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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19116/theory.202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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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이론 제 27권 1호 (2022․봄)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1)

정혜욱

I. 들어가며

불안은 오늘날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대단히 불길하고 끈덕진 정동이다. 처음


에는 한두 달 정도 조심하면 종식되리라 생각했던 코로나19의 사태는 2022년 1월
현재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법을 새로이 배워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출현한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는 우리 삶의 모
든 토대를 흔들고, 위기가 곧 일상이며, 일상이 곧 예외 상태인 사회의 모습을 매 순
간 일깨운다. 바이러스 감염이나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이러스
로 인해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들, 국가 주도의 봉쇄와 격리로 인해 직장을 잃은
사람들, 더 힘들어진 취업, 가게의 문을 닫은 자영업자 등 삶이 생존의 문제가 되면
서 삶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사회는 점
점 더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렇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위기의
한가운데 불안이라는 정동이 있다. 어떤 이는 불안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고, 또 어
떤 이는 만연하는 폭력으로 인해 더 큰 불안에 휩싸인다. 외부로 향하는 폭력은 주
로 취약한 타자를 겨냥하고, 내부로 향하는 폭력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외부적 폭력이나 자기학대로서의 내
적 폭력은 위기에 대한 반응이요 증상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와 고

*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9S1A5B5A07111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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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 치유를 모색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종종 길을 잃는다.


정신의학에서 불안은 정신병의 가장 일반적인 증상 중의 하나로 걱정이나 두려
움과 같은 정신적 현상과 동시에 호흡곤란, 두근거림, 피로, 어지러움, 식은땀 등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포함하는 개인적 질병으로 진단되어왔다. 그러나 불안이 몇
몇 예외적이거나 특수한 개인의 병증으로 한정되지 않고, 사회 문화적으로 광범위
하게 확산될 때, 불안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여러 병리적 증상을 폭넓게
포함하게 된다. 사회적 불안은 큰 전쟁을 겪은 이후나 경제적 대공황기와 같은 기
존의 삶의 질서가 흔들리는 시기에 더 증대하며, 우리의 삶의 구조를 지탱해주던
기존 판타지 구조의 붕괴로 인해 삶의 불확실성과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모르는
방향 상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안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이것은 ‘불안’을 주제로 이루
어지는 거의 모든 논의에서 어김없이 제기되는 질문이지만 그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치료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진단은 증상에 상상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항불안
제나 항우울제 등을 처방하여, 증상을 억제 수준에 머물도록 한다. 약물은 주로 증
상을 산출하는 호르몬을 억제하거나 심장박동을 느리게 하여 외상 기억을 약화시
키고, 증상을 완화하고자 한다. 약물치료가 심각한 증상의 완화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원인에 대한 접근 없는 약물치료는 보조 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소외
를 강화하여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큰 문제를 생겨나게 할 수 있기에 라캉
(Jacques Lacan)이 지향하는 분석 윤리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치유에 초점을 맞추어 라캉을 읽으면 읽을수록 불안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라캉의 난해한 이론 속에
서 임상 분석가를 만족시킬만한 해답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렵다. 라캉은 “분석에서
치유는 일종의 덤으로 받는 보너스다”(cure is an additional bonus)(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X: Anxiety 56)1) 라는 식으로 말할 뿐, 임상적 치료에
적합한 객관적 절차나 과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임상을 강조하는 라캉의
비판자들은 그의 이론이 골칫거리이고 그의 치료방식은 무의미하다고 목소리를 높
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라캉의 이론적 행보에서 라캉의 “불안” 세미나가 가지는

1) 이하 이 논문에서 인용되는 라캉의 모든 세미나는 권수와 쪽만 표기한다.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19

위상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그의 10번째 세미나인 불안 은 정


동을 주제로 다루는 유일한 세미나이기도 하고, 2차대전이 끝난 후 50년대와 60년
대 초반의 길잃은 세대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불안을 정신분석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고찰하고자 했던 강연이며,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라캉만의 독
자적 이론이 태어나는 교두보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라캉의 세미나 10 은
오늘날 정신분석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 의 개념
적 토대가 된다. 라캉의 세미나는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전체를 미리 요
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의 이전의 이론적 행보와 세미나 10 의 차이
점을 조금 엿보자면 다음과 같다.
초기 라캉은 프로이트 제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당시의 이론이 프로이트의 오독
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하고, “프로이트의 회귀”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
해나갔지만, 세미나 10 에 이르면 프로이트 이론과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동일시
하는 것을 그만둔다. 세미나 10 에서 프로이트의 ‘거세불안’이나 나르시시즘과 연
결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프로이트의 분리 불안을 포함하여 프로이트가 개념화한
다른 종류의 불안은 거의 폐기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2) 라캉이 1932년 국가박사
학위 논문인 “인격과 관련된 편집병적 정신병에 대하여”에서 정신병의 원인을 자
아의 유전적 요인이나 신체 기관의 이상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
되는 인격과 연관 지어 설명하면서부터 기존 국제정신분석학회의 방향과 다른 길
을 가지는 하지만, 불안 세미나를 계기로 정신분석을 초현실주의와 같은 문화이
론과 실존주의 등의 철학과 연결하여, 상징계의 개념을 흔드는 대상 a나 실재의 개
념 등 전복적이고 급진적 개념을 정교하게 선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캉은 어느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서 공화주의자도 될 수 있
고, 급진적 혁명가도 될 수 있다. 초기의 라캉이 공화주의자에 가깝다면, 세미나
10 을 전후하여 그의 이론은 변신을 꾀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는
세미나 10 에서 드러나는 라캉의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면모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 책의 내용이 ‘전복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후기 라캉의 개념의 토대가
되는 대상 a와 주이상스(jouissance)의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의 설명에 온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상 a’ 개념이 이 강의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2) 이 주장에 대해서는 Diatkine 1049-58쪽 참고.


220 정혜욱

아니지만,3) 상징계에서 실재와 주이상스와 이어지는 핵심 개념으로 정교화되는


것은 세미나 10 에 이르러서라고 보아야 한다. 초기 라캉이 상징계에 초점을 맞
췄다면, 세미나 10 에서는 주이상스와 욕망의 사이에 대상 a 개념을 위치시키고,
불안이 대상 a와 실재계의 개념에서 필수적인 정동임을 확인한다. 많은 학자들이
라캉 이론의 필독서로서 세미나 11권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 을 꼽는
것은 개념의 정의에 초점을 맞춘 10권보다 11권이 라캉의 고유한 목소리가 훨씬
더 명료하게 정리된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11권이 아니라, 세미나 10: 불안 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10권이 최근에 영역되어 아직 이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
유로 첫째,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는 유명한 말에서 보듯, 정신분석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정동보다는 언어와 기표를 우선시해왔다고 비난받아
왔지만,4) 세미나 10 은 불안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가 무엇보다 정동 이론가라
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둘째는, 불안은 사건의 발생 이후가 아니라 어떤 위험한
사건의 기대에 의해서 더욱 증폭되기에, 정신분석학회의 회원자격 박탈을 앞두고
있었던 라캉의 개인사가 그의 정체성 불안과 연결되어, 타자의 욕망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타자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살고자’ 기존의 상징질서에 저항
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불안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2장에서는 대상 a와 관련한 ‘불안’ 개념과 그것의 위치, 3장에서는 그가 프로이트
의 억제, 증상, 불안 을 좀 더 세분하여 정교화시킨 불안 차트 속에 등장하는 억
제, 장애, 당황, 정서, 증상, 좌절 그리고 액팅-아웃과 행위로의 이행 등을 개념을
살핀 후, 4장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와 연결하여 결여의 결여로서의 불안을 살피고 5
장에서는 불안과 치유의 문제를 불안 세미나를 전후하여 엄청난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던 라캉이 자신의 불안과 대면하여 어떻게 대처해나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
회적으로 치유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3) 세미나 10권 이전에 대상 a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60년대 이전의 라캉은 대


상 a를 주로 상상계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관련 국내 논문으로 이수진 21-27쪽 참고.
4) 이 주장과 관련하여 라플랑슈(Jean Laplanche)의 무의식과 이드 (The Unconscious and
the Id) 18쪽 참고..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21

II. 불안: ‘없지 않은 대상’이 보내는 신호

세미나 10 은 총 4부로 구성된다. 1부는 ‘불안의 구조’, 2부는 ‘대상 a의 위


상’, 3부는 ‘욕망과 주이상스 사이에 있는 불안’, 4부는 ‘대상 a의 다섯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으로 보자면 라캉은 불안보다는 대상 a의 개념과 위상을 설명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하지만 제한된 지면에 이 모든 주제를 다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라캉이 말하는 불안을 ‘대상 a와 관련하여 불안의 위
상’을 살피고 다음 장에서 프로이트의 억제, 증상, 불안 을 발전시킨 ‘불안 차트’
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한다.
이 장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덧붙이자면, 대상 a 개념은 라캉 고유한 이론의
출발점이지만, 이 개념에 대한 요약은 불가능하고,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기도 쉽
지 않을 만큼 방대하다. 1950년대에서부터 라캉이 세미나를 그만둘 때까지 이 개
념은 많은 수정을 거쳤고, 세미나별로 대상 a는 타자, 실재, 잃어버린 대상, 욕망의
원인, 아갈마(agalma), 황금수(golden number), 프로이트적 사물(the Freudian
Thing), 유사자(semblance), 잉여 주이상스(surplus jouissance) 등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 익숙한 연구자라면 대상 a에 대한 이 장
의 논의가 수많은 라캉 해설서에 나와 있는 설명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고, 에크리 (Écrits), 세미나 11 혹은 그 이후의 세미나에서 ‘대상 a’
의 설명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미나 10 에서 라캉은 ‘무’(void)
가 ‘없지 않다’(not without)는 것을 보여주고, 주체가 불안을 감지하는 자리가 이
‘없지 않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논의하는 대상 a는 세미나 10 에서 ‘없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대상 a’와 불안 논의가 겹치는 부분으로 한정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세미나 10 에서 라캉은 불안이 “대상이 없는 공포”라는 당시의 지배적 해석
에 도전한다. 프로이트를 포함하여 당시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자, 철학자인 하이데
거 등도 공포에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에는 대상이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라캉
자신조차도 1960년대 이전에는 프로이트를 따라 불안과 공포를 구분하고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고 주장했다(Seminar IV 238; 240). 즉 어둠이
두렵다거나, 개가 짖는 것이 두렵다는 식으로 공포는 대상을 가지지만, 불안은 ‘대
222 정혜욱

