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173

세포가 한 개라도 있으신 분 손 들어보세요. 없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한하며, 변하며 후패합니다. 그 땅에 있는 것들의 화려함과 초라함에 너무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저 천국을 준비하는 분들입니다. 비록 초라한 종의
자리일지라도 그게 여러분의 천국을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자리를 지키십시오.
히브리서 11장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항상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만을 바라보며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성도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터는 없습니다. 우리는 저 견고한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상황과 환경에
불평하지 마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해 해 나가십시오.
그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77) 마귀를 대적하라(I)


(엡6:10-13)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958 -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오늘부터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6장 10절부터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에베소서의 절정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에베소서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 적인 부분을 다루었고 4장과 5장 그리고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6장 9절에 이르기까지는 신자 된 자로서의 삶, 그러니까
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일상생활 속에서의 신앙원리를 어떻게 녹여내야 되는가를
기록하고 있고 오늘부터 공부할 6장 1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바로 그 신자의 삶은 혈과
육에 관한 싸움, 즉 사람과 인간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초월적인 싸움,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겨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1장부터 3장까지는 지금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그 싸움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필연성을, 교리로 자세하게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에베소서의 결론이 이렇게 신자들이 치러내야 하는 신앙생활 속에서의 영적
전투라면 왜 처음부터 전신갑주와 대적들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기술하지 않고
많은 지면을 그 싸움의 필연성에 대해 설명을 할까요?
군에 가면 군인들에게 총 쏘는 연습, 사람 때리는 훈련, 유격 훈련 이런 것만 시키지
않습니다. 똑같은 비중으로 정신 훈화를 합니다. 왜 정신 훈화가 필요합니까? 아무리
싸우는 기술이 출중한 병사라 하더라도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한 정보와 왜 그 싸움을 싸워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병사는 싸울 의욕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시간만 나면 반공 교육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정신 훈화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는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투의 상세한 내용을 기술하기에 앞서서 우리의
목표 지점과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의 내용과 그 싸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먼저
훈화해 준 것입니다.

간략하게 복습을 하고 갈까요? 1장으로 가보시면 사도는 처음부터 우리가 무엇을 향해


의도되어져 있는 사람들인지에 대한 것을 시작으로 에베소서를 엽니다.
(엡1:3-5)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을 주지시킴으로 이 땅에서의 싸움이
단순히 땅의 것들과 인간들과의 싸움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복을 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빠져있는 죄
속에서 그들을 건져내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구원의 이야기가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엡2:1-5)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너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 959 -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리고 그렇게 죄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사람으로 지어져 가야
하는지에 관해 3장에서 보여줍니다.
(엡3:14-19)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1장 3절의 목표 지점을 향해
열심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 삶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1장에서도 사도가 이미 한번 했던 기도입니다.
(엡1:17-19)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는 여기서도 이미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으며, 부르신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기를 원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목표지점까지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건해 져야 한다고 사도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 그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싸워야 하는 싸움에 대해
기술을 합니다.
(엡4:1-3)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너희가 죄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이제 그 신분에 맞는,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사도가 권고합니다. ”너희가 판사가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럼 법학을 공부해라.
너희가 운동선수로 부름을 받았느냐? 그럼 운동을 열심히 해라” 하고 사도는 우리
성도들에게 합당한 삶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교회 안에서 힘써 지켜야 한다.”고 덧붙인 후에, 성도가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나열을 합니다.

- 960 -
(엡4:17-32)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리고 5장으로 넘어가서 술 취함으로 대표되는 방탕한 삶에 대한 경고와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권고를 하고 “성령 충만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지에 대해 5장22절부터
6장9절까지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라, 종들아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상전들아 종들을 형제처럼 대하라“ 이렇게
성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설명을 한 후에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하다.” 라고 6장 10절부터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지요?
(엡6:12)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 싸움은 단순히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씻어 내고 선한 일을 하는 정도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외부에 있는 어떤 영적인, 초월적인 대적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부에 있는 나의 옛 사람과도 싸워야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나를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과도 싸워내야 하기 때문에 전신갑주가 없이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에베소서의 결론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내 안에 있는 나의 옛 사람도 세상 권세 잡은 자인 마귀의 손아래에서

- 961 -
길들여진 “자아”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대적은 영적 존재인 “마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그 전쟁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마귀는 어떻게 생겨 난 것인 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철학은 이 “악”의 기원을 이원론 적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즉 세상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는데 이 물질 세계는 악한 신이 창조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선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악한 신이 그 것을 방해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 선한 신과 악한 신은 똑같은 권세를 갖고 있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이원론적 신관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오멘이라는 영화를
보면 하나님과 악한 마귀가 동등한 세력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쫓아도 끄덕도 없고 성경책으로 방을 도배를 해 놓아도 마귀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서슴없이 죽입니다.
이러한 이원론 적인 신관에 근거하여 악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악의 존재에 대해 진화론 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완전의 결여”라고 보는 것입니다. 만물은 발전하고 성장해서 언젠가 완전한 선에 도달하게
될 텐데 지금은 아직 미성숙한 단계이기 때문에 그 미성숙의 모습이 약점으로 나타나게
되고 사람들은 그 약점을 “악”으로 부른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인내”“기다림”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면 악이
다 사라지고 선만 남는 세상이 올 거라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선이 완성이 될 몇 천 년 뒤에 태어나지 않은 것뿐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그 악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성경 속으로 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 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의 “천”은 히브리어로 “솨마임”입니다.
“솨메“의 복수지요.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늘들에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대기권과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영들과 함께 하시는 그 하늘나라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 하늘에는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해 놓으신 천사라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그 천사들은 영적 존재이며 하나님이
부리시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 성도들이 부릴 영적 존재들입니다.
(히1:14)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 천사들은 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욥38:4-7)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그리고 이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늘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천사들 중 어떤
놈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았습니다.
에스겔서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두로 왕에게 전하시는 심판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이
에스겔서 28장과 이사야 14장의 내용은 두로와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임과

- 962 -
동시에 그들의 배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있는 악의 원조, 마지막
날에 결국 멸망하게 될 마귀와 마귀의 세력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겔28:2-6)
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3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와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하고
4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6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겔28:12-17)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 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 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 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사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이렇게 천사 장 중 하나였던 “아름답고 완전한 존재”사단은 그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께 반역을 했고 하나님은 그러한 마귀를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누리던
모든 하늘의 복을 빼앗으신 후에 땅으로 내 쫓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혼자
쫓겨난 것이 아니라 그의 미혹에 빠져 그에게 동조했던 수많은 다른 천사들과 함께
쫓겨났습니다.
(벧후2:4)
4 하나님이 범죄 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6)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렇게 마귀와 그의 무리들은 교만하여져서 타락을 하게 되었고 그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의
격렬하신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 타락한 천사들의 세력을 성경은 “악”이라고 부르는

- 963 -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이 전에 마귀와 어떤 천사들의
타락이라는 무서운 사건이 있었고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만드신 것을
보시고 스스로 “좋았더라.“ 하고 여기실 만큼 이 세상은 완전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들 곧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과 정사와 권세들이 그들의 악한 욕망과 건전치 못한
야망과 하나님께 대한 증오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나타나서 여자를 유혹했고 여자를 통해 남자가 유혹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악은 에덴동산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악은 이미 그 전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으시면서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이 드실 것입니다.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타락이 가능한 천사를 만드셨을까? 그리고 왜 천사들이 타락을 했을 때 다
없애 버리지 않으시고 놔두셨을까? 그리고 왜 그 마귀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끔찍이
생각하시는 인간을 유혹하게 놔두셨을까? 거기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지만
저의 추론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드릴 수는 없고 이런 답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건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그게
옳습니다.”라는 말뿐입니다.
그렇게 마귀를 포함한 악의 세력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창조 세계를 한 순간에 접수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권세를 위임받은 인간을 정복해 버림으로 사단은 그 인간이 다스려야 할
세상까지 접수해 버린 것입니다. 그 후로 이 세상은 사단의 세력에 의해 놀아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 어두움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들을 그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건져내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걸
우리가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26:16-18)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골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성경은 구원을 “흑암의 권세,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기 전의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사단의 권세, 곧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이제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말을 하지요? 그렇게 구원받기 전의 모든 인간들은
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 마귀는 무장을 하고 자기 소유물들을 지킵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더 강한 분이 그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 세간을 늑탈해 버리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눅11:21-22)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요일5:19)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 964 -
(표준 새 번역)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못한 모든 인류는 이 세상 신의 대리자요 심부름꾼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전부 그 마귀와 마귀의 세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고
그들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그러한 타락한 인간들을 가리켜
“장기판의 장기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적들은 이 땅의 인간들, 즉 혈과 육이 아닌 영적인 존재,
마귀와 그 세력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들만을 보고 그 현상들을 고쳐서 지상 낙원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은 이 마귀의 존재를 너무 얕보는 무지한 발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낙태 반대 운동을 한다던가, 핵 반대 운동을 한다던가, 반전 운동을 하는
것은 근본적인 병의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고 나타나는 증상에 대한 약을 쓰는 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폐렴이 걸린 사람이 열이 나고 기침을 한다고 해서 해열제와 기침약만을 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 못 가 죽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투의
현장을 바로 인식하지 못 하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만을 바라보는 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인 마귀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귀는 아직까지 엄청난 파워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그를 가리켜
“세상 신”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고후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전에 공부했던 에베소서 2장 2절에서는 그 마귀를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아까 보았던 마태복음12장 2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마귀를 “강한 자”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 번째 서신 서에서 그 마귀가 우는 사자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자가 우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당시 고대 시대 때에
가장 무서운 동물이 바로 사자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귀를 묘사하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로 무서운 짐승을 인용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그 마귀를 “정사와 권세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정사"“알케”“ruler"라는 것은 특별한 지역을 다스리는 마귀의 졸개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세력들도 질서와 체계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세“”엑수시아“는 정치적이며 물리적인 면에서가 아닌 철학, 사상,
물질만능주의, 과학 만능 주의 같은 문화 속에서 체계를 갖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정사와 권세는 하늘나라에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엡1:21)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보시다시피 하늘에도 정사와 권세라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 하늘의 정세와 권세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 있는 것처럼 마귀도 그를 따르는 졸개들에 의해 둘려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귀도 이렇게 그의 세력을 질서로
다스리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는 마귀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세상”“아이온”은 특별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지배밖에 있는

- 965 -
세계, 또는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세계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도
이외의 모든 세상 사람들을 포함한 전체 세상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그 곳 전체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짓들을 합니까?
(엡4:17-19)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어두운 세상에 속해서 총명이 어두워진 사람들은 감각이 없어지고 모든 더러운 것들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살인, 도둑질, 마약, 사기 같은 인간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주관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사도는 마귀의 세력을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부릅니다. 좀 더 정확한
번역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적 군대”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라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닌
것을 나타내기 위해 동원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이 지상의 현상만이 아닌 보다 초월적이며 영적인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마귀의 권세와 대담성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공격을
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과 족장들도 수시로 마귀의 궤계에 패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정도로 마귀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엄청난 마귀의 힘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에서도 보았듯이 그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성도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눅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보세요. 여기도 사단이 성도를 밀 까부르듯 청구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더니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사단의 권세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종속되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단 칼에 없애 버리지 않으시고 가만 놔두신다고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그
사단의 세력이 우리 성도의 양육에 꼭 필요하다는 것만 알뿐입니다.
(계12:13-14)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보시다시피 13절에서는 용이, 사단이 교회를 핍박한다는 표현을 쓰고 14절에서는 교회가
양육 받는 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사단과 그 세력들은 교회의 양육에 필요해서 남겨
두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마귀의 세력은 과연 어디까지 이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요?


욥기에 보면 사단이 우리 인간 세상의 어떤 영역까지 손을 댈 수 있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 966 -
(욥1:16-19)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보시면 사단은 번개도 동원할 수 있습니다. 태풍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격동하
여 도둑질과 살인을 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들 위에도 그 권세를 부릴
수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렸던 돼지 떼들 기억나시지요? 이렇게 사단 마귀의 세력
은 자연 현상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거의 이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허락 하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인간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 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고후4:3-4)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고 사단은 성도들에게 의심의 마음을 넣어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마16:15-23)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분명 엄청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그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알게 하신 것”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있다가 사단이 그
마음에 의심을 불어넣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해서 듣다가
갑자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하고 그 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의심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마음속에 의심을 불어넣은 사단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나님께서 베드로더러 사단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시다가 의심이 드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많습니다. 심지어 저는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실까? 도 의심해 보았습니다.

- 967 -
마음속에서는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고 도리질이 일어나는데 자꾸 그러한 의심이 들 때가
있지요? 그게 바로 마귀가 존재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때로 마귀는 우리 성도들을 공포의
영으로 억누르려고 시도를 합니다.
(마26:31-34)
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러나 며칠 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예수님을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여러분이 순종과 헌신에 대한 설교를 들으시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뭡니까? “그래 오늘부터 그렇게 한 번 살아보는 거야” 이 생각이 먼저 드세요? 아니면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 손해가 막심 할 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드세요. 많은 분들이
“목사님이 설교하는 대로 살면 우린 다 망해요“라고 겁을 내십니다. 그건 마귀가 주는
공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 져 주십니다. 그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고
공포에 떠는 것은 마귀가 여러분을 미혹하고 있는 증거 인 것입니다.
또 마귀는 충동적인 거짓 교훈의 전문가입니다.
(딤전4:1)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거짓 교리와 거짓 가르침은 사단 마귀의 작품인 것입니다.
(요일4:1)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2:18-22)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신 신학의 아버지 슈바이처는 그런 의미에서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마귀는 낙심의 영으로 사람들을 무력화 시켜 버립니다. 마귀는 “난 가짜인가 봐,
난 안 돼“ 이러한 패배 의식을 성도들의 마음에 심어 넣어서 그들의 영적 성숙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성도를 교만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인류 최초의 타락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도 마귀가 인간의 교만을 부추긴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지배를
당하고 있기에는 너무 훌륭해,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길이 있어” 인간은 그 교만을
부채질하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다윗도 사단의 미혹에 빠져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떨다가 혼났던 적이 있지요.

- 968 -
(대상21:1-2)
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두목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사단은 다윗의 승리를 타고 들어와서 “너를 자랑해봐, 너의 승리를 계수 해 봐”라고
꼬드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그 교만의 미혹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딤전3:6)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새로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에게 어떤 직분을 주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경고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금방 교만해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교만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질병으로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베레아 파처럼
모든 질병이 귀신의 짓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질병에는 원인이 있지요. 그러나
사단이 원인이 되는 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눅13:11-16)
11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을 가리켜서 “사단에게 매인바 되었던 여자”라고
부르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질병을 “사단의 가시”라고 부르지요.
이렇게 마귀는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주며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과
떨어뜨려 놓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기 시작한 그 때부터 마귀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우리 인간을 어떻게 하면 넘어뜨릴까만 연구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과 겨루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강한 힘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력들이 질서와 체계를 가지고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서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무시하고 단
한순간이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언어도단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대적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그 대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신앙생활에 매진하십시오.
이 마귀 론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78) 마귀를 대적하라(II)
(엡6:10-14)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969 -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의 궤계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하기를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살인, 간음, 도둑질,
사기, 험담, 시기, 질투 같은 더럽고 어두운 일을 시킬 수도 있고 자연 현상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람의 목숨까지도 빼앗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도 찾아와서 의심의 마음과 공포의 마음을 불어넣기도 하고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의 마음으로 때로는 교만한
마음으로 성도를 파괴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하고 다음 시간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마귀의 궤계를 파 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먼저 몇 가지 확인해 두고 넘어갈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셨나요? 왜 그렇게 마귀들은 인간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요? 우리
가 넘어지면 마귀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예전에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던 분의 아드님이 마약 중독에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
드님에게는 연예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외아들이 너무 외로워 하니까 대통령이 연예인 친
구들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예인들 중에 마리화나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마리화나를 하면서 자신들이 처벌받지 않기 위해 그 대통력의 아들에게 마리화
나를 가르쳤습니다. 대통령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공범으로 만들면 자기들도 무사할 줄
알았던 것이죠.
결국 그 대통력의 아들은 얼마 전까지도 마약을 끊지 못하는 마약 중독자로 청춘을 허비하
고 말았습니다. 그게 죄의 전염성입니다. 죄인들은, 어둠의 세력, 마귀의 세력은 자신의 어
두움을 많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지옥의 동지들을 구하는 것이지요. 여
담이지만 사단도 하나님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인간들이 사단과 함께 타락을 해 버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용서하실 때 자기들도 용서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
다. 그리고 마귀는 자신의 패배나 파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신의 세력을
한 명이라도 더 늘여서 끝까지 하나님과 대적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
록을 보면서 그게 더욱 더 선명하게 확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귀는 끝까지 어떤 기대를
갖고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음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만
이 세상의 결국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해서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여 하나님과 대적하고 그게 실
패로 돌아갈 시에도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범으로 만들어 놓음으
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실 때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여 자신들도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시도는 분명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입각한 지혜로운 발상이기는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다른 방법을 이미 강구해 놓으셨습니다. 뭐
죠? 십자가지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로 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해 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옥의 형벌을 다 받아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12시부터 3시까지 온 세상이 흑암으로 덮였습니다. 그리
고 예수님은 “목이 마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나오지만 목마름과 흑암은 “지옥”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징들입
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의 지옥을 미리 살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마귀가 우
리를 미혹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는 그 지옥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법에도 “일

- 970 -
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지요? 어떤 사건에 대하여 일단 판결이 내리고
그 것이 확정되면 그 사건을 다시 소송으로 심리 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
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고 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벌을 받
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속성을 죄인들이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걸
신학에서는 죄의 전염성이라고 하지요. 죄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과 공범을 만들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죄로 끌어들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와 정 반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받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은 마귀의 전도자가 되어서 다른 이들을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이끄는 그 어두움 속으
로 전도를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죄와 허물로 죽어가고 있는 세상 속에 들어가
서 그들을 빛으로 끌고 나와야 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마귀의 공경에 수동적으로 대처하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방
어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이며 공격적으로 마귀와 싸워야 하는 존재들
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 마귀는 자기편을 우리 편에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삶에 엄청난 공격과 미혹이 가해지겠지요. 우리가 이번 여름 선교를
떠나면서 기도로 철저하게 무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영부영 여행가는 마음
으로 떠나려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지해야할 사항은 사단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사단이라는 인격적인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숨어버리는 것
입니다. 사단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대적은 이 ‘어두운 세상‘일 뿐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어 버려서 그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들기 위한 시도와 노력들만을 유도해 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성취의 종교로 전락을 시켜 버립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는
성도가 이 어두운 세상과 싸우고 도를 닦아 자신의 인격을 연마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어두운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듯이 이 어두
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존재를 부인하게 만드는 사단의 미혹’은 인간의 시야를 이 보이는 세계에만
고정을 시킴으로 해서 영적 존재이신 “성령을 부인”하는 데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에 무감각해 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 성령에 대해서
도 둔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인격을 소유하고 전략과 전술과 지혜를 동원해서 우리를 파괴하려드
는 마귀 사단이라는 존재와 정사와 권세와 하늘의 악한 영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마귀의 전략과 전술과 공격의 내용을 잘 알아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겠지요? 넋 놓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마귀의 세력에 대한 경고를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 있고, 그 대적들은 얼마나 큰 힘을 소유한
자들이며 거기에 지게 되면 하나님도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하는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는 게
으른 죄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들은 그냥 평화롭고 낙관적인 말
만 듣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역사를 한번 보세요. 대적을 경계하는 일에 실패한 나라들이 전부 어떤 일을 겪었습
니까? 선조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군사를 모으고 훈련해야한다는 율곡의 10만 양병 설
을 묵살해 버리고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군들에게 쫓겨 다니며 물고기나 잡아먹는 신

- 971 -
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오성 이항복 대감이나 서애 유성룡 대감까지도 그 10만 양
병 설을 배격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에 대비해서 오늘의 편안함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대적의 공격에 대비하자고 외친 율곡 이이는 그 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왜군에 의해 침략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실재한다는 것과 그의 궤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리들은 특별히 성도들
을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밀착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거기에 대해 대비
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적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인식이 우리에게 더 많은 열심
을 요구해서 우리가 더욱 불편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대적의 실재에
대해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농구 감독을 하시는 분이


미국의 어느 대학에 국가대표 농구팀을 이끌고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대표 팀 감독님이 미국의 어떤 대학에 짐을 풀고 몇 달간 전지훈련을 하면서 그 대학 농
구팀과 친선경기도 하고 했는데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답니다. 그래도 일국의 국가대표 팀
인데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한 번도 못 이기는가? 그래서 그 대학 농구팀 코치에게 선수들
을 어떻게 훈련을 시키는가? 물어 보셨답니다. 그 때 그 미국 대학 코치가 그 감독님을 자
기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랍니다. 그리고 자기네 선수들 한사람 한 사람을 찍어놓은 비디오
테잎을 보여주면서 그 선수들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다 파악해서 기록한 노트를 보여 주셨
답니다.
어떤 선수는 패스를 할 때 습관적으로 팔을 5cm정도 당겼다가 패스를 하는 바람에 블로킹
을 자주 당한다. 어떤 선수는 슛을 던질 때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고 어떤 선수는 패스를 할
때 뒤꿈치를 자주 든다. 이런 기록들 옆에 “수정”“수정”“수정” 이렇게 적혀 있더랍니다. 자
기 선수들의 약점을 모두 파악해서 완전히 수정이 될 때까지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와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약점과 장점이 정확하
게 파악이 된 데이터도 이미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 아무리 국가 대표 선
수들이라 할지라도 상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나 데이터 없이, 그리고 자신들의 약점에 대
한 파악 없이 그저 패스나 연습하고 슛 연습이나 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 대해 그 보다 몇 배 더 확실하고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몇 주간에 걸쳐서 그 마귀의 공격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것
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그 대적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마귀의 존재에 대한 인
식도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그건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존 번연의 ‘warfare’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악화된 상태에 빠지게 된 주된 원인 중의 하나는 마귀의 존재가 잊
혀지고 있다는 사실임을 나는 확신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탓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
의 태도나 사고를 심리학적 현상으로만 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 엄연한 객관적 사실, 존재
성, 마귀의 실존, 적, 참조 자 및 화전 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르면 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대적이 존재하며 그 세력은 왕성하게 활동을 하
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 972 -
그럼 지난주에 이어서 그 마귀의 공격의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마귀는 교회를 공격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부분이 엉터리 교리를 교회에 갖고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다음 주에 다른 내용으로 넘어가지요. 전쟁에서 자국의 주력화기를 보통 어디다 쏟아 붓습
니까? 상대방의 주력 부대를 깨는데 쓰지요? 그 귀한 주력 화기를 동사무소에 있는 방위들
공격하는 데 쓰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주력부대를 교회로 보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특히 교회 안에서도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을 합니다. 그 지도자가 잘 못 가게 되면 교회 전체가 잘 못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분명 주인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거기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려 놓는 것을
그냥 허락하십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농촌에서 자라신 분들은 “피 사리”라는 것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논이나 밭에 벼하고 비슷하게 생긴 잡초가 자라나는 데 그 것을
“피”라고 부릅니다. 그 것을 정기적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그 잡초는 번식력이 엄청나고
성장 속도가 빨라서 진짜 벼가 자라는데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됩니다.
사단은 그런 가라지를 교회 안에 “덧 뿌려” 놓았습니다. 사단은 엄청난 숫자의 가라지를
교회의 지도자로 영적 리더로 뿌려놓고 그들에게 엉터리 교리를 가르치게 함으로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엉뚱한 길로 가게끔 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진짜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짜라고 우기고 엉터리 교리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가짜는 어떻게 해서든 진짜로 믿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책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주일에 말리부 해변으로 소풍을 다녀오셨지요? 그 때 제일 먼저 챙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도시락? 음료수? “지도“지요. 우리 교회를 나가서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퍼시픽 하이웨이가 나오면 계속 직진해서 말리부 해변까지 가는 정확한 지도를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 지도가 바로 “교리“입니다. 그 지도가 엉터리이면 아무리 맛있는 도시락도
아무리 시원한 콜라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라지 들이 틀린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성도들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성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기적적으로 물질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저도 전도사 때 자주 아파트 렌트 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파트 렌트 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가 없어서 걸어서 학교를 통학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새 차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엽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그 것이 마치 기독교의 핵심인 양 왜곡시켜서 기독교의 핵심을 바꾸어 버리게 만드는 것이

- 973 -
바로 사단의 공격 방법인 것입니다. 사단은 아주 지엽적인 것을 핵심에 놓고 기독교라는
원을 다시 그리게 함으로써 정말 중요한 핵심 적인 것들을 놓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삼박자 축복이 교리의 핵심에 오게 되면 “고난을 통한 성화와 거룩“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이 원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의 귀신 론처럼 ”우리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마귀의 짓이고 그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난 성도들은 병도 걸리면 안
되고 눈도 나쁘면 안 되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게 되어야 한다.”는 그런 교리가 중심에
오게 되면
죽을 때까지 간질을 가지고 간, 사도 바울이나 위장병으로 고생한 디모데는 지금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라지 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가라지들, 이단들은 열심히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가야 할 신앙의 여정에 아주 지엽적인
것들을 핵심으로 놓게 해서 그 여정의 지름길들을 제시 해주고 마취제나 환각제를 투여해서
그 길을 고통 없이 단축시켜 줄 수 있다고 속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우리가 한발 한 발 가야하는
험난하고 고단한 길입니다. “이 물만 마시면, 이 약만 먹으면, 기도만 하면, 금식만 하면“
성경은 이런 지름길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가라지며 이단인 것입니다.
이 이단과 비슷한 것이 “사교”라는 것입니다. 이“사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인물이나 사물에 대해 헌신하는 것을 “사교”라
합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은 이단과는 달리 성경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만의
경전을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몰몬 교의 창시자 요셉 스미스가 유타의 계곡에서 발견했다는 황금 종이 위에 쓰인 몰몬 경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렌 화이트가 쓴 저술이나
진술이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습니다. 통일교에도 자기들만의 경전이 따로 있지요.
이 사교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교주들에게 시선이 모아진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가 바로 사교의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이단과 사교에 빠지게 되는 주원인은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해서 주를 알고
주를 기뻐하는 것보다 자기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인식시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지 않는
것, 이단과 사교가 제공하겠다는 세상 것들을 추종하게 함으로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누차 확인한 것처럼 영생은, 진짜 복은
이러합니다.
(요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진짜 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단과 사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바르지 않은 교리나 왜곡된 교리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그러한 엉터리 교리들을 좇아
죽음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의 궤계는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1678년에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warfare 라는 책이 이러한 사단의 공격과 도전과 궤계에
관해 기술한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300년 동안 기독교는 그 부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마귀의 공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히 사라져 버렸을까요?
종교 개혁 이후에 교회의 구원론이 너무 칭의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진의를 깨닫고 당시의 로만 카톨릭의 알매니안 적 구원론을 배격하다보니까 성화까지도

- 974 -
칭의와 붙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이 인간의 행위와 공덕을 하나님의 은혜와 믹스를
시켜서 엉터리 종교를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분노가 성화까지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분명 성화도 우리 주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로마서 5장을 공부하면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구원과 사심의
구원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시켜 가고 계시다는 의미에서 사심의
구원을 설명해 드렸지요? 그러니까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의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반드시 징계 하신다”는 말씀에서
“징계”“파이데이아”는 “자식 만들기”라고 했지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 의해 “자식 만들기”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12장의
논증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자식 만들기의 과정을 통과시키심으로
성화 시켜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것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격 속에 이미 “신의
성품에로의 참여“가 진행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는 그 때까지 그가 젖어있던 옛
성품과 신의 성품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끊임없는 갈등과 의심과 때로는 감격과 기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은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고스란히
내가 다 겪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다른 말로 책임이라고도 부르며
의무라고도 부르는 것이며, ”내가 싸운다.”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내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마귀의 세력입니다. 싸우는 것도 내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길 때까지
우리를 채찍질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도우시지 않으시면 절대 우리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끊임없는 전투가 있게 마련입니다. 무작정 “주님
도와주십시오.”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엡4:22-27)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절부터 새 사람을 입는 방법이 나옵니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기도만 하면 된다.“그러나요? 새사람을 입는 과정에서 마귀가
틈을 타서 방해를 할 것이니 너희는 너희의 의지를 발동해서 그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벧후1:3-11)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975 -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는 예언적 과거입니다. -미래에 반드시 완성 될 것을 미리 과거로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는 우리의 목표지점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러 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습니다)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힘써 치러내야 할 전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전투를
치러 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본문 10절에서 하나님의 전투와 인간이 치러내야 할 전투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기술한 것입니다.
(엡6:10)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누구의 힘입니까? 하나님의 힘의 능력입니다) 강건하여지고(누가 강건해 져야하는
것입니까? 내가 강건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영적전투는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100%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동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싸워야 할 싸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의 하이퍼 칼비니스트 적인 교리가 그 마귀의
실재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교리를 정립하는 것은
성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정신일도 하사불성“ 식의 신앙생활이 마치 올바른 신앙생활인 것처럼
오해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좋은 말 같지만 일제가 한국에 심어놓은 아주 나쁜 정신입니다.
예전에 일본과 러시아가 아시아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했습니다. 사실 일본은
대제국 러시아의 전쟁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지게
되면 국가의 존폐위기가 오게 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이겨도 좋고 져도 상관없는 그런 전쟁이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전투방법은 세계에서 유명한 퇴각 전투였습니다. 미리 참호를 다
준비해 놓고 적에게 치명타를 가한 후에 안쪽으로 후퇴해 들어가는 전투 방법입니다.
그렇게 전선이 자꾸 길어지다 보면 적군의 보급로가 길어져서 적군은 많은 병력을 식량과
탄약 보급에 쏟아 부어야 하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지치게 될 때 한 순간에 잡아 버리는
그런 전쟁을 말합니다.

