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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선우남지음


대한기독교서회
A Commentary

on

J
The Lamentations of eremiah

by

SUNWOO , Nam

The Christian Literarure Society of Korea


Seoul , Printed in Korea , 1994
간행사

민족의 개화와 복음선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대한기독교서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습니다. 우리는

100주년 기념사업을 여러 모로 추진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

한 역점사업은 국내 성서학자들에 의해 집필된 성서주석의 발간이

었습니다.

기독교가 우리 문화와 생활 속에 접목된 지 어느덧 l세기의 세월

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는 받아들이고 이식시키는 데에만 열중한 것

이 사실업니다. 성서주석이란 그 나라의 신학사상을 가늠하는 중요

한 학술활동인데도 불구하고 신학적 주체성을 살린 주석작업이 아

직까지는 미흉하다는 점, 그 때문에 빈번하게 얽히고 있는 현재의


주석서가 대부분 번역서라는 점 등은, 한국교회로 · 하여금 우리 실

정에 알맞는 새로운 성서주석의 출현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정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신학사상까지도

포괄하는 주석서, 그러면서도 신학적 주체성이 충분히 반영된 이상

적이고 활용하기에 편리한 주석서의 출간은, 1 천만 성도의 간절한

기다렴이자 바람업니다.
올리브나무에 야생 올리브나무를 접붙이면 야생 나뭇가지 또한

원래의 올리브나무 뿌리에서 영양을 공급받지 않겠느냐는 사도 바

울의 표현처럼 , 우리 민족 또한 하나님의 젖줄에서 양분을 공급받

기 시작한 지 어느덧 1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한국


의 기독교는 더 이상 외래문화가 아니며, 더 이상 남의 옷이 아니

라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결국은 남의 옷에 지나지 않는 번역서가 아니라 우리 손에 의해

쓰여진, 우리 실정에 알맞은 주석서가 발간되었다는 것은, 우리 신


앙의 현주소를 바로 보여주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국내의 성서신학자들이 대거 동원되어 가장 최신의 연구성과까

지도 반영하고 우리 현실과의 관계 안에서 성서가 주는 메시지 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에 중점을 둔 새로운 주석서의 출현이, 한국

교회 기독인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가리키는 참신한 이정표로 자

리잡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끝으로 이 주석 이 나오기까지 땀흘려 주신 W lQ O주년 기념 성서

주석 위원회 』 위원장과 위원 여러분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학생들을 지도하시기에 바쁜 중에도 귀한 생명의 양식을 나

누는 일에 동참해 주신 여러 교수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1992_ 12_ 10

발행인 검소영
출판에 즈음하여

한국의 산업구조를 분석한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에 의하면, 우

리 체질의 심각성은 외국 기술의존도가 지극히 높다는 데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외수출고를 높이는 데만 힘을 기울이는 사이에,
우리는 경제기반이 흔들리는 중대한 위기 속에 휘말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형이 기독교와 교회라는 특정상황에서도 위기의식으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교회성장과 부홍에만 역점을 두는 사

이에 기독교의 정체와 본질에 대해 다시 질문하는 도전과 위기가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관심사는 부흥과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요청에 걸맞는 패기있는 선두자들은 주야로 활동하여 한국의 신도

수를 극적으로 증대시켰고, 그리고 몇몇 교회의 경우, 단일교회로

서의 크기가 가히 세계적인 위대한 교회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

한 과정에서 기여한 몇몇 교회지도자들의 수고와 노력에 우리는 모

두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러한 성장과 크기에 걸맞

는 성숙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자리에 봐 있다. 성숙이 없는 성

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가 성숙을 위하여 지금까지 성장지향의

의지가 보여준, 그 이상의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그것은


쉬지 않고 커 가기만 하는 외채더미에 눌리면서 화려한 소비경제에

빠지는 종래의 파국과 비교될 것이다.

기독교가 자기의 뿌린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지혜는 성서에 대한

진지한 탐구에서만 비롯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자각이

아쉬운 대로 행동으로 옮겨지면서, 우리는 외국의 출판사나 지적소

유자에게 적지않은 로열티를 주고 그 방법을 번역하여 교회에 보급

시킨 몇 가지의 성서연구법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숙의


대명제 를 감안할 때 그것이 해결은 아니었다.

이런 맥락적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자존과 명분을 걸고 한국의

성서신학자들이 지식과 능력을 한자리에 결집하여 구약과 신약의


주석을 직접 저술하기로 하여, 이제 그 실현이 가시화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서주석 출판을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기획했다는 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참S로 오늘의 우리에게 예 수 그리스도가 영생이시고, 좋은 신학

의 전부가 되며, 참하나님이심을 인지하고 고백하는 은혜와 진리가

날마다 한국의 모든 교회에 더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와 함께,

한국교회의 100주년을 감사하는 이때에 소망스러운 2000년대를 지

향하는 벅찬 문턱에서 여기 한국 성서신학자들의 성서주석서를 겸


허한 마음으로 내놓는 바이 다. 1992. 12.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출판위원회

위원장 이상훈 박사(서울신학대학교)

위원 박준서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검중은 박사(장로회신학대학)

민영진 박사(대한성서공회 부총무)

박수암 박사(장로회신학대학)

검득증 박사(감리교신학대 학)

김창락 박사(한신대학 신학부)


· 일러두기·

1. 본 주석서는 시리즈로 발간되므로 각 책들간의 통일성을 기하려고 했

으나, 불가피하게 각 집필자들의 특성에 따라 최소한의 통일성만을

유지한 경우도 있다.


2. 본 주석서의 체제 는 서론, 본문주석 (성서본문 제시, 본문주석, 신학적

메시지), 참고문헌으로 이루어 졌다. 그러나 펼요에 따라서는 본문주

석과 신학적 에시지 를 동시에 전개시키기도 한다.

3. 본 주석서의 성서본문은 한글개역판을 그대로 따랐다.


4.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1) 한자는 괄호 안에 넣었다.
2) 성서 원어 표기는 우리말 음역을 쓰고 원어는 로마자로 괄호 안에
넣었다 [예. ‘파라클레토스’ ( parakleros - 보혜사)].

5. 히브리어 • 헬라어는 본 성서주석출판위원회에서 정한 통일안에 따라


서 표기한다.

6. 외래어는 문교부에서 고시한 『외래어 표기 용례집 』 교과용 도서 수정


용과 『외래어 표기 용례집(인명, 지영 ) J 을 따랐다. 단 성서에 나오는

외래어는 한글개역판을 따랐다 [예. 바빌론→바벨론].

7. 성서의 장절(章節) 표기는 다음과 같다.


범 례. 1) 1 장 1 절부터 10절까지 / 1: 1- 10
2) 1 장 l 절부터 2장 5 절까지 / 1:1 -2 :5

3) 1 장 l 절, 2절, 7절 /1: 1, 2, 7
4) 마태복음 1 장 1 절, 요한복음 1 장 1 절 / 마 1 1 요 1 : 1

8. 독자들의 내용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각주난을 최대한으로 활용

했다.
히브리어 • 헬라어의 로마자음역 및 한글음역 통일안

헬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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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문자 않마자음역 한글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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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책명 약자 . - - - - -

창세기 . . ... .. .. ... 창 이사야 ......... .. . 사 로마서 .... . . .. .... 롬


출애굽기 . ... ..... 출 예레미야 ... .... .. 렘 고련도전서 .... .. 고전
레위기 ............ 레 예레미야애가 ... 애 고린도후서 ...... 고후
민수기 . .... .. . .... 민 에 스겔 . .. .... .. ... 겔 칼 라디아서 ...... 갈
신영기 ........ .... 신 다니옐 ...... .. .... 단 에베 소서 . . . ... ... 엠
여호수아 .. .. . .... 수 호세아 .. . .. ..... .. 호 벌럽보서 . ..... ... 빌
사사기 ..... .... ... 삿 요옐 .... ........... 용 골로새서 . ... .. ... 골
룻기 ......... ... ... 룻 아모 스 ... ..... .. .. 암 데살로니가전서 ... 살전
사무옐상 .... .... . 삼상 오바다 ......... . .. 옵 데살로니가후서… 살후
사무옐하 ... .... .. 삼하 요나 ... . .. .... .. ... 용 디모데전서 . ..... 임전
열왕기상 .. .... .. . 왕상 미가 ............ …미 디모데후서 ...... 덤후
열왕기하 ... ...... 왕하 나홈 . ... ... .. .. .. .. 나 디도서 ............ 딛
역대상 ... .... ..... 대상 하박국 ... .. ..... .. 합 빌레온서 ........ .몬
역대하 ............ 대하 스바냐 . ........ . .. 습 히브라서 ... . ..... 히
에 스라 ......... ... 스 학개 ............ . .. 학 야고보서 ... . ..... 약
느헤미야 ......... 느 스가랴 ... .. .... . .. 속 베드로전서 ...... 뻗전
에 스더 ... ...... ... 에 말라기 . .. .. .... ... 말 베드로후서 ..... . 벤후
용기 .... . ....... ... 용 마태복음 ......... 마 요한 1서 .. . . ..... 요일
시편 .. ...... .... …시 마가복음 ....... .. 막 요한 2서 .. .... ... 요이
잠언 .... ... .... ... . 잠 누가복음 .. . ...... 녹 요한 3서 . .. .. .... 요삼
전도서 ............ 전 요한복음 .. .. .... .요 유다서 .... ......... 유
아가 .... . .... ...... 아 사도행전 .... .. .. . 행 요한계시록 _..... 계
·구약시대의 연대표:

1. 기원전 2000년 이전 시대

II. 족장시대
1I1. 후기 청동기 시대
IV. 기원전 약 1200 - 900년

v. 기원전 8세기 중반의 분열상


VI. 기원전 8세기 중반 - 6세기 중반
VIl. 기원천 6-5 세기
VIIl. 기 원전 400 - 150년
이 집트 팔레스 타인 메 소포타 미 아
7000 여라고(도기제조 야르모(도끼l 제조 이전의 신석기 시대)
이전의 신석기 시대) 활레스타인
수리。L 걸리기。L 신석기 시대
6000 아나흘려아등지에서
정착
신석기 시대의
{
촌락문화형성
--'-
5000 렛수나

4500 할라프
여라고(도기를 제조한 신석기 시대) :
파。l융 A

동 · 석기 문화 오에 이드
4000 바다리안

와르카
아므라티안
가슬흑은라안 최초의 도시화 시대
3500 혹은 초기 원까l 운자시대
초기청동기 시대
게르셰안 제 1초기청동기 시대 후기 원시 문자시대

3000 고왕국시 대 29-23세 기


제 2초기청동기 시 대 초기청동기 시 대
영엣(t.f나초스기르 i
왕조시대 약 28l0- 236o
제 3농기챙동기 시대 (수에르인의 도시국가)
제 3-4왕조 26-23세기
셰갚기챙동기 시대 _._
2500 (피라미듀시대)
(제 3갱동기 시대) 초기 청동기와중기 악카드 왕국,약 2360-2 180
- {

셰 I중간기 시대 22-2 1 세기
청동기 시대의 중간기
야만
3 왕족조구.티의 캠잉
{
(반유옥민들의 칭입) :
2000 중왕국시대 21-18세기 제 l중기청동기 시대 우르 셰 약 2060-19l 。

1. 기원전 2000년 이 전 시 대
이집트 필레스타인 횟 타이트 메소포타미아
2050
중왕국 21-18세기 중기 중간기 우르 제 3왕조 암 2060-19)。
제 U 왕조! 혹은 i
2000 이집트 재통일 약 2040 청통끼l 시대 초기챙동기
처111 2앞끼- -중기갱동기
약 199 1- 1786 처11 1 7 1 23-2에기
1950 앗시리 아 마리 j 이신 라르사
2 l -R0세 기
--'- ’
1900 강바도가아인의
제 2~1 중기 흐 셰 I기중기
도시국가 식민지 라피트이쉬다르
청동지 시대 ^ ~ 갱옹기시대
i 써「 약 1870
1850

1800
i i 바옐론셰 l왕초
; 약 1830-;- 1 )3。
제 2기중기

1750
셰 2중간기 시대 챙통~ I 시대 i!
i
!
;: i 1
와라드신
약 1770- 17)9
찍소스 1 8-1ω11 기 쳐J2기 중기
청동개시대 B
!_. . . "t리시대 ; i 링 신
상시 아닷 l세 약 17 찌 - 1 697 약 브성 +-앞괴잭=1.6 98
1700 ,‘ - 1 7)0뉘끄효→ 지으리 렴 함무라비 i
: u씨 헛타이트 ' . ←-약 1730- 1697 약, 1 728- 1 686 :
제 1 ) 왕조
oJ 고왕국
iir
1650 약 16)0- 1)42 DI ; !앗사이트 해국왕조
제 2기 중기 홉
청동기시대 C 효 라바르나스 ! : 왕주 i
1600
1 웅
씨|
--'-
신왕국(제국) 시대 i(ll 뺏투〕일리스 I 세
1550 제대왕조약 1))2 - 1306

우르실리스 l세 + _l_ : :
찍소스흘올。}냉 후기청동기시대 후기챙동기시대
1500 ←~ :

11. 족장시대
이집트 필 레스타인 횟타 이 E 미탄니 앗시리아
1600
고왕국
셰아오11>신시왕왕스조국약약(제II권””시대
2- 1306

1550 석소스률올아냉

2-1 27
후기 갱동기
。}에노피스 1써 약 1 27-1)07’ 시대 우르실려스 l세

투트모시스 i세 약 l ’ 07- 1494

1500 투트오시스 2세 약 1494- 1490


투트모시스 3세 약 1490- 1436 히므리인들
이집트에 숫타르나 l 세

거주
사우스사달
1450 。}에노피스 2세 약 1438-1412

투트모시스 4세 약 1412- 1403 아르타타마


헛타이-왕조
숫타르나 2세
1400 。}에노피스 써 약 1403- 1
수필흘리우마 l세
아에노피스 4세(아케냐댄)
약 1364- 1347
아마르나시대
’ ’
약 137 -133
푸스랫타
앗슈르우발리트 1 세
약 13)6-1321
1350 히므리인들
하염합 약 1333-1306 이집트에
거주 우와당리스
제 19왕조 약 1306-1200
1300 세토스 l세 약 130)- 1290 약 1306- ,1282
아닷니라리 l세
라때셰스2세 약 1290- 1224 약 1297-1266
출얘굽약 1208 ? 핫투성리스 3세
약 127 ’ -12)。 살안에생 l세
1250 정복
약 12)0-;-1200

약 126 - 123)

마르니프다 약 1224 - 1211 투쿨티 니누르타 l세


__._ 헛타이트왕조을락 약 1234- 1197
(쇠약하고 혼란한 시기)
1200

IIL 후기 청동기 시대
이집트 필레스타인 앗시리아
1250
투클티니누르다 l세
마르니프타 약 1224- 1211 이스라엘 민족의 팔레스타인 갱복 약 12) 0-1200
약 1234-1197
(해양민족을올 혜배사컴) 챙기시대 약 1200-1000

1200 쇠약하고혼란한시가 사사시대 약 1200-1020 -'-

제 20왕조 약 118'- 1069


활레스타인에 융레셋족 거주

라에세스 3세 약 1183- 11 2
(해양민족을올 패배시컴)
’ 앗시리아의 쇠퇴

1150

라에셰스 4-11 세 약 II 2-1069 드보라
기드온
디글닷 벌레생 l 세 약 1116- 1078

1100 이집트왕조올락

(앗시리아가 장깐 동안 부흉 핑)

셰 21(타냐트)왕조 약 1069-93'
{

1050 설로의 올락 (10'0년 이후)


사우옐 앗시리아의 쇠퇴기
사올 약 1020 - 1000 ?
아랍인들의 압제
1000 다윗 약 1000-961

솔로온 약 961-922
다마스커스
950 르손

제 22왕조 약 93 - 72) 운옐쟁 922 앗슈르단 2세


시삭 약 93 -914 유다왕국 이스라엘 왕국
(앗시리아 재발견 시작)

900 922- '87 922-722/1

IV. 기원전 약 1200 - 900년


이집 E 이〈라엘 다마스커스 앗시리아
950
솔로온 약 961-922 르손
제 22왕조 약 93)-72)

925
시삭 약 %’ 914
유다 - - - 9 2 2 - - - 이스라옐 앗슈르 단 2세 %’ -913
르호혹앙 922-91 ) 여로보암 l세 922-901
요소르콘 l 세 약 914- 874 아비야 91)-913
아닷 니라리 2세 912-892
900 아사 9 13-873
나땅 901-900
바아사 900-877
벤하닷 l 셔l
옐라877- 876 약 88 ’ 870
앗슈르 나시르팔 2세 884-860

875 시묘려 876


여호사앗 873-849 벤 하닷 2세
오므리 876-869 약 870- 842
아함 869-8)。
(엘리야)
(카르카르 전쟁 853)
850 여호랑 849-843 야하시야 __l_ 8)0-849 ’
살만에생 3세 8 9-82)
아하시야 843 / 2 여호랑 (엘리씨 849-843/ 2
야달리야 842-837 하생
요아스 837-800 예후 f 8 4 3/냥 l ’ 약 842-806
825
상시 아닷 써I 824-812
여호아하스 : ’
81 -802
아마시야 800-7 83 여호아스 _;__ 802-786 벤 하닷 ,세 아닷 니라리 3세 811-784
800
웃시야(아사랴) 783-742 여로보앙 2세 786-746

775 앗시리안
제 23왕조

약 7 9- 71) 쇠퇴기

750 (아오스)

v. 기원전 8세기 중반의 분열상


이집트 유다 이스라엘 다마스커스 앗시리아
775
웃시야 783-742 여로보앙 2세 786-746 I ! I :
서1122왕조 약 935-725 I I (아모스) !’ 앗시리아• 쇠퇴기
750
:
제 23왕주 약 7 9-71
:
’ ’ 요당
(요당 성갱 약 750)
742-735
I
스가리야
(호세얘
i 746-745 르신 다글핫-벌례생 3세 745-727

