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165

(53) 충만한 삶

(엡3:16-4:3)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우리는 지난주까지 아주 긴 시간동안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이미 신자였던 에베소 교회를 위해 위대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기를,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더 깊이 발견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그리고 그 깊고 넓고
높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그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정말 긴 시간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 보시면 그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성도와 함께”알아가야 하는 사랑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가 함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거죠. 혼자서는 그
사랑을 배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라는 무리로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올바른 교회를 만나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9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와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이 너희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교회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을 조금 곡해
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무슨 특별한 열심이나, 대단한 은사의 발휘 같은 것으로 이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것이 정말 그런 것일까요?
우리 안에 성령하나님께서 내주 하시게 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성령 충만”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는 정말 그런 커다란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대단한 열심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까?
아마도 이런 구절들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 655 -
(눅24:49)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성령을 보낼 것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입게 되는 것을 능력을 입는 것이라고 하신
이런 말씀을 토대로 그리스도인들의 충만을 대단한 열심이나 능력의 발휘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휘해야 할 능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던 그 권능, 능력은 이런 능력입니다.
(요21:18-19)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성령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던 삶을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직접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실 때, 순종하고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절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 갈 수가 없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된 자들의 능력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실까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자들을 가리켜 “능력 있는 자”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나타날 그 충만은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해 보면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요? 첫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요, 둘째가 사랑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렇죠?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성품” 그러면 그 둘 중에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충만은 뭘까요?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그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하게 흘러넘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이렇게 마칩니다.
(엡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20절 보시면 “우리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이 말씀은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기도한 것들을 벌써 하나님께서는 교회 가운데서 역사 하시면서 이루어 가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는 구절로
하나님은 늘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보다 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위해 공급하신다는 것을

- 656 -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주지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바라지 못한 것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조차 다 아시고 이미 그것들보다 더 넘치게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지금까지 기도한
것들보다 더 훌륭하고 멋지게 너희들을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들을 가지고 “거 봐라,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바라지 못한 것까지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말이 맞다” 그렇게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 “넘치도록” “휘페르 에크 페리수”는 사도 바울이 만든 단어입니다. 여기
하고 데살로니가 전서 3장 10절에 딱 두 번 쓰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넘치도록
풍성하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영적인 풍성함을 가리킬 때만 쓰인 단어입니다.
같은 의미의 단어가 2장에서 한번 쓰였는데 2장7절을 한번 볼까요?
(엡2:6-7)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지극히 풍성함”이 “휘페르 발론타”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풍성함이
어떤 풍성함입니까? 바로 그 앞의 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시고 다시
살려내셔서 하늘에 앉히신 영적인 풍성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아직 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아시고 그 것보다 더 엄청난 것으로 우리에게 ”휘페르 에크 페리수“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신 것”은 영적인 풍성함인 것입니다. 이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말년,
사도 바울이 죽기 2, 3년 전에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 어떤 것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세상 것들이 뭡니까? 가난에
쪼들리고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교인들에게 배신당하고 했던 것들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풍성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것은 영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와 예수 안에서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빌고 기도를 끝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고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사도는 그 영광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 안에서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영원 궁하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교회인 여러분에게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장 세 장에 걸쳐서 기독교의 교리를 완벽하게 설명을 하고 그리고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까지 마치고 나서 4장부터 “그러므로” 하고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을 나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우리가 오늘부터 공부할 내용입니다.
왜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그렇고 에베소서에서도 그렇게 꼭 교리를 세세하게 설명을 한 뒤에

- 657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하고 나중에 가서야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을 기술을
할까요? 처음부터 거두절미하고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하고 써도 되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 번 설명해 드린 대로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은 오히려 자기 의를 쌓게
되어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죠.
(롬10:2)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지식 없는 열심은 아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도는 “그 바른 지식”을 먼저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그리고 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은 바른 진리를 근거하지 않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엉터리 열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께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저주의 욕을 들었습니까?
그들이 계명을 잘 지켰다고 우겼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의인이며 선민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그렇죠? 많은 계명 중에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가장 길게 설명을 하신 계명이 뭡니까? 출애굽기 20장을 잘 생각해
보세요. 안식일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거의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이 칼을 들고 좇아오는데 그날이 안식일이면 그 사람들이
뛰어서 도망가지 않았다고 하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그 날을 지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출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문학 양식에서 중요한 어떤 것들을 나열할 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들은 활자의 양을 많이 할애를 해서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에서도 안식일에 관한 계명에 아주 특별히 촉각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진노하셨음을 유대인들이 읽고
있었던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31:12-17)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 658 -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러
가지 율법이 있지만 이렇게 그 율법을 어긴 사람이 처형이 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상징하고 있는 어떠한 것이 범해질
때 그렇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민15:32-36)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패역한 일을 할 때마다 “너희가
안식일을 어겼다”라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행위의 대명사로 유독 안식일을 강조해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겔20:10-13)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로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게다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시는 이유도 그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범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그들이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70번을 한꺼번에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대하36:17-21)
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18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기명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9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20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 659 -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제가 설명해 드렸죠?
이렇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뉘우치고 행한 것이 안식일을
포함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유가
안식일을 안 지키고,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서 그들은 그
이후로 더더욱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안식일을 지켜왔고 지금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의 전차“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chariots of fire" "반젤리스”의 영화음악으로
더욱 유명하지요?
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영국의 캐임브리지에 다니는 헤럴드와 에릭이라는 두 수재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공부만 잘할 뿐만 아니라 달리기에도 소질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이 두 청년은 올림픽에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올림픽 100m 달리기 결승전 날이 하필 일요일이었습니다. 에릭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안식일 날 뛸 수 없다고 하며 그 결승전을 포기합니다.
결국 다른 선수들의 배려로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결승전이 있는 400m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스토리입니다. 이 영화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주일 성수“에 관한 고정관념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죠? 골든 글로브와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여서 더욱
그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안식일이 뭐길 래 하나님은 그렇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못 견뎌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주일은 꼭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여행을 갔다가도
주일에는 자기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멀리 유학을 가거나 이사를 가서도 꼭 헌금을 전에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 부치죠?
도대체 그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그러는 겁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일부러 그 안식일을 범하시며 일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신 일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미움을 사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도 안식일이고, 소경 된 자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 그 눈을 뜨게 하신 날도 안식일입니다. 손 마른 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고 제자들이 이삭을 비벼서 먹은 날도 안식일입니다. 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비빈
게 안식일을 어긴 겁니다. 복음서를 잘 보면 예수님은 일부러 그 안식일에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이제 그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살펴보고 왜 우리 주님은 그 안식일에 그러한
일들을 하셨는지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교리 설명에
심혈을 기울여서 유대인들의 엉터리 열심, 가장 사악한 죄악인 율법주의를 경고했는지를
확실하게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안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창세기 2장2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안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2:1-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 660 -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made it holy, because on it he rested from all
the work of creating that he had done.
여기에 안식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어떤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 날에 복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 안에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질문을 여러분의 가슴에 잘 품으시고 계속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안식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하고 오랜 역사 동안에 안식이라는 것이 등장하지 않다가


출애굽기 20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출20:10-11)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창조기사로 대십니다.“내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칠 일째 쉬었다. 그러므로 너희도 안식일을 지켜 아무 일도 하지 마라”
그리고 딱 40년 후 신명기에서 다시 안식일을 명하시는데 신명기에서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5:12-15)
12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4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 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 째날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 ‘구속, 죄 사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보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잘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그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에 어떤 복된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복된 씨앗은 우리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영생”이라는 씨앗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 661 -
그 부분을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과 육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시간이 뭡니까? 우리는 시간이 뭔지 잘 몰라요. 우리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뚝뚝 잘라서 우리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원자의 복사주기에 91억 9천 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시간에 의해 두려워진 마음을 공간과 물질로 달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고, 멋진 집을 사고 싶어 합니다. 그 안에 불안한 자신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열심히 아름답게 가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값비싼 것들로 자신을 치장하
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합니다. 그도 물론 자신이 숨을 공간과
물질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공간과 물질의 영역에서 공간과 물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복은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과 일곱째 '날'에 공히 복을 부으셨습니다. 사람
과 시간에다가 동일한 하나님의 복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지어진 인간, 즉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이 주
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시고
그 '날'이라는 시간을 거룩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복되고 거룩한 어떠한 것이 담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간의 영역 속에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는 그 분이 보
이질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도 행복
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간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깨닫고 인식한 사람들이
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고 소망하는 것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이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
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인 로마서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가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와 때'가 바로 '카이로스''호라''시간'입니다.
바울은 시간의 영역을 모르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잠자는 자'라고 부르

- 662 -
고 시간의 영역을 깨닫고 시간의 영역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깨어있는 자'라고 일컫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제발 이 소멸될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 갇혀서 엉뚱한 허비를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시간의 영역을 바라보라'고 간곡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물질과 공간은 시간의 영역에서 배태되어 탄생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창조해 놓은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천지의 창조 이전에 '태초에' '레쉬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
다. 히브리어 '레쉬트'는 '시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즉 시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목
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창조되는 것임을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
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것의 모형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영원에서 튕겨져 나온 이 물질 세계의 모든 것은 하늘의 것들을 그림
자처럼 닮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에덴동산도 하나님 나라의 성전을 그림자처럼 담고 있습니
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늘의 어떤 것을 원형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영원이라는 것을 제한된 물질세계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시간인 것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영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영원 속에 존재하
시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도 바로 그 영원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에서 물질과 공간
이 어떠한 목적과 계획을 지니고 잠시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그 시간의 영역을 안식일 속에서 찾으려 했었습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안식일을 감지되지 않는 그 시간의 거룩한 지성소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우리말 개역 성경에 ‘거룩’이라고 번역이 된 ‘카다쉬’라는 단어는 원래 자세한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의 신비함, 하나님의 위대함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이 땅의 것과 구별되는, 하나님을 포함한 하늘의 것에 쓰인
단어입니다. 잘 생각 하시며 들으세요.
그러니까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유일하게 거룩했던 것은 “안식일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거룩한 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해서 많은 묵상을 해야 하고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헬라 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다가 올 시간, 영적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있는 영생이 뭡니까?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하게
살게 되는 시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 663 -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그 사실을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처음에 이스라엘에게만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구원을, 영생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모델로
택해졌기 때문입니다.
(출31:13-17)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라는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죠?
첫 번째 “할례” 그렇죠? 할례는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선택 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symbol 이었지요? 언약의 축복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했던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가 이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언약 백성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생활주기가 전 세계 공통으로 일주일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그렇게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은 “달 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 바벨론의 생활주기는 달마다 돌아갔습니다. monthly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같은 나라는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life cycle은 하루, 1day life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시스나 오시리스 같은 계절 신을 섬기던 나라는 한 계절이 그들의
life cycle 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이스라엘만이 7days life cycle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7days life cycle로 살게 되면서, 일주일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세상의 모든
잡신들은 다 가짜고 오직 여호와만이 창조주이시고 , 오직 이스라엘만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누리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갖고 있는 의미가
뭔지 점점 분명해 지지요?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뭡니까?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 664 -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입니다. 바로 안식일이 그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망이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범상치 않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이 갖고 있는,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언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말이에요. 여기까지 이해가 가시죠? 왜 안식일을 어기면 죽이는지,
왜 할례를 안 받으면 죽이는지.
그러니까 그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완성될
진짜 참 안식, 영생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골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것이죠? 그 실체는 (여기서 몸“소마”는 실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정확해 졌죠?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진짜 안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이 뭡니까? 그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죠?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이 왜 일을 하지요?
이제 타락한 인간은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아서 자기가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제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동반자로서 그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의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의 상태, 그렇죠? 거기에서는 누가 우리를 먹여
주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먹여 주십니다. 그래서 그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는 그 천국의
삶의 모형으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시니까.
광야에서도 안식일에 먹을 것은 미리 그 전날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부터 안식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계속해서 demonstration해 주신 것입니다.

- 665 -
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지 아시겠지요? 왜 주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을
비벼서 먹는 것을 놔두셨는지 아시겠지요? 주님은 안식일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그들에게
demonstration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너는 왜 그 날을 안 지키느냐?”하고 예수님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여러분, 3.1절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광복절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3.1절 날 대문에다가 태극기 달면 그게 3.1절지키는 것입니까?
광복절 행사장에 참석해서 광복절 노래 부르고 오면 광복절 지키는 것입니까?
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를 잘 되새기고 그 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그 자유를 잘
누리는 것을 “3.1절을 지킨다, 광복절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태극기 하나 꽂아놓고 “난 지켰네.”한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우리가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열심으로 자기의 죄를 덮으려고 하는 것,
이것을 막기 위해 사도 바울이 3장까지에서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4장의 “그러므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장장 11장까지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12장부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인간이 법을 지키려는 열심을 극악한 죄라고 하는지 지난번에 잠깐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 없이 살게 된 후에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악이라는 놈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간음과 다툼이 생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정작 자신은 그"법“을 지키기
싫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법“을 지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는 노력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안위를 스스로
챙기는 것이 바로 인간의 법입니다. 스스로 법을 지켜서 내 삶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지요.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죄책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죄책감이라는 녀석은
엄청난 괴물입니다. 누구도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 죄책감을
상쇠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바로 오늘 제가 지적하고 싶은 ”율법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무조건 내가 내
힘으로 지켜 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율법주의, 그 율법주의는 가장 사악한 죄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율법주의에 젖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를 하셨고 율법주의를 다룬 책 갈라디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 율법주의를
다른 복음이라고 했고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욕을 퍼부은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사악한 죄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로 넘어오겠습니다. 이제 그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일날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그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고 소망하며,
그 나라를 직접 누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갖고 있던 의식적인 면은 이제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의미는 그대로 오늘 날 주일에 배어있는

- 666 -
것이니까요.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이 그러했듯이 그 날을 무작정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는 것이 정말 그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또 다른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주일 날 왜 모여서 예배를 하는지 그리고 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순히 “난 주일 지켰어” “난
교회 안 빼 먹었어” 라는 열심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그 주일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고 평소에도 그 안식을 잘 누리실 수
있는 분이라면 여러분 꼭 주일 날 예배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에 들어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 일요일은 한국의 월요일입니다. 날짜에 얽매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중앙아시아의 어떤 작은 나라에 가신 선교사님은 그 나라의 휴일이 목요일이랍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목요일 날 모여서 예배를 드린 답니다. 그거 안 되나요?

캘빈의 기독교 강요 2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꼭 토요일 날
지켜야 했던 안식일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으로 그가
나타나심으로 모든 그림자들이 뒤로 숨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참 된 안식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어느 하루 동안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까지 우리 삶의 전 과정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날짜를 지키는 미신적인 행위를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일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그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배우고 누리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가 모이기로 한 어느
날에 함께 모여서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즐기는 시간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신 분들은 빠지셔도 됩니다.
여행 가셨다가 비행기 타고 본 교회로 안 오셔도 됩니다.
왜 한국 교회에 “주일 성수” 바람이 불었느냐 하면 목사님들이 신자들의 열심을 독려하기
위해서 겁을 많이 줬다고요. 주일 날 교회 빼먹고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이야기,
십일조 떼먹었더니 아이가 불치병이 걸린 이야기, 십일조 다 계산해서 냈더니 그 아이가
나았다는 이야기 등등 뭐 이런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로 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겁이 나서, 혹은 재수 없을까봐 교회에 나와 주는 것이 “주일 성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이는 이유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영원히 천국에서 함께 살 내 천국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 천국의 예배를
사모해서 가 아니라, ‘그 날 안 나오면 차에 빵꾸 날까봐, 비즈니스에 지장 있을까봐, 왠지
꺼림칙해서‘ 이런 거라면 여러분 교회 안 나오셔도 됩니다. 집에서 푹 쉬세요.

제가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몇몇


악당들이 “이제 마음 놓고 교회 빼먹어도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될까봐 제일 걱정입니다.
그래서 캘빈이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날을 택하여 성도가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비한 떡을 떼며

- 667 -
공적으로 기도하며 일군들을 노동에서 쉬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날을 정해 놓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혹자는 날을 구별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날마다 모이자고 한다. 그렇게 날마다 모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을 실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을 영적인 지혜를 위해서 정하는 것은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로 그 날을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날을 소중하게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꼭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쉼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부득이하게 교회를 빠지게 되었을 때 죄책감 같은 것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서마다 이렇게
교리 설명에 열을 올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끌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신자들의 헌신을 요구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그러니까 열심만을
가지고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두 번째 표어를 지었습니다.
“자나 깨나 열심 조심” 그렇다고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이렇게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를 하면 사람들이 열심을 잃어버리곤 하는 것을 왕왕 봅니다.
제가 그러한 형식이나, 율법주의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회가
헌금이 다른 교회들에 비해 월등히 적어진 것을 아십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이 기도하고
전도하는데 다른 교회 교인들과 비교도 안 되게 열등하다는 것 아세요? 여러분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야 합니다.
(고전15:58)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롬12:11)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벧전4:8)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후1:10)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열심을 내라고 하시죠? 여러분 전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내되 먼저 왜 열심을 내야 되는지를 알고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자들의 열심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열심이, 희생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열심과 율법주의에서 나오는 열심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그 사람이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해 보면 압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가 열심을 내어 하고 있는 것을 못하게 하면 못 견딥니다. 그리고 그것을
못 하게 한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 대신 일을 맡은 사람에게 비협조적이 됩니다. 자기의 유일한

- 668 -
죄책감의 해결 방법을 빼앗겨 버린 결과가 되기 때문에 상당히 분을 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1)직분을 탐합니다.
(2)예배를 빼 먹거나, 평소에 하던 큐티를 몇 번 빼먹거나 매일 하던 새벽기도를 며칠 쉬고
나면 불안해합니다.
(3)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열심히 교회 일을 하면서도,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면서도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4)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신앙생활이 짐처럼 여겨집니다. 예배 시간, 성경공부 시간, 교회
식구들이 모이는 시간이 부담스럽고 짐처럼 느껴집니다.
(5)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완벽주의를 지향합니다.
(6)율법주의자들은 자기보다 모자란 사람을 깔봅니다.
진짜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안 사람들은 그런 엉터리 열심 안 부립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겸손한 열심을 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들에게 바로 그 진짜 열심을 독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늘 충분하게
교리를 먼저 설명을 하고 “그러므로” 로 시작되는 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그러므로”의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율법주의자”의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멍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 다음 주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내어야 할 열심에 대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충만”에 대해 한 절 한 절 자세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669 -
(54)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엡4:1-6)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제 본격적으로 4장부터 전개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부분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부터 3장까지에서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교리 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1장부터의 내용을 잠깐 요약해 드리면, 교회는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을 하시고 예정을 하셔서 성자 예수 그리스의 사역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자녀를 삼으시고, 그들이 죄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보증으로 성령하나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인 치셨다는 것을 설명하지요. 그러고 나서 1장은
특별히 에베소 교회를 위해 드리는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려내시고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교회는, 원래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구원을
허락하셔서 살려내신 새로운 무리라는 것을 설명하며 시작을 합니다. 그 유명한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이 거기 있지요.
(엡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리고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의 선물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 없이 모든
열방에 적용이 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교회는 서로 서로 연결이
되어 서로 도우며 거울이 되어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로 지어져 가는 것이란 것으로
2장을 맺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바울 자신의 이방인에 대한 사명을 기술한 후에 우리가 오랜
시간 공부했던 바울의 두 번째 기도로 3장을 마칩니다. 그리고 4장으로 이어지면서
“그러므로”로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강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1장에서 3장까지에서 예정과 선택, 양자됨과 구속, 성령의 사역과 거듭남,
만국 백성을 연합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연합하는
삶에 대해 말하고, 이러한 것이 입력되었을 때 너희에게서는 어떠한 출력 정보가 나와야
하는가를 4장부터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대부분 이러한 순서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그 다음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는 그리스도인의 행동강령을

- 670 -
설파합니다.
(골3:1)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롬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살전4:1)
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갈5: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가 바른 교리를 입력받았을 때 반드시 우리 안에서는 사도 바울이 요구하는 출력정보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1절부터 한 절 한 절 보겠습니다.


(엡4:1)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합당하게“”악시오스“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깃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는 조화의 사상입니다.
여러분, 천칭 저울 아시죠? 보통 저울은 무게를 재지만 천칭저울은 무게를 재는 저울이 아니라
질량을 재는 저울입니다. 양쪽에 접시가 달려있고 거기에 동일한 무게를 올려놓아 그 물질의
질량을 재는 저울입니다. 이 저울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무게와 질량의 물질이 동시에 올라가야 그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조화의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악시오스”라는 단어를 동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와 실천에 똑같은 비중을 두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히6:9-12)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들을

- 671 -
부지런하게 실천하라고 권고하는 동시에 믿음의 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특히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 위하여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낼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와 실천 사이의 조화를 유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의 말대로 하면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교리와 실천은 둘 다 중요한 것이니까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합당하게”“악시오스”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사상이 “어울림”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흠정 역 성경에는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어울리게 행동하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구절이 빌립보서에도 있지요?
(빌1:27)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어울리게) 생활하라
복음을 잘 깨달은 자들은 그 복음에 어울리는 생활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에 많이 쓰던 단어였습니다. 예를 들어 회색 양복에 녹색 양말에
흰색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우 악시오스”죠. “우”가 절대 부정을 나타내는 단어니까 “절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라는 뜻입니다. 단아한 미색 투피스 정장에 쇠사슬 목걸이와 뱀 모양
팔찌 같은 것은 “우 악시오스”입니다.
그리고 80먹은 할아버님이 힙합 청바지를 입으시고 바지를 엉덩이 중간쯤에 걸치고 계신 것,
전혀 어울리지 않죠?
그렇게 교리를 제대로 배우고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그에 걸 맞는 어울리는 삶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사도는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시오스”“합당한 생활”의 근거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제시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 즉,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가 원래 ”에크“”밖으로“ ”레시아“”부르심” 그러니까 ”밖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 아닙니까? 어디서 어디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죄에서 거룩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어디로 불려 나왔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부르심을 받고 밖으로
나온 사람이 계속해서 부르심을 받고 나오기 전의 생활을 답습한다면 그 사람이 어찌 부르심을
받아 밖으로 나온 사람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부르심에 어울리게, 합당하게
생활을 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J I Packer가 John Owen목사님이 쓰신 “The Mortification of Sin""죄 죽이기”라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도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의 실천부분에서 상당히 갈팡질팡 했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하실 텐데 뭐“ 하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는 것이죠. J I Packer도 똑같은 고민을 했었다고 합니다. J I
Packer뿐만 아니라 시카고 무디 기념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셨던 해리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도
똑같은 고민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고갈이 될 때까지 갔었다고 합니다.
그 같은 고민 끝에 그 대가들이 내린 결론이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과 의지를 움직여서 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모았습니다. 네, 우리는

- 672 -
반드시 부르심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장1항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일단 유효한 부르심을 입어 거듭났고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들 속에 새로운 영의
창조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이고 개인적으로 더
거룩하게 하심을 입되, 그리스도의 말씀과 자기들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다. 죄가 몸 전체를 지배하는 권세는 파괴가 되고, 그 죄의 지배함에서
나왔던 여러 정욕들이 갈수록 어 약화되고 죽여지고, 구원하시는 모든 은혜에 있어서는 더욱
더 생기를 가지고 힘을 얻되, 참된 거룩의 실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그 참된 거룩이
없이는 주를 뵙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난번에 읽으신 회심의 저자 리차드 백스터는 그의 책에서 회심을 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나태해서 엉터리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의 죽음을 얼마나 잊어버리고 사는지, 또한 여러분이
영원한 것들을 얼마나 가볍게 취급하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입술로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나 용감하게 죄를 짓고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사는지, 얼마나 여러분의 영혼 문제에 대해서 소홀하게 대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부정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세상 적인 관심사와 쾌락에 빠져있으며 유치한 장난감
같은 세상 것들을 간절히 추구하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여러분의 짧고 귀중한
시간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낭비하고 있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이제 그 무서운 날이 임박했습니다. 그날에 여러분의 슬픔은 시작될 것이며 반드시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고통과 파멸 속에서 부르짖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 지난날 어리석게 행동한 기억들 때문에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무시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신속히 여러분의 죄를 버리려고 합니까? 얼마나 빨리 여러분의 생각과 생활을 그리고
진로와 모임을 변화시키고 감정의 물줄기를 바꾸며 여러분의 관심을 다른 것으로 돌리려고
합니까? 얼마나 굳게 결심하고서 지금 여러분을 속이고 또 여러분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여러 유혹들을 떨쳐 버리려고 하십니까? 또한 여러분은 얼마나 열심히 가장 복된 삶을 위해
분발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님의 율법들을
묵상해야 하겠습니까?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점점 성화 되어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제가 오랜 신앙생활의 고민 끝에 완전하게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자라면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정말 죄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파멸시킵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 극동방송국에서 방송을 잠깐 진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거기서 만난
미국 선교사님들이 계셨습니다. 나이 많으신 할머니들이신데 그 분들이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 673 -
계셨습니다. 그 선교사님들이 특히나 저를 예뻐하셔서 그 분들이 일하시는 곳에 저를 자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중에 얼굴에 피부암이 걸리신 한 중년 남자 분을 세 달 정도 계속 뵌
적이 있습니다. 그 피부암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에는 입술 있는 곳이 조금 헌
것처럼 구멍이 뚫리더니 이내 코가 없어지고 얼굴 전체가 날아가 버립니다. 마스크를 벗으면
분명 살아있는 사람인데 얼굴이 없어요. 암세포가 점 점 점 점 얼굴을 먹어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죄를 묵상하면서 그 얼굴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죄라는 놈은 우리를 그렇게
처참하게 갉아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한센 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고통을 못
느끼고 계속 그 죄라는 놈에게 자기 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의 모든 서신 서에서 “너희들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롬8:12-13)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3절을 보시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하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교회입니다. 바울은 같은 로마서 8장1절에서 그 유명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이미 선언해 놓은 뒤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신자들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지요? 그러면 이 13절의 제대로 된 해석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아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육신의 행실을 죽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 땅에 남아서
살게 되는 모든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를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13절 후반부에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구절이 있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영원한 나라에서는 지금 우리의 육신이 그 정욕으로 말미암아 저지르는 행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몸의 행실이 죽는다는
것=살리라 인 것입니다. 물론 그 것은 먼 훗날 될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그 영원한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맛을 보실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이 육신의 정욕으로 말미암는 더러운 행실이 다 사라진 새 삶을 사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생을 이 땅에서 우리가 맛 볼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싸워서
하나하나 이겨 낼 때 그 나라의 맛을 조금씩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계속해서 “죄와 싸우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고전9:26-27)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사도는 늘 자신의 몸을 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직 완성된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완성품, 걸작, masterpiece가 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스스로 쳐 나갔다는 것이죠.
(빌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 674 -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렇게 우리는 온전함을 향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전에 TV를 보니까 24번이나 성형 수술을 한 남자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얼짱 탤런트가
되기 위해서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랍니다. 그 사람 얼굴의 변천사를 보니까 정말
처음하고는 완전히 다른 멋진 미남이 되어있었습니다. 연기자가 되겠다는 작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런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수술을 한번 할 때마다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우리가 그 정도의 열심이라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죄를
죽여가야 합니다. 그게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입니다.
(골3:1-5)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사도 바울로 부터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권면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1절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 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구원받고 매일
”할렐루야, 할렐루야“하다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부터 아주 바빠지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야 하고 이 땅의 지체를 죽여가야 하기 때문에 게으를 시간이 없습니다.
(요15:2)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완전히 잘라내 버리시지만 과실을 맺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신
답니까? "깨끗케 하시느니라“”카따이로“ ”가지치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쳐내게 만드신 다는 것이지요.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더럽고 필요 없는 가지를 쳐내듯 죄 죽이기를 힘써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생각 해 봐야죠. 혹시 나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곧 잘려나갈 나무가 아닌지.
여러분,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욕을 무참하게 박살을 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갈5:17)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싶으시면 여러분이 소홀히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셨던 작은 죄들을 하나하나 죽이세요. 이 잡듯 잡아내셔야 합니다. 참 빗으로 싹싹 빗어서
엄지손톱으로 콕 콕 눌러서 죽이듯이 죄를 그렇게 죽이셔야 합니다.

- 675 -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죄라는 놈이 얼마나 달콤하고 집요한지 성경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죄에 빠질 수 있는지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히12:1)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죄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표현을 합니다. 죄는 그렇게 우리를 쉽게
얽어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죄부터도 허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 죽이기”라는 책을 쓴 존 오웬은 “죄는 뿌리까지 다 말려버려야 한다.”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댐에 작은 금이 간 것을 그대로 놔두면 얼마 있다가 그 댐 전체가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처럼
죄의 파괴력은 그토록 무섭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모든 적들을 다 진멸 하고서
“저 정도는 그냥 놔둬도 우리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가사와 가두와
아스돗에 조금 남겨 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낭패를 당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가사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이 죽었습니다. 가두의 블레셋 사람들 중에 골리앗이란 놈이
나왔습니다. 아스돗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 뿐입니까? 그 때 다 진멸
하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이 지금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지요? 죄는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이 원해서, 좋아서, 그 달콤한 죄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는데 예전과는 달리 그게 여러분을 너무나 괴롭게 만든 경험이 없으세요?
예전에는 남의 돈 떼먹고 하는 것이 “나의 이익”으로 바로 연결이 되어서 떼먹으면 떼먹은
만큼 기뻤는데 언젠가 부터 가슴 한 켠이 답답하고 해가 떠 있는데도 자기 주변만 어두운 것
같은 그런 경험 해보신 적 없으세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후에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너무나 괴롭습니다.
(시31:10)
10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시51:8)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단으로 부터 자기의 죄에 대해 지적을 받고 다윗이 고백한
시입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하나님께서 자기 뼈를 꺾으셨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한동안 죽이지 않은 정욕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때 그는 영적으로 소진되어
완전 파산지경에 처해 버렸음을 다른 시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시38:1-8)
1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2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5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 676 -
7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이렇게 신자가 정욕을 품고 있으면 실제로 육신이 상하고 피곤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시40:12-13)
12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고, 나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눈
앞이 캄캄합니다.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내가 낙심하였습니다.
신자의 죄는 이렇게 자신을 파괴하고 스스로 괴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우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죄를 죽여라“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죄가 우리를 죽이니까요.
끊임없이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부지런히 경주해 가는 것은 마치 부지런한 농부가
열심히 밭을 돌보아서 좋을 결실을 맺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는 잡초도 뽑아주고 성냄이라는 돌맹이도 골라내고, 시기, 질투라는 벼멸구도
잡아주고 그렇게 부지런하게 논밭을 돌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르게 그냥 그런 잡초들과 벌레들을 방치한 농부는 결국 잡초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더러 매일 매일 정욕의 잡초를
부단하게 제거하는 데 힘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가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회심을 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중에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그냥 저의 설교를 도덕적인 권면으로 받아들여서 “그래, 난 오늘부터 열심히 죄를
죽이면서 살 거야”하고 결심하고 노력하시게 되면 그 분들은 바리새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죄가 뭔지도 모르고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적인 행위를 고치는 것으로“나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이렇게 가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권면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진짜 죄가 무엇인지 알고, 나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그 죄를 이미 없애주신 주님이 너무 감사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노력하며 경주하게 되는 죄 죽이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뭡니까? 단순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행동만이 죄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흉한 생각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죠? 왜 형제를 가리켜 라가라
하는 자는 살인을 한 것과 같다고 하셨죠? 죄라는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가시적인 행동이기
이전에 그 마음속에 있는 경향, 의도 이런 것부터가 죄라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겨울철이나
봄철에 사과가 열리지 않을 때도 사과나무입니다. 죄의 해결을 받지 못한 죄인이 죄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겉으로 나타나는 죄의 행위를
막을 수는 있어도 그 마음속에 진드기처럼 붙어있는 죄에 대한 경향이나 끌림 같은 것은
해결할 수가 없잖습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연극을 할 수 있습니다.
(행8:9-13)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 677 -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마술사 시몬이 빌립이 표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다니며 잠시
마술을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안에 있는 다른 욕심 때문에 마법을 잠시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안수를 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시몬이 은을 가져와서 “그거 나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하지요?
(행8:23)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우리는 이렇게 얼마든지 겉으로 보이는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연극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시78:32-37)
32 이 모든 일을 보고서도,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지으며, 그가 보여 주신 기적을 믿지 않았다.
33 그래서 그들의 생애는 헛되이 끝났으며, 그들은 남은 날을 두려움 속에서 보냈다.
34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 하실 때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으며, 돌아와서 하나님께
빌었다.
35 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심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기억하였다.
36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만 하나님께 아첨하고, 혀로는 하나님을 속일뿐이었기에,
37 마음은 분명히 그를 떠났으며, 그가 세우신 언약을 믿지도 않았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입니다. 얼마든지 예수를 믿는다고, 난 회개했다고 할 수 있고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도 너무나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죄에
대한 경향이나 습관이나 정욕은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는 죄 뿐 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에 대한 욕구까지도, 경향까지도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가능할까요? 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으니까요.
(사57:18-19)
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고 또 그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기도하면 우리를 도와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 먼저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고 있던 죄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 앞에서 무기력한 우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 죄에 대해서 죽이시고 다시 의에 대해서 살리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 678 -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는 이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 버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처음에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친답니다. 그러다 점점 힘이 빠져
결국은 소리 없이 죽어 버리게 되듯이 우리의 죄도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포악하게 그의 힘을
발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이제 우리에 대해 영원히 죽을 것이고, 아니 이미
죽은 것이고 지금 그 죄는 우리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흠집을 내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며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럽게 붙어 있는 죽어
가는 죄의 시체들을 털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이 죄와는 절대 친할 수 없는
존재라는 확신 속에서 그 죄를 털어내며, 밟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에 부칠 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부지런히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요구하는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입니다.
(고후7:1)
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받았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 가운데서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막13:37)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요즘 제가 새벽에 일어나면서 한 번씩 읊조리는 구절입니다. “성수야, 깨어있자”
우리 주님께서 오죽하면 이렇게 몇 번씩이나 부탁하고 가셨겠습니까?
(눅21:34-36)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른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시18:20-26)
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3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여러분, 여러분에게 작은 정욕이 일어날 때 항상 생각하세요. 이 작은 정욕에서 출발한 것이
결국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절박함으로 그 정욕을 밟으십시오.
(약1:14-15)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씀은 정욕의 초동단계에서 진멸 해 버리라는 경고입니다.

