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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정서적 뇌, 정동, 그리고 변형 주체화의 가능성
https://doi.org/10.36114/JLF.2022.9.23.2.243
정혜욱 (부경대)
I.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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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스스로 학습하면서 진화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인간이 기
계의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종이 “심각한 교정과 업그레이드가 필
요한 웻웨어(wetware)”3)로 간주될 지도 모른다(Leonhard 30). 강한 인공지능
의 도래로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하게 될 때, 영화 <가타카>나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처럼, 유전자재조합기술이 아닌 자
연수정으로 태어난 인간을 천시하거나 금지하게 될지도 모르고, 나아가 <터미네
이터>(The Terminator) 시리즈에서처럼 기계가 지구상의 최고의 버그를 인간으
로 간주하고 인류멸종프로젝트를 가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문제는 기계가 인간처럼 진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
라, 사람들이 기계처럼 프로그램화되어 시키는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것 외에
제작하고 창조(poiēsis)하는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망각한 데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인공지능과는 달리 반복
적 노동이나 차가운 논리와 복잡한 계산 시스템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보전과 생존 활동에 최적화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생존은 단지 살아남는
것에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키는 대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고, 외딴 섬에 끌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고기를 잡을 수도, 20시간 이상 마늘을 깔 수도 있다. 그러나 뇌는 목숨만 부지하
는 “생존”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살만한 삶(livable life), 혹은 스피노자의 용
어로 살고자 하는 의지인 코나투스(conatus)를 지향한다. 코나투스란 ‘생존’만이
아니라, 뇌과학의 용어를 빌자면, ‘삶다운 삶(wellness, wellbeing)을 추구하도록
하는 뇌 회로의 활동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종종 물리치거나 길들여
야 하는 정동으로 간주하는 불안, 공포, 슬픔, 수치 등의 부정적 감정조차도 ‘생명
체가 위험을 물리치고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고
살만한 삶을 지향’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성/감정, 정신/육체 등을 분리하고 이성과 정신에 우위를 두는 위
계적 이분법에 익숙하지만, 신경과학자 다마지오(Antonio Damasio)가 주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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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다마지오의 ‘정서적 뇌’와 자기감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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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문제의 논리와 씨름할 수 있었다. 그의 유일한 문제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 있었다. 그 이유는 [사고로 인하여] 느낌을 경험하는 능력에
현저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Descartes’ Error 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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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시간적 간극을 포착하고 내 속에서 최소한 둘로 쪼개져서 존재하는 자아
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분리되지 않는(in-dividual) 자아인 개인이 분리된
간극의 존재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물론 공포에
떠는 자신을 [일종의 타자처럼] 감지하는 것이 언제나 완전한 의식 차원에서 일어
나는 것은 아니다. 느낌 차원에서 자기-감지(self-touching), 혹은 자기감응
(auto-affection)은 비언어적일 수 있다.9)
하지만, 바로 이 ‘자기감응’이 다마지오의 “원 자아(protoself), 씨앗 자아
(core self), 자기 기록적 자아(autobiographical self)”로 이어지는 자아와 씨앗
의식(core consciousness)에서 확장된 의식(extended consciousness)으로 이
어지는 의식에 대한 심오한 재정의로 나아가게 한다.
원자아란 비의식적이고 비이미지적인 뉴런적 자아로, 상호연결된 뉴런 패턴의
집합으로 유기체의 내적인 상태를 대표한다. 원자아는 유기체가 항상성을 유지하
도록 돕는다. 씨앗 자아는 (곰을 만났을 때와 같이) 외부 대상에 의해 유기체의 항
상성이 흔들리는 사건에 의해 원자아를 변형한다. 그리고 자기기록적 자아는 의식
적인 동시에 언어적이며, 명백히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내가 ‘곰을
만났을 때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 도망을 쳤고, 다음에
곰을 만날 때는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기억을 일관적 이야
기로 구성한다. 자기기록적 자아에 의해 일관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에는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식의 시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고, 축적된 기억에 의해 경험이 변형
되기도 한다. 씨앗 의식은 씨앗 자아에 상응하고 확장된 의식은 자기 기록적 자아
에 상응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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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기술적 자아로 가면, 반응하는 자아와 느끼는 자아의 간극이 삭제되기는 하
지만, 다마지오는 외부의 충격에 반응하는 자아를 느끼는 자아에서 씨앗 자아가
생겨나기 때문에, 자기 감응이 없다면 의식적 자아의 토대가 된다. 다마지오를 포
함하여 뇌과학의 연구자들은 우리의 지각은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뇌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벨은 누르
면, 초인종의 다양한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초인종에서 어떤 소리가 나든 문
을 연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기술적 자아가 소리와 문을 여는 행위 사이의 간극
을 삭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느끼지만 이는 사실 뇌
가 만드는 착각이다.
