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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0405 남유수록 (충청)
ch0405 남유수록 (충청)
남유수록南遊隨錄
남유수록 南遊隨錄
1894년 1월 초 1일 기묘 [甲午元月初一日己卯]
눈이 많이 오고 맑음.
산소山所에 성묘를 하고 복여復汝씨 댁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생원生員 민
경습閔景習과 민주백閔周伯 두 어른을 뵈었다.
초 2일 [初二日]
눈이 많이 옴.
이노李老, 이씨 노인가 돌아가신다고 하기에, 돈 1냥을 가져다가 드리고 유모油
帽를 빌려드렸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유장柳庄의 민도사閔都事 어른께 가서 세배를 했다. 친구 정중길鄭仲吉과 종형
제從兄弟들이 찾아왔는데, 통감通鑑 제 8권을 돌려받았다. 쌀과 돈 2냥을 김순
동金順同에게 주었다.
14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4일 [初四日]
맑음.
밤에 임경회林景會를 가서 보았는데, 그 부지런함과 재빠름은 예사로 보기
어려웠다. 전 도사都事 민경소閔景昭 어른께 세배를 했다. 지나가다 되돌아 간
것이다.
초 5일 [初五日]
흐리다가 오후에 눈이 옴.
읍내의 김현모金顯謨가 왔다. 전에 흰 비단 값과 그 밖의 셈이 있어 7전
6푼分을 주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아우 근根, 근영이 서면西面 가재동佳才洞 전 도정前都正 이봉현李鳳鉉의 서녀를
재취再娶로 들이기로 하였다. 그 집에서 3월 18일로 길일을 정해 왔는데, 할아
버지 기일忌日과 맞물려 2월 3일 사시巳時, 오전 9시 11시로 날을 바꿔서 보냈다.
형님이 탑동塔洞에 갔다.
초 7일 [初七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유장柳庄 모친의 왼쪽 귀 밑에 종기가 났다가 저절로 터졌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봉래가 아우 근根과 함께 떠나갔다.
염창 倉 이석사李碩士 치효治曉가 찾아와서, 백씨伯氏가 예전에 김제金堤 고
잔리高盞里에 살았는데, 세속의 참언에서 십리노화불견소十里蘆花不見所2라 하니,
그 마을 앞 들판 이름이 멱소평覓所坪이다 라고 하였다. [봉래가 갈 때에 당시(唐詩)
초 9일 [初九日]
맑음.
상중인 노씨가 왔는데, 바로 죽은 노첨사魯僉使,의 사촌이다. 집이 영동永同
에 있는데, 혼자 비인庇仁에 머문다고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규암窺巖 사종숙四從叔이 오셨고, 다복多福이 왔다.
판교板橋에 들렀다 왔는데 우족牛足 2개를 보내왔다.
비인庇仁 분장汾庄 사는 박朴이 왔다. 노魯씨 어른이 지난 해에 선달先達 서공
11일 [十一日]
흐림.
노씨 어른이 박朴과 함께 대산大山의 서선달집에 갔다. 마천馬川의 족종族從인
칠종七宗과 신정新亭의 윤경락尹景洛이 와서 군수평軍守坪 거자巨字4 5두락斗落과 수
자水字 4두락을 180금金에 사기를 청했는데, 20일 내에 값을 치른다고 한다.
전주全州의 민閔씨 어른이 찾아오셨다.
사종숙이 돌아가는 길에 탄촌灘村의 김상인金喪人, 상주에게 위문하는 편지를
붙 다. [아버지의 위문 편지이다]
12일 [十二日]
맑음.
6전錢으로 동해의 청어靑魚 10마리를 샀다. 이 물고기가 올해처럼 풍성한
13일 [十三日]
맑음.
위원령渭原令5이 왔다. 저녁에 도사都事 민경효閔景孝를 가서 뵈었다.
14일 [十四日]
맑음.
위원령이 웅포熊浦6로 출발하였다. 오후에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밤이 되어
도 그치지 않았다.
15일 [十五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16일 [十六日]
맑음.
한홍韓弘을 데리고 미당美堂으로 길을 나섰다. 봉득鳳得을 불러 한홍과 함께 오라
고 하였으나 봉득이 신발과 버선을 바꿔 신겠다고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한홍
만이 뒤따라와 길에서 만났다. 용전龍田에 이르러서 탑동塔洞의 숙장叔丈, 처숙부을 만
나 함께 가진촌佳眞村 홍생원집에 갔다가 분대盆垈에 이르러 서로 헤어졌다.
왕진汪津에 들러 저물어서야 미당美堂에 도착하였다. 먼저 소농紹農을 보았
다. 성무聖茂는 마침 노중魯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처갓집에 가서 묵었는데 윤자황尹滋晃 어른이 자리에 계셨다.
17일 [十七日]
맑음.
율정栗亭에 갔다. 성무聖茂가 저녁에 돌아왔다. 첫닭이 울 무렵 사내아이를
순산하였다.
18일 [十八日]
흐리다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밤에 율정에서 묵었다.
19일 [十九日]
맑음.
성칠成七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관현冠峴의 사종숙 집에 이르러 묵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49
20일 [二十日]
맑음.
빙현氷峴에 들어가 한韓씨 어른께 인사를 하였다. 읍내의 김영학金永學 집에
가서 서형석徐衡錫을 불러서 만나보고 탑동에 들러 성칠에게 몇 마디 말을 하
였다. 가속佳束의 산소에 배례하고 저물어서 집에 도착하였더니 어머니의 종
기가 완전히 아물었다. 반곡盤谷의 자형 兄인 윤尹과 남당南塘의 종형이 와서
머문 지가 여러 날이 되었고, 가사동佳寺洞 생질인 용이도 이미 와서 있었다.
새해 전에 인사하러 오는 김에 누이가 보냈는데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게
하고 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형과 반교盤喬7의 종형이 16일에 반곡
에 들어갔다가 어제 돌아올 때에 가재동佳才洞의 조租를 모두 가져왔는데, 1포
包는 벌써 관현冠峴의 사종숙이 가져갔다고 하니 매우 의아스럽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홍산鴻山 여단촌 壇村 석사 김심원金尋源이 왔고 임천 조석사趙碩士도 왔다. 모
두 지난번에 종형從兄과 함께 와서 각각 친척을 방문했다가 종형과 같이 돌아
갔다. 미예美隸와 판옥判玉을 보내어 봉득鳳得을 불렀으나 완강히 거절하며 오
지 않아 여러 장정을 시켜 잡아와서 약간 형벌을 가하여 그 죄를 징치하였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성칠이 돌아갔다. 자형 윤尹이 돌아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윤아尹雅, 윤경락가 사려던 9두락의 논도 허사가 되었는데 매우 이상하다. 밤
에 서모庶母의 제사를 지냈다.
24일 [二十四日]
오전에 흐려 비가 쏟아지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앞의 제언堤堰을 다시 쌓았다.
규암窺巖의 사종숙四從叔 성일聖逸이 염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25일 [二十五日]
맑았다가 오후에는 흐려지고 밤에 비가 왔다.
종 1명에게 이불과 쌀 1말을 지워서 규암에 갔다. 그가 염병으로 죽고 온
가족이 돌아가며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까운 이웃이라도 반드시 기꺼이
주선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객지에서 궁박하게 사는 입장이니 어떻
겠는가? 도울 길이 없어서 직접 가서 간호幹護하는 것이 바로 가까운 친척의
도리라고 생각하여 외부사람에게 약간 기별寄別을 하였다. 성교聖敎와 나산蘿
山 등의 친구 몇 명이 안타깝게 여겨 다행히 삼베를 얻어 수의 衣를 만들었
다. 관현의 사종숙이 오후에 비로소 도착하여 염습殮襲을 하고 포시 時, 오후
26일 [二十六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그쳤다.
반곡의 하인이 돌아갈 때에 양화의 하인도 함께 가게 하였다. 자형 윤에게
답장을 쓰기를, 50금을 양화의 하인에게 주어 보내게 하고 다음 날에 100금
을 보내면 그 사이에 웅포에서 답장을 얻어 돌아가는 인편에 부칠 것이다 라
고 하였다. 150금을 내가 바꿔 사용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28일 [二十八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권이가 돌아왔다. 위원령의 답장에, 상환相換은 매우 좋은 방편이다 라고
하고, 봉표捧標를 써서 보내왔다. 정재식鄭在植이 경포시鏡浦市에 가서 돈 35냥
을 주고 당목唐木 1필을 사서 반 필은 가져오고 나머지는 다시 팔아 돈으로
가져왔다. 4전 5푼으로 죽파자竹杷子 2개를 샀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일룡一龍을 데리고 돈 33냥을 가지고 백강白江에 가서
배 1척을 잡아 관현에 가서 조租를 실어오게 하였다.
곡화천曲火川 산지기 엄공필嚴公必이 왔다. 밤에 민원삼閔元三 어른을 뵈러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용금龍金에게 술값 1냥을 주었다. 순금을 구동久洞에 보냈다.
2월 초 1일 [二月初一日]
흐림.
초 2일 [初二日]
맑음.
장정을 뽑아 조포租包 15석을 유장柳庄으로 곧바로 수송하였다. 가가哥哥12
가 한양에 가는데 어제 민석사閔碩士 원삼元三과 길동무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민석사가 기다리느라 떠나지 못하다가 먼저 출발하였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
이 사위 조순의趙舜儀를 데리고 왔다.
대산大山 서선달徐先達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17일에 딸을 순산했다 라
고 하였다. 연이어 딸 셋을 낳으니 너무 많구나. 또한 비인의 박朴에게 완영
의 환전換錢을 구할 길이 없는지 다시 소식을 알아보았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정재식에게 사람을 보내어 돈 18냥을 구했다. 당목唐木 반필 31자 5촌을
먼저 가져왔다. 옥천沃川 어소漁沼의 팔촌 동생 민영敏榮, [자(字)는 서오(敍五)이고 을해
(乙亥)생이다]이 노강魯岡에서 왔다. 바로 2방房 숙부님의 장남이다. 가까운 친척
간에 서로 만나는 것이 이처럼 늦었으니 한탄스럽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조趙, 조순의가 오평梧坪으로 돌아갔다. 서오徐五, 서민영가 홍주 용주동龍珠洞으로
갔다. 자형인 윤과 동행하여 남당南唐의 사촌형님 댁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
서 유숙하였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배를 타고 웅포에 이르렀다. 주인집은 다행히 편안하나 춘서春瑞는 입술의
부스럼을 치료하러 집에 돌아온 지가 이미 열흘이 넘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노성魯城 천동 사는 김성의金聖儀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자형인 윤尹과 김생金生, 김성의이 돌아갔다.
천동의 윤진사가 왔다.
초 8일 [初八日]
흐리고 비가 왔다.
윤진사가 빗속에 울적하여 사람을 시켜 기생을 불렀다. 이름은 하엽河葉이
고 나이는 23세로 전주에서 와서 이곳에 거처하였다. 용모는 빼어나고 음색
남유수록 南遊隨錄 155
초 9일 [初九日]
아침에 비가 오고 흐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윤진사가 하엽荷葉이 정산定山 땅으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 노잣돈 10금金을 주었
다. 저녁에 3명이 배를 타고 남당에 도착하여 강가 김치경金致景의 집에서 머물렀다.
초 10일 [初十日]
아침에 눈비가 내렸다.
오후에 해전령海田令과 내가 웅포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윤진사가 외로운
점막店幕에서 봄비에 객회客懷를 견디기 어려워 그것 때문에 서글퍼하며 서운
해 하였다. 주령主令13의 근행覲行14이 멀지 않아 웅포에 일이 있으니 내게 며
칠 묵으면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돌아가기를 간곡하게 권
15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1일 [十一日]
맑음.
임천 죽리竹里의 윤석사 치구致九와 그의 삼종숙三從叔이 왔다. 그래서 함께
사촌형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왕호旺湖의 민경습閔敬習 어른이 이치원李致元 집
에 와서 머무신다는 소식을 듣고, 들러서 뵙고 집에 편지를 부쳤다.
12일 [十二日]
맑음.
13일 [十三日]
맑음.
해전령海田令이 부모님을 찾아뵈러 들렀다가 바로 헤어졌다. 오후에 배를
14일 [十四日]
맑음.
찬중이 떠나갔다. 정산定山 공서원公西院16 사는 이훈융李訓戎, 훈융은 훈련대장이
주령을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갔다.
석정石亭 추금록秋金祿이 소금을 정산주인定山主人, 객주에게서 샀는데, 부족한
돈이 78냥이었다. 25일 안에 돌아와서 갚을 것이라고 했으나 서로 믿지 못하
였다. 찬보贊甫는 금록의 이종형인데, 주인댁의 표지標紙로 써서 줄 것을 청하
니, 바로 정산주인의 뜻이었다. 나는 그때 체해서 구토를 하고 겨우 숨을 쉬
고 있었으나 병을 무릅쓰고 써서 주었다.
가동佳洞 김석보金石甫가 시흥始興의 편지를 전해왔다. 석분石奮이 왔다. 남당
에서 윤진사를 들러서 뵙고 부장部將의 편지를 얻어 논호論湖에서 왔다고 하였
는데, 이것은 역시 빨리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15일 [十五日]
맑음
석보를 율정에서 전송하고, 시흥과 전동典洞으로 편지를 부쳤다.
찬보가 동해의 청어가 요즈음 값이 뛰어서 이익을 볼 수 있다. 200두름은
148냥에 샀고, 55두름은 39냥 2전 8푼에 샀다 고 하였다. 월담月潭이 와서 묵
16일 [十六日]
맑음.
윤진사가 이 새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시장사람들 편에 종이를 보내와서
벽에 붙일 주련柱聯을 써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이런 글에 처음부터 능숙하
지 않아서 종이를 마주하고 앉으니 난감하기만 하고 실제 쓸모도 없을 것
같다. 다만 시속時俗에서 헛된 명예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실內室
의 도배塗褙로는 비록 솜씨가 없더라도 사람의 안목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
도 같아서 억지로 쓰긴 했으나 도저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으니 우습다.
남당 김복여金復汝가 보러왔다.
17일 [十七日]
춘상갑자春上甲子일이다.
흐리고 비가 왔다.
18일 [十八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았다.
19일 [十九日]
맑음.
춘서에게 대구大口 2마리를 보냈다. 청어를 팔아 남은 이익 중에 수십 금을
찬보에게 돌려보냈다.
20일 [二十日]
아침에 흐렸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지池 오위장五衛將이 왔다. 무주茂朱에 사는 허許 이李 두 노인이 지나다 찾
아왔는데, 전에 유성의 사종숙 댁에 손님으로 있었다고 한다. 박일오朴一梧가
왔다.
고부古阜민란이 크게 일어나서 각 읍에 격문을 전하였다. 그 대략에, 지방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道를 알지 못하고 백성을 돈이 나오는 근원으로
바라본다. 더욱이 전운轉運18을 창설하여 많은 폐단이 심하게 생기니 백성들
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 우리들이 비록 초야의 유민遺
民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태로움을 앉아서 볼 수가 없다. 각 읍의 군자君子들
은 한 목소리로 의기를 내어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종사宗社
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란다 고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흐리고 비가 조금 내렸다.
춘서가 왔다. 회숙晦叔이 와서 집안이 편안하고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셨다
22일 [二十二日]
흐리고 비가 왔다.
아우 근根이 미예美隸, 미당(美堂)의 하인 업록業祿을 데리고 육로를 따라 돌아왔
다. 찬중이 떠나갔다. 예학명 鶴銘20의 글자를 임서臨書하였다.
23일 [二十三日]
서리가 내렸다. 맑았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주령主令이 서방동書房洞 평답坪畓 35두락을 전공유田公有에게서 새로 사들였
다. 그것을 답험踏驗하는 것도 하나의 상쾌한 일이라서 춘서와 찬보를 데리고
가서 보았다. 그리고 윤북청尹北靑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공주 청림靑林
25일 [二十五日]
맑음.
서방동書房洞 윤생원尹生員이 왔다. 손찬중이 왔다가 떠나갔다. 김금동이 왔
는데 추위가 무서워서 문을 닫고 있다가 이제야 머리를 내미니, 쇠하고 병드
는 일을 어찌하겠는가? 주령主令이 바둑을 두자고 하였으나 정신이 피로하여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여 사양하고 떠나갔다.
새벽 축시丑時, 오전 1 3시에 차섬且暹이 딸을 낳았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손찬중이 왔다. 주동注洞사람이 생일날이어서 점심에 술과 국수를 마련하
였다. 주령主令이 반곡의 환전換錢 700냥을 갚았다. 한생원韓生員이 50금을 가지
고 돌아갔다. 여산礪山 천동면 대성台城 진형철陳珩澈 [자(字)는 광필(光弼)이다]이 왔다.
낙흥樂興이 왔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손찬중과 찬보가 2,000전과 마포麻布 3동同, 150필을 가지고 논산論山에 갔다.
낙흥樂興과 가동佳洞에서 온 사람이 150금과 계곡溪谷에 보낼 부의賻儀를 가지고
떠나갔다. 진씨陳氏, 진형철가 떠나갔다. 서방동書房洞의 윤尹이 왔다가 갔다. 공
주읍의 상봉촌上鳳村 김성학金聖學이 천동에서 와서 윤진사의 편지를 보았다.
16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8일 [二十八日]
맑음.
본읍의 지사동芝沙洞 유진사兪進士가 왔는데, 전주에 사는 이李와 최崔 두 객
이 따라왔다가 바로 떠났다.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바람이 불다가 오후에 비가 내렸다.
윤교관尹敎官 집에서 당나귀와 일꾼을 빌려 김성학을 데리고 여산으로 길을
떠났다. 함열읍咸悅邑에서 여산 오동정梧桐亭의 점막店幕에 이르러 어떤 노인을
만났는데, 성姓은 이李씨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자字는 규원奎元이었다. 원래 안
심동安心洞 근처에 살다가 지금은 탑동塔洞으로 이사했다고 하였다. 함께 가다
가 고삼거리高三巨里에 이르러 헤어졌다. 미동美洞 두화촌豆花村을 거쳐 안심동安
心洞의 산지기 김기철金基哲의 집에 이르렀다.
밤에 비가 왔다.
