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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남유수록南遊隨錄

본 자료는 부여扶餘 유생儒生 이복영李復榮이 1889년 9월 1일부터 1934년까


지 45년에 걸쳐 기록한 일기이다. 본 국역총서에서는 1894년의 일기 내용을
국역하여 실었다.
주요 내용으로, 6월, 7월 일기에서 부여 대방면大方面 농민군의 설포設包과정
과 농민군이 부민의 가산을 침탈한다는 내용, 농민군 장봉한張鳳翰과 최천순崔
天順이 소작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8월 일기에는 도사都
事 이유상李裕尙이 부여 초촌면草村面 건평리乾坪里에서 ‘토왜보국討倭報國’을 주장
하며 진법훈련을 하고 있던 유회세력의 일부를 이끌고 논산論山으로 가서 전
봉준全琫準과 합세하여 공주 전투에 참여한 내용 등이 실려 있다.
본 자료는 충청도 내륙지방의 상황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원
본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43

남유수록 南遊隨錄

1894년 1월 초 1일 기묘 [甲午元月初一日己卯]
눈이 많이 오고 맑음.
산소山所에 성묘를 하고 복여復汝씨 댁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생원生員 민
경습閔景習과 민주백閔周伯 두 어른을 뵈었다.

초 2일 [初二日]
눈이 많이 옴.
이노李老, 이씨 노인가 돌아가신다고 하기에, 돈 1냥을 가져다가 드리고 유모油
帽를 빌려드렸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유장柳庄의 민도사閔都事 어른께 가서 세배를 했다. 친구 정중길鄭仲吉과 종형
제從兄弟들이 찾아왔는데, 통감通鑑 제 8권을 돌려받았다. 쌀과 돈 2냥을 김순
동金順同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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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4일 [初四日]
맑음.
밤에 임경회林景會를 가서 보았는데, 그 부지런함과 재빠름은 예사로 보기
어려웠다. 전 도사都事 민경소閔景昭 어른께 세배를 했다. 지나가다 되돌아 간
것이다.

초 5일 [初五日]
흐리다가 오후에 눈이 옴.
읍내의 김현모金顯謨가 왔다. 전에 흰 비단 값과 그 밖의 셈이 있어 7전
6푼分을 주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아우 근根, 근영이 서면西面 가재동佳才洞 전 도정前都正 이봉현李鳳鉉의 서녀를
재취再娶로 들이기로 하였다. 그 집에서 3월 18일로 길일을 정해 왔는데, 할아
버지 기일忌日과 맞물려 2월 3일 사시巳時, 오전 9시 11시로 날을 바꿔서 보냈다.
형님이 탑동塔洞에 갔다.

내전內錢1 1냥을 갚았다.


성출聖出네 집에 두부값 1전 9푼을 주었다.
봉래鳳來가 남당南塘에서 왔고, 조카 경庚도 따라왔다.
밤에 중리中里에 갔다.

1 내전(內錢): 집안의 사적인 관계에서 거래한 돈을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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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7일 [初七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유장柳庄 모친의 왼쪽 귀 밑에 종기가 났다가 저절로 터졌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봉래가 아우 근根과 함께 떠나갔다.
염창 倉 이석사李碩士 치효治曉가 찾아와서, 백씨伯氏가 예전에 김제金堤 고
잔리高盞里에 살았는데, 세속의 참언에서 십리노화불견소十里蘆花不見所2라 하니,
그 마을 앞 들판 이름이 멱소평覓所坪이다 라고 하였다. [봉래가 갈 때에 당시(唐詩)

주련(柱聯) 댓구 하나를 주었는데 바로 이백형(李伯衡)이 쓴 것이었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상중인 노씨가 왔는데, 바로 죽은 노첨사魯僉使,의 사촌이다. 집이 영동永同
에 있는데, 혼자 비인庇仁에 머문다고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규암窺巖 사종숙四從叔이 오셨고, 다복多福이 왔다.
판교板橋에 들렀다 왔는데 우족牛足 2개를 보내왔다.
비인庇仁 분장汾庄 사는 박朴이 왔다. 노魯씨 어른이 지난 해에 선달先達 서공

2 십리노화불견소(十里蘆花不見所): 십리에 갈대꽃을 보지 못하는 곳이란 뜻으로 흔히 승지(勝地)를


비결로 풀어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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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徐公由와 완영完營의 환전換錢을 얻어 저방紵房3에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사


람을 보내온 것이다.

11일 [十一日]
흐림.
노씨 어른이 박朴과 함께 대산大山의 서선달집에 갔다. 마천馬川의 족종族從인
칠종七宗과 신정新亭의 윤경락尹景洛이 와서 군수평軍守坪 거자巨字4 5두락斗落과 수
자水字 4두락을 180금金에 사기를 청했는데, 20일 내에 값을 치른다고 한다.
전주全州의 민閔씨 어른이 찾아오셨다.
사종숙이 돌아가는 길에 탄촌灘村의 김상인金喪人, 상주에게 위문하는 편지를
붙 다. [아버지의 위문 편지이다]

저녁에 가속리佳束里의 참봉參奉 정성원鄭聖元과 석사碩士 정석로鄭惜老가 찾아


왔다. 서로 이별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외진 곳에 떨어져 있었으나 소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분 좋게 찾아와서 술잔을 들며 옛일을 얘기하니 밤이
깊어가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가속리에 돌아가려는 것을 묵어가라고 만류하
였다. 그 때에 희미한 달은 몽롱하고, 빗방울이 드문드문 내려서 정참봉이
유모油帽를 빌려 쓰고 갔다.

12일 [十二日]
맑음.
6전錢으로 동해의 청어靑魚 10마리를 샀다. 이 물고기가 올해처럼 풍성한

3 저방(紵房): 감영에 딸린 공방의 하나로 갓에 쓰는 감을 만드는 공방을 말한다.


4 거자(巨字): 천자문의 글자순서를 따라 매긴 지번(地番)을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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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없는데, 어떤 조짐인지 모르겠다. 한가韓可의 처를 시켜서 7전錢으로 죽


리竹里의 민씨 집에서 마늘 100근根을 사도록 하였다. 유모油帽를 돌려받았다.
판교板喬의 종형從兄과 아우 근根이 임천林川에서 왔다.
그저께 밤 꿈에, 견여肩輿, 가마를 타고, 강가의 석산石山 위에 올라갔다. 돌아
오는 길에 강가의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이 얕고 맑아서 거울을 보는 것 같았
다. 갑자기 커다란 물고기가 지나가기에 손으로 잡아가지고 돌아오다가 누군
가의 집에 이르니, 친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 이웃마을의 친구들로
운韻을 내어 시를 짓고 있었다. 나는 생각 끝에 시 한 구절을 얻었는데, “십리
금강강상사十里錦江江上寺, 십리 금강가의 절에, 한래독자불진의閑來獨自拂塵衣, 한가롭게 와
서 홀로 세속에 묻은 옷을 떠네 라고 하였다. 다 끝내지 못하고 잠이 깼다. 내 정신이
혼탁하여 꿈속에서 시를 짓는 일이 거의 없고, 지은 것도 기억한 적이 없었
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지만 말뜻도 이상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13일 [十三日]
맑음.
위원령渭原令5이 왔다. 저녁에 도사都事 민경효閔景孝를 가서 뵈었다.

14일 [十四日]
맑음.
위원령이 웅포熊浦6로 출발하였다. 오후에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밤이 되어
도 그치지 않았다.

5 위원령(渭原令): 위원(渭原) 지역에서 수령노릇을 했기 때문에 높여서 부른 호칭이다.


6 웅포(熊浦): 보령 북쪽 광천(廣川) 하구의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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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16일 [十六日]
맑음.
한홍韓弘을 데리고 미당美堂으로 길을 나섰다. 봉득鳳得을 불러 한홍과 함께 오라
고 하였으나 봉득이 신발과 버선을 바꿔 신겠다고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한홍
만이 뒤따라와 길에서 만났다. 용전龍田에 이르러서 탑동塔洞의 숙장叔丈, 처숙부을 만
나 함께 가진촌佳眞村 홍생원집에 갔다가 분대盆垈에 이르러 서로 헤어졌다.
왕진汪津에 들러 저물어서야 미당美堂에 도착하였다. 먼저 소농紹農을 보았
다. 성무聖茂는 마침 노중魯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처갓집에 가서 묵었는데 윤자황尹滋晃 어른이 자리에 계셨다.

17일 [十七日]
맑음.
율정栗亭에 갔다. 성무聖茂가 저녁에 돌아왔다. 첫닭이 울 무렵 사내아이를
순산하였다.

18일 [十八日]
흐리다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밤에 율정에서 묵었다.

19일 [十九日]
맑음.
성칠成七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관현冠峴의 사종숙 집에 이르러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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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맑음.
빙현氷峴에 들어가 한韓씨 어른께 인사를 하였다. 읍내의 김영학金永學 집에
가서 서형석徐衡錫을 불러서 만나보고 탑동에 들러 성칠에게 몇 마디 말을 하
였다. 가속佳束의 산소에 배례하고 저물어서 집에 도착하였더니 어머니의 종
기가 완전히 아물었다. 반곡盤谷의 자형 兄인 윤尹과 남당南塘의 종형이 와서
머문 지가 여러 날이 되었고, 가사동佳寺洞 생질인 용이도 이미 와서 있었다.
새해 전에 인사하러 오는 김에 누이가 보냈는데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게
하고 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형과 반교盤喬7의 종형이 16일에 반곡
에 들어갔다가 어제 돌아올 때에 가재동佳才洞의 조租를 모두 가져왔는데, 1포
包는 벌써 관현冠峴의 사종숙이 가져갔다고 하니 매우 의아스럽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홍산鴻山 여단촌 壇村 석사 김심원金尋源이 왔고 임천 조석사趙碩士도 왔다. 모
두 지난번에 종형從兄과 함께 와서 각각 친척을 방문했다가 종형과 같이 돌아
갔다. 미예美隸와 판옥判玉을 보내어 봉득鳳得을 불렀으나 완강히 거절하며 오
지 않아 여러 장정을 시켜 잡아와서 약간 형벌을 가하여 그 죄를 징치하였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성칠이 돌아갔다. 자형 윤尹이 돌아갔다.

7 반교(盤喬): 현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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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맑음.
윤아尹雅, 윤경락가 사려던 9두락의 논도 허사가 되었는데 매우 이상하다. 밤
에 서모庶母의 제사를 지냈다.

24일 [二十四日]
오전에 흐려 비가 쏟아지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앞의 제언堤堰을 다시 쌓았다.
규암窺巖의 사종숙四從叔 성일聖逸이 염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25일 [二十五日]
맑았다가 오후에는 흐려지고 밤에 비가 왔다.
종 1명에게 이불과 쌀 1말을 지워서 규암에 갔다. 그가 염병으로 죽고 온
가족이 돌아가며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까운 이웃이라도 반드시 기꺼이
주선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객지에서 궁박하게 사는 입장이니 어떻
겠는가? 도울 길이 없어서 직접 가서 간호幹護하는 것이 바로 가까운 친척의
도리라고 생각하여 외부사람에게 약간 기별寄別을 하였다. 성교聖敎와 나산蘿
山 등의 친구 몇 명이 안타깝게 여겨 다행히 삼베를 얻어 수의 衣를 만들었
다. 관현의 사종숙이 오후에 비로소 도착하여 염습殮襲을 하고 포시 時, 오후

3~5시에 출빈出殯8을 하니 날이 어두워졌다. 상喪중인 이문약李文若에게 들렀는데,


마침 대상大祥을 맞아 외출 중이었다. 하늘에 가득 비가 오려고 하여 횃불 2자루
와 유모油帽를 얻어서 돌아왔다. 홍주洪州 갈동葛洞의 누이동생 박朴씨 집의 종이

8 출빈(出殯): 장례를 치르기 전에 집 밖에 차린 빈소에 시신을 내어다 놓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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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안부편지를 받고 기뻤다. 양화陽和9에서 사람을 보내왔는데, 종질녀從侄女가


윤진사尹進士 인구寅求씨의 조카와 정혼定婚하여 2월 19일에 혼례를 치르게 되었
으니 김기보金奇甫에게 조條 100금金을 독촉하는 내용이었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땅을 1,300금
에 팔아 그 중에서 700금은 웅포에 보낼 것이다. 천동泉洞의 윤진사가, 웅포
에서 올 돈이 있는데, 그것을 서로 바꿔서 쓰고 웅포에 편지를 써서 보내어
증거로 삼자 고 하였다 고 한다. 그러나 자형 윤과 위원령의 교분이 깊지 않
아 내게 천동泉洞의 편지를 보내와서 답장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자형 윤의
가세가 날로 오그라들어 이익을 도모하려고 나를 위원령 사이에 끼게 하여
동도주東道主10가 되기를 구하였다.
밤에 비가 왔다.

26일 [二十六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그쳤다.
반곡의 하인이 돌아갈 때에 양화의 하인도 함께 가게 하였다. 자형 윤에게
답장을 쓰기를, 50금을 양화의 하인에게 주어 보내게 하고 다음 날에 100금
을 보내면 그 사이에 웅포에서 답장을 얻어 돌아가는 인편에 부칠 것이다 라
고 하였다. 150금을 내가 바꿔 사용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9 양화(陽和): 현 충남 부여군 양화면이다.


10 동도주(東道主): 일정한 곳으로 지나는 길손을 자신의 집에 묵게 하여 대접하는 주인을 말한다.
15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권이權伊를 웅포에 보내어 천동의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위원령이 저번에


두고 간 토시[吐手]와 풍차風遮11를 모두 보냈다. 반곡의 하인 2명이 100금을
지고 왔고, 양화의 조條 50금도 보냈다고 하였다.
반곡의 하인을 돌려보냈다.

28일 [二十八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권이가 돌아왔다. 위원령의 답장에, 상환相換은 매우 좋은 방편이다 라고
하고, 봉표捧標를 써서 보내왔다. 정재식鄭在植이 경포시鏡浦市에 가서 돈 35냥
을 주고 당목唐木 1필을 사서 반 필은 가져오고 나머지는 다시 팔아 돈으로
가져왔다. 4전 5푼으로 죽파자竹杷子 2개를 샀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일룡一龍을 데리고 돈 33냥을 가지고 백강白江에 가서
배 1척을 잡아 관현에 가서 조租를 실어오게 하였다.
곡화천曲火川 산지기 엄공필嚴公必이 왔다. 밤에 민원삼閔元三 어른을 뵈러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용금龍金에게 술값 1냥을 주었다. 순금을 구동久洞에 보냈다.

2월 초 1일 [二月初一日]
흐림.

11 풍차(風遮):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방한용 두건으로 앞은 이마까지 오고 옆은 귀


를 덮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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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富己 집에서 소를 얻어 상손上孫에게 강변의 밭에 봄보리를 심게 하였


다. 산지기가 돌아갔다. 용금이 5전 을 빌려갔다. 관현의 조租가 39포包인데
포당 태가 價로 7전을 주었다. 백강에서 배를 구해 조수를 타고 흘러가서 전
강前江에 정박하였다. 한가韓哥에게 장리長利로 한 포包를 주었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장정을 뽑아 조포租包 15석을 유장柳庄으로 곧바로 수송하였다. 가가哥哥12
가 한양에 가는데 어제 민석사閔碩士 원삼元三과 길동무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민석사가 기다리느라 떠나지 못하다가 먼저 출발하였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
이 사위 조순의趙舜儀를 데리고 왔다.
대산大山 서선달徐先達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17일에 딸을 순산했다 라
고 하였다. 연이어 딸 셋을 낳으니 너무 많구나. 또한 비인의 박朴에게 완영
의 환전換錢을 구할 길이 없는지 다시 소식을 알아보았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정재식에게 사람을 보내어 돈 18냥을 구했다. 당목唐木 반필 31자 5촌을
먼저 가져왔다. 옥천沃川 어소漁沼의 팔촌 동생 민영敏榮, [자(字)는 서오(敍五)이고 을해
(乙亥)생이다]이 노강魯岡에서 왔다. 바로 2방房 숙부님의 장남이다. 가까운 친척
간에 서로 만나는 것이 이처럼 늦었으니 한탄스럽다.

12 가가(哥哥): 여러 가지 관계에서 쓰는 호칭인데 가까운 상대방을 지칭할 때 쓰는 것 같다.


15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4일 [初四日]
맑음.
조趙, 조순의가 오평梧坪으로 돌아갔다. 서오徐五, 서민영가 홍주 용주동龍珠洞으로
갔다. 자형인 윤과 동행하여 남당南唐의 사촌형님 댁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
서 유숙하였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배를 타고 웅포에 이르렀다. 주인집은 다행히 편안하나 춘서春瑞는 입술의
부스럼을 치료하러 집에 돌아온 지가 이미 열흘이 넘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노성魯城 천동 사는 김성의金聖儀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자형인 윤尹과 김생金生, 김성의이 돌아갔다.
천동의 윤진사가 왔다.

초 8일 [初八日]
흐리고 비가 왔다.
윤진사가 빗속에 울적하여 사람을 시켜 기생을 불렀다. 이름은 하엽河葉이
고 나이는 23세로 전주에서 와서 이곳에 거처하였다. 용모는 빼어나고 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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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맑아서 자못 사랑스러웠지만 다만 눈동자가 바르지 않아 사람을 감동시키


는 빛이 없는 것이 애석하였다. 채운彩雲은 나이가 31세이고 원래는 장성長城
기생인데 이곳에 온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체구가 제법 크고 용모도 수려
하나 이미 자식이 2명이나 있어 춘색春色은 조금 시들었다. 노래와 춤은 본래
그녀의 장기가 아니나 산업産業을 깊이 알고 사리를 분명히 통달하고 있었으
며 요염함은 아낄 만하였다. 어떤 이는 하엽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키가 훤칠하고 청아하여 자연스런 풍모가 있는 것은 채운이 더 낫다고 생각
한다. 저녁에 다시 비가 와서 두 기생과 늙은 가객을 불렀는데 퉁소로 새소
리를 내는 것이 매우 그럴싸하였다. 공주 사람 박계수朴桂秀가 윤진사의 남당
새집에 도배를 하러 왔는데, 풍류 속에서 낳고 자라 노래와 춤을 잘하고 우스
갯소리를 좋아하여 번갈아가며 흥을 돋우니 그리 서툴지 않았다. 밤이 늦어
서야 비로소 헤어졌다.

초 9일 [初九日]
아침에 비가 오고 흐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윤진사가 하엽荷葉이 정산定山 땅으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 노잣돈 10금金을 주었
다. 저녁에 3명이 배를 타고 남당에 도착하여 강가 김치경金致景의 집에서 머물렀다.

초 10일 [初十日]
아침에 눈비가 내렸다.
오후에 해전령海田令과 내가 웅포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윤진사가 외로운
점막店幕에서 봄비에 객회客懷를 견디기 어려워 그것 때문에 서글퍼하며 서운
해 하였다. 주령主令13의 근행覲行14이 멀지 않아 웅포에 일이 있으니 내게 며
칠 묵으면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돌아가기를 간곡하게 권
15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하였다. 오후에 윤진사와 남당의 기와집에 들어가 보았는데, 바로 지난 날에


주령이 사들인 곳이었다. 규모는 웅장하여 비할 데가 없었으나 바깥채와 행
랑, 사당 건물과 창고는 거의 무너져버렸으며 다만 부서진 돌계단과 황량한
초석礎石만은 완연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곁에 큰 연못은 갈아 엎어 밭을 만
들었고, 연못 위쪽에 토대土臺가 있었는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리켜
서 사후射侯15를 세웠던 곳이라고 하였다.

11일 [十一日]
맑음.
임천 죽리竹里의 윤석사 치구致九와 그의 삼종숙三從叔이 왔다. 그래서 함께
사촌형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왕호旺湖의 민경습閔敬習 어른이 이치원李致元 집
에 와서 머무신다는 소식을 듣고, 들러서 뵙고 집에 편지를 부쳤다.

12일 [十二日]
맑음.

13일 [十三日]
맑음.
해전령海田令이 부모님을 찾아뵈러 들렀다가 바로 헤어졌다. 오후에 배를

13 주령(主令): 손님이 정삼품 이상의 위치에 있는 주인을 높여 부르던 말을 말한다. 여기서는 주인


을 가리킨다.
14 근행(覲行): 근친(覲親)의 나들이로 따로 사는 자식이 부모를 찾아뵙는 일을 말한다.
15 사후(射侯): 과녁으로 쓰는 사방 열 자 가량의 베, 가죽을 말한다. 원문에서는 후(侯)가 후( )로
쓰여 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57

타고 웅포로 돌아와서 김낙구金洛龜의 병세를 위문하였는데, 동향同鄕의 인정


상 그만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손찬중孫贊仲이 왔다.

14일 [十四日]
맑음.
찬중이 떠나갔다. 정산定山 공서원公西院16 사는 이훈융李訓戎, 훈융은 훈련대장이
주령을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갔다.
석정石亭 추금록秋金祿이 소금을 정산주인定山主人, 객주에게서 샀는데, 부족한
돈이 78냥이었다. 25일 안에 돌아와서 갚을 것이라고 했으나 서로 믿지 못하
였다. 찬보贊甫는 금록의 이종형인데, 주인댁의 표지標紙로 써서 줄 것을 청하
니, 바로 정산주인의 뜻이었다. 나는 그때 체해서 구토를 하고 겨우 숨을 쉬
고 있었으나 병을 무릅쓰고 써서 주었다.
가동佳洞 김석보金石甫가 시흥始興의 편지를 전해왔다. 석분石奮이 왔다. 남당
에서 윤진사를 들러서 뵙고 부장部將의 편지를 얻어 논호論湖에서 왔다고 하였
는데, 이것은 역시 빨리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15일 [十五日]
맑음
석보를 율정에서 전송하고, 시흥과 전동典洞으로 편지를 부쳤다.
찬보가 동해의 청어가 요즈음 값이 뛰어서 이익을 볼 수 있다. 200두름은
148냥에 샀고, 55두름은 39냥 2전 8푼에 샀다 고 하였다. 월담月潭이 와서 묵

16 공서원(公西院): 공주와 직산 사이에 있던 역원(驛院)을 말한다.


15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었다. 창선감의록倡善感義錄17을 필사하였다. 밤에 월식이 있었다는데, 직접 보


지는 못하고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16일 [十六日]
맑음.
윤진사가 이 새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시장사람들 편에 종이를 보내와서
벽에 붙일 주련柱聯을 써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이런 글에 처음부터 능숙하
지 않아서 종이를 마주하고 앉으니 난감하기만 하고 실제 쓸모도 없을 것
같다. 다만 시속時俗에서 헛된 명예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실內室
의 도배塗褙로는 비록 솜씨가 없더라도 사람의 안목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
도 같아서 억지로 쓰긴 했으나 도저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으니 우습다.
남당 김복여金復汝가 보러왔다.

17일 [十七日]
춘상갑자春上甲子일이다.
흐리고 비가 왔다.

18일 [十八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았다.

17 창선감의록(倡善感義錄): 작자, 연대 미상의 고소설인데, 한문소설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 의 국


문 번역본이다. 중국 명(明) 나라를 배경으로, 대가족제도와 일부다처제 아래 일어나는 배다른 형
제간의 다툼과 그 화해의 과정을 그렸다. 유교적 도덕관에 따른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주제로 하고
있다. 구운몽(九雲夢 이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와 비교되기도 한다. 영조(英祖) 때 김도수(金
道洙), 숙종(肅宗) 때 조성기(趙聖期) 혹은 정준동(鄭浚東) 등이 작자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59

19일 [十九日]
맑음.
춘서에게 대구大口 2마리를 보냈다. 청어를 팔아 남은 이익 중에 수십 금을
찬보에게 돌려보냈다.

20일 [二十日]
아침에 흐렸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지池 오위장五衛將이 왔다. 무주茂朱에 사는 허許 이李 두 노인이 지나다 찾
아왔는데, 전에 유성의 사종숙 댁에 손님으로 있었다고 한다. 박일오朴一梧가
왔다.
고부古阜민란이 크게 일어나서 각 읍에 격문을 전하였다. 그 대략에, 지방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道를 알지 못하고 백성을 돈이 나오는 근원으로
바라본다. 더욱이 전운轉運18을 창설하여 많은 폐단이 심하게 생기니 백성들
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 우리들이 비록 초야의 유민遺
民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태로움을 앉아서 볼 수가 없다. 각 읍의 군자君子들
은 한 목소리로 의기를 내어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종사宗社
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란다 고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흐리고 비가 조금 내렸다.
춘서가 왔다. 회숙晦叔이 와서 집안이 편안하고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셨다

18 전운(轉運): 전운영은 조선 말기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세미(稅米)를 서울로 실어 오는 일


을 맡아보던 관아인데, 고종 20년(1883)에 설치했다가 31년(1894)에 없앴다.
16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는 소식을 전하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주령이 천동에서 돌아왔


다. 손자인 찬중이 왔다.
백목白木 2필[11냥], 주황라紬晃羅 15자[11냥 2전 5푼], 당목唐木 10자[6냥 5전가] 회숙晦
叔의 혼수였다. 침장염沈醬 19 3포를 부강선芙江船에 부치고 그 배를 타고가려
고 점심 때에 나오니 물은 차고 바람도 순조로워서 배가 떠나갔다.

22일 [二十二日]
흐리고 비가 왔다.
아우 근根이 미예美隸, 미당(美堂)의 하인 업록業祿을 데리고 육로를 따라 돌아왔
다. 찬중이 떠나갔다. 예학명 鶴銘20의 글자를 임서臨書하였다.

23일 [二十三日]
서리가 내렸다. 맑았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주령主令이 서방동書房洞 평답坪畓 35두락을 전공유田公有에게서 새로 사들였
다. 그것을 답험踏驗하는 것도 하나의 상쾌한 일이라서 춘서와 찬보를 데리고
가서 보았다. 그리고 윤북청尹北靑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공주 청림靑林

19 침장염(沈醬 ): 장을 담글 소금을 말한다.


20 예학명( 鶴銘): 법첩(法帖)의 이름이다. 서법을 익히는 데 쓴 서첩인데, 청대 고증학자들은 도홍
경 [陶弘景, 456~536]의 글씨로 보았다. 도홍경은 자가 통명(通明), 호는 은거(隱居)로 단릉말릉
(丹陵 陵:江蘇省 南京) 출신이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61

한생원韓生員이 왔다. 그 자식의 혼사가 있어 시흥에서 재물을 구하려고 주령


主令에게서 50금의 전표傳標를 얻었는데, 바로 주명周明씨의 외숙이다.
손감찰이 왔다가 바로 떠났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서방동書房洞 윤생원尹生員이 왔다. 손찬중이 왔다가 떠나갔다. 김금동이 왔
는데 추위가 무서워서 문을 닫고 있다가 이제야 머리를 내미니, 쇠하고 병드
는 일을 어찌하겠는가? 주령主令이 바둑을 두자고 하였으나 정신이 피로하여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여 사양하고 떠나갔다.
새벽 축시丑時, 오전 1 3시에 차섬且暹이 딸을 낳았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손찬중이 왔다. 주동注洞사람이 생일날이어서 점심에 술과 국수를 마련하
였다. 주령主令이 반곡의 환전換錢 700냥을 갚았다. 한생원韓生員이 50금을 가지
고 돌아갔다. 여산礪山 천동면 대성台城 진형철陳珩澈 [자(字)는 광필(光弼)이다]이 왔다.
낙흥樂興이 왔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손찬중과 찬보가 2,000전과 마포麻布 3동同, 150필을 가지고 논산論山에 갔다.
낙흥樂興과 가동佳洞에서 온 사람이 150금과 계곡溪谷에 보낼 부의賻儀를 가지고
떠나갔다. 진씨陳氏, 진형철가 떠나갔다. 서방동書房洞의 윤尹이 왔다가 갔다. 공
주읍의 상봉촌上鳳村 김성학金聖學이 천동에서 와서 윤진사의 편지를 보았다.
16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8일 [二十八日]
맑음.
본읍의 지사동芝沙洞 유진사兪進士가 왔는데, 전주에 사는 이李와 최崔 두 객
이 따라왔다가 바로 떠났다.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바람이 불다가 오후에 비가 내렸다.
윤교관尹敎官 집에서 당나귀와 일꾼을 빌려 김성학을 데리고 여산으로 길을
떠났다. 함열읍咸悅邑에서 여산 오동정梧桐亭의 점막店幕에 이르러 어떤 노인을
만났는데, 성姓은 이李씨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자字는 규원奎元이었다. 원래 안
심동安心洞 근처에 살다가 지금은 탑동塔洞으로 이사했다고 하였다. 함께 가다
가 고삼거리高三巨里에 이르러 헤어졌다. 미동美洞 두화촌豆花村을 거쳐 안심동安
心洞의 산지기 김기철金基哲의 집에 이르렀다.
밤에 비가 왔다.

30일 [三十日]
한식寒食날이다. 아침에 비가 오다가 정오쯤에 그쳤다.
산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내고 투총偸塚을 살펴보았더니, 산소의 주룡主龍은
앉아서든 서서든 보이지 않았다. 100여 걸음 되는 곳에 있는 무덤의 주인은
아직 알지 못하여 다시 경계를 파고 산기슭을 돌아보며 산지기에게 경계를
물어 보았다. 산지기가 말하기를, 주룡 위로 가면 장송이 서있는 곳이 있는
데, 바로 투총한 곳에서 위로 100여 걸음을 가면 청룡靑龍 한 기슭에 이르게
됩니다. 주룡의 서쪽 절반 가장자리와 백호白虎의 앞뒤가 그의 선산先山이라고
하며 지금 산소를 봉안한 곳도 바로 김씨네의 산이기 때문에 전부터 경계를
남유수록 南遊隨錄 163

정하여 이와 같이 지킨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 재상집의 산


소경계가 어찌 이처럼 모호하겠는가? 돌아가서 문적文蹟을 살펴보면 저절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주객主客이 다르고 남들은 반드시 구별하지는 않을 것
이니 일체 잘 보호하라. 안산案山의 한 기슭이 전부 금양禁養, 나무 등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것에 속해 있었고, 일찍이 선친에게 날마다 자기 부모의 산소자리로
쓰게 해달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길이 질척거려서 살펴볼 수가 없었다.
가산嘉山 정시鄭蓍21의 후손과 윤대감 영신榮信씨 생정生庭, 생가의 높임 말의 종질從
侄이 이웃에 와서 살기에 모두 가서 만나보았다. 산 아래의 친구들이 남보다
각별함이 있었다.

