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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발제

김민경(극단 노마드 대표, 연극연출가)

희망의 이면, 절망을 노래하다

예전 ‘1박 2일’ 예능 프로그램에서 ‘집 사는데 여기서는 여유 없이 열심히 일해


으로’라는 미션을 기획했었다. 그 내용 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은 경북 영양 산골 노인들 집에 멤버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의 첫 장면, 종
이 1박 2일 동안 머물며 미션을 수행하 철과 선미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나누
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승기를 이순길이 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가 거산댁 할머
라고 부르는 거산댁 할머니가 있었다. 니의 말과 온도만 다를 뿐 똑 닮아있었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다.
할머니와 멤버들은 함께 예능 프로그램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독일의 현대
을 보고 있었고 유쾌한 내용, 방청객들 작가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의 <오버외
의 웃음소리가 화면 밖으로 흘러나왔을 스터라이히>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때 물끄러미 TV를 보던 할머니가 한마 작품은 한 부부의 이야기이다. 마트에서
디 하셨다. “저렇게 앉아서 봐도 밥 먹고 비정규직으로 배달원을 하는 종철과 판
사는데 우리들은 이 농촌에서 왜 이렇게 매원을 하는 선미는 소박한 삶 속에서
사는 게 어렵노?” 할머니 말인즉슨 TV 소소한 행복을 찾아 살아간다. 그들의
안의 사람들은 즐겁게 지내며 윤택하게 삶에는 별 이상이 없다. 심지어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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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기까지 한다. 가난하지만 나름의 삶 앙피르 서랍장의 단상
을 즐기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구색 : 원했고 소유했지만 결국 부담으로 다가
은 좀 빠지지만, 집에서 스테이크를 굽 온 가치의 발견
고 기념일에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
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등 절약을 기반으 종철과 선미의 방, 단출하다 못해 단
로 그들은 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소 조로운 세간살이의 한가운데에 부자연
한의 것들을 즐기며 산다. 그들은 부족 스러우나 위풍당당하게 사람 키만 한 빨
한 살림에 이상하리만치 온전한 삶을 향 간 서랍장이 서 있다. 부자연스러움이
유한다. 하지만 선미가 임신한 사실을 오히려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것은
알리며 평온했던 삶이 삐걱거리기 시작 앙피르 서랍장으로 129만 9천 원, 10개
한다. 아이를 낳길 원하는 아내 선미와 월 할부로 부부가 구입한 것이다. 그들
자신들의 상황에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은 자신들의 한 달 수입 절반에 조금 못
생각하기에 아이를 지우기 원하는 남편 미치는 이 서랍장을 꽤나 마음에 들어
종철은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월 300만 한다. 그들이 삶의 모토로 삼고 있는 절
원 남짓의 벌이, 출산 후 200만 원으로 약이 가능케 한 기적이라 여기며 궁핍한
줄어들 생활비에 그들은 고민하고, 싸우 삶이 일순 고급스러워지는 달콤한 환상
고, 갈등한다. 아이를 낳기 원하는 선미 을 맛본다. 하지만 이러한 환상은 그리
는 이상주의자로, 아이를 지우기 원하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종철은 현실주의자로 비친다. 이 부분 위해 가계부를 정리하던 중 매달 12만
을 받아들이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지는 9천 원씩 지불해야 하는 서랍장은 순간,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아 옷도 많이 들어가지 않고 팔 수도 없으
키우는 것이 이상 내지는 환상이 되어 며 돈을 내고 버려야만 하는 애물단지로
버린 현실을 방증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락하고 만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 그렇다면 월에 300만 원 밖에 벌지 못
고 생계에만 매달려도 아이 하나 키워내 하는 부부가 129만 9천 원짜리 서랍장을
지 못하는 삶, 노력해도 나아진다는 보 10개월 할부로 샀다고 해서 — 분수에
장이 없기에 노력을 종용할 수 없는 현 맞지 않는 행동을 한 그들을 손가락질해
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민낯 야 마땅한 것일까? 그들이 미래를 위해
이 아닐까? 선미와 종철은 그 한가운데 좀 더 신중했어야만 했나?
서 있었다. 이야기가 치달으며 어느 순간 앙피르
서랍장은 아이로 치환되어 보인다. 통념
상 보통의 부부라면 응당 바라고 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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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고 어쩌면 가져야만 하는 아이의 간다. 이것은 그들의 방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부부의 생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들의 삶 자체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 육아 것을 단편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보여
휴직이 끝나도(물론 비정규직인 선미는 준다. 선미와 종철은 각자의 입장에서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해고될 테지만) 어떻게든 합일점을 찾기 위해 애쓴다.
계속 돈을 투자해 키워야 할 아이와 10 그리하여 그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
개월간 꼬박 12만 9천 원씩 내야 하는 력한다. 하지만 그들이 노력하면 노력할
앙피르 서랍장의 의미가 무엇이 다를까? 수록 그들의 삶은 정리되는 것 없이 엉
