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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수풍댐 건설-번역
만주국 수풍댐 건설-번역
히로세 貞三 *広瀬貞三*
목차
시작하기
1 · 만주국의 압록강 개발 계획
(1) 압록강 개발 계획의 진전
(2) "선만一如"와 압록강 개발
(3) 수풍댐 시공 체제의 정비
(1) 대규모 인력 동원
(2) 현장의 경비
(3) 현장에서의 노동과 생활
결론
시작하기
3) 수풍댐 시공체제 정비
1) 안동성 공서의 용지 매입
表1・満州側水没地住民の移住先(1939年11月~1940年5月)
(3) 잔류주민으로의 압력
(2)현장의 경비
(3)현장에서의 노동과 생활
西松組 43 48 3 94
間組 54 24 O 78
鴨緑江水電 5 0 1 6
合計 102 72 4 178
表2 水豊ダム建設の犠牲者(1937~1941年9月) 単位:人
[보주]
(1) 일본 질소비료 주식회사 조사부편 "수풍보 제공사지"(동사,
1949년)(일본 공영 주식회사 자료실 소장).조선전기사업사편찬위원
회편 '조선전기사업사'(중앙한일협회, 1981년) 참조. 1945년 이후의
수풍댐에 관해서는 랴오닝성 지방지편공실편' 랴오닝성
(2) 하자마 구미 백년사 편찬 위원회편 "하자마 구미 백년
사·1889-1945"(동사, 1989년).히로세 사다조 [수풍발전소 건설 관
련 수몰지 문제1조선측을 중심으로]조선학보 139호(1991년 4월)동
"군수 경기와 전력 건설 공사", 옥성소 편저 "산업의 쇼와 사회사 12
토목"(일본 연어제 평론사, 1993년).
동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수풍발전소 건설과 유카타 문제", "니가
타 국제 정보 대학 정보 문화 학부 기요"1호(1998년 3월).
(3) 만사회편 '만주개발 40년사'(겸광사, 1964년) 82쪽. 만주 회고
집간행회편'아만주일국만들기 산업개발자의 수기'(동간회).만들어진
일본 근대사의 정신"(코분사, 2001년) 269 페이지.
(4) 야마구치 본생 "만주 수력 자원 옛날과", 만주 전업 외사편씨
위원회편 "추억의 만주 전업" 제1권(만주 전업회, 1982년) 12~13.
(5) 전게서 "만주전업사", 472 페이지.
(6) 미타라이 타츠오 "난지로"(남지로 전기간행회, 1957년)
327360페이지. 일중 전쟁기의 남쪽에 대해서는, 테루누마 야스타카
"쇼와 10년대의 우가키 계 군인", 아리마학·
카와히로분관, 1993년) 참조.
(7) 호리 가즈오(만주국) "만주국"에 있어서의 전력업과 통제 정책
" "역사학 연구"564호(1987년 2월호)"18 페이지.
(8) "가모덴 건설 부장 사토 토키히코씨 말하는 "조선"1941년 9월
호, 43 페이지. 쿠보타 유타카
(9) 조선총독부편 '압록강개발위원회 관계'(안달수 소장) 276쪽.
이 사료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게히로세 쇼조 논문 '수풍발전소에
의한 수몰지 문제'.
(10) 마에게야마구치 본생 논문 "만주 수력 자원 옛 모습", 12~13
페이지.
(11) 전에 게리호리카즈 여론문" "만주국"에 있어서의 전력업과 통
제 정책 "역사학 연구"564호, 18 페이지.
(12) 전게서 "만주전업사"579 페이지. 우치다 히로시 4편 "토요타
홍사 방제 발전 공사록"(다이펑젠 설치, 1979년) 참조.
(13) 전에 게시한 쿠보타 유타카 "노구치씨와 압록강 개발",
775~776 페이지."만주 관계자 좌담회", 전게서 "노구치 준옹 추회록
"976~987 페이지.
(14) 코이소 쿠니아키 "갈산홍조"(중앙공론 사업 출판, 1963년)
82 페이지.
(15) 우가키 카즈나리 지음 츠노다 준교정 "우가키 카즈나리 일기
"2(미스즈 책방, 1970년) 1033 페이지.
