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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상 2022 가을

https://doi.org/10.36114/JLF.2022.9.23.2.243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23)

정혜욱 (부경대)

I. 들어가며

인지과학에서 뇌는 오랫동안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디지털 컴퓨터와 같은 테크


놀로지의 은유에 의해 묘사되어왔고, 뇌를 명령을 내리고 몸을 통제하는 제어장치
이자, 합리적 이성의 거주지로서 간주해왔다. 그러나 21세기의 오늘날, 뇌가 순전
히 논리적이고 인지적인 과정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점점 부인할 수 없
는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사실 뇌가 엄격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면 좋은
기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간 뇌는 논리 기계와 비교할 때 소위 말하는 버그가

*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A-2


트랙)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21S1A5B5A16078645).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43


많아도 너무 많다. 2015년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구글의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을 떠올려도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알파고는 대국 중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고 있다고 해서 긴장하지도 않고,
이겨야 한다는 욕망이 없기 때문에 승리 시의 쾌감이나 패배 시의 불쾌감도 없었
다.
또한 2017년 업그레이드 버전인 알파고 제로는 바둑의 기본 규칙만 입력한
상태에서 3일 동안 스스로 가상 바둑을 두면서 수를 터득했고, 그 결과 인간 기보
16만 건을 7개월간 학습한 알파고를 100대 0으로 완파했다. 만일 알파고 제로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하찮은 인간과 자신이 비교당하는 데 굴욕감을 느끼고 분
노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초조, 욕망, 쾌, 불쾌, 굴욕, 분노 등 이 모든 것들은 아
직까지는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 그러나 논리 기계 입장에서 본다
면, 바로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바로 이 수많은 감정 때문에 인간의 뇌는 효율성
이 떨어지는 버그 덩어리가 될 수 있다.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학습한다면? 잘 알려진 예로, AI가 성차별과 인종차별
이 만연하는 한 기업의 사무실에 설치되어, 카메라를 통해 직원들의 모든 행동과
말투, 심지어는 사적이고 은밀한 대화까지 익히고 배운다고 상상해보자. 혹은 AI
가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 만연하는 편견과 차별에 익숙한 표현들을
빅데이터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학습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AI는 인간의
도를 넘는 행동에 몰입하여 세상의 편견을 더 강화하고, 정말 나쁘거나, 혹은 우리
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문화를 만들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
한 일상대화 챗봇인 ‘테이’(Tay)와 ‘조’(Zo)의 막말 논란,1) 스캐터랩에서 개발한
‘이루다’ 논란2)이 그 대표적 예다.
물론, 음성, 근육, 호흡 등을 측정하고 분석하여 감정을 읽는 감성공학
(sensibility ergonomics)의 발달과 더불어, 업그레이드된 감성 AI는 온갖 부적
절한 언행으로 가득한 인간을 모방하기보다는 알파고 제로처럼 인간에 의지하지

1) 박근모. MS AI 챗봇 ’조’, 지난해 ’테이’ 이어 막말 논란 . 디지털 투데이 2017년


7월 5일. <https://www.digita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792>
2) ‘이루다 논란’은 최새슬 홍아름 참고. 2022년 ‘이루다’는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
해 욕설, 선정적, 차별적 문장을 삭제하고 재출시되었지만, 아직은 한계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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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스스로 학습하면서 진화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인간이 기
계의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종이 “심각한 교정과 업그레이드가 필
요한 웻웨어(wetware)”3)로 간주될 지도 모른다(Leonhard 30). 강한 인공지능
의 도래로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하게 될 때, 영화 <가타카>나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처럼, 유전자재조합기술이 아닌 자
연수정으로 태어난 인간을 천시하거나 금지하게 될지도 모르고, 나아가 <터미네
이터>(The Terminator) 시리즈에서처럼 기계가 지구상의 최고의 버그를 인간으
로 간주하고 인류멸종프로젝트를 가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문제는 기계가 인간처럼 진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
라, 사람들이 기계처럼 프로그램화되어 시키는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것 외에
제작하고 창조(poiēsis)하는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망각한 데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인공지능과는 달리 반복
적 노동이나 차가운 논리와 복잡한 계산 시스템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보전과 생존 활동에 최적화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생존은 단지 살아남는
것에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키는 대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고, 외딴 섬에 끌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고기를 잡을 수도, 20시간 이상 마늘을 깔 수도 있다. 그러나 뇌는 목숨만 부지하
는 “생존”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살만한 삶(livable life), 혹은 스피노자의 용
어로 살고자 하는 의지인 코나투스(conatus)를 지향한다. 코나투스란 ‘생존’만이
아니라, 뇌과학의 용어를 빌자면, ‘삶다운 삶(wellness, wellbeing)을 추구하도록
하는 뇌 회로의 활동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종종 물리치거나 길들여
야 하는 정동으로 간주하는 불안, 공포, 슬픔, 수치 등의 부정적 감정조차도 ‘생명
체가 위험을 물리치고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고
살만한 삶을 지향’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성/감정, 정신/육체 등을 분리하고 이성과 정신에 우위를 두는 위
계적 이분법에 익숙하지만, 신경과학자 다마지오(Antonio Damasio)가 주장한

3) wetware는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에 인간을 대입한 것으로, 피와 살을 이루


어진 인간의 두뇌나 생체(a flesh and blood version of software), 즉 인간을 신체
를 가진 소프트웨어로 개념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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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처럼 이성은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과 완전히 분리되어 순수하
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그물처럼 얽혀 있다”(Descartes’ Error xii). 비
합리적인 감정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때로 비합리적이고 감정에 치우치기도 하는 우리의 뇌는 스스로 역사
를 만든다. 단지 우리는 뇌가 한 일의 결과인 ‘의식으로 떠오른 이미지’만을 알 수
있을 뿐, 의식화되기 전에 뇌 속의 뉴런이 비의식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세스를 우
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자신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과학
과 인문학의 통섭적 연구를 지향하는 말라부(Catherine Malabou)4)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는 “인간들이 인간만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라고 말하면서 역사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 주장은 우리의 상황과 뇌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고유한 뇌를 만들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 1)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말라부의 자아와 정서적 삶: 철학, 정신분석, 신경


과학의 융합 (Self and Emotional Life: Merging Philosophy, Psychoanalysis,
and Neuroscience)에 초점을 맞추어,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정서적 뇌’를 인문학
적 사유에 접목할 때, 그것이 자기감응(autoaffection)이라는 전통 형이상학을 단
지 반복하고 있을 뿐인지, 아니면 그것이 전통 형이상학과는 다른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선보이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4) 말라부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로, 1959년생이며, 현재 킹스턴대학에 재직하


