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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금영래찰 錦營來札

충청감영의 감사인 박제순과 개화정부의 총리대신인 김홍집과 외무협판


인 김윤식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세 사람은 당시 개화정부
의 주역이었다. 박제순은 1894년 가을, 충청감사로 부임하여 충청도 일대에
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학농민군의 진압 대책을 세우느라 골몰하였다. 일
본의 사주를 받은 개화정부는 동학농민군 토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시기
세 사람은 여러 대외정책을 상의하였다.
1책에는 김홍집이 1894년 8월 2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수록하였
다. 여기에는 대책을 지시하거나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제순은 사
건의 전말을 알리는 답신을 간간이 보내기도 하였다.
2책에는 김윤식이 1894년 8월 1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담고 있
다. 김윤식은 “동학도의 소요는 복심의 고통이므로 서양의 소요보다 심하
다”고 말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적대하는 문구들이 많다.
김홍집의 편지에는 일반 대책을 알리기도 하고 당부를 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으나 김윤식의 편지에는 자신의 견해를 많이 드러내고 있어 대조를 보
인다. 여러 내용 속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의 사건 전말만이 아
니라 전국적인 현상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일본군의 동정과 외국 공관의 대
책도 아울러 전해준다. 김윤식의 12월 14일자 마지막 편지에는 프랑스 선교
사가 피해를 입었는데 2천원의 배상금을 주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배상할 것을 당부하는 등 기밀에 속하는 사실을 적고 있어 흥미롭다.
따라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전보를 이용하지 않고 사신私信형식을 빌은 것
으로 보인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7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금영래찰 錦營來札

금영래찰 [錦營來札] 도원 [道園]

<주신 편지를> 받고 맑은 가을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편


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부交符, 병부兵符를 주고 받는 것는 어느 날입니까? 매
우 위로가 되고 잘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피곤하고 바쁘니 괴로움을 어찌
하겠습니까? 간략히 하고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8월 21일 아우 김홍집金弘集1) 올림.

천안天安의 일본인이 만든 명안命案도 뜻밖의 일입니다. 보내주신 기록은


외무대신外務大臣에게 보내어 의논하였는데, 그 답장이 이와 같으니 보고 헤아
려 주시고, 보첩報牒2)으로 외서外署, 외부아문에 제부題付3)할 계획입니다.
천안의 명안命案을 초록鈔錄한 것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4)가 마침 그 자리

1) 김홍집(金弘集) : 1842~1896. 초명(初名)은 굉집(宏集)이다. 자는 경능(敬能)이고, 호는


도원(道園) ․ 이정학재(以政學齋)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총리대신으로 개화정권을 이끌
다가 광화문앞에서 시민들에게 살해되었다.
2) 보첩(報牒) : 무엇을 알리는 공문이나 통지서를 말한다.
3) 제부(題付) : 상급관아에서 어떤 취지나 지령을 공문서에 적어서 하급 관아에 보내는 것
을 말한다.
4)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 일본 외교관으로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근무하였으며 동학
농민전쟁시기 일본의 외교정책을 수록한 󰡔재한고심록(在韓苦心錄)󰡕을 저술하였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71

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소매에 넣어가지고 가서


사람을 보내 정형情形, 사정을 탐문하여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헤아
려주시기 바랍니다.
소인小人이 아룁니다.

어제 주신 편지를 받고 그 사이에 이미 감영에 가느라 피로한 뒤에도 대


감이 지내시는 형편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때에
새로운 일로 매우 괴로우시리라 여겨져서 도리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저
는 매우 피로하고 병이 빈발하니 괴롭고 가련함을 어찌 하겠습니까? 매우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9월 3일 아우 김홍집 올림.

협지夾紙, 따로 적은 쪽지에서 말씀하신 것은 잘 알았습니다. 동요東擾는 끝내 방


법을 마련해서 그치게 하겠습니까? 선무宣撫대감5)은 지금 어느 곳에 머무르
고 있습니까? 청곤淸梱, 청주 병사兵使이 장수의 방략方略을 자부하기에, 떠날 때에
순영巡營, 감영과 상의하여 기미를 보아 가장 불량한 자를 체포하고, 법을 세워
처벌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정말 왕복往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구제하고, 처벌할 방도를 도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노성魯城의 일은
참으로 억울할만합니다. 호남의 10여개 읍의 수령은 나문拿問6)만 하였으며,
이 읍들의 수령이 파직된 것은 공론公論이 아닙니다. 다만 방법을 생각할 계
획입니다.

오늘 오후에 한쪽의 작은 편지를 받아보니 급보여서 곧바로 외서外署에 주

5) 선무(宣撫) 대감 : 호남 선무사(宣撫使)인 이도재(李道宰)를 말한다.


6) 나문(拿問) : 죄인을 잡아다가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47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어 일본 공사관에 보내어 알려주었습니다. 선봉장先鋒將, 李圭泰이 내일 떠나는


데, 인솔하여 가는 군대는 교도병敎導兵 200명과 통위병統衛兵 200명을 합한
400명입니다. 일본공사관이 파견한 사관士官 2명이 약간의 병사를 인솔하여
교도병과 함께 가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편지로 외서가 나에게 교도병 200
명을 요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번에 해당 사관士官이 절제節制, 지휘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내게 병법兵法을 아는 장수가 없어 군대에 기율紀律이 없을 것
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이 교도병 200명이 의심할 것 없이 힘이 될 것입니
다.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일본 공사는 여전히
신중하여 많이 파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본과 청국간의 전쟁이 지금 한
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군이 이미 봉황성鳳皇城, 皇은 凰의 오기7)을 점거하
였고, 해군도 여순旅順, 중국 요동반도에 있는 항구의 입구를 빼앗아서 승리는 머지않
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병함兵艦이 모두 위해威海8)에 모여 이 전쟁이
결정된 뒤에 바로 모두 일어나서 화약和約을 권유할 것입니다. 이 화약이 이
루어져서 육군 100,000명이 개선하는 날에 기세가 미치면 비도匪徒도 두려워
서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며칠을 기다려야 되므로 매우 관심 있
는 일입니다. 청영淸營, 청주 감영의 영관領官9)이 싸움에서 죽어 매우 원통합니다.
80명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서 죽었습니까? 참담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아우 홍弘, 홍집 올림. 9일 밤.

덕산德山과 부여扶餘의 <수령을> 논파論罷한 계본啓本10)이 한양에 도착했고,

7) 봉황성(鳳凰城) : 중국 요녕성의 방어성, 안동(단동)에서 심양가는 통로 옆에 있다.


8) 위해(威海) : 웨이하이. 중국 산동반도 북쪽 기슭에 있는 항구도시로 청나라 말기 북양함
대의 기지였다.
9) 청영(淸營)의 영관(領官) : 청주 진남영의 지휘관인 염도희(廉道希)로 한밭에서 병사 73
명과 함께 농민군에게 피살되었다.
10) 계본(啓本) : 임금에게 큰 일을 아뢸 때에 제출하던 문서 양식을 말한다. 계목(啓目).
금영래찰 錦營來札 473

태안泰安과 서산瑞山의 일에 관한 계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홍주洪州


의 일은 어떻게 견디고 있습니까? 강화 진무영의 군대는 어제 이미 배를 출
발하였으니 내일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8일과 29일에 연이어 편지를 받으니 고맙습니다. 태공太公, 흥선대원군에게

올리는 편지와 부본副本을 모두 읽었습니다. 비도匪徒의 실정實情을 갈수록 예


측하기가 어려우니 크게 징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제 의정부議政府에서
순무사巡撫使11)를 만나 상의했습니다. 이규태李圭泰를 선봉으로 삼아 통위영統
衛營12)의 병사 2중대 560명을 인솔하여 공주公州와 청주淸州를 향해 먼저 출발
하도록 한 초기草記는 며칠사이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을
다시 빌려서 보내도록 두 서너번 말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걱정할 것이 못된다. 당신들의 군대가 먼저 출발하고, 우
리는 기미를 살펴서 대처할 것이다. 비도를 토벌하는 일은 그들이 담당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산釜山의 일본군도 진주晋州와 하동河東을 향해 가
서 호남으로 들어가 석권席卷한 뒤에 북상北上할 계획입니다. 경병京兵이 떠난
뒤에 그 동정을 바로 알려주십시오. 지금 수원水原의 비괴匪魁 김내현金鼐鉉 등 2
놈을 압송하여 바로 벨 것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기내畿內가 깨끗해지
고, 호남의 비도가 그것을 듣고 기세를 잃을 것입니다. 일본군이 이미 압록
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 압록강 북쪽에 있는 성을 점거하였고, 안동현安東縣에서 청군
과 일전一戰을 치루려고 합니다. 각 나라의 병함兵艦이 모두 여순의 입구에 모
여 이 싸움 뒤에 일제히 일어나서 싸움을 조정하여 화약和約을 맺을 것입니

11) 순무사(巡撫使) :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시기, 농민군을 토벌키위해 순무영을 설치하고


순무사로 신정희(申正熙)를 임명하였다.
12) 통위영(統衛營) : 고종 25년(1888)에 친군영의 후영(後營), 우영(右營), 해방영(海防營)
을 합하여 개편한 군영을 말한다.
47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다. 이노우에井上馨13)가 온 것은 우리나라를 위해 조약을 개정하는 일 때문이


라고 합니다. 모두 헤아려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손님을 대하느라 바
빠서 대충 씁니다. 이만 줄이며 답장을 올립니다.
홍집 올림. 10월 3일

5일과 6일에 보낸 편지는 어제 이미 다 보았습니다. 각 처의 비요匪擾가 근


래에 더욱 심합니다. 이런 때에 심신心身이 모두 피로하여 어찌 근심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임중군任中軍은 이미 내려갔는데, 힘을 얻어 스스로 지킬 수
있다면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청대淸隊, 청주진남영의 군사 80명
이 죽음을 당한 것은 매우 참담합니다. 서산瑞山의 수령이 해를 입어 읍의 아
전이 전패殿牌14)를 지고 한양에 와서 이미 상세히 듣고 출대出代, 후임을 보내는 것
하였습니다. 전 안성군수前 安城郡守 성하영成夏泳은 경병京兵을 나누어 인솔하여
가서 비도를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태안泰安도 상서롭지 못한 소문이 있고,
전해들은 얘기가 상세하지 않아 매우 울적합니다. 옥천沃川과 목천木川의 <일
로>15) 병사兵使는 이미 파직을 아뢰었는데,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까?
선봉은 어제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교도병敎導兵 200명을 일본 사관士官이 지
휘하고, 다시 통위병統衛兵 200명이 함께 갔습니다. 일본군 3중대中隊는 내일
이어서 출발하는데, 그 정록程錄을 보내드립니다. 3도三道에 모두 위무사慰撫使
를 보냈습니다. 호남은 이선무사李宣撫使, 李道宰에게 다시 신임 감사의 직을 주

