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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문인수
말 걸지 말아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젖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뿔>, 민음사, 1992
슬퍼도 좋구나
2020120141 경영학과 김준재
1. 형식 및 효과
문인수 시인의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는 제목 그대로 슬픔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나무의 모양새로 나타낸다. 나무의 구조는 상부와 하부, 그리고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나무의 큰 키는 /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 땅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
온다.” 이때 하늘과 땅, 높이와 깊이, 상승과 하강과 같은 개념의 대조를 볼 수 있고, 이는 시
세계의 자연스러운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를 한곳에 모으는 규칙은 바로 회귀의
개념이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제자리에 원 상태로 돌아온다. 그 어떤 예외도 없고, 나무의
“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무는 무엇을 의미하고, 키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나무는 시적 화자를 나타내는 상징이고, 나무의 키는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준다. 나무
는 가지 혹은 뿌리의 형태로 하늘을 향해 올라가거나 땅 깊숙이 자리를 잡는다. 우리도 마찬
가지로 감정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다시 말하자면, 나무의 상·하
부는 화자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무엇보다도 “나무의 중심”과
는 달리 상·하부는 모두 “나갈 곳”이 있어 보인다. 말인즉슨 하늘과 땅에 맞닿은 나무의 모습
은 감정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화자의 능력 범위를 나타낸다. 게다가 “큰 키”라는 표
현을 고려하면 나무의 존재는 적어도 화자의 관점에서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라
는 낱말로 끝나는 “높이”와 “깊이”와 “여”로 끝나는 “사무쳐”와 “뻗혀” 같은 각운은 나무의
생명력에 리듬을 살려주는 효과를 낸다.
그러한 와중에 화자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 도화선 같겠다.”며 통제할 수 없는 감
정의 범위를 드러낸다. 나무의 상·하부는 각각 하늘과 땅에 연결되어 있으나, 중심은 그렇지
않다. “예민함”은 무생물인 나무에 어울리지 않은 표현으로, 나무를 의인화하여 화자의 민감
성을 보여준다. “도화선”은 터질 것 같은 화자의 심리를 표출하는 흔적이자 필연의 장치이다.
“-겠다”라는 낱말의 사용은 나무의 특정 부위에 대한 화자의 불확실성을 알려준다. “터질 듯
막 고요한” 이파리의 모습도 폭풍전야 같은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상황에 불을 붙이는 것
은 다름 아닌 물이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는 의구심 섞인 깨달음을 선언하는 화자는 어떻게 슬픔을 은
유한 것일까? 불과 물의 관계는 나무라는 중간 매개체를 통하여 감정을 증폭한다. “말 걸지
말아라”는 시의 첫 마디는 슬픔을 분출하는 화자의 격정적이고도 감정을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어조를 나타낸다. 반면에 “나무는 폭발한다”는 마지막 구절은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 외에도 나무의 “팽팽함”과 “외로움”은 화자의 긴장과 고독을 나타낸다.
나무는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통상 물은 불을 꺼주거나 이기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이 구절은 오히려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다. 빗물은 나무의 불꽃을 피운다. 즉,
빗물은 화자의 감정을 촉발하는 원인이다. 물과 불은 서로 공존하지만 충돌하면 상극으로 인
해 감정의 소용돌이가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가 바로 슬픔이다.
2. 해석 및 의의
슬픔은 과연 무슨 감정이길래 불과 물의 성질을 동반할까? 슬픔은 비바람이 일으키고 “나
갈 수 없는 나무의 중심”에서 “덜컥, / 덜컥, 걸리는” 감정이다. 나무는 잎이나 뿌리가 물을
흡수하여 살아남는 생명체이다. 우리도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을 나타낸다. 나무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불꽃처럼 “폭발한다.” 말인즉슨 슬픔은 눈물의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불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으나,
시인은 이에 더불어 긍정적인 의미도 더해준다. 슬픔은 반드시 나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에 들어 있는 응어리를 모두 태워버릴 수 있고, 삶의 방향을 끌어내는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해낼 수 있다.