고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미래: 가소성,
시간성, 변증법 (The Future of Hegel: Plasticity, Temporality, and Dialectic)을 출간
했다. 말라부는 최신 과학적 성과를 인문학에 적용한 ‘가소성(plasticity)의 철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가소성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에서 가져온 개념으로, 말라부
는 이를 최신 뇌과학의 성과와 접목시켰다. 결합시켰다. 말라부에 대한 개론적 소개는
정혜욱, 뇌는 세계를 어떻게 파괴/창조하는가: 말라부의 뇌가소성과 뉴런 이데올로
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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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다마지오의 ‘정서적 뇌’와 자기감응

오늘날 신경과학의 성과에 의하면, 뇌는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디지털 컴퓨터


와 같이 순전히 논리적이고 인지적 과정에 헌신하는 기관이라는 관점에서, “감정
이 우리의 정신적 삶을 함께 묶어주는 실이며, 자신의 마음 속에 비친 나를 정의
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정의해주는”(LeDoux, Emotional
Brain 11) ‘정서적 뇌’라는 관점으로 이동하게 한다. 즉 뇌는 인간의 리비도 경제
를 관장하며, 정동(affect), 즉 정서와 느낌이 자아정체성과 주체성이 생겨나기 위
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5)
물론 뇌에 정서와 감정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감정
를 담당하는 뇌라는 것은 뇌 활동의 일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선택을 하는
것은 뇌의 단일부위가 아니라 뇌의 여러 부위의 연합적 네트워크이다. 뇌에서 생
성된 이미지 가운데 상당 부분이 뇌를 제외한 몸의 다른 부분에서 들어오는 신호
로 형성되기 때문에 뇌와 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구분될 수 없다. 뇌
는 몸의 일부이며 하나의 뇌의 중추가 주요 정신기능을 관장하지 않는다.
우선, 뇌과학에서 정동이 어떻게 자아정체성이 생겨나기 위한 토대가 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의 유명한 예를 들어보자. 게
이지는 미국 버몬트에 사는 성실하고 인내심 강한 평범한 철도직원으로, 1848년
암석폭파작업 중에 쇠막대가 얼굴을 꿰뚫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지름이 3센티,
길이 1미터의 쇠막대가 그의 왼쪽 뺨과 왼쪽 눈, 그리고 전두엽을 관통했다. 그러
나 놀랍게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당시 그를 담당
했던 할로우(Dr. John Martyn Harlow) 박사는 “나는 치료를 했을 뿐이고, 하
느님이 그를 고치셨다”(I dressed him, God healed him)(Descartes’ Error 7)
고 말했을 정도였다. 약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은 후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에게는 거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듣고 말할 수 있었으
며, 잘 걸었고 언어나 대화에 눈에 띌만한 어려움이 없었다.6)

5) 다마지오는 정동을 느낌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정동이 느낌을 생성하


는 상황과 메커니즘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느낌보다 넓은 개념이다(Strange Order
of Things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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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지의 두개골(삽화) 회복된 게이지의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photograph from the collection of Jack
and Beverly Wilgus

약 4개월 후 그는 일터로 복귀했다. 사고 전의 게이지는 절제할 줄 알고 동료


들에게 존경받는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사고 후의 게이지는 감정조절이 불가능하
고 쉽게 화를 내고, 망설임없이 저속한 말을 내뱉었으며, 사소한 문제를 붙잡고 시
간을 보내다가 주어진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 많은 성격의 소유자로 변했다.
사고 후의 게이지는 사고 전의 게이지와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되어있었다. 게이지
가 퇴원한 후 그의 행적이 묘연하여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860년에 1848년의 사고 후유증으로 생긴 간질 발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1860년 그가 죽은 후 1868년에 자신을 수술했던 담당 의사에 의해 두개골 부
분만 따로 적출되어 세상에 공개되면서 뇌의 어떤 부분이 정서를 담당하는지, 정
서가 합리적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가 촉발되었다. 게이지의
치료 사례 및 예후, 그리고 이후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살펴본 후 다마지오는 다
음과 같이 말한다.

게이지는 합리적 행동을 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과 주의력, 기억력을 소유


하고 있었고 언어 구사에도 장애가 없었으며, 계산을 할 수 있었고, 추상

6) 게이지 사례는 다마지오의 데카르트의 오류 (Descartes’ Error) 3~83쪽을 참고하여


요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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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문제의 논리와 씨름할 수 있었다. 그의 유일한 문제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 있었다. 그 이유는 [사고로 인하여] 느낌을 경험하는 능력에
현저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Descartes’ Error xvi)

다마지오는 정서와 느낌 없이는 합리적 판단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정서와 감정의 부재가 게이지의 합리성과 이성을 훼손했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
면 도대체 감정이란 무엇인가? 이성/감정의 전통적 이분법은 잘못된 것인가? 전
통적으로 감정은 우리가 억제해야할 것, 우리가 언제나 통제해야할 것이 아니었던
가? 그런데 어떻게 뇌의 감정과 관계하는 부분의 손상이 게이지를 완전히 다른 사
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여기서 신경과학 및 뇌과학적 연구에서 진행된 정서 연구를 잠시 살펴보자.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William James)의 가설에 따르면, 정서
(emotion)는 자극 반응에 대한 피드백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는 “곰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가는가? 아니면 도망치는 행위에서 공포가 생기는가?”라고 질문하
고 이에 관련된 실험을 했다(”What is an Emotion?” 188-205). 많은 사람들은
곰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친다고 생각하지만(공포→행위), 그의 실험에 의하면, 도
망치는 행위가 먼저이며, 공포에 대한 정서 반응은 그 이후에 생긴다고 한다. 즉
곰(자극)→반응(도망)→공포(정서)의 순이다. 심리학자인 제임스의 가설을 과학적
으로 뒷받침해 준 학자는 1920년대 신경생리학자인 캐논(Walter B. Cannon)이
다. 그에 의하면, 뇌 속에 축적된 오랜 관습과 기억에 의거하여 (1) 곰에 대한 비
의식적7) 평가가 먼저 이루어지고, (2) 그 다음에 도망치는 행위가 따르고 (3) 공
포라는 정서가 의식에 기록된다고 주장한다.
신경생물학자 다마지오8)는 이를 보다 발전시켜 그 성과를 심리학과 철학에

7) 정신분석학과 달리 뇌과학에서 사용하는 “무의식”(unconscious)은 억압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의식 영역 바깥에서 발생한다. 의식은 뇌 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는 알지만,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은 알지 못한다. 뇌
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중 많은 부분이 인식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부 지식
은 수백만년 동안 진화를 거치면서 뇌에 굳건히 내장되어있다. 이를 정신분석의 무의
식과 구분하기 위하여 “비의식”(nonconscious)으로 칭하고자 한다.
8) 다마지오는 신경생물학자이기도 하지만 ‘느낌’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최근에 번역된
느낌의 진화 (The Strange Order of Things: Life, Feeling, and the Making of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49