30일 [三十日]
한식寒食날이다. 아침에 비가 오다가 정오쯤에 그쳤다.
산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내고 투총偸塚을 살펴보았더니, 산소의 주룡主龍은
앉아서든 서서든 보이지 않았다. 100여 걸음 되는 곳에 있는 무덤의 주인은
아직 알지 못하여 다시 경계를 파고 산기슭을 돌아보며 산지기에게 경계를
물어 보았다. 산지기가 말하기를, 주룡 위로 가면 장송이 서있는 곳이 있는
데, 바로 투총한 곳에서 위로 100여 걸음을 가면 청룡靑龍 한 기슭에 이르게
됩니다. 주룡의 서쪽 절반 가장자리와 백호白虎의 앞뒤가 그의 선산先山이라고
하며 지금 산소를 봉안한 곳도 바로 김씨네의 산이기 때문에 전부터 경계를
남유수록 南遊隨錄 163
3월 초 1일 [三月初一日戊寅]
맑음.
산지기가 일 때문에 한양에 가려 하기에 가형家兄에게 편지를 부쳤다. 돌아
올 때에 두화豆花와 신폭新瀑을 거쳐 소령小嶺을 넘어 의량촌意量村 앞에서 손발
악巽發岳의 점막에 이르렀다. 점막은 산 위에 있었다. 서남쪽 길로 해서 용안龍
安의 봉수대烽燧臺에 올라가 말을 쉬게 하였다. 야교野橋를 넘어 동쪽으로 가서
함열咸悅 지산池山의 손감찰 집에 도착했으나 손감찰은 집에 없었다. 그 집안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가기를 간청하여 마침내 말을 먹이고 점심을 한 뒤에
길을 떠났다. 주령의 집안노비인 고목매高睦賣가 손씨집에 있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기뻐하였다.
21 정시(鄭蓍): 1768(영조 44) 1811(순조 11).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원(德
園), 호는 백우(伯友). 1799년(정조 23)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주부·도총부경력
등을 역임했으며, 18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에서 봉기하여
가산을 습격하였는데, 이에 저항하다 죽었다.
16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2일 [初二日]
흐리고 비가 왔다.
당나귀를 빌린 비용으로 2냥을 주었다. 천곡의 윤진사가 왔다. 김성학이
소금배를 끌고 부강芙江에 갔다.
초 3일 [初三日]
흐림.
주령 및 윤진사와 함께 배를 타고 남당에 이르렀다. 찬보를 논호論湖에 보
내 환표換標를 처리하였다. 배 안에서 시를 지었다.
해전海田의 시이다. [칠언율시이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세 사람이 함께 종형댁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저녁에 남당에 찾
아왔다. 오시午時, 오전 11 오후 1시에 친구집에 가서 죽산 종형의 편지를 보았는
데, 밥을 얻어먹으려고 이산利山땅으로 이사하고, 부장部將 남규南圭에게 20금
을 주어 제수祭需를 돕게 한다고 하였다. 앞으로 분곡奔哭22하지 않으려는 것
인가? 비정함이 너무 심하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초 5일 [初五日]
맑음.
윤진사는 찬보가 오지 않아서 바로 서둘러 본가로 돌아갔다. 나와 주령은
배를 타고 내려갔다. 찬보가 와서 말하기를, 환전換錢의 가계加計23가 10,000
냥이어서 1,000냥이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초 6일 [初六日]
맑다가 오후에 비가 오려고 하였다.
종형 어른이 주령에게 20금을 환전해주기를 요구하였다. 10냥은 가져온
북포北布24 1필을 사는 값이었다.
신석사申碩士 복원復元이 왔다가 갔다. 석분石奮을 천곡에 보내어 가계加計의
고하高下를 셈하지 않고 환표를 얻어 경성으로 가게 했다. 찬보가 집에 돌아
초 7일 [初七日]
비가 왔다.
성의가 떠나갔다. 여름철이 다가와서 박朴이 감리환坎 丸 재료를 가지고 왔
기에 3분의 2를 나누어 샀고 그 들어가는 양을 계산하였다. 석류황石硫黃 8냥,
송진가루 8냥, 오미자五味子 1냥 3전, 구기자枸杞子 1냥 3전, 적하수오赤何首烏 1
냥 3전, 백하수오白何首烏 두충杜 파고지破古紙 원지遠志 석창포石菖蒲가
각각 1냥 3전, 백복신白伏神 2냥, 속단續斷 1냥 3전, 인삼人蔘 황백黃柏이 각각
1냥 3전이었다. 계자청오자대작환鷄子淸梧子大作丸은 위의 약재에다가 사물탕四
物湯의 약재를 각각 2근씩 하였다. 그래서 본 가격이 17냥 7전 5푼이고 지난
가을에 모자랐던 약값이 1냥이어서 합계가 18냥 7전 5푼이 되었다. 새해 전
에 준 20냥과 흥성興成의 조條 중에 1냥 2전 5푼을 합하니 21냥 2전 5푼이
되었고, 거기서 제하고 남은 돈은 2냥 5전이 되었다. 그것으로 인삼을 빼고
비아탕肥兒蕩25 2제劑를 가져오게 했고, 사물탕四物湯의 약재는 각각 2근 중에
숙호熟 1봉 6냥 8전, 당귀當歸 천궁川芎 백작약白芍藥 각각 5냥을 거듭 먼저
가져오게 하였다.
찬보는 오지 않았고 춘서도 돌아갔다.
초 8일 [初八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개려고 하였다.
세 발 달린 토기탕관에 사물탕四物湯을 달였고, 감리환 한 줌을 먹었다. 오
초 9일 [初九日]
맑음.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가 주신 편지를 받아보았더니, 중리中里의
민경식閔卿植이 어젯밤에 그 아비를 모정茅亭의 끝자락에 투장偸葬하였다. 그곳
은 바로 백종조비伯從祖 신씨 부인의 산소 왼쪽 옆의 아주 가까운 데였다.
이른 아침에 비로소 알았으나 가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가 남을 해치려
고 못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날 이런 변괴가 일어났겠는가?
억장이 막히고 심장이 서늘해져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가려움이 심하고 다리가 당기고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윤복여尹復
汝의 집에서 당나귀를 얻어 남당 종형집에 도착했으나 집에 없었다. 오랫동안
백부伯父의 영연靈筵에 곡哭을 하고 따져보니 상사祥事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임
천읍의 근처에서 업동業同과 낙흥樂興을 만나서 몇 마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이르니 반교의 종형어른이 와서 계셨다.
11일 [十一日]
한여름처럼 맑고 더웠다.
본읍 수령이 한양에 올라가서 겸관兼官26이 홍산鴻山에 있었다. 종형이 판옥
判玉을 데리고 홍산에 가서 소장을 내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69
12일 [十二日]
맑음.
오시午時에 판옥이 홍산에서 왔다. 관아에서 보낸 묘지의 그림을 가지고 왔
는데 부여扶餘의 형리刑吏가 수결한 것이다. 판옥으로 하여금 본 읍의 공관空官
에 공문을 전하게 하였다. 형리가 모두 나가서 날이 저물 때에 비로소 일년一年
이라는 젊은 아전과 함께 나왔다. 이름은 이한민李漢敏이고 본래는 공주의 아전
이었다. 날이 저물어서 돌려보내고 내일 일찍 오게 하였다.
당리唐里 윤감역尹監役 어른이 오셨고, 임경선林景先이 찾아왔다.
민씨 집에서 사람을 시켜 우리 집의 하인을 잡아 최가와 이가의 일을 보복
하려고 하였다. 보내지 않으니 다시 와서 종득宗得을 잡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구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국동菊洞의 매부인 정鄭
이 왔다.
13일 [十三日]
맑음.
형리가 와서 도형圖形을 재어보니 백종조비伯從祖 의 산소에서 투장한 무덤
14일 [十四日]
흐리고 비가 왔다.
남당 백부伯父님의 대상大祥 입재入齋27에 참석하지를 못하니 멀리서 슬프고
애통하여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홍산에서 바로 남당에 가서 제사에 참여하게
했는데 과연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노성魯城 소사素沙의 조생원趙生員 어른이 오셨는데, 바로 월곡月谷 진사 조우
현趙禹玄 생가의 아버지이고 용전龍田 윤오병尹午炳의 처妻 할아버지이다. 올해
76세인데 기력이 강건하여 걸어서 오셨다. 늙었으나 더욱 강건하구나.
또 감리환을 먹었다. 강판동姜判童의 혼례 때에 빌려간 승교乘轎가 돌아왔다.
조생원 어른이 돌아가셨다. 홍주 갈동 사는 박씨에게 시집간 누이동생 내외
가 왔다.
15일 [十五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시午時 때에 조금 개었다.
16일 [十六日]
흐림.
박랑朴郞이 돌아갔다. 왕진汪津의 조생원趙生員 공오公五씨가 걸산傑山 이진사
치함致咸씨와 함께 왔다가 바로 갔다. 중리中里 민안주閔安州가 내려왔다. 가마
꾼이 돌아가는 편에 가형의 봄 옷을 부쳤다.
17일 [十七日]
맑음.
김성은金聖恩이 보러 왔다. 임동지林同知 성탁聖鐸이 보러 왔다. 오후에 길을
떠나 반교에 이르렀다.
18일 [十八日]
맑음.
임덕규林德圭는 바로 육촌형의 이모부인데, 근래에 화갈촌花葛村에 이사를 왔
다. 육촌형 및 이덕현李德賢과 함께 길을 떠나 임덕규에게 들러보았다. 그의
아버지 제천堤川 병익炳翼 어른이 별실別室, 첩을 데리고 내대촌內垈村에 살고 있
어 들러서 인사를 하였다. 저물녘에 보령 죽동竹洞에 이르러 조함평趙咸平 어른께
인사를 하였다. 내종형과 희원羲元이 한양에 갔었는데, 희원이 방금 북쪽한양
에서 돌아왔다.
대흥大興의 수령 이창세李昌世가 왔는데, 바로 주장主丈의 친사돈이었다.
19일 [十九日]
맑다가 흐려서 어둑어둑하여 하늘에 가득하였다.
이우李友, 이덕현가 피곤하여 자리에 곯아떨어졌다. 종형제가 역촌驛村에 이르
남유수록 南遊隨錄 173
20일 [二十日]
흐려서 어둑어둑하였다.
돌아오다가 마산촌馬山村에 이르렀다. 종친인 재동在東, [자는 자춘(子春)이다]의 아
들 공현公鉉과 후현侯鉉은 청백리공淸白吏公32의 둘째아들인 수령守領의 후손으
로 한 마을 10여 호 중에 타성바지가 없었고 중간에 투향投鄕33했다가 지금은
그만두고 물러났다고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죽동竹洞에 이르렀다. 이번
행차는 산송山訟을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 소장을 내려는 것이었
21일 [二十一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광주廣州 사헌촌師軒村 신참판申參判 단檀의 셋째 아들인 주서注書 필희弼熙가
호상護喪34을 위해 역촌에 이르러 조우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 중에 처음부
터 끝까지 호상을 한 사람은 이 사람 뿐이었다.
22일 [二十二日]
맑았지만 날씨가 다시 매우 추워졌다.
천렵川獵하였는데 잡은 것이 없었다. 주인 및 사촌형제들과 시를 지었다.
轉眄春光已暮天 돌아보니 봄빛은 이미 저물고
長堤一望思悽然 긴 둑은 아득하여 생각이 처연하다
紅飄驛路千堆雪 역로驛路에 많은 눈이 날려 쌓이고
碧擁溪橋萬縷煙 시내다리에 만 가닥 연기가 둘러쌌네
徒有流觴同逸少 다만 술잔을 띄워 일소逸少, 왕희지와 함께 하니
誰能擧網待蘇仙 누가 그물을 들어 소선蘇仙, 소식(蘇軾)을 기다리겠는가
23일 [二十三日]
맑음.
반교로 떠날 때에 율시律詩 1수를 지었다.
短 遙指白雲間 지팡이로 멀리 구름 사이를 가리키니
巖 溪橋意更關 바위 돌계단과 시내다리는 다시 닫으려하는 듯
木末迷明盤額路 나무 끝 반액로盤額路는 희미하고
天邊削翠峨眉山 하늘가 아미산峨眉山은 비취를 깍은 듯하네.
固知重訪非容易 참으로 다시 찾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自笑浮生不暫閑 잠시도 한가롭지 않은 헛된 인생에 웃음을 짓네.
雨後靑靑堤上柳 비가 온 뒤에 언덕 위 푸른 버드나무가
臨風 若爲攀 바람을 대하고 쓸쓸히 잡아당기는 듯하네.
17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4일 [二十四日]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 개었다.
봉래와 함께 길을 가서 안현鞍峴 박경직朴景直 노인의 집에 들러 점심을 먹
고 정문旌門의 단청丹靑을 보았다. 화공畵工은 그 근처의 전씨田氏라고 하였다.
단청 4 5종류를 구하였다. 박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와서 현판을 써주기를
요청하였다. 탑동에 들러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아우 근根의 혼인은 기약한 대로 혼례를 치루고 다음 날에 돌아가는데, 새
사람이 기대에 흡족하여 다행스럽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26일 [二十六日]
맑음.
봉래와 회숙을 데리고 읍에 들어가 소장을 내었다. 본 읍의 수령 심의훈沈
宜勳이 데김題音하기를, 이미 도형圖形에서 말했으니 양쪽에 대답하겠다 라고
하였다. 저쪽, 민씨 쪽에서 무소誣訴37하기를, 병오丙午, 1846년 이후에 산기슭
전체를 빼앗겼다 라고 하였다. 민계호閔啓鎬와 민영철閔泳哲 두 대감이 보령의
장지葬地에서 이 곳에 와서 성묘를 하고 돌아가다가 금백錦伯을 만나 산송을
맡아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바로 의송을 내었다. 그 데김의 대략에, 공
심公心에 따라 처결하여 소란을 일으키거나 침탈이 없게 하라 고 하였다. 본
읍에서 단자單子를 올리니, 데김에서 이르기를, 매장을 금하는 것은 무덤 때
문이지 땅 때문이 아니다. 비록 대대로 지켜온 땅이라고 하지만 법에 이치가
36 시장(柴場): 나무를 말리는 나뭇갓을 말한다. 나뭇갓은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단속하는
땅을 말한다.
37 무소(誣訴): 없는 일을 꾸며서 관청에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17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맑음.
봉래가 거군炬軍을 데리고 돌아갔다. 산송 때문에 관에서 다짐을 주어 비록
영문營門에 가서 내었으나 반드시 유쾌하지 않았다. 단지 본관의 뜻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남당의 종형님이 돌아갔다.
28일 [二十八日]
비가 왔다.
어제 늦게 아우 근根을 한양에 보냈다. 용전에 가서 머물다가 비 때문에 가
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조인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이 양주楊州 송산서원松山書院에
봉향되어 있었는데, 전에 훼철되었다가40 근래에 조정의 명이 있어 훼철된 서
원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매우 성대한 은전이었다.
다른 집안들은 모두 이미 완성했으나 우리 집안만이 힘이 모자라서 하지 못했
으니 어찌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양 종친회에서 돈을 모으자고 발
29일 [二十九日]
맑음.
아우 근根이 출발하였고, 대산大山 서선달徐先達이 왔다.
4월 초 1일 [初一日]
맑음.
매부 서선달이 그 부모의 병환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갔다.
초 2일 [初二日]
흐리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초 3일 [初三日]
아침 일찍 비가 오다가 늦게야 개었다.
동학東學이 크게 일어나서 종종 무리를 모아 사대부에게 못된 짓을 하
고 욕을 보였다. 세도世道가 변한 것이다. 사대부 중에 평소 기세를 믿고
위협을 하여 백성을 침탈한 자들은 모두 그 화를 모면하지 못했는데, 또
한 스스로 불러온 결과였다. 그러나 사소한 원한조차 보복하니 도리의
어그러짐이 심하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181
초 5일 [初五日]
맑음.
본관에게 소장을 내었다. 도형圖形의 판결문 중에 산기슭의 전체를 빼앗
겼다는 등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의 매득문권買得文券과 송변문장訟辯文
狀을 덧붙여서 무고를 밝혔다. 그 대략에, 저쪽에서 매장한 곳이 바로 그의
11세 조상의 정자亭子 터라고 하지만, 정자를 짓는 것과 무덤을 쓰는 것은 같
지 않고 매장을 금하는 것과 땅을 다투는 것은 다릅니다. 만약 지난날 정자
터라고 하여 모두 매장을 하게 한다면 세상에 어찌 매장할 수 없는 땅이 있겠
으며, 나라에 어찌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법이 있겠습니까? 몇 백년 전에 과연
정자가 있었는지는 참으로 알 수가 없고 살펴볼 수도 없습니다. 두 집안의 산
이 자리 잡은 곳에 그가 계속 매장하려 한다면 그 선산先山이라도 당연히 금해
야 할 텐데, 더욱이 다른 집안의 산이라면 그가 무슨 의지할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두 민씨閔氏네 산은 모두 저희 집이 산소를 쓰기 전에 있었다는데, 산이
높고 땅은 넓다고 한들 처음부터 서로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 둘러대는 말의
구차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고, 한밤중에 몰래 매장했다거나 대낮에 대놓고 묻
었다는 등의 말은 번거롭게 어찌 일일이 들겠습니까? 지난 경자庚子, 1840년에
복영復榮의 할아버지 참판공參判公, 원필(源弼)이다이 비싼 값으로 모정茅亭 민보성閔
寶城 집의 가대家垈을 샀고, 을사乙巳, 1845년에 다시 정동지鄭同知와 한석성韓石城의
두 집터를 샀습니다. 병오丙午, 1846년 봄에 집을 허물고 산소를 썼고, 밭을 없애
고 소나무를 심었으니, 들인 공이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지금 이 모정 한쪽의
산기슭은 바로 그 당시 세 집터와 집 뒤의 울타리 안에 있던 몇 경頃의 과수원
과 채마밭입니다.
중리의 민씨閔氏는 처음부터 금할 만한 무덤이 없었고 다툴만한 땅도 아니었
습니다. 단지 향곡鄕曲에서 제멋대로 하는 습속과 산등성이 맞은편에 떨어져 있
18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6일 [初六日]
맑음.