13)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 일본공사 오오토리(大鳥圭介)를 대신해, 동학농민군 토벌을


총지휘의 책임을 맡아 이해 9월 28일 새 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공주전선에 직접 나가
지시를 내렸다.
14)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에 세운 나무패를 말한
다. 공무로 간 관리나 그 고을의 수령이 절을 하고 예를 표시하였다.
15) 옥천과 목천의 일 : 북접농민군이 옥천으로 진출하여 공주로 합류하였고 목천 세성산에
모인 농민군은 10월 22일 이두황군에 패배하였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75

어 겸임하게 하였고, 호서湖西는 한양에서 파견하여 일본군의 뒤를 따라 가게


하려는데, 박제관朴齊寬16)대감이 지금 물망에 올랐다고 합니다. 지금 대규모
부대部隊가 이어서 진군하면 각 처의 비도는 멀지 않아 흩어질 것이나 미리
출발하지 못하여 관官과 백성으로 하여금 비도의 해독을 당하게 한 것이 한
탄스럽습니다. 심병沁兵, 강화 진무영이 정말 경병京兵보다 먼저 내포內浦에 도착했
는지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별지는 일본 소위少尉와 1대一隊의 병사가 계속 주
둔하여 도와주기를 청하는 것으로 이미 외서外署에 보냈고, 일본 공사에게 전
하여 알릴 계획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아우 홍弘 올림. 10월 12일 밤.

보내주신 편지는 이미 태공太公께 드려서 작은 쪽지의 답장을 함께 보냅니


다.

금백錦伯, 충청 감사의 편지를 상세히 모두 들었다. 단지 <해놓은 것 없이> 헛


되이 늙는 것을 탄식할 뿐이다.
순무영巡撫營에 근래 재물을 모아 보낸 것이 많으나 아직도 출정出征하지 않
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일각日刻, 짧은 시간이 걱정스러우니 이 편지를 해당 영
에 보내기를 바란다.

김주사金主事가 보낸 편지를 받고 모두 알게 되어 기쁩니다. 호남에 갔다가


이미 돌아왔는데, 호랑이 굴을 출입하는 것처럼 매우 위험합니다. 어느 날
에 돌아오게 되어 한양으로 향한다고 합니까? 정신이 산란하여 따로 답장을
하지 못했으니 이 편지를 전해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유도헌兪都憲, 도헌은 대사헌
의 별칭. 유길준을 말함은 13일에 토쿄東京를 거쳐서 출발하여 며칠 뒤에 귀국할 수

16) 박제관(朴齊寬) : 1834~?. 자는 치교(致敎)이고, 호는 율암(栗菴)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47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있을 것입니다. 홍弘이 다시 씁니다.

9일과 12일 2차례의 편지를 어제 받아 보았으나 매우 기뻐서 답장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조카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의 편지를
얻어 보고 남쪽의 변고가 더욱 위급하여 그것 때문에 근심스럽습니다. 조카
님이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호17)이 있는 곳으로 가기에 한편으로는 일본 대사관
에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 순무영巡撫營에 알려 이미 출발한 군대를 재촉하여
빨리 가게 했습니다. 귀영貴營이 지킬만한 성城이 없으면 산성山城의 입보入保는
스스로 마련하고, 청주에 머무르고 있는 경병京兵은 더욱이 이동을 계청啓請하
였으며 선봉군과 일본군도 며칠내에 차례대로 도달할 것입니다. 군대의 행
군이 느린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조카님이 보고 들은 것을 대신 말
할 것입니다. 심병沁兵, 강화 진무영은 영관領官이 병이 났기 때문에 다시 지체되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일본군이 이미 3갈래로 길을 떠났고, 이노우에井上馨가
장담하기를, “동학은 그들이 담당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일
본군이 만약 영내에 도착하면 비도匪徒가 몇 만이더라도 두려워서 흩어질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병土兵의 조련은 다행스러울 만합니다. 식량은 우선
공전公錢과 공곡公穀을 급한대로 사용한 뒤에 보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새로 임명한 수령은 계속 빨리 갈 것을 재촉하나 늘 떠나는 것이 늦어져서
개탄스럽습니다. 군대 뒤를 따라 떠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기계機械를 잃
어버린 읍은 단지 병사兵使를 논파論罷하고 아직 후임을 보내지 못했는데, 대
감의 분부를 기다렸다가 결정할 계획입니다. 헤아려서 다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병사의 편지를 보고 돌려드립니다. 밤이 깊어 대충 씁니다. 이만
줄입니다.

17)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 김윤식은 당진의 면천에 유배되어 있다가 개화정부에 의


해 석방되어 외무대신을 맡아 농민군 토벌을 위해 일본과 교섭을 벌였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77

10월 15일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금백錦伯, 충청감사도 편지를 보낸 뜻이 있어 정말 편한대로 실행하도록 답장


을 하였습니다. 호서湖西로 말한다면, 군대를 마련하여 주둔해서 지켜야 합
니다. 군량은 세미稅米에 의지하여 수량을 1,000포包에 한하여 쌀을 거두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헤아려서 답장을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소인도
군대를 마련하도록 제시하겠습니다.

17일의 편지를 받아보고 모두 알았습니다. 남첩南諜18)을 이미 체포하였으


니 북당北黨도 해산하면 초미焦眉의 위급함을 덜 수 있습니까? 선봉과 함께 간
일본군이 지금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것인데, 이것은 서쪽길입니다. 가운데
길은 교도병敎導兵과 일본군이 함께 갔고, 동쪽 길은 일본군 2중대가 연달아
갔습니다. 그 위세가 크게 떨치어 호서의 비도는 걱정할 만한 것이 없을 듯
합니다. 이렇게 합세하여 호남으로 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대소大䟽가 이미 철회되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태공太公이 곧 이 상소를


보고 바로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제가 힘껏 만류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어찌 갑자기 바꾸어 인심을 동요시키겠습니까? 며칠을 기다려서 3 갈래의
군대가 합세하여 남하한 뒤에 의논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뜻을 헤아려주시
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10월 20일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근래에 기계機械를 잃어버린 읍의 수령은 단지 병사兵使의 계본啓本을 보고

18) 남첩(南諜) : 남쪽의 첩자. 흥선대원군의 수하인 송정섭(宋廷燮)이 흥선대원군의 비밀


문서를 가지고 전봉준 등과 접촉하였는데 이를 가리킨 것이다.
47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모두 후임을 내지 않았습니다. 대감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8일 2차례의 편지는 어제 이미 받아보았습니다. 기계를 잃어버린 읍은


병사兵使의 계본啓本에 따라 갑자기 개결開缺, 관리의 면직과 충원을 할 수가 없고, 순
영巡營, 감영의 논파論罷 여부를 기다려서 결정해야 합니다. 연기읍燕岐邑은 이경
희李景熙를 후임자로 할 계획입니다. 아직 부임하지 않은 신임 관리는 모두 엄
중히 재촉해야만 합니다. 절기에 따라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22일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성하영成夏永의 군대는 감영에 도착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고, 선봉과 일


본군도 이미 도달한 것 같습니다. 이제 근심이 없게 되고, 남쪽의 비도가 두
려워서 숨기를 바랍니다.

대소大䟽는 그저께 이미 비답批答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비도를>절제할


방안이 생겨서 급급하게 다시 사직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서湖西의 한쪽이
조금 안정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영읍營邑의 경계가 풀린 뒤에 서서히 생각하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른 아침에 20일 밤의 편지를 받았고, 조카님이 다시 운현雲峴, 운현궁의 흥선대


원군의 편지를 가져와서 모두 읽어보고 다 알았습니다. 순무영巡撫營과 외서外署
의 편지도 보냈는데, 편지를 보신 뒤에 다시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천안天安
에 머물던 군대는 이미 도착했습니까? 선봉도 자유롭지 않아 스즈키 아키라
鈴木彰 병관兵官에게 부탁하여 각 처의 병관에게 급히 알려 나가도록 재촉하여
바로 질러가서 잘못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헤아려서 재가해 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오후에 이노우에井上馨가 대궐에 왔을 때에 대면하여 일본군을
금영錦營, 충청 감영에 빨리 오도록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이미 사람을 파
금영래찰 錦營來札 479

견하여 급히 명령을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등보謄報, 원본을 베껴서 보고한 것


를 뽑아서 보여 주었습니다. 전괴全魁. 전봉준에게 격문을 전달하고, 비괴匪魁 2
명을 효수梟首하여 경계하는 부분을 언급하며 내가 “이 도백道伯, 감사이 적을
토벌하는 것에 엄중하기가 이와 같은데, 어찌 급히 구제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더니, 이노우에井上馨가 말하기를, “이런 죄를 지은 범인은 일본군에게
주어 한양京師으로 압송하여 조사해서 처결하고 급히 참수斬首해서는 안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혹시 나중에 긴밀한 범인을 잡으려는 것이니 절
대로 급히 참수하지 말고 압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23일 밤에 아우 홍弘 올림.

23일 밤의 편지를 받고 알았습니다. 보은 수령이 왔을 때에 천안天安의 군


대가 영내營內로 출발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미 도착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비
도匪徒의 기세가 위축되어 정말 물러갈 만합니까? 순무사巡撫使, 신정희 영감이 일
본군에게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온 편지를 운양雲養, 김윤식에게 보냈는데, 그 답
장이 이와 같습니다.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10월 25일 밤. 아우 홍弘 올림

동영東營, 어영청 총융청 등의 분영에서 바꿔 사용한 청나라 군대의 은표銀票 700냥은


어제 의정부에서 행문行文, 관아에서 문서가 오고 가는 것하였으니 가까운 시일에 교부交
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머지않아 24일 밤의 편지를 받고, 저녁에 다시 25일 오후에 도착한 조카


님의 편지를 받아 보았습니다. 24일의 일은 참으로 위태롭습니다. 경병京兵
과 일본군이 다행히 저물녘에 도착하여 이튿날 아침까지 격렬하게 싸워 오
히려 적을 몇보 퇴각시켰다고 합니다. 각 처에서 오는 군사가 차례대로 바
로 와서 우리의 기세는 점점 더해지고 적은 두려워서 도주하기를 두손 모아
48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빕니다. 신중하여 자애自愛하시기를 바랍니다.


