨을 겁니다. 승리를 하던 패배를 하던
전쟁 당사자들은 결과적으로 보면 아무 이득이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미친 짓들을 하는
것입니까? 전쟁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에요. 인간의 죄악이 가시적으로 표현이 된 것 중에 가장
극치의 미친 짓입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다른 이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죽이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뭡니까? 교만과 이기적인 자기애입니다. 모든
전쟁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커다란 전쟁 말고도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작은 전쟁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포탄과 탱크만 없지 파괴력은 동일합니다. 죄인들은
그들의 말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암암리에 공격하고 죽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적대적인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어떤 한 무리를 건져내셨고 그들을
화평케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웃들과도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개처럼 여기던
이방인들과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야만인으로 여겼던
유대인들과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건대 세계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모여서 회담을 하고 회합을 가져도 절대 세계는 평화로워지지 않습니다.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고집스럽고 독한 유대인들을 변하게 만드신
하나님밖에는 평화를 이루실 분이 없습니다. 그 교만하고 이기적인 헬라인들을 변하게 만드신
하나님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평화가 없으신 분들은 회개하세요. 그리고 예수를
바로 믿으십시오. 분명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데 여러분은
계속 분쟁 중에 계시다면 그거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사도는 계속해서 진술을 이어갑니다. 화평 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화평케 하시기
위하여 그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합니다.
(엡2:14-15)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막힌 담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율법을 가리켜 “원수 된 것“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우리 인간이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그 율법은 오히려 인간에게
올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셔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구나,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 했는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면서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거들먹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원수로
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자세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제물이 되셔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 그 율법을 완성을 시켜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이 유대인들만 지키던 율법과 제사를 통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유효하게 만들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를 원수로 만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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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예수님의 몸으로 인해 폐하여 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이신 주님은 원수 되었던 율법을 몸으로 폐하셨을 뿐 아니라 그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해 버리셨습니다.
(엡2:15)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교회는 화평케 되기 위해서 단순히 그 막힌 담만 헐어내진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드릴게요. 대영제국과 미국을
보자고요. 예전에 대영제국 하면 영국본토와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을 다 통틀어
대영제국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국가의 형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성도
각기 달랐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각국의 민족들이 모여서 이룬 나라입니다. 이곳 미국에도
영국사람, 이태리 사람, 독일사람, 한국사람, 일본 사람, 멕시코 사람 아주 다양한 민족이
삽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원래의 국적을 포기해야
미국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시민은 옛 국적 뿐 아니라 옛 국가에 소속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 미국은 여러 민족이 각기 자기 나라의 민족성과 국적을 갖고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미국이라는 나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담이 허물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전혀 다른
사람들로 재창조된 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어떤 사람은 부자로 있었고 가난한 자로 있었습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
어떤 사람은 굉장히 잘 난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아주 못 난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교회라고 할 때는 그러한 여러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개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제 완전히 다른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고
화평한 새로운 창조물로 다시 태어난 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 차이가 없기에 화평이
가능한 것입니다. 차이가 있으면 늘 질투가 있어요. 그러나 교회는 서로 평등하기 때문에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둘로 한 새사람이 된 하나의 유기체가 된
것입니다. 옛 것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갈3:28)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메튜 헨리의 아버지 필립 헨리의 이야기를 한번 해 드렸었지요? 필립 헨리는 아주 가난한
기독교인이었고 메튜 헨리의 어머니는 귀족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어느 날 메튜 헨리의
어머니가 그의 남편을 자기 부모에게 소개시켜야 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메튜 헨리의 어머니
부모님께서 그 메튜 헨리의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이 남자가 어디서부터 왔느냐? 어디
태생이냐? 고 예의 귀족들이 묻는 질문을 했답니다. 그 때 메튜 헨리의 어머니가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나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나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요.“
이제 어디로부터 나온 옛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 새 사람만 교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영원을 향해 가고 있느냐?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옛 날에 집에 금송아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아무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자꾸 이 사실을 놓칩니다. 그래서 자꾸 화평이 깨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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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도 그러한 예들이 있었지요?
초대 교회 때의 예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잘 못이 뭔지 한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초대 교회 때도 교회 안에 출신에 따른 파벌이 있었습니다.
(행6:1)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초대교회 안에 헬라 파와 히브리 파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니까 즉각 화평이 깨지고 원망이
일어납니다. 헬라 파 히브리 파 뿐 아니라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까지 있었지요? 바울은
그 사실을 개탄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은 가족들까지도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싸우고 갈라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들의 화평이 깨졌지요?
바나바의 조카 마가 때문입니다. 마가는 그 전 선교 여행 때 낙오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불성실한 자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나바는 마가가 자기 조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옹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족이라는 혈연이 개입이 되면 교회는 반드시 분란이
생깁니다. 한국의 큰 교회들에서 담임 목사의 후계자로 제일 먼저 꼽히는 사람이 그 목사의
아들입니다. 물론 그 아들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지 담임
목사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favor를 받는 것은 분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혈연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물로서의 신분에 자꾸 익숙해 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과거가 여러분을 붙들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눈물이 쏙 빠지게 면박한 사건이 있지요?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는 이방인들과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이방인들과 먹다가 그들이 오자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교회 멤버들의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러분의 신앙도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과
이제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져 있는 것 아십니까? 은근히 자기의
신앙을 재는 사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고전8:9-13)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신앙의 연륜이 깊은 사람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더 조심하고 그 약한
사람들이 실족치 않게 배려해야 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게 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신앙이 어린 사람들을 위하여 너희는 고기를 안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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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번쩍이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교회에는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12:12-26)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신앙의 연륜이나 은사의 크고 작음이 여러분의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골고루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재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약2:1-4)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차별을 하게 되면 교회의 화평은 금방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파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신분을 따라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혈연도 때에 따라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빈부로 사람을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의 연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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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나누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화평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화평 이신 예수께서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공히 평안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공히 평안이 필요했다는 것은 둘 다 죄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 57장을 인용한 구절이지요?
(사57:19)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약속의 성취입니다. 악인들의 마음속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마치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고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바다가 왜 그렇게 요동합니까? 왜 바다에는 파도가 있는
것이지요? 왜 바다는 간조와 만조가 있지요? 그 한 원인은 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원인은
반대편의 지구의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이 두 힘이 바다를 가만있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변에는 늘 지저분한 미역과 불가사리가 떠다니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의 마음속에도 그들을 끌어당기는 두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이라는 우리 안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는 죄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늘 불안하고 쫓기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인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 화평이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평안을
선물하셨습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다른 세력인 죄의 세력을 처참하게 죽여 버리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속고 있지요? 아직 이 죽을
몸(사륵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우리의 옛 습관과 경향을 죽여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의 새 신분을 자꾸 명확하게 알아가므로 해서 그
요동하는 바다와 같은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평강을 찾아가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이제 그의 진술의 클라이맥스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엡2:18)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표준 새 번역)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결론으로 맺어집니까? 그 모든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쉬운 말로 하면 이제 우리가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1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만 대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이제 수시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언제든지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지 아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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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맥스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그저 나의 필요를 나보다 힘이 센 어떤 존재에게 알리는 것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조르면 장땡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좀 더 깊고 좀 더 고급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속히 안 해 주시는 것이 많습니다.
(눅18:1)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이 말씀은 항상 기도를 해도 밤낮 부르짖어도 기도의 응답을 안 해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를 하는 데도 아주 무너져 버리게 그냥 방치해 두시기도 합니다.
(요11:1-4)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그러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께 기도를 합니다. “오셔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를 고쳐주소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로 안 가시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하십니다. 그게 무슨 심통이십니까? 왜 바로 가서 고쳐 주시지 않으십니까?
이 요한복음 11장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장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사로의
죽음으로 예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가 죽은 뒤 나흘째에
그 곳에 도착하십니다. 당시 랍비들은 사람이 죽으면 3일간 육체 주위에 머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3일도 지난 나흘째에 간 것입니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죽어 있는 시체에게 가신 것입니다. 그 시체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끔 그가 살아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 나오는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1:40,43,44)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게 기도의 결과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고 무시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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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성도의 부활의 필연적인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요구가 들어지느냐
안 들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 면 여러분의 기도가 안 들어 지는 것도 때로는 여러분에게
유익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시고
때로는 기도의 응답을 뒤로 미루시면서 우리에게 기다림과 인내를 가르치시고 때로는 우리의
기도와는 정 반대로 일을 진행시키시기도 하시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뭡니까? 여러분의 거룩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든 기도의 응답은 그리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의 기도의 내용도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은 모두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일5:14-15)
14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확신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께 구한 것을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눅11:5-13)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귀찮게 졸라대면(수치를 면키 위하여) 마침내 일어나서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만큼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친구가 밤에 찾아와서 먹을 것을 대접해야 하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떡을 좀 빌리기
위해서 이웃 친구를 찾아갑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풍습에서는 친구가 아무리 한 밤 중에
찾아와도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을 때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의 체면 문화에서 친구를 외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창피한 일이기에 수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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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하기 위하여 친구는 일어나서 떡을 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친구가 아니라 그게
아버지라면 오죽 좋은 것을 주겠느냐? 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조르면 준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껏 ‘구하라, 두드려라, 찾아라.’ 하고 기도를 촉구하십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되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일단 13절을 보시면 “성령”이라는 힌트가 나옵니다. 영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친구의 비유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혹시 아세요?
(눅11:1-5)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바로 주기도문에 붙어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이 비유를 붙여
놓으신 것은 이러한 기도들은 아버지가 다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1)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하나님이 나라가 임하옵시며,
(3)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4)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내일의 양식)“에피우시오스”
(5)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안에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무엇에 관한 기도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필요한 무언가를 하나님께 조르는 방법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자녀답게 만들어져 가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게할디스 보스는 기도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사귐이다. 기도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있다. 기도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사귀다보면
요청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도 있으며 찬양할 때가 있는가 하면 묵묵히 하나님과 함께 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사귐이며 이 모든 것이 기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기도다. 이렇게 사귐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점점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점점 깊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며 우리는 점점 더 그 분을
닮아가게 된다.” 맞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사용하시는 도구이고 우리 편에서 보면 바로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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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스로 사용하는 도구가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믿음 생활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신앙의 행위 중에 가장 강조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반면에
가장 훈련이 안 되고 오용되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 기도를 정복하라” 이런 책들이 버젓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라 있을 만큼
기도는 오해되어지고 있고 실제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만큼 우리의
대적들이 그 진의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기도가 어떻게 오해되어지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바르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도의 관습은 아주 전투적이고 강렬합니다. 세계에서 새벽기도를 계속 하는
교회는 한국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금식기도, 작정기도, 특별기도 같은 것이 그렇게
강조되는 나라도 한국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도가 한국의 교회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john stott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와의 대담에서
“한국 교회는 기도로 부흥했고 기도로 망하고 있다.”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무엇을
보신 걸까요?
그럼 보겠습니다. 창조부터 내려오도록 하지요.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모든 인간의 삶에는
고난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게 되자 그들은 곧 죄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죄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전쟁, 질병, 분 냄, 다툼, 시기, 질투 모든 것이
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피조물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탄식하며 기다리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합니다. 자기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충족시켜 줄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불교에는 3000배가 있습니다.
탑돌이가 있습니다. 108염주를 돌리며 기도를 합니다. 108번뇌라는 허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을 얻어 우주의 본질인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에 합일되어 해탈을
이루게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도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알라신의 계율을 따라서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힌두교에도 기도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과 인디언들도 어떤 대상에게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했던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 몸을 상하게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기도를 했습니다, 정 한수 떠놓고 알 수 없는 천지신명께 비는 어머니들의 간구 역시
기도입니다. 무당들이 작두 위에서 간절하게 신을 부르는 행위, 기도입니다. 월드컵 때
대한민국! 외치던 붉은 악마들의 염원, 기도입니다. 광화문 촛불 시위,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분신자살을 하거나, 할복을 하는 것, 더 나은 세상 더 많은 자유 함과 평등이 있는 세상을
열망하는 인간들의 염원이 담긴 기도입니다. 모두가 자기 안에 채워지지 않은 만족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종교,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에도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다른 종교나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에 의한 기도가 같아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 뭐가 달라야 하고 뭐가 오해되고 있는지 한번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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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들의 기도는 “인격적인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이나 힌두교 인들이 누구에게
기도를 하는 겁니까? 불교인들이 부처에게 기도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긴 요즘에는
불교인들도 부처에게 기도한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불교는 그게 아니에요. 힌두교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들은 기도의 대상이 없습니다. 막연한 대상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범신론이라 하지요? 해도 달도 별도 벌레도 바위도 다 신입니다. 그 말은 모두가 다 신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슬람교는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은 신은 인정하지만 우리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그런 신이 아니라 그 신은 우주를 창조한 후에 저 하늘에 앉아서
자연의 법칙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두고 있는,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신입니다. 그들은
그런 비 인격적인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종교의 범주가 아닌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강렬한 염원을 담아 소원을 품으면 인간에게는 신념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남북통일, 독도 사수” “주체사상” 이런 것이죠. 그런 신념이 생기게 되면 인간은 그 신념에
대해 헌신을 합니다. 실제로 공산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헌신을
했습니까? 민주화 투쟁을 위해 분신을 하는 사람들, 바로 헌신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바치고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이런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기도는 이렇게 인격적인 대상이 없기 때문에 기계적인 기도가 됩니다. 기계적인
기도가 되면 마치 vending machine에 동전을 넣으면 무언가가 나와야 되는 그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무당이 굿 발이 서지 않을 때 돼지머리에 돈을 더 끼워 넣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야
신이 오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input이 많으면 out put이 많을 거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기도의 행위를 더 적극적으로 하면 결과물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밥을 굶는다든지 몇 년간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소지 공양, 오체투지 이런 것을 하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목소리를 크게 하면 더 많은 결과물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눈물을 애절하게 흘리면서
기도하면 더 응답이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격해 지고 과장되는 것입니다. 기계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방 선지자들이 이렇게 기도했었지요?
(왕상18:26-29)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여러분 혹시 이런 기도하고 계시지 않으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기도를 길게 하는
것과 짧게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에 더 응답을 잘 해주실 것 같으세요? 소리 내어 애절하게
기도하는 것과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입도 안 벌리는 기도와 어는 것을 더 잘 들어주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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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으세요? 어떠세요? 우리 기독교 안에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의 기도의 모습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신념의 모습이 많이 침투해 들어와 있지요?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그 역사가 100년밖에 안 되는데다가 불교와 샤머니즘, 무속 신앙이
짬뽕이 되어 혼합적 성격을 띠게 되어 기도가 그렇게 과격해 진 것입니다.
마치 사생결단을 내려서 안 들어주면 죽어 버리겠다는 식의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의 기도도 인간이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든 감동시켜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는 식의
기계적인 기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물론 기도에 열심을 내는 것이 잘 못 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입다가 “암몬과의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시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오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승리를 얻어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아 이기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에게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그의 딸이 제일 먼저 마중을 오는 바람에 딸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입다가 옷을 찢으며
참담해 합니다. 그것은 객기입니다. 안 그래도 될 것을 괜한 객기를 부리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똑같이 아들을 바쳤지만 그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께 자식을 바친 것입니다. 다른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열심인가를 먼저 확인하세요.