화자는 “말 걸지 말아라”며 감정을 숨긴 채 시를 시작한다. 만약에 화자가 직접 자신이 슬
프다고 상대방에게 말했더라면 자신의 감정이 온전히 전달되었을까? 대화의 부재도 역설적으
로 의사소통의 한 가지 방법이다. 슬프다고 말하는 대신 눈물을 흘림으로써 똑같은 의미를 부
여할 수 있다. 비바람 속에서 “젓고” 있을 상대방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이러한 불분명한 은
유는 상대방은 배를 타는 선원처럼 바다를 유랑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이처럼 슬픔은 “만 리”
를 넘길 수 있을 만큼 헤아리기 어려운 감정일 수 있으며, 감옥인 마냥 답답할 수도 있다.
나무는 회귀의 법칙을 따르는 매개체이다. 나무의 “키”는 시인의 자존심을 투영한다. 마음
은 제자리에 돌아오면서 긴장을 일으키고 충돌한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타자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에 눈물을 흘리면 우울해지고 삶의 활력이 줄어든다. 그러
면서도 다운된 심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떠오른다. 때로는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사고
를 위하여 회복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슬픔은 적 같이 달갑지 않겠지만, 때로는 의존하기 가
장 가까운 아군이기도 하다.
슬픔의 폭발 직전 모습인 폭풍전야는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한” 상태에 이른
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은 예고도 없이 쓰나미처럼 세상을 휩쓸 수 있다. “터짐”의 미학은 이
러한 감정의 우발적인 특성을 잘 드러낸다. 무엇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독자는 이를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감정을 일으키는 “비바람”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화자
의 심정을 반영하는 묘사이다. 나무는 억눌렸던 감정이 터지고 본모습을 잃게 된다고 예상하
지만… 이후의 상황은 독자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슬픔이란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
다. 그러니 슬픔에 침식되기 전에 자신에게 더더욱 솔직해지자는 뜻이 아닐까 싶다.
무서운 은유
함민복
이불 뗏목 타고 떠나는 꿈의 세계
파란만장 파란만장
인연 있는 사람 낯선 사람 죽은 사람
관계의 사슬 물처럼 흐르다가
아침 햇귀에 눈뜨면
언제나 혼자일세
어두운 죽음이
나를 그렇게 데리러 올 걸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1999
현실의 공포와 미지의 세계, 꿈
2020120141 경영학과 김준재
1. 형식 및 효과
함민복 시인의 「무서운 은유」는 은유를 사용하여 현실과 이상의 의미를 확장한다. 먼저
시적 화자는 1연에 “이불 뗏목”을 타고 “꿈의 세계”로 떠난다. 이때 “이불 뗏목”은 침대의
은유로 보인다. 단순히 침대에 눕고 잠을 잔다고 표현했더라면 꿈을 꾸는 행위는 수동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반면에 “이불 뗏목”이라는 표현은 취침에 능동성과 모험성을 더하는 효과를
준다. 뗏목처럼 바다 위를 가로 지으면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목적지는 “꿈의 세계”로,
현실과 이상은 영역이 엄연히 분리된다. 두 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잠을 자는 행위를 통하여
연결된다. 1연은 현실 → 꿈으로의 방향이다. 현실에서 서정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2연은 “파란만장”이라는 사자성어를 두 번 반복한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이란 일이
진행되거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기복과 변화가 몹시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단어의
반복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 힘들고 어려움을 강조한다. 사자성어 뜻풀이를 하면 “물결이 만
길 높이로 일렁인다”로, 앞서 1연의 바다를 건널 때 타는 “뗏목”과도 관련이 크다. 단, 이러한
단어의 대상이 현실인지 이상인지 직접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화자는 자신이 지금 사는
세계(현실)와 상상하는 세계(이상)를 둘 다 한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3연과 4연은 인간관계에 대한 은유를 사용한다. 사람들은 “사슬”의 형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인연이 있을 만큼 서로 가까운 관계일 수도 있고, 안면이 없는 낯선 관계일
수도 있다. 혹은 아예 산사람이 아니라 망자일 수도 있다. 관계는 한 번 맺으면 사슬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좋아해도, 싫어해도, 가까워도, 멀어도 함께 엮어버린 운명이다. 적어도
꿈의 세계에는 그렇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는 친밀감과 생사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인연 있는 사람 낯선 사람 죽은 사람”은 관계의 다양성을 얼핏 보여주는 나열의 형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여러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시간이 “물처럼 흐르다가” 꿈에서 깨어나면서 “언제나 혼자”인 것을 알게 된다.
