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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1) 고려의 건국과 국가 기틀의 확립
§1. 고려의 건국
1) 10세기 초 동아시아 정세
중국 당 멸망 후 5대 10국 시대 전개
북쪽 거란 성장 → 요를 세우고 중국과 발해와 대립
5대와 외교 관계 맺어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는 한편, 친신라 정책
고려
을 펼쳐 후백제를 고립시키려 함.
ㅇ후고구려(901, 송악) → 마진(904, 철원) → 태봉(911, 철원)
ㅇ고려는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5대와 외교를 관계를 체결하려고 함. 당시 중국은 북중국의 5대가 주도
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오월 등 남중국과 친선 관계를 맺고 있던 후백제를 견제하는 데에 도움이 됨.

2) 고려의 건국(918)
① 왕건의 등장
㉮ 송악의 호족 출신 + 예성강 하구 중심의 호족 세력(해상 무역으로 성장)과 연합하
여 성장
㉯ 궁예 세력에 귀부(895)
㉠ 한강 유역 점령 등 영토 확장 → 궁예의 부하로 전공을 세워 백성들의 신망을 얻
음.
㉡ 금성 지방(903, 수군 이용, 나주) 점령 -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 → 광평성의 시중 지위 차지
㉢ 궁예의 폭정을 계기로 정권 장악(정치 기반 미약, 실정으로 민심 상실)
② 건국
㉮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 전제 정치 → 신하(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들이 궁예를 축
출, 왕건을 왕으로 추대
㉯ 고구려 계승, 국호 ‘고려’(918) → 철원 건국, 연호 천수, 송악으로 천도(919)
ㅇ왕륭이 송악을 바치고 궁예의 부하가 됨,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 왕건을 발어참성의 성주로 임명
ㅇ왕건 :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과 연합하
여 세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궁예의 신하가 되어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
에서 견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 민족의 재통일(936)


1) 왕건의 통일 정책
① 대내적 : 호족 세력 적극 포섭 통합 → 세력 확대
② 대외적 : 신라에 우호적, 중국의 5대와 교류 → 후백제와 경쟁, 후백제 고립 정책
2) 후삼국 통일
① 과정
㉮ 발해 유민 포용 : 발해 멸망(926) 후 왕자 대광현이 유민 이끌고 망명 → 태조는 우대하여 고구려 계 유민 포용
㉯ 신라 병합(935, 경순왕의 항복) → 전쟁 없이 신라 흡수
㉰ 후백제 격파(936) : 지배층 내분으로 견훤이 고려에 귀순(935) → 왕건이 후백제 격파해 통일 달성(936.9., 후백제 멸망,
일리천, 선산 싸움)
ㅇ견훤과 아들 신검이 권력 다툼(신검, 양검, 용검 ↔ 금강)을 벌여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했으나 견훤이 탈출해 고려에 귀순하였다.ㅇ920
년 견훤의 신라 합천 초계 공격 시 왕건이 신라에 원군 파견 → 견훤과 왕건의 사이가 멀어짐 ㅇ927년 경애왕 피살(견훤) → 대구 공산 싸움에
서 왕건 패배(신숭겸 전사)
② 의의
㉮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유민 수용 → 민족의 재통합 달성
㉯ 새로운 민족 문화 발달의 토대 마련
ㅇ고려의 발해 유민 포용 : ‘발해국 세자 대광현이 무리 수만 명을 데리고 와서 귀화하였다.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주어 왕실 족보에
등록하고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고려사- →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934년 대광현이 이끄는 다수의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하였고, 왕건은 그에게 관직을 주어 우대하여 동족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고려에 온 발해 유민 중에는 관리, 장군, 학자, 승려 등이 상당수 있었는데, 태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활용하였다.

§3. 해동 천하 인식
1) 삼국 시대부터 형성된 독자적 천하관 계승
2) 황제국 자처 : ‘황제(천자)’ 칭호 사용
ㅇ자국 영토와 영향력이 미치는 주변 지역을 ‘해동 천하’로 인식함. 요하이동(遼河以東)의 한반도 남방 해양 지역과 북방 대륙을 포함한, 공간·지
리적 범주를 포함한 영역을 가리킨다. 해동에 대응되는 주요 영역은 중국이었는데, 중국을 ‘해서’라고 칭할 정도로 독자적인 영역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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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가 기틀의 확립
§1. 태조의 정책
•취민 유도를 내세워 조세 인하(1/10), 요역 부담 경감, 호족의 가혹한 수취 금지, 흑창 설치(빈
민생 안정책
민 구제) •불교 숭상 : 연등회·팔관회 등의 전통적 행사 중시
•회유책 : 혼인 정책(정략 결혼), 사성 정책(왕씨 성 하사), 관직·토지 하사, 자기 지역에 대한
호족 세력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지방 중소 호족의 자치권 인정)
적극 포섭
•견제책 :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 실시 → 지방 통치 보완
•정계, 계백료서 편찬 :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 제시
왕권 안정책
•훈요 10조 :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 제시(고려 왕실 가훈, 태조 말년)
•고구려 옛 영토 회복 목적, 서경 중시(전진 기지로 개발), 거란 적대시(강경책) → 영토 확장
북진 정책
(청천강~영흥만 국경선 확보)
ㅇ취민유도 : 백성들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유교적 민본 이념을 나타내는 말.
ㅇ흑창 :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하여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 주고 추수 후에 갚게 했던 빈민 구제 기구. 986년(성종 5)에 의창으로 바뀌었다.
ㅇ정계(政誡)와 계백료서(誡百寮書) : 태조가 신하들의 임금에 대한 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지은 책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ㅇ정략 결혼 : 태조는 유력한 호족과의 혼인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군사적 기반도 강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많은 자손을 두어 왕실의
번성도 꾀하였다. 그러나 태조 사후 혜종과 정종 때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등 왕권이 불안정해지기도 하였다.(정주–유천궁, 나주–오다
련, 충주-유긍달, 황주-황보제공, 정주-김억렴 등)
ㅇ태조 왕건의 혼인 정책 : 왕건은 호족의 지원과 호응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력한 호족의 딸과 혼인을
하기도 하였는데, “고려사” 후비 열전을 보면 왕후 6명과 부인 23명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인의 출신지는 황해도와 경기도가 가장 많
으며 전국적으로 고루 펴져 있다. 태조는 부인 29명에게서 왕자 25명과 왕녀 9명을 얻었다.
ㅇ사심관과 기인 제도 - 지방 호족 견제,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함, 우대와 감시
ㅇ사심관 : 태조 18년(935)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항복해 오니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라 하였다. (김)부로 하여금 경주의 사심이 되어 부호장 이하
의 (임명을) 맡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이 이를 본받아 각기 자기 출신 지역의 사심이 되었다. 사심관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중앙의 고위
관직으로 올라온 지방 세력을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그 지방을 통제하도록 한 제도이다. 지방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치안 유
지, 풍속 교정을 맡김, 국가에 큰 공이 있어 중앙의 고관이 된 사람에게 자기 고향의 사심관이 되게 함. 출신지에 대한 일정한 권한 부여(호족
감시 통제, 서울에 거주, 부호장 이하 향리 임명과 치안 유지 담당, 조세 조달 임무)
ㅇ기인제 : 건국 초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볼모(인질)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고문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이를 기인이라 말한
다. -고려사- → 지방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삼아 수도에 두고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자문하게 한 제도이다. 지방 호족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데려다가 지방 행정의 고문 역할을 하게 한 제도
ㅇ훈요 10조
제1조 우리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사원을 짓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게 하되, 후세에 간신이 승려들의
청탁을 받아 각 사원을 서로 다투어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제2조 사원은 모두 도선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다. 신라 말에 사원들을 야단스럽게 세워서 지덕을
훼손하였고,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제3조 만약 원자(元子)가 불초이거든 그 차자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그 차자가 또 불초이거든 형제 가운데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는
자에게 왕위를 전하여 대통을 계승하게 하라.
제4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중국의 풍속을 경모하여 문물, 예악이 다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지만, 나라와 풍토가 다르고 인성이 틀리니 반드
시 구차스러이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어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의관과 제도를 본받지 말라.
제5조 짐은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달성하였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므로, 마땅히 춘하추동의 중간 달에는 100일 지나도록 머물러 안녕을 도모하도록 하라.
제6조 짐이 지극히 바라는 바는 연등과 팔관에 있으니,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바이요, 팔관은 천령과 오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바이다.
후세에 간신이 가감을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것을 금지시키도록 하라.
제7조 임금이 백성의 신망을 얻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백성에게 일을 시키되 시기를 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조세를 적게 해야 할
것이다.
제8조 차현(금강) 이남, 공주강(차령산맥)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등지고 거역하고 있으니 인심도 그러하다. … 중략 … 비록 선량한 백성일
지라도 마땅히 벼슬을 주어 일을 보게 하지 말라.
제9조 관리의 녹은 그 직무에 따라 정하되, 함부로 증감하지 말 것.
제10조 경사를 널리 읽어 옛 일을 거울로 삼을 것. → 훈요 10조는 태조가 말년에 후손에게 내린 가르침으로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바라는
태조의 사상과 정책 방향이 담겨 있다. 불교를 숭상하면서도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했으며(제1조), 풍수지리설을 중시하였다(제2, 5조). 유교 정
치사상의 입장에서 덕치와 애민을 강조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제7조). 제4, 5조는 거란 배격, 북진 정책과 관련이 있다. 서경을 중시하라는 제5
조 에서는 왕실의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연등회, 팔관회를 중시하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ㅇ태조 왕건의 호족 통합 정책
•왕순식은 명주(강릉 지방) 사람으로 본주 장군이 되어 …… 아들 장명을 왕건에게 보내어 600인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으며, 뒤에 자제와 더
불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협력할 뜻을 보이니 태조가 왕씨 성을 하사하고 대광 벼슬을 내렸다. …… 태조가 신검을 토벌할 때 순식은 명주에
서 자기 병사를 거느리고 참전하였다. -“ 고려사”-
•신성왕태후 김씨는 신라인 잡간 억렴의 딸이다.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하니 태조가 이를 후히 대접하고 돌아가
왕에게 고하라 하며 이르기를 “지금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니 그 덕이 크도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하여 사위와 장인의 친분을 길이 하고자
하노라.”하니, 김부가 답하기를 “우리 백부 억렴에게 딸이 있어 용모가 두루 아름다운지라 이 딸이 아니면 내정을 고루 갖출 수 없을 것이다.”하
므로 태조가 이를 취하여 안종을 낳았다. -“ 고려사”- →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
하거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인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호족 세력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혼인 정책의 부작용으로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 왕권의 불안정(혜종·정종) : 왕자와 외척들과의 왕위 계승 다툼 ← 정략 결혼이 원인


ㅇ혜종(무, 943-945) → 정종(요,945-949) → 광종(소, 949-975) → 경종(976년 시정 전시과<중앙 관료의 경제적 기반 보장>)
ㅇ왕규의 난 : 945년 광주 호족, 혜종 때 광주원군(태조 16비 소생)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반란 → 혜종 사후 정변 → 서경 왕식렴군이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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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종(949-975)의 개혁 정치 : 공신과 호족 세력 억압, 왕권 강화
노비안검법 •국가 재정 기반 확대, 공신·호족의 경제·군사적 기반 약화 도모
(956)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해방 → 양인 확보 통한 국가 재정 확충
과거 제도 •후주 귀화인 쌍기 건의,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진 세력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 시도, 개인
시행(958) 의 능력 중시,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 마련
공복 제정 •관리 기강과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함[관리들이 입는 예복, 자색, 단색, 비색, 녹색으로 구분]
국왕의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광덕, 준풍 등) 사용, 개경을 ‘황도’라고 부름 → 국가적 위상과
권위 강화 왕권 과시 •외척, 공신, 호족 세력들을 과감하게 숙청(←왕권 강화책에 반발하는)
ㅇ노비안검법 : ‘광종 7년(956)에 노비를 조사해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으므로, 주인을 업신여기는 풍속이 크게 유행하였다. 사람 들이 다 수치스럽게 여기고 원망하였다. 왕비도 간절히 말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사”- →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전쟁 포로, 빚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기 위한 법이다. 이에 따라 양민이 증가하였으며, 양민 증가로 인하여 국가 수입이 늘어나고 국방력이 강화되었다. 호족의 노비들은
유사시에 군사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노비안검법에 의해 노비가 풀려나면 호족의 군사력이 자연스럽게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효
과가 있었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 실시에 귀족들은 매우 강하게 반발하였다. 더욱이
노비였던 자가 옛 주인을 찾아가 행패를 부린 일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호족들은 노비안검법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삼국 이전에는 과거법이 없었다.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이 쌍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과거로 인재를 뽑게 하였다. 이때부터 문풍(文風)이 일어났다. ……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는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는 것이 많아
서 관복 제도도 우선 신라에서 물려받은 그대로 두었다. 광종 때에 와서 비로소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이때부터 귀천과 상하의 차별이 명
확해졌다. -“고려사”-
ㅇ고려, 황제국을 자처하다 : “해동의 천자는 지금의 부처님이라, 하늘을 도와 교화를 펴러 오셨네. 세상을 다스리는 은혜가 깊으니, 예나 지금이
나 드문 일이네. 외국에서 친히 달려와서 모두 믿고 의지하니……. - 「풍입송」, 『고려사』 - → 「풍입송」은 연회가 끝날 무렵 왕과 신하가 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임금을 ‘천자’로 부르며 ‘부처’와 같은 고귀한 존재로 칭송하고 있다. 고려는 건국 당시부터 황제국을 칭하며 천수(태조), 광덕,
준풍(광종) 등 독자적 연호는 물론 폐하, 짐(朕), 태자(太子), 황후(皇后) 등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고려는 이처럼 황제국을 자처하며 자국
을 중심으로 세계(천하)를 인식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천하관)은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 주변의 거란(요), 서하 등도 지니고 있었다.

§4. 성종(981-997)의 개혁 :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 마련, 유교 정치의 본격화


•신라 6두품 출신 유학자들의 정치 참여 → 최승로의 건의 수용하여 유교 정치 실시
•국정 쇄신책 :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시정의 득실을 논하게 함 → 정책 건의서 제출 요구(정치 비판, 정책 건
의) → 최승로가 시무 28조 올림
•유교 정치 이념 도입 : 최승로의 시무 28조[유교 사상에 입각한 정치 사회적 질서 개혁안]
정치 상황 •최승로의 시무 28조 수용 : 유교의 진흥, 불교 행사 억제, 외관 파견 제안 → 유교 정치 이
념을 바탕으로 한 통치 체제 정비(문치주의 전통 확립) ※광종의 지나친 왕권 강화 정책 비판
•과도한 재정 낭비 가져오는 불교 행사 억제 : 연등회와 팔관회 일시적 폐지
•5대 왕[태조~경종]의 치적과 잘잘못 평가하여 교훈(정치의 잘잘못을 밝혀 본받을 것과 경계할 것을 성종에게 권하
는 ‘오조정적평(五祖政績評)’ 올림)
유교 정치
•6두품 출신의 유학자가 국정 주도,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한 통치 체제 정비
질서 강화
교육 제도
•국자감과 향교 설립(유학 교육 장려), 지방(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파견
정비
과거 제도
•과거 출신자 우대,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유도
정비
•중앙 관제 정비 : 2성 6부제 중심의 중앙 관제 마련, 중추원·삼사 설치(송 관제 수용)
통치 기구
•도병마사·식목도감 설치(고려의 독자적 기구)
개편
•지방 제도 정비 : 전국에 12목 설치하여 지방관 파견, 향리 제도 마련 → 지방 세력 견제
의의 문치주의 전통 수립, 신라의 골품제 사회보다 개인 능력을 중시(신라보다 개방적)
ㅇ국정 쇄신책 :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앰, 국정 쇄신 위함. ㅇ최승로 : 최은함의 아들, 경주 출신, 신라 항복시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벼
슬함,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 유교 사상에 입각한 28조의 개혁안을 성종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중 22조가 전해진다.
ㅇ시무 28조. 최승로의 개혁안
•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은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일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익되는 일과 손
해되는 일을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군현에 수령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임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로
워 시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 청컨대 외관(外官)을 두소서. 비록 한꺼번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10여 곳의 주현에 1명의 외관을
두고, 그 아래에 각각 2~3명의 관원을 두어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맡기소서.
•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만 사방의 풍습이 각기 그 토성(土性)에 따르게 되니 다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예악(禮樂)ㆍ시
서(詩書)의 가르침과 군신ㆍ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비루함을 고쳐야 되겠지만 그 밖의 거마(車馬)ㆍ의복의 제도는 우리의 풍속대
로 하여 사치함과 검소함을 알맞게 할 것이며 구태여 중국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ㅇ성종의 지방 제도 정비 :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ㅇ최승로의 시무 28조
제7조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은 집집마다 가서 돌보고 날마다 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수령을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익되는
일과 손해되는 일을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외관(外官)을 두십시오. --지방관 파견을 통한 중앙 집권화 추구
제13조 우리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회를, 겨울에는 팔관회를 베풀어 사람을 많이 동원하여 힘든 일을 시키니, 이를 줄여서 백성이 힘을 펴게
하십시오. --불사를 폐지하여 민생 안정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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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신하를 예로써 대우할 때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입니다.
제19조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공신 및 호족 세력의 포용
제20조 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곧 오늘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유교 정
치 이념의 수용 -고려사절요- → 고려 전기 성종은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중앙 고위 관료들에게 그동안의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정책을 건
의하도록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유교 사상에 입각한 시무 28조를 올렸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체
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전국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화의 기초를 세웠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
사의 억제 등을 요구하였다. 성종은 이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2성 6부의 중앙 통치 기구 개편, 12목 설치 등이 대표적이다.

(3) 통치 체제의 정비
§1. 중앙 통치 체제 ※건국 초 : 신라, 태봉 제도 수용 → 통치 조직 운영
특징 •체제 안정 후 → 당의 3성 6부제, 송의 제도 수용 → 고려의 실정에 맞게 개편 운영(2성 6부제)
•2성 : 중서문하성(최고 관서로 문하시중이 국정 총괄, 정책을 심의·결정), 상서성(상서령, 6부
총괄하며 정책 집행을 담당) ※6부는 사실상 중서문하성이 지휘
2성 6부
-재신(국가 정책 심의, 2품 이상) -낭사(정치의 잘못 비판, 3품 이하)
•6부 : 상서령, 이·병·호·형·예·공부 - 정책 집행 담당
중추원 •군사 기밀(추밀, 2품 이상)과 왕명의 출납(승선) 담당 - 중서문하성과 통치 조직의 핵심
삼사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담당
어사대 •관리의 비리 감찰
대간 •어사대 관원과 중서문하성의 낭사 → 정치 운영의 견제와 균형 도모(간쟁, 봉박, 서경권 행사)
•도병마사(국방상 중요 사항 논의)와 식목도감(법률, 제도 제정) : 귀족 합의 기구, 재신(중서문
독자 기구 하성 고관)과 추밀(중추원 고관)이 합의로 국가의 중대사 결정 → 국제 정세, 국정 운영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함,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
ㅇ당의 3성 6부와 송의 삼사와 중추원 제도 등을 모방했으나, 2성 6 부제를 실시함, 도병마사· 식목
도감 등 합의제 기구 설치 등 고려의 실정에 맞게 운영되었다. 재신과 추밀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대간은 국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 조화를 추구함
ㅇ중서문하성 : 중서문하성은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로 구성되는 재부(재신)와 3품 이하의 관리로 구
성되는 낭사로 구분되어 있었다. 재신은 국가의 정책을 심의, 낭사는 정치의 잘못을 비판(정책을 건
의하고 잘못을 비판)
ㅇ대간 : 어사대와 중서문하성의 낭사로 구성된 대간은 왕의 잘못이나 정책을 잘못을 비판(논)하는 간
쟁과 잘못된 왕의 명령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 등을 통해 지위는 낮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들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 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ㅇ도병마사와 식목도감 : 귀족 합의 최고 재부 국정 총괄
중서문하성
기구, 고관인 재신과 추밀[주요 관부의 2성 6부 낭사 간쟁, 봉박
최고직 겸함]이 함께 모여 국가의 중대 상서성 - 6부 정책 집행
사를 결정짓는 회의 기관, 고려 자체의 추밀 군사 기밀
중추원
필요에 의하여 만든 독창적 기관 → 고 승선 왕명 출납
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보여줌 어사대 감찰 기구
ㅇ도병마사는 성종 989년에 설치, 군사 삼사 화폐, 곡식 회계
기밀과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임시 기
구(고려 전기) → 고종 말년 도당(재추 전원 회의 참석, 국정 전반 대사 의논 결정) → 원 간섭기인
1279년 충렬왕 때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서 구성원이 확대되었고, 국정 전반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최고 정무 기관으로 발전
ㅇ식목도감 : 국내 정치에 관한 법의 제정․각종 시행 규칙을 다루던 회의 기구(성종 말 – 현종 초)
ㅇ호부와 삼사의 차이 : •공통점 : 재정 운영 관청 •차이점 : 호부(인구·토지 파악), 삼사(재정 회계 기관)

§2. 중앙 통치 조직의 특징
1) 국왕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을 막고 권력의 균형 추구하는 방향으로 정비
2) 국왕은 최고 정책 결정자로 국정을 주도 → 실제 운영은 군신 간의 합의가 중시됨
§3. 지방 행정 제도 : 성종 때 정비 시작 → 현종 때 완료
건국 초 •지방 세력(호족 세력)이 강하여 효율적인 지방 통치 어려움(지방관 미파견) → 호족의 자치 인정
•12목 설치, 지방관 파견(향리 제도 시행) → 현종 때 4도호부 8목 → 중앙 집권화 추진 : 전국을 5도
성종 양계·경기(개경과 그 인근 지역으로 편성)로 정비, 그 안에 3경, 4도호부, 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 설치
•지방 세력 중 일부 : 향리로 전환
•일반 행정 구역, 안찰사 파견 → 도내 지방 순찰
5도
•도 아래 주·부·군·현을 설치하여 수령(지방관) 파견(지방 호족들은 향리로 전락)
•군사 행정 구역, 동계·북계 → 북방의 국경 지대에 설치, 병마사 파견
양계
•국방상 요충지에 진 설치
특징 •지방관 파견 :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음 → 속현, 향·부곡·소는

4
주현의 수령을 통해 통치(중앙 정부의 지배 받음)
•3경 중시 :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 → 개경, 서경(평양), 남경(한양)
특수 행
•향·부곡·소 설치 : 일반 군·현에 비해 차별 대우 → 주현의 수령이 향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
정 구역
향리 •조세·공물의 징수·요역 징발 등 행정 실무 담당, 업무는 자손에게 세습
ㅇ특징 : 고려의 지방 행정 제도는 중국의 군현제를 기본으로 만들어졌으나 5도(일반 행정 구역, 안찰사
파견, 상설 행정 기관 없음>)와 양계(군사 구역, 병마사 파견)의 이원적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5도는
파견되어 도내 지방을 순찰하고 수령을 규찰함, 중앙 통제력이 지방까지 속속들이 미치지 못함, 군․현․
진 까지 지방관 파견 ㅇ주현과 속현 : 주현(지방관 파견)보다 속현(지방관 파견되지 않음)이 더 많음
ㅇ8목 : 주․군․현을 관장하는 지방 행정의 핵심 단위 ㅇ3경제 :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설치, 서경은
태조, 동경은 성종, 남경은 문종 때 설치되었다. - 중기에 동경 대신 남경(서울) 설치
ㅇ특수 행정 구역 : 향과 부곡은 농업 담당, 소에는 도자기, 종이, 먹, 철 등 수공업이나 광업에 종사하
는 주민들이 거주. 특징 : 이들의 신분은 양인이지만 일반 군현민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였고, 원
칙적으로 거주 이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전쟁 포로 집단적 수용지, 군현이 반역이나 적군에 투항하
는 등 중대한 범죄가 발생하면 격을 강등
ㅇ향리의 영향력 강화 - 신라 말․고려 초기의 중소 호족 출신, 집권적 지배 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 실무자가 됨, 속현과 특수 행정 구역은 주현을 통해 간접 지배(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 받음), 향리가 실제 행정 사무 담당(조세․공물 징수, 노역 징발), 토착 세력으로서 향
촌 사회의 지배층이며 지방관보다 영향력이 컸음
ㅇ고려의 향리 : 고려 시대 군현은 모두 500여 곳이었다. 그중에서 수령이 파견되어 직접 다스린 군현은
불과 110여 곳이며, 나머지 400여 곳의 속현은 수령의 통제를 받는 향리가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였
다. 향리는 신라 말 호족에서 기원하였다. 초기에는 독자적인 행정 조직을 갖춘 지방의 세력가였으나,
성종 이후 지방 행정 제도가 정비되면서 종래의 독자성을 잃고 중앙 집권 체제에 포섭되어 그 힘이 많
이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수령은 짧은 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다스려야 했고, 농업 장려, 세금 징수, 재
판 등 업무가 많았기 때문에 각종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향리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특히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에서는 향리가 사실상
수령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속현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속현을 없애고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으로 그 지위가 크게 낮아졌다.

*초기에는 속
현의 수가 많
았음. 후대로
가면서 점차
감소함

§4. 군역 제도와 군사 제도 지방 행정 조직 수 :
관리가 파견되지 않
•2군(국왕의 친위 부대) 6위(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 담당)로 구성 는 속군, 속현과 향·
중앙군 •직업 군인, 복무 대가로 군인전 지급, 역을 자손에게 세습, 전공 세워 부곡·소는 향리가
무신으로 신분 상승 가능 행정 업무를 담당하
•주진군(양계에 주둔, 상비군, 국경 지역의 방어 담당), 주현군(5도의 일 였는데, 주군, 주현
반 군현에 주둔, 지방관 지휘, 치안 유지 및 외적 방어 담당)으로 구성 의 수령을 통해 중
지방군 앙 정부의 통제를
•군적에 오르지 못한 일반 농민, 16세 이상 60세 이하 양인 장정으로
받았다.
편성

§5. 교육 제도와 관리 선발 제도
1) 교육 제도
① 유교 정치 이념 강조로 유학 교육 중시
② 학교 설치
㉮ 국자감(국학) : 개경에 설치된 국립 대학, 유학 교육(유교적 소양 갖춘 인재 양성 주력, 국자학·태학·사문학 –
각기 3품, 5품, 7품 이상 관리의 자제 입학) + 기술 교육(국가 운영에 필요한 전문 인력 양성, 율·서·산학 - 양민
이상 자제면 입학 가능) 실시 ㅇ율·서·산학 : 율학은 율령 교육, 서학은 서예 교육, 산학은 산술 교육을 의미
㉯ 향교 : 지방(각 주)에 설립,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 양성
2) 관리 선발 제도 – 과거와 음서로 선발, 반역자, 천인, 불충한 사람, 불효자, 향부곡소민은 응시할 수 없음.
•종류
과 -문관 선발 : 유교적 소양과 실무 능력 갖춘 인재 선발, 제술과(문학적 재능 시험), 명경과(유교 경전
거 에 대한 이해 능력 시험), 중앙 관리, 일부 향리, 또는 그 자제가 응시
-기술관 선발 : 잡과(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 시험), 일반 백성도 응시 가능

5
-승과 : 승려 선발, 승계 부여 –무과는 미실시
•응시 자격 : 법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가능 •의의 : 신분보다는 개인의 학문 능력을 더욱 중시
음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자손에게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주는 제도
서 •의미 : 귀족 관료의 지위 세습 가능 → 고려 관료 체제의 귀족적 성격을 보여 줌
① 과거제 실시 의의 : 지배층 사이에서 학문 능력을 중시하는 분위기 형성, 지방 세력의 중앙 정치에 진출할
기회 부여 → 신라 골품제 사회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개방적 사회로 성장
ㅇ음서의 범위 : 고려 시대에는 공신과 종실의 자손 외에도 5품 이상 관료의 아들, 손자, 사위, 외손자, 동생, 조카 등에게도 음서의 혜택을 주었
다. 1인당 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 원칙, 실제로 여러 사람에게 줄 수 있었음 ㅇ무과 : 예종 때 잠깐 실시, 문관 반대로 폐지, 공양왕 때 정식
으로 실시 ㅇ과거와 음서 : 고위 관리에 오르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유리 → 음서로 관리가 되더라도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음.
ㅇ5품 이상 관리는 특별한 신분만 될 수 있었을까? : 신라에서는 골품제로 인해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제6관등(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제5관등(대아찬) 이상의 관직은 모두 진골이 차지하였다. 고려에서는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상속이 가능한 공음전이 지급되었고, 그 자
손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고려에서는 5품 이상의 관리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9품 관직에 나
아가는 것은 어려웠지만, 일단 임명된 후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5품 이상의 관리로 승진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 지방의 향리나
직업 군인도 5품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ㅇ사학 발달 : “유인저는 음서로 종7


품 위위주부라는 관직에 임명되었
고, 예종 3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종4품 합문지후에서 시작하여 관직
을 두루 거쳐 종2품 참지정사에 이
르렀다.” →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과거 합격자의 승진 비율 : 고위 관직에서 과거 합격자의 유인저는 과거를 보았다. 과거에 합
비율이 높음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음서로 관직에 처음 격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면 관
나갔더라도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리 등용 제도 직 승진에 조금 더 유리하였기 때문
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과거 응시를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사학 열풍이 불었다. 사학으로는 최충이 세운 9재 학당 등 사학 12도가
유명하였다. 이들 사학은 대부분 지공거(과거를 관장하는 고시관) 출신들이 세웠고, 과거에서 중시되는 과목 위주로 가르쳤기 때문에 과거에 응
시하려는 문벌 자제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국학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이 실시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전개
1) 문벌 귀족의 등장
① 새로운 지배층 형성 :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의 확립, 신라 말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 + 6두품 계열의 유학자들 중심
② 문벌 : 이들 중 일부가 여러 대에 걸쳐 다수의 고위 관리를 배출한 가문
③ 대표 가문 : 경원 이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철원 최씨, 해주 최씨, 남평 문씨, 강릉 김씨, 평산 박씨
등 –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 관직에 나갔으며 한정된 통혼권을 행사함
ㅇ귀족 : 혈통, 문벌, 재산, 공적 등에 의해 일반 민중과 다른 특별한 정치적, 법제적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이
나 그 집단

2) 특징
① 정치면(음서 출신)
㉮ 중서 문하성․중추원 재상으로 정국 주도(정치 주도)
㉯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 진출 → 요직 독점 → 정치 권력 장악
㉰ 일부는 과거 급제자를 2대 또는 3대에 걸쳐 배출하여 가문의 이름을 떨치기도

② 경제면(공음전) : 국가에서 토지와 녹봉 받음<전시과(과전), 공음전의 혜택(세습 허용)>, 권력 이용하여 막대한
토지 소유 → 풍요로운 생활 누림
③ 사회면 : 특권 유지 노력(왕실 및 다른 문벌과 중첩 혼인 관계 맺어 결속 강화)
§2. 문벌 사회의 변화
1) 거란 침입 격퇴 후 본격적으로 형성 → 한동안 안정 누림
2) 12세기 : 여진 성장으로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변화 → 금의 군신 관계 요구 → 이자겸 등이 수용(대부분 신하
반대함, 정권 유지위해 수용) → 북진 정책 타격
3) 문벌 사회의 모순 드러냄 : 금과 군신 관계 맺는 문제로 갈등, 일부 문벌이 권력 독점하고 막대한 토지 차지하
면서 이를 둘러싸고 지배층 내부 분열 발생
§3. 문벌 귀족 사회의 동요
①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 : 12세기 이후 정치 권력과 경제적 혜택을 둘러싸고 분열 → 과거로 중앙에 진출한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들이 문벌의 권력 독점에 대한 반감을 드러냄
② 문벌 귀족 사회의 동요 :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발생

6
§4.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에 드러난 사건
1) 측근 세력의 성장 : 과거를 통한 지방 출신 관리들 중 일부가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 강화, 보좌하면서 개혁
정책 추진 → 문벌 귀족 비판(정치, 경제적 지위 차지하기 위함)
ㅇ측근 세력 : 문벌 귀족을 비판하면서 정계에 진출한 신진 관리들 중에서 왕의 측근 세력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예종 때의 한안인이다.
ㅇ굴비(屈非) : 소금 절여 말린 조기를 임금에게 진상하면서 ’선물은 보내되 굴한 것은 아니다‘에서 비롯됨
2) 이자겸의 난(인종 4, 1126)
① 배경 : 경원 이씨 가문의 권력 독점(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 - 11세기 이후 대표적인 문벌 귀족 → 7대 80여
년 간 정권 장악(문종~인종)) → 이자겸이 예종과 인종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 독점
ㅇ외척 세력 : 이자연의 세 딸(→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함) → 이자겸의 딸(→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 →
예종의 측근 세력인 한안인 일파를 축출하고 인종(14세)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함
ㅇ이자겸은 예종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내 왕의 장인이 되었다. 예종 사후 어린 인종이 즉위하면서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은 권력을 독점하였고,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척준경과도 사돈 관계를 맺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
다. ㅇ척준경 : 고려 중기 무신, 윤관을 따라 여진 정벌에 참여, 이자겸과 함께 군사 일으킴, 왕의 밀지를 받은 최사전의 설득으로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냄, 이후 권세부리다가 정지상의 탄핵으로 유배됨, 이자겸의 심복이었지만 인종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② 전개 : 이자겸의 권력 확대 → 이자겸 세력[문벌 귀족 중심의 질서 유지, 금과 타협 성향]과 왕의 측근 세력 간


대립[이자겸 권력 독점에 반발] → 인종과 측근 세력의 이자겸 제거 시도 → 이자겸의 반격(궁궐 침입, 인종
독살 기도), 척준경과 함께 왕의 측근 세력 제거(반대파 제거)와 권력 장악(인종 감금, 1126, 이자겸의 난)
→ 이자겸․척준경의 불화 → 인종이 척준경 설득하여 이자겸 제거(1127, 영광 귀양) → 척준경은 정지상의
탄핵 받고 축출됨 → 이자겸 세력 몰락
③ 결과 : 반란 진압, 왕실의 권위 하락, 민심 동요, 문벌 사회의 분열 심화
ㅇ내시지후 김찬, 내시녹사 안보린, 최탁, 지녹연 등이 이자겸 세력인 병부상서 척준신, 내시 척순, 지후 김정분 등을 죽이자 이자겸 일파인 척준
경과 이자겸 아들인 현화사승 의장이 무장하고 이들을 공격함 ㅇ이자겸의 난 결과 : 서경 천도론 대두, 정지상 득세, 민심 동요, 금 압력 가중
(1125, 요 멸망), 왕의 권위 실추 → 경원 이씨는 문종 때부터 7대 80여 년 동안 왕실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리면서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
였다. 특히 이자겸은 백성의 재산을 빼앗는 등 각종 부정을 일삼고 반대파를 숙청하였으며 왕권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을 차지하였다. 그는 十八
子 성씨 즉,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十八子위왕설’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여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3)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인종 13, 1135) : 보수적 관리와 개혁적 관리 사이의 대립
① 배경
㉮ 인종의 정치 개혁 추진(묘청, 정지상 등 서경 세력 이용 → 실추된 왕권 회복,
민생 안정, 국방력 강화) - 왕권 강화 → 서경파 성장
㉯ 금의 사대 요구에 대한 서경 세력의 비판
② 주장
㉮ 보수 세력(김부식, 개경 귀족 세력)과 개혁 세력(묘청, 정지상, 지방 출신 세
력) 사이의 대립
㉯ 묘청 세력의 주장 - 풍수 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 주장, 황제 칭호 사용과
금 정벌 주장 → 보수적인 개경 문벌 귀족 세력 누르고 왕권 강화하면서 귀족
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주적인 혁신 정치 시행하려 함 → 인종이 서경에 대화궁 궁궐 축조하고 여러 차례
서경에 행차(1128.8. 명당 잡게함 → 11월 공사 착수)
㉰ 개경 귀족 세력(김부식 중심)의 주장 : 유교 이념에 충실하여 사회 질서 확립,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과 사
대 관계 주장(금과의 충돌은 송에 이용당함)
③ 전개 과정
㉮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 →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 개경 세력의 반대로 천도 실패 → 서경 천도 통한
정권 장악이 좌절되자 묘청 세력이 서경에서 반란(1135. 정월, 국호 대위국, 연호 천개, 서북 지방 주민 지
지로 서북 지방의 대부분을 점령) → 김부식의 관군에 의해 약 1년 만에 진압(1136.2.)
④ 결과 :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심화 → 이후 무신 정변으로 문벌 귀족 몰락
⑤ 의미 : 금의 사대 요구에 대한 반발, 지역 세력 간의 대립(개경의 문벌과 서경 출신 관료), 풍수지리설이 결부
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구분 서경파(지방세력) 개경파(중앙귀족)
지방 출신의 신진 관리(묘청, 정지상), 백
중심 인물 보수적 관리(문벌 귀족, 김부식)
수한(일관)
사상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 •보수적 유교 정치 사상
서경(평양) 천도, 칭제 건원(稱帝建元), 금 서경 천도 반대, 사회 질서 확립, 금의
주장
국 정벌 사대 요구 수용(민생 안정 내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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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식 고구려 계승 이념, 북진 정책 신라 계승 이념
성격 자주적, 개혁적 사대적, 보수적
ㅇ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 제가 보건대 서경 임원역의 땅은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 들이 말하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짓고
옮겨 앉으시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금이 선물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요, 주변의 36나라가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고려사”- ㅇ인종의 천도 계획 포기 : 길한 땅인데 대화궁 준공 직후 벼락으로 파손됨, 인종이 서경 행차 도중 폭풍우 만나 인명 살상됨
ㅇ김부식의 주장 : 금년 여름 서경 대화궁에 30여 군데나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서경이 만약 좋은 땅이라면 하늘이 이렇게 하였을 리없습니다.
또 서경은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거둥하시면 농작물을 짓밟을 것입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뜻과 어긋납니다.
-“ 고려사”- → 묘청과 김부식의 사상적 차이점 : 묘청은 풍수지리설과 낭·불 양가를 바탕으로 하였고, 김부식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대립하
였다. 대외 정책의 차이점 : 묘청은 금국 정벌·칭제 건원을 주장한 것으로 미루어 자주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당시 금이 요를 멸망시킬 만큼 강했기 때문에 금에 대한 사대 관계를 통한 고려의 안정을 더욱 중시하였다.
ㅇ신채호의 서경 천도 운동 인식 : (고려 인종 13년)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王師)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
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실상은 낭가(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
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
일대사건> → 일제 강점기에 신채호는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김부식과 대립시켜 문벌 귀족의 보수적, 사대적 성향에 대항했던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평가하였다.

3. 송, 거란, 여진과의 관계
(1) 북진 정책의 추진과 송과의 교류
§1. 10세기 초 상황
1) 중국 : 당 멸망 → 5대 10국으로 분열 → 송 건국(960)
2) 거란 건국 : 916년 야율아보기 거란족 통일 → 926년 발해 멸망
3) 금 : 12세기 초 만주에서 여진족이 부족을 통일하고 건국(1115)
① 송과 연합하여 요 멸망 → 송까지 강남으로 몰아내고 화북 지방 차지
② 동아시아에서 금과 남송이 대립하는 형세 전개
4) 발해 멸망 후 : 대씨 중심으로 단결하여 후발해 성립 → 934년 대광현 고려 이주
5) 정안국(936-986) : 발해 유민 열만화가 압록강 일대에 건국 → 거란의 침입으로 패망(986)
6)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 전에 고려에 친선 관계 맺고자 접근 → 고려의 거란 배척
§2. 고려의 친송 북진 정책
1) 북진 정책 : 고구려 계승자 자처 → 태조 때 서경(평양) 중시(북진의 전진 기지), 청천강까지 영토 확장 → 거란
배척
2) 송과의 교류 : 중국의 발달된 문물 수용 목적, 송은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긴밀한 우호 관계 유지
(2) 거란의 침입과 격퇴(10~11세기)
§1. 배경
1) 거란의 성장 : 발해 멸망(926), 중국을 압박하면서 세력 확장 → 송이 등장하자 고려와 친선 관계 맺으려 함.
2) 고려 : 발해 유민 수용, 거란에 대한 강경책,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추진 → 거란과의 관계 악화
§2. 거란의 침략 – 송을 공격하려던 거란은 양국의 관계를 끊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려에 침략
•원인 :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 옛 땅 요구, 거란이 송과의 외교 단절 요구(송과 단교한 뒤 거란과 통
1차(성종 12,
교 요구)
993년, 소손녕
•결과 : 서희의 외교 담판(993, 안융진, 여진에 대한 협공 제안) → 송과의 단교 약속, 거란
80만 대군) 침입
과의 교류할 것 약속 →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획득(994, 여진족 축출)
2차(현종, 1010, •구실 : 강조의 정변, 고려의 송과의 친선 관계 유지
요 성종 40만군) •전개 : 강조 패배, 개경 함락, 현종의 피난(나주) → 고려가 신하의 예를 갖춘다는 조건 제
침입 시 → 외교와 군사 전술로 격퇴 → 거란 철수 → 양규의 활약으로 거란군 피해
3차(현종, 1019) 현종 입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침입 →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1018) → 강
침입 감찬 등이 귀주 대첩 승리(1019)
ㅇ강동 6주 : 중국과 연결되는 길목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오는 북방 민족의 침략을 방어할 숭 있는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다. ㅇ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동 6주의 획득 :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거란이 고구려
를 계승하였으므로 옛 고구려 영토는 모두 거란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옛 고구려 영토
역시 고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양국은 이러한 명분론을 내세웠지만 회담의 핵심은 여진족 문제였다. 당시 거란은 여진, 송, 고려가 연합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서희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거란과 고려가 여진을 협공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이에 소손녕은 기뻐하며 두 군대가 만나
는 지점인 압록강 부근의 강동 6주를 내놓았다. 그 후 이 지역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였다. ㅇ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하는 한편, 송의 연호 대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려는 압록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성종은 이 지역의 여진족을 축출하는 한편, 성을 쌓고 관리를 파견하여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ㅇ강감찬 : 1018년 흥화진 전투, 냇물 막았다가 터뜨려 거란군 격파) → 1019년 정월 거란군 개경 근처 도달하였으나 함락할 수 없자
군사 돌려 돌아감 → 귀주 공격하여 퇴각하는 거란군 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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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과 및 영향
1) 고려‧송‧거란 사이에 세력 균형 유지 → 약 100년간 평화 유지 → 경제,
문화적 교류 활발, 대내외적 안정으로 고려에서 문벌 중심의 사회 전개
2) 국방력 강화 : 개경에 나성(강감찬 건의, 1029, 현종 때 도성 수비 강화)
축조,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 장성(덕종-정종까지 12년 공사, 압록강~도
련포, 거란과 여진 침략에 대비) 축조
ㅇ천리장성 : 거란의 침입 이후 북쪽 국경에 쌓은 성(1033-1044). 압록강 어귀에서 도련포에 이 강동 6주
르는 총길이 1천여 리를 돌로 쌓은 성으로 여진과 국경을 이루었다.
(3) 여진 정벌과 9성의 개척(12세기)
§1. 여진족의 성장 : 말갈(오랫동안 고구려에 복속, 부족 단위 생활) → 여진(발해 멸망 후)으로 불리면서 반독립적인
상태로 세력 유지(고려를 상국의 나라로 섬김=부모의 나라, 평화 관계 유지)
§2. 고려의 여진족 회유, 동화 – 두만강 연안의 여진
1) 초기 :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평화로운 관계 유지
2)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포섭 – 무역 허락하고 귀화인에게 가옥과 토지 하사
3) 12세기 초 완옌부의 여진(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족 통일) : 숙종 9년(1104) 고려에 복속된 여진족을 토벌하여
함흥 차지 → 도망자를 쫓아 국경 침범(정주에 이름)
ㅇ여진 지배자 변천 : 영가(우야소, 아골타의 숙부) → 우야소(영가의 조카) → 아골타(우야소 동생, 1115 금 건국)
ㅇ숙종 때 영가가 여진족을 통합한 후 두만강 유역 진출 → 우야소가 고려에 복속된 여진 부락을 공략 → 여진을 따르지 않는 도망자 추격 →
함경도 천리 장성 부근의 정주까지 진출 → 고려군과 충돌

§3. 여진 정벌 과정
1) 12세기 초 여진족의 통합(완옌부의 추장 우야소)과 세력 성장 : 도망자 쫓아 고려 국경 부근 정주까지 남하
(1104, 우야소)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 → 고려는 임간<문하시랑 평장사>, 윤관<추밀원사> 파견하여 방어 →
고려군 패배 → 윤관 화의
2) 별무반 편성(윤관 건의) → 여진 토벌(예종, 1107) → 동북 9성 축조(공험진 선춘령에 기념비 건립) → 윤관 공
로 시기자 존재, 여진족의 반환 요청과 거란과의 대치 상황을 고려하여 1년 7개월 만에 9성 반환(1109, 수비의
어려움과 여진의 요구로 반환<여진의 조공 약속>, 거듭된 공격)
§4. 여진의 강성
1) 아구다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 건국(1115, 아골타 건국) → 형제관계 요구(1117) → 요 멸망(1125) → 송
을 남쪽으로 축출한 후 고려에 군신 관계 요구(1126)
2) 이자겸이 전쟁을 피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금의 요구 수용[대부분 신하가 반대] → 무력 충돌 피함 → 북진 정
책 타격
ㅇ별무반 :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고려군이 매번 기병에게 패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특수군, 윤관의 건의로 조직, 17만명, 숙종 때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다. ㅇ동북 9성 : 적극적인 영토 확장책에 따라 사민을 실시하였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길주 지방설, 두만강 유역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9성 설치 이후 여진족의 침입이 이어지자,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려주
었다. ㅇ여진 정벌 : 숙종과 예종이 여진 정벌을 단행한 배경은 윤관 등을 이용하여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결국 동북 9성을 반환함으로써 정벌을 주도한 세력의 입지는 현저히 약회되었다.
ㅇ척경입비도(고려대학교박물관) : 윤관이 동북 9성을 쌓은 뒤, 고려의 국경임을 알려 주는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
ㅇ고려 지배층의 대외 인식
1. 거란에 대한 강경한 태도 : 10월에 거란 사신이 낙타 50필을 가지고 왔다. 태조가“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약속을 배신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처럼 도리가 없는 나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을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국교를 단절 하고
그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두었더니 모두가 굶어 죽었다. -“ 고려사”- → 태조는 북진 정책
을 추진하면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2. 금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 : 인종 4년 대부분 신하들은 사대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 경이“옛날의 금은 소국으로
거란과 우리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강성 해져 거란과 송을 멸망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함과 동시에 군사력을 강화하였
습니다. 또 우리와 영토가 맞닿아 있으므로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 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입니다.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예를 닦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고려사”- → 이자겸은 당시 금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이들과 대결하
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대외 관계의 안정도 필요하였다.