이렇게 죄인들의 기도의 특징 첫 번째가 인격적인 대상이 없는 기계적인 기도라면


두 번째로 그들의 기도는 자기들이 먼저 신을 찾아 부르짖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며 빨리 신이 나와 주기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주도권 자체가 기도 자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의 기도의 결과는 기도자의 특별한 정성이나 기도의
형식이나 유창한 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성이나 우리의 표현 방법의 애절함 등으로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슙니다” 왜 그렇게 강한 악센트를 넣으면서 소리치지요? 안 믿어지니까?
왜 “주여, 주여, 주여” 복창하지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안 믿어지니까?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주여’를 50번 복창하면 의심이 사라진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그렇습니까? 제가 한창 종교 행위에 열심일 때에 정말 ‘주여’를 있는 힘껏 50번 반복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의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아득하게 의식이 사라지던데요? 너무
힘을 써서요. 아닙니다. 기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매달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거나 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이 온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 사람은
아마 예수님일 겁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한 것만 들어집니다. 어떻게 우리
이 사악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잘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우리는 구합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 응답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사탄이 응답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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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여러분에게 얼마든지 물질이나 명예로 응답해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불교 신자나, 이슬람 신자들이 기도를 해도 병이 낫습니다. 누가 들어주는
것입니까? 사탄이 들어주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꾸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의 성숙에는 아무 관심 없고,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분으로 전락이 되어버리겠지요?)
그런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사탄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고 응답이 주어지는 것으로 ‘그 기도가 참된 기도였다, 아니었다.’ 판단을
내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최근 어떤 정치인이 당 대표로 선출 된 후에 절에 가서 108배(拜)를 하고, 카톨릭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교회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자신이 속한 정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해달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보세요.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없고 그 대상과
인격적인 관계도 없고 그저 자기의 소원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보궐 선거에서 그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들어 준 것입니까? 부처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러한 한국교회의 기도를 간파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 잡신을 섬기는 자들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근거로 그 분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금식기도? 그게 뭔지 잘 모르시면 하지 마세요. 그거 잘 못하면 단식 투쟁 되는 겁니다.
예전에 어떤 만화를 보니까 겉으로는 ‘믿습니다.’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속으로는 “들어 줄래?
안 들어 줄래?”하면서 예수님의 팔을 꺾고 있더라고요. 그게 오늘 날 기독교인들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주 잘 본 것이지요.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1-3절까지의 말씀처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었고 이방인의 뜰에서 까치발을 들고도 성소를 바라 볼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창세기 3장24절에 보면
(창3:23-24)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인간이 타락을 하고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 에덴은 화염검과 그룹들이 지킵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지성소가 바로 그 화염검과 그룹들이 지키고 있는 에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두꺼운 휘장에 금실로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거기는 일 년에 한번 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피를 들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지성소에 들어가 친히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마27:50-51)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히10: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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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막는 저주의 휘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쪼개지고,
찢겨져서 그 휘장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사정을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기 위해 앉아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감격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아니,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쓸 수 있는 단어였던 “아바”라는 말을
우리에게 쓰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롬8:14)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4:6-7)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바 호 파테르” 아빠 곧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를 하실 때 기도의 언어를 택하실 때 너무 거창하게 궁중 용어를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이제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빠를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빠가 들어가면 전부 붙어 앉아서 무슨
이야기들을 해요. 저희 집에서 저에게는 꼭 한국말을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재잘 재잘 이야기를 합니다. 솔직히 반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제가 거기다 대고
“야, 말 좀 똑바로 해” “어쭈 존대 말 안 해?” 그러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도 다
들어줍니다. 말이 어눌해도 그 아이들이 아빠한테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다 알아요. 그리고
아이들이 이 시점에 뭐가 필요한지도 이미 다 알아요. 그런데도 그 아이들이 무언가 아빠한테
와서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그렇게 예뻐요. 그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적인
언어입니다. 내용이 뭔지 몰라도 너무 달지요? 그 언어에는 사랑과 신뢰가 함께 묻어있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언어가 정보언어로 바뀝니다. 무엇을 설명하고 이름을
붙이고 하는 언어이지요. 좀 더 지나면 설득적 언어로 바뀝니다. 그 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 하는 식의 언어를 말합니다.
자식들이 품안에 있을 때는 엄마 아빠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분들이 나의 필요를 완전하게 채워줄 것을 믿고 그 다정하고 사랑스런 아빠 엄마에게 가식
없는 언어로 대합니다. 그게 관계 적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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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라면서 아이들의 정신을 빼앗는 것들이 많이 생기지요? 만화영화 게임 딱지 구슬
장난감 이런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깁니다. 지금까지 아빠 엄마에게 쏟았던 그 관심과 사랑이
다른 것에 집중이 됩니다. 당연히 관계 적인 언어는 줄어들고 정보언어와 설득적 언어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에 필요한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언어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날 우리가 하는 기도의 언어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 거창하게 “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말 안 쓰셔도 됩니다.
여러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빠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새벽 기도에서 어떤 성도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아버지, 저 힘들어요, 힘들어 죽겠어요,
그리고 무서워요”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관계 적 언어입니다. 때로
너무 골이 나서 할 말이 없으시면 그냥 골 부리고 앉아 계시는 거예요, 때로 하나님께 삐진
마음, 섭섭한 마음을 드러 내놓을 수도 있어요, 침묵 속에서 감사를 드릴 수도 있고요, 때로는
신음함으로, 때로는 탄식하면서, 때로는 분명한 언어로 심지어 때론 의심도 하면서 내가
느끼는바 내가 원하는 바를 여러분의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로 표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다가 말이 막히면 당황해 합니다. “아이고, 내가 이거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거 아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화를 할 때 막히지 않고
좔좔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사기꾼이 많습니다. 어눌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
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만 확인이 된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여러분 왜 기도를 할 때 집중이 안 되는 지 아십니까? 한 30분만 앉아있으면 생각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오지요? 마음은 온통 잡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거창한 미사여구로 하나님을 모욕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복화술 하지 마세요. 그런 기도는 시간 낭비입니다. 왜 그렇게 집중이
안 되는지 아세요?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정말 자기 앞에 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화를 할 때 자기 앞에서 누군가가 잘 들어주고 있으면 집중해서
이야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데 무언가 열중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미친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하시려거든 먼저 여러분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대상을 여러분이
확실하게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초가 되어있지 않으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도 보시면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 성령이 계신 자들은 그 성령 안에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서낭당에서, 대웅전에서, 작두 위에서, 돼지머리 앞에서
기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확실하게 살아 계신 것을 믿는
행위입니다. 살아있지도 않은 대상에게 무슨 아뢸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도는 복음을
명확히 알기 전에는 전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고 의심합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복음을 모르니까 자기가 어떤
신분으로 바뀌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같은 사람의 기도도 하나님이 정말
들으실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한 자들이 자기의 신분을 알게 되고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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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기도의 자리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방법이기 이전에 특권이며 신분의 확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먼저 복음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first part는 여러분이 말씀을 잘 들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하여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여러분의 감정이 여러분의 영적
가이드가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감정이 안 따라주면 절대 기도 안 하지요? 그러면 사탄이
계속 여러분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객관적인 시간을 정해 놓으시거나 공동체 안에서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기도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기도나 예배나 헌금이나 찬양이나 사랑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에 따라 하고 안하고가 결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훈련하셔야 합니다.

총 정리를 하겠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시려고 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우리가 기도를 통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많은 어려움을 곤경을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고난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장이다.“ 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문제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바꾸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게 만드신 후 그의
기도를 통해 그의 내면을 바꾸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좌를 흔들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고도 변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그러니까 안 변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과 그 말씀에 근거한 기도만이 우리를 바꿉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새겨지고 그것을
activate시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먹어야 효험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세요.
여러분의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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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지어져 가라
(엡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그
죄로 말미암아 갈라졌던 사람들 사이의 담과 하나님과의 담을 허물어 버리셨고 우리 교회를
예수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만드셔서 화평케 하셨고 화목케 하셨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진술들이 18절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라”로 수렴되는 것을
확인했지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써
기도가 얼마나 엄청나고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인지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공부하면서 기도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조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에게 그들의 거룩을 이루어가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는 거기에서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기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고 응답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좌를 흔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사고와 인격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기도자의 바른 자세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하려면 또 오늘 시간을 다 할애해야 할 것
같아서 hand out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버리지 마시고 꼭 읽어보세요.

오늘은 19절부터 22절까지를 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18절까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가 살아나고 그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도 허물어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는 위대한 진술을 마치고 19절부터 그
새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권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첫째로 그 새사람들은 하나의 큰 나라의
시민이며 그들은 한 권속, 가족이며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먼저 19절을 보시면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12절에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에베소 교인들은 이방인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도 외인이었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너희가 이제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외인들은 어떤 사람들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외인들은 어떤 나라 안에 그 나라
시민들과 함께 살더라도 그들은 여권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소에는 아무 불편이 없이
시민들과 함께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그가 사는 나라와 자기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면
그 여권을 갖고 있는 외인들은 바로 적군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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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올라갔을 때 많은 다른 족속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
갔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움직였지만 이스라엘이 아닌 자들이 있었습니다. 외인들이
있었습니다.
(요일2:19)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They went out from us, but they did not really belong to us. For if they had
belonged to us, they would have remained with us; but their going showed that none
of them belonged to us.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함께 수 십 년씩 신앙생활 하다가 중간에 변질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외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시민권이 아니라 패스포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어떨 때 표시가 나는지 아십니까?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압니다. 여권만을 소지한 채 자기의 유익 때문에 그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이내 다른 좋은 곳을 찾아 철새처럼 떠납니다. 그러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사는 그
나라 시민들은 오히려 그 어려움으로 인해 더욱더 일치단결하여 그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할 때는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하늘의 시민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나 어려움이 닥치면 그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그 나라 시민은 그 나라의 법률과 관습을 잘 따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사랑합니다.
(시119:97-115)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113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4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5너희 행악 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당시의 나라들은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왕국(kingdom)이었습니다.
그 나라에 속한 시민들은 모두 그 황제와 중앙 정부의 훈령과 명령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표현을 한 것은 거기에는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함께 따른 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왕국은 한 통치자와
그가 제정한 법과 생활방식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 시민들은 그것들과 함께 묶여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의 법을 기쁘게 준수해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아울러 그 나라의 시민들은 왕과 나라의 보호를 받습니다.
1739년에 영국에 젠킨스 선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배를 가지고 있었는데
스페인 해안 경비대가 아무 이유 없이 젠킨스 선장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젠킨스 선장을
잡아다가 귀를 자르고 돌려보냈습니다. 이 젠킨스 선장이 그 귀를 술병에다 담아 가지고
영국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의회에다가 그 귀를 제출하고 상황 설명을 했습니다.
그 즉시 영국은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른바 “젠킨스 귀 전쟁“(The War Jenkins'
Ear)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모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회의 판단이었습니다. 스페인이 아니라 스페인 할아버지라도 대영제국의 시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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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식으로든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만일 미국 시민 중 누군가가 북한에 포로로
잡혀갔고 그 사실이 부시 행정부에 알려졌다면 당장에 미국에서 그 사람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시3:6-7)
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4:8)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슥2:8)
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롬8:31)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히13:6)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그렇게 신실한 왕을 섬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시민들은 자기의 왕을
자랑합니다. 롬멜의 부하들이, 히틀러의 부하들이,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이순신의 부하들이
“난 그 위대한 장군의 부하였다. 난 그와 함께 싸웠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지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명령에 기쁘게 순종합니다.
(벧전2:10-12)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그렇게 교회를 시민으로 부른 후에 다시 권속이라 부릅니다. 권속은 말씀드린 대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서 이제 하나님의 가족으로 그 개념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국가나 시민 하면 외적인 연합을 떠올리게 되지만 권속, 가족 하면 이제 내적인
연합이 떠오르시지요? 국가는 법률적인 관계이지만 가정은 생명 적이고 살아 있는 피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묘사하면서 한 단계 더 전진해서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는 좀 더 조밀하고 깊은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는 교회를 묘사하는데 건물의 개념을 갖고 들어옵니다.