(이 A싼) (미개 으브상애가냐가홈야뺑 :: 745


745-737 약 740-732
725 션112앵조 ; 아i암 ; i 73 ’-71 ’ ~ 737-736
;약 725-709 : 1 i ; 1 "'7f 736-732 살안에생 ’세 726- 722
’ ←제 2 ’(에티오피얘왕조 ’ ! 호세아 732-724
! 약 716/1 ‘ -663 < 7 ; :7l ’-6밍/6 사마리아 멸망 722/ 1 사르곤 2세 721-70 ’
~ 히 l야 ,산혜렵 캠업해옹 산에렵 704-681
700 샤바로 약 710/9-696/5(?) I : 701
’ ’
생데코 약 696/ -68 / 4(1) I : 688 ? 산헤링 캠업해옹?
(티르하카 성갱 약 690/8씨 (?) 므낫써 687/ 6-642
티르하카 약 (69이 68’/4-664 : 에살핫돈 680-669
675
이집트의 칭입 ’ 테베 약틸 ’ 앗슈 E 바니팔 668- 627

제 26왕조 664- 52 ’에‘데


650 프상에티쿠스 l세 664-6 10 아온 642- 640
요시야 640-609

(예에미
l 야) 신바엘흔제국
625 (스바냐L i 나보플핫상 626-605 키학사레스 신 사르 이스운 629-612
(냐흥) ! 약 625- 585
여호아하스 609
느고 2셔11 610- 594 여호아깅 : 609-598 니느워l 멸망 612
600 (하박국) : 느부갓네살 605/ 4- 562 앗슈르 우말리트 2세 612-609
프상에티쿠스 2세 ’ 94- ’ 89 여호야긴
시드시야 ’ 97- ’ 87
: !
’에98스/7밭←누-­
아프리 스(호브라) 589- ’ 70 예루잘캠 멸망 587 .. : +--t-- 아스티아게스
유배 : 1 1 585-55。
575

VI. 기원전 8세기 중반 -6세기 중반


이집트 히브리 바빌론 메디 Of
600
느고 2세6 10- 594 제 l차추방 597 느부갖네상 605/4- 562 ’
키락사로스 62 -585
프상에티쿠스 2세 94- 89
’’ ’
예루상렘 멸망, 제 2차 추방 587
아프리스(호브라) 89- 570 제 3차추방 아스티 아게 스 ’ 85-55。
575
아마시스 570- ’26 L 부갓네상, 이집 E 를 ’
챔업함 68
유배 아멜 마르둑 ’62-560
네리글렷사르 560-556 고레 스 아스티아게스를 전복시컴 55。
550 나보니두스 556- 539
. 프상에티 쿠스 썩I 526/ ’ 고레스의 칙령
(제 2 이사야)

’38 ! 고레스, 바멜론제국 성립 539


페르시아(아카에나아인) 제국
•--- 고레 스 550- 53。

525
캉비셰스
’ 스륨바헬 캄비셰스 530- 22 ’
이집트 정복 52
。l 정트 왜르시아 통치하에
성전재건 520 ’” 다리우스 l세 히스타스페스 ’22-486
들어강 (학개, 스가랴)

500
(오바야? ) (마라톤 49이
크세륙셰스 486-465
475 (테르모필레, 살라마스 48이
(말라기)
이냐로스의 반란 460-4 54 아르타크세 특셰 스 l세 465-4 24
에스라의 선교 458? ? 종기 마누스
450
느헤 이야통치 445 (갈렬리아스의 평화)

425 ! 에 스라의 선교 428 ? 크세특세스 2세 423


다리우스 2세 노투스 423-404
이집트해방핑 40 1 바고아스통치 아로다크세륙셰스 2세 므네온 404- 358
400 에스라의 선교 398? ?

V11. 기원전 6-5세기


이집 E 51!:! 리 퍼I~ 시 Of
400
제,2 8, 29, 30왕초

375

350 아르타크세륙셰스 3세 요쿠스 358- 338


이집투 페 E 시아에 의해 칭업받} 343 아르세스 338- 336
알렉산더 대왕 336- 323 다리우스 3세 코도안누스 336-331
325 이집트,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휩 332
잇수소 333 가우가에라 331
I 톨레미 왕조
프툴레이 l세 라기 323-28 ’ 유대인들, 프톨러l미 압제하에 들어감
생류커 A 왕조
300 생류커스 l세 312/ 11 -280

275 ’
프툴레미 2세 휠라렐푸스 28 - 246 안티오쿠스 l 세 280- 261

안티오쿠스 2세 261- 246


250
프톨레미 3세 유셰르게테스 246- 221 생류커스 2세 246- 226

225 생류커스 3세(대왕) 223-187


프툴레미 4세 옐로파호르 221-203 안티오쿠스 3세(대왕) 223-187
생류커스 팔레스타인 갱복 200-198
200 프툴레미 3세 에피파네스 203-18 1
히브라인들, 생류커스 통치하게 들어강
생류커스 4세 187-175
프툴레미 어l 필로에토르 181 - 146
175 성전올 더럽힘 167.9(168)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 175- 163
유다 마카에요 166-160 안티오쿠스 써
성전 재용헌 164.9.(16
요냐단 160-143
’) 163- 162
데에트리우스 l세 162-15。
150

VIII. 기원천 400-150년


머리말

이 땅에 복음이 전따된 지도 200년이 넘었다. 성서가 이미 한국

백성의 퉁대가 되어, 사랑과 정의와 화형의 구현현장을 밝혀주는

과정에서 대다수 우리나라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

획을 각인해주는 놀라운 일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얼이 고

통과 희생의 대가 없이 명탄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


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역경과 고난의 과정을 겪게 하시면서도,

그 폐허와 상처를 싸매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흘연히 일어나서

급기야는 풍족한 삶을 일구어낼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셨던 것이

다.
한국교회가 이러니저러니 하면서도 분명히 하나념께서는 우리나
라 백성을 그분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필요한 도구로 삽으시고자 하

여 오늘의 상태로 키우주신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나라 교회가 이

토록 성장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창대케 하신 것은, 옛날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결코 그

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교육과 연단을 통해 제구실


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 연후에, 하나님의 인류 구원계획에 일조
케 하시고자 뭇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이 마당에서 우리는 새로운 각오와 긴박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까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해온 것에 안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조속히 질적인 성숙을 도모하지 않다가는 무용지물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립을 받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이런 시점

에서 대한기독교서회가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이

나라의 신학자들에 의한 성서주석 간행사업에 착수한 것은 매우 당

연하고도 시의적절한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한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홀로 신비체험을 맛보면서

신적 존재와 합일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성서 안에 깃들여 있는 생활원리에
따라 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전체척

인 목적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고작 개인적인 입신양명에만 힘쓴다

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야다. 그것은

그분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이해가 결핍한 데서 온 소치다. 즉 성

서 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회가 그 동안 성서, 특히 구약성서 읽기를 즐겨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문화적 격차 때문일 것이

다. 구약성서가 우리의 일상언어와 생활에 견주어서 생소하게 느

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는 판이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버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를

제대로 읽으면 그 안에 나타난 전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

자이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설제로 볼 수 있

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척 목적을 위해 이스

라옐을 태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은 봉사의


책엄만 주어졌을 뿐, 스스로의 우월감을 나타낼 특권이 주어진 것

은 아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가 정의와 사랑으

로 만물을 구훤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에


예수가 그의 왕국을 건셜하기 위해 돌아오설 것을 믿지 않을 수 없
다. 그럴 때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주기도문이 현실적으로 하나님
에게 옴소 다가서서 간구하는 그런 내용이 될 것이다.

성서는 우리 세대에 적절한 메시지를 갖고 있으며, 그 메시지는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도처에서 성서가


그 기록 당시에 의미했던 것과, 또 오늘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탐구하도록 권유받는다. 우리는 성서에서 유다와 이스라
옐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거역한 것에 대해 하나님
의 심판이 내리리라고 선언한 것과 실제로 심판이 내린 사실을 목

격한다. 예언자들을 위시한 신앙인들은 규범적 전통을 확고하게

고수하면서, 그 백성이 신앙을 저버린 컷에 대해 이스라엘과 유다

를 견책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서에서 현재의 심판과 구원의 약

속, 곧 심판과 희망의 양면성을 본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언급하

면서 오늘 회개할 것과 역사를 능동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

한 신앙을 지금 새롭게 할 것을 요청받는다. 성서에 등장하는 계약


백성은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현재 하나님께 충실할 것을 그들의

비극의 현장에서까지도 요청받으면서, 하나님께서 미래에 강력하


게 간섭하설 것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곤 했던 것이다. 그리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보았

다. 우리도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때, 홀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희망의 대열의 선두에 서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이 성서 전체가 마지막 얼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 중거함을 깨닫는다. 이런 맥락에서, 죄는 인간이 하

나님께 전척으로 종속되 어 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계획


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최종적

통치 아래 있게 될 때, 평화 ·구원·회복의 놀라운 일이 나타난

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완

성되는 경지를 뭇한다. 이 목적에는 애초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함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초월해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꽤러다임으로서 등장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가 ..

옛날의 하나님의 회중, 곧 히브리어로 ‘카할’, 헬라어로 ‘에클레시

아’를 계숭하여 참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


여 아직 완성되지는 못했£나, 장차 하나념의 통치의 권능과 영광

이 완전히 나타나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완성된 하

나님의 통치에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창조의 목표는 교


회가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의 통치이므로, 우리는 꾸준히 분발하

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하는 것이다(신 31:12).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압제자들에 의해 고

통을 받고 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엄연히 일하고 계신다.

그리고 간섭하신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왕께 충성한다는 것은 현재의 악의 질서에 거슬려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


난을 겪어야 한다(행 14: 22). 따라서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 냐

라를 위한 것인 셈이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


는 것 이 아니었던가(마 6 : 33) .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 범위가 개

인의 행복의 차원을 념어 확장되듯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개인적 충실의 차원을 넘어 연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


독교 공동체의 과제는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않는 새로운 시대,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환난과 고


통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인생의 성숙한 면모를 갖추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


러한 일의 본보기로서 우리는 애가서를 연구함이 유익하다고 믿어

진다.
‘애가’는 예레미야가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사야서
53장의 고난의 종을 방불케 하는, 예레미야가 고뇌했던 내용을 간
직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그리 스도인에게도 고난 가운데서

위로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에 달리신 예수의 고난에 체험이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할 만하다. 우리는 예수가 고난을 겪으신 후에 부활과 숭천을


제시해주셨듯이 ‘애가’의 현실 저변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완성하시

며,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그의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

며, 종당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기독교적 소망이 동터오는

것을 바라볼수 있다.
애가서를 읽을 때 우리는 먼저 예루살렘이 무참히 무너져내린 폐

허를 목격하게 된다. 여기에서 시인은 상아 남은 통족들에게 이 비

극을 결코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하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

우, 6.25의 참변을 겪고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런데 우리가 ‘애가’를 읽음으로써 이제는 우리도 6.25의 비극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공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정에로 숭화시킬 수 있게 됨을 감사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이 끝장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희망의 근거가 남아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분의 통치가 세세

에 이르는 하나님의 왕권을 고백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원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경험한 고난의 의미를 신앙고


백의 언어로 담아, 역시 어려운 역사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

는 후대의 신실한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자칫 부활의 영광에


만 매달리기 쉬운 한국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심
정의 폭이 열려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값이 아

닌, 인류의 죄값으로 고난당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고난은 그보다

더한 것일지라도, 우리가 범한 최과에 대한 정당한 형별임을 ‘애

가’의 교훈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얘가서에 깃든

시인의 불굴의 신앙을 본받아 암혹을 꿰뚫고 눈부시게 비쳐지는 희

망의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끝으로 본 ‘애가 주석’을 집필할 기회를 주신 대한기독교서회 검

소영 사장님과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1994년 7월

저자선우남
차 례

간행사 /3
출판에 즈음하여 /5

일러두기 /7
히브리어 • 헬라어 표기 통일안 /8
성서책명 약자표 /9
구약시대의 연대표 /10

머리말 /19

I. 서 론

예레미야애가는 어떤 책인가

1. 이 책의 중요성 .. ....... ......... ............. ............ ... ........... 33


2. 민족적 비극의 의미 ................ …................................ 35
3. 슬픔 뒤에 오는 은혜의 광명 ....................................... 38
4. 이 책의 이름 ............................................................ 40
5. 정경에 있어서의 이 책의 위치 . . . .... ....... . .... . .. .. .... . ....... 42
6. 기록목적 ......... . .. ...................................................... 44
7. 저자문제 ....... ... ......... .. ............... . ............ . . ... ..... ....... 46
8. 역사적 배경과 저작연대 ........ .. .... .... ..... ... ........... ...... .. 50
9. 구조와 문학적 특성 ................................................... 55
10. 예레미야애가의 신학 .. .. ... ... .. ... ...... . ....... ..... ... .... ....... 59
11. 예레미야애가의 현대적 교훈 ... ................................. . .. 63
12. 예레미야애가의 사용 .. .. .................. . ........... .. ............ “
13. 내용개요 -- ---- ------ -- ------ ----- -- -- --- --- ---- ----- -------- -- --- ----- - 67
14. 내용분해 ........ .. ......... .... .. .. ……… ..... ......... .. ... . …… .70

II. 본문주석

첫번째 비탄의 노래

1. 단죄의 현실 (1: 1-22) ................................................ 77


1) 예루살렘의 참화 (1: 1-7) /79
2) 시온을 파멸케 한 죄악 (1: 8-11) /94
3)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 (1: 12-22) / 107

두번째 비탄의 노래

2. 진노의 날의 참상 (2: 1- 22 ) ......... .. ........... .. .. ............ . 139


1) 시온의 철저한 수난 (2 : 1-1 이 / 141
2) 위로하는 사람 없는 시온 (2: 11-16) / 166
3) 주님께 소망을 둔 시인의 기도 (2 : 17- 22) / 180

세번째 비탄의 노래
3. 폐허 앞에 선 수난자의 간구 (3: 1-66) ........................ 201
1) 수난자의 호소 (3: 1-18) /2 03
2) 고난 중의 구원의 소망 (3: 19-39) /219
3) 회개의 권면 (3 : 40- 48) /242
4) 구원의 간구와 회개 (3 : 49- 54) /253
5) 신뢰의 노래 (3: 55-66) /260

네번째 비탄의 노래

4.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소망 (4: 1-22) ........................... 273


1)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재난 (4: 1-12) /275
2) 지도자들의 죄와 그 결과 (4: 13-2 이 /297
3) 위로와 소망 (4: 21-22) /313

다섯번째 비탄의 노래

5. 회개하는 공동체의 기도 (5: 1-22) ... ..... .. .... ........ ...... .. 319
1) 자비의 간청 (5: 1-7) /321
2) 시온의 참상과 철저한 고백 (5: 8-18) /330
3) 구원을 위한 기도 (5: 19-22) /341

참고문헌 /349
예레미야애가는 어떤 책인가
1. 이 책의 중요성

기원전 6세기의 유다 왕국의 멸망은 단순히 세계사적 사건으로

서의 한 나라의 소멸을 뭇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두운 국면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


인가에 관한 지혜를 가르치기 위한 전형적 사례로서의 가치를 지난
다. 유다 백성이 당한 재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침략자 바벨론 군대
에 의한 파괴행위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분노의 발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신앙인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참회의 현장을 앞

에 놓고 망연자실하면서도 그것이 스스로의 범죄의 결과라고 뒤우

친 ‘애가’의 시인이야말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언에게는 신앙인의


본보기이며 지혜의 교사인 것이다. 그 시인은 슬픔을 희망으로 전

환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구원의 유일한 길은 회개와 탄식의

기도뿐이라고 역설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인으로 묘사된 예루살렘의 애통하는 호

소와 시인의 목소리가 교차되면서, 그 파멸을 신앙적으로 수용하

며 회개할 것을 권변하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의탁할 것을

시인은 타이른다. 이 책에 전개되어 있는 대로 죄인이 회개하지 않


η
μ
34 / 예레미야애가

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 우리는 그 현실적 고통


을 탄식하는 데만 머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훌을 믿고 고난을

참으며 죄를 회개하고 의로운 심판자의 변함없는 사랑에 힘입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

에게 봉사할 새로운 각성과 미래의 희망을 열어나갈 강력한 충동을

받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가 성서척 신앙으로 성숙해지고 건전해져


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신앙생활의 또 다른 지침서로서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심판과 신앙의 언어 사이의

심충구조론적 연관에 비추어볼 때, 이 책이 오늘날과 같이 문제가

많은 역사적 현실에서 살아가야 할 현대인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

기에 알맞은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 민족적 비극의 의미

열왕기하 25장 8-12절에 의하면, 남왕국 유다의 멸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중언했다. 즉 때는 바멜론 왕 느부갓네살 19년 곧 기


원전 586년으로 그해 5 월 7 일에 마침내 느부사라단 휘하의 바멜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적병들은 성전과 왕궁, 예

루살렘 온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주력부대인 갈대아 군대는

성벽을 파괴했고, 살아 남은 주민들을 포로로 끌어갔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은 남겨두어 그 땅을 경작하게 했다.