접목하여 새로운 주체론을 만든다. 어원에서도 드러나듯, 정서(emotion)는 밖으
로 드러난(ex-) 움직임(motion)으로, 우리가 표정이나 목소리 톤의 변화 등으로
알아챌 수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과학적 도구들, 즉 호르몬 분
석, 전기 생리학적 뇌파나 파동 패턴 등에 의해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
마지오는 “정서는 몸의 극장에서 상연된다”고 말한다(Looking for Spinoza 28).
반면, 느낌(feeling)은 숨어있기에 그 소유자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볼 수 없
는 뇌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사적인 현상이다. 상식적으로 사람들은 ‘슬퍼서 울었
다’라는 표현처럼 느낌이 먼저 있고, 그에 따라 슬픔의 표현(눈물) 등이 생겨난다
고 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과학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근육의 떨림, 심장 두근
거림, 눈동자가 커지는 등의 정서 반응이 먼저 나타나고, 그 뒤에 그것이 슬픔, 공
포, 불쾌와 같은 느낌으로 정신(mind)에 이미지로 기록된다. 그러므로 느낌은 정
신의 표상이며, “정신의 극장에서 상연된다”(Looking for Spinoza 28).
우리는 이성적 판단이라는 말을 손쉽게 사용하지만, 전적으로 이성적인 판단
은 있을 수 없다. 판단은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다마지오는 이성의 전
략은 “정서와 감정이 주목할만한 표현이 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 없이 발전될 수
가 없다”고 말한다(Descartes’ Error xvi). 다마지오에게 정서와 느낌, 그리고 정
서에서 느낌으로 이어지는 시간차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정서-느낌의 프로세스
가 기존 철학과는 다른, 신경생물학적이고 뉴런적 주체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정동(primordial affects)으로서의 정서가 자아에게 일어난 사건이라면,
느낌은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제임스와 캐논의 곰(자극)-
반응(도망)-공포(정서)의 예를 통해 느낌을 설명하자면, 느낌은 ‘곰 때문에 도망치
는 자기 자신을 감지하고 두려움에 떠는 자신에 감응하는’ 것이다. 즉 느낌의 순
간에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 하나는 도망치는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도망치고
있는 ‘나’를 느끼는 자아이다.
다마지오의 정서와 느낌의 분리가 중요한 것은 신경생물학적으로 정서와 느낌

Cultures), 느끼고 아는 존재 (Feeling & Knowing: Making Minds Conscious)를 포


함하여 다마지오는 ‘느낌’을 키워드로 하여 자아, 의식, 정신 등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지만, 초기작인 데카르트의 오류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1994)에서 느낌과 정서를 구분하고 그가 느낌에 주목하게 된 과정이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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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시간적 간극을 포착하고 내 속에서 최소한 둘로 쪼개져서 존재하는 자아
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분리되지 않는(in-dividual) 자아인 개인이 분리된
간극의 존재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물론 공포에
떠는 자신을 [일종의 타자처럼] 감지하는 것이 언제나 완전한 의식 차원에서 일어
나는 것은 아니다. 느낌 차원에서 자기-감지(self-touching), 혹은 자기감응
(auto-affection)은 비언어적일 수 있다.9)
하지만, 바로 이 ‘자기감응’이 다마지오의 “원 자아(protoself), 씨앗 자아
(core self), 자기 기록적 자아(autobiographical self)”로 이어지는 자아와 씨앗
의식(core consciousness)에서 확장된 의식(extended consciousness)으로 이
어지는 의식에 대한 심오한 재정의로 나아가게 한다.
원자아란 비의식적이고 비이미지적인 뉴런적 자아로, 상호연결된 뉴런 패턴의
집합으로 유기체의 내적인 상태를 대표한다. 원자아는 유기체가 항상성을 유지하
도록 돕는다. 씨앗 자아는 (곰을 만났을 때와 같이) 외부 대상에 의해 유기체의 항
상성이 흔들리는 사건에 의해 원자아를 변형한다. 그리고 자기기록적 자아는 의식
적인 동시에 언어적이며, 명백히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내가 ‘곰을
만났을 때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 도망을 쳤고, 다음에
곰을 만날 때는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기억을 일관적 이야
기로 구성한다. 자기기록적 자아에 의해 일관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에는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식의 시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고, 축적된 기억에 의해 경험이 변형
되기도 한다. 씨앗 의식은 씨앗 자아에 상응하고 확장된 의식은 자기 기록적 자아
에 상응한다.10)

9) 헤일즈는 이 단계를 ‘비의식적 인지’(nonconscious cognition)이라고 부른다


(Unthought 10).
10) “The autobiographical self is based on autobiographical memory which is
constituted by implicit memories of multiple instances of individual
experience of the past and of the anticipated future. The invariant aspects
of an individual’s biography form the basis for autobiographical memory. .
. . The core self inheres in the second-order nonverbal account that occurs
whenever an object modifies the proto-self. The core self can be triggered
by any object. . . . The proto-self is an interconnected and temporarily
coherent collection of neural patterns which represent the state of the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51


이러한 다마지오의 자아론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첫째, 정서와 느낌으로 분
열되어있는 씨앗 자아 혹은 씨앗 의식에서 최초의 주체 형식이 생겨나며, 최초의
주체는 “인지 기능 없이 순수한 정동적 자각으로만 결정된다”(Malabou, Self
32). 그러므로 주체이론에 대한 다마지오의 공헌은 첫째 의식이 원초적 정동인 정
서에서 출발한다는 것, 유기체의 항상성을 깨뜨리는 정서가 없다면 원초적 의식이
라고 할 수 있는 씨앗 의식조차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해냈다는 점이며, 둘
째, 그가 “자아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내가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Descartes' Error 238)라고 말했듯이,
자아와 의식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밝혀내었고, 셋째, 몸의 반응인 정서와 분리된 순
수 의식, 혹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말하는 몸과 분리해서 존재하는 순수
코기토(cogito)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 넷째, 자아란 자신을 [대
상처럼] 느끼는 자기감응에서 생겨나며, 자아는 자극에 반응하는 자아와 그 자아
를 느끼는 자아로 분열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짧은 요약만으로도 다마지오가 데카르트의 오류 에서 왜 데카르트를
비판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데카르트와 같
은 전통 형이상학에서 자기감응이 무엇인지 살피면서, 말라부의 통찰을 빌어서,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다마지오가 사실은 숨은 데카르트주의자는 아닌지, 데카르
트와 같은 주장을 신경과학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인지, 데카르트 사상을 탈육화된
코키토로 비판하는 데리다의 관점과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III. 자기감응과 데카르트의 ‘경이’(wonder)