(16) 사토 토키히코 "압록강수풍보 제공사 개요" "토목 학회지
"1944년 1월호, 13~14 페이지. 사토 토키히코 "토목 인생 50년"(중
앙공론 사업 출판, 19)
(17) 미타라이 다쓰오 '남총독의 조선통치'(경성일보사1942년)
106쪽.
(18) 선만국경 공동개발 만주평론 12권4호(1937년 6월) 68쪽.
모리타니 가쓰미 선만여일 그 의미, 제시설경영과 조선의 지위 아
래 만주평론 12권 15호(1937년 9월) 5페이지 전게서 남총독의 5페
이지.
(20) 전게서 "난지로"437 페이지.
(21) 전게서 '남총독의 조선통치' 71쪽.
(22) 하라다 쿠마오술 "니시조노사공과 정국" 제 6권(이와나미 서
점, 1950년) 54~55 페이지.
(23) '압록강개발위원회' 276쪽.
(24)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 290~291쪽.
(25) 타치바나나이 토쿠메"이론에 뒷받침된 실행", 하라구치 츄지
로의 횡안 간행회편 "하라구치 츄지로의 옆얼굴" (동회, 1966년)
126~127 페이지.
(26)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 290~292쪽.
(27)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 296쪽.
(28) 이요시 사다카즈편 "사카키타니 센지로 일기"(사카키야 센지
로 일기 간행 회간, 1969년), 1937년 5월 7일, 18일 부록.
(29)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535쪽. 전게서 '하자마 구미백년사'
상권 342쪽.
(30) 사노 유키치편 "창업 회고"(니시마츠구미, 1940년) 5153 페
이지. 창업 백년사 편찬위 조개회편 "니시마츠 건설 창업 백년사"(니
시마츠 건설, 1978년)
(11) '서송조 사보' 1941년 10월 31일호(니시마츠 건설 소장).
(32) 전에게시 히로세 사다조 논문 "수풍 발전소 건설에 의한 수
몰지 유제", 5~6 페이지.
(33) "압록강댐 애사의 진전" "만선일보" 1941년 3월4일자. 만선
일보"는 39년 12월1일부터 40년9월30일까지는 영인본(만선)이후,
42년 10월 29일까지는 와세다 대학 도서관 소장 마이크로필름을 사
용했다."만선 일보"의 결호에 관해서는, 오오무라 마스오·이상범편" "
만선일보 "문학 관계 기사 색인"(동인, 1995년) 1~3 페이지 참조.
(34) 만주국 통신사편 "만주국 현세·강덕 3년도"(동사, 1939년)
186 페이지.
(35) 나가츠카 토시카즈 "쿠보타 유타카"(전기 정보사, 1966년
214 페이지.
(36) 압강수전매몰지민 이주대책 협의 동아일보 1938년 3월25일
자.
(37) 경비 18만 엔으로 수몰지 실정을 조사 동아일보 1938년 5월
28일자.
(38) "압강수몰지 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로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 일자.
만주측 수몰지 주민 5만명이주책 결정 동아일보 1938년 8월 3일
자(대) 강익선 영하의 압록강수몰지(완) 만선일보
(40) "압강수몰지 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로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일자.
(11) '압강수몰지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일자.
(42) "압강수몰지이주민 선후처치 대책수로 결정", "만선일보"
1940년 2월 5일자. 빈장성의 농업에 대해서는 앞에서 서술한 히로세
사다미츠 논문 "수풍발전소 건설에 의한 수몰지 문제"25페이지 참조.
(43) 만주쪽 수몰지 농민 이주 광경 동아일보 1940년 2월 6일자.
(44) 압록강 수몰지대의 이주민 천7백호 구합시 역두에서 희망을
잃어 방해 근박, '만선일보' 1940년 1월28일자.
(45) "압강수몰지이주민 선후조치 대책수 결정" "만선일보" 1940
년 2월 5일자.
(46) [수몰지작농엄금], [만선일보], 1940년 3월 5일자.
(47) "압강 수몰 가옥 매각 처분을 개시" "만선일보"1940년 3월 5
일자.
(48) "압강 수몰 지대 주민 북만 이주를 자원" "만선일보"1940년
3월 26 일자.
(49) "압강수전몰지 입목가옥 처분" "만선일보"1940년 4월 20 일
자.
(50) 수몰지 잔존주민은 조속히 철거하라 만선일보 1940년 5월12
일.
(51) "수전회사 철거령에 주민 선후책 강구" "만선일보"1940년 5
월 15 일자.