4. 무신의 집권과 대몽 항전
(1) 무신 정변(1170, 의종)
§1. 배경 :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심화
1) 문신들의 정치 주도권 장악(군사 부문 최고 지휘관 문신 독점, 국가 정책 결정(재상)에서 무신 배제)
2)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심화, 의종의 실정과 향락
3) 문신 우대, 무신 차별 대우에 따른 불만 고조 : 승진 제한, 무과 없음, 문신이 군사 최고 지휘권 행사, 전투,
노역, 행사시 문신 호위에 동원 ㅇ군사 지휘한 문신 :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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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급 군인들의 불만 고조 :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각종 잡역에 동원되어 시달림.
§2. 과정 : 정중부․이의방이 의종[측근 세력의 사치 향락 → 민중 도탄]의 보현원 행차 계기로 무신정변(1170) → 다수
의 문신 제거, 의종 폐위 거제도 귀양, 명종<의종 아우> 옹립 후 정권 장악 → 중방 중심으로 권력 행사
ㅇ무신 차별 내용 : 과거에서 무과 제외, 문관이 무관직 겸직(병마사 문관으로 임명), 전시과에서 차별 대우, 정3품 상장군까지만 승진
가능 ㅇ무신 모욕 : 의종 24년 8월 수박희, 대장군 이소응 패배 →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 모욕 계기, 김돈중은 정중부 수염 불태움
ㅇ중방 : 본래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상장군, 대장군의 합좌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무신 정변 이후 무신들의 집단 지도 체제가 형성되면서 정치적 핵심 기구로 등장함). 군사 문제 의논, 군사, 형벌, 관리 인사
문제까지 처리 ㅇ대장군 이소응은 무인이지만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였는데, 다른 장수와 수박희를 하여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문신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후려갈기자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왕과 모든 신하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고 ……. -“
고려사”- → 뺨을 맞았다는 수치심과 함께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무신은 이러한 수모와 계속된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
다. 고려의 지배층은 문신과 무신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무신은 여러 가지 차별 대우를 받았다. 결국 분노가 폭발한 무신은 정변을 일으
켰고, 이 때문에 문벌 귀족이 무너지고 무신 정권이 100여 년간 이어졌다.

§3. 결과 – 백성들의 생활 안정 배제
1) 정치와 사회 혼란, 중방 중심의 권력 행사, 고관 요직 독점(2성 6부 기능 정지), 토지와 노비, 사병 확대
2) 대토지와 노비 불법적 소유 확대 → 토지 제도 문란
3) 무신들 간에 권력 쟁탈전 전개(하극상, 사병 보유) →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 → 농민 생활 궁핍 → 농
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
§4. 무신 집권자의 변화 : 무신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
1) 집권자의 변화 : 이의방 → 정중부(중방) → 경대승(도방) → 이의민(중방) → 최충헌(교정도감)
§5. 반무신란(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
1)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난(1173, 이의방 집권시, 의종 복위 기도) - 정중부, 의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세우고자 이경
직, 장순식 등과 모의하여 반란 → 2개월만에 진압
2) 교종 계통 승려들의 난(귀족들의 후원받음)
3) 서경 유수 조위총의 난(1174, 정중부 집권시) → 모두 실패
ㅇ김보당 : 동북면 병마사로, 의종의 복위를 내세우고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처형당할 때 “문신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말하여 많은 문신이 죽음을 당하게 하였다. 김보당은 무신 정변이 일어난 지 3년 후 정중부·이의방 등을 토벌하고 전왕
의종을 세우고자 이경직·장순석 등과 모의해 난을 일으켰으나 2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문신들이 일으킨 대표적인 반무신 난이다.
ㅇ조위총의 난 : 조위총의 난은 개경 무신 집권자들의 탐학과 수탈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 난은 당시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한 서북
면 민중의 봉기였다는 측면에서 민란의 성격도 가진다. 2년간 지속(1174~1176, 정중부 집권 초기, 이의민이 토벌하여 상장군이 됨
ㅇ이의민 : 천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가 되었다. 이의민은 천민 출신으로, 아버지가 소금 장수, 어머니가 옥천사의 종이었다. 이의민은
기골이 장대하여 중앙군에 편입되었으며,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무신 정변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며, 김보당의 의종 복
위 음모를 평정하고 조위총의 난을 제압하여 상장군에 올랐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자 경주에 은거해 있던 이의민은, 경대승이 죽은
뒤 개경에 올라와 무신 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되었다. 그는 관직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였으며, 그의 아들들도 부패를 일삼았다.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것이 계기가 되어 미타산 별장에서 최충헌에게 살해되었다.
ㅇ도방 : 고려 시대 무신 정권의 사병 집단이며 숙위 기관으로 경대승이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최씨 무신 정권 시기에 크게 확대되어 무신 집권자
의 신변을 보호하고, 무신 정권을 무력으로 뒷받침하였다.

무신 정권 최고 집권자와 지배 기구의 변천
최씨 무신정권(1196~1258) : 4대 60여 년간 지속,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집착 → 사회 개혁에 소홀하여 민심을 잃음
(2)
§1. 최충헌(1196-1219)의 독재 정치 – 최충헌, 최충수 형제가 이의민 부자 제거(명종 26, 1196)
1) 사회 안정(개혁이 아닌 전제 정치) - 정국 점차 안정됨
2) 봉사 10조의 사회 개혁책 제시 : 정변의 정당화(집권 명분에 불과),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개혁책 → 권
력 유지에만 집중
3) 농민 항쟁 진압에 적극적(무단 정치 실시) – 무신 정권 초기 혼란을 극복하기 위함
4) 사회 개혁책 흐지부지(미봉책), 대토지(진주 지방 식읍)와 노비 차지, 사병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 광대한
농장 소유
5) 교정도감 설치 : 정적 감시 숙청 기구, 국정 총괄하는 최고 권력 기구(세금 징수, 관리 감찰 등 국가의 중요한
일 결정하는 기구), 우두머리 : 교정별감(무신 정권 최고 집권자들이 교정별감이 되어 막강한 권력 행사)
6) 도방 확대 : 신변 경호하던 사병 집단, 군사적 기반 강화
ㅇ교정도감 : 청교역 역리들이 최충헌을 살해하고자 모의한 사건을 다스리기 위해 임시로 설치 고려 후기 무신 집권 하의 최고 권력 기관. 최충헌
의 반대 세력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서무를 관장하고 모든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등 국정을 총괄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1270년 임유무 피살
로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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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씨 무신 정권의 권력 기반 : 권력 기구(교정도감, 정방), 군사적 기반(최씨 정권 유지 기반, 삼별초, 도방[신변
경호]), 경제적 기반(대토지 소유)
•교정도감 :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권력 기구(최고 집권자 : 교정별감)
최충헌
•도방 : 사병 기관 겸 숙위 기관(신변 경호 수행), 경대승이 처음 설치
•정방 : 인사 행정 기구[인사권 장악], 유학 지식과 행정 실무 능력 갖춘 문인을 관리로 등용
최우
•삼별초 : 도방과 함께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 역할
ㅇ삼별초 : 최우가 집권하면서 야간 경비를 위하여 설치한 야별초(방범과 치안 담당)에서 비롯됨, 야별초의 수가 늘어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
누었고, 몽골군에 포로로 잡혀갔다 탈출한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말한다.(치안, 국방, 형옥 담당)
ㅇ삼별초의 항쟁 : 몽골이 침입해오자 당시 고려의 집정이었던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1232). 1270년 고려 정부가 개경 환도를 단행하자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진도가 함락되자 탐라(제주도)로 가서 항쟁을 하였다. 결국
탐라는 함락되고, 원은 여기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ㅇ최충헌의 봉사 10조(일부) : 선왕의 제도에 의하면 토지는 공전을 제외하고 신민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는데, 벼슬자리에 있는 자들이 탐욕
스러워서 공전과 사전을 빼앗아 겸병하여 한 집이 가진 기름진 옥토가 몇 고을에 걸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의 조세 수입이 저하되고 군
사들이 결핍을 겪게 되었으니, 원컨대 폐하는 해당 기관에 명령하여 공문서를 검증하고, 강탈당한 것은 전부 본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도록 하십
시오. -고려사- → 1196년(명종 26)에 이의민 부자를 제거한 최충헌, 최충수 형제는 봉사 10조라는 개혁안을 올려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수
습하려고 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봉사 10조라는 사회 개혁안에는 토지 겸병의 금지, 승려의 고리대 금지, 탐관오리 징벌 등의 내
용을 담았으나 국가 발전이나 백성의 생활 안정보다는 권력 유지에 목적을 두고 제시한 것이다.

§3. 최우(1219-1249)의 집권
1) 강화 천도(1232), 교정도감과 도방의 기능 강화 → 정치 권력 행사
2) 정방 설치(자신의 집에 설치, 문무백관의 인사권 장악, 정색<문무백관의 인사 행정을 처리하던 정치 기구>승
선<왕명출납>), 서방(정국 안정 후 문학적 소양과 행정 실무 능력 갖춘 문신을 관리로 등용 → 고문 역할)
3) 삼별초 조직 : 공식적인 국가의 군사 기구 → 개인적으로 활용, 도방과 함께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 삼음
ㅇ정방 : 1225년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 행정을 처리하던 정치 기구이다. 국왕은 인사 행정에서 정방의 결정을 승인하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4. 최씨 무신 정권의 특징 : 정치 안정 달성(개혁아닌 전제 정치로) → 국가 통치 질서는 약화


1) 한계 : 왕권 무력화, 국왕과 재상 간의 합의를 중시하던 기존 통치 질서 유명무실화
2) 정권 유지 위한 경제적 기반 확대 → 토지와 노비 약탈 → 진주 지방 및 남해안 곳곳에 넓은 농장 소유 → 국
가 기강 문란, 토지 제도 붕괴
3) 정국의 안정과 권력 유지에만 집착 → 국가 발전과 민생 안정에는 소홀함(사회 개혁에 소홀, 민심 잃음)
§5. 무신 정권의 붕괴 : 몽골과의 전쟁 → 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1270)로 붕괴
(3) 농민·천민(하층민)의 봉기 – 사회 변혁 의지 드러냄
§1. 배경
1) 신분제 동요 :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음[노비 출신 이의민, 하극상의 풍조 형성],
2) 무신들의 횡포 : 농민의 토지 강탈과 노비 확대, 농민과 천민에 대한 수탈 확대
3) 지방관의 수탈 심화[지방 수령들의 과도한 세금 수취]
ㅇ무신 정변으로 하층민 중에 권력층이 된 자들도 많아서, 이의민과 같이 노비 출신이면서 최고 권력을 잡은 자까지 나타났다. 그렇지만 농민과
천민 등 하층민의 삶은 문벌 귀족이 지배하던 시기보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2. 초기 무신 정권기
1) 하층민의 봉기
① 서북 지역의 농민 봉기(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 많은 농민들이 참여하였고, 난이 진
압된 이후에도 농민의 봉기가 계속 이어짐)
②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난(1176, 정중부, 소 거주민에 대한 차별에 반발),
김사미·효심의 난(1193, 경상도, 이의민) → 지방관의 수탈에 대한 시정 요구, 왕
조 질서를 부정(신라 부흥 표방)하기도 함.
2) 신분 해방 운동 : 개경의 만적의 난, 전주 관노비(관노비와 군인이 합세)의 봉기
§3. 최충헌 집권기
1) 강력한 억압과 회유 정책으로 봉기 다소 감소
2) 만적의 난(1198, 최충헌, 신분 해방 운동의 성격)
ㅇ망이·망소이의 봉기 : 명종 때 명학소(鳴鶴所)의 망이(亡伊)가 그 무리를 모아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하자,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관리를 파견하여 농민군을 무마하였다. 그 후에 망이의 무
리가 항복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반항하자 이 현을 폐지하였다. -“고려사”-→ 당시 명학소 내의 상황을 고
려하지 않은 가혹한 세금 부과와 열악한 사회적 처지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에 봉기하였다
ㅇ만적의 난 : 최충헌의 노비 만적 등 6명이 북산으로 나무하러 가서 노비들을 모아 놓고 “우리나라에서는 무신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候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가! 시기만 잘 만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만 어찌 뼈 빠지게 일하겠는가! …… 최충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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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 땅의 천민을 없애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 고려사”- → 만적은 개경 송악
산에 노비들을 모아 놓고 노비 해방을 주장하여 봉기를 선동하였다. 그러나 봉기를 약속한 날 모인 사람이 적어 봉기를 연기하였고, 결국 거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때 체포된 100여 명의 노비는 예성강에 던져져 죽고 말았다. 하층민의 봉기가 일어나게 된 배경은 신분 질서 동
요, 무신의 횡포, 지방관의 수탈이었고, 하층민의 봉기가 지닌 성격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항거, 신분 해방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4) 몽골과의 전쟁(13세기)
§1. 13세기 초 정세
1) 몽골의 세력 확장 : 몽골 초원 통일(13세기 초) → 통일 국가 형성 → 금 공격 → 북중국 점령(1234)
2) 고려 : 최씨 정권 확립기(최충헌 1196 – 최우 1219년 집권)
3) 고려와 몽골의 접촉(1219, 강동성의 역) : 금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 침입 → 고려
는 강동성 포위 → 몽골 군대와 연합하여 강동성을 함락하고 거란족 토벌 → 여·몽협약 체결 → 고려와 몽골
사이의 사신 왕래 → 몽골의 과도한 공물 요구
§2. 몽골과의 전쟁 : 40여 년 동안 6차례 고려 침략
1) 배경 : 지나친 공물 요구(몽골은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 내세움) → 몽골 사신 일행(1221년 파견)이 귀국하
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피살(1225, 저고여 사건, 징기스 칸 재위 시기)
2) 과정
•원인 : 몽골 사신 저고여 일행이 귀국길에 피살 구실로 침략(1231, 태종 오고타이 칸, 살리타이
1차 침입 침입) → 이후 40여 년 동안 몽골과 전쟁
(1231) •과정 : 몽골의 침입 → 의주 점령 → 귀주성(박서), 안북부(최춘명)에서 격퇴 → 길 돌려 개경
포위 → 몽골 요구 수용(몽골, 고려의 항복을 유도하여 강화) → 다루가치를 남겨두고 철수
•원인 :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대한 반발 → 최우 정권의 강화도 천도(1232) → 장기 항전
2차 침입
준비(주민은 산성, 섬에 들어가 몽골군과 맞서도록 함) → 몽골의 재침입
(1232) -
•과정
살리타이
-처인성(경기 용인) 전투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고려 김윤후[민병과 승군]에게 사살당함]가 전사
침입
하자 철군 -금을 정복한 다음 여러 차례 고려 공격
3) 몽골 침입에 대한 저항
① 박서의 귀주성 전투, 최우의 강화 천도 후 항전 대비
② 하층민의 적극 항전 : 처인성 김윤후[처인부곡민인 민병과 승군]의 활약, 충주성 노비의 항전, 다인철소 주민들
의 항전, 관악산의 초적, 일반 민중들의 결사적인 저항[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항전]
③ 팔만대장경 조판
ㅇ최씨 정권의 강화도 천도 이유 : 몽골군은 기병이 강한 반면 해전에는 약하였다. 그런데 강화도 주변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선박 운행에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 또 강화도 외곽은 가파른 산이 둘러 있고, 앞쪽은 뻘이 발달해서 천연의 장벽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넓은 평야가 있어
생산물이 풍부하고, 해로와 수로를 통해 조세를 안정적으로 걷을 수 있었다. ㅇ박서의 귀주성 전투 : 1231년(고종 18) 서북면 병마사 재임 시
몽골이 침략하여 온갖 무기로 귀주성을 공격해 오자 1개월에 걸쳐 친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ㅇ처인성 전투와 승려 김윤후 : 1232년 몽골은 살리타를 대장으로 하여 다시 고려에 침입해 왔다. 살리타는 광주 공격에 실패하고, 처인성(현 용
인)을 공격하였다. 당시 처인은 부곡으로, 일반 군현에 비하여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곳에서 승병을 이끌었던 김윤후는 주민들과 함께 몽
골군을 맞아 싸워,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김윤후는 1253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 문서를 불사르며 노비들을 독려하여
몽골군을 막아 내었다.
ㅇ몽골과의 전쟁 때 활약한 백성들 : •김윤후는 고종 때의 사람으로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에 있었다. 몽골병이 이르자, 윤후가 처인성으로 난
을 피하였는데, 몽골의 원수 살리타가 와서 성을 치매 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왕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사양
하고 받지 않았다. •처음 충주 부사 우종주가 매번 문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판관 유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골병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성 지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의견상 차이가 있어서 우종주는 양반 별초(兩班別抄;별초는 정규군 이외에 조직된 부대)를 거느리고, 유
홍익은 노군(奴軍)과 잡류(낮은 신분층으로 구성) 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였다. 몽골병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
께 다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잡류만이 힘을 합하여 쳐서 이를 쫓았다.

4) 영향
①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으로 국토의 황폐화
② 왕, 귀족 : 화려한 생활 유지, 연등회와 팔관회 시행
③ 백성들의 생활 곤란 : 몽골군에게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감, 최씨 무신 정권의 수탈
④ 문화재 소실 : 초조대장경판(대구 부인사)과 황룡사 9층 목탑 등 문화재 소실
ㅇ최씨 정권의 강화도 생활 : 최이(최우)가 왕족과 고관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비단으로 산더미같이 장막을 만들고 가운데 그네
를 매었다. …… 악공 1,350여 명이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서 연주하니 거문고와 북, 피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악공에게 각각 은
3근씩 주고 기녀, 광대에게도 각각 비단을 주니 그 비용이 엄청났다. -“ 고려사절요”- → 몽골의 침입 때 귀족과 하층민의 생활을 극명하게 비
교한 사료로 지배층이 몽골의 침입과 민중의 생활은 도외시하고 향락에 빠져 있을 때, 이와 반대로 민중은 나라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3. 몽골과의 강화
1) 주화파[오랜 전쟁으로 백성 고통 극심, 강화도 위기 닥침 → 몽골과 강화 주장] 득세로 최씨 정권 붕괴[1258년 최의 피살(문신
유경+무신 김준) → 왕정복고(고종)] → 1259년 몽골과 화의(몽케 칸 → 쿠빌라이 칸으로 황위 계승될 때, 태자였던 원종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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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쿠빌라이 칸)를 만나 강화 체결) 추진 → 몽골은 무력 침공에서 회유책으로 전환 → 개경 환도(쿠빌라이 칸 때,
1270)
2) 결과 : 몽골과의 오랜 항쟁 → 원 세조의 ‘세조 구제’ 제시(고려 자주성 유지)
ㅇ몽골 요구 : 세금 부활할 것, 육지로 환도할 것, 국왕, 태자가 몽골에 입조할 것 → 강화도에서 쿠테타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짐, 고종 즉위 →
태자 전의 입조 → 쿠빌라이와 만남 → 전이 귀국하여 원종이 됨(1259)
ㅇ무신 정권 변천 : 1219 최우 → 1249 최항(승려, 8년만에 병사) → 최의(1257) → 문신 유경, 무신 김준[가노 출신](1258) → 1259 화의 →
1268 임연(부장) 등창으로 사망 → 1270 임유무(임연의 아들) → 1270 원종 11년 왕정복고(홍문규, 송송례)

§4. 삼별초의 항쟁(1270~1273)


1) 배경 : 무신 정권의 붕괴 → 몽골과의 강화, 개경 환도
①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대몽 항쟁 전개하던 삼별초가 반몽 정권을 세우고 저항
2) 과정
① 강화도에서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에 반발(배중손 지휘) → 진도 용장성 → 제주도 항파두리성(김통정)에서
대몽 항쟁 →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
② 서남해안 도서 지방 점령 → 정부의 조세 수송로 차단
③ 일본에 외교 문서(몽골의 일본 공격 가능성, 연대 필요성)를 보냄. → 군사 지원 요청
3) 장기 항쟁 배경 : 몽골군의 접근이 어려운 지리적 이점 이용, 몽골에 대한 굴복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의 적극
적인 지원, 최씨 정권 사병 역할로 처벌을 두려워함
ㅇ삼별초 항쟁 :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았다. 이들은 관료와 가족을 인질로 잡고 진도로 떠났으며, 진도의
용장산성을 중심으로 정부의 조세 수송로를 차단하였다. 여·몽 연합군이 진도를 함락하자 삼별초는 김통정의 지휘 하에 제주도의 항파두리성으
로 옮겨 항쟁하다가 1273년 결국 패하였다.

원의 내정 간섭 - 개경 환도 이후(1270~1351) ※공민왕(1351~1374)
(5)
§1. 원 성립(1271), 충렬 – 충선 – 충숙 – 충혜 – 충목 - 충정
§2. 자주성의 시련 ※대부분 나라 : 원에 정복되거나 속국이 됨, 고려는 장기 항쟁으로 자주성 유지(원 세조 구제)
•쿠빌라이 : 일본에 사신 보내올 것 요구 → 일본 거절
일본 원정 •물적 자원(선박, 식량, 무기 등 전쟁 물자)과 인적 자원(군대와 선원) 징발 → 원정 실패(태풍)
동원(2차) 로 고려는 큰 손실입음
•삼별초 항쟁 진압 후 1차 원정 : 1274(원종 15, 충렬왕 즉위), 2차 원정: 1281(충렬왕 6년)
•쌍성총관부(화주, 고종, 1258-1356) : 철령 이북 땅 직속령 편입, 공민왕 때 무력으로 수복
영토 •동녕부(서경, 1270-1290) : 자비령 이북의 땅 차지, 충렬왕 때 반환
축소(상실) •탐라총관부(제주도, 1273-1301) : 삼별초 항쟁 진압 후 설치, 일본 원정 준비로 목마장
관장, 충렬왕 때 반환
왕실 •원의 부마국(국왕이 원의 공주와 결혼) - 왕실의 호칭과 격을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개
호칭과 격 편(예우와 통제 병행) – 독립국의 지위 유지
및 관제 •1349년(공민왕 즉위 전)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 – 사망 후 왕비 초상화보며 울었음
※충렬왕 + 원 세조의 딸 제국 대장공주 이후 공민왕까지 원 공주 7명이 고려 왕비가 됨
개편 •관제 격하(중서문하성→첨의부, 6부→4사, 중추원→밀직사, 도병마사→도평의사사)
•정동행성 : 1280, 개경, 중서성의 지방 파견 기관, 일본 원정 준비 기구 →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음
내정 간섭 •다루가치(감찰관) 파견 : 원에서 총독 등을 호칭한 직명으로, 다루가치는 고려에 파견되어
내정을 간섭함 •만호부 : 만호, 천호, 백호로 조직, 원 영향 받아 설치한 군사 조직, 국방과 치안 담당, 고
려 군사 조직에 영향력 행사
•인적 수탈 : 공녀 요구(첩과 하녀) → 사회 문제 야기 → 조혼 야기
인적·물적
•물적 수탈 : 특산물 징발(금, 은, 베, 인삼, 약재), 매 징발(사냥에 필요한 매 사육 및 징
수탈
발, 응방 설치, 특수 기관)
풍속의 원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교류 활발 → 몽골풍 유행(몽골어, 몽골식 의복·머리·성명 사용),
변화 조혼의 풍속, 고려양(원의지배층)
ㅇ정동행성 : 정동행중서성은 중서성의 지방 파견 기관을 의미, 원은 자신의 직할지 통치와 대규모 군사 행동을 위해 여러 행성을 설치하였는데,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충렬왕 6년(1280)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일본 원정이 실패한 이후에도 여전히 존속되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ㅇ동녕부 : 1270년 원이 서경에 설치한 통치 기관으로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1290년 이 땅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는
요동으로 옮겼다. ㅇ다루가치 : 1231년 1차 침입 후 배치, 점령 지역 백성 직접 지배, 국사 전반에 간섭, 고려 내정 간섭을 위해 두었던 민정
담당자. ※고려의 왕위 계보 : 원에 충성하는 번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칭호 사용
ㅇ원은 자국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거나 집권 세력이 변동하면 고려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왕위를 교체함, 원 성종 즉위 후 충렬왕을 충
선왕으로 교체하였고, 영종 즉위 후 충숙왕을 원에 억류하였다. 문종 때 권신의 권력 다툼 속에서 충숙왕과 충혜왕이 복위되거나 폐위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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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원 간섭기의 관제 변화 : 충렬왕 원년(1275년) 황제국 체제 → 제후국 체제

ㅇ이, 예부→전리사, 병부→군부사, 형부→전법사, 공부는 폐지, 호부→판도사, 어사대→감찰사, 문하시중→첨의중찬, 상서→판서, 짐→고, 선지
→ 왕지, 사 → 유

§3. 원과의 교류
1) 인적 교류 : 몽골풍, 고려양 유행
① 원 : 전쟁 포로나 공녀로 원에 끌려감, 공녀 중 원 황제나 고위 관리의 후처가 되기도 함, 스스로 원에 귀화
하여 정착하는 사람도 생김.
② 고려 : 몽골 인, 중국인, 색목인 등 다양한 민족 왕래
ㅇ몽골풍과 고려양 : 고려와 원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각 나라의 풍속을 따라 하게 되었다. 특히 머리 모양, 옷, 음식, 도자기, 언어 등이 섞
이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몽골식 머리인 ‘겁구아(怯仇兒)’에 대한 저항감은 상당히 심하여 문제가 되었다. 1278년 충렬왕은 모두 몽골식 머리
를 깎도록 했지만 아버지 원종은 끝까지 깎지 않았다. 한편 원에서 소주가 전래되었는데, 요즘 일반적인 희석식이 아닌 증류식 술이었다. 고려
의 의복과 음식, 도자기 등이 몽골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는 원 궁궐 안에 있던 고려 출신 궁녀나 환관들이 유행시킨 것이다.

2) 원 간섭기의 상황 : 권문세족 형성(친원적 성향의 지배 세력)


유 종래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정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형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새롭게 성장한 가문(몽골어의 역관, 환관, 응방 관리 등)
등장 : 원 간섭기 동안 형성된 새로운 지배층
친원파(친원적 성향의 지배 세력),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 장악
특 음서 등을 통해 관직 진출, 독차지 → 정치 권력 장악(첨의부, 밀직사 등 재상으로 고관 요직 장
징 악, 도평의사사 장악하여 국정 좌우)
광대한 농장 확대(대농장 경영),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아 경제력을 확대하는 등 사회 모순
격화 → 왕권 약화, 국가 재정 부실,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짐.
ㅇ권문세족 : 원 간섭기에 새롭게 등장한 친원적 성향의 지배 세력, 고려 전기부터 이어져 온 가문도 있지만 무신 집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해 등장한 가문 등이 포함되었다. 대개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경영하였다.

(6) 공민왕의 개혁 정치(1351-1374) - 자주권 회복, 왕권 강화 목적


시기 14세기 중반(한족의 반란으로 원은 쇠퇴)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 추진
•친원 세력 숙청(기철 일파)
•왕실 호칭 및 고려의 관제 복구 : 정동행성 폐지, 도평의사사 정비
반원 자주
•원의 연호 사용 폐지, 몽골식 풍습(변발 등) 금지
정책
•쌍성총관부 공격(1356, 철령 이북의 땅 무력 수복), 요동 지방 공략(인당, 최영 등, 고
구려의 옛 땅 회복 위함)
•정방 폐지(국왕이 인사권 장악), 신진 사대부 등용
왕권 강화
•전민변정도감 설치[신돈 등용,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소유주에
정책(권문
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 → 권문세족들의 경제 기반 약화, 국가 재정 수입 기반 확
세족 억
대]하여 개혁 추진
압)
•유학 교육 강화(성균관), 과거제 정비(인재 배출) → 신진 사대부 등용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과 홍건적, 왜구의 잇따른 침입(개혁 추진 어려움), 신진 사대부의
결과
세력 미약 → 신돈 제거 → 개혁 추진의 핵심인 공민왕이 시해됨 → 개혁 실패
ㅇ기철 : 누이동생이 원 순제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자, 기
황후와 원을 등에 업고 친원파 세력을 결집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권세를 부림
ㅇ전민변정도감 : 고려 후기에 권문세족들이 토지와 노비를 늘
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약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특별 기구,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를 본래의 소유
주에게 돌려주거나 본래 양민이었지만 권세가에게 억압당하여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개혁 기
구이다. 1269(원종 10)에 최초로 설치된 후 공민왕, 우왕 때까
지 여러 차례 설치되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거나 유명무실화되어 폐지되었다.
ㅇ개성의 성균관 : 충렬왕 때(1308)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함, 공민왕은 신돈을 중용하여 개혁 정치를 하던 1367년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다시 세우고 경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이를 통하여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고 성리학이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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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자제위 : 1372년 설치, 청년 선발하여 시중들게 함. 홍윤, 한안, 권신 등이 비빈과 자제위 청년 사이 풍기
문란 → 1374년 최만생이 익비가 홍윤과 사통하여 임신 5개월이란 사실을 왕에게 보고 → 왕은 사실을 알고
있는자 죽인다고 화냄, 최만생과 자제위 청년 공모하여 왕을 시해함 → 이인임이 진압
ㅇ공민왕의 개혁 정치 : 왕이 …… 일개 승려에 불과하던 신돈에게 국정을 맡겼다. 신돈은 “오늘날 나라의 법
이 무너져 나라의 토지와 약한 자들의 토지를 힘 있는 자들이 모두 빼앗고, 양민을 자신의 노예로 삼고 있
다. 그러므로 백성은 병들고, 나라의 창고는 비어 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관청을 만들고 이를
시정하고자 하니 서울에서는 15일 이내로, 지방에서는 40일 이내로 자기 잘못을 알고 스스로 시정하도록 하
라. 기한 내 시정하는 자는 그냥 두겠으나, 기한이 경과한 후에 일이 발각된 자는 처벌할 것이며, 거짓으로
보고한 자도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명령이 발표되니 세도있는 많은 집들이 강제로 빼앗았던 토
지와 노비를 돌려주었으니, 나라 안이 모두 기뻐했다. -『 고려사』- → 공민왕은 반원 개혁 정치를 추구하면
서 권문세족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이란 토지와 노비(전민)를 판정
해(변정) 토지는 본래의 주인에게, 노비는 본래의 신분으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재정 수입을 확대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내
세워 전민변정도감(임시 기구)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 중에 본
래 양인이었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이를 통해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
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격으로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어 개혁 정치는 중단되었다 공민왕 때 수복한 영토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

(7) 신진 사대부의 성장과 고려의 멸망


§1. 신진 사대부의 성장
시기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 통해 중앙에 진출, 공민왕의 개혁 정치 때 정치 세력으로 성장
•지방의 향리 자제 출신으로 중소 지주가 대부분,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
형성 리로 진출
및 •학문적 교양과 정치적 행정 실무 능력에 능한 학자적 관료
성장 •친명적 성향 → 공민왕의 개혁 추진 과정에서 정계 진출 확대 - 일부는 측근 세력으로 성장
하여 권문세족이 됨, 대부분은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 세력으로 성장
사상 성리학 수용, 불교의 폐단 시정하려 함 → 고려 사회 모순 시정하려 함.
•개혁 추구 : 신진 사대부의 기반을 침해하면서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족과 충돌 → 국가
권문
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권문세족의 비리와 불법을 비판, 견제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
세족
하려고 노력

•한계 : 권문세족의 인사권 장악 → 관직 진출 제한, 과전과 녹봉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함 →
대립
왕권과 연결하여 고려 후기의 각종 개혁 정치에 적극 참여 → 적극적인 개혁 추진 역부족
ㅇ사대부 : 사(士, 학자)와 대부(大夫, 관료) 가 합쳐진 말로, 학문적 소양을 갖춘 관료층을 일컫는다. 무신 정권기부터 중앙 관료로 진출, 13세기
충선왕의 개혁 정치 추진 때 정계에 진출 시작, 공민왕 때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

§2. 고려의 멸망
사회
•공민왕의 개혁 실패 → 권문세족의 정치 권력 독점과 대토지 소유 확대 → 정치 기강 문
모순
란, 백성들의 생활 궁핍 →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신흥 무인 세력 성장)으로 혼란 가중
심화
•홍건적의 침입 : 공민왕, 두 차례 침입[1359년 1차 침입, 서경, 이승경, 이방실이 격퇴, 1361년 2차
침입으로 → 개경 함락,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 → 정세운, 안우 격퇴]
•왜구의 노략질
-해안 지방은 물론 내륙 깊숙이 침략하여 약탈[전국의 해안 지방 황폐화],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감,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조운선이 끊어지고 서남부 해안 초토화
과 -토벌 작전 : 남과 북의 외적 침입에 대한 토벌 작전 수행 → 최영과 이성계의 큰 전과(국민의
왜구의 신망) → 신흥 무인 세력 성장
침입 •신흥 무인 세력의 성장 ※우왕(1374~1388)
-최영의 홍산 전투(1376), 이성계의 황산 전투(1380) 등에서 왜구 격퇴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 격퇴(진포 대첩, 1380), 정지 : 관음포(1383)
-박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1389, 창왕)
•국제 정세의 변화 : 명의 건국, 원은 북쪽으로 밀려남
최영의 •우왕(공민왕 시해 후 1374년 이인임이 추대, 원명 양다리 외교) 때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 확대
집권 → 최영이 이성계와 사대부 세력의 지원으로 이인임 일파 축출 → 개혁 방향 둘러싸고 갈등
요동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함[철령위 설치 통보, 1388년 쌍성총관부 관할 지역이 원
정벌 을 대신하는 명의 영토] →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 단행
위화도 •최영의 요동 정벌론과 이성계의 4불가론의 대립 → 요동 정벌 단행 → 이성계가 위화도 회
회군(1 군(1388)으로 최영을 제거, 정권 장악 → 군사적 실권 장악 → 본격적인 개혁 계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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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의 집권 → 우왕·창왕(조민수, 이색이 옹립) 폐
조선
위, 공양왕 옹립(정치적 실권 차지) → 전제 개혁 단행[과전법 실시(1391)] → 조선 건국
건국
(1392)
ㅇ홍건적 : 원의 지배에 저항한 한족의 농민 반란 세력으로, 원의 군대에 쫓긴 무리가 고려에 두 차례에 침입하였다.
ㅇ위화도 회군 : 고려 우왕 때 명이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쌍성총관부 관할의 땅을 명의 직속 영토로 한다고 통고하자 최영은 이
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1388).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ㅇ과전법 : 공양왕 3년(1391), 도평의사사가 글을 올려 과전을 지급하는 법을 정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따랐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무릇 경성에 거주하여 왕실을 시위하는 자는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18등급으로 나누어) 과전을 받는
다.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후, 그의 아내가 자식이 있고 개가하지 않으면 남편의 과전을 모두 물려받고, 자식이 없고 개가하지 않으면 반을 물
려받는다.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그 자손이 유약한 자는 휼양전으로 아버지의 과전을 모두 물려받고, 20세가 되면 본인의 과에 따라 받는다.
ㅇ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및 격퇴 : 홍건적은 원 말 한족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라
하였다. 1355년(공민왕 4)에 국호를 송이라 정하고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그 일부가 요동을 점령했다가 원의 반격
에 쫓기게 되자 고려를 침범하였다. 홍건적의 침략을 계기로 고려에서는 원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면서 반
원 정책이 퇴색하기도 하였다. 한편 단순한 해적에 불과한 왜구는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다 1350년부터 왜
구가 대규모화하였다. 왜구는 교동과 강화도까지 점거했으며, 이들로 인해 조운선이 끊기고 서해와 남부 해안의
군현이 초토화되었지만 별다른 대책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5. 신분 제도와 생활 모습
(1) 정호, 고려의 지배층
§1. 신분의 구성 : 크게 양인(정호, 백정 등으로 구분)과 천인으로 구분
§2. 정호 : 문무 양반, 중간 계층으로 구분
1) 국가로부터 일정한 직역을 부여받은 지배 계층 → 직역의 대가로 토지를 받음, 신분 세

문 무 •관료,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계층
양반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 지배층인 문벌 형성
•중앙과 지방 통치 기구의 말단 행정 실무 담당
•서리 : 중앙 관청의 말단 행정 업무 담당 •향리 : 지방 행정 담당
중간
•남반 : 궁중 업무 •하급 장교 등
계층
•향리 : 호장, 부호장 등 여러 단계로 구분 → 상층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직 진출 가능
•직역의 대가로 토지를 받음, 신분 세습
ㅇ직역 : 국가에서 양인 신분의 남성에게 국가 공공 업무를 수행하도록 부여한 의무를 말한다. ㅇ정호 : 학자에 따라 관리를 제외하고 서리, 향리,
하급 장교 등 중간 계층으로 한정하는 경우도 있음. ㅇ남반 : 고려 시대 궁중의 숙직, 왕의 시종, 왕명의 전달 등의 사무직을 보던 관리층. 중국
에서 기원한 제도로 문무 양반이 동서로 배치된 것과 달리 남쪽에 횡으로 반열했기 때문에 남반 또는 횡반이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ㅇ서리 : 고려, 조선 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에 근무하던 하급 관리층으로 이서, 아전 등으로 불리었는데 근무지에 따라 경아전과 외아전으로
구분되었다. 일반적으로 서울의 경아전은 서리로, 지방의 외아전은 향리로 불린다. ㅇ향리 : 고려 시대의 향리는 토호적 기반을 가진 지방의
유력자였으며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향리들은 상호 혼인 관계를 맺어 일반 백성과 신분적 격차를 드러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의 행정을 자치적으로 수행하였는데, 조세·공납을 징수하고 부역을 동원하였다. 지방 호족 출신의 향리들은 호장층이 되어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지만, 하위 향리들은 점차 지방관을 도와주는 역할에 머물러 사회적 지위는 낮아졌다. ㅇ호장층 : 고려, 조선 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부호장과 더불어 호장층을 형성하였으며,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들이 수행하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하였다.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ㅇ향리의 직급(문종 5년) 1. 호장(戶長) 2. 부호장 고려의 신분 구성
(副戶長) 3. 병정(兵正), 창정(倉正) 4. 호정(戶正) 5. 부호정(副戶正) 6. 부병정
(富兵正), 부창정(副倉正) 7. 주부군현사(州府郡縣史) 8. 병사(兵史), 창사(倉史) 문무 양반(관료) 지
정호(지배층
9. 제단사(諸壇史) 서리, 향리, 하급 장교 배
양인 ) 층
(2) 백정과 천인 등
백정(대부분 농민, 수공업자, 피

