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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란 무엇인가?

’에 관한 라캉적 답변
– 진정과 불안 사이에서 -

A Lacani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Picture?’


- Between The Pacifying and The Anxiety -

안수진 (Ahn, SooJin)


서울대학교 미학과

투고일자 : 2019. 4. 14 심사일자 : 2019. 5. 2 수정일자 : 2019. 5. 11 게재일자 : 2019. 5. 28


국문요약

그림이란 무엇인가? 라캉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바꾸어 그림을 정의하고, 그 두 가지 효


과를 논한다. 보기란 무엇인가? 보는 주체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림의 정의에 관한 라캉
의 답변은 주체로서 인간이 가진 고유의 운명에 대한 그의 진단과 상통한다. 이 글은 ‘대상
a로서 응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세미나 11』의 강의를 중심으로 주체의 보기에 관한 라캉의
설명을 살펴보고, 그가 예로 든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진정’과 ‘불안’이라는 그림의 두 가지
효과를 구체적으로 확인한 후, 그림의 길로 대변된 주체의 길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라캉은
그림의 두 가지 효과를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림이 가진 양면성으로 발견한다. 그러나 라캉
의 주장은 응시 이론으로 축약되며 시각 경험의 본질을 위협이나 공포 같은 테러적 속성에
한하였다고 비판받거나, ‘실재의 귀환’이라는 테제 아래 불쾌나 무의미, 심지어 혐오를 자아
내는 미술의 양상을 옹호하는 데 전용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라캉의 주장이 눈에 대한 응
시로 일축되며 빚어진 오해와 이해를 재고한다. 먼저 응시를 사회적 시각성의 요구로 오해
한 노먼 브라이슨의 주장을 통하여 대상 a로서 응시의 실재적 차원이 간과되거나, 위협이나
공포만이 응시 자체의 속성으로 강조되어서는 안 됨을 확인한다. 나아가 응시의 실재적 차
원을 강조한 할 포스터의 혐오미술 분석을 통하여 미술의 소명이 상징계와의 절대적인 단
절, 상징계의 와해나 파열로 이상화되기보다 새로운 현실로의 돌파구를 가늠케 하는 균열로
재조정되어야 함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그림에 관한 라캉적 답변은 라캉 정신분석 특유의
윤리로 이어진다. 눈과 응시의 변증법으로서 보기는 응시를 포괄하는 눈으로의 종합을 겨냥
하며, 그림은 응시를 가리며 가리키는 스크린으로서 새로운 눈의 발명을 추동해야 한다. 마
찬가지로 의미와 존재 사이의 분열로서 주체는 상징화되지 못한 존재-결여를 포괄해내는 새
로운 주체화를 윤리로 삼는다.

핵심어
응시, 왜상, 대상 a, 실재의 귀환, 자크 라캉, 노먼 브라이슨, 할 포스터

56 ∙ 예술과미디어
Abstract

A Lacani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Picture?’


- Between The Pacifying and The Anxiety -

Ahn, SooJin

What is picture? Jacques Lacan changes this question to define the picture
and to discuss two effects of it in Seminar XI. What is seeing? How can the
seeing subject be constructed? Lacanian answer to these questions corresponds
to Lacanian diagnosis regarding human destiny. This paper identifies the two
effects, the pacifying and the anxiety, in the works of the artists Lacan
mentioned. Particularly, this paper focuses on the fact that the two effects are
the double-sidedness of every picture rather than the dichotomous choice of
one picture. Therefore, this paper finds Lacanian definition and even ethics of
the picture in the exquisite coexistence of the two effects. However, Lacanian
theory has been misunderstood as the triumph of the gaze. In this regard,
Lacanian theory has been criticized for limiting the essence of seeing to the
terroristic attributes such as threatening and fear. On the other hand, Lacanian
theory has been used to justify the practice of art which arouses displeasure,
meaninglessness, or even disgust. This paper reconsiders these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in the gaze theory of Norman Bryson and the analysis of
abject art by Hal Foster. With Foster, this paper suggests the goal of art is not
the absolute breakdown but the breakthrough to the new possibilities. The pic-
ture aims the invention of the new eye. The ethics of the subject is the same.
The subject should seek the new subjectivity which embraces a lack-of-being.

Keywords
Gaze, Anamorphosis, Object Petit a, The Return of the Real, Jacques Lacan, Norman
Bryson, Hal Foster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57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 진정과 불안 사이에서 –

Ⅰ. 들어가며: 그림이란 무엇인가?


Ⅱ. 보는 주체의 구성: 보기란 무엇인가?
Ⅲ. 그림의 두 가지 효과
1. 진정: 응시-길들이기
2. 불안: 응시-포착
Ⅳ. 그림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Ⅴ. 나가며: 그림의 길, 인간의 길

Ⅰ. 들어가며: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림이란 무엇인가? 라캉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바꾸어 그림을 정의하고, 그 두 가지 효


과를 논한다. 보기란 무엇인가? 보는 주체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림의 정의에 관한 라캉
의 답변은 주체로서 인간이 가진 고유의 운명에 대한 그의 진단과 상통한다. 이 글은 ‘대상
a로서 응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세미나 11』의 강의를 중심으로 주체의 보기에 관한 라캉의
설명을 살펴보며, 그가 예로 든 화가의 작품을 통하여 진정과 불안이라는 그림의 두 가지
효과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마지막으로는 그림의 길로 대변된 주체의 길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림은 언제나 인간의 그리기이고 인간의 보기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특히 라캉이 그림의 두 가지 효과를 한 그림의 양자택일로 제안하기보다 모든 그
림이 가진 양면성으로 발견함에 주목하여, 두 효과의 미묘한 공존을 그림의 정의 나아가 그
림의 윤리(‘그림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으로 제안한다. 그림에 관한 라

58 ∙ 예술과미디어
캉의 주장은 응시 이론으로 축약되며 시각 경험의 본질을 위협과 공포 같은 테러적 속성에
한하였다고 비판받거나, ‘실재의 귀환’이라는 테제로 화하며 불쾌나 무의미, 심지어 혐오를
자아내는 미술의 양상을 옹호하는 데 전용되었다. 그러나 『세미나 11』에서 라캉은 응시를
테러로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현실이며 그러한 현실이 구성물임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
게 구성되는지를 밝히며, 나아가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을 논구한다. 따라서 이 글은 대상 a
로서 응시가 가진 양면적 지위에 근거하여 응시의 일면만을 주목하여 빚어진 오해를 재고하
고, 그림에 관한 라캉적 답변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답변은 현실의 중력이나 그로부
터의 이탈로 단순화될 수 없는 라캉 정신분석 특유의 윤리로 이어질 것이다.

Ⅱ. 보는 주체의 구성: 보기란 무엇인가?

