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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본 자료는 1894년 10월 1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양호선봉장 이규


태가 동학농민군을 진압 토벌하는 과정에서 순무사(巡撫使) 신정희
(申正熙)에게 보낸 첩보(牒報)를 수록한 것으로, 모두 104종의 첩보
가 포함되어 있다.

주요한 내용으로, 선봉진 각 부대의 활동상황, 특히 공주의 효포,


판치, 유구, 우금치와 노성, 논산, 강경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을 격파
하고 전라도에 내려가서 동학농민군을 소탕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
술되어 있다. 또한 군수 물자의 내역까지도 다수 수록되어 있다.

본 자료는 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 지역에서 벌어진 정부군과


동학농민군의 전투상황과 농민군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서,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 과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본
자료의 원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03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스물다섯 9월 24일(위 부분은 누락됨) [其二十五 二十四日(以下缺)]

첩보(牒報)하는 일입니다. 오늘 손시(巽時, 오전 8시 30분∼9시 30분)


경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출발하여 유시(酉時, 오후 5
∼7시) 경에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도착하였고 이어서 주둔하여 별탈
없이 편히 머물며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1894년 10월 11일 순무사에게 보고한 내용 [甲午十月十一日 報巡撫使]

선봉진(先鋒陣)이 보고하는 일입니다.1) 어제 유시 경에 각 소대를 거


느리고 겨우 관문 밖으로 나왔으나 날이 이미 어두워져서 형편상 전진
(前進)할 수 없었으므로, 교도소(敎導所)의 각 부대는 청파(靑坡)의 앞길
에 머물러 묵고, 통위영(統衛營)의 각 부대는 숭례문 밖에서 주둔하였으
며, 각각의 장령(將領)들에게 신칙하여 군사를 나누어 각기 주찰(駐紮)2)
하게 하여 무사히 밤을 새운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무사하게 밤을 지냈다니 매우 다행스럽다. 한낮쯤에 즉시 출발
할 일이다.

1) 이하로 ‘선봉진(先鋒陣)이’란 말이 생략되었으며, 12월 10일 93번째의 보고 때부터는


‘좌선봉진’으로 바뀌며 그 이하로 ‘좌선봉진이’이란 말이 생략되었다.
2) 주찰(駐紮): 군대를 주둔시켜 변란 등을 막는 것을 말한다.
30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둘 [其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소대를 거느리고 즉시 출발한다는 사정을 보고


하는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머물러 묵는 곳에서 거접(居接)3)하고 공궤(供
饋)4)한 일을 상세하게 보고하라.

셋 10월 12일 [其三 十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어제 유시 경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별탈없이 한


강을 건너 과천읍(果川邑)에 도착하여 머물렀고, 조석(朝夕) 식사를 무사
히 조달하였으며 이어서 출발한다는 사정의 일입니다.
제(題): 화성(華城, 현 수원)에 도착하면 잠시 머물렀다가 일본 병사가
들어가기를 기다려 상의하여 출발하라.

넷 [其四]

보고하는 일입니다. 장졸(將卒)을 거느리고 20일에 양찬(糧饌, 군량)


대금 27,470냥 중에서 통위영(統衛營) 영관처(領官處)에 11,826냥을 나누
어 주고, 교도소 영관처에도 11,400냥을 분배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3) 거접(居接): 잠시 몸을 의탁하여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4) 공궤(供饋): 식량이나 물자 따위를 공급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05
다섯 [其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오늘 미시(未時, 오후 1∼3시) 경에 각 소대를 거


느리고 아무 별 탈 없이 행진하여 술시(戌時, 오후 7∼9시) 경에 수원부
(水原府)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여섯 10월 14일 [其六 十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소대를 거느리고 수원부에 주둔하여 아무 별


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일곱 10월 15일 [其七 十五日]

각 소대를 거느리고 수원부에 주둔하여 아무 별 탈 없이 유숙하면서


음식을 조달하였으며, 일본 병사가 아직도 이르지 않았기에 여러 날을
머물고 있어 몹시 근심스럽습니다. 이런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여덟 [其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어제 신시(申時, 오후 3∼5시)경에 도착하여 청주


(淸州)에 머물고 있는 친군영(親軍營) 경리청(經理廳)의 체직된 부령관
(副領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 내용에, 순무영(巡撫營)의 전령(傳令)에
따라 즉시 후원을 받은 영관(領官) 구상조(具相祖)와 함께 병사 3개 소
대를 거느리고 청주로 달려간 사유는 이미 순무영에 보고하였거니와, 청
30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주에 도착하여 머물러 주둔하고 있었더니 다시 도착한 순무영의 회답한


처결 내용에, “죽산에 군대가 머물러 진군하지 않아 호응함이 지연되고
있으니, 어찌 이 같은 군대의 기율이 있는가? 지금 들으니 청주의 사태
조짐은 조금 완화되었고 경영(京營)의 병사들이 일본 병사와 함께 도착
한다 하니 진천(鎭川)・목천(木川)의 <동학농민군을> 소탕하는 일이 급
선무이다. 이 공문을 보내어 시행할 것이며, 많은 병사들로 호응하기 위
해서는 지금 출발하여야 할 것이니 적을 토벌하는 방책은 자연히 선봉진
에게 절제권이 있다”라고 하신 까닭에, 날짜에 맞춰 아울러 목천의 복구
정(伏龜亭)으로 진군하여 선봉진의 절제를 기다리도록 먼저 죽산부(竹山
府)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미 영관으로 체직되었으나 새 영관이 임명된 지 며칠
이 지나도록 아직 군사를 거느리는 임무를 교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책
임이 없는 장수가 군대를 진퇴하는 일을 과감하게 천단하기 어렵습니다”
라고 하므로 보고 내용 중에, “체임한 영관이 병정을 거느리는 데에 불
편한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선 통솔하고 순무영의 처분
을 기다리라는 회답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병정을 통솔하고 호응하는
일은 처분을 기다려 즉시 지휘할 생각의 일입니다.
제(題): 해당 영관으로 하여금 속히 군대를 거느려 시행하라.

아홉 [其九]

보고하는 일입니다. 순무사께서 베껴 보내주신 방시문(榜示文)은 몇 개


의 본으로 베껴서 경기와 호서의 각 읍에 공문서로 보내 게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두루 보도록 신속히 통지한 사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07
열 10월 16일 [其十 十六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15일 미시(未時)에 도착한 사또[순무사]께서 전령


(傳令)하신 내용에, “행군하는 중에 군대의 기율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
데, 듣자하니 거느리고 간 전배군(前排軍)들이 수원부에서 머물러 묵을
때에 수원군에 피해를 끼치고 관청 아전들에게 토색질하여 크게 소란을
떠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어찌 이와 같은 군율이 있는가! 이리하
여 전령을 하는 것이니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엄밀하게 수사하여 군율을
어긴 군사들은 모두 신속히 위로 압송하고 해당되는 법률을 시행할 것이
며 이 뒤에도 단속하는 일을 각별히 더 신칙해서 다시는 털끝만큼이라도
읍촌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2일에 행군하여 어두워질 무렵에 수원부에 들어가게 되니 많
은 수의 인마(人馬)들을 돌아가서 묵게 하지 않을 수 없어 기수(旗手)를
시켜서 이속(吏屬)들을 불러 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처소를
분간하지 못하고 영내로 난입하여 적발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
록 소란스러운 일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일의 체모를 생각해보면 몹시
놀랄 일입니다. 즉시 그놈들을 수원관부(水原官府)의 감옥에 가두어 놓았
고, 회군하여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 법대로 처벌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정행위가 적발되어 이런 지시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극
히 죄송한 바이며 즉시 서둘러 위로 압송할 겨를이 없으며, 그놈들이 찬
감옥에 갇혀 구금된 지 벌써 여러 날이 된지라 현재 병이 들어 생사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다가 압송할
계획인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본진에서 죄의 경중을 참작하여 처결하라.

열하나 [其十一]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소대를 거느리고 수원부에 주둔하여 무사히 유


30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숙하고 공궤한 사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狀啓)로 아뢸 것이다. 도착하였다.

열둘 [其十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별무사(別武士)5)가 수령해 온 인자군막(人字軍幕)


18부(部)는 수량대로 점검해 받은 뒤에 9부는 통위영(統衛營) 병정(兵丁)
이 있는 곳에 나누어 주고, 그 나머지 9부는 교도소(敎導所) 진영(陣營)
이 머무르는 곳을 탐문한 뒤에 수송하겠다는 사유의 일입니다.
제(題): 교도대(敎導隊)가 있는 곳에 바로 서둘러 수송하라.

열셋 [其十三]

보고하는 일입니다. 인자군막을 수송해 온 복마군(卜馬軍) 5명 및 말 5


필, 그리고 식량부식 대금과 말먹이 대금 26일 조(條)를 합한 429냥을 정
해진 수량대로 점검해 받은 뒤에 별 탈 없이 나누어 준 연유의 일입니다.

열넷 10월 17일 [其十四 十七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선봉진이 12일에 화부[수원부]에 도착하여 당일 저


녁부터 17일 아침까지 각 부대에 조달한 열넷 끼니의 음식은 운량소(運
糧所)에서 시행하였으므로 보내준 경비와 물자는 전에 출발시켜서 필요
할 때 쓰는 데에 대비하게 계획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5) 별무사(別武士): 특별히 가려 뽑혀 윗자리를 받은 병졸을 말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09
열다섯 [其十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거느리고 온 각 소대 및 어제 도착한 일본 병사는


아직 무사합니다. 오늘 진시(辰時, 오전 7∼9시)경에 다 같이 출발하여
진위(振威)에 이르러 유숙할 계획인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도 빠질 것이다. 도착하였다.

열여섯 10월 18일 [其十六 十八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어제 진시에 각 소대를 이끌고 일본 병사와 함께


행진하여 유시 경에 진위(振威)에 도착하여 별 탈 없이 유숙하고 공궤하
였습니다. 오늘 손시 경에 이어 출발할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일이다. 도착하였다.

열일곱 [其十七]

보고하는 일입니다. 오늘 손시에 진위읍을 떠나온 사유는 급히 보고하


였거니와, 일본군 1지대(枝隊)는 해당 대위가 거느리고 진위읍에서 안성
(安城)으로 행진하여 다음날 천안군(天安郡)에서 서로 회동하기로 약속하
였습니다. 일본 병사 87명, 소위(少尉) 1명 및 서울 병정과 잡색(雜色)
43명은 교장(敎長) 황수옥(黃水玉)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평택(平澤)과 아
산(牙山) 등지로 파견하여 향하게 하였고, 역시 천안 땅에서 회동하였다
가 출발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거느린 각 병력은 미시(未時)경에 칠원점
(漆園店)에서 점심을 먹고 술시(戌時)경에 성환역(成歡驛)에 머물러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각 부대가 무사히 유숙했다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31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열여덟 10월 19일 [其十八 十九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어제 술시 경에 병사를 거느리고 성환역에 도착하


여 무사히 밤을 지냈습니다. 직산읍(稷山邑)에서 소 1마리와 술 4동이를
선봉진 앞으로 와서 바치면서 병사를 위로하고자 하기에 각 소대 및 진
영에 부임한 모든 관원에게 분배하여 주었습니다. 진시 경에는 천안땅을
향해 전진할 생각입니다. 이런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것이다. 도착하였다.

열아홉 [其十九]

보고하는 일입니다. 본진(本陣)의 치중(輜重)6)을 실고오던 일겸금군(一


兼禁軍)7) 배용주(裴用珠)의 말이 성환역에 이르러 폐사하였습니다. 그래
서 말 주인에게 노자 2냥을 줘서 올려 보낸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해당 진영에 통지하라.

스물 10월 20일 [其二十 二十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인접한 고을의 수령 및 읍민들이


바친 군수 물품은 균등하게 나누어 지급하였고 후록(後錄)하여 보고하는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일이다. 도착하였다.

6) 치중(輜重) : 무거운 짐바리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군수물품을 말한다.


7) 일겸금군(一兼禁軍): 말을 타고 임금과 궁중의 호위를 맡은 금군의 윗자리 무사를 말
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11
후록(後錄)
삶은 쇠고기 2마리
막걸리 1항아리
담배 15줌(把)
천안군수 김병숙(金炳塾)
짚신 100켤레(部)
전의현감 이교승(李敎承)
소 1마리 - 대진[大陣 주력부대]
돈 40냥 - 의병(義兵) 음식조달
천안거주 전 감찰(前 監察) 윤영렬(尹英烈)

스물하나 [其二十一]

보고하는 일입니다. 성환에서 천안을 향해 전진한 사유는 어제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각 부대는 어제 유시 경 천안군에 도착하여 무사히 주
둔하여 묵었습니다. 즉각 출발하여 지방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함이 마땅
하지만 안성에서 전진해하여 오는 일본군 대위가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 알려왔기 때문에 천안군에 머물러 있는
기다렸다가 행동을 같이 하자고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것이다. 도착하였다.

스물둘 10월 21일 [其二十二 二十一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천안에 사는 전 감찰(前 監察) 윤영렬(尹英烈)・아


산에 사는 출신(出身) 조중석(趙重錫)이 대의(大義)에 분발하여 300여 명
을 모아놓고 주력 부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주력 부대가 다다르자 앞
31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으로 나아가 용력을 과시하여 써 주기를 바라는데 강개해 하지 않은 이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부의 결정을 기다리며 아무튼 그들이 바친 공
로는 차례로 보고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믿고 권면해주는 의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윤영렬의 아들 유학(幼學) 윤치소(尹致昭), 출신
조중석을 우선 본진의 별군관(別軍官)으로 차출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의거(義擧)는 진실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니, 그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
돋을 수 있도록 삼가 처분을 기다리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듣자니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다. 우선 장계로 아뢴 뒤에
별군관에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용(義勇)이 있는 사람을 모으게 하
여 군대의 앞에서 세운 공로에 대해서는 별도로 상하여 선양해야 한다.

스물셋 10월 22일 [其二十三 二十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출진(出陣)한 장위영 부영관(副領官) 죽산도호부사


겸죽산진토포사(竹山都護府使 兼竹山鎭討捕使) 이두황(李斗璜)이 보고한
내용에, “이달 18일에 연기(燕岐)의 봉암동(鳳巖洞)에 도착하여 상부의
결정에 따라 전진하기 위해 금영에 보고한 사유는 이미 급히 달려가 보
고하였거니와, 이달 2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도착한 청주 병영
(淸州兵營)의 감결(甘結)에, ‘목천의 세성산(細城山)8)에 진을 치고 모여
있는 비류(匪類)들을 빨리 토벌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날 사시(巳時,
오전 9∼11시) 경에 30리를 행군하여 청주 송정리(松亭里)에 이르러 주
둔하고 묵었으며 이튿날인 21일 묘시 경에 행군하여 곧바로 목천의 세성
산 아래에 도착하였습니다.

8) 세성산(細城山): 현재는 천안군 성남면 화성리에 있는 산으로, 세성산 정상에는 병풍


암이라 부르는 둥근 바위가 있는데 농민군의 지휘부가 자리잡은 곳이라 한다. 이곳은
공주 감영과 청주병영의 중간에 있어서 북접 농민군들이 일본군과 관군의 진로를 차
단하려는 작전에 따라 웅거하였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13
이어서 지형과 비류들의 동태를 상세히 살펴보니, 세성산은 세 면이
가파른 절벽이고 한쪽 면이 다소 평편합니다. 보루와 참호는 극히 견고
하고 넓으며 깃발이 빽빽이 늘어섰고 들녘에는 포성이 요란하였습니다.
부대를 동북쪽 토산(土山) 위에다 잠시 멈추고 병사를 쉬게 한 다음 차
례로 출발시켜 한 개 소대는 세성산 동남쪽 기슭에서부터 총포를 쏘면서
쳐 올라가게 했고, 두 개 소대는 세성산 북쪽 기슭에 매복시켰으며, 한
개 소대는 호응케 하기 위해 토산 위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적(賊)이 반 식경을 버티다가 우리 군대의 공격을 받아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고, 이때에 우리 군대는 동남쪽 기슭부터 쳐 올라가서는
먼저 성지(城池)를 점령하였습니다. 한편 북쪽 기슭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대는 도망치는 <동학농민군을> 쫓아 북쪽으로 수 십 리를 추격하여
사살하거나 사로잡는 등 크게 이겼으니 이때가 그날 신시 경이었습니다.
노획물은 차례대로 헤아린 뒤에 책자로 만들어 보고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격해서 비류들을 토벌하여 크게 전승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매우 통쾌합니다. 이에 보고하여야 마땅하나 단지 병영에서 관문으로 시
행해야 하므로 시간이 지체됨을 면치 못했다는 뜻으로 제송(題送)9)하였
습니다. 음식물을 베풀어 군사를 위로하는 일은 먼저 본 읍으로부터 넉
넉하게 지공(支供)10)을 준비한 뒤인지라 아무쪼록 사용한 공곡(公穀)과
공전(公錢)을 해당 감영에게 보고하도록 감결을 발송하였습니다. 참모관
(參謀官) 정도영(鄭道永)과 별군관(別軍官) 이필영(李弼榮) 그리고 이종
진(李宗珍) 및 병정 5명은 위로차 보냈습니다. 그리고 죽이거나 사로잡
은 <동학농민군의> 숫자는 다시 보고를 기다렸다가 보고할 생각인 연유
의 일입니다.

9) 제송(題送): 상급 관아에서 어떤 취지나 지령을 공문서에 적어서 하급 관아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10) 지공(支供): 음식을 이바지한다는 뜻이다.
31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제(題): 마땅히 비밀로 명령하라.


통위영(統衛營)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
고함.

스물넷 10월 23일 [其二十四 二十三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천안군에


주둔하여 별 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하였으며, 금일 먼동이 틀 무
렵에 같이 출발하여 광정참(廣亭站)을 향하여 나아간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스물다섯 10월 24일 [其二十五 二十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어제 진시 경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행진하여 유시 경에 일본 병사는 덕평점(德坪店)에 이르러 유숙하
였고, 각 소대는 그대로 앞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술시 경에 광정참에 도
착하여 별 탈 없이 주둔하고 편히 쉬었습니다. 그리고 금일 손시 경에
일본 병사와 함께 출발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보고하는 일입니다. 오늘 손시 경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출발하여 유시 경에 금영에 도착하여 그대로 주둔하였고 별 탈 없
이 편히 쉬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15
스물여섯 10월 25일 [其二十六 二十五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별군관 겸경리청부령관(別軍官 兼經理廳副領官) 안


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의 보고에, “이달 23일 인시 경에 충청
도 관찰사의 통지에 따라 군수가 후원군(後援軍) 참령관(參領官) 구상조
(具相祖), 참모관(參謀官) 이상덕(李相德)・이윤철(李潤徹)・신효식(申孝湜)・
황승억(黃昇億), 대관(隊官) 조병완(曺秉完)・이상덕(李相德) 및 교장(敎
長) 김홍엽(金弘燁)・이봉춘(李鳳春)・이장혁(李章爀)・우기준(禹基㻐)과 함
께 2개 소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진영을 나와 공주목(公州牧)에서 남쪽으
로 10리 거리의 효포(孝浦)를 막아 지키면서 사방으로 정탐군(偵探軍)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경(二更, 오후 9∼11시)이 지나 보고하기를, ‘호남의 전봉준
(全琫準)이 동도(東徒) 4만 명을 이끌고 남쪽 30리 거리에 있는 경천(敬
川)을 겁략하고는 장차 공주목으로 향할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고 하고,
옥천포(沃川包)11) 동도 수만 명이 동쪽 30리 거리에 있는 대교(大橋, 현
도교리)에 진을 치고 모여 있으면서 전봉준과 합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약한 군사로는 한 곳도 방어하기가 극히 어려운데다가 효포
는 배와 등의 모양을 하고 있어 양쪽에서 적을 맞는 지세(地勢)인지라
오래 주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닭이 울 때를 기다렸다가 즉시
출발하여 25리를 후퇴하고 수촌(壽村)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그런 다음 대교의 뒷길을 따라 20리를 나가 멀리서 <저들을> 관망하니
골짝 뒤 작은 능선에 숲을 의지하여 진을 치고 모인 자가 수천 명이며,
넓은 들판에 빙 둘러 꽂힌 깃발로 보아 모두 합치면 수만 명의 무리가
됩니다. 그래서 몰래 그들의 뒤편을 따라 숲을 의지하고 있는 적을 먼저
습격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이 포격을 받고는 산에서 내려와 들

11) 포(包) : 동학의 전도(傳道)를 위한 조직의 한 단위. 또는 그 조직이 있는 곳. 포의


책임자를 포주(包主)라 하고, 그 하위 조직을 접(接)이라 하였다.
31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판에 있는 적들 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그들의 능선을 빼


앗고 상호간에 총포를 쏘아대니 서로의 간격은 반 식경 거리였습니다.
우리 군사가 20여 명을 사살하고 6명을 생포하니 그들은 차츰 흩어져
산으로 기어올라 고개를 넘어 달아났습니다. 이에 45리를 진격하여 반나
절을 접전하니 날은 저물고 군병(軍兵)들도 지쳐서 만일 모조리 잡으려
고 한다면 진퇴양난에 빠질 수 있어 방시문을 내걸어 백성들을 안정시키
고 <동학농민군이> 버리고 간 약간의 물건을 거두어 모으고는 즉시 회
군하였습니다. 다시 수촌으로 오는 도중에 지시를 받고 공주목으로 돌아
와 머물렀습니다. 생포한 여섯 놈은 효수하여 여러 사람의 경계로 삼기
위해 바칠 것이며 노획한 군수물은 책을 만들어 순무사께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보내온 책을 다시 수정하여 올려 보내며 해당 영관이 졸지에 적
들을 만나 적은 군사로써 많은 수를 대적하였는데도 그들을 생포하고 사
살한 수효가 적지 않습니다. 그 장관(將官)의 용감함과 병졸들의 목숨
바쳐 싸운 일은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제(題): 듣자니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다. 노획한 공을 아뢰어 더
욱 사기를 분발시켜라.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총어영(摠禦營)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

스물일곱 10월 25일 [其二十七 二十五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출진(出陣) 장위영 부영관 죽산도호부


사 겸죽산진토포사 이두황의 보고에, “죽산부를 떠나 행진(行陣)한 뒤로
18일에 연기읍(燕岐邑) 봉암동(鳳巖洞)에 도착하여 상부의 결정에 따라
전진하기 위해 금영에 보고한 사유는 이미 19일 봉암동에 있을 때에 급
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21일에는 목천의 세성산에 도착하여 비류들
을 대파한 사유도 21일 술시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17
그런데 이달 20일 사시에 발송하여 22일에 도착한 전령 안에, ‘주력부대
가 남쪽으로 내려간 지 벌써 열흘이 되었거늘 겨우 금영의 이문을 받고
비로소 본진이 연기읍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건대
군무(軍務)의 허술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군법대로 문책함이 마땅하지
만 본진에서 전해 알릴 수 있는 편권(便權)12)이 없었으니 혹 용서할 수도
있겠다. 연기는 유성(維城)에서 40리 거리에 있는데 요즘 듣자하니 비도
(匪徒)가 그곳에서도 출몰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선 유성 어귀 등지로 이
동하여 주둔해서 먼저 <동학농민군이> 날뛰는 폐해를 막고 또 호남의 비
도가 이곳을 경유하여 올라올 걱정거리를 끊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들을 토벌할 경우에는 금영의 지원군을 기다렸다가 진퇴해야 하지만,
적의 동정을 살펴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은 오로지 임기응변하는데 있
는 것으로, 멀리서 헤아려 지휘할 것이 아니다. 대저 중요한 길목을 굳게
지키는 것이 만전의 대비책이다. 이런 뜻을 금영에다 공문으로 통지하였
으니 틀림없이 소상한 지시가 있을 것이다. 마땅한 바를 헤아려 시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달 16・17일 양일에 즉각 금영(錦營)으로
오라는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금영으로 급히 나아가 직접 분부를 받고
진병하기 위해 연기 봉암동에 있으면서 금영에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제(回題)에서, ‘비류들의 정형(情形)을 계속해서 더 정탐하여
야 할 것이며, 주거할 만한 곳에 부대를 머물게 하고 선봉진의 지휘를
기다리라’고 하기에 사태의 실마리를 알 수 없어 즉시 금영으로 달려가
직접 지휘를 들은 다음 진병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달 20일 묘시 경
청주 병영에서 도착한 감결(甘結) 안에, ‘목천의 세성산에서 진을 치고
모여 있는 비류들을 빨리 섬멸하라’고 하셨고, 목천의 적들은 공주・청주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장차 크게 함부로 날뛸 우려가 있고 또한 서울로
통하는 길목을 핍박하여 선봉진의 전도에 장애가 될 터이니 가슴속에 숨

12) 편권: 현지에 출동한 장수는 법에 따라 처결해야할 일을 현지 사정에 따라 즉시 처


결해야할 위급한 일을 편의종사(便宜從事)의 권한을 받아 처결하였다.
31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어있는 화근이라 이를 수 있습니다.