§1. 백정 : 특정한 직역을 부여 받지 않은 일반 백성, 대다수 향․부곡․소의 상인)
주민

는 농민 → 조세․공물․역 부담, 법적으로 과거 응시 가능 천인 공․사노비 층
§2. 향·부곡·소의 주민 : 신분상 양인, 백정보다 무거운 세금 부담, 학교 입학과 과거 응시 제한
§3. 노비 : 매매․상속․증여 가능, 부모 중 한 명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됨
1) 공노비(관청 소속) : 입역 노비(관청의 잡역에 종사하면서 급료받음), 외거 노비(토지 경작하여 얻은 수입 중
일정한 액수를 신공으로 납부)
2) 사노비(개인 소유) : 솔거 노비(주인집에 살며 잡일), 외거 노비(주인과 따로 살며 신공 납부)
§4. 그 밖의 천민 : 양수척[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버들고리 만들어 파는 사람], 화척[짐승 잡는 사람], 재인[광대놀음], 기생
[술 팔음] 등 → 대다수는 거란족이나 여진족 출신으로 고려에 들어온 사람들 → 국가에 아무런 부담을 지지 않았으며 호
적에도 등록되지 않았음.
ㅇ신공 : 관청이나 주인에게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던 외거 노비가 관청이나 주인에게 매년 바쳐야 하는 몸값이다. ㅇ백정(白丁) : 고려에
서는 ‘나라에 특정한 직역을 가지지 않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였다. 특정한 직역을 담당하지 않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층을 지칭, 조선
시대에는 도살업이나 유기 제조업에 종사하는 천민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과목인 제술과를 보기는 어
려웠다. 과거를 통해 신분을 상승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군인이 되어 공을 세우는 것이 출세의 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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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향, 부곡, 소 :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부곡의 주민은 주로 농업에 종사함. 소에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수공
업품, 광산물 등을 생산하였다. 신라가 주군을 설치할 때 전정과 호구가 현을 이룰 규모가 아니면 향이나 부
곡을 설치하여 소재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 소(所)는, 은소, 동소, 철소, 사소〔실〕, 지소〔종이〕, 와소〔기
와〕등 공납하는 물품에 따라 구별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 향과 부곡은 신라 때, 소는 고려 때 처음
설치하였다. 부곡민은 조세를 납부하였다. 고려 시대에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양
민이면서도 일반 군현민에 비해 심한 규제를 받았다. 이들은 양민에 비해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졌으며, 이주
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ㅇ고려 시대 소민들의 생활 : 원래 소는 무엇인가 특별한 물건이 나오거나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금, 은, 동 등
의 산지, 실이나 명주, 종이, 기와, 숯, 먹, 도자기 등을 만들거나 생산하는 곳에 소가 만들어졌다. 정부가 이
러한 물품의 생산을 장악하여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한 것이다. 소민들은 힘들게 일을 해도 보상이 없었으며
천하게 취급당하였다. 또한 소에 사는 사람들이 도망가면 물건 생산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이들은 생산하는
곳에 묶여 다른 직업을 갖기가 어려웠다.
ㅇ공노비 : 반역, 적진 투항, 이적 행위와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의 가족 및 사노비가 관에 몰
수됨으로써 발생. 공노비는 재산을 가지고 독립적인 가계를 꾸려 나갔음. 솔거노비보다 나은 처지, 실제로 매
매 대상이 되지 않았음. 사노비보다 신분상 더 높은 지위에 있었음
ㅇ사노비 : 사노비는 그 주인의 중요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상속·매매·증여의 대상이 되었다.(주인에게 예속
되어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였음) 이들은 주인의 호적에 등재되었는데, 성은 없고 이름만 있고 조세와 공납
은 부과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모 중 한쪽이라도 노비이면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귀족의 재산 증
식 수단) ㅇ노비의 처지 : 노비가 아무리 천하다고 해도 역시 사람인데 보통 재물과 같이 취급하여 공공연히
전시과의 성립과 변천
이를 사고판다. 혹은 말과 소와 교환하기도 하는데, 말 한 필에 노비 2, 3명씩 주고도 오히려 말 값에 모자라니, 이는 말과 소를 사람의 생명보
다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고려사- → 고려 시대 노비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노비가 재산으로 간주되는 것은 물론, 말과 소보다도 천시
되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 피지배층인 농민과 노비는 인간다운 삶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3) 신분 상승의 가능성


§1. 특징 : 엄격한 신분제 사회 → 제한적이지만 신분 상승 가능성
신분 상승 가능성 방법
향리 → 중앙 관리 과거에 합격
군인 → 무관 전공 등
백정 → 정호 잡과에 합격, 군인으로 선발
외거 노비 → 백정 재산을 모아 주인에 바침
향․부곡․소 → 일반 군현 승격 신분 해방 운동, 대몽 항전(외적 침입에 항전) 등
외국인 → 관리로 등용 귀화하여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음
ㅇ명종 때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나자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하였고, 몽골의 침입 때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치자 처인부곡을
처인현으로 승격하였다.
ㅇ현 승격 : (김윤후는) 원래 백현원의 승려였으나, 적군이 침입하자 인근 처인부곡의 처인성으로 몸을 피하여 백성을 지휘하였다. 전투를 벌여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이로써 적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철군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을 포상하여 섭랑장이라는 무반의 직책을 주고
처인 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사-→ 몽골과 항전 과정에서 부곡민들이 큰 역할을 하자 부곡을 현으로 승격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ㅇ신분 상승 예 :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집안 노비로,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유하게 되었다. 그는 권세가 있는 요직의 인물에
게 뇌물을 바쳐 천인에서 벗어나 산원동정의 벼슬을 얻었다. -고려사 -고종 45년 2월에 최의가 집안 노비인 이공주를 낭장으로 삼았다.
옛 법제에 노비는 비록 큰 공이 있다 하더라도 돈과 비단으로 상을 주었을 뿐 관작을 제수하지는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항이 집정해서는
인심을 얻고자 처음으로 집안 노비인 이공주와 최양백, 김인준을 별장으로 삼고, 섭장수는 교위로 삼았다. -고려사 - → 고려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사회였지만, 부분적으로 신분간 이동이 가능하였다. 특히 천민이었던 노비의 신분 상승도 가능했는데, 첫 번째 자료와 같이 부지런히 농
사를 지어 부를 쌓은 후 이를 통해 벼슬을 얻어 양민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두 번째 자료처럼 군공을 세워 벼슬을 얻어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노비들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는 점은 고려 사회의 개방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의미 : 고려 사회가 신라 골품제 사회보다 개방적이었음


ㅇ고려에 온 외국인 : “장순룡은 원래 이슬람 사람으로, 본명은 삼가였다. …… 장순룡은 제국 공주의 *겁령구로서 고려에 와서 낭장에 임명된
후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 『고려사』 - *겁령구 : 원의 공주를 따라 고려에 온 사람
(4) 여성의 지위
§1. 특징 : 정치, 사회 활동 제한 → 가정생활과 경제 운영 등 일생생활에서의 지위는 남성과 거의 대등
§2. 여성의 지위
1) 호적 :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음, 호적에 자녀 구분 없이 나이순으로 기록,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오르기도
함(처가살이)
2) 음서 혜택 : 사위나 외손자에게도 적용
§3. 재산과 결혼 : 자녀 균분 상속, 결혼할 때 여성이 데려온 노비의 소유권은 부인에게 있었음, 여성의 재가 자
유, 재가한 여성의 자손도 거의 차별받지 않음
ㅇ순비(順妃) 허씨는 공암현 사람으로 중찬 허공의 딸이다. 일찍이 평양공 왕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으나, 그가 죽자 충선왕이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허씨가 왕비로 즉위하자 순비로 책봉하였다. -“ 고려사”- → 한 여인이 왕실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죽자 왕이 그녀를 왕비로 맞았
다는 내용이다. 왕과 재혼할 수 있을 정도로 고려 시대 여성은 재혼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ㅇ여성의 지위 : 고려의 옛 풍습에 혼인 예법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자손을 낳으면 외가에서 자라므로, 외친(外親)의 은혜가 무거웠다. 이에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장례 시에는 모두 30일 동안 휴가를 주었다. -“ 태종실록”- → 고려 시대에는 혼인 후 상당 기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생활
하였고, 자녀의 교육도 외가쪽에서 이루어져 친가와 처가의 차이가 별로 없었음을 알 수 있다.
ㅇ고려 여성의 지위 : 충렬왕 원년 2월 대부경 박유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에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다. 그런데 지위고하를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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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하고 한 아내로 그치고 아들이 없는 사람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한다. 다른 나라(몽골) 사람이 와서는 아내를 얻는 데 제한이 없다. 장차 인물이
모두 북쪽으로 흘러갈까 두렵다. 신하들에게 첩을 두는 것을 허락하면 짝이 없어 원망하는 남녀가 없어지고 인물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으니
인구가 점차 늘어나게 될 것이다.”부녀자들이 모두 듣고 원망하자 두려워하였다. 이때 재상과 장군 가운데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많아 그 논
의를 중지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 이 기록은 고려가 대체로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박유는 몽
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실제 남자의 수가 여자의 수보다 훨씬 적어 결혼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생겨나자, 일부다처의 풍습을 지닌 몽골의 경우를
참고하여 일부다처제를 법제화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아내를 무서워한 신하들과 여성들의 원성으로 무산되고 말았는데, 이는 고려
여성들의 가정 내 지위를 짐작하게 한다. ㅇ재산 분배 : 어머니가 재산을 분배할 때 나익희에게 따로 노비 40명을 물려주려고 하였다. 나익희는
“제가 6남매의 외아들이라 해서 사소한 것을 더 차지하여 여러 자녀들로 하여금 화목 하게 살게 하려 한 어머니의 거룩한 뜻을 어찌 더럽히겠습
니까?”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그 말을 옳게 여기고 따랐다. → 외아들이 어머니와 협의하여 여자 형제들과 똑같이 재산을 분배
하려는 모습을 보여 준다.

ㅇ여주 이씨 호적 : : 장성한 아들이 3명이 있지만 그 어머니 최씨가 호주로 기록


되어 있다.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남편이 죽으면 호주는 큰아들에게 계승되었다.

ㅇ밀양 박씨 호적 : : 호적에 아들, 딸 구별 없이 나이순으로 기록했으며, 장녀


소사의 남편, 즉 사위가 처갓집의 호적에 이름이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6.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1. 유교 정치 이념의 제시
1) 불교와 유교의 관계
① 불교 :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 유지의 중추적 역할 담당
② 유교 : 정치적인 면에서 강조 → 유학 교육 확대, 유교에 대한 이해 심화
2) 고려 초기 :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
•신라 6두품 출신 유학자 도움으로 건국(유교 사상에 입각한 국가 운영 방향 제시)
태조
•유교 민본 사상에 따라 취민유도 강조
광종 •과거제 실시 → 유교적 소양 갖춘 관리 등용
•유학이 정치 사상으로 확립[유교 정치 이념 확립], 유교 교육 기관 정비(국자감 설립과 지방에 향교
설립) →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문치주의 전통 확립
성종 •최승로의 시무 28조 개혁안(유교 이념에 입각한 정치·사회 질서 개혁) 건의 → 고려의 생활 전통과
관습은 그대로 따를 것 주장 → 유교 사상은 국가 건설과 사회 개혁 추구하는 과정에서 확립 → 자주
적이고 주체적인 특성 지님
ㅇ최승로의 주장 : 예악·사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나쁜 풍속은 고쳐야 되겠지만, 그 밖의 거마·의복 제도는 그
지방의 풍속대로 하여 사치함과 검소함을 알맞게 할 것이며, 일부러 중국의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시무 28조, 고려사절요- → 유학의
가르침은 본받아야 하지만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은 중국의 것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함. 의복 제도는 중국의 것과 같을 필요가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유교 사상이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특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즉 자주적, 주체적 입장에서 사회 개혁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2. 유학의 보수화 – 고려 중기


1) 배경 : 문벌 귀족 사회의 형성 → 유학은 사회 개혁보다 지배 체제의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 성격을 띰
2) 대표적 유학자
•유학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 •문종 때 활약, 후진 교육에 노력 → 해동공자로 칭송
최충 •중앙 집권적 귀족 정치 강조 → 문벌 귀족 사회의 안정 추구
•9재 학당 설치 → 사학 12도 융성
•인종 때 활동, 이자겸의 난과 금의 사대 압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보수적이면서 현실 안정 추구
김부식
경향 → 보수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유학 학풍
3) 사학의 발달
① 사학 12도의 등장 : 11세기 최충의 9재 학당 설립을 계기로 등장
② 결과 : 사학 출신의 과거 급제자 증가 → 국자감의 관학 교육 위축
ㅇ최충 : 문종 때 활약, 해동공자라는 칭송, 퇴직 후 9재 학당(사립학교) 설립하고 유학 교육에 치중, 11세기 목종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9재 학당이라는 사학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ㅇ문헌공도(文憲公徒) : 문종 때 최충이 송악산 아래 자하동
에 세운 9재 학당으로, 12도 중에서 가장 번성하여 명성이 높았다. 최충이 사망한 후 그의 시호인 문헌을 이름으로 붙였다.
ㅇ고려 사회에 부는 사학 열풍 : 최충이 죽은 뒤 시호를 문헌(文憲)이라고 하였는데,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모두 9재 학당에 소속되어 이를 모
두 문헌공도라고 불렀다. …… 세간에서는 12사학 중에서 최충의 학도가 가장 성대하다고 하였다. -“ 고려사”-→ 최충의 시호인 문헌은 ‘문(文)
의 으뜸’, 즉 최고의 학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가 세운 9재 학당에 많은 학생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재 학당은 최충이
관직에서 물러나 세운 사학으로 문헌공도로고도 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유학자들이 개경에 11개의 사학을 설립하여 모두 12개의 사학이 융성
하게 되었는데 이를 사학 12도라 한다. 문헌공도, 정헌공도, 서시랑도, 구산도 등이다. 고려 중기 이후 사학이 과거 합격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크게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관학이 침체되어 관학 진흥책이 실시되었다. 사학의 설립자들은 대개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 출신이었다. 지공거
(좌주)와 과거 합격자(문생)는 사제 관계처럼 엮여서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지공거는 퇴임 후에도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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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사학은 유교 경전(명경) 교육을 중시하는 국자감과 달리 과거에서 더 중시되는 제술 과목을 필수로 운영하였다. 이로 인해 과거를 준
비하는 귀족 자제들에게 사학이 더욱 인기를 끌게 되었다. 사학의 교육 성과가 국자감을 뛰어 넘자 귀족의 자제들이 12도로 몰리게 되었고, 12
도를 중심으로 일종의 학벌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문벌 귀족이 중앙 권력을 독점한 현상과 짝을 같이하였다. 사학 12도는 공양왕 3년까지 이어
지면서 고려 교육에 이바지 하였다. ㅇ향교 : 지방의 국립 학교로 공자를 제사 지내는 문묘를 갖춘 중등 교육 기관이다. 언제 처음 설치하였는
지 분명하지 않지만 인종 때 조서를 내려 모든 주현에 학교를 세워 교육의 길을 넓히라고 하였다. 지방 관리와 서민 자제 교육
ㅇ7재 : 예종은 국자감을 정비하여 최충의 9재 학당과 비슷하게 전문 강좌 7재를 설치하였다. 7재는 ‘주역’, ‘상서’, ’모시‘, ’주례‘, ’대례‘, ’춘추
‘를 공부하는 6재와 무학을 공부하는 강예재로 구성되었다. 제1재부터 제6재까지 는 모두 유학을 공부하는 강좌로 각각 70명씩 선발하여 교육
하였으며, 제7재는 8명을 선발하여 교육하였다. 문벌 귀족의 반발로 인종 때 폐지되었다. ㅇ경사 6학 : 경사 6학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유학
부와 율학, 서학, 산학의 기술학부를 말한다. 국자학에는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이, 태학에는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이, 사문학에는 문무관
7품 이상의 자손이 입학하였다. 율학, 서학, 산학의 기술학부는 8품 이하 관리나 서민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3. 성리학의 수용
1) 성리학의 수용과 계승
고려 후기 불교계의 혁신 운동 쇠퇴 → 불교계의 타락과 세속화 경향 심화 → 새로운 지도 이념의
배경
수용 필요성 대두
목적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할 개혁 사상으로 성리학 수용
수용 원 간섭기에 안향이 소개(심성 수양을 중시하는 실천적 성격이 강함)
경전 자구의 해석에 힘쓰던 한당의 유학(훈고학)과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
특징
로 탐구하는 신유학
내용 유교적 생활 관습 시행 노력,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 비판
2) 수용과 확산
안향 충렬왕 때 고려에 처음 성리학 소개(심성의 수양을 강조하는 실천적인 면이 강함)
원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충선왕이 원 수도인 연경에 세운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에 대한
이제현
이해 심화 → 귀국 후 이곡, 이색 등에게 전수
공민왕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 → 성리학 연구와 교육 본격화
성균관에서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치면서 확산 → 신진 사대부에 의해 계승됨 → 개혁의
이색
정도와 방법을 둘러싸고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열
3) 신진 사대부
① 사회 모순 개혁 시도 : 성리학을 바탕으로 불교의 폐단과 권문세족의 횡포 비판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
② 유교적 생활 규범 확산
㉮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실천적 기능 강조
㉯ “소학”과 “주자가례” 보급
4) 유교 교육 강화 :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명, 공민왕이 순수 유교 교육 기관으로 확대 개편 → 신진 사대부 양성
ㅇ성리학 :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 기존 한당의 훈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 문제와 우주의 근본 원리를 철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하였다.
ㅇ안향의 성리학 : 성인의 도(道)는 현실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자식된 자는 효도하고, 신하된 자는 충성하며, 예의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로 벗을 사귀며, …… 그런데 불교는 어떠한가?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서서 윤리를 파괴하니 이는 오랑캐 무리이다. -회헌실기- → 안향이
소개한 성리학이 윤리의 실천을 강조한 것에서, 심성 수양을 중시하는 실천적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ㅇ이제현 : 원의 수도에 설립된 만권당(충선왕이 세운 독서당)에서 조맹부, 염복 등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을 심층적으로 이해하였다.
이제현은 귀국한 후 이곡, 이색 부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ㅇ만권당 :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수도 연경에 세운 독서당, 고려와 원의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교류하던 장이었음 ㅇ소학 : 사대부 자제에게 일상생활의 예절을 학습시키기 위한 초보 교재이다.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
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 ㅇ주자가례 : 명나라 때 구준이 관혼상제 등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송의 주자가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관해 저술한 책
§4. 역사서의 편찬 : 유학 발달 → 유교적 역사 서술 체계 확립
초기 •왕조실록(거란 침입으로 소실), 현종 때 “7대 실록(태조∼목종))” 편찬 → 현재 전해지지 않음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 왕명을 편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것은 서술
하지 않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을 기록하고자 함.
중기
-목적 : 묘청의 난 진압 이후 분열된 민심 수습,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 강화
-특징 :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 - 신라 계승 의식 반영
•특징 : 무신 정변[사회 혼란]과 몽골 침입[위기 의식] 겪음 →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
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경향 대두
-각훈의 “해동고승전” : 삼국 시대 이래 명승들의 전기 정리, 현재 일부만 전함
-이규보의 “동명왕편” :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의 업적 칭송한 영웅 서사시, 고구려 계승 의식 표출
후기
-일연의 “삼국유사” : 충렬왕, 단군의 건국 신화 포함, 불교 중심의 역사 서술 → “삼국사기”에 누락
된 많은 자료를 포함, 삼국 시대 역사 복원에 중요
-이승휴의 “제왕운기” : 충렬왕, 단군 조선부터 고려 충렬왕 시기의 역사 서술, 단군 조선을 우리 민
족 최초의 국가로 기록 – 자주 의식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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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이제현의 “사략” : ‘사론’만 존재,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의 대두
ㅇ7대 실록 :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에 이르는 7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다. 현종∼덕종 때 완성
ㅇ기전체(紀傳體) : 역사 서술 방식의 하나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정사(正史)를 편찬할 때 사용하였다. 본기(제왕), 세가(제후), 열
전(인물), 지(주제), 표(연표) 등으로 구성된다. 한편, 역사를 연대 순서에 따라 기록하는 편년체도 있다.
ㅇ삼국사기 : 1145년(인종 23)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비교
식 등 11명이 편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 계승 의식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고 고
조선과 삼한의 역사를 다루지 않았으며, 유교 사관 시기 고려 중기(문벌 귀족) 원 간섭기(고려 후기)
에 입각하여 삼국 시대의 불교와 원시 신앙을 비판 저자 김부식 일연
적으로 서술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구려 주몽이
나 신라 박혁거세의 건국 신화도 실었으며, 고구려, 편찬 국가적 차원 개인적 차원
백제, 신라의 본기를 똑같이 두고 있고, 각 본기에서 특징 신라 중심 서술 단군의 건국 기록
해당 국가를 ‘우리나라’라고 칭하였다. 이러한 점은 사관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 자주적 사관
삼국사기가 삼국의 역사를 동등하게 다루었고, 중국
의 역사와 대등하게 인식했던 흔적으로 삼국사기가 •유교적 사관을 바탕으로 한 사대
불교 신앙을 중심으로 신화와 전설 등을
신라 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성격 주의적 역사서
정리한 자주적 성격의 역사서
•본기, 열전, 지, 표 등으로 구성
한다. 본기, 열전, 지, 연표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고
려 중기 ‘구삼국사[고려 초 편찬]’를 바탕으로 문벌 귀족의 입장에서 유교적 도덕 사관과 합리주의 사관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정리
ㅇ동명왕편 : 무신 정권기인 1193년(이의민 집권기) 이규보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주몽)의 신비스러운 행적을 민족 장편 영웅 서사시로 편찬
한 것,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한 일종의 역사서로 고구려 건국의 신성함을 인정하고 고려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하였다. ㅇ삼국유사 : 승려이면서 유교 지식을 갖춘 일연이 경북 군위의 인각사에서 저술한 것으로 ‘삼국사기’를 보완한다는 뜻에서 삼국유사라
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적 관점에서 불교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와 야사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으며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소중하게 다
루고 있다. 원 간섭기에 민족의 긍지와 자주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편찬, 나열식으로 자유롭게 서술, 전설과 단군 신화 소개
ㅇ제왕운기 : 1287년(충렬왕 13) 원 간섭기에 이승휴가 저술한 것으로 단군을 강조하고 발해에 대해 서술한 것이 돋보인다. 또 우리 역사를 중국
과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이 나타나 있다. 상권은 신화 시대부터 원의 발전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였고, 하권은 단군부터 충렬왕 때까
지의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단군 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기록 → 자주 의식 표현, 우리 역사와 중국사를 한시로 적은 것

(2)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의 발달


§1. 숭불 정책 : 고려 초기부터 국가적 지원으로 불교 발전
1) 고려 불교의 성격
① 지위 : 왕실, 귀족, 서민 등 모든 사회 계층이 믿는 국가 종교
② 역할 : 국가의 안녕, 개인의 행복 기원, 국가와 사회 통합, 외세 침입 때 국가를 지키는 정신적 지주 역할
2) 초기의 불교 정책
① 숭불 정책 : 건국 초부터 국가와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
•불교를 적극 지원하여 개경 주변에 여러 사찰 건립 •훈요 10조에서 불교를 숭상할 것 당부
태조 •연등회(불교 행사)와 팔관회(불교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진 행사) 등 불교 행사 성대한 개최 당부
•일반인들도 현세적 기복 신앙으로 불교를 믿음.
•승과 제도 시행 → 승려에게 실시한 과거 제도, 합격자에게 품계(승계(僧階)) 주고 승려의 지위 보장
•왕사·국사 제도 실시 → 신망이 높은 승려에게 왕과 왕실의 고문을 맡도록 함. 불교의 권위가 상징적으로
광종 나마 왕권 위에 존재하게 되어 불교가 국교의 권위를 가지게 됨[국사는 승려에게 주었던 최고의 승직, 왕사는 왕의 스승이 되
었던 덕행이 높은 승려에게 내린 최고의 지위]
•사원에 토지(사원전)와 노비 지급, 승려에게 면역의 혜택 부여
② 사원 : 막대한 노비를 소유하고 수공업품을 생산하기도 함. 고리대 사업과 상업 활동에 참여
ㅇ연등회 : 봄철에 치른 국가적 불교 행사, 신라 진흥왕 때 팔관회와 더불어 국가적인 행사로 시작되어 주로 고려 시대에 성행함. ㅇ팔관회 : 민
속 신앙과 불교의 팔관재계가 융합된 신라와 고려 시대의 국가적 행사이다.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불교 의식의 하나로, 팔관에서
‘관’은 금지한다는 뜻으로 살생, 도둑질, 음행 등의 여덟가지 죄를 뜻한다. 팔관회는 매년 11월 15일에 열렸으며, 고려 왕의 정치적 권위를 확인
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송의 상인이나 여진과 탐라의 사절이 와서 축하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하는 등 국제적 규모의 행사가 됨.
ㅇ연등회와 팔관회는 태조가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당부할 만큼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이를 통해 민심을 어루만지고 국가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연등회와 팔관회 등 대규모 불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되었으며, 불교가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를 이끌어가는 사상이었다.
ㅇ승계 :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 지급한 것으로 고려 시대에 제도화되었다. 서경을 거쳐야 했고 정해진 규정에 따라 승진할 수 있었다. 최고의
승계(선종은 대선사, 교종은 승통)에 오른 고승이 국사·왕사로 책봉되었다. ㅇ승통 : 교종의 가장 높은 법계, 승과의 교종선에 합격하면 대선-대
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승통에 이르게 되는데 승통에게는 왕사나 국사가 될 자격을 부여되었다.

§2. 불교 통합 운동 : 불교의 세속화와 교종과 선종의 분열 극복 의도


1) 불교의 분열
① 교종과 선종의 분열 : 신라 말 선종의 대두로 교종과 선종의 두 흐름으로 분화
② 교종의 융성 : 중앙 집권 체제 정비 → 문벌 귀족 사회가 안정되면서 외형적 발전과 형식에 얽매이는 경향
확산 → 교종과 선종의 종파적 분열 심화
③ 화엄종·법상종 등 교종이 왕실과 귀족의 지원을 받음
ㅇ화엄종 :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신라의 승려 의상이 만든 불교 종파이다. 화엄 사상의 핵심은 우주만물은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한다는 것이다. ㅇ법상종 : 유식(唯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다. 유식 사상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결국 마음뿐이며,
외계의 모든 대상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는 사상이다. ㅇ문종–순종(1083)-선종(1083-1094)-헌종(1094-1095)-숙종(1095-1105)-예종-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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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천(1055-1101)의 교단 통합 운동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 통합 → 숙종의 후원을 바탕으로 해동 천태종 개창(교종 입장에서 선종
통합 과정
통합)
사상적 기반 •교관겸수 제창 :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함께 강조
•의의 : 불교 교단을 재편하고 교·선 통합의 사상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력
의의와 한계
•한계 : 통합 방향이 학문·종교적 차원에 머뭄, 당시 사회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제시되지 않음.
한계 •의천 사후 불교교단이 다시 분열, 외형적 발전만 추구하는 경향이 대두, 귀족 중심의 불교 지속
ㅇ의천 : 문종의 넷째 아들로, 승려가 된 후 송에 유학하여 불교를 연구하였다.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 교단을 억압하여 교종을 정리하고 새로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을 통합함으로써 교선의 대립을 극복하려 하였다. 교선 통합의 사상적 바탕으로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함께 강조하는 교
관겸수를 제창하였다. 의천은 한때 경원 이씨와 연결된 법상종 교단의 공격으로 지방으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원 이씨 세력을 억압하
고 즉위한 숙종의 후원으로 국청사를 창건하고 해동 천태종을 창립하였다. ㅇ교관겸수(敎觀兼修) : 교와 관을 같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 교는
불교의 이론적인 교리 체계로 교종이, 관은 실천적인 수행법으로 선종이 중시하였다. ㅇ의천의 불교 통합 운동 : 교리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버리고 외적인 것을 구하는 일이 많고, 참선하는 사람은 밖의 인연을 잊고 내적으로 밝히기를 좋아한다. 이는 다 편벽된 집착이고 양극단에 치우
친 것이다.-“ 대각국사문집”- → 교(이론적 체계)관(실천 수행)겸수를 주장하며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3. 무신 집권기 신앙 결사 운동
1) 배경
① 불교가 외형적 발전만 추구하여 세속화됨 → 불교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는 신앙 결사 운동 대두
② 무신 정권 : 자신들에게 반발하는 교종 사원 탄압 → 불교의 새로운 움직임 지원
2) 결사 운동 : 불교계의 자기 반성과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운동
① 지눌 : 수선사 중심으로 결사 운동 전개 → 독경, 참선(수행), 노동에 힘쓸 것 주장
② 요세 : 백련 결사 조직, 법화 신앙을 토대로 불교의 혁신과 민중 교화 노력
3) 지눌의 신앙 결사 운동 –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
수선사 결 •송광사에서 조직
사 조직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참선, 노동에 고루 힘써야 한다는 개혁 운동 전개
•내용 :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과의 조화 추구 → 조계종 개창
•사상적 기반
교단 통합
-실천 방법 : 정혜쌍수 제시 : 선(참선)과 교학(지혜)을 나란히 수행하되 선 중심으로 교학 포
운동
용할 것
-돈오점수 강조 :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 꾸준히 수행할 것 강조
의의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는 선·교 일치 사상 체계 정립
4) 혜심의 유·불 일치설[유교와 불교의 통합 시도]
① 주장 : 지눌을 계승해 유·불 일치설을 주장 → 심성의 도야 강조
② 의의 :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토대 마련
5) 요세(의종 17, 1163-고종 32, 1245)의 신앙 결사 운동
① 백련결사 결성 :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에서 결성, 염불을 중심으로 수행에 정진하는
운동 전개
② 의의 : 토호와 지방민의 호응 얻음 → 수선사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 이끎.
6) 고려 말 불교 폐단 : 권문세족과 연결되어 토지(대농장)·노비 차지, 고리대를 통해 백성을 수탈하는 등 폐단
드러냄 → 신진 사대부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됨
ㅇ의천과 지눌의 사상 : 의천과 지눌은 교종과 선종으로 분열된 불교계의 조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의천은 불교의 이론적인 교리 체계인
‘교’와 실천적인 수행 방법인 ‘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내세워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지눌은 마음이 곧 부처임을
단박에 깨달음을 얻고[돈오], 깨달은 후에도 꾸준히 수행해야[점수] 온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 실천 수행
방법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 이는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선정禪定)’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여 일체의 분별을 없애
는 ‘지혜(智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ㅇ신앙결사운동 : 결사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단체를 조직하는 것, 12세기 말부터 본격화한 불교 신앙 운동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닦기 위해 맺은
단체 ㅇ수선사(송광사) : 지눌(의종 12, 1158-희종 6, 1210)이 결성한 신앙 결사 단체, 처음에는 정혜사라 함, 송광산에 있는 길상사로 옮긴 뒤
왕명에 의해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정혜사를 수선사로 개칭하였다. 뒤에 송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종 세력의 공격을 받은 무신 정권은 선종
에 관심을 가졌다. 최충헌은 당시 새로운 선종 결사인 수선사를 지원하였고 최우도 적극 지원하였다.
ㅇ유불일치설 : 유교와 불교가 사상적으로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 무신 정변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학설로 유교와 도교의 뿌리는
모두 부처의 법에서 흘러나온 것이므로 같은 것이라는 주장, 다시 말해 불교의 심성 수양과 유교의 심성 수양은 본래 차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
에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설.
ㅇ백련결사 : 만덕사라고도 한다. 승려 요세는 천태종계의 승려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를 맺었는데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 결사였다.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에서 결성
ㅇ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 : 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
하는 데 열중하며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 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하루는 같이 공부
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여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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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 “권수정혜결사문” → 1190년 명종 2년에 발표, 무신 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ㅇ불교 통합 운동
종파 개창자 융성기 교리 특징
천태종 대각국사 의천 문벌 귀족 전성기, 왕실과 문벌 귀족 후원 교관겸수 교종 입장에서 선종 통합
조계종 보조국사 지눌 무신 집권기, 무신 세력 후원 정혜쌍수, 돈오점수 선종 입장에서 교종 통합

§4. 팔만대장경의 조판
1) 목적 : 불교 경전의 집대성(교리 정리), 부처의 힘으로 이민족을 물리치려는 호국의 염원(호국 불교), 불교 사상 연구
2) 대장경 : 경·율·론 삼장의 불교 경전을 통틀어 일컫는 말, 불교 관련 저술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
3) 대장경의 간행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격퇴(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70여 년의 기간 동안 제작, 현종∽선종 때
초조대장
완성)

•개경에 보관하다가 대구 부인사로 이동하여 보관 → 몽골 침입 때 소실(현재 인쇄본의 일부가 전해짐)
•속장경으로 의천이 주도 •고려와 송, 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 편찬
교장
•신편제종교장총록[불교 관계 저술을 수집하여 엮은 목록집]을 만들고 흥왕사에 교장도감 설치 → 10여 년간
편찬
4,700여 권의 교장 간행
•강화 천도 시기, 고종 때 •몽골 침입 격퇴 목적
재조대장 •강화도 선원사에 대장도감, 진주 남해에 분사 대장도감을 설치 → 16년 만에 완성, 81,258장
경(팔만 •합천 해인사에 보관, 몽골 침입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불교의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격퇴하고자
대장경) 제작 •내용의 정확성과 제작의 정밀성[오·탈자가 거의 없이 정밀],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힘
ㅇ대장경 : 경(經), 율(律), 논(論) 등 삼장의 경전을 총칭하는 말로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경은 부처가 설법한 것으로 근본 교리이고, 율
은 교단에서 지켜야 할 윤리 조항과 생활 규범 즉 교단의 규칙이며, 논은 경과 율에 대한 승려나 학자들의 의론과 해석을 일컫는다. 대장경 경판
은 돈독한 불심과 많은 경비를 바탕으로 조성된다. 따라서 경판의 규모와 내용의 정확성은 당시 학문의 발달, 불교 이해 및 문화 수준, 인쇄 기
술의 우수성을 보여 준다. ㅇ교장 : 교장은 그 동안 속장, 속장경, 속대장경 등으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의천이 경,
율, 논 등의 삼장, 즉 대장경에 대해 연구하여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고 그 목록을 만들고 간행한 것이다.
ㅇ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의 과학성 : 팔만대장경은 남해안에서 많이 자라는 후박나무로 만들었는데, 경판이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막고 나무 재질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원목을 바닷물에 3년 동안 담가 두었다. 이후 담가둔 원목을 꺼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 기름을 짜내서 그늘에 말렸다. 판각이 완성되면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양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하였고, 다시 네 귀퉁이를 동판으로 쌌다. 팔만대장경 경판은 2007년 6월 ‘고려
대장경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5. 불교 예술 : 불화, 불상, 사원 건축, 석탑을 중심으로 발전


1) 불화 : 혜허의 수월관음도[현재 일본 센소사에 전함, 현세에서의 구제], 부석사 조사당 벽의
사천왕상과 보살상 등
2) 불상
① 특징 :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
② 초기 : 대형 철불 유행(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 큰 규모에 비해 조형미 부족,
소박한 지방 문화의 모습 표현(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 혜허의 수월관음도
상, 안동 이천동 마애여려입상) (일본 센소 사) : 물
방울 모양의 독특한
③ 신라 양식 계승 :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뛰어난 세련미로 고려 불상의 걸작) 광배 로‘물방울 관음’
이라고도 한다.
ㅇ고려의 불상 : 고려 시대에는 거대한 불상이 유난히 많이 제작되었다. 다만, 균형미 등 완성도는 이전 시대보다 부족하
였다. 이는 불상의 제작에서 균형미와 조화미 등의 미의식보다는 규모를 더욱 중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통일 신라와 달리 중앙의 미술
양식이 지방의 미술에 끼치는 영향력이 부족하였고, 지방민의 종교적 열정이 자유롭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ㅇ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조성되어 지역적 특색을 나타낸 석불

하남하사창동 철조석가
여래 좌상(국립중앙박물영주 부석사 소조여래논산 관촉사 석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
관) 좌상 미륵보살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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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건축
① 전기 : 궁궐 건축(개성 만월대 궁궐 터,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계단식으로 건
물 배치 → 외관이 웅장하게 보임), 사찰 건축(흥왕사 터) → 현재는 터만 남아 있음
② 후기
㉮ 주심포 양식 : 안동 봉정사 극락전[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예산 수
덕사 대웅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13세기 이후 건축된 일부 건물
현존) -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양식으로 축조
㉯ 다포 양식 :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 조선 시대 건축에 영향
ㅇ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ㅇ주심포 양식 : 고려 전기에 등장,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면서 건물을 치장하
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에는 짜여져 있는 건축 양식이다. ㅇ다포 양식 : 고려 후
기에 등장,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짜여 있는 건물로, 웅장한 지
붕이나 건물을 화려하게 꾸밀 때 쓰임
ㅇ공포 배치가 주심포인가 다포인가 : 공포(栱包)란 앞으로 내민 처마를 받치며 그
무게를 기둥과 벽으로 전달시켜 주는 조립 부분을 말한다. 전통 건축은 공포 (栱包)
의 배치에 따라 크게 주심포 양식과 다포 양식으로 구분 된다.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으면 주심포,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으면 다포이다. 우리나라 궁궐, 사찰 건축
에서 다포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ㅇ기둥은 배흘림기둥인가 민흘림기둥인가 : 기둥도 모양에 따라 배흘림기둥과 민흘
림기둥으로 구분한다. 배흘림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하여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기둥의 굵기를 일정하게 했을 경우 착시 효과로 기둥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게 보인다고 한다. 민흘림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기둥을 약간 굵게 만
드는 것을 말한다.

§6. 석탑과 승탑 : 다양한 형태로 제작(조형, 감각면에서 신라에 비해 떨어짐, 형식에 구애받지 않음)
1) 특징 : 다양한 형태의 탑 제작(다각다층탑) → 신라에 비해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움
2) 대표 석탑 : 전기에는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평창 월정사 8각 9층 석탑 → 후기에는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
탑(원의 영향, 조선 원각사지 10층 석탑에 영향)
3) 승탑 : 여주 고달사지 승탑(팔각 원당형), 탑비 :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탑과 탑비
ㅇ승탑 : ‘부도’라고도 불리며 불교에서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ㅇ고려 탑의 특징 : •지방민의 발원으로 건립되면서 석탑의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옛 삼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삼국의 양식을 따른 탑들
이 부활하는 경향도 나타나, 옛 신라 지역에서는 석가탑 유형의 탑이, 옛 백제 지역에서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탑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3층탑, 5층탑, 7층탑, 다각다층탑등 다양한 형태의 석탑이 제작되었다.