10월 28일 밤. 아우 홍弘 올림.

소회少晦, 그믐 전날의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잘 알았습니다. 연산連山의 나중


소요는 매우 놀랄 만합니다. 이 읍은 지금 정대위丁大緯로 결원을 보충했는데,
그 사람됨이 쓸만한 것 같습니다. 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경병京兵은 이미 군산
群山의 적을 격파했습니까? 홍주洪州의 유병儒兵이 정말로 세력이 강대해져서
이미 박도헌朴都憲에게 맡겨 편지를 주어 단속하게 하였으나 순영巡營에서도
편지로 독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귀영貴營 장졸將卒의 논공論功은 틈을 내
어 분부하신대로 <임금께> 아뢸 계획입니다. 구완희具完喜를 순무사巡撫使에게
부탁하여 참모參謀로 삼아 이인利仁에 보내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미 2곳의
관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우 홍弘 올림. 3일 밤.

19일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선봉군과 일본군이 호남을 향해


떠났고, 현재 귀영貴營, 충청감영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군이 100명에 불과하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여 어제 스기무라杉村濬를 보고 그것을 말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병관兵官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는데, 100명의 병사
로도 지킬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정말입니까?
멀지 않아 홍주洪州 목사이승우가 순무사에게 보고한 것을 보니, “임천林川과 홍
산鴻山 등지에 지금 비당匪党이 있어 경병京兵이 내려와서 도와주기를 바라지만
<병사를> 징발하여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
습니다. 보내온 편지들,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經理廳의 󰡔행군기율行軍紀律󰡕, 󰡔순
속신사洵屬信史󰡕, 전종 천안수령前從 天安守의 󰡔독유심인필기讀有心人筆記󰡕 등은 사료
史料로 구비할만하여 관보官報에 넣어 발간하려고 했으나 의논들이 일정하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음성陰城은 백성의 소송訴訟이 계속되고 있고, 결성結城
금영래찰 錦營來札 481

은 장민狀民이 1달 동안 괴롭게 소송을 하여 법을 어겨 계속 요청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임기준任基準19)이 만약 온다면, 비록 일본인이 풀어주
기를 요청하더라도 그대로 가두어두고 기다리십시오. 제가 근래에 겪은 것
이 더욱 난처합니다. 죽는 것을 구할 수는 없다고 하는 옛사람의 말이 허튼
것이 아닙니다. 절기에 따라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지冬至 전날밤 아우 홍弘 올림.

멀지 않아 23일 밤의 편지를 받으니 매우 고맙습니다. 서천읍舒川邑이 소실


된 것은 경악할 만합니다. 유병儒兵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다행히 성하영成夏永이 마침 와서 비도를 추격하여 격퇴하였습니다.
다시 화성華城의 전보를 받고, 바로 귀영貴營, 충청감영이 보내온 편지에 각 영의
군대가 이미 전주의 경계로 향하였고, 완영完營, 전라 감영의 길이 비로소 열려
신임 감사이도재도 경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다만
금산錦山과 용담龍潭 등지가 도륙을 당했다니 매우 참담합니다. 전의全義의 조
방장助防將은 실로 아낄 것이 아니지만 이런 직함 때문에 시끄러워 혐오할 만
합니다. 귀영貴營이 기미를 보아 <이 직함을> 주어 절제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대감께서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동지冬至 다음 날 밤. 아우 홍弘 올림.

9일 오후의 편지를 읽고 <모든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이 날에 정말 크게


이겼다20)니 매우 축하를 드립니다. 멀지 않아 다시 이두황李斗璜이 해미海美에

19) 임기준(任基準) : 1894년 9월 23일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에게 효유문을 보내자 호서


창의소의 도접주 안교선(安敎善)과 대접주 임기준이 그 효유에 호응하여 귀화의사를 밝
혔다.
20) 남북접 연합전선을 형성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과 손병희의 지휘아래 공주일대를 공격
했는데 곰티 효포 우금티 등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패해 12월 12일 노성으로 후퇴하
48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서 이겼다21)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홍주洪州목사도 논산論山에 진격하여


이겼는지 다시 걱정스럽습니다. 일본 병관兵官은 이미 이전의 의심을 모두
풀었습니다. 송아무개송정섭가 지금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있어 이들을 조사하면
설령 무고誣告를 하더라도 어찌 걱정을 하겠습니까? 절기에 따라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11월 13일 밤.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어제 14일에 보낸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잘 알았습니다. 12일의 대승大勝


이후에 각 군대가 다시 진격하여 남은 비도匪徒를 섬멸했습니까? 어제 화성華
城, 수원의 전보를 받아보았는데, 김개남金開南의 무리22)가 청주 가까이에 왔다
가 병사兵使에게 격퇴를 당하여 죽은 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또한 유쾌할 만
합니다. 혹시 김적金賊, 김개남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특별
히 3일 관보官報를 보내드립니다. 어찌하여 사실을 잃어 버려서 군심軍心의 이
런 변화를 초래합니까? 군율이 엄중하지 않은 것도 개탄할 만합니다. 순무
사巡撫使에게 보내어 그 답장을 보내니 보시기 바랍니다. 홍주의 군대는 그 사
이에 정말 논산論山을 협공하여 승리를 얻었는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근래에 겪은 것이 갈수록 난처하니 어찌 하겠습니까? 대감께서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11월 17일 밤. 아우 홍弘 올림.

그저께 천안天安 수령이 편지로 보고하였는데, 논산論山의 적이 물러갔으나

였다.
21)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은 12월 28일 홍성전투에 이어 해미 ․ 서산 등지에서 농민군을 격
퇴하였다.
22) 김개남(金開南)의 무리 :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은 청주병영을 공격했으나 11월 13일
패전하였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83

한산韓山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며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형편은 정말 어떠합니까? 지금 순무사巡撫使의 지시를 보니 선봉장
이규태을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하고, 이두황李斗璜은 전공戰功에 따라 우선봉장右先
鋒將으로 계차啓差, 임금께 아뢰어 임명하는 것할 것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전공을 다투
는 탄식은 없게 됩니까? 법무法務의 이참의李參議와 의정부 주사議政府 主事 최석민
崔錫敏이 지금 공무公務로 내려가니 대접하여 전후의 싸움에 관한 사실을 상세
히 조사해서 실상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만 줄입
니다.
아우 홍弘 올림. 11월 21일.

서양근徐楊根, 양근 수령인 서씨이 아뢴 것은 이미 아셨으리라 여겨지나 어제 가


서 틈을 내어 이야기23)를 나누려고 했습니다. 금백錦伯, 충청 감사의 편지 2건을
함께 보신 뒤에 돌려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오늘 연이어 3번의 전보를 받아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안괴安魁24)는 이미


풀어주어 돌려보냈고, 심병沁兵도 김적金賊, 김개남25)을 산채로 잡았다니 매우
유쾌합니다. 술을 걸러 축하할 만합니다. 박기익朴己弋은 명령하여 풀어주었
습니까? 어제 제 편지도 순무사巡撫使 관문關文에 함께 보냈습니다. 박기익에
대해 청주淸州 병사兵使에게 들어보니, 그가 공功은 있고 죄가 없는 것을 알았
습니다. 박朴은 바로 당신 집안의 도사都事인 제범齊範씨의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라
고 합니다. 어제 편지에서 잘못 썼기 때문에 다시 고칩니다. 신申대감과 성成

23) 경해(謦欬) : 기침을 말하나 담소와 이야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24) 안괴(安魁) : 호서창의소의 도접주인 안교선(安敎善)은 흥선대원군의 효유로 귀화해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25) 김적(金賊) : 김개남은 태인 종송리에 숨어 있다가 11월 1일 심영의 중군병방 황헌주(黃
憲周)에게 잡혀 전주로 끌려와 전주서교장에서 처형되었다.
48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대감의 편지를 함께 보내니 보시고, 이미 순무사에게 부탁하여 기록을 삭제


한 뒤에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의 관찰사와 수신帥臣, 초토관招討官과 소모관召募官에게
관문關文을 보냈습니다. 깊이 헤아려서 명령하여 조처해주시는 것이 어떻습
니까?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12월 6일 밤. 아우 홍弘 올림.

분부를 받아보니 새해에 상소를 올려 사직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대감에


게 있어 스스로 도모하여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공론이 그것을 허락
하겠습니까? 이참의李參議가 돌아와서 공산公山, 공주의 승리를 일컬어 비도匪徒
를 토벌한 관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의 일이 매우 위험했는데, 대감의
영단英斷이 아니면 이런 전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나머지
요사한 기운을 숙청하고 가라지를 교화하여 양민으로 만드는 것을 어찌 서
툰 사람에게 맡기겠습니까? 제 생각이 이와 같으니 다시 여러 번 생각하여
사직을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영장營將의 이직移職은 고생에 대한 보수가
지난 날의 중군中軍과 서로 비슷하여 모두 일개 읍을 주어야 하나 근래에 주
군州郡 관리의 추천은 전적으로 내무內務의 직권이어서 저는 머리를 끄덕여 허
락할 뿐입니다. 일부러 식언食言을 하려던 것은 아니니 혹시 양해해 주시겠
습니까? 하하.