3월 초 1일 [三月初一日戊寅]
맑음.
산지기가 일 때문에 한양에 가려 하기에 가형家兄에게 편지를 부쳤다. 돌아
올 때에 두화豆花와 신폭新瀑을 거쳐 소령小嶺을 넘어 의량촌意量村 앞에서 손발
악巽發岳의 점막에 이르렀다. 점막은 산 위에 있었다. 서남쪽 길로 해서 용안龍
安의 봉수대烽燧臺에 올라가 말을 쉬게 하였다. 야교野橋를 넘어 동쪽으로 가서
함열咸悅 지산池山의 손감찰 집에 도착했으나 손감찰은 집에 없었다. 그 집안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가기를 간청하여 마침내 말을 먹이고 점심을 한 뒤에
길을 떠났다. 주령의 집안노비인 고목매高睦賣가 손씨집에 있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기뻐하였다.

21 정시(鄭蓍): 1768(영조 44) 1811(순조 11).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원(德
園), 호는 백우(伯友). 1799년(정조 23)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주부·도총부경력
등을 역임했으며, 18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에서 봉기하여
가산을 습격하였는데, 이에 저항하다 죽었다.
16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오후에 웅포에 도착하였다. 남당의 종형이 왔다가 방금 돌아가면서 편지를


남겨 말하기를, 그 사이에 왕호旺湖에 갔었는데 왕호의 집에 화재가 있었으나
다행히 바로 불을 껐다. 약간의 손해가 없지 않으나 매우 놀랐고, 아울러 부친
의 편지가 있어 멀리서 놀라움과 걱정을 견딜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당나귀를 끌어준 품삯으로 1냥을 주었다.
오후에 일식日食이 있었다는데 보지 못하여 알 수가 없다.

초 2일 [初二日]
흐리고 비가 왔다.
당나귀를 빌린 비용으로 2냥을 주었다. 천곡의 윤진사가 왔다. 김성학이
소금배를 끌고 부강芙江에 갔다.

초 3일 [初三日]
흐림.
주령 및 윤진사와 함께 배를 타고 남당에 이르렀다. 찬보를 논호論湖에 보
내 환표換標를 처리하였다. 배 안에서 시를 지었다.
해전海田의 시이다. [칠언율시이다]

上下江村路不遙 강가의 마을을 오르내려도 길은 멀지 않고


衰年追逐共朝朝 노년에 빈번히 왕래하며 아침마다 함께 하네
兩家相望春宜柳 마주한 두 집의 봄날에 버드나무 어울리고
一葦淸遊夜可簫 밤의 뱃놀이에 퉁소가 좋다.
石壁山如看畵筆 석벽의 산은 그림을 보는 듯하고
風波舟似渡危橋 풍파에 배는 높은 다리를 건너는 듯하다.
箇中自有生涯足 이런 중에 저절로 삶의 만족이 있어
남유수록 南遊隨錄 165

君欲漁時我亦樵 그대가 고기를 잡고 싶을 때에 나도 나무를 하고 싶네


임당林塘의 시이다. [윤진사가 임천의 남당에 살아 그렇게 호를 지었다]

滄波一葦可逍遙 창파의 작은 배는 소요逍遙할 만하고


佳麗江南似六朝 아름다운 강남은 육조六朝와 비슷하네
只有詩硯兼畵筆 단지 시와 벼루 그리고 붓만 있고
恨無盃酒與淸簫 술과 맑은 퉁소가 없어 한스럽네
分明鳥下斜陽岸 새는 분명히 석양이 지는 언덕에 내려앉고
散亂人歸芳草橋 사람들은 흩어져 방초교芳草橋로 돌아간다
我往君來成樂事 나와 그대가 왕래하여 즐거운 일을 만드니
何妨晩節老漁樵 늦은 계절에 노인이 고기 잡고 나무를 한들 어찌 방해
가 되었는가?

소정小亭, [이복영의 호이다]의 시이다.


萬頃如天一葦遙 하늘같은 만경萬頃에 작은 배로 소요하고
芳辰 卽今朝 좋은 날에 불계 가 바로 오늘 아침이네
是日蘭亭無泛棹 이 날 난정蘭亭에선 배를 띄우지 않았고
不時赤壁 吹簫 이 때 적벽赤壁에서 퉁소를 불지 않았던가
醉眼暖迷紅杏雨 살구나무에 내리는 비에 취하여 바라보고
漁歌暮隔綠楊橋 저물녘에 버드나무 다리를 건너 어부의 노래소리가
들리네
空留同志未同賞 헛되이 동지들을 남겨두어 같이 감상하지 못하고
停盃思 樵 처연하게 잔을 멈추어 신을 신고 나무하는 일을 생각
한다.
16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4일 [初四日]
맑음.
세 사람이 함께 종형댁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저녁에 남당에 찾
아왔다. 오시午時, 오전 11 오후 1시에 친구집에 가서 죽산 종형의 편지를 보았는
데, 밥을 얻어먹으려고 이산利山땅으로 이사하고, 부장部將 남규南圭에게 20금
을 주어 제수祭需를 돕게 한다고 하였다. 앞으로 분곡奔哭22하지 않으려는 것
인가? 비정함이 너무 심하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초 5일 [初五日]
맑음.
윤진사는 찬보가 오지 않아서 바로 서둘러 본가로 돌아갔다. 나와 주령은
배를 타고 내려갔다. 찬보가 와서 말하기를, 환전換錢의 가계加計23가 10,000
냥이어서 1,000냥이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초 6일 [初六日]
맑다가 오후에 비가 오려고 하였다.
종형 어른이 주령에게 20금을 환전해주기를 요구하였다. 10냥은 가져온
북포北布24 1필을 사는 값이었다.
신석사申碩士 복원復元이 왔다가 갔다. 석분石奮을 천곡에 보내어 가계加計의
고하高下를 셈하지 않고 환표를 얻어 경성으로 가게 했다. 찬보가 집에 돌아

22 분곡(奔哭): 초상이 났을때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문상하는 의식을 말한다.


23 가계(加計): 화폐의 액면가와 시가(時價)가 다를 때, 그 차액을 더하여 셈하는 것을 말한다.
24 북포(北布): 함경북도에서 생산하던 올이 가늘고 고운 삼베를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67

왔다. 천동의 김성의金聖儀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비가 왔다.
성의가 떠나갔다. 여름철이 다가와서 박朴이 감리환坎 丸 재료를 가지고 왔
기에 3분의 2를 나누어 샀고 그 들어가는 양을 계산하였다. 석류황石硫黃 8냥,
송진가루 8냥, 오미자五味子 1냥 3전, 구기자枸杞子 1냥 3전, 적하수오赤何首烏 1
냥 3전, 백하수오白何首烏 두충杜 파고지破古紙 원지遠志 석창포石菖蒲가
각각 1냥 3전, 백복신白伏神 2냥, 속단續斷 1냥 3전, 인삼人蔘 황백黃柏이 각각
1냥 3전이었다. 계자청오자대작환鷄子淸梧子大作丸은 위의 약재에다가 사물탕四
物湯의 약재를 각각 2근씩 하였다. 그래서 본 가격이 17냥 7전 5푼이고 지난
가을에 모자랐던 약값이 1냥이어서 합계가 18냥 7전 5푼이 되었다. 새해 전
에 준 20냥과 흥성興成의 조條 중에 1냥 2전 5푼을 합하니 21냥 2전 5푼이
되었고, 거기서 제하고 남은 돈은 2냥 5전이 되었다. 그것으로 인삼을 빼고
비아탕肥兒蕩25 2제劑를 가져오게 했고, 사물탕四物湯의 약재는 각각 2근 중에
숙호熟 1봉 6냥 8전, 당귀當歸 천궁川芎 백작약白芍藥 각각 5냥을 거듭 먼저
가져오게 하였다.
찬보는 오지 않았고 춘서도 돌아갔다.

초 8일 [初八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개려고 하였다.
세 발 달린 토기탕관에 사물탕四物湯을 달였고, 감리환 한 줌을 먹었다. 오

25 비아탕(肥兒蕩): 어린이가 맥이 없고 헛배가 부르는 증상에 대한 처방을 말한다.


16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후부터 온 몸이 가렵고 붉어져서 옻독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유황의 독


일 것이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가 주신 편지를 받아보았더니, 중리中里의
민경식閔卿植이 어젯밤에 그 아비를 모정茅亭의 끝자락에 투장偸葬하였다. 그곳
은 바로 백종조비伯從祖 신씨 부인의 산소 왼쪽 옆의 아주 가까운 데였다.
이른 아침에 비로소 알았으나 가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가 남을 해치려
고 못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날 이런 변괴가 일어났겠는가?
억장이 막히고 심장이 서늘해져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가려움이 심하고 다리가 당기고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윤복여尹復
汝의 집에서 당나귀를 얻어 남당 종형집에 도착했으나 집에 없었다. 오랫동안
백부伯父의 영연靈筵에 곡哭을 하고 따져보니 상사祥事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임
천읍의 근처에서 업동業同과 낙흥樂興을 만나서 몇 마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이르니 반교의 종형어른이 와서 계셨다.

11일 [十一日]
한여름처럼 맑고 더웠다.
본읍 수령이 한양에 올라가서 겸관兼官26이 홍산鴻山에 있었다. 종형이 판옥
判玉을 데리고 홍산에 가서 소장을 내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69

구정鷗亭의 최가와 이웃마을 이가李哥가 모두 장소葬所에 와서 일을 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최가는 전에 우리 행랑에 있었고, 이가는 여러 해 동안 이웃에
서 물과 불을 나누어 쓰던 한 집안과 같았으나 잡아다 매질했다. 박가와 임
가는 산지기이고 권이權伊는 집의 종인데, 울타리 건너 투장偸葬을 살피지 못
하고 소홀히 한 죄목으로 우선 엄하게 매질했다.

12일 [十二日]
맑음.
오시午時에 판옥이 홍산에서 왔다. 관아에서 보낸 묘지의 그림을 가지고 왔
는데 부여扶餘의 형리刑吏가 수결한 것이다. 판옥으로 하여금 본 읍의 공관空官
에 공문을 전하게 하였다. 형리가 모두 나가서 날이 저물 때에 비로소 일년一年
이라는 젊은 아전과 함께 나왔다. 이름은 이한민李漢敏이고 본래는 공주의 아전
이었다. 날이 저물어서 돌려보내고 내일 일찍 오게 하였다.
당리唐里 윤감역尹監役 어른이 오셨고, 임경선林景先이 찾아왔다.
민씨 집에서 사람을 시켜 우리 집의 하인을 잡아 최가와 이가의 일을 보복
하려고 하였다. 보내지 않으니 다시 와서 종득宗得을 잡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구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국동菊洞의 매부인 정鄭
이 왔다.

13일 [十三日]
맑음.
형리가 와서 도형圖形을 재어보니 백종조비伯從祖 의 산소에서 투장한 무덤

26 겸관(兼官): 한 고을의 수령자리가 비었을 때 이웃 고을 수령이 그 사무를 겸직하는 것을 말한다.


17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이 30자가 되지 않아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였다. 그 가운데 작은 골짜기가


있어 직접 가서 재어보니 30자에 가까웠다. 부안공扶安公의 산소가 조금 멀긴
했으나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였다. 날이 늦어져서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판
옥을 데리고 홍산읍에 가게 하였다.
저녁 때 비가 내렸다. 노촌老村의 정씨 어른이 찾아오셨다. 임경회林景會가
찾아왔다. 매부 정鄭이 남당으로 떠나갔다.

14일 [十四日]
흐리고 비가 왔다.
남당 백부伯父님의 대상大祥 입재入齋27에 참석하지를 못하니 멀리서 슬프고
애통하여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홍산에서 바로 남당에 가서 제사에 참여하게
했는데 과연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노성魯城 소사素沙의 조생원趙生員 어른이 오셨는데, 바로 월곡月谷 진사 조우
현趙禹玄 생가의 아버지이고 용전龍田 윤오병尹午炳의 처妻 할아버지이다. 올해
76세인데 기력이 강건하여 걸어서 오셨다. 늙었으나 더욱 강건하구나.
또 감리환을 먹었다. 강판동姜判童의 혼례 때에 빌려간 승교乘轎가 돌아왔다.
조생원 어른이 돌아가셨다. 홍주 갈동 사는 박씨에게 시집간 누이동생 내외
가 왔다.

15일 [十五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시午時 때에 조금 개었다.

27 입재(入齋): 제사 전날에 음식과 행동을 조심하며 재계(齋戒)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제사를


가리킨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71

갈동 하인이 돌아가며 당나귀 1마리와 하인 1명을 남기고 박랑朴郞, 누이동생의


남편에게 돌아간다고 하였다. 사람을 탑동에 보내 종가의 물건인 천익天翼,28
목화木靴, 목안木雁, 청사초롱 등을 가져왔다.
교촌校村 이여진李汝振에게 먼저 1냥을 보내 인삼 8전을 얻어 다시 비아탕
肥兒蕩에 넣었다. 장교 김양배金良培가 와서 성역전城役錢의 영조零條 292냥 3전을
요구하기에 모두 주었다. 능산陵山 정백원鄭伯元이 전립氈笠을 빌려주기를 청하
려고 암염소 1마리를 보내왔다. 혼례에 쓰려는데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구정鷗亭의 동장洞長인 박가朴哥가 와서 각 읍의 관전官錢과 작년 호포를 합
하여 1냥 5전 9푼을 요구하기에 모두 주었다. 이여진이 왔다가 바로 떠났다.
성만性萬이 한양에서 돌아와 가형家兄의 안부편지를 받아보니 달리 들을만한
한양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사인士人 홍종우洪鐘宇가 마침내 상해上海에서 흉괴凶
魁인 김옥균金玉均을 잡아 죽이고 시신을 싣고 돌아와 도시都市에서 형벌을 줄
계획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
겠다. 그러나 만리萬里를 넘나드는 괴수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형률을 적용한
것은 종우의 공이 크다. 어찌 한漢의 부개자傅介子와 함께 논하지 않겠는가?
아우 근根이 홍산읍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지난날에 민씨 쪽과 형리刑吏가
해가 저물어가서 각각 그 집에 돌아가 다음 날 새벽에 이어서 하기로 약속하
였다. 그도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와서 빙현氷峴에 유숙하고, 다음 날에 일찍
홍산읍에 도착하여 하루 종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홍산의 수령이
오늘 아침에 보령保寧으로 떠나 마침내 어찌할 수가 없어 돌아왔다 라고 하였
다. 이 또한 무슨 곡절인지 매우 분하고 한탄스러웠다.

28 천익(天翼): 철릭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무관이 입던 공복으로 직령(直領)이고 허리에 주름이 잡


혔으며 큰 소매가 달렸다.
29 영조(零條): 셈을 할때 조금 모자라서 남은 액수를 말한다.
17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6일 [十六日]
흐림.
박랑朴郞이 돌아갔다. 왕진汪津의 조생원趙生員 공오公五씨가 걸산傑山 이진사
치함致咸씨와 함께 왔다가 바로 갔다. 중리中里 민안주閔安州가 내려왔다. 가마
꾼이 돌아가는 편에 가형의 봄 옷을 부쳤다.

17일 [十七日]
맑음.
김성은金聖恩이 보러 왔다. 임동지林同知 성탁聖鐸이 보러 왔다. 오후에 길을
떠나 반교에 이르렀다.

18일 [十八日]
맑음.
임덕규林德圭는 바로 육촌형의 이모부인데, 근래에 화갈촌花葛村에 이사를 왔
다. 육촌형 및 이덕현李德賢과 함께 길을 떠나 임덕규에게 들러보았다. 그의
아버지 제천堤川 병익炳翼 어른이 별실別室, 첩을 데리고 내대촌內垈村에 살고 있
어 들러서 인사를 하였다. 저물녘에 보령 죽동竹洞에 이르러 조함평趙咸平 어른께
인사를 하였다. 내종형과 희원羲元이 한양에 갔었는데, 희원이 방금 북쪽한양
에서 돌아왔다.
대흥大興의 수령 이창세李昌世가 왔는데, 바로 주장主丈의 친사돈이었다.

19일 [十九日]
맑다가 흐려서 어둑어둑하여 하늘에 가득하였다.
이우李友, 이덕현가 피곤하여 자리에 곯아떨어졌다. 종형제가 역촌驛村에 이르
남유수록 南遊隨錄 173

렀는데, 바로 부원군府院君 민치록閔致祿30의 장례에 재상 보국輔國부터 승지承旨


주서注書에 이르기까지 민씨 10여 명과 타성他姓인 금백錦伯 및 각읍 수령들이
안개처럼 늘어서고 별처럼 달려왔다. 중도에서 박취운朴醉雲을 만났다. 그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 朴彭年)의 호의 후손이므로 그렇게 호를 지었고 근래에 연산連
山 땅에 이주하였다.
동구洞口에 들어가다 위원령渭原令과 온양溫陽 좌부左阜의 친족 오위장을 만났
는데, 내게는 아저씨뻘 되는 항렬이었다. 보령 사동砂洞의 친족과 만나게 하
여 말을 해보니 바로 참의공參議公31 부실副室, 첩의 계통系統인 토산공兎山公의 후
손이었다. 내게는 대부大父뻘의 항렬로 이름은 원호源鎬이고 자字는 경술景述이
며 시임時任 수사水使의 외숙이었다. 날이 늦어져서 사동 친족의 집에서 유숙
하였다.

20일 [二十日]
흐려서 어둑어둑하였다.
돌아오다가 마산촌馬山村에 이르렀다. 종친인 재동在東, [자는 자춘(子春)이다]의 아
들 공현公鉉과 후현侯鉉은 청백리공淸白吏公32의 둘째아들인 수령守領의 후손으
로 한 마을 10여 호 중에 타성바지가 없었고 중간에 투향投鄕33했다가 지금은
그만두고 물러났다고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죽동竹洞에 이르렀다. 이번
행차는 산송山訟을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 소장을 내려는 것이었

30 민치록(閔致祿): 1799~1858. 명성왕후의 친부이며 딸이 왕후에 책봉됨으로써 여성부원군(驪城府


院君)이 되었다.
31 이담(李湛): 이백지(李伯持)의 5대손이다. 호는 정존재(靜存齋).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선조 때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32 이백지(李伯持): 태종 때 관찰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33 투향(投鄕): 시골 선비가 지방관아의 관원이 되는 것을 말한다.
17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다. 단지 부여와 홍산의 두 수령만이 아니라, 감사監司와 민씨 재상들이라도


모두 그 억울함을 듣고 그 공심公心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나이 든 어
른들과 상의하였더니 한결같이 일에 이로움이 없다 라고 말하고는 금세 얼
굴에 근심을 띠어서 끝내 하지 못하였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21일 [二十一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광주廣州 사헌촌師軒村 신참판申參判 단檀의 셋째 아들인 주서注書 필희弼熙가
호상護喪34을 위해 역촌에 이르러 조우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 중에 처음부
터 끝까지 호상을 한 사람은 이 사람 뿐이었다.

22일 [二十二日]
맑았지만 날씨가 다시 매우 추워졌다.
천렵川獵하였는데 잡은 것이 없었다. 주인 및 사촌형제들과 시를 지었다.
轉眄春光已暮天 돌아보니 봄빛은 이미 저물고
長堤一望思悽然 긴 둑은 아득하여 생각이 처연하다
紅飄驛路千堆雪 역로驛路에 많은 눈이 날려 쌓이고
碧擁溪橋萬縷煙 시내다리에 만 가닥 연기가 둘러쌌네
徒有流觴同逸少 다만 술잔을 띄워 일소逸少, 왕희지와 함께 하니
誰能擧網待蘇仙 누가 그물을 들어 소선蘇仙, 소식(蘇軾)을 기다리겠는가

34 호상(護喪): 장례에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75

閑愁無限題難得 수심은 한이 없어 글을 짓지 못하고,


盡日空提筆似椽 종일 헛되이 서까래처럼 붓을 들고 있네

처음에 죽동에 이르러서 시를 읊는다


乘春憑望懶回頭 봄을 맞아 느긋이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十載重遊拭病眸 10년만에 다시 노닐며 병든 눈을 닦는다
洞府煙沈垂柳合 동부洞府는 연기에 묻혀 늘어진 버드나무와 어울리고
海門日 暮天浮 해문海門은 날마다 요동하여 저녁 하늘에 떠있네
堂中白髮今長健 집안에 백발노인은 지금도 강건하나
山外紅塵摠 愁 산 밖의 홍진紅塵은 모두 근심스럽네.
擬向眉塋移屋近 미영眉塋을 집 근처로 옮겨
我來君往亦風流 나와 그대가 오고 가는 것도 풍류이리라.

23일 [二十三日]
맑음.
반교로 떠날 때에 율시律詩 1수를 지었다.
短 遙指白雲間 지팡이로 멀리 구름 사이를 가리키니
巖 溪橋意更關 바위 돌계단과 시내다리는 다시 닫으려하는 듯
木末迷明盤額路 나무 끝 반액로盤額路는 희미하고
天邊削翠峨眉山 하늘가 아미산峨眉山은 비취를 깍은 듯하네.
固知重訪非容易 참으로 다시 찾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自笑浮生不暫閑 잠시도 한가롭지 않은 헛된 인생에 웃음을 짓네.
雨後靑靑堤上柳 비가 온 뒤에 언덕 위 푸른 버드나무가
臨風 若爲攀 바람을 대하고 쓸쓸히 잡아당기는 듯하네.
17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성주동聖住洞35에 들러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의 비碑를 보았는데, 비석이 매우 컸


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비석은 떠 있어서 비석의 귀부龜趺에 붙어 있지 않다
라고 하였다. 살펴보니 귀부龜趺를 뚫지 않고 서 있었으나 머리카락이 들어갈
정도의 흔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이 너무 황당하여 그대로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 옆에 가부좌跏趺坐를 한 철불상鐵佛像이 있었는데, 반쪽이 부서져 있었
으나 매우 장대하였다. 그리고 좌우에 크고 작은 4좌座의 탑이 있었다. 보리밭
가운데에 무너진 초석礎石과 황량한 담이 잡초에 파묻혀 있었다. 이것이 거대한
사찰의 옛터였다. 백운사白雲寺를 따라 고개를 넘어 무량사無樑寺를 보고 싶었으
나 날이 저물어서 그러지 못했다. 바로 도화담桃花潭을 따라 반교에 이르렀다.

24일 [二十四日]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 개었다.
봉래와 함께 길을 가서 안현鞍峴 박경직朴景直 노인의 집에 들러 점심을 먹
고 정문旌門의 단청丹靑을 보았다. 화공畵工은 그 근처의 전씨田氏라고 하였다.
단청 4 5종류를 구하였다. 박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와서 현판을 써주기를
요청하였다. 탑동에 들러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아우 근根의 혼인은 기약한 대로 혼례를 치루고 다음 날에 돌아가는데, 새
사람이 기대에 흡족하여 다행스럽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35 성주동(聖住洞): 현 충남 보령시 미산면으로, 조선(朝鮮) 시대에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


선 말엽에는 남포군(藍浦郡) 북외면(北外面) 지역(地域)이었는데, 성주산(聖住山) 아래이므로 성주
골 또는 성주동(聖住洞)이라 하였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77

곡령鵠嶺 시장柴場36의 위쪽 전답田畓을 경작하는 사람이 하천을 파서 물을


대려고 시장 한 귀퉁이를 사기를 청하였다. 곡령은 생원 민주백閔周伯과 구포
鳩浦 동지同知 임성탁林聖鐸이 여러번 말하였다. 그래서 나가 보고 경계를 정하
였다. 남쪽가의 한 줄기를 길게 자르니 시장 나머지 땅의 위쪽 넓은 곳은 구
포촌 내의 팽목彭木을 향해서 가로로 넓이가 12보가 되었고, 아래쪽의 좁은 곳
은 곡령 아래 샘泉을 향해 6보가 되어 그 아래 중간에 가로로 작은 도랑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시장의 하천을 판 곳에서 10냥을 받기를 청하기에 허락
하였다. 그 때에 민생원과 임동지가 모두 답보踏步 중에 있어 강관진姜寬鎭이
종득宗得을 불러 가서 보았다. 남당의 종형이 왔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봉래와 회숙을 데리고 읍에 들어가 소장을 내었다. 본 읍의 수령 심의훈沈
宜勳이 데김題音하기를, 이미 도형圖形에서 말했으니 양쪽에 대답하겠다 라고
하였다. 저쪽, 민씨 쪽에서 무소誣訴37하기를, 병오丙午, 1846년 이후에 산기슭
전체를 빼앗겼다 라고 하였다. 민계호閔啓鎬와 민영철閔泳哲 두 대감이 보령의
장지葬地에서 이 곳에 와서 성묘를 하고 돌아가다가 금백錦伯을 만나 산송을
맡아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바로 의송을 내었다. 그 데김의 대략에, 공
심公心에 따라 처결하여 소란을 일으키거나 침탈이 없게 하라 고 하였다. 본
읍에서 단자單子를 올리니, 데김에서 이르기를, 매장을 금하는 것은 무덤 때
문이지 땅 때문이 아니다. 비록 대대로 지켜온 땅이라고 하지만 법에 이치가

36 시장(柴場): 나무를 말리는 나뭇갓을 말한다. 나뭇갓은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단속하는
땅을 말한다.
37 무소(誣訴): 없는 일을 꾸며서 관청에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17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닿지 않아 패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그 소장訴狀에서 그 땅이


바로 11세世 정랑正郞의 정자亭子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도형圖形의 데김에,
이 도형을 보면 이씨李氏 묘소는 후록後麓의 위에 있고, 민씨閔氏 부모의 묘소
는 그 선산先山에 있다. 두 묘소의 사이에 매장하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만영李萬榮의 할머니 산소가 20여 자여서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이
는 곳이라면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이 민씨 집안이 대대로 지켜
온 땅으로 병오丙午년 이후에 산기슭 전체를 빼앗겼다고 들었는데 원통한 마
음이 없겠는가? 그리고 이미 매장한 무덤을 하루가 못되어 파내도록 독촉하
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같은 산에 개인적으로 화해하면 관과 마을
이 무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가한 때를 기다려 파서 옮기겠다는 다짐
音38을 받아주겠다 라고 하였다. 그 다짐에, 1894년 3월 26일 민경식閔卿植,
나이 35세. 아뢰옵기는 제가 매장을 금지한 이만영의 땅에 부모의 산소를 잘
못 묻었다가 이번 송사에서 이치에 닿지 않아 패소하여 이장移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힘이 남는 가을을 기다려 산소를 파서 옮기겠다는 뜻으로 관
가에 다짐을 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왼쪽 위에 관자官字를 쓰고 아래에 수결手決을 하였으며 다시 그 아래에 백
자白字를 쓰고 민씨閔氏가 도장을 찍었다.
김현모金顯謨가 점심밥을 가져왔다. 괴로움을 끼쳐 부끄러웠다. 저녁에 외출
하여 안주安州목사를 지낸 민씨 어른에게 들러 인사를 하였다. 병丙자 들어가는
해에 도정都正에 올랐고 뒤에 공조참의가 되었다. 그의 장남은 용안龍安 현감이
되었고, 막내아들도 벼슬을 한 뒤에 소성小成39하였으므로 축하를 하였다. 말이

38 다짐( 音): 관아에서 백성에게 확실한 대답을 받는 일을 말한다.


39 소성(小成): 과거의 소과(小科) 가운데에서 초시(初試)나 종시(終試)에 합격하는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79

모정茅亭의 산송에 미치자 말하기를, 우리 집의 묘소도 그 아래에 있다. 그러나


구차하게 임시로 매장하여 분묘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그대 집의 매장을
금하지 않았으니 지금 반드시 송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식을 위
해 출력出力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시생
의 종조모從祖母 산소는 성관聖官 [경식(卿植)의 자이다]의 부모 산소에 비교하면 훨씬
떨어져 있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그 사이가 어느 정도인가 라고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봉래가 거군炬軍을 데리고 돌아갔다. 산송 때문에 관에서 다짐을 주어 비록
영문營門에 가서 내었으나 반드시 유쾌하지 않았다. 단지 본관의 뜻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남당의 종형님이 돌아갔다.

28일 [二十八日]
비가 왔다.
어제 늦게 아우 근根을 한양에 보냈다. 용전에 가서 머물다가 비 때문에 가
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조인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이 양주楊州 송산서원松山書院에
봉향되어 있었는데, 전에 훼철되었다가40 근래에 조정의 명이 있어 훼철된 서
원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매우 성대한 은전이었다.
다른 집안들은 모두 이미 완성했으나 우리 집안만이 힘이 모자라서 하지 못했
으니 어찌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양 종친회에서 돈을 모으자고 발

40 1865년 흥선대원군의 조치에 의해 실시되었던 서원철폐를 말하는 것이다.


18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의하여 근영根榮을 서북도西北道의 수전유사收錢有司로 정하였기 때문에 한양에


올라가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가형家兄에게 여름옷을 부쳤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아우 근根이 출발하였고, 대산大山 서선달徐先達이 왔다.

4월 초 1일 [初一日]
맑음.
매부 서선달이 그 부모의 병환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갔다.