개성 경천사지
여주 고달사지 승 개성 불일사 5층 평창 월정사8각9층 10층 석탑 (국립
탑(경기 여주) 석탑(개성) 석탑(강원평창) 중앙박물관 전시)

§7. 도교와 풍수도참설


1) 도교 – 삼국 시대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되었고,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불교 대신 장려하기도 함
① 성립 : 민간 신앙 + 신선 사상 + 도가나 음양오행 이론
② 역할 : 불교와 함께 국가의 안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종교, 기복 신앙(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신
앙 → 일반 백성에게 널리 유행)
③ 도교 행사 : 국가 차원에서 자주 개최 → 초제 거행[국가나 왕실에서 안녕과 왕실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 행사]
④ 팔관회 : 국가적으로 이름난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는 행사, 도교와 민간 신앙 및 불교가 어우러진 행사
⑤ 한계 : 불교적 요소, 도참사상, 민간 신앙 등을 흡수하였으나 일관된 교리 체계와 교단을 갖추지 못하고 민
간 신앙 형태로 유지
2) 풍수도참설 : 풍수지리설 + 도참사상 결합
① 도입 : 신라 말 도선이 소개, 산세,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지리적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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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내용 : 땅의 형세나 모양이 국가의 운명이나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
정치 변동에 영향
③ 특징 :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도참사상과 결합하여 고려 시대에도 크게 유행
④ 명당설의 유행
ㅇ풍수지리로 살펴본 개경 : 한 나라를 세울 때에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명당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개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경은 풍수지
리상 바람을 가두는 형세를 지닌 명당이라고 한다. 개경 주변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 일컫는 네 개의 산에 둘러싸여 있다. 이는
겨울철 바람을 막아 주어 생활에 편리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도 유리하였다. 이와 더불어 개경 주변에는 예성강, 임진강 등의 하천이 있어
상업과 무역에도 유리하였다. → 개경은 풍수지리상 분지 형태로 사신사라고 불리는 4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다. 사신사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
작, 북현무를 일컫는 것으로 각각 오공산, 자남산·덕암봉, 용수산, 송악산이 이에 해당한다. 사신사는 바람을 막고 명당을 만드는 기능을 하는데,
개경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ㅇ남경 : 고려 3경 중 하나, 성종 때 경주에 동경이 설치되면서 초기에는 수도인 개경과 평양의 서경을 합해 3경이라 함. 그리고 문종 때 남경이
설치되면서 4경이 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동경을 제외하고 3경이라 칭하였다.
(3) 과학 기술의 발달
§1. 인쇄술의 발달
•12세기말~13세기 초에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었으리라 추측됨
•배경 : 청동 주조술 발달로 세계 최초 금속 활자 발명, 활판 인쇄에 적합한 먹과 종이 제조가 이루어짐
금속 활자 •장점 : 다양한 인쇄물을 소량으로 발행하는 데 적합
인쇄술(활판 •활판 인쇄본
인쇄술) -상정고금예문(1234) : 13세기 중엽 강화 피난 시에 인쇄, 현존하지 않음 →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직지심체요절(우왕, 1377) :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제지술 발달 •닥나무 재배 장려, 중국에 종이 수출
ㅇ상정고금예문 : 12세기 인종 때 최윤의 등이 지은 의례서인데,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이 가지고 오지 못하여 최우가 보관하던 것을 강화도에
서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였다. 금속 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만,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서양의 금속 활자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ㅇ직지심체요절 :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직지심체요절’ 또는 ‘직지’라고도 불린다. 백운화상(白雲和
尙)이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에 필요한 내용을 선별해 해설한 책으로,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보다 약 70년이 앞선 것이다. 1887년 프랑스의 대리 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했던 콜랭 드 플랑시가 프
랑스로 가져가 현재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ㅇ고려의 금속 활자 인쇄술 : 1.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됨. 2.
고려 시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됨. 대장경 간행으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인쇄술은 초기부터 발달하여 이를 바탕으로
중기 이후 활판 인쇄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당한 먹과 종이의 제조 등도 그 배경이 되었다. 금속 활자 인
쇄술은 상정고금예문이 최초이고, 현존하는 것으로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는데,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
(4) 귀족 문화의 발달 - 자기, 금속 공예, 나전칠기 등 정교하고 세련된 문화(문벌귀족 사회 발달)
§1. 청자와 공예
1) 자기의 발달 – 신라의 전통 이에 송의 기술 수용
① 11세기 : 귀족 사회 전성기, 순수 청자 발달(신라의 전통+송의 기술) → 독자적인 경지
에 이름
② 12세기 : 상감법 개발로 황금기 → 원 간섭기 이후 쇠퇴[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해안 지방
의 많은 가마가 폐쇄되었기 때문] → 고려 말 북방 가마 기술 도입으로 분청사기 유 행
2) 금속 공예 : 불교 도구 중심으로 발달, 은입사 기술
3) 기타 : 나전 칠기 공예 발달(불경함, 화장품갑, 문방구)
ㅇ상감법 : 나전 칠기나 은입사 공예의 방법을 응용한 것으로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 토 ,
청동 은입사 향완(국
흑토를 채워 무늬를 내는 방법 ㅇ은입사 기술 :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 워립중앙박 물관)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기술이다. ㅇ나전 칠기 : 옻칠한 바탕에 무늬를 파내고 자개를 붙이 고려 시대의 나전 칠기 는
공예 방법이다. ㅇ분청사기 : 청자에 백토의 분칠을 한 것, 회청색 자기 → 청자 빛깔 퇴(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조, 소박함
ㅇ고려 시대 청자를 굽던 가마터 : 이곳에서 장인의 피와 땀, 예술혼은 1000℃가 넘는 뜨거운 열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고려청자로 탄생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중국인들은‘고려 비색 천하제일’이라 칭송하였다. 세계적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고려청자가 당시 중국 에서도 가장 귀
하게 취급될 만큼 뛰어난 공예품이었다.
ㅇ고려의 석탑 : 고려의 석탑은 대체로 조형 감각면에서는 신라의 석탑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느 낌 이
나,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 형태는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런 모 습 을
띠는 다각 다층탑으로,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은 고려 전기의 다각 다층탑이다. 고려 후기의 대표 적 인
석탑인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을 본뜬 것으로, 조선 시대로 이어져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원 형
이 되었다.
ㅇ고려의 불상 : 재료면에서 석불과 금동불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광주 춘궁리 철불과 같은 대형 철 불
이 많이 조성되어 시대적 특징을 나타낸다. 논산의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인체 비례가 균 형 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조형미도 퇴화된 감이 있으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 분방한 면과 함께 향 토
적 특색이 있다.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신라의 전통 양식을 계승한 가장 우수한 고려의 불 상
이다. 분청 사기 철
ㅇ분청사기 :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흰흙으로 겉면을 바른 뒤에 유약을 씌워 환원염에서
분청 사기 조구 운화 어문 병
조선 전기의 도자기
ㅇ고려청자 : <청자 상감 운학[구름과 학]무늬 매병[아가리가 좁고 어깨가 크며 밑이 홀쭉한 병]〉화 어문 병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翡色)이라고 말하는데, 근년 이래로 만드는 솜씨가 더욱 정교하여지고 색깔과 윤택이 더욱 아름
다워졌다. 술그릇의 모양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주발, 접시, 사발, 꽃병, 국그릇
을 만들 수 있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와 닮은 것들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술그릇 만은 다른 그릇들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한다.” - 고려도
경- → 고려의 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중국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자기 중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비취색이 나는 청자인데, 중국인도 천하의 명품으로 손꼽았다. 12세기 중엽에는 고려의 독자적인
상감법이 개발되었다. 상감은 본래 재료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재료를 채우는 기법으로, 나전 칠기나 은입사 공예에서 응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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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1)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동과 조선의 건국
§1. 새로운 정치 세력의 성장
1) 14세기 후반 국제 정세
① 중국 : 원의 세력 쇠퇴(왕위 계승 분쟁, 왕실의 사치와 낭비, 방만한 재정 운영) → 홍건적(한족 반란군)을 이끈 주원장이
난징을 수도로 명 건국 → 명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세계 재편
② 일본 : 중앙 권력의 통제 약화 → 왜구가 고려와 중국 해안에 출몰 → 인명과 재산 약탈
2) 새로운 정치 세력의 성장
① 배경
㉮ 명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재편
㉯ 권문세족의 권력 독점과 불법적인 농장 확대, 불교 사원의 농민 수탈 → 사회 모순 심화
㉰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 – 사회 혼란 가중
② 신진 사대부의 성장 : 성리학을 바탕으로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 폐해 비판 → 신흥 무인 세력과 함께 사회
개혁 추구
③ 신흥 무인 세력의 성장 : 홍건적과 왜구 격퇴 과정에서 → 최영, 이성계 등 성장 → 사회 모순 개혁 방향 둘
러싸고 최영과 갈등
(2) 위화도 회군(1388)
§1. 배경 : 개혁 방향을 둘러싼 최영[권문세족 이익 옹호]과 이성계[권문세족을 개혁 대상으로 인식]·신진 사대부의 대립
§2. 과정 : 명의 철령 이북 땅 요구[철령위 설치 통보] → 우왕과 최영 주도로 요동 정벌 단행 → 요동 정벌에 반
대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1388) → 최영 제거, 우왕 폐위 → 이성계가 정치 권력 장악
ㅇ배극렴 등이 여러 신하와 함께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자, 태조는 “예로부터 제왕은 천명 (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라며 거절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지 않고 왕위에 오르기를 거듭 권고하니, 마침내 태조가 마지
못하여 …… 대전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를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여러 신하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 태조실록”- → 신하들의 거
듭된 간청에 따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모습이다. 이렇게 선양의 모양새를 취하여 이성계가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음을 기록한 것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덕이 있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양’의 모양새를
취하며,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 ㅇ철령 이북 : 원이 직접 지배했던 지역으로 명이
직속령으로 삼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옴. ㅇ홍건적 : 원 말기에 봉기한 한족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
을 둘러 홍건적이라고 불렸다. 홍건적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했는데, 1차 침입(1359년) 때 모거경이 4만
의 병력을, 1361년 2차 침입 때에는 반성, 사류 등이 10여 만 대군으로 침입하였다. ㅇ공민왕 10년(1361)에 홍
건적 침입 시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은 홍산 대첩(1376), 이성계는 황산 대첩(1380)
※위화도 회군 :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4불가론)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3. 요동
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4.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5.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3) 과전법의 시행과 조선 건국 위화도


§1. 신진 사대부의 분화 : 사회 모순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분열 - 권문 세족 횡포와 불교의 폐단 비판
구분 온건 개혁파 급진 개혁파
고려 문제 고려 왕조의 틀에서 점진적 개혁 고려 왕조 부정 → 역성혁명 주장
비리의 핵심 세력 제거, 대토지는 정리하되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 축소 → 전면적 토
개혁안
전면적 토지 개혁 반대 지 개혁 주장
불교 문제 불교의 폐단 비판 불교의 폐단과 교리 비판
중심 인물 이색, 정몽주 등, 부패한 권문세족 제거, 정도전, 조준, 남은 등
ㅇ역성혁명(易姓革命) : 왕이 부덕해 민심을 잃으면, 덕이 있는 다른 사람이 천명을 받아 왕조를 바꾸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도 좋다는 유교 정치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ㅇ불씨잡변 : 불교의 교리인 윤회설, 인과설, 지옥설 등을 성리학의 입장에서 철저히 비판하였다.

§2. 과전법 시행(1391) - 조준, 정도전


1) 목적 : 국가 재정 악화시키고 농민에게 큰 부담이 되는 토지 문제의 해결
2) 내용 : 토지 측량 →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토지 몰수 → 신진 사대부에게 재분배
3) 결과 : 권문세족 몰락(경제 기반 붕괴), 신진사대부 관리의 경제 기반 마련, 국가 재정 확충
§3. 조선 건국(1392) :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가 정몽주 제거 후 조선 건국
ㅇ정몽주 제거 : 이성계가 사냥 중 중상을 입은 것을 기회로 정몽주가 이성계 제거를 시도 → 이방원이 조영규 등을 시켜 정몽주 살해
ㅇ조선의 건국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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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1388) 우왕 축출(1388), 창왕 축출(1389) 전제 개혁(과전법, 1391)
조선 건국
이성계 일파의 군사적 실 ➡ 공양왕 옹립, 급진 개혁파의 실권 장 ➡ 개창될 새 왕조와 신진 사대부의 경 ➡
(1392)
권 장악 악 제 기반 마련
§4. 국호 제정과 한양 천도
1) 국호 제정 : 조선(고조선 계승 의미)
2) 한양 천도
① 지리적 이점 : 중앙에 위치, 교통 편리·물자 풍부(한강), 방어 유리(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
② 한양 건설 : 유교 이념에 따라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건물 배치하고 명칭을 제정함
ㅇ건물 명칭 : 정도전이 유교 경전에서 유교 덕목을 따 주요 건물의 명칭을 정하였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유교 덕목을 4대문(흥인지문, 돈의
문, 숭례문, 숙정문)의 이름에 넣었다. 경복궁은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
ㅇ경복궁 근정전 : 경복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 정전(正殿)으로, 조례, 가례, 즉위식, 사십 접견 등 국가 중요 행사가 치러졌던 곳.
ㅇ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유 : 조선이 개경을 떠나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 새 수도를 한양에 건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도평의사사는 한양
의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장점과 배와 수레가 통한다는 교통의 편리성 등을 제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주변이 높은 산들로 둘러
싸여 외적을 막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고, 고려 시대부터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으로 불리어 3경 중 하나로 중시되던 곳이었다.

(4) 통치 체제의 정비
§1. 건국 초기의 통치 기반 마련
•정도전과 조준 등 개국 공신이 주도 → 재상 중심의 정치 추구, 성리학적 통치 이념 확립
태 조 (성리학을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채택), 문물 제도 정비
(1392- •한양(1394) 천도 :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 경복궁 등 궁궐·종묘·사직·관아·학교 등 건설 → 도읍의
1398) 기틀 마련, 풍수지리설(한양 명당설), 국호 : 조선
재상중 •정도전 : 유교적 민본 통치 규범 마련(조선 문물 제도 정비),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 확립
심 정치 노력, 『불씨잡변』저술 →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 조선 경국전, 고려국사 편찬
•명 중심의 국제 질서에 참여(화이론적 세계관 바탕)
•두 차례왕자의 난을 거쳐 즉위 → 개국 공신 세력 축출하고 왕권 강화
태 종
-배경 :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에 대한 이방원과 왕자들의 불만 고조
(1400- -과정 :
이방원과 왕자들이 이복동생인 세자와 정도전 제거
1418) -결과 :
이방원이 정치적 실권 장악 →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
- 국왕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 6조 직계제 실시, 사간원 독립(대신 견제), 왕실 외척과 종친의
중심의 정치적 영향력 축소(정치 참여 제한)
•국가 재정 확충 : 양전 사업, 호적 작성, 호패법 실시(16세 이상 양반-천민), 사원 토지 몰수(재정
통치 체
확보), 억울한 노비 해방
제 정비
•국왕의 군사권(병권) 장악 : 사병 폐지, 친위 군사 증가
ㅇ정도전이 꿈꾸던 나라, 조선 : 조선 건국 이후 제도를 정비하는 데 앞장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과 같은 저서에서 그의 정치
구상을 남겨 놓았다. 그는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 체제를 지향하였다. 또한 명에 대한 사대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조선의 주권과 자주성을 지키
기 위한 수단이라 보았다. 따라서 요동 정벌 계획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도전은 본인이 소유한 땅에서 가족 노동력으로 농사를 짓고 생활해
나가는 자작농을 육성하려 하였다. 또한 성리학을 앞세워 불교 교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은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를
지향한 이방원(태종)과 갈등을 빚어 끝내 그에게 목숨을 잃었다.
ㅇ6조 직계제(直啓制) : 1414년 태종 14년,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제도로, 의정부의
재상권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의정부는 사대 문서와 중죄수의 재심만 관장 ㅇ6조 직계제 : 의정부의 서사를 나누어 6조에 귀속시켰
다. …… 의정부가 관장한 것은 사대문서와 중죄수의 심의뿐이었다. -“태종실록”- → 태종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즉위한 후 국왕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라 정치의 주도권이 재상
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즉위한 세조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ㅇ정도전의 정치 사상 :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
니, 재상은 임금의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가장 올바른 경지에 들
게 해야 한다. -정도전, “조선경국전”- →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함. 조선 건국과 통치 체제 정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정도전이 국왕이
한결같이 뛰어날 수 없으므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재상의 역할을 강조.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 체제를 담아 “조선경국전”을 편찬.
ㅇ왕자의 난 : 태조의 왕자들 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다. 1차 왕자의 난(1398)은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와 종친 세력이 정도전
과 세자를 제거한 것이고(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방연/방번-방석<세자책봉>,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종에게 양위), 2
차 왕자의 난(1400)은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에 대항해 이방간이 일으킨 것이다.(방간의 방원 제거 시도)
ㅇ호패 :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발급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이용하였다. 호패법을 실시한 목적은 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직업과
신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군역과 요역의 부과 기준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호패 재료와 기재 내용 : 신
분에 따라 다름, 양반은 얼굴 빛, 수염 유무, 노비는 주인 연령, 거주지, 얼굴빛, 신장, 수염 유무를 기록하였다.

§2. 유교 정치의 구현 노력
•강력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의 이상 추구
세종(1418 •집현전 설치 : 학문과 정책 연구 담당, 집현전 학사 우대, 궁중에 설치, 정책 방향 제시,
-1450) 학문 연구와 경연 참여 등을 통해 국왕 통치에 자문
•경연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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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서사제 : 훌륭한 재상 등용, 인사와 군사는 왕이 직접 처리[재상에게 대부분의 정
치를 맡기고 인사와 군사는 국왕이 직접 주관] → 왕권과 신권의 조화 추구(재상은 정
치, 왕은 인사와 군사 담당)
•유교 윤리의 사회 윤리화 노력 : 오례 정비, 사대부에게 주자가례 시행 장려
•왕도 정치 강조 : 유교적 민본 사상의 실현 노력, 청백리 재상 등용
단종(1452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의 실권 장악 → 왕권 약화
-1455)
•즉위 배경 : 어린 단종의 즉위 → 재상이 정치적 실권 장악 → 수양 대군(세조)이 정변통해 조카인
세조(1455
단종 폐위(계유정난)하고 즉위
-1468) -
•왕권 강화 노력 : 6조 직계제 재시행, 집현전과 경연 일시 폐지(언론 활동 제한 목적),
왕권 강화
종친 등용(지지 유도)
•문물 제도의 정비 완비 : 경국대전 반포(세조 때 편찬 시작, 성종 때 완성 반포, 조선 왕
조의 기본 법전) → 통치 체제 정비 일단락 → 법전에 근거하여 국정 운영할 수 있는 유
교적 법치 국가의 토대 마련
성종
•홍문관 설치 : 집현전 계승, 관원 모두가 경연관을 겸함
•경연 활성화 : 정승을 비롯한 주요 관리가 참여 → 경연이 단순히 왕의 학문 연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왕과 신하가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하는 역할을 하게 됨
ㅇ경연 : 왕과 신하들이 모여 유교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던 제도이다. 현실 정
치에 대한 왕과 신하들의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ㅇ경연을 활성화 : 홍문관의 관원과 고위 관리가
참석해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하는 형태
ㅇ의정부 서사제 :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 보내어 시행한다. 다만 이조·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 업무, 형조
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 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만약 타당하지 않으면 의정부가 맡아 심의 논박하고 다시 아뢰어 시행토록 한다. -“세종실록” → 왕권과
신권의 조화 추구, 의정부 서사제는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권력의 독점을 막으면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
가 이루어진 통치 체제 구축을 목표로 실시되었다. 훌륭한 재상을 등용해 정치를 맡기면서도 국왕이 인사
와 군사에 관한 일을 직접 주관하므로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ㅇ의정부 서사제 : 6조 직계
제를 시행한 이후, 모든 업무가 6조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업무의 크고 작음과 가볍고 무거움이 제대
로 구별되지 않으며, 의정부는 오직 사형수를 심판하는 일만 하게 되므로 재상을 임명한 뜻에 어긋난다.
6조는 모든 업무를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는 협의를 거쳐 나에게 보고하여 명령을 받고, 그 내
용을 다시 6조에 내려보내 시행하도록 하라. - “세종실록” - 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
ㅇ오례 : 국가적인 5가지 의식(국가 행사 유교식 거행), 즉 가례(嘉禮, 관혼례)·길례(吉禮, 제사)·흉례(凶禮, 상례)·군례(軍禮, 군사 의식)·빈례(賓禮,
사신 접대)를 말한다. ㅇ주자가례 : 관혼상제(冠婚喪祭)의 4례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수집하여 만든 책
ㅇ왕도 정치 : 인과 덕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 유교에서 이상으로 삼는 정치 사상 ㅇ집현전 기능 : 집현전 학사는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짐. 당나라 경전 간행, 서적 수집 담당 → 고려 인종(1136) 연영전을 집현전으로
개칭, 1420(세종 2) 학자 양성, 문풍 진작, 기구 확장 정비, 1456(세조 2) 단종 복위 기도 → 폐지
ㅇ조선 초기의 통치 체제는 의정부와 6조의 기능에 따라 크게 의정부 서사제와 6조 직계제로 나눌 수 있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에서 국가의
정책을 의결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제도이며, 6조 직계제는 6조에서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제도이다.
ㅇ6조 직계제 : 의정부의 사무를 나누어 6조에 귀속시켰다. …… 처음에 임금께서는 의정부 재상의 권한이 너무 막강하여 없애려고 하였으나, 의
정부를 없애기는 어려울 듯하여 이를 개선하고자 한다. 앞으로 의정부는 사대문서를 작성하는 일과 중죄수를 심의하는 일만 하도록 하라. 그리
고 의정부의 행정 업무는 6조가 나누어 처리하되 먼저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내가 직접 보고를 받아 결정하겠노라. -“태종실록”-
ㅇ수양대군 정변 : 수양 대군이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ㅇ경국대전의 편찬 : 세조 때 양성지의 건의로 호전과 형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이전, 예전, 병전, 공전도 편찬하였으나 세조의 갑작스런 죽음으
로 반포하지 못하였다. 최종적으로 성종 15년에 완성하여 이듬해 반포하였다.

§3. 중앙 통치 체제 – 경국대전에 법제화


1) 중앙 정치 조직의 특징 :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구성
① 국정 운영 : 국왕을 정점으로 의정부(재상 합의 기구)와 6조(정책 집행), 3사(언론 활동)가 중심이 되어 운영
② 특징 : 권력 독점과 부정 방지, 왕권과 신권의 조화 추구
㉮ 의정부와 6조의 고위 관리 회의에서 중요한 국가 정책 결정
㉯ 경연 제도 : 국왕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교육, 국왕과 대신이 학술, 정책 토론 → 학술 정치 추구
㉰ 3사의 언론 활동 : 잘못된 정책 결정을 비판, 견제하고 관리와 사족의 여론을 정책에 반영
㉱ 상소 제도 : 재야 유생도 정치 현안에 대한 의견 제기하여 정치 참여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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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국정 총괄, 재상들이 합의하여 정책을 심의·결정 → 최고 정무 기구 •의정부·6조의 고위 관리는 주
•주요 행정 담당, 아래에 여러 관청을 두어 업무 분담 → 행정의 전 요 정책 회의나 경연에 참여해
6조 문성과 효율성 높임 정책 협의 → 업무를 조정하고
•이·호·예·병·형·공조 구성(판서 : 정2품, 참판 : 종2품) → 정책 집행 담당 통합적인 정책 추진 가능
•사헌부 : 관리의 비리나 부정 감찰, 장관 : 대사헌 •언론 기구 → 권력의 독점과
•사간원 : 왕에게 간언 → 국왕의 정치 비판, 장관: 대사간 부정 방지
3사 •사헌부와 사간원은 간쟁, 봉박,
•홍문관 : 왕의 정책 자문, 경연 주관, 장관: 대제학 서경권 행사, 홍문관은 사헌부
와 사간원의 역할 지원
의금부 •국왕 직속의 사법 기구, 왕명에 따라 중죄인 처리, 장관 : 판사
•왕권 유지·강화하는 기능 담당
승정원 •국왕의 비서 기관, 왕명 출납, 장관 : 도승지
한성부 •서울의 행정 담당
춘추관 •역사서의 편찬과 보관 담당, 장관 : 영사(領事)(영의정이 겸임) 성균관 최고 교육 기관, 교장 : 대사성
ㅇ3사 기능 강화 : 고려에서는 어사대와 중서문하성의 낭사가 언관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에서는 어사대를 사헌부로 바꾸고 정3품 아문으로
승격, 중서문하성이 폐지될 때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하였다. ㅇ당상관 : 왕과 함께 정책을 논의,
주요 관서의 책임자, 당하관 : 국정 실무 담당 ㅇ당상관 제조 : 6개월 마다 당하관의 근무 성적을
평가 - 승진, 좌천 ㅇ봉박 : 왕명이나 조칙이 합당하지 않을 때이것을 되돌려 보낼 수 있는 권한
ㅇ서경권 : 5품 이하 관리를 임명할 때, 인물의 경력과 신분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를 승인하는 권
한이다. ㅇ통치 체제의 정비 -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 이룩(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
룬 통치 체제)
ㅇ3사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일컫는 말. 이들은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정사를 비판하며 문
필 활동을 하면서 언론 활동을 담당함.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
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3사의 기능 강화는 국왕과 재상의 권력의 독점
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
ㅇ3사의 언관 : 벼슬 등급은 높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특
별한 일이 없는 한 나중에 판서나 정승 등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ㅇ대간(대관, 간관) : 대관은 마땅히 위엄과 명망이 우선되어야 하고 탄핵은 뒤에 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위엄과 명망이 있는 자는 비록 종일토록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워 복종할 것
이요, 이것이 없는 자는 날마다 수많은 글을 올린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
이다. 대개 강의한 뜻과 정직한 지조가 본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한갓 탄핵만으로 여러
신하들을 두렵게 하고 안과 밖을 깨끗이 하려 한다면 기강은 떨쳐지지 못하고 원망과 비방이 먼저
일어날까 두렵다. …… 천하의 득실과 백성들을 이해하고 사직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일정한 직책
에 매이지 않는 것은 홀로 재상만이 행할 수 있으며 간관만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니, 간관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직무는 재상과 대등하다. <삼봉집>
ㅇ의정부 서사제는 6조가 먼저 의정부에 업무를 보고하면 의정부 재상들이 이를 심의한 후 국왕의 재가를 얻어 시행하는 체제였지만, 6조 직계제
는 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왕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의정부 서사제는 재상의 국정
주도권을 강화해 준 반면, 6조 직계제는 국왕의 국정 주도권을 강화해 주었다. 6조 직계제는 국왕의 권력을 크게 강화하던 태종이 처음으로 실
시하였다. 뒤를 이은 세종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의정부 서사제로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나이
어린 단종의 즉위로 국정 주도권이 재상에게 넘어가자,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다시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국왕의 국정 주도권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국정 운영 방식은 의정부 서사제가 다시 시행되는 중종 때까지 이어졌다.

§4.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 지방 조직 일원화


1) 정비 방향 : 지방 세력이 백성을 임의로 지배하는 것을 방지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2) 지방 행정 조직 : 8도(관찰사 파견, 수령 지휘 감독) – 부·목·군·현(수령 파견, 행정·사법·군사권 행사) – 면리
제 실시

ㅇ부·목·군·현 : 고을의 인구와 토지의 크기에 따라 부·목·군·현으로 구획, 그에 따라 수령의 품계에도 차등이 있었다. ㅇ면리제 : 지방 행정의 기
본 단위인 군ㆍ현을 몇 개의 면으로 나누고, 면을 다시 몇 개의 리로 나눈 것이다. 면의 책임자인 면장이나 리의 책임자인 이정은 그 지역 주민
중에서 선임하였다. 국가의 통치력이 일반 백성에게 직접 미치게 함.
ㅇ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 : 일반 행정 구역과 군사 행정 구역을 두었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어 지방 행정 조직을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한성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7개 도의 이름은 도(道)지역의 거점 중심인 계수관(界首官)의 명칭에서 하나씩 따와서 이
름을 지었기 때문에 계수관의 읍 승격이나 치폐(致斃)에 따라 도의 명칭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3) 지방관 파견
① 관찰사 : 8도에 파견, 도의 행정 총괄, 관할 지역의 수령 지휘·감찰(군현의 수령 지휘 감독)
② 수령 : 모든 군현에 파견, 국왕의 대리인, 행정·사법·군사권 행사
③ 향리 : 수령을 보좌하며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지위가 이전보다 낮아짐)
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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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군, 현 : 고을 크기에 따라 지방관 등급 조정(330여 개 군현 설치 ← 작은 군현 통합)
② 모든 군현에 수령 파견 직접 통치 : 속현과 향·부곡·소 소멸(일반 군현으로 승
격) → 지방에 대한 통치력 강화
③ 수령의 권한 강화 :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향리의
지위 격하]
④ 상피 제도 : 수령이나 관찰사의 자기 출신 지역에 부임 금지 → 부패 방지
⑤ 수령 감독 : 관찰사의 권한 강화, 수시로 암행 어사 파견
ㅇ관찰사(감사, 종2품) : 8도에 파견[감찰권,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 가진 중요한 직책] → 수령의 비행
견제(수령 지휘, 감독), 민생 파악 목적(군현 순찰, 백성들의 생활 관찰) ㅇ수령(목민관)의 권한 강화 :
府․牧․郡․縣에 파견, 왕의 대리인으로 모든 군현에 파견, 상피제와 임기제 적용 → 지방의 행정·사법· 군
사권 장악
※수령 7사 : 평택 현감 변징원이 하직하니, 임금이 묻기를, ……“그대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무엇을 먼
저 하겠는가?”하니, 변징원이 대답하기를, “ 마땅히 칠사(七事)를 먼저 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
하기를,“ 이른바 칠사(七事)라는 것은 무엇인가?”하니, 변징원이 대답하기를, “농상(農桑)을 성하게 하
고, 학교를 일으키며, 사송(詞訟)을 간략하게 하고, 간활(奸猾)*을 없애며, 군정(軍政)을 닦고, 호구(戶
口)를 늘게 하며,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는 것이 바로 칠사입니다.”하였다.-『 성종실록』- *간활(奸
猾):간사하고 교활함 ➡ 조선 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수령은
그 지방의 행정 뿐 아니라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였으며 농업이나 조세 징수 등을 책임지고 있었다.
ㅇ충청도는 왜 공청도가 되었을까? : “충청도를 공청도로 고치고 감사·병사·수사와 충원 현감의 병부(兵
符)를 다시 만들어 내려보내라. -인조실록-→ 인조 6년(1628) 허유 등이 일으킨 역모 사건을 처리하면조선의 지방 행정 조직
서 정부가 내린 명령이다. 죄인들의 조사와 처벌이 결정되는 가운데 역적들이 살던 곳의 수령은 파직되
었고, 읍호(邑號)가 강등되어 충주목이 충원현으로 바뀌면서 충청도도 공청도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충청도는 그 이름이 무려 16번이나 바뀌어
공충도, 공청도, 공홍도 등 매우 다양하게 불렸다. 조선은 원래 각 도의 경계 안에 있는 고을 중 가장 큰 규모의 고을 이름을 따서 8도의 이름을
정했다. 충청도의 경우 충주와 청주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그런데 반역과 같은 중대 범죄가 일어날 경우, 그 고을의 격이 강등되고 다른 고을
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도의 명칭도 바뀌었다. 이러한 읍호 강등은 강상의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5) 유향소와 경재소 - 고려 시대의 사심관 제도가 분화 발전한 것, 향촌 자치와 중앙 집권의 조화 추구


① 유향소 : 군현에 설치, 지방 사족으로 구성된 향촌 자치 기구, 지방 사족의 여론을 모아 수령을 보좌하거나
견제, 향리의 비리 감시, 풍속 교화 기능 → 향촌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지방 통치의 효율성 높임)
② 경재소 : 정부가 서울에 설치, 유향소와 정부의 연락 기능 → 중앙에서 유향소 통제를 통해 중앙 집권 체제 강화
ㅇ유향소 : 지방의 유력자나 벼슬에서 은퇴한 양반[전직 관리]들로 구성(덕망있는 인사들로 구성), 향촌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 군현의 수령
보좌, 향리와 관노비의 불법 규찰, 불효와 불목(不睦) 감찰, 향촌의 풍속 유지 목적, 전직 관리 중심, 수령보다 품계가 높은 경우가 많아 수령을
능멸하는 일이 많았음 ㅇ경재소 : 1435년, 세종 때 유향소 견제 위해 설치, 중앙에 재직하는 고위 관리가 자신의 출신 지역인 지방에 설치되어
있는 유향소를 통제하고, 출신 지역과 정부의 중간에서 여러 가지 일을 주선하거나 공물의 상납에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중앙 정부가 현직 관
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 통제를 위해 설치, 중앙과 유향소의 연락 업무 담당]
ㅇ• 앞서 유향소의 사람들이 향중(鄕中)에서 권위를 남용하여 불의한 짓을 행하니, 그 폐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왕께서 폐지하였던 것입니다.
간사한 아전을 견제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수령이 해야 할 일인데, 만약 모두 유향소에 위임한다면 수령은 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 유향소를 폐지한 이후 시골의 풍속이 날로 악화되고 있으니 다시 세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전하께서 다시 유향소를 세우고 좌수와 별감을 두도록 하였는데,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자를 추대하여 좌수로 일컫고, 그 다음으로 별감이라
하여 한 고을을 규찰하고 관리하게 하였다. - 성종실록 -
ㅇ유향소의 변동 : 조선 시대에 유향소는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다. 고려 말부터 있었던 유향소는 수령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태종 6년에
폐지되었다. 그 뒤 수령의 불법 행위, 향리들의 폐단 등이 향촌 사회의 새로운 문제로 나타나자, 세종 10년에 부활되었다. 1435년에는 유향소를
견제하기 위해 경재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유향소가 관권과 결탁하여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빈발하자 세조 말에 다시 폐지(함경도의 이시애 난
때 일부 가담하여 폐지됨)하였고, 성종 20년에 다시 세워 그 체제를 정비하였다. 19세기에 와서 향촌 질서의 변화를 배경으로 유향소는 수령에
대한 규제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수령을 보좌하는 기능밖에 하지 못하였다.
ㅇ유향소의 설치 : 국가가 향소(鄕所)를 설치하고 향임(鄕任)을 둔 것은 수령을 중히 생각해서였다. 수령이란 임금의 나랏일에 대한 걱정을 나누
어 어떤 지역의 사람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러나 수령은 임기가 정해져 있어 늘 바뀌고 있다. 늘 새 사람이라는 것은 일을 함에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따라서 각 고을에 명령을 내려,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한 고을의 기강을 바르게 하고 일정한 임무를
주어 일을 하도록 한다. -장현광, 여현선생문집- → 각 군현에는 지방의 유력한 사족들이 모여 유향소를 설치하였다. 임기가 있는 수령이 해당
지역의 사정을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유향소의 사족들이 수령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고, 나아가 아전이 백성을 침탈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수령을 비난하거나 백성을 침탈하는 경우도 있어 유향소를 혁파하기도 하였다.

§5. 관리 선발과 인사 관리 제도
1) 관리 선발 : 개인 능력 중시 방향으로 운영 → 과거, 음서, 천거제 실시
2) 과거 : 유교적 소양과 능력을 갖춘 관리 선발을 위한 방법
① 과거의 종류 : 문과(문관 선발)·무과(무관 선발)·잡과(기술관 선발, 해당 관청에서 별도 실시) 실시 → 고려와
달리 무과가 제도화
② 시행 시기 : 3년마다 정기 시험 실시(식년시), 수시로 특별 시험(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시행) 실시
③ 응시 대상 : 원칙적으로 천인이 아니면 응시 가능[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처지로 일반 백성이 합격하기는 쉽지 않았음]
④ 내용
식년시의 경우 초시(각 도의 인구 비례로 선발, 240명) → 복시(문과 33명, 무과 28명) → 전시
문과, 무과
(순위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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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관 선발, 분야별로 정원 있음, 초시, 복시 2단계, 역(19, 사역원), 율(9, 형조), 의(9, 전의감),
잡과
음양(9, 관상감)
3) 천거 : 추천에 의한 등용[고위 관리가 추천] → 대부분 기존 관리 대상으로 실시
4) 음서 : 고려에 비해 대상 축소,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관 승진 어려움 → 고려에 비해 개인의 능력을 중시
했음을 의미함
5) 인사 관리 제도
① 상피제 : 권력의 집중과 부정 방지 목적
② 서경 : 인사의 공정성 확보 목적(5품 이하 관리 등용시 대간의 동의권 행사)
③ 근무 성적 평가 : 매년 두 차례 실시 → 승진과 좌천 자료로 이용
ㅇ문과 : 문과 예비 시험인 소과(각 100명 씩, 생원시, 진사시)와 대과(문과)로 이루어졌다. 소과 합격자는
문과에 응시,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ㅇ상피제 : 부정을 막기 위해 가족이나 가
까운 친인척과 같은 관서에 근무하지 않도록 하거나 출신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제도 과거제의 운영
ㅇ교육 제도 :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교육 제도도 마련하였는데, 주로 문관 양성을 위한 유학 교육을 강조하
였다. 서울에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4부 학당이 있었고, 각 지방의 군현에는 향교가 있었다. 사립 초등 교육 기관인 서당도 있었다. 한편, 기
술 교육은 각 해당 관청에서 담당하였고, 국가에서 별도로 설치한 무관 교육 기관은 없었다.
ㅇ고려에서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음서의 혜택이 주어졌지만, 조선에서는 2품 이상 관리의 아들, 손자, 사위, 아우, 조카와 3품관의 아들,
손자로 제한되었다. ㅇ문과 응시 자격 제한 : 탐관오리의 아들, 재혼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 서얼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무과
나 잡과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ㅇ과거 선발 인원
생원과 사서오경 시험으로 100명 선발
소과
진사과 문예 시험으로 100명 선발
문과 초시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 생원·진사·성균관 유생 중에서 240명 선발, 각 도 인구 비례
대과 복시 서울에서 실시, 초시 합격자 중에서 33명 선발
전시 왕 앞에서 실시, 복시 합격자의 등급을 정함(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2. 사림 세력의 등장과 붕당의 출현


(1) 사림의 성장
§1. 사림과 훈구

사림 15세기 중반 이후 성장,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 왕도 정치 강조, 향촌 자치 주장


훈구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협조한 공신, 대토지 소유, 상업에 관여해 재산 축적
1) 사림(지방 사족) 세력
① 등장 : 15세기 중반 이후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투
철한 지방 사족의 성장
② 특징 :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
강조, 향촌 자치 주장 →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 강화 추구[유향소 등
통해 향촌 질서를 이끌어 나감]
2) 훈구 세력
① 세조 즉위 과정에 공 세운 공신 → 고위 관직 독점, 권세를 이용해 막대한 토지 소유, 상업 활동에 관여해
재산 축적 → 이 과정에서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 지탄의 대상이 됨.
3) 성종의 사림 등용
① 중앙 정계 진출 :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등용, 성종 때 김종직을 중심으로 본격 진출
② 사림의 활동 : 주로 3사[언관직]에서 언론과 학술 담당, 훈구 세력의 비리 비판하고 독주 견제 → 훈구와 사
림의 세력 균형이 한동안 이루어짐
ㅇ훈구 세력 : 세조의 집권 이후에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임. 이들은 조선 초기에 관학
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함. ㅇ영남, 기호 : 영남은 경상도, 기호는 경기와 호서(충청도)를 합칭하는 말
ㅇ예림 서원(경남 밀양) :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 사족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지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
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난하는 글이라는 훈구 세력의 공격을 받아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그의 문집이 불태워지고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예림
서원은 명종 22년(1567)에 창건되었다.
ㅇ훈구와 사림의 비교
구분 훈구파 사림파
경제, 정치 대지주 출신, 중앙 집권·부국강병 추구 지방 중소 지주, 향촌 자치·왕도 정치 추구
사상, 학문 성리학 이외의 사상에 관대, 사장 중시 성리학 이외의 사상에 배타적, 경학 중시
역할 문물 제도 정비에 기여 성리학적 향촌 질서 확립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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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화와 사림의 집권
§1. 사화의 발생
•김종직과 그 문인 진출 →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 차지 → 훈구 세력 비판하여 그들의 일
성종 방적인 독주를 견제
•성종 : 훈구 세력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 중용 → 훈구와 사림 세력이 균형 이룸
•왕권 강화를 위해 사림의 언론 활동 억제(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이 사림 공격, 연산군도 자신의 실정
을 비판하는 사림 세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함)
무오사화(1498) : 김종직의 ‘조의제문’ → 성종 때 등용된 사림 세력 몰락
연산군
갑자사화(1504) : 폐비 윤씨 사건 →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된 사림과 훈구 피해 → 영남 사림
대부분 몰락
•폭압적 정치(언론 탄압, 재정 낭비) → 중종반정(1506)으로 축출
•훈구 공신의 권력 강화 → 조광조 등 사림 중용(현량과 통해 사림 대거 등용) → 3사 언관직
중종 차지 → 급진적 개혁 추진(조광조의 개혁 정치)
•기묘사화(1519) :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에 대한 공신(훈구파)의 반발 → 조광조 등 사림 제거
명종 을사사화(1545) : 외척끼리의 권력 다툼에 휩쓸려 윤임과 연결된 사림이 피해를 입음
ㅇ훈구 공신의 권력 강화 : 훈구 공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막대한 재산 차지 →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조광조 등 사림 세력 등용

§2. 조광조의 개혁 정치
1) 조광조의 등용 : 중종이 훈구 공신[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는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을 지칭함]의 견
제를 위해 등용
2) 개혁 내용 : 사림의 여론을 내세워 급진 개혁 추구 → 현량과 실시, 경연과 언론 활성화, 소격서 폐지, “소학”
보급(유교 윤리 확산), 공납 제도(농민의 부담 가중) 개선, 위훈 삭제[과대 평가된 훈구 대신의 공훈을 삭제하고 경제 기
반을 축소하려함] 주장 → 기묘사화로 실패
3) 결과 : 훈구 세력의 반발 → 기묘사화로 실패
ㅇ“아, 이곳은 정암 조 선생(조광조)이 귀양살이를 하던 집이고 또 생을 마친 곳이다. 아, 지난 기묘년은 지금으로부터 149년이나 되는데, 학사
(學士)·대부(大夫)는 그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은 그 혜택을 생각하되,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잊지 못하고 ……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숙연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아, 이는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 타고난 떳떳한 마음에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송자대전- → 글자
하나마다 공경심이 가득 담긴 이 글은 조광조의 유배지에 세워진 비문이다. 이 비는 17세기 당시 지방관이 대학자인 송시열의 글을 받아 조광조
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고자 세운 것이다. 중종 때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다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던 조광조의 유배지에 당대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던 송시열의 추모 글이다. 또한 잇따른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이 중앙 정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ㅇ조의제문 : 김종직이 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초의 마지막 황제 의제를 추모하고 항우를 비난하여 쓴 글. 훈구 세력은 이 글에 등장하는 의제
가 단종, 항우가 세조를 가리킨다고 비판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ㅇ현량과 : 중종 14년 28명의 사림을 등용하였다. 학문이 뛰어난 인
재를 천거하여 간단한 시험을 통해 등용하는 제도이다. ㅇ공훈 삭제 : 중종 반정 때 부당하게 공신에 오른 사람의 훈작(포상)을 삭제하자는 조
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주장. 반정 공신들 가운데 거짓 공신의 잘못된 공훈[위훈(僞勳)]을 공신록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하여 심정, 홍경주 등
74명의 관직과 위훈을 박탈하였는데, 이것은 전체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ㅇ김종직과 문인들 : 김종직의 자는 계온인데, 사예 김숙자의 아들이고, 호는 점필재이며 선산 사람이다. 세조 때 급제하고 예종과 성
종을 섬기면서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공이다. 효행이 있고 문장이 고결하여 한때 유림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후학들에게 권장하기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학문을 성취하였다. 김굉필과 정여창 같은 이는 도학으로 명성이 있었고, 김일손, 유호
인, 조위, 이종준, 남효온, 홍유손 같은 사람은 문장으로 이름나고 그 밖에도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이름을 얻은 이가 매우
많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당시에는 공이 이미 죽었으므로, 그 화가 지하에 미쳐 그의 관을 쪼개고 시체를 목 베었다.
-『대동야승』-
ㅇ중종 때의 사림 : 전하께서도 교화를 일으키고 뜻을 날카롭게 하시어 저희를 친애하고 믿으셔서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고 간함
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셨고, 그 계책 듣기를 좋아하여 건의하는 것이 있으면 따르셨습니다. …… 이에 모든 일을 옛일을 가지고 지
금 시행하려 하였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태어난 지 8세가 되면 모두 소학에 들어간다 하여, 대체로 처음으로 배우는 선비는 반드
시 소학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씨 향약의 법이 있다 하여 그 법이 온 나라에 유행하게 하였으며, 옛적에는 현량과가 있다
하여 또한 그런 과거를 설치하였습니다. -『대동야승』- → 사림은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었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였는데, 김종직과 그 문인이 활약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 사림의 언론 활동을
억압하면서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 영남 사림의 대부분은 몰락하였다. 그러나 중종이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
려 하여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현량과, 소학 보급, 향약의 전국적 시행 등을 주장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위훈 삭제를 주장하여 훈구파의 반발을 받아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ㅇ소격서 : 조선시대 도교와 관련된 제천 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 ㅇ소학 : 어린이를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된
중국 송나라 때 지어진 서적 ㅇ방납 : 조선시대 공물의 납부를 대행함으로써 중간 이윤을 취하는 행위

§3. 사림의 집권
1) : 서원(학문적, 정치적 결속 도모)과 향약(향촌 지배 강화)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에서 세력 확대 → 선조 때 중
앙 정계에 대거 진출해 정치 주도권 장악
2) 성리학을 기반으로 삼음, 출신 지역 다양, 정치적, 학문적 성향 차이 →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림끼리 붕당 형
성 → 사족의 의견 모아 공론을 내세우며 붕당 정치 전개

31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책 - 왜란 이후 비변사 기능 강화, 3사 언론 기능 변질됨
(3)
§1. 비변사의 기능 강화 – 최고 통치 기구, 정치와 행정 총괄
•16세기 초 중종 때 3포 왜란을 계기로 설치
설치
•여진족과 왜구 침입에 대비 → 국방,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구성원이 확대되고, 군사뿐 아니라 국
정(모든 정무)을 총괄하는 최고 회의 기구화[군사 문제, 외교, 인사 관리, 재정 등, 국가 정책 전
기능
반 논의하고 집행하는 최고 기구로 발전, 고위 관리의 인사 문제까지 관할]
강화
왜란 후 전후 복구 사업과 후금의 침략,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변사 위상
그대로 유지
결과 •왕권 약화,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의 유명무실화 초래
폐지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이 축소, 폐지 → 의정부, 삼군부 부활
ㅇ비변사 : 1510년 부산포·염포·제포의 일본 거류민이 일으킨 폭동인 3포왜란을 계기로 설치되었다. 변방의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 기구, 변방 사정에 능통한 무관인 지변사 재상(종 2품 무관) 중심으로 운영
ㅇ비변사의 기능 변화 : 임시 기구[3포 왜란(중종)], 상설 기구[을묘왜변(명종)], 최고 정무 기구[임진왜란(선조)], 폐지[흥선 대원군 개혁(고종)]
ㅇ비변사의 구성원 : 임진왜란 이후 전·현직 정승을 비롯하여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 각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국가의 중요 관원들
로 확대되었다.
※비변사의 폐지 : 흥선 대원군의 개혁으로 기능이 크게 약화되어, 일반 정무는 다시 의정부가 담당하고 국방 문제는 새로 설치된 삼군부가 담당
하게 됨으로써 폐지됨 ※비변사 - 여진에 대비하여 성을 쌓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정승 가운데 한 사람이나 모두 함께 의논해서 조치하도록
하시고 이름은 비변사라하십시오。-「중종실록」
- 김익희가 상소하였다. “요즈음 비변사가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취급합니다. 의정부는 한 갓 헛이름만 지니고 6조는 할 일을 모두 빼앗
기고 말았습니다. 이름은 변방 방비를 담당하는 것이라 하면서 과거에 대한 판정이나 비빈 간택까지도 모두 여기서 합니다.” -「효종실록」-
ㅇ비변사의 기능 강화 : “비변사를 설치한 이유는……변방의 일을 잘 아는 재상이 한자리에 모여 계책을 세우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8도와 6조의 공사(公私)가 거의 모두 비변사로 들어갑니다.”-선조실록-→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비변사가 거의 모든
일을 다루게 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2. 3사의 언론 기능과 전랑권의 변질 – 붕당 간 대립 격렬해짐


