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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수풍댐 건설

The construction of the supung-dam in Manchukoku

히로세 貞三 *広瀬貞三*

목차

시작하기

1 · 만주국의 압록강 개발 계획  
(1) 압록강 개발 계획의 진전
(2) "선만一如"와 압록강 개발  
(3) 수풍댐 시공 체제의 정비

2 · 침수 지역과 만주국 주민의 이주

 (1) 안동성공서 경찰서에 의한 용지 매수


 (2) 수몰 지역 주민의 이주
 (3) 잔류 주민에 압력

3 · 노동자의 대량 동원과 현장의 노동 · 생활

 (1) 대규모 인력 동원
 (2) 현장의 경비
 (3) 현장에서의 노동과 생활

결론
시작하기

수풍댐은 1937년부터 44년 (41년 일부 발전 시작)에 걸쳐 조선


총독부 (이하 총독부라 한다)와 괴뢰"만주국"(원래는 괄호를 첨부해
야하지만, 복잡하게 되기 때문에 다음에서는 생략한다.)정부가 공동
으로 당시의 '국제 하천'인 압록강에 건설한 대규모 댐이다. 실제로는
후술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의 국책 의해 건설된 것이다. 수풍댐은 중
력식 콘크리트 댐으로 높이 166.4m, 길이 899.5m, 제체적 311만㎡
로 당시 세계 최대급이었다. 수풍댐으로 막은 강물을 조선쪽에 설치
한 수풍발전소로 인도하여 최대 출력 70만KW(실제에는 60만KW에
그친다)를 얻으려고 했다.

지금까지 수풍댐 건설은 일본의 조선 지배에 성공한 거대 개발의


한 사례로 자리 매김되어 왔다.(1)지만 개발의 배후에 있는 지역사
회로의 영향은 어느 정도 등한시되어왔다. 나는 수풍댐 건설의 전체
상을 재구성하기 위해, 수몰지와 이주문제, 압록강의 뗏목문제, 댐
건설의 과정 등을 밝혀왔다.(2) 그러나 수풍댐이 조선측의 백본질소
계 기업에 의해 건설, 운영되고 총독부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주로
조선근대사 연구의 범강수로 불려왔다.
만주국사에 있어서도 수풍댐 건설이 일본에 의한 만주국 지배의 "
성과"로서 말해지는 것뿐(3), 만주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련됐는
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수풍댐 건설이 총독부와 만주국의 공동
사업이었던 이상, 그 전체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이 수풍댐
건설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만주국에서
의 수풍댐 건설 계획이 어떻게 제의되었으며 총독부와의 관계가 어
떠했는가이다. 두 번째는 만주국이 수몰 예정지 주민에게 어떤 대응
을 했는가, 용지 매수와 "북만"이주의 경과를 분명히 한다. 셋째로는
수풍댐 건설에 동원된 근로자들이 어떻게 모이고 어떤 근로조건이
있었느냐이다.
1장 만주국의 압록강 개발 계획

(1) 압록강 개발계획의 진전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동청철도의 남반부를 손에 넣자 1906년


11월 동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로 약함)를 수립했다. 만철은 압
록강 수리자원에 주목하여 16, 17년 두 차례 압록강 조사대를 보냈
다. 만철은 이후 각 지역의 수력자원 조사를 진행하여 21년에 '만주
의 수력자원'을 간행했다.(4)
31년 9월 18일 일본은 유조호 사건으로 인해 중국 동북부 침략을
개시했다. 군사적 승리로 인해 동북 3성은 일본군의 손에 완전하게
장악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압록강 좌안 뿐만 아니라 우안(만주국 쪽)까지 지
배하게 된 것이다. 만주국 정부는 전력 개발을 위해 34년 10월 많은
전기회사를 통합해, 만주전업주식회사(자본금 6000만엔(이하, 만주
전업으로 약함)를 설립했다.(5)
34년 12월에 미나미지로가 관동군 사령관 겸 주만 특명 전권 대
사, 관동 장관에 부임했다. 미나미(南)는 부임에 앞서 '대만정책수행
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고, '일만경제회의(위원)'의 설치를 요구했다.
35년 7월에 일본과 만주국은 "일만경제공동위원회 설치에 관한 협정
"을 맺고, "일만 경제 공동 위원회"를 설치했다.(6)
 만주 국내에서 실업부 임시산업조사국과 국도국이 장기적인 수력
조사에 나섰다. 또 만철 계획부도 비교적 일찍부터 수력전원의 기초
조사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한층 강화했다. 역시, 만주
전업도 사내에 기획국을 마련해 전원 조사와 개발 계획의 입안을 실
시하고 있었다.(7) 아베는 수력전원조사반의 주임자로 제2송화강 태
자하, 요하, 압록강 太子河、遼河、鴨緑江 등 수원지 조사를 벌였다.
아베는 상사인 실업부 광공사장鉱工司長 시나 에쓰 사부로椎名悦三
郎, 또 산업부 차장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강한 신뢰를 얻고 있었다.
또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 지로, 참모장 이다가키 세이시로도 무조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는 만주국내의 전원개발을 맡기
는 인물은 조선질소의 노구치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주국 요인에게 진언했다고 한다.(8)
35년 11월 만주국과 총독부는 압록강 공동개발을 둘러싼 1차 협상
을 은밀히 시작했다.압록강 개발에 관심을 가진 만주국은 1936년 3
월과 6월 본격적인 압록강 수력조사를 실시했다. 실업부, 만철, 만주
전업의 3자 합동으로 압록강 본류와 지류담강을 상세히 조사했
다.(10) 만주국에서는 36년 9월의 탕간자회의湯簡子会議에서 관동
군, 만철경제조사회, 일만 재정경제연구회의 경제계획안이 검토되었
다. 중공업화를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육군성 군무과는 36년 12월 "
이 중에서는, 철강·석탄과 함께 전력업과 전력 다소비 산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초 계획은, 36년말의 생산 능력으로서 철
강, 철광석, 석탄, 액화 연료, 알루미늄, 마그네슈움등의 목표치를 정
해 놓고 덤으로 전력업도 400만KW라고 하는 거대한 전력이 필요하
게 되었다. 5개년 계획은 만주국에 있어서의 전력 산업의 본연의 자
세에 큰 변화를 일으켜, 수력 발전의 개발의 계기가 되었다.(11)
만주 국내의 수력 발전소 공사를 추진하기 위해 만주국은 37년 4
월 국무원에 수력 전기 건설국(초대 국장 나오키 린타로, 2대 혼마
토쿠오)을 설치했다. 수력전기건설국은 하천종합개발을 구체화하고
제2송화강, 목단강, 택강 第二松花江、牡丹江、澤江의 개발을 추진했
다. 첫 번째 목표는 제2송화강 풍만댐 풍만발전소 건설이었다. 풍만
댐은 수력전기건설국 직영으로 1937년 11월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풍만댐은 중력식 콘크리트 댐으로 높이 91m, 길이 1110m, 댐제 체
적 220만m2, 풍만발전소는 70만KW이다. 수몰지역은 150km2, 수몰
호수는 8400채라는 장대한 규모이다.(12)
만주국은 급료 대규모 전원개발이 필요함에 따라 압록강 전원개발
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아베의 제언을 받아 관동군, 실업부에서 검
토한 결과, 그 실현을 조선의 노구치 준에 맡기게 되었다고 생각된
다. 36년 여름 무렵 관동군에서 조선군을 통해 조선질소의 노구치
준에 대해 송화강 수력개발을 위해 장진강 수전 구보타 유타카 상무
를 만주로 보내도록 했다. 노구치는 "이것은 압록강 개발의 하상담에
도 좋은 기회다"라고 생각해 쿠보타를 신쿄에 보냈다. 쿠보타는 사전
에 우가키 카즈나리 총독에도 압록강 개발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쿠보타는 관동군의 이타가키 참모장이나 만주국 정부 요인을 만나,
마츠하나에 이외에도 압록강 개발의 설명을 했다. 이 후, 노구가 직
접 신경에 가서, 만주국측과 이야기를 붙였다고 한다.(13)
원래 조선측에서도 조선질소 야구를 중심으로 새로운 수력 개발로
압록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질소는 조선 내 수력 개발을 위
해 26년 조선수전을 설립하고 부전강 개발을 했다. 이어 33년 장진
강 수전을 설립해 장진강 개발을 추진했다. 노구치, 쿠보타가 차례로
눈을 돌린 것이 압록강이었다. 34년 2월, 나가쓰에 수전의 쿠보타는
조선군 사령관 코이소 쿠니아키를 방문해 압록강 개발을 의뢰했
다.(14)
우가키 총독은 총독부와 만주국에 의한 압록강 공동 개발의 제1회
교섭 직전인 35년 10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은 실로 지
금은 시처를 얻고 있다. (중략) 입장은 대륙의 선창이며 일만불가분
관계日満不可分関係를 기준으로 한 범위에서는 그 심장부에 상당하
고 있다.“(15) 조선의 전력사업과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던 우가키
총독은 압록강 개발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2) 선만일여와 압록강 개발