나의 구로일 勞日43이다. 신탑동新塔洞 대부大父님과 중리 족숙族叔이 오셨다
가 돌아갔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상평上坪의 벌자伐字 하루갈이 포전浦田, 갯밭을 40금에 임경선林景先에게 팔았
고 선금으로 20금을 받았다.
고부古阜민요, 곧 동학의 무리들이 해산했다가 다시 모였다고 한다. 안핵사
按 使 이용태李容泰가 부자들의 재물을 취하려고 해서 다시 모였다고 하는데,
혹은 감사 김문현金文鉉이 그 괴수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6 7읍의 무기를 훔쳐 가져서 그 형세를 예측할 수 없어 감사가 각 읍에 전
령을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공격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중리의 민용안閔龍安 진호進鎬가 오늘 부임하였다. 영문營門에서 전령을 보내 해
당 읍으로 하여금 병사 30명을 모집해서 좌수座首가 영솔하여 초하룻날에 일제히
여산礪山에 도착하게 하였으나 기일을 어겨서 공형을 잡아갔다고 한다.
박경직과 길을 떠나 장암場巖에 도착하여 헤어졌다. 오후에 남당에 이르러
요기를 하였다. 저물녘에 또 비가 와서 빨리 걸어 웅포에 이르렀다. 윤진사
와 권학림權鶴林이 와서 있었다.
43 구로일( 勞日): 자식을 낳아서 기르느라고 부모가 애쓰기 시작한 날이라는 뜻으로, 생일을 말한다.
18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8일 [初八日]
흐림.
윤진사와 권학림 그리고 주령主令과 함께 배를 타고 남당에 갔다.
집안 노비가 돌아왔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이 마을의 행상行商, 부상負商, 백정 등은 모두 각기 그 두목이 소집하여 떠
났다. 촌민들은 관의 명령으로 떠나게 하였으나 모두 도망쳐서 관예官隸, 관속
들이 나와 잡아가니 마을이 동요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왕왕 들렸다. 군중軍中
에서 도망쳐 돌아오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그 얘기를 전하였다.
선봉장 이재섭李在燮과 송봉호宋鳳浩는 본래 전주의 아전으로 신망이 없었으나
마침내 중임重任을 제수 받았다. 기율紀律이 엄중하지 않아 병사를 보내 백성들
을 침탈하니, 심하게는 부녀자를 겁탈해서 지나가는 곳이 스산하였다. 소를 잡
아 병사를 먹일 때에 먼저 자신만 배부르게 먹고 바로 말을 몰아가서 병사들이
모두 굶주렸다. 따뜻한 집과 깊숙한 장막에서 자신만 편안함을 취하고 이슬을
맞은 병사들은 추워서 견디지를 못했다. 지나는 곳마다 촌민으로 하여금 음식
을 제공하게 했으나 백성들과 병사들은 모두 괴로워하였다.
적을 쫓아 고부古阜 두승산斗升山44에 이르렀는데, 적이 산 위를 점거하고 있
어서 관군이 산 아래에 있었다. 4월 7일에 날이 밝기 전에 두 진영이 서로
접전을 했는데,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형세가 달라 관군이 무너지니,
10,000여 명의 군사가 4,000 5,000명의 적들에게 크게 패하였다. 싸울 때에
초 10일 [初十日]
맑음.
율정栗亭의 하인이 왕호旺湖에서 와서 부모님께서 편안하시고 회숙晦叔도 별
탈 없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종중宗中의 수전북도유사收錢北道有司로 차
임되어 왔는데, 이처럼 어수선한 때에 어떻게 멀리 다닐 수 있을까? 가형家兄
이 여행 중에 편안하시다니 기쁘고 위로가 되었으나 함께 돌아오지 않았는
데, 돈을 거두는 논의는 그치지 않으니 한양은 그리 급박하지 않은가보다.
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경병京兵 1,500명을 이끌고 내려왔다.
권학림이 돌아갔다.
11일 [十一日]
맑음.
청병淸兵을 실은 배 1척이 군창軍倉에 정박하여 홍장洪將, 홍계훈의 뒤를 도왔
다. 전운사轉運使가 군사들을 먹이려고 각 읍에 닭과 계란을 요구하였고, 관속
들로 하여금 각 마을에서 거두도록 하였다. 날아가는 닭을 잡고 놓여있는 계
란을 거두기를 매우 서두르니 백성들이 더욱 실망하였다.
12일 [十二日]
아침에 맑았다가 늦게 흐려졌다.
이대감 용원容元씨가 상소하여 대리代理를 쟁론한 일로 죄를 얻어 흑산도黑山
島에 유배된 지가 올해로 4년이 되었다. 그의 셋째아들 중우重愚가 목도木道에서
아버지를 뵈러 가려고 앞의 점막店幕에서 배를 구하였다. 그의 반당伴 46 황생
13일 [十三日]
맑음.
주령의 외손外孫 윤순화尹順和가 왔다. 충청도에서도 군사를 내어 동학을 잡
아들이니 모두 흩어져 도망했으나, 진잠鎭岑에서는 또 동도東徒에게 군기를 빼
앗겼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것인가? 여산진礪山鎭 아래 5개 읍의 병사들 군
습정軍濕亭에 주둔하였는데, 날마다 사람들에게 100전을 주어 먹는 것이 남아
돌고 술을 먹고 투전鬪錢을 하며 논다고 하였다. 사납지 않은 것은 좋지만 훈
련을 하지 않고 단지 놀며 쉰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14일 [十四日]
맑음.
월담月潭이 와서 묵었다. 이 마을의 행상行商으로 군에 나가 죽은 자가 2명이다.
15일 [十五日]
맑음.
임당林塘 윤진사가 그의 손자 팔기八起를 데리고 와서 기숙하며 글씨를 배우기
를 바랐다. 당련唐聯 1축軸과 해주먹 1정丁을 보냈는데, 그것을 거절하자니 공손
하지 않고 속수束脩48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임당林塘, 윤진사이 천곡泉谷을 향하
여 갔다.
48 속수(束脩): 제자가 되려고 스승에게 드리는 작은 예물을 말한다. 열 조각의 육포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였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89
16일 [十六日]
맑음.
남당의 종형님과 박도사朴都事, 박생朴生, 김생원金生員 성유聖有씨, 공주 방화
산芳華山 이석사李碩士 희석禧錫이 찾아왔다. 아우 근根이 모시옷을 가지고 왔다
가 오후에 모두 바로 떠나갔다. 공주 공서원 김생원金生員 경칙敬則이 조선租船,
소작료를 실은 배을 끌고 왔다.
17일 [十七日]
하루 종일 비가 왔다.
18일 [十八日]
흐렸다 개었다 하면서 바람과 구름이 떠나지 않았다.
손감찰孫監察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 읍리邑吏 조항권趙恒權, [자(字)는 자신(子新)이
다]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바로 이 마을 조자순趙子順의 형이었다. 행동거지와
마음씀이 아전들 중에 가장 뛰어나서 들리는 이름이 제법 익숙하였는데 그를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또한 식견도 보통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김
시풍이 죽은 일을 물어보았더니, 그가 말하기를, 김金이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해쳐 사람들에게 원한을 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방하여 홍대장
洪大將의 귀를 현혹하였습니다. 마침 동학교도 1명을 잡아 전대를 뒤졌더니 도
록都錄이 있었고 김시풍의 이름이 그 처음에 들어있었습니다. 마침내 초토사
가 자리잡은 곳에 잡아왔는데, 김시풍이 몸을 몇 길 솟구치니 묶었던 줄이
모두 끊어졌다. 그가 노하여 쳐다보며 크게 소리를 지르기를, 7월 보름이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닐 터인데 너와 내가 살 수가 있겠는가? 먼저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홍대장이 많은 병사들로 하여금 창을 찔러 죽이고
19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맑음.
동도東徒가 무장茂長을 함락시키고 관리와 호강족豪强族 1,000여 명을 죽였
다. 방향을 돌려 광주光州를 향했는데, 행군하고 멈추는 것이 예측할 수 없고
바람과 우뢰처럼 빨랐다. 홍대장은 아직 전주에 머물러 있고 전운사轉運使는
화를 피해 함열읍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한양에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 편지를 써서 주령에게 경비를 대라고 재촉
하였다. 각가脚價49를 10리마다 6전씩 주어 돌려보냈다. 박국朴局에서 사물탕
四物湯 재료를 각각 5냥씩 구하였다. 다시 감리환을 먹었다.
20일 [二十日]
맑음.
완영의 기록奇錄을 보고 기록한다.
로 향할 것 이라고 한 일.
一. 동복同福 수령이 군수보납전軍需補納錢 300냥을 바친 일.
一. 13일 나온 영광의 보고에 의하면, 동적東賊 10,000여 명이 성안에 난입
하여 사방으로 총을 쏘아 거주하는 백성들이 흩어졌으나 그들을 궤멸
시킬 방책이 없어 송구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고 한 일.
一. 초토사가 이번 18일에 행군한 일.
一. 청군淸軍 1,000여 명이 이번 18일에 부안포扶安浦에 내린 일.
21일 [二十一日]
맑음.
여산에서 모집한 군사 중에서 100여 명을 뽑아 영문營門에 올려 보내어 종군從
軍하게 했는데, 태인泰仁에 이르러 다시 풀어주어 돌아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 나머지는 다시 뽑아 영문에 올려 보내어 성을 지키도록 하려 했으나, 순사巡
使, 감사가 지금 엄중한 처벌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여 외사外舍에 나가 거처하며
말하기를, 군사를 모집한 것이 나이니, 내가 풀어준 것이다 하였다.
유석천兪石泉이 왔다가 갔다.
22일 [二十二日]
맑다가 오후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23일 [二十三日]
맑다가 밤에 검은 기운이 가로로 동북쪽에 걸쳐 있어 무지개 같았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193
25일 [二十五日]
맑음.
사돈 조趙씨 어른께서 지금 군창軍倉에 있고 아직 댁에 돌아오지 않았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다시 출발하여 한산읍의 동쪽에 이르러 오곡烏谷 이석사李碩士 한조翰朝의 집
을 방문하였다. 오후에 웅포에 이르렀다.
만길萬吉이 시흥에서 왔다.
27일 [二十七日]
안개가 끼었다가 맑았다.
주령이 본가本家로 길을 떠났다. 정산의 아전인 양재환楊在煥이 들렀다.
28일 [二十八日]
맑다가 가끔 약간 흐렸다.
양재환이 갔다. 반교의 종형과 아우 근根이 왔는데, 종숙의 산소를 7월에
양주 땅에다 면례緬禮를 하려고 하였다. 그 터는 지사地師 이李가 잡아준 곳이
었으나 현재의 소요가 이와 같고, 관진關津이 끊어지려 해서 급히 먼저 운구
를 하여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전주성이 무너졌다는 얘기가 퍼졌는데, 읍내에서 전해온 것이었다. 이 마
을의 백정인 조경엽趙景葉이 뽑혀서 전주의 수성군守城軍이 되었다가 이제 막
도망하여 돌아왔다. 불러서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어제 오시午時 쯤에 동도東
徒들이 용두현龍頭峴에서 커다란 붉은 기를 앞세우고 길게 몰려와서 깃발과 창
남유수록 南遊隨錄 195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비가 왔다.
종형이 새벽에 아우 근根을 데리고 소룡동小龍洞 산 아래 갔는데, 일꾼을 사
기 위해 돈 4냥을 가지고 갔다. 밥을 먹은 뒤에 칠성판七星版 1건件 삼베 15
자 백지白紙 1속束 창호지 6장을 보냈다.
만길萬吉이 정산定山에 갔다. 아침이 지나서 비가 왔다.
주령이 일전에 남당에 가서 윤진사와 함께 임천읍에 갔다가 그 읍의 수령
4월 29일 [四月二十九日]
흐리고 비가 왔다.
주령의 여식女息 윤씨네 모자母子가 비를 무릅쓰고 돌아왔다. 남당의 주령이
그 막내딸로 하여금 형을 따라 잠시 피하게 하였다.
김석구金碩求가 와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홍대장이 300명의 군사로 하여금 적을
쫓게 하여 장성 월평에 이르렀다. 동학도東學徒들이 민가에 들어가 밥을 하는 것처
럼 꾸며 몰래 제각기 흩어졌고, 마을사람들은 적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다시
모여들었는데, 관군이 그들을 보고 동학도로 여겨서 마침내 대포를 쏘았다. 동학
도가 물러나 뒤로 돌아가 관군의 뒤쪽에다 포를 쏘니 관군 중에 죽은 자가 태반이
고 나머지는 모두 놀라서 흩어졌으며 대포도 잃어버렸다 라고 하였다.
오늘 전주에서 나는 포 소리를 다섯 차례 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도 많이
들었는데, 이는 반드시 양쪽 군대가 접전하는 것이다. 슬프다. 성에 가득한 생
령生靈이여!
밤에 비가 왔다.
30일 [三十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았다가 흐려졌다.
육촌형이 소룡동小龍洞에서 2인이 드는 가마에 운구를 하여 전진前津을 건너
기에 주령과 함께 강가의 나루에 나가서 전송하였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99
5월 초 1일 [五月初一日丁丑]
맑음.
익산 수령인 정운승鄭雲承이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관에서 장정을 뽑아 전주
홍진洪陣에 쌀을 운송하였다. 포구가 소란스럽고 인심이 흉흉하여 예측하지
못한 변고가 일어날 것 같았다. 주령이 돈 3,000꿰미를 남당의 여각旅閣55 바
로 억휘億輝의 배편으로 수송하였다. 웅포로 돌아오다가 새로 온 완백인 김학
진이 여산에 머무르며 감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홍대장은 삼례參禮56에 있으
면서 [또는 용두현(龍頭峴)이라고도 하는데] 대포만을 쏠 뿐 동도들이 굳게 완영을 지켜
내용이다]
58 대곤(大棍): 죄인의 볼기를 치던 곤장의 하나로 길이는 5자 6치, 너비는 4치4푼, 두께는 6푼 가
량 되었다.
59 연역(煙役): 연호잡역(煙戶雜役), 민가에 부과하던 여러 가지 부역을 말한다.
20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2일 [初二日]
맑음.
어제 남당의 윤진사가 사람을 시켜 주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의하면, 임천 수령의 편지를 보니 한양의 병정 몇 백명이 수영水營에 정박하
여 임천 함열을 거쳐 내려오고 있으니 영문營門에서 공사곡公私穀과 돈을 막
론하고 압류하여 사용할 것을 통보하였다 라고 하였다.
조자신趙子新이 와서 말하기를, 동도東徒들이 완성完城에 들어오는 날에 포
를 쏘아 문을 부수었다고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 동도들이 시장 사
람들과 뒤섞여 들어와서 몇 백명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다만 사람들이 평소의
시장 상시常市보다 월등이 많은데도 바로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스럽
다. 갑자기 깃발 하나가 용두현에서 달려오니 성문이 저절로 열려 앞을 향해
몰려왔다. 군진軍陣의 대오에 엄중히 경계하여 조금도 범하지 못하게 해서 백
성을 안무安撫하고 각자 그 생업을 안정시켰다. 그래서 그 날 오후에 시장의
가게가 예전처럼 서로 왕래하여 시종始終 차이가 없었다. 거처하는 사람과 부
초 3일 [初三日]
맑음. 절기로 망종芒種이다.
경병京兵 700명이 은진恩津 경포鏡浦, 강경에 와서 머무른다고 하는데, 이곳이
양호兩湖의 요충지이어서 지키려는 것인가? 또는 신정희 대장이 700명의 군
사를 이끌고 경포를 통해 바로 여산으로 향했다고 한다. 지난날에 홍대장이
저들의 진영에 격문을 전했는데, 저들이 그 격문의 뒤에 쓰기를, 홍洪, 홍계훈
은 대장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또는 홍洪이 대장의 소임을 감당하
지 못하면 오래되지 않아 신申대장이 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신 대장도 구제
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속어俗語에, 모양이 좋고 맛이
없으며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는 것을 홍紅이라고 하며 달지 않은 장醬도 홍紅
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장辛醬은 장의 색깔이 붉지만 맛은 달지 않고 신 것을
말한다. 저들이 그 글자의 음音이 서로 비슷한 점을 취하여 홍대장이 대장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조롱하였다. [홍장(洪將)은 홍장(紅醬)과 글자의 음이 같고
남유수록 南遊隨錄 205
투리에 홍(紅)은 불구(不久, 붉다는 뜻)와 글자의 소리가 같고 신장(辛醬)은 신장(申將)과 글자의 소리가
초 4일 [初四日]
맑음.
부장部將이 영회永會를 데리고 정산으로 돌아갔다. 남당 종형이 담복 服을
초 5일 [初五日]
맑다가 약간 흐렸다.
석보가 온 것은 족숙댁族叔宅의 이사 비용 때문이었다. 시흥조始興條, 시흥에서
받은 조(租)에서 획급劃給한 100금과 만길조萬吉條, 만길에게서 받은 조(租)의 100금을 합
친 숫자를 주령主令에게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석사兪碩士, 유태준는 그
돈을 바꿔 쓰려고 했기 때문에 따라 온 것이었다. 150금은 유석사에게 나눠
주고 50금은 석보에게 주어 가지고 갔다.
관에서 감영의 감결과 전령을 받았는데, 장세場稅를 폐지한다고 하였다. 유
석사가 포구浦口에 자리잡을 뜻이 있어 윤한익尹漢益의 형이 집을 팔려고 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09
초 6일 [初六日]
흐리고 비가 왔다.
윤교관尹敎官이 와서 유석사와 가대문권家垈文券66을 만들었다. 유석사가 떠
나갔다.
남당의 종형님이 칠립漆笠67을 사려고 왔으나 값이 비싸서 사지 못하고 돈
3꿰미를 남기고 떠나갔다.
함열읍에서 요호饒戶를 선택하여 계획 없이 군수전을 배정하여 내게 하였
다. 300냥에서부터 20 30금에 이르렀는데, 공정하지 않다는 여론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손감찰孫監察 자유子裕가 왔다. 밤에 비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흐리고 비가 왔다.
창식昌植이 정산으로 돌아갔는데, 그 어머니의 대상大祥이 하루 남았기 때문
이었다.