보기란 무엇인가? 인간의 보기는 신체 기관인 눈이 수행하는 생리적인 과정이나 기하광학


적인 빛의 궤적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보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상상계
(l’imaginaire), 상징계(le symbolique) 그리고 실재(le réel)라는 개념으로 인간이 주체로
구성되는 절차를 서술한다.1) 먼저 실재란 이미지나 언어로 대리될 수 없는 존재 자체다. 그
러나 인간은 탄생 이전부터 이미 통용되어온 이미지나 언어의 질서를 터전으로 삼아 그 현
실에 등록되어야 하기에, 이러한 차원에 머무르지 못한다. 주체로서 인간에게 선상징적 실재
란 상정될 수 있을 뿐이고, 상징적 현실에 대하여 실재는 상징화되지 못한 잔여, 결여, 공백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로서 인간의 현실은 실재를 폐기하며 빚어진다.2)
달리 말하자면 주체로서 삶은 존재와 의미 중 언제나 전자를 포기하는 대가로, 주체는 존
재와 의미 사이의 분열 그 자체이다. 라캉은 이러한 현실을 강도의 협박에 빗댄다. 돈을 내
놓든 목숨을 내놓든 선택하라는 강도의 협박 앞에서 돈을 선택할 자는 없다. 돈을 선택하면
강도에게 목숨까지 모두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숨을 선택할지라도 우리가 건질
수 있는 것은 돈을 빼앗긴 목숨뿐이다. 돈과 목숨의 양자택일과 마찬가지로 주체로서 인간
은 존재와 의미,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존재 즉 “무의미”를 택하는 대신 의미화될 수 없는
“무의미의 부분이 도려진 채 존속”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3)
그러나 매 순간 이러한 진실을 자각한 채 살아가야 한다면, 주체의 삶은 결코 안정적일

1) 보는 주체의 구성에 관한 라캉의 설명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미술과 마조히즘: 프로이트, 들뢰즈,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2018, pp.67-97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이러한 맥락에서 브루스 핑크는 자크 알랭-밀레의 수업을 참고하여 선상징적 실재를 “문자 이전의
실재”로, 상징화되지 못한 잔여를 “문자 이후의 실재”로 구분한다. Bruce Fink, 『라캉의 주체』, 이
성민 역, 도서출판b, 2012, pp.66-67.
3) Jacques Lacan, Le Séminaire Ⅺ,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1964, Jacques-Alain Miller ed., Seuil:Paris, 1973, p.192. (이하 SXI)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59


수 없다. 편안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과 세계가 상징계에 의하여 완벽하게 해명되며, 상징계
현실 내에서 완전한 향유가 가능하다는 기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요청되는 것이 상상
의 공간, 환상이다. 상징화될 수 없는 잔여로서 포기된 향유는 상징계 내에서 정의상 불가능
하지만, 환상을 통하여 주체는 상징계가 허용하는 방식을 따라 완전한 충족에 이를 수 있음
을 보증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환상은 욕망의 운동을 추동하며, 주체의 현실을 지탱한다.4)
그리고 실재적 향유는 상징적 현실에서는 무의미로, 무의식으로 밀려나며, 금기시된다.
다만 실재는 정의상 완전히 길들여질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이미지나 언어가 사태 자체
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캉은 환상이 지탱하는 현실, 기표를 정해
진 기의에 꿰어주는 상징계의 완전성이 일시적인 “누빔점(point de capiton)”에 불과하다고
본다.5) 기표 아래에서 영영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기의를 잠시나마 고정하여 의미화를 가능
하게 만드는 작용을 라캉은 쿠션이나 소파에 단추처럼 박혀 있는 누빔점은 무형의 충전재를
정해진 형태로 고정시키는 봉제 작업의 결과에 빗대는 것이다. 즉, 라캉은 기표의 체계로서
언어가 외부 현실과 같은 기의에 직접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본질주의 언어관을 주창하는 것
이 아니라, 그러한 본질주의 언어관이 얼마나 환영적인지를 지적한다.
따라서 실재는 양면적인 지위를 가진다. 한편으로 상징계로 대변된 의미화의 그물은 실재
를 길들이고, 상징계 현실이 허용하는 방식으로 향유를 추구하는 욕망의 운동을 추동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이 그물이 포획하지 못한 잔여이자 그물의 구멍 자체로서, 문득 그
틈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며, 그물 너머를 가리킨다. 이러한 실재적 차원을 향한 움직임을 추
동하는 상기물이 라캉이 대상 a로 칭한 바이다. 한편으로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으
로, 주체는 환상을 통하여 상징계 내의 대상을 추구하는 욕망의 운동을 통하여 완전한 향유
에 다다를 수 있다는 기만을 보증받는다.6) 욕망은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고, 언제나 상징
계 내에서 허용된 만큼의 따라서 주체로서 견딜 수 있는 만큼의 향유로 귀결된다. 그러나
상징화 불가능한 것이라는 실재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상징계에 의하여 억압되는 것은
실재적 향유에 상응하는 관념일 뿐 그를 향한 정동 자체가 아니다. 라캉은 이러한 역동을

4) 라캉은 자아/주체가 이미지/언어의 효과에 그칠 수밖에 없는 “주체의 분열(division)”을 “소외


(aliénation)”라는 “주체의 사태(fait)”로 명명한다. 나아가 주체의 운명은 절대적인 소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부분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을 통하여 [주체로서] 자신을 낳는” 것, “분리
(séparation)”로 주체 형성이 마감됨을 강조한다. 즉 소외와 분리는 주체로서 삶을 위하여 상징계의
완전성을 보증받고자 주체 자신을 부정하는 기만을 습득하는 단계로, 환상의 주체의 탄생이다. 주체
로 구성되는 매 순간은 소외와 분리의 뒤얽힌 순환이다. Jacques Lacan, Écrits, Seuil:Paris, 196
6, pp.840-844. (이하 E); SXI, p.194.
5) E, p.503.
6) 이렇게 제공된 대상 a를 라캉은 실재적인 것으로서의 대상 a를 상징계 내 대상으로 위장한다는 의
미에서 ‘가짜’ 대상 a(un a postiche)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대상 a가 가짜여야만 주체를 실재적
인 것이 임박하는 데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Jacques Lacan, Le Sémina
ire Ⅹ, L’angoisse: 1962-1963, Jacques-Alain Miller ed., Seuil:Paris, 2004, p.63. (이하 SX)

60 ∙ 예술과미디어
충동으로 구분한다. 충동은 욕망과 같이 대상 a를 원인으로 하지만, 대상 a를 소유하려 하
지 않으며, 대상 a를 맴도는 “순환적 회귀” 운동 자체로부터 만족을 취한다.7)
라캉은 활쏘기 게임에 빗대어 목적(aim)과 목표(goal)라는 개념을 구분하며 충동의 여정을
상술한다.8) 목적은 목표로써 달성되는 바다. 예컨대 활쏘기 게임의 목적(승리를 위한 득점)
은 목표(표적을 명중하는 행위)를 통하여 성취된다. 그런데 욕망과 달리 충동의 목적은 대상
의 획득이 아니라 충동 자신의 만족, “기관의 즐거움(Organlust)”이다.9) 이러한 목적은 대
상의 획득과 무관하게, 대상의 주변을 돌아 기관 자체로 되돌아오는 데서 달성될 수 있다.
껌을 씹거나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이러한 여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껌을 씹거나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그것을 반복하는 것 자체로 입에 모종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즐거움은 껌
이나 담배를 삼키는 일과 무관하며, 이러한 일은 심지어 그 즐거움을 해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동은 상징계 주체에게 금기시된 대상 a의 획득은 불가하더라도 대상 a로
써 상기되는 향유를 향한 동력이며, 그러한 향유에 상응하는 만족을 실재적으로 성취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충동은 현실과 조율된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의 질서 바깥을
맴도는 움직임이며, “쾌락원칙과 관련해 주체에게 허용된 유일한 형태의 위반”이다.10) 충동
의 실재적 만족은 상징계 현실에서 무의미, 심지어 고통으로 표기되는 일종의 금기, 즉 불가
능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대상 a에 대한 주체의 관계가 상징계 주체로서 기입되
는 절차를 대변한다면, 충동은 상징계의 바깥 즉 상징계 주체로서의 죽음을 향한다.11) 이러
한 죽음은 상징계 내 주체가 모종의 퇴행을 통하여 선상징적 차원의 향유를 다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a에 대한 관계를 변경함으로써 욕망을 지탱해온 환상의 환영성을 자각하
는 실천을 표지한다. 주체의 삶은 대상 a의 이러한 양면성이 대변하는 긴장 자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주체의 보기란 무엇인가? 라캉은 시관적 장에서 주
체의 보기는 “눈과 응시의 분열”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답변을 제시한다.12)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눈과 응시의 삼각형을 통하여 존재와 의미, 주체와 타자, 충동과 욕망의 분열의 구
도가 시관적 장에서 눈과 응시의 분열로 반복됨을 보여주며, ‘시관적’이라는 표현은 ‘시각적’
이라는 말로 채 드러낼 수 없는 이러한 보기의 영역을 수식한다.

