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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i.org/10.17790/kors.2022.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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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 80(2022.3.30.), pp.31-61.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을 통해

1)

김선우*

국문초록

박상순의 시는 기호와 이미지의 차원에서 난해성, 모호성 등의 규명을 위


한 일관된 논의로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그의 시를 자세히 살피면, 소외를
통해 시 세계를 현시하고 있다. 소외는 자크 라캉의 주요한 개념인데, 이는
자아와 주체 형성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이다. 박상순은 대략
10년마다 시집 1~2권을 출간하며, 시기마다 소외를 다르게 표시하고 있다.
본 논문은 그의 초기 시집에 나타난 소외 양상을 통해, 시 시계를 조망할
예비적, 계기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특히, 그의 초기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에는 1차 소외 전후의 양상이 두
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이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반복을 활용한다. 반복은
상징계와의 거리 두기와 상상계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특징적 언술 양상이다.
단어 및 문장, 문형, 기호의 반복을 통해 소외의 당위성과 개연성을 획득하
고, 나아가 반복을 문체적 자질로써 획득한다. 요컨대, 분리하는 육체와 자기
분실의 양상, 거울 단계와 소외하는 ‘나’의 양상, 해체하는 텍스트와 와해하
는 말의 양상은 반복을 통해 나타난 주요한 시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와 같은 고찰은 박상순 시에 짙게 스민 초현실풍의 시 쓰기와도 관계하므로,

*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문예창작학 전공)


한국학연구

논의할 가치가 있다.

주제어: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자크 라캉,


소외, 1차 소외, 거울 단계, 상상계, 반복

1. 서론

박상순은 1991년 작가세계 를 통해 시단에 등장하였다. 시집 6은 나


무 7은 돌고래 (민음사, 1993),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세계
사, 1996), Love Adagio (민음사, 2004), 슬픈 감자 200그램 (난다,
2017), 밤이, 밤이, 밤이 (현대문학, 2018)를 차례로 출간하였다. 초기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민음사, 2009)와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
주인공 (문학과지성사, 2017)은 차후에 재발간 및 복간되었다. 또한, 현
대시동인상, 현대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면서 시
적 성취를 증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이후
‘민음사’, ‘펭귄 클래식’ 등의 출판사에서 출판인의 삶을 살아왔다.1) 언
어가 개인이 체득한 ‘환경’2)을 환기해준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력은 시
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가 강조한 ‘정서와 심미성의 관계’, ‘예술가의
의무’3)는 독특하고 고유한 내력이 시적 특질로 형성되었음을 방증해주
고 있다. 이는 그의 시가 모호성, 난해성 등의 평가를 받아온 이유에 조

1) 박상순, 소프라노와 시와 우산과 나와 , 시와세계 53호, 시와세계, 2016, 109~112


쪽 참조.
2) 이종오는 샤를르 바이이(Charles Bally)의 논의를 통해 언어 활동에서의 “환경의 개념
은 지리적, 지형적 특성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으나, 행위와 사고의 관습적인 형태를
내포가 있다. 예를 들면 놀이, 운동, 유행, 과학적/문학적/예술적 활동 등이 있는데, 이
것들은 사회적 계층, 문화의 수준, 교육, 관습, 종교적 사상, 도덕적 원칙을 결정하는
요소들과 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종오, 문체론 , 살림, 2006, 51쪽.
3) 박상순, 이승훈 엮음, 그림카드와 종이놀이 , 한국현대대표시론 , 태학사, 2000, 365
쪽 참조.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응한다.
오형엽은 박상순이 시작 활동을 개시하였던 1990년대의 한국시를 ‘대
중문화의 패러디’, ‘테크놀로지적 상상력’, ‘무의식적 타자성의 시’로 크
게 유형화하였다. 그 중 ‘테크놀로지적 상상력’과 ‘무의식적 타자성의 시’
가 본격적이고 심층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꼬집으면서 박상순의 시를
‘무의식적 타자성의 시’에 포함시키고,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라캉
(Jacques Lacan)이 제기한 꿈의 문법인 압축과 전위, 은유와 환유의 연쇄
구조를 통해 시적 논리를 평론하였다. 나아가,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의 ‘-되기’ 및 변신 담론을 부기하여서 박상순 시의
독특한 시적 국면을 비평하였다.4) 이처럼, 박상순의 시는 1990년대 ‘무
의식적 타자성의 시’로서의 특징 및 그만의 독특한 시적 양상을 통해 해
석의 난해와 해명의 유예를 나타낸 바 있다.
이와 유관하게, 빅상순의 시는 난해한 시적 논리를 규명하고, 시 해석
을 위한 구조 및 논리 틀을 밝히거나 설정하고자 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
다. 요컨대, 기호학적 관점 및 상호텍스트성을 통한 바르트(Roland
Barthes),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리파테르(Michael Riffaterre) 등의
담론을 참조한 신화화와 자연화, 텍스트 간의 오인과 재오인에 관한 논
의, 이미지의 관점을 통한 들뢰즈의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참조한
논의 등, 기호 및 이미지의 시적 표지 차원에서 난해성·실험성·모호성·전
위성 등이 발현하는 이유를 다소간 해제하고 고찰하기 위한 연구가 주요
하였던 것이다.5) 그런데 박상순의 시를 이상의 내용만으로 갈음하기에
는, 풍요한 고찰을 유보하겠다는 경구가 아닐는지 우려가 남는다. 박상순
의 시를 자세히 살피면, ‘소외’ 혹은 ‘분열’의 궤적을 오롯하게 그리고 있
다. 소외와 분열은 애초에 짝을 이루고, 주체 형성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4) 오형엽, 반복, 변주, 변신, 생성 빅싱순론 , 주름과 기억 , 시작, 2004, 303~327쪽


참조.
5) 박상순에 관한 선행 연구에는 정민구, 박상순 시의 기호학적 읽기 : 텍스트의 의미화
과정과 상호-텍스트성을 중심으로 , 용봉인문논총 38호,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1; 이기주, 박상순 시에 나타난 영화 이미지 연구 , 한민족문화연구 73호, 한민
족문화학회, 2021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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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하는 결과이다.6) 특히, 박상순에게 소외는 시적 화자의 증명-반( )


증명을 추동하는 시적 특질이므로 새로운 분석을 요청한다. 여기서 그의
첫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의 해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승훈은 욕망, 분열, 소외, 결핍 등을 통해 박상순의 시를 해설하였다. 그
의 시가 “욕망의 문제”로 드러나고 “상징적 질서를 거부”7)한다고 지적하
였다. 박상순의 시 세계가 화자와 욕망의 일정한 관계를 내비치고 있다
는 테제였다. 해당 해설은 상징계의 논리에 천착하여 첫 시집만 살핀 부
분적인 평가이므로, 박상순의 시 세계를 다시금 조명해보기 위해서는 이
를 바탕으로 섬세한 교정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의 시 세계는 꾸준
하게 변모해왔다. 그는 대략 10년마다 시집 1~2권을 출간하며, 시기마다
소외를 다르게 표시하였다.
‘소외’는 라캉의 주요한 개념이다. 라캉은 소외를 그가 주창한 ‘상상
계’8), ‘상징계’9), ‘실재계’10)의 등장과 진입에 관계하여 설명한다. 유아

6) 김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 살림, 2007, 110쪽 참조.
7) 이승훈, 결핍의 공간에서 태어나는 자아 (해설), 6은 나무 7은 돌고래 , 민음사, 199
3, 97쪽.
8) 상상계는 거울 단계에서의 자아 형성에서 시작된다. 자아는 영상( ) 또는 유사자와
맺는 동일시에서 형성된다. 자아의 소외는 자아와 상상계 자체가 근본적인 소외의 장
소임을 의미한다. 소외는 상상계를 구성하며, 나르시시즘적 특징을 보인다. 또한, 상상
계는 이미지와 상상, 기만과 현혹물의 영역이고, 상상계에서의 착각은 전체성, 통합성,
자율성, 이원성, 유사성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즉, 상상계는 자신의 신체와 맺는 관계
에서 기인한다. 딜런 에반스(Dylan Evans), 라캉 정신분석 사전 , 김종주 외 역, 인간
사랑, 1998, 175~177쪽 참조.
9) 상징계는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적 개념으로 언급한 선물교환에서 차용한 ‘상징적
기능’의 세계이다. 교환은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지고, 법과 구조의 개념은 언어 없
이 형성될 수 없으므로, 상징계는 필연적으로 언어적인 영역이다. 또한, 상징계는 타
자성의 영역이고,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규제하는 법
과 질서의 영역이기도 하다. 상상계가 이자 관계의 세계라면, 상징계는 삼자 구조를
나타낸다. 위의 책, 178~180쪽 참조.
10) 실재계는 애초에, 이미지의 영역에 대치되는 개념이었지만, 1953년이 되면서 상상계,
상징계와 함께 이론적 범주에 위치하게 된다. 실재계는 상상계의 반대가 아니며, 상
징계를 넘어서 위치한다. 상징계는 일군의 분화되고 분리된 요소들의 구성이라면, 실
재계는 분화되지 않은 채 상징화에 절대적으로 대항한다. 즉, 상징화 밖에 존재하는
무엇이든 실재계와 관계한다. 실재계는 불가능한 것이며, 상상할 수도 없고, 상징계
에 통합될 수도 없다. 위의 책, 216~218쪽 참조.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는 생후 몇 달 동안,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을 무작위적이고 파편화된 덩