한편 금영의 사기(事機)로 말한다면 경리청(經理廳)의 군병(軍兵)들이
이미 그곳 병영에서 방어하고 있으니 방비책이 전에 비하여 조금은 낫
고, 또 한편 명령을 들은 것으로 말한다면 이미 가서 지원하라는 순무영
(巡撫營)의 전령이 있었습니다. 이치를 따져서 거행하자면 먼저 청주에
근접해온 적을 섬멸하는 데에 있지만, 목천이 다급한 지경에 처해 있기
에 또한 위급한 형세를 들어 금영에 논보(論報)13)한 뒤 행군하여 곧바로
비류들이 모여 진을 치고 있는 목천 세성산에 들어가서 크게 전승을 얻
었습니다.
그랬는데 즉시 도착한 금영의 제사(題辭) 안에, “공주로 가서 지원하라
는 순무영의 전령이 이미 도착했을 것인데 순무영의 지시는 듣지 않고
청주 곤수(梱帥)14)의 감결만을 따랐으니 이 무슨 곡절인지 모르겠다. 병
사(兵使)가 처리함이 일치하지 않고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현재 파직
(罷職)시킬 것을 장계로 올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도착한 금영의 관문에, “전에 접수한 귀 영관의 보고
내용은 연기에 도착하여 명령을 듣겠다고 말한 까닭에 감히 공주와 대전
으로 진병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지금 병영에서 온 감결 때문에 다른 곳
으로 가서 공문을 보내면서 ‘전진할지 말지 명령을 기다린다고
’ 하였다. 병
영의 말을 오인하여 진병시켰다가 돌아와서 당돌함을 깨달으니 매우 당혹
스럽다. 지금 순무영의 지시 때문에 문서를 보냈는데, 귀 영관이 순무영의
절제를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병영의 절제를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
다. 또 비류들을 섬멸하는 일로 말한다면 도내에서 봉기하는 것이 목천의
무리들과 같이 도처에 다 그러하지만 전주에 있는 거괴(巨魁) 전봉준(全琫
準)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과 같이 가장 큰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공

13) 논보(論報): 하급 관청이 상급 관청에 자기 의견을 붙여 보고하는 일을 말한다.


14) 곤수(梱帥): 곤외(閫外)라고도 한다. 병마의 책임을 맡은 장군의 다른 이름으로, 병사
(兵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수사(水使)와 같은 지방관을 가리키거나 그 직분을 지
칭하기도 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19
주는 성회(省會)15)의 중요한 땅이자 요충의 큰 길목인데다 적들은 100리의
안쪽에 있어서 하루나 반나절이면 공주에 이를 수 있는데도 귀 영관이 험
난한 곳을 피하여 평탄한 곳으로 가느라고 이렇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귀 군진(軍陣)이 나가고 머무르는 것은 본영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진퇴하는 일을 잘 헤아려 알아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목천의 적을 먼저 토벌하는 것은 실상 선급후완(先急後
緩)하는 의도에서 나왔겠지만 금영의 지시가 이처럼 엄격하니 황송한 마
음 간절합니다. 이제 세성산에서 적을 토벌할 때에 생포한 북접(北接)의
유명한 괴수 김복용(金福用)을 압송하여 주력부대에 대령해야할 지의 여
부는 회답에 따라 시행할 생각이며 노획물은 책을 만들어 수정하여 상부
로 올려 보낼 것이라 합니다.
사로잡은 괴수 김복용을 잠시라도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즉각 목을
베어 백성들을 깨우치게 한 다음 즉시 본영(本營)에다 보고하게 하였습
니다. 쌀과 벼는 주력부대가 행군을 옮긴 뒤에 비도들이 노략질을 할 염
려가 있기 때문에 즉시 청주병영으로 수송하게 하였고, 군기(軍器)는 목
천과 천안으로 나누어 보냈습니다. 해당 영관이 거느린 병사는 금영에서
지원을 요청하기에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어 밤낮을 가리지 말고 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노획한 책 한 건은 잘 간수해 상부로 보낼 것입니다.
이번에 목천의 비류들이 공주・청주의 사이에 모여 웅거해 심히 창궐하
는 형세였으나 해당 영관이 깊이 들어가 소탕하여 괴수를 사로잡았으며
그 밖에도 군기(軍器)와 쌀과 벼 등 작물이 적지 않아 공효가 극히 가상
합니다.
제(題): 듣건대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다. 노획한 공을 아뢰어 더
욱 사기를 분발시켜라.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

15) 성회(省會): 지방행정 단위인 성(省)의 수도를 말한다.


32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스물여덟 [其二十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경리청의 계원(繼援)16) 영관 구상조의 보고 내용


입니다. 오늘 13일에 죽산도호부사 이두황이 이끄는 군대 및 진남영진
(鎭南營陣)이 합세하여 청주(淸州)를 떠나 곧바로 보은(報恩)으로 향하니
비류들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청산(靑山)・영동(永同) 등지로 도피하였고
접주(接主) 백학길(白學吉)을 붙잡아 효시하여 대중을 경계시켰습니다.
그런 뒤에 두 진영과 상의하여 곧장 영동으로 뒤쫓아 가 잡으려 할 때에
금영에서 시급히 와서 지원하라는 재촉의 공문이 도착하여 즉시 공주로
향하였습니다.
이런 사유로 회인읍(懷仁邑)에 주둔하여 묶고 있다가, 도집강(都執綱)
유홍구(柳鴻九)・윤경선(尹敬善)과 접사(接司) 이승일(李承一)・우범손(禹範
孫)을 붙잡아 죄상(罪狀)을 조사하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효시하여 대중을 경계시켰습니다. 그런 뒤에 18일에 모로원으로 달려가
서 주둔하여 묵었고 19일에 금영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순무영의
지시에 의거하여 병정 두 개 소대 내에서 1개 소대를 서산군수(瑞山郡
守) 성하영에게 주어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20일에 도착한 관군과 호응하는 일은 곧 다시 지휘할 것이라는 제칙
이 있었고, 21일에 또 금영에서 명령이 도착하였다고 하며 동시에 도착
한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 내용과는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만약 그들을
획참(獲斬)하여 소굴을 소탕한다면 크게 유쾌하고 시원할 것이라는 연유
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것이다. 도착하였다.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 함.

16) 계원(繼援): 후속 지원부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 책임을 맡은 장수를


계원장(繼援將)이라고 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21
스물아홉 [其二十九]

보고하는 일입니다. 순무사께서 전령하신 대로 준수하고 있으며 내려


주신 북어(北魚)는 통위영 두 소대에 나누어 지급하여 반찬으로 사용하
게 하였고 낱낱이 선포하여 모두들 임금의 은혜를 알게 하였으며 순무사
께서 위문하신 것도 모두 깨우쳐 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서른 [其三十]

보고하는 일입니다. 순무사께서 전령하신 내용에, “진중(陣中)에서 밤


을 지세며 입을 무명겹옷 20령을 내려 보내니 도착 즉시 수량에 맞춰
처리할 일이다”라고 하셨기에, 그 무명겹옷을 통위영 두 소대에 분급하
여 밤을 지낼 때 입도록 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서른하나 [其三十一]

보고하는 일입니다. 운량관(運粮官) 양성현감(陽城縣監) 남계술(南啓述)


의 보고에, “이달 12일 본진이 수원부에 머물러 있을 때에 군수 물자로
배정한 것은 용인현(龍仁縣)에서 보낸 돈 3,000냥과 쌀 40석, 과천현(果
川縣)에서 보낸 돈 225냥 7전과 쌀 15석입니다. 그런데 군진(軍陣)에서
는 쌀을 대전(代錢)으로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쌀을
합치면 55석인데 1석이 시두(市斗)로 13말이 되니 1말을 1냥씩 계산하면
모두 715냥이 되고 여기에 보낸 돈이 3,225냥 7전이니 도합 3,940냥 7전
이 됩니다.
그 중 수원부에서 머무를 때와 출발하여 진위현의 끝 지경에 이르기까
32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지의 쓴 비용이 모두 3,440냥 7전이며 남은 돈이 500냥 6전 3푼입니다.


그래서 남은 돈은 우선 유치(留置)하였고 받은 돈과 쌀 및 지출한 비용
은 구별해서 책자를 만들어 올려 보냅니다. 용인현에 나누어 배정한 장
작 600속(束), 짚 200속은 숫자대로 운반해 왔으며 모두 일본 병사에게
내주었습니다”라고 그 사정을 보고하였습니다. 따라서 만든 책자는 다듬
어 함께 올려 보냅니다.
제(題): 책자를 받았다.

서른둘 [其三十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진영의 각 소대와 일본 병사를 거느리고 공주


에 주둔하여 각기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전과 같이 방어하고 있으며
별 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서른셋 10월 27일 [其三十三 二十七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바로 도착한 출진한 장위영 부영관 죽산도호부사


겸 죽산진토포사 이두황의 보고 안에, “세성산의 비적(匪賊)으로 북접(北
接)의 우두머리인 김복용(金福用)의 처결은 회제(回題)를 기다렸다가 시
행하려고 보고를 하였더니 곧바로 도착한 회제 안에, ‘즉시 효시하여 대
중에게 경계로 삼아라’ 하였기 때문에 그날 처단하였습니다.
이른바 적진(賊陣)의 중군(中軍) 김영호(金永祜)와 화포대장(火砲大將)
원전옥(元全玉) 및 수종(隨從)한 세 놈은 다른 길로 염탐하여 사로잡았
는데, 소모관(召募官) 정기봉(鄭基鳳)이 잡아 보내온 두 놈과 천안군에서
압송해 온 열네 놈과 아울러 한꺼번에 목을 벤 뒤에 그들의 성명을 책으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23
로 만들어 보고하며, 제사(題辭)에 따라 달려가 지원하기 위해 당일로 공
주를 향해 출발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두머리 이외는 상세한 조사를 거치지 않고 즉시 목을 베었으니 처결
함이 지나쳤다는 뜻을 제송(題送)하여 신칙하였으며 목을 벤 동도의 성
명을 적어온 책을 올려 보낸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것이다. 도착하였다.

서른넷 [其三十四]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진영의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공주에 주둔하여 각기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전과 같이 방어하고 있습
니다. 장위영의 영관 이두황이 이달 26일에 목천읍에서부터 병정 4 소대
를 거느리고 연기에 도착하여 유숙하고 오늘 유시 경에 공주에 도착하여
별 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서른다섯 10월 28일 [其三十五 二十八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진영 각 소대를 영솔하여 함께 공주에 주둔하


여 각기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전과 같이 방어하고 있으며 별 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서른여섯 [其三十六]

보고하는 일입니다. 금일 10월 24일에 적이 금영 10리까지 당도했다는


32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급보를 듣고 길을 재촉하여 진군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또한 당일 신시 경에 금강(錦江) 장기진(將旗津)에 도착하여 공주부에
들어갈 겨를도 없이 납교(蠟橋)의 뒷산에 올라 적의 형세를 관망하였습
니다. 적들은 건너편 높은 봉우리에 있었는데 늘어세운 깃발이 가로로
수십 리나 산 위에 걸쳐있어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 같았습니다. 서로의
거리는 1리쯤 되는데 사이에 하나의 개천과 큰 들이 있어 총탄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해질 무렵이라 나가 싸우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금치(牛金峙)・금학동(金鶴洞)・효포봉(孝浦峰)・납교(蠟橋) 뒷
산 및 동편 산성(山城)17)의 요해 각처에 병정들로 하여금 적을 관망하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25일 이른 새벽에 선봉이 통위영 영관
이하 2개 소대를 거느리고 병정을 나누어 진을 폈으나 상황으로 보아 경
솔하게 진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른바 저들의 주력부대는 효포봉 건너편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고 통위
진영의 주변에 있는 적진은 모두 성원하는 적들이었습니다. 또한 납교
뒷산의 앞과 효포봉의 방어하는 곳은 서로 남북으로 떨어져 가로로 걸친
거리가 수십 리가량 되지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어느 한 곳을 따라
진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효포 등지에서 방어하는 각 진영에 명
령하여 곧바로 진격하게 하는 한편, 각 진영을 독촉하여 때를 같이하여
함께 전진하여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통위대관 신창희(申昌熙)・오창성(吳昌成), 교장(敎長) 김상운(金相
雲)・박상길(朴相吉)이 분발하여 용기에 북받쳐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총포를 쏘면서 앞장서 병정들을 독촉하여 곧장 적진을 향하여 불시에 습
격하니 적 가운데 총포를 맞은 자가 5∼60명이 되고 부상당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적의 선봉이 한 번 꺾이자 적들은 후퇴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갔으며 늘어서서 바라보던 자들도 모두 산등성을 내려와

17) 산성(山城): 쌍수산성을 가리킨다. 공주에는 산성을 별도로 쌓지 않고 백제시기 쌓은


쌍수산성을 금강을 지키는 보루로 삼았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25
후퇴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이때 날도 어두웠기 때문에 2전대처럼 병정을
거두어 방어하였습니다.
그날 유시에 도착한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 안에, “24일부터 25일 진
시 경까지 적을 대항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적과 교전한
지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적들은 조금도 후퇴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지라
대관 윤영성(尹泳成)・백락완이 병정을 나누어 거느리고 세 갈래 길로 협
공하여 반나절을 싸웠고, 적 수십 명이 총포에 맞아 죽자 후퇴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긴 여세를 몰아 추격하여 대포 2좌(坐) 및 총・창・
탄약・깃발 등을 빼앗으니 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산꼭대기로 도피하였
습니다. 겨우 격퇴할 즈음에 선봉진으로 가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대관 백락완에게 1개 부대의 병정을 이끌고 진격하게 하니 역시 적
당(賊黨)을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현재 가까운 산꼭대기에
퍼져 있고 군수가 거느린 병정은 이제 네 번에 걸쳐 주야로 싸우면서 잠
시도 쉬지 못하여 전투에 임하여 힘을 쓰지 못하니 송구한 마음을 이기
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도착한 안성군수 홍운섭의 보고 안에, “이달 24일에 대
교에서부터 공주목으로 돌아와 주둔한 사유는 이미 보고를 드렸거니와,
그날 술시 경에 곧바로 금영에 도착하여 미처 주둔하지도 못하고 바로
명령을 받았습니다. 군수가 대관 조병완과 함께 1개 소대의 병력을 거느
리고 금강 나루터를 경계하여 지켰고, 참영관 구상조는 참모관 이상덕・
신효식・황승억과 대관 이상덕, 교장 김홍엽・이봉춘・이장혁・우기준・장대
규(張大奎)와 함께 1 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봉수현(烽燧峴)을 경계하여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25일 인시 경 다시 받은 지시 안에, ‘서산군수 성하
영이 웅치(熊峙)에서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적의
세력이 심히 커서 우리가 허술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길을 나누어 구원하
라’고 하셨기 때문에 군수가 20명만 남겨서 전대로 경계하여 지키게 하
32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고는 대관 조병완을 시켜 군수 휘하의 병정을 거느리고 북쪽에서 적의


오른쪽을 치게 하고, 참영관 구상조에게는 그의 휘하 장졸을 거느리고
일본 병사 30명과 함께 남쪽에서부터 적의 왼쪽을 공격하게 하고 서산군
수 성하영은 전면을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의 형세는 과연 소
문대로 산과 들을 온통 덮을 정도여서 승리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이란 놈은 가마를 타고 일산을 펴고
깃발을 날리며 나팔소리와 함께 벌떼처럼 옹호하면서 왔습니다. 세 갈래
길에서 부대가 진격하여 반나절 동안 치열하게 싸웠으나 승부를 판가름
내지 못하더니 해질 무렵에 이르러 70여 명을 포살하고 2명을 생포하고
군기(軍器)를 뺏으니 적의 기세가 점점 꺾여 차츰차츰 뒤로 물러나 들
건너 바라보이는 시야산(時也山) 능선에 모여 진을 쳤습니다. 이때 해는
이미 저물고 병정들도 피로하여 교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역시 군사를
거두었습니다.
오경(五更, 4시경)쯤 되어 여러 적은 어두움을 타고 도주하여 남쪽 30
리쯤 되는 경천점(敬川店)을 향하여 가니 우리가 조금 승리했다고 하여
방어를 소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각별히 단속하여 전처럼 경계하여
지켰습니다. 포살하고 생포한 숫자와 뺏은 기물은 책을 만들어 보고하겠
거니와, 두 차례의 접전에도 우리 병사들은 한 명의 부상자가 없으니 매
우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세력이 저와 같이 크고 성한데 관군은 사방으로 나누어 적들을
막고 지켜냄에 그 형세가 모두 고립무원(孤立無援)인데도 장졸 이하 각
부대 병정들은 다만 충성심이 격동하여 제 몸도 잊은 채 힘을 내어 진격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비록 적을 모두 섬멸하지는 못했으나 적들
의 기세를 크게 좌절시켜 날뛰게 하지는 못하게 하고 퇴거시켜 형적을
숨기게 하였으며 참획한 자도 적지 않고 빼앗은 기물도 심히 많습니다.
그리고 대포를 탈환한 일이 더욱 가상합니다.
이튿날 오시에 경리청 병정 12명이 적의 남은 무리가 모여 진을 친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27
곳을 관망하다가 몰래 습격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하니 적
들이 놀라 겁을 먹고 달아나 흩어짐에 회선포(回旋砲) 1좌(坐)를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의 후미를 습격하니 가
상한 일입니다. 당장 격려하고 권장하는 포상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앞에서 말한 대포를 탈환한 경리청 병정 12명에게 은전(銀錢) 1푼씩을
시상하였으며, 각 진영에서는 충분하지 않은 병정으로 곳곳에 나누어 진
을 치고 적은 수로서 많은 적을 대적하였어도 손상된 자가 한 명도 없으
니 이는 진실로 왕의 신령이 미친 바로 엎드려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
니다. 각 진영에서 죽인 적의 수효와 노획물은 하나하나 책자를 만들어
올려 보내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것이다. 도착했다. 전후로 두 번이나 승리한 것은
장사(將士)들의 적개심과 병정들이 명령에 잘 따른 것으로 매우 가상하
고 칭찬할 만하다. 경리청 병정들이 회선포를 탈취한 일은 기특한 공로
이니 아울러 가상하다. 만들어 온 책자는 받았다.

서른일곱 [其三十七]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순무사께서 전령하신 내용에, “선봉진


이 성환을 떠나 출발한 뒤로 행군하는 전도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런 일을
계속해서 급히 보고하라”고 하셨기에 그동안 차례로 보고를 드렸거니와,
이달 24일에 일본 장교와 함께 공주감영으로 달려간 연유의 일입니다.

서른여덟 10월 29일 [其三十八 二十九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예산현감의 보고에 따르면, “충청감영의 왕복 문서


내용에, 관병(官兵)들이 예산(禮山)・대흥(大興)・홍주(洪州) 세 읍의 의병
32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및 토병(土兵)들과 함께 예산 신례원(新禮院)에서 수만 명의 비류들을


맞아 접전하다가 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지자 비류들이 바로 예산읍으로
들어갔다. 사태를 보니 시각이 급하다. 즉시 병사를 출동하여 구원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만약 즉시 가서 후원하지 못하면 예산읍이 반드시 함락
되겠기에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에게 명하여 휘하의 4소대를 거느리고 길
을 재촉하여 후원하도록 당일 진시 경에 파견하여 보냈습니다. 비록 수
십 리를 우회하는 수고로 길의 편・불편함이 있는데 현재 광정(廣亭)에서
출발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초토사가 거느리는 군대와 함께 호응하는 것이 마
땅하며 이후의 상황을 계속 빨리 보고하라.

서른아홉 [其三十九]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진영의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공주에 주둔하여 각기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전대로 방어하고 있으며
별 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마흔 11월 초 1일 [其四十 十一月初一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진영의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공


주에 주둔하여 각처의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전과 같이 방어하고 있으
며 별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29
마흔하나 11월 초 2일 [其四十一 十一月初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진영의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공


주에 주둔하여 각처의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전과 같이 방어하고 있으
며 별탈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마흔둘 [其四十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의 보고 내용에,


“본영(本營)의 좌 2소대 대관 백락완을 금번 금영으로부터 본도(本道)의
중군(中軍)으로 임명해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니 그 후임 대관・교장・
규칙(糾飭)들도 차례차례 승진하는 일은 각 영(營)에서 이미 행하고 있
는 통례일 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게 행진하여 적을 토벌할 때에 공적이
있는 자는 시상도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번 효포에서 싸워 이긴 교장 가운데 공이 으뜸인 김명환
(金命煥)을 대관으로 승진하도록 천망(薦望)을 하며, 교장과 규칙은 공론
에 따라 전 규칙(前 糾飭) 고진룡(高振龍)을 선택하여 교장에 임명하고,
전 십장(前 什長) 안창석(安昌石)을 선택하여 규칙에 임명되도록 이렇게
천망을 보고하오니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를 보
고합니다.
제(題): 마땅히 해당 진영에서 승진시켜야 한다.

마흔셋 [其四十三]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난 달 27일 문서로 작성하여 이달 2일에 도착한


비밀 전령의 내용을 간추리면, “목천 세성산의 비괴(匪魁) 김복용을 경군
33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과 일본 병사가 함께 압송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놈은 비록 세성


산에 모여 진을 쳤던 비류의 두령(頭領)・거괴(巨魁)는 아니지만 이미 괴
수가 되었는지라 한 시각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공문의 지시
에 따라 참작해 처단하게 한 뒤에 지난달 25일에 역시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미처 보낸 문서를 보시기도 전에 이런 명령을
받으니 죄송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후에는 보고하는 것마다 처분
을 기다려 시행해야 할지 이에 보고합니다.
제(題): 이미 생포한 자를 상부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지만,
거괴를 체포한 뒤에 즉시 효수하여 대중을 깨우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
편이다.

마흔넷 [其四十四]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진영의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각처의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전과 같이 방어하고 있으며 별 탈 없이
유숙하고 음식을 조달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마흔다섯 [其四十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정탐군의 보고를 들으니, “사방의 비도들이 노성


(魯城) 및 논산(論山) 초포(草浦) 등지에 진을 치고 모여 있다”고 합니
다. 그런즉 서로의 거리가 5∼60리 또는 7∼80리가 되는 지역이라 방어
가 소홀하기 때문에 경리청의 두 소대를 이인 방향으로 파견하여 보냈고
통위영의 두 소대를 판치(板峙)로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비도를 관망
하고 각별히 정탐하게 한 연유를 보고합니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31
제(題): 각별히 더 정탐하고 상황에 따라 변동에 대응하라.