상 없는 공포’로서 우리는 명확히 무엇이 우리는 불안하게 하는지 모르는 데서 생


겨나는 정동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세미나 8 에서 대상 a을 중심으로 불안을 정의하기 시작하면서, 욕망
의 대상 원인과 불안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고, 세미나 10 에서 라캉은 “불
안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not without having it)라고 “이중부정”을
행함으로써 어떤 대상이 인간의 욕망을 움직여서 정신분석의 주 대상이 되는지에
대한 혁명적 분석을 행한다. 따라서 이 세미나에서 라캉은 자신의 불안 이론이 프
로이트의 억제, 증상, 불안 (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에서 전개되는
불안 이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분석가의 욕망이라는 문제를
탐구하면서 처음으로 입, 항문, 목소리, 시각의 가장 하에 등장하는 대상 a를 등장
시켜 이 개념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역-전이와 해석, 판타지와
판타지 프레임, 그리고 주이상스와 욕망 사이에 있는 불안과 같은 나중에 반복적으
로 등장하게 되는 주제들의 탐색으로 나아간다.
불안 논의에서 대상 a의 중요성은 라캉의 “대상 a에 대한 유일한 주체의 번역
이 불안이다”(“anxiety is the sole subjective translation of this object”)
(Seminar X 100)라는 문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재현 불가능한 대상 a는 인간
의 인식의 기능에서 언제나 맹점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기에, 인식의 공백 속에서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없지 않은 대상’이다(217). 그렇다면 라캉이 프로이
트를 경유하여 어떻게 ‘없지 않은 대상’을 주체가 불안으로 번역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살피도록 하겠다.
먼저 불안과 관련해서 프로이트의 논의를 살필 때 1894년의 신경쇠약증에서
‘불안신경증’이라는 특별한 증후군을 분리하는 근거 (“On the Grounds for
Detaching a Particular Syndrome from Neurasthenia under the Description
‘Anxiety Neurosis’”)에서 초기 프로이트는 불안이 억압된 리비도와 관련되어있다
고 보고, 특히 성적 에너지가 반복적으로 해소되지 못할 때 불안신경증으로 이어진
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성교중단, 해소되지 못한 성적 흥분, 또한 강요된 금욕과
같은 성적인 관행, 즉 성적 흥분이 만족을 추구하는 데서 방해를 받거나 저지당하
거나 빗나가게 되었을 때 불안신경증에 시달린다고 보았다. 1894년 프로이트는 불
안신경증과 관련하여 불안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23

외부에서 다가오는 일(위험)에 적절히 반응하여 처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정신은 불안 정동에 빠지며, 내부에서 유래하는 (성적) 흥분에 대처
할 수 없을 때, 불안 신경증에 빠진다. (112 원문 강조)

그러나 위와 같은 초기 프로이트의 불안 이론은 30년 후에 대폭 수정된다.


1926년의 억제, 증상, 불안 에서 프로이트가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위
험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경우에는 정상이고 다른 경우에는 병적인가? 혹은 현실적
불안과 병적인 불안의 차이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현실적 불안이 알려진 위험에
관한 것이라면, “신경증적 불안은 알려지지 않은 위험”(Inhibitions 165)에 관한 것
이라고 말한다. 현실적 불안은 외부에서 다가오는 위험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을
때 생기는 것이기에 이는 반드시 병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반면, 신경증적 불안은 현실 속에서 느끼는 실제 위험을 드러내기보다, 알려지
지 않은 위험에 대한 기대와 관계한다. 프로이트에게 알려지지 않은 위험은 대상의
상실과 연결된다. 대상의 상실에 대한 공포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첫 번
째 시기는 아이가 태어나 자궁에서 분리되면서 생겨나는 불안으로, 이 시기의 불안
은 몸의 내부와 외부에서 연원하는 흥분을 감당할 수 없는 자아의 무능력과 연결
된다고 보았고, 두 번째 시기에는 어머니가 사랑을 거두어갈까 봐 불안해한다. 그
리고 세 번째 시기에는 거세불안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불안이 거세 위
협이나, 거세 위협과 유사한 죽음의 공포와 관련된다고 결론 내린다.
거세불안은 거세 위협이 실제 거세가 아니라, 거세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 관계
한다. 자아가 대상의 상실 가능성에 대해 느끼는 위험은 대상(만족의 리비도적 대
상)이 언제나 이미 상실된 것이라는 사실을 감춘다. 고통이 대상의 상실에 대한 실
제 반응이라면, 불안은 그 상실이 수반하는 위험에 대한 반응이자 경고이다. 그러
므로 우리가 불안이 가능한 위험에 대한 기대라고 말할 때 불안한 상태에서 주체
는 대상의 상실이 그에게 가져올 바로 그 위험에 의해 공포에 질린다. 프로이트는
말(馬) 공포증을 가진 “꼬마 한스”의 사례, 즉 5세 소년의 공포증 분석
(“Analysis of a Phobia in a Five-year-old Boy”)의 사례를 환기하면서, 한스의
공포증의 원인이 불안이라고 진단한다. 한스가 정말로 무서워한 대상은 말(馬)이
아니라 아버지의 거세 위협이다. 엄마에 대한 은밀한 성적 애정으로 인해 아이는
224 정혜욱

아버지의 존재에 불안을 일으킨다. 불안을 야기하는 거세 위협을 현실에서 퇴치할


수 없기 때문에 억압하고자 하고 이것이 공포증을 낳는다. 한스가 정말 두려워한
것은 말이 아니라 거세다. 거세불안을 피하고자 가짜 대상인 말에 리비도를 집중한
것이다. 거세불안이 거짓 표상인 말로 드러날 때 공포증이 되는 것이다. 꼬마 한스
의 사례보다는 덜 명확하지만 유아 신경증의 역사 (“From the History of an
Infantile Neurosis”)의 늑대인간의 사례에서도 프로이트는 “늑대가 거세불안을 은
폐하는 거짓 대상”이라고 확인한다(108). 그러므로 공포의 진짜 원인은 불안이다.
불안에 대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늑대나 말에 대한 공포증이 불안의 결과
가 아니라, 불안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세가 주체의 근본적 공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수용하지 않은 정신
분석학자도 있다. 일 예로 클라인(Melanie Klein)은 거세불안이 아닌 분리불안을
받아들여, 불안의 근원은 삶과 죽음의 투쟁에서 연원하는 죽음의 공포 혹은 “절멸
의 공포”(the fear of annihilation)라고 주장했다(30-42). 반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불안 개념 중 분리 불안은 수용하지 않고5) 거세불안만을 받아들여서, “불안은 억
압된 리비도에서 생겨나지 않는다”(Inhibitions 108-09)는 프로이트의 통찰력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프로이트가 꼬마 한스와 늑대인간의 분석을 통해 보여주듯
이, 억압을 낳는 것이 불안이지, 억압 때문에 불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즉 라캉
이 프로이트의 불안 개념 중 분리 불안은 수용하지 않고6) 프로이트의 거세불안만
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안은 결과로서의 증상이 아니라, 원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를 덧붙이자면, 라캉 분석의 초점이 자아가 아니라
주체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분석은 자아에 초점을 맞추어 자아의 불
안을 줄이거나 자아의 항상성을 회복시켜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언어의
상징적 네트워크)와 주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대타자는 우리 사회가
조직화되는 제도나 의식과 같은 상상적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발화되는 존재로 표
시되는 언어이자, 기표의 네트워크에 의해 구조화되는 상징계의 질서다. 그래서 라

5) 라캉은 불안이 엄마와의 분리, 즉 엄마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현존에서
생긴다고 주장함으로써, 프로이트와 다른 길을 간다. 즉 분리를 통해서만 주체(S/)로 성장하
며, 엄마의 현존은 주체의 결여를 결여하게 함으로써 불안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불안이
결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결여의 결여에서 생긴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6) 분리 불안이 라캉에 의해서 어떻게 새로이 해석되는가는 이 논문의 4장 및 5장 참고.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25

캉은 거세불안을 받아들이면서도, 프로이트의 거세를 자아의 차원에서 상상적 거세


위협이나 실제 페니스 상실의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고, 언어라는 타자의 장에서 구
성된 주체 차원의 상징계적 팰러스로 대체한다.
공포와 같은 정동만이 속이는 대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표 역시 속인다.
모든 기표는 사물을 대신하지만, 실제 사물은 아니다. 공포의 대상이 그 원인인 불
안을 감추고 거짓 대상으로 자신을 표상하는 것처럼, 기표 역시 기표와 지시대상이
1:1로 정직하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 대상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 흔적을 지우
고, 실제 대상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언어가 사물을 살해한다”는 라캉의 유명한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Ecrits 262). 그러나 기표에 의해 주체가 표상
될 때는 1:1 대응이 아니라, 한 기표가 다른 기표를 대신하고, 이어지는 기표의 연
쇄에 의해서 주체가 재현되기에(Seminar X 62), 기표와 기표 사이, 그리고 기표의
그물망 속에는 공백이 없을 수 없다.
오른쪽 도식에서 보듯 A는 타자인 동시에 언
어의 장소이고 S는 아직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은 원주체다. 원주체(S)는 경험으로 포착되지
않는 “가설적 주체”다(Seminar X 114). 언어의
세계로 들어선 주체는 빗금이 그어진 S/이며, S/의
빗금(/)는 기표에 의해 대체된 주체가 원래의 자 Seminar X 114
기 자신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있음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자신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을 대상의 자리에서 타자로
서 인식했을 때 원래 자신과는 간극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는 고전적 인식론을 뒤
집는 것으로 주체와 대상이 1:1의 관계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며, 언어로
재현되지 않은 부분이 a라는 잔여로 남게 된다. 상징적 네트워크에서 비워진, 공백
으로 존재하는 곳이 대상 a의 자리인 동시에 그것이 출현하는 자리다. 그래서 타자
쪽에서 분열된 주체와 a가 출현하고, 내 쪽에서는 타자가 비일관적인 것처럼 보이
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자의 장에 들어감으로써만 자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주체가 이
재현되지 않은 공백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라
캉에게 “불안”은 무엇보다 상징계에 저항하는 “대상 a”가 주체에게 보내는 신호
226 정혜욱