1) 계기 : 공론[公論, 붕당 내부에서 토론 과정을 거쳐 형성된 여론]을 반영하기보다 자기가 속한 붕당의 이해관계 대변
2) 변질 : 3사는 공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 자기 붕당의 세력 유지 위해 상대 붕당을 비판, 견제하는 역할
3) 전랑권의 변질 : 이조와 병조의 전랑도 중하급 관리의 인사권과 자기 후임자 천거권[자천권]을 이용 → 자기
붕당의 세력 확대에 앞장서고 상대 세력 축출에 이용 → 영 정조 거치면서 혁파
ㅇ전랑 : 문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의 정랑(5품), 좌랑(6품) 지칭, 문관 인사 천거, 전형 등 관리 임명 실무 담당

§3. 중앙군 개편 : 5군영 체제


배경 16세기 대립제의 일반화로 5위 체제 붕괴 → 왜란 초기 패전, 훈련도감 설치
훈련도감 상비군,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 삼수병 편성[포수, 사수, 살수]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추가 설치(인조 때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숙종
5군영 설치
때(17세기 말) 금위영 설치로 5군영 체제가 갖추어짐)
5군영 특징 서인들이 군영 운영 장악으로 서인 정권의 군사 기반
ㅇ훈련도감 : 기존의 활과 창으로 무장한 사수, 살수 외에 조총으로 무장한 포수를 포함하여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ㅇ제승방략 체제 : 유사시 필요한 방어처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앙에서 파견하는 장수가 지휘하게 하는 방어 체제
•훈련도감: 선조 때 설치, 직업 군인으로 구성된 상비 부대, 수도 방위, 삼수병(포수∙사수∙살수) 체제로 구성
•총융청: 인조 때 설치, 북한산성 거점으로 수도 외곽 방어 ---
•수어청: 인조 때 설치, 남한산성 거점으로 수도 외곽 방어 ---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설치
•어영청: 인조 때 설치, 북벌 담당 부대, 도성 수비 ----------
•금위영: 숙종 때 설치, 도성 수비

§4. 지방군의 개편 : 속오군 설치


지방 방 조선 초기 진관 체제 → 16세기 후반 제승방략 체제 → 왜란 후 진관 복구(속오군 체제- 속오법에 따라 군대
어 체제 편제)
속오군 편성(평상시 생업에 종사, 유사시 전투에 동원, 양반~노비 포함 → 양반의 회피로 상민과 노비만 남음)
지방군 ※평시 : 군포만 납입, 입번(군대에 복무)하지 않음
•속오군의 변질: 양반이 속오군을 기피하면서 천민군으로 변화

(4) 동인과 서인의 붕당 형성


§1. 붕당의 출현(16세기 후반, 선조[1567-1608] 때)
1) 사림의 정국 주도 : 향촌에서 세력을 키운 사림이 중앙 정계로 진출 확대 → 정국 주도
2) 배경 : 명종 때 나타난 척신(외척) 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 이조 전랑 임명 문제로 사림 간의 대립 발생
3) 발생 : 동인과 서인 분화

32
동인 서인
•신진 사림 : 영남 사림, 선조 때 중앙 정계에 진
•기성 사림(명종 때부터 정치에 참여) : 경기,
출,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과 사림 정치의 실
충청 지방 사림, 척신 정치 청산에 소극적
현 주장(원칙 철저)
•이이와 성혼의 학문 계승한 문인, 심의겸 지지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문 계승, 김효원 지지
4) 붕당의 성격 :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함께 가짐
5) 붕당의 기본 원리 :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상호 견제와 비판을 인정하는 것 → 정치의 활성화와 정
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
ㅇ붕당 : 정치적 견해와 학문적 성향을 같이하는 사림이 모여 만들었다. ㅇ척신 : 임금과 친척 관계로 정계에 진출한 관리
ㅇ이조 전랑 : 이조와 병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통칭하는 말. 당하관 이하 관원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였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
하였다. 3사 관리의 인사권(추천권)을 갖고 있던 관직,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함
ㅇ이조 전랑을 둘러싼 사림의 대립 : “심의겸이 이조 참의로 있을 때 예전의 잘못을 들어 김효원이 전랑이 되는 것에 반대했지만[명종의 외삼촌
인 윤원형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뒤에 김효원은 전랑이 되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전랑으로 천거하
자, 김효원이 “이조의 관직이 외척의 물건인가?[심의겸과 심충겸 등이 명종의 처남으로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심씨 집안에서 차지하려 한단 말
이냐?”라고 반대하였다. …… 동인과 서인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김효원의 집이 동쪽 건천동에 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 정동에 있
기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심의겸과 김효원이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다. 이조 전랑이란 정5품 이조 정랑과 정6품 이조 좌
랑을 함께 부르던 말이다. 이조 전랑은 젊고 명망 있는 문신 중에서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까지 순조롭게 승진할 수 있는 요직이
었다. 품계는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3품 이하 문관의 천거와 3사 청요직의 선발권, 후임 전랑의 추천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3사의 언론 활동을 은연중에 주도하는 등 정치적 역할도 커서, 고위 관리도 길에서 이조 전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할 정도
였다고 한다. 누가 이조 전랑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를 둘러싼 붕당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2. 붕당 정치의 두 얼굴
1) 붕당 정치의 전개 : 학연에 따라 모인 사림이 공론을 내세워 국정을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
2) 긍정적 측면 : 재야 사림의 폭넓은 의견 수렴, 붕당 상호 간의 비판과 견제 가능, 공론 형성 과정에서 재야 사
족의 의견까지 폭넓게 수렴함
3) 부정적 측면 : 늘어나는 사족이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권을 두고 권력 다툼 → 자기 붕당의 이익 우선시(백
성을 위한 올바른 정책의 시행이나 사회 모순의 적극적 개혁보다) → 권력 독점 경향 대두
ㅇ정치는 기본적으로 국왕이 주재했지만 학연에 따라 모인 사림이 공론을 내세어 국정을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됨

§3. 붕당 정치의 전개
시기 전개
•척신 정치 청산 문제로 사림이 분화 → 동인·서인 분당(동인 우세 정국 주도)
선조
•정여립 모반 사건 계기 →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분당(남인 우세)
왜란 •북인 집권 → 서인과 남인을 배제하고 정권 독점 → 인조반정으로 몰락[광해군(선조의 적자인 영창
이후~광해군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폐위시킴)과 북인 정권 축출]
•서인 : 인조반정 주도, 비변사 장악, 군영의 병권 장악(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 – 서
인이 권력 유지를 위한 군사적 기반으로 삼음)
인조~효종 •서인과 남인은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의 정책을 비판, 견제하는 방식으로 상
호 비판적 공존 체제 유지[붕당 정치의 본격화 : 서인 정권이 남인의 정치 참여 허용]※지방 사족
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렴해 정책이나 인사에 반영
•효종과 효종비의 국장과 관련해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로 대립 → 예송 논쟁 발생 → 서인과 남
인의 대립 격화
현종 •두 차례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붕당 정치 체제 붕괴
-1차 예송(1659, 기해예송) : 효종 사후 자의 대비의 상복 기간 두고 대립 → 서인 승리
-2차 예송(1674, 갑인예송) : 효종 비 사후 자의 대비의 상복 기간 두고 대립 → 남인 승리
ㅇ남인과 북인 : 선조의 미움을 산 서인 정철의 처벌 문제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열
ㅇ인조반정의 명분 : “처음 광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선묘께서 바꾸려는 의사를 두었는데, 결국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영창 대군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를 원수처럼 보아 그 시기와 의심이 날로 쌓였다. 적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또 그의 악행을 종용하여 임해군과 영창 대군
을 해도(海島)에 안치하여 죽이고 연흥 부원군 김제남(왕대비의 아버지)을 멸족하는 등 여러 차례 대옥(大獄)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
였다.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는 등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도가 없이 가혹하게 거
두어들임으로써 백성들이 수화(水火) 속에 든 것 같았다. 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
고 반정할 뜻을 두었다. -인조 실록- → 자료는 광해군의 패륜을 들어 인조반정을 정당화한 글이다. 서인이 지적한 광해군의 실정 중에는 왜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과 후금의 성장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반정에 성공한 서인은 광해군을 부정적으
로 묘사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ㅇ예송 : 효종과 효종비(인선왕후)가 죽은 후, 대비가 적장자에 준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 차남으로 왕위를 이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 심각한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예송은 효종과 효종의 비가 각각 죽었을 때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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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느냐를 놓고 벌어진 의례 논쟁이다. 상복 입는 기간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서인
과 남인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을까? 예송은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을 정하는 문제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해 심각한 정치 논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신권 중심 정치
를 지향한 서인은 왕실도 사대부와 같이 『주자가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국왕의 권위를 중요시한
남인은 왕실의 예는 사대부의 예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서인과 남인은 학문적 연대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으로 내세우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지만, 2차 예송
에서는 현종의 적극적인 의지로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정치 주도권이 남인에게 넘어갔다.
•1차 예송(기해예송) : 효종 사망 시 3년설의 남인과 기년설(1년설)의 서인이 대립 → 서인의 기년설이 받아
들여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에게 사대부의 예를 적용하여 1년 상복을 주장하였다. 반면, 남인은 왕실
과 사대부는 다르다고 주장하며 3년 상복설을 주장하였다.
•2차 예송(갑인예송) : 효종의 비(인선 왕후) 사망 시 기년설(1년)의 남인과 대공설(9개월)의 서인이 대립 →
남인의 기년설이 받아들여짐, 남인은 1년 복상, 서인은 9개월 복상 주장
ㅇ상복 문제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대립, 예송
국왕 : 선왕의 장례 준비를 어떻게 할지 논의해 봅시다. 신하 : 무엇보다 먼저 어머니이신 자의 대비의
상복 문제를 정해야 합니다.
서인 : 선왕께서는 장남이 아니시니 1년만 상복을 입어야 합니다.
남인 : 선왕께서는 왕위를 이으셨으니 장남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땅히 3년 상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서인 : 예는 천하가 동일한 것입니다. “주자가례”에 따라 1년만 입는 것이 옳습니다.
남인 : 왕과 신하는 그 구분이 엄격한 것입니다. 어찌 왕실에서 사대부와 똑같은 예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 예송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해 심각한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신권 중심
정치를 지향한 서인은 왕실도 사대부와 같이 “주자가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왕권 강화를 추구한
남인은 왕실의 예는 사대부의 예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붕당 정치의 전개와 변질
ㅇ사림은 정치·학문적으로 성향이 비슷한 사림끼리 모여 붕당을 형성하고 공론을 내세우며 서로 경쟁하
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환국이 잇따르면서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특정 붕당이 권
력을 독점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4. 붕당 정치의 변질
1) 환국의 발생(숙종)
① 붕당 정치의 변질 : 환국으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 → 상대 붕당에 대
한 탄압과 보복으로 공존의 원리 붕괴
② 결과
붕당과 학연의 관계
㉮ 특정 붕당이 권력 독점, 공론이 당파의 이익을 대변 → 공존 원리 붕괴 →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
㉯ 3사의 언론 활동 : 공론을 반영하기보다 자기 붕당의 이해관계 대변 → 상대 붕당을 비난하는 형태로 변질
ㅇ환국 : 국정을 주도하는 붕당과 이를 견제하던 붕당이 교체되면서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숙종 때 경신환국 이후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 붕괴, 특정 붕당의 권력 독점, 상대 붕당 부정 → 환국[왕이
과 직접 나서서 주도,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이 교체되어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 발생 → 일당 전제화 추세 대두
정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 후에는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대립
•서인·남인의 정국 주도권 다툼(숙종 때의 환국) → 남인 축출 후 노론과 소론의 다툼(경종의 왕위 계승 문제로 대립)

결 •국왕의 환국 주도로 외척이나 종실의 정치적 비중 증대, 집권 붕당이 비변사의 고위 관직 독점, 정권 장악 → 비변


과 사의 권한 강화, 의정부와 6조의 기능 약화
•남인 윤휴 등이 북벌론 제기하며 군사 기반 강화, 세력 확대 → 남인 몰아내고 서인 중심의 정권 세움
경신환국(1680, 서인 집권)
•서인 내 정국 운영 방식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분열
기사환국(1689, 남인 집권) 남인계 후궁인 장희빈이 낳은 왕자(경종) 세자 책봉 문제에 반대하는 노론 축출 → 남인 정권 성립
갑술환국(1694, 서인 집권) 장희빈 사사 후 노론 정권 회복
③ 신임 사화 : 경종의 이복 동생 연잉군 세제 책봉 문제를 둘러싼 분쟁 → 소론이 노론을 역모죄로 몰아 제거
④ 이인좌의 난(1728) : 영조 즉위 후 일부 소론 세력이 경종의 죽음에 의문 제기하며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
ㅇ노론과 소론은 정책 수립, 상대 붕당 탄압 과정에서 분열됨 ㅇ대리청정(代理聽政) : 왕을 대신하여 그 후계자로 지정된 사람이 중요한 정무를
처리하는 정치 형태 ㅇ이인좌의 난 : 경종 독살설을 믿는 강경파(소론, 준소)와 남인들의 거병 → 완소에 의해 진압됨

2) 탕평론의 대두(숙종) - 붕당 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왕권이 위협받자 탕평론을 제기


① 탕평의 의미 :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
② 한계 : 편당적 인사로 환국의 빌미 제공
배경 붕당 정치 변질 → 정치 집단의 세력 균형 붕괴 → 왕권 불안정
성격 강력한 왕권 토대, 국왕 중심의 정치 세력 균형 유지
숙종의 •공정한 인사 관리를 통한 세력 균형 유지책 제시 → 실제로는 편당적 인사 관리[상황에 따라 한 당
탕평책 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로 환국의 빌미 제공
ㅇ노론과 소론 : 숙종 때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남인에 대해 강경한 탄압을 주장했던 송시열 중심
의 노장파가 노론(老論)이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하며 노론과 대립했던 윤증 중심의 세력이 소론(少論)으로 분화되었다. 노론은 대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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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존중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고,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ㅇ환국 :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의 교체로 인한 정국의 급격한 전환,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
이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대결하였던 기사환국(1689,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 송시열 등이 숙청
당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과 갑술환국(1694, 폐출된 인현 왕후가 중전으로 복위되면서 남인이 축출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이어졌다.

§5.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며 국왕이 국정 운영을 주도하는 정치 형태


영조 정조
•초기 : 탕평교서 발표,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 강조 → 자신을 지 •각 붕당 주장의 시비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 탕평책 추
지하는 탕평파 육성, 탕평파 중심의 정 진
국 운영 – 1725년 탕평책 실시 •영조 때의 척신(김귀주, 홍인한, 정후겸)과 환관을 제거
특징
•강화된 왕권 바탕 → 노론과 소론 번갈아 •노론, 소론, 남인 중용(능력 중심 인재 등용, 붕당의 입장
등용 → 세력 균형 조정하여 정쟁을 억 을 떠나 능력 있는 사람 중용) → 관료 세력의 균형 유지
제하고 정국의 안정 도모 •온건 계열 : 완 •급진 계열 중심 : 준론 탕평
론 탕평
•초계 문신제도 : 중하급 관리 재교육
•산림의 존재 부정 •규장각 육성(1776) : 왕실 도서관, 비서실, 권력과 정책
왕 권
•서원 대폭 정리(붕당 뿌리 제거), 병권 뒷받침, 과거 시험 주관, 문신 교육 등 담당
강화
장악 •장용영 설치 : 친위 부대 → 왕권의 군사적 기반 강화
(붕당
•이조 전랑의 3사 관리 선발권과 후임 •수원 화성 축조 : 사도 세자의 묘 이전, 상공인 유치, 자
세력
자 천거권 폐지 → 권한 약화시킴, 후 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
약화)
임자 천거권은 정조 때 완전히 폐지됨 •수령의 권한 강화 : 수령의 향약 주관,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 약화 = 백성에 대한 국가 통치력 강화
•민생 안정,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 완화(서얼 출신 학자 규장각 검서
문 물 •균역법(1750) 시행, 가혹한 형벌 폐지, 관 기용)
제 도 사형수에 대한 엄격한 삼심제 시행 •상공업 진흥(1791, 통공정책=자유로운 상업 활동 보장)
정비 •신문고 부활,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 •고금도서집성 수입,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무예도보통지
헌비고 편찬 등 편찬 •농업 기술 발전, 광산 개발 장려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
이 아님(왕권에 의한 일시적 억압에 불과)
한계 국왕에게 권력 집중 → 정조 사후 세도 정치의 빌미 제공
•영조의 후원 세력으로 중용된 외척의
권력이 강화되는 부작용 발생
ㅇ탕평의 의미 : 서경에 나온 말,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 ㅇ탕평비(성균관대학
교) : 영조가 탕평 의지를 알리기 위해 성균관 앞에 세운 비이다. ‘편당을 만들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고,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만드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ㅇ탕평파 : 붕당을 없애자는 영조의 논리에 동의하는 관리들을 일컫는 말로 주로 노
론과 소론의 온건파였다. ㅇ산림 :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 대우를 받던 사람으로,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는 등 붕당의
사상적인 지주였다. ㅇ시파(時派)와 벽파 : 시파는 사도 세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죽음 자체는 지나치다는 입장이었고, 벽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고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하였다. ㅇ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 정조가 화성에 다녀오는 중 시흥 행궁에 도착한 모습
을 그렸다. 이런 행차를 통하여 정조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여론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 하였다.
ㅇ초계 문신제 : 정조 5년 경연 폐지, 37세 이하 자질있는 문신 선발, 일정 기간 규장각에서 재교육, 신진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킴. ㅇ규장각 :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갖는 기구로 설치되었다(왕의
친필, 서화, 유교 선보[왕실 족보]를 관리한던 곳). 그러나 정조는 이를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고자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
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관리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ㅇ정조의 문물 제도 정비 : 전통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 들였다.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
를 다졌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재정비하였다. ㅇ속대전 : 영조 때 편찬된 법전, 조선 초
기 경국대전 편찬 이후 사회 변화에 따라 법령도 달라진 것이 많아서 법전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ㅇ탁지지 : 정조의 명에 따라 호조의 모든
사례를 정리해 편찬한 책
ㅇ사료 : 붕당의 폐해가 요즘보다 심각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예절 문제로 붕당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한쪽이 다른 쪽을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재도 그리 많은 것이 아닌데 근래에 들어 인재를 등용할 때 같은 붕당의 인사들만 등용하고자 한다. 조정의
대신들이 서로 상대 당을 공격하면서 반역인가 아닌가로 문제를 집중하니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책이 나오지 못하고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
지기 어렵다. … 이제 유배된 사람들의 잘잘못을 다시 살피도록 하고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탕평의 정신을 잘 받들어 직무를 수행하
도록 하라. -「영조실록」-
ㅇ붕당 정치의 변질과 탕평책
-붕당 정치의 원인 :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이 깊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될수록 붕
당이 견고해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조정의 붕당도 이와 다르지 않다. …… 과거를 자주 보아 인재를 너무 많이 뽑았고, …… 이것이 이른바 관직은 적은
데 써야 할 사람은 많아서 모두 조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익,“곽우록”-
- 탕평 교서 : “근래에 와서 인재 임용이 당목에 들어 있는 사람만으로 이루어지니 …… 이러한 상태가 그치지 않는다면 조정에 벼슬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 이조는 탕평의 정신을 수용토록 하라.”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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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붕당 정치가 변질된 원인 : 양반의 수는 늘어나는데 관직의 수와 그에 따른 권력과 경제력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치열
한 정쟁이 전개되었다. ㅇ영조가 추진한 탕평의 방법 : 여러 붕당에 관직을 안배하여 관료 세력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정쟁을 억제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ㅇ정조의 통공 정책 : 5-6년 전부터 서울 안에 놀고먹는 무리들 가운데 평시서(상행위 감독청)에 출원하여 시전을 새로 낸 자가 대단히 많다. 이
들은 상품을 판매하는 이보다 난전 잡는 일을 일삼고 있다. 지방민이 가져오는 조그만 물건을 사고팔아 입에 풀칠하는 서울 영세 상인들은 장차
거래가 끊어질 형편이다. 내 생각으로는 정부가 평시서의 전안(시전목록)을 조사하여 십 년 이내에 조직된 작은 시전은 금난전권을 모두 없애
영세민들을 구제하여야 한다. -비변사등록- → 조선 후기의 시전 상인은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인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어, 도성과 그 부
근에서 사상들의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ㅇ통공 정책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 폐지한 것, 이로 인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부분
적으로 보장되었다.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갑오개혁 때 폐지 ㅇ수원 화성 :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이 함께 고려되었고, 동·서양의
축성술이 집약된 과학적·실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ㅇ규장각의 엘리트, 4검서 : “아! 저 서류(庶流)들도 나의 신하인데, 그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포부도 펴지 못한다면, 이 또한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 정조실록”- → 정조가 서얼에게 벼슬길을 넓혀 줄 수 있는 법을 만들도록 지시하며 한 말이다. 이에 따라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
는 규정이 완화되었고, 얼마 후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별히 임명되었다. 검서관이 된 네 사람은
신분제에 얽매여 그동안 머릿속에만 담아 두었던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조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4검서
(四檢書)’ 라고 불렀다. 이들은 서얼이라는 한계를 딛고 일어나,‘ 부국 안민’을 위한 방책으로 중상주의와 북학을 들고 나와 정조의 개혁을 뒷받
침하였다.
§6. 탕평 정치의 의의와 한계
1) 의의 : 붕당 간 대립 완화로 한동안 정국 안정, 왕권 강화에 도움 → 민생 안정을 위한 개혁 추진 가능
2) 한계 :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간의 정쟁을 억압한 미봉책(일시적인 정쟁 억제에 불과) → 정조 사후 세도 정치
출현
§7. 세도 정치의 전개(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약 60년간 세도 가문이 권력 독점)
•탕평 정치기 왕에게 권력 집중 → 정조 사후 탕평 정치의 역할 상실 → 정치 세력 간의 균형 붕괴
배경
→ 특정 유력 가문 출신[외척 세력] 인물에게 권력 집중(3대 60여 년 동안 외척 세력이 권력 행사)
•순조(11세 즉위) :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초기) → 안동 김씨(김조순, 노론 명문가)의 세도 정치
전개 •헌종 : 풍양 조씨(조만영) 가문 득세
•철종 : 안동 김씨(김문근) 중심의 세도 정치 → 흥선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기 전까지 지속
•정치 기반 축소 : 붕당이나 탕평파·반탕평파의 대립 구도 소멸 → 몇몇 특정 소수 가문의 정치 주
도하고 권력과 이권 독점
특징 •고위직의 정치 독점 : 비변사의 요직 독점, 세도 가문이 주요 관직과 중앙 군영의 지휘권 장악, 하
위직은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 상실
•다른 정치 세력이나 지방 사족을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
결과 왕권 약화, 지배 체제 붕괴, 3사의 언론 비판, 견제 기능 상실, 정치 기강 극도로 해이, 삼정 문란
ㅇ권력 구조 변화 : 정2품 이상 고위직만이 정치 기능을 발휘하고 의정부와 6조 체계는 기능을 상실, 유력한
가문 출신 인물이 비변사를 장악하고 실제 권력 행사 ㅇ큰 힘을 갖고 있던 6개의 세도 가문이 고위직인
비변사 당상의 40% 정도를 차지해 권력이 몇몇 특정 가문에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줌
ㅇ정순왕후 수렴청정기 : 규장각 출신 축출, 장용영 혁파, 훈련도감 장악, 1804 정순왕후 사망
ㅇ순조 때 안동 김씨 세동 전횡 견제 : 효명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 간택, 세자에게 대리 서무 시킴 →
유력 가문 간의 균형을 도모함. →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개혁 실패 → 세도 가문의 전횡이 심해지고 국왕의
지위 약해짐 ㅇ삼정 : 국가의 주요 재정 수입원인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그리고 춘궁기에 곡식을 농민
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하던 환정(환곡)을 말한다.
ㅇ세도 정치의 전개

세도 정치기 가문별 비변사 당


상(고위 관직) 역임자 수(순조~
철종 연간)

(5) 세도 정치의 폐단
•정조 때 등용되었던 남인, 소론, 지방 사족들을 권력에서 배제
사회 통합
•새롭게 성장하던 상인, 부농들을 통치 체제에 포섭하지 못하고[집권층에서 배제] 수탈의 대상으로
실패
삼음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함, 새 정치 질서 창조 능력도 없음, 사회 개혁 능력과 의지 부재
개혁 부재
•향촌 사회에서 수령이 향약 주관, 향리나 향임 이용해 부세 수취 → 사족층의 견제 기능 상실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소유하고 조세 징수(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 →
농민의 저항 확대) ※수령, 아전의 농민 수탈 극심 → 삼정 문란 → 이들 부정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음, 사족
부정부패
들이 수령을 견제하지 못함
•정치적 견제 세력 부정, 권력을 남용해 경제적 이권과 부 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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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재해와 기근 질병으로 인구 급감 → 조세 부담 가중으로 민생 파탄
•정치 기강 문란 : 과거 시험의 부정과 관직 매매(매관매직) 등 지방 수령 자리의 상품화 성행
•상품 화폐 경제 발달로 지배층의 사치 욕구는 국가 재정 지출 증가 → 국가의 재정 위기가 만성화됨
재정확보책
•지방 관청의 재정 보충 : 각종 잡세 부과, 환곡, 고리대 통한 재정 보충 → 농민에 대한 수탈 심화 → 삼정의 문란 야기
ㅇ세도 정권은 정치적 견제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을 남용해 경제적 이권과 부를 챙기기에 바빴다.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과거 시험 부정이나 관직 매매 등의 비리가 만연했고, 수령과 아전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삼정이 매우 문란해졌다.
※세도 정치의 폐단
떵떵거리는 수십 집안이
대를 이어가며 국록을 먹는다 순종,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은 몇몇 외척 가
서로들 돌아가며 싸우고 죽이면서 문이 모든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휘두르던 시대였
약한 이를 고기 삼아 힘센 놈이 먹어 치우네 다. 왕권은 약화되고 모든 정책이 세도 가문의 사
세력을 휘두르는 대여섯 집안 랑방에서 결정되었다.
재상 자리 대감 자리 모두 다 차지하고 세도 가문은 주요 관직을 모조리 차지하고 지방
관찰사 절제사도 완전히 차지하네 선비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냈다. 또한 지방 사
도승지 부승지는 모두가 이들이며 회에서 성장하던 상인과 부농들을 수탈의 대상으
사헌부, 사간원도 전부가 이들이라 로 삼았으며, 왕권을 대행하는 지방 수령의 자리를
이들이 모두 다 벼슬아치 노릇하며 뇌물을 받고 팔기도 하였다.
이들이 오로지 소송 판결하네 - 정약용, ‘여름날에 술을 마시며’

3.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1) 명과의 관계 – 사대교린 정책(전 시기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
§1. 태조 : 정도전의 요동 정벌 추진, 명에서 탈출한 여진인 송환 문제로 불편한 관계 → 태종, 정도전 등을 제
거하고 즉위한 이후 명과 우호 관계(친선 관계) 유지 → 문화 교류 활발(우호, 친선)
§2. 태종 이후 : 사대 외교를 통해 친선 관계 유지 → 왕권 확립과 국가 안정 목적
§3. 사대 외교 : 동아시아의 일반적 외교 형식, 서로의 독립성 인정 → 조공과 책봉을 통해 유지
1) 조공 : 예물을 바침, 사신 파견과 함께 이루어진 경제적·문화적 교류 → 명의 선진 문물과 기술 수용하는 실리
적 차원에서 추진, 일종의 공무역
2) 책봉 : 국왕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형식적 절차, 내정이나 외교 간섭은 받지 않음. → 정치 안정에 도움
3) 내용 : 매년 정기적 사절 교환, 조공 관계 →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 유지(형식적)
4) 성격 : 내정 간섭 없었음, 왕권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 실리 외교, 선진 문물 흡수를 위한 문
화 외교, 공무역, 정기적, 부정기적 사절 파견 → 문화적, 경제적 교류 활발
ㅇ사대교린 정책 : 조공 관계로 맺어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나타난 외교 정책으로,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ㅇ친선 관계 : 명은 태조가 즉위 후 요청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해 주어 새 왕조 개창은 인정하였다.
여진 유민의 생환 문제와 세공 문제로 국왕의 인장과 왕위를 승인하는 문서인 고명을 보내지 않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태종 때 이 문제
가 해결되면서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ㅇ조선은 명과 사대 관계를 맺고 국왕이 교체될 경우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나, 그것은 의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사대 관계의 일환으로 조선은 명에 정기적으로 사절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답례품을 받아 오는 조공 무역을 행하였다. 조공
무역에서 실익이 없었던 명은 사절의 횟수를 제한하려고 하였으나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원했던 조선의 요청으로 조공 무역은 지속적으로 행해
졌다. ㅇ경제적, 문화적 교류 : 조선에서는 조공이란 이름으로 토산품을 가져가서 회사란 이름으로 우리가 원하는 물품을 받아왔다. 주로 종이,
붓, 화문석, 금, 은, 인삼, 도자기 등을 가져가고 비단, 약재, 책, 문방구 등을 가져온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ㅇ정기 사절 : 매년 정월 초하루에 파견되는 하정사, 황제의 탄신일에 파견되는 성절사, 황태자 생일에 파견되는 천추사, 동짓날에 파견되는 동지
사를 말한다. ㅇ부정기 사절 : 사은사, 주청사, 진하사, 진위사 ㅇ조선과 명의 무역은 사신 왕래를 통해 이루어졌다. 명은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을 폈기 때문에 명과 조공·책봉 체제를 맺고 있는 나라들만 교역을 할 수 있었다. 조공 무역은 사신을 따라온 사행들,
특히 역관들이 수행하였다. 조선 후기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갑부는 숙종 대의 역관인 변승업을 모델로 한 것이다.
ㅇ왜 조선은 많은 사절을 명에 파견했을까? :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 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태조실록 → 명에 사신으로 갔던 남재가 조선에 돌아와, 명 황제가 3년에 한 번
만 사절을 파견하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조선은 매년 정기 사절 이외에도 여러 번 비정기 사절을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절 파견은
조공품도 바쳐야 하고 비용도 많이 들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실제로 명은 주변 국가가 사절을 자주 파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국으
로서 사절을 후하게 대접하고 돌아갈 때 많은 답례품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명에 매년 세 차례의 사절 파견을 요청해 두
나라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에는 조선의 입장이 받아들여져 중종 때까지 매년 세 차례의 정기 사절이 파견되고, 비정기 사절도 수시로 파
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명에 대한 사절 파견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조선에 이익이 더 많았음을 보여 준다

(2) 4군 6진 개척
§1. 여진과의 관계 : 교린 정책 - 강경책과 회유책 병행하여 국경 지역 안정, 영
토 확장 꾀함.
1) 목적 : 영토 확보와 국경 지방 안정 도모 → 태조 때 두만강 지역 개척, 세종 때
4군(최윤덕) 6진(김종서) 설치(압록강~두만강 경계로 하는 국경선 확정)
2) 회유책(온건책)
① 귀순 장려(관직과 토지, 주택·의복·식량 지급 → 우리 주민으로 동화)
② 조공 무역(북평관=사신 숙소, 서울, 사절 왕래 통한 무역)과 국경 무역 허용
(함경도 국경 지방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 설치)
3) 강경책 : 여진족의 국경 침입하여 약탈 행위 때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 → 4군 6진 개척(최윤덕, 김종서, 오늘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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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확정)
§2. 사민 정책 추진 : 삼남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함 → 북방 개척과 국토의 균형 발전 추구, 지역 방
어 체제 확립 목적
§3. 토관 제도 : 거주민들을 토관으로 임명 → 민심 수습
ㅇ여진 : 12세기 금 성립 → 중국 일부 만주 지배, 몽골 패망 후 부족 단위 생활(만주 지방 근거), 반농 반수렵(식량, 농기구, 의류 수입) → 생필
품과 생산 도구 획득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소란 ㅇ토관 : 수령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민을 행정 책임자인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
려 하였다. ㅇ야연사준도 : 김종서가 6진 개척하고 함경도에 있을 때의 고사를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
ㅇ무역소 설치 : ”경성·경원 지방에 야인의 출입을 금하지 아니하면 혹은 떼 지어 몰려들 우려가 있고, 일절 끊고 금하면 야인이 소금과 쇠를 얻
지 못하여서 혹은 변경에 불상사가 생길까 합니다. 원하건대, 두 고을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저들로 하여금 와서 물물 교역을 하게 하소서.“-“태
종실록”- ㅇ북평관 : 야인 사신 숙소, 태평관 : 명 사신 숙소, 동평관 : 일본 사신 숙소 ㅇ4군 6진 : 4군 개척은 1433년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
사로 삼아 여진을 정벌하면서 본격화되었다. 6진 개척은 김종서를 함경도 도절제사로 임명해 개척에 나서 1442년에 완성되었다.

(3) 일본에 제한된 교역 허용


§1. 왜구 침략 : 여말 선초까지 왜구의 해안 지방 침입 → 백성들 산속 피신 →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음
§2. 조선의 일본 침략 대비책
1) 수군 강화, 성능 뛰어난 전함 대량 건조, 화약 무기 개발(최해산: 화포 , 화차) 선박에 장착, 국방 강화
2) 왜구 격퇴 노력 → 왜구들의 평화적 무역 관계 요구 → 일부 항구 개방(제한된 무역 허용)
왜구 약탈 계속 → 화약 무기, 병선 개량 → 세종 때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세종 1년(1419) 이종무,
강경책
병선 227척, 병력 17,000여명 동원)
-쓰시마 토벌 후 평화적 교역 요청 → 3포 개항(세종, 1426, 왜관에서 무역 허용) : 부산포(동래), 제포
온건책 (창원), 염포(울산) 개방, 무역 허용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 허락
-계해약조(癸亥約條, 세종, 1443) : 쓰시마 섬에서 체결, 교역량 제한
3) 교역 물품: 식량, 의복, 면포, 서적 등(조선) ↔ 구리, 유황, 물감, 향료 등(일본)
4) 일본의 교역 확대 요구에 대한 조선의 통제 → 3포 왜란(1510), 을묘왜변(1555)
ㅇ대마도 토벌 :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토벌은 고려 말부터 이어졌다. 고려 말 창왕 때에는 박위, 조선 태조 때에는 김사형이 각각 토벌에 나섰
다. 세종 1년(1419) 이종무는 병선 227척과 17,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왜구 소굴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옴
ㅇ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 : 세종 8년(1426)에 3포를 개방하여 왜관에서만 무역을 허용하였고, 세종 25년(1443)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변효문이 귀국 길에 대마도 도주 소사다모리와 계해약조를 체결해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등으로 무역 규모를 제한하였다.
ㅇ해동제국기 : 세종, 신숙주, 왕명에 따라 쓴 견문기 ㅇ왜관 : 일본인 입국, 교역위해 설치한 장소

4.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 왜란과 호란의 극복
§1. 왜군의 침략
15세기 일본과 비교적 안정 관계
•여진족의 잦은 침범
•일본인의 무역 요구 증가 → 조선 정부의 통제 강화
일본과
16세기 •3포 왜란(중종, 1510), 을묘왜변(명종, 1555) 소란 발생 → 국방 문제를 전담하는 비변사
대 립
정세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
격화
•일본에 사신 파견 정세 관찰(황윤길<서> ↔ 김성일<동>) → 적극적인 대책 마련못함
•국내 정세 : 방군수포 성행으로 국방력 약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시대 혼란 수습 뒤 조선 침략을 철저히 준비(영토 확장, 무역
일본의 정세 통한 이익 증대 욕구, 불평 세력 무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진출 야욕 달성을
위함.=征明假道)
•명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구실로 조선 침공(1592) →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 침략[1592.4] - 부산진(정발)·동래성(송상현)의 분발 → 왜군의
임진왜란의 발발 북상 → 상주(이일), 충주 싸움 패배(신립, 탄금대)
•조선은 전쟁에 미대비 → 선조가 의주로 피난, 명에 원군 요청 → 왜군의 한양 점령
과 평양·함경도 진출
ㅇ3포 개항(1426) → 계해약조(1443,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 3포 왜란(1510) → 임신약조(1512, 계해약조 내용 반감) → 사량진왜변
(1544) → 정미약조(1547, 세견선 규칙 제한, 벌칙 규정) → 을묘왜변(1555) : 국교 단절
ㅇ방군수포 : 군대에서 복무해야 할 군인에게 포를 받고 복무를 면제해 주던 것으로, 군사 지휘관에 의해 사사로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ㅇ삼포왜란(중종 5, 1510) : 3포에서 일어난 거류민 폭동 사건, 비변사 설치[임시 기구화] ㅇ을묘왜변(명종 10, 1555) : 3포를 개항한 이후 왜인들
은 약조를 지키지 않고 자주 소란 피움, 1555년 왜인들이 70여 척의 배를 몰고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해 옴 → 이후 일본과 교류는 일시
단절, 비변사 상설 기구화 ㅇ비변사 설치 : 중종, 군무 협의 임시 기구 | 상설 기구화 : 을묘왜변(명종 11, 1555) 계기, 3포 왜란을 계기로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설치하였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되었다.
ㅇ대륙 진출 : 당시 왜는 명을 침략하고자 하니 조선은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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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군과 의병의 활약
1) 전쟁 초기의 상황
왜군의 침략 •관군의 잇따른 패배 : 선조는 명에 지원군을 요청, 의주로 피란
작전 •수륙 병진 작전(육군은 북상, 수군은 서해와 남해를 돌아 물자 조달하여 육군과 합세)
•이순신의 침략 대비 : 전라도 지역에서 전함과 무기 정비, 군사 훈련 강화
•조선 수군의 승리
이순신의 활 -옥포해전(1592) : 경상도 진격, 80 척 거느리고 첫 승리
약과 조선 수 -연합 함대 편성 : 전라 우수영, 경상 우수영 함선 연합(5월 말), 당포(충무), 당항포
군의 승리 (고성) 해전에서 연전연승 거둠[사천해전-거북선 사용]
-한산도 대첩(1592. 7. 8) : 남해의 제해권 완전 장악,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 수호
→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 좌절
•조직 :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 → 향촌 사회 수호
•구성 : 농민이 주축, 전직 관리와 사림 양반, 승려가 조직[의병장] 및 지도
의병의 항쟁
•전술 : 향토 지리에 익숙한 이점 활용 ,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 사용(매복,
[육지]
기습, 위장 등 유격 전술) → 적은 병력으로 왜군에 큰 타격
•관군에 편입 : 전란 장기화로 관군에 편입되어 조직화됨 → 관군의 전투 능력 강화
※ 대표적 의병장 : 정문부(함경도 길주), 조헌, 영규(충청도 금산), 고경명, 김천일(전라도), 곽재우, 정인홍(경상도), 휴정(서산대사, 묘향산), 유정
(사명대사, 금강산) ※ 왜란의 3대첩 : 한산도 대첩(이순신), 행주 대첩(권율), 진주 대첩(김시민)
ㅇ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왜의 수군을 연이어 격퇴해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이로써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지키고, 황해를 통한 왜군의 물자 보
급을 좌절시켰다. 의병은 익숙한 지형과 그에 맞는 전술을 활용해 적은 병력으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2) 전세의 역전
•초기 수세[열세] → 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반격 → 전쟁을 뒤집을 수 있는 발판이 됨.
•명의 참전 → 조·명 연합군 평양성 탈환(1593.1) → 행주산성에서 대승(1593.2 : 권율, 관
전세 전환
군과 백성 합심) → 한성 탈환(1593.4.18.) → 왜군 후퇴, 경상도 해안 일대에서 장기전에
대비 *1593.4 명에 협상 제의 –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 결렬
•왜군의 휴전 제의로 3년간 협상 → 결렬 → 정유재란(1597)
-조선의 전열 정비 : 왜군의 완전 축출 준비
휴전 회담
-훈련도감(1594) 설치 :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 개편[삼수병]
(3년 간)
-속오법 실시 : 지방군 편제 개편(5명을 1오로 양천혼성군)
-무기 약점 보완 : 화포 개량, 조총 제작
•휴전 회담 결렬[명과 일본, 3년] → 왜군의 재침[1597] → 조․명 연합군(왜군 북상을 직산
정유재란
(천안)에서 격퇴)
[1597, 왜
•이순신 삼도 수군 통제사 복귀(1597.7) → 명량 해전(1597.9)에서 대파 → 왜군 남해안
군의 재
일대로 후퇴
침]
•왜군의 본국 철수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1598.8) → 노량해전(1598.11)으로 전쟁 종결
ㅇ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 전선의 수가 비록 적으나 신이 죽지 않는 한 왜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 일본군과 목숨을 건 전투(명량 대첩)를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으로, 장군의 드높은
기상과 불굴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강인한 정신에 힘입어 조선은 왜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 명까지
참전한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다.