어리로 인식한다. 실제로 유아는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을 구별할 줄 모
르고, 심지어 자기의 신체 부위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 무렵의 유아에게
는 ‘자기’라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11) 유아는 이후에 상상계와 상징계
로의 진입을 위한 ‘1차 소외’와 ‘2차 소외’를 겪게 된다. 여기서 1차 소외
는 자아의 획득을 통해 발생한 포괄적 의미에서의 주체의 소외를 가리키
며, 2차 소외는 욕망의 표징인 기표를 통해 탄생한 주체와 해당 주체의
소외를 나타낸다.12) 즉, 소외의 시기마다 ‘거울 단계’13)와 ‘언어’ 및 ‘아
버지’14)를 거쳐 각 계( )에 참여하면서, ‘자아’와 ‘주체’가 형성되는 것
이다. 여기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균열을 통해 드러나고, 욕망과 끊임없이
접착하며 현재한다. 라캉의 소외는 박상순의 시에서 일정한 징후로 순치
하고 있으며, 변주하며 표시되는 주체의 양상은 30여 년에 걸친 시력의
변모 양상을 살필 가늠자가 된다.
1990년대에 출간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와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2000년대에 출간한 Love Adagio , 2010년대에 출간한 슬
픈 감자 200그램 과 밤이, 밤이, 밤이 , 복간된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에 추가한 14편의 시는 그의 시 변모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데,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90년대의 시에는 1차 소외의
전후 양상이 시적 징후로 나타난다. 화자는 다르게 나타나는 육체성과

11) 로이스 타이슨(Lois Tyson), 비평 이론의 모든 것 , 윤동구 역, 앨피, 2019, 78면 참조.
12) 김석, 앞의 책, 155~158쪽.
13) “거울 단계는 약 6개월과 18개월 사이에 일어나며 프로이트의 단계들 중 일차적 자
기애의 시기에 상응한다. ( ) 거울 단계를 거치며 아이는 거울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봄으로써 처음으로 그/그녀의 신체가 전체의 형태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 )
이 동일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것 없이 아이는 자신을 완전하고 전체적인
존재로서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숀 호머(Sean Homer), 라캉
읽기 (개정판), 김서영 역, 은행나무, 2014, 46쪽.
14)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에서의 첫 번째 규칙은 대문자 어머니(Mother)는 내가 아닌
대문자 아버지(Father)의 소유라는 것이다. ( ) 그러한 의미에서 라캉은 상징계가 어
머니의 욕망/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교체되는 지점이라고 주장한
다. ( )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회 규칙과 금지 사항을 인식하고 이로써 사회적으로
길들여지는데, 그러한 규칙과 금지 사항을 만들어내고 계속 유지시키는 존재는 대문
자 아버지, 즉 권력자로서의 남성이기 때문이다.” 로이스 타이슨, 앞의 책,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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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정체성을 통해 시 세계에 드러난다. 모호하거나 불분명한 이미지의


세계 및 충만과 풍요한 정서를 환기하는 상상적 세계를 시각성, 이미지
를 통해서 시의 표층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2000년대의 시에는 2차 소외
의 전후 양상이 시적 징후로 나타난다. 화자는 다르게 나타나는 주체성
과 언어와의 관계를 통해 시 세계에 드러난다. 상징계를 나타내는 언어,
무의식,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상상계의 특징인 이미지적 세계가 잔
여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2010년대의 시에는 상징계로의 완전한 참
여가 나타난다. 화자는 기표의 놀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상징계에서
주체의 분열을 경험하는 ‘나’의 모습으로 시의 표층에 드러난다. 무의식,
언어, 욕망 등의 징후인 농담, 은유와 환유 작용 등이 ‘나’를 견인하고 표
시해준다.
위의 내용을 선명하게 확인하고자 한 차례 더 요약하자면, 1990년대의
시에는 전( )-상상계 및 상상계의 징후(1차 소외)가, 2010년대의 시에는
상징계의 징후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2000년대의 시에는 상상계와 상
징계에 걸친 과도기의 징후(2차 소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캉
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보로메오 매듭으로 설명한 바와 같이, 박상
순의 시에는 맞물려 틈입하는 세 계( )의 징후가 혼재하여 나타나기도
하므로, 위에서처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투박한 일이지만, 시기마다 특
징적으로 현시하는 소외 양상은 그의 시를 논의할 중요한 지표임이 분명
하다. 위의 분석은 박상순 시의 내적 원리 및 연원을 갈음해보고 제시하
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을 것이며, 나아가 지속하여 해명하고 고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초기 시집인 6은 나무 7은 돌고래 와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을 살펴 박상순의 시 세계 전반을 조망할 계기
적, 예비적 논의로 삼고자 한다.15) 앞서 언급하였듯, 박상순의 초기 시집
에 드러나는 상징계 이전으로의 회귀는 1차 소외의 전후 국면을 통해 화

15) 앞서 언급하였듯, 두 권의 시집은 각각 재발간 및 복간되었다. 본 논문은 박상순의


초기 시를 통해 그의 시 세계를 예비적으로 조망해보기 위한 논의이므로, 1993년, 19
96년에 출간한 초판 시집을 분석 텍스트로 삼고자 한다.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자의 두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거울 단계 이전의 화자이며, 다른


하나는 거울 단계 이후의 화자이다. “주체는 먼저 거울에 비친 외화된 신
체 이미지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자아라는 최초 실체를 획득한다.
자아 없는 주체는 불가능하”16)기 때문이다. 박상순의 초기 시에 나타나
는 자아의 획득은 화자의 존립과 시 세계의 성립을 위한 필연적이며 의
식적인 국면으로 드러나는 측면도 있으므로 분석의 유의미한 지점을 나
타낸다. 분리하는 육체와 분실하는 자기, 거울 단계와 소외하는 ‘나’, 해
체하는 텍스트와 와해하는 말을 통해 1차 소외 전후 양상의 박상순 초기
시 세계를 살필 수 있다.
특히, 박상순은 ‘반복’17)을 통해 이를 의식적으로 표시한다. 그에게 있
어 반복은 상징계와의 거리 두기와 상상계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특징적
언술 양상이다. 그는 단어 및 문장, 문형, 기호의 반복을 통해 소외의 당
위성과 개연성을 획득하고, 나아가 반복을 문체적 자질로써 수확하기에
이른다.18) 반복은 리듬을 형성하고 강조와 각인 효과를 낳는 기법이다.
‘시에서의 리듬은 반복성이 느껴지는 모든 음악적 현상을 포함’19)하는데,
시의 한 자질인 반복을 살피면 박상순 시의 특이점과 참조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박상순은 “시는 언어의 예술”20)이라고 말하면서, “나의
도구는 언어이고, 이미지와 소리와 문자이고, 나 자신”21)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라캉에게 있어 언어는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받을 수 있는
한계이자 창구인 셈인데, 시인이라는 주체의 존재성은 언어 운용의 방식

16) 김석, 앞의 책, 87쪽.


17) “반복은 문학적 효과의 중심이다. ( ) 반복 어법을 주요한 미학적 원리로 삼는 시의
경우, ( ) 언술의 차원에서는 작품의 의미 구조 생성에 기여하는 방식이라는 광범위
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시에서 반복은 정서의 변화, 혹은 발전을 나타내거나
시인이 인식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한국문학평론가협
회, 인문학용어대사전 , 국학자료원, 2018, 693쪽.
18) 박갑수는 국어문체론 에서 시에서의 ‘반복’을 통해 형성하는 리듬을 문체의 자질로
언급하고, 문체 분석은 결국 작가 및 작품의 심리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갑수, 국어문체론 , 대한교과서, 1994, 51~52, 233쪽 참조.
19) 이혜원, 김종훈 외, 리듬 , 현대시론 , 서정시학, 2020, 130쪽 참조.
20) 박상순, 앞의 책, 379쪽.
21) 박상순, 시인의 말 , 슬픈 감자 200그램 , 난다, 2017,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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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을 그의 담론에서 참작해볼 수 있다. 즉, 박상순


이 희구하는 ‘언어의 예술성’과 라캉이 말한 ‘언어의 원리’는 반복적 언
술을 통해, 상징계와의 거리 두기와 화자의 퇴행 양상을 시의 징후로써
확인시킨다.