대감께서 절기에 따라 편안하신지요. 이번에 기록 하나와 편지 2장을 올


리니 대감께서 보시고 헤아려 주십시오. 내일 아침에 선장先將, 선봉장인 듯 박朴
과 육陸을 잠시 늦추는 일로 전보를 칠 계획입니다. 이 편지가 오래된 것이
되어 도리어 나중에 도착할 것입니다. 들어보니 박朴은 당신의 집안사람으
로 그 자字가 정빈正彬이라고 합니다. 모두 상세히 조사하여 처리해서 후회하
는데 이르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아우 홍弘 올림. 4일 밤.
금영래찰 錦營來札 485

병사兵使가 파직된 몇 개 읍에 아직도 후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도계道啓,


감사가 임금에게 아뢰는 글를 기다렸으나 아직까지 전혀 소식이 없어 걱정스럽습니
다. 신속히 분별하여 논계論啓해서 그것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백錦伯, 충청 감사의 편지는 어제 오후에 운양雲養, 김윤식의 호이 보내온 것 안에


있었습니다. 제가 편지 1장을 베껴 썼는데, 마침 스기무라杉村濬가 자리에 있
어 직접 그 지시를 주며 부탁을 하였으나 공사公使가 아직까지 답장이 없습니
다. 대개 공산公山, 공주의 승리는 적이 북상하는 길을 막아 그 공이 대단합니
다. 다만 병사가 적어서 추격하여 섬멸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또한 근래
에 적이 물러간 뒤에 사정을 알지 못하여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연기燕岐의
이경희李景熙는 내무內務에 명령하여 사조辭朝, 임금에게 드리는 하직인사를 면제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바로 속히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는
제 집안의 편지에 넣었으니 완장阮丈26)을 맞이하면 대감이 보실 수 있을 것
입니다.

26) 완장(阮丈) : 남의 삼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48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금영래찰 [錦營來札] 운양[雲養]

평재平齋27) 인형仁兄 대인大人 절하節下, 절도사에게

풍문風聞으로 절도사의 깃발이 그 사이에 이미 감영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서늘한 가을 기운이 생겨나는 때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신지요. 이런 때에 감영의 사무가 갑절이나 괴로우시리라 여겨
지는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동요東擾는 복심腹心, 아주 가까운 곳을 의미의 질병으로
서요西擾, 양이洋夷의 소란보다 심합니다. 귀영貴營은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의 사이에 있
어 이들이 출몰하고 모두 모이는 곳입니다. 그 괴로움은 말하지 않아도 짐
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정형情形도 짧은 글로 다하기가 어렵습니다. 청나
라 군대와 일본군이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사이에서 서로 대치하여 길이 막히고,
조령朝令, 조정의 명령이 10리 밖에는 시행되지 않으며, 조반朝班, 조정의 반열 곧 양반도
편안하지 않고, 창으로 쌀을 씻고 칼로 불을 때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언제
지난날의 기상을 다시 보게 될지 알지 못하여 단지 지붕만을 바라볼 뿐입니
다. 영감의 조카를 그 사이에 몇 번 만났을 때에 남쪽 소식을 들었는데, 이것
도 오랫동안 끊겼습니다. 지금 프랑스 사람의 일로 외서外署에서 사람을 보
내 빨리 갔다가 오게 하여 조카를 찾아 편지를 부쳤는데, 받아 보셨습니까?
프랑스 사람의 일을 아래에 적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성환成歡에서 패배하여
돌아갈 때에 금강근처에 이르러 프랑스 선교사 1명28)과 말을 끌던 조선인

27) 박제순(朴齊純) : 1858~1916. 호는 평재(平齋)이고 본관은 반남이다. 김윤식과 동문수


학했으며 을사조약과 한일병합 조약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친일관료였다. 동학농민혁명
시 충청도관찰사로 일본군과 합세하여 동학군을 토벌했다.
28) 프랑스 선교사 1명 : 청군과 공주영장이 금강연안에서 프랑스 선교사와 마부를 처형한
일로 전주 윤신부의 연락으로 사실을 탐지한 프랑스 공사관에서 항의하였다. 이에 청국
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대익장(大翼長) 원세개의 이름으로 ‘법국교사보호지령’을
전라감사에게 내려보내고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했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87

을 잡아가서 목을 베었습니다. 프랑스 공사公使가 나중에 그것을 듣고 외서外


署에 조회照會하여 바로 사실을 조사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외서外署가 전임
감사에게 관문關文으로 명령하였으나 1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보고하기를,
“감영 안에도 소문을 전해 들어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 날에 목격한 사람
은 금강 나룻배의 사공뿐으로 청淸의 장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느 날의
일인지는 하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외서에서 주사
主事 이강하李康夏를 파견하여 이 사실을 조사하였는데, 그가 돌아와서 말한 것
도 보사報辭, 감영의 보고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프랑스 공사가 크게 소란을
일으켜서 말하기를, “이 일은 우리가 이미 상세히 탐문하였다. 금강 건너편
에 신임 감사와 전임 감사의 휴게소가 있는데, 그 날 공주의 영장營將과 중군
中軍이 화진華陣, 청나라 군대을 영접하러 나왔다가 청의 장수와 함께 앉아 프랑스
선교사를 잡아가서 취초取招하여 강을 건너 나룻터 근처 모래사장에서 살해
한 것은 의심할 것 없이 확실하다. 중군과 영장이 이미 그 자리에 합석했는
데, 어찌 청나라 장수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청나라
장수의 성명과 날짜 및 장소를 분명히 알고, 그 취초한 말을 기록한다면 더
욱 좋을 것이다. 만약 이런 증거가 없다면, 성명과 날짜 및 지명과 증인을 적
어 이것을 가지고 청나라에 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이런 증거가 없다
면 당신 나라에 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방백方伯과 지방관은 보호할 책임이
있는데, 다른 나라 사람이 경내에서 해를 입었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가? 이 일은 관계가 적지 않으니 신속히 처리하여 답변을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도 청나라 사람의 행위를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 나라가 만약 그들을
보호하려고 한다면 대신 괴로움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하여 공
갈이 대단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방이 곤란한 가운데 있는데다가 프랑
스 사람의 죽음을 당하여 형세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다시 사람을
보내 탐문합니다. 철저히 탐문하여 중국 장수의 성명과 날짜 및 장소와 증
인 등을 명백히 적어서 보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프랑스 공사는 교도敎
48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徒, 신도에게 들어 반드시 모두 거짓은 아닐 것입니다. 영장과 중군에게 증인


을 세우더라도 조금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 피혐避嫌하려고 한다면
금강의 사공을 증인으로 세워 그 성명을 적어 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러나 프랑스 공사가 우리 관리의 동참을 알고 있다면 끝내 피해서는 안됩니
다. 청나라 장수의 이런 행동은 매우 난폭하여 남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라고 할 만 합니다. 어찌 통쾌함이 있겠습니까? 결국 섭聶, 섭사성聶士成과 섭葉, 섭
지초葉志超29) 2사람 중에 1명일 것입니다. 상세히 탐문하여 알려주어 하인을
보내어 헛된 걸음을 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이
만 줄입니다.
갑오년 8월 11일 아우 김윤식金允植 올림.

당신 집에 편지는 이미 일전의 인편으로 했기 때문에 다시 부치지 않습니


다. 선무사가 지금 귀영貴營, 감영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이 편지를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달9월 7일의 편지를 받고, 지난날 먼저 보내신 편지를 아직도 받아보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뒤에 최근의 소식을 아니 더욱 위로가 됩니다.
늦가을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피로에도 별탈이 없다는 것
을 아니, 실로 평소 저의 바램에 부합합니다. 영감의 조카가 먼 길을 떠나려
다가 갑자기 용인龍仁의 변고를 듣고 황급히 길을 바꿨다고 하여 놀라움을 견
딜 수가 없습니다. 멀리서 이런 소문을 듣고 어떻게 정신을 진정시키겠습니
까? 어찌 우리들이 이런 세상을 만날 줄을 알았겠습니까? 저번에 양호兩湖의

29) 섭사성(聶士成) ․ 섭지초(葉志超) : 청군의 총사령관은 제독 섭지초, 통령 섭사성이었다.


원세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직함을 갖고 대익장(大翼長)이란 이름으로 총지휘임
무를 맡았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89

동비東匪가 제법 귀화하려는 뜻이 있다고 들었는데, 각 읍에서 나오는 소문은


그들이 불처럼 더욱 심해지니 아무리해도 저 속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때에 안팎에서 애써 주선할 사람이 <재능을> 발휘할 방도가 없으니 한탄을
어찌 하겠습니까? 운수소관에 돌리고 실로 어찌할 수 없는 말뿐입니다. 고
견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선교사의 일은 전에 보고한 것이 너무
모호하여 프랑스 공사와 여러 번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보고를 공문으로
보내면 어떻게 답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청나라 장수가 섭지초葉志超
라고 했다가 지금은 섭지초의 조카라고 하나 처음 듣는 얘기이고, 섭지초는
평양전투에서 죽었습니다. 청나라 군사 중에 패하여 돌아가지 못한 자가 동
도에 붙어 그 세력이 대단하여 일본군이 들어올 것이고, 불쌍한 우리 백성
의 간과 뇌가 길에 뒤엉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의 형편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니 내버려두는 것이 좋습니다. 저의 사촌이
관서關西에 절도사로 있어 괴로운 상황에다가 위험합니다. 대감이 계신 곳과
비교하여도 더욱 심합니다. 평상시에 행락行樂하는 관찰사는 모두 남에게 주
고 위험하고 어지러운 때에 명을 받드니 한마디 찬탄을 내게 합니다. 등불
아래서 대충 쓰며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9월 12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저번에 주신 편지를 받고, 아직 감영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이에 이미 부임하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서늘한 가을 날씨에 지방관으
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편안하신지요. 새로 부임하여 감영의 일이 매우
괴로우시리라 여겨지는데, 더욱이 평상시가 아닌 이런 때에야? 그립고 걱정
스러워서 실로 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저는 임금의 은혜로 다시 벼슬길
에 나와 의리상 감격하여 은혜를 갚으려고 도모해야 하나 쇠약함이 너무 심
하고 어려움이 너무 괴로워서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30). 양서兩西의 전란으
로 가득한 먼지와, 삼남三南의 소요는 언제 그치겠습니까? 귀영貴營은 양호兩湖
49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에 교차하는 데에 있어 동비의 환난이 더욱 심하여 관官이 관답지 못하고 백