만주국, 총독부, 장진강 수전이 추진하고 있던 압록강 개발 계획이
한층 더 실현에 가까워진 것은, 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 지
로가 우가키 총독의 뒤를 이어 제7대 조선 총독으로 취임했다. 총독
부의 수뇌와 오노 료이치로 정무 총감, 시오바라 토키사부로 비서관
(후에 학무국장)은 모두 만주국에서 각각, 관동군 최대 고문· 관동국
총장, 관동장관비서관, 만주국총무처인사처장을 지낸 바 있다. 이 만
주 트리오가 선만일여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36년 9월 총독부와 만주국은 압록강의 첫 공동조사를 했다. 조선
측은 총독부, 장진강 수전 관계자, 만주국측은 실업부, 국도국, 만주
전업 관련자로 모두 일본인 기사이다. 이들은 압록강의 최상류 혜산
진에서 하류의 의주까지 배로 내려 각 보제 예정지를 시찰하고 조사
했다. 조선측은 보제지로 수풍을 추수한 반면 만주 측은 청수 벽동
청원 青水、碧滝、清原 등 3곳을 추천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출
력이 크고, 비교적 편리하고 공사가 용이한 수풍을 제1의 건설 지점
으로 하기로 결정했다.(16)
36년 10월 조선에서 '조선산업경제조사회'가 개최되어 조선의 공
업화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는 일본, 만주
국, 관동군, 만철, 조선 등으로부터 50명의 경제인이 모였다. 미나미
총독은 마쓰오카 요오만테쓰 총재와 '선만경제 협력에 관한 모든 문
제'를 논의하였다.
36년 10월 29일, 미나미 총독은 만주국 도문의 일본 영사관에서
후임의 우에다 카마요시 관동군 사령관을 만나 1."선만일여"의 구현
방법, 2.조선·만주 산업 강화 3.국방과 치안, 특히 비적토벌안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동시에 도조 히데키 간토군 헌병사령관과 미하
시 고이치로 총독부 경무국장이 국경경비(비적토벌)와 밀수 방지에
관해 회담을 가졌다. 이에 따라 국경의 항일 무장세력에 대한 공동작
전이 개시된다.
36년 11월, 마쓰오카 미츠노리 총재는 남총독을 방문해 1북철 이
양, 2압록강수전 계획, 3이민 정책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17)
이와 같이 압록강 개발은 "선만일여"의 상징으로서 급속히 실현되
기 시작했다. 36년 12월 압록강 도문강 가교에 관한 협정이 총독부,
만주국 간에 조인됐다. 이는 양국이 앞으로 7년간 압록강, 도문강에
14교를 설치한다는 장대한 계획이었다. 14개교 중 조선 측이 6개교
(압록강 4, 두만강 2), 만주국 측이 8개 교(압록강 4, 두만강 4)을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완성되면 조선·만주국간의 교통·경제 등
은 한층 긴밀해질 것으로 예상됐다.(18)
 37년 1월 총독부와 만주국간에 '선만압록강 공동조종술위원회'(이
하, '공동기술위원회'로 약함) 설치에 관한 각서가 조인되었다. 총독
부 내무국과 만주국 교통부가 각각의 주무국이 되어, 압록강의 하천
조사·측량·항로의 개설·유지·개량 등의 사업을 공동으로 실시하는 것
이었다. 37년 4월이면 총독부와 만주국 정부 요인들이 상호 방문을
하면서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4월 15일에 만주국 궁내부 대신 희
지가 조선을 방문해 미나미 총독과 회견한다. 4월 20일에 마츠오카
미츠노리 총재는 다시, 조선을 방문해 남총독과 회견한다. 4월 21일
만주국 국무총리 장경혜 張景恵가 조선을 방문해 미나미 총독과 만
난다.(19)
 37년 4월 미나미 총독은 새로운 조선 통치의 방침으로 '국체명징
', '선만일여', '교학작진', '농공 병진', '서정쇄신'과 소위 '오대정강'을
발표했다. 남쪽은 '선만일여'에 관하여, '일장일체필연의 내용으로서
선만일체의 성립이 반드시 필요'라고 한다. (중략) 지금은 압[록강]
두[만강] 두 강은 이를 국경이라기보다 오히려 선만을 형제이여의
정의로 이어가는 친화적 유대라고까지 명언하고 있다. 이러한 남 총
독의 의도는 "만주국과의 협력을 진행시켜 선만 국경을 사실상 철폐
해 경제적으로 일체화하려는 기둥"(20) 이었다고 여겨진다. 남측의 "
선만일여" 정책에 대해서, "당초 중앙에 있어서 편견, 또는 오해로부
터 여러 가지 논의되었다"(21)라고 한다. 아마도 남쪽이 관동군, 조
선군을 중심으로 조선과 만주국의 경제적, 군사적 일체화를 구상하고
있다고 의심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37년 8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최근 미나미 조선 총독과 우에다 관동군
사령관 모두에서 북지에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 운동의 건백서가
나왔다. 물론 이런 것을 채택할 필요는 없지만, 일종의 도각 운동의
전제로도 더욱 흐뭇하게 느껴진다"(22)고 말해 총독부와 관동군의
제휴한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압록강 개발을 둘러싸고, 총독부와 만주국은 35년 11월의 제1차
교섭 이래, 신경, 경성에서 "상호 관계 당국자 가회동시", 간담, 절충,
협의를 실시한 결과, 37년 4월의 제 5회 교섭에서 "상당한 곡절을
거쳐 구체적 계획 2부에 양자의 의견 일치"의 것이다. 압록강 전원개
발에 관한 원안은 사전에 각 기관에 타진됐다. 총독부는 탁무성, 외
무성 등 관계 중앙부에 따라 양해를 얻었다.또, 만주국은 육군성, 대
만 사무국 対満事務局 등의 승낙을 얻고 있었다.(23)
이 결과, 37년 8월 총독부와 만주국은 압록강 개발에 관한 두 개
의 문서를 조인했다. 하나는, 총독부의 체신국장, 재무국장과 만주국
산업부 차장, 경제부 차장 사이에 "압록강급도문강발전사업상호시행
각서실시건조양해사항"을 조인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 두 강의 전원개발에 관하여 일본국은 조선압록강수전에, 만주국
은 만주압록강수전에 공동경영을 허가한다.
2) 공동으로 수력을 개발한다.
3) 자본금은 반반해서 쌍방에서 낸다.
4) 허가기간은 35년으로 한다.
5) 전력은 양 지역에 절반으로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수풍댐 건설은 만주국과 총독부의 공동 사업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총력을 든 일대 개발 계획이었던 것이다.(24)

3) 수풍댐 시공체제 정비

압록강 개발의 구체적인 계획은 37년 1월 총독부와 만주국문에 설


치된 공동기술위원회에서 검토됐다. 특히, 수풍 저수지 마감, 수풍
댐 공사의 실시 설계 등을 협의했다. 댐 공사는 38년 8월 기술위원
회가 설립된 후 이 결의사항이 승인됐다. 만주국측의 위원장과, 토목
국 제2공무처장 하라구치 츄지로(原口忠次郎)였다. 공동기술위원회
회의에서 하라구치는 두 가지를 제창했다. 첫번째로 수풍 댐의 블록
시공에 관해 압록강 수전은 조기 발전을 위해 우선 수압을 견디는
최소한의 단면에서 계단상으로 쌓아 올려 그 후 발전하면서 이 단면
에 콘크리트를 얹는 공법을 제안했지만, 하라구치는 댐의 스트레스가
일체가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둘째는 압록강 본류에 7곳의 댐을
건설하면 인공홍수를 유발할 우려가 있으므로 댐 상호문의 방수량과
방수시상과의 관련성을 충분히 연구할 것을 제안했다.(25)
 37년 8월 수풍댐을 담당하는 회사로서 조선압록강수력전기주식회
사, 만주압록강수력전기주식회사(사장 초대 노구치준, 2대 구보타 유
타카)가 설립되었다. 양 회사의 자본은 각각 5000만엔으로, 합계 1
억엔이다. 자본금 출자는 만주국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수전 조선송
전 등 4개사다. 사장에는 노구치, 상무 이사에는 쿠보타, 陳吾(만주
국 수상)가 취임했다. 양 회사는 별개의 법인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로는 임원·종업원 등은 공통으로, 노구치 준등이 쌍방의 사장·이사를
맡은 것처럼 하나의 회사였다.(26)
수풍발전소 건설은 압록강 유역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37
년 5월 총독부는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각 국장 등을 위원으
로 하는 조선총독부 압록강수력발전개발위원회(이하 “개발위원회”라
한다.)(오오노 료이치로 위원장)을 설치하였다. 또한 기술적인 지도
를 받기 위해 일본에서 최고의 기술자를 모으고, 38년 8월 압록강
보제기술위원회를 설치했다. 초대 위원장은 전 내무 기감 나카가와
요시조(세계보제회의 일본부 회장)가 취임해, 후에 원내무기 감 다니
구치 사부로가 제2대 위원장이 되었다(이하, "기술 위원회"라고 한
다) 만주국에서는, 나오키 린타로(교통부), 하라구치 츄지로( 동),
혼마 토쿠오(수력 교통부), 타카노 무네히사(산업부)가 임석했다. 거
대한 공사수주를 목표로 만주토목건축업협회 이사장이자 사카키다니
구미 단장 사카키야 센지로는 총독부, 노구치 준에게 압록강 수력 공
사의 출자는 만주와 조선이 절반씩 감당하고 공사는 양국의 건설회
사를 지명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노구치는 "사라와케(白分)쪽에는
지정 청부인, 하자마(間)구미, 니시마츠(西松)구미, 마츠모토(松本)
구미의 3개조가 있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되므로, 압록강 공
사는 이 3개조로 한다"(주)고 거절했다. 최종적으로, 일본 질소의 공
사를 일관해서 수주해 온, 하자마 구미, 니시마츠 구미, 마츠모토 구
미가 특명으로 수주했다. 공사는 수풍댐으로 양분됐고, 조선 측은 하
자마 구미, 만주 측은 니시마츠 구미가 맡았다. 댐 건설 이외의 부대
공사는 주로 만주측(류벌설비流筏設備, 압북철도鴨北鉄道) 니시마츠
구미, 조선측(수풍발전소, 평북철견平北鉄遣)을 하자마 구미가 담당
했다.(29)
만주국측을 담당한 니시마츠 구미(사장 林米七)는 14년 창업 이래
조선질소가 조선 내에서 진행한 전원개발(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赴
戦江、長津江、虚川江)을 하자마 구미와 함께 하고 있다. 니시마츠
구미는 37년 9월 압록강 보제공사 사무소(鴨緑江堰堤工事事務所만주
국 안동성)를 두었다. 소장은 초대 코바시 아사오小橋朝雄, 2대 고바
야시 광진小林光鎮이다. 이후 공사 확대로 순차적으로 4개 출장소
(신의주, 구령포, 장순하구, 라고초 新義州、九寧浦、長旬河口、拉古
哨)를 설치했다. 공사 최성기에는 니시마츠 구미의 사원은 80명을
넘어 전 사원의 1할을 넘는 등, 니시마츠 구미에 있어서 전전 최대
의 토목 공사였다.(30)
예하로서 공사에 임한 것은, 이오시타 마사요시(토공), 나리사와
요시야(토공), 미야자키 호카쿠(토공), 미야자키 신이치(토공), 이오
시타 에이노스케(토공), 나카조노신키치(목공), 카이카메키(운송),
아라이만래(운송) 등이다.
配下として工事にあたったのは、庵下政吉(土工・鳶)、成澤吉彌
(土工)、宮崎好鶴(土工)、宮崎新一(土工)、庵下栄之助(土
工)、中園新吉(木工)、甲斐亀喜(運送)、新井晩来(運送)など
である。(31)
2장, 수몰지와 만주국 주민의 이주