- 976 -
거기에 나폴레옹이 무너졌고 히틀러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게 러시아가 퇴각 전투를 하고 있을 때 러시아 안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내분을 수습하는데 주력을 했습니다.
그 때 일본은 표면상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었고 러시아는 퇴각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로 그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 전쟁 후에 일본 군부에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아주 몹쓸 병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 정신이 어떤 폐단을 낳았는가 하면 “노력하지
않고 실력이 없어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이길 수 있다”는 무모함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력도 없는 것들이 걸핏하면 머리 삭발하고 머리에 띠 두르고 “혹시나“하는 기대로
무모한 도전을 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게 일제 36년 동안 우리 조선 땅에 그대로 들어와서
공부를 하던, 운동 경기를 하던 심지어 종교 생활까지 어디서든 ”정신일도 하사불성“ 이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양궁을 하는 선수들은 활을 들고 있는 왼팔의 근력을 열심히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호흡을 고르게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하고 오른 손은
아무리 강한 바람 속에서도 진동 없이 시위를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연습은
하나도 하지 않고 정신을 통일하고 과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신께 기도를 드리면 어느
순간 그 과녁이 남산 만하게 크게 보이게 된다는 식으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써먹었습니다.
야구 감독이 실력 없는 사람을 대타로 내 보내면서 정신만 똑 바로 차리고 공을 보면 “공이
수박 만해 진다“고 사기를 치는데 그 정신일도 하사불성이 사용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싸워 나가야 할 것들을 40일 금식 기도를 하면,
천일 새벽기도를 하면, 헌금을 도에 지나치게 정성스럽게 하면 마치 내 삶 속에서
완성되어져야 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될 것처럼 이 “정신일도
하사불성”의 원리가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훈련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4:7-8)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여기서 “연습하라“”귐나조“는 ”운동선수들의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올림픽 선수
촌에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훈련받는 것을 보여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거의 하루 종일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정말 지옥 같은 훈련을 합니다.
우리는 경건을 그렇게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신의 성품을 방해하는 대적이 엄청난
세력으로 공격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신의 성품이 완성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것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히12:4)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렇게 교리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우리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를 읽다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어린 시절 다니던 서당에 칠성이라는 머리가 나쁜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
는 그 칠성이가 오성과 한음에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오성 이항복 어린이가 내일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워 오면 그 비결을 가르쳐

- 977 -
주겠다고 했답니다. 칠성이가 밤을 새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다보니까 물이 새긴 새는데
새는 속도보다 더 부지런히 물을 부으니까 그 독이 서서히 채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 날 ‘칠성이’는 오성과 한음에게 좋아라하고 달려가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웠노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공부를 잘 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오성
이항복이 그 칠성이 더러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말했답니다. 우리는 경건을 그렇게 연습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룩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지 거룩과 경건과 신의 성품까지 완성해서 함께 넣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궁극
적으로는 그 모든 것도 은혜 속에 이루어 질 것이지만 우리는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
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완성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귀의 엄청
난 공격이 가해 질 것이고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난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다 해주실 거야“ 이런 마귀의 미혹에서 얼른 벗어나십시오. 그건 엉터리 교리입니
다.

- 978 -
(79) 마귀를 대적하라(III)
(엡6:10-13)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에 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마귀가 우리 성도들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에 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 정, 의입니다. 인간은 지, 정, 의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천을 합니다. 마귀는 이 인간의 지, 정, 의를 효과적으로 공략함으로 해서 바른
신앙생활을 막습니다.
우리는 “지, 정, 의”의 올바른 조화 속에서 바른 것을 인식하고 바른 것을 체험하며 바른 것을
실천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지, 정, 의”의 불균형이 일어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지, 정, 의” 중에 어느 하나에 지나치게 치중하게 만들거나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것들을 놓아버리게 만드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식과, 감정과 실천의 “지, 정, 의” 중에 지적인 문제에 편중된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지식에 편중되는 것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고전8:1)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뭔가 부족한 지식, 그러니까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편중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편중된 지식과 사랑이 왜 대조가 되어 있는지 아세요?
사랑은 행동을 유발하는 것임에 반해서 편중된 지식은 그 행동이 결여됨으로 다른 이를 정죄
하고 비판하는 교만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다 뭡니까?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절대 그냥 머리로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식은
실천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지식이 행동과 동 떨어져 혼자 다니면
“너는 이래서 틀렸지, 너는 저래서 안 돼지, 이렇게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됐지”밤낮 비판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행동이 수반되는 사랑은 어떻습니까?
(벧전4:8)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행동이 수반되는 사랑은 이렇게 상대방의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래서 행동이 필연적으로

- 979 -
수반되는 사랑과 행동 없이 홀로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지식을 대조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적 대 각성 운동이 먼저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드나 조지 휫필드, 요한 웨슬리, 무디 같은 설교자에 의해 올바른
복음, 즉 지식이 전달이 됩니다. 거기서 성령께서 그 영원한 지식, 성경 말씀을 조명해 주시고
이해를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깨달음이 그 마음을 휘어잡게 되고 회개를 합니다. 통회
자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회 자복은 그를 움직이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그 지역의 음란한 술집이나 유해
업소들이 하나같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마약 상들이 마약을 불태우고 도박장 주인이
도박장을 헐고 교회를 만드는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항상 “지, 정, 의“가 올바른
균형을 이루며 영적 대 각성 운동은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영적 대 각성 운동은 꼭 얼마 되지 않아서 흐지부지 끊어지게 됩니다. “왜
끊겼냐?”를 보면 언제나 균형을 갖추어야 할 그 세 가지가 따로 놀아서 끊어집니다. 지식의
길, 경험과 감동의 길, 그리고 실천의 길이 따로 놀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따로 따로”가 됩니다.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기게 되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 사단은 꼭 그
안에서 지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정론이 맞느냐 틀리느냐, 세례가 옳으냐? 침례가
옳으냐? 유아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안 주는 것이 옳으냐? 내가 어느 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항상 이러한 논쟁들이 내가 신자로 살고, 신자로 감동하고
신자로 깨우쳐 나가는 일을 중지시켜 왔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왜 여기는 성가대가 없지? 왜
여기는 목사가 가운을 안 입고 설교를 할까? 왜 예배 순서가 이래?” 이러한 지적인 논쟁이
정작 추구해야 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중부에 있는 어떤 교회가 잘 성숙해 가고 있던 중에 목사가 세족식을 할 때
“오른 발부터 닦는 것이 옳으냐? 왼발부터 닦아주는 것이 옳으냐?“ 로 싸움이 붙어서 교회가
갈라지고 갈라져 나간 사람들이 바로 그 교회 앞에다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
이름이 ”RIGHT FOOT CHURCH"입니다. 실제로 그 교회가 오늘도 버젓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부 때 양수리 수양 관으로 여름 수양회를 떠났었습니다. 그 때 강사 목사님의 성함은


잊었지만 한 쪽 다리를 못 쓰시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개혁 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처음 접하게 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전해 주시는 말씀이 너무 너무 좋아서 모두들 푹 빠져 말씀 듣고 밤이면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는데 분임 토의 시간에 그 때 한창 한국 교회를 뒤흔들었던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확실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구원 확신 파”와 “그렇게 정확한 날짜와 시간과 장소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안 된다”는 사람들 간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양파로 갈라져서 수련회 내내 싸움만 하다가 내려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수련회는 그 “구원 확신”에 관한 싸움 때문에 망친 것이죠. 제가 거기에 제 친한
친구들을 몇 명 전도해서 올라갔었는데 그 친구들 볼 면목이 없더라고요. 그 잘난 논쟁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여자들이 데이트를 나가기 위해서 머리 손질을 하다가 머리 스타일이
자기 마음대로 나와 주지 않으면 그거 만지고 또 만지고 하다가 결국 약속 시간에 늦는다든지

- 980 -
아예 약속 장소에 안 나가고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사소한 것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미혹하는 방법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집중을 시켜서 그 싸움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하시면서 여러분이 마음에 안 드시고 성에 안 차는 일들이 분명 있으실
겁니다. 그 때 그게 정말 논쟁거리가 되는지 여러 번 재고를 하시고 공론화 시키세요. 자칫하면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서 교회가 정말 추구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적인 습득과 그 것을 수호하기 위한 논쟁에만 치중을 하게 되면 성도는
성숙한 자리로 자랄 수 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단은 경험과 감정에 편중되도록 성도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게 오늘 날 한국 교회에 제일 크게 있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
다른 것이 배제되고 “경험과 감정”으로 편중이 되면 그냥 “내가 기쁜가, 내가
감동스러운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때나
찬양을 할 때나 기도를 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뻐지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깨달음이나 올바른 인식이나 이해가 배제되고 무조건 “내가 기쁘고 내가 감동스러워야
한다.”는 것에 치중을 하게 되면 자꾸만 더 큰 감동과 더 큰 기쁨만을 좇게 되고 그러한
감동과 기쁨이 없는 것은 전부 가짜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은 부흥회가 유행이었습니다. 몇몇 유명 부흥강사가 전국을 떠
돌며 사람들을 웃기고 울려 주고 할 때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그런 부흥회를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제가 남성 복 4중창단을 했었습니다. 그 중창단이 전국
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난 뒤에 저희 동네 교회들로부터 부흥회 특 송 초청이 아주
많아졌었습니다. 그렇게 이러 저러한 이유로 저는 그런 사람의 감동을 격발시키는 부흥회에
아주 자주 참여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냥 주일 예배는 시시해서 하품이 나더라고요.
왜 우리 목사님은 그 때 그 부흥사처럼 감동을 격발시켜 주지 못할까? 왜 우리 교회 예배는
이렇게 고리타분할까? 이런 생각하느라고 예배를 못할 지경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성경은 그렇게 희열과 기쁨과 감격만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는 것을 “쾌락을 좇는다.”라고 엄히
꾸짖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쾌락을 좇는 것”은 단지 세상에서의 쾌락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당 안에서도 “나를 기쁘게 해 주고, 나를 감동시켜 주는 것”만을
원한다면 그게 바로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도는 실천에만 편중되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실천으로만


편중이 되다보면 자기가 한 일이 자기의 자랑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것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해 낸 일이 자랑스러워지고 자기만큼 실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지식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너무 경험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너무 감동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너무 실천 위주로 되어서 교만한 자리에
가 있지는 않은가?”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판별할 수 있지요? 나의 그 모든 “지,
정, 의”의 열심들이 나의 거룩에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그러한 나의 열심히 내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성경 지식이, 나의 체험이,

- 981 -
나의 봉사와 실천이 나를 교만하게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지 여러분은 늘 확인 하셔야 합니다. 만일 아니라면 여러분은 마귀의 궤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세요. 사단은 우리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가지고도 우리를
넘어뜨리는 자입니다.
(마6:2-5)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보세요. 구제와 기도는 참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나의 거룩이 아닌 나의 자랑을
위한 것이 된다면 그 것도 하나님의 꾸중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우리의 “지, 정, 의“의 불균형을 공격함과 동시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으로
성도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골2:8-15)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지금 사도가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조심하라고 경고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세상의 철학과 속임수와 대조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15절을 보시면 그 십자가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철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권위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
철학은 인간을 최종 권위자로 믿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최종 권위자로 믿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은 ”인간의 생각으로 사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진리이고 인간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거짓이다“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모든 사실은 객관적 논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이성이 모든 것을 이해하며 모든 것을 정리하며 모든 것의 위치를 선정할 수 있다고 믿는,

- 982 -
인간의 완전성과 능력을 그 기준으로 하는 휴머니즘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출발이 어디입니까? 그리스죠. 그 그리스야말로 인본주의의 극치를 달리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리스에서는 신도 사람처럼 그립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해 보세요. 전부 그렇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모든 것은 사람으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것이
철학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 사상이 형이상학으로 올라가면 그게 철학이고 그 사상이 형이
하학으로 내려오면 그게 과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상 철학과 과학이 성경을 바라보게
되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모두 도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동정녀가
아이를 낳나?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걸어?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나 뻥튀기가
되어서 2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되나?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그건 다 어떤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건들이 주려는
교훈만 잘 알아들으면 되는 거야“ 이게 바로 철학과 과학이 성경을 보는 눈인 것입니다. 그
사조가 신학에도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러한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 부릅니다.
클레오몬트나 프린스톤, 하바드 같은 곳에서 가르치는 신학입니다. 전부 일류 신학교지요.
똑똑하고 과학적인 두뇌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 철학과 과학으로 미혹하는 사단의
미혹에 아주 쉽게 빠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내가
공부했던 세상 지식들이 오히려 나의 신앙에 방해가 되더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빌3:1-9) .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 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상 지식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 이유는 그 세상
지식이 “자”가 되어서 그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재려고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게
오히려 나의 신앙을 방해 하더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 우리의 세상 지식은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초월적인
것이요 신비스러운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0-29)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 983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인간의 지식, 지혜는 복음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자꾸 세상의 철학과 과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산하게 만들고 재게 만들어서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단의 공격 방법이 신앙을 자꾸 관념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단은 믿음을
추상화시키고 이론화시켜서 성도의 신앙을 그냥 지적인 동의에 머물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되지 꼭 수요 예배에까지 가야해? 기도는 꼭
저렇게 소리 지르면서 해야 해? 헌금은 꼭 해야 해?” 이렇게 신앙을 그냥 관념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는 다르게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을 맹신자라고 비아냥대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물론 어떤 면에 있어서는 맞는 말도 있습니다. 꼭 새벽 기도 안 나오셔도
됩니다. 꼭 울고불고 기도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서 난 안 해”로 결론이
난다면 그 사람은 더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은 소위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우리 교회 같은 데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바르게 배웠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수렁입니다. “뭐 저렇게
유별나게 난리를 떠나?” “좀 지적으로 고상하게 믿을 수 없나?” 아니요. 신앙생활은 좀
부산하고 수선스러워야 합니다. 저는 예수를 알고 난 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던데요. 뭐라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더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 사랑하는 분이 생겼어요. 그러면
우리는 하루 종일 그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그 사람이 행복할까를 생각하지 ,
않습니까? “꽃을 선물할까? 반지를 선물할까? 멋진 식당을 예약할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표현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사랑을 좀 표현 해달라고 하면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야” 그런 사람은 정말 재수 없지요. 정말 사랑한다면 그렇게 무덤덤할 수가 없습니다.
별의 별 시도를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조금 부산해 지는 것이 맞습니다. 너무
고상들 떨지 마세요.

그리고 또 사단은 우리 성도들의 무분별을 공격합니다. 많은 분들이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 984 -
것의 구별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무분별로 인해 아주 낙심을 하거나 심지어
“난 가짜인가 봐”하고 절망까지 하게 됩니다. 마귀는 그러한 무분별을 공격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너무 감격스러워 남들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 새벽 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잘 버텼는가 싶었는데 그
다음부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분명 자명종을 맞춰놓고 잤는데도 일어나 보면 8시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보통 “난 영적으로 너무 나태해”하고 절망을 합니다.
여러분 새벽에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도 오랜 연습을 통해 가능해 지는 겁니다. 맨발의
기봉이가 매일 매일 10키로, 20키로, 30키로 이렇게 늘려가며 연습을 해서 결국에는
42.195km를 완주해 낸 것처럼 신앙생활도 꾸준한 연습과 훈련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오래 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앉아서 “조지 부시서부터 노무현 대통령 오사마 빈
라덴, 김정일까지 기도를 하고 아프리카, 중국, 10/40 윈도우까지” 다 기도를 해도 5분밖에 안
지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옆에서는 중얼중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옆
사람들의 기도가 안 끝납니다. 그 때 보통 사람들이 절망하지요. “아무래도 난 아닌가봐”
아닙니다. 여러분 기도는 중노동입니다. 기도는 훈련과 연습이 없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기도도 연습하셔야합니다. 처음에는 10분, 그 다음에는 20분, 그 다음에는 30분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체력이 약하신 분은 매일 새벽 그렇게
못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체력의 문제이고 훈련의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님에도
사람들은 그런 것을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을 합니다.
왜 여자들이 새벽기도에 많이 나오는지 아세요? 남자들은 낮에 노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끔 밤에 술도 한 잔 해야 하고 얼마나 피곤합니까? 여자들은 그래도 낮에 잠깐씩이라도 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우리 집사람보다 신앙이 못 할까?” “난 구제불능인가 봐”그렇게
절망한다니까요.
여러분 너무 피곤하면 새벽기도 안 나오셔도 되요.
이번 중국 선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선교를 가려고 하는데 회사에서 절대
휴가를 안 내준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 상사에게 좀 더 강하게 자기 의사를 피력하지
못하고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선 것 가지고 “난 영적인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어.”
이렇게 자책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닙니다. 그건 잘하신 거예요. 그런데 사단은 거기다 대고
“너 그러고도 진짜 그리스도인이야?” 이렇게 우리를 낙담시킨다고요. 아니요. 그건 체력의
문제요, 훈련의 문제요, 환경의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기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향적이요, 어떤 사람은


내성적이며 어떤 사람은 적극 적이고 어떤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은 교회의 행사나, 앞에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난 왜 늘 이렇지, 난 아직 멀었나봐” 이렇게 절망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그 기질까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래도 남들은 다 잘
하는데 왜 너만 못해?”라고 질책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낙담시킵니다.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앞 장 서서 하는 일을 잘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뒤에서 설거지하는 일에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 흘리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주우며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물건을 잘 파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밤새 그 음식을 만들어 대는 사람이

- 985 -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질의 문제이고 성격과 개성의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마세요.
이렇게 사단은 육체적이며 심리적인 문제들을 영적인 문제로 오해시켜서 자아의식 과잉에
빠지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모순에 빠져서 많은 시간을 자기를 깨물다가 허송세월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의 문제가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단순히
육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으로 핑계를 대게 만드는 사단의 공격도 있습니다.
내가 기도가 안 되고 신앙생활이 정당하게 되지 않는데 그 것을 단순히 “내가 각오와 결심을
안 해서 그렇지, 언젠가 결심만 하면 금방 될 거야”라고 그냥 그 상황에 안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태한 삶이, 기도가 뭔지 모르고 예배가 뭔지 모르고 왜 내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영적인 무지에서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는 다 알고
있고 깨달았는데 단지 결심만 미루고 있을 뿐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나태는 교리의 부재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란 누구이며, 은혜는
무엇이며, 언약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가 없이 결심을 강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상태에서 결심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금방
피곤해 집니다. 그럼에도 사단은 그러한 것들을 육체적인 결단이나 힘의 부족으로 오해시켜서
”주님 제게 사랑을 주십시오. 충성을 주십시오,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헌신을 주십시오,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만듭니다. 사실은 영적인 무지에서 온 것임에도 ”나에게
능력만 있으면, 나에게 충성만 있으면, 난 잘 할 수 있어“라고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사단은 민족성을 타고 들어와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 민족이
최고의 경지로 여기는 것은 “군자의 도”입니다. 군자의 도는 “자기도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지만 남들에게 잘 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오해되어도 안 된다“는 기본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혹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남들에 의해 모함을 받거나 무고를 당했을
때도 우리 조상들은 ”다 내가 부덕한 탓이라“고 자기를 탓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민족성 안에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약점을 보이거나 나의
실수를 들키게 되면 나의 체면에 커다란 손상이 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언제나 거룩한 사람 투성이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집에서는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에 와서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부부인 척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참 교제를 깨는 마귀의 공격인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의 고민이나 잘못이나 갈등이나, 실수를 언제든지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그 “군자의 도”가 그걸 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훌륭한 사람의 기준이 그렇게 무흠하고 완벽한 것임에 반해
기독교 정신을 문화유산으로 갖고 있는 서구의 위인의 기준은 좀 다릅니다.
2차 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할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미국 공수부대를 독일 내륙 심장부에 낙하를 시킵니다. 그래서 독일군의 모든 포화를
그 쪽으로 유인합니다. 그 사이 연합군의 주력부대가 노르망디로 상륙을 하는 것이지요.
그 때 미 공수부대는 완전히 미끼로 던져진 것이기 때문에 보통 고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추운 날 참호를 파고 거기서 먹고 자며 몇 날 며칠을 버팁니다. 그러나 한번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 닥쳤습니다. 독일군들이 그들을 완전히 포위를 하고 총알과 포탄을 비 퍼붓듯
퍼부었습니다. 미 공수 부대는 아예 고개도 못 들고 전부 참 호 속에 머리를 박고 숨어

- 986 -
있었답니다. 그 때 한 병사가 머리를 든 정도가 아니라 밖으로 혼자 뛰어 나가서 적의 제일 큰
주력 화기인 기관포를 격파하고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그래서 미 공수부대는 그 병사의 덕택에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답니다. 우리나라의 위인전이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런데 그 미국의 위인전에 보면 그 병사가 그 뒤에 엄청난 고민을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으로 치켜 주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너무 무서워서 참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어나간 것이지 사명감에 불타서 뛰어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 취급하니까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료들이 그래도 누군가 해야 했던 일이었는데 네가 했으니 너는 영웅이 맞다고 하니까 그
병사가 “왜 그게 하필 나여야 하냐?”하고 갈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구의 영웅은 다릅니다.
김유신처럼 자기 말이 천관녀의 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자 단 칼에 그 말의 목을 베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영웅은 별로 없습니다. 무과를 치르다가 말에서 떨어진 뒤 아무 말 없이
버드나무 가지로 부러진 다리를 묶고 다시 말을 달렸다는 그런 이순신 같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모함을 당해서 백의종군 하면서도 아무런 불평이나 갈등 없이 묵묵히 쌀자루를
날랐다는 그런 장군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 갈등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큰일을 치러내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위인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에 푹 젖어 살던 옛 사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실수하고
끝없이 갈등하고 끝없이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씩 조금 씩 알아
가면서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우리를 바꿔 가는 은혜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고후1:8-9)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에게 “나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자살까지 생각해 봤어” 이런
소리를 서슴없이 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유대인의 선생이며 고린도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예수 믿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살 소망이
다 끊어졌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왜 그게 안 되지요? 사단이 우리의 체면
문화를 타고 들어와서 성도간의 친밀하고 긴밀한 교제를 막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 마귀의 세력은 치밀하고도 빈틈없이 우리 성도들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쉴
틈 없이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의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마귀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늘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대적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고 오늘도 성실하고 부지런히
그리고 치열하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해 나갑시다.
(엡6:10-13)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 987 -
(80) 마귀를 대적하라(IV)
(엡6:10-12)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마귀의 공격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둘 것은 ‘마귀가 우리를 공격해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통해 어떤 손해를 보게 되는가?’입니다.
구원이 상실됩니까? 아니지요? 마귀는 우리 성도들을 공격해서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감격과 기쁨을 빼앗고 자녀로서 가져야 될 자신감을 빼앗음으로써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못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궤계를 잘 분별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늘 불안하고 외롭고 슬프고 낙심하며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죄책감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볼까합니다.
저는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제일 많이 공격하는 부분이 바로 이 죄책감의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이 그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성도로서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낙심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고 심지어 자폭할 지경까지 떨어지게 되는 것을 저는
자주 봅니다.
여러분 중에도 분명 지금 여러분이 짓고 있는 죄 때문에, 혹은 과거에 저지른 죄 때문에
극심한 죄책감에 낙심하고 절망해서 ‘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라는 의심 속에
헤매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특히 제가 놀란 것이 어떤 분들이 제 설교를 오해 하셔서 “난 왜 우리 목사가 저렇게 강조하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할까“하고 더욱 더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시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건 제 설교를 완전히 오해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부분을 확실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오늘 설교를 준비한 것이니까 혹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잘 들어주세요.
출발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롬3:10-18)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게 바로 우리의 정체였습니다.

- 988 -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악인들을 의롭다 하실 수가 없습니다.
(잠17:15)
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시7:8)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의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전혀 짓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당당함이 아닙니다.
(시51:1-10)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지금 다윗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과 자신이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세요.”
사이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까? “제가 잘못했으니까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다윗은 이 시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그러니 무조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는 요구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1절의 말씀처럼 주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에만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이야기를 아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준 곳이 바로 출애굽기
14장입니다.
(출14:13-16,21)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 989 -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 바닷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믹돌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진퇴양난의 저주 속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홍해를
가르시는데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십니다. 성경에서 동풍은 저주의 바람입니다. 더럽고 추한
것들을 다 날려버리고 부수어 버리는 바람입니다.
(렘18:17)
17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겔17:10)
10 볼 지어다 그것이 심겼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이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그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의 장면에 동풍이 부는 것입니다. 그 동풍은 저주의 바람, 심판의
바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주의
바람으로 모두 몰살시켜 버리셔야 합니다.
실제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는 그 저주의 바람에 몰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저주의 바람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살아나게 된 것입니까?
(고전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그 저주의 바람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넌 것을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을
합니다. 세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죄인인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그 홍해 바다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사람으로 탄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세례를 누구 안에서 받았습니까?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상징하는 모세에게 속해서 죽었고 모세에게 속해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두를 모세 안에다 넣고 죽이시고 모세 안에 있는 그들을 새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벌하십니다. 죽여 버리십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바람이 부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어 안고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새 창조라고 합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흑암과 공허와 혼돈(混沌) 속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라고 번역이 된 “르와흐“는 “바람,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홍해 앞의 상황과 똑같죠?
더럽고 불가능한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흑암과 공허와 혼돈(混沌) 속에 저주의 동풍이
부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더러운 흑암과 공허와 혼돈(混沌)이 물러가고 빛과 하늘과 바다로
틀이 잡혔던 것처럼 구원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의 새 창조인 것입니다.

- 990 -
거기에는 우리의 공로나 노력이나 헌신이나 회개가 선행되지 않습니다. 그냥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나도 같이 죽어야 하는 그 저주의 동풍이 부는 홍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뽑아내어 품에 안고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중에 또 죄 지으면 그 땐 정말 버린다.” 이런 협박이 없습니다. 구원은
거기에 우리가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만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일1:9-10)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모두 공짜로
하나님의 의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도 “너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다”라고 과거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들이 앞으로 어떻게 사는지는 구원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새 옷을
입었다, 새 사람을 입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롬6:6-7)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성경은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골3:9-10)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것이 과거 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엡2:5-9)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에는 구원의 현재 시제인
성화와 구원의 미래 시제인 영화까지도 다 포함 된 것이지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화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설사 그들이 지금 여전히 죄를

- 991 -
짓고 있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를 씻어내고 잘라내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제가 그토록 외치는 거룩한 삶도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와 정 반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시지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세요.
(요17:19)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고전1:30)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거룩은 우리가 열심히 연마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자신이 거룩이시고 그
분이 이미 나의 거룩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의 거룩함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빌2:12)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보면서 ‘혹시 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려고 힘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그게 그런 뜻이라면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둘이 완전히 상반된 교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4:18)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보세요. 여기서는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한 말과도 모순이 됩니다.
(딤후1:7)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면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도 바울이 그 똑같은 단어를 고린도서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고전2:3)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은 나의 재주나 나의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구원은 그 어떤
부분도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마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나의 거룩을 이루어 내야지‘가
아니라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구나‘가 ’두렵고 떨림’인 것입니다.
(벧전1:2)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 992 -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보세요. 순종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성경은 순종까지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과거시제, 현재시제, 미래시제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시켜서 아무 능력 없고 아무 가능성 없는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 장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자는 아버지와 동격입니다. 동격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맏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과 그 분의 계획 모두를 상속받으신 하나님의 장자이십니다.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것을 모두 물려받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는다는 합일의 의미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즉 십자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로서 그 수난과 죽으심까지도 다 순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게 진정한 장자입니다. 그게 진정한 상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지키지 못하고 팔아 버린 에서를 끝까지 장자의 명분을 지키신 예수님과 비교해서
‘악의 상징’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 한 번 장자로 나십니다. 이제 인간이 되셔서 또 한 번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십니다.
(골1:18)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서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이 된 ’프로토토코스‘는 ’첫 아이, 처음 태어난 아이’즉
‘맏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인간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 나셔서 맏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5:5)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 구절을 가지고 혹자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분이라고 우기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셨음을 가리키는 것이지 예수님의 피조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
드리기를 맏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모두 물려받는 상속자의 의미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첫 번째 창조 때 예수 그리스도께 그 모든 만물을 주시고 다스리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두 번째
창조, 즉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택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새 창조물들을
상속하시기 위해 그 분을 다시 맏아들로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호칭, “맏아들“은 새 창조의 후사로서의 호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 창조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새 창조의 시행자로,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 993 -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상속자인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들을 아버지께 받아서 새롭게 창조해 내신
것입니다.
(요6:39)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17:6)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상속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창조
하셨습니다. 그것은 첫 창조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1:2)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표준 새 번역)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맏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게
만드신 것처럼 새 창조 때도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맏아들을 세우시고(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상속하시고 그 맏아들을 통하여 그들을 새 창조물들로
창조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공동 상속자라고
부릅니다.
(롬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우리는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장자로 취급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히12:22-23)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니까 우리 장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고 계신 거룩과 영광을 상속받아 지니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그 옛 사람이 저질렀던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와 상관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이걸
잘 구별하셔야 그 쓸데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짓는 죄는, 죄가 아니라 “육신의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 994 -
옳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가는
행위나 생각들은 죄의 모양을 띠고 있지만 “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자가 되었지만 그 육신의 습관이 우리 안에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의 광채를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육신의 습관을 자꾸
제어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새 사람의 삶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의 습관을 떨어내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꾸 그 육신의 습관에 젖어서 그 매력에 푹 빠지곤 합니다. 성경은 거기서 빠져 나와 우리가
받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합니다.
(빌1:27-28)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어떻게?)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한 성령으로 굳게 서는 것으로, 원인 절)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쉬나들레오, 함께 씨름하다)
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육신의 습관에 자꾸 빠지지 않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성령으로 굳세서는 것”을 제시합니다. “한 성령으로 굳게 서는 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가 좀
전에 함께 읽었던 출애굽기 14장에서 인용 해다가 쓴 구절입니다.
(출14:13)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죄책감에 자신을 자폭시키는 것도 아닌 출애굽 사건이 상징하는 구원을 이해하는
길밖에 없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이 죽어야 하는 성령의 바람, 저주의 바람인
동풍이 부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속하게 하셔서, 즉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넣으셔서
건져내신 그 은혜의 사건을 이해하고 올바로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구원에 있어서는 도저히 어떤 근거나 조건도
갖다 댈 수 없는 그런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셨다는 그 복음이 이해되는 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경주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8절에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이라는 구절이 붙어있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꾀어 다시금 육신의 습관에 젖게 하고 때로는 극심한 고통 속에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동풍 속에서 굳게 서서 지켜 본 그 구원의 드라마에
의하면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죽이셨고, 그런데 그 저주의
칼을 예수가 대신 맞아 주셨고 나는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나를
넘어뜨리는 이 육신의 습관을 지켜보면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내 속에서 나타날 때, “이래서
하나님은 나를 죽이실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데 그 죽음의 동풍을 우리 예수가 맞아 주셨구나.“
”이게 웬 은혜인가?“”그래 난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을 지불하고 건져내신

- 995 -
엄청난 자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거룩으로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금씩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거룩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속에 거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습관이라는 것이
자꾸 성도들의 삶 속에서 삐죽 삐죽 올라옵니다. 사탄은 그 육신의 습관이 올라올 때 “봐 네가
진짜 구원받았다면 이렇게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이야? 넌 구원받은 사람 아니야” 라고
속삭여서 성도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단은 그렇게 해서 성도의 성숙을 막고 성도가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 때 우리 성도들은 “이건 죄가 아니라 육신의 습관일 뿐이야, 이미 나의 모든 죄는 예수
안에서 다 해결되었다. 어떻게 여전히 이런 더러운 육신의 습관 속에 젖어 있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는가?”하고 오히려 홍해 바닷가에 굳게 서서 저주의 동풍 속에서 일어났던
구원의 드라마를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이런 추악한 죄인을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달은 만큼 육신의 습관을 제어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거룩한 삶의 광채를 밖으로
조금씩 더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상태를
“ABLE NOT TO SIN”"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거룩하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외치는 것은 “여러분의 노력으로 거룩을
완성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분들이 맞다 면 여러분은 육신의 습관에
의해 자주 실패하고 실수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여러분의 실패와 실수가 여러분을 다시
동풍이 부는 홍해 바닷가로 인도할 것이고 거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육신의 습관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제가 ”노력하라, 성실하라, 진지해 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노력을 해야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 깨달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노력한 만큼 여러분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해 주십시오.
노력한 만큼 여러분이 여러분의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노력한
만큼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고 그 때마다 여러분은 홍해 바닷가에 서게 될
것이고 구원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거룩을 조금 씩
조금씩 더 밝게 꺼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은 죄가 생각날 때, 혹은 지금
죄를 지으면서 여러분은 죄책감으로 가셔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은혜의 바다 홍해로 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기뻐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특권입니다.
saving private ryan 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탐 행크스가 주연한 아주 훌륭한 영화입니다.
네 형제를 2차 대전에 내 보낸 미국의 한 시골 마을의 아주머니의 세 아들이 동시에 전사를
합니다. 그런데 막내아들도 공수부대의 일원으로 독일 시내 한 복판에 던져져 있습니다. 미군
사령부에서 그 막내아들을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탐 행크스의 부대에
하달합니다. 중대장인 탐 행크스와 그의 부대원들은 그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기 위해 독일

- 996 -
시내로 진입합니다. 진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대원들이 죽습니다.
결국 모든 부대원과 탐 행크스까지 다 전사하고 그 라이언 일병은 살아남습니다.
그 때 탐 행크스가 다리 위에서 그 라이언 일병에게 유언을 합니다.
“라이언 넌 꼭 살아서 훌륭한 삶을 살아다오” 그리고 죽습니다.
나중에 그 라이언 일병이 할아버지가 되어서 탐 행크스의 무덤에 와서 오열을 하며 말합니다.
“난 중대장님의 유언대로 한 평생 훌륭한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 묻습니다. “내가 정말 훌륭한 삶을 살았소?” 아내가 말합니다. “네
당신은 참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라이언 일병은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중대장과 동료
전우들의 사랑을 실감했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의 유언대로 한 평생 열심히 산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우리의 실패와 실수로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이런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목숨을 끊어가며 구속의 전쟁을 펼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진정 그게
감사하거든 그 분이 우리에게 어떤 유언을 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정말 우리가 홍해 바다에서의 그 구원의 이야기를 실감하고 믿고 있다면 그 라이언 일병이
살아 낸 훌륭한 삶을 우리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 997 -
(81)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엡6:10-13)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서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미혹하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마귀의 공격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는 것”이라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도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권고의 구절과 병행시켜 10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신 갑주를 입는다는 것과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라‘ 는
구절은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안에서”라는 구절이,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마귀를 대적하는데 있어서 “주안에서” 싸우라는 것은 우리가 마귀를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내
개인적인 싸움의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라는 전체로서의 싸움이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마귀와의 싸움은 지금은 나 혼자의 싸움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의 구속의 완성의 측면에서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겪는 마귀와의 싸움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는 ’주안에서‘라는 구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배운 교회 론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그래서 나의 패배와
나의 실수는 나에게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주안에서’ 싸워야 하는 ‘대적들과의 싸움’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절대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천국 형제, 자매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리고 나의 실수와 나의 패배가 그 사랑하는 분들에게도 폐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새로운 각오로 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괴물이라는 영화에 보면 송강호가 그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송강호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아마 그게 자기 혼자만의 싸움이었다면 그는 쉽게 포기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싸움에는
자기의 딸과 가족들의 안위가 걸려 있거든요. 자기가 지면 딸의 목숨도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위험해 지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괴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잡힌 연쇄 살인범의 기사를 읽다보니까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 998 -
것인지를 알겠더라고요. 원래 그 사람은 혼자서 그렇게 연쇄 살인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답니다. 교도소 동기하고 둘이 같이 모의를 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범행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돌아섰답니다. 그 돌아선 이유가 어린 자기 아들들 때문이었답니다.
자기가 또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면 이제 자기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인데 그 아이들이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당하게 될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더래요.
그리고 혹시 자기가 교도소에 가 있는 범죄자라는 것을 자기 아이들 친구들이 알게 되면 그
아이들이 얼마나 괴로울까를 생각하니 도저히 범행을 하지 못하겠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범행 직전에 돌아섰고,
이번에 잡힌 그 범인도 역시 가족이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지만 자기로 말미암아 가족들에게
어떤 피해가 가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수 십 명의
부녀자들과 노인네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천국 가족인 교회를 바로 인식하는 것과 내가 그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게다가 교회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어떤 한 지체가 잘 성숙하게 되면 상승작용이 생깁니다.


