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161

천영록 (Julius Chun)

㈜두물머리 대표이사

KTB투자증권, 키움증권, 아이엠투자증권


등에서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커리어를 쌓았
습니다. 금융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백만 명
에게 최고의 자산관리를 제공하겠다는 일념
으로 불리오를 창업하였습니다.
목차

1부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04

1. 사고! 05

2. 전수 18

3. 인간지표 30

4. 선수 선발 40

5. 금단 55

6. 기법 72

7. 원클릭 92

8. 번트 105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16

2부 투자의 룰 : 소수결 141

3부 레짐을 이해하라 152


1부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4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 사고!

필자는 선물옵션 트레이더로 6년여를 생활하였다.


지난 2년간 불리오 서비스를 개발하면서 일반인
들에게 꼭 필요한 반자동화된 매매 시스템과 교육
시스템은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해오고 소통해오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프로 투자자로 살면서 느낀
점들을 동료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시간이 날 때만 쓸 것이기 때문에 다소 느려
질 수 있는 점은 미리 양해를 부탁드린다.

1. 사고! 5
  선물옵션 트레이딩 룸은 증권사가 자기자본을
가지고 선수들을 고용해서 운용을 시키는 곳이다.
‘선수들’의 조건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 ‘신기하게
돈 버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수익으로 ‘증명’만 하
면 뽑아서 운용해본다. 경영진은 물론이고, 학계나
업계 전체에서도 이들 트레이더들이 구체적으로
돈을 어떻게 찍어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
지 못한다. 일종의 전문 도박꾼들인 셈인데, 그래
도 회사가 어려울 때 수익을 계속 내주다 보니 반
신반의하며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트레이더
들도 회사나 심지어 동료들에게 자신의 매매기법
을 죄다 설명하진 않는다. 일종의 영업기밀인 셈이
다. 그러다 보니 회사 입장에선 리스크 관리가 힘
든 면이 있다. 실제로 낱낱이 설명해준다 한들 리
스크 관리팀장이 트레이더 출신이 아니라면 애초
에 리스크의 본질을 전부 이해하긴 어렵다. 더불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6
어, 돈 잘 버는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풍
토 때문에 더더욱 관리가 어렵다. 이러한 문화 때
문에 수많은 금융 사고가 발생해왔다고 얘기할 수
도 있지만.
 
그러다 보니 트레이딩 룸은 기본적으로 매우 비
대칭적인 협상이 오가는 곳이다. 아주 쉬운 매매를
하고 있어도 돈을 꾸준히 벌면 높은 인센티브율을
보장받을 수도 있는가 하면, 몹시 어려운 매매를
하고 있어도 손실이 발생하면 아차 하는 순간 잘려
버린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돈 버는 트레이더는 데
리고 있고 돈 못 버는 트레이더는 이유 불문 잘라
버리기를 반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
다. 한마디로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특수능
력을 지닌 용병집단이다.
 

1. 사고! 7
이런 정체불명의 집단을 경영자는 왜 데리고 있
는 것일까? 한 회사의 경영수익이 소수의 전문 타
짜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증권사가 아니라면
그 어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사업체에게도 용인하
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왜 증권사만 이것을 당당하
게 지속하는 것일까? 우스갯소리로, 경영자의 임기
가 워낙 짧아서 사고가 날 때 나더라도 자기 임기만
잘 채우면 된다는 식이란 속설도 있다. 즉 아주 위
험한 매매를 하고 있는 트레이더라도 단기적인 의
미에선 수익에 보탬이 되니 경영진 개개인의 커리
어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그럴 수도 있다.
 
잠시만 트레이딩 팀들을 위한 변호를 덧붙여본
다. 관리자가 트레이딩 기법을 전부 이해하기 어
려운 만큼, 절대적인 손익에 대한 관리는 매우 철
저하다. 예컨대 하루 손실 한도가 1천만 원이라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
손실 한도를 1원이라도 어긴 사람에겐 경고가 들
어가고, 3회 어긴 사람에겐 매매 정지가 내려지고,
월간 손실 한도나 분기 손실 한도를 못 지키는 사
람, 수익을 못 내는 사람은 재빨리 해고된다. 손실
한도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자체가 다양한
리스크를 높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손실 한도
를 어기고 발생시킨 손실에 대해서 회사가 개인 트
레이더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음을 계약에 명시한다. 회사로서는 이론적인 손
실 가능 폭이 한정된 셈이다. 수익을 못 낸다는 개
념 자체도 잔인할 정도다. 연간 자기 밥값인 2억
원 수준을 못 벌면 잘린다. 그런데 초기엔 리스크
관리가 철저하므로 2억 원을 벌 수 있는 자원을 거
의 안 준다. 매매의 질과 손익의 안정성, 칼 같은
손실 한도 실행으로 회사와의 신뢰가 어지간히도
쌓여야 자기 밥값을 할 기회나마 주어지는 것이다.

1. 사고! 9
주니어가 양성되기 매우 힘든 조건이다. 그런데도
주니어를 양성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트레이딩 룸
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필자는 항상 윗분들
께 건방질 정도로 호소해왔다. 안타깝게도 나도 여
러 후배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사수 잘 만난 부사수
들은 몇 년간 돈을 못 벌어도 안 자르기도 한다던
데 참, 아직도 생각할 때마다 속 쓰린 기억들이다.
 
트레이딩 생활을 하며 가장 두려운 단어는 ‘사고’
였다. 사고는 두 종류의 사고가 있다. 본인이 매매
하다가 얼어버려서 생기는 사고와 순수한 착오매
매 같은 것이 있다.
 
손실 한도를 못 지키는 데서 생기는 사고, 트레이
더는 물론 모든 투자자가 살면서 한 번쯤 겪어 볼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0
것이다. 트레이더는 트레이딩이 잦다 보니 인생에
여러 번 겪는 사람들도 있다 (그 전에 잘리지 않았
다면). 특히 예상치 못한 변동성 때문에 예상치 못
한 손실 폭에 놀라서 정신이 날아가 버리는 경우를
아주 많이 봤다. 눈앞에서 커리어는 물론이고 인생
마저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터. 어제 새 자동
차를 샀는데 오늘 말도 안 되는 손실을 보면서 당
장 내일부터 직업을 잃을 것이고, 자동차 할부금
은커녕 전세대출도 못 갚게 생겼고, 엄밀히 말하
면 구상권 청구 재판이 이어지며 파산신청을 하고
이혼절차를 밟는 자신의 미래가 상상이 될 때 사람
은 누구라도 얼어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특히 처
음 겪어본 상황이라면 말이다. 최순실이 검찰 앞
에 섰을 때의 느낌이 아닐까. 진짜 X 됐구나, 하는
생각이 피부로 확 와 닿는 그 순간 말이다. 이럴 때
대개는 포지션을 청산조차 못 한 채 손실이 급격히

1. 사고! 11
불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럴 땐 경험 많은 시니어가 차분하게 해
당 트레이더를 밀쳐내고 청산 주문을 넣어준다. 안
타깝게도 이런 케이스들은 대개 청산 타이밍을 놓
쳐서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추가된다. -1억 원에
끊었으면 좋았을 것을 -10억에 끊으려고 하니 유
동성이 없어서 -30억 원에 끊는 식이다. 유럽사태
때는 한 선물옵션 투자자문사에서 700억 원짜리
손절매 청산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한다. 소문에 의
하면 대표이사가 운용역들을 밀쳐내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버티다가, 한 운용역이 쌍욕을
하면서 대표이사를 내동댕이치고 청산했다고 한
다. -100억 원에 끊었으면 회사가 큰 타격을 입긴
했겠지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였을 텐데
정신적 혼란에 빠진 대표 덕에 임직원이 줄소송을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2
당했음은 물론 투자자들의 피해가 쓸데없이 막심
해졌다. 마지막 남은 손실 한도라는 약속을 멘붕으
로 인해 지키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의 손절성 포지션 청산만큼 투박하고 무식
한 매매가 없다. 한 주요 주체의 손절매가 촉발될
때는 하늘에 불꽃이 터지듯 장렬하고 안타깝게 시
장에 각인을 남긴다. 물론 그때까지 자금이 남아있
는 사람들에겐 매우 큰 기회이기도 하다. 조지 소
로스는 이런 손절매 촉발 타이밍에 대한 전문성이
대단했고, 나 역시도 이 특정 타이밍 매매를 많이
활용했다. 연구만 많이 하면, 되려 쉬운 매매다. 반
면 조지 소로스도 1987년 검은 월요일 며칠 후에
손절매 주문을 냈다. S&P500 롱, 일본 숏을 가지
고 있던 조지 소로스가 2차 하락의 징조를 보고 시
장가에 손절매 주문을 걸자 이 주문의 막대한 사이

1. 사고! 13
즈에 놀란 브로커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
졌다. 소로스의 후계자로 지목받으며 절친하게 지
내던 드러큰밀러도 당시에 대량 매도 주문으로 호
가가 50% 밀리는 것을 보며 이것이 바닥이다 생각
하고 재빨리 매수 주문을 들어갔다고 한다. 오후에
소로스한테 전화해서 ‘소로스 형님! 시장이 더 빠질
수 있다고 며칠 전에 말씀드렸는데 오늘 아침에 이
상한 넘 손절매 치는 거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습니
다! 형님이 맞았어요. 지금이라도 사야 해요!’ 라며
눈치 없이 떠들었다고 한다. 소로스는 ‘…난.. 당분
간 상처를 핥으며 잠수 탈거야’ 라고 전했다나?
 
이런 게 사고인 셈이다.
 
반면 착오매매 사고도 자주 나타난다. 소위 ‘한
맥 사태’가 가장 유명했지만, KTB 증권도 알고리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4
즘의 어처구니없는 오류로 100억대 손실이 난 적
이 있었다. 비슷한 건수는 작고 큰 차이일 뿐 많이
있었다. 다만, KTB 증권에서 문제의 사고가 터진
2013년 6월 25일 날 나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
에 어제처럼 생각이 난다. 해괴한 사건이었다.
 
나는 당시 새로 적응한 매매 스타일로 특히 그 날
역대 최대 손익을 벌고 있었다. 아침부터 느리게
움직이던 하락 추세에 편승해서 풋옵션을 아주 많
이 매수하고 있었고 시장은 약속된 패턴으로 하락
하여 옵션들이 들썩이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트레이딩룸에서 매매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후에 엄청난 주문사고가 선물 시
장에서 나타나더니 본부가 술렁거렸다. 주문사고
의 규모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선배들이 서로
부르고 뛰어다니고 난리도 아니었다. 매매에 방해

1. 사고! 15
될까 봐 나한텐 정확히 설명해주진 않았는데, 우리
팀에 갓 전입해온 분이 연루된 악성 사고였다. 심
지어 그분은 당일 출근도 안 한 상태. 금요일 날은
나한테 ‘천 과장의 매매를 보고 있으니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매매 기법을 완전히 바꿔보고자 한
다.’라는 불길한 소리를 남기고 휴가를 낸 상태였
다. 어떻게 휴가를 낸 분이 이런 사고에 엮여 있는
가, 머릿속에 온갖 께름칙한 생각들이 스쳐 갔다.
그 직전 2년여를 우리 팀장님과 우리 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인생을 전부 쏟아부은 터였다. 당일
매매를 정리하고 축하받을 새도 없이, 상황이 얼마
나 상상을 초월한 영역에서 발생했는지를 전해 듣
고 충격을 받았다.
 
소위 KTB 사고라고 불리는 이 사고는 다음번에
그 내용과 함의 점을 한번 깊이 있게 다뤄볼까 한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6
다. 로보어드바이저의 시대가 오면 어설픈 팀들에
서 수없이 반복될 사고들이기 때문이다.

1. 사고! 17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2. 전수

슈퍼 트레이더들이 제자를 양성하다.


 
KTB 알고리즘 사고에 대한 얘기는 조금 뒤로 미
뤄두고, 트레이더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화들을 통
해 소개하고자 한다.
 
트레이더가 제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흔히 도제식
교육에 비교한다. 도제식 교육은 일반적으로 두 가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8
지 이면이 있다. 영업비밀을 전수함으로써 제자가
막대한 금전적 혜택을 얻을 수 있기에 그만큼 미리
생색을 내고 괴롭히는 사람들의 심리를 빼놓을 수
없다. 좁은 곳에서 폐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사제
간의 권력의 차이가 클수록, 제자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이나 혹은 불이익이 클수록 이런 권력형 괴롭
힘은 심하지 않은가. 심지어 학계 교수님들도 이렇
게 치사를 떤다고 하니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면인
가 보다. 또 다른 면은 소중한 기술이니만큼 비인
부전을 하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되지 않은 자에게
좋은 기술을 가르쳐봐야 나쁜 곳에 쓰일 것 아니겠
는가 하는 우려이다. 이는 금융인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트레이딩 룸은 사
고에 예민하다 보니 더욱 그렇겠다. 그러나 통상
명분과 변명이 지저분하게 뒤섞여 갈등으로 이어
지니 결국 아름다운 사제관계가 완성되기 힘든 게

2. 전수 19
현실이다.
 
트레이딩은 기술 자체가 워낙 일반인이 접하기
힘들고 진입장벽이 높으므로 트레이딩 기술을 익
힌 사람들은 후학 양성에 야박하다. 희소성 자체가
트레이더들의 몸값을 높게 유지해주는 법이니, 그
희소성을 굳이 희석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돈을 버는 방법들은 간단했다. 찾기가
어려울 뿐. 그러니 쉽게 떠먹여 주겠는가. 그래서
모든 것은 비밀의 장막 뒤에 있었다.
 
그럼에도 몇몇 트레이더들은 후학 양성에 아주
열정적이었다.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산업
의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나갔던 분들이다. 이런
트레이더들의 심리는 ‘터틀 트레이딩’이라는 80년
대의 전설적인 실험에서도 나타난다. 리처드 데니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20
스라는 당대 최고의 트레이더가 어느 날 친구 윌리
엄 에카르트에게 ‘나 같은 트레이더는 얼마든지 양
성할 수 있어.’ 라고 말하자 친구는 ‘너는 타고났기
때문에 절대로 복제될 수 없다’며 내기를 제안했
고, 그에 따라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뽑아 트레이더
로 양성하는 과정을 여러 번 진행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실제 교육 시간은 몇 시간에 불과했다
고도 한다.
 
트레이더는 스스로 내면 아주 깊은 곳에서 특별
한 질서를 찾아낸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모
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인데 발견되지 않은 질서인
지, 내 마음속에만 있는 특별한 무엇인지에 대한
실존적 호기심이 일어나 참을 수가 없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을 필자 역시도 여러 번 반복해봤
다. 결과는, 트레이딩 사제 관계에서 역대 최고의

2. 전수 21
제자라 할 수 있는 브루스 코브너의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레이딩은 “배울 수는 있어도 가
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말이다.
 
후학 양성에 있어 가장 파격적이었던 분은 대우
증권의 트레이더 J.S 셨다. 나에겐 까마득한 선배
되시는 분이라 길거리에서 인사를 드린 정도밖에
연을 나눠본 적은 없지만 트레이더로서도 리더로
서도 대단한 분이었다. 안정적이고 뛰어난 수익도
대단했지만, 매매기법 자체를 대중 앞에서 동영상
화면으로 전부 공개하시며 해설까지 해주셨다. 이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그것도
당시 10년이 넘게 손실 없이 수익을 쌓고 있는 대
형 증권사 팀장님의 매매였다. 이 분이 없었다면
다른 트레이더들도 감히 후배를 키울 생각을 못 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22
지 않았을까 싶다. 이 분의 기법은 다행인지 불행
인지 너무나 익히기 힘들어 실제로 익힌 후배는 거
의 없다는 슬픈 후일담이 있다. 마치 밥 로스처럼
“어때요. 참 쉽죠?”를 반복한 느낌이랄까.
 
