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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Fi002466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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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라캉적 답변
– 진정과 불안 사이에서 -
핵심어
응시, 왜상, 대상 a, 실재의 귀환, 자크 라캉, 노먼 브라이슨, 할 포스터
56 ∙ 예술과미디어
Abstract
Ahn, SooJin
What is picture? Jacques Lacan changes this question to define the picture
and to discuss two effects of it in Seminar XI. What is seeing? How can the
seeing subject be constructed? Lacanian answer to these questions corresponds
to Lacanian diagnosis regarding human destiny. This paper identifies the two
effects, the pacifying and the anxiety, in the works of the artists Lacan
mentioned. Particularly, this paper focuses on the fact that the two effects are
the double-sidedness of every picture rather than the dichotomous choice of
one picture. Therefore, this paper finds Lacanian definition and even ethics of
the picture in the exquisite coexistence of the two effects. However, Lacanian
theory has been misunderstood as the triumph of the gaze. In this regard,
Lacanian theory has been criticized for limiting the essence of seeing to the
terroristic attributes such as threatening and fear. On the other hand, Lacanian
theory has been used to justify the practice of art which arouses displeasure,
meaninglessness, or even disgust. This paper reconsiders these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in the gaze theory of Norman Bryson and the analysis of
abject art by Hal Foster. With Foster, this paper suggests the goal of art is not
the absolute breakdown but the breakthrough to the new possibilities. The pic-
ture aims the invention of the new eye. The ethics of the subject is the same.
The subject should seek the new subjectivity which embraces a lack-of-being.
Keywords
Gaze, Anamorphosis, Object Petit a, The Return of the Real, Jacques Lacan, Norman
Bryson, Hal F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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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의 주장은 응시 이론으로 축약되며 시각 경험의 본질을 위협과 공포 같은 테러적 속성에
한하였다고 비판받거나, ‘실재의 귀환’이라는 테제로 화하며 불쾌나 무의미, 심지어 혐오를
자아내는 미술의 양상을 옹호하는 데 전용되었다. 그러나 『세미나 11』에서 라캉은 응시를
테러로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현실이며 그러한 현실이 구성물임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
게 구성되는지를 밝히며, 나아가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을 논구한다. 따라서 이 글은 대상 a
로서 응시가 가진 양면적 지위에 근거하여 응시의 일면만을 주목하여 빚어진 오해를 재고하
고, 그림에 관한 라캉적 답변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답변은 현실의 중력이나 그로부
터의 이탈로 단순화될 수 없는 라캉 정신분석 특유의 윤리로 이어질 것이다.
1) 보는 주체의 구성에 관한 라캉의 설명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미술과 마조히즘: 프로이트, 들뢰즈,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2018, pp.67-97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이러한 맥락에서 브루스 핑크는 자크 알랭-밀레의 수업을 참고하여 선상징적 실재를 “문자 이전의
실재”로, 상징화되지 못한 잔여를 “문자 이후의 실재”로 구분한다. Bruce Fink, 『라캉의 주체』, 이
성민 역, 도서출판b, 2012, pp.66-67.
3) Jacques Lacan, Le Séminaire Ⅺ,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1964, Jacques-Alain Miller ed., Seuil:Paris, 1973, p.192. (이하 S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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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으로 구분한다. 충동은 욕망과 같이 대상 a를 원인으로 하지만, 대상 a를 소유하려 하
지 않으며, 대상 a를 맴도는 “순환적 회귀” 운동 자체로부터 만족을 취한다.7)
라캉은 활쏘기 게임에 빗대어 목적(aim)과 목표(goal)라는 개념을 구분하며 충동의 여정을
상술한다.8) 목적은 목표로써 달성되는 바다. 예컨대 활쏘기 게임의 목적(승리를 위한 득점)
은 목표(표적을 명중하는 행위)를 통하여 성취된다. 그런데 욕망과 달리 충동의 목적은 대상
의 획득이 아니라 충동 자신의 만족, “기관의 즐거움(Organlust)”이다.9) 이러한 목적은 대
상의 획득과 무관하게, 대상의 주변을 돌아 기관 자체로 되돌아오는 데서 달성될 수 있다.