마흔여섯 11월 초 4일 [其四十六 初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거느리고 있는 각 부대 및 이인・판치 두 곳에 파


견한 방수대(防守隊)가 별 탈 없이 하룻밤을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마흔일곱 11월 초 5일 [其四十七 初五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거느리고 있는 각 부대 및 이인・판치 두 곳에 파


견한 방수대가 별 탈 없이 밤을 새웠습니다. 이인 방향으로 파견한 경리
청 영관 구상조의 보고에, “영관이 어제 유시 경에 행군하여 이인역(利
仁驛)에 도착하여 무사히 밤을 새웠습니다. 역내의 정세는 소요를 겪은
뒤라 온 마을이 텅 비어 남아있는 것은 열 가운데 하나도 되지 않아 여
러 날을 주둔하기에는 형편이 곤란합니다.
한편 적의 정세를 정탐하니 아직까지는 노성과 논산 두 곳에 모여 진을
치고 있으며 그 수효는 아직 상세하게 염탐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젯밤에
국동(菊洞) 마을 사람들이 군사를 위문하기 위해 돼지 1마리와 술 3동이
를 이곳까지 와서 바쳤으므로 일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방어하고 있는 양쪽 부대가 연일 머물러 주둔해 있기에는 불편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판치에 주둔하고 있는 통위영의 두 소대를 이인으로
이송하고, 이인에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의 두 소대를 금영으로 들어가
주둔하게 하고, 금영에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의 두 소대를 판치로 나가
주둔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차례로 바꿔 돌아가며 쉬도록 한 사정을
보고합니다.
제(題)
33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마흔여덟 [其四十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李軫鎬)가 초 2


일 문의읍(文義邑)에 있으면서 문서로 작성하여 초 3일에 도착한 보고
안에, “청주진(淸州鎭)으로부터 지난달 26일 자시에 휘하의 병정과 진남
영(鎭南營) 병정 100명과 일본 주력부대가 합세 출발하여 이미 회덕(懷
德)에 도착하여 명장(明場)에 이르러 보니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는 적
의 무리가 물 건너에 진을 이루었는데 그 세력이 자못 괴이하였습니다.
그래서 혼전(混戰)을 한바탕 치러 수십 명을 죽였고 남은 적의 무리는
흩어져 사방으로 도망쳐 다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그 생포한 동도 13명 가운데 정복기(鄭福基) 등 6명은 본래 농민들로
비록 비류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이는 흉도들이 위협해서이지 실상은 본
심이 아니라며 귀화할 것을 애걸하기에 일깨워주었고, 박성엽(朴聖燁) 등
7명은 소란을 피운 짓이 많고 너무도 경악스러워 문의(文義) 남장(南場)
에서 총포로 사살하여 대중을 경계시켰습니다.
장차 공주로 합류하기 위해 29일에 행군하여 부강(芙江)의 신대(新垈)
에 도착하니 정탐군이 저들 세력이 회덕에 많이 모여있다고 보고하기에
문의읍으로 회군하여 섬멸시킬 것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려주신
군량이 불과 며칠이면 떨어질 지경이니 316명분의 군량과 복마(卜馬) 43
필의 먹이 대금을 즉시 넉넉하게 내려주셔서 군색하고 낭패한 지경을 면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비도들을 토벌하고 생포했다는 보고는 심히 가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만
들어 온 책은 다시 수정하여 보고할 것입니다. 과천의 길에서 나누어 출발
한 뒤로 비로소 한 번의 보고가 있으니 군대의 기율이 허술하고, 양식과
반찬의 금액은 마땅히 다시 보고하도록 회답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
차례로 초 3일 증약참(增若站)에 있으면서 문서로 작성하여 초 4일에
도착한 중대장 이진호의 보고 안에, “현재 비도 5∼60,000명이 옥천에
모여 있는데 형세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일본 병사 2개 소대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33
및 교도소 병사 1개 소대가 그저께 먼저 도착하여 증약역에 주둔하여 있
고, 주력부대의 병사들도 뒤를 이어 출발하여 내일이면 즉시 옥천으로
향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현재 군수 물자가 떨어져서 온 군사가 굶주린
기색을 면치 못하고 있어 앞으로 적을 격파하기를 기약할 수 없을 것 같
습니다. 그러니 한 달치 군량에 한하여 한 시각도 지체하지 말고 보고대
로 교도소 병력이 주둔한 곳으로 수송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비류들이 여기저기에 창궐하여 처음에는 회덕에 있다 보고하고 또 옥
천에 있다 보고한 것은 그들이 하나만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각별히 탐
색하여 섬멸한 뒤에 곧바로 연산(連山) 등지로 향해야 할 것이고, 군량
자금은 재차 보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군색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런데 그동안 당초에 여러 읍에서 제공함이 없었는지, 형편상 갑자기 마
련하여 보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문의・회덕・옥천・공주・연산 등의 읍에다
이진호의 부대가 지나갈 때 군량을 제공해준 다음 보고하고 또한 별 탈
없이 책임지고 제공하도록 공문을 보낸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교도대가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으니 필시 중도에 적을
토벌하는 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인지 행방을 단정 짓기가 어렵다. 군수
물자는 즉시 발송해야 할 것이니 그쪽에서 서둘러 수송케 하라.

마흔아홉 11월 초 6일 [其四十九 初六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변이 일어난 때를 당하여 공사(公私)의 문


서를 한 시각이라도 늦출 것이 아닌데 충청감사의 왕복하는 문서를 보니
요즘 각 역(驛)과 참(站)에서는 난리를 겪은 이래로 참이 다 끊어져 전
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10리마다 3참(站)씩 고용인을 두어 시행하도
록 한편으론 정부에 보고하고 또한 경기도 감영에도 공문을 보냈습니다.
고용할 사람은 바로 상민(商民)들입니다. 그런데 상민들도 근래에는 뿔
뿔이 흩어져 통솔할 사람조차 없습니다. 그러더니 본진이 주둔한 이래로
33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연로의 상민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지금은 거의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그


러나 각 참에 고용인을 배정할 때 비용을 준비할 길이 없어서 매번 호소
하였습니다. 이제 여기 금영에서 별도로 제도(規制)를 만드는 것이 사실
상 사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니 고용비를 보내주어 반드시 지방에서부터
넉넉하게 마련하도록 한 다음에야 지체되는 별탈이 없어질 것이기에 이
렇게 보고합니다. 우선 농상아문(農商衙門)으로부터 연로의 각 영과 읍에
이르기까지 별도로 고용비를 배정하여 중간에 끊기는 일이 없도록 정부
에 보고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영에서도 말을 만들어 공문으로 명령하
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금 상민들이 본진이 출동한 이후에 과천참(果川站)을 시작으로 각처
에 흩어졌다가 차츰차츰 모여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야를
가리지 않고 왕래하는 문서 및 정탐하는 일을 부지런히 시키고 있으며
각처의 파견한 부대 가운데 몇 십 명씩 따라 보내서 그들을 부리도록 하
고 있습니다. 공주 부근 각 읍의 상민들이 차례로 흘러들어와 모임에 그
일을 주간하게 해서 지체 없이 시행되어 효력이 매우 큽니다. 그 우두머
리에게 이러한 뜻을 알려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관문을 발송하라.

쉰 [其五十]

보고하는 일입니다. 거느린 각 부대 및 이인・판치 두 곳에 파견하여


지키고 있는 부대가 별 탈 없이 밤을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35
쉰하나 11월 초 7일 [其五十一 初七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거느리고 있는 각 부대 및 이인・판치 두 곳에 파


견하여 지키고 있는 부대가 별 탈 없이 밤을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쉰둘 11월 초 8일 [其五十二 初八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공주 달동(達洞)의 접주 장준환(張俊煥)은 전부터


행패를 부리던 일개 읍의 거괴입니다. 그런데 지난달 25일 호남의 비류
들이 패하고 돌아간 뒤에 감히 포(包)를 설치하려고 몰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달 초 2일 밤에 병정과
공주진의 포교를 출동시켜 보냈더니 분통하게도 저 장준환이 기미를 알
아차리고 도피하여 바로 체포하지 못하였고 그놈의 집을 수색하니 깃발
을 만들고 기계를 많이 모아놓았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총 3자루・환도
(環刀) 1자루・창(鎗) 13건(件) 및 그밖에 포를 설치하려 했던 여러 흔적
들을 찾아내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달 3일에 공주에 사는 전 오위장인 본진(本陣)의 별군관 이상만이
원당・단평 두 마을의 민간 장정을 거느리고 장준환을 추적해 잡고는 본
진에 와서 아뢰었습니다. 지금 이상만이 의리를 내세워 힘을 다하여 거
괴를 추적하여 잡았으니 이미 가상한 일이기에 먼저 본진에서 엽전 50냥
을 시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영에서도 특별히 200냥을 주었으며 두 마
을의 동포(洞布)를 감면해 주어 권장의 뜻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 오
위장 이상만에게는 별도로 장려하여 등용(獎用)하는 분부가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특별히 처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장준환은 잠시라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군영 앞에서 목을 베어 백성들의 품은 원한을 갚아주었
습니다.
33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제(題): 이상만이 의리를 내세워 노고를 다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마


땅히 상부에 보고하여 상을 요청하라.

쉰셋 [其五十三]

보고하는 일입니다. 본진의 군수물품을 실어오던 총어영 복마군(卜馬


軍) 이흥복(李興卜)이 이달 초 5일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인정상 매우 불
쌍하여 지방관에 명령하여 양주(良州)에다 우선 염습하게 하였습니다. 죽
은 이의 인마(人馬) 비용은 그 날짜를 계산하니 4일이 되는 까닭에 일수
만큼 다 내주었고 앞길의 역참 각 관부는 무사히 서울로 호송하도록 일
체를 관문으로 신칙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들으니 몹시 참담하고 측은하다. 해당 영(營)에 신칙하여 후하
게 위문하고 구제함이 마땅할 것이다. 본영에서도 목포(木布)를 지급하라.

쉰넷 [其五十四]

보고하는 일입니다. 거느린 각 영 각 소대의 1차 경비는 두 차례에 받


아왔습니다. 그런데 30일 지급 규정에 따라 지금에서야 날짜를 계산하니
이미 다 써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보고하오니 순무사께서는
군무(軍務)의 어려움을 참작하시어 며칠치의 경비를 더 보내주십시오.
제(題): 이미 본 도(道)의 운량관이 시행함이 있었고, 해당 도에도 관
문으로 신칙하였다. 생각건대 틀림없이 다 떨어졌다는 탄식이 없을 것인
데 다시 군량 자금을 요청하니 무슨 곡절이 있는지 속히 사리를 따져 보
고하라.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37
쉰다섯 [其五十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거느리고 있는 각 부대 및 이인・판치 두 곳에 파


견하여 지키고 있는 각 부대가 별 탈 없이 밤을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쉰여섯 11월 초 9일 [其五十六 初九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본진의 별군관 최일환(崔日煥)이 보고


한 내용에, “10월 18일 밤에 직산의 거괴 김성범(金聖凡)・신일석(申日石)
및 해당 현 마산(馬山)의 황성도(黃聖道) 세 놈을 체포하여 김성범・신일석
은 그 곳에서 포살하고, 황성도는 수원의 중영(中營)으로 이송하였습니다.
동월 22일에도 직산의 대괴(大魁) 이천여(李千汝) 등을 붙잡았고, 황성
도의 집을 수색하니 대포탄환 12궤(樻), 총 5자루의 군물(軍物)이 나왔습
니다. 이천옥(李千沃)의 집에서는 총 17자루가 나왔는데 9자루는 파손되
어 쓸 수가 없었고 또 양창(洋鎗) 9자루, 창 80자루, 철환(鐵丸) 500개,
환도 4자루와 이른바 동학동경대전(東學東經大全) 판각본 2권이 나와
본진으로 운송하였습니다.
14일에 또 잡은 비류 14명 가운데 목천에서 격파한 적괴(賊魁) 김춘일
(金春日)・김치희(金致喜), 진천의 괴수 박명숙(朴明叔)・직산의 서성만(徐
成萬) 등 네 놈은 29일 신시에 군민을 크게 모아놓고 목을 베어 백성들
을 경계시켰습니다. 직산의 비류(匪類) 신성보(申成甫)는 천안군에 가두
어 놓았고 나머지 9명은 엄히 신칙하고 풀어주었으며, 또한 목천 괴수
최창규(崔昌奎)・김병헌(金炳憲)을 붙잡아 군관(軍官) 이창직(李昌稙)의
진영으로 압송하겠습니다.
11월 초 4일 밤에 공주 신촌(新村)에 도착하여 이른바 비류의 소법헌
(小法軒) 지명석(池命石)의 집을 수색하니 무수장삼(舞袖長衫)18), 홍기
33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紅旗) 1폭, 뇌장(雷杖)19) 1건(件), 용천검(龍泉劍)20) 1건이 나왔으며, 비


류 최판석(崔判石)을 체포하고 그의 집을 수색하니 동학문자(東學文字)와
법을 어겨 훔쳐놓은 전깃줄 1바리(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명석・최
판석을 아울러서 본진으로 압송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직산의 거괴 황성도는 수원 중영에 갇혀있고 김성범・신일석 두 놈은
그들의 행패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고 목천에서 패하고 온 적괴
(賊魁) 이천여・김춘일・김용희 및 진천 비괴(匪魁) 박명숙・직산의 적 서
성보(徐成甫)는 지방관과 입회하여 목을 베어 백성들을 경계시켰습니다.
직산의 적 신성보는 천안군에 갇혀있고, 목천의 괴적 최창규・김병헌, 공
주의 적 지명석・최판석은 선봉진으로 압송되어 도착하였기에 즉시 처단
하였습니다. 천안군에 갇혀있는 신성보는 천안군수의 보고에 따라 엄하
게 신칙하고는 석방시켰습니다. 탈취한 기계와 잡물은 책을 만들어 상부
로 보낼 것입니다.
최일환(崔日煥)은 험난함을 가리지 않고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전후로
잡은 비도(匪徒)와 군물(軍物)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이에 격려하고
권하는 방법으로 합당한 포장(襃獎)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원
의 중영에 갇혀있는 황성도는 순무사께서 수원의 중영에 공문을 내려 여
러 사람을 모아놓고 효시하여 경계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題): 장계로 아뢴 것은 도착하였거니와 잡은 바가 이같이 매우 많
으니 힘을 내어 정성을 바친 것임을 알겠다. 포상의 일을 의당 상부에
보고할 것이다.

18) 무수장삼(舞袖長衫): 동학에서는 수련의 한 방법으로 장삼을 입고 칼을 휘두르면서


노래를 부르는 의식이 있었다. 이 노래를 검가(劍歌), 이 춤을 검무(劍舞), 이 가사
를 검결(劍訣)이라 하였다. 검가 검무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행군할 때에도 곧잘 벌
였다. 그 의식에 입는 옷을 무수장삼이라 하였다.
19) 뇌장(雷杖): 조화를 부리는 지팡이를 말하며, 불교의 법장(法杖)과 같다.
20) 용천검(龍泉劍): 검가에 나오는 칼 이름으로, 검무를 출 때 이 칼을 들고 장삼을 입
고 춤을 춘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39
쉰일곱 11월 초 10일 [其五十七 初十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출진(出陣)한 장위영 부령관 이두황의 보고 안에,


“해미성(海美城)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을 격파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
하였거니와, 노획한 군물은 책자를 만들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시에 도착한 이두황의 보고 안에, “본진이 지나가는 각 읍의 촌리에
서 보내온 군량미와 무기류는 책자를 만들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그래서 해미에서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을 격파한 뒤에 노획한 군물을
책자로 만든 것과 지나는 각 읍의 촌리에서 보내온 군량미와 무기류를
책자로 만든 것 모두를 다듬어 올려 보냅니다.
제(題)

쉰여덟 [其五十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인・판치 두 곳에 있는 경리청・통위영 병정들이


돌아가면서 방어하도록 한 일은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초 8일 미시 경에
판치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가 구두로 전한 급보
에, “당일 미시 경에 수만의 비도들이 경천점(敬川店)에서 오는가하면 노
성현 뒷산에서도 산에 올라 포위하면서 쳐들어옵니다.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들이 뒤섞여 어지럽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병력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형편에 따라 효포・웅치의 요
새지인 높은 산에 진을 치고 각별히 파수를 명하여 관망하게 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인으로 출동하여 주둔하고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이
구두로 전한 급보에, “몇 만 명의 비류가 논산 직로(直路)로부터 고개를
넘어 지쳐오고 있으며 또 다른 몇 만 명이 길이 끊긴 오실산(梧室山)의
뒤편을 따라 포위해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장
34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교에게 통보해 그들의 군대를 출동하게 하는 한편, 감영에 머물러 있던


통위영 병정 2개 소대를 나누어 출동시켜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연이어 판치의 진영에서 급히 보고한 내용에, “효포와 능치
를 방어한 이후로는 비도들이 산야를 가득 뒤덮고서 감히 곧바로 올라오
지는 못하지만 여기저기에 온갖 깃발을 곳곳에 세워놓아 기세가 매우 성
대하고 날이 저물 무렵에 이르러도 아직까지는 별다른 소요를 일으키는
정형(情形)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속해서 이인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부대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양쪽 길로 쳐들어온 적병들을 힘을 다해 싸워 죽이고 양쪽의 적들을 격
퇴하니 그들은 10리 밖 우금치(牛金峙)로 후퇴하여 주둔하니 이때 술각
(戌刻, 오후 8시)이 되었습니다. 양쪽 부대의 병정 및 군수물품은 손실이
없었으나 좌 2소대 병정 김명수(金明壽)가 왼쪽 팔에 탄환을 맞아 실어
왔습니다. 그리고 밤이 이미 깊어 다시는 적의 정형을 정탐하지는 못했
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형이 좋지 못하고 지원하는 병력도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
령을 내려 우금치로 후퇴하여 진을 치게 하였습니다. 휘하의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이인에 파견
되어 지원하는 처지로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으되 몇 만의 비류를
죽이거나 물러나게 하였으며 병정을 독려하고 신칙하여 군사를 온전하게
하면서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힘을 내 앞장서지 않
았다면 이런 전과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각처에서 방어하
고 관망하는 일에 있어 각별히 더 독려하고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
고 일본군 장교 육군 보병대위가 친히 병정을 거느리고 우금치로 출동하
여 함께 머물러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초 9일 이른 아침에 적의 정세를 자세히 정탐하니 적들은 각기 진영
이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여러 깃발을 빙 돌아 꽂아놓아 동쪽 판치의 뒤
봉우리에서부터 서쪽 봉황산 뒤 능선까지 3∼40리를 연달아 뻗어있었고,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41
산위에 부대를 벌여놓고 사람들을 병풍같이 에워싸게 하여 기세가 심히
창궐하여 고립무원의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금학・웅치・효포에서 산을
넘어온 비도들은 10리 정도의 서로 바라다 보이는 높은 산에 나열하여
진을 치고 있었는데, 때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때로 포를 쏘기도 하면
서 항상 침범할 기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학동(金鶴洞)을 방어하는 통위영 대관 오창성(吳昌成), 교장
박상길(朴相吉), 웅치 양쪽을 방어하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구상조, 대관
조병완・이상덕, 참모관 이상덕・황승억, 별군관 유일환(兪一煥), 교장 김홍
엽・이봉춘・이장혁・우기준, 효포를 방어하는 통위영 영관 장용진, 대관 신
창희, 교장 김상운 등에게 각별히 정찰할 것을 신칙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류들의 정형은 온종일 출몰하면서 우리를 침범할 듯하고 조금이라도
허술히 하면 올라와서 시험 삼아 떠보며 총포를 쏘면 몸을 피하며 빠르
게 움직이니 만약 꾀어내는 계책이 아니라면 반드시 싸울 태세입니다.
그들이 단속하는 정도는 맞붙어 벌이는 싸움터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금치의 서쪽과 남쪽 양쪽에 있는 적의 무리는 고함을 질러대며
요란스러워 늘 침범해 들어오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머물
러 주둔해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에게 신칙
하여 일본 병사와 합세하고 진격하여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시
경부터 비로소 포를 쏘아 적을 사살하였습니다. 일본 병사는 앞 산봉우
리 위쪽으로 군대를 정렬하고 총포를 수십 차례 몰아 쏘니 적들이 많이
피살되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으나 인원은 아직도 중과부적의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미시 경에 이르러도 격퇴시키지 못하자 모든 사람들
이 충성심을 분발하였고 사졸들이 원통해하였습니다.
이때 참모관인 전 도사 권종석(權鍾奭), 참모사인 전 주서(前 注書) 이
규백(李圭白)과 유학 정도영(鄭道永) 등이 사졸을 독촉하여 용맹스럽게
진격하였고 본영에서 계차(啓差)21)하여 별군관이 된 출신(出身) 이달영

21) 계차(啓差): 임금에게 상주하여 벼슬아치를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34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李達榮)・송흠국(宋欽國), 전 만호(前 萬戶) 이지효(李志孝), 전 감찰(前


監察) 이재화(李在華), 전 중군(前 中軍) 이종진(李宗珍), 전 수문장(前 守
門將) 유석용(柳錫用), 전 부장(前 部將) 박정환(朴晶煥), 사과(司果) 이흥
교(李興敎), 본진에서 차정(差定)한 군관(軍官) 전 오위장 황범수(黃凡秀),
유학 이주서(李周瑞), 사과 이선(李璿) 및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교장
김명환・정재원(鄭在元)・정인갑(鄭寅甲)・장대규(張大奎) 등이 죽음을 각오
하고 먼저 올라가 몸을 떨치며 독려하여 총포를 쏘아 죽인 자가 속출하
니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격하여 비류를 쫓아내고 적들이 진을 쳤던 높은 봉우리를 빼
앗아 차지하고 군기・대포 등의 군물 및 잡기(雜旗) 6∼70면(面)을 탈취
하고는 일본군 장교 대위 및 병정들과 함께 중로(中路)에서 남쪽으로 뒤
쫓아 갔습니다. 공주영장(公州營將) 이기동(李基東)은 공주영의 수교(首
校) 박준식(朴準植), 병교(兵校) 박춘식(朴春植)・안재후(安在厚), 집사(執
事) 김백현(金伯鉉)・양원길(梁元吉), 천총(千摠) 박순달(朴順達), 좌별장
(左別將) 박춘명(朴春明), 우별장(右別將) 조광승(曺光承), 파총(把摠) 말
시원(末始元), 장무군관(掌務軍官) 정평오(丁平吾) 및 공주영의 병정을
이끌고 봉황산(鳳凰山) 뒤 원봉(圓峰)을 파수하다가 몸을 떨쳐 병정을
거느리고 북쪽에서 길의 우측을 따라 전진하여 적을 뒤쫓았습니다.
경리청 대관 조병완・이상덕・참모관 황승억 등은 웅치의 최고봉을 방어
하다가 100여 명의 병정을 거느리고 동쪽 길에서 왼쪽을 따라 돌격하여
힘을 모아 적들을 사살하고 10리쯤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 등은 우금치 동쪽 최고봉을 방어하면서 수천의 무리를 벗
어나 연대(聯隊)를 버리고 먼저 오르는 비류들을 힘을 모아 방어하며 총
포를 쏘아 격퇴시켜 다행히 수호하는 진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비록 비
도로 하여금 사방으로 흩어지게는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칠흑 같아 병사
를 철수하여 진영으로 돌아오게 되어 결국 깨끗하게 섬멸하지 못하였습
니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43
참모관 이구영(李龜榮), 유학 이승욱(李承旭), 전 사과 신효식(申孝湜)・
이윤철(李潤徹), 별군관 전 부사 이필영(李弼榮), 전 오위장 김진옥(金振玉)
등은 탄환을 조달해주어 각 진영에서 조금도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였고
병정들을 독촉하고 신칙하여 함부로 차서를 잃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금영은 서북쪽의 대로(大路) 아래에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산성이
험준한 곳에 의거하고 있으며, 감영 동남쪽의 산세는 높이 치솟았고 아주
험하여 단지 두서너 통로만 있기 때문에 방어의 성첩이 없더라도 본래부
터 믿을 만한 장소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런데 아! 저 비류의 몇 만 무리
들이 4・50리나 둘러 뻗쳐 있어 길이 있으면 싸워 빼앗고 높은 산은 싸워
차지하여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에서 내달리며 왼쪽에서 번쩍하더니
오른쪽으로 사라지고 깃발을 휘두르며 북을 쳐대고 목숨을 버리면서 먼
저 오르려 하니 저들의 의리는 무엇이며, 저들의 담략은 어찌된 것입니
까? 그들의 하는 짓을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섬뜩해집니다.
우리의 미약한 병력으로도 전후좌우에서 대비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 모두가 힘을 다하여 용맹을 펴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
다. 그러나 결국 깨끗하게 섬멸하지 못하여 비류로 하여금 아직도 여기
에서 날뛰게 한 것은 몹시 절통하나 다행히도 일본군 대위와 각 영의 장
졸 및 종군한 여러 관원들 그리고 토병(土兵)과 민간 장정들의 분력과
합심에 힘입어 비록 적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어놓았지만 잔당이 아직
도 많으며 실상 적의 동정을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로 명령하여
전보다 더욱 철저하게 방어하게 하면서 관찰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고립무원의 우리 병정들이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
고 잠을 잔지가 6・7일이나 되고 매우 격렬한 싸움을 치르고 난 뒤에 연
이어 밤새 노숙하였으니 극히 불쌍합니다. 경리청 좌 2소대 병정 남창오
(南昌五), 중 2소대 병정 김관일(金寬一)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앞장을 서다가 남창오는 왼팔에 탄환을 맞았고 김관일은 오른팔에 탄환
을 맞았으나 다행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탄환을 맞은 병정
34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김명수를 포함하여 모두를 고쳐주었다 합니다.