말라부는 자기감응을 신경과학과 전통 형이상학에서 모두 “주체가 자기 자신


을 호명하는 기원적 능력”(the subject's originary ability to interpellate
itself)(New Wounded 42)으로 설명하고, “대뇌의 자기감응은 주체의 무의
식”(cerebral auto-affection is the unconscious of subjectivity)(43)으로 설명한다.

organism, moment by moment, at multiple levels of the brain. We are not


conscious of the proto-self.” (Feeling of What Happens 1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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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기술적 자아로 가면, 반응하는 자아와 느끼는 자아의 간극이 삭제되기는 하
지만, 다마지오는 외부의 충격에 반응하는 자아를 느끼는 자아에서 씨앗 자아가
생겨나기 때문에, 자기 감응이 없다면 의식적 자아의 토대가 된다. 다마지오를 포
함하여 뇌과학의 연구자들은 우리의 지각은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뇌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벨은 누르
면, 초인종의 다양한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초인종에서 어떤 소리가 나든 문
을 연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기술적 자아가 소리와 문을 여는 행위 사이의 간극
을 삭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느끼지만 이는 사실 뇌
가 만드는 착각이다.
뇌는 물리적 세계와 엮인 온갖 끈을 숨기고 외부세계와 독립된 자율적 체계를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과가 붉다고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아니라 뇌의
해석이다. 우리가 사과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사과가 뇌에서 표상되어야하고, 그
다음에 의식이 그 표상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아무리 짧다고 해도
시간적 차이가 있다. 의식적 정신적 표상에 앞서 비의식적 성분의 작용이 있는 것
이다. 사실 사과의 색은 낮이냐, 밤이냐에 따라서, 혹은 빛의 파장, 명도, 채도에
따라서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지하는 사과의 색깔은 늘 ‘빨강’이다.
이를 색의 항상성(color constancy)이라고 인지과학에서 부르지만, 사실 이 항상
성이 가능한 것은 유기체의 자기기록적 자아의 자기감응 때문이다.
자기감응의 간극의 삭제는 재현체제에서 잘 드러난다. 재현은 ‘노에시스’
(noēsis)와 ‘아이스테시스’(aisthēsis), 즉 사유와 감각의 일치를 상정한다. 이는
다마지오의 ‘자기기술적 자아’가 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커피가 향기롭고
맛있다고 느끼는 것이나 담배 냄새를 역겨운 것으로 느끼는 것은 단순히 감각중
추의 지각이 아니라 그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는 사유가 몸에 합체된 결과
다. 역사적으로 교황청에서 커피에 세례를 주기 전까지 새까만 커피는 사탄의 음
료였고, 담배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뇌하는 남자의 낭만적 아우라를 상
징했다. 그러나 오늘날 재현체제에서 커피의 쓴맛을 느끼는 감각지각은 커피 문화
를 멋진 취향으로 간주하는 판단 뒤로 사라지며 담배의 낭만성은 담배가 역겨운
것으로 판단 뒤로 사라지고, 몸에 합체된 인식이 마치 생물학적인 원초적 정동인
것처럼 전시된다.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53


다마지오가 말한 것처럼 정서와 감정, 느낌은 이성의 요새에 침입한 침입자가
아니며, 정서는 이성의 네트워크와 쉽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은 기계적 카메라와 달리 눈의 렌즈에 포착되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
니라 뇌의 스크리닝을 통해 해석된 결과를 본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본
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윙크는 단순히
눈을 감았다 뜨는 행위가 아니고 다이아몬드는 단순히 단단한 돌이 아니다. 재현
이나 상징화를 통해 다이아몬드는 그냥 돌이 아니라 귀한 보석으로 인식되고 윙
크는 눈의 물리적 깜박임이 아니라 사랑의 표시가 되며 돌이나 눈의 깜박임 등은
그것을 대리하는 기표 뒤로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것은 단지 대상이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고 들리지 않는 것은 소리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뇌가 시각중추로 들어오는 모든 신호를 지각으로 내보내지 않듯이 몸의
감각중추의 활동은 뇌의 해석 뒤로 사라진다.
60년대 이후의 후기구조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학자들은 이러한 재현의 문
제를 비판하고 해체하면서, 재현 속에 숨어있는 권력의 작동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대표적 예가 말라부의 스승인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11) 차연
(différance), 흔적(trace) 등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은 모두 자기 감응 속의 간극
드러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외부의 자극이나 사건에 반응하는 자아와 그
자아를 감지하는 자아 사이의 시공간적 간격(espacement)를 드러내어, 자기감응
이 실제로는 이질 감응(heteroaffection)임을 설파했다.
데리다에 의하면 순수한 자기감응이란 없다. 데리다에 의하면 자기감응은 내
적 목소리이자,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Voice and Phenomenon 67)이기도 하
지만, 동시에 나 안에 마치 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부르고 대답하는(Postcard

11) 데리다가 1990년대까지 로고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접촉에 대


하여: 장 뤽 낭시 (On Touching: Jean-Luc Nancy)와 같은 후기작에서는 촉각이 시
각과 청각을 넘어서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감각으로 해석한다. 그의 대표작 그라마
톨로지 와 목소리와 현상 (Voice and Phenomenon, 특히 5, 6장)에서 데리다가 로
고스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자기감응의 문제를 다룬다면, 접촉에 대하여 이후에
는 촉각을 중심으로 자기감지(self-touching)을 다루고 있다. 그 외 사후에 출판된
강의록인 하이데거: 존재와 역사의 문제 (Heidegger: The Question of Being and
History) 역시 주요 주제는 자기-감응이다.