껌을 씹거나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이러한 여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껌을 씹거나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그것을 반복하는 것 자체로 입에 모종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즐거움은 껌
이나 담배를 삼키는 일과 무관하며, 이러한 일은 심지어 그 즐거움을 해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동은 상징계 주체에게 금기시된 대상 a의 획득은 불가하더라도 대상 a로
써 상기되는 향유를 향한 동력이며, 그러한 향유에 상응하는 만족을 실재적으로 성취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충동은 현실과 조율된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의 질서 바깥을
맴도는 움직임이며, “쾌락원칙과 관련해 주체에게 허용된 유일한 형태의 위반”이다.10) 충동
의 실재적 만족은 상징계 현실에서 무의미, 심지어 고통으로 표기되는 일종의 금기, 즉 불가
능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대상 a에 대한 주체의 관계가 상징계 주체로서 기입되
는 절차를 대변한다면, 충동은 상징계의 바깥 즉 상징계 주체로서의 죽음을 향한다.11) 이러
한 죽음은 상징계 내 주체가 모종의 퇴행을 통하여 선상징적 차원의 향유를 다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a에 대한 관계를 변경함으로써 욕망을 지탱해온 환상의 환영성을 자각하
는 실천을 표지한다. 주체의 삶은 대상 a의 이러한 양면성이 대변하는 긴장 자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주체의 보기란 무엇인가? 라캉은 시관적 장에서 주
체의 보기는 “눈과 응시의 분열”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답변을 제시한다.12)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눈과 응시의 삼각형을 통하여 존재와 의미, 주체와 타자, 충동과 욕망의 분열의 구
도가 시관적 장에서 눈과 응시의 분열로 반복됨을 보여주며, ‘시관적’이라는 표현은 ‘시각적’
이라는 말로 채 드러낼 수 없는 이러한 보기의 영역을 수식한다.
7) SXI, pp.163-164.
8) Ibid., p.163.
9) Ibid., p.153. 충동의 목적에 관한 라캉의 주장은 충동을 정의하는 프로이트와의 입장차를 보여준
다. 프로이트가 성 충동의 다형성과 독립성을 고찰하고, 그것이 이후에 통합되는 양상을 확인한다
면, 라캉은 충동이 언제나 부분 충동으로 어떠한 전체를 이루지 않으며, 부분 충동들 사이에도 일정
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본다.
10) Ibid., p.167.
11) E, p.848.
12) Op. cit., p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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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을 문제로 제시한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이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우리가 방금 살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 가시성, 이 감성적인 것
자체의 보편성, 우리 자신의 타고난 익명성이다.”16) 라캉은 메를로-퐁티가 우리 눈의 ‘봄’에
언제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임’이 선재하며, 그 둘이 얽혀 있다는 진실을 밝혀냈다는 점에
서 그를 높이 평가한다.
눈의 환영성은 거울 단계에서도 이미 예견된 바다. 아이는 거울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나(Je)의 기능을 형성”한다.17) 거울상을 마주하기 전까지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
다. 더 정확히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완전한 충족을 누리던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외따로 구분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는 거울 속의 통일적인 신체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아이의 신체는 아직 스스로에 의해 완벽하게 제어되지 못하
기에, 이 동일시는 근본적으로 오인이다.18) 아울러 이 동일시는 타자적 질서에 의하여 이루
어진다. 아이를 안고 거울 앞에 선 어머니가 거울 속 아이를 가리키며 “저것이 너란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인간이 “타자 속에서만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주체로 구
성되는 근원적인 장면이다.19) 심지어 거울상은 아이나 거울이 움직이면 변하고 사라지는 불
안정한 이미지이기에, 이렇게 형성된 ‘나’라는 자아는 결국 이미지의 효과에 불과하다.