다니엘에게는 풀무 불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 친구가 있었기에 다니엘이이 다니엘이 된
것입니다. 그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는 다니엘이라는 걸출한 친구가 있었기에
그들이 풀무 불을 견딘 것입니다. 에스더에게는 모르드개가 있었고 바울에게는 실라와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상승작용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우리 지체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다면 그러고도 전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 우리가 복음을 바로 이해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주안에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구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마귀와 대적해서 싸우시면서 자부심을 가지시란 말이에요. 여러분의 그
분투가 하나님의 전체 교회에 상승작용을 가져다준다는 엄청난 유익을 생각하시면서 잘
참으시란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엄청난 고생들을 한 것,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 같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끊임없는 마귀의 공격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그들도 아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그들이 겪는 고통이 전체 교회에 득이
되었습니까? 해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마귀의 공격으로 인한 고난까지도 선용하셔서
교회의 성숙과 양육에 사용하고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가는 곳마다 두들겨 맞고,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배척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그 몸에 사단의 가시라는 질병을 갖고 있었던 것이 때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저 사람은 저런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는구나, 난 내가 제일 힘들고 어려운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힘을 내자’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곤경에 처한 사도 바울을 시기해서 더 많은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겪는 마귀의 공격을 전체 교회 안에서 다시
이해를 해 보면 나의 고난은 나 혼자만의 고난이 아니고 나의 눈물도 나 혼자만의 눈물이 아닌
것입니다.

- 999 -
고린도 후서 1장이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1:4-10)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아시아에서 받은 고난은 다른 교회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혹독한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고난을 겪고 난 후에 ‘내가 또 이러한 고난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건지실 것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더 강해 진 것입니다. 그 것을
고린도 교회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로 써서 ‘너희들도 그러한 고난이 오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해서 잘 이겨내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싸우는 그 싸움은
우리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닙니다. 전체 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싸움을 다시 바라보세요.
나의 분투가 다른 교회 지체들에게 상승작용을 일으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여러분을 강건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안에서’의 싸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이 싸움은 결국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와 함께 싸우는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싸워 주시는 우리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 주님께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끄시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스스로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만드신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앞의 11장을 받아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11장에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믿음의 조상들이 죽 열거되지요. 그 11장의 내용을 받아 ‘그렇게 열심히 마귀와
대적하며 싸워낸 구름같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아 우리도 열심히

- 1000 -
경주하자‘’그런데 그 구름같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아니? 바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봄으로 싸워 이긴 거야‘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끄러움과 고통을 개의치 않으시고 참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 예수가 우리를 마귀의 공격에 그대로 당하게 만드시겠느냐?
왜? 그 분은 우리의 머리니까, 우리의 머리는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함께 지옥에 가셔야 하는
운명 공동체로 묶여 있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의 싸움에 개입하셔서 그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 내실 거야” 이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긴 싸움이기 때문에
신이 나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 다음 3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히12:3-4)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롬8:26-35)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휘페렌 팅카노, 스테낙모스’라는 이 단어들은
성령께서 신음까지 내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를 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여러분 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질 수 있나요)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니까 모든 것은 선용되어서 선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쉼몰프호스, 같은
모양)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반드시 일어나게 될 예변적 과거)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러분들에게 바로 이런 배짱이 있냐 말입니다. ‘난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주안에서
싸우고 있다’
(엡1:17-19)

- 1001 -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힘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라고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6:26-30)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화려하게 입히시고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게 누구입니까? “너희 아버지“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돌보신다면 자녀인 우리는 어떠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라고’확신에 찬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 지금 내 안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신음을 내며 기도하고 계시고
나를 완성시키시기 위해 싸우고 계신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확인 된 사람들이, ‘그럼 잘
싸워보세요‘ 하고 뒷짐 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저하고 제 아버님하고 고모님 댁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서


아버님을 먼저 내려드리고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서 주차할 곳을 찾다가 그만 어떤 집 앞에
있는 다 찌그러진 냄비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나이도 어린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가니까 한 몫을 잡으려고 그랬는지 차 앞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제가 내려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고 냄비 값을 물어주겠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정신적 피해 보상’을 하라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한 대 때려 주려고 했는데 저만치서 아버님이 오셨습니다.
주차하러 간 아들이 오지 않으니까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파자마 바지와 런닝 셔츠
차림의 어떤 건달 같은 놈이 아들의 멱살을 잡고 금방 잡아먹을 듯이 하고 있으니까 쏜살같이
달려오셔서 ‘이유 불문’으로 그 사람을 밀쳐 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사람이 우리
아버님한테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대들었습니다. 이제 저와 그 남자의 싸움에서 우리 아버지와
그 남자의 싸움이 된 것입니다. 그 때 저희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이놈이 지금 어디다 손을 대, 이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그 때 제가 ‘이제 우리 아버지가

- 1002 -
해결해 주시겠지’하고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쫓아가서 찌그러진 냄비로
뒤통수를 갈겨 주었죠.
그런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내 안에서 거룩을 향한 나의 실패와 실수를 나보다 더 슬퍼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패만 하는 아들을 위해 홀로 싸우고
계십니다. 그 걸 아는 우리가 뒷짐 지고 가만있을 수 있다고요? 그걸 아는 우리가 잠 하나도
못 이기며 그런 게으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그 천부가 내 아버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날 사랑하셔서 내 대적들과 혈투를 벌이고
계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싸우시는 싸움은 여러분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이며 신랑이며 벗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승리와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 ‘주안에서 싸우라’는 구절이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강건해 질 수밖에 없지요. 그들은 그 강건함을 가지고 나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주님께 맡기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도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in his mighty power”라는 구절이 있지요. 언뜻 보면 ‘우리가 강건해
질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다‘라는 의미로 보이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힘의 능력만을 의지하라는 말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하이퍼 칼비니스트들의 주장입니다. 만일 그 구절이 말하는 것이 그런 뜻이라면 왜
굳이 우리가 강건해 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다 싸워주시고 우리는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왜
우리가 굳이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까?
분명 본문 1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하라”는 내용이지만 그 힘을 의지해서 “우리가
강건해 져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께 맡긴다, 주님께 의탁한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 내 대신 싸워 주세요, 저는
그냥 낮잠이나 잘게요“가 아니라 이 싸움의 원리와 힘과 지혜와 방법과 모든 것이 내가 갖고
있는 인간의 생래적인 재주와 능력과 지식과 방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 즉 십자가의 원리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주께 맡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에베소서4장에 그 구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엡4:17-32)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 1003 -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이방인이었을 때(민족적 구별이 아님) 즉 구원받기 전에는 어떤 공격이나 상황에
대처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습관이나 우리의 방법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전의 이방인들은 당연히 나를 보호하고 나를 높이기 위해 남을
밟아 버리고, 핑계를 대고, 험담을 하고, 상대를 밟아 버리는 것으로 반응을 하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인, 덕을 세우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를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함같이 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 맡기라’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맡기라’는 말은 어떤 일에 반응을 할 때 세상의 방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방법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드릴게요.
우리 첫째 아이가 공부를 잘 합니다. 그리고 동생들 공부를 차근차근 잘 도와줍니다.
얼마 전에 우리 둘째 아이가 산수 숙제를 가지고 끙끙거리고 있기에 제가 ‘형님한테 부탁해’
그랬더니 이 녀석이 숙제를 통째로 형한테 맡겨버리고 저는 놀고 있었습니다. 제가 ‘형님한테
부탁해, 형님한테 맡겨’라고 이야기를 한 것은 ‘너는 실력이 부족해서 네 방법으로는 안 되니까
형님으로부터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배워서 네가 풀어봐‘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지
형한테 아예 숙제 전체를 맡기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과 원리와 능력을 배워 마귀의 공격에 맞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지 ’예수님한테
맡기고 낮잠이나 자고 있으면 예수님이 무조건 다 싸워주신다’ 는 이야기는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로 만드시는 것을 목적으로 우주를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건과 상황이
동원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손수 그 걸 다 해결해 주시면 우리는 무엇으로 성숙해
지며, 무엇으로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웁니까?
왜 하나님이 우리를 시켜 전도를 하시죠? 왜 우리에게 구제를 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며 시간도 절약될 텐데 왜 굳이 우리를 그 일에
부르십니까? 우리가 전도해서 성공한 예가 몇 건이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카네이션을 하셔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창조입니다.

- 1004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새 창조입니다.(우리의 구원)
그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보내셨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자들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신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보내셨겠습니까? 새 창조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새 창조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성숙되어져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니까요. 그 길에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걸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전도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지어져 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선교를 가서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도라든지, 헌금이라든지, 구제라든지 그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십자가와 보혈의 필연성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고 거룩으로의 진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손이 부족해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전신갑주까지 입혀서 우리를 마귀와의 전선으로 내 모시는 것은 그 전투가 우리의
거룩에 유익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귀가 무서워서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 사장님이 자기 아들을 막장으로 몰아서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노동부터 시키는 것은 그


아이가 없으면 그 시멘트를 나를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장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군말 없이 시멘트도 나르는 그런 성실한 아들을 보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전투의 한복판으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울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춰 놓으시고 우리 더러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음 직전까지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들이 시멘트 포대를 나르다가 몇 개 떨어뜨려서 못쓰게
만들었다고 그 아들 쫓아낼 아버지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열심을 부리는 그 아들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에4:13-14)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모르드개가 왕비인 에스더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해 달라고 왕에게 부탁을 해 달라는 전갈을 하닥을 통해 보냈습니다. 그 때 에스더가 ‘내가
허락 없이 왕에게 나가게 되면 나도 죽을 것입니다‘ 라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네가 안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 너를
왕비를 만들었는지 누가 아느냐? 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풀어내기 위해서 에스더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에스더의 자녀 됨을 위해 에스더를 그

- 1005 -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두고 어슬렁거리며 놀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궤계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서는 ‘강건함’을 입어야 하는데
그 ‘강건함‘은 ’주안에서‘’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안에서’라 함은 우리는 결코 홀로 사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어 있는
교회의 지체로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사랑하는 지체와
나의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피해가 되는 실수와 실패를 경계함으로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안에서’라 함은 결국 우리의 머리이신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싸움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진리 앞에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내 아버지가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를 도와 그 대적의 뒤통수를 향해 돌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함을 입는 것’입니다.

- 1006 -
(81)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II)
(엡6:10-13)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지난주에 10절 말씀을 통해 ‘주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잠깐 정리를 해 보자면,
우리가 마귀의 궤계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서는 ‘강건함’을 입어야 하는데
그 ‘강건함‘은 ’주안에서‘ 또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먼저 ‘주안에서’라 함은 우리는 결코 홀로 사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어
있는 교회의 지체로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사랑하는
지체와 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피해가 되는 실수나 실패를
경계함으로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안에서’라 함은 결국 우리의 머리이신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싸움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진리
앞에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내 아버지가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를 도와 그 대적의 뒤통수를 향해 돌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함을 입는 것’ 이라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그의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 지기 위해 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에 관해


조금 더 보충을 하고 ‘그분의 힘을 의지하는 것’과 ‘우리가 강건해짐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십일조’라는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 주님의 힘의 강력’으로 우리가 강건해 지기 위해 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10절의 그 말씀‘그의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 지라’는 말은
풀어보면 ‘우리의 힘, 에너지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힘의 에너지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에너지원은 어떻게 공급받습니까? 먹는 것으로
공급을 받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싸우는 전투에서의 우리의 힘과 에너지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하지요? 그래서 성경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떡을 먹고 그 분의 피를 마신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에너지 원, 힘의 원천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일을
한정한다는 것을 아세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휘발유가
에너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달리는 말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휘발유보다는 홍당무가
에너지로 필요하지요. 그런데 과수원을 하는 사람이 과수원에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 1007 -
에너지는, 힘은 비료와 퇴비입니다. 이렇게 그가 어떤 에너지를 갖고 있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정합니다. 비료를 갖고 자동차를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에너지로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하는 일은 어떤 일이겠습니까? 그 에너지에 걸 맞는
운동이, 행위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를 가진
자에게서는 그에 걸 맞는, 그 에너지가 한정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게 시기입니까? 질투입니까? 경쟁입니까? 살인입니까? 간음인가요? 험담인가요? 예수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어떻게 마귀의 것들이 나옵니까? 그건 자동차에다가 비료를 쏟아 부으면서
‘자동차야 달려라’하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더 우스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먹고 마신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에너지로, 힘의 근원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맞다 면 우리 안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뭡니까? 그 일은 우리가 수차례 공부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다른 이웃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를 힘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은
고난을 고난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을 결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 고난을 바라보지
않으며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공격에 절대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강합니다. 그들이 울 때는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에 동참하여 그리스도가 우실 일에만
함께 동참해서 웁니다. 왜? 예수라는 에너지에서, 예수라는 힘에서 그들의 행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서 예수가 불타고 예수가 불 태워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라는 결실이,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고후11:23-29)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죽도록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가고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한 사도 바울이 그런 것을 두려워했다는
대목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러한 고난의 시간들을 죽 열거하면서 자기가 진짜 눌리는 일,
고통스러운 일은 어떤 일이었다고 고백을 합니까? ‘교회를 위한 염려’였습니다.‘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하게 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노심초사하는 진짜 강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요4:31-34)

- 1008 -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은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은 바로 아버지를 그 분의 힘의 근원으로,
에너지로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당연한 일이라는 의미에서 ‘나의 양식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 속에서 그 삶이 나온
것입니다. 그 행위가 우리 속에서도 나와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6:57)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먹고 아버지를 위한 일을 토해 내며 사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에서 나오는 그러한 ‘걸 맞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지금 부지런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걸 아는 자들이 힘을 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해서 열심히 거룩을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진”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힘으로 강력으로 자리하고 계신 그 분이 어떤 분이신 지를 잘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이 어떤 것인 지를 잘 분별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 안에서 엉뚱한 것이 나올 때 ‘아 이것은 사단 마귀가 나를 미혹하는 것이구나.’하고
식별해서 잘라낼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 분투는 행복한 분투입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을 싸우다 보면 그 싸움의 한 복판에서
문득 이 전쟁은 나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제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싸워주시는 싸움이라는 것을 반드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분투가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 우리 주님께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기쁨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나의 싸움을 대신 싸우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 때 우리는 그 아버지의
넓은 등 뒤에서 행복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희 아버님이 저를 위해 싸워 주실 때 뒤에서 찌그러진 냄비로 그 놈 뒤통수를 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혹시 내가 실패해도
우리 아버지는 저놈을 끝까지 패서 죽여 버리실 거야“ 이런 확신이 우리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토해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로 인한 한정된 열매가 맺혀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우리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 예수라는 열매를 열심히 맺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바로 그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무시무시한 사단의 세력과 싸우면서 어떻게 아직 이렇게 멀쩡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막아 주시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결정타들은 다 막아 주시고
우리의 성숙을 위한 작은 싸움들에만 우리를 투입시키셨다가 힘에 달리면 뒤로 빼 주셨다가 또
다시 원기를 회복시켜 전장으로 투입시키시고 하는 그 은혜의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주안에서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진

- 1009 -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주안에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싸운다는 것’과 ‘그 것들로
강건해져서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은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물론 이번 주일 설교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 드리겠습니다만 그 설교를 잘 이해하시기 위
해서는 오늘 이 설명을 잘 새겨 두셔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구약 내내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십일조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십일조의 의미를 비교해서 그 둘을 조화시켜 보겠습니다.

여러분 십일조가 뭡니까?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시키셨지요? 하나님이 하


늘나라 재정이 부족하셔서 그렇게 시키신 것입니까?
십일조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십일조는 약속의 땅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명령하신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후였습
니다.
(레27:30)
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소산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꼭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습니
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모든 것
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는 의도에서 십일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땅과 그 땅에서 나
는 소산은 하나님의 전투를 통해 너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걸 기억하라’ 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신명기에 가면 그 십일조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계시가 점진됩니다.
(신14:22-23)
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그
용도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히 레위 인들의 생활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모든 것들이 은혜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것을
자신과 권속들이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을
보시면 십일조를 먹으라고 하시면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우 양의 처음 난 것‘ 즉
’맏물‘ ’맏이‘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맏물‘이 무조건 처음 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18:12-13)
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 1010 -
1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과 제사장들의 분깃에 관해서 설명하시는 구절입니다.
아시다시피 레위 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십일조로 그 분깃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분깃을 “첫 소산”이라고 표현을 하시면서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이라고 부연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쳤던 것은
단순히 제일 처음 익은 곡식과 제일 처음 태어난 짐승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가장 좋은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
뒤의 별로 안 좋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맏물’은 단순히 첫 번째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맏물이 속해 있는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어떤 복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럼 ’맏물’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게 뭐가 있지요? ‘출애굽, 유월절‘
그러니까 이 십일조는 유월절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
라엘의 장자를 모두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 장자들을 살려 주었으
니 처음 난 것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두 나에게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민3:13)
13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27:26)
26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이렇게 십일조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의해 살아난 ‘처음 난 것‘’맏이‘ 들의 ’대신’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바쳐질 ‘맏물’에 대한 명령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주
어졌던 것입니다.
(출13:11-15)
11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약속의 땅에서)
12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초태생 중 수컷은 곧 ‘장자’를 의미)
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하나님께서 나귀는 그냥 안
받으시겠답니다. 나귀는 어린 양으로 대신 바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 나귀를 대신할 어린
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만일 나귀
대신 바쳐질 어린양이 없으면 나귀는 목이 꺽여 죽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게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우리 죄인들은 우리를 대속 하신 어린양이 없었다면 모두
목이 꺽여 줄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인간의 모든 장자들도 다 대속 하라고 하십니다)

- 1011 -
14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15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이렇게 맏물은 어떤 것을 대표하며 대신하는 ‘대속’의 효능이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바로 그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계속 점진됩니다. 이 개념이 히브리서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잘 보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들 대신에 한 지파를 선택하셔서 전체 이스라엘 지파를
대표해서 장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게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바쳐진 대속 물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야곱의 12아들 중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씩을
이루었기 때문에 원래 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를 포함하면 13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레위
지파는 약속의 땅에서 지파로서의 이름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12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나머지 12지파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민3:40-41)
4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남자를 일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장자들 대신에, 장자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사람)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 물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장자로 여기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레위 인들을 이스라엘의 장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것으로,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 대속 물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나머지가 전부 복을 받게 되는 원리,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4:22)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분명 이스라엘
전체를 장자라고 부르시지요? 레위 지파만이 아닙니다. 레위 지파는 그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장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 지파 속에는, 처음 난 것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장자’의 개념과 어떤 무리를
대표하여 대속 하는 ‘맏물’의 개념이 겹쳐있는 것입니다.
아까 그 장자와 맏물의 개념이 십일조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의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할게요.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명령하신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을 받은

- 1012 -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순종하는 그 것을 기뻐하시며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그러한 복의 순환을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레위 지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은혜로 복을 주셨으며, 또 주실 것이라는 것의
표징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지파인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제사를 잘 지내면 이스라엘 전체가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게 되는 것이고
레위 지파가 제사를 잘 못 드리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의 제물임과 동시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 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 안에 그 두 가지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 고백인 것처럼 레위 인들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것 또한 그 레위
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이 복을 받게 된다는 구속사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물질적인 어떤 소득을 하나님께 떼어서 바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아주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신14:24-29)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 다시 그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또 다시 받아서 먹으며 즐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바치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전이 아무리 멀어도 끝까지 끌고 와야 한다.‘ 그래야
맞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이 너무 멀면 그 십일조를 팔아서 너희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을
사라, 그리고 그 것을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나에게 주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 ‘이 땅의 물질’뿐이라는 이 세상의 시대정신이
낳은 악마적인 발상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 단순히 물질
뿐입니까?

- 1013 -
이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를 하시려면 최초의 십일조가 드려졌던 창세
기로 가 보셔야 합니다.
(창14:14-20)
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
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최초의 십일조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소알
왕 이렇게 다섯 나라 왕의 연합군이 엘람왕, 고임왕, 시날왕, 엘라살왕 이렇게 네 왕의
연합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집에서 키우던 사병 318명을 데리고 그 네 나라 국가 연합군 수
만 명을 무찌르고 롯을 구해옵니다. 그 전쟁은 상식적으로 어느 모로 보나 아브라함이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긴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살렘 왕 즉
‘샬롬 왕’‘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떡과 포도주, 제사장, 축복
언뜻 떠오르는 분이 있지요? 그 멜기세덱이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위는 ‘이 모든 것은 당신 덕택입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은 ’이
전쟁은 당신이 이기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건 조금 있다가 시편에서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을 보면 그 멜기세덱 왕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원래 왕은 힘을 가지고 전쟁을 치르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뒤에서 그 왕의 승리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살렘왕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 말은 그 살렘 왕 멜기세덱은 제사장의 일, 즉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왕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힘으로 전쟁을 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승리를 이끌어 내고 왕국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이 시편 110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110:1-4)(다윗의 시)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 1014 -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보세요. 여기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리고 전쟁을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전쟁의
승리는 주의 우편에 계신 주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며 그 분이 반드시 열 왕을
쳐서 파하고 승리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전쟁을 당신이 맡아서, 열 왕을 쳐서 파해 버리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의 멜기세덱과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의 멜기세덱은 ‘십자가라는 제사’로 ‘영원한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그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7장에서 인용합니다. 그 구절을 보시면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실해 질 것입니다.
(히7:1-10)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압호모오이오, 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여기 보면 멜기세덱, 아브라함, 레위지파, 십일조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먼저 레위 지파와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세요.
5절을 보시면 레위의 아들들, 즉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그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허리‘라는 것은 쉬운 말로 ’배‘라는
뜻입니다.
(창35:11)(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 1015 -
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렇게 ‘허리’라는 말은 시간차를 두고 세상에 나오지만 본질이 하나인 것들을 가리킬 때 쓰던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앞에 있을 때에 그 레위를 배에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그 때 멜기세덱 앞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레위 지파처럼 제사장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위에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가 그 안에서 함께 십일조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레위에게 바친
십일조는 누구의 십일조가 포함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잘 그려 보세요.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복을 받고 십일조를 드린 제사장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 아래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있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다른 말로 복을 받은 자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에게 십일조를 바친 이스라엘이
있지요? 그들도 역시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린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라인에 서 있는 아브라함, 레위, 이스라엘 모두가 멜기세덱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멜기세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십일조를 받으면 그 것을 역시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대 제사장인 아론이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것을 ‘내가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그림이 확실해 졌지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흘려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그의 허리에 있는 레위, 그리고 그 레위가 대표하고 있는 ‘믿음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신앙 고백으로 바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내가 받은 모든 것, 내가 받은 모든 복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임과 그 자체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속 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도 레위가 드렸던 십일조와 제사도, 아브라함이 드렸던
십일조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부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지는 대속 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짜 참 복을 받게 된 것이고 이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진짜 참 복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재물로 드려진 복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새로운 저는 하나님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의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일조도, 레위 지파도, 제사장도 다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에서 십일조까지를 죽 그려보면 거기에 뭐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까? ‘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복의 계통도’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던 십일조를 레위 지파에게 내게 함으로 해서


구원이라는 복이 어떤 모양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인가를 힌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구약시대 사람들도 자기의 유익을 따라 그 중요한 십일조를 눈속임으로

- 1016 -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레위 지파 사람들이 개인 집으로 흩어져서 ‘무당 노릇’을 해
주고 밥벌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안 들어오니까, 들어 와도 저는 것, 흠 있는 것,
약해 빠진 것 이런 것들만 들어오니까 레위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통탄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에서 구약을 닫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한 것은 하늘의 복을
부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것을 상징하는 그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라고 한 것이었는데 너희는 그것조차도 눈속임으로 하는구나, 너희가 정말 그 십일조의
정신을 잘 알고 십일조를 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부어줄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데 너희는 그
것조차 하지 않는단 말이냐“ 하고 통탄하신 것입니다.
(말3:8-10)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게 바로 그 말인 것입니다. 너희는 그 십일조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소득을
바치는 것으로만 십일조를 오해하고 있기에 저는 것, 흠 있는 것, 쓸모없는 것들을 가져다
바쳐놓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하는데 ‘그거 정말 착각이다‘ ’그거 내가 원하는 십일조
아니다‘’그래서 내가 진정한 십일조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수밖에 없다‘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라‘하시면서 ’마태복음‘을 여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도 같은 내용입니다.
(마23:23-24)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십일조로, 제물로 드려지기 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일조의 정신을 여전히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십일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24절에 보면 소경된 인도자들이 즉 다른 말로 가짜 목사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려는 마음에 -하루살이는 살이 없지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낙타는
살점이 있잖아요.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곡식이나 짐승만 던져놓고 자기 할 일 다 한 것처럼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의를 의지하고 죄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하고 똑 같지요? 그런 썩어 빠진 정신이 형식적인 십일조를 낳은 것입니다.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 그런데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의’‘인’(mercy 자비)‘신’(faith 믿음) 이랍니다. 다
뭡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들이지요? 너희들은 십일조가 뭔지 정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십일조가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으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7:26)

- 1017 -
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10:3-10)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은 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된 율법에 또 다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갈4:4-5,10-11)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여러분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율법에 얽매이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또 양을 잡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뭔가 부족한 것입니까? 율법에는 여자가 남자 옷 입으면
벌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제사는 안 지내세요? 여자가 멘스를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지금 하나도 안 지키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십일조만 고집하나요? 목사들의 입장에선 교회의 재정의 최고 효자가
십일조이기 때문이고 신자의 입장에서는 십일조 하면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보답해 주실
것이라는 헛된 기대 때문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헌금이고 뭐고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영생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영생의 십일조를 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로, 십일조로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고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나의
전부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돈과 시간과 힘을 헛된 곳에 쓸 수가 없습니다.

- 1018 -
그리고 교회가 필요로 할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서 이 땅의 것과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는 전 재산을 교회에 다
내 놓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썼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요?
(고후8:1-5)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자신을 주께 드린 사람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옛 사람을 못 박은 사람들은 이
세상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행함의 조화인 것입니다. 이제 ‘그분의 힘을 의지하는 것’과
‘우리가 강건해짐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가 조금 선명해
지셨습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 안에서의 그러한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일날 결론을 맺지요.