§3. 왜란의 영향 – 명의 지원군 파병으로 국제전으로 발전


•인명 살상, 기근과 질병 → 인구 격감
•토지 대장(양안)과 호적 소실, 국토 황폐화 → 국가 재정 궁핍과 식량 부족
대내적 •공명첩 발급 : 국가 재정 확보위해 발급 → 신분제 동요
•문화재 소실 : 왜군의 약탈과 방화, 불국사와 경복궁, 서적, 실록 등 문화재 손실
•사족 중심의 지배 질서 유지, 명을 숭상하는 관념 확대
•활자, 그림, 서적 등 약탈 → 성리학자, 활자, 인쇄공, 도자기 기술자 등 포로로 납치 →
일본의 문화 발전 계기(성리학과 도자기 문화 발달의 토대)
대외적 •동아시아 형세의 변화 : 명 쇠퇴, 여진족의 흥기 ← 명과 조선이 전쟁을 치르는 틈 이용
[1616년 후금 성립]
•일본 :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 성립
※ 공명첩(空名帖) :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 도자기 기술자 : 이삼평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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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자기 기술자들은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
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ㅇ사고 : 전주 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들이 불타 실록 등이 소실
되었다.
ㅇ여진족의 지원군 파견을 거부하다 : 건주(建州)의 달자(㺚子: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가 2만 명
의 병력을 보내 왜적을 무찌르겠다고 청해 오자, 형군문(명군 장수)이 허락하고자 했다. 그러자 양
포정(명 사신)이 “만일 달자에게 왜적을 정벌하도록 허락해 준다면 우리나라(명) 병마의 다소와 조
선 병력의 강약은 물론이요, 산천의 형세에 대해서도 모두 세밀히 알게 될 것이니 결코 따르기가
어렵습니 다.”라고 말하니, 형군문이 중지시켰다. -“ 선조실록”- → 왜란 당시 여진이 조선에 지원
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던 명은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이는 당시 명도 여진의
성장을 경계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명의 국력은 점차 쇠퇴하여 결국
명에서 청으로 왕조 교체가 이루어졌다. 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요청에 따라 지원병을 파견했
는데, 이는 명을 침략하려는 일본을 조선에서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명의 사신 양포정은
일본을 하루빨리 격퇴하기보다는 여진족을 경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여진족의 지
원병 파견을 거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여진족은 결국 명을 멸망시켰다. 조선과 명이 왜
란에 집중해 국력을 소비한 틈을 타서 그 세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ㅇ만동묘(충북 괴산) :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의 신종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때 건립한 사
당이다. 송시열의 유명(遺命)에 따라 그 제자 권상하 등이 1703년에 부근 유생들의 협조를 얻어 충
관군과 의병의 활동
청북도 괴산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4. 광해군의 중립 외교
•건국(1616) -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의 세력 약화 → 압록강 북쪽에 거주하던 건주위 여진족이
후 금 의 부족 통일 → 후금 건국(누루하치)
성장 •세력 확장 : 서쪽으로 세력 확장 → 명에 대해 전쟁 포고(1618) → 명의 후금 공격(1619),
조선에 원군 요청
•즉위 : 왜란으로 피폐해진 국내 사정과 후금이 성장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즉위
•대내적 : 전후 복구 사업 실시(전쟁의 뒷수습 위한 정책)
–농지 개간 장려, 토지조사와 호적조사 → 양안(토지대장)과 호적 작성 → 국가 재정 확충
-대동법(경기도) 시행[농민 생활 안정], 사고 정비, 동의보감 편찬
광해군의 -성곽, 무기 수리, 군사 훈련 → 국방 강화
정 책 •대외적 :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 중립 외교 정책 실시→ 국가 안정 도모
( 1 6 08 ~ •후금의 명 변경 위협 ⇒ 명의 조선에 출병 제의 → 명의 후금 공격 요구 거절할 수 없는
1623) 입장,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
•도원수 강홍립 파견[1619.2, 1만 3,000명의 군대] 명을 지원 → 출병한 후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
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 → 조·명 연합군의 패배 → 강홍립 후금에 항복 → 후금과 불필
요한 마찰 피함 *도원수 : 전쟁시 군대를 지휘하는 임시 무관직, 무관의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 중에서 선발
•명의 원군 요청 계속 → 적절히 거절, 후금과 친선 도모(중립적인 정책 실시)
ㅇ광해군의 중립 외교
•강홍립이 오랑캐에게 있으면서 장계하기를 “……신 등이……부득이 화해를 청하여 오랑캐 장수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와 귀국이 혐의나 원한
이 없고, 금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 나라의 의사가 아니다. 서로 싸우기로 한다면 우리 군사는 죽음을 각오하였으니, 귀국에 무슨 이득될 것이
있겠는가? 강화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더니, 오랑캐 장수가 승낙하고……”
•어제 강홍립의 글을 보니 저 적이 우리를 침범할 계획을 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전후에 여러 차례 전교하였는데, 하루 이틀 날만 보내고 끝내
잘 처리하지 아니하여 앉아서 종묘사직을 위태하고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니, 경들은 과연 안심이 되는가? …… 홍립 등의 죄가 중하지마는,
만일 군사를 멈추게 하여 화를 면할 수 있다면 또한 가긍(可矜)*하게 여길 만하다. -『 대동야승』- *가긍(可矜):불쌍하고 가엾다.
ㅇ대동법 : 각 가호마다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납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면포·동전 등으로 징수한 제도 이다. ㅇ유교 윤리 : 광해군이 인목 대비
가 낳은 적자인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폐위시킨 것을 말한다.
ㅇ인조반정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
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
육으로 만들고 품 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
곤 다시 없었다. …… 이것뿐이 아니다. ……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
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
에 퍼지게 하였다. -『 인조실록』-
*고명(誥命):황제가 제후나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주던 임명장 *수신(帥臣):병마절도사와 수
군절도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
➡ 왜란 후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중국을 위협하자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왜란 때 도움을 준 명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
도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군사를 파견하여 명을 지원하게 하되, 상황에 따라 대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으로 광해군은 왜란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주력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립 외교 정책은 대다수 사림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며, 결국 서인이 주도
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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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호란의 발발
•배경 :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대한 서인 등 일부 사림의 반발(명에 대한 의리 주장)
인조 반
•서인 : 성리학적 명분론 중시, ‘폐모살제(廢母殺弟)’ 명분
정(능양
•광해군이 인목 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 윤리를 어겼다는 이유 → 서인이 주도하여 광해군 축
군,1623)
출(북인 정권), 인조 즉위
•배경 : 서인의 광해군 중립 외교 정책 비판, 친명 배금 정책 추진 ⇒ 후금 자극
•과정
-배후를 위협하는 평안도 가도의 명군을 제거하고 명과의 교역 중단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
어나고자 조선 침략
-청 태종[홍타이지, 1626-1643, 3만 군] 침공 →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까지 진격[광
정묘호란 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 → 인조, 강화도로 피신(2개월간 지속)
(인조 5, -정봉수(철산 용골산성), 이립(의주)이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항전 → 정봉수 큰
1627) 전과 거둠
•결과
-후금의 강화 제의 → 조선 수락(후금 목표가 중국 대륙 장악하는데 있음 → 후금의 군대는 보
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 이루어짐)
-조선은 적극적으로 항전할 힘 없었음, 형제 관계 체결,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유지 *
후금과 무역 개방, 매년 목면(1만5천필 제공 약속)
•배경
-후금 : 요서 지방, 내몽골 장악, 청 국호 사용(1636), 황제 칭호 사용 → 군신 관계의 사
대 요구
병자호란 •전개 : 정묘호란 이후 국내 정세 : 척화파 vs 주화파
(인조 구분 대표 주장
14, 척화파 정온, 김상헌 등 후금에 대한 강경책 주장, 전쟁 주장, 명분론(윤집)
1636) 주화파 이귀, 최명길 등 외교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
-주전론의 우세(조선의 거부) → 청 태종 침입(10만군) → 한양 점령 → 남한산성에서 항
전(45일간 저항)
•결과 : 굴욕적인 강화 체결(삼전도), 청의 군신 관계 수용, 명과 국교 단절, 막대한 공물 부담
•조선인의 충격 :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북벌 운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
동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주장
ㅇ[자료 1]최명길의 주화론 :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는 말입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 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지천집”-
ㅇ[자료 2]윤집의 척화론 : 화의로 백성과 나라를 망치기가 ……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이 없습니다.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 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 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서 부모를 저버리겠습니까. …… 차라리 나라
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 인조실록”-
-[자료 1]의 주장은 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주화론이고, [자료 2]의 주장은 명과의 의리, 명분을 지키기 위해 청의
요구를 거부하자는 척화론이다. - [자료 1]의 주장 반박: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을 돕는 것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당연하다는 점과 신하
로 대하던 여진족이 강해졌다고 임금으로 받드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작성한다. •[자료 2]의 주장 반박: 현실적으로
청의 힘이 강한 상황에서 청의 요구를 거절하면 또다시 전쟁에 휩싸여 백성에게 큰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작성한다.
※척화론과 주화론
• 부제학 정온이 상소하여 적의 사신을 목 베고 결전을 준비할 것을 아뢰다. -“ 연려실기술”
•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하루아침에 오랑캐 기병이 달려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 -“ 인조실록”
→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제기되었던 척화론과 주화론을 대표하는 글이다. 정온은 청의 포로가 된 후에도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최명길은 조선이 청에 굴복한 후 청의 무리한 경제적 · 군사적 요구를 막아 내고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ㅇ삼전도비 :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에게 명하여 삼전도비를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인조실록- → 외세의 침략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치욕의 역사를 보여 준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내용을 담고 있는 비로, 청의 요구로 세워졌다.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군사는 10만이고, 은은한 수레 소리 호랑이와 같다. ……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하니,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이다. 황제께서 ……주신 것이 무엇이던가. 준마와 가벼운 갓옷, 도희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한다.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고, 황제께서 군대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다. -삼전도비- → 삼전도비는 병자호란에서 굴욕적
으로 항복한 조선이 1639년 12월에 세운 비석으로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청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관리가 썼는데.
비문 작성을 담당했던 이경전은 고심하다 숨을 거두었고, 조희일은 일부러 조잡하게 쓰는 바람에 장유와 이경석의 글이 청에 보내졌다. 여기서
이경석의 글이 채택되어 이 비가 세워졌다.
ㅇ조선의 세자, 베이징에서 서양인과 만나다 : 1644년 청이 명을 무너뜨린 그해, 베이징에서 소현 세자는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 두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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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서양과 직접 교류할 통로가 없던 조선 시대에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 당시 소현 세자는 8년 전 병자호란에서 패한 후 청에 인질로 잡
혀 온 상태였다. 외국에서 생활하게 된 소현 세자는 자신의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 나갔다. 특히 외국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
각하여, 청의 문물뿐 아니라 아담 샬[독일 선교사로 중국에 서양 천문과 역법, 망원경, 총포 제작 방법 등을 전파]을 통해 서양 문물도 적극 수용
하였다. 귀국할 때에는 아담 샬의 소개로 천주교 신자인 청의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들어왔으며, 망원경·자명종·천구[별과 별자리를 천구 위에
표시한 것]의 등 서양 물건을 가져왔다. “어제 귀하에게서 받은 천주상, 천구의, 천문서 및 기타 양학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으로 기쁘기
짝이 없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러한 것들은 본국에서는 완전히 암흑이라 해야 할 정도로 모르고 있는데, 지식의 빛이 될 것입니다. ……
제가 고국에 돌아가면 궁궐에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출판하여 학자들에게 보급할 계획입니다. 그리하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나라
가 학문의 전당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은총을 입은 우리 백성은 서양에서 배운 과학을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 아담 샬의 회고록 중
소현 세자의 편지 -
→ 서양 문물에 눈뜬 소현 세자는 조선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자신이 청에서 보고 느낀 것을 인조에게 말하며 서양 책과 물건들을 보여
주었으나, 인조는 분노하여 세자에게 벼루를 내던졌다고 한다. 이에 상심한 탓인지, 소현 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여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
기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소현 세자의 장례식을 아주 간소하게 치른 뒤, 반청 의식이 강한 둘째 아들 봉림 대군(효종)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왕위에 오른 봉림 대군은 북벌을 적극 추진했는데, 여기에는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당시 지배층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2) 양 난 이후의 대외 관계
§1.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1)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관계
① 표면적 관계 : 청과 사대 관계를 맺고 평화 유지 → 사신이 왕래하면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이어감.
② 북벌 운동 추진
㉮ 청에 당한 치욕을 씻고 명과의 의리를 지키려는 것(청에 대한 적개심)
㉯ 효종 때 가장 왕성(효종이 적극 추진), 송시열, 이완 등 서인의 지지(병자호란 패전 책임 회피와 정권 유지
목적) → 무기 개량, 군대 양성, 성곽 수리
㉰ 성격 : 실현 가능성이 적고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됨, 민심 수습과 국방력 강화에 기여함
2) 북학론 대두
① 배경 : 청의 국력 신장과 서양의 문물을 수용한 청 문화의 융성
② 주장 : 18세기 이후 실학자 중심,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부국 강병을 추구하자는 주장 제기[청을 무조건 배척
하지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주장]
③ 내용 : 사신들의 문물 소개 → 북벌론은 차츰 쇠퇴
ㅇ효종의 북벌 정책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였다. 현종과 숙종 때에도 북벌론이 제기되었지만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ㅇ홍이포 : 네덜란드의 화포를 모방해 명이 만든 것이다. 인조 9년(1631)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정두원에 의해 주조법이 도입되었으나 실용화되
지 못하다가 영조 때 주조되었다.
ㅇ북벌 운동의 폐단 : “군병을 징집하고 훈련하는 데 쉴 틈이 없으며, 혼자 두 가지 신역을 진 사람은 농사도 짓지 못하고 오랫동안 관문에서
대기해야 하며,…… 설령 군사 기술이 전보다 100배 나아진다고 해도 민심을 잃을 것입니다.……국가의 근심거리는 남쪽 왜와 북쪽 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국내에 있습니다.” -효종실록- → 효종의 북벌 운동이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북벌보다 백성의 생활 안
정이 우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리) 북벌론과 북학론
구분 대표 인물 주장
명의 은혜를 갚고 청에 무력으로 정벌하자고 주장 → 청의 국력 신장, 효종의 죽음으로 실천에 옮
북벌론 효종, 송시열 등
기지는 못함.
북학론 박지원, 박제가 등 청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

§2. 백두산정계비
1) 배경 : 북부 지역(함경도, 평안도 거주)의 조선인들이 압록강, 두만강 건너가 인삼 채취, 사냥 활동 → 청이 만
주 일대를 성역화 하여 한족의 출입 금지(봉금(封禁)) 지역으로 설정 → 조선과 청의 국경 분쟁 발생
2) 정계비 건립(1712) : 청이 백두산 일대의 경계 확정 제안 → 조선과 청의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
경 확정 → 정계비 건립(조선과 청의 국경을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경계 확정) → 압록강, 두만강 중상류 지역의 인구
증가, 개간지 확대 → 조선 정부, 읍을 설치하여 주민 보호, 개발 지원
ㅇ봉금 지대 : 청은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만주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봉금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ㅇ백두산 정계비와 간도 : 오라총관 목극등이 국경을 조사하라는 교지를 받들어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고, 서쪽은 압록강으로 하고 동쪽은 토문강
으로 경계를 정하여 강이 갈라지는 고개 위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노라. 강희 51년(숙종 38년, 1712) 5월 5일 - <백두산 정계비문> → 조선과
청의 관리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토문강의 위치를 놓고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선 후기 북방 지역의 발전 : 조선은 세종 때 4군 6진을 설치하였으나 1455년부터 1459년에 걸쳐 4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수시켰다. 그리하
여 이곳은 폐4군이라 불리었다. 양 난 이후 조선은 전란의 피해를 극복하면서 북방 지역 영토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여 1684년(숙종 10)에 함경
도 무산에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후에는 적극적으로 북방 지역을 개발하여 1787년(정조 11)에 개마고원 일대에
장진부를 세우고, 1823년(순조 23)에는 압록강 상류 지역에 후주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1869년(고종 6)에는 자성군·후창군을 세워 폐4군 지역
의 행정 구역을 완전히 복구하였다.

§3. 일본에 통신사 파견


1) 국교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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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배경 : 왜란으로 국교 단절 → 에도 막부가 조선에 국교 재개 간청(경제적 어려움 해결하고 선진 문물 수용위해)
② 조선의 의도 : 일본에 끌려간 포로 송환, 북방 여진족의 견제 *막부 사정 파악과 전쟁 포로 송환 위해 사명대사(유
정) 파견 → 조선인 송환(1607)
③ 기유약조 체결(1609) : 부산포만 개방(왜관 설치) → 제한된 범위에서 무역 허용
2) 통신사 파견
① 계기 :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막부의 실권자인 쇼군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절 파견 요청)
② 통신사 파견
㉮ 시기 : 19세기 초까지 12차례 파견 → 외교 사절 역할(일본에서 국빈으로 예우), 조선의 선진 문물의 전파
㉯ 영향
㉠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여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
㉡ 일본의 역사서 수입, 견문록을 남겨 일본 사정을 국내에 전함
ㅇ기유약조 : 1609년(광해군 1)에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대마도주와 맺은 조약
ㅇ조선 통신사 : 에도 막부는 이전의 막부와는 달리 지방의 영주(다이묘)들을 강하게
통제하였다. 그리고 영주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고자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에도에 왕래하는 동안 통신사는 가는 곳마다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이들은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난 인물들로 편성되어 학문·사
상·기술·예술 등 발달된 조선의 문화를 전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새로운
문화를 배우려 통신사의 숙소에 모여들었다.
→ 왜란과 호란 이후 다시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조선의 연행사와 통신사가
청과 일본을 향하고 있다. 연행사의 파견은 사대 관계에 따른 것이었지만, 통신사
의 파견은 일본의 요청따라 대규모로 파견되어 선진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
다. 에도 막부는 막부의 1년 조세 수입에 버금가는 비용을 들여 가며 통신사를 성
대히 맞아들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 청에 파견된 사절을 연행사, 일본에 파견된 사
절을 통신사라고 한다.

§4. 안용복의 독도 수호 활동
1) 조선의 독도 인식 :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조선 영토로 기록(울릉도와 함께)
2) 안용복의 활동 – 숙종, 동래 수군 출신
① 배경 : 일본 어민이 울릉도와 독도 지역을 자주 침범해 충돌을 빚음
② 안용복의 독도 수호 활동 : 울릉도에 침범한 일본 어민 축출 → 일본에 건너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받
고 돌아음
③ 조선 정부의 활동 : 19세기 말 주민들의 이주 장려, 군 설치, 관리 파견
④ 결과 : 정부의 수토 정책[조선 정부가 장기적으로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살피도록 하는 정책] 추진 계기, 에도 막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령 발표
※안용복의 독도 수호 활동 : 숙종 때 안용복은 에도 막부에게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고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받아
냈다. 에도 막부는 1696년에 지방 영주들에게 “죽도(竹島, 울릉도)와 송도(松島, 독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일본인들의 출어를 엄금한다.”라고
명령하였다.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의 고유 영토임을 알려 주는 다른 시대의 자료
일본 자료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1870), 태정관 지령(1877)
근대
대한 제국 자료 제41호 제2조(1900. 10. 27.), 참정대신 박제순 지령 제3호(1906. 5. 10.)
연합국 자료 연합국 최고 사령부 각서 제677호(1946),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1950)
현대
일본 법령 자료 대장성령 4호(1951. 2. 13.), 총리부령24호(1951. 6. 6.)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일본 류코쿠대학)
제작 시기 : 1402년
특징 : 중심에 중국을 그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만, 조선을 크게 그려 자주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세계관 : 조선 초기에는 세계의 중심이 중국[中華]이며, 그 주변에
오랑캐[夷]가 있다는 화이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세계를 인
식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은 명에 사대 외교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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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제작 시기 : 16세기
특징 : 유럽, 아프리카, 인도 등이 삭제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전보
다 축소되고, 조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크게 그려졌다.
세계관 : 지배층 사이에서 화이론적 세계관이 확대되는 가운데 조선은 중화
문명을 수용한 소중화라는 자부심이 크게 높아졌다.

「곤여만국전도」(경기 남양주 봉선사)


제작 시기 17세기
특징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 도」를 그대
로 따라 그렸으며, 세계 각 대륙이 비교적 정확하게 사
실적으로 그려졌다.
세계관 : 조선의 지배층이 중국 바깥에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
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세계 지도에 나타난 세계관의 변화와 연관 된 조선 시대 대외 관계
의 변화 : 조선 전기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에 사대 외교를 폈다. 호란 이후에 존화양이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
으나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점차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청과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3) 세도 정치 시기의 경제 상황
§1. 삼정의 문란 - 전정, 군정, 환곡(광범위한 착취와 수탈) → 18세기 중엽 이후 지역 단위로 총액 부과하여 징수
전정 •각종 부가세를 법정 액수보다 과다 징수, 지주가 부담할 세금 소작농에게 전가
•군사 기구 확대로 군포 부담 증가 → 농민의 군역 회피(노비, 양반으로 신분 상승, 도망 등) →
군정
남아 있는 농민의 군포 부담 증가
운영 과정에서 폐단 발생 : 늑대(환곡의 강제 배당), 환곡을 대여하지 않고 이자 납부 강요, 반작(출
환곡
납에 허위 장부, 허위 문서), 허류(창고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문서 작성) 등
•조세의 공동납제 확대[지역 단위로 총액 부과하여 징수(조세의 안정적 수취를 위해 인구의 증감과 관계없이 군현
단위로 미리 정해진 총액을 공동으로 부담함)] : 양반 증가, 농민의 토지 이탈로 세금이 잘 걷히지 않음
18세기 → 정부가 고을 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공동납제 확대[남아있는 농민의 부담 증가] → 군현의 수령과
중 엽 향리들의 농민 수탈 심화 계기 *공동납제 : 조선 후기 정부가 거둘 세금의 총액을 미리 정해 놓은 뒤 각 지방에
이후 할당해 징수하는 방식
•부유한 농민은 신분 상승 등을 통해 조세 수탈 대상에서 제외되고 이들이 부담해야 할 조세는
빈농층에게 전가
19세기 조세 수취 체제는 삼정의 문란으로 붕괴됨 → 농민 봉기의 원인 제공
정부의
암행어사 파견 → 부패한 권력 구조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함
대응
ㅇ삼정 : 국가의 주요 재정 수입원인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춘궁기에 곡식을 농민에게 빌려 주고 그 이자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하던 환정(환
곡)을 말한다. ㅇ군정 : 강년채(나이 줄여 60세 이상 남자에게 징수), 마감채(병역 의무자에게 일시불로 받고 군포 면역 ㅇ환곡 : 늑대(강제 배
당), 반작(출납에 허위 장부, 허위 문서), 허류(창고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문서 작성), 분석(分石, 쌀에 겨 섞어 대여) ㅇ전정 : 진결(경작하지
않는 땅, 황폐한 땅에 징세), 은결(토지 대장에 기록되지 않은 땅), 백지(공지(空地)에서 징수), 도결(정액 이상의 세를 덧붙여 징수)
ㅇ양반의 증가와 농민의 토지 이탈로 세금이 잘 걷히지 않자, 정부는 고을 단위의 공동납제를 확대하였다. 그 결과 남아 있는 농민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탐관오리는 법에도 없는 세금을 만들거나, 무고한 백성을 잡아다 죄명을 씌워 재물을 받고 풀어 주는 등 횡포를 부렸다. 정부가 암행
어사를 파견했지만, 부패한 권력 구조 속에서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ㅇ대원군의 문란 시정 : 전정 : 양전 사업, 은결 색출, 양반의 불법적 토지 겸병 금지, 군정 : 호포제 실시, 환곡 : 사창제 실시
ㅇ환곡으로 재정을 보충하다 : “올 봄 너희 마을에 분배되는 환곡은 40석인데, 겨가 많이 섞여 있어 실제로는 20석 밖에 안되고 왕래 수납 비용
과 타석 비용을 더한다면 손해가 더욱 클 것이다. 나에게 방책이 하나 있으니 들어 보아라. 일단 내가 40석을 대신 받는 것으로 하겠다. 가을에
20석과 그 밖의 비용은 우리가 부담할 터이니 나머지 20석을 가져다 쓰고 가을에 책임지고 환납하라.” -목민심서- → 환곡은 곡물을 구하기
어려운 봄이나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환곡을 운영할 때 자연 감소분을 보충한다거나 환곡 운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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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빌려 준 곡물 액수의 10%를 모곡이라는 것으로 덧붙여 받았다. 문제는 환곡을 빈민 구제용이 아니라 재정 보충
수단으로 삼으면서 아예 모곡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편법을 동원하면서 생겨났다. 심지어는 곡물의 양을 줄여 대여하거나 실제 대여해 주지 않
고 이자만 받는 각종 불법과 부조리까지 만연하였다.

(4) 농민의 항거 : 세도 정치 하에서 국가 기강의 해이, 탐관오리[탐욕이 많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관리]의 부정과 탐학, 삼
정의 문란에 항거
배경 세도 정치로 인한 삼정의 문란, 농민들의 사회 의식 성장
항거의 형 소청, 벽서, 괘서와 항조, 거세 등 소극적 저항(세금 납부 거부, 항의 시위, 관리나 향리 폭행
태 등의 방법으로 저항) → 점차 적극적인 형태의 농민 봉기로 발전 → 사회 개혁 요구
•평안도 지역 : 상인층 성장, 광업 발달 →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인재 등용에서 차별 대우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과 지배층의 수탈에 항거, 세도 정치 → 몰락 양반의 홍경래의 지
홍경래의
휘,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 → 가산에서 봉기, 선천, 정주 점거 → 청
난(1811)
천강 이북 지역 장악 → 정주성에서 관군에게 5개월 만에 진압 → 농민 봉기 이후 관리들
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음
•배경: 가혹한 수탈에 불만 품은 농민, 부민들의 소청 운동 → 향반, 잔반 합세 → 수령이나
지주, 고리대금업자 공격
•단성 농민 봉기와 진주 농민 봉기 →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 → 한때 진주성 점령하
임술 농민
기도 함 → 북쪽의 함흥에서 남쪽의 제주까지 전국적으로 확산 → 삼정 문란 시정 요구
봉기(1862)
•농민들의 사회 의식 성장,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가 점차 붕괴됨
•정부 대책 : 암행어사 파견, 삼정이정청 설치 → 미봉책에 불과(근본적인 대책은 강구하지 못
함.)※안핵사 파견하여 조사, 삼정이정청 설치하여 개혁 방안 논의 → 지배층 반발로 3개월 정도 시행하다 백지화
※농민 봉기의 원인과 대책 : 정부에서는 삼정 문란을 원인으로 파악하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여러 가지 개혁안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정확한 측량, 제도 개혁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은 시행하지 못하였다. 또한 신분에 따른 군역의 부과 기준을 해결하려면 신분제 개혁이 필요했으
나 부담의 조정에만 머물렀다. 환곡 역시 드러난 폐단만 고치려 했다.
ㅇ홍경래의 난 : 홍경래는 함경도 가산의 대정강(大定江)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 기지를
만들고 치밀한 준비를 통해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정주성에서 순무영(巡撫營) 관군과 수개월 대
치하다가 결국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끝을 맺었다.
⚫소청 : 관리 조세 수탈, 부정에 대해 관청에 시정 요구, 본인에게 불이익 처분을 받은 자가 그 처
분을 따르지 않고 심사를 청구하는 행정 심판을 말한다. ㅇ항조, 거세 : 소작료를 깍거나 납세를 거
부하는 행동 ㅇ벽서·소청 : 벽서(괘서)는 억울한 일을 알리기 위해 벽에 쓰거나 써 붙이는 것이고,
소청은 관청에 가서 호소하는 것. ㅇ농민 봉기 : 몰락 양반이나 향반, 서얼이나 중인 등도 농민과
연대하여 농민 봉기를 지도하거나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진주 농민 봉기 :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향리들의 횡포로 발생하였다. 환곡의 부정과 비
리를 참다 못한 이 지방의 몰락 양반인 유계춘 등이 농민들과 함께 고을을 습격하였다. 이 진주 농
민 봉기를 계기로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이어졌다. 정부는 안핵사 박규수, 암행어사 이인명, 영남선
무사 이참현을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삼정이정청 : 철종 13년(1862년 5월)에 임술 농민 봉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진주 안핵사로 파견
되었던 박규수의 건의에 따라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 삼정이정청은 각종 보고
서와 전현직 관리와 유생들로부터 개혁 방안을 모아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삼정이정절목이
라는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고, 임시 기구였던 삼정
이청정이 폐지되면서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1862년 윤 8월 ‘삼
정이정절목’을 책으로 내면서 철폐, 삼정 업무는 비변사에서 관장
⚫19세기 농민 봉기의 발생
(가) 평서대원수 홍경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父老)와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19세기 농민 봉기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衣冠)이 뚜렷하
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관서)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이라고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는 자 있겠는가. …… 지금, 임금의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가지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君侯)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패림』-
(나) 공주의 백성들이 화제소에 모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인가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 처음에는 호소하더니 움직임이 문득 무리를 이루고 마
침내 고을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 임술록』- → 19세기 세도 정치 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
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해결하기 어려웠다. 농촌 사회가 피폐해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더욱 강해져 갔으며, 마침내 농민들은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더욱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
봉기가 당시에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 봉기이다. (가)는 홍경래의 난과 관련 있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와 서북인에 대한 차별 대우가 원인이
되어 몰락 양반인 홍경래를 중심으로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가 합세하여 일으킨 것이다. 평서대원수를 자처한 홍경래는 그를 따르
는 무리와 함께 정주성에서 100일 넘게 버텼지만, 화약으로 성을 무너뜨리며 공격해 온 관군을 막아 내지는 못하였다. (나)는 임술 농민 봉기
중 공주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진주 농민 봉기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임술 농민 봉기에서 농민들은 삼정 문란의 해결을 요구하였다.
ㅇ공주부 농민의 요구 사항
1. 세미(稅米)는 항상 7량 5전으로 정하여 거둘 것. 2. 각종 군포를 농민에게만 편중되게 부담시키지 말고, 각 호마다 균등하게 부담시킬 것.
3. 환곡의 폐단을 없앨 것. 5. 아전과 장교의 침탈을 금지할 것. - 송근수,“ 용호한록”- → 임술 농민 봉기는 지방관의 수탈로 인한 삼정의 문란
이 심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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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 토지 제도와 수취 체제의 정비
§1.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
1) 과전법(1391, 공양왕 3년) : 고려 말에 마련된 제도, 조선의 토지 제도로 운영
① 기본 방향 : 관리의 경제 기반 마련, 국가 재정의 유지
② 경기 지방의 토지를 전·현직 관리에게 등급에 따라 수조권(생산량의 1/10) 지급
③ 특징 : 원칙적으로 세습 불가(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 원칙), 토지 중 일부가 수신전, 휼양전으로
세습
ㅇ수신전 : 조선 전기에 과전을 지급받은 관리가 죽은 뒤에 재혼하지 않은 부인에게 지급한 수조지이다. 과전을 받던 관리가 죽은 뒤 자식이 있는
경우는 남편 과전의 전액을, 자식이 없는 경우 반액만 지급하였다.
ㅇ휼양전 : 조선 시대에 과전을 봉록으로 받던 관리 부부가 다 죽고 그 자식이 어릴 경우 이를 휼양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과전을 물려받은 토지.
ㅇ과전법 :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무릇 경성에 거주하여 왕실을 시위하는 자는 직위의 고하에
따라 과전을 받는다.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후, 그 아내가 자식이 있고 수신하는 자는 남편의 과전을 모두 물려받고 자식이 없이 수신하는 경우
는 반을 물려받는다.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그 자손이 유약한 자는 휼양전으로 아버지의 과전을 전부 물려받고, 20세가 되면 본인의 과에 따라
받는다.” -고려사- → 1391년(공양왕 3)에 실시된 과전법의 시행이다. 고려 말 과전법의 시행은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부인 조준과 정도전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1390년에 기존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그 이듬해에 과전법 시행을 공포하였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권
문세족은 경제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선 왕조 개창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2) 직전법(세조, 1466)
① 배경 : 세습 토지 증가 → 새로운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 부족 문제 발생
②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토지에서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 지급, 수신전·휼양전의 폐지
3) 관수관급제 시행(성종, 1470)
① 배경 : 수조권 남용 방지 목적(수조권을 받은 관리의 수조권 남용 사례 증가로 농민의 불만 고조)
② 지방 관청이 수확량을 조사해 징수 → 수조권을 받은 관리에게 지급(→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4) 직전법 폐지(16세기 중엽)
① 수조권 지급 제도 폐지 → 녹봉만 지급
② 이후 : 토지 사유 관념 확산 → 양반 지주의 토지 사적 지배권 확대
ㅇ관수관급제 : “지금 들으니 조정 관원이 그 세(稅)를 지나치게 거두어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고 한다. ……직전의 세는 소재지의 관리로
하여금 감독하여 거두어 주게 하고, ……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 직전법이 시행된 이후 수조권 행사가 재직 기간에 한정되면서 과도한 수
취가 잇따르자 성종 1년에 관수관급제가 실시되었다.

§2. 지주제의 확대
1) 사적 소유지 확대 : 매매, 겸병, 개간을 통해 확대
2) 지주제 확대
① 확대된 토지는 노비에 의해 직접 경작하거나 유랑민(자신의 노비처럼 만듬)을 모아 경작
② 규모가 큰 경우 : 병작반수(竝作半收)로 운영 → 직전법 폐지 이후 더욱 확산
ㅇ병작반수 : 지주가 작인에게 경작지를 빌려 주고 그 대가로 수확의 절반을 징수하는 제도. 토지의 사적 소유와 병작반수에 입각한 지주제는
직전법이 폐지되자 더욱 확산되어 갔다.

§3. 수취 체제의 정비 : 국가 재정의 토대 ← 상민들이 부담하는 조세, 공납, 부역으로 충당


•토지 소유자에게 부과
•과전법 체제 : 수확량의 1/10 수취(1결당 30두, 1결당 최대 생산량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수확
량에 따라 납부액 조정)
조세[ 전 •공법의 실시 : 세종 때 전분6등법(토지의 비옥도), 연분9등법(풍흉) 실시 →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의
세( 토지 조세 수취 → 농민의 부담 경감
세)] •조세 운반
-조운 : 조세는 군현에서 쌀, 콩 등 곡식으로 징수 → 조창(강가나 바닷가에 위치) → 경창으로 운송
-잉류 지역 : 평안도, 함경도의 조세미는 군사비, 사신 접대비로 현지에서 사용[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경에 가깝
고, 평안도는 사신의 내왕이 잦은 곳]
•가호마다 지역 토산물을 현물로 징수(전세보다 농민들에게 부담이 가장 컸음)
•중앙 관청이 각 군현에 중앙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수량 할당(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
공납 재 등) → 군현에서 각 가호에 할당해 징수(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 징수)
•대납·방납의 성행 : 공물 생산량 감소, 생산지 변화 → 물품이 없으면 다른 곳에서 구입하여 납부(부담 가중),
공물을 다른 사람이 대신 납부하고 해당 군현에서 그 대가 지급
•16세 이상 정남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제도
•역의 종류
- 군역(일정 기간 군사 업무에 복무, 복무에 드는 비용 보조), 면제자(현직 관료, 서리, 향리, 학생 등)
- 요역(토목 공사 등에 동원, 가호 기준 동원 → 성종 때 토지 8결당 한사람씩 동원, 6일 이내 제한)

•농민들의 요역 기피 현상 심화 → 정부, 군인을 각종 공사에 동원 → 군인도 요역을 기피 → 대립이나 방군수포
현상 발생
- 대립 : 면포를 받는 대가로 군역을 대신 부담
- 방군수포 : 군대의 장수들이 면포를 받고 군졸을 내보냄.
•염전, 광산, 산림, 어장, 상인, 수공업자 : 세금 납부
기타
•재정 지출 : 군량미나 구휼미로 비축, 각종 경비와 관리의 녹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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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 생산량 감소와 생산지 변화로 납부 기준에 맞는 품질과 수량을 맞추기 어려우면, 그 물품을 다른 곳에서 구입해다가 납부
※조운(漕運) : 군현에서 거둔 조세는 배를 이용하여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으로 운반하였다가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는 바닷길로, 강원도는 한강,
경상도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통하여 경창으로 운송, 다만 국경이 가깝고 사신 왕래가 많은 평안도와 함경도는 거둔 조세를 현지에서 군사비와
사신 접대비로 사용하였다.
※세종의 전분6등법에서 1결의 토지 크기 : 1등전 : 2,986.6평, 6등전 : 11,946.4평 ㅇ작인 : 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농민
※당시 1두(말)의 용량 : 대략 현재 1말(18리터)의 3분의 1정도이다. ※ 정포 1필의 크기 : 폭 32.8cm, 길이 16m 38cm, 저화 10장 = 포 1필
ㅇ전세, 공납, 역 외에 염전, 광산, 산림, 어장,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었다. 거둔 세금은 군량미와 구휼미로 비축하거나 각종
경비와 관리의 녹봉으로 지출되었다.
※조선 시대 토지 계산법 : 결부법은 농경지 면적을 계산하는 우리 나라 특유의 방식이다. 결부가 제대로 계산되면 세금을 공평하고 쉽게 거둘
수 있었다. 결부는 결(結), 부(負), 속(束), 파(把)라는 단위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 단위 사이에는 ’10파=1속, 10속=1부, 100부=1결’이라는 관계
가 있었다. 이 중 전세를 거둘 때 법으로 정한 기준은 바로 ‘결’이었다. 즉 1결에 쌀 몇 두라는 방식으로 세금이 매겨졌다
※방납으로 인한 농민들의 고충
각 도에서 중앙의 관청에 납부하는 공물을 해당 관리들이 매우 정밀하게 살피면서 모두 품질이 나쁘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도성 안에서
사들인 물품을 납부할 때에만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각 관청 아전들이 이 과정에서 이득을 노려 다투어 대납을 하면서 원래 공물 가격의 몇 배
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세종실록” → 방납은 공물을 부담하는 백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상인을 비롯한 방납업자들이 공물을 미리 관청에
납부하고 나중에 지방민들에게 그 대가를 받아 가는 것이었다. 해당 군현에서 공물이 생산되지 않거나 공물의 수납 기한이 빠듯하여 방납이 불
가피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관리와 방납업자들이 이익을 노리고 행하였으며 해당 고을에서 생산할 수 있는 물품조차 방납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방납을 금지하였으나, 방납에 따르는 이익이 막대하여 실효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4. 16세기 수취 체제 문란 → 농민 부담 증가
전세 지주가 작인에게 전가(강요)
농민의 토지 이탈로 많은 유민
공납 관청의 서리가 공물을 대신 내고 그 대가를 징수(방납) → 방납의 폐단
발생 → 일부는 도적이 되기도
역 대립(다른 사람을 사서 역을 대신함)·방군수포(포를 받고 군역 면제) 성행
함(명종 때 임꺽정이 대표적)
환곡 고리대 수단으로 변질
ㅇ임꺽정( ? ~1562) : 명종 때 의적으로 알려진 백정 출신의 인물로,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6. 양반 신분제 사회와 상품 화폐 경제
(1) 양 난 이후 조선의 경제 변화
§1. 양 난 이후 경제 변동의 방향
1) 배경
① 조선의 경제 정책 : 유교의 민본 이념에 따라 민생 안정에 주력하여 농업을 진흥하
고 상공업을 적절히 통제
② 양 난 이후 : 농촌 인구 감소와 농경지 황폐화(전쟁 중 사망, 피난), 기근과 재난 →
농촌 경제 파탄(농민 생활 궁핍,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음)
2) 내용
임진왜란 이후 토지의
① 정부의 대책 : 수취 체제의 개편[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을 통한 부당
감소
한 조세 징수 방지하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고자 함 → 민생 안정에 기여(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함)
② 피지배층 : 농업 생산력 증대와 상공업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 → 민간의 상공업 활동 활발로 정부의 상공업
통제 약화, 상품 화폐 경제 발달로 경제 구조가 자급자족적 단계를 탈피하고 사회, 문화에도 큰 변화 나타남
※양전 사업 : 토지의 실제 경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전국의 결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양안(量案:토지 대장)에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탈세
를 방지하며, 토지 경작 상황을 조사하여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기 위해 시행하였다.
ㅇ“선조 26년(1593) 10월, 국왕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성안은 타다 남은 건물 잔해와 시체로 가득하였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은 인육
을 먹기도 했고, 외방에는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 유성룡,“ 서애집”- →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도성의 모습과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이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비참한 실상을 보여 주는 글이다. 7년에 걸친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경작지가 전쟁 전의 3분의 1 수
준에 머물 정도로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 들이 도적 떼가 되어 양반 지배층과 정부에 항거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에 지
배층은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줌으로써 양반 지배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왜란으로 인구와 토지가 크게
감소해 재정이 궁핍해졌음은 물론,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도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농민들이 정부와 지배층에 저항하는 일이 많아지자, 지배층
은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수취 체제를 개편하였다.

§2. 영정법(인조, 1635) : 전세의 정액화 → 점차 지주의 부담을 소작농에게 전가


1) 전분6등법·연분9등법 시행의 어려움(매년 풍흉을 조사해야 하는 번거로움) → 복잡한 징수 절차로 15세기 말부터
풍흉을 조사하지 않고 최저 세율 적용이 관행(1결당 4∼6두)
2) 배경
① 양 난 이후 토지 대장 소실, 농경지 황폐화 → 재정 수입 크게 축소, 전세 제도 문란, 농경지 감소(임진왜란 직전 150만
결 → 임진왜란 직후 30만 결로 감소)
② 안정적인 재정 확보, 민생 안정 → 수취 제도의 개혁 추진
3) 개혁 내용 : 토지 개간 장려, 양전 사업 시행 →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쌀 4~6두 징수
4) 영향 : 전세율 인하, 토지 없는 농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함(농민의 부담은 거의 변화가 없음), 삼수미를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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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러 명복의 각종 부가세(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 보충비)의 징수로 부담 증가 → 지주의 부담이 작인에게 전가되는
현상 지속 → 농민 부담 증가(대다수 농민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함)
ㅇ자기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불리 : 영정법은 토지가 많을수록 전세 인하 효과가 컸고 토지가 없는 경우 혜택이 거의 없었다.
ㅇ영정법 실시의 배경 : “국가의 토지는 여섯 등급으로 나누는 법이 있고, 세를 거둘 때에는 아홉 등급의 제도가 있다. …… 그런데 토지의 등급
을 나누고 세를 내게 할 때 모두 하하를 따르고 중상의 법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되풀이 하다보니 일상적인 규정이 되었다.” -선조실록- → 전
분6등법과 연분 9등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최저 세율을 적용하는 관행이 영정법 실시의 배경이었음을 보여 준다.