7) SXI, pp.163-164.
8) Ibid., p.163.
9) Ibid., p.153. 충동의 목적에 관한 라캉의 주장은 충동을 정의하는 프로이트와의 입장차를 보여준
다. 프로이트가 성 충동의 다형성과 독립성을 고찰하고, 그것이 이후에 통합되는 양상을 확인한다
면, 라캉은 충동이 언제나 부분 충동으로 어떠한 전체를 이루지 않으며, 부분 충동들 사이에도 일정
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본다.
10) Ibid., p.167.
11) E, p.848.
12) Op. cit., pp.69-70.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61


[그림 1] 눈과 응시의 삼각형

눈은 기하광학적 조망점의 자리에서 세계를 향해 올곧게 뻗어나가는 주체의 ‘시선’으로,


첫 번째 삼각형 도식에 상응한다.13) 눈은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데카르트
코기토적 명제로 대변되며,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으로 구현된다. 기하광학적 조망점에 자
리한 주체의 눈은 그 절대적인 위치에서 자신과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며 좌표를 부여한
다. 그러나 라캉은 눈이 보기의 전부도 아니거니와, 보기의 진실과도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
이고자 한다. 막히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보고, 보이는 모든 것이 흐림 없이 명료한 눈이란
환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여러 층위에서 눈의 환영성을 역설한다. 무엇보다 눈의 환영성은 근대적 의식 주
체를 반박해온 철학사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라캉이 복귀의 지점으로 거듭 주장하는 프로이
트의 정신분석은 이러한 역사의 대표적인 예다. “정신분석의 사색은 무의식의 과정을 조사
한 데서 오는 이상, 즉 의식은 심리 과정의 보편 속성이 아니라 심리 과정의 특수한 기능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출발점으로 삼는다.”14) 심리 과정을 근대적 주체의 의식으로 환원하여
무의식이라는 중핵을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보기를 눈으로 환원하는 일은 “시각
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15) 라캉은 메를로-퐁티가 그의 유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정확히 이러한 지적을 가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메를로-퐁티는 보기를 사유로
치환하고 보는 주체를 원근법의 조망점에 위치시켜온 전통을 비판하고, ‘봄’과 ‘보임’의 뒤엉

13) Ibid., p.81.


14) Sigmund Freud, 「쾌락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회기ㆍ박찬부 역, 열린책들,
1997/2017, p.292.
15) Op. cit., p.86.

62 ∙ 예술과미디어
킴을 문제로 제시한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이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우리가 방금 살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 가시성, 이 감성적인 것
자체의 보편성, 우리 자신의 타고난 익명성이다.”16) 라캉은 메를로-퐁티가 우리 눈의 ‘봄’에
언제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임’이 선재하며, 그 둘이 얽혀 있다는 진실을 밝혀냈다는 점에
서 그를 높이 평가한다.
눈의 환영성은 거울 단계에서도 이미 예견된 바다. 아이는 거울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나(Je)의 기능을 형성”한다.17) 거울상을 마주하기 전까지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
다. 더 정확히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완전한 충족을 누리던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외따로 구분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는 거울 속의 통일적인 신체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아이의 신체는 아직 스스로에 의해 완벽하게 제어되지 못하
기에, 이 동일시는 근본적으로 오인이다.18) 아울러 이 동일시는 타자적 질서에 의하여 이루
어진다. 아이를 안고 거울 앞에 선 어머니가 거울 속 아이를 가리키며 “저것이 너란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인간이 “타자 속에서만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주체로 구
성되는 근원적인 장면이다.19) 심지어 거울상은 아이나 거울이 움직이면 변하고 사라지는 불
안정한 이미지이기에, 이렇게 형성된 ‘나’라는 자아는 결국 이미지의 효과에 불과하다.
눈의 환영성은 생리적인 시지각, 근본적으로는 빛의 성질 자체에서도 발견된다. 르네상스
원근법이 보여주듯이 사유로 환원된 눈은 ‘시선’ 즉 눈에서 출발한 하나의 직선으로 표현된
다. 예컨대 알베르티는 시선을 “시각 광선(visual ray)”으로 표현하며, 눈이 인지하는 요소
에 따라 시선을 분류하기도 하였다.20) 그러나 이는 시각을 전혀 시각적이지 않은 기하광학
적 공간에 가두어 다루는 방법이다. 라캉은 디드로의 「눈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맹인
에 대한 서한」을 언급하며, 르네상스 원근법이 재현하는 공간이란 그 상징 형식을 따르기만
하면 맹인도 구성해낼 수 있는 공간임을 지적한다.21) 라캉은 빛이 실제로 직선으로 전파될
지라도 빛을 광점, 즉 빛이 발산되는 원점으로 보아야 빛과 시지각이 맺는 관계가 드러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광점이자 광원으로서 빛은 “굴절되며 확산되고” 우리 눈을 “가득 채우
거나 넘치기도” 한다는 점으로부터 일종의 “방어 기관”이 요청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
이다.22) 즉 신체 기관으로서 눈의 차원에서도 시지각은 세계의 투명한 반영이 아니며, 빛과
보는 주체의 관계에는 어떤 “애매모호함” 메를로-퐁티가 발견한 어떤 뒤엉킴이 존재한다.23)

16) Maurice Merleau-Ponty, Le visible et l’invisible, Gallimard, 1964, p.181.