이분의 매매를 듣자 하니 한번 진입해서
+20~50만 원을 벌거나 0원에 도망치거나를 종일
반복해서 하루평균 천만 원 정도를 버는 단타 매매
였다. 매일 벌 뿐 아니라 일 년에 2~30억씩 꾸준
히 버는 그야말로 돈 찍어내는 공장이었다. 이런
기법을 스캘핑이라고 하는데 훗날 다시 설명하겠
지만, 선물 스캘핑, 옵션 스캘핑, 주식 스캘핑은 각
자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세대별 변화를 계속했다.
이 분의 매매는 소량의 선물로 스캘핑하는 방법론
중에 가장 안정적인 기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2. 전수 23
이와 비슷한 기록을 세운 분 중에 고졸 출신으로
백 오피스 업무를 보던 어느 누님이 계셨다. 전설
에 의하면 어느 날 팀장이 ‘매매 한번 해볼래?’라
며 기회를 줘 시작한 옵션 스캘핑 매매에서 그날
부터 300일 이상 연속으로 수익을 내며 업계 최강
자로 군림했다고 한다. 불법의 영역이겠지만 누군
가 이 분의 모니터를 몰래 녹화한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이 분이 첫 은퇴를 하고 한참 후의 일이다.
종일 또각 또각 마술처럼 돈을 뽑아내는 게 ATM
이나 다름없었다. 보고도 그 기법을 다 알 수 없으
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향후에 이
영상을 구경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참고로
이 기법은 당시에는 통했으나 나중에는 통하지 않
는, 시대적인 제약조건을 활용한 방법이었다. 항상
첫 시장을 찾아낸 자에게 부와 명예가 몰리는 법이
아닐까. 그러나 이 영상이 유출된 탓인지, 아니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24
사람들이 그 기법을 유추한 탓인지, 한 세대의 옵
션 스캘퍼가 같은 방법론을 깨닫고 매매하여 큰돈
을 벌었다. 이 누님께서는 장중에 한 성깔 하셔서
매일 모니터와 마우스를 집어 던지시는 취미가 있
으셨는데, 주위에서 방음 유리 벽을 설치해주었다
고도 한다. 이 분은 은퇴 후에도 호쾌하게 트레이
딩 룸에 놀러 오곤 하셨는데, 이분께 함부로 대하
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전설이기 때문
이 아닐까. 성격 아주 좋아 보이신다고 주위에 여
쭤보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 여장부
야’라고만 하셨지.
 
여하간에 J.S 선배님 같은 분들의 긍정적 영향을
받아 꽤 많은 트레이더들이 소수의 후배라도 최선
을 다해 가르쳤다. 대신 그런 소그룹은 철저하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이었으며, 상당히 강력한 공동

2. 전수 25
체 의식 내지는 군기로 유지되었다. 일종의 문하생
집단이었다. 문제는 대다수 트레이더가 자신의 것
을 제대로 가르치는 방법을 몰랐고, 너무 신기에
가까운 기술들을 끝없이 설명하는 방식, 트레이딩
에 훈수를 두는 방식으로 가르치다 보니 제대로 성
장한 제자들이 극히 소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
신의 막대한 손익으로 제자들의 비용을 충당하며
5~6명의 제자를 키우던 트레이더들의 조직을 보
면, 결국 제자 중 누구도 제대로 올라서지 못하고
마이너스만 누적하다가 팀이 해체되기 일쑤였다.
이것이 제자의 탓인지 스승의 탓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에 눌린다’는 표현 마냥,
뛰어난 트레이더 옆에 있으면 대체로 잘할만한 사
람도 주눅이 들어 모든 매매가 엉망이 된다는 점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26
다. 조금만 잘못해도 혼이 날까 걱정이 되고, 조금
잘하기 시작할 땐 더 욕심을 부리게 된다. 잘해봤
자 칭찬을 못 듣기도 쉽고, 아무리 잘한들 팍팍 밀
어주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살고자 독립을 한다. 팀워크가 이뤄지지 않으면 의
리를 지킬 여유조차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식으로 독립한 어느 선배는 본인의 사수를
떠올리며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가장
훌륭한 사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후, 자
기 기법의 한계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까지 몸소 보
여주고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사수
다’. 그분의 사수는 엄청난 커리어의 끝에 큰 손실
을 보며 그 기법의 한계를 가장 식은땀 나는 방법
으로 증명하였다. 그래서 그 제자는 그 기법의 마
지막 약점들을 보완하여 그다음 경지로 승화시켰

2. 전수 27
다. 이 말이 얼핏 건방지고 배신적이지만 한편으론
겸양이 담겨 있었던 것은, 자신의 후배에게도 그런
최후를 보여줌으로써 매매가 세대를 거치며 발전
하길 기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
켜보면 이런 정신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 같다.
특히나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매매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또, 완벽한 정권도 없고 완벽한 정치도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 속의 모든 이들이 가
져야 하는 겸양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이성계가 이방원을 께름칙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트레이더들은 후배를 다소 께름칙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오만을 돌아보면, 후배의 오만
속에 자신이 얼마나 쉽게 잊힐 존재인지 눈에 선할
것이다. 잘 키운 자식한테 잡아먹힐 어느 독거미의
마음이 아닐까.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28
 이렇게 한 세대의 트레이더들이 정규직으로 시
작해, 철저히 베일에 싸인 방식으로 돈을 벌고, 동
시에 성과급율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여가며 업계에
서 트레이더라는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러나 한국
트레이딩 룸의 비극은 차세대 트레이더들의 부재
에 있었다. 비인 부전이, 사람이 없어 전수할 수 없
는 시대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2. 전수 29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3. 인간지표

아주 말이 많은 선배가 있었다. 모르는 게 없는


선배라고나 할까, 반짝이는 눈으로 시장이며 지표
며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많은 얘기를 해주셨
다. 그런데 나는 배은망덕하게도 대화가 불편했다.
다 뻔한 얘기기도 하거니와, 말을 거는 타이밍도
안 좋았고 말을 끝낼 줄도 모르셔서 퇴근길에 만나
면 한자리에서 한두 시간씩도 얘기가 이어지곤 했
다. 그것만으로는 후배에게 이 넓은 트레이딩의 세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30
계를 이해시키시려는 그분의 호의를 싹퉁머리 없
이 무시한 게 될 테지만, 조금 더 비겁하게 얘기하
자면 그분은 돈을 잘 못 버시는 분이었다. 컴비네
이션으로 돈도 못 버는 선배가 끝도 없이 훈계인지
변명인지 모를 얘기를 늘어놓으니 듣기가 벅찼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불
편할 수 있는 이야기.
 
이번 얘기는 패자에 대한 이야기다. 투기가 오가
는 이 바닥에 흥미로운 인간군상이 정말 많지만,
그중에 가장 이야기하면 입에 쓴맛이 남는 방 안의
코끼리는 바로 ‘루저’다. 루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저것이 나의 모습인지, 혹은 내일의 나의 모습이
되진 않을지, 저 사람을 사랑해야 할지, 지독하게
미워해야 할지 정신이 아늑하다.
 

3. 인간지표 31
워런 버핏은 ‘카드를 칠 때 호구가 눈에 띄지 않
으면, 내가 그 호구인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
다. 우리 선량한 한국 사람들은 팀 내에 호구나 패
자를 인지하거나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남
일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좁은 사회에서 애
써 사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실패하는 모
습을 진정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매
에 있어서는 소위 ‘인간지표’가 낭중지추처럼 바지
를 뚫고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느 순간부터였
는지 점잖은 선배들이 후배를 위하는 마음에 비기
를 알려줄 듯 머뭇거리다 속삭여줬다. ‘매매를 잘
하고 싶거든 네 옆에 제일 못하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해봐….’ 반면교사의 개념을 넘어 이들 인간지
표는 항상 가장 잘못된 순간에 가장 잘못된 예언을
한다. 예컨대 코스피가 5일째 올라가고 있을 때 평
소에 주눅이 들어있던 최하위 트레이더가 목소리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32
에 갑자기 힘을 싣고 ‘봤지? 내가 장 오를 거라 그
랬지? 봤지? 이제부터 상승장이야~’ 라고 외치기
시작하면 뒷머리가 쭈뼛이 서며 묘한 영감 같은 게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일부 팀원을 무시하거나 희
롱하는 심리 때문이 아니다. 이런 인간지표는 트
레이딩 룸이라면 어디에든 있다. 이들은 8~90%
의 확률로 장을 정확히 반대로 본다. 무서울 정도
다. 이들이 내뱉은 모든 이야기를 다 합치면 솔직
히 50:50에 가깝겠지만, 특정한 때에 아주 정교한
반대 예언을 뚜렷한 방식으로 내뱉는다. 이에는 이
유가 있다. 이유는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
고, 이러한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고수익 트레이더
의 존재만큼이나 시장이 무작위 의하지 않다는 살
아있는 증거라는 점을 우선 곱씹어보자.
 
심하게 얘기하면 투자자가 셋만 모여도 한 명은

3. 인간지표 33
인간지표일 수 있다. 애널리스트들의 보고서를 (평
균 내서) 반대로만 매매해도 돈이 벌린다 하니 그
들도 인간지표요, 주간지 표지만 보고 (평균 내서)
반대로 매매해도 돈이 벌린다 하니 기자들도 인간
지표요, 기관매매도 트레이더들에게는 인간지표
다. 우리의 동료도 인간지표 취급하는 판에 남들에
게 점잖을 떨 이유는 없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개인 매매의 방향을 사람들이 인간지표로 흔히 쓰
지 않던가. 그런 씁쓸한 이야기다. 이런 인간지표
들은 수십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해왔다.
 
수십 년 전에 전자거래가 활성화되기 전에는 트
레이딩 플로어 (trading floor)라는 곳이 있었다.
증권사 직원들이 거래소에 모여 서로를 마주 보며
주문을 체결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에는 증권사 직
원 외에도 전문 트레이더들이 득실거렸고 지금도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34
득실거린다. 그 시끄러운 장터가 싫어 떠나는 사람
도 많았지만, 예로부터 장터에서 인간지표를 발견
하기 가장 쉬운 법이다. 당시의 트레이더들은 시장
의 움직임 자체보다도 항상 과장과 허영을 섞어 뻘
짓을 하는 인간지표들을 솎아내어 항시 그들의 의
견을 구하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하여 그 반대
방향으로 매매 했다고 한다. 포커판과 똑같다. 불
안한 자의 허황 성세는 숙달된 선수에게 다른 어떤
정황보다 정확하게 포착된다. 모두에게 허용되지
는 않는 재능이 바로 블러핑이기 때문이다.
 
주니어들은 대개 인간지표들이다. 기가 막히게
반대로 매매한다. 미국의 어떤 헤지펀드는 주니어
들을 뽑아놓고 매매를 시켰는데, 주니어들이 아무
리 손실이 늘어나도 온화한 미소로 용서해줬다고
한다. 전설적인 트레이더 한 명이 주니어 시절 여

3. 인간지표 35
기서 일했는데, 점점 수익이 개선되어 결국엔 큰돈
을 벌기 시작했다. 임원진이 그를 부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자네들의 매매를 정확히 반대로 체결해서 회사가
크게 수익을 내고 있었네. 근래에 자네의 포지션도
그렇게 매매를 했는데 이걸 어쩌나. 손실이 커져서
회사를 문 닫게 되었어.” 졸지에 돈도 못 받고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다. 이 경우는
실패했지만, 이런 전략이 트레이딩 룸에서는 정말
흔한 얘기다. 시장을 작두 타듯 반대로 매매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의 주니어며, 대다수의 일반인이
기도 하다.
 
이유는 시장의 움직임 자체가 이런 주니어며 일
반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어
쫄아 있다가, 불현듯 알 수 없는 용기가 솟구치는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36
순간을 비단 그 사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루저들이 정확히 똑같은 주파수 상에서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장 움직임에서 수익을 내
지 못해 불안한 사람, 손실이 쌓여 불안한 사람, 소
중한 돈을 날려 불안한 사람, 괜한 욕심이 치솟는
사람, 모두가 무의식중에 더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뚜렷하게 방향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장 패턴이 있
다. 이럴 때 그들은 자신 있게 예언을 외친다. 틀릴
가능성이 가장 작아 보이므로 명예 회복을 하고 싶
은 심리 일터. 이럴 때 시장만 바라보며 살얼음 위
를 걷던 트레이더들이야 말로 예언을 듣는 느낌이
다. 인간지표의 목소리 속에 용기로 가장된 허영과
불안감을 느껴버리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숙련된 트레이더들이 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팔아치우게 되어
있다.

3. 인간지표 37
 모든 투자자들이 그렇지만, 트레이더들도 입버
릇처럼 ‘이 방에 도청장치가 있어 내가 사기만 하
면 빠져’라고 되뇐다. 팀원들의 긴장을 녹여주려고
CCTV를 찾는 흉내를 내기도 한다. 절친했던 형님
은 시장(이라 쓰고 무의식이라 읽는다)을 속이기
위해 눈꼽만큼 사고 동시에 다른 계좌로 왕창 팔아
버리기도 했다. 그 형님은 도청장치 들으라고 어마
어마하게 엄살을 부리곤 했는데 “야!! 야!! 왜 이렇
게 빠져 도대체 왜 이렇게 빠졋!!” 고함을 치길래
포지션을 보니 몽땅 하방 포지션이었다. 인간지표
가 아니건만 행여 인간지표화 되고 싶지도 않은 처
절한 블러핑이 또 블러핑을 불러서 나중엔 듣는 내
가 다 헷갈리고 안쓰러웠다. 대부분 돈 버는 사람
들은 남들이 위기일 때 버는 법이다. 입으론 ‘X 같
네 왜 이렇게 움직여대냐’라고 쌍욕을 하며 매매를
하지만 뜯어 보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함이지 포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38
지션은 시장에 순응해 있거나 선도해 있었다.
 
흔히 트레이더들끼리 ‘매매에 재능이 없는 건 죄
가 아니야,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좋은 선택이야.’ 라고 위로를 한다. 실패하는 사람
이 너무나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에, 붙잡고 있는 사
람이 처절해 보인다. 트레이딩의 꿈, 일확천금의 꿈
만이 삶의 정도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도, 언젠간 나도 심리가 꼬여서 인간지
표로 추락하는 것 아닐까 하는 깊은 근심을 안고 산
다. 배가본드라는 만화에서 큰 상처를 입은 자객 츠
지카제 고헤이가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고백하는 장
면이 있다. ‘이 죽고 죽이는 나선에서 나는 내려간
다’, 라며 평안한 표정을 하는 고헤이 앞에 무사시
는 혼란에 빠진다. 트레이더들의 삶이 그러했다.

3. 인간지표 39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4. 선수 선발

내가 트레이더를 목표로 하게 된 이유는 모든 트


레이더 지망생과 똑같았다. 견딜 수 없이 높은 ego
때문이다. 미친 듯이 현란하게 돈을 긁어모아야 내
과대한 자의식이 충족될 것 같았다 (세상에).
 
엄밀히 말하면 돈 자체에 의미를 두진 않았는데,
더 엄밀히 말하면 돈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다만 지혜를 만렙으로 채우고 싶었다고 하면 대충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40
맞을 것 같다
 
계기는 이랬다. 주식 차트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
봤더니 삼성증권이 30% 정도의 박스권에서 움직
이고 있었다. 박스권이라는 단어를 당시엔 몰랐지
만,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대단히 신비하고 정
교한 패턴을 찾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다른 주식은
보지도 않은 채 어머니께 100만 원을 빌려 투자했
다. 그리고 한 달 후에 30만 원을 벌고 그만뒀다.
주식 따위 대단히 쉽고 하찮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
렸는지 한동안 쳐다보지 않고 잊고 지냈다. 그래
도 나름의 겸손이 있었나 보다. 그 정도의 경험으
로 내가 깨달은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고, 다
만 나의 주식 경험이 남들과 다르게 수익으로 끝났
다는 데서 잘난 긍지를 유지하는 정도의 요령을 부
린 셈이다.

4. 선수 선발 41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투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 주위에 넌지시 주제를 꺼내니 신
기한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전혀 토론을 좋아하
지 않는 이들이 투자에 대해서만은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주식은 무조건 잊고 묵혀놔야 해’, ‘주
식은 싼 걸 사야 해’, ‘주식은 재무제표를 달달 외
우면 돼’, ‘주식은 예술이야.’, ‘차트 속에서 그림을
보는 눈이 있어야 돼’, ‘주식은 가는 주식이 더 간
다’ 등등 알고 보면 서로 엄청나게 상충되는 얘기
를 엄청나게 그럴싸하게 역설하는 것이었다. 흥미
를 느꼈다. 이들 중 다수는 나보다 딱히 많이 알지
못할 터임에도, 이들 모두가 진리를 찾은 양 얘기
한다는 것, 그 자체로 그 진리를 직접 정리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저 수많은 담론 중에 오직
하나만이 정답이라면, 그 오해의 산더미 속에서 가
장 어려운 문제를 풀어 과대한 자의식을 충족시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42
고 싶었다. 쩐다.
 