(signal)이자 우리가 상징계로 진입함과 동시에 발생한 우리 존재에게서 잘려져 나


온 어떤 것의 호소(appeal)와 관계한다. 호소는 알튀세적 의미에서 호명
(interpellation)과 다르다. 호명은 대타자의 요구(demand)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존재를 삭제한다. 라틴어 ‘대상’(obiectus)은 인간의 시각에 의해
포착되는 대상을 의미하지만, ‘대상 a’는 인식에 의해 포착되는 대상은 아니다. 대
상 a의 ‘a’는 문자로서, 타자(autre)의 a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a(혹은 ab-)가 ‘무엇
인가에서 탈락한, 떨어진’(off, away from)을 의미하듯, 대상에서 탈락하여 상징계
에서 공백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빈자리이기도 하다. 이것이 호명에 의해 삭제된
잔여로서 대상 a이며, a는 상징계로 포착되지 못하고 “보잘것없이 버려진 비체적
대상”(the abject and paltry object)의 a이기도 하다(Seminar X 319). 그러나 이
대상은 상징계에 등록될 수 없기 때문에 공백으로 남아있다. 공백은 말 그대로 공
백이기에 삭제할 수도 없고 억압할 수도 없다.
참고로 대상 a는 부분 대상이 아니다. 부분 대상은 대상 a에서 기인할 수 있지
만, 부분 대상은 젖(입), 응시(눈), 똥(항문), 목소리(귀) 등의 대상이다. 그러나 대상
a는 감각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지위에서 탈락한 것을 문자로 표기한 것이
다. 탈락한 기표로서 a는 소유하거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캉이 부분 대
상을 통해 대상 a를 설명할 때도, 눈, 입, 항문 등의 기관 자체가 아니라, 눈의 구
멍, 입의 구멍, 항문의 구멍이나 잘림(cut) 등을 더 강조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탈
락에 의해 상징질서에서 공백(구멍)에 위치하는 대상 a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더 쉬운 예를 들자면 도서관에 가서 총 20권의 전집을 열람하다가 그중
10권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 빈자리를 통해 열람되어 있지는 않지
만 10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권이 있는 빈자리, 바로 이 결여의 자리가
대상 a의 위치다(Seminar X 182). 바로 이것이 “없지 않다”는 이중부정의 의미다.
공백(void)이 부재하는 대상의 존재를 추론을 통해서 알 수 있게 해주듯이, 불
안은 결여로 존재하는 대상 a가 주체에게 보내는 신호이며, 주체는 불안으로 인해
대상 a가 보내는 신호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실
재를 정의할 수도, 상징계와 상상계, 실재가 우리의 존재 속에서 어떻게 서로 묶이
고 연결되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라캉은 불안이 “이전까지 정확히 연결되지 않았
던 세 차원,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연결되는 만남의 지점”이며(Seminar X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27

3), 불안은 “몸의 명치”와 같


이 욕망의 그래프에서 나뉘어
있는 의식의 차원(숫자 (2)로
표시한 부분)과 무의식의 차원
(숫자 (3)으로 표시한 부분)을
묶어주는 변증법적 운동으로
도입된다(Seminar X 6).
불안은 대타자와 관계 속
에서 실재가 있다는 것을 주
체가 경험하게 하고, 불안을
통해 주체에게서 부분적으로 욕망의 그래프(Seminar X 4)
떨어져 나간 잔여가 상징적 그래프 가운데 숫자는 설명을 위해
필자가 임의로 삽입한 것이다.
네트워크 속에 빈 자리로 존
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최소한 세미나 10 에서는 바로 이 비어있는 자리에 라캉
이 붙인 이름이 대상 a이다. 공포의 대상은 말이 무섭다거나 늑대가 무섭다는 등의
속이는 대상, 즉 그 원인을 감추는 대상이지만, 불안의 대상 a는 기표와 기표 사이
의 공백에서 출현하는 것이기에 속이지 않는다. ‘사이’, ‘틈’ 혹은 ‘무’라고도 말해
질 수 있는 ‘공백’은 없는 것이 아니라, 결여이자 부재로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
는 대상 a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곳에 있고, 이중부정의 형
식에 의하지 않고서는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은 주체가 되기 전의 원초적
경험이 기표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질문 ‘케보이’(Che vuoi? 혹은 Que veux-tu?)을
만날 때,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때 형성되는 것이다
(Seminar X 61). 그래서 대상 a는 인식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없지 않다”는 이중부정에 의해서 그 존재를 엿볼 수 있다.
불안은 속일 수 없다. 불안을 길들이고 불안에 상상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악마화할 수 있겠지만, 악마화되어 등장하는 대상은 공포증과 마찬가지로 속이는
대상이며, 진짜 원인을 가리는 대상일 뿐이다. 속일 수 없는 불안은 우리의 지식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 주체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텅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속일 수 없어서 확실한 불안과 달리 욕망은 불확
228 정혜욱

실하다. 욕망은 상실된 대상을 우회하는 환유적 네트워크에 의해 작동되며, 욕망은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정말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지 못한다. 욕망의 원인은
대상 a이지만, 욕망의 실제 물신적 대상(fetish)은 결코 그 원인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가 다이아몬드를 욕망한다면, 실제 욕망의 대상은 반짝이는 돌이 아니라 그 너
머에 있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든 금이든 바깥의 사물 그 자체는 리비도를 보유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표와 관계하는 다른 모든 정동은 속인다. 반면 속이지 않는 정동
인 불안은 욕망의 근본 원인에 다가간다.
라캉에게 불안은 단지 거세불안에 머물지 않는다. 불안을 거세불안으로 설명할
때, 설명이 쉬워지는 것은 맞지만, 거세불안만으로 대상 a의 위상이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체는 대타자를 주체에게서 아주 소중한 어떤 것[주이상스]
을 빼앗아가는 자로서 받아들인다. 주체가 말하는 존재가 될 때, 언어는 주체를 표
시하고 주체에게 본질적인 주이상스를 빼앗아간다.7) 즉 라캉은 신경증자가 거세하
는 대타자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체 그 자체가 비어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고 설명한다.
불안이 없다면 욕망의 그래프 S/→I(A) 벡터8)에서, 분열된 주체(S/)는 자아이상
[I(A)]에 통합되는 것으로 끝나고 상징계를 넘어선 지점을 감지하지 못한다. 세미
나 10 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라캉은 주체를 대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
고, 대타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기표의 효과로만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명확해
진다. 물론 욕망의 그래프에서 주체는 대타자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총체적으로 구
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판타지(S/◊a)의 평면 위에 있다. 그러나 판타지의 ◊는 언제
나 조금씩 넘치거나(<, more) 조금씩 모자라야(>, less) 하지, 완전히 닫혀서는 곤
란하다. 그래서 판타지의 구조와 불안의 구조는 다르지 않다(Seminar X 3). 결여
를 없애는 판타지의 자리에서 대상 a가 주체에게 전이됨으로써 주체는 대타자에
결여가 있다는 것[S(A/)]을 발견하고, 대타자에 복종하는 주체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론적 공백에 직면하고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자유의 무게를 감내해야하는

7) 프로이트가 남근선망으로 설명한 것을 라캉은 세미나 10 에서 주이상스를 빼앗아가는 것


으로 설명한다.
8) 앞 페이지의 욕망의 그래프에서 필자가 숫자 (1)로 표시한 부분. 즉 제일 아래쪽 화살표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끝나는 부분까지.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29

존재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불안은 주체가 자신을 간극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정동이며, 그것은 상징질서가 어긋나있다는 표시[S(A/)]에서
시작된다. 상징질서의 어긋남에서 연원하는 불안이 없다면 주체는 사건의 주체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불안 개념을 라캉의 불안 차트에 대한 설명과 예시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겠다.

III. 불안 차트

이제 라캉이 프로이트의 억제, 증상, 불안 을 활용하여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불안 차트를 보면서 주체가 불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겠다.

불안차트 ( 세미나 10 77, 319, 333쪽의 차트를 합친 것이다)

프로이트 표준판 영어 전집을 발간하면서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는 억


제, 증상, 불안 의 서문에서 프로이트가 억제, 증상, 불안이 같은 평면에 속하지 않
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밝혔다(Inhibitions 78). 라캉도 이 점에 주목하여 억제, 증
상, 불안을 어려움의 가로축과 운동의 세로축으로 나누어서, 불안 주위의 정동과
행위를 불안에 가까이 다가가는 정도에 따라 세분한다.
불안 차트에서 분석의 시작점이 ‘억제’이며, 세로의 운동축은 실재계에서 불안이
주체에게 보내는 신호의 강도이고, 그 강도에 따라, 억제-정서-좌절이라는 정동으로
230 정혜욱

표현된다. 어려움의 가로축은 실재의 신호를 받은 주체가 어려움에 처하는 정도로


해석된다. 즉 억제-장애-당황의 가로축은 주체가 상상계의 총체성을 잃어버리고 실
재, 결여, 혹은 간극을 인식하는 정도로서 아직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의 정지 상태
다. 억제된 것이 표출되면 정서, 좌절로 이어지고 주체가 느끼는 장애가 표출되면 증
상, 행동화로, 그리고 움직임의 세로축에서 당황이 행위로 표출되면 행위로의 이행이
된다. 불안 차트의 정중앙에 자리한 증상은 다른 정동 및 행위와 모두 연결되어 분석
에서 증상의 중요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진단에서 증상의 중요성을 나타내준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억제, 증상, 불안 에서 억제와 증상에 대한 정의를 먼저
살피고, 억제-증상-불안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논의를 전개한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억제와 증상을 어떻게 개념화했는지부터 살피도록 하겠다. 프로이트는 억제와 증상
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개념[억제와 증상]은 같은 평면에 놓이지 않는다. 억제는 기능과 특


별한 관계가 있지만, 반드시 병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억제는 정상상
태에서 기능이 제한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병적인 과정이 실제로 나타
나면 증상이 된다. 그러나 억제도 증상이 될 수 있다. 언어적 용법에 따
르면 단순히 기능 저하만 있을 때는 억제라 쓰고, 기능이 비정상적 변화
를 겪거나 그 변화로 인해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면 증상이 된다. 병적인
과정의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면 증상이 되고 소극적인 면을 강조하면 억
제이지만, 많은 사례에서 이 구분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보인다.
(Inhibitions 87 원문 강조)

가로축의 첫 행에 있는 억제, 장애, 당황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두 억제에 해당