17) E, p.93.
18) Ibid., p.93.
19) Ibid., p.181.
20) 알베르티는 면적 등 대상의 양적인 요소로 형(形)을 측정하는 것을 경계광선, 빛과 색을 지각하는
것을 중앙광선, 초점 등 주목과 관련된 것을 중심광선으로 분류하며 보기를 시‘선’의 문제로 다룬다.
Leon Battista Alberti, On Painting, John R. Spencer trans., Yale University Press, 1970, p
p.43-49.
21) SXI, p.81.
22) Ibid., pp.87-88.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63


두 번째 삼각형 도식과 관련하여, 눈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시선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되쏘
아져 빛의 관점에서 눈의 환영성을 조금 더 살펴보자. 빛은 눈과 대상을 대응시켜 좌표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선이 아니라, 눈을 비껴가거나 그로부터 흘러넘친다. 라캉은 하나의 일화를
든다. 젊은 시절 어부의 배를 타고 나간 라캉에게 함께 탄 이가 바다를 떠다니는 무언가를
가리키며 저것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반짝반짝 빛을 내는 그
것은 작은 정어리 통조림 깡통이었다. “보이나? 저 깡통이 보여? 그런데 깡통은 당신을 보
고 있지 않아!” 라캉은 이 경험이 얼마나 불쾌했는지 회고한다. 빛을 받아 일렁이는 깡통을
볼 수 없었던 그와 달리 깡통은 빛을 온통 되쏘며 그를 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화는 안
경이나 렌즈, 선글라스처럼 빛을 ‘올바르게’ 투과시킬 방어막이 없어 무언가를 ‘보아내지’ 못
했을 때 느껴지는 어떤 불쾌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주체는 조망점에 자리할 수 없고,
두 번째 삼각형의 오른쪽 변으로 나타나는바 그림 속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응시는 어머니의 따스한 시선도, 또 다른 주체인 타인의 시선도 아니며, 빛의 응시
즉 눈을 벗어나며 사물로부터 되쏘아지는 무언가이다. 눈이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사물의
표면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즉, 응시는 눈의 보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근
거로서 선재한다. 그러나 깡통의 일화가 보여주듯이 아무런 스크린 없이 빛의 응시를 맞닥
뜨린다면 어떠한 이미지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상징계 주체에게 그것은 무엇도 알아볼
수 없는 절대적인 불안의 사태일 것이다. 따라서 응시는 눈으로서 보기에서는 언제나 “생
략”되어야 하는 “이면”이다.24) 한낱 풍경이 되지 않기 위하여 주체는 원근법과 같은 스크린
을 통하여 응시를 막는다. 세 번째 삼각형 도식은 주체의 보기가 가진 이러한 시각성을 대
변한다. 스크린은 응시의 틈입을 방어하는 한편 그를 매개하여 눈이 보는 대상으로서 이미
지를 가능하게 하는 기만적인 방어막, 환상의 스크린이다.
이러한 변증법의 중핵에는 눈이 아니라 응시가 있다. 본성상 길들여질 수 없는 채 선재하
는 응시는 불투명한 스크린을 뚫고 나오기도 하며, 눈의 기능은 더 정교한 방어 체계를 세
워 견고해지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응시는 시관적 장에서의 대상 a이며, 주체의
보기는 눈과 응시의 분열 자체이다. 라캉은 이러한 보기의 영역을 통념적 의미에서 시각적
(visuel)이라고 수식하기를 거부하고, 시관적(scopique)이라고 구분하여 형용한다. 상징계의
억압에 의하여 원초적인 향유를 포기한 주체 일반에게 응시는 주체가 자신과 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의미로 정박시킬 수 없도록 흔드는 위협이고 공포로, 불안을 일으킨다. 라캉은 이러
한 불안에 대항하여 진정 효과를 낳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기능이었다고 진단한다.

23) Ibid., p.88. 라캉의 이러한 입장은 망막, 나아가 시각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이 수동적 각인보다 능
동적 여과에 가깝다는 최근의 발견과도 상응한다. Semir Zeki, 『이너비전: 뇌로 보는 그림, 뇌로 그
리는 미술』, 박창범 역, 시공아트, 2003, pp.27-28.
24) Op. cit., p.79.

64 ∙ 예술과미디어
Ⅲ. 그림의 두 가지 효과

1. 진정: 응시-길들이기

응시-길들이기(dompte-regard)의 전략으로서 그림은 불안을 더는 “아폴론적 진정 효과”


를 낳는다.25) 이러한 효과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은 르네상스 원근법에 충실한 고전 재현
회화이다. 알베르티의 『회화론』 제1권은 회화의 수학적 원리에 관한 것으로, 점, 선, 면이라
는 기하학적인 요소를 분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재현 대상과의 비례 관계에 근거하여 시각
의 피라미드의 횡단면으로서 회화를 제작하는 원리를 정리한다.26)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
는 세계를 완벽하게 좌표화하는 완전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위해 뒤러의 목판화에
그려진 원근법 기록기(perspectographe)를 비롯한 장치가 고안되기도 하였다. 브루넬레스
키의 실험은 원근법이라는 스크린의 투명성을 검증함으로써 그것이 보장하는 눈의 완전무결
함을 확증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이 실험의 참여자는 원근법을 따라 그린 세례당 그림의
소실점 자리에 뚫린 구멍을 통하여, 그림이 그려진 면 앞에 놓인 거울을 바라본다. 그러면
거울에 비쳐진 만큼의 이미지와 거울 뒤편으로 보이는 실제 세례당의 모습이 합쳐지며 완전
한 세례당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거울을 치우면, 거울이 비추던 세례당 그림과 한 치의 어긋
남 없이 합치하는 실제의 세례당 형상이 눈앞에 드러난다.
눈의 바깥에서 응시는 눈의 죽음을 표지하기에, 이 글은 죽음을 길들이려는 그림에서 그
진정 효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표적으로 메멘토 모리 회화는 죽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어떻게,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교리적 물음으로 대체하며, 개인의 죽음을
공동체 성원의 상실로 제례화한다. 이승의 삶을 단절시키는 죽음은 천국으로의 이행이라는
기독교적 질서의 한 단계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27)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을 적용한 최초
의 회화라는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1425-1427)는 원근법이라는 스크린을 통하여 죽음
의 응시를 길들이는 대표적인 르네상스 회화이다.

25) Ibid., p.93.


26) Leon Battista Alberti, Op. cit., pp.52-59.
27) 물론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다고 해서 중세 초기와 말기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죽음
이 공통의 의미를 지녔으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중세부터 오늘
날까지 죽음은 달리 정의되었고, 각 시대의 인간이 달리 죽어갔음을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중세 초
기에는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명제가 종교적 숙명으로 수용되었다면, 중세 말기 흑사병의 창궐과
르네상스 이후 개인주의의 발흥으로 죽음은 무엇보다 ‘나 자신의 죽음’이 되었다. 바로크 시대에 죽
음은 거부되어야 할 사태(‘먼 죽음’)이자 치명적인 관능성을 가진 어떤 것(‘가까운 죽음’)이 되었으며,
낭만주의 시대에는 ‘타인의 죽음’을 미화하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오늘날에는 더는 수사로 가려질
수 없는 절대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Phillippe Ariès, 『죽음 앞의 인간』, 고선일 역, 새물결,
2004.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65


[그림 2] Masaccio, Holy Trinity, 1425-1427

<성 삼위일체>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벽에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화다. 위쪽에는