- 679 -
그리고 2절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2절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의 구체적인 목록을
기술합니다.
(엡4:2)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그 목록을 보시면 겸손, 온유, 인내, 사랑, 관용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들이죠? 네,
성도들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3절까지의 내용은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죄를 죽이는 삶이다. 그렇게 살게 될 때 너희는
비로소 “샬롬” “평강, 평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우리더러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 되는 삶을 살아라.“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해 놓으신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 됨을 이루고 평강을 얻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져 있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확인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아주 다른 말이죠. 캐톨릭이나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탈락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출발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령에 의해 완성되기로 찍힌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완성이 될 수밖에
없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갈 길, 괜히 멀리 돌아가지 말고 오늘부터
가자“ 그게 우리의 신앙관입니다. 사뭇 다르죠.

그럼 2절에 나와 있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으로 열거된 내용들을 훑어보고 오늘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겸손““타 페이노프로수네” 이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이 “타 페이노프로수네”라는 말은 단순히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를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 페이노프로수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이 단어는 약자들에게 쓰이는 경멸의 단어였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온유“”프라오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의 뜻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역시 비굴한 사람들에게, 혹은
노예들과 같은 억지로 굴종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쓰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겸손과 온유는 “나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에게 분노하지 않고 악의를 품지 않고
모든 심령의 나쁜 것에서 벗어난 상태”를 겸손이요, 온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시죠.
(마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을 쉬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쉼“이냐면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없애주시겠다는 물리적인 해결로서의 ”쉼“이
아니라 ”너희 마음의 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 680 -
예수님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의 멍에와 짐이 정말
가벼운 것입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남의 죄를 짊어지고 배반당하고 수난당하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는 것이 쉽고 가벼운 짐입니까? 무겁고도 무거운 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그 짐을 가볍게 느끼실 수 있었던 것이죠?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우리가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모든 상황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나를 위해서 살던 삶을 돌이켜서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니까
억울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이 그 온유와 겸손이 무엇인지 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롬15:1-3)
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겸손이요 온유함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 사는 사회 속에 똑똑한 사람, 성공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똑하거나 능력이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똑똑함과 나의 능력이 나의 부가 다른
사람의 누추함이나 열악함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그렇게 자기 자랑이나 자기의 증명용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진 것으로 다른
이들이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 바로 겸손과 온유의 사람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고후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자기의 부요를 풀어 원수들의 가난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과 온유입니다.
또 한사람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민12:3)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는 어떻게 이런 온유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무엇을 알았길래 이러한 겸손과
온유를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시편 90편을 보면 모세가 이렇게 온유한 사람이 된 이유가
나옵니다.
(시90:1-12)
1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2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3 주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4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5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6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7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 삶이 끝이 나고,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스러지고 맙니다.

- 681 -
8 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9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11 주의 분노가 발산하는 능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의 진노가 가져 올 두려움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12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모세의 겸손과 모세의 온유의 비결입니다. “인생은 짧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같다. 얼마나 짧은지 그 시간이 날아간다. 결국 인간은 순식간에 주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 지은 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계수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게 모세의 겸손과 온유의 비결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위해 악착같이 죄를 지어도 그 시간이라는 것이 날아가는 것이라서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라는 것을 모세는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혀도 참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가지고 남을 누르거나 잘난 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실존주의가 옳고 그름의 유일한 확인논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도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아야 잘 믿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나의 가진 것을 부어서 남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겸손과 온유를 가르치셨습니다.
제 교회 후배 중에 대학교 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친구가 있습니다. 일찍 검사가 되어서 권력의
맛을 일찌감치 향유하던 아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함께 야학을 하던 섬김의 집에
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날 밤에 친척집에 다니러 갔답니다. 볼일을 보고 밤늦게 나오면서
차를 후진 하다가 누가 불법주차 해 놓은 개인택시의 문을 받았답니다. 한국은 주차할 곳이
없으면 가로로 막아서 주차를 해 놓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아파트 경비원도
졸고 있더랍니다. 그냥 도망갈까 하다가 그래도 자기가 그리스도인인데 물어 줘야 하겠다는
마음에서 아파트 경비원을 깨웠답니다. 그런데 그 아파트 경비원도 그 차가 누구 차인지
모르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냥 가라고 하더래요. 그래도 이 친구가 자기 연락처를 써서 앞 유리에 끼워놓고
왔대요. 자기가 차를 받았으니까 물어줄 테니 연락하라고.
다음 날 연락이 와서 나가봤더니 이 사람이 정비 공장에 가서 문 짝 뿐만이 아니라 범퍼하고
백미러, 그리고 안에 있는 인테리어까지 다 갈았더랍니다. 자기는 살짝 받은 거라서 얼마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수 백 만원이 나온 거예요. 그래도 끝까지 다 물어 줬대요.
끝까지 웃는 얼굴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면서 다 해결을 해 줬답니다.
그렇게 다 해결해 줬는데도 나중에 헤어지는데 자기가 너무 놀라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해 달라고 하면서 십 만원을 더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줬대요.
그리고 돌아서는데 “젊은 놈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너 뭐하는 놈이야?”
그러더래요.
그래서 저 “서울지검 몇 호 검사입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딱 얼어붙어 가지고 아무 말도
못하더랍니다. 그리고 그냥 왔대요. 제가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병신“ 그런 인간들은 혼을
내줘야지 어떻게 그렇게 당하고 오냐”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속은 좀 후련했겠지요?
아닙니다. 그렇게 참을 수 없을 때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모세의 시편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 682 -
인생이 길어야 70이고 강건해야 80인데 그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꽃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날아가고 있다. 이제 곧 하나님 앞에 서서 내 저지른 모든 것이 드러날 텐데,
그 순간을 준비하자. 이게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를 보니까 워치만 니의 제자 이야기를 예화로 써
놓으셨더라고요. 그 사람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는데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저 아래
저수지에서 수차를 돌려서 겨우 겨우 물을 댈 수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한 번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거의 한 나절을 꼬박 그 수차를 돌려야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논에 물을 대
놓으면 바로 아래 논 사람이 물꼬를 살짝 터서 자기 논으로 물을 다 대더라는 것입니다.
매번 그렇게 하고 나면 이 사람은 다음 날 다시 수차를 돌려야 하고 너무 힘들었대요.
그런데 아래 논 주인이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한데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묵묵히 참았대요. 그런데도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교회 사람들과 상의를 했답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따끔하게 알려줘야 합니다.“그랬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어떤 분이 일어서서 ”여러분,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을 한번 해봅시다. 당신 논에 물을 대기 전에 먼저 그 사람 논에 물을 대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논에 물을 대세요.“ 하시더랍니다. 아무 말 없이 수차례 그렇게 하고 나자 그 아랫집
사람이 예배당에 나타났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요? 아닙니다. 이게 겸손이요 온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덕목이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긴 시련“ 그렇죠?
어떤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인내를 배우고 싶습니다. 제가
인내를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즉시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이 형제에게 지금 즉시 큰 환난을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시더랍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화가 나가지고 “목사님 제가 인내를 배우게 해 달라고
했지 언제 환난을 당하게 해달라고 했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로마서 5장3절을
읽어주셨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편할 수가 없어요. 겸손해야죠, 온유해야죠, 인내해야죠.
언제 편할 날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음 덕목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우리가 공부를 할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아셨죠?


남들이 다 엉터리로 산다고 해서 여러분, 우리도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경주해 내야 합니다. 다른 엉터리 같은 종교 행위 뒤로 숨지 마시고 ,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뒤로도 숨지 마시고 여러분의 손과 발을 움직여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지금부터 사십시오. 죄를 죽이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관용과 사랑과 하나 됨을 지켜
내십시오.

- 683 -
(55) 힘써 지키라
(엡4:1-6)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는 지난주에 에베소서는 3장까지에서 교리를 설명하고 있고 4장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생활에 관한 행동강령을 기술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믿어야 할
것들(credenda)에서 행해야 할 것들(agenda)로 초점이 옮겨지고 있는 것이죠.
그 처음 서론 부분으로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 어떤 삶인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서론 부분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악시오스”라는 단어에 관해 자세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합당한“”악시오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는 단어라고
했지요? 그 첫 번째가 “조화의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천칭 저울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해드렸죠. 교리라는 입력정보가 들어가면 반드시 합당한 삶이라는 출력 정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선택된 단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어울림의
사상”이라고 그랬어요. 우리의 성별이나 나이나 생김새에 걸 맞는 어울리는 옷차림이 있는
것처럼 우리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도 어울리는 삶이 있으며 우리는 그 삶을 살아내야 함을
그 “악시오스”라는 단어에서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관용,
하나 됨을 힘써 지킴”등을 사도는 나열해 놓고 있음도 공부했습니다.
사도가 4장 이후부터 성도들에게 주지시키고 싶은 행동강령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4장1절부터 16절까지가 교회의 통일성에 관한 내용이고 4장17절부터 5장 21절까지가 교회의
순결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종합해서 한 단어로 표현을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 됨” “통일”입니다. 1장 공부할 때 배웠죠? 우리 1장10절을 한번 보고 가죠.
(엡1:10)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신 이유와 목적이 나오죠? 뭡니까? “통일” “애나케
팔라이오” “하나 됨”입니다. 한군데 더 보죠. 요한복음 17장입니다.
(요17:11,21-23)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 684 -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역을 완성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 됨“”연합“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하나 됨을 통해서 어떤 일이 결과로 일어나게 됩니까?
23절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 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져 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셨다는데 그게 어떤 하나 됨입니까? 어떤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연합, 하나 됨, unity가
무엇입니까? 조직적인 연합, 조직적인 하나 됨입니까?
실제로 그렇게 된 적이 있었죠? 언제입니까? 중세시대입니다. 그 때는 교황을 머리로 해서 전
세계 교회가 하나였습니다. 그 때 세상이 교회의 하나 됨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까? 당시의 상황을 스펄전 목사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파쇄 적이고 폭군적이고 미신적이고 무지한 것, 이른바 기독교라고 불리는
그 종교와 진짜 하나님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해서
동서남북 어디에서든지 진정 지성적인 신자를 발견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조직적 하나 됨을 이루어 냈던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기독교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조직적인 하나 됨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인데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 됨“이 ”획일화“입니까?
모든 교파를 초월해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장로 교인들이 침례교인들 수십만
명을 물에 수장시켜 버린 것을 아십니까? “왜 너희는 세례를 안 주고 침례를 주느냐?” 가
이유였습니다. 수많은 장로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례 교인들을 배에 태우고 강 가운데로
가서 그들의 목에 커다란 맷돌을 묶어서 물에 던져 죽였습니다.
“왜 너희는 우리와 다르냐? 하나가 되자” 이게 그 참혹한 살인극의 허울 좋은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 됨이 이러한 획일화입니까? 아니죠?
그럼 조직적인 연합도 아니고 전체를 한 색깔로 맞추는 “획일화“도 아니라면 어떤 연합입니까?
영적 연합입니다. 하나님의 신격 안에 들어 있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같은 연합을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렇게 하나로 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이신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그런 연합과 하나 됨을 지켜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조금 어렵죠?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덕 안에 있는 단일성, 즉 세 분이
일체이시라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지상에서 반영하는 공동체라는 것이죠.

- 685 -
바로 그 영적 연합을 이룰 수밖에 없는 근거가 오늘 본문 4절에서 6절까지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 됨을 지켜 낼 수 있는가?
먼저 3절과 4절을 보시죠.
(엡4:3-4)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령을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하나로 묶어 놓으셨답니다. 여기서 쓰인
“평안의 매는 줄“ ”쉰데스모스”는 “쇠사슬, 끊을 수 없는 굴레“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끊을 수 없는 쇠사슬로 서로 묶여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summers는 그의 에베소서 주석에서 ”성령하나님은 평안과 사랑의 쌍둥이 쇠사슬을 취하셔서
그것을 모든 구속받은 자들을 한 몸으로 묶어 버리셨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하나로 묶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쇠사슬이 어떤 쇠사슬이냐 하면 평안의
쇠사슬입니다. 그 말은 교회는 하나 됨을 힘써 지켜 낼 때 평안하게 된다는 것이죠.
사도는 그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교회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스푸다 존테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헬라어 시제가 현재 분사입니다. 헬라어의 현재분사는 계속되는 진행의 상태를
나타내는 시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푸다 존테스”는 “끊임없이 부지런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스위스에서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칼바르트의
아들 마르쿠스 바르트는 그 단어를 주석하면서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전에 나오는 이 헬라어 동사가 표현하는 절박함을 정확히 번역하여 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이 단어가 요구하는 것은 크고도 큰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서두름과 열정 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 감정, 이성, 육체의 힘 및 모든 마음가짐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모든 힘이기도 하다. 이 단어는 수동적인 태도나 정숙 주의 기다리며 두고 보는 자세
또는 부지런하긴 하지만 여유를 부리는 태도를 모두 배격한다. 당신이 행동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당장 시작하라.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라.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진정으로
말하건대 당신은 이러한 절박함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이 영적 하나 됨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 바르트의
권고처럼 절박함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운 것이,
어차피 듣고 잊어버릴 건데, 이곳을 나가면서 전혀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 버릴 텐데 내가 뭐
하러 이렇게 열을 올리나... 이런 생각이 자꾸 제 힘을 뺍니다. 안 그러실 거죠? 진짜
절박함으로 한번 지켜보실 거죠?
성령으로 하나로 묶인 사람들은 하나 됨을 힘써 지켜 가면서 “우리는 정말 하나구나,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정말 똑같구나.” 하는 확인을 하게 되고 그 확인 속에서 평화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4절부터 6절까지에서 일곱 개의 “하나”를 동원해서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를 설명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일곱 개의 개념을 동원한 것을 들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수, 완전수”를 동원해서 교회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신성의 완전함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흥미 있는 지적이지요.
잘 보시면 4절에 세 개 5절에 세 개 6절에 한 개 이렇게 나옵니다.

- 686 -
4절의 세 개는 성령 하나님께 대한 것들입니다. 5절의 세 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6절에서 성부 하나님을 등장시키고 전체를 종합하는 듯한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그림을 미리 그려본다면 그 세 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하나님께서 오셔서 비로소 완성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성자께서 이루신 일이
없었다면 성령하나님은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지 않았으면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성령, 성자, 성부 하나님의 공조 하에 탄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교회는 통일성을 지켜야 한다.” 라고 웅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짚어 볼까요?
그 일곱 개의 “하나”들 중에서 사도가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이 (교회는 “한 몸”이다)입니다.
(엡4:4)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을 하고 나서 인간에게 나타난 죄의 대표적인 결과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주관주의”죠. 다른 말로 “이기주의” “개인주의”입니다.
죄인들은 그렇게 전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삽니다. 다른 이들과 협조나 공조를 하더라도
그게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절대 서로를 돕지 않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을 건져내셔서 한 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유기체는 어느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온 몸이 함께
아플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서로 협조나 공조(公租)를 안 하면 존재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2장을 공부할 때 “한 몸”에 대해 자세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론
설교에서도 한번 다뤘던 내용이지요? 대표적인 구절을 한 군데만 찾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고전12:13-26)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687 -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 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우리는 이렇게 각자가 독립적인 생명체라는 개념을 잊어야 하는 것입니다. 손과 발과 머리와
다리가 서로 각각의 생명체인데 필요에 따라 결합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 대해
독립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한 몸입니다. 누구는 중요하고
누구는 중요하지 않은 그런 구별이 있을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한 몸을
이루자“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공조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장 소홀하게 다루는 데가
어디입니까? 항문입니다. 얼굴이 항문더러 “야 너는 왜 그렇게 더럽고 늘 추하냐?” 고 이야기
할 수 있나요? 어느 날 항문이 마음을 굳게 먹고 “오늘부터 한 달간 나는 아무 것도
통과시키지 않겠다.“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조롱하던 예쁜 얼굴이 누렇게 뜨고 피부 트러블이
생기고 그렇게 됩니다. 교회는 그렇게 모두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서로에게 소중하게
도움이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가 “한 성령”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에 의해 새 사람으로 탄생이 되었고


지금 그 한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수많은 악령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한 분 성령님에 의해 탄생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한 분
성령님이 교회 전체의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한 영이 흐르는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다른 영을 받은 사람들처럼 예수를 믿습니다.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목표를 향해 경주를 해야 하며 한 가지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한 인격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고린도 전서 12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고전12:13)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성령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은 열매도 같은 열매가 맺혀져야 한다는 사실로 귀결이 되지요?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맺으시는 것이니까요.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언제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매들이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혹시 세상에 무수한 다른 악한 영을
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비교해서 다른 영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5:16-21)

- 688 -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지금 어떤 열매가 나오고 있는지 확인하세요. 분명 성령은 한 성령입니다.
이 구절에 관해서는 우리가 여러 번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자세하게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살펴보고 가지요. 20절에 보면 악령의 열매로 열거된 것들
중에 “우상숭배와 술수“가 있지요? 헬라어로는 ”에이돌롤 라트리아”“파르마케이아”인데 이
단어들의 뜻은 “악의 권능을 빌리거나 악의 세력과 결탁해서 피조물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예배를 하도록 사람을 속이는 기만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라는 것이 뭐겠습니까?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것들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성령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은사도 받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돕게 되는 것입니까? 성령이 왜 오셨습니까?
그럼 다른 질문을 드릴게요. 성령이 언제 영원히 인간을 떠나셨습니까?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복의 근원이셨던 성령께서 언제 인간을 떠나게 되었습니까?
(창6:1-3)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 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인간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새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신을 인간들
속에 영원히 부어 넣으셔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겔36:24-27)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 689 -
그렇죠? 어떤 무리들에게 성령이 영원히 거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새 언약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다른 말로도 표현을 해 놓았는데 예레미야서로
가보지요.
(렘31:33)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성령이 오시는 것을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긴다.”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성령이 왜 오신다는 겁니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분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해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그 일이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율례를 기쁘게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짜 성령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정확한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엉터리 같은 다른 영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기적이다, 능력이다“ 하면서 사람들을 우상숭배와
술수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개혁주의 목사님들까지 성령 운동에 열을 올리고 계신데 여러분도 성령 충만
받고 싶으세요? 도대체 성령 충만이 뭡니까? 내 안에 와 계신 성령이 점점 자라서 내 안에 꽉
채워지는 것입니까? 성령 충만이 뭐예요? 성령 충만이 뭐 길래 성령 충만의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2류 신자라고 서슴없이 말들 합니까?
(엡1:23)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합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엡4:8-10)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죠.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누구세요? 성령
하나님이세요.
(빌1:19)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표준 새 번역)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성령이)도와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 690 -
‘충만’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에베소서 1장 23절을 풀어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교회는 성령의 ‘충만’이니라“가 되지요?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으시다 면 여러분은 이미 성령 충만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성령 충만의 결과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무슨 성령 충만을 또
바라세요. 이제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면서요? 그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한 성도가 맞으시다 면 여러분은 이미 “성령 충~만“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령 충만함을 입은 자들로서의 신분에 맞는 열매를 당연히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라든지 신비한 체험이라든지, 놀라운 은사를 열매로 내 놓는 사람들은 전부
다른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어쩌면 악령의 속임수일지 모릅니다. 잘 구별하세요.
우리에게는 오직 한 성령만이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 한 성령에 의해서 탄생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세 번째가 한 소망입니다.
그렇게 한 성령에 의해 태어난 교회는 같은 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만사형통, 문제해결, 일확천금, 질병치유“ 이런 소망입니까? 분명 한
소망이라고 했는데 같은 종류의 소망이어야 하잖아요? 다른 여러 종류의 소망들이 있다면
에베소서 4장 3절은 성경에서 지워 버려야죠. 우리가 가져야 할 ”한 소망“이 뭘까요?
(골1:27)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의 소망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딤전1:1)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한 소망”
(딛1:2)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3:7)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한 소망입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바라보고 경주해 가는 소망입니다.
(롬8:24-25)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보이는 소망을 소망하는 자들은 다 뭐라고 합니까? “가짜다“ 그러죠?
(딤전6:17-19)

- 691 -
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로 말미암아 얻어 낼 어떤 물질 적인 것들을 소망하는 것은 참 된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왜요? 소망은 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소망을 바라보며
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한 소망“이 가지는 또 다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의 과거의 상태를 뒤돌아보거나 그것에 집착해도 안 되며 자신의 회심의 경험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기 다가오는 소망을 바라보며 가는
자들이지 과거에 집착해서 괴로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하거나 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의 강해에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과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 그리고 존 스토트
목사님 세분 다 인용을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John Macneil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하셨는데 그 분이 설교 가운데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두 사람의 소경들의 대화를
가상적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한사람은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고 다른 사람은 마가복음
8장의 소경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서 고쳐 주셨고 마가복음 8장의 소경은 그냥 고쳐주셨습니다. 눈을 뜬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 마가복음 8장의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발라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 때 기분이 어떻던가요?”
마가복음 8장의 소경이 말합니다. “진흙이라뇨? 저는 진흙 안 발라 주셨는데”
“아니, 진흙도 안 바르고 눈을 떴단 말입니까?” “그럼 당신은 가짜입니다” “주님은 분명
진흙을 발라서 소경을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마가복음 8장의 소경이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가짜입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바르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싸우다가 초대 교회가 진흙파와 비 진흙파가 갈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말씀을
예화로 드셨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저처럼 할
것 안 할 것 다해 보고 돌아 온 사람도 있고 아주 어려서부터 얌전하게 이삭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아내 운전해 주러 왔다가 너무 더워서 에어콘 바람이나 쐬자고
들어 왔다가 회심한 사람도 있고 구봉서 장로님처럼 어머님 예배당 모시고 와서 뒤에서 골프
퍼팅 연습하다가 주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이제 한 소망을 바라보며
한 곳 만을 바라보며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들에게는 우열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이제 모두 평등한 하나가 되어서 한 곳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끝나고 바울은 5절부터 성자의 사역으로 넘어갑니다.
(엡4:5)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먼저 “주도 하나이요”부터 볼까요? “한 분 주님”이라는 뜻이죠.
요즘은 종교 다원시대가 되어서 주님이 참 많습니다. 공자, 맹자, 석가, 마호멧 인간들이
만들어 낸 주님이 참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일렬로 줄 서 계신
여러 주님 중의 한 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신학자들이나 목사들까지도 많이

- 692 -
그 사상에 물이 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는 그저 많은 위대한 박애주의자들 중의 한 분으로 혹은
많은 성인들 중의 한 분으로 전락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간과했던
교회가 있었죠?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전1:12)
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와 한 줄에다 세워 놓고 편먹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고전8:6)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행4:11-12)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 주님,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모두 한 분 주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한 분
주인으로부터 한 명령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 분이 어떤 주님이시죠?
(빌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원수들을 위해서 죽으신 주인님이십니다. 그 주인께서
우리에게 자기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가셨습니다.
(눅21:12-19)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마5:11-12)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 693 -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리로 부르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처럼 억울하게 당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부르심의 소망에 합당한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고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가셨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사도행전을 공부할 기회가 있으시면 한번 잘 보세요. 요즘 새벽기도 때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는데 잘 보시면 사도들이 핍박을 받는 장면을 누가가 예수님의 핍박
장면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들과 동일한 장면들을 동원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해야 함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주인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공부를 했으니까 깊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교회는 “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과 내용을 바르게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런 분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겨도 안심이다”하고 항복을 하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인격에 항복시키시는 전 과정을 우리는 “믿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객관적인 믿음에 의해 우리가 주관적인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처럼
그 믿음 위에 “할례나, 안식일 문제”등을 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습니다. 그건 “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알매니언 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주장은 “한 믿음”이 아니죠.

그리고 여섯 번째가 “한 세례“입니다. 이 세례에 관한 것도 우리가 여러 번 공부를 했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뭡니까? 옛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새 사람이 탄생되었다는 징표로 우리가
세례를 행합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표현을 하지요? 애굽 쪽에서 보면 그들이 바다로 들어가서 다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나안 쪽에서 보면 새로운 사람들이 바다에서 살아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세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새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을 인증 해 주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벧전3:18-21)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 694 -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여기서 세례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노아 시대 때 비가 내려서 모든 죄인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물이었지만 어떤 사람들, 즉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그들의 배가 뜨게 되는 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은 다 빠져 죽고 의인이
살아남는 것을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부 죽었다가 살아난 한 경험을 한
자들이기 때문에 “한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 서로에 대해 분열의 칼을 휘두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
안에서 하나로 통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10-13)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어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바울 파다 아볼로 파다 게바 파다 이런 분파를
만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전12:12-13)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 세례는 이렇게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인으로 살아난 자들은 어떤 통일된 결과물들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뭡니까?
(롬6:1-7)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 695 -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표징이 뭡니까?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죄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세례를 받은 자의 표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죽은 자들, 세례를 받은 자들은 반드시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기는 받았는데 여전히 죄와 함께
뒹굴기를 좋아하는 그런 세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세례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갈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한 세례”를 받으신 여러분, 열심히 그 “한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가 4절에서 시작한 위대한 말씀을 6절에서 종결짓습니다.


(엡4:6)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보시다시피 마지막 일곱 번째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권유의
말씀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지금까지 보신 것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를 일곱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고 그것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처음에 세 가지가 성령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두 번째 세 말씀은 성자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는 최고 절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언제나
성령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서 멈추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까지
갑니다. 로마서에서도 11장까지에서 복음의 교리를 잘 설명한 다음 어떻게 11장까지를 결론
맺습니까?
(롬11:33-36)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에 대한 영광의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자주 실수하는 것이 우리는 너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에만 관심을 둡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까지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벧전3:18)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696 -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께 우리를
인도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목표로 하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목표 지점을 자주
놓칩니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서 이 땅에서 분투하고 경주해야하는
경주자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들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언제 구원을
받았으며 어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멈춰있습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것이 “당신 언제 구원받았어?” “방언 할 줄 알아?”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쓰러지는데 당신은
안 쓰러져?” “혹시 믿음이 너무 모자라고 어린 것 아냐?” 뭐 이런 것들만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엡1:3-10)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한 줄에 한 번씩 나오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체의 주어가 뭡니까?
3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가 전체의 주어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께서 끝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모든 것을 운행하시며 모든 것의 결론이 되시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 4장과 5장을 공부하면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통일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죠? 네 우리는 바로 그 “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분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6절을 계속보시면 아주 중요한 통일성의 근거가 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6절을 보세요. 그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다음에 어떤 구절이 붙어있습니까?
(엡4:6)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697 -
만유의 아버지 “파테르 판톤”입니다. 이 구절에서 만유“파스”라는 단어가 중성이 아니고 남성
형용사가 쓰였습니다. 그 것은 이 “파스”가 온 천지 만물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포함시켜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요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타락한 죄인들의 아비는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의 아버지입니까?
교회의 아버지입니다. 이 6절은 그 한 분 하나님께서 교회의 아버지시며 교회를 통일하시는
분이시며 교회 위에 계시며 교회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한 분 하나님의 큰 계획이요 설계이며 하나님의 모든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분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분열하고 다투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분열하지 말고 하나 됨을 지켜내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 됨을 지켜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 아셨습니까?


몸이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시고 소망도 한 소망이고 주도 한 주요,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교리는 한 색깔만을 띄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목적지를 향해서 서로 서로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끼리 다투지 말자고요. 내 안에서 울컥하고 분이 올라오고 화가 올라올 때
우리가 지켜내야 할, 하나 됨을 꼭 생각하십시오.

- 698 -
(56)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엡4:1-6)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는 지금 에베소서에 기록 된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agenda)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교리에 근거해서 교회의 하나 됨과 교회의 순결함을 힘써 지켜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앞으로 세 장에 걸쳐서 더욱 더 자세하게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게 될 때 자칫 잘 못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과 위선에 빠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외식과 위선은 오히려 세상을 더욱 더
어둡고 춥게 만듭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에서 도덕 적, 윤리 적 설교가 행해지고 있고
교인들은 바르게 살겠다고 결심들을 하는데 여전히 세상은 이렇게 어둡고 오히려 더 살벌해
지고 추악해 지는 것을 보십시오. 도덕 적 윤리 적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외식 적이며 가식적인 행위와 참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겠지요? 오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경 적인 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삶이 성경 적이지 못한 삶인지도 아울러 살펴
볼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번듯하게 살아낸다 할지라도 그게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겁니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 영국의 국교회 성도들이 유럽 전역을 떠돌다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 대륙인 미국 땅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필그림스 파더스“라고 부르지요. 그들이 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한
것이 늦가을이었습니다. 겨울을 날 양식과 집이 없었던 그들은 그 한 겨울 동안 반 이상이
굶주림에 그리고 얼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시 이 미국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
청교도들에게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감자와 옥수수를 양식으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땔감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살아남았던 그 청교도들은 “우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큰 빚을 졌다“ 고 술회를 했습니다. 그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첫 해에 감자와 옥수수를 추수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게 오늘날의 추수 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왜 그렇게 훌륭한
청교도 신앙인들의 목사님들이었던 리챠드 벡스터나 존 오웬, 그리고 리차드 십스 목사님 같은
분들이 왜 ‘회심’이나 ‘죄 죽이기’‘돌아오는 배역 자’같은 책을 쓰셔야 했는가?“였습니다. 그런

- 699 -
훌륭한 신앙인들의 목사님들이 왜 “당신들 회개하라, 죄를 죽여라”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당신들의 책에서 그 당시에도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드물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왜 청교도들을 그렇게 도와 준 천만 명이 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청교도들의 후예인 백인들에게 떼죽음을 당했는가?”입니다.