254
359) 내 안의 나와 타자 간의 이중회합이기 때문이다. 자기감응은 자신의 존재를
주체가 감지하는 단계에서 자아가 둘로 쪼개지지만, 마치 다마지오의 자기기술적
자아에서 그 간극이 사라지는 것처럼, 전통 철학의 주체론은 마치 그 간극이 존재
하지 않는 것처럼 그 간극을 삭제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삭제된 간극과 틈새을 드
러내고, 내가 감응하는 내 안의 ‘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내 안의 타자이자, 내 속
의 내가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타자이기 때문에, 자기 감응의 순간은 사실은 이질
감응(hetero-affection)의 순간으로 단일하고 일관된 존재로서 ‘주체’가 타자를 향
해 파열하는 순간이 된다.
그러나 말라부는 감응(affection)의 개념을 스피노자를 따라 “차이의 감지함
으로써 생겨나는 모든 종류의 변용”(every kind of modification produced
by the feeling of a difference)(Self and Emotional Life 5)으로 정의하기 때문
에,12) 데리다가 주장하는 ‘이질 감응’이 사실은 자기 감응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마지오가 보여준 바처럼, 생물학적으로는 자기 감응은 곧 이질 감응
인 것이다.
말라부가 보기에, 다마지오와 데리다 모두 자기 자신을 [마치 대상처럼] 감지
하고 느끼는 주체의 분열을 전경화하지만, 데카르트의 경우에도 경이의 주체는 놀
라는 자신과 놀라는 자신을 느끼는 자아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기감응’ 역시 이질 감응이며, 자신을 타자처럼 느낀다는 점에서 ‘자기
이질 감응’(auto-hetero-affection)의 전통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말라
부가 보기에는 다마지오나 데리다 역시 넓은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전통에 속한다
고 본다. 이러한 말라부의 견해를 살피기 위해 데카르트가 정동을 다루는 텍스트,
영혼의 정념 (The Passions of the Soul)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영혼의 정념 은 총3부로 나뉜다. 1부는 정념(passion), 혹은 정동적 행위 속
에서 영혼과 몸의 통일을 다루고, 제2부는 원초적 정념과 파생된 정념을 다룬다.
여기서 경이, 사랑, 증오, 욕망, 기쁨, 슬픔이라는 총 6개의 정동이 등장한다. 제3

12) 정동(affect)은 사용하는 학자에 따라 그 개념의 편차를 보이고 있고, 정동의 번역도
학자마다 다르다. 정동을 “몸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affection)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보는 스피노자
를 따른다면, ‘변용’이 더 적절하겠지만, 여기서는 데리다나 다마지오의 affection을
함께 논의하기 위하여 ‘변용’보다 조금 더 포괄적인 단어인 ‘감응’으로 번역한다.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55


부에서는 관대함(generosity)을 다룬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정념(passion)이 영
혼과 몸을 묶어주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다마지오의 정동 개념과 다르지 않다. 그
러나 다마지오와 데카르트의 차이와 근친성을 함께 살피기 위해 말라부는 이 모
든 정동 중 첫 번째인 ‘경이’(wonder)에서 드러나는 자기 감응을 살핀다.
경이는 예기치 않고 낯선 아름다움에 의해 야기되는 놀람을 의미한다
(Descartes, §28). 데카르트에 의하면, 정동의 기원이 경이이며, 경이는 세계에 대
한 반응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대상이 우리에
게 도움이 되는지 유용한 것인지를 알기 이전에 일어나는 정동이며 그래서 모순
없는 일차적 정동이다.
그러나 데리다와 다마지오와의 차이는 데카르트가 ‘대상에 의해서 놀라는 능
력이 주체에게 없다면, 주체는 경이를 느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즉 우리
가 경이를 느끼는 것은 자아가 외부적으로 마주한 대상 때문이 아니라, 자아의 스
스로 놀라는 능력 때문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이가 대상, 외부세계, 타
자에 열려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 자기 감응의 형태인지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는 경이가 영혼에만 관계하고, 영혼 그 자체를 위한 정념이기 때문에
제1정념이라고 설명하면서(§28) 놀라는 능력은 주체의 외부에 있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놀라는 능력이자 정신이 놀람이며, 정신이 열려서 대상에게 개방되고, 놀
랄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경이는 타자성이 영혼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으로 설
명한다. 이는 경이가 차이의 정동이라는 것, 데카르트에게도 경이 이전의 자아와
경이 이후의 자아가 동일하지 않으며, 경이가 내 속에 나와는 다른 타자를 일깨운
다는 점에서 ‘경이’는 자아-이질-감응인 것이다.
데리다는 자기감응을 해체하면서 이질 감응(hetero-affection)을 주장했지만,
해체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경이가 없다면 해체는 가능하지 않다. 데리다에게
이질감응은 타자에게서 오는 감응이자 전적인 타자에서 오는 예기치 않은 감응인
동시에 내 속에서 있지만 마치 내가 아닌 듯한 이질적 타자에 의해서 촉발되는 정
서다. 말라부는 데리다의 이질감응이 내적인 타자를 느끼는 자기감지
(self-touching)이기도 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이질감응이라기 보
다는 자기이질감응(auto-hetero affection)이며, 타자에 대한 반응(놀람, 경이)에

256
서 촉발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데리다도 인정했듯이, 고유하게 순수하고 즉각적이며, 직관적인 정신의 자기
감응이란 없다. 데카르트에게서도 ‘경이’는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자동감응과 이질
감응 사이의 경계에 있다. ‘경이’는 양가적인 정동이다. 한편에서 그것은 자아를
놀라게 한다는 점에서 예기치 않은 것이며, 익숙하지 않은 이질적인 것과의 조우
로 발생하며, 다른 한편으로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을 포착하는 영혼의 능
력과도 관련되어 있다. 후자가 자기 감응이라면, 전자는 이질 감응이다. 이질 감응
으로서 경이는 이전에는 무시하거나 간과했던 대상을 배우고 기록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즉 이전에는 고려할 가치가 없었던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경이
이다. 이것은 판단 이전의 정동이기 때문에 위계질서가 개입하지 않는다. 특이성
에 대한 개방이며, 동일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 즉 타자성에 대한 개방이다. 경이
에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갇힌 사람이며, 세계의 언캐니(the uncanny)를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경이를 느끼는 자만이 타자와 이질성을 존중할 수 있다.
이는 경이를 통해 자아를 가치 있게 바라볼 때만,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받아들
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이질감응이 바로 자기감응이며, 자기 속에서 편
안함을 느끼는 자아의 반응이 아니라, 자아 속의 불편함과 타자성에 반응하지 않
는다면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서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구조가 자기감
응 혹은 자기이질감응의 구조와 동일하며, 주체가 독특한 현존을 느끼는 자기와의
접촉(self-touching) 역시 자기(이질)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감응이 없다면
주체가도 존재할 수 없으며, 원초적인 자기감지의 변이과정이 바로 정동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와 다마지오는 왜 데카르트를 비판하는가? 데카르트의 문제
는 영혼이 뇌의 솔방울샘(pineal gland)에 위치한다고 생각했고, 정신과 육체의
통합이 솔방울샘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솔방울샘은 몸과 영혼이 연결되는
유일한 장소이자 영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데카르트에게 영혼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생각할 때, 영혼이 과연 ‘솔방울샘’과 같이 그렇게 작은 공
간만을 차지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질문하면서(On Touching 155), 솔방울샘을
실제 몸의 일부라기 보다, 몸과 영혼의 연결을 위해 고안해낸 은유이자 관념의 산
물로 간주한다. 데리다에게 데카르트의 솔방울샘은 영혼의 손이며 타자성을 향해
열리는 공간이 아니라, 영혼이 자신을 감지하는 비공간적 공간이며, 영혼의 자기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57