성이 백성답지 않아서 손을 댈 방도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조처할지 모
르겠습니다. 삼도三道, 전라 ․ 경상 ․ 충청를 선무宣撫하여 끝내 귀화하지 않았으나 군
대를 파견하면 도리어 소요를 더하게 할 것이 염려되어 지금 운현雲峴, 흥선대원
군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삼도三道를 효유曉諭하려고 합니다. 온 백성이 평소 태
공太公, 흥선대원군의 말을 믿기 때문에 혹시 감격하여 해산하기를 바랄 뿐입니
다. 귀영에서도 말을 잘하는 사람을 골라 보내어 효유하리라 생각합니다.
운하雲下, 흥선대원군로부터 편지로 부탁하신 것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지금
안동安東에서 난민亂民 3,000명이 일본군 병관兵官 2명을 포위하여 심지어 죽였
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군사의 빌미를 일으킬
것입니다. 곳곳마다 이와 같은 일이 생겨 팔역八域, 팔도에 편안한 땅이 한조각
도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하겠습니까? 저의 사촌이 아직 산사山寺에 있는
데, 어제 편지를 받아보니, “평양의 청나라 군대가 이미 패배하여 도망을 갔
고, 일본군이 성을 점거했습니다. 계속 신임 감사가 감영에 도착하도록 재
촉했으나 인부印符가 없고, 묘당廟堂, 의정부의 특별한 명령도 없어 감영에 올 수
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신이 매우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8월 27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저번에 프랑스 선교사가 피살된 일은 여러 번 프랑스 공사가 조사를 재촉


함에 따라 연이어 귀영貴營, 감영에 관문關文을 보냈고, 다시 관리를 파견하여 조
사했으나 끝내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전후의 귀영에서 전임 감사 때의 조사
는 살펴볼만한 사안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프랑스 공사가 사람을 보
내 상세히 탐문해 와서 그것에 근거하여 말하기를, “6월 27일에 청나라 진

30) 김윤식은 당진 면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6월 개화정부의 조치로 강화유수와 외무대


신으로 등용되었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91

영이 아산牙山에서 패하고 금강의 시동柿洞에 이르렀는데, 금영錦營, 충청 감영의

영장營將과 중군中軍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서양 선교사를 잡아다가 섭葉, 섭지초


葉志超이다 장수와 우리나라의 영장과 중군이 함께 취초取招하여 나룻터로 압송
해서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귀영의 보
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어 프랑스
공사가 크게 애가 탔다고 합니다. 또한, “이 일은 너희 나라와 상관이 없고,
우리는 명백한 증거를 얻은 뒤에 청나라에 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너희 나
라가 어찌하여 사실을 감추고 비호하여 그 책임을 대신하려는 것은 무슨 의
도인가? 금영의 경내에서 프랑스인이 피살되었으니 지주地主, 감사를 지칭하는 듯는
보호를 하지 못한 책임을 모면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그들을 엄호하니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너희 나라는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는데, 다시 우리나라
와 피를 흘리려는 것이 어찌 좋은 계책인가? 내가 들은 것이 이와 같고, 이
것은 소문이 아니며 바로 사람을 보내 확실하게 탐문한 것이다. 해당 감영
에 이것을 왕복하여 소상히 보고하게 해야 한다. 프랑스 선교사가 피살된
곳과 날짜 및 청나라 진영의 장수와 참관한 영장과 중군의 성명, 그리고 취
초取招한 내용 등을 일일이 기록하여 온 뒤에 내가 이것에 근거하여 증거를
만들어야 너희 나라와 추호도 관계가 없게 될 것이다. 숨겨서 스스로 낭패
스럽게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누누이 말하는데, 급속하게 보고를 만들
어 보내어 나중에 말다툼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그 때에 청나
라 군대의 주장主將은 섭葉, 섭지초입니까? 섭聶, 섭사성입니까? 음이 같아서 구별하
기가 어려우니 상세히 탐문하여 공문公文위에 적어 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일 취초한 말입니다. 영장과 중군은 이미 참관을 했다고 하는데, 통
사通詞, 통역가 곁에 있어 자연히 알고 있을 것이니 반드시 회피하려고 하지 마
십시오. 만약 계속 피하려고 한다면 임금께 아뢰어 잡아다가 신문할 수밖에
없으니 참관한 사정을 이것으로 명령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전임 감사
가 크게 겁을 먹은 일은, 국가에 일이 생기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처음부터
49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끝까지 호도糊塗하여 회피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여기니 매우 걱정스럽습


니다.

거듭 서로西路의 일본군이 이미 의주를 다 건너간 것을 며칠 전 일본 대사


관에 온 전보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 전보에 의하면, “청나라 군대가 다시
구연성九連城에서 패하여 송경宋景은 혼자 탈출하여 죽음을 모면하였고, 앞에
는 주둔하는 진영이 없어 석권할 기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사람이
말하기를, “멀지 않아 조약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했는데, 만약 연이어
패배하여 조약을 맺으면 청국이 크게 무너지게 될 것은 미루어 알 수가 있
습니다.

이 달10월 1일 밤에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비도匪徒의 우환이 언


제 끝나겠습니까? 지금 들으니 보은報恩에 모였다고 하는데, 또한 어떤 상황
인지 알지 못하나 충주忠州 등지도 지금 크게 어수선할 것입니다. 순무사巡撫使
가 이미 순무영을 세웠더라도 병사가 500명이 안되는데다가 식량과 무기도
없어 일마다 군색합니다. 선봉先鋒 이규태李奎泰가 여러 날 동안 출발하지 못하
였고, 일본군은 며칠 뒤에 1,000명을 파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비東匪가 각 처에 흩어져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1,000
명의 군사로 물리치지는 못할 듯합니다. 이것은 차차 크게 징계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당匪党이 매우 어리석은 중에도 교활하여 옮겨 다니
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강자를 피해 약자를 침범하여 마치 명明말의 유구游
寇,31) 유구流寇이다와 같습니다. 이것은 읍邑마다 의병을 일으키고, 촌村마다 보堡
를 쌓아 각자 스스로 싸우지 않고는 마을을 지킬 방도가 달리 없습니다. 지

31) 유구(游寇) : 유구(流寇). 명(明)말의 이자성(李自成) ․ 장헌충(張獻忠) 등이 이끌던 농


민군을 말한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93

금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법을 세우고 함께 권면하며 여러 읍을 다니며 그


들이 서로 호응하여 돕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먼저 이런 뜻을 경상
감사에게 전보로 통지하였습니다. 읍마다 사람들이 의지할만한 호걸을 택
하여 그로 하여금 마을에서 용감한 자를 모으게 하고, 요호饒戶에게 권유하여
식량의 일을 맡기며, 그 능력의 여부를 살펴서 소모관召募官 등의 직임을 준다
면 국가는 병력과 재력을 쓰지 않고도 그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
람은 권한을 백성에게 주어 혹시 폐단이 더욱 생길 것을 걱정합니다. 이런
염려가 없지는 않으나 이런 때를 맞이하여 어찌 과실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방편을 많이 마련하여 앉아서 곤경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현영운玄暎運32)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이상하게도 오랫
동안 오지 않아서 이미 체직遞職을 아뢰고 후임을 내었습니다. 만약 뚜렷한
공로가 있다면 나중에 어찌 변통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나중 일을 염려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주선하도록 대신 말해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심병沁兵은
7일에 출발하여 인천항에 이르러서 9일에 화륜선을 타고 10일에 군산群山에
도착해 보름 전에는 노성魯城에 갈 수가 있습니다. 식량과 기계가 있다면 어
찌 쥐새끼같은 적을 걱정하겠습니까? 황헌주黃憲周33)는 부지런하고 뜻이 있
으며 군사에 관한 일에 능숙하여 제가 믿고 맡기던 사람입니다. 객지에서
굶지 않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반드시 하는 일에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귀영貴
營과의 거리가 조금 멀어서 이것이 흠이 됩니다. 주사主事 이병규李秉珪는 저의
생질인데, 지금 휴가를 얻어 내려갑니다. 사람됨이 허약하여 병이 많으나
평소에 지극한 성품으로 향리鄕里에서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려가
는 뜻은 향리를 화합하여 스스로 지키려는 계획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이

32) 현영운(玄暎運) : 1883년 신사유람단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94년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뒤 일본어 통역관으로 수행하였다.
33) 황헌주(黃憲周) : 심영의 군사를 지휘한 중군병방. 김개남을 체포하였다.
49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러한 계획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사람들을 모으고 실제 준비가 없다면


먼저 그 피해를 받을 것이니 일에 따라 특별히 돌보아 주시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태공太公, 흥선대원군에게 올리는 글은 대신 바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비
록 군대를 빌리고 싶지 않더라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날에 잘 타일
러서 해산시킨다는 계획이 이미 허사가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일일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헤아려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10월 4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어제 저녁에 김학우金鶴羽34)가 자객에게 살해를 당했는데, 이것이 무슨 변


괴입니까? 현재 경무警務에서 뒤를 밟아 체포하려고 하나 그 종적이 아직도
막연하니 놀랄만합니다.

부산의 일본 병관兵館이 이용호李容鎬와 윤병갑尹炳甲이 밀지密旨를 고쳐서 백


성을 선동한 일로 지금 모두 한양에 올라와 정탐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정
부가 기한을 정해 윤尹을 추적하여 체포하였고, 이李, 이용호는 아직 잡지 못했
습니다. 일본인이 다시 대감35)과 동도東徒가 밀통한다고 의심을 하여 저희들
이 힘껏 변호를 하였습니다. 도원장道園丈, 김홍집의 기록과 전적全賊, 전봉준에게 전
한 격문 및 2명을 효수梟首하여 경계한 일로 의사를 분명히 하니 저들도 의심
을 풀었습니다.