1616-1619년까지 미 동북부 지역 뉴잉글랜드에서 큰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 지역의


인디언들이 거의 멸종이 되다시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에 미 대륙에 상륙한
청교도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미개한 인디언들을 청소해 주셨다”고 이해를 했습니다.
당시의 청교도 목사였던 윌리암 브랜든 목사의 설교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설교집 안에
들어 있는 그 목사님의 기도의 내용을 잠깐 인용을 해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살 곳을 그 분의 섭리 가운데 놀라운 방법으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사자인 전염병을 보내주심으로 인디언 번식의 씨가 될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을 중점적으로
효과적으로 죽여 주셨습니다.” 청교도들이 세운 교회 목사님의 기도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것도 칼비니즘, 개혁 신앙을 좇아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이 이렇게 이기적이며 파괴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이기적인 발상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 중반까지 기독교 선교는 식민주의를 통한 선교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강대국인 기독교 국가가 약소국가를 침략해서 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뒤이어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그러한 식민주의 선교를 통해서 많은 나라들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졌습니다.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이러한
나라들이 전부 식민주의에 의해 기독교화 되었던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나라들이
예수를 잘 믿고 있습니까? 거의 100% 이슬람에게 다 넘어갔습니다. 그것은 이 식민주의에
의한 선교가 절대로 잘 못 된 방법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민주의를 통해 선교를 하다보면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입니다. “그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교회의
교황이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세계 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이 Doctrine of Discovery 라는
교황청의 교리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새롭게 발견한 땅은 그 발견한 나라에 소유권이 주어진다. 그
소유권에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생명과 모든 재산까지도 포함 된다” 이것이
Doctrine of Discovery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며 용서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가르치는
교회가 이러한 식민주의를 처음 주창하고 지원했다는 것이 믿겨지십니까?
이 괴상한 원리가 언제 처음 발효되었느냐하면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 때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스 5세가 포르투갈 왕에게 웨스트 아프리카로 가서 사라센 세력, 즉 이슬람
교도들을 모두 몰아내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의 모든 소유와 토지를 다 몰수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 사람들을 전부 붙잡아다가 노예로 삼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이것이 Doctrine of Discovery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1492년에 콜롬부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갔을 때에도 당시 교황 알렉산더6세가 “인터세트라”라는 칙서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 700 -
콜롬부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의 그 일부분의 모든 원주민과 그 원주민의 재산을
포르투갈에게 준다는 칙서였습니다.
왜 제가 이러한 과거 역사를 들추어내는가 하면 “아메리카 대륙이나 캐나다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 있는 원주민들이 그렇게 정복자들에게 수 천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게끔 권한을 준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가 그 학살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처음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이 되었을 때는 미국에 동부의 작은 13개 주밖에 없었습니다.
그 13개 주를 기초로 해서 미국이 영국으로 독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서쪽으로
서쪽을 땅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레곤은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고 중부의 넓은 땅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땅들을 미국이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청교도의 후예였던 당시 미국의 “디모크라틱 리뷰“라는 유력한 신문의 편집장인 ”죤
설리반“이 ”매니페스틱 데스티니“ ”명백한 운명론“이라는 논설을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인들이 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미국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백인들에게 부여하신 권리다“라고 지리적인 예정론을 그의 논설에 실었습니다.(geographic
predestination) 그러니까 이 미국 땅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백인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하신
땅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방해가 되는 인디안 들은 모두 죽여 없애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거룩한 전쟁“”Holy War"라고 명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그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28절이었습니다.
(창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온통 자기들만을 위한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 원주민과의 전쟁을 구약의 가나안 정복 전쟁과 동일시했습니다.
자기들은 선민이고 인디언들은 가나안 족속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멸절 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후예라고 하는 백인들은 천만 명이 넘는
인디언들을 학살하고도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매니페스틱
데스티니”는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을 거의 짐승 취급을 했던 노예 제도로 이어졌고
“racism""인종차별”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조지휫필드 목사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흑인 노예가 있었다니까 얼마나 그 “메니페스틱 데스티니“가 편만하게
퍼져있었는지 아시겠지요? 당시 백인들이 흑인들을 그렇게 홀대할 때 미국 남부의
침례교회들(southern baptist)교회가 강단에서 그 인종차별을 소리 높여 지원한 것을 아십니까?
왜 청교도들에 의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이 나라에서 그러한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날까요? 왜 자기들이 쓰는 돈에 까지 “In God we trust"라고 기록하고 있고 저마다 차
뒤꽁무니에다가는 ”God bless America“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처럼
엉뚱한 개인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에 빠져 있을까요? 그리고 왜 교회들은 그 때마다 입을 닫고
그러한 폭력들을 묵인하거나 암암리에 동조를 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이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당시 가장 복음 적이라고
자처했던 독일의 교회가 그 “헤렌라신” “아리안 민족 우월주의”를 지지한 것을 아십니까?

- 701 -
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는 교회들이 그러한 터무니없는 엉뚱한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사수하겠다고


나섰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역사에 그려진
교회의 열심이 맺은 열매들이 이 모양입니까? 왜 존 오웬이나 리차드벡스터 같은 청교도
목사님들이 그렇게 무섭게 청교도들을 몰아세워 야단을 쳐야 할 만큼 교회가 엉뚱한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을까요?
아니, 이제 멀리서 예를 찾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고요. 왜 우리는 그토록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종교행위도 열심히 하는데 어떤 결정적인 중요한 선택을 할 때는 늘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됩니까?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안 바뀌죠? 남이 볼 때는 착한 일도 하고
교회 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왜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런
일을 저지른 것만 생각이 납니까? 때로는 두렵기도 하죠? “내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맞기는
맞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세계관이 변하지 않은 채 엉터리 열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에 대한 문제는 지난번에도 한번 잠깐 다루었지만 오늘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세계관이 뭡니까?
동물들은 자기의 본능을 따라 삽니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싸고 싶으면 쌉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선택을 하며 살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떠한 관점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내 삶 속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하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인간과 인생과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인간은 자기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간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1)우주와 세상의 기원과 구조가 무엇인가?
2)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나는 누구인가?
3)인간과 이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가 무엇인가?
4)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은 인생을 살면서 마음속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는
관점들을 정립하게 됩니다. 그 것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모두 우리의 세계관에 의해 표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마치 우리가 쓰는 안경과 같은 것입니다. 녹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세계관이 어떤 세계관이냐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은 우리가 나면서부터 하게 되는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서 정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뜨거운 난로는 맨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내가 확고하게 붙들게
되기까지는 그 난로를 만져서 혼이 난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수많은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인간은 전부 자기 무의식에 저장을 합니다.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상황들에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들을
모조리 저장해 둡니다. 그것을 “이성의 합리화 작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모여
나의 세계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계관은 나에게 꼭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 702 -
자신의 세계관에 의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과 어떤 집단의 세계관이 오랜 시간 어떤 공동체의 사회나 문화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리가 “시대정신”이라고 부릅니다. 7,80년대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민중운동”이라든지 지금 대한민국을 끌고 가는 “투쟁”의 정신 같은 것, 뭐든지 “투쟁”으로
풀려고 하지요? 7,80년대를 살아오면서 작은 힘들이 모여 투쟁을 하게 되면 큰 세력이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험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시대정신이 “투쟁” “쟁의”같은 것들입니다. 그 것들은 아주 작은
시대정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정말 커다란 시대정신이 있습니다. 전 세계, 심지어 공산
국가들까지도 열광하는 시대정신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라는 시대정신입니다. 그러한
시대정신을 성경은 “세상 풍속”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너희는
세상 풍속을 좇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세상 권세 잡은
마귀의 세력이 인간들을 미혹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성경적 세계관과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렇게 경험에 의해 단단하게 굳어진 세계관에 의해 가치관이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의해 행동양식이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제일 가운데 세계관이 있고 그 다음에 가치관이라는
가치 체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 행동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관이
변하지 않으면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행동양식이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관의 변화가 없이 행동양식만을 바꾸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혼합주의(syncretism)이라고 합니다. 겉만 바뀌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깨끗하게 보이려고 한다던지 종교적인 형태만을 추구하는 것을 혼합주의(syncretism)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설교들을 듣고 그렇게 깨끗하게
사는 흉내를 내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만족하고 하나님 앞에 떳떳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결정적인 선택을 할 때는 성경 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 혼합주의를 우려하는 것입니다.
이 혼합주의라는 말은 선교 학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서는 원래 그들이 갖고 있던 정령사상이나 무속신앙이 혼합되어져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이가 몹시 아프거나 사업이 어려워지면 부적을 사서 붙이기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하는 그런 것을 혼합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결혼을 앞 둔 많은 청년들과 그 부모들이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궁합을 보고
날을 받는 것을 아십니까? 심지어 교회 자리를 잡아달라고 점쟁이를 찾아 간 목사님도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신앙고백을 똑같이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종교행위도 열심히 하는데
어떤 한계 상황에 부딪치면 항상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을 해 버리는
것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일론 신자라고 합니다. 나일론 양말이 나오기
전에는 전부 면 양말밖에 없었습니다. 그 면양말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일론이
나오니까 남녀노소가 발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가지고 돌려 신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나일론입니다. 어떨 때는 성경 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가 어떨 때는 엉뚱한 비 성경 적 세계관으로 엉뚱한 선택을 하는 그런 사람들을 나일론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일론 신자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종류는 아예 가짜

- 703 -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른 한 종류는 신자는 신자인데 아직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유아기 신앙인들은 아직 아기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비 성경적 세계관인
세상의 시대정신을 따라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편만하게 퍼져있는 혼합주의가 뭡니까?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입니다. 예수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세상 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자기의 직장문제라든지 경제적 이익이 걸린 문제라든지
자녀들의 학업에 관한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걸리면 금방 힘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무서운
혼합주의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없는
엉터리 혼합주의가 그렇게 기독교 역사에 많은 오점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혼합주의가 있어왔지만 이 힘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가장


대표적인 비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그 물질주의는 더욱 더 인간들을
사로잡았고 급기야 오늘날에는 그 물질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시대정신이 된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뭡니까? 르네상스는 사실 중세로부터의 탈출이라고 명명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세는 AD500년 경부터 1500년경까지 약 1,000년 동안을 중세시대라고 합니다. 그 때는
교황이 세계의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법이 곧 세상의 법이라 할 만큼 교회의 영향력이
컸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마귀의 일로 풀어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인간들은
참으로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을 했던 때입니다. 그 때는 모든 질병을 하나님의 징벌이나
마귀의 시험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낫게 된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었습니다. 그렇게 1,000년을 살다보니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그렇게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나왔습니다. 뉴턴이나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 억제되어있던 인간 이성에 불을 붙였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천둥이나
번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구름이 부딪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의학이 발달하면서 병은 세균 때문에 오는 것이지 마귀나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것들을 발견한 인간
스스로에 대해 대단한 기대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과거에 맹목적으로 믿었던
하나님을 폄하하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부터 성경에 나오는 우리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적 같은
사건들도 하나하나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점차 어떤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인간들은 점차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점차 좋은 쪽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역사 진보주의라고 합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의 종착역을
멸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인류 역사는 목적지가 있는데 그 목적지는
멸망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 성경적 역사관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이성을 존중하는 사상이 시대정신이 되고 역사와 사회는 점차 진보할 것이라는
역사 진보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자 인간들은 점점 초월적인 영역에 대해 회의를 갖기

- 704 -
시작했습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기원과 근원을 물질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것을 유물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초월적인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올려놓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물질에서 찾으려고 하는 시대정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을 “자연주의”라고 합니다. 이 자연주의를 잘 기억해 두세요. 기독교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대표적인 시대정신입니다.

그러던 차에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써서 “진화론”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그 학설은 당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와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할 것이라는 철학과 사회학 적 진보사상이 시대정신을 이루고 있을 때에
“생물학 적인 진화론”이 등장하니까 인간들은 기고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더욱 멋지게 진화해서 엄청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역사 낙관주의”라는 시대정신이 발화했습니다. 그러한 역사낙관주의에서 비롯된
가장 비극적인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이 땅에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진보할 것인데 그 진보의 정점에 있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150년간 이 세상의 모든 지성인들은 공산주의에
열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말기부터 시작해서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송구영신 예배 때 다뤄
보겠습니다.
그렇게 역사적 진보사상과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낙관주의라는 시대정신에 빠진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진화론의 기본 뼈대가 뭡니까? 적자생존, 약육강식,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는 힘의 원리입니다. 많이 가진 자, 힘 있는 자, 지식으로든 물질로든 많이
소유한 자가 월등하게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힘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훨씬 앞선
문명과 문화를 갖고 있는 인종은 그렇지 못한 미개한 자들을 밟아서 없애버려도 된다는
시대정신이 세상 사람들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들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진화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자기네 인종이 저 미개한, 검고 누런 인종들을 지배하거나
계몽시키거나 짓밟거나 아니면 죽여 없애도 된다는 행동양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찌 독일의 히틀러도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에 물들어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아리안 족이
진화의 꼭대기에 있는 종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아리안 족으로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찌 독일의 골수 장교들은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되었습니다. 많이
낳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가 되는 유대인들은 모조리 씨를 말려 죽여 버리겠다는
것도 당시의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어때요? 마귀가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이리
저리 끌고 다니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실 수 있지요?
오랜 세월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러한 힘의 원리라는 시대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 교회는 커져야 하고,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목사는 이왕이면 훌륭한 학벌을
소유해야 하고, 장로는 돈이 많아야 하고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그런 엉터리 같은 사상이
교회의 세계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 적 세계관이 세상의 시대정신을 부수고 세상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데 인류의 역사 내내
거꾸로 시대정신이 기독교 세계관을 지배했던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러한 시대정신에 미혹되지 말고 거기에 물들어 버린 너희의 세계관을 바꾸라“

- 705 -
(롬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 보시면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라는 말이 있지요? 세상에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어떤 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틀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붕어빵이 붕어빵 틀에
들어가면 모조리 똑같은 붕어빵이 되어서 나오듯이 우리도 그러한 시대정신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똑같은 엉터리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롭게 변화된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이렇게 정확합니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힘의 원리, 물질주의, 성공주의 이것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에베소서 4장 이하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양식을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 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낸다고 해도 간디보다 더 잘 살아낼 수 있을까요?
슈바이처보다 더 헌신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양식은 얼마든지 거룩하게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들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까? 세계관의 변화에 의한 행동의 변화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착하게 성실하게
순수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계관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심히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다듬는다면 우리는 뭐가 되는지 아세요?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계관이 무엇이며 어떤 세계관이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에베소서 4장 이하를 열심히 공부하고 달달 외운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세계관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알아야겠지요?
여러분, 제가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저 우주에는 7X10의 23승개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별들이 전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위해 한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을 믿으세요?
힘의 원리를 추구하는 자연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물질들이 빅뱅에 의해 존재케 된 것이지 어떤 초월적인 영역이 있고 그 곳에 계신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창조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끝나면
인간은 소멸되어 버리게 되고 역사도 목적 없는 직선적인 해프닝의 나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우주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 뿐 만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요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15-16)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 706 -
창조되었고
(시8:3)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히11:3)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니라)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천지 만물)이 전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가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 우주와 세상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영역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 목숨을 걸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가 끝이기 때문에 여기서 기필코 성공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남들 눈에 보여 지는 의식주의 해결이 인생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가 가진 소유와 물질, 그리고 지식으로 평가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게 성경적 세계관과 가장 상극이 되는 자연 주의 라는 시대정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자연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성경적 세계관을 먹어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초월적 영역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 자연주의자들과 똑같이 삽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계관, 성경적 세계관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재능을 갖고 있고
얼마나 많은 힘을 소유하고 있고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착한가?”로도 그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인간을 평가할 때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죄와 허물 속에서 살아난 자인가? 아닌가?“로만
평가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윤리는 세상 윤리와 다릅니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합니다. 그게
선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라 하면 거짓말해야 합니다. 그게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금수와 모든 아말렉 사람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 왕 아각과 살진 양과 소를 살려서
데려 왔습니다. 의도는 좋았지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살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사울은 그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폐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살인을 명하시면 살인을 해야 합니다. 그게
기독교 윤리관입니다.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지역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 때 다윗이 그 곳에 가면 제가 오해를 받아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하니까, 그럼 제사 지내러
왔다고 거짓말하라고 하십니다. 뭐가 선입니까? 뭐가 윤리입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 707 -
하는 것이 선이며 기독교 윤리입니다. 우리가 이 에베소서 4장 이하를 공부하면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수많은 윤리적 도덕적 요구들을 대할 때 그 것들을 단순히 “내가 이렇게 살아야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게 될 거야”라고 행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까 열심히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계관을 여러분이 갖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분을 기쁘게 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물질 세계를 떠나 영원한 초월적 세계로 가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삶을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여러분의 세계관은 어떤 세계관입니까?
나이롱 신자로 살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지금 준비하십시오. 그게 신자의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았다면 지금 다 때려치우시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 내면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를 간절하게 구하세요.
그리고 여러분 인생의 수많은 경험들이 여러분의 그 딱딱한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처럼 이제
성경 안에서 다른 경험들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성경 적 경험들이 여러분의 세계관을
바꾸도록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변하기 위해서는 참 된 복음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엡5:26)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행20:32)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돌덩이 같은 우리의 더러운 세계관이 성령께서 들어오심으로 균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실천을 통해 차곡차곡 성경 적 경험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더러운 세계관의 균열이 점점 커지고 마침내는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도 하고 거룩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그 것을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시대정신에 물들어 있는 나의 세계관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고 새로운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기대로 우리는 성경이 요구하는 행동양식을 피 흘리기까지
해 내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자랑을 위해서 성경의 말씀들을 실천하려고 하느냐? 아니면 내
내면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를 위해서 성경 적 경험을 위해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느냐? 이
둘은 천지차이입니다.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이 둘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기독교는 결국 육신
적인 나를 죽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의뢰하는 새로운 나로의 탄생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자랑과 체면을 위해서도 얼마든지 도덕적 윤리적인 노력과 종교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의 원리에 의한 세계관에서 나온 악한 행위입니다.
내가 변하기 위해서 애쓰는 열심과 나의 자랑을 위해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열심을 부리고 계십니까?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아시죠?
(행4:32-5:11)

- 708 -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께서 교회에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오시니까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늘리기 위해 일로 매진하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유무상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때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속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모두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마 당시에 꼭 필요한 돈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이 그 요셉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바나바”는 번역을 하면
“권위자“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 ”권”자는 “권할 권“자입니다. 그리고 ”위”자는
“위로할 위”자입니다.
헬라어로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의 헌금이 대단한 위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옵니다. 역시 그들도 그들의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화를 벌컥
냅니다. “네가 네 소유를 팔아서 여기 안 가져왔으면 그 모든 것이 네 것인데 왜 여기
가져와서 “이게 다”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이게 무슨 뜻 인고하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요셉이
헌금을 하고 나서 바나바라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칭송을 얻은 것을 시기해서 ”자기들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칭송을 얻기 위해서 한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나무란 것입니다. ”왜 너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 709 -
박수를 받으려고 하느냐?” 이것이 사도 베드로의 지적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사망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5장 3절에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지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스스로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헌금 떼먹으면 하나님께 혼난다는 그런 구절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저를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냅니다.“ 하고 자랑을 합니다. 세리는 어떻게 합니까? 감히 얼굴을 못
들고 ”아버지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의 기도가 옳다고
하십니까? ”바리새인은 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행위도 자기의 자랑을 위해
하는 것이면 다 “사망의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눅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왜 사람들이 재물을 쌓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쌓습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힘을 삼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재물과
지식과 권세로 자기의 힘을 삼아 다른 이들에게 자랑을 하려는 자들은 전부 세상 권세 잡은
마귀가 주도하는 시대정신을 좇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처럼 “사망”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엡5:3-5)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여기 보시면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탐심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라고 아주 못을 박아 놓으셨습니다. 탐심은 전부 무엇에

- 710 -
대한 탐심입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탐심입니다. 권력, 쾌락, 입신양명
이런 것들은 전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그런 것들을 탐내죠? 전부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거죠.
제가 지난번에 사랑에 관해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자기를 사랑하세요. 그래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랑을 이런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제가 사랑하라는 자기는 구원이 확인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신분으로서의 ”자기”입니다. 아무리 지금 못나 보이고 찌그러져
보여도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해 놓으신 귀한 자녀이니까 자기를 너무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자기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죄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순결하게,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전히 이 껍데기, 옛
몸뚱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란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나라에 관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입니다.
(민11:4-6)
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굉장히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절하게 고생을 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전부 죽여 버리라는 명령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건져내신 것이 아니라 10가지 기적을 보여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야 하는 사막이 낮에는 거의 섭씨 50도를 오르내리고 저녁에는 거의 영하로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히터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복과 신발을 40년
동안 헤지지 않게 인도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만나가 내려옵니다. 메추라기가
내려옵니다. 목이 마르면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불평했다고요?
그들에게 탐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입과 배를 즐겁게 해 줄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마늘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탐욕을 품으면 자기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립니다. 그 영원을 향하는 눈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가 짓지 않은 집으로 가고 있고 그들이 경작하지 않은 땅에서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리,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 속에 탐심, 물질주의, 성공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자 자기들의 목표지점이
어딘 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 711 -
오늘 내가 먹고 싶은 참외와 수박과 부추와 마늘과 생선을 먹으면 나는 지옥에 가도
상관없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관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내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세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라고 합니다.
(출32:1-4)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 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강림하십니다.
(출19:3-11)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희는 내가 너희를 어떻게 애굽에서 건져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모두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 712 -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에게 확인 도장을 찍어주시기 위해서 직접
시내 산에 강림하실 거라 하십니다. 그리고 20장에서 십계명이 주어지고 18절 19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봅니다.
(출20:18-19)
18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리고 21장부터 31장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하는 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제사법과 제사장들을 세우는 제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러는 동안 산 밑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레 같은 음성과 빽빽한 구름과 불타는 산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켰습니다. 그리고 24장에 가면 아론과 70명의 장로들이 직접 하나님을 봅니다.
(출24:9-11)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겪은 이스라엘과 아론과 70장로들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을 직접 보여줘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은 어떤 기적을 보아도
아니, 하나님을 직접 보고도 여전히 이 땅에서의 힘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도륙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78:12-20)
1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14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7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20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시106:19-22)
19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20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21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22 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 자로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좇아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자들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 713 -
(출32:21-25)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22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5절에서 “백성이 방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풀어놓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어떤 규율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근신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발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신 것과
그 앞에 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이 땅의 힘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삶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혹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다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여러 번 체험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정작 그에게서 나오는 행동양식은 전부 자기 자랑과 자기 배 만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들, 여러분 그런 나이롱 신자 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지 보세요.
(출32:26-28)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혈육까지도 다 죽여 버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가족과도 타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족이 잘 못 가면 말려 주세요. 아니면 여러분 눈앞에서 그들이 도륙 되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쾌락주의,
자연주의 이러한 세상 풍속을 좇지 마시고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영역을 소망하며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내십시오.

- 714 -
(57)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시다
(엡4:7-12)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6절까지를 공부했습니다.
간단하게 읽고 복습을 해 볼까요?
(엡4:1-6)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통일시켜 놓으신 그 하나 됨을 너희들은 힘써 지키라고 사도는 권면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하나 됨을 지킨다.”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미 성령께서 하나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하나 됨을 또 지켜야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은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갑돌이와 갑순이가 결혼을 해서 철수, 영희, 순희 이렇게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돌이하고 갑순이가 사이가 안
좋아졌습니다. 싸움이 길어지고, 잦아지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전부
뿔뿔이 다른 곳으로 보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갑돌이의 아버지라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무리 너희들이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헤어져 있어도 너희는 한
가족이야, 그러니까 계속 헤어져 있어라” 그러시겠습니까? 아니죠?
“너희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내 눈에 보여다오. ”“너희가 함께 모여 행복하게 서로를 사랑해
주는 한 가족의 삶을 내게 보여 다오.” 그게 아비의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입니다. 그 것은
누구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인 자식들이 자기들이 하나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시기하고 다투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 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희들은 가시적으로 이 땅에서 보여줘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라“가 아니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원래 원문에는 접속사 “데”가 있습니다. “데”는 “but""그러나”입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을

- 715 -
힘써 지켜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에게 각기 다른 선물을 주셨다“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하나 됨“이라는 것은 조직적이며 획일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 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하나
됨“은 (uniformity)가 아니라 (unity)인 것입니다.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7절부터 교회의 연합에서 교회의 다양성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단어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여섯 절에 걸쳐서 “하나”에
대해서 강조하다가 이제 “우리 각 사람”이라는 완전히 다른 표현을 등장시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이면서 또 “각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완전한 독립체이면서 그
전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죠.
그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구원이나 제가 받은
구원이나 모두 똑같은 구원입니다. 모든 회심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입니다.
어떤 대 가족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cheaper by dozen"이라는 영화를 보면 12명의
아들딸이 나옵니다. 그 열두 명은 키도 나이도 생김새도 성별도 재주도 특기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12명의 아이들의 한 부모의 똑 같은 자식이라는 면에서는 그들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들 사이에는 부동성과 차이성과 다양성과 변화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다양성들을 통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7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다양한 선물들이 교회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데 그 선물들, 은사들은 모두 한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이 더 빛나는 것입니다.
(고전12:4-5)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여러 가지 은사나 직임 모두 한 주, 한 성령으로부터 어떤 목적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은사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사로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곳에서는 “성령의 은사”라고도 표현하지요? 그것은 전부 같은 말입니다.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절은 교회는 그 통일을 어떻게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느냐 하면 그 다양성인
각자의 은사에 의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복선으로 깔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 7절이 11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7절과 11절을 붙여서 한번 읽어보지요.
(엡4:7,11)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정확하게 이어지죠? 그러면 8절과 9절과 10절은 무엇인가? 원어 성경에 보면 그 부분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NIV 나 KJS version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8절에서 10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분이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에 있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8절을 보세요.
(엡4:8)

- 716 -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로 시작하고 있지요? 이 말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시편68편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주신 은혜, 은사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즉흥적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계획하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천 년 전에 시편 기자에게도
계시해 놓으신 거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까?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눕니다. 단순히 역사를 세대로 나눈 것이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루이스 벌콥 같은 대 신학자도 세대를 구분했고 이레니우스나 클레멘트, 어거스틴 같은 분들도
세대의 존재를 인정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이,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에는 율법으로 구원하셨고
교회 시대에는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식의 주장이 문제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는
원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지 않으셨던 무리인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에 덤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무리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왕국이 다시
유대인들에게 전파될 때까지의 임시방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 9절 10절만 보더라도 그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시편 68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안겨주신 큰 승리를 찬양하는
시입니다. 다윗은 그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라고 찬양을 하면서 과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바로와 그의 군대가 멸망한 것과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넣으신 사건을
모두 하나님의 승리라고 찬양을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시편 68편을 그대로 인용해서 그 것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다윗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단들, 아리우스파나 유니테리안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우리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보면서 구약의 그 모든 사건들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시편 68편 기자인 다윗은 어떤 지역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서 당시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을 감동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구원의 사건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지역적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과 그가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표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바울이 인용한 시편 68편의 내용과 오늘 에베소서 4장8절 이하의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 717 -
(시68:18)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하심이로다
(엡4:8)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for men) 선물을 받으셨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선물을 ”주셨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받으셨고
한 쪽에서는 주셨습니다. 이러한 인용은 바울이 잠깐 헛갈려서 그렇게 기록한 것도 아니고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선물을 주시는 것과
받으시는 것은 따로 떨어져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동작입니다.
(행2:33)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시편 68편 18절이나 에베소서 4장 8절이나 전부 동일한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두 경우에서 동일하게 전달해 주는 메시지는
“교회에 오는 모든 선물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며 그를 통하여 온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68에서는 “아들”에게 선물들을 주시는 분은 “아버지”시라는 것이 강조가 되어
있는 것이고 에베소서 4장에서는 “교회”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은 “아들”이시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8절을 다시 정리를 해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그 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들을 받으셔서 교회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귀의 세력은 사로잡혀 질질 끌려오게 된 것이고요. 이것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점진적이며 반복적인 계시의 방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8절을 읽어보지요.
(엡4:8)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정확히 이해가 가셨습니까? 9절로 넘어갑니다.
(엡4:9)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한글 개역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9절은 “토 데” “그런데”로 시작이 됩니다.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이 올라가셨다”라고 시편68편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올라가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오셨었다는 말이 아니냐?“라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면서 다윗이 말한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넌지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 아래 곳“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 아래 곳은 ”지옥“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쓰인 ”게스“가 ”게“”땅“의 소유격이기 때문에 ”땅의 아래 곳“은
땅 보다 더 아래인 지옥을 말하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기초로 해서 오늘 날 많은 교회에서 암송하고 있는 “사도
신경”에 “he descended into hell""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이 들어가게 된

- 718 -
것입니다. 한글 사도신경에는 빠졌지요.
이 부분과 함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구절이 베드로전서 3장이지요?
(벧전3:18-20)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구절은 전에 한번 설명해 드렸으니까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20절을 보시면 옥에 있는 영들이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않던 자들“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가정을 해 보자고요. 그런데 그 지옥에는
노아의 때에 방주에 안 들어간 사람들만 들어가 있나요? 아니면 그 사람들만 따로 모아놓은
지옥이 있습니까? 거기서도 방별로 따로 모여요? 바로 다음 장인 베드로전서 4장을 볼까요?
(벧전4:5-7,17)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최후의 심판입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오직 두 차례의 큰 심판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노아의 홍수이고 두 번째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있게 될 심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첫 번째 대 심판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두 번째 대 심판 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노아의 때에도 성령으로, 노아의 입을 통해 “회개”를 외치셨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입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노아의
때에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옥에 갇힌 수많은 자들이 그 복음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고 전부
물에 빠져 죽어 버린 것을 교훈 삼아 두 번째 대 심판 전에 살고 있는 너희들도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라고 권고하는 것이 베드로전서 3장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은데 너희는 지금 그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느냐는 지적입니다. 교회야, 지금 너희들이 아무리
고난과 환난을 통과하고 있다 하더라도 너희는 방주에 들어 있는 자들이니 힘을 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문자 적으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서 “아직 덜 이루었다”가
된 것입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일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 719 -
내려가실 일도 없으시고 내려가신 일도 없으십니다.
여기 “땅의 아래 곳”에 쓰인 소유격은 “동격 적 소유격, 정의적 소유격”입니다. “땅 곧 아래
곳”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번역이지요. 존 캘빈이나 찰스 핫지, 헨드릭슨,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분들이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그러니까 “땅 아래 곳“은 9절의 ”모든 하늘 위“와
대조해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문학적 기교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늘 위라는 것이 하늘을 강조하는 것인 것처럼 땅 아래 곳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당하신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를 ”대표해서“ 이 땅에서 죽기 위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보면 모두 죽을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군가가 대신 그 죄를 짊어진다면
그의 백성들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다 한꺼번에
짊어지고 “대신 할 수 있는” “순결한”인간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그 죄를 “대신” 짊어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인간을 대표해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또 인간이셔야 했습니다. 옛날 고려시대에 “보인”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제도는 어떤 장정이 전쟁에 징집이 되었을 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많이 지불하고 대신해서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것을 보인 제도라고 합니다. “나를 대신 하는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 대신
우리 강아지를”보내면 어떻게 됩니까? 안 되죠?마찬가지로 우리를 대표할 분은 똑같은
인간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철학적 사유의 한계 위에 있는 개념이기에 이해하는 것이 힘들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 것을 받아들입니다.
(요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께서 “육신“”사륵스“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쓰인 ”되어“”에게네토“가
”부정과거“시제입니다. 과거에 한번 일어났던 일이 미래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이
헬라어의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영원히 육신을 입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눈에 비친 그 분의 모습은 아주 비천한 목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은 힘을
추구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힘이 없고 연약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라는 자들이, 곧 교회만이 그 연약함을 보면서 그 연약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순 같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 인 들, 그리고 율법사들에게
미움을 받으셨고 무고하게 고발을 당하셨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면 끝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은
사망과 무덤을 정복하시는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선물을 나눠주시기 위해서 이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기나긴 침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최후의 심판을 하실 때의 일을 가상으로 그려놓은 책입니다.

- 720 -
거기에는 이 땅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하시는 예수님에게 항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이 우리를 심판할 권리가 있는가?“ ”당신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은 고통을 알고나
있는가?“
하면서 어떤 여인이 팔을 걷고 예수 님 앞에 섰습니다. 그 여인의 팔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서 가스실에서 죽기 전까지 그녀의 팔에 새겨져 있던 죄수 번호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우리 유태인들의 이 고통을 알기나 하는가?“
그리고 한 흑인 소녀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 소녀는 자기가 흑인이라는 것 때문에 린치를
당해서 입은 화상 자국을 보여주며 당신이 이런 고통을 아는가? 하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당신이 나의 이 억울함을 알기나
해? “우리가 전부 땅에서 그렇게 고통 받고 있을 때,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휴식이나 취하고 있었으면서 당신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저마다 예수님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고발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들 중에서 고발 자들을
뽑았습니다.
먼저 나찌의 홀로코스트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유태인
그리고 인종차별로 평생을 고통 받던 흑인
그리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죽은 사람,
지독한 관절염으로 불구가 된 사람 등 여러 명을 뽑아서 예수님이 심판 주로 인정을 받기 전에
예수님을 땅에 보내서 그 고발 자들이 겪었던 가장 지독한 고통을 골고루 겪게 하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만들까를 의논했습니다.
“그를 유태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그리고 그의 출생의 합법성을 의심받게 하자” “그리고
그에게 아주 무거운 짐을 맡겨서 그의 가족들로부터 그가 미쳤다는 말을 듣게 하자”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게 하자” “잘못된 재판과 잘못된 배심원들에게 평결을 받고 억울하게
죽게 만들자” “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맛보게 하자”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게
하자” 그리고는 그 수많은 군중 앞에서 그 것을 발표했습니다. 마지막 발표자가 “그를
고통스럽게 죽게 하자”까지 발표를 했을 때 그 모든 군중은 일순간에 침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안하고 고안해서 만든 그 모든 고통을 이미 예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을
거기 모인 사람들이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땅의 아래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구절의 진의입니다. 왜 그러셨다고요?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자원하셔서 지옥을
경험하고 가신 것입니다.

오늘 신 장로님하고 김복진 목사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


장로님께서 어제 자녀 분 들하고 함께 본 영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성경 이야기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좀처럼 하시지 않는 분인데 영화 이야기를 하셔서 좀 의아하기는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man on fire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덴젤 워싱턴이 열연을 한 영화죠.
저도 일전에 우리 승호가 갖다 줘서 봤는데, 정말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굵직굵직한 선의 영화를 만들어온 토니 스콧 감독의 진가가 잘 드러난 영화입니다.