꿈의 세계는 가능성이 무한하고 희망이 가득 차 있지만, 반면에 현실은 절망과 불능이 짙은
세계이다. 꿈속 화자는 타인과의 관계를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꿈은 어두운 밤을 의미하지만, 현실은 아침 햇귀인 “해가 처음 솟을 때의 빛”이자 밝은 낮을
의미한다. 낮과 밤의 대조는 꿈과 현실의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1연과는 달리
5연은 꿈 → 현실로의 방향이다. 서정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화자는 “어두운 죽음”이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을 예감한다. “어두운 죽음”은
다른 말로 하면 잠이기도 하다. 잠은 죽음의 사촌이라는 말을 떠오르면 두 개념의 유사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잠을 죽음의 의미로까지 확장하여 공포의 의미를
부여한다. 6연과 8연은 “~세”라는 문장 구조를 사용한다. 이는 시인이 제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알려주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이러한 구조가 반복되면서 운율이 생성된다.
마지막으로, 제목도 삶 자체가 은유라는 사실을 귀띔한다. 무엇이 무섭길래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까? 시 속에는 수많은 은유가 숨을 쉬고 있고, 제목은 무언의 공포를 내포한다. 은유의
형식을 통하여 시는 더더욱 새로운 의미로 풍족해지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서 있는 미지의
세계인 꿈은 두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2. 해석 및 의의
함민복의 서정시는 죽음을 향한 시인의 공포심을 드러낸다. 1연과 5연은 각각 현실에서
꿈으로, 꿈에서 현실로 가는 방향을 잡는다. 전자는 “이불 뗏목”을 타는 모습이 모험을
떠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상은 긍정적이고 상상력이 짙은 세계이다. 후자는 “아침 햇귀에
눈뜨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피곤하고 지루하다. 심지어 실망하는 내색까지 보인다. 이상과
현실을 향한 화자의 태도가 극명히 다르다. 꿈에서 화자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지만,
현실에서는 “혼자”이다. 현실과 이상의 대비는 두 세계의 틈새를 넓혀준다. 꿈을 꾼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현실의 차가운 모습을 직시할 수 있다.
낮과 밤의 대비도 마찬가지로 꿈과 현실의 차이를 뒷받침하는 한 가지 은유이다. 낮은 주로
빛과 긍정을 의미하고, 반면에 밤은 주로 어둠과 부정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아침 햇귀”는
낮을 나타내고 “어두운 죽음”은 밤을 나타낸다. 특히 밤은 “꿈의 세계” 이면에 감춰져 있는
거짓된 사실을 알려준다. 이상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모두가 자신과 연결되고 행복한 삶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아예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사실 “혼자”이다. 우리를
둘러싸는 수많은 관계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다. 꿈은 즐겁고 따뜻해도 현실은
재미없고 차갑다.
“파란만장”의 반복은 현실과 이상을 관통하는 삶의 공포인 죽음을 표현한다. 인생은 왜
파란만장할까?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현실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시간은 “물처럼 흐른다.”
즉, 과거를 되돌릴 수 없어서 삶은 무서운 것이다. 평생을 후회해도 꿈에서만 후회한 선택을
바로잡을 수 있다.
죽음으로부터 기인하는 공포는 현실과 이상을 모두 지배한다. 미래를 알 수 없어서 삶은
무서운 것이다. “어두운 죽음”이 화자를 회수하러 오는 것처럼 우리는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삶이 비록 무섭더라도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내기를 바란다는 것이 시인의 궁극적인 메시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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