삼위일체가, 아래쪽에는 제단과 그보다 더 아래의 석관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소실점은
실제로 벽에 난 구멍처럼 그려진 위쪽의 어두운 아치형 천장의 연장선에 자리하여, 생생한
깊이감을 자아낸다. 또한 이 그림의 소실점은 기부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단 위에 자리하여,
바로 그 단에 의하여 그림의 위쪽 부활의 세계와 아래쪽 죽음의 세계가 분리된다는 느낌을
준다. 동시에 세로 6.67미터의 거대한 화면에서 소실점의 위치는 벽 앞에 서서 그림을 바라
볼 관람자의 눈높이를 고려하여 설정되어, 그림의 위쪽과 아래쪽이 그를 향하여 모아들며
연결되는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예수의 역삼각형, 성부-성모-세례 요한과 성부와 두 기
부자로 중첩되며 확장되는 삼각형 구도는 예수의 형상이 가진 부유감을 중심으로 뒤편의 공
간으로부터 차례대로 형상이 앞서 나오는 입체감을 더한다. 이 정교한 공간을 따라 움직인
시선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내려다보는, 원리상 가장 튀어나온 석관으로 떨구어진다. 해
골이 누운 석관에 쓰인 문구(“그대들의 오늘은 나의 어제. 그리고 나의 오늘은 그대들의 내
일”)는 그 해골을 바라보고 있는 자와 같은 모습이었던 해골이 그 자도 자신처럼 될 것을
예언하며 그림 위쪽과 아래쪽 세계의 결연을 매듭짓는다.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지만, 실상 메멘토 모리 회화에서 죽음은 이렇듯 삶을 위한 교훈적 도구로
순화되고, 사태로서 죽음은 망각된다.
17세기경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에서 유행한 바니타스 정물화 역시 비슷한 예이다. 바니타
스 정물화에서는 죽음을 명시하는 해골과 생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촛불이나 꽃이 정밀하게
묘사된다. 시계나 책, 왕관 등이 각각 시간, 앎, 명예의 무용함을 보여주는 오브제로 등장하
기도 한다. 삶은 유한하기에 삶에서의 성취는 모두 상실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니타스 정

66 ∙ 예술과미디어
물화의 메멘토 모리이다.28) 여기서도 죽음은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메시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즉 죽음의 응시를 길들이는 전략으로서 그림은 죽음을 삶
의 동기로 대체하며, 그러한 상징적 의미를 벗어나는 죽음의 차원에 눈을 감는다. 그림은 죽
음을 심오한 교훈으로 승화함으로써, 모두의 운명이지만 누구도 실체화할 수는 없는 죽음의
불안을 진정시킨다.

2. 불안: 응시-포착

반면 어떤 그림은 “응시에 노골적으로 호소”하며 불안을 자아낸다.29) 라캉은 뭉크, 앙소


르, 쿠빈 등 표현주의 화가와 초현실주의 특히 앙드레 마송을 예로 든다. 그리고 “응시 자체
를 가면 속에서 포착해내는 데 탁월함”을 보인 화가로 고야를 꼽는다.30) 불안은 어떠한 감
정인가? 불안을 제목으로 한 『세미나 10』에서 라캉은 불안이 무엇보다 “실재의 신호”로서
대상 a의 임박을 표지한다고 역설한다.31) 실재의 임박은 주체에게 해방이 아니라 불안인데,
실재의 과잉은 주체를 주체로 정박해주는 상징계 질서의 폐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32)
달리 말하자면 불안은 주체가 상징계 내 의미로 정박되지 못하고 자신이 상징계 바깥의
존재로 명명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응시-길들이기로서 그림은 상징계 내 주체의 죽음을 표
지하는 실재의 임박을 상징계 내의 대상, 즉 현실에서 가능한 어떤 의미, ‘가짜’ 대상 a로
대체하여 불안을 가리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다. 반대로 방어가 실패한다면, 그리하여 불안
이 계속된다면 주체는 어떻게 될까? 응시에 호소하거나 응시를 탁월하게 포착한 그림의 효
과란, 보는 주체를 정신병에 빠뜨리는 것인가?
일흔이 넘은 고야는 1819년부터 1823년까지 마드리드 외곽 별장 ‘귀머거리의 집’에서 14
점의 벽화를 그렸다. 이 그림들은 1870년대 캔버스로 옮겨져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이
후 <검은 그림들>로 불렸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중 하나이다. 사투르누스(새턴)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로, 그는 가이아(어머니)를 억
압하고 범하러 온 우라노스(아버지)를 거세하고 왕위에 오르지만, 그가 우라노스를 몰아낼

28) John B. Ravenal, Vanitas: Meditation on Life and Death in Contemporary Art, Virginia
Museum of Fine Arts, 2000, p.3.
29) SXI, p.100.
30) Ibid., p.79.
31) SX, p.188.
32) 주체성에 관한 라캉의 구분(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에서 상징계의 폐제는 정신병의 원인으로, 프로
이트의 「부정」(1925)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 ‘Verwerfung’에서 유래하였다. 브루스 핑크에 따르면,
라캉은 『세미나 1』 당시에는 이를 ‘배척(rejection)’으로 번역하였다가 『세미나 3』에서 곧 ‘폐제(for
eclosure)’로 수정한다. 핑크는 이러한 수정이 건전하다고 보는데, 정신병이란 무엇보다 상징계 전
체를 지탱하는 요소를 완전히 추방해버리는 데서 성립하는 주체성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Bruce Fin
k,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 이론과 임상 분석』, 맹정현 역, 민음사, 2004, p.134, p.139.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67


때 도움을 주었던 형제(퀴클롭스)를 탄압하여 가이아의 저주를 받는다. 그가 우라노스를 몰
아냈듯이 그의 자식이 그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저주이다. 이 저주 때문에 크
로노스는 레아와 낳은 자식을 차례로 집어삼킨다. 유일하게 그의 눈을 피해 장성하여 가이
아의 저주대로 그를 몰아낸 신이 제우스이다.

[그림 3] Francisco Goya, Saturn Devouring His [그림 4] Peter Paul Rubens, Saturn Devouring
Son, 1819-1823 His Son, 1636-1638

고야의 그림와 함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된 루벤스의 동명 작품은 크기도 비슷하고, 고야


가 참조한 대상으로 지목되어왔다.33) 루벤스의 그림에는 노인과 아기가 등장한다. 노인은
몸집이 커다랗고, 낫을 쥐고 있으며, 아기를 물어뜯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가 농경의 신 크로노스임을 알아볼 수 있다. 자식을 죽이는, 심지어는 잡아먹기까지 하는 그
의 행위는 기행이 범람하는 신화 속에서도 광기로밖에 설명될 수 없을 것 같다. 크로노스의
팔에 싸인 아기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고개
를 숙인 채 차분하게, 마치 엄숙한 의식을 행하듯이 아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를 먹는
중이다. 그의 위에서 세 개의 별이 수호성처럼 반짝이며,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하여 자식을
삼키는 노인의 신성을 붙잡는다.
반면 고야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거인이 인간을 잡아먹는 순간 자체이다. 크로노스는
그를 상징할 만한 어떤 오브제도 없이 눈을 까뒤집고 입을 크게 벌린 채 금방이라도 찢어버

33) Nigel Glendnning, The Interpretation of Goya’s Black Paintings, Queen Mary College an
d University of London, 1977, p.25; Fred Licht, Goya ―The Origins of the Modern Temp
er in Art, Harper & Row Publishers, 1983, p.168; Rose-Marie & Rainer Hagen, Francisco
Goya, 1746-1828, Taschen, 2003, p.76 등 참조.