‘애가’는 이런 민족적 비극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
다섯 편의 시는 18개월에 걸친 예루살렘 포위기간에 그 백성이 겪

은 공포와 고난, 그리고 그 도시가 함락된 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그련 것이다. 그들은 야훼에 의해 선태된 백성임을 내세우고 있었
으나, 이제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그들이 근거로 삼았던 신앙적

상정이 일시에 무너져버렸음을 뭇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시인은

그 도성, 성벽과 망루, 야훼가 기름부어 세운 왕, 제사장과 예배

제도, 예언자를 통한 하나념의 말씀, 기업으로 받은 국토, 그 백

성,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정물, 이 모든 것이 사라져버런 데 대해

- 35 -
36/ 예레미야애가

슬퍼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 종교적인 자기 동일성의 상실과 절

망 상태는 하나님과의 시내산 계약의 무효화를 의미했고, 다윗 왕

조의 단절은 다윗과의 계약의 파기를 의미했다. 그들의 팔레스타

인 추방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신앙의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했

다. 그들은 모세 전승과 다윗 - 시온 전승에 근거해서 예루살렘이

절대로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400년간의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실제로 예루살렘은 하나

님의 가호로 건재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

램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신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제 그 보장

조차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에 일대 전환을 일으키는 위기의 사건이었다.

‘애가’는 재난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형언할


수 없는 비탄과 공포를 표현해준다. 사람들은 슬픔과 충격을 단순

히 드러내는 것만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

변함으로써 그 고통을 철저히 체험하고 그 심각함을 헤아렬 때, 가

치있는 삶에로의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용의 이

야기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애가’는 이토록 완벽하고 능란하고

기탄없는 비탄의 언어를 구사한 까닭에, 하나님 앞에 대면한 인간

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슬픔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성숙

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고 바르게 살도록 새롭

게 분발하는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슬픔은 칼빈의 말과 같이 거

룩한 슬픔이다. 그것은 애곡하는 가운데 새로 탄생하는 일이다.


이런 고난받는 사람들의 아픔의 노래는 기쁨의 언어로 고백된 찬
양의 노래와 함께 인간의 삶의 양상을 표현하는 두 기둥인 까닭에,

비탄의 노래는 찬양의 노래만큼이나 하나념 앞에서 설득력 있는 신

앙인의 기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탄의 노래 역시 분명

히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일으키는 동력인 것이다. 이렇듯 ‘애가’는


서론 /37

슬픔을 표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는


그들이 당한 재난의 이유를 캐기 위한 성가신 탐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무고하게 고난받는다고 원통해하는 넋두리도 아니

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저지른 최악으로 말미암아 기펼코 국가적


버운을 맞게 되리라고 지난날의 예언자들에 의해서 명확히 경고된

바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유다의 종교적 • 정치적 지도자들의 최


과가 너무도 극심했으므로 야훼 자신이 채찍을 들어 그 나라를 멸

하신 것이다.
기원전 586년의 이 비극은 예루살렘의 폐허화 및 계약백성의 포

로생활이라는 암당한 현실을 념어 수많은 풀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

했다. 계약의 하나님이 어찌해서 이런 일을 발생케 하셨을까? 야

훼는 무력한 분이신가? 이 백성을 버리셨을까? 약속을 따기하셨

는가? 장차 이 백성이 구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과 하


나념 사이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진 것같이 보였으며, 그들이 전적

으로 새로 시작해야 할 처지가 된 듯했다. 이 책의 다섯 편의 애가

는 이상의 불음에 대해 해답을 제공한다. 이 책은 어느 한 사람의

발언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선 그 공동체가 신앙과 현실의 갈등


에서 내뿜는 감정의 격류를 시의 표현으로 억제하며 나타낸 것이
다. 그들의 고난은 역사 안에서 하나념이 예정하신 운명을 뼈저리

게 인식하게 한다. 그들이 사랑했던 국가는 파멸했다. 끝장내야

마땅한 일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세


계의 먼동이 터야만 했다. 그 백성의 정신은 슬픔과 고통을 넘어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낡은 껍질을 깨고 자유롭게 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애가’는 전능하신 하나닝에게 희망을 결 수밖에 없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3. 슬픔 뒤에 오는 은혜의 광명

‘애가’는 예루살렘의 참화를 애통해하며 지은 비장하고도 엄숙한

애가들을 수집해서 엮은 책이다. 유다 왕국의 멸망은 예언자들의


예언의 진실성을 업증하는 것으로서, 그 재난의 원인이 그 백성의

벙죄에 의해 유발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깨달은 이 책의 저자

는, 그러한 곤경의 원언에 대한 명상을 기초로 해서 이제부터는 하


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응훌과 미래의 소망에 의지해야만 현재의

슬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본문 3장


39절의 고백과 같이 그 불행을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은 형별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일로 여기며, 장차 그들의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바르게 살고자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에게는 불행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을

날이 반드시 있을 것 이 다. 계약백성은 옛날부터 그들의 것이었던

모든 즐거움을 회상하게 된다 (1 : 7). 여기저기서 애달픈 신음소리

가 들리는 가운데서도 “야훼여 ...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라고 소

리치며 하나님께 매탈렬 수 있으며 (1 : 9) , “야훼여 우리의 당한 것

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탄원할 수 있는 것이다 (5 : 1). 때로는 소박

- 38-
서론 / 39

한 희망의 확신도 갖게 된다. “야훼는 나의 기업이시니 내가 저를


바라리이다"(3 : 24). “야훼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이리하여 지


난날의 반성과 미래의 기대가 교차된다. 그리고 슬픔이 죄책으로,
다시금 회복의 기대로 옮겨간다. 이런 정신적 움직임 속에서 신앙

고백으로 이어지고, 다시금 계약의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확신하는

속삭임이 하나님의 중훌에 대해 희망하는 열렬한 외침으로 확대된

다 (3:2 2 - 24 ).

이것은 밝은 변과 어두운 면이 반드시 있게 마련인 인생에 있어

서,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와 대응하는


또 다른 변의 묘사인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 앞에 엄연히

자리잡게 되는 은혜로운 현실의 전개를 보여주는 증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익명의 ‘나’를 내세워 오늘의 독자들을 대리해

서 고난의 갯더미를 헤치고 힘차게 얼어서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

고 있다. 이 사람은 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탄시의 형식을 벌


려, 하나념의 자버와 뭉훌의 문이 결코 닫혀져 있지 않다는 확신을

노래하고, 동시에 이 소망의 문턱에 서서 온 세계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


다. 그리하여 이 시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자아내고 각자
의 책임의식을 갚게 할 뿐만 아니라, 시야를 미래지향적으로 확대

시킨다.
이 책은 처음부터 제의적 애도 의식의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신앙적으로 겸손히 순응하는 자세로

노래한 것이지만, 신앙고백적인 성격 때문에 나중에 그것이 종교

적 집회의 제의적 목적에 맞도록 편집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정경에 포함되기에 이른 것이다.


4. 이 책의 이름

히브리 원전 (MT) 에는 이 책의 표제가 따로 없다. 다만 이 책의

첫머리에 있는 낱말 ‘에카’(‘아 어찌하여’, ‘웬일로 ... ’, ‘어찌 이런 일


이 ... ’란 뭇)가 그 이름을 대신한다. 이 말은 ‘어떻게’라는 뭇을 지

닌 ‘에크’에서 파생된 감탄사로서, 지극히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신음하듯 토해내는 표현이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율법서와 잠언

등의 예에서 보듯이, 각기의 책의 이름을 그 책의 내용에 적합한

말로 표시하지 않고, 그 서두의 낱말을 그대로 책명으로 사용하는

일이 관례였다.

일반적으로 ‘에카’로 시작되는 노래를 애가, 비가 또는 만가라고

부르는데, 우리말의 ‘애가’와 발음이 비슷해서 단순히 우연의 일치

라고 볼 수 없는 의미심장한 일같이 느껴진다. 이 ‘에카’란 낱말은


역시 제 2 장과 제 4장에서도 그 첫머리에 나온다.

그러나 랍비들에게 전해진 문서와 율법과 그 해설을 집대성한 탈

무드 (The Babylonian Talmud) 에서는 이 책을 ‘키농’이라고 불렀다.

‘키돗’은 아모스 5장 1 절, 에스켈 26장 17절, 32장 16절, 예레미야

9장 10절, 사무옐하 1 장 17절에도 언급되어 있는 대로 히브리어로

-40-
서론 /4 1

만가 또는 애가란 뭇을 지닌 ‘키나’의 복수형이다.

구약성서의 헬라어역인 70인역 (LXX) 은 역대기하 35장 25 절에

있는 대로, 예레미야가 요시야왕의 죽음을 슬퍼하여 애가를 지었

다는 기사에 근거해서, 그가 이 ‘애가’를 썼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책의 서두에 “이스라엘이 포로되어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황폐된
후, 예레미야는 주저앉아 슬피 울면서 예루살렘의 참상을 탄식하
여 말하기를 …”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표제를 ‘예레미야애가’란
뭇의 ‘드레노이 예레미우’ (8P~j)Ol Iêpêμ lOU) 라고 불렀다. 눈물 또

는 비애를 뭇하는 ‘드레노이’는 ‘드레노스’의 복수형이다. ‘예레미야

애가’라는 긴 이름은 후기 헬라어 번역이나 시리아 번역, 그리고

라틴어 번역에서야 비로소 나타나고 있고, 처음에는 단순히 ‘애가’


라고만불렀다.
라틴어 성서 (Vg) 를 번역한 교부 유스틴은 70인역에서 이 책을

옮길 때, 얘가서란 뭇으로 ‘리베르 트레노룸’ (Liber Threnorum) 이라

고 불렀다. 우리말 성경은 ‘예레미야애가’라고 부르는데, 이는 70

인역의 표제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애가’라고 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과도 부합되는 자연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5. 정경에 있어서의 이 책의 위치

이 책은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언서 부분에 속하는 예레미야서 다

음에 옴£로써, 마치 예레미야서의 부록인 것처럼 나타나 있지만,


히브리 원전에서는 다르게 배열되어 있다. 히브리 원전에서는 이
책이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제 3부인 성문서에 들어 있다.

그리고 성 문서 (kethubim) 안에서 는 다섯 두루마리 (megilloth) 중의


하나로서 자리잡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은 시대와 신앙공동

체의 변천에 따라 성문서 안에서도 그 위치가 변동되어 있기도 하

다. 히브리 원전에서는 성문서의 순서가 시편, 잠언, 용기, 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바멜론 탈무드 『바바 바트라 J (Baba Bathra

14b) 에 의하면, 훗기, 시편, 용기,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다

니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로 나타나 있다.

실제로 히브리 성서에는 ‘애가’를 포함한 다섯 두T루마리를 한데

모아서 그들이 지키는 5대 절기의 예배용으로서 공중 앞에서 낭독

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가 성서연구에 주로 사용하는 키탤 (Kinel)

의 히브리 원전 BH 3는 레닌그라드 사본 (Codex Leningradensis , 기원

-42-
서론 /43

1008년)에 기초한 것인데, 이 안에서는 다섯 두루마리가 룻기, 아

가, 전도서, 애가, 에스더의 연대순으로 되어 있고, 그 밖의 다른

사본에서는 축제를 지키는 순서대로 배열되어, 아가〔유월절 : 1 월(양

력 3-4월) 15-21 일) , 룻기〔오순철: 3월(양력 5-6월) 6일), 애가〔성전

소멸 기념일 : 5 월(양력 7-8월) 9일), 전도서〔회막절 : 7월(양력 9-10


월) 15-21 일), 에스더 〔부렴절, 제비뽑는 날 : 12월 (양력 2-3월) 14일〕
로 나타나 있다.
70인역 헬라어 성경, 라틴어 성경, 기타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

책이 예레미야서 뒤에 붙어 있는데, 이 계열은 요세푸스, 멜리토,

오리게네스, 제롬 동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애가’를 예레미야서의 부록으로 간주하여 한 책으로 보

고, 동시에 룻기와 사사기를 합하여 한 책으로 계산할 경우, 22자

인 히브리어 알파뱃과 동수로 구약성서의 책이 모두 22권이 된다

는 것이다. 그 이후에 사르디스의 감독 멜리토(기원 180년경) 역시

구약성서를 22권으로 계산했으며, 오리게네스, 어거스틴, 제롬도

이를 추종하여 ‘애가’를 예언서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레미야서와 ‘애가’를 별개의 책이라고 보

아, 히브리 원전의 입장을 따라 별도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6. 기록목적

이 책을 기록한 시인은 비록 그 당시의 처지가 비통함£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공허한 것같이 생각되며, 구원의 소망


이 없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하나

닝을 찾는다면, 소망은 남아 있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는 현

실의 낙담, 절망상태를 극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확신

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다.


‘애가’를 읽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하나님에게 희망을

거는 생활의 정당성이 업중됨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애가’의

시인은 지혜적 교훈을 통해 부단히 깨우침을 받으면서 참을성있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정별하는 것은 더 큰 옥


척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스라엘에게 응분의 영광이 돌아오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재난의 이유에 대한 반성에서 시인은 먼저 재난에

대한 애도와 함께 회개의 감정을 넘어서서 새 회망을 북돋워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무한하성으로 말미암


아 그의 심판의 그늘에서 심각한 고통을 스스로 젊어지신다는 것이 ·

-44-
서론 /4 5

다 (3 :22 ). 따라서 이같이 성실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 희

망과 신뢰를 두어야만 할 것이라고 시인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3: 25-26). 따라서 그 고난을 잘 참아내면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


과 공흉이 반드시 임할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27-33).
결국 ‘애가’는 현재 닥친 파멸에 대한 비탄을 극복하고 미래의 구
원과 소망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유

다 나라와 예루살렘의 운영을 거울삼아,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7. 저자문제

히브리 성서에는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통적으로는 예레미야가 저자일 것

이라고 생각하고, 이 책을 ‘예레미야애가’라고 불러왔다. 그것은

헬라어로 성서를 번역한 70인 장로들이 본서의 문체와 예레미야서

의 문체가 일부 유사한 점이 있고, 예루살렘 함락에 따른 ‘애가’의

비단과 애도가 예레미야서의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예레미야를 ‘애가’의 저자로 간주하여, 이 책을 예레미야서 다음에

배치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요나단의 아람어 타르궁, 바벨론 탈무드, 페쉬타 사


본 등이 한결같이 예레미야 저작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

다. 그후 라틴어 성서도 이 책의 저자가 예레미야라고 간주했다.

그 때문에 후대의 각종 성서 번역본도 이 책을 예레미야서 뒤에 배


열하고, 예레미야가 저자라는 견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예레미야가 저자라고 하는 전송들의 공통적 주장의 또 다른 근거

는 역대기하 35장 25절이다. 여기에서 요시야왕의 전사를 애도하

46
서론 /47

여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었다고 한 것과, 애가 4장 20절의 ‘우리의

콧검’이라는 구절을 타르궁이 요시야를 언급한 것이라고 주석한 데


서 예레미야와 관련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애가 4장 20절의 ‘우리
의 콧검’은 실상은 시드기야에 대한 언급인 듯하며, 또한 역대기
기자가 언급한 것을 우리가 연구하는 ‘애가’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막연하다. 왜냐하면 ‘애가’의 역사적 배경이 요시
야왕의 그것과는 시대적으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가’
의 내적 증거는 예레미야가 저자라는 전숭을 지지할 아무런 요소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18세기에 이르러 ‘애가’의 저자문제를 연구함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밝혀져야 할 사항이 나타났으므로, 학자들 사이에는 역사적

으로나 신학적으로 그 정당성을 의성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게 되

었다. 우리가 예레미야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기만 해도, ‘애가’

의 예레미야 저작설에는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정하신 그들의 운

명을 공정적으로 받아들일 것과,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인 바벨론

에게 반항하지 말 것을 권고했던 터였다. 그러므로 ‘애가’의 탄식

과는 다른 성격의 비장한 슬픔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레


미야가 저자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애가’와
예레미야서의 시적 부분 사이의 유사성이 있고, 이스라엘 멸망의

국가적 슬픔에 대한 예리한 아픔의 표현, 하나념의 형벌이 이방에


도 엄한다는 사상, ‘처녀 유다’, ‘딸 내 백성’, ‘처녀 시온의 황폐’

화는 표현이 유사하다는 점, 이스라엘의 국가적 재앙의 원인이 백

성들의 죄와 허물 그리고 기만적인 군사동맹에 대한 백성들의 헛된

신뢰, 거짓 예언자와 태만한 제사장들의 죄과,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면서 갖는 두려움, 결국 예루살렘의 원수


들이 처벌당하리라는 기대 등등이 서로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예

레미야가 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논거가 필요조건을 충족시


48 / 예레미야애가

킬지는 몰라도 충분조건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더구나 우리가

여러 모로 두 책을 비교, 검토할 때, 적지않은 유사점이 있는 반면

에, 차이점도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당시에 예레미야 이외의 사람들도 그와 유사한 언어와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밝혀내기는 어렵지 않다. 애가 제 2장 및 제 4장은

에스켈서에 있는 표현과 유사한 점이 많으며, 제 l 장 및 제 5 장은

제 2 이사야의 사상 내용과 유사하고, 제 5 장의 경우에는 시면과 비

슷한 점이 있다. 따라서 그러한 유사성은 저자의 동일성을 의미하

기보다는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문학적 교류의 빈번함으

로 상호 영향을 준 데서 오는 부분적인 공통적 사고 유형과 언어

경향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문인으로서도 수준이 높은, 그 당시의 교양있는 인사였다고 한다

면, 시대적 사조의 주류를 점했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다섯 편의 시는 반드시 통일한 저자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 라는 것도 충분히 고려 할 수 있다. 그래서 파이 퍼 (Pfeiffer) 는

이 시들의 복합적인 삶의 정황과 공동체적 탄식의 성격 및 시 각편

의 상이한 기록시기 등을 보아서, 세 명이나 혹은 그 이상의 시인


이 쓴 작품을 편집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드라이버 (S. R. Driver) 도

‘애가’를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수집한 것을 후대에 다듬어서 성전

소멸 기념일에 회중 앞에서 낭독하기에 알맞도록 편집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특히 애가 제 3장에 등장하는 ‘나’로

표현된 인물은 예레미야 개인과 연관이 없는, 다른 어떤 인물일 것


이며, 제 3장의 형식과 내용도 기타의 장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오

히려 시편의 그것과 유사한 유형의 특갱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


밖에도 오늘날의 많은 학자가 예레미야가 저자라는 주장에 반대하

거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최종적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분명한 역사


서론 / 49

적 전숭을 찾아서 신학적 연구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현단


계에서 ‘애가’의 저자는 예레미야가 아닌, 몇 사람의 시인들의 공
동저작일 것이며, 최종척인 편집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고 보고,
우리의 연구를 추진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8. 역사적 배경과 저작연대

기원천 586년에 예루살렘에 임했던 가공할 만한 채난이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이다. 예루살렘의 함락에 대해서 예레미야 52장 4-17

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중언했다 : 시드기야왕 9년 (B . C. 588) 10월

10 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시작

했다. 이 도성은 시드기야왕 11 년까지 18개월 동안 포위되어 있었

는데, 그해 4월 9일에는 그 도성 안에 기근이 심해져서 양식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드디어 성벽이 뚫어졌을 때 이것을 본 왕과 그

신하들이 바멜론 군대가 포위하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도성을 빠

져나와 도망했다. 그러나 바멜론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여 여리고

형원에서 시드기야를 사로잡았다. 바벨론 왕이 그를 심문하고 시


드기야의 아들들과 고관들을 그가 보는 눈앞에서 처형했다. 그리

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쇠사슬로 묶어서 바멜론으로 끌

고 갔다. 그후 5 월 10 일에는 바멜론 왕의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지휘하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완전 점령하여, 성전과 왕궁과 모든

큰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예루살렘 성벽도 모두 헐어버렸다. 그리

고 백성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만 남겨두고 모두 포로로 잡아갔고,

- 50-
서론 / 51

성전의 금, 은, 농그릇 둥 귀중한 물건들을 가져갔다.