남들이 자격증이나 열심히 따놓으라고 조언해줄
때 나는 해외 매크로 블로그를 읽으며 옵션 트레이
딩을 시작했다. 그것 역시 대단한 돈을 벌 목적은
아니었다. 실전을 경험하지 않으면 남들과 같이 탁
상공론 속에 헤맬 뿐, 깊이가 생기지 않으리란 생
각에 과감히 수강료를 내는 것이라 (라고 쓰고 돈
다 날려보는 것이라 읽는다) 생각했다. 투자 격언
에 “수강은 내가 선택하지만 수강료는 시장이 책
정한다” 비슷한 말이 있는데, 나는 어쨌든 적정한
수강료를 내고 제법 많은 걸 배우고 기록해놨다,
애초에 수강이 목적이었으니까. 시장 경험이 있으
니 옵션의 구조를 잘 이해할 수 있었고, 2008년
키움증권 입사 시에 단 한 명을 뽑는 서류 및 면접
과정에서 합격했다. 경쟁자는 약 백 명이었다고 한

4. 선수 선발 43
다. 남들과 달랐던 점은 자격증도 없으면서 옵션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점 아닌가 생각한다. 남들처
럼 자격증을 따는 데 시간을 썼더라면 면접의 기회
조차 없었을 것이라며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양 우
쭐해졌다. 역발상과 특유의 고집으로 얻은 성취감
이니 오죽했겠는가. 좋게 얘기한다면 하나에 빠지
면 미쳐버리는 근성과 뮤지션으로서의 집요함 같
은 것이 발휘되었다.
 
그때 나를 뽑아준 분이 해준 말씀은 이렇다. “옵
션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아서 좋아 보였지
만,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다 잊어야 해요. 이제부
터 레이시오를 통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다시 공부해야 할 거예요. 레이시오 매매는 옵션매
매의 완성판입니다.” 그때는 이 말의 의미가 얼마
나 깊은지, 내 삶을 얼마나 바꿀지 알지 못했다. 인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44
제 와서 돌아보면 6년 넘는 옵션 트레이딩의 생활
동안 하나의 묘기를 배웠다면 ‘레이시오’라고 생각
한다.
 
그 이후의 삶은 빠르게 건너뛰기 해보자. 이후 수
년간 신입사원들이 어떻게 업계에 들어오게 되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참이니까.
 
트레이더는 어떻게 뽑을까? 많이들 궁금해하는
대목이다.
 
공개채용으로 뽑을 수도 있고, 타부서 경력직을
뽑아 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인턴한테 짧게 기
회를 주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업계 전체에서 연
간 뽑는 인원이 총 수십 명 수준이니 사실 굉장히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입사할 수 있다. 대형사들은

4. 선수 선발 45
그래도 사내모집을 한 번씩 하는 편이지만, 중소형
사들은 누군가의 보증을 받다시피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워낙 입사기회가 적다 보니 인턴 모집 때 경
력이 지긋한 사람들도 정말 많이 지원하는 편이다.
일반 대학생들은 중소형사 인턴에 흥미를 못 느껴
서 많이 지원하지는 않는다. 사실 트레이딩에 간절
한 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커리어로서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도 않다. 피똥 싸다가 건강만 해치고
허영심만 잔뜩 부풀어 한동안 정상생활을 못 할 가
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가장 모범적인 방식은 인턴들을 주
기적으로 많이 뽑아, 배울 기회와 운용 기회를 주
고 몇 개월에 걸쳐 관찰한 후 그 중 탁월한 친구들
을 주니어로 전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
법이 좋은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되도록 많은 기회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46
를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각 후보자를 오랫동안 지
켜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 전체의 비정규
직 문제를 백배로 확대해놓은 듯한 방식이라 사실
당사자들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들을 처
음부터 정규직으로 뽑자면 기회를 받는 사람이 더
적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
이다. 뿐이랴, 이들이 팀에 합류해서 소위 악성 재
고처럼 팀 손익을 까먹다 보면 새로운 인력을 뽑
을 기회는 더 줄어든다. 그러니 여러 사람을 뽑아
싹이 안 보이면 빨리 자르는 것이 실은 트레이딩을
꿈꾸는 전체 인구엔 가장 공평하다. 대형사 중에
서는 대우증권이 이런 실험을 앞장서서 하기도 했
었는데, 안타깝게도 젊은이들한테 너무 가혹하다
는 뒷얘기가 무성하여 널리 확산되진 못했다. 뒷얘
기가 무서워 애당초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한테 사
다리를 오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아쉬

4. 선수 선발 47
운 면인데 참 세상이 이렇다. 옵션 시장 규제하고
ELW 시장 규제하고 ELS 시장 규제하듯이, 기회가
무엇이든 간에 피해자가 나오면 아예 기회 자체를
막아버리기 급급한 게 현실이다. (왜, 사고 난다고
칼이랑 망치랑 톱이랑 다 규제시키지)
 
그러나 이러한 인턴제가 잔인한 것은 ‘충분한 시
간’을 주지 못하기 때문인 부분도 있다. 트레이더
가 제대로 육성되는데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고 생각한다. 그러니 3개월 혹은 6개월 인턴 기간
에 ‘싹수’를 확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말이 6개월이지, 첫 달에 손실이 나면 위축되어 그
다음 달에 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고, 시간이 갈수
록 압박감에 시달려 뭔가 제대로 배울 시간이 부족
하다. 회사 차원에서는 ‘육성’에 뜻이 있는 것이 아
니라 ‘천재의 발굴’에 뜻이 있는 것이니 물론 할 말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48
은 없다.
 
한때 메리츠 증권이 인턴제 운영으로 그야말
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아니
면 자상하고 현명한 시니어들의 노력 결과였는지,
2008년경에 메리츠에서 천부적인 재능의 트레이
더가 여럿 나왔다. 특히 세 명의 신진 선물 스캘퍼
가 서로 자극을 주며 성장하여 일찍이 본 적 없는
레벨로 성장하였다. 메리츠는 이들로 인해 최소한
연간 100억 원씩 순이익이 증가했을 것으로 생각
한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이들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일주일에 벤츠 한 대씩 살 수 있
는 돈을 벌어가며 아무 때나 출근하고 아무 때나
퇴근했다. 공황장애라며 15분 만에 퇴근하는 분도
계셨다고 한다. 15분 동안 몇천만 원 벌어놓고 퇴
근하니 다들 경이의 눈으로 쳐다봤다나. 다음 기회

4. 선수 선발 49
에 이들 트레이더들의 얘기를 더 할 날이 오겠지
만, 확실한 것은 이런 신진 천재의 탄생이 다른 증
권사들의 신입 발굴을 부추기기도 하였다는 것이
다. (그리고 기준치를 과대하게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이런 신입사원들은 어떤 재능을 보고 뽑
아야 할까? 위에 언급한 트레이더 중 한 명은 테트
리스를 3시간 동안 할 정도로 동체 시력이 발달했
다는 전설도 있는데, 스캘핑에 분명히 도움이 되는
재주일 것이다. 나머지 두 분은 대학 포커 대회를
번갈아 가며 휩쓴 분들이었다. 또 가히 왕 중 왕이
라 부를 수 있는 한 트레이더는 암산 능력이 천부
적이었다. 여러 이유로 국내 가장 유명한 트레이더
중에 한 명인 P.C.Y 아저씨다. 이 형님은 사칙연
산을 컴퓨터만큼 빨리하는 터라 실제 장중에 호가
의 움직임을 보고 정확히 누가 몇 계약을 언제 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50
수했다 언제 매도하는지 다 계산한다고 하셨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엄청나게 숫자를 더
해서 암산을 부탁드려봤는데 정말 해내더이다. 그
러나 이런 묘기들이 트레이딩 자질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트레이더의 자질은 절제력, 집중력, 정신력, 습
득력, 겸허함, 독립적 사고력, 통계적 사고, 전략적
사고 등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은 이런 자질들
을 쉽게 갖추기 힘들어서, 특정한 영역에서 전문적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들이 트레이더로서 유리하
다. 예로 바둑인이라거나, 전문 군인, 스포츠 선수,
뮤지션 등 오랜 인고의 세월 동안 훈련을 거듭한
사람이 대체로 생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트레이
닝을 받지 않았더라도 이런 자질을 타고나는 사람
들은 따로 있을 것도 같다. 처칠은 ‘사람과 차의 공

4. 선수 선발 51
통점은, 뜨거운 물에 담가봐야 그 진짜 향을 알 수
있다는 점’이라고 다소 잔학한 얘기를 남긴 적이
있는데, 사실 트레이더도 이래저래 다각도에서 살
펴보지 않으면 그가 가진 정신력의 진짜 가치를 알
기는 힘든 것 같다.
 
한번은 당시에 매우 잘나가던 우리 회사 트레이
딩 본부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데 자격요건에 ‘돈 냄
새 잘 맡는 사람’이라고 적어둔 적이 있었다. 인사
팀에서 공개 채용 문서인데 의도는 알겠지만 이런
식의 표현은 너무 격 떨어지지 않냐고 항의가 왔는
데 담당 트레이더들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
는 걸 어쩌냐’라고 한참 웃지 못할 실랑이를 한 적
이 있었다. 그렇다, 다소 천박하지만 저렇게밖에
표현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돈에 대한 감각이 있
거나, 집요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돈을 안 쓰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52
고 혼자 배부르자고 욕심만 부리는 사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수익을 일으키는 데에 남들보다
관심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어야만 험난한 트
레이더 생활을 견뎌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해외 트레이딩 룸에서는 10억 손실을 낸 주니어
가 화장실에 달려가서 토하는 모습을 보며 ‘저 친
구는 멘탈이 약해서 안 되겠다’며 잘랐다는 이야
기도 있었다. 반면 옆에서 100억 손실을 내면서도
태연한 주니어는 ‘이놈 배짱이 제법 두둑하구나~’
라며 사이즈를 올려줬다 카더라. 재밌는 얘기고 한
때 부러워한 문화기도 하지만, 실제로 반대의 경우
도 설득력이 있다. 어느 산악인이 ‘산을 두려워하
지 않는 사람에겐 산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해주셨었는데,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트레이딩을 가르쳤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다. 카지

4. 선수 선발 53
노에 가보라. 다들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
이라 손실이 쌓여만 간다.
 
나는 개인적으로 프로 게이머들이 여러 가지 의
미에서 트레이딩에 적합할 거로 생각해 더지니어
스에 출연한 홍진호한테 연락도 해봤었다. 쪽지를
보내고 얼마 후 식당 옆자리에 있길래 살살 얘기를
풀어봤는데 매니저분이 꺼지라는 눈빛이어서 제대
로 못 꼬셨다. 엄밀히 말하면 홍진호를 꼬시고 싶
던 것은 아니고 그의 후배들을 소개받아 입사시켜
보면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구상이
었는데.
 
여하간에 신입을 뽑는 주먹구구식 방법들에 관해
얘기해봤다. 신입사원들이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54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5. 금단

2012년 1월 12일, 한 달의 수익이 결정된다는


선물옵션 만기 날. 돌이켜보면 그날은 절대 매매를
하지 말았어야 할 날이었다. 그러나 인생을 다시
살아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만 같아 두렵다. 승
부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군들 그 자
리에서 쉽게 멈출 수 있었을까. 오늘 하루만 더, 조
금만 더, 초롱불을 비껴 날갯짓을 하는 불나방 같
이 뛰어들지 않았을까. 승부의 노예가 되어가는,

5. 금단 55
금단의 열매에 대한 금단 현상. 오늘의 이야기다.
 
나는 가끔 강원랜드에 갔다. 전문 도박사나 다름
없는 트레이더 주제에 ‘도박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이 가당키는 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도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당구를 쳐보니 천장에
당구공이 아른거려 일상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승부에서 지면 참을 수가 없었고, 없는 돈으로도
내기라면 잘 받아주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박에 너
무 쉽게 빠지는 성격인 것 같아 일체의 고포류 (고
스톱 포커류)를 배우지 않고 살았다. 항간에는 O
형이 도박을 배우면 패가망신한다는 설도 있었다.
감정적인 편인 데다 자기주장이 강해서 과연 패가
망신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에 도박을 의식적으
로 미워하며 피해 지냈다. 그러나 트레이딩을 시작
하고 나서는 결국엔 이것도 운명이라 받아들이며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56
혼자 가방을 싸매고 강원랜드에 구경하러 다녔다.
 
카지노는 시장과 닮은 점이 참 많다. 도박쟁이에
대한 온갖 설명들이 난무하지만, 무엇도 대단히 합
리적으로 들리지 않은 것 마저 닮았다. 도박 중독
자들과 투자 중독자들도 많은 부분이 겹친다. 더욱
이 파생 쪽은 개인들에겐 그야말로 투자 폐인들로
이뤄진 최후의 노름판이라 하지 않던가. 포넷 같
은 게시판에 가보면 ‘파생쟁이’의 불안하지만 뜨거
운 동료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강원랜드
에서 도박쟁이들이 늘어놓는 무용담과 씁쓸한 결
론까지, 무서울 정도로 동일한 구조의 서사들이었
다. 다른 게 있다면 전체 시장에서 노니는 프로가
한 명이라도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정도.
 
나는 모니터 너머에서 상대하던 내 적수들의 눈

5. 금단 57
빛을 보고 싶었다. 공포에 젖었을 때, 희망에 찼을
때, 용기를 끌어낼 때, 자포자기할 때의 눈빛을 보
지 않으면 그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단체로서의
그들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누가 이 판의
호구인지 알 수 없으니, 내가 호구가 아닐까 하는
막막함이 싫었다. 우리의 눈은 일초에 최소한 서너
번은 움직인다. 사람을 직접 관찰하면 무의식적으
로라도 흡수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다.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의 표정을 하고 싶은지, 혹은
어떤 사람의 표정을 하고 싶지 않은지를 확인해야
했다. 젊은이가 혼자 인생말종들 사이에서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담배를 피우고, 모텔에 묵노라
면 듣고 보는 게 많다. 그 느낌들은 새벽 4시에 카
지노를 나올 때의 음산함으로 대변된다. 찌를 듯한
적개심과 혼란과 동종 의식이 새벽 안개처럼 파다
하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58
 돈은 별로 잃지 않았다. 애당초 의미 없는 베팅
을 했기 때문이다. 종일 홀짝에 거는 수준으로 놀
아 하루가 지나도 5만 원을 따거나 잃고 끝났다.
10만 원쯤 따게 되면 차비에나 보태 썼고, 돈을 조
금 잃는 중이라면 수강비라 생각하고 흔쾌히 두고
왔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이게 만약 내 전 재산이
라면 어떤 기분일지를 상상하며 마인드 트레이닝
을 하고 있었다. 홀수가 20번 연속으로 나오는 경
우가 나한테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 그럴
때의 감정은 어떨지를 생각해봤다. 일종의 모의매
매에서 내가 느끼는 충동이나 심리적 변화를 관찰
하며, 트레이딩 룸에서의 더 큰 유혹 앞에서 흔들
리지 않을지를 자문했다. 동시에 남들의 행동을 지
켜봤다. 이들이 얼마나 현명한지, 혹은, 어리석은
지를 내 눈에 남기고 싶었다.
 

5. 금단 59
이 모든 건 돈을 많이 벌기 전의 일이다. 돈을 벌
고 나서는 어땠냐면 베팅 그 자체가 업무처럼 느껴
져 고통스러웠다. 팀 차원에서 마카오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가는 비행기에서 블랙잭 통계표를 달
달 외워서 하룻밤 블랙잭을 해본 적이 있다. 옆에
중국 아주머니들이 훈수 두고는 잘되면 돈을 뺏어
가서 짜증이 났다. 같이 간 부사수 놈이 돈 다 잃었
다길래 밤늦게 열심히 베팅해서 150만 원인가 벌
어 쿨하게 손실을 메꿔준 기억이 난다. 주니어는
카지노에서 돈 잃고 나오면 메사끼 없다고 얕잡아
봐서 주눅이 든다. 아예 베팅을 안 하는 게 남는 장
사다. 여하간에 처음엔 블랙잭이 생소해서 재미가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기껏 최선을 다해야 49%
의 승률밖에 안 되는 게임을 하자니 막노동처럼 피
곤해서 죽을 맛이었다. 매매를 하며 매일 몇천만
원에서 많게는 몇억이 오가던 시절이었음에도 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60
렇게 적은 돈에는 더 큰 긴장과 피로감이 몰려온
이유는 확률 때문이었다. 내 매매는 승률이 70%가
넘었지만, 그래도 잃을 확률을 생각하며 매일 스트
레스를 견뎌왔는데, 적은 돈이라지만 더 낮은 승률
의 게임에서 왜 이렇게 고생하고 있어야 하는가 생
각이 들어 다시는 카지노가 가기 싫어졌다. 지금도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다. 지는 게임에 대한 증오
가 있어야 트레이더다.
 