눈의 환영성은 생리적인 시지각, 근본적으로는 빛의 성질 자체에서도 발견된다. 르네상스
원근법이 보여주듯이 사유로 환원된 눈은 ‘시선’ 즉 눈에서 출발한 하나의 직선으로 표현된
다. 예컨대 알베르티는 시선을 “시각 광선(visual ray)”으로 표현하며, 눈이 인지하는 요소
에 따라 시선을 분류하기도 하였다.20) 그러나 이는 시각을 전혀 시각적이지 않은 기하광학
적 공간에 가두어 다루는 방법이다. 라캉은 디드로의 「눈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맹인
에 대한 서한」을 언급하며, 르네상스 원근법이 재현하는 공간이란 그 상징 형식을 따르기만
하면 맹인도 구성해낼 수 있는 공간임을 지적한다.21) 라캉은 빛이 실제로 직선으로 전파될
지라도 빛을 광점, 즉 빛이 발산되는 원점으로 보아야 빛과 시지각이 맺는 관계가 드러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광점이자 광원으로서 빛은 “굴절되며 확산되고” 우리 눈을 “가득 채우
거나 넘치기도” 한다는 점으로부터 일종의 “방어 기관”이 요청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
이다.22) 즉 신체 기관으로서 눈의 차원에서도 시지각은 세계의 투명한 반영이 아니며, 빛과
보는 주체의 관계에는 어떤 “애매모호함” 메를로-퐁티가 발견한 어떤 뒤엉킴이 존재한다.23)
23) Ibid., p.88. 라캉의 이러한 입장은 망막, 나아가 시각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이 수동적 각인보다 능
동적 여과에 가깝다는 최근의 발견과도 상응한다. Semir Zeki, 『이너비전: 뇌로 보는 그림, 뇌로 그
리는 미술』, 박창범 역, 시공아트, 2003, pp.27-28.
24) Op. cit.,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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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그림의 두 가지 효과
1. 진정: 응시-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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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화의 메멘토 모리이다.28) 여기서도 죽음은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메시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즉 죽음의 응시를 길들이는 전략으로서 그림은 죽음을 삶
의 동기로 대체하며, 그러한 상징적 의미를 벗어나는 죽음의 차원에 눈을 감는다. 그림은 죽
음을 심오한 교훈으로 승화함으로써, 모두의 운명이지만 누구도 실체화할 수는 없는 죽음의
불안을 진정시킨다.
2. 불안: 응시-포착
28) John B. Ravenal, Vanitas: Meditation on Life and Death in Contemporary Art, Virginia
Museum of Fine Arts, 2000, p.3.
29) SXI, p.100.
30) Ibid., p.79.
31) SX, p.188.
32) 주체성에 관한 라캉의 구분(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에서 상징계의 폐제는 정신병의 원인으로, 프로
이트의 「부정」(1925)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 ‘Verwerfung’에서 유래하였다. 브루스 핑크에 따르면,
라캉은 『세미나 1』 당시에는 이를 ‘배척(rejection)’으로 번역하였다가 『세미나 3』에서 곧 ‘폐제(for
eclosure)’로 수정한다. 핑크는 이러한 수정이 건전하다고 보는데, 정신병이란 무엇보다 상징계 전
체를 지탱하는 요소를 완전히 추방해버리는 데서 성립하는 주체성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Bruce Fin
k,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 이론과 임상 분석』, 맹정현 역, 민음사, 2004, p.134, p.139.