그 당시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대제국을 건셜한 바멜론이 앗시

리아의 영토였던 서부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이집트와 각축전을 벌


이고 있었다. 그 두 강대국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던 유다 왕
국은 바멜론의 느부갖네살에 의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보다 앞서 기원천 601 년, 이집트의

영향하에 있었던 유다는 예레미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멜론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일이 있다. 그리하여 첫번째 예루살렘 포위 끝


에 기원전 597년 3월 16일, 여호야깅의 아들 여호야긴이 다스리는

유다를 점령해버렸다. 그때 유다는 이집트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아무런 원조도 받을 수 없었다. 바멜론은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우


고 일단 물러갔으나, 광신척 애국주의자들에게 둘러싸인 시드기야
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이집트의 후원을 받아 두로, 암몬과 함께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가 기원천 588년의 일이다.


기원전 587년 1 월부터 느부갓네살의 지휘 아래 바멜론 군대가

장장 18개월간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지방의 방어거점을 점령했


다. 이집트가 그 배후에서 유다를 돕기 위해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

아감으로써 무위로 끝났다. 기원천 587년 7월에는 예루살렘의 비

축식량이 완전히 고갈되어 기근과 철병으로 말미암아 고전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 5 월 (태양력으로는 7월
과 8월 사이)에 여지없이 함락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열왕기서와
예레미야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왕하 24:8 -2 5; 램 39 , 52장) .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 시들은 그때의 비극척 현장을 중언하


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목격자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동안에 지은 것이다. 이 시들을 수집해서 다섯 편으로

구성된 애가 시집을 꾸민 것은 예루살렘 훼파의 끔찍한 사건을 마

음에 새겨 기념하기 위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 당시 이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그들의 도성이 파괴된 일을


52 / 예레미야얘가

슬퍼하는 비가전숭이 발전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애가의 유형이 이스라엘에 유입되어, 그 나름

의 비가문학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애가 1-4장은 용어, 문체,

화자로서의 주격의 변동, 유형구조, 두운법 답관체 ‘키나’ 음조의

시 형식 등 공통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는 점을 보아서, 그 당시 애


가전승의 한 장르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동일인의 저작이 아닐지라도 동일학파에 속한 애가전숭 집단의 공

동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애가’가 본래는 각기 독

립척으로 율어지던 비탄시였음을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들을 수

집해서 단권의 저작물로 편찬할 때에 그러한 애가 특유의 공통성을

지니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최종 편찬자는 적어도 그중


의 한 편 정도는 직접 지은 사람인 듯하며, 아마도 제 5장이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바멜론 포로기간에 유다 백성은 파괴된 성전터에 모여서 연례 금

식일 행사를 지키면서 애가를 낭독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하는 기사


를 우리는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램 41: 4-6; 속 7:1-7;8:

18-19) . 이 경우에 처음에는 각개의 장으로 독렵되어 있던 애가를


낭송해오다가, 그들이 바벨론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후에 성전재건

등 국민적인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체를 단권의 ‘애가’로 편집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애가’에 포로귀환 및 성전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성전재건의 계기에서 ‘애가’가

펀찬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미 메소포

타미아 지방에 그러한 전례가 있으므로, ‘애가’의 전체적 면찬이

국민적 사업의 계기로서 이루어졌다는 견해에는 일단 응정할 수 있

다고 생각된다.

‘애가’가 후일에 전체적 현집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더욱 당연시된다 : 제 5장의 시는 다른 장에 비해

단축되어 있고, 비알파뱃 답관체 구조인데, 이 제 5 장 때문에 애가


서론 / 53

전체가 교훈적 성격을 띠게 되고 보다 더 확신을 자아내는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편찬자의 신학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제 3장은 중심적 역할의 기능을 갖고 다른 장에 해석의 기준을 제공

해주며, 다른 장에 비해 66절이라는 많은 철을 가지고 있는 데다


가 편집자 자신의 목소리가 깃들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하여 제 3장을 중심부로 삼아 ‘애가’ 전체가 교차 배열식

(chiastic) 구조를 나타내 게 되 었다. 즉 제 1 창과 제 5장이 일반적 •


감청외향적 성격으로 교차 대조되며, 제 2장과 제 4장이 구체적 • 강

정내향적 성격으로 교차 대조된다. 그리고 제 1 장과 제 2장은 발언

자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 데 비해, 제 4장과 제 5 장은 고난받는

집단을 부각시켜 나타낸다. 끝으로 제 3장은 ‘애가’의 정점을 장식

하며, 그 재난이 교훈적이란 것을 드러내고 있으며, 나아가서 새

롭게 살도록 깨우쳐준다. 따라서 우리가 제 3장을 되풀이해서 원어

보게 되면, ‘애가’의 다섯 편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

다. 그리하여 이 노래 전체가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살핀 바대로 예루살렘의 파괴, 시드기야왕과 유다 백

성의 바벨론 포로 등 그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 지은 이 다섯 편의

시들에 흐르고 있는 한줄기 감정은 그 백성이 의존해왔던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갚이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 시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잠겨 있는 모든 비애와 고통에 대한 표현과 그들의 죄악에 대한 고

백과 뒤우치는 고뇌의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나’ 또는 ‘우리’로 표현한 것과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 관

한 언급이 없이 다만 예루살렘의 재난에 대해서만 생생하게 묘사를

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이 시들을 지은 사람을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이 기록된 시기

는 예루살렘 함락 직후로부터 기원전 538년 고레 스 칙령 이전의

기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 4 / 예레미야애가

구약학자 고트발트 (GottwaJd) 는 그 저자를 포로기간에 바벨론에

머물렀던 사람으로 보고 있으나, 또 다른 학자들은 제 1 , 제 2 , 제 4

장만 바멜론에 끌려간 사람에 의한 것일 것이고, 제 3 , 제 5장은 팔


레스타언에 남아 있던 사람에 의한 것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
는 이 책 전체를 제 1 차 예루살렘 포위 (B. C. 598) 로부터 기원전

538년 사이에 ‘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록한 장소는 ‘애가’의

장에 따라 팔레스타인 또는 바벨론일 것으로 추정한다.


9. 구조와문학적 특성

다섯 편의 시 중 마지막 노래를 제외한 앞의 네 노래는 이른바

알파뱃 두운법 (頭짧法) 답관체 (acrosrics) 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시들은 히브리 자모 22자와 같은 수의 22절로 되어 있으며, 셋째

노래만은 알파뱃이 두운으로서 세번씩 연달아 쓰여졌으므로 66절

로 구성 되 어 있다. 두운법 (allireration) 이 란 시 에 나오는 낱말의 머


리 글자의 조합을 통해서 운율을 나타내는 방법이며, 답관체란 그

머리 글자를 이으면 일정한 문장이나 알파뱃 순서를 밟는 꼴이 되

는 시 작법을 말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알파뱃 시로 ‘애가’를 지은

이유를 (1) 자모의 마술적 힘에 대한 관심, (2) 낭송을 위한 암기


보조, (3) ‘애가’의 주제를 일관되게 서술하는 일, (4) 작시기법,
(5) 무한한 슬픔을 절제된 표현으로 묘사하는 일 등에 유리하기 때

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알파뱃을 총망라함으로써 완

전한 슬픔의 진술과 철저한 죄의 고백을 통한 의식의 정화를 완벽

히 수행한다는 뭇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런 시의 형식은


그 시가 널리 애송되게 하고, 쉽게 외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으

며, 멸망에 대한 슬픔을 히브리인들의 가슴에 사무치게 하기 위해

-55-
56/ 예레미야애가

서였을 것이다.

첫째 노래는 22절인데, 각 절의 머리 글자가 알파뱃 순서로 되

어 있으며, 각 절이 3 행인데 7절이 4행이므로 모두 67 행이다. 둘

째 노래는 역시 22절이며 각 절의 머리 글자가 알파뱃 순서로 되어

있다. 각 절은 3행인데 19절이 4행이므로 모두 67행이다. 그리고

16철의 ‘페’와 17절의 ‘아인’이 뒤바뀌어 있다. 셋째 노래는 66행인

데도 각 행을 한 절로 매겨서 66절이 되어 있다. 그리고 3절씩 묶

어서 같은 알파뱃 머리 글자로 두운을 나타냈다. 역시 여기서도

46절, 47절, 48절의 ‘페’와 49절, 50절, 51 철의 ‘아인’이 뒤바뀌어

있다. 넷째 노래는 각 절이 2 행씩으로 모두 44행으로 구성되어 있

다. 역시 각 절의 첫 행의 머리 글자가 알파뱃 순서로 된 답관체

시(짧)다. 그리고 16절의 ‘페’와 17절의 ‘아인’이 뒤바뀌어 있다.

다섯째 노래는 22절이면서도 두운법 답관체 시가 아니며, 각 절이

1 행으로 되어 있어 모두 22 행이다. 이 시들이 알파뱃 순서에 있어

서 ‘아인’과 ‘페’가 바띤 이유를 어떤 학자 (Lighrfoor) 는 70이라는 수

를 나타내는 ‘아인’을 눈에 띄게 함으로써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70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학자 (Grorius) 는

그 당시의 알파뱃의 순서가 아직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에서 이 비 슷한 알파뱃 노래는 시편 9편, 10편, 25 편,

34편, 37편, 111 편, 112 편, 119편, 145 편, 나홈 1 장 2-8절, 잠

언 31 장 10- 31 절 등이다. ‘애가’의 첫째, 둘째, 넷째 노래는 순천

한 ‘키나’ 가락의 만가이며, 다섯째 노래는 일반적인 애가다. 이


노래는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사용되었

던 시편을 연상케 하는 형식과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기도


문이다. 그리고 셋째 노래는 같은 만가이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로

대변하는 서정시와의 혼합체로서 기도로 끝나고 있다.

여기 나오는 ‘키나’ 가락은 3강음구와 2강음구의 전후 두 소절로

되어 있는 행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애절한 느낌을 자아내며,


서론 /57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만가 운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3+2

이외에 4+3 , 4+2 , 3+3 등의 불규칙형도 있다. 어떤 학자들 (H.


J. Kraus , W . F. Albright) 에 의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이 그들

의 파괴된 수메르 도성에 대한 애가문학을 일찍부터 형성한 바 있

는데, 히브리인들이 나중에 그 형식과 내용을 적지않게 본딴 것이

라고 한다. 수메르인의 애가에는 “포위된 우르 성안에서 우리가 기

근으로 죽고, 성밖에서는 옐람족의 무기에 살륙당했노라”는 구절


이 있는데, 이것은 애가 1 장 20절과 매우 홉사하다. 그리고 이 비

슷한 말이 신명기 32장 25절, 에스겔 7장 15 절, 예레미야 14장 18


절에도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 당시 이스라엘이 메소포타미

아 문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 성서연구에 있어서 문헌적 • 전숭사적 • 사회학적 시각의 새


로운 전환점을 맞이해서, 종래의 연구성과에 대한 충실화가 나타

나게 되 었다. 그 결과 알파뱃 두운법 (頭題法) 답관체 짧冠體) 시 형

및 양식적 구조가 처음부터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거듭된 수정과

정을 거쳐서 생성된 것임을 밝히게 되었고, ‘애가’의 사회학적 • 신

학적 배경도 드러나게 되었다.


‘애가’의 문학적 양식은 간결하고 명료한 특성을 갖는다. 알파뱃
형식의 시로 표현함으로써 견해의 전환 및 화자의 교대에 따른 새
장면의 전개를 보여주는 효과를 나타낸다. 그리고 화자의 목소리
의 변화를 통해 개인적 비가와 집단적 비가가 교차되는 모습을 보

여준다. 이 책의 시인은 예루살렘의 훼파를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처럼 표현하면서, ‘딸 시온’의 죽음을 만가 형식으로 통곡하는

장면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과부로도, 때로는 상을

당한 어머니로도 묘사했다. 특히 개인적 버가의 부분에서는 예루


살렘이 고통당하는 여인으로서 인격화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모

성화된 시온이 자녀로 묘사된 유다 백성의 고통과 분노를 한 옴에


안고 폼부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백성의 집단적 죄악을 고백
58 / 예레미야얘가

하며, 하나님께 이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감면 또는 제거해달라고 애

원한다. 그런데 이 여인은 상상적 인물로서 유다 백성을 대리하기

도 하고, 유다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유다의 슬픈 사정을 알리며

통곡하기도한다.

이와 같이 ‘애가’는 인격화 방식으로 대중고난을 개인적 차원의

감각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특히 공동비가인 다섯

째 노래에는 목격자 시인의 목소리와 인격화된 예루살렘 또는 유다

백성의 음성으로 구분되는 두 갈래의 비가와 기도가 나타난다. 그


런데 유다 백성은 공동적으로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문학적 견

지에서 볼 때, 이 다섯째 노래에서는 앞장에 나오는 노래에서 흔히

보는‘애매모호함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 비탄의 감정을 정리해서 극

적으로 마무리짓는 결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

히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신학적인 단안을 유보한 채, 하나

님께 겸손히 잔구하는 일로써 여운을 남기고 있다.


10. 예레미야애가의 신학

‘애가’는 예언전승, 신명기 전숭, 시온 및 다윗 왕조 전숭을 바

벨론 포로시대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하나로 용해시켜 연단된 새

로운 희망에로 집약한 예언적 , 신명기적, 지혜적 개념들의 융합체


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준엄하게 형벌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과거로부터의 교훈을 배우게 하

고, 극한적인 재난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지키게 하려는 의도도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미

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만든다.

‘애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는 (1) 이스라엘에게는 받아 마

땅한 형별, (2) 조기경고 기능을 하지 못한 예언자들, (3) 시온


전숭, 다윗 왕조 전숭의 무조건적 보호능력의 무효화, (4) 참회의
필연성, (5) 하나님의 주권과 희망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두렵
고 슬픈 일이지만, 이스라엘의 엄청난 죄악 때문에 그것은 받아 마
땅한 형벌이다 (1 : 5 ; 3 : 42 ; 4 : 5 동) • ‘조기 경고체제’ 구실을 했

어야 할 예언자들이 거짓 환상만 보고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59-
60 / 예레미야애가

했기 때문이다 (2 : 4 ; 4: 13). 야훼가 예루살렘을 척의 공격으로부

터 기적적으로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 (2 : 15 ; 4: 12) 은 유다의 죄

때문에 무산되었다. 시온이 다시 구원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유다

자신의 죄과에 대한 참회가 선행될 때에만 가능하다. 받아 마땅한

형벌과 부당한 재난 사이의 모순적 현실 속에서도 뭇민족 사이에

엄연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애


가’의 시인은 이러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과거회상적인 슬픔을 떨쳐

버리고 미래지향적인 소망의 역동성을 캉조한다. 기원전 586년의

참극은 하나님이 계약백성을 버린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무

력해서 유다로 하여금 패망하도록 내버려둔 것 같은 의문을 불러일

으켰다. 그러나 ‘애가’의 저자는 인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정계했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그 사실에 머물지 않고

이토록 처참한 절망 가운데서 장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기대하도

록 역설한다. 한편,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운영은 결코 영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바벨론이 유다를 정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잠시 사용된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서 제시된 주제와 관련해서 ‘애가’의 저자는 (1) 하나님의 심

판의 실상을 언급하고, (2) 회개하라고 권고하고, (3) 소망을 가


지라는 위로와, (4) 기도의 문을 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리하여 먼저 죄악을 자각케 함으로써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하

나님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구약학자 고트발트 (N . K


GottwaJd) 에 의하면, 이러한 이 책의 신학을 이해하는 열쇠 는 보복

과 보상의 교리에 대한 신명기적인 신앙과 참담한 역사적 현실 사

이의 갈풍을 하나님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해 소하는 일이라고 했

다. 한편 올브렉트슨 (B . AJbrektson) 은 당시의 예루살렘 불가침성의

개념과 실제의 역사적 현실 사이의 괴리 를 놓고 고뇌한 시인의 심

정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애가’의 시인은 사태가

매우 비참할 때에도 은혜를 기대할 수 있다는 예언자적 • 신영기적


서론 / 61

전숭에 나타난 야훼신앙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재난을 이야기한


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에게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그는 예

루살렘의 멸망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

의 진리가 무의미해졌다고 생각한 자들과,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

암은 그들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갱신된 자비의 통로는 신

설한 자들에게 아직도 열려져 있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 사이의

갈등을 다음과 같은 것들로써 해소하려고 했다 : (1) 죄에 대한 책


임, (2) 고난의 연단하는 기능적 가치, (3)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의 개념으로 해소하면서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다시 말

하면, 그는 ‘시온과 다윗 왕조에 대한 약속들’을 철저히 무효화시

킨 다음, 예언자적 • 신명기적 • 지혜적 개념들의 혼합체 속에 그것


을 종속시켜, 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희망관의 한 형태로 발전시

격 나타냈던 것이다.