- 721 -
거기에 덴젤 워싱턴이 전직 CIA암살 요원으로 나옵니다. 덴젤 워싱턴은 지난 날 잔인한 암살
요원으로서의 암울한 삶이 괴로워서 알코올 중독자가 됩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멕시코시티의 부유한 사업가의 9살 난 딸의 경호원으로 취직을 합니다. 멕시코만 하더라도
부유한 집 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는 범죄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유한 집
자녀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다녀야 할 정도로 무섭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자 덴젤 워싱턴은
9살짜리 소녀 “피타”와 지내면서 비로소 잃었던 웃음을 찾습니다. 오랜만에 피타와 함께 잘
지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덴젤 워싱턴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쳐옵니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피타가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덴젤 워싱턴도 큰 부상을 입습니다. 부상에서 깨어난
덴젤 워싱턴은 피타가 납치되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덴젤 워싱턴은 그 납치범
일당들을 모두 죽일 결심을 합니다. 한 명 한 명 찾아내서 잔인하게 죽여 가는 과정에서 그
피타가 살아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범인들은 그 아이 피타와 덴젤 워싱턴의 목숨을
맞바꾸자고 제안을 합니다.
덴젤 워싱턴은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범인들에게 찾아가고 다리 위에서 피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여러분, 피타를 대신해서 죽으러 가는 그 덴젤 워싱턴이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끌어
안으면서 마음속으로 어떤 당부를 했을까요?
“내가 네 대신 죽으러 간다. 그러니 건강하고 씩씩하고 착하게 살아다오” 그랬겠지요?
“내가 네 대신 죽으러 간다, 그러니까 앞으로 네 마음대로 개판으로 살아라.”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시기 위해 이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러 가시면서 다리 위에서 우리를
끌어안고 한 마디를 하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 거 같으세요?
“내가 널 위해 죽는 것은 너의 그 죄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죄와 잘 싸워내야 한다. 그
죄가 너를 유혹할 때마다 너는 나의 이 죽음을 기억해라”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그 덴젤 워싱턴은 그렇게 당부하고 죽어버렸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당부하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고요. 이제 내가 살아낸 이 삶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다리 위에서 예수님과 끌어안고 나대신 죽으러 가시는 그
예수님을 정말 안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다시 막 살 수 있을까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막 살지 못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와 전쟁과 험담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 이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통일 시켜놓고 우리에게 그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고 부탁하고 가셨다는 것 잊지 마세요.
내 안에서 불쑥 불쑥 악한 것들이 올라올 때 그 다리 위에서 여러분을 끌어안고 “잘 살아다오”
부탁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리십시오.

- 722 -
(58)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하나님의 은사
(엡4:7-13)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고
급기야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복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8절과 9절 10절은 괄호로 묶어서 이해를 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제 11절부터 그 선물의 목록이 나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보시다시피 11절에는 여러 가지 은사의 목록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총 다섯 군데에서
하나님의 은사, 선물을 열거합니다. 여기 에베소서 4장과 베드로전서 4장, 그리고 로마서
12장과 고린도 전서12장입니다. 그 구절들에서는 수많은 하나님의 선물 중에 대표적인 것들
스무 가지 정도를 나열해 놓았는데 그 모든 하나님의 선물을 다 모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구원“”영생“입니다.
(롬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표준 새 번역)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선물의 내용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구절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는
전부 구원이 어떤 것인가, 구원받은 자들은 어떻게 사는가를 이 땅에 가시 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라는 결론이 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가시적으로 세상에 보여주며, 그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에 보시면 “우리가 장차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구절이 있지요? 거기서 ”이르리니“”카탄타오“는 ”획득하다, 만나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완전한 구원이 주어져 있는데 ”장차“
획득할 것이고, 장차 그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한 3절을 보면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는 말도 나오죠?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운명적 신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3절의
말씀처럼 힘써 지켜, 유지되어야 하며, 동시에 획득해야만 하는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 723 -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이미 획득한 사람은 그 구원을 힘써 지키려는 노력이 나타나야 하며
심지어 그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냄으로 그 구원을 획득하려는 자의 삶과 방불하게
치열함과 진지함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구원의 획득은 우리 신자의 삶 속에서 visually, 그리고 fully 획득되어지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획득의 과정에 필요한 것이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은사들, 선물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자들이 자기들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받은 선물들을 잘 선용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visually 잘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선물을 주심으로 어떤
결과를 기대하시는가가 나오지요?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기에 아무리 하찮은 것 같은 은사라도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은사들이 잘 발휘되어야만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숙이 되어지고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어떻게 건강하게 성숙하고 유지됩니까?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발의 도움을 받아
갑니다. 눈으로 음식을 보지요. 그리고 코로 냄새를 맡습니다. 냄새는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고
우리는 손의 힘을 빌려 음식을 입으로 밀어 넣습니다. 음식은 이에 의해 잘게 부수어 지고
식도를 타고 위로 내려갑니다. 위에서 그 음식물은 소화가 되고 장을 통과하면서 영양분이
체내로 흡수됩니다. 흡수된 영양분은 혈액을 타고 간으로 가지요. 간에서는 여러 가지
화학반응으로 그 영양분을 해독합니다. 그리고 그 영양분은 각종 에너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콩팥에서 질소 노폐물을 걸러주고 전해질을 조정해 줍니다. 그리고 내분비기관에서는
각종 호르몬을 만들어서 신체 여러 기관의 기능을 자동적으로 조정하게 해 줍니다. 심장은
신체의 각 부분에 필요한 만큼의 피를 공급해 주고 폐는 산소를 불러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 보내 줍니다.
예전에는 맹장, 충양 돌기는 인체에 전혀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서 개복을 하게 되면 덤으로
그 것까지 잘라주곤 했습니다. 편도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붓고 아프면 수술을 해서
잘라버렸습니다. 우리가 진화되어진 동물이고 그러한 기관들이 진화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들이 남게 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잘라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필요한 것들을 창조해 놓으셨을까요? 그 모든
것들은 우리 몸에 반드시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지요.
이렇게 인체의 모든 기관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건강하게
유지되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잘 세워지기
위해서는 교회의 멤버 어느 한 사람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하나님의 선물 중에 다섯 가지가 선별이 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 짚어 보지요. 여기에 열거된 은사들 중에는 교회의 설립 때
임시적으로 주어졌던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의 설립 후 그 유지를 위해 지금까지 내려오는
은사가 있습니다.
먼저 “사도“입니다. 사도는 여기에 기록된 것처럼 분명히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 사도 직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창안하신 직분입니다.

- 724 -
(갈1:1)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그리고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본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라야 합니다.
(고전9:1)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표준 새 번역)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행1:21-22)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리고 두 번째로 사도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갈1:11-12)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엡3:2-3)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그리고 사도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입니다.
(히2:4)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초대 교회 시대에는 거짓 사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분법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고후11:13-15)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런 가짜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추천장을 주고받았습니다.
(고후3:1)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 725 -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사도는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뵌 사람이어야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 기적을 행할 수 있었으며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도가 존재할까요? 아니면 사라졌을까요?
(고전15:8-9)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예수님은 맨 마지막에, 맨 나중에 (에스카톤) 사도 바울에게 보이시고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사도는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필요했던 임시적인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비되기 전에는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아 후계자를 세우지만 나중에 교회가
세워지고 정비가 된 다음에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순교했을 때 그의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교황제도는 이것을 오해한 데서 생긴
것입니다. 로만 카톨릭은 베드로가 로마에 정착해서 고정된 사도요 감독이었으며 베드로는
후계자를 임명했고 그 베드로의 사도직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비 성경 적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잘못 된 것입니다. 사도직은 초대 교회에 한하여
임시적으로 주어진 은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혹은 선지자로“의 선지자 직입니다.
선지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꼭 보아야 한다는 조건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 하에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복음 2장에 보면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지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에게 예언을 하는 딸 넷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등장합니다.
(행21:8-10)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 와
(행11:27)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리고 구약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은 모두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을 받고 이스라엘에게 예언을 전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렘23:16-22)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 726 -
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19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진짜 선지자는 하나님의 회의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땅에 내려 꽂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되는, 그런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선지 동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데 그건 잘못된 호칭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신약 성경이 아직 없었고 진리가 아직 글로 기록이 되기 전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교회가 안정되어진 후에
쓰인 목회 서신에는 사도와 선지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 때에 와서는 더 이상
선지자의 직책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는 이제 그 진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목사와 교사 같은
다른 직책들에 대한 소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자칭 선지자들이 등장했다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2세기에 일어난 몬타누스파들이 대표적인 이단들입니다. 그리고 로만 카톨릭은 이 선지직의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이단들입니다. 카톨릭은 신약성경을 떠나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대부분 그런 것들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종교 개혁시대에 유럽에 일어났던(Zwikau prophets) 쯔비카우 예언자들이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루터와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와 계속 충돌했던 집단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선지자들이라고 우겼고 성경은 거의
무시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에 조지 폭스에 의해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 교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지폭스는 처음과는 달리 점차 성경보다는 성령의 내적 조명과 직접적인 지도를 강조하게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신약 성경 적 의미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끝난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이상의 하나님의 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딱 알맞은 만큼의 계시가 이미 완성이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시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요한이 성경의
말미에 기록을 하고 성경을 닫은 것입니다.
(계22:18-19)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가 정비되고 성경이 완성 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재했던

- 727 -
임시적 은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열거된 은사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입니다.
“목사와 교사”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을 보아서 바울은 이 직책을 하나로 본 것이
분명합니다. 목사는 곧 교사입니다. 이제 완전하게 계시되어져 있는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고
풀어서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한다면 그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이 목사와 교사의 은사는 지금까지 지속되는 은사이지요.
지금 살펴본 이 다섯 가지 은사는 그 은사들이 임시적인 은사이건 지속되는 은사이건 간에
전부 가르치는 사역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들 중에서 이 다섯 가지를 뽑아
열거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이 가르침이 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이 직분들, 직책들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11절을 보세요.
(엡4:11)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헬라어 원문은 “아우토스 에도켄”으로 시작됩니다. 영어로는 “He himself gave some” “그가
친히“라고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부르십니까?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직분들을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교회주의는 틀린 것입니다.
교회는 행정 조직도 필요하고 직분과 직책도 필요합니다. 그 것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직분과 직책을 통해서 그 직분 자 자신이 온전케 성숙되어져 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며, 그 직분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함으로 다른 지체들이
온전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데 쓰시기 위해 직분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목사와 교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사로 세워지는 것이고
장로와 집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던 사도들이 교회의 필요에
의해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목사와 장로 집사라는 직분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면서 가는 곳마다 장로를 세웠습니다.
(행14:21-23)
21 바울과 바나바는 그 성에서 복음을 전해서 많은 제자를 얻은 뒤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님께 장로들을 맡겼다.
(행20:17)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딛1:4-5)
4 나는, 같은 믿음을 따라 진실한 아들이 된 디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5 내가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것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게 하고, 내가 명령한 대로

- 728 -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고 디도서와 디모데 전서에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렇게 반드시 직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직분이 필요합니까?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그 직분을 통해서 자기의 성숙과 다른 이들의 성숙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직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집사를 항존 직이라고 부릅니다. 항존 직이라는 것은 “한번 장로는
죽을 때까지 장로다“라는 의미에서 항존 직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야 하는
직분이라는 의미에서 항존 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직분들은 봉사를 하고 섬겨서 상대방을 온전케 세우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진짜 복음을 잘 이해하고 계신 분들은 이런 직분을 맡기려고 하면 손
사래를 칩니다. “내 몸 하나도 못 가누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의 온전함에 제가 기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른 태도죠.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종교와 정치가 손을 잡게 되면서 귀족들과 힘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 자리를 차고앉게 되면서 “서임(敍任)권”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고
교회의 직분이 무슨 벼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직분이 나를 알리고 나를
증명하는 방법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도 사람들이 저마다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냥 앉아서 듣는 것보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 폼 나잖아요. 우리가 공부했다시피 가르치는 은사는 우리 주님의
선물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너도
나도 자기 목소리를 높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했죠?
(약1:1-2)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을 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무서운 소리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정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때 많이 인용하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영혼 소멸 설을 주장하고 있고 지옥의 부재를
주장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령 론을 읽어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은 사도직이 아직까지 계승되고 있다고 열심히 우기고 계십니다. 저마다
나름대로 성경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든 생각이 혹시 나는 잘못 가고 있는 부분이 없는가? 심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인간의 영생이 걸린 문제인데 혹시 내가 잘 못 가르친 것이 있으면 어떡하나,
지난주에는 심각하게 “목회를 그만둘까“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가르치는 직분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워치만니 책 몇 권만 읽으면” 할 수
있는 우스운 직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가르치고 싶어 한다고요? 존경받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직분은 전부 나는 죽고 남이 살아나는 기독교의 정신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남이 함께 거룩하게 성숙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 직분입니다.

- 729 -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분 자들은 전부 합격점수를 받은 완전한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저런 사람도 직분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시구나” 이렇게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분도 있으실 것이고 “아, 교회의 장로는
저런 분이 되셔야 하는구나.”라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든
교회에 유익이 되면 됩니다.

제가 요즘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교회 직분 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직분 자들의 자격 요건은 참 높습니다. 디도서나 디모데서에 나오는 직분
자들의 자격을 보면 제가 다 얼굴이 붉어집니다. 저도 거기서 해당되는 게 몇 개 안 되요.
그런데 목사하고 있거든요. 그걸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서 직분 자를 세운다면
아마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한 명도 못 세울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력을 어떻게
신뢰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잘 속아요. 예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제일 기도 잘 하시고
사회 봉사활동도 제일 많이 하셨고 돈도 많으시고 덕망도 높으셨던 고 모 장로님이 지금
원불교 포교원 원장이 되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놀래서 가슴을 다 쓸어내리면서
진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만날 그날까지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 섣불리 판단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그 상황과 환경들을 우리의 거룩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선용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워 놓았더니 매일 하는 일 마다 실수요, 하는 일 마다 시험거리를
만든다고 쳐보자고요. 우리가 그 분을 보면서 “정말 사람 잘못 뽑았다”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성숙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도 그
실수와 실패를 통해 얼마든지 성숙의 자리로 자라갈 수 있는 것이고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직분을 맡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다가 볼에 밥풀이 묻으면 사람이 참 우습게 보입니다. 그 밥풀 하나로 그 사람
전체가 우습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밥풀로 그 존재의 명예를 실추시킨 볼 전체를
잘라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까짓 밥풀 같은 실수 때문에 볼 전체를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밥풀 때문에 볼을 잘라내면 그 다음부터 밥은 다 먹는 겁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다가 실수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수를 보면서 용서하고 품어주고 인내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입니다.
12절 후반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구절이 있지요? 거기서 “세운다.”는 단어는 “부러진 뼈를 맞춘다.”는 뜻입니다. 잘라내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추어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위골 된 상태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상태에서 위골 된 서로 서로를 잘 맞춰서 제 자리를 찾게 해주고 건강하게 자기의
힘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도록 이렇게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직분을 맡은 분들은 재지 마세요.
고을 원님을 태우고 가던 당나귀가 모두가 자기를 보고 절을 하는 줄 알고 호랑이한테도 “이
놈” 그랬다가 뼈도 못 추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직분은
우리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해서 주신 그야말로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난 척 할 수 없지요.

- 730 -
(고전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왕이면 훌륭한 사람, 힘 있는 사람 뽑아서 하시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시는지, 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을 하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이 맞고
우리는 늘 틀립니다. 작은 개집을 지을 때는 그 집의 모양이 금방 나타나지요? 그러나 커다란
빌딩을 지을 때는 아주 오랫동안 그 집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골격만이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그 것이 완성이 되면 “아 여기가 거기였고, 거기가 여기 였구나.” 이렇게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큰 집을 짓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해를 못합니다.
정말 큰 원은 직선처럼 보이는 것을 아십니까? 지구가 그렇죠. 산 위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면
직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지평선은 거대한 원의 한 부분입니다. 달에 가서 보면 모든 땅이
동그랗게 휘어져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그렇지만 너무 커다란 동그라미는
작은 존재한테는 직선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중에 밝히 밝혀질 것입니다. 이거 한 가지만 놓치지
말자고요. 하나님은 맞고 우리는 틀립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완성을 위해 이렇게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사람들을 직분 자로 부르시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직분을 맡은 사람이 그 직분을 통해서 자기의 권위와 권세와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린 아이 같은 일입니다. 직분은 우리의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직분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얼토당토한 일입니다.
그까짓 직분 없으면 어떻습니까? 인품과 성품, 인격으로 존경을 받으세요. 다들 그거 자신
없으니까 직분으로라도 어떻게 자기 존재를 좀 과시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대학 시절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가장 존경받던 분이 사찰 집사님 이셨습니다.


오죽하면 담임 목사님께서 그 분께 늘 “형님, 형님”하셨겠습니까?
누가 보던 안 보던 정말 열심히 교회를 가꾸시고, 청년들이 밤늦게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고 하면 계란을 삶아서 살짝 놓고 가시고 하십니다. 보통 사찰 집사님들은 빨리 불 끄고
문 닫고 쉬려고 평일 날 아홉 시만 넘으면 눈치 주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분은 나이 어린
청년들이 밤늦게 까지 신앙으로 고민하고 서로 부등켜 안고 기도하고 하는 것이 너무 보기
좋은 거예요. 누구에게나 아버지처럼 대해주셨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청년들이 목사님은
아버지, 사찰 집사님은 어머니로 불렀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 사회 저명인사 장로님들이 많이
계셨지만 늘 군복 바지에 빗자루를 들고 다니시는 그 집사님을 우리 청년들은 가장
존경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존경받고 싶으세요? 늘 겸손하게 섬기세요. 그게 진짜 존경받는
지름길입니다.

- 731 -
이건 단지 직분 자들뿐만 아니라 교회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벧전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는 우리 각자의 부르심, 선물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분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성숙되어져야 합니다. 거기에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그 합격 통지서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버드대에 합격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 대학에
들어가서 앞으로 그가 배울 학문과 그가 받을 혜택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에게 주어질 가능성,
이런 것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이지 입학한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장영주의 리사이틀 티켓을 샀으면 그 리사이틀 장에 가서 그 공연을 봐야죠. 그리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해야지. 표만 갖고 있으면 뭐합니까? 그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교회가 여러분을 통해서 온전하게 서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엉뚱하게
다른 거 하느라, 무슨 운동이니, movement니 이런 거 하다가 진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태권도장의 목적이 열심히 태권도 가르쳐서 다른 도장과 싸우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열심히 관원들 태권도 가르쳐서 다른 도장하고 싸워서 지면, 다시 갈아치우고 다른 사람들
훈련시켜서 또 싸우고 이런 게 태권도장 아니지 않습니까? 태권도장은 도장에 오는 관원들의
정신 수양과 인격 연마를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거룩의 문제를 제쳐두고 어떤 일들에 열심을
갖게 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일을 동원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를 동원해서
우리의 힘을 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봉사하시고 열심히 섬기시고 열심히 자라 가십시오. 우리는 교회에서 그걸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빠지는 만큼 손해입니다.
어떤 사람이 테니스를 배운다고 해 보세요.
매일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한 달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세 달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누구의 실력이 월등히 나아지겠습니까? 매일 가는
사람이지요. 예전에 제가 중학교 때 과외를 했는데 어떻게 하다가 하루를 빼먹었어요. 그런데
그 과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너 만일 어제 배운 것이 대학
입시에 났는데 네가 어제 빠짐으로 해서 그 문제를 틀렸다고 생각해 봐라. 그런데 네가
안타깝게도 1점 차이로 서울대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봐. 너는 어제의 그 불성실 때문에 평생을
망칠 수 있는 거야“ 그 후로 그 과외에 한 번도 안 빠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도 신림동에서 반포까지 매주 수요일에 택시를 타고 성경공부에 갔습니다. 혹시
내가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서요.
열심히 교회들과 모여서 여러분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십시오.
아껴주고 품어주고 사랑해 주십시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지이며
선택이라고 했지요? 사랑도 훈령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할 수

- 732 -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마련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아도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왜냐고요? 맛있으니까? 그러나 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호는 개를 좋아합니다. 맛있으니까.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개를 키우려면 많은 손이 가기 때문입니다.
지영이는 개를 사랑합니다. 내가 그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도 내야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나에게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호야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수두룩할 것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자식, 내 형제, 내 자매 그렇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쿠폰이 생겨서 월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곳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쇼의 90%이상이 전부 마귀, 귀신, 머미,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이런 것을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준다는 것이
귀신 복장을 하고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시커먼 놈들이 놀라게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 지옥인 것 같았습니다.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어떤 곳에 수많은 벌거벗겨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제가 낮에 본 그 모든 귀신들이 전부 살아서 실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한 사람 씩 불러서 커다란 원판에 묶어 놓고
그 원판을 돌리면서 도끼로 그 사람들 퍽 퍽 찍었습니다. 팔 다리가 쩍쩍 찢어지고 피가
튀는데 묶여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이를 가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제 차례가 오는 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공포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지? 하나님 저 좀 구해 주세요. 제발 여기서만 벗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려서 잠이 깼습니다. 그게 꿈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 보였습니다. 집사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방에 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모두 천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망에서 나를 건져 주신 것이구나, 참 실감이 가는
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경고를 오히려 재미삼아, 놀이 감 삼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나중에 우리는 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에 던져지게 될 텐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 것들을 놀이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기서 건져진 것입니다. 거기서 건져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서 건져주신 그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훈련하는 것, 그거 외에 우리가 무엇에 욕심을 두겠습니까?

- 733 -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초가 모여 일분이 되고 이 일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우리의 일생,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 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어떤 것과 계속 바꾸시면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생명을 무엇과 바꾸시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할 교회와 여러분의 성숙에 더욱더 매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더욱 더 진지해 지십시오.
(엡4:7,11,12)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734 -
(59) 영적 어린아이에서 벗어나라
(엡4:11-14)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12절까지 공부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수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대치 않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구원이라는 선물을 은혜로 거저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그
구원이라는 선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을 알아가고, 우리는 왜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인지를
삶을 통해 확인하며 점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하게 지어져 가는 시간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교회가 이 땅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필요한 은사를 우리 교회 각각에게 주셨다는 것을
12절까지에서 공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은사들 가운데 특별히 가르치는 은사들과
직분들을 열거함으로 해서 특별히 교회의 직분이나 직책을 받은 자들이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자세죠?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자“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비단 직분 자들뿐만 아니라 선물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요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가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 가 13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13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교회라는 무리를 이루고 각각의 은사를 잘 발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구체적인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사도가 이것을 이렇게
중요하게 언급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너무
각양 색이죠? 이단적인 가르침에 속아서 엉뚱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렇게 잘 못 알고, 잘 못 믿고 있었던 것들에서 벗어나서 바른
예수를 바르게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3절을 보시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면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나오지요?
거기서의 “온전한”이라는 말 “텔레이오스”는 “성숙한, 완전히 발전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지 못하면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지체가 완전히 성숙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가 11절에 열거한 하나님의 선물의 내용이 전부 가르치는 직분인

- 735 -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다 다른 부분입니다. 누구는 팔이고 누구는 손가락이고 누구는
다리이며 누구는 발가락, 누구는 입, 코, 귀...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각 지체는 각자의
자리에서 “텔레이오스” 온전히 성숙해져야 합니다.
누구는 조그만 물 컵의 역할일 수 있습니다. 누구는 커다란 물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통에는 반드시 물이 가득 차야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여러분, 농작물 품평회 하는 것 보셨습니까? 배면 배, 사과면 사과, 고구마면 고구마를 한
가마니를 다 봅니다. 그런데 다른 것들은 다 실하고 좋은데 그 중에 벌레 먹은 것이 하나 들어
있으면 그건 탈락입니다. 모두가 실해야 일등급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지원이 몸에 10살짜리 아이의 다리가 붙어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그런 사람을 “악어“라고 부르죠. 몸통은 큰데 팔 다리는 짧은 사람,
그건 ”안드라 텔레이온“”온전히 성숙한 사람“의 모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큰아들이 지금 열
살인데 27살 먹은 지원이 몸에 그 다리가 붙어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전에 영국에서 우리 교회 설교 테잎을 들으시는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그
이지원이라는 친구 다리가 그렇게 짧습니까? 그리고 최경호라는 분은 아직도 그 교회 다녀요?”
이렇게 물어 보시더라고요. 제가 하도 설교 때 예화로 많이 써서 교회에서 나갔는지 알았대요.
제가 설교 때 가끔 인용하는 사람들은 그만한 그릇이 되기 때문에 언급을 하는 거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절대 언급 안 합니다. 나 하나 망신당해서 다른 지체들의 성경 이해를 돕게
된다면 얼마든지 희생하겠다는 그런 참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만을 제가 인용합니다.
이 시간 전 세계에서 저희 교회 설교 테잎을 들으시는 분들께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면서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서머나 교회 이지원의 다리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정말 그렇게 짧습니다.“ 저는 진리만을 말하기로 선서하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네요.
아무튼 각 각의 지체는 각자의 자리에서 “안드라 텔레이온” 온전히 성숙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성숙은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했지요? 바른 예수를 바르게 알고 믿는 것으로 이루어
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되실 수 없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위대한 박애주의자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사시면서 하늘의 비밀을 직접 알리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인간들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 분은 선지자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온전하신 대 제사장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의 왕국을 완성하시고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 왕이요, 선지자요, 대 제사장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원수들을 살려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삶을
본받아 이 땅에서 그 자기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견지하는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바른 예수를 바르게 믿게 되면 거기서
삶이 바뀌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또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 736 -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에피그노시스“는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완전히 아는 것, 지적인 지식이나 이해를 초월한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에피그노시스“는 지식과 더불어 경험과 삶을 통해 완전히 자기
것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게 삶으로 살아지기 전 까지는
아직 ”에피그노스시“가 안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지식은 교만이라는 죄를 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고전8:1-3)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성경 지식이 다른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에피그노시스”가 아닌 것입니다. 열심히 삶 속에서 훈련하시고 연습하셔야 합니다.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는 훈련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습득한 지식을
“에피그노시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에피그노시스“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고 삼층 천까지 다녀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가르쳤던
탁월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대 사도도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에 죽는 날까지
매진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빌3:7-14)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리고 우리가 일전에 공부한 3장에서도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대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엡3:18-19)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교회의 각 지체들은 이렇게 바른 그리스도를 믿고 그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 737 -
우려내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온전한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4절을 보시면
(엡4:14)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헬라어 성경은 “히나”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그 “히나”라는 말은 “그와 같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의 결과나 이유를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봉사의 기능인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그 모든 직책들은 우리
주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주신 것인데 그 것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을 온전한 사람에
이르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우리는 성숙하게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데 힘써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가 14절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힘써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합니까?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숙해지기를 염원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어린아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신앙의 어린아이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14절에 “이제부터”라는
단어가 있지요? “이제부터”라는 말은 현재와 미래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랬는데 “이제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2:12-14)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여기서 쓰인, “아이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라는 말은 우리가 신앙의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거쳐야 하는 단계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벧전2:1-3)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여러분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회심을 목적지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회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해 내신다.“는 의미에서 회심을 구원의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보면 회심은 이제 머나먼 순례의 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첫
발걸음일 뿐입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인격과 삶과 인생

- 738 -
속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안드라 텔레이온“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3:1-3)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럼 이 영적 신생아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4절을 다시 봐 주세요.
(엡4:14)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아이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사람이라고
사도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아이의 특징인 “사람의 궤술”에 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궤술이라고
번역이 된 “퀴베이아”는 “퀴보스” “주사위”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노름, 술책, 기만” 이런
뜻입니다. 영적 어린아이들은 이렇게 속기 쉽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나오는 “쉐이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전문 도박사들의 속고 속이는 기가
막힌 기술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카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나눠줍니다.
그들은 그 것을 기술이라고 부르지만 전부 속임수입니다.
박태선이나 문선명 이런 이단들이 자기들이 메시야라고 떠들고 다닐 때 거기에 집 팔고 논
팔아서 들어간 사람들이 어리버리 한 초신 자들 아니었습니다. 다들 열심 깨나 부리던 교회
중진들이 그 속임수에 속아 넘어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겉으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처럼 행세했지만 모두다 어린아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지 못했던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단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속임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잘도 속습니다.
성경에는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라는 경고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마7:15)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24:23-26)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장로들을 모아놓고 권고하는 말을 한번 볼까요.
(행20:29-31)

- 739 -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후11:4,13-15)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 하는구나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들은 아주 훌륭한 목사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아주 자비로운 선교사의 모습으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인의 칭송을 받는 위인일 수도 있습니다.
(눅6:26)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거짓 선지자들은 모든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골2:8)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들은 많은 능력과 기적과 표적을 보이기도 합니다.
(살후2:9-11)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 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그러니까 어린아이 같은 신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속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로든 곳뿐만 아니라 유다서, 베드로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아주 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바른 예수를 바르게 알고 믿어라“
다시 오늘 본문 14절을 보세요.
(엡4:14)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지금 우리는 어린아이가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말이
“간사한 유혹”입니다. 이 “파눌기아”라는 말은 원래 “짐승이 그의 먹이를 좇아가며 기회가 올

- 740 -
때까지 숨어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맹수가 그 먹이를 잡아서 찢기까지 숨어서 천천히
냉정하게 뒤를 좇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십중팔구 물어 뜯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라라, 성장해라, 성숙해라,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라”하고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풍조에 밀려 요동합니다. 거기서 쓰인 단어 “크리도니 조마이”는
“파도치듯 일렁이다“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이리 밀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면 저리
밀리고 한 마디로 ”귀가 얇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 어린아이들에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약속해 줍니다.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적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5분 이상 한 곳에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아주 단순한 것이라고
사기를 칩니다. 그냥 안수 기도 한방이나 트레스디아스나 부흥회, 수련회 이런 것들을 성화의
수단으로 제시합니다. 꾸준히 자신과 싸우며 죄와 싸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그
먼 길을 교묘히 감추고 쉽고 빠른 길들을 제시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그 것을 좋아합니다.
정말 좋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인기를 잃더라도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회초리를 자주 댑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새벽 5시에 등교해서 저녁 11시까지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 땐 중3 아이들이 뺑뺑이 돌려서 “경문 고등학교”가 걸리면 “사흘
밤낮을 울었습니다” “난 이제 죽었다” 선생님들도 얼마나 극성이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그게 참 저에게 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짜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는 성도들을 달달 볶습니다. 함께 천국가야 하니까, 무럭무럭 자라라고 달달 볶는
것입니다.
(꼭 제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그 어린아이가 자라지 못하고 계속 어린아이로
머물게끔 편한 길을 제시하고 제공해 줍니다. 저희 중학교 때 기술 선생님이 계셨는데
월남전에 참전하셨던 분입니다. 거의 수업시간의 반은 월남 여자들 이야기였습니다. 월남
여자들을 월남말로 “콩까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선생님을 “콩까이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설렁설렁 놀 수 있는 기술 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지나고 나니까 기술 시간에 뭐 배운 게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망치질 같은 걸 잘 못
하나 봐요, 기술 시간에 맨 날 콩까이 얘기만 들어서.
어떤 게으른 영어 선생님 밑에서 영어를 배운 학생이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왔습니다.
얼마나 공부를 안 했는지 그 친구는 영어 알파벳의 발음기호만 겨우 읽을 줄 아는 친구입니다.
“A 는 아, B는 브, G는 그” 이렇게 발음기호만 대충 알고 미국엘 왔으니 말이 통할 리 만무
입니다. 이 친구가 햄버거를 사 먹으려고 맥도날드에 들어갔습니다. 바닥에는 wet floor
DANGER"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잘난 척 하려고 그걸 크게 읽었습니다. “당거”
그리고는 직원에게 “I'm a stranger(스트레잉거)" 하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 종업원이
친절하게 거기서 g 발음은 ”그“ 발음이 아니라 ”지“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머쓱해진 이 친구가 “oh I'm sorry, please give me a hamburger (햄버저)"라고
했답니다.
공부할 때 공부 안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할 때 게으르고
나태함에 빠지면 나중에 어떤 낭패를 당할지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들이 전능자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울면 부모는 언제든지 나의 요구를 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영적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조차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

- 741 -
분”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며 내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인식을 자꾸
심어줍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오락과 흥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모인 교회는 재미있고 흥미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어린아이들은 금방 싫증을 낼 것이고 그들이
떠나면 교회의 힘이 줄어들기 때문에 자꾸 재미를 추구하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시기심과 질투심이 아주 많습니다. 어거스틴의 책을 보면 어떤 어머니가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항상 둘을 한 번에 안고 젖을 물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녀석이 엄마
젖을 먹으면서 다른 아이 머리를 자꾸 밀더랍니다. “이거 다 먹고 저것을 마저 먹어야 하는데
다른 녀석이 그걸 먹고 있으니까 그 머리를 미는 것이랍니다.” 어린아이들은 질투가 많고
시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그 어린아이들의 시기심과 질투심을 부채질해서 공동체를
깨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장난감이 부서지면 마치 세상이 끝나버린 것처럼 울어댑니다.
부모가 보기에는 전혀 가치 없어 보이는 장난감인데 그 장난감을 잃게 되면 어린아이는 세상이
끝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런 어린아이에게는 늘 축복이야기를 해 주어야 합니다. 고난을
이야기하면 아이는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새 것을 좋아합니다. 새 장난감을 사 주면 헌 장난감은 금방 천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새 것도 3시간이면 이내 싫증을 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는 늘 새 것을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 아덴 사람들이 전부 무엇을 하고 있었죠?
(행17:21)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가장 새 것만 말하고 듣느라고 시간을 다 보냈다고 합니다. 새 것을 알아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이렇게 “크리도니 조마이” “파도치듯 일렁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 ”자라라, 성숙해라”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바로 믿는 일에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버섯들 중에 절대 만지면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독버섯입니다. 독버섯을 구별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지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칼라를 가지고 있는 것은 100% 독버섯입니다.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신앙의 길이 쉽고 탄탄한 대로라고 가르치는 독버섯 같은 가짜들을 조심하세요. 우리가 가야할
길은 정말 멀고 험한 길입니다. 열심히 가야 합니다.