김선달金先達 석구錫九가 군산항 영문의 사람이 알려준 최근 기별지를 보여주
었다.
이 달 3일 술시戌時에 초토사와 동도들이 서로 싸워서 14살 되는 복용福用
이라는 소년장사 [동도 안에서는 모사(謀士)라고 한다] 가 아군에게 참수를 당하고 전녹
두全綠豆도 상해를 입었다고 한다.[적의 괴수를 말한다] 그 나머지 500명의 적도들은
모두 박멸을 당하여 성안의 적들도 지금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다고 한다.
어진봉심관御眞奉審官68 참판 김종한金宗漢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 염찰
사廉察使 참판 엄세영嚴世永이 내려오기로 하였다. 옥구沃溝 수령인 조병징趙秉澄
이 마침 완백의 행영소行營所에 있다가 전보電報를 보고 그 아버지 전운轉運, 조필
영 어른께 이렇게 편지를 했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춘서春瑞가 어제 떠나가며 주령에게 아뢰기를, 오늘 모내기를 하려는데 일
꾼이 부족하여 억휘億輝 배의 뱃사공 몇 사람을 빌려주기를 청하니 허락을 하
였다 라고 하였다. 오늘 아침 영이 내려와 억휘 석분石奮 뱃사공 1명이 떠
나가고 단지 1명이 남아 배를 돌보았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주령과 배를 타고 다근茶根에 가서 주령의 서모庶母 홍주 사람을 보았다. 돌
아오는 길에 배를 칠산七山에 정박하고 유참봉兪參奉 집을 방문하였다. 남당에
이르러 임당林塘 윤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늦은 밤에 조수潮水가 빠져서야
비로소 배를 돌려 웅호熊湖에 도착하니 달은 지고 북두칠성은 가로로 걸쳐있
으며 마을의 닭 울음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초 10일 [初十日]
흐리다가 차츰 비가 왔다.
들리는 소문에, 전주성에 있는 동도 수 천명이 아직 항복하지 않고, 순사
에게 글을 올려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길을 열어 준다면, 각각 흩어
21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1일 [十一日]
우레가 치고 비가 왔다.
감영의 기별을 얻어서 보았다.
창식이 돌아왔다.
12일 [十二日]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13일 [十三日]
맑음.
오시午時에 배를 타고 주령과 길을 떠나 남당진南塘津에 이르러 뱃사공으로
하여금 송정松亭 종형집에 돈 4냥을 전하게 하였다. 지난번에 삿갓을 사지 못
하고 돈도 모자랐기 때문에 1냥을 더해서 보냈다. 다근茶根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니 물이 이미 빠졌다. 운죽포雲竹浦에서 배를 수리하고 밥을 해서 먹었다.
한밤중에 물이 들어와서 배를 운행하여 다음날 이른 아침에 왕포旺浦에 이르
렀다. 비가 삼麻처럼 내려서 먼저 억휘를 집에 보내어 집안의 장정을 불러
갈치葛致 감곽甘藿, 미역 그리고 돈 등을 운송하게 하였는데, 장차 보리를 사려는
것이었다. 밥을 먹은 뒤에 비가 조금 멈추어서 집에 돌아왔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17
14일 [十四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배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 안주安州 할아버지의 기제사를 지냈는데, 탑
동에 시를 공부하러 갔던 손자 미嵋도 와서 참여를 했다.
15일 [十五日]
비가 왔다.
아내가 며칠 전부터 가슴통증으로 자리에 누웠다. 여종 채봉彩鳳이 학질
을 앓아 목구멍이 부어서 음식을 넘기지 못하였다.
16일 [十六日]
비가 오고 크게 바람이 불었다.
갈치 감곽 모해의毛海衣, 김 등을 노촌老村 정경락鄭敬洛 어른 댁에 보내어
보리와 바꾸게 하였다. [갈치 큰것이 230마리이고 작은 것은 50마리이며 미역은 15통이고 김은
50톳이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집터의 보리를 베었다. 유장柳庄 텃밭에 콩을 심었다. 순성順成이 보리를 타
작하여 각각 1석 7두씩 나누었다. [월방(越房)의 사전(私田)이다] 갑길甲吉이 탑동에
왕래하며 시詩를 배우는데, 원창元昌도 따라가게 하였다. 비록 시를 짓지는 못
하더라도 학당學堂에서 노는 것은 해가 없으리라. 용성用成이 돈 5냥을 얻어가
지고 갔다.
18일 [十八日夏至]
맑음.
아우 근영을 관현冠峴에 보냈다. 노촌老村 정경락鄭敬洛씨가 왔다. 춘봉春鳳 박
가朴哥가 보리를 타작하여 각각 14두씩 나눴다. 사종숙 성일聖逸이 살아있을
때에 가져온 소금 값 6냥을 아우 근根에게 주어 그 부인에게 전하게 하였다.
19일 [十九日]
비가 오고 흐렸다.
구정鷗亭에 새로 오씨약국吳氏藥局이 문을 열어 천궁 3냥을 사왔다. 값으로
1냥을 바로 성만에게 보냈다. 아우 덕德, 덕영이 왔다.
20일 [二十日]
절반은 맑았다가 절반은 흐렸다.
아우 덕영이 탑동으로 돌아갔다. 다시 감리환을 먹었다. 아우 근영이 돌아
와서 말하기를, 조포租包, 벼를 담는 볏가마는 때가 늦어서 돈으로 바꿀 수가 없
다. 20포대 중에서 광조光租 7석은 운송할 것이고, 백조白租, 희게 정미한 쌀 8석은
가동佳洞 윤尹으로 하여금 장리長利를 놓게 하며 5석은 관현의 정鄭으로 하여금
장리를 놓게 할 것입니다. 대두大斗를 썼는데 시중의 됫박 10되가 들어간다
라고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탑동 숙부님의 생신이어서 몇 잔의 막걸리를 보내드렸다. 당리唐里의 윤감
역尹監役 어른이 지나다가 들러서 풍문으로 들은 한양 소식을 말하기를, 왜병
倭兵 수십 척이 서강西江에 와서 정박하였기 때문에 성문을 닫았다 고 하였다.
성만을 은시恩市에 보냈다. 박가朴哥가 보리 값 4냥을 얻어가지고 갔다.
22일 [二十日]
맑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집에서 텃밭의 보리를 타작했으나 비에 젖어서 까부르지 못하였다.
23일 [二十三日]
맑고 매우 더웠다.
권이權伊가 보리을 타작하여 각각 28두씩 나눴다. 노촌의 척숙戚叔 정鄭이
왔다. 남경춘南景春이 왔다.
22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4일 [二十四日]
안개가 꼈다.
색리色吏 김광희金光熙와 장교 김양배가 와서 세금을 독촉하였다. 그 치부책
에 신묘조辛卯條, 신묘년에 내야하는 조세 쌀 6두와 몇 되가 있었는데 이것은 전에
풍헌을 지낸 김춘집金春集에게 20여복卜을 방납防納 한 것인 듯하여 전표를 보
여주었더니, 모두 그렇다고 한 뒤에 춘집이 대충 처리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전해에 김치삼金致三에게 1결結을 방납한 것도 기록하지 않고 완길完吉과 인길
仁吉의 이름 아래에 50복을 줄여 치삼致三을 적어놓고 갔다.
박가朴哥가 돈을 갚았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몸에 흰 반점이 오래되어 더욱 심해져서 선어 魚74를 잡아 피를 내어 발랐
다. 선봉先奉이 경시鏡市에서 제대로 다 큰 전복全鰒 1개 및 오징어포 2조각을
가지고 와서 박매朴妹, 박씨에게 시집간 누이동생가 돌아갈 때에 술안주로 하려고 하
였다. 쇠고기는 선봉의 처가 다른 곳에 사용하여 내일 시장에서 다시 사기로
하였다. 석유石油 한 그릇 생강 1전 왜화시倭火柴, 성냥 2갑을 샀다.
선봉의 아내가 왔기에 봄 사이에 어머니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할 때에 인
삼 2전 을 가져다가 썼기 때문에 값으로 1냥을 주었다. 성만이 보리를 타작
하여 각각 1석씩을 나눴다. 판옥이 갈치를 팔러 미당美堂으로 들어갔다가 편
지를 받아서 왔다. 갈치 값 10냥은 노촌의 척숙인 정씨댁에 남겨두었고, 4냥
5전은 은산 시장에서 나중에 받기로 하였다고 한다.
26일 [二十六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늦게야 맑아졌다.
창윤昌允 권이權伊 매득梅得 수봉壽鳳이 관현으로 떠났다. 창윤 등 3명은
광조光租를 가지고 왔고, 권이는 백조白租를 가지고 왔다. 임천 황생원이 조생
원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청병 3,000명이 말을 타고 금영錦營에 내려와서
임천에도 말먹이 콩 50석이 배정되었다. 청병이 온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
겠으나 어떤 자는 동도가 다시 완영을 침범했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수봉壽鳳이 가져온 조租의 품질이 가장 낮아서 먹고 싶지가 않아 2번이나
돌려보냈으나 허탕을 쳤다. 농사를 방해하는 것이 근심스러웠다. 품삯으로
5전을 주었다. 선봉先奉이 고기를 사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했다고 하여 판옥
으로 하여금 읍에 들어가 9전 5푼을 구해오게 하였다. 계피桂皮 4전을 사왔고
소주燒酒를 가져왔다.
구정 박가朴哥가 와서 말하기를, 본 면의 주인이 보리 1석을 팔려고 보리
값 8냥을 주기를 요청한다 라고 하여 마침내 그 값을 주었다. 사람을 염창鹽
倉에 보내 보교步轎를 구해왔다. 이것은 민씨네 집안 물건인데 빌려가서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체기滯氣가 있어 갑자기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하였는데 곽란 亂과
28일 [二十八日]
아침 일찍 맑았다가 오후에 흐리고 비가 왔다.
22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못하게 하고 금지할 것.
一. 각 포浦와 항港에서 잠상潛商들이 쌀을 사는 것을 일체 금지할 일.
一. 각 포浦의 어염魚鹽에 수세하는 것을 시행하지 못하게 할 것.
一. 각 관아에 차입次入된 물건의 종류는 시가에 따라 배정하여 사용하고
상정례詳定例77는 혁파할 것.
一. 각국의 사람들은 항구에 머무르게 하고 도성 안으로 들어와 관사館舍을
마련하지 못하게 할 것.
一. 본영의 사람 중에 죄 없이 죽은 자와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일일이
억울함을 풀어줄 것.
一. 전보국電報局이 백성들에게 가장 폐단이 크니 혁파할 것.
一. 보부상과 잡상이 무리를 지어 행패를 부리니 영구히 혁파할 것.
一. 흉년에 백지징세白地徵稅는 시행하지 못하게 할 것.
一. 연역煙役에서 분전分錢을 더 거두는 조항은 영구히 혁파할 것.
一. 국태공國太公을 받들어 국정을 살피고 돕게 할 것.
一. 경저리京邸吏의 급료는 규례에 따라 삭감할 것.
一. 본영의 진전賑錢은 백성에게 폐단이 되니 영구히 혁파할 것.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바람 불며 비가 오다가 오후에 비가 그치고 날이 맑아졌다.
민참의閔參議가 두루마리 2축과 부채 1자루를 관직을 그만둔 부친에게 주고
절황節 , 계절에 드리는 선물을 이으려 했는데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삼손三孫만이 먼저 돌아와서 박씨에게 출가한 누이동생이 무사히 도착했다
는 소식을 들었다. 삼손에게 품삯 1냥 5전을 주었다.
생질 윤용도 갑길甲吉과 함께 탑동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6월 초 1일 [六月初一日丙午]
아침 일찍 흐렸다가 맑아졌다 오후에 비가 내렸다.
민참판과 민도사閔都事 경소景昭, 그리고 원서삼元書三 3명이 왔다. 한생원
도 함께 왔다가 바로 함께 떠나갔다. 아우 근영이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성만은 처음에 백마강에 도착하여 갑자기 학질에 걸렸는데, 그 증세가 매
우 심하였으나 오히려 병을 무릅쓰고 따라가서 돌아왔으나 병이 아직 낫
지 않았다. 그가 노고를 사양하지 않은 것이 가상하였다. 직접 닭 1마리
를 잡아서 주었다. 상손上孫에게 품삯 1냥을 주었고, 매득梅得에게는 2냥을
주었다. 상손은 행랑지기이기 때문에 조금 차등을 두어 주었다. 말을 빌
린 값으로 2냥을 주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25
초 2일 [初二日]
흐리고 바람이 불며 비가 왔다.
민씨네 교자轎子와 교자를 빌린 값 1냥을 보냈다.
초 3일 [初三日]
흐리고 비가 왔다.
조카 갑길甲吉이 건강하지 못하였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관진寬鎭의 온 집안이 돌림병으로 돌아가며 아팠고, 그도 돌림병을 모면하
지 못하였다. 병중에 죽도 잇지 못할 것이 걱정되어 그 아우를 불러 백미 1두
와 갈치 2마리를 보냈다. 유장의 텃밭에 김을 맸다. 지금 한양소식으로 걱정
하였는데, 봉한이 와서 민가閔家네가 편안함을 알려주어 기뻤다.
초 5일 [初五日小暑]
아침 일찍 맑다가 늦게서야 흐렸다.
새로 행랑에 든 행랑지기 한씨를 불러 남초南草 밭에 김을 맸다.
탑동에 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초 6일 [初六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오시午時 쯤에 갑자기 비가 하루 종일 왔다.
아침 갑자기 비가 하루 종일 왔다. 아침 뒤에 땅을 흔드는 소리가 우레와
22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같았다.
죽리竹里 민전주閔全州 집에서 용이龍伊를 경성京城에 보내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용이가 본래 올곧아 굽힘이 없는 성격이라서, 지난번 난리 중에 옷 안에 돈
꿰미를 기꺼이 차려고 하지 않았고, 성문에 들어가 편지를 전하려 하지 않았
다. 봉한이 김춘일金春一 집에 보고할 것이 있어 그로 하여금 들러서 전하게
하였다. 죽리 모금毛金의 어미가 보리를 팔려고 업성業成을 시켜 가져왔기에
재어보았더니 10두 3승이었다. 보리가 좋고 말斗도 넉넉하여 4냥 5전 2푼을
주었는데 말당 4전 2푼에 샀다.
밤에 다시 크게 바람이 불어 새벽까지 이어졌고 폭우가 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홍대장이 한양으로 돌아갈 때에 병정 1명당 가져가
는 재물이 2짐이 되었고 연로沿路의 백성들을 압박하여 바꾸어가며 운송하게
하였다.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 욕을 당하여 지나는 곳마다 어
수선하여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청병淸兵 5,000명이 아산牙山 백석포白
石浦에 와서 정박하여 처음에는 남요南擾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왜구가
성城에 근접하여 원대인袁大人이 불러서 올라오게 하였다. 그 중에 섭대인葉大人
이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공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모두 불러 올려
서 왜倭를 막게 하였다. 섭대인이 4기騎를 이끌고 호남으로 가서 그 동정을 탐
문했는데, 그 군률이 엄중하고 밝아서 혹시 민가의 오이 하나라도 가져가는
자가 있으면 바로 귀를 베어 내쫓았다 라고 하였다. 대소간에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을 수 있겠가? 또한 현명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을 뿐이다.
초 7일 [初七日]
흐리고 비가 왔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27
초 8일 [初八日]
맑음.
반곡의 자형 兄 윤이 왔다. 텃밭에 김을 맸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반교 종숙모님이 유행병 때문에 평안하지 못하였다. 열흘 동안 아주 위중하
지는 않았으나 어제 해시亥時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심부름꾼이 와
서 알렸다. 부음을 받고 놀랍고 참담하여 애통함을 비할 데가 없었다. 바로
길을 떠나 규암窺巖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친구인 이자민李子敏의 집
에 들어가 하룻밤을 기숙寄宿하였다.
반곡의 매형도 길을 떠나 노강魯岡에 부고訃告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새벽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수천秀川 윤석사尹碩士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
었다. 안현에 이르러 박노인을 불러 함께 길을 떠났는데 날씨가 더워 감당할
수 없었다. 오시午時에 반교에 도착하니 종형도 이런 증세를 앓고 겨우 일어
났으나 기력이 부족하여 곡을 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큰사촌 형수도 병을
앓아 일을 살피지 못했고, 둘째 사촌형수는 임신을 하여 한달 넘게 깨끗한
곳에서 분만을 하려고 화촌花村 임씨林氏 집에 가서 있다가 분상奔喪78하여 돌
11일 [十一日]
맑음.
여러 곳에 부고訃告를 전했다. 집 앞에 출빈出殯83을 하고, 저녁에 상식上食
을 하고 상복을 입었다.
12일 [十二日]
맑음.
동도東徒가 창궐猖獗하여 조정에서 원대인袁大人과 의논하여 청병淸兵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혜당 민영준閔泳駿은 동도가 이미 무너진 뒤에 권력이
약화되면 민씨들에게 이롭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몰래 왜병倭兵을 불렀다.
13일 [十三日]
맑음.
증조부의 산소와 선친의 산소를 찾아보았다.
14일 [十四日]
맑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화촌花村에 사는 친구 임대경林大卿에게 들러서 만나
보았다. 굳게 잡아끌어서 점심을 먹었다. 안현에 이르러 잠시 박노인을 방문
하였다. 수천秀川에 이르러 윤씨 집에서 다리를 쉬다가 가형家兄이 집에 돌아
왔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다. 규암에 사는 친구 이씨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달
빛에 집에 돌아왔다. 부친이 하루 걸러 학질을 앓아 지금 2직直84이어서 근심
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가형이 과연 6월 11일에 돌아왔고 한양 소식은
정말로 소문과 같았다. 왜병 10,000여 명이 남산南山에 진을 치고 경성의 밭
몇 십곳을 훼손하고 출입하며 사면四面의 요충지를 지켜서 겨우 숨만 붙어 있
는 것처럼 위급한 형세였다고 하였다.
15일 [十五日初伏]
맑음.
반곡의 자형 윤尹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해오기를, 지난 번 보름쯤에
16일 [十六日]
맑음.