(엡2:20-21)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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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지어져 가는 건물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사도가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하면서 교회의 울타리를 설명을 하고, 교회를 권속, 가족이라
묘사를 하면서 울타리 안에서의 그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어져
가는 건물이라 묘사를 하면서 교회의 유기체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건물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시민이나 가족은 서로가 끈끈한 연합관계에 있지만 여전히
개인이 모인 개인 집단입니다. 그러나 건물은 어떤 부분이 빠져버리면 붕괴되어버립니다.
교회는 그렇게 어떤 한정된 울타리가 쳐져 있는 곳이며 끈끈한 새로운 혈연으로 묶인
사람들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진정한 유기체라는 것을 사도는 점층법을 써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보시면 우리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고 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벽돌들인 것입니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어떤 집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벽돌들이라는 것입니다.
(요14:21-23)
21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22 가룟 사람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기를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다.
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고전3:9-11)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6:19)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벧전2:5)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는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건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의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연결되어져서 지어지는 전체 교회라는 건물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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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건물은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다시 보시면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여기에서 “되어가고“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욱 세이“는 ”길러지다, 자라나다”라는 뜻입니다.
성전이 자라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교회가 커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많아지면 교회가 자라나는 것입니까? 예배당 건물이 커지면 자라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건물의 특징이 뭡니까?
“거룩”입니다. “성전”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나온 하기온”이라는 말은 “거룩한 전”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자라난다는 것을 점점 거룩하고 성결하게 되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성전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 말은 교회의 벽돌 각자가 거룩하고
성결하게, 그 성전에 맞는 돌로 만들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란다는 것은 기계적이며 산술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란다는 것은 생명 적인
것입니다. 거룩과 성결이 없이 숫자만 늘어난 교회에 어찌 하나님께서 머무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로서 이 땅에서 싸우는 싸움이 궁극적으로 누구와 싸우는 싸움인지
아세요? 사탄과의 싸움입니까? 자기와의 싸움입니까?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여러분이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누구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끝까지 잘 들어주세요.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죽여 가십니다. 우리는 그게 힘드니까 싫다고 버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거룩하게 만들어야 ,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야 천국에
데리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사탄도 우리의
죄 성도 모두 그 싸움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방법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져 간다는 말이지요? 죄와 싸워서
이긴다는 말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러 저러한 방법을 동원해서 타락한 우리를 죽여 가시며 우리에게 항복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인생입니다.
(출4:24-26)
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모세가 40세에 애굽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 나와서
미디안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40년 동안 풀이 다 죽어서 이제 파파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떨기나무에 큰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모세가 힘없는
떨기나무가 되어서 하나님의 불로만 일을 하는 자가 될 때가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모세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모세는 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우깁니다. 하나님의 설득으로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오기로 하고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데 길의 숙소에서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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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모세도 “이스라엘은 좋은 사람이라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애굽은 나쁜 사람들이라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려 하신다.“라는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애굽 사람들보다 그들이 잘나고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유월절 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난 것은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하러 출발하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닫고 가야 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착하고
선한 자들이기 때문에 너희를 건져주는 것 아니다, 나는 나의 기쁜 뜻에 따라 너희를 건져
내려 하는 것이고 건져 낸 후에 애굽과 똑같이 죄 속에 젖어있던 너희를 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라는 것을 모세는 알고 출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것은 너도 내 말에 순종치 않으면 살아 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셨던 할례를 행치 않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할례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으니까 오늘은 그 할례를
명하시는 부분만 한번 찾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창17:9-14)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들, 곧 할례를 받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삼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수5:2-7)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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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할례를 받지 못하면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포경수술 하고 안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지 못하면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뜻인 것입니다.
(신10:16)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할례를 행하지 않은 자들은 목이 곧은 자들이라는 말이죠?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들은
하나님께 순순히 순종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렘4:4)
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하는 자들의 표징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며 이제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할례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시켜 설명을 해드렸었지요?
예수님도 역시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육체적인 할례도 받으셨지만 진짜 예수님의 할례는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골2:11)
11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보세요. 우리더러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할례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아기 때 육적인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골로새서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 할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는 십자가에서 온 몸이 쪼개지신 그 할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 할례인 십자가의 사건은 무엇을 나타내는 사건입니까?
철저한 순종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하나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마셔라.
네가 마셔라. 예수님은 “제가 원하는 것은 이 잔이 지나가는 것이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시고 할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 즉 할례를 행하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지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가 되지 못하면 모세처럼 하나님께 죽임을 당할 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순종한 자로 여겨 주셨고 실제로 그 순종을 지금 우리와
싸우시면서 가르쳐 가고 계시기 때문에 감히 소망을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우러 오시는 장면은 여기 말고도 또 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싸우십니다. 비열한 사기꾼 야곱은 형
에서가 두려워서 재물로 그를 회유하려 합니다. 그리고 강 건너로 식솔들과 가축들을 다
보내고 혼자 남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야곱과 씨름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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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러운 야곱은 하나님께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지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에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인 나다.“라는 것을 야곱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도 뼈를 쳐서
그의 고집스러운 옛 사람을 죽여 버리시고 순종하는 새 사람으로 만드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야곱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수5:13-15)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이제 여리고를 공격해서 무너뜨리고 가나안에 막 입성하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의 모습으로 칼을 빼 들고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 적군의 편이냐?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No! 아니다. 여호수아가 자기들은 좋은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은 나쁜 적군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No! 그게 아니다. 너희도 가나안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들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 사실을 반드시 깨닫고 들어가라“ 그러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은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가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그 신을 벗으라는 것은 ”이제부터 너희는 내가 이끄는 대로 순종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6장부터 여리고를 공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망치질 같은 것 하지
말고 그냥 돌아라.“ 그러십니다. 주님이 돌라면 그냥 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항복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러 우리와 싸우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오해해서 마치 사탄과 욥의 전쟁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사탄은 처음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일
뿐입니다. 욥기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이야기는 욥과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욥이 사탄의 공격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의 소유가 다 사라진 것을
들어서 “너는 하나님한테 뭔가 잘 못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다 빼앗아 가신
것이다“라고 충고를 해 줍니다. 욥이 아주 멋진 반응을 보입니다.
(욥1:21-22)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2:9-10)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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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욥의 마음속에도 자기는 의로운 자라는 생각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욥13:3,15,22-24)
3 그러나 나는 전능하신 분께 말씀드리고 싶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다.
15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셔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사정만은 그분께
아뢰겠다.
22 하나님,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내가 먼저
말씀드리게 해주시고, 주께서 내게 대답해 주십시오.
23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24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욥은 하나님께 어찌 의로운 나에게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욥31)
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7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9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욥32:1)
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욥은 계속해서 나는 잘 못한 것이 없다“ 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의롭다 여겼습니다. 그
말은 ”의로운 나한테 이렇게 한 하나님은 불의 하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을 소송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착하게 살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사탄과의 싸움에서도
이기고 있는 데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생기느냐고 막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그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욥38:1-3)
1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2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는 말은 허리를 묶고 씨름을 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과 씨름을 하시며 욥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 보세요.
하나님은 38장4절에서21절까지 지구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2절부터
38절까지 우주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우주를 창조할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리고 39절부터 39장 끝까지 동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항변하던 욥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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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40:1-8)
1 야훼께서 욥에게 대답하셨다.
2 전능하신 이와 변론하는 자야, 어찌 물러서려느냐?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야, 대답하여라.
3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4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읍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5 한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읍니까? 두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6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7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8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그리고는 네가 세상의 죄를 물리치고 악을 해결 할 수 있느냐? 또 베헤못(하마)와
리워야단(악어)이야기를 하시면서 너 그 들을 네 종으로 삼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욥이 완전히 항복을 합니다.
(욥42:1-6)
1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욥과 씨름을 하시면서 의로운 자 욥을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개혁신학을 배웠고 지지하고 있으며 오직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여러분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 편과 적군을 가르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기 위해 지금도 매일 우리와 씨름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구원을 받았습니다.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오늘도 허리를 묶고 우리와 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죽이신 고집과 집념으로
여러분을 죽이시고 계신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날마다 죽여 가십니다. 그리고 완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는 자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가면 죽어갈수록 사탄은
오히려 우리에게 카운터펀치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롬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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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우리를 죽여 가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사탄을 짓밟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정말 사탄을 이기신 것을 우리가 그 이기는 삶을 살아냄으로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야, 정말 예수님께서 사탄을 이기셨구나,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이길 수 있는
것이구나.“하고 세상에 증명해 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던 그 고백을 우리도 반드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자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라는 거룩한 건물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엡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여기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서 사도는 어떤 사람들을
사도라고 하지요? 먼저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지요? 그래서 다른 사도들보다 뒤늦게 부활하신 주님을 뵌 자신을 가리켜
고린도 전서 15장 8절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고전9:1)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표준 새 번역)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그리고 사도는 특별히 부름을 받아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복음의 전도자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행26:16-18)
16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너에게 보여 줄 일을 밝힐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7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서,
18 그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복음 전도자로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사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특별한 권위들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적들을 행하고 교회들을 설립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 일이 없고서는 어떤 사람도
사도일 수 없습니다. 카톨릭이 주장하는 사도직의 계승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리입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예언했고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쓰인 선지자는 신약의 선지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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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라고 순서를 바꿔서 기술을 했을 텐데 사도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라고 기술합니다.
(엡3:5)
5 지나간 다른 세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성령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분명히 여기서도 선지자들은 신약의 교회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들입니다.
(엡4:11-12)
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그 계시를 땅에다 내리꽂는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 신약의 선지자들이 성령을 받은 선지자들이 아직 신약 성경이 없는 신약의
교회에서 무엇을 전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겠지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교훈을 전했던 사람들로 그들을 터로 삼아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3:11)
11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습니다.
(갈1:6-8)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닌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저주받을 건물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외골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융통성도 없고 아량도 없는 자들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고집불통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 이미 그 터가 닦여졌고 거기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또 따른 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터는 한번 닦이면 그걸로 끝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 그 터 위에
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터가 왜 필요합니까? 왜 지금 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필요합니까? 카톨릭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들을
좇아가는 일부 개신교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20절을 다시 보시면 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 교회의 모퉁이 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엡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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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돌은 건물의 제일 초석을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모퉁이 돌을 세우고 그 돌을
기준으로 거기서부터 돌을 쌓아 건물을 지어나갔습니다. 그 모퉁이 돌이 없으면 건물은 세워질
수도 없고 지어져 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 모퉁이 돌이라는 말은 시편 118편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다.
(시118:22)
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할 때에 쓸모없는 돌이 굴러 다녀서 버렸는데 그 돌이 바로 모퉁이 돌
머릿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비유로 모퉁이 돌이신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막12:1-10)
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공경하리라 하였더니
7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성전 청소를 하시고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너는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했을 때에 답변으로 하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포도원 지기들이 주인이 소출을
바치라고 사람을 보내면 보내는 족족 때리고 죽이고 해서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더니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 주인이 그
소출을 바치지 않은 포도원 지기들을 다 진멸하고 소출을 바칠 다른 포도원 지기들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욕심 많은 포도원 지기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포도원 지기들은 욕심 때문에 소출을 못 바친 것이 아니라 바칠 소출이 없었기
때문에 못 바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배경 본문인 구약의 이사야서를 한번 찾아보지요.
(사5:1-7)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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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께서 극상품의 포도를 바라시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서 포도원을 만들어 주셨는데
거기서 쓸모없는 들 포도만 맺혔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꼬집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칠 열매가 없으니 열매를 요구하러 간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 말라기 호세아 등등
선지자들을 다 때려죽이고 쫓아내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요구하러
내려 오셨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열매를 요구하시니까 예수님마저 죽여서
내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 원 지기들을 예수 안에
넣어서 다 죽여 버리시고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너희가 죽여서 내 버린 그 아들을 모퉁이 돌로 삼아
너희를 열매를 맺는 거룩한 전으로 지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로 말미암아 그 짓이겨 질 뻔했던 포도원은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사27:2-6)
2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 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 나 여호와는 포도 원 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4 나는 포도 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6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예수를 통해서 열매 맺는 데 방해가 되는 질려와 형극, 잡초와 가시나무 같은 것은 여호와께서
밟아 뭉개 버리시고 극상품의 포도가 맺히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예수만이 교회의
터이고 모퉁이 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터로 모퉁이 돌로 하여 지어져 가는 자들은 충돌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준비되어져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잡음이 없습니다.
(왕상6:7)
7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 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이렇게 조용히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의 소리도 자랑의 소리도 시기나
질투의 소리도 없이 조용히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그 전에 맞는 돌이 되기 전에 여러분은 아직 성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절박하고 긴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옛 몸을 죽여 가십시오.
여러분의 안에서 여러분을 공격하고 있는 아말렉을 쳐부수세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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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지금도 그 전쟁은 매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어야 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집니다.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야 합니다. 그런데 최전방에서 누가 싸웁니까? 여호수아가 싸웁니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입니다. 예수가 누구와 싸웁니까? 아말렉과 싸웁니다. 아말렉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금 여러분 안에 있는 여러분 자신과 싸우고
계십니다. 항복하십시오. 두 손을 높이 드세요. 우리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는 것이
예수가 이기는 길이고 예수가 이기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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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알려지기 위한 비밀, 무스테리온
(엡3:1-6)
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는 2장 말미에서 교회의 특권과 신분과 상태에 대해서 기술을 하고 3장을
“이러하므로”라고 시작을 합니다. 헬라어"tou tou karin"은 “for this reason""이러저러한
이유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2장과 3장은 나뉘면 안 되는 장입니다. 계속 연결이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2장 전체의 내용을 잠깐 review를 해 드리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어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던 이방 사람들인 에베소 교회가 유대인들과 화평해 지게 되었고 하나의 새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성도들과 같이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고 주께서 사시기 위한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가르던 담은 허물어졌고 모든 적대감이
사라졌습니다. “이 놀라운 연합과 평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기술한 뒤에 "tou tou karin" “for this reason" ”이러하므로“ 하고 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하므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전혀 앞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갑자기 “이러 하므로”하고 말을 꺼낸 뒤 자기의 임무와 그 임무의 목적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갇힌 이유를 설명하고 자기가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서 너희가
낙심하면 안 된다고 부탁을 한 후 14절에서 다시 “이러하므로“ 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장1절에서 13절까지는 삽입구입니다. 2장 말미와 3장의 14절이 문맥상
매끄럽게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갑자기 자기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목회자적 심정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자기가 갇혀있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건강과 장래에 대해 심히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영광에 대해 기술해 나가다가 혹시
자기가 갇혀 있는 것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 오해를 하고 그 것이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될까봐 잠시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 교리의 체계가 잡히지 않은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인의 영적 풍요와 영광을
가르쳐 놓았는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그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도 점점 핍박과 환난이
닥쳐왔습니다. 그 때 믿음이 어린 신자들이 환난 때문에 복음 그 자체를 의심하게 될까봐
노파심에서 자기의 처지에 대해 확실한 해석을 해주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문제만큼 빈번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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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똑같이 물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련과 환난을 겪도록 하시는가? 왜
바울과 같이 구별되어져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두어 놓으실까?” 그런 것으로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서에서 그토록 자주 고난의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장 디모데서, 에베소서 거의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시련과 환난을 견디어 내야만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룰 때 절대 “걱정 마세요, 곧
나아질 거예요.” 이렇게 위로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호전될 거예요”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고난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반응을 먼저 보여주고 “여러분도 이렇게 고난에
대처해야 합니다.“ 하고 권고 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갇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사도 바울이 한 마디라도 불평을
하나요? “내가 이렇게 주의 일을 하다가 노인이 되었는데 왜 이 나이에도 감옥에 가두게
놔두시는가?” 하고 불평을 합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이 단순히 “힘들지만 불요불굴의 극기 정신으로 이를 악물고 참아낼 것이다“
그렇게 고난을 설명하나요? 그건 극기요, 이교 적 신앙입니다.
사도는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12절에 걸쳐서 그 환난의 이유와
내용에 대해 설명한 후 1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엡2:13)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오히려 자기의 환난을 벅차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바울은 자기가 처한 고난을 견뎌
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해서 환희에 넘쳐 있습니다. 역시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서도 사도는 자기의 갇힌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1:12)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디모데에게는 어떻게 편지를 썼는지 한번 볼까요?
(딤후1:7-8)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똑같은 진술을 합니다.
(벧전4:12-14)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복되고 기뻐해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갇힌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바울은 자신이 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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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로마 제국 때문에 붙들려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잘 보세요. 사도는 지금 하나님께서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데, 네로와 로마제국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도 말려 주시지 못하고 나를 이렇게 감옥에
갇히게 하셨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난을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엄밀히 말하면 네로의 죄수도 아니고 로마의 죄수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죄수인 것입니다. the prisoner of Christ Jesus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그 사실만 확인하고 계신다고 해도 여러분은 대단한 실력자 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아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의 힘도
닿을 수 없는 대단한 대적의 감옥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옛날의 사울로 살았다면, 여전히 바리새인으로 살았다면, 여전히 유대인의
율법교사로 살았다면 그 감옥에 들어갈 일이 있었겠습니까? 왜 바울이 그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님 때문에 그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왜 그 친했던 여러분의 술친구들이 여러분을 하나 둘 씩 떠납니까? 왜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때로 독설을 퍼붓습니까? 왜 여러분의 남편이, 아내가 “예수를 믿으려면 곱게
믿어라” “왜 그렇게 미쳐서 날뛰냐?“ 이런 심한 말로 여러분을 공격합니까?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예수 님 때문 아닙니까? 그러한 핍박이 올 때에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도 이기지 못하는 대단한 대적의 감옥에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가 되어있는 영광스러운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그리스도의 죄수로 삼고야 마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죄수의 모습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승리의 길이기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죄수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골1:24)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벧전2:21)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빌3:10-11)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1:29)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래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감옥에 앉아서도 웃음이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을 시켜주시는가? 아, 나는 진짜 맞구나” 이런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리스도인이 되면 필연적으로
가난해지고 고통만 당하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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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게 타협하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반드시 어떤
모양으로든 불이익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당하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고 있구나.” 그렇게 고민하다가 어느 때 신앙 때문에 어떤
핍박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 이런 거구나.”하고
오히려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나는 이방인들인 너희들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엡3:1)
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우리가 지난번에 실제로 사도행전 21,22장을 두루 살펴보면서 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지요? 왜 입니까?
(행21:27-28)
27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바울이 각처에서 우리백성(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훼방해서(against)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이 유대인들을 훼방했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특히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명확하게 전파했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을 자극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이야기만 뺐어도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그렇게
막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확하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감옥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미워해서 그런 것인가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롬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렇게 자기 민족을 사랑했던 바울이 왜 그들에게 미움을 사게 될 이방인들의 구원을
전했겠습니까? 진리니까, 양보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이기 때문에 전한 것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을 보면서 자기들 때문에 감옥에 가 있는 그의 편지를 받으면서 에베소 교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노예이거나 평범한 서민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으셨고 사도 바울 같은 대 사도가 자기들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것도 마다 않고 진리를 전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흔들려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에베소 교인들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3장 1절에서 13절까지 그렇게 문법과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파격까지 행하면서 에베소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는 그렇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한 새 창조물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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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비밀”이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복음은 비밀이다.“ 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되지요? 그 “비밀” 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secret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secret는 절대
알려지면 안 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쓰인 단어 “무스테리온”은 영어의 mystery와 같은
말입니다. 미스테리는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고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서
나중에 그 감추어진 것이 드러났을 때 감격을 더하게 하기 위해 감추어 놓은 것입니다.
미스테리 영화 볼 때 계속 마음 조리다가 끝나면 시원하지요?
그러니까 이 “무스테리온”이란 단어는 감추기 위한 비밀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한 비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막4:21-23)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에다 두겠으며 평상
아래, 침대 아래에다 두겠느냐?” “숨겨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은 나타내기 위한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이라는 단어를 3장에서만 네 번이나 쓰고 그의 서신 서에서 총 19번이나
씁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서신 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밀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3절과 4절을 다시 한 번 보지요.
(엡3:3-4)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제가 거기에 괄호를 집어넣었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문맥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KJV에는 아주 잘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3 How that by revelation he made known unto me the mystery; (as I wrote afore in few
words,
4 Whereby, when ye read, ye may understand my knowledge in the mystery of Christ )
그걸 보시면 지금 3,4절에 두 가지 종류의 비밀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비밀은 6절의 내용을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것을 특별한
비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괄호 안의 삽입구 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비밀을 우리가 일반적인 비밀이라 합니다. 이런 내용이지요.
(딤전3:16)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여기서 “경건”이라고 번역이 된“유세베이아”는 “복음의 개요” “거룩”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복음의 비밀“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한 아이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전 세계에서는 매일같이 수많은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특별한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아기는 한 인격 속에 두 본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는 완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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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셨고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작고 못 생긴 아이로 자라갔습니다. 그 아이는 청년이
되어 결국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수난을 당했으며 그 길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었고 사흘 만에 부활을 했습니다. 그 사건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 비밀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사도 바울에게 계시하셨고 사도는 이해를 한 것입니다. 사도는 그 예수 안의 복음에 푹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바울은 지금 특별한 비밀을 이야기하면서 또 자기가 1장2장에 이미
기록해 놓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 복음의 비밀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되었다는 6절의 특별한 비밀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있는 일반적인 비밀, 즉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먼저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특별한 비밀은 일반적 비밀의 결과지요, 결국은 같은 이야기 즉, 교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6절은 원래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엡3:3-6)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됨이라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내게 알게 하신 그 비밀은 , 지금 그 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명확하게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비밀의 내용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동일한 상속자가 되고 함께 동일한 한 몸이 되고 함께 동일한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해가 더 쉬워지셨지요?
그런데 5절의 말씀을 가지고 세대주의자 들이 이렇게 우깁니다. 먼저 5절을 읽어보지요.
(엡3:5)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봐라, 교회에 대한 비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계시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냈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덤으로 , 마치 삽입구처럼 역사에 등장한 존재들이다“
이렇게 우깁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였다면 결코 교회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들은 언젠가 교회가 종말을 맞게 될 때 다시 유대인들은 하나의 국가로서 회복될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세대주의입니다.
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은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이나 근동지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해서
봅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성경에 적용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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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것인가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2만만
2억의 군대가 실크로드를 따라 아마겟돈 전쟁을 하러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도 하고
적그리스도는 누구누구일 것이라고 추측도 합니다.
Dr. Bullinger같은 Ultra dispensationalism“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4복음서조차도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4복음서도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관한 메시지는 우리가 오늘 읽은 에베소서 3장에 처음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럼 베드로의 설교는 뭡니까? 고넬료의 집에 간 사건은 뭡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가서 안수 하니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건 뭡니까? 전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교회! 하나님 나라는 창세기 3장 15절부터
계시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셨지 “너만 복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남은
자만 건지십니다. 나머지는 계속 유기 시키십니다. 그럼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마엘도
아니고, 에서도 아니고, 이렇게 오히려 장자들을 유기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안에
모압 여자 롯이나 여리고 여자 라합을 굳이 집어넣으십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는 바로 이 감추어진 비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교회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럼 5절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다시 한 번 보자고요.
(엡3:5)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는)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다른 세대에서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확실하게 나타내지는 않으셨지만“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로 모형으로 계속 계시
하셨다는 것입니다.
(히11:39-40)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브라함, 야곱, 모세, 사라,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 모두가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이신 예수를 받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그들은
멀리서 보고 기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세대 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구절들은 찢어버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
내내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교회를 계시하셨고 그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져서 이제 너희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이렇게 함께 동등한 상속자가 되고 함께 동등한
지체가 되고 함께 동일한 약속의 수혜자가 된 것이라는 것을 사도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그 특별한 비밀에 대해 조금 부연설명을 하고 넘어가지요. 3절의 그 특별한