제가 요즘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상담 전화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이 “목사님 저는


이러 저러한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이곳에 정말 남아 있어야 합니까?” 이런 내용입니다.
인터넷으로 저희 교회 웹사이트의 설교를 들으신다는 스위스에 계신 어떤 분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오셨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저는 스위스 대사관에서 근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한국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도 먼저 섬길 교회부터
찾았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우리 민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주일을 우리

- 742 -
성도들은 손꼽아 기대합니다. 그런데 저희 담임 목사님은 어떤 사명감이 있어서 이곳에 오신
분이 아니라 한국에서 더 이상 갈 도 없고 아이들 교육 문제도 해결할 겸해서 오신 분입니다.
저희 목사님 뿐 아니라 영주권을 목적으로 유럽에 와 계신 목사님이 많으신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목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목사가 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막으면 반드시 사고가 나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암에 걸리게 된다고 서슴없이 말씀하시면서
교회의 모든 재정을 혼자만 관리를 하십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안내면 직장까지 찾아다니면서
십일조를 강요하십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저도 이제 이 교회를 떠나려
합니다. 목사님 혹시 제가 잘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혹시 스위스에 좋은 교회 아시는
곳 있으시면 소개 좀 해 주세요.‘
하나 더 소개해 드리지요. 이것은 한국에 계신 어떤 성도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입니다.
‘목사님 저희 목사님은 한 달에 스무 번 이상 부흥회 강사로 나가시는 유명한 분이십니다.
표면적으로 공시된 저희 목사님의 연봉은 저의 열 배가 넘는 4억5천 만 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책 인세로 매달 수백만 원에서 수 천 만원씩을 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의 자동차는 재벌 그룹 회장님들이나 타는 최신형 체어맨입니다. 운전기사가 항상
목사님을 모시고 다닙니다. 우리는 한 달에 딱 세 번만 목사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세
번의 주일 설교의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이 되기도 하지만 혹시 그런 불경한 생각이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올까 두려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하나님의 종을 모욕하지 말자,
하나님의 종을 모욕하지 말자” 하고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목사님께서
매년 아프리카 선교 지에 전달하신다고 현찰로 가지고 가셨던 선교비가 한 푼도 그 곳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돈들은 전부 우리 목사님의 부동산
구입비용에 쓰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십일조가 너무 많아 십일조를 다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인들에게는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고 매주 강요를 하십니다. 목사님, 정말 교회를 옮기면 하던 일에 문제가
생기고 , 목사님이 저주를 하시면 병에 걸리게 되는 겁니까? 이젠 매주 교회 가는 것이
곤혹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야 하는 이게 신앙생활입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이 나온 김에 한 장 더 읽어 볼게요. 역시 한국에 계신 성도님에게 온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지만 너무 답답해서 편지를 올립니다. 저는
대구에 있는 중형 교회에 다니는 박 아무개입니다. 저희 교회는 지금 원로 목사님과 후임
목사님의 세력 다툼 때문에 예배다운 예배를 못 드린 지 수개월이 넘었습니다. 원로 목사님을
쫓아내려는 지금의 담임 목사님 세력과 원로 목사님의 세력이 둘로 갈라져서 서로 예배당
정문에 못 질을 하고 못 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예배당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예배당 정문 앞에 모여 앉아 확성기로 예배를 드립니다.
지금은 건물 소유권에 대한 소송이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담임 목사님은 그 예배당 건물로
쓰는 상가 건물을 모두 자기 개인 소유로 바꿔 놓은 상태여서 그 것을 도로 빼앗으려는 세력과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렇게 해서라도 집사 안수를 받은 이 교회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다른 좋은 교회를 찾아야 하나요? 다른 교회라고 또 이런 문제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습니까? 그냥 눈 딱 감고 사태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나세요? “참 어리다” 이런 생각 안 드세요?

- 743 -
바른 예수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지 못하면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전부 아이들처럼 자기를 전능자로 여겨달라는 아우성 아닙니까? 당연히
거기서 가르쳐 지는 것은 “당신들도 예수 믿고 전능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라”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한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베스트셀러 소설이 무엇인지 아세요? 나관중의
삼국지입니다. 삼국지는 서진 시대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라는 실화에다가 허구를 조금
가미한 책입니다. 후한 말부터 위, 촉, 오나라의 삼국시대를 거쳐 진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이죠.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조조, 동탁 수많은 영웅호걸
들이 등장해서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싸움에서 이기는 법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문열 씨가 번역한 삼국지만 천 오백만부가 팔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 삼국지에 그렇게 열광합니까? 거기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는 자가 영웅이 되고 나라를 차지하는, 우리의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주는 내용이 전편에 걸쳐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갈공명의 지략이 다 뭡니까? 적을 속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속여서 내가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그런 어린아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요.
소설가 황석영 씨는 황석영의 삼국지를 펴낸 뒤 그 후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삼국지를 읽는 맛은 가슴이 썰렁해 지도록 밀려오는 사람의 일생이 덧없다는 회한뿐이다”
그렇게 권모술수, 속임수로 싸우고 이기고 할 때는 재미있는데 나중에 다 끝나고 나면 모두다
덧없는 것이라는 회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를 한번 보세요. 전부 패를 가르고
권모술수와 속임수와 폭력으로 집단 패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이 아닙니까? 정치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교회도 그렇게 어린아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자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야 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어립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은 어떻습니까?
일전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자기 교회 성도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성도님은 평생 청소를 해서 열심히 모은 돈을 모두 식당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나이가 드셔서 이제 힘든 청소 일을 그만두고 조그만 가게라도 오픈 할
양으로 이리 저리 알아보고 있는데 아주 친한 교회 집사님께서 자기 가게를 사라고
하더랍니다. “이 가게의 하루 매출액은 얼마고 집세는 얼마고 한 달 순수익은 얼마이니까
이만큼의 권리금을 내고 인수하라“고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해서 믿고 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가게는 매달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친한 사람에게
속았다는 분함과 나는 완전히 망했다는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정말 참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신 생각이 “나도 똑같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 그에게 그 만큼의 권리금을
받고 파는 방법밖에 없다“ 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너무 갈등을 하셨답니다. 결국 그 분은 조용히 가게 문을 닫고 다시
청소를 시작하셨답니다. 얼마 후에 마켓에 갔다가 자기를 속인 그 집사를 만났답니다. 그런데
자신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 사람은 얼굴을 못 들고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가더랍니다.
그 때 그 분이 생각했답니다. “뭐가 성공이고 뭐가 승리냐” “다 잃었지만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고 밤에 두 발 쭉 뻗고 자는 사람이 진짜 이긴 거지, 그깟 돈 몇 푼, 사기 치고 사람을

- 744 -
보고도 인사도 못하는 그 사람이 이긴 거냐?” 이런 생각이 드셨답니다. 이게 어른입니다.
우리 교회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진 집사님이 계셔요. 그 집사님은 어서 빨리 그 가게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어떤 사람이 이 남지도 않는
가게를 사겠다고 나섰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요? 제가 뭐라 그랬겠어요. “빨리 파세요.” 그런데
그 집사님은 “목사님, 도저히 제 양심상 이런 상태에서는 팔수가 없어요, 집 주인한테 집세라도
깎아 달라고 해서 이문이라도 남게 해주고 팔더라도 팔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 때 확실하게 느꼈죠. “우리 서머나 교회는 확실히 목사보다 교인들이 훨씬 낫다“
네, 삼국지처럼 무조건 권모술수와 속임수를 동원해서라도 이겨야 하는 사회에서는 이 분들은
바보이며 실패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속여서 이득을 본 사람이 승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안 살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삶을 안 살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사는데 그렇게 안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며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북극점 등정에 성공한 최종열 씨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북극점에 도착해서 태극기를 꽂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 북극점에
도달하려고 지난 3년간 그토록 애를 썼던가? 왜 이 성공의 자리에서 나는 허무함과 허탈함에
슬퍼해야 하는가?”
삼국지 같은 삶은, 그런 어린아이 같은 삶은 결국 우리에게 허무함과 허탈감만 줄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시면서 누구를 위해 사시겠습니까?
열심히 자라십시오. 영적 어른이 되십시오.

- 745 -
(60) 나는 예수를 먹고 예수는 나를 먹는다.
(엡4:15-20)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본문을 통해 모든 신자들은 거듭나게 되면 영적
어린아이에서부터 출발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라나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린아이로 있게 되면, 우리는 사람의 궤술(퀴베이아, 속임수) 그
“퀴베이아”에 쉽게 빠질 수 있고, 또 간사한 유혹(파눌기아, 짐승이 먹이를 잡기 위해 살금살금
좇아오면서 기회를 노리는 것)그 “파눌기아”에 언제든지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랄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공부한 것이“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비결이 나옵니다.
그게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엡4:15)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으로 시작되지요. 방법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의 본문과 연결해보면 그 비결은
“바른 예수를 알고 믿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이 구절을 좀 더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15절은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14절과 대조해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모든 엉터리 교훈의 풍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붙잡아야 한다.”라고 그 14절의 해결 방법을 다른 표현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뭡니까?
진리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리스도이십니다. 그 진리의 내용이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성경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을 풀어 주시면서 “나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영적 성인이 되기 위해서 오직 진리를

- 746 -
붙잡으라.”는 말씀은 “오직 성경대로만 믿고 고백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날 에큐메니컬운동이다 뭐다 해서 기독교를 빙자한 얼마나 많은 엉터리 교훈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잘 배우고
익히고 그 대로만 믿고 그대로 고백하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기적을 부인합니다. 창조설을 부인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책이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은 책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솝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설화나 우화 등을 도입해 놓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좋은 교훈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저 팔레스타인 땅에 어떤 목수의 아들이 처녀에게서 났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수긍하기는 정말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설화 중에서도 3류 설화쯤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면 우리나라 경주에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서 신라를 건국했던
그 때입니다. 태백산 자락에서 하늘나라 헤모수의 아들 주몽이 알에서 태어나서 고구려를
세웠던 때입니다. 우리가 박혁거세나 주몽의 이야기를 설화나 신화로 믿는 것처럼
동정녀에게서 난 예수님의 이야기도 그렇게 취급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박혁거세나 주몽은 안 믿어도 예수님의 이야기는 믿습니다. 그게 신비입니다.
어떻게 그게 믿어지지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그대로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찔리죠?
그러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과 여러 기적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헛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5:12-15)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유다서는 그렇게 헛것, 엉터리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가만히 들어온 자”라고 표현합니다.
(유1:3-4)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 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 747 -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강대상이나 성경공부
자리에서 가르쳐 지는 것을 무조건 옳다고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성경을 토대로
말씀을 옳게 분변하셔야 합니다.
(딤후2:15)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는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람의
궤술에 속지 않고 간사한 유혹에 빠져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엉터리 교훈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게
배운 엉터리 같은 교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다”라고 번역이 된 “알레뜌오”는 “어떤 것을 꽉 붙들어 전혀 흔들리지 않게 되어
그 붙들고 있는 것을 자신 있게 고백하고 가르치고 행하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정말 진리로 믿고 있는 바는 반드시 행함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는 부탁과 아울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6:17-18)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우리가 배운 바 그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딤후1:13-14)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렇게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분변한 바를 열심히 행동으로 옮기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내가 참된 진리를 붙들고 말하고 행하는
데 있어서 “사랑“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진리를 고백하고 가르치고 행하는 데 있어서
친절함과 따뜻함과 포용력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단호하게
회초리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그가 바른 길을 가게
만드시기 위해 반드시 징계를 한다는 대목이 나오죠? 우리도 때로는 상대방이 오해를
한다할지라도 바른 진리를 가르치고 수호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참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기가 세운 교회 교인들과 원수가 된 적도
있습니다.
(갈4:16-19)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 748 -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이렇게 그가 세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로부터 원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원수 취급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는 말의 진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음으로 자라가게 된다.” 가 15절입니다.
이렇게까지 한 절 한 절, 한 단어 한 단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는데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전부 우리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진행되어져 갑니다.
15절 후반부와 16절을 연결해서 한번 볼까요?
(엡4:15-16)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음”으로 자랍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16절에 보시면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도움을 입어 연락하고 상합하여 자란답니다. 생명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에너지와 양분과 힘이 어떻게 공급이 되는가
하면 “마디를 통하여”공급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마디“”헵헤“라는 말은 ”끈, 힘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연락하고 상합하여“라는 말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져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힘과
에너지와 모든 것을 공급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떤 끈을
통하여 공급을 받습니다. 이제 그 생명의 젖줄이 다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그리스도와 생명을 공급받는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서로 연결이 되고 결합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과 동시에 서로 간에도 결합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각 지체가 자기의 분량대로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그 에너지와 생명력을
발휘해야 전체가 조화 있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그러지 마시고 제발 좀 서로 도와주세요, 그게 얼마나 중요하면 지금 그 이야기가 또
나옵니까?
잘 보시면 그렇게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생명력과 에너지와 힘을 공급하시는데 16절
말미는 우리가 ”스스로“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이중적인 성장의
논리를 갖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스스로 자라야 합니다. 이 말은 자칫 모순되는 표현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끝을 통해 자라게 하셔서 천국으로 데리고 갈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의 삶 속에서 그 자라남의 몸부림이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세우느니라.’ 하나님이 다 해 주시는 것 아닙니다.

- 749 -
그리고 이제 17절부터 24절까지에서 우리 신자들이 일상에서 매일 매일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함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먼저 옛 사람의 행위들을 나열하고 “그렇게 살지 말라“로
결론을 짓습니다. 17절을 먼저 보시면 우리가 행해서는 안 될 것들, 옛 사람이 하는 일들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엡4:17)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여기서 “행함”이라고 번역이 된 ”페리파테오“는 ”전체 적인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체적인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삶의 방식은, 허망한 것을 좇는 삶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목표지점을 분명하게
잡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망한 것“ “마타이오테스“는 ”텅 빈 것, 초점이 없는 것,
목적이 없는 것, 방향감각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텅 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 천리 행군을 갈 때 고참들은 수통에 물을 가득 담고, 주머니에 소금과
아주 간편한 군장을 쌉니다. 그리고 무좀약과 빨래 비누를 얇게 갈아서 비닐에 싸 가지고
갑니다. 혹시 군화에 뒤꿈치가 벗겨지게 되면 그 비누 간 것을 군화 뒤꿈치에 조금 넣어 두면
한결 편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400km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짐과 탈진에 대비해서
물과 소금만 준비합니다. 어차피 먹을 것은 부대에서 다 공급이 되니까, 절대 짐이 될 만한
것은 안 가져갑니다. 그런데 이제 갓 입대한 이등병들은 무슨 소풍 가는 줄 알고 군장 안에
초코파이, 사탕, 컵 라면 가득 담습니다. 어떤 놈은 칠성 사이다까지 사서 바리바리 싸 가지고
갑니다. 천리를 마냥 걷다보면 그런 거 먹을 새도 없고 10리만 가도 벌써 어깨가 축 처집니다.
결국 50리 지점에서 다 쏟아 버립니다. 정확히 뭘 해야 하고 뭘 가지고 가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우왕좌왕 좌충우돌 하다가 다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초점도 없고
목적도 없이 막무가내로 삶을 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이
행하는 모든 열심, 그게 “허망한 것으로 행함“”마타이오테스“입니다.
(롬8:20)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타락한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했다“그러죠? 여기서의 허무한데가 바로
”마타이오테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게 된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 선행체계,
지식체계를 아우르는 모든 것들이 다 헛된 시도들이라는 것이죠. “너희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외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모든 부귀영화를 경험하고 난 뒤에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구구절절이 토해낸 그 전도서의 고백을 사도 바울이 지금 다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옛 사람의 특징을 19절에서 방탕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엡4:19)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Having lost all sensitivity, they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sensuality so as to
indulge in every kind of impurity, with a continual lust for more.
이 “방탕“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아셀게이아“입니다. 이 ”아셀게이아“라는 단어는

- 750 -
”허비하다, 필요 없이 소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없이 나오다가 부엌에 수돗물을
켜 놓고 왔다거나 가스 불을 켜 놓고 나왔을 때 그건 이유 없이 소비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게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간을 정말 의미 있는 곳에 쓰고 계신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전에 제가 김도향씨가 부른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곡을 참 즐겨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제 야망과 꿈을 좇아 살았던 그 모든 삶을
한마디로 잘 표현해 주는 노래여서 그렇게 즐겨 불렀나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저의
지난 시절은 정말 허비하는 삶이었습니다. 바보 같은 삶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고
자부했지만 참 허무하고 허망했습니다. 결과가 허무하고 허망하다면 그 것을 이루는 데 쓰인
시간은 허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한 데 와 방탕“이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벤허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을 기억하십니까? 정말 탄탄하고 건강한 청년이었던 헐리웃 최고의
스타 찰톤 헤스톤이 몇 년 전에 마지막 인터뷰를 했습니다. 벌써 알츠하이머 병, 치매에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찰톤 헤스톤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40이 넘으면서부터 나는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황금 같은 나의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 이렇게 40년이 지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 다시 정신을
놓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한지 모르겠네요.” 그 모습을 TV로 보는데 그 주다 벤허가
얼마나 초라한 노인으로 변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이집트의 바로 투탄가멘 왕의 미라를 직접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생존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잘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얼마나
시체를 잘 간수했는지 1,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체가 거의 썩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황금 왕관 아래의 투탄카멘 왕은 그냥 마른 쥐포와 별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까 아마 지옥에 갔겠지요. 그렇다면 그 화려한 왕관과 그 황금
의자가 지금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졌었지만 그는 인생을
“아셀 게이아”“방탕”하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

제가 최근에 독일 영화 “falling"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히틀러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거의 이길 뻔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후에 점점
소련군이 그가 머물고 있는 베를린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을 때 그 히틀러의 심경을 참 잘
그려 놓은 영화입니다. 결국 그가 숨어있는 벙커의 800m 전방까지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자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가로 세로 4M의 벙커에서 자살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그
둘의 시체를 급히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웅덩이에서 태워 버립니다. 나치 총통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습니다. ”아셀 게이아“”방탕“한 삶입니다. 그들은 뭔가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전 생명을 허비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
그리고 세 번째로 옛 사람의 특징이 18절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엡4:18)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우리의 타락한 옛 사람은 총명이 어두워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미련하다”는

- 751 -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미련합니다.”
(롬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 인간들은 자기들이 참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해온 짓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킹콩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킹콩을 달래기 위해 그
마을 원주민들이 어떤 의식을 행합니까? 처녀를 제물로 바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늘상 있어
온 실제입니다. 우리가 인류 역사를 되 짚어보면 실제로 귀신들을 달래기 위해 산 사람을 바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몰렉에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바쳤지요? 자기 아이를 죽여서 바쳤습니다. 자기 배를 위해 산 사람을 죽여서
바칩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그런데 그게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왜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면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절을 합니까? 그 돼지머리가 정말
인간들의 일을 도와 줄 수 있나요? 첨단의 항공 산업을 하는 사람들도 여객기가 하나 들어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기장들과 임원들을 모아 놓고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그 돼지는
꼭 웃고 있지요? 예전에 저희 시골에서 참 돼지머리 많이 봤습니다. 마을에 무당이 몇 명
있었거든요. 근데 그 돼지들은 전부 웃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정육점
아저씨한테 왜 돼지머리는 전부 웃고 있냐고 물었더니 돼지를 죽일 때 간지럼을 태워서
죽인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전 진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돼지머리 파는
사람이 그 죽은 돼지 입을 웃는 입으로 만들기 위해서 막 잡아당기더라고요. 왜 그런지
아세요? 이왕이면 웃는 돼지가 복을 더 줄 것 같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왜 가게 안에 꼭 북어 말린 것을 걸어 놓습니까? 왜 집집마다 복조리를 걸어 놓습니까? 그게
똑똑하고 지혜 있다는 인간들이 하고 있는 짓입니다. 참 미련하지요? 혹시‘ 어, 나도 집에
북어 걸어놨는데‘하시는 분들 오늘 집에 가서 다 갖다 버리세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를 미련하다고 손가락 질 합니다.
‘야, 그렇게 힘들여서 돈 벌어다가 교회다 갖다 바치니? 이 미련한 놈아.’ 그런 소리 들어
보셨죠? ‘일주일 내내 그렇게 힘들게 일 하고서 하루 쉬는 일요일에 교회에 하루 종일 가서
앉아 있으면 넌 언제 쉬니? 이 미련한 놈아.’ ‘야, 저쪽에서 너한테 되로 주었으면 너는 말로
갚아 줘야지, 왜 멍하니 히죽히죽 웃고 있어, 이 미련한 놈아’
그 똑똑한 세상은 우리를 보고 혀를 찹니다. 미련하다고. 그러나 두고 보자고요. 누가 정말
미련한 사람들인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2:14)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752 -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세상은 우리를 가리켜 끊임없이 미련하다고 놀릴 겁니다.
(고전1:18-2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십자가의 도가 뭡니까? 나를 죽여서 원수를 살리는 도입니다. 당연히 세상은 그 십자가를
미련하다 합니다. 보세요. 세상에 지혜가 없습니다.
(고전2:8)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진짜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였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그 예수와 예수의 삶은 미련한 것이었으니까 미련한 것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예수와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지혜 있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예수와 예수를 따라 사는 십자가의 도를 섬기고 , 져 주고, 순종하는 그 삶을 미련하다고
놀려댑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네 번째 옛 사람의 특징이 18절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엡4:18)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라고 옛 사람의 특징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금 서구에서는 진화론이 한 풀 꺾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 중에 창조론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창조론도 하나의 가설이고 진화론도
하나의 가설입니다. 그러면 교과서에 인류의 기원에는 창조설과 진화설 두 가지의 가설이
있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전부 진화론 일색입니다. 아예 진화론만이 유일한 논리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이 된 자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에 관한 것에는 극도의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교회 안에도 이런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13:3-9,19-23)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 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753 -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교회 안에도 세상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듣습니다.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를 모릅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냥 예배당 출입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연애나 하고 밥이나 먹고 장사에 도움이나 얻으려고 예배당 출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은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삶에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금방 교회를 떠납니다. 그 사람들을 돌 짝 밭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이익과 재물의 유혹이 오면 언제든지 교회를 안 나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빼먹고 골프를 몇 번 쳤는데 교회 가서 따분하게 목사 설교 듣는 것보다
백 배 좋아요, 그러면 교회 안갑니다. 어느 날 교회 안 가고 장사를 했는데 훨씬 이익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그거 생각나서 교회 못 앉아 있습니다.
전부 진짜 같은데 마음이 굳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혀 그 삶에 열매가 없습니다.
여전히 부부싸움 하고, 여전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일가친척 다 필요 없고, 말씀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고 이런 사람들은 100% 가짜입니다. 진짜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아
결실을 맺는 사람입니다.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진짜들의 삶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옥토가 되었습니까?
(겔11:19-20)
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36:24-27)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 754 -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하나님께서 그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시편에서 어떻게 노래합니까?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create me a clean heart" "하나님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그럽니다. 우리의 마음을 조금 고친다고 부드러운 마음,
정결한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셔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열매가 안 맺힙니까? 정결한 마음, 옥토는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다면서요? 그 사람은 가짜 아니면, 여전히 게으른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여러분,
옥토에서는 씨도 안 뿌렸는데 무조건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나요? 아무리 부드러운 옥토라도
씨가 뿌려져야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죠?
여기서 씨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옥토에 뿌려져야
부드러운 옥토가 그 씨를 받아먹고 그 다음부터는 씨가 옥토를 먹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소홀히 대하는데 어떻게 열매가
맺힙니까? 씨도 없는 곳에서 열매를 찾는다면 그건 미친 사람입니다. 옥토가 되셨습니까? 그럼
이제 씨를 심으셔야 지요.
그렇게 마음이 무딘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살게 됩니다.
디모데 서에서는 그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볼까요?
(딤전4:1-2)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말세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화인을 맞았다는 것은 인두로 지진 화상 자국을 말합니다. 그 자리는 감각이 없습니다. 마음이
무딘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믿음에서 떠나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굳어있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지 보지요.
(딤후3:1-5)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게 마음이 굳은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무정한 자들이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자들입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자기 사랑”에서 나온 종교입니다.
아니, 교리는 그럴듯하게 교양 있게 잘 꾸며 놓았다 할지라도 결국 그 교주나 그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따랐던 것은 전부 “자기 사랑”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 “자기 사랑”앞에

- 755 -
무너집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코란을 외우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아시죠? 이슬람
국가에서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택시 운전기사가 기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면 팔목을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했을
때 회교국가인 이라크에서 엄청난 약탈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라크 군인들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입원치료중인 이라크 국립 병원까지 약탈을 해갔습니다. 아마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부상을 당한 군인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도둑질해 간 놈들은 그 놈들이 처음일
겁니다. 그게 매일 알라의 코란대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이 저지른 일입니다. 폭격으로 치안이
부재상태가 되니까 전부 도둑놈으로 변해서 알라고 뭐고, 기도시간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라마교 중들과 신도들은 라마교 경전을 읽어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니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라마교 경전이 적혀있는 원통을 사원 앞에 죽 달아놓고 그걸 한 바퀴
돌리면 한번 읽은 것으로 간주해 줍니다. 경전 읽는 것은 그렇게 해결하고 그들은 전부 어떻게
하면 국가로부터 이 라마교 승려로서의 권익을 다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것만 걱정합니다.
힌두교 사원에 가도 가관입니다. 힌두교 사원 앞에서 늘 제물 장수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힌두교 신자들은 고기, 떡, 꽃 같은 제물이나 돈을 가지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서 그걸
사제들에게 바치고 사제가 찍어주는 빨간 물감을 이마에 받아 가지고 나옵니다. 그게 그들의
하루치 거룩 인증입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전부 자기들의 복을 위해서만 매진합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불교의 가장 핵심 교리는 “몰아(沒我)“와 ”무아(無我)“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고승들이 죽으면 ”다비식“이라 해서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몰아(沒我)”를 외치며
제자들에게 화장을 명하고 죽은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그 “몰아“의 외침을 무색하게 젓가락을
들고 스승의 시체를 휘저었습니다. 사리를 찾은 것입니다. 그 뒤 ”몰아“의 지경에서 열반했다고
하는 고승들의 시체는 여지없이 부젓가락에 의해 헤침을 당했고 ”몰아“가 아닌 ”유아“를
상징하는 ”사리“들이 예쁜 보석이 박혀있는 사리함에 총총히 쌓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압니다.
나의 쾌락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예배를 빼먹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소비해도 아깝지 않은데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배우는 데 쓰는 시간은 너무
아깝지요?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겨 비참하게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밀려 4,000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엘리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여리고가 무너질 때, 그리고 요단을 건널
때 그들을 앞장섰던 하나님이 법궤였습니다. 그들은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30,000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패배소식을 들은
엘 리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엘리의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그 소식을 듣고 죽습니다.
왜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그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의 부적이상 취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이 대패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에게 법궤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로

- 756 -
말미암아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그들의 신상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시 아스돗에 큰 재앙이 닥칩니다. 블레셋은 얼른 그 법궤를 가두로 옳깁니다. 거기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재앙이 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진짜 이 법궤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여 시험을
해 봅니다. 아직 멍에를 한 번도 매어보지 않은 방금 새끼를 낳은 암소를 두 마리 차출합니다.
그렇게 새끼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 암소는 절대 새끼를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멍에를 매어 보지 않은 암소는 절대 멍에를 매고 먼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 암소에 멍에를
매게 하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연결합니다. 그 수레는 잘 끌리지 않는 새 수레입니다. 그런데도
그 소가 이스라엘로 두말없이 가면 그 법궤 때문에 블레셋에 재앙이 온 것이고 안 가면 그냥
우연으로 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실은 소는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곧장 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법궤를 찾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
법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들여다보고 무려 오만 70명이
죽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셨을까요? 호기심이라는 것이 뭡니까? 왜 관음증이라는
것이 커다란 이슈가 됩니까? 몰래카메라,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 그 호기심은 바로 우리
욕망과 내적 욕구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욕구 충족의 수단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역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법궤를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깁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그 법궤를 관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7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고 모두 잊고 있었던 그 법궤를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다윗이 그 법궤를 가지로 30,000명의
군사와 함께 기럇여아림으로 갑니다.
(삼하6:1-7)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2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웃사가 왜 죽었을까요? 소가 뛰어서 그 법궤를 잡은 것뿐인데 왜 하나님은 손수 그를
치셨을까요?
민수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법궤는 항상 레위 인들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2절에도 다윗이 그 법궤를 메어오려고 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법궤를
관리하던 웃사와 아효가 그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다 싣고 나옵니다. 그 법궤는 레위 인들의
어깨에 메어 운반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관리하던 그 웃사와 아효가 마치

- 757 -
자기들의 법궤의 주인인 것처럼, 이 법궤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내가 전문가라고 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옮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소가 뛰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그 법궤를 잡았습니다. 당시 수레의 높이가 60cm정도 되었고 법궤의 높이가
68cm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남자의 가슴 정도 높이에 법궤의 윗부분이 놓여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거기서 붙들었다는 말(아하즈)는 소유 개념으로의 단어입니다.
웃사는 “이건 내 것이다“라고 거들먹거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자기가
거들먹거린 것입니다. 성경 가르치는 분들 조심하세요. 하나님은 그 웃사를 죽여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지 않나요?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마음이 굳어진 자,
마음에 화인 맞은 자“”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시면 그런 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 욕심대로 행하되“라고 기술합니다.
(엡4:19)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옛 사람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한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행하는
종교행위들이 여러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건 모두 더러운 것입니다.
잘 분별하세요. 20절 보시면
(엡4:20)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럼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를 배웠습니까? 우리는 나의 유익과 나의 배를 위해 존재하는
예수가 아닌 십자가의 도를 좇아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예수를 배웠습니다.
제가 여태 일 년 반 동안 여러분에게 가르친 예수는 바로 그 예수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안 바뀝니까? 어떻게 여전히 자기에게 유익이 안 되고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면
투정부리고 삐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럽니까? 여러분, 우리는 허망하고 방탕하고 총명이
어두워진 자들처럼 미련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죄를 짓고도 아무 두려움 없이 그렇게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여러분의 옥토에 말씀의 씨를 심으십시오.
그러면 그 씨앗이 우리의 옛 몸뚱이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낼 것입니다. 이 밤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 758 -
(61) 벗고 입기
(엡4:20-24)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는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지 말라“ 라는 권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잠깐 복습을 하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사람, 우리의 옛 사람은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첫 번째로 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허망한 것
“마타이오테스”는 “초점이 없는 것, 텅 빈 것, 목표지점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함이라는 단어”페리파테오“는 ”전체적인 삶의 방식“을 말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그들의 모든 삶의 방식이 다 텅 비고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두 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총명이 어두워져 미련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지혜 있고
똑똑한 줄 알지만 총명이 어두워져 미련한 짓만 행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우상에다가 아이를 바치고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고 하는 그런 미련하고 어리석은
수준에 있으면서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지혜 있다고 착각하지요.
세 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마음에 화인을 맞아 마음이 굳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합니다. 책방에 있는 수많은 반기독교 서적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고 했지요.
네 번째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방탕합니다. 이 “방탕”“아셀게이아”는 불필요한
것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생명과는 상관없는 불필요한 것들을 좇아 살다가 허무하게 삶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허무한 삶의 내용을 기술한 후에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마치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에서 인간들의
죄의 내용을 낱낱이 고발하고 나서 3장 21절에서 ”그러나 이젠“”누니 데“로 시작하는 것처럼
오늘 본문 20절도 ”누니 데“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그 로마서 3장을 공부하면서 얼마나
감격을 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의 처절한 실체를 샅샅이 훑고 난 뒤에 ”그러나
너희는“이라고 대 반전을 일으켜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오늘 본문도 바로 그 감격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그렇게 허망하게 미련하게 목표 없이 시간을 허비하며 욕심을 좇아 방탕하게 살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았느냐” 그게 20절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허망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허망한 그 세상
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세상 속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아직도 그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 수 있느냐“ 이게 사도 바울의 권고의 요지입니다.