부친의 학질이 직直을 맞아 다시 발작을 했다. 닭 1마리에 원삼元參을 약간
을 넣고 달여 먹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저녁에 관진寬鎭이 왔다.
노촌에 보관한 감곽甘藿 8단丹이 돌아왔다.
생선을 사서 연계 , 병아리와 함께 달였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오후에 맑아져서 늦게 흐리고 우레가 치며 비가 왔다.
부친의 학질이 다시 발작하여 때때로 조금 나아졌다가 증세가 심해졌다.
미당美堂 사돈어른의 아내인 서씨徐氏부인이 인시寅時, 오전 3 5시에 세상을 떠났
다는 부음訃音이 와서 비통함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19일 [十九日]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왔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31
20일 [二十日]
아침에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서야 맑아졌다.
부모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여 지난 직直보다 한기寒氣가 더해졌다.
웅호熊湖사람 손성진孫成眞이 보러 왔다.
21일 [卄一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돈 1냥을 교촌校村 이국李局에 보내 인삼을 구하고, 바로 금계랍金鷄蠟85 2푼
을 보내어 노강즙露薑汁, 밤이슬을 맞힌 생강즙과 섞어서 먹게 하였다.
22일 [卄二日]
맑음.
부모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여 아침에 금계랍을 조치했으나 효력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이의李宜가 보러 왔다.
23일 [卄三日]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서야 맑아졌다.
아침에 금계랍 1푼을 들게 하였다.
탑동에 가서 살펴보았다.
죽리竹里 용이龍伊가 일전에 비로소 돌아와서 말하기를, 왜병倭兵이 여전히
24일 [卄四日]
맑음.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왔다.
다시 금계랍을 들게 했더니 정말로 효과가 있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기를, 사위인 조군趙君이 아
직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그 대부인大夫人이 편지로 질책했는데, 한양에서 그
믐날에 왜병과 청병이 서로 싸웠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위인 조군
을 빨리 돌려보내려고 하나 반전盤纏, 노자(路資)이 없으니 돈 40꿰미를 보내주어
어려울 때에 도와주는 의리를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비록 저축
한 것은 없더라도 그 부탁을 저버리기가 어려워서 이쪽저쪽에서 돈을 꾸어
다음날 심부름꾼에게 주어서 보냈다.
25일 [卄五日]
맑음.
중복中伏날이다.
21일 왜장倭將 오토리가 대궐 안에 몰래 들어가 병사들이 모두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국태공國太公을 영접하여 양전兩殿과 함께 거처하게 하고 온갖 방법
으로 협박하며 개화開化를 요구했다고 한다. 원대인袁大人이 칼을 뽑아 혜당惠
堂, 민영준을 죽이려고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여러 번 중국
中國에 전보를 쳤으나 이홍장李鴻章이 왜倭에게 뇌물을 받고 군사를 출병시키지
않아 바로 돌아갔다.
26일 [卄六日]
맑았다가 오후에 소나기가 왔다.
매형인 윤尹과 웅포를 가는 길에 수자령秀子嶺에 이르러 남당 종형을 만나
담배를 빌려 피우며 대화를 하였다. 산을 내려가는데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와서 용왕동龍王洞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날도 저물어서 친구 조부경趙復卿
의 집을 방문하여 유숙留宿하였다.
27일 [卄七日]
맑았다가 밤에 비가 왔다.
용왕동입구에서 서씨徐氏어른께 들러 인사를 하였다. 부친이 병을 앓은 뒤
에 기력이 쇠해졌기 때문에 가미대보탕加味大補湯 5첩貼을 5냥에 샀다. 오후에
남당에 이르렀다.
호남에서 동학이 크게 일어나 전운사 조필영趙弼永씨가 함열 성불암醒佛庵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가 동학도에게 잡혀서 모진 형벌을 당하였다. 곤욕스런
23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8일 [卄八日]
맑음.
다시 남당에 이르렀다.
동학도 1명이 강을 건너 임천수령을 보고 여자 1명을 찾았다. 돌아가는
길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만나 역마驛馬를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 이보다 앞
서 임천의 관인官人이 호남의 여자를 강제로 범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감
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친구인 조치선趙致先에게 들렀다.
29일 [卄九日]
맑음.
자형인 윤尹이 노새 1마리를 빌려 타고 황급히 먼저 왕호旺湖로 돌아갔다.
오시午時 쯤에 남당에서 동학도 수십 명이 말을 타거나 왜산倭傘을 펼치고,
또는 창과 칼을 가지거나 총을 쏘고 있었다. 친구인 윤익수尹益壽와 함께 집
남유수록 南遊隨錄 235
7월 초 1일 [七月初一日]
맑음.
읍邑마다 당黨이 있고, 촌村마다 도徒가 있었으며 하루에 오는 것이 3 4번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금구접金溝接, 김제접金堤接, 옥구접沃溝接이라고 하고
서로 접장接長으로 불렀다.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도인道人이라고 불렀고,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속인俗人이라고 불렀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초 3일 [初三日]
맑음.
종형과 길동무를 하여 왕호의 집으로 돌아왔다.
가재동佳才洞 이李가 왔다. 그는 회숙晦叔의 처적질妻嫡侄로 그 고모姑母의 귀성
歸省 때문에 왔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범암帆巖 매부妹夫 조趙가 왔다.
23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5일 [初五日]
맑음.
며칠 전부터 동학도가 자주 동네에 들어 부유한 집에서 말 총 창 칼 돈
왜산 등을 빼앗았다. 원한을 가지면 눈을 흘겨보고 반드시 보복하였다. 비록 노예
奴隸라고 하더라도 동도東徒에 들어오면 반드시 존대하여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
초 6일 [初六日]
맑음.
종형이 말을 타고 돌아갔다.
동학도가 자주 중리中里를 침입하여 민참의 어른이 이인도회소利仁都會所87에
가서 소 1마리와 돈 100금을 내주었다. 본 읍의 동학접주인 이석보가 가속시
佳束市에 들렀는데, 민도사 경효敬孝가 나가서 몸소 맞이하여 윗자리에 예우하
였다. 그 집안의 사람들과 마을의 상민들이 모두 그 무리에 들어갔다. 아!
고립되어 이웃이 없고 우리 도가 궁박하구나.
제수弟嫂가 부모님을 뵈러 왔다.
초 7일 [初七日立秋]
맑음.
노촌의 정경락鄭景洛이 와서 해산물을 보리와 바꿔서 3석 12두를 거두어 보
관했다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범암 매부 조씨 집의 종이 와서 말하기를, 전운장轉運丈과 그 둘째아들이
옥구沃溝에서 모두 순서대로 도망하여 숨었고, 그 집안은 화를 모면할 방도로
동학에 들어갔다 라고 하니 한탄스럽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초 10일 [初十日]
맑음.
임함종林咸從의 아들이 찾아왔다.
11일 [十一日]
맑음.
신정新亭 윤승민尹承敏이 도인道人 1,0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도답島畓88 5두
락에서 작년에 난 소출 5석의 조租를 요구했는데, 말이 도리에 어긋나고 흉악
하였다. 이 마을의 도인인 장봉한張鳳翰과 최천순崔天順 및 여러 도인들이 와서
그 사정을 분별하여 말하기를, 논의 주인이 바뀐 땅에 그 구작舊作, 전에 짓던
소작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윤尹이 본래 근거가 없이 지금 와서 요구하는 것은
매우 이치가 없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사과하고 물러갔
다. 장도인張道人이 말하기를, 일이 근거가 없으나 이미 소란을 야기했고 사
12일 [十二日]
맑음.
신정 윤승민의 중씨仲氏, [중형(仲兄)으로 자(字)는 준여(俊汝)이다]가 와서 돈 2냥을 돌
려주고 자기 동생의 불의를 사과하며 간절히 용서해주기를 빌었다. 그래서
억지로 그 돈을 주어 위로하여 보냈다.
민참의 집과 임함종林咸從, [함종(咸從)도호부사를 지낸 임씨(林氏)이다] 집이 모여서 마
을의 도인들로 하여금 후강後岡에 포包를 설치하여 다른 우환에 대비하자고
의논하였다. 그래서 산 위에 차일遮日을 겹으로 쳐 총을 쏘고 진법을 연습하
며 모양을 갖추었다. 군중에서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소리가 사방의 마을에까
지 들렸다.
저녁에 가서 임함종의 아들을 보았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39
13일 [十三日]
맑음.
경삼敬三과 함께 일룡日龍을 데리고 반교길을 떠나 수천秀川에 이르러 친구
윤경삼을 방문하여 점심을 먹었다. 안현鞍峴에 이르러 박노인을 데리고 먼저
화촌花村에 들어가 친구 임대경을 조문하였다. 봉래가 지금 일 때문에 도인道
人에게 곤란을 당하여 시골집에 피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전해
오는 얘기에 의하면, 선친 진사공進士公의 산소 근처에 있는 그 고총古塚의 자
손이 이름난 장수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지 무덤을 파낼 뿐만이 아니
라 사람을 해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밤에 구경칠具景七과 함께 삿갓을 쓰고 반교에 가서 종형을 만나보았더니
병이 난 뒤에 귀신의 모양을 면하지 못하고 허학許鶴의 집에 피신하여 거처하
고 있었다. 곤란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산기슭의 입안立案89으로 처지가
궁박하고 구차함이 한층 더하였다. 원망을 자초하여 원한을 만들었기 때문이
었다. 그의 이종姨從 한경오韓敬五가 제법 굶주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침탈
이 날마다 이르러 도인道人에게 핍박을 당하였다. 지금 홍주에 가서 그 부모
의 산소를 파서 옮기고, 아내는 낮에 피했다가 밤에 돌아갔다.
15일 [十五日]
<해석불능>
15일 [十五日]
맑음.
16일 [十六日]
아침 일찍 맑았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부모의 산소일로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가마꾼 4명을 마을에서 샀는데,
모두 도인道人이었다. 값을 너무 높게 불러서 1인당 2냥 5전씩으로 정하여 다
음날 범암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경삼과 먼저 출발하여 배치拜峙에서 비를 만
났으나 비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하여 범동汎洞 이도사 집에 도착했다.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범암의 사태를 알지 못하여 어두워진
뒤에 길을 떠나 범암에 이르렀다. 산을 따라 길을 등지고 매부 조씨의 집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동네가 어수선하여 급히 경삼 및 여러 종형제들과 대나무
숲에 숨었다. 얼마 뒤에 소수접小水接에서 전운장 집의 장객庄客90인 전가田哥를
잡아갔다고 하였다.
선친의 산소는 원래 그 묘자리를 옮기려고 했으나 한가롭게 할 겨를이 없고,
더욱이 남의 말이 있으니 어찌 하겠는가? 마침내 무덤을 옮기려고 팠다.
17일 [十七日]
맑음.
동네 민가마다 뒤에 대나무 숲이 있어 나가서 피신하여 몸을 숨길 수 있었
다. 경삼과 함께 대나무를 헤치고 풀을 깔고 앉았다. 오시午時에 호남의 도인
70명이 와서 점심을 먹고 갔다
가마꾼이 왔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출발하여 범동에 도착하니 날이 비로소 밝았다. 길은 매우 위험
하여 내행內行의 왕래는 아주 염려가 되었으나 범암의 사태가 잠시라도 머무
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을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경삼은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아니 되고 그 아버지를 가서 뵙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 있게 하고,
노비 분이粉伊의 부부와 그들의 여식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였다. 다만
할머니의 사판祠版을 가마 안에 싣고 점손占孫이 갓난아기를 업고 따랐다. 여
종의 아들 12살 판덕判德이 가마 뒤를 따랐다. 가산과 집물은 먹는 그릇 이외
는 모두 가져가지 않고 옷만 급히 입고 대략 수습하였다. 사랑지기 방가方哥
에게 27냥을 구해 가마를 빌린 돈 10냥과 올 때의 노자 2냥을 주었다. 연일
잠을 자지 못한 뒤라 모두 피곤하여 곯아떨어져서 날이 새는 것을 알지 못하
였다. 날도 밝았으나 밥을 짓지 못하고 마침내 찬밥을 가져다가 가마꾼을 먹
여 길을 떠났는데, 어둑어둑할 때에 시장을 지나가려는 참이었다.
범동 이도사 집에 이르러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길을 떠났다. 친구 이李
가 가동家 에게 명하여 길을 호송하게 해서 쌍계동雙溪洞 입구에 이르렀다. 갑
자기 큰비가 내려 옷이 모두 젖어서 점사店舍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한참
뒤에 비가 조금 멈추어 길을 떠나 영흥점永興店에 이르러서 점손占孫 및 범동의
24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맑음.
20일 [二十日]
맑음.
종형 및 막내 문영과 함께 신암사新庵寺에 갔더니, 서천舒川 문장리文章里 친
구인 조趙씨와 여러 사람들도 소요를 피하여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21일 [二十一日]
비가 왔다.
남포 도인이 반교에 들어와서 봉래를 매우 급하게 찾는데 반드시 절에 와
서 뒤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인창麟昌과 함께 밤의 어둠을 이용하
남유수록 南遊隨錄 243
22일 [二十二日]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23일 [二十三日處暑]
아침 일찍 맑았다.
산지기 허학의 아내가 도인 4 5명을 데리고 남의 여종이 된 딸을 찾았다.
여산에서 부여로 나와 함께 동행하여 지치遲峙에 이르렀다. 저동苧洞에 이르러
비를 만났으나 준비가 없었다. 드디어 비를 무릅쓰고 길을 가서 규암에 도착
하여 점심을 먹으니 날이 이미 저물어서 사람들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유숙
하였다. 그 사람들은 김성구金成九 이성삼李成三 허봉이許鳳伊 강명길姜明吉
등의 접의 동몽과 허씨 아내였다.
남당 종형이 회숙과 함께 국동菊洞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친이 나날
이 학질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고 기력이 숨이 끊어질 듯이 매우 약한 상태여
서 근심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24일 [二十四日]
맑음.
반교사람이 아침밥을 일찍 먹고 경호시鏡湖市로 가는 배를 탔다.
근동近洞 도인들이 가속시에 모두 모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리中里의 민
씨閔氏가 위세를 믿고 고약한 성질을 부려 화가 되는 일을 향곡鄕曲에서 행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갈지 않는 사람들이 없어서 한번 복수하기
를 바랐던 것이다. 장張, 장봉한과 최崔, 최천순 두 도인이 사사로운 옛 약속으로
집 뒤에 포包를 설치하여 힘껏 그것을 막으니 원근의 사람들이 한스러워 하
였다. 꾸짖고 나무라며 여러 번 와서 말하기를, 민씨는 나라를 망하게 한
적賊이고 백성을 해친 좀벌레이다. 의병을 일으켜 죄를 벌할 때에 이것을 반드
시 먼저 해야 하는데 도리어 보호해 주고 그 추악한 무리를 받아들여 우리 도道
를 더럽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해당 접주는 민씨의 죄를 다스려야 하고, 접
接의 여러 사람들도 중형重刑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장張과 최崔
두 사람은 두려워서 민씨 두 사람의 이름을 빼고 가속佳束으로 포를 옮겨 사죄
를 하였다. 민씨 두 사람은 민석여閔錫汝와 민경식閔卿植 [자(字) 성관(聖寬)이다]으로 화
를 두려워 하여 먼저 입도入道하였다. 민석여의 아우인 민참봉閔參奉 순칠順七이
왔다가 그 부형父兄이 곤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바로 가족을 데리고 떠나갔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홍주 갈산의 김씨 집이 그 노복奴僕에게 참혹한 화를 입었는데, 원근의 양
반집들에 종종 이런 화가 있었다. 마침 묘당廟堂에서 관제官制와 의제衣制를 개
정하였고, 공사천公私賤 창우倡優 백정을 혁파하여 모두 종량從良하였다. 인
근 마을의 민씨네 집에서는 모두 풀어주어 종량했다고 한다. 바로 김권이金權
남유수록 南遊隨錄 245
26일 [二十六日]
맑음.
27일 [二十七日]
맑음.
중산中山에 가서 윤씨네 사촌 누이동생을 보고 계양평리桂陽坪里를 지나갔다.
28일 [二十八日]
흐림.
돌아오는 길에 왕진汪津에 이르러서 조진사趙進士를 방문하려고 그 집에 갔
29일 [二十九日]
맑음.
어머님의 생신날이다.
빙현氷峴에 사는 친구 정鄭과 족종族從인 순약舜若이 찾아왔는데, 건평乾坪의
유회儒會93에 가려는 것이었다.
30일 [三十日]
맑음.
양화의 종이 범동에 갔다가 여기에 들러 오늘 아침에 떠났다. 그 편에 친
구 조趙에게 보내는 옷과 양말을 부쳤다.
8월 초 1일 [八月初一日乙巳]
비가 왔다.
아우 근영이 이른 새벽에 와서 말하기를, 건평의 유회에 들러서 보았더니 사
람들이 몇천 명은 되었고, 공주사람 이영해李寧海가 와서 진법陣法을 연습하였
다. 그는 바로 장신將臣, 대장 봉의鳳儀의 종질從姪로 몸은 허약하여 옷을 감당하
지도 못할 것 같았으나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눈빛은
번개처럼 빛났다. 전주 사람 이도사李都事 유상裕尙은 지모智謀가 있어 성겁평成
劫坪 민사능閔士能 준호俊鎬가 왜를 토벌하고 나라에 보답하자고 권면하여 의병
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었다. 민閔이 비록 창의倡義를 내세
웠으나 실제는 그런 뜻이 아니어서 이李는 바로 떠나 건평으로 들어갔다. 그
를 따르는 자는 100명이었고, 다시 민준호에게 돌아간 자는 1,000명이었다.
이영해와 이유상의 뜻이 서로 일치했으나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을 따르지 않
아 두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갔다 라고 하였다.
아우 근영이 다리 부분에 종기가 나서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곡부曲阜 민생
원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중리中里에 갔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부친이 며칠 전부터 건강이 조금 나아졌고 학질증세는 거의 나은 것 같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24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4일 [初四日]
맑음.
초 5일 [初五日]
맑음.
아우 덕영이 노중魯中에서 돌아왔고, 조카 용이도 따라 와서 말하기를, 반곡
생질녀가 주마담走馬痰94으로 고생한다 라고 하여 매우 놀라고 걱정스러웠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가사佳寺 생질 용이龍伊가 돌아갔다.