2. 분리하는 육체와 분실하는 자기

박상순의 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상징계와 거리를 두려는 화


자의 시적 태도를 살필 당위가 있어 보인다. 주지하였듯, 그의 초기 시에
서의 화자가 끊임없이 탈주하려는 세계가 현실과 상징적 세계라면, 가닿
고 융해되는 세계는 이미지와 상상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먼저, 상징계는
사회, 현실과 바꾸어 설명할 수 있는 등록소를 의미한다. 현실의 법과 질
서, 규칙과 구조가 상징계를 환치하여 설명할 수 있는 그것들이다. 여기
서 무의식과 욕망, 언어는 서로 관계하며 주체가 하는 상징계로의 참여
와 주체의 성질을 표시해준다. 즉,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면서 언어를
통해 형성되고, 욕망은 언어를 통해 주체에 영향을 끼치므로, 위의 세 개
념은 상징계의 특질을 설명해주고 주체를 움직이도록 추동하는 기제들이
된다.22) 나아가, 상징계로의 진입은 ‘어머니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을 그
치고, ‘아버지의 이름’을 욕망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으로 전환하여서
‘욕망의 대상’이자 ‘결여된 기표’인 상징적 팔루스를 쫓게 되는 것을 의
미한다.23) 박상순의 초기 시에는 이와 반대하는 시적 징후들이 의식적으
로 나타난다. 화자는 상징계의 질서인 무의식과 욕망, 언어와 결별하면서
시의 표층에 드러난다. 또한, 신체의 퇴행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1차
소외 전후의 양상을 나타낸다. 먼저, 아래의 인용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차가 지나갔다

22) 숀 호머, 앞의 책, 109~144쪽 참조.


23) 위의 책, 85~91쪽 참조.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그들은 피묻은 내 반바지를 갈아입혔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나를 다락으로 옮겨 놓았고
기차가 지나갔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부분24)

누군가 사라진다. 일곱 살의 나, 여덟 살의 나, 아홉 살의 나. 누군가 사


라진다. 한 사람의 빵집 아저씨, 두 사람의 빵집 아저씨, 세 사람의 아저씨.
누군가 사라진다. 한 사람의 기관사, 두 사람의 기관사.
마라나;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3) 부분25)

위의 시는 각각, 6은 나무 7은 돌고래 와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


주인공 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연작시 중 한 편들이다. 먼저, 빵공장
으로 통하는 철도 는 “기차가 지나갔다”라는 문장의 반복을 통해, ‘나’와
현실 세계를 결별시킨다. 또한, ‘나’는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육체의
분해를 경험한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의 육체도 따라서 분리되고
있다. 이윽고 ‘나’는 낯선 ‘그들’에 의해 “다락으로 옮겨”지고, ‘가족’ 및
현실과 단절되기에 이른다. “뒤집힌 벌레처럼 발버둥”치는 ‘나’의 모습은
육체성의 분열과 행동의 퇴행을 나타내면서, 상상계 이전을 환기하는 주
요한 특질이므로 해석의 지표임을 나타낸다. 또한, “달리는 기차에 앉아
흰 구름 한 점 웃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장면 역시, 불분명하고 모호한
형상인 ‘구름’을 통해 상상계 이전으로 회귀한 모호한 세계 인식을 의식
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박상순은 반복적 언술이 견인한 ‘나’의 퇴
행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으로 유치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마라나;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3) 은 “누군가 사라진다”라는 문장
의 반복을 통해, 사람들이 사라지고, 현실 세계가 증발하는 장면을 묘사
한다. “누군가 사라”져서 ‘나’와 ‘마라나’ 밖에 남지 않게 되는데, 2자 관

24)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 민음사, 1993, 15쪽.


25) 박상순,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1996, 46~47쪽. 이후의 시 인용은 책 제
목과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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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세계를 환기하여 상상계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이 시에서는 “누가


알 수 있을까”라는 문장도 반복된다. “아마도 3만 명쯤 너를 알고 있겠
지”에서 “2만 명쯤”, “1만 명쯤”으로 숫자가 줄더니, “누가 알 수 있을까”
만 반복하며 시가 마무리된다. 결국, 현실은 완전하게 사라져서, ‘나’와
‘마라나’만 남았음을 시의 마지막까지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숫자’는
상징계의 질서를 내포하므로, 숫자가 줄어가는 표현은 상징계와 거리를
두려는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박상
순의 초기 시는 상징계와의 결별과 거울 단계에 근거하는 1차 소외 전후
의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먼저, 분리된 육체 이미지와 분실한
자기 인식을 통해 시를 살피고자 한다. 시적 화자는 상징계로부터 한 의
식적 회귀를 나타낸다. 또한, 갓난아이가 자신( )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확보하지 못한 자기의 모습을 표시한다. 요컨대, 눈, 흙더미, 폐
허, 구름, 덩어리 등을 통해 사유가 드러난다. 중요한 대목은, 화자는 자
신의 분리와 분실을 향한 능동성을 보인다는 지점이다.

표지판의 기둥들이 눈 속에 점점 묻힌다. 그래도 나는 들판을 가로지른


다. 그동안 내 아내가, 커다란 붓을 들고 눈 덮인 들판의 표지판을 지운다.
눈보라도 지운다. 나의 귀가, 나의 팔이,

나의 한쪽 눈이 지워진 눈보라에 묻힌다. 반 토막의 내가 외눈을 뜨고 눈


덮인 들판을 간다. 아내가 다시 반 토막의 나를 지운다. 들판의 눈을 지운다.
아내의 발밑에서 외눈박이 금붕어가 꿈틀거린다.
지워진 사람 부분26)

위의 시는 “아내가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간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은 말 그대로 회화의 세계이며, 물감으로 치장하여 외화된 세계이
다. 따라서, ‘그림’은 한 폭의 사건을 반추하는 일종의 창구가 되어준다.
위에 인용한 두 연은 해당 시의 뒷부분인데, 시의 앞부분에서 화자는 “그

26) 6은 나무 7은 돌고래 , 50~51쪽.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림 속”으로 들어가 “표지판을 따라” 끝없이 걷는다. ‘눈’과 ‘눈보라’도 그


치지 않는다. 그런데 ‘아내’가 “커다란 붓을 들고 눈 덮인 들판의 표지판
을 지”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육체도 지우더니, ‘귀’, ‘팔’, ‘눈’이
차례로 사라진다. ‘나’는 결국, 마지막 연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육체
는 삭제되었지만, “들판의 눈을 지운다. 아내의 발밑에서 외눈박이 금붕
어가 꿈틀거린다.”라고 언술할 수 있는 의식은 살아 있다. 위의 시는 화
자의 분리되고 사라지는 육체를 통해, 상상계 이전으로의 회귀 양상을
나타낸다. 즉, 1차 소외 이전, 세계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신체 감각
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퇴행시키는 것이다. ‘아내’는 회귀와 퇴행을 일
으키는 장본인으로 위치한다. 라캉에 의하면 “사람은 존재하기 위하여 타
자에 의해 인식되어야만” 하며, “타자는 우리 자신들의 보증인이 된다.”27)
따라서, 지우는 행위의 반복은 ‘아내’로 하여금 개연성을 획득한다. ‘나’는
능동적으로 참여한 회화의 세계에서 다시 드러날 수 있고 영원히 갇혀있
을 수도 있는데, 이는 ‘아내’를 통한 2자 관계의 세계를 반추하도록 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내’와 내가 맺는 상호 우회로의 관계는 “외눈박이 금
붕어”라는 오브제를 통해 결속되는 것이다. 요컨대, 가짜 데미안 에서
‘나’는 외눈박이로 표현되는데, “외눈박이 금붕어”는 ‘나’의 또 다른 현시
이자, ‘아내’와의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그
림’의 내부가 거울 단계 이전의 세계를 반추한다면, ‘그림’의 외부는 거울
단계 이후의 상상계를 환기한다. 이로써, ‘나’는 언제든 육체성을 정비하
고 ‘그림’ 바깥에서 현재할 수 있는 잠재성을 소지한다. ‘지운다’의 반복
은 ‘나’의 퇴행을 통해, 박상순 시 세계의 ‘소외’ 양상과 합치한다.

흙더미 속으로 시간이 흘렀다. 여러 개의 방들이 하나씩 무너졌다. 모든


방이 무너졌다. 자전거도 흙속에 묻혀버렸다. 내 얼굴 위로 마루 또한 무너
졌다. 장마비가 내렸다. 나는 더 깊은 흙 속으로 빠져들었다.

장마비가 내렸다. 비 속에 자전거가 있었다. 비 속에 아저씨가 있었다. 비

27) 숀 호머, 앞의 책, 48쪽.