평재平齋 인형仁兄 대인大人 절하節下

저번에 9월 6일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다 알았습니다. 이런 때에 몸이 초

34) 김학우(金鶴羽) : 친러파로 활동한 정치가. 흥선대원군 계열인 전동석(田東錫)의 손에


암살되었다.
35) 대감 : 흥선대원군을 지칭. 이용호와 윤병갑은 대원군의 수하 인물.
금영래찰 錦營來札 495

췌하고 정신이 피로할텐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카가 갑자기 용인龍


仁에서 적의 변고가 있다는 것을 듣고 황급히 길을 바꿔 바로 돌아서 귀영貴營
에 갔는데, 그 사이에 이미 도착했습니까? 보고 들은 것이 이런 종류가 아닌
것이 없어 비록 놀랄만한 것을 듣더라도 다시 심상尋常해집니다. 지금 군대
를 파병하는 일 때문에 조정의 논의가 끝내 확정되지 않고, 질질 끌어 날을
보내며 사람마다 칠실지우漆室之憂36)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우석又石, 이재
면李載冕의 호어른이 보내온 형의 편지를 받아보니, 각 안건마다 논한 정형이 매
우 자세하여 우리들의 천마디 만마디 말보다 낫습니다. 박朴, 박내현을 효수하
여 경계한 일은 옥안獄案에 얽매이지 않아 상쾌할 만합니다. 이후로 사람들
의 의혹을 없앨 수 있고, 경병京兵을 보낼 수 있으며, 적의 간담을 꺾을 수 있
게 되었습니다. 이런 거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한한 복이 되어 기쁨과
축하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완백完伯, 전라감사37)이 글을 읽은 사람인지 모르겠
습니다. 아직도 잠을 자는 듯 꿈을 꾸는 듯합니다. 비도匪徒의 기세가 이와
같으나 의정부에 1자字의 보고도 없으니 오히려 이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좌
우에서 견제하여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한탄스럽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일은 지난번에 적어 보낸 것으로 해서 임시로 공문을 만들어 프랑스
공사관에 조회照會하였으나 아직 대답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바쁘기만 할 뿐 조금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귀화했다고 하는 자는
대개가 얼굴만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속임수는 크게 나
랏일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이번의 형의 편지는 그 도움이 적지 않습니다.
만약 일전의 장계狀啓에 성토하는 한마디 말도 없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속담
에서 말하는 휘徽 ․ 흠欽 ․ 배拜 3자字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등불 아

36) 칠실지우(漆室之憂) : 칠실(漆室)에 사는 여자가 나라 걱정을 하는 것으로 제 신분에 맞


지 않는 근심을 말한다.
37) 완백(完伯) : 김학진을 가리킴. 김학진은 전봉준을 도우기도 하였다.
49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래에서 대충 씁니다.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9월 20일 밤. 아우 윤식 올림.

제 사촌이 이미 감영에 도착했으나 혼자 빈 성城에 앉아 일본군과 주선할


뿐입니다. 청나라 사람은 이미 달아나서 경내 밖으로 나갔고, 일본군은 의
주義州에 도착했으나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강가의 수비가 더욱 삼
엄하여 바로 건널 수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동도東徒가 서쪽으로 올라간다
는 얘기가 무성하여 이미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수령38)을 파견하여 각각 수백명
을 이끌고 내려가서 탄압하게 했습니다. 이어서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였으
나 순무사가 정해지지 않아서 계속 군사를 파견할 것입니다. 일본인도 먼저
1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아군我軍을 도와 기미에 따라 <동도를> 토벌한다
고 합니다.

보내온 편지를 받고 요사한 기운이 아직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소 근심스럽고 괴로우시리라 여겨지니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일
본군은 일간 500명을 파견하여 3갈래로 나누어 내려갈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용인龍仁과 안성安城을 거쳐 충주忠州에 도착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수원水原을 거쳐 바로 귀영貴營에 도착하여 군대를 나누어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편지 중에 저에게 보낸 다른 편지는 이미 일본 공사에게 보냈는
데, 아직 회신을 받지 못했으나 반드시 전부를 철병撤兵할 리는 없을 것입니
다. 심병沁兵은 대감이 이미 주둔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신임 전라 감사에게
주어 완영完營, 전주감영을 함께 지키게 한다면 귀영의 일에도 도움이 없지 않을

38) 안성과 죽산 수령 : 안성군수 성하영(成夏泳), 죽산부사 이두황(李斗璜)을 가리킴. 성하


영은 경리청(經理廳, 남한산성수비대), 이두황은 장위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였
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97

것입니다. 대개 비도匪徒는 무리를 모아 기세를 이루지만 그 실상은 맹랑孟浪


하여 빈손의 적에 불과하고, 오합지졸烏合之卒처럼 비록 많더라도 어찌 두려워
할 것이 있겠습니까? 양창洋槍, 서양 총洋銃이다39)을 얻더라도 사용하는 데에 익숙
하지 않고, 또한 탄알이 없으면 도리어 토총土銃만 못합니다. 토총은 볼품없
는 기계인데, 어찌 서양 총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래서 일본군 1명이 비도 수
천명을 상대할 수 있고, 경병京兵 10명이 비도 수백명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계가 예리한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일본군
1명이 비도 수천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어떤 놈의 말이겠습니까? 일
본군이 10명이면 비도 수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형세입
니다. 근래에 괴산槐山의 일본군이 비도와 마주쳤는데,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몇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이 비도는 아직도 제법 강성하기 때
문입니다. 그 밖에는 1~2명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 모두 두려워서 흩어집니
다. 정형과 일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지
역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적과 상대한다면 그 성패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
는 괴롭고 피로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괴로움을 어찌하겠습니까? 정
신이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10월 12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일본인이 병사를 보낼 때에 적을 평정한 뒤 반드시 위무慰撫하는 일이 있


어야 한다고 하여 3도三道에 각각 위무사 1명을 파견하여 군대를 따라 갈 것
을 요청하였습니다.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지금 초기草記를 만들었는데, 박제관朴
齊寬을 충청도 위무사로, 전라 감사 이도재李道宰를 본도本道, 전라도 위무사로, 경
상도 선무사 이중하李重夏를 바꾸어 위무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호서와 호

39) 양창(洋槍) : 양창(洋鎗)으로 쓴 것이 맞지만 양창(洋槍)으로도 많이 호칭하였다. 19세


기 이후 수입한 유럽의 총을 말한다.
49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남의 위무사가 아직 채비를 꾸리지 못하여 일본군과 함께 떠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5~6일을 미루었다가 떠나야할 것 같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연달아 받고 마음이 놀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일본


공사를 만날 때마다 일본 공사가 어린애 장난으로 보여 처음에 마음이 움직
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파견하는 일본군이 겨우 750명이고 다시 3갈래 길
로 나누었는데, 이것으로 비도匪徒를 평정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
다. 일본인이 정형을 세심히 관찰하는 것이 우리보다 나은 것을 알았습니
다. 참으로 실제가 없는 큰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심병沁兵은 처음에 군산으
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그 뒤에 내포內浦에 소요가 심하고 홍주가 고립
되어 급박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상의하여 홍주로 향해 내도內島에 내려
먼저 홍주로 가서 위급함을 구제하고 귀영貴營으로 향하려고 합니다. 해당
중군中軍 황헌주黃憲周가 3일전에 병사를 이끌고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관격關格, 갑자기 체하여 생기는 위급한 병이 일어나고 산증疝證까지 이어져서 병세가 가
볍지 않아 움직이는 데에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300명의 병사와
아직도 인천항에 머무르며 몸을 조리해서 화륜선에 오르려고 합니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스즈키鈴木彰 소위少尉가 귀영에 남아 지키는 일은 전에 이미
일본 공사에게 여러번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것에 근거하여 이미 해당 병관
兵官에게 명령을 했다고 합니다. 어제 다시 간청하여 편지 1장을 얻어 보냅니
다. 갑자기 그만두고 떠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경병京兵과 일본군이
계속 전진하고, 이어서 심병도 와서 모이면 멀지 않아 눈살을 펴게 될 것이
니 쥐새끼같은 무리들을 어찌 크게 걱정하겠습니까? 3로三路의 위무사 중에
서 호서의 위무사로 처음에는 심순가沈舜歌, 심상훈沈相薰을 이름를 올렸으나 모면하
려고 하여 다시 박치교朴致敎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방百方으로 그만두
려고 하여 일이 따라서 늦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일에는 이와 같은 것들이
많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499

갑오년 10월 15일 밤. 아우 윤식 올림.

이노우에井上馨 공사의 편지를 함께 부칩니다.

날마다 편지가 왕복하여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어버리는 것만 못합니다. 어제 비도匪徒와 조금 접전을 하여 이미 적 1명을
죽이고 10여명의 적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기쁜 소식이
고 이전의 명성대로입니다. 병사의 간담이 그것에 힘입어 대단해졌을 것입
니다. 요즘에 지내시는 형편은 어떻습니까? 매번 보내주신 편지를 일본 공
사관에 통지할 때마다 일본인이 그것을 보고 크게 웃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
다. 마치 왕패王覇40)가 시장사람의 야유를 만나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무릅쓰고 대신 간청하여 조금도 소홀함을 용납하지 않았습
니다. 지금 일본군 1중대가 그저께 이미 출발했고, 며칠내에 귀영貴營에 도착
해서 이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합세하면 물리치지 못할 것이 없을 것
이니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본인이 적을 판단하는 것이 매
우 세심하여 진실로 적을 가볍게 보고 큰소리를 친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신임 전라감사 이성일李聖一, 성일은 이도재의 자임도 일본인이 적을 가볍게 본다고
매우 걱정하였습니다. 저도 그 말을 믿고 있습니다. 호남의 적도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비록 심창沁槍, 심병沁兵의 총과 심포沁砲, 심병의 대포를 얻었더라도 개인
적으로 연습하면 끝내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만약 경영京營의 군대와 서로
마주친다면 승패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일본군과 만난다면 비록 수가 많더라
도 용기를 펴보지도 못하고 엄청난 명성을 듣기만 해도 공연히 기운을 잃어
버릴 것입니다. 어찌 군대가 병사 숫자가 많은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듣지

40) 왕패(王覇) : 후한의 은사. 왕망이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관리와 교제를 끊고 시장을
노닐며 살았다.
50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못했습니까? 심병沁兵이 인천항에 이르렀으나 총대관總帶官, 중군병방 황헌주黃憲周


가 갑자기 중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생사生死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주둔
한지 5일이 지났으나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데, 전장에 나간 장수를 바꾸는
것도 쉽지가 않아 제가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이니 빨리 답장을 구합니다.
정신이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10월 17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평재平齋 인형仁兄 대인大人 절하節下

보내주신 편지를 연달아 받고, 당신 집에 보낸 편지를 탐문해보니 비도匪


徒의 기세가 급박하여 고립된 성城에 조금 의지하고 있어 걱정과 피로가 지나
쳐서 신도愼度41)에 이르렀다니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곳의 공公들
이 귀영貴營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편안하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고심하여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역량力量이 모
자라서 모두 여의치 않습니다. 전에 파견한 군대는 수원에 이르러 체류하다
가 다시 급하지 않은 동쪽 땅으로 향했는데, 이것은 모두 일본인의 계획에
서 나온 것입니다. 귀영이 급박하더라도 만약 한 곳만을 구제한다면 비도가
모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토벌하여 평정할 기약이 없기 때문에 한번에 끝
내려는 계획입니다. 한漢의 주아부周亞夫42)가 양梁의 위급함을 구제하지 않았
으나 양의 포위가 저절로 풀린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밀인 듯하니 누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더욱 방어에 힘써서 감히 쉽게 침범하지 않도
록 하고, 조금 기다리면 저절로 방법이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
소문의 원본은 당신의 조카를 통해 얻어 보았으나 이런 때에 사직하려는 것

41) 신도(愼度) : 건강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을 말하는 듯하다.