[그림 3] Francisco Goya, Saturn Devouring His [그림 4] Peter Paul Rubens, Saturn Devouring
Son, 1819-1823 His Son, 1636-1638
33) Nigel Glendnning, The Interpretation of Goya’s Black Paintings, Queen Mary College an
d University of London, 1977, p.25; Fred Licht, Goya ―The Origins of the Modern Temp
er in Art, Harper & Row Publishers, 1983, p.168; Rose-Marie & Rainer Hagen, Francisco
Goya, 1746-1828, Taschen, 2003, p.76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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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 것처럼 잘린 신체를 쥐고 있다. 붉은 피가 흐르는 신체에서 머리와 오른팔은 이미 먹혀
사라진 채다. 크로노스 자신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자세로 자식을 먹어치
우는 데 급급하다. 크로노스의 하반신과 그 근처에서 뒹굴고 있을지 모르는 신체, 그리고 그
가 서 있는 바닥은 급하게 찍힌 스냅사진처럼 뒤엉킨다.34) 유일한 소재인 크로노스조차 화
면 안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심연 같은 배경과 광기어린 거인, 고기가 되어버린 하얀 몸
앞에서 눈은 도망갈 곳 없이 위기에 몰린다. 거인과 눈이 마주치면 다음은 나의 차례가 될
것 같은 죽음의 임박이 불안을 자아낸다. 그림의 제목이나 그림 속의 형상은 크로노스라는
최소한의 의미를 주지만, 불안을 진정시키기에는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34) 별장의 벽화였던 <검은 그림들>은 쿠벨스가 캔버스에 복원하여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었는데, 복
원 전 사진에 따르면 크로노스의 남근이 발기한 채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자식을 먹는 기괴한 행위
는 신화의 일종으로서 검열을 피했지만, 해부학적 성기의 묘사는 공공의 감상에 부적합하다는 복원
자의 판단으로 지워졌다. Robert Hughes, Goya, Knopf Publishing Group, 2006.
70 ∙ 예술과미디어
장 드 댕트빌이다. 그림 속 왼쪽 인물이 당시 라보르의 주교였던 셀브이고, 오른쪽의 인물이
외교 사절 댕트빌이다. 둘은 당시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헨리 8세의 이혼을
둘러싸고 빚어진 영국과 교황청의 갈등과 관련한 외교 업무를 비밀리에 수행하기 위하여
1533년 영국에 머물렀다. 둘 사이의 선반에 놓인 사물들은 두 인물에 관한 상징인 동시에
세계를 수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좌표화하기 위한 당시의 방식을 보여준다. 예컨대 거기에는
별의 운행을 측정하기 위한 천구의가 놓여 있는데, 여기에는 닭(프랑스)이 독수리(유럽)에 대
하여 차지할 우위를 과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셀브 쪽에 있는 해시계는 4월 11일 10시
30분, 즉 헨리 8세의 이혼 날짜와 이혼서 서명 시간을 가리킨다. 선반 하단에 있는 현이 끊
긴 류트나, 나눗셈 부분이 펼쳐진 수학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의미화 할 수 있다.
39) Ibid.
40) Ibid., p.81.
41) Ibid.,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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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간과하지 않으며 그림이 나아갈 방향을 암시한다.