(52) 압록강댐 수몰지 농민 이주 사업을 마침내 완료, 만선일보
1940년 12월 4일자.
(53) 북만 이주 후속 부대 관순 수몰지에서 백호 이주 "만선일보"
1942년 3월 21 일자.
(54) "니시마츠구미 사보"28호(1940년 4월) 42 페이지.
(55) 히로세 사다조(히로세 쇼조)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관주선 토
건 노동자 일도외 알선을 중심으로 "조선학보"155호(1995년 4월),
10~12쪽.
(56) '압록강개발위원회 관계' 212쪽.
(57) "난센 알선 인부 카모에 수전댐 에사에 1,650명 도착역" "만
선일보"1940년 3월 21 일자.
타이카와 아이타이스케 [니시마츠구미 유신경] 제8회, [니시마츠건
설사보] 1970년 12월호 3132쪽.
(58) 조선수력발전공사 좌담회 기록(2), 전기토목공업협회 전력건
설업협회편 일본토목건설업사(기보당1971년) 751쪽.
(58) 타카노 타케오 찬 "만주 노무 관리 개론"(대학 책방, 1939
년).나카무라 타카토시 "파두 제도의 연구"(노동 과학 연구소, 1944
년).마츠무라 타카오 "만주국 성립 이후의 이민·노동 정책의 형성과
전개“
만주사연구회편 "일본 제국주의하의 만주일 "만주국"성립 전후의
경제 연구"(오챠의 수서방, 1972년) 242 페이지, 장성진 "토목 건축
", 마츠무라 타카오타부.
(61) 김천미(김정미) 중국 동북부 항일조선중국민중사 서설(현대
기획실1992년) 349358쪽.
(62) 중국인 강제연행·니시히라쿠 건설 재판을 지원하는·회편 "수
풍댐 현지 조사 보고집일전전의 "수풍"으로부터 "안노"의 지금에·니
시마츠 건설의 전쟁 책임"(동회, 1999년)수풍댐 건설의 노동력 동원
이 어떻게 실시되었는지를 분명히 한 귀중한 증언이다.
(63) 전게서 '조선전기사업사'418쪽.
(64)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131 페이지.
(65) "20세기의 일대 위업수풍발전소 근래 완성" "만선일보" 1940
년 6월 22 일자.
(66) 서대숙저림무역 김일성 일사상과 정치체제(어차의 수서방
L992년) 1953쪽.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평평사1992
년)
(67)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 239쪽.
(68)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 213쪽.
(69) '압록강개발위 조카이회 관계' 135쪽.
(70) 전게서 "일본 토목 건설업사"752 페이지.
(71) '압록강개발위원회 관계' 238쪽
(72) 전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집 4142쪽.
(73)앞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집'45~46쪽
(74) 전게서 "수풍담 현지 조사 보고집"42~43 페이지.
(75) 압록강 개발위원회 관계 240쪽.
(76) 전게서 "수풍담 현지 조사 보고집"28 페이지.
(77) '라고초 대화반장 15동 전소' '만선일보' 1940년 8월 30일자.
(78) 압강댐 현장에서 직공 2명이 참사, 만선일보, 1940년 4월 11
일자.
(79)'순직자위령제', '서송조사보'1941년 8월호, 4~5쪽.
(80) 전게서 "수풍보제 공사지"292 페이지.
(81) 전게서 "수람담 현지 조사 보고집"41 페이지.
(82) 전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서' 44쪽
(83) 전게서 '수풍댐 현지조사보고집' 47쪽
(84) 전에 내걸었던 히로세 사다미츠 논문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관알선 토건 노동자"13 페이지.
(85) 전게서 "수풍댐 현지보 조사고집"46쪽.
(86) 전게서 "수풍담 현지 조사 보고집"51 페이지.