어쨌든, 카지노에서 나는 모든 트레이더들이 내
면에 간직하며, 때론 달래고, 때론 경멸하고 있는,
폐인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카지노 폐인의 한 부류는 슬롯머신 앞에 앉아 있
다. 이들은 종일 슬롯을 땡긴다. 이번에 실패했으
면 다음에도 실패할 것을 알만도 한데, 오늘에 실

5. 금단 61
패했으면 매일 반복해봤자 안될 것을 알만도 한데,
이들은 동공이 풀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계속 돈을
펴 넣는다. 일종의 트랜스 상태다. 만성 알콜 중독
처럼, 매 순간 ‘멈출까’, ‘아니 한번만 더할까’, 두
가지 중 본능이 이끄는 쪽으로 선택을 반복한다.
이들의 무의식에는, ‘오늘만큼은’, ‘이번만큼은’,
‘나만큼은’ 특별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만이 지배하
고 있어, 매 순간 실망과 기대를 오가며 돈을 무한
히 넣고 있는 것 아닐까. 운명의 여신이 등 뒤를 스
쳐지나가는 감각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진화과정과 연관 있다고 생각한다. 이쯤이면 완전
한 폐인이라 답이 없다. 아마 스스로 이보다 나은
일상이 존재조차 할 수 없도록 삶을 파괴해놨으리
라. 숨을 쉬는 유일한 이유가 그 찰나의 긴장감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한편으론 슬
롯머신 앞에 앉아는 있지만, 지폐 따위를 접어 기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62
계에 영역표시를 해놓고 게임은 하지 않는 사람들
도 많다. 뭔고 하니 제갈량이 동풍을 기다리는 느
낌이다. 이 기계들 안에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나의 운이 움직일 것이라는 강렬한 기대를 자조감
으로 짓누르며 기다리는 중인 셈이다. 혹은 자리세
를 받고 개평이라도 받으려는 사람들이다. 스페인
내전 때 병원에 실려가는 부상병을 부축하는 동료
들이 값나가는 물건은 다 털어갔다 하던데, 이런
무리들이 떠올랐다. 다들 빚이 많아 카지노 안에서
만 마음의 평온을 느끼는 사람들 같았다.
 
또 한 부류는 뭔가 머리를 써서 도박을 하고 있
다. 알고 보면 동전 던지기나 다름없는 게임들에,
독특한 게임룰이 더해지면,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
들은 구조를 이해하고 전략을 짜느라 열성이다. 나
는 주로 룰렛을 했는데, 룰렛은 쇠공을 굴려 0~36

5. 금단 63
숫자 사이에 아무 데나 떨어지는 단순한 게임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구사하는 전략을 보니 가관이었
다. 슬롯머신과 달리 이곳은 사람들의 눈이 매섭게
반짝인다. 전쟁터에서 전술을 지휘하고 있는 제갈
량의 눈빛이다. 손가락 끝에서 이뤄지는 한치의 감
각으로 운명의 자취를 쫓으려는 듯, 몸짓이 예술적
이고 시적이다. 종이에 지금까지 나온 숫자들을 다
적어놓고 엄청난 분석과 고민을 하기도 한다. 과장
하자면 분수로 표현할 수 있는지, 혹시 피보나치
수열인지 확인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세련되게 미친 셈이다. 100만 원을 걸어 98만 원
은 딜러가 쓸어 담아 버렸지만, 남은 2만 원이 테
이블 위에서 36배가 불어나 74만 원 치 칩을 화려
하게 돌려받았다고 해보자. 룰렛의 재미는 주위에
서 부러움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런 순간의 우쭐
함인 것 같다. 니미, 방금 26만 원을 잃었는데도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64
말이다. 그 맛에 계속하나 보다. O형들이 패가망
신할 때는 룰렛 테이블을 찾아가서 하면 딱 적당할
것 같다. 우쭐하게 망할 테니까.
 
그나마 포커처럼 손님들끼리 다투는 게임에는 타
짜들이 숨어있다. 내가 몰라서 하는 소린지 몰라
도, 슬롯이나 룰렛 판에는 직업 투기꾼이 없다. 약
자를 공략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운을
시험하러 온 약자들일 뿐이다.
 
이런 분들의 모습을 시장에서도 많이 보았다. 프
로지망생한테서도 봤고, 취미로 시작한 사람들한
테도 봤다. 똑똑한 사람한테서도 많이 봤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한테도 많이 봤다. 시스템 트레이더,
퀀트, 펀드 매니저, 직종을 불문하고 발견할 수 있
다. 너무 많이 봐서, 95% 이상이라고 얘기하고 다

5. 금단 65
닌다. 물론 내 안에서 뼈 아플 정도로 가장 많이 확
인한 것이었다. 슬픈 얘기다.
 
다시 2012년 1월 12일, 문제의 선물옵션 만기
날. 아무리 되새겨 봐도 그날은 매매를 하지 말았
어야 할 날이었다. 지난 글에서 ‘빠르게 건너뛰기’
한 그간의 사정은 우쭐했던 취업 과정과 달리 처절
하게 힘들었고 많이도 헤맸다. 여러 회사 여러 부
서를 돌며 나름의 내공을 많이 쌓았고, 남들과는
차별화된 무기들을 장착해왔지만, 꿈은 항상 트레
이딩 룸에서 세계적인 트레이더로 성장하는 것이
었다. 자산운용사로의 이직을 거쳐 내 금융업 커리
어의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KTB 투자증권 트
레이딩 룸에 입사했다. 트레이딩 룸 바깥의 세계에
선 트레이더들은 ‘쓰레기’ 취급 당한다는 얘길 들
었다. ‘인생 막장’, ‘왕따 새끼들’ 이니 절대 돌아가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66
지 말라는 얘기를 임원급 선배들한테 마저 들었다.
브로커리지와 주식 운용팀까지 경험한 마당에 다
시 트레이딩 룸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날 받아줄 사
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꿈을 좇았다. 12년
1월 즈음까지 또 수개월간의 고생을 하다가 마침
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던 BEP를 달성할 기미
가 보였다. 월간 BEP 1500만 원, 그 돈을 못 벌면
인간 취급도 못 받고,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도 살
아갈 수도 없다. 게다가 주니어에게는 유난히 기회
의 문이 좁은 법이다. 애당초 한도가 너무 적어 극
단적인 수익률을 올리지 않으면 BEP를 할 수 없을
뿐더러, 선배들보다 공격적으로 매매하면 손실 폭
이 커져 망하는 지름길이다. 그 월물에 처음으로
1000만 원을 만기 전날까지 벌었다. 옵션트레이
더들에겐 매월 둘째 주 목요일인 옵션 만기일이 큰
승부의 날이라 대개 한 달 수익의 60% 이상이 만

5. 금단 67
기 당일에 벌린다. 그러니 1월 드디어 그토록 기다
리던 BEP를 하는 것일까 싶었다.
 
다만 그날은 내 결혼식 이틀 전, 나에게 아주 중
요한 날이었다. 그 혹독한 주니어 시절을 끝낼 기
회가 왔으니 두 번 생각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매매
했다. 600만 원을 벌었을 때 끊었어도 되었으련마
는 미친 듯이 매매를 해서 당일 1600만 원을 벌었
다. 매 주말을 사무실에 살다시피 하며 보낸 지긋
지긋한 주니어 시절에 자력으로 종지부를 찍은 날
이었다. 매달 1500만 원씩 사납금처럼 쌓여간 비
용은 아직 빚처럼 남아있었지만. 그렇게 결혼을 하
고 신혼여행을 갔는데, 마지막 한주의 매매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신혼의 흥분감과 성취감이 뒤섞
여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이국의 맑은 하늘을 보
고 있노라니 여의도에서 도대체 왜 그리 악바리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68
럼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도 들었지만, 한편으
론 이제부턴 이런 천국 같은 여행을 주기적으로 즐
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매매가 얼마나 멋지고 화려했고
특별했는지 도취감에 젖어 들어갔다. 이후 나는 트
레이더로 자리를 잘 잡았다. KTB 사고를 포함해
수많은 고생길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돌이켜보면 무서운 선
택이었다. 만약 내 결혼식 직전의 매매에서 예상치
못한 일로 큰 손실을 봤다면 나는 돈을 잃었을 뿐
아니라 신혼여행의 행복을 잃었을 것이다. 절대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불필요한 모험을 해서는 안 된
다. 이것은 내 스승에게 배운, 모든 사람에게, 하지
만 특히 트레이더에게 더욱 중요한 자세다. 무엇이
중한지를 아는 자제력 말이다. 나는 당시에 수익

5. 금단 69
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한 상태였으니, 결혼 직전
의 승부를 미루었어도 실은 괜찮았을 것이다. 그렇
다면 손실을 볼 위험도,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망칠
위험도, 인생을 망칠 위험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혈기에 만용을 부려 운 좋게 사자 가죽을 들쳐업고
결혼식장에 나타난 격이었다. 무릅쓸 이유가 전혀
없는 위험이었음을 당시엔 정녕 몰랐다. 오로지 앞
만 보고 도전해야 할 정도로 절박해 있었다. 듣자
니 첫 아이를 낳은 날 아이를 보러 가지 않고 만기
매매를 하러 출근하신 선배도 계셨다고 한다. 돈이
아무리 중하다고 해도 이런 것은 만용이다. 그날
돈을 잃고 첫 아이를 만나러 간다면 자신의 무의식
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일 터, 그런 가능성을 사전에
막는 것이 리스크 관리이다, 제아무리 멘탈이 강하
다고 해도 말이다. 나도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겨,
훗날 창업을 할 때 모든 위험자산을 다 팔아 안전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70
한 곳으로 돌렸다. 아무리 투자에 큰 자신이 있고
큰 기회가 있어도 사업의 성패에 영향을 줄 정도의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과연 그날 매매
를 안 할 수 있었을까?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받아들였을지 자신이 없다. 카지노의 폐인들과는,
명함 한 장 두께의 차이, 그것이 트레이더인 것은
아닐까.

5. 금단 71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6. 기법

가끔 한 사람이 익힌 기예가 그의 정신이 되기도


하고 때론 그의 혼이 되기도 한다. 흡사 내림 받은
신에 따라 무당의 삶이 바뀌듯 말이다. 예술가가
손끝을 통해 표현하려 애써온 감성이 세월을 타 그
의 얼굴에도 각인되듯, 자신이 혼을 담은 타이밍이
온몸과 온 생활에 각인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격렬하게 싸우고 물러서고 치열
하고 겸허하기를 반복하느냐에 따라 트레이더들도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72
특유의 성품이 빚어지는 것 같다. 스캘퍼들은 격노
를 안고 살지만, 자기에겐 자비롭기도 하고, 포지
션 트레이더들은 관망에 익숙하지만, 후회가 깊다.
 
이런 이야기를 풀어 보려면 매매 기법이 무엇이
있는지부터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선물옵션 트레이딩을 한다면 크게
스캘핑, 양매도, 포지션 매매, 세 가지가 있다. 서
로 간의 영역이 상당폭 뒤죽박죽 섞여 있지만.
 
스캘핑은 초단타 매매부터 단타 매매까지를 일
컫는다. 평균 포지션 보유 기간이 짧게는 0.01 초
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길게는 30초 혹은 그 이상
도 될 것이다. 진입의 이유는 시장의 방향을 읽어
서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시장의 방향과

6. 기법 73
상관없이 해당 투자 상품이 갖는 특성상 발생하는
가격 움직임을 활용하였을 수도 있다. 예컨대 어떤
선물 혹은 옵션 종목이 이상하게 한 달에 한 번 경
기를 일으켜 위아래로 다섯 번 흔들린다고 해보자.
그걸 포착해서 매매한다면 그것도 스캘핑이며, 실
제로 이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패턴도 존재한다. 단
기적 시장 현상을 이용한다면 그것이 기계를 활용
하는 매매건 아니건 간에 스캘핑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분은 스캘핑 포지션을 진입해
2~3시간에 걸쳐 청산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만 그
런 포지션이 진입할 기회는 2~3초밖에 안 되는 경
우도 있다. 이런 것도 찰나의 승부이니 스캘핑이
아닐까 한다.
 
양매도는 시간의 길고 짧음으로 구분한 매매는
아니다. 옵션 상품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격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74
저렴해지는 성질을 이용해서 포지션을 운용하는
방법이다. 장중 매매인 경우가 많다. 보험사와 비
슷하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특별한 일이 발생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때 그런 일이 발생할 가
능성에 대한 ‘보험’을 발행하는 행위와 원론적으
로 같으니까. 달리 얘기하면, 특별한 일이 발생하
기 전에 낌새를 느끼는 능력이나, 발생한 이후에
대응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단순한 보험 발행 따위
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돈을 버는 보험사를 경영
하기는 힘든 법이다. 나는 오늘 얘기하는 세 가지
매매를 결국엔 다 섞어서 사용하게 되었지만, 커리
어의 큰 줄기는 양매도에 있었다. 양매도가 무슨
매매인지 가끔 답을 잃었을 때는 200년 전에 런던
어느 커피집에서 보험을 발행했을 갈색 정장의 남
자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아는 모든 정황상 이 보
험을 발행해도 되는 것일까, 혹시 아무도 눈치채지

6. 기법 75
못한 어떤 실패의 징조가 눈앞에 스친 것은 아닐
까, 내 옆자리에서 남들이 정신없이 보험을 발행해
준다고 나까지 휩쓸리는 것은 아닌가, 같은 고민을
할 때 말이다. 보험 발행의 묘는, 한순간의 큰 사고
를 피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주의 깊은 사람이 용
맹한 사람을 이기는 게임이다.
 
국내 증권사에 유달리 양매도 팀이 많아 트레이
딩 룸의 주 수익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제도적
인 이유 덕분이다. 증권사는 옵션 매도 포지션에 대
해 장이 끝난 후에 증거금을 정산한다. 개인은 옵션
을 거래할 때 실시간으로 증거금을 정산해야 하니
까 큰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면 장중에 100억 원
의 증거금이 필요한 포지션을 구축했다가 장이 끝
나기 전에 청산하면 실제 증거금을 마련하지 않아
도 된다는 얘기다. 부러울 만하다. 물론 증거금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76
무제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제도적
이점으로 인해 증권사 트레이더들은 개인으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아무나
데려다 놓는다고 돈을 벌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진
짜 타짜들을 모아 놓는다면, 승률이 50%냐 50.5%
냐에 따라 아주 큰 결과의 차이가 발생하기에 이 정
도만 해도 큰 차이라는 것이다. 또한, 증권사 주문
시스템이 자기자본 전용과 개인 고객 전용으로 구
분되어 있어서 결국 자기자본 트레이더들의 주문이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체결된다. 수수료가 저렴한
것은 물론이다. 양매도 매매만으로 개인 매매에서
성공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제도적 이점들은 스캘퍼에게도 동일하게 작용
하지만, 양매도가 스캘핑보다 다소 더 전수가 쉬웠
던 이유는 이 점 때문이다.

6. 기법 77
 때론 양매도나 양매도의 구조적 이점에 대해 허
황한 해석들을 인터넷에서 읽기도 하였다. 대부분
어디서 잘못 줏어들은 얘기를 택도 없이 부풀려서
써놨다. 심지어 그런 정보들을 접한 스캘퍼 마저
양매도를 혐오하는 경우도 봤다. 증권사가 매도 포
지션을 가져가는 것은 너무 쉬워서 차라리 비윤리
적이라는 시선인 것이다. 어떤 분은 양매도가 뭔지
조차 잘 몰라서 옵션을 ‘매도’하는 행위는 다 허접
떼기들의 전략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주식을 매
수 해서 돈 버는 사람은 하수라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게, 무식하고 오만한 얘기다. 고수는 매수만
해도 돈을 벌고, 하수는 매도만 해도 돈을 잃는다.
매수건 매도건 유리할 건 하나도 없다. 어차피 모
든 승부는 내기 당구처럼, 당구장 주인에게 수수료
떼고 나면 전체로선 손해다. 고수들은 수수료를 만
회할 눈곱만한 확률을 확보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78
눈곱만한 확률은 저 넓은 우주 수천억 개의 은하계
속에 먼지 한 톨처럼 미묘한 곳에 구체적으로 숨겨
져 있다. ‘근처에 있는 것은 다 탐색 당했기 때문’
이라는 문병로 교수님의 말씀을 빌려본다.
 