초 2일 [初二日]
흐리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초 3일 [初三日]
아침 일찍 비가 오다가 늦게야 개었다.
동학東學이 크게 일어나서 종종 무리를 모아 사대부에게 못된 짓을 하
고 욕을 보였다. 세도世道가 변한 것이다. 사대부 중에 평소 기세를 믿고
위협을 하여 백성을 침탈한 자들은 모두 그 화를 모면하지 못했는데, 또
한 스스로 불러온 결과였다. 그러나 사소한 원한조차 보복하니 도리의
어그러짐이 심하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181

초 5일 [初五日]
맑음.
본관에게 소장을 내었다. 도형圖形의 판결문 중에 산기슭의 전체를 빼앗
겼다는 등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의 매득문권買得文券과 송변문장訟辯文
狀을 덧붙여서 무고를 밝혔다. 그 대략에, 저쪽에서 매장한 곳이 바로 그의
11세 조상의 정자亭子 터라고 하지만, 정자를 짓는 것과 무덤을 쓰는 것은 같
지 않고 매장을 금하는 것과 땅을 다투는 것은 다릅니다. 만약 지난날 정자
터라고 하여 모두 매장을 하게 한다면 세상에 어찌 매장할 수 없는 땅이 있겠
으며, 나라에 어찌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법이 있겠습니까? 몇 백년 전에 과연
정자가 있었는지는 참으로 알 수가 없고 살펴볼 수도 없습니다. 두 집안의 산
이 자리 잡은 곳에 그가 계속 매장하려 한다면 그 선산先山이라도 당연히 금해
야 할 텐데, 더욱이 다른 집안의 산이라면 그가 무슨 의지할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두 민씨閔氏네 산은 모두 저희 집이 산소를 쓰기 전에 있었다는데, 산이
높고 땅은 넓다고 한들 처음부터 서로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 둘러대는 말의
구차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고, 한밤중에 몰래 매장했다거나 대낮에 대놓고 묻
었다는 등의 말은 번거롭게 어찌 일일이 들겠습니까? 지난 경자庚子, 1840년에
복영復榮의 할아버지 참판공參判公, 원필(源弼)이다이 비싼 값으로 모정茅亭 민보성閔
寶城 집의 가대家垈을 샀고, 을사乙巳, 1845년에 다시 정동지鄭同知와 한석성韓石城의
두 집터를 샀습니다. 병오丙午, 1846년 봄에 집을 허물고 산소를 썼고, 밭을 없애
고 소나무를 심었으니, 들인 공이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지금 이 모정 한쪽의
산기슭은 바로 그 당시 세 집터와 집 뒤의 울타리 안에 있던 몇 경頃의 과수원
과 채마밭입니다.
중리의 민씨閔氏는 처음부터 금할 만한 무덤이 없었고 다툴만한 땅도 아니었
습니다. 단지 향곡鄕曲에서 제멋대로 하는 습속과 산등성이 맞은편에 떨어져 있
18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는 별묘別廟41를 핑계 삼으나, 스스로 근거가 없음을 알기에 감히 공정公庭에 제


기하지 못하였습니다. 함부로 성대한 무리를 믿고 몰래 사사로이 파려고 모의
하니, 그 흉계와 못된 버릇은 전부터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의 이치가 있는
데, 어찌 징계하는 처사가 없었겠습니까? 그리고 민씨도 스스로 뉘우치고 직접
잘못을 드러냈기에 이웃 간에 호의를 닦은 지가 50 6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
고 저희 집안에서 계속 매장을 하여 그 아래에 이미 5세世 8분의 묘가 있게 되었
습니다. 민경식閔卿植은 늦게 태어난 후손으로서 지난날의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
지 않고 도리어 한 마디 말을 지어내 송사를 조장하는 근거로 삼아 갑자기 거짓
된 소송을 하면서, 모욕을 당했다! 빼앗겼다 합니다. 모욕을 당했다는 견욕見
辱 2글자로 빼앗을 기회를 만들려고 가장한 것이니, 그 계략이 매우 교묘합니다.
성주城主가 이에 군자라도 잠시 속을 수 있으니, 간악한 자의 진심인 것처럼 꾸
민 말을 살피지 못하고 도형圖形에 이러이러 하다고 판결을 하였습니다.
아! 민경식이 성주를 속인 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라고 하였다. 이
에 판결문에 말하기를, 이미 가을을 기다려 파서 옮기겠다는 다짐을 받았으
니 그 때에 다시 소송하여 이장移葬을 독촉하라 고 하였다. 교촌校村 앞을 지
나가다 청인淸人 장득영張得英을 만났다. 평제탑平濟塔42의 글자를 탁본했는데,
이것은 하남河南 사람 권회소權懷素의 글씨체이나 누락되어서 알 수가 없었고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0에 2 3글자뿐이었다.
박경직朴敬直이 왔는데,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효행孝行과 열녀烈女로 정려
旌閭를 받은 일로 현판글씨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41 별묘(別廟): 가묘에서 받들 수 없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둔 사당을 말한다.


42 평제탑(平濟塔): 부여 동남리에 있는 정림사지에 있는 탑으로, 현재 백제탑이라 부른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인을 데려와 자기의 공적을 과시하려고 정림사탑 뒷면에 기록을 새겼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83

초 6일 [初六日]
맑음.
나의 구로일 勞日43이다. 신탑동新塔洞 대부大父님과 중리 족숙族叔이 오셨다
가 돌아갔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상평上坪의 벌자伐字 하루갈이 포전浦田, 갯밭을 40금에 임경선林景先에게 팔았
고 선금으로 20금을 받았다.
고부古阜민요, 곧 동학의 무리들이 해산했다가 다시 모였다고 한다. 안핵사
按 使 이용태李容泰가 부자들의 재물을 취하려고 해서 다시 모였다고 하는데,
혹은 감사 김문현金文鉉이 그 괴수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6 7읍의 무기를 훔쳐 가져서 그 형세를 예측할 수 없어 감사가 각 읍에 전
령을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공격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중리의 민용안閔龍安 진호進鎬가 오늘 부임하였다. 영문營門에서 전령을 보내 해
당 읍으로 하여금 병사 30명을 모집해서 좌수座首가 영솔하여 초하룻날에 일제히
여산礪山에 도착하게 하였으나 기일을 어겨서 공형을 잡아갔다고 한다.
박경직과 길을 떠나 장암場巖에 도착하여 헤어졌다. 오후에 남당에 이르러
요기를 하였다. 저물녘에 또 비가 와서 빨리 걸어 웅포에 이르렀다. 윤진사
와 권학림權鶴林이 와서 있었다.

43 구로일( 勞日): 자식을 낳아서 기르느라고 부모가 애쓰기 시작한 날이라는 뜻으로, 생일을 말한다.
18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8일 [初八日]
흐림.
윤진사와 권학림 그리고 주령主令과 함께 배를 타고 남당에 갔다.
집안 노비가 돌아왔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이 마을의 행상行商, 부상負商, 백정 등은 모두 각기 그 두목이 소집하여 떠
났다. 촌민들은 관의 명령으로 떠나게 하였으나 모두 도망쳐서 관예官隸, 관속
들이 나와 잡아가니 마을이 동요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왕왕 들렸다. 군중軍中
에서 도망쳐 돌아오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그 얘기를 전하였다.
선봉장 이재섭李在燮과 송봉호宋鳳浩는 본래 전주의 아전으로 신망이 없었으나
마침내 중임重任을 제수 받았다. 기율紀律이 엄중하지 않아 병사를 보내 백성들
을 침탈하니, 심하게는 부녀자를 겁탈해서 지나가는 곳이 스산하였다. 소를 잡
아 병사를 먹일 때에 먼저 자신만 배부르게 먹고 바로 말을 몰아가서 병사들이
모두 굶주렸다. 따뜻한 집과 깊숙한 장막에서 자신만 편안함을 취하고 이슬을
맞은 병사들은 추워서 견디지를 못했다. 지나는 곳마다 촌민으로 하여금 음식
을 제공하게 했으나 백성들과 병사들은 모두 괴로워하였다.
적을 쫓아 고부古阜 두승산斗升山44에 이르렀는데, 적이 산 위를 점거하고 있
어서 관군이 산 아래에 있었다. 4월 7일에 날이 밝기 전에 두 진영이 서로
접전을 했는데,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형세가 달라 관군이 무너지니,
10,000여 명의 군사가 4,000 5,000명의 적들에게 크게 패하였다. 싸울 때에

44 두승산(斗升山): 실제 전투는 두승산 근방에 있는 황토재에서 이루어 졌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85

장수가 먼저 도망하였고 죽은 군졸들이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도망하여 흩어졌다. 적이 산 위에서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병대와 포수는
죽이고 용서하지 말라. 그 나머지 상인商人과 백성은 원한은 있지만 죄가 없으니
가볍게 해치지 말라 라고 하니, 인심이 더욱 풀어졌다.
나중에 들었는데, 고부에서 죽은 관군을 조사해 보니 900여 명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전주사람 김용태金用泰가 말하기를, 고부의 민란은 조병갑趙秉甲이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고 안핵사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으나, 두 사람
만을 전적으로 허물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무슨 말인가? 하였
더니, 고부의 백성들이 원망을 호소하려 관문밖에 모였을 때에 처음에 그
사람을 시중市中에서 따르는 자는 몇 십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일대에서 듣
고 따르는 자가 다시 몇 십명이 되어 100명, 1,000명을 이루어 갑자기 무리를
이루었다. 동학인 전명숙全明肅45이란 자가 거기에 들어가 스스로 장두狀頭가
되어 계책을 세워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요구한 것을 이루지 못하면 도
리어 화를 입으니 갑자기 흩어져서는 안 된다 라고 하고, 마침내 관창官倉의
쌀을 가져다가 먹었다. 영읍營邑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허락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우리가 요구한 것을 이루었으니 떠나가겠다 라고 하였
다. 전명숙은 형세가 외롭자 잠시 해산했다가 그 무리를 이끌고 다시 모여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관의 곡식을 먹은 것은 죄가 죽음에 해당된
다. 죽기를 기다리느니 어찌 살기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여 따르는
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 말이 제법 이치에 가깝다.
주령主令이 돌아갔다.

45 전명숙(全明肅):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全琫準)을 말한다. 자(字)가 명숙(明叔)인데 여기


에는 명숙(明肅)으로 잘못 되어있다.
18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10일 [初十日]
맑음.
율정栗亭의 하인이 왕호旺湖에서 와서 부모님께서 편안하시고 회숙晦叔도 별
탈 없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종중宗中의 수전북도유사收錢北道有司로 차
임되어 왔는데, 이처럼 어수선한 때에 어떻게 멀리 다닐 수 있을까? 가형家兄
이 여행 중에 편안하시다니 기쁘고 위로가 되었으나 함께 돌아오지 않았는
데, 돈을 거두는 논의는 그치지 않으니 한양은 그리 급박하지 않은가보다.
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경병京兵 1,500명을 이끌고 내려왔다.
권학림이 돌아갔다.

11일 [十一日]
맑음.
청병淸兵을 실은 배 1척이 군창軍倉에 정박하여 홍장洪將, 홍계훈의 뒤를 도왔
다. 전운사轉運使가 군사들을 먹이려고 각 읍에 닭과 계란을 요구하였고, 관속
들로 하여금 각 마을에서 거두도록 하였다. 날아가는 닭을 잡고 놓여있는 계
란을 거두기를 매우 서두르니 백성들이 더욱 실망하였다.

12일 [十二日]
아침에 맑았다가 늦게 흐려졌다.
이대감 용원容元씨가 상소하여 대리代理를 쟁론한 일로 죄를 얻어 흑산도黑山
島에 유배된 지가 올해로 4년이 되었다. 그의 셋째아들 중우重愚가 목도木道에서
아버지를 뵈러 가려고 앞의 점막店幕에서 배를 구하였다. 그의 반당伴 46 황생

46 반당(伴 ): 한양의 관아에서 부리는 관원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87

黃生이 주령主令을 알고 있어 찾아왔다. 나는 이대감 부자父子를 뵌 적이 없었으


나 평소에 그 곧은 의기와 청아한 명성을 흠모하여 말고삐를 잡고 머물러
가기를 바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아들이 큰 바다를 건너 높은 파
도를 타고 뵈러갈 때에 기뻐서 마음에 감회가 있어 말하기를, 이씨李氏는 바
로 12세世 할머니의 본댁으로 그 때에 우리 집안이 불행하여 가화家禍가 있어
세 아들을 데리고 가서 의지하여 가르치고 길러 성취하였으니, 우리 집안으
로 하여금 오늘의 문호門戶를 갖게 한 것은 이씨李氏 집안 덕분입니다. 비록
후손이지만 오히려 옛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어젯밤에 달빛
을 타고 찾아왔는데, 나이는 25세이고 자字는 계연季淵이었다.
김석구金碩求가 읍에서 와서 확실한 기별을 전하기를, 홍장洪將이 순천順川
영장營將47 김시풍金始豊을 죽이고 사람들의 목숨을 많이 해쳐서 백성들의 소
요를 불러왔고, 이재섭李在涉과 송봉호宋鳳浩를 군중軍中에서 형틀에 묶었으며,
어제 군대를 이동시켰다 라고 하였다.
초토사가 각 읍에 감결을 보내 깨우쳐 타이르기를, 백성들을 안심시켜 생
업에 힘쓰게 하고, 동학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쳐서 돌아오면 귀
히 여기라. 만약 그 우두머리를 잡아서 바치면 죄는 없고 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안심시키려는 뜻이었다. 완백完伯에게 경병京兵을 기다리지 않
고 함부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인 것을 책망하니 완백이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는 김시풍도 동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적도를 토벌하려 하지 않았
다고 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47 순천영장(順天營將): 전주영장의 오기이다.


18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3일 [十三日]
맑음.
주령의 외손外孫 윤순화尹順和가 왔다. 충청도에서도 군사를 내어 동학을 잡
아들이니 모두 흩어져 도망했으나, 진잠鎭岑에서는 또 동도東徒에게 군기를 빼
앗겼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것인가? 여산진礪山鎭 아래 5개 읍의 병사들 군
습정軍濕亭에 주둔하였는데, 날마다 사람들에게 100전을 주어 먹는 것이 남아
돌고 술을 먹고 투전鬪錢을 하며 논다고 하였다. 사납지 않은 것은 좋지만 훈
련을 하지 않고 단지 놀며 쉰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14일 [十四日]
맑음.
월담月潭이 와서 묵었다. 이 마을의 행상行商으로 군에 나가 죽은 자가 2명이다.

15일 [十五日]
맑음.
임당林塘 윤진사가 그의 손자 팔기八起를 데리고 와서 기숙하며 글씨를 배우기
를 바랐다. 당련唐聯 1축軸과 해주먹 1정丁을 보냈는데, 그것을 거절하자니 공손
하지 않고 속수束脩48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임당林塘, 윤진사이 천곡泉谷을 향하
여 갔다.

48 속수(束脩): 제자가 되려고 스승에게 드리는 작은 예물을 말한다. 열 조각의 육포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였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89

16일 [十六日]
맑음.
남당의 종형님과 박도사朴都事, 박생朴生, 김생원金生員 성유聖有씨, 공주 방화
산芳華山 이석사李碩士 희석禧錫이 찾아왔다. 아우 근根이 모시옷을 가지고 왔다
가 오후에 모두 바로 떠나갔다. 공주 공서원 김생원金生員 경칙敬則이 조선租船,
소작료를 실은 배을 끌고 왔다.

17일 [十七日]
하루 종일 비가 왔다.

18일 [十八日]
흐렸다 개었다 하면서 바람과 구름이 떠나지 않았다.
손감찰孫監察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 읍리邑吏 조항권趙恒權, [자(字)는 자신(子新)이
다]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바로 이 마을 조자순趙子順의 형이었다. 행동거지와
마음씀이 아전들 중에 가장 뛰어나서 들리는 이름이 제법 익숙하였는데 그를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또한 식견도 보통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김
시풍이 죽은 일을 물어보았더니, 그가 말하기를, 김金이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해쳐 사람들에게 원한을 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방하여 홍대장
洪大將의 귀를 현혹하였습니다. 마침 동학교도 1명을 잡아 전대를 뒤졌더니 도
록都錄이 있었고 김시풍의 이름이 그 처음에 들어있었습니다. 마침내 초토사
가 자리잡은 곳에 잡아왔는데, 김시풍이 몸을 몇 길 솟구치니 묶었던 줄이
모두 끊어졌다. 그가 노하여 쳐다보며 크게 소리를 지르기를, 7월 보름이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닐 터인데 너와 내가 살 수가 있겠는가? 먼저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홍대장이 많은 병사들로 하여금 창을 찔러 죽이고
19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다음날에 역적률逆賊律로 형벌을 시행하였다. 7월 보름의 반란을 꾀하는 말로


지존至尊, 임금을 핍박하는 율에 걸렸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서원 김생원이 돌아갔다.

19일 [十九日]
맑음.
동도東徒가 무장茂長을 함락시키고 관리와 호강족豪强族 1,000여 명을 죽였
다. 방향을 돌려 광주光州를 향했는데, 행군하고 멈추는 것이 예측할 수 없고
바람과 우뢰처럼 빨랐다. 홍대장은 아직 전주에 머물러 있고 전운사轉運使는
화를 피해 함열읍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한양에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 편지를 써서 주령에게 경비를 대라고 재촉
하였다. 각가脚價49를 10리마다 6전씩 주어 돌려보냈다. 박국朴局에서 사물탕
四物湯 재료를 각각 5냥씩 구하였다. 다시 감리환을 먹었다.

20일 [二十日]
맑음.
완영의 기록奇錄을 보고 기록한다.

一. 동도東徒 김학구金學九 등 68명은 비류匪類의 꼬임에 물들었다고 잡아 가


두었으나 공초供招해보니 죄가 없어 모두 풀어준다. 괴수인 김영신金永
信, 김용하金用夏, 김동근金東根 등은 모두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한 일.
一. 영문營門의 병방兵房 정석희鄭錫喜는 고부 민란의 괴수 등에게 뇌물을 받고

49 각가(脚價): 심부름꾼에게 주는 비용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91

형벌을 중지시킨 죄로 엄중히 곤장 5대를 치고 형구를 채워 가둔 일.


一. 10일 술시戌時, 오후 7 9시에 나온 무장의 보고에, 현감이 부임해서 인부
印符를 전수傳受받아야 하는데 아직 장성長城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유향
소留鄕所의 보고를 연이어 접하였고, 다시 탐리探吏의 보고를 들어보니,
9일 신시申時, 오후 3 5시 쯤에 저 무리 10,000여 명이 읍내의 동헌에 난
입하여 각 공해公 를 모두 훼손하고 읍에서 잡아 가둔 그들의 무리
40여 명을 모두 풀어주었으며, 성城 안팎의 7개 큰 마을인가를 모두
불태워서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좌수, 공형, 수교首校와 읍내의 관속
들을 잡는 대로 모두 죽였다. 한편으로는 성벽처럼 둘러서서 계속 총
을 쏘고, 한편으로는 나머지 무리들을 요로에 보내어 관속들을 탐문하
였다. 읍의 1리되는 호산봉狐山峯, 여시뫼에 진陣을 치고 더러 갑옷을 입
기도 하고 각자 총과 창을 소지하여 그 위세가 위태롭고 두려워서 읍
은 어육魚肉이 된 모양이다 라는 보고가 온 일.
一. 12일 진시辰時, 오전 7 9시에 나온 무장현의 보고에 의하면, 동도東徒들이
난입하여 함부로 잡아간 이교吏校 중에 죽음을 당한 자가 10여 명이고,
마을과 도로에서 죽은 자는 몇 천명인지 모르겠다. 마침내 군기와 집
물은 다 가져가서 남은 것이 없고, 고금의 문적文籍과 장부는 모두 불
탔으며 사람은 상해를 입어 읍邑은 읍꼴을 갖추지 못했으니 매우 송구
스럽다 라고 한 일.
一. 초토사가 이번 15일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을 칠 적에 군량은 공사
곡公私穀을 막론하고 미리 압류하였다가 통지하여 알려주기를 기다려
운송한 일.
一. 정읍井邑 나주羅州 장성 고부 흥덕興德 무안務安 영광靈光 함평
咸平 고창高敞에 전령을 띄운 일.
一. 흥덕 공형의 보고에 의하면, 저들이 무장에서 이달 12일에 영광군으
19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로 향할 것 이라고 한 일.
一. 동복同福 수령이 군수보납전軍需補納錢 300냥을 바친 일.
一. 13일 나온 영광의 보고에 의하면, 동적東賊 10,000여 명이 성안에 난입
하여 사방으로 총을 쏘아 거주하는 백성들이 흩어졌으나 그들을 궤멸
시킬 방책이 없어 송구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고 한 일.
一. 초토사가 이번 18일에 행군한 일.
一. 청군淸軍 1,000여 명이 이번 18일에 부안포扶安浦에 내린 일.

21일 [二十一日]
맑음.
여산에서 모집한 군사 중에서 100여 명을 뽑아 영문營門에 올려 보내어 종군從
軍하게 했는데, 태인泰仁에 이르러 다시 풀어주어 돌아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 나머지는 다시 뽑아 영문에 올려 보내어 성을 지키도록 하려 했으나, 순사巡
使, 감사가 지금 엄중한 처벌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여 외사外舍에 나가 거처하며
말하기를, 군사를 모집한 것이 나이니, 내가 풀어준 것이다 하였다.
유석천兪石泉이 왔다가 갔다.

22일 [二十二日]
맑다가 오후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23일 [二十三日]
맑다가 밤에 검은 기운이 가로로 동북쪽에 걸쳐 있어 무지개 같았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193

거인居人50이 감영의 기별奇別을 보여주었다.


一. 초토사가 이번 18일에 아침밥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금구金溝 오참午站
에 이르러 병방兵房 정석희를 효수한 일.
一. 4월 19일 오시午時에 정부의 전보電報에 의하면, 전라감사는 파면하고
장흥부사는 유배시키며 고부군수는 형구를 채워 잡아온 일.
一. 여산에서 소집한 5개 읍의 군병軍兵은 금구참金溝站에서 모두 돌아가서
농사를 짓도록 분부하여 풀어준 일.
一. 신임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일부 군대를 영광군의 성내에 주둔시켜 사방
의 문을 지키고 양곡을 찾아내어 보관한 일.
一. 강화江華의 군대 500명이 이번 19일에 군산항에 내려 목포로 향한 일.
一. 영광 전운영轉運營에서 윤장감관輪裝監官 강고부康古阜가 잡혀서 그들 진영
에 왔는데, 그들 진영에서 각읍의 나머지 양식을 풀지 말도록 절목節
目을 만들어 보내면 풀어주어 돌려보낸다 고 말한 일.
여산에서 각 포浦의 선척船隻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큰 배는 3냥, 작은 배는
2냥씩 거두어 전사한 병사를 거두어 묻었다고 한다.
주가主家에서 인마人馬를 빌려 범암帆巖에 있는 셋째 누이동생을 보러갔다.
한산韓山 신시新市에는 오후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있던 처지에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4 5년 사이에 모습이 많이 달라졌고 아들
하나를 얻었다가 바로 잃고 지금 다시 잉태하여 아홉 달이나 되었다고 한다.
사람일의 변화가 이와 같다.

50 거인(居人): 집에 있는 사람, 곧 부리는 사람을 말한다.


19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5일 [二十五日]
맑음.
사돈 조趙씨 어른께서 지금 군창軍倉에 있고 아직 댁에 돌아오지 않았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다시 출발하여 한산읍의 동쪽에 이르러 오곡烏谷 이석사李碩士 한조翰朝의 집
을 방문하였다. 오후에 웅포에 이르렀다.
만길萬吉이 시흥에서 왔다.

27일 [二十七日]
안개가 끼었다가 맑았다.
주령이 본가本家로 길을 떠났다. 정산의 아전인 양재환楊在煥이 들렀다.

28일 [二十八日]
맑다가 가끔 약간 흐렸다.
양재환이 갔다. 반교의 종형과 아우 근根이 왔는데, 종숙의 산소를 7월에
양주 땅에다 면례緬禮를 하려고 하였다. 그 터는 지사地師 이李가 잡아준 곳이
었으나 현재의 소요가 이와 같고, 관진關津이 끊어지려 해서 급히 먼저 운구
를 하여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전주성이 무너졌다는 얘기가 퍼졌는데, 읍내에서 전해온 것이었다. 이 마
을의 백정인 조경엽趙景葉이 뽑혀서 전주의 수성군守城軍이 되었다가 이제 막
도망하여 돌아왔다. 불러서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어제 오시午時 쯤에 동도東
徒들이 용두현龍頭峴에서 커다란 붉은 기를 앞세우고 길게 몰려와서 깃발과 창
남유수록 南遊隨錄 195

및 칼을 들고 성 밖을 에워쌌고 화살과 돌이 선화당宣化堂에까지 이르게 되었


습니다. 전임 순사巡使가 미투리를 신고 도망가려고 하니 어떤 집사執事가 만
류하여 말하기를, 대감이 일단 나가시면 성은 지킬 수가 없으니 가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소임이 갈린 감사가 말하기를,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문루門樓에 올라가 보려는 것이다 라고 한 후에 다시 연신당燕申堂에 들어갔습
니다. 조금 있다가 도끼질에 서문西門이 깨졌다는 보고가 있자 마침내 몸을
숨겨 성을 넘었습니다. 여산의 병사 30여 명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서문西門을 가서 지키고 있었는데 동도들이 대포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니 소
임이 갈린 감사가 동문을 열고 나가서 그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고 하였습니
다 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장洪將이 하도下道51에서 포위되어 소식이 끊긴 지
가 여러 날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본읍의 이속吏屬들도 읍 밖의 촌으로 식솔
들을 옮긴 자가 많았다.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비가 왔다.
종형이 새벽에 아우 근根을 데리고 소룡동小龍洞 산 아래 갔는데, 일꾼을 사
기 위해 돈 4냥을 가지고 갔다. 밥을 먹은 뒤에 칠성판七星版 1건件 삼베 15
자 백지白紙 1속束 창호지 6장을 보냈다.
만길萬吉이 정산定山에 갔다. 아침이 지나서 비가 왔다.
주령이 일전에 남당에 가서 윤진사와 함께 임천읍에 갔다가 그 읍의 수령

51 하도(下道): 삼남(三南)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호남 아래지역을 말한다. 농민군이 정읍 고창 영광


장성 등 아래지역으로 내려가자 홍계훈은 뒤를 따라 다녔다.
19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과 성흥산성聖興山城에 올라 성첩城堞을 둘러보고 민보군民堡軍처럼 힘을 합쳐서


지킬 것을 의논하였다. 마침 전주성에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을 보고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조금 뒤에 한 아전이 들어와 소인의 자식이 황산黃山에
갔는데, 관에서 급하게 배를 구하기에 물어보았더니, 소임이 갈린 완백完伯
사또가 맨발로 도망하여 여산에 이르렀는데, 육지로는 예측하지 못한 변고가
있을까 염려되어 뱃길로 금영錦營에 가려고 한다 고 하였답니다. 또 갑자기
매우 조악하게 휘장을 두른 가마 1대가 나와, 완영完營의 비장裨將이다 라고
했지만 이는 반드시 완백일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들어와 아뢰기를, 읍내에 어떤 사람이 혼례 물품을 갖추
기 위해 완영의 객점客店에 환전換錢을 부쳐 장롱粧籠을 사려고 하다가 금방 환전
을 찾아갔습니다. 영장營將이 말을 타고 문을 나갔다가, 망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급히 달려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용두현에서 붉은 깃발이 몰려오고 수
천 명이 에워싸서 크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백성들은 안심하고 상인도 안
심하고 장사하며, 멀리 가는 사람도 걱정말고 떠나가도 되니 모두 놀라지 말라
고 하고는, 천천히 길게 앞으로 몰려 나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어떤 행인이 읍의 점포에서 짚신을 황급하게 샀는데, 그
행색이 이상하여 물어보았더니, 김제金堤에 사는데, 공주로 간다 고 하였습니
다. 남쪽의 소요가 어떠한가 라고 물어보았더니, 동학도들이 원평에 이르러
불을 지르고 금구를 도륙하고 막 전주로 향했다 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주령이 그것을 듣고 정산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에 임천에서 돌아갔다. 백정
인 이회성李會成도 완영에 있다가 난리를 겪고 돌아왔기에 불러서 상세하게
물어보았더니, 이번 달 26일 저물녘에 영문營門에서 성 밖의 인가人家를 허물
게 하였는데, 동도들이 금구에서 오면 그 지붕에 기어올라 성을 오를까 염려
했기 때문입니다. 영令이 엄중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모두 허물지 못하였는
남유수록 南遊隨錄 197

데, 재목에 불이 나서 100여 가의 집에 옮겨 붙어 불타버렸습니다 라고 하였


다. 어제 임천의 산성에서 본 연기는 이것이 틀림없었다. 밤새 괴로움을 겪
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육촌의 집에 가서 잤다. 다음날에 영문에서 불러
서 들어가 봉서封書 2장을 주어 홍장군에게 급히 전하게 하였다. 영문을 나와
육촌의 집에 돌아와서 무사히 돌아갈 방법을 의논하였다. 한참 있다가 완산
의 7봉峯 위에서 포를 쏘고 나팔을 불었다.
원래 완산의 상봉上峰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하나를
올리고, 적이 이르면 두 개와 세 개의 봉화를 올리며, 아주 급박하면 포를
쏘고 나팔을 불었다. 갑자기 동학도들이 용두현에서 길게 몰려나와 상인과
백성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거처하라고 했으나 성안은 끓는 솥처럼 울부짖으
며 통곡하는 소리가 길에 이어졌다. 적이 서문西門을 부수고 들어오니 본관本
官이 나가서 맞이하였다. 동학도들이 말하기를 본관은 그냥 두고 감사만을
잡아들이라 라고 하였다. 감사가 동문을 열고 도망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적
에게 살해되었다고 하기도 하였다. 동도들이 문루에 올라가거나 성 밖을 돌
며 백성을 안심시켜 모두 다시 돌아와서 시장의 가게가 예전 같았다.
어제 일찍 출발하여 성안에 올라갔는데 포 소리가 구슬 꿰듯이 끊어지지
않았다. 금구에서 대포를 쏘는데 그 소리가 산악山嶽을 뒤흔들었다. 이것은
홍장군이 적을 몰아내고 금구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보다 앞서
적이 영광을 함락시키고 바로 장성으로 달려갔는데, 홍대장은 300명의 병사
로 하여금 대포를 가지고 적을 탐문하게 하였다. 장성의 화룡시華龍市52에 이
르러 홍대장에게 미처 보고하기도 전에 적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한 자가 태

52 화룡시(華龍市): 황룡시(黃龍市)의 오기이며 농민군과 관군은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월평 신호리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장위영 대관(隊官) 이학승(李學承)이 전사했다.
19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반太半이며 대포까지 빼앗겼다고 하였다. 동학도들은 모두 고깔을 쓰고 염주


를 걸었으며 또는 푸른 두건을 쓰거나 왕왕 의복이 번쩍거렸다. 모두 칼을
쥐고 포砲를 가지고 있었다. 죄가 있는 자는 잡아다가 죽였고, 군대를 만나면
바로 살해했다고 한다.

4월 29일 [四月二十九日]
흐리고 비가 왔다.
주령의 여식女息 윤씨네 모자母子가 비를 무릅쓰고 돌아왔다. 남당의 주령이
그 막내딸로 하여금 형을 따라 잠시 피하게 하였다.
김석구金碩求가 와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홍대장이 300명의 군사로 하여금 적을
쫓게 하여 장성 월평에 이르렀다. 동학도東學徒들이 민가에 들어가 밥을 하는 것처
럼 꾸며 몰래 제각기 흩어졌고, 마을사람들은 적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다시
모여들었는데, 관군이 그들을 보고 동학도로 여겨서 마침내 대포를 쏘았다. 동학
도가 물러나 뒤로 돌아가 관군의 뒤쪽에다 포를 쏘니 관군 중에 죽은 자가 태반이
고 나머지는 모두 놀라서 흩어졌으며 대포도 잃어버렸다 라고 하였다.
오늘 전주에서 나는 포 소리를 다섯 차례 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도 많이
들었는데, 이는 반드시 양쪽 군대가 접전하는 것이다. 슬프다. 성에 가득한 생
령生靈이여!
밤에 비가 왔다.

