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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 C H IN K O

M i n J i n L e e 이미정 옮김
ij 종후보작
參^
파친코 ◎
제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세계적 작가로 성장한 이 민 진 Min Jin Lee

한국계 1.5세대로서 제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명성이
자자한 이민진은 유년 시절
가족 이민으로뉴욕에 정착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함
경남도 원산, 어머니는 부
산 출신이다. 그녀는 일곱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 미
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미국
식 이름 대신 어릴 때부터
의 한국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화장품회사 영업사원으로 지내다가 새로운 삶을 찾아 1970년
대 중반에 이민을 결행했다. ‘쥐가 나오는 방 한 칸짜리 아파트
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던’ 가난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이민진
은 일요일도 없이 일하는 부모님의 뒷바과지를 받으며 성장했
다. 이 런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
운대 로스쿨을 졸업한 그녀는 기업변호사로 일하며 한인 이민
사회의 성공 모델로 성장했다.
하지만 B 형간염으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잘나가던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고교 시절부터 재능올 보였던 글 쓰는 일을 시작했다.
2004년에 단편소설〈행복의 축Aids of Happiness〉
,〈조국Mocheriand〉
둥을 발표해 작가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2008년 발표한 첫 장
편소설 (백만장자들을 위한 공짜 음식nee Food for MJHonaires^ -
11개국에 번역 출판되었으며 전미 편집자들이 뽑은 올해의 책,
미국 픽션 부문 ‘비치상’, 신인작가를 위한 ‘내러티브상’ 둥의
결코 작지 않은 출판상올 받았다.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이민진의 소설적 뿌리는 이민이라는 소
재를 자양분으로 뻗어나간다. 막연한 호기심만 품고 있던 재일
교포에 대해 직접 알게 된 계기는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만난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도쿄의 금융회사에서 근무하게 되면
서 그녀는 일본에서 4년간 생활하게 되었고_ 이 기간동안 다양
한 취재와 연구를 통해 소설 <파친코>를 완성할 수 있었다.
P A C H IN K O
Copyright © 2017 by M in Jin Lee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W 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LLC.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8 by Munhaksasang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W 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LLC.
through Im prim a Korea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Imprima Korea Agency 를 통해


W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 LLC.와의
독점 계약으로 (주)문학사상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파친코©
이민진자음ᅵ 이미정 옮김

문 ^ •사 상
■일러두기
1. 한국어판 역주는 본문 안에 고딕 서체의 작은 글자로 처리하였으며,
별도의 표기는
생략하였습니다.
2. 외래어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규정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규정에 없는 경우는 현지
음에 가깝게 표기하였습니다.

※작가의 요청에 의해 주인공의 이름인 ‘Sunja’의 표기를 ‘순자’에서 ‘선자’로 변경하였습니다.


크리스토퍼와 생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크)z
Book 1

P
고 향
n HOM ETOW N
tr

‘•
公 부산의 작은 섬,영도 • -11

o 한겨울의 방문자 • -21

젊은 목사, 이삭 • 니3

운명의 남자 • 나5

몰래한 사랑 • *57

한수의 고백 • 나5

신이 주신 선물 • 내5

신의 계시 • -99

우동 두 그 릇 ,
,115

속죄와 용서-131

떠날 채비

재회 그리고 새로운 생활‘ -153

첫날밤. -167
고난의 길. -179

경희의 꿈 • -195

213엔의 빚,
.빠

엄마가 된 소녀 • -219

혹독한 시련 • *229

김치 아줌마 • -241

새로운 일자리 ' *257

좋은 소식 • ,
269

낯익은 사람 • ,
285

12년 만의 재회 • .301

농장 생활 • -313

a
노아의 아버지 "333 好

사랑의 고통 "351 CT

卜‘ •

지.

Book 1

고향
HOMETOWN

1910-1949
고향은 이 름이 자 강력 한 밀이 다 .
마 법 사 가 외 우 는 , 혹은영혼이 옹답하는
부산의 작 은 섬,영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세기가 바뀔 무렵,나이 든 어부와 그 아내는 돈을 더 벌어 보려고


하숙을 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항구 도시 부산의 영도에서 태

어나 자랐다. 영도는 지름이 8킬로미터 남짓한 작은 섬이었다. 오랜

결혼 생활 동안 어부의 아내는 세 아들을 낳았지만 가장 약한 첫째

훈이만 살아남았다. 훈이는 언청이에다 한쪽 발이 뒤틀린 기형아였

다. 하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체격이 좋았으며 안색은 건강한구릿

빛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온화하고 사려 깊었던 성격은 커서도 변함

이 없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습관적으로 흉한 입을 두 손으로 가릴

때면 자기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잘생긴 얼굴이 었다. 커다란 두 눈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고 먹처럼 짙은 눈썹은 넓은 이마 위로 길게 휘어

졌으며, 피부는 바깥일을 하느라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외모는 부모

를 닮았지만 다른 것은 부모를 닮지 않았는지 훈이는 말을 잘 하지

부산의 작은 섬 ,영 도 11
못했다. 훈이가 말을 빨리 못 하는 걸 보고 생각까지도 어눌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만 천만의 말씀이 었다.

1910년, 훈이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에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었

다. 그러나 훈이의 어부 아버지와 어머니는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중

요한, 신체 건강하고 검소한 서민일 뿐이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썩어

빠진 통치자들이나 무능한 양반들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부부

는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집세가 다시 오르자 자기들 침실까지 하

숙인들에게 내주고 부엌 옆의 곁방에서 잠을 잤다.

부부가 장장 30여 년 동안 세내어 살고 있는 나무집은 그다지 크

지 않았다. 14평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지문으로 나뉜 아늑

한 방이 세 개나 있었다. 구멍이 숭숭 난 초가지붕은 어부가 직접 불

그스름 한 진흙기와지붕으로 바꾸어놓았다. 결국 부산의 호화찬란한

저택에 산다는 집주인만 주머니가 두둑해진 셈이었다. 나중에는 큼

직한 냄비와 휴대용 식탁이 회반죽을 칠한 돌벽에 다 걸어둘 수 없

을 정도로 많아져서 부엌도 채소밭으로 옮겼다.

훈이는 하숙집에 관련된 장부를 쓸 수 있어야 하고 시장에서 속지

않을 만큼은 셈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에 못 이겨 마

을의 학교 선생한테서 조선어와 일본어를 배웠다. 하지만 훈이가 딱

글을 읽고 쓸 수준까지만 배우고 나자 부모는 바로 학교에서 훈이를

빼내 왔다. 청소년이 된 훈이는 두 다리가 멀쩡한 자기 또래보다 두

배나 많은 일을 했다. 손재주가 좋았고 무거운 짐도 나를 수 있었지

만 빨리 달리거나 걸을 수는 없었다. 훈이나 훈이 아버지는 마을에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훈이의 아버지와 어머

니는 살아남은 유일한 불구아들을 영리하고 부지런한 아이로 키웠

12 파친코 O
다 자신들이 죽고 나면 그 아이를 누가 돌봐주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어부와 어부의 아내는 자신들의 심장을 한데 합쳐 기운차게 팔딱

이는 심장으로 만든 게 바로 훈이라고 생각했다. 부부는 다른 자식

들을 모두 잃었다. 막내는 홍역으로 잃었乂 둘째는 허무하게도 소에

받쳐 목숨을 잃었다. 이 노부부는 아들 훈이를 학교와 시장에 갈 때

가 아니면 항상 집 가까이에 두었다. 때문에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

지만 훈이는 끝내 집에 머물면서 부모를 도와야 했다. 노부부가 아들

을 실망시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지는 않았다. 죽은 자식보다 살아 있는 못난 자식 이 가족

에게 더 큰 해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노부부는 아들

을 응석받이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 했다.

영도에 사는 다른 아이들은 훈이의 부모처 럼 분별 있는 부모 밑에

서 자랄 정도로 운이 좋지 않았다. 적들에게 짓밟히거나 자연재해로


황폐해진 나라식ᅵ서는 으레 그렇듯이 노인과 과부,고아 같은 약자들

은 식민지 땅에서 더없이 절박한 처지였다. 한 명이라도 더 먹여 살

릴 수 있다면,보리쌀 한 되만 받고도 하루 종일 일하려는 사람들이

^ 도 없이 많았다.

1911년 봄,훈이가 스물여덟 살이 된 지 2주가 지났을 때였다 뺨

이 불그스레한 중매쟁이가 훈이 엄마를 찾아왔다.

훈이 엄마는 중매쟁이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앞쪽 방에서 하숙하

는사람들이 자고 있었기 때문에 두사람은 나지막한목소리로 이야

기를 나누어야 했다. 늦은 아침이었지만 저녁 늦게까지 고기잡이를

하다 들어온 하숙인들은 저녁을 먹고 잠든 후 여태 잠들어 있었다.

훈이 엄마는 중매쟁이에게 물 한 잔을 사발에 따라 건네고 도마 위

부 산 의 작 은 섬 ,영 도 13
의 무를 계속썰기 시작했다.

훈이 엄마는 중매쟁이가 뭘 바라고 찾0}왔는지 짐작이 갔지만, 무

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훈이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대로 된 집안에서 딸을 언청이에게 내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형은 십중팔구자식에게 유전되

기 때문이다. 훈이 엄마는 아들이 여자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마을 처녀들은 대부분 훈이를 보자마자 피했고 훈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매쟁이의 작고 우스꽝스러운 얼굴은 퉁퉁하고 불그스레했고 감

정 없는 까만 눈이 약삭빠르게 빛났다. 중매쟁이는 좋은 말만 하려고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갈증이라도 나는 것처럼 입술을 핥기도 했

다. 훈이 엄마는 매서운 눈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중매쟁이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중매쟁이는 훈이 엄마의 속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훈이 엄마는

아침에 눈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날그날 필요한 일을 묵묵히 해

내는 조용한 여자였다 아낙네들과 정신 사나운 수다를 떨 시간이 아

까워 시장에도 좀처럼 가지 않았다. 시장에 갈 일이 있으면 대신 훈

이를 보냈다. 중매쟁이가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훈이 엄마의 입은 좀

처럼 열리지 않았다. 무가 토막토막 썰려 나가도 꿈쩍 않는 묵직한

소나무 도마처 럼 미동도 없었다.

결국에는 중매쟁이가 먼저 운을 뗐다. 훈이가 발이 좀 성치 않고

입술이 갈라져서 그렇지 누가 봐도 좋은 아이라고 말했다. 또 교육도

잘 받았고 황소처럼 힘도 세서 듬직하다고 칭찬했다. 그처럼 훌륭한

아들을 가진 건 축복이라고까지 했다. 그러고는 자기 아들들 흉을 보

14 파친코 O
기 시작했다. 아들이라고 있는 것들이 죄다 별 볼 일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책을 파고드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장사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또 그렇게 못 봐줄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다고 했다. 딸은 일찍 결혼해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乂 자식들 모

두 결혼을 했지만 아들들이 게을러서 훈이 같지 않다고푸념했다. 중

매쟁이는 한참 이렇게 늘어놓고 나서 훈이 엄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그 얼굴에 조금이라도 흥미가 어리

지는 않나 살펴본 것이다.

훈이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날카로운 칼을 단단히 잡고서 무를

반듯반듯하게 탁탁 썰었다 네모난 무 토막들이 도마 위에 수북하게

쌓이면 무 더미를 커다란 그릇에 깨끗하게 쓸어 담았다. 하지만 실상

은 중매쟁이의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훈이 엄마는 너

무 긴장해서 몸이 떨릴까 봐 불안할 정도로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중매쟁이는 훈이네 집에 들어오기 전에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

았다. 집안의 재정 상태를 점검해본 것이다. 어디로 보나 훈이네 집

이 알부자라는 소문이 틀린 말은 아니 었다. 텃밭에는 이른 봄비를 맞

아 통통하고 묵직한 무들이 뽑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당의 긴

빨랫줄에는 대구와 오징어가 가지런히 걸려 햇살 아래서 바짝 말라

있었다. 창고 옆의 돼지우리 안에는 흑돼지 세 마리가 들어 있었다.

뒤뜰에 있는 암탉 일곱 마리와 수탉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셈에 넣

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잘 사는 티가 훨씬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부엌의 선반 위에는 쌀과 국그릇들이 쌓여 있었고 하얀 마늘과 붉

은 고추가 낮은 서까래에 매달려 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 갓 캐

낸 감자들이 대나무 바구니 가득 들어 있었고>가마솥에서 훈훈한 보

부 산 의 작 은 섬, 영도 15
리 향과 수수 향이 피어올라 작은 집 안을 떠돌아다녔다.

이곳 시골 사람들은 다들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었지만 훈이네 집

은 무척이나 안락해 보였다. 중매쟁이는 훈이도 건강한 신부를 맞이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는 울창한 숲 속 너머의 섬 반대쪽에 사는 여자애였다. 그 여

자애의 아버지는 소작인이었는데,최근 토지 조사로 임차권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신세였다. 이 홀아비는 빌어먹게도 딸만 넷에

아들 하나 없었다. 하도 가난해 숲에서 주워온 것이나 시장에 내놓을

수 없는 생선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아주 가끔은 이웃이 적선해주

는 것으로 간신히 배를 채우기도 했다. 이 점잖은 아버지는 중매쟁이

에게 딸들의 신랑감을 찾아달라고 간청했다. 딸들이 굶주려서 음식

을 홈치는 신세가 되기보다는 아무하고라도 결혼하는 것이 훨씬 나

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결한 몸이니 비싸게 팔릴 터였다. 훈이의

신붓감으로 올라온 여자애 이름은 양진이 었다. 양진은 넷째 중 막내

였는데 아직 어려서 불평을 하지 못하고 또 적게 먹기 때문에 치워

버리기가 가장 쉬웠다.

양진은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열다섯 살 여자

애라고 중매쟁이가 말했다. “큰돈은 필요 없다 아입니꺼. 양진이 아

부지가 선물을 많이 바랄 수 있는 처지도 절대 아니고예. 알 잘 낳는

암탉 몇 마리하고 양진이 언니들한테 줄 면으로 된 옷, 올겨울을 날

수수 예닐곱 자루만 주면 충분할 낌니더.” 중매쟁이는 결혼 선물을

줄줄이 읊어댔는데도 아무런 불만을 듣지 못하자 점점 더 대담해졌

다. “염소나 돼지 새끼 한 마리 달라 할지도 모르겠네예. 여자애 가족

이 가진 게 너무 없거든예. 사실 신부 몸값은 많이 떨어졌지예. 보석

16 파친코 O
도 필요 없을 낌니더.” 중매쟁이가 살짝웃었다.

훈이 엄마는 두툼한 손목을 튕기듯 움직여서 무에 소금을 뿌렸다.

중매쟁이는 훈이 엄마가 얼마나 집중해서 중매쟁이의 의도를 알아

내려고 애쓰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훈이 엄마는 훈이 신부가 될

아이를 데려올 값이라면 주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가

슴속에서 솟아오르는 상상과 희망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지만,훈이

엄마는 그 마음을 속으로만 간직한 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

만 중매쟁이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도 손자를 볼 수만 있다면야 뭐든지 줄 수 있다 아입니꺼.” 중매

쟁이가 훈이 엄마의 주름진 구릿빛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승부수를 던졌다. “손녀딸은 있지만서도 손자가 없거든예. 가시나들

은 너무 많이 울잖아예.”

중매쟁이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첫 아를 안아 들었을 때가

지금도 기억납니더. 그때 을마나 행복했나 몰라예! 새해에 갓 쪄낸

백설기처럼 새하얀 얼라였다 아입니꺼. 따뜻한 반죽맹키로 부드럽

고 촉촉한 얼라였지예. 한입 깨물어가지고 맛보고 싶을 정도였거든

예. 뭐, 지금은 덩치만 크다란 얼간이가 됐지만서도.” 중매쟁이는 때

아닌 흰소리에 머쓱해져서 불평 한마디를 마지막에 덧붙였다.

드디어 훈이 엄마가미소를지었다. 덩치 큰 얼간이의 모습이 너무

나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매쟁이의 방문을 받기 전

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손자를 안고 싶어 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훈이 엄마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이를 꽉 깨물

고 무가 담긴 커다란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무에 소금이 고

르게 스며들도록 흔들었다.

부 산 의 작 은 섬, 영도 17
“여자애 얼굴도 괜찮아예. 얽은 자국도 없고예. 예의도 발라서 아

버지하고 언니들 말에 순종적이고,피부도 그렇게 시꺼멓지도 않습

니더. 덩치가 좀 작기는 해도 손하고 팔 힘이 세다 카데예. 살은 좀

찌워야 하는데 그건 훈이 엄마도 와 그런지 잘 알잖아예. 양진이 가

족이 좀 힘들어가지고.” 중매쟁이는 부엌 구석에 있는 감자가 가득

들어 있는 대나무 바구니를 보면서 살짝 웃음을 지 었다. 여자애가 여

기서는 원하는 만큼 많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훈이 엄마는 무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고 중매쟁이를 돌아보았다.

“훈이 아부지하고 훈이한테 말해볼게예. 염소나 돼지를 사줄 돈은

없어 예. 겨울을 나게 다른 것들하고 이!솜 은 좀 보낼 수 있고예. 일

단은 물어볼게 예.”

신부와 신랑은 결혼식 날에 처음 만났다. 양진은 신랑의 얼굴을 보

고도 겁먹지 않았다. 양진의 마을에도 그런 사람이 셋이나 있었기 때

문이다. 양진의 집 근처에 살았던 여자애는 코와 갈라진 입술 사이에

딸기 같은 혹이 나 있어서 다른 애들이 딸기라고 놀렸다. 그래도 그

여자애는 놀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양진은 아버지한테서

남편이 딸기와 비슷한데다 다리가 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울

지 않았다. 그런 양진을 아버지는 착하다고 칭찬했다.

훈이와 양진은 무척 조용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훈이 엄마가 쑥떡

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이웃들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숙하던 사

람들도 결혼식 다음 날 신부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양진은 임신을 했을 때 아이가 훈이처럼 기형이지는 않을까 걱정

18 파친코 O
했다. 첫아이는 입술이 갈라지긴 했지만 다리는 멀쩡했다. 훈이와훈

이 부모는 산파가 아이를 보여주었을 때 당황하지 않았다. “당신 괜

찮나?” 훈이가 물었을 때 양진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양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첫아이와 단둘이 남았을 때 양진은

집게손가락으로 아이의 입술을 쓸어보고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양진은 자기 자식만큼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첫아

이는 태어난 자 두 달도 못 되어 열병으로 죽어 버렸다. 두 번째 아

이는 얼굴과 다리가 모두 정상이었지만 그 아이도 백일이 되기 전에

설사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양진의 언니들

은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서 그렇다며 양진에 게 무당을 찾아가 보라

고 했다. 훈이와 훈이 부모는 무당을 믿지 않았지만 양진은 세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들에게 말하지 않고 무당을 찾아갔다. 하지만

임신 중에 벌써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양진은 이 이도 죽겠구나


하고 체념해버 렸다. 세 번째 아이는 천연두로 세상을 떴다.

양진의 시어머니는 몸에 좋은 한약을 지어다 달여주었다. 양진은

갈색 한약을 매일 먹으며 돈을 쓰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훈이는

아내가 출산하고 나면 시장에 가서 미 역을 사다가 직접 미역국을 끓

여주었다. 아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매번 따뜻하고 달콤한 떡을

사다주며 이렇게 말했다. “묵어야 힘이 생기지.”

결혼하고 3년이 지났다. 훈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몇 달 후에 훈

이 엄마도 그 뒤를 따라갔다. 양진의 시부모님은 양진에게 먹을 것이

나 입을 것을 주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살아 있는 손자를 안겨

주지 못한다고 양진을 때리거나 욕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양진은 선자를 낳았다. 네 번째 아이이자 유일한 여자아이

부 산 의 작 은 섬, 영도 19
인 선자는 건강하게 자랐다. 선자가 세 살이 됐을 때에야 비로소 선

자의 부모는 옆에 누운 작은 몸뚱이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지를

몇 번이고 계속해서 확인하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었다. 훈이는 딸

아이에게 옥수수 껍질로 인형을 만들어주었고^ 담배를 끊은 돈으로

사탕을 사주었다 하숙인들이 같이 식사를 하고 싶어 했지만 훈이네

는 항상 가족끼리만 오붓하게 식사를 했다. 훈이는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했듯이 딸아이를 사랑했다. 하지만 응석받이로 만들지 않으려

고 했던 자기 부모님과는 달리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선자는 잘 웃고 밝은 보통 아이였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천하

제일의 미인이었다. 훈이는 선자의 완벽한모습에 감탄했다. 이 세상

에서 자기만큼 딸아이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아버지는 또 없

을 거라고 생각했다. 떨아이의 웃는 모습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단 하나밖에 없는 소

중한 딸이었다.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겨울날 훈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훈

이의 장례식에서 양진과 선자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서 울

고 또 울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젊은 미망인은 잠자리에서 일어

나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가 여느 때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다.

20 파친코 O
한자울:의 방문자
1932년 11월

일본이 만주를 침공했던 그 이듬해 겨울은 유달리 혹독했다. 살을

에는 바람이 작은 하숙집을 훑고 지나가자 추위를 견디기 위해 여자

들은 겹겹이 끼워 입은 옷사이사이로 솜을 집어넣어야 했다. 하숙인

들은 가게에 갔다가 신문을 읽을 줄 아는 남자들한테서 들었다며 대

공황인지 뭔지가 전 세계를 덮쳤다는 이야기를 식사 시간에 자주 꺼

냈다. 불쌍한 미국인들이 가련한 소련인들과 중국인들 못지않게 굶


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는 천황의 은총 아래 무

탈하게 지내던 일본인들도 배를 곯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 겨울에 살

아남은 사람들은 약 삭 빠 ^고 강인한 이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차

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소식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린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乂 여자

아이들은 국수 한 그릇에 몸을 팔았으며, 노인들은 젊은이들이라도

먹고 살 수 있게 죽을 곳을 찾아• 남몰래 떠나버렸다.

한겨울의방문자 21
상황이 이런데도 하숙인들은 규칙적으로 식사가 나오기를 바랐

고 낡은 하숙집은 수리를 해야 했다. 집주인의 대리인이라는 사람은

또 어찌나 집요한지 매달 꼬박꼬박 집세를 지불하지 않고는 배겨 낼

방법이 없었다. 양진도 이제는 금전 다루는 법, 납품업자들을 대하는

법,싫은 것을 거절하는 법을 배웠다. 양진은 고아인 자매 둘을 데려

다 일을 시키는 고용주가 되었다. 하숙집을 운영하는 서른일곱 살의

과부 양진은 이제 더 이상 속옷 한 벌만 들어 있는 보자기를 움켜쥔

채 훈이네 집 문간에 나타났던 맨발의 십 대 소녀가 아니 었다.

양진은 선자를 돌보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두 사람은 자기 집은

없었지만 운 좋게도 하숙이라는 벌어먹고 살사업은 있었다. 매달 첫

날이면 하숙인들이 각자 방세와 식대로 23엔씩을 꼬박꼬박 냈지만

그 돈으로 곡식과 난방용 석탄을 사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하

숙인들이 버는 돈은 변함이 없어서 하숙비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

도 양진은 똑같은 양의 식사를 제공해야 했다. 그래서 소뼈를 사다가

끓인 다음 우유를 넣어 진한 죽을 만들고 텃밭의 야채를 요리해 찬

거리로 내놓았다. 그러다가 월말이 되어 돈이 거의 다 떨어지면 곡

간에 있는 수수와 보리,그 밖의 다른 변변찮은 것들로 끼니를 겨우

겨우 때웠다. 그나마 남아 있던 곡식 자루도 텅텅 비다시피 하면 콩

가루로 맛깔스러운 부침개를 부쳤다. 하숙인들이 시장에서 팔지 못

하는 생선을 가져올 때도 있었는데,


어떤 때는 게나 고등어를 들통에
가득 담아 가져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양진은 어김없이 또 찾아

올 찬거리 없는 그날을 대비해 양념을 해서 보관해두었다.

지난 두 해 동안 하숙인 여섯 명이 방 하나를 교대로 사용했다. 전

라도에서 온 정 씨 삼 형제는 밤에 물일을 하고 낮에 잠을 잤다. 대구

22 파친코 O
에서 온 젊은이 두 명과 부산 출신 홀아비 한 명은 생선 가게에서 일

하는데 아침 일찍 나갔다가 이른 저녁에 잠을 자러 들어왔다. 덩치

큰 남자들이 작은 방에 나란히 누워 잠들어야 했지만 누구 하나 불

평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하숙집이 예전에 살던 자기들 방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이부자리가 깨끗했고 밥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

다. 하숙집을 관리하는 여자들이 빨래도 해주고 닳아서 해진 작업복

도 기워서 한 해를 더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하숙인들 중에 아내를

맞이할 만한 여력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

하숙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으

면 이 거친 노동자들을 몸으로 따뜻하게 위로해주어서 좋기야 하겠

지만,
그것 말고 성가신 게 더 많을 것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길
것이고,아이가 생기면 먹이고 입혀 키워야 할 것이고,또 집이 있어

야 할 것이다. 가난한 남자의 아내는 바가지를 긁고 질질 짜기 일쑤

일 게 분명했다. 여기 이 하숙집 남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돈이 부족한 데다 물가가 올라서 힘들었지만 하숙집 남자들이 방

세를 미루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게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종종 팔

지 못한 물건으로 세를 대신 치르곤 했는데 양진은 방세를 받는 날

에 돈 몇 푼 대신 식용유 한 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양진의 시어머니

는 하숙인들에게 잘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지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우리 여자들하

고는 다르게 선택을 할 수 있단다.” 시어머니가 양진에게 자주 했던

말이었다 한 해가 끝날 무렵,
동전이 좀 남자 양진은 그 돈을 항아리

에 넣어서 벽장 안쪽의 나무판 뒤에 넣어 두었다. 남편이 시어머니한

한겨울의방문자 23
테서 물려받은 금반지 두 개를 넣어 둔 곳이기도 했다.

양진과 선자는 식사 시간마다 말없이 음식을 내놓았고 하숙인들

은 정치 이야기를 야단스럽게 떠벌렸다. 정 씨 삼 형제는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선창에서 세상 소식을 주의 깊게 주워듣고 와서는 하숙

집 식탁에서 나라의 운명을 논하기 좋아했다.

11월 중순에는 예상보다 고기가 잘 잡힌 탓에 할 일이 많았다. 정

씨 삼 형제는 막 일어난 참이었고 이제 곧 저녁 교대 하숙인들이 잠

을 자러 들어올 시간이었다. 삼 형제는 바다로 나가기 전에 식사를

했다. 푹 쉬고 나서 힘이 넘쳐 보이는 삼 형제는 일본이 중국을 차지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며 떠들었다.

“난쟁이들이 그 큰 나라를 차지한다고라? 말도 안 되지라! 중국은

우리 형제 아녀! 일본 놈들은 빌어먹을 종자고!” 삼 형제 중 막내인

뚱 보 ^ 따뜻한 찻잔을 꽝 하고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중국이 그 잡

것들을 잡아먹어버릴 거랑께. 두고 보드라고!”

가난한 남자들은 하숙집의 허름한 벽을 방패삼아 식민지 경찰에

게 잡힐 염려도 하지 않고 식민지 통치자를 조롱했다. 뭐, 식민지 경

찰들이야 어부들이 원대한 이상을 떠벌리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겠

지만 말이다. 정 씨 삼 형제는 중국의 힘을 자랑하며 자기 나라 통치

자들이 실패했으니 다른 나라라도 강해지기를 간절하게 열망했다.

조선은 벌써 22년째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었다. 정 씨 삼 형제의 둘

째와 셋째는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조선에서 살아본 적도 없었다.


“아짐씨, 아짐씨.” 뚱보가싹씩하게 양진을 불렀다.

“응?” 양진은 뚱보가 더 먹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신

24 파친코 O
소리를 잘 늘어놓는 정 씨 삼 형제 중 셋째는 나머지 두 형제의 몫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먹었다.

■■국한 그 릇 더 달 라 꼬 ?”
“바 로 그 거 ^께 요 ”

양진은 부엌에서 국 한 그릇을 더 갖다주었다. 뚱보는 국 한 그릇


을 후루룩 마시고는 형제들과 함께 일을 하러 나갔다.

저녁 교대 하숙인들이 곧 들어와씻고 빠르게 저녁을 먹었다 그러

고는 담배를 피우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여자들은 상을 치우고 잠

든 남자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식모들과 선자

는 부엌을 정리하고 더러운 세숫대야를 씻었다. 양진은 잠자리를 준

비하기 전에 석탄을 확인했다. 하숙인들한테서 들었던 중국 이야기

가 양진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어른거렸다. 훈이도 소식을 가져

다주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한

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고는 집안일을 하러 일어서며 “상관없데이,

상관없다고”라고 중얼거렸다. 중국이 항복을 하든지 복수를 하든지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거였다. 세상이 어찌 변하든 그들은 그저 텃밭

의 잡초를 뽑아야 했고,신발이라도 신고 다니려면 짚신을 만들어야

했으며, 닭을 홈치러 들어오는 도둑들을 쫓아내야 했다.

축축하게 젖은 모직 코트가" 뻣뻣하게 얼어붙을 즈음에야 백이삭

은 겨우 하숙집을 찾아냈다. 평양에서부터 떼 4 온 긴 여행에 그는 완

전히 지친 상태였다. 눈 내리는 북쪽과 달리 부산의 추위는 사람을

이상하게 현혹시켰다. 남쪽의 겨울은 더 따뜻해 보였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은 이삭의 약한 폐를 뚫고 들어와 햇속까지 시

한겨울의방문자 25
리게 했다. 집을 나섰을 때만 해도 이삭은 자신이 기차 여행을 충분

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

히 녹초가 되어버렸고 어서 빨리 쉬어야 했다. 이삭은부산에서 작은

배를 타고 영도로 들어왔다. 배에서 내린 이삭은 한참을 헤매다가 길

에서 만난 석탄 배달부의 안내를 받고서야 겨우 이 하숙집 앞에 도

착했다. 이삭은 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오늘 하룻밤만 잘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는 괜찮아질 거라

고 생각했다.

양진이 솜이불을 깔아 놓은 허름한 잠자리에 막 앉았을 때, 제일

어린 식모아이가 여자들이 모두 같이 자는 방의 문틀을 톡톡 두드

렸다.
“아지매,웬 신사분이 왔어예. 하숙집 주인을 만나고 싶다 카는데

예. 몇 년 전에 자기 형이 여기서 지냈다카면서 여기 머물고 싶다고

예. 오늘 밤에예.” 동희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양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훈이를 찾는 거지? 양진은 의아했

다 다음 달이면 남편이 죽은 지 3년째가 된다.

선자는 따뜻한 온돌 아랫목에서 가볍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

다. 하루 종일 땋고 있어서 고슬고슬해진 머리카락이 느슨하게 풀

어 헤쳐져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검은색 실크처럼 베개 위로 흩어

져 있었다.

“주인이 돌아가셨다고 말씀 안 드렸나?”

“했어요 그캤더니 깜짝 놀라는 것 같더라고예. 자기 형이 하숙집

주인한테 편지를 썼는데 소식을 못 들었다고 카던데예.”

양진은 일어나 앉아서 베개 옆에 단정하게 개어 놓았던 모슬린

26 파친코 O
한복 조끼를 입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손을 놀려 머리를 쪽 지어

올렸다.

양진은 남자 손님을 보자마자 식모가 남자를 돌려보내지 않은 이

유를 알아차렸다. 남자는 어린 소나무처럼 곧고 우아했다. 보기 드물

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가느다랗게 웃는 듯한 눈매에 코가 오뚝하고

목이 길었다 이마가 주름 하나 없이 하얀 것이 밥 달라고 소리치거

나 시집 안 간다고 식모들을 놀리는 머리가 희끗한 하숙인들하고는

달라 보였다. 젊은 남자는 서구식 정장을 차려입 었고 두꺼운 겨울 코

트를 걸쳤다. 수입 가죽 구두에 가죽 서류가방,중절모까지 어느 것

하나 이 작은 문간에 어울리지 않았다. 외모로 보아 남자는 상인들이

나 무역상들이 이용하는 시내의 더 큰 여관에 머물 정도의 돈도 충

분히 갖고 있을 법했다. 조선인이 머물 수 있는 부산의 여관들은 거

의 모두가 꽉 차 있었지만 돈만 충분히 있으면 방 하나 구하는 것쯤

이야 어렵지 않았다. 남자는 옷차림으로 보아 부유한 일본인이라 해

도 다들 믿을 것 같았다. 동희가 입을 살짝 벌린 채 남자를 쳐다보았

다. 아무래도 남자가 이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모양이 었다.

양진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자의 형

이라는 사람은 분명 편지를 보냈겠지만 양진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몇 달에 한 번씩 시내에 가서 학교 선생에게 편지를 좀 읽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올겨울에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배에서 내렸을 때 이미 날이 어두워져버려서

요 남편 분 소식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 슬픈 일이 있었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전 백이삭이라고 합니다. 평양에서 왔어요 제 형 백요

한겨울의방문자 27
셉이 몇 년 전에 여기서 지냈답니다.”

북쪽 지방 억양이 살짝 묻에나왔지만 배운 사람의 말투였다.

“저도 오사카로 가기 전에 몇 주 동안 여기서 묵고 싶습니다.”

양진은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손님방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이런 남자는 혼자 잘 방을 찾고 있겠지만 이 밤에 저 남자를 부산까

지 데려다줄 뱃사공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이삭은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형님이 거의 10년 전에 여기 머물렀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형님은 부군을 무척 존경했답니다.”

양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좀 더 많았던 백 씨가 생각났다.

그 사람도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어부 같지는 않았다. 이름은 요

셉이었는데 성경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했다. 부모가

기독교 신자였고 북쪽에 교회를 지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신 형님,그러니까 그 신사 분은 당신하고 별로 안 닮았

는데예. 키가 작고 둥그런 금테 안경을 쓰신 분 아입니꺼. 그분은 일

본으로 갔거든예. 그전에 몇 주 동안 여기서 묵었고예.”

“네, 네, 맞아요” 이삭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삭은 거의 십 년이 넘

도록 요셉 형을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형수님과 오사카에 살고 있

어요 부인의 남편 분에게 편지도 썼고요■형님이 저보고 여기에 꼭

머무르라고 했어요 부인의 대구찜이 ‘집에서 먹는 것보다 낫다’고도

하셨죠”
양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칭찬에 기분 좋지 않을 사람이 있을

까.

28 파친코 O
“형님 말씀이 부군께서 무척 열심히 일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요

셉이 편지에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이삭은 갈라진 입술이나 비틀어

진 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삭은 그러한 역경을 딛고 일어선

남자를 만나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꺼?” 양진이 물었다.

“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먹을거 좀드릴게예.”

“여기 머물 수 있을까요? 이렇게 누가 찾6}올지 전혀 모르셨겠지

만,전 지금 이틀째 여행을 한 참이라서요”

“빈방이 없습니더. 이 집이 그리 큰 곳이 아니거든예. 보시다시

피……”

이삭은 한숨을 쉬 었다가 괜찮다는 듯 양진에게 미소를 지 었다. 이

건 양진이 아니라 그가 책임질 문제였고 양진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

지 않았다. 이삭은 가방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방은 문 옆에 놓여

있었다.

“그럼 전 부산으로 돌아가서 머물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그전에 혹

시 제가 오늘 머물 만한 하숙집을 아시면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삭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몸을 곧게 펴며 말했다.

“이 근처에는 없고 우리 집에도 빈방이 없습니더.” 양진이 말했다.

그렇다고 저 남자를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지내게 했다가는 지

독한 남자들 냄새에 당황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씻어도 생선 냄새

는 씻어낼 수 없었다.

이삭이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떠나려고 돌아섰

다.

한겨울의방문자 29
“하숙인들이 자는 데에 공간이 좀 남기는 합니더. 보시다시피 방이

하나뿐이지만예. 세 사람은 낮에 자고 다른 세 사람은 밤에 자가지

고 거기에 한 사 람 더 들어갈 공간이 있기는 한데 편하지는 않을 끼

라석ᅵ. 그래도 괜찮으시면 들어와서 한 번 보이소;

“그거면 괜찮아요” 이삭이 안도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달 방세는 지불할 수 있어요”

“생각보다 훨씬 더 좁을 껍니더. 당신 형님이 여기 머물 때는사람

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어예. 지금만큼 바쁘지도 않았고예. 글쎄, 우

짤런지……”

“아뇨 괜찮습니다. 구석에 몸 누일 공간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밤이 늦었고 오늘은 바람도 웹니더. 들어오시소; 양진은 갑자기

하숙집이 초라하게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이런

느낌을받은 적이 없었다.

양진은 남자에게 한 달 치 방세를 선금으로 달라고 말했다. 남자가

한 달이 되기 전에 떠난다면 나머지 돈을 돌려줄 작정이 었다. 양진은

남자에게 어부들의 방세와 똑같은 23엔을 달라고 했다. 이삭은 23엔

을 잘 세서 양진의 두 손에 건네주었다.
동희가 이삭의 가방을 방 앞에 내려놓고 깨끗한 이불을 가지러 갔

다. 남자가 씻으려면 부엌에서 따뜻한 물도 가져다줘야 했다. 동희는

두 눈을 내리떴지만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양진은 동희와 함께 잠자리를 준비했고 이삭은 그 두 사람을 말없


이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다른 식모가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깨끗한 수건을 가져왔다. 방에는 대구 출신 청년들이 나란히 누워 있

었고^ 홀아비는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이삭의 잠

30 파친코 O
자리는 홀아비 바로 옆이 었다.

아침이 되면 하숙집 남자들은 하숙인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을 보

고 다소 당황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를 내쫓을 수도 없

는 노릇이었다.

한겨울의방문자 31
젊은 목 사 ,이삭

동이 뜨자 정 씨 형제들이 돌아왔다. 뚱보는 방에 잠들어 있는 새

로운 하숙인을 단번에 발견했다.

뚱보가 양진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아짐씨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성공하니까 내가 다

거시기하니 기쁘당께요 아짐씨 요리 솜씨가 부자들 귀에까지 들어

갔는갑소잉. 이렇게 일본인 손님도 다 받고잉! 저 사람한테는 우리

가난뱅이들 방세의 세 배는 받았지라?”

선자가 뚱보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 었지만 뚱보는 알아차리지 못

했다. 뚱보는 이삭의 양복 옆에 걸린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양반네들이 대단한 사람 티 내려고 목에 두르는 거 아니당

가? 올가미 맹키로 생겼는디. 이거를 이래 자세히 보는 거는 처음이

여! 와, 허벌나게 부드럽네잉!” 막내 뚱보가 이삭의 넥타이를 수염에

대고 문질렀다. “실크인가 보드라고 진짜 실크 올가미여 !” 뚱보가 시

젊 은 목 사 ,이 삭 33
끄럽게 웃었지만 이삭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뚱보야, 만지지 말드라고.” 곰보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형의

얼굴에는 얽은 자국이 있었고^ 화를 내자 군데군데 움푹 팬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큰형이 두 동생을 보살펴 왔다.


뚱보가• 넥타이를 내려놓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뚱보는 곰보 형

의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았다. 정 씨 형제들은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한

후 모두 잠에 빠져들었다. 그들 옆에서 계속 잠들어 있던 새로운 하

숙인이 이제 잠에서 살짝 깼는지 숨죽인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양진은 부엌으로 가서 식모들에게 새 하숙인이 깨어나면 따뜻한

식사부터 챙겨주라고 말해두었다 선자는 부엌 구석에 웅크리고 앉

아 고구마를 북북 문질러 씻고 있었다. 엄마가 들어오든 나가든 고개

조차 들지 않았다. 지난 한 주 동안 두 사람은 필요할 때만 이야기를

했다. 식모들은 선자가 왜 저렇게 2 용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오후 늦게 정 씨 형제들이 일어나 다시 식사를 하 고 배 타기 전에

담배를 사러 간다고 나갔다. 저녁 교대 하숙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

아서 한두 시간 동안 하숙집이 5 용했다. 바닷바람이 숨구멍이 많은

벽과 창 가장자리를 뚫고 들어와 방과 방 사이의 짧은 복도가 꽤 쌀

쌀했다

양진은 여자들이 잠자는 아늑한 방의 따뜻한 아랫목에 양반다리

를 하고 앉아 있었다. 대여섯 벌은 되는 하숙인들의 낡은 바지 더미

가운데 한 벌을 수선하는 중이 었다. 남자들 옷을 깨끗하게 빨지 못하

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남자들은 돈을 아주 적게 내서 그런지 별

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뭐, 또 더러워질 텐 데 요 잉 뚱 보 는 이렇게 푸념했지만 형들은 깨

34 파친코 O
끗한 옷을 더 좋아했다. 양진은 빨래를 하고 나서 할 수 있는 한 옷을

수선했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더 이상 수선하거나 깨끗하게 빨

수 없는 셔츠와 윗도리의 깃을 갈았다. 새로 온 하숙인이 기침을 할

때마다 옷더미에 파묻힌 양진의 고개가 올라갔다. 양진은 바닥 청소

를 하고 있는 딸보다 바느질에 더 집중하려고 애썼다. 노란색 파라핀

지를 깔아놓은 바닥은 짧은 빗자루로 하루에 두 번 쓸고 나서 깨끗

한 걸레로 닦았다.

그때 현관문이 천천히 열려서 양진과 선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

다. 석탄 배달부, 준이 돈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양진이 일어나서 나갔다. 선자는 고개를 까닥하고는 다시 청소를

했다.

“아지매는 좀 어떠십니꺼?” 양진이 물었다. 석탄 배달부의 아내는

위가 좋지 않아서 몸져눕는 경우가 잦았다.

“오늘 아침에는 일찍 일나드만 시장 나갔다 아입니꺼. 잠시도 돈을

안 벌고는 못 살겠는 모냥이지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잘 아시

잖아예.” 준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저씨는 참 운도 좋 소 ” 양진이 지갑을 꺼내서 석탄 값을 치렀다.

“아지매요,손님들이 다 아지매 같으면 저는 배를 곯을 일이 없을

낌니더. 항상 이래 제날짜에 값을 치러주시니.” 준이 즐겁게 껄껄 웃

었다.

양진도 미소를 지었다. 매주 준은 석탄 값을 제때 치르는 사람이

없다고불평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을 것을줄여 가며 석탄 값

을 마련했다. 올겨울은 너무 추워서 석탄 없이는 지낼 수 없었다. 약

간 뚱뚱한 석탄 배달부는 수금을 하러 다니면서 물 한 사발과 간식

젊 은 목 사 ,이 삭 35
을 얻어먹었다. 그러니 이렇게 식량이 귀할 때에도 절대 굶을 일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시장에서 미 역을 잘 팔아 많은 돈을 벌었다.

“저짝에 아래쪽에 사는 못되처먹은 이가 놈이 돈을 토해 내지를

않아가지고……”

“어째 만사가 다 쉽게 풀리겠십니꺼. 다들 어려운 일은 있다 아입

니꺼:

“마, 그렇기는 해도 그래도 아지매는 갱상도 최고의 요리사라서

하숙집에 손님들이 가득하다 아입니꺼. 목사님도 지금 여 계시지예?

목사님이 잘 곳은 있든가예? 아지매 도미 요리가부산에서 최고라고

제가 목사님한테 말씀드렸거든예.” 준은 다음 집으로 가기 전에 뭔가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 코를 쿵쿵거렸지만 맛있는 냄새는 나지 않

^다 .

양진은 딸을 흘껏 돌아보았다. 선자는 바닥 청소를 그만두고 석탄

배달부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려고 부엌으로 갔다.

“근데 그 젊은 목사님이 1〇 년 전에 여기 묵었던 자기 행님한테서

아지매 요리 솜씨를 들었다 카든데 알고 계셨십니꺼? 역시 가슴보다

는 배를 채워 줘야 한다니까요!”

“목사님?” 양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젊은 목사님은 북쪽에서 왔다 카데요、어젯밤에 아지매 집을

찾아서 거리를 헤매고 계시드라꼬예. 백이삭이라꼬 훤칠하이 잘생

깄데예. 제가 아지매 집 보여주고 들릴라꼬 그겠는데 조가 놈한테 가

야 했거든예. 조가 놈이 한 달을 요리조리 피하드마는 드디어 돈을

준다 캐가지고……”
“아 … ”

36 파친코 O
“어쨌든 제가 그 목사님한테 집사람 위가 안 좋은데 너무 열심히

일한다 카니까 그 목사님이 당장 기도를 해주겠다 카면서 고개를 숙

이고 눈을 감데예! 그 쭝얼거리는 소리를 믿는 건 아니지만 뭐 해가

되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예. 그 목사님 윽시로 잘생깄지예? 오늘 간

다 캅디꺼? 인사해야 하는데.”

선자가 따뜻한 보리차 한 잔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그릇

에 담아 가져왔다. 석탄 배달부는 바닥의 방석에 털썩 주저앉아 따뜻

한 고구마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조심스럽게 고구마를 씹어 먹

으면서 그는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집사람한테 몸이 좀 어떤가 물었는데 집사람이 그래

나쁘지 않다 카면서 일하러 갔다 아입니꺼! 그 목사님 기도 덕분인

지도 모르겠네예. 하 !”

“가톨릭 신자라 캅디꺼?” 양진은 준의 말을 그렇게 자주 끊고 싶지

않았지만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떼 어 댈 수 있는 준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편은 항상 준이 남자치고는 말이 너

무 많다고 말하곤 했다. “신부라예?”

“아니라예. 그거랑은 좀 다릅니더. 백 목사님은 개신교라예. 결혼

할 수 있는 성직자. 행님이 사는 오사카로 간다고 카던데예. 그 행님

이라는 사람은 만난 기억이 없네예.” 준은 또 고구마를 먹고 보리차

를 홀짝거렸다.

양진이 틈을 타서 끼어들기 전에 준이 또 말을 이어나갔다. “히로

히또 그 새끼가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드만 이 땅하고 쌀,생선을 다

훔쳐 갔지 예. 인자는 젊은이들까지 빼앗아가고 있으니.” 준이 한숨을

쉬고 고구마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일본으로 가는 젊은 놈들을 탓

젊 은 목 사 ,이 삭 37
하는 건 아입니더. 이 땅에서는 돈을 벌 수가 없으니까 별 수가 없지

예. 저는 너무 늦었지만 머스마가 있었으면……” 준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말을 멈추고 슬픔에 잠겼다. “하와이로 보냈을 껍니더.

거기서 집사람네 똑똑한 조카가 설탕 농장을 하고 있거든예. 일이야

힘들다 카지만 뭐 어떻십니꺼? 저 후레자식들 밑에서 일 안 해도 되


니까 된 거 아입니꺼. 요전날 항구에 갔더니마는 그 개자식들이 저한

테 뭐라 겠는가아십니꺼? 제가……”

양진은 준의 욕설에 얼굴을 찌푸렸다. 집이 좁아서 부엌에 있는 여

자들과 지금은 방을 닦고 있는 선자도 준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

다. 다들 준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터였다.

“보 리 차 좀 더 주실람니꺼?”

준이 미소를 짓고는 두 손으로 빈 컵을 내밀었다.

“나라를 잃아 묵은 거는 젠장맞을 우리 잘못이지예. 저도 알아예.”


준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빌어먹을 양반 나리들이 우리를 팔

아버 렸으아 배짱 있는 양반이 한 놈도 없지 예.”

양진과 선자는 부엌에 있는 식모들이 석탄 배달부의 매주 똑같은

열변에 낄낄거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야 무식쟁이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일꾼입니더. 저는 일본 놈들

한테 멧기지 않을 껍니더.” 준이 석탄 가루로 뒤덮인 잠바에서 깨끗

하고 하얀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닦았다. “개노무 새끼들. 아이고 저

는 그만 다음 집으로 가볼게예.”

양진이 부엌으로 가면서 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양진은 준

에게 감자 한 보따리를 건네주었다. 감자 하나가 떨어져 바닥에 뒹굴

었다. 준이 바닥에 떨어진 감자를 집어서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귀

38 파친코 O
한 거는 잃어버리면 안 되지예.”

“아지매한테 안부 전해주이소양진이 말했다.

“감사합니데이.” 준이 급하게 신발을 신고 떠났다.

양진은 문간에 서서 준이 다음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줄기차게 이어지던 석탄 배달부의 고귀한 연설이 사라지자 집 안

이 훨씬 썰렁하게 느껴졌다. 선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앞

쪽 방에서 집 안 전체로 이어지는 복도를 닦고 있었다. 선자의 나무

토막처 럼 핼쑥하고 탄탄한 몸은 엄마를 쏙 빼닮았다. 손이 빠르고 힘

이 센 선자는 두 팔의 근육과 다리가 탄탄했다. 작달만하고 떡 벌어

진 체격에다 몸이 튼튼해서 힘든 일도 잘 할 수 있었다. 얼굴이나 사

지에서 섬세함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상당히 매혹적인 몸이었다. 예

쁘다기보다는 잘생긴 편이었다. 선자는 재빠르고 활기찬 몸짓과 밝

은 태도로 어디서나사람들 눈에 띄었다 하숙인들은 쉬지 않고 선자

에게 구애를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선자의 검은 눈동자는

매끈거리는 강가의 하얀 돌처럼 반짝거렸다. 선자가 웃을 때면 같이

웃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는 선자가 태어

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딸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선자는 어린아

이였을 때도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

각했다. 걷는 법을 배우자마자 충성스러운 애완견처럼 아버지를 졸

졸 따라다녔다. 물론 엄마도 존경했지만, 지극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자는 쾌활한 소녀에서 사

려 깊은 젊은 여인으로 변했다.

젊 은 목 사 ,이 삭 39
정 씨 형제 가운데 누구도 결혼할처지가 아니었지만, 맏형 곰보는

선자가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좋은 아내가 될 거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뚱보는 선자를 흠모하면서도 형수로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자가 자기랑 똑같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

는데도 말이다. 정 씨 삼 형제 중 누군가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첫째

인 곰보가제일 먼저 아내를 맞아들일 것이었다.

하지만 선자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요즘, 그런 것들은 전혀 중

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선자는 임신을 한상태였고 아이 아버지는

선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전에 선자가 엄마에게 그 사실을

밝혔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아지매,아지매.” 두 식모 중 나이가 많은 식모가 소리를 질렀다.

하숙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양진이 방으로 달려갔고 선자도

걸레를 던지고 그 뒤를 따라갔다.

“피예! 베개에 ! 흠백 젖었어예!”

복희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복희답지 않았다. 복희는 다른 사람들을 겁주려

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숙인이 이미 죽은 것인지 혹은 죽

어가고 있는 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양진은 식모에게 방을 나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결핵인 것 같아예.” 선자가 말했다.

양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숙인의 상태가 훈이의 마지막 몇 주 동

안의 상태와 비슷했다.

40 파친코 O
“약사를 불러온나.” 양진이 복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가 마음을 바댔

다 “아이다,
기다리 봐라. 니는 여 있는 게 낫겠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이삭은 붉어진 얼굴로 땀을 흘렸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어린 식모 동희가 막 부엌에

서 나오다가 혁하고 숨을 들이쉬었지만 곧장 언니의 주의에 입을 다

물었다. 이삭은 어젯밤에 도착했을 때부터 얼굴이 창백하기는 했었

다. 하지만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잘생긴 얼굴이 웅덩이에 고인 더

러운 빗물처럼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베개는 기침할 때마다 튀어나

온 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으음……” 양진은 깜짝 놀라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을 당

장 옮기야겠다. 다른 사람들까지 아플 수 있데이. 동희야, 당장 곡간

에 있는 것들 전부 다 꺼내라. 언능.” 양진은 남편이 플 때 사용했

던 곡간으로 이삭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를 들어서 옮기기보

다는 남자가 일어나서 움직여주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었다.

양진은 이삭을 흔들어 깨우려고 이불 귀퉁이를 잡아당겼다.

“백 목사님, 목사님!” 양진이 목사의 팔뚝을 건드렸다. “목사님!


마침내 이삭이 눈을 떴다. 이삭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이삭은 집 옆에 있는 과수원에서 사과나무에 핀 하

얀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차츰 돌아오자 이삭은 하숙집 주인

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결핵입니꺼?” 양진이 물었다. 분명히 목사는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 으 리 ^■
목사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젊 은 목 사 ,이 삭 41
“아니요 2년 전에 앓았지만 다 나았어요” 이삭은 자기 이마를 만져

보고는 열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자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아,알겠어요” 목사가 자기 베개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보고 말았

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가 될 줄 알았으면 이렇게 오지 말았어야 했

는데. 떠나야겠어요 여기 계신 분들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요 ” 이삭은 눈을 뜨고 있지 못할 만큼 피로를 느꼈다. 이삭은 평생

동안 아파서 골골거렸다. 결핵은 그가 앓은 많은 병 중에서 최근에

앓았던 하나의 병에 불과했다. 이삭의 부모와 의사는 이삭에게 오사

카에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형 요셉만이 이삭에게 오사카로 오라고

말했고 이삭은 형의 말을 따랐다. 오사카는 평 양보다 훨씬 더 따뜻했

고 이삭이 평생 동안 허약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것을 얼마나 싫어했

는지 형 요셉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이삭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랬다가는 기차 안에서 죽을 껍니더. 낫기도 전에 악화될 거라꼬

예. 일어나실 수 있겠십니꺼?” 양진이 물었다.

이삭이 몸을 일으켜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다. 여행 중에도 피곤을

느끼기는 했지만 지금은 곰한테 떠밀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

다. 이삭은 숨을 참았다가 벽에 대고 기침을 했다. 핏자국이 벽에 튀

었다.

“다 나을 때까지는 여기 계시이소” 양진이 말했다.

양진과 선자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훈이가 결핵에 걸렸을 때 두 사

람은 전염되지 않았다. 하지만 식모들은 그때 이곳에 없었고 다른 하

숙인들도 섬호해야 했다.

양진이 이삭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뒷방까지 걸어갈 수 있겠어

42 파친코 O
예? 다른사람들하고 같이 계시면 안 됩니더.”

이삭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양진이 고개를 끄덕

였다. 양진은 동희에게 약사를 데려오라고 하고 복희에게 부엌으로

가서 하숙인들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양진은 이삭을 요 위에 눕히고 요를 천천히 끌어서 곡간으로 향했

다. 3년 전에도 남편 훈이를 이렇게 옮겼었다.

이삭이 중얼거렸다. “해를 끼치려는 생각은 아니었어요”


단지 바깥세상이 보고 싶었을 뿐인 젊은이는 자신이 평생 나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오사카까지는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젊

은이는 오만했던 스스로를 저주했다. 자신과 접촉했던 사람이 감염

되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죽음은 자기 탓이리라. 이삭은 죄 없는사람

들을 죽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빨리 죽기를 바랐다.

젊 은 목 사 ,이 삭 43
운명의 남 자
1932년 6월

젊은 목사가 하숙집에 도착하기 여섯 달쯤 전 초여름의 어느 날,

선자는 새로 온 생선 중매상 고한수를 만났다.

선자가 장을 보러 시장에 갔던 그날 아침은 유달리 서늘했다. 선자

는 엄마 등에 업혀 다니던 갓난아기 때부터 남포동의 노천시장을 드

나들었다. 좀 더 자라서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녔다. 아버지는 불

편한 발을 질질 끌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시장에 갈

때면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갈 때보다 아버지

와 함께 심부름 가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아버지는 가는 곳마다 사

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가족

과 하숙인들의 안부를 물을 때면 아버지의 흉한 입술과 어설픈 걸음

걸이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선자는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말없는 승낙, 정직한 눈에 어리는 사

려 깊은 눈빛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운명의남자 45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선자가 장보기를 도맡았다. 장보기 순서는

아버지와 엄마한테서 배운 그대로였다. 처음에 신선한 농산물을 사

고 그다음에 정육점에서 국거리용 뼈를 구입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청록색과 빨간색 방수천을 깔고 그 위에 몇 시간 전에 잡은 반짝거

리는 갈치나 통통한 도미를 늘어놓은 채 손님들의 시선을 끄는 노점

상 아주머니한테서 생선 몇 마리를 샀다. 남포동 시장은 조선에서 제

일가는 해산물 시장이었다. 시장은 자갈이며 부서진 돌조각이 양탄

자처럼 깔려 있는 바위투성이 해변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서 노점상 아주머니들은 네모난 방수천을 하나씩 깔고 앉아 목청껏

소리 지르며 물건을 팔았다.

선자는 석탄 배달부의 아내를 찾아•갔다 시장에서 제일 좋은 미역

을 파는 그 아주머니는 선자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새로 온 생선 중매상이 선자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찌푸려지고 말았다.

“아이고야, 부끄럽은 줄 도 모 르 는 갑네. 니를 저래 쳬 ^보 고 있노

니 아 ^지 뻘 은 될 것 같은 인간이!” 아주머니가 두 눈을 데굴데굴 굴

렸다 “돈 좀 많다고 좋은 집안의 번듯한 처자를 저래 뻔뻔하게 쳐다

봐도 되는 건 아이제 !”

선자가 고개를 들어 밝은 색 양복에 하얀 가죽 구두를 신은 남자

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다른 미역 중매상들과 함께 골판지와 나무로

된 사무실 옆에 서 있었다.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배우처럼 황백색

파나마모자를 쓴 고한수는 짙은 색 옷을 입은 다른 남자들 속에서

우웃빛 하얀 깃털이 달린 우아한 새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남자는 말

을 거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선자를 뚫어지게 쳐

46 파친코©
^보 고 있었다.

중매상들은 이곳을 거쳐 가는 모든 생선의 도매를 통제했다. 생

선 가격을 결정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 었고 선장과 어부들을 징 계하

기 위해 잡은 고기를 사들이지 않는 것도 그들의 마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매상들은 부두를 통제하는 일본인 관리들과도 거래를 했

다. 모두가 중매상들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그들을 편안하게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매상들은 자기네 무리가 아닌 사람들과는 거

의 어울리지 않았다. 선자의 하숙집 사람들은 중매상들을 생선 냄새

하나 나지 않는 곱고 하얀 손으로 고기잡이의 모든 이득을 다 챙겨

가는 오만한 침 입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부들은 그렇게 흉을 보면

서도 중매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중매상들은 언제

든지 어부들이 잡아온 고기를 사들일 수 있었고 고기잡이가 시원치

않을 때도 선금을 지불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 같은 가시내

는 근사한 남자들의 시선을 끌게 마련이데아 그치만서도 저 사람은

너무 날카로워 보인다 아이가. 제주도 출신인데 오사카에 살고 있다

카데. 일본어도 완벽하게 할 수 있다 카더라. 우리 아저씨가 그카는

데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똑똑한 사람이라 카더

라꼬. 아이고야! 아직도 니를 보고 있데이!” 아주머니가 목까지 빨개

져서 말했다.

선자는 일부러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하숙인들이 수작을 걸어올

때도 무시하고 할 일만 했는데 지금이라고 다르게 행동할 이유가 없

었다. 미역 파는 아주머니는 원래 호들갑을 잘 떠는 성격이었다.

“저희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 있어예?” 선자는 가격과 품질별로 차

곡차곡 개어져 있는 마른 미역에 관심이 있는 척했다.

운명의남자 幻
아주머니가 눈을 낌벅이더니 미역 한 뭉치를 싸주었다. 선자는 동

전을 헤아려 건네주고 두 손으로 미 역 뭉치를 받아들었다

“지금은 하숙하는사람이 몇이나 있노?”

“여섯 명이요” 선자는 다른 중매상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아직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힐끗거렸다. “엄마가 요즘 많이 바빠

예.”

“당연히 그렇겠지 ! 선자야, 여자의 일생은 일이 끊이지 않는 고통

스러운 삶이데이.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운 게 여자의 인생 이겠

나. 니도 각오하는 게 좋을 끼다. 인자 니도 여자가 되었으니까네 이

건 꼭 알아뒤야 한데이. 여자의 인생은 남편한테 달려 있다, 이 말이

라. 좋은 남자를 만나면 근사한 삶을 살게 되고 나쁜 남자를 만나면

저주받은 인생이 시작되는 거레이. 그래도 우야든동 여자의 인생이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아이가. 항상 일을 해야 한데이. 가난한

여자를 돌봐줄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가. 기댈 건 우리 자신뿐이다

이기^■”

말을 마친 아주머니가 한껏 불룩해진 배를 툭툭 두드리고 새로 온

손님을 향해 돌아섰다 그제야 선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정 씨 형제들은 고한수에게 오늘 잡은 생선을

전부 팔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괜찮은 중매상이드라고잉. 나는 고한수처럼 멍청이들을 못 봐주

는 똑똑한 사람이 좋당께. 고한수는 흥정도 안 해부러. 가격을 딱 정

해놓고 부르제. 그 정도면 공평허고 고한수는 다른 인간들처 럼 니를

뜯어먹으려고 들지 않을 거여. 하지만 그 인간한테 거역할 수는 없제

이.”^보 가 말했다.