[補註]
(1)日本窒素肥料株式会社調査部編『水豊堰堤工事誌』(同社、
1949年)(日本工営株式会社資 料室所蔵)。朝鮮電気事業史編纂委
員会編『朝鮮電気事業史』(中央日韓協会、1981年)参 照。1945年
以後の水豊ダムに関しては、遼寧省地方志編纂委員会弁公室編『遼寧
省志一電 力工業志』(遼寧科学技術出版社、1996年)37~38頁参
照。
(2)問組百年史編纂委員会編『間組百年史・1889-1945』(同社、
1989年)。広瀬貞三「水豊発 電所建設ドよる水没地問題一朝鮮側を
中心に」『朝鮮学報』139号(1991年4月)。同「軍需景気と電力建設
工事」、玉城素編著『産業の昭和社会史⑫土木』(日本鮭済評論社、
1993年)。
同「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水豊発電所建設と流筏問題」『新潟国際
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1号(1998年3月)。
(3)満史会編『満州開発四十年史』(謙光社、1964年)82頁。満
州回顧集刊行会編『あ・満州一 国作り産業開発者の手記』(同刊行
会、1965年)66頁。満州国史編纂委員会編『満州国史・ 総論』(満
蒙同胞援護会、1970年)93頁。国際善隣協和会編『満州建国の夢と現
実』(同会、 1975年)193頁。「満州電業史」編纂委員会編『満州電
業史』(満州電業会、1976年)472頁。 黄文雄『満州国の遺産一歪め
られた日本近代史の精神』(光文社、2001年)269頁。
(4)山口本生「満州水力資源昔がたり」、満州電業外史編さん委員
会編『思い出の満州電業』 第1巻(満州電業会、1982年)12~13頁。
(5)前掲書『満州電業史』、472頁。
(6)御手洗辰雄『南次郎』(南次郎伝記刊行会、1957年)327~
360頁。日中戦争期の南については、照沼康孝「昭和十年代の宇垣系軍
人」、有馬学・三谷博編『近代日本の政治構造』(吉
川弘文館、1993年)参照。
(7)堀和生「「満州国」における電力業と統制政策」『歴史学研
究』564号(1987年2月号)’18頁。
(8)「鴨電建設部長佐藤時彦氏語る」『朝鮮』1941年9月号、43
頁。久保田豊「野口さんと鴨緑 江開発」、高梨光司編『野口遵翁追懐
録』(同編纂会、1952年)773~774頁。
(9)朝鮮総督府編『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安達遂氏所蔵)276
頁。この史料に関しては、前 掲広瀬貞三論文「水豊発電所による水没
地問題」『朝鮮学報』139号、補注⑬参照。
(10) 前掲山口本生論文「満州水力資源昔がたり」、12~13頁。
(11) 前掲堀和世論文「「満州国」における電力業と統制政策」
『歴史学研究』564号、18頁。
(12) 前掲書『満州電業史』579頁。内田弘四編『豊満ダムー松花江
堰堤発電工事実録』(大豊建 設、1979年)参照。豊満ダム建設時に
おける中国人労働者の状態は、中国共産党吉林省委 党史研究室・中共
豊満発電廠委員会編『労工血泪史』(同会、1991年)参照。
(13) 前掲久保田豊「野口さんと鴨緑江開発」、775~776頁。「満
州関係者座談会」、前掲書『野口遵翁追懐録』976~987頁。
(14) 小磯国昭『葛山鴻爪』(中央公論事業出版、1963年)82頁。
(15) 宇垣一成著角田順校訂『宇垣一成日記』2(みすず書房、1970
年)1033頁。
(16) 佐藤時彦「鴨緑江水豊堰堤工事概要」『土木学会誌』1944年1
月号、13~14頁。佐藤時彦 『土木人生五十年』(中央公論事業出
版、1969年)136~137頁。
(17) 御手洗辰雄『南総督の朝鮮統治』(京城日報社、1942年)106
頁。
(18)「鮮満国境の共同開発」『満州評論』12巻4号(1937年6月)
6~8頁。
(19) 森谷克巳「鮮満一如一その意味、諸施設経営と朝鮮の地位」
下、『満州評論』12巻15号 (1937年9月)5頁。前掲書『南総督の朝
鮮統治』105~128頁。
(20) 前掲書『南次郎』437頁。
(21) 前掲書『南総督の朝鮮統治』71頁。
(22) 原田熊雄述『西園寺公と政局』第6巻(岩波書店、1950年)5
4~55頁。
(23)『鴨緑江開発委員会』276頁。
(24)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290~291頁。