30일 [三十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았다가 흐려졌다.
육촌형이 소룡동小龍洞에서 2인이 드는 가마에 운구를 하여 전진前津을 건너
기에 주령과 함께 강가의 나루에 나가서 전송하였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199

회숙을 범암에 보냈고, 조매趙妹를 왕제旺第, 왕호(旺湖)의 집에 딸려 보냈다. 그


녀의 산달이 찼고 동학도가 이미 완영을 함락시키고 전운영으로 향한다고 성
언聲言했다 하니, 범암도 그 여파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유약한 아녀자인 데
다 산달을 맞아 생각지 못한 변고를 만나서 놀라게 된다면 장차 어쩌겠는가?
그래서 급히 돌아가게 한 것이다.
배를 타고 남당의 육촌형집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백부의 담사 祀53를 상
정일上丁日54에 지내야 했지만 의관을 갖추지 못하여 중정일中丁日로 미루었다
고 한다. 비가 삼농三農, 농사을 바라기에 부족하여 애석함이 제법 컸으나 보리
농사의 풍년을 점칠 수 있어 기뻤다.

5월 초 1일 [五月初一日丁丑]
맑음.
익산 수령인 정운승鄭雲承이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관에서 장정을 뽑아 전주
홍진洪陣에 쌀을 운송하였다. 포구가 소란스럽고 인심이 흉흉하여 예측하지
못한 변고가 일어날 것 같았다. 주령이 돈 3,000꿰미를 남당의 여각旅閣55 바
로 억휘億輝의 배편으로 수송하였다. 웅포로 돌아오다가 새로 온 완백인 김학
진이 여산에 머무르며 감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홍대장은 삼례參禮56에 있으
면서 [또는 용두현(龍頭峴)이라고도 하는데] 대포만을 쏠 뿐 동도들이 굳게 완영을 지켜

53 담사( 祀): 담제( 祭)이다. 대상(大祥)을 치른 뒤에 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54 상정일(上丁日): 음력으로 매달 첫째 드는 정일(丁日)을 말한다.
55 여각(旅閣): 연안 포구에서 상인들의 숙박, 화물의 보관, 위탁판매, 운송 등을 맡아보던 시설을 말
한다. 객주라고도 한다.
56 홍계훈은 삼례에 주둔하지 않았으며 신임감사 김학진이 여산을 거쳐 삼례에 머물면서 전주입성
의 시기를 조절하였다.
20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서 동요시킬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이 식솔을 이끌고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바다에 떠서
적도들의 화를 피했다고 한다.
적이 영광靈光에 있을 때에 홍대장이 싸움을 청하니 적들이 말하기를, 야
전夜戰을 할 때 밤에 흰 베로 장막을 두르고 수천의 횃불을 그 위에 나열하여
불빛을 비추게 하고 관군을 정제하여 그들이 야전을 할 기구가 있음을 알게
하라 라고 하였다. 경계를 엄중히 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가서 보니
장막은 비어있었다고 한다.
지난번에 김시풍의 구초口招57에, 7월 보름에 반역의 얘기가 있었다고 한
다. 이 동네사람 중에 동도와 친한 사람이 있어 참으로 재앙을 피할 방도를
물었더니 역시 7월 보름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 7월 보름이 과연 근거가 있
는지 모르겠다.
청병淸兵이 모두 경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전주 서문 밖이 가장 재화의 창고라고 불렀으나 불이 번져 수백가의 집을
태웠다. 정재흥의 집에 모아놓은 돈이 106만금이었고, 다른 물건도 이것에
상응할 정도였으나 모두 재가 되었으니 사물이 성대하면 쇠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완부完府의 부호도 이미 다했구나!
손찬중이 읍에서 와서 최근의 기별지奇別紙 1장을 전하였다. [다음은 기별지의

내용이다]

一. 이번 19일 진시辰時 함평현의 보장報狀에 의하면, 이번 16일 신시申時에


동도들이 본읍에 이르러서 각 공해公 에 주둔한 연유는 이미 보고하

57 구초(口招): 심문에 대한 죄인의 진술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01

였고 사방의 요로를 가로막고 읍촌에 있는 총 창 말 노새 등을 남


김없이 빼앗았으며 심지어 군기를 탈취하고 집물을 은닉했다고 하여
군기감관軍器監官에게 대곤大棍58 20대를, 이방에게는 대곤을 무수히 때
리고 또한 바로 주리를 틀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읍촌에 돈과
쌀을 나누어 배정하였는데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습니다. 저들로부터
원정原情 1장을 초토사에게 보냈다고 했기 때문에 보장報狀을 만들어 초
토사에게 올려 보낸 일.

원정原情에 의하면, 호남 유생은 원한과 피를 머금고 백번 절하며 엄중한


위엄으로 밝게 살피시는 초토사께 편지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들
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교화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어찌 감히 함부로 의롭지
않은 일을 하여 스스로 형벌에 빠지겠습니까?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
이 견고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는 것이 옛 성인의 유훈遺訓이고 시무時務의 대강
大綱입니다. 방백方伯과 수재守宰는 목민牧民하는 관리로서 선왕의 법으로 선왕
의 백성을 다스린다면 비록 천년을 지난다고 해도 그 나라를 오랫동안 누릴
것입니다. 지금의 수령은 왕법王法을 돌아보지 않고 왕민王民을 생각하지 않습
니다. 탐학이 일정하지 않아 군전軍錢은 때도 없이 함부로 배정하고, 환전還錢
은 밑천을 뽑아 바치기를 독촉하며 조세는 명목이 없이 더 거두고 각종의
연역煙役59은 날마다 중복하여 거두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운영의 균전
관均田官이 전결田結을 농단하여 세稅를 걷으며 각사各司의 교례배校隸輩들의 토
색과 지독한 탐학은 하나하나 견딜 수가 없습니다.

58 대곤(大棍): 죄인의 볼기를 치던 곤장의 하나로 길이는 5자 6치, 너비는 4치4푼, 두께는 6푼 가
량 되었다.
59 연역(煙役): 연호잡역(煙戶雜役), 민가에 부과하던 여러 가지 부역을 말한다.
20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그래서 백성들이 그 둥지를 잃고 10중에 8 9명이 옷과 먹을 것이 없이


길바닥에 흩어졌고 늙은이를 부축하며 어린애를 데리고 온 자가 연이어 골짜
기를 메웠습니다. 살아갈 방도가 만에 한 가지도 없습니다. 가엾은 이 백성
은 죽어도 서로 모일 수가 없습니다. 수 백명이 본관本官에 호소하면 난류亂類
라고 하고, 영문營門에 호소하려고 하면 역류逆類라고 지목하여 막중한 친군親
軍60이 마음대로 발포하여 여러 읍에서 병사를 모아 칼로 도륙합니다. 죽이
고 없애는 데에 거리낌이 없으니 교화를 펴고 백성을 기르는 사람이 참으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저희들의 오늘 거사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왔고 병기를 쥔 것은 단지
몸을 보호하는 계획입니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 억조億兆가 마음을 한
가지로 하고 팔로八路가 논의하였습니다. 위로는 국태공國太公을 받들어 부자父
子간의 인륜과 군신君臣간의 의리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종묘사직을 보호하려는 바람을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습니다.
초토사께서 살펴주시고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一. 이번 4월 21일 오시午時에 무장 공형의 보고에 의하면, 초토사께서 고


창현으로부터 본읍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당일 바로 출발하여 영광군에
머물렀습니다 라고 보고한 일.
一. 이번 21일 오시午時에 장성 공형의 보고에 의하면, 저들 수 천명이 이
날 진시辰時에 읍의 남쪽 10리 월평촌月坪村에 이르러서 방금 아침밥을
먹었으나 거취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라고 보고한 일.
一. 해남海南수령이 군수보납전軍需補納錢 500냥을 바친 일.

60 친군(親軍): 전라도 지역 방어군인 친군 무남영(武南營)의 군사를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03

부장部將이 한양에서 돌아와 가형家兄의 안부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27일에


출발할 때에 완영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보지 못하고 왔다. 한양의 인정人情
은 밖[지방]은 편안하고 안[한양]은 위태롭다고 여기며, 전보가 올라가면 선혜당
상宣惠堂上61만이 보고 대신大臣 이하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병정들이 밤
에 빠져나가 사람들이 더욱 의아해했다고 한다. 저녁에 내권內眷, 아내 일방一房
과 쌀부대를 다근茶根의 여각에 옮겼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어제 남당의 윤진사가 사람을 시켜 주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의하면, 임천 수령의 편지를 보니 한양의 병정 몇 백명이 수영水營에 정박하
여 임천 함열을 거쳐 내려오고 있으니 영문營門에서 공사곡公私穀과 돈을 막
론하고 압류하여 사용할 것을 통보하였다 라고 하였다.
조자신趙子新이 와서 말하기를, 동도東徒들이 완성完城에 들어오는 날에 포
를 쏘아 문을 부수었다고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 동도들이 시장 사
람들과 뒤섞여 들어와서 몇 백명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다만 사람들이 평소의
시장 상시常市보다 월등이 많은데도 바로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스럽
다. 갑자기 깃발 하나가 용두현에서 달려오니 성문이 저절로 열려 앞을 향해
몰려왔다. 군진軍陣의 대오에 엄중히 경계하여 조금도 범하지 못하게 해서 백
성을 안무安撫하고 각자 그 생업을 안정시켰다. 그래서 그 날 오후에 시장의
가게가 예전처럼 서로 왕래하여 시종始終 차이가 없었다. 거처하는 사람과 부

61 선혜당상(宣惠堂上): 관리의 급료를 주는 기관인 선혜청의 책임자로, 당시 민영준(閔泳駿)을 혜당


(惠堂)이라 불렀다. 민영준은 현지에 정보원을 보내 사실을 낱낱이 파악하였다.
20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녀자 중에 길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감히 손을 잡아 일으켜주지 않고


아이들로 하여금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거처하게 하니 온 성안이
화목하였다. 간간이 관군과 북문北門 밖에서 싸워 동도들이 패하여 성안에 들
어갔다. 성 밖을 왕래하는 성안의 백성이 성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 몇 명을
잡아다가 홍진洪陣에 바치니 동인東人이 화가 나서 다시는 그들의 출입을 허락
하지 않았다. 홍대장은 성의 사방을 에워싸고 장차 그들을 도륙하려고 사람
들을 전주성 10리 가까이에는 오지 못하게 하였다. 혹시 그것을 어기는 자가
흰옷을 입었으면 동인東人이라고 하여 바로 죽였기 때문에 전주성 10리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졌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라고
하였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절기로 망종芒種이다.
경병京兵 700명이 은진恩津 경포鏡浦, 강경에 와서 머무른다고 하는데, 이곳이
양호兩湖의 요충지이어서 지키려는 것인가? 또는 신정희 대장이 700명의 군
사를 이끌고 경포를 통해 바로 여산으로 향했다고 한다. 지난날에 홍대장이
저들의 진영에 격문을 전했는데, 저들이 그 격문의 뒤에 쓰기를, 홍洪, 홍계훈
은 대장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또는 홍洪이 대장의 소임을 감당하
지 못하면 오래되지 않아 신申대장이 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신 대장도 구제
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속어俗語에, 모양이 좋고 맛이
없으며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는 것을 홍紅이라고 하며 달지 않은 장醬도 홍紅
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장辛醬은 장의 색깔이 붉지만 맛은 달지 않고 신 것을
말한다. 저들이 그 글자의 음音이 서로 비슷한 점을 취하여 홍대장이 대장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조롱하였다. [홍장(洪將)은 홍장(紅醬)과 글자의 음이 같고
남유수록 南遊隨錄 205

불감장(不堪將)은 불감장(不甘醬, 달지 않은 장)과 글자의 음이 같다]

사람들이 이에 그 말을 부연하여 홍이신장紅而辛醬이라고 했는데, [방언方言, 사

투리에 홍(紅)은 불구(不久, 붉다는 뜻)와 글자의 소리가 같고 신장(辛醬)은 신장(申將)과 글자의 소리가

같다] 신申대장이 멀지 않아 올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과연 그런 것인가? [신(申)

대장이 내려 왔다고 한 것은 헛소문이었다]

이보다 앞서 동요童謠에서, 전주 고부의 녹두, 새가 모두 먹어버리니 우리


대장은 무엇을 먹을까 라고 하였고, 다시 정숙하지 못한 자를 성내어 꾸짖기
를, 녹두 호령하여 경박하고 패악한 자들을 크게 물리치셨네 라고 하였는데
거의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저들의 괴수 전명숙全明叔을 녹두장군綠豆
將軍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그 조짐인가? 근래에 가장 선풍을 끈 것이 아라
리요俄羅里謠인데 음절이 슬프고 급하여 식자識者들은 틀림없이 아라사俄羅斯, 러
시아의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평범한 한마디 말이지만 어찌
조심하지 않겠는가?
남당의 편지 속에 최근의 소식을 간략하게 알려왔는데, 초토사가 계문啓聞
하여 어제 저녁에 국局, 비변사에 도착하였다. 장사狀辭에서 아뢴 것은 빨리 이
길 수 있는 방도가 있음을 말할 뿐입니다. 아뢰기를, 적도들이 성을 근거로
그 세력이 대단하고 대포를 쏘아서 갑옷을 입고 천보포千步砲를 쏘던 30명이
바로 죽었습니다. 나머지 군졸 200여 명도 따라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후사後
事가 없어서는 안 되니 청주淸州의 병사 몇 천명을 밤을 무릅쓰고 내려 보내십
시오. 저들이 선전관宣傳官과 금부도사禁府都事62 등 모두 3명을 참수했으니 지
금부터는 백성으로 대우해서는 안 되고 저들의 간교한 술책이 평범하지 않으
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대장 이근수李根壽가 청병淸兵

62 선전관(宣傳官): 임금이 선유사자로 보낸 이효응, 배은환, 이주호 등을 말하는데 금부도사는 오류


이다.
20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000명과 경군 1,000명을 이끌고 둔포屯浦에 내려 오늘내일 사이에 본 읍에


도달할 것이라고 하였다. 매 호戶마다 짚신 2건 사발 2개 대접 2개 숟가락
1개를 관에서 배정하여 거두었다 라고 하였다.
조자선이 밖에서 신문지 한 조각을 얻고서 말하기를, 북경北京에 사는 호
진사胡進士가 꿈속에서 관공關公, 관우이 봉서封書 1통을 주면서 말하기를, 중간
에 머무르지 말고 급히 조선에 가서 널리 알려라 고 하여 크게 놀라서 일어났
는데, 편지가 손안에 있었다고 한다. 그 편지에, 올해는 비록 풍년이라고 해
도 1월과 4월에 염병과 괴질이 크게 발생하여 백성들이 많이 죽을 것이고,
9월과 10월에는 더욱 심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면하고자 한다면 신묘한 부
적 글씨 4자字와 약물이 있으니 주사朱砂로 누런 종이에 정사精寫하여 3장은
태워서 그 재를 먹은 뒤에 바로 정결한 곳에 대변을 눈다. 약은 후방後方, 뒤에
적은 처방에 따라 합하여 분말을 만들어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다니다가 병이
처음 시작될 때 이 약을 달여 먹으면 면할 수 있다. 석웅황石雄黃 주사朱砂
석유황石硫黃 오약烏藥 천궁川芎 백지白芷 세신細辛 각각 2푼이다. 네 글자,
만약 이 글자를 보고 난 뒤에 10장을 정성스럽게 써서 남에게 주면 한 집안
이 재앙을 모면할 수 있다 라고 한다 고 하였다.
손영회孫永會가 왔다.
동도東徒들이 처음 완성完城에 들어가 농민을 보고 반드시 위로하고 타일러
서 농사에 힘써 때를 놓치지 말도록 했기 때문에 성 밖을 출입하는 자들은
모두 삿갓을 쓰고 가래를 메어 기찰譏察을 모면하였다. 성 밖의 조금 먼 곳에
거주하는 자들도 일부러 촌티 나는 농군 복장을 입고 적진賊陣을 가서 보았다
고 한다. 민심이 도리어 동도들의 즐겁고 편안함을 기뻐하고 관군의 침략을
괴로워하였으니, 순리順理와 역리逆理 그리고 상도常道에 어긋남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남유수록 南遊隨錄 207

읍내의 기별에, 윤음綸音에서 무명색無名色의 세금을 더 거두는 것과 포시浦市


에서 수세收稅하는 등의 여러 가지 잡세는 일일이 조사하여 줄이라 고 하였다.
신임 사또의 비감秘甘63에, 3국三國, 청 일본 조선의 청병請兵이 지금 내려와
서 소용되는 쌀 몇 천석과 돈 몇 천냥을 수송하여 바치라 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비감결秘甘結에, 군수軍需에 소용되는 소와 말 몇 필을 바치고, 함열읍
에 배정된 군수전軍需錢 1,000냥 중에 단지 300냥을 수송하여 납부했다 라고
하였다. 회제回題에, 나머지 700냥은 오늘 해지기 전까지 공형이 안동眼同64
하여 바치고 죄인을 잡아오라 라고 하였다.
700명의 경군이 이미 여산에 도착했고, 지금 완산 아래 불빛이 하늘을 찌
르는 것을 보았다. 어제 밤에 모군募軍하라는 초토사의 분부를 받은 뒤에 감
영의 비밀관문關文이 도착하였고, 지난날에 초토사가 군사를 모집하여 요로要
路를 방비하도록 영칙令飭한 뜻을 방보防報65하였습니다.
회제回題에서 이런 뜻을 초토사에게 적어서 보고하였다고 한다.
승려 유순有順이 지난 달 27일에 전주 용두고개를 지나다가 마침 소나무
숲 사이에 숨어있던 난병亂兵을 만났는데 전에 친분이 있던 사람이 깃발 아래
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멀리서 절하며 살려주기를 애걸했다. 그 사람이 웃으
며 서쪽을 가리켜서, 유순이 말하기를, 임피臨陂인가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다. 임피는 관정官政이 다스려지지 않아 아전들의 행태가 교
활하여 우리들을 잡아가두어서 이에 거역하여 한차례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유순이 말하기를, 반드시 함열일 것이다 라고 하

63 비감(秘甘):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몰래 보내던 공문을 말한다.


64 안동(眼同):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거나 물건을 지니고 가는 것을 말한다.
65 방보(防報): 상급기관의 지휘대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때에 그 연유를 적어서 올리던 보고를
말한다.
20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니, 그가 말하기를, 함열의 전임 수령은 아전들을 밝게 다스려서 악행이 없


어 물을 만한 죄가 없다 라고 하였다.
유순이 본 읍의 숭림사崇林寺에 와서 머무르며 이처럼 말했다고 한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부장部將이 영회永會를 데리고 정산으로 돌아갔다. 남당 종형이 담복 服을

갖추지 못하여 돈 3꿰미를 부장편에 부쳤다.


어젯밤에 전주성의 화염이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만약 홍대장이 공격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동도가 도망한 것이리라. 비록 평정을 해서 잿더미 속
에서 관부官府를 다시 세워 초창기의 규모와 다름이 없게 한다고 해도 그 비
용이 거창하여 어찌 마련하겠는가?
부여 서면西面 후동厚洞 유석사兪碩士 태준台濬, [그의 자는 문유(文有)이다]이 가동佳洞
의 족숙族叔 어른 집의 종인 김석보를 데리고 왔다.

초 5일 [初五日]
맑다가 약간 흐렸다.
석보가 온 것은 족숙댁族叔宅의 이사 비용 때문이었다. 시흥조始興條, 시흥에서
받은 조(租)에서 획급劃給한 100금과 만길조萬吉條, 만길에게서 받은 조(租)의 100금을 합
친 숫자를 주령主令에게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석사兪碩士, 유태준는 그
돈을 바꿔 쓰려고 했기 때문에 따라 온 것이었다. 150금은 유석사에게 나눠
주고 50금은 석보에게 주어 가지고 갔다.
관에서 감영의 감결과 전령을 받았는데, 장세場稅를 폐지한다고 하였다. 유
석사가 포구浦口에 자리잡을 뜻이 있어 윤한익尹漢益의 형이 집을 팔려고 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09

는 소문을 듣고 주령과 함께 가서 보았다.


읍내 사람인 조정현趙正賢이 와서 말하기를, 5월 3일에 동도들이 전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모두 남복男服을 입히고 흰 두건을 쓰게 하여 북문을 나가
게 하였다. 관군이 대포를 쏘아 죽였는데 이들을 동도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동도들이 바로 동문東門에서 나와 황방산黃方山에 머무르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
람으로 하여금 전대前隊, 전위부대를 삼아 관군의 칼날을 받게 하였기 때문에 동
도들 중에 다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또는 동도들의 한 지파가
북문에서 나와 관군을 습격하려고 했으나 관군에게 패배를 당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고 산 자는 태인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라
고 하였다.

초 6일 [初六日]
흐리고 비가 왔다.
윤교관尹敎官이 와서 유석사와 가대문권家垈文券66을 만들었다. 유석사가 떠
나갔다.
남당의 종형님이 칠립漆笠67을 사려고 왔으나 값이 비싸서 사지 못하고 돈
3꿰미를 남기고 떠나갔다.
함열읍에서 요호饒戶를 선택하여 계획 없이 군수전을 배정하여 내게 하였
다. 300냥에서부터 20 30금에 이르렀는데, 공정하지 않다는 여론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손감찰孫監察 자유子裕가 왔다. 밤에 비가 왔다.

66 가대문권(家垈文券): 집터와 그에 딸린 토지의 매매문서를 말한다.


67 칠립(漆笠): 옻칠을 한 갓으로, 흑립을 말한다.
21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7일 [初七日]
흐리고 비가 왔다.
창식昌植이 정산으로 돌아갔는데, 그 어머니의 대상大祥이 하루 남았기 때문
이었다.
김선달金先達 석구錫九가 군산항 영문의 사람이 알려준 최근 기별지를 보여주
었다.
이 달 3일 술시戌時에 초토사와 동도들이 서로 싸워서 14살 되는 복용福用
이라는 소년장사 [동도 안에서는 모사(謀士)라고 한다] 가 아군에게 참수를 당하고 전녹
두全綠豆도 상해를 입었다고 한다.[적의 괴수를 말한다] 그 나머지 500명의 적도들은
모두 박멸을 당하여 성안의 적들도 지금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다고 한다.
어진봉심관御眞奉審官68 참판 김종한金宗漢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 염찰
사廉察使 참판 엄세영嚴世永이 내려오기로 하였다. 옥구沃溝 수령인 조병징趙秉澄
이 마침 완백의 행영소行營所에 있다가 전보電報를 보고 그 아버지 전운轉運, 조필
영 어른께 이렇게 편지를 했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춘서春瑞가 어제 떠나가며 주령에게 아뢰기를, 오늘 모내기를 하려는데 일
꾼이 부족하여 억휘億輝 배의 뱃사공 몇 사람을 빌려주기를 청하니 허락을 하
였다 라고 하였다. 오늘 아침 영이 내려와 억휘 석분石奮 뱃사공 1명이 떠
나가고 단지 1명이 남아 배를 돌보았다.

68 어진봉심관(御眞奉審官): 전주 경기전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보관되어 있어 그것을 살피


러 온 관리를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11

손감찰도 춘서와 함께 어제 집으로 돌아갔다.


전주 사람 중에 성벽의 물구멍으로 몰래 나온 자가 있어 말하기를, 성안
에 동도들은 300명에 지나지 않고 전녹두全綠豆는 애초에 성을 나가지 않았으
며 하루에도 의관을 10여 차례나 바꾼다. 관군의 대포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당한 두 곳의 모사謀士인 5살 아이와 14살 아이가 먼저 성에서 나가면서 말하
기를, 이 성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죽게 되는 계책이다 라고 하였다. 나머지
적도들이 비록 후군後軍 7,000명이 내도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단지 과장이
라고 생각했으나 도주하고 싶어도 관군이 매우 긴밀하게 요로를 지키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라고 하였다. 이른바 전보와는 서로 맞지
않으니 어찌 된 것인가? 또한 5살과 14살 아이가 비록 숙성하다고 해도 어찌
이런 큰일을 도모하겠는가?

초 9일 [初九日]
맑음.
주령과 배를 타고 다근茶根에 가서 주령의 서모庶母 홍주 사람을 보았다. 돌
아오는 길에 배를 칠산七山에 정박하고 유참봉兪參奉 집을 방문하였다. 남당에
이르러 임당林塘 윤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늦은 밤에 조수潮水가 빠져서야
비로소 배를 돌려 웅호熊湖에 도착하니 달은 지고 북두칠성은 가로로 걸쳐있
으며 마을의 닭 울음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초 10일 [初十日]
흐리다가 차츰 비가 왔다.
들리는 소문에, 전주성에 있는 동도 수 천명이 아직 항복하지 않고, 순사
에게 글을 올려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길을 열어 준다면, 각각 흩어
21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져서 돌아가 농사를 짓기를 원한다고 요청하였다. 홍대장이 사자를 풀어주어


나가게 하여 지금 김제읍에 들어가 임피臨陂를 향하여 군창을 돌아 호서에 이
르렀다. 완백은 감영에 들어가 임소任所에 도착하였다 라고 하였다.

11일 [十一日]
우레가 치고 비가 왔다.
감영의 기별을 얻어서 보았다.

一. 저들이 5월 8일 오전에 동문과 북문에서 3,000 4,000명이 일제히 김


제 등지로 향하여 흩어져 간 일.
一. 초토사 사또께서 동일同日, 5월 8일 오후에 용두현龍頭峴에서 군대를 이끌
고 성에 들어온 일.
一. 순변사巡邊使 사또께서 동일同日 미시未時경에 평안도 군사 500명을 이끌
고 삼례參禮에 머물러 진을 친 일.
一. 5월 6일에 한양 동곡東谷 김참판金參判이 태조대왕의 영정影幀을 살펴보
려고 삼례에 머물렀고, 5월 9일에 위봉산성威鳳山城에 행차한 일.
一. 염찰사廉察使 사또께서 5월 4일에 삼례에 행차하여 날마다 용두현의 진
중에 왕래하였고, 5월 8일부터 삼례에 계속 머문 일.
一. 순사巡使 사또께서 5월 5일에 위봉산성에 행차하여 태조대왕의 영정 앞에
제사를 지냈고 삼례에 행차했다. 5월 7일에 비장裨將을 보내 성교聖敎의
뜻을 직접 받들어 효유하였다. 그 글에서 말하기를, 본사本使가 몇 일
사이에 임금께 하직인사를 하고 말을 재촉하여 길을 떠나, 한 대의 수
레로 너희들이 있는 곳으로 온 것은 너희들은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윤음을 일일이 선포하여 너희들의 해묵은 고통과 괴로움을 씻어주고
남유수록 南遊隨錄 213

또한 임금의 뜻이 너희들을 살리는 데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이


었다. 본사가 그러한 임금의 뜻을 받들어 너희들을 감동케하여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서 각각 그 삶을 온전히 하게 하
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천안에 도착하여 길 위에서 장성의 보고를 들었고, 다음 날 밤에 금강에서


완영의 변고를 들었다. 본사는 놀라서 말을 잃어버렸고 참담하여 눈물을 흘
렸다. 임금의 뜻이 제대로 펴지지 못하여 너희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목에
빠졌을 뿐이다. 너희들이 명命을 받든 신하를 죽이고 함부로 여러 읍의 병사
를 농락하며 전묘殿廟, 경기전과 조경묘를 놀라게 하고 성문을 닫아 점거하였으니
너희들의 죄를 생각하면 죽음에 해당할 것이다. 비록 본사가 너희들을 물과 불에
서 건져내어 위로하고 임석 席에 두려는 확고한 마음을 미루더라도 어찌할 수
가 없다. 너희들이 스스로 살 수 없는 지경으로 들어가 마침내 살리고자 하는
내 마음을 시행할 수 없게 하였으니 참담하고 참담하도다.
너희들이 신임 사또에게 원한을 호소하려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들
의 원한은 너희들의 호소를 기다리지 않고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처음에
관장官長의 학정虐政에서 시작하여 사핵査 69의 잘못에서 다시 촉발되어 마땅
히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한번 모이고 두 번 모이는 것을 거
듭하여 호소하려 했으나 헤아려서 살펴주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해산하려고
했으나 도망하여 살 곳이 없는 상황의 올빼미와 경 70처럼 평소에 복수심을

69 관장(官長)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사핵(査 )은 안핵사 이용태를 말한다.


70 경( ): 범과 비슷한데 몸집이 작으며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하는 전설상의 짐승을
말한다.
21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품은 흉악한 괴수들이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허무


맹랑한 말로 현혹하고 위의危疑71한 형세로 선동하여 안정되지 못한 민심을
속여 점차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희들 중에 흉악한 괴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 살 길
이 있다. 그 괴수를 죽이고 협박에 의해 따른 자들은 처벌하지 않는 것이 바
로 본사本使가 임금께 직접 받은 하교이다. 너희들은 만약 진심으로 귀화하여
바로 병기를 반납하고 성문을 활짝 열며 흉악한 괴수를 결박하여 휘정麾旌,
대장의 깃발 아래에 목숨을 청하도록 하라.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글을 한번 올리고 다시 올려 오히려 회피하는 말을
반복하며 성문을 닫고 숨어서 청원하고 있으나 그 실정을 살펴보니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다. 아! 너희 양민과 나의 적자赤子들은 내 말을 잘 들어 후회
하는데 이르지 않기를 간절하게 특별히 회유한다 라고 하였다.
동도東徒들이 올린 글에, 영중營中에 있는 저희들이 삼가 생각건대, 저희들
은 천지간에 교화를 입은 사람으로 밝으신 임금의 교화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찌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를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거사는 이
미 보고 들어서 알고 있듯이 탐학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또
한 병기를 쥔 것은 몸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히려 지난달 초에 물러
나 돌아갈 때에 전임 방백이 군사를 풀어 먼저 공격해서 살육하였고, 서로
진을 치고 공격해서 본래의 뜻은 아니지만 끝내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어
물러나 장성에 머물렀습니다. 초토사가 효유하는 한 장의 글도 베풀지 않고
군사를 내어 먼저 공격하여 대포를 난사하였습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죽은

71 위의(危疑):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15

자가 태반이고 지금 전주성에 들어와 단지 신임 사또께서 교화의 덕을 펴시


어 전임 방백이 저지른 원한을 갚아주시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초토사가 추격하여 들어와서 한편으로는 찔러 죽여서 불태우고, 다른 한편으로
는 집을 태우니 예기치 못한 광경은 차마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막중한 전묘殿廟에 여러 번 대포를 쏘아 몇 곳이 훼손되어 묘전廟殿을 놀라게 한
죄는 도리어 저희들이 인가를 불태웠다는 말로 옮겨 저희들을 모함하였습니다. 이
것은 한사람이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온 관아의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
다. 또한 공해公 를 부순 것도 저희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원한을 호소하려다가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
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살아서 그 생업을 근실히 한다
해도 어찌 죽어서까지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진
것은 모두 탐관오리貪官汚吏와 간신권척奸臣權戚들이 국정國政을 농단하여 탈취하
는데 만족할 줄 모르고 살육을 제멋대로 하여 종사宗社를 돌보지 않아 위태로
워진 데에 있습니다. 이것을 용인한다면 무엇인들 용납하지 못하겠습니까?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공고하면 나라가 편안합니다. 설령 작은
잘못이 있더라도 책망하고 타일러야 하지만 바로 귀화하지 않는 자는 처벌을
하고 죽여도 됩니다. 그러나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도륙만을 하며,
여러 차례의 윤음을 아직 펴지 않고 감추니 이것은 전임 방백의 간사함과 학
정을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명을 받은 신하를 죽였다는 것은 이치상 온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 장의 선유宣喩하는 글은 없고 병사를
모아 토포討捕하라는 글자만을 계속 보니 그 말이 매우 두렵습니다. 그리고
윤음은 영문 안에 있다고 하니 어찌 명을 받은 사신이 또한 전임 방백의 부
탁을 받아 윤음을 감출 수가 있습니까? 지금 저희들의 목숨은 따로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閤下께서 감영에 오셔서 만백성의 원한을
21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풀어주시고 초토사께 올린 조목들을 저희들의 바람대로 임금께 아뢰어 위로는 종


사宗社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
다 라고 하였다.