48 파친코©
뚱보는 제주에서 온 그 생선 중매상이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이야

기를 얼음 중매상한테서 들었다고 했다. 고한수는 일주일에 삼 일만

부산에 왔고,평소에는 오사카와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지냈다. 모

두가 그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고한수는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것 같았다. 선자가 시장에 갈 때마

다 고한수가 나타나 흑심을 한껏 드러냈다. 선자는 그 시선을 무시하

고 평소처럼 심부름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그 남자의 존재감은 도저

히 모르는 척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선자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오

트곤 했다.

일주일 후,선자가 막 장을 다 보고 영도로 들어가는 연락선을 타

려고 혼자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고한수가 선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오늘 밤하숙집 저녁은 뭡니까?”

두 사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부산스러운 시장에서 멀

지 않은 곳이었다.
선자는 고개를 들긴 했지만 고한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두려움에 가슴이 쿵광거 렸다. 선자는 남자가 따라오

지 않기를 바랐다. 연락선에 타자마자 선자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땠

는지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강인한 남자가 애써 부드럽게 말하려는

목소리였다. 몇몇 모음을 길게 늘여 말하는 제주도 억양이 살짝섞여

있었다. 부산 사람들 말씨와는 아주 달랐다. 남자가 ‘저녁’이라는 말

을 아주 웃기게 발음해서 선자는 그 말을 재깍 알아듣지 못했다.

다음 날도 고한수는 선자를 따라와서 말을 걸었다.

“시집은 왜 안 갔어요? 나이가 찬 것 같은데.”

운명의남자 49
선자는 이번에도 종종 걸음으로 고한수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남

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선자가 대답을 하지 않는데도 고한수는 매번 선7H 1게 말을 걸었

다. 항상 질문을 하나만 던졌고 반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선자를 볼

때마다 자기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서 뭐라고 말을 건넸고 선자

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도망쳤다.

6월 둘째 주였다. 선자는 장을 다 보고 한쪽 팔에 장본 물건으로

꽉 찬 바구니를 끼고서 연락선을 타러 가는 길이었다. 교복을 입은

일본인 고등학생 세 명이 낚시를 하려는지 항구 쪽으로 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에도 더운 날씨를 핑계 삼아 학교를 빼먹은 모양이

었다. 남학생들은 선자를 발견하자마자 낄낄거리면서 다가와 선자

를 에워쌌다. 얼굴이 허옇고 멀쑥하니 깡마른 남학생 하나가 선자의

바구니에서 길쭉하고 노란 참외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친구들을

향해 선자의 머리 위로 던졌다.

“돌리도; 선자는 조용히 조선말로 말하면서 남학생들이 연락선에

타지 않기를 바랐다. 부산에서는 이런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지

만 영도에는 일본인들이 많지 않았다. 선자는 이런 골치 아픈 상황에

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인 학생들은

조선인 아이들을 괴롭혔고 가끔씩 그 반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린 조선인 아이들은 혼자 다니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지만, 선자는

열여섯 살의 강한 여자아이였다. 일본인 남학생들이 자기를 더 어린

아이로 착각한 것이 분명 했다. 선자는 좀 더 단호하게 말하려고 했다.

“뭐라고? 재 뭐라고 한 거야?” 일본인 남학생들이 낄낄거리며 일본

말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 구린내 나는 창녀야.”

50 파친코 O
선자는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 같았

다. 연락선 옆에 서 있는 뱃사공은 다른 두 남자와 이야기하느라 바

빴五 시장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는 자기 일을 하느라 정신

이 없었다

“당장 돌 리 도 ; 선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오른손을 뻗었다.

팔꿈치에 바구니가 걸려 있어서 균형을 잡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선자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깡마른 남자아이를 똑바로 노려

보았다.

남학생들은 웃으면서 계속 일본말로 뭐라고 중얼거 렸다. 선자는

그들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남학생 두 명이 노란 참

외를 주고받았고 나머지 한 명은 선자의 왼팔에 걸린 바구니를 뒤졌


다. 선자는 너무 두려워서 주저앉고만 싶었다.

남학생들은 선자 또래거나 선자보다 어린 것 같았지만 체격이 좋

았고 에너지가 넘쳤다.

키가 제일 작은 남학생이 선자의 바구니 바닥에 있던 소꼬리를 꺼

냈다.

“요보 놈들은 개를 먹는다던데 이제는 개가 먹는 음식까지 훔치는

구나! 너 같은 계집애가뼈를 먹어? 멍청한년.”

선자는 소꼬리를 되찾으려고 공중으로 손을 휘둘렀다. 요보라는

말 하나는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요 乂 그러니까 여보는 원

래 ‘당신’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비하할 때 쓰

는 욕이기도 했다.

키 작은 남학생이 소꼬리를 들고 냄새를 킁킁 맡더니 인상을 찌푸

렸다.

운명의남자 51
“역겨워! 요보놈들은 어떻게 이런 걸 먹지?”

“야, 그거 비싼 기 대 당장 돌리도!” 선자가 소리쳤다. 눈물이 쏟아

질것만같았다.

“뭐라고? 야, 이 멍청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왜 일본어

를 못해? 황국 신민은 모두 일본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넌 황국

신민이 아닌 거냐?”

키 큰 남학생은 친구들을 무시한 채 선자의 가슴 크기를 재 보고

있었다

“저 요보 년 가슴이 아주 큰데. 일본 여자애들은 섬세해서 저런 잡

종들 같지 않단 말이야.”

선자는 두려움에 질려 참외를 포기한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

만 남학생들은 금세 선자를 둘러쌌고 선자는 그들 사이를 지나갈 수

가 없었다.

“이년 참외를 한번 쥐어짜보자.” 키 큰 남학생이 오른손으로 선자

의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주 좋은데? 즙이 넘치겠어? 한입 먹어


볼까?” 남학생이 입을 크게 벌려 선자의 가슴 가까이 가져다 댔다.

키 작은 남학생은 선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선자의 바구니를 꽉 움

켜쥐더니 검지와 엄지로 선자의 오른쪽 젖꼭지를 비틀었다.

“얘 어디 끌고 가서 저 긴 치마 아래에 뭐가 있는지 한번 보자. 낚

시는 집어 치우고 대신 얘를 잡아가자고!” 나머지 남학생 한 명이 말

했다.

키 큰 남학생이 선자에게 아랫도리를 들이댔다 “야,너도 내 물건

맛보고 싶어 죽겠지?”

“놔줘. 소리 지를 끼다.” 선자는 이렇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목구멍

52 파친코 O
에 꽉 막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키 큰 남학생 뒤에 서 있

는 어떤 남자가 보였다. 고한수였다.

한수는 한 손으로 키 큰 남학생의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다

른 손으로 남학생의 입을 막았다.


“더 가까이 와.”

낮게 깔린 목소리로 한수가 말했다. 다른 남학생들은 공포에 질려

두 눈을 크게 뜬 친구를 버리고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잔뜩 겁을 먹

은 표정이었다.

“너희 같은 개자식들은 뒈져버려야 해.” 한수가 완벽한 일본어 속

어로 말했다. “다시 한 번 이 아가씨를 건드리거나 못생긴 그 낯짝을

들고 이 근처를 어슬렁거렸다가는 다 죽여 버리겠어. 내가 아는 최고

의 일본 암살자들을 시켜서 네놈들과 네놈 가족들을 죽여 버릴 거야.

네놈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 네 녀석들 부모는 일

본에서 실패한 인간들이야. 그래서 여기로 쫓겨났겠지. 네놈들이 여

기 사람들보다 더 잘났다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도 마.” 한수는 이렇

게 말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 녀석들을 죽일 수 있아 아무도 그런 일을 하

지 않겠지만, 사실 그건 너무 쉬운 일이자 내가 마음먹었다 하면 네

놈들을 잡아서 고문해 죽여 버릴 수도 있어. 오늘은 경고만 하고 보

내주지. 내가 좀 너그러운 사람이거든. 게다가 젊은 아가씨도 있는

자리고 말이야”

두 남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튀어나올 것 같은 친구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정장에 하얀 가죽 구두를 신은 한

수가 키 큰 남학생의 머리카락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키 큰 남학생

운명의남자 53
은 한수의 꺾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운에 짓눌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일본인처럼 정확하게 말했지만 남학생들은 남자의 행동으로 남자

가 조선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남자의 위

협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장 사과해,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한수가 남학생들에게 말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학생들이 허둥지둥 선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과했다.

선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남학생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남학생들이 다시 고개를 숙였고 한수는 남학생의 머리카락을 움

켜쥐 었던 손아귀의 힘을 살짝 풀었다.

한수가 선자를 돌아보고 미소 지 었다.

“얘들이 미안하다고 하네요 물론 일본말로요 조선말로도 죄송하

다고 말하라고 시킬까요? 그렇게 할 수 있거든요_ 아니면 사과 편지

를 쓰라고 시킬까요?”

선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 큰 남학생은 이제 울고 있었다.


“차라리 이 녀석들을 바다에 던져버릴까요?”

한수는 농담을 던졌지만 선자는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선자는 간

신히 다시 고개를 가로저 었다. 그 남학생들은 선자를 어디론가 끌고

갈 수 있었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고한수는 어떻게 남학생들의 부모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일본

인 학생은 조선인이라면 다 큰 어른이라도 충분히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고한수는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긴장이 풀린

54 파친코 ©
선자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한수가 선자에게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키 큰 남학생을

풀어주었다.

남학생들이 참외와 소꼬리를 선자의 바구니에 다시 넣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학생들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다시는 여기 오지 마라. 내 말 알아들었냐, 이 돌대가리들아?” 한

수가 일본어로 말하면서 선자에게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선자

가자신의 거친 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남학생들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키 큰 남학생은 바지에 오줌을 약

간 지린 것 같았다. 남학생들은 시내 방향으로 서둘러 도망쳤다.

선자는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팔이 떨어

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한수가선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영도에 살고 있죠?”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하숙집을 운영하고요?”

“네.”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선자가 고개를 가로저 었다.

“벌써 폐를 많이 끼쳤습니더.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예.” 선자는 고

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 말 잘 들어요 혼자 다니거나 밤에 돌아다니지 않도록 조심해

야 해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좋은 일자리

가 있다고 떠들어대는 조선인들을 만날지도 몰라요 당신이 아는 사

람일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저런 멍청

운명의남자 55
한 남학생들과 달라요 재들은 그냥 문제아들일 뿐이죠、하지만 당신

이 조심하지 않으면 저런 아이들한테도 해를 당할 수 있어요 알겠어

요?”

선자는 일자리를 찾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고한수가 왜 그런 이

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자에게 집을 떠나서 일하러 갈

생각이 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는 엄마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한수의 말이 옳았다. 여자는 언제나 욕을 당

할 위험이 있었다. 고귀한 여성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저고리 안

에 은장도를 품고 다니거나 욕을 당하면 자살을 했다.

한수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선자는 그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집에 가이죠_어머니가걱정하실 거예요”

한수가 선자를 연락선 타는 데까지 바래다주었다. 선자는 연락선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앉았다. 다른 승객은 두 명뿐이 었다.

선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한수는 다시 선자를 바라보았

지만 이번에는 얼굴 표정이 전과 달랐다. 그 얼굴에서는 선자에 대한

걱정이 느껴졌다. 배가 부두에서 멀어졌을 때야 비로소 선자는 한수

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56 파친코 O
몰래한

고한수가 연락선에 태워줬을 때 선자는 그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서 박하 향이 섞

인 포마드 기름 냄새가 났다. 한수는 서른여섯 살 먹은 선자의 엄마

와 나이가 같다고 했다. 두 다리는 길지 않았지만 키가 작은 것은 아

니었다. 한수는 어깨가 넓고 상체가 떡 벌어진 강인하고 건장한 남자

였다. 황갈색 눈썹이 살짝 찌그러져 있었고 희미한갈색 점과주근깨

가 날카로운 광대뼈 위로 흩뿌려져 있었다 코가 좁고 높아서 일본인

처럼 보였고 콧구멍 주변을 터진 실핏줄이 감싸고 있었다. 갈색이라

기보다는 검은색에 더 가까운 짙은 눈동자는 긴 터널처럼 빛을 빨아

들였다 선자는 한수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배 속이 불편하게 간질거

리는 것만 같았다. 한수의 서 양 ^ 정장은 우아하고 잘 손질되어 있었

고 옷에서는 하숙집 사람들한테서 나는 노동자들의 냄새나 바다 냄

새가나지 않았다.

몰래한사랑 57
다음 날 장이 섰을 때 선자는 중매상 사무실 앞에서 사업가들 무

리와 함께 서 있는 한수를 발견했다. 선자는 아무 말 않고 그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자 한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

고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선자가 장을 다 보고 연락선을 타러 가기

위해 걸어가는데 한수가 뒤따라왔다.

“시간 있어?” 한수가 물었다.

선자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슨 말이지?

“이야기할 시간 말이야.”

선자는 평생을 남자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남자를 두려워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한수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한수 옆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

도 힘들었다. 선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하숙집 남자들을 대할 때처럼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겁에 질린 아이가 아니라 열여섯 살이나

먹은 여자니까 말이다

“저번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더:

“별일 아니었어:

“좀 더 빨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더.”

“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여기서 말 고 ”

“그럼 어디서예?” 선자는 왜냐고 먼저 물어볼걸,


하고후회했다.

“너희 집 뒤쪽 해변으로 갈게. 조수가 낮아지는 쪽에 있는 커다란

검은 바위 근처로 넌 거기에서 가끔 빨래를 하잖아.” 한수는 자기가

선자의 일상에 관해서 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다. “혼

자 올 수 있어?”
선자는 장W]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

58 파친 코 O
남자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내일 아침에 나올 수 있어? 이 시간쯤에?”

“모르겠어예:

“오후가 더 나을까?”

“하숙하는 사람들이 일하러 나간 뒤가 좋을 것 같아예.” 선자는 자

신의 말끝이 흐려지는 걸 알아차렸다.

고한수는 검은 바위 옆에서 신문을 읽으면서 선자를 기다리고 있

었다. 바다는 평소보다 더 파랗게 보였고 길쭉하고 가는 구름들은 기

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하얬다 그와 함께 있으니 모든 것이 더 생생

하게 느껴졌다. 고한수는 미풍에 날려 팔락거리는 신문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선자를 발견하고는 신문을 접어

서 팔 아래에 끼워 넣었다. 고한수는 선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선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선자는 큼직한 빨래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균

형을 잡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선생님.” 선자는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고개를 숙일 수가 없어서 양손으로 빨래 뭉치를 잡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한수가 먼저 재빠르게 손을 뻗어 선자의 머리 위에서 빨래

보따리를 들어 올렸다. 그가 빨래 보따리를 마른 바위에 올려놓았고

선자는 등을 곧게 폈다.

“감사합니더,
선생님:

“오빠라고 불러야지. 넌 오빠가 없고 난 여동생이 없으니까,네가

내 여동생이 될 수 있는 거 아냐?”

몰래한사랑 59
선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참 좋다!” 한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낮게 일렁거리는 파도

를 « 어보다 지평선을 응시했다. “제주도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느

낌이 비슷한 곳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는 둘 다 섬 출신이네. 언젠가

는 너도 섬사람들이 좀 남다르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우리는 좀 더 자

유로운 사람들이거든.”

선자는 한수의 목소리가 좋았다. 남성적이면서도 슬픔이 어려 있

는 목소리였다.

“넌 아마 여기서 평생을 보내겠지.”

“네. 여기가 제 고향이니까예.” 선자가 말했다.

“고향이라……” 고한수가 생각에 잠겼다. “우리 아버지는 제주에서

글 농장을 했어. 난 열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오사카로 갔지. 난 제

주도를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

가셨어.” 한수는 선자가 자신의 엄마를 닮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

다. 선자의 눈과 훤한 이마가 그랬다.

“빨랫감이 엄청 많구나. 나도 아버지와 내 옷을 빨곤 했는데 정말

지긋지긋하게 싫었지. 부자가 돼서 제일 좋은 건 빨래와 요리를 대신

해줄사람이 있다는 거야.”

선자는 걷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빨래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사실 빨래는 일도 아니 었다. 다림질이 훨씬 더 어려웠다.

“빨래할 때 무슨 생각해?”

한수는 선자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선자의

생각을 아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한수는 누군가의 생각을 알고

싶을 때 질문을 많이 던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

60 파친코 O
로 하고 나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진실

을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거짓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

은 소수에 불과했다. 한수는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을 때보다 그 사람도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알

았을 때가 더 실망스러웠다. 한수는 멍청한 여자보다는 똑똑한 여자

를 좋아했고,뒤에서 거짓말만 일삼는 게으른 여자보다는 열심히 일

하는 여자를 좋아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나도 옷이 딱 한 벌밖에 없었어. 그래

서 내가 매일 빨래를 해야 했지. 밤새 옷을 말려서 입으려고 했지만,

아침에도 아직 덜 말라서 축축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을 때가 많았

아 열 살인가 열한 살 때는 한 가지 꾀를 냈지. 젖은 옷을 빨리 말리

려고 난로 근처에 두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간 거야. 당시에는 보

리죽도 간신히 먹는 형편이 었거든. 난 싸구려 냄비에 든 보리죽을 저

어야 했어. 안 그러면 바닥에 눌러 붙으니까. 그래서 한참 보리죽을

젓고 있는데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거야. 아버지 잠바 소매가 난로에

타버렸더라고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어. 그 일로 크게 혼이 났지.”

한수는 아버지한테 호되게 맞은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머리가무

슨 속 빈 박이냐! 천하에 아무 쓸모도 없는 멍청한 놈 !” 한수의 아버

지는 번 돈은 모조리 술을 퍼마시는 데 쓰고 가족올 제대로 부양하

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참 대책 없는 사

람이었다. 오히려 혼자 힘으로 숲에서 먹을 것을 캐거나 사냥을 하고

좀도둑질까지 하는 아들에게 모질게 굴었다.

선자는 고한수 같은 사람이 자기 빨래를 직접 한다고는 상상도 하

지 못했다. 한수의 옷은 모두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선자는 한수가

몰래한사랑 61
지금껏 걸쳤던 각기 다른 정장들과 하얀 구두들을 이미 본 터였다.

영도에서 한수처 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도 뭐라고 말을 해야 했다.

“전 빨래를 할 때 어떻게 하면 잘 빨 수 있을까 생각해예. 빨래는

제가좋6!•하는 일 중에 하나라서예. 깨진 냄비는그냥 던져서 버려야

되지만 빨래를 하면 옷이 깨끗해지잖아예.”

한수가 선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난 오래전부터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

선자는 또다시 왜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넌 아주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 한수가 말했다. “아주 정직해 보

여.”

선자는 시장의 아주머니들한테서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선자는 한수의 말에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선자는 엄마에게 고한수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혔던 일본인 학생들 얘기도 하지 않았다. 노상

같이 빨래를 하던 동희에게는 그저 자기가 대신 빨래를 하겠다고만

말했다. 동희는 빨래를 안하게 되니 뛸 듯이 좋아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한수가 물었다.

선자의 뺨이 붉어졌다. “아니예:

한수가 미소를 지었다. “넌 이제 열일곱이 다 됐어. 난 서른네 살이

라 너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아. 내가 네 오빠이자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한수 오빠 말이야. 어떠니?”

선자는 한수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선자는 병에 걸린 아버

62 파친코 O
지가 낫기를 바랐던 때를 제외하고 이보다 더 간절한 순간은 지금껏

없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거나 머릿속에

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빨래는 언제 하러 오니?”

“사흘에 한번씩예:

“이 시간에?”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순간,폐

와 심장이 기대와 경이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선자는 항상 이 해변

을 사랑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열은 청록색의 바다, 돌이 섞인 모래


와 바다 사이에 놓인 검은 바위들,그리고 그 바위들을 둘러싼 하얀

자갈들을 사랑했다. 이 해변의 고요함은 선자에게 안전과 만족을 느

끼게 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을

예전과 똑같이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수가 선자 옆에 놓여 있던 매끄럽고 납작한 돌 하나를 집어 들


었다. 회색 줄무늬가 있는 검정 돌이었다 한수는 생선 도매용 컨테

이너에 표시를 할 때 쓰는 하얀 분필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돌바닥에

X 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쪼그리고 앉아 주변에 깔린 어마어마하게

많은 바위들을 살펴보다가 중간 크기의 바위를 찾아냈다. 벤치 높이

만한 그 바위에는 물기가 없는 틈이 있었다.

“내가 여기 왔는데 너를 만나지 못하고 일하러 돌아가야 하면 이

돌을 여기 바위틈에 넣어 둘게. 그럼 내가 왔다 갔다는 뜻이야. 네가

여기 왔다가 나를 못 만나면 너도 이 돌을 같은 곳에 놓아뒀으면 좋

겠어. 그러면 네가 날 보러 왔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한수는 선자의 팔을 토닥여주고 선자에 게 미소를 지 었다.

몰래한사랑 (S 3
“선자야, 난 이만 가봐야 해. 나중에 또 보자. 알겠지?”

선자는 한수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수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선자는 쪼그리고 앉아 빨래 보따리를 풀어서 빨래를

하려고 했다. 더러운 옷 하나를 꺼내 차가운 물에 담갔다.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삼 일 후, 선자는 다시 한수를 만났다. 빨래를 혼자서 하

겠다고 식모들을 설득하는 것은 별스러운 일도 아니 었다. 한수는 이

번에도 바위 옆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검은색 띠가 둘러진 밝은

색 모자를 쓴 한수는 아주 우아해 보였다. 한수는 바위 옆에서 선자

를 만나는 게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선자는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 엄마나복희, 그리고 동희에게 한수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선자와 한수는 검은 바위

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한수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니?”

선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하숙집에서는 항상 할 일

이 넘쳐났고^ 선자는 엄마가 빈둥거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

었다. 선자는 한수에게 항상 바쁘다고 대답했다가 곧이어 사실은 그

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

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다지 신경 쓰

지 않고도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선자는 아무 생각 없이 감자를

깎거나 바닥을 닦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그렇게 조용히

일할 때면 머릿속 가득 한수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그런 이야기를

64 파친코©
한수에게 할 수 는 없었다.

한수가 떠나기 직전에 선자에게 좋은 친구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

각하는지 물었다. 선자는 한수가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한수는 선자

가 곤란에 처했을 때 도와줬으니까. 한수는 그 대답에 미소를 짓고


선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며칠에 한 번씩 만났고,선자

는 빨래와 집안일을 점점 더 빨리 끝냈다. 그 바람에 선자가 해변이

나 시장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는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는 시장이나 해변으로 가기 전에 잘 닦아 놓은 냄비 뚜껑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며 단단히 떻까둔 머리를 매만졌다. 선자는 어떻

게 해야 사랑스럽게 꾸밀 수 있는지도 몰랐뵤 한수처럼 대단한 남자

뿐 아니라 평범한 남자를 유혹하는 법도 몰랐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고 단정 한 차림을 하려고 노력 했다

한수를 만나면 만날수록 한수의 존재는 선자의 마음속에 점점 더

생생하게 새겨졌다. 한수는 선자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장소와 사

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선자의 머릿속을 가

득 채웠다. 한수는 오사카에 살고 있었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라서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모두 살 수 있고 모든 집

에 전기가 들어오며 난방기가 있어서 겨울에도 따뜻하다고 한수가

말했다. 도쿄는 경성보다 더 분주한 도시라서 사람과 가게, 식당, 극

장도 더 많다고 했다. 한수는 만주와 평 양에도 가 봤다. 한수는 그 모

든 곳을 선자에게 설명해주면서 언젠가는 함께 가 보자고 말했다 하

지만 선자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뭐

라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한수와 함께 여 행을 다니는 것보다 훨씬 오

몰래한사랑 65
랫동안 한수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그저 좋았다. 한

수는 출장을 다녀오면 아름다운 색깔의 사탕과 달콤한 비스킷을 선

자에게 사다 주었다. 한수는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것처

럼 사탕을 까서 선자의 입에 넣어주었다. 선자는 그렇게 달콤한 것을

맛본 적이 없었다. 딱딱한 분홍색 사탕은 미국에서, 버터 비스킷은

영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선자는 엄마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사


탕포장지를 집 바깥에 조심스럽게 버렸다.

선자는 한수의 이야기와 경험에 매료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먼 곳

에서 온 어부들이나 노동자들의 모험담보다 훨씬 더 독특했다. 선자

와 한수의 관계는 한층 더 새롭고도 강력해졌고 그것은 선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한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

해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다. 하숙인들의 웃기는 습관들이나 엄마 밑

에서 일하는 언니들과 주고받은 대화들, 아버지에 대한 추억들, 선자

자신의 내밀한 궁금증들을 이야기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영


도와 부산 바깥 세상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생겼다. 한수는 선자의

일상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심지어는 선자에게 꿈이 뭔지 물어보

았다. 이따금씩 선자가 사람을 다루는 법을 몰라 곤란해하거나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한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했다. 한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내놓았다. 두 사람은 선자 엄

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일을 할 때의 한수는 낯설게 느껴졌다. 선자와 함께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선자와 함께 있을 때 한

수는 선자의 친구이자 오빠였다. 선자의 머리에서 빨래 보따리를 내

려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넌 빨래를 이고 오는 모습도 정말 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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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한수가 곧고 건강한 선자의 목덜미를 감탄스러운 눈길로 바라보

며 말했다 한번은 한수가 두툼한 두 손으로 선자의 목 뒤쪽을 만졌

다. 선자는 그 손길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선자에게는 그 느낌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선자는 항상 한수가 보고 싶었다. 한수 오빠는 또 어떤 사람과 이

야기를 나눌까? 아니면 어떤 질문을 할까? 내가 집에서 하숙인들 시

중을 들거나 엄마 옆에서 잠들 때 한수 오빠는 뭘 할까? 하지만 선자

는 이런 질문들을 그에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에만 묻어

두었다.

선자와 한수가 몰래 만난 지 석 달이 지나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점점 더 익숙해졌다. 가을이 되자 시원하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었

지만 선자는 그 바람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9월 초에는 닷새 동안이나 비가 내린 후에야 날이 개었다. 양진이

선자에게 내일 아침에 태종대 숲으로 버섯을 따러 7}■자고 했다. 선자

는 버섯 따는 일을 좋아했다. 해변에서 한수와 만날 때가 다가오자,

선자는 자신이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뭔가 다른 일을 하러 간다고

한수에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한층 들떠 있었다 한수는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자주 보았지만, 선자는 매일 반복되는 일에서

벗어난 뭔가를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자는 흥분해서 내일 아침 식사 후에 버섯을 따러 갈 거라는 계

획을 한수에게 털어놓았다. 한수는 잠시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선

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이지 버섯과 약초 뿌리는 아주 귀신같이 잘 찾아내는 사

람이야.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

몰래한사랑 67
지. 내가 어렸을 때는 몇 시간씩 버섯과 약초를 찾아다녔어. 봄에는

고사리를 따서 말렸자 새총으로 토끼를 잡아먹기도 했고. 한번은 해

지기 전에 꿩 한 쌍을 잡기도 했단다. 덕분에 오랜만에 고기를 먹었

지. 아버지가 엄청 기뻐했어.” 한수의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우리가 함께 갈 수 도 있지. 거기선 얼마나 있을 거니?”

“오빠야도가고 싶어 예?”

일주일에 두 번씩 30분 정도 한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그와 함께 보낼 수 있다니,선자는 그런

일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둘이 함께 있다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어

떻게 될까? 선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선자는 한수에 게 그건 안 된다고 말해야 했지만 함께 가겠다는 한수

를 막을 수도 없었다

“여기서 만나자. 난 이만 시장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한수가 이

번에는 마치 잔뜩 흥분한 어린 소년이 된 것처럼 선자에게 미소를

지 었 ^•

“우리는 버섯을 엄청 많이 딸 수 있을 거야 분명해.”

두 사람은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게 섬 바깥쪽을 따라 걸었다 해안

선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우아해 보였다 두 사람이 섬 반대쪽 숲

에 다다르자 어마어마하게 큰 소나무와 단풍나무, 전나무들이 마치

나들이옷을 입은 것처럼 금색과 붉은색으로 치장하고 그들을 맞이했

다. 한수는 오사카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했다 일본인들을 비난할 필

요는 없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들이 조선인들을 이기고 있지만 원래

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한수는 조선인들이 서로 싸우

68 파친코 O
지만 않는다면,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인들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

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를 가든 썩어빠진 사람들이 있아 그들은 좋은사람들이 아니

야 아주 나쁜사람을 보고 싶니? 그럼 평범한사람은 상상도 못할 성

공을 안겨줘 봐. 언제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

떤 행동을 하는지 한번 보는 거야:

선자는 한수가 이야기할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을 모두 다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의 모습을 모두 다 간직해두고 그가 하는 말

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선자는 어렸을 때 모으곤 했던 예쁜 돌맹이

처럼 한수의 이야기들을 보물처럼 간직했다. 한수는 선자의 손을 잡

고서 잊을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었고,선자는 그의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선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와사상이 많았고,경험도 없이

배우려고 애쓰는 것이 때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자는 돼지 내장

에 속을 채워 넣어 순대를 만들 듯이 한수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구

겨 넣었다. 무식한 여자처럼 보이기 싫어서 한수의 이야기를 이해하

려고 무진 애를 썼다. 선자는 한글이나 일본어를 몰랐다. 아버지한테

서 간단한 덧셈과 텔셈을 배워서 돈을 헤아릴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선자나 선자 엄마는 자기 이름도 쓸 줄 몰랐다.

한수는 버섯을 담으려고 커다란 보자기를 가져왔다. 버섯 따기 소

풍에 신이 난 한수의 모습에 선자도 기분이 더 좋아졌다 하지만 선

자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걱정스러웠다. 두 사람이 친구라

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들 했

다 한수가 선자와 결혼하고 싶다면 선자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

몰래한사랑 69
는데 한수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석 달 전에 선자에게 좋아하는 사

람이 있는지 물어본 이후, 한수는 그런 주제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

다. 선자는 한수가 여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했

다 한수 같은 남자가 여자를 찾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선자

는 힌수가 자신에 게 관심을 보이는 게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숲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숲에 들어선 선자

는 여기는 평소에 한수와 만나던 해변보다 더 고립된 것 같다는 느

낌이 들었다. 숲은 나지막한 바위들과 청록색 물이 펼쳐져 탁 트인

바다와는 달랐다. 마치 나뭇잎으로 둘러싸여 어두컴컴한 거인의 집

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선자는 새소리가들려서 어떤 새인지 알아보

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한수의 얼굴이 선자의 눈에 들어왔다. 한

수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오빠야, 괜찮아예?”

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는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여행과

일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 다채로운 나뭇잎과 울퉁불퉁한 나무둥치

앞에서는 말이 없어졌다. 한수는 오른손을 선자의 등에 갖다대고 선

자의 땋은 머리끝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선자의 등을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치웠다.

한수는 어렸을 때 이후로 숲에 오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교활한 거

리의 이들과 함께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일삼았던 거친 십 대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일본으로가기 전에는 나무가우거진 제주의 산

들이 그의 안식처였다. 그는 한라산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나무를

알고 있었다. 가느다란 다리로 고상한 척 교태를 부리며 걷던 작은

사슴도 생각났다. 짙게 풍기던 귤꽃 향기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70 파친코 O
영도의 숲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가자.” 한수는 더 이상울지 않았다.

한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수는 버섯 찾기 선수였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잔뜩 찾아•내서 요리 법까지 알려주었다.

“굶으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

게 돼.” 한수가웃었다. “난 굶주리는 게 싫어. 그건 그렇고 버섯이 많

이 있다는 곳은 어디야? 어느 쪽으로 가면 되니?”

“몇 분 더 가야 됩니더. 엄마가 어렸을 때 비가 억수로 오고 난 다

음 날이면 거기서 버섯을 땄다 겠어예. 엄마는 이 근처 출신이거든

예.”

“til구니가 좀 작은 것 같구나. 바구니를 두 개는 들고 왔어야 했는

데. 그래야 버섯을 잔뜩 따서 말려 놨다가 겨울 내내 먹지. 내일 또

와야겠는데.”

선자가 한수에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빠야, 오빠아:는 아직

버섯 있는 데를 보지도 못했잖아예 !”
두 사람이 선자 엄마의 비밀 공간에 도착하자,
눈앞에는 선자 아버

지가 좋아하던 갈색 버섯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수가 즐겁다는 듯 활짝 웃었다. “내 말이 맞았지? 저녁 먹을 준

비를 해올 걸 그랬어. 다음에는 여기서 점심을 먹자. 이거 너무 쉬운

데! 말을 마치자마자 한수는 버섯을 한 움큼 집어다 두 사람 사이 에

놓인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바구니가 가득 차자 손수건에도 버섯을

올렸다. 손수건 위에도 버섯이 수북하게 쌓였을 때, 선자가 허리춤에

묶어 놓았던 앞치마를 풀어서 버섯을 더 많이 모았다.

“이걸 다 우예 들고 가야 할지 모르겠어예. 제가 욕심쟁이가 됐나

몰래한사랑 71
봐예:

“그 정 도 로 욕심쟁이가 되지는 않아.”

한수가 선자에게 다가갔다. 선자는 한수의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

와 머릿기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한수는 깨끗하게 면도를 한 잘

생긴 남자였다. 선자는 한수의 티끌 하나 없이 하얀 옷을 좋아했다.

왜 그런 것이 중요했을까? 하숙집 남자들은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다 더러워졌고 아무리 씻어도 윗도리와

바지에서 생선 냄새를 지울 수가 없었다. 선자의 아버지는 선자에게

그런 피상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입은 것이나 가

진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성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도 했다.

선자가 깊이 숨을 들이쉬자 한수의 냄새가 상쾌한 숲 속 향기와 뒤

섞여 속으로 들어왔다.

한수가 선자의 저고리 안으로 두 손을 슬그머니 넣었지만 선자는

말리지 않았다. 한수는 선자의 옷고름을 풀고 저고리를 벗겼다. 선자

는 조용히 신음하기 시작했五 한수가 선자를 끌어당겨 안으며 나지

막하게 달래는 소리를 냈다. 선자는 한수가 달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 한 ^가 선자를 땅바닥에 부드럽게 눕혔다.

“오빠가 여기 있어. 괜찮아. 다 괜찮아.”

한수의 두 손은 선자의 엉덩이를 내내 단단히 잡고 있었다. 한수는

선자가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려고 애썼

지만 선자의 다리 뒤쪽은 숲 속의 부스러기에 쓸려 빨갛게 부어올랐

다. 마침내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고 한수는 손수건으로 선자의 피를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네 몸은 정말 예뻐. 꼭 잘 익은 과일 같아.”

72 파친코 O
선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자는 그저 마치 갓난아기처럼

한수를 할았다. 한수가 그녀의 안에서 움직이는 동안 선자는 그 날카

롭고도 생생한 고통에 깜짝 놀랐다. 점차 통증이 사라지자 그것이 고

맙게 느껴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노랗고 빨간 나뭇잎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수는 선자가 옷을 챙겨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랑스러운 내 선자.
두 사람이 다시 몸을 섞을 때도 한수는 같은 말을 했다.

몰래한사랑 73
한수의 고백

한수는 일본으로 사업상 출장을 떠났다. 출장 갔다가 돌아올 때는

깜짝 선물을 사오겠다고 약속했다. 선자는 한수와의 결혼은 이제 시

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한수의 여자이기 때문이


었다. 어서 빨리 한수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엄마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수와 함께 살기 위해서 오사카로 가야 한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 었다. 선자는 하루 종일 지금쯤 한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

각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생활할 한수의 삶을 상상할 때면 선자는

자신이 어딘가 다른 세상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영도호 부산도

심지어는 조선도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대체

어떻게 엄마와 아버지밖에 모르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것이 선자가 아는 전부였다.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도

리였다 선자는 생리가 멈추었을 때, 한수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있

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했다.

한수의고백 75
선자는 한수가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집에 시계가 있었더

라면 시침은 물론이고 분침까지 다 헤아렸을 것이다 한수가 돌아온

날 아침, 선자는 서둘러 시장으로 달려갔다. 선자가 중매상 사무실을

지나칠 때 한수가 선자를 발견했고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내일 아

침에 해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하숙인들이 일하러 나가자마자 선자는 재빨리 빨랫감을 모아들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정장에 멋들어진 외투를 걸친

채 바위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선자는 저렇게 멋진 남자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숙녀처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수에게 다

가갔겠지만, 오늘은 급한 마음에 두 팔로 빨래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달음질해서 한수가 있는 데로 갔다.

“오빠야, 오셨네예.”

“말했잖니. 난 항상 돌아온다고”
“오빠야 보니까 너무 좋아예.”

“어떻게 지냈니?”

선자는 한수를 다시 만나서 기뻤다.

“너무 빨리가지 는 마 시 소 ”

“눈 감아봐.” 선자는 한수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한수가 선자의 오 른 예 묵직한 뭔가를 올려놓았다. 차가운 금속

느낌이 났다.

“오빠야 거랑 똑같네예.” 선자가 눈을 뜨고 말했다. 한수는 영국에

서 물 건너왔다는 금으로 된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선자의 시계

는 그와 비슷한 크기에 은으로 만들어 도금한 것이라고 한수가 설명

76 파친코 O
했다. 얼마 전 선자는 시침과 분침을 구별해서 시계 보는 법을 한수

에게 배웠다. 한수의 시계는 조끼 단추 구멍에 끼워진 자형 막대에

금색 체인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걸 눌러봐.” 한수가 시계 뚜껑을 누르자 뚜껑이 열리며 꼬불꼬

불한 숫자가 적힌 우아하고 하얀 시계가 보였다.

“요래 아름다운 건 한 번도 못 봤어 예,
오빠. 고맙십니더. 증말로 고

마워예. 오데서 사셨어예?” 선자는 이런 것을 파는 가게를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돈만 있으면 못 살 게 없어. 런던에서 주문한 거야. 이제 너도 우

리가 만나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거야.”

선자는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한수가 선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선자를 끌어당겼다

“보고 싶었어;

선자는 시선을 내리깔고 저고리 앞섶을 열어젖혔다. 선자는 전날

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며 온몸 구석구석을 새빨개질 정도로 깨끗

하게 씻었다.

한수가 선자의 손에서 시계를 가져가서는 선자의 가는 속옷 끈으

로 고리 모양a:만들어 시계를 묶었다.

“다음에 오사카에 가면 시계에 맞는 체인이랑 핀을 주문해야겠다.”

한수가 속삭이며 선자의 속옷을 내렸다. 한수는 드러난 가슴에 입

술을 갖다대고 선자의 긴 치마도 벗겨냈다.

처음으로 한수와 사랑을 나눴을 때 선자는 다급하게 성욕을 채우

려는 그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좀 무덤덤해졌

다 한수와는 벌써 수차례 관계를 가졌고 처음처 럼 아프지도 않았다.

한수의고백 ᄁ
선자는 한수와사랑을 나눌 때,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힌 한수의 거친

몸짓뿐만 아니라 한수의 부드러운 애무가 좋았다. 근엄했던 그의 얼

굴 표정이 아이처럼 순진하게 변하는 모 습 도 좋았다.

마침내 한수의 몸이 떨리며 정사가 끝나자 선자는 저고리를 다시

챙겨 입었다 몇 분 후면 한수는 일하러 돌아가고 선자는 하숙집 빨

래를 해야 했다.

“저 얼라를가졌어예.”

한 ^가 눈 을 3 게 떴다

“진짜?”

“네,
그런 것 같아예.”

“그렇구나.” 한수가 미소를 지 었다.

선자도 두 사람이 함께 맺은 결실을 자랑스러워하며 빙긋 따라 웃

었다.

“선자야”

“오빠야?” 선자가 한수의 심각한 얼굴을 살폈다

“난 오사카에 아내와 애가 셋 있어.”

선자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가 천천히 닫혔다. 한수 오빠가 다른

누군가와 있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널 돌봐줄게. 하지만 너와 결혼할 수는 없어. 난 이미 일본에

서 혼인신고를 했거든. 내가 하는 일이랑 관련된 문제라서 좀 복잡

해.” 한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거야 마침 너한테 좋은 집을 찾아 줄 생각이었

어:

“집이예?”

78 파친코 O
“네 엄마 집 근처에. 아니 네가 원한다면 부산에 집을 사 줄 수도

있어. 곧 겨울이 올 거 고 그럼 밖에서 만날 수도 없잖아.” 한수가 웃

었다. 한수가 선자의 팔을 쓰다듬었지만 선자는 움찔거렸다.

“그래서 오사카에 간거였어예? 거기서……”

“철들기도 전에 한 결혼이야. 딸만 셋이고” 한수가 말했다. 한수의

딸들은 영리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사랑스

럽고 단순한 아이들이 었다. 한 아이는 꽤 예쁘장해서 시집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두 아이는 항상 안절부절못하고 연약했

다. 게다가 신경질적인 아이들 엄마와 똑 닮아 비쩍 말랐다.

“어쩌면 네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일지도 몰라.” 한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어떠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한수는

지갑에서 지폐 한 뭉치를 꺼냈다. “먹고 싶은 거 사 먹어. 너랑 0}이


옷도 시아겠다.”

선자는 돈을 노려보기만 할 뿐 받지 않았다. 선자의 손은 옆구리

옆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반면 한수는 점점 더 흥분에 휩싸여 목소리

를 높였다.

“기분이 좀 달라? 어때?” 한수가 선자의 배에 손을 올리고 기쁘게

웃었다.

한수의 아내는 한수보다 두 살이 많았다. 두 사람은 세 아이를 낳

은 이후로는 몇 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고 관계도 거의 가지지 않

았다. 한수에게는 최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we가 있었지만 아

이는 없었기 때문에 선자가 아이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

다. 한수는 겨울이 오기 전에 선자에게 작은 집을 사 줄 계획을 세우

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큰 집을 사 줘야 할 것 같았다. 선자는

한수의고백 79
젊은 데다 아이도 잘 낳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아이를 더 가

질 수도 있으리라. 한수는 조선에 자기 여자와 아이들이 생긴다는 생

각을 하자 기분이 좋 아 졌 ^■

한수는 이제 더 이상 젊은 나이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성욕

은 줄어들지 않았다. 선자 곁을 떠나 있을 때는 선자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기도 했다. 한수는 남자가 오직 한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은 거추장스러운 관습에 불과했고

남자라면 많은 여자들을 거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수는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버리는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한수는 선자

가 정말로 좋았다. 선자의 탄탄한 몸,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좋았

다 선자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자신을 흠모하

는 순진한 선자의 마음에 기대고 싶었다. 선자와 함께 지내고 나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지내면 다시 소년이 되는 모양이 었다.

한수가 선자의 손에 돈을 쥐어주었지만 선자는 돈을 받지 않았다.

지폐들이 선자의 손에서 떨어져 흩어지며 날아갔다. 한수가 허리를

숙여 떨어진 돈을 주 웠 ^■

“뭐 하는 거니?” 한수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선자는 한수의 시선을 피했다 한수가 뭐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

았다. 더 이상 한수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자

의 마음이 한수의 목소리를 아예 거부하는 것 같았다. 모든 말이 그

냥 시끄러운 잡음처럼 들렸다. 일본에 아내와 세 아이가 있다고? 선

자는 한수가 항상 자기에게 솔직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번 한 약

속은 반드시 지켰다. 깜짝 선물을 주겠다고 하더니 시계를 사다 주었

80 파친코 O
다. 그렇지만 선자가 한수를 위해 준비한 이 깜짝 선물은 그에게 알

리고 싶지 않은 소식이 되고 말았다. 지금껏 한수가 이 여자 저 여자

를 희롱하고 다니는 제비 같은 남자라고 의심할 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아내와도 사랑을 나누었을까? 내가 대체 이 남자에 대해 는 게

뭐가 있지?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선자는 알고 싶었다 아름다울

까? 친절할까? 선자는 더 이상 한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선자

는 자신의 하얀 무명 치마를 응시했다. 닳고 닮은 치맛단은 아무리

깨끗하게 아도 여전히 얼룩덜룩한 젯빛이었다.

“선자야, 언제 네 엄마를 만나 이야기할까? 이제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어? 아기가 생긴 건 아시니?”

“엄마예?”

“그래, 말씀드렸어?”

“언지예. 말 안했어예.”선자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숙집을 사 줄게. 그럼 너랑 어머니는 더 이상 하숙생을 받지 않

아도 되고^ 넌 그냥 아이만 돌보면 돼. 아이를 더 가질 수도 있아 네

가 좋다면 훨씬 큰 집을 사 줄게.”

선자는 자기 발치에 놓인 빨래 더미가 햇살을 받아 불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 오늘 해야 할 일거리였다. 선자는 자신이 남자가 원

하는 대로 몸을 내준 어리석은 시골 처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자는 한수가 탁 트인 해변에서 자신을 안으려 할 때도 거부하지

않았다. 늘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몸을 맡겼다 자신이 한수를

사랑하는 만큼 한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수와 결혼을 하지 못하는 한 자기는 평생 손가락질 받는 매춘부와

한수의고백 81
다를 바가 없었다 배 속의 아이는 성도 없는 사생아가 되고^ 엄마의

하숙집도 자기 때문에 온갖 욕을 먹으며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었

다 배 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선자처럼 진짜 아버지를 가지지는 못할

터였다.
“다시는 오빠아를 안 만날 껍니더.”

“뭐라고?” 한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한수가 두 팔

로 선자의 양어깨를 잡았지만 선자가 어깻짓으로 그 팔을 떨쳐냈다.


“한 번만 더 날 만지면 고마 죽어버릴 껍니더. 내가 창녀 같은 짓을

했다니……”

선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아버지의 모습이 떠

올랐다. 아버지의 아름다운 두 눈과 찢어진 입술, 구부정하고 느릿느

릿한 걸음걸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버지는 긴 하루 일을 끝내고

나면 마른 옥수수 속대와 나뭇가지로 인형을 만들어주곤 했다. 주머

니 속에 동전이라도 남아 있으면 선자에게 엿을 사다 주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못 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

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은 묵묵히 일만 하면서 자신을 보

석처럼 소중하게 아껴주셨는데 선자는 그런 부모님을 배신한 꼴이

되고 말았다.

“선자야,착한 우리 애기야, 왜 그렇게 화를 내니? 변한 건 무것

도 없어.”

한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와 아이를 돌봐줄게. 한 가정을 더

꾸릴 만한 돈과 시간쯤은 충분히 있어. 난 내 의무를 다할 거야. 널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널 더 깊이 사랑하는 것 같

82 파친코 O
아.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야. 할 수 있다면 너와 결혼할 거야. 넌 내

가 정말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야 넌 나와 닮았어. 우리 아이들

은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라나겠지. 하지만 아내와 세 딸을 버릴 수

“그런 얘기는 한 번도 안 했잖아예. 난 오빠야가• ••…”

한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에는 한 번도 자기 뜻을 거스른 적이

없는 선자였다 선자의 입에서는 단 한 번도 거절이나 반대하는 말이

나온적이 없었다
“다시는 오빠야를 안 볼낌니더.”

한수가 선자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선자가 소리쳤다. “저리 가이쇼

오빠야랑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예.”

한수는 멈춰 서서 선자를 바라보았다. 선자는 속에서 들끓는 화를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이제 한수의 눈앞에 서 있는소

녀는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빠이는 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아예. 전혀 예.” 선자는 갑자기 진

실을 깨달았다. 선자는 한수가 자기 부모님처럼 자신을 아껴주기를

기대했다. 부모님은 딸이 가정 있는남자의 첩이 되는 것보다는정직

한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랄 게 틀림 없었다.
“아가 딸아면 우째 할 껍니꺼? 제 〇 }부지처럼 태어나면예? 기형인

발에 윗입술이 갈라져서 태어나면예?”

“그래서 결혼을 안 한 거니?” 한수가 이마를 찌푸렸다.

선자 엄마는 선자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선자 엄마

에게 딸을 달라고 하지 않았乂 하숙인들도 선자를 놀리기만 할 뿐

결혼 상대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임신을 하고 나서야 선

한수의고백 83
자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기형인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매년 먼저 죽은 오빠들의 무덤을 찾아갔다. 엄마는

그중에서 아버지처럼 입술이 갈라져 태어난 아이도 있다고 했다. 한

수는 건강한 아이를 기대하고 있겠지? 그런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를 버릴까?

“그래서 나와 결혼하려고 한 거지? 정상인과는 결혼할 수 없어서?”

한수는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선자는 빨래 보따리를 움켜쥐고 집으로 달려갔다.

84 파친코 O
신이 ^신 선물

추 약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양진의 하숙집에 왕진을 왔다. 그러는

사이 백이삭의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추 약사는 이 평양 출신의 목

사가 회복되어 가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백 목사는 이제 다 나

은 것처럼 보였다.

“누워만 있기에는 너무 건강해 보이는데?” 추 약사가 말했다.

“그래도 아직은 일어나면 안 된데이.”

추 약사가 이삭 옆에 앉았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찬바람이 추 약

사의 하얀 앞머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는 두꺼운 이불을 이삭의 어

깨 위로 덮어주었다.

“따뜻^!
•나?”

“네. 선생님과 주머니께 빚을 졌네요”

“너무 말랐네.” 추 약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살이 좀 쪄야겠데아


얼굴에 살이 하나도 없다 아이가. 여기 음식이 입에 잘 안 맞 나 ?”

신이주신선물 85
추 약사의 말에 양진은 질책이라도 받은 것처럼 움찔했다.

“식사는 아주 잘 나와요” 이삭이 황급히 답했다. “제가 내는 식비

보다 더 많이 먹고 있어요 집보다 여기 음식이 더 좋은걸요” 이삭은

복도에 서 있던 양진과 선자에게 미소를지었다.

추 약사가 마짝 다가와 이삭의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댔다. 호흡은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와 비슷하게 강하고 또 안정적으로 들렸다. 목

사는 이제 아주 건강해 보였다.
“기 침 한 번 해 봐 레 이 ;

추 약사는 목사의 가슴에서 나는 소리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좋아지긴 했지만서도 지금까지 줄곧 아왔던 사람이 결핵까지 걸린

거 아이가. 그러니 조심해야제;

“네. 하지만 지금은 훨씬 나아진 것 같아요 선생님, 오사카에 있는

교회에 언제 갈 수 있는지 편지로 알리고 싶어요 제가 떠날 수 있을

까요? 형이 꼭 선생님 허락을 먼저 받고 오라고 했거든요” 이삭은 마

치 기도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평 양에서 출발할 때는 의사가 혼자서 오 카 로 여 행해도 된다 카

^나 ?”

“갈 수 있다고는 하셨지만 의사 선생님과 어머니가 제 여행을 적

극 찬성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집을 나섰을 땐 그 어느 때보다 건

강했어요 뭐, 지금 이렇게 됐으니 할 말이 없지만요 그분들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오사카•의 교회에서 빨리 와 달라고 해서

요”
“의사가 가지 말라고 겠는데 왔다는 거네.” 추 약사는 웃었다 “젊

은 사람들은 갇혀가 지내는 거를 못 하제. 지금 또 떠나고 싶은데 이

86 파친코 ©
번에는 내 허락을 받고 싶다는 거 아이가. 여행 중에 또 무 슨 일이 생

기면 우얄라꼬? 아니며는 일본에 도착해서 다시 아프면 우짤낀데?”

추 약사는 고개를 저었다. “우야면 좋겠노? 잡지는 못하겠지마는 그

래도 쯤 기다려야 한데이.”

“얼마나 오래요?”

“적어도 이 주일. 아니모 삼 주는 있어야제.”

이삭은 양진과 선자를 훑어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에게 짐이 된 걸로 모자라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했

으니……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도 전염되지 않아서 얼마

나 다행인지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죄송해요”

양진이 고개를 가로저 었다.

백 목사는 모범적인 손님이 었다. 예의 바른 목사가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다른 하숙집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훨씬 나아졌다. 게다가 목

사는 방세도 거르지 않고 제때 냈다. 양진은 목사의 건강이 크게 좋

아져서 마음이 놓였다.

추 약사가 청진기를 치웠다.

“서둘러가 집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데아 북쪽보다는 그래도 여기

날씨가 폐에 더 낫다 아이가. 오사카 날씨는 여기하고 비슷하IL든.

일본은 겨울이 그래 안 춥다.”

이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삭이 오사카에 가기 위해 부모님께 동

의를 얻으려 했을 때도 따뜻한 기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사카의 교회에 편지를 써도 될까요? 제 형에 게도요?”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가서 기차 탈끼제?” 추 약사가 물었다

하루도 더 걸리는 여행이 었다.

신 이 주 신 선물 87
이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추 약사가 떠나도 좋다는 뜻을 내

비치자 이삭은 속이 후련해졌다.

“밖에는 나가봤나?”

“마당까지만요 나가는 게 좋지 않다고 하셔서요”

“이제는 괜찮다 매일 두 번 산책 나가레아 다리 힘을 길러야 하니

까. 거의 석 달을 누워 지냈다 아이가.” 추 약사가 양진에게 다가갔다.

“환자가 시장까지 갈 수 있는지 봐주이소 혼자 보내면 안 됩니데이.

자빠질 수도 있으니까예.” 추 약사는 이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이삭은 성경 공부와 기도를 끝내고 마루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했다. 하숙인들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이삭은 오사카

에 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진 것 같았고 어서 떠날 준비를 하고 싶

었다. 일본으로 향하기 전에 부산 교회의 목사님을 방문하고 싶었

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괜히 찾아갔다가 병을 옮길까 봐 걱정돼

서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의 다리는 예전처럼 휘청거

리지 않았다. 이삭은 방에서 맏형 사무엘이 어렸을 때 가르쳐준 가

벼운 체조를 했다. 살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낸 이

삭은 그다지 확실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체력을 단련하는 법을 배워

야했다.

양진이 아침상을 치우러 왔다. 이삭은 양진이 가져다준 보리차를

마시며 감사 인사를 했다.


“산책을 하고 싶은데,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이삭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아주 좋아요 멀

88 파친코 O
리 가지 않을 거예요”

양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닭장 속의 귀한 수탉

처럼 그를 가둬둘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양진은 그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집 주변은 황량하니 인적이 드물었다. 그가

해변을 걷다가 무슨 일이 생겨도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터였다.

“목사님 혼자 가시면 안 됩니더.” 하숙인들은 일하러 나갔거나 별

로 알고 싶지도 않은 볼일을 보러 나갔다. 목사와 동행할 사람이 아

무도 없었다.

이삭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 힘을 키우지 못하면 떠나는 날도 늦

어질 게 뻔했다.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이삭이 잠시 말을 멈


췄다. “바쁘시겠지만 잠깐만 저랑 같이 산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다 큰 성인 남자가 여자에게 해변을 산책시켜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이삭은 오늘 외출하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못 가신다고 하셔도 괜찮아요_ 해변 근처에

서 잠깐만 거닐다 올게요 몇 분만요

이삭은 허약한 탓에 어릴 때부터 특별한 보살펌을 받았다. 가정교

사와 집안 하인들이 늘 그와 함께했다. 날씨가 좋아도 이삭이 산책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는 하인이나 형이 이삭을 업고 다녔

다 의사가 바람을 쐬라고 말하면 정원사가 이삭을 지게에 태워서 과

수원에 데려가 낮은 가지에서 사과를 따게 해주었다. 그때 그 사과의

달콤한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두 손에 쥐었던 붉은 과일

의 묵직한 무게와 아삭하고 한입 깨물어먹는 순간 하얀 즙이 손목을

신이주신선물 89
타고 흘러내렸던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삭은 집이 그리웠다.

그는 지금 자신이 바깥나들이를 시켜달라고 조르던 허약한 아이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작고 거친 손을 무릎에 접어둔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가 가족이 아닌 사람과 산

책하는 것은 적절한 행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삭보다 나이가 많아

서 추한 소문이 날 일은 없겠지만, 양진은 아버지나 남편이 아닌 남

자와 산책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삭은 양진의 곤란한 표정을 힐끗 훔쳐보았다. 또 폐를 끼치게 되

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주머니께선 이미 많은 것을 해주셨는데…… 제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군요”

양진은 등을 곧게 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해변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한 적이 없었다. 훈이는 다리와 등 때문에 짧은 인생 동안 심

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장애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었다. 하

지만 훈이가 처리해야 할 일은 늘 많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아

껴야 했다 훈이도 평범한 소년처럼 달려보고 싶었을 것이다. 영도의

다른 어린애들처럼 소금기 섞인 짠 공기를 들이마시며 갈매기를 쫓

고 싶었을 것이다.

“제가 참 이기적이죠?” 이삭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삭은 함께

가 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양진이 일어났다. “그래 나가시면 춥습니더. 외투 입으시야지예.


제가가져올게예.”

90 파친코 O
짙은 해초 냄새가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파도는 해변가에 솟아

오른 바위들에 부딪혀 부서지며 허공에 하얀 포말을 흩뿌렸다. 파랑

과 회색이 뒤섞인 황량한 풍경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맴도는 하얀 갈매기들뿐이 었다. 오랫동안 작은 방에 갇혀

있다시피 한 이삭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광경이었다. 아침 햇살

이 아무것도 쓰지 않은 이삭의 머리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이삭

은 술에 취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명

절에 만취해서 춤을 추는 농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이삭은 눈앞의 풍경에 취해 있었다.

이삭은 가죽 신발을 벗어 손에 쥐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

크고 마른 몸에는 이제 아픈 기색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남들처럼 튼튼해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진 듯했다.

“고맙습니다.” 이삭은 시선을 양진이 있는 쪽으로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이삭은 눈

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양진은 미소 짓고 있는 청년을 훑어보았다. 이삭이 지니고 있는 어

린애 같은 순수함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양진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아주머니는 정말 친절하세요”

그녀는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손을 휘휘 저었다 양진은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산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해야 할 일

들은 넘쳐나는데 이렇게 바깥에 나와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가

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무언가가 형체를 이루어 당장이라도 튀어

신이주신선물 91
나올 것만 같았다.

“뭐 하나물어봐도 될까요?”

“예?”

“선자 씨는 괜찮나요?”

양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해변을 걷고 있었지만 양진은

전혀 알 수 없는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는 더 이상

그녀의 집 뒤에 있는 해변 같지 않았다. 젊은 목사와 함께 있다는 것

이 양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고 몽롱한 기운에 취하게 했다. 그


러나 목사의 예상치 못한 질문은 얄팍했던 몽상을 깨트려버 렸다. 이

사람은 선자에 관해 뭘 알고 있는 걸까? 얼마 후면 선자의 배가 불

러오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티가 나는 것 같지 않았다. 목사는 어떻

게 생각할까? 무래도 상관없는 일인가?

“아를 가졌십니더.” 양진은 젊은 목사에게는 이 이야기를 해도 괜


찮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떨어져 있어서 힘들겠군요”

“남편은 없어예:

이삭은 아이 아버지를 일본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흔한 일이 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니 었 ^■

“그럼,
아이 아버지는……”

“말을 안 할라꼬 합니더.”

선자는 그 남자가 이미 결혼을 해서 자식까지 둔 사람이라고 했다.

양진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목사에 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창피 했다.

92 파친코 O
이삭의 눈에 양진은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체념한 여자처럼 보였

다. 글을 모르는 하숙인들은 이삭에게 신문을 가져와 내용을 묻곤 했

는데, 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하나같이 슬픈 이야기들뿐이었다. 이삭

은 망가지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슬픔과 불행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

었다. 조선은 20년이 넘도록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고 그 어디에도 끝

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포기에 익숙해져버렸다.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예. 아 인생이 망가져버렸십니더. 전에도 결

흔하기 어려웠는데 인자는……

이삭은 양진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자 아부지 몸이 성치 않았거든예. 사람들이 우리 아를 꺼려합니

더.”

“그 랬 ^ ^ ”

“결혼 안 하고 혼자사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남편 없이 아를 낳다

니요 이웃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낌니더. 성도 없는 아는 우찌 되겠

습니꺼? 아를 우리 족보에 올릴 수도 없는데 말입니더.”

양진이 남에게 자기 생각을 이렇게 자유롭게 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 속도는 조금씩 느려

졌다.

양진은 선자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어떻게든 하고 싶

은 마음에 머리를 쥐어짰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

도 하지 않은 두 언니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五 아버지는 오

래전에 돌아가셨다. 의지할 만한 남자 형제는 한 명도 없었다

이삭은 양진의 말에 그리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고향에 있는 교회

신이주신선물 93
에서도 이런 일은 이따금 벌어졌다. 교회에서는 온갖 일들을 보고 들

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도 용서받을 수 있었으니까.

“아이 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건가요?”

“몰라예. 선자가 말을 안 합니더.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한적이 없

어 예. 사람들 얘기를 들어주는 게 목사님 일이라는 건 알지만서도 저

는 예수쟁이도 아닌데…… 이런 얘기까지 해서 죄송해예.”

“아주머니가 제 목숨을 구해주신 걸요 아주머니가 돌봐주시지 않

았다면 전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 어느 하숙집 주인이 손님에게 그런

일을 해주겠어요?”

