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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역사인식
강문식
학습 내용
1. 고려 전기의 역사 서술
2. 김부식의 생애
3. 『삼국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
고려 전기의 역사 서술
2 남 : 김부필 ( 金富佾 )
1 남 : 김부필 ( 金富弼 )
문과 급제 [ 연대 미상 ]
1088 년 ( 선종 5) 문과 급제
직한림원 ( 直翰林院 ), 평장사 ( 平章
1107 년 ( 예종 2) 여진 정벌 참전
事)
4 남 : 김부철 [ 의 ]( 金富轍 [ 儀 ])
1097 년 ( 숙종 2) 문과 급제
3 남 : 김부식 ( 金富軾 )
직한림원 ( 直翰林院 ), 지추밀 ( 知樞
密)
(cf) 이자겸 집권기에는 이자겸의
김부식의 활동과 업적 전횡에 맞섰던 신진 관료
역사가
고려 중기 대표 유학자
왕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유가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삼국사기』 , 『예종실록』 , 『
불교 비판 , 신라 유학자 행적 부각
인종실록』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 정면 )
고려 전기에 제작
비문 ( 碑文 ) 을 김부식이 지음
•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므로 왕에게 칭신 ( 稱臣 ) 하지 말도록 하자는 주장 제기
→ 김부식이 반대
“( 전략 ) 비록 천자의 아버지라 하더라도 존호가 없으면 , 왕으로 하여금 절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 또 위제 ( 魏帝 ) 의 아버지 연왕 ( 燕王 ) 우 ( 宇 ) 는 표문 ( 表文 ) 을 올릴 때에 칭신 ( 稱
臣 ) 하였습니다 . 부자가 지극히 가깝다고 하더라도 예수 ( 禮數 ) 가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
하물며 외조부는 어떻겠습니까 ? 『의례 ( 儀禮 ) 』의 오복 ( 五服 ) 제도를 살펴보면 어머니의
부모는 복 ( 服 ) 이 소공 ( 小功 ) 으로 5 달에 그칠 뿐이니 자기의 부모와는 존중하고 가까이
함에 거리가 있습니다 . 어찌 똑같은 예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 마땅히 표문을 올릴 때는
칭신하고 왕정에 있을 때는 군신의 예를 행하며 궁궐 안에서는 집안 사람의 예로 서로 만나야
합니다 .”
• 본기 ( 本紀 ), 열전 ( 列傳 ), 지 ( 志 ), 연표 ( 年表 ) 로 나누어
기전체
( 紀傳 기록하는 체재
體) • 사마천 ( 司馬遷 ) 의 『사기 ( 史記 ) 』에서 처음으로 적용
→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에서 정형화됨
• 중국 -25 사 ( 史 ) / 한국 - 『삼국사기』 , 『고려사』
• 역사 기록을 연 · 월 · 일순으로 정리하는 편찬 체재
편년체 • 중국 - 『자치통감 ( 資治通鑑 ) 』 / 한국 - 『고려사절요』 , 『
( 編年
體) 조선왕조실록』
• 편년체의 변형 → 강목체 ( 綱目體 ), 『자치통감강목 ( 資治通鑑綱
目)』
성상 폐하 ( 聖上陛下 ) 께서는 당요 ( 唐堯 ) 의 문사 ( 文思 ) 를 타고나셨고 하우 ( 夏禹 ) 의 근검
( 勤儉 ) 을 체득하시어 , 부지런히 정무를 돌보신 여가에 전고 ( 前古 ) 를 널리 보시고 , “ 지금의
학사 ( 學士 ), 대부 ( 大夫 ) 는 오경 ( 五經 )∙ 제자 ( 諸子 ) 의 서적과 진 ( 秦 )∙ 한 ( 漢 )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하고 자상히 설명하는 자가 더러 있으나 ,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시말 ( 始末 ) 을 알지 못하니 , 매우 한탄스럽다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더구나 신라 , 고구려 , 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정립 ( 鼎立 ) 한 후 예를
갖추어 중국과 상통했으므로 범엽 ( 范曄 ) 의 『한서 ( 漢書 ) 』나 송기 ( 宋祁 ) 의 『당서 ( 唐書 ) 』
에는 모두 열전 ( 列傳 ) 을 두었는데 , 중국의 일은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소략 ( 疏略 )
히 하여 다 싣지 않았습니다 . 또 고기 ( 古記 ) 는 글이 거칠고 볼품 없으며 사적 ( 事跡 ) 이
누락돼 있어서 군후 ( 君后 ) 의 선악과 신자 ( 臣子 ) 의 충사 ( 忠邪 ) 와 국가의 안위 ( 安危 ) 와
인민의 치란 ( 治亂 ) 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기에 부족합니다 . 그러니 재주와 학문과
식견을 갖춘 인재를 얻어 일가 ( 一家 ) 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 ( 萬世 ) 에까지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해야 합니다 . - 김부식 , 「진삼국사표 ( 進三國史表 ) 」 -
< 신라 여왕 즉위에 대한 『삼국사기』 사론 >
논하여 말한다 . 신 ( 臣 ) 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 ( 女媧氏 ) 가 있었는데 , 이는 바로
천자 ( 天子 ) 가 아니라 복희 ( 伏羲 ) 를 도와 9 주 ( 州 ) 를 다스렸을 뿐이다 . 여치 ( 呂
雉 ) 와 무조 ( 武曌 )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서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정치를 행하였으나 [ 稱制 ] 사서 ( 史書 ) 에서는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고황후 ( 高皇后 ) 여씨 ( 呂氏 ) 나 측천황후 ( 則天皇后 ) 무씨 ( 武
氏 ) 라고 썼을 뿐이다 .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 ( 陽 ) 은 굳세고 음 ( 陰 ) 은 부드러우며 ,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 어찌 늙은 할멈 [ 姥嫗 ] 이 규방 ( 閨房 ) 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하도록 하겠는가 ? 신라는 여자를 받들어 세워서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요 ,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
특징 한계
신채호 , 김철준 등
부정적
- 김부식은 진취적인 고유 사상을 말살시킨 사대주의자
평가
-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에 물든 역사서 ( 신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