그러나 라캉의 이론은 눈에 대한 응시의 승리로 일축되며, 위협이나 공포와 같은 테러적
속성에 한하여 시각 경험을 논하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노먼 브라이슨은 「확
장된 장에서의 응시」에서 응시에 관한 라캉의 주장이 주체의 탈중심화를 시각장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한편 이러한 탈중심화에 테러라는 부정적인 함의를 부여하고, 그러한 함의를 부여
하는 시각성을 보편화하는 협소한 이론이라고 비판한다.42) 브라이슨은 라캉의 응시 이론이
탈중심화를 위협이나 박해로 의미화하지 않는 대안적 시각 체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시각 경험의 본질을 테러에 두는 시각성을 구성하고 이용하는 권력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43)
브라이슨의 주장은 응시에 관한 라캉의 주장을 오해한 결과이다. 브라이슨은 라캉의 응시
를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시각에 끼어들어 그러한 주체의 중심성을 무화시키는 사회적 요구
정도로 오독하고 있다. 즉, 응시는 일종의 코드로서 문화적 공동체의 시각성을 강제하는 항
이고, 스크린은 그러한 코드망으로 삽입되어 코기토적 주체 내지 현상학적 주체의 중심성을
무화하며, 이렇듯 사회적 코드에 따라 보기가 형성된다는 시각 경험의 본질을 라캉은 테러
로 규정한다는 것이다.44)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상 a로서 응시가 주체에게 테러로서
도래하는 것은 그것이 상징계로서 부과되기 때문이 아니라, 상징화될 수 없는 잔여로서 상
징계라는 방어 체계를 요구하는 동시에 그 체계의 바깥을 표지하며 임박하기 때문이다. 상
징계는 주체로 기입되기 이전 인간의 원초적 향유를 억압하는 항이지만, 대상 a를 길들여
주체가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터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브라이슨은 라캉의 관점에서 그림의 윤리를 묻는 데 있어 중요한 고민의 방향을
보여준다. 시각 경험의 본질을 테러적 속성에 한하고 시각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브라이슨의 지적은 타당하다. 물론 브라이슨이 염려한 바는 상징계
를 부과하는 응시의 테러를 불가항력으로 치부하여 상징계 자체의 근원이나 그것의 실질적
인 작용을 성찰하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러한 테러가 자연스러운 사실로서 간과되는
사태다. 그러나 응시의 테러를 상징계 내 주체에게 되돌아오는 상징계 바깥의 문제로 바라
볼지라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일종의 재현 양식인 상징계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반-재현의
실천이 상징계의 근원과 작동에 관한 충분한 재고 없이 당위로서 선망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혐오미술의 수용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60년대 이후 미국 모더
니즘 미술의 대항으로 등장한 신체미술에서 신체는 물질적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
적 기호, 특히 주체라는 특권적 기호로서 대두되었다.45) 이러한 흐름에서 혐오미술은 배설
42) Norman Bryson, “The Gaze in the Expanded Field,” ed. Hal Foster, Vision and Visibilit
y, Bay Press:Seattle, 1988, pp.87-113.
43) Ibid., pp.107-108.
44) Ibid., p.107.
45) Hal Foster & Rosalind Krauss & Yve-Alain Bois & Benjamin H. D. Buchloh, Art Sinc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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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학에 응하는 트라우마 담론으로 대변된다고 결론을 내린다.49) 혐오미술은 주체
라는 ‘혐오하기’의 자리에 있기를 멈추고 ‘혐오하는 것 되기’ 달리 말해 주체의 죽음을 향하
도록 추동하며 해체주의의 주체 비판에 응한다. 동시에 외상적 이미지로서 혐오미술은 그
외상적 사건이 보장하는 목격자나 증언자, 생존자와 같은 어떠한 주체성을 여전히 탄생시키
며, 그에 권위를 부여한다. 즉 “주체는 소개되는(evacuated) 동시에 고양된다(elevated).”50)
혐오미술에 관한 포스터의 분석은 응시-포착의 방법으로서 혐오가 상징계와의 단절이나
그것의 와해(breakdown)라는 상징계의 파열(rupture)을 향한 ‘테러적’ 전략으로 이상화된
원인과 그로 인한 문제를 보여준다.51) 그렇다면 주체라는 단위 자체에 대한 비판과 소수자
주체성의 탄생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공존하는 지금, 미술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포스터
는 혐오미술 대부분이 나아간 방향을 분석하면서 혐오미술 대부분이 향하지 않은 제3의 선
택지를 언급한다. 그는 상징계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는 균열(fracture)이자 그로부터
새로운 현실이 구성될 수 있는 돌파구(breakthrough)를 미술의 소명으로 재조정하기를 제
안한다.52) 이는 앞서 <대사들>에 관한 라캉의 분석을 통하여 살펴본바 상징계 논리의 재생
산이나 그로부터의 단절 그 어디로도 기울지 않으면서 상징계 현실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게
하고 새로운 현실의 발명으로 나아가기를 추동하는 전략과 상통한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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