68 ∙ 예술과미디어
릴 것처럼 잘린 신체를 쥐고 있다. 붉은 피가 흐르는 신체에서 머리와 오른팔은 이미 먹혀
사라진 채다. 크로노스 자신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자세로 자식을 먹어치
우는 데 급급하다. 크로노스의 하반신과 그 근처에서 뒹굴고 있을지 모르는 신체, 그리고 그
가 서 있는 바닥은 급하게 찍힌 스냅사진처럼 뒤엉킨다.34) 유일한 소재인 크로노스조차 화
면 안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심연 같은 배경과 광기어린 거인, 고기가 되어버린 하얀 몸
앞에서 눈은 도망갈 곳 없이 위기에 몰린다. 거인과 눈이 마주치면 다음은 나의 차례가 될
것 같은 죽음의 임박이 불안을 자아낸다. 그림의 제목이나 그림 속의 형상은 크로노스라는
최소한의 의미를 주지만, 불안을 진정시키기에는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그림 5] Francisco Goya, The (Half-Drowned) Dog, 1819-1823

그런데 <검은 그림들> 중 어떤 그림은 이 아슬아슬한 의미화의 발판마저 치우고, 말 그대


로 ‘검은’ 그림이 된다.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거의 남지 않은 <모래 늪의 개>는 그림
이라기보다 무언가의 흔적처럼 보인다. 화면 대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이 일렁이듯이 노랗게
칠해져 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역광 사진처럼 보이며, 제목에 쓰여있는 ‘늪’이나 ‘개’처럼
보이는 검은 덩어리는 형상인 동시에 그림자가 된다. 온통 늪에 빠진 채 머리만이 남은 개
의 얼굴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어떠한 표정도 아니고, 무언가에 대응하는 시선도 아니며,
말 그대로 구멍처럼 보이는 동공 즉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아무 것도 모르
는 채 순진해 보이기도, 모든 것을 달관한 채 초연해 보이기도 하는 개의 고개는 오른편을

34) 별장의 벽화였던 <검은 그림들>은 쿠벨스가 캔버스에 복원하여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었는데, 복
원 전 사진에 따르면 크로노스의 남근이 발기한 채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자식을 먹는 기괴한 행위
는 신화의 일종으로서 검열을 피했지만, 해부학적 성기의 묘사는 공공의 감상에 부적합하다는 복원
자의 판단으로 지워졌다. Robert Hughes, Goya, Knopf Publishing Group, 2006.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69


향하는데, 여기에는 늪도 빛도 아닌 어떤 그림자가 유령처럼 늪과 빛 모두에 드리운다. 이
때문에 화면 전체, 정의상 심연인 늪조차 깊이감을 잃으며, 개는 늪으로 하강하기보다 납작
한 화면에 갇혀 질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 포착된 것은 최소한의 인간적 의미화조
차 거부하는 죽음으로부터 되쏘아지는 응시이다.

Ⅳ. 그림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응시-길들이기로서 그림은 실재의 차원에서 되쏘아지는 응시를 가리는(screening) 스크린


이다. 응시-포착으로서 그림은 응시가 투사되는(screened) 스크린이다. 전자는 눈을 만족시
킴으로써 불안을 진정시키고, 주체를 상징계 내 삶으로 돌아가게 한다. 후자는 응시에 호소
하여 불안을 일으키고, 주체가 상징계 바깥을 즉 주체로서의 죽음을 맴돌게 한다. 주체의 보
기가 눈과 응시의 변증법이듯이, 대부분의 그림에서 두 가지 효과는 공존한다.

“회화 예술은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주체로서, 응시로서 스스로를 강요한다는 점에


서 다른 예술과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 여기서 저는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시해볼까 합니
다. 즉 확실히 그림 속에는 언제나 응시와 같은 무언가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 통상 응시
라 불리는 것이 부재하는 그림들, 어디서도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림들을 바라볼 때
조차도 […] 응시가 현존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35)

『세미나 11』에서 라캉은 회화 일반이 응시가 아닌 눈이 볼 만한 것을 제공하며 “응시의


포기와 철회”를 권해왔다고 보지만, 그러한 회화에서도 응시와 같은 무언가는 나타나며, 회
화의 어떤 양상은 “응시가 요구하는 것”을 즉 “충동의 만족”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36) 그렇다면 그림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1964년 2월 26일 세미나에서 라캉은 홀바인의 <대사들>(1533)을 돌려보며 그에 관한 분
석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홀바인은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우고, 성상 파괴 운동이
개진된 종교 개혁 시기 독일을 떠나 영국에 정착하여, 1536년에는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대사들>의 인물은 물론 사물과 배경 모두는 매우 세밀하게, 원근법이라는 재
현의 논리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인물의 표정이나 자세뿐 아니라,
머리카락, 의복의 무늬나 주름, 모자나 끈을 비롯한 장식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빛의 효과는
홀바인의 역량을 남김 없이 드러낸다.
나아가 이 그림은 촘촘하게 짜인 상징의 그물과도 같다. 그림 속 두 인물은 성공회를 국
교로 만든 영국과 가톨릭 교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파견된 대사들, 조르주 드 셀브와

35) SXI, p.93.


36) Ibid., p.94.

70 ∙ 예술과미디어
장 드 댕트빌이다. 그림 속 왼쪽 인물이 당시 라보르의 주교였던 셀브이고, 오른쪽의 인물이
외교 사절 댕트빌이다. 둘은 당시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헨리 8세의 이혼을
둘러싸고 빚어진 영국과 교황청의 갈등과 관련한 외교 업무를 비밀리에 수행하기 위하여
1533년 영국에 머물렀다. 둘 사이의 선반에 놓인 사물들은 두 인물에 관한 상징인 동시에
세계를 수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좌표화하기 위한 당시의 방식을 보여준다. 예컨대 거기에는
별의 운행을 측정하기 위한 천구의가 놓여 있는데, 여기에는 닭(프랑스)이 독수리(유럽)에 대
하여 차지할 우위를 과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셀브 쪽에 있는 해시계는 4월 11일 10시
30분, 즉 헨리 8세의 이혼 날짜와 이혼서 서명 시간을 가리킨다. 선반 하단에 있는 현이 끊
긴 류트나, 나눗셈 부분이 펼쳐진 수학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의미화 할 수 있다.

[그림 7] The anamorphosis of skull in The


[그림 6] Hans Holbein, The Ambassadors, 1533
Ambassadors

그런데 함수의 그래프처럼 진열된 <대사들>의 사물들 사이에서 보는 주체를 붙드는 “이


그림의 진정한 매혹”은 그것들 앞에서 공중을 날고 있는 듯 기울어져 있는 기이한 형상이
다.37) 이는 일종의 왜상(歪像, anamorphosis)이다. 왜상은 정의상 왜곡된 형상을 뜻하나,
본래는 원근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안된 역설적인 상이다. 르네상스 이후 원근법은
그림의 질서로 공고히 자리하였으나, 화가들은 원근법을 엄격히 고수하면 오히려 눈에 보이
는 것과 거리가 먼 형상이 그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원근법이라는 원칙을 왜곡
하여 그를 보완하는 여러 방식을 모색하였다.38) 그런데 <대사들>의 왜상은 이러한 기능을

37) Ibid., p.83.