하지만, 라캉은 이를 단계별로 억제, 장애, 당황으로 나눈다. 억제, 장애, 당황은 모
두 행동 차원에서 중지를 도입한 것이다. 억제는 자아 기능이 제한되는 것으로 자아
가 불안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부과하는 한계로서 프로이트는 이를 성 기능
의 억제(성기능장애), 소화의 억제(소화불량), 운동 억제(보행 저하) 등으로 설명했
다. 반면 라캉은 억제를 기능의 저하가 있지만, 정상적인 경우로 간주하고, 실재에서
오는 신호인 불안이나 대상 a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욕망”(desire not to see)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억제 수준에서 증상은 잠복해있지만 등장하지 않는다.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31

증상은 프로이트가 말한 바 그대로 “기능이 예외적인 변화를 겪거나 그 변화로


인해 새로운 현상이 생겨난 경우”이다. 억제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다른 것으로 대
체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증상이다. 즉 증상은 대체다. 그래서 증상의 진단은 어렵
다. 같은 증상이라도 히스테리, 강박증, 정신병 등 진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제는 증상이 주체의 위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며, 주체
와 대타자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을 드러내는지 파악하여 사례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의 “꼬마 한스”의 사례를 활용하여 예를 들자면, 말(馬)이 자신을 물
까 봐 극도로 무서워하는 한스가 말을 무서워하는 것은 사실 말 자체가 아니라 아
버지다. 말에 대한 두려움은 아버지의 거세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므로, 공포의 실제
대상은 말이 아닌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말(馬)로 대체되어 나타날 때 증상이 된다.
세로축을 기준으로 보면, 억제는 증상이 아니지만, 장애는 증상이다. 장애는 어
원적으로 ‘impedicare’에서 파생된 것으로 ‘발에 족쇄를 채우다’, 혹은 ‘곤경에 처
하다’라는 뜻을 가진다(Seminar X 10). 라캉은 이 ‘곤경’이 욕망을 고수하지 못하
는 주체의 곤경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불안 차트에서 장애를 “할 수 없음”(not
being able)(Seminar X 319)으로 설명하는 것은 억제 단계에서 ‘~하지 않으려는’
형태로나마 작동했던 욕망이 장애 단계에서는 주체가 처한 곤경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고수할 수 없는 무능(powerlessness)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로축에서 장애는 증상과 만난다. 즉 장애가 바깥으로 표현될 때 증상이 된다.
이때 주체는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대타자(almightiness)를 증
상으로 전시한다. 꼬마 한스의 사례를 억제, 장애, 증상으로 설명하자면, 억제에서
한스가 대상 a을 엿보았으나 원초적 장면을 ‘마치 보지 않은 것처럼’ 욕망을 억제
하는 단계였다면, 장애는 아버지 대타자 앞에서 욕망할 수 없게 된 무능의 단계이
며, 이 단계가 대타자(한스의 경우는 아버지)가 전지전능해서 자신을 거세시킬 수
있다는 환상이 말 공포증으로 표출되어 나타나면 증상이 된다. 증상은 대타자의 전
지전능함의 표출로, 주체가 대타자에게 종속되는 양태 중 하나다.
세로축의 억제에서 정서, 좌절로 이어지는 축은 현상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정
동으로 구성된다. 우선 억제되어있던 정동의 움직임이 증가하면, 정서(emotion)가
된다. 어원적으로 정서의 어원은 ‘ex-movere’로서 정서는 내 속의 무엇인가가 “바
깥(ex)으로 움직여서(motion) 나오는 것”이다(Seminar X 11). 즉 정서는 표출된
232 정혜욱

감정으로 흥분, 분노, 히스테리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정서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


려는 상상계적인 오인(misrecognition)에 해당한다. 증상도 거짓 표상으로, 대체를
통해 등장하지만, 대상의 전지전능성에 승복하기에 정서 단계의 오인과는 구분된
다. 증상은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억제가 아니라, ‘대상과의 만남’의 무의식적
인정에 기초한다. 정서가 장애와 만나면 증상이 된다. 그래서 정서는 증상과 같은
가로축에 있다. 정서는 불안의 단계에서 경험되는 극단적인 고뇌까지 도달하지 못
하기에 속이지 않는 정동인 불안과 같은 층에 있지 않다.
운동의 세로축에서 가장 아래층에 위치한 좌절(émoi)9)은 불안과 동일한 무게
를 가진 정동이다. ‘émoi’는 emotion과 비슷해 보이지만, 어원적으로는 emotion과
상관이 없고, ‘완전히 압도당한, 짓이겨진 근심에 찬 상태’이라는 뜻으로, 갑작스럽
게, 완전하게 힘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럼 무엇에 의해 압도당해 힘을 상
실하는가? 그 답은 대상 a이다. 즉 좌절의 좌표는 “대상 a가 출현하는 순간에 위치
된다.” 이 순간은 “속이지 않은 정동인 불안이 베일을 벗고 그 자체를 드러내는 외
상적 순간, 대타자의 장이 찢어져서 열리고, 그 단단한 바닥[대상 a]을 노출하는 순
간”이다(Seminar X 312). 늑대인간 사례에서 늑대 공포증을 가진 세르게이가
창문이 갑자기 열리고 호두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늑대의 응시에 노출되었을 때 두
려움으로 갑자기 마비되는 상태가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언캐니(uncanny,
Unheimliche)를 마주했을 때의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자아 이상(ideal)이 완
전히 짓이겨진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가로축의 가장 오른쪽, 주체가 다다를 수 있는 어려움의 극단에 위치하는 ‘당
황’(embarrassment)은 어원에서 em+bar로 이루어진 단어로 ‘빗장(bar)을 걸다’는
뜻이다. 빗장(bar)이 인유하는 바처럼 당황은 원주체(S)가 빗금(/, bar)을 만나서 빗
금 주체(S/)가 되는 순간이다(Seminar X 11). 즉 자신을 곤경으로 몰아간 숨은 원

9) émoi는 번역이 쉽지 않다. 핑크(Bruce Fink)는 이 용어를 turmoil로, 하라리(Roberto Harari)


는 dismay, 보루즈(Veronique Voruz)는 agitation으로 옮겼고, 이수진은 ‘혼란’으로. 강응섭은
‘근심’으로 번역했다. 라캉은 émoi를 프랑스어, 라틴어(구어), 독일어, 포르투칼어 등의 어원을
살피고, 그 의미를 “근심하다, 두려워하다”(to trouble, to frighten), “힘을 잃어버리다(to cause
to lose one’s might, one’s strength),” “좌절하다”(to become discouraged), “짓이겨진다”(to
crush)라는 뜻이라고 밝히고, “근심인 동시에 힘의 상실”(trouble, the fall of might)(Seminar
X 13)로 정의하고 있으므로, ‘기운이 꺾인다’는 뜻도 포함하는 ‘좌절’로 옮긴다.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33

인(cause)에 바로 노출된 순간으로 주체가 당황하게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행동이 정지되는 순간이다. 위의 불안 차트에서 라캉이 설명하듯, 주체는 당황 속
에서 “불안의 개념”을 품는다(333). 즉 실재 앞에서 상징계가 상연을 멈추고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진실, 즉 불안의 원인을 마주한다는 뜻이다. 불안의 개념은 현상적
으로 드러난 가상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진실인 불안의 원인을 마주하면서, 실재
앞에서 상징계가 상연을 멈추면서 형성된다.
이제 불안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행동화(acting-out)와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으로 들어가 보자. 이 둘은 주체가 불안 앞에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
다. 둘 모두 최악의 경우 주체를 죽음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 생물학적 죽음이 라
캉 분석의 목표는 아니지만, 쉬운 예로 자살을 들자면 행동화는 대타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유서를 남기고, 행위로의 이행은 유서를 남기지 않는다. 즉 행동화는 상
징계에 대한 호소이며, 행위로의 이행은 상징계의 포기다. 그래서 세로축에서 증상
은 행동화로 이어지고, 행위로의 이행은 당황에서 행위로 이어진다. 즉 세로축에서
행동의 중지상태인 ‘당황’에서 운동이 더해지면 ‘행위로의 이행’이 된다. 행위로의
이행은 상징계라는 대타자의 무대에서 “떨어져서”(being dropped), 실재계로 향한
다. 반면, 행동화에서 주체의 위치는 상징계이며, 그의 행위는 대타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구성된다.
라캉이 불안 차트에서 행위로의 이행을 자살(suicide)로 설명한 것은 행위로의
이행의 순간에 주체가 상징적 죽음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행위로의 이행은 당황한
주체(barred subject, S/)가 불안과 마주하여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로서, 주체
가 대상 a가 되어 상징계라는 무대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당황’이 스페인어
‘embarazada’에서 ‘임신한 여자’를 의미하듯(Seminar X 11), 당황에서 행위로의
이행은 이전 주체의 죽음이자 새로운 주체를 예비한다. 이때, 새로운 주체는 상징
질서의 판타지에서 떨어져나온 잔여로서의 주체이다.
라캉은 행동화와 당황, 행위로의 이행을 프로이트의 “도라” 사례10)와 “여자 동

10) 도라 사례에서 당황의 순간은 K가 도라에게 고백을 하면서 “내 아내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냐”라고 말할 때, “당황”은 도라가 그녀의 무의식적 욕망의 원인이 거부되자, 말문이 막
힌 정지의 순간이며, 행위로의 이행은 “도라가 K의 뺨을 때리는 행위”에 해당한다(Seminar
X 122). 행위로의 이행은 대상의 출현에 의해 분열된 주체를 복구하려는 시도다.
234 정혜욱

성애자” 등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하지만, 지면 관계상 여자 동성애자가 되는 심


리 (“The Psychogenesis of a Case of Homosexuality in a Woman”)의 경우만
살핀다. 잘 알려진 사례이지만, 기억을 환기하기 위해 간략하게 그 내용을 요약하
고, 행동화, 당황, 행위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부분을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젊은 동성애 여자는 좋은 집안 출신의 18살 소녀로, 자신보다 10살이


많은, 악평이 자자한 매춘부를 숭고하고 소중한 대상으로 열렬히 사랑한
다. 그녀의 부모(특히 아버지)가 이를 금지하고 단속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행동화] 그녀는 오히려 사람이 많고 번잡한 거리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공공연하게 그 여자를 만났다.
[당황]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딸을 목격하고,
화난 눈짓을 하며 지나갔다.
[행위로의 이행] 바로 그 직후 그 소녀는 담장을 뛰어넘어 교외선 기찻길로
떨어졌다. 이것은 확실히 심각한 자살 시도였다. (“The Psychogenesis”
147-48)