민경식 집에 가서 그 무덤을 파낼 것을 독촉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오후에 민閔씨가 왔는데 전혀 무덤을 파낼 뜻이 없었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두동杜洞 정경선씨가 찾아왔다. 석성石城 야곡冶谷의 내종內從 윤상복尹相福과
영남의 붓장사 안安씨 노인이 왔다.
민경식이 와서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도인가? 땅을
애걸하려고 거적을 깔거나 이미 매장을 하고 용서를 비는 경우도 있다. 그러
초 8일 [初八日]
맑음.
이 마을의 오봉룡吳鳳龍 3형제가 동도東道에 들어가서 말하기를, 지난 겨울
에 바친 4석의 조租는 매우 근거가 없으니 그 물건은 찾아야 하고 그 원한을
갚아 달라 고 하였다. 접주와 접사接司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모두 한동네 사
람으로 그 일을 잘 알고 있어서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책망하며
제지하였다. 봉룡이란 자가 와서 아버지를 보고 조포租包를 요구하였는데, 패
악한 말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바로 지난 날 내가 반교에 있을 때의 일 때문
이었다. 그 아우인 봉기鳳起가 다시 와서 요구하기에 바로 포包에 가서 장접주
張接主, 장봉한를 만나 그 이유를 말했더니 장접주와 최접사崔接司, 최천순는 모두
가당하지 않다고 했으나 송접사宋接司 건노建老만이 말하기를, 나라법에 이자
는 자모子母95에 그쳐야 한다. 무자조戊子租96 10두를 말한다면 10두로 4석을
받은 것으로 외부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면 의아해할 것이니 나라법에 따르
는 것이 옳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500년 동안 전
초 9일 [初九日]
맑음.
임가네 종을 돌려보내며 답장하기를, 조카 갑길이 나이가 13세이지만 매
우 가냘프고 변변치 못하여 아직 젖 냄새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런
소요를 맞아 굶어죽을 것을 내 자신이 알고 있고 입을 이어가는 것은 이미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자식을 해쳐서는 아니되니 다른 혼처를 구해보
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11일 [十一日]
맑음.
형제가 두릉杜陵에 가서 정鄭씨 어른을 방문하고 아울러 그 어른의 관객館客
남유수록 南遊隨錄 251
12일 [十二日]
맑음.
동리東里 박석사朴碩士 성백聖伯이 공주 반송포盤松包에 입도入道하였다. 며칠
전에 접주를 만나러 가서 앉아 있을 때에 성이 석石씨인 자가 억울함을 호소
하여 말하기를, 저의 선산이 곡화천曲火川 뒤의 산등성이에 있는데 어떤 집에
게 빼앗겼습니다. 지금까지 펴지 못한 억울함을 위엄있는 명命을 빌려 한 번
에 씻고 그 무덤을 파서 그 땅을 돌려받으며 이미 베어서 팔아버린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돈으로 받아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접주가 말하기를,
땅을 돌려받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무덤을 파는 것은 법으로 금하고 있
다 라고 하였다. 석石씨가 말하기를, 이 달 보름에 그가 성묘하는 것을 이용
하여 잡을 계획이니 이것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니, 접주가 말
하기를, 어찌 이와 같은 사리事理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 집안의 산소
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었다. 그 때 대접주大接主 김상오가 공주에 들어왔을
때에 접주 이李가 송사를 듣고 심리했는데, 그는 바로 이남원李南原의 아들로
성백聖伯과는 교분이 있었다. 접사 윤尹은 바로 성백과는 사돈사이의 친척으
로 더욱 막역하여 내 집안을 위하여 매우 힘있게 말을 해주었다. 돌아와서
25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3일 [十三日]
맑음.
고모부 윤씨가 집으로 돌아갔다. 야점野店 최학춘崔鶴春이 보러왔다.
14일 [十四日]
맑음.
밤에 할머니 종상終祥을 치렀다.
15일 [十五日]
맑음.
남은 음식과 술 및 안주를 동네사람에게 먹이는 전례前例가 있었으나 지금
은 마을에 포包을 설치하여 동네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것들을 보
내고 직접 가서 보았다. 술자리가 끝난 뒤에 오봉룡을 불러서 꾸짖었다.
남당 종형이 친구인 이경화李景和와 윤성고尹聖皐 등과 함께 왔다.
16일 [十六日]
맑음.
이학여가 와서 오래된 약속을 실천하였다. 종형 및 친구 이李와 함께 길을
남유수록 南遊隨錄 253
17일 [十七日]
맑음.
이학여와 함께 길을 떠나 웅포에 이르렀다. 위령渭令이 이달 초에 정기희丁
奇喜를 얻었다. 오후에 김제를 향해 길을 떠났다가 춘서가 병이 나서 집에 누
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전주 고잔진高盞津을 건너 고잔리高盞里 이학여의 집으로 들어갔다.
학여는 큰형님집의 경재敬在이다. 바로 김제와는 경계지역으로 세상에서 말
하는 십리노화十里蘆花인데 그 곳을 보지 못하였다. 마침 이학여의 친척이 왔
다. [자字가 평중平仲씨이며, 비인(庇仁) 인관동(仁冠洞)에서 거주한다]
18일 [十八日]
비가 왔다.
19일 [十九日]
맑음.
같이 기거하던 이경문 박경우 이학여의 삼종三從 형제들과 함께 나가서
경치를 구경하였다. 백구정白鷗亭 뒤쪽의 산등성이에 올라가 보니 바로 평탄
하고 넓은 들판 가운데에 허리띠처럼 좁은 한줄기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서
백구정 아래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북쪽으로 고잔에 이르러 포촌抱村을 건
넌 뒤에 서쪽의 바다로 들어갔다. 바로 정남향正南向으로 한쪽은 육지와 이어
져 있고 모두 소택沼澤이 가로로 걸쳐 있었다. 백구정에서 조금 떨어진 산줄
25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0일 [二十日]
맑음.
이학여가 돌아가고 이李와 박朴 두 사람 그리고 평중平仲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전주 대장촌大壯村을 거쳐 춘포春浦 최감찰崔監察 덕경德卿의 집에 이르렀
다. 집 앞에 십리하화十里荷花가 있었는데 바로 익산의 장연長淵이었다. 주인과
함께 나가서 구경을 하였다. 아름답구나! 어느 곳이 금릉金陵, 중국 남경만 못하
겠는가? 그러나 멀고 외진 땅에 있어서 고명한 사람과 뛰어난 선비의 감상이
없고 또한,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 유명한 정자亭子나 화려한 누대를 짓지 못
하여 마침내 없어져서 그 이름을 들을 수가 없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이웃에 남학南學을 하는 자가 밤마다 산에 올라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오
홍五虹97을 불렀는데, 그가 춤추는 자세가 매우 법도에 맞았다고 하기에 주인
과 함께 가서 보니 마침 집에서 경經을 외우고 있었다. 갓을 쓴 아이들이 줄
지어 앉아서 합장合掌을 하며 아미타불을 암송하였다. 한참 뒤에 방울이 흔들
리는 것처럼 손이 떨렸는데, 신령이 내려왔다고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길을 떠나 익산益山에 이르러 금묘총金猫塚에 올라 이석사李碩士, 이경문와 헤어
졌다. 저녁에 두천斗川 최씨집에서 묵었다. 그 집은 바로 박朴, 박경우의 새 사돈
집이었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박朴과 헤어지고, 평중과 길동무를 하여 웅포에 이르러 평중도 떠나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24일 [二十四日秋分]
맑음.
25일 [二十五日]
맑음.
한산 기호岐湖에 갔는데, 바로 위령渭令이 새로 이사한 곳이었다. 족숙모族叔
母의 병세가 지금 매우 위중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비가 왔다.
25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맑음.
웅포에 돌아왔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웅포 도인이 남원의 군회軍會98에 가게 되어 웅포 일대 부유한 집에서 여비
를 거두었는데 위령도 그 숫자 안에 들어갔다. 사람을 보내 집강執綱이 있는
곳에 불러와서 잡아 가두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두 접接에서 각각 100금을
거두었다.
29일 [二十九日]
흐림.
찬보와 손감찰 그리고 손씨라는 어떤 사람 1명과 함께 길을 떠나 남당에
이르렀다. 위령이 그들로 하여금 간추看秋99를 하도록 했기 때문에 매산梅山 사
음舍音의 집에서 헤어졌다. 종형과 함께 친구인 이경화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고, 용두리龍頭里로 친구인 정치심鄭致心과 윤익수尹益壽를 찾아갔으나 만나
지 못하였다. 죽리 윤여선 어른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조곡鳥谷 김복경金復卿
9월 초 1일 [九月初一日]
맑음.
다시 죽리에 가서 윤尹과 정鄭 두 친구를 만났다. 점심을 먹은 뒤에 다시
길을 떠났는데, 친구 윤사극尹士克이 그 막내동생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
다. 누이동생이 노성 반곡의 족인族人 집에서 혼담이 있었기 때문에 종형과
함께 가기를 바랐다. 날이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다. 이미 그저께에 연기燕岐
의 형수 임씨가 출가를 하였다. 난리 중에 사람 일이 이와 같은가? 다만 가족
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종형이 친구 윤尹과 함께 노성을 향해 떠났다. 오후에 길을 떠나 반교에
들어가니 날이 저물어서 석우 이씨집에 투숙하였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반교에 도착했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25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5일 [初五日]
맑음.
거문巨門 이선생李先生이 이른 새벽에 왔고, 서천 구具씨가 따라왔다. 밥을
재촉하여 먹고 서천을 향해 떠났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초 7일 [初七日]
맑음.
초 8일 [初八日]
맑음.
초 9일 [初九日]
맑음.
종형 및 매제妹弟 조趙와 함께 거문에 갔는데, 이선생이 집에 없고 날은 저
물어서 아랫마을 낙여洛汝의 집에 가서 묵었다.
초 10일 [初十日寒露]
맑음.
아침에 다시 마을에 올라가니 이선생이 밤에 돌아와서 막 한양으로 떠날
려고 하여 함께 동행하여 북두문北斗門에 이르러 헤어졌다. 친구 조趙, 조경장는
남유수록 南遊隨錄 259
11일 [十一日]
맑음.
친구 조경장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은현隱峴 권진사 종진種振 [자(字) 성지(聲之)이
다]을 찾아갔는데, 바로 전운장轉運丈이 부리던 자로 재물을 모아 살만하였고
사람됨이 신실信實하여 함께 일을 할 만하였다. 친구 조趙, 조경장가 그와 심정
이 통했기 때문에 만나보고 도움을 구하였다. 권權, 권종진도 이런 뜻을 가진
지가 오래되어 대략 배치한 것이 있고 삼굴三窟100을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흔쾌히 허락하고 먼저 250금의 전표를 써서 주어 찾아 쓰게 하였다.
12일 [十二日]
맑음.
길을 떠나 범암에 도착하였고, 날이 저물어서 서천 계룡鷄龍에 이르렀는데,
바로 친구 조趙의 거처였다. 중도에 민오위장閔五衛將과 이석사李碩士 민도敏道를
만났다.
100 삼굴(三窟): 교활한 토끼는 굴 3개를 가지고 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여러 가지로 몸을 보호
하는 방법을 말한다.
26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3일 [十三日]
맑음.
짐꾼 1명을 얻어 웅포로 향하다가 동죽東竹에 들러 조옥구趙沃溝를 위문하였
다. 한 달 전에 장모丈母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길을 떠나 신성리新成里 나루
터 주점酒店에 이르러 위원 집의 종인 석분石奮을 만나 위원이 어제 기호岐湖
집에서 모친상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놀라움을 그만둘 수 없어 바로 가서
곡을 하려고 했으나 짐꾼을 하루 종일 허비하게 할 수가 없어 강을 건너 웅
포에 도착했다. 이생원李生員 군오가 기호에서 소요를 피해 왔고 서만길徐萬吉
이 왔는데, 설사병이 매우 심하였다.
14일 [十四日]
맑음.
주가主家101에서 유치전留置錢 100금을 찾고 궤짝에 있는 돈 5냥을 내어 여
비에서 남은 돈을 합치니 6냥이 넘었다. 104냥은 짐을 꾸렸고 2냥 5전은 짐
꾼이 썼는데, 태가 價 1냥 6전을 제외하면 9전은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이
었다. 강을 건너 길이 나뉘어져 기호에 도착했다. 이 날 집안에 중상重喪102
의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15일 [十五日]
맑음.
101 주가(主家): 주인집 또는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명칭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물품과 돈을 빌려
주거나 보관하는 객주(客主)를 말하는 것 같다.
102 중상(重喪): 탈상을 하기 전에 부모상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1
16일 [十六日]
맑음.
종 1명을 데리고 어은현漁隱峴에 갔는데, 지난번에 25조 전표를 물렸기 때
문이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객주가 다시 150금의 전표를 써서 범암의 종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반교로
돌아갈 때에 주인이 말하기를, 홍산읍의 시장에서 60금을 찾을 것이 있으니
지나가는 길에 찾아서 쓰라 고 하였다. 조치鳥峙 임林씨와 함께 가서 시장에
들어가 그 사람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날이 늦어져서 마침내 임林씨와
헤어져 돌아왔다. 구반령九盤嶺을 넘어 잠영리簪纓里 뒷고개를 통해 월명산月明
山 금지사金池寺에 올라 다리를 쉬고 절 뒤쪽 길을 따라 반교에 도착했다.
18일 [十八日]
맑음.
26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맑음.
경삼과 함께 거문에 갔는데, 집값을 보내주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이미
어제 도착하였다. 최씨와 학여를 만나보고 두 집의 문권文券을 만들었다. 4칸
집에 헛간 2칸이 덧붙여졌고 여자麗字 밭 1석石락지 논 3승升락지 감나무
2그루 대추나무 3그루 밤나무 3그루였으며 결結은 10복卜 6속束이고 돈으
로는 130금金이었다. 새 패지牌旨103 1장에는 6칸 집에 여자麗字 텃밭 1두斗락
지 밭 2석石락지 결結 24복 5속 뽕나무와 과일나무 80여 그루 논 1배미
夜味이고 돈으로는 120금이었다. 임진壬辰년 3월에 노비가 용업龍業인 패지와
갑오년 1월에 노비가 성돌成乭인 패지 2장과 새로운 패지 1장이었다. 대개 패
지를 가지고 서로 매매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었다. 최씨쪽 문권에서 노
비 이름은 정득正得이었다.
지금 이런 배치는 같은 배를 타고 서로 구제하는 것과 같다. 집과 양식을
사는데 이쪽저쪽을 논하지 않고 다만 그 노동력의 여하에 따랐다. 그리고 6
칸 집은 웅포에서 나누어 준 조條를 보냈을 것이다.
20일 [二十日]
바람이 불고 흐렸다.
범암에서 경삼을 보내고 혼자 반교로 돌아왔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22일 [二十二日]
맑음.
길을 떠나 안애 박노인을 들러서 보았다. 망건을 만드는 만경萬頃사람 유양
숙柳良叔을 만나 동행하여 돌아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동생 근영의 생일날이다.
임천 이경화와 그 재종씨再從氏가 왔다가 바로 떠났다.
유柳, 유양숙로 하여금 망건을 새로 만들게 했는데, 부친이 복服을 벗은 뒤에
아직 갓과 망건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25일 [二十五日霜降]
맑음.
묘시卯時에 형수가 딸을 순산하였다. 설사 증세가 있었는데, 낫지 않아서
더욱 걱정스러웠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돌아가신 할머니 정부인貞夫人 나주 임씨 기일이라서 맥종麥種 18두를 반교
로 보냈다.
26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맑음.
고모부 서상원徐相元이 새로 비인현감을 제수 받아 일정을 재촉하여 임소에
나아갔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는데 그의 둘째아들이 따라왔다.
28일 [二十八日]
흐림.
비인현감이 할머니산소와 서조모庶祖母 묘소를 찾아뵙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내종內從이 패도佩刀와 고문古文중에 구양수문집 104 1권을 빌려갔다.
반곡의 자형이 어제 왔다가 오늘 떠나갔다.
29일 [二十九日]
내용 없음
30일 [三十日]
맑음.
중리의 포包에서 일제히 본 읍에 들어와 군기를 함부로 탈취하기에, 어떤
이가 옳지 않다고 하니 바로 그쳤다. 구실을 대기를, 성을 지킨다 라고 하였
다. 마을의 사대부 집들이 모두 그 신주神主를 땅에 묻고 곡을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10월 초 1일 [十月初一日甲辰]
맑음.
중리 민원유閔元有에게 빌려 쓴 돈의 원금이 40냥이고 다시 용금을 시켜 가져
온 돈 10냥에다가 이자를 계산하면 100여 금이었다. 그의 삼촌 경휘景輝에게는
원금 260금에 이자를 계산하면 600 700금이 되었고, 민성홍閔聖弘에게는 원금
12냥에 이자를 계산하면 30금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낮은 이자의 빚은 그
냥 두고 높은 이자의 돈을 갚아 가면 결국 빚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이자를 받아먹고 시간을 끌며 참으로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 불행하게도
소요를 맞아 일이 모두 어긋나게 되었다. 더욱이 이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
하여 이별할 때에 영원히 마음에 짐이 되었다. 돌아와서 지금 남아있는 물건을
보니 재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황폐한 집과 척박한 땅뿐이어서 재산을 처분하여
여러 집들의 빚을 갚아야 할 형편이었다. 이런 뜻을 경휘에게 말했더니 삼촌과
조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유장鍮庄의 집과 터 텃밭 강변江邊의 시
장柴場 포전 2곳 신정新亭 논 9두락지를 하나의 문권文券으로 만들어 경휘에게,
포전 2곳과 논 4두락지를 문권으로 만들어 원유에게, 포전浦田 2곳을 하나의 문권
으로 만들어 성홍에게 주었다. 경휘와 그 아버지가 모정茅亭의 새집을 욕심내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유장에 있는 모정은 집이 더 아름답지도 않고 땅도
더 길吉하지가 않다. 다만 선산先山 섬돌 아래를 남에게 줄 수가 없다. 조상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향당鄕黨에 빚을 남기겠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끝내 이
루어지지 못하고 두 민씨閔氏도 물러났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26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3일 [初三日]
맑음.