포지션 매매는 며칠에 걸쳐 포지션을 가져가는
매매로 통칭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시장의 방향
성을 보는 매매와 그렇지 않은 매매로 구분할 수
도 있다. 시장 예측을 귀신처럼 해내는 분들이 아
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99%는 시장 예측을 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다가 파멸하고 만다. 방향성 예
측 매매를 ‘스펙 매매’ (speculative trading, 투
기성 매매)라고 부르는데, 야구로 치면 투수만큼이
나 귀한 재능의 소유자들이며 또 한편으로는 투수
만큼이나 압박감에 많이 시달리는 매매다. 대체로
이런 분들은 트레이딩 룸에서 잘 안 뽑는다. 이 악

6. 기법 79
마의 매매로 안정적인 수익을 낼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대신 스펙 매매를 깨친 분들은
개인으로서 투자하더라도 재벌이 될 정도로 성장
한다. 선경래라는 트레이더가 있었는데 미래에셋
을 나와 개인 투자를 시작하셨다가 2008년 하락
장에서 1조 원을 벌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장 방향성에 대한 감각이 계발된다면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다. 대다수의 1세대 헤지펀
드 트레이더들은 이 감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
겠다. 그러나 제발 독자들은 시도조차 하지 말기를
권한다. 인류가 겪는 재무적 고통의 절반 이상은
시장 예측을 할 수 있을 것이란 환상 때문이다. 그
래도 당신만은 특별하다고 믿지 말아달라. 스펙 트
레이딩 마저도 대부분은 예측이 아니라 대응의 영
역이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0
양매도나 스캘핑과 마찬가지로, 시장과 상관없이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특정 이점을 노리는 포지션
매매 유형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매매
로 생각하는 것은 일전에 언급한 레이시오 매매다.
헤지에 헤지를 거듭해 아주 구체적인 시장 현상만
을 취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시장 상황에서 옵션
들이 행사가별로 순차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강력히 반복하는
현상이지만 이것을 취해 이득을 보기는 매우 어려
웠다. 레이시오라는 독특한 방법론만이 이 현상에
낚싯바늘을 내릴 수 있었는데 참으로 기이하고 훌
륭한 전략이다. 이런 것을 차익거래라 부르기는 어
렵고, 일종의 헤지 매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헤지 트레이더들은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어떤 상
품들을 서로 헤지시키느냐’에 대한 답을 정확히 갖
고 있지 않으면 쓸데없는 헤지만 하다가 날밤 새운

6. 기법 81
다. 주식도 잘 못 하는 사람이 주식을 롱숏으로 서
로 헤지시킨다고 수익이 안정적으로 될 리가 없다.
오히려 꾸준히 패착이 쌓여서 손실을 볼 가능성이
더 높다. ‘헤지’라는 단어 자체가 지나치게 미화되
어 있는 셈이다. 포지션 매매에는 이외에도 ‘순수
차익거래’를 표방하는 유형들도 있다. 내가 레이시
오를 정통으로 배웠다고 레이시오에 매우 치우친
평을 쓰는 점은 이해하시라. 이보다 더 세련된 류의
매매도 책을 통해 파편적으로 여러 번 접했는데, 비
대칭적 수익 기회가 발생할 수 있는 원리와 환경을
정확히 이해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응용 가능하다.
여하간에 포지션 매매는 단타의 반댓말이 아닌가
한다. 단순히 매매시간이 길어지기만 해도 때론 포
지션 트레이딩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간 단위가 길어질수록 실력과 운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2
역할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하루에 100번 스캘
핑을 하는 사람은 100일 동안 1만 번 매매를 해볼
수 있고, 그 정도면 스스로의 실력이 비교적 정확
히 검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컨대 주식을 들고
1년간 홀딩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가 실력에 의해
서였는지 장세에 의한 우연이었는지 판단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린다. 한 매매를 최소한 수십번은 반
복해야 하나의 사이클이 완성된다. 그럼에도 장기
투자를 하는 이가 한 해 수익률이나 월간 수익률을
자랑하는 것은, 스캘퍼가 1회의 매매를 이겼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매매의 사이
클을 여러 번 거쳐봐야만 장세에 의한 효과가 평가
가능하다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니 대여섯 번
의 매매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우쭐해 있는 사람을
보면 하수의 조기경보라 생각하고 피하라. 딱 그때
가 가장 우쭐하기 좋은 때라 스스로 감추기 어려울

6. 기법 83
정도의 오만방자에 휩싸인다. 사이클이 지나간 후,
그런 이들이 생존해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헤
지펀드 트레이더라 하더라도 주식이나 장기월물을
이용한 매매를 하는 사람들은 2~3년간 별다른 실
력 없이도 큰 실적을 올릴 수 있다. 사이클을 많이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어디까지가 운이
었는지 판단이 매우 어렵다. 국내뿐만이 아니라 특
히 국외 금융업에서 초대형 사고들이 자주 일어나
는 매우 본질적이고 고질적인 이유이다. 개인적으
론 투자 사이클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기만 해도 좋
은 본부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국내 선물옵션 트레이딩 룸에서 이뤄지는 트레이
딩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를 해봤다. 알고리즘 트
레이딩이나 시스템 트레이딩도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모든 트레이딩은 일종의 시스템에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4
의해 거래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스템이 트레이더
개인의 머릿속에 있을 수도 있고, 여러 트레이더의
회의를 거쳐 결정될 수도 있고, 여러 개발자와 함
께 컴퓨터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시스템이 무엇이든 간에 크게 보았을 때는
전략의 성향을 구분 점으로 삼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그렇다면 이들의 성품은 어떻게 다르다는 걸까?
 
스캘퍼들은 시장에서 초단타의 싸움을 계속한
다. 하지만 한 번의 매매가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
로 중요한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목숨이 걸린 듯
이 스스로 긴장감을 형성할 뿐이다. 스캘퍼들이야
말로 장중에 욕설이 가장 난무하는 분들이다. 체결
자체에서 수익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찰

6. 기법 85
나의 망설임이나 불량체결로 수익을 놓치거나 손
실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
의 고통이 매매 중 가장 큰 고통이다. 그러니 감정
을 자주 표현한다. 한 분은 장중에 욕설이 너무 심
했는데, 어떤 때는 자기 얼굴을 때리며 자학까지
해서 주위 사람들이 힘들었다고 한다. 재미난 것
은, 하도 시끄럽게 분통을 터뜨리길래 당일 손익
을 보면 +300만 원을 버는 중인데 순간의 실수로
-10만 원을 잃었거나 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손
실이 커져서 자학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이기는
게임 중에 자신의 집중력 저하를 꾸짖는 것이다.
실제 손실 중인 트레이더들은 남들이 눈치챌까 봐
묘하게 조용해진다.
 
스캘퍼들은 시스템이나 체결 등의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장비를 중시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미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6
신이나 리츄얼을 진지하게 시행하기도 한다. 미역
국을 먹고 출근하면 체결이 미끄러진다고 생일날
에도 미역국을 안 먹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분들
은 사실 매일의 트레이딩이 매우 단순한 영업의 반
복이다. 그러다 보니 거시적인 시장에도 관심 없고
업계의 규율에는 더욱 관심 없어서 아무 때나 출
퇴근하기도 하고 회사 문화에 섞이지 않곤 한다.
대체로 팀원들 간에도 공동책임은 거의 없고, 각
개 손익을 가지고 각개 계약을 하는 편이었다. 내
가 번 만큼만 칼 같이 가져간다는 뜻이다. 실제 같
은 스캘핑 팀에 앉아 있어도 기법이나 타이밍이 모
두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팀원의 수익이 함께 움직
이는 근본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여러 시스템을 모
아둔, 하나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니
각 개인에겐 외로운 매매일 수밖에.
 

6. 기법 87
양매도 선수는 조금 다르다. 양매도가 벌리는 날
은 팀원들이 대체로 다 같이 버는 편이고, 양매도
가 힘든 날은 팀원들이 다 같이 힘들다. 물론 힘들
다고 해서 수익이 다 같이 난다는 보장은 없다. 전
팀원이 손실 한도가 걸려도, 혼자 살아남아 큰돈을
버는 선수들도 가끔 있고, 반대의 경우도 나온다.
양매도 시장 내의 모든 이들이 정어리 떼처럼, 때
로는 동지이고, 때로는 포식자 앞에서 생존 경쟁을
펼치는 경쟁자다. 매수를 하는 개인들이 거래 상대
방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섞여 있는 진짜 큰 손이
우리를 다 잡아먹을 수도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위기의 순간 양매도 선수들끼리의 손절매 매매가
서로의 손실을 폭발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모든 매도자가 매수자로 변하는 그 순간
우리는 각자도생의 아비규환에 빠지곤 한다. 역발
상보다는 무리 안에서 눈치껏 생존하는 사바나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8
물소 같은 눈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양매
도는 한 매매 사이클을 겪고 나면 찰나에 몇 달의
손익이 증발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집중적
인 두려움을 떠안고 얼마나 냉정하게 매매할 수 있
느냐 하는 강철의 심장을 요한다. 양매도는 오늘
장중에 북한이 도발을 하면 몇 달 치 손익이 날아
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각오로 출근해야 한다.
이런 환경들이 트레이더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기
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에 잠을 잊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포지션 트레이더다. 야간에 생기는 이벤트들
이 내일의 손익이나 심지어 커리어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으니 밤늦게까지 시장을 보는 경우가 많
다. 옛말에 ‘포지션은 잠이 오는 수준까지 줄이라’
고 했다. 잠이 안 온다는 것은 과도한 위험성을 취

6. 기법 89
해서 몸이 버티지 못한다는 얘기다. 몸이 버티지
못하면 정신이 버티지 못한다. 용맹해 보여서 우쭐
하겠지만 허망하게 전 재산을 날릴 체질이다. 그래
서 포지션 트레이더는 생각이 많다. 또한 팀원, 팀
장, 심지어 회사에 많이 의존해야 한다. 해외 트레
이딩 룸들은 포지션 트레이더가 다수이며, 선물옵
션 외에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포지션들을 운용
한다. 포지션 트레이더들은 회사가 제공하는 자원
과 한도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회사와의 관계
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하며, 대고객 매매로 전환
이 가능한 확장성이 있다. 운용 사이클이 길다 보
니 검증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는 편이다. 포지
션이 절대적인 위험에 처하는 사이클은 약 3년이
다. 그러니 3년 이하의 기간을 운용한 사람은 위기
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또한, 포지션에 덕지덕지 꼼수를 부려둘 여지도 많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90
은 편이라 관리 감독이 쉽지 않다.
 
매매나 투자에서 극심한 위기는 주기적으로 온
다. 주식은 10년, 옵션 포지션은 3년, 양매도는 1
년, 스캘핑은 시시때때로 온다. 그 위기를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대다수 매매기법의
핵심이다. 물 들어오는 구간에서 노 젓는 것은 젊
기만 하면 가능하니까, 강세장에선 무모하고 혈기
넘치는 청춘이 최강자다. 그러나 태풍이 오고 나면
누가 생존해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아마 로보어
드바이저에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도 이런 면 때
문에 아닌가 한다. 시장의 사이클을 이해하지 못
한 사람들이 일시적인 장세를 흉내 내는 것이라면
고객들은 처참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이미 다른
이름으로 수없이 반복되었던 일이다.

6. 기법 91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7. 원클릭

한 클릭이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클릭은 연속적인 아날로그의 세계에서 분절
을 일으키는 무한히 미세화된 구분점이다. 하루에
도 수백 번을 눌러대는 마우스의 한 버튼, 그 한 클
릭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트레이
딩 룸에선 그 한 클릭이 핵미사일 발사 버튼만큼이
나 운명을 가르는,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의사결정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92
의 폭포이다. 그런 중대한 의사결정을 전달하는 게
이따위 마우스 한 조각이라는 게 때론 현실성이 떨
어질 만큼.
 
딸깍, 딸깍, 딸깍. 어떤 날은 트레이딩 룸에서 들
려오는 소리가 마우스 클릭이 전부인 날들이 있다.
그 안에 식은땀을 흘리며 인생의 육정칠욕이 움직
이고 있을 트레이더들에게, 어느 선배 트레이더가
이런 얘기를 했다. ‘한 클릭이면 이 모든 고통을 끝
낼 수 있다.’ 손절 할까 말까, 수익을 챙길까 말까,
무한한 복기와 자성의 고민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데에는 한 찰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외
로 결정은 한 클릭만큼, 손가락이 0.1cm 움직이는
노력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이어서 울
림이 있었다. 천 년 후의 어느 종교의 기도문으로
써도 될 문구 아닌가. 어쩌면 너무 깊게 생각하지

7. 원클릭 93
말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빠른 의사
결정을 내리라는 얘기였을 수도. 어쨌든 그 표현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때론 한 클릭으로 정리
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포지션마저도, 결국은 결
정을 내린 순간 전부 청산할 수 있는 찰나의 포지
션이 아닌가 하는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
 
어릴 적 Market Wizard 라는 트레이더 인터뷰
시리즈를 접해서 지금까지 수십번을 읽어보았다.
이제야 소개하는 이유는 내 글보다 훨씬 재밌기 때
문에 내 글을 안 읽을까 봐서다. 그 책에 나오는 수
십 명의 트레이더들에게 트레이딩에서 가장 중요
한 것은 무엇이냐 물어보면 절대다수는 ‘손절’을
이야기한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손절일 뿐이다. 손절은 기법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실천하는 게 어렵다. 그 한 클릭을 누르기까지 어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94
떤 심리적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조지 소로스에게
손절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수천 번 망했다. 제아
무리 위대한 로직도 손절 없이 성공하는 경우는 없
다, 예금 투자와 가치투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
은 시작과 끝이 있는데, 끝을 정해두지 않는 것만
으로도 시작의 선택 폭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다. 손절 없는 투자는 100% 성공하는 로직이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단,
손절이 있는 투자는 51%의 승률만으로도 수익을
쌓을 수 있다. 그런 것은 흔하다. 그것을 손절과 버
무려서 성공의 방정식을 만드는 것만 해도 아주 극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운명이다.
 
트레이더의 95% 이상이 잘린다고 했다. 실제 수
치는 이보다 훨씬 높다. 트레이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쉬운 기준은 ‘손절을 할 수

7. 원클릭 95
있는 위인인가’이다. 손절은 실전 인생에서 별로
쓸모없는 개념이어서 대부분 사람이 익숙지 않다.
투자를 해보아야만, 몇 번의 인생을 사는 듯한 사
이클을 반복해봐야만, 손절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인생에서는 손절이 없어도 용기와 기백만으로 수
십 년에 걸쳐 기적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왕왕 있
다. 투자에선 그렇지 않다. 손절에 대한 심리적 배
리어가 있는 사람은 교육에 의해 손절이 가능해지
기도 하고, 영원히 불가능하기도 하다. 나는 전자
를 믿는 편이다. 누구나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
면 손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다수
는 당장 손절을 못한다. 머릿속에서 받아들여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랑이 전혀 아니다. 퇴출
사유일 뿐이다. 아름다운 퇴출 사유도 아니다. 그
냥 일차 퇴출 사유다. 서비스 업종에 들어온 사람
이 세수를 안 해 눈곱이 덕지덕지 끼어있는 것만큼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96
이나,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아름다움도 없는
결격 사유일 뿐이다. 왜 손실을 받아들여야 최소한
의 사고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너
무나 명확한 방증이다. 병사들을 다 죽일 생각으로
전쟁터에 출근하는 장수만큼이나 무모하다.
 
그러니 ‘물려서 장기투자 중이에요.’라고 자랑
스럽게 말하지 마라. 인류의 90% 이상이 겪는 흔
한 투자 장애이고, 필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심리
적 편향일 뿐이다. 서울대 교수도, 재벌 2세도, 초
등학생도, 모두 똑같이 떠안고 사는 아마추어리즘
이다. 불빛에 놀라 트럭을 멍하니 쳐다보는 노루
의 심리와 다를 바 없다.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
라서 행동을 멈춘 것이다. 반복하면 반드시 길거리
시체로 끝날 습관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문득 아
름다워 보이는 보유 종목의 엄청난 펀더멘탈은 그

7. 원클릭 97
저 손절을 하지 않기로 한 변명을 찾다가 나타난
착시일 뿐이다. 그 착시가 우연히 오아시스의 방향
을 알려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착시를
꾸준히 쫓아다니면 사막에서 미라가 되어 삶을 마
감할 것이다.
 