42) 한(漢)의 주아부(周亞夫) : 한의 공신 주발(周勃)을 가리킴. 한의 고조를 도와 공을 세운
끝에 후(侯)의 지위를 누렸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501

은 사체事體가 온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깊이 헤아


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갑오년 10월 19일 밤 아우 윤식 올림.

심병沁兵이 이미 출발했으나 일본인이 긴급하지 않다고 극력 주장하여 그


만두고 영營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다 알았습니다. 수비가 점점 견고


해지고, 조도調度, 품격가 방정하여 미친 도적도 두려워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
고, 따라서 사기가 더욱 올랐을 것입니다. 자사刺史, 감사의 별칭의 건강도 완쾌되
어 국가를 위해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최근에 곧 이 도적을 소탕할 것이라
는 말을 듣고 심병沁兵의 철수를 당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즘의 정형情形
이 어떠한 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 군대를 독려하여 일본군과 협력하여 지
키고, 밖의 도움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힘을 합쳐 토벌하며, 저들이 만약 패
하여 흩어지면 그 접주接主와 접사接司를 모두 체포하여 요사한 기운이 뒤를
이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스즈키 아키라鈴木彰의 편
지는 바로 전하고 표票를 받아 보내주십시오. 일본 공사관의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스즈키가 귀영에 머물러서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에
사직 상소는 단지 임금을 번거롭게 할 뿐이고 양해를 얻지도 못할 것입니
다. 공功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물러나는 것이 온당한 도리입니다. 어
찌 잠시 견디지 못합니까? 당괴黨魁는 비록 죽더라도 그 죄는 바다를 터뜨려
도 씻기가 어렵습니다. 신원伸寃하라는 얘기는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말이 더해질까 걱정스럽고, 일에 있어서 이로움이 없습니다. 좋으시
기를 바랍니다.
갑오년 10월 22일 밤. 아우 윤식 올림.
50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생질 이李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온전히 도착을 했다니 기쁩니다.


만약 만나서 이런 뜻을 전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21일 밤에 주신 편지를 24일 밤에 받아보았습니다. 매우 신속하여 위로됨


과 기쁨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구원군이 점점 모여 고립된 성城이 의지하
게 된 것은 대감의 복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복입니다. 요사한 기운을 쓸어
버리고 생민生民을 다시 안정시키기를 바랍니다. 지금 눈을 씻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介南은 천보天寶, 당唐 현종의 연호년간의 안녹산安祿
山과 사사명史思明과 같습니다. 이 도적 2명을 죽인다면 나머지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도적 2명이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데, 하늘의 뜻이
반드시 모여서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순천順天 ․ 남원南原 ․ 고창高敞 등과 같은
읍의 수령은 모두 욕을 면하지 못했고 생사도 알지 못하여 말을 하니 마음
이 아픕니다. 홍주 목사의 위엄을 멀리서 듣고 지금 조정에서 유서諭書와 포
상이 내려졌습니다. 공주와 청주의 적이 감히 호서를 침범하지 못한 일이
조금 민심을 안정시킵니다. 다만 내포內浦의 소문이 날로 심한데, 선봉군이
지체되는 것은 일본군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약속 때문입니다. 신임 전라
감사가 내달 5일에 떠나기로 했으나 심병沁兵이 이미 떠났다가 일본인이 만
류하여 심영沁營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신임 전라감사는 호송할 군대가 없
어 다시 심병 200명을 뽑아 호송할 계획입니다. 이노우에井上馨 일본공사가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궁에 들어와서 대신들을 모아놓고 정치 19조43)를 임
금께 올려 실시할 것을 기약하고, 다시 위에 고告하고 아래에 선포하여 온 나
라가 훤히 알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자주독립과 정치를 개혁하는 일은 모

43) 정치 19조 : 이노우에는 이해 10월 고종과 대신을 모아놓고 ‘내정개혁강령’ 19개조를 제


시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내용은 궁중 ․ 정부의 분리, 재정 ․ 군대 ․ 형법 ․ 경찰
의 근대화와 군국기무처의 권한축소, 고문관채용, 유학생 일본파견 등이었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503

두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새벽에 인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등불을 돋


우어 황급히 씁니다.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10월 24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거듭 알립니다. 한산韓山의 정대무丁大懋는 청렴한 관리입니다. 지금 나이가


72세로 매우 늙고 병들어서 이런 비도匪徒의 소굴을 맞아 아침저녁으로 위급
함을 고하고 해임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의정부는 어찌 이유 없이
수령을 바꿉니까? 반드시 본영本營, 관할인 충청감영의 계파啓罷가 있은 뒤에야 후임
을 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매우 쉽지 않은 일이고, 그 사정은 공사公私
간에 매우 괴롭습니다.

지난 27일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귀영貴營이 구원병에 힘입어


방어하니 비도匪徒가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서 영남嶺南으로 흩어졌습니다. 어
제 영남의 전보를 받아보니, 또한 곳곳마다 위급함을 알렸습니다. 도처에
무인지경無人之境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일본군 대위大尉가 산에 올라가서 비
로소 놀랐고, 저들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저번에 일본 공사의 말을 들어
보니, “세 갈래 길의 군대가 멀거나 가까운 데서 그들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
렸다가 사방에서 압박하여 그 퇴로를 막아 섬멸할 것이다. 지지부진한 것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세 갈래 길
의 군대가 아직 다 모이지 않았으나 비도가 기미를 알고 사방으로 흩어졌습
니다. 또한 일본군의 계산 밖에서 나온 것으로 저들 중에 반드시 출중한 자
가 있어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비도를 잡을 때마다 일본인은 바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옥석玉石, 선악을 조사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밀지密旨, 임금의 비밀지시를 꾸며 백성을 선동한 종적蹤跡을 조사하려
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노우에井上馨가 이런 말을 하였는데, “비도가 주고
받은 서찰을 찾아낸 것이 책상가에 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이 밀지로 명령
50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한 것이다. 이밖에 달리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용


호李容鎬와 윤병갑尹炳甲도 밀지한 일이 일본인의 염탐에 걸려들어 잡혔습니다.
법무아문에서 회심會審44)을 하여 평문平問45)을 하였으나 아직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대개 이와 같은 일들이 많습니다. 해서海西의 비도가 또한 대단합
니다. 해주의 적이 재령載寧을 습격하려고 하니 일본인이 평양에 파견하여
주둔하고 있는 1중대를 보내어 토벌하였습니다. 동도東徒의 우환이 팔도八道
에 널려 있으니 어찌 운수運數가 아닙니까? 한탄스럽습니다. 일전에 일본인
이 여순旅順의 입구를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이것은 중국이 가장 역점을 두던
곳입니다. 지금 달리 믿을만한 곳이 없어 북경北京에서 피난할 계획을 논의
하여 매우 어수선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현재 일도 알만합니다. <일본과 청
국간에> 조약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갑오년 11월 1일 아우 윤식 올림.

거듭 천안天安의 군대가 탄알 20,000개를 더 보내달라고 하여 제가 대신 일


본 공사에게 요청을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가 그것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군대가 적을 만나면 창槍, 총銃을 의미한다을 버리고 도망가서 적에게 도
움을 줄 염려가 있다. 탄알이 모자라면 반드시 일본군 병관兵官과 상의하여
그 신표信票를 얻어서 보내면 바로 보내줄 것이다. 일본 공사관도 일본 병관
에게 탐문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탄알을 요청하면 반드시 일
본 병관의 신표를 얻어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9일에 보내신 편지를 받아보고 기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양至陽, 가장


왕성한 양기陽氣이다이 돌아오는 때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신지요?

44) 회심(會審) : 법관이 모여 사건을 심리하는 것을 말한다.


45) 평문(平問) : 형구(刑具)를 쓰지 않고 죄인을 신문하던 일을 말한다.
금영래찰 錦營來札 505

남쪽 하늘의 구름 빛에 요사한 기운이 없어지니 바로 제 마음의 바램에 부


합합니다. 이두황李斗璜은 쓸만합니다. 중앙에서 파견한 경군은 어찌 기율紀律
이 없습니까? 경병京兵은 거만하고 횡포한 것이 고질이 되었으니 탄식할 만
합니다. 심병沁兵은 완백完伯, 전라감사을 호송하기 위해 보내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전라감사는 부임하여 수비만을 하고 다른 일에 관여하지 않
았습니다. 수원에 반달15일 머무르고 질질 끌다가 출발하였습니다. 지금 일
본인이 비도匪徒의 형세가 점점 궁박해지는 것을 보고 힘을 써서 토벌하려고
이번에 군화軍火46)를 많이 싣고 호남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많
은 비도가 멀지 않아 토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귀영貴營, 충청감영에 병
사들이 모여 군량과 접대를 하느라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으리라 여겨집니
다. 또한 많은 비도가 흩어지더라도 나머지 무리가 곳곳에 숨어 있어 나중
의 대책에도 다소 신경이 쓰일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저
는 늘 괴롭고 힘듭니다. 내일 어가御駕를 모시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유告
由47)하러 갑니다. 이번이 바로 옮겨갈 기회이나 임금의 뜻을 알지 못하니 어
찌 하겠습니까?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정신이 매우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
다.
동지冬至 하루 전날 아우 윤식允植 올림.

연이어 승리의 소식을 받으니 기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괴匪


魁가 오히려 풀숲에서 숨을 쉬고 있고, 나머지 무리들이 아직도 호남과 영남
에 가득합니다. 조정의 관리가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는 때는 오히려 지난
날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때에 대감이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심을 알았습니
다. 병사들이 성城 한 곳에 모여 있어 그것에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나 접대

46) 군화(軍火) : 화기(火器)와 화약(火藥)을 말하는 듯하다.