1) 안동성 공서의 용지 매입

수풍댐이 완공되면서 조선 만주국 쌍방 각각 3000만평씩 총 6000


여만평(약198km2)의 수몰지가 생기고, 수몰호수는 1만5000여가구,
수몰지 주민은 7만여명이다. 38년 7월의 시점에서 조선 쪽 수몰지는
평안 북방의 삭주 창성 벽도 초산 윤원 등 5개 군에 걸쳐 있으며,
침수 면적은 3212만1212평(약 106km2). 수몰호수는 5106채, 수몰
지 주민은 3만2780명이었다.(32) 만주쪽 수몰지는 안동성 관전현과
환런현 일부로 약 300만평, 수몰호수 5800여가구, 수몰지 주민 4만
여명으로 추정됐다. 수몰 지역은, 안동성 관전현의 영순마을, 석계자
마을 등이다.(33)
 안동성은 만주국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이전의 봉천성에 속한 11
개 현에 의해 구성되어 압록강 우안을 따라 가늘게 전개된다. 이 지
대는 "동변도"라 불리운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39년 7월 통화
성 신설에 따라 5개 현이 할양되고 같은 해 12월 안동시가 탄생하면
서 1개 시 5개 현이 됐다. 관전현은 거의 평야가 없었고 콩, 팥, 쌀,
포미, 고량 등을 재배했으며, 조선인 농민에 의해 벼가 다소 경작되
고 있었다. 환인현은 산이 많고 고량, 콩, 쌀 등이 특산물이다.(34)
압록강수전의 조선측에서는 평안북도청과 협력해 보상문제를 진행시
킨 것에 대해, 만주국에 대해서는 만주국에 대해 보상을 총액으로 일
괄해 맡겼다.(35) 37년 10월, 수풍댐 건설 공사는 만주국 주민의 의
향을 아무런 물지 않고 급료에 시작되었다. 38년 3월 안동성 공서는
"조사위 조개회"를 개최해, 4월 초순부터 현장 조사를 실시하기로 결
정했다. 수몰지 주민에 대해서는 압록강 수전 보상뿐 아니라 만주국
에서도 이주비용과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36)
안동성 공서는 38년 3월부터 경비 18만엔으로, 수몰지의 실정 조
사를 개시했다. 안동성 공서는 ‘토지건물조사반’, ‘선전선무반’, ‘주민
처리반’ 등 3개 반을 두었다. 토지건물조사반은 안동성 공서의 토지
계 최근우 백용득 등 수십 명이 맡았다. 이들은 38년 5월 25일 안동
현에서 수몰지인 관전현으로 출발하였다. 토지건물조사반은 사무실을
포석동에 두고 실태를 조사했다. 6월 1일에는 다른 2개 반도 안동
현에서 현지로 출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선전선무반은 수몰
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영화로 선전할 예정이었다.(37)
안동성 공서는 38년 4월부터 12월까지 수몰지 주민의 신고를 기초
로 제1회 사정을 했다. 1차 사정 결과는 수몰지역은 7만8000여 정
보(약 77만4540m2) 토지가옥 보상비이주비는 500여만 엔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각 방면의 불만이 터져, 이절 백지화해서 재조사를 하
기로 했다.(38) 
38년 8월, 안동성 공서는 수몰지구처리간사회에서 아래와 같은 선
무요령을 결정, ‘압록강 수전공사에 관한 수몰지구 현 주민에게 고
함’이라는 팸플릿을 수몰지 주민에게 배포하고 선무공작에 나섰다.

"1· 농민에게 수전공사는 근대 산업상 중요한 것임을 인식시키는


것. 
2· 이전 시 휴대불능한 부동산에 대해서는 촌장협의 하에서 적당히
보상해야 한다.
3· 이동에 필요로 하는 일체의 비용은 전부 지급하는 것.
4· 노동자로서 극력전환을 시키는 것. 
5. 수전공사 완공 후에는 공장에 수몰지 주민들을 우선 취업시키는
것.“

이 시점에서 안동성 공서는, 만주측의 수몰호수는 1만여호, 수몰지


주민은 5만명이라고 추정했다.
당초에는 수몰지 주민 5만명을 모두 이주시킬 계획으로, 38년에
약 5천명, 39년에 약 2만명, 40년에 나머지 2만 5000명으로 예정하
고 있었다.(39) 
안동성 공서는 39년 9월, "협화회 수몰지 주민 선무 본부協和会水
没地住民宣撫本部"(총지휘·최활崔活)를 관전현 소포석하구小浦石河口
에 두어, 현지에서 선무 준비 공작을 실시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선무 본부는 관전현내의 수몰 6촌
(영순촌·포석하촌·배추지촌·석계자촌·대청순촌·하루하촌 永旬村・浦石
河村・白菜地村・石桂子村・大青旬村・下漏河村)에 "수몰지 주민 변
사처水没地住民弁事処"특히 수몰호수가 700채가 넘는 백채지촌, 석
계자촌白菜地村、石桂子村 2개 마을에는 조선인지도원 2명을 각각
주재했다. 이는 이 지역에 조선인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무본부
에서 1개 간 40년 4, 5월까지 전수몰 지역공작을 종료할 예정이었
다.(40)
만주측의 보상기준이 언제 정해져 그것이 조선측의 그것과 같았는
지, 틀렸는지는 불명확하다. 어쨌든, 39년 9월까지 기준이 작성되었
다고 생각된다. 안동성 공서는 39년 10월부터 12월까지 수몰 예정지
의 제2회 사정을 행해, 그 결과를 40년 2월에 발표했다. 이것에 의
하면, 수몰 지역은 8만 1000 정보( 약 80만 4330 m2), 수몰 호수
5860호, 수몰 주민 3만, 9000명, 토지가옥 보상비·이주비 610만엔이
다. 제1회 토지사정과 비교해서 수몰지역은 3000정보, 수몰호수와
수몰지 주민은 약간 증가했고, 토지가옥 보상비·이주비는 110만 엔
씩 각각 증가했다. 토지 가옥보상비·이주비 610만 엔 가운데, 460만
엔은 토지 가옥의 보상금으로, 150만 엔은 이주비에 충당하기로 했
다. 2차 사정에서 늘어난 땅은 대부분 부다지浮多地나 미신고지였다.
2차 사정에서는 신고를 적정하게 하기 위해 연좌신고제를 도입했
다.(41)

(2) 수몰지 주민의 이주


안동성 공서는 40년 2월, 수몰호를 만주 국내의 "북만"으로 이주할
방침을 최종 결정했다. 수몰 5860채 가운데, 이주호수는 2750호
(46·9%)다. 이 중 2400호(이주 호수의 87·2%)는 빈강성浜江省의
오상, 주하, 연수, 목란 五常、葦河、珠河、延寿、木蘭 등 5현으로,
300호(동22·8%)는 지린 성의 건안, 장령 양현으로, 각각 이주하게
되었다 잔류자도 40년4월까지 모두 옮겨가고, 또 수몰지내 조선인
중에서 '북만' 이주민을 원하지 않는 300호는 인근 광산에서 갱부로
알선해주기로 했다.(42)
만주국측의 수몰 지역 주민은, 제2회 사정 결과가 공표되기 이전의
39년 11월부터 임시 열차로 "북만"의 빈강성, 지린성으로 이주를 개
시했다. 만주국측이 예정한 이주호수 2750호 가운데 2600호에 관한
자료가 표 1이다.

月   日 地 名 戸 数 人 数


11月10日、13日、16日、19日  浜江省葦
600戸 3900名
河県朝屯
11月22日、
浜江省珠河県大猪園 300戸 1950名
25日
11月28日 浜江省延寿県桃山秋皮屯 200戸 1300名
12月1日 浜江省延寿県 200戸 1400戸(朝鮮人のみ)
12月4日 吉林省乾安県 150戸 975名
12月7日 吉林省長春県 150戸 975名
12月10日、
浜江省五常県沙子河 500戸 2250名
13日、16日
5月1日 浜江省木蘭県葉古屯 100戸 650名
5月4日、8
浜江省木蘭県 400戸 2600名
日、12日
合   計 2600戸 16000名

表1・満州側水没地住民の移住先(1939年11月~1940年5月)

표 1의 수를 성별로 보면, 빈강성은 2300호(88·5%)와 1만 4050


명(87·8%), 지린성은 300채(11·5%), 1950명(12·2%)이 된다. 만주
쪽 수몰지 농민은 먼저 마차로 안동현의 영순 숙소에 모였고 여기서
소형차로 안동까지 갔고, 철도로 만주국 오지로 옮겨졌다.(43) 이러
한 이주민은 빈강성 공서의 경우, 개척청이 수락을 실시했다. 빈강성
공서에서는 39년 11월 이래, 약 1700호를 성내의 5현(오상, 위하,
주하, 연수, 목관木関)에 할당해, 이주시켜 왔다. 그런데 40년 1월
20일에 위하현에의 이주민 157명이 돌연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빈강
성 공서는 사전에 연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민 수송 사상 유
증유"의 사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급료, 역전의 복순잔(福順桟) 에
전원을 수용했다.(44)

(3) 잔류주민으로의 압력

만주국은 39년 11월부터 일부 수몰지 주민의 이주를 개시, 그러나


수몰지 주민들의 반대는 뿌리 깊었던 것 같고, 40년 2월의 시점에서
도 현지에 "4할 이내의 자작농 이상층의 주민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토지가옥문제와 채무정리문제로 어쩔 수 없이 체재하지 않을 수 없
는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45)
북만 기차에 의한 이주가 본격화되면 안동성 공서와 압록강 수전
은 수몰지 주민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보였다. 40년 3월, 압록강수
전은 수몰지 전답의 파종을 절대 금지할 방침이며, 금년에 침수되지
않는 잔답에 대해서도 작농을 절대 허가하지 않을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주하지 못하고 현지에 머무는 농민과 수몰지 인근 주민들은
더욱 곤궁해졌다.(46) 게다가 압록강수전은 수몰 예정 지역내에 있
는 가옥 약 1만호의 매각 처분을 개시했다. 매각가격은 압록강수전
이 구입한 가격의 약 2할이며, 40년도의 결빙기까지 매각할 수 없는
가옥 건물은 그대로다. 이 때문에, "아직도 이주하지 못하는 주민은
사용하고 있는 집이 망가지는 것은 아닌가" 초초해하고 있었다.(47)
이러한 실력 행사를 배경으로, 40년 2월 호리우치 안동성 차장은
관전현내의 수몰 지역에 가, 현지 주민과 수담회를 가졌다. 이 시점
에서 조선인 약600호가 이주에 반대해 현지에 머물면서 호리우치 차
장은 토지대금과 보상금은 즉시 현금으로 지불하고 4월까지 지불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현지 주민에게 말했다. 40년4월에는 압록강수부
수몰예정지의 가옥과 임야와 총립목을 벌채, 매각처분으로 하기로 했
다. 며칠 후부터 하루 300명의 인부를 쓰며 이곳, 작업을 시작할 예
정이었다.(49)
같은 해 5월 초순이 되어도 안동성 공서의 알선에 의한 만주 국내
의 이주를 따르지 않고 현지에 머무르는 조선인은 "수백호"에 이르
렀다. 이중 34채는 북만 이주를 희망했지만 이송 시기가 늦어지면서
다른 방안을 취하게 됐다. 그러나 안둥성 공서는 "아직 남아 있는 2,
3백호는 즉시 스스로 철거할 것을 희망해, 만약 국책을 인식하지 않
고, 철퇴기가 가까워도 이주를 하지 않을 경우는 단호 온화주의를 버
리고, 강제 철거를 단행할 방책"(50)이라고 밝혔다.
40년 5월 1일자로 압록강 수전은 수몰 예정지에 남는 170여호, 약
600명에 대해, 5월 17일까지의 기한부로 "철거령"을 냈다.600여 명
의 주민은 짧은 시한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고, 남아
있는 주민들은 사측과 경찰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해 향후 선후책을
강구 중이었다.(51)
 이처럼 수몰 예정지에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주는 만주국과 압록
강 수전이 당초 예정했던 것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40년12
월의 시점에서, 수몰지호수는 5860호, 수몰지 인원은 39000명이다.
이 가운데 이미 이주한 곳은 1312채(224%) 14505명(37.2%)에 불
과했다. 현지에는 아직 3548채(77.6%), 24945명(62.8%)이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압록강 수전으로부터 이미 이주 비용을 지급
받았지만 끝내 현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동성 공서의 수
몰지 주민처리위원회는 2040년 12월 7일을 끝으로 해산했다. 이로
인해 행정 레벨에서의 만주국의 주민 이전 문제는 종료한 것이
다.(52)
수풍댐의 완성에 의해 담수가 시작되어, 41년 8월 26일에 종료되
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주가 실시되었다. 만주국은 39년에 관전
현의 수몰호 86호를 흑하성 손하현 黒河省遜河県에 이주시켰는데,
그 "성적이 우량하다" 때문에, 42년 3월에 관전현의 100호를 같은
지역에 이주시켰다.(53)
3장 노동자의 대량 동원과 현장의 노동·생활