一. 순사巡使 사또께서 감영에 오는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일.


一. 본 관아의 수령이 임소任所로 돌아오는 때는 부내府內의 화를 피한 인민
人民들이 일제히 등소等訴하였으나 아직 돌아오지 못했고 초토사 앞으
로 편지를 써서 답장을 기다린 뒤에 임소로 돌아온다고 한 일.

창식이 돌아왔다.

12일 [十二日]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13일 [十三日]
맑음.
오시午時에 배를 타고 주령과 길을 떠나 남당진南塘津에 이르러 뱃사공으로
하여금 송정松亭 종형집에 돈 4냥을 전하게 하였다. 지난번에 삿갓을 사지 못
하고 돈도 모자랐기 때문에 1냥을 더해서 보냈다. 다근茶根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니 물이 이미 빠졌다. 운죽포雲竹浦에서 배를 수리하고 밥을 해서 먹었다.
한밤중에 물이 들어와서 배를 운행하여 다음날 이른 아침에 왕포旺浦에 이르
렀다. 비가 삼麻처럼 내려서 먼저 억휘를 집에 보내어 집안의 장정을 불러
갈치葛致 감곽甘藿, 미역 그리고 돈 등을 운송하게 하였는데, 장차 보리를 사려는
것이었다. 밥을 먹은 뒤에 비가 조금 멈추어서 집에 돌아왔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17

박약국朴藥局에서 당귀當歸 백작약白灼藥 숙지熟芷 각각 5냥씩을 구했으나


천궁川芎은 떨어졌다. 손찬중이 마른 민어民魚 1마리를 주기에 거절했더니 역
정을 내어 받았으나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았다.

14일 [十四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배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 안주安州 할아버지의 기제사를 지냈는데, 탑
동에 시를 공부하러 갔던 손자 미嵋도 와서 참여를 했다.

15일 [十五日]
비가 왔다.
아내가 며칠 전부터 가슴통증으로 자리에 누웠다. 여종 채봉彩鳳이 학질
을 앓아 목구멍이 부어서 음식을 넘기지 못하였다.

16일 [十六日]
비가 오고 크게 바람이 불었다.
갈치 감곽 모해의毛海衣, 김 등을 노촌老村 정경락鄭敬洛 어른 댁에 보내어
보리와 바꾸게 하였다. [갈치 큰것이 230마리이고 작은 것은 50마리이며 미역은 15통이고 김은

50톳이었다]

관진寬鎭이 둘째 형수의 상을 당하여 그 동생으로 하여금 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돈 20꿰미를 보냈다.
순동으로 하여금 민선달 집에서 빌린 시변市邊72을 갚도록 하였다.

72 시변(市邊): 장에서 주는 수준의 이자를 말한다.


21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3월 5일 15냥에 대한 구변具邊73 이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집터의 보리를 베었다. 유장柳庄 텃밭에 콩을 심었다. 순성順成이 보리를 타
작하여 각각 1석 7두씩 나누었다. [월방(越房)의 사전(私田)이다] 갑길甲吉이 탑동에
왕래하며 시詩를 배우는데, 원창元昌도 따라가게 하였다. 비록 시를 짓지는 못
하더라도 학당學堂에서 노는 것은 해가 없으리라. 용성用成이 돈 5냥을 얻어가
지고 갔다.

18일 [十八日夏至]
맑음.
아우 근영을 관현冠峴에 보냈다. 노촌老村 정경락鄭敬洛씨가 왔다. 춘봉春鳳 박
가朴哥가 보리를 타작하여 각각 14두씩 나눴다. 사종숙 성일聖逸이 살아있을
때에 가져온 소금 값 6냥을 아우 근根에게 주어 그 부인에게 전하게 하였다.

19일 [十九日]
비가 오고 흐렸다.
구정鷗亭에 새로 오씨약국吳氏藥局이 문을 열어 천궁 3냥을 사왔다. 값으로
1냥을 바로 성만에게 보냈다. 아우 덕德, 덕영이 왔다.

73 구변(具邊): 본전과 이자를 합한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19

20일 [二十日]
절반은 맑았다가 절반은 흐렸다.
아우 덕영이 탑동으로 돌아갔다. 다시 감리환을 먹었다. 아우 근영이 돌아
와서 말하기를, 조포租包, 벼를 담는 볏가마는 때가 늦어서 돈으로 바꿀 수가 없
다. 20포대 중에서 광조光租 7석은 운송할 것이고, 백조白租, 희게 정미한 쌀 8석은
가동佳洞 윤尹으로 하여금 장리長利를 놓게 하며 5석은 관현의 정鄭으로 하여금
장리를 놓게 할 것입니다. 대두大斗를 썼는데 시중의 됫박 10되가 들어간다
라고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탑동 숙부님의 생신이어서 몇 잔의 막걸리를 보내드렸다. 당리唐里의 윤감
역尹監役 어른이 지나다가 들러서 풍문으로 들은 한양 소식을 말하기를, 왜병
倭兵 수십 척이 서강西江에 와서 정박하였기 때문에 성문을 닫았다 고 하였다.
성만을 은시恩市에 보냈다. 박가朴哥가 보리 값 4냥을 얻어가지고 갔다.

22일 [二十日]
맑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집에서 텃밭의 보리를 타작했으나 비에 젖어서 까부르지 못하였다.

23일 [二十三日]
맑고 매우 더웠다.
권이權伊가 보리을 타작하여 각각 28두씩 나눴다. 노촌의 척숙戚叔 정鄭이
왔다. 남경춘南景春이 왔다.
22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4일 [二十四日]
안개가 꼈다.
색리色吏 김광희金光熙와 장교 김양배가 와서 세금을 독촉하였다. 그 치부책
에 신묘조辛卯條, 신묘년에 내야하는 조세 쌀 6두와 몇 되가 있었는데 이것은 전에
풍헌을 지낸 김춘집金春集에게 20여복卜을 방납防納 한 것인 듯하여 전표를 보
여주었더니, 모두 그렇다고 한 뒤에 춘집이 대충 처리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전해에 김치삼金致三에게 1결結을 방납한 것도 기록하지 않고 완길完吉과 인길
仁吉의 이름 아래에 50복을 줄여 치삼致三을 적어놓고 갔다.
박가朴哥가 돈을 갚았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몸에 흰 반점이 오래되어 더욱 심해져서 선어 魚74를 잡아 피를 내어 발랐
다. 선봉先奉이 경시鏡市에서 제대로 다 큰 전복全鰒 1개 및 오징어포 2조각을
가지고 와서 박매朴妹, 박씨에게 시집간 누이동생가 돌아갈 때에 술안주로 하려고 하
였다. 쇠고기는 선봉의 처가 다른 곳에 사용하여 내일 시장에서 다시 사기로
하였다. 석유石油 한 그릇 생강 1전 왜화시倭火柴, 성냥 2갑을 샀다.
선봉의 아내가 왔기에 봄 사이에 어머니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할 때에 인
삼 2전 을 가져다가 썼기 때문에 값으로 1냥을 주었다. 성만이 보리를 타작
하여 각각 1석씩을 나눴다. 판옥이 갈치를 팔러 미당美堂으로 들어갔다가 편
지를 받아서 왔다. 갈치 값 10냥은 노촌의 척숙인 정씨댁에 남겨두었고, 4냥
5전은 은산 시장에서 나중에 받기로 하였다고 한다.

74 선어( 魚): 논이나 호수 하천에 서식하는 뱀장어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를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21

26일 [二十六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늦게야 맑아졌다.
창윤昌允 권이權伊 매득梅得 수봉壽鳳이 관현으로 떠났다. 창윤 등 3명은
광조光租를 가지고 왔고, 권이는 백조白租를 가지고 왔다. 임천 황생원이 조생
원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청병 3,000명이 말을 타고 금영錦營에 내려와서
임천에도 말먹이 콩 50석이 배정되었다. 청병이 온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
겠으나 어떤 자는 동도가 다시 완영을 침범했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수봉壽鳳이 가져온 조租의 품질이 가장 낮아서 먹고 싶지가 않아 2번이나
돌려보냈으나 허탕을 쳤다. 농사를 방해하는 것이 근심스러웠다. 품삯으로
5전을 주었다. 선봉先奉이 고기를 사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했다고 하여 판옥
으로 하여금 읍에 들어가 9전 5푼을 구해오게 하였다. 계피桂皮 4전을 사왔고
소주燒酒를 가져왔다.
구정 박가朴哥가 와서 말하기를, 본 면의 주인이 보리 1석을 팔려고 보리
값 8냥을 주기를 요청한다 라고 하여 마침내 그 값을 주었다. 사람을 염창鹽
倉에 보내 보교步轎를 구해왔다. 이것은 민씨네 집안 물건인데 빌려가서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체기滯氣가 있어 갑자기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하였는데 곽란 亂과

비슷하였다. 원손元孫에게 옛날 빚 2냥을 갚았다.

28일 [二十八日]
아침 일찍 맑았다가 오후에 흐리고 비가 왔다.
22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아우 근영이 박씨에게 출가한 누이동생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전별금을


삼을만한 것이 없음을 걱정하여 여비 외에 따로 2냥을 주어 장렴粧 75의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 가마꾼 중에 삼손三孫이 마침 고역雇役, 부역이 있어 가


지 못하여 한홍韓弘에게 명하여 그 빈자리를 메우게 하였다. 영남의 붓장사꾼
인 박노인이 왔다. 민용안閔龍安의 집에서 최근 기별을 적어서 왔는데 용안에
서 보낸 보고와 비슷하였다.

一. 전운轉運의 조복미漕復米76를 해당 읍에서 상납하는 것을 관례대로 복구


할 것.
一. 균전관均田官이 진결陳結을 농단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폐단이 가장 크니
영구히 혁파할 것.
一. 군포는 봄과 가을에 매 호당 1냥씩 원래 정할 것.
一. 결미結米는 전례대로 다시 만들 것.
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보洑를 쌓아 수세하는 것을 혁파할 것.
一. 각 읍 시정市井의 물건에 매기는 분전分錢에 수세하는 것과 도매都賣는
영구히 혁파할 것.
一. 환곡還穀은 전임 방백이 이미 밑천을 뽑아 받았으니 다시는 거두지 말 것.
一. 갚지 못한 공전公錢이 1000금이어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죄를 갚으면
친척을 침범하지 말 것.
一. 오래된 사채私債는 관장에 보고하여 강제로 거두는 것은 일체 금지할 것.
一. 여러 읍의 이속吏屬에게 임채任債를 바치고 차임差任하는 것을 시행하지

75 장렴(粧 ): 경대(鏡臺) 또는 시집 보낼 때 보내는 혼수를 말한다.


76 조복미(漕復米):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군(漕軍)들에게 나누어 주던 복결(復結)을 도로 선혜청에
바치게 하고, 대신 봉급으로 조창에서 나누어 주던 쌀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23

못하게 하고 금지할 것.
一. 각 포浦와 항港에서 잠상潛商들이 쌀을 사는 것을 일체 금지할 일.
一. 각 포浦의 어염魚鹽에 수세하는 것을 시행하지 못하게 할 것.
一. 각 관아에 차입次入된 물건의 종류는 시가에 따라 배정하여 사용하고
상정례詳定例77는 혁파할 것.
一. 각국의 사람들은 항구에 머무르게 하고 도성 안으로 들어와 관사館舍을
마련하지 못하게 할 것.
一. 본영의 사람 중에 죄 없이 죽은 자와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일일이
억울함을 풀어줄 것.
一. 전보국電報局이 백성들에게 가장 폐단이 크니 혁파할 것.
一. 보부상과 잡상이 무리를 지어 행패를 부리니 영구히 혁파할 것.
一. 흉년에 백지징세白地徵稅는 시행하지 못하게 할 것.
一. 연역煙役에서 분전分錢을 더 거두는 조항은 영구히 혁파할 것.
一. 국태공國太公을 받들어 국정을 살피고 돕게 할 것.
一. 경저리京邸吏의 급료는 규례에 따라 삭감할 것.
一. 본영의 진전賑錢은 백성에게 폐단이 되니 영구히 혁파할 것.

동배東輩들이 이러한 23조를 의정부에게 내어 임금께서 절목을 계하啓下 하


였다고 한다.
용금에게 1냥을 빌려 성만에게 주었다.
장교 김양배와 색리 김광희가 와서 세미稅米를 요구하였다. 완길과 인길 두

77 상정례(詳定例): 상정(詳定)에 관한 규례를 말한다. 상정(詳定)은 나라의 제도나 관아에서 쓰는 물


건의 값 세액(稅額) 공물액 등을 심사하여 결정하는 일이다.
22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곳의 세미가 80복 1속이고 또한 가속佳束과 귀석貴石의 것이 13복 7속이었다.


그들이 다시 온 것은 완길 36복 3속과 귀석 13복 7속을 합한 50복, 돈으로는
25냥을 양배에게 주었으나 두 곳을 합하여 40여 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질甥姪 윤용尹龍이 왔다.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바람 불며 비가 오다가 오후에 비가 그치고 날이 맑아졌다.
민참의閔參議가 두루마리 2축과 부채 1자루를 관직을 그만둔 부친에게 주고
절황節 , 계절에 드리는 선물을 이으려 했는데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삼손三孫만이 먼저 돌아와서 박씨에게 출가한 누이동생이 무사히 도착했다
는 소식을 들었다. 삼손에게 품삯 1냥 5전을 주었다.
생질 윤용도 갑길甲吉과 함께 탑동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6월 초 1일 [六月初一日丙午]
아침 일찍 흐렸다가 맑아졌다 오후에 비가 내렸다.
민참판과 민도사閔都事 경소景昭, 그리고 원서삼元書三 3명이 왔다. 한생원
도 함께 왔다가 바로 함께 떠나갔다. 아우 근영이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성만은 처음에 백마강에 도착하여 갑자기 학질에 걸렸는데, 그 증세가 매
우 심하였으나 오히려 병을 무릅쓰고 따라가서 돌아왔으나 병이 아직 낫
지 않았다. 그가 노고를 사양하지 않은 것이 가상하였다. 직접 닭 1마리
를 잡아서 주었다. 상손上孫에게 품삯 1냥을 주었고, 매득梅得에게는 2냥을
주었다. 상손은 행랑지기이기 때문에 조금 차등을 두어 주었다. 말을 빌
린 값으로 2냥을 주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25

초 2일 [初二日]
흐리고 바람이 불며 비가 왔다.
민씨네 교자轎子와 교자를 빌린 값 1냥을 보냈다.

초 3일 [初三日]
흐리고 비가 왔다.
조카 갑길甲吉이 건강하지 못하였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관진寬鎭의 온 집안이 돌림병으로 돌아가며 아팠고, 그도 돌림병을 모면하
지 못하였다. 병중에 죽도 잇지 못할 것이 걱정되어 그 아우를 불러 백미 1두
와 갈치 2마리를 보냈다. 유장의 텃밭에 김을 맸다. 지금 한양소식으로 걱정
하였는데, 봉한이 와서 민가閔家네가 편안함을 알려주어 기뻤다.

초 5일 [初五日小暑]
아침 일찍 맑다가 늦게서야 흐렸다.
새로 행랑에 든 행랑지기 한씨를 불러 남초南草 밭에 김을 맸다.
탑동에 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초 6일 [初六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오시午時 쯤에 갑자기 비가 하루 종일 왔다.
아침 갑자기 비가 하루 종일 왔다. 아침 뒤에 땅을 흔드는 소리가 우레와
22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같았다.
죽리竹里 민전주閔全州 집에서 용이龍伊를 경성京城에 보내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용이가 본래 올곧아 굽힘이 없는 성격이라서, 지난번 난리 중에 옷 안에 돈
꿰미를 기꺼이 차려고 하지 않았고, 성문에 들어가 편지를 전하려 하지 않았
다. 봉한이 김춘일金春一 집에 보고할 것이 있어 그로 하여금 들러서 전하게
하였다. 죽리 모금毛金의 어미가 보리를 팔려고 업성業成을 시켜 가져왔기에
재어보았더니 10두 3승이었다. 보리가 좋고 말斗도 넉넉하여 4냥 5전 2푼을
주었는데 말당 4전 2푼에 샀다.
밤에 다시 크게 바람이 불어 새벽까지 이어졌고 폭우가 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홍대장이 한양으로 돌아갈 때에 병정 1명당 가져가
는 재물이 2짐이 되었고 연로沿路의 백성들을 압박하여 바꾸어가며 운송하게
하였다.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 욕을 당하여 지나는 곳마다 어
수선하여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청병淸兵 5,000명이 아산牙山 백석포白
石浦에 와서 정박하여 처음에는 남요南擾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왜구가
성城에 근접하여 원대인袁大人이 불러서 올라오게 하였다. 그 중에 섭대인葉大人
이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공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모두 불러 올려
서 왜倭를 막게 하였다. 섭대인이 4기騎를 이끌고 호남으로 가서 그 동정을 탐
문했는데, 그 군률이 엄중하고 밝아서 혹시 민가의 오이 하나라도 가져가는
자가 있으면 바로 귀를 베어 내쫓았다 라고 하였다. 대소간에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을 수 있겠가? 또한 현명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을 뿐이다.

초 7일 [初七日]
흐리고 비가 왔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27

초 8일 [初八日]
맑음.
반곡의 자형 兄 윤이 왔다. 텃밭에 김을 맸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반교 종숙모님이 유행병 때문에 평안하지 못하였다. 열흘 동안 아주 위중하
지는 않았으나 어제 해시亥時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심부름꾼이 와
서 알렸다. 부음을 받고 놀랍고 참담하여 애통함을 비할 데가 없었다. 바로
길을 떠나 규암窺巖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친구인 이자민李子敏의 집
에 들어가 하룻밤을 기숙寄宿하였다.
반곡의 매형도 길을 떠나 노강魯岡에 부고訃告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새벽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수천秀川 윤석사尹碩士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
었다. 안현에 이르러 박노인을 불러 함께 길을 떠났는데 날씨가 더워 감당할
수 없었다. 오시午時에 반교에 도착하니 종형도 이런 증세를 앓고 겨우 일어
났으나 기력이 부족하여 곡을 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큰사촌 형수도 병을
앓아 일을 살피지 못했고, 둘째 사촌형수는 임신을 하여 한달 넘게 깨끗한
곳에서 분만을 하려고 화촌花村 임씨林氏 집에 가서 있다가 분상奔喪78하여 돌

78 분상(奔喪): 먼 곳에서 부모의 상을 듣고 급히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22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아왔다. 거문리巨門里 지사地師 이성중李聖中이 와서 여러 날을 머무르며 그 시


종始終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비로소 사람을 여야汝野시장에 보내어 포목과
명주 등을 구해 와서 마을에서 사람들을 구하여 급히 바느질을 하였다. 밤이
늦어서야 염습을 하고 입관入棺을 하니 날이 밝았다. 관棺에 옻칠을 하지 않고
반함飯含79을 하지 않았다. 대렴大斂80이 없이 단포單布로 된 이불 하나 홍가
계주紅可溪紬로 된 치마 하나 녹색저고리와 홑 명주저고리 각각 하나 베바
지 하나 홑명주바지 하나였고 원삼圓衫은 없었다. 여모女帽81와 명목暝目 및
악수握手는 모두 명주를 사용했고 천금天衾82은 붉은 치마를 사용했다.

11일 [十一日]
맑음.
여러 곳에 부고訃告를 전했다. 집 앞에 출빈出殯83을 하고, 저녁에 상식上食
을 하고 상복을 입었다.

12일 [十二日]
맑음.
동도東徒가 창궐猖獗하여 조정에서 원대인袁大人과 의논하여 청병淸兵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혜당 민영준閔泳駿은 동도가 이미 무너진 뒤에 권력이
약화되면 민씨들에게 이롭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몰래 왜병倭兵을 불렀다.

79 반함(飯含): 염습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리는 것을 말한다.


80 대렴(大斂): 소렴(小斂)을 한 다음날에 시신에 옷을 거듭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것을 말한다.
81 여모(女帽): 여자를 염습할 때 머리를 싸는 베를 말한다.
82 천금(天衾): 시신을 관에 넣고서 그 위에 덮는 이불을 말한다.
83 출빈(出殯): 장례를 치르기 전에 집 밖에 차린 빈소에 시신을 내어다 놓는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29

왜倭는 본래 총銃을 모으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며 왔다고


한다.

13일 [十三日]
맑음.
증조부의 산소와 선친의 산소를 찾아보았다.

14일 [十四日]
맑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화촌花村에 사는 친구 임대경林大卿에게 들러서 만나
보았다. 굳게 잡아끌어서 점심을 먹었다. 안현에 이르러 잠시 박노인을 방문
하였다. 수천秀川에 이르러 윤씨 집에서 다리를 쉬다가 가형家兄이 집에 돌아
왔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다. 규암에 사는 친구 이씨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달
빛에 집에 돌아왔다. 부친이 하루 걸러 학질을 앓아 지금 2직直84이어서 근심
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가형이 과연 6월 11일에 돌아왔고 한양 소식은
정말로 소문과 같았다. 왜병 10,000여 명이 남산南山에 진을 치고 경성의 밭
몇 십곳을 훼손하고 출입하며 사면四面의 요충지를 지켜서 겨우 숨만 붙어 있
는 것처럼 위급한 형세였다고 하였다.

15일 [十五日初伏]
맑음.
반곡의 자형 윤尹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해오기를, 지난 번 보름쯤에

84 직(直): 학질이 발작하는 차례를 나타내는 단위를 말한다.


23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자는 약속을 했으나 사정이 있어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


에 사람을 보내 알리니 20일 뒤로 미루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포시哺時, 신시申時에 우레가 치고 서리가 내려 조짐을 보여주었다. 이에 올
해는 서리가 빨리 오지 않을 것 같아 기뻤다.

16일 [十六日]
맑음.
부친의 학질이 직直을 맞아 다시 발작을 했다. 닭 1마리에 원삼元參을 약간
을 넣고 달여 먹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저녁에 관진寬鎭이 왔다.
노촌에 보관한 감곽甘藿 8단丹이 돌아왔다.
생선을 사서 연계 , 병아리와 함께 달였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오후에 맑아져서 늦게 흐리고 우레가 치며 비가 왔다.
부친의 학질이 다시 발작하여 때때로 조금 나아졌다가 증세가 심해졌다.
미당美堂 사돈어른의 아내인 서씨徐氏부인이 인시寅時, 오전 3 5시에 세상을 떠났
다는 부음訃音이 와서 비통함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19일 [十九日]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왔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31

20일 [二十日]
아침에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서야 맑아졌다.
부모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여 지난 직直보다 한기寒氣가 더해졌다.
웅호熊湖사람 손성진孫成眞이 보러 왔다.

21일 [卄一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돈 1냥을 교촌校村 이국李局에 보내 인삼을 구하고, 바로 금계랍金鷄蠟85 2푼
을 보내어 노강즙露薑汁, 밤이슬을 맞힌 생강즙과 섞어서 먹게 하였다.

22일 [卄二日]
맑음.
부모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여 아침에 금계랍을 조치했으나 효력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이의李宜가 보러 왔다.

23일 [卄三日]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서야 맑아졌다.
아침에 금계랍 1푼을 들게 하였다.
탑동에 가서 살펴보았다.
죽리竹里 용이龍伊가 일전에 비로소 돌아와서 말하기를, 왜병倭兵이 여전히

85 금계랍(金鷄蠟): 독일인이 경영하던 세창양행의 학질치료제 상표가 금계랍인데, 이 금계랍은 신약


으로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세창양행은 1883년에 설립되었고, 1896년 독립신문에 금계랍 광고
가 실리기도 했다.
23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안에 주둔하여 들을 수가 없었고 민가閔家에 볼만한 문적文蹟이 있어 적어서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빌려서 보았더니, 왜인倭人이 요청한 5조약이라는
것86은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정무政務로 외국보다 특별히 긴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으로 조약을 요청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그 의도는 바로 용관冗官
을 없애고 인재를 등용하며 학교를 세우는 것과 같은 일에 있었다. 여러 나
라의 공사관들이 서로 모여서 담판談辦을 할 때에 각국은 모두 대략 가부可否
를 말했으나 아라사俄羅斯만이 끝까지 한마디 말도 없었다고 하니 그 의도를
알만하다.

24일 [卄四日]
맑음.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왔다.
다시 금계랍을 들게 했더니 정말로 효과가 있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기를, 사위인 조군趙君이 아
직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그 대부인大夫人이 편지로 질책했는데, 한양에서 그
믐날에 왜병과 청병이 서로 싸웠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위인 조군
을 빨리 돌려보내려고 하나 반전盤纏, 노자(路資)이 없으니 돈 40꿰미를 보내주어
어려울 때에 도와주는 의리를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비록 저축
한 것은 없더라도 그 부탁을 저버리기가 어려워서 이쪽저쪽에서 돈을 꾸어
다음날 심부름꾼에게 주어서 보냈다.

86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공사는 본국 훈령에 따라서 1894년(고종 31) 7월 3일 고종에게


내정개혁방안요령(內政改革方案要領) 5개조를 제출하는 한편, 청의 세력을 물리칠 것을 강요하
였다. 이에 따라 갑오개혁이 진행되었고, 청일전쟁을 거쳐 일본이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해
간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33

25일 [卄五日]
맑음.
중복中伏날이다.
21일 왜장倭將 오토리가 대궐 안에 몰래 들어가 병사들이 모두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국태공國太公을 영접하여 양전兩殿과 함께 거처하게 하고 온갖 방법
으로 협박하며 개화開化를 요구했다고 한다. 원대인袁大人이 칼을 뽑아 혜당惠
堂, 민영준을 죽이려고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여러 번 중국
中國에 전보를 쳤으나 이홍장李鴻章이 왜倭에게 뇌물을 받고 군사를 출병시키지
않아 바로 돌아갔다.

26일 [卄六日]
맑았다가 오후에 소나기가 왔다.
매형인 윤尹과 웅포를 가는 길에 수자령秀子嶺에 이르러 남당 종형을 만나
담배를 빌려 피우며 대화를 하였다. 산을 내려가는데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와서 용왕동龍王洞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날도 저물어서 친구 조부경趙復卿
의 집을 방문하여 유숙留宿하였다.

27일 [卄七日]
맑았다가 밤에 비가 왔다.
용왕동입구에서 서씨徐氏어른께 들러 인사를 하였다. 부친이 병을 앓은 뒤
에 기력이 쇠해졌기 때문에 가미대보탕加味大補湯 5첩貼을 5냥에 샀다. 오후에
남당에 이르렀다.
호남에서 동학이 크게 일어나 전운사 조필영趙弼永씨가 함열 성불암醒佛庵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가 동학도에게 잡혀서 모진 형벌을 당하였다. 곤욕스런
23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온갖 모습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위원渭原은 낌새를 보고서 식솔을 거


느리고 다근茶根 여각으로 옮겨왔다. 윤진사는 동학도가 강을 건널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밤에 집을 철거하여 배에 싣고 떠났다. 동학도는 말 노새 왜
산倭傘 총 창 칼 등과 같은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빼앗았
다. 위원의 노새도 빼앗겼다고 한다.
위원을 보려 다근에 도착했으나 위원은 누추하고 좁은 거처를 견디지 못
하여 그 딸[윤진사의 며느리이다]을 따라 남당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밤에 바깥
뜰에서 노숙露宿을 하였는데, 땅이 축축하고 모기가 지독하여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와서 들어가 밤을 지냈다.

28일 [卄八日]
맑음.
다시 남당에 이르렀다.
동학도 1명이 강을 건너 임천수령을 보고 여자 1명을 찾았다. 돌아가는
길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만나 역마驛馬를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 이보다 앞
서 임천의 관인官人이 호남의 여자를 강제로 범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감
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친구인 조치선趙致先에게 들렀다.