한국학연구

속으로 떠나가는 여인이 있었다. 젖꼭지가 있었다. 자전거가 있었다. 나를


이곳에 처음으로 파묻은 누군가가 있었다. 내가 있었다. 여러 개의 방을 가
진 폐허가 내게 있었다. 하늘 아래 파묻힌 사람들이 있었다.
폐허 부분28)

위의 시는 ‘아저씨’와 ‘여인’과 ‘나’의 삼각 구도로 시가 조형된다. ‘아


저씨’, ‘여인’간의 애정과 불화, “내 입 속에 털어넣”은 ‘젖꼭지’ 등은, 라
캉이 말한 ‘부성 은유’29)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 과정으로 살필
여지를 함의한다. 그런데, 위의 시는 ‘부성 은유’의 좌절이 나타나고 있
다. 여인(어머니)과 ‘나’의 ‘상상적 결합’과 ‘일체감’이 훼손되어 있고, 오
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 과정인 ‘상징화 과정’도 좌절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상상계 이전으로 회귀하는 ‘나’를 반추해준다. 시
를 살펴보면 ‘나’는 끝까지 헤매고, 숨고 방치되고 있다. ‘아저씨’와 ‘여
인’만이 ‘방’에서 생활하고, ‘나’는 ‘마루’ 아래 들어가 생존하기 때문이
다. ‘나’는 ‘자전거’를 이용해 ‘밤’을 누빈다. ‘밤’은 ‘방’과 대비되며, ‘마
루’와도 다소간 배치된다. ‘방’과 ‘마루’가 ‘아저씨’와 ‘여인’의 세계에 가
깝다면, ‘자전거’를 탄 채 헤매는 ‘밤’은 그들의 세계와의 아득한 거리감
을 자아낸다. 여기서 ‘자전거’는 ‘기차’, ‘비행기’, ‘승강기’ 등의 상징계적
언표와 다르게 ‘나’와 친연성을 맺으며, 유일하게 감응하는 사물이다. 시
의 후반부에서는, ‘아저씨’와 ‘여인’의 다툼 이후에 ‘여인’이 집을 나간다.
‘아저씨’도 자취를 감춘다. 결국, 3자의 관계는 완전하게 와해가 되고,
‘나’는 “흙더미 속”에 몸소 유폐되어서 능동성을 상실한다. 그곳에서 세
계가 무너지는 것만을 목격하게 된다. 무너지는 장면은 ‘무너졌다’의 반
복을 통해 강조된다. 그러다가 ‘나’는 “더 깊은 흙 속으로 빠져들”어 ‘폐
허’와 구분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이다. 시 세계는 모호하
고 구분 불가능한 ‘폐허’로 새로운 세계성을 주조해, 나와 혼재한다. 라
캉이 설명하였듯, 모호하고 분리되지 못한 ‘나’-세계의 관계는 상상계 이

28) 6은 나무 7은 돌고래 , 38~42쪽.


29) 김석, 앞의 책, 129~138쪽 참조.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러므로 ‘폐허’에 섞이는 ‘나’는 상상계 이전으


로 퇴행한 ‘나’의 부정확한 세계 인식을 표시한다. 이내, “장마비가 내”리
고 꿈의 장면처럼 ‘자전거’와 ‘아저씨’와 ‘여인’과 ‘젖꼭지’가 나타나지만,
이곳은 여전히 “폐허”다. 앞에서 실재했던 그들을 ‘있었다’라는 반복을
통해 드러내어, “폐허가 내게 있었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강조해낸다. 이
어지는 “하늘 아래 파묻힌 사람들” 역시, ‘나’와 혼재하는 ‘폐허’를 상기
시키고 타자들이 삭제된 세계를 각인시킨다. 이는 ‘나’만 방치된 세계와
자기 결여의 상태를 드러내는 반복적 언술의 수확물인 것이다. 이러한
반복 양상은 ‘나’를 1차 소외 이전의 세계로 퇴행시키고자 하는 자기 분
실의 의도를 고스란히 나타낸다.

항아리는 자꾸 나무를 뱉어내고 있었습니다. 청녹색 높은 하늘은 항아리


가 뱉어낸 버드나무의 무성한 이파리들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습니다. 항아
리는 여전히 땀을 흘리며 천하지간 온 곳을 더운 여름으로 꽉꽉 메워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무를 뱉어내는 항아리 부분30)

위의 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항아리’의 존재를 집요하게 나타낸


다. ‘항아리’를 주어의 자리에 위치시키면서 ‘있었습니다’라고 강조한다.
‘항아리’는 위의 시 전체에서 10회 등장하고, 상태와 작용을 나타내는 동
사와 어울려 묘사되면서 시 세계를 견인한다. 위의 시는 자네트가 아픈
날 연작시와 분석의 내용을 공유한다. ‘나’는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는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항아리를 노래한
다.” 그러나 ‘그녀’는 아파서 죽게 되며, ‘나’는 ‘항아리’에 “그녀를 묻
고”, “뚜껑을 밀봉한다.”( 자네트가 아픈 날 2 ) 그런데 그 항아리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것이다. 그 ‘나무’는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 자네트
가 아픈 날 2 )이자, ‘그녀’처럼 “몸을 떨며 잎”을 떨구는 ‘나무’( 자네트
가 아픈 날 1 )이다. 즉, 위의 시에서 ‘나무’는 ‘나’와 ‘그녀’의 합일이자

30)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77~79쪽.


한국학연구

혼융의 언표이며, ‘나’를 삭제하고 분해하여 퇴행한 육체의 언표로 위치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겨울의 막바지”에서 ‘항아리’가 뱉어낸 ‘나무’와
그 ‘나무’가 이파리를 무성하게 만들고 구름을 몰아내며 여름을 도래시
키는 대목은 당위성을 획득한다. 앞선 작품에 나타난 구름, 그림, 폐허처
럼 “무성한 이파리들”은 하늘을 덮어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
호한 형상의 세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아리는 “틀어진 항아
리”( 자네트가 아픈 날 2 )이므로 외양이 온전하지 못하며, 위의 시에 나
타나는 ‘눈’, ‘바위’, ‘검은 산’, ‘기운’, ‘땀’ 등도, 상징계의 언표 체계와
대비되는 모호한 형상성을 띤다. 이 대목에서, ‘반복’이 시 해석의 실마
리를 가미한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지만 ‘있’도록 강조되는 ‘항아
리’는 ‘나무’를 통해, 또한 신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묘연한 화자를 통해
상상계 이전의 세계를 자아낸다. 또한, ‘항아리’의 ‘있’음을 반복하는, 모
호한 존재로서의 화자의 언술은 불가해하고 선명하지 않은 시 세계를 해
독하지 않는 채 그대로 두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시의 마지막 문장인
“그런데 아저씨, 항아리가 뭐예요?”는 3자의 개입과 이해가 거절되고 와
해하는, 모호한 이미지인 채로 ‘있’는 상상계 이전의 세계를 환기하는 시
적 장면이다. 이처럼 박상순의 초기 시에는 불가해하고 모호한 국면을
통해 분리하는 육체와 자기 분실, 모호한 세계 인식을 환기해주고, 거울
단계 이전으로의 퇴행을 보여준다. 요컨대, ‘그림’, ‘폐허’, ‘항아리’와 ‘나
무’는 그를 드러내는 표징이며 이와 함께 드러나는 단어와 문장, 문형의
반복은 상상계 이전의 세계성을 시의 표층에 의식적으로 나타내는 기법
이다. 그런데, 박상순의 초기 시는 모호한 1차 소외 이전의 세계를 지나,
1차 소외 이후의 세계를 드러내고도 있다. 다른 표지의 세계에서는 ‘나’
의 소외와 자아 획득을 환기해낸다.

3. 거울 단계와 소외하는 ‘나’

박상순의 초기 시집의 또 한 핵심은 거울 단계를 직면한 화자와 그를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통해 소외하는 ‘나’이다. 화자는 거울 단계를 통해 1차 소외를 체화하며,


상상계에 진입하기에 이른다. 이미지의 세계는 “형체 없이 파편화된 덩
어리가 아닌 온전한 전체로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감각”의 “발달”31)을
경험하는 세계이다. 상징계 이전의 화자에게 언어는 현재하나 미답의 영
역이므로, 언어 아닌 이미지를 통해 자기를 경험하고 직면하여 정서의
충만과 만족을 경험한다.32) 물론, 거울 단계에서의 소외는 ‘나’를 성립하
고 인식하는 풍요한 만족감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라캉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파편화된 느낌과 자아를 탄생시킨 상상계적 자율성 사이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타자의 이미지와 맺는 동일시 및 그 이미지와 하는
원초적인 경쟁을 이야기한다.33) 이는 자아가 겪는 갈등과 불안을 설명하
면서, 차후에 이어지는 욕망과 욕구의 발현을 환기해준다. 어머니의 욕망
을 좇다가 아버지를 욕망하는 단계로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징후가 그것
이다. 그리고 상상계에서는 타자가 중요하다. 상상계에서의 타자는 거울
을 통해 확인한 스스로일 수도 있고,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나 낯선 사
람 등의 우회로인 ‘이마고’34)일 수 있다. 그들은 ‘나’의 자아 형성, 자기
인식을 견인해주는 존재이다. ‘나’는 ‘이마고’를 통해 거울 단계에서 ‘오
인’을 경험하고 극복하며 현실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오
인은 “영어의 ‘오해’ 및 ‘잘못된 인식’이라는 단어에 대충 일치한다.” 또
한, “상상계에서의 자기 인식”과 동의어이면서, “존재의 상징적 결정으로
부터 소외시키는 체제”35)를 의미한다. 즉, 상상계는 이미지와 환영의 영
역이므로, 오인은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는 환상적 국면에 따라

31) 로이스 타이슨, 앞의 책, 79쪽.