(1) 대규모 노동력 동원

수풍댐 건설이 이뤄진 압록강 하류 유역은 조선측도 만주국측도


인구밀도가 낮은 지대였다. 시공에 나선 건설업체 니시마츠 구미, 하
자마 구미가 통솔하는 근로자 수로는 이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조선, 만주국 쌍방에서 강제, 반강제에 의해
건설노동자를 대량 동원했다.
만주국측의 공사를 담당한 니시마츠 구미는 주로 3가지 방법으로
노동자를 모았다. 첫째, 조선 내에서 총독부가 하는 '관알선', 특히 '
도외알선'이다. 둘째, 화북(華北)에서 일하는 노동자인 '고력'의 이입
이다. 셋째, 수풍댐 건설지 인근 농촌에서 모집한 중국인 노동자였
다. 이러한 노동력의 조달 사정을, 40년 4월의 니시마츠 구미 "사보"
는 "당초는 인부부족으로 곤란하게 만들지만, 알선인부급천진고력의
내착을 얻음"(54)이라 기록하고 있다.
첫째,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관알선 정책은 총독부 총괄하에 도청이
필요한 노동력을 도내에서 동원하는 ‘도내 알선’ 및 총독부가 노동력
이 풍부한 도에서 부족한 도에 노동자를 보내는 "도외 알선"의 두
종류를 총칭하는 것이다. 도외 알선은 노동력이 풍부한 남부(전라도,
경상도)로부터, 노동력이 부족한 북부(함경도, 평안도)에의 이송이
중심이었다. '관알선'의 대상이 된 것은 토건, 광업, 교통운수, 공업
등 4개 부문에 걸쳐 이 중에서 가장 일찍부터 실시되었으며, 대다수
를 차지한 것이 토건 부문이었다. 도외 알선 노동자를 사용한 건설사
가운데 니시마츠 구미는 하자마 구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니시마츠 구미는 "도외 알선"의 조선인 노동자를, 만주 국내의 공사
로 사용한 것이다.(55)
실례를 보자. 38년 4월, 남부에서 1200명의 도외알선노동자가 수
풍에 도착했다. 대부분 여행 구경꾼들이 많아 근로를 마다하고 점차
흩어지며 1938년 12월 현재 336명으로 줄어들지만 잔류자는 모두
성실하게 취업해 매월 고향으로 송금하고 상당히 저축하는 등, 일반
노동자의 모범인물로 인정할만 했다.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조선남부 1650명의 조선인 근로자가 수풍에 도착했다.(57)
둘째, 이주노동자의 고력이입이다. 조선 내에서 중국인의 고력을
사용할 경우 "왕"이라는 대고력두(大苦力頭)가 조선 전 국토의 권한
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왕은 총독과도 마주보고, 권선(拳銑)의 휴
대도 허가되었다. 조선 내 건설업체는 니시마츠 구미까지 포함해 모
두 왕의 손을 거쳐 중국에서 고력을 이송했다고 한다.(58) 도미 그
러나 조선을 본거지로 하는 니시마츠 구미는 만주국내에서 고력을
확보하는 데 고심했다. 이 때문에, 니시마츠 구미는 만주 국토건업계
의 거물 사카키야 센지로榊谷仙次郎 아래에 있던 고력두를 소개 받
아, 그와 계약했다. 임금의 지불은 1년에 1회이며, 톈진에 직접 송금
했다고 한다.(59)
만주국에서는 대량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34년 4월부터 다이
토공사(大同公司) 고력의 통제를 행하고 있었다. 다이토 공사는 톈진
육군 특무기관의 지도 아래 설립된 합명회사로 본부를 톈진에 설치
하고 사증사무소를 각지에 설치했다. 만주국은 다이토 공사의 사증을
소지하지 않는 중국인이 입국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1938년 만
주노공회(満州労工会)가 결성되자 이에 단일화됐다. 고력은 대파두
(大把頭), 소파두(小把頭) 등이 장악하는 파두제도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이것은 "반농반공적(半農半工的) 성격을 가지는 고력 노동력
"을 기초로 하는 "유제적 생산 체제의 청부 제도"이다. 그 가장 전형
적인 "외포공제(外包工制)"로서, 사업주는 거래고에 따라 파두에 일
정한 금액을 지불할 뿐이다. 사업주는 아예 관리해 주는 중국인 근로
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다단계에서 중국인 근로자의 모집, 임금 지
급, 숙소 제공, 식사 부여 등 모든 업무를 맡겼다. 고력은 중국의 관
내로부터 유입(출수) 노동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완전히 토지
에서 유리된 노동자가 아니라 가계보조 현금 수입을 요구하는 일종
의 돈벌이 노동자였다. 계절성 있고 고향귀환률도 높았고 만주국에서
의 임금소득을 그곳에서 소비하기보다 고향으로 송금한다는 특색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고용형태는 모두에 의한 일괄 청부가 일반적이
었다.(60)
셋째, 현장 주변에서 "모집"한 노동자이다. 만주국에서는 중국 공산
당이 지도하는 항일 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농촌을 불태우고 동
변도(東辺道) 일대에 갖가지 ‘집단부락’을 만들었다. 목적은 '무주지
대'를 설정하고 중국 민중과 항일무장부대의 연계 활동을 중단하기
위해서였다. 안동성에서는 1936년 이전에 49곳의 집단 부락이 결성
됐으며 36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추가로 219곳의 집단부락 건설에
착수했다.(61) 이러한 "집단부락"으로부터, 노동자가 무리하게 "모집
"된 것이다.
 중국인 장선원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는 관전현의
보달원에 살았습니다. 어느 때인가 제가 사는 곳이 '집단부락'의 대상
이 되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일본군이 불을 질러 불태운다고 하여,
'집단부락'에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단부락'에서는 전원이 울타
리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어요. 거기에는 집도 아무것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땅바닥에 구멍을 파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조건이
나쁜 곳에서 여럿이 함께 생활하고 이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했습니
다. 사망자가 생겨 매일 한두 명의 시신이 집단부락 밖으로 반출되었
습니다. 일가 전부가 사망한 집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희 가족도 4
명이 죽었습니다. 봄이 되어서 논밭을 가꾸어야 할 시기에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정말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밖에 나가면, 총을 가지고 감시에 서 있는 일본병에게 쏴 죽임을 당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수풍댐]공사에 가면 몇각의 돈
이라도 벌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아래에서,
모집에 따라 랍고초(拉古哨)촌에 왔던 것입니다.”

(2)현장의 경비

수풍댐 건설에서는 압록강 양안에 거점이 마련됐다. 조선측은 평안


남도 삭주군 구곡면 구령포 平安南道朔州郡九曲面九寧浦이며, 만주국
측은 안동성 관전현 랍고초 安東省寛甸県拉古哨이다. 수풍댐 건설지
역은 조용한 한촌이었지만, 37년 10월 댐이 착공된 이래, 급속히 인
구가 증가했다. 현장에는 압록강수전 사무소, 직원 주택, 직원 숙사
(생기 기숙사, 두남 기숙사生気寮、斗南寮) 또, 노동자용 반장飯場
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63)
 수풍댐 현장에서는 급격히 인구가 증가해 39년 9월 현재 조선측
삭주군 수풍동은 1만3000명, 만주국 안동성 관전현 랍고초에는
5000명이 정착됐다. 덩치는 커지고 40년 6월에는 조선 쪽 수풍동이
인구 2만 명(이 중 일본인은 1500명)에, 만주 쪽 랍고초에는 8000
명이라는 일대 취락이 결성됐다. 만주국측의 랍고초에는 니시마츠 구
미의 사무소를 중심으로, 반장등이 100건 가깝게 처마를 이뤘다. 압
록강, 두만강 유역 일대는 항일무장투쟁의 일대 거점이었다. 중국 공
산당이 지도하는 항일유격대가 만주국 곳곳에서 결성돼 33년 1월 이
후에는 동북인민혁명군이 됐다. 이어 민족통일전선을 기반으로 하는
동북항일연군 개편이 시작돼 36년 7월 제1로군, 같은 해 12월 제2
로군, 39년 5월 제3로군이 각각 결성됐다. 제1로군의 영향 아래 36
년 6월 조선인 전광全光 등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 설립을 선언했
다. 이러한 동북항일연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주국내에서 관동군은
36년 4월부터 39년 3월까지 3년간에 걸친 "치안숙정 계획"을 실시
했다.(66)
압록강 우안 상류에서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수
풍댐 공사 현장은 엄계체제에 놓였다. 1938년 12월 현재 조선 측은
만주국 쪽에서 항일독립운동가가 유입되는 것을 특히 경계했다. 총독
부의 사료는 “해당 공사장은 만주측과 연쇄적으로 실시하는 관계상,
시국병재만 불순분자 등은 지리적 특이성을 교묘히 역용해, 노동자를
가장해, 혹은 궁민을 가장해, 본 공사장에 잠입하여, 더 나아가 주의
선전, 동지 획득, 국정조사 등의 불순행위를 행할 위험성 또는 소홀
히 하는 등, 국책적 중요성을 가지는 본공사는 고등, 외사경찰에 있
어서 또 엄밀한 주의를 요하는 대상(67)”이라고 말하고 있다.
압록강 양안에 걸친 대량의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해 총독부와 만
주국은 경비 체제를 철저히 한다. 39년 9월 현재 평안도청은 수풍동
에 31명의 경관(경부보 1명, 순경 30명)을 배치했으며 만주국은 랍
고초에 경좌 이하 34명을 주재시켰다. 총 65명의 경찰이 공사현장을
철저히 감시하고 보안단속, 화약류 단속, 근로자 단속을 했다. 조선
측에서는 순경 2명을 배치해 제복 순경 2명을 격일교대로 현장에 근
무시켰다. 또, 노동자 명부(호구 조사식)를 작성해, 1개월 3회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특히 "주의를 필요로 하는 자 그 외 용의 인물은
즉시 본적지 또는 전거주지에 신원을 소개"했다. 조선 측에는 음식점
2채, 식육판매업 2채, 이발업 2채가 허용됐으며 이 밖에 잡화상 6채
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예하의 직속으로 있었다. 성매매는
엄금됐고 일주일에 1~3차례는 일제 검거에 나섰다. 일반 치안 단속
에 관해, 하자마 구미 경비원 2명, 압록강 수전 경비원 10명을 보조
원으로 했다.(68)
화약류 단속은 시국적이라 가장 중시할 것이며 선내는 물론 대안
만주対岸満州의 치안에 중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운반, 출납, 소비
에 엄밀한 감독 및 지도를 했다. 공사 발파는 하루 4회(오전 6시, 정
오, 오후 6시, 오전0시)로 한정하고, 사이렌을 신호로 일제히 발파하
기로 했다. 총독부의 사료는, “각지로부터 모집된 노동자는 그 습성
이 타약하다. 특히 알선인부처럼 국경의 특수성과 일에 익숙하지 않
은 관계상 이동성이 강하다. 때문에 이들이 도착하는 경우에는 그때
마다 한 곳에 모여 부지런히 저축하도록 장려.”(69)라고 말하고 있
다.
니시마츠 구미의 공사 책임자는, “2년 정도는 고생했네요. 그러다
가 경찰이 총을 들고 왔고, 그리고 헌병대가 들어 왔다구요. 그리고
고사포가 2문인가 세문인가 들어왔지요. 군인들이 들어오게 되어서
우리도 안심하고 소총 열일곱, 팔정 가지고 있는 것을 경찰에 기부했
어요”(70)라고 말했다.