“선자 아부지도 결핵으로 죽었어예. 목사님은 젊으니까 오래 사셔

야지 예 :

그들은 계속 걸었다. 양진은 햇빛을 받아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바

다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주저앉고 싶

었다.
“선자 씨에게 제가 안다는 사실을 말해도 될까요? 제가 선자 씨와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안 놀라셨어 예?”

“전혀요 선자 씨는 책임감이 아주 강한 여성인 것 같아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주머니, 지금은 괴로우시겠지만 아이는

신이 주신 선물이에요”

양진은 여전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머니,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선자 아부지는 교회 댕기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꼬 했어예.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들도 많다꼬예. 맞

94 파친코 O
습니 꺼?”

“맞아요 평양에 있는 신학교 선생님들은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제 큰형은 1919년에 세상을 떠났죠”

“목사님도 독립운동을 하십니꺼?” 양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훈이는 위험하니까 운동가들에게 방을 내주지 말라고 말했다.

“목사님 행님처럼예?”

“사무엘 형은 목사였습니다. 형은 저를 그리스도께 인도했죠 훌륭

한남자였어요 두려움 없이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었죠:

양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이는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

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을 돌보는 것이라고 믿었다.

“선자 아부지는 다른 사람 말은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예. 예수

님도,
부처님도,황제도,심지어는 조선인 지도자도예:

“그랬군요”

“여기서는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우리는 그분의 이유를 이

해하지 못하죠 때로는 그분이 행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

고요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 죠 ”

양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님을사랑하는 자들,
즉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삭은 자신이 좋아하는 로

마서 구절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양진이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순 社 이삭은 자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양진과 그 딸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 마음고생이 심하시겠어요 저는 자식이 없지만, 부모도

신이주신선물 95
자녀에게서 상처를 받곤 한다고 생각해요;

이삭의 말에도 양진은 슬픔에서 해어나오지 못했다.

“오늘 목사님이 이래 쬐매라도 산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예.”

양진이 말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신다 해도 이해합니다.”


“목사님네 가족은 제사 지내시나예?”

“아 뇨 ; 이삭은 미소 지었다. 그의 가족 중에서 죽은 자를 위해서

제를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다른 개신교 신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자 아부지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꼬 겠지만 저는 아직도

그 사람이 좋아했던 음식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냅니더. 시부모님하

고 제 자신을 위해서 예. 시부모님은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어 예.

두 분은 저한테 엄청 잘해주셨습니더. 저는 시부모님 무덤뿐만 아니

라 죽은 우리 자식들 무덤도 깨끗하게 돌보고 있습니더. 귀신은 안

믿지만 그래도 저세상 간 사람들한테 넋두리라도 늘어놓으면 기분

이 좋아지거든예. 우짜면 그게 신일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더. 좋은 신

이라면 제 자식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껍니더. 그런 신은 믿

을 수가 없어 예. 제 자식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맟아요 그 애들은 아무 잘못도 없죠” 이삭은 그녀를 바라보며 신

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일 우리가 옳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면 우주의 창조자가 되지 못하셨을 겁니다. 우리의 꼭두각

시가 되고 말았겠죠 그런 분은 하나님이 아니지요 우리가 알 수 없

는 일이 많답니다.”

96 파친코 O
양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점차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같았다.
“목사님이 선자하고 얘기를 하신다고 하면 아마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더. 우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냥 그럴 것 같아예.”

“내일 선자 씨에게 함께 산책하자고 부탁해볼게요”

양진이 돌아섰고 이삭은 그 옆을 따라 걸었다.

신이주신선물 97
신러 계시

이삭은 형에게 보낼 편지를 다 쓴 다음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일

어났다. 앞방의 좁은 창문을 열고 바깥의 상쾌한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평생 동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일찍 죽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위장과 심장, 가슴에 심각한 병

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어린 시절부터 이삭은 줄곧 아팠다. 당연하게

도 이삭은 자신의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다. 신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그 순간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이삭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이상

하게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이삭은 낙담하지

않았다. 이삭은 죽음에 익숙해져버 렸고,


동시에 살아 있을 동안 무언

가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강해져 갔다.

큰형 사무엘은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요절했다. 시위에 나갔

다가 체포당해 모진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큰형의 죽

음을 계기로 이삭은 용감한 삶을 살겠노라 결심했다. 그는 젊은 시절

신의계시 99
내내 가정교사와 가족의 보살펌을 받으며 집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

야 했다. 그래도 고향의 교회에서 평신도 목사로 일하면서 다녔던 신

학교 시절에는 어느 때보다 건강했다. 큰형은 살아 있는 동안 신학교

와 고향 교회의 빛나는 별 같은 존재였다. 이삭은 큰형이 어릴 적 자

신의 다리가 되어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고 믿었다.

작은형 요셉은 사무엘이나 이삭처럼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는 학교생활을 좋아하지 않았고 기회가 생기자마자 다른 삶을 찾아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독학으로 기계공이 된 그는 지금 오사카에 있

는 공장에서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족끼리 친분이 있었던 경


희와 일본에서 결혼을 했고 아직 자식은 없었다. 이삭에게 오사카로

오라고 한 사람은 요셉이었다. 요셉은 이삭을 위해 교회 일을 찾아

놓았다고 했다. 이삭은 선자에게 청혼하려는 자신의 결정을 형인 요

셉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요셉은 관대한 성격

을 가진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삭은 봉투에 주소를 쓴 다음 외

투를 챙겨 입었다.

그는 쟁반을 들고 부엌문 앞으로 갔다. 부엌은 남자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고 이삭이 직접 쟁반을 가져다줄 필요도 없었다. 하지

만 이삭은 항상 일하는 여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선자는

흰 한복 위에 누비조끼를 입고 난로 근처에 앉아 무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 모습

이 사랑스러웠다.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어서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

다. 여성의 몸이 바뀌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삭은 여

자와 단둘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

100 파친코〇
선자가 쟁반을 받으려고 서둘러 일어섰다.

“저한테 주이소;

그는 쟁반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하려고 입

을 열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선자가 그를 보

았다.

“뭐 필요하신 거 있어예?”

“오늘 마을에 가려고요 만날 사람이 있거든요”

선자는 이해한 것처럼 끄덕였다.

“석탄 갖다주시는 준 아저씨가 마을에 가실 낀데 목사님 데려다달

^ 고 할까예?”

이삭이 미소를 지었다. 선자에게 동행을 청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용기가사라졌다. “네. 아저씨가 괜찮다고 하시면요 고맙습니다.”


선자는 준 아저씨를 데려오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교회는 버려진 학교를 개조한 낡은 목제 건물이 었다. 준은 우체국

뒤에 있는 교회를 가리키고는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심부름 할 끼 있어가지고예. 편지는 제가 보내 놓을게예.”

“신 목사님 아세요? 한번 만나보실래요?”

준이 웃었다 “교회는 딱 한 번 가 봤십니더. 인자 됐십니더.”

준은 돈을 요구하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주를 청하는

스님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준이 생각하는 종교란 쓸데없이 교

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일다운 일을 하기 싫어서 공으로 돈을 벌

려는 짓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평양에서 온 청년 목사는 게을러 보

이지 않았五 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준은 그가 좋았다.

신의계시 101
또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준다는 것도 좋았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벨시러운 일도 아닙니더. 제가 교회 안 다닌다꼬 화내시는 거 아

니지예? 보시다시피, 백 목사님, 저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

고 나쁜 사람도 아니거든예.”
“아저씨가 좋은 분인 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길 잃은 저를 하숙집

으로 데리고 가주신 분도 아저씨잖아요 너무 어지럽고 힘들어서 제

이름 석 자나 겨우 대던 저를 아저씨는 아무런 해코지도 하시지 않

고 도와주셨잖아요”

석탄 배달부가 웃었다. 그는 칭찬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

“목사님이 그 카시며는 그런 갑지예,뭐.” 그는 다시 웃었다. “끝나

면 우체국 옆에 있는 만두집에서 기다리시소. 심부름을 끝내고 나서

^짝 으 로 갈게예.”

교회 식모는 작은 몸에 비해 너무 크고 여기저기 기워 놓은 남자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농아» 인 그녀는 예배당 바닥을 빗자루로 쓸

고 있었는데,빗자루를 흔들 때마다 그녀의 몸도 덩달아 부드럽게 흔

들렸다. 이삭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예배당 바닥을 울리자, 여자는

그 기척에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섰다 낡은 빗자루가 그녀의 다리를

스쳤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여자는 빗자루 손잡이를 꽉 움켜쥐

었다. 여자가 뭐라고 말했지만 이삭은 알 아 #을 수가 없었다

“신 목사님을뵈러 왔어요” 이삭은그녀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식모가 교회 뒤쪽으로 달려갔고 곧 신 목사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102 파친코 O
50대 초반인 그는 두꺼운 안경으로 깊은 갈색 눈을 가리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검었乂 흰 셔츠와 회색 바지는 잘 다려져

있었다. 절제되고 차분한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신 목사는 서양식 옷을 입은 멋진 젊은이에게 미소

를 지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백이삭입니다. 신학교 선생님들께서 목사님께 편지를 쓰신 줄로

^소니^만.”

“아,백 목사! 드디어 여기 와줬구먼! 이렇게 만나니 너무 좋네! 내

연구실이 저기 뒤쪽에 있어. 거기가 조금 더 따뜻하거든. 그리로 가

세.” 그는 식모에 게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부산에 얼마나 오래 있었지? 언제 들를지 궁금했다네. 오사카에

있는 자매 교회로 가는 길인가?”

신 목사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빠르게 질문을 쏟아내는 바람에 이

삭은 질문에 답할 틈이 거의 없었다 신 목사는 평양에 있는 신학교

의 초창기 졸업생이었고,자신의 어린 후배를 만나게 된 것이 매우

기쁜 듯했다. 학교에서 이삭을 가르치던 교수들은 모두 신 목사의 졸

업 동기들이었다.

“머무를 곳은 있나? 여기서 지낼 방을 마련해줄 수도 있다네. 지금

은 어디서 지내나?” 신 목사는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목사가 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서구에서 온 선교사들은 식민지 정부의 단속 때문에

대부분 조선을 떠나버렸다. 목사가 되려는 청년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신 목사는 요즘 들어 부쩍 외로움을 느꼈다.

“편하게 머물다 가게]”

이삭이 웃 었 ^•

신의계시 103
“더 일찍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빨리 찾아뵙고 싶었는

데 몸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영도 부두 근처에 있는 하숙집에서 나

오지를 못했어요 김훈이라는 분의 미망신과 딸이 저를 잘 보살펴주

었습니다. 혹시 신부님도 아시나요?”

신 목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영도 사람은 잘 몰라. 내 나중에 그리로 한번 찾아가지. 얼굴

이 좋아 보이네,조금 수척해 보이기는 해도 요즘 배불리 먹는 사람

이 어디 있겠나 아참,
식사는 한 건가? 먹을 게 좀 있을 텐데.”

“아뇨 먹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식모가 차를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이삭의 안전한

도착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오사카 갈준비는 잘 되어 가는가?”

“네 :

“좋아,
좋아.”

나이 든 목사는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

은 교회에 나오기를 두려워 했다. 그것은 조선도 그랬고 일본도 마찬

가지였다. 정부가 승인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 었다. 캐나다에서 온 선

교사들은 이미 조선을 떠나버 렸다.

이삭은 이미 그런 슬픈 소식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

이 시련에 맞설 준비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신학교 시절부터 그는

교수들과 정부의 탄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에 잠긴

이삭은 말이 없었다.

“괜찮나?” 신 목사가 물었다.

“목사님,
호세아HOsea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104 파친코 O
“어? 물론이지.”신 목사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흔쾌히 대답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에게 창녀와 결혼하여 자기 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양육하게 하셨죠 주님께서 그를 배반하는 백성들과

의 결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선지자 호세아를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이삭이 물었다.

“그래,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큰 이유였지. 선지자 호세아는 주님

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고; 신 목사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은 그가" 전에 설교한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헌신하시지.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셔. 어떤 면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내하는 결혼 생활 같기도 하고,아버지나 어머니가 빗

나간 아이 에게 쏟아붓는 사랑과 닮았다고도 볼 수 있다네. 호세아는

사랑하기가 힘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때 하나님과 같이 행동하라는

부름을 받았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사랑하기가 어려워. 죄는 언

제나 주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야.” 신 목사는 이삭의 얼굴을 주의 깊

게 보고 그가 이해했는지 확인했다.

이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느끼시는지 우리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물론이지.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

을 수 없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단순히 주님을 흠모하거나 두

려워하고,주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감정을 알아야 해.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실 게 분명하니

까. 우리는 주님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

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

신의계시 105
리에게는 위로가 되는 거야 우리가 홀로 고통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게 말일세.”

“목사님, 하숙집 아주머니와 딸이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결핵에

걸린 저를 석 달이나 돌봐주었어요”

신 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이 훌륭한 일을 했군. 고귀하고 친절한 일이야.”

“그 딸이 임신 중인데 0ᅵ•이의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어요 결혼도하

지 않아 아이에게 성을물려줄 수도 없습니다.”

신 목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청혼하려고요_ 아내로 삼아 일본에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녀가 좋다고 한다면 일본에 가기 전에 결혼할 겁니다. 저는……”

신 목사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기독교인들은 기꺼이 자신의

재산과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곤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

가 있어야 했고,결혼은 선불리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성 바울과 성

요한은 “모든 것을 시험하라”고 말했다.

“부모님께는 알려 드렸나?”

“아니요 하지만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줄곧 결혼을 하지 않겠다

고 말씀드렸거든요 부모님은 저에게 결혼은 기대도 하지 않으세요

이 얘기를 들으시면 기뻐하실 거 예요”

“결혼은 왜 안 하겠다고 한 건가?”

“전 태어났을 때부터 허약했거든요 지난 몇 년 동안 조금 나아지

긴 했지만 여기로 오는 길에 다시 악화되었어요 우리 가족 중에 제

가 스물다섯 살이 넘을 때까지 살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

었습니다. 전 올해 스물여섯이고요; 이삭이 미소 지었다. “제가 결혼

106 파친코 O
해서 아이를 낳으면 젊은 여자는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어

버 리 ^지 요 ”

“그랬구먼.”

“전 진작에 죽었어야 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어요”

“자네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네. 하나님께 감사를.” 신 목사는 젊은

이에게 웃어주며 답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려는 어린 목사를 어

떻게 보호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믿기 어려웠다.

평양에 있는 친구들의 편지로 이삭의 지성과유능함을 미리 알지 못

했다면, 신 목사는 이삭이 종교적 미치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아가씨는 무어라고 하든?”

“아직 얘기 못 했어요 하숙집 아주머니한테서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어제였거든요 그리고 어젯밤 저녁에 기도드리면서 제가 해

야 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良 여자와 이에게 제 성을 물려주는

겁니다. 성이 뭐 대수인가요? 전 그냥자손을 족보에 올릴 수 있는 남

자로 태어나는 은총을 입은 사람일 뿐인 걸요 젊은 여자가 불한당에

게 버림받은 것이 그 여자 잘못은 아니잖아요 설령 나쁜 사람이 아

닌 남자에게 버림받았다 해도 여자 탓은 아니죠 태어날 아이는 무고

합니다 아이가 그런 고난을 겪고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이유는 없지

요”

신 목사는 이삭의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 제가살도록 허락하신다면, 전 선자의 좋은 남편이자 아

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선자?”

“네, 하숙집 아주머니의 딸이에요”

신의계시 107
“네 신앙은 선하고 네 의도도 옳지만……”

“아이들은 모두 축복입니다. 성경에 나오다시피 남자와 여자는 자

녀를 갖기 위해 꾸준히 기도해야 했지요 불임은 곧 하나님께 버림받

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아닌가요? 제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

지 않는다면,
저는 그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가여운 남자일

뿐입니다.” 이삭은 전에는 이런 생각을 결코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

다. 아내와 가족을 원하는 마음은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신 목사는 젊은 목사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5년 전 자식

넷과 아내를 모두 콜레라로 잃은 후,신 목사는 상실감이 말로는 표

현할 수 없는 감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들은

그저 어리석고 입에 발린 말들이었다. 신 목사는 실제로 가족을 잃고

서야 겨우 상실이 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처자식은 모두 비참

하게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과 신학에 관해 그가 배운 모든 것들은

훨씬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마치

따뜻했던 방이 차갑게 식었어도 여전히 같은 방인 것은 틀림없는 것

처럼 말이다. 신 목사는 눈앞의 이상주의자가 신앙으로 눈을 빛내는

모습이 경탄스러웠다. 그러나 자신은 장로로서 이삭을 돌볼 의무가

있었다.

“어제 아침 호세아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몇 시간 후,

하숙집 아주머니가 임신한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주님은

저에게 말씀하고 계셨어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지요 이런 식으로

확실한 하나님의 의지는 느껴본 적이 없어요; 이삭은 신 목사와 함

께 있는 이 자리에서는 그 사실을 밝혀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목사

108 파친코 O
님은 이런 일을 겪으신 적이 있나요?” 그는 신 목사의 눈에 의구심이

비치는지 살펴보았다.

“그래, 나도 그런 일을 겪었지. 하지만 항상그렇게 생생한 것은 아

니야 성경을 읽을 때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곤 하지.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 하지만 우연이라는 것도 존재한다네. 우

리는 그러한 것들에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하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야. 어쩌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

게 말씀하고 계실지도 몰라. 그저 우리가 그 음성을 듣는 법을 모르

는 것일 수도 있지.” 신 목사가 말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고백하는

것은 어색했지만, 그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살아오는 동안 이를 가진 채 버려진 소 녜 을 세 명이나

알게 되었어요 소녀들 중 둘은 자살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저희

집에서 식모로 일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가족들에게 남편이

이미 죽어버렸다고 말해야 했어요 평생 거짓말이라곤 입에 담아본

적이 없던 저희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런 일은 자주 있다네. 특히나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말이

야.”

“하숙집 아주머니가 저를 살린 겁니다. 어쩌면 제 목숨이 그 가족

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전 죽기 전에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형처럼요”

신 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사무엘

이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제 인생이 큰 의미가 될 수도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아니

라 소수의 사람들에 게요 어쩌면 제가 그 어린 여자와 아이를 도울

신의계시 109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또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죠

저에게 가족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목사님이 어떻게 보시든 그건 큰

축복이 될 겁니다.”

이 젊은 목사는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신 목사

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가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그 딸을 만나보고 싶구만. 그 어머

니도”
“선자가 제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이리로 데려올게요 그녀는 아직

절 잘 몰라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신 목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결혼 전날

까지 아내를 보지 못했어. 자네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써 보겠지만 결

혼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진지한 언약이야. 자네도 알잖나. 가능

하면 두 사람을 데려와.”

이삭이 교회를 떠나기 전, 신 목사는 이삭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

를위해기도했다.

이삭이 하숙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 씨 형제는 저녁상을 막 물리고

따뜻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여자들은 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왕마, 목사님,
마을에 댕겨 오셨는갑서? 술 한잔하시드라고.” 맏형

인 곰보가 윙크를 하며 물었다. 이삭에게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것은

형제들이 지난 몇 달간 꾸준히 해온 농담이었다.

“고기잡이는 어땠어요?”

막내인 뚱보가" 실망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110 파친코〇
“인어는 못 잡았당께요.”

“그거 안 됐군요” 이삭이 말했다.

“목사님, 저녁은 지금 드시겠습니꺼?” 양진이 물었다.

“네,감사합니다.” 외출한 덕분에 이삭은 배가 고팠다. 먹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었다.

정 씨 형제는 일어나 앉을 생각이 없었지만 이삭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었다. 곰보는 오래된 친구처럼 이삭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숙집에서, 특히 선량한 정 씨 형제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이삭은

자신이 인생의 대부분을 책에 파묻혀 지낸 병약한 학생이 아니라 진

짜 남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반찬 몇 가지와 뜨거운 그릇에 넘칠 듯이 가득 담긴 국,


꾹꾹 눌러

퍼 담은 수수보리밥을 앉은 밥상을 들고 선자가 방에 들어왔다. 이삭

이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자 다른 사람들은 이삭이 기도를 마칠 때까

지 어색하게 침묵을 지켰다.

“아따, 잘생긴 목사님헌티는 내보다 밥을 더 많이 주는 거 보쇼잉

뚱보가" 불평했다. “뭐 놀랄 일도 아니제.” 그는 선자를 향해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선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식사했어요?” 이삭은 자기 국그릇을 뚱보에게 건넸다. “여기 많이

있어요”

분별력 있는 둘째가 목사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아따, 이노무 자숙은 국 두 그릇에 밥도 세 그릇이나 먹었당께요

이 자숙이 끼니를 놓치는 법이 어디 있을랑가요? 밥을 안 묵어불며

는 이 자숙 이거는 내 팔도 씹어 묵어불 것이당께. 완전 돼지 새끼아

니 ^능 ^}:

신의계시 111
뚱보가 형의 갈비뼈를 찔렀다.

“왐마? 원래 힘씬 남자가 밥도 많이 묵고 그러는 거시제! 인어들이

나를 더 좋아해분께 행님이 질투하는 거 아니당가? 두고 보시랑께

요 나는 시장에서 이쁜 가시내 얻어가지고 결혼혀서 평생 돌봐달라

할템께. 행님은 평생 자기 그물 자기가 꼬매면서 사쇼잉 !”

곰보와 둘째가 크게 웃었지만 뚱보는 형들을 무시 했다.

“밥이나 더 묵어야겠구마아 나 묵을 밥 아직 남았능가요?” 뚱보가

선자에게 물었다.

“여자들 먹을 밥 좀 남겨 두드라고 이 자숙아!” 곰보가 끼어들었다.

“여러분들 드실 건 충분한가요?” 이삭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하모예,
저희 먹을 거 충분해예. 걱정하지 마시소. 뚱보가 밥 더 묵

고 잡다 카며는 더 주면 돼 예” 양진이 이렇게 말하며 이삭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뚱보는 멋쩍은 듯했다.

“워메, 배도 인자 안 고프네잉. 담배나 피우야것다.” 그는 주머니에

서 담뱃잎을 꺼냈다.

“그래서 목사님은 오사카로 금방 떠나실랑가요? 아니면 우리랑 같

이 배 타고 인어 찾으러 다니실라요잉? 이제는 튼튼하셔가지고 그물

도 잘 끌어올리실 것 같은디.” 뚱보가 말했다. 그는 자기가 피우기 전

에 먼저 큰형에게 곰방대를 건넸다. “아따 참말로 이래 이쁜 섬 을 놔

두고 거시기허게 춥은 도시로 갈라 하쇼잉?”

이삭이 웃었다 “형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어요 여행을 해도 되겠


다 싶으면 바로 오사카에 있는 교회에 가려고요;

“영도에 있는 인어를 생각해보쇼.” 뚱보가" 부엌으로 향하고 있던

112 파친코 O
선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본 인어는 안 그럴 것이지라.”

“그거 유혹적인 제안이네요 어쩌면 오사카에 가면 인어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삭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목사님이 지금 농담을 하셨당가?” 뚱보가 바닥을 탕탕 두드리며

박장대소했다.

이삭은 찻잔을 입가로 옮기며 미소 지 었다.

“오사카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면 아내가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이모 찻잔 내려 놓으시쇼잉. 새신랑한테 진짜 술이라도 부어드

려 불자고!” 곰보가•소리쳤다.

형제들은 크게 웃었고 목사도 따라 웃었다.

집은 작았고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는 여자들의 귀에 다 들어왔다.

목사님이 아내를 원한다는 말에 동희는 갈망에 사로잡혔고 복희는

미친 여자 보듯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부엌에서 선자는 저녁 쟁반을

치우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놋쇠 대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접시를

씻기 시작했다.

신의계시 113
公 도 ' —T 石!
1 6 ~r 그고

부엌 청소를 마친 후 선자는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동희 자매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보통 선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잠자

리에 들었지만, 지난달에는 유독 피곤해서 다른 사람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

침에는 억센 두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 선자

는 차가운 방의 공기가 체온을 빼앗아 가기 전에 재빨리 옷을 벗고

두꺼운 이불 밑으로 들어갔다. 온돌 바닥이 따뜻했다. 베개에 무거운

머리를 대자마자 제일 먼저 한수가 생각났다.

한수는 더 이상 부산에 없었다 해변에 한수를 두고 떠나왔던 그다

음 날,선자는 엄마에게 속이 메스꺼워서 집 밖으로 멀리 나갈 수가

없다며 시장에 대신 가달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선자는 시장에 가지

않았다. 선자가 마침내 보통 때처럼 장을 보러 나가기 시작했을 때,

한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매일 아침 시장에 가서 한수를 찾아

우동두^릇 115
보았지만 한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온돌 바닥의 열기가 올라와 깔고 누운 요가 따끈따끈해졌다 하루

종일 차가웠던 몸이 녹자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선자는 살짝 불러

온 배에 두 손을 올렸다 아직은 아이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지

만 자신의 몸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예민해진 후각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생선 좌판을 지나갈 때면 속이 울렁거렸다.

특히 게와 새우 냄새가 제일 지독했다. 팔다리는 부어올라 스펀지라

도 된 것만 같았다. 선자는 임신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


신의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남들에게 말 못할 비

밀이었고,선자 자신에게도 그 사실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떤 아이

가 태어날까? 선자는 이런 생각들을 한수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선자가 엄마에게 임신했다는 것을 말하고 난 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고민이 깊어지는 만큼 진

해지는 엄마의 주름은 찡그린 채 그대로 굳어질 것만 같았다. 낮에는

늘 하던 것처럼 일에 전념했지만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선자는

한수가 자신과 아이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한수의 첩이 되겠다고 말하고 그를 붙잡았다면 그를 자기 사람으

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수는 마음 내킬 때마다 언

제든지 일본에 있는 아내와 딸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선자는

그런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보 지금 이렇게 약해진 순간에도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자는 한수가 그리웠지만 다른

여자와 그를 나눠 갖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멍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참

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대 왜 나이도 있고 지위도 있는 사람에게

116 파친코 O
아내와 자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한수가 자기처럼 무식한

시골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

조선의 부잣집 남자들은 아내와 첩을 여럿 거느리는 것이 일상적이

었고,심지어는 본처와 첩이 한집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 하지만 선

자는 한수의 첩이 될 수는 없었다.

몸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자기보다 더 가난하게 자란 엄마를 사랑

하고 소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는 하숙집 사람들에게

식사를 준비해주고 난 후,세 식구가 나지막한 상 앞에 앉아 다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여자들보다 먼저 먹을 수 있었지만 늘

함께 먹 겠다고 했고 다른 집 남자들처 럼 상을 따로 차려주기를 바라

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엄마가 자기 만큼 고기

와 생선을 먹고 있는지 확인했다. 여름에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수

박을 먹여주겠다고 수박 밭을 일구었고 매년 겨울이 돌아오면 가족

들이 입을 외투 안에 채워 넣으라고 깨끗한 솜도 잊지 않고 사 두었

다. 아버지는 혹시라도 솜이 부족하면 자기 옷에는 솜을 새로 채워

넣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니한테는 세상에서 젤 상냥한 아부지가 있다 아이가.” 엄마는 종

종 이렇게 말했고 선자는 부잣집 아이가 자기 아버지의 수북하게 쌓

인 쌀 포대들과 금반지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도 선자는 한수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 해변에서 한수를

만날 때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옥빛의 바다는 보이지도 않았다.

늘 한수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선자는 시간이 어찜 그렇게 빨리

흘러갈 수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다 오늘은 한수가 얼마나 재미 있는

우 동 두 ^릇 117
이야기를 해줄까? 그와 좀 더 오랫동안 같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자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그래서 한수가 바위틈으로 그녀를 쓰러뜨리고 저고리 끈을 풀어

도 선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에 살이 에일 것 같았어도

한수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한수의 따뜻한 입술과 살갗에 닿은

몸이 너무 뜨거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긴 치마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온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

겼을 때,선자는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 이런 것이란 걸 알아

차렸다 한수와 사랑을 나누는 내내 온몸의 감각은 날카롭게 곤두서

서 그의 손길만을 바라고 있었다. 선자는 자신의 아래를 뭉근하게 눌

러오는 한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한수가 자기에게 나쁜 짓을 하지

는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선자는 빨래 보따리를 이고 해변으로 나가면 한수가 가

파튼 바위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펼쳐

든 신문이 산들 바람에 시끄럽게 퍼덕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수는 그녀의 땋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당기며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우리 애기, 어디 있었어? 내가 아침까지 널 기다

렸을 거라는 거 알아?”

지난주에 선자는 한수가 자신을 부르고 있을 것만 같은 강한 예감

이 들어 변명을 둘러대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

었다. 두사람이 메시지처럼 남겨두었던 돌맹이는 더 이상바위 틈새

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돌맹이에 X 표시를 그려 바위틈에 넣어 두

고 자신이 다시 돌아와서 그를 기다렸다는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하

지만 이제는 그 돌맹이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선자는 깊은 상실감에

118 파친코 O
사로잡혔다.

한수가그녀에게 했던 모든 것은 진심이었다. 그건 선자도 알고 있

었다. 한수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위안이 되

지는 못했다. 갑자기 부엌에서 식모 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선

자는 감고 있던 눈을 번뜩 떴다. 잠시 후 언니들의 웃음소리가 잦아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선자는 문에서 떨어져 나와

안쪽 벽을 마주보고 서서 한수가 그랬던 것처럼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한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끊임 없이 그녀를 어루만졌다. 사랑을 나눈 후에 그의 손가락은 선


자의 작고 둥근 턱에서 둥그스름한 귓불을 타고 올라가 창백하고 널

찍한 이마를 쓸며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왜 나도 그런 식으로 그

를 만져 보지 못했을까? 선자는 자기가 먼저 한수를 만진 적이 없었

다. 언제나 한수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다. 선자는 그의 얼굴을 만

지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피부 아래 이어지는 강인한 뼈

마디를 하나도 빠짐 없이 기 억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아침이 밝았다. 이삭은 따뜻한 내복과 와이셔츠 위에 남색 모직 스

웨터를 입은 채 책상으로 쓰려고 갖다 놓은 나지막한 밥상 앞에 앉

아 있었다. 하숙집 남자들은 모두 일하러 나갔고 여자들이 일하는

소리 만 뜨문뜨문 들려 왔다. 집 안은 아주 조용했고 성경책은 밥상 위

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삭은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방 앞에서는 양진이 앉아서 화로에 석탄을 채워 넣고 있었다 이삭

은 양진에 게 말을 걸고 싶었지 만 부끄러운 마음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양진은 타오르는 불씨를 관찰하면서 부지깽이로 석탄을 뒤

우동두그릇 119
집고 있었다.

“따땃하십니꺼? 옆에 갖다 놓을게예:’ 양진은 무릎을 꿇고 화로를

이삭 쪽으로 밀었다.

“제가할 게 요 ” 이삭이 말했다.

“아닙니더, 마 거기 계시소. 그냥 밀면 됩니더.” 다리가 불편했던 남

편은 항상 그런 식으로 화로를 움직였다.

양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삭은 주변을 둘러보고 엿듣는 사람이

없 ^지 확인했다.

“아주머니, 선자 씨가 절 남편으로 받아줄까요? 제가 청혼하면요?”

양진의 주름진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면서 부지깽이가 떨어지는

소리가났다. 양진은부지깽이를 재빨리 집어 들고는 좀 전의 행동을

바로잡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이삭 옆으로 바

짝 다가갔다. 양진은 그때까지 남편과 아버지를 제외하고 남자 옆에

그렇게 가까이 앉0}본 적이 없었다.

“아주머니, 괜찮으세요?” 이삭이 물었다.


“와예? 와 그라실라고예?”

“아내가 있다면 오사카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형한테도 이미 편지로 알렸어요 형님과 형수는 선자 씨를 환영해줄

거예요”

“부모님은예?”

“부모님은 오랫동안 제가 결혼했으면 하셨어요 하지 만 제가 항상

싫다고 했지요”

“와예?”

“늘 아왔으니까요. 지금은 몸이 괜찮은 것 같지만 전 언제 어떻게

120 파친코 O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선자 씨도 그런 건 이미 알고 있고요 놀

랄 일도 아니지요”

“그치만우리 선자는지금……”

“네,잘 알아요 저랑 결혼하면 선자 씨는 젊은 과부가 될 수도 있

어요 그렇게 되면 아시다시피 살기가 쉽지 않겠죠 하지만 전 죽기

전에 아이 아버지가 될 수 있어요"

양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젊어서 과부가 되었다. 남

편은 장애를 안고 태어났어도 나름 최선을 다해 한평생 살다 간 정


직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양진은 그가자신에게 얼마나소

중한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남편이 돌아와서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머니를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삭이 양진의 충격

받은 얼굴을 보고 말했다. “전 선자 씨가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요 선자 씨가 제 청혼을 받아들일까요? 어

쩌면 아주머니와 여기에서 살고 싶어 할지도 몰라요 그게 선자 씨와

아이에게 더 좋을까요?”

“무신, 아입니더. 여길 떠나는 게 훨씬 나을 기라예.” 양진이 냉혹한

현실을 생각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선자도 여서 사는 게 끔찍할 깁

니더. 목사님이 그리 해주시면 지 딸 인생을 구해주시는 거지예. 선

자를 돌봐주신다카면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릴 수 있어예. 할 수 만

있으며는 이 은혜 잊지 않고 두 배로 갚아드리고 싶습니더.” 양진이

눈물을 훔치며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깊이 숙여 절했다.

“아니,그러지 마세요 아주머니와 선자 씨는 천사 같은 분들이에

요;

우 동 두 ^룻 121
“퍼뜩 선자한테 얘기할게예. 선자도 고마워할 깁니더:

이삭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음 말을 어떻게 꺼내야 좋을지 생각

해야 했다.

“그러지 마세요” 이삭이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선자 씨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선자 씨가 언젠가

는 절 사랑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요; 이삭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

온 속마음에 당혹스러웠다. 자신도 평범한 남자처럼 여자가 은혜를

갚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그의 아내가 되어주기를 바라

는 것이었다.

“아주머니 생각은어떠세요?”

“목사님이 선자하고 얘기해보는 게 좋겠네예;' 선자가 어떻게 이런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자씨에게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 또 병에 걸

리거나 아플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전 괜찮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

할 거고 아이도 사랑해줄 거예요 그 아이는 제 0}이가 될 겁니다.”

이삭은 아이를 키우며 오래오래 살 수 있다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낼 말입니더,선자랑 같이 산책을 하시면서 지금 하신 얘기 전부

해주이시소.”

선자는 엄마에게 백이삭의 생각을 듣게 되었乂 곧 그의 아내가 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백이삭과 결혼을 한다면 선자는 물론이고 선자

의 시 와 엄마 모두 고통스러운 짐을 덜게 될 것이다 하숙집도 평

안해질 테고 선자의 아이는 좋은 가정에서 영예롭게 태어난 사람의

성을 얻을 것이다 선자는 백이삭이 왜 그런 일을 하려는지 알 수가

122 파친코 O
없었다. 엄마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사실 선자의 엄마나

선자 둘 다 백이삭을 돌봐준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

다. 하숙집 사람이 그런 병에 걸렸다면 누구라도 보살펴주었을 터였

다. 게다가 이삭은 하숙비를 제때에 꼬박꼬박 지불하는 좋은 사람이

었다 “보통 남자라카면 다른 남자한테서 얻은 아를 키우고 싶어 하

지 않을기다. 천사나 바보천치가 아이모 못 그라제.” 선자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삭은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식모가 필요할지도 몰랐지만

그런 것을 바라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백 목사는 몸이 나아지자마

자,아니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을 때도 식사가 끝나면 그릇이 담긴

쟁반을 부엌 문지방까지 날라다 주었다. 아침에는 자기 이불을 흔들

어 먼지를 털고 요와 함께 잘 개어두었다. 이삭만큼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하숙인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는 하인을 거느리

고 사는 상류층 출신의 남자가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선자는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고 흰 면양말을 신은 두 발에 짚신

을 신었다. 그리고 대문 밖에서 이삭을 기다렸다. 공기는 차가웠고

눈앞에는 안개가 깔려 있었다 한 달도 안 되어 곧 봄이 오겠지만,


자는 여전히 한겨울 같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양진은 이삭에게 집 밖

에서 선자를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하숙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두 사

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에 이삭이 중절모를 들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삭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일단 선자 옆에 나란

우동두그릇 123
히 섰다. 이삭은 이렇게 젊은 여성과 함께 외출한 적도 없었과 누군

가에게 청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삭

은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자 신도를 상담해주듯 자연스럽 게 행

동하려고 애썼다.

“시내로 갈까요? 연락선을 타고요; 갑작스러운 제안이 이삭의 입

에서 무의식중에 흘러나왔다.

선자는 고개를 끄덕 이고 두꺼운 목도리로 머리를 감쌌다. 귀와 새까

만 머리가가려지자 선자는 시장에서 생선을 과는 여자처 럼 보였다

두 사람은 선착장으로 말없이 걸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지 몰랐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 앞에서 선장이 나와 두 사람의 뱃삯을 받았다.

배에 탄 승객이 거의 없었던 덕분에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나마

나란히 앉 을수 있었다.

“어머니한테서 이야기를 들었군요” 이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네 :

이삭은 선자의 젊고 예쁜 얼굴에 비친 감정을 읽으려 애썼다. 선자

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감사합니더.” 선자가 말했다.

“선자씨 생각은 어때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예. 목사님이 제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

주셨으니까예. 우째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예.”

“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잘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죠 그렇지 않나요?”

124 파친코 O
선자는 치마 가장•자리를 만지작거 렸다.

“물어볼 게 있어요” 이삭이 말했다.

선자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이삭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선자 씨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괜찮

아질 겁니다.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거예요 지금은 이해할 수 없을지


도 모르죠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오늘 아침, 선자는 백 목사가 그런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래서 백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버

지는 귀신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

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도 자신 곁에 함께하는 것만 같았다.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산소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를 보다 더 잘 느

낄 수 있었고 그것은 큰 위안이 되 었다 많은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

가 이삭의 하나님이 백이삭에게 그토록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했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예,
그랄 수 있어예.”

배가 항구에 닿자 이삭은 선자가 무사히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부

산의 날씨는 영도보다 더 추웠다 선자는 외투 소매를 끌어당겨 손을

덮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살갗을 에는 것 같았다. 선자는 추운 날씨가

백 목사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둘 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선자는 항구에서 멀지 않

은 시장을 가리켰다. 그곳은 선자가 부모님과 함께 부산에 왔을 때

유일하게 가본 곳이었다. 선자는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남자보

우 동 두 ^릇 125
다 앞장서 걷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삭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

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무 말 않고 선자의 뒤를 따라갔다.

“선자 씨가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겠다니 기뻐요 그건 제게

아주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을 나눌 수 있다면 결혼 생

활을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선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다시 고개를 끄

덕였다. 이삭이 그런 요구를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

문 이 었 ^•

“처음에는 함께 사는 게 낯설게 느껴질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

우리와 아이를 축복해달라고 기도드릴 겁니다.”

선자는 그의 기도가 두꺼운 외투처럼 그들을 감싸 보호해줄 것만

같았다.

갈매기는 시끄럽게 울면서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멀리 날

아갔다. 선자는 이삭과의 결혼에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조건을 내거는 것 외에는 이삭이 선

자의 헌신을 시험해볼 방법이 달리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보일 수 있을까?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선자는 결코 이삭을 배신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삭을 잘 보필하는 것이

었다.

이삭은 국수를 파는 깔끔한 일식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우동 먹어 봤어요?” 이삭이 눈썹을찡긋거리며 물었다


선자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이삭이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 손님들은 모두 일본인이 었고 여

126 파친코 O
자 손님은 선자뿐이 었다 깨끗한 앞치마를 두른 일본인 주인이 두 사

람에게 다가와 일본어로 인사했다.

이삭은 일본어로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요구했고 가게 주인은 이

삭의 유창한 일본어에 마음이 놓인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문 근처의 테이블로 두 사람을 안내해주었다. 이삭과 선

자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앉았다. 자리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선자는 합판으로 된 벽에 손으로 써놓은 메뉴를 바라보았다. 글자

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숫자 몇 개는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테이블

에는 이 근방에서 일하는 사무원들과 가게 주인들이 앉아 김이 모락

모락 나는 국수를 먹고 있었다. 빡빡머리 일본인 남자 아이가 무거운

주전자를 들고 와 보리차를 따라주었다. 아이는 선자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다 돌아갔다.

“이런 데는 한 번도 안 의봤어예.”선자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도 많이 온 건 아니에요 그래도 여긴 깨끗해 보이네요 저희 아

버지는 집 밖에서 식사를 할 때는 청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어


요 ” 이삭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는 선자가 불편하지 않기를 바

랐다. 가게 안이 따뜻해서 선자의 얼굴에도 색이 돌아왔다.


“배 고 프 죠 ? ”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선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이삭은 우동 두 ^릇 을 주문했다

“칼국수처럼 보이지만 좀 달라요 선자 씨 입에도 잘 맞을 것 같은

데. 오사카에서는 어딜 가든 이런 우동을 판데요 조선과는 모든 게

우동두그릇 127
다 다를 겁니다.” 이삭은 선자와 함께 오사카에 가게 될 거라고 생각

하자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선자는 이미 한수에게서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

삭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한수는 오사카가 같은 사람과

두 번 마주칠 수 없는 거대한 도시라고 말했다.

이삭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선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선자

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집에 있을 때도 다른 식모나 어머니에게 말

을 많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자는 항상 이런 모습인 걸까? 이삭

은 이렇게 내성적인 선자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

웠다.

이삭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선자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선자 씨, 절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편으로서?” 이삭은 마

치 기도하는 것처럼 손을움켜쥐었다.

“네.” 진심이었기에 대답은 재깍 나왔다. 선자는 지금도 이삭을 좋

아했고,그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삭은 마치 병든 폐가 다 낫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깨끗하고 맑

아진 기분이었다. 짧게 숨을 고른 다음 이삭이 말을 이었다.

“어려운 건 알아요 그렇지만 그 사람을 잊기 위해 노력해주겠어

요?”서로에게 비밀은 없어야 했다.

선자는 눈을 깜빡거 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 었다.

“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남자입니다. 잘못된 일일 수도 있

지만 저에게도 자존심이 있어요: 이삭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

지만 당신과 아이를 사랑하고 존경할 겁니다.”

128 파친코 O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껍니더.”

“고마워요” 이삭이 말했다. 이삭은 자신의 부모님이 그러했듯 자

신도 선자와 다정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우동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이삭은 감사 기도를 하려고 고개를

숙였고 선자는 이삭을 흉내 내어 두 손을 맞잡았다.

우동두그릇 129
속죄와 ^서

일주일이 지났다. 양진과 선자, 이삭 세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연

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여자들은 솜을 덧댄 누비 외투 아래에

흰색 한복을 입었고 광을 낸 구두를 신은 이삭은 깨끗하게 다려진

정장 위에 코트를 걸쳤다. 신 목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들이 찾

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 도착하자 교회 식모가 이삭을 알아보고 일행을 신 목사

에게 안내했다.

“드디어 왔구나.”

신 목사는 바닥에서 일어나 인사하며 세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들 오세요”

양진과 선자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교회에 온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양진은 고개를 들어 신 목사를 조심히 살펴보았다. 신

목사의 낡은 목사 가운은 마른 몸 때문에 너무 커 보이고 소매도 닳

속 죄 와 ^서 131
아 있었다. 그러나 목 부근의 흰색 목회자 칼라는 깨끗하고 빳빳했

다. 신 목사는 어깨가구부정했지만주름진 목사 가운이 그것을 가려

주는 것같았다.

교회는 난방이 거의 되지 않았乂 신 목사의 방 한가운데에 화로

하나만 놓여 있었다. 식모가 손님들을 위해 방석 세 개를 가져와 그

주위에 놓아두었다. 세 사람은 신 목사가 앉을 때까지 자리에 앉지

못한 채 어색하게 서 있어야 했다. 신 목사가 자리에 앉자 이삭이 신

목사 옆에 앉았다. 양진과 선자는 우물쭈물하며 신 목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행은 자리에 앉았으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신 목사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나지막이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기도를 끝내고 나서

야 이삭이 결혼하려는 여자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젊은 목사가 다녀

간 후, 신 목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호세아

서도 다시 읽어보았다. 회색 모직 정장을 입고 앉아 있는 우아한 청

년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느낌의 여자를 신 목사는 아무 말 없이 바

라보았다. 다부진 몸집과 둥그스름하고 수수한 얼굴을 한 여자는 겸

손해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 어디에서도 선지자 호세아가 결혼해야 했던 창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태도나 몸가짐에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

었다. 신 목사의 아버지는 관상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말했

지만 신 목사는 아버지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으

로 여자의 운명을 점쳐 본다고 하더라도 쉬운 삶을 살 여자처럼 보

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박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신 목사는

여자의 배를 흘껏 보았지만 풍성한 치마와 외투에 가려 임신했는지

132 파친코 O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삭과 함께 일본에 가는 걸 어떻게 생각해?”신 목사가선자에게

물었다.

선자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내렸다. 그녀는 목사가 정확히 무슨 일

을 하는지 잘 몰랐다. 신 목사와 백이삭은 무당이나 승려들의 주술에

홀릴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신 목사가 선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라고 말 좀 해보렴. 한마디도 않고 여기서 나갈 거야?”

이삭은 두 여자가 신 목사의 엄격한 어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

라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와 달리 신

목사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까 걱정 말라고 두 사람을 안심시켜주

고 싶었다.

양진은 딸의 무릎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몇 가지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신 목사가 두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마

음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선자야, 신 목사님께 백이삭목사님이랑 결혼하는 걸 우째 생각하

는지 말씀드려 봐레이.”

선자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증말 감사하지예. 백이삭 목사님이 힘드실낀데 그리 해주신다 캐

서 증말 감사해예. 지는 백 목사님을 위해 증말 열심히 일할 껍니더.

일본에서 더 잘 살 수 있게 뭔 일이라도 다 할 끼라예.”

이삭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자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선자의 그런 마음을 듣게 되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속 죄 와 ^서 133
“알겠다.” 신 목사는 양손을 맞잡았다. “이건 참으로 고통스런 희생

이야. 이삭은 좋은 가정에서 자란 훌륭한 청년이지. 네가 처한 상황

이 그런데 결혼을 하려고 마음먹다니,전혀 쉬운 일이 아니야.”

이삭이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렸지만 어른

의 말씀을 존중해야 했으므로 조용히 있었다 신 목사가 결혼을 반대

하면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곤란해할 게 분명했다.

“이게 다 네가 자초한 일이라던데 사실이냐?” 신 목사가 선자에게

말했다.
이삭은 선자의 상처받은 표정을 계속 바라볼 수는 없었다 빨리 여

자들을 하숙집으로 다시 데려가고 싶었다.

“제가 진짜 큰 실수를 했습니더. 엄마랑 훌륭하신 백 목사님한테

짐이 돼서 정말로 죄송스러워예.” 선자의 새까만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상처받은 선자는 평소보다 더 어린애처럼 보였다. 양진은

딸이 잘했든 잘못했든 상관없다는 듯 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

나 잇새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참을 수는 없었다.

“신 목사님, 이 사람은 이미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이 이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해야 해. 진정으로 회개

해야만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어.” 신 목사는 단어를 신중하게 골

라말했다.

“이 사람도 그걸 원할 겁니다.” 이삭은 선자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

께 다가서기를 원하지 않았다.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연스럽

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신 목사는 선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말, 죄를 용서받고 싶어?” 신 목사는 선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

134 파친코 O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순교자나 선지자가 되고자 하는 이 젊

은이의 패기가선자에게 자신의 죄에 대해 제대로설명했을까? 회개

하지 않은 죄 많은 여인과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선지자 호세아에게 지시하신 일이기도 했다.

이삭은 그걸 알고 있었던 것인가?

“하나님의 눈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와 함께하는 것은 큰 죄

란다. 그 남자는 어디 있니? 이삭이 왜 네 죗값을 치러야 하지?” 신

목사가 물 었 ^■

선자는 붉어진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려고 했다. 모퉁이

에 있던 교회 식모는 농아였지만 사람들의 입술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대충 알아차리고 외투 주머니

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불쌍한 十ᅵ에게 건네주었다. 식모가 선자에

게 얼굴을 닦으라고 몸짓으로 알려주자 선자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

으며 고개를 숙였다.

신 목사는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소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젊은 목사를 보호해야 했다.


“아이 아버지는 어디 있지?”

“지도 모른다 카네예.” 양진은 자신도 그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선

자를 감싸야 했다. “우리 애는 지가 한 일을 정말로 죄송스럽게 생각

하고 있어예.” 양진이 딸을 돌아보았다. “목사님한테, 하나님께 용서

받고 싶다고 말씀드리거 레이.”

양진도 선자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무당에게 돈을 주고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비슷한 의식이 아닐까? 백이삭

은 한 번도용서에 관해 말해준 적이 없었다.

속죄와용서 135
“지를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꺼?” 선자가신 목사에게 물었다.

신 목사는 소녀가 가련하게 느껴졌다.

“얘야, 너를 용서하는 건 내가 아니란다.” 신 목사가 대답했다.

선자는 계속 시선을 내리깔고 있을 수 없어서 신 목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콧물과 눈물로 엉망이 된 선자의 얼굴은 보기가

흉했다.

“선자야, 네가 할 일은주님께 용서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거란다. 예

수님께서 우리의 빚을 갚아주셨지만 넌 여전히 용서를 구해야 해. 선

한 마음을 되찾겠다고 약속해라. 회개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단다, 얘야” 신 목사는 선자가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

렸다. 그 순간 선자의 배 속에는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가 있다는 사

실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또다시 호세아의 창녀 아내 고멜이 떠올랐

다. 수치심도 모르는 고멜은 나중에 호세아를 다시 속였다 그 생각에

신 목사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말로 죄송합니더.” 선자가 또다시 사과를 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껍니더. 다른 남자랑 함께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끼라예.”

“너도 이 청년과 결혼하고 싶은 거구나. 이삭은 너와 결혼해서 아

이를 돌보고 싶다지만 그게 현명한 행동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삭

이 너무 이상주의자라서 걱정이야. 이삭의 가족이 여기 없어서 내가

이삭이 잘 지내도록 보살펴야 한단다.”

선자는 흐느낌을 억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은 백이삭이 신 목사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말한 이

래로 두려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신 목사님,저는 선자가 좋은 아내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이삭이

136 파친코 O
간청했다. “결혼을 허락해주시고 축복해주세요 목사님께서는 현명

한식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겠지만, 이게 다주님의 소망이라고 전

믿습니다. 저는 이 결혼이 선자와 아이뿐만 아니라 제게도 유익하리

라고 믿어요.”

신 목사가 한숨을 내쉬 었다.


“목사의 아내가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신 목사가선자에

게 물었다

선자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선자의 숨소리가 다시 편해졌다.

“이 아이에게 말했나?”신 목사가 이삭에게 물었다.

“전 부목사가 될 겁니다. 선자 씨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아요

신도가 많지 않거든요 게다가 선자 씨는 열심히 일하고 빨리 배워


요 ” 이삭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평양에 있는 고향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의 아내는 아이를

여덟이나 낳아 기르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남편과 함께 고아를

돌보고 가난한사람들을 위해 일했던 훌륭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죽

자교구민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처럼 구슬프게 울었다.

이삭과 선자,양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조용히 앉아 있었

다.

“넌 이 사람에게 충실하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

금보다 더 큰 수치를 네 어머니와 돌아가신 네 아버지에게 안겨주게

될 거야. 주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고,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달라고 해야 한다. 완벽한사람이 돼야 해. 일

본에서 조선인들은 처신을 아주 잘 해야 한단다. 그들은 이미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잖니. 우리를 더 나쁜 인간으로 매도할 빌미를 줘서는

속죄와^서 137
안 돼. 나쁜 조선인 한 명이 다른 조선인 수천 명의 평판을 망치는 거

야. 나쁜 기독교인 한 명이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그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지 만, 특히 불신자들의 나라에서는 더 하단다.

내 말 알겠니?”

“지도,정말로 용서받고 싶어 예, 목사님.” 선자가 말했다.

신 목사는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선자의 어깨에 올렸다. 그러

고는 선자와 이삭을 위해 한참 동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신 목

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자와 이삭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결혼

예배를 올려주었다. 그 의식은 몇 분 만에 끝나버 렸다.

신 목사가 이삭과 선자를 데리고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관청과 경

찰서로 간 사이,양진은 시장을 향해 차분하지만 빠른 발걸음을 옮

겼다. 양진은 마치 달리기라도 하듯 걸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양진은 신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자가

처한 이런 상황에서 더 나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어처구니없고 배은

망덕한 짓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양진은 원래 현실적인 사람이었

다.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에게는 더 나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말이

나온 김에 결혼식은 최대한 빨리 올리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

었지만,그것이 오늘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양진은 고

작 몇 분 만에 끝나버렸던 자신의 형식적인 결혼식을 떠올렸다. “그

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양진은 스스로 되뇌 었다.

양진은 쌀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미닫이문의 넓은 문틀을 두

드리며 안을 살펴보았다. 가게 안에는손님이 없었다.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쌀가게 주인의 짚신 근처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며 나른한

138 파친코O
울음소리를 냈다.

“아지매, 오랜만이네예.” 쌀집 주인인 조 씨가 나와 양진을 보고 웃

는 얼굴로 인사했다. 조 씨는 양진의 머리가 전보다 더 희끗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 지내셨지예? 아지매하고 딸들도 잘 지냅니꺼?”

조 씨가 고개를 끄덕 였다.

“흰쌀 좀 있어예?”

“중요한 손님이 왔는 가베예? 근데 팔 수 있는 게 없는데 우야지

요? 흰쌀이 죄다 어데 가는가 아지매도 아시잖아예.” 조 씨가 말했다.

“돈은 있습니더.” 양진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탁자 위에 돈주머니

를 올려놓았다. 2년 전 선자가 직접 파란 천에 노란 나비를 수놓아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파란 돈주머니는 반쯤 차 있었묘 양진은

그 돈이면 충분하길 바랐다.

조 씨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양진에게 흰쌀을 팔고 싶지 않았

다. 일본인에게 부르는 것과 똑같은 값을 양진에게 받아야 하기 때문

이 었 ^•

“남은 게 너무 적어서 이카는 거 아입니꺼. 일본인 손님이 왔는데

팔 게 없으면 곤란해서 예. 아지매한테 안 팔고 싶어서 이카는 게 아

니고예.”

“오늘 딸이 결혼을 했심더.” 양진은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선자가예? 누구랑예? 누구랑 결혼했어예?” 조 씨는 불구인 아버

지의 손을 잡고 다니던 어린 소녀를 떠올려 보았다. “선자가 약혼을

했는 줄은 몰랐네 예. 오늘 결혼했다고예?”
“북쪽에서 온 목사랑 했어 예.”

속죄와^서 139
“결핵에 걸렸다던 그 사람예? 그거 미친 짓 아입니꺼! 와 그런 남

자한테 딸을 보냈어예? 그 남자는 곧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 아입니

꺼.”

“그 목사님이 선자를 오사카로 데려갈껍니더. 그라몬 남자들이 많

은 하숙집에서 사는 것보다 덜 힘들 거 아입니꺼.” 양진이 말했다.

양진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조 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

자는 자기 둘째 딸보다 몇 살 어렸으니 분명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쯤 되었을 것이다. 시집갈 만한 나이기는 했지만, 하필 왜 그런 남

자에게 딸을 보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석탄 배달하는 준은 그

목사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자는 자식에게 나쁜

피를 물려줄 수도 있는 여자가 아닌가? 누가 그런 여자를 원할까? 아

무리 오사카에 여자가 많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사람이 뭐 좋은 조건을 내걸었는갑지 예?” 조 씨는 작은 돈주머

니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양진은 그럴듯한 결혼 지참금을

줄 수 없는 형편이 었다. 하숙집에는 노상 배가 고픈 어부들과 거두지

말았어야 했던 가난한 두 식모들이 있었다. 그들을 먹이고 나면 남는

것은 겨우 동전 몇 푼뿐이 었다

조 씨는 딸들을 시집보낸 지 몇 년 되었다 작년에는 작은딸의 사위

가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만주로 도망쳤다. 그래서 지금 조 씨

는 사위가 그렇게 기를 쓰고 이 나라에서 쫓아내려 했던 부유한 일본

인 손님들에게 가장 좋은 상품을 팔아서 그 훌륭한 애국자사위의 자

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일본인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

일 당장 가게 문을 닫아야 하괴 조 씨 71족은 굶어 죽을 것이다

“잔치 치를 만치 쌀이 필요하신 겁니꺼?” 조 씨는 양진이 그 많은

140 파친코 O
돈을 어떻게 지불할 건지 궁금해서 이렇게 물었다.

“언지예, 두명 먹을 것만 있으면 됩니더.”

조 씨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눈앞의 자그닿고 지친 여자

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 게 그래 많지가 않습니더.” 조 씨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신랑 신부한테 고향 떠나기 전에 저녁으로 흰쌀밥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라니까네 고만큼만 있으면 되예.” 양진의 눈에 눈물이 차오

르자 조 씨는 시선을 피했다 조 씨는 여자들이 우는 걸 보는 게 싫었

다. 할머니와 어머니,아내,딸들은 모두 끝없이 울었다. 여자들은 너

무 많이 운다고 조 씨는 생각했다.

큰딸은 인쇄업자로 일하는 남자와 마을의 다른 쪽 동네에 살았고,

작은딸과 손자 셋은 아내와 함께 조 씨네 집에서 살았다. 조 씨는 딸

과 손자들을 먹여 살리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불평했지만 그래도 열

심히 일했고,최고 가격을 지불하는 일본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

다.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선인

들이 헛간의 동물 취급을 당하는 먼 나라로 딸들을 보낸다는 건 상

상할 수도 없었다. 자기 피붙이들을 그 개자식들에게 뺏긴다는 건 상

상할 수도 없는 일이 었다.

양진은 지폐를 세서 탁자 위에 놓인 나무 쟁반에 올려놓았다.

“작은 봉지도 하나 있으면 주시소 흰쌀밥 실컷 먹게 해주고 남는

걸로는 떡도 만들 껍니더.”

양진이 돈이 놓여 있는 쟁반을 조 씨 쪽으로 밀었다. 조 씨가 그래

도 거절한다면 양진은 부산의 쌀집이란 쌀집은 모두 찾이•다녀서라

도 흰쌀을 구할 작정이었다. 선자가 결혼한 날 저녁만큼은 흰쌀밥을

속 죄 와 ^서 141
꼭 먹여주고 싶었다.

“떡이예?” 조 씨는 팔짱을 끼고 크게 웃었다. 흰쌀로 만든 떡에 관

해 떠들어대는 여자들 이야기를 들은 지가 얼마나 오래됐던가? 그

시 절이0}주 멀게 느껴졌다. “아저씨한테도 좀 갖다 드릴게예.”

쌀집 주인이 이런 일을 대비해서 저장해둔 쌀을 찾으러 창고로 갔

고,양진은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주억거 렸다.

142 파친코 O
떠날 채비

마침내 하숙인들이 작업복을 빨아달라고 말했다. 자기들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지독했던 것이다. 복희와 동희, 선자는 네 더

미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빨랫감을 들고 해변으로 갔다. 세 사람

은 긴 치마를 그러모아 올려서 묶고 물가에 웅크리고 앉아 빨래판을

꺼내 놓았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에 여자들의 작은 손이 금세 얼

어붙었다. 긴 세월 일을 한 탓에 세 사람의 손은 두껍고 거칠어져 있

었다. 동희가 옆에서 더러운 옷을 분류하는 동안 언니인 복희는 골이

진 나무 빨래판에 젖은 옷을 문질러댔다. 선자는 생선 피와 내장이

묻어 있는 정 씨 형제의 검정색 바지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이까 기분이 다르나?” 동희가 물었다. 선자가 혼인신고를

마치고 처음으로 두 자매에 게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그들은 하숙인

들보다 더 놀랐다. “목사님이 니를 여보라고 부르나?”

복희는 빨래를 하다가 선자의 반응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무례

떠날채비 143
하게 굴지 말라고 동생을 꾸짖을까 했지만 선자의 대답이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다.

“아직은 안 그란다:선자가 말했다 결혼한 지 삼 일이 지났지만

공간이 부족한 탓에 선자는 여전히 엄마와 두 자매들이 함께 쓰는

방에서 ^다 .

“내도 결혼하고 싶다.” 동희가 말했다.

복희가 웃었다. “누가 우리 같은 가시나들하고 결혼한다 카대?”

“내도 이삭 목사님 같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데이.” 동희는 눈도 깜

박하지 않고 말했다 “이삭 목사님은 너무 잘생기고 멋지다 아이가.

니랑 이야기할 때 보몬 니를 윽수로 자상하게 «}라보드라. 바다에 관

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도 하숙인들이 다 목사님을 존경

한다 아이가. 니 그거 알고 있었나?”