§3. 대동법, 공납의 전세화


1) 배경 : 방납의 폐단 → 농민 부담 가중, 임진왜란 이후 현물 징수 자체가 어려워짐.
2) 수미법 주장 : 이이, 유성룡 등 → 미실시
3) 목적 : 부족한 국가 재정 보완, 농민 부담 경감
4) 대동법 실시(1608)
① 내용 : 가호에 부과되던 토산물 징수 → 토지 결수에 따라 쌀(1결당 12두)·면포(삼베,무명)·동전 등으로 징수
(공납을 전세로 전환)
② 시행 : 경기도에 시범 실시, 이후 전국 확대(숙종) → 지주의 반대로 확대에 어려움(전국 시행에 100년 걸림,
평안, 함경도 제외)
③ 반발 : 방납 관련자들과 지주층의 강한 반발 → 전국적 실시에 많은 시
간 소요
※1608 경기도, 이원익 주장에 따라 시행, 선혜청 설치 → 1623 강원도 대동청 → 1651 호서
대동청(충청) → 1658 호남 대동청(전라) → 1677 영남 대동청 → 1708 해서 대동청(황해) ㅇ
변화 내용 : 과세 기준이 가호에서 토지로 변화, 납부 방식이 토산물에서 쌀ㆍ무명이나 삼베ㆍ
동전 등으로 변화, 징세율은 토지 1결당 미곡 12두 징수
5) 결과
① 토지가 없는 농민 : 과세 부담에서 벗어남, 토지 소유 농민 – 1결당 미
대동법의 실시
곡 12두 납부
② 대토지 소유 양반 지주 – 부담 증가, 가난한 농민의 부담 경감
6) 영향
① 상품 수요와 공급의 증가, 화폐 유통 활발, 수공업 발달, 공인들이 막대한 자본 축적 → 상품 화폐 경제 발달
② 공인 등장 : 관청에서 공가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는 어용 상인[왕실이나 관청에 물건을 대는 상인]
→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 구매 → 상품 수요 증가
③ 농민의 토산물 판매 확대 : 대동세 마련 목적[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쌀, 베, 돈 마련] → 상품 화폐 경제 발전
7) 의의 : 국가 재정 확충하고 일시적으로 농촌 경제 안정에 기여(농민 부담 크게 감소), 상품 화폐 경제 발전
8) 한계 : 상공만 폐지, 별공과 진상 등 현물 징수 잔존, 관리들의 부정(유치미 감소, 상납미 증가로 수령 아전 수탈), 운영
과정에서 대동세가 작인에게 전가됨
※대동법 : 우의정 김육이 아뢰다.“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대동법은 역을 고
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다만 교활한 아전은 명목이
간단함을 싫어하고 모리배들은 방납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어지럽게 할 것입니
다. 삼남에는 부호가 많은데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으나 국가에서 법령을 시행할 때에는
마땅히 소민들이 원하는 대로해야 합니다.”임금이 이르기를,“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가 원망하고, 시행하
지 않으면 소민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원망하는 대소가 어떠한가?”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소민의 원망
이 큽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효종실록”→ 대동법 시행에
반대한 사람들과 그 까닭 : 공납제를 시행할 때 현물을 직접 납부하기 어려운 점을 이용하여 물품을 대납
하고 그 대금을 비싸게 받던 중간 상인(방납인)과 지방 수령이나 아전, 중앙 관리들은 대동법 시행에 반대
하였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지주들도 자기들의 땅에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므로 찬성하지 않았다.
ㅇ전국에 확대 시행되는 데에는 100년 : 광해군 때인 1608년에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숙종 때인
1708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ㅇ대동법의 실시 : “선혜청을 설치하였다. 처음에 영의정 이원익이 아뢰기를 ”각 고을의 진상과 공물이 각
관청 방납인에게 막혀, 한 물건 값이 서너 배나 수십 수백 배로 징수되어 그 폐해가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특히 경기도가 심합니다. 지금 별도의 담당 관청을 설치하여 매년 봄, 가을에 백성들에게 쌀을 거두는데,
토지 1결마다 두 번에 걸쳐 각각 8두씩 거두어들이게 하고 담당 관청은 수시로 물가 시세를 보아 쌀을 방
납인에게 지급하여 물건을 조달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광해군일기- →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이원익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 처음 실시되었다. 당시에는 토산물 대신에 1년에 두 번, 8두씩 모두 16두
를 거두도록 하였다. 이후 제도를 보완해 1결당 12두를 징수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실시 지역도 점차 확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대되었다. ㅇ공인 : 공가를 미리 지급받아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납품하는 어용 상인(상인, 수공업자, 경주인)
ㅇ대동법 실시를 둘러싼 찬반 주장
-대동법 실시 반대 : “지방에서 온 사람이 “백성이 모두 한꺼번에 납부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먼 지방은 경기
와 달라 부자들이 가진 땅이 많습니다. 10결을 소유한 자는 10석을 내고 20결을 소유한 자는 20석을 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땅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고통스럽게 여길 것은 당연합니다. …… 대가(大家)와 거족(巨族)이 불편하게 여기며 원망을 한다면, 어려운 시기에 심히 걱정스
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 인조실록”-
-대동법 실시 찬성 : “부자는 전결이 많으므로 내야 할 양도 많아 한꺼번에 준비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부자는 수확이
많고 노동력이 많은데, 가난한 사람들도 여태껏 그럭저럭 납부해 온 것을 왜 못 내겠습니까?” - 조익,“ 포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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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대동법 실시에 반대 이유 : 대동법에 따라 토지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게 되면서 토지가 많은 지주의 세금 부담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ㅇ대동법의 실시로 공납의 부과 기준과 징수 방법 변화 : 공납의 부과 기준은 가호에서 토지로 바뀌었다. 징수 방법은 토산물을 현물로 징수하
던 것을 쌀, 면포, 동전 등으로 징수하게 되었다.

§4. 균역법의 실시 : 군포 징수 과정의 폐단 해결 목적, 군포를 1필로 축소, 결작 징수해 보충 → 농민 부담의


일시적 감소 ※양인 장정은 16개월마다 군포 2필 납부 원칙
1) 배경 : 농민의 군포 부담 증가
① 양인 장정의 수와 징수할 군포의 양을 미리 정해 놓고 마을 단위로 부과
② 군역 회피자의 증가(양반으로 신분 상승, 도망, 신분 위조 등) → 남은 양인들이 이웃, 친족은 물론 군역 면제
자의 군포까지 부담(농민의 군포 부담 증가) ※군역 의무가 없는 가호, 어린이, 죽은자까지 군포 부과
③ 5군영 경비 마련을 위한 군포 징수 확대(1년 2필 원칙, 수포군의 증가, 훈련도감 등의 성립으로 모병제 제도화)
④ 군적 미비(제대로 정비되지 못함)
2) 군포 부담 가중
① 각 군영의 독자적 군포 징수 : 징수 기관 난립[이중 삼중(5군영, 지방의 감영, 병영)의 군포 부담 초래]
② 납속 등으로 군포 수입 감소, 농민의 군역 회피(→ 족징, 인징, 황구첨정, 백골징포)
③ 수령과 아전의 불법징수(실제 납부액 증가)
3) 군포 징수 개혁 방안[양역변통론] 논의 : 호포론[호 단위 부과], 결포론[토지 결수에 따라 군포 부과] 등 다양한 방안 제시
→ 군포 부담을 우려한 양반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함
4) 균역법의 시행(영조, 1750)
① “양역실총” 편찬 → 양인 1인당 1년에 1필씩 납부하도록 조정(1년 2필 → 1필)
② 감소액 보충 : 결작(토지 1결당 미곡 2두 부과)·일부 상류층에 선무군관포 징수, 잡세(어장세, 선박세, 염세
등 국가 재정으로 돌림) 수입으로 충당
5) 의의 : 농민의 군포 부담 일시 경감
6) 한계 : 결작이 작인에게 전가, 징수 과정의 폐단(인징·족징, 백골징포·황구첨정 등) 지속, 면제자 증가 → 농민
부담 다시 증가

§5. 중농 정책의 실시와 농업 기술의 발달
군적 : 군역 담당자들의 명단을 작성한 장부 ㅇ기관마다 다른 군포 징수량 : “황해도 병영은 포를 2필씩 거두는데, 감영은 1필을 거둔다. 그래서
감영군은 서로 다투어 들어오려고 하고, 병영군은 모두 싫어해 달아나려 한다.” -“ 비변사등록”-
ㅇ호포론, 결포론 등 농민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한 다양한 방안 : 양역변통론 ㅇ호포론 : 군포를 호 단위로 부과해 양반 에게도 징수하려 한 제
도이다. ㅇ결포론 : 토지 결수에 따라 군포를 부과해 징수하려 한 제도이다.
ㅇ선무군관 : 영조 때 지방의 토호(土豪)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에게 선무군관의 직책을 부여하여 유사시에 소집되어 군사를 지휘하게 하고 평
상시에는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다. 이들은 양반은 아니었으나 양반 행세를 하였다.
ㅇ양역변통론 : 군포 징수를 가호 단위로 하여 양반에게도 징포하자는 호포론(戶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토지에 부가세를 부과하자는 결포론(結
布論), 유한양정(有閑良丁)을 적발하고 양반 자제 및 유생에게도 징포하자는 유포론 (游布論:儒布論, 군역 기피자 색출하여 군역 의무 부담),
군포를 폐지하고 매인당 전화(錢貨)로 징수하자는 구전론(口錢論), 군사비를 감축하자는 등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양반층의 강경한 반대로
군포를 줄이자는 감필론(減匹論)이 대두되었다.
ㅇ균역법의 실시 배경
-군역의 폐단 : “현재 10여 만 호로써 50만 호가 져야 할 양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한 집안에 비록 남자가 4, 5명 있어도 모두 군역에서 벗어나
지 못합니다. 군포를 마련할 길이 없어 마침내 죽거나 도망을 가게 되고, 이러한 자의 몫을 채우기 위해 백골징포, 황구첨정의 폐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 영조실록”-
-결포론을 실시할 수 없는 이유 : “구전(口錢: 군포 대신 성인에게 돈을 징수하는 것)은 한 집안에서 거두는 것이니, 이를 거두면 주인과 노비의
구분이 문란해진다. 토지에는 이미 많은 세금이 매겨져 있어 더 부담시키기 어렵다. 호구를 기준으로 거두는 것이나 토지를 기준으로 거두는
것은 모두 문제가 있다.” -“ 영조실록”-→ 군포 징수 과정의 폐단과 양반 인구 증가에 따른 군역 담당자의 감소로 늘어난 군포 부담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개혁안이 논의되었으나 군포 부담을 우려한 양반층의 반대로 결국 농민의 군포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균역법이 실시되었다.
ㅇ인징, 족징, 백골징호, 황구첨정 : 군포 납부 대상자가 도망했을 때 그 이웃에게 걷는 인징, 그 친족에게 걷는 족징의 폐단이 나타났고 이미
사망하거나 16세가 안 된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폐단이 계속되었다.
ㅇ납속(納粟) : 부족한 재정 보충 및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돈이나 곡물을 납부한 사람에게 특혜를 준 정책, 면천, 면역은 물론 관직을 주는 경우
도 있었다.ㅇ공명첩(空名帖) :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선무군관의 불만 : 영조 27년 4월 28일 을미 “충청도 관찰사 이익보가 상서하다. “선무군관은 국가의 법령에 따라 뽑아 정원을 채우고 이들에
게 과거 응시를 허락하여 무반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들은 문관도 아니고 무관도 아니며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니며 농사
짓는 이들도 있고 장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평소에 사대부의 의관을 모방하여 군역을 모면하고 있었는데 지금 군관이라는 명칭을 주어 군포를
거두니 일반 정군이나 보인과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모면하기를 도모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영조실록→ 선무군관은 양인
신분이면서도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령이나 향리들과 결탁하여 향촌에서 사대부로 행세하면서 군역을 피하고 있었다. 국가는 이들에게 무반 명
목을 주고 군포를 내도록 하였다. 일반 양인과 마찬가지로 군포를 부담하게 되자, 이들은 신분 상승 노력을 계속하였다.

(2) 조선 전기의 경제 생활 중농 정책 –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재정 운영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실시


① 개간 장려(일정 기간 면세), 수리 시설 확충, 농업 기술 개발, 농기구 개량
② 농서 간행 보급 : “농사직설(세종)” 편찬(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해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 정리)
2) 농업 생산력 증대 노력
① 양반 지배층 : 적극적으로 토지 개간, 간이 수리 시설 확충, 직접 농업 경영에 참여
② 농민 : 스스로 농업 기술 개량
③ 농업 기술 발달
㉮ 조·보리·콩의 2년 3작 확대, 남부 일부 지방에 모내기법 확대 보급(벼와 보리 이모작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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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경지 소멸(시비법 발달, 매년 농사지음), 목화 재배 확대로 의생활 개선, 약초와 과수 재배 확대
3) 농민 생활 곤궁
① 자연재해로 큰 피해, 농민 몰락(세금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빚을 지고 몰락), 양반 지주의 땅 빌려 경작 – 수확의 절반 납부
ㅇ농본주의 정책 :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는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므로, 임금이 정치에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한다.” -“ 세종실록”- ㅇ시비법 : 조선 시대에는 작물을 파종하기 전에 주는 밑거름과 성장 과정에서 주는 덧거름을 이용하게
되어 매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ㅇ고려 말 조선 초의 토지 결수 : 건국 초부터 계속된 개간과 양전으로 고려 말 50여 만결에
불과했던 경지 면적이 세종 때에는 150여 만 결로 증가하였다. ㅇ국가의 상공업 통제 : “우리나라에는 이전에 공상(工商)에 관한 제도가 없어,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백성이 줄어들었으며, 말작(상업)이 발달하고 본실(농업)이 피
폐하게 되었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경국전- → 이러한 경제관을 배경으로 조선은 농업 중심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고, 상공
업은 지배층의 편리를 위해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하였다.

§2. 관영 수공업 체제의 정비


1) 정부의 상공업 정책 :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 경제관에 따라 정부가 통제
2) 관영 수공업
① 운영 방법 : 장인을 공장안에 등록해 각 관청에 소속시킴 → 장인을 동원해 필요한 물품 제작
② 공장(장인)의 활동
㉮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작해 납품(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 책임량 초과 생산품은 세금을 내고 판매
㉯ 관청에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물건을 제작해 판매
③ 16세기 이후 쇠퇴 : 장인들이 관청에 동원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 확대로 점차 쇠퇴
3) 민영 수공업 : 농기구, 양반의 사치품 생산, 판매
4) 가내 수공업 : 자급자족 형태로 생활필수품 제작
ㅇ공장안 :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생산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장인을 등록해 놓은 문서이다.
ㅇ관청에 소속된 장인 : 조선 초에는 왕실과 중앙 관청에 소속된 장인이 2,800여 명, 지방 관청에 소속된 장인이 3,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3. 국가의 상업 활동 통제 속에 장시 등장
1) 시전(종로 거리 위치) : 정부가 점포를 지어 상인에게 대여 → 점포세와 상세 징수
① 시전 상인 : 왕실과 관청에 물품 공급하는 대신 특정 상품의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음
② 경시서[평시서] 설치 : 시전에서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
2) 장시 : 15세기 후반 처음 등장 → 농업 생산력 발달을 배경으로 16세기 중엽 전국으로 확대 → 18세기 전국, 1,000여 개소 확대 → 인근
농민과 수공업자, 보부상의 활동(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 매매)
3) 화폐 : 저화, 조선통보 보급 → 유통 부진, 농민은 주로 쌀과 면포를 이용해 거래
ㅇ시전 상인 : 한양이 건설되면서 정부는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 시켜 상업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한양의 시전은 초기 상업
활동의 중심이었다.
ㅇ전국 장시를 한 달에 세 번, 모두 같은 날에 서게 하소서! : “(장시가) 오늘은 이곳에 서고 내일은 이웃 고을에 서며, 다음 날에는 다른 고을에
서서 한 달 30일 동안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규정을 마련해 큰 고을은 두 곳에서, 작은 고을은 한 곳에서 한 달에 세 번 모두 같은
날 개시(開市)하는 외에는 일체 금지하여 민심을 진정시키소서.” -“선조실록”-→ ‘한 달에 세 번, 모두 같은 날에 장이 서게 하자.’라는 주장은
장시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나왔다. 정부는 장시를 금지했지만, 농민과 수공업자는 필요한 물품을 교환할 수 있는 장시가 필요하였다.
일부 지배층조차 흉년 극복에 도움이 된다며 장시 허용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시가 5일장으로 정착되어 가자, 전국의 장날을 국가가
통제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 이것은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증가를 억제해 상업의 발전을 막으려는 고육책이었지만, 장시는 계속 확산되었다.
ㅇ장시의 등장과 발달
-경인년 흉년 때 전라도 백성들이 서로 모여들어 점포를 만들어 장문(지상)이라 칭하고,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목숨을 유지하였다.-성종실록-
-임진왜란 이후 백성들은 정해진 곳 없이 교역으로 생활하는 것이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 한 고을에 열리는 시장은 적어도 3∼4곳이 되어 ……
한 달 30일 이내에 시장이 열리지 않는 날이 없다. -선조실록- → 15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흉년을 배경으로 장시가 등장하였고,
16세기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일부 관리들은 상업의 발달을 막기 위해 전국의 장날을 국가가 통제하자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3) 조선 후기 농업과 광공업의 발달


§1. 농업 생산력의 증대
1) 정부 : 양난 이후 농경지 확충을 위한 개간 사업 장려 → 경지 면적 확대※개간 사업은 주로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양반 지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2) 농민 : 농법을 개량해 농업 생산력 증대 노력(자구책)
① 논농사 : 모내기법 확대(가뭄 우려해 정부는 금지령) → 노동력 감소, 잡초 제거 용이, 수확량 증대, 벼와 보
리의 이모작 가능
② 밭농사 : 견종법 보급(밭에 이랑을 만들고 보리, 콩 등의 씨앗을 밭고랑에 뿌리는 방법) → 두둑에 심을때보다 노동력
감소와 수확량 증가 효과
③ 농업 기술 발전
㉮ 수리 시설 확충 : 작은 규모의 보를 쌓아 물 확보 – 모내기 보급으로
㉯ 시비법 발달 : 퇴비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거름 만들어 사용
㉰ 농기구 개량 : 논농사에서 소를 이용한 쟁기 사용이 널리 보급
㉱ 공동 노동 방식 확대 : 두레, 품앗이
ㅇ두레, 품앗이 : 짧은 기간 내에 노동력을 집중해서 모내기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공동 노동 방식이 확대되었다.
ㅇ모내기의 확대 보급 : 모내기의 확대 보급은 피지배층이 자신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증거라고 할 수도 있다. 모내기의
보급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광작의 유행, 부농층의 성장 등 조선 후기 농촌 사회에 일어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조선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모내기법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ㅇ모내기법의 효과 : “이앙의 이점은 봄보리를 갈아 먹고 물을 몰아 모내기를 하여 벼를 수확하니 1년에 두 번 농사지음이 그것이다.” -신작,
석천유집-, - “이앙(모내기)을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김매기의 노력을 더는 것이 첫째요, 두 땅의 힘으로 하나의 모를 기르는 것이
둘째요, 좋지 않은 것은 솎아 내고 튼튼한 것을 고를 수 있는 것이 셋째이다.” - 서유구,“ 임원경제지”- → 모내기법의 보급이 가져온 효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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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내기법은 그 자체로 생산력 증대와 노동력 감소의 효과가 있었으며, 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확대시켜 단위 면적당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ㅇ정부의 금지령 : 봄에 가뭄이 들어 모내기를 할 수 없으면 1년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이유로 모내기를 금지하였다. 정부는 가뭄을 우려하여
모내기 금지령을 내렸으나 농민들은 수리 시설을 확보하여 이를 해결해 나갔다.
ㅇ보 : 하천에서 농업 용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쌓은 둑이다. 쉽게 만들 수 있으나 홍수로 유실되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

§2. 농업 경영 방법의 변화
1) 광작의 유행과 농업 경영의 변화
① 배경 : 모내기 보급 → 노동력 감소 → 광작(1인당 지을 수 있는 경작지의 면적 확대)의 유행
② 지주의 농업 경영
㉮ 광작으로 빌려준 토지를 회수하고 노비와 머슴 이용 → 직접 경영하는 토지 확대(종전 : 지주는 대부분의 농
지를 작인에게 빌려주고 일부만 직접 경영)
㉯ 지주의 직접 경영 증가 → 지주 → 자작농 → 소작농까지도 재산 축적 가능 ⇒ 농가 소득 증대, 부농 출현, 농민층의 분화 현상 발생
(소작농 몰락)
③ 농민층의 계층 분화 : 신분제의 동요로 이어짐,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 지주 : 더 많은 수익, 많은 농민은
영세 상인(경작지 잃고 도시로 나감)·임노동자로 전락 ※자급자족적 농업에서 벗어나 상업적 농업으로 발전하는 변화도 일어남
④ 상업적 농업 발달 : 도시 인구 증가, 상품 유통의 활발 → 자급자족적인 농업에서 벗어나 상업적 농업이 발달
2) 상품 작물 재배 확대
①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 재배 : 장시 증가 → 상품 유통 활발
② 도시 인구 증가와 상품 유통 경제 발달 → 인삼, 면화, 담배, 채소 등 상품 작물 재배 확대, 쌀의 상품화 활발
(→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 확대) ※상품작물은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기에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함
ㅇ광작 : 모내기법으로 제초 노동력이 감소하여 한 농가에서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현상, 모내기법의 확대 보급으로 이모작이
가능해져 생산력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일부 농민은 부농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모내기법이 노동력을 절감시키자 줄어든 노동력을 이용해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경작지가 넓어지는 광작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광작이 유행하면서 농지를 얻지 못하고 몰락하는 농민도 늘어났다.
ㅇ부농층은 땅이 넓어서 빈민을 농업 노동에 고용함으로써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서도 향락을 누릴 수 있으며, 빈농층 가운데 어떤 농민은 지주
의 농지를 빌려 경작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 가운데 어떤 자는 농지를 얻을 수가 없으므로 임노동자가 되어 타인에게 고용됨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것도 할 수 없는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유리걸식하게 된다. <농포문답>
ㅇ상품 작물의 재배 : “밭에 심는 모든 곡식은 그 땅에 알맞아야 한다. …… 대개 그 종류는 9가지 곡식뿐만은 아니다. 모시·삼·참외·오이와 온갖
채소, 온갖 약초를 심어 농사를 잘 지으면 한 이랑 밭에서 얻는 이익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도성 안팎과 번화한 큰 도시의 파·마늘·배추·오이밭
은 10묘의 땅에서 얻은 수확이 돈 수만 냥을 헤아리게 된다.” - 정약용,“ 경세유표” → 작물 재배가 유행하게 된 배경. : 광작의 유행으로 토지
에서 밀려난 많은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 인구가 증가하였다. 도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상
품 작물의 재배가 확대되었다.
§3. 지대 납부 방식의 변화
1) 타조법 : 일반적 형태, 지주와 작인이 수확을 절반씩 나누는 방식
2) 도조법 : 일부 지방에서 등장, 일정 액수를 지대로 납부(곡물이나 화폐로 납부, 작인은 지주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영농을
추구할 수 있었음)
3) 지주와 작인의 관계 : 종속적 관계 → 계약적 관계로 전환
ㅇ양반 지주가 대부분의 농지를 지주제로 경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작인들은 자신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대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하였
다. 그 결과 일부 지방에서는 지대 납부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4. 민영 수공업의 발달
1) 배경 :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 생산 활발, 도시 인구 증가, 대동법 실시로 제품 수요 증대 → 수공업 생산 촉진
2) 민영 수공업 발달
① 국가에 장인세 납부하고 활동하는 수공업자 증가 → 16세기 이후 관영 수공업(관청에 소속되어 의무적으로 관수품
제조) 쇠퇴 → 민영 수공업(제품을 시장에 판매하고 세금을 납부) 발전
②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 부담 후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제품은 품질과 가격 면에서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
에 비해 품질과 가격면에서 경쟁력이 높았음), 18세기 말 장인 등록제 폐지로 발달 촉진
3) 농촌 수공업 : 자급자족 형태에서 벗어나 소득을 올리기 위해 상품으로 생산 → 곳곳에 점촌[철기, 유기, 옹기 등을 생산] 형성
4) 선대(先貸)제 수공업 발달 : 수공업자가 자본력을 갖춘 상인[공인이나 사상]에게 물품의 주문과 함께 자금과 원
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작업장과 자본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판매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았음] → 상업 자본이 수공업자 지배(종이, 화폐, 철물 제조 분야 중심)
5) 상인이 수공업자를 직접 고용해 제품을 생산하기도 함
6) 18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 → 독립 수공업자 등장[일부 수공업자는 상업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함]
ㅇ장인 등록제의 폐지 : “여러 관청 중에 사섬시, 전함사, 소격서, 사온서, 귀후서 등은 지금은 없어졌고,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예빈시, 제용
감, 전설사, 장원서, 사포서, 양현고, 도화서 등은 소속 장인이 없어졌으며, 그 밖의 여러 관청은 장인의 종류도 서로 달라졌고, 정해진 인원도
들쑥날쑥하다. 그리고 장인을 공조에 등록하던 규정들은 점차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는다.” -“ 대전통편”- → 장인들이 관청에 등록하는 것을
기피하면서 등록된 장인이 없는 관청이 늘어나고, 등록된 수공업자의 종류와 인원도 제각각이어서 장인 등록제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기 때문
이다. ㅇ점촌(店村) : 각종 장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생산 활동을 하던 마을, 토기·유기·철기·옹기를 생산하는 마을이나 광산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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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산 개발의 확대
1) 배경 : 민영 수공업 발달로 원료인 광산물 수요 급증 → 광업 활성화, 청과의 무역 성행으로 은의 수요 증가
2) 초기 : 민간 광산 개발 금지(부역제)하여 국가가 직접 광산 경영 → 16세기 농민의 부역 동원 거부
3) 17세기 이후 : 설점수세[개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 광산 개발 촉진] 정책
4) 광산의 개발
① 청과의 무역 성행 → 은의 수요 증대(결재 수단) → 은광 개발(17세기 이후) 활발
② 광산 채굴의 수익성 고조 → 상업 자본 유입 → 금광 개발(18세기 이후) 활기, 잠채(潛採) 성행(농민이 광산
으로 몰려듬)
5) 광산 경영 : 덕대[전문 경영인]가 상인 물주로부터 자본을 조달받아 혈주[채굴업자]와 노동자를 고용하는 형태
로 운영 → 채굴, 운반, 제련 등의 분업과 협업이 발달, 자본과 경영, 노동이 분리되는 생산 방식 등장
ㅇ덕대 : 광산 주인과 계약을 맺고 광물을 채굴하는 광산 경영 전문가 ㅇ잠채 : 광산 개발은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부의 허가없이
몰래 광산을 채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잠채라고 한다. ㅇ설점수세제 : 개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 조선 후기 부역
제의 붕괴로 농민을 동원한 광산 채굴이 어려운 문제와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ㅇ광산의 민영화 : “조정에서 은이 나는 곳에 은점 설치를 허가해 주면, 돈 많은 장사꾼은 각자 재물을 내어 일꾼을 모집할 것입니다.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백성이 점민이 되어 그곳에 모여 살며, 은을 캐서 호조와 각 영, 고을에 세를 바치고 남는 대로 물주에게 돌릴 것이니 공사
간에 유익한 일입니다.” - 우정규,“ 경제야언”- → 청과의 무역 증대로 결제 수단인은 수요가 증대하여 은광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광산 개발
장려를 주장한 이유는 세금 징수로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고 농촌을 떠난 농민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ㅇ조선 후기 광산촌의 모습 : “황해도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수안에는 본래 금광이 다섯 곳이 있었다. 두 곳은 금맥이 다하였고, 세 곳만 금맥
이 풍성하였다, 그런데 지난해 장마가 심해 작업이 중지되어 광꾼들이 대부분 흩어졌다. 금년(1799) 여름 새로이 39개소의 금혈을 팠는데, 550
여 명의 광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부가 도내의 무뢰배들이지만, 대부분은 사방에서 이득을 쫓아 몰려온 무리들이다. 그리하여 금점 앞에
는 700여 채의 초막이 세워졌고, 광꾼과 그 가족, 좌고, 행상, 객주 등 인구도 1,500여 명에 이른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곳에서
는 생필품의 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비변사 등록-
※광산 개발의 부작용 : “ 전 평안감사 이성원이 아뢰기를“평안도 곳곳에서 금을 캐는데 심하면 남의 산을 침범하고 남의 밭을 무너뜨리기도 합
니다. 백성들도 태반이 금광에 몰려드니 평안도 농사가 근년에 잘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각별히 금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정조실록” → 당시 정부에서는 광산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드는 것이 농업 생산력 저하와 사회 불안 세력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보아 막으
려 하였다.

7.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1) 상업 정책의 변화와 사상의 성장
§1. 정부의 정책 : 중농 정책을 내세워 통제, 일부 특권 상인에게만 상업 활동 허용
§2. 상품 화폐 경제의 활성화
1) 배경 : 양 난 이후 도시 인구 증가, 농업과 수공업 분야의 생산력 증대
2) 주도 : 대규모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공인과 사상이 주도적 역할 ※ 처음에는 공인, 18세기 이후 사상
§3. 공인의 활동
1) 대동법 실시로 등장, 관청의 관수품 대량 조달, 특정 물품 독점권 확보(부 축적) → 수공업 생산 촉진, 장시
활성화 → 상업 발달에 기여 ※시전뿐만 아니라 전국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 → 도고 상인으로 성장
§4. 사상의 성장 – 17세기 난전 성장
1) 시전 상인, 공인 등과 경쟁하며 상권 점차 확대
2) 종루(종로 일대), 칠패(남대문 밖), 배오개(이현, 동대문 부근), 송파 등지에서 활동 → 시전의 상권을 잠식[시전
상인은 국역을 담당하는 대가로 금난전권을 행사하며 사상을 억압함] → 사상의 성장을 막지 못함
3) 통공 정책(1791, 정조)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폐지 → 자유로운 상업 발전 촉진, 사상 번창함.
4) 지방의 대표적 사상
① 종류 : 송상(개성), 만상(의주), 내상(동래), 유상(평양), 경강 상인
② 점차 각지의 장시를 연결하는 유통망 구축 → 물화를 공급하면서 부 축적
③ 경강 상인 : 한강을 거점으로 운송업에 종사 → 서남 해안을 오가며 서울에 쌀, 어물 공급 → 거상으로 성장
5) 공인과 사상 : 조선 후기 상업 발달 주도하면서 부 축적, 일부 사상은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특정 물품을 대량
거래(경강상인, 송상, 만상 등) → 독점적 도매 상인인 도고로 성장
§5. 도고의 출현 : 독점적 도매 상인 → 조선 후기 상업 자본 축적 의미
ㅇ몰락 농민과 도시 이주민 → 잡상인으로 활동 → 상거래 질서 문란 → 난전 규정 ㅇ관허 상인 : 서울 - 시전 상인, 공인, 지방 – 보부상 ㅇ사
상 : 서울 - 난전, 지방 - 경강상인, 송상, 만상, 내상, 객주, 여각 ㅇ난전 : 판매를 허가받지 않고 물건을 파는 행위나 가게를 말한다.
ㅇ육의전 : 선전(비단 취급), 면포전(무명 취급), 면주전(명주 취급), 지전(종이 취급), 포전(삼베 취급), 내외어물전(각종 어물 취급)
ㅇ금난전권 : 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로, 시전 상인이 도성 안과 밖 10리 지역에서 정부의 허가없이 상행위를 하는 난전을 금지하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 정조의 통공 정책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은 폐지됨
ㅇ통공 정책 : “평시서로 하여금 30년 이내에 새로 설립된 시전을 모두 없애고 형조와 한성부로 하여금 육의전 이외에는 난전을 금할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자는 벌주도록 해야 한다.” -“ 비변사등록”-→ 통공 정책이란 시전 상인이 갖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ㅇ평시서 : 시전에서 사용하던 도량형과 물건 가격 등을 검사하던 관청이다. 경시서로 불리던 것을 세조
때 평시서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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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이현과 종루, 그리고 칠패는 도성의 3대 시장이라네./ 온갖 수공업자가 다 모여 있고 사람들은 분주한데/ 수많은 화물이 값을 다투며 수레가
줄을 이었네./ 봉성의 털모자, 연경의 비단실, 함경도의 마포와 한산의 모시 쌀, 콩, 기장, 조, 피, 보리 ……/ 소에 실은 나무를 사려고 고삐를
끌기도 하고/ 말 이빨을 보고 나이를 알려는 사람은 허리에 채찍을 꽂고 있으며/ 눈을 껌뻑이며 말 중개인을 부르는 사람도 있네.“ - 박제가,‘
한양성시전도가’ → 위 시는 지방에서 온 수레가 줄지어 있고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한양의 시장을 노래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대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시전 이외에도 도성 주변의 여러 곳에 상설 시장이
생겨났으며, 다양한 상인들이 저마다의 특징적인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ㅇ자본을 축적한 도고 상인의 등장 : (허생이) “내 조금 시험해 볼 일이 있어 그대에게 만 금(萬金)을 빌리러 왔소.”라고 하였다. 변씨는 “그러시
오.”하고 곧 만 금을 내주었다. ……그 (허생)는 안성의 한 주막에 자리잡고서 밤, 대추, 감, 배, 귤 등의 과일을 모두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도거리로 사 두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과일값은 크게 폭등하였다. 허생은 이에 10배의 값으로 과일
을 되팔았다. 이어서 허생은 그 돈으로 곧 칼, 호미, 삼베, 명주 등을 사 가지고 제주도로 들어가서 말총을 모두 사들였다. 말총은 망건의 재료였
다. 얼마 되지 않아 망건값이 10배나 올랐다. 이렇게 하여 허생은 50만냥에 이르는 큰 돈을 벌었다. -박지원, 허생전- → 박지원의 소설 속 허생
은 과거를 포기하고 돈 만 냥을 빌려 과일을 매점매석해 큰돈을 번 인물이다. 조선 후기에는 실제로도 허생과 같이 자본을 운용하여 부를 축적
한 상업 자본가(도고)가 많이 나타났다. 대규모 상업 활동이 주로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던 이전과 달리, 권력에서 소외된
허생과 같은 인물이 스스로 자본을 운용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속에서 이루어진 상업 자본가의 활약은
독립 수공업자의 성장, 덕대의 광산 경영 등과 더불어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근거로 이해된다.
ㅇ도고(道賈) : 매점매석 통해 이윤 극대화하던 상인, 상행위, 공인 또는 사상의 활동 ㅇ근래 소민이 견디기 힘든 폐단은 도고입니다. 도고라는
것은 물화를 모두 모아 그 이익을 독점하는 것으로 백 가지 물종이 다 한 곳으로 귀속되니 다른 사람들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영조실록>

(2) 유통 경제의 활성화


§1. 배경 : 양 난 이후 상품 생산과 유통 활발
§2. 활성화 : 시전 수 증가, 지방 장시의 수 크게 증가(주변 장시와 연계된 하나의 유통망 형성, 일부 상설 시장
화), 포구가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해로와 수로를 이용한 상품 운송 증가, 포구는 대규모 거래로 상품
유통의 거점 역할)
§3. 대외 무역의 발달
1) 상업 발달 → 대외 무역 활기
2) 개시 무역(정부가 공식적으로 허용), 후시 무역(국내 상업 발달로 무역 수요가 증가하면서 사적으로 이루어짐) 성행
§4. 화폐 유통의 확대 : 상업 유통 활발로 화폐 사용 확대 →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 → 18세기 후반 조
세·지대의 금납화로 화폐 사용 일반화, 신용 화폐(대규모 거래에는 동전 대신 어음·환 등 이용) 이용
§5. 장시의 발전
1) 배경 : 농업 생산력의 증대, 유통 경제의 발달
2) 장시의 발달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 시작 → 16세기 중엽 전국적로 확대 → 18세기 중엽 전국에 1,000여 개소로 확대
① 16세기 이후 장시 수 증가(5일장이 일반적, 지방민의 교역 장소 : 보통 5일, 인근의 농민ㆍ수공업자ㆍ상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
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 → 상품 교역량 증가로 일부는 상설 시장화
② 18세기말 송파장, 강경장, 원산장이 상업 중심지로 성장(몇 개의 군현을 연결) → 상업 도시(광주, 은진, 덕원 등)로 발전
3) 보부상의 활동 : 장시를 무대로 활동,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준 행상 → 순환하는 장날에 맞춰 장사하면서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 → 보부상단(자신의 이익지키는 조합) 조직
ㅇ행상 :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상인 ㅇ보부상(褓負商) : 보부상은 농촌 사회에서 공급이 부족한 물품을 보충하거나 구하기 어려운
물품을 농민들에게 제공하였다. 보상은 비교적 값비싼 필묵, 금·은·동제품 등 정밀한 제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
며 판매하는 봇짐장수를 가리킨다. 부상이란 나무 그릇, 목기나 토기 등의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등짐장수를
말한다. 보부상들은 전국적으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결성하고 엄격한 규율 밑에서 상행위를 했고, 지역권을 넘나들며 상업 활동을 펼쳤다.
※조선 후기의 상업의 주역, 사상 : 조선 후기 상품 유통 체계의 변화를 주도한 상인은 사상이었다. 사상들은 조직망과 정보력, 자본력과 영업력
등을 기반으로 운송과 보관의 시기를 조절하는 등 새로운 유통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사상의 활동은 1791년 신해통공 이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부 사상은 독점 상인으로 변신하여 자유로운 상행위를 막고 독점 이윤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객주의 활동 : 객주(客主)는 여각·저가·저점 또는 선주인으로도 불렸으며, 위탁 매매, 즉 매매의 주선을 주로 하였다. 이외에도 상인들을 위한
숙박, 금융, 창고, 운송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3) 포구에서의 상거래
§1. 배경 : 도로와 수레의 미발달 → 대부분의 물화가 수로로 운송 → 포구가 물화 운송하는 기지 역할 및 유통 경제 발달로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성장
§2. 포구 상업의 특징 : 장시보다 교역 규모가 큼(수로를 이용한 교역이 전개) → 상품 유통 거점 역할[포구와 주변 장시와 연계된 상품 유
통 거점 역할]
§3. 선상의 활동 : 배를 가지고 상업 활동 → 각지의 포구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
§4. 객주·여각의 활동 : 포구와 규모가 큰 장시에서 활동 → 물품 매매 중개(운송업, 숙박업, 창고업, 금융업에 종사)
ㅇ포구 상업 : “우리나라는 동, 서, 남의 3면이 모두 바다이므로, 배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배에 물건을 싣고 오가면서 장사하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에서 이득을 얻는다. 전라도 나주의 영산포, 영광의 법성포, 흥덕의 사진포, 전주의 사탄은 비록 작은 강이나
모두 바닷물이 통하므로 장삿배가 모인다. 충청도 은진의 강경포는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바닷가 사람과 내륙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서
로 물건을 교역한다. 매년 봄, 여름에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을 때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포구에 줄을 서고
있다.” - 이중환,“ 택리지”-
•선상 : 선박을 이용하여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는 상인 •경강 상인 : 대표적인 선상으로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 →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함

(4) 개시ㆍ후시 무역의 발달


§1. 배경 : 국내 상업 발달로 대외 무역 활기
§2. 청과의 무역 - 17세기 중엽부터
1) 개시 무역 : 국가 공식 허용 무역(국경 지대 중심), 교역 품목과 물량이 통제
2) 후시 무역 : 사무역(상인이 사적으로 무역) → 교역량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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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출품 : 은, 인삼, 무명, 수입품 : 비단, 약재, 문방구
§3. 일본과의 무역 : 17세기 이후, 부산포의 왜관에서 무역(개시·후시 무역), 수출품 : 인삼, 쌀, 무명
과 청에서 수입한 물품, 수입품 : 은, 구리, 황, 후추 등
§4. 무역 상인 : 후시 무역 확대로 만상(대청 무역), 내상(대일 무역), 송상(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
계 무역) 성장 → 부 축적
ㅇ상평통보 : 인조 때 시험적으로 사용, 효종 때부터 발행 → 18세기 후반 이후 동전의 세금과
소작료 납부 가능 → 유통 활발, 숙종 4년(1678)에 법화로 채택되어 유통되기 시작된 조선 후기
의 동전이다. 허적, 권대운 주장에 의해 주조, 서울, 서북 일대에 유통
ㅇ전황 : 지주나 대상인이 동전을 재산 축적과 고리대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발생함 → 화폐가 유통되지 못
하는 현상(전황) 발생. 전황은 화폐 가치를 상승시켜 물가가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ㅇ고리대 성행 : 동전과 현물의 시세 차익을 이용한 고리대로 인해 농민들의 피해 심각, 일부 학자들은 동
전 사용 금지 주장
ㅇ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 발달의 영향 :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계층 분화가 활발히 일어났다. 농민이나 상인, 수공업
자 중에서도 재산을 축적해 양반 부럽지 않게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사회
적·문화적으로 이전과 다른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 신분제의 동요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과정에서 재산을 축적한 일부 하층민이
다양한 방법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수탈을 피하고 군포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상민이 있었고, 주인에게 돈을 내고 해방되어 양인이 되
는 노비도 있었다. 이로써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조선 후기 상업과 무역
- 서민 문화의 발달 :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서민층이 새로운 문
활동
화의 주체로 성장하였다. 서민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인간의 감정을 솔직
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에 양반의 위선을 비판하거나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
하는 판소리와 탈놀이 등이 크게 유행하였다.
- 서당 교육의 확대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일부 서민층의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서당 교육
이 확대되었다. 서당 교육으로 서민층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서민도 관청에 자기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 변혁의 토대가 되었다.
8.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상평통보
(1)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확립
§1. 양천제의 법제화
1) 조선의 신분 제도 : 양천 제도와 반상 제도
① 양인 확대 추구
㉮ 배경 : 고려 말 권문세족이 양인을 노비로 삼아 농장에 예속 → 조선 초 세금
납부할 양인의 수 부족
㉯ 국역을 담당하는 양인층을 늘려 국가 기반의 안정 추구 → 고려 말~조선 초에
많은 노비 해방, 양인의 지위 향상
② 양천제 법제화 : 모든 사회 구성원을 자유민인 양인과 비자유민인 천인으로 구분
2) 양천제 : 법제적 신분제,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 기본적 신분제(갑오개혁 전까지
유지) 조선의 신분 구조
양인 자유민, 조세와 국역의 의무,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 가능
천인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된 비자유민으로 대부분 노비, 각종 천역 담당, 관직 진출 불가능
3) 양인층의 분화 : 반상제의 일반화, 지배층은 양반과 중인[양반 관리 보좌]으로 구분 →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
ㅇ양인의 다양한 구성 : “오늘날 양인이라는 자들의 등급은 하나가 아니다. 비록 공이 많고 벼슬을 많이 지낸 집안 후손이 아니더라도 상하와
내외의 구별이 있는 자가 있고, 상하·내외의 구별을 하지 않아 대대로 상민이 되는 자가 있으며, 몸은 천인이 아니나 천인과 다름이 없는 자도
있다.” -세종실록- → 조선 시대 양인 신분 안에서도 다양한 신분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ㅇ호패 : 오늘날 주민등록증과 같은 신분증으로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지녀야 했다. 남자 장정으로 16세 이상이면 호패를 찬다. 동반, 서반과
내관 2품 이상인 자는 아패(牙牌:상아패)를 차고, 삼의사(내의원, 전의원, 혜민서)로서 잡과에 급제한 자는 각패(角牌:뿔패)를 차며, 생원과 진사
는 황양목패, 유품, 잡직, 사, 서인, 서리, 향리는 소목방패(小木方牌), 공사천, 가리(다른 지방에서 온 아전)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찬다. 서울
에서는 한성부, 지방에서는 각 해당 관에서 도장을 찍어 발급한다. 호패를 차지 않은 자는 제서유위율에 따라 처벌하고, 남의 호패를 찬자는 호
적에 빠진 죄로써 처벌하고 다른 사람에게 호패를 빌려준 사람은 장형 100과 도형 3년에 처한다. 군병은 그대로 요패(腰牌)를 찬다. -속대전-
4) 반상 제도 : 지배층 양반과 피지배층 상민 간의 차별 제도 → 실제적으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
정착 *직분에 맞게 주어진 의무와 규범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강조되면서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자리 잡음
5) 신분 이동 : 고려 사회에 비해 개방적, 양인(과거 응시 → 관직 진출), 양반(죄를 지으면 노비로 전락, 경제적 몰락 → 중인,
상민)

§2. 양반 :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정착


1) 의미 : 문반과 무반의 합칭(문·무반직의 현직 관리) → 문·무반은 물론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 확대(사족이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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컫음, 관직을 가질 수 있는 신분과 가문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 확대)
2) 기득권 유지 노력 : 문·무반직을 받은 자만을 양반(사족)으로 인정 → 향리와 서리 등 하급 관리와 서얼을 중
인으로 격하시킴[지배층인 양반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3) 특권 – 최고 지배층
① 군역 면제 : 생산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학문과 가문을 배경으로 오직 관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함
② 과거, 음서, 천거 등으로 관직에 진출 → 고위 관직 독점
③ 경제적 기반 : 많은 토지와 노비 소유, 과전과 녹봉 바탕 → 풍요로운 생활 향유
4) 풍요로운 삶 :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이 일생의 목표 → 유교 경전 공부에 집중
ㅇ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그 백성이 넷이다. 그중 가장 귀한 것이 선비인데, 양반이라고 불리며 그 이익도 막대하다. 농사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으며, 문사(文史)를 대강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하고 적어도 진사가 된다. - 박지원,“ 양반전”- → 조선 시대에 양반은 다양한 특권을
지녔다. ㅇ양반 : 본래 문반과 무반 관리를 아울러 부르던 명칭이었다. 국왕이 조회를 받을 때, 남향한 국왕에 대해 동쪽에 서는 동반(문반), 서
쪽에 서는 서반(무반)을 함께 부르는 용어로 고려 초부터 사용되었다. ㅇ양반가의 노비 숫자 : 양반다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여러
잡일을 담당하는 노비가 꼭 필요하였다. 15~16세기 경상도 전통 양반가 중 중앙 관료나 그 자손은 200구 이상, 지방 양반은 60~80구 내외의
많은 노비를 소유하였다. 양반은 자신의 수족 역할을 하는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해 자기가 소유한 여종을 양인 남자와 혼인시키기도 하였다.