(3)현장에서의 노동과 생활

조선측에는 남부로부터 대량의 도외 알선 토건 노동자가 보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현장에서의 대량 도피를 당했다. 이 때문에
건설업체들은 알선 인부보다 다른 근로자를 더 중요하게 봤다. 총독
부의 사료는, “기업자는 그 채산적 견지와 숙련근로자 내지 실력 있
는 노동자의 사냥 수단으로서 알선근로자의 사용을 꺼려, 또는 타공
사장으로부터의 우수노동자 모집을 계획하고, 또는 만지인 노동자의
역량이 왕성한 데에 주목하여 여러 가지 구실 아래 제한된 중국인
노동자를 사용하고 있다.(71)”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측의 노동 조
건이 열악했기 때문에 노동자의 도피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만주 측
의 근로조건은 더 가혹했다고 본다.
만주국 쪽의 반장을 장선원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사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반장에는 50명 정도가 살았습니다. 벽은 나무
판자, 지붕은 토탄으로 겨울은 아주 춥고, 여름은 더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에는 벽판에 시멘트 봉지로 눈을 부릅뜨고 추위를
막았어요. 가장 고통스러운 건 먹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매일같이
정해진 옥수수 가루라던가, 우투(窩頭)라든가 ‘병(떡), 가루를 반죽
해 구운 것’ 등 1회 1개였습니다. 벌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
만, 그래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일
하러 왔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겨울에도 면옷을 입을 수도 없고,
마대를 정리해서라도 일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72)
또 동옥발씨도, “반장은 줄기를 짜서 만든 것으로, 취사시에만 한번
불을 땐 방에서 40-50명이 함께 자고 일어났습니다. 식사는 콩으로
만든 죽과 우토. 처음에는 우토에도 제한이 있었지만 뒤에는 일을 제
대로 하기 위해 없어졌습니다. 겨울신은 집에서 가져온 것을 신고 지
급은 일절 없었습니다. 가장 추운 때에도 무명옷을 한 장 입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난해서 속옷이 없어 면을 한 장만 입고 줄로 묶고
일했어요. 면이 없는 사람은 마대를 쓰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겨울에는 보통 솜이 들어간 신을 신어야 하는데 우린 지하비를 신었
어요. 양말 따위는 있을 리가 없고 발은 온통 보라색으로 부어오르고
몸에는 서리가 내렸지요. 정말 혼났습니다.”(73)라고 말하고 있다
 장선원씨는 현장에서는 모집 시의 조건이 지켜지지 않아 임금이 '
갈라표ガラ票'로 지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금은 발판공이 하루 1.3
원~1.4원, 아무런 기술이 없는 고력은 하루 1원~1.3원이었습니다.
지불된 것은 진짜 돈이 아니라 갈라표라는 표였습니다. 랍고초에서는
갈라표였지만, 조선측은 금표(중략)가 사용되었습니다. 갈라표는 매
일 지불했지만 당장 쓰겠다고 눈감았습니다.(신략) 제가 하루 1원
받겠다고 약속했는데, 7각밖에 못 받았어요. 모집할 때 잘 하는 말인
데 사실은 달랐어요.(74) 만주측에서는 이러한 전표제도에 의해 노
동자의 임금은 한층 더 착취되었다. 또한, 38년 6월에 만주측에서
전표 위조 사건이 발생했다. 피의자 13명 중 4명은 조선 쪽에서, 9
명은 만주측에서 체포됐다. 또, 같은 무렵 만주 측에 악질 전표 중개
인"이 들어왔다.(75) 이러한 사건은 현장의 노동자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가혹한 노동 환경 때문에,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불렸다고 한다. 랍고초에 오면 짐은 던져놓은 채 먹는 것은 도토리
가루, 받는 것은 갈라표, 병이 나도 고치지 않고 숨이 가쁘게 쉬어라
(76) 대화재로 피해를 입었을 때도 있었다. 40년 8월 25일 오후 4
시경, 랍고초 니시마츠 구미의 반장에서 불이 나 4시간에 걸쳐 타
큰 화재가 일어났다. 반장 15동이 전소, 5동이 붕괴했다. 이에 따라
부상자는 20명에 달했다. 또 조선인 이재민은 200여 명에 달했
다.(77)
 노동 중 사고에 관한 신문 기사는 한 건밖에 보이지 않는다. 40년
4월 5일 오전 11시경 조선인 직공 1명은 작업 때 방죽제(仮堰堤)에
서 떨어져 즉사했다. 또, 3월 27일이나 현장의 작업시, 조선인 직공
1명이 똑같이 떨어져, 즉사했다"(78)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희생자
를 낸 것이다. 수풍댐 공사로 인한 사망자 수는 두 가지 사료다. 첫
째, 1941년 9월 27일 수풍발전소 식전 하루 전날 순직자 기념비 앞
에서 순직자 위령제가 열렸던 시점 수이다.(79)

朝鮮人 「満支人」 日本人 合計

西松組 43 48 3 94
間組 54 24 O 78
鴨緑江水電 5 0 1 6
合計 102 72 4 178

表2 水豊ダム建設の犠牲者(1937~1941年9月) 単位:人

표2와 같이 합계 178명이다. 조선측(하자마 구미)보다 만주측(서


송조)의 수가 많으며, 또한 만주측(니시마츠 구미)에서는 조선인보다
'만지인'의 수가 약간 많다. 민족별로 보면 조선인, 만지인 사망자가
압도적(합계 97.8%)이다. 수풍댐 건설은 조선인, 중국인의 희생으로
건축되었다. 37년부터 45년까지 공사 전체의 사망자수는 알 수 없
다. 전후 가장 이른 시기에 일본질소가 기록한 사료로는 약 300명으
로 돼 있다.(80) 조선측, 만주측 사망자 내역은 알 수 없다.
또, 부상자수에 대해서는 전혀 불명확하다. 그러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생존자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장선원씨는 만주측 사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고나 부상은 아
주 잦았어요.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디거나, 콘크리트 믹서가 떨어져
서 부상을 입거나, 와이어 로프가 다리에 휘감겨 다치거나, 정말 여
러가지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기초 타기의 공사가 끝나가고 있고 내
가 목공방에서 틀에 테두리를 만들고 있을 때, 원목을 매단 와이어
로프가 느슨해져 원목이 낙하해, 아래에 있던 수십 명의 목공이 죽었
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공기가 늦는 것을 무서워해
일본인도 감독도 당황하고, 즉시 처리했습니다. 사망해도 돈이 지급
되지 않고 얇은 판자로 만든 관으로 시신을 실어 날라 묻었습니
다.(81)
또, 동옥발씨는 "어느때 콘크리트를 흘리는 틀에서 "노공"을 때려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댐에 철근을 실어올때, 그것이
무너져 내려서 한시에 수십명이 그 밑에 깔리고 죽었습니다.(중략)
당시 모집되어 온 사람들, 또 붙잡혀 온 사람들도, 자주 괴롭힘을 당
했습니다. 수많은 사망자 중에는 물 속에서의 작업이 매우 위험해 얼
핏 죽을 뻔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고 노공을 거기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물에 떠내려가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82) 그는 1941년 13세 때 현장에서 동공으로 일하다 작
업 중인 차량 사고로 오른발을 절단했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다.절단
한 다리는 그대로 묻혔다고 한다.(83)