- 1019 -
(83) 하루가 늦을 수 있습니다.
(엡6:10-12)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주안에서, 그리고 그 분의 힘의 능력으로 내가 강건해지는 것’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지에 관해 ‘십일조’라는 예를 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 율법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상태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는 오히려 이제, 나를 품에 안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재물, 시간,
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지난주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내 놓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열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지만 우리는 이
역사와 육신 속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그 것을 경험하며 이루어 가는 이 복음의 이중성이
우리에게는 이해가 됩니다.
예수를 먹고 예수를 마신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수를 태워 나오는 예수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그
예수라는 에너지가 한정하는 ‘행위’를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혀 자라지
않고 성숙하지 않고 변화도 없는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아직 예수를 먹고 마시지 못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을 태워서 나오는 ‘예수’라는 에너지가 한정하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알아야겠지요?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지요.
(딤후3:10-17)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차세대 지도자로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아직 지도자로서의
강건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자기 스승인 바울은 감옥에 가 있고, 주변에 있는 바울이 세운
교회마다 분쟁이 생기고, 바울을 배반하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디모데는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 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디모데를 훈계합니다. 그리고

- 1020 -
’성경을 꼭 붙들어라‘라고 권고를 합니다.’오직 그 길만이 네가 강건해 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시면 ‘그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만들어 주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성경을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먹고 마신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배우고 자각하는 길은 오직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롬15:4-6)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성경)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성경을 통하여)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여기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는데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자녀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하여 성경으로부터 양식을 잘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양식을 잘 섭취한 후에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 모든 것이 ‘배 둘레 햄’이 되는 것처럼
성경이라는 양식을 먹고 그 것을 에너지 화 시켜서 나의 행위로 터져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유20-21)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거룩한 믿음을 터로 삼아 우리 스스로를 건축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성도’라는
건축물에 내가 동역 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히5:11-14)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
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 사람들 중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람들은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인 유대주의와, 그들이 믿기 시작한
기독교가 서로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혼란을 겪고 있었고, 같은 유대인들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 1021 -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민족과 동료를 배신한 자’로 매도당했습니다. 거기다가 나라를 잃고
여러 나라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면서 겪는 서러움과 어려움 들이 최초의 히브리서 독자인
히브리 기독교인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 기자가 본 히브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이제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된 세월이 오래 되어서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이며, 무슨 약속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 가를 충분히 알 만큼 되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그들이 마땅히 이웃들에게 신약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대로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여짐으로, 저들의 선행과 저들이 가진 약속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들로 인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풍성하도록 나타내야 할 일들을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뭡니까? ‘그들이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성장하지 않는 자들은 ‘지각의
훈련이 없고, 그로 말미암은 연단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이 뭡니까?
이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것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아주 오해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야 하고, 내가 감동 받아야 하고, 내가 즐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목사는 엉터리 목사가 되는 것이고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예배는 엉터리 예배가
되지요.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은 내 기분을 따라 행동하던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서 내
기분이, 내 감정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성경에서 배운 대로 행하는 연습을 지각의 훈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 날 목사가 설교 시간에 ‘여러분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에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자기감정을 따라
계속해서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을 감성 적 혹은 감정에 입각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글쎄 그 걸 신앙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기분은 영 아니지만 내가 배운 것이 진리라는 것이
확실하므로 난 내 지각을 따라 용서하고 사랑해 봐야지‘ 이것이 ’지각의 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고 영적으로 우리는 이미
그러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의 악한 습관을
자꾸 떨쳐 버리고 내 새로운 존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굼나조’는 ‘운동,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에는 그
앞에‘헥시스‘’습관‘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에 머물지 않고 잘 자라난
그리스도인은 지각을 잘 훈련해서 습관적으로 선을 행하는 연습을 통해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자기를 자랑하고 싶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싶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6:1-8)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 1022 -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랑을 하고 싶어 하지요? 그렇다고 그냥 자기의 기분대로 해 버리는
것이 바로 감정을 좇아 하는 교회 생활이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토록 명확하게
금하고 있는 것을 내가 어찌 나 좋다고 어기겠는가? 숨자‘ 이리로 가는 것을 ’지각의
훈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한번 보세요.
(히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어떻게 모세가 ‘바로’가 될 수 있는 신분을 포기하고, 고난 받고 처참한 위치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고난에 자기를 집어넣을 수 있었습니까? 모세는, 결국 애굽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백성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지각의 훈련입니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지금 당장, 자기가 살고 있는 왕실의 화려함을 놓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혹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아는
것과 행위’를 전혀 연결시키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모세는 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의 대열에서 제외되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택한 이상 모세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아는 것을 근거로 행위로 옮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야
마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울러 그렇게 지각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힘쓰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히10:23-25)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지각을 훈련하여 사랑과 선행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돌아보고 서로를

- 1023 -
격려하며 더욱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하셨을 것입니다.
나 혼자는 너무나 버겁고 힘든 짐처럼 여겨졌던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의 행위들이 주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과 함께 모여 격려 받고, 위로 받고, 힘을 얻고 나면 ‘그래 저들도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나’하는 마음에 훨씬 수월해 지는 것을 누구나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모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지각을 훈련했고 그 훈련의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런데 그 믿음의 선진들의 맨 앞에 우리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십자가라는 잔이 자기에게 비켜 가기를 원하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뭔지를 아셨기에 참으신 것입니다. 절대 그분이 원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고, 갖고
싶고, 좇고 싶은 것을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흔쾌히 버릴 수 있는 훈련, 그것이 바로 지각의 훈련인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1장으로 가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지각의 훈련‘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벧후1:3-11)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 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여기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구체적으로 지각의 훈련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잘 나와 있지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너희는 언제든지 실족하게 된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 1024 -
그러면 믿음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어떻게 우리가 주안에서 그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지는 데에, 지각의 훈련을 하는 데에 유용한 과목이 될 수 있는가?
(히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세상과 싸우다보면 항상 세상은 끊임없이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고 공격해 들어
옵니다. ‘돈이 전부야, 힘이 전부야, 그러니까 고지로 올라가’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퍼
붓습니다. ‘네가 정직하게 살아서 이득 본 게 뭐 있어? 네가 거룩하게 살아서 보상을 받은 게
뭐가 있어? 그냥 보이는 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라고 끊임없이 속삭이지요.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거기에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보는 것인데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뒷전으로 밀어버리게 만드는 사단의 계략에 속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쪽으로 넘어갑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학교에서


1등 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세요?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동창회에 잘 안 나가는지 아십니까? 창피해서 안 나갑니다.
지금 사단이 주무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최고라는 시대정신이 모든
인간들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물질이 없으면 사람들은 살인이나 도둑질을 했을
때와 똑같은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건 심리학 적으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나는 동대문 시장에서 3,000원 주고 산, 조금만 걸어도 발 다 까지는 구두신고 발목까지 오는


1,000원 짜리 스타킹 신고, 전형적인 촌스러운 아줌마 스타일처럼 그렇게 차려입고, 만원
버스에 전철 갈아타고 땀 뻘뻘 흘린 채로 동창회에 갔는데 다른 친구들은 전부 고급 승용차에
명품 옷을 걸치고 화려한 화장으로 단장을 하고 나왔다고 해 보세요. 그 사람은 이내 마치
도둑질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자괴(自愧)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곧 심한 자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밥이 제대로 넘어가나요, 목에서 자꾸 걸립니다.
여러분 가난한 것이 죄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죄인중의 괴수시게요? 가난이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예수께서 이 세상 신이라고 부르셨던 그 사단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이라는 것과 정 반대의 시대정신, 즉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는
시대정신으로 이 세상을 꽁꽁 묶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업적이나
성과를 손에 넣고 있지 못할 때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그 촌스러운 아주머니가 지극히 정상인 것인데, 온 세상이 다 미쳐 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비정상이 되고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자들이 시집가서 아이 낳고, 그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나이 오십 넘어서 여전히 허리가 23인치면 그거 직무유기 한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여자가 해야 할 것을 안 한 거예요. 정상적인 아낙네들은 오십 넘어서 허리 36인치 아래로
내려 갈 수가 없어요.

- 1025 -
애들 남긴 밥 아까워서 다 먹어야지요.
동선이 그리 길지 않은 집안 일하다보면 운동 부족 되지요? 그렇다고 찜질방엘 한번 마음 놓고
갑니까? 늘 아이와 남편 생각에 변변한 자기 옷 한 벌 못 사 입고 몸매 관리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는 것이 평범한 정상적인 한국 여성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3,000원 짜리 구두에
1,000원 짜리 살색 스타킹에 만원버스가 맞는 것이지요. 그건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이지 절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죄’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이 믿는 예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뿐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지각의 훈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시대정신, 세상
풍조로 우리를 주눅 들게 해도 보이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베드로 후서 1장 9절에서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원시치 못하는 자들‘ ‘멀리보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바로 믿음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요즘 ‘바다이야기‘라는 오락기계 때문에 한국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그 기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빠찡꼬 기계 같은 것입니다. 문어, 조개, 생선 같은 바다 고기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막
돌아가다가 멈췄을 때, 특정한 배열을 이루면 점수를 얻거나 상품을 받는 그런 오락
게임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카지노가 골목골목 마다 오락실 간판을 걸고, 들어 선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건물을 사서 십자가만 떼고 거기다가 ’바다 이야기‘라는 간판을
걸었더라고요. 그 사진을 보는데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맘몬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
그 바다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물질만을 땀
흘리지 않고 얻어내기 위한 미친 세상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렇게 보이는 돈에는
열심히 배팅을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는 절대 배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에 배팅을 한 사람들이고요.
그러나 그 ‘바다이야기’에 살아 있는 물고기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그러나 진짜 허상인 바다 이야기 같은 것을 좇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그 바다이야기가 사행성 도박 게임이라는 판결이 나자 정부가 전부 폐쇄를 해 버렸지요.
그러고 나니까 그 도박장 주인들이 줄줄이 목을 매 자살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이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지각을 훈련하여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 사행성 도박인 ‘바다이야기‘와
비교해서 오늘날 ‘교회 이야기‘가 뭐가 다릅니다.
바다 이야기에 살아 있는 물고기가 없듯이 교회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없습니다.
둘 다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주에 나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지금 내가 배팅 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져 주면 되’ 이게 오늘날 교회라 간판을

- 1026 -
붙이고 있는 무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이 세대는 믿음을 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래씨의 장편 소설 중에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벌써 육이오 전부터 남한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피 비린내 나는 홍역을 치러내는 역사 소설입니다.
거기 보면 그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 싸우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땅 따먹기’ 지주는 소작농에게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소작농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주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싸움이 좌우익의 싸움입니다. 마르크스의 막시즘이 결국
뭡니까? 쉽게 말해서 ‘가진 놈들 땅 빼앗아서 우리 배도 좀 불리자’아닙니까?

지금 중동은 왜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까? 결국은 땅 빼앗기, 석유 빼앗기 아닌가요?


united 93라는 911 테러를 주제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우리 둘째 녀석과 함께
보는데 둘째 아이가 ‘아버님 저 사람들이 왜 미국 비행기를 납치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아홉 살짜리한테 정치 이야기를 하겠어요? 경제 이야기를 하겠어요? 어떻게 설명해 줄까? 하고
한참을 생각했는데 깊이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왜 싸우지?’ 결국 자국의 이권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그 영화에서 united 93
항공기가 추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테러범은 테러범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자기들이 살기 위해 테러범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던 미국 승객들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 아닌,
보이는 것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그런 자들의 기도는 전혀 관심 없으십니다.
두 번째로 ‘믿음에 덕을’세우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덕‘이라고 번역이 된 “아레테“는
’남자다움‘’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말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믿음을, 힘을 내어 휘두르라는 말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믿음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힘을 내어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가 덕에 지식을 쌓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믿음’과는 다른 지식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천지 만물을
지으신 것과, 나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이신
것, 이 모든 것은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고 만져보지
못한 것이지만 그 것이 나에게 ’앎’으로 담겨 있게 된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덕에 지식을‘에서의 ’지식‘은 내가 가진 모든 믿음을 세상 속에서 펼치기 위해서 알아야 되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하기 위해 놀라운 지적 적응력을
보여 준 것이 고린도서에 나옵니다.
(고전9:19-22)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 1027 -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모양을 취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후서에서 말하는 ’지식‘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물에 뛰어드는 행위도 필요하지만 그냥 뛰어들게 되면
함께 익사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 때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요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뒤로
접근해서 목을 잡고 뒤로 끌어내지 않고 앞으로 접근을 하면 백발백중 물에 빠진 사람한테
붙잡혀서 함께 익사를 하게 되지요. 그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 지혜,
요령’은 힘을 발휘해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어서 거기에 ‘힘’을 보태십시오. 행위로 옮기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작정 힘을 싣다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겸허한
마음까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그 지식에 ‘절제‘를 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엥크라테이아’는 ‘자기통제’를 말합니다. 무조건 ‘난 어떤 것을 안 한다’라는
금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엥크라 테이아’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그 목적에 집중하는 것,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그 절제와 상극이 되는 것이 나옵니다.
(잠16:32)
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절제와 상극인 것이 바로 ‘급하게 성을 내는 것‘입니다. “분노” 분노만큼 절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분노합니까? 분노라는 것은 ’자존심‘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지요.
나의 위상에 흠집이 갈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니까 급하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여전히
“나”라는 옛 자아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습니다.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여러분 정말 정의심에서 분노하셨습니까? 오히려 ‘몇 명이나 죽었나?‘ 하고 호기심만
발동했었지요? 그러니까 나의 옛 자아가 죽어 가면 죽어갈수록 세상의 현상이나 공격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내가 목숨 걸고 분노해야할 현상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믿음에 ’덕‘’힘‘이 실리고 그 ’힘‘에 ’지식‘’요령‘이 실린 후에 거기에 목표를
향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절제’가 보태지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실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세요. 40일 금식 후에 사단이 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했을 때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그 천사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
창조주 앞에서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이 기고만장해서 까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이게 까불어’하시면서 주변의 모든 돌들과 산들을 전부 떡으로 만들어서 마귀에게

- 1028 -
대항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래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봐’라는 사람들의
놀림에 분노하셔서 진짜 내려오셨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구원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조금 전에 히브리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 그 앞의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게 절제입니다. 단순히 내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어떤 목적에 집중하는 것.

여러분 권투 선수가 시합에 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을 굶어야 하는지 아시죠? 그리고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야 하는지 아시지요? 시합 전에는 침도 제대로 못 삼킵니다.
체중 늘어날까 봐,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 투입된
군사라고 하면서 어떻게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자고 싶은 거 다 자면서
전투를 합니까?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절제하셔야 합니다.
캠핑 가고 싶어도 주일이 끼어 있으면 좀 참고, 데이트는 성경공부 없는 날로 미루고, 정
시간이 안 되면 잠을 좀 덜 주무세요.

여섯 번째로 절제에 ‘인내’를 쌓아야 합니다. 이 말은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를 쌓는


것은 한 두 번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하고 싶을 때만 공부했나요? 시험, 퀴즈 이런 테스트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억지로 공부하지요? 그게 인내입니다. 공부하고 싶을 때만 공부한
사람은 모두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에 우러나서 공부를 하고 싶을 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싫고, 짜증날 때도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 ‘몸짱’ 열풍이 불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좋은 몸매를 만들려고 난리가


났답니다. 그런데 운동을 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스무 명이 시작하면 열아홉 명은 중도에
그만 둡니다. 하고 싶지 않을 때 한두 번 빠지다 보면 탄력이 붙질 않습니다. 그러다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 들어서 하기 싫을 때도 참고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때부터인가 자기 몸이 변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신이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열심히 경주하다 보면
재미가 붙을 때가 있습니다. 인내하시면서 가셔야 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하기 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싫어도 시간을 정해 놓고 열심히 해 보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창세기 5장에서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앉으면 20초면 할 기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실족한다.’ 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덕과 지식’이 우리의 목표와 방향성에 관한 것이라면 지금 공부한 ‘절제와


인내’는 그 추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분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한 걸음씩 걸어 가야하는 것이며, 하고 싶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 1029 -
싶지 않을 때에도 애를 쓰고 집중해야 되는 참으로 길게 보고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인내의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 볼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거기에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은 우리가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서 영적 전투를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의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경건’‘유세베이아’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 면전에
있듯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이 ‘경건’‘유세베이아’가 여기에 들어갔는지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그 ‘경건’‘유세베이아’라는 말은 우리가 믿음과 덕, 힘과, 지식과, 절제를 인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수행해 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 열심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나를 증명하기 위해 그런 열심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신앙의 열심은 소 요리 문답 1번의 대답처럼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타락을 했는지 우리는 우리의 자랑을 위해서 신앙을 위장할 수 있는 파렴치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기의 성취욕 때문에 자신과 싸웁니다. ‘난 기필코 해 내고 말 거야’ 그리고 자신의
자랑을 위해 남보다 훨씬 열심을 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힘이 들 뿐 아니라 자기처럼 열심을 부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언제든지 정죄 합니다.
그건 성경이 요구하는 열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열심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열심 즉, 경건에서 나온 열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건에 ‘형제 우애’가 바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 우애’는 경쟁이나 시기나
질투에서 나오는 열심은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는 단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눈에 보이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하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내 형제 자매들과 수평적인 사랑을 갖지 못한다면 난 아직 하나님과 그 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 우애에 바로 사랑이 붙어 있습니다. 마지막 과목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형제우애와 어떻게 다릅니까?
(롬12:9-21)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1030 -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이
엄청난 것들이 모두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시겠다고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힘을 내어,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절제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이 꼭 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집을 부리고 그 길을 가지 않고 있으면 우리만 손해인 것이지요. 우리가
누려야 할 마땅한 하늘의 복을 계속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젠가는 되겠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경을 열심히 안 보신 겁니다.
(히4:1)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여기서 ‘미치지 못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스테레오‘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하면
’하루가 늦다‘라는 뜻입니다. 너희들 그렇게 자꾸 미루다 보면 ’하루가 늦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민수기 14장의 내용을 모두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민수기 13장부터 한번 볼까요?
(민13:30-33)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열두 정탐 군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이 하나님께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나안 땅의 아낙 자손 대장부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더라, 우리는 절대 그 땅을
취할 수 없다’라고 절망적인 불신앙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온 회중이 통곡을 하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민14:1-4)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 모습을 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너희들은 왜 두려워하느냐? 하나님께서 분명 이루시겠다고

- 1031 -
약속하셨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니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두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민14:6-10)
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셨습니다.
(민14:26-38)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그제 서야 이스라엘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날 이스라엘이

- 1032 -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민14:39-45)
39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 아말렉 인과 가나안 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 아말렉 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 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여러분 이스라엘은 단 하루가 늦음으로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여러분의 그 마지막 하루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종말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루가 늦으므로 여러분은 여호와의 안식에 못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인내를, 인내에 절제를, 절제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그리스도의 군사다운 전투를 오늘부터 해 내십시오.

- 1033 -
(84) 전쟁의 기원
(엡6:10-13)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성도들이 치러내야 하는 영적 전쟁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는 우리가 입어야 할 전신 갑주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전신 갑주에 관해 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치러야 할 그 영적 전쟁은 어떻게 기인한 것이며 그 전쟁의 내용은
무엇인가에 관해 마지막으로 잘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정리를 하겠습니다. 창조와 타락에서부터 어린아이들에게 story
telling하는 방식으로 아주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도 경험상 느끼셨겠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어떤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며 고통의 향연’입니다. 참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 보아도,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도 그 ‘인간의 고통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연구와 시도와 그로 말미암은 해결책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그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의 문제는 ‘가난’에서 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는 학교도 그리 많지
않았었기 때문에 제가 학교까지 가려면 어린 걸음으로 적어도 50분은 걸어야 했습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이 두 길이 있었습니다. 한 쪽 길은 좀 가파르긴 하지만 산을 넘어 판자
집들이 즐비한 가난한 동네로 질러가는 길이 있었고, 다른 한 쪽 길은 평지이긴 하지만 긴
시간 가야 하는 아주 부자 동네를 지나서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등교할 때는 산길을 이용했고, 하교할 때에는 친구들과 함께 멀긴 하지만 평지인
부촌을 통과해서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를
아침저녁으로 번갈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부자 동네와 아주 가난한 극빈자들의 동네를 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부자 동네는 전반적으로 조용합니다. 그리고 싸움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동네는 참 소란스럽습니다. 그 가난한 와중에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낳았는지 그 판자촌에는 길거리에 코를 질질 흘리며 이 것 저 것 주워 먹으며 기웃거리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 산 동네에는 당시에 5원 짜리 극빈자 국수집이 있었는데 항상 아침부터 배고픈 아비들이
줄을 지어 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곤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동네에서는 싸움도 참 많이 일어납니다. 돈이 없어 먹을거리도 변변하게 없는

- 1034 -
사람들이 술은 어디서 그렇게 마시고 다니는지, 술을 마시면 그냥 곱게 마십니까? 술에 취하면
꼭 싸움이 일어납니다. 가난으로 말미암은 세상을 향한 원망과 복수심이 술의 힘을 빌어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그 동네에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그 동네는 아줌마들도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센지 몰라요. 옷이 다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한 웅큼
씩 빠지는데도 절대 항복하지 않습니다. 분명 가난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고통의 근원은 아닙니다. 가난이 고통의 근원이라면 부자는 모두 행복해야 하는데 부자라고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지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과 교양 교육을 받지 못해서 품위라는 것과 예의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비교해
볼 때, 분명 무지도 고통의 한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무지’가 인간 고통의
근원은 아닙니다. 무지가 고통의 근원이라면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르네상스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이 ‘인간은 교육을
잘 해도 역시 악하구나, 교육이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발견한
것 아닙니까? 실제로 요즘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교활하게 들키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혹은 엄청난 전문 지식들을 이용해서 제도나 조직의 허를 파고
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제가 2년 전에 중국에 갔을 때, 그 때는 크레딧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은 당시만 해도 컴퓨터 전산망이 허술해서
현금인출기에서 돈이 빠지면 그게 전산망에 뜨는 것이 1분에서 2분이 걸린답니다.
그 걸 알아낸 컴퓨터 전문가들이 통장에 만원을 저금해 놓고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다 뽑은
다음 오토바이로 1분 안에 다른 현금 인출기로 가서 또 만원을 뽑는 그런 수법으로 돈을 하도
많이 뽑아가서 현금 인출기로 현금을 인출하는 것이 전면 금지 됐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더 악하고 교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교도소 선교를 가셨다가 그 곳 재소자 중에서 아주 선량한 한 청년을
만나셨답니다. 왜 저렇게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 교도소에 와 있는지 의아해서 교도관에게 그
사람의 죄 목을 물으셨다가 목사님이 깜짝 놀라셨답니다. 그 청년의 죄목이 ‘집단 살해
미수’죄였답니다. 저런 어리 숙한 사람이 어떻게 집단 살해를 시도했을까 너무 궁금해서 그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 청년이 시골서 갓 상경해서 일자리를 얻으려 다녔는데 아무도 그
무식하고 재주 없는 시골 청년을 고용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가져 온 돈도 다
써 버리고 며칠을 굶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추운 겨울에 추위라도 피할
곳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떤 집 대문이 열려 있더래요. 순간 너무 배가 고프고 추웠던 그
청년은 밥이라도 한 그릇 훔쳐 먹기 위해 그 집 부엌으로 살짝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부엌하고
바로 붙어 있는 방안에서 온 식구가 함께 자고 있더래요. 그래서 혹시 자기가 밥을 먹는 동안
누가 깨기라도 할까봐 연탄아궁이에서 연탄을 꺼내 가지고 그걸 양동이에 넣고 방 앞에서
부채로 막 부쳤답니다. 연탄가스 마시고 모두 기절하라고... 그런데 추워서 꽁꽁 얼었던 몸이
따뜻하게 풀리면서 자기가 잠이 들어 버렸답니다. 자다가 깬 그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를 해서
그 청년은 잡혔고 그 청년은 변호사도 없이 검사에게 곧이곧대로 그 집 식구들 정신을 잃게 할
목적으로 연탄불을 꺼내놓고 부채로 부쳤다고 대답을 해서 ’집단 살해 미수죄‘로 장기간 복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좀 귀엽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그렇게 바보처럼 연탄에 부채질이나 하고 있었겠습니까?

- 1035 -
인질극을 벌이던지 다른 방도를 택했겠지요. 오히려 무지가 큰 범죄를 막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것도 인간 고통과 악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병이 들었을 때나 혹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얼마나 우리 마음이 고통스럽습니까? 분명 ‘질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한 원인입니다. 그러나 ‘질병’도 우리 인간 고통의 근원은 아닙니다.
만일 ‘질병’이 우리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의 근원이라면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난, 무지, 질병’같은 것들은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 고통의 근원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증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독감에 걸리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도 나고, 몸이 으슬으슬 춥고, 뼈
마디가 쑤시고 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은 그런 증상들인 것입니다.
그럼 ‘독감’이 콧물과 재채기와 통증의 근원인 것처럼 ‘가난과 무지와 질병’같은 고통의 증상을
수반하는 ‘인간 고통의 근원’은 뭡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사망’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의 증상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히2:15)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러면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이 ‘죽음’이라는 질병은 어떤 병원균에 의해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까? 그 죽음이라는 질병의 병원균은 “죄”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도대체 뭐 길래 우리 인간들은 부지불식간에도 그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다른 짐승들처럼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나요?
우리 인간의 ‘죽음’은 다른 짐승들의 죽음과는 판이하게 다른 ‘죽음’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짐승들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창2:19)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그런데 인간도 역시 흙으로 지어졌지만 인간에게는 뭔가 다른 것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그 것이
바로 ‘생기’입니다.
(창2:7)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네솨마”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그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이 네페쉬’‘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가 교회론 9번을 설교할 때도 한번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만 히브리어
‘네페쉬’는 ‘생명 있는 존재, 생명이 있는 짐승’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네페쉬가 생기를 불어넣으니까 ‘살아있는 네페쉬‘’하이 네페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냥

- 1036 -
네페쉬도 짐승들처럼 숨을 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기‘’네솨마‘가 들어가니까
살아있는 네페쉬’하이 네페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살아있음’‘생명’은 다른 짐승들처럼 단순히 육신의 살아있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생기로 인한 살아있음’이 보태져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을 다른 말로 속사람의
생명과 겉 사람의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는 ‘육신의 생명, 영의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하나님은 육체의 생명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해서 영혼의 생명이 그 육체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인간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짐승들의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숨이 끊어진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로 말미암게 된 ‘영혼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살아있으되 그 영혼의 생명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엡2:1-5)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렇게 영혼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사망’이라고 하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 영혼의 생명이 끊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사실상 걸어 다니는 시체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 지경이 되었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후에 ‘문화 명령’과 ‘종교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문화 명령은


창세기1장 28절에 나오지요.
(창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다스리라’‘라다’는 황제가 제국을 통치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그렇게 황제처럼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명령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창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지만 이 선악과는
먹으면 안 된다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종교 명령이라고 부르는데, 그 선악과라는 것은
‘인간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만물 중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 위에 계신

- 1037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그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 있다’라고 하는 인간의 자기 존재의
확인 도구였습니다.
그 때는 이미 천상의 존재였던 사단이 죄를 범한 상태였습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을 옳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그르다고
하시는 것을 그르다고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 아래에서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판단 자가 되어 ‘순종’을 저 버린 사건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인
것입니다.
(창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 말이 바로 인간들이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나님처럼 스스로 판단 자가 되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불순종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증상입니다. 인간은 그 때까지 무죄한 자였기 때문에 악이 무엇인지 몰랐던 존재였습니다.
아직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선악과의 이름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직 악이 들어오기 전에 그 나무 실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나무 실과를 따먹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그
불순종의 행위로 말미암아 악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죄요, 그 증상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나의 상위권위자인 하나님이 계심을 인식하고 그 분께 순종해야 하는 인간 존재의


실존을 자각시켜 주는 복된 나무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원래 만물을 다스리면서 선악과 앞에
설 때마다, ’아 나에게는 창조주가 계시지, 나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나에게 이러한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고 은혜를
반추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불순종, 즉 ’죄와 악‘의 결과는 “무트 타무트” “정녕 죽으리라”였습니다. 이 ’무트
타무트‘는 히브리어의 ’필연적 강조 용법‘입니다. ’죽고 죽으리라, 반드시 죽으리라‘입니다. 모든
인간은 바로 그 선악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게 된 것입니다.
’아니 금방 안 죽었잖아요? 아담과 하와는 그로부터 수백 년 후에 죽었는데요?‘
제가 조금 전에 인간을 ‘하이 네페쉬’‘생령’으로 만든 것이 하나님의 생기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분께로부터 오는 모든 생명력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영적 생명이며, 그 영적 생명이 우리의 육적 생명을 주관하도록 만드셨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영혼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우리를 ‘하이 네페쉬’로 존재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바라크’‘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어주시는 그 생명력, 복을 차단시켜 버리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죽음, 사망입니다.

그러면 분명 인간의 영적 생명이 육체의 생명을 주관하도록 했다고 했는데 왜 영적 생명이

- 1038 -
죽은 상태에서 인간의 육 적 죽음이 금방 따라오지 않았는가? 거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엄청난 선물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사망으로 떨어져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임을 창세기 3장
15절에서 힌트하십니다.
(창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때 이미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죽음 상태에 떨어진 인간들에게 육 적 생명을
한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은 그 육신의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다시
하나님의 ‘복’ ‘바라크’ ‘영적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력으로 그 ‘복’을 회복시킬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해서 ‘복의
근원’을 만들어 주심으로 해서 그 하나님의 복은 전적으로 은혜로 회복 될 것임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어떤 선택된 자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셔서 그들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항복하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의 회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막 오용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성경의 복의 개념과 너무나 이질적인 것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죄를 짓고 악을 알게 된 인간들은 그로 말미암아 고통 속으로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창3:18-19)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가시와 엉겅퀴‘’다르다르 코쯔‘는 구약 내내 등장하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이 떠나가 버린 그 때부터 ‘고통’ 속으로 내 던져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지요? ‘아니 나는 선악과 맛도 못 봤는데 왜
내가 그 할아버지와 똑같이 취급을 당해야 합니까?’ 그걸 신학에서는 대표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여쭤 볼게요.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안
따먹었다면 여러분은 선악과를 안 먹기 위해 전혀 고민한 적도 노력한 적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건 정당한 것입니까?’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드릴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그 십자가를 잠깐이라도 짊어져 보셨나요?’
‘여러분 손에 못으로 긁힌 자국이라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나요?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표의 원리인 것입니다.
(롬5:14-18)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 1039 -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렇게 우리 인간은 모두 사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라는 병의 증상들이
고통의 모양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천적 관계를 연구하는 어떤 연구 기관에서 고양이의 새끼와 쥐의 새끼를 낳자마자 한
방에 넣어서 키우는 실험을 했었습니다. 낳자마자 한방에서 자라게 된 고양이와 쥐는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생활 패턴으로 키워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러면 고양이와 쥐가
서로 형제인 줄 알고 잘 지낼 것 같지 않습니까? 고양이가 어느 정도 크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쥐를 물어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적 관계는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타락으로 전적인 타락에 빠져
버린 모든 인간은 죄를 본능으로 타고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먼저 인간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그 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걸 ‘쩨다카’ 혹은
‘짜다크’‘의로운 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복의
통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 사이의 ‘의’가 깨졌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가리켜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불렀습니다. 그 말은 ‘네가 나고 내가 너다’라는 ‘일체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창3:12)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예전에 본 만화 중에 창세기를 내용으로 한 만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연유를, 아담이 하와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것을 본 아담이 ‘여보 하나님이 그 거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먹었어? 당신 없는 세상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살겠소, 나도
당신 따라 죽으리이다’ 그러고 선악과를 먹더라고요. 만화입니다. 아무튼 아담과 하와는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 상호간의 의로운 관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자식 대에 가서 바로 그
결과가 무서운 살인으로 나타나지요.