비류가 창궐할 때에 성에 가득했던 백성들은 큰소리로 울부짖고 달아
나니 거의 한순간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 같았고 참담한 일을 당하
고 나서 <관군이> 싸움에서 이기자 백성 노소는 각각 빼앗은 깃발과
죽창을 쥐고서 기뻐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각 아문(衙門)에서 치하하
면서 한쪽에서는 소리쳐 울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기뻐하며 웃기도 하였
습니다. 그러니 천의(天意)가 민심이라는 말이 틀림없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부상을 입은 두 병정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앞장 선
장졸과 참모관은 비록 본분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지만 합당하게 격려하
는 포상의 법은 있으나 감히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었고 노획한 군
물은 책을 만들어 순무사께 올릴 것입니다. 탈취한 군물을 부대[선봉진]
앞으로 와서 바치는 병정은 마땅히 구별에 별도로 갖추어 보고할 것이며
군관인 전 오위장 황범수, 사과 이선, 유학 이주서 등은 먼저 계차(啓差)
하고 나서 격려해 전공을 쌓게 하는 것이 편의종사(便宜從事)에 합당할
것같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모두 차례로 급히 보고할 것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뢴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장관(將官)들이 적을 증오
하여 잘 싸우고 사졸들이 명령에 잘 따랐으니 바로 행군한 뒤로 가장 큰
승전이다.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을 것이다. 남
은 적들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거괴를 아직 잡지 못하였으니 앞으로도
힘을 크게 기울일 때이다. 진병하여 적을 토벌함에 조금이라도 태만함을
용납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각별히 도모하여야 할 것이며 부상을 입은
병사 3명은 각별히 구호해야 한다. 이후의 상황을 연속해서 급히 보고할
것이며 앞에서 말한 군관 3명은 마땅히 다시 전공세우길 기다렸다가 포
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총어영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45
쉰아홉 11월 11일 [其五十九 十一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적의 무리를 격퇴한 사유는 어제 이미 급히 보고


하였거니와, 그날 패한 잔당들이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중대(中垈)의
뒷산 및 우와리(牛臥里) 앞뒤의 산 등지에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각별
히 더 단속하고 요해처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별 탈 없이 밤을 지낸 연
유를 알립니다.
제(題)

예순 [其六十]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출진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이달 초 7일 해미(海美)에 주둔한 적을 격파한 뒤 노획물은 책
을 만들어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그날 남은 적들이 달아나서 해당
읍 서북쪽 능선 옛 산성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그곳은 사면이 가파른 절
벽이며 가운데가 펀펀하고 광활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합니다. 그래
서 즉시 2개 소대를 파견하여 대관 윤희영, 별군관 조편(趙翩)・윤지영(尹
摯榮), 교장 추광엽(秋光燁)・□성희(□聖熙)・장세복(張世福)・오순영(吳順
永)・이경진(李景振)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돌격해 올라가게 해서 성
을 깨트리고 적을 쫓아냈습니다.
성안의 40여 개 풀로 덮은 구덩이에는 기계가 여기저기 많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한편에 남은 적 4・500명이 성의 남쪽 10리쯤 거리의
저성지(猪城地)로 가서 차지하려고 함에 다시 1개 소대의 별군관 이겸래
(李謙來), 교장 김대유(金大有)・최기성(崔基成)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뒤
쫓게 하였는데 적을 사살하여 온 진영을 흩어지게 하였지만 혹 병사들이
피곤할까 염려스러워 즉시 철수케 하여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다시 정탐군의 말을 듣고 참영관 원세록 휘하의 부대를 나누어
34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대관 윤희영・이규식(李圭植), 교장 이경진・양기영・최기성・홍선경(洪善敬)・
김인선과 별군관 윤지영・김광수에게 각기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서
산(瑞山) 땅을 나와 순라를 돌고 보초를 서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
의 큰 소굴을 만났는데 바로 서산의 매현(梅峴)이었습니다.
그 곳은 높으면서 둥글었습니다. 또한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깃발을 가
장자리에 꽂아놓고 적들은 가운데 모여서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저문 틈을 타서 몰래 서산읍으로 들어가 잠시 쉬었고, 황혼이 막
지나자 밥짓는 사람이 밥이 다되었다고 알리는데 혹 기미가 새나갈까 염
려하여 밥을 그대로 남겨두고 곧바로 적한테 달려가 느닷없이 뛰쳐나가
고함을 지르면서 에워싸고 총포를 쏘았습니다. 적들도 또한 항거하여 탄
환을 서로 쏘아대고 대포(大礟)를 연달아 쏘았습니다. 그러다 휴식과 공
격을 되풀이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적은 무슨 의도인지 가지고 있는 화약에 불을 붙이
거나 큰 굉음을 내며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갈라지는 듯하였습니다. 그
럴 적에 수천의 적들은 나란히 아래로 쏟아지듯 내려와 마치 곡식이 흩
어지듯 달아났습니다. 이에 우리 병정들도 크게 놀랐지만 잠시 후 정신
을 차리고 수 백보를 추격하여 버린 무기를 수습하고 서산읍으로 돌아와
서 요기를 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예전 수령이 죽임을 당한 곳을 탐색하니 읍내의 율장촌(栗
場村)이었습니다. 그 곳을 도륙내고 군대를 돌려 해미성(海美城)로 돌아
오니 닭이 세 차례나 울었습니다. 접전할 때에 쏘아죽인 적은 어두운 밤
이었고 갈 길이 급하여 미처 헤아려보지 못하였으며 사로잡은 적은 모두
옷 뒷면에 적의 표시가 완연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이었기 때문에
공초를 아니 하고 그 자리에서 23명을 총살하였으며 노획물은 책자를 만
들어 보고합니다.
그리고 주둔해 있는 일본군 장교 아까마쯔 고쿠보(赤松國封)의 공문
안에, ‘공주에 급박한 일이 있으니 각 진을 모두 모아 일제히 남쪽지방의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47
적을 토벌하자’는 글에 따라 부득이 남은 적을 포기하고 날이 밝기를 기
다렸다가 행군하여 홍주읍에 주둔하여 묵었습니다. 하루빨리 서둘러 공
주로 갈 생각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비도(匪徒)들을 차례로 토벌하고 많은 군수물자를 탈환하여 현
저한 공을 세웠으니 진실로 심히 흠탄할 일인지라 빨리 금영으로 가서 구
원하라고 지시하였으며 노획한 군수물자는 책을 엮어 순무사께 올립니다.
제(題)
통위영・장위영・경리청・총어영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

예순하나 11월 12일 [其六十一 十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부대와 소대를 이끌고 별 탈 없이 밤을 지냈으


며 각처를 방어하고 있는 각 부대의 급한 보고를 연이어 접하니 각처에
서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이 오후부터 점점 해산하였다 합니다. 각처를 정
찰해 보니 도무지 형적을 찾을 수 없다 합니다.
방금 접수한 능치를 방어하는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의 보고에, “수천
의 적의 무리가 험한 요충지를 점거하고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으니
쳐부술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낮에 이르러 교장 이봉춘이 별도로
정예 병사 10명을 거느리고 군복을 모두 벗고 비류(匪類)로 위장하여 조
금씩 전진하니 적들은 의심하지 않아서 산에 올라가 적의 앞에까지 이르
러 일제히 총포를 쏘아 4∼5명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적들은 무기를 버
리고는 몸을 빼어 사방으로 흩어졌으되 우리의 적은 병사로서는 뒤쫓을
수가 없었고 계속 총포를 쏘며 위력을 보여 적들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
게 한 뒤에 무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따라서 노획한 여러 가지 군물은
책자를 만들어 올립니다. 적정을 정탐하니 패하여 흩어지고 남은 적들은
바로 계룡산 등지로 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4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노획한 군물을 적어 엮은 책을 올려 보내며, 이들의 과감한 군인정신


에 대해 특별한 장려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뢴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이봉춘이 용감하게 앞장을
서서 10명 병사와 함께 깊숙이 적진으로 들어가 이런 기특한 전공을 얻
었으니 진실로 얻기 어려운 뛰어난 재간이다. 응당 포상의 은전을 따로
조치할 것이고 남은 적들의 동향을 각별히 정탐하여 급히 보고하라.

예순둘 [其六十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영(營)의 소대를 거느리고 각처의 중요한 길목


을 예전같이 방어하면서 별 탈 없이 밤을 묵었습니다. 비류의 정형은 바
로 관망하고 있는 곳에 진을 친 일이 없었습니다.
제(題)

예순셋 [其六十三]

보고하는 일입니다. 진잠 공형의 문서 내용에, “본 현에 현감이 아직


부임하지 않은 상황에, 전라도 김개남(金開男)의 포(包) 5,000여 명이 금
산(錦山) 등지에서 이달 초 10일 신시에 본 읍으로 와서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공해(公廨)의 문호 및 각 청(廳)의 등록된 문부(文簿)와 상고할
만한 자문(尺文)22) 등속을 모두 파쇄하고 방화하는 한편, 창고의 자물쇠
를 부숴 열고 환곡(還穀)을 탈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읍내 집들의 물품들
을 파쇄하거나 빼앗고 유향소(留鄕所)의 공형 및 읍의 이속(吏屬)들을
주뢰(周牢)를 틀고 때려서 거의 사경에 이르러서 공문으로 보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다음날 11일 오시 경에 회덕의 신탄진(新灘津)으로 떠

22) 자문(尺文): 관청에서 공납금을 받고 써 주는 영수증을 말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49
나면서 장차 청주로 향할 것이라 운운했지만 정형을 헤아릴 수 없습니
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에게 명령하여 해당 영(營)의 좌 2개 소
대와 우 1개 소대의 병정을 거느리고 오늘 신시경에 연기 등지로 출동시
킨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서둘러 병영에 통지하고 상황을 연속하여 급히 보고할 일이다.

예순셋 11월 14일 [其六十三 十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영(營)의 소대를 거느리고 각처의 중요한 길목


을 예전같이 방어하면서 별 탈 없이 밤을 묵었습니다.
제(題): 도착하였다.

예순넷 [其六十四]

보고하는 일입니다. 순무사께서 전령하신 내용에, “출정한 장사(將士)


들이 여러 날 동안 비바람을 맞고 있으니 과연 한질(寒疾)을 앓는 자는
없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걱정이 그지없다. 각 부대의 군량은 자연히
해당 도(道)의 운량관(運粮官)이 원조하지만 교도진(敎導陣)에는 충분치
못할까 염려가 된다. 그러니 30일에 군량자금 16,542냥을 별무사(別武士)
배명춘(裵命春)을 수령하게 보내서 수효에 맞게 받게 한 뒤에 즉시 교도
진이 주둔한 곳을 찾아내어 수송의 상황을 응당 급히 보고하라”고 하셨
습니다.
따라서 보내주신 교도진의 30일치 군량자금 16,542냥이 숫자대로 도착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도진이 주둔한 곳을 찾아내어 보낼 계획입니다.
제(題)
35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예순다섯 [其六十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접수한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의 보고 내용에,


“이달 13일 신시 경에 지시에 따라 대관 조병완・김명환, 참모관 황승억,
교장 김홍엽・정재원・우기준・고진홍과 함께 2개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
사와 함께 곧바로 출발하여 대교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고, 14일에 행
군하여 연기현에서 점심을 먹고 부강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습니다. 닭
이 울 때에 이르러 문의현의 보부상 2명이 전령 1장(張)을 가지고 왔는
데 바로 문의현령이 보부상에게 명령을 내린 일이었습니다.
그 말에 이르길, ‘방금 듣건대 비류(匪類)들이 청주에서 패하고 신탄
(新灘)과 파군(坡軍) 등지로 도망가 모여 있다하니 형편을 헤아려 군대

의 행진을 인도 하십시오라고 하기에 즉각 소위(少尉)와 함께 상의하고
행진하여 그들을 섬멸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통위영과 장위영 두 진영은 오늘 노성읍에 모여 진을 치고 있
는 비류들을 토벌하러 진군하였고 해당 진영이 이미 신탄과 파군으로 향
하였으니 그곳은 진잠으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한편 청주에서 패한 비도
들은 그곳 읍을 침범함에 힘을 다하여 막아내어 잠시 쫓아버렸으나 현재
상황이 시급하다는 진잠의 문보(文報)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진
군하여 후원한 뒤에 날짜를 약속하여 논산 등지로 진군하려는 사정을 써
서 보냅니다.
제(題): 이후의 상황을 연속해서 급히 보고할 일이다.

예순여섯 [其六十六]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접수한 출진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제사(題辭)에 따라 하루빨리 공주에 도착하기 위해 이달 초 9
일 해미를 떠나 출발하여 홍주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묵은 사유는 이미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51
보고하였거니와, 그 다음날 초 10일에 30리를 행군하여 대흥읍에 주둔하
고 유회소의 지적대로 동도(東徒)를 붙잡아 즉시 처단하였습니다.
11일에는 40리를 행군하여 공주의 유구(維鳩)에 머물러 있었더니 12일
축시(丑時, 오전 1∼3시)에 도착한 전령에, ‘곧바로 정산로(定山路)를 향
해 출발하고 편의대로 기다렸다가 군사를 합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전령
에 따라 회군하여 정산 쪽으로 전진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11일
신시 경에 유구에 도착하여 주둔하기 위해 수레를 멈추고 병사를 쉬게
하였습니다.
의병(義兵) 진영에서 잡아 보낸 동도 9명이 있었는데, 바로 유구에서
사는 놈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공초를 하였더니 유구에는 이른바 충
경포(忠慶包)가 4∼5,000명이 되는데 저들은 당일 밤이 깊어진 뒤에 약
속대로 산에 올라가 포를 쏘아 민심을 현혹시킨 다음 경군(京軍)의 무기
를 약탈하여 경군을 도살하고 그 탈취한 기계를 가지고 동도가 강의 북
쪽으로 성원하도록 한다는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녁밥이 다 되
었다 하는데도 먹을 겨를도 없이 황혼녘에 병력을 출동시켜 저들을 엄습
하여 천여 명을 체포하여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놈들을 캐물어 조사하니 거괴가 매우 많았고 위협
에 못 이겨 복종한 자들의 수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일의 이치를 따지자
면 마땅히 다 죽여야 하지만 감히 그 거괴만 죽이고 위협에 복종한 사람
들은 다스리지 말라는 의리에 따라 그 괴수만을 죽이고서 협종한 사람들
은 석방하였습니다. 유구에 있던 적의 큰 소굴을 통렬히 다스렸으니 역
시 전투를 벌려 적을 사살한 것에 비해 못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적의
담력을 부숴버리는 동시에 뒷길을 열어 무고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 방
편의 계획이었습니다.
금영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대교가 있
고, 가운데 광정(廣亭)이 있으며, 서쪽으로 유구가 있는데, 유구에서부터
넓게 트였습니다. 대교와 광정은 근래 어떤 판국인지? 남쪽과 북쪽에 있
35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는 적들이 서로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경군을 포위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그들을 예측하지 못하는 행동을 대처함은 오직 깊
이 통촉하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놈들을 처단하여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
오며 거괴 중에는 선봉진의 별군관 한 명이 있는데 여러모로 물어보고
들어보니 범한 바 또한 많았습니다. 즉시 처단하여 화근을 제거해야 할
것이오나 군관이기 때문에 회답의 공문을 기다렸다가 처결하려고 공초한
내용을 첨부해 보고합니다. 그리고 대흥읍에서 처단한 동도의 성명도 책
자를 만들어서 아울러 보고합니다.
대저 유구의 각 동에 당초 포(包)를 설치했다가 추후에 귀화를 하니
곧 이는 각 읍과 각 동의 근래 상투적 수법입니다. 지금 장위진(壯衛陣)
이 본 동으로 들어가 주둔하는 날에 잡은 비류들의 공초한 내용이 이와
같이 확실하니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이 진실로 크게 징계하고 뉘우칠 겨
를도 없이 비류가 도처에서 난을 일으키니 어찌 심하고 심하지 않은 구
별이 있겠으며 그 난을 일으키는 계제를 따져보면 한결같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귀화한 뒤에도 참작하고 구별해야 다 죽여 버리는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오정선은 사교(邪敎)에 물들어 이름을 더럽힌 자로 조정의 신료
로서 마땅히 그 처벌을 배로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귀화하였
는데 다만 난을 일으킨 비류를 공초하는 죄목으로만 조정의 신하를 잡아
가두었으니 사리로 보아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우선 진중에서
명령을 기다리면서 회답의 공문을 기다려 시행할 뜻을 써서 보내오니 삼
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공초한 내용을 어찌하여 올려 보내지 않았는가? 즉시 속히 보
고해서 결단하여 처리하도록 할 것이며, 이른바 별군관 일원(一員)의 성
명 역시 보고하지 않았으니 심히 모호한 일이다. 아울러 오정선을 잡아
가둔 뒤에 함께 보고하라.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53
예순일곱 11월 16일 [其六十七 十六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접수한 소모관(召募官) 천안군수(天安郡守)


김병숙(金炳塾)의 보고 내용에, “본도의 감영에서 후록(後錄)하여 열거한
가운데 신사(紳士, 벼슬아치 출신) 중에 좋은 생각을 내어 비류를 섬멸하
는 계책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재능에 따라서 수용하여 규정을 넘어 권
면하고 시상한다 하였습니다. 지난 번 본군에 비류가 창궐하는 때에 민
심이 분잡하고 사기(士氣)가 막혔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두서너 현
량(賢良)들이 일어났으니 그 공효(功效)가 심히 컸습니다.
전 도사 홍유주(洪有周)는 연전에 성균관 시험에서 사예(司藝)로 천거
를 받았고 경술 문학(經術文學)과 청백염근(淸白廉謹)한다하여 초년부터
충청남도에서 중망(重望)을 짊어져서 이미 조정에서 등용하였습니다. 진
사 박영민(朴永民)은 문학이 일찍부터 현저하였고 재주와 슬기가 모두
뛰어나 사우(士友)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고 경제(經濟)23)에 관한 일을
꿰뚫고 있습니다. 유학 박제면(朴齊冕)・이주혁(李周赫)은 기국이 깊고 넓
으며 재식(才識)이 뛰어납니다. 이 네 사람은 본 읍에 같이 살면서 서로
권려하고 기강을 붙들고 세우니 난당(亂黨)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고
향리에서 촉망을 받고 있어 실로 선비의 모범이며 한 주(州)의 의표가
됩니다.
지금 우리 군대가 가까이 임하니 이미 은혜와 위엄을 떨쳐 사악한 무
리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렇지만 민심은 많이들 흩어졌으니
이를 진압하고 바로 잡는 데에는 훌륭한 선비를 나오게 하고 사림을 권
면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인망이 있는 사람들은 장려해 발
탁하고 권면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는 바, 삼가 순무영의 공문에 따라
이에 사실에 의거하여 베껴서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3) 경제: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구제한다는 경국대세(經國濟世)의 줄인 말. 뛰어난 인


재를 말함.
35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지금 이렇게 소란스러운 때에 네 사람이 홀로 의리를 지키면서 의연히


흔들리지 않고 한 지경 내의 본보기로 실로 사림의 표준이 됩니다. 해당
읍의 수령의 보고에 의거하여 청컨대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장
려하고 발탁하여 민심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여론에 합당할 것 같기 때
문에 이에 문첩으로 보고하오니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마땅히 공주부에 보고하라.

예순여덟 [其六十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연속해서 비류의 정형을 정탐하니 노성현에 진을


치고 있다 하므로 공격하기 위해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에게 명하여 이인
에서 출발하고, 경리청 2개 소대에게 명하여 공주부에서 머물러 주둔하
게 하였으며, 선봉은 통위영 병정 2개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대위와 병
정과 함께 오실로(梧室路)를 향하여 출발하게 하였습니다. 공주부 남쪽
30리 용수막에 이르러 회동하여 유숙하고 길을 나누어 노성에 진을 치고
있는 적을 합세하여 공격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선봉장은 다만 경리청
병정 2개 소대만 거느리고 공주부로 돌아와 주둔하여 별 탈 없이 밤을
묵었습니다.
같은 날 묘시에 도착한 공주영장 이기동(李基東)의 보고 내용에, “경천
(敬川)으로 전진한 사유는 어제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어제 해시 경에 일
본군 대위 진영에서 통지하기를, ‘우리 부대는 자시에 즉각 출동하여 행
진할 것이니 당신네 부대도 통위영 병정과 함께 경천에서 합류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시 경에 즉시 경천으로 출발하였고 일본군 대위의
부대가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어 동이 트기를 기다리면서 사방을 관망하
였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고 노성읍에서 포성이 나기에 즉시 달려갔습니
다. 거기서 일본군 대위를 만났는데 그 사태의 단서를 물어보니 봉화대
를 따라 가다가 그대로 이 읍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55
총포로 동도 10여 명을 쏘아죽이니 비류 만여 명은 행군해온 부대를 두
려워하여 그대로 논산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리하여 일본군 대위와 장위
진은 합류하여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영장(營將)이 즉시 부대를 나누어 되돌아가는 길에 노성의 누동면(樓
洞面) 칠동(漆洞)으로 들어가 비류들이 쌓아놓은 쌀 51 석을 압류하여
동민들을 시켜 다음날 운반해 오도록 명령하고 다시 경천으로 향하였습
니다. 이때 길에서 청산(靑山)에서 돌아오는 일본군 대위와 병사 100여
명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즉시 논산으로 전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천 비류의 도회소(都會所)로 진입하여 다시 쌓아둔 쌀 127석을 얻고
동민들을 시켜 다음날 운반해 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도진
영(都鎭營)24)으로 가는 길에 느닷없이 창을 든 비류를 만나 4명을 포살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사들이 지치고 날도 어두워져서 도진영으로 가지
못하고 본 주(州)의 진두면(辰頭面) 봉양동(鳳陽洞)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에 진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쌀 187석을 금영에 운송하게 하여 군수(軍需)로
보충하도록 하였고 선봉진도 앞으로 수습하는 대로 출발하여 논산으로
뒤쫓아 간 뒤에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다.
제(題)

예순아홉 11월 18일 [其六十九 十八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17일에 도착한 통위영 소속 우참영관(右叅領官)


장용진(張容鎭)의 보고 내용에, “오늘 14일 진시 경에 선봉의 주력부대
가운데 동시에 떠난 참모관 권종석, 별군관 유석용・이지효・황범수・이주
서 등이 유시 경에 용수막 30리에 도착하여 유숙하였습니다.

24) 도진영(都鎭營): 총지휘를 맡은 장위영을 말한다.