사실이 었다. 보통 하숙인들은 많이 배운 상류층 사람들을 비웃었

지만 이삭은 좋아했다. 선자는 그를 남편으로 생각하기가 여전히 어

려웠다
복희가 동희의 팔을 찰락 때렸다. “미쳤는갑다. 그런 남자는 절대

니캉 결혼 안 한다. 고 머리통에 든 멍청한 생각들은 다 끄집어 내삐

리라 마.”

“선자랑은 결혼했는데 와 그라노”

“선자는 니랑 다른 거 모르나 우리는 식모 아이가.” 복희가 말했다.

동희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목사님은 닐 뭐라 부르노?”

“선자라고 칸다.” 선자는 스스럼없이 말을 이었다. 한수를 만나기

전에는 두 자매와 자주 수다를 떨곤 했다.

144 파친코 O
“일본에 간다 카니까 흥분되나?” 복희가 물었다. 복희는 결혼 생활

보다는 도시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결혼 생활은 끔찍한 거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복희의 할머니와 엄마는 결혼해

서 죽을 때까지 거의 일만 했다. 엄마의 웃음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

했다.

“남자들이 그라는데 오사카가 부산이나 경성보다 더 복잡하다 그

라데. 니는 어디에서 살끼고?” 복희가물었다.

“내도 잘 모른다. 이삭 목사님 행님 집에서 살 거 같더라.” 이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선자는 한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

나 7}■까운 곳에 있을까 생각하면서 선자는 자신이 한수에 게로 달려

가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한수를 영영 못 보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복희는 선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떠나는 기 무섭나? 그럴 필요 없데이. 니는 거기 가서 멋지게 살

기다. 거기 가면 온 천지에 전등이 있다 카더라. 전차랑자동차, 집 안

에도 말이제. 오사카의 가게에서는 마 뭐든지 다 살 수 있다 카데. 우

짜면 니가 부자가 돼서 우리를 오사카로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우리가 거기 가서 하숙집을 할 수도 있다 아이가!” 복희는 자

신이 방금 한 허황된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거기 사람들한테

도 하숙집이 필요할 기다 니 엄마는 요리를 할 수 있고 우리는 청소

랑 빨래를 할 수 있고……”

“내보고 미쳤다 캐놓고 지금 뭐하는 기고?” 동희가 언니의 어깨를

찰싹 때 렸 ^•

선자는 젖은 바지가 너무 무거워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떠날채비 145
“목사 아내가 부자가 될 수 있을라나?” 선자가 물었다.

“목사님이 돈을 마이 벌어 올지도 모르제! 목사님 부모님이 부자

라 카던데, 아이가?” 동희가 말했다.

“그걸 •우적 아노?” 선자가 물었다. 엄마한테서 이삭의 부모님이 땅

을 좀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하지만 많은 토지 소유자

들이 새로 부과된 세금을 내기 위해서 일본인들에게 땅을 다 팔아넘

기고 있었다. “돈이 마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제. 그건 그리 중요한

기 아이다:
“이삭 목사님은 좋은 옷도 입고 다니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 아니

가.” 동희는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잘 몰랐다.

선자는 또 다른 바지를 빨기 시작했다.

동희는 언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 주까?”

복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희는 선자가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에

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를 바랐다. 선자는 걱정스럽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서 행복한 신부 같지 않았다.

“니는 우리한테 여동생이나 마찬가지다. 근데 영리하고 참을성이

많아서 그런가 항상 언니 같데이.” 복희가웃으며 말했다.

“니가 떠나고 나면 니 엄마한테 혼날 때 내는 누가 감싸주겠노? 친

언니라 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게 뻔하고 말이

다.”동희가 덧붙여 말했다.

선자는 바위 옆에서 빨고 있던 바지들을 옆으로 치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항상 동희, 복희 자매와 함께 지냈다. 두 자매와 떨

어져 지내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니한테 뭐라도 하나 주고 싶어 가지고.” 동희는 붉은 비단 끈에 매

146 파친코 O
달린 아카•시아 나무로 조각한 오리 한 쌍을 꺼내 들었다 아기 손만

한 것이었다.

“시장에서 아제가 오리는 평생 동안 짝을 지어 산다 카데.” 복희가

말했다. “어쩌면 니가 몇 년 후에 아를 낳아 가지고 집에 와서 우리한

테 소개해줄지도 모른다 아이가. 내는 아 돌보는 거 윽시로 잘한데

이. 동희는 거의 내 혼자서 키웠다 아이가. 동희 저 가시나가 얼매나

장난이 심했는가 모린다.”

동희가 검지로 콧구멍을 들어 돼지코를 만들며 장난을 쳤다.

“요새 니가 좀 우울해 보이는데, 와 그런지 잘 안다.”동희가 말했다.

선물 받은 오리를 꼭 쥐고 있던 선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부지가 그리운 기다.” 복희가 말했다. 복희와 동희는 아주 어렸

을 때 부모를 잃었다.

복희의 널찍한 얼굴에 슬픈 미소가 서렸다. 올챙이를 닮은 그녀의

작고 자애로운 눈이 툭 불거진 광대뼈를 향해 아래로 처졌다. 동희가

키가 작고 약간 통통하긴 했지만,두 자매의 얼굴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선자가 울기 시작하자 동희가 억센 두 팔로 선자를 끌어안았다.

“。1부지, 아부지.” 선자가 흐느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괜찮다. 걱정 마레이.” 복희가 말했다. “니는 이제 좋은 남편을 만

났다아이가.”

양진은 딸아이의 짐을 직접 쌌다. 옷은 전부 다 조심스럽게 개어서

보자기 위에 적당하게 쌓아 올렸다. 그러고는 네 모퉁이를 잡아 올려

묶어서 고리 모양 손잡이를 만들었다. 신혼부부가 떠나기 전, 며칠

떠날채비 147
동안 양진은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보따리 하나를 몇 번이나

풀었다 묶었다 했다 말린 대추와 고춧가루, 고추장, 말린 큰 멸치, 발

효시킨 된장 등 더 많은 음식을 이삭의 형에게 싸 보내고 싶었다. 하

지만 이삭은 배에 짐을 많이 실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다

살 수 있어요” 이삭이 양진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양진과 선자, 이삭이 부산의 여객선터미널로 향하던 날 아침, 복희

와 동희는 하숙집에 남았다. 선자는 두 자매와 작별 인사를 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동희는 양진도 오사카로 떠나 영도에 있는 자신

들을 버릴까 봐 두려워서 하염없이 울었다.

부산의 여객선터미널은 벽돌과 목조로 급조된 건물이었다. 승객

들과 그들을 배웅하러 온 가족들,그리고 행상인들이 혼잡한 터미널

에서 시끄럽게 돌아•다녔다. 엄청나게 많은 승객들이 시모노세키행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타기 전에 경찰과 이민 관계

자에게 서류를 보여주고 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삭이 줄을 서 있

는 동안, 여자들은 때가 되면 지체 없이 일어날 수 있게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을 태울 대형 여객선은 이미 도착해서 승객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조류 냄새가 여객선의 연료 냄새와 뒤

섞였다. 선자는 아침부터 속이 메스꺼웠고 그래서인지 핼쑥하고 지

쳐 보였다. 앞서 구토를 해서 배 속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양진은 제일 작은 보따리를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다. 언제 다시 딸

을 볼 수 있을까? 선자가 떠난다고 생각하자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만 같았다. 선자와 태어날 손주에게 더 잘된 일이라는 위안 따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왜 가야만 할까? 딸이 이렇게 떠나면 손주를


안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왜 같이 갈 수 없을까? 오사카에도 그녀가

148 파친코 O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진은 자신이 여기 머물

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부모님과 남편 무덤을 돌보

는 일은 그녀의 책임이었다. 양진은 훈이를 떠날 수 없었다. 게다가

오사카에 가면 어디에 머물겠는가?

선자가 약하게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구부렸다.

“괜찮나?”

선자가 고개를 끄덕 였다.

“니한테 금시계가 있던데.” 양진이 말했다.

선자가 두 팔로 키 몸을 끌어안았다.

“그사람이 준 기 가 ?”

“네.”선자가 엄마를보지 않고 말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걸 줄 수 있노?”

선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이삭 앞에는 몇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계를 준사람은 어디 사노?”

“오사카에 살아예.”

“뭐라꼬? 어디 사람이길래?”

“제주 사람인데 오사카에 살아예. 지금은 어딨는지 모르고예.”

“그 사람만날 끼가?”

“언지예.”

“선자야, 그 남자 다시는 만나모 안 된다. 그 남자는 니를 버린 사

람이다. 나쁜 사람이라꼬.”

“결혼도 했고예.”

양진은 한숨을 쉬 었다.

떠날채비 149
선자는 엄마와 이야기하는 자신이 꼭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

다.

“그 사람이 결혼했다는 거는 몰랐어 예. 그 사람이 말을 안 해줬어

예.”

양진은 살짝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장에서 일본 남자애들 몇 명이 저를 괴롭혔는데 그 사람이 도

와줬어 예. 그라면서 알게 됐어 예.”

마침내 선자는 한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선자는 항

상 그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사람 이야기를 할 상대가 아무도 없

었다.

“그 사람은 저랑 아를 돌봐주겠다고 그겠지만 결혼할 수는 없다

고 그라더라고예. 일본에 부인하고 딸이 셋 있다고예.”

양진은 딸의 손을 잡았다.

“절대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된데이. 저 남자가……” 양진이 이삭을

가리켰다. “저 남자가 니 인생을 구해줬다 아이가. 이삭 목사가 니 아

이를 구한 기다. 니는 이제 이삭 목사의 가족이데이. 내는 다시는 닐

만날 수 없을 기다. 엄마가 된다는 기 어떤 긴지 아나? 니는 이제 엄

마가 되는 기다. 나는 결혼해서도 니 곁을 떠나지 않는 머스마가 태

어났으면 좋겠데이.”

선자는 고개를 끄덕 였다.

“시계는우째 할 기고?”

“오사카에 가서 팔기라예.”

양진은 그 대답에 만족했다.

“큰일이 생길지 모르니께 잘 챙기 놔레이. 이삭 목사가 어데서 났

150 파친코〇
노 물으면 내한테 받았다 케라.”

양진은 속주머니 안을 더듬거렸다.

“니 아부지한테서 받은 기다.” 양진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준 금반지 두 개를 선자에 게 건네주었다.

“꼭 팔아야 하는 일이 아이면 팔지 말거레이. 큰돈이 필요할 때를

생각해서 보관해두는 게 좋올 기다. 니는 검소하지만서도 아를 키울

라 카면 돈이 필요하데이. 의사를 불러와야 할 수도 있고 니가 생각

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아이가. 아들이 태어나면 핵교에

보낼 돈이 필요하고. 남편이 돈을 못 벌어다주면 니가 벌어야 할 수

도 있데이. 그럴 때를 생각해서 저축을 해둬야 한다 이 말이다. 필요

한 것만 사 쓰고 남는 동전은 깡통에 던져 넣어 두면 그기 있는지도

모르고 살게 된다 여자는 항상 저축을 해야 한데이. 남편도 잘 돌봐

야 하고 안 그러면 다른 여자한테 햇기뿐다. 시댁을 존경하고 그분

들 말씀을 잘 따르거레이. 니가 잘못하면 우리 가족이 욕을 먹는다.

항상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친절한 니 아부지를 생각해보거레

이.” 양진은 선자에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선자는 시계와 돈을 넣어 웃옷 아래에 숨겨 놓은 천주머니를 꺼내


금반지를 같이 넣었다.

“엄마, 미안해예.”

“안다, 내 그 맘 다 안다.” 양진이 선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니는

내가 가진 전부다. 이제 내한테는 무것도 없데이.”

“도착하면 이삭 목사님한테 편지를 보내달라고 할게예.”

“그래, 필요한 기 있으면 이삭 목사한테 조선어로 편지를 써달라

떠날채비 151
고 부탁해봐라. 그럼 내가 동네 사람한테 읽어달라고 하면 되지 않것

나 ” 양진은 한숨을 쉬 었다. “우리가 글자를 알면 얼마나 좋았을꼬广

“숫자는 알자나예,계산도 할 수 있고예. 아부지가 가르쳐주셨자나

예.”

양진은 웃었다. “그래. 니 아부지가 가르쳐줬제:

“니 집은 인자 니 남편 곁이데이.” 양진이 말했다. 이것은 그녀가

훈이와 결혼했을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이었다 “다시는 집에 오

면 안된데이.” 아버지가 양진에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양진은 자

기 자식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얼라하고 남편을 위해 아늑

한 가정을 꾸며야 한데이. 그기 니 할 일인기다 남편하고 자식이 고

통받게 해서는 안 된데이.

이삭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류나 돈이 부족해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선자와

이삭은 괜찮았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다 준비되어 있었다. 이삭과

그의 아내는 이제 오사카로 떠날 수 있었다.

152 파친코O
m ᅰ n
오 사 카 , 1933 년 4월

백요셉은 체중을 한쪽 발에서 다른 쪽 발로 바꿔 가면서 오사카

기차역을 왔다 갔다 했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 같았다. 친구

와 함께 왔다면 산들 바람을 쐬면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겠지

만 지금은 혼자였다. 요셉은 원래 자연스럽게 누구하고나 말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본어가 아무리 능숙해져도 조선인 특

유의 억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일본인에게 다가가도 정중

한 미소를 얻어낼 수 있는 외모였지만 뭐라고 한마디만 해도 조선인

이라는 게 탄로나 환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결국 그는 조

선인이었고,불행하게도 일본인에게 있어 조선인은 성격이 얼마나

좋든 간에 교활하고 영악한 종족이었다. 공정하고 마음이 착한 일본

인도 많았지만 그들도 외국인을 경계했다. 특히 똑똑한사람들을 조

심해야 해. 그런 조선인은 타고난 ^썽꾼들이야. 요셉은 일본에서


10년 이상살면서 그런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

재회그리고 새로운 생활 153


다. 그만큼 한심한 소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넘겨버 렸다. 오사카 역의

순찰원은 요셉의 불안한 모습을 주시했지만, 열차 도착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 범죄는 아니었다.


경찰은 요셉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일아차리지 못했다. 요셉의

행동거지와 옷차림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었

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할 수 있

다고 주장했지만,모든 조선인은 그게 헛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든지 일본인을 흉내 낼 수 있었다. 요셉은 오사카의 단정한 노동

자처럼 수수한 바지에 서양식 셔츠,조금도 닳지 않은 무거운 모직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오래전 부모님이 평양의 양복점에서 특별히

주문해준 값비싼 양복은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지난 6년 동안 요셉

은 서른 명의 소녀와 남자 둘이 일하는 비스킷 공장에서 감독관으로

일해왔다. 일터에서는 깔끔하게 차려입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상사

인 시마무라 씨보다 옷을 잘 입을 필요는 없었다 시마무라 씨는 요

셉을 대신할 사람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다고 아침마다 말하곤 했다.

매일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하는 열차와 제주도에서 오는 배들은 배

고픈 조선인들을 오사카로 불러들였고 시마무라 씨는 그중에서 제

일 괜찮은 일꾼을 데려다 쓸 수 있었다.

요셉은 동생이 도착하는 일요일에 일을 쉴 수 있다는것에 감사했

다. 아내 경희는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따라왔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삭이 어떤 소녀와 결혼했는지 무척이

나 궁금했다. 그 소녀가 처한 상황은 충격적이었지만,이삭의 결정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이삭의 이타적인 행동에 익숙

했다. 이삭은 어렸을 때부터 기회만 생기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

154 파친코 O
의 음식과 물건을 모두 내주는 아이였다. 그 어린 소년은 어린 시절

을 병상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옻칠한 대추나무 쟁반에 담긴 풍성

한 식사가 빈 그릇이 되어 부엌으로 돌아왔지만,아이는 늘 젓가락처

럼 비쩍 마른상태였다. 이삭이 하인들에게 자기 밥을 푸짐하게 덜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결혼은 지나친 것처럼 보였

다. 다른 남자의 아이 아버지가 되겠다니! 아내 경희는 그 여자가 어


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때까지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삭과 매우 닮은 아내는 흠이 있는사람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시모노세키 열차가 역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군중들이 조직적으로

정확하게 흩어졌다. 짐꾼들은 특실 승객을 돕기 위해 달려갔다. 요셉

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바삐 움직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가 더 큰 이삭이 우뚝 서 있었다. 회색 중절모가 이삭의 아름다운 머


리 위에 비딱하게 얹혀 있었고 거북등껍질테 안경은 곧은 코에 낮게

걸려 있었다. 이삭은 주위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요셉을 발견하고는

앙상한 오른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요셉이 이삭에게 달려갔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삭은 요

셉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모습보다 훨씬 더 앙상했다. 창백한

피부는 좀 더 올리브빛을 띠었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눈 주위에 주

름이 잡혔다. 이삭은 큰형 사무엘을 신기할 정도로 많이 닮은 모습이


었다. 가족의 재단사가손수 만든서구식 정장이 이삭의 헬쑥한몸에

헐렁하게 걸쳐져 있었다. 요셉이 11년 전에 두고 떠났던 수줍음 많고

병약한 소년은 어느새 키가 큰 신사로 자라 있었다. 최근에 크게 앓

아서 그런지 몸이 더 수척해진 것 같았다. 요셉은 빼빼 마른 동생을

재회 그리고 새로운 생활 155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모님은 어떻게 저 아이를 오사카에 보낼 수 있

었을까? 내가 왜 저 아이에게 오사카로 오라고 고집을 부렸을까?

요셉은 두 팔로 동생을 끌어안았다. 일본에서 요셉이 친밀하게 접

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내뿐이 었다. 이제는 이렇게 혈육이 곁에 있는

것이다. 요셉은 귓가에 닿는 동생의 까칠한 피부를 느낄 수 있는 것

이 기쁘고또 좋았다. 동시에 어리게만 생각했던 동생 얼굴에 수염이

나 있어서 요셉은 깜짝 놀랐다.

“많이 컸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지막으로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웃음을 터뜨렸다.

“형.” 이삭이 말했다.

“이삭, 드디어 왔구나. 정말기뻐.”

이삭은 활짝 웃으며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나보다훨씬 커졌잖아. 건방지게 말이야!”

이삭은 일부러 사과하는 척하며 허리를 굽혔다

선자는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다. 형제들의 편안하고 따뜻한 모습

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이삭의 형 요셉은 재미있는 사람 같았다. 요

셉의 농담을 듣고 있자니 하숙생 뚱보가 살짝 떠올랐다. 뚱보는 선자

가 이삭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거실 바닥에서 철퍼덕

소리를 내며 기절하는 척했다. 그sT4 가 잠시 후에 선자의 손에 2엔

을 쥐어 주며 오사카에 가서 남편과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고 했다.

2엔은 뚱보가 이틀을 일해서 버는 돈보다 큰 금액이었다.

“일본에서 달콤한 떡을 묵을 때 영도에서 외로움과 슬픔에 젖어

널 그리워할 나를 잊지 말드라고 이 뚱보의 맴이 낚싯바늘에 걸린

156 파친코O
어린 새끼 농어의 입처럼 얼마나 찢어질 듯 0}플지 생각해보드라고

잉:

뚱보는 주먹으로 눈을 문지르고 엉엉 소리 내며 우는 척 했다. 다른

정 씨 형제들이 뚱보에게 입 다물라고 말하더니, 두 사람도 결혼 선

물이라며 그녀에게 2엔을 주었다.

“게다가 결혼까지 했지 !” 요셉은 이삭 옆의 작은 소녀를 조심스럽


게 바라보며 말했다.

선자는 요셉에게 인사를 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요셉이 말했다 “예전엔 아버지를 따라 다

니던 아주 작은 아이였는데 다섯 살인가 여섯 살쯤 됐을 때죠? 나 기

억 ^요 ?”

선자는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흔

들었다.
“당신 아버지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요 돌아가셨다니 참 안타깝

습니다. 아주 현명하신 분이어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참 좋았어

요 당신 아버지는 말수는 적었지만 신중하게 말씀하시는 분이셨지

요 그리고 당신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정말 좋았고요”

선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더. 엄마가 너그럽게 절 받아주셔서 감

사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어 예.”

“당신과 당신 어머니는 이삭의 생명을 구했어요 선자 씨, 고마워

요 우리 가족은 당신 가족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어요”

요셉은 무거운 짐을 이삭한테서 받아들었고>이삭은 선자의 보따

리를 들었다. 요셉은 선자의 배가 부른 것을 일아차렸지만 임신을 한

재회 그리고 새로운 생활 157


것이 확실해 보이지는 않았다. 요셉은 역 출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처럼 보이지도 않았고,말이 많지도

않았다. 너무 겸손하고 평범해 보여서 요셉은 그녀가 는 사람에게

강간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을 당했다면 잘못

된 행실로 남자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고 비난받았을 수도 있다

“형수님은 어디 있어요?” 이삭이 경희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물었

다.

“집에서 식사 준비 중이야. 배고프니? 이웃 사람들은 우리 주방에

서 나는 냄새 때문에 질투가 나서 죽으려고 할 거다.”

이삭은 존경하는 형수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선자는 자신의 옷차림을 힐끗거리는 행인들의 시선에 윗옷을 더

바짝 끌어당겼다. 역에는 한복을 입은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형수님은 훌륭한 요 리 사 아 이 삭 은 선자에게 형수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요셉은 사람들이 선자를 힐끗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새 옷이 필요할 것 같았다.

“집에 가 자!” 요셉은 바로 두 사 람 을 역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오사카 역 맞은편에는 노면 전차가 잔뜩 오갔고 보행자들이 떼거

리로 주출입구를 드나들었다. 선자는 조심스럽게 군중들을 헤쳐 나

가는 형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들이 전차를 향해 걸어갈 때 선자

는 잠시 뒤돌아서서 기차역을 바라보았다. 서양식 건축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돌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짐승 같았다. 그녀가

크다고 생각했던 시모노세키 역은 이 거대한 구조물과 비교하면 아

무것도 아니었다.

158 파친코O
남자들의 걸음이 빨라서 선자는 그들을 따라잡으려고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전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자는 이미 상상 속에서 오사카

에 와본 적이 있었다. 시모노세키행 여객선과 오사카 열차,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소년을 앞질러 갈 수 있는 전차도 상상 속에서는 벌써

타 보았다. 쌩쌩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들은 한수가 말했던 것처럼 바

퀴 달린 금속 황소 같아 보였다. 선자는 시골 처녀였지만 이 모든 것

을 한수의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복을 입은 개표원과 출입

국 관리자,짐꾼, 전차, 전기 램프 등유 난로나 전화기에 대해 알고 있

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자는 새로운 땅에서 싹을

퇴워 햇살을 받으려고 곧게 피어나는 묘목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요셉은 선자를 전차 뒤쪽에 하나 남은 빈 좌석으로 데려가 앉혔고

선자는 이삭한테서 보따리를 받아들어 무릎에 올렸다 형제는 나란

히 서서 가족들의 소식을 나누었다. 선자는 남자들의 대화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보따리를 가슴과 배에 바싹 끌어안고 소

지품을 감싼 천에서 배어나오는 고향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오사카 시내의 넓은 거리에는 낮은 벽돌 건물과 멋진 상점들이 늘

어서 있었다.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이곳에는

훨씬 더 많았다. 역에는 멋진 서양 옷을 입은 청년들이 많아서 이삭

의 옷이 낡고 케케묵은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아름다

운 여성들을 동희가 봤다면 그 탁월한 색과 자수에 감탄했을 것이다.

부산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가난한 일본인들도 있었다. 그 남자

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에 침을 뱉었다. 선자는 전차를 타고 가는

길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
일행은 조선인들이 사는 빈민가 이카이노에서 내렸다. 요셉이 사

재회 그리고 새로운 생활 159


는 동네는 전철 안에서 본 멋진 집들이나 풍경과 전혀 다른 곳이었

다. 동물 냄새가 음식 냄새는 물론 화장실 냄새보다도 더 지독하게

났다. 선자는 코와 입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카이노는 일종의 잘못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

는 판잣집들은 모두 똑같이 값싼 자재들로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다.

현관 계단을 깨끗하게 청소해놓거나 창문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

은 집도 군데군데 있었지만,대부분의 집들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

다. 무광택 신문지와 타르지가 창문 안쪽을 덮고 있었고^ 지붕에 사

용된 금속은 녹슬어 있었다. 집들은 거주자들이 값싼 자재나 주운 자

재로 직접 지어 올려 오두막이나 텐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임시로

만든 강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봄날치고는 따뜻한 저녁이

었다 넝마를 반쯤 걸친 아이들은 술에 취해 골목에서 잠든 남자를

무시한 채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요셉의 집에서 멀지 않은

현관 계단에서는 어 린아이가 변을 보고 있었다.

요셉과 경희는 지붕이 약간 뾰족한 상자 같은 오두막집에 살았다.

오두막집의 나무틀은 골이 진 강철로 덮여 있었다. 금속 덮개가 있는

합판이 현관문이었다.

“이곳은 돼지들과 조선인들만 살 수 있는 곳이야.” 요셉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고향 집 같지 않지?”

“아니,우리는 잘 지 낼 수 있을 거야.” 이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우리가 불편을 끼쳐서 미안해.”

선자는 요셉과 그의 아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공장 감독이 이렇게 가난한 곳에서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60 파친코 O
“일본인들은 괜찮은 땅을 조선인들에게 임대해주지 않아. 난 8년

전에 이 집을 샀어. 이곳에서 집을 소유한 조선인은 우리뿐일 거야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왜?” 이삭이 물었다.

“집주인이라는게 알려지면 좋을 게 없어. 여기서 집주인은 나쁜 놈

들이거든. 모두가 집주인을 싫어해. 나는 여기로 이사 왔을 때 아버

지가 준 돈으로 이 집을 샀어. 지금은 이 집을 살 여유가 없지.”

창문에 타르지를 바른 옆집에서 꿀꿀거리는 돼지 소리가 들렸다.

“이웃집에서 돼지를 길러. 아이들도 함께 살지.”

“아이들이 몇 명이야?”

“아이 넷과돼지 세 마리.”

“다 한집에 있어?” 이삭이 속삭이듯 물었다

요셉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집값이 그렇게 비쌀 리가 없어.” 이삭이 말했다. 이삭은 선자

와 아기를 위해 집을 빌릴 계획이었다.

“세입자는 소득의 절반 이상을 세로 지불해야 해. 식품 가격도 고

향에서보다 훨씬 비싸고”

한수는 오사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선자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때 부엌으로 이어진 옆문이 열리더니 경희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경희가들고 있던 양동이를 문 옆에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나! 거기 서서 뭐하고 있어요? 들어와요 어서! 세상에!


” 경희

는 이삭에게 달려가 이삭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너무 행복해

요 드디어 왔네요”

재회그리고새로운생활 161
“아멘.” 경희는 이삭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이삭은 그런

경희가 자기 얼굴을 어루만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내가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네요! 어서

집 안으로 들어와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이삭에게 명령하고는 선자

를 돌아보았다.

“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는지 몰라요 여기서

는 같은 여자끼리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답

니다.” 경희가 말했다. “기차를 타지 못했을까 봐 걱정했어요 기분이

어때요? 피곤해요? 배고프죠?”

경희는 선자의 손을 잡고 남자들을 따라갔다.

선자는 이렇게 따뜻한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경

희는 감 씨처럼 빛나는 눈과 아름다운 입매,하얀 작약 같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선자보다 열두 살이 많았지 만 훨씬 더 매력

적이고 활기차 보였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를 나무 핀으로 곱게 말아

올리고 열은 파란색 서 양 ^ 옷 위에 면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서, 서

른한 살 먹은 주부라기보다는 마치 여학생처럼 보였다.

경희는 등유 난로 위에 놓인 놋쇠 찻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역에

서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사줬어요?” 경희가 남편에게 물으며 테라

코타 컵 네 잔에 차를 따랐다

“가능한 한 빨리 집에 왔다고 했잖아!” 요셉이 웃으며 답했다.

“정말 못 쓸 사람이네! 됐어요 뭐.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잔소리도

하기 싫네요 서방님 가족을 집에 데려왔으니 됐어요” 경희는 선자

에게 가까이 다가가 머 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판판한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가는 눈,


조그마한 몸집을 가

162 파친코 O
진 평범한 여자처럼 보였다. 선자는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여자도 아니었다. 선자의 얼굴과 목, 발목은 심하게 부어 있었고 긴

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희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걱정할 필요

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선자의 땋아 내린 두 갈래 머리

카락은 평범한 삼으로 만든 끈으로 묶여 있었다. 선자의 불룩 솟아

있는 배를 보며 경희는 배 속의 아이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경희가 차를 건네주자 선자는 떨리는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며 고

개를 숙였다.

“춥죠? 옷을 많이 입지 않았네요” 경희는 낮은 밥상 근처에 방석

을 내려놓고 선자를 거기에 앉혔다. 그러고는 선자의 무릎 위에 초록

색 이불을 덮어주었다. 선자는 뜨거운 보리차를 홀짝거 렸다.

외관과 달리 집 안은 편안했다. 많은 하인이 있는 집안에서 자란

경희는 남편을 위해 집을 청결하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장소로 꾸미

라고 배웠다. 단둘뿐이지만 두사람이 사는 집에는 다다미 여섯 장짜

리 방이 세 칸이나 있었다 다다미 두 장짜리 방에서 열 명이 같이 자

야 하는 이 동네의 수준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경희와

그녀의 남편이 자란 고향의 웅장한 집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것이었다. 경희와 요셉은 아들과 함께 조선의 경성으로 이주한다는

아주 가난한 일본인 과부한테서 이 집을 샀다. 이카이노에는 아주 다

양한 조선인들이 살았고,두 사람은 그런 사람들 틈에서 사기와 범죄

를 조심하는 법을 배웠다.

“아무한테도 돈을 빌려주지 마.” 요셉은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해하

는 이삭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먹고 나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다들 금방도착했잖아요” 경희

재회그리고새로운생활 163
가간 청 했 다

“여분의 돈이나 귀중품이 있다면 알려줘. 따로 보관해줄게. 난 은

행 계좌를 가지고 있어.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돈과 옷,살 곳과

음식이 필요해. 네가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아 우리

가 어떤 식으로 자라났든 상관없어. 우리는 교회에 기부를 해왔고 교

회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줘야만 했지. 넌 여기 상황이 어

떤지 잘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웃들과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게

좋아. 집 안에 낯선 사람을 절대 들이지 말고” 요셉이 이삭과 선자에

게 냉정하게 말했다.

“이 규칙들을 지켜주면 좋겠어. 넌 관대한사람이지만 그래서 위험

할 수 있어. 우리한테 여분의 돈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우리 집

에 도둑이 들 거야 우린 넉넉하지 않아, 이삭. 항상 조심해야 해. 기

부를 시작하면 결코 멈출 수가 없아 여기 사람들 중에 일부는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해. 돈이 떨어지면 여자들은 필사적이 되자 나는 그

들을 비난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부모님과 경희 부모님을 먼

저 돌봐아: 해.”

“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적이 있어서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

예요” 경희가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이삭이 물었다.

“내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이웃들에게 음식을 나눠줬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매일 음식을 달라고 오더라고요 내가 남편의 다음 날 점심

으로 음식을 보관해두는 걸 다들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우리 집에 침입해 들어와서 마지막 남은 감자봉지를 가져

갔어요 그들은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했지만……”

164 파친코 O
“그들은 굶주리고 있었군요” 이삭은 이해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요셉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우린 모두 굶주리고 있어. 그들은 도둑질善 한 거야. 그들이 조선

인이라고 우리 친구는 아니야. 다른 조선인들을 조심해야 해. 나쁜

사람들은 경찰이 우리들의 불만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 우

리 집은 두 번이나 털렸어. 경희는 보석을 잃어버렸고” 요셉은 다시

경고하는 눈빛으로 이삭을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하루 종일 집 안에 있아 그래서 나는 돈이나 다른 귀중

품들을 절대 집에 두지 않아.”

경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식을 나눠 줬다고 결혼반지와 어


머니의 옥 머리핀, 팔찌를 도둑맞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두 번째로

도둑이 든 후;,
요셉은 며칠 동안 그녀에게 화를 냈다.

“생선을 구울게요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그녀는 미소

를 짓고 뒷문 옆의 작은 부엌으로 향했다.

“저도 도울까예?” 선자가 물었다.

경희는 고개를 끄덕 이고 선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경희가 속삭였다. “이웃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들은 좋은 사람들

이에요 남편은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이가 그런 일

들을 더 잘 알고 있죠• 그이는 우리가 여기 사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기를 바라요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는 혼자서 너무 외

롭게 지냈어요 당신이 와서 정말 좋아요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겠

죠 !” 경희의 눈빛이 빛났다. “이 집에서 아이가 태어날 거고,난 큰엄

마가 될 거 예요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어요”

경희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비통한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재회그리고새로운생활 165
고난과 가난을 겪으면서 경희는 훨씬 더 강해졌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이삭은 선자에게 경희와 요셉이 원하는

모든 것은0}이라고 말했다.

부엌에는 난로와 빨래통 하나,


도마가 있을 뿐이었다. 영도의 부엌

에 비하면 아주 좁은 공간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자리는 충분

했지만 많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선자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바닥에

있는 임시변통의 개수대에서 호스로 손을 씻었다. 야채를 삶고 생선

을 구워야 했다.
“선자야.” 경희가 선자의 팔에 가볍게 손을 댔다. “이제부터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자;
이미 마음속 깊이 헌신이 뿌리 내린 어린 소녀는 경희의 말에 감

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는 경희가 준비해둔 요리가 펼

쳐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선자는 오늘 처음 허기를 느꼈다.

경희가 냄비 뚜껑을 집어 들어 흰쌀밥을 보여주었다.


“오늘만이야. 동생이 여기 온 첫날이니까. 이제 이곳이 동생 집이

야:

166 파친코 O

식사 후에 네 사람은 남탕과 여탕이 따로 있는 공중목욕탕으로 향


했다. 목욕하러 온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경희와선자를 무시했다. 예

상했던 일이어서 선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긴 여행으로 쌓인 먼지

를 문질러 닦아내고 한참 동안 비누칠을 하고 나자 기분이 한결 상

쾌해졌다. 일행은 깨끗한 속옷에 외출복을 입고 집으로 향했다. 깨


끗하게 목욕도 했으니 이제 잘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요셉은 희망

에 부풀어 있었다. 오사카에서 사는 것은 힘들 게 분명했지만 점점

더 나아질 것이었다. 쓰디쓴 씨앗■으로도 맛있는 죽을 만들어낼 자신

이 있었다 일본인들이야 자기들 좋을 대로 생각하겠지만, 살아남아


서 성공하면 그만이었다. 이제는 네 명이 되었고 곧 있으면 다섯 명
이 될 거라고 그리고 그들은 다 함께 있으니 더 강해질 거라고 경희

가말했다.“그렇죠?

경희는 선자와 팔짱을 끼고 남자들 뒤를 바싹 쫓아 걸었다.

첫날밤 167
요셉이 동생에게 경고를 했다. “정치적인 문제들이나 노동 조직에

관계된 것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쓸데없는 것들하고는 엮이지 마.


고개 숙이고 일만 해. 독립운동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짓거리에 휩쓸
리거나 휘둘리지 말 라 는 기 야 . 경찰이 너한테서 그런 낌새만 맡아

도 널 체포해서 감옥에 넣어버릴 거야 그런 일을 많이 봤어.”

이삭은 너무 어린 데다 몸이 좋지 않은 탓에 삼일운동에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삭이 다녔던 평양의 신학대학 졸업생들 중 대다수


가 삼일운동을 주도했다. 많은 신학대학 교수들도 1919년에 거리를

행진했^•
“여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아?”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삭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응,그런 것 같아. 도쿄에는 더 많:또 몇몇은 만주에 숨어 있아 어

쨌든 일단 잡혀갔다 하면 죽는 거야. 운이 좋으면 추방당하고 말겠지

만 그런 경우는 드물어. 내 지붕 밑에서는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일을 하라고 널 오사카로 불러들인 게 아니니까


넌 교회에서 일을 하러 온 거야.”

이삭은 목소리를 높이는 요셉을 뚫어지 게 쳐다보았다.

“운동가들과는 일분일초도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알았지?” 요셉


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는 너 혼자가 아니야. 아내와 아이를 생각

해야지.”
오사카로 떠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

삭은 식민 통치에 대항해 싸우는 애국자들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


다 고향에서는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삭의 부모

님도 새로운 토지 조사로 부여된 세금 때문에 재산의 일부를 팔아야

168 파친코 O
i
했다. 요셉은 지금도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다. 이삭은 압제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인다운 행동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몇 달 사이


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싱SiS 은 일과 선자에게 밀려 부수적인 것

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생각해야 했다.

이삭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요셉은 불안했다.


“헌병대는 네가 포기하거나 항복할 때까지 널 괴롭힐 거야 게다

가 넌 건강도 좋지 않잖아. 다시 아프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여기서

체포된 사람들을 많이 봤어. 조선과는 달라. 여기 판사들은 모두 일

본인이야. 경찰도 일본인이고 법은 공평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아. 독

립운동가 단체의 조선인들을 항상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양쪽을


오가는 스파이들이 있거든. 시 토론 모임에도 스파이들이 있아 당연

히 교회에도 있고. 결국에는 모든 운동가들이 익는 족족 따 가는 과

일처럼 저들 손에 떨어진다고 봐야 해. 일단 잡혔다 하면 저들이 자

백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할 거야. 내 말 알겠어?” 요셉이 걸음을 늦추

며 말했다.
뒤따르던 경희가 남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여보,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삭은 그런 일에 휩쓸리지 않을 거

예요 이삭이 여기 온 첫날밤을 이렇게 망치지 말아요”

요셉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


다 그 불안을 털어내려면 동생에게 경고를 해야 했다. 요셉은 일본

인들에게 짓밟히지 않았던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는지 똑똑히 기억


하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요셉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하지

만 사무엘 형이 용감하게 싸우다 순교자로 생을 마감했던 것처럼 요


셉도 그 길을 갈 수는 없었다 압제에 저항하는 일은 가족이 없는 젊

첫날밤 169
은이들의 몫이었다.
“네가 또 아프거나 말썽에 휘말리면 부모님이 날 죽이려고 할 거

야. 네 앙심에 맡기마. 내가 죽기를 바라니?”

이삭은 왼팔을 흔들어 형의 어깨에 걸치고 형을 끌어안았다.

“내 말 듣고 있니?”요셉이 조용히 말했다.

“착하게 굴게. 형 말도 잘 듣고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자꾸 그

렇게 걱정하면 머리가 하얗게 세거나 그나마 남아 있는 머리카락도


다 빠져버릴걸.”

요셉이 웃었다. 그래, 이런 게 필요했다. 이래서 동생을 가까이 두


고 싶었다. 그를 잘 알고 심지어는 놀려 먹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 곁

에 있는 게 좋았다. 아내는 요셉의 보물이었지만 날 때부터 자신을


알고 지 냈던 사람과는 달랐다. 그런 동생을 이런 혼탁한 시국에서 자

칫하면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요셉은 겁에 질렸다. 그래서


동생이 오사카에 도착한 첫날부터 동생에게 훈계를 늘어놓았던 것

이다.
“진짜 일본식 목욕탕이었아 아주 근사하더라고 이게 이 나라의
좋은 점이야,
그렇지?” 이삭이 말했다.
요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음속으로 이삭이 어떤 해도 입지 않

기를 기도했다. 동생이 도착했을 때는 그저 순수하게 기쁘기만 했지

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다른 누군가를 걱정한

다는 게 어떤 건지 예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경희가 이삭과 선자에게 기차역 근처에 유명한

국수집이 있다면서 꼭 한 번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일행이 집에 도

착하자마자 경희가 불을 켰乂 선자는 이제 이곳이 자신이 살 곳임을

170 파친코 O
되새겼다. 바깥의 거리는 어둡고 고요했지만,
작은 판잣집은 밝고 깨

끗했다. 이삭과 선자는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고 경희는 그들 뒤로

문을 닫아주며 잘 자라고 인사했다.

창문 없는 방은 요 하나와 옷장 대용인 판판하고 납작한 트렁크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널찍했다. 사방은 깨끗한 벽지로 도배되어 있


었고 다다미도 누군가가 손으로 일일이 쓸어서 닦아 놓은 상태였다

경희가새 솜을 넣어서 누비이불을 도톰하게 부풀려 놓았다. 경희와

요셉의 방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등유 난방기도 있었는데,그 일

정하게 응웅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제 이삭과 선자는 한 요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잠들어야 했다 선

자가 집을 떠나기 전날 밤, 선자의 엄마는 선자가 처음 겪는 일이기


라도 한 것처럼 선자에게 부부 관계에 관해서 설명해주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말해주며,임신 중에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을 즐겁게 해줘야 한데이. 남자들은 고것을 해야 하는 기라.

천장에 걸린 작은 전구 하나가 희미한 빛을 방 안에 드리웠다. 선

자가 그 전구를 힐끗 쳐다보자 이삭도 고개를 들었다

“피곤하겠군요” 이삭이 말했다.

“저는 괜찮아예:

선자는 개어져 있는 요와 이불을 바닥에 펴려고 둥을 웅크렸다. 이

제 남편이 된 이삭 옆에서 같이 잠을 자야 했다. 잠자리 준비는 빠르

게 끝났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외출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선자가


옷 보따리에서 잠옷을 꺼냈다. 엄마가 낡은 속옷 두 벌로 만든 잠옷

이었다 선자는 양손에 잠옷을 들고서 요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첫날밤 171
“불을 끄는 게 좋을까요?” 이삭이 물었다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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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그럼에도 장지문 하나를 사이에 둔 옆방에서 흘러나오는 희미

한 불빛이 방 안을 물들였다 얇은 벽 저 너머 거리에서 행인들이 시

끄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옆문 너머에서는 이따금씩


돼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저 바깥이 아니라 방 안에 있는 것

만 같았다. 이삭은 속옷만 남겨둔 채 옷을 벗었다. 선자는 벌써 몇 달

동안이나 이삭의 목욕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모습이었


다 선자는 이삭이 구토에 설사를 하고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는 모
습을 모두 보았다. 갓 결혼한 남편이 젊은 아내에게 보이고 싶지 않

은 아픈 모습을 이미 선자는 보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갓

결혼한 대부분의 신혼부부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함께 지냈고, 보

다 더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모두 깊이 감춰두었던 서로


의 추한 모습을 목격했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니 어색할

게 없잖아. 이삭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삭은 한 번도 여자 옆에 누워서 자본 적이 없었다


이삭은 이 밤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선자가 외출복을 벗었다. 조금 전 목욕탕에서 둥그스름한 가슴 아


래부터 치골까지 세로로 길게 이어진 짙은 임신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선자는 재빨리 잠옷을 입었다.

이삭과 선자는 금방 목욕을 마친 아이들처럼 비누 향을 풍기면서


파랗고 하얀 이불 아래로 재빨리 미끄러져 들어갔다.

172 파친코 O
선자는 이삭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

랐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삭이 병을 앓으며 시작되었고、그 후 수치

스러운 일을 저지른 선자는 이삭에게 구원받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

다. 경희가 두 사람을 위해 꾸며준 방에 누워서 선자는 희망에 부풀


어 올랐다. 그때 자신이 한수를 되찾으려고 애썼다는 생각이 떠올랐

지만 이제는 다소용 없는 짓이었다. 선자는 이삭과 아이에게 헌신하


고 싶었다. 그러자면 한수를 잊어야 했다.

“행님네 식구들이 정말 친절하시네예.”


“부모님께도 당신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형님이랑 닮았

죠 선한 성품에 정직한 분이에요 어머니는 현명하시고生 내성적으


로 보이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당신을 지켜주실 분이시죠 어머니는

형수님이 옳다고 생각하셔서 항상 형수님 편을 들어요” 이삭이 나지

막하게 웃었다
선자는 이삭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실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

였다.
°14°1 선자의 베개 쪽-으^ 머리를 가까이 기울이자 선 승 숨이

턱 ^혁 ^다 .
지금 날 원하는 걸까? 그게 가능할까? 선자는 이런저런 생각에 머

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삭은 선자가 불안할 때면 앞을 더 잘 보려는 것처럼 이마를 찌
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삭은 선자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선자

는 유능하고 침착한 여자였다. 이삭은 특히 선자의 무기력하지 않은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이삭 자신도 무기력한 사람은

첫날밤 173
아니었지만 항상 분별력 있게 행동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버
지가 한때 지적하셨던 자신의 ‘비현실적인 성격’과 선자의 유능함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오는 길은 임산

부는 말할 것도 없이 누구에게나 힘든 여행이었다. 그런데도 선자는

불평이나 심술궂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삭이 깜빡하고 먹을 것

을 챙기지 않거나 코트를 걸치지 않아도 질책의 기미 하나 없이 일


일이 챙겨주었다. 이삭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을 하면서
그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불안을 파악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선자는

살아남는 법을 아는 것 같았프 그것은 이삭이 언제나 알 수 없는 것

이었다. 이삭은 선자가 필요했다. 남자에 게는 아내가 필요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요 가슴이 욱신거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아

요 ” 이삭이 말했다
“목욕탕에 다녀와서 그런가 보네예. 저녁도 잘 먹었고예. 이렇게

잘 먹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예. 이달에 두 번이나 흰쌀밥을 먹어


서 꼭부자가 된 것 같습니더.”

이삭이 웃었다. “매일 당신에게 흰쌀밥을 먹여 줄 수 있으면 좋겠


어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먹고 자고 입는 것에 관심을 두어

서는 안 될 노릇이었지만,이제는 결혼했으니 선자에게 필요한 것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이삭은 생각했다.


“언지예,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예. 그냥좀놀라서 그랬지예. 그

렇게 사치스러운 건 먹지 않아도 됩니더.” 선자는 이삭이 자신을 되바


라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나도 흰쌀밥을 좋아해요” 이삭은 먹을 것에 관심을 보인 적이 거

의 없었음에도 이렇게 말했다. 이삭은 선자를 달래주려고 선자의 어

174 과친코 O
깨를 만지고 싶었지만,걸친 게 거의 없는 몸으로 가까이 붙어서 누

워 있던 터라 양손을 옆구리에 딱 붙였다. 옷을 제대로 걸치고 있었

더라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자는 계속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이삭에게 속삭이는
게 훨씬 편했다. 여객선이나 기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때는 어색하기만 했다.

“아주버니가 참 재미있는 분이시네예. 엄마한테 들었는데 아주버

니가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셔서 아부지가 많이 웃었다고……”

“공평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요셉 형이 제일 가깝게 느껴졌


어요 어릴 때 형은 학교에 가기 싫어해서 많이 혼났답니다. 형은 읽
기와 쓰기를 힘들어했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기억력이 좋았어

요 한 번 들은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고 일단 조금이라도 들었다

하면 대부분의 언어를 익힐 수 있었죠 형은 중국어와 영어,러시아


어도 조금씩 알아요 기계도 잘 고쳤어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형을

좋아했고 형이 일본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

버지는 형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형은 가만히 앉아 공부하는 데


는 소질이 없어서 그 소원을 들어드릴 수가 없었죠 학교 선생님들은

항상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형을 꾸짖었어요 형은 아파서 집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자기이길 바라곤 했어요 나는 집으로 찾아오는

학2 선생님들한테 수업을 들었는데 가끔씩 형은 나한테 자기 일을

떠넘기고 친구들과 함께 낚시를 가거나 수영을 하러 갔어요 형은 아

버지랑 싸우기 싫어서 오사카로 온 것 같아요 큰돈을 벌고 싶은 데

다 자신이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정직한


조선인들이 매일 재산을 잃어버리는 조선에서는 돈을 벌 방도가 보

첫날밤 175
이지 않았죠;
이삭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리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한 여자가 아이들에게 집에 들어오라고 소리

쳤다. 술에 취한 몇몇 남자들은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렸

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곧이어 요셉의 코고는 소리와 경


희의 가볍고 나지막한 숨소리가 마치 그들이 바로 옆에 누워 있기라

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이삭이 오른손을 선자의 배에 올렸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

지 않았다. 선자는 아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삭은 종


종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이삭이 말했다.


“네, 저도그래 생각합니더.”

“배가 따뜻하네요”

선자의 양 손바닥은 굳은살이 잡혀 거칠었지만 배는 질 좋은 천처


럼 부드럽고 탱글탱글했다. 이제 아내와 함께 있으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야 했지만 좀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이삭의 양 다리 사이 물건


이 잔뜩성이 나서 치솟아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아침마다항상 겪던

일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여자 옆에 누워 있자니 느낌이 달랐다. 물론


이런 일을 상상하기는 했지만 살을 맞댄 여자의 온기와 숨결을 직접

느끼니 기분이 묘했다. 또한 여자가 자기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을 느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삭의 양손이 조심스레 선
자의 가슴을 감쌌다. 봉긋하고 예쁜 가슴이었다. 선자의 숨소리가 달

다.
선자는 긴장을 풀려고 애썼다 한수의 손길은 이처럼 부드럽고 조

176 파친코 O
심스럽지 않았다. 해변에서 한수를 만날 때면 언제나 급하게 관계를

맺어서 선자는 정상적인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불편한 삽입 후에 한수의 얼굴에 만족감과 고마움이 어리는 것을 확


인하면 선자는 빨리 차가운 바닷물에 그곳을 씻고 싶었다. 한수는 선

자의 턱과 목을 쓰다듬곤 했고 선자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도 좋아


했다. 한번은 한수가 땋은 머리를 다 풀라고 하는 바람에 선자는 머

리를 다시 땋느라 집에 늦게 돌아가기도 했다 지금 선자의 몸속에는

한수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지만 한수는 이미 떠나버렸다. 그는 자신


의 아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선자가 두 눈을 뜨자 이삭도 눈을 떴다. 이삭이 선자의 젖꼭지를

어루만지며 선자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자는 이삭의 손길에 빠

르게 달아올랐다.
“여보” 이삭이 속삭였다.

이삭은 이제 선자의 남편이었고 선자는 이삭을 사랑할 것이었다.

첫날밤 \
T7
고 ^^길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삭은 요셉이 그려준 약도를 보고 한국장로교

회를 찾아갔다. 비스듬히 기운 목조 건물은 번라한 시장통에서 몇 발


자국 떨어진 이카이노 뒤쪽 거리에 있었다. 다른 건물과 구별되는 표
식이라고는 갈색 나무문에 그려진 초라한 하얀색 십자가뿐이었다.

젊은 교회 관리인,후가 이삭을 교회 사무실로 안내했다. 후는 류

목사가 어릴 때부터 키운 만주 출신의 고아였다. 류 목사는 한 남매

와 상담 중이었고 후와 이삭은 사무실 문 옆에서 잠시 기다려야 했


다. 낮은 톤으로 말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류 목사는 자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방문할까요?” 이삭이 후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닙니다,
목사님.”

후는 사무적인 태도로 조심스럽게 새로 온 목사를 관찰했다. 백이


삭 목사는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후는 남자의 확연하게 잘생긴 얼

고난의길 179
굴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한창때의 남자는 체격이 그보다 훨씬 더

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류 목사는 나이가 들어 몸집이 작아졌지


만,한때 훨씬 더 건장했고^ 먼 거리를 달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축구도 능숙하게 잘했다. 나이를 먹은 그는 지금 백내장과 녹내장으

로 고생하고 있었다.

“류 목사님이 아침마다 목사님 소식이 없는지 물어보셨어요 목사


님이 언제 오시는지 몰랐거든요 어제 도착하신 걸 알았다면 제가 역

으로 마중을 나갔을 텐데 말이죠、


” 일본어와 조선어에 모두 능통한
후는 스무 살이 넘지도 않은 나이였지만 행동거지나 말투가 훨씬 나

이 든 사람 같았다. 후는 깃을 젖힌 낡은 하얀 셔츠를 갈색 모직 바

지에 단정히 넣고 여기저기 기워진 파란색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들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남기고 간 몇 안 되는 겨

울옷이었다.
이삭이 몸을돌려 기침을 했다.

“얘야, 누구와 같이 있는 거니?” 류 목사가 목소리가 들리는 문 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묵직한 뿔테 안경을 얼굴에 좀 더 가까이 닿게

밀어 올렸지만 그래 봤자 시야가 더 밝아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류

목사의 눈을 가리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차분하고 단호


해 보였다 류 목사는 문 옆에 있는 형체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청

각은 아직 살아 있어 그중 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차렸다. 일본인


장교가 교회에 버리고 가 본인이 직접 키운 후였다. 그러나 후와 이

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백 목사님이에요”후가 말했다.

류 목사 옆 바닥에 앉아 있던 남매가 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180 파친코 O
류 목사는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없어 보이는 남매와의 상담을 그
만 끝내고 싶었다.

“이삭, 이리로 와주겠나. 내가그쪽으로가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이삭이 그 말을 순순히 따랐다.

“드디어 왔구나. 할렐루야!” 류 목사가오른손을 이삭의 머리에 가

볍게 얹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오사카에 도착했어요” 이

삭이 말했다. 류 목사의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은빛으로 빛났

다. 류 목사는 시력을 거의 잃었음에도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고 곧게

앉은 자세는 안정적이 었다.


“이리 가까이 오게.”

이삭이 가까이 다가가자 류 목사는 먼저 이삭의 두 손을 꼭 잡고

나서 두툼한 손바닥으로 이삭의 얼굴을 감쌌다.

남매는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있었다 후는 문 옆에 무릎 꿇고 앉

아서 류 목사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잘 알겠지만 자네는 나에게 보내진 걸세.”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가 마침내 여기 와 줘서 기쁘다네. 아내를 데려왔나? 후가 자

네 편지를 읽어줬어:

“네, 오늘은 집에 있지만 일요일에는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그래, 그래.”늙은 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들도 모두 자네가

와서 매우 기뻐할 거야 아 참, 이 사람들을 만나봐이지 !”


남매가 이삭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보賊:던

고난의길 181
그 어느 때보다 류 목사가 행복해하고 있음을 알이•차렸다.

“이 두 사람은 가족 문제를 상담하러 날 찾아왔어.” 류 목사가 이삭


에게 말하고는 남매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짜증을 숨기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동생과 누나는 제주도

의 시골 마을 출신이었五 도시 출신 젊은이들처럼 딱딱하게 굴지도


않았다. 까무스름히 그을린 피부에 굵고 검은 머리카락을 한 누나는

매우 순진한 매력을 풍기는 상당히 예쁜 여자였다. 하얀 셔츠 단추를

깃까지 꼭 잠갔고 남색 빛깔의 몸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기는 새로 오신 백이삭부목사님이란다. 부목사님께 상담을 부


탁드려 볼까?” 류 목사는 남매에게 반박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주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삭이 남매에게 미소를 지었다. 누나는 스무 살쯤 되어 보였고 남


동생은 그보다 어렸다.

남매의 문제는 복잡했지만 평범한 것이었다. 남동생과 누나는 돈


문제로 싸우고 있었다. 누나가 일하는 직물 공장의 일본인 관리자한

테서 선물로 돈을 받았다고 했다. 두 사람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


은 그 일본인 관리자는 기혼남에 아이가 다섯이었다. 그 관리자가 누

나라는 여자를 식당에 데려갔고 장신구들과 돈을 주었다 여자는 그


돈 전부를 고향으로 돌아간 가난한 삼촌과 부모님께 보냈다. 그런데

남동생은 누나가 자기 봉급보다 많은 것을 받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고 누나의 생각은 달랐다.

“그 남자가 누나한테서 뭘 원하겠어요?” 남동생이 이삭에게 퉁명

스럽게 물었다. “누나는 그돈을 받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건 죄예요”


류 목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두 사람의 태도에 지쳤는지 고개

182 파친코 O
를 축 떨어뜨렸다.

누나는 이곳에 와서 어린 남동생의 비난을 들어야 한다는사실 자


체에 화가 나 있었다. “일본인들이 우리 삼촌의 농장을 빼앗아 갔어

요 우리는 일자리가 없어져서 집에서 일할 수가 없고요 일본인 남


자랑 같이 저녁을 먹어주는 조건으로 준 돈을 좀 받는 게 해가 된다

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가능하다면 그가 주는 돈의 두 배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그 정도로 많은 돈을 주지는 않죠”
“그 남자는 뭔가를 바라는 거야. 저질이라고.” 남동생이 역겹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요시카와 씨가 날 만지게 둔 적은 한 번도 없어. 난 그냥 앉아서


미소 지으며 그의 가족과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야.” 누나

는 남자에게 술을 따라주고 남자가 사준 입술연지를 발랐다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문질러 지웠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누나와 놀아나려고 돈을 주는 거야 그건 창녀나 하는


짓이라고.” 이제는 남동생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숙한 여자는

유부남과 식당에 가지 않아! 우리가 일본에서 일하는 동안은 내가

집안을 책임지고 누나를 지켜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누나

가 나이가 더 많은 게 무슨상관이야? 누나는 여자고 난 남자야. 이런

일을 계속 두고 볼 수는 없아 내가 허락 못 해!”

남동생은 열아홉 살인 누나보다 네 살이 더 어렸다. 남매는 이카


이노의 복작거리는 집에서 먼 친척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그 여자 친척은 방값을 제때 받기만 하면 남매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교회에 오지 않는 여자라서 류 목사는 그 여자를 몰랐다.

“아버지와 엄마는 고향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 삼촌은 자기

고난의길 183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릴 수가 없고 상황이 이러니 할 수만 있다면
내 손도 팔아버릴 거야 하나님께서는 내가 부모님을 존경하기를 바

라셔. 부모님을 돌보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그 대가로 내가 수치스러

운 일을 해야 한다면……” 누나가 울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우리 기


도의 답으로 요시카와 씨를 보내주신 게 아닐까?” 누나는 자신의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것처 럼 고개를 숙인 류 목사를 바라보았다.

이런 종류의 합리화는 흔했다. 나쁜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탈바꿈


시키고 싶어 하는 열망은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부

정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확실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젊은 여자가 몸을 팔아서 계율을 따르기

를 바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과가 좋다고 해서 저지른 죄악을 씻어

낼 수는 없었다
“아이고.” 류 목사가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의 그 작은 어깨에 이

세상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니 참으로 힘들겠구나. 부모님은 네가 그

돈을 어디서 얻었는지 알고 계시니?”

“제 봉급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제 봉급으로는 방세와 생활비도 간


신히 내는 형편이에요 남동생은 학교에 다녀야 하고요 엄마는 제가

책임지고 동생이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죠 동생은 공부

를 그만두고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멀리 내다봤을 때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랬다가는 항상 지금처럼 끔찍한 일자리밖에 못 얻는다

고見 일본어를 읽고 쓰는 법을 모르면 말이죠;

이삭은 누나라는 여자의 명쾌한 생각에 깜짝 놀랐다. 여자는 그 문


제를 깊이 생각해보았던 모양이 었다. 이삭은 눈앞의 여자보다 몇 살

더 나이를 먹었지만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184 파친코 O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자기 봉급을 단 한 푼
도 드려본 적이 없었다. 고향의 교회에서 평목사로 잠시 일했을 때는

교회 형편이 좋지 못한데다 신도들의 요구는 벅찰 만큼 많아서 봉급

을 받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돈을 벌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


다. 이 교회에서 일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고용 조건에 대해 이

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라면 얼마를 받든 상관없었지


만 이제는 가족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주머니에 돈이 있었고,

부모님이나 형에게 말만 하면 언제든지 쉽게 돈을 융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벌고 쓰는지에 신경을 써본 일이 없었다. 눈앞의 젊은


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삭은 자신이 참으로 이기적인 바보 같았다.

“류 목사님, 목사님이 결정을 내려주세요 누나가 제 말을 듣지 않


아요 누나가 일을 끝내고 어디에 가는지를 제가 일일이 확인할 수

는 없어요 누나가 계속 그 늙은 놈광이를 만난다면 그 남자가 뭔가

끔찍한 짓을 할 거예요 누나가 무슨 일을 당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고요. 누나는 제 말을 들어야 해요” 남동생이 조용히 말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요;

누나가 고개를 숙였다. 누나는 류 목사가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일요일 아침은 그녀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교회


는 그녀가 기분 좋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요시카와 씨와

는 나쁜 짓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요시카와 씨의 아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요시카와 씨는 종

종 그녀의 손을 잡고 싶어 했는데 그게 그다지 해로운 일 같지는 않


았다. 그렇다고 순수한 행동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는 교토

에 있는 기가 막히게 멋진 온천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동생

고난의길 185
의 식사를 챙겨 줘야 해서 못 간다고 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건 맞아.”류 목사가 이렇게 말문을 열자 여

자는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덕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 그건 돈보다훨씬 더 소중한 거니까. 네 몸은 성령이 머무는 신

성한 곳이란다. 네 남동생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우리의 믿음


과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네가 결혼할 때는 순결과 명예가
중요한 문제가 되자 이 세상은 부도덕한 여자를 혹독하게 비난한단

다. 설령 실수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 해도 말이야. 잘못된 일이지만

이 죄 많은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단다.”류 목사가 말했다.