- 1040 -
세 번째로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과의 ‘의의 관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깐 언급을 해 드렸지만 인간 뿐 아니라 이 우주는 서로 서로 의존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상생의 관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상생’이라는 말은 ‘오행 상생’의 준말입니다. 원래 동양 철학에서 쓰이는 말인데 ‘수에서
목이 나오고 목에서 화가 나오고 화에서 토가 나오고 토에서 금이 나온다는 조화 속의 우주의
이치’를 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비와 바람과 땅 속의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그
영양분은 다른 짐승이나 벌레의 분비물 혹은 시체의 부패, 혹은 다른 나무들의 열매나 잎이
땅에 떨어져야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 우주는 질량과 거리와 여러 가지 역학 관계에 의해 치밀한 그물처럼 얽혀 있습니다.
행성들은 서로의 인력에 의해, 혹은 질량과 거리와 회전 속도 같은 것에서 나오는 역학 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나 지렁이 모기나 파리, 어떤 것도 이 대 자연
속에서 빠지면 안 됩니다. 모든 우주는 그렇게 상생 관계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 우주는 그렇게
서로 서로 상대방을 위해 존재하고, 상대방에 의해 내가 존재하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간의 수평적 상생 이 전에 하나님과의 수직적 ‘의의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을 때에 비로소 완벽한 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균형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기는커녕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합니다. 자연은 그러한
인간들에게 복수를 합니다. 그게 바로 자연 재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의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날 그 자연은 본래대로 안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8:19-22)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네 번째로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후에 아주 조금 남아 있는 하나님의 기능적 형상에 의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그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과도
화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을 살해해
버리는 자살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들 상호간에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모두 distort 되어버린 망가져 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다른 관계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 ‘복’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안에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스스로를 만족하게 만들어 줄

- 1041 -
만한 자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원을 남으로부터 빼앗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시기요, 질투요, 분열이요, 다툼이요,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착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없는 자원은 다른 사람 안에도 없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다른 이를 밟아 이윤을 챙겨도 고통의 문제, 만족의 문제, 행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복’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없이 행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읽었던 것처럼 허무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아도 될 허무한 일들을 하다가 사라지고 맙니까?
중국 자금성에 가면 황제가 다니던 계단 옆에 40,000명이 들어서 옮겨다 놓았다는 거대한
바위 조각이 있습니다. 황제를 즐겁게 해 줄 그 바위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낭비를 했겠습니까? 그 황성에 들어 있는 침대, 책상, 용상 이런
것을 잘 보시면 나무를 잘라다가 못을 박아서 만든 것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다 커다란
나무를 그 모양으로 판 것입니다. 그 임금의 밥상이나 침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보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그 목사님께서 중국에 가서 책꽂이가 하나 필요해서


목수를 불렀답니다. 그래서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책꽂이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하고
며칠이나 걸리겠습니까? 했더니 15일 걸린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무슨 책꽂이 하나 짜는데
15일이 걸리느냐고 물었더니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더래요. 다음 날 그 목수가 책꽂이를
짜겠다고 집으로 왔는데 그 목사님이 졸도할 뻔했대요. 트럭에다가 커다란 통나무를 싣고
오기에, 이걸로 뭘 하려고 그러냐고 그랬더니 지금부터 책꽂이 모양으로 파 낼 거라고
그러더랍니다. 아니 이 귀한 인간이 고작 그런 허무한 일에 시간을, 자기의 생명을
허비해야겠습니까?

황제의 한 끼 식사에 사용 될 채소와 고기가 한 트럭 반 분량이었다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식사를 위해 한 트럭 반의 재료와 1 000명의 요리사가 100가지가 넘는 반찬을 만들어 내야
했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행복과 편리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도둑맞은
것입니다. 황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원을 빼앗으면 자신이 행복해 질 줄 알았던
것이고요. 무덤의 높이가 200미터가 넘고 저승 갈 때 심심하지 말라고 그 안에 생사람을 함께
묻어 버린 그 잔인함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건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그러한 힘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그 사람들처럼
남들의 자원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을 채우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소소하나마 그렇게 다른 이의 자원을 빼앗아 나의 행복을 채우려는 허무한 시도들을
하고 있고요.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다 허무한 데 굴복한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종교와 이념 같은 선행 체계와 교육과 훈련이라는 지식 체계를 동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끊겨진 복을 대체하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을 해 왔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만족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배웠습니다.

- 1042 -
그렇게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다가 결국에는 영과 육이 모두 죽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얼마간의 인간들을
선택하셨고 그 인간들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것도 아셨고, 인간들이 타락할 것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 우주와 역사라는 무대 장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왜 다른 이들은 구원하지
않으시는지 그건 묻지 말자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수수께끼를 주십니다. 그건 그냥 수수께끼로 남겨 둬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수수께끼를 풀면 곧 그 수수께끼를 자기가 소유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이내
하나님께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부분을 비밀로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사단을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 날 때 여전히 순종하고 충성했던 천사들이 이제
영원히 타락할 수 없는 천사들이 된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그 남아 있는 천사들처럼 영원히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다 그 유혹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담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 안에서 취급해 가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유혹을 이기실 때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크레딧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사단의 유혹에 안 넘어 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사람들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미 그들에게 덮어
씌워진 죄책은 십자가로 해결을 하셨습니다.
(신21:22-23)
22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저주해 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그들은 모두 죽을죄를 지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실 수 있는 죄 없으신, 그리고 자격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의 죄를 참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말끔하게 지워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주어졌던 사망에서
그리고 그 사망의 증상인 고통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받고 있는 이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은 또 무엇입니까?
왜 성경은 우리에게 전신 갑주를 입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오염’ ‘macula"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제 절대적인 죄의 지배력에서
자유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 사람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게 바로
오염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이 오염을 방치하고 깨끗이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 죄의
오염은 점점 누룩처럼 퍼져서 신자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생명의 성령의 법을 약화
시켜 버립니다. 그럴 때 신자들은 불신자와 방불하게 자기 보호의 허무함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1043 -
(롬6:15-16)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분명 우리 신자들은 이제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고 정서는 하나님의 감정을 공유하며
의지로는 지성으로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오염에서 허덕이고 있으면 그의 삶은 불신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치르는 전쟁인 것입니다. 나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와 싸우고 나는 나의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D-day designated day 는 이미 왔지만 V-day victory day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25 때 전쟁이 끝나고도 약 2만 5천명의 빨치산이 지리산을 비롯한 여러 산에 잠입해서
국지전을 벌이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러한 죄의 잔당들이 우리를 여전히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 마귀의 공격을 그냥 놔두신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쉽게 죄에 걸려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고, 죄에 걸려 넘어졌을 때의 그 고통을 곱씹으며 더 이상 이러한 죄의
유혹도 없고, 넘어짐도 없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죄의 오염을 한
겹 한 겹 벗어 가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 함과 행복함과 만족함과 기쁨을
조금 씩 맛보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 1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칼을 뽑아 들고


싸우시는 그 전쟁이 바로 이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앞장서서 싸워
주시는데 우리까지 힘을 쓸 필요가 있나?‘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싸우실 때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고 돌격하셔서 칼로 도려내시는 자신들의
죄를 대하면서 처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19:13-14)
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 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고범 죄라고 번역이 된 ‘페솨’는 ‘실행 죄’ ‘actual sin'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리처드 십스는 ‘양심을 거스르는 죄는 살아남은 기도의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영혼의 자유를 빼앗다 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죄는 우리를 그렇게 절망케 하고 좌절케 합니다.
John owen 목사님은 “죄와 은혜는 모두 실행하면 할수록 더욱 내적인 원리가 강화된다.
사람들이 그들의 은혜를 쓰지 않기 때문에 내재하는 죄가 증가되고 그 은혜를 사용함으로써 더

- 1044 -
이상 내재하는 죄가 자라지 못한다. 순종의 의무에 있어서 더 많은 은혜를 사용할수록, 은혜는
더욱 강화되고 증가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정욕의 열매를 많이 생산해 낼수록 그들
안에서 더 많은 정욕들이 생겨난다. 정욕은 스스로를 먹고살며, 자신의 독을 삼키며 증식한다.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수록 그들의 성향은 죄를 향하게 된다. 그 것은 죄의 법의
속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현규은 집사님께서 교회
게시판에 올려놓으신 글처럼 내 안에 두 마리의 개가 있는데, 한 마리는 은혜라는 개이고, 한
마리는 죄라는 개입니다. 그 두 마리 개는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은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지만
먹이를 못 먹는 쪽이 점점 말라비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반드시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 모든 노력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려 지겠지만, 그 모든 노력은 다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라는 병원균에 의해 사망이라는 병에 걸렸을 때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으려면
그 죄라는 병원균을 우리의 순종으로, 우리의 충성으로 몰아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거듭나게 되면 얻게 되는 확실한 것이 우리의 변치 않는 신분과,
죄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대하게 될 때 ‘내가 설사 이 죄에 무너지더라도 나의 신분은 변하지 않아’라는
확신과 ‘난 이제 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부 예배 때도 말씀드렸지만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께서 빌이라는 정신 지체아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지요?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실 때 그 사모님 반에 빌이라는 정신
지체아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시험을 보면 맞히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늘 학업이 부진했는데 한 특수 교육 전문가가 그 사모님 학교에 방문을
하셔서 그 아이를 진단한 후에 ‘이 아이는 구술시험을 보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맞힐 수
있는 아이’라고 조언을 해 주셨답니다. 실제로 그 아이에게 구술시험을 보게 했더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척척 알아맞히더랍니다. 그 빌이라는 아이는 자기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한 번 두 번 경험하고 나서는 이내 자신이 붙어서 아주 훌륭한
성적의 학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빌에게 사모님께서 물어 보셨답니다.
‘빌, 전에 너는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지?‘’저는 제가 바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지금은 제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하고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빌이라는 아이는 공부를 못 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기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경험되자 그는 이내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소유하셨습니다. 과거의 빌처럼 ‘나는 바보야, 나는 못
해’ 그러고 있으시면 여러분은 언제까지나 미숙아나 저능아처럼 바지에 똥오줌이나 싸는 그런
분으로 머무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아신다면
여러분은 ‘난 이제 할 수 있어요, 나에게는 능력이 있어요.’라고 감격의 탄성을 지르실 수 있을

- 1045 -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은 쉬지 않고, 바로 우리의 곁에서 문지방에서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그 투쟁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그러한 투쟁 속에서
struggle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힘을 내십시오.
마지막으로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로 널리 존경을 받았던 Jerry bridges 목사님의 "The
discipline of grace" 라는 책의 한 부분을 소개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55세다. 지난 10 여 년 동안 나는 이따금 내 삶을 뒤돌아보며 살아
왔다. 물론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진지한 마음으로 내 삶을 돌이켜 본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과 행위와 태도를 살펴볼 때, 정말이지 매우 괴로운 일도 더러 있었다. 내면의 생각, 갈등,
두려움을 통제하려 했지만 거듭 실패했다. 나의 미성숙함을 극복하고, 자아 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죄를 정복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성결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 삶은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속되는 실패와 과거에
대한 회한 때문에 최근 몇 년간은 더욱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투쟁을 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다들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 실패에 괴로워하며, 그러나 투쟁을 멈추지 않는 전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싸우십시오.

- 1046 -
(85) 성도들이 숙지해야 할 전쟁의 원칙
(엡6:13-17)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는 지난주에 구속사 안에서, 우리가 치러내야 할 전쟁의 기원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이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경고의 메시지까지 어떻게 에베소서를 전개해
왔는지 에베소서 전체의 개관을 짧게 복습하고 그 전쟁에 임하는 성도들이 승리를 위해
숙지해야 할 전쟁의 원칙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에베소서는 여러분이 2년 넘게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어느 성경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에 대한 깊고 풍성한 진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해 먼저 진술을 합니다. 지금부터
에베소서 전체를 한번 복습하는 것입니다.
(엡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우주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다스림을 받고 그의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우주와 인간이 창조된 목적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매일
암송하는 것처럼 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것이 바로 교회의
구원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구원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단지 우리 개개인의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인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오는 통치권의 개념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1장 11절부터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 묘사를 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엡1:11-14)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 1047 -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죠?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그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구원을 얻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그 영원하신 계획에
대해 더 깊고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2)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복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그 전에 (3)그리스도가 누구 신지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며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영원하신 아들을 본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도는 15절부터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엡1:15-19)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20절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지위’에
대해 설명합니다.
(엡1:20-22)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이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 구원받은 당사자인 교회, 바로
우리들의 신분은 어떤 것인가‘가 23절입니다.
(엡1:23)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지
않으시기로 하실 만큼 귀한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어 가면서 꼭 확인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두 가지 실상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미 점과 흠이 없는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입니다. 그 것은 교회가 완전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왔고 그 생명의 충만이요 확대이기 때문에 교회는 마귀가 건드리지도 못하며 따라서 절대

- 1048 -
실패할 수 없는 항상 거룩하고 이기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는 교회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가운데 있는 교회는 여전히 연약함과 문제를 나타내는 흠 있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본래 흑 암의 권세 아래 있던 죄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흠 있는
인간들의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 교회의 외형은 항상 문제투성이 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적 현실 교회 역시 성령께서 이루시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시는
역사’를 통해 점점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어 마침내 역사 속에서 외형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이미 거룩한 교회’와 ‘거룩해져 가는 교회’의 두
실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왜 제가 또 이 already, not yet 의 교리를 설명해 드리는가 하면 에베소서 1장은 ‘이미 거룩한
교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는 교회’를 보여주고 있고 2장에서는 ‘거룩해져 가는
교회, 지금 역사적 현실 가운데 있는 교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는 교회와 이 역사적 현실 속에 있는 교회가 서로
다른 교회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전자는 교회의 본질적 생명을 말한 것이고 후자는 그 생명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펼쳐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에게는 이미 완성된 완제품의 믿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시간 속에서 그 믿음을 객관적인 믿음으로 체득해 가야 하는
것처럼 교회의 구원도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지만 시간 속에서는 그렇게 점차 성숙해
가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3장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안에서 구원을 받고 있는 교회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밀이 1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엡3:1-10)
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 1049 -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비밀이 뭐예요? 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여 교회를 이루게 하심으로써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방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선민이라고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요.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교회가 그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의 비밀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전 열방의 구원에 ‘대상자’임과 동시에‘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엡3:14-19)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교회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만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복의 수혜자일 뿐
아니라 복의 전달자로도 부름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도가 그 교회의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장에서 바울은 3장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교회가 복의 수혜자요 전달자로서 제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답게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인가? 그게 4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엡4:1-3)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뭡니까? 첫 번째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들, 곧 성도의 연합을 힘써 지키고, 새 사람답게 세상과 육과 마귀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이퍼 칼비니스트 같은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도의 거룩한 삶은 절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성도가 이 땅에서 천국의 행복을 맛보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이
그 삶을 결사적으로 막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또 신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힘써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요구되는 우리의
부지런함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지런함을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는 확신의 방편으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벧후1:10-11)

- 1050 -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조건)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면)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 성도들은 부지런함과 힘씀을 통해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그 확신은 우리를 실족치
않게 해 주는 것이고, 그 길을 따라 우리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히2:1)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물론 그 믿음은 완성된
완성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완성된 믿음, 객관적 믿음에 의해 주관적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체득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속에서는 자라가야 하는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이미 도달해 있는 그 지점까지
부지런히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얻은 자들의 삶 속에서 자라남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부지런함과 힘씀과 인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에베소서 4장 15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엡4:15)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 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
땅에서 구현해 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성경이 표현을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예수를 이 땅에서 구현해 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 안에 은사와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4장10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엡4:10-15)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어서 4장 17절부터는 그 ‘자라남‘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정말 자라나고 있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4장 17절부터 5장 2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엡4:17-32)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 1051 -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5:1-21)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 1052 -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러한 삶을 열심으로 추구하며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라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서신 서들을 보면 사도들이나
서신서의 기자들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신자의 올바른 삶에 대해 권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존경하는 청교도 신학자 John owen 목사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권고는 단순히 신자의
의무를 제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신자에게 권고를 통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따라서 목사의 의무는 신자들에게 끊임없는 권고와 경고를 퍼부어야 한다. 만일
강대상에서 권고가 경고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 서에서 쉬지 않고 성도의 바른 삶에 대해서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서로서로 신자의 올바른 삶과 부지런함과
힘씀에 대해 권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상대방이 그 권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간의
권고는 ‘잔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아주 복 된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제가 어떤 신비주의 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권고라는 작용에 결단과 행위라는 반작용이 일어나도록 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5장 22절부터 6장 9절까지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되어지고 자라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을 대할 때 사랑과 순종으로 받들며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는 인간을
바라볼 때 그 인간 자체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 된 그 무엇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계획을 알며, 지금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 것을 삶으로 살아내게 되면, 우리는 ‘모든 인간은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상대방을 섬기고
존중하며 사랑과 순종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섬김과 순종이
삶의 열매로 맺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엡5:22-33)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지니라

- 1053 -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계속해서 부모와 자식, 종과 상전의 관계를 나열하면서 그 사이에서도 섬김과 순종과 돌봄의
삶이 나와야 함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10절부터 우리가 오랜 시간 공부하고 있는 성도의 전투에 관해 기술을 하면서 결론을
맺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신자다운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숙, 그 자체가
바로 ‘전투‘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들이 그 삶을 결사적으로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싸움을 통과해야 하고 그 싸움을 통해 성숙하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싸움은 승리를 얻기 위한 공격적 투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승리를 지키는 방어적 투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한시적으로 풀어
놓으심으로 해서 그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공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그 전투를 통해
마귀의 손아귀에서, 마귀 적인 삶의 원리로, 마귀처럼 살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적나라하게 까 발려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를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크심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그 싸움을 잘 싸워 낼 수 있는 무기와 갑옷에 대해 친절하게 기술을 하고
에베소서를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 주 간에 걸쳐서 그 싸움의 내용과 우리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숙지해야 할
원칙들을 공부했습니다. 다 기억나시나요? 프란시스 쉐퍼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사활을 좌우하는 기본 원칙들을 잘 알고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듣고 잊어버리시면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고 나누는 의미가 전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잘 기억하시고 그 말씀을 삶에 잘 적용시키셔야 지요.

그 간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우리 성도들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요. 첫째가 적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차대전 중에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 장군은 자신의 적인 독일의 롬멜 장군의 사진을 여기
저기 많이 꽃아 두고 붙여 두었다고 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자신이 무찔러야 할 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언제나 염두에 두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탄의 존재와 그의
집요하고 간교한 시험, 계략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항상 매개체를 사용해서 사람을 공격합니다. 마귀는 아무 수단이나 과정 없이 그냥

- 1054 -
나타나고 그냥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고 그 것을 통해 사람을
시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표현 수단인 마귀의 매개체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자신의 매개체로 쓰는 것은 사람과 물질적 환경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매개체인 ‘사람‘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다가오는 ‘육신’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바깥에서 세상의 원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입니다.
마귀는 우리 안에서 아주 교묘하게 자신을 나타냅니다. 마귀는 마치 자기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인 양 우리 안에 집어넣고, 그 것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그가 우리를 속인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조종을 받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권고대로 영으로 육을
지속적으로 죽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자기’는 육적인 ‘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육적인 삶의 방식‘이 자꾸 죽어 가는 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육은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닙니다. 우리의 육이 밖으로 표출되는 대표적인 형식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이 물질 적 세상에서의 ‘나’라는 존재를 ‘나‘밖의
다른 존재들보다 더 높이 올려놓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 그건 지금 마귀의 궤계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자아를 해체하고 부인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항복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의 육 적 자존심을 자극해서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로 성도가 누려야 할 하늘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아무런 기쁨 없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매개체인 ‘사람‘의 두 번째 모습은 ’나‘의 밖에서 다가오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마귀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일구어 놓은 거대한 인격체입니다. 마귀는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이 일군 문화를 통해서 우리를 속이며 시험합니다.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우리를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무조건 거부하고 살아서는 안 되지요. 그러한 그릇된 사고에서
수도원 운동 같은 것들이 나온 것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된 채 수도를 하면 거룩한
삶이 금방 올 줄 알았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세상 뿐 아니라 자아 속에 들어
있는 육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놓친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러한 금욕주의적 가르침이나 영지주의 적 가르침을 ‘귀신의 가르침’으로
불렀습니다.
물질세계는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물질이나 환경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것을 하나님이 지으신 용도에 맞지 않게 오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결혼이든, 먹고 마시는 것이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딤전4:1-5)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 1055 -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초대 교회 사람들 중에 인간의 성적 욕구를 죄라고 여기고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쿰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엣센파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적인 욕구가 죄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은 그 말 자체가 ‘에드나’를
어원으로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pleasure'라는 뜻이지요. ’pleasure'중에서도 성적인
‘pleasure'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 것을 인간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쓰게 될 때 ‘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 정욕을 없애기 위해
실제로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들이 수도사나 스님들 중에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고 다들
후회했지만...
양귀비는 중국에서 약재로 잘 쓰이던 것이었습니다. 소화나 통증 같은 것에 아주 귀하게
쓰이던 것이었는데 인간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양귀비를 사용하자 그게 아편이 된 것입니다.
음악, 미술, 영화 얼마나 좋은 선물입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그 아름다운 예술을 죄를
부추기고 죄를 묘사하는 것에 쓰기 시작하면서 오늘 날 예술은 ‘외설’의 선봉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맥주나 와인이 식수가 귀한 중동 지방이나 유럽지방에서 식욕을 돋우고 소화를 돕는 음료로
쓰일 때는 아주 유용한 것이 되지만 쾌락을 위해 주체를 못할 만큼 마시게 되면 독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물질세계 자체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그
선물들을 더러운 것들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에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뭐였습니까? ‘나의 자아, 그리고 세상사람, 그리고 세상의
문화, 물질적 환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의 두 번째가 이 싸움의 주도자요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히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주님은 우리의 지휘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장 되신 주님께 나의 전 존재를 의뢰하며
순종하며 마귀와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역대 하에 보면 우리가 우리의 대적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그 전쟁의 양상이 아주 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대하20:15-24)
15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 1056 -
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19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0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
24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모압 사람과 암몬사람 그리고 세일 산 사람들이 남 유대를 쳐들어 왔을 때 유다 왕이었던
여호사밧과 온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을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그 냥 놔두었는데 그들이 지금 우리를
쳐들어와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떡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스가랴의
아들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해 여호사밧과 유대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전쟁은 나의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하여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시면 유대인들의 대적이 될 모압과 암몬을 하나님이 멸하지 않으시고 놔두게
하십니다. 나중에 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대적을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알게 하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며,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케 하시기 위해 대적의 공격을 묵인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
전투를 유도하신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대적들이 공격해 올 때, 우리는 콧대 높았던 우리의 약함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와의 전쟁에서 나의 힘만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백 전 백패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어떤 모양의 전쟁도 모두 내 개인의 힘으로 싸우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 그 모든 전쟁들을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싸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패해서 고통을 겪을 때마다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대적들이 너무


강하고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아주 약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 1057 -
무참하게 짓밟힐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이웃의 강대국에게 도움을 청했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즉 불순종과 믿음 없음이 그들을 실패하게 한 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이나 다른 세상 적인 해결책으로 마귀와의 전쟁을
하려고 할 때 그가 철저하게 패배하도록 놔두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닥치는 그 전쟁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나’를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의견과, 내 고집과, 내 힘을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내 전쟁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조금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제 전도사로 사역을 하는 제 친구가 찾아왔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3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 상대방이 너무나 사치가 심해서 하루 16시간씩 일을 해도
자기 아내의 생활비의 삼분의 일도 못 벌었답니다. 당연히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전도사 일도, 신학교도 다 그만두기를 강요했답니다. 심지어 일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졌는데도 당장 내일 모래 이삿짐 날라야 하는데 다쳤다고 핀잔만 주는 그런 아내였답니다.
결혼 한지 3년이 넘었는데 집안에 남편 사진 한 장이 없답니다. 그리고는 걸핏하면 이혼을
요구하는데 이번이 다섯 번째랍니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노라고 제게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 친구 왈‘이제 하나님은 나의 일에 전혀 간섭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전혀 들으시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신앙마저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어떠세요? 분명 영적 전투입니다.
이럴 때 그 전쟁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하루에 three job을 뛰어서라도 아내가 요구하는 생활비를 벌어야지, 그러면 아내도 나를
사랑해 주겠지’ 혹은 ‘카운셀러를 만나서 아내의 성질을 교정해 볼까?’ 아니면 ‘저 성질 나쁜
아내를 착한 아내로 교환해 버리자, 다른 말로 이혼하고 새 장가들자’ 이런 방법들이 많이
떠오르겠지요?
바벨론이 공격해 오니까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애굽에게 도움을 청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사단이 마음먹고, 믿지 않는 아내를 통해 이 사람의
신앙을 흔들고 있는데 그런 세상 적인 방법으로 그의 공격을 멈출 수 있을까요?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되는 것이 그 친구가 그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모습일까요? ‘아내가 착한 여자로 변하는 것? 수입이 지금의 세배가 되어서 아내로부터 구박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 어떤 것이 그 전쟁의 해결책입니까?
여러분, 영적 전투는 물질세계의 전투가 아닙니다. 따라서 물질세계의 현상이 해결되는 것이
영적 전투의 승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전투의 승리는 영적인 영역의
일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전투의 승리입니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 그 친구가 하나님께 그의 전쟁을 맡긴다는 것은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아내를 착한 아내로 교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아라.‘’원수를 사랑해라‘’끝까지 순종하라‘’섬겨라‘’절제해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복종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전쟁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 1058 -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써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똑같은 상황 속에서 이 사람 속에 평안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영적 전투는 100% 내가 싸우는 것이고 100%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게 주님이 앞서 싸우시는 전쟁의 승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맞서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내가 주님께 그 전쟁을 맡기고 주님께 순종하게 되면 주님은 나에게 승리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평안과 기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전쟁은 주님과 나와의 전쟁이고 거기에
사단은 잠시 사용될 뿐인 것이고, 우리의 승리라는 것은 그 견딜 수 없는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의 ‘거룩한 성품의 빚어짐‘ 이것이 바로 성도의 승리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약4:7)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이렇게 우리의 영적 전쟁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복 하고
순종할 때 주님께 맡길 때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전신갑주의 착용입니다. 사실 이 전신 갑주는
우리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기라기보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를 복종시키고 주님의 뜻에
우리를 순종시킬 수 있는 방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싸움’을 마귀와 내가 씨름을 해서 내가 삼판양승을 하는 모양으로 그리시지
마시고 육신의 삶을 더 즐기려고 하는 나를 향해 주님께서 거룩의 검을 들고 돌격하시고
마귀는 그 복된 전쟁에 사용되고 있는 소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마귀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싸울 때만 무서운 존재이지 그
전쟁의 대상이 예수님이 되어 버리면 마귀는 그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대적이 누구인지 바로 인식하셨으면, 그 전쟁이 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순복하여 그 전쟁을 하나님께 돌려버리세요.
그래야 내가 그 고통 속에서 탈출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승리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예수로 말미암아, 소망으로 말미암아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게 되는 것.
그 길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 땅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이 쏟아지는 그런
가시적인 승리를 생각하시는 한 여러분은 끝까지 고통 속에 시달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우리가 그 영적 전투를 잘 치러낼 수 있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전신 갑주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059 -
(86) 진리의 허리띠
(엡6:13-14)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우리는 지난주에 에베소서 전반에 대한 review를 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물의 재통일‘‘애나케팔라이오’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1장과 2장에 각각
묵시 속에 완성되어 있는 교회와 이 땅의 역사적 현실 가운데 있는 교회를 보여주지요. 다른
말로 이미 거룩해진 교회와 거룩해져 가고 있는 교회를 나누어서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이미 묵시의 세계인 하늘에 완성이 되어 있고, 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이 바로 교회의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주어졌음을 사도는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렇게 교회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복의
수혜자로서 뿐 아니라 복의 전달자로서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순복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바로 거기에 사단의 공격이 가해지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사단의 공격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이라는 내용이 에베소서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단의 공격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우리가 마귀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의 거룩한 성장을 위해 한시적으로 이
세상의 권세를 잡도록 허락된 자들이기 때문에 저는 이 영적 전쟁을 ’마귀와의 전쟁‘이라는
관점보다 ‘하나님께로의 항복‘의 측면으로 바라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전신 갑주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첫 번째 것이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왜 허리띠가 가장 먼저 나오는가?
오늘날 우리의 옷차림에서는 사실 허리띠의 중요성이 별로 부각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옷은 옷의 형태나 재질 같은 것들이 허리띠의 필요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 시대에는 달랐습니다.
당시처럼 치렁치렁한 옷을 즐겨 입었던 때에 옷차림을 단정하게 마무리 짓는 것은
허리띠였습니다. 고대시대 사람들은 쉴 때나 잠잘 때 이외에는 늘 허리띠를 매야 했습니다.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사지가 자꾸 옷에 걸려서 행동에 제약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자기 치마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가끔 보지요?
명절 때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들이 일을 하시기 위해 그 걸리적거리는 한복 치마를 어떻게 단
도리를 하십니까? 치마를 허리춤으로 걷어 올리고 끈으로 꽉 묶으시지요? 그게 고대 시대의
허리띠입니다. 그러니까 군사가 전쟁에 출전하기 위해 무장을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허리띠를 묶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허리띠를 매지 않고는 그 위에 다른 갑옷을
입을 수도 업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먹으라고 하실 때도 제일 처음 요구하신

- 1060 -
것이 ‘허리에 띠를 띠고’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가나안까지 행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행12:8)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 대
(감옥에서 퍼져서 잠자고 있던 베드로에게 천사가 한 말)
보세요. 어떤 움직임이나 변화에는 항상 띠를 띠는 것이 먼저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적 전쟁에 투입되는 사람들이 허리띠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께서도 신자들에게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권고를
하고 가셨습니다.
(눅12:35)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사도들도 성도들에게 똑같은 권고를 했습니다.
(벧전1:13)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렇게 허리띠는 전투의 전제조건이요 기본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영적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꼭 매어야 하는 그 허리띠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보시다시피 그 허리띠의 내용은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싸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지요. ‘진리’로 허리가 묶여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나머지 무장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무장에서 제일 먼저 제시되고 있는
이 ‘진리’를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배우고 연구하고 간직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진리‘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구원과 승리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중에 공부할 부분인
17절의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중복되지 않는가?
오늘 본문의 ‘진리의 허리띠‘는 ’전체 진리,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진리, 복음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마귀의 유혹과 궤계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성경 말씀의 일부분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께서도 언급을 하신 바 있지요?
(요8:30-32)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1061 -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만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맨 처음 내용이 ‘진리’의 허리띠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진리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을 합니다. 베드로는 ‘진리의 허리띠를 매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벧전1:13)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여기처럼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라‘라고도 표현을 하고 ’믿음을 굳게 하라‘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벧전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믿음이 뭡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지식을 믿음이라고 하지요? 다른 말로 ‘진리에 대한
신뢰와 지식’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를 매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확실한 지식을 가지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 다른 말로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 다른 말로 ‘확고한 믿음’이 왜 이렇게
서두에서 강조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안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본성이 ‘지성과 애성’입니다.(여기에 대한 논증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지금은 그냥 들어 두라)
그 중에 ‘지성’은 라틴어로 ‘라치오’와 ‘인뗄리겐지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치오’라는 것은 ‘이성의 추론적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찾아가는 이성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뗄리겐지아’는 ‘오성’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그 단어를
‘총명’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성‘이라는 것은 ’지적인 능력‘과 ’지식자체‘를
합해서 ’지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원인과
결과를 완벽하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또한 풍성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성‘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자체‘를 ’애성‘이라고 합니다.
이 ‘애성’의 부분에서는 우리가 구별해 두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까리따스’와 ‘꾸삐띠다스’가 있습니다. ‘까리따스’는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인간 쪽에서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꾸삐띠다스‘라는 것은
’유격적 자기 사랑‘을 말합니다.
조금 쉬운 말로 바꾸면 ’까리따스’는 ‘아모르 데이’ 즉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고 ‘꾸삐띠다스’는 ‘아모르
쓰스’‘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해 버린 모든 인간들은 ’까리따스‘를
잃어버렸고 온통 ’꾸삐띠다스‘에 흠뻑 젖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그 ’꾸삐띠다스‘를 깨버리고 ’까리따스‘를 발휘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인 ’까리따스‘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들어있는 ’애성‘의 사랑은 바로 ’까리따스‘말하는 것입니다.