35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선봉진이 공주로 되돌아가 주둔한 뒤로 일본군 대위 부대와 함께 각각


배정을 하고, 해시 경에 일본군 대위의 통지에 따라 참모관 권종석・별군
관 유석용 등을 이인에서 주둔하고 있는 장위진(壯衛陣)으로 보내 노성
읍 서쪽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게 하고, 일본군 대위 부대는 노성의 봉
수대 뒷길을 따라가며, 본진은 경천 길을 따라서 노성의 동쪽 길로 곧장
들어가서 세 길을 석권하고자 자시에 출발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래서 상지소(相池所)로 간 좌 3소대가 일제히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때
맞춰 출발하여 곧바로 노성 동쪽 길로부터 적이 진을 치고 있는 곳까지
서둘러 들어가니 날이 샐 무렵에 이르렀습니다.
이른바 진을 치고 모여 있다는 적진은 적막하기가 마치 사람이 없는
듯하여 의아스러웠습니다. 약속대로 총포를 쏘니 봉수대 뒷길로 온 일본
병사 및 서쪽 길을 취하여 온 장위진이 일제히 총소리에 호응하여 두 길
에서 달려오니 기세가 산악(山嶽)과 같았습니다. 함께 나란히 노성읍으로
전진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적들을 추격하여 잡았고 각 부대는 그 잡는
대로 포살하였습니다. 이윽고 비류들이 논산 등지로 도주한다는 말을 듣
고는 길을 나누어 뒤쫓아 가보니 과연 큰 마을 뒤 둥근 산봉우리 위에
여러 깃발들이 연립해 있었으며 간간이 총포를 쏘아대니 보기에 통탄스
러웠습니다. 그래서 병정 및 대관・참모관・군관 등을 독려하여 힘을 다해
쫓아 올라가니 진을 치고 모여 있던 약간의 적들은 대부분 도망쳐 흩어
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곳을 빼앗아 차지하고 적들의 여러 깃발을 뽑아버린 뒤에
아군의 대장기로 대응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관군이 주둔하여 웅거하고
있음을 알게 하였습니다. 또 봉수대가 있는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니 진
을 치고 있는 적들이 있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수십 리쯤 되었습니다. 승
세를 탐에 따라 일본 병사와 일제히 출발하여 날래게 올라가 웅거지를
탈환하였습니다. 이때 장위진의 주력 부대가 또 다른 쪽에서 진격해 옴
에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고 모두 쫓아버렸는데, 한쪽에서는 총포를 쏘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57
며 뒤쫓아 죽인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나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을 뒤쫓아 10리쯤 갔으나 날이 벌써 저물어 각 부대 모두는 논산 등
지로 되돌아가 주둔하였습니다.
주둔지에는 몇 백의 여염집 전부가 텅 비어있어 보기에 걱정스럽고 참
혹하였습니다. 밤을 지낸 뒤 그 이튿날 16일에 높은 곳에 올라가 관찰하
였으나 적들의 형적(形跡)을 전연 볼 수가 없었고, 곧장 호남의 경계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부대는 노성읍의 길로
돌아와 주둔하였고 강촌(江村)에 도착하여 화약을 제조했다는 곳과 접
(接)을 설치한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참모관・별군관 등이 병정
여러 명을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화약을 제조하는 기구들을 모두
파괴하였고 남겨진 여러 깃발과 잡물 짚신의 등속들도 하나같이 파괴하
거나 태워버렸습니다.
한편 일본군 대위의 지휘에 따라 경천점의 앞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방어하게 하고 있으며 각 부대의 장졸(將卒)들은 한 명도 상해를 입은
자가 없었습니다. 노획한 군물과 앞장서서 적진으로 올라간 장졸의 성명
은 차례로 책자를 만들어 달려가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오늘 늦게 도착한
전령에 따라 정산에서 출발하여 이인으로 향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
와, 어제 정산에서 주둔하여 묵을 때에 적의 정형을 탐지하니 해당 읍의
건지동(乾芝洞)에 저들 무리가 많이 있다고 하기에 밤 오경 때가 되어 병
정을 파견하여 주거지를 포위하고는 엄습하여 동도(東徒) 100여 명을 체
포하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인에서 접전할 때에 따라 간 사람 및 멋대로
행패를 부린 자를 적발하여 10명에 한하여 즉각 처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여러 놈들도 이미 다 무리에 들어갔기에 당장에 모
두 죽여야 하지만 다들 위협에 못 이겨 따랐으며 행패도 없었고 ‘과오와
불행으로 지은 죄는 풀어 놓아 준다’라는 죄목에 관계되어 용서하는 은
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앞으로 유회소를 빨리 설치하여 동도
35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들을 기회에 따라 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깨우치며 또 타이르고는 모두


를 석방하여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행군하여 이인에 이르러 주둔하여 묵
었습니다. 그리고 처단한 동도의 성명은 책자를 만들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통위영 중에 우참영관 장용진의 보고 안에, “본진이 행
군하여 논산 등지에 도착하여 비류를 대파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
와, 비류와 접전할 당시 본진의 장졸들은 의기를 떨쳐 힘을 내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그 중에서 앞장서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운 자를 나열하
고 기록하여 다시 보고합니다. 본 좌 3소대 병정 이원근(李元根)・김계운
(金啓云)・조용이(趙用伊)・김의준(金宜俊)이 가장 앞서 적을 쫓았고 용기
를 떨치며 출전하여 그들의 깃발을 빼앗아 적들로 하여금 놀라 겁먹고
후퇴하게 하였습니다.
병정 김복용은 적들의 인신(印信)과 문서를 빼앗았고, 병정 김량일(金
亮一), 십장(什長) 김수길(金守吉), 화병(火兵) 최점동(崔點同) 등은 적진
에 깊이 들어가 그들의 군수물자와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대관 오창성,
교장 박상길, 규칙 김원석(金元錫)・이귀길(李貴吉), 십장 김봉두(金奉斗)・
오성겸(吳性謙), 중(中) 4소대 대관 신창희, 교장 황수옥・김상운, 규칙 박
원식(朴元植)・홍복영(洪福英), 십장 차흥규(車興圭)・김순일(金順一) 등은
맨 앞에서 병정을 이끌고 적을 무수히 무찔러 죽여서 적들은 이내 크게
궤멸하여 멀리 달아났습니다. 노획한 각 항목의 군수물자는 책자를 만들
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차례로 도착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이달 14일에 이
인에서 주둔하여 묵은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그날 밤 해시 경에
선봉진 참모관이 와서 일본군 장교의 통지를 전하기를 ‘즉시 용수막에서
’ 하기에 그날 자시 경에 행군하여 용수동(龍水洞)에 도착하여
합류하자고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을 접견하니, ‘장차 노성에 있는 적
을 칠적에 병력을 세 길목에서 출동시키되 본진은 서쪽 길을 따라서 날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59
이 새기 전에 싸울 곳에 도착하여 서로 호응하자’고 말을 하므로 듣는
즉시 행군하여 노성의 주산(主山) 서남쪽 능선에 도착하니 날이 아직 밝
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을 암석과 소나무 사이에 잠복시키고는 멀리 적의 무리가 모여
있는 곳을 살펴보니 저 멀리에 불더미가 매우 많았고, 노성읍을 살피니
고요하여 사람의 그림자나 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숨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고 한 때가 지나 날이 채 밝지도 않았는데 주산에서 먼저
불이 붙어 아군이 먼저 싸움에서 이긴 줄을 알았고 이어 발걸음을 크게
하여 노성읍으로 향하니 주민들이 전하기를 적들은 어제 벌써 도망쳤다
고 하였습니다.
대관 이규식을 보내 일본군 장교와의 약속을 이행하게 하고는 성읍에
서 병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논산에서 10리 떨어진 지초동(地轈洞)에 도
착하였습니다. 밥을 짓기 위하여 잠간 머물렀고 이미 일본 병사와 통위
영 병사들이 논산을 향해서 앞서 갔다는 말을 듣고는 즉각 군장(軍裝)을
묶고 뒤를 따랐습니다. 겨우 몇 리를 지났더니 급히 말을 몰고 와서 보
고하기를, ‘논산의 적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관군에게 항거할 태세이
다’라고 하므로 이를 응원하기 위하여 병사를 재촉하여 전진하였고 또
몇 리를 이르지 않아 앞서 간 부대의 포성이 들녘에 진동하였고 적병의
깃발은 해를 가릴 정도였습니다. 본진의 병사들은 포성을 듣고 깃발을
보더니 제각기 날뛰며 앞으로 달려 나갔으며 장관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후면을 따라 호응하였고 일본 병사와 총위영 병사들은 벌써
작은 토산(土山)에 있던 적진의 깃발을 빼앗고는 함성을 질렀고 본진의
병사들도 일제히 호응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주둔한 적들은 아직 흩어져 낙오하지 않았고 무리를 정돈하더니 몇 백
보의 땅으로 후퇴하여 은진의 황화대를 차지하고는 다시 돌격해 올 염려
가 있었습니다. 헤아려보니 일본 병사와 총위영 병사들은 먼저 적을 격
파하느라 지쳐있기에 본진이 이에 앞 언덕을 점거하고 적진을 살폈습니
36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다. 적이 방어하는 황화대는 커다란 들판 중앙에 우뚝 서있고 사방에는


산기슭이 둘렀는데 가운데 산봉우리는 펀펀하고 이곳을 두른 산발치는
천연의 견고한 성벽이었습니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주위는 매
우 널찍하고 적병은 사방에 서서는 번갈아 각종의 총을 쏘았는데 그 소
리가 각각 달랐습니다.
천보총(千步銃) 소리는 크면서 멀리 갔고 후문총(後門銃) 소리는 작으
면서 급했으며 화승총(火繩銃) 소리는 퍽퍽하면서 가까웠는데 제각기 격
발하여 멀고 가까운데서 날아오는 탄환이 곡식이 흩어지는 듯 했습니다.
이에 의분과 용기가 격동되어 이를 개의치 않고 적을 업신여겨 즉시 대
관 윤희영・김진풍, 별관군 윤지영・이겸래를 보내어 2개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 서쪽 광야 중앙을 따라 그 서남쪽을 포위하게 하고 참영관 원세
록에게 반 개 소대를 주어 뒤에서 의병(疑兵)을 만들게 하고, 대관 박영
호(朴永祜)・이규식, 별군관 김광수(金光洙)와 함께 몸소 1개 반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 동북쪽의 작은 능선을 따라 함성을 지르면서 곧장 올라
가서 적의 서쪽 포위망을 부수게 하니 적은 남쪽 산기슭을 향해 미친 듯
달아났습니다.
이어서 모든 부대의 장졸을 지휘하여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여 그 후미
를 압박하면서 사격을 하니 남은 적 천여 명이 마치 새벽하늘에 별이 지
듯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지듯 쓰러졌고 길에 버려진 무기와 밭두둑을 따
라 시체가 눈에 들어오고 발에 채였습니다. 이때 서쪽으로 해가 산에 걸
리고 바다 장기(瘴氣)가 점차 일어남에 지는 해를 돌리지 못함을 탄식하
고는 이어서 부대로 복귀한 병정을 수습하여 마침내 황화대에 주둔하고
는 마을 집을 수색하여 병정을 먹이고 풍설을 무릅쓰고 밤을 지냈습니다.
그날 전투는 병사를 부리는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와 같이 오르고 본 사람라면 참으로 그의 용심과 용력
에 실로 흠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병정들이 몸을 바치면서 명령을
따랐던 것 역시 가상한 일입니다. 이튿날 모리오(森尾)의 통지에 따라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61
노성으로 회군하여 주둔하며 묵었습니다. 회군하는 길에 은진(恩津)의 묵
동(墨洞)을 수색하였습니다. 적이 화약을 제조한 곳이라 하기에 참영관
원세록의 휘하 병정을 나누어 묵동으로 들어가게 하여 엄습하고 체포하
여 죽인 자가 7명이나 되었고, 나머지 모두는 깨우치도록 설득하고 놓아
보냈습니다.
화약을 만드는 기구는 모두 파괴하였으며 어떤 지방으로 진군할지는
다시 명령을 기다려 시행할 생각입니다. 적과 접전 할 때에 적에게 부상
을 당한 병정 김치순(金致順)은 보부상을 보내 공주 판관에게 후송하여
치료해주고 음식을 제공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이 노성・논산 두 곳에서의 승리는 비록 괴수를 다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포살자・익사자가 도합 수삼백 명이 넘으며 이미 목인(木印)도
빼앗았고 또 저들이 말하는 괴수의 깃발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저들을 흩트려 놓았다하더라도 다시 호남 등지에서 날뛰게 한 것은 진실
로 극히 통탄스럽습니다. 힘을 다해 의기를 떨치고 목숨 바쳐 앞장서 올
라갔던 각 진영의 장졸들은 분명한 포상과 격려의 방도가 있어야 하니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통위영에서 만든 탈취한 군물의 책자 및 장위
영에서 만든 죄인의 책자는 모두 다듬어 순무사께 올립니다.
지금 호서(湖西)의 왼편[충청북도]으로 모여 진을 쳤거나 다시 소요가
있다는 보고가 없으니 조금은 정화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포(內
浦)・임천(林川)・한산(韓山) 등의 읍과 서산(瑞山)・태안(泰安) 두 읍은 아
직 토벌하여 평정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경리청의 두 소대가 있으니 이후
의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뢴 보고가 도착하였다. 장졸들이 앞을 다투어 적진으
로 달려들어 여러 번 승전의 소식을 올렸으니 극히 가상한 일이다. 장령
(將領)들이 몸을 바쳐 사졸(士卒)을 격려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종당에
포상이 있을 것이니 더욱더 면려할 일이다.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총어영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
36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일흔 [其七十]

보고하는 일입니다. 공주에서 선봉진이 머물러 있을 당시 각처에서 보


내준 물자의 종류를 책자로 엮어 올려 보냅니다.
제(題)

일흔하나 11월 19일 [其七十一 十九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어제 신시 경에 일본군 대위가 직접 호남 등지로


향하기 위해 노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경천에 주둔하고 있는 통위영의
두 소대는 어제 유시 경에 공주로 되돌아와서 주둔하고 별 탈 없이 밤을
묵었습니다.
제(題): 도착 하였다.

일흔둘 [其七十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경리청의 좌 2 소대 병사 남창우(南昌祐)・김명수,


중 2 소대 병사 김의일(金意一)과 장위영 병사 김치순이 적과 접전할 때
유탄에 부상을 당하였는데 때가 엄동이라 객지에서 치료하기에는 어려움
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상경해서 치료를 받게 하려 각자의 집으로 보내
서 요양하게 하였습니다. 용호영(龍虎營)에서 옮겨 온 이만창(李萬昌)의
복마 한 필이 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통위영 가운데서 우영관 장
용진(張容鎭)만이 급보하였기에 이에 보고하오니 각 그 영에다 이런 일
이 없게 신칙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제(題): 그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특별히 치료를 받도록 하라.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63
일흔셋 [其七十三]

보고하는 일입니다. 보은 겸임 회덕현감 □□□의 보고 내용에, “방금


접수한 같은 군의 공형 등이 보고한 내용에 말하기를 ‘이달 15일 오시
경에 도내 옥천의 안내(安內) 창의소(倡義所) 대장 및 순무군관(巡撫軍
官)이 본 읍에 와서는 공형을 초치하여 금동학사통문(禁東學事通文) 한
통을 내주면서 즉시 번역하고 베껴서 경내에 돌리고 그 상황을 창의소로
달려와 보고하라 하고는 즉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베껴서
경내에다 돌려보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즉시 베껴서 급히 보고합니다’라
고 하기에 다음의 통문을 베껴서 뒤에다 붙여 급히 보고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뒤에 붙인 통문을 이에 후록(後錄)하고 이를 베껴서 올립니다.
다시 상세히 조사하여 서둘러 보고하라는 제사를 보냈으나, 대장의 칭호
는 심히 황당하고 본영 관군의 성명도 알 수 없으니 이는 정부(政府)와
본영의 양 아문(衙門) 간에 지휘가 있어야 되겠기에 삼가 처분을 기다리
는 연유의 일입니다.
후록(後錄):
옥천 안내 창의소 통문(沃川安內倡義所通文)
다음과 같이 통유(通諭)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성인 기자(箕子) 이후
로 유학을 숭상하고 도의를 중하게 여겨왔다. 본조에 이르러 정치와 교화
가 매우 밝아지고 생민들을 배양하시고 생육하신지 50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교(邪敎)가 어느새 스며들어 들끓더니 스스로 일컫기를
동학이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어리석고 미련한 백성들을 속이고 꾀이더니
결국엔 밭 갈고 글 읽는 사람들을 몰아치고 위협하여 평민을 침범하고 약
탈하며 마을에서 방자한 짓을 하였으니 하나하나 그 죄상을 세어보면 책
에 다 적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성교(聖敎, 임금의 전교)가 매우 엄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완강하게 항거하는 자는 토벌하여 섬멸하고 귀화하는 자
는 안무(安撫)하라고 명하셨다. 아! 저 어리석은 무리들이 포(包)를 만들고
36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당을 모아서 감히 왕의 군대에 대항을 하니 이들은 임금을 거역[無將]25)


하고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대역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춘추(春秋) 의 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먼저 그 무리를 다스리고’
또 ‘사설(邪說)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므로 사람마다 죽여도 된다고
’ 했으
니 이것은 만고 이래의 대경대법(大經大法)이다. 근래에 동학으로 투입되
는 자들은 밭 갈고 글 읽는 사람 또는 우매한 백성 아님이 없거늘 저놈
들이 협박했거나 혹은 꾐에 빠트린 것이다. 이제 십행의 윤발(綸綍)을
보고 모두 다 귀화한 뒤에도 무리가 오히려 다 없어지지 않고 인심이 끝
내 안정되지 않고 있으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애통한 눈물이 흐른다.
원하건대 각 마을의 여러분은 의구심을 품지 말고 서로에게 단단히 일
러 경계하여 비록 저놈들이 만 가지로 협박하고 유혹하더라도 맹세코 따
르지 말 것이니 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신민(臣民)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이 통문을 발송하니 이 글을 보고서 일제히 귀화하여 책자를
만들어 창의소로 보낼 것이다. 그런데 만일 거짓으로 귀화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순종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거나 또는 거괴를 감추어 두고는
끝내 사사로움을 좇는 별탈이 있다면 그 마을은 마땅히 의병에게 도륙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절대 모른다하지 말고 빨리 저놈들의 죄를 성토하
기를 심히 바란다.
창의소장(倡義所長) 박정빈(朴正彬)・군관 육상필(陸相弼)

이에 이 통문을 각 마을로 전해 해당 마을이 귀화하면 책자를 만들어


군기(軍器) 등의 물건과 함께 하나하나 창의소로 수납(收納)하여야 할 것
이다. 그런데 만일 사사로운 정에 끌리거나 탈이 있는 것을 핑계대고 감
추어 두는 별탈이 있다면 해당 마을은 의당 의병들에게 섬멸될 것이다.

25) 무장(無將): 군친무장(君親無將). “임금과 어버이에게는 시역하려는 의사가 없어야 한


다”는 말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장공(莊公) 32년에 나온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65
일흔넷 11월 21일 [其七十四 二十一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소대를 거느리고 별 탈 없이 밤을 묵었고 당일


진시 경에 곧장 호남으로 가기 위하여 노성 등지로 출발한 연유의 일입
니다.
제(題):

일흔다섯 11월 22일 [其七十五 二十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교도중대장 이진호의 보고에, “이달


초 5일에 파송한 대관 이겸제가 병정 1대를 거느리고 각 읍으로 나가서
청산(靑山) 석성리(石城里)에 도착하여 저들 무리 수만 명과 한바탕 접
전하여 40여 명을 죽였습니다. 초 8일에 김산읍으로 회군할 때에 옥천의
양산(梁山) 장터에 도착하여 또 저 무리들을 만나 몇 천 명이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접전하여 50여 명을 죽였습니다. 초 10일에 금산에 도착하여
보니 저 무리들 수만 명이 읍 안과 산 위아래에 포진함에 적의 형세가
자못 괴이한바 한바탕 혼전하여 50여 명을 사살하였다”고 합니다.
동시에 도착한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의 보고에, “이달 12일에 금산읍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13일에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가 주
력 부대를 거느리고 진산(珍山)으로 향하였습니다. 교도소 병정은 일본군
중위 히라기 조다로(白木城太郞)와 함께 행군하여 14일에 용담(龍潭) 위
의 조림(照林) 장터에 도착하여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는 저들의 무리와
접전하여 30여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생포한 동도 20명 중에 서
도필(徐道弼)・박만호(朴萬浩)・이만실(李萬實)・조윤삼(趙允三)・박치팔(朴治
八)・김윤일(金允一) 등 6명은 대단히 소란을 피워 극히 망측하기에 모두
사살하였고 그 나머지는 효유(曉諭)하여 석방하였습니다.
16일에 진안읍(鎭安邑)에 도착하여 또 저들 수천 명을 만나 한바탕 접
36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전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고 17일에 고산읍(高山邑) 산천리(山川里)에 도


착하여 저들 수백 명과 접전하여 30여 명을 죽였습니다. 18일에 고산읍
에 도착하여 또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는 저들을 만나 한바탕 혼전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생포한 동도 30명 가운데 이른바 접
사(接司)인 고산에 사는 이만학(李晩學)・여관서(呂寬西)와 진안에 사는
김치서(金致西) 등 세 놈은 우선 잡아 가두었고 김성도(金聖道)・임성원
(林聖元)・김중이(金仲伊) 등 3명은 포살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효유
해서 석방하였습니다. 교도소 병정과 일본 병사는 한 사람도 부상자가
없었습니다.
각처에서 접전할 때에 노획한 여러 군물(軍物)은 법대로 그곳 읍에다
두어야 하지만 읍이 대부분 비어 있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되어 총 200
자루・창 300자루는 파쇄하고 화약 천여 근은 물에 띄워버리고 납탄 10
여 말은 주조하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는 여러 가지 물건은 태웠습니
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진영의 장졸들이 여러 곳에서 노고를 이처럼 가상하게 바치니 포상
하고 격려하여 주시길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일흔여섯 [其七十六]

보고하는 일입니다. 호남으로 출발하기 위해 노성으로 향한 사유는 어


제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이 2개 소대를 영솔하고
연기에서부터 문의・연산・은진 등의 읍을 거쳐 갔는데 지나는 곳은 모두
평안하였습니다. 은진읍에 도착하여 일본군 대위의 통지에 따라 위의 1
개 소대 병정 50명을 교장 우기준에게 영솔하게 하여 일본 병정 100명
과 함께 고산・용안 등지로 나갔다가 금영으로 돌아오는 길에 판치의 앞
길에서 만나 그들로 하여금 금영에서 머물러 주둔하게 하고 유시 경에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67
노성현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축시 경에 즉시 도착한 금영의 왕복(往復)한 문첩 가운데 초토사에게
내려 보낸 공문 내용에, “한산(韓山)에 있는 비류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
병을 뽑아 보낸 사유는 이미 공문을 보내 알렸거니와 방금 접수한 저희
진영의 참모관 박홍양(朴鴻陽)의 보고에 의하면, 참모인 제가 전진(戰陣)
으로 가는 길에 남포(藍浦)에서 주둔하여 방어하고 있는 장수 최재홍(崔
在弘)의 보고를 접견하니, 이달 19일 신시 경에 관군이 비도에게 패하여
각각 흩어져 달아났고, 홍주・보령(保寧)・남포・비인(庇仁)의 군병들로 서
천(舒川)으로 도로 들어온 자는 2,000명에 불과하며, 적의 기세가 갈수록
창궐하여 실로 대적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관군이 적의 예봉에 꺾인 것에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
다. 그래서 성을 지키던 군병들 모두가 출전하니 저희 진영의 방어가 허
술할 우려가 있어서 서둘러 예비(豫備)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기에 공문
을 보내니 급박한 사태의 조짐을 굽어 살피시어 저희 진영으로 지원병을
보내주시면 힘을 합해 경계를 엄중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대가 행
군하는 서천 땅으로 정예의 소총수를 나누어 출발시켜서 함께 힘을 다하
여 비류들을 섬멸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서로 상고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
니다.
성하영이 이끄는 2대 병력은 비록 출발하였으나 필시 임천・한산 등지
에서 주둔하고 있을 것이니 때에 늦을 우려가 있을 것 같기에 한편으로
는 금영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 영관에게 영칙하였고 또 홍주
등지로 1개 부대를 파견하게 하였습니다. 선봉이 지금 멀리 있으니 갑자
기 조발(調發)하기가 편지 않기에 경리청 각 부대는 편의대로 조용(調用)
하도록 금영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시 경에 즉시 떠나 은진의
앞길로 향하였으나 충청도에는 비류가 아직도 창궐하니 재차 양호의 정
세를 정탐하여 머물거나 형세를 살펴 전진할 계획입니다.
제(題)
36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일흔여섯 11월 24일 [其七十六 二十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경리청 부영관으로 안성군수를 겸직한 홍운섭이