윤자영에게 빌려 쓴 돈은 그의 아들 미봉未鳳의 하는 말이 위협적이어서
먼저 10냥을 주고 나머지 10냥은 내년 봄에 보리를 줄 때 본전 20금을 마감
하기로 약속하였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시요時擾가 점점 심해져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담사 事105를 상정일上丁日, 초
순에 드는 정(丁)일에 지냈다.
부여두접주扶餘頭接主 강희서姜希書가 자신의 접솔接率 2명을 보내 돈을 독촉했
는데, 오래 전에 관련된 일이었다. [접솔 두 사람은 성(姓)이 성(成)씨와 조(趙)씨로 모두 대흥
(大興) 신창(新昌)사람이었다] 마침 농 을 판 돈과 망건 값으로 줄 돈을 합하여 20금
金을 주고 두 사람에게 애걸하였다. 두 사람 모두 반명班名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있어 기꺼이 승낙하고 가서 좋게 말을 해주었다. 우리 마을의 접주 장대
현張大賢이 편지를 부쳐 힘껏 말을 해주어 다른 소란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선친이 살아계실 때에 구포鳩浦 강가姜哥들이 이슥하여 어두운 밤에 떼를 지어
산지기 김판득金判得의 아내를 겁탈하였다. 그래서 바로 종을 보내 그들을 잡
아다가 모두 엄중히 징계했는데, 그 때에 중간에서 권세를 부린 자가 있어 뇌
물 70금을 받았다고 하였다. 희서도 바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근래에
사람을 보내 150금을 요구하였는데 실제로 본전의 갑절에 해당하였다. 강가姜
105 담제를 말한다. 담사( 祀)라고도 한다. 초상으로부터 27개월 만인, 즉 대상(大祥)을 지낸 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하여 지낸다. 아버지가 생존한 어머니상(喪)이나 처상
(妻喪)은 초상 후 15개월 만에 지낸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7
초 5일 [初五日]
맑음.
경휘敬輝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자 안색을 바꿔 말하기를, 그대가 떠날
날이 며칠 남았으니 집물什物을 가지겠다 라고 하기에, 파산한 처지에 집물
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기를, 그대 집에 책이 많은데, 질帙을 갖춘 경사經史를 가질
수 있는가 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집에 부형父兄이 있어 감히 마음대로
허락할 수가 없다. 말씀드려야만 할 수가 있다 고 하였다. 원유가 말하기를.
내가 집이 없으니 용금과 성만이 살고 있는 집을 가지겠다 라고 하기에, 내
가 말하기를, 이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으나 지금 거처하는 사람이 있고 추
울 때에 내쫓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 더욱이 노비와 같은 사람들을 지금 양
인으로 풀어준다고 해도 혐의는 더욱 심할 것이다. 지금 갑자기 허락할 수
없고 다시 의논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오봉룡을 불러 4포의 조를 돌려주니, 그가 사양하고 2포를 가지고 갔다.
그도 부끄러움을 알았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용금이 들어와서 하소연하며 말하기를, 민씨집에서 빚값으
로 집 3채를 얻었으니 빨리 비우고 나가라고 하는데, 소인 등은 길에서 얼어
죽으라는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 원유가 보기를 청하여 가서 그를 보고
26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7일 [初七日]
흐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마을사람들 중에 나온 자가 제법 많았다. 가마 3대로 유장 어머니와 맏형
수 및 제수弟嫂를 먼저 보내고 회숙晦叔이 뒤를 따라갔다. 순동어미와 원창元昌
은 걸어서 따라갔다. 그 밖에 나머지 일꾼들은 영성零星한 책과 급히 입을 옷
가지 등을 날랐다. 점심은 안애 박노인 집에서 먹었다.
오후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매우 좋지 않았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순동의 어미가 돌아와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9
초 9일 [初九日]
맑음.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라서 재계齋戒를 하였다.
비인수령이 규암에 편지를 남기고 영문營門을 향해갔는데, 인신印信을 받으러
갔다고 하거나 돌아갔다고 하기도 해서 사정을 알지 못하여 걱정스러웠다.
초 10일 [初十日立冬]
맑음.
반교에 장醬이 없어 복여씨로 하여금 장 한동이를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저물어서 반교에 도착하였다. 중도에 회숙을 만나 돌아왔다.
11일 [十一日]
맑음.
복여씨가 돌아왔다. 경삼과 경우敬佑가 기포起包의 소요를 피하려고 따라왔다.
12일 [十二日]
맑음.
종형집에서 농작물 6 7포包를 겨우 얻어 그 날 빚진 집에 나누어주니 남
은 것이 없었다. 경삼쪽도 군색하여 100금으로 10여 포를 사서 저녁이면 콩
27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3일 [十三日]
맑음.
14일 [十四日]
맑음.
동네 도인이 장작청將作廳의 도조賭租를 가져가서 허군성許君成이 그것을 담
당하였다. 군성을 만나보고 그 조租를 구해서 사려고 하니, 군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댁宅의 조租를 빼앗은 것은 아니고 장작청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러나 그 본래 주인을 살펴보면 바로 당신입니다. 새로 이사하여 먹을 것이
없으니 5석을 드리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고 군성이 떠나갔다. 내가 종형에게
말하기를, 군성의 뜻은 가상하다. 그러나 그릇되었던 일이 바로잡히는 날에
歸正之日 아전들에게 수모를 당할까 걱정스러우니 그냥 받아두고 기다리자 고
하였다.
15일 [十五日]
맑음.
경삼이 조租 1포를 거문巨門 이李선생집에 보냈다.
16일 [十六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271
17일 [十七日]
맑음.
김생원金生員 문숙文叔에게 사우祠宇를 옮겨 봉안하는 날짜를 구했더니, 내일
이 길일이라고 하였다. 기약한대로 하지 못하여 이 날은 다만 좌처坐處만 옮
기고 무덤을 파서 옮기는 예처럼 하였다.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다. 도중에 포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들었고 마천
馬川에 이르러 깃발과 창 및 칼 등이 넓은 들에 가득한 것을 보고 물었더니,
광암포廣巖包가 부여의 군기를 탈취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는데 크게
일어나서 침입할 것이다. 호서동도수접주湖西東道首接主 이종필李鍾弼이 규암에
오면 일은 해결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읍촌邑村의 도인이 수접首接에게 갔다
가 왔다. 들판에서 군대의 위력을 과시하여 위엄을 보였다.
남당 종형과 국동菊洞에 사는 매부 정치영鄭稚穎이 왔다.
18일 [十八日]
맑음.
마을의 여러 어른들이 와서 모여 놀면서 날을 보냈다.
어제 반교 접주 김종식金鍾植이 장정 2명을 딸려 보내어 배추와 무를 사줄
것을 부탁하여 무는 집에 있던 것을 보냈고 배추는 사서 보냈다. 값으로 1짐
에 1냥을 받았다.
반곡에 사는 자형 윤尹이 왔다. 나무 궤짝에서 신주를 옮겨서 봉안하였다.
27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맑음.
유장의 집은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살게 하려고 이미 무를 땅에 묻었
다. 민원유가 채무조債務條로 계산하여 성문成文106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래서 내가 말하기를, 성문을 만들 때는 그 돈의 숫자를 자세히 계산하는 것
이 옳다. 본전 30냥에 다시 10냥 그리고 또 10냥이다 라고 하니, 원유가 거짓
으로 모른 척하며 말하기를, 40금은 그렇다고 하고, 10금은 용금이 상관한
것인데 어찌하여 행랑의 빚까지 합쳐서 상관하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
기를, 용금이 상관한 것으로 말하면 50금인데 모두 나와 두 사람이 직접 대
면하여 주고받은 것이 아니다. 지난 번 자리에서 비로소 계산한 숫자를 모두
발설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행랑에게 돌리는가 라고 하였다. 민도사노인은
이 일에 간섭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썹을 치뜨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내가 일어나 돌아가려고 하자 종형이 화해를 권고하며 말하기를, 이미 성
문을 하려고 했는데, 10금 때문에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성문을 주고 말하기를, 본전 40금에 이자를 계산하면 지금 100여금이 될 것
이다. 부여 대방면大方面 유장鍮庄 초가집 안채와 바깥채 8칸, 복자服字 텃밭 2
곳 그리고 화리禾利107를 영구히 허급許給한다 고 하였다. 바로 고개 동쪽 길
아래 동쪽 방향의 옆에 있는 밭에 심은 보리와 마른 풀은 한가韓哥와 인접한
터이다. 내가 원유에게 말하기를, 그 밭 주변 옆으로 높은 곳에 종종 소나무
를 심었는데, 밭두렁으로 여기지 말라. 평지에 곡식을 심은 곳이 바로 그 곳
20일 [二十日]
맑음.
용금이 내야할 내전內錢이 있었다. 올 가을 이자는 받지 않는다고 했기 때
문에 지난 가을의 이자를 계산하면 17냥이 되었다. 내가 용금을 시켜 민씨에
게서 얻은 돈이 작년 가을에 15냥이 되었고 용금에게 빌려 쓴 돈이 2냥이어
서 2냥을 빼면 마침 서로 들어맞았다. 이에 이것으로 원망을 토로하는 저 용
금의 입을 막았다. 아! 인심은 예측할 수 없는데, 돈도 마찬가지이다. 내전內
錢은 갚지 않아도 해가 없고 민씨의 돈은 두려운 것인가? 설령 민씨가 10금을
거부하지 않았어도 합하여 계산했을 것이다. 내전은 원래 나중에 받아낼 수
가 없다. 마침내 그 가을 뒤에 통탄할 만한 실상을 나열하여 질책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월룡月龍에게 갚아야 할 본전 8냥이 있어서 그를 불러서 보고 먼저 8냥을
주며 이자 4냥은 나중에 갚겠다고 말했더니, 월룡이 자신을 먼저 불러준 것
에 감동하고 또한 요즈음 형세가 옛날과 다르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본래
이자를 계산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기식寄食하는 것이
늘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우니 조 5두를 용금의 집에 남겨주기를 청합니다 라
고 하였다. 그래서 좋다 라고 말하였다.
27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2일 [二十二日]
맑음.
부친이 갑길을 데리고 반盤에서 길을 떠났는데 박노인이 모시고 따라갔다.
권이權伊로 하여금 소를 몰아 반교에 들어가게 하였다. 친구 한韓이 따라서
갔다. 호남동도湖南東道 전명숙全明叔이 12일에 논산에 와서 주둔하였다. 건평 접
주 이도사 유상이 선봉이 되어 이본전李本全의 무리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유회
儒會에 의탁하여 그 무리를 안심시켜서 동도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전명숙에게
붙어서 그 전위부대가 되어 이인利仁을 향해가다가 부여에 들린다고 하여 인심
이 흉흉하였다. 그러나 바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진정되었다.
회숙이 모정에서 가족과 합치고 복여씨는 바깥방에 들어와 살며 모두 거
처할 계획이었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권이權伊가 돌아와서 부친이 어제 안현에서 묵고 오늘 아침에 지치遲峙에 도
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여종 채봉彩鳳이 그저께 아이를 낳은 뒤에 바로 나가서 일을 하고 불을 땠
다. 그러나 그들이 양식이 없는 것이 걱정되고 판옥에게 겨울옷을 주지 못해
남유수록 南遊隨錄 275
서 조 1포를 주었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전명숙과 이유상이 효포孝浦와 이인에 진군하였으나 불리하여 논산으로 물
러났다고 한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27일 [二十七日]
맑음.
박가朴哥의 도지賭地 전결田結 12복卜을 초하初夏, 음력 4월에 방납防納했는데, 그
값이 매 복卜당 5전이어서 합산하니 6냥이 되었다. 가을에 2냥을 가져왔고
그 나머지는 날마다 연기하였다. 오늘 그를 불렀더니 오지 않고 말하기를,
작년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 전부 낼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세상이 바뀐다
면 이런 놈들을 청소하리라.
28일 [二十八日]
맑음.
회숙을 가좌동에 보내어 미당에 들러서 가게 하였다.
용성이 밭에 콩을 경작하여 각각 15두씩 나누었다. 추가로 나눈 것은 흑대
두黑大豆가 1두 2승이고 수임水荏, 들깨은 3승이었다.
27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9일 [二十九日]
흐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포시 時, 오후 3시 5시에 어느 포包인지 모르겠는데, 도인道人 400 500명이
갑자기 본읍에 들어와 군기와 촌가에서 옷 이불 소 등을 빼앗아 갔다. 우
리 마을에 들어올 때 인정人丁을 모두 모아 횃불을 들고 나가 그 채비를 보니
바로 능산陵山으로 향하였다. 불빛이 들판에 가득하고 사람들의 소리는 솥안
에서 물이 끓는 것 같아서 정말 전쟁터였다.
용성이 웅포로 가서 김춘서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부쳤다.
11월 초 1일 [十一月初一日]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업성이 여름에 민원유 집에서 빌린 호미를 잃어버렸다가 밭을 거두어 치
울 때에 찾았기에 그 아내의 어미로 하여금 돌려주게 하였다.
여종 옥섬玉蟾이 어머니를 위해 불을 때고 물을 긷느라 아직도 떠나지 못하
였다. 그래서 갑자기 먼저 떠날 것을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날짜가 늦어
져 오늘에 이르렀다. 마침내 지루한 마음이 생겼는지 게으름이 비할 데가 없
고 심지어 물을 긷는 것도 물을 얻어먹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옥섬으로
하여금 나가서 일을 하고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아침에 밥을 지을 때 끝내
지도 않고 나갔다. 마치 끓는 물을 만진 것 같았다. 인정이 참으로 이와 같은
가? 내가 너를 대우하는데 야박하게 한 적이 없었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탑동塔洞에 가서 가마꾼을 얻으려고 했으나 인심이 어지럽고 아침저녁으로
남유수록 南遊隨錄 277
초 3일 [初三日]
흐림.
이학여가 와서 함께 가려고 하루를 묵었다. 권용대로 하여금 영록을 불렀
으나 오지 않았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영록이 거듭 약속을 어겼다. 마침내 4냥으로 장정 2명을 사서 가마 1대를
메게 하였다. 천가千哥 업성業成 선봉先奉 한가韓哥 등은 모두 가마를 메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4명이 번갈아가며 서로 도와 가마 1대를 메었다.
학중學仲과 한홍韓弘은 옷과 이불 및 그릇 등을 메었고 최가崔哥는 늙고 조금
성격이 차분하여 신주를 넣는 궤를 메게 하였다. 학여도 짐을 메고 경삼과
함께 먼저 떠났다. 어머니와 아내는 가마를 탔고, 나와 아우 덕영이 옆에서
모시고 갔다. 여종 계월桂月이 뒤를 따랐고 순동어미와 용금도 따라왔다.
오시午時에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저물지 않아서 반교에 도착했다.
7냥 5전에 궤짝 하나를 팔았다.
초 5일 [初五日]
흐림.
일꾼과 여종 둘이 돌아갔다.
27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6일 [初六日]
흐리고 비가 왔다.
웅치熊峙를 넘어 간치시艮峙市 남소령南小嶺에 이르렀는데 요충지에 초막을 설
치하고 행인을 기찰譏察하고 있었다. 마침 사람 1명을 잡아 총을 쏘아 죽여서
여러 사람에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 때를 이용하여 빨리 지나갔다. 만약 조금 한
가하게 보냈다면 반드시 옷을 뒤지는 치욕을 당했을 것이다. 비인읍에 들러서
보았더니 바닷가에 가까우며 바로 쇠락하고 궁박한 마을로 수십 호의 작은
집에 지나지 않아 참으로 견줄 데가 없는 퇴락한 읍邑이었다. 길 옆에 옛날
비碑가 있었는데, 바로 여러 현감들이 선정善政을 펼친 것을 기록하였고 여러
가지 성씨들도 처음으로 거기서 보았다. 10리 가까이 가서 관동冠洞 이평중의
집에 이르렀는데 객실客室이 없어서 이웃 최씨네 집에 가서 묵었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279
초 8일 [初八日]
맑음.
주인과 동행하여 샛길을 따라 범암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근동近洞의 소
수포小水包 접주 전한규田漢圭와 홍산 접주 김성원金聖元 및 김태운金太雲 등이
모두 기포起包하여 한산 상포上浦에 주둔했는데, 수성군守城軍에게 패배를 당하
여 몇 명이 사로잡혔고 원근遠近의 접주들과 패악을 부리던 자들은 모두 호남
으로 달아나서 하루가 안 되어 강을 건넜다고 해서 인심이 소란스럽고 삼엄
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범동汎洞 이도사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저동紵洞
접주 김윤선金允先과 서승보徐承輔 및 구성천具性天 등이 모두 홍주로 달아나서
유회가 그 집을 몰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길을 떠나 이치梨峙에 이르렀는데, 역시 막幕을 치고 지키고 있어서 말을
잘하여 지나갔다. 유표儒標가 없으면 흔히 그 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얻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길을 가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반교에 도착했다.
28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10일 [初十日]
흐림.
학여가 돌아갈 것을 알렸다.
포성소리를 들었는데 멀지 않았다. 부여도인과 이석보 및 강희서 등이 규
암에 주둔하여 길이 막혔다고 하거나 논치論峙로 이동했다고 하였다.
11일 [十一日小雪]
흐림.
12일 [十二日]
비가 왔다.
13일 [十三日]
흐리고 비가 왔다.
14일 [十四日]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길을 떠나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만경萬頃 망건장網巾匠 유양숙柳良叔
이 와서 본 읍에 머무른다고 하여 경삼의 망건을 주어 앞면을 고치게 하였다.
탑동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밤에 집에 도착했다.
용성이 웅포에서 돌아와 나무상자와 위원渭原의 편지를 가져왔다.
15일 [十五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281
16일 [十六日]
흐림.
상호商胡, 청국 상인 4명이 동네를 지나갔는데, 사람들이 병사로 여겨 소란을
떨며 달아나 숨었다. 만일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호남동도湖南東道와 임천 및 칠산七山의 동도가 한산읍을 공격하여 불태우
니109 수령은 걸어서 도망을 하여 임천땅에 이르러 사로잡혔다. 구제를 받아
죽음을 모면하고 중리 민참의 집에 도착하여 가마를 타고 떠나갔다고 한다.