- 759 -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똑같은 권고를 합니다.
(갈1:4)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왜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그
세상에서 나온 상태라는 것입니다)
(시40:2)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벧전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17:14)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 세상 속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 것입니까?
(골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빌3:18-20)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0절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이다”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의 시민들은 이제 이 허망하고, 초점 없고, 방탕하고, 미련하고, 무감각한, 땅의 삶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그 하늘의 것들을 위해 이 땅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8절 19절을 보시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나오지요?
어쩌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로 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땅의 것에 몰두하고 사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정부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늘 정부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후6:14-16)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 760 -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렇게 세상과 섞여서는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산 위의 마을입니다. 말 아래 있는 등불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밝게 세상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사람 들 앞에서 “나는 이렇게 순결하고 정직하게
삽니다.”라고 나팔을 불지 않아도 순결한 우리의 삶의 방식“페리파테오”가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두운 세상에서 “나온”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개화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에서 나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어서 거기서 나오라고” 열심히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회 복음이니 해방 신학이니 해서 그 사회를 한번 멋지게
변화시켜 보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시도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에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인용한 부분이 있어서 여러분께도 한번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존 번연은 우리 신자들의 삶을 너무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기술해 놓은 사람입니다. handout에도 적어놓았으니까 한번 보세요.
“그 때에 나는 내 꿈속에서 그들이 광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그들 앞에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허영“이라는 마을이었다.
마을에 가까이 가보니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 시장의 이름은 “허영의 시장”이었다.
그 이름이 “허영의 시장”이라고 붙여진 것은 이 시장에 물건을 팔러오는 사람이나 그리로
물건을 사러 오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허영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
자가 “모든 것은 다 헛되다.“ 라고 외친 그 허영들을 사고팔고 있었다.
그런데 이 허영의 시장은 근래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세워져 있었다.
그 시장의 세워진 내력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지금 두 정직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천성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이 5천여 년 전에도 사람들 중에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성을 향하여 가는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바알세불이나
아폴리온과 레지온의 세 악한 마귀들이 그의 동류들과 한 짝이 되어서 이 허영의 마을에 온갖
허영을 파는 시장을 세워 놓고 연중무휴로 장을 열기로 고안을 하였던 것이다. 이 시장에서
파는 상품으로는 가옥, 토지, 직위, 명예, 진급, 귀족칭호, 국가, 왕국, 치정, 향락, 그리고
매춘부, 뚜쟁이, 아내, 남편, 어린이, 하인, 생명, 피, 육체, 영혼, 은, 금, 진주, 보석 등등 온갖
갖가지 오락물과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 시장에서는 언제나 요술사, 사기꾼,
도박꾼, 연극, 바보, 원숭이, 악한, 장난꾼, 그 밖에 온갖 못된 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여기서는 도적질하는 사람, 살인하는 사람, 거짓 맹세하는 사람, 피처럼 붉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을 돈이 없어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천성을 향하여 가려면 육적인 욕심의 상품으로 가득 찬 시장 거리를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장 거리를 지나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서서 천성을 향하여 가려는
사람은 불가불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만왕의 왕으로 계시는 예수님께서도 이 시장의
주인인 바알세불이란 마귀에게서 허영을 사라는 권고를 받으셨다. 그 마을 거리를
지나가시면서 예수님이 그 마귀의 권고를 귀하게 여기고 들었더라면 그는 이 시장의 주인이
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아는 바알세불이 그를 모시고 이 허영의 시장
거리를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고 이 세상의 왕국을 보이면서 어찌하면 이 복된 예수님을 꾀어서
허영을 사도록 할까 꾀를 내었던 것이다.

- 761 -
그러나 그 허영의 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허영을 사기 위하여 돈 한 푼을 안 쓰시고 그냥 그 시장을 떠나셨던 것이다. 그런데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순례자들은 이 시장을 통과하지 않고는 천성을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신의(信義)라는 두 순례자는 이 읍을 지나야만 했다. 그들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읍내 주위 전체가 법석을 떨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이 두 순례자가 입은 옷은 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입은 옷과는
아주 달랐다. 그리하여 그들의 옷을 눈여겨 바라보는 시장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놀리기도 하고 더러는 이 사람들은 미쳤다고 욕설을 하기도 하고 이
사람들은 외국인인가 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그 곳의 사람들이 이 두 순례자들의 말도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순례자들은 그 허영의
시장에서 쓰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그 시장의
사람들은 그 순례자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 순례자들과 그 허영의 시장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했다.
셋째로 두 순례자가 이곳 상품을 경시하여 눈여겨보지도 않는 것이 이 시장의 장사꾼들을
화나게 하였다. 상인들이 사 달라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순례자들은 귀를 손으로 막고 “내
눈을 돌이켜 허망한 것을 보지 말게 해 주십시오”라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위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위를 쳐다보는 이유는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더 좋은 하늘의 것들을
사겠습니다.”라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존 번연은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정확하게 간파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존 번연의 말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모를 치장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에도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세상 풍조를 좇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허영의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자질구레한 것들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보물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고 팔 것이 없습니다.
(골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이 허영의 시장에서 팔리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위엣 것을 찾는 삶을
살 수 있는가? 20절에 답이 나오죠? “너희가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웠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말미암아 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not able
not to sin"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모두 죄만 짓다가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굳은 마음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중의 어떤 한 무리에게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게 된 그 무리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워갑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딤전2:4)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762 -
이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즉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거기 쓰인 접속사 “카이”가 여기서는 동격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구원은 곧
진리를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정말 우리가 지식적으로
진리를 알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우리 주변에 성경의 교리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요? 그럼 아는 게 곧 구원이라는 말이 단순히 지식
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 적인 습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나에게 경험되어 체득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추구하던 세상의 가치가
덧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추한 것인지도 알게 되고 지금 영위하고 있는
삶의 저 너머를 궁금해 하게 되고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될 뻔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이제는 이 허영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런 것들에 눈
두지 말자“”그리고 그 하늘나라 백성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 내자“하고 경험으로 체득하게
되는 것, 그 전체를 가리켜 ”그리스도를 배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전7:25)
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9:3)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그러니까 그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초점 없이 허망하게 막 살아서는 안 되겠다“하는
곳까지 가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삶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그럼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우신 분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목사에게
배우나요? 물론 목사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지식적인 정보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배울 수 있습니까?
(요일2:27)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고전2:12-13)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십니까? 성령)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여러분은 성령께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에 있어서는 이 땅의 지식, 학벌, IQ 이런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버드 출신이라고 해서 예수를 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훌륭한 학자라고

- 763 -
해서 예수를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IQ 200의 천재라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이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그저 밭이나 갈던 농사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 부분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DL Moody나 리챠드 벡스터는 일자무식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윌리암
캐리, 존 번연 모두 무식한 구두 수선공들이었습니다.
DL Moody의 설교를 지식인들이 듣고 매번 50군데 이상의 문법과 맞춤법이 틀린 곳을
찾아내었답니다. 그런데 그 무식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난다, 긴다하는 지식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다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그렇게 이 땅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골의 일자무식 할머니들의 신앙이 그렇게 좋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조직신학을 아십니까? 성경 신학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그냥 “예수“하면 감격을
하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전에 제가 중등부 때 수련회를 갔었는데 그 때 우리에게 설교를
하러 오신 분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신 우리 전도사님 할머니셨습니다. 그런데 옥색 명주
한 복을 입으시고 바위 위에 올라서서 얼마나 유창하게 복음을 설명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마
제가 그 때 처음으로 ”진짜 복음“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2:8)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신 것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되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서 모두 도말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그 죄 속에서 뒹굴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내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리라”하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전6:9-11)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남창 노릇을 하는 것)나
남색하는 자(동성연애)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뒤에서 남 욕하는
것)나 토색하는 자(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전에는 그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했었지만 성령 안에서
씻음을 받고 성령께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 후에는 그런 것을 안 하는구나“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아도 여전히 삶이 지저분하고 너절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안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 많이 아시죠? 그걸로 자랑도 많이 하셨죠? 그러나 그 지식이 우리 삶을 바꾸지

- 764 -
못합니다.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다니는 제 선배는 하루에 담배를 4갑을
피웁니다. 폐암 전문 내과 의사입니다.
알콜 중독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들이 절대 그 지식으로 술을 못
끊습니다. 마약과 도박이 얼마나 가정을, 그리고 자신을 파괴하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것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하나요? 알아도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죠? 우리 경험해 봐서 알잖아요. 우리는 너무나 약합니다. 그래서 알지만 여전히 끌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성령의 도우심과 가르치심이 없으면 말짱
헛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많이 아는데 그 것으로
자기가 왜 술을 마셔도 되는지를 입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아무 구애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풍부한 성경 지식으로 왜 교회가 필요 없는 지를 설명합니다. 그건
저주입니다. 그렇게 성령 하나님과 관계없는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내 질 때
“이건 내가 내 지식으로 내 의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도우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혀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식적인 것이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듣지 않고 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고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기본입니다. 그렇게 습득된 지식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게 삶 속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구절의 진의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21절을 보시면
(엡4:21)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바울은 우리가 배우는 그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설파합니다. 제가 전에 4 복음서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이 홀로 독립적으로 자주 쓰이지만 서신 서에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이름 ”예수”가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분은 부활하시고 승귀 하셔서 하나님 우편의 왕좌에
않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 예수의 이름으로만 그 분을 부르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
드렸지요? 그러면 여기 본분에 쓰인 예수는 어떤 예수이겠습니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만 쓰였잖아요. 이 말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 진리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역사성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들처럼 어떤 개념이나 이론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냥
여느 종교들처럼 그 가르침들이나 이론을 잘 습득해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잘 살아내면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는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기적과 이사들, 초월적인 것들은 단지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동원된
”픽션“이라고 기독교의 진리를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
처녀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후에 실제로
골고다에 섰던 그 십자가를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물위를 걸으셨던 인간 예수를 우리는

- 765 -
믿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덩이의 떡 조각으로 2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습니다. 진리는 바로 그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개념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이며 역사입니다.
그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 설정된 인물이
아닙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어떤 가르침”이 나를 구원한 것 아닙니다. 바로 그
“예수”가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들레헴에 태어났던 인간 예수 안에 있는 진리”
(행4:11-12)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줍지 않은 세상 지식으로 엉터리 예수를 만들어 내는 마귀의 속임수에 속지 마십시오.
다빈치 코드요?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거기에 혹 하신 분들 계시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니까요. 저한테 오세요. 제가 성경을 가지고 구구 절절이 왜 그 책이 틀렸는가를
설명해 드릴 테니까 잘 들으세요.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에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배우고 아신 분들은 여러분이 배우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벧전3:15)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 자, 지식 적으로만이 아닌 삶 속에서 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득한 사람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나는 기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행복합니다.” 이건 설명이 아닙니다.
이슬람 교인들도, 불교인들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실제로 그들도 그들의 신앙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들과는 다른 설명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어야 했는지 그 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 살다가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 뻔 한 인간이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떠한 소망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명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래서 난
구원받았고 그래서 난 기쁘다.“ 단순히 지식적으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이 예수를 설명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 자입니다.

- 766 -
계속해서 21절 후반부를 보세요.
(엡4:21)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진짜로 예수에게서 진리를 듣고 또한 그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방입니다. 그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 님 생전에 예수님께 설교를 들었을 리가 만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가
예수에게서 듣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언제 어떻게 들으셨어요? 못 들었죠? 그럼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분명 예수님께서 “나의 음성을 들은 자들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살아나게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승천하실 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약속을 안 지키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부활의 몸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예수로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쪼개서 교회가 모이는 곳에 나와 앉아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라고 시인하게 되셨습니까? 고린도 전서 12장 3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된 것입니까? 성령하나님, 성령하나님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들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듣는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세요.
(엡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게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에게서 듣는 자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와 세상의 윤리 도덕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 도덕은 “옛 사람을 벗는”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 하지 마라, 저것 하지
마라” 이게 도덕의 진수입니다. 이건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입니다.
“왜 새벽기도 안 나와?” “왜 주일 날 자장면 사먹어?” 이런 것 가지고 목숨 거는 사람들
많지요? 기독교는 거기서 더 많이 가야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옛 사람을 벗는 것 뿐 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 있습니다. 뭘까요?

- 767 -
“거룩”입니다. 그게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지가 누더기를 벗어버리는 것은 새 옷을 입기
위해서입니다. 누더기를 벗긴 벗었는데 새 옷을 안 입고 계속 벌거벗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미친 사람” 되는 것입니다. 벗는 다는 것은 다른 좋은 것으로 입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습니다. 죄에서 건져졌다는 것은 옛 사람을
벗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냥 건진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딛2: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죄에서 나와서 선한 이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를 안
짓는 것에서 멈추는 것은 기독교를 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섬김과
겸손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구원과 거룩의 삶을 분리하는 것만큼 복음을 부인하는 죄악 적인 것은 없습니다. 모든 구분
중에서 가장 무서운 구분은 우리가 믿는 바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고 핑계 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사람에게서 나온 악한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서 두루 지낼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다시 자기 있던 곳에 와 봤더니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어서 그 귀신이 다른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사정이 전보다 더 악해졌다“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그저 도덕적인, 윤리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소극적으로 정의해 버리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 같은 모습은, 겉은 번드르르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옛 사람은 벗어버린 것 같은데 뭘 입지 않고 계속 벌거벗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건
아주 악한 위선이요, 외식이요, 쇼라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게 교만으로 변해서 더욱더 악한
지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꼭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왜요? 아직 용서가 뭔지
포용이 뭔지 이해가 뭔지 인내가 뭔지 섬김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주일학교를 맡고 계실 때, 여름 성경학교가 끝나고 주일학교
교사들하고 전부 뚝 섬에 가서 회식을 하셨답니다. 일주일 동안 수고 하셨다고 서로 서로
격려하면서 밥도 먹고 수박도 잘라먹고 막 가려고 하는데 교사 중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이게 뭡니까?” 그러더래요. 그래서 다들 수박 먹던 거 물고서 그 청년을 쳐다 봤다지요. 그
선생님 왈 “우리가 먹은 이 밥 값이면 가난한 농어촌 교회 몇 군데를 도와 줄 수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수박까지 먹어야 합니까? 수박은 안 먹어도 살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죠. 다들 아무 말도 못했답니다. 그 때 선생님들이 수박 먹은 게 전부 얹혀 가지고
아주 우울하게 다들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아니 수박 좀 먹으면
어때요. 그렇게 농어촌 교회가 안타까우면 자기가 좀 돕던가, 꼭 헌금도 안 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대놓고 사람들 무안을 준다고요. 자기가 보지도 못한 농어촌 목사님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왜 자기 곁에 있는 선생님들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난도질을 합니까? 왜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해요. 그 때부터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일기
시작했답니다. 선생님들이 회의 하다가 그 선생이 휴지라도 흘리고 가면 “우리가 이렇게

- 768 -
휴지를 흘리고 가면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시겠습니까?”, 그 선생이 조금만
늦어도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시간관념이 그렇게 없어서 되겠어요?” 다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니죠. 옳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아내가 가스 불을 켜 놓고 나가는 바람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울고불고 하는 아내에게
“그러니까 내가 가스 불 켜 놓고 다니지 말랬잖아” 그렇게 말하는 게 옳습니까? 아내가 잘
못했지만 “괜찮아” 하며 위로해주고 안아주는 것이 옳은 것이죠.
교통사고가 나서 조서를 받고 있는 친구한테 “그러 길래 평소에 속도위반하지 말랬잖아”
그러면 됩니까? “어디 안 다쳤니?” 가 옳은 것이죠.
교인이 사업이 망했는데 거기다 대고 “주일을 밥 먹듯 빼 먹더니 하나님한테 벌 받은 거야”
그러는 바람에 달마사로 간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제가 드린 hand out에 위 아래로 여백이 많지요? “왜 종이 아깝게 이렇게 빈칸을 많이 남겨
뒀어요? 다음부터는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빼곡하게 써주세요”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만
옳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여백의 미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여백이, 융통성이 좀
있어야지요. 원리 원칙에서 머물러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복음을 아직 반도 못 이해한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뭘 잘 못했다 하더라도 먼저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하고 이해를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셔야지, 그냥 돌격해서 받아버리는 것은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남편이 아직 술을 못 끊고 있습니까? 어떻게 교회 다니는 인간이 아직도 술을 못 끊느냐고


바가지 긁지 마세요. 남편들도 다 살자고 그러는 거예요. 그 남편은 술을 마셔서 뇌를
마비시켜서라도 여러분 같은 아내하고 끝내 헤어지지 않고 살아 보려고 가끔 뇌를 마비시키는
거예요. 그게 잘하는 짓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좀 이해심을 갖고 보자는 겁니다.
“아무개 집사가 교회 앞에 와서 담배를 끄고 들어왔다“ 그럼 뒤에서 수군대지 말고 ”와, 아직
담배도 못 끊은 사람이 어떻게 꼬박 꼬박 교회를 오냐, 참 그 정성이 갸륵하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셔“ 왜 이리로 못 가시냐는 말이에요.
전부 자기네 목사를 닮아 가지고 때리고 부수려고만 그래요. 전 여러분에게 옳은 것을 가르쳐
드리기 위해 소리를 빽빽 지르는 거지, 절대 여러분을 무시하거나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끼리는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 주시면서 서로 서로 잘 자라 가셔야
합니다.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 다른 사람이 정죄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 공부 이렇게 많이 하는데, 너는? 나는 새벽기도 매일 나오는데 너는? 나는 교회
봉사 이렇게 많이 하는데 너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 되는데 쓰여야 하는
것이지 분열을 가져 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벗은 자는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버리고 입는다.”는 말 “아포 떼스따이”“엔 뒤 사스따이”는 둘 다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이미 과거에 영 단번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22절의 ‘벗어
버리다’‘아포떼스따이’와 23절의 ‘새롭게 되다’‘아나떼우스따이’, 24절의 ‘입다’‘엔두사스따이’는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사 혹은 설명형의 부정사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그 부정사들은
모두 21절의 ‘너희가 가르침을 받았다’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구원 받은

- 769 -
이후에도 계속해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과거에 옛 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미 다 일어나 버린 일인데 왜 우리에게 또 벗고 입으라는 요구를 하는가? 그
대답이 원문에는 나옵니다. 벗고 입으라는 단어는 부정 과거 시제지만 23절의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아나뉴스따이“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진행의 의미“가 있다고
했지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고
있는 사람이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계속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already, not yet"의 교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로 한번 가보시죠.
(골3:9)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여기서도 분명하게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미 옛 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신분적이며 운명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옛 사람을 벗어가야 하고
새로운 사람을 입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not able to sin"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합니다. 오직 우리만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우리가 이미 벗은 옛 사람을 매일 매일 벗어버릴 수 있고, 우리가 이미 입은 새 사람을 매일
매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롬6:6)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우리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럼 이미 죽었는데 뭘 벗어버리라는 말인가?
여러분, 로마서 5장이나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우리는 날 때부터 아담 안에서 태어난다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모두가 바로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이 옛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옛 사람이 죽은
사람만이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은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악한
것들은 이미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옛 사람은 살아있는 것처럼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것은 옛 사람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붙어 있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너무 오랜 시간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그
어두운 죄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 습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이미 죽은 그 옛 사람을 빨리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아냐, 네 옛 사람은
아직 안 죽었어.“ 이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자포자기(自暴自棄)
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계시면 여러분의 옛 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단지 그 옛 사람의 습관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죽은

- 770 -
껍데기를 얼른 벗어버리십시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 중 대부분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래 주인이 시키는 것만을 하는 단순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자유인의 삶보다 그렇게 노예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익숙하고 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습관은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전에 한번 말씀드렸죠? 군대에 있을 때 저를 몹시도 괴롭히던 고참이 있었습니다.


“제대하고 사회에 나가서 저 놈을 길에서 만나면 저 놈의 모든 이빨을 새 걸로 갈아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제대하고 몇 년 후에 진짜 그 고참을 길에서 만났는데 때려
주기는커녕 “충성” 하고 경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던 그 못된 죄들, 악한 말들, 모난
성격들 다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은 시체를 우리는 매일 매일 벗어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벗으세요. 그리고 거룩의 옷을 입으세요. 용서의 옷, 인내의 옷, 섬김의 옷, 사랑의
옷 새 옷을 입으세요.
그런데 22절을 보시면 “그 옛 사람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의 삶은 전부 썩어져 가고 있고 썩게 만드는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여러분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에 소홀히 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이
하시는 일들도, 썩어져 가고 있는 일이고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썩게 만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켜서 이루어낸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지만 우리는 결국 이 우주를 썩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휴가 때 어떤 곳을 선호하세요? 우리 영이가 캠핑을 자주 가는데 보통
어디로 캠핑을 갑니까? LA downtown으로 갑니까? 63빌딩 옥상으로 가나요? 사람들은
자기들의 쉼을 위해서 문명의 때가 조금이라도 덜 묻은 곳으로 떠납니다. 그래서 푸켓이나
미얀마, 피지 이런 미개한 나라의 휴양지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편한 삶을 위해
문명을 발달시켜 지상 낙원을 이루려고 하는 인간들이 정작 쉼을 위해서는 문명이 닿지 않는
곳을 선택합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문명은 결국 지구를 썩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덜 썩은 곳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삶이 바로 그 썩어져 가는 구습입니다.
(갈6:7-8)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 썩어짐의 끝이 어딥니까? 사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옛 사람의 삶, 썩어져 가는 것들을
추구하는 세상의 삶 속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2절은 그 썩어져 가는 구습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밝혀 줍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바로 욕심입니다. 이 “욕심”이라는 단어는 전에도 한번 설명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원하고 원했다“ 가 오늘 본문에 ”욕심“으로
번역이 된 ”에피뒤미아“입니다. 그러니까"에피뒤미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 771 -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처럼 인간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나쁜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본능, 욕구가 있습니다. 식욕, 성욕 같은 자연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게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게 나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안에 나쁜 것을
창조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본능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본능과 함께 두뇌와 생각하는 이지와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본능들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인간의 마음으로 다스리고 통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본능들이 “에피뒤미아”가 바른 위치에서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이지와 이해의
통제를 받게 되면 그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이제
그 본능이 인간의 마음을 통제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본능이 주도권을 잡고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본능은 욕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정욕이나 본능이
이지를 침묵케 하고 양심과 하나님의 소리를 묵살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그 “에피뒤미아”라는 단어가 인간에게 쓰일 때는 나쁜 의미로만 쓰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은 “유혹”이라는 것이 통제합니다. 22절에 보시면 “유혹의 욕심”이라고
나오지요? 이 “유혹” “아파테스”는 “기만, 속임수”라는 뜻입니다. 기만과 속임수는 누구의
무기입니까? 사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은 그 사단의 손아래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11:3)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그 사단은 아주 달콤하게 인간을 미혹합니다.
(잠2:16)
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잠5:3-4,20)
3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4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20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잠6:25-26)
25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이렇게 사단 마귀는 아주 매력 있고 달콤한 모습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본능이 욕심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그의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나만 따라오면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그리고 삶이 행복해 질 거라고 얼마나 아부를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유혹들은 탕자의
주머니를 완전히 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떠나 버렸습니다. 결국 그
탕자는 먹을거리를 위해 돼지와 다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온통 자기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행복이

- 772 -
영원할 거라 믿고 있겠지만 결국 돼지우리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 마귀의 유혹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일초도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여전히 약한 존재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다라 붕어 낚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라에다가 붕어 몇 마리 갖다놓고 100원씩 내고 낚시 하는 겁니다. 물론 잡으면
다시 놓아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붕어들이 금방 잡았다 놓아줘도 또 금방 미끼를 뭅니다.
그래서 윗입술이 아주 너덜너덜해 지죠.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 더러운 유혹에 빠져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의 삶을 살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 열심히 부탁하며, 의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죽은 옛 사람을 빨리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매일 매일 입으십시오.

- 773 -
(62)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부분을 잠깐 복습을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7절부터 19절까지에서 이방인들에 대해서 기술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를
믿기 전의 에베소 교인들의 상태에 대해 언급을 한 것이죠. “너희들은 허망하게 행했던
자들이고 총명이 어두워져 있던 자들이며 무지하고 마음이 굳어져 있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감각 없는 자였고 방탕에 자기를 방임하던 자들이었고 모든 더러운 것들을 욕심으로 행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되었는데도 왜 그런 것들을 좇아 다니느냐?
너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지 않느냐?” “너희는 진리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배웠고 그에
대해 들었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배웠다. 그러니까 너희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라” 여기까지가 지난주까지 우리가 공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다”라고 인간으로서의 이름 “예수”만 쓴 것입니다. 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 했지요?
왜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역사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에 쓰인 동사가 부정 과거시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다” 는 뜻이라고 했지요?
골로새서에 가면 좀 더 정확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골3:9-10)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똑같은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너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다”
그런데 왜 성경 여러 곳에서는 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요구한다고
했습니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옛 사람이 죽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게 이러한
요구가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더러운 우리 옛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제 죽어버린 그 옛 사람의 시체를 벗어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774 -
25절을 보시면 “그런즉“이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엡4:25)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여기서 쓰인 “그런즉” “디오”라는 접속사는 어떤 일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너희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고”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여주시고 우리 안에 새 사람을 창조해 주신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후로 계속해서 옛사람을 벗어가야 하고 새 사람을
입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어서
“어차피 하나님께서 나를 완성하실 텐데 뭐, 난 그냥 하나님께 다 맡길 거야” 이렇게 살아도
된다면 에베소서 4장 이후는 다 찢어 버려야지요.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하실 건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강령을 배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성시켜 가실 것이지만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화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믿음의 삶입니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서 우리는 일해야 하며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벗고 입는 일을 해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은 이 벗고 입는 일이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임을 인식하십시오. 거기부터가
시작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다른 이가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힘을 풀고 기다리며 그 일이 우리에게 성취되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지고도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써 보지도 않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의도적으로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옛 사람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귀 적이고 세상 적인 삶에나 속하여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들을 벗어버리십시오. 그것들을 제거하여 버리십시오.“
노 목사님의 분노가 보이지 않으세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기 원하시면 탁월한 신학자인 존 오웬 목사님의 ”The Mortification of
the Flesh"를 꼭 읽어 보십시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미 다 읽으신 책이죠? 우리 청년들에게는 제가 한 권씩 사 주었으니까
분명히 읽었을 테고요. 목사가 박봉을 쪼개 그렇게 여러 번 책을 사 주는데 그런데도 안
읽었다면 여러분은 정말 회개하셔야 합니다.

존 캘빈도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렇게 이 부분을 주석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권유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권고하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우리의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린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위에 덮인 이중의 실로 짠
털옷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직도 남아있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누가 존 캘빈의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어서

- 775 -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이제 목숨 다 바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목숨을 거는 겁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충동질하고 미혹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수시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실 일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여러분 자신에게 확인시키십시오.
“난 이제 새 사람이다. 나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다. 나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옛 사람과 관계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로운 창조물이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다. 나는 새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시켜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예전처럼, 그 악한 세상에서
사는 자들과 똑같이 살수가 없다” 여러분은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복음”아닙니까?
(빌1:27)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우리는 매일 매일 그 복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합당한 삶, 벗고 입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전투의 현장입니다. 맹하게 사시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여러분을 총력을 기울여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얼마나 이 부분을 강조하시는지 이 부분의 강해 설교 제목을
“기도하지 말고 행하라”로 붙이셨습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행하기도 하십시오.”가 아닙니다.
“기도하지 말고 행하라”입니다. 그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해 내야 하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삶이 엉터리 같았으면 그 노
목사님께서 설교 제목을 “기도하지 말고 행하라” “not pray, just do it"이라고 붙이셨겠습니까?
여러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건 모두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롬8:15)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요일4:17-18)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 안에는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으십시오. 새 사람을 입으세요. 알콜, 도박, 마약, 분 냄, 시기, 질투, 다툼 다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겁먹지 마세요. “나는 환자야, 난 할
수 없어“ 아닙니다. 이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just do it!"
우리 윤 효진 집사님이 어떤 못된 랜드 로드를 만나서 1년 넘게 고생을 하셨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하고 정말 눈물 속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목사인 저도 그
주인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잘 참아 내셨습니다.