동성애 여자의 사례에서 ‘행동화’는 그녀가 일부러 사람 많은 거리를 선택하여 여


자를 만나는 등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을 모든 마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행동
하여 아버지를 도발하고, 아버지뿐만 아니라 동네의 모든 사람에게 여자와의 관계
를 보여주고자 시도하는 행위다. 즉 행동화는 욕망을 상징계라는 무대에 올려서 인
정을 갈구하는 행위로 구성된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의하면 동성애 여자는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기를 욕망했지
만, 아버지의 아이를 낳은 것은 그녀가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자, 그녀는 동생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불같이 분노하고 마음이 쓰
라려서 아버지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싶은 것은 증상이며,
실제로 그녀가 욕망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팰러스다. 그녀의 욕망의 숨겨진 진실은
아버지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팰러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를 도발하기 위해 10살 연상의 여자에게 열렬히 구애하면서 자신에게는 없
는 팰러스를 마치 가진 것처럼 행동하고 아버지가 이를 알아주기를 원한다. 행동화
는 본질적으로 바로 이러한 ‘욕망’의 “보여주기”로 구성된다(Seminar X 124).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35

그러나 젊은 동성애 여자는 자신의 욕망의 숨은 원인을 모른다. 성장하면서 무


엇인가를 잃어버렸고, 그것을 타자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녀는 무엇인
가를 잃어버린 결여의 주체(S/)로서 자신이 잃어버린 소중한 그 무엇(agalma, άγαλ
μα)를 욕망하는 것이다. 욕망의 원인은 대상 a이다. 그래서 행동화는 증상이며, 혹
은 증상의 보여주기이자 증상의 전시다. 행동화에서 보여지는 증상은 해석되어야
하고, 해석되기 위해서는 상징계로의 전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증상이 언제나 해
석되는 것도 아니고, 증상의 전이가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금지
가 없다면 증상이 행동화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동성애 여자의 행동화 역시 근친
애 금지 혹은 동성애 금지를 배경으로 한다. 동성애 여자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라
캉은 프로이트가 몰랐던 것은 “바로 이 금지를 배경으로 출현한 대상 a, 상징계에
서 거부당하고 버려진 남아있는 대상 a”라고 말한다(Seminar X 129).
증상에 어려움이 가중되면, 주체는 증상의 전시를 멈추고 행위로의 이행으로
향한다. 동성애 여자의 사례에서 아버지의 화난 눈짓은 응시에 노출된 순간이자,
증상이 아버지(상징계)에 전이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당황의 순간이며, 그 직후
그녀는 기찻길로 “떨어진다.” 이 “떨어짐”(being dropped)이 상징계의 무대에서
떨어져 나온 ‘행위로의 이행’에 해당한다(Seminar X 115). 행위로의 이행에서 동
성애 여자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사랑을 허락받고자 시도하지 않고, 아버지를 설득
하려고 시도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전시하지도 않는다. 당황이 최대치로 올라가는
순간, 주체는 그동안 자신이 소중하게 일구었던 세계라는 무대를 버린다.
라캉은 증상, 행위화, 행위로의 이행을 수도꼭지의 은유에 의해서 다시 설명한
다. 수도꼭지는 처음부터 잠겨있도록 설계된 것이며, 수도꼭지의 역할을 증상의 원
인, 즉 대상 a를 숨기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억제 단계에서 수도꼭지는 최소한
고장난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증상은 수도꼭지가 고장이 나서 “물이 새는 것”(a
leaking tap)이고, 행동화란 수돗물이 줄줄 새다 못해 “분출하는 것”(spurt)인 반면,
행위로의 이행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수도꼭지를 틀어버리는 것”(to
turn it on without knowing what one is doing)이다(Seminar X 321).
아직 공식적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라캉은 세미나 15 에서 행위로의 이행
이 기존 주체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태어난 새로운 주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가장 알기 쉬운 예가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다.11) 로마법에 의하면, 무장을 한
236 정혜욱

채로 로마의 국경선인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한다. 즉 루비콘강을


건넌다는 것은 실증법의 위반이자, 금지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
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며 루비콘강을 건넌다. 이는 카이사르가 단순히 군
사를 일으켰다는 의미로만 환원될 수 없다. 강을 건너기 전의 카이사르와 강을 건
넌 후의 카이사르는 결코 같은 인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기 전의 카이사
르는 위대한 장군이었고, 위대한 신하였다. 하지만 강을 건너면서 그가 이제까지
발을 딛고 있었던 상징적 질서를 전복한다. 즉 강을 건넌 후의 카이사르는 혁명적
행위의 주체로, 반역자가 될지 황제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행위란 돌이
킬 수 없는 지점을 가로지른다는 의미다. 행위를 통해서 주체는 이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그가 어떤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한 채 행위를 감행한다. 행위 이후 그
는 새로운 주체, 이름 없고 머리 없는 주체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불안 차트의 가로축의 구조는 종합으로 귀결되지 않는 열린 변증법의
구조를 띤다. 상징계를 통과한 주체를 정(thesis)이라고 본다면, 억제는 아직 의심
이 활성화되지 않은 정(thesis)의 단계이다. 반면, 장애는 의심에 의해 활성화된 반
(anti-thesis),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 불안이라는 확실성이 들어서면서 당황은 행동
으로 이어지지 않은, 아직 개념만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정(new thesis)이다. 그리
고 억제/장애에 행동이 더해지면, 정서/증상/행위화는 모두 반에 해당하고, 당황에
서 행위가 더해진 행위로의 이행은 새로운 정, 즉 이전의 판에서 떨어져 나온 새로
운 주체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IV. 자본주의 담론과 결여의 결여로서의 불안

들머리에서 말했듯 우리는 범불안장애의 시대를 산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대부분 수많은 불안 증상에 시달리고 있고, 증상은 원인으로서의 불안을 숨긴다.
최근의 팬데믹으로 인해 불안 증상이 가중된 것은 사실이지만, 팬데믹 이전에도 우

11) “Crossing the Rubicon did not have a decisive military meaning for Caesar. But on the
contrary, to cross it was to re-enter his motherland. The land of the Republic, which to
attack, was to violate. This was a breakthrough that had been made, in the sense of”
(Seminar 15, 1월 15일 강의, 5장 3쪽).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37

리는 불안했다. 우리는 경쟁사회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서 스펙을 쌓고 끊임


없이 자신을 계발하며 자기 계발을 통해서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라고
요구받는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직업이든 어떤 삶이든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개인에게 있다. 한편에서 생존경쟁이 극
대화되면서 함께 잘 살기보다는 나만 살아남겠다는 이기심이 팽배하고 다른 한편
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고, 그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공격한다. 이 공격이 극단에 이르면 주체는 자살에 이른다. 전자가
사디즘적이라면, 후자는 마조히즘적이다. 각자도생의 논리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신
을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주체의 결여와 취약성의 인정’을 무력하고
능력 없는 개인의 표상으로 만든다. 또한 생산이 아닌 소비에 초점이 맞춰진 후기
자본주의는 개인의 건강, 젊음, 외모, 운동 등 몸 관리에서 정신관리에 이르기까지
상품을 즐기라고 요구한다. 시장의 힘이 도덕적 한계 없이 발휘되는 세계에서 소비
없는 생산은 무용하다. 소비경제 속에서 노동자/생산자는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려
지는 잉여적 삶으로 전환되고, 아직 교환경제로 전환되지 않은 사랑이나 약자에 대
한 배려와 같은 가치들은 사회적 가치이기를 멈춘다.
72세의 라캉은 이러한 자본주의를 목격하면서 밀란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기
존의 담론과 달리 돌연변이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담론을 다음과 같이 새로이 만들었
다. 1980년에 라캉이 타계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자본주의 담론이 완성형이라고 보
기 어렵지만,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혼밥, 혼술과 같은 고독에 익숙해지고,
각자도생의 논리에 함몰되어 연대를 상실한다.
라캉이 담론이론을 처음 이론화한 것은 1969~1970년에 행해진 세미나 17권
정신분석학의 이면 (The Other Side of Psychoanalysis)에서 이다. 라캉에 의하
면 담론은 “언어에서 생겨난 것으로 [한 사회 혹은 시대에서] 사회적 유대를 맺는
뚜렷한 유형”으로 설명된다(Seminar 19 30; “On Psychoanalytic Discourse” 12).
라캉의 담론이론은 세계와 주체 간의 관계를 도식화한 것이며, 주체가 담론의 작인
이라는 기존 이론에 도전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 개인의 심리치료에
초점을 둔다면, 정신분석의 담론이론은 주체와 세계의 상호관계 및 주체 상호 간의
관계 등을 무대화한다.
238 정혜욱

도식 2

S1: 주인기표
S2: 지식
도식 1: 라캉의 다섯 담론 S/: 분열된 주체
(“On Psychoanalytic Discourse” 6) a: 대상 a 혹은 잉여향락

세미나 17권에서 만든 네 담론, 즉 주인 담론(Discourse of the Master), 대학


담론(Discourse of the University), 히스테리 담론(Discourse of the Hysteric),
분석가 담론(Discourse of the Analyst)은 모두 주체가 타자 및 세계와 맺는 관계
의 유형을 서술한 것이다. 각각의 담론은 두 개의 분수가 화살표로 연결된 구조를
보여준다. 라캉의 분수 형태의 도식이 수학의 분수와는 다르지만, 편의상 위쪽 항
을 분자, 아래쪽 항을 분모로 칭하기로 한다. 왼쪽 분수의 분자는 행위자(agent)를,
가로선 아래의 분모는 숨겨진 진실(truth), 오른쪽 분수의 분자는 타자(other, 행위
자의 상대)를 나타내고 가로선 아래의 분모는 생산물(product)을 나타낸다.
행위자에서 타자로 이어지는 화살표(agent→other)는 사회적 연결(social link)
혹은 관계성을 표시한다. 물론 이 연결은 타자에서 행위자로 가는 화살표( )가 없
기에, 행위자가 타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행위자의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행
위자가 원하는 데로 타자를 행동하게 할 수 없고, 행위자가 원하는 데로 세계를 기
능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위자와 타자 사이에 이견도 불협화음도 없는 완
전히 조화로운 유대는 불가능하지만, 어떤 사회에서든 이러한 이상적 유대는 이상
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불가능성 위에서 시도되는 소통이 담론을 가
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12)
왼쪽 분수에서 분자 아래의 분모는 가로대 아래쪽에 억압되어 있어서 ‘담론의