뇌는 물리적 세계와 엮인 온갖 끈을 숨기고 외부세계와 독립된 자율적 체계를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과가 붉다고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아니라 뇌의
해석이다. 우리가 사과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사과가 뇌에서 표상되어야하고, 그
다음에 의식이 그 표상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아무리 짧다고 해도
시간적 차이가 있다. 의식적 정신적 표상에 앞서 비의식적 성분의 작용이 있는 것
이다. 사실 사과의 색은 낮이냐, 밤이냐에 따라서, 혹은 빛의 파장, 명도, 채도에
따라서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지하는 사과의 색깔은 늘 ‘빨강’이다.
이를 색의 항상성(color constancy)이라고 인지과학에서 부르지만, 사실 이 항상
성이 가능한 것은 유기체의 자기기록적 자아의 자기감응 때문이다.
자기감응의 간극의 삭제는 재현체제에서 잘 드러난다. 재현은 ‘노에시스’
(noēsis)와 ‘아이스테시스’(aisthēsis), 즉 사유와 감각의 일치를 상정한다. 이는
다마지오의 ‘자기기술적 자아’가 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커피가 향기롭고
맛있다고 느끼는 것이나 담배 냄새를 역겨운 것으로 느끼는 것은 단순히 감각중
추의 지각이 아니라 그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는 사유가 몸에 합체된 결과
다. 역사적으로 교황청에서 커피에 세례를 주기 전까지 새까만 커피는 사탄의 음
료였고, 담배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뇌하는 남자의 낭만적 아우라를 상
징했다. 그러나 오늘날 재현체제에서 커피의 쓴맛을 느끼는 감각지각은 커피 문화
를 멋진 취향으로 간주하는 판단 뒤로 사라지며 담배의 낭만성은 담배가 역겨운
것으로 판단 뒤로 사라지고, 몸에 합체된 인식이 마치 생물학적인 원초적 정동인
것처럼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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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내 안의 나와 타자 간의 이중회합이기 때문이다. 자기감응은 자신의 존재를
주체가 감지하는 단계에서 자아가 둘로 쪼개지지만, 마치 다마지오의 자기기술적
자아에서 그 간극이 사라지는 것처럼, 전통 철학의 주체론은 마치 그 간극이 존재
하지 않는 것처럼 그 간극을 삭제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삭제된 간극과 틈새을 드
러내고, 내가 감응하는 내 안의 ‘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내 안의 타자이자, 내 속
의 내가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타자이기 때문에, 자기 감응의 순간은 사실은 이질
감응(hetero-affection)의 순간으로 단일하고 일관된 존재로서 ‘주체’가 타자를 향
해 파열하는 순간이 된다.
그러나 말라부는 감응(affection)의 개념을 스피노자를 따라 “차이의 감지함
으로써 생겨나는 모든 종류의 변용”(every kind of modification produced
by the feeling of a difference)(Self and Emotional Life 5)으로 정의하기 때문
에,12) 데리다가 주장하는 ‘이질 감응’이 사실은 자기 감응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마지오가 보여준 바처럼, 생물학적으로는 자기 감응은 곧 이질 감응
인 것이다.
말라부가 보기에, 다마지오와 데리다 모두 자기 자신을 [마치 대상처럼] 감지
하고 느끼는 주체의 분열을 전경화하지만, 데카르트의 경우에도 경이의 주체는 놀
라는 자신과 놀라는 자신을 느끼는 자아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기감응’ 역시 이질 감응이며, 자신을 타자처럼 느낀다는 점에서 ‘자기
이질 감응’(auto-hetero-affection)의 전통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말라
부가 보기에는 다마지오나 데리다 역시 넓은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전통에 속한다
고 본다. 이러한 말라부의 견해를 살피기 위해 데카르트가 정동을 다루는 텍스트,
영혼의 정념 (The Passions of the Soul)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영혼의 정념 은 총3부로 나뉜다. 1부는 정념(passion), 혹은 정동적 행위 속
에서 영혼과 몸의 통일을 다루고, 제2부는 원초적 정념과 파생된 정념을 다룬다.