이 다섯 편의 서정시적인 발언은 함락된 도시의 운영에 대한 어


느 한 사람의 사상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이스라엘 공동

체의 집단적인 고백과 호소와 간구인 것이다. 참혹한 고난 속에서

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들의 이 고난에 대한 비탄의 표시는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운명에 대한 수용을 정착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

연의 사명을 껴안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섯 편의 시

속에 나타난 내용상의 특성은 계약백성이 당연한 불행과 고통 중에


서도 옛날부터의 하나님의 약속을 즐거움으로 회상한다는 점이다

(2:20;5:1). 이러한 회상을 통해서 그들은 더 큰 확신과 미래의


희망을 갖게 된다. 이 확신과 희망은 하나님의 통치의 보편성과 영
원성과 전능하심에 근거해서, 파멸된 그들에게까지도 변함없는 계

약관계에로 복귀하게 하는 보증으로 작용한다 (3 : 24). 그러므로


고난받는 자는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잠잠히 기다리는 도

리밖에 없다.
62 / 예레미야애가

올바른 삶은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섭리에


감사하는 삶이다. 그것은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피할 수 없는 하나

님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순응하는 자세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

는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이다. 즉 본회퍼의 ‘값싼 은혜가 아닌 하나

님의 섭리’ 안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인식하는 일이다.


11. 예레미야애가의 현대적 교훈

‘애가’의 시인은 유다 왕국 멸망의 비극을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

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으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f 그 국가척

파멸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성


을 고백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의 최를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의탁하는 마음을 가다틈을 것을 역설했다. 그리


고 그들 자신이 재난에 직면하고도 오히려 하나님의 원대한 목척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구원과 미래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로 돌이키지 않는 자에 대한 예표적 경고가 되게 하는 동시에, 슬

픔을 극복하고 감정의 정화를 얻게 하며 순종의 태도와 희망의 전

망을 갖게 한다.

우리는 ‘애가’를 지은 시인의 증언을 통해서 온 유다가 갯더미에


묻히게 된 비참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며 미래의 구원의 희망을 노래로서 나타내는 그들

의 신앙 표현에 갱탄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고난의 훈련을 감수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

-63-
64/ 예레미야얘가

권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했던 것이다. 그

시인은 절망 중에서도 신실한 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

하도록가르치고 있다.

‘애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백성의 회개를 역설한 다음,

독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고 당대히 나가라고 가르친다. 그리


하여 처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일깨워준다. ‘애가’의 시인은 유다 멸망의 계기로 이제까지 흐려졌

던 야훼신앙에 다시금 굳건히 서서, 그 참상을 종말론적으로 야훼

의 날의 정조로서 수용하고자 했다. 그는 현재의 황량함을 직시함

으로써 과거를 회상했다. 그 과거의 역사에서 야훼가 그들을 이집

트에서 구출하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었으며 가나안으로

인도해내 그 땅을 유업으로 주신 사실을 회상했다. 그는 신명기의

정신에 따라 그들의 계약에 충실했다면 축복을 받았을 터인데, 불

충실했기 때문에 죽음의 참상과 비탄의 아픔을 맛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정별하시는 야훼의 권능을

똑똑히 보았으므로 야훼에 의한 미래의 구원을 불을 보듯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야훼의 임재와 구원을 간구했다(3:


57- 58). 이 간구에 대해서 야훼의 자비와 응흘이 중단되지 않으리
라 (3 : 22) 는 희망과, 야훼는 영원히 그 백성을 저버리지 않는다

(3 : 31) 는 확신이 샘솟는 가운데, “너의 징계는 끝이 났다. 다시는

너를 포로로 끌어가지 않을 것이다"( 4 : 22) 라는 음성이 그에게 대

답으로 들려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을 주제로 노래한 ‘애가’는 미래의 하나념의 나라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의미에서 현대언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12. 예레미야애가의 사용

경건한 계약백성들은 고통 중에 자연적인 슬픔을 표현하는 영적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시온에 대한 추억을 생생하게 보존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애독하게 되었다. ‘애가’는 주를 믿는 사람들


로 하여금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져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광

명은 다시 온다는 희망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나가면 언제든지 하

나님의 자비를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북돋워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늘의 교회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빛을 보여주며, 교회가 나아갈 바를 제시하여 신앙인으로 하여금

교회의 주역으로서 활력있는 봉사를 하도록 만들어준다.

옛날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동질성 상실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뭇에서 이 책을 온 민족이 원도록 권장해왔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민족적 비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민족적 위로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 1성전 소멸 기념일로 지키


는 연례 금식일 곧 다섯째 달인 ‘압’월(태양력으로는 7월과 8월 사

이) 9 일에 회중틀 앞에서 이 책을 냥독했다(렘 41 : 4- 5 ; 속 7: 1-

5). 성서의 기록에는 제 1성전이 파괴된 날이 ‘압’월 7 일이라는 기

-65-
66/ 예레。 lpþo~ 가

사(왕하 25: 8-9) 와 10 일이라는 기사(렘 52 : 12) 가 있는데, 그 중

간인 9 일에 지키게 된 듯하다. 그리고 그 뒤에 재건했던 제 2성전

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날은 기원 70년 같은 달 9 일이며, 바르

코크바 (Bar Kochba) 요새가 함락된 날이 기원 135 년 같은 달 9 일이

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압’월 9 일이 ‘대참상 기념일’로 기록되어

있다.
‘애가’는 독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교훈과 감명을 주는 책이다.

따라서 모든 백성이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인정하

고, 현실의 고난에도 실망하지 않고 기도의 문을 열면서 회개와 믿

음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이 ‘애

가’가 음악의 주제로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 스트라빈스키 (Igor Fedorovich Stravinski) 등이 ‘애

가’를 주제로 한 작곡을 하기도 했다. 앞서 살핀 바 대로, ‘애가’는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공통 주제와 그 일에 대해 애도하는 공식 행

사를 중심으로,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불려지던 비가들이 수집되

어 한권의 책으로 편집된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인들의 공식적인

예배행사에 사용되기에 알맞도록 갖추어진 책이 된 것이다.


13. 내용개요

이 책은 시인 자신이 백성을 대변하여 비통한 사실주의로 계약백

성의 파멸에 대해 증언하고 하나님의 공훌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기

록되어 있다. 유다 나라와 예루살렘에 닥쳐온 파멸과 그 백성에게

가해진 수치와 모욕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시인은 이런 재난


을 탄식시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했다.
이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한 데서 온 결과였
다. 시인은 굶주리고 여윈 나머지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비참한 창

면과, 극도의 기아로 자기의 자녀를 잡아먹는 잔인한 현실과, 성

전에서 제사장을 살육하는 참상을 묘사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원대한 목표와 계획이 잠정적으로 백지화되는 안타

까운상황을표현했다.
이 시들은 영적으로 황폐된 그들 공동체의 고뇌로 가득 차 있으

면서도, 시종일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로 옳어지고 있다. 시언


은 제사장적인 심정에서 중재를 겨냥한 항의를 하는 동시에, 예언

자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화와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예루살렘은 그 자체의 최악과 계약파기 때문에 훼파되었다는 것이

-67-
68/ 예레미야얘가

다. 아무리 그 도성의 재앙이 극심하다고 해도, 그러한 운명은 지

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백성을 이 지경으로까지 이끈 불

성실한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규탄하면서 그들에게 현혹되지 말

컷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이 시인은 원수들에 대한 수동적인 입장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조용한 신뢰를 권고한다. 그는 옛날부터의 하나님의 약

속을 신뢰하는 본래적 신앙에 돌아감으로써, 이제까지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청산하고 야훼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

앙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간직하도록 역설했던 것이다.


첫번째 노래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인격화했다. 그리고 예루살
램의 불행을 스스로 다양한 모양으로 진솔하게 하면서 그들의 멸망

의 원인을 실토케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

기도 하고, 지나친 고통을 가져온 원수들에게는 보복이 나타나기

를 기도하기도 한다.

두번째 노래에서는 그들의 멸망이 주님의 종으로 자처한 종교지


도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과, 인격화된 예루살렘의 슬픔과 고

난의 원인에 대한 시인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하나님께 기도

할 것을 권연한다. 이 권면에 따라 시온 곧 예루살렘이 가장 애절

하고 격렬한 슬픔을 안고 기도를 올린다.


세번째 노래에서 처음에는 고통의 절정에 다다른 시인이 스스로

‘나’호 동장해서 하나님께 호소하기 시작한다. 그는 원수로부터뿐


만 아니라, 동족과 친구들로부터도 고통을 당한다. 이 수난자는

영적 이스라엘을 대변하여 주념으로부터도 버렴을 받았다고 고백

한다 (3: 1-21). 그리고 야훼의 자비와 공흘이 무궁하시므로 이스

라엘 신앙공동체가 진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서는 주께서는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도록 하신 것이 본심


이 아님을 밝힌다. 따라서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는 것이
서흔 / 69

므로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고 역셜한다 (3 : 22- 39). 이번에는 주

격이 ‘우리’로 바뀌면서 그들의 범죄함과 돼역함을 용서받지 못할

까 우려한다 (3:40-47). 다시 ‘나’로 표현된 화자는 주님께 그 백

성을 보호해주실 것과 그의 원수에게 공의로우신 보웅을 해주시기


를 기도로써 애원한다 (3 : 48-66).

네번째 노래에서는 고귀하던 시온의 아들들이 질항아리같이 추


하게 되고, 비단옷을 업혀 양육받던 사람이 거름더미에 앉게 되었

다는 표현과, 칼에 죽은 자가 차라리 굶주려 죽은 자보다 나은 처

지라는 표현 동으로 계약백성의 버참한 상태를 노래한다. 이러한


일은 종교지도자들이 의인의 피를 성읍 안에서 흘리게 했기 때문이
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외국의 군
사적 원조를 바라다가 좌절하게 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끝으로
시온이 받은 잔을 에돔도 받게 된 것을 차라리 즐거워하라고 빈정

대는투로노래한다.

다섯번째 노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식의 노래로서,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알파뱃 두운법 답관체

형식이 아니라 시편의 형식과 비슷하다. ‘우리’로 표현된 화자가

공동체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

다. 그들은 바멜론에 잡혀간 무리와 이집트에 피난간 무리를 포함


한 야훼신앙 공동체였을 것이다. 그들은 야훼께 기도하기를 자신

들을 버리지 말고 주께로 돌이키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끝을 맺는

다.
14. 내용분해

첫번째 비탄의 노래

1. 단죄의 현실 (1: 1-22)


1) 예루살렘의 참화 (1 : 1- 7)
2) 시온을 파멸케 한 죄악 (1: 8-11)
3)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 (1: 12-22)

두번째 비단의 노래

2. 진노의 날의 참상 (2: 1-22)


1) 시온의 철저한 수난 (2 : 1-1 이

2) 위로하는 사람 없는 시온 (2: 11-16)


3)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 ( 1 : 17-22)

세번째 비탄의 노래

3. 폐허 앞에서의 수난자의 간구 (3: 1-66)


1) 수난자의 호소 (3 : 1- 18)
2) 고난 중의 구원의 소망 (3 : 19- 39)

- 70-
서론 / 71

3) 회개의 권면 (3: 40-48)


4) 구원의 간구와 회개 (3 : 49- 54)
5) 신뢰의 노래 (3: 55-66)

네번째 비탄의 노래

1.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소망 (4: 1-22)


1)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재난 (4: 1-12)
2) 지도자들의 죄와 그 결과 (4 : 13-20)
3) 위로와 소망 (4: 21-22)

다섯번째 비탄의 노래

5. 회개하는 공동체의 기도 (5: 1-22)


1) 자비의 간청 (5: 1-7)
2) 시온의 참상과 철저한 고백 (5:8-18)
3) 구원을 위한 기도 (5 : 19-22)
첫번째 비탄의 노래
1. 단죄의 현실 (1 : 1-22)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와 비참한 현재의 재난을 비교하면서 시언

의 슬픔을 표현한 이 노래는, 각 절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뱃

순서로 시작되게 지은 답관체 형식의 애가 중 첫번째 것에 해당된


다. 이 노래는 히브리어 글자 수대로 22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백성이 예전에는 번영과 영광을 누리고 있었으나, 현재의 참

상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간 뒤끝과 같이 황막하기 쩍이 없었다. 이

노래를 지은 시인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재난에 대해서 애통하며,


그 팡경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이
러한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것은 그들이 모세의 율

법을 소흘히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최악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주실 것을 간구


했고, 그들의 원수에게는 정의가 행해지기를 호소했던 것이다.
이 노래는 두번째 애가 및 네번째 애가와 마찬가지로 매행이 세
강음절을 두 강음절로 받아서 비가의 여운이 울리게 하는 순전한

만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 파행적 운융의 만가적 영탄의 노래


는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의 활

-77-
78 / 예레미야애가

의 노래’(상하 1:19- 2 6) ,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한 노래’(상하 3 :

33-34) 등이다. 한변 세번째 애가는 만가이면서도 개인적인 계기


의 서정시와 혼합되어 있는 점이 그 특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첫번째 애가의 시인은 그 당시의 하나님의 단죄의 현실을 직

접 목격하고, 단순히 소극적으로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가 크게 범죄했다’ (1 : 8) , ‘이를 심판하시는 야훼는 정당하시도다’

(1 : 1 이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

했다. 물론 이 첫번째 노래는 그 뒤에 이어지는 네 편의 애가들과

밀접하게 구조화되도록 편집된 까닭에, 서로 연관시켜 살펴야만

그 사회학적 • 신학적 배경이 잘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 첫번째


애가만으로도 그 참화의 광경과 그 당시의 생존자들의 심리적 • 사

회적 ·종교적 비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시편, 용기, 예레미야, 에스켈, 제 2 이사야

(40- 55장)의 비가적 요소와의 공통성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첫번째 애가는 여인으로 의인화된 시온과 시언이 번갈아가

며 슬픈 노래로 발언한다. 여인 시온은 처음에는 비가의 내용으로

등장하다가, 점차 자신의 고난에 대해 직접 통사정하게 된다. 여

인 시온이 말하는 그 딱한 사정을 듣고 시인이 깨닫게 된 것은 그

도시가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로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시

온은 그 고통이 노하신 야훼의 직접적인 행위에서 온 것이므로, 하

나님 외에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도 시온은 한편으로는 그들이 형별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고백

하고 체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야훼께 그들의 형벌이 가벼

워지게 해주실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 예루살렘을 잔혹하게 파괴한 무리를 벌하신다

면, 심리적으로나마 그들의 고통이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생각에 앞서 철저한 반성과 회개가 있


을 때, 그 오만한 바멜론과 그 동맹국 에돔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1 : 1 / 79

임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 예루살렘의 참화 (1 : 1-7)

매 개요

이 부분은 상황묘사적이다. 하나님의 형벌의 대상이 된 계약백

성은 고독하고, 억눌리고, 더럽혀지고, 경멸되는 여인으로 인격화

되어 있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은 과부와 같이 처량한 신세가 되었

다. 지난날에는 친교를 가졌던 나라들도 이제는 적대적 태도로 외

면한다. 백성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고, 남은 백성들도 재난을


피해서 흩어졌다.

환회가 념쳐야 할 절기가 되어도 예루살렘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고, 시온은 황무지같이 되었으니, 원수들이 오히려 비웃기만 하

는 것이었다.

띠알레프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괴부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80/ 예레 01 야얘가

매 주석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각 절은 3 행 ( tristich) 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행은 ‘키나’조의 특정인 3강음절과 2강음절로 되어 있다.

슐프다는 너무나 가혹한 재난 앞에서 아연실색할 비탄의 심정을

나타내는 감탄사 ‘에카’를 옮긴 말이다. 이 말은 이 책의 표제로 사

용되었으며, 히브리 원천 (MT) 에서 ‘애가’의 첫절에 대한 두운법

답관체의 첫문자 ‘알레프’를 취하기 위해서 이콧에 사용된 것이다.

‘에카’는 감탄사 ‘에크’(어떻게)보다도 더 강한 표현이다.

쩍막히 앉았는고의 “척막히”는 히브리어로는 ‘바다드’(훌로)인데,

철저한 고렵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텅 비

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려진 상태가 되었음을 알게 한다.

둘째 행의 이제는 과부 감고에서 “과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


마나’는 고아와 마찬가지로 가없고 불쌍한 존재를 뭇하는데, 여기

에서는 예루살렘이 그런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행의 옐방 중에 공주되었던 자라는 구절에서 “공주”는 ‘왕비’
라는 뭇으로도 사용된다(왕상 11 : 3 ; 사 49: 23}.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디노트’는 한 강대국 안에 있는 여러 속국을 말한다.
페르샤 시대에는 127개의 열방이 있었는데, 에스더 1 장 2 , 22절에

는 도(道)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는 유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주


변의 여러 나라들을 가리킨다.