- 1062 -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랑’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에 충만히 젖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서 ‘까리따스’가 반응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우리에게 부어진 그 하나님의 형상의 대표적인 요소인 ‘지성과 애성’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성과 애성’으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지만 이 ‘지성과
애성‘의 뿌리는 원래 하나입니다.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구약에 보면 ‘야훼 경외 사상’이라는 것이 있지요? 그 ‘야훼 경외 사상’의 핵심이 바로 ‘지성과
애성‘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다아트’와 ‘헤세드’입니다. ‘다아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헤세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 ‘다아트’와 ‘헤세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들이
지식을 버렸기에 나도 그들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 왜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시킬까요? ’이 놈들이 감히 나를 몰라?‘ 이런
분노는 아닐 거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 ’다아트’가 없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헤세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보였던 사랑은 형식적이며 의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과 애성‘은 한 뿌리에서 나오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상실해 버린 ’다아트‘와 ’헤세드‘(지성과 애성)의
회복이라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것은 ‘사랑과 진리’‘참 지성과 참 애성‘이신 ,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의 안, 그러니까 ‘사랑과 진리’ ‘참 지성과 참 애성’속으로 집어 넣으셔서 ‘다아트’와
‘헤세드’를 회복시켜 내는 것입니다.
(요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그 안에 ‘은혜(카리스)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은혜(카리스)’는
‘사랑’‘까리따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은 참 지성과 참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지성과 애성’을 회복한 사람들이 되었고 이 시간 속에서 그
‘참 지성과 애성’을 키워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참 지식과(참 진리에 관한
지식)사랑’을 추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고, 또 마땅히 그 ‘지식과 사랑’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살후2:10)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여기서도 성도는 ‘진리의 사랑’을 받은 자로 묘사가 되고 있지요? 여기서
‘진리’‘알레떼이아스’는 ‘동격 소유격’으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진리 곧
사랑’이라고 번역을 해도 무방하지요. ‘진리 곧 사랑을 받은 자’가 바로 구원함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 1063 -
(벧전1:22)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를 순종하게 되면,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라는 명제가 이 구절 속에 숨어 있지요?
(요이1:1-3)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서의
진리와 사랑은, 다른 말로 지성과 애성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고
반드시 성도의 삶 속에서 회복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그노시스 투 크리스투’가 단순히 지적 동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헬라어 ‘그노시스’‘지식’이라는 단어 속에 ‘성행위를 하다’라는
뜻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 요구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차원이 아니라 부부관계처럼 ‘경험으로 깊이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지식이 바로
‘하나님과 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러니까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라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사랑이 시간
속에서 자라 가는 것’을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와 사랑은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
임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안다는 사람들 속에서 ‘사랑’‘까리따스’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잘못된 ‘진리’로 허리띠를 매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올바른 진리를 찾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 진리를 알아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지지 못하도록 초대교회 때부터 혼란과 불확실성의 씨앗을 뿌려 왔습니다. 순결하고
순수한 복음 안에 잡티를 자꾸 뿌려서 엉터리 진리를 생산해 내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단이 어떻게 교회에 들어와 진리를 훼방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행20:29-32)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보세요. 그 이리떼 같은 사단의 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다고 합니까? ‘은혜의
말씀’‘진리’밖에 없습니다.
사단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할례를 필수적인 과정으로 거치게 하고 또 다른 의식들도
지키도록 미혹하기도 하고,(율법주의) 또 초대교회 당시 전 세계의 철학 사조였던 헬라의
이원론을 근거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막 살아도 천국 갈 수 있다. 육이 저지르는
것이 영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얼토당토 한 왜곡된 진리를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 1064 -
사두개 인들처럼 마지막 때에 부활이 없다는 교리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딤후2:18-19)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진리를 왜곡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는 사도의 권고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외침을 한 번 보십시오.
(갈1:6-9)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러한 잘못된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 어디에 있었다고요?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끊임없이 교회가 믿는 진리를 왜곡해서 성도를 미혹해 왔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단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할 때마다 우리 기독교에는
거기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전투에서 나온 것들이
유명한 신경이나 신조들입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 고백서 등등 많은 신조와 신경들이 사단의 진리 왜곡에 대해 맞서서 나왔던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의 교리는 하나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엡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인 참 진리의 허리띠를 굳게 띠고 있는 것만이 엉터리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왜곡된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다른 말로 ‘사랑이 수반되는 참된 진리’ 만이 엉터리
교리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지요.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경 안에서 계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이시며,
우주의 정상적인 질서이며 하나님이 내신 인간의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자꾸 그

- 1065 -
진리를 왜곡해서 여러 개를 제시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따라서 그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열정과 노력이 없이는 절대 이 미혹의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유사 이래로 사단이 진리를 공격했던 많은 방법들 중에 사람들이 흔히 속기 쉬운, 그리고
오늘날도 많이 속고 있는 비 진리의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을 하나 예로 들어 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 공부는 이번 주일 설교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안 들으신 분들은 주일
설교도 충분히 이해하시기가 힘드실 거예요.

사단이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시대정신과 하나님의 진리를 그 때


그 때 잘 섞어서 전혀 다른 엉터리 진리를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사실을 분별하고 진위를 판별하는 데에는 납득과 수긍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인간이 어떤 사실을 납득하고 수긍하는 방법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전통적이고 생래적인 것으로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객관적 논증‘입니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먼저 진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이 어떻게 진리를 왜곡해 왔는지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경험’은 다음 주에, 의의 흉배에서 다루어 드리겠습니다.
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원래 헬라 적인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헬라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헬레니즘하면 우리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라는 ‘이원론’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원래
이 ‘이원론’보다 인류 정신사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헬레니즘 속에 들어있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반면에 헤브라이즘은 ‘내가 나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조상들이 옳다고 한 것은 옳다’라고 인정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양축이
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지요.
헬라사람들은 하나의 사실을 판별할 때 인간이 갖고 있는 오감으로 체득해서만 판별하지 않고
객관적 논리성을 갖고 증명하려고 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성경책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여기 성경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런데 헬라 사람들은 객관적인 논리성을 갖고 논리적인 증명을 하는 것을 오감을 이용한
직접적인 감각과 대등하게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헬라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진짜 사실로 증명하려는 시도로 만들어낸 헬라
사람들의 방법론입니다.
그런데 이 과학이라는 것이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것이 이제는
성경보다 앞서서 진위를 판가름하는 심판자의 위치에 서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이제 어떠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내는 방법론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이 안
되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 드릴게요. LA 공항에 마약을 색출해 내는 어떤 마약 탐지견이 있습니다. 그


마약 탐지견은 지금까지 나온 모든 마약의 냄새를 다 맡아서 색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약 탐지 은 모든 사람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판단하기에 긴가 민가
하는 것들을 가져와서 그 탐지견의 코에 갖다 대면 어김없이 진위 여부를 가려 주었습니다.

- 1066 -
그래서 LA시에서는 그 탐지견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하고 마약 사범에 대한 재판에도
그 탐지견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해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개가 맞다 그러면 유죄요,
아니다 그러면 무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종 마약이 생겼습니다. 그 마약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마약보다 치명적인 해를 가져오는 그런 마약입니다. 그런데 이 탐지견은
새로 나온 마약까지 ‘마약’으로 밝혀 낼 실력은 없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분.명
마약임에 틀림없는데 그 탐지견이 자꾸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실력 밖의 것은 ‘모른다’라고
하면 되는데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하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마약 상들이 무죄 방면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마약 사범들은 그 마약 탐지견이 모르는 마약들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그 마약 탐지견은 계속해서 나오는 신종 마약들을 마약이 아닌 것으로
판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LA는 마약 천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인간들이 과학을 이용해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시도를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그 과학이 입증해 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한 30년 전에 타계를 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불트만의 신학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하고 많은 이들의 동의를 이끌어낸 사람입니다.
비신화화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신적 권위와 가치를 부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의 가르침을 잘 지키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좋은 의미의 fiction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을 비신화적이며 실존 론
적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신 신학의 발로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세 시대는 기독교가 세상 정치권 위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하나님의 특별 법칙과 종교라는 것으로 압제를 했던 시절입니다. 그 때 득세한
것이 바로 스콜라철학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믿고 있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라는 사실에 헬라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증이 합세를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입증이 된 기독교를 믿게 될 것이라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러한 접근 방법이 잘 먹혀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중세 때는 과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었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증도 목적론 적인 접근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적론 적인 접근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실이 참이냐 아니냐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증으로
판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실이 ‘참이다‘라는 목적을 이미 설정해 놓고 그 것이 참인
이유를 과학과 객관적인 논증을 사용해서 꿰어 맞춘 것을 말합니다.

그 것은 과학의 발전이 미미했을 때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과학이 급속히


발전을 했습니다. 질병은 사단의 시험이나 하나님의 징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병원균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며, 벼락은 하나님의 저주의 화살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방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우턴, 아인슈타인 같은 걸출한
과학자들이 만류인력의 법칙, 관성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등을 쏟아 내었고 그 때부터 그
발전된 과학으로 다시 성경을 입증하기 시작한 것이 신 신학의 태동을 가져온 것입니다.

- 1067 -
그러한 과학적 이론을 성경에 가져다 대니까 이건 너무 어이없는 내용이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동정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나는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하나? 어떻게 질량을 가진
사람이 물위를 걷나? 그건 다 예수의 가르침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러한 신화들은 다 빼버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만 받아들이자’ 이게 신 신학인 것입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일각에서 성공을
했지요. 그래서 미국의 유수의 신학교에서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 버젓이 가르쳐 지고 있고
그들이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사실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관념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도덕적 윤리적 관념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잡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관념론에
빠진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것도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도록 겁을 주기 위해
동원한 가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도둑질 하지 말라‘’살인 하지
말라‘ 그냥 이렇게 말로 하면 인간들이 들은 척도 안 하니까 지옥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동원해서 인간들에게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다는 해석이지요. 오늘 날 가장
무서운 사단의 공격이 바로 이 것입니다. 기독교를 관념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화 된 기독교, 신 신학의 중심에는 예수가 아닌 ’나‘가 항상 주인공입니다. ’나‘의
착한 삶,’나‘의 깨끗한 행동,’나‘의 자랑스러운 행위 이렇게 모든 것의 중심에 ’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나‘의 깨끗함, ’나‘의 착한 삶,’나‘의 자랑스러운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하심,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구원‘이 중심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착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착하기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셔서 살인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거짓말 안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계속 세상 속에서 뒹굴면 무시무시한 지옥을
보낸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이 문제는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관념이 아니라 실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실재하셨고 지금도 우리 안에, 우주에 편만하게 실재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분이 ‘하라’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고 그 분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안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이 빠진 구제, 희생, 사랑, 헌신, 교제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없고
관념으로만 떠도는 그러한 소위‘착한 일‘들에서는 오로지 ’나‘만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 속에서 누가 부각되는 가를 잘 보세요. 이것이 진리를 분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와 열심 속에서 ‘나’가 부각되고 있고 ‘나’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고 있다면 그 것은 관념화된 기독교, 박제가 되어버린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행위 자체는 종교적인 모양을 띠고 있는데 내용은 오히려 주님께 지탄을
받고 있는 세 가지 예가 나옵니다.
(마6:1-8,16-18)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 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 1068 -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뭐지요?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도의 마땅한 행위 중에도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행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부 뭡니까? ‘나’가 부각되는 행위들입니다. 관념화 된 기독교, 왜곡된 진리 속에서 엉터리로
distort되어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가 배태한 더러운 찌꺼기들인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요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그 어떤 아름다워 보이는 행위도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 행위도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지지 않는다면
다 울리는 꽹과리요 소리 나는 구리일 뿐입니다.
지금 안도의 한숨을 쉬는 분들 있지요? ‘아, 나는 적어도 내 자랑은 안 해, 난 어떤 일을 해도
늘 숨어서 일해, 그래서 난 참 괜찮은 사람이야’ 이건 더 악질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교활한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유명한 교회 목사님은 헌금 봉투에 이름을
못 쓰게 하신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누구 보라고 내는 것 아니니까 이름을
쓰지 말자고 합의를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 교회 교인이 목사님께
전화를 하셨답니다. ‘목사님 여기 이민 교회들 중에 헌금 봉투에 이름을 안 쓰는 교회를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너무 한심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헌금 봉투에 이름을
쓰는 무식한 신자들이 있습니까?’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명으로 헌금하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 헌금 봉투에 이름 쓰는 사람은 무식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자기 자랑이 가득 차

- 1069 -
있는 것입니다. 참 의로운 지적 같아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꾸삐띠다스‘가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습니까? 교활하고 교묘하게 자기의 자랑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들은 그야말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님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분들이 교인들에게 자기 PR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꼭 기도할 때 당시 이슈가 되는
정치 문제, 사회 문제들을 장황하게 들먹이면서 목소리 높여 간절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한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을 부각시켜 주지요. ‘나는 남들이 못 보는 이러한
일들까지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다. 너희들은 뭐하고 있니? 아직도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런 기도나 하고 있니? 한심하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꾸삐띠다스’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다 잘못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한 숨은 의도가 그 기도 속에서 읽혀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한 일을 하고도 거기서 ‘나’가 부각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건 예수가 빠진 엉터리 진리로 허리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십자가와 보혈이라는 진리 앞에서 ‘나’가 죽고, 진리이신 예수가 드러나는
것이 진짜 진리로 허리띠를 매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참 진리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로 말미암은 사랑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 하게
되는 것이고 그 때 마귀는 우리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는 명령이 왜 맨 앞에 나와 있는지 아시겠지요? 나머지 내용은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1070 -
(87) 의의 흉배를 붙이라
(엡6:14)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진리의 허리띠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허리띠라는 것은 고대 시대 때, 사람들이 전투뿐만이 아니라 행동의 자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가장 기초적인, 그러나 필수적인 무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허리띠‘가 없이는 다른 무장을 그 위에 붙일 수 없을 만큼 ’진리‘는 우리가 영적 전투를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실 ‘진리‘라는 허리띠는 그 나머지 모든 무장들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오늘부터 공부하는 나머지 무장들을 잘 연구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머지 무장들은 ‘진리’라는
허리띠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가 오늘 공부할 부분인 ‘의의 흉배’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에베소서를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는 양손이
쇠사슬에 묶였고 양쪽에서 두 명의 군사가 쇠사슬로 그 죄수와 함께 묶여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바울이 편지를 구술했고 누군가가 편지를 대필했을 것입니다.
아마 로마 군인 중에 한 명이었겠지요.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감옥 안에 적어도 3명 이상의 로마 군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전신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투구를 쓰고 있었고
허리띠를 매고 있었고 흉배를 차고 있었고 단단한 군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패와 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그대로 인용해서 묘사하면서 바울은 이
에베소서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허리띠 위에 흉배를 대고 있었습니다. 흉배는 가슴과 배를 모두 가리는


가죽이나 혹은 얇은 철판으로 만든 보호 장구입니다. 벤허나 스팔타커스같은 영화에 보면
로마의 군인들이 앞부분을 가죽이나 철로 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러니까 흉배는 가슴과 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가슴과 배에는 심장이나 간, 창자 같은
내장이 들어있는 곳입니다. 당시 고대 사람들은 그 내장 안에 사람의 마음과 기분과 감정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2:11)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예레미야가 그의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표현하면서 ‘내 창자가 끊어지며 간이 땅에
쏟아졌다’라는 표현을 쓰지요?
(합3:16)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사6:11)
11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 1071 -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이 된 ‘메에’라는 히브리어는 ‘창자, 심장, 내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시편에는 ‘신장’‘콩팥’이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빌2: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여기서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스플랑크논’은 ‘내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대 사람들은
동정이나 자비, 긍휼 같은 개념들과 ’내장, 심장‘이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썼습니다. 바로 그
내장을 보호하는 것이 ’의의 흉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의 흉배’는 어떤 공격에 대한 보호 장구입니까? 감정과 기분과 양심과 욕구와
의지를 공격하는 사단의 공격에 대한 보호 장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의의 흉배’에서 ‘의’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를 해 놓아야 하겠지요. 그래야
그걸 입고 우리의 감정과 기분과 양심과 욕구와 의지를 공격하는 사단의 무기를 막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단순히 ‘righteousness'나’correctness'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네페쉬‘’존재‘는 많은 관계를 맺고 살게 되는데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러한 관계 속에 있는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내는 것을 ’의‘’자다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던 ‘의’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그 ‘의’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시키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깨어져 버린 의의 관계를 온전히 해결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니까 ‘의’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것입니다. 그 ‘의’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인간이 자신을 수양해서 회복시킨 것도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빌3:4-9)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지요? 우리 개신교에서의 ‘의’는 ‘전가된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요구와 표준은 워낙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 노력으로 도저히 회복시킬 수 없는
‘의’입니다.
(마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 1072 -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거든요. 우리가 정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가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의무와 책임은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의 회복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홀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간들에게 ‘전가’(imputation) 시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롬8: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런데 이러한 은혜의 교리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칫 우리가 ‘방종’에 빠질 수가 있지요.
‘이제 우리가 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 이러한 은혜를 악용한 ’무
율법주의‘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구별하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홀로 완성하신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영적 상황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 속에서 그 ‘전가된 의’를 삶으로 경험해 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라는 씨앗이 주어져있는데 우리의 육신
전체에는 타고난 ‘의’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전가된 ‘의’가 시간 속에서 ‘경험’이라는 것을
통하여 육신 안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청교도들은 ‘전가된 의’와 비교해서
‘나누어주시는 의’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미 완전하게 의롭게 만들어 놓으신 후 그들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의 의’가
역동적으로 역사 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삶 속에서 주관적인 ‘의로운 삶’을 체험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언젠 가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게 되며,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그러한 ‘관계가 요구하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신학에서는 그러한 ‘전가된 의’와 ‘나누어지는 의’의 부분을 ‘질료의
창조’라는 것으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물 등의 질료가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질료를 가지고 창조를 완성시켜 나가셨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우리 성도에게 ‘의’라는 질료가 전가되어 그들의 인생
동안에 그 ‘의’가 완성이 되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지금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입된 의’에 우리의 행위를 보태서 ‘완성된 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전가된 의가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 ‘의’를 주관적으로 이해시키고
체험시킨다는 말입니다.
(빌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 1073 -
행하게 하시나니
그래서 우리는 방종에 머무를 수가 없으며 점점 의를 행하는 자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육신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2:11)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거듭난 사람의 속에서도 육체의 정욕, 육체의 욕심이 쏟아져 올라옵니다. 그래서 간혹 실패나
실수를 하게 되지요.
그 때 마귀가 참소를 합니다. ‘너 같은 인간이 무슨 성도냐?’‘하나님이 너 같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실 것 같아?’‘넌 구원받은 사람 아니야’ 이렇게 참소를 합니다. 그 때 만일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우리의 힘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홀로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이라는 ‘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넘어지지요. 그래서 ‘의의 흉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분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의’는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근거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은혜로,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실수로 인해 마귀가 참소해 들어올 때 ‘그래 맞아, 네 말대로 내 행위에
근거한다면 난 지옥가도 싸, 그런데 그런 나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배제해 버린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셔서 나에게 거저 전가해 주셨어, 그래서 난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는
거야’라고 말씀에 근거해서 반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의의흉배’입니다. ‘이러고도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라는 기분과 감정에 넘어지지 않고 다시 분투할 수 있게 하는
보호 장구가 바로 ‘의의 흉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은 구원의 취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를 지은
것이지만 우리가 구원받고 난 후에 짓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의 죄인 것입니다. 그 것은
징계로는 나타날지언정 정죄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여전히 죄에 노출된 자신을 보며 실망될 때에 이런 구절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의의 흉배’를 가진 사람이 분명하지요.
(롬3:21-22)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는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완성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그 동안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 낸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 1074 -
의’만을 의지하노라고 한 것은 ‘자기 의’는 항상 하나님의 의를 공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자기 의를 쌓았던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고 열심히 제사를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의’가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 버렸고 결국 그들은 그들의 ‘의’를 지키기
위해 참된 의를 선물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신앙생활 내내 불안하고,
절망하고, 심지어 자폭하게 되거나 자기 스스로 의를 쌓아서 교만의 선봉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초조하고 고단하고 기쁨이 없지요.

여러분이 지성소 안에 들어 있는 법궤를 생각하시면 그 전가된 의가 무엇인지 좀 더 확실해


집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것들은 모두 인간의 실패와 실수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실패와 실수를
법궤가 감쌉니다. 그리고 그 법궤 위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피가 부어집니다. 그 것은
그 법궤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의 실패와 실수가 전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어떤 죄 없는 대속 물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뒤로는 인간들의
실패와 실수를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덮고 있는 어린양의 피롤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보시기로
하신 것이 바로 ‘전가된 의’인 것입니다.
법궤 안의 인간들이 뭐 한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의로운 자‘들이 모여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3:4-9)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 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이러한 구절들을 곡해하면 자칫 ‘죄책감’ 때문에 더욱 더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절대 죄를 짓지 않고, 심지어 죄를 짓지 못 한다‘라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마귀의 수하에서 죄만을 일삼던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표면적으로 죄를 짓더라도 그건 죽은 자의 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은 이제 그 안에서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 1075 -
그런데 마귀는 항상 우리의 외적 행위만을 들고 나옵니다. ‘너 이런 거 잘못했지? 이런
파렴치한 일을 하고도 네가 성도냐? 분명 성경에는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고 했는데,
넌 계속 짓고 있잖아?’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 다른 말로 ‘생명’을 꺼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씨, 생명은 우리를 방종에 머무르게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그 생명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곳으로 끌고 가십니다.
(요일5:18)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히7:24-25)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더러운 우리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요일1:6-10)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런 구절도 우리가 자칫 오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 즉 구원 못
받아놓고 구원받은 것처럼 속이는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항상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해석들을 합니다. 정말 부담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똑같은 메시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6절과 7절 그리고 8절과
9절 그리고 10절 이렇게 세 부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혼돈 하는
구절이 6절과 7절인데, 6절의 내용과 7절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움의
나라에 있으면서도 ‘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리새인들처럼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의로 말미암아 자기들은 당연히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의 나라로 옮긴 사람들 가운데에도 외적 행위로는 죄를 짓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더러운 외적행위에도 불구하고 빛의 나라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행위는 그 행위가 어떤 행위라 할지라도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 1076 -
왜? 나라가 옮겨졌으니까. 그들이야말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외적 행위들은
예수님께서 그 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이며, 지금도 계속해서 깨끗하게 씻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7절의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가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그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8절과 9절 10절의 내용과 맥이 같아지지요. ‘너희가 죄 없다 하면 너희는 속이는 자다.
그러나 너희가 죄를 자백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사람들의 죄를 예수께서 씻는
것이다’가 8절과 9절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를 믿게 된 ‘전가된 의’를 받은 사람들은 전혀
죄를 안 짓는 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짓기는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빛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가 어떤 행위라 할지라도 그들은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게 되어서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게 되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들여다보면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감히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적으로 깨끗하게 씻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용서와 사랑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사람이 정말 같은 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해서 ‘죄
죽이기’의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의의 흉배’를 착용한 전투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내가 의롭게 살아
보겠다는 시도는 늘 죄책감과 고통과 속박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의롭게 살려고 하는 막무가내의 노력’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분을 아는 지식에 자라 가는 것‘입니다.
(벧후3:17-18)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이
우리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게 ‘기분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의의 흉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죄를 지을 때 그 외적 행위를 들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가 죄 지을 때 뿐 아니라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려 할 때도 공격을 합니다.
‘너 같은 인간이 무슨 기도를 해? 너 같은 인간이 무슨 예배를 해?’라고 우리의 과거의 죄나
현재 저지르고 있는 죄, 그리고 자격지심 등을 동원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럴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기도를 하고 무슨 자격이 있어서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난 자격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그 분이 홀로 의를 완성하셔서 나에게
전가시켜 날 의롭다 칭해 주셨다. 그래서 난 기도하고 그래서 난 예배 한다‘ 로 반박하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종교 행위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지요? 자격이 있어서 기도하고 자격이 있어서 예배하고 자격이 있어서 헌금하는 사람은 한

- 1077 -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공중기도 하는 것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공중기도를 하냐, 빼 달라’고 마치
겸손한 것 같은 요구를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야베스,
전 세계 크리스챤들과 카톨릭 신자들 심지어 불교인들에게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도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전심으로 부르짖어 하나님의 곳간에
저장되어 있는 우리의 복을 얻어내자,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야베스를 보라‘
이게 야베스의 기도이지요? 정말 야베스의 기도가 그 뜻인지 한번 보지요.
(대상4:9-10)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기서는 열왕기서와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서로 불리 우는 책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서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의 역사를 공히 기록한 것에 반해서 역대기서는 남 유대의 역사만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속에 들어 있는 다윗 왕국의 이야기가 바로
역대기서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대기서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들의 족보가 죽 나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유다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창49:8-10)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하나님의 이 은혜의 언약이 유다의 왕들과 유다 백성들의 행위를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여전히 불가능하고 패역하지만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역대기서입니다.
그 유다의 족보 중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그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실제로 그 기도응답을 받은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험상 성경이 갑자기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내용을 삽입해서 ‘열심히
간구 하면 복 준다, 존귀한 자가 되면 복 준다.’ 이런 이야기하는 책이 맞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로 말미암게 될 구원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뜬금없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역시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요?
역대상 4장 9절을 보시면 야베스는 존귀한 자라고 칭한 후에 그가 존귀한 자로 칭해지는
이유에 대해 나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수고로이 낳았다‘는 이유

- 1078 -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존귀한 자가 되었고 그는 그러한 존귀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절대 야베스가 다른 사람보다 열심을 더
부려서, 더 부르짖어서 존귀한 자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의 기도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10절 보시면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여기서 등장하는 복에 복을 ‘바라크, 바라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필연적 강조 용법입니다. 이 필연적 강조 용법이 어디에서 처음 나왔었지요?
창세기 2장 17절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 이게 바로 ‘죽음
그리고 죽음‘이라는 필연적 강조용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죽어야만 했던 자들 중 어떤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필연적 강조 용법을 써서 ’복에 복을 주리라‘라고 은혜의
언약을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기 2장 17절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구절입니다.
(창22:17)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자기가 죽어야 할 나무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시는 예수를 상징하는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의
사건 바로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큰 복이라고
번역이 된 ‘바라크, 바라크’가 바로 역대 상 4장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베스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야베스는 어떤 사람이었다고요?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내용을 잘 연결해 보세요. 이 야베스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고로이 낳은 존귀한
자식들인 성도들의 기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의 복을 구하고 추구하는 자들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고 완성하신다는 구속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수고로이 태어나게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의 자격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 구원에 관한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야베스의 이야기입니다.
(잠15:29)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만 들으세요. 그런데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지요? 그럼 누구의 기도만 하나님께 들려지는 것입니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분
중에 유일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만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14:13-14)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예수님이 간절히 간구

- 1079 -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으로 수렴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 기도가 뭡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들을 내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건져 올리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는 모두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도 궁극에 가서는 영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자격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보면서 ’난 이런 거 할 자격이 없어‘라고
판단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난 기도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라고 자폭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드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의의 흉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쉽게 무너지는 구원의 확신 문제도 바로 이 ‘의의 흉배’와 관련이 있는
대목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의 기분이나 감정을 좇아 구원의 확신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는 경험이 없으면
구원받은 것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구원 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구원받은 때를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 그 때에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다거나 여느 때와는 다른 특별한
기분이나 감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러한 특별한 경험이나 기분, 혹은 감정은
수시로 흔들립니다. 특별한 체험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던 사람은 그러한 특별한 체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불안해 집니다. 그리고 기분이나 감정이 흔들릴 때는 구원 자체가
함께 흔들리기도 합니다. 거기에 의의 흉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가해 주시는 의’라는 것은 우리의 체험이나 감정이나 기분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물론 나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에 뭔가 달라지는 ‘나’를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임하고 눈과 귀가 열려 그 때까지는 비밀로 감추어 졌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은혜가 깨달아지면서 점점 자신의 구원이 확인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관적인 체험에 우리의 구원을 근거하게 되면 우리는 늘 마귀의 미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을 흔들어 버리면 우리는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은혜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더욱
진지하게 알고 배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선행되지 않은 경험이나 체험, 기분, 감정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확하게 지 정 의 의 순서로 의가 성도에게 경험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롬6:17)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7절을 보시면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사람들은 전하여 준바 교훈(지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감정) 순종하여(의지)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의의 흉배를 잘
입기 위해서는 지식이 먼저 앞서는 것이고 거기에 감정이 유발되는 것이며 그 다음에
순종이라는 의지의 발동으로 순서가 매겨지는 것입니다.

- 1080 -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앎에서 기분이나 감정도 나오는 것이고 의지도 앎에서 출발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4:6)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앎‘은 행함이 수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너희가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삼상2:3)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참된 지식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시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먼저 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사모하며 연구하며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순종은 그 다음에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을 먼저 앞에다 놓아버리면 그 건 낭패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근거하지 않은 체험 그것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거짓 체험들을 많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만 좇다가 어느 날 그런 느낌과 흥분이
사라져 버리게 되면 이내 ‘난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지도 몰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모트가 찬송가 539장에서 한 고백은 이것을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예수의 보혈과 의 위에 세워져 있네. 나는 가장 달콤한 기분들,
감정들조차도 신뢰하지 않네. 오직 예수의 이름만 의지할 뿐이네
나는 굳건한 반석 되시는 예수 위에 서 있네. 다른 모든 토대는 무너지는 모래일 뿐이라 다른
모든 토대는 무너지는 모래일 뿐이라
주님의 사랑스런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질 때, 나는 그 그늘을 보지 않고 그의 변치 않는
은혜를 의지하리라. 높고 거친 풍랑이 일 때마다 나는 나의 닻을 그 은혜에 두리라‘
우리가 ‘의의 흉배’를 잘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 경험 같은
것에 흔들리게 되고 마귀는 거짓 기분, 거짓 감정, 거짓 체험으로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기분이나 감정으로 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병 고침을 받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은 이빨이 금이빨이 되는 그런 신비한 경험들에
심취하게 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마귀의
장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고치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들어 온
사망의 증상들인 질병과 귀신들림 같은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몰아내시고
사망을 죽여 버리실 것이라는 하나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사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지요? 여기서 질고‘호리’가 질병입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증상인 질병을
다 짊어지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마태복음에서 성취됩니다.
(마8:26-27)

- 1081 -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즉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은 모두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분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계시의 차원이었지 사도들에게
임한 어떤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바울 같은 사람은 사랑하는 디모데의
위장병도 못 고칩니다. 성경이 완성이 되면서 그러한 기적들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기적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병과 죽음, 귀신들림 같은 사망의 증상들을 모두 예수께서 짊어지시고
우리는 그러한 사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구속의 메시지가 그 기적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쫓겨 가고 질병이 치유되는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되는 사망의 세력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현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러한 질병의 치유나 축귀, 기적 같은 것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즉 구원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질병과 귀신들림, 죽음 같은 것들은 사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세상 사람들을
총칭하는 개념들입니다. 우리가 귀신들림 하면 벌벌 떨면서 입에는 거품을 물고 예수님을
욕하고 하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건 정신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림의 정확한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풍속과 원리를 좇아
복음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암에 걸리고 불치병에 걸리는 것을 질병이라고
정의하지만 성경 적 관점의 질병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적 불구자, 영적 감염자들을 질병을
가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교회에서 ‘귀신이 나갔다. 질병이 치유되었다.‘
라는 것은 단순히 암이 낫고 정신병이 치유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를 알게 되는 사건을 ’질병치유, 축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노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감정과 기분을 자극해서
진짜 은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 들린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귀신 들린 자들입니다.
(마12:39)
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보세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귀신들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시는 모든 표적은 요나의 표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복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우리가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시 병에 안
걸리나요? 정신이상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영원히 삽니까?
오히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결국 육신은 썩어질 유한한

- 1082 -
것이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 소망해야 하는 곳은 저 하늘나라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배웠다면 그게 복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영적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침으로 우리가 마땅히 영적으로 얻어 누려야 할 기쁨을 육 적
기쁨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그게 어찌 귀신들린 자가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복음에 의한 영적 기쁨이 아닌 육 적 기쁨을 세상에 쏟아 부음으로써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귀신들린 자들이 보이는 기적들 좇아 다니지 마시고 의의 흉배를 입으세요.