공사로 인한 사상자 이외에 수풍댐에 관한 노동자에게 큰 피해를


준 것은 전염병으로 인한 사상자이다. 조선에서는 40년부터 공사현
장과 공장에서 발진티푸스, 이질, 천연두, 회귀열, 아메바 이질 등의
전염병이 만연했다. 수풍댐 건설 현장의 조선 쪽에서 큰 피해가 발생
했다고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만주 쪽에서는 상황이 달라졌
다. 여러 반장에 전염병이 만연해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전염병은
우선 "집단부락"에 발생해, 이것이 만주측의 니시마츠 구미의 반장으
로 확대되었다. 동옥발씨는 "병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된 사람은 격
리소에 보내졌습니다. 병이 나서, 파두가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하면
격리소에 보냈습니다. 병에 걸려도 일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음식을 줬
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격리소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리고 일
절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중에는 아직 숨
이 차는데 묻혀 버린 사람도 있었어요.“(85)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격리소는 '태평방'이라 하여 사망자를 메운 '만인갱'은 수풍댐 북쪽
의 작은 언덕 위에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수풍댐 건설 때의 병사자
수를 약 5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인갱에서 발굴된 유골에는 수
갑을 차고 여러 명이 함께 철사로 묶이거나 가슴에 칼의 상처를 입
었다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일본에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상세한 실태의 해명은 향후의 과
제이다. 일단 이상 수풍댐 건설을 만주국의 입장에서 검토해 온 두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만주국에 있어서의 수력 개발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
과의 관련으로부터 급속히 부상해 왔다. 압록강 개발 계획은 당초 만
주국에서 조선 측에 제안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추진하는 '선만일여'의
상징으로 만주국과 조선총독부의 공동 사업이 되었다. 수풍댐 건설의
계획, 시공에는 조선측의 노구치 준, 쿠보타 유타카등이 있었다. 그
러나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국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둘째, 만주국측
의 수몰지는 안동성 관전현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 지
역 내에는 중국인, 조선인 농민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수몰지 주
민은 대다수가 빈강성, 지린성등의 "북만"으로 이송되었다. 수몰지
주민 중에서는 소작인등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북만"으로 이주했다.
이에 반해 자작농, 지주 등은 이전료나 보상비용을 둘러싸고 대립하
여 끝까지 현지에 머물러 만주국 안동공서나 압록강수전과 대립하였
다.
세 번째로, 대량의 건설 노동자는 시공사인 니시마츠 구미에 의해
서 모집되었다. 크게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조선총독부가 실
시한 도외 알선에 의해 남조선에서 이송된 조선인 노동자들이다. 다
음으로, 니시마츠 구미가 계약한 중국인 파두에 의해서 모인 이주 노
동자(고력)이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집단 부락"으로부터 "모집"한
중국인이다. 현장의 노동 조건은 가혹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보주]
(1) 일본 질소비료 주식회사 조사부편 "수풍보 제공사지"(동사,
1949년)(일본 공영 주식회사 자료실 소장).조선전기사업사편찬위원
회편 '조선전기사업사'(중앙한일협회, 1981년) 참조. 1945년 이후의
수풍댐에 관해서는 랴오닝성 지방지편공실편' 랴오닝성
(2) 하자마 구미 백년사 편찬 위원회편 "하자마 구미 백년
사·1889-1945"(동사, 1989년).히로세 사다조 [수풍발전소 건설 관
련 수몰지 문제1조선측을 중심으로]조선학보 139호(1991년 4월)동
"군수 경기와 전력 건설 공사", 옥성소 편저 "산업의 쇼와 사회사 12
토목"(일본 연어제 평론사, 1993년).
 동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수풍발전소 건설과 유카타 문제", "니가
타 국제 정보 대학 정보 문화 학부 기요"1호(1998년 3월).
(3) 만사회편 '만주개발 40년사'(겸광사, 1964년) 82쪽. 만주 회고
집간행회편'아만주일국만들기 산업개발자의 수기'(동간회).만들어진
일본 근대사의 정신"(코분사, 2001년) 269 페이지.
(4) 야마구치 본생 "만주 수력 자원 옛날과", 만주 전업 외사편씨
위원회편 "추억의 만주 전업" 제1권(만주 전업회, 1982년) 12~13.
(5) 전게서 "만주전업사", 472 페이지.
(6) 미타라이 타츠오 "난지로"(남지로 전기간행회, 1957년)
327360페이지. 일중 전쟁기의 남쪽에 대해서는, 테루누마 야스타카
"쇼와 10년대의 우가키 계 군인", 아리마학·
 카와히로분관, 1993년) 참조.
(7) 호리 가즈오(만주국) "만주국"에 있어서의 전력업과 통제 정책
" "역사학 연구"564호(1987년 2월호)"18 페이지.
(8) "가모덴 건설 부장 사토 토키히코씨 말하는 "조선"1941년 9월
호, 43 페이지. 쿠보타 유타카
(9) 조선총독부편 '압록강개발위원회 관계'(안달수 소장) 276쪽.
이 사료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게히로세 쇼조 논문 '수풍발전소에
의한 수몰지 문제'.
(10) 마에게야마구치 본생 논문 "만주 수력 자원 옛 모습", 12~13
페이지.
(11) 전에 게리호리카즈 여론문" "만주국"에 있어서의 전력업과 통
제 정책 "역사학 연구"564호, 18 페이지.
(12) 전게서 "만주전업사"579 페이지. 우치다 히로시 4편 "토요타
홍사 방제 발전 공사록"(다이펑젠 설치, 1979년) 참조.
(13) 전에 게시한 쿠보타 유타카 "노구치씨와 압록강 개발",
775~776 페이지."만주 관계자 좌담회", 전게서 "노구치 준옹 추회록
"976~987 페이지.
(14) 코이소 쿠니아키 "갈산홍조"(중앙공론 사업 출판, 1963년)
82 페이지.
(15) 우가키 카즈나리 지음 츠노다 준교정 "우가키 카즈나리 일기
"2(미스즈 책방, 1970년) 1033 페이지.
(16) 사토 토키히코 "압록강수풍보 제공사 개요" "토목 학회지
"1944년 1월호, 13~14 페이지. 사토 토키히코 "토목 인생 50년"(중
앙공론 사업 출판, 19)
(17) 미타라이 다쓰오 '남총독의 조선통치'(경성일보사1942년)
106쪽.
(18) 선만국경 공동개발 만주평론 12권4호(1937년 6월) 68쪽.
모리타니 가쓰미 선만여일 그 의미, 제시설경영과 조선의 지위 아
래 만주평론 12권 15호(1937년 9월) 5페이지 전게서 남총독의 5페
이지.
(20) 전게서 "난지로"437 페이지.
(21) 전게서 '남총독의 조선통치' 71쪽.
(22) 하라다 쿠마오술 "니시조노사공과 정국" 제 6권(이와나미 서
점, 1950년) 54~55 페이지.
(23) '압록강개발위원회' 276쪽.
(24)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 290~291쪽.
(25) 타치바나나이 토쿠메"이론에 뒷받침된 실행", 하라구치 츄지
로의 횡안 간행회편 "하라구치 츄지로의 옆얼굴" (동회, 1966년)
126~127 페이지.
(26)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 290~292쪽.
(27)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 296쪽.
(28) 이요시 사다카즈편 "사카키타니 센지로 일기"(사카키야 센지
로 일기 간행 회간, 1969년), 1937년 5월 7일, 18일 부록.
(29)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535쪽. 전게서 '하자마 구미백년사'
상권 342쪽.
(30) 사노 유키치편 "창업 회고"(니시마츠구미, 1940년) 5153 페
이지. 창업 백년사 편찬위 조개회편 "니시마츠 건설 창업 백년사"(니
시마츠 건설, 1978년)
(11) '서송조 사보' 1941년 10월 31일호(니시마츠 건설 소장).
(32) 전에게시 히로세 사다조 논문 "수풍 발전소 건설에 의한 수
몰지 유제", 5~6 페이지.
(33) "압록강댐 애사의 진전" "만선일보" 1941년 3월4일자. 만선
일보"는 39년 12월1일부터 40년9월30일까지는 영인본(만선)이후,
42년 10월 29일까지는 와세다 대학 도서관 소장 마이크로필름을 사
용했다."만선 일보"의 결호에 관해서는, 오오무라 마스오·이상범편" "
만선일보 "문학 관계 기사 색인"(동인, 1995년) 1~3 페이지 참조.
(34) 만주국 통신사편 "만주국 현세·강덕 3년도"(동사, 1939년)
186 페이지.
(35) 나가츠카 토시카즈 "쿠보타 유타카"(전기 정보사, 1966년
214 페이지.
(36) 압강수전매몰지민 이주대책 협의 동아일보 1938년 3월25일
자.
(37) 경비 18만 엔으로 수몰지 실정을 조사 동아일보 1938년 5월
28일자.
(38) "압강수몰지 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로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 일자.
만주측 수몰지 주민 5만명이주책 결정 동아일보 1938년 8월 3일
자(대) 강익선 영하의 압록강수몰지(완) 만선일보
(40) "압강수몰지 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로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일자.
(11) '압강수몰지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일자.
(42) "압강수몰지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로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일자. 빈장성의 농업에 대해서는 앞에서 서술한 히로세
사다미츠 논문 "수풍발전소 건설에 의한 수몰지 문제"25페이지 참조.
(43) 만주쪽 수몰지 농민 이주 광경 동아일보 1940년 2월 6일자.
(44) 압록강 수몰지대의 이주민 천7백호 구합시 역두에서 희망을
잃어 방해 근박, '만선일보' 1940년 1월28일자.
(45) "압강수몰지이주민 선후조치 대책수 결정" "만선일보" 1940
년 2월 5일자.
(46) [수몰지작농엄금], [만선일보], 1940년 3월 5일자.
(47) "압강 수몰 가옥 매각 처분을 개시" "만선일보"1940년 3월 5
일자.
(48) "압강 수몰 지대 주민 북만 이주를 자원" "만선일보"1940년
3월 26 일자.
(49) "압강수전몰지 입목가옥 처분" "만선일보"1940년 4월 20 일
자.
(50) 수몰지 잔존주민은 조속히 철거하라 만선일보 1940년 5월12
일.
(51) "수전회사 철거령에 주민 선후책 강구" "만선일보"1940년 5
월 15 일자.
(52) 압록강댐 수몰지 농민 이주 사업을 마침내 완료, 만선일보
1940년 12월 4일자.
(53) 북만 이주 후속 부대 관순 수몰지에서 백호 이주 "만선일보"
1942년 3월 21 일자.
(54) "니시마츠구미 사보"28호(1940년 4월) 42 페이지.
(55) 히로세 사다조(히로세 쇼조)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관주선 토
건 노동자 일도외 알선을 중심으로 "조선학보"155호(1995년 4월),
10~12쪽.
(56) '압록강개발위원회 관계' 212쪽.
(57) "난센 알선 인부 카모에 수전댐 에사에 1,650명 도착역" "만
선일보"1940년 3월 21 일자.
타이카와 아이타이스케 [니시마츠구미 유신경] 제8회, [니시마츠건
설사보] 1970년 12월호 3132쪽.
(58) 조선수력발전공사 좌담회 기록(2), 전기토목공업협회 전력건
설업협회편 일본토목건설업사(기보당1971년) 751쪽.
(58) 타카노 타케오 찬 "만주 노무 관리 개론"(대학 책방, 1939
년).나카무라 타카토시 "파두 제도의 연구"(노동 과학 연구소, 1944
년).마츠무라 타카오 "만주국 성립 이후의 이민·노동 정책의 형성과
전개“
만주사연구회편 "일본 제국주의하의 만주일 "만주국"성립 전후의
경제 연구"(오챠의 수서방, 1972년) 242 페이지, 장성진 "토목 건축
", 마츠무라 타카오타부.
(61) 김천미(김정미) 중국 동북부 항일조선중국민중사 서설(현대
기획실1992년) 349358쪽.
(62) 중국인 강제연행·니시히라쿠 건설 재판을 지원하는·회편 "수
풍댐 현지 조사 보고집일전전의 "수풍"으로부터 "안노"의 지금에·니
시마츠 건설의 전쟁 책임"(동회, 1999년)수풍댐 건설의 노동력 동원
이 어떻게 실시되었는지를 분명히 한 귀중한 증언이다.