(25) 橘内徳目「理論に裏づけられた実行」、原口忠次郎の横顔刊行
会編『原口忠次郎の横顔』 (同会、1966年)126~127頁。原口は
1939年に満州国より帰国後、内務省神戸土木出張所 所長(39~43
年)、参議院議員(47~49年)、神戸市長(49~69年)を歴任する。
(26)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290~292頁。
(27)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296頁。
(28) 飯吉精一編『榊谷仙次郎日記』(榊谷仙次郎日記刊行会刊、
1969年)、1937年5月7日、18日 付。
(29)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535頁。前掲書『間組百年史』上
巻、342頁。
(30) 佐野勇吉編『創業回顧』(西松組、1940年)51~53頁。創業
百年史編纂委貝会編『西松建設 創業百年史』(西松建設、1978年)
88~89頁。
(31)『西松組社報』1941年10月31日号(西松建設所蔵)。
(32) 前掲広瀬貞三論文「水豊発電所建設による水没地由題」、5~6
頁。
(33) 「鴨緑江ダムエ事の進展」『満鮮日報』1941年3月4日付。
『満鮮日報』は、39年12月1日から 40年9月30日までは影印本『満鮮
日報』全5冊(亜細亜文化社、1988年)を使用した。それ 以降、42年
10月29日までは早稲田大学図書館所蔵のマイクロフイルムを使用し
た。『満鮮 日報』の欠号に関しては、大村益夫・李相範編『『満鮮日
報』文学関係記事索引』(同人、 1995年)1~3頁参照。
(34) 満州国通信社編『満州国現勢・康徳三年度』(同社、1939
年)186頁。
(35) 永塚利一『久保田豊』(電気情報社、1966年)214頁。
(36)「鴨江水電埋没地民 移住対策を協議」『東亜日報』1938年3月
25日付。
(37)「経費十八万円で水没地実情を調査」『東亜日報』1938年5月
28日付。
(38)「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39)「満州側水没地住民 五万名移住策決定」『東亜日報』1938年8
月3日付。㈹姜益善「氷点下の鴨緑江水没地(完)」『満鮮日報』
1940年2月1日付。
(40)「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41)「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42)「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浜江省の農業 については、前掲広瀬貞三論文「水
豊発電所建設による水没地問題」25頁参照。
(43)「満州側水没地農民移住光景」『東亜日報』1940年2月6日付。
(44)「鴨緑江水没地帯の移住民千七百戸 口合市駅頭で希望を失い妨
僅」『満鮮日報』1940年1月
28日付。
(45)「鴨江水没地移住民 善後処置対策遂に決定」『満鮮日報』
1940年2月5日付。
(46)「水没地作農厳禁」『満鮮日報』1940年3月5日付。
(47)「鴨江水没家屋 売却処分を開始」『満鮮日報』1940年3月5日
付。
(48)「鴨江水没地帯住民 北満移住を自願」『満鮮日報』1940年3月
26日付。
(49)「鴨江水電水没地 立木家屋処分」『満鮮日報』1940年4月20日
付。
(50)「水没地残存住民は速やかに撤去せよ」『満鮮日報』1940年5
月12日付。
(51)「水電会社撤去令に住民善後策講究」『満鮮日報』1940年5月
15日付。
(52)「鴨緑江ダム水没地農民 移住事業を遂に完了」『満鮮日報』
1940年12月4日付。
(53) 北満移住後続部隊 寛旬水没地から百戸移住」『満鮮日報』
1942年3月21日付。
(54)『西松組社報』28号(1940年4月)42頁。
(55) 広瀬貞三「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官斡旋土建労働者一道外斡旋
を中心に」『朝鮮学報』155号,(1995年4月)、10~12頁。