20일에 작성하여 23일에 도착한 보고 내용에, “이달 18일 은진(恩津) 성
응리(成應里)에 도착하여 영리한 사람을 많이 동원하여 적의 정형을 정
탐하니 각처에 패주한 자들이 모두 남하하였는데 거처가 일정한 곳이 없
습니다. 그런데 은진의 육곡(六谷)에 사는 신현기(申鉉基)가 자신을 대장
이라 하고 무리 5,600명을 모아 김산 등지에서 소란을 피우더니 현재 자
기 집에 있다고 하므로 오늘 첫새벽에 1개 소대를 조발하여 대관 김명환
(金命煥)・교장 정재원(鄭在元)에게 가서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현기는 아직 귀가하지 않아 그 아비 신응균(申應均)・숙부 신
낙균(申洛均)・종형 신현구(申鉉九) 및 옥천포(沃川包)의 잔당 원준상(元
準常) 등 네 놈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쌀과 벼와 화약・납탄・조총・곤장
등의 물건을 무수히 쌓아두었기에 불로 태울 수 있는 것은 태우고 물에
빠트려 버릴 수 있는 것은 물속에 집어넣었고 곡물의 경우는 모두 운반
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육곡 주민들 모두가 말하길, ‘잡혀간 네 놈 중에
만약 한 놈이라도 살아서 돌아오는 자가 있게 되면 온 마을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하였으니 이놈들이 서로 얽혀 저질렀던 행패를 미루어 알
만하였기에 한꺼번에 포살하였습니다.
쌀과 벼는 성덕리 각 식주인들(食主人)에게 적당히 헤아려 나누어 주
었고 다시 남은 것은 수량을 기록하고 일본군 진영 소위에게 이송하여
병영에서 수요대로 쓰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운섭이 거느린 경리청 2소대는 금영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있는바 벌
써 지시를 받았으니 성하영이 돌아와 주둔할 때까지 지체하며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로 하여금 임시로 그 부대를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홍운섭은 23일에 출발하여 안성을 향해 전진할 때에 우1소
대 2분대를 거느리고 출발하였는바, 경기도의 안성・죽산과 충청도의 진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69
천・목천 등지에 흩어져 있는 비류들이 많다고 하니 역시 소홀하게 할 수
없는 탓에 금영에 있는 2개 소대 중에서 1개 소대를 안성으로 파송하여
그로 하여금 순라를 돌며 보초를 서게 하고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는 것
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처분을 기다려 시행할 생각입니다.
제(題)

일흔일곱 11월 24일 [其七十七 二十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노성에서부터 호남을 향해 전진한 사유는 이미 보


고하였거니와 22일 손시 경에 노성에서 출발하여 행군하여 가는 동안 백
성들을 진무하였습니다. 그날 신시 경에 20리를 가서 논산땅에 도착하니
끝없이 넓은 들에 1,000여 호가 즐비하게 모여 있었으며 한 줄기 조수가
통하는 큰 강 너머 북쪽은 노성과 논산이고, 남쪽은 은진과 논산이었습
니다.
노성 땅은 지방관의 효칙(曉飭)으로 인하여 백성들 대부분이 생업으로
돌아왔습니다. 은진 땅은 7,800호의 빼곡한 여염집이 양반과 상놈 가릴
것 없이 열 집에 열이 비었다 말할 수 있으니 보기에 걱정스럽고 비참하
였습니다. 그래서 한편에 방문을 내걸어 그들로 하여금 즉시 돌아와 안
도하게 하였으나, 만일 괜히 의구심을 갖고 안주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
면 저 비류의 거괴나 행패를 부린 자들과 같이 형벌을 줄 것이며, 거괴
를 비호하는 자는 그 동리의 주민들까지 마땅히 중한 형벌을 내린다는
뜻으로 말을 엮어 공문을 보내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저녁부터 밤까지
차츰차츰 돌아와 모이는 자들이 자못 모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지체
하여 머무를 수 없었기에 두 끼의 식사는 비류들이 쌓아놓은 곡식 중에
서 유용하였고 남은 곡식 몇 백 석은 금영의 포교를 만나 주어서 그로
하여금 총괄하여 처리하도록 신칙하였습니다.
하나같이 난리를 겪은 뒤로부터 여러 차례 시장을 열지 못하다가 비로
37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소 23일에 장사치들이 모여 시장의 모양새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제각


기 편안하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각별히 낱낱이 일러주었고, 그날 사시
경에 출발하여 미시 경에 20리를 가서 강경포(江鏡浦)에 도착하였습니다.
근래에 장위영 병력이 두 차례 지나가서 조금씩 대부분 생업에 안주하고
있어 논산에 비해 안정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난리를 일으켰던 거괴들은 다 도망가 흩어졌는데도 주민들은
오히려 의구심을 품고 있는바 논산에 효칙했던 방문으로 글을 엮고 내걸
어서 그들로 하여금 이곳을 떠나는 별탈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논산・강
경포와 같이 큰 곳은 모습이 쓸쓸하고 민심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더
욱이 시골과 은진에는 관아가 비어있어 뒤를 이어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위로하기에는 틀림없이 곤란함이 있을 것이기에 금영에다 공문을 보내
그들이 빨리 부임하도록 재촉하였고 또한 즉시 지방에 신칙하였습니다.
강경(江景) 장날은 바로 24일로 차츰 시장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습니
다. 그날 출발하여 호남 땅으로 향하고 있으며 은진에 주둔하고 있는 일
본군 병력과 장위영 병력이 일진(一陣)은 내포(內浦)로, 일진은 용안・고
산 등지로 향하고, 일진은 여산(礪山)으로 향하였으나 아직 보고된 공문
이 없고 다만 정탐한 자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의 소홀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고 하니 뒤의 상황을 차례로 살펴서 급히 보고할 계획입
니다. 공주에서 군사를 위로하기 위해 보낸 군수품을 미처 기록하지 못
한 것도 아울러서 책자를 만들어 순무사께 올립니다.

일흔여덟 11월 26일 [其七十八 二十六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교도 중대장 이진호의 보고에, “이달


24일 미시 경에 파송한 대관 최영학(崔永學)이 교도병 1개 부대 및 일본
군 병력 1개 부대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금구읍에 이르러 밤을 지냈습니
다. 그리고 25일 묘시 경에 행군하여 나아가서 곧 원평(院坪)에 도착하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71
니 적도 수만 명이 한 번 나팔소리가 나자 진(陣)을 삼면(三面)으로 벌
리고 품(品)자 모양을 형성하고는, 천 보(步)의 거리를 두고 서로 총포를
쏘며 싸웠습니다. 손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포성이 우뢰 같고, 탄환이
비 오듯 날아 오갔습니다. 적은 산 위에 있었고 우리 군대는 들에 있었
는데 사방 주위에서 함성이 진동하고 불꽃과 연기가 안개를 이루어 원근
을 분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대관 최영정이 칼을 뽑아 적을 향해 앞장서서 산 위에서 지휘
하고 호령하였고, 동서(東西)로 부대를 나누어 한꺼번에 힘을 써서 다투
어 먼저 올라가서 찌르거나 목을 베어서 죽인 적이 37명이었습니다. 남
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각자 도망하였는데 산세가 가파르고 험하
였으며 해는 이미 저물어 가고, 게다가 적도의 행색이란 것이 모여 있으
면 그들이 동학인지 알 수 있고, 흩어져 있으면 농민과 비슷하기 때문에
일일이 추격하여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빼앗은 군물(軍物)은 회룡총 10자루와 조총 60자루・납탄 7섬・화약 5궤
짝・자포 10좌・도창(刀創) 200자루・쌀 500섬・돈 3,000냥・무명 10동・소 2
마리・말 11필・쇠가죽26) 10장・호피 1령을 모두 일본 대육진(大陸陣)으로
귀속시켰고, 그 나머지 활, 화살, 부서진 총, 가죽 갑옷,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우리 병사와 일본 병사는 한 명도 죽거
나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유시 경에 군대를 금구읍
으로 회군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대관 최영학이 분발하여 앞장서서 노고를 다하니 극히 가상합
니다. 이에 합당하게 격려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군물과
돈・무명・잡물 모두를 일본군 진영으로 수송하였다 하니 제멋대로 처단해
서는 안 되는 바 이러한 연유의 일입니다.

26) 쇠가죽[鋉牛皮]: 농민군들은 야외에서 쇠가죽을 펼치고 쌀과 물을 부어 밑에서 불을


집혀 밥을 해먹었다 한다. 그래서 쇠가죽을 필수품으로 들고 다녔다.
37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일흔아홉 [其七十九]

보고하는 일입니다. 강경포(江鏡浦)를 떠나 출발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


였거니와 24일 신시 경에 30리를 가서 여산읍(礪山邑)에 도착하여 별 탈
없이 머물러 묵고 음식을 먹였습니다. 25일 진시 경에 출발하여 신시 경
에 삼례역(參禮驛)에 도착하여 별 탈 없이 밤을 지냈습니다. 26일 진시
경에 행군하여 전주부를 향해 전진한 연유의 일입니다.

여든 [其八十]

보고하는 일입니다. 출진(出陣)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


에, “이달 15일에 논산의 적을 격파하고 16일에 노성읍으로 돌아온 사정
및 홍주를 출발한 뒤로 처결한 동도의 성명은 책으로 엮어 17일에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18일 전령(傳令)에 따라 노성에서 도로 출발하여 20리
를 가서 논산 황화대 위에 도착하여 막사를 짓고 밤을 지냈습니다.
19일에 일본군 장교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의 통지에 따라 황화대를
떠나 20리를 가서 은진 한곡(鷳谷)에 주둔하여 묵고 이어서 하루를 더
머물었습니다. 21일에 또다시 일본군 장교의 통지에 따라 진영 안에 잡
아 가둔 동도로 유구의 도집병(都執兵)인 오정선(吳鼎善) 및 그 나머지
동도 12놈을 모두 일본군 장교의 진영으로 압송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
로 일본군 장교 미나미 쇼시로의 통지에 따라 본 진영의 병사 100명을
일본군 장교 아까마쯔 고쿠보(赤松國封)에게 나누어 주고는 석성(石城)에
서 보령까지 이동하였습니다.
이때 참영관 원세록의 거느린 부대 가운데 병사 180명을 머물게 하여
해당 소좌(小佐)와 함께 은진현에 체류하게 하였고, 이두황이 몸소 2개 소
대를 거느리고 용안(龍安)으로부터 함열(咸悅)을 거쳐 익산읍・삼례역 등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병사와 회합하기 위해 이달 21일에 용안현을 향해 출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73
발하였으며 이후의 상황은 계속하여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 일본 진영으
로 압송한 동도의 성명은 책으로 엮어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5일에 도착한 장위영 참영관 원세록의 보고 안에, “이달 21일에 은진
현에서 일본군 대대장의 지휘에 따라 교장 최기성(崔基城)・김인길(金仁
吉)에게 병사 100명을 거느려서 석성・보령 등지로 파견하여 보냈고, 22
일 밤 동트기 전에 일본군 대대장의 지휘에 따라 삼례에서 행진(行陣)하
였는데, 대관 윤희영은 병정 100명을 거느리고 먼저 만마관현(萬馬館峴)
으로 나아가서 방어하였고, 대관 김진풍은 병정 100명을 몸소 거느리고
차례로 용두현으로 행진하여 방어하였습니다.
적의 정황을 염탐하니 23일 오후에 수천 명이 전주성으로부터 도망하
여 금구・원평 등지로 돌아왔다고 하기에 일본의 주력부대를 기다렸다가
24일 진시 경에 같이 전주성으로 들어가 주둔하고 묵었으며 이런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별히 더 적의 정세를 정탐하도록 제사(題辭)를 발송하였고, 일
본 진영으로 압송한 동도의 성명을 엮은 책을 베껴서 순무사께 올립니다.
제(題)

여든하나 [其八十一]

보고하는 일입니다. 장졸 일행을 거느리는데 든 경비는 날수를 계산해


보니 이미 다 썼기 때문에 모두를 보고하였더니, 제교(題敎)하신 내용에,
“이미 본도의 운량관이 시행하였으므로 다시 해당 도에다 관문으로 지시
하였다. 생각건대 틀림없이 모자라게 되는 일이 없을 터인데 다시 양식
을 청구하니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인지 속히 사리를 따져 보고하라”고 하
신바, 교도중대의 경비는 이미 요청하는 보고를 하였으니 다름이 있어서
37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는 안 되지만 벌써 양곡을 운반하고 각 참(站)에서 책임지고 공급하게


하였으니 재차 처분해주실 것을 기다려서 시행할 계획입니다.
제(題)

여든둘 [其八十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삼례를 떠나 출발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


니와 각 소대를 거느리고 어제 유시 경에 전주부에 도착하여 별 탈 없이
밤을 묵은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여든셋 28일 [其八十三 二十八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20일에 발송하여 방금 도착한 나주(羅州) 공형의


문서에, “나주 읍이 저들 무리 수만 명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몹시 위급
하여 성이 곧 함락될 지경에 닥쳐있습니다”하고 급박함을 보고한 바에
따라 통위영 두 소대를 출동시켜서, 일본군 진영에 통지하여 일본 병사
100여명과 함께 선봉진이 거느리고 그날 진시경에 금구 등지로 출발하였
으며,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 및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는 각기 부하를 거
느리고 전주부에 주둔하면서 출동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진
영의 지휘를 들어서 전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제(題)

여든넷 30일 [其八十四 三十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달 20일에 작성하여 27일에 도착한 서산군수 성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75
하영의 보고에, “행군하던 부대가 부여에 도착하여 무사히 주둔한 사유
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홍산(鴻山)을 향해 출발하여 부여(扶餘)
근방 30리 가량에 이르러 정탐하니 바로 그곳 마을은 본래 동도가 기포
(起包)한 곳이라 합니다. 그래서 대관 윤영성, 교장 장대규(張大奎)・정인
갑에게 1대 병력을 거느려서 그 마을을 포위하고 그 마을 사람들을 시켜
비류들을 찾아내고 우두머리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캐묻
고 조사하여 실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이운(金伊運)・강공진(姜公鎭)・강
원형(姜元亨)・강팔복(姜八福)・이명옥(李明玉) 등 5놈은 죄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
홍산 고당리(古堂里)의 주민들이 비류 최상윤(崔尙允)・전묵진(田黙鎭)
을 붙잡아 바치기에 자세히 조사한 뒤에 역시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니
다. 홍산읍에 이르러 주둔하면서 소문을 들으니, 한산・서천 등지에서 비
도들이 바야흐로 무리를 모아 이 때문에 소란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장차 그쪽 두 읍을 향해 출발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1일에 작성하여 29일에 도착한 서산군수의 보고에, “이달 20일에 홍
산현에서 출발하여 한산군으로 향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그날 오시 경에 한산읍에 이르니 온 성의 인가(人家)들은 모조리 불타버
렸고 각처의 공해(公廨)는 네 벽만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아전과 백성들
이 울부짖는 모습은 참혹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
들여 위무하였습니다.
한편 적의 정형을 정탐하니 서천・한산 두 곳에 둔취한 비류들이
서천 읍으로 돌격해 들어와 불을 지르고 성을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산 수성장(守城將) 김련(金鍊)・호장(戶長) 김하은(金夏殷)으
로 하여금 별도로 수성군(守城軍) 및 읍에 소속된 사람들 수백 명을
거느리고 힘껏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홍산 유회장(儒會
長) 최학래(崔鶴來)가 보부상을 거느리고 몸을 날려 뒤를 따랐고 병
정들이 가운데에서 모두를 길게 몰아 크게 진격하여, 겨우 한산읍의
37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경계를 벗어나니 적의 무리가 서천읍에서부터 이미 불을 지르고 들


판을 뒤덮으며 퇴각하였습니다.
적은 문득 주력부대가 전진해 오는 것을 보고는 남북으로 흩어지니,
몇 천 명은 서천의 삼수동(三水洞)의 뒤 산기슭으로 뭉치고 몇 천 명은
그 읍의 남쪽 연포(沿浦) 등지에 둔취하였습니다. 북쪽에 둔취한 적군의
형세는 심히 창궐하여 깃발이 산을 덮었고 포성은 우레처럼 들려왔습니
다. 그래서 대관 윤영성, 별군관 유석용, 참모 신효식, 교장 장대규・정인
갑은 1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북쪽 산길을 따라 교전하면
서 나누어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관 이상덕, 참모관 권종석, 교
장 이봉춘・이장혁은 1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쪽 갓길을 따라서 힘을 떨
쳐 곧장 들어가 위아래에서 협공하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적진을 대파하니 포살한 자가 몇 백 명이 되고 빠져 도망친
나머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으며 남쪽에 둔취한 비류 역시 달아
나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날이 이미 저물고 캄캄해져서 더 이상 추
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회군하여 한산 역촌(驛村)에 주둔하면서 여
섯 곳에 복병(伏兵)을 두어 적도 몇 십 명을 잡아 죽였습니다. 노획물은
책자를 만들어 보고합니다. 향후의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
다”라고 하였습니다.
22일에 작성하여 29일에 도착한 서산군수 보고에, “서천・한산의 두 지
역에서 적을 물리친 사유는 어제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한산 역촌
으로부터 21일 묘시 경에 내산(內山)・외산(外山)・길산(吉山) 등지를 거쳐
행군하여 서천 지역에 이르러 잔당인 김제(金堤)에 사는 강명선(姜明善)
등 일곱 놈과 대기수(大旗手)라는 네 놈을 체포하여 모두 즉시 포살하였
습니다.
이어서 한산읍의 신아포(新牙浦)로 가다가 강을 건너 도주하는 임피
(臨陂)에 사는 비류 김해룡(金海龍) 등 7명을 잡아 죽였고, 마침 날이 이
미 저물고 어두워서 그대로 신아포에서 주둔하였습니다. 22일 묘시 경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77
행군하면서 연포(沿浦)를 방어하는 일을 더욱 더 엄히 단속시키고 주민
을 안무하고는 와초포(瓦草浦)를 거쳐 돌아 활동리(活洞里)로 향하였습니
다. 한산읍의 아전과 이교(吏校)들이 소 2마리・돼지 5마리・술 10동이・떡
10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군진(軍陣) 앞에서 기다리므로 병정들을 먹였습
니다. 지나는 여러 곳에 한편으로는 위엄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효유하였
으며, 향후의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산・서천 두 읍이 혹독하게 비류들의 해독을 입었다는 말을 듣자니
애처롭고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거처할 만한
곳을 특별히 조치하고 호남 연해로 통하는 길목을 엄하게 방비하도록 공
문을 발송하는 한편, 각 해당 읍에다가도 감결을 보내 신칙하였습니다.
장졸들이 의기를 떨치고 힘을 다하여 이렇게 크게 승리하였으니 가상하
고 칭찬할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에는 합
당한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노획한 군수물자는 책자를 만들어 순
무사께 올립니다.
한산읍의 아전과 이교 등이 사용한 양곡 및 처단한 여러 놈들의 명단
은 처음에는 책자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순무사께 보고할 수가 없었습
니다. 이후의 상황은 보고를 기다렸다가 차례로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다.
제(題)

여든다섯 [其八十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28일에 전주에서 전진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


니와, 같은 날 30리를 가서 금구현(金溝縣)에서 점심을 먹고, 20리를 가
서 원평(院坪) 거리(巨里)에 도착해보니, 25일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뒤라 가게 및 여염집 40여 채가 불탔으며 비류들이 저장해둔 곡식 몇
100석과 민가의 물건들이 모조리 불에 타서 보기에 몹시 처절하였습니
다. 그래서 흩어진 약간의 백성을 불러 모아 우선 불타지 않은 집에 머
37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물게 하고 차차로 집을 짓고 거처할 곳을 정하도록 각별히 효유(曉諭)하


였습니다. 17리 정도를 행군하여 태인(泰仁)의 석현점(石峴店)에 도착하
니 수십 채의 인가가 역시 불에 탔는데 연기와 불꽃이 아직도 살아있어
몹시 참담하였습니다.27)
장위영 대관 윤희영・이규식이 자기 소대를 이끌고 원평을 지원하기 위
하여 바로 내려오다가 태인읍에 도착하여 비류 몇 천 명을 토벌하였는데
포살한 자가 매우 많았으며 생포한 자와 노획물 또한 많았다고 합니다.
태인읍에서 묵으려 할 즈음, 석현점의 앞길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세한 상황을 듣고 이어서 행군하는 부대와 함께 3리쯤 가서 태인
읍내에 도착하니 7,800채의 집이 또한 불에 타버렸는데 모두 비류들이
흩어질 때에 방화한 것이라 합니다. 몇 백 채의 마을 집도 각 공해(公
廨)도 모두 텅 비었습니다. 몇 명의 유랑민을 불러서 만 가지로 효유(曉
諭)하니 차츰차츰 모여들었습니다만 그중에는 멀리 달아난 자도 있으며,
비류들의 위협에 못 이겨 따라간 자도 있는지라 끝내 편안케 불러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비류들이 저장해 두었던 곡식이 남아있어 이것으로
각 진영(陣營)을 공궤한 뒤에 그대로 묵었습니다.
한편 비류들이 다시 진을 치고 정읍(井邑) 등지로 전진한다는 말을 듣
고서 그 이튿날 29일 진시 경에 일본군 각 부대와 함께 동시에 출발하
여 30리를 가서 정읍현 앞의 점(店)에 도착하니, 비류들은 이미 달아나
흩어져서 끝내 자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리를 전진하여 정읍현 중흥
리(中興里)에 도착하여 유숙하였고, 일본군 병사는 천원참(川原站)에서
나누어 주둔하였습니다. 금구현 아래의 100리 길에는 점막(店幕)과 여염
집은 물론 원평(院坪) 석현(石峴)이 전소(全燒)된 것 외에 가끔 있는 한
두 집까지도 불에 타서, 인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영원히 끊어지고 사는

27) 태인전투: 주력 농민군의 최후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를 끝으로 동행하던 손병희와


헤어져서 손병희는 최시형이 숨어 있는 임실로, 전봉준은 장성 입암산성으로 들어갔
다. 세 산은 태인읍을 둘러싸고 있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79
사람이 없으니 보기에 처절함을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위영 두 소대와 일본 병사 64명이 도착하여 태인읍의 싸움에서 이
긴 일은 다만 일본 사람의 통지에 의해 알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보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승첩한 사실을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하니 그 전보(轉報)를 기다렸다가
즉시 급히 보고할 생각입니다. 생포한 놈들은 이미 일본 진영에서 참작
하여 방면하였다 하므로 문초(問招)할 수 없었습니다. 적의 정형은 다수
가 나주 근처에 모여 있다고 하는바, 일본 사람이 각 부대가 일제히 도
착할 때까지 하루 더 머물 것을 요청하기에 그대로 천원(川原)에 유숙하
였으며 차차 전진할 계획입니다. 연로의 상황은 우선 급히 보고할 연유
를 알립니다.
제(題)

여든여섯 12월 초 2일 [其八十六 十二月初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11월 30일 천원역(川原驛)에서 유숙한 사유는 이


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이달 초 1일 진시 경에 각 소대와 일본 병사를
거느리고 비를 맞으며 출발하여 노령(蘆嶺)에 도착하니 눈비가 내려 사
졸들이 그대로 맞았고 유시 경에 50리를 가서 장성읍(長城邑)에 이르러
별 탈 없이 밤을 묵었습니다. 미시 경에 일본군 대위 모리오 가이찌(森
眉雅一)가 대관 신창희・오창성, 별군관 이지효・황범수・이주서, 교장 박상
길(朴相吉)・황수옥(黃水玉), 병정 150명을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담
양(潭陽)에 둔취하고 있는 비류들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출동한 연유
의 일입니다.
제(題)
38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여든일곱 12월 초 3일 [其八十七 初三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장위영 대관 윤희영 등이 보초(報草)28)


를 베껴 올린 내용에, “지난달 26일에 본영의 좌부영관(左副領官) 이두황
의 통지에 의거하여 대관 윤희영・이규식, 교장 오순영(吳順永)・장세복(張
世福)・양기영(梁基英)・이경진(李景振)・홍선경이 병정 230명과 일본 병사
40명을 거느리고 완영(完營)을 출발하여 금구읍의 숙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행군하여 태인의 경계에 이르니 때가 사시(巳時)
였습니다. 적의 정형을 정탐하니 동괴(東魁) 전봉준・김문행(金文行)・유공
만(劉孔萬)・문행민(文行敏) 등 네 놈의 접주가 8,000여 명을 이끌고 태인
읍의 주산인 성황산(城隍山)・한가산(閒加山)・도리산(道理山, 또는 道伊山)
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 곳이라고 하지만 봉우리는 아홉
봉우리가 되며 깃발을 세우고 진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적은 경군(京軍)이 도착한 것을 알고는 천보총을 한꺼번에 쏘아대니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탄환이 빗발쳤으며 계속해서 깃발을 휘두르고
나팔을 크게 불어 그 기세가 호대(浩大)하였습니다. 적들이 진을 치고 모
여 있는 곳은 모두 높은 산과 험한 곳이고 그 이외는 모두 넓은 들이었
습니다. 우리 병사는 230명이고 일본 병사는 40명이었는데, 대관 윤희
영・교장 이경진・홍선경이 거느린 병정 9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적이 있는 산 서쪽 길에서부터 공격하고, 대관 이규식・교장 오순영・장세
복・양기영이 거느린 병정 14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쪽 길을 따
라 호응하였습니다.
적들을 공격하기 위한 분담이 정해지자 두 길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산으로 올라가니 이때 적의 탄환이 끊임없이 아래로 쏟아졌습
니다. 그래서 밭이랑에 의지하여 몰아서 한꺼번에 총을 쏘기도 하고 혹
은 들판에 엎드려 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조금도 두려움 없

28) 보초(報草): 보고서의 초안을 말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81
이 대열(隊列)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호응하여 길게 몰아서 앞을 향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자 적들은 비로소 황겁한 기색이 있었고 깃발이 바야흐로 움직이
려 할 때 두 길목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산으로 올라
잽싸게 공격하니 적들은 대열 앞뒤가 뒤섞여 후퇴하며 흩어지기 시작하
였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진을 쳤던 산을 탈환하고서 멀리 건너편을 바
라보니 앞뒤의 산에 있던 적들이 성황산에서 합하고는 회룡총을 연속 쏴
대며 크게 나팔을 부니 탄환이 빗발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즉시 산
에서 내려와 군사를 모으고 각각의 산으로 올랐던 병사를 집합시켜 다시
네 갈래 길로 나누어 산으로 돌격하였고 몰아서 한꺼번에 총을 쏘며 공
격하니 그 소리가 우레 같았습니다.
이때 적들은 막아내지 못하고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고는 사방으로 흩
어져 각자 도망하였습니다. 네 길목에 있던 병사들은 동서로 20리가 되
는 경계까지 그들을 뒤쫓아 각기 생포한 자가 50여 명이고 탄환을 맞아
죽은 자가 40여 명이었습니다. 노획한 군물(軍物) 가운데 회룡총 15자루,
조총(鳥銃) 200여 자루, 탄약과 죽창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
았고 안장을 앉힌 말이 6필이었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술시(戌時)가 다
갔는지라 즉시 태인읍에서 군대를 모아 한 명 한 명 점군(點軍)29)하니
우리 병사와 일본 병사 모두 무사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휴식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승리의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보초(報草)를 지금 대
관들이 있는 곳에서 베껴 보내온 바, 격려하는 보답을 잠시도 지체해서
는 안 될 것 같기에 우선 보고하며 책자는 다듬기를 기다렸다가 수정하
여 올릴 계획의 연유입니다.
제(題): 이렇게 대첩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상하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의 군대의 행진을 계속하여 보고하라.