38) 문헌에서 왜상은 1559년 다니엘로 바르바로의 『원근법의 실제』에서 최초로 발견되고, 1584년 조
반니 파올로 로마초의 『회화론』에서 다루어진다. 15세기 다 빈치의 여러 스케치 또한 왜상에 관한
탐구를 엿볼 수 있다. 다만 당시 왜상에 대한 이러한 주목은 원근법의 파괴를 의식적으로 지향하였
다기보다 원근법이라는 이성적 원리에 따라 사물을 보지 못하는 감각의 환영성을 보완하거나 그를
폭로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71


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홀바인이 앞서 묘사와 상징으로 구축한 이 그림의 논리를 보완
한다기보다, 그를 벗어나며 침입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무엇보다 보는 이가 이 왜상이 해골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림이 있던 “방을 나가
면서 뒤돌아보는 순간”임에 주목한다.39) 그림의 왼쪽 아래나 오른쪽 위에서 그것을 기울여
보거나, 멀리서 유리실린더나 당대에 유행하였던 유리잔을 통하여 그것을 바라볼 때, 즉 주
체가 조망점을 벗어나거나 반대로 그곳에서 축배를 들 때 왜상은 해골로 출현한다. 두개골
의 응시는 홀바인의 섬세한 묘사와 상징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함수 관계”로 그림을 조직하
려는 눈에 틈입하여 그러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사들>의 긴장을 이루며, 방을 나서는 이
를 붙든다.40) 왜상으로서 두개골은 정상(正像)의 논리를 흔들며 그 바깥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캉은 홀바인이 “무화된 것으로서의 주체” 자체를 가시화한다고 평가한
다.41) <대사들>은 정상(正像)의 자리에서 그리고 왜상의 자리에서 두 가지의 죽음을, 무화를
표지한다. 왜상을 제외한 <대사들>의 나머지 부분은 치밀하게 조직된 상징의 그물로서 그것
을 알아보는 주체의 자리와 그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보장한다. 실제로 <대사들>의 묘사
와 상징을 알아보는 일은 안정적인 쾌락을, 일종의 진정을 준다. 그런데 앞서 라캉이 강도의
협박에 빗대어 말한바 이러한 진정은 존재의 포기를, 실재의 죽음을 대가로 가능하다. 다른
한편 정상(正像)을 알아보는 자리를 벗어난 왜상의 자리에서, 즉 그 이상한 형상을 두개골로
맞닥뜨릴 수 있는 자리에서, <대사들>은 조망점에 위치한 주체의 자리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드러내며, 주체와 그의 현실이 구성되기 위하여 포기되어야 했던 어떤 잔여를 암시한다. 그
두개골은, 선반의 맨 아래쯤 ‘제대로’ 그려졌다면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바니타스라
는 상징의 그물에 포획되었을지 모르나, 그 그물이 기능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대사들>이 가시화하는 두 번째 죽음이 발견된다. 바니타스를
비롯하여 두개골의 가능한 의미는 계속해서 미끄러지기에, 그 두개골은 의미화의 중심인 주
체의 죽음을 가리키며 불안을 자아낸다.
이렇듯 <대사들>은 명백한 진정으로도 막연한 불안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대
사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왜상의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정상(正像)의 치밀함에 근거한
다. 묘사와 상징에 대한 홀바인의 역량이 뛰어난 만큼 두개골의 응시가 일으키는 불안은 강
렬해진다. 응시-길들이기와 응시-포착 사이의 진자 운동으로서 <대사들>은 주체의 불안을
진정시켜온 방어의 기만을 자각하게 하고, 그 방벽의 틈을 가늠하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그
림은 응시를 포괄하는 새로운 눈의 발명을 추동할 수 있다. 일단 두개골의 응시와 맞닥뜨리
고 나면, 그것이 보이지 않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고, 그 자리로 돌아갈지언정
어디선가 느껴지는 두개골의 응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세미나 11』에서 라캉
은 응시-길들이기로서 그림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대사들>과 같은 그림의 가능

39) Ibid.
40) Ibid., p.81.
41) Ibid., p.83.

72 ∙ 예술과미디어
성을 간과하지 않으며 그림이 나아갈 방향을 암시한다.
그러나 라캉의 이론은 눈에 대한 응시의 승리로 일축되며, 위협이나 공포와 같은 테러적
속성에 한하여 시각 경험을 논하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노먼 브라이슨은 「확
장된 장에서의 응시」에서 응시에 관한 라캉의 주장이 주체의 탈중심화를 시각장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한편 이러한 탈중심화에 테러라는 부정적인 함의를 부여하고, 그러한 함의를 부여
하는 시각성을 보편화하는 협소한 이론이라고 비판한다.42) 브라이슨은 라캉의 응시 이론이
탈중심화를 위협이나 박해로 의미화하지 않는 대안적 시각 체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시각 경험의 본질을 테러에 두는 시각성을 구성하고 이용하는 권력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43)
브라이슨의 주장은 응시에 관한 라캉의 주장을 오해한 결과이다. 브라이슨은 라캉의 응시
를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시각에 끼어들어 그러한 주체의 중심성을 무화시키는 사회적 요구
정도로 오독하고 있다. 즉, 응시는 일종의 코드로서 문화적 공동체의 시각성을 강제하는 항
이고, 스크린은 그러한 코드망으로 삽입되어 코기토적 주체 내지 현상학적 주체의 중심성을
무화하며, 이렇듯 사회적 코드에 따라 보기가 형성된다는 시각 경험의 본질을 라캉은 테러
로 규정한다는 것이다.44)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상 a로서 응시가 주체에게 테러로서
도래하는 것은 그것이 상징계로서 부과되기 때문이 아니라, 상징화될 수 없는 잔여로서 상
징계라는 방어 체계를 요구하는 동시에 그 체계의 바깥을 표지하며 임박하기 때문이다. 상
징계는 주체로 기입되기 이전 인간의 원초적 향유를 억압하는 항이지만, 대상 a를 길들여
주체가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터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브라이슨은 라캉의 관점에서 그림의 윤리를 묻는 데 있어 중요한 고민의 방향을
보여준다. 시각 경험의 본질을 테러적 속성에 한하고 시각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브라이슨의 지적은 타당하다. 물론 브라이슨이 염려한 바는 상징계
를 부과하는 응시의 테러를 불가항력으로 치부하여 상징계 자체의 근원이나 그것의 실질적
인 작용을 성찰하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러한 테러가 자연스러운 사실로서 간과되는
사태다. 그러나 응시의 테러를 상징계 내 주체에게 되돌아오는 상징계 바깥의 문제로 바라
볼지라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일종의 재현 양식인 상징계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반-재현의
실천이 상징계의 근원과 작동에 관한 충분한 재고 없이 당위로서 선망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혐오미술의 수용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60년대 이후 미국 모더
니즘 미술의 대항으로 등장한 신체미술에서 신체는 물질적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
적 기호, 특히 주체라는 특권적 기호로서 대두되었다.45) 이러한 흐름에서 혐오미술은 배설

42) Norman Bryson, “The Gaze in the Expanded Field,” ed. Hal Foster, Vision and Visibilit
y, Bay Press:Seattle, 1988, pp.87-113.
43) Ibid., pp.107-108.
44) Ibid., p.107.
45) Hal Foster & Rosalind Krauss & Yve-Alain Bois & Benjamin H. D. Buchloh, Art Since 1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73