(63)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418쪽.
(64)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131 페이지.
(65) "20세기의 일대 위업수풍발전소 근래 완성" "만선일보" 1940
년 6월 22 일자.
(66) 서대숙저림무역 김일성 일사상과 정치체제(어차의 수서방
L992년) 1953쪽.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평평사1992
년)
(67)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 239쪽.
(68)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 213쪽.
(69) '압록강개발위 조카이회 관계' 135쪽.
(70) 전게서 "일본 토목 건설업사"752 페이지.
(71) '압록강개발위원회 관계' 238쪽
(72) 전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집 4142쪽.
(73)앞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집'45~46쪽
(74) 전게서 "수풍담 현지 조사 보고집"42~43 페이지.
(75)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 240쪽.
(76) 전게서 "수풍담 현지 조사 보고집"28 페이지.
(77) '라고초 대화반장 15동 전소' '만선일보' 1940년 8월 30일자.
(78) 압강댐 현장에서 직공 2명이 참사, 만선일보, 1940년 4월 11
일자.
(79)'순직자위령제', '서송조사보'1941년 8월호, 4~5쪽.
(80) 전게서 "수풍보제 공사지"292 페이지.
(81) 전게서 "수람담 현지 조사 보고집"41 페이지.
(82) 전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서' 44쪽
(83) 전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집' 47쪽
(84) 전에 내걸었던 히로세 사다미츠 논문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관알선 토건 노동자"13 페이지.
(85) 전게서 "수풍댐 현지보 조사고집"46쪽.
(86) 전게서 "수풍담 현지 조사 보고집"51 페이지.
[補註]
(1)日本窒素肥料株式会社調査部編『水豊堰堤工事誌』(同社、
1949年)(日本工営株式会社資  料室所蔵)。朝鮮電気事業史編纂委
員会編『朝鮮電気事業史』(中央日韓協会、1981年)参  照。1945年
以後の水豊ダムに関しては、遼寧省地方志編纂委員会弁公室編『遼寧
省志一電  力工業志』(遼寧科学技術出版社、1996年)37~38頁参
照。
(2)問組百年史編纂委員会編『間組百年史・1889-1945』(同社、
1989年)。広瀬貞三「水豊発  電所建設ドよる水没地問題一朝鮮側を
中心に」『朝鮮学報』139号(1991年4月)。同「軍需景気と電力建設
工事」、玉城素編著『産業の昭和社会史⑫土木』(日本鮭済評論社、
1993年)。
 同「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水豊発電所建設と流筏問題」『新潟国際
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1号(1998年3月)。
(3)満史会編『満州開発四十年史』(謙光社、1964年)82頁。満
州回顧集刊行会編『あ・満州一  国作り産業開発者の手記』(同刊行
会、1965年)66頁。満州国史編纂委員会編『満州国史・  総論』(満
蒙同胞援護会、1970年)93頁。国際善隣協和会編『満州建国の夢と現
実』(同会、  1975年)193頁。「満州電業史」編纂委員会編『満州電
業史』(満州電業会、1976年)472頁。  黄文雄『満州国の遺産一歪め
られた日本近代史の精神』(光文社、2001年)269頁。
(4)山口本生「満州水力資源昔がたり」、満州電業外史編さん委員
会編『思い出の満州電業』 第1巻(満州電業会、1982年)12~13頁。
(5)前掲書『満州電業史』、472頁。
(6)御手洗辰雄『南次郎』(南次郎伝記刊行会、1957年)327~
360頁。日中戦争期の南については、照沼康孝「昭和十年代の宇垣系軍
人」、有馬学・三谷博編『近代日本の政治構造』(吉
 川弘文館、1993年)参照。
(7)堀和生「「満州国」における電力業と統制政策」『歴史学研
究』564号(1987年2月号)’18頁。
(8)「鴨電建設部長佐藤時彦氏語る」『朝鮮』1941年9月号、43
頁。久保田豊「野口さんと鴨緑  江開発」、高梨光司編『野口遵翁追懐
録』(同編纂会、1952年)773~774頁。
(9)朝鮮総督府編『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安達遂氏所蔵)276
頁。この史料に関しては、前  掲広瀬貞三論文「水豊発電所による水没
地問題」『朝鮮学報』139号、補注⑬参照。
(10) 前掲山口本生論文「満州水力資源昔がたり」、12~13頁。
(11) 前掲堀和世論文「「満州国」における電力業と統制政策」
『歴史学研究』564号、18頁。
(12) 前掲書『満州電業史』579頁。内田弘四編『豊満ダムー松花江
堰堤発電工事実録』(大豊建  設、1979年)参照。豊満ダム建設時に
おける中国人労働者の状態は、中国共産党吉林省委  党史研究室・中共
豊満発電廠委員会編『労工血泪史』(同会、1991年)参照。
(13) 前掲久保田豊「野口さんと鴨緑江開発」、775~776頁。「満
州関係者座談会」、前掲書『野口遵翁追懐録』976~987頁。
(14) 小磯国昭『葛山鴻爪』(中央公論事業出版、1963年)82頁。
(15) 宇垣一成著角田順校訂『宇垣一成日記』2(みすず書房、1970
年)1033頁。
(16) 佐藤時彦「鴨緑江水豊堰堤工事概要」『土木学会誌』1944年1
月号、13~14頁。佐藤時彦    『土木人生五十年』(中央公論事業出
版、1969年)136~137頁。
(17) 御手洗辰雄『南総督の朝鮮統治』(京城日報社、1942年)106
頁。
(18)「鮮満国境の共同開発」『満州評論』12巻4号(1937年6月)
6~8頁。
(19) 森谷克巳「鮮満一如一その意味、諸施設経営と朝鮮の地位」
下、『満州評論』12巻15号  (1937年9月)5頁。前掲書『南総督の朝
鮮統治』105~128頁。
(20) 前掲書『南次郎』437頁。
(21) 前掲書『南総督の朝鮮統治』71頁。
(22) 原田熊雄述『西園寺公と政局』第6巻(岩波書店、1950年)5
4~55頁。
(23)『鴨緑江開発委員会』276頁。
(24)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290~291頁。
(25) 橘内徳目「理論に裏づけられた実行」、原口忠次郎の横顔刊行
会編『原口忠次郎の横顔』  (同会、1966年)126~127頁。原口は
1939年に満州国より帰国後、内務省神戸土木出張所  所長(39~43
年)、参議院議員(47~49年)、神戸市長(49~69年)を歴任する。
(26)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290~292頁。
(27)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296頁。
(28) 飯吉精一編『榊谷仙次郎日記』(榊谷仙次郎日記刊行会刊、
1969年)、1937年5月7日、18日 付。
(29)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535頁。前掲書『間組百年史』上
巻、342頁。
(30) 佐野勇吉編『創業回顧』(西松組、1940年)51~53頁。創業
百年史編纂委貝会編『西松建設  創業百年史』(西松建設、1978年)
88~89頁。
(31)『西松組社報』1941年10月31日号(西松建設所蔵)。
(32) 前掲広瀬貞三論文「水豊発電所建設による水没地由題」、5~6
頁。
(33) 「鴨緑江ダムエ事の進展」『満鮮日報』1941年3月4日付。
『満鮮日報』は、39年12月1日から  40年9月30日までは影印本『満鮮
日報』全5冊(亜細亜文化社、1988年)を使用した。それ  以降、42年
10月29日までは早稲田大学図書館所蔵のマイクロフイルムを使用し
た。『満鮮  日報』の欠号に関しては、大村益夫・李相範編『『満鮮日
報』文学関係記事索引』(同人、 1995年)1~3頁参照。
(34) 満州国通信社編『満州国現勢・康徳三年度』(同社、1939
年)186頁。
(35) 永塚利一『久保田豊』(電気情報社、1966年)214頁。
(36)「鴨江水電埋没地民  移住対策を協議」『東亜日報』1938年3月
25日付。
(37)「経費十八万円で水没地実情を調査」『東亜日報』1938年5月
28日付。
(38)「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39)「満州側水没地住民  五万名移住策決定」『東亜日報』1938年8
月3日付。㈹姜益善「氷点下の鴨緑江水没地(完)」『満鮮日報』
1940年2月1日付。
(40)「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41)「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42)「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浜江省の農業  については、前掲広瀬貞三論文「水
豊発電所建設による水没地問題」25頁参照。
(43)「満州側水没地農民移住光景」『東亜日報』1940年2月6日付。
(44)「鴨緑江水没地帯の移住民千七百戸  口合市駅頭で希望を失い妨
僅」『満鮮日報』1940年1月
 28日付。
(45)「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46)「水没地作農厳禁」『満鮮日報』1940年3月5日付。
(47)「鴨江水没家屋  売却処分を開始」『満鮮日報』1940年3月5日
付。
(48)「鴨江水没地帯住民  北満移住を自願」『満鮮日報』1940年3月
26日付。
(49)「鴨江水電水没地  立木家屋処分」『満鮮日報』1940年4月20日
付。
(50)「水没地残存住民は速やかに撤去せよ」『満鮮日報』1940年5
月12日付。
(51)「水電会社撤去令に住民善後策講究」『満鮮日報』1940年5月
15日付。
(52)「鴨緑江ダム水没地農民  移住事業を遂に完了」『満鮮日報』
1940年12月4日付。
(53) 北満移住後続部隊  寛旬水没地から百戸移住」『満鮮日報』
1942年3月21日付。
(54)『西松組社報』28号(1940年4月)42頁。
(55) 広瀬貞三「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官斡旋土建労働者一道外斡旋
を中心に」『朝鮮学報』155号,(1995年4月)、10~12頁。
(56)『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12頁。
(57)「南鮮斡旋人夫  鴨江水電ダムエ事に千六百五十名着駅」『満鮮
日報』1940年3月21日付。
(58) 河合泰介「西松組維新の頃」第8回、『西松建設社報』1970年
12月号・31~32頁。
(59)「朝鮮の水力発電工事・座談会記録(2)」、電気土木工業協
会・電力建設業協会編『日本土木建設業史』(技報堂、1971年)751
頁。
(60) 高野武雄撰『満州労務管理概論』(大学書房、1939年)。中
村孝俊『把頭制度の研究』(労働    科学研究所、1944年)。松村高夫
「満州国成立以降における移民・労働政策の形成と展開」
満州史研究会編『日本帝国主義下の満州一「満州国」成立前後の経
済研究』(御茶の水書房、  1972年)242頁。張声振「土木建築」、松
村高夫他編著『満鉄労働史の研究』(日本経済評論  社、2002年)21
3~248頁。
(61) キムチョンミ(金静美)『中国東北部における抗日朝鮮・中国
民衆史序説』(現代企画室、1992年)349~358頁。
(62) 中国人強制連行・西柊建設裁判を支援する・会編『水豊ダム現
地調査報告集一戦前の「水豊」  から「安野」の今へ・西松建設の戦争
責任』(同会、1999年)37~38頁。(以下、『水豊ダム  現地調査報
告集』と略す)。水豊ダム建設の労働力動員がどのように実施された
のかを明 らかにした貴重な証言である。
(63)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418頁。
(64)『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131頁。
(65)「二十世紀の一大偉業水豊発電所近々完成」『満鮮日報』1940
年6月22日付。
(66) 徐大粛著林茂訳『金日成一思想と政治体制』(御茶の水書房、
L992年)19~53頁。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71~314頁。
(67)『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39頁。
(68)『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13頁。
(69)『鴨緑江開発委貝会関係』135頁。
(70) 前掲書『日本土木建設業史』752頁。
(71)『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38頁。
(72)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1~42頁。
(73)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5~46頁
(74)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2~43頁。
(75)『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40頁。
(76)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28頁。
(77)「拉古哨に大火  飯場十五棟全焼」『満鮮日報』1940年8月30日
付。
(78)「鴨江ダム現場で職工二名が惨死」『満鮮日報』1940年4月11’
日付。
(79)「殉職者慰霊祭」『西松組社報』1941年8月号、4~5頁。
(80) 前掲書『水豊堰堤工事誌』292頁。
(81) 前掲書『水藍ダム現地調査報告集』41頁。
(82)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書』44頁
(83)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7頁
(84) 前掲広瀬貞三論文「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官斡旋土建労働者」
13頁。
(85) 前掲書『水豊ダム現地報調査告集』46頁。
(86)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51頁。
解密丹东宽甸万人坑 一座血泪电站一段尘封历史
http://www.sina.com.cn 2004年02月24日09:52 辽沈晚报