32) 위의 책, 79쪽 참조.
33) 라캉의 말에 따르면, “자아는 본질적으로 갈등과 불화의 지대 끊임없는 투
쟁의 장소 라고 할 수 있다.” 숀 호머, 앞의 책, 47, 55쪽 참조.
34) “타자적인 이미지의 역할에 대해 라캉은 ‘이마고’라는 명칭을 붙이는데, 그것
은 한편으로는 주체를 소외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 형성을 도와준다.
이마고는 거울에 비친 모습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마주하는 어
머니의 얼굴이나 자신의 능력과 모습을 거울처럼 확인시켜주는 모든 대상이
이마고가 될 수 있다.” 김석, 앞의 책, 148쪽.
35) 딜런 에반스, 앞의 책, 262쪽.
한국학연구

발생하는 작용이다. 박상순의 시에도 이러한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화자는 발화와 말이 아니라, 시각성과 이미지를 통해 세계에 포섭되거나
세계를 구현하며, 거울 단계의 국면과 1차 소외의 양상을 진솔하고 묘연
하게 술회한다. 요컨대, 너, 사람, 그림자 등의 타자가 등장하거나, 상징
계를 함의하는 기차, 비행기, 엘리베이터, 공장, 발전소 등의 기표를 배타
하며 사유가 드러나기도 한다.

나에게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날마다 공동 묘지에 갔다. 한 사람


은 무덤을 파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은 자의 이름을 돌조각에 새기며 함께 지
냈다. 묘비를 새기는 사람은 내 국어책의 겉장을 달력 종이로 하얗게 씌워
주었다. 죽은 자의 이름을 묘비에 새기던 솜씨로 새로 씌운 국어책의 겉장
에 내 이름을 새겨 주었다. 무덤 파는 사람은 책장을 열어 책 속에 누워 있
는 글씨들을 내게 읽어 주었다. 이제 무덤 파는 사람은 <무덤>이라 부르고,
묘비명을 새기는 사람은 <묘비>로 쓴다.

어느 날 오후, 사람이 적게 죽은 날
무덤과 묘비는 묘지에서 술을 마셨다.
별이 빛나는 밤 부분36)

위의 시는 “나에게 두 사람이 있었다”라는 언술로 시작된다. 첫 문장


에서부터 2자의 세계임을 드러내며, “두 사람”은 각자의 역할로 존립한
다. “한 사람은 무덤을 파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은 자의 이름을 돌조각에
새기”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무덤 파는 사람은 <무덤>이라 부르고, 묘
비명을 새기는 사람은 <묘비>”라고 응당 부르겠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
서 ‘무덤’과 ‘묘비’는 서로의 존재를 반추하여 자기를 확립하는 타자 관
계를 맺는다. 또한, ‘무덤’과 ‘묘비’가 함께 존재해야 ‘묘지’는 완성되므
로, 정( )-반( )-합( )의 변증법적 구도를 환기한다. 이후에 “무덤과 묘
비는 묘지에서 싸”우게 되는데, “술에 취”했기 때문이다. 결국 “삽을 든

36) 6은 나무 7은 돌고래 , 48~49쪽.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무덤이 죽고”, “망치를 든 묘비는 붙들려” 간다. 이로써 ‘묘지’는 와해가


되면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무덤’과 ‘묘비’는 상호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동시에, ‘묘지’는 ‘무덤’(정)과 ‘묘비’(반)의 합으로 드러난 자
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싸움’은 ‘묘지’가 하는 자기를 수확하
고 정체성을 성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기 인식을 위한 자아라는
지대 내의 갈등, 투쟁인 상상계의 국면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
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나’는 “낯선 사람 하나가 빈방의 문을 열었다”
며 “펼쳐진 내 국어책의 책장을 덮고 책가방을 꾸리고 옷가지를 챙겼다”
고 덧붙인다. 이 “낯선 사람 하나”의 은밀하면서 직접적인 방문은 ‘나’의
존재, ‘사람’됨을 확인시킨다. 나아가, ‘국어책’에만 존재하던 “묘비도 오
지 않고 무덤도 오지 않는 빈방을 떠”난다는 언술과 뒤섞이며, ‘무덤’과
‘묘비’, “낯선 사람”은 ‘나’의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이마고’인 타자적
인물들로 승화한다. 이로써, ‘사람’의 반복과 ‘낯선 사람’의 출현은 상상
계의 징후를 ‘나’의 시 세계로 환전시키는 의식적 언술이 된다. ‘사람’인
타자를 통해 ‘나’라는 ‘사람’의 형질을 주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주술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나타나는 ‘묘지’는 분열하
고 소외하는 자아의 특질을 은유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나는 포장지를 뜯는 사람
숲을 뜯너낸다

너는 나에게 우송된 사람
내 복도를 달린다

나는 포장지만 뜯는 사람
썩은 복도에 앉아 너를 만난다

네 손에는 꽃과 열매, 내 손에는 나


너는 매일 나에게 포장되어 오지만
포장지를 뜯는 사람 부분37)
한국학연구

위의 시는 ‘나(내)’와 ‘너(네)’의 교차 반복을 통해, 시 세계를 기묘하게


구축한다. ‘나’는 “포장을 뜯는 사람”이다. “너는 나에게 우송된 사람”이
므로, ‘나’는 ‘뜯는’ 행위를 통해 ‘포장’되어있던 ‘너’를 마주한다. 그런데
4연에서 “내 손에는 나”라는 언술이 발생한다. “내 손에는” ‘너’가 있어
야 할 텐데, 대신에 ‘내’가 있음은 시선을 끈다. 기본적으로, 위의 시는
‘나’와 ‘너’의 대비를 보이면서 시각성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이미지의 세
계임을 나타낸다. ‘너’는 ‘숲’과 ‘꽃’, ‘열매’를 통해 풍요한 정서를 유발
하고 “내 얼굴도 뜯어”낸다는 자기 인식의 고백을 일으키는 ‘나’의 이마
고적 존재이다. 위의 시에서도 ‘나’와 ‘너’는 ‘사람’이라는 표현과 결속하
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람처럼, ‘너’는 포장물처럼 시각화하므로 ‘사람’
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앞의 별이 빛나는 밤 에서처럼, ‘사람’
은 수차례 반복된다. 이는 자기 인식과 자아 형성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
을 도맡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가짜 데미안 , 녹색 머리의 소년
등의 시에서도 ‘나’와 ‘너’의 호명과 그로 형성한 관계성을 통해, 자기 형
성을 반복적으로 확인시킨다. 마지막 연에서 ‘나’는 “도대체 이게 뭐야./
이건 뭐야?/ 뭐야. 뭐야. 뭐야.”라는 반복을 통해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표출한다. 이는 ‘너’라는 거울상을 통해 ‘나’의 자기 인식을 나타내는 특
징적인 언술 양상이다. 1차 소외는 최초의 타자-되기가 이루어지는 단계
이므로, ‘소외’는 상상적이지만 현실 및 세계로의 참여와 포섭을 환기한
다. 즉, 화자가 마지막에서 하는 언술의 반복은 자아의 획득과 주체의 소
외를 극적으로 내보인다. 이처럼 소외 양상은 상상계와 상징계에 걸쳐
경험하는, ‘나’의 형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국면일 수밖에 없다.