29) 점군(點軍):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가며 군사의 수효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38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여든여덟 [其八十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장성읍에 주


둔하였고 별 탈 없이 머무르며 주둔하고 음식을 공급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여든아홉 12월 초 4일 [其八十九 初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부대를 이끌고 무사히 장성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장병을 담양부로 파송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어제
유시 경에 대관 오창성이 담양부에서 일본군 대위와 함께 선봉진으로 돌
아왔는데 담양부에는 의병이 일어나 읍내를 방어하고 있으며 순창의 의
병도 와서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비류배(匪類輩)들은 경군(京軍)이 읍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달아나 흩어져서 하룻밤을 묵고서 선봉진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대관 신창희는 비류 거괴를 토벌하기 위하여 우선 담
양부에 나누어 주둔시켰으며 다른 읍에서 보고한 바는 별달리 경계할 것
이 없다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이후의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하라.

아흔 12월 초 5일 [其九十 初五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각 부대를 거느리고 별 탈 없이 장성부에서 밤을


묵었습니다. 이때 정읍의 비류 거괴인 손덕수(孫德秀)30)는 역적 손화중
의 집안으로 읍민들이 붙잡아 바쳤는데, 용대기(龍大旗) 1면(面) 및 수기

30) 손덕수: 잡힌 곳은 장성군 북하면 용두동이다. 손화중은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 이씨


제실에서 12월 11일 잡혀서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으므로 이때 처형되었다는 보고 내
용은 오류이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83
(手旗) 1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화중과 곤장수(棍杖手) 정정
칠(丁正七) 및 장성부 아곡(鵞谷)에서 잡아들인 거괴 이춘학(李春學) 3놈
을 어제 오시 경에 군민(軍民)을 장대(將臺)에 크게 모여 놓고 즉각 목
을 베어 백성들에게 경계로 삼았습니다.
어제 신시 경에 대관 신창희가 담양부에서 선봉진으로 돌아왔는데, 담
양의 접주 2놈을 잡아왔습니다만 일본군 진영에서 잡아 가두는 바람에
아직 문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오시 경에 일본군 대위의 통지에 따
라 병정 20명을 흥덕현으로, 병정 30명을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고창현
으로 파송하였습니다. 두 부대의 남은 병정은 영관 장용진・대관 신창희・
오창성이 거느려서 일본군 대위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와 함께 영광
(靈光)의 사창(社倉) 50리 지점으로 출발하게 하였습니다. 선봉진에서 거
느린 순무를 담당하는 관원 및 병정 30명은 그대로 장성읍에 머무른 연
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각처로 병사를 파송한 뒤의 상황을 자세히 살
펴 보고하라.

아흔하나 12월 초 8일 [其九十一 初八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완영과 왕복(往復)하는 문첩에, “심영


(沁營)에서 파견한 병정들이 태인 종송리(種松里)31)에서 거괴 김개남(金
介男)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도착한 순창(淳昌)의 소모관(召募官) 임두학(林斗鶴)의
보고에, “동비(東匪) 가운데 고부에 사는 전봉준은 본래 동도 중에서 맨
처음 선동을 주도한 거괴로 허다한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기는 어려우나

31) 태인 종송리: 현재 정읍시 산내면에 있다. 김개남은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


포되었다.
38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대중을 기만하여 군사를 만들어 관군에 항거하고 고을을 타파하고 창고


를 불사르며 마을을 겁략하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천리
의 사이에 오래도록 인가에 연기가 끊어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조리
이놈의 소행입니다.
옛날 홍산(鴻山)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여섯 곳의 성을 함락하고도
오히려 패역(悖逆)한 자라 일렀는데, 이놈은 60여 성을 함락하고 수만의
백성을 도륙하였으며, 두서너 고을의 수령이 살해를 당한 것도 이놈의
한 짓입니다. 그의 죄상을 따져보면 중국 한나라 때의 황건적에 비견될
만하고 오히려 명나라 때의 유적(流賊)보다 더 지나치니 그들을 섬멸하
고 주륙함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천신(天神)이 길을 인도하사 이달 초 2일 밤에
저놈이 김개남(金開男)과 서로 만나려고 순창의 피노리(避老里)32)를 몰
래 들렸는지라 그 마을의 선비 한신현(韓信賢)이 의거(義擧)를 분발하여
김영철(金永徹)・정창욱(丁昌昱) 두 사람과 함께 몰래 민간의 장정을 이
끌고 다방면으로 주선하여 그를 따라온 세 놈과 함께 일시에 생포하였습
니다. 이는 참으로 함정을 파놓고 맹호를 유인한 것이요 그물을 치고 맹
금을 기다린 것이라 이를 수 있으니 어찌 성덕(聖德)이 미친 바가 아님
이 아니며 세 사람이 의거를 분발한 것이 어찌 가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권장하는 방법으로 우선 이곳에서 1,000냥을 상금으로 주었고,
죄인 전봉준은 구격(具格)33)하여 본도의 순영문(巡營門, 전라감영)으로
압송하려 하였더니, 일본군 주력부대가 마침 읍으로 들어와 말하기를,
‘우리들이 남하한 것은 오로지 이 한 놈을 잡기 위해서였으니 함께 간수
(看守)하면서 경사(京司)로 압송하여 추국(推鞫)함이 당연하다고
’ 하면서
끌고 가니 이를 막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죄인 전봉준을 일본인에게 내

32) 순창 피노리: 현재 순창군 쌍치면에 있다. 전봉준은 옛 부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체


포되었다.
33) 구격(具格): 수갑을 지르고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우는 것을 말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85
주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김개남・전봉준은 바로 비류의 거괴로서 만 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벼운 자들이지만 나라의 법이 매우 엄하고 천리가 매우 밝아서 스스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니 매우 통쾌한 일입니다. 김개남을 체포한 심영의
병사에게는 반드시 완영에서 넉넉하게 격려의 상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
다. 그리고 전봉준을 체포한 순창의 선비 한신현 및 김영철・정창욱 세
사람은 비록 소모소(召募所)에서 상을 주었다하나 선봉진에서도 별도의
격려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순창읍에 신칙하여 어떤 종류의
공납(公納)이라도 1,000냥을 내어 지급한 뒤에 보고하도록 감결을 발송
하였습니다.
양호에는 아직도 법망을 빠져나간 거괴가 많아서 앞으로 그들을 체포
하는 길은 오직 각 지방 백성들이 의기를 분발하여 붙잡는 데에 달려 있
으니 앞서 말한 순창의 선비 한신현에게는 임금에게 알려 후한 포상을
내리고 김영철・정창욱 두 사람에게도 합당하게 별도로 포상하여 백성들
을 격려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제(題): 잘 알았거니와 포상의 은전은 의당 조정에서 처분이 있을 것
이니 이를 격려하고 권장하라.

아흔둘 12월 초 9일 [其九十二 初九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초 5일부터 초 8일까지 장성부에 주둔하여 별 탈


없이 밤을 묵었습니다.
방금 도착한 벽사 찰방(碧沙察訪)의 보고에, “동도 1,000여 명이 장흥
부의 사창(社倉) 등지로 모여들더니 이달 초 4일 진시 경에 이르러 여기
벽사역(碧沙驛)으로 곧장 쳐들어와 관아와 여염집을 다 불질러 태워버리
고 장흥부(長興府)로 향하니 그곳에 살던 백성들은 흩어져 우관(郵官)34)

34) 우관(郵官): 역참에서 일을 보는 찰방과 역졸 등을 말한다.


38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과 같은 능력으로는 대비책이 없어서 형세상 부득이 찰방인 제가 병영으


로 달려가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방책을 사유를 갖추어 대면하여 청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병영의 사또가 분부하기를, ‘비류들이 병영문 가까
이까지 닥쳤는데 방어하는 군사를 보내기가 몹시 어려우니 지금 이런 사
유를 초토영(招討營)에 가서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토영에 가서 역시 답답함을 고하니 분부하기를, ‘나주에서 군
병을 출발시킬 생각이니 역시 이런 사유를 가지고 주력부대에 가서 여쭈
’ 하기에 찰방인 제가 이미 면대하여 품고하였거니와, 비류들이 장
어라고
흥 성안에 침입하여 점거하고 부사(府使)를 곤박(困迫)하니 그의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비류들이 함부로 날뛰며 겁략하니 역
(驛)에 사는 백성들이 피하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
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월하(越下)의 군병35)이 아니면 그들
을 과감하게 섬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걱정스럽고 절박한 사정을 외람
되이 보고하니 특별히 처분을 내리어 경군(京軍) 몇 백 명을 출동하여
읍과 역에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로 하여금 전처럼 안도하게 해 주십시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공문에, “비류 10,000여 명이
본영에서 30리 되는 장흥 등지에 진을 치고 모여 있다가 이달 초 4일에
벽사역을 불질러 태워버리더니, 초 5일 새벽에는 장흥부를 함락하고 부
사를 잡아 마구 때려 머리가 다쳤는데 생사를 가늠할 수 없으며 공형을
포살하고 가호(家戶)를 분탕하고 남녀를 닥치는 대로 죽이니 유혈이 도
랑을 이루고 울부짖는 소리와 달아나 숨는 모양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
습니다.
또한 좌측 연안에서 탐문한 보초(步哨)에게 들으니 각처의 비류 수만
명이 현재 병영과 40리 떨어진 장흥 사창의 저자에 진을 치고, 장흥을
함락한 무리들과 합세하여 곧장 본 병영을 도륙하겠다고 흉악한 말을 마

35) 월하(越下)의 군병 : 본문에서는 경군(京軍)을 지칭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87
구 지껄였습니다. 방어와 수비를 아무리 엄히 단속하더라도 군병(軍兵)이
모두 민간의 장정이고 더구나 중과부적임을 생각하면 몸을 뒤척이며 자
나 깨나 노심초사하지만 방어할 재간이 없어 성을 잃는 환란이 조석으로
닥쳐왔습니다”라고 하는바, 병영과 역(驛)에서 알리는 보고가 이렇게 급
박하기 때문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진시 경에 나주를 향하여 출발하였으
며 여산(礪山)에서 군대를 위로하기 위해 보낸 물품은 책을 만들어 순무
사에게 올리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상황을 계속해서 달려와 보고하라.

아흔셋 12월 초 10일 [其九十三 初十日]

좌선봉진(左先鋒陣)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순무사께서 26일에 작성하


여 초 9일에 도착한 전령에, “지금 11월 25일 전하께 아뢰기를, ‘적도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선봉장 이규태를 좌선봉장(左先
鋒將)으로 임명하고 장위영 영관 이두황은 여러 번의 전공이 있으니 우
선봉장(右先鋒將)으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동학농민군
을> 섬멸하고 포획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
한다’고 하셨다. 이리하여 전령하니,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통위영・경리
청・교도대 세 부대의 장관 이하 병정들을 거느리고 전처럼 절제(節制)하
여 우선봉진(右先鋒陣)과 충분히 상의하여 길을 나누고 기한을 정하여서
적을 섬멸하고 포획하라. 좌선봉진의 수기(手旗) 1면(面)을 새로 만들어
내려 보내니 수령하면 마땅히 급히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아흔넷 [其九十四]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난 24일에 도착한 전의현감의 보고에, “전의현


지경에 있는 비류들의 거괴와 겉으로만 고치고[革面]36) 속마음을 고치지
38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않은 무리, 그리고 다른 경내에서 쫓겨 와서 숨은 자들을 하나하나 적발


하여 섬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큰 군대가 사방에 있고 기찰포교(譏
察捕校)가 두루 돌아다니니 비도가 겁내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런데도 잡을라치면 더욱 더 깊숙이 숨어 잡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민
심이 안정되지 않아 기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현감이 몸소 마을을 다니면서 특별히 더욱 타일러 깨우치고
화를 받을지 복을 받을지는 타일러 그들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며 저 비
류들로 하여금 모두 의구심을 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서 때를
틈타 체포하면 빠뜨리는 자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별
초군(別哨軍)과 모의하여 기한을 정해놓고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본영의 참모가 성묘하러 온 길에 비밀리 계책을 짜내어 이달 20일 밤에
대대적으로 교졸(校卒)을 출동시켜 비류들의 거괴 25인을 잡았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문초해보니 전의현 경내에 사는 비류들의 거괴 8놈 모
두가 순무사의 본가에서 변을 일으킨 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놈
들은 세성산에서 쫓겨난 자들, 또는 임오군란 당시 목숨을 부지하기 위
해 도망쳤다가 다시 동학작경(東學作梗)에 들어가 한없이 못된 짓을 한
자들인 까닭에 한시라도 그 수령(首領)들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다시 지체한다면 무슨 변고가 생길지 염려되어 즉시 본영의 참모와 함께
삼가 위령(威靈)37)에 의거하여 모두 즉시 포살하였습니다. 포살한 비도
의 성명을 책자로 엮어 올리며 비류들이 숨겨둔 군물 일체도 찾아냈기에
아울러 책자로 만들어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책을 베껴서 순무사께
올리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거괴를 체포하고 포살했다니 혹 변고가 생길까 염려된다. 각별
히 자세하게 살필 것이고 만든 책은 받았다.

36) 혁면(革面): 주역 에 “군자는 표범이 변하듯 하고 소인은 얼굴만 변한다[君子豹變小


人革面]”라는 데서 나온 말인데, 마음은 감복되지 않고 다만 안색만 변하는 것을 말
한다.
37) 위령(威靈): 임금의 빛나는 위엄을 말한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89
아흔다섯 [其九十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본진에서 타고 온 기마금군(騎馬禁軍) 박영준(朴永


俊)의 말과 군수물품을 실고 온 총어영 복마군(卜馬軍) 원명돌(元明乭)의
말이 태인읍에 이르러 폐사하였습니다.
방금 도착한 통위영 참영관 장용진의 보고에, “총어영으로부터 옮겨온
김광운(金光云)의 말이 12월 초 4일에 폐사하였습니다”라고 하는바, 마
부와 함께 상부로 보내는 연유의 일입니다.

아흔여섯 [其九十六]

보고하는 일입니다. 호연초토사(湖沿剿討使)의 보고에 의하면, “순무사


께서 전령하신 가운데 내용을 간추리면, ‘방금 별군관 이창식(李昌植)이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린 작태를 들으니 몹시 통탄스럽다. 그곳 진영으로
’ 하신바, 전령이 도착하면
잡아와서 바로 문초하고 가둔 다음 보고하라고
즉시 조사하여 보고하기 위하여 그에게 와서 대기하도록 통지하였으나
내포(內浦)의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없어 시행하는 일이 자연
히 지체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지난달 25일에 작성하여 이달 초 8일에 도착한 별군관 이창식의 보고
내용에, “이달 13일에 태안(泰安) 백화산(白華山)38)에 비류들이 모여 진
을 친 일을 급히 보고할 때에 거두 유규희(兪圭熙)・최성서(崔聖西)・최성
일(崔聖一)・안순칠(安順七)・피만석(皮萬石) 등 다섯 놈은 죄상을 열거하
고 잡아서 상부로 압송하였거니와, 태안 및 이 경내에는 비록 비류들이
모여 있지 않았으나, <동학농민군의> 흉화(兇禍)를 당하여 온 읍의 백
성들이 생업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즉시 각 면리(面里)에 지시

38) 백화산: 태안 관아의 뒷산으로 현재 태안군청 뒤에 있다. 이 산에 농민군이 집결해


있었고 그 중턱에 교장바위라 불리는 바위에서 농민군을 처형하였다 한다.
39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민심을 수습하고 습성을 고쳐 귀


화케 하여 각자의 생업에 안주하도록 하였습니다.
변을 일으킨 거괴는 일일이 체포하여 법대로 처치하고 어지간한 수종
자(隨從者)들은 경중을 가려 별도로 징계하고 풀어주었습니다. 죄인의 목
록은 책을 만들어 올리거니와 괴수들을 섬멸시켜 다시는 싹이 나지 않도
록 계속해서 뒤쫓아 잡을 때에 일자가 절로 어긋나고 더뎌져서 시행됨이
극히 죄송하고 민망스럽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울러 보고하니 처분해 주
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연이어 도착한 지난달 26일에 작성한 이창식의 보고 내용에,
“분부를 받고서 이 읍에서 군대를 머물게 한 뒤에 변을 일으킨 거괴를
잡아 처형하고 그들을 뒤따르던 여러 사람 중에 죄가 의심스러운 자들은
징계하고 풀어주었습니다. 번거롭게 하나하나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 중에서 괴수 안순칠의 진술에 따라 동참했다는 유상희(柳相喜)를 바
로 군사를 동원하여 체포하였으나 유상희가 진소(陣所)로 미처 이르기도
전에 초토영으로부터 유상희를 놓아주라는 전령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즉
시 놓아준 사유를 초토영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교(題敎)한 내용에, ‘체포하는 일과 토벌하는 일은 각각 관장하
는 곳이 있을 뿐더러 토벌하는 군대가 체포하는 일을 한다면 더욱 마땅히
공명정대해야 하거늘, 여러 읍을 돌아다니며 병사를 풀어 놓아 약탈을 하
니 난리를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이따위 소요를 당하게 한 것이며 게다가
침탈을 당한 백성들은 유독 넉넉한 집이었으니 그들이 옥을 소지한 죄39)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행진하는 군대를 통제함에 있어 가당키나 한 일
인가? 진실로 군대의 기율로써 논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을 위
해서 우선 용서할 것이니 제교가 도착하는 대로 회군하여 진영으로 돌아

39) 옥을 가진 죄: 주(周) 나라 속담에 “필부가 무슨 죄가 있나, 옥구슬을 가진 것이 바


로 죄라네[匹夫無罪 懷璧其罪]”라는 말이 있었다 하는데, 이후 재물 때문에 재앙을
초래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91
오고 군대의 기율을 거듭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유상희를 중도에서 방환하여 살려준 일개의 사건은 조금
이라도 있을 수 없으며, 백성들을 약탈했다는 말씀이 있으니 만약 잘못
염탐한 단서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모함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죄인을
쫓아가 잡을 때에는 각 마을의 유막(儒幕)40)에서 잡아 바치는 대로 경중
을 분별하여 법으로 처분할 뿐이며, 간혹 어쩔 수 없어 군대를 동원하여
잡을 경우에는 먼저 병사들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백성들을 침해하는 행
위를 단속하고 게다가 몰래 염찰하여 못된 짓을 막으려 하지만, 가령 아
래에서 못된 짓을 범하려고 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일의 체모를 말한
다면 행군하는 부대가 신속하게 왕래하는 것은 마땅한 군례(軍例)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 군대가 머무를 적에, 부로(父老)와 아이들이
모여들어 씨를 뿌리면 씨가 나는 염려가 있어서인지 움직일 때마다 만류
하여 마음대로 이동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길을 막고 거리를 메우고 울
면서 ‘신관(新官)의 부임이 며칠 사이에 있을 것 같으니 신관이 부임해오
면 교대하여 출발해야만 우리의 성명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복잡한 상황에 관계되고 참으로 사정(私情)에 걸려 또한 뿌리치
기 어려웠으니 즉시 출발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착한 해당 진영의 제교(題敎)가 이와 같이 엄중하니 어찌 송구함
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장차 백성을 효유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출발할
것이며 이런 사정을 우선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서산에 사는 백성들이 같이 올린 소장에, “이제 통위영 군대
가 만약 출발하여 행군해 가면 온 경내의 백성들은 의지할 바를 잃게 됩
니다. 본 군에서 신관의 부임이 하루 이틀 사이에 있을 듯하니 우선 머
물렀다가 교대하고 출발하라고 죽기를 무릅쓰고 만류하고 있습니다. 그
런데 초토영으로부터 어찌하여 그렇게 못하는 사단(事端)이 있는지 밤을

40) 유막(儒幕): 유림들이 농민군 토벌 군사를 모으려고 둔 임시 처소를 말한다. 이들이


소모(召募)한 군사를 민보군 또는 유회군 수성군이라 불렀다.
39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가릴 것도 없이 출발하라고 지시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굳게 붙잡고


이렇게 한 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고 하는바, 그 날짜를 따져보니 이
미 출발하였을듯하나 그 시행하는 일로보아 약간 늦춰짐을 면치 못할 것
입니다. 순무사께서는 참작하여 처분해 주십시오. 책을 만들어 등서하여
순무사께 올리는 연유입니다.
제(題)

아흔일곱 12월 12일 [其九十七 十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장성을 떠나온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행군하여 40리를 가서 북창참(北倉站)에 도착하여 별 탈 없이 유숙하였
고 초 10일 진시 경에 발행하여 신시 경에 나주목(羅州牧)에 이르러 별
탈없이 유숙하였습니다.
초 7일에 발송하여 초 9일에 도착한 강진병영(康津兵營)의 보고문에,
“비류들이 장흥을 무너뜨리고 침입한 사유는 어제 급히 공문을 보냈거니
와 계속해서 동태를 정탐해 보니 비류들이 장흥부사를 포살하고는 불태
워 버렸으며 사람들을 총검으로 쏘고 찔러 죽이니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흘러 절굿공이가 떠다닐 지경인지라 피비린내가 온 성안에 가득하
며 각 관청 및 인가는 모두 불태워버렸고 겨우 객사(客舍)만 남았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초 6일 사시 경에 벽사역(碧沙驛)의 뒤쪽 고개로 이
동하여 진을 치더니 미시 경에는 다시 장흥・강진 본영의 접경지인 사인
점(舍人店) 앞 들로 이동하니 본영과 10여 리에 불과합니다. 저들의 흉
칙한 말이 낭자하게 선전되어 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을 공격하여 과연
예측하기가 어려우므로 미약한 군사로는 방어할 대책이 없어 위급한 화
가 경각에 닥쳐옴에 어찌 황급하게 보고하지 않겠습니까? 장흥부사가 피
살됨에 관인과 부절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고 공형들도 함께 죽
어 일을 집행할 사람이 없고 온 성 안은 텅 비어 공문이 계류되고 있는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93
것을 무어라 책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시라도 급히 저들과
상대할 군사가 없으면 본영을 잃는 환란도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귀 군영에서는 특별히 속히 지원하여 한 영(營)을 보전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차례로 도착한 공문에, “저 무리들이 사인점 앞들로 이동하여
주둔한 사유는 벌써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저들은 오늘 사시 경에 강진
현을 침범하여 인가를 분탕하고 총포를 쏘고 칼로 찔러 백성들이 울부짖
고 도망쳐 숨는 사태를 보발(步撥)로 급하게 보고하니 <동학농민군이>
본영을 곧바로 도륙함은 지금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화가 곧 닥쳐올 것
임에 이에 재차 급히 공문을 띄우니 귀 군영에서는 정예 병사를 촉발시
켜 주야를 가리지 말고 달려와 지원하여 이 한 영(營)을 보전하게 해주
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초 8일에 발송하여 초 10일에 도착한 공문에, “비류들이 강진현을 침
입한 사유는 어제 이미 발마(撥馬)로 달려가 공문으로 보고하였거니와,
비류가 어제 축시 경에 각처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현재 세 갈래 길로 본
영을 침입하려 합니다. 그런데 장흥・강진의 관아는 함락되어 병사를 징
발할 방도가 없으므로 영암군(靈巖郡)에 지시하여 포군(砲軍)을 징발하려
발마로 재촉하기를 이미 89
․ 차례나 하였는데도 거짓과 농락만을 일삼고
즉시 서둘러 보내지 않으니 희망을 잃는 걱정이 당장에 닥쳐왔습니다.
영암군수의 소행을 살펴보건대 어찌 놀랍고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바
야흐로 장계로 아뢰어서 감처(勘處)41)할 것이거니와 만약 귀 군영에서
호응하여 주지 않으면 성이 함락되는 변고를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특별히 굽어 살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초 10일에 발송하여 12일에 도착한 공문에는, “지금 여기에 비류 수천
명이 관군보다 먼저 성 아래에 당도하여 위급함이 눈앞에 있으니 주야를
가리지 말고 와서 지원해서 한 영(營)을 보전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

41) 감처(勘處): 죄를 심리하여 형벌에 처하는 것을 말한다.