(56)『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12頁。
(57)「南鮮斡旋人夫 鴨江水電ダムエ事に千六百五十名着駅」『満鮮
日報』1940年3月21日付。
(58) 河合泰介「西松組維新の頃」第8回、『西松建設社報』1970年
12月号・31~32頁。
(59)「朝鮮の水力発電工事・座談会記録(2)」、電気土木工業協
会・電力建設業協会編『日本土木建設業史』(技報堂、1971年)751
頁。
(60) 高野武雄撰『満州労務管理概論』(大学書房、1939年)。中
村孝俊『把頭制度の研究』(労働 科学研究所、1944年)。松村高夫
「満州国成立以降における移民・労働政策の形成と展開」
満州史研究会編『日本帝国主義下の満州一「満州国」成立前後の経
済研究』(御茶の水書房、 1972年)242頁。張声振「土木建築」、松
村高夫他編著『満鉄労働史の研究』(日本経済評論 社、2002年)21
3~248頁。
(61) キムチョンミ(金静美)『中国東北部における抗日朝鮮・中国
民衆史序説』(現代企画室、1992年)349~358頁。
(62) 中国人強制連行・西柊建設裁判を支援する・会編『水豊ダム現
地調査報告集一戦前の「水豊」 から「安野」の今へ・西松建設の戦争
責任』(同会、1999年)37~38頁。(以下、『水豊ダム 現地調査報
告集』と略す)。水豊ダム建設の労働力動員がどのように実施された
のかを明 らかにした貴重な証言である。
(63) 前掲書『朝鮮電気事業史』418頁。
(64)『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131頁。
(65)「二十世紀の一大偉業水豊発電所近々完成」『満鮮日報』1940
年6月22日付。
(66) 徐大粛著林茂訳『金日成一思想と政治体制』(御茶の水書房、
L992年)19~53頁。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71~314頁。
(67)『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39頁。
(68)『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13頁。
(69)『鴨緑江開発委貝会関係』135頁。
(70) 前掲書『日本土木建設業史』752頁。
(71)『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38頁。
(72)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1~42頁。
(73)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5~46頁
(74)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2~43頁。
(75)『鴨緑江開発委員会関係』240頁。
(76)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28頁。
(77)「拉古哨に大火 飯場十五棟全焼」『満鮮日報』1940年8月30日
付。
(78)「鴨江ダム現場で職工二名が惨死」『満鮮日報』1940年4月11’
日付。
(79)「殉職者慰霊祭」『西松組社報』1941年8月号、4~5頁。
(80) 前掲書『水豊堰堤工事誌』292頁。
(81) 前掲書『水藍ダム現地調査報告集』41頁。
(82)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書』44頁
(83)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47頁
(84) 前掲広瀬貞三論文「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官斡旋土建労働者」
13頁。
(85) 前掲書『水豊ダム現地報調査告集』46頁。
(86) 前掲書『水豊ダム現地調査報告集』51頁。
解密丹东宽甸万人坑 一座血泪电站一段尘封历史
http://www.sina.com.cn 2004年02月24日09:52 辽沈晚报
从2000年开始,为了收集更多日军侵华时期的罪证,辽宁省委党校
党史研究室对日军在省内各市遗留罪证的“万人坑”进行了一次大规模的调