“하지만 동생이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어요,목사님. 엄마한테 약

속했는데……”
“네 동생은 아직 어려. 나중에 다시 학교에 갈수도 있어.”류 목사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반박했다.

이 말에 남동생의 표정이 살아났다. 남동생은 목사님이 그런 제안


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그는 학교가 싫었다. 일본인

교사들한테서는 멍청한 아이 취급을 받았立 옷차림과 억양 때문에

매일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남동생은 가능한 돈을

많이 벌 계획이었다. 그러면 누나가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곳에서 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번 돈을 제주도에 보낼 수도 있었다.


누나가 흐느꼈다.

류 목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네


동생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면 더 좋을 거야. 일이 년이라도 읽고 쓰

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지. 교육보다 더 나은 것은 당연히 없으


니까 우리나라에는 우리를 이끌어줄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가 필요

186 파친코 O
해.”
누나는 류 목사가 자기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마

음을 가라앉혔다. 요시카와를 계속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

어리석은 늙은이한테서는 좀약 냄새가 났다. 그녀가 여기 오사카에

온 것은 숭고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녀가 일을 하고 동생이 학교를


다니면 그들에게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지리라고 믿었다.

이삭은 류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류

목사는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면서도 상대를 단호하게 이끌어주는

남다른 능력의 소유자였다.

“요시카와가지금은 그냥 너와 같이 지내고 싶을 뿐 다른 것은 원하
지 않겠지만 나중에는 다른 것들을 바랄지도 모른단다. 그때가 되면

너는 그에게 빚을 졌다는 죄책감에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생


각할지도 모르지. 일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워질 수도 있고 그때는 이

미 너무 늦어서 돌이킬 수 없을 거야 넌 지금 네가 그를 이용하고 있


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일까? 우리가 착취당했다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그런 사람일까?”

이삭은 류 목사의 연민과 지혜가 담긴 이야기에 흡족해하며 고개


를 끄덕거 렸다. 자신이 류 목사와 같은 상황이 었다면 이 남매에게 뭐

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이삭, 이 아이들을 축복해주겠나?” 류 목사가 물었고 이삭은 남매


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남매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교회를 떠났다. 두 사람은 일요일 아


침에 예배를 드리러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 * *

고난의길 187
밖에 나가 있었던 후가 짜장•면 세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세 사람
은 식전 기도를 올린 후 의자도 없이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
다. 상도 따로 없어서 후가 버려진 나무상자로 만든 나지막한 임시

밥상에 그릇을 올려놓고 먹어야 했다.

싸늘한 방 안에는 방석 한 장 보이지 않았다. 이삭은 이 열악한 환

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항상 자신은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있자니 불

편함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먹어보게. 후는 훌륭한 요리사야. 후가 없으면 난 배를 끓을 거야.”
류 목사가 이렇게 말하고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까 그 여자가 요시카와 씨와 그만 만날 거라고 생각하세요?” 후

가 류 목사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임신을 하면 요시카와에게 버림받을 거야. 그러면 남동

생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겠지. 그 일본인 관리자는 젊은 여자와 함께

다니며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에 젖어들고 싶어 하는 어리석


고 늙은 낭만주의자일 뿐이야. 머지않아 그 아이와 자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리겠지. 남녀 관계는 뭐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운 게 아니야.


그 아이는 일본인 관리자를 그만 만나야 하고 남동생은 일자리를 찾
아야 해. 그 아이는 지금 다니는 직장도 즉시 바꿔야 하고. 둘이 벌면

생활비와 부모님께 드릴 돈을 충분히 벌 수 있어.”

이삭은 류 목사의 달라진 어조에 깜짝 놀랐다. 류 목사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가워서 거의 오만하게 들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심하는 것처럼 조

용히 짜장면을 먹었다.

188 파친코O
류 목사가 이삭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을 아주 많이 봤어. 여자애

들은 나긋나긋해 보이는 그런 남자들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


지. 하지만 자기들이 저지른 실수의 쓰디쓴 대가를 치르는 건 결국

그 여자애들이야 하나님은 그 아이들을 용서하시지만 이 세상은 그

렇지 않지.”

“네.” 이삭이 웅얼거렸다.


“자네 아내는 어떤가? 자네 형 집에는 둘이 지낼 만한 공간이 충분

한가?”

“네,
형님이 방을 내줬어요 아내는 곧 출산할 예정입니다.”

“아주 빠른데! 정말좋은소식이네.”류목사가기쁘게 말했다.


“진짜 좋은 소식이네요”후가 처음으로 젊은이답게 흥분해서 말했

다. 매일 교회 뒤쪽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은 하루 일과

중 후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일본에 오기 전 큰 고아원에서 자

란 후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좋아했다.

“형은 어디에 살지?”

“여기서 몇 분 안 걸리는 곳입니다. 괜찮은 집을 구하기가 꽤 어려

운 것같더군요”

이삭의 말에 류 목사가 웃었다.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도 집을 빌려

주지 않아. 이곳 목사가 됐으니 자네도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있을 걸세.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을 보게 될 거라는 얘

기야.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방에서 열두 식구가 살면서 일을


나가는 남자들과 나머지 가족들이 교대로 잠을 잔다네. 돼지와 닭도

집 안에서 기르고 말이야. 수돗물도 없아 난방도 되지 않고. 일본인


들은 조선인들이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에서는 더러운 꼴로 살

고난의길 189
수밖에 없어. 서울에서 온 양반들이 거지꼴이 되는 걸 많이 봤다네.

목욕탕에 갈 돈도 없이 넝마를 걸치고 살고^ 신발이 없어서 시장에서


짐꾼으로 일하지도 못해. 그들은 갈 곳이 없아 일자리와 돈이 있는

사람도 살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 몇몇 사람들은 불법 거주를 하고

있아”
“일본 회사에서 데려온 사람들은 회사에서 살 곳을 내주지 않습니
까?”

“홋카이도 같은 곳에는 광산이나 대규모 공장에 수용소가 딸려 있

지만 가족들은 거기서 살 수가 없아 수용소라고 별반 나은 것도 아


니고 말일세. 주거 상태가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지.” 류 목사가 감정

이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또다시 류 목사의 어조가


차갑게 느껴져서 이삭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 남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들이 겪는 고난을 걱정하던 류 목사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

^소다.
“목사님은 어디에서 지내십니까?” 이삭이 물었다.
“이 사무실에서 지내지. 저 구석에서:류 목사가 난로 옆을 가리켰
다 .“후는 저쪽 구석에서 자고.”

“요나 침구가 안보이는데……”

“벽장 안에 있어. 후가 매일 밤마다 잠자리를 폈다가 아침에 치우


지. 자네도 여기 머물러야 한다면 자네와자네 식구 자리도 만들어줄

수 있어. 그것도 자네 보수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와 함께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

만교회 건물은 아기가살기에는 외풍이 심했다.

190 파친코〇
“식사는 어떻게 하십니까?”

“후가 건물 뒤쪽 화로에서 식사 준비를 해. 거기에 수돗물이 나오

는 부엌 비슷한 게 있거든. 별채가 이 건물 뒤에 있지. 고맙게도 선교

사들이 마련해놨더라고”

“가족은 없으세요?” 이삭이 류 목사에게 물었다.


“아내는 우리가 여기 도착하고 2년 후에 세상을 떠났어. 그게 15년

전이己 아이는 없었고 하지만 내게는 아들 같은 후가 있어. 나에게


는 후가 축복 같은 아이지. 이제 자네가 우리 두 사람을 축복해주러

왔고.”
후는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기뻐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돈은 좀 갖고 있나?”류 목사가 물었다.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삭은 후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지 몰라 망설였지만, 후가 류 목사의 눈과 같아

서 자리를 뜰 수 없음을 깨달았다.


류 목사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냉철한 장사꾼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 보수는 월 15엔이야. 한 사람이 먹고 살기에도 충분하지 않

은 돈이지. 후와 나는 보수를 받지 않아. 캐나다 교회에서 지원을 좀


해주지만 그게 꾸준하지가 않아. 우리 신도들은 많은 것을 낼 수 없
고 그래도 괜찮겠나?”

이삭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형 집에서 사는 데에 얼마가


필요한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형에게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
까지 먹여 살려 달라고 부탁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었다.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나?” 류 목사가 이삭을 고용하려 한 것

은 그 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삭의 가족은 평양에 땅을

고난의길 191
가지고 있었고 이삭의 추천서에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이 기재

되어 있었다 이삭의 보수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게 분

명했다. 게다가 류 목사는 이미 이삭이 평목사로 일할 때 보수를 요

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삭은 병약해서 든든한 일꾼은


되지 못하겠지만 류 목사는 이삭의 가족이 교회를 재정적으로 후원
해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게…… 어…… 형에게 도와달라고할 수는 없습니다.”


“어? 그래?”

“게다가 지금은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요”

알겠네.”
후는 놀란 데다 수치심까지 느끼는 젊은 목사가 안쓰러워 보였다.

“부모님은 세금을 내려고 토지의 상당 부분을 팔고 있고 상황은 자

꾸불안해지고 있습니다. 형이 부모님에게 생활비를보내드리고 있어


요 형은 아마 형수님 가족도 부양하고 있을 겁니다.”

류 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예상했

던 상황은 아니었다. 류 목사의 기대와는 달리 이삭의 가족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식민 정부의 지독하게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

고 있었다. 류 목사는 이삭이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게다가 시력이 심하게 나빠진 자신을 도와 설교문을 작성하


고,지역 관리들과 행정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만큼 일본어에 능통

한 목사가 필요했다.

“헌금이 충분하지는 않겠지만그걸로……” 이삭이 말을 꺼냈다.


“그건 안 돼.” 류 목사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요일 아침 예

배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신도는 75명에서 80명 정도였지만 전체 헌

192 파친코 O
금의 상당 부분을 채워주는 부유한 신도는 대여섯 명뿐이었다. 나머

지는 하루에 두 끼도 연명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후가 밥상에서 빈 그릇들을 집어 들며 말했다.

“늘 그렇듯 주님께서 보살펴주실 겁니다.”


“그래,아들아,네 말이 맞구나.” 류 목사는 후를 바라보고 미소 지
었다. 류 목사는 늘 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고 싶어 했다 지

성과 뛰어난 소질을 타고 난 이 아이는 훌륭한 학자는 물론 목사도

될 수 있을것같았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자네도 많이 실망했겠지.” 이삭을 위


로하는 류 목사의 어조가 좀 전에 남매의 누나에 게 이야기 했을 때와

^같았다.
“전 이 일자리를 얻게 돼서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목사님. 보수
문제는 가족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당연히 후의 말이 맞아요 주님

께서 준비해주실 겁니다.” 이삭이 말했다.


“일용할 모든 것을 내려주시는 신실하신 주님,나의 구주*t t !” 류

목사가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

자네를 준비해주셨지.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두 돌봐주실 거야:

고난의길 193
경희의 꿈

여름이 빨리 찾0}왔다. 오사카의 태양은 고향에서보다 훨씬 더 뜨

거웠고,습도는 지독하게 높았다. 몸이 무거워지면서 둔해진 선자의

움직임이 날씨로 인해 더욱 느려졌다. 하지만 선자의 일상은 편안했

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선자와 경희는 그들 자신과 밤늦게야 들


어오는 가장들을 돌보기만 하면 되었다. 이삭은 점점 늘어나는 신도

들을 보살피느라 교회에서 밤낮으로 오랜 시간을 일했다. 요셉은 낮

에는 비스킷 공장을 관리하고 밤에는 이카이노의 공장에서 기계를


수리해 돈을 더 벌었다. 네 사람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빨래와 청

소를 하는 것은 하숙집을 관리하는 일보다 훨씬 덜 힘들었다. 선자는


부산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느꼈다.

선자는 경희를 언니라고 부르며 그녀와 하루를 보내는 게 좋았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


런 관계는 그토록 과한 행복을 기대하지 않았던 두 사람에게는 예기

경희의꿈 195
치 못한 선물이었다. 경희는 더 이상 집에서 하루 종일 외롭게 지내
지 않아도 되었고>요셉은 이삭이 하숙집 딸을 아내로 데려와서 고마

워했다.
요셉과 경희는 선자가 임신한 이유를 자기들 나름대로 합리화해

서 오래전에 결론을 내렸다. 선자는 아무 잘못도 없이 해코지를 당했

乂 이삭은 천성적으로 희생을 자처하는 성격이라 그런 선자를 구해

주었다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선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물

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선자도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경희와 요셉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경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경 속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경희는 하나님이 자신을 져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실한 경희

는 교회에서 가난한 어머니들을 도우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꾸려 남편이 주는 돈을 아껴 저축도 했다. 요셉의 아

버지가 준 돈을 가지고 이카이노에 집을 사자고 한 사람도 경희 였다.


요셉은 그게 좋은 생각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왜 집주인에게 방세를

지불해야 하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게 무것도 없잖


아요” 그때 경희는 요셉을 설득하며 이렇게 말했다. 경희가 예산을

신중하게 짜서 관리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경지를 모두 잃어가던 양


가 부모님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경희는 쓰루하시 역 근처의 시장에 김치와 장아찌를 과는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었다. 선자가오면서 경희에게 자기 계획을 들어줄사

람이 생긴 것이었다. 요셉은 경희가 돈을 벌려고 일하는 것을 허락하


지 않았다. 그는 집에 돌아갔을 때 예쁜 아내가 저녁을 준비해놓고
활기차게 자신을 맞이해주기를 바랐모 그게 바로 남자가 열심히 일

196 파친코 O
하는 이상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다. 경희와 선자는 매일 세 끼를 준비

했다. 아침에는 전통적으로 따뜻한 국을 준비했고 점심엔 도시락을


싸주었으며, 저녁엔 가급적 따뜻한 음식을 준비했다. 냉장고도 없고

평양처럼 기온이 서늘하지도 않아서 경희는 음식을 버리지 않으려


고 자주 요리를 해야 했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이례적으로 따뜻한 날이 계속되었다. 보통 주

부라면 이런 날씨에 집 뒤쪽의 화덕에서 국을 끓인다는 것은상상만

질색할 법한 일인데 경희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녀는 장보기와 저녁거리로 뭘 준비할지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이카


이노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 여성들과는 달리 경희는 품위 있는 일

본어를 사용했모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인들과 흥정도 할 수 있

었다.

경희와 선자가 정육점에 들어서자 키가 크고 젊은 정육점 주인 다

나카가“어서 오세요!
”라고소리치며 그들을 맞이했다.

정육점 주인과 직원인 고지는 예쁜 조선인과 그녀의 임신한 동서


를 보고 반가워했다. 두 사람은 사실 큰손님은 아니었다. 돈을 많이

쓰지 않는 사람들이 었지만 대신 꾸준히 찾아왔다. 8대손인 다나카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가게 운영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가끔씩

큰돈을 쓰는 손님보다 매일 꾸준히 조금씩 돈을 쓰는 손님이 더 귀

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부들은 이 사업의 주춧돌이었고 조선


인 여자들은 일본인들처럼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래야 가게 주인들

이 좋아하는 손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조부가 조선인

이거나 부라쿠민일본의 신분제도아래에서 최하8에 속하는천민집단이 었다는 소문도 있

경희의꿈 197
는 이 젊은 정육점 주인은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라는 부모님
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분명히 시대는 바뀌 었지만 죽은 짐승을 만져

야 하는 도축업은 아직도 수치스러운 직업이었다. 중매쟁이가 그에

게 맞선을 잡아주기 어려워하는 주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런 탓에


다나카는 외국인들에 게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들은 경희에게 추파를 던지면서도 선자는 무시하기 일쑤였


다. 선자도 이제는 경희와 함께 다닐 때마다 유령이라도 된 것 같은

신세가 되는 것에 익숙해졌다. 경희는 미디스커트에 빳빳한 하안색


블라우스를 입어서 말쑥해 보였고 섬세한 이목구비 탓에 학교 선생

이나 점잖은 상인의 아내처럼 보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소에서 환

영을 받았다. 경희가 말을 하기 전에는 모두가 경희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나중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다들 경희


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자는자신이 못 봐줄 정

도로 못생긴 데다 옷차림이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사카에

서는 자신이 못생긴 여자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낡아서 해진 한복은

그런 차이를 확연히 보여주는 피할 수 없는 증표나 마찬가지였다. 선

자는 서양 옷이나 몸빼 바지를 입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새

옷에 돈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경희는 선자에게 출산하고

나면 새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경희가 남자들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묘 선자는 가게
구석으로 물러났다.

“오늘은 뭘 도와드릴까요,
보쿠 씨?” 다나카가 물었다.

두 달이나 지났음에도 선자는 아직도 남편의 성을 일본어 발음으

로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식민 정부의 강요로 조선인들은 이

198 파친코 O
름을 적어도 두세 개는 가지고 있었다. 고향에서 선자는 자신의 신분

증에 적힌 일본 이름, 그러니까 가네다 준코라는 이름을 쓸 일이 거

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공적인 업무를 볼 일이 전혀 없었


기 때문이다. 선자는 김씨 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여자가 남편의 성

을 따라가는 일본에서 선자의 이름은 백선자였고,보쿠 선자로 번역

되었다. 신분증에 적혀 있던 일본 이름도 반도 준코로 바뀌었다 조

선인들이 일본식 성을 골라야 했을 때 이삭의 아버지는 조선어로 반

대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반도라는 성을 선택했다. 그


렇게 해서 일본의 창씨개명 정책을 조롱했던 것이다. 경희는 그 모든

이름들이 머지않아 정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확신했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할 건가요 보쿠 씨?” 젊은 정육점 주인이 물

었다.
“정강이뼈와 고기를 조금 주실래요? 국을 끓이려고生” 경희가 라

디오 아나운서 같은 일본어로 말했다. 경희는 억양을 바꾸려고 일본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청취했다.


“바로 대령하죠; 다나카가 조선인들을 위해서 아이스박스에 넣어

둔 소뼈 더미에서 커다란정강이뼈 세 조각과소꼬리를 꺼냈다. 일본

인들은 뼈로 요리를 하지 않았다. 다나카는 국거 리용 고기 약간도 포

장했다.“이게 다인가요?”
경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36센입니^즈

경희가동전 지갑을 열었다. 요셉의 월급 봉투를 받을 때까지는 아


직 8일이 더 남아 있었고,
그때까지는 2엔 效센으로 버텨야 했다.
“죄송하지만 정강이뼈만 계산하면 얼마죠?”

경희의꿈 199
“10센입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오늘은 뼈만 사고>고기는 다음번

에 꼭 ^게 요 ”

“네,그러세요” 다나카가 고기를 다시 진열장에 넣었다. 이처럼 손

님이 돈을 충분히 가지고 오지 않을 때가 가끔 있지만 다른 손님들

과는 달리 조선인들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다. 물론 다나

카도 외상은 거절했다.

“국을 끓이려고요?” 다나카는 저렇게 우아한 아내가 자기 식사를

걱정해주고 적은 수입으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간다면 기분이 어

떨지 궁금했다. 장남인 다나카는 간절하게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도

축업자인데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서 쉽지 않았다.

“어떤 국인데요?”

“설렁탕이요” 경희는 그가 설렁탕이 무엇인지 알까 생각하면서 다

나카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만드는데요?” 다나카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계산대에

기댄 채 경희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다나카

는 경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심지어 치아마저 예떴다.

“먼저 뼈를 차가운 물에 조심스럽게 씻어야 해요 그러고 나서 끓

인 다음 그 물을 버리죠 그 물에는 국에 넣기 싫은 피와 찌꺼기가 가

득하거든요 다시 한 번 깨끗하고 차가운 물로 뼈를 끓이는데 국물이

두부처럼 하얗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끓여야 해 요 그러고는 무

와 과를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 죠 그럼 아주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국이 완성돼요”

“고기를 넣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200 파친코 O
“흰쌀과 국수를 넣으면 더 좋죠!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경희가 웃

으면서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드러난 치아를 가렸다.

남자들이 경희의 농담을 알아듣고 웃었다 쌀은 그들도 사먹기 힘

들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다.

“그거랑 김치를 같이 먹나요?” 다나카가물었다. 경희와 이렇게 오

랫동안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원인 고지와 경

희의 동서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다나카는 경희와 이야기를 나누어

도 괜찮다고 느꼈다 “김치는 좀 맵지만 구운 닭고기나 돼지고기와

같이 먹으면 괜찮은 것 같아요;

“김치는 모든 음식과 잘 어울리는 맛있는 반찬이에요 다음번에는

김치를 좀 가져다줄게요”

다나카는 뼈를 포장한 종이를 다시 펼쳐서 방금 전에 진열장에 다

시 넣었던 고기의 반쪽올 넣었다.

“많지 않지만 아기에게는 충분할 거예요” 다나카가 선자에게 미


소를 지 었고1선자는 정육점 주인이 자신을 알아봐주자 깜짝 놀랐다.

“황국의 건실한 일꾼을 키우려면 엄마가 잘 먹어야 하죠广

“공짜로 받을 수는 없어요” 경희가 당황해하면서 말했다 경희는

다나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정말

로 고기를 살 수가 없었다.

선자도 두 사람의 대화에 당혹스러웠다. 두 사람은 김치에 관한 이

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게 오늘 첫 거래예요 나눠 가지면 저한테도 복이 올 거예요”

다나카는 매력적인 여자에게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남자

라도 된 양 우쭐해하며 말했다.

경희의꿈 201
경희는 계산대 위에 놓인 흠 하나 없이 깨끗한 동전 접시에 10센

을 올려놓고 두 사람에 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가게 바깥에서 선자가 경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었다.

“주인이 고기 값을 받지 않았어. 고기를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모

르겠네:

“그 사람은 언니가 좋아가지고 선물로 준 거네예.” 선자는 고향의

식모 동희가 된 것처럼 깔깔거 렸다. 동희는 틈 날 때마다 남자들에

대한 농담을 하곤 했다. 엄마 생각은 자주 했지만 고향에서 식모로

일하는 언니들을 떠올린 것은 정말 한참 만이었다. “이제부터 다나카

씨를 언니 남자친구라고 불러야겠네 예.”

경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장난스럽게 선자를 찰싹 때렸

“네 아이에게 주는 거랬어. 네 아이가 커서 이 나라의 훌륭한 일꾼

이 될 거니까.” 경희가 얼굴을 찌푸렸다. “게다가 다나카" 씨는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알아.”

“남자들이 언제 그런 거에 신경이나 쓰는가예? 옆집 김 씨 아지매

한테 들었는데 길 끝에 사는 참한 일본 여자가 집에서 술을 만드는

조선 남자하고 결혼했다 카데예. 그 사람들 아이들은 혼혈이고예!”

선자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물론 돼지를

키우는 김 씨 아주머니의 이야기 중에 충격적이지 않은 것은 없었지

만 말이다. 요셉은 경희와 선자가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김

씨 아주머니와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양조업을 하는 일본 여자

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고 했다. 그 여자의 남편이 밀수로 감옥에

202 파친코 O
갇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언니가 저 근사한 정육점 주인하고 도망치면 많이 보고 싶을 낌

니더.”선자가웃으며 말했다.

“내가 미혼이래도 저런 남자는 고르지 않을 거야. 웃음이 너무 많

거든.” 경희가 선자에게 윙크를 했다. “나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주고>하나에서 열까지 다 걱정해주는 내 괴짜 남편이 좋아. 이


만하고 서두르자. 이제 채소를 사야 해. 그래서 고기를 A]지 않은 거

야. 구워 먹을 감자를 좀 찾아봐야겠어. 점심으로 감자를 싸주면 좋

을 것 같지 않아?”

“언니……”

“왜?”

“저희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어예. 채소 값에 연료

값,목욕탕 요금까지…… 제 평생 묵고사는 데에 이래 돈이 많이 드

는 건 처음 봤어 예. 고향에서는 텃밭이 있어서 채소를 돈 주고 사먹

은 적이 없었거든예. 생선은 또 어떻고예! 엄마가 생선 값이 이래 비

싼 줄 알았으면 다시는 안 먹었을 겁니더. 고향에서도 절약하면서 살

기는 했지만 우리가 그런 물건들을 얼마나 쉽게 얻었는지 몰랐어예.

손님들이 갖다주는 생선을 공짜로 먹었는데 여기서는 사과 값이 부

산의 소갈비보다 더 비싸잖아예. 저희 엄마도 언니처럼 돈을 신중하

게 쓰는 사람이었지만 언니처럼 절약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는 없었어예. 이삭 씨하고 저는 먹는 것만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돈

을 드리고 싶어예.”

사실 요셉 부부는 동생 부부에게 한 푼도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삭과 선자는 그 뜻을 따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

경희의꿈 203
로 나가서 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설령 그럴 수 있다하더라도

두사람이 이사를 나가면 경희의 기분이 크게 상할 게 분명했다.

“동생은 고향에서 훨씬 배부르게 잘 먹었을 거야.” 경희가 슬픈 표

정으로 말했다.

“언지예, 그런 말이 아니라예. 그 엄청난 생활비에 보탬이 못 되는

것 때문에 그냥 저희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예.”

“요셉과 나는 두 사람한테서 돈을 받을 수 없아 동생은 태어날 아

이를 위해서 돈을 모아야 해. 아이 옷과 기저귀도 사야 하乂 언젠가

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서 신사로 만들어야지. 그러면 멋질 것 같지

않아? 아이가 도련님처럼 학교를 좋아하乂 큰아버지처럼 책을 멀리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아이와 함께 살 거라고 생각하자 경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는 그동안 드렸던 기도의 응답인 것만 같

“엄마가 지난번 편지에 3엔을 넣어 보내줬어 예. 그거 말고도 저희

가 가져온 돈도 좀 있고예. 이삭 씨도 요즘에 돈을 버니까 좀 보탤 수

있을 거라예. 그러면 언니가 그래 많이 드는 생활비 때문에 걱정하거

나 김치를 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 예? 저희 식구 둘,아니

쪼매 있으면 셋이 될 텐데 저희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언니가 그렇

게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예.”

“선자야, 너 지금 나한테 너무 무례한 거 같은데. 난 너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야. 우리가 잘 꾸려나갈 수 있어. 게다가 네가 있어야 돈을

벌어 보탬이 되고 싶다는 내 소망도 이야기할 수 있어. 네가 없으면

쓰루하시 역에서 김치 파는 아줌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할 수

가 없다고” 경희가 웃었다 “넌 착한 동생으로 있어주면 돼. 내가 사

204 파친코 O
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성« 도 사고 네 아들을 도쿄의 의대에 보내

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줘.”

“아지매들이 다른 여자가 만든 김치를 사려고 할까예?”

“안 될 게 뭐 있 내 내가 만든 김치가 맛이 없을 거 같아? 우리 가

족은 평양에서 제일 맛있는 장아찌를 만들었어.” 경희가 턱을 들어

올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난 진짜 뛰어난

김치 아줌마가 될 거야 내가 절인 배추는 깔끔하고 맛있을 거라고”

“지금은 와 못 하는 데예? 배추와 무를 살 돈은 충분히 있잖아예.

언니 꿈을 이룰 수 있게 저도 도울 수 있고예. 우리가 많이 팔면 제가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예. 얼라가 태에4 ■도집에서

돌볼 수 있잖아예.”

“그래, 우리 둘이라면 진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요셉이

날 죽이려고 들걸. 요셉은 가정 주부가 밖에서 일하는 걸 싫어해. 절

대 안 된다고 할 거야. 네가 일하러 나가는 것도 싫어할걸.”

“그치만 저는 부모님하고 같이 일을 하면서 자랐는데예. 아주버님

도 그걸 아시잖아예. 저희 엄마는 손님들 시중을 들고 요리를 하셨지

예. 저는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셉은 구세대 남자야.” 경희가 한숨을 쉬었다. “난 아주 좋은 남

자와 결혼했어. 내 잘못이긴 하지만,아이가 있었다면 이렇게 따분해

하지 않았을 거야 난 그냥 빈둥거리기 싫아 이건 요셉의 잘못이 아

니야. 요셉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없어. 옛날이라면 아이를

못 낳는 나 같 은 여자는 버림받았을걸.” 경희는 어릴 때 들었던 애 못

낳는 여자들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그런

여자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난 남편 말을 따라야 해.

경회의꿈 205
남편은 항상 날 잘 돌봐주니까.”

선자는 그 말에 수긍할 수도,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어서 그냥

그 말이 허공에 맴돌도록 내버려두었다. 사실 요셉은 경희 같은 양반

가 출신의 여자는 집 밖에서 일을 해서는 안 되지만 선자는 평번한


서민의 딸이니 시장에서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런 차별에

도 선자는 마음 상하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경희가 여러모로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이 분명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자는 경희

와 함께 지내며 솔직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동안,경희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김치

파는 아주머니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면 훨씬 더 행복해하리라는 사

실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선자가 그 문제에 대해서 이래라저 래라 할 수 있는 처지

는 아니었다. 그래봤자 아주버님은 그 이야기를 ‘어리석은 여자들의

잡담’으로 치부하고 말 테니까. 선자는 다소 우울해하는 경희의 기분

을 바꿔주려고 밝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배추와

무를사러 걸음을 옮겼다.

206 파친코 O
213엔의 빚

경희는 문 앞에 나타난 두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두 남자는

경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뾰족한 얼굴의 키가 큰 남자가 미소를 더 자주 지 었지만, 키가 작

은 남자의 표정이 훨씬 더 친절해 보였다 두 사람은 노동자와 비슷

하게 검은 바지에 소매가 짧은 셔츠를 걸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은 값비싸 보이는 가죽 구두였다 키 큰 남자는 두드

러지게 티가 나는 제주도 억양으로 말을 했다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

서 접어 놓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당신 남편이 여기에 서명을 했어요” 키 큰 남자가 경희에게 공식

문서 같아 보이는 종이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서류의 일부는 조선어

였지만 대부분은 일본어와 중국어였다. 경희는 서류 상단 오른쪽 구

석에 적힌 요셉의 이름과 도장을 발견했다. “지불이 연체됐어요”

“전 모르는 일이에요 남편은 지금 일하러 가고 없어요”

213엔 의 빚 207
경희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한 손을 문에 올려놓은

채 남자들이 떠나주기를 바라며 말했다. “나중에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다시 찾아와 주세요”

선자는 두 손을 배에 올린 채 경희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선자의 눈

에는 남자들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체격으로 봤을 때 두 남자는

고향의 하숙집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경희 언니는 무척 당황한 것 같

^다 .

“아주버님은 오늘 늦게 집에 들어오실 거니까 나중에 다시 오이


소 ; 선자가 훨씬 큰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당신이 동서군요 그렇죠?” 키 작은 남자가 선자에게 말했다. 남자

가 미소를 짓자 # 에 ^ 3 J p \깊게 팼다.

선자는 남자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다물었다.

키 큰 남자는 경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싱긋 웃고 있었다. 남

자의 크고 네모난 치아는 물론이고 열은 분홍색 잇몸까지 훤히 드러

나 보였다.

“남편과는 이미 이야기를 해봤는데 우리를 무시하더라고요 그래

서 당신을 만나보려고 이렇게 집에 들렀죠; 키 큰 남자가 말을 멈추

고 경희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백경희라…… 내 사촌 이름도 경

희인데. 당신 일본 이름이 반도 기미코 맞죠?” 키 큰 남자가 큼직한

손을 문 위에 올리고는 선자를 흘껏 쳐다보았다. “당신 동서까지 만


나게 되다니 이거 두 배로 기쁜데,안 그래?” 두 남자는 서로 마주보

며 크게 웃었다.

경희는 다시 한 번 눈앞에 보이는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해할 수

208 파친코 O
가 없어요” 경희가 마침내 말했다.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백요셉이 우리 사장님께 120엔을 빚졌

어 요 ” 키 큰 남자가 두 번째 단락에 한자로 적힌 120이라는 숫자를

가리켰다 “당신 남편이 두 번이나 빚을 갚지 않았어요 오늘 당신이

남편에게 돈을 좀 갚으라고 말해주면 좋겠는데요”

“갚을돈이 얼마인데요?” 경희가물었다.

“매주 8엔에 이자까지 내야 합니다.”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경상

도 억양이 강한 남자였다. “집에 돈이 좀 있다면 지금 줄 수 있을까

요?” 키 작은 남자가 물었다 “20엔 정도 되거든요”

요셉이 준 돈은 다음 2주 동안 쓸 식비뿐이었모 경희의 지갑에는

겨우 6엔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돈을 남자에게 줘버리면 식구들이

굶어야 했다.

“총금액이 120엔이라면서예?” 선자가물었다. 선자는 그 서 류 내용

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선자의 말에 키 작은 남자가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

다.

“지금은 이자가 붙어서 거의 두 배가 됐어요 왜요? 돈 있어요?”

“오늘까지 치면 총금액은 213엔이 될 겁니다.” 암산에 능한 키 큰

남자가 말 했 ^•

“어머!” 경희가 놀라 소리쳤다. 충격을 받은 경희는 두 눈을 감은

채 문틀에 몸을 기댔다.

그때 선자가 앞으로 나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 드릴게

예.” 선자는 옷을 빨아달라던 하숙생 뚱보에게 하던 것과 다를 바 없

는 태도로 두 남자를 대했다 그녀는 심지어 두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213엔 의 빚 209
않았다.

“세 시간 후에 다시 오시소. 어두워지기 전에예.”

“그럼 나중에 뵙 죠 ; 키 큰 남자가 말했다.

두 여자는 쓰루하시 역 옆의 상점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천 가

게 창문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센베이 과자 가관대 앞에 멈춰 서지도

않았다. 친절한 야채 가게 주인들과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은 한 몸이 된 듯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동생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경희가 말했다.

“아부지한테서 이런 일에 대해서 들었어예. 원금을 갚지 못하면 이

자가 점점 높아져서 그 돈을 다 못 갚게 된다꼬예. 결국에는 빌린 돈

보다 훨씬 많은 빚을 지 게 된다고 아부지가 말씀하셨어 예. 잘 생각해

보이소 120엔이 어떻게 213엔이 됐겠어예?”

선자의 아버지는 묘목이나 장비를 사려고 적은 돈을 빌렸다가 모

든 것을 잃어버린 이웃들을 봤었다. 그런 이웃들은 고리대금업자들

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원금에다 가진 곡식까지 모두 줘야 했다.

선자의 아버지는 고리대금업자들을 혐오했고 종종 선자에게도 빚

을 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며 조심하라고 했다.

“내가 알았다면 우리 부모님께 돈을 보내지 않았을 거야.” 경희가

중얼거렸다.

선자는 그녀들을 힐끗거리는 혼잡한 거리의 그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선자는 전당포 주인에 게 할 말

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언니, 언니가 조선어 간판을 봤다고 했지예? 그럼 그 가게 주인도

210 파친코 O
조선인이겠네 예?”

“글쎄. 나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두 여자는 나지막한 벽돌 건물 정면에 달린 조선어 간판들을 따라

가다가 그 뒤쪽으로 난 널찍한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갔다. 전당포의

사무실 문에는 커튼으로 가려진 창구가 하나 있었다. 선자는 조심스

럽게 그 문 을 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6월의 따뜻한 날이었지만 창구 뒤쪽에 있던

노인은 하얀색 셔츠 안쪽에 초록색 목도리를 매고 갈색 조끼까지 입

고 있었다. 거리를 마주보는 네모난 창 세 개는 모두 열려 있었고 반


대쪽 구석에는 선풍기 두 대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서로 닮은

통통한 얼굴의 젊은 남자 둘이 중앙에 있는 창문 옆에서 화투를 치

고 있었다 두 여자가 들어서자 남자들이 힐끗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

었다.

“어서 오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전당포 주인이 조선어로 물었다.

고향이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억양이었다. “앉으시겠어요?” 전

당포 주인이 의자를 가리켰고,선자는 서 있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

다 경희는 선자 옆에 서서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선자가 손바닥을 펴서 회중시 계를 보여주었다.

“아제요,이거 드리면 얼마 주실 수 있습니꺼?”

“어디서 난 거 죠 ?”

“친정엄마가 주신 깁니더. 은이 확실하고 그 위에 도금한 거라고

했어 예.” 선자가 말했다.

“이거 과는 걸 어머니가 아나요?”

“팔라고 주신 겁니더. 아기를 위해서예.”

213엔 의 빚 211
“시계를 맡기고 돈을 빌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시계를 팔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 전당포 주인이 물었다 한 번 빌린 돈은 갚기가 힘들

테니 담보물을 계속 갖고 있을 수 있었다.

선자가 천천히 말했다. “팔고 싶습니더. 아제가 이걸 사기 싫다 카

면 여기 오래 있을 필요가 없지예.”

전당포 주인은 눈앞의 여자애가 이미 다른 전당포에도 들렀다 온

건지 궁금해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전당포가

세 개나 더 있었다 다른 전당포 주인들은 조선인이 아니지만 여자애

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면 시계를 쉽게 팔 수 있었다. 같이 온 예쁘장

한 여자는 옷차림 때문에 일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쁜 여자가자

기 시계를 팔려고 임신한 소녀를 데리고 왔을 수도 있었다.

“시계를 팔아아: 한다면 고향 사람인데 당연히 기쁘게 도와드려야

죠;전당 포 주 인 이 말했다.

선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시장에서는 말을 적게

하라고 가르쳤다.

경희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 더 차분한 선자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전당포 주인은 시계의 은색 덮개를 열어서 그 속으로 보이는 기계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굉장히 특별한 시계라서 눈앞의 여자애

엄마가 이런 것을 갖고 있었다고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계는 일

년 정도 된 것 같았고^ 흠집 하나 없었다. 전당포 주인은 시계를 뒤집

어서 책상 위의 초록색 가죽 패드 위에 올려놓았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손목시계를 선호해요 이걸 팔 수 있을지 잘

모 르 겠 ^요 ,

212 파친코 O
선자는 전당포 주인이 그 말을 하고 나서 눈을 자주 깜박거 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좀 전에 자신과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을

한 번도깜박거리지 않았다.

“살펴봐주셔서 감사합니더.” 선자는 이렇게 말하고 전당포 주인에

게서 등을 돌렸다. 경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선자가 시계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긴 치마 끝을 모아 잡았

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요” 전당포 주인이 살짝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선자가 돌아섰다.

“돈이 당장 필요하다면 이 더운 날에 그 몸 상태로 걸어 다니는 것

보다 여기서 시계를 파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출산일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말이죠 엄마를 잘 돌봐드릴 수 있

는 아들이 태어나면 좋겠군요” 전당포 주인이 말했다.

“50엔 드리죠;

“200엔 주이소 그건 적어도 3〇 〇 엔의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더. 스

위스에서 만든 새 물건이니까예.” 선자가 말했다.

창가에 있던 두 남자가 화투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두 사

람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곳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지 그래요; 전당포 주인은 여자애의 거만한 태도에 짜증이 난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

선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본인이 주인인 전당포에 시계를

팔면 전당포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할까 봐 두려웠다. 이곳에서는 모

213엔 의 빚 213
든 사업 거래에 경찰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한수한테서 들

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더. 아제 시간을 더 이상 멧고 싶지 않네예.” 선자가 말했

다.

선자의 말에 전당포 주인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경희는 선자가 막 오사카에 도착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그때 선자

는 너무도 무력해 보였고 혹시 길을 잃기라도 할까 봐 이름과 주소

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다니게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선자

는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든든한 사람으로 보였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무슨 일을 했나요? 부산에서 온 것 같은데;

전당포 주인이 물었다.

선자는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느라 잠시 뜸을 들였

다.

“거기 시장에서 일했나요?”

“하숙집을 운영하십니더.”

“분명히 현명한사업가시겠네요” 전당포 주인은 임산부의 어머니

가 창녀거나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상인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었

다. 시계도 훔친 것일 수 있었다 임신한 소녀는 말씨와 옷차림으로

보아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아가씨, 어머니가 이걸 팔라고


준 게 확실하단 말이죠_혹시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아가씨 이

름과 주소를 기록해둬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선자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 좋아요 125엔까지 쳐드리죠;

“200엔 주셔야 됩니더.” 선자는 그 돈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214 파친코 O
는 없었지만 욕심이 많아 보이는 전당포 주인이 50엔에서 125엔까

지 값을 높여 부를 정도라면 이 시계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란 생

각이 들었다.

전당포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책상 옆으로 다가온 젊은

이들도 같이 웃었다 두 젊은이 중에서 어린 쪽이 이렇게 말했다. “당

신은 여기서 일해야겠는데요”

전당포 주인이 가슴에 팔짱을 꼈다 전당포 주인은 시계를 갖고 싶

었다 그는 이 시계를 살 만한사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버지, 저 어린 엄마가 부르는 값을 쳐줘01겠는데요 저렇게 고

집을 부리다니 !” 전당포 주인의 둘째 아들이 말했다. 그는 자기 아버

지가 이 거래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좀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소녀가 안

돼 보였다. 소녀는 곤경에 처할 때마다 금반지를 팔러 오는 그런 평

범한 여자들과는 달랐다.

“당신이 여기 온 걸 남편도 알고 있어요?” 이번에도 전당포 주인의

둘째 아들이 물었다.

“네.” 선자가 대답했다.

“남편이 술주정뱅이거나 도박꾼인가?” 전당포 주인의 둘째 아들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여자들을 많이 봐왔고,그네들의 사정은 다 거기

서 거기였다.

“언지예.” 선자는 더 이상 묻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단호한 목

소리로 말했다.

“175엔.”전당포주인이 말했다.

“200엔.” 선자는 손바닥에 닿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금속의 감촉을

213엔 의 빚 215
느낄 수 있었다. 한수라면 자기가 부른 값을 절대 낮추지 않았을 것

이다.

전당포주인이 반박했다. “내가 그걸 팔 수 있을지 어떻게 알지?”

“아버지, 같은 땅에서 온 어린 엄마를 도와주셔야죠; 이번에는 큰

아들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전당포 주인의 책상은 선자가 난생 처음 보는 나무로 만든 것이었

다. 짙은 갈색 바탕에 아이 손바닥 크기만 한 소용돌이무늬가 있었

다. 선자는 책상 상판에 있는 눈물방울 모양의 소용돌이무늬 세 개를

헤아려 보았다. 한수와 버섯을 따러 갔을 때 그곳에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있었다. 숲 속에 양탄자처럼 깔려 있던 퀴퀴한 냄새가 나는

젖은 나뭇잎들, 버섯으로 가득 찬 바구니, 그와 함께 누웠을 때 느꼈

던 날카로운 통증…… 그 모든 추억이 사라지지 않았다. 선자는 한수

를 지워버려야 했다. 잊고 싶은 남자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짓을 그만

둬야 했다.

선자가깊이 숨을들이쉬었다. 경희는 긴장한탓에 양손을 거의 비

틀듯이 맞잡고 있었다.

“아제가 이걸 사고 싶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예.” 선자가 조용히 말

하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 순간 전당포 주인이 한 손을 들어 올려 선자에게 기다리라고

신호하고는 금고가 있는 뒷방으로 들어갔다.

두 남자가 돈을 받으러 돌아왔다. 경희와 선자는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제가 돈을 내주면 빚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걸 우째 암니꺼?” 선자

216 파친코 O
가 키 큰 남자에게 물었다.

“우리 사장님이 약속어음에다 빚이 청산됐다고 서명해줄 겁니다.

당신이 돈을 갖고 있다는 건 어떻게 믿죠?”

“당신 사장님이 여기로올 수 있나예?” 선자가 물었다.

“미쳤군요” 키 큰 남자가 선자의 요구에 충격을 받아 말했다.

선자는 눈앞의 남자들에게 돈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자는 경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문을 살짝 닫으려고 했지만 남자

가 발로 문을 밀었다.

“내 말 들어봐요 진짜 돈을 갖고 있다면 우리와 함께 사무실로 갈

수 있어요 당장 사무실로 안내하죠,

“어디에 있는데요?” 경희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술 가게 옆에 있어요 멀지 않아요;

사장이라는 사람은 성실해 보이는 젊은 조선인이었고 경희보다


나이가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의사나 교사처럼 평범한 정장에 금

테 안경을 썼으며,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서 사려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봐도 고리 대금업자라고 생각하지 못할 그런 인상

의 남자였다. 사무실은 아까 갔던 전당포 가게만 했고^ 출입문 반대

쪽 벽 선반에는 일본어와 조선어로 된 책이 늘어서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의자들 옆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남자애 한 명이 컵에 뜨

거운 녹차를 따라서 갖다주었다. 경희는 남편이 왜 이 남자한테서 돈

을 빌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경희가 갚을 돈을 모두 건네주자 고리대금업자는 고맙다고 말하

고는 붉은 도장을 익속어음에 찍어 어음을 취소시켰다.

213엔 의 빚 1X 7
“제가 도와드릴 다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고리

대금업자가 경희를 보면서 이야기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에서는 서로 돕고 살아이죠 언제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언제,그러니까 남편이 언제 그 돈을 빌렸나요?” 경희가 고리대금

업자에게 물었다.

“2월에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어요 남편 분과는 친구 사이라서

당연히 그 부탁을 들어드렸죠;

두 여자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은 이삭과 선자의 입국

허가증을 받으려고 돈을 빌린 것이 었다.

“감사합니다.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경희가 말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걸 알면 남편 분이 0}주 기뻐하실 겁니다.” 고리

대금업자는 여자들이 돈을 어떻게 이처럼 빨리 구했는지 궁금해하

면서 말했다

두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저녁 준비를 하러 집으로 돌아

^다 .

218 파친코 O
엄마가 된 소너

“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난 거야?” 요셉이 취소된 약속어음을 움켜쥐

면서 소리쳤다.

“선자가 어머니한테서 받은 시계를 팔았어요; 경희가 대답했다.

이 거리에서는 언제나 매일 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거나 아이가

울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난 적이 한 번

도 없었다.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요셉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

다. 선자는 거실 뒤쪽 구석에 딱 붙어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바위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눈물이 선자의 붉어진 두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삭은 아직 교회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200엔이 넘는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이삭도 그걸 알

고 있어?” 요셉이 선자에게 소리쳤다.

경희가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요셉과 선자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머니한테서 받았대요 아기를 위해서 팔아 쓰라고요”

엄마가된소녀 219
선자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골반과 등에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선자는 두 눈을

꼭 감고 머 리를 두 팔에 묻었다
“시계를 어디에 판 거 야 ?”

“야채 가게 옆에 있는 전당포요; 경희가 말했다.

“정신 나갔어? 대체 어떤 여자가 전당포에 간대?” 요셉이 선자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여자가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바닥에 앉은 선자가 요셉을 올려다보며 간청했다. “언니 잘못이 아

닙니더.”

“전당포에 가도 되는지 이삭에게 물어봤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동생은 그냥 우리를 도우려고 그

랬던 거잖아요 게다가 임신한 상 태 라 요 동생을 가만히 내버려둬

요 ” 경희는 선자가 요셉에게 말대답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선자의

시선을 피했다. 요셉은 선자가 이삭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 아주버니가 모든 비용을 다 치러야 한단 말인가? 왜

그가 모든 돈을 관리해야 하지? 지난번에는 선자가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리를 해서 요셉과 말다툼을 한 적도 있었다.

“선자는 우리를 걱정한 거예요 선자가 그 아름다운 시계를 팔아서

저도 마음이 안 좋아요 하지만 선자를 이해하려고 해보세요 여보.”

경희가 요셉의 한쪽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멍청한 여자들 같으니라고! 그 거리를 지날 때마다 마주칠 텐데

이제 그 남자들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 어리석은 여자들이 내 빚을

갚았다는 사실을 그놈들은 다 알고 있는데! 불알도 없는 놈 취급을

받게 생겼다고”

220 파친코 O
요셉은 한 번도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경희는 그

가 선자를 모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요셉은 선자를 멍청하고

어리석은 여자라고 했다. 경희도 선자의 행동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빚은 갚는 것이 더 현명한 행동이었고

경희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저축도 가능했을 것이다.

선자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아랫배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통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선자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자

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여보,제발, 이해해주세요” 경희가 말했다.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자의 두 다리는 거리의 술주정뱅

이처럼 벌어져 있었고,두 손이 부푼 배를 겨우 받치고 있었다. 선자

의 어머니가 어떻게 금시계를 갖고 있었을까? 오래전이었지만 요셉

은선자의 어머니와아버지를 만나 적이 있었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

는 남에게 빌린 작은 집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가난한 부부의 아들

에다 몸도 성치 못했다. 그의 아내가 어디서 그렇게 비싼 물건을 얻

었을까? 그들의 하숙생들은 주로 어부거나 생선 시장에서 일하는 일

꾼들이었다. 선자가 어머니한테서 30엔이나 的엔짜리 금반지 몇 개

를 받았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면 10엔짜리 옥반지라거나. 선자

가 홈친 시계일까? 이삭이 도둑이나 창녀와 결혼을 한 걸까? 요셉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서 밖으로 나가버 렸다.

이삭은 집에 돌아와서 울고 있는 여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좀

더 조리 있는 설명을 듣고 싶어서 이삭은 두 여자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고는 여자들의 뚝뚝 끊어지는 설명을 귀 기울여 들었다.

엄마가된소녀 221
“그래서 형은 어디로 갔어요?” 이삭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원래는 이렇게 나가지 않아요 그 사람이 이렇게 나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경희는 선자의 기분을 더 이상 건

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을 멈췄다.

“형은 괜찮을 거예요: 이삭이 이렇게 말하고는 선자를 돌아보았

다.

“당신이 고향에서 그렇게 귀한 걸 가져왔는지 몰랐어요 어머니한

테서 받았다고요?” 이삭이 주저하며 물었다.

선자가 여전히 울고 있어서 경희가 대신 고개를끄덕였다.

“그래요?” 이삭이 다시 선자를 바라보았다.

“당신 어머니가 어디서 그 시계를 얻었어요?” 이삭이 물었다.

“안물어 봤 어 예 .아 마 누 가 돈 대 신 준 거 겠 지 예 .”

“그렇군요” 이삭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 채 고개

를 끄덕였다.

경희가 선자의 열이 나는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이에게 잘 설명해

주시겠어요?” 경희가 이삭에게 부탁했다. “도련님은 저희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이해하시죠?”

“네, 그럼요 형은 저희를 도우려고 그 돈을 빌린 거잖아요. 선자는

그 빚을 갚으려고 시계를 팔았고요 그러니까 선자는 우리가 여기 올

수 있게 도우려고 시계를 판 셈이죠 여기 오는 데 필요한 입국 허가

증은 비싸니까요. 형이 그 큰돈을 어떻게 그처럼 빨리 구했겠어요?

제가 먼저 그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순진하고 아이

같아서 형이 언제나 절 돌봐주고 있네요 선자가 그 시계를 팔아야

했다니 안타깝지만 일단 빚은 갚는 게 낫죠、형에게도 잘 이야기할게

222 파친코 O
요 형수님. 다들 걱정 말아요” 이삭이 여자들에게 말했다.

경희가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마치 찌르는 듯한 경련이 선자의 옆구리에 일었다. 선자

는 뒤로 쓰러질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으음,
^음 !

“아니? 이건……?”

선자의 다리를 타고 따뜻한 물이 흘러내렸다.

“산파를 불러와야 할까요?” 이삭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이 거리 아래쪽으로 세 집 건너에 사는 옥자 언니를 불러와요; 경

희가 말하자 이삭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경희가 선자의 손을 잡고 선자를 달랬다

“동생은 이제 엄마가 할 일을 하는 거야. 여자들은 고통을 겪는 거 알

지? 아, 선자야, 네가 아프니까 내 마음도 너무 아파. 경희가 선자를

위해 기도했다. “주님,
제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선자는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으려고 치마를 움켜쥐고 입 안

에 넣었다. 계속해서 칼에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선자는

입 안의 거친 천을 세게 깨물었다. “엄마, 엄마.” 선자가 소리 내어 울

기 시작했다.

산파인 옥자는 제주도 출신의 쉰 살 먹은 조선인이 었고,이 빈민가

에서 많은 아이들을 받았다. 고모한테서 훈련을 잘 받은 옥자는 산파

일과 간호 일,그리고 아기 돌보는 일을 해서 자신의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여섯 아이의 아버지인 남편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라는 작자는 살아 있기는 했지만 언제나 술에 취해 살았다. 때문에

엄마가된소녀 223
옥자는 산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공장이나 시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동네 여자들의 아이들을 봐주었다.

이번 출산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길쭉하니 잘생겼고,

산고는 어린 엄마에게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짧게 끝난 편이

었다. 또 고맙게도 아이가 한밤에 나온 것이 아니어서 산파의 저녁

준비를 약간 방해했을 뿐이었다. 옥자는 함께 사는 며느리가 또 보리

밥을 태우지 않았기를 바랐다.

“쉬, 쉬, 잘했어.” 옥자가 아직도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는 이제 막

엄마가 된 소녀를 달랬다 “아들이 아주 튼튼하고 잘생겼어. 이 검은

머리 좀 봐 ! 자네는 이제 좀 쉬어야해. 곧 있으면 에게 젖을물려

야 하니까.” 옥자가 떠나려고 일어서기 전에 말했다.

“에구, 이 망할 놈의 무릎 같으니라고.” 옥자는 산모의 가족들에게

돈을 찾아올 시간을 주려고 무릎과 정강이를 문지르면서 천천히 일

어섰다.

경희가 옥자에 게 3엔을 건네주었다.

옥자는 덤덤하게 돈을 받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날 불러.”


경희가 옥자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경희는 마치 자신이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아기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경희는 아기의 새까만 머리와

작은 얼굴, 짙은 남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심장이 짜릿해지

는 것 같았다. 아이는 경희에게 성경 속에 나오는 삼손을 떠올리게

했다.

경희는 배추를 절일 때 쓰는 망가진 대아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아이

를 씻기고 나서 깨끗한 수건으로 감싸 이삭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도련님이 아버지가 됐어요 아주 잘생겼죠?” 경희가 미소 지

224 파친코 O
으며 말했다.

이삭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어,전 선자에게 줄 미역국을 끓여야겠어요 선자는 바로 국을 먹

어야 하거든요” 경희는 아이를 안고 있는 이삭을 거실에 내버려둔 채

선자를 보러갔지만 선자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경희는 부엌에서 마

른 미 역을 차가운 물에 담가놓고 남편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다음 날 아침, 집 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희는 밤새 잠들지 못했

다 요셉이 전날 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삭도 자지

않고 기다리려고 했지만,경희가 다음 날 아침에 설교를 해야 하고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교회에서 일해야 하니까 잠을 자라고 했다. 선

자는 아주 깊이 잠들어서 코까지 골았고 거의 뒤척이지도 않았다.

경희는 요셉을 기다리면서 부엌을 청소하고 아침을 준비하고 아기

옷을 바느질했다. 그러면서도 몇 분마다 창밖을 힐끗거 렸다.

이삭이 아침을 다 먹었을 때 요셉이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더러워진 안경을 쓴 요셉의 얼굴은 까칠해 보였다. 경희는 남편을 보

자마자 부엌으로 가서 아침을 준비 했다.

“형,괜찮아?” 이삭이 일어섰다.

요셉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끄덕였다.

“아이가 태어났어. 남자아이야.” 이삭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삭의 말에도 요셉은 아무 대꾸 없이 나지막한 아카시아 나무 밥

상 옆 바닥에 앉았다. 그 밥상은 고향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요셉은 밥상을 만지면서 부모님을 떠올렸다.

경희가요셉 앞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가된소녀 225
“당신이 나한테 화가 난 거 알아요 하지만 당신도 뭔가를 좀 먹고

쉬어야죠; 경희가 요셉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형,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선자는 아직 어려. 그냥 우리가

걱정됐던 거 야 사실 그 빚은 내가 진 거나 마찬가지고……”

“우리 가족은 내가 알아서 다 돌 볼 수 있어.” 요셉이 말했다.


“알아■
. 하지만 내가 형에게 예상치 못했던 짐을 지웠고,형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었아 다 내 잘못이야 선자는 우리를 도우려고 했던

거야”

요셉이 두 손을 맞잡았다. 요셉은 이삭의 말에 반대하거나 이삭에

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동생의 슬픈 얼굴은 요셉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삭은 우수한 예술작품처럼 보호해야 하는 존재였다 요셉은

밤새도록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조선인들이 자주 찾는 술집에서 도

부로쿠일란) 탁주한 병을 마시면서 병약한 이삭을 오사카로 데려온 것

이 잘한 짓인지 고민했다. 이삭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선자가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면 이삭은 어떻게 될까? 경희는

이미 선자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고 아이까지 태어나면 한 명

을 더 책임져야 했다 양가 부모님도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복

잡한 술집에서는 남자들이 술을 마시며 던지는 농담 소리가 크게 울

려댔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중 돈 걱

정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 낯설고 살기 힘든 땅에서 가족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두려워하지 않는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요셉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형, 형은 아주 좋은 사람이야. 형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잘 알

고 있어.” 이삭이 말했다.

226 파친코 O
요셉은 조용씩 흐느끼기 시작했다.

“선자를 용서해줄 거지? 선자가 먼저 형을 찾아가지 않은 걸 용서

해줄래? 형에게 빚지게 한 날 용서해줄 거지? 우리를 용서해줄 수 있

지?”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 고리대금업자한테서 공

장에서 힘들게 일하거나 집에서 부업을 하는 아내들에게 염치없이

붙어사는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생겼다. 아내와 동생의

임신한 아내가 훔친 것일지도 모르는 시계로 자신의 빚을 갚았으니

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넌 일하러 가야지? 일요일이야.” 요셉이 말했다.

“응,
그래야지. 형수님이 선자와 아이를 보살펴주겠다고 하셨어.”

“어서 가봐.” 요셉이 말했다.

요셉은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요셉은 집 밖으로 나서는 이삭을 따라나가 동생의 손을 잡았다.


“넌 이제아버지가 됐어;

“응.” 이삭이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정말잘됐어.”요셉이 말했다.

“형이 아이 이름을 지어 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답장을 기

다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여기서는 형이 우리 집 가장이니

까……” 이삭이 말했다.

“내가 아이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되지.”


“아니, 형이 지어줘야 해.”

엄마가된소녀 227
요셉은 숨을 들이쉬고 텅 빈 거리를 바라보다 이삭에게 시선을 돌

렸다.

“노아.”

“노아.” 이삭이 요셉을 따라 말하며 미소 지었다. “좋아, 근사한 이

름이야.”

“노아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신 일을 행했지. 불가

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믿었어.”

“오늘은 형이 설교를 해야겠는데.” 이삭이 형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형제는 교회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키가 크고 약하지만 결단력

있는 한 남자와 키가 작지만 강인하고 재빠른 한 남자가 나란히 걸

었다.

228 파친코 O
독 한 시련
오 사 카 ,1939년

요셉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문 앞에서 두 발을 떡 벌리고 섰다.

여섯 살짜리 조카가 일주일 내내 기다렸던 사탕을 노리고 달려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을 천천히 밀어

서 열었다.

하지만 조용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요셉은 미소를 지었다. 아하, 요 녀석이

숨어 있구나!
“여보,나 왔어.” 요셉이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사탕 봉지를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며 연극하듯이 말했다. “어허,

노아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집에 없나 본데. 그럼 노아한테 줄

사탕을 내가 먹을 수 있겠는걸. 아니면 노아 동생에게 줘도 되겠

어. 오늘 우리 모자수가 아주 운이 좋네. 처음으로 사탕 맛을 보겠

어. 아무리 어려도 사탕은 먹을 수 있겠지! 모자수가 태어난 지 벌

혹독한시련 229
써 한 달이 됐으니 노아 형처럼 이 큰아버지와 레슬링을 할 수 있

을 거야. 모자수도 강해지려면 이 호박 사탕을 먹어야 하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요셉은 쪼글쪼글한 사탕 포장지를 찢어 보

란 듯이 펼쳐서 사탕을 입에 넣는 척 했다.

“이야, 이거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서 제일 맛있는 거잖아! 여


보 이리 나와 봐. 당신도 좀 먹어봐! 진짜 맛있어!” 요셉이 평소에

노아가 잘 숨는 옷장과 문 뒤를 확인하면서 사탕 씹는 소리를 냈다.

노아는 갓난아기인 동생 모자수 이야기만 들어도 바로 튀어나올

아이였다. 원래는 얌전한 아이였는데 최근에는 틈만 나면 동생을

꼬집으며 말썽을 부렸다.

요셉은 부엌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난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반찬들이 문 옆의 작은 탁자에 놓여 있었고, 밥솥은 텅 비

어 있었다. 요셉이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항상 저녁이 준비되어 있

었다. 물을 붓고 감자와 양파를 썰어서 넣어 놓은 반쯤 찬 국 냄비

는 불에 올리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요셉은 토요일 저녁 식사를

제일 좋아했다. 일요일에는 일을 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아무것

도 준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저녁을 느긋하게 먹고

나면 가족 모두가 함께 목욕탕에 갔다. 요셉은 부엌 뒷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지만 더러운 홈통밖에 보이지 않았다. 옆집인 돼지

아줌마네 큰딸은 식구들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열린 창문 밖

을 힐끗거 리지도 않았다.