비밀의 내용은 6절이라고 했지요? 6절을 다시 보세요.
6 이는 (그 비밀은)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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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됨이라
개역 성경으로는 그 의미를 밝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 “후사, 지체,
약속에 참예 하는 자” 앞에 전부 "쉰“ 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접두어는 ”동등한,
공동의, 하나의”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쉰”이라는 접두어가 상속자를 의미하는 “클레로
노모이” 앞에 붙어있고 몸을 의미하는 “소마” 앞에 붙어 있고 “동반자, 함께 나누는 자“를
의미하는 ”메토카” 앞에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함께 동등한 상속자가 되고, 함께 동등한 한 몸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쉰 클레로노모스, 쉬소모스, 쉰 메테코스 테 에팡겔리아스’ 이 말은
구원받은 자들은 그가 하나님과 조금 더 친한 측근이냐 측근이 아니냐의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일등이고 이방인은 이등이고 이런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복을 공동으로, 동일하게 함께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몸이 되는 것이고 하나의 구속의 언약 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이 바울 서신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이죠. 무슨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이 옵니까? 우리가 예전에 공부한 1장 9절 10절에도 같은 설명이 나와 있지요?
(엡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없습니다. 누가 유대인입니까? 지금 어떻게 유대인을 구별합니까?
유대인들이 2000년 동안 전 세계를 유리방황하며 피가 섞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사람들과 잠깐 섞였다고 그들을 사마리아인으로 몰아 개 취급도 안 했습니다. 그러면 2000년을
다른 민족과 섞여있던 사람들 중 몇 %가 순수혈통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원래
유대인들이 저렇게 유럽인들처럼 생겼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사막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미 신약 성경에서도 12지파는 사라졌습니다. 12지파도 없는 이스라엘이 무슨
이스라엘입니까? 그런 세대주의의 농간에 속지 마세요.
상속자나 후사에 대해서는 여러 번 공부를 했으니까 ‘동일한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것만
간단하게 보겠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약속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약속이 뭡니까?
(갈3:14)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표준 새 번역)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행2:14-17)
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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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서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보지요.
(엘2:28-32)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교회에 대한 약속은 이미 구약에 이렇게 명확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오심으로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민이 그 약속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비밀이 밝히 드러나 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 드러난 비밀의 내용에 따라 이방인들도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방인들이 개종을 하면 이스라엘 사람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제로 개종을 요구하는 전도를 해 왔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갈1:11-12)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마11:25-26)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바울 사도는 지금 그 비밀을 사도인 자기가 계시로 받았고 그것을 기록하였고 너희도
내가 기록해 놓은 그 계시를 보면 그 비밀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3절 4절을 보겠습니다.
(엡3:3-4)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그토록 오랜 세월 비밀에 부쳐졌던 그림자로만 상징적으로만 주어졌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드러났고 그 것을 성령께서 사도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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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셨으며 그들은 그것을 성경으로 기록했고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받은 그 계시의 내용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경을 통해 다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깨어난 자들은 성경 안에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전부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2:6-11)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받은 자, 성령을 받은 자들은 성경 안에서 그 하늘의 비밀을 밝히 계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또 다른 계시들을 받으시느라고 그렇게들 바쁜 분들이 많아요? 사도 바울보다 더
큰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베드로보다 더 밝히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 보다 더 큰 계시를 받을 수 있나요?
그 분들이 받으신 계시는 모두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더러 너희가 읽으면
나와 같이, 나와 똑같이 그 계시를 깨달을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데 무슨 딴
계시가 또 필요하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만 계시를 받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우리는 나의 의견을 첨가할 수도 없고 그 성경에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뺄
수도 없습니다.
(계22:18-19)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비밀이었던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었고, 그 곳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기쁘십니까?
진짜 그 천국의 소망 때문에 잠 못 이루시고 그렇습니까? 그게 잘 안되시죠?
왜 그렇습니까? 천국은 이 땅에 겨자씨처럼 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겨자씨 안에 들어있는 가지와 줄기와 잎사귀와 열매를 믿음으로 보는 자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아 시큰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맛 볼 수 있는 천국의 풍성함은 그야말로 겨자씨 같은 것입니다. 그나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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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믿음의 분량만큼만 맛 볼 수 있습니다.
(막4:26-34)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여기에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씨를 뿌려놓은 농부의 비유이고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거시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및 성장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이지만 작게는 성도 개개인 안에서 체감되어지는 천국과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 성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고 열매를 기다리는데 처음에는 그 것이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고 정말
여기서 줄기와 뿌리가 나고 열매가 맺힐까? 의심이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 이 땅에 계시되어진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씨 안에 줄기와 뿌리와 열매,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기가 생길 때도 그 작은 수정란이 엄마의 자궁에 착상이 되고 그것이 2의 배수로 분열을
하다가 세포가 270개가 되면 멈춥니다. 그리고 뇌가 생기고 심장이 생기고 콩팥이 생기고 뼈가
생기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수정란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도 겨자씨는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작은 것을 표현 할 때 속담이나 격언에서
쓰던 단어입니다. 우리말에서도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가리킬 때 “새 발의 피” 같은 말을
쓰지요? 그런 겨자씨 안에 나중에 3미터나 되는 겨자 나무가 다 들어 있는 것처럼 천국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중의 새라는 말은 “열방”을 의미하는 랍비들의 숙어입니다. 천국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이 깃드는 그렇게 엄청난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겨자씨를 볼 때는 정말 보잘
것 없고 여기서 뭐가 나올까 의심스럽지만 그 씨 안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만한 커다란 나무가
숨어 있듯이 천국도 지금은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아주 조금, 겨자씨만큼 그 천국을 맛보고
있지만 그 천국은 세상 모든 나라를 품을 만큼 풍성하고 엄청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난하고 못생긴 나사렛의 목수와 11명의 보잘 것 없는 제자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바로 3000명, 5000명으로 늘어났고 심지어 로마의
심장부를 강타했습니다. 그 천국은 이제 마침내 그 완성된 위용을 드러낼 것입니다. 열방에
퍼져있던 그 천국의 백성들이 수도 없이 그리로 들어갔고 지금도 들어가고 있고 앞으로도 들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확장 원리는 힘과 무기가 아닙니다. 그 나라의 확장 원리는 전하는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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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떨어져서 죽는 “썩어지는 밀알의 원리”입니다.
2000년 동안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전파되어졌습니까?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칼을“”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해서 전해졌나요? 실제로 그렇게 했던 적이 있었지요?
12세기 후에 200여 년 동안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하겠다고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를 늘려 가면서 여론을 의식해서 기독교 복음 전파라는 허울을 쓰고 기독교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그렇게 해서 정말 기독교가 전해 졌습니까? 오히려 그런 곳은
모두 이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독교는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죽음으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가 됨으로 승리를 하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논리가 바르고 똑똑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대학교 4학년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어머님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나가 앉아있기는 했지만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언제나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설교를 공박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논리가 정연한지
목사님들이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목사님들이 와서 그 청년을 논리
정연하게 설득을 시키려 해도 그 청년은 오히려 목사님들의 빈틈을 노려 목사님들을 골탕
먹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청년이 예수를 믿겠노라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예배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 청년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그 어머니의 인격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머니의 소박하고 겸손한 삶은 어떤 논리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소리 없이 살아내는 소박한 희생에 의해 전해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고 늘 당하는 것 같고 가족을 위해 흔쾌히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는 그런
어머니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라고 우리가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심 순덕님의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라는 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누어 드린 handout에 적어 놓았으니 함께 보세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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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엄마가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알았는데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어머니라는 이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며 홀로 하나님 앞에서 눈물짓는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살다가 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님의 희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이 생각이 안 나시거든 그런 어머니의 삶이라도 떠올리시며 그렇게 살아
주십시오. 다른 이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며 이런 아름다운 회고를 할 수 있게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 보자고요. 하나님 나라 , 천국은, 교회는 그렇게 자라 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숫자가 차게 되면 계시록의 그 찬란한 하나님
나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누구도 방해 할 수 없습니다. 이 겨자씨는 반드시 엄청난 겨자
나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겨자씨의 비유가 천국의 외적인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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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백성의 내실이 깊어지게 될 것에 대해서도 주님은 비유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마13:33)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빵을 발효시킬 때 쓰는 것이죠. 누룩은 밀가루 안에 아주 적은 양으로 숨어있지만 그
적은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아십니까? 이 누룩 비유는 성도들의
내부적인 변화 (intensive transformation)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천국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아주 조금밖에 못 누리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누룩이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천국을 더 명확히 알아가게 될 것이고 그 만큼
우리도 천국의 시민으로 변해 갈 것이며 곧 그 완전하고 풍성한 천국에서 완전히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이 땅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가 집착하고 있고 중독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끊어버리고 완전히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순종하게 만들어져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13:44-46)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끼어 있던 팔레스타인에는 유독 전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던 지주들이 전쟁에서 빼앗길까봐 자기만 아는 밭에다가
보물들을 묻어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주인이 갑자기 급사를 하게 되면 아무도 그 보물이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 종이 밭을 갈다가 보물항아리를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종은 얼른 그 보물을 묻어두고 가서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밭을 산다는 것이죠. 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시대는 진주가 부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주 상인들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곤 했었지요. 그러다가 진짜 좋은
진주를 발견하게 되면 그 진주 상인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사들였습니다.
좋은 진주는 부르는 게 값이었기 때문입니다. 클레오파트라가 가지고 있던 진주가 250만
파운드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하늘의 비밀을
안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 천국을 움켜쥔다는 것입니다.
그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 팔아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비밀을 아는 만큼 천국 백성답게 사실 수 있고 아는 만큼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생각만 하면 가슴이 떨리고 처음 연애할
때 애인 만나러 갈 때처럼 두근두근 한다는데 혹시 천국에 대해 아직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없는 것 아닙니까? 성경을 공부하세요.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그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그 소망 때문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멋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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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엡3:7-12)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바울은 7절에서 자신은 6절까지 상기한 그 비밀인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로 된 것이라고 사도는 또
반복해서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 그 은혜의 크기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가리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구약과 신약에서 중요한 사람을 한사람씩 꼽으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구약에서는 모세, 신약에서는 바울, 보통 이렇게 꼽습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을 통 털어 한사람만 꼽으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참 많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옷을 맡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넣으려고 공문을 가지고 살기등등해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그런 사람을 택해서 그 중요한 일을
맡기셨을까요? 영원 전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 두셨던 비밀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그 중요한 일을 왜 그런 바울에게 맡기셨을까요?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창세전에 택함을 받는다고 우리는 1장에서 배웠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던 것처럼 바울은 이미
택해졌던 자입니다. 그런데 왜 스데반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감옥에 넣기 위해 살기등등해서
다니게 놔두셨을까요? 조금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그렇게 엉터리 유대교인으로 살기
전에 이미 택해졌다면 그 삶은 바울이 택해지게 된 조건입니까, 아니면 택해졌기 때문에 그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까? 야곱의 엉터리 같은 삶도 바울의 어리석은 삶도 전부 그들이
택해졌기 때문에 통과하게 놔두신 삶입니다. 왜 바울에게 그런 사도로서 평생 후회가 될 만한
삶을 허락하셨을까요? 구원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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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약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가셔서
풍성하신 은혜로 그들을 건져내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삶 자체가
그 구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삶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을 가리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기에 “그리스도의 풍성” “풍성한 은혜” 이런 표현들을
즐겨 쓰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참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성질 급하고 놀기 좋아하고 야망도 크고 승부욕도
많고 해서 임기응변이나 권모술수에 아주 능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그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순식간에 낯이 뜨뜻해 집니다. 어떤 시간들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한동안은 그것 때문에 굉장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나 같은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 과거의 삶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해주시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예수님께서 바르게 사는 순위대로
끊어서 구원을 하셨다면 저 같은 사람은 당연히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가
더 큽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 중에는 이삭처럼 모범생의 삶 속에서 건져냄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곱처럼 파렴치한 생활 속에서 건져짐을 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구원의 감격의 무게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굳이 저울에 달아보면 누가 더 감사하겠습니까?
야곱 같은 사람이겠지요? 그렇다고 지금 제가 엉터리 같은 삶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불가능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를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교만한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가 어디서부터 건져냄을
받은 자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도 바울처럼 말끝마다
풍성한 은혜, 그리스도의 풍성, 이런 감격의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어떤 분이 이 구절을 갖고 “예수를 믿으면 삶의 모든 부분이 풍성해 진다, 그리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풍요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설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풍성함은 그 풍성함이 아닙니다. 만일 성경이 말하는 것이 그런 풍성이라면 사도 바울은
가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병자였고 가난했고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갔습니다. 그 사람의 삶이
진짜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한 풍성한 삶이었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세상 적인
풍성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면 실제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풍성합니다. 예수 안
믿는 부자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행복한 사람이 훨씬 많아요. 예수 믿는 자들이
투리고 전해야 할 “풍성”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행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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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예수를 믿으면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라고 이 이야기를 제한시키시면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전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금과 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6:35)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는 풍성함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 떡이 아니고 세상 물이 아닙니다. 다른 풍성함입니다.
이 구절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눈으로 그 무리를 바라보셨는지 상상해 보셨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이 배고파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어떤 눈이었겠습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을 굶겨 봐서 압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가끔 지금도 죄스러워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이 먹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입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조림 두 마리
요한복음에 보면 그 물고기를 “익뚜스“가 아닌 “옵사리온“이라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
헬라어 ‘옵사리온’은 멸치조림 같이 작은 물고기를 조미료에 조린 것을 말합니다. 그 조금을
가지고 남자 어른만 5000명, 다 합치면 아마 30 000명은 족히 될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아니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아무도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 많은 무리, 200데나리온으로도 먹이지 못할 그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들린 그
작은 것은 엄청난 “풍성”을 품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풍성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런
멸치조림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뷔페 앞의 콩떡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작은 것
속에서의 풍성입니다. 세상에서의 물리적인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고 세상에서의 목마름은
해갈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고픔 속에서 배부름을 느끼고 그 목마름 속에서
시원한 해갈을 주시는 풍성함입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그리스도의 풍성을 느끼고 누리십니까? 비즈니스가 상상외로 너무 잘 풀릴
때 풍성을 느끼십니까?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 풍성함을 느끼십니까?
사도가 누리고 전했다는 풍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그의 사역 기간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고문으로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사도는 풍성함을 누렸습니다. 그 사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 풍성한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마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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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 오면 내가 대신 그 짐을 다 져 줄게“ 안 그러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 짐을 지고 예수님께 뭘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짐은 아주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그 짐을 져야 우리가 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신 짐이 정말 가벼운 짐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가 정말 쉬운
멍에였습니까? 끔찍하게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 짐을 가볍다고
말씀하시지요? 그 분에게는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짐을
지고 멍에를 매고 가시는 길이 그 분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길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53:5-12)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 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예전에 제가 “아빠의 구두”라는 글을 한번 읽어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아빠의 헌
구두를 보고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버스비를 아껴서 아빠의 구두를 사드리려고
몇 달 동안 학교를 걸어서 다녔다는 내용이지요.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아빠가 새
구두를 받아들고 환히 웃으실 것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뿌듯한 것입니다. 그렇게 정확한
목적과 목적지가 확인된 사람들은 그 목적을 위해 받는 고통 속에서 풍성하게 넘치는 기쁨도
함께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전해야 할 풍성은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하늘의 풍성입니다.

- 434 -
예수님은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손해보고
섬기는 삶이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감옥에서 오히려 기뻐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기뻐하며 찬송을 했습니다. “내가 한번 찔리고 내가 한번
물리고 내가 한번 맞을 때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살아나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찔려주겠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가난하고 그렇게 쪼들리고 그렇게 뻑 하면 감옥에 들어가 있었으면서도 말끝마다 풍성함과
풍요, 부유함(플루토스)를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왜 대접이 이것밖에 안 됩니까?”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아직 그
풍성함이 뭔지 모르는 가짜들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자꾸 “가짜”라는 말을 많이 하니까
어떤 분이 “목사님 성도의 견인도 모르세요?” “저는 지금 조금씩 변해 가는 중이지, 가짜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영적으로는 구원을 받은 분일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지금 그
풍성함을 모르시고 죽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천국 가실 수 있으신가요?
못 갑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것을 알고 누리실 때까지 안 죽이시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으셨을지라도 여러분 안에서 그 풍성함이 누려지고 그 풍성함이
삶으로 전해질 때 여러분은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지옥 가는 사람이 어떻게
진짜입니까? 제가 “이런 사람들은 가짜다.”라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그 말을 채찍 삼아
진짜의 삶으로 내 달으시라는 의미에서 자꾸 제가 원색적인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짜 가짜”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9절 후반부로 넘어갑니다. 9절을 다시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 전파의 의무가 함께