여기서 경이, 사랑, 증오, 욕망, 기쁨, 슬픔이라는 총 6개의 정동이 등장한다. 제3
12) 정동(affect)은 사용하는 학자에 따라 그 개념의 편차를 보이고 있고, 정동의 번역도
학자마다 다르다. 정동을 “몸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affection)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보는 스피노자
를 따른다면, ‘변용’이 더 적절하겠지만, 여기서는 데리다나 다마지오의 affection을
함께 논의하기 위하여 ‘변용’보다 조금 더 포괄적인 단어인 ‘감응’으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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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촉발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데리다도 인정했듯이, 고유하게 순수하고 즉각적이며, 직관적인 정신의 자기
감응이란 없다. 데카르트에게서도 ‘경이’는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자동감응과 이질
감응 사이의 경계에 있다. ‘경이’는 양가적인 정동이다. 한편에서 그것은 자아를
놀라게 한다는 점에서 예기치 않은 것이며, 익숙하지 않은 이질적인 것과의 조우
로 발생하며, 다른 한편으로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을 포착하는 영혼의 능
력과도 관련되어 있다. 후자가 자기 감응이라면, 전자는 이질 감응이다. 이질 감응
으로서 경이는 이전에는 무시하거나 간과했던 대상을 배우고 기록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즉 이전에는 고려할 가치가 없었던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경이
이다. 이것은 판단 이전의 정동이기 때문에 위계질서가 개입하지 않는다. 특이성
에 대한 개방이며, 동일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 즉 타자성에 대한 개방이다. 경이
에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갇힌 사람이며, 세계의 언캐니(the uncanny)를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경이를 느끼는 자만이 타자와 이질성을 존중할 수 있다.
이는 경이를 통해 자아를 가치 있게 바라볼 때만,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받아들
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이질감응이 바로 자기감응이며, 자기 속에서 편
안함을 느끼는 자아의 반응이 아니라, 자아 속의 불편함과 타자성에 반응하지 않
는다면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서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구조가 자기감
응 혹은 자기이질감응의 구조와 동일하며, 주체가 독특한 현존을 느끼는 자기와의
접촉(self-touching) 역시 자기(이질)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감응이 없다면
주체가도 존재할 수 없으며, 원초적인 자기감지의 변이과정이 바로 정동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와 다마지오는 왜 데카르트를 비판하는가? 데카르트의 문제
는 영혼이 뇌의 솔방울샘(pineal gland)에 위치한다고 생각했고, 정신과 육체의
통합이 솔방울샘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솔방울샘은 몸과 영혼이 연결되는
유일한 장소이자 영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데카르트에게 영혼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생각할 때, 영혼이 과연 ‘솔방울샘’과 같이 그렇게 작은 공
간만을 차지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질문하면서(On Touching 155), 솔방울샘을
실제 몸의 일부라기 보다, 몸과 영혼의 연결을 위해 고안해낸 은유이자 관념의 산
물로 간주한다. 데리다에게 데카르트의 솔방울샘은 영혼의 손이며 타자성을 향해
열리는 공간이 아니라, 영혼이 자신을 감지하는 비공간적 공간이며, 영혼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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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사물을 자신에 맞게 변형하는 통합된 자아다.
말라부가 보기에, 데리다나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경이’를 몸과 관련되지 않
은 영혼의 자기 감지로만 축소했다고 본다. 데카르트의 경이가 정동인 이상, 경이
의 순간은 타자성에 대한 열림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자기감응은 될 수 없
으며, 경이 또한 자기이질감응이다.
그래서 말라부는 데카르트의 은유적 촉각에 대항하여, 낭시가 말한 “비은유적
촉각”, 즉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잃어버린 “불연속성, 중단, 휴지, 소실”
(“discontinuity, interruption, cesura, syncope”)에 주목한다. 의학에서 이 소
실(syncope)은 의식의 상실이며(Nancy 161-71), 게이지처럼 이전의 자신과의
불연속성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대뇌의 자기감응은 주체의 자기감응과는 다르다. 대뇌는 자신을 대상으로 타
자화하여 사유할 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사 자신을 대상으로 사유한다
해도, 주체는 뇌가 하는 일의 복잡한 프로세스를 알지 못한다. 단지 뇌가 뉴런과
뉴런, 그리고 몸이 보내는 신호 등을 조합하여 의식으로 내보낸 결과만을 알기 때
문이다. 내적 자아 속에 뇌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아가 존재하는 장에서 뇌는 부재
한다. 대상으로서 자신을 주체화하는 과정이 뇌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
로 대뇌의 자동감응은 주체성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무의식과 달리, 대뇌의 비의
식은 파괴가능하며, 게이지와 같은 뇌손상을 입은 경우에 비의식적 뇌지도는 파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감응을 연구한 자들 중 어느 누구도, 다마지오도, 데리다
도, 데카르트도 파괴가능한 정동인 진정한 이질감응에 관하여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라부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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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가소성’이란 원래 물리학의 개념으로 외부에서 열이나 압력을 가했을 때 형
태가 변하고, 형태 변화가 일어난 뒤에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지 않는 플라스틱의
속성에서 유래한다. 일단 형태를 얻으면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다. 마치 조각
가가 대리석으로 조각을 했을 때, 일단 조각이 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Accident 4). 가소성은 그 속에 능동과 수동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가소성은 외
부의 압력, 충격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형태(form)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며, 성형수술(plastic surgery)과 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주는
능력”이다(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 5). 성형수술이 아무리 잘못되
었다 해도, 일단 수술이 되면 원래 상태 그대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플라스틱은 형
태 변화가 일어난 뒤 결코 원래 형태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정론적이지
만, 그것이 다른 뉴런과 끊임없이 접속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무
한한 변형에 열려있다. 가소적 뇌는 명령을 내리는 중앙통제센터라기보다는 접속
과 연결에 의한 네트워크의 의미가 더 강하다. 따라서 세계 그 자체는 가소적이며,
우리가 아직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창조될 수 있다.