변화를 위한 초월적 위
치인 것이다.
다마지오 역시 데
카르트의 오류가 무엇
보다 솔방울샘을 영혼
과 몸을 연결하는 소프
트웨어처럼 간주하여
뇌가 몸의 다른 부분들
과 연결되어있다는 사
실, 뇌를 포함한 전체
몸을 보지 못했기 때문
에 데카르트에게 정신
이란 탈육화된 정신과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Descartes’ Error 236).
데카르트의 영혼의 정념 에서 넓은 의미의 정념은 6개의 정서로 구분되지만,
좁은 의미에서 정념은 영혼 그 자체의 놀라는 능력인 경이로 한정된다. 그 경이가
위치하는 곳이 솔방울샘이다. 그래서 다마지오는 데카르트가 영혼의 순수한 반성
적 사유에서 놀라는 능력이 나온다고 보았고, 그래서 정서(몸)과 의식(마음)이 연
결되어있다는 사실을 데카르트가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즉 외부의 침입이라는 뇌
사건, 즉 정서에서 느낌으로 이어지는 과정없이 경이가 가능하다는 데카르트의 주
장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다마지오에 의하면, 의식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 외부 대상과의 대면으로
인해 야기되는 유기체의 항상성 혼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식은 외부에서 오는
충격의 결과다. 신경과학에서 자동감응은 데카르트처럼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자
기감응이 아니라, 그 반대로 비의식적인 과정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 근육의 떨
리거나 혈압이 오르는 등 뉴런적인 동시에 신체적인 자기감응은 생물학적으로는
이질감응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자기감응은 이질감응의 소산인 것이다. 원자아는
비의식적인 몸에서 나오는 뉴런적 자아다. 반면 자기기록적 자아는 나와 타자 정
도만을 구분하는 원자아를 변형하여 과거 개인의 경험과 경험에서 비롯하는 미래
의 예견에 의해서 이야기를 만든다. 자기 기록적 자아는 의식적인 동시에, 타자나

258
외부 사물을 자신에 맞게 변형하는 통합된 자아다.
말라부가 보기에, 데리다나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경이’를 몸과 관련되지 않
은 영혼의 자기 감지로만 축소했다고 본다. 데카르트의 경이가 정동인 이상, 경이
의 순간은 타자성에 대한 열림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자기감응은 될 수 없
으며, 경이 또한 자기이질감응이다.
그래서 말라부는 데카르트의 은유적 촉각에 대항하여, 낭시가 말한 “비은유적
촉각”, 즉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잃어버린 “불연속성, 중단, 휴지, 소실”
(“discontinuity, interruption, cesura, syncope”)에 주목한다. 의학에서 이 소
실(syncope)은 의식의 상실이며(Nancy 161-71), 게이지처럼 이전의 자신과의
불연속성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대뇌의 자기감응은 주체의 자기감응과는 다르다. 대뇌는 자신을 대상으로 타
자화하여 사유할 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사 자신을 대상으로 사유한다
해도, 주체는 뇌가 하는 일의 복잡한 프로세스를 알지 못한다. 단지 뇌가 뉴런과
뉴런, 그리고 몸이 보내는 신호 등을 조합하여 의식으로 내보낸 결과만을 알기 때
문이다. 내적 자아 속에 뇌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아가 존재하는 장에서 뇌는 부재
한다. 대상으로서 자신을 주체화하는 과정이 뇌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
로 대뇌의 자동감응은 주체성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무의식과 달리, 대뇌의 비의
식은 파괴가능하며, 게이지와 같은 뇌손상을 입은 경우에 비의식적 뇌지도는 파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감응을 연구한 자들 중 어느 누구도, 다마지오도, 데리다
도, 데카르트도 파괴가능한 정동인 진정한 이질감응에 관하여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라부의 관점이다.

IV. 사고(accidents)의 존재론: 파괴적 가소성과 경이를 모르는 주체

말라부에 의하면 신경과학자와 구조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인문학자들도


이질감응을 제대로 설명한 학자는 없었다. 이질감응을 주장한 데리다조차도 데카
르트에서 좀 더 멀리 나가지 못하고, 자기이질감응에 머물고 말았으며, 다마지오
의 경우도 자아는 결국 자기기술적 자아라는 통합적 자아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59


물론 차연, 대리보충, 흔적 등과 같은 데리다의 개념은 자기감응과 재현의 네트워
크가 포착하지 못한 것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외부적 사고에 의한 뇌손
상, 즉 게이지와 같은 사례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이 말라부의 주장이다.
다시 게이지의 사례로 돌아갈 때, 우연한 사고 이후의 게이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파괴 이후에 만들어진 인격이다. 사고
후에 새로이 생겨난 게이지의 인격은 그 자신의 안에서 태어난 괴물이다. 그러나
이 괴물은 유전에 의해서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수많은 게이지들은 해결되지
않는 어떤 유아기의 갈등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억압된 것의 귀환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전쟁에서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 혹은
자연재해나 정치의 재난에 의해서 희생자가 된 사람들, 치명적이고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전의 자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을 산다. 하지만 새로 태어난 인격은 자신 속의 타자가 아니고, 절대
적 타자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들을
그 어떤 이론가도 치료되어야할 환자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마지오가 뇌와 정동의 연구를 하면서 주목하지 않은 분야는 대뇌 가소성
(plasticity)과 관련된 부분이다.13) 신경과학과 의학, 예술, 교육 등 거의 모든 분
야에서 논의되는 가소성은 언제나 긍정적 가소성이다. 그것은 형식을 주고 받는
것 사이의 평형, 항상성을 언급한다. 가소성은 어떤 충격으로 인해서 뉴런 연결의
형상이 변화가 생길 때 발생한다. 그 어떤 사람도 자발적 가소성을 생각할 수 없
다. 완전히 으깨어져버린 얼굴도 얼굴이며, 트라우마를 입은 마음도 여전히 마음
이다. 그러므로 가소성은 그 자체의 부정성, 즉 파괴적 가소성을 언급하지 않고서
는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오늘날 가소성 담론은 잠재능력강화라는 이
름으로 활성화되지만, 이것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배적 담론의
강화와 보존에 봉사할 뿐이다.
말라부의 핵심 개념인 ‘가소성’ 개념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에서 가져온 개념

13) 말라부의 가소성의 개념과 가소성의 오용 사례에 대해서는 뇌는 세계를 어떻게 파


괴/창조하는가: 말라부의 뇌가소성과 뉴런 이데올로기 에서 이미 논의한 바 있으므
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논의에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겠다.