요셉은 식구들이 모두 시장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거실

바닥 방석에 앉아 신문 하나를 펼쳐들었다. 전쟁에 관한 기사들이

눈에 들 어 ^다 .

230 파친코 O
‘일본이 농촌 경제에 기술적 진보를 가져와 중국을 구제할 것이

다. 일본이 서방 제국주의의 치명적인 손아귀에서 아시아를 보호

할 것이다. 일본의 두려움 없는 진정한 우방국가인 독일만이 서방

의 악당들에게 맞서 싸우고 있다:

요셉은 이 런 기사들을 믿지 않았다. 허위 선전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요셉은 매일 신문 서너 개를 읽으면서 서로 다른 사실들

과 중복되는 사실들 가운데서 몇 가지 진실을 찾아냈다. 오늘 밤에

는 모든 신문에 똑같은 이야기들이 실렸다. 전날 밤에 검열자들이

유독 열심히 일을 한 모양이었다.

조용한 집 안에 혼자 있자 요셉은 불안해졌다. 저녁을 먹고 싶

었다. 경희가 시장에 뭔가를 사러 갔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자와 노아, 갓난아기까지 나갈 리는 없었다. 이삭은 분명히 교회

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 요셉은 신발을 신었다.

거리로 나갔지만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

었다. 교회에 도착했는데도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교회 뒤쪽 사무

실에는 평소처럼 바닥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며 중얼거

리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요셉은 여자들이 고개를 들 때까지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백 목사님이나 류 목사님을 보셨나요?”

거의 매일 저녁 교회에 오는 중년의 주머니들이 백 목사의 형

을 알아보았다.

“백 목사님이 잡혀갔어요.”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주머니가

소리쳤다. “류 목사님과 중국인 후도 잡혀갔고요. 그분들을 도와드

혹독한시련 231
려야… … ”

“뭐 라고요?”

“경찰이 오늘 아침에 그분들을 잡아갔어요. 다들 신토 신사에 참

배하러 갔는데 관리하던 사람이 후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 때 주기도문을 외우는 걸 알아챘어요. 경찰이 후를 심문했고, 후

는 신사참배 의식이 우상숭배라고 말하며 더 이상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류 목사님은 후가 잘 몰라서 한 소리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경찰을 설득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후가

류 목사님의 말에 반박했어요. 백 목사님도 설명하려고 했지만 후

가 용광로로 걸어 들어갔죠혹독한시련을선택했다는 비유적 표현.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처럼 말이에요! 그 이야기 아시죠?”

“네, 네.” 요셉은 여자들의 종교적 흥분에 짜증이 나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다들 경찰서에 있나요?”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노아가 경찰서 계단에 앉아서 잠든 동생을 안고 있었다.

“큰아버지, 동생이 너무 무거워요.” 노아가 큰아버지를 보자 안심

이 되었는지 샐쭉 웃으며 소근거렸다.

“넌 아주 훌륭한 형이구나, 노아. 큰엄마는 어디 계시니?” 요셉이

물었다.
“안에요.” 노아가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고갯짓으로 경찰서를

가리켰다. “큰아버지, 모자수를 안아줄 수 있어요? 팔이 너무 아파

요.”

232 파친코 O
“조금만 더 여기서 기다릴 수 있지? 곧 돌아오마. 아니면 엄마를

보내줄게.”

“모자수를 꼬집지 않고 잘 안고 있으면 엄마가 사탕을 준다고 했

어요. 애들은 안에 들어가면 안 된대요.” 노아가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배가 고파요. 여기에 아주, 아주 오래 있었어요.”

“큰아버지도 사탕을 줄게. 곧 돌아오마.” 요셉이 말했다.

“하지만 큰아버지, 동생이… …”

“알아,노아. 하지만 넌 아주 힘이 세잖니.”

노아는 제일 좋아하는 큰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어깨

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요셉은 경찰서 문을 막 열려고 하다가 노아의 목소리에 뒤를 돌

보았다.
“큰아버지,모자수가 울면 어떡하죠?”

“모자수를 안고 걸어 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주거라. 큰아버지가

어린 널 재웠듯이 말이야. 기억나지?”

“아뇨,기억 안 나요.” 노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

했다.

“곧 나 올 게 :

경찰은 이삭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여자들은 경찰서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자는 몇 분마다 밖 ^로 나가서 노아와 모자수

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아이들은 경찰서에 들어올 수 없었고, 일본

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경희뿐이라서 경희가 안내 데스크 근처에

남아 있어야 했다. 요셉이 대기실로 들어갔을 때 경희가 숨을 급히

혹독한시련 233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경희 옆에 앉아 있는 선자는 웅크린 채 울

고 있었다.
“이삭이 여기 잡혀 있어?” 요셉이 물었다.

경희가 고개를 끄덕 였다.

“조용히 말해야 해요.” 경희가 선자의 등을 계속 토닥거리면서

말했다. “누가 엿들을지도 몰라요.”

“교회 아줌마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줬어. 그 중국 사람은

참배를 하다가 왜 그런 소동을 일으킨 거야?” 요셉이 속삭였다. 고

국에서 식민 정부는 기독교인들을 모아서 매일 아침마다 신사참배

를 시켰다. 여기에서는 자원한 지역사회 지도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만 그런 일을 시켰다. “벌금을 내게 될까?”

“아닌 것 같아요. 경찰관이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겠다고해서… … ”

“이삭은 감옥에서 견딜 수 없어. 그건 불가능해.” 요셉이 말했다.

요셉은 안내 데스크에 가서 양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허리를 깊

이 숙여 인사했다.

“제 동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요 선생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

답니다. 동생은 감옥에서 지내기 어려울 거예요. 결핵에 걸렸다가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동생이 집으로 갔다가 내일 다시


경찰서에 와서 심문을 받을 수는 없을까요?” 요셉이 공손한 일본

어로 물어보았다.

경찰은 그런 호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옥은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로 가득 차 있었

234 파친코 O
고 ,그들의 가족들 말을 빌자면 거의 모 든 사람들이 건강이 안 좋

아서 감옥에서 지낼 수 없었다. 문제아 동생을 위해 간청하는 형이

안됐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목사는

오랫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런 종교 운동가들은 언제나 그랬다.

전시에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말썽꾼들을 엄중하게 처벌해야 했

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조선인들은 문제를 일

으키고 나서 변명을 했으니까.

“여자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 목사는 심문을 받고 있

고, 당신들은 그를 만날 수 없어요. 이건 시간 낭비입니다.”

“선생님, 제 동생은 어떤 식으로든 천황폐하나 정부에 저항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일에는 관여한 적이 없어요. 제 동생은 정치

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

“지금은 면회를 할 수 없어요. 당신 동생은 모든 죄목이 벗겨지

면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경찰이 정중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고한 사람을 여기에 가둬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도

없어요.” 경찰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나요?” 요셉은 지갑이 든 주머니를 두드

리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나나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경찰이 짜증스럽게 말했

다. “뇌물을 먹일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랬다가는 당신 동생의

죄가 더 중해지니까요. 당신 동생과 그 동료들은 천황폐하께 충성

을 맹세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건 중죄입니다.”

“무슨 해를 끼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제 어리석은 말을 용서해

혹독한시련 235
주세요. 경관님을 모욕하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요셉은 이삭을 풀

어주기만 한다면 경찰서 바닥에 배를 대고 기어갈 수도 있었다. 용

감한 사무엘 형이었다면 대담하고도 위엄 있게 경찰에게 맞섰겠

지만 요셉은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

이 뇌물을 요구했더라면 더 많은 돈을 빌리고 집이라도 팔았을 것

이다. 요셉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뭔가 더 위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남아 가

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경찰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요셉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

제 그곳에는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들을 집으로 데려갈 수 있겠죠? 여기는 여자들이 있을 곳

이 못 됩니다. 남자아•이와 갓난아기는 바깥에 있어요. 당신네들은

항상 저녁에도 아이들을 길거리에서 놀게 놔두더군요. 아이들은

집에 있어야 해요. 당신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 아이들은

언젠가 감옥에 갇히고 말 겁니다.” 경찰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동생은 오늘 밤 이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성가시게 해드려서 죄송합니

다. 오늘 밤에 동생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와도 될까요?”

경찰이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가져오세요. 옷과 음

식을 가져올 수 있어요. 종교 서적은 안 됩니다. 게다가 읽을 것들

은 모두 일본어로 쓰여 있어야 해요.” 경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사려 깊었다. “안타깝지만 당신 동생을 면회할 수 없어요. 유감스럽

지만 어쩔 수 없군요.”

요셉은 눈앞의 정복 경찰관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믿

236 파친코 O
고 싶었다. 그냥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한 남자에 불과할 뿐이

라고, 한 주가 끝날 무렵이라 지쳐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사람도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싶을지도 몰랐다. 요

셉은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모든 일본 경찰들을 악당으로 취급하

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했다. 점잖은 사람들이 동생을 감

시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겠습니다.” 요셉이 경찰

의 신중한 눈빛을 훔쳐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씀을요.”

경찰이 고개를 살짝 까닥거 렸다.

노아는 이제 사탕을 모두 먹고 밖에 나가 놀 수 있었다. 선자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요셉은 경희의 질문에 답하고 있

었다. 경희는 좁은 담요로 모자수를 등에 업고 서 있었다.

“연락할 수 있는사람이 있어요?” 경희가조용히 물었다.


“누구한테 연락해?”

“캐나다 선교사들은 어때요? 몇 년 전에 그 사람들을 만났잖아

요 기억하죠?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죠. 이삭은 그들이 정기적으

로 교회에 돈을 보내준다고 했어요. 어쩌면 그들이 경찰에게 목사

님들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경희가 작게 원을 그리며 돌자 모자수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옹알

거렸다.

“그들에게 어떻게 연락하지?”

혹독한시련 237
“편지를 쓰면 어때요?”

“그들에게 조선어로 편지를 써도 될까? 그들이 편지를 받아 답

장을 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삭이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아

있을 수 … … ”

그때 선자가 들어와서 경희의 등에 업힌 모자수를 풀어 내려서

젖을 먹이려고 부엌으로 데려갔다. 보리밥 냄새가 작은 집 안을 가

득채웠다.

“선교사들이 조선어를 알 것 같지 않아요. 일본어로 편지 쓰는

걸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요?” 경희가 물었다.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건 어떻게

든 할 수 있겠지만 전쟁이 한창인 이때에 경찰이 캐나다 선교사의

말에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게다가 편지가 도착하려면 적어도 한

달이 넘게 걸릴 것이다.

선자가 모자수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 사람한테 필요한 걸 좀 챙길게예. 내일 아침에 가져갈 수 있

지예?” 선자가 물었다.


“내가 일하러 가기 전에 갖다 줄게.” 요셉이 말했다.

“당신 사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어요? 일본 사람 이야

기라면 들어주지 않을까요?” 경희가 물었다.


“시마무라 씨는 절대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 기독교

인들은 반역자라고 생각하거든. 삼일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기독

교인들이니까. 모든 일본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어.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내가 저항운동에 연루됐다고 생각하•면 당장 날 해고할 사람

238 파친코 O
이야. 그럼 우리는 어떡하겠어? 나 같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일

자리가 없어.”

그 후로 01무 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선자는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노아를 불렀다. 이제 밥 먹을 시간이었다.

혹독한시련 239
김치 아줌마

선자는 아침마다 경찰서에 가서 보리와 수수로 만든 주먹밥 세

개를 넣어주었다. 계란 살 돈이 있을 때는 계란을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간장에 졸여서 이삭의 부실한 도시락에 함께 넣었다. 그 음

식이 이삭에게 확실하게 전달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

만 이삭이 도시락을 받지 못한다는 증거도 딱히 없었다. 동네 사람

들은 아는 사람이 감옥에 간 적이 있다고 아는 체하면서 감옥 생

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이 사람은 이렇다 하고 저 사람은 저렇다

하여 별 신빙성이 없었다. 그냥 좀 번거로웠을 뿐이라는 이야기에

서 무시무시하게 끔찍했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 편차가 아주

컸다. 요셉은 이삭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이삭이 체포된 이후

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한때 새카닿던 머리카락은 희끗

희끗해졌고 위경련이 심해졌다. 부모님에게 편지 쓰는 일도 그만

두었다. 부모님에게 이삭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희가 대신 편지를 쓰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이삭 이야

김치0!^ 마 241
기를 피했다. 요셉은 또한 식사를 할 때마다 자기 음식의 대부분을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노아에게 밀어주었다. 요셉과 노아는 둘 다

이삭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하고 있

었다.

식구들은 다 함께 가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따로 가기도 하면서

경찰서를 찾아가 수없이 간청했지만 아무도 이삭을 만날 수 없었

다. 하지만 경찰이 가타부타 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이

삭이 살아 있다고 믿었다. 류 목사와 교회 관리인도 여전히 감옥

에 갇혀 있어서 세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실제

로 죄수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이삭이 체포

된 다음 날,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이삭의 책과 서류 몇 개를 압수해

갔다. 이삭의 식구들이 들고 나는 것도 감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형

사가 몇 주마다 한 번씩 찾아와서 질문을 던졌다. 경찰이 이삭의 교

회를 자물쇠로 잠가 폐쇄했지만 신도들은 몇몇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휘 아래 소규모로 비밀리에 만났다. 경희와 선자, 요셉은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까 봐 절대 만나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에 있던 외국

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오사카

에서 백인을 보기가 힘들었다. 요셉은 캐나다 선교사들에게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장로교회의 의사 결정권자들은 엄청난 압력에 못 이겨서 의무적

인 신사참배를 천황을 위한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로

받아들였다. 국교의 우두머리인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신실하고 실용적인 류 목사는 신사

참배가 이교도적인 의식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242 파친코 O
삭과 후,신도들에게 더 위대한 선을 위해서 신사참배에 참석하라

고 했다.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많은 신도들이 억

울하게 희생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류 목사는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그러한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을 찾았다. 그래

서 마을마다 횟수가 다른 신사참배가 가장 가7>운 신사에서 거행될

때마다 류 목사와 이삭,


후는 그때 때마침 교회에 남까 있는 사람들

이 있으면 그 사람들과 함께 신사참배에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류

목사는 시력이 약해진 상태여서 후가 신사참배 의식에서 다른 사람

들처럼 절을 하고 물을 뿌리고 박수를 치는 내내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삭은 물론 후의

그런 행동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의 그러

한 신념과 저항의 몸짓을 존경 했다.

이삭이 체포되자 선자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이 정말로 닥치

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셉이 아이

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때는 어디로, 어떻게 가아:

할까? 아이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경희는 떠나라는 말을 하

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요셉의 아내일 뿐이지 않은가? 선자는 아이

들을 데리고 고국의 엄마에게 돌아가아: 할 때를 대비해서 계획을

세우고 돈을 모아야 했다.

그러자면 일을 해야 했다. 행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자의

엄마는 하숙집을 하면서 남편과 함께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젊은

여자가 시장에서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치면서 낯선 사람들에게

음식을 파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요셉은 선자가 일을 하지

김치아줌마 243
못하게 했지만 선자는 그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선자는 이삭도

아이들 학비를 벌 수 있기를 바랄 거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요셉에

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요셉은 선자가 일하는 것을 허

락했다. 그렇지만 경희에게는 바깥에서 일하지 말라고 했고,경희

는 순순히 요셉의 말을 따랐다. 경희는 선자와 함께 장아찌를 준비

해놓을 수는 있었지만 직접 팔 수는 없었다. 요셉은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형편이라서 강하게 반대할 수 없었다. 두 여자는 요셉의 뜻

을 거스르는 와중에도 어느 정도까지는 요셉에게 순종하려고 애썼

다. 요셉의 뜻을 거역해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 혼자서 감당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금전적 부담이 커지고

있었다.

이삭이 투옥된 지 일주일 후,선자는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감옥에 가서 이삭의 식사를 넣어주고 나서, 커다란 김치 항아리를

나무 수레에 싣고 시장으로 밀고 갔다. 이카이노의 노천시장은 가

정용품과 옷, 다다미, 전기용품을 과는 자잘한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집에서 만든 파전과 초밥,된장을 파는 행상인들이 즐

비하게 늘어선 곳이었다.

경희는 집에서 모자수를 돌보았다. 선자는 고추장과 된장을 파

는 행상인들 옆에서 튀긴 밀과자를 파는 젊은 조선 여자 둘을 발견

했다. 그러고는 그쪽에 자리를 잡아볼까 하고 수레를 밀고 갔다.

이쪽에 고약한 냄새를 풍길 생각은 하지도 마. 밀과자 장수 두

명 중에서 나이 든 쪽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 여자가 생선 파는

행상인들 쪽을 가리켰다.

선자가 마른 멸치와 미 역을 파는 여자들에 게 가까이 다가갔지 만

244 ^친 코 O
그 나이 든 조선 여자들도 선자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 더러운 수레를 당장 치우지 못해. 안 그러면 우리 아들들 불

러 거기다 오줌을 갈기라고 할 거다. 알겠어, 이 촌것아?”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키 큰 여자가 말했다.

선자는 너무 놀라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김치를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된장도 냄새가 지독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선자는 그 여자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걷다가 기

차역 출입구 근처의 생닭을 과는 곳에 다다랐다. 지독한 고기 냄새

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돼지 도축업자와 생닭을 파는 곳 사이에는

선자의 수레가 들어갈 만큼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일본인 도축업자는 커다란 칼을 휘두르면서 어 린아이만 한 돼지

한 마리를 자르고 있었다. 피가 가득한 커다란 양동이가 남자 발치

에 놓여 있었다. 돼지 머리 두 개가 앞쪽 좌판 위에 있었다. 도축업

자는 나이 든 사내였지만,튼튼한 근육질인 두 팔에는 혈관이 불룩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선자에게 미소

룰지었 다 .

선자는 그 남자의 좌관 옆에 수레를 놓았다. 기차가 도착할 때마

다 기차의 진동을 신발 아래로 느낄 수 있었다. 승객들이 기차에서

내렸고,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출입구에서 시장으로 들어

갔지만 선자의 수레 앞에 멈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는 터

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았다. 젖이 불어서 가슴이 묵직하니 아파

왔다. 선자는 경희와 함께 집에 있었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러나 선

자는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고향에서 가장 장사를 잘하던 시장 아

주머니들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김 치 마 245
“김치 사이소! 맛있는 김치 사이소! 이 맛난 김치를 자셔보시고

다시는 집에서 담지 마시라예!” 선자가 소리쳤다. 행인들이 선자를

돌아보았다. 순 社 선자는 수치심에 그들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뭐

라도 하나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도축업자가 돼지를

다 자르고 나서 손을 씻더니 선자에게 25센과 김치를 담을 그릇

을 건넸다. 선자는 도축업자가 건넨 그릇에 김치를 담아주었다. 도

축업자는 선자가 일본어를 하지 못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김치 그릇을 돼지 머리 옆에 내려놓고 좌판 뒤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김치 한 조각을 밥 위에 올려놓고 먹

었다.

“맛있네요! 정말 맛있어요!
” 남자가 일본어로 말하며 웃었다.

선자는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점심때가 되자 경희가 젖을 먹이려고 모자수를 데려왔고, 선자

는 문득 배추와 무,양념을 사느라 들어간 돈을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재료를 사느라 쓴 것보다 많은 돈

을 벌어야 했다.
선자가 벽 쪽으로 돌아앉아서 모자수에게 젖을 먹일 동안 경희

가 수레를 살펴보았다.

“나라면 겁을 먹었을 거야. 내가 김치 아줌마가 되고 싶다고 말

했던 거 기억나지? 실제로 여기 서서 김치를 판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고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아. 동생은 정말 용감해.” 경희가 말

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예.” 선자가 아름다운 아기를 내려다보며 말

했다.

246 파친코 O
“나도여기 있어줄까? 동생과같이 있을까?”

“그러면 언니가 곤란해질 겁니더. 노아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언니가 집에 계셔야 저녁을 챙겨주지예. 언니를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더;

“그런 소리 마. 내가 하는 일은 어렵지 않 아 ;

오후 2시가 다 된 시각이었고, 해가 넘어가면서 기온이 훨씬 더

서늘해졌다.

“다 못 팔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깁니더:

“정말?”

선자가 고개를 끄덕 였다. 아기 모자수는 이삭을 닮았다. 모자수

는 구릿빛 피부에 윤이 나는 굵은 머리카락의 노아와는 완전히 달


랐다. 노아의 밝은 눈은 놓치는 것이 없었다. 입을 제외하면 노아

는 젊은 한수와 완전히 똑같았다. 학교에서 노아는 공부도 잘하고

얌전해 훌륭한 학생이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노아는 키우기 쉬

운 아이였고,모자수는 낯선 사람에게 안겨도 기뻐하는 행복한 아

이였다. 선자는 더없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부모님

이 떠올랐다. 엄마와 아버지한테서 아주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지

금 선자는 기차역 바깥에 서서 김치를 팔고 있었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부모님은 선자가 이런 일을 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자는 부모님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

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했다.

선자가 아이에게 젖을 다 먹이자 경희가 빵 두 개와 분유에 물을

타서 만든 우유 한 병을 수레에 내려놓았다.

“동생도 먹 어 지 . 아이 젖을 먹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알지?

김 치 6} # 마 247
동생은 물과 우유를 많이 마셔야 해.”

경희가 돌아서자 선자가 모자수를 경희 등의 포대기 안에 넣어

주었다. 경희는 아이를 바짝 당겨 업었다.

“난 집에 가서 노아를 기다렸다가 저녁을 챙겨 줄게. 동생도 빨

리 들어올 거지? 우리는 멋진 한 팀이야.”

모자수의 작은 머리가 경희의 가는 양어깨 사이에 놓였다. 선자

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에게 자신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겠다 싶었을 때 선자는 다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김

치 있어예! 맛있는 김치 있어예! 김치 사이소! 맛있는 김치 사이

소! 오이쉬! 오이쉬 김치 사시라예.”

이렇게 외치던 선자는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 목소

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시장에 갔던 시절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처음쉬ᅵ는 아버지와 함께, 젊은 아가씨가 되어서는 혼자

서, 그 후에는 사랑하는 이의 시선을 받고 싶어 하는 여인이 되어

시장에 갔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 선자의 주위에는 언제

나 호객 행위를 하는 아주머니들의 합창이 울려 퍼졌는데 지금은

선자가 그들처럼 그러고 있었다. “김치 사이소! 김치 있어예! 집에

서 만든 김치 사이소! 이카이노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 있어예! 할

머니가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맛있어 예. 오이쉬 데스, 오이쉬!” 선자

는 밝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애썼다. 고향에서 선자도 언제

나 상냥한 아주머니들을 자주 찾았기 때문이다. 행인들의 힐끗거

리는 시선에 선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미소를 지었다. “오이

쉬! 오이쉬!”

돼지 도축업자가 선자의 그런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웃었

248 파친코 O
다.

그날 저녁, 선자는 김치 항아리 바닥이 보일 때까지 집에 돌아가

지 않았다.

선자는 이제 어떤 김치라도 경희와 함께 만들어서 팔 수 있었다.

그렇게 물건을 팔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고 나자 자신감이 생겼다.


경희와 함께 김치를 더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팔 수 있겠다는 자

신이 생겼다. 하지만 김치를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적합한 재

료들을 항상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벌이가 괜

찮다 해도 다음 주에 배추 가격이 오를 수도 있었고, 더욱 상황이

심각해지면 배추를 아예 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시장에 배추가

없을 때는 무와 오이로 장아찌를 만들었다. 가끔씩 경희는 마늘이

나 고추장을 넣지 않고 무와 오이를 절여 장아찌를 만들었다. 일본

인들은 그런 장아찌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선자는 항상 밭이 있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하숙집에는 부엌 뒤쪽

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하숙인들이 내는 돈보다 두 배나 더 많이

먹을 때도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신선한 식품의 가격은 계속

올랐고, 노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살 여유도 없었다. 최근

에는 몇몇 손님들이 김치 한 포기를 통째로 살 수가 없어서 반으로

쪼개서 조금만 살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선자는 김치나 장아찌를 팔 수 없을 때는 군고구마와 군밤, 삶은

옥수수 같은 다른 것들을 팔았다. 이제는 수레가 두 개로 늘어났다.

수레 두 개를 기차 객차처럼 연결해서 수레 하나에는 임시로 만든

석탄 난로를, 다른 하나에는 장아찌를 실었다. 수레는 부엌에서 가

김치아줌마 249
장 좋은 곳에 놓아두었다. 집 바잘에 두었다가는 누가 훔쳐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선자는 벌어들인 돈을 경희와 똑같이 나누었고,

아이들 학비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허가증을 살 수 있게끔 돈을 모

^다 .

모자수가 생후 5개월이 됐을 무렵부터 선자는 설탕과자도 팔기

시작했다. 배추를 비롯한 김치 재료를 구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

을 때 경희가 우연히 시동생이 군대에 있다는 식료품 잡화상한테

서 흑설탕 두 봉지를 싼값에 얻은 덕분이 었다.

선자는 평상시처럼 돼지 도축업자 옆자리에서 설탕을 녹이기 위

해 쇠로 된 국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난로로 사용하는 강철

상자가 말썽이었다. 선자는 여유가 생기는 대로 수레에 적합한 난

로를 살 계획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선자는 공기가 잘 통하게

타고 있는 석탄을 뒤적거려서 불길을 키웠다.

“아가씨,오늘 김치 있어요?”

웬 남자 목소리에 선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삭의 나이쯤 되어 보

이는 남자는 선자의 0ᅵ•주버니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시선을

많이 끄는 사람은 아니었다.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에 손톱이 단정

했다. 안경알이 아주 두껍고 테가 굵어서 잘생긴 이목구비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언지예. 오늘은 김치가 없고 설탕과자만 있어 예. 아직 준비가 안

돼서 예.”

“아. 그럼 언제 김치가 준비되나요?”

“확실히는 모르겠네예. 배추를 많이 살 수가 없어서예. 마지막 담

은 김치는 아직 익지 않았고예.” 선자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석탄

250 파친코〇
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루나 이틀 걸리나요? 아니면 일주일?”

선자는 남자의 끈질긴 질문에 놀라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치는사흘쯤 지나면 다 익을 거라예. 날씨가 점점 더 따뜻해진

다카면 한 이틀 걸릴 수도 있고예. 하지만 그래 빨리는 안 될 깁니

더.” 선자는 설탕과자를 만드는 데에 방해가 되는 남자가 떠나주기

를 바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 시간쯤이면 기차에서 내리는 젊은

여자들에게 설탕과자 몇 봉지를 팔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팔 수 있는 김치는 얼마나 있어요?”

“많이 있어 예. 얼마나 사실라 캅니꺼? 제 손님들은 대부분 김치

담을 그릇을 직접 가져오십니더. 김치가 얼마나 필요하신데예?” 선

자의 손님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 여자들이라서 직접 반찬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설탕과자는 어린아이들과 젊은 여자들에게

팔았다. “사흘 후에 다시 오시소. 그릇을 가져오시면… … ”

젊은 남자가 웃었다.

“음,전 아가씨가 갖고 있는 걸 다 사 려 고 하는데요.”

남자가 안경을 고쳐 썼다.

“김치를 그래 마이 먹을 수는 없지 예 ! 그 많은 김치를 우째 보관

할라고예?” 선자가 남자의 어리석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

서 대답했다. “몇 달 있으면 여름이 될 긴데예. 벌써부터 날이 덥다

아입니꺼.”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제 이름은

김창호입니다. 전 쓰루하시 역 바로 옆에 있는 숯불구이 식당을 운

영하고 있어요. 아가씨 김치가 맛있다는 소문이 멀리까지 퍼졌더

김치 마 251
^고 요 .”

선자는 뜨거운 석탄을 계속 주시하면서 양손을 앞치마로 닦았

다.

“집에서 김치를 담는 건 제 언닙니더. 저는 그냥 김치를 팔고 또

언니가 김치 만드는 걸 도울 뿐이지 예.”

“네, 네. 그 소문도 들었습니다. 음, 전 우리 식당에 김치와 반찬

을 모두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배추도 조달해줄

수 있 고 ……”

“어디서예? 어디서 배추를 구하시는데예? 저희도 사방팔방 다

찾<아봤어예. 언니가 매일 아침 일찍 시장에 가도 아직… …”

“전 구할 수 있어요.”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선자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설탕과자를 만들 국자가 뜨

거워졌다. 이제 설탕과 물을 넣어야 했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았

다. 눈앞의 남자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남자의 말을 듣는 게

더 중요했다. 기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첫 손님은 이미 놓친

상태나 마찬가지 였다.

“손님 식당이 어디 있다고예?”

“기차역 뒷골목에 있는 큰 식당입니다. 약국이 있는 거리에 있

죠 날씬한 약사인 오카다 씨가 운영하는 약국 아시죠? 저처럼 검

은 안경을 쓰고 있잖아요?” 남자가 안경을 다시 코 위로 밀어올리

고 소년처럼 웃었다.

“네, 그 약국이라면 어디 있는지 알아예,


그 약국은 모든 조선인들이 진짜로 아파서 좋은 약을 사야 할 때

가는 곳이었다. 오카다는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정직한 사람이었다.

252 파친코 O
게다가 많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눈앞의 젊은 남자는 선자를 이용하려는 사람처 럼 보이지는 않았

지만 그렇다고 그 남자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행상인으로 몇

달 일하면서 선자는 몇몇 손님들에게 외상을 주었지만 돈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소한 거짓말을 서슴없이 했고, 상대의 입장이

나 이익은 신경 쓰지 않았다.

김창호가 선자에게 명함을 건넸다. “여기 주소가 적혀 있어요. 준

비되는 대로 김치를 가져다줄 수 있나요? 다 가져오세요. 현금으로

김치값을 지급하고 배추도 더 구해줄게요.”

선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김치를 한 손

님에게 다 팔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을 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배추를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는데,이 남자가 배추를 구해줄 수

있다면 일이 한층 더 쉬워질 터였다. 경희는 모자수를 등에 업은

채 그 귀한 배추를 구하려고 시장 곳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배추를

얼마 구하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선자는 남자

에게 갖고 있는 김치를 모두 다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젊은 남자의 식당은 기차역 맞은편에 나란히 이어진 짧은 골


목 쪽에 위치한 큰 가게였다. 근처의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전문

간판 제작자가 만든 멋들어진 간판이 걸려 있었다. 선자와 경희는

널찍한 나무판에 새겨서 칠해놓은 큼직한 검은색 글자들을 넋 놓

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 글자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조선식

갈비집인 것만은 분명했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도 구운 고기 냄

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간판에 적힌 일본어는 선

김치아줌마 253
자는 물론이고 경희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글자였다. 선자

는 지난 몇 주 동안 담가놓았던 김치를 전부 실은 수레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식당에 김치를 안정적으로 판

매할 수 있다면 정기적인 수입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식구들에게

계란을 좀 더 자주 사서 요리해줄 수 있었고, 요셉과 노아에게 새

외투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경희에게 두터운 옷감을 사다줄 수

있었다.

요셉은 부엌에 쌓여 있는 김치 재료를 보기도 싫고 냄새도 맡기

싫다면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김치 공장에서는 살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요셉의 불만이 여자들이 설탕과자를 팔기 시작한 주

된 이유였지만, 설탕은 배추나 고구마보다 훨씬 더 구하기 어려웠

다. 노아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지만 김치 냄새 때문에 누구보

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원래도 다른 조선 학생들처럼 놀림

을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이제는 옷에서 항상 양파와 고추, 마

늘, 새우젓 냄새가 났기 때문에 선생님도 노아를 교실 뒤쪽에 앉혔

다. 그곳은 집에서 돼지를 키우는 조선 아이들이 앉는 자리였다. 집


에서 돼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놀림을 받았

다. 일본 이름이 노부오인 노아는 돼지 아이들과 함께 앉았고, 마늘

자식 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노아는 아이들의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아서 큰엄마에게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간식과 음식을 달라고 부탁했다. 큰엄마가 그 이유


를 묻자 노아는 사실대로 말했다. 경희는 돈이 더 들어도 노아의

아침으로 빵집에서 커다란 우유빵을 사서 주었고, 학교에 가져갈

점심으로는 감자 고로케와 야키소바를 만들어주었다.

254 파친코 O
일본 아이들은 무자비했지만 노아는 그런 아이들과 싸우지 않

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2학년 학급에서 1등이나 2등

을 하면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 학교에서 노아는 친구를 사귀

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노는 조선인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노아

가 만나고 싶어 하는 유일한 사람은 큰아버지였지만 요즘 집에 있

을 때의 요셉은 예전의 그 요셉이 아니었다.

경희와 선자는 식당 앞에 말없이 선 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

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지만 영업을 하려고 열어 놓은 것은 아니

었다. 경희는 처음에 김치를 더 많이 팔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

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그 제안에 의구심이 생긴다며 선자

를 낯선 곳에 혼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모자수를 등에 업

은 채 함께 가겠다고 선자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두 사람은 요셉에

게 무 말도 하지 않고 왔지만 첫 거래가 성사되고 나면 다 말할

계획이었다.

“내가 수레를 가지고 여기 바깥에서 기다릴게.” 경희가 오른손으

로 모자수를 토닥거려 어르면서 말했다. 아이는 경희의 등에 업혀

서 얌전히 쉬고 있었다.

“김치를 가지고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예?” 선자가 말했다.

“그 사람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게 어때?”

“둘 다 같 이 들 어 갑 시 더 .”

“난 비깥에서 기다릴게. 동생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그때 내가

들어갈게, 알겠지?”

“하지만 수레를 우째 밀라꼬… …”

“괜찮아,할 수 있어. 모자수도 괜찮을 거야.” 아이는 이제 경희의

김치아줌마 255
등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었고,경희는 안정적으로 아이를 계속

흔들었다.

“안에 들어가 봐. 난 밖에서 기다릴게. 그냥 김창호에게 여기로

나오라고 해. 그 남자와 안에서 이야기하지 마, 알겠지?”

“하지만 우리 둘이서 같이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할 기라고 생각

했는데… …”

선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경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러다가 문득 경희가 식당에 들어가는 것은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식당에 들어가지 않아야 요셉이 무슨 짓을 했는

지 물어봤을 때 자기는 내내 식당 바깥에 있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다.

256 파친코 O
새로운 일자리
1940년 4월

선자가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와 본 것은 살면서 이번이 두 번째

였다. 김창호의 식당은 이삭과 함께 갔었던 부산의 우동 가게의 거

의 다섯 배는 될 것 같았다. 전날 밤에 장사했던 흔적 인 구운 고기

냄새와 퀴퀴한 담배 냄새가 아직 남아 있어서 선자의 목이 컬컬해

졌다. 다다미가 깔려 있는 마루에는 식탁이 두 줄로 놓여 있었고

마루 아래에는 손님들의 신발을 놓는 공간이 있었다. 개방된 부엌

에서는 십 대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맥주잔을 한 번에 두 개씩 씻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와 맥주잔이 부딪히는 소리에 남자까이는

선자가 식당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선자는 설거지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아시의 날카•로운 옆모습을 응시하면서 그 아이

가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기다렸다.

시장에서 만났던 남자는 김치를 정확하게 몇 시에 가지고 오라

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선자도 아침에 와야 할지,오후에 들러

새로운일자리 257
야 할지를 물어보지 못했다. 김창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김

창호가 오늘 나오지 않았거나 오후나 저녁에 나온다면 어떻게 하

지? 선 자 가 0}무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나가버 린다면 경희도 당황

할 터였다. 선자는 항상사소한 일에도 크게 걱정하는 경희의 마음

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부엌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멈췄다. 밤부터 아침까지 일하는 남

자아이는 피곤했는지 목을 좌우로 돌리며 한숨 돌리려던 순간,젊

은 여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여자는 일본식 바지에 낡아서


색이 바랜 파란색 누비옷을 입고 있었다.

“아가씨,지금은 영업 안 합니다.” 남자아이가 조선어로 말했다.

여자는 손님 이 아니었지만 거지도 아닌 것 같았다.

“실례합니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지만 김창호 씨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예? 김창호 씨가 김치를 갖다달라고 하셨거든예. 언


제와<야 할지 몰라서… … ”

“아하! 그 사람이 아가씨 예요?” 남자아이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

다. “사장님은 저 거리 아래쪽에 계세요. 오늘 김치가 도착하면 데

리러 오라고 하셨죠. 좀 앉아서 기다리실래요? 김치 가져왔어요?

손님들이 몇 주 동안 내내 반찬이 부실하다고 불평했거든요. 아가

씨도 여기서 일할 건가요? 아,그건 그렇고 몇 살이에요?” 남자아

이가 두 손을 닦고 부엌 뒷문을 열었다. 새로 온 여자가 귀여워 보

인다고 그 남자아이는 생각했다. 지난번 김치 주머니는 이가 다

빠진 할머니였는데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해고당했는데,이번에 온 아가씨는 자기보

다 더 어려 보였다.

258 파친코O
선자는 어리둥절했다. “잠시만예. 김창호 씨가 여기 없다고예?”

“앉아 있어요 곧 돌아올게요!


남자아이가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선자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기 혼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

으 로 ^갔 다 .
경희가 속삭였다. “모자수가 잠들었어.”

경희는 수레 옆에 걸어두는 나지막한 시장용 의자에 앉아 있었

다. 밝은 태양 아래 가벼운 미풍이 모자수의 북슬북슬한 머리카락

을 살포시 날렸다. 이른 아침이라서 지나가는 행인이 거의 없었다.

약국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언니, 사장님이 오고 있는 중이라 카네예. 아직도 밖에 있고 싶

습니꺼?” 선자가 물었다.

“i f e 여기 있는 게 #^1-. 동생이 창 있 어 . 그

럼 동생이 보이니까. 하지만 사장님이라는 그 남자가 도착하면 밖

으 로 ^와 , 알았지?”

선자는 식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지만 자리에 앉기가 무서워서

문에서 한 발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김치는 시장에서도 오늘 하

루에 다 팔 수 있었지만 김창호가 배추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거 하나만 확실하다면 여기에 서서

김창호를 기다릴 만했다. 배추를 구하지 못하면 장사를 하지 못하

니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창호가 부엌문으로 들어오면서 소

리쳤다. “김치 가져왔어요?”

“언니가 밖에서 수레를 지키고 있어예. 김치는 마이 가져왔고예.”

새로운일자리 259
“김치를 더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직 맛을 보지도 않으셨는데예.” 선자는 남자의 열정적인 반응

에 어 리둥절해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건 걱정 안 합니다. 저도 숙제를 좀 했죠. 오사카에서 가장 맛

있는 김치라고 하던데요.” 김창호가 빠르게 선자에게 다가가면서

말 했 다 .“그럼 밖으로 나 가 죠 :

경희는 김창호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말은 하

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김창호라고 합니다.” 김창호는 경희의 아름다운 외

모에 살짝 놀라며 인사를 건넸다. 여자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었

지만 등에 업은 아이는 6개월쯤 된 것 같았다.

경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사랑스럽지만 초조해

하는 말없는 여자 같아 보였다.

“당신 아기인가요?” 김창호가 물었다.

경희는 고개를 흔들며 선자를 힐끗거렸다. 집에 필요한 물건이

나 야채를 사려고 일본인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요셉은 돈 문제와 사업은 남자들의 일이라고 수

차례 말했다. 갑자기 경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

기 오기 전에는 선자가 거래하는 것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가 무슨 말이든 한마디라도 한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거나 일이 잘못될 것만 같았다.

“김치가 얼마나 필요하신데예? 앞으로 꾸준히 필요하신 거 맞지

예? 먼저 이 김치를 먹어보고 나서 주문을 하실라고예?” 선자가 물

었다.

260 파친코 O
“당신들이 만들 수 있는 김치를 모두 구매하려고요. 당신들이 여

기서 김치를 만들 수 있다면 더 좋고요. 냉장고와 아주 시원한 지

하실이 있어서 김치를 만들기에도 좋을 거 예요.”

“부엌에서예? 제가 저기서 배추를 절여주면 좋겠다고예?” 선자

가 식당 문을 가리켰다.

“네 ; 김창호가 미소를 지었다. “아침마다 당신들 두 사람이 여기

로 와서 김치와 반찬을 만들면 좋겠어요. 오후에는 고기를 자르고

고기 양념장을 만드는 요리사들이 오지만 그들은 김치와 반찬을

만들지는 못해요. 그런 음식을 만들려면 솜씨가 더 좋아야 하거든

요. 손님들은 집에서 만든 것 같은 절임 반찬을 원해요. 양념장이랑

구운 고기는 바보라도 만들 수 있지만 손님들은 왕의 수라상을 받

는 것처럼 푸짐하게 차려진 반찬을 원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요?”

김창호는 두 사람이 식당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아직 부담스러

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많은 배추와 야채 상자들을 당신들 집으로 갖다주는 것

도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야말로 집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

을까 싶어서요.”

경희가 선자에게 속삭였다. “식당에서 일할 수는 없어. 집에서 김

치를 만들어서 여기로 가져올 수는 있어. 아니면 우리가 김치를 배

달하지 못하면 저 남자애가 김치를 가지러 오거나.”

“아직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그전에는 당신들이 김치를 얼마나

만들었는지 몰라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김치가 필요합니다. 전 김

치와 반찬이 필요한 식당을 두 개 더 운영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새로운일자리 261
이 식당이 본점이라서 부엌이 가장 커요. 재료는 모두 제공할게요.

필요한 것만 말씀해주세요. 봉급도 많이 줄게요.”

경희와 선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

았다.

“주급으로 35엔을 줄게요. 두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줄 테니까

합치면 70엔이 되 죠!”

선자가 깜짝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요셉은 한 주에 40엔을

벌었다.

“가끔씩 고기도 집으로 가져갈 수 있어요.” 김창호가 미소 지으

며 말했다. “당신들이 여기서 즐겁 게 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건

다 준비해줄게요 곡식도 좀 줄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사용할 물건

이 많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구입하는 비용으로 구해줄게요. 그 비

용은 나중에 정산하면 되고요.”


선자와 경희는 재료값을 빼고 나면 한 주에 대략 10에서 12엔을

벌었다. 한 주에 70엔을 벌 수 있다면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집안 식구들은 너무 비싸서 지난 6개월 동안 닭고기나 생선을 한

번도 먹지 못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도 사 먹을 수 없었다. 아직도

매주 국거리용 뼈다귀를 사고 간혹 가다 남자들에게 줄 계란을 샀

지만, 선자는 식구들에게 감자와 수수 외에 다른 음식을 먹이고 싶

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어렵게 생활하고 계실 시부

모님에 게도 돈을 더 많이 보낼 수 있었다.

“큰아들 노아가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예?” 선자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럼요,물론이죠.” 김창호는 그 문제도 생각해본 것처럼 말했

262 파친코 O
다. “일을 끝내면 돌아갈 수 있어요. 점심시간 전에는 일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아기는예?” 선자가 경희의 등에 업혀서 자고 있는 모자수

를 가리켰다. “아기를 데려올 수 있을까예? 저희랑 같이 부엌에 있

으면 되는데 예. 선자는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서

일하는 여자들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동네 할머니에게 모자수룰 맡

긴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집에서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거나

아이를 봐주는 할머니를 고용할 돈이 없는 몇몇 여자들은 어린아

이들을 수레에 밧줄로 묶어서 시장에 데리고 나왔다. 밧줄에 묶여

시장에 나온 아이들은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엄마 옆에 앉아서 싸

구려 장난감을 갖고 놀았는데 그래도 행복해 보였다.

“많이 성가신 아이는 아닙니더.” 선자가 말했다.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일만 잘 끝낸다면 상관없어요. 당신들이

일할 때는 손님들이 오지 않으니까 방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일이

늦게 끝나서 큰아들이 여기로 오고 싶어 한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저녁시간 전에는 손님들이 오지 않거든요”

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추운 겨울 내내 노아와 모자수

걱정을 하면서 바깥에서 손님들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경희는 이런 일자리를 제의받아서 기뻐하기보다는 모든 것이 달

라질 게 분명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상당히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일단 물어봐야 합니더. 허락을 받아야 해서 … … ” 선자가 말했다.

저녁 식탁을 치우고 나서 경희는 남편에게 따뜻한 보리차 한 잔

과 담배를 피울 수 있게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노아는 큰아버지

새로운일자리 263
근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큰아버지가 사주신 밝은 색상의

팽이가 얼마나 빨리 돌 수 있는지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무

팽이가 듣기 좋게 씽씽 소리를 내며 돌았다. 선자는 모자수를 두

팔로 안은 채 노아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삭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했다. 이삭이 체포된 이후로 요셉은 성격이 완전히 변

해버렸다. 선자는 이런 요셉이 회를 내는 게 두려워서 집에서는 거

의 말을 하지 않았다. 요셉은 화가 나면 집을 나가버렸다. 때로는

아주 늦게까지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자가 식당에서 일을

하겠다고 하면 요셉이 반대할 거라는 사실을 두 여자는 잘 알고 있

었다.

요셉이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경희가 일자리에 대해 이야기했

다. 경희는 할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돈’이 아니라 ‘일’이 필요

하다고 했다.

“당신 지금 정신 나갔어? 처음에는 기차역 다리 아래에서 판답

시고 음식을 만들더니 이제는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식당에서 일하고 싶다고? 어떤 여자들이 그런 곳에 일하러 가는지

나 알아,어? 이제 다음에는 술 따르는 일을 하겠다고… … ” 아직

불도 붙이지 않은 요셉의 담배가 떨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거

렸다. 요셉은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

었다.

“그 식당에 들어갔어?” 요셉은 자신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요 전 아이와 함께 바깥에 있었어요. 하지만 식당이 크고

깨끗했어요. 바깥에서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봤거든요. 혹시라도

264 파친코 O
좋은 곳이 아닐까 봐 선자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선자와 같이 갔
던 거예요. 김창호라는 그 사장은 말을 잘하는 젊은 사람이 었어요.

당신도 한 번 만나보세요. 당신이 허락을 안 해준다면 거기에 일하

러 가지 않을 거예요. 여보… …” 경희는 남편이 얼마나 화가 났는

지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경희에게 요셉보다

더 존경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들은 다들 남편 흉을 보지만 요셉

한테는 흉을 볼 게 없었다. 요셉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였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존경스러

운 남자였다. 요셉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요셉이 담배를 꼈다. 노아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팽이 돌리기를

그만두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본다면… …” 경희는 이 일자리 제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남편에

게 치욕을 안겨줄 게 분명했다. 결혼 생활 내내 요셉은 돈을 버는

일을 제외하면 경희에게 못 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요셉은

열심히 일하는 남자는 혼자서 가족을 돌볼 수 있어야 하고,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었다.

“우리 두 사람 봉급을 다 줄 수 있대요. 그럼 노아와 모자수를

위해 돈을 〒 -에 -, 당신 부모님께도 돈을 더 보낼 수 있어요. 이

삭에게 더 좋은 음식과 옷을 사서 보내줄 수도 있고요. 이삭이 언

제 … … ” 경희가 말을 하다가 말았다. 노아가 큰아버지를 보호하려

는 것처럼 큰아버지 옆에 바싹 다가갔다. 그러고는 자기가 넘어지

거나 학교 일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등을 두드려주었던 큰아버지

처럼 큰아버지의 다리를토닥거렸다.

새로운일자리 265
요셉의 머 릿속에는 할 말이 잔뜩 들어 있었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지금 요셉은 정기적으로 두 가지 일을 하

고 있었다. 일본인 감독이 받는 봉급의 절반을 받으며 시마무라의

공장 두 개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최근에는 근무 시간 이후에 조선

인이 하는 공장의 부서진 금속 압연기를 고치는 일도 했지만 정기

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최근에 시작한 수리

일은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수리공이 아니라 관리

자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셉은 매

번 집에 들어가기 전에 뻣뻣한 솔로 양손을 빡빡 문질러 씻고, 갯

물로 손톱 밑에 낀 기름때를 제거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마치 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지폐와 동

전이 주머니에서 빠져나갔다.

일본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패배했음을 알면서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전쟁이 쉼 없이 계속되었다. 요

셉의 사장인 시마무라의 들들도 일본을 위해 전쟁터로 나갔다.

만주로 간 큰아들은 지난해에 다리 한쪽을 잃은 후 괴저« 로 사망

했고, 작은아들이 난징으로 가서 그 빈자리를 채웠다. 시마무라는

지나가는 말로 일본이 중국을 안정시키고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에 있다고 했지만,말투로 봐서는 시마무라도 진심으로 그렇

게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한층 더 치열하게 전

쟁을 벌이고 있었고, 머지않아 유럽의 전쟁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

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일들이 요셉과 무슨 상관이 란 말인가? 요셉은 일본인 사장

이 전쟁 이야기를 할 때 시기적절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긍정적으

266 파친코©
로 맞장구를 쳤다. 사장이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마

땅한 행동이었으니까. 요셉이 아는 모든 조선인들은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확장 전쟁을 무의미한 짓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

다. 중국은 조선이 아니었다. 중국은 백만 명을 잃어도 계속 버틸

수 있었다. 땅덩어리가 조금 떨어져 나가도 다 측량할 수 없을 정

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였다. 그 엄청난 머릿수와 의지만으로

도 버틸 수 있는 나라였다.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

인들이 남몰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 었다. 가족을 구하고,자기 배를

채우고,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

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

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

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은 매일 한시도 돈 걱정을 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가 갑

자기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대체 어떤 남자가 아내를 식당에 일

하러 내보낸단 말인가? 요셉은 그 갈비 식당을 알고 있었다. 모르

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갈비집은 기차역 옆에 있는 본점을

비롯해서 분점도 두 개나 되었다. 늦은 밤에는 폭력배들이 그 식당

에서 식사를 했고, 식당 주인은 일반 손님들과 일본인들이 찾아오

지 못하게 가격을 높게 불렀다. 요셉은 이삭과 선자의 일본 입국

새로운일자리 267
허가증을 사기 위한 돈을 빌려야 했을 때 그곳을 찾아갔었다. 아

내가 고리대금업자들 밑에서 일하는 게 더 나쁠까? 아니면 요셉이

그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 더 나쁠까? 조선 남자에게 선택권이 있

다는 소리는 언제나 개소리 였다.

268 파친코 O
좋 은 ^식
1942년 5월

백노아는 이 동네의 여덟 살 먹은 여타 아이들과는 달랐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는 반드시 뺨이 빨갛게 될 때까지 얼굴을 문

질러 씻었다. 또 올리브기름 세 방울을 검은 머리에 발라 문지르고

나서 엄마한테 배운 대로 이마 옆으로 빗어 넘길 줄도 알았다. 아침

으로 보리죽과 된장국을 먹고 나면 입을 깨끗이 행구고 작고 둥근

손거울로 하얀 이를 살펴보았다.

엄마는 아무리 피곤해도 전날 밤에 노아의 셔츠를 다려놓았고,

깨끗하게 다린 옷을 차려입은 노아는 부유한 동네 출신의 중산층

일본인 아이처럼 보였다. 씻지도 않은 채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빈민가 아이들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학교에서는 산수와 쓰기를 잘했고, 기민한 운동신경과 달리기

실력으로 체육 교사를 놀라게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누가 하라

고 하지 않았는데도 책상을 정리하고 교실 바닥을 닦았다. 그러고

좋은소식 269
나서 지나치게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혼자 집으로 돌아

갔다. 자기보다 거친 아이들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고,남

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면 저녁

먹을 때까지 밖에서 노는 동네 아이들과 달리 바로 집으로 들어가

숙제를 했다.

엄마와 큰엄마가 식당에서 김치를 담기 시작하자 늘 집 안에 떠

돌던 김치 익는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노아는 더 이상 마늘

소년이라는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와 큰엄마가 식

당에서 요리한 음식을 집으로 가져오는 덕분에 오히려 동네의 다

른 집들보다 음식 냄새가 훨씬 덜 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식당에

서 가져오는 구운 고기와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노아에게도 비밀이 있었지만 평범한 비밀

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노아는 백노아가 아니라 보쿠 노부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물론 반 친구들은 한국 성을 일본식으로

읽는 노아의 이름이 평범한 일본 이름과는 달라서 노아가 조선인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을 만

났을 때 노아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밝히지 않았다. 노아는 대부분

의 일본인 아이들보다도 더 일본어를 잘 말하고 잘 썼다. 교실에서

는 부모님이 태어난 한반도 이야기가 나올까 봐 두려워했고,혹시

라도 선생님이 조선 식민지 이야기를 할 때면 종이만 내려다보며

고 개 를 ^지 않았다.

그것 외에도 노아는 또 다른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개신교 목사

인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고, 2년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70 파친코〇
노아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기억이 나

지 않았다. 학급 과제로 가족을 소개해야 했을 때는 아버지가 비

스킷 공장에서 감독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몇몇 아이들이 큰아버

지인 요셉이 노아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때도 아니라고 반박하

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와 큰엄마, 심지어는 가장 좋아하는 큰아버

지에게도 밝히지 않은 가장 큰 비밀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온화하고 친

절한 아버지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감옥에 갇히게 내

버려두었다. 2년 동안 하나님은 노아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주의 깊게 들어주신다고 한 아

버지의 말과는 달랐다.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

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 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

의 가장 큰 꿈이었다

늦은 봄날 오후였다. 노아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엄마

가 일하러 가기 전에 준비해놓은 간식을 발견했다. 간식은 가족들

이 식사를 할 때나 노아가 숙제를 할 때 쓰는 나지막한 밥상에 놓

여 있었다. 노아가 목이 말라서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였다. 노아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 근처

바닥에 지저분한 몰골의 비쩍 마른 남자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왼쪽 팔꿈치로 바닥을 짚은 채 일어나 앉으려고 안간힘

을 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 었다.

좋은소식 TJ\
다시 비명을 질러야 할까? 노아가 고민했다. 누가 도와주러 올

까? 엄마와 큰엄마,큰아버지는 일하러 가셨고, 처음에 비명을 질

렀을 때도 아무도 노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문 옆에 쓰

러진 거지는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지저분한 데다 어딘가 아픈 사

람처럼 보였지만 도둑일 수도 있었다. 큰아버지는 음식이나 귀중

품을 훔치려고 집 안으로 쳐들어오는 강도와 도둑을 조심하라고

했다. 노아의 바지 주머니에는 50센이 들어 있었다. 활쏘기에 관한

그림책을 사려고 모아둔 돈이었다.

이제 남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노아는 남자가 안됐다고 생각했

다. 거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상태가

나빠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거지의 얼굴은 빨간 상처와 검은 딱지

로 뒤덮여 있었다. 노아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동전을 꺼냈다. 남

자에게 발을 잡힐까 봐 두려워서 남자의 손 근처에 동전을 던져놓

을 수 있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노아는 부엌으로 뒷걸음쳐서

뒷문으로 달려 나가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었지 만 남자의 울음소리 에

멈춰서고 말았다.

노아는 남자의 회색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

았다. 옷이 찢어지고 더러웠지만 학교 교장선생님이 입는 짙은 색

정장과 비슷해 보였다.


“노아야, 아버지야.” 남자가 말했다.

노아는 숨을 헉 들이쉬고 고개를 가로저 었다.

“엄마는어디에 있니?”

아버지 목소리 였다. 노아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는 식당에 있어요.” 노아가 대답했다.

272 파친코 O
“어디에 있다고?”

이삭은 혼란스러 웠다.

“지금가서 엄마를 데려올게요. 아버지,괜찮아요?”

노아는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두려움은 여전했

지만 남자는 아버지가 분명했다. 벗겨진 피부로 덮인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부드럽게 빛나는 눈빛은 아버지의 것이 분명했다. 아버

지는 배가 고픈 건지도 몰랐다. 옷 아래의 어깨뼈와 팔꿈치가 삐쩍

말라 날카로운 나뭇가지처 럼 보였다.

“뭔가 먹고 싶어요, 아버지?”

노아가 엄마가 준비해놓고 간 간식을 가리켰다. 수수와 보리로

만든 주먹밥 두 개가 있었다.

이삭이 소년의 걱정 어린 태도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우리 아들, 물 좀 갖다줄래?”

노아가 부엌에서 차가운 물 한 컵을 갖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

사이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요! 물 가져 왔어요! 물 마 셔요 아버지.”

노아가소리 쳤다.

이삭이 눈을 뜨고는 노아에게 미소를 지 었다.

“아버지가 피곤해서 그래. 잠 좀 자아겠구나.”

“아버지, 물 드세요.” 노아가 컵을 들어 올렸다.

이삭은 고개를 들고 물을 쭉 들이키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노아는 몸을 숙여서 아버지의 입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는 숨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아버지의 약한 숨소리를 들은 노아는

좋은소식 273
자기 베개를 가져와 아버지의 부스스한 잿빛 머리 아래에 받쳐주

었다. 묵직한 이불도 갖다가 덮어주고는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집

을 나섰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지만 노아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아니오’ 말고는 별다른 말

을 하지 않는 예의 바른 소년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

다. 모자수는 창고에서 자고 있었다. 두 살배기 아기 모자수는 잠에

서 깼을 때는 식당을 헤집고 다녔지만 잠들어 있을 때는 천사 같았

다. 김창호 사장은 선자의 아이들에 관해서 불평을 한 적이 한 번

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만화책을 사주었고,이따

금씩 뒤쪽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모자수를 돌봐주었다.

“어머나.” 한창 일을 하던 경희가 고개를 들었다가 창백하게 질

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노아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무슨

땀을 이렇게 흘리니? 괜찮니? 곧 일이 끝날 거야. 배고파?” 경희는

노아가 혼자 있는 게 외로워서 왔나 보다 생각하면서 먹을 것을 챙

겨 주려고 일어났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픈 것 같아요. 우리 집 바

닥에서 자고 있어요.”

노아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면서 무 말도 않던 선자가 젖은

양손을 앞치마에 황급히 닦았다. “가도 될까예? 지금 가도 되겠습

니꺼?” 선자는 여태껏 한 번도 일찍 나선 적이 없었다.


“내가 남아서 일을 끝낼게. 어서 가. 서둘러. 나도 일이 끝나는 대

로 바로 갈게.”

274 과친코 O
선자가 노아의 손을 잡았다.

선자는 거리를 반쯤 달려 내려가다가 소리쳤다. “모자수!” 노아

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큰엄마가 집으로 데려올 거예요.” 노아가 차분하게 말했

다.
선자는 노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고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이제 우리 노아가 엄마를 달래주는구나. 우리 아들, 다 컸네, 다

컸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아들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었다. 부

모는 자식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 아이를 그렇게 키웠다가는 아이

를 망치고 만다는 사실을 선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자의

아버지는 항상 선자에게 뭔가를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심지어

는 선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도 습관적으로 선자의 정수리를

만지거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른 부모가 그랬다면 딸을 망치는

짓이라고 동네 사람들의 질책을 받았겠지만 선자의 불구 아버지를

질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의 아버지는 정상적인 팔다리

를 갖고 태어난 선자를 경이롭게 바라보는사람이었으니까. 선자의

아버지는 선자가 걷 고 말하보 간단한 암산을 하는 것만 봐도 즐거

워했다. 이제는 떠나고 안 계시지만 선자는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

와 다정한 말을 소중한 보석처 럼 간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칭찬

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선자는

어린 여자아•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귀하게 보살핌을 받았다. 선자

는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노아에게도 그런 보살펌을 받는다

좋은소식 275
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선자는 아이들을 주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 바쳐 감사했다. 힘

. 들고 외로울 때면 한 번도 그녀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던 아버

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란 그 자체가 기쁨임을 가르쳐주

셨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선자에게도 자식들은 그녀의

기쁨이 되었다.
“아버지가 마이 아파 보이더나?” 선자가 물었다.

“아버지인지도 몰라봤어요. 아버지는 항상 깨끗하고 깔끔하게

옷을 입었잖아요. 그렇죠?”

선자는 이미 오래전에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되뇌이

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 어른들이 조선인 죄수들은 죽을 때가 돼

서야 집으로 돌아온다고 선자에게 경고했었다. 그래야 죄수들이

감옥에서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죄수들은 구타당하고,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제공받지 못해서 약해졌다. 오늘 아침에도 선자는 음

식과 한 주 동안 입을 깨끗한 속옷을 감옥에 갖다주었다. 아버지인

지도 몰라봤다는 노아의 말대로라면 교회 어른들 말이 맞았다. 이

삭은 그동안 선자가 가져다준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한 것이 분명

했다.

아들과 함께 거리를 따라 걷는 선자의 눈에 행인들은 들어오지

도 않았다. 이삭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를 아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선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삭이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돈을 벌고 모을 생각만 했지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나 최

악의 경우,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들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를 아들에

276 파친코 O
게 미리 알려주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으니 노아는 분명 큰 충격을 받

리라.

“오늘 간식은 먹었나?” 선자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렇게 물

었다.

“아버지한테 주고 왔어요.”

두 사람은 사탕가게에서 행복하게 사탕을 먹으며 나오는 학생들

몇몇을 지나쳤다. 노아는 그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숙였지만 엄마

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노아가 는 아이들이 었지만 노아의 친구

들은 아니었다.
“숙제 있나?”