- 776 -
그 억지와 치기에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계속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잘
참아내셨습니다. 결국 1년이 넘어 일이 기적처럼 해결이 되었습니다. 우리 윤 집사님께서 그
못된 주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실 때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나오셨답니다. 그렇게 못 되게 굴던 그 주인이 안절부절 못했답니다.
그게 승리입니다. 세상을 향해 멋지게 카운터펀치를 한방 날린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다른 분에게 전해 들으면서 참 통쾌했습니다. “이게 진짜 승리구나, 승리는 정말 사람을 이렇게
통쾌하게 만드는구나.“ 그리고는 주일날 윤 집사님을 뵙는데 무슨 갑옷을 입은 전사가 저기서
걸어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이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속에 뭐가 들어 있기에 그 동안 그런
억지를 다 참고 견뎌냈을까? 그리고 멱살을 잡아도 시원찮은 마당에 공손하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가는가?” 윤 집사님이라고 왜 성질 없겠어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견뎌내고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제가 저희 집사람을 보면서 참 은혜를 받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신혼 초에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저한테 혹시 눈이라도 흘기고 가면 달리는
차 앞을 가로막고 그 사람을 제 앞에 붙들어 와서 기어코 사과를 시키고야 마는 괴력의 왈가닥
“루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참 잘 참습니다. 엊그제 월요일 날도 제가 집에 있는데 저희
집사람이 동네 가게에서 인종차별 비슷한 모욕을 당했답니다. 그런데도 어제 들은 남편 설교를
떠올리면서 계속 웃어 주었답니다. 나중에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더래요. 같이 맞받아서 욕
한번 해 주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지는 것입니다. 참는 겁니다.
지금 “잘 벗고 잘 입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실 때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셨답니다.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 바로 그 설교를 하시는 날, 그 동네에서 제일 골치 덩어리인
남자가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40대 중반의 남자는 싸움꾼이었고 술고래였고
바람둥이였답니다. 술만 마시면 누구하고든 싸움의 자웅을 겨뤄서 꼭 이겨내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었고 당시 불량배들이
그렇게 했듯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있었고 늘 그 힘의 상징인 콧수염을 자랑했었습니다.
늘 그 콧수염이 싸움의 발단이었습니다. 또 다른 불량배들이 자기 콧수염이 더 길다고 도전을
해 오면 그거 재 보다가 싸움이 붙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다음 주에 그 분이 교회에 다시 나왔는데 수 십 년을 길러오던 그 콧수염을 완전히 밀고
나왔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노파심에 “교인들 중의 누가 형제님보고 콧수염을 자르라고
충고하던가요?” 그랬더니 그 남자가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이 지난주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싸움의 동기가
되는 콧수염부터 잘라버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 후로 그 분은 완전히 변한 새 사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에드워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무지하고 글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난하고 초라해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반드시 옛사람은 벗어 버리셔야 합니다. 저는 이 형제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단순한 신앙인들이 우리 교회에 가득 차기를

- 777 -
하나님께 간구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은 늘 수의를 입어야 합니다. 그 수의를 입고 있는 동안 그들은
죄수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소방관들은 소방관의 옷을 입습니다.
경찰은 경찰의 옷을 입지요. 그 옷을 입고 있는 동안 그들은 모두 그 옷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거지같은 누더기를 벗기고 하늘의 잔치에 입고 갈 파티
복을 입혀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파티 복을 입고 여전히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으면 안
되지요. 그 왕자 옷에 걸 맞는 그 공주 옷에 걸 맞는 품위 있는 삶을 살아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엡5:8-12)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여기서 “참예하지 말라“”슁코이노네오”는 “철저하게 관계하지 말라” 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경험상 “나를 죄짓게 하는 것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장소만 가면 여러분이 주체를 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시거든 거기에 가시면 안
됩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 보시면 안 됩니다. 듣지 말아야 할 것들 보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망가십시오. 만나지 마세요. 그게
상책입니다.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철저하게 막아야 합니다. 욥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욥31:1,7)
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욥은 자신의 눈과 언약을 맺었답니다. 자기는 지나가는 처녀도 안 쳐다봤다는 것입니다. 혹시
죄에 대한 욕구가 올라올까봐)
7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항상 마음은 눈을 따라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엉뚱한 것들 보지 마십시오. 눈과
언약하십시오. 귀와 언약하십시오.
(롬8:13)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골3:5-8)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우리는 반드시 육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건 누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이라“”네크로사테“는 ”의도적으로 공격을 하다” 혹은 “굶겨서 죽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에게 의도적으로 먹이를 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 778 -
여러분이 죄에게 먹이를 준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주 끊어 버리지 못하고 찔끔 찔끔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아예 의도적으로 그 놈을 굶겨 죽여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육을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그 근육이 위축되고 약해져서 결국은 못 쓰게 되지요?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았다가 찔끔 하고, 도 찔끔하고 그러면 계속 그 놈에게 밥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아예 쓰지도 말고 굶겨 죽여라“ 그게 “죽이라“”네크로사테“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하는 게 그리 쉽지 않은 것입니다.
(고후9:26-27)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서 “내 몸을 치다“라는 단어는 ”휘포피아조”입니다. 이 “휘포 피아조”는 권투 선수가
상대를 쳐서 KNOCK DOWN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려잡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의 육신을 때려잡듯이 옛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나는 육신의 도모를 하지 않고 육신을 죽여 복종케 하기 위해 늘 나의 몸을 칩니다. 나의
몸을 녹초가 되게 합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그것을 쓰러뜨립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 안에 있는 나의 적수를 향해 기를 세웁니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몸을 넉 아웃시킵니다.”
이런 분들의 고백을 들으면 우리가 참 부끄러워집니다. 이렇게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이 왜
오늘날에는 이렇게 사라지고 없는지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23절을 보시면
(엡4:23)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우리는 날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사도는 강조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아나뉴스따이“는 현재시제라고 했지요?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진행형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심령의 새로움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라고 번역이 된 “프뉴마티 투 누스”는 “마음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기독교 교리를 바로 정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여러분, 마음은 뭐고 마음의 영은 뭡니까? 이걸 따지고 들자면 이분설이니 삼분설이니
전인설이니 이러한 전문적인 “인간의 구성 론”을 다 들춰내야 하는데 저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 아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 아니다,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은 하나다“ 이건 복음과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분설을 지지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비중 있게 연구를 해 보지
않아서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별로 거기에 대해서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 뒤에 그 마음 자체를 주장하고 조정하고
작용케 하는 내적인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음의 영” “프뉴마티 투 누스”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 ”아나뉴스따이“는 ”다시 새롭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애나케 팔라이오“”재통일“에 대해서 공부할 때 배웠듯이 여기도 ”다시“를 의미하는 ”아나“가
앞에 붙어서 ”다시 새롭게 되다“”쇄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779 -
그러면 전에는 우리 마음의 영이, 우리 마음을 조정하는 영이 새것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움직이는 영이 타락을 한 것입니다.
(창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타락이라는 것은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생각과 계획이 악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태초에 가지게 되었던 마음의 기능은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주도하는 영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 제가 안토니 후크마의 인간론을
요약해서 설명해 드릴 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 중에 우리는 기능적 형상을
잃었고 구조적 형상은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죠.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독수리가 여전히 날개는 가지고 있는데 그 날개로 날지를 못하고 마당을 쓸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마음을 움직이는 영이 새로워지기 전에는 옛 사람을 벗을 수
없고 새 사람도 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 마음을 움직이는 영을 새 것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새롭게 하여”가 수동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제를 현재형을 써서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마음의 영은 이미 새로워져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그 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영이 다시 새로워졌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성경을
통해, 우리 신앙생활을 통해 매일 매일 조금 씩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왜 수동태입니까?
여러분이 이걸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100% 하나님이 완성시켜 가시는 것이지만, 100%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50% / 50% 나눠서 하는 것도 아니고 100% 우리가 하는 것이고 100%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진리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100%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100%의 우리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너희는 옛 사람을 이미 벗었다. 너희는 새사람을 이미 입었다“라고도
말씀하시지만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옛 사람을 죽여라, 새 사람을
입어라, 심령을 새롭게 해라“ 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마음의 영’이 매일 매일 새롭게 됨으로써만” 우리는 옛사람을 벗을 수
있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인 바른 삶을 사는 것을
가리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심령이 새 것이 되어 그
새 마음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흉내를 잘 낸다 하더라도 정말 여러분의 심령의


새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서 차가운 한기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아무리 번드르르한 경건한 삶을 살고 아무리 종교행위를
열심히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 주위에는 상처를 입는 사람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러분의 심령을 날마다 새롭게 한다고요? 성경에 설명되어 있는 여러분의
신분을 매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780 -
그게 진짜 새 사람을 입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시고 거기서 여러분의 신분을 확인하시고 또 성경이 요구하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삶을 자신을 쳐가며 살아내셔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만난 사람들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나요? 여러분이 오늘 밤 세상을 떠나게 되면 여러분의 장례식에 올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의 장례식에 와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해 주었던 사람, 언제나 그의 곁에 가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
먼저 보내기 아까운 사람” 이런 평가를 들어내실 수 있는 오늘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내가 어쩔 수 없이 오긴 왔지만 네가 오늘 나한테 한 걸 생각하면 죽은 시체 따귀라도
때려주고 싶다” 이런 하루를 사신 것은 아닙니까?
매일 매일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셔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은 여러분의 종말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행11:25-26)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Then Barnabas went to Tarsus to look for Saul,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 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and when he found him, he brought him to Antioch. So for a whole year Barnabas
and Saul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great numbers of people. The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first at Antioch.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 번역이 된 “크리스 티아노스”는 “크리스토”와 “...을 추종하는
사람”이라는 “이아노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님만 추종하며 좇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안디옥 사람들의 일종의 비아냥이었습니다. 아니, 언젠가부터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무엇을 해도 예수로만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수쟁이”“크리스 티아노스”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안디옥이 어디입니까? 소아시아입니다. 그 안디옥은 술의 신 바카스와 님프인
다프네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술의 신 바카스는 말씀 안 드려도 잘 이해하실 테고, 님프인
다프네는 요정입니다. 그리스 신화속의 님프는 피터팬에 나오는 그런 예쁘고 작은 요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성적으로 문란한, 오직 그것만을 재미로 삼고 사는 여자를
님프라고 합니다. 그 다프네는 아폴로 신과 쥬피터 신의 싸움의 희생물이 된 요정입니다.
아폴로는 활을 들고 다니는 신이라고 했지요? 쥬피터도 사랑의 화살을 들고 다니는 신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폴로가 쥬피터를 놀렸습니다. 조그만 녀석이 자기와 같은 활을 들고 다니는
것이 못 마땅했던 것입니다. 마침 다프네가 아폴로의 앞으로 지나가는데 쥬피터는 아폴로의
가슴에 사랑의 화살을 쏩니다. 아폴로는 즉시로 다프네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심술
맞은 쥬피터가 다프네에게는 미움의 화살을 쏜 것입니다. 그래서 아폴로는 죽자 사자 좇아가고
다프네는 열심히 도망을 가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한참을 도망가던 다프네는 아폴로에게 거의
잡힐 지경이 되자 차라리 저 놈에게 잡힐 바에는 나무가 되게 해 달라고 빕니다.
즉시로 그 다프네는 나무가 됩니다. 아폴로는 그 나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고백하고

- 781 -
그 나무가 된 다프네는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아폴로는 그 것을 기념해서 앞으로 모든 운동
경기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그 나무 가지로 관을 만들어 씌워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게 바로 올림픽 우승자들에게 씌워주는 월계관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의 지성과 건각들이
모여서 열심히 경기를 해서 겨우 얻어 쓰는 게 고작 만화 같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월계관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게 전부 어떤 것인지 잘 아시겠죠?
그런 술의 신과 성적으로 문란한 다프네 요정을 섬기는 도시가 어땠겠습니까?

그 더럽고 추악한 지옥 같은 도시 안디옥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서 일 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공부했습니다. 뭘 한 것입니까?
심령을 새롭게 한 것이죠. 그리고 열심히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뭐라고 불렀다고요? “크리스티아노스”“예수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여러분의 일상의 삶 속에서 그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이름을
들어내셔야 하는 분들인 것입니다.
오늘부터 하십시오. 그래서 다음번에는 제가 우리 교회 교인들의 멋진 간증들을 더 많이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고후12:19-21)
19 아마도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고 있는 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덕이 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0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 볼 때에, 여러분이 혹시나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또는 내가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싸움과 시기와 분노와 야심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교만과 무질서가 있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합니다.
21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다시 갈 때에, 내가 여러분 때문에, 내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까, 전에 죄를 지은 많은 사람이, 그들이 범한 부정함과 음란함과 방탕한
생활을 회개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 내가 슬피 울게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합니다.

이게 여러분을 향한 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하실 것입니다.

- 782 -
(63) 친구 되어 주기
(엡4:25-32)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다는 것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묵은 잎을 떨어내기 위해서는 새순이 돋아나야 하듯이,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벗고 입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가시적인 벗고 입음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생활을 통해서 매일 매일 우리
마음의 영,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울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으며 이미 우리의 심령은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옛 사람을 벗어야 하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며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100%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사도는 이제 25절부터 좀 더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가 “거짓을 버리라”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24절에서 공부했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속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반대말이 뭡니까? “거짓”이죠. 그러니까 진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경계의 목록으로 주시는 첫 번째 것이 “거짓을 버리라“인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가 무엇 때문에 기인한 것입니까? 거짓말의 결과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라는 사단의 거짓말 때문에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사단의 세력을 “거짓말하는 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요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783 -
이렇게 “거짓“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거짓 속에서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 인간들은 저마다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남들에게 자기를 드러 내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점점 더 큰 거짓말을 해야 하고 결국에는 거짓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본인은 압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를 스스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합니다. 그 위장은 교만으로도 표출이 되고
때로는 겸손으로도 표출이 됩니다. 때로는 수줍음으로도 표출이 되고 때로는 경건함으로도
표출이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존경과 인정과 부러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정의해 놓은 자기 스스로의 힘을 쌓아서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죄에 대한 욕구나 탐욕, 정욕 같은 것들을 다른
종교 행위들과 거짓 관용으로 그럴싸하게 위장을 하며 사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입니다. 누가
발을 밟아도 “no problem"이라고 웃으며 지나가지만 그 마음속에는 ”many problem"이라는
분노를 숨기고 있는 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교양 있고 매너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죄인들은 거짓 미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인사하고 참아주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참아주고 웃어줘야지요.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온통 거짓 속에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이런 예를 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뉴욕에 계신 어떤 목사님께서 저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이민
초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시는데, 미국에 오니까 웬 서울대 출신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더래요. 특히 자기가 처음 간 그 뉴욕의 교회에는 서울대 출신 아니면 대화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답니다. 그래서 기죽기 싫어서 궁여지책으로 자기도 서울 상대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슷한 또래의 진짜 서울 상대 출신이 그 교회에
출석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사람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셨는데 어느 날 막다른
복도에서 딱 마주치셨답니다. 그 서울 상대 출신 집사님이 “서울 상대 몇 학번이세요?”라고
물으시더래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제가 말하는 서울 상대는 서울에서 상당히 먼 대학”을
말하는 겁니다. 라고 얼버무리셨답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런 거짓말들이
왕왕 우리 주변에 있지요? 왜 그런 거짓말들이 난무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잃은 죄인들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사회는 거짓말로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그 거짓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사도는 단호하게 그 “거짓”을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 우리의 힘을 축적해서 우리를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겸손을 떨고 다른 이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 종교적
열심을 부리고 하는 가면에서 벗어나서 이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서 진심으로 친절해 지고, 진심으로 용서를 하고, 진심으로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하면 단순히 거짓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광범위한 죄의 형태입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모든 삶, 그 것을 우리는

- 784 -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남기신 유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남선녀를 속인 것으로 나는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있었다.” 산 속에서 속세의 사람들을 별로 만난 적도 없는 그 분이 뭘 그렇게 속였다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철 스님은 분명 진리를 알고 있고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진리가 뭔지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보면서 그렇게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을 본인이 “속였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그럼 내가 거짓 속에서 사는 사람인지 진리 속에서 사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구별 할 수
있을까요?
(요일2:4-6)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 할지니라
거짓을 버리는 사람들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게살기 위해 노력하고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내는 사람이 거짓을 버려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짓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25절 말미에 나옵니다.
(엡4:25)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우리가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듯이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게 거짓말을 하는 병이 있지요? 아픈데도 안 아프다고 거짓말하는 병이 뭡니까?
문둥병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과장하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해롭게 만드는 일이니까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 거짓말이 언젠가 커다란 흉기가 되어서 나를 치게 되는 것을 여러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체들에게
거짓과 과장으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복음 안에서 참된 것만을 말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진리를 나누세요. 예수 이야기를 하십시오. 쓸데없는 세상일들로 잡담하지
마세요. 항상 그러한 잡담은 자기 자랑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것, 진리를
나누십시오.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이 “분노”입니다. 26절과 27절을 보겠습니다.
(엡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올기제스떼 카이 메 하마르타네테“ 이 구절을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분을 내라,
그러나 그 분으로 인해 죄를 짓지는 말라“라는 뜻입니다. 분을 내라? 이게 도대체 무슨

- 785 -
뜻일까요? 분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분노와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앞에
쓰인 “올기제스떼”는 의로는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내려오셔서 분노하신 적이 있지요?
(막3:5)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여기서도 “올게”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거룩한 분노“
(눅13:15)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마23:33)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요2:15)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하나님도 분노하십니다.
(롬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계6:17)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렇게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도 그 의로운 분노를 심어주셨습니다.
(고후7:10-11)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우리는 어떨 때 분노해야 합니까? 우리는 진리에 반하는 것들을 대할 때 분노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외식을 볼 때 분노해야 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보면서
분노할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렘8:11-12)
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죄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고도 그게 죄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 786 -
않습니다. 버젓이 죄를 짓고 있는 자신들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와 악 앞에서 의분을 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분을 내십시오.”
(시97:10)
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이게 분을 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전혀 저항감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 낸 것들이 뭡니까? 살인과 간음과
전쟁과 사기와 폭력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조차도 너무나 세상의
악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우리는 분노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죄로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26절을 다시 보세요.
(엡4:26)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내라’ ‘그러나 그 분노로 인해 죄를 짓지는 말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의분 말고 악한 분노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는 악에
대해 의분과 수치를 느끼는 것이지만 ‘악한 분노, 죄가 되는 분노’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를 무시하고, 나를 공격하는 무리에게 같은
힘으로 대항하는 것을 악한 분노라 합니다.
(약3:17-18)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는 악에 대해서는 분노해야하지만 그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삶을 요구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6절을 보시면 거기에는 두 가지 분이 나옵니다.
(엡4:26)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6절을 다시보시면 첫 번째 “분”은 “올기제스떼”입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의 “분“은 ”파롤기스모스”입니다. 이 “파롤기스모스”는 “격앙되고 이미 고정되어
버린 복수심“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한 유의 분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분노도 물론 안 되지만 자신이 의로운 분노를 내었다 할지라도 그게 그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이나 미움이 되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인은 용서를 해주고 사랑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악한 자리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12:19-21)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요일2:9-11)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 787 -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일3:10-18)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는 의분을 내야 하지만 그 죄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긍휼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의분이라는 것은 사랑을 근거로 나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저 죄, 악 때문에 저렇게 망가져야 하는가? 하고 죄와 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분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5:22-24)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가 악을 미워하고 악에 의분을 내며 형제를 계도하고 충고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악에 빠진 형제까지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죄인이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일어서도록 하는 데 우리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분을 내십시오. 의로운 분노를 내십시오. 그러나 혈기는 안 됩니다. 복수심을 품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렇게 악하게 대한 분들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세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용서하셔야 합니다. 하루를 넘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미움과 분노가 지속이 되면 그게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고 우리는 그 것을 “파롤
기스모스”“악한 분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분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788 -
그렇게 분노가 치밀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들어주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를” 떠올리세요. 일만 달란트는 인간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 빚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사람에게 주인이 그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서 사정하는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를 감옥에 쳐 넣습니다. 그 주인이 다시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부릅니다. “내가 너의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고작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저 사람을 감옥에
넣었느냐? 이 악한 종아, 너도 감옥에서 썩어봐라”
여러분, 우리가 어디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인지를 늘 생각하세요. 그리고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한 분들이 있으시면 어서 용서하십시오. 혈기, 악한 분노, 복수심은 안 됩니다.
그러한 자기 지체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은 전부 자기 자신을 테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일생을 망가뜨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분노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분을 내되 그게 죄가 되지 않게 하고
해지기 전에 풀어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을 보시면 도적질에 관한 경고가 나옵니다.
(엡4:28)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지금 사도는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적질하던
자들은 도적질하지 말라“ 라고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도 도둑질을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구원받는 순간 거룩한
성자로 뒤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도적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적질이라는 것의 정의가 뭡니까?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사용하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훔칠 수도 있고, 돈을 훔칠 수도 있고 남의 시간을 훔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생각도 훔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한창 부흥집회에 불려 다니실 때 어떤 공무원이 공무로만 써야 하는 공용
용지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합니다. “목사님 이번 봄에 저희 교회에 오셔서 부흥 사경회를
인도해 주십시오.” 그 목사님께서 뭐라고 답장을 하셨는지 아세요? “이 공용 용지는 이렇게
사적인 용도로 써서는 안 되는 종이로 알고 있습니다. 귀하는 지금 국가의 재산을 도둑질 한
것입니다”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실제로 그렇게 사셨다니까요.
그렇게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쳐 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사소한 것부터 지키며 사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당신들 직장에서 월급 받으면서 신우 회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대노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직장 신우(信友)회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안 하는 것 보다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직장에서 직장 동료들에게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뭔가 달라”라는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냥 모여서 “신우 회”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때우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데 삶은 여전히 개판이고 “신우 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자기는 괜찮은 신앙인인 것처럼 뻔뻔스럽게 산다는 것이죠.
그리고 직장에서의 시간은 자기 것이 아니라 이미 돈 받고 팔아버린 회사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돈 받고 판 회사의 시간을 도둑질해서 신우 회 같은 거 하지 말고 그

- 789 -
시간에 열심히 부지런히 회사 일을 하라는 설교였습니다. 일과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점심시간에 하는 건데요?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어라. 밥을 열심히 먹고 휴식을 취해서 오후
일과 시간에 열심히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좀 지나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맞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종교행위로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삶
속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 자기 직장과 직업에 대해서 상당히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직장은 너무 사람을 많이 부려먹는다. 우리 직장은 돈을 너무 적게 준다. 우리 직장
상사는 날 너무 들볶는다. 그럼 집에서 쉬세요. 왜 그런데 나가세요. 그 직장을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으세요? 그럼 당장 때려
치우세요. 그럴 생각 없으시면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해주세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들 다 야근하는데 “난 수요 예배 가야 돼.” 이러고 나오지 말란 말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는 여러분도 남들처럼 야근을 하세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내 종교 행위를
위해서 남의 시간을 도적질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세금, 정당하게 내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바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로또? 사지 마십시오. 자기가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서 번 돈이 아닌 것은 도적질입니다.
28절에 보세요. “제 손으로 수고하여 일을 하라”고 사도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 같은 것 바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왜 사람들이 도박을
합니까? 수고하지 않고 수확을 거두려고 하는 도둑놈 심보입니다. 절대 그런 거 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수고 하셔야 합니다. 절대 게으름 피우지 마세요. 부모님들은 아이들한테 돈
너무 쉽게 주지 마세요. 이 사회에 도둑놈 심보를 만연하게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해서
갖게 하셔야 합니다. 28절에 나오는 “수고하다”“코피아테”는 너무 열심히 일해서 “피곤하여
기력이 쇠약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열심히 수고하여야 합니다.
(행20:34-35)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여러분, 직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생계의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기까지 이 우주를 존속시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성시켜 가십니다. 이 강대 상위에서 설교를 하는 것만이 성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는 것만이 경건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이가
필요합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힘을 내기 위해서는 저는
먹어야 합니다. 제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우리 아내가 쌀로 밥을 해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고 제 옷을 빨아 주어야 하고 옷을 다림질을 해 주어야 비로소 여기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뭐가 성직이고 뭐가 상스러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시는 바로 그 일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성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시고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최선을 다해서 장사를 하세요. 식당에서

- 790 -
서빙을 하시는 분들은 늘 밝게 웃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하시고, 직장인들은 최선을 다해
회사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수고해야 합니다. 수고하는 그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져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우리가 일을 하는 목적이 나오지요? 목적이 뭡니까?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벌어서 자기 배를 불리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빈궁한 자를 도울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돈을 버는 목적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나의 야망을 위해 돈을 벌었고 직업을 가졌다면 이제 우리는 빈궁한 자들을 돕기 위해,
남을 돕기 위해 피곤하도록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세요. 그리고 부자
되십시오. 그래서 그 돈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도와주세요.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못 먹고 있는
내 백성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들을 잘 관리하시고 전달해 주십시오. 자기
배만을 위해 쌓고 쌓아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후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나를 비워서 남을 배불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영적인 도적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신앙생활 속에서 struggle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안수 한번 받고 훌쩍 추월하려는 사람들
있지요? 무슨 기적 같은 것 체험해서 하루하루를 쌓아 올려가야 할 신앙생활을 단번에
지름길로 가려는 사람들, 도둑놈 심보입니다. 신앙은 수고하며, 노력하며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지 기적이나 체험하고 안수나 받아서 단번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적질하지 마시고 수고하여 힘써 일하십시오. 29절에는 말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엡4:29)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사도가 25절에서 제일 먼저 던진 권면이 뭡니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입니다.
그리고 지금 29절에서도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말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도 떠드는 것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그리고 5장 3절에서 말에 대한 권면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엡5:3-4)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왜 이렇게 우리의 말에 대한 권면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까?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
뱉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마12:34-37)

- 791 -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좋은 말, 선한 말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게 여러분의 내면을 선한
것으로 채워 가십시오. 아울러 사도는 우리에게 말로 덕을 세우라고 권고합니다. 말로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말로 남에게 유익함을 끼치라는 것입니다.
(사50:4)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여러분 주변에 곤핍하고 곤고하고 고단한 삶을 사는 분들이 계십니까? 선한 말로 위로해
주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병들어 고통 받고 계신 분들이 계시지요? 그 분들에게 여러분의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선한 말로 덕을 세우세요. 우리 그리스도인 들 만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시면 계속 권면의 내용이 나오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엡4:30)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헬라어 원문에 더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성령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입니다.
성령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사도가 나열한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들과 또 앞으로 나열 할 내용들
모두가 어떤 한 가지 목적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매일 아침 기상하면 부대원 전체가 연병장을 열 바퀴씩 뛰었습니다.
왜 뛰게 하는 것입니까? 강인한 체력을 키워서 훌륭한 전투병으로 키우기 위함입니다.
연병장 구보는 그 자체가 일이요 목적이 아니라 체력 단련이라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여러분이 거짓말을 안 하고 분을 안 내고 선한 말을 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목적지가 뭡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는 것, 거짓말을 안 하는 것, 분을 안내는 것, 도둑질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불변의 선은 아닙니다. 분명 성경에는 선한 거짓말도 있고 선한 살인도 있습니다. 선한
탈옥이 있는가 하면 선한 불륜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선한 것들, 새사람을 입는 것들과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악한 것들, 옛 사람을 벗는 일은 전부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하나님과의 화목의 차원에서
실행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김홍전 목사님께서 예전에 기독교에 가장 피해를 준 인물 세 사람을 ‘간디,

- 792 -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로 꼽으셨습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선의 극치를
이루어 낸 사람들이지만 신앙이 요구하는 것은 그 ‘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디처럼 슈바이처처럼 마더 테레사처럼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기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목적과 이유와 근거가 다른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짓말하라” 하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라” 하면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까지 다 죽여라” 하면 다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선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믿어지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 것입니다.
그 성령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게 믿겨지십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와 계신 것이 믿겨
지세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서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끊으신 그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새사람을 입고 옛 사람을 벗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족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치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해 버린다면 그보다 더 모욕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구역 모임이나 조 모임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 구역장님이나 조장이 죽
돌아가면서 한사람씩 의견을 묻다가 자기만 건너뛰고 일을 결정해 버렸다면 그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겠습니까? 성령하나님은 분명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면서 전혀 성령 하나님을 개의치 않고 산다면 이 어찌 불경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성령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데도 아무 때나 분을 발하고, 아무 때나 거짓말을 하고,
아무 때나 더러운 말을 하고 아무 때나 도적질을 한다면 그게 바로 그 분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 안 하기로 하고, 분을 안 내기로 하고, 도적질을 안 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31절과 32절에서 우리가 공부한 25절부터 29절까지의 권면을 보다 더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풀어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엡4:31-32)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러분, 지금까지 사도가 우리에게 권고한 내용들이 전부 내 이웃과 관계된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거짓말을 하지 마라, 선한 말을 하라, 더러운 말을 피하라, 분을 내지 말라,
용서해라, 불쌍히 여겨라, 악독을 버려라. 전부 내 이웃과 관계된 권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로하고 이웃의 곤핍함을 나누고,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고, 이웃을 따뜻하게 포용해주고 이웃을 사랑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 793 -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교회에서 올바른 가르침 아래 열심히 이웃과의
관계를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가 실패한 것이 수도원 운동 아닙니까? 혼자 산에 올라가서 도 닦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struggle하면서 훈련하고 성숙되어지는 것이 훨씬 힘들고 어려운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웃과의 교제, 교회 안의 형제자매와의 교제를 깨는 모든 일은 그게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성 프란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기로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우리 이왕 금식할 거면 방 가운데에다가 죽을 끓여 놓고
금식을 합시다.“ 하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방 가운데에다가 맛있는 죽을 보글보글
끓이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한사람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고 합니다. 그 때 제자들이 모두 벌떼처럼 그 제자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인내심도
없는 배신자로 몰아세웠다고 합니다. 그 때 성 프란시스가 죽 사발을 들고 그 죽을 전부 마셔
버렸답니다. 그렇게 형제를 몰아세우는 것으로 자기의 경건함을 증명하려고 금식을 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없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에베소서를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도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통일, 하나 됨, 한 지체, 한 몸“입니다.
여러분, 제발 부탁입니다. 여러분끼리 제발 다투지 마세요. 여러분끼리 제발 미워하지 마세요.
여러분끼리 제발 험담하지 마세요. 에베소서 내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뭡니까? 하나 됨을 지키라는 것 아닙니까? “네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형제자매 사이의
교제는 깨지 말라“ 그게 훈련 아닙니까? 나를 무시하고 나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 섬겨 줌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땅에 구현해 내는 것이 바로 교회
아닙니까?
왜 안 될 거라고 지레 겁을 먹으세요.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시도도 안 해보고 미리 포기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고
가야 할 일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형제자매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
됨을 깨지 마십시오,

- 794 -
(64) 행하라, 또 행하라
(엡4:31-5:5)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우리는 지난주에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만을 말해야 하며, 죄와 악에 대해서
의로운 분을 내되 그 분을 낸 것이 죄가 되지 못하게 해야 하고 도적질하는 자들은 도적질을
멈추고 자기가 수고하여 일을 하되 일을 하는 목적을 가난하고 곤핍한 자들을 돕는 것에
두라는 사도의 권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삼가야 한다.”라고 그 동기까지도 확인을 한바 있습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 31절에서 그 앞에서 언급했던 소극적 의미의 버려야 할 것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언급을 한 뒤에 32절에서는 성도가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을 또 반복하여 기술을
합니다. 31절부터 보겠습니다.
(엡4:31)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악독“입니다. 여기서 “악독“ ”피크리아“는 ”남과 화합하려들지 않는
음험하고 노를 잘 내는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성품이지요.
예배당 안에서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남과 화합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드러 내야하고, 자기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면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품위가
손상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멀찌감치 에서 남들을 욕하고 다른 이들이 하는 일을 평가하고, 분노하고 하는 일로
신앙생활을 소비해 버립니다. ”그런 악독은 버려라”라고 사도가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함”과“분 냄”을 버리라고 합니다. 둘 다 비슷한 단어 같지만


“노함”“뒤모스”는 감정적인 격분을 말하는 것이고 “분 냄“이라고 번역이 된 ”오르게“는 보다
내적인 것으로서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노함과 분 냄, 그러한 것들은 다
버려라“
그리고 계속해서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떠드는 것“”크라우게“는
흥분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건물과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LA의 어떤 교회를 TV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가관이더군요. 서로
상대편의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메가폰“까지 들고 싸우는 그런 모습을 보며

- 795 -
인간들이 얼마나 그 탐욕 앞에서 지저분해 지는지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게 ”크라우게“입니다.
반면에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이 된”블라스페미아“는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비방하여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참 다른 사람이야기 하길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예전에 친구들 여럿이서 술자리를 하게 되면 화장실 가는 횟수를 최선을
다해 줄여야 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기만 하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 험담을 하니까,
화장실도 제대로 못간 것입니다.
우리 정말 말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성경이 얼마나 우리
“말”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될 수 있으면 말 많이 하지 마세요.
특히 다른 사람 이야기는 그게 칭찬이 아니면 절대 하지 마세요.
도둑맞아서 자살하는 사람 없고, 누군가에게 억울한 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목숨을 끊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치 혀“로 내 뱉은 험담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말의
위력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정말 말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혹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으면 그 사람 쫓아내고
싶으시죠? 왜냐하면 내가 불편하니까, 그래서 당을 짓고 속닥속닥 그 사람 험담을 늘어
놓으며 그 사람을 “왕따“시켜서 내 쫓아 버리는 일들이 교회 안에도 비일비재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내편만 있어 주기를 바라는 아주 악한 행위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그 복된 소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를 힘들게 하는 상대방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주셔야 지요.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항상 이스라엘을 연단하기 위해 쓰여 졌던 바벨론, 앗수르, 헬라, 로마
같은 나라들은 하나님의 사용 기간이 끝나면 처참하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연단하고 있는 표독스러운 상대방을 대할 때 ”저걸 어떻게 해서든지 쫓아내 버려야지“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상대방도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기를 기도해 줘야 지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훈련 교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전부 쫓아내 버리는 버릇이 들면 자신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맘에 조금만
안 들면 뒤에서 험담하고 앞에서 외면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서
내쫓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항상 어린애들만 북적북적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제발 입 조심하세요. 그리고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다 포함하는 “악의”'카키아'를
버리라는 말로 소극적 권면을 마칩니다. “다 버려라, 그 모든 것들은 악한 것들이다”
사도는 이렇게 소극적인 금기 사항을 나열한 후에 32절에서 보다 적극적인 권장을 합니다.
(엡4:32)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뒤에서 남 험담하고 분을 내고 고함을 치고 악독함으로 남을 상처 주고 하는 것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해 주라“ 이게 사도의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여기서 “인자하다“”크레스토스“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눅6:35)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이 “인자하다“”크레스토스“는 어떤 단어하고 발음이 거의 흡사하지요? ”크리스토스“

- 796 -
사도는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해야 할 적극적인 행위를 ”크레스토스“라는 단어로
시작함으로 해서 우리는 결국 ”크리스토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야 하는 자들임을
word play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뒤의 5장으로 넘어가면 ”크리스토스“를 본
받으라는 구절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크레스토스“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인자한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인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렇게 되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이 ”불쌍히 여기라”는 말을 직역을
하면“더 강한 긍휼의 내장을 가져라”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내장 속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내장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 긍휼이 우리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서로 용서하라” “카리조메노이”가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 주어라“
4장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나왔었습니다. 사도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면 이렇게 계속 반복을
하겠습니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실감하세요? 영국의 christian정신병원 원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환자에게 용서를
확신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만 있다면 나의 환자 절반
이상을 나는 내일 당장 퇴원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용서에 아주 인색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죄책감 속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여전히 분노에 몸을 상하게 합니다.
그 정신병원 원장의 말은 상대방이 진지하게 용서의 말을 한번이라도 해 주었다면 굳이 정신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이 그 큰 정신 병원 환자 전체의 절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에 인색한 세상 속에 살다보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용서를
그다지 심각하게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죄책감
때문에 밤마다 머리를 쥐어 뜯고 계십니까? 그러한 죄책감이 우리를 정신병원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아직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가 그 죄책감 때문에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용서하세요. 용서는 그렇게
파워가 있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꼭 한번 만나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려서 헤어진 부모나 형제 자식들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대부분이 너무나 가난해서
자식들만이라도 잘 먹이고 싶어서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시킨 부모들이 자식을 찾거나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으로 오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들은 자기들만 잘 살아 보겠다고
자식들을 버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20년 30년 만에 만난 그 부모들을 자식들이
용서하고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떠듬떠듬 말할 때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 “용서는 참
아름다운 거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데 간혹 그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방송국의 연락을 받고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자식을 찾으러 나왔던 어머니나 아버지는 통곡을 합니다. 그건 보는
사람도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용서하셔야 합니다.
월요일에는 제가 집에서 꼼짝을 안 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에는 주로 음악을 듣거나 신앙 서적 말고 소설책을 간간이 봅니다.