260
이다. ‘가소성’이란 원래 물리학의 개념으로 외부에서 열이나 압력을 가했을 때 형
태가 변하고, 형태 변화가 일어난 뒤에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지 않는 플라스틱의
속성에서 유래한다. 일단 형태를 얻으면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다. 마치 조각
가가 대리석으로 조각을 했을 때, 일단 조각이 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Accident 4). 가소성은 그 속에 능동과 수동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가소성은 외
부의 압력, 충격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형태(form)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며, 성형수술(plastic surgery)과 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주는
능력”이다(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 5). 성형수술이 아무리 잘못되
었다 해도, 일단 수술이 되면 원래 상태 그대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플라스틱은 형
태 변화가 일어난 뒤 결코 원래 형태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정론적이지
만, 그것이 다른 뉴런과 끊임없이 접속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무
한한 변형에 열려있다. 가소적 뇌는 명령을 내리는 중앙통제센터라기보다는 접속
과 연결에 의한 네트워크의 의미가 더 강하다. 따라서 세계 그 자체는 가소적이며,
우리가 아직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창조될 수 있다.
즉 뇌의 가소성은 세계의 실제 이미지다. 알랭 르네(Alain Resnais)의 1968
년 SF 영화 <사랑해 사랑해>(Je t’aime, Je t’aime)에서, 자살에 실패한 후 실험대
상이 된 주인공 끌로드의 기억이나,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에서 형상화된 세계는 뇌의
신경망(오른쪽 그림)처럼 총체화
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는 눈으로 세계를 본다고 생각하
지만, 사실은 실제 세계를 보지
못하는 뇌가 눈이 보내온 파편화
된 정보를 통해서 시각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뇌 속에 정확히 무엇이 입력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과거의 사후적 재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 인과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 시간에 펼쳐져 있는 세계를 보지 못한다. 가소적 뇌
는 명령을 내리는 기관이 아니라, 신호의 교환과 소통, 접속과 연결을 통한 협동,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61


지원, 적응, 창조다. 시냅스에 의한 네트워크의 연결이 세계를 형상화하는 힘이며,
이 힘에는 위계질서도 명령을 내리는 중심이 되는 기관이 없다. 여기까지의 정의
는 기존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신경가소성, 대뇌가소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말라부만의 고유한 사유가 전개되는 부분은 헤겔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부정적인 “파괴적 가소성”(destructive plasticity)에 이르러서 이다. “플래스틱
폭탄”(plastic bomb)이라는 용어에서 보듯 파괴적 가소성은 “형상을 파괴하고
형태를 무화시킬 수 있는 능력” 또한 가진다. 이 역시 창조적이지만, 그것은 파괴
를 통한 창조이다.14)
진정한 창조는 파괴적 가소성을 통해서 생겨난다. 태아의 손가락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손가락 사이의 분리가 일어나야 하고, 이는 시냅스의 파괴를 동반한다.
파괴적 가소성은 초월이 가능하지 않을 때, 도주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생
겨나는 타자성의 형식이다. 이 환경에서 유일한 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타자가
되는 것이다. 말라부는 이러한 파괴적 가소성을 헤겔에서 찾아낸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 의 유명한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주인과 노예는 자아가 둘로 쪼개져서
존재하는 자아 속의 두 다른 형태다. 대부분의 헤겔 학자들은 전통철학자와 마찬
가지로 헤겔에서도 자기-감응의 구조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타
자, 그리고 영혼과 몸, 나와 세계 사이의 분리가 있고, 변증법은 자기감응, 이질감
응,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이질 감응의 운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14) 필자가 이해하기에, 말라부의 ‘파괴적 가소성’의 주장과 가장 유사한 주장을 펼치는
학자는 데리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슬라보 지젝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포스트카드
(The Post Card)의 뒤늦음(post)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스승-제자의 위계를 깨트
리고, 둘 사이의 어긋난 조우를 공연하듯, 말라부는 스승인 데리다와의 어긋난 조우
를, 그리고 지젝은 자신의 지적 스승인 라캉과의 어긋난 조우를 공연함으로써, 둘
사이의 만남의 무대가 마련된다. “뒤따르는 것이 앞선 것의 모방이나 복사가 아니
라, 먼저 도착한 자가 도래할 것(to come)을 예기하는 것”처럼, 데리다가 말라부의
스승이지만, 말라부의 이론이 오히려 데리다에 앞서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
고(인터뷰), 지젝은 자신이 라캉을 표절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이 지젝을 표절한다
(Less than Nothing 557)고 말하는 방식에서도 둘 사이의 유사점을 찾을 수는 있지
만, 더 큰 유사점은 헤겔, 혹은 그들에 의해서 새로이 해석된 헤겔(포스트-헤겔)과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운 오늘의 현실에 대한 통찰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
다.

262
다시 말해, 헤겔학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자기감응(정)에서 이질감응(반), 자
기이질감응(합)의 과정으로 읽었지만, 말라부가 읽는 헤겔은 이와는 다르다. 진정
한 변형은 ‘나’라는 전통적 개념에 폭파가 일어나야 하며, 헤겔을 그러한 폭파의
사유자로 간주한다. 즉 자기 의식이 몸의 외부적 조건을 내부화할 때, 내부화와 그
것을 이해가 자기-의식 그 자체를 해체한다. 헤겔에서 다시 태어난 자아는 결코
원래 자아에 상응하지 않는다. 자기 변형은 진정한 이질감응이다. 헤겔이 말하는
가소적 주체는 그 자신의 형상과 분리된다.
말라부가 헤겔의 주체를 파괴적 가소성의 사례로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주로
‘지양’으로 번역되는 aufgeben에 대한 독해에 있다. 말라부에 의하면 aufgeben
은 지양이 아니라, 포기다. 절대정신이라는 익명의 자아가 등장하는 순간, ‘포기’
에 의해서 폭발의 주체, 파괴적 가소성의 주체로 나아간다. 절대정신의 자아가 태
어나는 것은 그 자신의 본질을 포기함으로써다. 이 포기는 자아-이질감응의 형태
로 그 자신에게 다시 환원되지 않는다(“You be my body for me” 624).
헤겔의 포기 이후의 주체는 차이를 보유하지 않는다. 마치 ‘차이’에 의존해서
남녀차별이 없어지지 않듯이, 차이에 의거해서 남성중심사회를 아무리 비판해도,
젠더 이분법을 보유하고 있는 한, 여전히 남/녀의 위계질서는 작동한다. 가장 급
진적 도전은 차이가 아니라, 차이의 무화이며, 차이의 폭발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아는 푸코의 변형주체화를 닮아 있다(Hermeneutics of the
Subject 214). 변형주체화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다는 뜻도 아니고 타자
의 차이를 흡수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나’ 속에 존재하는 자아의 두 형식에
반대하는 자아-만들기(self-making, self-care)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체의 예를 말라부는 자기 자신을 변형시킴으로써 아폴로의 손에서
벗어난 다프네의 예를 든다. 나무가 된 다프네는 불가능한 순간에 자신을 폭파하
고 그녀를 쫓아오는 아폴로가 전유할 수 없는 몸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대단히 기
이한 변형이지만, 구원은 구원이다. 카프카의 변신 은 파괴적 가소성의 다른 예
일 수 있다. 해충으로 깨어난 그레고르는 파괴적 가소성의 완전한 표현이다. 우리
는 아무도 그레고르가 왜 곤충으로 변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레고르에
게서 다프네의 나무껍질을 발견한다. 그러나 곤충이 된 그는 가족에 의해서 재오
이푸스화된 자신을 발견했고, 재오이디푸스화 이후 그는 비참 속에서 죽어간다.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63