研,并向全省征集线索,寻找幸存中国劳工。丹东宽甸境内的万人坑渐
渐浮出水面,但实际上了解宽甸万人坑的人很少,连宽甸人自己都不太
知道还有这么一个万人坑。省委党校党史研究室进行了长时间的调研,
这项工作至今仍在进行中,并已取得了初步的研究成果。同样令人忧虑
的是,“宽甸万人坑”旧址如今很大一部分已被夷为平地,种上了树木,这
对今后的发掘研究工作造成了一定影响。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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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省委党校党史研究室的李秉刚教授在接受记者采访时表示,为加
快此项工作的进展,他们目前正在进行日军侵华时期受害劳工的走访调
查工作,他希望省内更多的受害劳工或他们的子女能与研究室尽快联
系。(电话024-23981060)
“九一八”事变后的1937年到1941年,日本侵略军采用骗招和强拉的
方式,从吉林、黑龙江等地征集了大量中国劳工,在丹东宽甸境内的拉
古哨村修建“水丰水电站”。无数中国劳工用血泪筑起了当时号称“世界第
二、亚洲第一”的人工湖水电站。在修建水电站的过程中,由于日本侵略
者的残酷奴役与压榨,造成约2万中国劳工死亡,一具具血肉之躯化成累
累白骨,形成了现在的“水丰水电站万人坑”。“鸭绿江水血泪飞,存下多
少血和泪,两岸青山依旧在,谁看几人把家归。”这首民谣就是当时修建
拉古哨大坝劳工苦难生活的最好见证。
“水丰水电站万人坑”位于拉古哨村碑碣子沟门西山坡,据宽甸满族自
治县史志办的尚振声主任介绍,这是日伪当年埋葬修建水丰水电站过程
中死亡劳工的一处集中墓地,占地面积约3万平方米,坟地延绵三四里
远,当地人称之为“乱坟岗”。
1971年挖土事件对万人坑破坏很大,后来有关部门禁止村民再去拉
土。经过这次大规模的调研,仅初步估算,当时这里埋葬死亡劳工就约1
万余人,另有相当部分劳工死亡后被扔到鸭绿江中随江水冲走,还有部
分本地劳工死亡后由家族自己安葬。这是日本帝国主义在中国进行经济
掠夺的罪行见证。
随着时光的流逝,这段中国劳工的血泪史渐渐被尘封,只在相关资
料中留下简短的记录,很多宽甸人都不知道在宽甸境内还存有这么一个
万人坑。从2000年开始,省委党校党史研究室与宽甸史志办的专家开始
长时间的调研,通过对当地的考察、对幸存劳工及当地群众的走访,揭
开了这段尘封的历史。
权威考证“水丰水电站”规模巨大
据省委党校党史研究室的李秉刚教授介绍,为了修建水丰水电站,
日本侵略军于1937年9月成立了“满洲鸭绿江水力发电株式会社”,同年开
始动工修建。该电站主体工程混凝土直线重力式拦江堰堤直高106米,长
898米,体积300万立方米,使用水泥共计70万吨,全部工程历时四年
多,于1941年建成发电。该水电站形成的人工湖面积345平方公里,最
大蓄水量达到116亿立方米,是当时“世界上第二、亚洲最大”的人工湖。
宽甸万人坑形成原因
省委党校党史研究室的李秉刚教授通过对大量历史资料的分析研
究,认为宽甸“水丰水电站万人坑”的形成原因,主要有以下三个方面:
安全无保障意外事故频发
工程开工后,首先是挖掘大坝基础,清除大坝两端的山体,使之露
出岩石。在这个过程中,为了赶进度,劳工被安排在两侧山坡上分层施
工。由于山坡陡峭,经常发生塌方事故。据劳工幸存者唐宝文回忆,一
次他同父亲在施工时遇到塌方,被压死30余人,有时上面的土方崩塌下
来,将在下面施工的劳工一下子推到江里,连人带砂土全部淹没在滚滚
的江水中。
据当年幸存的劳工林庆发讲,在大坝主体工程施工过程中,由于缺
乏劳动保护设施,各种大小事故经常发生,从大坝上、架子上摔死的、
砸死的、压死的等等,几乎每天都有,有时一天发生多起。在大坝上干
活,木架子上绑一块板,冬天板上还有霜,非常滑,几乎每天都有掉下
去的,掉到江里只见冒一股血水,人就没有了。
生活条件差生病不救而死
根据幸存的劳工们回忆,当时劳工们吃的是玉米面与橡子面混合蒸
成的窝头,喝的是没有油的菜汤,又苦又涩,吃后肚子发胀,而且经常
吃不饱。每天从事十几个小时的繁重劳动,干活头发晕,所以经常出危
险而死人。劳工住的工棚子是用木头支的,用洋瓦铁盖的,一排挨一
排。屋内对面铺,夏天热,冬天冷,冬春时节,棚内的霜,早晨化了掉
下来把行李都淋湿了。炕有几丈长,炕头热,炕梢凉,卫生条件非常