임경회가 왔다. 만나서 떠날 날짜를 듣고 술을 마시며 밤새 얘기를 하다가
17일 [十七日]
흐림.
원완실元完實과 강미진姜美鎭이 보낸 시래기와 김치 한 동이 및 깨진 그릇 등
을 얻으니 회숙 내외가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었다. 참으로 매우 몰지각했
다. 그들은 쓸 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집의 물건을 모두 가지려는
것인가? 원완실과 강미진도 산에 들어갔다.
본읍의 동도東道가 기포起包하여 한산에 간 자들 중에 함부로 약탈을 하여
자기 집에 가지고 돌아가거나, 일부러 빼돌린 자가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인심人心이 이익을 탐하고 생生을 저버리는 데로 향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순약舜若이 맹자 를 빌려가서 1권부터 4권까지 모두 터득하였다.
2말 5되가 들어가는 큰 솥을 순성順成네 집에서 빌려가서 콩 7말 5되와 시
초柴草를 보내 메주를 쑤게 하였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며 추웠다.
가까운 마을의 동도들이 모두 점차로 도망하여 돌아왔으나 북계北溪 김학
남유수록 南遊隨錄 283
19일 [十九日]
맑았으나 바람이 불고 추운 것이 어제와 같았다. 병정 300명이 본읍에 어
28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0일 [二十日]
맑음.
복여씨가 반교의 소 1마리로 시초柴草를 날랐다. 장대현에게 경삼의 안경
을 빌려주었는데 바로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돌아왔다.
병정들이 부여에 들어와 맨 먼저 5명을 죽였는데 그 안에 김성근金聖根이
있었다고 하니 참담하였다. 강관진姜寬鎭에게 대간大簡 5폭과 혼서지婚書紙 2폭
을 주었다.
밤에 처음 눈이 왔는데, 제법 장관이었다.
본읍에서 내일 유회儒會를 연다고 통문을 냈는데 통문을 낸 사람은 사과司果 박
춘익朴春翊이었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눈꽃이 날려 떨어지고 찬바람이 종일 불었다. 집에서 메주 12말을 쑤어
49덩이를 만들었고 순성順成네 집에서 7말 5되를 쑤어 36덩이를 만들어 모두
85덩이가 되었다. 콩은 19말 5되를 썼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85
22일 [二十二日]
흐리고 추웠다.
임경회가 찾아와서 대간 1축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23일 [二十三日]
흐리고 추웠다.
가서 민경회를 보고 바로 구포로 향하여 경회景會와 임동지林同知를 찾아갔
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민성홍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시 석현奭賢을 찾아갔다가 성빈聖賓을 만나 셋이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점
심을 먹고 돌아왔다.
최학춘崔學春이 보러 왔다. 밤에 친구 윤기현尹奇賢을 만나러 갔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판옥判玉으로 하여금 소를 몰게 하고, 일룡日龍은 고추장 2항아리와 솥 1개
를 지게 하였다. 임경회가 머슴 1명을 보내어 그가 시래기와 커다란 간장 항
아리 1개를 지고, 성복은 철화로 쌀을 씻는 바가지 2개 된장 작은 항아리
1개 좌분坐盆 2개를 졌다. 소에는 흑소태黑小太 12말 지의地衣, 돗자리 곡병曲
屛, 가리개 검은 깨 1말 법유法油, 들기름 1병을 싣고 반교에 들어갔다. 성복은
바로 권이를 대신한 것이었다. 지난 4일 날에 갈 때에 다리가 아프다고 핑계
를 대며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하루가 안 되어 가
겠다 라고 하였다.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나가보니 바로 뜻밖의 이익을
얻으려고 한산의 진중으로 쫓아갔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불러서
반교에 들어오게 하였더니 바로 핑계를 대어 말하기를, 팔이 아파서 갈 수
28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5일 [二十五日]
맑음.
어제 홍산 경계를 들어와서 마을마다 수직守直하는 초막이 있는 것을 보았
는데, 반교도 마찬가지였다. 청양과 대흥大興의 유도인儒道人들이 장항리獐項里
에 와서 죄인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약탈하는 것이 매우 심하였고
반교로 향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모여 경계를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비로소 큰사랑을 수리하였는데 부친이 거기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여름에
시요時擾 때문에 닫아두었었다.
저녁에 서천 형수 구具씨가 걸어서 왔다. 이번 달 20일에 호남동도湖南東徒
가 금강을 건넜는데 방어중군防禦中軍 이광순이 유도儒道를 이끌고 막았다. 날
이 저물어 포 소리가 들리자 이광순이 겁을 먹고 스스로 후퇴하여 서천 송동
松洞에 들어왔다. 동도들이 기세를 타고 밀려와서 이광순이 전에 머물던 마을
을 불태우고 바로 서천읍으로 들어가 관의 창고를 불태워서 재가 되었다. 마
남유수록 南遊隨錄 287
27일 [二十七日]
맑음.
구진구具鎭九가 떠나갔다. 그는 사촌형수의 친정아버지이다.
아랫방 굴뚝을 고치다가 땅속에서 철물을 얻었다.
28일 [二十八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화촌花村으로 친구 임대경을 찾아갔다.
29일 [二十九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학이鶴伊로 하여금 소를 끌게 하여 안현에서 점심을 먹었다. 망해望海에서
봉래와 친구 한韓씨를 만나 한씨네 도조賭租를 거두어 먼저 나왔다. 막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거둔 것의 반을 줄이자고 하였다.
규암에 이르러 이자민李子敏을 찾아갔다가 저물녘에 왕제旺第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갈 때에 동리東里 오씨吳氏를 중도에 만나서 동행하여 죽림에 이르렀
는데, 이번에는 수천秀川 냇가에서 다시 만나 동행하여 돌아왔다. 오고 가는
것을 함께 했으니 이것도 우연이 아닌 인연이었다.
28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30일 [三十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허학이 돌아가는 편에 사류事類110 낙질落帙 두루마리 3축 초결변의草訣辨
疑 타시朶 1필 등을 보냈다.
행랑집인 매득梅得을 시켜 박가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가 자주 흉악하게
무엄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와룡臥龍 용학龍學의 아내와 한가의 아내 백
현白玄을 불러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였다. 강가姜哥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순성이 콩을 12말씩 나누었고 행랑집 한가가 콩을 4말 5되씩 나누었다. 2말
은 용금으로 하여금 메주를 쑤게 하여 12덩이를 만들었고 4말 5되는 순성으로
하여금 메주를 쑤게 하여 17덩이를 만들었으며 집에서 6말을 쑤어 30덩이를
만들었다. 까불어 깨끗하게 한 콩 3말은 복여씨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밤에 비가 왔다.
12월 초 1일 [十二月初一日癸卯]
비와 눈이 왔다.
성만이 왔다.
초 2일 [初二日]
눈이 왔다.
독감으로 매우 아팠다. 김학보金學甫가 보러 왔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박성백朴聖伯을 불러서 만나보고 편지지 5폭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감기가 조금 덜하다가 밤에 다시 매우 춥고 아팠다. 목화 10근을 저울에
달아 복여씨에게 주었는데, 이미 어머니에게 값을 치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임경회가 찾아왔다.
저녁에 임경구가 와서 이야기하였다. 밤에 오한이 나서 괴로웠다. 행랑지
기 한가가 홍산에 갔다가 반교에 들렀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회숙이 가재동加才洞 강관진姜寬鎭에게 갔다가 친구 윤덕수尹德綏가 작은 집에
나가 살고 그 마름집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간수看守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치량稚良 처숙부에게 편지를 얻어 관진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해주기를 바랐다.
구정鷗亭 동계洞契 돈의 이자 2냥을 독촉하는 것이 끊이지 않아 마침 매득梅
得에게 빚을 받은 돈 2냥을 관진寬鎭으로 하여금 민도사 경효에게 전하게 하였
다. [이것은 어제 일이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29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7일 [初七日]
흐림.
오시午時에 눈이 몰아쳐서 내렸다.
치량씨稚良氏가 시흥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주명씨周明氏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는데, 관진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서비인徐庇仁, 비인 현감인 고모부이 소요를 피해 한양에 갔다가 지금에야 내려왔
다. 규암에 이르러 고모님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거슬러 찾아와
서 20금을 주어 옷을 만들게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비인 수령이 이른 새벽에 다시 출발하였다. 치량씨가 찾아 왔다가 바로 떠
났다. 어젯밤에 다시 패독산 1첩을 먹었는데, 제법 약효가 있었다.
초 9일 [初九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성만이 아버지를 따라 공주 땅으로 난리를 피했다가 지금 아내를 데리고
돌아오는 편에 양화에서 주신 편지를 받았다. 편안하다니 마음에 위로가 되
었다. 복여씨가 임경구林景九를 불러 오른쪽 팔꿈치에 침을 맞았다. 머물러서
남유수록 南遊隨錄 291
초 10일 [初十日]
맑음.
유장 박씨 아내에게서 달마다 여조餘條를 계산하여 본전 1냥 8전을 받았다.
권이에게 장리조長利租의 이자 10두 중에 5두를 남겨 월룡月龍에게 주게 하고
5두를 받았다. 복여씨가 경작한 땅의 도지를 3두斗 감해 주고 12두를 받았다.
조 27두를 염창리鹽倉里에서 소금과 바꿨는데, 조와 소금은 모두 양을 넉넉히
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를 다시 재었더니 24두 몇 되가 되어 소금 22두 몇
되와 바꿨다. 박성백朴聖伯이 한 떨기 생삼베를 주었다. 밤에 눈이 몰아쳐서 내
렸다. 매득梅得이 비인수령을 따라 갔다가 돌아와 비인수령의 편지를 받았다.
11일 [十一日]
안개가 끼고 눈이 왔다.
다복이 여기에 와서 감기를 여러 날 앓은 뒤에 보러왔다. 일전에 아우 근영
이 민경칠閔卿七을 보았는데, 경칠이 말하기를, 모정茅亭터 논 9두락을 빚 때
문에 내 종질從侄에게 주어 내년부터 그 집에서 경작한다 라고 하여, 아우 근
영이 말하기를, 비록 문권文券을 잡혀 빚을 써서 기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1 2년 정도 조금 지나가는 경우가 없겠는가? 지난번에 이작移作111하
지 않겠다고 말을 하고서 지금 이런 말을 하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12일 [十二日]
안개가 끼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93
13일 [十三日]
안개가 끼었다.
순금을 구동久洞에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하고, 역대명필歷代名筆 과 원교
필결圓嶠筆訣 , [이광사(李匡師)의 서론(書論)] 2첩 및 무 30개를 보냈다.
은천恩千이 가는 편에 이천 산촌山村 진사 종형댁에 편지를 부쳤다. 다복이
돌아가겠다고 해서 아침밥을 먹이고 금곡 내종 형님 댁에 편지를 부쳤다. 저
녁에 권용대가 보러 왔다. 강정만姜正萬의 부친이 시변市邊으로 본전 2냥을 썼는
데 먼저 1냥을 갚았다. 복여씨로 하여금 돈 1냥을 곡령 민주백閔周伯 어른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부친이 소일할 때에 사용했다고 한다. 밤이 깊
어 가는데 가동 치량씨의 별실別室이 종 1명을 데리고 왔기에 놀라서 그 연유
를 물었더니, 치량씨가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찾으러 나왔다가
이곳까지 왔다고 하였다. 만류하여 묵고 가게 하려고 했으나 듣지 않고 바로
빙현氷峴으로 향하였다.
29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4일 [十四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늦게야 맑아졌다.
와룡臥龍이 시변市邊으로 3냥을 썼는데, 이미 여러 달이 되었다. 시변은 월
리月利로는 줄여서 계산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자를 합하니 4냥이 넘었으나
그 어미가 4냥을 품에 안고 와서 갚았다. 그래서 그 나머지는 탕감해 주었
다. 이여진이 찾아왔다. 용전龍田에 사는 상중인 처숙부 정鄭씨가 찾아왔다.
가을 이후 일이 많아 가서 위문하지 못했는데 먼저 방문을 받으니 매우 부끄
럽고 송구스러웠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어제의 일이다]
15일 [十五日]
흐리고 바람이 불며 추웠다.
성만과 매득을 데리고 솥 1개 화로 1개 다른 그릇 백설고白雪 1상자를
지게 했는데 노인이 낮과 밤에 요기하기 위한 양식이었다. 판옥으로 하여금
소를 몰게 하였고, 소에는 콩 8두 무 50개 들깨 2두斗 누룽지가루 9승升을
실었다. 규암진窺巖津에 도착하니 바람과 날씨가 매섭고 지독하여 판옥이 너무
추워서 몸을 떨며 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돌려보내고 내 자신이 소를 몰아 안
현鞍峴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박노인은 지금 사촌동생의 상喪이 있었다.
짐꾼과 함께 저동苧洞에서 만나 저물녘에 판교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건강
이 조금 회복되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16일 [十六日]
흐리고 추웠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95
17일 [十七日]
흐렸다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며 추운 것이 어제와 같았다.
거문리巨門里에 이사李師, 이학여를 보려고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도
화담桃花潭의 수직守直하는 초막에서 개화천開花川 박중삼朴仲三을 만났고, 거문巨
門 길거리에서 이생원 어른을 만났다. [이생원은 우석(禹錫)의 종조(從祖)이다]
18일 [十八日]
맑고 추웠다.
새 달력을 보니 맨 앞에 대조선 개국 504년 세차歲次 을미乙未, 1895년 시헌서
時憲書112라고 적혀 있었다.
19일 [十九日]
맑고 추웠다.
김순경金順卿이 와서 자리를 짜는 것을 도와주다가 포시 時가 되어서 갔다.
112 시헌서(時憲書): 태음력의 구법(舊法)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
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을 말한다. 명나라 숭정 때에 아담 샬이 만든 것을 1644년에
김육이 연경에서 들여와서 1653년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29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0일 [二十日]
흐리고 눈이 왔다.
임미산任眉山이 남초南草 1묶음을 보냈다. 김명선金明宣에게 남초 14묶음, 돈
으로는 5냥 6전인데 바로 조경장이 사서 가져간 것이어서 지난번에 독촉하
여 받아 먼저 2냥을 주고 다시 2냥을 주었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종형과 함께 앞산에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거문巨門 이선생이 왔다는 소식
을 듣고 다시 함께 거문에 갔다.
22일 [二十二日]
맑았으나 바람이 불고 추웠다.
이선생과 함께 원심리元沈里 정좌수鄭座首 집에 가서 큰 항아리와 중간 정도
의 항아리를 합하여 5개를 샀는데 돈으로 13냥이었고, 쇠도끼 1개와 쇠괭이
1개를 합하여 6냥 5전이었으며, 짚신이 모두 5전이어서 총액이 20냥이 되었
다. 모두 이사李師에게 가져다가 썼고, 5전으로 이사의 사위인 김시중金時中을
불러 거문巨門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이사가 한산韓山시장으로 출발했는데, 환
전換錢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권주성權周聲이 집 2채를 사려고 했다. 집 2채
중에 하나는 50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150금이었는데 모두 환표換標를 주어
나중에 받게 하였다. 그래서 50금의 전표는 이사가 체납한 것 때문에 한경우
韓景祐에게 주어 홍산읍의 시장에서 받아 쓰게 하였고, 150금은 자신이 한산에
가서 받아내려고 하였다. 친구 조경삼의 이사가 25일로 정해져서 경삼에게
편지를 부쳐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낙여의 집에서 묵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97
23일 [二十三日]
바람이 불고 추웠다.
판제板第에 돌아왔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경삼이 왔다.
25일 [二十五日大寒]
맑음.
4전으로 마을에서 가마를 빌렸고, 8전으로 가마꾼 2명을 구했다. 조씨에게
시집 간 누이동생을 데리고 거문巨門에 가서 먼저 윗집에 거처하게 하고, 밥
솥은 우선 왕제旺第의 것 하나를 쓰게 하였다. 있고 없는 것을 서로 필요로
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날에 정돈하면 옮겼다가 다시 놓는 수고를 줄일 수
있어서였다.
다시 김명선金明宣에게 남초 값 1냥을 주었다. 27일 가마꾼을 빌린 삯도 모
두 지급하였다. [이것은 잘못 적은 것이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조형趙兄이 사람을 보내 주성周聲에게 석유를 빌렸는데, 3 4주발이 되었다.
나는 이선생과 함께 3등분을 하였다. 이선생에게 4냥을 빌려 직접 가지고 돌
아왔다. 회숙이 일꾼 3명을 데리고 왔으나 중도에 뒤쳐졌다. 중국인 거지 7
명이 허학의 집에 와서 방을 빌려 달라고 사정을 하고 해를 넘긴 뒤에 먹는
것은 스스로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이선생에게 돈 4냥을 얻어서 돌아왔다.
29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반쯤 흐렸다.
가마와 가마꾼을 빌린 돈을 주었다. 경우景祐, 한경우에게 이전과 이후에 빌린
돈 2냥 2전 3푼을 갚았다. 왕제에서 온 일꾼 3명이 도착하였다. 박가朴哥가 결전結錢
3냥을 가지고 와서 자원하여 물건을 지고 들어가 지난 잘못을 갚고자 하였다.
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회숙이 돌아가는 편에 서徐씨댁 고모님의 새로 지은 옷 한 벌을 보냈다.
거문리 연경連慶이 청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 2냥의 고기를 사서 보내어 조형
趙兄 및 이선생 댁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했는데, 오래된 부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봉래가 범암에서 돌아왔다.
오시午時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여 밤까지 와서 전에 온 눈에 더해져 1자나
되었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외상外上으로 2냥 5전의 고기를 구하고 흰떡 1두와 두부 5덩이를 마련하였
다. 한 해를 보내는 양식이 겨우 이것뿐이었다.
30일 [三十日]
맑음.
생정生庭 어머니의 생신이지만 채소반찬 뿐인 밥을 올렸다. 조경삼이 와서 함
께 먹었다. 허학에게 돈 1냥을 주어 정한 액수보다 많이 쓴 돈을 깎게 하였다.
(번역 : 최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