주어지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엡3:9)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런 못된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신 이유는 그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 섭리(오이코노미아)를 세상에
드러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다“라는 ”프호티조“라는 말은
단순히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것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프호티조“는 빛을
비추어서 상대방까지 환하게 계몽시키는 것까지, 상대방에서도 빛이 나올 때까지 가는 것을
”프호티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나서도 그가 빛으로 잘 자라날
때까지 계속 양육하고 기도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한
교회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도 쓰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부터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엡3:9-11)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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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부터“”아이온“이라는 말은 ”영원 전부터“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의
탄생이라는 비밀은 영원 전부터 예정되었던 것인데 천사들조차도 몰랐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들어 놓으신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신다고 하시죠?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늘에서 우주의 창조부터
인류의 역사를 다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해 주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을 이미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 창조 때 천사들이 환호를 했습니다. 수많은 꽃들과
새들과 동물들을 보면서, 사계절이 오고가며 우주가 자리를 잡고 궤도대로만 움직이고 하는
것을 보면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선악과를 두시고 인간들에게 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따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쫓아 내버리셨습니다.
천사들은 생각했습니다. 인간들은 이제 끝났구나. 하나님께서는 아예 인간들을 다 쓸어버리시고
다시 만드실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인간들을 용서하시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집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작정 벌하시면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흠집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천사들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계속 두고
보십니다. 그런데 가인이라는 놈이 동생 아벨을 때려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십니다. 셋의 후손 중에 노아라는 사람을 하나 택하십니다. 노아와 그
식구들 8명을 구해내시고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십니다. 그렇다고 그 살아난 사람들이 다
착하고 의로워서 구해 내신 것도 아닙니다.
(창8:21)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표준 새 번역)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그렇게 여전히 악한 자들이라면 “왜 다 쓸어버리지 않으실까?”천사들은 의아했겠지요?
그러더니 갈대아 우르,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있는 우상을 만들어 팔던 한 남자를
찾아가십니다. 그러더니 그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십니다. 천사들이 다 보았단 말입니다.
마누라를 두 번 씩이나 팔아먹고 좌충우돌하는 아브라함을 끝까지 끌고 가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하시는 걸까? 그리고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그 아내 사라의 태를 닫아
버리십니다. 그리고 결국 100세에 아들을 주시더니 그 귀한 아들을 또 죽이라고 하십니다.
어린 양 한 마리를 준비시키시고 그 아들, 이삭을 살려 내시더니 사기꾼 야곱을 또 택하십니다.
그리고 야비한 그의 삶을 보시고도 그를 구원하십니다. “왜 저 에서를 두고 야곱을
택하셨을까?” 천사들은 궁금했겠지요? 그리고 요셉이라는 청년을 택하셔서 애굽으로 보내셔서
감옥에 보내셔서 죽도록 고생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가족들을 모두 애굽으로
보내시고 거기서 400년 동안을 노예로 살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모세라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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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운 청춘을 미디안 광야에서 다 보내도록 가만 놔두십니다. 천사들이 초조해졌을
것입니다. “어, 이제 모세가80인데 곧 있으면 죽을 텐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80세에 그를
부르십니다.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끌어내십니다.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만나와 메추라기 생수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눈앞에 둔 곳에서 모세가 죽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세워서 요단을 건너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넣으십니다. “아, 이제 됐구나.” 되긴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은 계속 죄를
짓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신28:53)
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표준 새 번역)
너희의 원수가 너희를 에워싸서 너희에게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너희는 너희의 뱃속에서
나온 자식, 곧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너희의 아들딸을 잡아서, 그 살을 먹을
것이다.
(왕하6:28-30)
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이렇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경고가 사실이 되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천사들은 그 성자 하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찬송을 하고 올라왔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찬송을 하면서도 천사들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땅으로 내려가야 하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성자 하나님께서
구유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천사들이 쑥덕거렸을 것입니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광의 우리 주님께서 왜 저런 모습으로 내려가셔야 하는가? 그
천사들은 천상에서 우리 주님을 섬기던 자들이었으니까요.
(사6:1-5)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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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는 여호와를 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사야가 예수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요12:40-41)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표준 새 번역)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예수를
가리켜서 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의 수종을 받던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내려가셔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말을 배우시고 목수 일을 배우시고 글을 배우시고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 시면서도
그들에게 맞고만 다니시지 대응해서 때리지도 않으십니다. 천사들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저렇게 땅에 내려가셔서 고생을 하실까?
심지어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 때까지도 천사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3일 만에 살아나셨고 다시 하늘로
올라오셨습니다. 이제 그 분은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편재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성령하나님께서 땅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는 교회라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령의 모습으로 다시 그 교회의 안에 들어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 그 교회라는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 예배를 하고 찬양을 하고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깜짝 놀란 것입니다. 자기 자식을 구워먹으면서도
자기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르던 그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셔서 그 교회를 건져내시기 위해
역사를 그렇게 운행하시고 우주를 그렇게 경륜해 나가셨구나.“ 하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신 그분의 속성을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으시고 타락한
인간들을 건져내시는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지혜를 천사들은 교회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시85:9-10)
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1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이미 이렇게 긍휼과 진리, 의와 화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구약에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천사들이 보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분열된 그 세상을 보면서 절대 그들은 다시 합쳐 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플라톤이나 키케로의 국가론을 가져다 완벽하게 시행을
해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갈기갈기 갈라져 있는데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인 교회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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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은 교회를 통해 그 하나님의 지혜의
최종적이며 최고의 극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벧전1:12)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복음은 천사들도 너무 궁금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말인 ”파라큅토“는
”몸을 구부리고 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관심 있게 가슴 조리며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딤전3:16)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왜 그 천사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보이셨는지 아십니까? 천사들이 너무 궁금해 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사망아래 던져지는가?, 과연 어떻게 될까?”
거기에 “짠”하고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들도 궁금해서 미칠 뻔 한 그 복음의 비밀을 이제 완전히 알게 되신 여러분,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께 고급스러운 대접을 받고 계신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는데 힘으로 무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썩어지는
밀알로 전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의 힘을 이용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복음이 전해지더라는 것이지요. 천사들은 우리 교회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전4:9)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천사가 여러분의 삶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러분의 삶으로,
입으로 인해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천사들이 “와” 하고 환호를 지르는
것입니다.
(눅15:10)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지금도 천사들은 교회의 예의 주시해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극치인 교회를
천사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기들이 수종을 들어야 할,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과 바꿀만한 그러한 존귀한 존재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열심히
트랙을 돌고 있고 천사들은 지금도 그 하나님의 지혜의 열매인 교회를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인님, 힘내세요.”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천사들한테 뭘 보여주고 있습니까?
건물 나눠 가지려고 싸움박질 하는 거 보여 주고 있나요?
시기, 질투, 미움, 다툼 이런 거 보여주고 있나요? 우리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각종 지혜라는 말을 씁니다. (manifold)그 지혜는 다소의 사울을
다메섹에서 고꾸라뜨려서 그 분의 종으로 쓰시는 지혜이며, 유럽 최초의 신앙인인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는 지혜이며 빌립보의 간수를 부르시는 지혜이며, 방배동의 한량 김성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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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시는 지혜입니다. 우리 교회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세요. 그
manifold한 지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 삶으로 증거로, 내 놓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천사들에게 세상에 그 비밀의 주인공으로서의 멋진 삶을 좀 보여
주세요. 자기의 삶이 조금 힘들다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아니, 이게
무슨 하나님의 지혜냐고“ 섣부른 불평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맞으시다 면
여러분의 삶은 지금 천사들도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지혜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대하세요.
(시76:10)
10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그 지혜대로 지어져 가고 계시는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여러분을 이끌고 계십니다. 불안해하지 마시고, 힘들어하지 마시고
불평하지 마세요.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내 보자고요.
12절로 갑니다.
(엡3:12)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 교회는 이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당당히 나아감“이라고
번역이 된 ”프로 사고게“라는 말은 어떤 들어가기 어려운 곳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대학 후배들 중에 제주도 출신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전부 ”앵커“라는
제주도 학생들의 써클 출신이었습니다. 그 ”앵커“라는 써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고 얼굴도 잘생겨야 하고 집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들어가기가 아주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서울대학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렇게 들어가기가 아주 까다롭고 거의
불가능한 어떤 곳에 들어감을 ”프로 사고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당함의 근거가 뭡니까?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음으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신앙을 느낌으로 평가합니다. 느낌이나 감정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자체가
느낌이나 감정으로만 정리가 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왜 오늘은 눈물이 안 나지? 은혜가
떨어졌나?“ 이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신비적입니다. 많은 기적이 나오고 신비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되서는 안 됩니다. 제 말을 잘 새겨들으세요. 신비주의는 교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기의 오감으로만 기독교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비적인 기적이나 체험을 통해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교리를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교리가 뭐가 필요해? 뜨겁게 느끼면 되지”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 기적이나
체험이 없어지면 괜히 불안해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딤전2:4-5)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440 -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런데 어떻게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이 생기고 자랍니까?
(롬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러분이 뜨레스 디아스나 무슨 부흥회 같은 데서 눈알이 빠지도록 울었다고 해서 아니면 무슨
전기가 오르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게 여러분의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그런 체험과 느낌에만 머물러
계신다면 여러분은 무당을 믿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배우시고 예수를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당해 질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그렇게 흐지부지하고 힘이 없는 줄 아세요? 예수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적입니다.
문둥병 자, 소경, 귀머거리, 혈기 마른 자들은 모두 타락을 하고 저주를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국이 오게 되면 그러한 타락의 열매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절대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계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바로 이 천국의 모습을 미리 조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사인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구약에서 예언 된 진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런 기적들이 일어 난 것이지 예수 믿는 것과 병 낫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35:4-6)
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바로 이분이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그 분이다“ 그걸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나아야 하고 강건해 져야 한다면 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병이 낫지
않습니까? 믿음이 부족해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소경이 믿음으로 눈을 떴습니까?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고요.

- 441 -
(요9:3)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그 상대방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귀신을 쫓아 내
주셨습니다.
(마17:17-19)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믿음이 있는 자만 병이 낫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설명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설명
하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기적을 가리켜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눅11:29-30)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러 간 요나가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예표 하는
경험을 하여 표적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표적, 기적들은 전부
우리에게 복음을 선물하실 예 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요5:36)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성경에서 “표적”이라는 말 “세메이아”는 “sign”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사인 판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얼바인” 이라는
사인 판을 보고 이게 얼바인 인가보다 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의 기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닥칠 하나님 나라를
사인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15:22-24)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24 내가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
(요14:10-11)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분이 행하신 일들을 동격으로 놓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다 복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 442 -
절대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하나님께
나사로를 다시 무덤에서 내 보내서 자기 형제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눅16:31)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실제로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라는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요11:53)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12:10-11)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진짜 죽은 사람이 살아났더니 그 죽은 사람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부흥회 가서 강사가 쓰러 뜨려 주지 않으면 “그 강사 능력
없네.“이러십니까? 왜 사람들이 기적을 좇아 다니죠? 안 믿어지니까 좇아 다니는 것입니다.
기적을 좇는 자들은 말씀으로는 안 믿어지니까 뭘 좀 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그런 얼치기 무당 짓거리 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기적을 믿는 사람들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세요. 기분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할 때 “허, 허”하고 숨을 내 쉬는 소리를 내면서
기도한답니다. 그러면 금방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난다나요? 눈물 좀 안 나면 어떻습니까?
왜 바보 같이 그런 얼치기 무당 짓들을 좇아가십니까?
신앙은 느낌이 아닙니다. 신앙은 감정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정확한 사실을 믿으시는
것입니다.
(시77:1-13)
1 내가 하나님께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 이 소리를 들으시고,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2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 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한숨을 짓습니다. 주님 생각에 골몰하면서, 내 기운은 쇠약하여
갑니다. (셀라)
4 주께서 나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시니, 내가 지쳐서 말할 힘도 없습니다.
5 내가 옛날 곧 흘러간 세월을 회상하며
6 밤에 부르던 내 노래를 생각하면서, 생각에 깊이 잠길 때에, 내 영혼이 속으로 묻기를
7 "주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8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9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 하였습니다. (셀라)

- 443 -
10 그 때에 나는 또 이르기를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 오른손을 거두시는 것, 이것이 나의
슬픔이로구나" 하였습니다.
11 주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12 주께서 해주신 모든 일을 하나하나 되뇌고, 주께서 이루신 그 크신 일들을 깊이깊이
되새기겠습니다.
13 하나님, 주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
정말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게 아닐까? 하는 절망 적인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가 어떻게
합니까? 11주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그걸 모르면 ? 거기서 못 나오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떠납니까? 느낌으로 감정으로 기분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바른 교리가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은 신앙은 언제든지 흔들립니다.
우리의 당당함과 담대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절 앞 분을 보시면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누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다고 합니까? 목사가? 신부가? “우리가”입니다.
목사는 신부는 하나님과 조금 더 친한가요? 그래서 더 당당하게 나아갑니까?
아닙니다. 카톨릭이 나누어 놓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개신교 안에까지 들어와서 목사는
하나님과 좀 더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들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목사는 그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맡은 장로 일 뿐입니다. 여러 가지 역할 중에 한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성직자입니다. 열심히 밥을 만들어 파는 것,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설거지하는 것, 열심히 그림 그리는 것, 열심히 벌레 잡으러 다니는 것 모두 하나님 백성의
거룩을 위한 것이라면 다 성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직업을 주실
때는 교회의 거룩을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성직이지요?
제가 가끔 구역 예배에 참석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 교인들이 제가 올 때까지
식사를 안 하세요. 그래서 한 번은 제가 구역장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제가 시간이 좀 늦으면
먼저들 식사를 하시라고 하니까, 그 분께서 교회의 어른이 안 오셨는데 어떻게 먼저 식사를
하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교회의 어른이 아닙니다. 목사는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교인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목사를 우상화
시키지 마세요. 그건 죄입니다.

정리합니다. 신앙은 느낌으로 기분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정확한 복음의 이해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하나 하나님의 하신 일을
회상하십시오. 기적 같은 것으로 자꾸 환부에 진통제를 놓지 마세요. 나중에 큰 일 납니다.
천사도 궁금해 하던 비밀을 완전하게 이해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자부심을 가지시고
지금도 천사들이 세상이 여러분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시고 매일 매일을 그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 내보자고요. 기도하겠습니다.