“네. 하지만 집에 가서 할거예요, 엄마.”

“엄마가 걱정할 게 없네.” 선자는 잡고 있는 노아의 온전한 다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아가 튼튼하게 자라주

어서 고마웠다.

선자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삭은 바닥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

다. 선자는 이삭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었다. 눈구멍과 광대뼈를 덮

은 피부가 얼룩덜룩하고 거무죽죽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거의

하얗게 새어버렸다. 이삭은 형 요셉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였

다. 이삭은 이제 선자를 오명에서 구해주었던 그 아름답던 젊은이

가 아니었다. 선자는 이삭의 신발과 구멍 난 양말을 벗겼다. 갈라

지고 쓸린 발바닥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왼발의 새끼발가락은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좋은소식 277
“엄마.” 노아가 말했다.

“응.” 선자가 노아를 돌아보았다.

“큰아버지를 불러와야 해요?”

“그래.” 선자가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마

무라 씨가 큰아버지를 일찍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데이. 큰아버지

가 못 나오시면 엄마가 아버지랑 같이 있다고 말씀드리거레이. 큰

아버지가 회사에서 곤란해지면 안 된데아 알겠제?”

노아는 문을 꼭 닫지도 못한 채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틈에

새어 들어온 미풍에 이삭이 깨어났다. 눈을 뜬 이삭이 옆에 앉아

있는 아내를 알아보았다.

“여보.” 이삭이 말했다.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구만예. 당신이 돌아와서 을매

나 기쁜지 몰라예.”

이삭이 미소를 지었다. 한때 새하얗게 반짝였던 치아는 까닿게 변


했거나 빠지고 없었다. 아랫니는 전체가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예.”

“어제 교회 관리인도 죽고,목사님도 돌아가셨어. 나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선자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가로저 었다.

“드디어 집에 왔구나. 매일 집에 가는 생각을 했어. 한시도 빼놓

지 않고 말이야. 아마 그래서 이렇게 집에 돌아왔나 봐. 그동안 당

신 무척 힘들었지.” 이삭이 선자를 다정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선자는 소매로 얼굴을 닦으면서 고개를 가로저 었다.


* * *

278 파친코 O
비스킷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이 노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갓 구운 밀 비스킷의 맛있는 냄새가 노아를 반겨주었다. 문 옆에서

비스킷을 포장하는 소녀 한 명이 조선어로 노아의 키가 정말 크다

고 속삭였다. 그러고는 요셉의 등을 가리켰다. 요셉은 비스킷 기계

모터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공장은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쉽

도록 널찍한 터널처럼 설계되어 있어서 길고 좁았다. 공장 사장은


눈에 확 띄도록 비스킷 기계를 자기 사무실 옆에 두었고,컨베이어

벨트도 나란히 줄서서 일하는 노동자들 쪽으로 움직이도록 설치했

다. 요셉은 안전 보호 안경을 쓰고 펜치로 점검판 안쪽을 쿡쿡 찌

르고 있었다. 요셉은 공장 감독관이자 정비공이 었다.

묵직한 기계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

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공장에서는 잡담이 금지되어 있기

는 했지만 소녀들이 속삭인다 해도 그 소리가 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손이 빠르고 정돈을 잘한다고 해서 고용된 40명의 소녀들은 얇

은 밀 비스킷 스무 개를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했다. 이렇게 포장한

상자들은 중국에 있는 군 장교들에게 보내졌다. 비스킷 두 개를 부

서뜨릴 때마다 봉급에서 1센이 깎이기 때문에 소녀들은 빠르면서

도 조심스럽게 비스킷을 포장해야 했다. 부서진 비스킷을 한입 베

어 먹기만 해도 당장 해고되었다. 하루 업무가 끝나면 가장 어린 소

녀가 부서진 비스킷들을 천을 깔아놓은 바구니에 모은 다음 작은

봉지에 넣어 포장했다. 이렇게 포장한 부서진 비스킷들은 시장에서

할인가로 팔렸다. 그렇지 않으면 시마무라가 실수 없이 비스킷 상

자를 가장 많이 포장한 소녀들에게 저렴하게 팔았다. 요셉은 부서

좋은소식 279
진 비스킷을 절대 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아주 적은 돈을 받고 일

하는 소녀들에게는 부서진 비스킷 부스러기도 소중한 것이 었기 때

문이다.

공장주인 시마무라는 비품실 크기만 한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

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소녀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

시할 수 있었다. 일을 잘 못하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면 요셉을 불러

들여서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라고 시켰다. 두 번 주의를 받으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해도 주급을 받지 못했다. 시마무라는 파란 천

으로 장정한 원장에다 소녀들의 이름을 기입해놓고 그 옆에 경고

횟수를 기록해두었다. 감독관인 요셉은 직원들에게 벌을 주기 싫

어했지만 시마무라는 그것이 조선인의 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인

의 효율성과 치밀함, 높은 조직 수준으로 다스린다면 아시아 전체

가 번영하고 발전해서 저 무도한 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신이 아주 마음씨 좋고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흐리멍덩하게 일을 한다고 지적하면 시마무라

는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무능과 태만을 혐오하라고 가르치지 않으

면 그들이 뭘 배우겠냐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규

범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딱 한 번 공장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시마무라는 그것

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한 일 년 전에 경희가 열병으로 시장에서 기

절을 하자 노아가 요셉을 데리러 왔었다. 시마무라는 마지못해서

요셉에게 아내를 돌봐주라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는 그런 일

280 파친코 O
이 있으면 안 된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 두

개를 유능한 정비공 없이 어떻게 돌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

였다. 요셉의 아내가 또 아프거나 하면 그때는 동네 사람이나 다

른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요셉은 근무 시간에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비스킷 생산은 전쟁 명령이었고, 전쟁 명령은즉각수행

해야 했다. 남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모든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탓에 시마무라는 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이야기를 요셉

과 나눈 지 일 년이 겨우 지났을 뿐인데 또다시 노아를 보게 되자

화가 났다. 그래서 큰아버지의 둥을 톡톡 두드리는 소년을 못 본

척하며 신문을 쫙 펼쳐들었다.

노아의 가벼운 손길에 깜짝 놀란 요셉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노아구나. 그런데 지금 여기 왜 왔어?”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뭐? 정말이니?”

“지금 집에 갈 수 있어요?” 노아가 물었다. 조그맣게 벌어진 노아

의 입이 요셉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셉은 아무 말 없이 안경을 벗고 한숨을 쉬 었다.

노아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큰아버지는 엄마가 큰엄마

나 김 사장님에게 물어봐야 하듯이,자신이 선생님에게 화장실에

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하듯이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었다. 가끔


씩 바깥 날씨가 좋을 때 노아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오사카 만

M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아주 어렸을 때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


와 함께 딱 한 번 오사카 만에 가본 적이 있었던 노아는 언제나 그

좋은소식 281
곳에 다시 한 번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괜찮아 보이든?” 요셉이 노아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 머리카락이 회색이 됐어요. 몸도 더러워졌고요.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큰아버지가 올 수 없어도 괜찮다고 엄마가

그러셨어요. 그저 큰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

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알았다. 정말 좋은 소식이구나.”

요셉은 시마무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마무라는 신문을 들고

읽는 척했지만 자신을 아주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

다. 사장은 절대 지금 그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경희가 기절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시마무라는 교회 관리인이 신사참배를 거

부해서 이삭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경찰이 찾아•와서 요셉을 신문했고, 시마무라와도 이야기를 나누었

는데 그때마다 시마무라는 요셉이 모범적인 조선인이라고 옹호했

다. 만일 지금 요셉이 집으로 간다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그

렇게 되면 경찰 심문이라도 당하게 될 때 제대로 된 신원증명을 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노아야, 내 말 잘 들어. 세 시간도 안 돼서 일이 다 끝날 거야. 그

후에 서둘러 집에 갈게. 일을 끝마치지 않고 지금 나갈 수는 없어.

일이 끝나는 대로 너보다 더 빨리 달려서 집으로 가마. 엄마한테

곧 갈 거라고 전해줘. 아버지가 물어보면 큰아버지가 곧 올 거라고

말해.”

노아는 큰아버지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

다.

282 파친코 O
“난 일을 끝내야 해,
노아야. 그러니까 넌 집으로 달려가. 알았지?”

요셉은 안전 보호 안경을 다시 쓰고 몸을 돌렸다.

노아는 출입문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달콤한 비스킷 향기가


출입문 바깥까지 새어나왔다. 노아는 그 비스킷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하나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좋은소식 283
낯익은 람

노아가 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

고 달려오느라 머리가 울리고 가슴이 쿵광거렸다. 노아는 헐떡이

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엄마에게 말했다.

“큰아버지가 못 오신대요.”

선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선자는 젖은 수

건으로 이삭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삭의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가슴이 약하게나마 들썩이고 있

었고, 가끔씩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얇은 이

불이 긴 두 다리를 덮고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솟아오른 흉터들이

이삭의 양어깨와 거무죽죽하게 변색된 가슴 위로 불규칙하게 일그

러진 마름모를 그리며 가로질러 나 있었다. 이삭이 기침을 할 때마

다목이 붉어졌다.

노아가 조용히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안 된데이. 고마 물러나 있거라.” 선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

낯익은사람 285
지는 지금 윽시로 편찮으시다 아이가. 감기가 너무 심해서 가까이
오면 안 된데이.”

선자는 이삭의 몸을 다 닦지는 못했지만 이불을 이삭의 어깨까

지 끌어올렸다. 대야의 물을 여러 번 바꾸고 강한 비누를 써도 이

삭의 몸에서는 여전히 시큼한 냄새가 났고, 머리카락과 수염에는

서캐가달라붙어 있었다.

이삭은 심한 기침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몇 분 동안 정신을 차렸

으나 지금은 눈을 뜨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자도 알아보

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선자는 펄펄 끓는 이삭의 머리에 새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가장

가까운 병원은 전차를 타고 한참 가야 했고,설령 선자 혼자서 이

삭을 병원까지 데려갈 수 있다 해도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

이 없었다. 이삭을 김치 수레에 싣고 역까지 갈 수 있다면 전차에

태울 수 있겠지만 수레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수레는 전차에 실

을 수가 없었다. 노아가 수레를 집에 가져다놓을 수 있지만 그러면

전차에서 내렸을 때 수레 없이 어떻게 이삭을 병원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만약 전차 운전사가 그들을 태워주지 않는다면 또 어떡할

까? 선자는 전차 운전사가 아픈 여자나 남자에게 내리라고 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노아는 아버지의 기침을 피하려고 아버지의 두 다리 옆에 앉았

다. 당장 아버지의 날카로운 무릎 뼈를 두드려보고 싶었다. 아버지

를 만져보고 아버지가 진짜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노아는 아버

지의 숨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숙제를 하려고 책가방에서 공

책을 꺼냈다.

286 파친코 O
“노아야,신발 다시 신어0M 데이. 약국에 가서 공 약사 선생님을

모셔오그라. 중요한 일이라서 엄마가 진료비를 두 배로 드릴기라

고 이래 말씀드릴 수 있겠나?” 선자는 조선인 약사가 오지 않는다

면 경희에게 일본인 약사를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물론 일본

인 약사가 집까지 와 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노아가 군소리 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차분하면서도 빠

르게 달려가는 노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선자는 이삭을 닦아주던 작은 수건을 놋대야에 비틀어 짜서 물

기를 뺐다. 이삭의 앙상한 등에는 최근에 맞아서 부풀어 오른 자국

과 좀 더 오래된 흉터들이 가득했다. 거무스름하게 멍든 이삭의 몸

을 닦는 선자의 마음이 아팠다. 이삭처럼 좋은 사 람 은 어디에도 없


었다. 이삭은 그녀를 이해하려고 했고,그녀의 감정을 존중하려고

애썼다. 선자의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끄집어낸 적이 한 번도 없었

다. 모자수를 낳기 전에 몇 차례 유산을 했을 때는 인내심을 잃지

않고 선자를 위로해주었다. 마침내 아들을 낳자 이삭은 더없이 기

뻐했다. 하지만 선자는 없는 형편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어 이삭의 기쁨에 함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삭이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이제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하는 생

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삭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이삭이

자신을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이삭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선자는 이삭을 바라보았다. 비록 수

척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이삭은 여전히 눈부시게 름다

웠다. 통통하고 키가 작은 선자와는 달리 이삭은 팔다리가 길고 늘

씬하게 키가 컸으며, 심지어는 찢어져 엉망이 된 발도 여전히 반듯

낯익은사람 287
하게 잘생겼다. 선자의 작은 눈은 걱정 어린 빛으로 일렁거렸지만

이삭의 커다란 눈은 기대로 넘쳐흘렀다. 대야의 물이 거무튀튀해

져서 선자는 새 물을 받아오려고 일어섰다.

그때 이삭이 깨어났다. 이삭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선자를 발견했다. “여보”라고 소리쳐 선자를 불렀지만 선

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삭은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정신은 살아 있었지만 목소리가 죽어가는 것처럼 느

껴졌다.

“여보.” 이삭이 웅얼거리며 선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선자는 이

미 부엌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이삭은 지금 자신이 오사카의 요

셉네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린 소년이었던 꿈에서 깨어

났으니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이 분명했다. 꿈속에서 이삭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정원의 나지막한 밤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있었다.

밤나무꽃 냄새가 아직 콧속에 남아 있었다. 감옥에서 꾸었던 많은


꿈처럼 이번에 꿈을 꿀 때도 이삭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

다. 현실이라면 절대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을 테니까. 어렸을 때 집

안 정원사는 신선한 공기를 쐬라고 그 밤나무 아래에서 이삭을 받

쳐 올려주었다. 하지만 요셉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갈 정도로 건강

하지는 못했다. 정원사는 요셉을 ‘원숭이’라고 부르곤 했다. 꿈속에

서 이삭은 짙은 초록색 나뭇잎들과 진분홍색 속꽃잎이 있는 하얀

꽃송이들에게서 떨어지기 싫어서 굵직한 나뭇가지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집 안에서 이삭을 부르는 여자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

다. 이삭은 나이 지긋한 보모와 누나를 보고 싶었다. 그들은 수년 전

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꿈속에서는 어린 소녀들처럼 웃고 있었다.

288 파친코 O
“여 보!”

“어머나!” 선자가부엌 문간에 세숫대야를 내려놓고 이삭에게 달

려왔다. “괜찮으십니꺼? 뭘 좀 드릴까예?”

“여보.” 이삭이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이삭은 졸린

데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선자의 얼굴은 기억

하던 것과 달랐다. 좀 더 나이가 들었고, 훨씬 더 지쳐 보였다. “고

생 많이 했죠? 정말 미안해요.”

“말 많이 하지 마이소. 무리하시면 안 됩니더. 쉬셔야지예.” 선자

가 말했다.

“노아.” 이삭은 뭔가 좋은 것을 떠올린 것처럼 아들의 이름을 불

렀다. “노아는 어디 있어요? 좀 전에 여기 있었는데.”

“약사를 데리러 갔어예.”

“아주 건강해 보이더군요. 성격도 밝아 보이고.” 말을 하기가 힘

들었지만 갑자기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삭은 선자에게 하려고 준

비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거기서 요리를 하는 거예요?” 말을 마

치기가 무섭게 이삭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멈출 수가 없었다. 핏

방울이 선자의 윗도리에 튀었다. 선자는 수건으로 이삭의 입을 닦

아주었다.

이삭이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하지만 선자는 혹시라도 그가 다

칠까 봐 걱정스러워서 왼손을 이삭의 머리 아래에, 오른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 일어나지 못하게 말렸다. 기침을 하느라 이삭의 온

몸이 들썩거렸다. 이불 위로도 이삭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낯익은사람 289
“제발 좀 누워 계시소. 나중에 얘기하입시더. 나중에 얘기할 수

있잖아예.”

이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돼 요 .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선자는 손 을 무릎 위에 올렸다.

“내 삶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이삭은 고통과 피곤에 찌든 선자

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그녀에

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를 선자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자신을 기

다려주고, 자신의 식구를 보살펴준 그녀에 게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말이다. 자신이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을 때 대신 일하며 돈을 벌

었을 선자를 생각하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남편이 없는 상황에

서 전쟁으로 물가까지 상승해 금전적으로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감옥의 간수들은 끊임없이 오르기만 하는 물가를 불평하면서 배불

리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귀리죽에 벌레가 들어 있다고

불평하지 마! 이삭은 가족들을 위해 앙직을 제공해달라고 항상 기


도했다. “내가 당신을 여기로 데려와서 당신 인생이 더 고달파졌군

요”

선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날 구

해준걸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어


서 건강해지셔야지예.” 선자는 이삭에게 더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

었다. 온몸에서 열이 펄펄 나는데도 이삭은 떨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빨리 건강을 되찾으셔야지예.” 당신 없이 제가 우째 아이들

을 키울 수 있겠어예?
“모자수는 어디에 있어요?”

290 파친코〇
“언니와 같이 식당에 있어예. 식당 사장님이 우리가 일하는 동안

모자수를 데리고 있어도 좋다고 했거든예.”

이삭은 모든 통증이 사라진 것처럼 정신이 또렷하고 맑아졌다.

그는 아이들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었다.


“모자수.” 이삭이 미소를 지었다. “모세는 노예가 된 백성들을 구

하셨지… …,

이삭은 머리가 심하게 울려 또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두

아들이 다 자라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

삭은 지금껏 이렇게나 간절히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

이 든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보고 싶다고 바라게 된 지금에야,이

삭은 이렇게 죽으러 집에 보내진 것이었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어. 두 아들이. 노아와 모자수. 하나님, 제 아이들을 축복해주소

서 .” 이삭이 말했다.

선자는 조심스럽게 이삭을 살펴보았다. 이삭의 얼굴은 낯설어

보였지만 평온했다.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선자는 계속 이

야기를 했다.

“모자수가 많이 컸습니더. 늘 행복하고 자상한 아이로예. 웃는

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예. 어디를 가든 뛰어댕기는데 그게 또 을메

나 빠른지 예 !
” 선자는 양팔을 흔들어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달리기
를 흉내 내다가 자기 꼴이 우스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삭도 따라

웃었다. 그 순 社 선자는 이 세상에 모자수가 잘 크고 있다는 이야

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녀 이외에 단 한 사람 더 존재한다

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주버님 내외가 아이들

낯익은사람 291
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도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그들의 심정을 무

시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아이들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

워서 기뻐하는 모습을 감추어야 했다. 건강하고 착한 두 아들은 큰

재산이었다. 선자에게는 집도,돈도 없었지만 노아와 모자수가 있

었다.

이삭이 눈을 뜨고 천장을 보았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갈

수 없습니다, 주님. 아이들을 만나 축복해줄 때까지는 안 돼요. 주

님,제가아이들을… …”

선자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이삭이 다시 눈을 감았고, 양어깨가 통증으로 뒤틀렸다.

선자는 오른손을 이삭의 가슴에 올려서 이삭이 얕게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했다.

문이 열리더니 예상했던 대로 노아가 혼자 돌아왔다. 약사가 지

금은 올 수 없지만 저녁 늦게 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노아는

이삭의 발치로 돌아가 아버지가 잠을 자는 동안 산수 공부를 했다.

노아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학업 성적을 자랑하고 싶었다. 가장 엄

한 호시이 선생님도 노아에게 글씨를 잘 쓴다면서 문맹인 조선인

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부지런한

조선인 한 명이 만 명의 조선인들을 격려해 게으른 천성을 극복하

도록 도와줄 수 있단다!

이삭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노아는 공부에 몰두했다.

나중에 경희가 모자수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자 이삭이 체포된 이

후 처음으로 집 안에 활기가 돌았다. 이삭이 잠깐 깨어나서 해골 같

292 파친코 O
은 사람을 年.〒 .〒 .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모자수를 바라보았다. 모

자수는 이삭을 “아빠”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러듯이 두

손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토닥거렸다. 모자수는 통통하고 하얀 손으

로 이삭의 푹 꺼진 두 뻠을 톡톡 건드렸다. 아이는 이삭 앞에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이삭이 눈을 감자마자 경희는 아이한

테 병이 옮을까 봐 두려워 이삭한테서 아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요셉이 집에 돌아오자 집 안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요셉은 눈앞

에 명백히 보이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요셉은 이삭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

면서 말했다.

“이 녀석아,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니? 사실이

아니라도 천황을 숭배한다고 말할 수 없었어?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몰랐단 말이야?”

이삭은 눈을 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다시 눈을 뜨는 게 고통스러웠다.

이삭은 요셉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희가 남편에게 가위와 긴 면도날,기름 한 컵,식초 한 그릇을

쪄다주었다.

“서캐는 죽지 않아요. 그냥 머리카락과수염을 깎아•야 해요. 서방

님은 지금 무척 가려울 거예요.” 경희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잔뜩

젖어 있었다.

요셉은 할 일을 쥐어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삭의 머리에 기름 한 컵을 부어 두피를 문질렀다.

“이삭,움직이지 마.” 요셉은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낯익은사람 293
“널 가렵게 하는 이 못된 벌레들을 다 없애줄게.”

요셉은 이삭의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잘라내서 놋대야에 던져 넣

었다.
“이삭아, 기억나니?” 요셉이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 정원사가 어렸을 때 우리 머리카락 잘라줬잖아. 그때 난

미친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곤 했지만 넌 절대 그러지 않았지. 넌

동자승처럼 차분하고 평화롭게 가만히 앉아서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어.” 요셉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점점 목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삭아, 내가 왜 너를 이 지옥으로 데려왔을

까? 내가 너무 외로워서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그래 맞아,널 여

기로 데려온 건 내 잘못이야.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었던 벌을 이렇

게 받는구나.” 요셉이 칼날을 대야에 넣었다.

“네가 죽는다면 나도 살 수 없어. 알겠니? 넌 죽을 수 없어. 이삭

아, 제발 죽지 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니? 부모님께는 또

뭐라고 말할 수 있겠니?”

이삭은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계속 잠들

어 있었다.

요셉은 젖은 눈을 닦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칼날을

집어 들어 남아 있는 이삭의 회색 머리카락을 묵묵히 잘라냈다. 이


삭의 머리가 매끈해지자 요셉은 동생의 수염에도 기름을 발랐다.

저녁 내내 요셉과 경희, 선자는 이삭의 몸에서 이를 잡았다. 아이

들을 재우러 갈 때만 그 일을 멈췄다. 후에 약사가 찾°1•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제는 병원이나 의사가 이삭

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294 파친코 O
* * *

아침이 되자 요셉은 일을 하러 나갔다. 선자는 이삭 곁에 머물렀

고,경희는 식당에 나갔다. 요셉은 경희가 혼자 일하러 나가는 것을

年.7.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뭐라고 할 힘도 없

었고, 무엇보다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형편이었다. 집 바깥 거리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과 학교로 달려가는 아이들로 분주했지만,

방에서 잠든 이삭의 숨소리는 빠르고 얕았다. 이삭은 몸에 난 모든

털을 깎아서 깨끗하고 매끄러워졌고 꼭 갓난아기 같았다.

노아가 아침을 먹은 후, 젓가락을 단정하게 내려놓고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집에 있어도 돼요?” 학교에서 지독한 일을 당했을 때도 그

런 말을 하지 않았던 노아였다.

선자는 바느질을 하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디 아프나?”

노아가 고개를 가로저 었다.

반쯤 깨어난 이삭이 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노아야.”

“네,아버지.”

“네가 훌륭한 학자가 될 거라고 엄마가 그러더구나.”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지만 금세 습관처럼 발을 내려다보았다.

노아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아버지였다.

요셉은 노아에게 아버지인 이삭이 머리가 좋아서 독학으로 한글

과 한문,일본어를 익혔다고 말했다. 이삭이 신학대학에 갔을 무렵

낯익은사람 295
에는 이미 성경을 수차례 읽고 난 후였다.

노아는 학교 공부가 어렵다 싶을 때마다 아버지가 배운 사람임

을 떠올리고 배움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다졌다.

“노아야.”

“네,아버지?”

“넌 오늘 학교에 가아=해. 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가고 싶었단다. 정말 간절하게 가고 싶었지.”

노아는 예전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내하는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우리의 재능을

키워야 한단다. 네가 지금처럼만 한다면 아버지는 행복할 거야. 어

디를 가든 넌 우리 가족을 대표하는 훌륭한 사람이 분명해. 학교에

서건, 동네에서건, 이 세상 어디에서건,넌 그런 사람이야. 다른 사

람들의 말이나 행동은 중요하지 않아.” 이삭이 말을 멈추고 기침을

했다. 이삭은 아이가 일본 학교에 다니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넌 겸손하고 성실한 아이가 틀림없어. 모든사람에게 연민을 베

풀 줄 6}는 사람이 되거라. 적에게도 말이야. 아버지 말 알겠니, 노

아아? 인간은 불공정할 수 있지만 주님은 공정하시단다. 두고 보면

알 거야. 두고 보면.” 이삭이 지쳐서 약해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 호시이 선생님은 노아에게 언젠가조선인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조선인들을 자애로운 천황폐하의 훌륭한 신민으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노아는 깨끗하게 깎은 아버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정수리가 푹 꺼진 거무스레한 뺨과 대

296 파친코 O
조적으로 너무나 하얗게 보였다. 아버지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사

람처럼 느껴졌다.

선자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노아는 아버지와 어머니,셋이서만

오붓하게 하루를 보낸 적이 없었다. 선자가 자랄 때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항상 엄마,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세 사람

은 보이지 않는 삼각형처럼 늘 연결되어 있었다. 고향에서의 삶을

떠올릴 때면 그 친밀했던 관계가 그리웠다. 노아가 학교에 가<야 한


다는 이삭의 말이 옳았지만 이삭은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다. 머지않아 이삭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 테니까. 선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만큼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삭의 바람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선자는 노아의 가방을 집어

들어 풀죽은 노아에게 건넸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거라. 기다리고 있을게.” 이삭이

말했다.

노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질

까 봐 두려워서 아버지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

오기 전에는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노아

의 작은 가슴속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고통이 치솟아올랐다.

노아는 그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자기가 집에 있

으면 아버지가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지 않았던가? 왜 아버지처럼 집에서 공부하면 안 되는

걸까? 노아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 때

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낯익은사람 297
하지만 이삭은 노아에게 이런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기

싫었다. 아이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아이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과 배움, 하나님과 대

화하는 법에 관해서 아이에게 말해주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학교는 많이 힘드니?” 이삭이 물었다.

선자가 노아를 돌아보았다. 선자는 지금껏 노아에게 그런 것을

물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노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노아가

좋아하는 우등생들은 모두 일본인이 었는데 그들은 노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아는 자기가

조선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다면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할 수도 있

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버지나 다른 사람

에게 할 수는 없었다. 노아는 평범한 일본인이 절대 될 수 없었으

니까. 하루는 요셉 큰아버지가 조선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고, 노

아는 조선에서 사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가방과 도시락을 든 노아는 아버지의 친절한 얼굴을 음속에

새기면서 문간에서 어정거렸다.

“우리 아들, 이리 오렴.” 이삭이 말했다.


노아가 이삭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나님, 하나님,제

발 아버지가 낫게 해주세요. 한 번 더 부^드릴게요 제^■요. 노아


가 눈 을 꼭 감았다.

이삭이 노아의 손을 잡았다.

“넌 아주 용감한 아이야. 나보다 훨씬 더 용감하지. 너를 한 인간

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건 아주 용

298 파친코 O
감한 일이야.”

노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손으로 코를 문질러 닦았다.

“얘야,
사 랑 하 ^ 아퓰:아, 넌 내 혁 ^이 야 .” 이삭이 아돌■의 손•을 놓

아주면서 말했다.

낯익은사람 299
12년 만 의 재 회
1944년 12월

오사카의 가게들은 대부분 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선자가 일

하는 식당도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문을 닫았다. 하지만

식당의 일꾼 세 명은 여전히 일주일에 6일 가게에 나왔다. 식품은

시장에서 사실상 사라져버렸고, 배급이 나와서 상인들이 반나절

동안 길게 줄을 섰을 때도 배급랑은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고

성에 차지 않았다. 생선을 얻으려면 여섯 시간은 기다려야 했고, 그

래봤자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마른 멸치 약간이었다. 상황이

나쁘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다. 고위 군관계자와 연이 닿아 있

다면 필요한 것을 약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돈이 많다면 언제나

암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는 있었다. 도시 아이들은 기차를 타

고 시골로 가서 할머니의 기모노를 계란이나 감자와 바꿔왔다. 식

당에서 식자재 구입 업무를 담당하는 김창호는 곡물창고 두 개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식당 부엌을 불시 점검하기 좋아하는 주민연

12년 만 의 재 회 301
합 지도자들에게 안전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창고였고, 다른 하

나는 지하실의 가짜 벽 뒤에 있었다. 그곳에는 암시장에서 사들인

식품들이 있었다. 때때로 손님들이 자기들이 먹을 고기와 술을 가

져오기도 했다. 주로 오사카에서 온 부유한 사업가들과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그랬다. 저녁에 요리를 했던 사람들은 이제 떠나버

리고 없었다. 그 바람에 저녁 일꾼들이 하던 일을 김창호가 다 해

야 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놓을 고기를 요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은 모두 김창호의 몫이었다.

한 해의 열두 번째 달,따뜻한 겨울 아침이었다. 선자와 경희가

일을 하러 오자 김창호는 여자들에게 부엌 바깥쪽 벽에 붙여놓은

네모난 탁자 앞에 앉으라고 했다. 그들이 평소에 식사를 하거나 휴

식을 취할 때 쓰는 탁자였다. 김창호는 찻주전자도 미리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 다 자리에 앉자 경희가 각자의 컵에 차를 따라주

었다.

“내일 식당 문을 닫을 겁니다.” 김창호가 말했다.

“얼마나 오래예?” 선자가 물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요. 오늘 아침에 마지막 남은 쇠붙이를 내

줬어요. 이제 부엌은 거의 텅 비어버렸죠. 놋쇠로 된 밥그릇과 놋

대야, 냄비,조리도구, 수저까지 모두 징발당했어요. 새 조리도구를

장만해서 다시 식당 문을 열 수 있다 해도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갖

고 있다는 걸 경찰이 알면 그것도 다 압수해갈 겁니다. 정부는 물

건을 가져가고도 돈을 내놓지 않죠. 계속 물건을 사들일 수 없으

니… …” 김 창 호 가 차 를 한 모 금 마 셨 다 .“뭐, 다른방법이 없죠.”

302 파친코 O
선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의 김창호가 안됐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 였다. 김창호가 경희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경희가물었다.

이삭보다 어린 김창호는 경희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최근 김창

호는 시장에 나갔다가 검문을 당할 때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경희

에게 함께 가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경찰과 주민연합 지도자

들이 군복을 입지 않은 남자들을 군복무 회피자로 의심해서 심문

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김창호는

거리에서는 장님이 쓰는 검은 안경을 썼다.

“다른 일을 구할 수 있어요?” 경희가 물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적어도 저는 싸우러 나가지는 않아도

되잖아요.” 김창호가 안경을 만지면서 웃었다. 다른 조선인들이 징

병을 당했을 때 김창호는 시력이 나빠서 싸우러 나가지 않았고,광

산에도 끌려가지 않았다. “잘된 거죠. 전 겁쟁이니까요;

경희가 고개를 가로저 었다.

김창호가 일어섰다.

“오늘 저녁에 홋카이도에서 오는 손님들이 있어요. 프라이팬 두

개와 그릇 몇 개를 챙겨두었으니까 그걸 쓸 수 있어요. 누님, 저와

함께 시장에 같이 가주실 수 있겠어요?” 김창호가 이렇게 말하고

는 선자를 돌아보았다. “선자 씨는 여기 남아서 술 배달부를 기다

려주시겠어요? 술 한 상자를 가져오기로 했거든요. 아,손님이 오

늘 밤에 도라지 무침을 먹고 싶다고 했어요. 아래층 찬장에 마른

도라지 한 통을 넣어뒀어요. 다른 재료들도 거기 있을 거예요.”

선자는 김창호가 마른 도라지와 참기름을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

12년 만 의 재 회 303
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경희가 일어서서 스웨터와 일할 때 입는 바지 위에 낡은 파란색

코트를 걸쳤다. 경희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여인이었고 깨끗한 피

부에 몸매도 여전히 늘씬했다. 그러나 눈 주위에는 자잘한 잔주름

이 생겼고,미소를 지을 때는 입 주위에 주름이 잡혔다. 힘든 부엌

일로 한때는 부드러웠던 두 손이 상했지만 경희는 신경 쓰지 않았

다. 잠잘 때 그 작은 오른손을 잡고 잠드는 요셉은 매일 절임을 담

그느라 손바닥에 생겨난 붉은 흉터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

았다. 이삭이 죽은 후,요셉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시


무툭하고 음울한 표정으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고 일만

했다. 요셉이 변하자 집 안 분위기와 결혼 생활도 달라지고 말았다.

경희는 남편의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애썼지만 요셉의 침울한 분위

기와 침묵을 떨쳐버릴 방도가 없었다. 집에서는 아이들 빼고는 아

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요셉은 경희가 어린 시절에 그토록 사

랑했던 그 소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져버 렸다. 그는 이제 완전

히 망가져버린 냉소적인 남자가 되었고 이것은 경희가 전혀 예상

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경희는 식당에서만 발랄하던 본

인의 원래 모습을 내보였다. 식당에서는 김창호를 어린 남동생 대

하듯 놀리고, 요리를 하면서 선자와 깔깔거렸다. 그런데 이제 이 장

소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김창호와 경희가 시장으로 떠난 후, 선자는 문을 닫았다. 선자가

부엌 쪽으로 돌아서자 노크 소리가 났다.

“잊어버린 거 있어예?” 선자가 문을 열면서 말했다.

문 앞에는 회색 정장에 검정색 코트를 걸친 한수가 서 있었다.

304 파친코 O
머리카락은 여전히 짙었고 얼굴도 예전과 거의 비슷했다. 다만 턱

선을 따라 약간 살이 붙었을 뿐이었다. 선자는 반사적으로 한수가

오래전에 신곤 했던 하얀 가죽 구두를 신고 있는지 확인했다. 한수

는 검정색 가죽 끈 구두를 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한수가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선

자는 한수한테서 몇 발자국 물러섰다.

“당신 이 와 여 기 있는 겁니꺼?”

“여기는 내 식당이야. 김창호는 내 밑에서 일하지.”

선자는 정신이 혼미해져 가장 가까운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수는 11년 전,선자가 자신이 준 은시계를 전당포에 팔았을

때 선자를 찾아냈다. 그 전당포 주인이 그 시계를 한수에게 팔려

고 했던 것이다. 그 전후 사정은 흥신소에 맡겨서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한수는 선자의 일상을 추적해왔다. 이삭이

감옥에 가고 난 이후에는 선자에게 돈이 필요한 것을 알고 선자를

위해 이 일거리를 마련해주었다. 선자는 요셉에게 돈을 빌려주었

던 고리대금업자도 한수 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

실 한수의 아내는 간사이B8S. 교토. 2 사 카 를 중심으로한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맏딸이었고, 아들이 없던 한수의 장

인 모리모토는 한수를 데릴사위로 들여서 자기 성을 잇게 했다. 고

한수의 법적 이름은 모리모토 하루였고,그는 아내와 세 딸과 함께

오사카 외곽의 커다란 집에서 살았다.

한수는 몇 분 전에 선자가 경희와 함께 앉았던 탁자로 선자의 둥

을 밀어 이끌었다.

12년 만 의 재 회 305
“차 한잔하지. 여기 앉아 있어. 내가 컵을 가져올게. 날 만나서 불

안해하는 것 같으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는 모양인지 한수는 금방 부엌에서 찻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선자는 여전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한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노아는 아주 영리한 아이야. 잘생긴 데다 달리기도 잘하지.” 한

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선자는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떻게 그는 이 모

든 것을 알고 있는 걸까? 선자는 김창호와 아이들에 관해서 나누

었던 대화를 모두 떠올려보았다. 노아가 학교 수업이 없을 때는 모

자수와 함께 식당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원하는 게 뭡니꺼?” 마침내 선자가 속마음보다 훨씬 차분한 척

하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넌 당장 오사카를 떠나야 해. 네 언니와 아주버니도 같이 가도

록 설득해.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야. 하지만 두 사람이 가지 않겠

다면 어쩔 수 없겠지. 너와 아이들이 있을 곳을 마련해두었어.”

“와예?”

“곧 있으면 여기가 폭격당할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꺼?”

“미국인들이 며칠 내로 오사카에 폭탄을 투하할 거야. B -29가

중국에 도착했어. 지금 일본열도에는 B -29기지가 많이 발견됐어.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는 거야. 일본 정부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 일본군은 자신

들의 실수를 인정하느니 일본인 소년들을 모두 죽이고 말 거야. 다

306 파친코 O
행스럽게도 노아가 징병당하기 전에 전쟁이 끝날 거지만.”

“하지만 다들 일본이 잘하고 있다고 하던데예.”

“이웃 사람들 이야기나 신문에서 하는 소리를 믿어서는 안 돼.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

“쉬.” 선자는 본능적으로 유리창과 출입문 주위를 살폈다. 한수의


반역적인 언사를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한수는 감옥에 끌려갈 수

있었다. 선자는 아이들에게 절대 일본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이야

기를 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주의를 주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됩니더. 큰일을 당할 수 있으예… …”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못 들어.”

선자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수를 응시했다. 한수를 이렇게 마

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12년이 지났음에도 한수

는 여전히 똑같은 얼굴로 나타났다. 선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모

습 그대로. 선자는 밝은 달빛과 차갑고 푸른 바다를 사랑하듯이 한

수의 얼굴을 좋아했다. 한수는 맞은편에 앉아서 선자의 시선에 다

정한 눈빛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내뱉으

며 차분함을 유지했다. 주저하는 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수

는 선자의 아버지와 이삭, 아주버니, 혹은 김창호와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었다. 선자가 아는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선자야,넌 오사카를 떠나야 해. 생각할 시간이 없어. 폭탄이 떨

어져 이 도시가 파괴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널 찾아온 거야.”

왜 더 빨리 찾아오지 않았을까? 왜 그림자처럼 숨어서 지켜보기

만 했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자주 나를 지켜봤을까?

한수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올라서 선자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

12년 만 의 재 회 307
은 여기를 떠나지 않을 껍니더. 저도 그럴 수 없… …”

“네 0}주버니를 말하는 거겠지. 그는 멍청이야. 하지만 그건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지. 네가 설득한다면 네 언니는 떠날 거야. 이

도시는 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져 있어. 성냥불 하나만 떨어져도 다

타버릴 거라고. 그런데 미국 폭탄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어?”

한수가 말을 멈췄다. “네 아이들이 죽을 거야. 그걸 원하는 거니?

내 딸들은 이미 오래전에 멀리 보냈어. 부모가" 결정을 내려야 해.

아이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니까.”

그때 선자는 알아차렸다. 한수는 노아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한

수에 게는 일본인 아내와 세 딸이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압니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아냐고예?


“너한테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노아가

어느 학교에 다니고, 노아의 수학 선생님이 일본인인 척하는 조선

인이고, 네 남편이 제때 감옥에서 나오지 못해 죽었고,네가 이 세

상에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있겠어? 내 가족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법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겠느냔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는 게 내 일이야. 넌 김치를 만들고 길에

서 팔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한 거니? 살고 싶었기 때문

에 그 방법을 알아냈던 거야. 나도 살고 싶어. 내가 살아남으려면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해. 지금 난 너에게 아주 귀중한 정보

를 말해주는 거야. 네가 네 아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정보를

말해주는 거라고. 이런 정보를 헛되이 쓰지 마. 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거야. 하지만 넌 네 아들들을 보호해야 해.”

“아주버니는 집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 껍니더.”

308 파친코 O
한수가 웃었다. “그 집은 갯더미가 될 거야. 일본은 그 집이 사라

져도 그 대가를 한 푼도 치르지 않을 거고.”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했어예.”

“전쟁은 곧 끝날 거야.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아니

지. 부유한 일본인들은 이미 가족들을 시골로 보냈어. 현금도 이미

금으로 바꿨고. 부자들은 정치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아. 살아남기

위해서는 못할 게 없지. 넌 부자가 아니지만 똑똑하잖니. 난 지금

너에게 오늘 떠나라고 말하는 거야.”

“우째 떠나라는 말입니꺼?”

“김창호가 너와 네 아주버니, 언니,아이들을 오사카 외곽의 농장

으로 데려갈 거야. 고구마 농장 농부가 나한테 빚을 진 게 있어. 그

는 큰 땅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는 먹을 게 많아. 너희들 모두가 전

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일해야 할 테지만 잠잘 곳이 생기고, 먹

을 것도 풍족할 거니까. 다마구치는 아이가 없어.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저를 왜 찾아온 겁니꺼?” 선자가 울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 어리석은 여자처럼 굴지

마. 넌 그보다 훨씬 똑똑한 여자니까.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야. 네

집과 마찬가지로 이 식당도 파괴되고 말 거야.” 한수가 빠르게 말

했다. “이 건물은 나무와 벽돌 몇 개로 지은 허술한 거야. 네 0ᅵ■주버

니도 그 집을 다른 멍청이에게 빨리 팔고 떠나야 해. 아니면 적어

도 집 소유권 서류라도 갖고 가거나. 머지않아 사람들이 생쥐처럼

여기서 도망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늦기 전에 지금 떠나야 한다고.

미국인들이 이 어리석은 전쟁을 끝낼 거야. 어쩌면 오늘 밤, 아니면

12년 만 의 재 회 309
몇 주 내로 말이야. 이 어처구니없는 전쟁을 아주 오래 끌지는 않

을 거야. 독일군도 지고 있어.”

선자는 양 ^을 맞잡았다. 전쟁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

고 모두가 전쟁에 질려버렸다. 이 식당이 없었다면 모두가 일해서

돈을 벌었다 한들 가족들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옷은 낡고 구멍이

숭숭 뚫렸지만, 천과 실,바늘을 구할 수가 없었다. 구두닦이는 이


제 어디서도 찾 아 # 수가 없는데 한수의 구두는 어떻게 저렇게 반

짝거리는 걸까?

선자와 경희는 끝없는 주민연합회의를 혐오했지만 거기에 참석

하지 않으면 배급을 받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 받은 군사 훈련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할머니들과 어린아이들

이 날카로운 죽창으로 적을 찌르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미국 군인

들이 성인 여자들과 소녀들을 강간했다면서 그 야만인들에 게 항복

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는 소리도 들었다. 식당 사무실

뒤에는 미국인들이 상륙했을 때를 대비해서 노동자들과 손님들이

사용할 죽창이 보관되어 있었고 김창호는 책상 서랍에 사냥용 칼

두 개를 보관해두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꺼? 부산으로예?”

“그곳에는 먹을 게 없어. 게다가 그곳도 안전하지 않아. 작은 마

을에서 여자들이 대거 사라지고 있어.”

선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중국이나 다른 식민지에 좋은 공장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을 듣지 말라고. 그런 일자리는 없어. 내 말 알겠

어?” 한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310 파친코 O
“우리 엄마는괜찮을까예?”

“젊은 여자가 아니면 데려가지 않아. 네 엄마는 찾아볼게.”

“고맙심더.” 선자가조용히 말했다.

선자는 아이들 걱정을 하느라 엄마가 무사한지에 대해서는 신

경을 쓰지 못했다. 귀찮아하는 학교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드문드

문 보내는 편지에서 엄마는 괜찮다고만 하면서, 자신보다는 선자

와 선자의 아이들 걱정을 더 많이 했다. 선자는 한수를 보지 못했

던 세월만큼 엄마도 만나지 못했다.

“오늘 밤 떠날 준비를 할 수 있겠니?”

“아주버님이 제 말을 들을라 하시겠어예?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

“김창호가 오늘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해. 김창호는 지금 네

언니한테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야. 넌 김창호가" 이 귀중한 정

보를 자기보다도 더 높은 사장한테서 들은 거라고 말해. 김창호를

네 집으로 보내줄 수도 있어.”

선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셉이 이곳을 떠나도록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망설여서는 안 돼. 아이들을 보호해야지.”

“하지만언니는… … ”

“그 여자가 뭐? 내 말 들어. 다른 누구보다 네 아이들을 선택해야

자 지금쯤이면 그 정도는 알 때도 되지 않았어?”

선자가 고개를 끄덕 였다.

“해가 질 녘에 모두들 여기로 데려와. 김창호가 식당 문을 열어

둘 거야. 네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라야 해. 다른 사람들도

12년 만 의 재 회 311
우르르 따라 나서기 전에 여기를 빠져 나가고 싶다면 말이야.”

한수가 일어서서 냉정하게 선자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은 내버 려두고 와.”

312 파친코 O
생활
1945년

한수가 선자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가라고 일러줬던 그

날,
요셉은 일자리를 제의받았다. 그날 오후 일찍 친구의 친구가 요

셉의 비스킷 공장에 들러서 나가사키의 제강소에서 조선인 근로자

들을 관리해줄 감독관을 찾는다고 말했다. 남자들에게 방과 식사

를 제공해주는 주거지가 있다고 했지만 가족은 데리고 갈 수가 없

었다. 봉급은 현재의 거의 세 배였다.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요셉이 새로운 일자리를 제의받아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

경희와 선자도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한수의 손이 뻗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선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해가 질 녘에 김창호가 여자들과 아이들을 다마구치의 농장으로

데려갔다. 다음 날 아침,요셉은 비스킷 공장을 그만두고, 가방 하

나에 짐을 꾸리고는 집을 잠갔다. 그날 오후, 요셉은 오사카로 오려

농장생활 313
고 혼자서 평양을 떠났던 마지막 여행을 떠올리며 나가사키로 향

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폭격이 시작되었고 한 번 시작된 폭격은 여름

내내 계속되 었다. 한수는 비록 시기를 잘못 알았지만 동네가 갯더

미로 변할 거라는 그의 말은 옳았다.

58세의 고구마 농장 주인인 다마구치는 군식구가 늘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규적으로 일하던 노동자들과 계절마다 부리던 노

동자들이 모두 수년 전에 징병당했고, 그들을 대체할 만한 몸 성한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 노동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만

주에서 죽었고, 두 명은 전쟁에서 크게 다쳐서 불구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싱가포르와 필리핀으로 갔다는 소식이 드문드문 들렸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늙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 온

몸이 쑤셨다. 하지만 늙은 몸 덕분에 어리석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

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남자 일꾼들이 부족해서 농장을 키우려는 그의 야망은 꺾이고

말았다. 특히 고구마를 수확하기 위해 일손이 많이 필요해지는 이

시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다마구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불

법적인 가격 인상을 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미 돈맛을 본 그

는 농장 곳곳에 귀중품들을 숨겨놓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 나라

의 재앙을 틈타 돈의 단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없었다.

다마구치는 밤낮으로 고구마 심을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었지 만

남자들이 없으면 끝없는 농장 일을 마칠 수가 없었다. 다마구치가

거둘 수밖에 없었던 결혼하지 않은 아내의 두 여동생은 쓸모없는

314 파친코 O
도시 처녀들이라 할 줄 0}는 일이 없었다. 수다를 떨고 꾀병을 부
리며 아내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그들을 다마구치는 너무 오래

책임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부모는 돌아가셔서 큰 짐은 줄은 셈이었

다. 다마구치는 농사철에 마을 노인들과 여자들을 고용했지만, 그

들은 따뜻한 날씨에 씨앗을 심고 추운 날씨에 수확을 하는 게 힘들

다고 끝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피난처를 찾는 일본인들도 받아주지 않았던 다마구치는, 도시에

서 온 조선인들을 고용하거나 농장에 묵게 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

었다. 하지만 고한수의 청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수의 전보를 받자마자 다마구치와 과로에 시달리는 그의 아내

교코는 오사카에서 올 조선인 가족들이 지낼 수 있도록 헛간을 개

조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다마구치는

이 거 래에서 더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한수는 요리와 청소,밭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여자 둘을 보내

주었다. 거기에다 앞을 잘 보지 못할 뿐이지 땅을 파고 물건을 들

어 올릴 수 있는 젊은 남자도 있었다. 또한 영리한 남자아이 둘은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들 조선인들은 많이 먹었지만 자기들이 쓸 생활비를 벌었고,

아무도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불평도 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다마구치는 노아와 모자수에게 암소 세 마리와 돼지

여덟 마리,닭 서른 마리를 돌보고, 소 젖을 짜고, 계란을 모아오고,

닭장을 청소하라고 시켰다. 남자아이들은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잘

해서 시장에 데려가 물건 파는 일을 거들게 할 수도 있었다. 큰애

농장생활 315
는 셈을 잘했고, 원장을 작성할 정도로 글을 잘 썼다. 조선인 여자

둘은 훌륭한 주부에다 튼튼한 노동자였다. 날씬한 유부녀는 젊지

않았지만 상당히 예뻤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서 교코가 요리와 세

탁, 수선 일을 맡길 수 있을 정도였다. 키가 작은 여자는 과묵한 과

부였는데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젊은 남자와 함께 들에서 일하기

도 했다. 두 사람은 한 쌍의 황소처럼 일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다마구치는 긴장이 풀렸다. 아내도 짜증이 덜 나는지 그와 여동생


들을 타박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들이 도착한 지 넉 달 후, 한수의 트럭이 해 질 무렵 농장으로

들어왔다. 한수가 나이 든 조선여자와 함께 트럭에서 내렸다. 다마

구치가 한수를 맞이하러 달려갔다. 한수의 부하들이 저녁마다 도

시에서 팔 물건들을 가지러 오기는 했지만 한수가 직접 오는 일은

드물었다.
“다마구치 씨.” 한 ^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이 든 여자도 다

마구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여자는 한복을 입고 있었고, 양

손에 천보따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고 사장님.” 다마구치가 나이 든 여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의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젊은 것 같기도 했다.

여자의 갈색 얼굴은 못 먹어서 헬쑥해 보였다.

“선자의 어머니 되시는 김양진 씨요. 오늘 일찍 부산에서 도착했

소.” 한수가 말했다.

“김양진 씨.” 다마구치는 새 손님이 생겼음을 깨닫고 이름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젊은 과부와 닮은 곳이

316 파친코 O
있는지 찾아보려고 여자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입과 턱이 약간

비슷했다. 여자의 갈색 손은 남자 손처럼 튼튼했고, 손가락 마디마


디가 굵직했다. 쓸 만한 일꾼이 틀림없다고 다마구치는 생각했다.

“선자 씨 어머니요?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다마구치가 미소를 지

으며 말했다.

두 눈을 내려뜬 양진은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쳐 있었

다. 한수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이들은 어떤가요?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는

데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 애들은 아주 훌륭한 일꾼입니

다! 멋진 아이들이에요.”

다마구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일을 잘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마구치는 자기 아이가 없던 터라

도시 아이들은 버릇이 없고 아내의 여동생들처럼 게으르다고 생각

했다. 그가 살던 동네에서도 부유한 농부들은 자식들이 하나같이

어리석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다마구치와 그의 아내는 아이가 없

어도 아이가 있는 다른 부모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다마구치는 편견이 심한 사람이 아니 었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아

는 조선인은 고한수뿐이었고,두 사람의 관계는 전쟁 때 맺어진 터

라 평범하지 않았다. 다 아는 비밀이지만 몇몇 큰 농장들은 고한수

와 그의 유통망을 통해서 도시의 암시장에 물건을 팔았고,아무도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외국인들과 야쿠자들이 암시

장을 지배했고, 상품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한수를 돕는

농장생활 317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호의를 받으면 갚을 의무가 생기는 법

이다. 그래서 농부 다마구치는 한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

겠다고 다짐했다.

“고사장 님 , 안에 들어가서 차 한잔하시지요. 목이 마르시겠어요.

오늘, 날이 아주 덥거든요.” 다마구치가 집 안으로 걸어가서 자기

신발을 벗기도 전에 손님들에 게 실내용 슬리퍼를 내주었다.

오래된 미루나무 그늘 덕분에 커다란 농장 안은 서늘하고 쾌적


했다. 새 다다미에서 나는 상큼한 풀냄새가 손님들을 맞이했다. 삼

나무로 둘러싸인 안방에는 다마구치의 아내 교코가 파란색 비단

방석에 앉아서 남편의 셔츠를 바느질하고 있었다. 아내의 두 여동

생은 배를 깔고 엎드려서 발목을 교차시킨 채 수십 번 읽어서 내용

을 다 외워버린 낡은 영화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 세 여자는 특

별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하나같이 다 잘 차려입고 있어서 농장

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옷감을 배급받아야 하는 실정인데도


농부의 아내와 그 여동생들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교

코는 교토 상인의 아내에게나 더 어울릴 법한 우아한 기모노를 입

고 있었고, 그 여동생들은 상큼한 남색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있

어서 미국 영화에 나오는 여대생처럼 보였다.

여동생들이 누가 들어오는지 보려고 턱을 들어 올리자 멋스럽게

늘어뜨린 긴 앞머리 너머로 뽀얗고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전쟁이

터지면서 값비싼 보물들이 다마구치의 집으로 들어왔다. 귀한 족

자와 직물들, 다마구치 집안 여자들이 다 입을 수도 없을 만큼 많

은 기모노>옻칠한 장롱,보석, 접시 등 고구마 한 자루 또는 닭 한

마리와 바꾸려고 도시 사람들이 서슴없이 내놓는 가보들이 다마구

318 파친코 O
치의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내의 여동생들은 도시 생활을 열망했다. 그들은 새로

운 영화와 간사이 지방의 가게들, 깜박거리지 않는 전등이 있는 곳

에서 살고 싶어 했고 전쟁과 끝없는 푸른 들판, 평범한 농장 생활

을 질려 했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잘 곳이 있는 그들은 기름 전등

냄새와 물건 가격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시골뜨기 형부를 경시

했다. 미국인들의 폭탄이 영화관과 백화점, 두 사람이 좋아하는 과

자가게를 불태워버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화려한 도시 생활의 즐거

움을 떠올리며 불만만 늘어놓았다. 두 사람은 검소하고 희생적인

언니에게 매일 불평만 퍼부었다. 그들이 시골뜨기와 결혼한다고

조롱했던 그 언니가 그들의 지참금으로 쓸 금과 기모노를 마련해

놓았는데도 두 사람은 고마움을 몰랐다.

다마구치가 목청을 가다듬자 여자들이 일어나 앉아 마치 바쁘게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양 굴었다. 여자들은 한수에게 고개를 끄덕

여 인사하고, 조선인 여자의 더러운 치맛단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

푸렸다.

양진은 세 여자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집 안으로

초대받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문 옆에 머물렀다. 양진은 부엌에

서 일하는 여자의 구부정한 등을 약간 볼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이

선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수도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를 발견하고 다마구치의 아내에게

물었다. “선자 씨가부엌에 있습니까?”

교코가 다시 한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한수라는 조선

인은 너무 오만한 것 같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남편에 게 그 남자가

농장생활 319
필요하다는 사실을 교코는 잘 알고 있었다.

“고 사장님,어서 오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워요.”

교코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여동생들에게 꾸짖는 눈길을 보내자

그녀들도 일어나서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경희 씨예요. 선자 씨는 들에서 곡식을

심고 있어요. 앉으세요. 마실 만한 시원한 것을 갖다드릴게요.”

교코는 막내 동생인 우메를 돌아보았다. 우메가 시원한 우롱차

를 가지러 부엌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한수는 짜증을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가 일

을 하리라고는 예상했지만 바깥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교코는 한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인, 따

님을 보고 싶으시겠어요. 다코,이 부인을 따님에게 안내해드리겠

니?”

둘째인 다코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 말을 순순히 따랐다. 교

코에게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교코가 며

칠 동안 앙심을 품고서 벌로 말 한마디 안하고 자신을 괴롭힐 테니

까 한수가 양진에게 조선어로 선자에게 데려다줄 거라면서 여자

를 따라가라고 했다. 다코는 돌을 깔아놓은 입구에서 신발을 신다

가 늙은 여자의 시큼하고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이틀 동안 먼 길

을 온 터라 냄새가 더 지독하게 났다. 다코는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재빨리 여자를 앞질러 갔다. 다코는 할 수 있는 한 여자와 거리를

많이 두고 걸었다.

교코는 우메가 부엌에서 가져온 차를 따르고 나서 남자들끼리

320 파친코 O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우메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마구치가 한수에게 전쟁 소식을 물었다.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거요. 독일이 패했고, 미국이 치고 올라

오고 있소.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질 거요. 그때가 언제가 될지가 문

제일 뿐이요.” 한수는 유감이나 기쁨의 빛 하나 내비치지 않은 채

말했다. “훌륭한 남자아•이들이 더 많이 죽기 전에 이 미친 짓을 일

찌감치 끝내는 게 좋을 텐데 말이요. 그렇지 않소?”

“네, 네. 그렇죠.” 다마구치가 힘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

다. 물론 다마구치는 일본이 이기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수는 현실

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마구치는 설사 일본이 이기지

못하더라도 전쟁이 아직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고구마를 발효

시켜 비행기 연료로 쓴다는 말이 있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정

부가 값을 조금만 쳐주거나 아예 값을 지불하지 않더라도 암시장

에서 고구마 가격을 더 높이 부를 수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식품

과 술을 절박하게 구하고 있었으니까. 한두 번만 더 고구마를 수확

하면 근처의 넓은 땅덩어리 두 개를 살 만한 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지역 남쪽 땅 전체를 통째로 가지는 것은 할아버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한수가 다마구치의 몽상을 방해했다.

“그래,어떻소? 그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게?”

다마구치가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지만 아시다시피 일손이 딸려서… …”

“그들은 일하러 온 사람들이요.”

농장생활 321
한수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마구치가 숙식을

제공하면서 그보다도 훨씬 큰 이익을 챙기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선자와 선자의 가족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않으면 상관없었

다.

“오늘 밤 여기 묵으실 건가요? 떠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니

저희와 함께 저녁을 드시죠. 경희 씨는 아주 훌륭한 요리사예요.”

다마구치가 말했다.

다코는 늙은 여자를 멀리까지 데려다줄 필요가 없었다. 양진이

드넓고 짙은 들판에서 허리를 굽혀 일하는 딸을 발견하자마자 긴

치마의 끝단을 움켜쥐고 딸을 향해서 최대한 빠르게 달려갔기 때

문이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선자는 씨앗을 심다가 고개를

들었다. 빛바랜 하얀 한복을 입은 작은 여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선

자는 팽이를 떨어뜨렸다. 작은 어깨에 목 뒤로 쪽 지어 올린 회색

머리,부드러운 직사각형 모양으로 단정하게 매어놓은 짧은 저고

리 매듭. 엄마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선자는 고구마 밭을 밟

으며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이고,내 새끼. 아이고, 우리 딸.”

선자는 엄마를 끌어안았다. 저고리 천 아래로 엄마의 앙상한 쇄

골이 느껴졌다. 엄마는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한수는 저녁을 빨리 먹고 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고 헛간으로 갔다. 다마구치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소란을 피우는

322 파친코 O
게 싫어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을 뿐이었다. 한수는 선자를 포함

한 선자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게 더 좋았지만 다마구치의 기분

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하는 동안 한수는 내내 선자와

노아 생각만 했다. 그들과는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런

지는 자신도 설명하기 힘들지만 한수는 그저 그들과 함께 있고 싶

었다. 헛간에 들어갔을 때 한수는 경희가 다마구치의 부엌에서 두

종류의 저녁식사를 준비했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다마구치 가족

을 위한 일본식 식사였고,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조선식 식사

였다. 조선인들은 헛간에서 김창호가 남은 나무기둥으로 만들어준

나지막한 탁자에 기름먹인 천을 깔고서 식사를 했다. 선자는 막 설

거지를 끝낸 참이 었다. 한수가 들어가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쳐다

보았다.

밤에는 가축들이 훨씬 더 조용해졌지만 그렇다고 동물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축 냄새가 한수의 기억보다

훨씬 더 지독했지만 한수는 그 냄새에도 곧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헛간 뒤쪽에 머물렀고, 가축들은 헛간

앞쪽 가까이에 있었다. 김창호가 나무 칸막이를 설치해서 남자아

이들과 함께 칸막이 한쪽에서 잠을 잤고,여자들은 다른 쪽을 차지

했다.

손자 둘을 양옆에 끼고 바닥에 앉아 있던 양진이 일어나서 한수

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농장으로 오는 길에 양진은 한수에게

수차례 고맙다고 인사했고,가족과 상봉한 지금도 당황스러워하는

손자들을 꼭 붙든 채로 끊임없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양진은 나이

든 조선 여자답게 목청 크게 울었다.

농장생활 323
경희는 아직도 농장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설거지를

끝내면 한수가 묵을 손님방을 준비할 것이다. 김창호는 목욕탕으

로 사용하는 헛간 뒤쪽의 오두막에서 모두가 목욕할 물을 데우느

라 바빴다. 경희와 김창호는 선자가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선자의 저녁 일거리를 대신해주었다. 한수가 왜 양진을 조

선에서 데려오는 수고를 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양진이 울고 있을 때 선자는 한수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인생에

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던 저 남자를 선자는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다.
한수는 남자까이들 맞은편에 있는 두툼한 건초더미에 앉았다.