물이나 혈흔, 시체처럼 신체 특히 성이나 죽음과 같이 터부시되어온 신체의 영역과 연관된
기표를 이용하여 기존의 주체화의 질서에 반하는 수행으로 해석되었다. 윤리적인 문제를 일
으킬 수 있는 이미지가 스펙터클처럼 소비된다는 비판에 반하여 정신분석 이론은 혐오미술
을 ‘실재의 귀환’으로 정당화하는 틀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실재의 귀환」에서 할 포스터는 라캉의 정신분석을 통하여 외상적(traumatic) 이미지의
일종으로서 혐오미술을 재고한다.46) 이때 외상이란 주체의 현실 체계인 상징계가 머뭇거리
거나 멈춰서고 헛디디는 사건 자체, 즉 눈을 위하여 응시를 가리는 스크린 위로 응시가 투
사되는 충격의 순간이다. 이렇듯 포스터는 브라이슨과 달리 대상 a로서 응시가 가진 실재적
차원에 주목하며, 그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주체와 그를 매개하는 이미지-스크린의
양면성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포스터는 혐오를 응시-길들이기라는 미술의 전통적인 의무에
맞서 외상적 이미지로서 응시-포착을 추구하는 미술의 한 전략으로 보고, 그 사이에서 개진
되어온 혐오미술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포스터에 따르면, 혐오미술 대부분은 혐오스러운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혐오의 조건
을 재현하여 혐오 자체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이 두 전략은 모두 이상적
이지 못하다. 일단 기존의 혐오(혐오하기)가 이미 무효한 것이 되었다면, 두 전략은 더 이상
위반으로서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혐오가 유효할지라도, 두 전략은 언제나
혐오의 재확인에 그칠 위험을 안고 있다. 포스터는 심지어 혐오미술이 기존의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반대항, 즉 기존의 현실을 대변하는 일종의
초자아를 요청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 반대항을 축으로 삼는 투쟁이 스펙터클로 화할 수
있다고 본다.47) 다른 한편 혐오미술, 특히 혐오스러운 것과의 동일시(혐오하는 것 되기)로서
혐오미술은 혐오라는 현실적인 구분 자체가 무화되는 극단의 허무까지 가 닿으려 할 수 있
다. 이것은 단순히 기존의 ‘혐오하기’에 대하여 피로감이나 무관심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하기’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주체의 붕괴를 향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분열증적이다.48)
포스터는 이러한 양극이 혐오미술 대부분의 귀결이며, 여기서 나타나는 “트라우마에의 매
혹”과 “혐오에 대한 선망”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두 가지 문화적 요구, 해체주의 분석과

900: modernism, antimodernism, postmodernism, Thames & Hudson, 2004, pp.565-569.


46) Hal Foster, “The Return of the Real,” 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 The MIT Press, 1996, pp.127-170.
47) Ibid., p.157. 여기서 포스터는 캐럴 번스의 「문화 전쟁(The War on Culture)」(1989) 등에서 다
루어진 문화정치 문제를 유념하고 있다. 그는 미술가 안드레 세라노와 상원의원 제시 헬름스를 언급
한다. 당시 상원의원 알폰스 다마토의 비난을 시작으로 <오줌 예수>(1987)를 제작한 세라노에 대한
국립예술기금(NEA) 철회가 요구되었다. 비슷한 시기 헬름스는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포르노
라며 맹렬히 비난하며 마찬가지로 기금 철회를 주장하였는데, 이때 흔히 좌파로 일컬어지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운동 세력과 우파 종교계는 메이플소프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
며 비슷한 입장을 택하였다.
48) Ibid., pp.163-164.

74 ∙ 예술과미디어
정체성 정치학에 응하는 트라우마 담론으로 대변된다고 결론을 내린다.49) 혐오미술은 주체
라는 ‘혐오하기’의 자리에 있기를 멈추고 ‘혐오하는 것 되기’ 달리 말해 주체의 죽음을 향하
도록 추동하며 해체주의의 주체 비판에 응한다. 동시에 외상적 이미지로서 혐오미술은 그
외상적 사건이 보장하는 목격자나 증언자, 생존자와 같은 어떠한 주체성을 여전히 탄생시키
며, 그에 권위를 부여한다. 즉 “주체는 소개되는(evacuated) 동시에 고양된다(elevated).”50)
혐오미술에 관한 포스터의 분석은 응시-포착의 방법으로서 혐오가 상징계와의 단절이나
그것의 와해(breakdown)라는 상징계의 파열(rupture)을 향한 ‘테러적’ 전략으로 이상화된
원인과 그로 인한 문제를 보여준다.51) 그렇다면 주체라는 단위 자체에 대한 비판과 소수자
주체성의 탄생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공존하는 지금, 미술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포스터
는 혐오미술 대부분이 나아간 방향을 분석하면서 혐오미술 대부분이 향하지 않은 제3의 선
택지를 언급한다. 그는 상징계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는 균열(fracture)이자 그로부터
새로운 현실이 구성될 수 있는 돌파구(breakthrough)를 미술의 소명으로 재조정하기를 제
안한다.52) 이는 앞서 <대사들>에 관한 라캉의 분석을 통하여 살펴본바 상징계 논리의 재생
산이나 그로부터의 단절 그 어디로도 기울지 않으면서 상징계 현실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게
하고 새로운 현실의 발명으로 나아가기를 추동하는 전략과 상통한다.53)

Ⅴ. 나가며: 그림의 길, 인간의 길

이 글은 『세미나 11』을 중심으로 눈과 응시의 분열로서 주체의 보기에 관한 라캉의 설명


을 정리하고, 응시-길들이기와 응시-포착, 진정과 불안이라는 그림의 효과를 라캉이 언급한
작가의 작품에서 살펴보았다. 나아가 라캉의 답변이 눈에 대한 응시의 승리로 압축되며 빚
어진 오해와 이해를 재고하였다. 먼저 응시를 사회적 시각성의 요구로 오해한 브라이슨의
주장을 통하여 대상 a로서 응시의 실재적 차원이 간과되거나, 위협이나 공포만이 응시의 속

49) Ibid., p.166.


50) Ibid.
51) Ibid., p.157.
52) Ibid.
53) 1973년 『세미나 11』이 책으로 출간될 때 라캉은 직접 후기를 덧붙이며 정신분석의 이러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 후기가 쓰인 시점은 라캉이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을 중심으로 다루던 『세미나 23』이
진행되던 시기와 겹친다. 라캉은 조이스가 도입한 “읽히지 않는 글쓰기”를 윤리로 제안한다. 그리고
곧바로 “도입한(introduit)”보다는 “옮길 수 없도록 도입한(intraduit)”이라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고
수정한다. 이러한 수정은 “읽히지 않는 글쓰기”가 곧 번역할 수 없는 기표의 도입임을 암시한다. 번
역할 수 없는 기표의 도입은 그것을 번역하기 위한 언어의 발명을, 그것을 번역해내려는 새로운 주
체의 출현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Ibid., p.252; 백상현, 「0번째 강의 (후기): 시적(詩的) 실천(praxis)
으로서의 정신분석」, 미출간 강의록, 2019. 3. 20.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75


성으로 강조되어서는 안 됨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응시의 실재적 차원을 강조한 포스터의
혐오미술 분석을 통하여 미술의 소명이 상징계와의 단절이나 와해, 그에 대한 절대적인 거
부로 이상화되기보다 새로운 상징계의 도입, 새로운 현실로의 돌파구를 가늠케 하는 균열로
재조정되어야 함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림의 두 가지 효과와 그 미묘한 공존으로 대변된 그림의 길은 주체로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눈과 응시의 변증법으로서 보기는 응시를 포괄하는 눈으로의 종합을 겨냥하
며, 그림은 응시를 가리며 ‘가리키는’ 스크린으로서 새로운 눈의 발명을 추동해야 한다. 마
찬가지로 의미와 존재 사이의 분열로서 주체는 상징화되지 못한 존재-결여를 포괄해내는 새
로운 주체화를 윤리로 삼는다. 현실의 차원에서 이는 기꺼운 몰락의 선택일 것이다

76 ∙ 예술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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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라캉적 답변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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