- 444 -
(39) 오직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엡3:12)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In him and through faith in him we may approach God with freedom and confidence.
(표준 새 번역)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교회는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주인공들을 지금도 천사들이 구부리고(파라큅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나님과 세상과 천사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셨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공부를 했지요?
신비주의나 기적지향주의 같은 것들이 주장하는 엉뚱한 것들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 기독교는 신비주의를
지양해야 하며 기복주의를 배격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 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신비적인 것이나 기적적인 것의 체험이나 자기의 소원이 척척 이루어졌던
것에 대한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기독교의 체험은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 "이런 환난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한가? 어떻게
나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가?"에 대한 체험입니다.
(빌4:12-13)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집에다가 표구해서 걸어놓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내가
감옥 같은 고난과 배고픔과 비천도 이겨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체험은 바로 그런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앙생활은 기분이나 느낌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교리의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만 말미암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듣고 읽고 배워서 그것이 이해가 되면 그 이해가 가슴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조선소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조선소에 가면 배를 만드는 철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철판을 보고 또 그 철판으로 만들어지는 엄청난 크기의 배를 보면 그 배가
물에 뜬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 시간에
부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물속의 물체는 그것이 밀어낸 물의 양만큼 가벼워집니다.
p=p0-pgh 이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입해 보면 그 엄청난 크기의 배가 뜬다는 것을
확실하게 계산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인류가 느낌으로 그들의 인생을 경륜해 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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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나 배나 자동차 같은 것은 결코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나 기분으로 하는 신앙은 절대 진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기복 적이며 주술적으로 이해를 하고
정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도
기적을 일으켰고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켰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은 병도 물리쳐 주시고 물질도 풍성하게 채워 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병을 낫게 해 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음을 우리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우리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복입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즐거워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절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음도 지난주에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기적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여러분이 그 기적의 의미들을 잘
파악하고 계시면 그 엉터리 같은 신비주의나 기복 주의에 빠지지 않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전에 설명을 해드렸으니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예수님의 신적 기원과 예수님의 하실 일과
예수 님 자신을 설명하는 sign이라는 것입니다.
(요5:36)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먼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 중에 딱 일곱 개가 등장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많은
일들을 간추려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요한 음을 기록했습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요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게 하기 위해 행하신 것이지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면 왜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병을 고쳐 주시겠습니까? 한번에
“병 걸린 사람들 다 나아라.” 그러면 전부 나을 텐데요.
우리는 그런 체험이 없어도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과 그 분의 하신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차근차근 한번 보지요. 요한복음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기적이 뭡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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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습니다. 비어있던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위선적인 행위만 풍성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잔치가 진짜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적이라고 했지요?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몸을 닦는 물을 담는 항아리입니다. 그것이
비어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적 뒤에 예수님께서 그 이적의 본질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2:11)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그
이적은 단순히 세상의 잔치를 흥겹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포도주를 채우시는 데에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참 기쁨과 풍성이 오게 될 것을 sign으로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게 될 천국에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그 질병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참 천국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더니 그
질병이 물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왜 질병이 생긴 것입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공급되어야 할 “바라크”“생명력, 복”이 차단 되었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질병은 궁극적인 죽음의 맛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이 꽉
차있지 않은 증거, 이미 뿌리가 뽑혀버린 나무라는 증거, 점점 죽어 가는 증거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그 천국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복“바라크”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자 질병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적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라면 왜 그 베데스다 못 가의 수많은 병자 중 38년 된 병자 하나만
고치셨겠습니까? 그 이적은 우리 죄인들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런 불능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일어설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소경이요, 절름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복음의 시놉시스 인 것입니다.
네 번째 기적이 오병 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내용만 가지고 네다섯 번은 설교한 것 같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참 생명의 떡이시며, 그 떡으로만 우리는 영원히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복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영혼의 굶주림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오병 이어를 가져오라
하셨을까요? 그냥 “모두 배 불러라”하면 배가 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
물고기 두 토막(옵사리온)과 떡 다섯 개라는 아이의 도시락을 필요로 하셨습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 아이들과 여자들을 합쳐서 2만 명이 넘는 그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데나리온(노동자의 1년 치 임금)도 모자란다고 빌립이 계산을 했습니다. 거기에 이
오병이어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하나님 나라 ,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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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기적이 물위를 걸으신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네 번째 오병 이어의 기적과
연결이 되는 기적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막6:45)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즉시 제자들을 배를 태워 벳새다로 보내십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십여 리를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역풍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아네모스 에난티오스”역풍,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역풍이 부니까 제자들이 괴로워했다고 성경은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에이도) 그들에게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밤중에
등불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역풍에 표류하는 배를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하십니다. 십여
리면 4km가 넘는 거리인데 한 밤중에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황급히 바다로 내 모신 것입니다. 당시 한 부락의 인구가 평균 3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몇 개 부락이 동시에 모인 것으로
아주 혼잡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빵과 물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그 빵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누어주던 그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시기 위해 바다로 내 몬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절대 너희들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다 위의 폭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떠나자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로 벳새다로 떠나실 때 그들과 함께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역풍을 만나자 주님은 그들에게로 걸어오셨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주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는 데는 너희들의 힘이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능력으로만, 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폭풍 위를 주님께서 밟으시는 것입니다. 그 풍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을 떼어주던 손으로 열심히 노를 젓던 제자들은
그 때 주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배우게 된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수많은 내적 외적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병이 들고,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외풍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죄로 인한 역풍도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모난 성격, 불안, 우울, 근심, 염려, 욕심.. 계속해서 우리를 거스리는 외풍과 내
풍에 우리는 시달립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어두움과 고통의
세상에서 주님께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 내신다는 것입니다.
(시139:15-16)
15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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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사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풍랑 속에 함께 계십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뭘 해요? 능력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에 제한 된 인간은 자연 법칙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시고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으로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에 스스로
매이십니다. 그것을 “공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때때로 그 자연 법칙을 유보하십니다. 수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기브온 민족하고 전쟁을
합니다. 이기고 있었는데 해가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태양을
멈추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태양이 멈춥니다.
또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신 적이 여러 번 있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질량 불변의 법칙을 초월하신 것이고
물위를 걸으신 것은 만류인력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예수님께서 바로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 자연법칙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막6:48)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셔서 그냥 지나가려 하십니다. 성경이 왜 그런 표현을 쓸까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표현을 쓰는 곳이 몇 군데 나옵니다. 그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는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났습니다. 죄는 그렇게 저주하여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부터 약속해 오신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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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4:6)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나님께서 모세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그 분의 속성을 말씀하십니다. 그 분이 지나실 때는 그
하나님의 속성이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왕상19:11)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왜 역풍이 부는 풍랑의 현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인생의 고난과
환난, 그리고 죄로 인한 고통은 정말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계시는 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를 향한 징계의
채찍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대표적인 곳이 어디입니까?
(사6:1-3)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웃시야 왕이 죽고 유대가 영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을 맞고 있을 때입니다.
(겔1:26-28)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모조리 끌려가고 처참하게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20C 위대한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인 “랄프 카이퍼”가 아주 눈이 나빴다고 합니다. 설교자가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공부할 때도 힘들고 설교 원고를 볼 때도 아주 힘이
듭니다. 랄프 카이퍼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이유로 그런
것도 아니고 설교를 하는데 불편해서 그러니 눈을 좀 고쳐 주세요.“
십 수 년을 기도했는데도 눈은 계속 더 나빠졌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4장을 묵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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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답니다. 카이퍼야, 너는 네가 눈이 온전히 치료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네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카이퍼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좋지요’ 하고 마음속에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내 마음속에 “내가 너의 삶을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너는 왜 그것을
막으려 하느냐” 하는 하나님의 책망이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그 다음부터 자기
눈을 고쳐달라고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진화론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자생존, 뛰어난 자가 살아남고 존경 받는다“ 이런 진화론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못생기고 안 되고 못 난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실패자로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우리는 창조 을 진리로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창조론은 이 땅의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인
사람은 부자대로 예쁜 사람은 예쁜 대로 못난 사람은 못 난대로, 마른 사람은 마른대로 뚱뚱한
사람은 뚱뚱한 대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 줄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기적이 소경으로 난 자가 보게 되는 이적입니다.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소경이 왜 소경이 된 것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지금 지나가고 계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도
영적 소경인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이 저주 받은 흙에 이겨지셔서 그 저주받은
흙이 되어버린 죄인과 연합되어 그 예수 님 자신이 실로암 못에 씻겨 짐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부 그 진흙과 실로암 못이 효험이
있는 것을 생각들을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신유 은사 자들이 인기인들이 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전화 예약까지 하고 가야 겨우 만날 수 있고 아니면 전화로 치료해 주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받기도 한다고 합니다.
설사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병을 고쳤다고 해도 자기는 우리 주님의 능력의 통로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신유 은사 자들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복음이 뭔지
정확히 이해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이적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거기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1:3-4)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사건 역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죄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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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하게 되는 최종적인 정리를 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적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각 기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과 그 분의
하실 일과 십자가와 복음이 상징 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 보겠습니다.
(마8: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
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레14:2-9)
2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 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 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7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 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9 칠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레위기 율법에 문둥병이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제사장에게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가지고 가서
한 마리를 죽여서 그 피를 다른 새의 날개에 묻히고 그 새를 날려 버리는 의식을 합니다. 죄가
죽고 그 죽은 자의 생명을 산새에게 묻혀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이 레위기의 의식입니다.
복음이지요? 옛 몸이 죽고 새 몸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게 되는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사장으로서 문둥병자로 대표되는 저주받은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마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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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낫게 하시는 것을 잘 보면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은혜를
설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서 네 하인을 고쳐 주리라 하시니까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감당치 못 하겠습니다“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여,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나를 떠나소서.“ 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부하가 있어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며 하라하면 한다고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잘 보시면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목적보다 예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것에
따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대로 만족할 것이고
낫게 해주시면 감사하며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을 칭찬하시면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와서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율법과 혈통의 선민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의 믿음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적은 은혜로 얻는 구원과 행위를
의지한 외식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막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칠(七)병(餠) 이어로 4000명을 먹이시자 바리새인들이 또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막8:11-12)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렇게 한탄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 더러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신 것을 경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해로운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속 메시야, 그러니까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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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화려한 다윗 왕국을 재건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라면 그에 걸 맞는 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 한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그런 표적은 예수께서 보여 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런
잘 못된 메시야 관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자기들이 빵을 한 개밖에 안 가져 와서
나무라시는가 보다 하고 자기들끼리 수군 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나 칠(七)병(餠) 이어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의
생각처럼 이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실 메시아 왕국의 전주곡이 아니라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영적 굶주림이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려 했던 것인데
제자들이 여전히 이 땅의 떡으로 다투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아니 우리 교회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데 역시 침을 뱉어서 그 눈에 바르시고 (그
죄인과 연합 되셔서) 그 눈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소경이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고도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안수해서 또 치료해
주십니다. 그제 서야 잘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매하고 더딘 제자들의
영적 진보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환하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진리 앞에 세우실 것을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도 역시 demon possession귀신들의 소유였던 죄인들을 예수께서
건져내셔서 제자를 삼으시는 복음에 대한 진술입니다.
(막5:1-8)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그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묘사를 잘 보시면 첫째로 그 사람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공통점입니다. 죄인들은 부끄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그게 부끄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런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모여 앉아서 자랑하는 게 얼마나 많은 돈을 사기 쳤나? 얼마나 많은 여자를
울렸나? 얼마나 비싼 물건을 도둑질했나? 내가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때렸었나? 이런 것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가운데 삽니다. 무덤에는 죽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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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는 사람 썩는 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자기들의 의만
드러내는 썩어 가는 시체들 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죄인들은 힘이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 지식 이런 것을 자기만을 위한
힘으로 씁니다. 그런데 그 힘은 자신을 파괴해 가는 힘입니다.
5절에 보시면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더라.’ 는 구절이 있지요?
인류의 문명이 결국은 인간을 아주 가치 없고 값싼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키운 힘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이외에 자신이 힘이라고 여기고 있고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기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마귀의 속임수 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우상을 섬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우상에게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겨 버리는 것, 그것을
우상을 섬긴다고 하고 그런 자들을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65:1-5)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켜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어디서 봤지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해를 하면서 바알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자는 바로 세상의 가치인 우상 속에서 그 것이 진짜 가치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demon possession 된 자에게 예수께서 오십니다. 예수가 오셔서 그 귀신들을
돼지 떼에다 몰아 넣으셔서 바다에 넣어 몰살을 시키십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지요? 홍해에서 애굽이 모두 빠져 몰살당하는 장면입니다.
왜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면 되지 애굽을 다 몰살시키십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매력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충분히 인간들이 자신의
힘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바다에 넣어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하필 돼지인지 아세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부정한 짐승이 돼지였습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돼지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 돼지
같은 우상들, 세상의 가치들을 모조리 바다에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이적은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거짓 가치들로부터 벗어나서 참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41:21-24)
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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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22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23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24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고 있는,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우상은 전부 신기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그 모든 우상들을 일거에 몰살시키시고 우리를 참 진리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짐을 받은 자들이 바로 “제자“라는 것입니다.
(막5:18-20)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 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병을 낫게 하신 후에 한번도 “나가서 너에게 일어난 일을
자랑하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사람에게만 가서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방인 데가볼리에서 전도를
합니다. 20절의 ”전파하니“라는 말”케릿소“는 ”설교하다, 전도하다”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누구에게 그러한 일을 맡기셨지요?
(막3:14)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그 일을 이 거라사 광인에게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고후4:5)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같은 단어입니다. 그는 최초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모형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갖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빛에 어둠이 물러가듯이 마귀의 세력은 쫓겨 가고 그
세력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12:28)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리고 같은 마가복음 5장에 열두 해 혈루 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5:25-34)
25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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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혈루 증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생리현상이 아닌 지속적인 자궁 출혈(disfunctional uterine
bleed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철분이 함유된 비타민도 없었을 것이고 먹는 것도 부실한
시대에 12년 동안 하혈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여자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그 병은 더 중하여 졌습니다.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돈도 다 써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그 혈루 증에 좋다는 약으로, 타조의 알을 갈아서 베옷에 넣고
다니면 된다거나 흰 암나귀의 똥 안에 들어있는 보리알을 지니고 다니면 낫는다거나 하는 민간
처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타조나 흰 암 나귀는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돈이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허사였고 병은 더 중하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마가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레위기 율법에 보면 혈루 증을 앓는 여인들은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레15:6-8)
6 유출 병 있는 자의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7 유출 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8 유출 병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렇게 혈루 증을 앓는 여자는 문둥병자처럼 마을에서 함께 살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예배
하는 자리에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사력을 다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마9:20)
20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겉옷 가가 어디냐면 겉 옷 맨 아래의 옷 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
입던 겉옷은 그 옷 맨 아래에 술을 달았습니다. 그 옷 술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옷 술을 보면서 율법을 다시 상기하고 묵상하고 하기 위하여 옷 술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 정 죄를 받아야 하는 한 부정한 여인이 그 율법을 잡은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율법에 의하면 정 죄를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막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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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자신은 부정하여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거룩을 의지하여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 여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0절을 보시면
(막5:30)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자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100정도 충전하고 다니시면서 병을 고치실 때마다 능력이 조금 씩 조금씩
나가는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능력“”뒤나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메시아로서의 권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부정한 자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열두 해 혈루 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은 그 영광의 주님의 권세를 그 자리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혈루증이 나았는데도 그 여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 벌벌
떱니다.
(막5:32-33)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왜 병이 나았는데 기쁘게 펄펄 뛰지 않고 두려워 떱니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물 한 가득 고기를 잡았을 때 기뻐서 펄펄 뛰지 못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이야기
한 장면하고 똑 같지요? 아까 백부장이 “주여, 내가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하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면 경외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주어질 새 생명, 구원의 이야기를 혈루 증
여인을 통해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혈루 증 여인을 만나실 때 어디로 급히 가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급히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만 그 야이로의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막5:34-35)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께서 이미 병이 나은 혈루 증 앓던 여인에게 굳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조급해하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36절에서 한 번 더 야이로에게 믿음을 강조 하십니다.
(막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자, 이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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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어떻게 그 분이 죽어 가는 자기 딸을 살리실 것을 믿고
그 분을 모시고 가는 것입니까? 야이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믿겨졌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먼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살아있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야이로는 믿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믿음의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바쁜 와중에 혈루 증 앓는 여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갈 길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야이로의 딸이 죽습니다. 야이로는 허탈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나는 이제 절망이구나.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아니, 믿는 것도 어느 정도 실낱같은 것이라도 남아있어야 믿는 것이지 이제 딸이 숨이
끊어졌는데 뭘 믿으라는 것입니까?” 왜 이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12살 먹은
딸이 이제 곧 시집도 가야하고 손자도 보여주고 할 그런 딸이 죽을병이 들어서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찾아간 예수라는 사람이 오는 길에 지체하는 바람에 자기 딸이 죽었습니다. 야이로는
이제 완전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에게도 일부러 늦게
가시고는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고 말씀하셨지요? 왜 주님은 그런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시고 거기서 믿음을 요구하실까요?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자라서 죽음을 이기는 믿음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뭉개서 없애버리신 그 사망을 이기는 믿음을 우리가 우리 안에 실력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사망을 이기는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절망적인 상황인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너희를 버려도 하나님은 안 버리신다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역경 속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마고 약속하시고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태까지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왜 한나의 태를 그렇게 오랫동안 닫으셨다가 여시는 지 아십니까? 한나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야이로에게도 절망 속에서 그러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야이로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 믿음이 딸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소녀에게 가셔서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역경을 통해 자라난 믿음이 사망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야이로의 딸과 혈루 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소중하고 누가 덜 소중하고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믿음으로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유지인 회당장의
것이나 저 부정하고 가난한 혈루 증 여인의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귀신을 쫓아주신 사건과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막5: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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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먼저 2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려고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요? 지금 마가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45:14-17)
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애굽의 수고한 것과 구스의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족속들이
다 네게로 돌아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15절에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십니까?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즉사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막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기로 하셨습니다. 성막 안에 숨어
계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알아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 보면, 그 여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매몰차게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전에도 설명해 드렸지만 구속사의 진행상 유대인에게 먼저 구원이
있다는 것이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진행시키시면서 유대인을 먼저 택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교회를 설명하시고 그들의 실패로 전체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교회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그렇지만 구약 시대에는 어찌 되었든 이스라엘
민족 안으로 들어와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라고 하시고
이방인을 개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의 뜻은 ”예수 님, 그래도 당신은
모압의 룻과 여리고의 라합과 아람의 나아만을 건지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에게도 그 떡
부스러기를 허락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떡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그 복을 우리에게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의 말대로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그
여인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시27:5-6)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 460 -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숨어 계신 주님 안으로 우리를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자로서 당연히 예수의 수난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기적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막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영적 청각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정리를 해서 복음을
설명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걸 알아듣는 사람은 옆에서 가슴을 칩니다. “왜 그걸 못
알아들어?” 그런데 못 알아듣습니다.
(슥7:11-1)
11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렘6:10)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행7:51)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게다가 죄인들은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세워주고 살리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깎아 내리고 험담하고 욕하고 하는 데만 혀가 빠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말이 어눌합니다.
(잠18:21)
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제발 남 욕하지 마세요. 험담하지 마세요.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하세요. 세워주고 높여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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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주는 말들을 하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혀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따로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주님께서 그의 외로움과 고적함과 소외됨에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incarnation'입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귀머거리 말이 어눌한 자와
연합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저주받은 질병을 가져오시고 예수님의 그 거룩을
그에게 덮어 씌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분 안에 숨겨지는 것이며 그 분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가 듣고 말을 합니다.
이 사건은 그러한 영적 귀머거리 말이 어눌한 자인 죄인들 속으로 incarnation 하셔서 그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죄인들의 저주를 예수께서 가져오시고 예수님의 거룩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물하시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를 다 아시고
체휼하셨습니다.
(사53:3)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히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 주님은 우리처럼 소경이 되시고 우리처럼 귀머거리가 되시고 우리처럼 어눌한 자가
되시고 우리처럼 문둥병자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아픔이 되셔서 우리가 나은 것이고 그가 귀머거리가 되심으로 우리의 귀가 뚫리는
것입니다. 그가 벙어리가 되시면서 우리에게 온전한 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고후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가 외쳐야 할 그 비명을 우리
주님께서 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사35:6-10)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9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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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여러분들이 살펴보셨듯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예수께서 바로 이 천국,
하나님 나라이시며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이 완성이 되었고 그 기적들이 모두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이렇게 밝히 계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은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깨끗해 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부정하고 저주받은 자의
상징으로 나타났던 병든 자, 문둥이, 소경, 귀머거리, 말 어눌한 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면서 부정한자, 저주받은 자들을 정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이상 기적으로
신유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물론 자녀가 병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그 병을 치유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대교회 때처럼 하나의
은사로서 존재할 필요는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발 그러한 신비주의 좇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마시고 그 기적들이 설명하려고 했던 예수를 더 열심히 명확하게
공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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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오직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II) - 기복주의
(엡3:12)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지난주와 이번 주 두 주간에 걸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나아감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이루어
지는 것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은 모두 그 분의 신적 기원과 구속사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번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신앙생활은 느낌이나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 바른 교리에 근거하여 시작되고
성숙되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도 그러한 체험 지향적 신앙이 왜 위험한 것이며 아울러
그와 한줄기로 흐르는 기복 적 신앙이 왜 안 되는 것인가를 조금 더 공부하겠습니다.
(막7:1-2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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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저 북쪽 끝에 있는 갈릴리 지방까지 원정을 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을까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
중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을 한 뒤 자기들에게 그러한 환난이 닥친
것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더 잘
지켜내기 위해 그 율법을 해석하여 더 많은 조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미쉬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세분하여 쪼갠 것을 우리가 탈무드라고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모세 오경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장로들의 유전인데, 그
장로들의 유전에 어떤 것이 있었느냐 하면 제사장들이 성전에 제사를 지내러 들어 갈 때에
반드시 손을 씻고 들어가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반인들에게도 확산이 되어서
일반인들도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 장로들의 유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으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찌하여 저들은
부정하게도 손도 씻지 않고 밥을 먹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들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인간의 죄 성을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처해진 상황이라든지 우리의 여건,
우리의 경험, 체험, 노력 같은 외부의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너희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분들이 신앙의
내용을 자기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 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경험을 했느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느냐? 로 신앙의 경중을
가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적적인 체험을 하고 당면했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우리가
드렸던 기도가 응답이 되고 하는 것은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것 자체가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용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체험을
했는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로만 따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 기도의 응답이 더 큰 것이냐, 당신의 기도
응답이 더 큰 것이냐를 가지고 경쟁을 하게 되고, 내가 겪은 체험이 더 큰 것이냐, 당신이 겪은
체험이 더 큰 것이냐를 가지고 우열을 가르게 됩니다. 그래서 간증 같은 것들도 점점 더
자극적이 되어져 가고, 아주 파렴치하고 지저분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처럼 취급이 되어져서 어떻게 하면 자기 과거를 더욱 더 자극 적으로
꾸밀까 고민하는 사람까지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겨우 무좀 나은 것 가지고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고쳐 주셨다”라든지 겨우 동네
양아치 노릇 좀 한 것 가지고 “자기가 과거에 조폭 두목이었었다.” 라든지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들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내용은 그러한 밖의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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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기가 가진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으로 신앙을 정의하고 있는 사람들은 진짜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이후에 더 자극적인 기적을 원하며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불러서 날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러한 외적인 체험이나 경험으로 신앙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우길지 모르나 구원이라는 진정한 기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맞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돼, 예수를
믿으려면 곱게 믿어야지 무슨 기적이나 쫓아다니고, 체험이나 하려고 하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주님, 저는 저런 자들처럼 엉터리 신앙을 갖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누가 되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이 전혀 반대의 사람들 같지만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둘은 똑같이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신앙을 정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내가 얼마나 큰 경험과 체험을
했는가? 이지만 다른 쪽은 내가 얼마나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인격적이고
교양이 있는가라는 자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착한 행실을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열심을 냈는가? 우리가 얼마나 큰 체험을
했는가?“ 그런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정의하는 것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정말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체험과 종교행위의 목록들은 우리의 목표지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선하게 할 수도 없고 구원할 수도 없으며 우리를 더럽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신앙해야 하는 것입니까?