29일 [卄九日]
맑음.
자형인 윤尹이 노새 1마리를 빌려 타고 황급히 먼저 왕호旺湖로 돌아갔다.
오시午時 쯤에 남당에서 동학도 수십 명이 말을 타거나 왜산倭傘을 펼치고,
또는 창과 칼을 가지거나 총을 쏘고 있었다. 친구인 윤익수尹益壽와 함께 집
남유수록 南遊隨錄 235

뒤의 소나무 숲을 통해 신대新垈 이씨 집에 가서 피하였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위원은 농립農笠을 쓰고 걸어서 다근茶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7월 초 1일 [七月初一日]
맑음.
읍邑마다 당黨이 있고, 촌村마다 도徒가 있었으며 하루에 오는 것이 3 4번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금구접金溝接, 김제접金堤接, 옥구접沃溝接이라고 하고
서로 접장接長으로 불렀다.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도인道人이라고 불렀고,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속인俗人이라고 불렀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초 3일 [初三日]
맑음.
종형과 길동무를 하여 왕호의 집으로 돌아왔다.
가재동佳才洞 이李가 왔다. 그는 회숙晦叔의 처적질妻嫡侄로 그 고모姑母의 귀성
歸省 때문에 왔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범암帆巖 매부妹夫 조趙가 왔다.
23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5일 [初五日]
맑음.
며칠 전부터 동학도가 자주 동네에 들어 부유한 집에서 말 총 창 칼 돈
왜산 등을 빼앗았다. 원한을 가지면 눈을 흘겨보고 반드시 보복하였다. 비록 노예
奴隸라고 하더라도 동도東徒에 들어오면 반드시 존대하여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

지 않았다. 상하의 구분과 귀천의 분별이 없어 옛날에는 없던 것이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종형이 말을 타고 돌아갔다.
동학도가 자주 중리中里를 침입하여 민참의 어른이 이인도회소利仁都會所87에
가서 소 1마리와 돈 100금을 내주었다. 본 읍의 동학접주인 이석보가 가속시
佳束市에 들렀는데, 민도사 경효敬孝가 나가서 몸소 맞이하여 윗자리에 예우하
였다. 그 집안의 사람들과 마을의 상민들이 모두 그 무리에 들어갔다. 아!
고립되어 이웃이 없고 우리 도가 궁박하구나.
제수弟嫂가 부모님을 뵈러 왔다.

초 7일 [初七日立秋]
맑음.
노촌의 정경락鄭景洛이 와서 해산물을 보리와 바꿔서 3석 12두를 거두어 보
관했다고 하였다.

87 이인도회소(利仁都會所): 이인은 공주와 부여사이에 있는 곳. 유림들이 대일항쟁을 도모하려 이곳


에 유회소를 설치하여 군사와 양곡을 모았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37

초 8일 [初八日]
범암 매부 조씨 집의 종이 와서 말하기를, 전운장轉運丈과 그 둘째아들이
옥구沃溝에서 모두 순서대로 도망하여 숨었고, 그 집안은 화를 모면할 방도로
동학에 들어갔다 라고 하니 한탄스럽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초 10일 [初十日]
맑음.
임함종林咸從의 아들이 찾아왔다.

11일 [十一日]
맑음.
신정新亭 윤승민尹承敏이 도인道人 1,0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도답島畓88 5두
락에서 작년에 난 소출 5석의 조租를 요구했는데, 말이 도리에 어긋나고 흉악
하였다. 이 마을의 도인인 장봉한張鳳翰과 최천순崔天順 및 여러 도인들이 와서
그 사정을 분별하여 말하기를, 논의 주인이 바뀐 땅에 그 구작舊作, 전에 짓던
소작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윤尹이 본래 근거가 없이 지금 와서 요구하는 것은
매우 이치가 없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사과하고 물러갔
다. 장도인張道人이 말하기를, 일이 근거가 없으나 이미 소란을 야기했고 사

88 도답(島畓): 지번으로 도(島)자인 논을 말한다.


23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람들이 애벌갈이와 두벌갈이 및 농우를 빌린 값이라고 한 돈 2냥을 돌아가는


길에 술 한 잔 먹는 비용으로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기에, 내가 말
하기를, 좋다 라고 하고 바로 2냥을 주어 보냈다.
성복聖福이 지난 해에 아우 근영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고 임시로 김만실金
萬實을 천거하여 대신하고 품삯 7냥을 먼저 주고 자신의 품삯 4냥은 천천히
주게 하였다. 그러나 1달이 못되어 만실이 도주하여 성복은 감히 자신의 품
삯 4냥을 말하지 못하였다. 이런 소요를 당하여 자못 해괴한 마음을 먹는다
는 소문을 내가 듣고 장도인張道人에게 말하였더니, 장도인이 말하기를, 이것
은 최근이라 모두 그 실상을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허위사실을
만들어 퍼뜨려서 외부사람이 미혹되기가 쉬우니 이치를 다해 그 뜻을 해소하
는 것만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또한 이치에 맞기도 하여 성복을
불러 돈 2냥을 주니, 그도 부끄러워하였다.

12일 [十二日]
맑음.
신정 윤승민의 중씨仲氏, [중형(仲兄)으로 자(字)는 준여(俊汝)이다]가 와서 돈 2냥을 돌
려주고 자기 동생의 불의를 사과하며 간절히 용서해주기를 빌었다. 그래서
억지로 그 돈을 주어 위로하여 보냈다.
민참의 집과 임함종林咸從, [함종(咸從)도호부사를 지낸 임씨(林氏)이다] 집이 모여서 마
을의 도인들로 하여금 후강後岡에 포包를 설치하여 다른 우환에 대비하자고
의논하였다. 그래서 산 위에 차일遮日을 겹으로 쳐 총을 쏘고 진법을 연습하
며 모양을 갖추었다. 군중에서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소리가 사방의 마을에까
지 들렸다.
저녁에 가서 임함종의 아들을 보았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39

13일 [十三日]
맑음.
경삼敬三과 함께 일룡日龍을 데리고 반교길을 떠나 수천秀川에 이르러 친구
윤경삼을 방문하여 점심을 먹었다. 안현鞍峴에 이르러 박노인을 데리고 먼저
화촌花村에 들어가 친구 임대경을 조문하였다. 봉래가 지금 일 때문에 도인道
人에게 곤란을 당하여 시골집에 피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전해
오는 얘기에 의하면, 선친 진사공進士公의 산소 근처에 있는 그 고총古塚의 자
손이 이름난 장수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지 무덤을 파낼 뿐만이 아니
라 사람을 해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밤에 구경칠具景七과 함께 삿갓을 쓰고 반교에 가서 종형을 만나보았더니
병이 난 뒤에 귀신의 모양을 면하지 못하고 허학許鶴의 집에 피신하여 거처하
고 있었다. 곤란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산기슭의 입안立案89으로 처지가
궁박하고 구차함이 한층 더하였다. 원망을 자초하여 원한을 만들었기 때문이
었다. 그의 이종姨從 한경오韓敬五가 제법 굶주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침탈
이 날마다 이르러 도인道人에게 핍박을 당하였다. 지금 홍주에 가서 그 부모
의 산소를 파서 옮기고, 아내는 낮에 피했다가 밤에 돌아갔다.

15일 [十五日]
<해석불능>

15일 [十五日]
맑음.

89 입안(立案): 관아에서 어떠한 사실을 인증한 서면을 말한다.


24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여종 유덕有德의 남편인 서학순徐鶴順의 종질從姪로 자字가 사유士有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친족들과 함께 임천 청룡동靑龍洞에 거처하였다. 그 친족 수십
명을 이끌고 중간에 머무르며 사유만이 들어와 봉래를 보고 속량贖良을 청하
고 가을에 속전贖錢 50냥을 낼 것이라고 하였다. 봉래가 말하기를, 이런 난세
에 그가 떠날 뜻이 있다면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미 떠날 것을 허락했는
데 어찌 돈을 말하겠는가 라고 하기에, 내가 잘 허락했다. 그가 속전을 내겠
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다. 만약 허락하지 않았다면 위협하려고 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16일 [十六日]
아침 일찍 맑았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부모의 산소일로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가마꾼 4명을 마을에서 샀는데,
모두 도인道人이었다. 값을 너무 높게 불러서 1인당 2냥 5전씩으로 정하여 다
음날 범암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경삼과 먼저 출발하여 배치拜峙에서 비를 만
났으나 비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하여 범동汎洞 이도사 집에 도착했다.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범암의 사태를 알지 못하여 어두워진
뒤에 길을 떠나 범암에 이르렀다. 산을 따라 길을 등지고 매부 조씨의 집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동네가 어수선하여 급히 경삼 및 여러 종형제들과 대나무
숲에 숨었다. 얼마 뒤에 소수접小水接에서 전운장 집의 장객庄客90인 전가田哥를
잡아갔다고 하였다.
선친의 산소는 원래 그 묘자리를 옮기려고 했으나 한가롭게 할 겨를이 없고,
더욱이 남의 말이 있으니 어찌 하겠는가? 마침내 무덤을 옮기려고 팠다.

90 장객(庄客): 토지관리인으로, 장전(庄田) 안에 전농(佃農)과 고농(雇農)을 모두 일컫는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41

17일 [十七日]
맑음.
동네 민가마다 뒤에 대나무 숲이 있어 나가서 피신하여 몸을 숨길 수 있었
다. 경삼과 함께 대나무를 헤치고 풀을 깔고 앉았다. 오시午時에 호남의 도인
70명이 와서 점심을 먹고 갔다
가마꾼이 왔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출발하여 범동에 도착하니 날이 비로소 밝았다. 길은 매우 위험
하여 내행內行의 왕래는 아주 염려가 되었으나 범암의 사태가 잠시라도 머무
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을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경삼은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아니 되고 그 아버지를 가서 뵙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 있게 하고,
노비 분이粉伊의 부부와 그들의 여식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였다. 다만
할머니의 사판祠版을 가마 안에 싣고 점손占孫이 갓난아기를 업고 따랐다. 여
종의 아들 12살 판덕判德이 가마 뒤를 따랐다. 가산과 집물은 먹는 그릇 이외
는 모두 가져가지 않고 옷만 급히 입고 대략 수습하였다. 사랑지기 방가方哥
에게 27냥을 구해 가마를 빌린 돈 10냥과 올 때의 노자 2냥을 주었다. 연일
잠을 자지 못한 뒤라 모두 피곤하여 곯아떨어져서 날이 새는 것을 알지 못하
였다. 날도 밝았으나 밥을 짓지 못하고 마침내 찬밥을 가져다가 가마꾼을 먹
여 길을 떠났는데, 어둑어둑할 때에 시장을 지나가려는 참이었다.
범동 이도사 집에 이르러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길을 떠났다. 친구 이李
가 가동家 에게 명하여 길을 호송하게 해서 쌍계동雙溪洞 입구에 이르렀다. 갑
자기 큰비가 내려 옷이 모두 젖어서 점사店舍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한참
뒤에 비가 조금 멈추어 길을 떠나 영흥점永興店에 이르러서 점손占孫 및 범동의
24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노비를 돌려보냈다. 길을 떠나 배치拜峙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비가 다시


세차게 내렸다. 고개위에 올라가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행색이 황급한데
다가 비까지 더하여 놀리니 사람의 곤고함이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
가 라고 하니, 모두 그렇다 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들이 모두
어떻게 그 괴로움을 알고 비가 오는 것이 기뻐할 만함을 알 수 있겠는가?
쌍계점雙溪店 촌사람의 우화偶話로 알 수가 있다. 이 날이 만약 개어서 맑았다
면 도인의 왕래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고 어찌 소란 없이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사람은 큰 고통 중에 반드시 이런 방편을 찾아 그 괴로움을
잊어버리니 이것이 바로 마음을 편안히 하여 어려움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이
다 라고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반교에 이르러 허학의 동생 청운靑雲의 협실
夾室을 얻어 누이동생을 거처하게 하였다.

19일 [十九日]
맑음.

20일 [二十日]
맑음.
종형 및 막내 문영과 함께 신암사新庵寺에 갔더니, 서천舒川 문장리文章里 친
구인 조趙씨와 여러 사람들도 소요를 피하여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21일 [二十一日]
비가 왔다.
남포 도인이 반교에 들어와서 봉래를 매우 급하게 찾는데 반드시 절에 와
서 뒤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인창麟昌과 함께 밤의 어둠을 이용하
남유수록 南遊隨錄 243

여 풀과 나무를 헤치고 몰래 길을 떠나 누이동생이 머물던 곳에 돌아오니


도인 100여 명이 묘막墓幕에 거처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봉래를 찾아 하루에
6 7차례나 왔으나 봉래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정 6 7명을 보내 창소
리가 쟁쟁 울리게 하여 문밖에 세우고 접接의 동몽童蒙91으로 하여금 방안을
수색하게 하였다. 봉래가 이에 나타났다. 집을 빼앗아 도청都廳으로 쓰려고
하여 아무리 생각을 해도 금지할 수가 없어서 허락을 하였다.

22일 [二十二日]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23일 [二十三日處暑]
아침 일찍 맑았다.
산지기 허학의 아내가 도인 4 5명을 데리고 남의 여종이 된 딸을 찾았다.
여산에서 부여로 나와 함께 동행하여 지치遲峙에 이르렀다. 저동苧洞에 이르러
비를 만났으나 준비가 없었다. 드디어 비를 무릅쓰고 길을 가서 규암에 도착
하여 점심을 먹으니 날이 이미 저물어서 사람들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유숙
하였다. 그 사람들은 김성구金成九 이성삼李成三 허봉이許鳳伊 강명길姜明吉
등의 접의 동몽과 허씨 아내였다.
남당 종형이 회숙과 함께 국동菊洞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친이 나날
이 학질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고 기력이 숨이 끊어질 듯이 매우 약한 상태여
서 근심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91 동몽(童蒙): 집강소 또 포접(包接)에서는 행동대로 소년을 모아 동몽군이라 불렀다.


24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4일 [二十四日]
맑음.
반교사람이 아침밥을 일찍 먹고 경호시鏡湖市로 가는 배를 탔다.
근동近洞 도인들이 가속시에 모두 모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리中里의 민
씨閔氏가 위세를 믿고 고약한 성질을 부려 화가 되는 일을 향곡鄕曲에서 행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갈지 않는 사람들이 없어서 한번 복수하기
를 바랐던 것이다. 장張, 장봉한과 최崔, 최천순 두 도인이 사사로운 옛 약속으로
집 뒤에 포包를 설치하여 힘껏 그것을 막으니 원근의 사람들이 한스러워 하
였다. 꾸짖고 나무라며 여러 번 와서 말하기를, 민씨는 나라를 망하게 한
적賊이고 백성을 해친 좀벌레이다. 의병을 일으켜 죄를 벌할 때에 이것을 반드
시 먼저 해야 하는데 도리어 보호해 주고 그 추악한 무리를 받아들여 우리 도道
를 더럽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해당 접주는 민씨의 죄를 다스려야 하고, 접
接의 여러 사람들도 중형重刑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장張과 최崔
두 사람은 두려워서 민씨 두 사람의 이름을 빼고 가속佳束으로 포를 옮겨 사죄
를 하였다. 민씨 두 사람은 민석여閔錫汝와 민경식閔卿植 [자(字) 성관(聖寬)이다]으로 화
를 두려워 하여 먼저 입도入道하였다. 민석여의 아우인 민참봉閔參奉 순칠順七이
왔다가 그 부형父兄이 곤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바로 가족을 데리고 떠나갔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홍주 갈산의 김씨 집이 그 노복奴僕에게 참혹한 화를 입었는데, 원근의 양
반집들에 종종 이런 화가 있었다. 마침 묘당廟堂에서 관제官制와 의제衣制를 개
정하였고, 공사천公私賤 창우倡優 백정을 혁파하여 모두 종량從良하였다. 인
근 마을의 민씨네 집에서는 모두 풀어주어 종량했다고 한다. 바로 김권이金權
남유수록 南遊隨錄 245

伊를 불러 그의 아내 용금의 문권文券을 내어 주었다. 김성만의 아내인 순동과


김업성金業成의 아내인 옥섬玉蟾은, 모두 신만손申萬孫의 아내인 여종 순금의 소
생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문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증표를 써서 주었다.
성만이 옛날 문권을 고집스럽게 요구하였으나 끝내 주지 못하여 사뭇 야속하
게 여기고 돌아갔다. 한층 더해지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3형제가 함께 길을 떠나 가속佳束 산모퉁이에서 나는 미당美堂을 향해갔고,
가가哥哥92와 아우 덕영은 노중魯中을 향하여 갔다. 양화陽華로 돌아가서 경희景
熙 모친을 뵙고 미당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악岳의 모친 기제사에 참석을 하
였다.
방호芳湖 윤경우尹景雨 어른이 왔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27일 [二十七日]
맑음.
중산中山에 가서 윤씨네 사촌 누이동생을 보고 계양평리桂陽坪里를 지나갔다.

28일 [二十八日]
흐림.
돌아오는 길에 왕진汪津에 이르러서 조진사趙進士를 방문하려고 그 집에 갔

92 가가(哥哥): 호칭으로 여기서는 아우인 근영(根榮)을 말한다.


24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더니 마을 아낙네들이 집과 뜰에 그뜩하여 옷과 이불을 자르고 바느질하고


있었으며 청색과 붉은 색이 뒤섞여 있었다. 마음속에 놀라고 이상했으나 상
喪이 있어 염습할 물건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여겨 감히 바로 들어가지 못하
였다. 오른쪽 행랑채 아래에 3 4명의 아낙네들이 염색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바느질을 하는지를 물었더니, 이 마을 포包에
서 깃발을 만들어 궁원도회弓院都會에 나아가려고 한다 라고 하였다. 갑자기
친구 조군실趙君實이 집에서 나와 함께 그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강을 건너 용전龍田을 지나 노촌의 척숙 경락景洛씨 집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어머님의 생신날이다.
빙현氷峴에 사는 친구 정鄭과 족종族從인 순약舜若이 찾아왔는데, 건평乾坪의
유회儒會93에 가려는 것이었다.

30일 [三十日]
맑음.
양화의 종이 범동에 갔다가 여기에 들러 오늘 아침에 떠났다. 그 편에 친
구 조趙에게 보내는 옷과 양말을 부쳤다.

93 건평유회(乾坪儒會): 이유상(李裕尙) 등 충청도 유생들이 대일항쟁을 위해 이인 건평에 도회소를


차리고 유회를 결성하였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47

8월 초 1일 [八月初一日乙巳]
비가 왔다.
아우 근영이 이른 새벽에 와서 말하기를, 건평의 유회에 들러서 보았더니 사
람들이 몇천 명은 되었고, 공주사람 이영해李寧海가 와서 진법陣法을 연습하였
다. 그는 바로 장신將臣, 대장 봉의鳳儀의 종질從姪로 몸은 허약하여 옷을 감당하
지도 못할 것 같았으나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눈빛은
번개처럼 빛났다. 전주 사람 이도사李都事 유상裕尙은 지모智謀가 있어 성겁평成
劫坪 민사능閔士能 준호俊鎬가 왜를 토벌하고 나라에 보답하자고 권면하여 의병
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었다. 민閔이 비록 창의倡義를 내세
웠으나 실제는 그런 뜻이 아니어서 이李는 바로 떠나 건평으로 들어갔다. 그
를 따르는 자는 100명이었고, 다시 민준호에게 돌아간 자는 1,000명이었다.
이영해와 이유상의 뜻이 서로 일치했으나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을 따르지 않
아 두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갔다 라고 하였다.
아우 근영이 다리 부분에 종기가 나서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곡부曲阜 민생
원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중리中里에 갔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부친이 며칠 전부터 건강이 조금 나아졌고 학질증세는 거의 나은 것 같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24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4일 [初四日]
맑음.

초 5일 [初五日]
맑음.
아우 덕영이 노중魯中에서 돌아왔고, 조카 용이도 따라 와서 말하기를, 반곡
생질녀가 주마담走馬痰94으로 고생한다 라고 하여 매우 놀라고 걱정스러웠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가사佳寺 생질 용이龍伊가 돌아갔다.
민경식 집에 가서 그 무덤을 파낼 것을 독촉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오후에 민閔씨가 왔는데 전혀 무덤을 파낼 뜻이 없었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두동杜洞 정경선씨가 찾아왔다. 석성石城 야곡冶谷의 내종內從 윤상복尹相福과
영남의 붓장사 안安씨 노인이 왔다.
민경식이 와서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도인가? 땅을
애걸하려고 거적을 깔거나 이미 매장을 하고 용서를 비는 경우도 있다. 그러

94 주마담(走馬痰): 유주담(流注痰)이다. 담(痰)이 이곳저곳을 옮겨다녀서 몸이 군데군데 욱신거리고


아픈 병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49

나 지금 민경식은 투장偸葬한 지 이미 1년이 넘었고 그 끝없는 행패를 부린


것이 몽둥이를 든 것보다 심하였다. 송사訟事를 하여 판결이 나서 기한이 찼
어도 강변하며 파가지 않다가 하룻밤 사이에 이런 일을 하리라는 것을 어찌
꿈에서나마 생각이나 했겠는가? 통탄스럽고 가소롭다.
오후에 바로 떠나가서 오지 않았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이 마을의 오봉룡吳鳳龍 3형제가 동도東道에 들어가서 말하기를, 지난 겨울
에 바친 4석의 조租는 매우 근거가 없으니 그 물건은 찾아야 하고 그 원한을
갚아 달라 고 하였다. 접주와 접사接司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모두 한동네 사
람으로 그 일을 잘 알고 있어서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책망하며
제지하였다. 봉룡이란 자가 와서 아버지를 보고 조포租包를 요구하였는데, 패
악한 말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바로 지난 날 내가 반교에 있을 때의 일 때문
이었다. 그 아우인 봉기鳳起가 다시 와서 요구하기에 바로 포包에 가서 장접주
張接主, 장봉한를 만나 그 이유를 말했더니 장접주와 최접사崔接司, 최천순는 모두
가당하지 않다고 했으나 송접사宋接司 건노建老만이 말하기를, 나라법에 이자
는 자모子母95에 그쳐야 한다. 무자조戊子租96 10두를 말한다면 10두로 4석을
받은 것으로 외부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면 의아해할 것이니 나라법에 따르
는 것이 옳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500년 동안 전

95 자모(子母): 자모지리(子母之利)이다. 1년의 이자가 원금의 2할 이내가 되도록 정한 이자율을 말


한다.
96 무자조(戊子租): 무자년(戊子年, 1888년)의 조(租) 10두를 1894년까지의 5년동안 이자를 계산하
여 원금과 합해도 4석은 되지 않는다.
25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곡錢穀의 출납出納은 반드시 나라법을 따른 것인가? 해마다 이자를 계산하는


것은 공사公私간에 통행하는 규례인데 더욱이 받아야 할 전량錢兩을 모두 그
안에 넣어야 하는가? 받는 입장에서는 1전도 크게 탕감하는 처지인데 1000
금을 탕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금 이번 일이 내가 근거 없이 탐욕스럽
게 받는 것이 아니고 그가 좋은 말로 애걸했다면 반드시 4석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10석이라도 그럴 힘이 있다면 갚아야 한다. 만약 위세를 빌어
함부로 빼앗는다면 쌀 한 톨도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반교의 이우덕李友德이 왔다. 임가林家네 종이 와서 편지를 전했는데, 조카
갑길甲吉의 혼례를 빨리 치르자고 하였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임가네 종을 돌려보내며 답장하기를, 조카 갑길이 나이가 13세이지만 매
우 가냘프고 변변치 못하여 아직 젖 냄새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런
소요를 맞아 굶어죽을 것을 내 자신이 알고 있고 입을 이어가는 것은 이미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자식을 해쳐서는 아니되니 다른 혼처를 구해보
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11일 [十一日]
맑음.
형제가 두릉杜陵에 가서 정鄭씨 어른을 방문하고 아울러 그 어른의 관객館客
남유수록 南遊隨錄 251

인 한동란韓董蘭 선생을 보려고 하였다. 한韓선생은 지술地術에 신묘하다고 하


였다. 모두 만나지 못하고 산등성이를 넘어 토목동土木洞 정석사鄭碩士를 보러
갔다. 그래서 빙현氷峴에 이르러 한韓과 정鄭 두 친구를 보았다. 오후에 다시
두릉에 들어가니 동란선생이 밖에서 돌아와 한참동안 앉아서 이야기를 하였
다. 날이 저물려고 하여 바로 돌아왔다.
친구 이덕현李德顯이 산으로 돌아갔다. 민참의閔參議 어른이 조租 10두斗를 보
내어 제수祭需를 도왔다. 매우 고맙고 부끄러웠다.

12일 [十二日]
맑음.
동리東里 박석사朴碩士 성백聖伯이 공주 반송포盤松包에 입도入道하였다. 며칠
전에 접주를 만나러 가서 앉아 있을 때에 성이 석石씨인 자가 억울함을 호소
하여 말하기를, 저의 선산이 곡화천曲火川 뒤의 산등성이에 있는데 어떤 집에
게 빼앗겼습니다. 지금까지 펴지 못한 억울함을 위엄있는 명命을 빌려 한 번
에 씻고 그 무덤을 파서 그 땅을 돌려받으며 이미 베어서 팔아버린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돈으로 받아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접주가 말하기를,
땅을 돌려받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무덤을 파는 것은 법으로 금하고 있
다 라고 하였다. 석石씨가 말하기를, 이 달 보름에 그가 성묘하는 것을 이용
하여 잡을 계획이니 이것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니, 접주가 말
하기를, 어찌 이와 같은 사리事理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 집안의 산소
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었다. 그 때 대접주大接主 김상오가 공주에 들어왔을
때에 접주 이李가 송사를 듣고 심리했는데, 그는 바로 이남원李南原의 아들로
성백聖伯과는 교분이 있었다. 접사 윤尹은 바로 성백과는 사돈사이의 친척으
로 더욱 막역하여 내 집안을 위하여 매우 힘있게 말을 해주었다. 돌아와서
25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알려주기를, 성묘하러 가지 말라 고 하고, 다시 말하기를, 접사도 이처럼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매우 고맙고 고마웠다. 성백과 함께 접주와 접사를
만나보고 후환을 없애려고 했으나 성백에게 일이 있어 하지 못하였다.
야곡 고모부인 윤자창尹滋昌씨가 그 큰아들을 데리고 왔다. 순동 어미가 왔다.

13일 [十三日]
맑음.
고모부 윤씨가 집으로 돌아갔다. 야점野店 최학춘崔鶴春이 보러왔다.

14일 [十四日]
맑음.
밤에 할머니 종상終祥을 치렀다.

15일 [十五日]
맑음.
남은 음식과 술 및 안주를 동네사람에게 먹이는 전례前例가 있었으나 지금
은 마을에 포包을 설치하여 동네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것들을 보
내고 직접 가서 보았다. 술자리가 끝난 뒤에 오봉룡을 불러서 꾸짖었다.
남당 종형이 친구인 이경화李景和와 윤성고尹聖皐 등과 함께 왔다.

16일 [十六日]
맑음.
이학여가 와서 오래된 약속을 실천하였다. 종형 및 친구 이李와 함께 길을
남유수록 南遊隨錄 253

떠나 저물어서 남당에 도착했다.

17일 [十七日]
맑음.
이학여와 함께 길을 떠나 웅포에 이르렀다. 위령渭令이 이달 초에 정기희丁
奇喜를 얻었다. 오후에 김제를 향해 길을 떠났다가 춘서가 병이 나서 집에 누
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전주 고잔진高盞津을 건너 고잔리高盞里 이학여의 집으로 들어갔다.
학여는 큰형님집의 경재敬在이다. 바로 김제와는 경계지역으로 세상에서 말
하는 십리노화十里蘆花인데 그 곳을 보지 못하였다. 마침 이학여의 친척이 왔
다. [자字가 평중平仲씨이며, 비인(庇仁) 인관동(仁冠洞)에서 거주한다]

18일 [十八日]
비가 왔다.

19일 [十九日]
맑음.
같이 기거하던 이경문 박경우 이학여의 삼종三從 형제들과 함께 나가서
경치를 구경하였다. 백구정白鷗亭 뒤쪽의 산등성이에 올라가 보니 바로 평탄
하고 넓은 들판 가운데에 허리띠처럼 좁은 한줄기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서
백구정 아래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북쪽으로 고잔에 이르러 포촌抱村을 건
넌 뒤에 서쪽의 바다로 들어갔다. 바로 정남향正南向으로 한쪽은 육지와 이어
져 있고 모두 소택沼澤이 가로로 걸쳐 있었다. 백구정에서 조금 떨어진 산줄
25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기로부터 풀들 사이를 몸을 숙이고 서쪽으로 가서 북쪽이 고잔촌高盞村이었


다. 완연히 기운이 돌출하였고 마을 앞에 다시 한줄기 기운이 돌출하여 대금
大金, 징 소리가 퍼져 나오는데 소금小金, 꽹과리이 감싼 것과 같았다. 동쪽은 큰
못에 갈대가 주위를 둘러싼 것처럼 매우 넓어서 십리노화十里蘆花라고 말한 것
인가?

20일 [二十日]
맑음.
이학여가 돌아가고 이李와 박朴 두 사람 그리고 평중平仲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전주 대장촌大壯村을 거쳐 춘포春浦 최감찰崔監察 덕경德卿의 집에 이르렀
다. 집 앞에 십리하화十里荷花가 있었는데 바로 익산의 장연長淵이었다. 주인과
함께 나가서 구경을 하였다. 아름답구나! 어느 곳이 금릉金陵, 중국 남경만 못하
겠는가? 그러나 멀고 외진 땅에 있어서 고명한 사람과 뛰어난 선비의 감상이
없고 또한,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 유명한 정자亭子나 화려한 누대를 짓지 못
하여 마침내 없어져서 그 이름을 들을 수가 없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이웃에 남학南學을 하는 자가 밤마다 산에 올라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오
홍五虹97을 불렀는데, 그가 춤추는 자세가 매우 법도에 맞았다고 하기에 주인
과 함께 가서 보니 마침 집에서 경經을 외우고 있었다. 갓을 쓴 아이들이 줄
지어 앉아서 합장合掌을 하며 아미타불을 암송하였다. 한참 뒤에 방울이 흔들
리는 것처럼 손이 떨렸는데, 신령이 내려왔다고 하였다.

97 오홍(五虹): 흠치흠치 로 시작되는 남학이 부른 노래를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55

21일 [二十一日]
맑음.
길을 떠나 익산益山에 이르러 금묘총金猫塚에 올라 이석사李碩士, 이경문와 헤어
졌다. 저녁에 두천斗川 최씨집에서 묵었다. 그 집은 바로 박朴, 박경우의 새 사돈
집이었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박朴과 헤어지고, 평중과 길동무를 하여 웅포에 이르러 평중도 떠나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24일 [二十四日秋分]
맑음.

25일 [二十五日]
맑음.
한산 기호岐湖에 갔는데, 바로 위령渭令이 새로 이사한 곳이었다. 족숙모族叔
母의 병세가 지금 매우 위중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비가 왔다.
25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지호芝湖에 사는 친구 정鄭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웅포에 돌아왔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웅포 도인이 남원의 군회軍會98에 가게 되어 웅포 일대 부유한 집에서 여비
를 거두었는데 위령도 그 숫자 안에 들어갔다. 사람을 보내 집강執綱이 있는
곳에 불러와서 잡아 가두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두 접接에서 각각 100금을
거두었다.