즉 뇌의 가소성은 세계의 실제 이미지다. 알랭 르네(Alain Resnais)의 1968
년 SF 영화 <사랑해 사랑해>(Je t’aime, Je t’aime)에서, 자살에 실패한 후 실험대
상이 된 주인공 끌로드의 기억이나,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에서 형상화된 세계는 뇌의
신경망(오른쪽 그림)처럼 총체화
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는 눈으로 세계를 본다고 생각하
지만, 사실은 실제 세계를 보지
못하는 뇌가 눈이 보내온 파편화
된 정보를 통해서 시각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뇌 속에 정확히 무엇이 입력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과거의 사후적 재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 인과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 시간에 펼쳐져 있는 세계를 보지 못한다. 가소적 뇌
는 명령을 내리는 기관이 아니라, 신호의 교환과 소통, 접속과 연결을 통한 협동,
14) 필자가 이해하기에, 말라부의 ‘파괴적 가소성’의 주장과 가장 유사한 주장을 펼치는
학자는 데리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슬라보 지젝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포스트카드
(The Post Card)의 뒤늦음(post)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스승-제자의 위계를 깨트
리고, 둘 사이의 어긋난 조우를 공연하듯, 말라부는 스승인 데리다와의 어긋난 조우
를, 그리고 지젝은 자신의 지적 스승인 라캉과의 어긋난 조우를 공연함으로써, 둘
사이의 만남의 무대가 마련된다. “뒤따르는 것이 앞선 것의 모방이나 복사가 아니
라, 먼저 도착한 자가 도래할 것(to come)을 예기하는 것”처럼, 데리다가 말라부의
스승이지만, 말라부의 이론이 오히려 데리다에 앞서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
고(인터뷰), 지젝은 자신이 라캉을 표절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이 지젝을 표절한다
(Less than Nothing 557)고 말하는 방식에서도 둘 사이의 유사점을 찾을 수는 있지
만, 더 큰 유사점은 헤겔, 혹은 그들에 의해서 새로이 해석된 헤겔(포스트-헤겔)과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운 오늘의 현실에 대한 통찰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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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헤겔학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자기감응(정)에서 이질감응(반), 자
기이질감응(합)의 과정으로 읽었지만, 말라부가 읽는 헤겔은 이와는 다르다. 진정
한 변형은 ‘나’라는 전통적 개념에 폭파가 일어나야 하며, 헤겔을 그러한 폭파의
사유자로 간주한다. 즉 자기 의식이 몸의 외부적 조건을 내부화할 때, 내부화와 그
것을 이해가 자기-의식 그 자체를 해체한다. 헤겔에서 다시 태어난 자아는 결코
원래 자아에 상응하지 않는다. 자기 변형은 진정한 이질감응이다. 헤겔이 말하는
가소적 주체는 그 자신의 형상과 분리된다.
말라부가 헤겔의 주체를 파괴적 가소성의 사례로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주로
‘지양’으로 번역되는 aufgeben에 대한 독해에 있다. 말라부에 의하면 aufgeben
은 지양이 아니라, 포기다. 절대정신이라는 익명의 자아가 등장하는 순간, ‘포기’
에 의해서 폭발의 주체, 파괴적 가소성의 주체로 나아간다. 절대정신의 자아가 태
어나는 것은 그 자신의 본질을 포기함으로써다. 이 포기는 자아-이질감응의 형태
로 그 자신에게 다시 환원되지 않는다(“You be my body for me” 624).