조공드리는 자의 원문 ‘마스’는 ‘강제노역에 종사하는 자’ 또는 그

러한 집단을 뭇했으나(출 1: 11 ; 신 20: 11) , 이 말이 에스더 10장

1 절의 경우와 같이 ‘조공드리는 자’로 종종 사용되기도 했다.

m신학척 메시지
1 : 2 / 81

과부의 외로움이라는 표현만큼 불행한 여인의 처지를 잘 말해주

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북적거리던 성읍이 척막한 폐허로


변한 모습을 인간사회의 양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번영과 폐허,

위엄과 수치, 존귀와 비천의 극단척 묘사는 그들이 당한 재난에 대


한 심리척 반웅을 극대화시켜 주는 것이다.
열국 중에 위대했던 예루살렘 (유다)이 이제는 과부꼴로 몰락했

다. 과부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에서 주로 도움받지 못하고 절망척

언 상태에 빠진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한때 열방을 통치했던


그 나라가 이제는 ‘바멜론’을 섬기는 처지가 된 것이다. 누가 이들
을 이렇게 비천한 자리로 떨어지게 했을까? 그것은 그들 자신의

죄악이 그런 비참한 처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밍빼트
밤새도록얘곡하니

눈물이 뺑1 흐름이여

사랑하던자중에
위로히는자가없고

친구도다배반하여

원수가되었도다

매 주석

시인의 고독과 슬픔이 절정에 다다랐다. 사랑하는 자들올 다 잃

어버혔고, 위로하는 자도 없다.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는 우방국이

었던 나라들이 원수로 돌변해 있었다. 시인은 슬픔의 주체인 예루


살램을 여성 삼언칭 대명사로 나타내어 그 비극을 묘사했다.
82 / 예레미야애가

첫째 행에서 밤새도록은 참평안과 휴식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낮 동안만이 아니라 온밤을 지새면서 괴로워함


을 말한다. 밤은 본래 수고하는 자들의 안식을 위해서 주어진 것인

데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애곡하니 는 원

문에 ‘바코 티브케’(울고 또 한없이 울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몹시 운다’라는 뭇이다. 눈물이 향에 흐륨이여 에서 “흐름”이란 말은


원문에는 없으나, 눈물이 줄곧 뺨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그렇게 번

역한것 같다.
둘째 행의 위로하는 자에 해당하는 허브리어는 ‘메나햄’인데, 이

애가에 네 번 거듭해서 나타난다 (1: 2 , 9 , 17 , 21). 그리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전도서 4장 l 절에 한 번 나올 뿐이다. 시인은 여기

에서 참 ‘위로하는 자’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고백하

고있다.

셋째 행의 친구는 유다가 멸망되기 전에 협력해주던 여러 나라들


이다.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 나라들을 친구로 삼

아 도움을 바랐는데, 이것이 잘못이었다. 배반하여는 언약을 어기


고 오히려 원수같이 대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그두’가 이사야 48장 8절과 예레미야 5 장 11 절에서는 ‘패역하다’

로 번역되었다.

m 신효t적 메시지

예루잘렘을 여인으로 의인화한 이상, 그 주변의 동맹국도 변덕

스러운 애인 또는 친구로 의인화함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는 특


히 이집트를 그 같은 친구나라로 언급하고 있다(렘 2: 18 , 36). 세

상 나라들은 막상 한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 아무런 도움도 제

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과 같이 원

수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류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1 : 3 / 83

우리는 참도움을 위해서 참되고 영원한 친구이신 주님만을 의지

해야 할 것이다(요 15: 14-15).

댐기멜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열방에 거하여

펑강을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곳에 미쳤도다

매 주석

환난과 많은 수고로 언하여 와 사로잡혀 갔도다 라는 구절 사이 에는

환난과 수고가 원인이고 노예상태가 결과가 되는 도식으로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을 배반하는 생활로 말미암아 환난과 수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가, 마침내 포로로 물려가고 말았다는 뭇이다. “환난”

에 대한 원문을 풀이하면 ‘몰락하여 고초를 겪게 됨’이라는 뭇이


며, “수고”는 ‘종으로서의 고된 일’을 말한다. “사로잡혀 갔도다”는

히브리어로 ‘갈다’인데, 여성명사인 유다를 주어로 받고 있으며,

그 어간 ‘갈라’(이주해가다)의 칼 • 3인챙 • 여성 • 단수 • 완료형이다.


이 말은 유다 백성이 단순히 다른 나라에 이주했다는 뭇이므로, 성

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계약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일에 앞서 많은 환난과 수고를 겪다가 강

제로 바멜론에 사로잡혀 갔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

다.
84/ 예레미야애가

둘째 행의 져가 옐땅에 거하여 는 포로로 꿀려가고 남은 백성들 중

더러는 다른 나라로 도피해가 그곳에서 자리잡고 살았다는 것을 말


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도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얻
지 못함은 히브리어로 ‘로 마츠아’인데, 그 의미는 ‘찾고 또 찾아도

발견하지 못했다’라는 말이다.

셋째 행의 핍박하는 자는 도망가는 자를 끝까지 추적해서 괴롭히

는자를 말한다. 협확한곳에 해당하는히브리어 원문은 ‘하메차럽’


인데, 여러 난관 또는 궁지의 틈새에 끼여 꼼짝할 수 없는 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 백성이 심한 곤경에 몰리게 된 것을


말한다.

매 신학적 메시지

히브리어에서 죄라는 것은 형벌의 원인이 되는 범죄를 의미하기


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형벌 그 자체와 통일시되기도 한
다. 그러므로 형벌 그 자체에 해당되는 ‘환난과 수고’ 앞에 히브리
어로 ‘민’(…로부터, ... 때문에, ... 의 원인)이라는 전치사를 붙여서

사용하는 일이 혼하다. 고대 야훼 신앙인들에게는 야훼와의 관계


가 잘못된 것이 죄이며, 또한 잘못된 관계에서 온갖 고난이 필연적

으로 뒤따른다는 생각이 상식화되어 있었다.

우리말 성경에 “사로잡혀 갔도다”라고 옮긴 말의 원문은 ‘이민하


여 갔다’라는 뭇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형벌의 결과로서 그들
이 강제로 끌려간 상황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 당시 유다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 본국을 둥지고 이산하게 되었고, 어디로 가든지 고

생스러운 삶이어서, 그들은 마치 협독에 몰린 듯이 핍박을 받으며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죄악을 범할 경우, 어

디로 가든지 실패가 연속될 것이며, 형안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1 : 4 / 8'

협착한 곳에 몰려 핍박받는 삶으로 일관하게 될 것이다(신 28: 65 -

67).

E김왈렛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곤고를받았도다

매 주석

첫째 행과 둘째 행에서 시인은 “도로”와 “성문”을 의인화해서 노

래하고 있다. 그러다가 셋째 행에서 “시온”이 주어로 나타난다. 엄


밀히 말하면, 시온은 성전이 들어 서 있는 산 언덕이다. 아모스 6
장 1 절과 이사야 1 장 2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애가’에서도 시온은

곧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철기에 나아가는 사량이 없옴이로다라는 구


절에서 “없음이로다”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없기 때문이로다”라고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절기를 지키려는 순례자가 없는 까닭에 시

옹의 도로가 쳐량해진 것이다. 여기의 “시온의 도로”는 시온으로 향

하는 행로를 뭇한다. ‘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에드’는 ‘정한

시간과 장소’라는 뭇이다.

둘째 행의 황척하며 곧 ‘쇼에민’은 여성 • 복수 • 분사형인데, 아람

어에서는 자주 쓰이나 구약성서에서는 시에서만 드물게 사용된다.


단식하며 곧 ‘네에나힘’은 ‘아나흐’(신음하다)의 니팔 • 남성 • 복수 •
86 / 예레미야애가

분사형이다. 이 표현은 이 첫번째 애가를 지은 시인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셋째 행의 처녀들은 아마도 성전제의에 관련된 사역자들인 듯하

다. 근심하며 는 ‘야가’(슬퍼하다)의 니팔 • 여성 • 복수 • 분사로서,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누고트’다. 이 말은 괴로워하며 비탄에
젖 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분사형이 자주 사용된 것은 오래

지속된 행위로 나타냄으로써, 비참한 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다. 져도 곤고률 받았도다 라는 구절에서 “저도”는 시온을 여성으로

인격화해서 나타낸 것으로, 시온 자신이 ‘큰 곤고를 받았다’라는

뭇의 강한 표현이다(사 38: 17 ;풋 1 : 13).

매 신학적 메시지

앞절은 ‘유다’가 주어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시온’이 주어가

되어 있다. 유다가 계약백성을 대표하는 데 비해, 시온은 종교지

도자들을 대표한다. 앞절이 민족의 멸망에 대한 슬픔을 토로한 것


이라면, 여기서는 그들의 제의제도의 파탄에 대한 슬픔을 나타낸

다. 그때 국내의 불안 때문에 그리고 주민의 이산 때문에 순례가


한산해졌고 희생제사도 포기상태였다. 따라서 제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성전에서 노래에 종사하는 처녀가(시 68: 25 ; 램 31 : 4 , 13) 탄

식하고 낙망함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성전과 제단이


무너지고 제의가 끊어진 상태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증

표로 알고 몹시 슬퍼했던 것이다. 예배가 끊어졌다는 것은 정벌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칫 이런 처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예언자적

신앙으로 예배의 침체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암 5: 2-3 ; 사 1 :


1 : 5 / 87

딩해
저의 대적이 머리가되고

저의 원수가형통함은

저의 죄가많으고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매 주석

머리가 되고 라는 구절은 히브리어로 ‘하유 …레로슈 ’인데, 신영기

28장 13절에서 이스라엘이 애초에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


록’ 약속과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순종치 않았으므
로 결국은 원수들이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더욱 원통함을 자아낸다.

저의 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폐샤에하’는 다른 곳에서는 패역


(용 34 : 37) , 행악(용 31 : 3) , 허물(표준새번역의 애 1 : 5) 로 번역되

어 있다. 그것은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반역적 죄악을 말한다. 곤


고케 하셨음이라는 그 원어인 ‘호자흐’(‘야가’의 히필 • 3인칭 • 남성 •

단수·완료형)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인 의지

에 의해 그들에게 고통받게 하셨다는 것을 뭇한다.


어린 자녀들 곧 ‘올랄레하’는 어린 나이의 연약한 아이들만을 가

리키는데, 시인은 애처롭게도 이들이 잔인한 원수들 앞에서 노예


상태로 전락되는 광경을 묘사한다. 사로잡혔도다의 원문인 ‘할쿠 셰

비’는 여기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셰비’는 ‘포로에로’와 같이 방향


을 나타내기보다는 부사적으로 ‘포로상태로’라는 돗을 지난다. 여
88 1 예레미야애가

기서도 계약백성의 범죄에 대해 야훼 하나님이 이방세력을 도구로

사용해서 갱계하신다는 예언자척 사상이 나타나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에서 시인은 그 불행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고통으로 깅이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불행은 그들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이며 (호 9: .7 ; 렘 3 : 14f.) , 스스

로 뿌린 최의 열매인 것이다. 그들이 일찍이 우상을 돼한 찰못(겔


5 : 6f. ; 22 : 2- 5 ;사 30: 9; 렘 5 : 23) 때문에 급기야 어린 자녀들이
원수들 사이에서 비인간화되는 일로 이어졌으니, 죄와 벌의 법칙
이 너무나도 냉엄하다고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두가

크게 후회하지만 이제는 은혜의 때가 지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직

접척인 심판이 임했으니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다’고 시인은 노

래하고 있는것이다.

댐와우

처녀시온의

모든 영팡이 떠나감이여

저의목백은

꼴을찾지못한사슴이

쫓는자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매 주석
1 : 6 / 89

본절은 히부리 시에서는 혼히 볼 수 없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리고’의 뭇을 가진 ‘와우’-계속법 동사 (wa w-consecutive)

로 시작된 점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알파뱃 순서로 두운법 답관체


시를 작성하기 위해서 ‘와우’로 시작해야 했는데, 히브리어 가운데

서는 ‘와우’가 첫 자모가 되는 낱말을 달리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

다. 그리하여 부득이 ‘그리고’라는 뭇이 포함된 ‘와우’-계속법 동


사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앞절과 연결되는 듯한 시
행(詩行)이 되고 만 것이다.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다르’는
‘ 영화’(장 20 : 29) , ‘호화로움’(사 5 : 14) , ‘위엄’(신 33: 17) , ‘아름다

움, 훈장’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이 말은 여기 열

거한 모든 의미를 종합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쳐녀 시옹은 히브리어 ‘바트-치온’을 번역한 것인데, 직역하면

‘시온의 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뭇은 ‘딸과 같은 시온’ 또는

‘말 곧 시온’이므로 우리말 성경에는 ‘처녀 시온’이라고 번역되어 있

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의 문맥상으로는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 또는 예루살렘 자체를 인격화한 대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찍이 그 시온을 태하시고, 그의 거처로 상으셨던 것이
었으나(시 132: 13) , 이제 그 하나님이 시온을 버리셨으니, 시온의

영광과 아름다움과 영예는 사라지고 또한 그 권위와 영화는 ‘떠나


가’ 버린 것이다. 떠나감이여 라는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예

체’는 송두리째 가버렸다는 뭇이다.

저의 목백은 오늘날로 말하면 정치지도자, 고급관리, 지도층 인

사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와 그 일행이

도망가다가 붙잡혀 수치를 당함으로써, 그들의 위풍이 땅에 떨어


졌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찾지 못해 갈망절망하는 모습을 떠올리

게 한다(램 39: 4-8; 52: 4-11). 사슴이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

아야렴’은 ‘아얄’의 복수형과 ‘버슷하다’라는 뭇을 지닌 ‘케’가 합쳐


진 말로서, 시편 42편 1 절의 “사슴이 시뱃물을 찾기에 갈급함같
90/ 예레이야애가

이”라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꼴을 찾지 못한이라는 구절에서 “찾는

다”는 히브리어로 ‘모추우’인데, 여기에 부정사 ‘로’가 덧붙여져 완


료형으로 되어 있으므로, 찾는 일을 계속하다가 종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뭇이 되었다(창 8: 9; 용 3: 21-22). 즉 그들이 애써서 목

장 또는 풀밭을 찾아 헤댔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쫓는 자 곧 ‘로데프’는 ‘핍박하는 자’란 뭇도 있다(신 30: 7; 용 1 :

22). 그것은 흔히 사냥꾼이 새나 짐숭을 쫓는 경우에 쓰인다. 힘없


이 는 ‘베로-보카’ 즉 ‘맥이 빠진 상태에서’라는 돗이다. 여기의 ‘보

카’는 특별히 육체의 힘을 말한다.

m 신학적 메시지

본절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시종들 일행이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을 피해 도망가다가 붙잡히는 처량한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왕하 25:4 -7; 램 39: 4-5).

앞절에는 어린 자녀들이 원수의 목전에 떼지어 몰려들어 종살이

신세가 되는 처량한 모습이 전개되더니, 이 절에서는 마치 초원을

찾지 못한 사슴같이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이 쫓는 자 앞에서 기운

없이 달리다가 마침내 사로잡혀 포로살이 신세가 되는 비참한 모습

이 전개된다. 이 광경은 예루살렘의 최후를 배경으로 삼은 것으로

서 그때가 기원전 586년이었으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군

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지 18개월이 경과되어, 유다 백성이 극도

의 불안과 굶주렴으로 지친 끝에 일어난 사태였다. 성문이 무너져

서 바벨론 군대가 노도와 같이 난입해 들어오자, 시드기야왕과 그

를 따르는 무리가 성을 빠져나가 광야로 도망했다. 그러나 뒤쫓던

바멜론 군대에게 여리고 형원에서 붙잡히고 말았다(램 39: 1 이하) .

그리하여 유다는 완전히 망함으로써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시온

의 영광이 원문의 표현대로 ‘딸 시온으로부터 그 영광이 떠나가 ’ 버


1 : 7 / 91

렸던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시온은 유다의 자랑이었고 열국의 부


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렴을

받고 오히려 주변 나라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만방에 뽕내던 ‘시온의 영광’도 주념의 영역 밖에서는 참


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우리의 생활도 표면적인 찬란함에 도취하기에 앞서 온 정성과 온

능력과 온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기는 것이 되어야 하

며,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하

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그렇

지 않다면 우리가 그토록 성장을 자랑하는 한국교회의 영광도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섬해야 할 것이다.

띠자인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빅을 당히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둡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힘을 비웃도다

매 주석

이 첫째 애가의 다른 모든 절이 3 행인 데 비해, 본절은 4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둘째 행 또는 셋째 행을

행간에 삽입된 주해 (gloss)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둘째 행의

‘옛날에 있었던 모든 즐거움’이 삽입된 것이라면, ‘환난을 ... 당하는


92/ 예레미야애가

날’ 곧 ‘예메 안야흐’는 ‘환난 당시’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하다’ 곧 ‘자카르’의 목척어가 되어 인격화된 예루살렘

이 ‘환난 당시의 일을 기억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군박의 원문


‘마루드’는 ‘안식처 없이 유리 방황함’을 뭇하는데, 예레미야애가 3

장 1 9"절, 이사야 58장 7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말의 어간은 ‘루

드’인데, ‘불안정 상태’라는 뭇 외에 ‘압제받는 상태’라는 뭇도 있

다. 그래서 70인역 헬라어 성경에는 ‘배척당함’으로 번역되어 있

다.
둘째 행은 ‘옛날에 있었던 모든 좋았던 일’로 번역할 수 있다. 왜

냐하면 여기의 률거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카무데야’는 예루살

렘이 가졌던 ‘소중한 것들’이란 못이기 때문이다.


대척의 손에 빠지나에서 “빠지나”는 원문의 어간이 ‘네폴’인데, 뭇
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는 일(신 22: 4 ; 출 21 : 33 ; 왕하 1 : 2) 또는

완전히 항복하여 엎드리는 일 (창 50 : 18 ; 44 : 1 이을 말한다. 따라

서 이 셋째 행은 ‘그 백성이 대척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허탈상태에

빠져 있으나 아무도 품고자 하지 않는다’라는 뭇이라고 볼 수 있

다. 여기에서는 시인이 예루살렘의 통치계층을 비난하려 한 의도


가 엿보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대신 헛되이 주

변 강대국의 원조를 기대하다가 실망하게 된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애 4 : ~ 7 ; 렘 37 : 7) .