“저녁은 충분히 먹었니?” 한수가 유창한 조선어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한수가 조선어를 너무 잘하자 남자사•이들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두 아이는 할머니를 모셔온 남자가 일본인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너무 잘 차려입은 데다 다마구치 아저씨가 정중하게

대했으니까 말이다.

“네가 노아구나.” 한수가 노아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말했

다 .“열두 살이지?”

“네 !” 노아가 대답했다. 남자는 아주 좋은 옷에 아름다운 가죽 구

두를 신고 있었다. 판사나 영화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다.

“농장에서 일하는 건 어떠니?”

“좋아요.”

“전 곧 있으면 여섯 살이 돼요.” 모자수가 형 이 말할 때마다 습관

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불쑥 끼어들었다. “여기서는 밥을 많이 먹어

324 파친코 O
요. 전 밥을 몇 그릇이고 계속 먹을 수 있어요. 다마구치 아저씨가
잘 먹어야 쑥쑥 큰다고 하셨어요. 고구마가 아니라 밥을 먹으라고

했어요! 아저씨도 밥을 좋아하세요?” 모자수가 한수에게 물었다.

“노아 형이랑 오늘 밤에 목욕을 할 거예요. 오사카에서는 목욕을

자주 못했어요. 전 농장에서 목욕하는 게 더 좋아요. 여기 욕조가

목욕탕 욕조보다 훨씬 더 작거든요. 목욕하는 거 좋아하세요? 물이

너무 뜨겁지만 곧 익숙해져요. 물에서 나오지 않으면 손가락 끝이

할아버지처럼 쪼글쪼글해져요.” 모자수가 눈을 크게 떴다. “전 아직

어려서 얼굴에 주름이 없어요.”

한수가 웃었다. 어린 동생은 노아처럼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아

주 자유분방한 아이 같았다.

“여기서 잘 먹고 있다니 기쁘구나. 좋은 소식이야. 다마구치 아저

씨가 그러는데,너희들이 주 훌륭한 일꾼이라고 하더구나.”


“감사합니다,아저씨.” 모자수는 이렇게 대답하고 남자에게 더 많

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남자가 형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넌 무슨 일을 하니, 노아야?”

“여기 마구간을 청소하고, 동물들 먹이를 주고,닭을 돌봐요. 시

장에 갈 때는 다마구치 아저씨를 위해서 장부를 작성하고요.”

“학교가 그립니?”

노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산수 문제 풀기와 일본어 쓰기가 그

리웠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숙제를 할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리웠다. 농장에서는 책을 읽을 시간이 전혀 없었고,갖고

있는 책도 없었다.

농장생활 325
“넌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들었어.”

“작년에는 학교에 많이 가지 못했어요.”

학교 수업은 자주 취소되 었다.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노아

는 총검 훈련과 무의미한 공습 훈련이 싫었다. 요셉 큰아버지와 헤

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농장이 도시보다 훨씬 좋은 것은 적어도 이

곳 농장에서는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농장에서는 비행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공습 대피 훈련도 훨씬 적었다. 식사는 풍성하고 맛

있었다. 매일 계란을 먹을 수 있었고 신선한 우유도 마실 수 있었

다. 또 잠을 깊이 자고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가겠구나. 그러고 싶니?” 한수가 물

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 였다.

선자는 전쟁이 끝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었

다. 전쟁이 끝나면 영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엄마가 그곳에는 아

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했다. 정부가 집주인에게 세금을 부가해서

집주인이 건물을 일본인에게 팔아버렸다는 것이었다. 일하던 복희

자매는 만주의 공장으로 일하러 갔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었다. 한

수가 양진을 찾아냈을 때 양진은 부산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창고

에서 잠을 자는 신세였다.

한수가 윗옷 주머니 에서 만화책 두 권을 꺼 냈다.

“이거 받아라.”

노아가 엄마한테 배운 대로 두 손으로 책을 받았다. 조선어로 된

책이었다.
“감사합니다.”

326 파친코 O
“조선어를 읽을 수 있니?”

“아뇨.”

“배울 수 있을 거야.” 한수가 말했다.

“큰엄마가 이 책 읽는 걸 도와줄 수 있어요. 큰아버지는 여기 없

지만 다음번에 만나면 큰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있어요.”

모자수가 말했다.

“너희들은 조선어 읽는 법을 알아야 해. 언젠가는 돌아갈지도 모

르니까.” 한수가 말했다.

“네, 아저씨.” 노아가 말했다. 노아는 조선이 평화로운 땅이 되어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버지는 자

신이 자랐던 평앙은 아름다운 도시였고, 엄마의 고향인 영도는 청

록빛깔 바다에 물고기가 풍부한 평화로운 섬 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아저씨는 어디서 오셨어요?” 노아가 물었다.

“제주도. 너희 엄마가 태어난 부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야. 화산

섬이자 거기에는 귤도 있어. 제주 사람들은 신들의 후손들이란다.”

한수가 윙크를 했다.

“언젠가는 제주에 데려가주마.”

“난 조선에서 살기 싫어요. 여기 농장에서 살고 싶어요.” 모자수

가소리쳤다.

선자가 모자수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우리는 여기 농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해요. 큰아버지도 곧


오실 거 예요 그렇죠?” 모자수가 물었다.

그때 경희가 일을 끝내고 들어왔다. 모자수는 만화책을 들고 경

희에게 달려갔다.

농장생활 327
“이거 읽어주실 수 있어요?”

경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야, 이리 와. 이 책을 읽어줄게.”

노아는 한수에게 재빨리 인사를 하고 경희와 모자수에게 갔고

양진은 선자를 혼자 남겨둔 채 노아를 따라갔다. 선자가 일어서려

고 하자 한수가 앉으라고 몸짓했다.

“가지 마.” 한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 여기 있어.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

“잘 지냅니더. 감사합니더.” 선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를 데

려와주셔서 고맙십니더.” 선자가 말했다. 뭔가 더 말을 해야 했지만

그게 어려웠다.

“엄마 소식을 물어봤잖아. 그래서 엄마를 여기로 모셔오는 게 낫

겠다 싶었지. 일본 상황이 아주 안 좋지만 지금은 조선 상황이 더

나빠. 전쟁이 끝나면 좋아지겠지. 하지만 안정되기 전까지는 상황

이 좋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꺼?”

“미국인들이 이기면 일본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선에서

철수하겠지만 그러면 누가 조선을 손에 넣겠어? 일본인들에 게 붙

었던 조선인들은 어떻게 될까? 혼란이 일어날 거야. 유혈 사태가

더 많이 일어나겠지. 너도 그런 곳에는 있고 싶지 않을 거야. 네 아

이들이 그런 곳에서 사는 건 더 싫을 거고.”

“당신은 우째 할 건데예?” 선자가 물었다.

한수가 선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내 자신과 내 사람들을 돌볼 거야. 내가 정치인들에게 내 목

328 파친코 O
숨을 맡길 거라고 생각해? 책임자들은 아무것도 몰라. 알아도 신경

^지 않지.”

선자는 한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한수의 말이 옳을지

도 몰랐다. 하지만 왜 그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선자가 양손을 바

닥에 짚고 몸을 일으키 려고 했지만 한수가 고개를 저 었다.

“나와 얘기 좀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제발 앉아.”

선자는 ^시 앉있:다.

“저는 아이들을 돌봐야 합니더. 제 사정을 좀 이해해주이소.”

아이들은 만화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경희는 감정을 실어

서 만화책을 읽어주었고,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양진도 주인공들의

어리석은 이야기에 아이들과 함께 웃었다. 다들 만화책에 푹 빠져

서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돈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다른 것도… … ” 한수가

말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당신 도움을 받고 있지만예,전쟁이 끝

나면 제가 일해서 아이들을 돌볼 껍니더. 지금도 생활비를 벌려고

일하고있고… …”

“전쟁이 끝나면 집도 구해주고,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돈도 줄

게. 아이들은 소똥을 치울 게 아니라 학교에 가야 해. 당신 엄마와

언니도 같이 지낼 수 있어. 당신 아주버니에게 좋은 일자리도 구해

줄 수 있고.”

“가족들한테는 뭐라 하고예? 당신 얘기를 밝힐 수는 없어예.” 선

자가 말했다.

선자는 항상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수가 무

농장생활 329
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선자는 그가 자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선자는 먹여 살리고 교육시

켜야 하는 아이가 둘이나 딸린 스물아홉 살의 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나이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자신을

원하는 남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예전에도 아름

다웠던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매력적이지 않았다. 선자는

평범한 얼굴의 시골 여자였고, 피부는 햇살에 노출되어 얼룩덜룩

해졌으며 주름도 많아졌다. 튼튼하고 건장한 몸집은 소녀 시절보

다 더 커졌다.

선자는 인생을 살면서 두 남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사랑을 다

시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끔씩 선자

는 자신이 언젠가는 쓸모없어질 튼튼한 농장의 가축이 된 것 같다

고 느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자신이 떠나고 없어도 아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준비해주어야 했다.

“당신도아이들이 있지예?”

“딸이 셋 있지.”

“당신 딸들이 저에 대해 알면 뭐라 하겠어예? 우리 사이를 알몬

예?” 선자가 속삭였다.

“내 가족은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알겠심더.” 선자는 입술이 말라서 침을 삼켰다. “이렇게 안전하

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예. 그치만 전쟁이 끝나면 다

른 일을 찾아서 아이들하고 엄마를 부양할 거라예.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일할 깁니더.”
선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건초를 털어냈다.

330 파친코〇
선자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워 한수한테서 등을 돌리고는

황소들을 쳐다보았다. 영원한 고통의 빛으로 가득한 황소들의 커

다랗고 짙은 눈을 바라보며 선자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들었을까?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만화책에 집중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선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쌌다. 손을 씻었는데도

손톱 가장자리가 여전히 흙에 물들어 누렇게 변해 있었다.

농장생활 331
^아 의 아버지

또다시 한수가 옳았다. 전쟁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

났지만 한수조차도 그 마지막 폭탄 투하는 예상하지 못했다. 요셉

은 벙커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면하기는 했지만, 거리로 나왔을 때


불에 타 무너지는 판잣집 벽이 요셉의 오른쪽 어깨를 덮쳤다. 불길

에 휩싸인 요셉을 공장의 누군가가 달려와 겨우 구해냈다. 한수의

직원들은 나가사키의 형편없는 한 병원에서 마침내 요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길었던 계절이 끝나고 숨 막히게 조

용한,별이 많은 저녁이었다. 그날 밤, 한수가 요셉을 미군용 트럭

에 태워서 다마구치의 농장으로 데려왔다. 모자수가 처음으로 트

력을 발견했고, 그 작고 재빠른 남자아이는 죽창을 가져오려고 돼

지우리로 달려갔다. 나머지 식구들은 반쯤 열린 헛간 문 앞에 서서

다가오는 트럭을 지켜보았다.

“여기 있어요.” 모자수가 속이 빈 죽창들을 엄마와 할머니, 형,큰

노아의아버지 333
엄마에게 건넸다. 김창호는 목욕을 하고 있었다. 모자수가 형에게

속삭였다. “목욕하고 있는 아저씨를 데려와야 해. 아저씨에게 무기

도 갖다주고.” 모자수는 김창호에게 줄 죽창을 노아에게 하나 건네

주고, 자신도 하나 챙겼다. 노아에게서 물려받은 구멍 숭숭 뚫린 스

웨터가 모자수의 작업용 바지 위로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모자

수는 여섯 살치고는 키가 컸다.

“전쟁은 끝났어.” 노아가모자수에게 단호하게 상기시켰다. “한수

아저씨 사람들일 거야. 다치기 전에 그거 내려놔.”

트럭이 멈춰 섰고, 한수 밑에서 일하는 조선인 두 사람이 요셉을

실은 들것을 꺼냈다. 요셉은 붕대를 감은 채 진정제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경희가 들고 있던 죽창을 떨어뜨리더니 휘청거리다 모자수의 어

깨를 잡았다.

한수가 트럭 조수석에서 걸어 나왔고,연한 적갈색 머리의 미군

운전사가 그 뒤에 섰다. 모자수는 군인을 흘껏거렸다. 운전사는 얼

굴에 주근깨가 있었고,노란빛이 도는 붉은 머리가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비열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한수 아저씨도 그 군인

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주민연합 지도자였던

하루 아저씨는 동네 아이들에 게 미국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니까 미군을 보면 도망쳐야 한다고 경고했다. 차라리 자살하

는 것이 잡히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운전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

자수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경희가 천천히 들것을 향해 다가갔다. 경희는 요셉의 화상 입은

334 파친코 O
모습을 보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폭탄 투하에 관한 끔찍한

소식을 들었지만 경희는 요셉이 살아 있다고 믿었고,자신에게 소

식도 알리지 않고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경희는 항상 요

셉을 위해 기도해왔고, 요셉이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기는 한 것이

다. 경희가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일어설 때까지


모두가 침묵했다. 심지어는 김창호도 울고 있었다.

한수가 울고 있는 경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에 싼 커다란

꾸러미와 미제 군용 화상 약통을 건넸다.

“거기에 약이 있습니다. 작은 숟가락에 덜어서 물이나 우유를 섞

어 밤에 발라주면 잠들 수 있을 겁니다. 약이 떨어지면 더 이상은

구할 수 없으니까 조금씩 아껴서 발라야 합니다. 그가 약을 더 달

라고 해도 오래 쓰려면 아껴야 한다고 말해주세요.”

“그게 뭔데요?” 경희가 물었다. 선자는 경희 옆에 서서 아무 말도

•지 않았다.

“그에게 팔요한 겁니다. 통증을 줄여주죠. 하지만 계속 사용하는

건 좋지 않아요. 중독되거든요. 붕대는 계속 갈아주세요. 반드시 살


균도 해야 합니다. 붕대를 삶아서 사용하세요. 이 안에 붕대가 더

있어요. 피부가 팽팽해질 거니까 바르는 약이 필요할 겁니다. 할 수

있겠어요?”
경희가 여전히 요셉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

였다. 요셉의 입과 뻘은 동물에게 잡아 뜯긴 것처럼 반쯤 사라지고

없었다. 요셉은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사람이었

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러 나갔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저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

노아의아버지 335
니다.” 경희가 한수에게 말했지만 한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농장주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돌아섰다. 김

창호도 한수를 따라서 농장주의 집으로 향했다.

여자들과 남자아이들은 들것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헛간

으로 들어가 비어 있는 마구간 한 칸에 요셉의 자리를 마련했다.

경희가 자기의 요를 그곳으로 옮겼다.

잠시 후, 한수와 그의 부하들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다.

농장주는 조선인이 한 명 더 늘었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다른 조

선인들이 자기들 몫뿐만 아니라 요셉의 몫까지 일을 했기 때문이

다. 수확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농장주는 그 조선인들이 필요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다Pi구치는 머지않아 그들이 떠나

기 위해서 돈을 달라고 할 것임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들이 고향으

로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가능한 많은 일을 시킬 작정이었다. 농장

주는 조선인들에게 원하는 만큼 머물러 있어도 된다고 했는데,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마구치는 그동안 전역한 군인들을 일꾼으로

고용했었는데 그들은 더러운 일이라고 불평했고,외국인들과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모든 조선인들을 일본인 전

역 군인들로 대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고구마를 시장에 내놓으려

면 한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조선인들을 모두 농장에 머물게 해

주었던 것이다.

운송 트럭이 정기적으로 들어왔지만 한수는 몇 주 동안 나타나

지 않았다. 요셉은 고통에 시달렸다. 오른쪽 청력도 잃어버렸다. 요

셉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거나 통증에 울부짖었다. 가루약을 다

336 파친코 O
써버렸는데도 요셉의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요셉은 저

녁마다 아이처럼 울었지만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는 낮 동

안에는 농기구를 수리하거나 고구마를 분류하면서 농장 일을 도우

려고 했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술을 싫어

하는 다마구치가 가끔씩 안타까운 마음에 요셉에게 사케를 조금

주었다. 하지만 경희가 다마구치에게 사케를 좀 더 달라고 간청하

자 다마구치는 더 줄 수 없다고 했다. 자기가 인색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자기 땅에 술주정뱅이를 둘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달 후, 한수가 돌아왔다. 오후의 햇살이 조금 약해지고, 일꾼

들이 점심을 먹고 교대를 하려고 막 돌아왔을 때였다. 요셉은 서늘

한 헛간에서 짚을 채운 요에 혼자 누워 있었다.

요셉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베개 위로 내

려놓았다.

한수가 요셉 앞에 커다란 상자 두 개를 내려놓고, 의자 대용으로

쓰는 요 옆의 커다란 나무판 위에 앉았다. 잘 재단된 양복에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도 한수는 지독한 가축 냄새와 찬 기운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편안해 보였다.

“당신이 노아 아버지죠?”요셉이 물었다.

한수는 남자의 흉터가 진 얼굴을 살펴보았다. 한때는 날렵하게

깎아져 내렸던 턱 선이 울퉁불퉁해져 있었고 오른쪽 귀는 꽉 오므

라든 꽃봉오리 같았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다 해주는 거군요.”

“노아는 제 아들입니다.” 한수가 말했다.

“당신에게 빚을 졌어요. 우리는 그 빚을 갚을 수 없을지도 모릅

노아의아버지 337
니다.”

한수는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언제

나 적게 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그 아이 곁에 있을 권리는 없어요. 내 동생이 그 아이에

게 이름을 줬어요. 그 아이는 이 사실을 몰라야 합니다.”

“나도 그 아이에게 이름을 줄 수 있어요.”

“이미 이름이 있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건

잘못된 일이에요.”

요셉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느껴졌다. 노

아는 이삭과 그 행동거지가 똑같았다. 이삭처럼 차분한 어조로 말


했고,식사를 할 때도 음식을 조금씩 단정하게 씹어 먹었다. 노아는

이삭과 똑같이 행동했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에서 가져온 낡은 공책을 꺼내서 글을 썼다. 요셉은

저 야쿠자가 노아의 생부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노아의 얼굴 위쪽

이 한수와 똑 닮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노

아도 눈치를 챌 것이었다. 경희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설령 경희

가 진실을 짐작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친자매보다 더 가까워진 선

자를 보호하려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할 것이다.

“당신한테 아들이 없군요.” 요셉이 또 다른 사실을 짐작해서 말

했다.

“당신 동생은 친절하게도 선자를 도와줬어요. 하지만 나는 선자

와 내 아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선자가원하지 않았군요:

“그녀를 돌봐주겠다고 했지만 선자는 조선에서 제 현지처로 살

338 파친코 O
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한테는 오사카에 일본인 아내가 있었

으 니 요 .”

요셉은 등을 대고 누워서 헛간 지붕을 응시했다. 들쭉날쭉한 불

빛 조각들이 기둥에 부딪혀 깨지는 것이 보였다. 은빛으로 반짝이

는 먼지 기둥들이 대각선을 그리며 위로 떠올랐다. 화상을 입기 전

에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

지도 않았다. 요셉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앞의

남자가 미웠다. 남자의 값비싼 옷차림과 화려한 구두, 억누를 수 없

는 자신감,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강인함이

모두 싫었다. 통증에 시달리지 않는 그가 미웠다. 그에게는 동생의

아이를 빼앗아갈 권리가 없었다.

한수는 요셉의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선자는 내가 떠나기를 바랐죠. 그래서 나는 먼저 떠났다가 돌아

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시 돌아갔을 때 선자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이미 결혼을 한 거죠. 당신 동생과.”

요셉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이삭한테서 선자에 관한 이

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삭은 노아의 출생에 얽힌 이

야기를 묻어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 었다.

“노아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떠나세요. 노아에게는 가족이 있어

요.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당신에게 빚진 것을 모두 갚기 위해서 무

슨 일이든 다 할 겁니다.”

한수는 가슴에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짓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고

는 폭언을 쏟아냈다.

“이 개자식아, 내가 대가를 치렀어. 네놈 목숨 값을 내가 치른 거

노아의아버지 339
야. 모든 사람의 목숨 값을 치렀다고. 내가 없었다면 다들 죽었을

거야.”

요셉이 옆으로 살짝 돌아누웠다가 통증에 움찔거렸다. 가끔씩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자한테 들었나?” 한수가 물었다.

“그냥 아이 얼굴을 보고 알았지. 생판 남이 그 모든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 당신이 무슨 성자가 아니라는 걸 진

작 알아봤어.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 …”

한수가 큰 소리로 웃었다. 요셉의 직설적인 성격에 감탄해서 터

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요셉이 이렇게 말하며 눈을 감

았다.

“평양은 소련인들이 지배하고 있어. 미국인들은 부산을 점령했

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거야.”

“거기서는굶어 죽 을 거 야 .”

“일본은 지긋지긋해.”

“평양이든 부산이든 어떻게 돌아갈 건데? 이 농장도 돌아다니지

못하는 주제에.”

“내 월급을 받지 못했어. 내 몸 상태가 충분히 좋아지면 나가사

키로 돌아가서 월급을 받아올 거야.”

“신문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지?” 한수가 김창호를 위해 가

져온 조선어와 일본어로 된 신문 한 묶음을 상자에서 꺼내 요셉의

요 옆에 내려놓았다.

340 파친코 O
요셉은 신문 더미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집어 들지는 않았다.

“당신 돈 따위는 없어.” 한수는 요셉이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

천히 말했다. “그 회사는 당신에게 돈을 주지 않을 거야. 당신이 거

기서 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거든. 당신은 그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어. 일본 정부는 가난한 조선인들이 모두 다 돌아가기를 바라지

만 당신에게 한 푼도 주지 않을걸. 하 !

“그게 무슨 말이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잘 알지. 난 일본을 잘 알거든.” 한수가 내심 실망했다는 표정으

로 말했다. 한수는 성인이 된 후로 내내 일본인들 사이에서 살았

다. 장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

본인 고리대금업자였다. 한수는 일본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병적일

정도로 다루기 힘든 인간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런 점에서는 조선인들과 똑같았다. 조선인들보다 좀 더 조용히 , 훨

씬 감지하기 힘들게 고집을 부린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일본인들한테서 돈 받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나? 그들이

당신에 게 돈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절대로 돈을 받아

낼 수 없어. 당신은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될 거야.”

요셉은 몸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매일, 조선행 배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멍청이들이

가득 타지.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난민들로 가득찬 배 두 척이 들어

와. 조선에서 먹을 게 없어서 말이야. 조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당

신보다 더 절박한 상태라고. 그들은 한 주나 지난 빵을 얻으려고

일을 해. 여자들은 이틀 굶주리고 나면 창녀가 되 자 먹여 살릴 자

식들이 딸려 있으면 하루도 못 버틸걸. 당신은 지금 더 이상 존재

노아의아버지 341
하지 않은 꿈속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거야.” .
“부모님이 거기 계셔.”

“아니, 아닐걸. 그들은거기 없어:

요셉이 한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가 왜 선자의 어머니만 데리고 돌아왔을 것 같나? 내가 당신

부모님과 당신 아내의 부모님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그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요셉이 말했다.


요셉이나 경희는 일 년이 넘도록 부모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총에 맞아 죽었어. 어리석게도 그 땅에 눌러 붙어 있던

땅주인들은 모두 총살당했지. 공산주의자들은 사람들을 아주 단순

하게 분류하거든.”

요셉이 울음을 터트리며 두 눈을 가렸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수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고 밝

힐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부모는 아직 죽지 않았더라도 결국에는


굶어 죽거나 늙어 죽을 것이었고,사실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한 북쪽의 상황은 끔찍했다. 수많은 지주들이

살해당해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사실 한수는 요셉의 부모가 살았

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부하 몇 명을 희생시켜서라도 그들을

찾으려 했다면 그들의 생존 여부를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목숨이 한수 자신에게 유익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자의 어머니는 찾기 쉬워서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요셉과 경희는 부모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

았다. 그렇지 않다면 선자가 터무니없는 의무감에 맹목적으로 두

사람을 따라갈 것이 뻔했다. 요셉과 경희는 일본에서 사는 게 훨씬

342 파친코 O
나았다. 한수는 들 을 평양으로 보낼 수 없었다.
한수가 꾸러미 하나를 풀어서 커다란 소주병 하나를 꺼냈다. 그

러고는 소주병을 따서 요셉에게 건네주고 다마구치와 지불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헛간을 나섰다.

선자는 일이 끝난 후에 헛간으로 돌아왔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수를 발견했다. 한수는 헛간 맨 끝의 여물통 앞에 앉아 있

었다. 책을 읽는 아이들한테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요셉

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희와 양진은 집 안에서 저녁을 요리하고

있었고, 김창호는 서늘한 창고에 고구마 자루를 내려놓고 있었다.

한수가 먼저 선자에게 아는 체를 하며 대놓고 가까이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

양이었다.

선자는 한수 맞은편 의자 옆에 섰다.

“앉아, 앉아.” 한수가 고집했지만 선자는 거절했다.

“다마구치가 네 아이들을 입양하고 싶다고 했어.” 한수가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뭐라고예?”

“나는 네가 아이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다마구치

는 한 명이라도 달라고 하더군. 불쌍한 인간 같으니. 걱정하지 마.

그는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으니까.”

“우리는 곧 평양으로 갈 겁니더.”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라예?”

노아의아버지 343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경희의 부모도,너의 시부모

도.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지. 정부가 바뀌면 그런 일

이 일어나는 거야. 적을 없애야 하거든. 지주들은 노동자들의 적이

지.” 한수가 말했다.

“세상에.” 선자가마침내 앉았다.

“그래, 슬픈 일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선자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선자도 한수가 대단히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수라는 남자를 알게 될수록 그녀

가 소녀 시절에 사랑했던 남자는 그녀가 꿈꾸었던 환상에 불과했

음이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노아의 교육을 생각해야지. 노아가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할 수

있게 책 을 좀 가져왔어.”

“하지만… …”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상황이 더 안정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해.”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더. 여기서는 내 아들들한테 미

래가 없심니더. 지금 돌아갈 수 없다 카면 좀 더 안전해졌을 때 돌

아갈 깁니더.”

목소리가 떨렸지만 선자는 해야 할 말을 했다.

한수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나중 문제고,그동안은 노아가 대학

시험을 준비해야 해. 이제 열두 살이잖아.”

선자는 노아의 교육 문제를 고민해보았지만 노아를 어떻게 도와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학교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한단

344 파친코 O
말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허가증을 받을 돈도 충분하지 않았다. 세

여자는 요셉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항상 그 이야기를 했다. 오사카

로 돌아가서 돈을 벌 방법을 다시 찾아야 했다.

“노아는 이 나라에 있는 동안 공부를 해야 해. 조선은 오랫동안

혼란 상태에 있을 거야. 게다가 노아는 이미 우수한 일본인 학생이

잖아. 노아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는 일본 대학 학위를 갖게 될 거

야. 부유한 조선인들은 모두 그렇게 해.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

내 자 노아가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은 내가 댈 거야. 모자수의 등

록금도 대주지. 그 아이들에게 과외 선생도 붙여줄 수 있고… … ”

“언지 예. 그건 안 됩니더.” 선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한수는 선자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선자와 싸우려

고 하지 않았다. 몸소 체험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수는

요셉의 요 옆에 놓인 상자들을 가리켰다.

“고기와 말린 생선을 가져왔어. 미국산 과일 통조림과 초콜릿도

있어. 다마구치 가족들한테도 똑같은 걸 갖다줬으니까 그들에게

나눠주지 않아도 돼. 상자 바닥에는 천이 있어. 여기 있는 사람들한


테 옷이 필요한 것 같아서. 가위와 실, 바늘도 있어.” 한수가 그 모

든 것들을 준비해온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모직을 가져다줄게:

선자는 더 이상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지 않

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수치스럽고 무기력하게 느

껴졌다. 선자는 햇볕에 그은 손과 더러운 손톱으로 빗지 않은 머리

를 매만졌다. 한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사


랑스러운 여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노아의아버지 345
“신문도 좀 가져왔어.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해. 기사들은 다 똑

같아.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지금 돌아가는 건 아이들에게도 끔찍


한 일이 될 거야.”

선자가 한수를 마주보았다.

“그런 식으로 저를 여기로 데려와 놓고,이번에도 또 그런 식으

로 일본을 떠나지 못하게 할라 카는 거 아입니꺼? 이 농장에 올 때

도 애들한테 더 좋을 거라 했지예.”

“내 말이 맞았잖아.”

“당신을 못 믿겠어 예.”

“넌 날 상처주려고 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한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봐. 네 남편이라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

어 할 거야. 나도 아이들과 너에게 뭐가 제일 좋은지 알고 있어. 너

와 나는… … 이제 좋은 친구잖아.” 한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는 항상 좋은 친구가 될 거야. 항상 노아 곁에 있을 거라고.”

한수는 선자가 뭐라고 할지 기다렸지만 선자의 얼굴은 문처럼

꽉 닫혀 있는 것 같았다. “네 아주버니도 알고 있어. 노아에 관해서

말이야. 내가 말한 건 아니야. 그가* 짐작하고 있더라고.”

선자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오사카로 돌아가고 싶

다면 김창호가 도와줄 거야. 내 도움을 거절하는 건 이기적인 짓이

라고. 네 아이들이 모든 혜택을 다 누릴 수 있게 해줘야지. 난 아이

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어.”
선자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김창호가 헛간으로 돌아왔다. 김

창호는 아직도 책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지나쳐 걸어왔다.

346 파친코 O
“사장님,안녕하십니까. 마실 걸 좀 갖다드릴까요?” 김창호가 말

했다.

한수가 필요 없다고 했다.

선자는 그에게 아무것도 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네는 오사카로 돌아갈 건가?” 한수가 김창호에 게 물었다.

“네, 사장님.” 김창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자가 괴로워하

는 것처럼 보였지만 김창호는 0ᅵ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들아, 책이 어떠니?” 한수가 헛간 저편에 있는 아이들에게 소

리쳤다.
김창호가 아이들에게 오라고 손짓하자 아이들이 달려왔다.

“노아,학교로 돌아가고 싶니?


” 한수가 물었다.

“네, 하지만… … ”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면 당장 오사카로 돌아가야 해.”

“농장은 어떡하고요? 조선에 가는 건요?” 노아가 등을 곧게 펴면

서 물었다.

“한동안은 조선에 돌아갈 수 없어. 하지만 그동안 네 머리를 텅

비워둘 수는 없잖니.” 한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가져다

준 책들은 어땠니? 어려웠어?”

“네, 하지만 배우고 싶어요. 사전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하나 갖다주지.” 한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가 공부를 열심

히 하면 내가 학교에 보내주마. 남자아•이가 등록금 걱정을 해서는

안 돼. 조선인 어른들이 젊은 조선인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건 중요

한 일이야.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잘 후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위

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겠니?”

노아의아버지 347
노아의 얼굴이 밝아졌고, 선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 농장에 머물고 싶어요.” 모자수가 끼어들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전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학교가 싫어요.”

한수와 김 창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노아는 모자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인사를 시키고는 함께

헛간의 다른 편으로 걸어갔다.

어른들한테서 충분히 멀리 떨어지자 모자수가 노아에게 말했다.

“다마구치 아저씨는 우리가 여기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했어. 우

리가 자기 아들인 것처럼 말했다고.”

“모자수, 우리는 이 헛간에서 계속 살 수 없 어 ;

“난 닭이 좋아. 오늘 아침에는 계란을 꺼낼 때도 쪼이지 않았어.

헛간은 잠자기 좋은 곳이야. 큰엄마가 건초 이불을 만들어준 후로

더욱 좋아졌어.”

“네가 더 크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노아가 묵직한 책들을 양팔

로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대학에 가서 교육받기

를 바랄 거야:

“난 책이 싫어.” 모자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책이 좋아. 하루 종일 〇 }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을 수도 있어.

아버지도 책 읽는 걸 좋아했어.”

모자수가 노아를 넘어뜨리려고 하자 노아가 웃었다.

“형, 아버지는 어땠어?” 모자수가 똑바로 앉아서 진지하게 형을

쳐다보았다.

“키가 컸지. 너처럼 피부가 희고 매끄러웠어. 안경을 썼고. 학교

348 파친코 O
에서는 공부를 잘했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책을 읽고 혼자서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 었어.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고 아버지가 그

랬어.”

노아가 미소를 지 었다.

“형 같네. 나 같지는 않아. 난 만화가 좋아.”

“그건 진짜 독 서가아냐 .”

모자수가 어깨를 으쓱거 렸다.

“아버지는 엄마와 나에게 언제나 친절했어. 큰아버지를 놀려서

웃게 만들기도 했고. 아버지는 나한테 글자 쓰는 법을 가르쳐줬고,

구구단을 암기하게 했어. 그래서 내가 학교에서 제일 먼저 구구단

을암기했지:

“부자였어?”

“아니, 목사는 부자가 될 수 없 어 :

“난 부자가 되고 싶어. 큰 트럭을사서 운전사가 될 거야.”

“넌 헛간에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침마다 계란을 모으면

서 말이야.” 노아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수 아저씨처럼 트럭을 가질 거야.”

“난 아버지처럼 교육받은 사람이 될 거야:

“난 아냐. 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그럼 엄마와 큰엄마가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노아의아버지 349
랑의 통
오 사 카 ,1949년

선자의 가족들이 오사카로 돌아간 후, 한수는 김창호에게 쓰루

하시 시장의 가게 주인들에게서 세 걷는 일을 맡겼다. 한수의 회사

는 세를 받는 대신에 가게 주인들을 보호해주고 지원해주었다. 적

지 않은 세를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지만 그

문제에 있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드물지만 돈이 없다고 하

거나 어리석게도 세를 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한수는 김창

호가 아니라 다른 부하들을 보내서 그 상황을 해결했다. 가게 주

인들이 그런 세를 내는 것은 오랜 관행이 었고,그러한 세는 장사에

필요한 또 다른 비용에 불과했다.

한수를 위해 일하는 중매상은 더 큰 조직의 일원에 걸맞은 행동

을 해야 했고, 한수의 부하들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사랑의고통 351
김창호는 두꺼운 안경을 써야 하는 근시만 아니라면 싹싹한 인

상의 남자였다. 겸손하고 부지런하며 말을 잘했다. 한수는 김창호

가 효율적이고 언제나 정중하기 때문에 그에게 수금을 맡겼다. 김

창호는 더 러운 행동을 포장해주는 깨끗한 포장지 같았다.

토요일 저녁이었다. 김창호는 막 그 주의 수금을 끝낸 참이었다.

60개가 넘는 현금 다발은 각각 깨끗한 종이에 싸인 채 그 위에는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게 주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세를 냈다. 김창호는 한수의 주차된 자동차로 다가가서 막 자동차

문을 열고 나오는 한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운전사가 나중

에 그들을 데리러 올 것이었다.

“한잔하지.” 한수가 김창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 지나가는 남자들이 끊임없이 한

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한수는 그들을 알아보고 고개를 까

딱까딱했다. 하지만 한 번도 멈춰 서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새로운 곳을 소개해주지. 예쁜 여자들이 있는 곳이야.

오랫동안 헛간에서 살았으니 여자가 필요할 것 같은데.”

김창호가 깜짝 놀라서 웃었다. 한수는 보통 그런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넌 결혼한 여자를 좋아하지. 나도 알아.” 한수가 말했다.

김창호는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계속 걸었다.

“선자의 언니 말이야.” 한수는 좁은 시장 거리를 걸어 내려가면

서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여자는 여전히 예쁘지. 남

편은 더 이상 남편 노릇을 할 수 없는 상태고.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있지?”

352 파친코O
김창호는 안경을 벗어서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았다. 그는 요

셉을 좋아했기 때문에 뭐라고 변명을 해주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요셉은 술을 많이 마셨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 었다. 동네 남자들은

여전히 그를 존경하는 게 분명했다. 요셉은 집에서 몸이 괜찮을 때


는 아이들의 학교 숙제를 도와주고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

다. 가끔씩 아는 공장 주인들을 위해서 기계도 고쳐주었지만 그 몸

상태로는 정기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집 은 어 때 ?” 한수가 물었다.

“이렇게 잘 지 내 본 적이 없습니다.”

김창호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식사가 아주 맛있어요. 집도 굉장

히 깨끗^)•고요.”

“그 여자들한테는 보살펴줄 남자 일꾼이 필요해. 하지만 난 네가

유부녀한테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

“사장님, 요즘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있어요. 대구가 아니라 북한으로요.”

“또? 그 이야기는 끝났어. 네가 사회주의자들 모임에 나가는 건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헛소리는 듣고 싶

^■1 1? 1 ^ :
ᅵ946년 설립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약칭.대한민국■지지하는재일동포로구성된 민

족단체의 우두머리들도 나을 게 없어. 게다가 너는 북한에 가면 살해

당할 거야. 남한에서는 굶어죽을 거고. 다들 일본에서 살았던 조선

인들을 미워하거든. 네가 고국에 가는 건 절대 찬성할 수 없어. 절

대 안 돼 .”

“김일성 지도자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 … ”

“나도 그 무리를 알아. 그 무리 중 몇몇은 실제로 그러한 대의를

사랑의고통 353
믿고 따르겠지만 대부분은 매주 봉급 봉투를 걷으려는 자들에 불

과해. 이곳에 사는 책임 있는사람들은 절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

아. 두고 보라고.”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잘라놓고 있는데… … ”

한수는 김창호의 양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고 김창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넌 오랫동안 여자를 만나지 않아서 똑바로 생각할 수가 없는 거

야.” 한수가 미소를 짓고는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 잘

\+ 2 :
@ᅵ 945년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의 약칭. 친북한계 재일동포 단체고 f 0 ^ :

우두머리들을 모두 다 알고 있어.” 한수가 콧방귀를 꼈다. “아주 잘

알고 있지 … … ”

“하지만 민단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 ”

한수는 젊은이의 진지한 태도에 즐거운 기색으로 미소 지었다.

“내 밑에서 얼마나 일했지?”

“열두 살인가 열세 살쯤이었을 때 제게 일자리를 주셨죠.”

“그동안 내가 너와 정치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지?”

김창호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안 했어. 단 한 번도. 난 사업가야. 너도 사업가가 되기

를 바라고 있어. 나는 네가 그런 모임에 갈 때마다 너 자신을 생각

했으면 좋겠어. 난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자신의 이익을 높일


생각을 하기를 바라.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

들이 단체만 생각하기 때문에 망하는 거야. 하지만 진실은 이렇지.

자애로운 지도자 같은 건 없어. 난 네가 날 위해 일하기 때문에 널

354 파친코O
보호해주고 있지. 네가 바보처럼 행동하고 내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면 그때는 널 보호해줄 수 없어. 조선인 집단들 말인데 거기 책

임자들은 단지 사람들일 뿐이야. 돼지보다도 똑똑하지 못한 인간

들이지. 우리가 먹는 그 돼지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점을 명

심해둬. 전쟁 중에 고구마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아서 일본

인들을 굶주리게 했던 농부 다마구치와 살아봤지? 다마구치는 전

시 규정을 어겼고,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고 싶어서 그를

도왔지. 다마구치는 아마 자기가 점잖고 존경받을 만한 일본인이


라고 생각할 거야. 아니면 자랑스러운 애국주의자라고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전부 다일지도 다마구치는 일본인으로서

는 끔찍한 인간이지만 사업가로서는 영리한 사람이야. 나는 좋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야. 돈을 잘 버는 사람이지. 모든 사람이

사무라이 정신이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믿는다면 이 나라는 산

산조각이 나고 말걸. 천황은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아. 그래

서 난 너한테 그런 모임에 가지 말라거나 어떤 단체에도 가입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건 알아둬. 그 공산주의자들은 널 돌

봐주지 않아.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지. 그들이 조선을 생각한다고

믿는다면 넌 정신이 나간 거야.”

“가끔씩 고국이 그리워요.” 김창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고국이라는 게 없어.” 한수가 담배 하

나를 꺼내자 김창호가 불을 붙이려고 한수에게 다가갔다.

김창호는 20년이 넘도록 고국에 가보지 못했다. 그가 아장아장 걸

음을 떼기 시작할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꾹 소작농 아버지도 얼마

후 돌아가셨다. 누나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지만 결국에

사랑의고통 355
는 결혼해서 사라져버렸고 김창호는 혼자 남아서 구걸을 해야 했

다. 김창호는 북한으로 가서 국가 재통합을 돕고 싶었지만, 대구로

가서 부모님의 무덤을 돌보고 제사를 지내드리고 싶기도 했다

한수가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았다.


“내가 여기 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아냐, 난 여기가 싫어. 하

지만 여기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지. 넌 가난해

지고 싶지 않을 거야. 창호야, 넌 내 밑에서 일하면서 충분한 음식

과 돈을 모았어. 그래서 생각이 많아지는 거야. 그게 정상이지. 애

국주의는 신념일 뿐이야.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지. 하

지만 신념에 빠지면 자신의 이익을 잊어버릴 수 있어. 책임자들은

신념에 지나치게 빠져든 사람들을 착취할 거고. 넌 조선을 바로잡

을 수 없어. 너 같은 사람이나 나 같은사람은 백 명이 모여도 조선

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이제는 소련과 중국,

미국이 엉망진창인 작은 우리나라를 놓고 싸우고 있어. 네가 그들

에게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선은 잊어버려.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그 유부녀를 원한다고? 좋아. 그럼 그 여자의 남

편을 제거해버리거나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 그게 바로 네

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경희 씨는 남편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요셉은 실패자야.”

“아니에요,그렇지 않아요.” 김창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경희 씨는 그런 여자가 아니고… …” 김창호는 더 이상 그 이야기

를 할 수가 없었다. 요셉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는 있었지만 사

람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김창호는 많은 신념을

356 파친코 O
갖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신념도

들어 있었다. 경희가 그 망가진 남자를 떠난다면 경희를 흠모할 가

치가 떨어질 것이었다.

길 끝에서 한수가 걸음을 멈추고 평범해 보이는 술집을 향해 고

개를 기울였다.

“지금 여자를 품고 싶니?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서 그 유부녀 곁

으로 가고 싶니?”

김창호는 문손잡이를 노려보다가 잡아당겨 열었다. 한수를 먼저

들여보내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오사카의 새집은 옛집보다 다다미 두 개가 더 들어갈 정도로 컸

고 타일과 원목,벽돌로 지어졌다. 한수가 예상했던 대로 옛날 집

은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경희는 법적 서류를 코

트 안감에 꿰매 넣어 놓았고, 한수의 변호사가 요셉의 재산권을 인

정받도록 도와주었다. 요셉과 경희는 농장을 떠날 때 다마구치한

테서 받은 돈으로 옛날 집 근처의 빈 땅을 사들였다. 그러고는 한

수가 운영하는 건설회사의 도움을 받아 집을 새로 지었다. 이번에

도 요셉은 이웃사람들에 게 자신이 집주인이 라는 사실을 절대 말하

지 않았다. 실제보다 더 가난한 척하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 행동이

었다. 집 외관은 이카이노의 다른 집들과 거의 똑같았다.

요셉의 가족들은 김창호와 함께 살기로 했고,요셉이 같이 살자

고 했을 때 김창호는 거절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질 좋은 벽지를

발랐고, 작은 창문으로 쓸 튼튼하고 두꺼운 유리를 샀다. 돈을 조금

더 써서 더 나은 천을 사들여 따뜻한 이불과 방석을 만들었고, 밥

사랑의고통 357
상 겸 공부상으로 쓸 나지막한 조선식 상도 샀다.

밖에서 봤을 때는 널찍한 판잣집에 불과해 보였지만,집 안은 깨

끗하고 조직적으로 잘 설계되어 있었다. 부엌도 널찍해서 식품 수

레를 밤새 보관해둘 수 있었다. 부엌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 별채도

붙어 있었다. 양진과 선자, 아이들은 낮에 안방으로 쓰는 중간 방에

서 잠을 잤다. 요셉과 경희는 부엌 옆의 가장 큰 창고 방에서 잠을

잤고, 김창호는 장지문 두 개로 두 벽면을 막은 앞쪽 방에서 잠을

잤다. 이렇게 일곱 명이 이카이노에서 한집에 살았다. 이웃집들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거주지는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저녁 늦게 김창호가 술집에서 돌아오자 다들 잠들어 있었다. 한

수가 상당히 매력적인 조선인 여자를 사주었고, 김창호는 그 여자

와 뒷방에 들어갔다. 그 후에 목욕탕에 가고 싶었지만 그날 밤에는

집 근처에 있는 목욕탕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김창호는 별채 옆의

세면대에서 되는대로 몸을 씻었지만 입에서는 여전히 여자의 분홍

색 립스틱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어렸는데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뒷방에서

일하지 않을 때는 종업원으로 일하는 여자였다. 술집에서 일하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 여자도 전쟁과 미국의 점령군들을 겪으면서

강인해졌다. 상당히 예쁘장한 여자라서 많은 남자들을 만났을 것

같았다. 지나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여자였다.

뒷방은 돈을 지불한 고객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지나는 뒷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곧장 꽃무늬 옷을 벗었다. 그녀는 속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늘씬하고 가날픈 몸매에 둥글게 솟아오른

가슴은 브래지어를 할 필요가 없었고, 두 다리는 굶주린 농부의 것

358 파친코O
처럼 깡말라 있었다. 지나가 김창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부드럽

게 엉덩이를 돌리며 그를 흥분시켰다. 그러더니 김창호를 바닥에

깔린 짙은 빨간색 요 위로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지나는 김창호의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능숙하게 김창호를 닦아주더니


립스틱 바른 입으로 성병예방약을 김창호에게 먹여주었다. 김창호

는 여자와 자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지금까지 창녀들만 상대했지

만 이번 상대는 얼굴과 몸매가 창녀답지 않고 사랑스러운 여자였

다. 이번에는 그가 돈을 지불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나의 화대가 왜

그렇게 비싼지 알 것 같았다.

지나는 김창호를 오빠라고 불렀고, 지금 자기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지 물었다. 김창호는 매력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지나의 능숙

한 솜씨에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는 김창호를 부드럽게 밀

어 눕히고는 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아 엉덩이를 꽉 조여서 한 번

에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김창호의 이마와 머리카락에 키스

하고, 관계를 갖는 내내 김창호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파묻었다. 거

짓인지는 몰라도 지나는 다른 창녀들과는 달리 김창호와의 관계를

즐기는 것 같았다. 지나가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아서 김창호는 잔

뜩 흥분했고 바로 가버 렸다. 지나는 잠시 동안 김창호에게 안겨 누

워 있다가 일어나서 수건을 가져왔다. 김창호의 몸을 닦아주는 동

안에는 김창호를 잘생긴 오빠라고 불렀고, 오빠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또 와달라고 했다. 김창호는 밤새 머물면서 한 번 더 하고

싶었지만, 한수가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또 오겠다고 지나에

게 약^有!•고 뒷방에서 나왔다.


* * *

사랑의고통 359
방에 들어가자 누군가가 벌써 잠자리를 펴놓은 것이 보였다. 김

창호는 풀을 먹인 깨끗한 요에 누워서 경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침구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모습을 상

상했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경희와 사랑을 나누는 몽상에 젖어

들었다. 유부녀가 성관계에 놀라지는 않겠지만 지나가 그랬던 것

처럼 경희도 성관계를 즐길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경희가 그랬

다면 그는 경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헛간에서 지낼 무렵 김창호

는 항상 여자들보다 먼저 잠이 들었다. 요셉이 경희의 몸을 올라타

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김창호는 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 집에서도 그들의 소리는 들

리지 않았다. 요셉은 더 이상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김창호는 경희를 사랑하면서도 요셉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 같았다. 그렇게 경희는 그의

것이기도 했다.

김창호의 마음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난 탓에 고한수는 그

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김창호는 경희의 부드러운 얼굴, 우아

하고도 조용한 몸짓을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경희

와 함께할 수 있다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경희와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식당에서 경희와 나란히 일했을

때, 농장에서 경희와 단둘이 있었을 때,김창호는 경희의 몸을 끌

어당겨 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차마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경희가 자신에게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희는 남편을 사랑했고,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김창호가 절대 믿을 수 없乂 신도들에게 혼외정사를 허락하지 않

360 파친코 O
는 그 신을 경희는 믿었다.

김창호는 경희가 얇은 장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면

서 두 눈을 감았다. 그 창녀가 그랬던 것처럼 경희가 옷을 벗고 그

에게 입을 맞춘다. 김창호는 경희를 끌어당겨 자기 품 안에 가둔다.

경희와사랑을 나누는 순 社 그의 인생이 가장 완벽해지는 그 순 社

김창호는 죽어도 좋을 것 같다. 김창호는 경희의 아담한가슴, 새하

얀 배와 다리, 은밀한 그곳의 그림자를 그려볼 수 있었다. 다시 아

랫도리가 딱딱해지자 김창호는 오늘 밤은 자신이 어린 소년 같다

고 생각하며 조용히 웃었다. 또 하고 또 해도 충분할 것 같지 않았

다. 예쁜 창녀를 만나면 경희를 지워버릴 수 있을 거라는 한수의

생각은 틀렸다. 김창호는 오늘 밤 달콤하고 청량한 뭔가를 맛보았

고,지금은 그 청량한 기운을 커다란 욕조에 한 가득 끌어 모아 온

몸을 깊숙이 담그고 싶었다.

김창호는 성난 아랫도리를 문지르다가 안경을 쓴 채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김창호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도

먹지 않고 일하러 나갔다. 그날 저녁,집으로 돌아갈 때 김창호는

설탕과자 수레를 끌고 가는 가녀린 어깨를 발견했다. 그는 재빨리

그녀를 뒤쫓아 달려갔다.

“제가할게요.”

“아, 왔네요.” 경희가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침에 창호

씨가 그냥 가버려서 다들 걱정했어요. 어젯밤에도 못 봤고요. 오늘

은 뭘 좀먹었어요?”

“전 괜찮아요. 제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사랑의고통 361
김창호는 설탕과자를 포장하는 봉지 더미가 모두 사라졌다는 사

실을 알아차렸다. “봉지가 없네요. 오늘은 장사가 잘 됐어요?”

경희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팔았어요.

하지만 흑설탕 가격이 또 올랐어요. 어쩌면 젤리를 만들어야 할지

도 모르겠어요. 젤리를 만들 때는 설탕이 좀 덜 들어가거든요. 새로

운 제조법을 찾아야겠어요.” 경희가 걷다가 멈춰서 손등으로 이마

를 홈쳤다.

김창호가 수레를 빼앗아 대신 끌었다.

“선자 씨는 벌써 집에 갔어요?” 김창호가 물었다.

경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어요?”

“오늘 밤에는 소란이 좀 없었으면 좋겠어요. 요즘 남편이 모두에

게 너무 모질게 굴어요. 게다가… …” 경희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요셉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

는 자신의 화상과 부상으로 인한 끔찍한 통증을 느낄 만큼은 회복

되고 있었다. 요셉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게 생기면 화를 냈고 예

전처럼 그 화를 참지도 않았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소리도 자

주 질렀다. 전쟁 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고요.”

김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은 선자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니까 아이들을 동네 조선인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조선어를 배워야 했다. 하지만 한수는 선자에게 그

반대 이야기를 했다. 선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조선

으로 돌아가는 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362 파친코 O
집으로 가는 길이 텅 비어 있었다. 해가 지면서 하늘이 부드러운

회색빛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조용할 때가 좋아요.” 경희가 말했다.

“네,그래요.” 김창호는 수레 손잡이를 좀 더 세게 움켜쥐었다.

경희가 느슨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로 쓸어 넘

겼다. 긴 하루를 보냈음에도 경희의 표정은 여전히 맑고 밝았다. 그

누구도 절대 더 럽힐 수 없는 아름다움이 었다.

“어젯밤에 요셉이 또 학교 문제 때문에 선자에게 소리를 질렀어

요. 남편은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거예요. 남편도 마음이 많이 아플

거예요. 노아는 일본인 학교에 가고 싶어 해요. 와세다대학에 가고

싶대요. 상상이 가세요? 그런 큰 학교에 가고 싶어 하다니!”

경희는 노아의 원대한 꿈을 자랑스럽 게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었

다.
“뭐, 모자수는 전혀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 않지만요.” 경희가 웃

었다.

“우리가 지금 돌아갈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읽

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경희는 갑

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김창호가 코트 주머니에서 안경을 닦을 때 쓰는 손수건을 꺼내

경희에게 건넸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요.” 김창호가 말했

다.
경희가 고개를 끄덕 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사랑의고통 363
경희는 김창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부모님이 돌

아가셨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아직도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꿈

을 꿔요. 부모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요. 너무 위험해요. 상황이 좀 더

나아지면… … ”

“상황이 곧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세요?”

“뭐,누님도 우리들이 어떤지 알잖아요.”

“무슨 말이죠?” 경희가 물었다.

“조선인들이요 조선인들은 서로 싸우고 있죠_ 모두들 자기가 다

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권력을 쥐든 그 권력을

유지하려고 아주 독하게 싸울 겁니다.” 김창호는 한수한테 들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한수의 말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특히 인간의 추

악한 면을 꿰뚫어볼 때는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럼 창호 씨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요r 경희가 물었다.

“뭐라고요?”

“그런 정치 모임에 가잖아요. 창호 씨가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면

그들도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창호 씨는 일본

정부에 저항하고 우리나라를 통일하고 싶어 하잖아요. 맞죠? 시장

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뭘 믿어야 할지 모

르겠어요. 남편은 공산주의자들이 나쁘다고 말했어요. 그들이 우

리 부모님을 쏴 죽였다고요. 우리 아버지는 항상 모두에게 미소를

지었어요. 항상 좋은 일을 하 셨 죠 ;

경희는 왜 부모님이 살해당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셋째 아들이라서 가진 땅도 많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지주들

364 파친코 O
을 모두 다 죽였을까? 별 볼 일 없는 지주들도? 경희는 김창호의

생각이 궁금했다. 김창호는 좋은 사람이고 세상일을 많이 알고 있

었으니까.

김창호는 수레에 기대서서 경희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경희

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경희가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니,자

신이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런 여자를 곁에 둔다면 정

치에 신경이나 쓰게 될지 궁금했다.

“다른 종류의 공산주의자들도 있나요?” 경희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제가 공산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전 일본

이 조선을 다시 점령하는 걸 반대하고 있어요. 소련과 중국이 조선

을 다스리는 것도 싫고요.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왜 조선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조선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잖아요. 할머

니 두 사람이 싸울 때와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럴 때 보면 마을 사람

들이 상대의 나쁜 점을 소곤소곤 일러주면서 두 사람을 이간질시

키잖아요. 할머니들이 화해를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 말을 다 무

시하고 서로 친구로 지냈을 때를 기억하면 돼요.”

“아무래도 누님을 우리 지도자로 추대해야 할 것 같은데요.”

김 창호는 집 쪽으로 수레를 끌면서 말했다.

집까지 가는 길이 짧았지만 김창호는 경희와 함께해서 행복했

다. 하지만 그 바람에 경희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김창호는 가끔

씩 경희 곁에 머물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집 밖으로 나가 그런 모임

에 참석했다. 경희를 매일 과아: 했기 때문에 경희의 집에 살고 있

는 것이었다. 김창호는 경희를 사랑했다. 그 감정은 절대 변하지 않

사랑의고통 365
을 거라고 김창호는 생각했다. 결국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는 상황에 처 ^!
•고 말았다.

집까지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 두 사람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두

사람은 그날 하루 일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느

긋해지고 좀 더 친숙해졌다. 김창호는 경희를 사랑하는 고통을 끝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 2 권에 계 속 一

366 파친코 ©
옮긴이이미정

영 남 대 학 교 영 어 영 문 학 과 를 졸 업 했 다 . 졸업 후 KBS방송아카•데미 번역 작 가 과 정 올 수 료 하 고 , 전문

번역가의 길에 들 어 섰 다 . 현재 출 판 번역 에 이 전 시 인 베 네 트 랜 스 전 속 번 역 가 로 활 동 중 이 다 . 옮긴

책 으 로 는 《단 단 한 남자〉《단 테 클 럽 1, 2〉〈마 지 막 잎 새-내 인 생 을 위 한 세 계 문 학 6 > 《거 짓 신들의

세 상 〉〈파 국 K 낙 인 K 무 덤 의 침 묵 》<가면의 진 실 〉〈괴 도 신 사 뤼팽 H 수 정 마 개 의 비 밀 》외 다 수 가

있다.

파친코 〇
1판 1쇄 2018년 3월 9일

1판 17쇄 2021년 2월 8일

지은이 이민진

옮긴이 이미정

펴낸이 임지현

펴낸곳 好) 문 ^사 상

주소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363-8, 2이 호 (10881)

등록 1973년 3월 21일 제 1-137호

전화 031)9 始-8503
팩스 031)955-9912

홈페이지 www .munsa.co.kr

이메일 munsa@munsa.co.kr

ISBN 978-89-7012-981-5 04840


ISBN 978-89-7012-980-8 04840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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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 서 의 국 립 중 앙 도 서 관 출 판 예 정 도 서 목 록 (CIP) 은 서지 정 보 유 통 지 원 시 스 템 홈페이지

(http:// seoji.nl.go .kr) 와 국 가 자 료 공 동 목 록 시 스 템 (http:// www .nl.go .kr/ kolisnet) 에서

이 용 하 실 수 있 습 니 다 . (CIP제 어 번 호 : CIP2018〇 a 4798)


구상부터 탈고까지 장장 30년의 세월이 걸린
작가의 혼미 담긴 작품
‘역 사 가 우 리 를 망 쳐 놨 지 만 그 래 도 상 관 없 다 .’
이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 설 《파친코〉는 내국인이면

서 끝내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처절한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3〇 년이 걸린, 작가 이민진의 혼

이 담긴 이 대작은 그녀가 1989년 예일대 재학 시절 참석한 강


의에서 느낀 분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른

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다 자살한 어느 일본 중학생의 이야


기는 선천적인 이유로 상처 받 아 ^ 하는 이들에 대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분노와 슬픔에서 탄생한 소 설 〈파친코〉는 단순한 도
박 이야기가 아니라, 멸시받는 한 가족이 이민 사회에 적응하

기 위해 애쓰는 투쟁적인 삶의 기록이며 유배와 차별에 관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부산 영도의 기형아 훈이, 그의 딸 선자,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낳은 아들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핏줄의 역사이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일본에서 가혹한 차별과 가난을 견디

면서 이방인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도전에 맞서 살아간다.


이들은 정체성에 관한 의문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필사적인

투쟁과 힘겹게 얻은 승리를 통해 깊은 뿌리로 연결되어 하나

가 된다.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다.”


한국 독자에게 보낸 이민진의 메시지

■■고통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


다. 종종 보면 서구인들은 ‘고통의 회피’에만 초점을 맞
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와중에도 누구나 심
오한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한국 독자
들이 지금 그들의 유산이 매우 힘겨운 투쟁의 결과라는
것, 그 고통이 반드시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
게 되길 바란다.”
ᆻ 선 일 보 와 의 인터뷰 중에서
나라 잃은 유랑의 후예로서 뼈아픈 학대를 무릅쓰고
피어난 처절한 망국민의 애처로운 역 사 《
파친코》

이 작품에 보내진 권위있는 외국 매체와 평자들의 찬사

주 노 디아스(풀리처상 수상작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작품이다. 이민진의 소 설 《파친코>는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한 이민자
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훌륭
한 책 이다.《파친코〉는 뛰어난 소설가들 가운데서 화려하게 우뚝 선 이민진의 자리를 확인시

켜주는 책이다.

게리 쉬테인가트(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놀라운 작품이다. 디킨스와 톨스토이의 손길이 일본에서 살았던 20세기 한국인 가족에 스며
들었다. 이 민진의〈파친코>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가 족 과 사 랑 , 돈이라는 주제를
모두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 지금까지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의문도 제기하
고 있다. 한 나라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단하면서도 고통스럽고 친숙한 속
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이러한 것들을 제시한다.

시 몬 윈체스터(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현대와 삼성, 김치밖에 모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특별한
작품은 기쁨과 비통함이 무엇인지 뚜렷이 증명해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고,더없이 가슴 아픈 인생 여정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완벽하게 풀어낸 잊 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이상적으로 어울리는 다정함과 지혜를 보여준 이민진에 게 찬사를 보낸다.

다린 스트라우스(전미도서상 수상작가)
이 민 진 의 《파친코〉는 훌륭한 작품이자 열정적인 이야기이며 위엄 넘치는 글이다. 또한 극히
읽기 쉬운 뛰어난 작품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고전적인 작품이며 올해 최고의 책이 될
것으로 믿는다.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책 ’ 선정평에서


고국과 타국, 개인적 정체성에 관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묻게 하는 놀라운 소설이다.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인생 속에 녹아 있는 개인적인 욕망과 희망, 그리고 불행을 탁월


한 수법으로 그려 냈다.
www .m unsa .co.kr

-7012-981-5
-7O12-90O-0(A|*)

값 1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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