47) 고유(告由) :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종묘 등에 아뢰는 것을 말한다.
50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생질인 이李를 만나 형제의 편지를 보고


대감께서 남쪽을 지킨 위대한 업적을 알았습니다. 매우 대단하십니다. 전라
감사가 식량이 부족하다고 화성華城, 수원성에 머무르고 있는데, 언제 떠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전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정치를 개혁하고 자주自主의
기틀을 새로 세우는 일은 이웃 나라 공사의 힘에 의지하여 차례대로 거행할
것이나 과연 시종始終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갑오년 11월 17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근래에 소식이 조금 끊겼습니다. 비록 다행스럽게도 초미焦眉, 매우 급한 상황의


걱정은 점점 풀렸으나 오히려 울적합니다. 지후至候, 동지 때의 날씨인 듯가 많이 어
그러진 때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좋으신지요? 피로가 쌓인
뒤에 다시 <백성을> 보듬고 안정시키는 노고가 있어 다소 괴로우시리라 여
겨집니다. 더욱이 나머지 무리가 숨어들어 얼굴만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않아서 베개를 높이 하고 눕지 못할 것입니다. 경병京兵과 일본군이 모두 호
남으로 향했다는데, 귀영貴營, 충청 감영에서 모집한 토병土兵, 그 지역에서 모집한 병사으
로 충분히 지킬 수가 있습니까? 신임 전라감사는 그 사이에 이미 감영에 도
착했고, 전임 감사김학진의 소식은 어떠합니까? 이 친구 때문에 매우 괴롭습
니다. 저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나 이번 동지冬至날에 임금의 어가가 태묘太
廟, 종묘에 새로 나아가서 자주自主와 개혁改革의 일을 고告하려고 합니다. 마침
한산韓山의 수령 정대무丁大懋가 해임되었는데, 계파啓罷 후에 보름이 지났으나
아전이 숨겨서 듣지 못해 끝내 비도匪徒의 난리를 만났습니다. 80 노인이 맨
발로 70리를 달아나 겨우 몸만 빠져나왔고,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전부
잃어버려서 이미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좌수座首에게 맡겨 놓은 저포苧布
몇 필은 숫자를 맞추어 돌려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모두 순영巡營,
충청감영에 관문關文으로 지시한다고 하기 때문에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맡겨
놓은 물건의 목록과 좌수의 성명은 상세히 탐문하여 뒤에 알려드리겠습니
금영래찰 錦營來札 507

다.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갑오년 12월 1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이주사李主事의 녹지錄紙 1건件을 함께 보냅니다.

임금께서 얼굴 부위에 풍단風丹48)으로 편안하지 못하여 임시로 뒤로 미루


셨습니다. 지금 날로 좋아지는 희망은 있으나 아직도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
하여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말씀드릴 것은, 호서의 정형情形이 비류匪類가 조
금 진정되어 흉악하고 교활한 우두머리는 산골짜기와 숲속으로 흩어져 숨
었고, 강요를 당한 죄없는 사람은 점점 돌아오고 있으나 관병官兵과 유도儒道
라고 불리는 자49)들이 도리어 강요를 당했다가 돌아온 평민을 침탈하여 곳
곳마다 집을 부수고 망신을 주어 그 소요로 편안하지 못하여 오히려 지난
날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이에 허실을 서로 가리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목사와 감사가 된 자는 더욱 백성의 안정安定을 우선으로 하고, 죄
를 지은 유명한 우두머리가 아니면 일일이 찾아내어 체포해서 나머지 백성
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병정은 한양과 지방을 막론하고 매우
몰지각하여 세를 이용하여 약탈하는 습관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배우니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이들을 단속하여 나가서 체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날에 호서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양반의 폐단이었습니다.
하늘의 도가 순환하여 지금 가장 불쌍한 자는 양반집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이름이 있는 집안 중에 진심으로 <동학에> 입도入道한 자가 한사람도

48) 풍단(風丹) : 단독(丹毒). 피부의 헌데나 다친 곳으로 세균이 들어가서 열이 높아지고 얼


굴이 붉어지며 붓게 되어 종창, 동풍을 일으키는 전염병을 말한다.
49) 관병(官兵)과 유도(儒道)라 불리는 자 : 지방관아의 군대는 수성군(守城軍), 유림중심의
유회군 또는 민보군이 편성되어 색출 또는 경찰임무를 맡았다.
50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없습니다. 그런데도 집집마다 결딴이 나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비괴匪魁를 찾아내어 체포할 때에 다시 그 지명도知名度 때문에 뜻하지 않은 재
앙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병은 모두 상놈으로 평소에 반명班
名, 양반이라고 이를 만한 명색과는 원수가 되어 때를 이용하여 못된 짓을 저지르는데
반드시 양반집입니다. 좌우로 침탈을 당하여 살아갈 여지가 없으니 어찌 불
쌍하지 않겠습니까? 대감께서 지금 비도를 토벌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일
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처리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는 덕
을 베풀어 호서의 사족士族들이 물불과 같은 도탄塗炭을 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음공陰功이 어떻겠습니까? 저의 고언瞽言, 사리에 어두운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미리 방법을 마련하여 가지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본 관서官署, 외무아문의 주
사主事 이강하李康夏의 집이 당신 관아에 있어 또한 창상지변滄桑之變, 엄청난 변화을
겪어 후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특별히 보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李씨 집뿐만 아니라 도道의 전체 사족들이 모두 이런 바램을 가지고 있으니
깊이 헤아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제 주사主事 이강하李康夏 집의 인편에 편지 1통을 부쳤는데 이것보다 먼저


받아보셨으리라 여겨집니다. 매우 추운 때에 대감께서 지내시는 형편이 좋
으시다는 것을 아니 위로가 되고 제 바램에 부합됩니다. 비당匪黨이 멀리서
날뛰어 군대를 주둔하여 지키고 있으나 지금의 절박한 근심은 전에 비해 조
금 덜해져서 비로소 정사를 펴고 명령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서
리가 온 뒤에 칠곡桼谷이 다시 따뜻해지니 호서의 백성을 위해 축하할 만합
니다. 저는 여전합니다. 늘 평기坪基 장전長田의 생질편지를 받아보고 훌륭한
자사刺史를 잃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또한 대감께서 비방을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는 뜻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일은 이미 지난 것이고, 공
론公論이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난리가 지난 뒤
에 백성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매복한 비도의 잔당을 탄압하는 일은 결코
금영래찰 錦營來札 509

서투른 사람이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번거롭고 괴로운 생각


은 하지 마시고, 일개 성省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서 해주시는 것이 어
떠하겠습니까?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갑오년 12월 2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생질 이李에게 보내는 답장을 전해주도록 분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일 하교下敎를 받으니 위로가 되고 이웃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 뒤에


인민人民이 제법 모여들었으니, 여러 읍의 수령들이 관아에 앉아 읍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군무아문에서 각 읍에 주둔하여 방어할 군사를
임금께 아뢰어 정했습니다. 삼남三南의 수십개 읍에 각각 주둔하는 군사는
300명에서 150명까지 같지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마련할 방법으로 매복한
나머지 <비도의> 무리를 제압하고, 화살에 놀란 새와 같은 마음을 가진 불
쌍한 백성을 위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별군관別軍官50)과 유도군儒道軍이라
고 하는 것은 차차 거두어 돌려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호남의 소식은 근래
에 어떻습니까? 괴수 2명은 언제 머리를 바칩니까? 임기준任基準이 성城에 들
어와서 며칠동안 일본인의 처소에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심리하여
처리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임금의 풍화風火51)증세가 점차 회복되어가
고 있으나 아직 풍기와 화기가 남아있어 여전히 그것을 없애는 약제를 올린
다고 합니다. 저는 여전합니다.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갑오년 12월 4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50) 별군관(別軍官) : 각 군영에 딸린 군관의 하나. 각지에 임시로 이 직함을 주어 농민군을


토벌케 하였다.
51) 풍화(風火) : 병의 원인이 되는 풍기(風氣)와 화기(火氣)를 말한다.
51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청淸과 일본이 장약仗約, 조약문서을 주고 받았는지는 최근에 달리 들은 것이


없습니다. 조약을 맺은 듯하나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따로 편지 1통을
보내니 평기坪基의 제 생질에게 전하도록 분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프랑스 선교사가 전에 당신의 관아에 갔다가 해


를 입은 선교사를 매장한 곳을 살펴보고 이장移葬을 도모하는 한가지 일입니
다. 해를 입은 선교사를 조사한 것은 전임 충청감사 때의 일인데, 여러 차례
주고받은 편지가 책상에 있어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이번
선교사가 갈 때에 특별히 보호하여 실망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시고, 그가
머물고 한가롭게 관아 내를 걸어 다닐 때에 병정兵丁으로 하여금 호위를 하게
하여 뜻밖의 재난을 막아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해당 선교사가 지금 귀
영貴營, 충청감영에서 완영完營, 전라감영으로 가다가 방에서 잃어버린 집물什物의 배
상금으로 2,000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특별히 보호하지 않으면 나중
에 이런 걱정이 있을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그만두고 다음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12월 14일 밤 아우 김윤식金允植 올림.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섣달 추위가 매우 이상하고,


해가 이미 제야除夜가 되었습니다. 대감께서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신지요?
매우 그립습니다. 저는 우연히 감기에 걸렸다가 1달 만에야 일어났습니다.
마침 이 때에 상소를 올려 심영沁營의 병부兵符는 그만두고 아이를 심영沁營에
보내 관아의 권속眷屬들을 데려오려고 합니다. 공사公私간에 바쁘고 어수선하
여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청산靑山 등지52)에 주둔하고 있는 적

52) 청산(靑山) 등지 :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농민군은 전봉준과 함께 태인까지 내려와 전투


를 벌인뒤 임실에 피신해 있던 최시형을 데리고 장수 무주를 거쳐 영동 ․ 옥천의 용산 청
금영래찰 錦營來札 511

은 그 사이에 이미 해산하여 현재 어느 곳에 있습니까? 이 적을 올해 안에


쓸어버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마침 후반候斑, 임금을 알현할 때의 반렬을 따라
물러났습니다. 파발이 바빠서 대충 씁니다. 새해를 맞아 큰 복이 오고 나라
와 집안이 태평하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제야除夜에 아우 윤식允植 올림.

평기坪基에 보내는 편지를 전해주도록 분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번역 : 최원경>

산에서 전투를 치르고 이어 보은 북실에서 마지막 패전하고 나서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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