넷째 행의 그 황척합융 버훗도다의 “황적함”은 ‘샤바트’(안식 또는


종식)의 히필형 분사인 ‘미슈바트’인데, 그 뭇 가운데서 ‘종식’을 돼
하면 ‘끝장난 상태’ 또는 ‘완전한 패배’ 또는 ‘몰락’을 뭇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 홈정역 성경 (KJV) 에는 이 낱말의 ‘안식’이란 뭇을 취

해서, 유다 백성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안식일을 지키는’ 꼴,

또는 안식년에 경작하지 않은 땅 곧 ‘안식년의 묵힌 땅’ 같은 꼴을

대적이 보고 조소한다는 뭇으로 번역되어 있다 (the adversaries sa w

her, and did mock at her sabbaths).


1 : 7/93

매 신학적 메시지

사실 예루살렘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곤고함이 아무리 심하다 해

도, 그들이 이제라도 그 원인이 되는 죄를 뉘우치고 하나념만을 의


지한다면, 그 어떤 나라의 도움 없이도 파멸에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마다 그 누구의 도

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원망하기 일쑤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은 환

난 가운데서도 주위환경이나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과

부족을 깨닫고, 여전히 자기 삶속에 스며 있는 죄악의 요소를 찾아


내어 제거하기에 힘쓸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앞절에서 육체척인 고통 때문에 예루살렘과 유


다 백성들이 괴로워했던 것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정신척인 고뇌가 그들에게 엄습해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원수


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는 데도 아무도 돕는 자가 없다는 것은 참

으로 암담한 일이다. 더구나 유다가 험이 있을 때는 동맹국이라고

해서 돕는 듯하더니, ‘대척의 손에 빠지고’ 보니 이제는 그들도 원

수가 된 것이다. 과거의 그들은 ‘시온의 영광’을 부러워했으나, 이


제는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서 ‘그 황척함’을 비웃게 되었다. 이렇
게 설상가상으로 원수들과 주변 모든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비참함

을 동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는다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는 정


신적 고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옛날의 모든 좋았
던 일을 회상할 때, 황폐해서 조롱거리가 된 현재의 비참함에서 오
는 슬픔이 비례적으로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혼히 사랑들은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그때가 황금빛 찬란한 시절

이었다고 향수를 느낄 뿐만 아니라, 그렬수록 현재의 삶에 대해 불

행하다고 느끼면서 비관하기가 쉬운 법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하는 신앙언은 오히려 밝은 앞날을 기대하고 좋은 일이 다가올 것
94 / 예레미야애가

이라고 믿으며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그리고 현재의 생활


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하나님의 통행하심과 돌보아주실 것을 확실

히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예수는 세상 종


말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 “사람들이 전쟁의 소문을 듣고

세상에 임할 환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할 것이지만, 오히려 이런 일

이 나타나기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원이 가까웠


느니라"(녹 21: 26 , 28) 고 말씀하셨다.

2) 시온을 파멸케 한 죄악 (1: 8-11)

m 개요

시온 곧 예루살렘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결코 바벨론 군대가

아니라 계약백성 자신의 죄악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

약을 파기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겼고, 이방의 군사력과 외교적 우


호관계를 의지하여 만난을 극복하려고 했던 결과인 것이다. 그리

하여 시인은 예루살렘의 고난의 비밀이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에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하나님을 배반한 그 백성은 더러운 백성

이다. 그들의 최악은 내적인 성벽에 있는 것이며, 불결한 여인같


이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근본적언 문
제점은 마음의 타락이요 불결함이었다(렘 17 : 9). 예루살렘 거민들

은 양식이 없어 이방인들에게 성전 안의 보물을 내어주고 바꾸는

일조차도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연한 현실만

보고 엄기응변으로 위기를 념기려고 했다. 이때 시언의 ‘나’라는

목소리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을 대신해서 거둠 기도를 드린


1 : 8 / 95

다. “나는 비천하오니 야훼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

댐헤트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자같이 되니

전에높이던모든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탄식하며

물러가도다

매 주석

‘키나’조의 음률은 매행마다 3강세음 소절과 2강세음 소절로 구

성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절은 예외로서 첫째 행은 3+3,


둘째 행은 3+2 , 셋째 행은 2+2로 되어 있는 것이 그 특정이다 •

• “크게 범죄했다”는 말은 원문에서는 ‘헤트 하트아’로 되어 있는


데, 직역하면 “(여성으로 의언화된 예루살렘이) 죄악을 범죄했다”

(She sinned a sin) 가 된다. 그것은 같은 말이 반복됨으로써 그들의


범죄의 정도가 크다는 강세를 위한 표현이므로, 한글개역에 ‘크게

범죄했다’로 번역된 것이다. 이 말 다음에 원문에는 ‘알-켄’이라는

강세를 띤 접속사가 나오는데, 그것은 ‘그러므로’란 뭇이다. 이것


은 범죄했다는 그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크
게 범죄한 결과 “불결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원문언 ‘니다’

는 소위 ‘탈킨’이라 불리는 용법의 예로서 다중척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불결한 것’ 외에 ‘머리를 흔들게 할 대상 또는 경멸의 대


상’을 뭇한다 (시 44: 14, 15). ‘니 다’의 또 다른 뭇은 ‘떠 나다’, ‘방
96/ 예레미야얘가

황하다’, ‘집 없이 헤매다’ 등인데, 어떤 영어성경 (KJV) 에는 ‘내쫓

겼다’ (She is removed) 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혼히 둘째 행의

(예루살렘을) ‘업신여김’ 곧 ‘히지루하’와 함께 사용된다. 한글개역


의 룰컬한 자갈이 되니 라는 말은 원문을 약화시킨 셈이 된다. 그것

은 “확실히 불결한 자가 되어 버렸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말


은 1 장 17절에서도 쓰여졌는데,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의 근본척인

부정함을 말한다(레 12 : 2 ; 20 : 21 ; 켈 18: 6).

높이먼 모든 차는 원문이 ‘카바드’(존경하다)의 피옐 • 분사형으로

서 (예루살렘 에게) ‘항상 경의를 표해 왔던 자’를 뭇한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 (한글개역)에서는 그 앞에 천에 란 말이 첨가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향상 존경하던 자들이 돌변하여 업신여기다’라는

뭇으로 볼 수 있다. ‘업신여기다’ 곧 ‘히지루하’의 어간 ‘잘랄’은 ‘무


겁다’는 뭇에서 온 ‘카바드’의 반대개념으로서, ‘가볍다’라는 뭇이

다. 즉 ‘가치없게 여기다’라는 말이다. 그 척신융 보고는 벌거벗은


몸을 본다는 것으로서, 모든 죄악된 부끄러운 행위가 드러난 모습

을말한다.
져가 탄식하며 는 원문에서는 ‘감-히’(역시 그 자신이)란 낱말이

첨가되어서 강세를 나타내므로, ‘그가 심히 탄식했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그러고 나서 그가 ‘물러가도다’라고


끝을 맺었는데, 그것은 인격화된 예루살렘이 부끄러움을 당해서
고개를 돌리고 뒷전으로 물러서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사 42 : 17).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서는 시인이 다중적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의 한 단어를 갖고

범죄한 사람의 삶의 경로를 일시에 비추어 보여주는 예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니다’라는 낱말이 ‘불결한 자’라는 뭇으로


사용되면서, 또 다른 경우에는 ‘버렴받은 자’라는 뭇드로 나타나거
1 : 9 / 97

나, 다시금 ‘유리 방황하는 자’라는 뭇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

은 히브리어로 표현된 성서의 내용이 인생의 폭 넓은 국면을 짧막


한 표현으로 충분히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업종해주는 것이다.

서양의 언어는 서술적인 표현에는 적합하지만, 히브리어는 한마디

를 갖고도 총체적인 삶의 그림을 함축하는 데 장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이 본철의 처음 부분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예루살렘

이 크게 범죄한 까닭에 그 결과가 복합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불결한 백성


이 되더니,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에게 버렴받은 존재가 되었

고, 급기야는 바벨론 포로살이가 아니면 열국에 흩어져 유리 방황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컷을 여기에서 마치

그들의 인생행로를 비디오에 녹화해서 보여주듯이 전개시키고 있

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말 성경의 ‘불결한 자같이 되니’라는 표현
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어성경의 ‘내쫓김이 되니’를 동시에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타르궁이나 유대인 학자 리저


(Leeser) 의 번역과 같이 ‘유리 방황’하게 된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70인역 헬라어 성경 (LXX) 이 ‘환난에 빠졌

도다’라고 번역한 것까지도 종합해서 이해함으로써, 앞으로 우리들

역시 법죄하면 단순히 공동체에 용납되지 않는 부정한 자로 취급받

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결

과가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절의 말미의 불결한 여자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라는 말에

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람의 그토록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근접 촬영한 것같이 실감있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치욕

스러운 삶의 실존은 차라리 죽음보다도 못한 것이다(사 64: 6).

밍헤트
98 / 예레미야애가

저의 더러움이 그 치미에 있으나

결국은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자가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감찰하소서

매 주석

본절에서는 히브리어 원문의 시 형태가 이제까지와는 달라져서

2+3 , 2+2 , 3+2가 되어 있다.


져의 더러웅이란 여성으로 의인화된 예루살렘의 깨끗하지 못한
상태 곧 원어로 ‘틈아다흐’(그녀의 불결함)를 말한다. 이 “더러움”

이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러워진 경우인데, 예루살렘이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만큼 불결해졌다는 것이다. 그 더

러움이 ‘치마에 있다’라는 표현은, 치마 곧 히브리어로는 ‘슐’이 들

춰져서 더러운 죄가 드러나는 큰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사실을 회화

적으로 묘사한 것이다(렘 13 : 22 , 26; 나 3 : 5). 결국은 원문으로는

‘아하리트’인데, 시간 또는 공간의 종말을 뭇한다(신 11 : 12 ;민

23 : 10 ; 잠 5: 11 ; 용 8 : 7). 그러나 그밖에도 미래의 때, 미래의 운


영 (잠 23 : 18; 24 : 14 ; 시 73: 17 ; 렘 12 : 4 ; 31 : 17) 을 말할 때도 있

다. 그래서 영어성경 (RSV) 에서는 ‘그의 운영’ (her doom) 이라고 번

역했다. 생각지 아니함은 그 어간이 ‘자카르’인데, 과거를 회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해 신중히 살피지도 않는 태도를 말한

다. 여기서는 더 나아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암 4: 2 ; 시 37 : 38 f. ; 109 :


1: 9 / 99

둘째 행은 유별나게 짧아져 있다. 아마도 ‘핫테레드’(그녀가 전락

했다)라는 동사 앞에 또 다른 동사가 있었는데, 어쩌다가 탈락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놀랍게 는 원어로 ‘펠레’의
복수형인 ‘펠라임’이다. 이 말은 파격적인 사물이나 사항을 지칭하

면서도 여기서는 부사격으로 사용되었다. 낮아져도라는 히브리어의

어간은 ‘야라드’인데, 지위가 낮아져서 천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경

우(신 28: 43) , 그리고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어 쓸모없이 되는 경

우(신 20 : 20 ; 28 : 52) 와 함께 깊은 재난에 빠져든 상태를 말한다

(믹 1 : 12 ; 시 7 : 15).

셋째 행은 야훼에게 향한 시인의 기도문이다. 강활하소서는 ‘보옵

소서’ 또는 ‘살피소서’라는 명령형이다. 스스로 큰 체하오니 는 숭리

자인 양 극도로 교만한 상태를 고발하는 것이다. 설령 그 원수가

승리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에 얻어진 결파에 불과하

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들이 자존망대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

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m신학적 메시지

사람은 일단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게 되면 자포자기하게 된

다. 그럼으로써 첫째로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아 교훈으로 삼으려

고 하지 않으며, 둘째로 현재의 자기 형편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는 삶으로 신중허 가다듬을 노력을 하지 않으며, 셋째로 자기와

자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향락에 빠져들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말로는 애가 4장 3,


10절의 처참한 광경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

아야 하는 극단의 처지에 빠져들게 되는 일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분노에서 비롯되는
100 / 예레미야애가

것이라는 주장은 진실이다(겔 18: 4 ; 롬 6: 23). “왜 하나님께서 우

리를 버리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그처럼 버참한 운명을 더하십니


까? "라고 묻는다면, 신앙인은 “이것이 결코 선하신 하나님이 즐거

워하시는 바가 아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됨이 철칙이다”라고 답하

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어려운


일에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덧붙일 것이다.
여기의 시인은 이러한 진리를 인격화된 예루살렘이 그 뿌린 씨의

열매를 거두게 된 사실의 묘사를 통해서 우리의 폐부에 뼈저리게


인식시켜 준다. 우리는 시인의 이러한 피맺힌 중언을 들을 때, 하

나님이 주관하시는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장차의 운명을 추호도 생

각하지 않고, 당연한 현실만 보고 죄를 범하다가 멸망의 수치를 당

한 그들의 사연이 바로 우리들의 처지가 아닌지 새삼스럽게 긴장하

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 반드시 스스로 치욕을 당한

다는 성서의 진리의 일단이기 때문이다(시 64:5-7).

디피요드
대적이 손을펴서

보물을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회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매 주석

시인의 기도는 계속된다. 시인은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유린


1 : 10 / 101

되고 약탈되는 것을 보고 심히 안타까워하며 기도를 계속한다.

손율 펴셔 라는 구절에서 “펴서”는 히브리어로 ‘파라스’다. 이 말


은 본래 독수리 같은 큰 새가 날개를 편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출
25:20;37:9; 신 32 : 11 ; 왕상 6 : 27 ; 8 : 7 ; 렘 48 : 40 ; 49 : 22 ; 용
39: 26 ; 대상 28 : 18 둥) • 따라서 위세를 떨치며 공공연히 손을 뻗
는다는 뭇이며, 때로는 적대적인 감정이 깃들여 있기도 하다. 우

리말 성경의 때앗았나이다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는 것이나, “손을

펴서”에 그런 강제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번역상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보물 은 히브리어로 ‘마하마드’(사모하는 것, 좋고 귀한 것)

이며, 원문에는 ‘마하마데하’ 즉 ‘그녀의 보물들’로 되어 있는데,


‘하마드’가 그 어간인 동일한 낱말이 이미 7절에서 나왔고, 뒤의

11 절에서도 나온다. 이 말은 본래는 ‘사모하다’, ‘욕망하다’라는 뭇

에서 온 것이지만, 명사가 되면 ‘귀중한 것’, ‘찬란한 것’을 지칭하


게 된다. 본문은 예루살렘 궁중과 성전의 귀한 보물들을 언급한 것
으로서, 특별히 예루상램 성전의 귀한 기구와 그릇(대하 36 : 1 이과

궁중의 귀한 그릇(대하 36 : 19) 을 지칭한다고 생각된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둘째 행 맨앞에 ‘키’(왜냐하면)라는 접속사가

있으나,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이 말은 영탄사의


구실과 강조를 나타내는 구실도 하기 때문에, ‘과연’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어성경 (RSV) 은 강조를 위한 표현으로 간주하

고 ‘정녕’이란 뭇을 지닌 ‘예이 ! ’ (Yea! )라고 번역했다. 혹은 ‘분명


히’ (surely) 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 (R. Gordis) 는

본래 이유의 내용을 이꿀어내는 품사인 ‘키’에 대해, 그 뒤에 오는

문장이 이방인의 보물약탈의 이유라고 볼 수 없다고 해서, “예루살

램이 보았나이다”라는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아다’(보았나이


다)를 ‘옳게 간주하다’, ‘숭언하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 일찍이 이방언에게는 이스라엘의 공회에 들

어오지 말 것을 명했었으나, 이제는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오는 것


102 / 예레미야애가

을 주님이 숭언했으므로, 원수가 손을 펴서 예루살렘의 보물을 빼

앗았나이다라는 뭇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키’


라는 접속사를 ‘과연’ 혹은 ‘정녕’이란 뭇으로 번역하면, 구태여 그

렇게 해석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치에 닿는 시가 될 수 있으며,

시인이 하나님께 애절하게 하소연하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말 성경의 셋째 행의 맨 끝에 와 있는 보았나이다

는 히브리 어로 ‘라아다’ (She has seen) 로서 , 원문에서는 둘째 행의

‘키’에 이어서 나오는데, 그것은 여성으로 의인화된 예루살렘이 불

행히도 그 사실을 ‘목격했나이다’라는 뭇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목격한 내용을 밝히면서,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어처구니없게도) 저희가 성전에 들

어갔으니 어찌하오리까”라고 하소연한 것이다. 이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창자를 끊는 듯한 고통을 안

겨주었을 것이다. 여기의 “이방인”은 본문에서는 바멜론의 주력부


대인 갈대아 군인들이겠으나, 그밖에도 암몬과 모압을 위시해서

(신 23 : 3) 할례받지 않은 모든 이방인을 가리킨다(겔 44: 9). 주의

공회 는 원문으로는 ‘카헬카’(당신의 공회 곧 주의 공회)보다 강한 뭇

을 가진 ‘카헬 라크’(당신에게 속한 공회 곧 주께 속한 공회)로 나타

나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신앙인에게 있어서 정신적 고난은 물질적 ·육체 적 고난보다도

더욱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앙적 상처를 입


는 일은 죽음만큼이나 비참한 일이다. 계약백성에게 있어서는 이
방인의 성전 침범이란 여태까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치욕적

사건이었다. 그들의 성전이 더럽혀지고 그 안의 귀중한 기구와 그


릇이 약탈된 일(램 52 : 17- 19) 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큼이나
1 : 11 / 103

절망적인 사태였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성전을 불사르며 약탈


해간 사건은 그밖에도 열왕기하 24장 13절과 25장 9 , 13-17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의 장소

로서, 성민이라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야만스러운 이방군대에 의해서 마구 짓밟히고 약탈당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신성모독이며 국민적인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성서

에는 마음과 옴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물론이요, 아브라

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모압과 암몬 족속까지라도 들어오지 못한다

고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물질적 손해나 정신적 피해보다도 하나님의 거룩


하심이 침해당하고 그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크게 애통해하면서 하
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다름아

닌 예루살렘 스스로의 죄로 인한 결파임을 생각할 때, 그 숭픔은

한층 더 처절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신앙과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성전이

약탈되는 것을 목격하는 일은, 굶주렴과 유리 방황하는 것 이상으

로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의 낯을 잃어버리

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전은 장차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런

데 이제 이러한 성전이 여지없이 원수들에게 유린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아닐 수 없


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오늘날 주님의 몽된 교회가 하나닝을 거역

하는 세력의 영향으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

가?