그러나 손절을 못하는 순간의 심정을 어찌 모르
겠는가. 헤어진 것이 믿어지지 않아 연인의 뒷모습
을 바라보는 마음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
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금전적 이별을 겪고 나
면, 앞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내 삶이 얼마나 바뀔
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면, 그저 자신에게 멍한 시
간을 조금 허용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 식으
로 손절을 제때 못해 멘탈 붕괴에 빠진 사람들을 많
이 봐왔다. 1편에서도 몇 장면을 소개했지만, 오래
산 트레이더라면 누구라도 어느 순간에 역대 최고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98
의 손실을 보고 현실감을 상실할 때가 있다. 어디
트레이더 뿐이랴. 인생의 곳곳에 믿을 수 없는 현실
에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들이 올 것이다. 이별일 수
도, 사고일 수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행정적 절차를 밟아
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무정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별은 떠안고 살 수 있어도, 시체는 떠안고
살 수 없잖은가. 망가진 주식계좌는 이제부터 썩어
간다. 내 계좌는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 순간부터 내 마음도 생활도 썩어갈 것이고, 남은
돈마저도 썩어갈 가능성이 통계적으로 훨씬 높다.
매 순간이 새로운 결정을 내릴 새로운 기회다. 선택
지가 많다 해서 당황할 필요 없고, 더더욱이 선택지
가 없다고 자신을 속일 이유도 없다. 항상 선택지는
있다. 한 클릭을 누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7. 원클릭 99
계좌의 수익은, 내 집중력에 공명한다. 집중력이
바짝 올라있으면 수익이 늘어날 수 있고, 집중력이
떨어질 때는 온갖 뻔한 함정들에 노출된다. 그러나
웬걸, 손실이 늘어날 때 집중력이 늘어나는 묘한
착시를 모두가 느껴봤을 것이다. 긴장감 속에 입술
이 바짝바짝 타며 평생 느낀 적 없는 스릴을 느껴
봤을 것이다. 여기서 깜짝 선물! 이 글을 보신 분께
서 불리오 카카오톡을 통해 ‘불리오 이북 너무 재
밌어요.’라고 말씀 하시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리오 1개월 이용권을 드립니다. 그런 과도한 몰
입감을 집중력과 구분해야 한다. 특정한 감정 상태
는 손실을 유혹하는 밑밥이나 다름없다. 본인의 집
중력과 쓸데없는 몰입감의 종이 한 장 차이를 분간
하기 시작하면 언제 매매를 해야 할지 또 언제 하
지 말아야 할지를 알기 시작한다. 트레이딩은 정말
이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심법이며, 도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00


라고 생각한다.
 
승부사라는 이야기는 패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패배를 미워해야 하지만, 패배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패배
를 많이 경험해야만 패배에 익숙해진다. 패배해보
지 않은 트레이더는 언제든 멘탈이 녹아내릴 수 있
는 트레이더다. 그러나 패배에 무뎌진 트레이더는
또한 맛이 간 트레이더다. 다시 한번 종이 한 장 차
이의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장에서의 싸움을 전쟁터와 비교해보았
다. 스캘퍼에게 방향성으로 몰리는 날은 흡사 퇴군
하는 부대가 기병대에게 꼬리를 잡혀 한없이 쫓기
는 형국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3대 대전으로 꼽히
는 비수대전이 있다. 5호 16국 시대 중국을 통일

7. 원클릭 101
하다시피 한 전진의 3대 황제 부견이 100만 대군
을 끌고 동진의 장수 사현의 8만과 맞붙었는데 한
번 기세가 밀리자 아군에게 짓밟히며 퇴진하여 백
만대군이 하루아침에 대패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다. 때론 장의 방향성이 스캘퍼들에 의해 결정되는
날, 끝도 없이 한 방향으로 몰리는 시장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이제 그만 쫓았으면 좋겠건만, 적군의
붕괴되는 후미를 칠 기회를 봐줄 이유가 없기에 정
말 추세가 지옥처럼 추격해 온다. 반면 옵션 변동
성을 매매하는 입장에서는 큰 전투가 끝난 후 패잔
병의 금품을 털어가는 약탈자들이 생각난다. 전투
의 치열함은 정규군에게 맡기고, 모든 수익은 인내
심을 통해 취하는 형국이다. 어느 쪽이든, 트레이
더의 삶은 생각보다 전면전이 아니다. 트레이더는
큰 전투의 흐름에 맞춰 수익을 극대화하는 약탈자
이자 동시에 야비한 약자들이다. 내일도 생존해야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02


하기 때문이다.
 
한 클릭이면 이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다고 가르
쳐준 선배는 또 다른 것을 한가지 알려줬다. 모두
가 못 견디고 못 견디다 결국 너무 늦게 클릭을 누
르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멘탈이 붕괴된 자들의
때늦은 어설픈 손절이 한순간에 몰려 약자가 약자
를 짓밟는 아비규환의 타이밍에, 자기 같은 스캘퍼
가 지옥을 선사하며 떼돈을 벌어가니까 항상 자신
을 생각하고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분의 눈
빛을 잊을 수 없었다. 상냥한 말투 친절한 설명으
로 기법을 전수해준 그분과, 시장에서는 포식자와
먹이로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을 되새길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손절을 열심히 해왔지만,
그때부터 나는 퇴로를 확보하지 않는 진격을 생각
해본 적이 없다. 오늘의 거대한 승리는 역사 속에

7. 원클릭 103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투 중에 하루일 뿐이다.
오늘을 싸우고 생존해서 내일도 계좌를 지켜야 하
지 않겠는가.
 
한 클릭의 교훈은 트레이더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나로서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여운을 줄 것만 같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04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 번트

잽은 복싱에서 쓰는 용어다. 타격의 묵직함은 없


지만 빠른 펀치로 거리를 재거나 타격을 누적시킬
수 있다. 그에 반대되는 개념은 풀스윙 펀치가 아
니겠는가.
 
둘 간의 차이는 리스크의 차이다. 잽은 리스크가
거의 없다. 대신 얻는 것도 많지 않다. 풀스윙 펀치
는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빈틈이 생기

8. 번트 105
지만, 역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다. 잽을 날려
야 할 때와 풀스윙을 해야 할 때가 당연히 시시각
각 다르겠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얻어
맞고 있어 기세에 눌릴 때 무모한 풀스윙으로 역전
을 노리지 말 것. 이것이 트레이딩이나 투자에선
‘자금관리’라 불리는, 어쩌면 성공에 필요한 가장
핵심적 요소이다.
 
자금관리는 기본적으로 지고 있을 때 공격성을
줄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이기고 있
을 때 공격성을 줄이라는 이야기일 수 있다. 삼국
지 등에 나오는 고대 전투에서 한쪽이 승기를 잡아
추격을 시작할 때 ‘너무 깊이 추격하지 마십사’라
는 참모들의 조언을 많이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길
만큼 이겼으면 행여나 지리적 이점이 없는, 혹은
지리적 정보가 없는, 혹은 후방 부대의 매복이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06


아군의 피로나 진열의 붕괴로 인해 생각지 못한 변
수가 발생할 수 있는 구간까지 과욕을 부려 추격하
다간 불필요한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
다. 한편으로 자금관리는 기회가 보일 때 풀스윙을
날리라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풀스윙
은 정말 미묘한 부분이어서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
길 바란다. 장수의 본능으로 천재일우의 기회라 판
단이 든다면 적군을 밤새 가차 없이 짓밟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투자나 투기의 세계에서
풀스윙을 지를 용기나 결단성이 없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는 풀스윙을 너무 자주 너무 무분별하게
질러서 문제다. 그래서 오늘 할 얘기는 기본적으로
풀스윙을 줄이는 절제력에 대한 이야기다.
 
‘자금관리가 필요하다’는 표현은 짧은 현업 시절
에 최소한 천 번 이상 대화를 나눈 주제이다. 스승

8. 번트 107
이 제자에게, 또 그 제자가 자신의 제자에게 끝없
이 각인시키는 이야기다. ‘자금관리가 필요한 건
뭐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는 점을 이해한다. 하지만 코치가 선수들에게 매일
매일 강조하는 요지가 있다면, 그것이 그만큼 절대
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일 것이다. 농구 코치가
‘디펜스’를 외치고, ‘리바운드’를 외치는 것은 그런
작은 행동이 어쩌면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니셜D 라는 레이싱 만
화에도 이런 비슷한 말이 나온다: 승부가 결정 나
는 곳은 직진코스도 코너도 아닌 그사이 구간이라
고 말이다. 승부처로 보이는 곳이 사실은 승부처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유유한 어떤
지점, 추상화시키기 힘든 어떤 영역에서 미세한 차
이의 누적이 승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08


그런 의미에서 다 아는 얘기라 생각해도 한번 진지
하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자금관리의 묘에 대해서 나 역시 아직도 묘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심법이라 하나 보다. 슬램덩크에
나오는 ‘바람이 한번은 바뀐다’는 개념으로 생각해
도 좋다. 될 때는 뭘 해도 되는 구간이 있다. 그렇
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가 자금관리의 전부
다. 소위 패배하는 법, 패배를 극복하는 법인 셈이
다. 또한, 심법이 아닌 순수히 기계적이고 수학적
인 측면도 있다.
 
수학적인 면부터 예를 들어보자. NBA에서 한 팀
이 10점 차이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3점 슛을
남발한다고 해보자. 3점 슛을 던질 때마다 확률은
비슷하다고 할지언정, 만약 3점 슛을 실패한다면

8. 번트 109
겪게 되는 손실의 차이는 존재한다. 한번 실패할
때마다 승리할 가능성은 비대칭으로 줄어들 것이
다. 상대방이 역공하여 안전하게 2점 슛을 성공만
시켜도 이미 12점 차이가 되어 버린다. 갈수록 더
위험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요행
이 없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반면 10
점 이상 이기고 있는 팀 입장에선 얘기가 조금 다
르다. 승기를 확고히 하기 위해 3점 슛을 던졌는데
실패하면 여전히 10점 차이다. 상대방이 공격에
성공한다고 해도 7~8점의 승기를 유지할 수 있다.
승리의 확률엔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큰 손실이
없는 것이다. 소위 오차 한계, margin of error가
크다. 반면 3점을 성공시키면 13점 차이로 승부를
크게 갈라놓을 수 있다. 향후 더욱 공격적인 플레
이를 많이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특히
7점 차이와 10점 차이는 큰 차이가 없지만, 10점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10


차이와 13점 차이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는 경우를
비대칭적 수익 구조라 한다. 패색이 짙은 팀에겐 이
러한 비대칭적 이점이 없다 못해 역으로 발생한다.
 
양 팀이 접근해야 하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지
고 있는 팀은 점수가 적더라도 가장 자신 있는 플
레이를 해야 한다. 패스를 통해 공간을 확보하고,
아주 쉬운 레이업을 하나씩 성공시켜 나가는 것이
다. 단숨에 승기를 잡을 순 없겠지만, 한 발 더 벌
어지는 상황을 최대한 방지해야 한다. 상대방의 실
수를 기다리면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또한, 3점
슛이 들어갈 정도의 컨디션이었다면 2점 슛은 반
드시 들어갈 것이다. 컨디션이나 자신감이 있다면
더 확실한 전술을 다져가야 한다. 절대로 실패해서
는 안 되는 싸움일수록 이 점은 명료하다.
 

8. 번트 111
여기서 심리가 들어간다. 이미 지고 있는 팀은 심
리적으로 쫓기게 된다. 넣을 슛도 못 넣을 가능성
이 높다. 충분히 컨디션이 좋았다면 애당초에 이미
이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기에 승부에서 밀리
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상대방도 알고, 또
한 관중도 알기 때문에, 기세에 눌리게 된다. 무의
식적으로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운신의 폭이 좁
아진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강
한 패기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렇
지만 이겨낼 수 있다면, 2점부터 차근차근 점수를
쌓으며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렵지 않
은 슛을 성공시키며 자신감을 올려야만 기세를 역
전시킬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어려운 슛을 던지
다가 행여라도 실패하면 자신감은 훨씬 위축되게
마련이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12


이런 것이 모든 프로의 game plan에 반드시 포
함되어 있다. 주눅이 들면 번트를 쳐야 하고, 복싱
이 안 될 땐 잽을 날려야 하고, 골프가 꼬일 땐 짧
은 채로 거리를 포기하고 쳐야 하며, 당구가 꼬이
면 가야시를 생각지 않아야 하고, 전투에서 패색이
짙을 땐 돌진하면 안 된다. 이미 작전에서 밀리고
있을 때 만용을 부리다가는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
을 뿐이다.
 
모든 스포츠 모든 승부에서 뻔한 이야기다. 다만
투자를 하는 사람들만이 희한하게 만용을 생활화
한다. 아니지, 어쩌면 모든 분야의 초짜들은 만용
을 부리지만, 투자의 세계에선 유난히 정신 못 차
린 초짜가 프로 무대에 당당히 입장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일 수도 있다. 자신감이 위축되려 할 땐 가
장 자신 있는 액수로, 가장 자신 있는 기법으로, 배

8. 번트 113
트를 짧게 쥐고 한푼 두푼 다시 모아가기 시작해야
한다. 돈이 모이는 것도 기운이라 물꼬를 트지 않
으면 한도 끝도 없이 패배할 수 있다. 조지 소로스
도 일이 꼬일 땐 움츠린다. 세계 최고의 트레이더
들은 실패의 악순환을 반드시 끊어내고, 적은 금액
부터 다시 차분히 꽃 키우듯 가꿔간다. 심지어 프
로 갬블러들도 승기를 잡을 때까진 적은 금액으로
놀게 마련이다.
 
논외의 얘기지만, 투자의 세계에서 가장 흉 운은
첫 타석에서 홈런 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죽
어도 홈런의 꿈을 못 버린다. 몇 년이 지나도 손끝
의 그 짜릿함이 잊히질 않는 것일 터. 다른 모든 것
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번트를 노리는 사람은
남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홈런을 노리다가
날린 돈이 너무 많아져 돌아갈 곳이 없다고 얘기한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14


다. 자신은 홈런을 치기 위해 태어난 그런 유전자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안타깝다. 일전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도박 중독자들이 늘어놓는 레퍼토리
와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금관리는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석에서 때에 따
라선 번트를 치는 자세이다. 출루하지 못할 시에 잃
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이해하는 전략적 선택이
다. 지고 있을 때, 혹은 이기고 있으나 반드시 이겨
서 끝내고 싶을 때, 자금관리를 시작하면 절대 대패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론 대승은 하
지만 대패는 하지 않는 장군이 최강의 장군이다.

8. 번트 115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착오매매 사고도 자주 나타난다. 소위 ‘한맥 사


태’가 가장 유명했지만, KTB 증권도 알고리즘의
어처구니없는 오류로 100억대 손실이 난 적이 있
었다. 비슷한 건수는 작고 큰 차이일 뿐 많이 있
었다. 다만, KTB 증권에서 문제의 사고가 터진
2013년 6월 25일 날 나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
에 어제처럼 생각이 난다. 해괴한 사건이었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16


나는 당시 새로 적응한 매매 스타일로 특히 그 날
역대 최대 손익을 벌고 있었다. 아침부터 느리게
움직이던 하락 추세에 편승해서 풋옵션을 아주 많
이 매수하고 있었고 시장은 약속된 패턴으로 하락
하여 옵션들이 들썩이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트레이딩룸에서 매매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후에 엄청난 주문사고가 선물 시
장에서 나타나더니 본부가 술렁거렸다. 주문사고
의 규모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선배들이 서로
부르고 뛰어다니고 난리도 아니었다. 매매에 방해
될까 봐 나한텐 정확히 설명해주진 않았는데, 우리
팀에 갓 전입해온 분이 연루된 악성 사고였다. 심
지어 그분은 당일 출근도 안 한 상태. 금요일 날은
나한테 ‘천 과장의 매매를 보고 있으니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매매 기법을 완전히 바꿔보고자 한
다.’라는 불길한 소리를 남기고 휴가를 낸 상태였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17


다. 어떻게 휴가를 낸 분이 이런 사고에 엮여 있는
가, 머릿속에 온갖 께름칙한 생각들이 스쳐 갔다.
그 직전 2년여를 우리 팀장님과 우리 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인생을 전부 쏟아부은 터였다. 당일
매매를 정리하고 축하받을 새도 없이, 상황이 얼마
나 상상을 초월한 영역에서 발생했는지를 전해 듣
고 충격을 받았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편의 마지막 내용.
개발자가 아닌 사람은 몇만줄의 프로그래밍에서
단 하나의 부호를 잘못 썼을 때 얼마나 큰 규모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돈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한 줄의 잘못된 코
드가 어떤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는지 일반적인
감각으론 받아들이기 힘들다. 인공지능의 예측 불
가능성보다, 사악한 사람의 의지보다, 버그가 더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18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그 버그를 확인할 길이 없
는 회사의 시스템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자.
 
상대 호가라는 것이 있다. 호가는 ‘가격을 부르
다’는 뜻이다. 시장에서 미나리를 파는 아주머니
가 ‘한 단에 2천 원이요!’를 외치면 그것은 매도호
가이다. 내가 가서 ‘아주머니 1800원에는 안 되나
요?’라고 외치면 나는 매수호가를 부른 것이다. 둘
중 하나의 가격에 거래가 성사가 안 된다면, 서로
상대 호가를 물끄러미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2000/1800에 호가가 형성되어 있다고 세
련되게 표현해보자.
 