마지막으로 시련과 환난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봐’라고 절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는 이 땅에서의 성공이나 부귀영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룻기를 통해서 거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십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에 이민을 갔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죽게 놔두셨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거지가 되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룻1:20-21)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벌하시고 치셨다고 했습니다. 풍족했던 자기를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룻이 그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룻은 지금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하나님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어떻게 처참하게 만들었는지를 곁에서 다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외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를 망하게 만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외적인 환경의 몰락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것들, 남편과 두 아들을 의지하던 나오미에게 ‘나만 의지하라’고 그녀가
세상에서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빼앗아 가 버린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그게 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시련과 고난 앞에서 절대 자포자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겸허히 순종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처참하게 망해버린 나오미의 삶 속에서 다윗을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십시오. 우리의 목표지점이 그 하나님의 목표지점과 맞아
떨어지기만 한다면 도대체 뭐가 우리를 미혹할 수 있으며 무엇이 우리를 낙담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목표지점과 우리의 목표지점이 서로 다른 곳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잘 정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우리를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에게 넘어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며
항복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의를 알고 깨달은 사람은 마지막 때의 의인의 부활을 소망하며 반드시 자신의

- 1083 -
손발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행 24장 15절과 16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행24:15-16)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 1084 -
(88) 평안의 복음의 신
(엡6:13-15)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우리는 지난주에 진리의 띠와 의의 흉배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하나님 주시는 ‘의’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의 복을 누리기는커녕 불안한 마음과 흔들리는 신앙 속에서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게 된다고 했지요. 그러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은혜의 ‘의’를 힘입은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마틴 루터의 전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고


도망을 다니다가 어느 성에 숨어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하고 있을 때 루터는 마귀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루터의 말에 따르면 마귀는 성도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나 공포를 여지없이 타고 들어와서 그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루터는 평소에 이교나 무당들에게서 나타나는 귀신들에 대한 공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고 복음을 깨닫고 거듭난 이후에도 그 두려움과
공포가 완전히 씻겨 지지 않고 그냥 습관처럼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실제로 그 공포를 이용해서 자기를 공격하더랍니다.
성경을 번역하다가 잠을 자러 침대에 누우면 옷장에서 어린아이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답니다. 그리고 이불 속에는 시커먼 개가 날카로운 이를 내 놓고 자기를
물어뜯으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고 해요. 루터가 그 개를 들어서 창밖으로 집어던지면 그
개는 떨어지면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옷장을 열면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어린아이도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리고 없더랍니다. 루터의 전기 내내
자주 나오는 말이 ‘마귀는 나의 방에서 나와 함께 늘 붙어 다녔다. 한 시도 나를 떠나지 않는
그에게 ’나 이제 자려고 하는데 너도 가서 자‘라고 조롱해 주었다’입니다. 한번은 너무나
집요하게 ‘너는 죄인이야, 너 같은 것이 무슨 종교 개혁이야, 네가 진짜 옳아?’ 라고 속삭여서
그 속삭이는 마귀에게 잉크병을 집어던지기도 했고, 글을 쓰던 펜을 집어 던져서 나무 벽에 그
펜이 꽂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루터가 죽기 3개월 전까지 ‘하나님 정말 제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요? 제가 한 일이 옳은 것입니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니 사단의 미혹은
정말 집요하기 그지없습니다. 루터가 진리를 몰랐을까요? 루터가 ’의‘를 몰랐겠습니까?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그라티아’ ‘오직 성경과 오직 은혜‘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종교개혁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도 그 정도로 시달립니다. 마귀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그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확인하지 않으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언젠가 칼럼에다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는 글을 썼지요. 그 말은
회의론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단이 역사를 타고 내려오면서 언제 어떻게 진리를
왜곡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쑤셔 넣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철썩 같이 진리라고 믿고

- 1085 -
있는 것조차도 ‘혹시’라는 열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연구하고 공부하자는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군사 된 자로서의 무장이며 갑주 인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어떤 여 전도사님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뇌종양을


앓고 계신데, 거기에다 신부전증과 갑상선 암까지 앓고 계셨습니다. 의사도 이제 길어야 3개월
정도 살 거니까 준비를 하라고 호스피스를 집으로 보내주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선고를 받고 나니까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더랍니다. 남들은 하나도 걸리기
힘든 병을 몇 가지씩이나 고통 속에서 앓다가 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기도
하고 해서 매일 매일 울면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분이 병문안을 오셔서 저희
교회 설교 테잎을 열 개정도 가져다 주셨대요. 그래서 그 분이 가신 다음에 테잎을 틀었는데
제가 하는 첫 마디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여러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데 불만 있으십니까?’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도 대뜸 ‘불만 있습니다.’
그랬대요. 그러고 나서 너무 신경질이 나서 테잎을 끄고 곰곰이 생각을 했답니다. 그 동안
자기가 너무나 자신의 신세타령에 몰두하고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며 자신이
받은 선물이 어떤 것이며, 구원받은 자기가 가게 될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너무나 오래 동안 자기의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어서 그
문제 위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을 보지 못했답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을
복음을 묵상했대요. 왜 예수님이 오셨으며 나에게 무엇을 주시기 위해 오셨는지 그리고 왜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했으며, 나를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잘 정리를 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손해 본 것이 하나도 없더래요.
그런데 왜 그 동안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했을까? 이렇게 복음을 머릿속으로 정리만 하고
있어도 이토록 평안이 임하는데 도대체 뭐가 나를 그토록 복음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을까?
생각하다보니 얼른 ‘아 나에게는 대적이 있지’하는 생각이 드시더랍니다. 그러고 나니 소름이
오싹 끼치더래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그 사이를 삐 집고 들어와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투정이나 부리고 눈물 속에서 그 귀한 세월을 보내게 한 그 마귀가
자기 곁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랍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설교에서 귀신같은 게
나타나면 그건 단지 거짓말과 속임수로 성도를 속이는 존재이니까 박치기로 받아버리라고
그랬다나요. 그래서 큰 소리로 ‘저리 꺼져‘ 그러고 계속해서 설교를 들으시고 성경을
공부하시고 하신대요. 지금은 너무나 평안해서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 만날
날을 기다리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만일, 제 처지라 하더라도 목사님
그렇게 용감하실 수 있지요?‘그러고 끊으셨는데 제가 대답을 못했어요. 별로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크게 아파 보지 않아서, 사단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마구 쏟아 넣을
때 제가 어떻게 나올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에게 항상 무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복음의 신‘하면 생각나는 구절들이 있지요?
(사52:7)
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 1086 -
그리고 이 구절을 인용한 로마서10장15절도 생각납니다.
(롬10:15)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분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복음의 신’을 단순히 전도에만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이런 구절들과 연결시켜서 해석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마귀와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전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마귀와의 싸움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3:8)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보세요. 복음은 나 혼자 구원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을 받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까지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곳에
가서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깨달은 자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른 마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에게서는 다른 이들에게 그 복된 소식을
전해주는 삶과 언행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관계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흘리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다는 구절의 의미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타지로 떠나는 선교나 전도 여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은 사람과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은 사람이
마귀와 싸우며 지속해 나가는 신앙생활 바로 그 자체가 전도이고 그 전도가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그 복음의 신에 대해 자세히 한번 살펴볼까요.


우리가 아무리 허리띠를 잘 매고 흉배를 잘 대었다고 해도 발이 부실해서 자주 미끄러지거나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그 군인은 절대 전투를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투에 임하는 군사가 신는 신발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현대의 군대에서도 그 군대가 전투를 치를 곳의 지형과 기상 그리고 전투의
종류와 양상 등에 맞추어서 군화를 제작합니다. 순발력이 필요한 전투에서는 발목을 천으로
만든 군화를 지급합니다. 베트남전처럼 게릴라전이 주를 이루는 전투에서는 발바닥에 징과
철판을 깐 군화를 지급합니다. 부비트랩이나 못, 송곳 같은 함정에 적합한 군화지요. 당시 월남
전에서는 베트콩들이 밟으면 발바닥을 뚫고 들어오는 대나무 못이나 철 못 같은 것으로 함정을
많이 만들어 놓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산악지대가 많은 곳에는 발목까지 단단한 가죽으로 덮은 군화가
필요합니다. 뛰다가 돌이나 나무뿌리에 쉽게 발목을 다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군화,
신발은 기동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전투에서 기동력은 승패를 좌우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그리고 징기스칸 같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그 많은 승리를 거둘 수

- 1087 -
있었던 것은 그들이 공히 빠른 기동력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전투에 맞게
자기의 군사들에게 신을 만들어서 제공해 주었다고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알렉산더가 제작한
신발을 그대로 모방해서 신은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그 로마 병정들이 신었던 징이 박힌 딱딱한 밑창에 가죽 끈으로 단단히 붙들어
매게 되어있는 샌들을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입었으면
이제 일어서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은 이후에 가만히 유유자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고 뛸 신발이 필요한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신앙생활에는 기동력이
필요하다니까요.
(겔37:1-10)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우리의 구원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셔서
‘군대’로 만드십니다. 그 말은 살려낸 자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쓰시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자로 만들어 놓으신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
공부할 때도 살펴보았지만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는 144,000명을 계수 할 때 굳이 민수기의
군대 계수 장면을 인용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민수기에서도 이스라엘을 계수 할 때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장정만을 계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도, 영적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싸워야 하는 군사들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살아난 것으로 잔치만 벌이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급히 신을 신고 어디로 가야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전쟁터로.

- 1088 -
바울은 그렇게 전쟁터로 달려야 하는데 꼭 필요한 신발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아무리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대었어도 복음이 없이는 옴짝달싹 못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진리’나 ‘의’나 ‘복음’이나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신어야 할 신이 바로 ‘복음’인데 그 ‘복음’은 ‘예비 되어야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이라고 나오지요. 거기서 ‘예비’라고 번역이 된
‘헤토이마시아’는 ‘준비’ 혹은 ‘장비’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늘 준비되어져 있어야 하는 ’진행형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안 그러면 마귀가 그 틈을
타서 공격을 가하게 되고 우리는 기동력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는 착한 일로, 혹은 종교 행위로 오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으로 준비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 준비된 복음의 신을 신고 있지
않으면 사단이 만들어 놓은 뾰족한 함정에 빠져 언제든지 발을 다칠 수 있게 되고, 그 발을
다친 병사는 전투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전우들에게 폐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 된다‘ 혹은 ‘준비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먼저 우리가 복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를 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오늘은 신명기로 가서 복음을 찾아보겠습니다.
(신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 1089 -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 무죄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올라 어떤 맹세를 하게
하십니다. 레위 지파를 시켜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계명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이 모두 어떻게 끝나는가 하면 ‘이거 안 지키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하고 마쳐집니다. 그게 하나님의 행위 언약입니다.
(겔18:20)
20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내야만 합니다.
(신28:1-35)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 1090 -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
25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
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29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아 감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지나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33 네 토지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신28:58-62)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 1091 -
것이며
61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행위 언약 아래 두십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전7:20)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3:10-18)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 낼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다
저주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무리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깨실 수 없는 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디아데케’ ‘유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유언은 약속은 약속인데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상속해 주는 약속이지요. 그 언약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아데케’는
약속과 유언이라는 내용이 동시에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언약을 주시면서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 두 마리를
쪼개 놓으라고 하시고는 그 사이로 혼자 지나가신 것이 바로 이 ‘디아데케’ ‘언약’ ‘유언’의
내용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약속은 약속인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지켜내시는 약속.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한
복을 거저 주셨습니다. 그 복이 어떤 것인지 한번 보자고요.
(히1:2)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표준 새 번역)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상속받으실 그 분의 장자이십니다. 앞으로 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만물도 그 분께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장자라 불러주십니다. 장자는 항상 상속과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 1092 -
(히2:23)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만물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롬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표준 새 번역)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확실성을 ‘양자’라는 단어를 써서 강조해 줍니다.
(롬8:15)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쓰인 ‘양자‘’휘오떼시아‘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산 상속을 받게 되는 법정 적 용어입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적자, 친아들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되었지만 양자에게는
반드시 유산을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의지를 ‘양자’‘휘오떼시아’라는 단어를 통해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엡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도 ‘아들‘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사실 ’휘오떼시아‘’양자‘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주고자
한 것은 반드시 주고 말겠다.’ 그게 양자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단어들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 우리는 의붓아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함께 공동상속한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이 드는가?
(빌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이라고 번역이 된‘에피에이케스’는 히브리어의 ‘아니’와 같은 단어인데 그 단어가
스가랴서에 나옵니다.
(슥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여기서 ‘겸손하여서’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니’입니다. 그러니까 ‘관용‘’에피에이케스‘는
구원과 관련 있는 단어이고, 그 구원을 위해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에피에이케스‘ ’관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성도에게 그 관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보잘 것 없이 살고 있는 것은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억울하게 빼앗겨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용을 보이고 있는

- 1093 -
것입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는 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용’을 보이는
자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 삼으시는 그러한 구속 사건을 반드시 피로써 완성시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속은 그냥 구속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려내는 구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레17:11)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살아나게 되었고 이렇게 소망 속에서 우리 하나님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어디서든 그 복음을 잘 준비하고
있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꺼내서 확인하고 내 놓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5분대기 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5분 만에 그 상황 속으로
침투해서 그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5분대기 조에 걸리면 일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신발을 못 벗습니다. 잘 때도 신발을 신고자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5분대기
조처럼 늘 복음의 신을 신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단이 어떠한 모양으로 공격해 올지라도 신속하게 막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기동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복음으로만 무장하는 기동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을 때에 사울이 그의 갑옷과 큰칼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 다윗에게 맞지가 않았습니다. 만일 다윗이 그 사울의 갑옷과 큰칼을 들고 골리앗 앞에
나갔다면 절대 골리앗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맞는 물맷돌 다섯 개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부차적인 무기들을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김용옥 씨
같은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도 열심히 철학을
공부해서 철학으로 김용옥 씨를 누르고 그에게 기독교를 변증하겠다는 시도들을 합니다.
그리고는 망신만 당하고 슬그머니 도망치지요. 어떤 사람들은 과학으로 하나님을 변증하겠다고
과학자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절대 이 세상 학문으로 하나님을
변증하거나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그건 거추장스러운 사울의 갑옷인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만을 신고 기동력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신’입니다.
거추장스러운 프랑켄슈타인의 신발은 다 벗어버리세요.

그렇게 복음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시고 베드로가 사형
집행일 바로 전 날에 감옥에서 코를 골며 잘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평안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는 것이 바로

- 1094 -
그리스도인의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오직 복음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평안입니다.
(렘6:14)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표준 새 번역)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고쳐주며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요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세상 적인 평안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병이 낫는다든지
소원이 들어진다든지 기적이 일어나 사업이 회생된다든지 하는 그런 데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는 평안은 그와 정 반대의 평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눅12:50-53)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분명히 ‘내게 있는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으면서 여기서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라고 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아예 평안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평안, 예수님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정말 예수로 말미암아 그 평안을 지니게 되셨나요?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불안하세요? 여러분이 지금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을 하나씩만 다 떠 올려 보세요.
무엇 때문입니까? 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세상 것들 때문이지요? 평안의 복음으로
예배한 신을 신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불안함, 좌절, 절망 속에서 자폭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안의 복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롬5: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렇게 하나님 주시는 평안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게 되는지 볼까요?
(고후5:18-20)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 1095 -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에게는 다른 이들을 화목케 하는 직책이 주어졌습니다.
(롬12:16-21)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6절에 보면 복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낼 수 있는 지에
대해 나옵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마음을 두면” 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찾아 온 돌연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높은 데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복음을 알면 알수록 나는 자꾸 죄인중의 괴수인 것이 판명이 나는데
어떻게 높은 데 마음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사1:13-17)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를 책망하시는 장면인데 ‘너희들은 겉만 번드르르한 종교행위 하지
말고 학대받는 자들 도와주며 고아와 과부를 돌봐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인간의 죄에 대한
경고의 말씀의 결론이 고와와 과부를 돌보라는 명령으로 끝이 날까요?

고아와 과부라는 것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약속의 땅 가나안에 고아와 과부를 허락하실 까요?
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삭을 주워서 먹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있게 하실 까요?
(레19:9-10)
9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 1096 -
아니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난한 자를 생기게 놔두실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일을 막아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들어와서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고
거지가 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를 받은 자,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로서 그들이 받은 은혜와 긍휼이 무엇인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고아와 과부는 ‘우리는 원래
이렇게 나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고, 고와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도 원래
저렇게 고아와 과부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존재였는데 이렇게
생명을 얻고 복을 얻게 되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이 받은 긍휼과 은혜를
가시적으로 이 땅에서 재현해 냄으로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나의 구원에서 끝이 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복이 전달되는 것까지
인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지니게 된 사람들은 그 평안으로 다른 이들을 평화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 된 신을 신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빌2:2-4)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깨고 들어옵니다. 사단은 우리가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화평한 것을 눈뜨고 못 봅니다. 그래서 늘 그 관계를 깨고 들어와서 우리를
다툼과 분열과 시기와 이기심으로 자폭시키려 하지요. 그 때 평안의 복음으로 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의 복음으로 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서 어떠한 유혹과 미혹이 여러분을 흔들어도 절대
흔들리지 마시고 늘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주위가 화평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 1097 -
(89) 믿음의 방패
(엡6:13-17)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믿음의 방패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저희가 왜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는 잘 확인하고 계신
거죠? 우리에게는 대적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 대적들의 공격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굳게 서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행한 후에‘라고 번역이 된
’카텔가조마이‘는 ’완수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분명 무언가 완수하고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게
성도가 완수하고 성취해야 할 그 것을 잘 완성해 내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13절에 ’서기 위함이라’에서 ‘서다’라는 단어는 ‘히스테미’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붙잡다, 고정하다, 이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구원이라는 선물을 이 시간으로 제한 된 공간 속에서 우리의 이성과 육신을 가지고 경험하며
맛보며,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기 위해, 다른 말로 꼭 붙들고 고정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마귀의
공격을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소에서 ‘모의 전투’라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을지훈련’이나 ‘화랑 훈련’ 같은


가상 전투 훈련도 합니다. 그러한 가상 전투 훈련은 병사들이 실전에서 용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가상 적군’을 부대로 투입시켜서 전술과 전략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경계를
소홀히 하거나 그 가상 적군들에게 당해서 작전 상황실에 모의 수류탄이 들어오면 그 부대는
징계를 받게 되지요. 마귀는 그렇게 우리 성도들의 훈련과 성숙을 위해 구속사 속에서 ‘가상
적군’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적 전쟁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이
된 사람들의 성숙을 위한 싸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고지를 점령한 승리자들로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신
갑주의 내용이 방어 무기 일색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워서 쟁취해 내야 할 것이 있어서
전신갑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치르시고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승리의 전리품을 잘 지키는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히스테미’‘고정하다, 확고히 붙잡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마귀의 공격은 단순히 우리로 범죄 하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범죄를 하게 만들거나 의심, 타락, 절망 같은 것을 불어넣어서 우리가 우리 주님이
이루신 승리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며 불안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선물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데에 최종적인 목적이 있는

- 1098 -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마귀를 잘 이기고 있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실제로 죄로부터
자유 함을 누리고 거룩한 생명을 잘 누리고 있는 상태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면 그 전쟁에서 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전히
범죄하고 다투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절망하는 삶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지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 전쟁에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그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계신 분이신 지,
아니면 ‘전신 갑주‘고 뭐고 다 팽개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계신 분이신 지 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를 하면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구원‘이라는 것을 믿으며 누리며 경험해 나가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의 우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난
멍청하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의 이런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세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퍼부으셔서
애굽에게 항복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어서 이 애굽을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소리를 듣고 ‘이왕 할
거면 끝까지 다 해주세요. 난 하나님께 다 맡겼으니까 하나님이 날 들어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집어넣어 주세요.’ 이게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까?
어떤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지요? 요단강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건너라고 하시니 건너겠습니다.’하고 건너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다 갈라서 마른땅처럼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주시기 전까지 전 절대 못 움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의미를 너무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결론을 맺으실 것을 알기에
난 그 것을 굳게 믿고 그렇게 실행에 옮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으로 옮기실 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원망하고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광야에서 다 죽여 버리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려고 할 때 인간이 반응을 안 하면 그 구원은 취소시키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손발을
움직이게 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은 그러한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을 다중 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전혀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의 빛을 비추시고 좋은 것을 좋은 줄로 알도록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복됨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동의와 간절한 열망과 주관적 의미의
믿음을 만들어 내시는 ‘설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복음의 빛에 비추임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손발을 움직여서 그들의 인생 동안에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네 번째 장비인 믿음의 방패에 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 1099 -
존 번연이 쓴 천로 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찬이 겸손의 골짜기를 지날 때 무저갱의 사자
아볼리온이 다가오지요. 그 때 크리스찬이 겁을 먹고 돌아서서 도망가려고 할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아차 내 가슴에는 흉배가 있고 내 손에는 방패도 있지만 내 등에는 갑옷이 없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크리스찬은 아볼루온과 맞서기로 했습니다. 아볼루온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 때 크리스찬이 ‘나는 멸망의 성에서 살다가 그 성을 떠나
지금은 시온 성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볼루온이
‘그럼 넌 내 밑에 있던 놈 아니냐? 다시 내게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너를 여기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그 때 크리스찬이 ‘난 이미 참된 왕에게 나를 바쳤기 때문에
너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볼루온이 크리스찬에게 불화살을 쏟아 붓지요.
크리스찬이 방패를 들어서 다 막아냅니다. 존 번연이 바로 이 에베소서 6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장면을 쓴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믿음의 방패‘라는 구절 앞에 ’모든 것 위에‘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나 의의 흉배나 평안의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썼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나머지 모든 것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이라는 방패는 아주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울이 살던 시대의 로마 군인의 방패는 ‘스쿠툼‘이라 불렀는데 가로가 0.7미터 세로가
1.2미터였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덩치의 군인은 조금만 숙이면 그 방패 안에 자기 몸을 다
감출 수 있었습니다. 그 방패는 나무판에다가 가죽을 붙이고 앞면은 철판으로 덮여있었습니다.
그 방패는 각개 전투를 할 때는 너무 커서 들고 싸우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럼 어떨 때 주로
썼느냐 하면 불화살이나 불창이 날아 올 때 그 걸 막는 것이 ‘스쿠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의 방패’를 언급하면서 ‘악한자의 화전을 막기 위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화전’이 바로 불화살입니다.
전쟁에서 ‘화전’은 주로 먼 거리에서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공격의 길을 닦는 목적으로 쏘는
불화살이나 불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방패로 막아야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향해 툭툭 던져 보는 그러한 공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소, 의심, 악한 생각, 잡념,
불순종, 배반의 마음, 탐욕과 악의,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 원치 않는 것인데 가끔
불쑥 불쑥 우리 마음에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이 있지요? 바로 그게 마귀가 던지는
화전들입니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마귀가 그러한 화전으로 파상 공격을 해 올 때 믿음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못한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지요.
믿음이 뭡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내가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명령은 뭘 어떻게 하라는 명령일까요?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명령은 믿음을
만들어서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 안에 부어 넣으신 ‘믿음’을 행사하라, 발휘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에 관해서는 조금 있다가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라‘고 하지요. 거기서
’소멸하다‘’스벤뉘미‘라는 단어는 ’즉시 꺼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화전으로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는 하루 이틀 그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미 마귀의 의도대로 헛되이 분노하고 헛되이 범죄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시달리게

- 1100 -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좋지 않은 생각이고 이상한 생각이라도
별 의심 없이 그저 자기 생각이려니 하면서 그 것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그 것을 곰곰이 되
씹습니다. 한참 그런 생각에 몰두해 있으면 결국 그 사람은 공연히 분노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좌절과 낙망에 빠지거나 또는 더러운 생각을 깊이 받아들여 더러운 행동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골3:10)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지식까지도 새롭게 창조해 놓으셨고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우리 안에서 솟아 나오는
생각들은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연 의심과 허무함과 절망과
좌절의 생각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그 것이 ‘악한 자의 화전’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인 양 속이는 것입니다.
그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의 대적의 실제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악한 자‘’포네로스‘는 실존하는 인격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존하시는 인격체로 믿는다면 악의 실체에 대해서도
실존하는 인격체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지은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를 잘 보면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원래 영어 찬송가는 ’이 땅에 마귀 가득 차’입니다. 루터가 볼 때는 이 땅에 실존하는 인격체인
마귀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또 그게 사실이고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거기서 ‘악’이 바로 ‘악한 자’라고 했지요? 주님께서도 마귀들이 우리
성도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공격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런 기도를 다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루터는 실제로 마귀하고 밤을 새워 자기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논쟁을 주고받았는지 나중에는 진땀이 나고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루터가 그 논쟁의 마지막에 마귀더러 ‘그래 난 그런
사람이야. 네가 말한 것처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거룩한 마귀야 나를 위해
기도해 주렴’ 루터의 말에 따르면 마귀는 자기를 조롱하는 말이나 비아냥대는 말을 무척 싫어
한답니다. 그건 뭐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니까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여튼 루터는 마귀를 비아냥대면서 겨우 겨우 하루의 논쟁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귀는
실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귀의 실존에 대해 너무 무지하며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에게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마귀가 어떻게 우리에게 화전을 던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마귀가 흔하게 사용하는 화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려고 할 때 집중이 잘 되십니까? 꼭 마음먹고 기도만 하려고 하면 온갖
잡생각이 다 들지요? 집에 가스 불은 끄고 왔나?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까? 우리 아이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을까?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잡생각들이 몰려들지 않습니까?
저는 예전에 청년 부 때 새벽 기도를 하는데 새벽기도 시간 내내 떠나지 않고 저를 괴롭히는

- 1101 -
생각이 ‘혹시 사찰 집사님이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르고 기도 다 끝내고 나만 남겨두고 문
잠그고 가면 어떻게 하나’ 이 생각하느라고 괜히 소리 높여 기도하고, 일부러 부스럭거리고
그러느라고 기도를 못 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저를 덮는 거지요. 결국 이렇게
기도하려면 뭐 하러 기도는 하러 나오니? 그렇게 자신에게 실망하고는 새벽기도를 그만 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먹고 성경을 읽으려고 펴면 꼭 그 때 잡생각이 들지요. 그렇게 잡생각 5분만


하다보면 피곤해서 잠이 들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성경을 펴면서 잠이 드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슨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미처 다 읽지 못하고 ‘태초에 천지를, 태초에 천지를’에서 머무르다 결국 곤히 잠이 들어
버리지요.
여러분 신문이나 잡지를 보시면서 잡생각 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 땐 너무나 정신이
또렷또렷하지요? 완전히 ‘달고 오묘한 그 잡지‘ 아닙니까? 청소년들이 성경 공부하느라고 밤은
못 새워도 포르노 사이트 서핑하면서는 3박 4일도 꼬박 새운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누구 험담하면서 잡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럴 땐 너무나 집중이 잘
되지요? 그런데 왜 꼭 기도만 하려고 하면,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잡생각이 떠나질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의 대적이 살아서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몽’ 같은 드라마 볼 때는 초롱초롱 밤을 새우는 데 설교 시간만 되면 잠이 오는
사람들 있지요? 그것도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이번에 시애틀에 집회를 갔을 때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 곳 LA에 계신 분들도 참 고생들 많이 하시지만 그 곳에 계신
분들은 거의 하루에 12시간에서 16시간씩 일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16년 만에
처음으로 토요일을 쉬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집회에 참석하시겠다고... 그 중에 장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셔요. 그런데 설교시간에 조셨던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저에게 ‘목사님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처음부터 졸겠다고 마음먹고 조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은 머리가 앞으로 끄덕 끄덕 숙여 진답니다. 그런데 졸지 않으려고 애는
쓰는데 정말 불가항력 적으로 조는 사람들은 머리가 뒤로 넘어간 대요. 그러면서 자기 머리가
뒤로 넘어가는 거 보셨냐고 애교스러운 변명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오랫동안 끊었던 ‘중독, 집착‘ 이런 것들을 다시 저지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술을 아주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전혀 술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술로써만
해결되었던 내 마음속의 공허가 이제 다른 것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옛
날에 마셨던 그 술맛과 냄새가 뇌 속에서 재생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말씀 준비하다가 술 생각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모습.
상상만 해도 웃기지요? 그러한 것들이 바로 사단의 화전인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의 방패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마귀는 그렇게 우리에게 화전을 던져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아 난 정말 참 신앙인이 아닌가봐.