어차피 이들의 곤궁한 삶에선 앙피르 서 망이 되어간다. 이것은 앞서 말한 노력
랍장도, 계속 자라는 아이도 감당할 수 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반증일
없는 사치일 뿐이다. 수 있을 것이다. 부부는 그들이 처한 현
실을 자신들 안에서 어떻게든 덜어내고
난장판이 되어가는 방 포기하고 결합하여 살아내려 한다. 하지
: 노력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고단한 삶 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제도와 시스템
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들의 삶이 나아
선미와 종철은 출산과 생계에 대하여 질 희망 따윈 없다. 그런데도 야속하게
언쟁하며 끊임없이 행동한다. 그 행동이 ‘똑딱똑딱’ 시간은 흐른다.
란 것이 가구를 옮기고 베개 시트를 벗 종철과 선미가 아이를 낳아 키우기 위
겨내고 옷가지를 정리하는 일상의 몸짓, 해 노트를 펴 놓고 한 달 생활비를 계산
청소와 닮아있다. 하지만 닮아있을 뿐 하는 장면은 이 극의 하이라이트이다.
그 행동이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 부부가 목록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갈수
들이 정리하면 할수록 그들의 방은 점차 록 이들의 생활은 관객에게 낱낱이 까발
난장판이 되어간다. 바닥에는 옷가지들 려진다. 이 장면을 통해 부부가 앞서 누
이 뒹굴고 박스를 붙여놓은 침대는 어긋 려왔던 작은 사치마저 다소 무색해진다.
나 있으며 그 위에 뭉쳐진 이불과 껍데 그들의 가계부 목록에는 그들이 여유를
기를 벗겨낸 베개가 아무렇게나 널브러 부릴만한 작은 숨구멍조차 존재하지 않
져 있다. 그 위에 선미가 위태롭게 모로 는다. 육아를 위하여 절약 정신을 발휘
눕는다. 그리고 129만 9천 원의 앙피르 해 생계와 직결된 항목들만 빼놓고 모든
는 뱉어낸 듯 삐져나온 옷들과 어긋난 것을 삭제해가는 그들. 산악회, TV, 담
서랍의 모양새 때문에 볼품없다 못해 흉 배, 보험, 홈쇼핑, 자동차, 미용, 그리고
물스럽게 보인다. 그들이 노력하면 노력 식비마저 줄인 노트에는 생계를 위한 최
할수록 그들의 삶의 터전은 엉망이 되어 소한의 것들만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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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아이를 키우기에는 턱없이 부족 하게 상황을 알리는 종철. ‘정지냐, 취소
한 생활비를 확인하고 쓸쓸히 노트를 덮 냐’ 라는 선미의 질문에 종철은 의학적으
는다. 그들이 노트에 적어 내려간 것은 로 승산이 없을 것이라 답한다. 꽁꽁 언
살려는 방편이었을까, 포기하려는 방편 종철의 몸을 그러안고 이불을 덮어주는
이었을까. 선미의 품 안에서 종철은 끝내 울음을
터트린다. 면허가 취소되면 더 이상 살
절망의 순간에 부르는 희망가, 아갈 방편이 없는 부부를 보는 관객들은
그 잔혹함 참담한 심정으로 아이의 포기를 예감하
고 함께 절망한다. 하지만 이어 작은 반
이들의 삶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더 전이 등장한다.
참담하고 참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지 암울했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장면이
에 가까운 그들의 순박함 때문일 것이 환기된다. 종철은 테이블에 앉아 색소폰
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되고 소외당 을 손질하며 말한다. 자신은 운이 좋다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자본주의 산물에 고. 면허 취소가 아닌 정지 3개월로, 마
관심을 갖고 부유층의 삶을 동경한다. 트에서 해고되지 않고 3개월 동안 창고
볕 들 구멍 없어 보이는 삶 속에서 그들 일을 하게 되었다고. 100만 원의 벌금을
은 끊임없이 돌파구를 찾고 희망을 꿈꾼 내야 하고, 배달 일을 할 때보다 수입이
다. 그러한 그들의 순박함이 사실적이어 줄었지만 선미는 더 이상 나쁜 일은 없
서 우습고 현실적이어서 잔인하다. 사실 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초반에 진행되는 그들의 소소하고 행복 이야기와 똑 닮은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
한 일상을 보며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서 일어난 아내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웃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복이 어쩐지 를 종철에게 읽어주고 복권을 샀다고 자
부자연스럽고 곧 깨질 것만 같이 위태로 랑을 한다. 어차피 자신들의 상황은 달
워 보였기 때문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라지지 않을 거란 종철의 말에 선미는
질문, 엔딩을 알고 있는 드라마를 보는 배 속에 아이는 다를 거라고, 우리와는
것만 같았다. 다르게 살 것이라고, 희망적이라 말한
낙태하지 않겠다는 선미와 다툰 종철 다. 그런 선미의 말을 뒤로하고 여전히
은 음주 운전을 하고 단속에 걸려 피를 난장판인 방 한편에서 종철은 어눌하고
뽑은 후 집에 들어와 자고 있는 선미 앞 무겁게 색소폰을 연주하며 막이 내린다.
에 선다. 어둠 속 선미를 내려다보는 종 이 마지막 장면이 참혹한 이유는 바로
철의 실루엣에는 절망과 살의가 함께 느 여기에 있다. 절망의 순간에 고개를 드
껴진다. 이어 잠에서 깬 선미에게 담담 는 희망, 그 희망이 아름답다 말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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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종철이 면허 취소가 아닌
정지에 그쳐서 다행이라고, 해고당하지
않고 창고 일을 할 수 있어 잘됐다고 가
슴을 쓸어내릴 수가 없다. 선미를 살해
하지 않은 종철에게 잘했다 다독일 수도
없다. 오늘 산 복권이 당첨될 것이라고,
당신의 아이는 당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격려 또한 할 수 없다. 이것
은 일종의 희망 고문과도 같다. 그들은
포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박탈당
했다. 최악의 상황이 차악의 상황이 되
었다고 하여 이들이 꽃길을 걸을 수 있
는 것은 아니다. 폐허와도 같은 방 한구
석, 거기에서 울려 퍼지는 그들의 희망
가가 공허하게 다가오는 이유,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기 때
문이 아닐까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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