差,苍蝇成群,跳蚤遍地,造成传染病流行,致使许多人体弱生病直至
死亡。传染病严重时,“每个工棚每天都能死四五个人”。
日伪军迫害大批劳工死亡
在水丰水电站工程施工过程中,日伪军设置了警察所、警备队等武
装设施,建立劳务监督部门,对劳工有“大柜”、“二柜”、“西皮匠”等监
视,劳工凡违反所谓规定的,都要受到日本施工方的各种惩罚,轻则体
罚,重则毒打,甚至打死为止,许多劳工死在日伪军的皮鞭棍棒之下,
以致有时引起包工头与劳工的共同反抗。
李教授说,根据刘忠远等人描述的来看,有的尸骨上带着手铐,有
六具尸骨是用铁丝串在一起等事实,说明这些劳工是受迫害而死的。当
时的调查还了解到:有个劳工由于劳累过度,实在支持不住,就被活活
打死,扔到江里;劳工刘生友因拉肚子多上了几次厕所,就说他偷懒,
结果把他打得死去活来,两天以后就死了。
李教授还说,造成劳工大批死亡的根本原因,是日本侵略者只为赶
工程进度而不顾劳工死活。据我国军事科学院20世纪80年代的调查结果
显示,在当时的水丰电站工程中,“共有2万多中国劳工和近1万朝鲜劳工
被夺去了生命。”而劳工“死了埋的少,扔到江里的多,因为省劲,不用挖
坑埋。”所以埋在万人坑所在山坡上的死难劳工只是很少一部分,大多数
死难劳工被江水吞噬。
泣血证言
调研人员通过走访,找到一部分当年的幸存劳工,并记录下了他们
的证言,一段段泣血的文字,向后人讲述了一段中国劳工的血泪史。
幸存劳工唐宝文
拉古哨修大坝的时候,我家生活困难,为了多挣几个钱,我和父亲
就到大坝上干活,一干就是三年。在大坝上干活有中国人和朝鲜人共
2000多人。刚开始干活时,就清江底子,装草包每天挣6角钱,吃饭每
天得花3角钱。
有一天晚上打洋灰,装一个大灰罐子,灰罐子放下一半,蚂蚁绳就
断了,罐子掉下去爆炸了,有10多个人掉到灰罐子里呛死了。还有一次
在山洞里装草包,我和父亲及其他劳工30多人轮着干,洞里突然塌方
了,进去干活的人当场就压死了30多个,由于我和我父亲就在洞口干
活,跑的快,没砸着。有一次晚上干到深夜,由于又累又困,打个喷
嚏,差点掉进江里送命。
幸存劳工李远永
1939年,我到拉古哨修大坝。开始去时,干力工活,往轱辘码子车
上装石子,每天天不亮就上工地,天黑了才下班,每天得干12个小时
活。苦和累不说,还吃不饱,每天都吃橡子面和玉米面蒸的窝窝头,根
本不吃菜,大部分时间光喝汤,都是白菜汤、土豆汤、萝卜汤,汤里根
本不放油。就这样拼命干,每天挣5~6角钱。1940年就把我调去当电
工,有一次我亲眼看见大架子塌下压死20多人,在坝后绑架子又塌了,
压死30多人。
有一次吃东西中毒,日本人说是得瘟病,用汽车拉走50多人,再也
没有回来。有的没等死,就以瘟病为由,拉出去埋了。劳工得了病两天
不能上班,晚上就拉出去给活埋了,原因是不能干活了。光我家亲属就
死了四人,二叔李光福绑架子、立杆打死的,三叔李光有被轱辘马子车
压死的,叔叔李光启扎架子栽下来摔死的,大哥李远贵也被摔死了。人
死了什么也不给,在工地上活着就得干,死了算。我在坝上干几年,亲
眼看见的就死了100多人。
“鸭绿江水血泪飞,存下多少血和泪。两岸青山依旧在,谁看几人把
家归。”站在鸭绿江畔,看着滚滚的江水,那首凄惨的歌谣仿佛又在耳边
回响。然而滔滔的鸭绿江水冲不走留在中国劳工心中的苦难记忆,布满
坟丘的“宽甸万人坑”旧址仍在向人们诉说着当年中国劳工的苦难。用劳工
的生命和鲜血铸成的鸭绿江拦江大坝与万人坑中的累累白骨,成为日本
侵略者在中国疯狂进行经济侵略的铁证。
镜头回放挖掘现场令人发指
1971年,丹东宽甸满族自治县永甸镇大江口村农民在进行农田基本
建设时,在附近的山上取土垫地,挖出了数百具尸骨。其中,有的尸骨
上戴着手铐,有6具尸骨是用铁丝串在一起的;有5具尸骨牙齿全部被打
掉;有3具尸骨的手被铁丝捆着;有1具尸骨从脖子到脚周身缠满了铁
丝;还有1具尸骨的肋骨间插着一把匕首……
刘忠远,当时红口大队的党支部书记现年75岁。当时他带人到三莹
地拉土垫地,发现大量的尸骨。刘忠远说,骨头太多了,没地方放,就
在山顶上建个席棚子,把大骨头拣出来放在棚子里搞展览,对村民进行
爱国主义教育,那些碎的、小骨头没法拣,随土都拉去垫地了。挖出来
的骨头残缺不全,还有手铐、刀、铁丝等物。由于骨头太多,小席棚子
放不下,后来就在附近挖个坑又给埋起来了。现在三莹地里的骨头还有
很多没被挖出来。据当地村民反映,现在他们还经常能看到裸露出地面
的白骨。
(辽沈晚报 吴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