2,000원에 팔려고 내놓은 물량이 50단이 있으면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19


‘호가잔량’이 50인 셈이다. 내가 50단을 사야 하
는 상황이면 한 번에 다 살 수 있는 호가 잔량이 있
는 셈이고, 내가 100단을 사야 한다면 여기서 50
단을 싹 쓸어버리고 다른 데 가서 다시 물량을 확
보해야 한다. 어쩌면 소문이 나서 가격이 오를 수
도 있다. 물량이 없다면, 내가 2,000원에 50단을
사고 싶다는 이야기가 시장에 나돌며 매수호가의
잔량이 50이 쌓이는 셈이다. 어쩌면 50단이 팔리
자마자 아주머니는 어디선가 100단을 더 꺼내와
서 나한테 50단을 더 팔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다시 매도호가 잔량이 50개가 쌓여
있게 되는 것이다.
 
주식투자를 해본 사람이라면, 호가가 형성되는
구조를 호가 창을 통해 한 번이라도 봤을 것이다.
책처럼 겹겹이 쌓여서 가격(호가)과 물량이 나타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20


는 그 창 말이다. 단어가 어려워서 그렇지 별 얘기
아니다. 어려운 단어들이 난무하는 김에 더 어렵게
표현해보면 이런 것을 시장의 미시구조라 한다. 장
터에서 가격이 들쑥날쑥하는 메카니즘과 비슷하
다. 아이, 요새 미나리 쓸어가는 사람이 있어서 가
격을 올렸어요~ 라는 표현 안에 이런 미시구조가
듬뿍 담겨 있는 것이다.
 
보통 트레이더들은 선물 (futures) 거래와 호
가를 보며 시장의 분위기를 살핀다. KOSPI200
을 상징하는 이 선물이라는 상품은, (280pt인
지금 기준으로) 국내 대형주 200종목의 지수인
KOSPI200 주식 1.4억 원어치를 비중대로 들고
있는 것과 거의 똑같다. 다만 훨씬 적은 돈으로 같
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레버리지 효과와, 매도부터
할 수 있다는 장점 등이 있다. 그러니 선물 100계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21


약(주식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이면 140억 원
어치 KOSPI200 주식을 들고 있는 것과 손익이 거
의 같이 움직인다.
 
당시에도 많은 알고리즘이 시장에서 돌아가는 중
이었다. 0.001초를 millisecond, 즉 천분의 일초
라고 하는데, 선물시장의 체결과 호가의 움직임은
이런 천분의 일초보다 빠른 속도로 끝없이 움직인
다. 수많은 주체가 이 선물시장에서 한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호가를 넣거나 빼고 체결을 하고 청산
을 하며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매우 효율적으로 움
직이는 시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주식 시장 전
체의 분위기를 살펴보는 방법으론 매우 효율적인
상품인 셈이다. 이때는 한 호가에 적게는 50계약,
많게는 400계약 정도가 ‘호가잔량’으로 쌓이던 시
절이다. 그러니 약 4~500억 원까지는 시장을 놀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22


래키지 않게 한 클릭만으로도 체결이 가능했다. 이
러니 KOSPI200 선물 시장이 세계 지수선물 시장
중에 최상위의 거래량을 자랑했던 것이다.
 
이날 사고는 이 호가 잔량에서 우선 발생했다. 선
물의 매수호가 잔량, 즉 미나리 1,800원에 50봉지
사겠다는 실시간 정보가 갑자기 기괴한 숫자를 찍
기 시작했다. 50봉지가 100봉지 500봉지 1000봉
지 5000봉지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선물 기
준으로 다시 말해보자. 2013년 6월 25일 오후 2
시 반, 주식 동시호가는 20분 남아있었고 선물 동
시호가는 30분쯤 남아있어 거의 시장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 시장은 아침에 비틀대더니 하루종일 추
세적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었고, 먼젓번 글에 밝힌
것처럼 나에게는 이런 움직임은 모처럼 나온 ‘약속
된 패턴’이었기에 개인적으로는 역대 최대의 베팅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23


으로 역대 최대의 수익을 보고 있었다. 하락의 끝
자락이 다 진행되기 전에, 268.20이라는 매수호가
에 약 200계약 남짓하던 잔량이 순식간에 올라가
서 1만, 2만, 3만, 4만…. 10만 넘게 찍히는 것이
었다. 단순계산해도 10만 계약은 14조 원어치의
주문이다. 명백한 주문 실수였다. 게다가 한 증권
사에서 9999계약 이상을 보유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 주체임이 확실했으므로 시스템 오
류가 동반된 엄청난 주문 실수였다. 게다가 주문은
초당 몇천 계약씩 꾸준히 누적되어 쌓이고 있었다.
 
주문사고를 낸 사람이 주문을 취소하지 않고 있
는 것을 보니 주문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
니면 주문 취소 시스템마저 붕괴된 무척 심각한 상
황임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매도호가에서 사고가
났다면, 추세하락에 빌붙은 추세추종형 주문이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24


손절 사고가 났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매수 즉
시장상승을 노린 주문이 발생한 점은 그냥 단순 오
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트레이더가 아닌 누군가
의, 혹은 기계적 실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누군가
의 실수는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기회일 수 있다.
트레이더의 본능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머리 꼭대
기까지 솟구칠 만큼 흥분됐다. 당일 본부에서 매매
를 하는 사람은 거의 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
는데, 자잘한 주문사고를 순발력 있게 잡아먹은 경
험도 있어 이런 기회를 포착할 자신이 누구 보다
넘쳤었다. 더욱이 손익이 두툼한 날이었다. 일생일
대의 날이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사고 후 여기까지
3~40초의 시간이 흘렀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
졌고, 모니터의 한 픽셀 한 픽셀이 내 뇌에 직접 꽂
힌 듯 시장의 모든 뉘앙스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25


그때쯤 다른팀의 대리가 얼굴이 하얘져서 뛰어들
어오더니 얼마 전 부서이동을 한, 휴가 간 과장님을
찾더니, 휴가라고 답하자 얼굴이 더 창백해져 다시
뛰어갔다. 이 급한 시점에 남의 트레이딩룸에 저렇
게 찾아오는 것을 보니 이런 경험이 부족한 친구라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구나 싶었다. 손익도 안
좋을 텐데 불필요한 매매를 하다가 운 나쁘게 잘못
걸린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어 안타까웠다.
 
이런 주문사고의 진행 형태는 유경험자에겐 꽤
뻔한 패턴이다. 가격이 엉망진창으로 한쪽으로 튄
다. 포식자들의 압박을 버티지 못해 폭발하는 것이
라고 생각해도 좋다. 대개는 주문사고를 일으킨 사
람에게 최악의 형태로 끝나고 만다. 매수 주문을
취소하는 사이에 잔인한 트레이더들이 미친듯이
반대 체결시켜, 훨씬 불리한 가격에 눈물을 머금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26


고 손절할 수밖에 없도록 시장을 밀어붙이는 상황
이 가장 확률이 높다. 이곳은 정글이고, 약자의 사
체가 생태계를 보존시키니까. 매수 주문을 낸 사람
의 의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때일수록 결과는
뻔하다. 그러나 이번 사고는 규모 자체가 너무 커
서 의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트레이더들은 전
호가의 주문 잔량을 빼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일
단 무조건 이탈하는 셈이다.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주문사고를 낸 사람에겐 지옥 같은 상황이다. 엎
친 데 덮친 격으로 주문사고가 더 높은 가격에 매
수 체결되기 시작했다. 선물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
기 시작한 것이다. 호가에는 12만 계약, 약 15조
원의 주문이 쌓여있고, 시장가 매수로 7000계약,
즉 1조 원 정도의 주문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시
장을 뒤집어엎었다. 난장판이었다. 하방 포지션이
던 나는 리스크 관리를 해가면서 버텼다. 포지션을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27


많이 줄여둔 게 어쩌면 엄청난 다행이었다. 어차피
사고를 낸 사람은 매수한 물량을 시장에서 풀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도무지 이익을 보고 풀 수는
없는 포지션이다. 어마어마한 손실로 마무리될, 예
고된 비극이 보였다.
 
그런데 본부 분위기가 이상했다. 선배들이 뛰어
다니기 시작했고, 윗분들은 아랫사람에게 상황파
악을 하고 있느냐, 이 사고는 너희 탓이라느니, 면
피를 위한 잔인한 포석을 일찌감치 깔고 있었다.
뭔진 모르지만,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집중력을
흩트려 트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걱정이 들었
다. 나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봐도 우리 본부에
서 이런 사고를 일으킬 어떤 종류의 시스템도 매매
도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95%의 트레이더
가 손으로 매매하고 있었고, 한분 한분이 백전노장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28


들이었으며, 사고 대응 능력은 완벽에 가까웠을 것
이다. 12만 계약이라니,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
는 애당초 우리 시스템에서 주문이 나가지도 않을
터였다. 유일하게 손으로 매매하지 않는 사람은 내
가까이 앉아있던 절친 한 명과 오늘 출근도 하지
않고 매매도 하지 않은 스캘핑 시스템 트레이더 한
분이었다. 절친인 그 개발자가 평소에 사고를 막기
위해 들이는 정성과 사고방지를 위해 포기하는 엄
청난 손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로서는 당황스러
웠다. 다행히 (?) 호가 없이 폭등 질주하던 시장은
제정신을 차리고 순식간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하락세를 일부 다시 진행했다. 매수를 한 사람의
주문으로 폭등하고, 그 사람이 청산하며 다시 원위
치한 것이다. 나도 거의 휩쓸려 나갈 뻔했다. 7 포
인트, 약 3%에 가깝게 폭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다. 5 포인트 정도밖에 안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29


올랐을 수도. 리스크 관리를 더 잘했다면 수십억도
벌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본부 내 분위기가 심
상치 않고 도저히 매매할 환경이 아니어서 당일 벌
었던 수준의 절반도 안 되는 1억쯤에서 수익을 챙
기고 포지션을 다 정리해버린 다음 주위 분위기를
살펴봤다.
 
맙소사.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휴가 가신 분이
연루된 사고였다. 믿기지 않았다. 아까 뛰어온 대
리의 팀원 한 명이 이 분과 함께 무슨 사고를 일으
켜 1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
무리 들어도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트레이더들이 사고를 피하기 위해 바치는 비정상
적으로 어마어마한 조심성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심성이 99인 사람이란 1만큼이
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기회는 전부 포기하는 사람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30


들이다. 복잡해질 여지가 있는 시스템은 죄다 거부
한다. 블랙박스 시스템은 주문에 몇 겹의 안전망을
마련하지 않으면 쳐다도 보지 않는다. 그런 시스템
들마저도 개별 트레이더에게 구상권을 분명히 청
구하게 마련이다. 정글 속에서의 생존법을 익혀온
트레이더 출신에게서 발생할 사고는 절대로 아니
었다. 더욱이 그 팀 팀장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조심성이 가장 많은 분이었다.
 
장이 끝나고 사고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 사고의
본질은 이랬다. A 씨와 B 씨가 있는데, 한때 같은
팀으로 있다가, B씨가 불과 몇 주 전 우리 팀으로
들어왔다. 둘은 팀이 갈린 이후에 함께 주문 시스
템을 하나 사적으로 고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
자의 팀장들에게 보고 없이 시스템을 개발했고, B
씨가 A씨에게 베타버전을 건네고 휴가를 갔다. A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31


씨는 이것을 실험 운용해보다가 시스템이 뻑나서
사고가 난 것이다. 밖에서 담배 피우고 있느라 실
제 사고가 발생한 시점 한참 후에 사고를 알아챘다
고 한다. 손실은 A씨의 계좌에서 발생했으니 두말
할 것 없이 A씨가 책임질 일이었다. 팀장한테 보
고를 안 했으니 팀장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다. 관
리자의 책임을 져볼 기회마저 놓친 것이지만, 그렇
다고 책임이 없진 않을 것이다. B씨가 시스템을 잘
짰건 못 짰건 간에, 최소한의 절차 두 가지를 어긴
것이 나는 심각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팀
장한테 보고할 의무를 어긴 점, 둘째는 회사의 서
버상에서의 리스크관리 시스템의 프로토콜을 마
음대로 넘나 들은 자신감. 나는 특히 이 ‘자신감’에
의한 사고가 정말 무서운 점이고, 수없이 반복될
수 있는 유형의 사고라고 생각한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32


이 B씨는 서버 개발 및 관리자로 잘 나가시던 분
이셨는데, 스캘핑 시스템을 여럿이 함께 개발하여
트레이더로 전직하게 되셨다. 소위 반자동 시스템
이라는 것이었는데, 진입은 기계가 하고 청산은 손
으로 하는 그런 스캘핑이었다고 한다. 초기엔 돈이
되다가, 시스템을 고안한 트레이더가 떠나는 등 시
간이 흐르고 장이 바뀌자 시장에서 안 먹히기 시작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 팀에서 양매도 시스
템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한 번 더 자리를
마련한 셈이었는데, 다른 팀과 개인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계셨던 것 같다. 문제는 회사 내에서 거래
소랑 다이렉트로 연결된 증권 FEP 라는 서버가 있
는데 이를 딜러들에게 공개해놓으면서 대신 주문
한도 등을 철저히 정해서 보고하라고 했던 것을 다
소 악용한 점이다. 주문 한도를 제대로 설정을 안
해놓은 상황에서 잘했다고 대충 보고를 한 것이라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33


전해 들었다. 서버 개발자로서의 자신감 때문에 남
들한테 해당하는 규정이 본인에겐 필요 없다고 독
자적인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소스가
트레이더들한테 있다 보니 회사에서 그냥 믿는 수
밖에 없었고, 정확한 감시를 하기 힘들었다. 트레
이더의 자기 감시 능력과 윤리의식, 철저한 리스
크 관리 능력이 그때까진 그만큼 뛰어났다는 방증
이기도 하고, 그런 틈을 타 트레이더의 정신세계를
갖지 않은 사람의 가벼운 실수에 시스템이 붕괴한
면이기도 하다.
 
이 사고에 연루된 분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
고 한때 한솥밥을 먹었으니 이 글을 읽게 되면 속
이 상하시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인생
에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을 마냥 쉬쉬하는 것이 모
두를 위한 길은 아닐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잘나가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34


시던 윗분들도 인생에 큰 굴곡을 겪었다. 위에 밝
힌 A씨는 내가 만나본 트레이더 중에 가장 온화하
고 양반인 분 중에 한 분이셨다. 나중에 회사에서
처벌은 물론,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의 구상권까지
청구 당하시고도 이 사고로 피해를 보신 윗분들에
게 손편지를 써서 사과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
타깝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사건을 굳이 다루는 이유는, 앞서 말한 듯이
반복될 수 있는 유형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출신이 만든 로보어드바이저가 거의 없는
이 시대에, 금융권 출신인 내가 이런 얘기를 하긴
조금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 트레이딩 룸
의 경험이 있는 모든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것
이다. 리스크 관리와 사고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35


하고 막연히 잘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자신감’을
가지고 개발한 자동 주문 시스템들이 과연 사고가
없을 수 있을까? ‘이쯤은 괜찮겠지’라고 스스로 판
단하여 규정을 넘나들 권한이 있으면 어떻게 관리
가 가능할 것인가. 그들이 트레이더들이나 관련 부
서에서 가지고 있는 극한의 조심성과 자기 감시 능
력을 별도의 훈련 없이 되새기고 있을 것이라고 전
제할 수 있을까? 금융위에서 위와 같은 사고를 일
으킨 개발자들의 코드를 다 뜯어보면 이런 사고들
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분
명히 어처구니없는 사고들이 똑같은 패턴으로 반
복될 것이다.
 