12) 라캉의 담론 도식의 가로․세로 화살표의 설명은 Vanheule(1-14)을 참고했다.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39

숨겨진 이면’을 드러낸다. 행위자의 행동 이면에는 무의식적 진실(truth)이 억압되


어 있고, 진실에서 행위자로 올라가는 화살표( )는 억압된 진실이 행위자를 압박
함으로써 행위자는 장애를 느끼게 되고, 이것이 행위자로 하여금 타자를 향해 사회
적 연결을 모색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오른쪽 분모에서 타자에서 아래쪽으로 향하
는 화살표( )는 행위자가 타자에게 보낸 메시지, 혹은 타자를 행위하게 한 결과로
생산(product)된 것이다. 행위자 측에서 보면 그것이 생산된 것이지만, 타자 측에서
보면 타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하고 상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진실
에서 타자로 향하는 대각선 화살표(↗)는 행위자의 진실이 간접적으로 타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 그리고 생산에서 행위자로 향하는 대각선 화살표(↖)는 행위자의
생산물이 타자를 경유하여 얻어진 것임을 표시한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 중 기본형은 주인 담론이다. 주인 담론을 시계방향으로
90도로 회전하면, 분모의 자리에 있는 분열된 주체(S/)가 행위자가 되어 히스테리
담론이 생성되고, 히스테리 담론을 90도로 회전하면, 분모의 위치에 있는 대상 소
타자(a)가 행위자의 위치로 올라와서 분석가 담론이, 그리고 분석가 담론을 90도
회전하면, 분모의 위치에 있는 지식(S2)이 행위자의 위치가 되어 대학 담론이, 그
리고 대학 담론을 회전하면, 분모의 위치에 있는 S1이 행위자의 위치가 되어 주인
담론으로 복귀하게 된다. 네 담론이 반드시 시계방향으로만 회전하는 것은 아니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도 회전할 수 있고, 담론의 출현에 순서가 없을 수도 있다
(Seminar XX 16). 그러나 라캉의 네 담론은 행위자와 타자의 관계성이 설정되어
있고 네 담론 역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세미나 17권에서 라캉은 자본주의 담론을 주인 담론 변이형이거나 대학 담론
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기술하여 주인이 노예의 이익을 빼앗는 양상이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했다.13) 그러나 1972년에 새로 만들어진 자본주의 담론은 네 담론과 연
결되지 않고, 돌연변이처럼 혼자 따로 놓여 있어, 후기 자본주의에 의해 전통적인
사회적 삶의 양식이 무너졌다는 것을 도식화했다. 자본주의 담론의 가장 큰 특징이
상징계를 지탱해주는 창문으로서 판타지가 기반하는 자아-타자의 연대가 없다는 것
이다. 즉, 자본주의 담론을 제외한 네 담론은 사회적 연대 혹은 사회적 연결이 있

13) 지면관계상 각 담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네 담론에 대한 명료한 설명을 제공하는 국


내 논문으로 김용수(103-21) 참고.
240 정혜욱

다. 선술했듯이 주인 담론에서 노예에 의해 주인의 지위가 지탱되며(S1→S2), 히스


테리증자는 주인기표와 연결되어(S/→S1) 주인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대학 담론
에서는 지식인과 지식의 대상이 연결되어있고(S2→a), 분석가는 피분석가와 연결되
어있다(a→S/).
그러나 자본주의의 담론은 사회적 연결을 제공하는 가로 화살표(➜)가 없다.
다른 담론과 달리 시계방향이든 시계 반대 방향이든 자본주의 담론 도식은 회전이
되지 않는다. 회전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출구 없는 닫힌 담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본주의 담론은 히스테리 담론과 마찬가지로 분열된 주체(S/)가 행
위자의 자리에 있어서, 자본주의 주체가 히스테리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러나 자본주의 담론의 행위자는 주인 기표(S1)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
의적 구조에서 일탈하기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주인 담론에서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은 ‘착취’가 아니다. 주인이 노예의 노동을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독점
한다는 주인 담론의 진실은 경쟁 구도 속에서는 진리가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구분도 무용하다. 자본가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무한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본가가 주인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담론의 도식은 진리의 자
리에 있는 주인기표(S)가 대각선 화살표(↗)로 지식(S2)에 작용하여, 지식이 생산
물로서의 상품이 존재의 결여를 메운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본주의의 생산은 수
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수요가 없으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야 하고,
수요의 창출을 위해 자본가는 계속 투자해야 한다. 새로운 수요의 창출이나 재투자
에 실패하면 자본가 역시 낙오된다. 주인기표는 주체에게 즐기라고 명령하지만, 역
설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래서 라캉
은 “오늘날 모든 사람은 실제로 프롤레타리아다”라고 말한다.14)
또한 자본주의 담론에서 행위자는 진실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된 진실이 행
위자에게 작용하지 않는다. 주인 담론에서 화살표가 아래에서 올라가서( ) 행위자
의 자리를 지속해서 위협하여 행위자가 결여와 간극의 주체라는 것을 깨닫게 하지
만, 자본주의 담론에서 위로 향하는 화살표( )가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 )로 대
체되어, 주체(S/)가 결여 없는 원기표 S1와 바로 접촉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즐기라

14) “There is only one social symptom: each individual is actually a proletarian, that is to
say he has no discourse with which to make a social connection.” (“La Troisième” 27)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41

고 명령하는 향락의 수호자인 주인기표(S1)와 바로 접촉하여, 주체(S/)가 소비의 대


상인 상품을 즐기라는 명령에 바로 응답하도록 한다. 다른 담론과 달리, 아래쪽으
로 내려가는 화살표는 자본주의 담론이 행위자에게 구조적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즐기고자 하는 욕망의 생산에 의해 정의된다(Miller 9).
소비자 주체(S/)에게 욕망은 대타자/법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 상품에 대한 욕망이
며, 상품이 무한정하기 때문에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히스테리 담론과 마찬가지
로 자본주의 담론은 행위자의 자리에 분열된 주체(S/)를 위치시키지만, 이 주체는
히스테리증자와 달리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타
자, 혹은 단일한 아버지의 이름(a singular Name-of-the-Father)은 없다. 수많은
아버지의 이름들이 있을 뿐이며, 하나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법들이 있
으며 그 법은 대체 가능하다. 오늘날 대타자는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금지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담론을 특징짓는 것은 거세의 거부다.15) 거세의
거부란 결여의 결여를 의미한다. 즉 주체는 간극에서 생겨나며, 결여가 욕망을 가
능하게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가짜 욕
망이다. 라캉의 의미에서 욕망이란 금지에서 기원하기에 상품과 같은 대상이 아니
라 결여의 자리에서 생겨나는 대상 a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결
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담론에서 “기표들의 차이의 열린 시스템”을 표시
해주는 행위자에서 타자로 연결되는 가로화살표(➜)의 부재는 결여의 부정인 동시
에 자본의 절대적 자율성이 등장했음을 알려주며, 진리의 자리에서 올라가는 화살
표( )가 내려가는 화살표( )로 대체된 것은 기표 간의 차이와 교환가치의 간극
위에서 작동하던 환유를 불가능하게 한다(Tomšič 220 참고). ➜와 의 부재는
모두 자본주의가 결여를 부정하는 시스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돈 없이 생존 자체
가 불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자본주의가 구조적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닫힌 체제
라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담론이 보여주는 거세의 부정, 혹은 결여의 부정은 모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자기완성형 개인이 이상적 모델로 등극하게 한다. 결여는 주체의 무능함의

15) “What differentiates the discourse of capitalism is Verwerfung, the fact of rejecting
[castration], outside all the fields of the symbolic.” (Talking to Brick Walls 96)
242 정혜욱

표현에 불과하기에, 주체는 결여를 축출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데 몰


두한다. 사회적 연결의 상실과 더불어 거부된 부정성이 위기의 형태로 되돌아와서
자기충족적이지 못한 모든 사람을 불안에 떨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일관
성, 비전체성의 자리가 없다는 것에서 숨막히는 불안이 발생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우발성을 공포스럽게 여기고 우발성을 가능한 한 없애려고 시도하지만, 사실 더 큰
불안을 낳는 것은 우발성을 삭제하려는 시도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 분석을 위해 잠시 우회하기는 했지만, 세미나 10 에서도
가장 심각한 불안은 결여를 대상 a의 대체물로서 틀어막으려고 시도할 때 생겨난다.
이 글의 2장에서 언급했듯이 라캉은 프로이트의 거세불안은 받아들이지만, 분리불안
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엄마와의 분리가 아이에게 불안을
야기한다고 보지 않고, 엄마의 현존이 공백를 결여하게 하고, 공백의 결여가 아이에
게 분리를 불가능하게 하여 불안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패던지기 놀
이’(Fort-Da game)에서 아이는 실패를 던지면서 ‘없다’(fort)라고 말하고 실패를 당
기면서 ‘있다’(da)라고 말한다.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의 어떤
공백이자 틈새이다. 요구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불안이 발생하는 것은 이 공백이 완
전히 채워질 때 발생한다.16) 있다와 없다 사이의 잠깐의 공백 즉 잘림(cut)이 주체
가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이며, 상징계의 구조적 실패와 마주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세미나 10 의 주제는 바로 이 공백이
며, 있다와 없다 사이의 잘림이요, 구멍이자 공백이다.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서의
크로스캡(cross-cap)의 논의에서 보듯, 사이 공간이 없다면 안과 밖의 연결이 존재
할 수 없으며, 주체와 타자의 관계성도 사라지고 사회적 유대 또한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과도한 애국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등은 결여가 작동하지 않는 사
회의 현상이며,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일부 종교단체나 정체성 정치에 기반한 편
가르기 문화, 여성혐오, 동성애혐오 등 혐오담론의 확산 역시 결여의 거부에서 생
겨나며, 결여의 거부는 공백이 없지 않다는 부정의 부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앞서
헤겔의 변증법이 라캉에서 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중 운동의 순환이라고 말했듯,

16) “A certain void is always to be preserved,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the content,
neither positive nor negative, of demand. The disruption wherein anxiety is evinced
arises when this void is totally filled in.” (Seminar X 65)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43