나의 바다는 모래
서걱이는 돌가루

나의 바다는 모래
밤마다 돌아가는 발전기

37)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14쪽.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나의 바다는 모래
내 혀를 갈아내는 기계
바다를 입에 물고 너를 만난다 전문38)

위의 시는 “나의 바다는 모래”라는 문장의 반복을 통해, 안정적인 박


자감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3연의 짧은 시이지만 조형적 균형감을 획득
할 수 있다. 또한, ‘바다’와 ‘모래’는 이웃하는 관계이므로, ‘나’의 언술을
따라 시 세계는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바다는 모래”라는 표현은
쉽게 수긍되지 않기 때문에, 바다를 입에 물고 너를 만난다 는 제목을
살필 필요가 있다. “바다를 입에 물고” 있으면, 소통은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소통을 요청하기도 어렵다. 결국, ‘바다’와 ‘모래’는 소통의 어려
움을 유발하는 언표의 체계를 형성하고, 상호의 은유가 된다. 그러므로
‘나’와 ‘너’는 말이 아니라, 시각 등의 다른 감각 작용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관계임을 암시해준다. 이 대목에서 “내 혀를 갈아내는 기계”는 의미
를 획득한다. 언급하였듯, 상상계는 이미지, 시각성과 친연성을 맺는 세
계이다. 따라서, 위의 시는 “서걱이는 돌가루”, “내 혀를 갈아내는 기계”
라는 언술과 함께, ‘나’의 언어 운용이 거절되는 상상적 시 세계를 환기
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고독한 분투가 아니라, 2연에 나타나는 ‘발전기’
와 조응하므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화자는 존재의 동력을 획득할 것이
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상징계를 함의하는 기표가 아닌, 스스로 출현시켜
서 조응하는 ‘발전기’는 자아 형성과 연동되는 능동적 언표의 위상을 얻
는다. 요컨대, 기차, 비행기, 엘리베이터, 공장, 발전소 등의 기표는 박상
순의 시에서 상징계를 함의하는 기표로 줄곧 활용된다. 그것을 회피하고
거부하는 화자의 시적 태도를 통해, 시 세계는 상징계와의 거리 두기를
지속하여 나타내기도 한다.39) 박상순은 시를 언어 예술이라고 강조하면

38) 위의 책, 28쪽.
39) 6은 나무 7은 돌고래 의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 변전소의 엘리베이터에서 가
까운 곳 , 눈 덮인 추억의 의자 ,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5년 뒤 등, 마
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의 거울에게 전하는 말 , 형광등 공장의 고추잠자리 ,
내가 본 마지막 겨울 , 가는 길, 철공소 옆 등의 시에서 상징계를 표상하는 대상
한국학연구

서 시 쓰기에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시적 화자를 통해서는 능란한


언어 운용 보다, 시각성이 견인하는 이미지적 국면을 전경화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이므로, 해석을 거듭 유발한다. 이는 상상계에서의 현상 및 징
후와 조응하므로, 박상순만의 시적 특징으로 자리한다. 그런데 박상순은
이와 같은 시적 특질을 텍스트의 구조와 형식을 통해서도 드러낸다. 시
는 소통의 장르이고 메시지의 교환이지만 박상순은 이를 무화하거나 혼
란을 가중하고 중층화하면서 ‘시의 애매성’40)을 구축해 소통의 어려움을
의도한다.

4. 해체하는 텍스트와 와해하는 말

상징계 이전의 주체는 시각적 감각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고 세계의 이


미지를 수용한다. 특히, 박상순의 초기 시에는 반복하여 나타나는 말과
언어 운용의 거부가 주요한 특질로써 드러난다. 앞서 주지하였듯, 박상순
은 능란한 언어 운용 보다, 이미지의 전경화를 나타내면서 텍스트의 형
식과 구조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이는 텍스트를 난해하게 만들고 독자의
오해를 유도하는 방법으로 차용되기도 한다. 지속하여 굴절되는 화자의
발화는 시 텍스트의 의미 해석을 지연시킨다. 이로써 소통 불가능성을
촉발하면서, 소통 가능성을 텍스트의 배면에 은근하게 내장한다.41) 이와

과의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을 지속하여 확보한다.


40) 엄경희는 ‘시의 애매성’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의미의 잔여들을 아우르고자 할
때 ( ) 탄생한다”라고 말한다.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의 다의성을 이상섭
이 ‘뜻 겹침’으로 바꾸어 설명한 것을 온당한 제안이라고 덧붙이는데, ‘애매성’은 ‘명
료성’을 벗어난 “복잡성과 복합성을 다른 말로” 한 것이라고 부연한다. 박상순이 추
구한 ‘시의 애매성’은 그의 생활과 환경이 반추한 문체적 특질과 라캉의 ‘소외’를 따
라 주조한 시 세계의 복잡한 겹침이므로, 주요한 시적 특질이다. 엄경희, 은유 , 모
악, 2019, 40~42쪽 참조.
41) 제임스 크로스화이트(James Crosswhite)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텍스
트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과장’이고 ‘편파적인 이야기’라고 꼬집는
다. 제임스 크로스화이트는 소통의 불가능성을 짐짓 인정하면서도 소통 가능성을 지
속하여 환기한다. 나아가, “글쓰기가 의사소통과 단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글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같은 소통 불가능성, 언표의 미끄러짐은 상징계의 담론에 가까운 특징이


지만, 박상순은 이를 상상계의 징후를 드러내기 위해 텍스트의 문면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전달”이
나 “그 정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수신자와 송신자 그리고 그 사이에 발
생하는 차이에 대한 관점이”42)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텍스트의 해체를
통해 소통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대목은 시 쓰기 전략에서 기인한 탓이
있으므로, 논의할 가치가 있다. 특히, 기호 및 부호의 반복을 통해 보여
주는 텍스트 형상의 왜곡과 상상계에서 하는 화자의 모습이 조응하므로,
박상순의 초기 시 세계를 살필 시적 특질이 된다. 요컨대, ‘;(세미콜론)’,
‘,(반점)’, ‘-(붙임표)’, ‘/(빗금)’ 등이 주로 나타난다. 아래의 작품은 ‘;(세
미콜론)’과 ‘ (말줄임표)’를 통해, 거울 단계 전후의 국면과 대응하는 시
세계를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숲에 누워 꿈꾼다. 소쩍새가 폭발하는 꿈, 폭발하는 꿈속에 소쩍새


가 우는 꿈; 나는 숲의 꿈이 등장시킨 내 꿈속의; 또 꿈속의 운전사다. 밤이
가면 나는 지워진다. 운전석에 앉는다. 태양 아래 멈춘다.
( ) 한 소녀가 걷는다. 소녀의 손가방이 폭파된다.
찢어진 소녀, 찢어진 옷자락이 날린다. 사람들이 폭발한다. 내 밖의 모든
사람들이 폭파된다. 안테나가 흔들린다. 내가 흔들린다. 라고 생각하는 동
안, 소쩍 소쩍 그래, 참 이상하다. 이상하다?,
소쩍새는 폭발한다 부분43)

위의 시는 꿈속의 꿈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이로써, 현실과 꿈, 꿈과


꿈은 이어지고 연속하는 시 세계의 작동 원리를 환기해준다. 여기서 꿈

쓰기가 아닐 것이며, 더 이상 언어가 아닐 것이며, 아무 것도 열어 밝히지 않을 것이”


라고 말한다. 즉, 박상순은 소통의 불가능성과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복’ 기법 등을 통해 반추되는 해석과 소통의 더 한 가능성을 환기한다. 제임스 크
로스화이트, 이성의 수사학: 글쓰기와 논증의 매력 오형엽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2
001, 16~24쪽 참조.
42) 박상순, 이승훈 엮음, 앞의 책, 370쪽.
43) 6은 나무 7은 돌고래 , 83쪽.
한국학연구

은 현실로부터의 도주를 위한 장치이면서, 꿈 장면은 이미지적 시 세계


의 환상적 국면을 나타낸다. 때문에, ‘;(세미콜론)’의 반복이 중요한 역할
을 하게 된다. ‘;(세미콜론)’은 문장을 끊었다가 이어서 설명하거나, 설명
을 추가하는 경우 덧붙이는 기호이다. 위의 시에 등장하는 ‘꿈;’, ‘꿈속
의;’에서의 ‘;(세미콜론)’은 꿈 장면에 장면을 인위적으로 잇는 동시에, 현
실과 꿈이 뒤섞이는 환상적 시 세계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시의 난해함
과 모호함이 위의 기호를 통해 상쇄되면서, 해석과 감상의 가능성을 환
기하고 상상계의 국면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의 진행을 따
라 “숲에 누워 꿈”을 꾸고 “꿈속의 운전사”가 되면서 꿈 세계에 동참하
지만, ‘폭파’와 ‘폭발’의 장면에 뒤섞이면서 오롯한 자기 상실에 이르게
된다. ‘나’의 타자인 “찢어진 소녀”가 그것을 은유한다. ‘ (말줄임표)’
는 ‘폭파’, ‘폭발’의 연쇄와 함께 환상과 혼란한 시 세계에서의 자기 상실
과 신체의 해체를 극대화한다. 시의 마지막 문장인, “이상하다. 이상하
다?”의 반복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나’의 당혹스러움을 보여준다.
결국에, 무의식적 꿈의 세계와 환영의 영역인 상상적 세계가 용융하는
시 세계는 폭발로 하여금 ‘폐허’( 폐허 )가 되고, ‘나’는 그 모호성의 세
계에 휩싸이다가 오롯하게 무화된다. 따라서 ‘;(세미콜론)’과 ‘ (말줄임
표)’는 소통 불가능성과 와해하는 언어 운용을 넘어서 상징계로부터의
퇴행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박상순은 상상적 세계를 지나,
상상적 세계 이전의 세계에 순차적으로 도달하는 양상으로서, 시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기호의 반복을 활용한 측면도 있다.