그렇다고 규제 당국이 나타나서 이런 사고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막아질
사고도 아니다. 이런 글들을 통해 아주 많은 사고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36


의 위험성이 부각되어야 하고 고객 및 개발자들이
인지를 해야 한다. 금융은 정말이지 제약조건이 많
은 산업이다. 규제의 제약 말고도, 일상적으로 생
각하기 힘든 사고의 위험을 줄여나가기 급급한 재
미 없는 산업이다. 트레이더의 머릿속에는 시장 속
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갖가지 사고들의 지형이 입체
모델처럼 펼쳐져 있다. 어디서 어떤 사고가 발생해
도 이상하지 않기에, 그 사고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트레이더는 항상 리스크 관리팀의 눈을
피하고 싶다. 시장에 대한 이해가 더 높지 않은 리
스크 관리팀 입장에선 항상 트레이더의 자유도를
줄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투명한 전략, 불
투명한 시스템을 자꾸 만들고 싶은 충동이 있다.
뚜렷한 윤리 문화가 아니면 이를 막기는 힘들다.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37


로보어드바이저는 아마 더할 것이다. 로보어드바이
저에게 필요한 것은 명명백백히 투명한 투자 철학
과 논리이다. 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것을 만들면 사
고의 여지가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된다. 덜 복잡하
되, 자동화를 통해 효율을 늘릴 수 있는 전략들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 체결된 종목들이 어떤 이유로
체결되었는지 ‘블랙박스 인공지능 기술의 집합체이
기 때문에 안알랴줌’이라는 얘기는 같은 로보어드
바이저인 우리 입장에서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얘
기이다. 사고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일 수 있
는 자신감일까. ‘우리는 좋은 대학 나왔기 때문에
그럴 리 없음’이라고 반론을 제시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로보어드바이저들은 헤지펀드의
뒤켠에서 트레이더를 잡아먹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행여나 오류가 발생하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38


더라도 그 오류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책임
질 영역에서 말이다. 대중의 투자에 필요한 것은
첫째도 안정성이고 둘째도 안정성이다. 워런 버핏
마저도 ‘돈을 잃지 말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잡았
다. 버핏도 사용하지 않을 시스템을 대중에게 강요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여하간에 많은 금융권 출신들이 우리가 만드는
로보어드바이저의 투명성과 안정성, 신뢰성을 높
게 평가해주는 것은 이런 편집증에 가까운 조심성
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주어서일 것이다. 트레이더
라고 신비롭고 폐쇄적으로 포장할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누구나 프로가 되기 위해 바치
는 오랜 세월의 고된 경험과 자기절제를 통해 더욱
투명하고 간단명료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해왔다. 꼼수를 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알아

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139


볼 수 있다. 불투명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몇
마디 그럴싸한 얘기를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40


2부

투자의 룰: 소수결

141
투자의 룰: 소수결

투자계의 절대 원칙, 소수결.

소수결 게임을 하는 법. 군중이 OX 퀴즈를 한다.


답이 무엇이든 간에 다수는 탈락하는 게임이다. 엄
청난 눈치 게임이다. 친구도 못 믿고 부모 자식도
못 믿는다. 내 편에 다가서면 우리 모두 다수에 걸
릴 가능성이 커진다. 지인끼리 더더욱 흩어지고,
배신하고, 밀쳐내야 한다.

투자의 룰: 소수결 142


그것이 금융 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지는
게임 중 하나다.
 
소수결 게임을 시작하며, 군중 천명이 만 원씩을
들고 시작했다고 해보자. 게임이 진행되며, 탈락한
다수의 돈이 소수에게로 모인다. 소수들이 게임을
그만하자고 합의할 때까지 소수결은 진행된다. 결
국 다수의 돈은 소수에게 모여 아주 큰 돈이 되어
있다. 예컨대 열 명이 남았으면 인당 100만 원씩
이다. 이 게임의 묘미는, 잃은 사람은 적은 돈을 잃
고, 딴 사람은 많은 돈을 땄다는 것이다. 사회적으
로는 티가 별로 안 나는데, 소수는 매우 큰 행복을
얻었다고나 할까.
 
실제 금융시장에서의 소수결 게임은 이런 일반적
인 소수결 게임보다 잔인하다. 그 소수가 돈과, 권

투자의 룰: 소수결 143


력과, 정보를 모두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똑똑하며, 더 전략적으로 움직인다. 다수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띄엄띄엄 신문에 나온 내용을 찰떡
같이 믿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투자
정보나 줏어듣게 되어 있다. 행동이 느리고, 행동
은 일관성이 없고,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행동들은
아주 체계적인 손실을 입을 수 있는 행동들이다.
물소 떼처럼, 겁이 나면 달리고, 앞에서 달리면 벼
랑에라도 뛰어내린다. 단체로서 멍청할 수밖에 없
다. 정보의 흐름이 그렇다. 전문적인 전략을 짤 수
가 없다. 인력의 흐름이 그렇다. 그러나 소수의 부
자에겐 수백 명의 펀드 매니저 친구가 있고, 언론
이 있고, 자금이 있고, 회계사가 있다. 정보를 가장
먼저 얻을 수도 있고, 때론 정보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급할 경우엔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버릴 수
도 있다. 자, 여기서 소수와 다수가 싸우면 누가 유

투자의 룰: 소수결 144


리하겠는가. 얼마나 더 유리하겠는가.
 
나는 음모론자는 아니지만, 금융에 있어서 음모
론들이 일부나마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러한
소수결의 법칙 때문이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돈
이 많은 집단이 1920년대의 강세장에서 모든 국
민이 골고루 돈을 버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고
해보자. 세상의 자본총액은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나누면 나눌수록 부자가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폭
이 줄어든다. 부자들은 억울하게 생각했다. 큰 시
장 폭락을 조장해서 전 국민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헐값에 팔도록 시장을 조종할 수 있을까? 그런 것
을 원할까? 둘 다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내가 음모론자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정황상 실
제로 그렇게 치밀하게 음모론을 시행하기는 힘들

투자의 룰: 소수결 145


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자들도 군중을 따라 움직
이기도 하고, 부자들도 그렇게 단합해서 움직이긴
힘들다. 많은 부자들이 대공황 때 자살했고, 생존
한 부자들이 다 부자가 되진 않았다. 그러나 훨씬
더 부자가 된 소수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소수결
을 철저히 믿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런 위기를 철저
히 인지하고 활용하였다. 우연히 정확한 타이밍에
다수의 의견을 불신하여 반대로 투자한 사람은 흔
치 않다. 돈을 번다는 것은 정확한 설계가 필요하
기 때문이다. 반면 다수는 영원히 소수의 편에 서
지 못할 것이다. 소수의 편에 서는 순간 이미 다수
이기 때문에. 소수결 지향자들은 다 잽싸게 군중을
배신하고 흩어진 이후다.
 
소수결은 그 자체로 강력한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실제 음모를 가지고 기획하는 사람이

투자의 룰: 소수결 146


있건 없건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서브프라임 모기
지도 좋은 예이다. 모든 사람이 부동산 불패를 믿
다 못해 파생상품으로 부동산이 절대 하락하지 않
는다는 베팅을 하다보니, 그 베팅이 과열되어 실제
상황보다 훨씬 베팅액 비율이 과장된다.
 
예컨대 만 원짜리 로또의 기대수익이 오천 원이
해보자. 사람들이 중고나라에서 아직 발표되지 않
은 로또를 갑자기 투매하다 보니 중고 로또 가격이
폭락하여 만 원짜리가 장당 1원에 팔리고 있다고
해보자. 적당히 많은 로또를 긁어모으면 1원당 오
천 원의 기대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
도 가격이 만들어지려면 정말 엄청나게 압도적인
다수가 로또를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 실제 금액은
소수가 더 적을 수 있지만, 사회 전체가 들썩일 정
도로 로또 투매 붐이 만들어져야, 로또의 가격을

투자의 룰: 소수결 147


올리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소수의 인원끼리 그 로
또를 다 매집할 수 있다.
 
즉 사회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한가지 상품에 다
수가 몰릴 때, 소수에겐 항상 좋은 투자 기회가 발
생한다. 가격이 왜곡될 뿐 아니라, 실제 결과를 왜
곡하여 큰돈을 벌 기회마저 주어지기 때문이다.
 
코스피가 많이 올랐으니 과열 아니냐는 얘기를
근래에들 한다. 이 정도로는 소수결 수준이 아니
다. 코스피를 공매도해서 조금 하락시키면 전 세계
가 깜짝 놀라서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며 패대기치
진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한참 멀었다. 모든 사람
들이 교조적으로 어떤 현상을 믿고 있어야만 소수
결 게임의 시동이 걸린다. 대중 전부는 절대 진리
라고 믿고 있어서, 부자들이 마음껏 반대로 행동해

투자의 룰: 소수결 148


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누군가 소수결 의견을 얘기하면 사람들이 신성모
독이라며 돌팔매를 던져야 한다. 여기서 ‘사람들’
은 특히 똑똑하고 잘 배운 사람들이다. 학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권위 있는 교수와 업계 최고의 애널
리스트들이 모두 종교적 신앙을 가질 정도의 상황
일 때가 소수결의 정점이다. 그들에게 반론을 내세
우면 업계에서 매장당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서브
프라임 때 그랬고, IT 버블 때 그랬고, 대공황 때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 냄새를 잘 맡으면 위기를
피해 기회로 만들 수가 있다. 짧게는 산업군 투자
에서도 활용 가능한 방법이다.
 
내가 경제에 대해 무엇을 알겠느냐마는, 소수결
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그래서 지금 소수결 싸움
이 맹렬히 진행 중인 것도 있다고 느낀다. 아직 한

투자의 룰: 소수결 149


참이 더 진행되어 내가 도저히 창피해서 더 말하고
다니지 못하는 수준까지 가야 진정한 소수결일지
도 모르겠다. 마지막 남은 극소수까지 가야만 최대
수익을 얻을 수 있는게 소수결이니까.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현재 전 국민이 저금리의
고통을 외치며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다 자
산을 사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아니, 저금리이니까
돈을 빌리기 쉽고, 그러니 빌려서라도 뭔가 자산을
사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 근간은 물가상승에 의
해 내 현금이 다 휴지조각이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부동산이고 주식이고 밥값이고 다 꾸준히 영원히
오를 텐데 내 현금만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는 교수
들의 외침에 부응한 것이다. 정부도 돕고 있고, 금
융권도 돕고 있다. 다만, 전 세계 부자들만은 미친
듯이 자산을 처분하여 현금을 확보하고 있다. 1:99

투자의 룰: 소수결 150


의 싸움이다. 99는 현금이 필요 없다고, 손해라고
생각하고, 1은 현금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다. 1
이 전부 틀려서 99에게 모든 부를 다 나눠줘 버렸
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소수결의 게임이 이번만
기가 막히게 틀릴 가능성은 없다. 고의든 아니든,
현금의 가치가 올라가고 나머지 모든 가치가 떨어
진다면, 1은 대승을 이루게 되고, 99는 모두 한푼
두푼 다 모아서 1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할 때는 반드시 그렇게 되더라. 양
쪽 생각이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면, 세상은 다수에
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 버린단 얘기다. 현금의 가
치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정도로 극단적인 사회 분
위기가 형성되어야 소수결이 완성된다는 얘기였다.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더라고, 한 번씩 생각해주
면 좋겠다.

투자의 룰: 소수결 151


3부

레짐을 이해하라

152
레짐을 이해하라

정권, 혹은 체제라는 뜻의 ‘레짐’ (regime). 투자


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단어이고, 그에 비해 연
구가 덜 된 영역이며, 불리오 알고리즘에 들어가는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이 개념을 반드시 이해하기
를 권한다. 여기서 레짐은 경기 사이클이나 시장의
지배적인 분위기 혹은 구간을 이야기한다. 정권이
바뀌듯이, 시장 환경도 아주 뚜렷하게 바뀐다는 뜻
이다.

레짐을 이해하라 153


 모든 위대한 투자자들은 레짐을 완벽히 이해했
다. 대표적인 사람이 트레이더 중에 제시 리버모
어, 헤지펀드계에선 레이 달리오이다.
 
제시 리버모어는 한 세기 전의 전설적인 트레이
더다. 어릴 땐 직관과 호가 매매를 통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종국에는 개별 시세의 움직임보다 ‘거시
적 시장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이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상승장에 주
식을 들고 있고, 하락장엔 매도한다는 얼핏 듣기엔
매우 간단한 방법론을 얘기하지만, 그 결과는 어마
어마했다.
 
한국의 전설적인 트레이더 선경래 씨는 몇천만
원으로 투자를 시작하여 2008년의 하락장 내내
하락 베팅에 성공하여 1조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레짐을 이해하라 154


고 한다. ‘하락장’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인지하지
않는다면 이런 규모의 거래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락장이라는 레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
로 파고든 것이다. 남들은 물론 -50%의 하락세 내
내 ‘반등’만 얘기하다 끝난 시절이었다.
 
리버모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글로벌 매크로 트
레이더 Colm O’Shea (콜름 오셰아)는 조지 소로
스 밑에서 일하다가 향후 COMAC 을 차린다. 오
셰아는 2007년 8월 단기 자금 시장이 말라버린 것
을 보고 하락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
나 당시엔 아무도 단기 자금 시장을 주목하지 않았
다. 그가 항상 하는 이야기는, 거시전망은 내일 날
씨를 예측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빗방울이 떨어지
고 있는지를 관측하는 일이라고 한다. 즉 현재의
레짐이 변화하였는지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레짐을 이해하라 155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가 반전이다. 모
두가 레짐의 변화에 관심이 없고 허튼소리를 하고
있을 때, 정확한 정보를 찾아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브릿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레이 달리오는 레짐
을 독특하게 해석한 스타일이다. 달리오는 대부분
의 투자론을 ‘불가지론’으로 설명하는 겸허한 헤
지펀드 제왕이다. 즉 대부분 시장에서는 상승 종목
같은 것을 알 수 없기에, 오로지 분산투자한다는
관점이다. 단 하나, 수백 년의 역사를 연구하는 수
백 명의 역사학자로 이뤄진 팀원들이 연구해낸 것
은, 레짐이 변화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의 레짐
은 구체적으로 물가 상승기나 하락기와 경기 상승
기와 하락기가 교차하는 4개 구간의 레짐이다. 다
른 모든 것은 알 수 없지만, 특정 레짐에서 어떤 자

레짐을 이해하라 156


산군이 더 상승하는지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것에 양념을 조금 더해 세계 최대의 헤
지펀드를 만들어냈고, 매년 10% 안팎의 수익을 꾸
준히 올리고 있다.
 
우리가 구분하는 레짐은 위의 투자자들과 비슷하
면서도 조금 더 데이터 중심으로 구체화했다. 상승
장 중에서도 점진적 상승장, 폭발적 상승장, 하락
장 등으로 나누고 개별 레짐 내에서의 특징을 분석
하여 우리가 투자하고 싶은 레짐만 골라 투자하는
방식이다. 특정 레짐이 다른 레짐과 명료하게 구분
된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사점이다. 일반
적인 학자들은 레짐의 구분 없이 시장을 너무 일반
화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20년간의 시장의 특성,
같은 식으로 말이다. 시장은 레짐 별로 완전히 다
른 인격을 갖고 있다고 보는게 맞다. 하락장에선

레짐을 이해하라 157


뉴스를 받아들이는 모습도, 매도를 하는 모습도,
시장이 반응하는 속도도, 일반적인 수익률도, 순환
매 구조도 상승장과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하락장
과 상승장, 횡보장만으로 구분을 해도 일단은 충분
하지만, 구체적인 시장의 인격들을 발견하면 할수
록 더 정교한 레짐 플레이가 가능해진다.
 
레짐의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변동성이
억제된 점진적 상승장이다. 이 시장은 폭발적 변동
성을 갖춘 상승장과는 인격이 완연히 다르다. 금융
업자들은 흔히 ‘하락’이라는 표현을 싫어해서 ‘일
시적으로 빠졌을 뿐이야’라는 자기최면의 한 형태
로 ‘변동성 시장’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대부분
하락과 변동성이 함께 오는 시장을 이야기한다. 변
동성 높은 상승장을 변동성 시장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시장을 오래 살펴보

레짐을 이해하라 158


고 데이터를 충분히 분석해본 사람들은 상승형 변
동성 시장이 대부분 하락형 변동성 시장의 가장 주
요한 전조라는 것을 안다. 변동성 플레이는 베트를
매우 짧게 쥐고 욕심을 버리고 접근해야 하며, 일
반적으로 의외로 기대수익률이 낮다.
 
레짐을 어떻게 분류하고 인지할 것인지가 투자에
서 가장 중요하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로보어드바
이저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현시점
에 어떤 자산군이나 상품이 투자 기회가 늘어나고
있는지 줄어들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서비스가 투
자 수익률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
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투자 상품들이 레짐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결과, 많은 투자자에게 이루 말
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소위 전문가
들의 이런 무책임하고 무지한 태도를 보고 있으면

레짐을 이해하라 159


정신이 아늑할 때가 많다. 언제 사야 하고 언제 팔
아야 하는지를 모두 맞출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
만 언제가 매수하기 유리한 구간이고 언제가 매수
하기 불리한 구간인지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나 고
민도 없다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투자일 뿐
이다. 이런 투자로는 돈이 절대로 벌리지 않는다.
특히나 이런 투자에 비싼 수수료까지 지불하고 나
면, 남는 것은 나쁜 레짐의 고통을 다 겪고 좋은 레
짐이 오기 전에 포기하는 악순환의 고통일 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현명한 투자자들은 이런 레짐을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활용하길 권하며, 귀찮으시
면 불리오를 사용하기를 권한다. 전 세계의 우수한
레짐에 투자하고, 후진 레짐은 항상 피할 수 있는
길이다.

레짐을 이해하라 160


지은이 | 천영록

편집 | 이병준

디자인 | 유신애

(주)두물머리
(02) 6015-4300
https://doomoolmori.com/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