29일 [二十九日]
흐림.
찬보와 손감찰 그리고 손씨라는 어떤 사람 1명과 함께 길을 떠나 남당에
이르렀다. 위령이 그들로 하여금 간추看秋99를 하도록 했기 때문에 매산梅山 사
음舍音의 집에서 헤어졌다. 종형과 함께 친구인 이경화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고, 용두리龍頭里로 친구인 정치심鄭致心과 윤익수尹益壽를 찾아갔으나 만나
지 못하였다. 죽리 윤여선 어른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조곡鳥谷 김복경金復卿

98 남원(南原)의 군회(軍會): 김개남은 남원에 웅거하면서 전봉준과는 달리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1894년 7월 15일 대대적인 대회를 가졌고 때때로 큰 집회를 열었다.
99 간추(看秋): 추수상황을 살펴보는 일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57

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왕동王洞 김성유金聖有 어른의 집에서 묵었다.

9월 초 1일 [九月初一日]
맑음.
다시 죽리에 가서 윤尹과 정鄭 두 친구를 만났다. 점심을 먹은 뒤에 다시
길을 떠났는데, 친구 윤사극尹士克이 그 막내동생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
다. 누이동생이 노성 반곡의 족인族人 집에서 혼담이 있었기 때문에 종형과
함께 가기를 바랐다. 날이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다. 이미 그저께에 연기燕岐
의 형수 임씨가 출가를 하였다. 난리 중에 사람 일이 이와 같은가? 다만 가족
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종형이 친구 윤尹과 함께 노성을 향해 떠났다. 오후에 길을 떠나 반교에
들어가니 날이 저물어서 석우 이씨집에 투숙하였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반교에 도착했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25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5일 [初五日]
맑음.
거문巨門 이선생李先生이 이른 새벽에 왔고, 서천 구具씨가 따라왔다. 밥을
재촉하여 먹고 서천을 향해 떠났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초 7일 [初七日]
맑음.

초 8일 [初八日]
맑음.

초 9일 [初九日]
맑음.
종형 및 매제妹弟 조趙와 함께 거문에 갔는데, 이선생이 집에 없고 날은 저
물어서 아랫마을 낙여洛汝의 집에 가서 묵었다.

초 10일 [初十日寒露]
맑음.
아침에 다시 마을에 올라가니 이선생이 밤에 돌아와서 막 한양으로 떠날
려고 하여 함께 동행하여 북두문北斗門에 이르러 헤어졌다. 친구 조趙, 조경장는
남유수록 南遊隨錄 259

거문에 남아 그 백씨伯氏를 기다리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제인


조趙가 거문에 4칸 집을 사서 은거할 계획으로 먼저 선생을 거처하게 했고,
그 울타리 건너 6칸 집이 있는데 또한 최씨네 집터였다. 친구 조경장趙敬長이
그것을 사려고 120금에 값을 정하고 오늘 값을 치르기로 하였다. 날이 저물
어서 매제인 조趙씨 형제가 왔으나 돈은 치르지 못했다.

11일 [十一日]
맑음.
친구 조경장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은현隱峴 권진사 종진種振 [자(字) 성지(聲之)이
다]을 찾아갔는데, 바로 전운장轉運丈이 부리던 자로 재물을 모아 살만하였고
사람됨이 신실信實하여 함께 일을 할 만하였다. 친구 조趙, 조경장가 그와 심정
이 통했기 때문에 만나보고 도움을 구하였다. 권權, 권종진도 이런 뜻을 가진
지가 오래되어 대략 배치한 것이 있고 삼굴三窟100을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흔쾌히 허락하고 먼저 250금의 전표를 써서 주어 찾아 쓰게 하였다.

12일 [十二日]
맑음.
길을 떠나 범암에 도착하였고, 날이 저물어서 서천 계룡鷄龍에 이르렀는데,
바로 친구 조趙의 거처였다. 중도에 민오위장閔五衛將과 이석사李碩士 민도敏道를
만났다.

100 삼굴(三窟): 교활한 토끼는 굴 3개를 가지고 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여러 가지로 몸을 보호
하는 방법을 말한다.
26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3일 [十三日]
맑음.
짐꾼 1명을 얻어 웅포로 향하다가 동죽東竹에 들러 조옥구趙沃溝를 위문하였
다. 한 달 전에 장모丈母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길을 떠나 신성리新成里 나루
터 주점酒店에 이르러 위원 집의 종인 석분石奮을 만나 위원이 어제 기호岐湖
집에서 모친상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놀라움을 그만둘 수 없어 바로 가서
곡을 하려고 했으나 짐꾼을 하루 종일 허비하게 할 수가 없어 강을 건너 웅
포에 도착했다. 이생원李生員 군오가 기호에서 소요를 피해 왔고 서만길徐萬吉
이 왔는데, 설사병이 매우 심하였다.

14일 [十四日]
맑음.
주가主家101에서 유치전留置錢 100금을 찾고 궤짝에 있는 돈 5냥을 내어 여
비에서 남은 돈을 합치니 6냥이 넘었다. 104냥은 짐을 꾸렸고 2냥 5전은 짐
꾼이 썼는데, 태가 價 1냥 6전을 제외하면 9전은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이
었다. 강을 건너 길이 나뉘어져 기호에 도착했다. 이 날 집안에 중상重喪102
의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15일 [十五日]
맑음.

101 주가(主家): 주인집 또는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명칭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물품과 돈을 빌려
주거나 보관하는 객주(客主)를 말하는 것 같다.
102 중상(重喪): 탈상을 하기 전에 부모상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1

돌아오는 길에 계룡에 도착하였다. 잠시 뒤에 안애鞍厓 박노인이 왔는데,


이웃에 인척姻戚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달빛을 이용하여 친구 조趙와 함께 범암에 돌아왔다. 사돈어른이
담痰 때문에 평안하지 못하였다. 동요東擾가 어느 곳이나 그렇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범암과 문장文章의 조씨들이 아주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사돈어른이
거기에 있는데 편안하게 조금의 일도 없는 것은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16일 [十六日]
맑음.
종 1명을 데리고 어은현漁隱峴에 갔는데, 지난번에 25조 전표를 물렸기 때
문이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객주가 다시 150금의 전표를 써서 범암의 종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반교로
돌아갈 때에 주인이 말하기를, 홍산읍의 시장에서 60금을 찾을 것이 있으니
지나가는 길에 찾아서 쓰라 고 하였다. 조치鳥峙 임林씨와 함께 가서 시장에
들어가 그 사람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날이 늦어져서 마침내 임林씨와
헤어져 돌아왔다. 구반령九盤嶺을 넘어 잠영리簪纓里 뒷고개를 통해 월명산月明
山 금지사金池寺에 올라 다리를 쉬고 절 뒤쪽 길을 따라 반교에 도착했다.

18일 [十八日]
맑음.
26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맑음.
경삼과 함께 거문에 갔는데, 집값을 보내주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이미
어제 도착하였다. 최씨와 학여를 만나보고 두 집의 문권文券을 만들었다. 4칸
집에 헛간 2칸이 덧붙여졌고 여자麗字 밭 1석石락지 논 3승升락지 감나무
2그루 대추나무 3그루 밤나무 3그루였으며 결結은 10복卜 6속束이고 돈으
로는 130금金이었다. 새 패지牌旨103 1장에는 6칸 집에 여자麗字 텃밭 1두斗락
지 밭 2석石락지 결結 24복 5속 뽕나무와 과일나무 80여 그루 논 1배미
夜味이고 돈으로는 120금이었다. 임진壬辰년 3월에 노비가 용업龍業인 패지와
갑오년 1월에 노비가 성돌成乭인 패지 2장과 새로운 패지 1장이었다. 대개 패
지를 가지고 서로 매매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었다. 최씨쪽 문권에서 노
비 이름은 정득正得이었다.
지금 이런 배치는 같은 배를 타고 서로 구제하는 것과 같다. 집과 양식을
사는데 이쪽저쪽을 논하지 않고 다만 그 노동력의 여하에 따랐다. 그리고 6
칸 집은 웅포에서 나누어 준 조條를 보냈을 것이다.

20일 [二十日]
바람이 불고 흐렸다.
범암에서 경삼을 보내고 혼자 반교로 돌아왔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103 패지(牌旨): 양반이 노비에게 금전거래를 대신하게 하던 위임장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3

22일 [二十二日]
맑음.
길을 떠나 안애 박노인을 들러서 보았다. 망건을 만드는 만경萬頃사람 유양
숙柳良叔을 만나 동행하여 돌아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동생 근영의 생일날이다.
임천 이경화와 그 재종씨再從氏가 왔다가 바로 떠났다.
유柳, 유양숙로 하여금 망건을 새로 만들게 했는데, 부친이 복服을 벗은 뒤에
아직 갓과 망건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25일 [二十五日霜降]
맑음.
묘시卯時에 형수가 딸을 순산하였다. 설사 증세가 있었는데, 낫지 않아서
더욱 걱정스러웠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돌아가신 할머니 정부인貞夫人 나주 임씨 기일이라서 맥종麥種 18두를 반교
로 보냈다.
26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맑음.
고모부 서상원徐相元이 새로 비인현감을 제수 받아 일정을 재촉하여 임소에
나아갔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는데 그의 둘째아들이 따라왔다.

28일 [二十八日]
흐림.
비인현감이 할머니산소와 서조모庶祖母 묘소를 찾아뵙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내종內從이 패도佩刀와 고문古文중에 구양수문집 104 1권을 빌려갔다.
반곡의 자형이 어제 왔다가 오늘 떠나갔다.

29일 [二十九日]
내용 없음

30일 [三十日]
맑음.
중리의 포包에서 일제히 본 읍에 들어와 군기를 함부로 탈취하기에, 어떤
이가 옳지 않다고 하니 바로 그쳤다. 구실을 대기를, 성을 지킨다 라고 하였
다. 마을의 사대부 집들이 모두 그 신주神主를 땅에 묻고 곡을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104 구양수(歐陽修) 문집: 중국 당송(唐宋) 8대가로 꼽히는 구양의 시문을 모은 책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5

10월 초 1일 [十月初一日甲辰]
맑음.
중리 민원유閔元有에게 빌려 쓴 돈의 원금이 40냥이고 다시 용금을 시켜 가져
온 돈 10냥에다가 이자를 계산하면 100여 금이었다. 그의 삼촌 경휘景輝에게는
원금 260금에 이자를 계산하면 600 700금이 되었고, 민성홍閔聖弘에게는 원금
12냥에 이자를 계산하면 30금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낮은 이자의 빚은 그
냥 두고 높은 이자의 돈을 갚아 가면 결국 빚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이자를 받아먹고 시간을 끌며 참으로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 불행하게도
소요를 맞아 일이 모두 어긋나게 되었다. 더욱이 이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
하여 이별할 때에 영원히 마음에 짐이 되었다. 돌아와서 지금 남아있는 물건을
보니 재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황폐한 집과 척박한 땅뿐이어서 재산을 처분하여
여러 집들의 빚을 갚아야 할 형편이었다. 이런 뜻을 경휘에게 말했더니 삼촌과
조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유장鍮庄의 집과 터 텃밭 강변江邊의 시
장柴場 포전 2곳 신정新亭 논 9두락지를 하나의 문권文券으로 만들어 경휘에게,
포전 2곳과 논 4두락지를 문권으로 만들어 원유에게, 포전浦田 2곳을 하나의 문권
으로 만들어 성홍에게 주었다. 경휘와 그 아버지가 모정茅亭의 새집을 욕심내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유장에 있는 모정은 집이 더 아름답지도 않고 땅도
더 길吉하지가 않다. 다만 선산先山 섬돌 아래를 남에게 줄 수가 없다. 조상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향당鄕黨에 빚을 남기겠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끝내 이
루어지지 못하고 두 민씨閔氏도 물러났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26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3일 [初三日]
맑음.
윤자영에게 빌려 쓴 돈은 그의 아들 미봉未鳳의 하는 말이 위협적이어서
먼저 10냥을 주고 나머지 10냥은 내년 봄에 보리를 줄 때 본전 20금을 마감
하기로 약속하였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시요時擾가 점점 심해져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담사 事105를 상정일上丁日, 초
순에 드는 정(丁)일에 지냈다.
부여두접주扶餘頭接主 강희서姜希書가 자신의 접솔接率 2명을 보내 돈을 독촉했
는데, 오래 전에 관련된 일이었다. [접솔 두 사람은 성(姓)이 성(成)씨와 조(趙)씨로 모두 대흥
(大興) 신창(新昌)사람이었다] 마침 농 을 판 돈과 망건 값으로 줄 돈을 합하여 20금
金을 주고 두 사람에게 애걸하였다. 두 사람 모두 반명班名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있어 기꺼이 승낙하고 가서 좋게 말을 해주었다. 우리 마을의 접주 장대
현張大賢이 편지를 부쳐 힘껏 말을 해주어 다른 소란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선친이 살아계실 때에 구포鳩浦 강가姜哥들이 이슥하여 어두운 밤에 떼를 지어
산지기 김판득金判得의 아내를 겁탈하였다. 그래서 바로 종을 보내 그들을 잡
아다가 모두 엄중히 징계했는데, 그 때에 중간에서 권세를 부린 자가 있어 뇌
물 70금을 받았다고 하였다. 희서도 바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근래에
사람을 보내 150금을 요구하였는데 실제로 본전의 갑절에 해당하였다. 강가姜

105 담제를 말한다. 담사( 祀)라고도 한다. 초상으로부터 27개월 만인, 즉 대상(大祥)을 지낸 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하여 지낸다. 아버지가 생존한 어머니상(喪)이나 처상
(妻喪)은 초상 후 15개월 만에 지낸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7

哥들에게 이런 일을 말했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희서는 반드


시 혼자 결정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런 일이 있게 되었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경휘敬輝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자 안색을 바꿔 말하기를, 그대가 떠날
날이 며칠 남았으니 집물什物을 가지겠다 라고 하기에, 파산한 처지에 집물
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기를, 그대 집에 책이 많은데, 질帙을 갖춘 경사經史를 가질
수 있는가 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집에 부형父兄이 있어 감히 마음대로
허락할 수가 없다. 말씀드려야만 할 수가 있다 고 하였다. 원유가 말하기를.
내가 집이 없으니 용금과 성만이 살고 있는 집을 가지겠다 라고 하기에, 내
가 말하기를, 이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으나 지금 거처하는 사람이 있고 추
울 때에 내쫓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 더욱이 노비와 같은 사람들을 지금 양
인으로 풀어준다고 해도 혐의는 더욱 심할 것이다. 지금 갑자기 허락할 수
없고 다시 의논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오봉룡을 불러 4포의 조를 돌려주니, 그가 사양하고 2포를 가지고 갔다.
그도 부끄러움을 알았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용금이 들어와서 하소연하며 말하기를, 민씨집에서 빚값으
로 집 3채를 얻었으니 빨리 비우고 나가라고 하는데, 소인 등은 길에서 얼어
죽으라는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 원유가 보기를 청하여 가서 그를 보고
26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말하기를, 집 2채는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대가 어찌 나가라고 재촉하는


가? 설령 허락했다고 해도 나가고 들이는 것은 나에게 있는데, 그대가 어찌 그
렇게 할 수 있는가? 너는 집 한 채는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서 모두 가지려고
하는가? 만약 그대에게 발걸음 하나를 들여놓게 한다면, 모정茅亭 골짜기 일대가
어떤 지경이 될지를 모르겠다. 조만간에 돈을 마련하여 갚겠다 라고 하였다.
책에 관한 일을 부모님께 말씀을 올리고 밤에 경휘를 만나 말하기를, 소
학小學 칠서七書 강목綱目 사류事類 송명신록宋名臣錄 고문古文 사략史略
통감通鑑 등을 합하여 300권이 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이미 반교에 들어갔
고 또한 남겨두고 읽을 것이니 빼겠다 라고 하였다.
다음날에 먼저 아내를 반교에 보내려고 했으나 가마꾼이 모자라서 직접
구포鳩浦에 가서 가마꾼을 구했다.
밤에 비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흐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마을사람들 중에 나온 자가 제법 많았다. 가마 3대로 유장 어머니와 맏형
수 및 제수弟嫂를 먼저 보내고 회숙晦叔이 뒤를 따라갔다. 순동어미와 원창元昌
은 걸어서 따라갔다. 그 밖에 나머지 일꾼들은 영성零星한 책과 급히 입을 옷
가지 등을 날랐다. 점심은 안애 박노인 집에서 먹었다.
오후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매우 좋지 않았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순동의 어미가 돌아와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69

경휘가 와서 책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런 난리를 맞아 돈과 책을 고사


한다 라고 하였다. 비록 남의 말을 불러올까 걱정하여 속였으나 교묘히 꾸민
말이었다. 그 때에 도인에게 일이 있었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라서 재계齋戒를 하였다.
비인수령이 규암에 편지를 남기고 영문營門을 향해갔는데, 인신印信을 받으러
갔다고 하거나 돌아갔다고 하기도 해서 사정을 알지 못하여 걱정스러웠다.

초 10일 [初十日立冬]
맑음.
반교에 장醬이 없어 복여씨로 하여금 장 한동이를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저물어서 반교에 도착하였다. 중도에 회숙을 만나 돌아왔다.

11일 [十一日]
맑음.
복여씨가 돌아왔다. 경삼과 경우敬佑가 기포起包의 소요를 피하려고 따라왔다.

12일 [十二日]
맑음.
종형집에서 농작물 6 7포包를 겨우 얻어 그 날 빚진 집에 나누어주니 남
은 것이 없었다. 경삼쪽도 군색하여 100금으로 10여 포를 사서 저녁이면 콩
27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을 갈아 죽을 쑤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였다. 우리 일행은 겨우 돈 10여


꿰미가 남아 있어서 6냥으로 1포를 사고 8냥으로 쌀 10두를 샀다.

13일 [十三日]
맑음.

14일 [十四日]
맑음.
동네 도인이 장작청將作廳의 도조賭租를 가져가서 허군성許君成이 그것을 담
당하였다. 군성을 만나보고 그 조租를 구해서 사려고 하니, 군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댁宅의 조租를 빼앗은 것은 아니고 장작청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러나 그 본래 주인을 살펴보면 바로 당신입니다. 새로 이사하여 먹을 것이
없으니 5석을 드리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고 군성이 떠나갔다. 내가 종형에게
말하기를, 군성의 뜻은 가상하다. 그러나 그릇되었던 일이 바로잡히는 날에
歸正之日 아전들에게 수모를 당할까 걱정스러우니 그냥 받아두고 기다리자 고
하였다.

15일 [十五日]
맑음.
경삼이 조租 1포를 거문巨門 이李선생집에 보냈다.

16일 [十六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271

연일 종형과 함께 솔밭에 나가 땔감을 했다.

17일 [十七日]
맑음.
김생원金生員 문숙文叔에게 사우祠宇를 옮겨 봉안하는 날짜를 구했더니, 내일
이 길일이라고 하였다. 기약한대로 하지 못하여 이 날은 다만 좌처坐處만 옮
기고 무덤을 파서 옮기는 예처럼 하였다.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다. 도중에 포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들었고 마천
馬川에 이르러 깃발과 창 및 칼 등이 넓은 들에 가득한 것을 보고 물었더니,
광암포廣巖包가 부여의 군기를 탈취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는데 크게
일어나서 침입할 것이다. 호서동도수접주湖西東道首接主 이종필李鍾弼이 규암에
오면 일은 해결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읍촌邑村의 도인이 수접首接에게 갔다
가 왔다. 들판에서 군대의 위력을 과시하여 위엄을 보였다.
남당 종형과 국동菊洞에 사는 매부 정치영鄭稚穎이 왔다.

18일 [十八日]
맑음.
마을의 여러 어른들이 와서 모여 놀면서 날을 보냈다.
어제 반교 접주 김종식金鍾植이 장정 2명을 딸려 보내어 배추와 무를 사줄
것을 부탁하여 무는 집에 있던 것을 보냈고 배추는 사서 보냈다. 값으로 1짐
에 1냥을 받았다.
반곡에 사는 자형 윤尹이 왔다. 나무 궤짝에서 신주를 옮겨서 봉안하였다.
27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맑음.
유장의 집은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살게 하려고 이미 무를 땅에 묻었
다. 민원유가 채무조債務條로 계산하여 성문成文106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래서 내가 말하기를, 성문을 만들 때는 그 돈의 숫자를 자세히 계산하는 것
이 옳다. 본전 30냥에 다시 10냥 그리고 또 10냥이다 라고 하니, 원유가 거짓
으로 모른 척하며 말하기를, 40금은 그렇다고 하고, 10금은 용금이 상관한
것인데 어찌하여 행랑의 빚까지 합쳐서 상관하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
기를, 용금이 상관한 것으로 말하면 50금인데 모두 나와 두 사람이 직접 대
면하여 주고받은 것이 아니다. 지난 번 자리에서 비로소 계산한 숫자를 모두
발설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행랑에게 돌리는가 라고 하였다. 민도사노인은
이 일에 간섭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썹을 치뜨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내가 일어나 돌아가려고 하자 종형이 화해를 권고하며 말하기를, 이미 성
문을 하려고 했는데, 10금 때문에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성문을 주고 말하기를, 본전 40금에 이자를 계산하면 지금 100여금이 될 것
이다. 부여 대방면大方面 유장鍮庄 초가집 안채와 바깥채 8칸, 복자服字 텃밭 2
곳 그리고 화리禾利107를 영구히 허급許給한다 고 하였다. 바로 고개 동쪽 길
아래 동쪽 방향의 옆에 있는 밭에 심은 보리와 마른 풀은 한가韓哥와 인접한
터이다. 내가 원유에게 말하기를, 그 밭 주변 옆으로 높은 곳에 종종 소나무
를 심었는데, 밭두렁으로 여기지 말라. 평지에 곡식을 심은 곳이 바로 그 곳

106 성문(成文): 사사로이 작성한 문서를 말한다.


107 화리(禾利): 전답의 수확에서 생기는 이익을 말한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73

이다 라고 하였다. 전결田結은 상세하지 않아 대충 헤아려서 고르게 나누었는


데, 민씨는 자로 재서 나눌 것을 생각하여 단지 결자結字, 소출표시만 쓰고 그
아래의 숫자는 비워두었다.
종형과 자형 윤이 돌아갔다.

20일 [二十日]
맑음.
용금이 내야할 내전內錢이 있었다. 올 가을 이자는 받지 않는다고 했기 때
문에 지난 가을의 이자를 계산하면 17냥이 되었다. 내가 용금을 시켜 민씨에
게서 얻은 돈이 작년 가을에 15냥이 되었고 용금에게 빌려 쓴 돈이 2냥이어
서 2냥을 빼면 마침 서로 들어맞았다. 이에 이것으로 원망을 토로하는 저 용
금의 입을 막았다. 아! 인심은 예측할 수 없는데, 돈도 마찬가지이다. 내전內
錢은 갚지 않아도 해가 없고 민씨의 돈은 두려운 것인가? 설령 민씨가 10금을
거부하지 않았어도 합하여 계산했을 것이다. 내전은 원래 나중에 받아낼 수
가 없다. 마침내 그 가을 뒤에 통탄할 만한 실상을 나열하여 질책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월룡月龍에게 갚아야 할 본전 8냥이 있어서 그를 불러서 보고 먼저 8냥을
주며 이자 4냥은 나중에 갚겠다고 말했더니, 월룡이 자신을 먼저 불러준 것
에 감동하고 또한 요즈음 형세가 옛날과 다르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본래
이자를 계산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기식寄食하는 것이
늘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우니 조 5두를 용금의 집에 남겨주기를 청합니다 라
고 하였다. 그래서 좋다 라고 말하였다.
27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안애 박노인이 그 손자를 데리고 왔다.


허학이 은산시장을 향해 길을 떠났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부친이 갑길을 데리고 반盤에서 길을 떠났는데 박노인이 모시고 따라갔다.
권이權伊로 하여금 소를 몰아 반교에 들어가게 하였다. 친구 한韓이 따라서
갔다. 호남동도湖南東道 전명숙全明叔이 12일에 논산에 와서 주둔하였다. 건평 접
주 이도사 유상이 선봉이 되어 이본전李本全의 무리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유회
儒會에 의탁하여 그 무리를 안심시켜서 동도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전명숙에게
붙어서 그 전위부대가 되어 이인利仁을 향해가다가 부여에 들린다고 하여 인심
이 흉흉하였다. 그러나 바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진정되었다.
회숙이 모정에서 가족과 합치고 복여씨는 바깥방에 들어와 살며 모두 거
처할 계획이었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권이權伊가 돌아와서 부친이 어제 안현에서 묵고 오늘 아침에 지치遲峙에 도
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여종 채봉彩鳳이 그저께 아이를 낳은 뒤에 바로 나가서 일을 하고 불을 땠
다. 그러나 그들이 양식이 없는 것이 걱정되고 판옥에게 겨울옷을 주지 못해
남유수록 南遊隨錄 275

서 조 1포를 주었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전명숙과 이유상이 효포孝浦와 이인에 진군하였으나 불리하여 논산으로 물
러났다고 한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27일 [二十七日]
맑음.
박가朴哥의 도지賭地 전결田結 12복卜을 초하初夏, 음력 4월에 방납防納했는데, 그
값이 매 복卜당 5전이어서 합산하니 6냥이 되었다. 가을에 2냥을 가져왔고
그 나머지는 날마다 연기하였다. 오늘 그를 불렀더니 오지 않고 말하기를,
작년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 전부 낼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세상이 바뀐다
면 이런 놈들을 청소하리라.

28일 [二十八日]
맑음.
회숙을 가좌동에 보내어 미당에 들러서 가게 하였다.
용성이 밭에 콩을 경작하여 각각 15두씩 나누었다. 추가로 나눈 것은 흑대
두黑大豆가 1두 2승이고 수임水荏, 들깨은 3승이었다.
27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9일 [二十九日]
흐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포시 時, 오후 3시 5시에 어느 포包인지 모르겠는데, 도인道人 400 500명이
갑자기 본읍에 들어와 군기와 촌가에서 옷 이불 소 등을 빼앗아 갔다. 우
리 마을에 들어올 때 인정人丁을 모두 모아 횃불을 들고 나가 그 채비를 보니
바로 능산陵山으로 향하였다. 불빛이 들판에 가득하고 사람들의 소리는 솥안
에서 물이 끓는 것 같아서 정말 전쟁터였다.
용성이 웅포로 가서 김춘서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부쳤다.

11월 초 1일 [十一月初一日]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업성이 여름에 민원유 집에서 빌린 호미를 잃어버렸다가 밭을 거두어 치
울 때에 찾았기에 그 아내의 어미로 하여금 돌려주게 하였다.
여종 옥섬玉蟾이 어머니를 위해 불을 때고 물을 긷느라 아직도 떠나지 못하
였다. 그래서 갑자기 먼저 떠날 것을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날짜가 늦어
져 오늘에 이르렀다. 마침내 지루한 마음이 생겼는지 게으름이 비할 데가 없
고 심지어 물을 긷는 것도 물을 얻어먹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옥섬으로
하여금 나가서 일을 하고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아침에 밥을 지을 때 끝내
지도 않고 나갔다. 마치 끓는 물을 만진 것 같았다. 인정이 참으로 이와 같은
가? 내가 너를 대우하는데 야박하게 한 적이 없었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탑동塔洞에 가서 가마꾼을 얻으려고 했으나 인심이 어지럽고 아침저녁으로
남유수록 南遊隨錄 277

삼엄하여 입을 열지 못하였다. 돌아오다 가속佳束 시장터 권용대의 집에 이르


러 최영록崔永錄을 만나 그에게 말을 하여 11월 4일로 날짜를 정하였다. 북계
北溪에 사는 김학중에게 들러 만나보고 돌아왔다.

초 3일 [初三日]
흐림.
이학여가 와서 함께 가려고 하루를 묵었다. 권용대로 하여금 영록을 불렀
으나 오지 않았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영록이 거듭 약속을 어겼다. 마침내 4냥으로 장정 2명을 사서 가마 1대를
메게 하였다. 천가千哥 업성業成 선봉先奉 한가韓哥 등은 모두 가마를 메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4명이 번갈아가며 서로 도와 가마 1대를 메었다.
학중學仲과 한홍韓弘은 옷과 이불 및 그릇 등을 메었고 최가崔哥는 늙고 조금
성격이 차분하여 신주를 넣는 궤를 메게 하였다. 학여도 짐을 메고 경삼과
함께 먼저 떠났다. 어머니와 아내는 가마를 탔고, 나와 아우 덕영이 옆에서
모시고 갔다. 여종 계월桂月이 뒤를 따랐고 순동어미와 용금도 따라왔다.
오시午時에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저물지 않아서 반교에 도착했다.
7냥 5전에 궤짝 하나를 팔았다.

초 5일 [初五日]
흐림.
일꾼과 여종 둘이 돌아갔다.
27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오후에 학여와 함께 길을 떠나 거문巨門에 도착하여 마늘 60뿌리를 주어


차경且卿으로 하여금 심게 하였다. 마름 장씨張氏가 조포租包를 판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만나 보았더니, 팔지 않는다고 하여 점심을 얻어먹었다. 아랫마을
낙여洛汝씨 집에 묵었다.
남포 이광순李光順은 본래 동도대접주東道大接主로 기미를 보고 길을 바꿔서
귀화를 원하였다. 홍주 목사가 방어중군防禦中軍의 인수印綬를 주어 그로 하여
금 유도儒道를 일으켜서 비류匪類를 토벌하게 하였다. 남포와 비인 모두 호응
하여 따랐고, 서천과 한산도 모두 성城을 지켰다. 동도 접주들이 모두 도망하
였고 또한 많이 포획하여 홍주에 압송해서 참수하였다.