죽어가면서도 그는 가족을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파괴적 가소성이 변신 에서
완전히 구현되지 못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하는 것에
서 끝났기 때문이다.

V. 나가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오늘날의 공포가 새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1차산업혁명 시기


에도 기계에 대한 공포는 있었다. 러다이트 운동(Luddite)은 그 대표적 예다. 그
러나 4차산업혁명 시대에는 기계부수기 운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날
의 우리에게 기계파괴를 할만한 리비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고
(accidents)의 시대를 산다. 사고는 모든 곳에 있다. Covid 19 사태와 같은 전후
후무한 사건 속에도,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폭우와 같은 자연재해, 의료사고 등에
도 있다. 또한 직업을 가지고서도 안정적 삶을 보장받지 못하고, 실업이나 실업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에서부터, 결혼과 출산, 자신의 몸을 누일 집마저 포기하
는 삼포세대, 이에 더해 직장, 집, 그리고 희망/취미와 인간관계까지를 포기하는
N포세대는 ‘포기’를 통해 파괴적 가소성을 구현하는 주체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출구없는 닫힌 사회로, 누구도 자본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한
다는 데 있다.
지젝이 말하듯이 지난 세기의 혁명이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의 혁명은 “다르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건이다. 이들은 혁명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라는 사회의 명령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전
망을 포기한다. 이 포기는 말라부에게 현체재와 현세계에 대해 더 이상 경이가 가
능하지 않은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현 체재와 상징질서의 포기이다. 그러나 이 포
기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주체로서의 삶의 시작점이다. 결혼이나 집의 포기는 목숨
만을 연명하는 생존에 저항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에 대한 근본적 요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라부는 사고와 재난의 시대가 결국 지구의 근본변화를 낳은 변형
지구화의 시작점으로 우리의 뇌지도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말라부 자신도 말했듯이 뇌가 지향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죽음이

264
아닌 삶이다. 그리고 뉴런과 뉴런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냅스
라는 ‘사이’ 공간을 통해서 한편으로 단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연결을 모
색함으로써 삶을 추구한다. 따라서 말라부가 아직, 혹은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뇌의 활동에서 배워야할 것은, 파괴 이후에도 뉴런은 새로이 연결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한다.15)
필자가 말라부에 공감하는 부분은 이 모든 파괴와 재난에도 불구하고, 인간
주체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 있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더불어, 모든 취약성을
제거하고 신이 된 인간, 즉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가능성이나 탈신체화의
불멸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스런 감정과 유한한 신체를 가진 인간의 취
약성을 믿는다.
다시 말해 결여와 취약성이 인간 존재의
조건이며, 인간의 가능성이 바로 그 결여와
취약성에서 비롯한다. 大(클 대)와 人(사람
인)은 두 글자 모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상형
자에서 출발했으나, 똑바로 앞을 보고 서서
위대함이나 완전함을 자랑하는 모습(大)은 인
간이 아닌 ‘크다’의 뜻으로 발전했고, 옆으로
www.sciencefacts.net/synapse.html
서 있는 모습(人)이 인간이라는 뜻으로 발전
했다. 앞이 아닌 옆을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없어, 타자나
주변 환경 등과 접속, 관계맺음을 통해서만 살아간다는 고대인의 통찰이 반영된
글자다. 단어 ‘인간’(人間)의 ‘間’ 역시 문(門) 사이로 들어오는 빛(日)을 형상화하
여, 인간이 사이, 틈, 혹은 빈자리(void), 결여를 통해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
러낸다. 라틴어에서도 ‘산다’(to live)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inter homines
esse)는 뜻이며 ‘죽는다’(to die)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기를 멈춘다’(inter
homines esse desinere)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이,’ ‘틈’의 존재다. ‘감정’의
자리 또한 고정되어있지 않고, 불확실하여, 확실한 정의를 비껴가는 이 ‘사이’의

15) 말라부가 2021년 출간한 공동저작의 제목이 속박하지 않는 연대 (Unchaining


Solidarity)인 것을 보니, 말라부 역시 파괴적 가소성을 넘어서 접속과 연결을 통한
집합 주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65


공간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뉴런이나 세포들과 접촉하여 정보가 오고가는 부
분인 우리 뇌의 시냅스도 뉴런과 뉴런의 사이의 빈 공간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남은 과제는 기계와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이 틈새, 사이 공간을
이용하여 우리가 어떻게 이질적 타자와 새로운 접속을 만들고, 새로운 판짜기를
해나갈 것인가라는 것이다.

주제어: 말라부, 다마지오, 데카르트, 정동, 자기감응, 파괴적 가소성

인용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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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Abstract Jeong, Hae Ook

Emotional Brain, Affect, and the Possibilities of


Trans-subjectivation

Recent research on brain science has shown that the brain can not
be considered as the nonsensuous commanding center of the body,
devoted only to logical and cognitive processes, but it is closely related
to the production of emotions, passions, and feelings. Based on
Catherine Malabou’s recent works including Self and Emotional Life,
which has developed her conception of plasticity in relation to emotion
studies on neuroscience, I try to compare ‘emotions and feelings’
studied on brain science, neurobiology, and neuroscience and ‘affect’,
‘passion’, and ‘wonder’ in philosophy. Then, I examine the concept of
brain plasticity and the potential of subject to come, revisiting the
notion of Cartesian pure auto-affection criticized by Damasio and
Derrida. Finally, I critically examine how Malabou elaborates the
possibilities of trans-subjectivation beyond quasi-hetero-affective
subjectivity inherent to their views.

Keywords: Catherine Malabou, Antonio Damasio, Rene Descartes, affect,


autoaffection, destructive plasticity

논문투고일: 2022년 8월 31일 심사의뢰일: 9월 8일 심사완료일: 9월 17일 게재확정일: 9월 17일

•연구자: 정혜욱 /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 정혜욱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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