결여 역시 기표, 즉 상징계의 한 좌표로 환원


될 수는 없다. 결여의 결여는 바로 없지 않은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거세를 거부한다는 것은
거세가 만드는 공백의 거부다. 3장에서 언급했
듯, 한스의 불안은 거세의 거부에 기원을 두는
것이며, 젊은 동성애 여자의 증상은 상징계 속
Seminar X 134
에 동성애를 받아줄 여지가 없는 데서 생겨난
다. 그러므로 들머리에서 말했듯 불안은 우리가 추방하려고 들면 들수록 더욱 끈덕
지게 달라붙는 대단히 불길한 정동이다.
라캉이 40여년 전에 구상한 자본주의 담론은 오늘날의 불안 사회를 진단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도구다. 경제위기나 금융위기 등의 큰 담론이 아니더라도 코로나
19로 인한 일련의 조처들이 우리에게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단순히 바이러스가 무
섭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과 사물은 얼마든지 무한정 연결되어
도 좋지만, 전염의 위험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면 안 된다는 것, 혼밥은 가
능하지만 함께 먹는 것은 안 된다는 등 이런 사소한 것들이 불안을 더 가중시킨다.
함께 먹고 놀고 공부하고 일하는 공간이 반드시 현실 공간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
니라, 인간의 취약성을 삭제하고 사이 공간을 안전을 위해 완전히 메우려는 시도가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이며,
단지 코로나 사태로 가속화되었을 뿐이다. 자본의 유령성은 감각 형식을 폐기하고
시장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 알려준다. 갱년기 건강상품
과 멋진 몸매를 위한 운동기구 등 상품은 무한하다.
자본주의가 주체를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질병은 불안이다. 그
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점점 강력해지는 불안의 신호에 직면해서 무엇을 해야(하지
않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들머리에서 제기했던 자본주의라는 불안으로 점철된 사
회에서 ‘불안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이어진다. 앞서 언급했
듯이 라캉은 치유를 우회적으로만 언급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를 세미나 10 을 강
의하고 있을 당시의 라캉의 생애와 관련하여 그가 라캉은 자신의 불안과 대면해서
어떻게 치유를 모색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44 정혜욱

V. 라캉의 불안과 치유

라캉의 세미나 10 “불안”은 생트안(Sainte-Anne) 병원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세미나로서 1962년 11월 14일에서 1963년 7월 3일까지 행해졌다. 잘 알려져 있
듯이 라캉은 이 강의 직후에 국제정신분석학회(the International Psychoanalytic
Association, IPA)17)에서 회원자격을 박탈당함으로써, 생트안 정신병원을 떠나게
된다. 1961년 에딘버러 회의의 결과는 라캉에게 수련의 양성프로그램에서 영원히
손을 떼라고 요구했고, IPA와 결별이 이루어진 것은 불안 세미나가 끝난 후지만,
불안 세미나가 끝나기 전인 1963년 5월 IPA에서 라캉의 축출은 거의 결정되어 있
었다. 즉 라캉이 불안 세미나를 하고 있었던 1962년에서 1963년까지 라캉과 IPA
와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파국을 맞았다.
라캉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많지 않지만,18) 라캉이 세미나
10 의 주제를 “불안”으로 설정할 무렵부터 다음 해 세미나 11권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 을 시작하기 전까지 라캉이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시
련을 맞이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시기의 라캉은 세기의 천재라
기보다는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IPA의 축출을 전후
하여 그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었고, 극단적 불안에 시달렸다. 1963년 불안
세미나에 이어서 아버지의-이름 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지
만, 단 한 번을 제외한 나머지 세미나는 중단되었다. 알튀세의 편지에 의하면, 라캉
은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에 휩싸여서 자신을 배신한 자들을 저주하다가 진정제
과다 복용으로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Roudinesco 300-301). 이것이 자살
시도였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라캉은, 열 번째 세미나가 끝나고 열한 번
째 세미나가 시작되기 전, 이 “사이”의 시간에, 측근이던 크레온과 자신이 사랑하
던 아들들에게 버림받고, 삶의 비참 속으로 걸어 들어간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Oedipus at Colonus)처럼, IPA에서 배제당한 채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

17) IPA는 프로이트의 주도로 성립되었으며,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피해서 프로이트가 영국


으로 망명한 후 그의 제자들이 이끄는 ‘자아심리학’이 IPA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18) 1962~63년의 라캉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루디네스코(E. Roudinesco)의 Jacques Lacan, 메
이시(David Macey)의 Lacan in Contexts, 라캉 저널 Lacaninan Ink 39권(라캉의 생애 특집
본)을 참고했다.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45

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사후적으로 되돌아보면,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라
캉의 모델이 아니다. 라캉은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신들의 욕망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복종을 선택하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
를 상실하지도 않았다. 이 시기 이후의 라캉은 오이디푸스의 사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안티고네에 가깝다. 라캉의 안티고네는 헤겔의 해석처럼 ‘국가의
법’과 ‘친족의 법’의 대립을 극화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양도
할 수 없는 욕망’을 끝까지 고수하기 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캉은 안티
고네에 머물지 않고, 행위로의 이행을 감행한 분리(seperation)의 주체로 나아갔다.
주체가 분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자아의 기능을 정지시켜야 한다.
이 정지, 멈춤의 순간은 중요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면 주체는 죽는다. 그러나 분
석의 윤리가 지향하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정지의 순간을 지나서, 상징계
의 무대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를 겨냥한다. 파문 이후의 라캉의 삶이 보여주듯, 분리
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무 자체가 아니라 ‘복종하는 주체’의 죽음 이후 분리의 주체
가 대면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즉 “분리”(separation)란 주체가 자신을 소외와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판타지의 판에서 떨어져 나와서, 행위로의 이행을 통해 자유
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당황’의 어원에서처럼, 분리의 라틴어 어원
[se parere]도 “스스로를 출산하다”(engendering oneself)는 의미가 있다(Seminar
11 214; Écrits 715) 이는 이전의 판에서는 금지된 것이 분리 이후의 세계에서 새로
이 탄생한 주체에게는 가능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4장에서 잠시 언급한 라캉의 ‘분리 불안’에 대한 설명도 분리의 주체라는 맥락
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에서 탄생의 트라우마는 엄마 자궁에
서 분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궁 속의 세계에서 바깥 세계로의 이동(탈주)으
로 인한 숨막힘에서 생기는 불안이다. 아이는 탄생의 순간 문자 그대로 숨이 막히
고 숨을 쉴 수가 없다. 즉 라캉에게 최초의 불안은 분리가 아니라, 숨막힘에서 생
기는 “탄생의 트라우마”다(Seminar X 327). 자궁에서의 분리 이후 새로이 태어난
주체(neo-natal subject)는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서 숨막힘 이후의 첫 숨쉬기, 첫
호흡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아이의 젖떼기도 마찬가지다. 라캉에 의하면, 프로이트처럼 엄마가 아이에게 강
246 정혜욱

제로 젖을 떼게 만들어서 분리불안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이 스스로 젖을 포기


하고, “스스로 젖을 뗀다”(“He weans himself. He detaches himself from the
breast”)(327, 원문 강조). 물론 젖은 대타자가 아니다. 하지만 탄생 시의 숨막힘
(중지)과 첫호흡(시작), 그리고 젖의 포기(중지) 이후의 밥먹기(시작)는 분리 이후의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관련된다. 타자의 편에서, 태아를 키워준 어머니의 자궁이
태아에게 더 이상 삶의 터전으로 기능하지 못할 때, 아이의 편에서, 젖이 더 이상
아이에게 영양분을 제공하지 못할 때, 아이는 분리를 통해서 새로이 태어나야 한
다. 새로운 주체는 정-반에서 연원하는 합의 주체가 아니다. 헤겔의 지양은 모순의
극복이 아니라 이전 정체성의 ‘포기’이며, 새로운 주체는 이전 정체성의 모순을 극
복한 합이 아니라, 새로운 정이다. 첫 호흡의 순간 아이에게 대타자와의 아무런 유
대가 없는 것처럼, 새로 태어난 주체는 이전 주체의 초기화 상태에서 새로운 유대
를 만들어야 한다. 행위로의 이행을 통해 분리를 감행하는 주체는 태아나 유아가
아니다. 그러나 태아와 유아의 중지에서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과의 유비를 통해,
우리는 라캉의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우리는 합으로 귀결되지 않는 헤겔의 변증법
적 과정을 수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탄생 시의 숨막힘의 순간, 젖떼기에서 최초의 거식증이라고 할 수 있는 음식 거부
의 순간은 오래 지속되면 안 된다. 숨막힘이 질식을 유발하듯, 불안도 질식을 유발한
다. 불안의 어원인 ‘anguisse’가 질식을 의미하듯, 완전한 불안은 주체를 죽음으로 몰
고 간다. 불안이라는 절멸의 순간에 주체는 생존을 위해 행위로 이행하면서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징질서와 단절한다. 상징계의 파열을 낳는 분리를 감행할 때
그는 사건적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새로운 주체에게 도래할 미래는 불확실한
채 남아있고, 이 불확실한 자유 속에서 주체는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제 다시 IPA에서 라캉의 축출 과정을 되돌아보자. 과연 라캉이 그의 표현처
럼 파문을 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 스스로 IPA를 포기했는가? 세미나 10 의 논의
를 조심스럽게 따라갔을 때, 라캉 스스로 IPA와 그가 평생을 바쳐 일구었던 정체성
과 단체를 포기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IPA와 불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표면
적인 이유는 라캉의 상담 시간이 짧고, 전이나 역전이에 대한 개입을 엄격하게 자제
하지 않는 등 IPA가 만든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담 시간이나
규칙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라캉의 치료에 대한 태도다. IPA는 인간을 정상과 비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47

정상으로 나누고, 비정상인들의 질병을 치료하여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그 목적이