초 6일 [初六日]
흐리고 비가 왔다.
웅치熊峙를 넘어 간치시艮峙市 남소령南小嶺에 이르렀는데 요충지에 초막을 설
치하고 행인을 기찰譏察하고 있었다. 마침 사람 1명을 잡아 총을 쏘아 죽여서
여러 사람에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 때를 이용하여 빨리 지나갔다. 만약 조금 한
가하게 보냈다면 반드시 옷을 뒤지는 치욕을 당했을 것이다. 비인읍에 들러서
보았더니 바닷가에 가까우며 바로 쇠락하고 궁박한 마을로 수십 호의 작은
집에 지나지 않아 참으로 견줄 데가 없는 퇴락한 읍邑이었다. 길 옆에 옛날
비碑가 있었는데, 바로 여러 현감들이 선정善政을 펼친 것을 기록하였고 여러
가지 성씨들도 처음으로 거기서 보았다. 10리 가까이 가서 관동冠洞 이평중의
집에 이르렀는데 객실客室이 없어서 이웃 최씨네 집에 가서 묵었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279

주인이 지금 유회儒會를 갔다. 나는 월강越岡에 있는 외할아버지 감역공監役


公의 산소를 들러 참배를 하였다. 그 산소 옆이 바로 종천鍾川이었다. 풍수가
들은 종鍾을 엎어놓은 형태라고 여겼다. 대개 그 산의 모습이 빼어나고 맑으
며 지세는 넉넉하고 둘러싸서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였다. 20리를 더 가서
서천 계룡의 친구 조씨집에 도착했다. 서천읍에 유회儒會가 열려 인산인해人山
人海를 이루었다. 주인이 머슴을 대신 보냈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주인과 동행하여 샛길을 따라 범암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근동近洞의 소
수포小水包 접주 전한규田漢圭와 홍산 접주 김성원金聖元 및 김태운金太雲 등이
모두 기포起包하여 한산 상포上浦에 주둔했는데, 수성군守城軍에게 패배를 당하
여 몇 명이 사로잡혔고 원근遠近의 접주들과 패악을 부리던 자들은 모두 호남
으로 달아나서 하루가 안 되어 강을 건넜다고 해서 인심이 소란스럽고 삼엄
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범동汎洞 이도사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저동紵洞
접주 김윤선金允先과 서승보徐承輔 및 구성천具性天 등이 모두 홍주로 달아나서
유회가 그 집을 몰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길을 떠나 이치梨峙에 이르렀는데, 역시 막幕을 치고 지키고 있어서 말을
잘하여 지나갔다. 유표儒標가 없으면 흔히 그 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얻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길을 가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반교에 도착했다.
28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10일 [初十日]
흐림.
학여가 돌아갈 것을 알렸다.
포성소리를 들었는데 멀지 않았다. 부여도인과 이석보 및 강희서 등이 규
암에 주둔하여 길이 막혔다고 하거나 논치論峙로 이동했다고 하였다.

11일 [十一日小雪]
흐림.

12일 [十二日]
비가 왔다.

13일 [十三日]
흐리고 비가 왔다.

14일 [十四日]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길을 떠나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만경萬頃 망건장網巾匠 유양숙柳良叔
이 와서 본 읍에 머무른다고 하여 경삼의 망건을 주어 앞면을 고치게 하였다.
탑동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밤에 집에 도착했다.
용성이 웅포에서 돌아와 나무상자와 위원渭原의 편지를 가져왔다.

15일 [十五日]
맑음.
남유수록 南遊隨錄 281

학여가 와서 그와 함께 탑동에 갔는데, 바로 문하생들의 계일 日이었다. 하


유사下有司 강태구姜泰求가 집에 있지 않고 그 아우에게 말을 남겨 돈 20금을
내었다. 비록 이자로 삼기에는 부족하더라도 이런 때에 이런 물건을 내니 그
뜻이 가상하였다. 임순팔任筍八과 다른 사람에게서 이자 5냥을 받아 합산하니
25냥이 되었다. 선생 옷값으로 절납折納108하고 주인집에서 쓴 돈의 이자는
술값으로 제除하였다. 난리 중에 문도들이 모여 술을 먹고 옛 것을 말하니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권용대가 취해서 임시중林時中에게 농지거리를 하
여 시중이 화를 내니 용대가 처음에 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했으나 임시중이
여전히 풀지 않았다. 용대가 이에 큰소리를 내고 혈기를 부려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여 좌중이 그 때문에 얼굴빛이 달라졌다. 전봉준全奉準이
연산에서 크게 패하여 흩어진 군사들이 창에 의지해서 지나갔다.

16일 [十六日]
흐림.
상호商胡, 청국 상인 4명이 동네를 지나갔는데, 사람들이 병사로 여겨 소란을
떨며 달아나 숨었다. 만일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호남동도湖南東道와 임천 및 칠산七山의 동도가 한산읍을 공격하여 불태우
니109 수령은 걸어서 도망을 하여 임천땅에 이르러 사로잡혔다. 구제를 받아
죽음을 모면하고 중리 민참의 집에 도착하여 가마를 타고 떠나갔다고 한다.
임경회가 왔다. 만나서 떠날 날짜를 듣고 술을 마시며 밤새 얘기를 하다가

108 절납(折納): 현물로 납세하던 때에 돈으로 환산하여 내는 것을 말한다.


109 전라도 해안지방의 농민군과 충청도 해안지방의 농민군이 연합하여 한산 서천 서산 태안 홍산
부여 등지를 석권하였다.
28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마침 권용대가 와서 자리를 끝내고 보내니 밤이 이미


깊었다. 드디어 달빛을 이용하여 임평중에게 들러 조문하려고 그 집의 사립
문을 두드렸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경회의 집에 가니 정말로 술과 삶은 개고
기가 있었다. 그가 경영經營한 것이 근실하고 풍성하였다. 찬밥을 가져다가
그 국에 말아 먹으니 또한 매우 진솔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일 아침에 일이
있어 사양하고 돌아가려고 했으나 그가 붙잡아서 유숙하였다.
처음으로 메주를 쑤어 매일 3말씩 하였는데, 솥이 작았기 때문이었다.

17일 [十七日]
흐림.
원완실元完實과 강미진姜美鎭이 보낸 시래기와 김치 한 동이 및 깨진 그릇 등
을 얻으니 회숙 내외가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었다. 참으로 매우 몰지각했
다. 그들은 쓸 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집의 물건을 모두 가지려는
것인가? 원완실과 강미진도 산에 들어갔다.
본읍의 동도東道가 기포起包하여 한산에 간 자들 중에 함부로 약탈을 하여
자기 집에 가지고 돌아가거나, 일부러 빼돌린 자가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인심人心이 이익을 탐하고 생生을 저버리는 데로 향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순약舜若이 맹자 를 빌려가서 1권부터 4권까지 모두 터득하였다.
2말 5되가 들어가는 큰 솥을 순성順成네 집에서 빌려가서 콩 7말 5되와 시
초柴草를 보내 메주를 쑤게 하였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며 추웠다.
가까운 마을의 동도들이 모두 점차로 도망하여 돌아왔으나 북계北溪 김학
남유수록 南遊隨錄 283

중의 아우가 유탄流彈에 맞아 죽었다. 누구의 죽음인들 참담하지 않겠는가?


그에 대해 나는 더욱 이런저런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곡령
鵠嶺 산소의 뒤쪽 산등성이 북쪽방향에 묻었다. 지난해에 민경효가 처음으로
학정鶴亭에 들어왔을 때에 그 밭가에 붙었다고 하여 억지로 빼앗으려고 해서
여러 번을 다툰 적이 있었다. 민전주閔全州 어른에게 말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친이 보고 말을 하여 일이 타결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번 봄 가역家役할
때에 그 나무들을 베었는데 나는 그 때에 웅포에 있었고 나중에 말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전혀 알지 못하였다. 지금 복여씨와 한가롭게 얘기를 하다가
처음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산지기 김종득을 불러 그가
보고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민씨에게 말을 전하게
하고 따지니 민씨가 말하기를, 지난해에 일이 타결된 것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가역이 있어 내 산으로 여겨서 나무를 베었다. 지금 당신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감히 잘못을 다시 하겠는가? 걱정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종득을 시켜 재목 값을 요구하였는데, 물건 때문이 아니라 나중의 증거
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민씨가 말하기를, 반드시 이처럼 멀리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 말로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달리 의심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 라고 하였다. 종득이 다음 날 아침에 왔다. 마침 병정
때문에 어수선하고 물건도 많지 않은데, 너무 심하다는 혐의가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가재동加才洞 이도정李都正이 왔다. 회숙이 반교에서 저물 녘에 돌아왔는데,
콩을 운반하려고 심부름꾼 1명을 데리고 왔다.

19일 [十九日]
맑았으나 바람이 불고 추운 것이 어제와 같았다. 병정 300명이 본읍에 어
28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제 도착하였다. 오늘 50여 명이 와서 동도두목東道頭目을 수색하여 찾지 못하


고 다시 들어왔으나 마을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실로 본읍의 수령이 어질
고 밝은 덕분이었다. 민참의 어른도 접대를 잘했다고 한다. 이도정이 돌아가
며 대간大簡 1축軸과 혼서지婚書紙 5폭輻을 주었다.
권용대에게 대간 5폭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저녁에 마을을 편안하게 보
호해 준 은혜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민참의 어른에게 갔으나 마침 구정鷗亭
에 가고 없었다. 그래서 조진사趙進士와 몇 마디 말을 하고 돌아왔다.

20일 [二十日]
맑음.
복여씨가 반교의 소 1마리로 시초柴草를 날랐다. 장대현에게 경삼의 안경
을 빌려주었는데 바로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돌아왔다.
병정들이 부여에 들어와 맨 먼저 5명을 죽였는데 그 안에 김성근金聖根이
있었다고 하니 참담하였다. 강관진姜寬鎭에게 대간大簡 5폭과 혼서지婚書紙 2폭
을 주었다.
밤에 처음 눈이 왔는데, 제법 장관이었다.
본읍에서 내일 유회儒會를 연다고 통문을 냈는데 통문을 낸 사람은 사과司果 박
춘익朴春翊이었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눈꽃이 날려 떨어지고 찬바람이 종일 불었다. 집에서 메주 12말을 쑤어
49덩이를 만들었고 순성順成네 집에서 7말 5되를 쑤어 36덩이를 만들어 모두
85덩이가 되었다. 콩은 19말 5되를 썼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85

22일 [二十二日]
흐리고 추웠다.
임경회가 찾아와서 대간 1축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23일 [二十三日]
흐리고 추웠다.
가서 민경회를 보고 바로 구포로 향하여 경회景會와 임동지林同知를 찾아갔
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민성홍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시 석현奭賢을 찾아갔다가 성빈聖賓을 만나 셋이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점
심을 먹고 돌아왔다.
최학춘崔學春이 보러 왔다. 밤에 친구 윤기현尹奇賢을 만나러 갔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판옥判玉으로 하여금 소를 몰게 하고, 일룡日龍은 고추장 2항아리와 솥 1개
를 지게 하였다. 임경회가 머슴 1명을 보내어 그가 시래기와 커다란 간장 항
아리 1개를 지고, 성복은 철화로 쌀을 씻는 바가지 2개 된장 작은 항아리
1개 좌분坐盆 2개를 졌다. 소에는 흑소태黑小太 12말 지의地衣, 돗자리 곡병曲
屛, 가리개 검은 깨 1말 법유法油, 들기름 1병을 싣고 반교에 들어갔다. 성복은
바로 권이를 대신한 것이었다. 지난 4일 날에 갈 때에 다리가 아프다고 핑계
를 대며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하루가 안 되어 가
겠다 라고 하였다.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나가보니 바로 뜻밖의 이익을
얻으려고 한산의 진중으로 쫓아갔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불러서
반교에 들어오게 하였더니 바로 핑계를 대어 말하기를, 팔이 아파서 갈 수
28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가 없다 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다리가 아파서 가지 못했는데


병이 나아 한산에 갔었다. 지금 다시 팔이 아픈데 병이 나으면 어디로 가겠
는가? 병정이 사지死地에 가서 오히려 돌아오기를 구한다. 네가 다행히 죽음
을 모면했고 나중에 스스로 오겠다는 것도 어떤 마음으로 물리고 성복으로
대신하게 하는가 라고 하였다.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니 날이 이미 저물
었고 밤을 무릅쓰고 가서 도착하였다. 안애 박노인에게 대간 2축과 혼서지
5폭을 주어 집안사람들에게 나누어 쓰게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어제 홍산 경계를 들어와서 마을마다 수직守直하는 초막이 있는 것을 보았
는데, 반교도 마찬가지였다. 청양과 대흥大興의 유도인儒道人들이 장항리獐項里
에 와서 죄인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약탈하는 것이 매우 심하였고
반교로 향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모여 경계를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비로소 큰사랑을 수리하였는데 부친이 거기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여름에
시요時擾 때문에 닫아두었었다.
저녁에 서천 형수 구具씨가 걸어서 왔다. 이번 달 20일에 호남동도湖南東徒
가 금강을 건넜는데 방어중군防禦中軍 이광순이 유도儒道를 이끌고 막았다. 날
이 저물어 포 소리가 들리자 이광순이 겁을 먹고 스스로 후퇴하여 서천 송동
松洞에 들어왔다. 동도들이 기세를 타고 밀려와서 이광순이 전에 머물던 마을
을 불태우고 바로 서천읍으로 들어가 관의 창고를 불태워서 재가 되었다. 마
남유수록 南遊隨錄 287

침 경병京兵이 홍산에서 달려와서 쳐부수니 동도들이 달아나서 강을 건넜고


죽은 자도 많았다. 성城이 함락되려 할 때에 중로中路의 인척姻戚집에서 화를
피하려 지금 온 것이었다. 종인宗人 혜린惠 이 찾아왔는데 바로 이 마을 신申
씨의 사위였다. 그래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구진구具鎭九가 떠나갔다. 그는 사촌형수의 친정아버지이다.
아랫방 굴뚝을 고치다가 땅속에서 철물을 얻었다.

28일 [二十八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화촌花村으로 친구 임대경을 찾아갔다.

29일 [二十九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학이鶴伊로 하여금 소를 끌게 하여 안현에서 점심을 먹었다. 망해望海에서
봉래와 친구 한韓씨를 만나 한씨네 도조賭租를 거두어 먼저 나왔다. 막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거둔 것의 반을 줄이자고 하였다.
규암에 이르러 이자민李子敏을 찾아갔다가 저물녘에 왕제旺第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갈 때에 동리東里 오씨吳氏를 중도에 만나서 동행하여 죽림에 이르렀
는데, 이번에는 수천秀川 냇가에서 다시 만나 동행하여 돌아왔다. 오고 가는
것을 함께 했으니 이것도 우연이 아닌 인연이었다.
28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30일 [三十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허학이 돌아가는 편에 사류事類110 낙질落帙 두루마리 3축 초결변의草訣辨
疑 타시朶 1필 등을 보냈다.
행랑집인 매득梅得을 시켜 박가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가 자주 흉악하게
무엄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와룡臥龍 용학龍學의 아내와 한가의 아내 백
현白玄을 불러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였다. 강가姜哥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순성이 콩을 12말씩 나누었고 행랑집 한가가 콩을 4말 5되씩 나누었다. 2말
은 용금으로 하여금 메주를 쑤게 하여 12덩이를 만들었고 4말 5되는 순성으로
하여금 메주를 쑤게 하여 17덩이를 만들었으며 집에서 6말을 쑤어 30덩이를
만들었다. 까불어 깨끗하게 한 콩 3말은 복여씨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밤에 비가 왔다.

12월 초 1일 [十二月初一日癸卯]
비와 눈이 왔다.
성만이 왔다.

초 2일 [初二日]
눈이 왔다.
독감으로 매우 아팠다. 김학보金學甫가 보러 왔다.

110 사류(事類): 사문유취(事文類聚) 를 말한다. 전부 236권이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89

초 3일 [初三日]
맑음.
박성백朴聖伯을 불러서 만나보고 편지지 5폭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감기가 조금 덜하다가 밤에 다시 매우 춥고 아팠다. 목화 10근을 저울에
달아 복여씨에게 주었는데, 이미 어머니에게 값을 치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임경회가 찾아왔다.
저녁에 임경구가 와서 이야기하였다. 밤에 오한이 나서 괴로웠다. 행랑지
기 한가가 홍산에 갔다가 반교에 들렀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회숙이 가재동加才洞 강관진姜寬鎭에게 갔다가 친구 윤덕수尹德綏가 작은 집에
나가 살고 그 마름집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간수看守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치량稚良 처숙부에게 편지를 얻어 관진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해주기를 바랐다.
구정鷗亭 동계洞契 돈의 이자 2냥을 독촉하는 것이 끊이지 않아 마침 매득梅
得에게 빚을 받은 돈 2냥을 관진寬鎭으로 하여금 민도사 경효에게 전하게 하였
다. [이것은 어제 일이다]

윤성거尹聖居에게 도지賭地를 감해주고 콩 12말을 받았다. 봉길鳳吉터 도지로


콩 2말을 받았다. 윤남석尹南石에게 편지지 2폭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29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회숙이 당리唐里 마을 돈을 써서 사람을 보내 독촉하는 것이 하루에 세 번


이나 이어졌다.
관진寬鎭이 먼저 돌아왔는데 패독산敗毒散, 2첩을 지어 왔다. 저녁에 1첩을
먹었다.
성만편에 양화陽華에 편지를 써서 부쳤다.

초 7일 [初七日]
흐림.
오시午時에 눈이 몰아쳐서 내렸다.
치량씨稚良氏가 시흥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주명씨周明氏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는데, 관진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서비인徐庇仁, 비인 현감인 고모부이 소요를 피해 한양에 갔다가 지금에야 내려왔
다. 규암에 이르러 고모님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거슬러 찾아와
서 20금을 주어 옷을 만들게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비인 수령이 이른 새벽에 다시 출발하였다. 치량씨가 찾아 왔다가 바로 떠
났다. 어젯밤에 다시 패독산 1첩을 먹었는데, 제법 약효가 있었다.

초 9일 [初九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성만이 아버지를 따라 공주 땅으로 난리를 피했다가 지금 아내를 데리고
돌아오는 편에 양화에서 주신 편지를 받았다. 편안하다니 마음에 위로가 되
었다. 복여씨가 임경구林景九를 불러 오른쪽 팔꿈치에 침을 맞았다. 머물러서
남유수록 南遊隨錄 291

얘기를 하다가 새벽에 떠나갈 때에 편지지 2폭과 혼서지 1폭을 주었다. 아우


근영이 당리唐里에 가서 포전浦田 1곳으로 마을 돈을 갚으려고 했으나 마을에
서 받지 않았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유장 박씨 아내에게서 달마다 여조餘條를 계산하여 본전 1냥 8전을 받았다.
권이에게 장리조長利租의 이자 10두 중에 5두를 남겨 월룡月龍에게 주게 하고
5두를 받았다. 복여씨가 경작한 땅의 도지를 3두斗 감해 주고 12두를 받았다.
조 27두를 염창리鹽倉里에서 소금과 바꿨는데, 조와 소금은 모두 양을 넉넉히
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를 다시 재었더니 24두 몇 되가 되어 소금 22두 몇
되와 바꿨다. 박성백朴聖伯이 한 떨기 생삼베를 주었다. 밤에 눈이 몰아쳐서 내
렸다. 매득梅得이 비인수령을 따라 갔다가 돌아와 비인수령의 편지를 받았다.

11일 [十一日]
안개가 끼고 눈이 왔다.
다복이 여기에 와서 감기를 여러 날 앓은 뒤에 보러왔다. 일전에 아우 근영
이 민경칠閔卿七을 보았는데, 경칠이 말하기를, 모정茅亭터 논 9두락을 빚 때
문에 내 종질從侄에게 주어 내년부터 그 집에서 경작한다 라고 하여, 아우 근
영이 말하기를, 비록 문권文券을 잡혀 빚을 써서 기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1 2년 정도 조금 지나가는 경우가 없겠는가? 지난번에 이작移作111하
지 않겠다고 말을 하고서 지금 이런 말을 하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111 이작(移作): 논이나 밭을 경작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29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다 라고 하였었다. 오늘 경효가 덕룡을 시켜 아우 회영에게 전하기를, 백씨伯


氏가 논을 주었는데, 계씨季氏가 다른 말을 하니 어찌된 것인가? 이 달 그믐
안에 돈을 보낼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것에 대답하기를, 하나도 정해
진 것이 없는데, 갑자기 이작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에 말하기를, 설령 댁에게 땅이 돌아가더라도 내게 땅이 없으니 댁에게
땅을 빌려 경작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더욱이 정해진 논의가 없는데 갑자기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논을 빼앗는가? 마침내 이작이 합당하지 않음을 반복
하여 말을 하고 지금 어찌하여 이런 많은 말들을 초래하는가 라고 하였다.
1890년 겨울에 아우 근영이 시장柴場을 개간할 때에 경효에게서 100금을 빌
려 5년 기한에 매년마다 도조 4석을 보냈는데 혹 빠뜨리는 적이 있지 않았
다. 이번 가을에 민씨네가 신주를 땅에 묻고 이른 저녁에 집을 떠났고 나도
하루가 못 되어 집을 이사하였는데, 마침 경효를 만나 말하기를, 지금 난리
를 맞아 각각 동서로 흩어지는데, 나는 그대에게 빚진 것이 있으나 지금 갚을
수가 없다. 이미 전당 잡힌 물건이 있으니 우선 이것을 잡아 계산하라. 도조
는 지금 먹을 것이 있고 겨우 그 수를 채울 수 있으니 빨리 가져가라 고 하였
다. 민씨가 말하기를, 전곡錢穀과 토지는 모두 거론하지 말고 오직 살기만을
도모할 뿐이다 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만약 창고에 들
이려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른 곳에 쓸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민씨가 말하기
를, 잠시 보관하라 고 하였는데, 그 뒤에 이작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가서 만나보고 말했더니 지금 또한 이와 같았다.
저녁에 다복多福을 불러 밥을 먹었다.

12일 [十二日]
안개가 끼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93

은산恩山 시장 인편에 판교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부친이 감기로 편안하지 못


하며 많이 아파서 집안에 누워있다고 하여 매우 걱정스러웠다. 창윤昌允에게 해
의海衣 값 나머지를 보리 4두 3승으로 받았다. 여름에 보리가 없어 12월이 되어
비로소 있게 된 것이리라. 장리조長利租 30두 중에서 16두 6승을 먼저 갚았다.
지난 날 곡령鵠嶺의 산지기 이영성李永成의 아우 은천恩千이 지금 음죽陰竹 이
목정梨木亭 주점酒店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동도東徒에 들어가서 공주까지 갔
다가 그 생질 윤경희에게 들러 쉬었다. 지금 길을 떠나게 되어 옛 상전을 잊지
않고 찾아와서 눈을 비비고 옛일을 이야기하니 희비喜悲가 번갈아 몰려왔다.
저녁에 임경구가 찾아왔다.

13일 [十三日]
안개가 끼었다.
순금을 구동久洞에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하고, 역대명필歷代名筆 과 원교
필결圓嶠筆訣 , [이광사(李匡師)의 서론(書論)] 2첩 및 무 30개를 보냈다.
은천恩千이 가는 편에 이천 산촌山村 진사 종형댁에 편지를 부쳤다. 다복이
돌아가겠다고 해서 아침밥을 먹이고 금곡 내종 형님 댁에 편지를 부쳤다. 저
녁에 권용대가 보러 왔다. 강정만姜正萬의 부친이 시변市邊으로 본전 2냥을 썼는
데 먼저 1냥을 갚았다. 복여씨로 하여금 돈 1냥을 곡령 민주백閔周伯 어른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부친이 소일할 때에 사용했다고 한다. 밤이 깊
어 가는데 가동 치량씨의 별실別室이 종 1명을 데리고 왔기에 놀라서 그 연유
를 물었더니, 치량씨가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찾으러 나왔다가
이곳까지 왔다고 하였다. 만류하여 묵고 가게 하려고 했으나 듣지 않고 바로
빙현氷峴으로 향하였다.
29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4일 [十四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늦게야 맑아졌다.
와룡臥龍이 시변市邊으로 3냥을 썼는데, 이미 여러 달이 되었다. 시변은 월
리月利로는 줄여서 계산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자를 합하니 4냥이 넘었으나
그 어미가 4냥을 품에 안고 와서 갚았다. 그래서 그 나머지는 탕감해 주었
다. 이여진이 찾아왔다. 용전龍田에 사는 상중인 처숙부 정鄭씨가 찾아왔다.
가을 이후 일이 많아 가서 위문하지 못했는데 먼저 방문을 받으니 매우 부끄
럽고 송구스러웠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어제의 일이다]

순금이 돌아와서 세 곳 모두 평안하고 갑동 조카와 용이 조카가 모두 혼인


을 했으며 신부가 매우 예쁘다고 하여 기뻤다. 구동久洞에서 고추장 1동이를
보내왔다. 임경회가 보러 왔다.

15일 [十五日]
흐리고 바람이 불며 추웠다.
성만과 매득을 데리고 솥 1개 화로 1개 다른 그릇 백설고白雪 1상자를
지게 했는데 노인이 낮과 밤에 요기하기 위한 양식이었다. 판옥으로 하여금
소를 몰게 하였고, 소에는 콩 8두 무 50개 들깨 2두斗 누룽지가루 9승升을
실었다. 규암진窺巖津에 도착하니 바람과 날씨가 매섭고 지독하여 판옥이 너무
추워서 몸을 떨며 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돌려보내고 내 자신이 소를 몰아 안
현鞍峴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박노인은 지금 사촌동생의 상喪이 있었다.
짐꾼과 함께 저동苧洞에서 만나 저물녘에 판교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건강
이 조금 회복되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16일 [十六日]
흐리고 추웠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95

짐꾼이 돌아갔다. 8냥으로 김원중金圓中에게서 백목白木 1필 33척을 샀다.


흰 무지개가 가로 세로로 달을 관통하였다.

17일 [十七日]
흐렸다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며 추운 것이 어제와 같았다.
거문리巨門里에 이사李師, 이학여를 보려고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도
화담桃花潭의 수직守直하는 초막에서 개화천開花川 박중삼朴仲三을 만났고, 거문巨
門 길거리에서 이생원 어른을 만났다. [이생원은 우석(禹錫)의 종조(從祖)이다]

학이鶴伊를 시켜 무명 2필을 읍邑의 시장에서 사게 하였는데, 거친 무명은


60척尺이 돈으로 12냥 8전이었다. 밤에 금반대金盤垈 종씨宗氏인 혜린惠 을 찾
아갔다가 마침 신경순申景順의 집에 제사가 있어 남은 음식을 먹고 돌아왔다.

18일 [十八日]
맑고 추웠다.
새 달력을 보니 맨 앞에 대조선 개국 504년 세차歲次 을미乙未, 1895년 시헌서
時憲書112라고 적혀 있었다.

19일 [十九日]
맑고 추웠다.
김순경金順卿이 와서 자리를 짜는 것을 도와주다가 포시 時가 되어서 갔다.

112 시헌서(時憲書): 태음력의 구법(舊法)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
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을 말한다. 명나라 숭정 때에 아담 샬이 만든 것을 1644년에
김육이 연경에서 들여와서 1653년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29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0일 [二十日]
흐리고 눈이 왔다.
임미산任眉山이 남초南草 1묶음을 보냈다. 김명선金明宣에게 남초 14묶음, 돈
으로는 5냥 6전인데 바로 조경장이 사서 가져간 것이어서 지난번에 독촉하
여 받아 먼저 2냥을 주고 다시 2냥을 주었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종형과 함께 앞산에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거문巨門 이선생이 왔다는 소식
을 듣고 다시 함께 거문에 갔다.

22일 [二十二日]
맑았으나 바람이 불고 추웠다.
이선생과 함께 원심리元沈里 정좌수鄭座首 집에 가서 큰 항아리와 중간 정도
의 항아리를 합하여 5개를 샀는데 돈으로 13냥이었고, 쇠도끼 1개와 쇠괭이
1개를 합하여 6냥 5전이었으며, 짚신이 모두 5전이어서 총액이 20냥이 되었
다. 모두 이사李師에게 가져다가 썼고, 5전으로 이사의 사위인 김시중金時中을
불러 거문巨門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이사가 한산韓山시장으로 출발했는데, 환
전換錢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권주성權周聲이 집 2채를 사려고 했다. 집 2채
중에 하나는 50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150금이었는데 모두 환표換標를 주어
나중에 받게 하였다. 그래서 50금의 전표는 이사가 체납한 것 때문에 한경우
韓景祐에게 주어 홍산읍의 시장에서 받아 쓰게 하였고, 150금은 자신이 한산에
가서 받아내려고 하였다. 친구 조경삼의 이사가 25일로 정해져서 경삼에게
편지를 부쳐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낙여의 집에서 묵었다.
남유수록 南遊隨錄 297

23일 [二十三日]
바람이 불고 추웠다.
판제板第에 돌아왔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경삼이 왔다.

25일 [二十五日大寒]
맑음.
4전으로 마을에서 가마를 빌렸고, 8전으로 가마꾼 2명을 구했다. 조씨에게
시집 간 누이동생을 데리고 거문巨門에 가서 먼저 윗집에 거처하게 하고, 밥
솥은 우선 왕제旺第의 것 하나를 쓰게 하였다. 있고 없는 것을 서로 필요로
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날에 정돈하면 옮겼다가 다시 놓는 수고를 줄일 수
있어서였다.
다시 김명선金明宣에게 남초 값 1냥을 주었다. 27일 가마꾼을 빌린 삯도 모
두 지급하였다. [이것은 잘못 적은 것이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조형趙兄이 사람을 보내 주성周聲에게 석유를 빌렸는데, 3 4주발이 되었다.
나는 이선생과 함께 3등분을 하였다. 이선생에게 4냥을 빌려 직접 가지고 돌
아왔다. 회숙이 일꾼 3명을 데리고 왔으나 중도에 뒤쳐졌다. 중국인 거지 7
명이 허학의 집에 와서 방을 빌려 달라고 사정을 하고 해를 넘긴 뒤에 먹는
것은 스스로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이선생에게 돈 4냥을 얻어서 돌아왔다.
29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반쯤 흐렸다.
가마와 가마꾼을 빌린 돈을 주었다. 경우景祐, 한경우에게 이전과 이후에 빌린
돈 2냥 2전 3푼을 갚았다. 왕제에서 온 일꾼 3명이 도착하였다. 박가朴哥가 결전結錢
3냥을 가지고 와서 자원하여 물건을 지고 들어가 지난 잘못을 갚고자 하였다.
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회숙이 돌아가는 편에 서徐씨댁 고모님의 새로 지은 옷 한 벌을 보냈다.
거문리 연경連慶이 청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 2냥의 고기를 사서 보내어 조형
趙兄 및 이선생 댁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했는데, 오래된 부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봉래가 범암에서 돌아왔다.
오시午時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여 밤까지 와서 전에 온 눈에 더해져 1자나
되었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외상外上으로 2냥 5전의 고기를 구하고 흰떡 1두와 두부 5덩이를 마련하였
다. 한 해를 보내는 양식이 겨우 이것뿐이었다.

30일 [三十日]
맑음.
생정生庭 어머니의 생신이지만 채소반찬 뿐인 밥을 올렸다. 조경삼이 와서 함
께 먹었다. 허학에게 돈 1냥을 주어 정한 액수보다 많이 쓴 돈을 깎게 하였다.
(번역 : 최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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