헤겔의 포기 이후의 주체는 차이를 보유하지 않는다. 마치 ‘차이’에 의존해서
남녀차별이 없어지지 않듯이, 차이에 의거해서 남성중심사회를 아무리 비판해도,
젠더 이분법을 보유하고 있는 한, 여전히 남/녀의 위계질서는 작동한다. 가장 급
진적 도전은 차이가 아니라, 차이의 무화이며, 차이의 폭발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아는 푸코의 변형주체화를 닮아 있다(Hermeneutics of the
Subject 214). 변형주체화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다는 뜻도 아니고 타자
의 차이를 흡수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나’ 속에 존재하는 자아의 두 형식에
반대하는 자아-만들기(self-making, self-care)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체의 예를 말라부는 자기 자신을 변형시킴으로써 아폴로의 손에서
벗어난 다프네의 예를 든다. 나무가 된 다프네는 불가능한 순간에 자신을 폭파하
고 그녀를 쫓아오는 아폴로가 전유할 수 없는 몸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대단히 기
이한 변형이지만, 구원은 구원이다. 카프카의 변신 은 파괴적 가소성의 다른 예
일 수 있다. 해충으로 깨어난 그레고르는 파괴적 가소성의 완전한 표현이다. 우리
는 아무도 그레고르가 왜 곤충으로 변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레고르에
게서 다프네의 나무껍질을 발견한다. 그러나 곤충이 된 그는 가족에 의해서 재오
이푸스화된 자신을 발견했고, 재오이디푸스화 이후 그는 비참 속에서 죽어간다.
V.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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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삶이다. 그리고 뉴런과 뉴런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냅스
라는 ‘사이’ 공간을 통해서 한편으로 단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연결을 모
색함으로써 삶을 추구한다. 따라서 말라부가 아직, 혹은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뇌의 활동에서 배워야할 것은, 파괴 이후에도 뉴런은 새로이 연결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한다.15)
필자가 말라부에 공감하는 부분은 이 모든 파괴와 재난에도 불구하고, 인간
주체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 있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더불어, 모든 취약성을
제거하고 신이 된 인간, 즉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가능성이나 탈신체화의
불멸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스런 감정과 유한한 신체를 가진 인간의 취
약성을 믿는다.
다시 말해 결여와 취약성이 인간 존재의
조건이며, 인간의 가능성이 바로 그 결여와
취약성에서 비롯한다. 大(클 대)와 人(사람
인)은 두 글자 모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상형
자에서 출발했으나, 똑바로 앞을 보고 서서
위대함이나 완전함을 자랑하는 모습(大)은 인
간이 아닌 ‘크다’의 뜻으로 발전했고, 옆으로
www.sciencefacts.net/synapse.html
서 있는 모습(人)이 인간이라는 뜻으로 발전
했다. 앞이 아닌 옆을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없어, 타자나
주변 환경 등과 접속, 관계맺음을 통해서만 살아간다는 고대인의 통찰이 반영된
글자다. 단어 ‘인간’(人間)의 ‘間’ 역시 문(門) 사이로 들어오는 빛(日)을 형상화하
여, 인간이 사이, 틈, 혹은 빈자리(void), 결여를 통해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
러낸다. 라틴어에서도 ‘산다’(to live)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inter homines
esse)는 뜻이며 ‘죽는다’(to die)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기를 멈춘다’(inter
homines esse desinere)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이,’ ‘틈’의 존재다. ‘감정’의
자리 또한 고정되어있지 않고, 불확실하여, 확실한 정의를 비껴가는 이 ‘사이’의
인용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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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 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 Trans. Sebastian Rand,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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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 The New Wounded: From Neurosis to Brain Damage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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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자료
<사랑해 사랑해 Je t’aime, je t’aime>. 알랭 레네(Alain Resnais) 감독. 1968.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A Space Odyssey>. 스탠리 큐브릭 감독.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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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Jeong, Hae Ook
Recent research on brain science has shown that the brain can not
be considered as the nonsensuous commanding center of the body,
devoted only to logical and cognitive processes, but it is closely related
to the production of emotions, passions, and feelings. Based on
Catherine Malabou’s recent works including Self and Emotional Life,
which has developed her conception of plasticity in relation to emotion
studies on neuroscience, I try to compare ‘emotions and feelings’
studied on brain science, neurobiology, and neuroscience and ‘affect’,
‘passion’, and ‘wonder’ in philosophy. Then, I examine the concept of
brain plasticity and the potential of subject to come, revisiting the
notion of Cartesian pure auto-affection criticized by Damasio and
Derrida. Finally, I critically examine how Malabou elaborates the
possibilities of trans-subjectivation beyond quasi-hetero-affective
subjectivity inherent to their vi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