전화 나의 이름 지우고 싶은 바뀐 뒤에도 불리어 질 이름 바꾸지


못하고 그 이름에게 온 전화 춤 에 대해 시 한 편 쓸 수 있을까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날으는 물고기 코끼리 흘러가는 구름 하지만
이름을 고치는 대신 나는 움직임을 거부했었다 행동의 죽음.
춤 약속 부분44)

44)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84~85쪽.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나무 그림자 엷은 밤 돌아가는 길 철공소 옆 파인 길 아래로는 마


른 개천 스러지는 작은 밤 아주 작은 밤 ? 손에 잡혀 내 손에도 잡힐
까?

나무 그림자, 트럭 위에 실린, 좁은 길을 돌아서, 불꺼진 창들이, 어둠 속


에 놓아 둔, 트럭을 타고, 누군가의 밤을 타고, 하늘을 달려, 별이 되어, 흐
르는, 흘러가는 밤
가는 길, 철공소 옆 부분45)

위의 두 시는 ‘ (붙임표)’가 공통으로 반복된다. 온전한 발화를 거부


하는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 (붙임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다. 또한, 미획득한 언어를 표시하고 텍스트의 해체를 지속하여 환기하면
서, 1차 소외의 전후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춤 약속 은 “움직임
을 거부”하는 화자를 보여준다. 화자의 이름 바꾸기는 거절되고, 화자는
“이름에게 온 전화”를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이름’은 위치, 자리 등
의 상징계의 질서에 예속되는 자질이다. 즉, 위의 시는 앞부분에서부터
‘이름’, ‘약속’ 등을 거부하고 회피하면서 상징계와 거리를 두려는 의도
를 숨기지 않는다. 요컨대, 소녀를 만나다, 스탬프를 찍다 에서의 “편지
쓰지 않기, 구멍 내지 않기, 뚜껑을 열지 않기, 팔을 뽑지 않기, 내장을
꺼내지 않기, 고양이 수염을 자르지 않기, 스탬프를 찍지 않기 ( )”로 이
어지는 ‘않기’의 반복적 언술처럼, 상징계를 나타내는 ‘약속’을 거절하며
‘놀이’46)의 한 양상을 나타낸다고 이를 수 있다. 화자는 곧바로, “움직이
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는 곧, “행동의 죽음”이며, “죽음으로 사는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올바른 자기 인식을 하지 못하고 퇴행
해가는 의식을 표시하는 대목인데, “움직임을 거부”한 언술이 이와 같

45) 위의 책, 87쪽.
46)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에 따르면 놀이는 생활의 진지함과 반대되는 행위이며,
그것은 노동과 반대되는 낭비된 시간으로 인식된다. ( ) 즉 놀이는 실질적 보상이
없는 무상성( )을 근본으로 한다. ( ) 놀이는 잠시 동안 하는 현실의 억압을
끊어버린다. ( ) 이러한 놀이의 가치와 진실은 모든 예술에 잠복되어 있는 중요한
동력이다.” 엄경희, 앞의 책, 49쪽.
한국학연구

은 징후를 추동한 것이다. 화자는 3연에서 “가위가 내게 있다면”이라


고 말한다. ‘가위’는 시의 뒷부분에서 “내 목을 스스로 잘라 버리기”와
관계 맺는다. 즉, “움직임을 거부”한 화자의 더 한 퇴행인 신체의 해체
를 주문하려는 의미를 나타낸다. 결국에 화자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 춤
약속 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하기에 이른다. 그의 몸은 “이미 죽은
몸”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는 화자가 오롯한 자기 상실에 이르렀음을
반추해준다. 이처럼, ‘ (붙임표)’의 반복을 통해 나타난 온전한 발화의
거절과 현실 세계와의 거리 두기는 1차 소외 이전의 징후를 특징적으로
표시한다.
가는 길, 철공소 옆 은 ‘ (붙임표)’와 ‘,(반점)’의 반복이 연에 따라
교차하며 나타난다. 두 기호는 동일한 구실을 하면서 문장을 나눈다. 화
자는 ‘철공소’라는 상징계의 기표를 피하여 이동하고 있다. “철공소 옆
파인 길”을 따라 ‘트럭’을 타고 가는 것이다. 여기서 ‘트럭’은 빵공장으
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1년 뒤 에 등장하는 ‘버스’처럼, 피난, 도망, 회귀
등을 위한 일회적 수단으로 동원되는 시어이다. ‘기차’, ‘비행기’ 등의 완
고한 기표와는 다르게, ‘버스’, ‘트럭’ 등은 화자의 이동을 조력하는 일시
적 수단이 되어준다. 나아가, 위의 시에 나타나는 ‘트럭’은 움직이는 ‘밤’
과 이동하는 ‘나’를 매개해주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화자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가고 있어? 가고 있지? 그래, 그래”
에서도 대답하는 상대방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나’는 누군가를
확인하며 “흐르고, 흘러가는 밤”의 속을 이동한다. 여기서도 2자 관계의
세계를 환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너의 관계가 모호함에 뒤덮여 있
어서 확인하기 어렵다. 시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듯, 너는 대답 없이 “내
머리를 들고 가는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그림자”인 탓이다. 이는 ‘나’
의 세계 인식과 자아 획득을 ‘그림자’라는 이마고를 통해 드러내므로, 거
울 단계의 국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외의 과정에서
‘ (붙임표)’와 ‘,(반점)’은 움직이는 ‘밤’과 이동하는 ‘나’의 묘연한 시적
정황에 모호함을 가중하며, ‘나’와 ‘그림자’의 관계도 굴절시켜서 자기
획득을 시의 마지막까지 지연시키는 효과를 준다. 이처럼 반복하는 문장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의 분절은 ‘나’의 자기 상실과 획득을 극적으로 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이


기도 하다.

약병 안에 붉은 벌레 /벌레의 작은 등에
떠다니는 검은 배 /검은 돛대의 /둥근 배
붉은 등이 날개 치면 /흰 파도
솟았다가 /가라앉는 흰 파도에 둥근 배 /사라지고
떠오르는 배 부분47)

위의 시는 ‘/(빗금)’을 통해 문장이 끊어지면서, 장면과 이미지의 분절


도 나타낸다. 박상순 시 세계의 주요한 특질이자 상상계의 징후이기도
한 시각성이 왜곡되어 확연하게 드러난다. 화자는 “약병 안에 붉은 벌레”
를 관찰하고 있다. 그 ‘벌레’에게서 “검은 배”와 “검은 돛대”를 떠올리고,
“둥근 배”와 “붉은 등”을 반추한다. “날개 치”는 모습을 통해 “흰 파도”
를 상상하고, “흰 물결”, “붉은 바다”의 이미지 대비를 ‘벌레’의 육체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후에 표현하는 “숨 끊어진” ‘벌레’ 역시, 화자의 끈질
긴 목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위의 시는 처음에서부터 끝까
지, ‘/(빗금)’을 표시하면서 ‘벌레’의 외양 묘사만 나타낸다. 물론, 비가시
적인 분위기도 주요하지만, 이는 응시와 시선을 통해 현시하는 시 세계
를 드러내므로, 위의 시가 시각성이 추동하는 이미지와 상상적 세계임을
지속하여 환기하는 것이다. 시의 내용에서 ‘벌레’는 “약병 안에” 갇혀, 서
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화자는 죽음으로 향하는 ‘벌
레’를 목격하였고, 그 자체를 술회하고 있다. 여기서 ‘/(빗금)’은 죽음으로
향하는 ‘벌레’의 가까스로 한 약동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나’와 ‘벌레’
의 감응을 환기해낸다. 이는 다시금 “약병 안”이라는 단서를 통해, 자기
인식의 굴절과 현실 세계와의 유리( )를 은유해주므로, ‘벌레’는 ‘나’
의 타자이자 투사의 대상일 것이라는 함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처럼,
박상순의 시에서는 단어와 문장, 문형, 기호의 반복 양상을 따라 나타나

47)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107쪽.


한국학연구

는 1차 소외 전후 양상을 지속하여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와해하고 분


리되는 ‘나’, 모호하고 소외하는 ‘나’, 발화와 텍스트의 해체 양상은 박상
순의 초기 시 세계에서 긴요하게 다루어야 할 시적 특질임이 분명하다.