(렘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러했던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뜯어내고 새 마음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겔36:25-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셔서 우리를 바꿔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늘을 맛보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 율례를 행하게
만드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일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며 그
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우리에게 창조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 새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이제 착한 일만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마음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직 안착하잖아요?
그 새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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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2:9-16)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 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새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까지 알아서 그 예수님을 기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이나 선행이나 열심으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성령께서 그 새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렘17:1)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표준 새 번역)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제단 뿔 위에도 그 죄가 새겨져 있다.
이런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그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향해 그들의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왜 기적이 필요하며 왜 자극적인 체험이 필요합니까? 그 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안
믿어지니까 자꾸 기적을 보려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려하고 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왜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싶어 합니까? 그냥 교리 적인 지식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화끈한 체험이 있으면 신앙이 한 단계 더 높아 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방언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부채질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삼각산 기도원 같은
곳에서는 방언을 연습하고 가르치는 방이 따로 있었을 정도입니다. 저 아래쪽에 있는 어떤 큰
교회에서는 구역 예배 때 방언을 못하는 사람을 따로 갈라서 “할렐루야”를 가지고 방언을
연습시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신앙적인 우월감을 방언으로 뽐내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웠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그 은혜를
가슴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절대 누구에게 자기 신앙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아는 자가 어떻게 남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정죄를 합니까? 신자라는 사람들이 나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는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자기가 외적으로 가진 게 많다 하더라도, 성경도 많이 공부했고 성경도 많이
읽었고 교회도 오래 다녔고 봉사도 남보다 더 많이 했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했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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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남보다 내가 조금 나은 근거가 된다면 그건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도 제대로 못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들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으려고 방언을 하고 싶어 한다면
그 분은 아직 멀어도 한 참 먼 분입니다.
칼빈이 방언했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루터가 방언을 했나요? 어거스틴이 방언을 했습니까?
방언을 안 해도 예수 잘 믿고 천국 간다고요. 지금 방언이 있다 없다 에 대해서는 제가 논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을 제가 저의 주관으로 우길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종교에도 다 방언이 있고 종교적인 특별히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극단 적인 세대주의 자들처럼 “마귀가
주는 것이라는 둥”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고3 때부터 방언을 했었고
지금도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생전 배워 보지도 않은 중국말로도 방언을 합니다.
그러나 그 효용성에서는 제가 꼭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언을 비롯한 은사들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고전14:12)
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 은사로 우 열반으로 갈렸습니다. 은사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와 조금 부실한 은사를 가진 자 특별한 은사와 부실한 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언이나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같은 것은 조금 세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구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사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은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모두 헛것이다.“ 라는 것이죠.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주눅 들게 하거나
그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이 그 것으로 교만해 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사가
아니겠지요? 제가 한번 여쭤 볼게요. 이제 막 방언을 시작하신 분이 여기 계신 걸로 아는데
그런 분들 말고, 그런 분들은 지금 한창 신기하고 재미있고 자랑하고 싶으실 때이니까 조금 더
즐기시고, 그런 분들 말고 저나 저희 집사람처럼 10년 20년 방언을 해 오신 분들에게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어떤 유익을 주던가요?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오래 기도할 수 있다.’ 그게 유익입니까?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영적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잘 알아들으신다.’그게 정말 맞아요? 그럼, 사람 말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조금 덜 쳐주시는 기도입니까?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다가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방언으로 얼버무릴 수 있다.’ 그게 유익입니까? 어떤 유익이 있으세요. 제가
다 해본 겁니다. 제 경우에는 남들한테 자랑 할 게 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합니다.
(고전14:6-15)
6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훈이나, 이런 것으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7 피리나 거문고 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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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8 또 나팔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방언을 사용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10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말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11 내가 그 말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이에게 외국인이 되고, 그도 나에게
외국인이 될 것입니다.
12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여러분은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그 은사를 더욱 풍성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13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 방언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14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이성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이 구절에서 많이 들 오해하십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센 기도라고 생각들 하십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이성, 내 마음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이성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으로 뿐만 아니라 이성으로도 기도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주 메시지인 것입니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보시다시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방언을 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교회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 넣어 주신 그 새 마음을 하나하나 까서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밝게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기적이나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이런 방법입니다.
(욥7:11-20)
11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12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13 잠자리에라도 들면 편해지겠지, 깊이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만,
14 주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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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까?
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침 삼키는 동안에도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의 새 마음을 싸고 있는 옛
성품, 죄의 경향, 사륵스, 집착과 중독, 통제성향, 자기 방어 이런 것들을 깨 나가시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가게끔 훈련되고 익숙해진 근육들을 다
풀어 버리시고 그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시기 위해 침 삼키는 동안만큼이라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가 우리에게는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밝게 볼 수가 없습니다.
욥이 그 과정을 통과한 후에 “전에는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뵙습니다.”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모두 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왜 신비와 기적이 필요합니까?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외부적인 것들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성숙시키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잘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똑똑하거나 멍청하거나 많은 신비한 체험을 했거나 못 했거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마세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더 알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알게 되셨다면 그게
바로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함께 공부한 것처럼 천국은 이 땅에 겨자씨로 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분으로 오셔서 하릴없이 죽어 버리신 것처럼 그렇게 겨자
씨의 모습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그 겨자씨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체험으로 멋지게 남들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게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은사나 재능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숨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신비적인 체험이나 비상한 은사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숨겨진 겨자씨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사기의 사사들이 그렇게 하나같이 모자란 사람들로 세워졌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 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모자라
보이지만 성령이 임하시자 백전백승입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나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눅13:18-19)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 들였느니라
이 말씀은 에스겔서 17장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겔1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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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3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채색이 구비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되
4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고의 성읍에 두고
5 또 그 땅의 종자를 취하여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의 아래 있었더라
7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긴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발하고 가지가 퍼졌도다
8 그 포도나무를 큰 물 가 옥토에 심은 것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9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 나무가 능히 번성하겠느냐 이 독수리가 어찌 그
뿌리를 빼고 실과를 따며 그 나무로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연한 잎사귀로 마르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백성이나 강한 팔이 아니라도 그 뿌리를 뽑으리라
10 볼 지어다 그것이 심겼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이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이 에스겔서 17장의 내용은 바벨론과 유대와 애굽의 이야기입니다.
독수리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독수리가 포도 씨를 옥토에 심어 그 포도나무가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가 다른 독수리에게 붙어서 물을 달라 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씨를 심은 독수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뿌리를 뽑고 말라죽게 만들어 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유대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 범죄 하자 바벨론을 시켜서 유대를 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은 유대의 20대 왕인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정치인들이나 학자 같은
유대의 지식인들을 함께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때 잡혀 간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자기들 마음에 드는 시드기야 라는 왕을 세우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대는
바벨론에게 충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몰래 애굽에 원조를 구했습니다. 함께
바벨론을 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
하는 남 유대를 깨우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그 난국을 이겨내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대신에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시드기야와 유대를 멸망시켜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BC586년에
바벨론은 남 유대를 멸망시켰고 성전까지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겔17:22-24)
2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 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이 구절이 겨자씨의
비유에서 인용된 구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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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백향 목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높은 백향 목 꼭대기의 가지를 꺾어 아래에다 심은 모습으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꺾여서 심기운 연한 가지가 누구입니까?
(사53:2)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오시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거기서 끝입니다.
(마24:29-30)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꺾어진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한 가지의 정체는 온갖 새들이 깃들 수 있는 엄청난
백향 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비우시고 초라한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오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모두 죽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감추시고 겨자씨처럼 연한 가지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예수의 품안에 숨겨져 있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나아가려는 시드기야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커다란 체험을 해서 “이
정도면 되나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을 부려 성경을 공부하고 열심을 부려
선행을 행한 것을 자랑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봐라, 예수 믿으면 이렇게 이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게 되는 거야”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로 연한 순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자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그렇게 될 자들이 아니라 이미 그런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대로 살아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면서 자기만
군계일학이요 청산의 낙락장송인 것처럼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우리를
증명하는 데 쓰는 시드기야 같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권세와 힘으로 연약한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쓰는 바보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신비적인 체험이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부와 명예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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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세상에 자랑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로
가지고 나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험을 통해서 때로는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점점 알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입니다. 우리는 꺾여 심기운 연한 나무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그 광야 40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날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들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셨지요? 40일 내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시험이었나요?
그 시험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우리 인생이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지 잘 알게
되겠지요.
(눅4:1-1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
2절에 “날 수가 다하매“라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날 수까지 지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날 동안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 보시면 ”성령에
이끌려서“시험을 당했다고 나오지요? 사탄이 시험하지만 성령이 이끌고 가셔서 시험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시험은 전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시험은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허락을 하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40일을
굶주리시고 처음 받으신 시험이 어떤 시험입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우리 신자들은 우리의
힘과 노력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되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삶으로 시인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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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드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40일의 기간을 주셨습니다. 굶으라고 하셨습니다. 배가 고프시지만 하나님의 말씀,
그 명령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에서 인용하신 것이지요.
(신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절의 “예호바 페 모짜 콜“이라는 말은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존은 100%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8:17-18)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신자들의 성숙을 위해 허락하신 이 인생길에서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안달하게 될 때 여러분은 시험에 낙방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78:12-22)
1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14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7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20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22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우리는 때때로 그러한 시험을 받습니다. 유독 나만 다를 사람보다 늘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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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있습니다. 진짜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려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떠세요?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믿으십니까? 아니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거기에
만족하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완전하게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자, 즉 복을
회복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그러한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신8:15-16)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예수께서 두 번째 받으신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입니다. 그러면 시편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네가 다치지 않게 너를 수종들 것이다“ 하고 시험을 합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답하십니다.
그 말씀은 신명기 6장16절에서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신6:16-18)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 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맛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요?
(출17:2,7)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발 한발 가고
있었음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들은 모두 그런 자들이라는 것을 진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나 체험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다고요? 천만에요.
잘 보세요. 지금 주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시험들을 하나하나 성공으로 완성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시험들을 예수께서 완성시키셔서 우리 교회에게
통째로 선물하시려고 예수님께서 그 시험을 다 통과하고 계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40년 광야의 시험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실패를 세례를 받으시고 40일간 시험을
받으시며 그들의 실패를 완성하여 교회에게 선물하시기 위해 시험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그냥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되는데 왜 굳이 시험까지
받아야 합니까?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죄 사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한 점 흠도 없는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험도 다 받으시고 이겨내시고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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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시험이 닥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 좀 마르다고 똑같이 “하나님은 안 계실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를 지키지
않으시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실지
안 지키실지 시험해 볼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당연히 그 하나님께서 아들인 자신을
지키실 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도 배 안에서 편안하게 잠을 주무시는
것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감옥에서 노래하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왕왕 닥치게 됩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시험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신뢰해야지요.
마지막 시험이 마귀가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영광으로 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거치지 않게 하려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실 분입니다. 마귀도 그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왜 굳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까? 상식적으로 ,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지지 말고 그냥 왕으로 등극해라“ 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꾸짖어
가라사대 안 됩니다“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뭐라 하십니까?"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사람의 생각이요 사람의 상식입니다. 우리도 자꾸
거기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시험 통과하지 않고 그냥 천국 보내주면 안 되나? 하고
투정을 부릴 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천국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예수 님 생애 끝 날까지 계속된 시험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시험이 우리의 광야 인생 내내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온전하게 들어가기까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뭐 그렇게 심각해, 대충 대충 교회 빠지지 않고 선교나 가주고 헌금이나 잘 내 주면 되는 걸,
뭐 그렇게 심각하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다고 고민하는가?” 하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 뭡니까? 우리는 십자가에다가 무엇을 박아 죽여야 합니까?
그 옛 몸, 죄의 경향, 내가 하나님 없이 살도록 훈련되어지고 습관이 되어버린 그 악한 힘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 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그거 안 하면 미칠 것 같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가난하게 살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 죄가 되어 죽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를 매일 매일
죽여 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없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skip하고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풍요의 신인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광야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나안의 풍요를 도둑질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져서 하나님 나라에서 전혀 어색함 없이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광야의 길인 것입니다. 그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광야의 삶 속에 신비와 기복이 웬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아까움 없이 버리며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하는 광야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고 그 분을 이용해서 기적적으로 소원을 성취하려는 시도가 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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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저 땅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오직 그 분이 가신 그 길을 그 분 안에서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당당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길입니다. 겨자씨의 모습으로 꺾인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롤랑 조페 감독이 만든 감명 깊은 영화 미션을 보셨습니까?


전편에 흐르는 영화음악의 거장 엔리코 모리코네의 장엄한 음악과 시원한 화면이 압권이었지
요. 그 영화는 십자가에 달린 한 선교사가 이과수 폭포로 떨어져 죽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유럽은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1700년대 후반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화라니 강으로 쏟아지는 이과수 폭포 위에 사는 원주
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올라갔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도 그 예수회 소속 선
교사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가 과라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보에 하나를 가지고 맨
발로 절벽을 기어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곡을 연주 합니다. 원주민들과 상면하는 자리
에서 그는 로드리고 멘도자(로버트 드니로)라는 노예 상인을 만납니다.
그 로드리고는 동생과 자기 애인과의 삼각관계로 싸우다가 그만 동생을 죽여 버립니다.
괴로워하던 멘도자에게 가브리엘 신부가 찾아옵니다. 그는 그 예수회 수도원에서 곡기를 끊고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그를 과라니 족 마을로 데리고 갑니다. 로드리고는
속죄를 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용병 시절에 입었던 갑옷과 칼 투구 같은 무거운 것들을 그물에
넣고 그것을 끌고 과라니 마을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원주민들에게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 영토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과라니 마을에 들어가 있는 예
수회 신부들을 철수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조약을 합니다.
그 때 가브리엘 신부와 수사 로드리고는 포르투갈 정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신부는 원주민들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무저항의 행진을 합니다. 로드리고는
용병출신답게 다시 칼을 잡고 포르투갈 군대와 싸우지만 그들은 모두 죽습니다.
그들을 설득하러 왔던 교황청의 추기경이 나중에 이런 유명한 대사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 명과 과라니 족의 멸종으로 끝났습니다만 죽은 것은 저 자신이고 저들
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힘입니다. 총칼로 재물로 명예로운 직업으
로 우리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겨자씨의 모습으로 꺾어진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시면서 오늘도 나의 추잡한
인격의 한부분이 죽고 나의 고약한 습관이 죽고 나의 악한 생각들이 죽는 것으로 기뻐하시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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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엡3:14-21)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은 이제 두 번째 기도를 올립니다.
바울은 2장 마지막 부분에서 태반이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탁월하신 지혜로 전에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도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이방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헐어버리셨고 십자가로 한 몸으로 만들어 버리셔서 이제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고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만드셔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다는 복음의
핵심을 설명해 주었지요? 그리고 3장 1절에서 ‘이러하므로’하고 시작을 하는데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똑같은 ‘이러하므로’가 등장하는 것을 들어서 3장 2절부터 13절까지는 괄호를
쳐서 이해를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것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 13절까지는 앞에서 설명한 2장까지의 부분을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어 그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되어 환난을 당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영광으로 삼으라는 위로의 말을 하는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목회 적 심정에서 에베소 교인들의 낙심을 위로하는 것이 문맥의 매끄러움을 이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잠시 어법상이나 문맥의 흐름상 파격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래의 맥으로 돌아옵니다. ‘이러하므로’ 2장 말미와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의 결과물이므로 나는 이렇게 기도 한다“ 하고 오늘
본문을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교회가 그렇게 탄생이
되었고 지금 바울이 기도하는 그 기도의 내용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 열심히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는 기도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사도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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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내용을 공부하기 전에 우리는 기도의 자세부터 공부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의 자세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서서 기도하는 자세가 있지요?
(마6:1,막11:25,눅18:11)에 서서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눅18:11)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러한 기도는 보통으로 기도할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자복할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에스라10:1,눅18:3)
(스10:1)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세 번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단6:10,눅22:41,행7:60,20:36,21:5)
(단6:10)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렇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는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왜 제가 기도의 내용에 앞서 이렇게 형식의 부분인 기도의 자세를 언급을 하는가 하면 우리가
형식주의를 배격하면서 꼭 필요한 형식까지 다 내다버린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
목욕물을 내다버리면서 아기까지 내다버린 꼴입니다. 형식을 갖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에 대한 예의의 외적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형식주의를 나무라기 위해 자기가
설교할 때 반바지를 입고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1.5세 혹은 2세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리타분한 한국 예절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을 피력하는 몸부림입니다.
정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요? 윌로크릭 쳐치의 youth담당 목사님은
헐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팔뚝에 문신을 하고 머리는 삭발을 한 채 가죽 상하의에
쇠사슬을 달고 설교를 합니다. 아주 자랑스럽게 그 분을 소개하던 빌 하이블즈 목사님의
모습이 지금도 안쓰럽게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게 잘하는 것입니까?
청교도들은 주일날 교회에 갈 때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거리에 있는 교회이지만 자기 옷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잘 다려서 입고 갔습니다. 그들이 형식주의에 빠져서 그런
것일까요?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예를
갖춘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는 도저히 못 가겠어서 빌려서라도 좋은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러 간 것입니다.
렌스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몸의 자세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몸의 자세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는 것은 굴복과 겸손한
간청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형식을 완전히 배척해
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배척해야 할 것은 생각 없이 형식만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이지 크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예의까지 배격하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깨끗하고 순결하게 서기 위한 훈련은 그런 작은 노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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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28)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어떤 사람은 12절 말씀을 가지고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자들이 무슨
형식을 따지냐고 반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담대함은 뻔뻔스러움과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당당함은 건방진 것과 다른 것이지요. 물론 제가 마음에도 없이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도 없이 겉으로만 무릎을 꿇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몸은 무릎을 꿇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무릎이 꿇어진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로마의 감옥에서 죽기 2-3년 전의 노구의 몸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늙은 노 사도의 사역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두들겨 패고,
감옥에 넣고, 모함하고, 욕하고 하면서 사탄은 마침내 그 대 사도를 손발을 꽁꽁 묶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사도의 손발은 묶였습니다. 사도는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는 가르칠 수도
없었습니다. 사도는 전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자유로운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기도는 사탄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는 감옥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바울의 기도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할 수
있으시다면?”이라든지“그게 만일 당신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 것이다”라는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요14:13-14)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6:23-24)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분명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기도를 당당하게 하지 못하지요?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엉뚱한 것들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당당합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이러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하고 당당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요.
두 번째로 사도는 당당함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 어떤 특정한 무리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14절15절에서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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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각 족속“이라고 번역이 된 ”파사 파트리아“는 ”모든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2장 공부할 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권속”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부분이 있었지요?
(엡2:19)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역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모든 천국 가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모든 가족)“ ”파사 파트리아“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 어디에 국한되어 있습니까? 나, 아니면 우리 가족,
대부분의 기도가 여전히 이기적으로 드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한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교제를 기도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주신“이라는 말은, 고대 관습에는 이름이 개인의 근본적인 특성을 나타내었던
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가족들을 창조하셨으며 온전히 자기의 백성들, 가족들을
주관하고 계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도의 기도는 모두가 영적인 기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 내용 중에 물질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빨리 감옥에서 나가
너희에게 좀 더 많은 교리를 가르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든지, “병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든지”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복을 주어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시기를 바라는
이런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는 전부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하나하나 풀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첫 번째로 신자가 성령을 통해서 내적인 힘을
얻어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거하게 되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거기서 쓰인 단어“머물러”
“카토이케오”라는 말은 “영구적인 거주지로 삼다“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는 신자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신자는 사랑이라는 터에 성전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자라는 성전은 사랑이라는
뿌리로 사랑이라는 양분을 빨아들여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빼면 시체입니다.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다른 것으로 자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오직 여러분의 사랑을
자랑하십시오. 네 번째로 사도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충만함을 깨닫게 되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구약의 교훈이 도움이 됩니다.
(욥11:7-9)
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어찌 그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에 대해 계속해서 더 많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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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종교 재판소의 감옥을 부수고 지하 감옥을 열었을 때
처참하게 썩어 버린 시체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착고와 쇠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 작고 음침한 방에 십자가가 하나 그려져 있었는데 그 십자가 주위에 스페인
어로 네 마디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는 “높이” 라는 단어가 집자가 밑에는
“깊이”라는 말이 그리고 십자가 왼편에는 “넓이” 그리고 십자가 오른편에는 “길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신자는 그러한 고난 중에서도 결코 자신을 낙심시킬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깨닫고 있었고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것을 아는 만큼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삶을 살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라는 구절이 붙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성도들, 교회의 존재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무슨 종족이든지 그들의 서로 다른 경험과 배경이 모두
합쳐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신자가 충만해 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거기서 쓰인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단어는 목적 적 속격이 아니라 “주어 적
속격“입니다. ‘충만’이라는 단어”플레로마“ 앞에 ”에이스“라는 전치사가 있는 걸 봐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어떤 충만”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뜻입니다. 그 충만은 하나님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충만은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의 전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충만, 그 자체를
우리에게 부어 넣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의 응답은 확실하게 이루어 질
것들입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면
(엡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첫째,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며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을 능히
응답하실 수 있고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까지도 알고 계시고, 넷째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확신으로 기도하고 있지요? 따라서 이 기도의 내용은
우리 삶 속에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들을 공부하면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기도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근거로 ,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강건”이라는 말 “크라타이오-”는 13절의 “낙심” “엨카케오”라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엡3:13)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여러분, 속사람이 뭡니까? 속사람은 영혼을 말하는 것인가요? 겉 사람은 육신을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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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고요? 아닙니다. 그것을 헬라의 이원론이라 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를 공격한 이단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의 이원론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말합니다. 저 천상의 “이데아”가
실체이고 이 땅의 것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적인 것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 육적인 것은 속되고 저급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복음과 혼합시켜서 육적인 자기 몸을
마음대로 시궁창에 굴렸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비단 고린도 교회뿐이겠습니까? 그런 이단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신자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속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다 포함한 거듭난 “네페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도 없고 반응할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고
거듭난 자들은 그 영혼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게 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기는 본질적인 인간“을 속사람이라 합니다. 겉 사람은 우리 거듭난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훈련되어지고 길들여진 또 하나의 성향, 경향 등 속
사람과 반대 되는 모든 부분을 겉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처럼 속사람과 겉 사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자꾸 강건해져야 겉 사람이 후패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속사람이란
표현은 성도 전인을 다른 측면에서 관찰한 것입니다.
(고후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속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울의 기도가 어떤 기도 다음에 드려지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2장 말미에서 “너희의 신분은 이러이러한 자들이다“라고 선언해 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이후에 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12:5-11)
5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고 있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을
받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强健)입니다. 속사람의 강건함으로 우리가
힘을 키워 무엇인가를 이겨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만사형통, 탄탄대로는 아닐 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도 계속해서
속사람의 강건(强健)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분명 우리에게는 그 강건함으로
이겨내야 할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에베소서는 총 6장으로 되어있습니다. 3장까지가 교리 부분이고
4장부터가 실천 부분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었지요? 4장 1절이 “그러므로“라고 시작이 되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가 4장부터 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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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3장까지 에서만 머물고 있지 더 이상 삶의 부분으로 걸음을 내딛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4장부터의 투쟁의 삶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함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홍해를 건넌 감격 속에서만 머물면서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처럼 구원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막 살아도 된다는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어, 난 이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그런
사람은 지금 “아, 하나님은 딱 나 만 하구나.”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더 놀랄 것이
없다니요? 우리는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지 아십니까?
(엡3:19)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난 이제 목적지에 다 왔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성숙해 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엡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until we all reach unity in the faith and in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and
become mature, attaining to the whole meas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표준 새 번역)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숙해 져 가야 합니다. 그 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속 람의 강건함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은 수준이 아니라 성숙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나누어 부릅니다.
(요일2:12-14)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표준새번역)
12 어린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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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서,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로 한번 가보지요.
(고전3:1-2)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어린아이로 분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젖만 먹였다는 것이지요.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딱딱한 음식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성숙한 어른 대접을 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젖을 물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가 이미 거듭난, 성령의 이끄심대로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 내는 자들입니다.
(고전3: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여기서 신령한 자들은 헬라어 “프뉴마티코스“인데 이"프뉴마티코스”가 바로 그러한 영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전혀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전2:14)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이 “프쉬키코스”입니다. 이 “프쉬키코스”는 전혀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전3: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린도전서 2장의 육신에 속한 자와는 다른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을 사도 바울은 “사르키코스”라는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전 인류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인 “프뉴마티코스”와 거듭났으나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사르키코스”와 전혀 거듭나지 못한 “프쉬키코스”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이 동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나 시험공부를 할 때 늘 듣던 말이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입니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못 이룰 일 있습니다. 정신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 정신력에 상응하는 근력과
실력을 함께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벤치 프레스, 역기를 215파운드를 듭니다. 제 아내는
50파운드 들고도 팔이 덜덜 떨립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저와 똑같이 215파운드를 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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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일도 하사불성 하면 그게 들립니까? 기도는 항상 팔다리의 수고와 함께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많이 오해되어져 전해졌기 때문에 이런 속사람의 강건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불편해 하십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강건함, 힘은 요즘 예배당에서
유행처럼 전해지고 있는 그런 힘과는 완전히 다른 힘입니다.
그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힘은 어떤 힘인지, 우리는 어떤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강건함을
받아야 하는지 한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그룹회장 장로님께서 구속이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불법 외화 유출과 온갖