39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였습니다.
연이어 도착한 강진현감의 보고에, “이달 초 7일 진시(辰時) 경에 동
도 10,000여 명이 장흥부로부터 내려와 사방에서 쳐들어와 성을 함락하
고 인가를 불태워버려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장리(將吏)・별포수(別
砲手)・수성군(守城軍)과 성에 가득했던 백성들을 포살하고 도륙하니 살
아 도망친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였으니 엎드려 황송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달아 일본 진영에 통보하였고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의 통
지에 따라 세 갈래로 병사를 조발(調發)하여 이시구로 고세이(石黑光正)
는 그 휘하 1개 소대 및 2개 분대와 교도중대 2개 분대를 거느리고 영
암 땅으로 출발하고 제 1중대 1소대 및 통위영 병사 30명은 능주(綾州)
땅으로 출발하고 히라기(白木) 중위는 그 휘하 병사 및 교도대의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장흥 땅으로 출발하니 군대의 수는 모두 일본 진영에서
총괄하여 통솔하였기 때문에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보고하오며 선봉진은
그 휘하의 남은 부대를 거느리고 진시 경에 60리를 행군하여 유시 경에
무안읍(務安邑)에 도착하여 별 탈 없이 묵고 음식을 공급할 연유의 일입
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상황을 계속해서 급히 보고하라.

아흔여덟 12월 13일 [其九十八 十三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서산군수 성하영 진영으로 부임한 참


모관 권종석・별군관 유석용의 보고에, “한산・서천의 비류들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유는 서산군수에게 보고하여 속속들이 알렸거니와 이달 초 2일
에 군수가 부임하기 위해 경리청 병정을 거느리고 비인・남포로 방향을
바꾸었고 저희 참모관・별군관은 선봉의 본진으로 부임하려 서천 송동(松
洞)으로 길을 나누어 출발하였습니다. 가면서 각별히 연로의 정형(情形)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95
을 살피니 비류 가운데 궤멸되어 흩어진 잔당들이 왕왕 말썽을 일으키니
단기(單騎)로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산군수와 충분히 상의하여 결정하고 경리청 병정 20명을 나
누어 거느리고 당일 유시 경에 지나는 길에 한산읍에 도착하여 묵으면서
읍민(邑民)을 불러 모아 낱낱이 효칙(曉飭)하고 위무(慰撫)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초 3일에 부대를 이동하면서 나루를 건너려고 한산의 죽산(竹山)
나루에 도착하니 한산 주민 수백 명이 말하기를 ‘함열・웅포의 비류들이
와서는 한산성을 함락하고 읍촌(邑村)을 몽땅 태워버렸으니 이들 경군(京
軍)의 뒤를 따라가서 그 곡절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어
배를 타려하기에 하나하나 금지해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웅포의 앞 바다에 도착하니 웅포 주민들이 배가 대는 것을 엿보고는 사
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나루 주변에 배를 정박하고 백성들을
불러 타이르고 안도시켰습니다. 뒤를 이어 한산의 부보상(負褓商) 및 웅포
주민이 힘을 합쳐 잡아 바친 자는 바로 한산읍을 불지를 당시 앞장서서
변을 일으킨 최득용(崔得用)이었습니다.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고는 당장
에 처단하고 이어서 함열읍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무사히 묵었습니다.
그 이튿날 초 4일에 조반을 먹은 뒤 지나는 길에 읍 근처 상와촌(上瓦
村)에 도착하니 이곳은 본래 <동학농민군의> 소굴인지라 그래서 정탐하
여 수십 명을 붙잡았고 낱낱이 캐어물으니 모두 양민인 까닭에 효유(曉
諭)해서 놓아 보내주었습니다. 소위 비류를 따랐던 천귀돌(千貴乭)은 막
은신하였다가 붙잡혔는데 자복(自服)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분명
히 증언한 까닭에 즉시 처단하였습니다.
익산(益山)의 경계에 이르니 좌우로 울창하게 수십 리나 되는 소나무
숲에서 연달아 포성이 났는데 멀지 않은 가까운 곳인 듯했습니다. 그러
나 미약한 병력으로는 정찰할 수 없어 서둘러 익산읍에 이르러 알아보니
익산읍 미륵면(彌勒面)의 거괴 오경도(吳敬道)가 여기에서 출몰하여 스스
로 기포(起包)한다고 말한 연고로 익산군수・이교(吏校) 및 병정 5명을
39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독려해 같이 보냈으나 오경도란 놈은 이미 도망쳤고 그놈의 부하인 포사


(砲士) 7명을 붙잡았습니다. 그 중에 최영환(崔永煥) 등 세 놈은 비록 나
쁜 짓을 같이 했다고는 하나 억지로 가입한 것이 분명하여 타일러서 석
방하였습니다. 최정선(崔定仙) 등 네 놈은 익산읍의 군기(軍器)가 탈취를
당할 때에 총을 가지고 변을 일으킨 행위를 여러 사람이 목격하였다고
하므로 조사하여 실정을 알게 되어서 백성을 많이 모아놓고 사방으로 뚫
린 큰 거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
그들이 탈취한 군기는 저들이 사는 집 뒤에 묻어두었다 하므로 즉시
찾아오도록 익산읍 공형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전술한 죄인 6놈은 즉시
진영의 앞으로 압송하여 대기시켜야 하지만 갈길이 요원하고 비류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빼앗길 우려가 없지 않기에 스스로 결단하여 처결하였
으니 지극히 황송하며, 이달 초 6일 미시 경에 완영에 도착하여 우선 머
물러 주둔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참모관・별군관 두 사람이 경리
청에서 부임하러 가는 길에 한산・임천・서천 등지에서 현저한 공적이 많
았고 이번 연로에서 조처(措處)함에도 수고가 많았으니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 하다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이후의 상황을 연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아흔아홉 [其九十九]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함평현감의 보고에, “본 읍은 병정을


모집하여 성을 지키고 동학도당(東學徒黨)을 다른 길로 뒤쫓아 체포하였
는데, 이달 초 5일에 본 현의 거괴(渠魁) 이화진(李化辰) 및 접주 김경오
(金京五)・이춘익(李春益)・노덕휘(魯德輝)・이자면(李滋冕)・이곤진(李坤辰)・
김성필(金成必)・김인오(金仁五)・김성서(金成西) 등 9명을 힘써 체포하고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
초 6일에는 접주 김치오(金治五)・정곤서(鄭坤西)・김경선(金京先)・윤경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97
욱(尹景郁)・정곤서(鄭坤西) 등 5명도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
니다. 그리고 거괴 이화진의 수종자(隨從者)인 조병묵(曺丙黙)・서우순(徐
佑順)・김문조(金文祚)・이응모(李應模)・김봉규(金奉圭)・박준상(朴俊尙) 등
6명은 이화진이 포획될 당시 모두 붙잡아 구격하여 엄히 가두고 처분을
기다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차례로 도착한 같은 현감의 보고에, “이달 초 7일에 본 현에서 비류들
의 접주 이두연(李斗連)・김정필(金定必)・이관섭(李觀燮)・이창규(李昌奎)・
공명오(孔明五) 등 5명도 포획하여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라고 하
였습니다. 차례로 도착한 같은 현감 보고에, “이달 초 8일에 본 현의 동
도 접주 이재복(李在卜)・김원숙(金元叔) 2명도 붙잡아 포살하였습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잇달아 도착한 같은 현감의 보고에, “이달 초 9일에 본 현의 비류 거
괴인 윤정보(尹正甫)・장경삼(張京三), 대접주 박춘서(朴春西)・정평오(鄭平
五)・김시환(金時煥)・윤찬진(尹贊辰)・김경문(金京文)・박경중(朴京仲) 등 8
명도 잡아서 포살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도착한 영광군수의 보고에, “지금 비류들을 체포할 때에 여러 사람
의 요구에 부응하여 의병이 일어나 성을 지켜서 환란을 막아낼 수 있었습
니다. 지금 흥덕・고창・무장 등 3개 읍의 유생들의 소장(訴狀)을 보니 각
읍에서는 전 주사(前 主事) 김상녕(金相寗)를 창의장(倡義將)으로 삼기를
원하니 본 읍의 수성군을 또한 입회하게 한 다음 네 읍의 창의장으로 임
명하는 공문을 내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도착한 같은 군수의 보고에, “본 군 홍농면(弘農面)의 이현숙(李賢
淑)은 여러 번 의병으로 출동하여 동학 괴수 송문수(宋文守)를 붙잡아
머리를 바쳤으며 잔당 10여 명도 붙잡아 왔기에 바로 수성의 일을 맡겼
습니다”라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붙잡힌 수종자(隨從者) 6명은 만일 귀화하거든
타일러 석방할 것이다. 이현숙이 의기(義氣)를 내어 거두를 잡아 바쳤다
39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니 가상한 일이다.

일백 12월 14일 [其一百 十四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장성 한 읍이 이미 군기(軍器)를 분실하였고 이어


서 4개월 동안 관아가 비었으니 소위 비류들이 만연하여 숲을 이루고 오
장육부처럼 서로 이어져서 읍촌(邑村) 간에 무리를 모아 행패를 부리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본진이 들어가 주둔한 뒤로 방문을 게시
하고 효유(曉諭)하여 흩어졌던 주민을 대략 모으고 각 면리(面里)에 신
칙하여 거괴를 잡아오게 하여 죄의 경중을 참작하여 처단하였습니다.
장성부의 동쪽 용두리(龍頭里)는 본디 비류들의 소굴로 아전과 백성들
이 좇아가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병정 및 별군관 이재화(李在華)・황범
수(黃凡秀) 등을 파견하여 거괴 세 놈을 잡아서 백성들이 바라는 대로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 별군관 등이 그의 소굴로 깊숙이 들어가
위험을 가리지 않고 의기를 떨쳐 찾아내어 잡아왔으니 심히 가상한 일입
니다. 이에 합당한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1일 유시 경에 무안읍에 이르러 별 탈 없이 묵었습니다. 무안현 역시
비류들의 소굴로 거괴가 많이 있어서 수성군을 조직하여 각 면의 민간
장정들과 협동하여 접주 70여 명을 잡아 가두었고 그 밖에도 빠져나간
자들이 많았는데 본관(本官)은 민원(民願)에 따라 30명을 처단하였고 40
여 명을 가둬놓았습니다. 그 중에 배상옥(裵相玉)・배규찬(裵奎瓚) 형제는
무안의 거괴일 뿐만 아니라 하도(下道)의 연해(沿海) 지역에서 당초부터
괴수로 일컬어진 자로 김개남・전봉준・손화중・최경선(催景善) 등의 역적
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배상옥은 법망을 빠져나가 도주하였고 배규찬은 체포하여 가두어 놓았
습니다. 그래서 군민을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목을 베었고 그 다음의 거괴
9놈은 동시에 포살하였습니다. 잡아 가둔 여러 놈들은 본현에다 감결로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399
신칙하여 본현에서 죄의 경중을 분간하여 처리한 뒤 보고하였습니다. 두
읍에서 죽인 여러 놈들은 책자를 만들어 순무사께 보고하는 일입니다.
제(題)

백하나 12월 15일 [其百一 十五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전(前)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의 보고


에, “지난달 29일 금영의 통지에 따라 대관 김명환에게 병정 반개 소대
를 거느리고 참영관 이윤철(李潤徹), 교장 고진룡(高振龍), 금영 군관 장
윤국(張允國)과 함께 연산읍으로 출진(出陣)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관동포(關東包)의 우두머리 정판손(鄭判孫), 그 곳의 접주(接主) 김현구
(金鉉龜), 노성(魯城) 대명포(大明包) 접주 박만은(朴萬殷), 전봉준의 수
하(手下)로 이른바 오영도순찰(五營都巡察)이라는 명색의 이현석(李鉉石)
등 네 사람을 체포하여 즉시 큰 거리에서 포살하였고 그 나머지 김춘실
(金春實)・도정택(都正澤) 등 14명은 모두 귀화한다 하므로 효유(曉諭)하
여 석방하였습니다”라고 하는바 그런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상황을 연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백둘 [其百二]

보고하는 일입니다. 바로 도착한 행담양도호부사(行潭陽都護府使)42)의


보고 내용에, “방금 도착한 감결의 내용을 간추리면 ‘체포한 비류들의 접
주 이가(李哥)와 국가(鞠哥)43)은 거괴다. 가쇄(枷鎖)44)를 갖추어 도호부의

42) 행담양도호부사(行潭陽都護府使): 벼슬아치를 임명할 때 곧잘 행수법(行守法)을 적용


하였다. 행은 관계(官階)가 높고 관직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위에 붙여 쓴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수를 붙인다. 따라서 당시의 담양부사는 관계가 직책보다는 높은
벼슬아치가 임명되었음을 뜻한다.
40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옥에 가두고 공초한 뒤 그 기록을 급히 보고할 것이며 노획한 조총 10자


루는 순창 의병중군(淳昌義兵中軍)인 신기찬(申基燦)에게 물어보고 5자루
씩 두 읍의 의병소(義兵所)에 나누어 쓰게 한 뒤에 상황을 급히 보고하라’
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이에 일본군 주력부대가 여기 담양부로 들어와 각
죄인들을 취조함에 미처 다 마치지 못한 탓으로 이제 겨우 보고합니다.
그리고 이달 초 3일 일본 주력부대가 담양부로 들어올 때에 순창의
소모 중군(召募中軍) 신기찬 및 군관 임민학(林敏鶴)이 그곳 병정 150명
과 옥과(玉果)에서 온 의병군 100명을 거느리고 약속한 기일보다 먼저
도착하였고 별군관 황범수・이지효・이선 및 담양부 의병장 구상순(具相
淳)・수성군 통령(守城軍統領) 박동진(朴東眞)・국치열(鞠致烈)・작대별장(作
隊別將) 국희열(鞠羲烈) 등이 함께 작전을 짜고 힘을 합쳤기에 담양부
수성군 가운데 300명을 징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군대는 별도로 부교(府校)와 통령(統領)을 정하고 비류들을 쫓아가
체포하였는데 거괴 이장태(李長泰)를 즉시 체포하여 먼저 강성[鴟張]45)
한 기세를 꺾어 놓았습니다. 백성과 고을을 생각하면 실로 천만다행입니
다. 그리고 같이 체포한 죄인 중에 국문보(鞠文甫)・김희완(金喜完) 2놈은
이미 진중(陣中)으로 압송하였으며, 거괴 이장태는 어제 일본군 대대가
담양부로 들어와 떠날 때에 압송하여 갔습니다. 그 밖의 놈들은 대대가
그곳 읍에서 죄의 경중에 따라 처리하라고 하여 모두 가두었고 공초를
받은 뒤에 책을 엮어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장태는 여기 호남의 거괴이고, 국문보・김희완 역시 그곳 읍의 괴수

43) 이가(李哥)는 이장태, 국가(鞠哥)는 국문보이다. “장태”는 본명이 아니라 농민군이 개


발한 무기인 장태를 뜻하는데 당시 장흥의 접주 이방언이 발명하였다 하여 이 별명
으로 부르기도 하였고 장성출신 이춘영이 발견해 제작하였다 하여 별명으로 불렀다
고도 한다.
44) 가쇄(枷鎖): 죄수의 목에 씌운 칼과 발목에 채운 쇠사슬을 말한다.
45) 치장(鴟張): 흉포한 사람은 치조(鴟鳥 솔개)가 날개를 벌리고 덤비는 것 같다는 뜻
이다.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손견전(孫堅傳)」에, “동탁(董卓)이 죄를 두려워
하지 않고 치장하여 큰소리를 친다”하였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401
인데 일본 군대가 압송해 갔으며, 본영의 별군관 황범수・이지효・이선 및
담양부 의병장 구상순 등에게는 합당한 포상의 은전이 있어야 한다는 연
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별군관과 의병장에 대한 포상은 이 뒤에 마땅
히 임금에게 아뢰어 시상케 하라.

백셋 12월 17일 [其百三 十七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무안읍으로부터 목포를 향하여 출발한 사유는 이


미 보고하였거니와, 13일 유시 경에 목포진(木浦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밤에 비가 내린 뒤에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더니 16일에 이르러
서도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퇴하자니 200리를 돌아서
가야하고, 전진하자니 30리 험한 나루를 건너야 하겠기에 별다른 방법이
없어 나흘을 체류하였습니다. 군사의 행군을 생각해보건대 극히 송구하
고 민망스럽습니다.
상민(商民)에게는 이미 해당 소임(所任)에게 철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바, 상리국(商理局)의 소임(所任) 이완배(李完培)・송성은(宋成雲)은 여기
서 올려 보냈으나 올라가는 길가의 마을이 아직도 안정되지 않아 공사
(公私)의 전령을 번갈아 보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경포교(京捕校)46) 또한 긴하게 관련된 일이 없기 때문에 내려온 두 사람
의 포교도 함께 출발하게 하였습니다. 상리국의 소임 두 사람은 천리종
군하면서 보초를 설 때나 정탐할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를 다하였으
며, 포교 정태식(鄭台植)・이성근(李成根)도 역시 비류들을 뒤쫓아 체포하
고 문초하는 일에 애를 많이 썼으니 모두 매우 가상합니다. 또한 각 읍

46) 경포교(京捕校) : 서울에 있는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의 포교로 포도부장(捕盜部將)


의 별칭이다.
40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의 상민(商民)들로 말하면, 비류들이 창궐할 즈음에 각기 화를 피하면 감


히 몸둘 바가 없다가 군대가 행군한 뒤로 차차 모여들어 얼른 임방(任
房)47)을 만드는가 하면 종군하여 일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초를 설 때에 부지런히 노고를 다하고 조금도 실수가 없었는
바, 의당 각 읍으로부터 그들을 권장(勸獎)함이 있어야 하는데 감히 마음
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장흥・강진・영암・해남 등의 읍으로 각 진영을 골라
파송한 뒤로 비류들의 상황은 아직 정탐하지 못하고 또한 보고된 바도
없으니 군무(軍務)에 있어서 극히 민망스럽고 답답한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상황을 연속해서 급히 보고할 것이고 상민들이
정탐한 일과 경포교(京捕校)가 부지런히 애쓴 것은 가상한 일이다.

백넷 12월 20일 [其百四 二十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15일에 작성하여 20일 인시 경에 도착한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의 보고 내용에, “금영 순찰사 지휘에 따라 대관 김명환과
참모관 이윤철(李潤徹), 교장 정재원(鄭在元)으로 하여금 병정 70명을 거
느리고 이달 초 8일에 거괴를 토벌하고 체포하게 하려고 보은・청산 등지
로 출발시켜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관 김명환의 보고(手本)에, ‘초 9일에 회덕에서 유숙하고 초
10일에는 옥천에서 유숙하면서 비류들이 영동 용산(龍山) 장터48)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11일 청산으로 군대가 행군할 즈음에 청주 병사
180명을 청산 땅에서 상봉하여 진영을 합하고 청산읍에서 유숙하였습니
다. 12일 새벽에 군대를 출동하여 영동 용산 장터로 출발해 가니 적의
형세가 호대(浩大)하고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47) 임방(任房) : 보부상들이 모여 노는 곳을 말한다.


48) 용산장터: 영동 용산면에 있는 장시를 말한다. 북접군은 이곳에서 패전한 뒤 보은
북실로 가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 403
서로 거리를 두고 접전을 하여 비류 5∼60명을 포살한 다음 이어서
비류들을 추격하였더니 탄환이 떨어져 군대를 돌려 산으로 올라갔습니
다. 그러자 적들의 형세가 다시 강성해졌고 사면으로 포위해 와 형세상
회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순무영의 참모관 이윤철 및 본
영의 좌소대 병정 김창운(金昌云) 1명・진만영(鎭南營)의 병정 1명이 총
포에 맞아 죽었으나 시신은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군사의
수효를 점검하니 좌 1소대 병정 이기준(李基俊)・김억석(金億石)・김태산
(金太山) 3명도 낙오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으되 바로 청산읍으로 회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읍 역시 적들의 소굴이어서 항거하며 총포를 쏘
기에 머물러 주둔하지 못하고 다시 보은으로 회군하였습니다.
그러자 저 무리들이 우리 군대가 미약한 것을 엿보고서 사면에서 추격
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13일 청주 병영으로 회군한다’고 합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애당초 군대가 출동할 적에 지나가는 군읍(郡邑)에 순라
를 돌고 보초를 서게 하였기 때문에 병정이 많지 않았으며 탄환도 넉넉
하지 못한데다 갑자기 적당을 만나 이렇게 손실을 입는 지경에 이르렀습
니다. 참모관과 두 병정의 죽음은 그 참담하고 애통함이야 다 말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리고 관군도 따라서 체모가 손상되었으니 얼마나 죄송하
고 민망스러운 일입니까? 충청도의 각 읍이 굳이 일시의 편안함을 두고
무사하다고 말하면서 각 면리에서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규율이
전연 해이하여 <동학농민군이> 이렇게 잡초처럼 뻗어내려 무성해지는
데에 이르렀고 마침내 모여들어 다시 창궐하게 하였으니 법과 기율을 생
각하면 극히 통탄할 뿐만 아니라 잠적했던 비류들이 다시 뒤이어 일어날
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미리 난리를 방지하는 경계[綢繆之戒]49)가 있어
야 할 것입니다. 실로 근심되는 바입니다.

49) 주무지계(綢繆之戒): 주무하는 경계를 말한다. 주무는 주무미우(綢繆未雨)로, 장마가


오기 전에 올빼미가 뽕나무 껍질을 벗겨다가 둥지를 단단히 동여맨다는 뜻으로 재난
을 미연에 방지함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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