5. 결론

본 논문은 박상순의 시 세계를 살필 예비적, 계기적 고찰을 하고자 했


다. 박상순의 시는 그동안, 난해한 시적 논리를 규명하고, 시 해석을 위
한 구조 및 논리 틀을 밝히거나 설정하고자 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때
문에, 기호와 이미지 등의 층위에서 난해성, 모호성 등이 발현하는 이유
를 해제하고 고찰하기 위한 일관된 논의가 주요하였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으로만 갈음하기에는 풍요한 고찰을 유보하겠다는 경구가 아닐는지
우려가 남았다. 박상순은 초기 시에서부터 일정한 시적 특질을 보이고
있었는데 바로, ‘소외’ 양상이었다. 1990년대의 시에는 전( )-상상계 및
상상계의 징후(1차 소외)가, 2010년대의 시에는 상징계의 징후가 특징적
으로 나타나며, 2000년대의 시에는 상상계와 상징계에 걸친 과도기의 징
후(2차 소외)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초기 시집인 6은 나무 7은 돌고
래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에서는 1차 소외의 전후 양상을
특징적으로 표시하고 있었는데, 상징계와 거리를 두려는 언술 양상은 거
듭 해석을 요청하며 새로운 분석을 유도하였다. 박상순은 이를 드러내는
방법으로써 ‘반복’ 기법을 활용하였다. 그는 소외를 각인하고 왜곡하고,
시의 리듬을 만들고 해체하는 등, 텍스트의 특유한 성질을 배태하는 데
에 반복을 활용하였다. 반복은 문체적 특질이자, 시의 리듬에 있어서 한
자질이므로, 박상순의 시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위상을 가졌다.
본 논문은 반복을 통해 나타나는 박상순 초기 시의 소외 양상을 살펴
보았다. 먼저, 상징계와 거리를 두는 화자의 시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
다. ‘나’는 세계와 결별하거나 현실의 증발을 경험하면서 ‘나’만 남은 세
계와 ‘나’와 너만 남은 2자의 세계를 시적 징후로 나타냈다. 이는 박상순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의 시를 추동하는 원리를 살피는 예비적 분석이었다. 다음으로, ‘1. 분리


하는 육체와 분실하는 자기’의 양상은, 육체의 와해와 자기의 분실을 통
해 드러난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요컨대, 눈, 흙더미, 폐허, 구름,
덩어리 등의 모호한 형상이 드러났다. ‘나’는 모호하고 구분 불가능한 세
계에서 제대로 수확되지 못한 자기 인식을 거듭 강조하면서 상상계 이전
으로의 퇴행을 반추하였다. 다음으로, ‘2. 거울 단계와 소외하는 나’의 양
상은, 상상계로의 진입에서 이루어지는 자아 획득 양상과 결부하여 확인
할 수 있었다. 요컨대, 너, 사람, 그림자 등의 타자가 등장하거나, 상징계
를 함의하는 기차, 비행기, 엘리베이터, 공장, 발전소 같은 기표를 배타하
며 사유가 드러났다. ‘나’는 타자를 통해 자아를 획득하거나 확인하면서
시각성이 추동하는 세계를 지속하여 환기하였다. 마지막으로, ‘3. 해체하
는 텍스트와 와해하는 말’의 양상은, 말과 언어 운용의 거절과 난독 및
오해를 유발하는 해체된 시 텍스트의 구조적 의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
었다. 요컨대, ‘;(세미콜론)’, ‘,(반점)’, ‘-(붙임표)’, ‘/(빗금)’ 등의 반복을
통해 문장을 나누며 드러났다. 소통 불가능성을 유발하면서도, 시각성을
통한 자기와 세계의 인식을 환기하며 소통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었다.
이상으로만 박상순의 초기 시 세계를 살피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
다. 라캉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보로메오 매듭으로 설명한 바와 같
이, 박상순의 시에는 맞물려 틈입하는 세 계( )의 징후가 혼재하여 나타
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상순의 시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살핀 논의가 없
지는 않지만, 라캉의 소외를 통해 집요하게 분석한 연구 작업은 아직 없
다. 박상순은 소외를 통해 시적 화자의 자아 및 주체의 상실과 형성, 자
기 존재성의 현시 등을 반추하면서, 독창적인 시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
의 시를 따라 변주하며 고지되는 소외의 양상은 지속하여 해명하고 고찰
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지만, ‘박상순 연구’의 커다란 맥락을 가늠하도록
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할 수 있다. 또한 반복하는 단어, 문장, 문형,
기호의 양상을 통해 위의 시적 특질을 살핀 측면은 박상순이 말한 시는
언어 예술이라는 선언의 증명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박상순은 시
인 이상의 시선집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의 해설작업에 대한 소
한국학연구

회를 밝히며, 이상의 시를 넘어 “절망과 실패를 안고 한국 모더니즘 시의


역사는 더 생생하게 이어질 것이라고”48) 한국 문단의 미래를 그렸다. 박
상순 역시, 한국 모더니즘 시의 역사의 한 기점을 나타내는 주요한 시인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탁월한 언어 운용을 통해 시 세계의 독특한 형상화를 성취해냈
다. 그의 시가 난해성, 모호성 등의 논의로 귀결되었던 것도, 시에서의
언어성을 바라보는 그만의 미적 태도가 녹아든 사정이 있다. 시인 최승
호는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표4에서 박상순은 “초현실풍의
시를 쓴다”며 “앙리 미쇼보다 더 어렵게 시를 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앙리 미쇼는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화가이자 시인이다. 박상순의
시에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가 분명하게 스며있는데, 라캉 역시 초현실
주의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작품 세계와 친연성을 갖는 논의를 피
력한 내력이 있다. 요컨대, 르네 마그리트, 한스 홀바인의 작품과 그의
담론을 매개한 대목이나, 초현실주의 잡지 미노또르 창간호에 살바도
르 달리의 글과 라캉의 글이 함께 실린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
다.49) 이는 다시금 박상순의 시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담론의 조응을 환
기해낸다. 박상순이 미술과 친연성을 맺어온 생활과 창작의 시간이 시에
반영된 까닭도 있으므로, “초현실풍의 시” 세계는 그만의 심미성과 생활
상, 세계 인식의 용융을 통한 언어관을 드러낸다. 박상순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한국 시단의 탁월한 소산임
이 분명하다. 본 논문이 본격적으로 이어질 ‘박상순 연구’의 다각도로의
고찰을 위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48) 박상순, 이상, 에필로그 (해설),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 민음사, 2019, 379쪽.
49) 마단 사럽(Madan Sarup), 알기 쉬운 자끄 라깡 , 김해수 역, 백의, 1994, 48~48쪽 참조.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참고문헌

기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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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세계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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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논저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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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경희, 은유 , 모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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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평론가협회, 인문학용어대사전 , 국학자료원, 2018.
제임스 크로스화이트(James Crosswhite), 이성의 수사학: 글쓰기와 논증의 매력 ,
오형엽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2001.

논문
이기주, 박상순 시에 나타난 영화 이미지 연구 , 한민족문화연구 73호, 한민족
문화학회, 2021.
정민구, 박상순 시의 기호학적 읽기: 텍스트의 의미화 과정과 상호-텍스트성을
중심으로 , 용봉인문논총 38호,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1.
한국학연구

Abstracts

A Study on ‘Alieanation’ in the Poetry of Park Sangsoon


- Representation of Alienation through ‘Repetition’ in Early Works

Kim, Seon-Woo
(Korea University)

Previous studies on Park Sangsoon invariably focused on shedding light


on the abstruse and ambiguous symbols and images found in his poems.
However, on a closer examination, his poetry ins manifested through
alienation. Alienation is one of the key concepts of Jacque Lacan’s theory.
To Lacan, alienation is an unavoidable result of the formation of the self
and the subject. Park publishes one or two poem collections every decade,
and his poems represent alienation in different ways in each period. This
study provides a preliminary analysis on how alienation is represented in
Park’s early poems, to lay a foundation for overviewing his poetry. Park
Sangsoon’s early collections, such as Six is a Tree and Seven is a
Dolphin and Marana, the Heroine of a Cartoon Porn , show conspciuous
signs of primary alienation. He uses repetition as a way to express
alienation. In his poems, alienation is represented through repetition.
Repetition is a discursive pattern that represents the distancing of oneself
from the symbolic and the return to the imaginary. The legitimacy and
likelihood of alienation is obtained through the repetition of words,
sentences, sentence structures, and signs, through which repetition becomes
a stylistic quality. Separating bodies and self-loss, the mirror stage and
alienating ‘self,’ and deconstructing texts and collapsing words represent
poetic signs manifesting through repetition. These aspects warrant deeper
academic treatment because they are also related to the surrealistic
박상순 시의 소외 양상 연구 초기 시집에 나타난 반복 을 통해 김선우

poem-writing that heavily permeate the poetry of Park Sangsoon.

Key words: Park Sangsoon, Six is a Tree and Seven is a Dolphin , Marana, the

Heroine of a Cartoon Porn , Jacque Lacan, Alienation, Primary

alienation, Mirror stage, The imaginary, Repetition

김선우

소 속: 고려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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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22. 1. 29 / 심사완료일 2022. 3. 12 / 게재결정일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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