어떻게 내게는 기도와 성경이 이렇게 멀기만 할까?’ ‘그래 내가 무슨 성경을 읽어’ 이렇게
절망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에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렇게 마귀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방해 할 때 ‘아냐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어 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난 하나님의 말씀을

- 1102 -
사모하여 성경을 폈다. 그런데 지금 실존하는 마귀가 나에게 화전을 쏘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이라도 열심히 외우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마귀가 자주 쓰는 화전이 ‘의심’과 ‘터무니없는 생각들’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찾아와서 ‘의심과 불신’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나 마틴
루터 같은 훌륭한 목사님들도 자주 자기의 구원에 대한 의심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내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진짜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건가?’‘괜히
있지도 않은 하나님 믿는다고 아까운 청춘만 낭비하는 건 아닌가?’ 마귀는 이런 의심과 불신을
마구 불어넣습니다. 멀쩡하게 신앙생활 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의심이 들지요? 그게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불경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이상하게 예수님에 대한 욕도 막 나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며칠 동안 하루 종일 예수님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이 머릿속에
맴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말 절망했지요. ‘내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맞다 면
어떻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한 욕이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맴 돌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정말 절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책을 읽다보면
그 훌륭한 분들이 똑같은 경험들을 다 하셨더라고요. 그게 바로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 마귀가 자주 쏘는 화전이 상상력의 화전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광경도 그려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과 욕망의 상상을 실제로 어느 정도 현실화도
시켜 줍니다. 마귀는 성도의 마음속에 갑자기 욕정을 불어넣고 그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도 넌지시 던져 줍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근거 없는 열정과 희망에
사로잡혀서 흥분을 하게 되고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게도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이런 내가 무슨 그리스도인이냐’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마귀는 물리적인 박해를 가함으로 화전을 쏘기도 합니다. 마귀는 장기간 혹은 단기간의
국가적 박해 혹은 집단적 박해를 가해서 성도를 무너뜨리려고 시도를 합니다.
역사상 기독교를 핍박했던 악한 통치자들이 다스리던 시절에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정말 그들의 믿음 생활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그러한 핍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의 방패를
높이 들고 그 화전을 이겨내었습니다.
(벧전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보세요. 마귀의 공격이 ‘고난’으로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의 방패를 높이 들라는
것이지요.
(요일5:4-5)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1103 -
이렇게 마귀의 화전이 쏟아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더러 믿음을 만들도록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에
부어진 믿음을 얼마나 발휘하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부어지는 마귀의 화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들은 믿음도 없는 불신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귀는 절대 불신자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냥 놔둬도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공격합니다.
(벧전1: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우리 성도들은 우리에게 당연히 마귀의 화전이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자만이 그 화전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믿음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답이 데살로니가 후서
3장에 나옵니다.
(살후3:1-3)
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여기 보시면 사도 바울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기술을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부 악한 자의 화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바로 그 앞에 보시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악한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뭡니까?
기도입니다. 기도는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발휘가 크면
클수록 마귀도 더 거센 공격으로 달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내용에 관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간 믿음에 대해서


여러 번에 걸쳐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에는 당연히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는 믿음은
‘환상이나 상상’이라고 하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체인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보이지
않는 실체가 계시 화되어 어떤 존재에게 믿겨 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믿음에는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실체가
자신을 계시하는 ‘계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계시를
통해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를 ’실존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신념이나
지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 1104 -
’믿음‘은 나의 신념이나 결심, 지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이 세상의 중심에 놓고 오직 ’나‘만을 믿으며 ’나‘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이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예수라는 것을 계시를 통해 사실로 알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입으로 삶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믿음의
발휘‘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표현하면 ’믿음의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의 발휘를 도출해 내는 그 계시는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해 직접적인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이 된 후에는 그 성경
말씀만으로 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라는 직분 자체를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며 살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믿음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직통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벽에다가 글을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인 벨사살 왕의 잔치에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벽에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쓰시지요? 그렇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한 사람들을
‘선지자’‘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거기서 ‘예언자’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라 ‘맡길 예(預)’
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단순히 앞일을 예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을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중에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있지요? ‘하나님께서 오늘은
신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고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신장에 문제가 있으신 분들은
거기다 손을 대시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고치시겠답니다.‘ 이러는 사람들 있지요?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라고
하는 자들은 100% 가짜입니다. 그 사람들 사실은 무당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속지 마세요.

예전에 어떤 시사 프로그램에 어떤 무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부산에 사는 무당인데


얼마나 용한지 부자들, 정치인들이 줄을 잇는 그런 유명한 점집이었습니다. 보통 큰 굿 한 판에
5 천만 원 정도를 받고, 액땜을 하는데 2억에서 4억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사기전과 5범이었고 또 지명수배 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복채를
현찰로 받았습니다. 수사관들이 그 집을 들이닥쳐서 수색을 하는데 커다란 이민 가방 몇 개에
만 원 짜리 현찰이 수북했습니다. 그 집안에서 현찰이 수십억 원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불상
안에도 만 원짜리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그 사기꾼한테 4억을 뜯긴
사람이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그 사기꾼이 액땜을 하려면
굿도 굿이지만 실제로 그 액운을 가진 당사자가 영험한 신과 함께 그 액운이 다 가실 때까지
그 신에게 봉사하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공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매한 사람이 그
무당에게 매를 맞으면서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찍 소리 못하고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 액운만 나가면 난 행복해 질 거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품고 몇 년째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자기의 액 땜, 자기의 행복, 자기의 출세‘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 1105 -
앞일에 대한 예언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것을 주겠다고 하는 자에게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람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상대방의 말에 꼼짝을 못하지요. 무당들이 점치러 오거나 굿하러 온 사람에게 존대 말 하는 거
보셨어요? 전부 반말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그 무당 짓거리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하면
일단 교인들이 그 앞에서 꼼짝을 못합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한테도
아무한테나 반말 지꺼리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한테 기도 받기 위해 줄을 섭니다.
여러분 성경의 예언은 절대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언자들이 한 예언 중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은 그런 경우에라도 단순히 인간의 앞날,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미리 약속하시는
것을 ‘예언(預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15:12-17)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4백 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이고 그 후에 큰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나올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약속은 분명하게 이루어졌지요. 성경은 이러한 것을 ‘예언‘이라 하는 것입니다.
(출6:3-9)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평생

- 1106 -
종살이하게 내버려두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출애굽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반드시 성취라는 결과를 품고 있습니다.
(신18:15-22)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그러니까 진짜 선지자들, 진짜 예언자들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예언의 말씀 전체를 ‘계시’라고 하고 그
것이 사실로 믿어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마귀의 화전을 막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잘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휘하는 것을 ‘믿음의 발휘, 믿음의
방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음 시간에 조금
보충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107 -
(90) 믿음의 방패(II)
(엡6:13-16)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지난주에 믿음의 방패에 관해 다 마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믿음의 방패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악마의 화전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항상
믿음을 굳게 붙들고 있어야 믿음이 발휘될 수 있으며 그 믿음의 발휘를 가리켜 ‘믿음의
방패’라고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계시’를 통해 오게 되는데 그 ‘계시’는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해되어 질 때 비로소 그 성경 말씀은 계시로서의 효과를 발휘 할 수 있음을
주지시켜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계시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냥 도덕과 윤리, 혹은 허구를 기록해 놓은 허무맹랑한 잡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시비를 걸고 들어간 것이 어떤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시비를 걸다가 시간이 없어서 끝을 맺지 못했지요? 왜 제가 믿음의 방패를
설명하면서 그러한 계시와 예언을 끌고 들어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도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아서 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을 무지한 사람들이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치 그런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인 양
허세를 부리지요.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미리 예(豫) 자가 아닌 맡길 예(預)자 예언(預言)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불가불 세상에 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예언자를 히브리어로 ‘나비’로 표기합니다. 그
‘나비’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라는 의미의 ‘나바’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도 ‘예언자’를 헬라어로 ‘프로페테스’라고 표기를 하는데 이 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라는 의미의 ‘프로페테우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이라는 말은 앞일을 예견하는 predic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달하는 prophecy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예언은 모두다 ‘죄인들의 멸망과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이게 예언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 예언은 모두 ‘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가?’를 깨우치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선지자, 예언자들의 예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에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구원’이라는 울타리 밖의 예언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예언과 비교해서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이 받고 있다는,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점
쳐주는 그러한 가짜 예언은 오히려 믿음과 전혀 상반되는, 믿음의 방패를 부수어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이 세상 것은 다 멸망할 것이니까 하늘의 것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자‘로 결론이 나야 하는데, 혹자들이 한다는 그런 유의 예언은 여전히

- 1108 -
이 세상 왕국에 눈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더욱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액운을 피하고 길한 삶을 찾아 갈 수 있을까?‘를 충족시켜 주는 마귀 적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진짜 믿음은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의 종말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인식하고, 깨닫고 그 계시를 삶 속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계시가
이해되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생겨서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자기 앞날이
왜 궁금하지요? 왜 또 다른 계시와 또 다른 예언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 성경의 예언을 통해서, 이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분토‘처럼
여기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항복하는 삶을 입으로 전하고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니고 새 세상이 온다. 너희는 그 새 나라를 준비하라’ 그게 올바른 예언을
깨달은 성도들의 지향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예언자이며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분명히 올 나라로 믿고 있고, 그러므로 그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살다간 모든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힘을 쌓아서 자기들 힘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 보겠다.’고 하는 그 꿈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늘 쫓겨 다녔습니다.
(사50:4-6)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해서
전했더니 사람들이 돌로 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자, 예언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 예언자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렘20:7-10)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이게 바로 믿음의 방패를 들고 의심과 낙심과 고통의 화전을 막아내며 ‘예언’을 하는 자들의

- 1109 -
삶인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사20:1-6)
1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뵈이리니
5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6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하나님께서 애굽과 구스를 멸망시키실 것을 이사야를 발가벗겨서 그의 몸과 삶을 통해 예언을
하십니다. 이사야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예언자들의 삶은
모두 다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돌을 맞지 않으면
이렇게 자신의 삶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 부끄럽고 고단한 삶을 살다가 간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과 계시의 삶이 어디에서 완성이 됩니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지요. 발가벗겨져서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닙니까? 그 분이 바로
참 선지자요, 참 예언자이십니다.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이사야나 예수 그리스도는 발가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던
인간의 도모를 낱낱이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부나 명예나 지식으로 너희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애를 쓰고 살고 있지만 너희는 결국 이렇게 발가벗겨져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군데 더 찾아보지요.
(사21:1-4)
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 같이 몰려 왔도다
2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주께서 가라사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3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4 내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할 때도 이사야가 요통으로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여기서 요통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할할라’라는 단어는 ‘꼬이다‘라는 뜻의 ’훌‘이라는
단어의 파생어입니다. 그러니까 극심한 허리 통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 1110 -
멸망의 아픔을 몸으로 겪으면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멸망하게 될 것인지를 예언자가 자신의 몸으로 겪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돌이키지 않는 세상의 심판, 그리고
결국에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예언으로 토해내는
선지자들은 그 구속의 내용을 인생 속에서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소리도 듣게 되고, 때로는 돌에 맞아 거반 죽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이 하는 예언은 100% 다 맞아야 합니다. 99%만 맞아도 안 됩니다.
진짜 그런 은사 받은 사람 있으면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없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해서 올바로 전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올바른 예언은 성도의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고린도 전서14장에서 ‘예언하기를 힘써라’라는 구절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 줄


아시겠지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여러분이 많이 오해하고 계신 고린도 전서 14장을 조금
설명을 해 드리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전14:1-9)
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여기에 보시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는 예언하기를 힘써라’하고 권면을 합니다.
그가 말하는 예언은 우리가 배웠다시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는 아직 계시가 완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그들은 그 것을 예언과 방언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때의 방언은 모든 방언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역이 된 방언은 곧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방언이나 예언이 모두 다 채택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제재를 받았고 예언도 교회의 분변을 통해 걸러졌습니다.

- 1111 -
(고전14:27-30)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많아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여기까지만 정리를 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아직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초대 교회에
예언과 방언으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계시였고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방언에는 통역을 붙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 없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방언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었고 예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방언과 예언은
반드시 교회에서 걸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냥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만 주시면 되지 방언을 함께 주셔서


통역을 붙이게 하셨을까요? 구약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것은 항상 ‘너희는 심판 받을
존재다’라는 것을 보일 때 등장했던 것입니다.
(사28:1-3,11-12)
1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구절은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들어 에브라임을 심판하실 것임을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때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치러 들어 온
앗수르 군사가 한 말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방언‘은 심판을 그릴 때
등장했던 단어였습니다.
그 내용을 바울이 인용 해다가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전14:21-22)
21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 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공격하게 할지라도)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2절 보시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나오지요?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방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될 자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진노의 심판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라는 표적으로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알아들을 수 있는

- 1112 -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고요.
(창11:6-9)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도 나오지요?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방언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방언을 알아듣고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바로 초대 교회 때 방언을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이 교회에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은 자기에게는 덕이 될지언정 교회에는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고린도 전서 14장 4절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고전14:14-15)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잘 보시면 ‘방언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때문에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이 기가 많이 죽었었지요? 그러나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내용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과 방언으로 찬양을 하는 것은 전 인격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고 찬양하겠다는, 다른 말로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겠다는 바울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구절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영’이라고 번역이 된 ‘프뉴마’ 앞에 ‘나의’ 헬라어로는 ‘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영’‘프뉴마’가 사람에게 쓰이게 되면 그 단어는 ‘영’이라는 뜻보다는 ‘원초적인
능력’이라는 단어로 쓰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고 번역이 된 ‘누스’라는 단어는 ‘정신 혹은 내적인 성향, 도덕적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14절 15절의 정확한 내용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기도하는 것이긴 하지만 나의 전인격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방언이 아닌 내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고 찬양함으로
전인격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것이다’입니다.

- 1113 -
이렇게 초대 교회에 주어진 방언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였지만 어떤 제한적
목적을 위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모두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었던 예언은 교회
전체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고전14:19)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다섯과 일만을 대조하고 있지요? 여기서도 방언과 예언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이해하고 깨달은 다섯 마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 풍성한 방언의 은사가 자기들에게 왜 주어졌는지는 생각지
않고 단지 방언을 하는 것을 자랑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것을 심지어 ‘악’이라고
부릅니다.
(고전14:20)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바울은 은사를 자랑하는 그러한 이기심과 자랑을 이렇게 악으로 규정짓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은사를 추구하느라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성숙을 놓치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예언을 통한 영적 성숙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증거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은사가 임했다는 것은 ‘성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소유한 사람을 ‘신앙이 좋은 사람 혹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는 무슨 신유은사나 방언, 예언 이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신앙인으로 둔갑을 해 버렸습니다.
(고전3: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 사도는 그렇게 은사가 풍성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은사는 오히려 어린 신앙인들에게 힘내서 교회의 자라남에 기여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 결코 자랑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나 방언이나 예언을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의
방패가 담고 있는 내용과는 정 반대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제가 믿음의 방패를 설명하면서 ‘예언과 계시’를 끌고 들어왔는지 아시겠지요?
분명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그러한 예언과 계시는 믿음과는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준비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계시와 예언은 심판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이지 절대 사람의 길흉화복이나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은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 1114 -
(고전14:23-25)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 예언은 죄인들을 책망하고 숨은 것을 드러나게 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히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방언으로 듣던 자들이 어느 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게
되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슥8:22-23)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 예언을 입으로 삶으로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예언 (prediction)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언, 방언‘이러한 것들을 무슨 이상한 소리하는 것이나 앞일을 점치는 것
정도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방언을 하신다면 그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리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시면서 어떻게 나에게는 그 방언이 이렇게 이해가 되어지게
되었는가를 감사하시면 되는 것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분들도 누군가가 방언을 하거든 ’나는
어떻게 저러한 방언으로 들려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는가?’ 감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을 통해 믿음을 더욱 공고히 다지셔서 어떠한 마귀의
화전에도 쓰러지지 않는 용사가 되셔야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어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방언이 되어갈 것임을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암8:11-14)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 1115 -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이 어디에 붙어있는 말씀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수많은 재앙들을
선포하셨습니다. 불을 보내어 궁궐들을 사르리라고 하시고 적이 침략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비가 내리지 않아 마실 물을 구하려 비틀거리며 찾고,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로 곡식들과
과일들을 다 먹게 하시고, 전염병과 칼의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재앙들은 돌아오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언하는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자기들은 제사장이 있고 단과 벧엘에 제단이 있고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악기로
노래하는 것과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샤 같은 제사장이
나라와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마음 든든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북 이스라엘에 황 충과 불과 다림줄과 여름실과의 환상을 통하여 그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황 충과 불의 심판은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면서 중보를 하자 그 심판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다림줄의 환상과 여름실과의
환상과 9장에서 마지막 환상인 기둥머리를 치시는 것에서는 더 이상의 돌이킴이 없습니다.
심판이 그대로 시행될 뿐입니다. 이것은 갈수록 재앙이 그 강도가 세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앙의 끝, 다른 말로 가장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재앙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게 지금 읽은 아모스 8장 11절 이하인 것입니다.
한 날이 이를 것인데, 그 한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말씀을 거두어 버리셔서 말씀의 기갈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류의 가장 큰
재앙입니다.
(겔7:1-6,26-27)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3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발하여 네 행위를 국문하고 너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4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5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 지어다 임박하도다
6 끝이 났도다, 끝이 났도다, 끝이 너를 치러 일어났나니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26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27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왜 사람들이 굶어죽습니까? 먹을 것이 모자라서 굶는 건가요? 왜
사람들이 전쟁을 하지요? 모두다 그들의 죄와 탐욕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이 그들의 죄와

- 1116 -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총을 들이대고
멸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한다할지라도 자기들 취향에 맞는 하나님 말씀만
구합니다. 아모스 8장 14절 보세요.
(암8:14)
14 무릇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이 사마리아로 단으로 브엘세바로 말씀을 구하러 다녔지만 그 곳에서 그들이 섬긴
것은 금 송아지였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받을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든든한 우상을 붙들고 안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왜 예언을 비롯한 엉뚱한
기적과 신비를 좇는 것이 믿음의 방패를 갖는 것과 상극인지 아시겠지요?
(딤후4:1-4)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다른 사람들 이야기할 것 없이 우리를 한 번 보자고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고 있나요?
혹시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방언으로 들리는 그 심판 받을 사람들과 방불하게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도 혹시 그 대 재앙에 노출되어 계시지는 않으세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방패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궁금해 하시고
알려고 노력하시고 신앙생활에 더 진지해지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 후서 10장 5절과 6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고후10:5-6)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 1117 -
(91)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그리고 기도
(엡6:13-24)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믿음의 방패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주어진 믿음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 했
지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믿음을 선물해 주시지만 성령이 우리 대신 믿어주시지 않
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온전한 믿음을 연약한 이 육신과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발휘하여 악마의 화전을 즉
시, 즉시 꺼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1:21-25)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 말씀에 의해 주어지는 참 믿음을 거스르며 악마가 거짓으로
던지는 것이 바로 기적이나 신비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악마는 눈에 보이는
성취감이나 만족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기쁨을 대체시켜서 성도들이 진짜 믿음을

- 1118 -
소유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성경에 입각해서 설명을 해 주어도 그렇게
한 번 길을 잘 못 들어선 사람들은 좀처럼 바뀌지가 않습니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라는 책을 보면 ‘인지 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지 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믿고 있던 것과 사실이 충돌을 일으킬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자신의 믿음에 꿰어
맞춘다는 이론입니다. 원래 미국의 ‘레온 파이닝거’ 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만들어 진 이론인데
그 이론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아십니까?
예전에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휴거 소동이 있었습니다. 12월21일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
재산, 직장 모든 것을 버리고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날이 닥쳤는데도 휴거가 안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사람들은 그들이 몹시 부끄러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소리치기를 ‘자기들이 열심히 세상에 빛을 퍼뜨린
덕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들에게 기회를 더 주셨다’고 자신들의 믿음을 합리화
시켰습니다. 그 것을 보고 레온 파이닝거가 ‘인지 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왜 많은 사람들이 황우석 박사가 사기꾼임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 ‘황우석 살리기’를 외치는 지 아십니까? 인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합리화시키려는 악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성경에
입각해서 올바른 복음을 전하면 자신들이 잘 못 믿었다고 고백을 하는 대신에 자신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는 데 주력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자들은 다릅니다. 올바른 믿음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이렇게 신비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많이 돌아서서 오직 성경, 오직
믿음만을 오히려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지난번에 강수자 전도사님께서 저에게 ‘목사님처럼 강하게 복음만 설교하는 데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적입니다.
‘오직 믿음‘’오직 성경‘은 사람들에게 별로 매력적인 구호가 못 되거든요.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열심을 내어 그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오늘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그리고 사도가 그 모든 전신 갑주 위에 얹어 놓고 있는


기도에 관해 공부를 하고 에베소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많은 혼란의 시간을 맞게 됩니다.


‘이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맞나?’‘왜 예수를 믿는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왜
예수를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일까?’ 이러한 많은 질문들이
때때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입니다.

- 1119 -
‘혼란스러운 머리, 혼란스러운 생각을 보호하는 것’
그런데 그냥 ‘구원의 투구’ 그러면 사실 막연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어떻게 쓰라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다른 서신 서에서도 구원의 투구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을 찾아보면 그
의미가 조금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살전5:5-8)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여기서는 ‘구원의 투구’에 뭐가 하나가 더 붙지요? 뭡니까?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투구는 소망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염두에 두시고 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내용에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집어넣었는지 차근차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도가 예수를 믿고 난 뒤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애초에 손해와 비방을 감수하고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유사시에는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육신은 소유한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이 그치지 않고 계속 되면
누구나 지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혼란이 찾아오지요. ’이게 정말 성도가 가야하는
길이 맞나? 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이런 것 하나도 막아주지 못하실 까? 이런 기독교가 정말
나에게 영생을 허락해 주기는 하는 걸까? 그리고 왜 나만 이렇게 져 주고 섬겨 주고 살아야
되는가?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 온 내게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이런 의심과 혼란이 성도를
괴롭힙니다. 그러한 혼란 끝에 어떤 사람들은 다시 방종한 삶을 살게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신앙 자체를 부인하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아니었다.’라고 단언해서 말을 하지요.
그러나 성도들도 종종 오랜 인내 끝에 의심이나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척 알아보았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도 보았던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당신이 메시아가 맞다 면 왜 내가 이렇게 여전히
감옥 속에 갇혀있는 것입니까?’하고 항변한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고난의 강도가 너무 깊어지고 그 기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면 누구나 다
인내심의 한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마귀가 성도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초대 교회에서 실제로 그러한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이 여러 곳
등장합니다.
(벧후3:3-4)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 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 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곧 다시 오마 하고 가셨던 예수님이 그들의 생전에 꼭 오실 줄 알고

- 1120 -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10년이 갔는데도 예수님이 안 오십니다. 게다가
박해는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그 때 마귀가 기롱 하는 자들을 시켜서 미혹을 했습니다. ‘다
거짓말이야, 오긴 누가 온다고 그래, 오지도 않는 주님 기다리지 말고 네 마음대로 살아’
구약에도 그러한 혼란을 겪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기록해 놓은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시편 73편이지요. 오랜만에 한 번 보고 갈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아삽의 시입니다.
(시73:1-17)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어떠세요? 우리가 한 번쯤은 다 해 보았던 투정 아닙니까? 하박국도 똑같은 투정을
부렸었습니다.
(합1:2-4,13)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이렇게 우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구원’이라는 소망스러운 목적지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었는지 한 번 볼까요?
(벧후3:8-18)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1121 -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확인시킨 후에 베드로가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가는지
보세요.
14 그러므로 (너희는 절대 좌절하거나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인내심의 한계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대 그 구원의 소망을 놓지 말고 끝까지 성도다운 삶을
견지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닥치는 고난과 환난은 어느 시기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환난이라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우리 인간들은 죽는 날까지 죄의 오염과 싸워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끝까지 고난과 환난이 붙어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싸워야 하고 ‘끝까지’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로 가서 우리 성도들에게 끝까지
고난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히10:32-34)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고난의 이유가
나옵니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여기 보시면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뭐라고 나옵니까?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게 하기 위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알다’‘기노스코’라는 단어를
‘헤아우토이스’라는 단어가 수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스스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34절 후반부를 보다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너희 스스로 앎이라’입니다.

- 1122 -
그러니까 이 말은 고난이라는 것은 이 시간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이성 안에서 그 하늘의
소망을 ‘스스로’, 다른 말로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주관적으로 나의 것이 되는 데에 ‘고난’이라는 것이
방법과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삶에는 성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혼란함 속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굳건하게 쓴 사람들은 끝까지 견뎌내게
되는 것이고 가짜들은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의 박탈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뎌내게 되는 것이고, 보이는
것만을 소망하는 가짜들은 결국 걸러지게 되는 것이지요.
(히6:10-12)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3:6)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마24:12-13)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계2:25-26)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우리 성도의 삶은 이렇게 끝까지 전투인 것입니다. 10년 20년 해서 끝나는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위해 생의 끝까지 싸워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 긴 전쟁을 끝내고
나면 우리에게 멋진 소망의 나라가 주어지기에 그 소망을 바라보며 참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구원의 소망의 투구’인 것입니다.
(고전1:8)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보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그러한 훈련의 사건들이 닥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죽는 날까지 그 전쟁을 하다가 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은 단순히 복음의
전파를 위해 안 당해도 될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후4:7-9)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 1123 -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이렇게 늘 우겨 싸임과 답답한 일 당함과 핍박과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확실하게 쓰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후4:13-18)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새 몸을 입고 서게 될 그 소망의 때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고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15:31-34)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죽으면 끝이니까 살아 있을 때 즐기면서 살자)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마귀는 우리의 혼란을 타고 들어와서 우리의 행실을 더럽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하박국의 혼란은 어떻게 결론이 났지요?
(합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시편 73편의 기자인 아삽은 어떻게 그 혼란스러움을 해결하는지 볼까요.
(시73:17-28)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 1124 -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마귀가 혼란스러움과 의심으로 공격을 해 올 때 하늘로 눈을
돌려 구원의 소망을 굳게 잡아 그 상황들을 이겨내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많이 힘드신 분들이 계실 줄로 압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그
상황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늘의 소망으로 눈을 돌리세요. 물론 힘이 든다는 거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순종해야지요.
절대 왜 나만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투정부리지 마세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기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딤후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헬라어 원문에는 이 문장에 ‘판타스’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말은 ‘모두’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끌려가게 되어 있고 그
사람들이 ‘모두’ 여러 모양의 ‘핍박’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확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가 처해진 상황 속에서 열심히 소망을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저도 그러한 상황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와서 이모저모로 스트레스를 풀어 보려
애를 썼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면 풀릴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도 그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우리 성도들이 겪어내야 하는 것이고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의 빛이 더욱 더 찬란하게
비치게 될 것임을 잊지 마시고 잘 견뎌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어떤 사람은 나보다 고난을 덜 받고 있는 것 같고 나만 극심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모두 다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설사 남이 나보다 고난을 덜 받고 수월하게 간다고 하더라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결국 목적지는 한 곳이니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전에는 네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지만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고 남이 너에게 띠를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요?’ 그랬지요? 그 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나
잘해,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그러십니다.
맞습니다.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너무 불행해,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해’하시지
말고 그냥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겠거니‘하면서 묵묵히 인해하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적당한 인생을 허락하시는 것이니까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가 이 에베소서의 전신 갑주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단의
공격이 얼마나 거세며 지속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사단은 일방적으로 성도를 두들겨 패고

- 1125 -
있으며 성도는 전신 갑주를 입고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이다’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사단은 쉬지 않고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 유일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성도를 거짓과 위장으로, 속임수로 공격을 합니다.
(요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한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속임수를 격파할 수 있는 무기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14절의 ‘진리의 허리띠’와 오늘 본문의 ‘성령의
검’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진리의 허리띠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었지요?
오늘 본문에 쓰인 ‘말씀’이라는 단어는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입니다. 사실 로고스라는
단어와 레마라는 단어는 큰 차이가 없는 단어입니다. 굳이 그 차이를 따지자면 ‘로고스’는
‘전체’의 의미가 있는 단어이고 ‘레마’는 ‘부분’의 의미가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는 ‘전체로서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령의 검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단이 예수님을 미혹하는 장면에서 사단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바로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들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응수를 하신 것이 바로 ‘레마’인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쳤을
때 바로 말씀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4:3-10)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으로 ‘기록되었으되’라고 응수를 하시니까 결국 마귀가 도망가 버리고

- 1126 -
말았습니다. 마귀는 말씀의 진의를 왜곡해서 예수님을 속이고 격동시키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때마다 정확한 말씀으로 응수를 하시며 흔들림 없는 순종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마귀의 유혹이나 공격이 왔을 때 여러분이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로 인용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 바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요10:31-36)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우리 주님께서 악한 자들의 공격을 말씀으로 다 받아 내시자 악은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님을 힘으로 때려잡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예전에 마이크 타이슨이 경기 도중에 도저히 힘으로 안 되니까 상대방의 귀를 물어뜯어
버렸지요? 그래서 판정패했습니다. 우리는 힘으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속임수로
밀고 들어오는 마귀에 대항해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언제든지 꺼내어
응수할 수 있도록 익숙해져 있어야 합니다.
(딤후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배우고 확신한 그 말씀 안에 거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전2:12)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성령을 받은 자들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하고 주의해서 잘 공부를 해야 합니다.
(벧후1:19-21)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 1127 -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전1:10-11)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렇게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하여 올바른 진리를 소유하고 참 된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게
되면 마귀는 그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마귀에게 당하지요.
(행19:12-16)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저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나와서 참지를 못하겠어요.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연극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는 짓은 여전히
마귀 짓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제가 자주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나는 정말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인가?’를 점검하고,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대할 때에도 그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도록 늘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조명을 간구 하면서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또 너무 성령께 치우치게 되면 퀘이커 교도들처럼 이상한 쪽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우회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같은 사람은 영국의 훌륭한 개혁자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기록된 말씀을 무시하고 내적인 빛, 성령의 조명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바람에 나중에는
온통 성령으로부터 오는 즉각적인 영감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주
이상한 쪽으로 빠져들었지요. 그러니까 올바른 균형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시119:97-100)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100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령의 검, 말씀이 어떤 힘이 있는지 보세요.

- 1128 -
(시119:101-105)
101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03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104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렇게 말씀 속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에 있어서도 주의를 하게 됩니다.
(벧전4:11)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골3:16)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의 말은 치명적인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히 담기 전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증명하도록 본능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입만 열면 자기변호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높이기 위해 남을 욕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 속에 풍성히 담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말이 나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나올 수 있도록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말 많이 하는 사람들 보세요.
참 실수 많이 하지요?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꽃아 놓고도 자기가 몰라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담길 때까지 말을 조심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이 입어야 하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대해 자세해 설명한 후에 그


전신 갑주 위에 ‘기도’를 얹어 놓고 있습니다. William Gurnall의 책 중에 ‘완전 무장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을 주석 해 놓은 책입니다. 거널은 이 9 구절의 내용을 무려 1,200 페이지에 걸쳐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그 중에 기도에 관한 부분이 300페이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칼빈도 말했습니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면은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무릎을 꿇고 있을
때이다’ 여러분, 기도는 연약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그 누구도 비교할 자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사도 바울이 본문 18절 한 절에 ‘파스’‘모두’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엡6:18)
18 모든 기도(파세스 프로슈케스)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판티 카이로)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파세 프로스 카르테레세이) 힘쓰며 여러 성도(판톤 톤
하기온)를 위하여 구하고
여기서 ‘모든 기도‘라는 것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는 강조용법입니다.

- 1129 -
그리고 무시로 (판티 카이로)라는 것은 (all occasions)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에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 모든 경우에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파세 프로스 카르테레세이)은 (always)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 신자의 삶
속에서 ‘기도’라는 것은 책임이요 의무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성도(판톤 톤 하기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모든 성도’(all
saints)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지요?
그 말은 ‘기도’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천국 형제자매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할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 대해 강조를 하면서 19절에서 예를
들어줍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엡6:19-20)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천국을 직접 보았던 사람이고 논리
정연한 복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만들었던 사람이고 그가 쓰던 손수건만
가져다 얹어도 앉은뱅이가 벌떡 벌떡 일어났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 바울도 자기가 가르친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의 살아 갈 힘은 오직 주께 드리는
기도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어질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삶인지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러면 그 것을 아는 분께 물어보면서 가야지요.
여러분, 혹시 모르는 길을 가게 되었을 때 어떻게 가십니까?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서
가시지 않습니까? 어떤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열심만 부리면
베드로처럼 ‘사단’이라는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로 우리 신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확인하면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신자의 거룩이라고 했지요? 그 ‘거룩’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을 하면 어떻게 되지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만을
붙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는 바로 ‘기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리와 지식’으로 기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건 뭐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 못 된 것입니다. 교리와 성경지식은 반드시 ‘기도’로 결론이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와 지식’이 기도를 우습게 여기게 만들고 있다면 그
것은 결코 올바른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성도는 하나님을 자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전투입니다. 이 점을 늘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항상 무장을 하시고
늘 기도로 간구하며 치열하고 진지하게 그 전쟁을 치러 나가십시오.

- 1130 -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