있었지만, 라캉은 치료나 정상이라는 개념에 집착하지 않았고, 분석을 주체가 가진
자유라는 차원에서 포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IPA와 라캉 사이의 가장 큰 불화
의 원인이 상담 시간의 길고 짧음의 여부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치료의 방향성에 있
었다. 라캉이 IPA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라캉은 자
신의 주장을 굽히기를 거부했고, 그의 욕망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캉은 “행
위로의 이행”을 통해서 기존의 판타지 프레임에서 활동하기를 중단한다.
불안과 충격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수습한 직후 시작한 1964년 1월 15일의 첫
세미나에서 라캉은 자신의 이론을 저주의 대상으로 삼은 IPA의 결정을 스피노자
(Baruch Spinoza)를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했던 1956년의 파문에 비유한다. 파문
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IPA의 축출 이후 고독한 시기 동안 그가 동일시했던 사람
이 파문 이후의 스피노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라캉에게 파문은 끝이 아니라 ‘중지’
와 ‘단절’이자 중지 이후의 새로운 주체적 삶을 예고한다. 파문 이전의 스피노자가
파문 이후의 스피노자와 동일인이 아니듯, 파문 이전의 라캉과 파문 이후의 라캉을
동일선상에 놓고 논하기는 어렵다. 전기의 라캉이 주체가 상징계에 종속된다고 주
장하면서 칸트의 윤리를 따랐다면, “너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1964년 6월)란 주
장을 펼칠 때의 라캉은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된 이후, 존재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
았던 스피노자의 고독 속으로 침잠한 후, 철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스피노자의
길을 따른다.19)
불안 세미나의 마지막 부분에서 라캉이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를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불안은 자유와 연결된 불
안이며, 자유가 주는 불확실성과 연결되어있다. 그러므로 라캉이 치료란 “일종의
덤으로 받는 보너스”라거나 “우리가 속해있는 장에서 치유라는 개념보다 더 불안

19) 라캉은 스피노자의 삶의 행보를 따르는 것이지, 스피노자의 ‘욕망’을 그의 분석 이론에 접목


시키는 것은 아니다. 세미나 11권 의 마지막에서 언급된 바처럼 라캉은 스피노자의 철학
이 아니라 칸트의 철학을 따른다(275-76). 주의해야 할 점은 여기서 언급한 칸트는 사드에
의해 전복되고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 칸트라는 점이다. 칸트와 더불어 사드를 (“Kant with
Sade”)에서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 칸트는 무조건적 복종의 주체를 주장하는 이전의 칸트가
아니라, 주체의 병리성을 제거함으로써, 주체 속에 결여와 분열을 도입하고, 한계를 경험한
이후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는 주체를 말하는 칸트다(Écrits 645-670).
248 정혜욱

정한 것은 없다”(nothing is shakier, in the field we’re in, than the concept of


cure”)(Seminar X 56)고 주장했을 때, 이는 불안 증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다거나,
라캉 자신이 임상 치료를 포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불안”을 통
해 라캉이 겨냥한 것은 단순한 증상의 치료가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을 겨냥한다. 파
문 이후의 라캉의 여정은 불확실한 자유 속에서 대타자와 유대를 끊어내었다는 의
미에서 상징계에서 버려진 잉여이자 대상 a로서, 새로운 판에서 새로운 주체 되기
를 시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후기 라캉에 기반하여, 보다 정치적 주체를 사유했던 바디우(Alain Badiou)는
라캉의 치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사실상 라캉의 불안에 대한 해결책이
라고 볼 수 있다.

라캉에게 분석의 최종 목적은 치료하여 회복시켜주는 데 있지 않다. 분


석은 주체가 스스로 일어나 실재 지점에 도달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치료는 운명으로 보이는 것을 굴절시켜서 주체의
능력을 다시 여는 것이며.... 분석은 피분석가가 어쩔 수 없다고 느끼는
무능한 상황을 타개하고 그의 상징화 능력의 일부를 회복시켜줄 수 있는
실재의 지점으로 이끄는 것이다. (Badiou and Roudinesco 16)

결론적으로 세미나 10 에서 라캉의 불안은 두 층위에서 논의된다. 하나는 간


극에 자리하고 있는 대상 a가 주체에게 보내는 신호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 a가 다
른 대상으로 대체되어 구멍 마개처럼 간극을 메우려고 시도할 때 생겨난다. 역설적
으로 보이지만 이 두 주장이 다른 것은 아니다. 주체에게 불안은 없음이 있음의 형
태로 등장할 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20)
IPA가 프로이트의 이론을 완벽한 치료방식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불안
을 야기한다. 프로이트의 논의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망설임과 공백을 메우려는
IPA의 시도는 라캉을 정신분석학계의 잉여, 쓰레기, 대상 a로 간주했고, 이에 반발
한 라캉이 IPA라는 상징계의 판타지 프레임을 깨뜨리고, 행위로의 이행을 통해 새

20) 1974~1975년 세미나 22 에서 라캉은 신호 불안이 아니라 불안을 주이상스에 압도당하


는 몸의 차원으로 설명한다. 세미나 10 에도 불안과 관련한 주이상스에 대한 논의가 등
장하지만, 지면관계상 이와 관련된 논의는 생략했다.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49

로운 주체 되기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파문 당시 라캉은 60대 초반이었고, 그가 평생을 쌓아온 정신분석학자로의 업
적을 뒤로 하고,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에 그는 프로이트 학교를
새로 설립했다.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처럼, 라캉 역시 그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라캉은 기존정신분석학회의 반역자로서 대
상 a처럼 버려진 잉여의 삶을 살 수도 있었고, 혹은 정신분석의 새로운 판짜기에
성공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성공한 영웅이지만, 당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라캉과 같은 결단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누구나
새로운 주체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라캉에게 분석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
은 바로 이 때문이다.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산파나 의사가 필요하듯이, 영웅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거의 질식상태에 있는 수많은 위태로운 삶을 위하여
분석가의 역할은 중요하다. 70대가 된 라캉은 텔레비전 (Television)에서 분석가
에게 자본주의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임무를 부과하고, 예전에 성자(Saint)라고 불
렸던 지위를 부과한다(14). 물론 라캉은 성자를 지도자나 기존 도덕 담론의 수호자
로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설물과 같은 대상 a에 위치시키고, 피분석가를 자본
주의의 발전 담론에 기반하여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 자
본주의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찾도록 안내해야 하는 임무를 부과한다. 라캉의 분석
가는 경쟁과 평가에 지치고 무한경쟁 체재에서 극도의 스트레스와 우울, 공포증 등
의 불안에 시달리는 수많은 잉여 인구들이 스스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
록 산파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사회적 유대의 상실, 주체의 소외와 고독을 포함하여, 자본세
(Capitalocene)가 낳은 수많은 위기 등 오늘날 산적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는 뭔
가 부족한 면이 있다. 그래서 라캉에서 이론에서 더 나아가, 발본적 돌파구를 마련
하려는 시도는 후기 라캉의 통찰력을 정치적으로 발전시킨 바디우의 사랑이나 용
기와 같은 정동, 그리고 라캉과는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시도
하는 버틀러(Judith Butler)의 우울증, 광기나 조증, 그리고 개인의 차원을 너머서
‘상처받은 몸들의 연대’ 등의 논의로 보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
의는 다음 연구로 기약한다.
250 정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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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53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국문초록 정혜욱 (부경대학교)

정신의학에서 불안은 정신병의 일반적인 증상 중의 하나로 걱정이나 두려움과


같은 정신적 현상과 호흡곤란, 두근거림, 피로, 어지러움, 식은땀 등과 같은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포함하는 개인적 질병으로 진단되어왔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
에서 불안은 임박한 위험에 대한 경고이자, 간극에 자리하고 있는 대상 a가 주체에
게 보내는 신호인 동시에 대상 a가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 구멍 마개처럼 간극을
메우려고 시도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의 욕망을 지탱해주던 판타지 구조
의 붕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어렵고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지
만 동시에 불안에 대한 임상적, 사회적, 문화적 통찰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라캉의
세미나 10 에서 불안의 의미를 살피고, 그의 불안 분석이 오늘날 어떤 시의성을
지니는지, 기존의 판타지 구조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불안과 같은 부정적 정동을 제
거할 것이 아니라, 불안이 어떻게 사회의 환상을 가로지르고 상징적 좌표를 변경시
킬 수 있는 신호가 되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새로운 주체의 발생으로 이어지
는지, 그 긍정적 가능성을 도출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2장에서
는 대상 a와 관련한 ‘불안’ 개념과 그것의 위치, 3장에서는 그가 프로이트의 억제,
증상, 불안 을 좀 더 세분하여 정교화시킨 불안 차트 속에 등장하는 억제, 장애, 당
황, 정서, 증상, 좌절 그리고 행위화와 행위로의 이행 등의 개념을 살핀 후, 4장에
서는 자본주의 사회와 연결하여 결여의 결여로서의 불안을 살피고 5장에서는 불안
과 치유의 문제를 불안 세미나를 전후하여 엄청난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던 라캉이
자신의 불안과 대면하여 어떻게 대처해나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회적으로 치유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살폈다.

▸주제어: 프로이트, 라캉, 불안, 자본주의 담론, 행위로의 이행


254 정혜욱

Beyond Anxiety as Affect in Lacan’s Seminar X

Abstract Haeook Jeong (Pukyung National University)

Lacanian psychoanalysis accounts for anxiety as a warning signal for a


coming danger, or an affect relevant to the encounter with the objet petit a
i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X: Anxiety, while psychiatry
diagnoses it as a personal disease with mental phenomena of worry and
apprehension, accompanying physical phenomena of palpitations, fatigue,
dizziness, breathlessness, and sweats. The emergence of overwhelming
anxiety is closely related to the collapse of the subjective desire-based
fantasy frame. This essay examines how the anxious subject encountering the
object a can cross the fantasy structure and advance into a neo-natal subject.
To this end, the essay clarifies the concept and status of anxiety related to
object a, analyzing Lacan’s anxiety chart, consisting of such affects and acts
as inhibition, impediment, embarrassment, emotion, symptom, turmoil,
acting-out and passage à l'acte, which he developed based on Freud's
“Inhibition, Symptom, Anxiety.” Grounded on such analyses, the essay
further attempts to take advantage of Lacanian discourse on capitalism in
order to illustrate that anxiety arises when lack lacks and by so doing, it
gropes for Lacanian analysts’ roles for the society in spite of Lacan’s
comment, ‘cure comes as an additional bonus.’

▸Keywords: Sigmund Freud, Jacques Lacan, anxiety, capitalist discourse,


passage à l’acte
라캉의 불안 정동을 넘어서 255

▸Notes on the Contributor:


Haeook Jeong is Researcher of the Institute of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at Pukyung National University.
Email: jeonghaeook@gmail.com

Received: January 28, 2022.


Reviewed: February 11, 2022.
Accepted: February 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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