§3. 중인
1) 의미 :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층(넓은 의미), 잡과로 선발된 기술관(역관, 의관 등 기술직 종사자, 좁은
의미)만을 의미
2) 구성 : 서리(각 관청의 하급 관리), 향리(지방 수령의 행정 실무 보좌), 기술관, 서얼(중서라 지칭, 간혹 무반직
에 등용) 등
3) 특징 : 직역[각각의 신분이 부담해야 할 국역으로, 신역] 세습, 잡과 응시 가능, 같은 신분끼리 혼인, 전문 기술·행정 실
무 담당, 관청 근처에서 거주 → 상민보다 높은 지위 ※재산을 많이 모아 양반 못지않게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4) 지위와 역할 : 양반들로부터 멸시와 하대 받음, 대개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면서 나름대로 행세[역
관 :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부를 축적, 향리 : 토착 세력으로 수령을 보좌하며 위세 과시]
5) 서얼
① 양반 첩의 자녀, 중인과 같은 처우(‘중서’라 부름)
② 유교적 명분론[각자 지켜야 할 사회적 분수 강조]의 보급 → 처, 첩 사이의 구분 엄격 → 재산 상속과 관직 진출에
차별(문과 응시 금지, 간혹 무관직이나 기술관에는 등용 가능)
ㅇ서얼 : 서얼이란 첩의 자식인 서자와 얼자를 말한다. 이 때 본처의 자식은 적자가 된다. 첩의 신분이 양인이면 서자가 되고, 첩의 신분이 천민
이면 얼자가 된다. 서얼은 양반의 자손일지라도 가족과 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문과 응시가 금지되고 양반 계층에 속하지 못하여 중인
대우를 받았다. ㅇ향리의 지위 변화 : 지방에서 수령을 도와 각종 문서를 작성하고 수령의 재판 업무를 돕는 한편, 조세와 공물을 수납하고 역을
부과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고려의 향리는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세력으로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조선의 향리는 모든 군현에 지방
관이 파견됨으로써 수령 밑에서 일하는 아전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이는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및 양반 중심의 향촌 사회 확립을 위한 목적
이 내포되어 있다. ㅇ유교적 명분론 : 사회적 분수를 강조하면서 처, 첩 사이의 구분이 엄격해지게 되었다.
※중인의 지위
•사헌부 대사헌 채수가 아뢰었다. “어제 전지를 보니 통역관, 의관을 권장하고 장려하고자 능통하고 재주가 있는 자는 동서 양반에 발탁하여 쓰
라고 특별히 명령하셨다니 듣고 놀랐습니다. 무릇 벼슬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고 직책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무당, 의관, 약사, 통
역관은 사대부의 반열에 낄 수 없습니다. 의관, 역관 무리는 모두 미천한 계급 출신으로서 사족이 아닙니다.” -성종실록 → 양반(사족)과 기술직
중인이 비록 양인이지만 같은 신분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본래 기술직 중인은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양반 관료와 별다른 차별이 없었
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사회 신분층의 재편 과정에서 상급 지배 신분인 양반 사대부에 의해 천시되어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서얼의 자손은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다. -경국대전→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지배층이 늘어나는
것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고려 시대와 달리 중인에 대한 신분적 제약이 생겨났다. 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도 고려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서얼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에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라나라의 옛법이 아니다.……태종 때 서찬 등이 “서얼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고 적서를 분명히 구별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이전에는 현직에 등용되었음을 보여준다.……그런데 경국대전을 편찬하면
서 벼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아직 백 년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향리와 수군은 아주 낮은 신분인데도 오히려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 -패
관잡기- → 서얼은 중인과 비슷한 처우를 받았다. 고려까지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없었으나 경국대전에 과거 응시를 금지하면서 능력 있는 서얼
의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4. 상민 :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 서민, 평민, 양인 등으로 불리기도 함, 법적으로 과
거를 통해 관직에 나갈 수는 있었지만, 실제 현실에서 과거 응시는 쉽지 않았음
•상민의 대다수
농민 •자기 소유 토지나 양반의 토지를 경작하며 생계 유지 → 조세·공납·부역, 군역의 의무
•과거 통해 관직 진출이 가능하나 교육을 받기가 쉽지 않아 사실상 과거 응시가 거의 불가능
•수공업자(공장으로 불리며 일정 기간 관청에 등록하여 물품 제작, 관영 수공업이나 민영 수공업
수공업자·
에 종사), 상인(국가의 통제 아래 상업 활동에 종사, 시전 상인, 행상 등)
상인
•중농억상 정책으로 농민보다 낮은 대우

신량역천( •상민의 최하층, 신분은 양인이면서도 천역에 종사 → 수군, 조례(관청의 잡역), 나장(형사 업무), 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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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良役賤) (지방 고을 잡역), 봉수군(봉수 업무), 역졸(역에 근무), 조졸(조운 업무) 등
상민의
•과거를 통해 관직 진출 가능, 군공을 세워 신분 상승 가능
지위
ㅇ신량역천(身良役賤) : 양민이면서 하는 일이 천하여 천대받았던 사람들을 일컫는다. 힘든 일에 종사한 일곱 가지 부류, 칠반천역이라고도 한다.
ㅇ양인 : 노비가 아닌 사람은 모두 양인. 양인은 법적으로 평등하였고, 고려와 달리 교육을 받고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ㅇ농민은 국가에 조세와 군역 등의 의무를 졌는데, 그 부담이 무거워 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에 농업 기술을 개량하고 토지를 개간하
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농민은 과거 응시 자격은 있었으나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로 응시
에 매우 어려움, 전쟁, 비상시에 군공을 세우는 경우가 아니면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지 않았음.

§5. 천민 – 최하층 신분
천민 •대다수가 노비, 백정·광대·무당 등도 천민으로 간주
•재산으로 취급 → 매매·증여·상속의 대상, 신분은 자손에게 세습,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그 자
노 비 의 녀도 노비가 되는 법이 일반적으로 시행(일천즉천 원칙)
지위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으나 자기 재산을 소유하고 가족과 함께 거주
•주인이 함부로 노비에게 형벌을 내리거나 죽이는 것은 법으로 금지
•국가 관청이 소유권을 가짐(독립된 가옥에 살면서 일정 기간 동안 국가에 노동력 제공하거나 매
공노비 년 정해진 액수의 신공 납부)
•종류 : 입역 노비(매년 일정 기간 관청에서 근무), 납공 노비(국가에 정해진 액수의 신공 납부)
•개인이 소유권을 가짐.
•종류 : 솔거 노비와 외거 노비로 구분
사노비 -솔거 노비 : 주인과 함께 거주하며 노동력 제공
-외거 노비 :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신공 납부(농업에 종사하면서 주인에게 신공을 바침)※외거 노
비는 재산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농민과 비슷한 생활을 하였다.

ㅇ천민의 신분 상승 : “천인의 계보는 어머니의 역을 따른다. 천민이 양인 아내를 만나 낳은 자식은 아버지의 역을 따른다.”-경국대전- →기본적
으로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지만 아버지가 천민이고, 어머니가 양인일 때에는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도록 하였다. 즉 실제로는 부모 중 한 명이
천민이면 그 자녀는 천민이 되었다.
※노비의 경제적 가치
•무릇 노비의 매매는 관청에 신고해야 하며 사사로이 몰래 사고 팔았을 때는 관청에서 노비와 그 대가로 받은 물건을 모두 몰수한다.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는 값이 저화 4천 장이고, 15세 이하 50세 이상은 3천 장이다.
•공노비의 경우 노비 1년의 신공은 남자 종이 면포 1필과 저화 20장, 여자 종은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이다. 이는 모두 사섬시에 납부한다.
•면포 1필은 저화 20장에 해당하며 저화 1장은 쌀 1되에 해당한다. -“경국대전”
→ 2013년 기준 일반미 4kg의 가격이 1만~1만 5천 원이라 할 때 쌀 1되(0.8kg)는 약 2~3천 원에 해당한다(1되=0.1말=0.01가마, 1가마=80kg).
따라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6백만 원~1천 2백만 원에 해당하며 외거 노비가 바치는 신공은 약 6만 원~12만 원 정도이다. 노비가 땔나무와
식수를 조달하고 취사와 방아 찧기, 농사일 등을 담당한다고 했을 때 이들의 가치는 거래 가격보다 높다고 볼 수 있다.
ㅇ백정 : 고려 시대에는 직역이 없는 양인 농민을 의미했으나 조선 시대에는 소, 돼지 등을 잡는 도살업에 종사하거나 유기 제조업, 육류 판매업
등에 종사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천민으로 간주되었다. ㅇ노비 : 태조 때에는 14세~40세의 노비는 면포 400필, 14세 이하와 40세 이상의
노비는 면포 300필 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말 가격보다 싼 가격이었다.

(2)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
§1. 신분 질서의 동요
1) 양반층의 분화
① 붕당 정치의 변질(일당 전제화 추세 등장) → 권반, 향반, 잔반으로 분화
② 권반 : 중앙 정치 권력을 차지하고 권세를 누림
③ 향반[토반] : 벼슬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향촌에서 위세를 유지(영향력 행사)
④ 잔반 :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농민과 다름없는 처지
2) 하층민의 신분 상승
①전란 중 노비 문서 소실, 하층민이 전공 세워 신분 상승 자리 짜기(김홍도,
② 농업 생산력의 증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부 축적 계층 대두(부농층, 상업자 국립중앙박물관)
본가, 독립 수공업자 등), 농토에서 밀려나 임노동자나 영세 상인으로 몰락한 농민
③ 신분 상승 방법 : 부유한 상민이 공명첩 매입, 몰락 양반의 족보를 매입·위조 등
④ 결과 : 양반의 수가 증가, 상민 인구 감소
ㅇ양반이 되면 군포를 면제받고 지배층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분 상승을 도모하였다. ㅇ경제적
으로 몰락하는 양반이 늘고, 부를 축적한 상민이 신분 상승을 추구하면서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는 크게 동요하
였다.
ㅇ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질고 글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 하지만 몹시 가난하여 환
공명첩
곡을 타 먹은 지 여러 해가 되어 천 섬의 빚을 지게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 때마침 그 동네에 부자가
이 소문을 듣고 가족끼리 비밀회의를 열어 말하였다. “이제 저 양반이 환곡을 갚을 길이 없어서 곤란한 모양이니 그 양반 자리를 더 유지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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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을 것이다. 이 기회에 내가 양반 신분을 사서 가지는 것이 어떨까?” - 박지원, 양반전- → 박지원의 소설에
는 환곡을 받아야만 먹고살 수 있었던 가난한 양반의 모습과 그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유한 상민의 모습이
잘 대비되어 있다. 양반 중에서 경제적으로 몰락해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경우도 있었
고, 양반 신분을 사서 신분을 상승시키는 부유한 농민도 있었다.
⚫납속과 공명첩 : 납속책은 국가의 재정 부족을 해결하거나 구호 사업을 위해 곡물을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혜택을 주던 정책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실시되었다. 즉 정부가 군량미가 부족하거나 흉년 등으로 백
성을 구제할 곡식이 부족할 때, 재정 확보책의 하나로 실시하였다. 곡물을 바치는 자는 군역을 면제하거나 벼
슬을 내렸는데, 이 때 벼슬 임명장에는 이름을 비워두었기 때문에 이를 공명첩이라고 하였다. 조선 정부가 왜
란 이후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급하였다.
⚫신분제의 동요
(가) 적을 목 벤 자, 납속을 한 자, 작은 공이 있는 자에게 고신(告身)이나 면천(免賤)·면역(免役)의 첩을 주었다.
병사를 모집하는 담당 관리가 이 첩을 가지고 지방에 내려갈 때 이름 쓰는 데만 비워두었다가 응모자가 있으
면 그때마다 이름을 써서 주었다. -선조실록-
직역별 호구 구성비(대구
(나) 옷차림은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근래 이것이 문란해져서 상민과 천민이
지방)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것이 마치 조정의 관리나 선비같이 한다. 진실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시전
상인이나 군역을 지는 상민까지도 서로 양반이라 부른다. - 일성록-
(다) 문반의 홍문관, 규장각을 한미한 사람에게까지 미치면서 신 등만 홀로 과거에 대과, 소과 급제자가 있어도 한 번도 관리 추천에 거론되지
않고, 성스러운 세상의 버린 몸이 되어도 원통함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신 등은 관직을 세습하고 서무에 종사하는 자이니 여러 세력이 있는
집안에 감히 비길 수는 없으나 산골 비천한 무리에게까지 양보해야 합니다. -상원과방자료-
→ 조선 후기 붕당 정치의 변질과 경제적 변화로 양반 중심의 신분제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정권에서 배제된 양반은 몰락하여 향반이나 잔반으
로 전락하였으며, 부를 축적한 서민들은 납속·공명첩, 족보 매매·위조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양반의 신분을 획득하였다. 양반의 수는 증가하는
가운데 양반의 신분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는 합법적인 신분 상승 방법으로 이용된 군공,
납속, 공명첩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서민층이 양반으로 행세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다)는 중인층이 자신들의 신분 상승을 요구하는 상소
를 올린 소청 운동에 해당한다.

§2. 중인층의 신분 상승 움직임


1) 서얼의 신분 상승 : 왜란 이후 납속·공명첩을 이용해 관직 진출, 집단 상소 운동 전개(홍문관 등 청요직 진출
요구) →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 진출(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
2) 기술직 중인 : 19세기 중엽 관직 진출의 제한 폐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소청 운동 전개(실패) → 축적된 경제력
과 전문 지식을 토대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문화 향유, 서양 문물 소개와 개화사상 형성에 기여
ㅇ청요직 : 학식과 인물, 문망(文望) 있는 관리들이 주로 임명되는 관직으로,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의 관직을 말한다. 이 자리를 거쳐야만
판서나 정승으로 진출하는 데 유리하였다. ㅇ수계도권 : 1853년 중인들이 시 문학 동인 모임인 시사를 개최하는 장면을 그린 풍속화
ㅇ서얼에 대한 차별은 점차 완화되었지만, 기술직 중인의 차별 철폐 요구는 좌절되었다.
⚫소청 운동 : 왕에게 집단적으로 상소를 올리는 것. 철종 때 중인들의 소청 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전문직으로서의 중인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서얼의 집단 상소 운동 : 영정조 시기에 서얼 어느 정도 등용 → 관직 진출 제한 철폐 요구하는 집단적 상소 운동 전개
※서얼의 통청 운동 : “황경헌 등 하삼도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아뢰다. “작위의 높고 낮음은 조정에서만 써야 할 것이고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한 집안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 공사천 신분이었다가 면천된 이들은 벼슬을 받기도 하고 아전이었다가 관직을 받은 이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하는데 저희들은 한번 낮아진 신분이 대대로 후손에게 이어져 영구히 서족(庶族)이 되어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임에도
그저 버려진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정조실록” → 직급은 낮으나 이후 고위직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은 3사나 이조 낭관직 등을 청요직이
라 하며, 여기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구를 통청 운동이라 한다. 왼쪽 자료는 청요직 통청을 바라는 서얼들의 상소문이다.

§3. 노비 제도의 해체
1) 노비의 신분 상승 : 군공(전공), 납속을 통한 신분 상승이나 도망(신분적 속박 탈피)
2) 정부의 노비 해방 정책
① 목적 : 상민 감소로 부족해진 군역대상자 확대, 재정 보충
② 정책 :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노비종모법 확립(영조, 1731), 공노비 해방(순조, 1801, 6만여 명 ← 18
세기 후반 공노비의 합법적인 신분 상승과 도망으로 정부는 신공을 거의 거둘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③ 결과 : 노비 인구의 급격한 감소 → 노비 제도가 점차 해체되어 감.
3) 노비 제도의 변화
① 목적 : 군역 대상자 확보, 부족한 재정 보충
② 노비종모법(1731) : 어머니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 결정
③ 공노비 해방(1801) : 중앙 관서에 소속된 공노비 66,000명 해방
④ 노비 세습제 폐지(1886)
ㅇ도망 노비 : 임노동자나 머슴, 행상이 되거나, 화전을 일구며 살아감 → 도망 노비의 신공이 남아 있는 노비에게 부과 → 남아 있는 노비의 부
담 가중 → 노비 도망 빈번으로 국가는 신공을 줄여 노비의 도망을 막고, 도망간 노비를 찾아내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ㅇ군역 대상자 확대
: 하층민의 신분 상승으로 상민 인구가 줄어들면서 군역 대상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ㅇ순조 때에는 중앙 관서에 소속되어 있던 6만여 명의 공노비를 해방시켰다. 정조 때부터 이미 준비되고 있었던 것으로, 노비를 양인으로 전환하
여 군역 대상자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공사 노비 제도가 법제상으로 폐지된 것은 갑오개혁 때이다.
⚫노비종모법 : 고려 시대의 노비 종모법은 노비끼리 결혼하였을 때 어머니쪽 소유주에게 귀속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의 노비 종모법은 그 의
미가 다르다. 고려나 조선은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어머니의 신분
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는 형태의 노비종모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ㅇ신분 상승 운동
-자료1, 상민층의 신분 상승 : “근래 세상의 도리가 점점 썩어 가서 돈 있고 힘 있는 백성들이 군역을 피하고자, 간사한 아전, 임장(任掌: 호적을
담당하는 하급 임시직)과 한통속이 되어 뇌물을 쓰고 호적을 위조하여 유학(幼學)이라고 거짓으로 올리고 면역(免役) 하거나, 다른 고을로 옮겨
가서 스스로 양반 행세를 한다. 호적이 밝지 못하고 명분이 문란함이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일성록-
-자료2, 노비종모법 :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었다. “이경억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상소하여 공·사노비가 양인 처를 맞이하여 낳은 자녀는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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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어미의 역을 따르도록 청했습니다. 이는 일찍이 이이가 주장한 것인데, 당시 조정에서 막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양민이 날로 줄어
드는 것은 이 법을 시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빨리 제도를 만들어 실시하소서.” -현종실록-
→ 자료1의 현상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사회 변화 : 양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상민 인구가 감소해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게 되었다.
→ 자료2의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한 의도 : 노비종모법은 노비 인구를 줄이고 상민 인구를 늘리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군공 세우거나 도망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함.
도망 노비의 증가
•도망 노비 : 다른 지역에 이주하여 임노동자나 머슴, 화전민이 됨.
•공노비 유지에 비용 과중(입역 노비) → 신공 납부하는 납공 노비 전환
국가 노비 정책 변화 •노비 종모법[영조 때 시행, 노비 소생의 신분, 역, 주인을 결정하는 데 모계를 따르게 한 법] 실시 : 자식의 신분은
어머니에 따라 결정
•순조(1801),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노비안의 유명무실 → 신공 징수의 어려움 ⇒ 중앙 관서의 노비 해방
공노비 해방
(6만 6천명) 해방
•일반 농민이나 공노비에 비해 더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냉대 → 조선 후기에 사노비의 도망도 일상적으로 일어남
사노비 해방
→ 갑오개혁 때 법제상 노비제 폐지

(3) 사회 제도와 생활 모습의 변화


§1.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유향소 지방 사족이 조직, 수령 보좌, 향리 감찰 → 지방 행정에 참여, 지주로서 농민에 대한 지배력 강화
향회 지방 사족의 결속 강화 →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향촌에서 지배력을 유지하는 역할
서원 16세기 이후 보급, 각 지방에 설립, 지방 사족의 여론 수렴, 학문적 기반 마련 → 사족의 권위 강화
향약 주민들이 지켜야 할 자치 규약, 지방 사족 주도로 운영, 풍속 교화와 향촌 질서 유지에 기여
ㅇ16세기에는 서원을 설립하고 향약을 만들어 결속을 다지면서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를 확립함
ㅇ향촌 사회는 지방 양반(사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ㅇ향회 : 향안(鄕案)에 이름이 올라 있는 지방 양반들의 총회이다. ㅇ향촌은 중앙과 대칭
되는 개념으로, 향은 행정 구역상 군현의 단위를, 촌은 촌락이나 마을을 의미한다.
ㅇ정리
•설립 목적 : 이름난 선비나 공신 숭배·추모(제사), 지방 양반 자제 교육 •역할 : 향촌 사회 교화, 사림의 공론 형성 장소
서원
•최초의 서원 : 백운동 서원(16세기 중엽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설립) •사액 서원의 혜택 : 토지·노비·서적 지급, 세금 면제
•보급 : 중국의 “여씨 향약” 수용 → 조선 실정에 맞게 고쳐 보급(중종)
•특징 : 전통적 공동 조직 + 유교 윤리 → 향촌의 자치규약 •역할 : 향촌 사회의 풍속 교화, 질서 유지, 치안 담당
향약
•주도 : 사림이 향약의 조직과 운영 주도, 일반민도 향약의 구성원으로 참여 → 사림이 지방관보다 향촌 사회에서 더 큰 영향력
행사하기도 함.
§2. 향촌 사회에서의 주도권 다툼
1) 배경 : 양 난 이후 양반 수의 증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등장 → 양반의 권위 하락
2)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 동요, 사족의 권위 하락(중앙 권력에서 소외된 사족 중 경제력 잃고 향촌 사회에서 권위 약화
됨), 부를 축적해 신분을 상승시킨 계층(신향)이 등장하여 사족의 향촌 지배권에 도전
3) 사족의 지위 유지 노력 : 친족 간의 결속 강화(서원과 사우 건립, 동족 마을 형성), 자신들의 지위 유지(촌락 단위의 동약 시행)
4) 부농층의 향촌 지배권 도전
① 부농층은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령과 결탁해 사족 모임인 향회에 적극 참여하고 향임직에 진출 → 자
신들의 영향력 확대 → 향촌 지배권 둘러싸고 구향(기존 사족)과 신향(새롭게 성장) 간 향전 발생 → 사족의
향촌 지배권은 점차 약화됨
② 결과 : 수령과 향리의 권한 강화(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도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상황에서) → 향회의 역할 변질(자신들이 이해관계 대변 역할에서 수령이 세금을 부과시 의견을 묻는 자문 기
구로 전락) → 19세기 세도 정치 아래에서 수령과 향리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는 배경이 됨
ㅇ향임직 : 향청(유향소)에서 일을 보는 직책이나 사람을 일컫는다. 이를 둘러싸고 사족(구향)과 부농층(신향)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ㅇ사우 : 조상이나 선현의 영정, 신주를 모셔 두고 제사를 올리는 곳 ㅇ동약 : 규모가 작은 향약. 향약보다 세분된 단위에서 사족에 의한 직접적
인 대민지배(對民支配)가 이루어졌음을 의미이다.
ㅇ향촌 주도권 다툼 : “영덕의 오래된 가문은 모두 남인이며, 이른바 신향(新鄕)은 모두 서리와 품관의 자손으로 자칭 서인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근래 신향이 향교를 주관하면서 구향(舊鄕)과 마찰을 빚었다. 주자의 영정이 비에 손상되자 신향배들은 구향이 죄를 물을까 걱정하여, 남인에게
죄를 전가할 계획을 세우고는 주자와 송시열의 초상을 숨기고, “남인이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는 것을 꺼려 야음을 틈타 영정을 훔쳐 갔다.”라
고 하였다.”-승정원 일기- → 구향과 신향이 향촌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향교를 두고 다투는 내용이다. 전통적인 구향이
사회·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신향의 도전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향촌 지배권을 둘러싸고 구향과 신향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을 향전(鄕戰)이라
고 한다. 이를 통해 신향은 구향을 대신해 향촌 지배권을 장악하거나 구향과 타협해 향촌 지배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영향력
을 확대해 나갔다.

§3.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전기 부계와 모계가 함께 중시, 자녀 균분 상속, 자녀 윤회 봉사하거나 책임 분담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규범 정착 → 부계 중심 가족 제도 강화, 장자 상속, 장자 봉사, 양자 제도 일반화
ㅇ양자 제도 : 아들이 없는 경우 가까운 친족의 남자 아이를 아들로 삼아 가계를 이어가게 하는 제도 ㅇ딸과 다른 아들은 점차 재산 상속과 제사
에 대한 권리를 잃어 갔다. 또한 부계를 중심으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
반화되었다. ㅇ자녀 균분 상속 : “무릇 자손에게 유서나 훈계하는 글을 남기는 것, 노비와 전택(田宅)을 나누는 것은 모두 한집을 다스리는 것
이다. ……어찌 아들과 딸을 구별하고 외손과 친손을 구별하겠는가. 조부모, 부모의 마음으로 이를 보면 본래 내외의 구별도 없다.” -성종실록-
→ 조선 초기에는 아직 성리학적 생활 규범이 정착되지 않아서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던 관습에 따라 재산 상속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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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성의 지위 – 점차 하락
1) 혼인 형태 : 일부일처제, 첩제 존재(→ 부인과 첩은 엄격하게 구분, 재산 상속과 제사 등에서도 서얼 차별)
2) 혼인 후 거주 : 신부 집에서 상당 기간 생활(초기) → 곧바로 신랑 집에서 생활(후기)
3) 여성의 지위 변화 : 여성의 이혼과 재혼 금지, 정절 중시 → 여성의 지위 하락
ㅇ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였으나, 첩을 들일 수 있어 실질적으로 일부일 처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금지되었고, 여성의 정절을 중시해서 정부가 열녀를 표창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처럼 성리학적 윤리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
졌다. ㅇ열녀를 표창하는 제도 시행 : 조선 시대에는 효자, 충신과 함께 열녀가 살던 마을 입구나 집 앞에 붉은색의 정문을 세워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였다. ㅇ조선 시대 여성의 지위
-여성의 재가 금지 : “세상의 도덕이 날로 나빠진 뒤로부터 여자의 덕이 정숙하지 못하여 사족(士族)의 딸이 예
의를 생각지 아니해서 혹은 부모 때문에 절개를 잃고 혹은 자진해서 재가하니, 한갓 자기의 가풍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실로 성현의 가르침에 누를 끼친다. …… 이제부터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들은 관료가 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라. -성종실록-
-재산 상속 : “우리 집안은 일찍이 제사의 기본 방침을 정한 지 오래되었고 사위와 외손자가 제사를 지내지 않
는 것을 정식으로 삼아 따르게 하였다. 정으로 본다면 아들과 딸은 차이가 없으나 딸은 부모 봉양과 제사가 없
으니 어찌 재산을 아들과 똑같이 나눌 수 있겠는가? 딸은 삼분지 일만 주어도 되니……-“부안김씨우반고문서”-
→ 조선 시대 여성의 지위 : 재혼한 여성의 자손에게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여성의 재가를 금지하고 있
다. 딸에게는 아들에 비해 적은 재산을 물려주도록 하고 있어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산 상속이 나타나게 된 이유 :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적 생활 규범이 정착되어 가면서 점차 아들을 중심으로,
이들 중에서도 장자가 부모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재산도 점차 아들 중심으로, 아들 중에서도
장자 중심으로 상속되어 갔다.
신행(김홍도, ※삼강오륜 :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
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삼강행실도 : “삼강행실도”는 세종 16년(1434)에 만들어진 것으로, 110
편의 각 편마다 판화 한 점을 그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 글을 모르는 백성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종 때에는 “삼강행실도”
한글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변화된 여성의 지위와 역할 : 고려 시대 여성은 남성 못지않은 지위를 누렸다. 여
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으며,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상속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혼인 후 여자는 곧바
로 남자 집에서 생활하였으며, 제사나 재산 상속이 큰아들 위주로 운영되면서 여자는 제사를 모실 수 없게 되고 결혼 후 남편이 죽어도 재혼을
하기 어려워졌다.

§5. 실학의 등장
1) 실학
① 등장 : 17, 18세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의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 → 새로운 학문이자 사회 개혁론(양 난 이후
노적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
② 사회·경제적 현실의 변화에 발맞춰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 사회 체제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자고 주장
③ 발달 : 비판적이며 실증적인 논리를 펴며 농업과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으로 확산
④ 청의 고증학과 서양 과학 기술 수용
⚫양명학 :양명학은 인간의 마음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心卽理)를 바탕으로, 인간이 상하 존비의 차별 없이 본래 타고난 천리(天理)로서의 양지
를 실현하여 사물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치양지설(致良知設), 그리고 앎과 행함이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은 행함을 통해서 성
립한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ㅇ양명학 : 명의 왕양명에 의해 정립된 새로운 경향의 유학으로, 이론보다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였다.ㅇ고증학 : 청을 통해 들어온 학문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강조하였다.
⚫국학 : 외국 문화에 대해 자국의 고유한 역사, 언어, 풍속, 종교, 문학, 제도 등 민족 문화 전반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6. 농업 중심의 개혁론(중농 학파, 경세치용 학파)


1) 문제 인식 : 농민 생활 안정 가장 우선시, 토지 소유 불균형이 농민 생활의 피폐를 가져왔다고 인식 → 토지
제도 개혁 주장 → 토지 개혁론을 바탕으로 수취 체제, 군사, 행정 조직 등 국가 제도 개혁 등을 주장 → 중농
학파,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
2) 주장
•중농 학파의 선구적 역할, 반계수록 저술
유형원 •균전론 : 관리, 선비, 농민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분배(신분별 토지 재분배) → 자영농 육성 목적
•자영농 중심의 군사와 교육 제도 재정비, 노비 세습제 혁파 주장
•많은 제자 양성 → 성호 학파 형성, 성호사설 저술
•한전론 주장 : 생계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해 매매 금지(그 밖의 토지는 매
이익
매 허용) →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균등을 추구
•노비 제도 비판 → 당장 폐지할 수 없다면 노비 매매만이라도 금지해야 함을 강조
•실학을 집대성,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저술 -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권력은 본
래 백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
정약용 •여전론 주장 : 마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 소유, 공동 경작하고 노동력에 따라 수확량 분배,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 → 당장 실현하기 어렵다고 보고 정전제 제시
•정치권력이 본래 백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
⚫균전론(均田論) :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
⚫한전론(限田論) :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자유롭게 매매를 허용하자고 주장 ㅇ정전제 : 정약용은 여전론이 당장 실시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 대안으로 정전제를 제시함. 전국의 토지
를 국유화하여 정전 (井田)을 편성한 후, 그중 9분의 1은 공전으로 만들어 조세를 충당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 하자는 토지 개혁론이다.
ㅇ실학자들의 토지 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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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한전론 : 국가는 마땅히 한 집의 생활에 맞추어 재산을 계산해서 토지 몇 부(負)를 1호의 영업전(永業田)으로 하여, 당 제도처럼 한다.
땅이 많은 자는 빼앗아 줄이지 않고 미치지 못하는 자도 더 주지 않으며, 돈이 있어 사고자 하는 자는 비록 천백 결이라도 허락하여 주고, 땅이
많아서 팔고자 하는 자는 다만 영업전 몇 부 이외에는 허락하여 준다. -“곽우록”-
-정약용의 여전론 : 여(閭: 마을)에는 여장을 두고 1여의 농토를 여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다스리고 같이 농사짓게 하되, 내 땅 네 땅의
구별이 없고, 오직 여장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매양 하루 일을 하면 여장은 그들의 노력을 장부에 매일 기록하여 두었다가, 추수
할 때에 곡식의 수확을 전부 여장의 집으로 운반해 놓고, 그 곡물을 나누되 먼저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떼어 놓고, 그 다음은 여장의 녹(봉급)을
주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장부에 기준하여 분배한다. -“ 여유당전서”-
→ 한전론과 여전론의 특징 : 한전론은 1호당 최소한의 토지인 영업전을 정해 매매를 금지하게 하였고(영업전을 설정해 최소한의 농민 생활을
보장함), 여전론은 마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 경작하는 토지 제도이다. ㅇ실학자들이 추구했던 개혁의 목표 : 이익과 정약용은 토
지 제도를 개혁해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결하고 자영농을 육성하는 것을 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7.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 중상 학파, 이용후생 학파


1) 문제 인식 : 도시 인구 증가와 상품 화폐 경제 발전 등 변화하는 현실에 주목 → 상공업 진흥과 기술 혁신을
통한 부국 안민을 이루자고 주장, 청의 문물 수용 주장 → 중상 학파,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 북학파
2) 주장
유수원 우서 저술,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 주장
홍대용 기술 혁신, 문벌 제도 폐지 강조, 성리학의 극복을 부국강병의 전제로 인식
박지원 열하일기 저술, 수레와 선박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강조, 양반의 비생산성 비판
박제가 “북학의” 저술, 수레와 선박 이용 확대, 소비를 통한 생산력 증대, 청과의 통상 확대 주장
3) 영향 :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으로 계승 발전
ㅇ북학 : 북학이란 청의 학문을 말하는 데, 중상학파 실학자들은 청의 수준 높은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의 발달과 기술의 혁신을 이루자고 주장
하였기 때문에 북학파라고도 한다.
⚫유수원 :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의 개혁안을 제시. 또,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 ⚫북학파의 사상은 18세기 후반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노론 명문 출신인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임하경륜, 의산문답 등을 저술. 그는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
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함.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또,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인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양반 집안의 서자로 태어난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
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의 소비관 : 비유하건대, 재물은 대체로 샘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女紅)이 쇠퇴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공장(工匠 : 수공업자)이 도야(陶
冶 : 기술을 익힘)하는 일이 없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되며, 농사가 황폐해져서 그 법을 잃게 되므로, 사농공상의 사민이 모두 곤궁하여 서로
구제할 수 없게 된다. <북학의> → 박제가는 적절한 소비를 통해 생산 활동을 자극해 생산력을 증대시키려는 것이었다.

§8. 서학(천주교)의 수용
1) 수용 : 17세기에 서학으로 수용(베이징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해 서양 문물의 하나로 소개) → 18세기 후반 신앙으로 수용(남인 계열의 일
부 실학자)
2) 교리 : 평등사상, 내세 사상 →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줌. → 민간으로 확산
3) 탄압 : 정조 때 천주교 신자의 제사 거부와 조상 신주 소각 사건(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위를 불태웠던 사건, 진산
사건이라함)을 계기로 탄압(정부는 유교적 질서를 부정한다는 이유) → 순조 때 천주교 박해(1801, 노론 강경파에 의한 신유박해)
4) 황사영 백서 사건 : 천주교가 서양 침략과 연결되었다는 인식 확산 → 천주교는 백성 사이에 활발하게 전파 →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프랑
스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
ㅇ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 : 이벽, 정약전, 이승훈 등으로, 1777년을 전후해서 천진암, 주어사 등에서 집단적으로 서학서를 토론하며 신앙의 길
을 개척하였다. ㅇ백서 사건 :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청의 베이징 주교에게 조선에 군대를 보내 도와 달라는 내용의 청
원서를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이다.⚫신유박해(1801) : 순조 때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득세하여 정약용 등 남인 시파를 천주교 신자로 몰아 탄압
했던 사건, 이승훈,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천주교와 직접적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 박제가 등도 관직에서 쫓겨
났다. 이는 신유박해가 종교적 탄압일 뿐 아니라, 정치적 탄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황사영 백서 : 전선 수백 척과 정예 병사 5, 6만을 얻어서 대포 등 예리한 무기를 많이 싣고 우리나라 해변에 와서 국왕에게 글을 보내기를“우
리는 전교를 목적으로 온 것이지 재물을 탐하여 온 것이 아니므로 선교사를 용납하여 받아들여 달라.”라고 해 주소서. → 이 내용이 알려지면서
외국과 내통하여 군대를 끌어들이려 하였다는 명목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ㅇ천주교 박해
• 윤지충 사건 : 제사를 거부하는 등 성리학의 기본 이념과 충돌 → 국가에서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 처형
• 신유박해 : 노론 벽파가 남인 탄압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도 희생
• 황사영 백서 사건: 프랑스 군사력을 동원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 달라는 글 보내려다 발각 → 천주교에 대한 탄압 심화
• 1830년대 독립된 조선 교구 설정, 프랑스 신부의 포교 활동 → 프랑스 신부와 수많은 신도 처형(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 순교)
ㅇ교세의 확장 : 19세기 후반 신자 수 3만 명 정도

§9. 동학 : 서양 세력과 연결된 서학을 배격한다는 뜻


1) 창시 : 경주 출신 몰락 양반인 최제우가 창시(1860)
2) 교리 :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 인간 존중, 평등사상), 보국안민(외세 배척), 후천 개벽 사상(‘지금 세상은 운이 다했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
다.’, 농민의 사회 변혁 운동에 영향)
3) 탄압 : 지배층의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폭넓은 공감을 얻어 교세가 급속히 확장 → 정부가 동학을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의미]의 종교로 규정 → 최제우 처형
ㅇ후천 개벽 사상 : 세계를 선천 세계와 후천 세계로 나누고, 선천 세계의 운이 다하여 후천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사상이다. 동학에서의 후천
개벽은 봉건적 질서의 종말을 의미한다. ㅇ동학 : “내가 또한 동방에 태어나서 동방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니라.
하물며 땅이 동과 서로 구분되어 있으니, 서쪽이 어찌 동쪽이 되고 동쪽이 어찌 서쪽이 될 수 있겠 는가? ……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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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먼저 펴 나가면 자연히 온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니, 어찌 이것을 서학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 동경대전”- → 최제우는
서학을 배척한다는 의미에서 동학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ㅇ천주교와 동학
-천주교가 탄압받은 이유 : 유교에서 강조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 의식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이 천주교도가 제사의식을 거부하는 것을 유
교적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 천주교와 동학의 차이점 : 천주교는 유교적 제사 의식을 부정하였지만, 동학은 제사 의
식을 인정하고 서학(천주교)을 배척하였다.
ㅇ최제우(1824~1864) :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민중들에게 서학이나 천주교가 아닌 새로운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종교가 필요할 때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인물이 바로 최제우였다. 그는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하였으며, 서학과 서교에 대응하는 한편, 현실 생활에서도 실현 가능
한 부적 등의 요소를 활용해 농민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경상도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파급되던 동학은 산골 아이들까지 주문을
외울 정도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격히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조선 정부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동학이 정부에 대항할 수 있다는 인식에 따
라 최제우를 참형에 처했으며, 교도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였다.
(4) 다양한 문예 활동
§1. 양반 문화에서 서민 문화로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서당 교육의 보급 → 서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
서민의 경제력 향상, 서당 교육 확대 → 서민층이 문화 주체로 성장 → 서민 문화 등장 발달(중인과 서민층이 향유=역관
후기 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과 부를 축적한 상공업자,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 → 민중의 의식 수준 향상, 비판 의식 확
산에 기여
서민 문화의 서민이 주인공으로 등장, 작품은 현실 세계를 배경, 인간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 양반의 위선 비판, 사회의 부정과 비리
특징 풍자하는 내용이 주류
⚫양반 중심의 문예 활동에 중인층과 서민층이 참여하여 큰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 및 상공업 계층과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졌고, 상민이나 광대들의 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ㅇ서당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이후였다. 이 시기 서당계(書堂契) 등
이 조성되면서 서민층이 운영하는 서당이 많아졌다. 서당이 크게 늘어난 것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서민들의 경
제력이 향상되고 지적 욕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붕당 정치의 변질로 몰락 양반이 증가하면서 서당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서당의 훈장
은 대체로 몰락 양반이 많았고 중인 출신도 있었다.
※조선 후기 서당 교육 : 조선 후기 서당은 대개 훈장과 접장, 학도로 구성되었다. 훈장은 대개 재지 사족이나 몰락 양반층이었는데, 때로는 천수
경 같은 이름난 중인 출신도 있었다. 접장은 일종의 보조 교사로서 훈장을 돕기 위해 학도 가운데 나이와 지식이 많은 자를 두 세 명 뽑아 ‘접’
의 장으로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학도는 7, 8세에 입학하였고, 15, 16세에 교역 과정을 마친 뒤 향교나 서원 등에 입학하였다. 서당의 교육
내용은 강독, 제술, 습자의 세 가지로 교재는 “천자문”,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이 중심이었다. 교육 방법은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 응답하는 방법인 ‘강(講)’으로, 암송 낭독하는 배강(背講)과 책을 보고 낭독하는 면강(面講)이 있었다.

§2. 문학 활동과 공연 문화
•한글 소설 : “홍길동전”(허균, 서얼 차별 철폐, 탐관오리 응징), “춘향전”(신분을 뛰어넘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사설 시조 : 자유로운 형식,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서민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묘사하거나 익살스럽게 풍자
후기 •시사 결성 : 일종의 문학 동호인 모임, 중인과 서민층의 시사 활동 활발 → 창작 활동을 하거나 역대 시인의 시를 모아 시집
을 간행 •한문학 : 현실 사회의 문제점 비판(박지원의 양반전과 허생전 - 양반 사회의 허구성 지적 비판], 정약용의 삼정
문란을 폭로한 한시 •공연 문화 : 판소리, 탈놀이 등 →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
ㅇ탈놀이 :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위선과 사회 모순을 풍자하는 탈놀이도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시나 포구 등에서 공연된
탈놀이는 서민 의식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
도 하였다. 더 나아가, 하층 서민인 말뚝이와 취발이를 등장시켜 양반의 허구를 폭로하고 욕보이기까지 하였다.
⚫판소리는 광대가 한 편의 이야기를 노래에 해당하는 창과 이야기에 해당하는 아니리와 몸놀림인 발림으로 연출, 감정 표현이 직접적이고 솔직함.
서민층은 물론 양반에게도 큰 인기, 분위기에 따라 광대가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빼거나 더할 수 있었고, 관중이 추임새로써 함께 어울릴 수 있
음, 판소리 작품으로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마당만 전하고 있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에 이런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였다. ⚫시사(詩社) : 시인 동호회인 시사가 중인, 상민에게까지 확산, 중인층의 시인들이 서울 주변
지역에서 시사를 조직하여 문학 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역대 시인들의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박지원의 “호질”은 사대부 층의 부패한 도덕관념과 허위의식을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주인공 북곽 선생과 동리자는 표리부동하고 위선적인 인
물로 대표되는 당시의 양반 계층을 나타낸다. ㅇ한글소설 : 홍길동전[허균, 최초의 한글 소설, 서얼에 대한 차별의 철폐, 탐관오리의 응징을 통
한 이상 사회의 건설을 묘사하는 등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 춘향전[대표적인 한글 소설, 신분 차별의 비합리성 표현], 별주부전[제 목숨
을 구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못된 용왕을 골려 주는 토끼], 심청전[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왕비가 된 심청], 장화·홍련전[불
합리한 가족 관계에서 희생된 장화·홍련] 등
ㅇ한문학 : 박지원[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 현실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문체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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