불법 자금 관리 등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친지가 목회자로 있는 교회의
예배당을 지어 기증도 했고, 선교 사역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고, 많은 목사님들에게 장학금을
대주고, 구제 사업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몇 천억,
몇 조원 단위의 돈을 해외로 빼 돌리거나 상환능력이 없는 계열사에 불법 대여를 하는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도 기가 막혔지만 거기에 대응한 한국의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의 모습은 더욱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저마다 일간지에 그 분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고 미국 이민 교회 목사님들까지 나서서 연판장을 돌리고 그 분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수에 따끔한 징계도
하시지만 항상 너그러우신 용서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일련의 사건을 대하면서 교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예수 믿는 사람들도 똑같이
예수를 믿어 복을 받아 저렇게 힘 있고 빽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라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이 그룹 회장의 직분을 가진 장로가
아니었다면 누가 그 사람을 위해 구명 운동을 펼쳤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힘이
과연 그런 힘일까요?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서 교계가 전부 일어나서
구명을 해서 용서를 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감옥에 가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는 그런
것이 정말 기독교가 추구하는 힘입니까?
여러분 혹시 북미주 유학생 수련회, 코스타라는 것을 아십니까? 매년 시카고 휘튼 칼리지를
통째로 빌려서 4-5일간 수련회를 갖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카나다, 남미, 유럽, 일본까지 전
세계를 돌며 수련회를 갖습니다. 거기에 주 강사로 섭외가 되는 분들은 소위 한국에서 뜬
목사님들입니다. 거기에 가 보신 분들에게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그 주 강사님들이 목소리 높여
외치는 대표적인 주제가 뭡니까? “고지를 점령하라”입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그 설교들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뭔가를 결심합니다. 무엇을 결심할까요?
“예수 믿는 자들이 돈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도 올라가고 해서 거기서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내면 세상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런 설교를 듣고 무엇을 결심할까요?
“그래, 힘을 키우자. 강건해 지자. 세상 사람들이 우습게 볼 수 없는 훌륭한 사람이 되자.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통해 많은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겠지요?
정말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실까요? 그럼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공부도 많이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까? 어떤 강사님은 공부도 못하고,
가난하기까지 한 못난 사람들은 겸손의 미덕을 행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근본이 못났는데 어떻게 겸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건 그냥 못났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겸손도 못 떱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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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힘은 “겉 사람의 강건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사람의 강건함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 분들은 기독교를 오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동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위해 사건을
일으키시고 일을 도모하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일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백성다워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제넘게 무슨 일 하려고 하지 마세요.
기독교의 역사를 한번 보세요. 기독교가 세상의 힘을 추구 할 때 여지없이 기독교는 타락을
하지 않았습니까? 박해받던 초대 교회 때, 공산주의 치하에서, 독재자들의 권세 아래서
기독교는 그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박해의 때에 가장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힘이 주어지고 토지가 주어지고 물질이 풍성해 지자 기독교는 망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의 왕까지도 교황이 세웠다 폐위시켰다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던 때에 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는 지경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 추구하는 힘은 하나님이 추구하라고 요구하시는 힘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두 가지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말씀드린 세상 적인 “힘”과 “지혜”입니다. 인간은 타락을 하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무한한 것으로부터 차단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고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선행체계, 지식체계, 그리고 물질주의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한 인간들의 힘과
지혜와는 완전히 반대 개념이 바로 십자가의 도, 속사람의 강건함,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18-3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뒤나미스 떼우 에스틴) 성경이 말하는 힘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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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 적인
겉 사람의 능력이나 힘 같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2:1-5)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밖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10:10)
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표준 새 번역)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별것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도 시원치 않았고 몸도 약골이었고 생긴 것도 보잘 것 없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고 통솔력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서
전부 쫓겨나고 홀대를 당했겠습니까? 그러한 사도 바울이기에 사람들은 그의 족적을 따라 어떤
일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재력이나 힘을 키워 깃발을 높이 들고 나가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십자가의 도와 정 반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힘과 지혜를 우상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고전1:22-23)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구원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는 사람이 와서 일개 로마 지방 관리의 손에
잡혀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율법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명확히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신21:23)더더욱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매 달린 메시야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멸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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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인들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 더 진보되고
발전된 지혜를 자꾸 추구해서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철학이라든지, 동방 정복에서 얻은 물리학, 수학, 의학, 화학 같은 것들을 많이 발전
시켰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지혜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현실 적인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이성적이고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는 사람이 와서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습니다. 헬라철학에서의 신의 속성은
“아파데이아”신은 고통을 감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제1 속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그 십자가를 멸시했겠습니까? 고통과는 관계없는 신이 인간의 고통을 짊어지고 고통을
당했다는 말 자체가 그들에게는 너무 foolish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메시야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세상 부귀영화를 선물해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누구든지 나를
좇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이런 말이나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십자가의 도가 진짜 힘이요, 진짜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보 같은 십자가에 달려서 함께 죽은 바보들이 또 있습니다.
(롬6:6)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도 세상이 바보라고 손가락질했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자기 지혜로 세상을 살겠다고 하는 그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십자가의 원리로 세상을
살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몸은 예배당에 나와 앉아있으면서 여전히 세상이 추구하는 힘과 지혜를 똑같이
추구하고 살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 분은 아직 안 죽은
거지요? 오늘 날 교회라는 곳에서 여전히 힘 있고 돈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대접을 받고,
직분도 받고,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국회의원이나 장군 같은 사람들이 새 신자로 들어오면 온 교회가 술렁술렁합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도 현직 장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분과 함께 교회에 다닌다는 것조차 자랑스러워서
못 견뎌 해요.
저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누가 헌금을 얼마를 하는지를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걸 알게
되면 혹시 저도 사람을 가려 보게 될까봐, 안 봅니다.
교회에서조차 그러한 세상 적인 힘이 그 사람의 경중을 판단하는 판단 기준이 되면 안 되지요.
여러분, 인간이 추구한 지식체계, 선행체계, 물질주의가 정말 사람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얼마간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세상이 되었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힘겨운 세상입니다. 한국의 상위 1%가 전 국토의 60%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 바람직한 인류의 행복의 모습입니까? 상위 1%로는 명품관에 가서
수백만원짜리 사리마다를 사 입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극빈자가 되어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어 목을 매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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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생산되는 곡식만으로도 전 세계가 다 먹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지요? 미국은 전 세계 곡가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엄청난 양의 밀을
태평양 바다에 가져다 버립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자국의
유익을 위해 밀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 힘과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고 행복할 수 있습니까? 내 이익과 내 힘을 조금
포기하고 나누어주면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 아닙니까? “나를 죽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
그게 진짜 힘인 것입니다. 자기 배만 불리고 자기 힘만 추구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요? 그건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인류가 만들어 놓은 가장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가 뭔지 아세요? 공산주의입니다. 공동생산
공동 분배, 계급투쟁, 평등 얼마나 이상적인 개념들입니까? 그 이론대로만 된다면 지상 낙원이
될 텐데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죄인들은 절대 남을 위해 나의 노동력을 사심 없이 제공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탈북자 1호인 이민복씨가 LA에 왔을 때 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의 옥수수 종자는 남한의 옥수수 종자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겁니다.
유휴농지도 많습니다. 노동력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식량이 부족하냐고 했더니
사람들이 일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두 자기 것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할당된 분량만 겨우 채우면 이내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이지요. 계급투쟁을 해서 계급을
없애겠다던 공산당 혁명에 참여한 자들이 혁명에 성공하자 무엇을 하던가요? 자기들이 그 상위
계급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도 소수의 당 간부들을 위한 엉터리 이데올로기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죄 된 속성은 절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 합니다. 인간을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풀어서 남을 살찌우는 삶, 주고, 주고 주다가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주어버리는 십자가의 도, 그것이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인간들이
머리를 짜내고 짜내서 만들어 낸 최고의 지혜라는 것을 무색하게 하는 진짜 지혜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은 진짜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강건함. 세상을 뒤집어 버리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하지 못 하면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삶입니다. 어떻게 나의 것을
희생해서 남을 살찌웁니까? 어떻게 피 같은 돈을 남을 위해 씁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인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그러한 진짜 힘을 키워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기도하실 때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다른 자녀들보다
더 뛰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요행히 부자가 되기를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남과의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의 출세를 위해 교회는 빼
먹을지언정 학교에서는 무조건 일등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진정으로 아이의 복을 비는 부모가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는 자기 존재의 확장인
아이에게 자기의 욕심을 채워 달라고 요구하는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성경은 진짜 복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렇게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마5:3-12)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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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고, 져 주고, 당하면서 애통해 하고,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조차 남을 위해
포기하는 온유함을 발휘하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늘 잊지 않고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
입기를 힘쓰며, 남을 긍휼히 여겨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며, 자기 것을 챙기느라 전쟁과 다툼을
일삼는 자들과는 달리 자기 것을 나누어주며 오히려 평화를 만들어 내는 화평케 하는 자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진짜 복이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자들이 진짜 강한 사람이요, 진짜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가 힘드니까 늘 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LA 지역에 있는 커다란 한국 교회들이 또 다툼이 일어나서 많이 들
갈라졌습니다. 수 천만 불짜리 예배당 지어놓고 미국 교단한테 다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미국
교단에서 그거 빼앗아 가면 다시 한국 교회에게 줄 것 같습니까? 오늘 낮에 오레곤에 있는
선배하고 통화를 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랍니다. 오레곤에 있는 큰 한인 교회가 재산 싸움과
세력 다툼으로 거의 지리멸렬하게 되어서 20여명도 안 남았답니다. 다 무엇 때문에 생긴
일인지 아세요?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잘못된 신앙에서 생기는 일입니다.
(삼하12:8)
8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 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나라도 너에게 맡겼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여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나무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윗이 여자를 탐한 것에 대해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성적인 꾸지람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더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무엇을 나무라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힘으로 살지 않고 자기 힘을 믿고 그 힘을 오용했느냐“에 대한 꾸지람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를 계발하여 우리를 살찌우고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을 자꾸 비우고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고후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러분은 그 힘을 키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로 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매달려
기도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르키코스”에서 머무시면 안 됩니다.
“프뉴마티코스”로 성숙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로 있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사악한 죄악의 뿌리’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맞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계속 어린아이로 있으면서 누군가에게 care를 받고 싶어 합니다.
이상하게 세상에서 누가 자기를 어린아이 취급하면 “이게 누굴 어린애로 알아?” 이렇게 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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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서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목사님 젖 주세요.” 이렇게 어린아이가 됩니다.
감기가 들었는데 왜 목사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까? 감기가 들었으면 의사를
찾아 가셔야지요. 밥 먹을 때도 꼭 목사보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목사가 기도하면 밥맛이 더
나십니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속사람의 강건함을 입어 자기가 싸워야 할 싸움’을 목사가
대신 싸워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목사한테 자기를 투영시켜놓고 목사가 잘하면 자기가 잘하는
줄로 착각하고 목사가 못하면 금방 죽일 놈, 살릴 놈 합니다. 왠 줄 아세요? 자기를 거기에
투영시켜 놓았으니까? 예전에 저희 집사람하고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는데 우리 선수가
헛발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사람 얘기를 들어보니까 제가 저도 모르게 “저걸 다리라고
달고 다니냐?”그랬답니다. 자기가 들어가면 5분도 못 뛸 거면서 남 경기 시켜 놓고 욕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신앙인인 것입니다.
연고전을 보면 연대와 고대와의 경기가 아니라, 정작 싸워야 할 연 고대 학생들은 관중석에
앉아서 소리만 지르고 있고 돈 주고 사온 용병들이 경기장에서 싸우지요? 연 고대 농구선수
축구선수 배구선수 누구하나 제대로 공부해서 들어 온 사람들 있습니까? 전부 사 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는 그들이 이기면 마치 자기가 이긴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건 코미디입니다.
그런 코미디 같은 신앙에서 이제는 벗어나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하나님 제가 가서
대신 싸우겠습니다가 아닌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셔서 그들이 싸우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지 아시겠지요?
여러분도 속사람의 강건함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넉넉히 십자가의 도로 십자가의 원리로
세상을 살아가실 수 있는 실력을 키우세요. 성숙하십시오. 자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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