  从2000年开始,为了收集更多日军侵华时期的罪证,辽宁省委党校
党史研究室对日军在省内各市遗留罪证的“万人坑”进行了一次大规模的调
研,并向全省征集线索,寻找幸存中国劳工。丹东宽甸境内的万人坑渐
渐浮出水面,但实际上了解宽甸万人坑的人很少,连宽甸人自己都不太
知道还有这么一个万人坑。省委党校党史研究室进行了长时间的调研,
这项工作至今仍在进行中,并已取得了初步的研究成果。同样令人忧虑
的是,“宽甸万人坑”旧址如今很大一部分已被夷为平地,种上了树木,这
对今后的发掘研究工作造成了一定影响。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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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省委党校党史研究室的李秉刚教授在接受记者采访时表示,为加
快此项工作的进展,他们目前正在进行日军侵华时期受害劳工的走访调
查工作,他希望省内更多的受害劳工或他们的子女能与研究室尽快联
系。(电话024-23981060)

  “九一八”事变后的1937年到1941年,日本侵略军采用骗招和强拉的
方式,从吉林、黑龙江等地征集了大量中国劳工,在丹东宽甸境内的拉
古哨村修建“水丰水电站”。无数中国劳工用血泪筑起了当时号称“世界第
二、亚洲第一”的人工湖水电站。在修建水电站的过程中,由于日本侵略
者的残酷奴役与压榨,造成约2万中国劳工死亡,一具具血肉之躯化成累
累白骨,形成了现在的“水丰水电站万人坑”。“鸭绿江水血泪飞,存下多
少血和泪,两岸青山依旧在,谁看几人把家归。”这首民谣就是当时修建
拉古哨大坝劳工苦难生活的最好见证。

  “水丰水电站万人坑”位于拉古哨村碑碣子沟门西山坡,据宽甸满族自
治县史志办的尚振声主任介绍,这是日伪当年埋葬修建水丰水电站过程
中死亡劳工的一处集中墓地,占地面积约3万平方米,坟地延绵三四里
远,当地人称之为“乱坟岗”。

  1971年挖土事件对万人坑破坏很大,后来有关部门禁止村民再去拉
土。经过这次大规模的调研,仅初步估算,当时这里埋葬死亡劳工就约1
万余人,另有相当部分劳工死亡后被扔到鸭绿江中随江水冲走,还有部
分本地劳工死亡后由家族自己安葬。这是日本帝国主义在中国进行经济
掠夺的罪行见证。

  随着时光的流逝,这段中国劳工的血泪史渐渐被尘封,只在相关资
料中留下简短的记录,很多宽甸人都不知道在宽甸境内还存有这么一个
万人坑。从2000年开始,省委党校党史研究室与宽甸史志办的专家开始
长时间的调研,通过对当地的考察、对幸存劳工及当地群众的走访,揭
开了这段尘封的历史。

  权威考证“水丰水电站”规模巨大

  据省委党校党史研究室的李秉刚教授介绍,为了修建水丰水电站,
日本侵略军于1937年9月成立了“满洲鸭绿江水力发电株式会社”,同年开
始动工修建。该电站主体工程混凝土直线重力式拦江堰堤直高106米,长
898米,体积300万立方米,使用水泥共计70万吨,全部工程历时四年
多,于1941年建成发电。该水电站形成的人工湖面积345平方公里,最
大蓄水量达到116亿立方米,是当时“世界上第二、亚洲最大”的人工湖。

  宽甸万人坑形成原因

  省委党校党史研究室的李秉刚教授通过对大量历史资料的分析研
究,认为宽甸“水丰水电站万人坑”的形成原因,主要有以下三个方面:

  安全无保障意外事故频发
  工程开工后,首先是挖掘大坝基础,清除大坝两端的山体,使之露
出岩石。在这个过程中,为了赶进度,劳工被安排在两侧山坡上分层施
工。由于山坡陡峭,经常发生塌方事故。据劳工幸存者唐宝文回忆,一
次他同父亲在施工时遇到塌方,被压死30余人,有时上面的土方崩塌下
来,将在下面施工的劳工一下子推到江里,连人带砂土全部淹没在滚滚
的江水中。

  据当年幸存的劳工林庆发讲,在大坝主体工程施工过程中,由于缺
乏劳动保护设施,各种大小事故经常发生,从大坝上、架子上摔死的、
砸死的、压死的等等,几乎每天都有,有时一天发生多起。在大坝上干
活,木架子上绑一块板,冬天板上还有霜,非常滑,几乎每天都有掉下
去的,掉到江里只见冒一股血水,人就没有了。

  生活条件差生病不救而死

  根据幸存的劳工们回忆,当时劳工们吃的是玉米面与橡子面混合蒸
成的窝头,喝的是没有油的菜汤,又苦又涩,吃后肚子发胀,而且经常
吃不饱。每天从事十几个小时的繁重劳动,干活头发晕,所以经常出危
险而死人。劳工住的工棚子是用木头支的,用洋瓦铁盖的,一排挨一
排。屋内对面铺,夏天热,冬天冷,冬春时节,棚内的霜,早晨化了掉
下来把行李都淋湿了。炕有几丈长,炕头热,炕梢凉,卫生条件非常
差,苍蝇成群,跳蚤遍地,造成传染病流行,致使许多人体弱生病直至
死亡。传染病严重时,“每个工棚每天都能死四五个人”。

  日伪军迫害大批劳工死亡

  在水丰水电站工程施工过程中,日伪军设置了警察所、警备队等武
装设施,建立劳务监督部门,对劳工有“大柜”、“二柜”、“西皮匠”等监
视,劳工凡违反所谓规定的,都要受到日本施工方的各种惩罚,轻则体
罚,重则毒打,甚至打死为止,许多劳工死在日伪军的皮鞭棍棒之下,
以致有时引起包工头与劳工的共同反抗。

  李教授说,根据刘忠远等人描述的来看,有的尸骨上带着手铐,有
六具尸骨是用铁丝串在一起等事实,说明这些劳工是受迫害而死的。当
时的调查还了解到:有个劳工由于劳累过度,实在支持不住,就被活活
打死,扔到江里;劳工刘生友因拉肚子多上了几次厕所,就说他偷懒,
结果把他打得死去活来,两天以后就死了。

  李教授还说,造成劳工大批死亡的根本原因,是日本侵略者只为赶
工程进度而不顾劳工死活。据我国军事科学院20世纪80年代的调查结果
显示,在当时的水丰电站工程中,“共有2万多中国劳工和近1万朝鲜劳工
被夺去了生命。”而劳工“死了埋的少,扔到江里的多,因为省劲,不用挖
坑埋。”所以埋在万人坑所在山坡上的死难劳工只是很少一部分,大多数
死难劳工被江水吞噬。

  泣血证言

  调研人员通过走访,找到一部分当年的幸存劳工,并记录下了他们
的证言,一段段泣血的文字,向后人讲述了一段中国劳工的血泪史。

  幸存劳工唐宝文

  拉古哨修大坝的时候,我家生活困难,为了多挣几个钱,我和父亲
就到大坝上干活,一干就是三年。在大坝上干活有中国人和朝鲜人共
2000多人。刚开始干活时,就清江底子,装草包每天挣6角钱,吃饭每
天得花3角钱。

  有一天晚上打洋灰,装一个大灰罐子,灰罐子放下一半,蚂蚁绳就
断了,罐子掉下去爆炸了,有10多个人掉到灰罐子里呛死了。还有一次
在山洞里装草包,我和父亲及其他劳工30多人轮着干,洞里突然塌方
了,进去干活的人当场就压死了30多个,由于我和我父亲就在洞口干
活,跑的快,没砸着。有一次晚上干到深夜,由于又累又困,打个喷
嚏,差点掉进江里送命。

  幸存劳工李远永

  1939年,我到拉古哨修大坝。开始去时,干力工活,往轱辘码子车
上装石子,每天天不亮就上工地,天黑了才下班,每天得干12个小时
活。苦和累不说,还吃不饱,每天都吃橡子面和玉米面蒸的窝窝头,根
本不吃菜,大部分时间光喝汤,都是白菜汤、土豆汤、萝卜汤,汤里根
本不放油。就这样拼命干,每天挣5~6角钱。1940年就把我调去当电
工,有一次我亲眼看见大架子塌下压死20多人,在坝后绑架子又塌了,
压死30多人。

  有一次吃东西中毒,日本人说是得瘟病,用汽车拉走50多人,再也
没有回来。有的没等死,就以瘟病为由,拉出去埋了。劳工得了病两天
不能上班,晚上就拉出去给活埋了,原因是不能干活了。光我家亲属就
死了四人,二叔李光福绑架子、立杆打死的,三叔李光有被轱辘马子车
压死的,叔叔李光启扎架子栽下来摔死的,大哥李远贵也被摔死了。人
死了什么也不给,在工地上活着就得干,死了算。我在坝上干几年,亲
眼看见的就死了100多人。

  “鸭绿江水血泪飞,存下多少血和泪。两岸青山依旧在,谁看几人把
家归。”站在鸭绿江畔,看着滚滚的江水,那首凄惨的歌谣仿佛又在耳边
回响。然而滔滔的鸭绿江水冲不走留在中国劳工心中的苦难记忆,布满
坟丘的“宽甸万人坑”旧址仍在向人们诉说着当年中国劳工的苦难。用劳工
的生命和鲜血铸成的鸭绿江拦江大坝与万人坑中的累累白骨,成为日本
侵略者在中国疯狂进行经济侵略的铁证。
  镜头回放挖掘现场令人发指

  1971年,丹东宽甸满族自治县永甸镇大江口村农民在进行农田基本
建设时,在附近的山上取土垫地,挖出了数百具尸骨。其中,有的尸骨
上戴着手铐,有6具尸骨是用铁丝串在一起的;有5具尸骨牙齿全部被打
掉;有3具尸骨的手被铁丝捆着;有1具尸骨从脖子到脚周身缠满了铁
丝;还有1具尸骨的肋骨间插着一把匕首……

  刘忠远,当时红口大队的党支部书记现年75岁。当时他带人到三莹
地拉土垫地,发现大量的尸骨。刘忠远说,骨头太多了,没地方放,就
在山顶上建个席棚子,把大骨头拣出来放在棚子里搞展览,对村民进行
爱国主义教育,那些碎的、小骨头没法拣,随土都拉去垫地了。挖出来
的骨头残缺不全,还有手铐、刀、铁丝等物。由于骨头太多,小席棚子
放不下,后来就在附近挖个坑又给埋起来了。现在三莹地里的骨头还有
很多没被挖出来。据当地村民反映,现在他们还经常能看到裸露出地面
的白骨。

  (辽沈晚报 吴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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