- 797 -
이번 주 월요일에도 집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길 건너 앞집에 사는 백인
여자가 문을 발로 막 찼습니다. 그 백인 여자는 색깔 있는 사람은 전부 자기 집 개 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그런 무례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수백 번 인사를 했는데 한 번도 인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나 산책을 하다가 길에서 마주치면 너무 불결한 것을 만졌을 때처럼 옷을
털고 손을 털고 그러는 사람입니다. 남의 문을 발로 막 차기에 나가서 정중히 왜 그러냐고
했더니 “왜 내가 지금 고상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너희 집에서 잡음이 나서 나의 작품에
방해가 된다는”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자기 그림 다 그리면 그 때 음악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옆집도 아니고 길 건너 편 집에서 우리 집에서 틀어 놓은 음악이 들리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걸 가지고 남의 집에 와서 문을 발로 걷어차는 그런 몰상식한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저희 집사람이 따지려고 하는 것을 지긋이 말리고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여보 이런 것도 참아야 되요?” “그래 참자, 저 사람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거 알잖아, 설교는 맨 날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해 놓고 자기는 그렇게 못하면 그게
무슨 목사냐? 참자” 저희 집사람이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한참 뭔가를 생각하더니 “여보
우리 잔디 깎을까?” 그럽니다. 저희 집 잔디 깎는 기계가 거의 탱크 소리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저희 집사람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잔디를 깎자는 것이었습니다. 더
시끄럽게 만들어서 복수를 하자는 심사였겠죠. 설마 잔디를 깎는 것까지 시비를 걸지는 못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쳐다보면서 “그럴까?” 하다가 푸 하하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 여자도 미안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믿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그런데 잠자리에 들면서 아내가 그럽니다. “한바탕 해 주면 마음이
풀어질 것 같았는데 그렇게 안 하고 용서하기로 했더니 마음이 더 편해요” 우리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연습을 자꾸 자꾸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이 본문에서 “같이”


“카또스”라는 단어를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인자하게 대해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같이“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부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긍휼을 계발하고 훈련해서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4장이 끝납니다. 참 할 거 많지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행함“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벧전3:8-11)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사도 바울의 권고나 베드로의 권고나 대동소이하지요?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 798 -
이렇게 엄청난 노력과 열심이 요구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계속해서 5장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에 관해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5:1-2)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2절의 “행하라” “페리파테오”는 4장 17절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던 단어입니다.
(엡4:17)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4장과 5장에 걸쳐서 계속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극적 권면과 적극적
권면, 행하지 마라, 행하라)에 관해서 계속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장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운”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모든 악독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인자한 사람이 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내가 1절 이후에 기술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법이 뭐지요?
그 방법으로 사도는 “너희는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받는 자“”미메타이“는 ”그대로 본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영어의
"mimic"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떠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요구가
조금 지나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본떠서
살수가 있습니까?

사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본떠서 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유 적 속성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는 우리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비 공유 적 속성과
우리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공유 적 속성이 있습니다.
먼저 비 공유 적 속성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자존하심: 이 말은 하나님은 존재의 기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시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자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2)자족하심: 우리 인간들은 항상 어떤 환경이나 물질이나 상황 같은 매개를 통해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만 하나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고 아무도 의지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은 스스로 만족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옷, 가정, 우정, 산소, 햇빛, 비
같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왜 하나님께서 이 골칫거리 인간을 만드셨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3)영원하심: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영원성입니다.

- 799 -
(4)전능하심: (omnipotence)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5)전지하심: (omniscience)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속까지도 이미 다
아십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비 공유 적 속성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감히 본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본떠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공유 적 속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캘빈은 그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한 마디로 “거룩한 속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거기에는 공의, 악에 대한
분노, 지혜, 신실함, 사랑, 긍휼, 연민, 친절, 용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가 본떠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미메타이“”본 떠서 살아라.“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본떠서 살라고 말하기 전에 ”왜”우리가 하나님을 본떠서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언급 합니다“
뭐지요? “너희는 사랑을 입은 자녀이기 때문에”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녀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인 하나님을 본떠서 살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체의 유전자가 부모의 으뜸 되는 특징을 자녀가 소유하도록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의 영적 유전자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본떠서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목숨과 바꾸실 만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특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칼을 겨누고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에 대해 이미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5절에 “너희가 이미 알거니와”라고 사도가 명확하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을 하여야 할까요?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자기 자신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매일같이 술이나 퍼먹고 마약이나 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면 그
아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우리 아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예의를 배우고 그렇게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항상 우리를 파괴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우리를 파괴해 갈 때
하나님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사랑을 입은 자녀이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바울은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둘째 녀석이 유난히 저를 잘 따릅니다. 심지어 이제 여덟 살 먹은 녀석이 “난 아버님
죽으면 같이 죽을 거예요”하면서 절더러 오래 오래 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하니까 이 아이는 아버지의 냄새를 늘 맡기 위해서 제 스킨로션을 늘
손에 바르고 학교에 갑니다. 제 기침 소리도 일부러 흉내를 내고 제 걸음걸이, 말투도 그대로

- 800 -
흉내를 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우리 아들 녀석도 비디오게임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아빠는 애들이 비디오게임 너무 많이 하는 거 참
싫더라.” 했더니 이 아이가 그 이후로 제가 있는 곳에서는 게임을 안 합니다.
토요일 날이나 주일날처럼 아이들이 교회에서 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때 그 때는
제가 마음 놓고 게임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교회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아이들도 진짜 아빠가 좋으면 아빠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합니다. 저는 정말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식은 그 가정의 대표입니다. 어디 가서 자식이 사고를 치면 당장 그 부모가 끌려가서 욕을
먹습니다. 여러분이 어른들한테 인사를 안 하고 무례하게 보이면 당장 여러분 부모님이 부당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도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켰길 래 애가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을 짓을 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 하늘 가정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14:7)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게 우리의 신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곤혹스러울 때가 언제입니까?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와“ 그러면 제일 곤혹스럽죠. 왜요? 부모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니까, 부모님께 너무
미안해서 정말 곤혹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러한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5:16)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행실 때문에 하나님 얼굴에 먹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늘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본떠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엡5:2)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고 진술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시고 어떤 것을 버리셨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손해 보신 게 뭡니까?
시간, 물질, 힘 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희생들은 전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버리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시간을 희생하고 나를 위해서 물질을 희생하고 나를 위해서
힘을 씁니다. 우리는 절대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어떤 것을 손해 보셨다는

- 801 -
것이 아니라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도널드 그레이 반 하우스 목사님의 책을 읽다보니까 그 분의 상담 사례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부부가 도널드 그레이 반 하우스 목사님께 찾아와서 이혼을 하겠다고 상담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소. 좋은 자동차와 넓은 집과 고급 옷과 비싼 보석, 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해
주었는데 왜 이혼을 하자는 것이요?” 그랬더니 그 아내 왈 “맞아요,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주었어요. 당신 자신만 빼고...” “나는 이제 허깨비가 주는 다이아몬드와 허깨비가 주는
좋은 옷과 허깨비가 주는 좋은 자동차에 질렸어요.”
여러분, 우리는 얼마든지 물질적인 것으로, 화려한 것으로 상대방을 현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닌 연극은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없고 상대방을 기쁘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을 조금 나누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분의 전 존재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알라바마에서 며칠 동안 집회를 할 때 마지막 날 빌립보서를 설교하면서 이


대목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자매님이 갑자기 엉엉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너무 크게 장시간
우시는 바람에 좌중이 크게 당황했었습니다. 그 자매님이 우는 바람에 갑자기 저도 눈물이
쏟아져서 혼났습니다. 나중에 집회가 끝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분께 여쭤보았습니다.
“집사님 아까 왜 그렇게 우셨습니까?”
그 분은 “예수님이 기지촌 술집 접대부 출신인 자기를 위해서 예수 님 자신을 버리셨다는 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오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그런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게
믿어지면서 감격이 복받쳐 올라와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빌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이 복음의 메시지를 너무나 감격 없이 소홀하게 취급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왜 눈물이 안 나세요?
계속해서 2절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시고 “제물과 생축이 되셨다”고 진술합니다.
사실 제물 “뚜시안”과 생축 “프로스포라”는 거의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구약의 시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시40:6)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왜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십니까? 진정한 제사와 예물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 802 -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서 기자도 인용을 해다가 썼습니다.
(히10:5-6)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예수)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은 제사제도와 성막과 같은 상징과 모형을 통해서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을 미리 예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최상품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제단 앞에서 제사장이 그 제물과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합니다.
그 죄인의 죄를 제물에게 전부 전가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제물을 죽입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다가 지성소에 가서 뿌리고 그 제물의 시체는 번제 단에 올려놓고
태워버립니다. 이렇게 어떤 죄인의 죄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그 피와 살 전부를 희생해야 비로소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제물과 생축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입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제사와 성막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고후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2:22-24)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갈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제물과 생축으로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똑같이 “하라“고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을 버리기는커녕 자기가 가진 물질을 조금 나누어주는 것도 벌벌 떨지
않습니까? 심지어 남편, 아내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기가 힘들지요? 오히려 남들이 모두
합심해서 나를 좀 떠받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지 잘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에게 실천해 나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하셔야 하는지 아십니까?
(갈6:7-10)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803 -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부터 그 연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누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제물과 생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제물과 생축이 되어주는 연습을
열심히 하자고요. 자기가 맘에 드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여러분의
원수에게 먼저 제물과 생축이 되어주는 연습을 하십시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사도는 우리가 “이름이라도 불러서는 안 될” 금기 사항들을 또


나열합니다.
(엡5:3-5)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제일 첫 번째 나오는 단어가 “음행“입니다. ”포르네이아“ 많이 들어보신 단어지요? ”포르노“가
여기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등장한 단어가 ”더러운 것“”아카다르시아“입니다.
역시 성적인 범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성적인 범죄를 가리키는 단어들과
함께 ”탐욕”이라는 단어를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적인 범죄는 인간의 탐심에서 나온 아주 악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뭐라고 했지요?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면서부터 성적인 범죄는 있어왔습니다. 매춘과 동성애, 간음 이 모든
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점점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지금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두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천만
관객을 넘어선 “왕의 남자”이고 미국에서는 아카데미상을 휩쓴 “broke back mountain"입니다.
둘 다 게이 영화입니다. 이제 동성애는 쉬쉬해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떳떳해
졌는지 모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연예인이 ”나는 동성애자입니다“하고 커밍아웃을 하면
모든 방송에서 퇴출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영화, 연극, 드라마, 소설 같은 데서 오히려 그들에게 힘과 용기와 격려를 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동성애에 관한 설교를 한번 한 적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을 너무
몰아세우지만 말고 이해를 하려 애를 써보자고 결론을 맺었지요? 그러나 제가 동성애 자체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 드린 것은 아닙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순리로
쓰게 하신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서로 정욕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은
죄라고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쾌락 앞에서는 성경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터넷은 어떻습니까? 언제든지 자기가 원할 때마다 포르노를 클릭할 수 있었습니다.

- 804 -
예전에 저희 때만해도 어떤 불량한 녀석이 몰래 그런 책을 한 권 가져오면 가슴 두근거리면서
돌려보던 그런 낭만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1,2,3학년 아이들까지 포르노에 중독이 되어 있다는 아주 충격적인 통계가
있었지요.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런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그리고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할 것 세 번째가 “탐욕”입니다.


“탐욕”“플레오넥시아”는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돈을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는 말입니다. 돈은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돈을 목표로 삼게 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성경은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돈에 눈이 멀어 있다면 정말 심각하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마6:2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한 쪽 눈은 핸드 아웃을 보시고 한 쪽 눈은 저를 보세요.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자유 해 지세요.
네 번째가 “누추함”입니다. “이스크로테” 이 말은 “말로 나타내는 모든 추잡함을 다 포함하는
부도덕하고 버릇없는 행동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어리석은 말“”모롤 로기아“입니다. 이 헬라어는 바보라는 단어 ”모론”과
말씀을 나타내는 “로고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모롤로기아“하면 ”바보같이 말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 모롤로기아를 ”사려 없이 까불대는 것,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계시고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그 단어를
”고상하거나 칭찬할 만하거나 고귀한 것을 깎아 내리기 위하여 저속한 언어와 행동으로
그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박형용 교수님은 이 모롤로기아를 “의미 없고 빈 쓸데없는 말”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허튼 소리들 하지 마세요. 의미 없는 불평, 불만, 다른 사람 험담, 쓸데없는 농담 이런 것 하지
마세요. 좀 더 과묵해 지세요. “모롤로기아”“바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도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너희는 그런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그리고 우리가 그 이름이라도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의 여섯 번째가“희롱의 말”입니다.
이“유트라펠리아”는 “음탕한 농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뒤의 세 가지는 전부 더러운
대화로 더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조심들 하세요. 더럽고
상스럽고 허무한 말로 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골4:6)
6 여러분은 언제나 친절하게 유익한 말을 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약3:3-11)
3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의 온 몸을 끌고 다닙니다.
4 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마음먹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 805 -
5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부분이지만,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
6 그런데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는 혀도 지옥 불에 타 버립니다.
7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인류가 길들여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11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본문 4절에서도 너희는 그런 더러움 말들 하지 말고 “감사한 말”만 해라, 하고
우리에게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시면 “지금까지 요구한 것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자들은 천국 못 간다.“라고
못을 박고 계십니다.
(엡5:5)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 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들도 이렇게 지켜 내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당연히 우리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좇아, 그 분을 본받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에베소서 4장 이하를 강해하면서 참 많이 struggle했습니다. 저도 사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한번 해 보세요” 이렇게 말할 처지가 못
되거든요. 저도 매일 매일 쓰러지고 매일 매일 고통스럽게 허벅지를 찍으며 다시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당당하게 여러분 앞에서 “여러분 이렇게 사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는가?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을 얻은 교회에게 쓰신
편지라는 것이 일단 마음이 놓였습니다. 저만 그렇게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는 교회가
탄생된 이후 모든 성도들이 겪는 과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마음속에서 이런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1)“너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을 믿느냐?”
당연히 믿지요.
(2) “그럼 그 예수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은 것도 믿느냐?” “네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해서 너의 거할 처소를 마련하러 올라 간 것도
믿느냐?“ ”네, 믿습니다.“
(3)”너는 그 처소가 뭐라고 배웠느냐?“”바로 저 자신입니다“”그래 예수는 지금 열심히 네
안에서 너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거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셔서 네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 사실인 것처럼 네가 지금 내가 요구하는 대로 완성이 되리라는 것도

- 806 -
확실하단다. 그러니까 너무 절망하지 말아라.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내시고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도 완성시키실 거야“”네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분명 완성해 내실 거야“
그러고 나니까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넘어지는 저의 실패와 실수 속에서 감사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셨을까? 그게
역사적인 사실인 만큼 지금은 내가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많은 하나님의 요구도
반드시 내 안에서 이루어지겠구나.“ 그래서 복음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예수님의 손을 놓지만 우리 예수님이 제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저는 지금 이나마 온 것입니다. 제게는 지금 이 정도 온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저를 완전하게 완성해 내실 것을 저는 확고하게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다소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은 여러분을 자꾸 깨우기 위함입니다. 제가 간혹
분개하여 욕을 내 뱉는 것은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넘어가는 것이 화가
나서 그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건 제일 먼저 저에 대한 욕인 것입니다.
“넌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 그렇게 네 죄에 대해 둔감할 수 있냐?”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그렇게 저를 분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을 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제게는 참 소중합니다. 그렇게 제게 소중한 분들이기에 단 한 분이라도 마귀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안타까움에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실수와 실패로 괴로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것 잘 압니다.
우리 그럴 때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서로 거울이 되어 주며 쓰러지는 자를 세워주고
뒤쳐진 사람들을 기다려 주며 열심히 한번 가 보자고요. 여러분은 잘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 807 -
(65) 빛의 열매를 맺으라.
(엡5:6-11)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 바울은 3절과 4절, 5절에 걸쳐서 신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모든 것들, 흉내도 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 것들을 나열하고 그 것들을 전부 “헛된
것”이라고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6절을 한번 보세요.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우리 성도들이 입에도 올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해도 괜찮은 것처럼 속이는 것이 바로 헛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과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는 게 6절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헛된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는 점점 인간들의 쾌락 지수에 맞춰서 변해가고 있습니다.
1957년 영국에서 발표된 (Wolfenden report)울펜덴 보고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영국의 동성애 범죄 및 매춘 위원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이 보고서는
심리분석과 사회 과학이론을 인용해서 공공사안에 관한 제정법은 도덕성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성행위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합의를 거친 인간의 사적인 동성애 행위는 형법의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되고 정확히 10년 뒤에 유럽의 대다수의 나라는 성 관련 범죄
법을 뜯어 고쳤습니다. 간통죄를 폐지했고 동성애자 보호법을 발효했고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교회가 주례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도덕과 윤리의 담을 자기들의
쾌락지수에 맞게 수시로 낮추며 거기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낮추어진 도덕과 윤리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더 엽기적인 괴물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한 쪽에서는 인간의 범죄 행위는 다양성의 결과이며 내분비선들의
이상으로 오는 질병의 차원에서 보아야지 그 자체를 형벌로 고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감옥이 늘어나서는 안 되고 좋은 시설을 갖춘
치료기관과 상담 기관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죄를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무식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치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잘 가르치고 치료를 하면 죄를 안 짓는 존재들입니까?
단순히 내 분비선의 문제만을 해결해 주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별 문제없이 행복하게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존재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단순히 내 분비선들의 집합정도로만 생각하는
아주 우매한 발상인 것입니다.

- 808 -
인간이 유일하게 죄를 보고 역겨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은 거듭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만이
타락한 인간을 새 것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제 죄의 문제도 스스로 고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포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건 전부 “헛된 말“들입니다. 세상은 모두 그러한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점점 세상이 죄에 대해서 관대해 지고 죄를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은 인간의 죄악 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에 추호도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분이 요구하시는 법을
다 지켜내야만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게 안 지켜졌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우리가 전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우리가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죄에 대한
분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죄와 악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이며 반응인 것입니다”“그 것은 죄를
불쾌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며 하나님께서 죄를 향하여 가지시는 고정된 혐오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형벌로 다스리겠다고 하는 “선언된 결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대로 즐겁게 살다가 가면
된다.“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 구원과 해탈에 이를 수 있다“라고 헛된 말을 지껄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세상은 내세를 부인합니다. 이 세상이 끝이니까 여기서
최선을 다해 부를 쌓고 자랑거리를 만들라고 부추깁니다. 아니 혹 내세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것은 인간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그러한 헛된 말로 속이는 속임수가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바로


그러한 세상 사람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깁니다. 그것을 보편 구원론(Universalism)이라고 합니다. 유수의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겉으로 큰 소리로 말하지 않지만 그 보편 구원론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생겨났던 이단 사상입니다. 당시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 육신은 더러운 것이고 버리고 갈 것이기 때문에 이 육신으로 짓는 죄는 나의
영혼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무 율법주의도 나오고 보편 구원설도
나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무 율법주의나 보편 구원론에 빠진 사람들이 “어차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잘 못된 희망을 품고 거룩을 경주하는 길에서 게으름을
피웁니다.
그게 바로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분입니다.
6절을 잘 보시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를
인하여”는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그 앞에 열거한 모든 죄의 목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앞으로 임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거기에 쓰인 “엘섹타이”라는 동사가

- 809 -
현재형입니다. 그 불순종의 아들들에게는 지금 현재 진노가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 중에서 지금 그러한 헛된 말에 속아서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현재 그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진노는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는 진노와는 다른 차원의 진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공부한
것처럼 그 진노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할 때는 “징계”“파이데이아”가 되지만 죄인들에게는
영원한 진노의 연장인 것입니다.
(1)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 여러분에게 죄책감이 들지요? 후회가 일어나지요? 우리 양심이
우리를 정죄하지요? 괴롭습니다. 그게 아주 작게나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입니다.
(2)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시고 제일 많이 들어보셨던 의사의 진단 내용이 뭡니까?
“신경성입니다“
그건 우리의 마음 상태가 우리 몸을 물리적으로 망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후회, 갈등은 우리 몸을 정말 물리적으로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것 또한
우리가 아주 작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입니다.
(잠13:15)
15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여기서 “궤사“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바가드“는 ”약탈, 범죄, 위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험 하니라“”에탄“은 ”거칠다, 험난하다”라는 뜻입니다. 죄는 반드시 우리를 험한 길로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32:23)
23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 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우리가 짓는 죄는 절대 우리를 그냥 놓쳐버리지 않습니다. 심판 날에도 그 죄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올 것이지만 현재에도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징계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전11:29-31)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교회에서 성찬 예식 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엄히 경고하는 구절입니다.
너희 중에 성찬 예식 때 너희를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 때문에 “약해지고
병들고 심지어 죽은 자들이 적지 않다.“ 라고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것은
우리들이 세상과 함께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다.” 라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도 반드시
있다? 없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힘써 죄를 멀리 하자는 것입니다.
(롬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810 -
여기서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아포칼립테타이“가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
현재도 우리에게 임한다는 말입니다.
(사1:1-6)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머리는 온통 병이 들고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밖에 안 보이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누가 때리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패셨듯이 우리도 패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시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기어코 고쳐 내고야 마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분명 하나님의 진노는 현재에도 임하고 있고 앞으로 이 세상이 끝나게 되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진노의 불길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자연재해나
전쟁, 질병 같은 것들이 다 뭐라고 했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어서 돌아오라는 회개의 나팔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용서하실 것이다” 이런 헛된 말에 속지 마십시오.
(렘6:14-15)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속이는 자들은 이렇게 평강을 외칩니다. “다 잘 될 거야. 모두 다 천국에 가게 될 거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살후1:7-11)
7 환난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니,
이 일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8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9 그들은 주님의 앞과 주님의 권능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10 그 날에 주께서 오셔서, 주님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사람으로부터

- 811 -
찬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증거를 믿었습니다.
11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또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그의 능력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향해 외치신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죄 속에 빠져있던 우리가
거룩을 경주하며 결국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처음에는 프쉬키코스 였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살키코스가 되고 점점 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이해하게 되어서 나중에 프뉴마티코스가 되는 과정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서를 공부할 때 배웠죠? 육신에 속했던 사람이 어떻게 어린아이로
탄생이 되고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그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된 자가 이 땅에서도 그의 삶 속에서 진노를 벗어난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게 되는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룩에 관한 내용은 뒷전으로 밀어 놓고, 무조건 예수만 믿으면 병이 낫고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만 잘 믿으면 자식이 잘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은 정말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진노가 뭔지도 잘 모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말씀을 맡은 자가 교회 안에서 외쳐야 할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며 얼마나 큰사랑을 입은 분들이라는 것을 밝히
설명해 드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하게 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는 바른 삶을
살면서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다리자“ 이게 이 땅의 교회에서 선포되어져야 할 바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목사는 욕먹을 거 각오하고 순교할 거 각오하고 강단에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이는 자들은 양을 잡아서 자기의 배를 불려야 하기 때문에 양들이 듣기
싫은 말은 안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도움으로 부자 만들어 줄 테니까 당신들은 그 것의 십분의 일을 예배당에 두고
가라“ 이게 속이는 자들입니다. ”나눠 먹자“ 이거죠.
(미3:5-6)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속이는 자들은 자신들의 먹을 것을 위해서 평강을 외쳐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22장에 보면 미가야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미가야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은 BC931년에 여로보암의 북 이스라엘과 르호보암의 남 유대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는 앙숙으로 지내게 되었죠. 그런데 바벨론의 전신인
아람이라는 나라가 계속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 때 남 유대의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에게 찾아와서 우리 연합해서 아람을 공격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아합은 흔쾌히 동의를 했습니다. 그 때 여호사밧이 “우리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 812 -
물어보고 쳐들어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선지자를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 400명한테 내가 지금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 때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왕이여, 올라가소서 하나님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하고 왕이
듣기 좋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왕상22:11-12)
11 그 예언자들 가운데서,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가 만든 철뿔들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였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철로 만든 이 뿔을 가지고, 너 아합은 사람들을
찌르되, 그들이 모두 파멸될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하십니다."
12 다른 예언자들도 모두 그와 같은 예언을 하면서 말하였다. "길르앗의 라못으로
진군하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 주께서 이미 그 성을 임금님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이게 다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왕상22:7-9)
7 여호사밧이 물었다. "이 밖에 우리가 물어 볼만한 주의 예언자가 또 없습니까?"
8 이스라엘 왕은 여호사밧에게 대답하였다. "주의 뜻을 물어 볼 사람으로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인가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고, 언제나 흉한 것만 예언하곤 합니다." 여호사밧이
다시 제안하였다. "임금님께서 예언자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9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신하를 불러서 명령하였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빨리 데려
오너라."
드디어 미가야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미가야 선지자는 왕에게 한 번도 길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래서 나는 그를 싫어한다.”라고 아합이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여호사밧은 그 미가야에게도 물어봐야 한다고 그를 데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미가야에게 간 신하들이 미가야에게 미리 귀 뜸을 해 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왕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좋은 말을 해 주었으니 당신도 좋은 말을 해 주시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을
선지자들을 통해 듣고 싶은 것뿐이었습니다.
(왕상22:13)
13 미가야를 데리러 간 신하가 미가야에게 말하였다. "이것 보시오. 다른 예언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였으니, 예언자께서도 그들이 한 것 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아합 왕이 미가야를 보자 묻습니다. “내가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을 하러 올라가려 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미가야가 건성으로 “왕이 이긴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합이 “진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말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니까 미가야가 대답합니다.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미가야는 자신이 본 환상을 아합왕에게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왕상22:20-23)
20 주께서 물으십니다. '누가 아합을 꾀어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하자' 또는 '저렇게 하자' 하며, 저마다 자기의 의견을

- 813 -
말하는데,
21 한 영이 주 앞에 나서서, 말합니다. '제가 가서, 그를 꾀어내겠습니다.' 그러자 주께서는
그에게 물으십니다. '그를 어떻게 꾀어내겠느냐?'
22 그러자 그는 대답합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
23 그러므로 이제 보십시오.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여기에 있는 임금님의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주께서는 임금님께 이미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헛된 말로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자들은 전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가야가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아합에게 입에 발린 좋은 말만 해 주었던 옆에 있던
시드기야를 비롯한 가짜 선지자들이 미가야의 뺨을 때리면서 “언제 나한테 있던 성령이 너한테
넘어갔냐?” 하고 모욕을 합니다. 그리고 아합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게 합니다.
분명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재차 미가야를 재촉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미가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해 주니까, 그게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감옥에 쳐
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미가야를 속이는 자로 몰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면 세상 사람들은 “저 놈이 이단이라고, 저 놈이 속이는
자”라고 거꾸로 몰아세웁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이단 취급을 받았습니다.
(고6:8-10)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 바울이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기술하는 대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근심하는 자라고 하지만 자기는 항상 기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가난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실상은 자기는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사도 바울더러 뭐라고
평가했다고 나옵니까? “속이는 자” 오히려 사도 바울을 “이단이다, 속이는 자다“ 이렇게
몰아세웠다는 것입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의 책에 보면 당시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영국의
목회자들이 이단으로 몰아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그 분의 글을 인용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저보고 어리석은 설교를 하고 있는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내 버려두십시오. 그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 앞에서 롯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을 비웃었습니다. 저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마지막 날에 우리 하나님께서 해 주실

- 814 -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우셨겠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집이나 책을 읽어보면 그
분이 얼마나 호되게 성도들의 바른 삶을 강조하시는지 모릅니다. 저는 댈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 분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해 주면 무조건 ”저 놈은 이단이다.” 라고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가야를 속이는 자로 몰아세웠던 아합,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했던 아합은 적진에서
개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많은 목사들의 입에 속이는 영이 들어가서, 만사형통,
소원성취 이런 좋은 말만 해 주고 그 것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헬렐레 하다가 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땅의 교회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
너희들이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죽는다.“ 이거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를 요구하십니다.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성숙하라고 하십니다.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럼에도 그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엉뚱하게 자기가
듣기 좋은 말이나 찾아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사도가 너희는 그러한 속이는 자들과 함께 참예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엡5:7)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RSV같은 곳에는 “do not associate with them" “사귀지 말라“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참예하다”“수메토코이”는 단순히 “사귀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메토코이“는
”협동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절대 그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에게 협동하고 협조해서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8절에서 사도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에 관해 강조합니다.
(엡5:8)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렇죠? 또 “너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하고 못을 박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죤 캘빈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서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별반 되새겨 보지 않고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바울이 그의 서신
초두에서 천국의 기업을 말하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아울러 우리의 눈이 밝히 열리어 장차 우리의 것이 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신다고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그 기업을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처럼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단순한 추측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타락한 삶과 탐욕과 부도덕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닌 우상 숭배자일 뿐이며 순종하는 자가 아닌 불순종하는
자일뿐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은 천국이 아닌 지옥을

- 815 -
기업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바울의 엄숙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손발을 움직여서 우리의 거룩을 경주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부터 11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엡5:9-11)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는 “빛의 열매”의 목록을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나열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9절의 빛의 열매와 대조해서 “어두움의 일”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사도가 빛의 결과물은 “열매“라고 하는데 어두움의 결과물은 그냥 “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두움의 일“”엘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문명, 그리고
문화를 포함한 모든 시도들 우리가 열매라고 부르는 그 모든 인간의 작품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열매가 아니라 전부 “엘곤”“일”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도 똑같은
단어들을 사용해서 열매와 일을 비교하고 있지요?
(갈5:19-23)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19절의 “육체의 일“과 22절의 ”성령의 열매”를 확실하게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으로 가보면 조금 더 그 비교의 의미가 확실해 집니다.
(롬6:19-22)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보세요.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기 전에 도모하는 것들은 전부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라고 묻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라고 하면서 그들이 도모하고 만들어낸 것들은 전부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 “일”의
결국은 “사망”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 반면에 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종들이 맺는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것들“인데 그 결국은
”영생“이라고 합니다.

- 816 -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무슨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거룩함에 이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대단한 업적이라고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들은 전부 허깨비 같은
것들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아시죠? 그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 그의 수중에는 많은 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 것도 없는 빈 털털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친구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죄의 결국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빛의 열매를 맺으셔야 합니다.

그 빛의 열매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피고 오늘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9절을 보시면 빛의 열매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착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 “착함“ ”아가또쉬네“라는 단어는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며 모나지 않아서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촉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보듬어 안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5:43-47)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 뿐 만이 아니라 원수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게 바로
“아가또쉬네“”착함”입니다.
(롬15:14)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의로움”입니다. “의“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정의해 드렸지요?
어떤 존재“네페쉬”가 다른 존재들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의로움”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자기의 선입견이나
충동이나 자기의 생각에 지배를 받아 남을 판단하거나 옳은 일을 정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 나와 올바른 관계로 회복이 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어떤 삶을 원하시는가를
깨닫고 거기에 맞춰서 사는 것을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의로움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지 않은 자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롬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경건치 않음이 먼저 나오고 불의가 두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 말은 경건치 않음이 불의를

- 817 -
불러온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 경건함이 없이도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살아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성경을
기각하고서 성경이 가르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회복이 되어야 의로운 삶을 경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이라는 것은 속이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는 빛입니다. 빛은 모든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빛은 모든 것을 다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추거나 숨기는 것이 없는 열려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감추고 숨긴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의도적으로 감추고 숨기고 할 필요가 없는 진실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자신을 가리고 숨었지요? 그게 바로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죄인들은 가리고 숨습니다. 그리고 속입니다. 우리가 6절에서 어두운 세력들의
특징을 무어라고 공부했습니까? “헛된 말로 속이는 자”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롬3:13)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맺혀야 할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요약을 하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한 가지로 요약을 한다면 어떤 말로 요약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타적인 삶”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이타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만을 생각하던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도록 바뀐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그렇게 원수를 위해 자기를 불 태워 버린 빛이신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당연히 이제 우리는 그 이타적인 삶, 거룩한 삶을 소원하고 그리고 끌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0:24)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열매여야 합니다. 참 힘든 삶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목표지점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사도는 왜 우리가 그렇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고 요구합니까? “하나님의 진노” 그렇죠? 죄와 악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임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이유입니다. 사도는 보다
적극적인 이유를 10절에 이렇게 기술합니다.
(엡5:10)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서 “시험하여 보라”“도키마조”는 “분별하다, 구별하다, 자세히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금속을 시험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게 금인지 은인지 시험할 때 “도키마조”라는
단어를 씁니다. 똑같은 단어가 로마서 12장에 쓰였습니다.
(롬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 818 -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시험하고 분별하고 열심히 조사해서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기에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하고 두드려보고 또 두드려보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과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과는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물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모든 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웃에게 악평을
듣는 것이 무섭고 창피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무시합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하나님이 지금 나의 이 행동을 기뻐하실까“로 우리의 행위를 선택합니다.
(고전4:3-5)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께로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 암송해 보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 제 1번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왜
사세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거 힘드시죠? 압니다. 저도 많이 힘이 듭니다. 우리는 이제 나방이나 곤충들이
빛을 보게 되면 저절로 빛이 비추는 쪽으로 근육이 수축이 되어서 불 속으로 들어가 타 죽는
것처럼 그러한 광극 성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습관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육신이 그 소원을
따라주지 않아서 늘 갈등하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갈등하고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 자체가 바로 여러분이 구원들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내십시오.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또 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서 우리를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 819 -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