며 카프
그 모든 백성 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104 / 예레 P] 야애가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탄식하며

양식을구하나이다

나는비천하오니 여호뼈

나를권고하융소서

매 주석

우리말 개역성서의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의 본절 첫째 행과 둘째

행을 뒤섞어서 의역한 것이다. 성서공회가 나중에 간행한 “표준새


번역” 성서에서는 비교적 원문과 가깝게 번역되어 있다.

“예루살렘 온 백성이 탄식하며,

먹을거리를 찾습니다.

목숨을 이으려고

패물을 주고서 먹을거리를 바품니다.

주념,

이 비천한 신세를 살펴주십시오"

그 모든 백성 은 원문에서 여성으로 의인화된 예루살렘의 모든 백

성이란 돗으로, ‘모든 그녀의 백성’이라고 되어 있다. 탄식하며 와

(양식을) 구하나이다는 원문에서는 첫째 행에 나오연서, 모두 복수

분사형이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지금도란 말을 첨가함으로써

현재진행형의 뭇을 나타내고자 한 듯하다. 그리고 복수형으로 된


것은 그 행위의 심각성과 보편성을 보여준다. 생명융 소생시키려고

는 원문에서는 둘째 행에 나오는데, “생명”의 원어 ‘네페슈’는 ‘영


혼’ 또는 ‘생명력’을 뭇한다. ‘소성시키다’는 되돌린다는 뭇으로, 예

언자들이 하나념께 돌아오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할 때도 같은 어근

으로 된 낱말을 사용했다. 반면에 죽음을 가리킬 때는 ‘영혼이 떠

나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떠나가는 영혼을 다시 돌이키려


한다’는 말은, 죽음에 직면한 그들의 절망상태를 보여준다. 그들이

그런 곤경에서 온갖 왜물을 내어주고 먹을거리를 얻게 된 사정을

보물로 식물용 바꾸었더니라고 표현한 것이다.


셋째 행은 “야훼여, 나를 보소서 그리고 돌보아주소서. 과연 나
는 보잘것없는 존재이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권고하융소셔
의 원문은 ‘하비타’인데, 그 어간 ‘나바트’의 히필 • 2 인칭 • 남성 •

단수 • 명령형이다. 따라서 그 뭇은 깊은 관심과 보호를 기대한 ‘살


펴주십시오’ (behold) 라는 말이 된다. 영어성경은 이 말을 ‘배려하소

서 ’ 또는 ‘마음써 주소서 ’ (consider)라고 번역 했다. 우리 말 성 경 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접속사 ‘키’가 있는데, 그것은 시인


이 그토록 간청하는 이유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실로’, ‘과연’, ‘분명히’라는 강한 뭇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는 것

은 이미 10절에서 설명된 바 있다. 버천하나이다의 원문은 ‘잘랄’이

라는 어간에서 온 칼 • 분사형 ‘졸렐라’다. 이 말의 뭇은 ‘가벼운 사


물’에 관련된 ‘비천한 존재’를 말하는데, 분사형이므로 그 비천한
상태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m신학척 메시지

본절에서는 원수의 침략으로 백성들의 굶주링이 막심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시인의 ‘나’라는 목소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난받는 백성을 대변하면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

막 행에 이르러서는 예루살햄의 백성의 비참한 처지와 시인 자신의

처지가 겹쳐지면서, 시인 자신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스스로 비


106 / 예레미야애가

천한 존재임을 고백한다. 그 백성은 수없는 경고를 무시하고 불의

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에게 의지하려는 의지

가 아직도 달아오르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

을 대신한 시인의 호소가 마치 불을 뿜는 듯 강렬하며, 그만큼 스

스로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시인

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주념, 원수들이 하나닝을 모욕하고 스스로

우쫓랩니다. 우리의 이 고통을 살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

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격심한 굶주렴을 겪으면서 그들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패물이나 귀중품을 내어주고 식량을 구했


다. 생명의 절실한 문제 앞에서 재화는 무가치한 것이다. 그때 그
백성은 18개월에 걸친 예루살렘의 포위기간과 그 이후의 파괴행위

로 말미암아 식량이 고갈되어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물질주의의

무익함이 금과 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보물’이, 원문에 따라 살펴보면, ‘귀중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0절의 ‘보물’이 성전의 재


물로서의 ‘귀중한 것’을 의미한다면, 본절에서의 보물은 일반가정

에 있는 패물이나 귀중품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

다. 어떤 학자 (Hillers) 는 이 ‘귀중한 것’의 범주 속에는 심지어 ‘귀

여운 자녀’까지도 포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호 9: 16-17 ; 겔 24 :

16 ; 애 2 : 4). 그것들은 각 개인의 내어놓을 수 있는 최후의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내어놓은 것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따

라서 그들은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라는 본문의 말씀대로

한계상황에서 극단적인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드리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

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된다.


1: 12 / 107

3) 자비를 구하는 기도 (1 : 12- 22)

매 개요

첫째 애가의 후반부에서는 그 초점이 하나님의 자비와 응훌을 구

하는 기도로 바뀌었다. 이제까지 시인은 처참한 파괴현장을 목격

하고, 간신히 슬픔을 억제하는 가운데, 그런 결과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그것은 그 백성이 하나님과의 계

약을 파기한 데서 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발로였고, 공의로우신 하

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계약백성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깨

닫고, 스스로의 처지와 본분을 가다듬어,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전제하에 하나님

의 자비와 응흉을 간구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롭게 설정된 무대 위에서는 주어가 ‘나’라는 일인청 단수


로 나타나면서, 인격화된 예루살렘과 동격화되어 있다. 그는 지나

가는 사람을 불러세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볼풍없는 초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황폐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애절하게 부르짖는다 (12-19절) • 이렇게 한없

는 회한을 토로한 후, 20-22절에서는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끝을

맺는다.

뎌김라멧
무릇지나가는자여

너회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108/ 예레미야얘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m주석

너회에게는 관계가 없는가는 원문의 맨 앞에 나오는 두 단어인데,

원문대로 직역하면, “아닌가, 너회들에게는”이 된다. 그러나 ‘아닌


가’와 같이 의문문이 되기 위해서는 원문의 ‘로’(아니)를 ‘하로 ’ (아

닌가)로 나타내야 한다. 하지만 본절의 두운법을 살리기 위해서 맨


첫머리에 나오는 낱말을 히브리 알파뱃 ‘라엣’으로 시작되게 하려

는 데서 이 철의 첫 단어인 ‘아닌가’에 해당되는 낱말 ‘하로’에서 질


문사 ‘하’를 생략해서 단순히 ‘로’로 나타낸 것이다. 그래도 의문문

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칼빈도 지척하고 있


다. 그런데 어떤 학자 (A . W . Steane) 는 ‘로’를 ‘루’(오, 그런데)로 읽

음으로써, 전혀 다르게 ‘오, 지나가는 모든 과객 여러분’으로 해석

하기도 했으나, 실제로 그 주장을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유대


인 학자 사이에는 ‘이런 일이 너회에게는 일어나지 않을지어다’
(May it never happen to you ! )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무릇 지나가
는 자여 는 히브리어로 ‘콜 오브레 데레크’인데 ‘데레크’(행길)를 지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란 뭇이다.


내게 엄한은 관계대명사 ‘아셰르’에 의해 근심 같은 근심 의 뒤에
이어져 있다. 즉 원문이 ‘알랄’의 포알형으로서 강한 수동태인 ‘올
랄’ 즉 ‘내게 초래된’ (which was brought upon me) 이란 뭇이다. 그것

은 ‘창상’(렘 n: 8) 과 같이 심한 고통이 완전히 자기의 육신과 마

음을 강점한 상태를 말한다. “근심”은 ‘마케오브’로서, 그 어간은


1: 12 / 109

‘고통’이란 뭇의 ‘카아브’다. 이 고통은 단순히 정신척인 것뿐 아니

라 육체적인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말 성서는 ‘근심’이라


고 번역했으나, 실제로는 더 강한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근심 같
은 근섬”의 원문인 ‘마케오브 케마케오비’는 ‘내 근심 같은 근섬’이
다. 있는가 톨지어다 의 “있는가”는 ‘있는지 없는지 ’의 뭇인 ‘임 -예
슈’이며, ‘볼지어다’에 해당되는 ‘합비투 우레우’는 영어로는 ‘Look

and see ’ (RSV) 또는 ‘ behold and see’ (KJV) 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

서 그 뭇은 ‘유심히 살피고 그리고 볼지어다’라는 말이다.

셋째 행에서는 야훼가 관계대명사 ‘아셰르’ 문장의 주어로 언급


되면서, 그분의 진노로 말미암은 형벌이 그토록 혹성하다는 사실
을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째셔 진노하신은 직역하면 “그의 노여움의

화염으로”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격심한 노여움을 나타낸다. 괴홉


게 하신 즉 ‘호가’는 ‘야가’(상처업다)의 히필 • 3인청 • 단수 • 남성 •
완료형으로서 ‘고통을 받게 하신’이란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강한 주권척인 행위를 보여준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를 보여준

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훌이란 그저 최악을 덮어주는 것만이 아니

라, 사람들의 행실을 바로잡아 주고 그의 본연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혹독한 형별도 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당하고 있
는 비참한 현실을 통해서 중언한다.

예레미야 30장 12-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계약백성에게 하시

는 말씀이 나온다 :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위중하다.

네 상처를 싸밸 약도 없다. 사람들은 네 죄가 막중하므로 너를 기


피한다.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최악이 크고 네
죄가 막중하므로 내가 네게 이 고통을 겪게 한 것이다" 신앙인은
110 / 예레미야애가

야훼 하나님의 형벌에 겸손히 순응할 수밖에 없다.

“무룻 지나가는 자여, 너회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7"라는 시인의

호소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므로 그들이 당하는 이


형벌을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우정어

린 충고도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두고두고 명심해야 할 교


훈이기도 하다. 흔히는 ‘길 가는 자들’은 방관자로 자처해서 사회

의 흔란과 부패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의 그리스도인

도 교회라는 성곽에 틀어박혀서 교회 밖의 부조리와 부정에 대해

무감각하기 일쑤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예레미야 30

창 12-15절의 경고가 현실화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 데서 오는 교회의 병

을 고칠 약은 없을 것이며 , 아무도 교회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형벌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을 깨닫고 회개

하기 전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곧 세상에 대한 우리 주님의 슬픔

에 대한 무관심과 직결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주님이 십자가


에 달리신 모습을 다르게 묘사한 그렴을 그런 일이 있다. 그 그럼

에는 예수가 앗줄로 두 손이 묶인 채 어떤 제단에 기대어 서 있고,

그의 몽은 고통에 못이겨 구부러져 있었다. 그의 경력을 소개하는

글이 적힌 휘장이 펄럭거리는 가운데 화면을 가로지르는 배경에는


신학적 논쟁을 벌이고 있는 성직자들, 기도문을 읽고 있는 사제
들, 그밖에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의 고난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들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중 오직 한 여인만이 심

한 충격을 받고 구세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그렴에

서 현대인이 세상 짐을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등한히하고

있는지를 알것 같았다.

딘희볍
1:13 / 111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앞에그물을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고적하여
곤비케하셨도다

매 주석

시인은 앞절에서 ‘나’ 곧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형별로 견디기 어

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한 후, 여기서는 그 형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위에서부터 는 시편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원문의 ‘멈마롬’은

‘룸’(높은)의 명사 ‘마롬’에다 ‘ ... 에서부터’라는 뭇의 ‘민’을 앞에 붙


여 나타낸 단어다. 그리하여 알파뱃 답관체로서 ‘멤 ’의 두운(頭짧)

이 밟아지도록 맨 첫째 낱말로 채돼된 것이다. 냐의 골수에 불올 보

내어 이기게 하시고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다. 원문을 직역

하면 “내 뼈에 불을 보내어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로 된다. 그러나


어떤 주석서 (The Interpreter ’s Bible) 에서는 첫째 행의 마지막 두 단어

‘베아츠모다이 와이르덴나’의 순서를 바꾸어 ‘불을 보내어 내 뼈로

파고 들어가게 했다’로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영어성

경 (RSV) 에는 ‘높은 곳에서부터 불을 보내어 내 뼈속에로 하강케


했 다’ (From on high he sent fire ; into my bones he made it descend) 라고

되어 있다. “불을 보내어”에서 “보내어”에 해당하는 허브리어는

‘살라크’인데, 사자를 파송하거나 화살을 쏘아보내는 경우에 사용

된다. 이것은 불로 심판하는 경우를 방불케 한다. 그 비슷한 예를


112 1 예레미야얘가

창세기 19장 24절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경우에서 볼 수 있

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부터 유황과 불을 비와 같이 내리


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골수에”는 원어로 ‘베아츠모다이’인

데, ‘내 뼈속에로’라는 말이다. “이기게 하시고” 곧 ‘와이르덴나’는

‘라다’라는 어간의 칼 • 미완료형 • ‘와우’-계속법이다. 그것은 ‘제어


했다’, ‘관리했다’라는 뭇이므로 ‘불을 내 뼈에로 보내어 제어했다’
는 말이 된다. 다른 말로 말하면, ‘불이 내 뼈를 산산이 부수어 버

렸다’라는 돗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그 어간을 ‘라다’로 보


지 않고 ‘야라드’(내려가다, 하강하다)로 보고, 영어성경 (RSV) 과 같

이 ‘불이 내 뼈속에로 하강케 했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나라의 표준 새번역도 역시 “불을 보내셔서 내 뼈속에 갚이 들어가
게 하시고”라고 번역했다.
이제 둘째 행을 들여다보자. 이 행은 하나님께서 내 발 앞에 그
물을 쳐서 더 나아갈 수 없게 하시므로 부득이 뒤로 물러나게 되어
뒤쫓아오는 원수에게 발옥이 잡혔다는 내용이다. “그물”은 히브리

어로 ‘레 셰트’인데, 남의 유산을 차지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

다. 따라서 그물율 베푸사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섬판을 상정하는

것이다(호 7: 12). “베푸사”는 10절의 “펴서”와 마찬가지로 ‘따라

스’라는 낱말이 쓰였다. 나로 물러가게 는 원문을 직역하면 ‘뒤쪽으

로 나를 돌려세워’라는 뭇인데, 하나님의 심판의 강한 주권을 엿보

게 한다.
셋째 행은 2+2의 짧아진 형태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가 나에게

황폐함을 주셨고, 온종일 지친 상태에 있게 하셨다’로 된다. 고척


하여 의 원문은 ‘다와’인데, 슬프고 피곤해서 지친 상태를 말한다.
곤배케는 ‘쇼메마’를 옮긴 말로서 폐허가 되어 황막해진 상태를 말

한다. 그러나 ‘비참한 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듯하다.

매 신학적 메시지
1:13 / 113

본절의 내용은 앞절의 계속이면서 14절과 15 절로 이어지는 가운

데 여인으로 의인화된 예루살렘이 그 엄청난 고통에 대해 고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나’는 앞서 언급한 대로 시인 자신이면

서 동시에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직접척인 심판으로서 네 가지로 구

체화된다. 첫째로, 골수를 찌를 화전으로 오늘날의 로켓과 같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 말미암아 온 성읍이 파괴되었다.


이것은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우뢰가 사람을 치는 것으로 언급되기
도 했다(왕상 18: 38 ;왕하 1 : 10 , 12 ;용 1 : 16; 시 18: 12-14). 둘째

로, 하나님의 공격은 예루살렘의 발에 그물을 펴는 사냥꾼의 작업


과 같았다. 예루살렘이 그물에 걸려 꼼짝없이 사로잡혀 버렸다.

그물은 동물을 잡기 위한 몇과 마찬가지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얽어


매는 치명적인 것이다. 셋째로, 14절에 언급된 대로 목에 죄악의

멍에를 채우는 것과 같다. 넷째로, 15절에 언급된 대로 술틀에서

포도를 밟는 것과 같이 짓이겨 버린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그 도


시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도 사명을 다하지 않을 때 똑같은 운영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이 하늘로부터 퍼부어져 골수까지 산산

이 분쇄될 것이며, 함정을 파서 넘어지게 해서 사회의 지탄을 받게


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수치의 멍에를 에게

될 것이며, 교인들이 지리멸렬되어 포도주 틀 속의 포도와 같이 짓


이겨져 본연의 형태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

님의 자비와 공의의 보금자리를 이탈해서 우리 뭇대로 자행자지하

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불을 보내어 우리의 모든 뼈를 남깅없이 꺾


어버리시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과연 아픔 중에는 뼈 하

나하나가 꺾어지는 고통만큼 참을 수 없는 아픔은 없을 것이다(시


22: 16-17).
114 / 예레미야애가

예루살렘의 고통 속에서 자기의 고통을 보았고, 예루살렘의 멸

망 속에서 자신의 멸망을 느꼈던 이 애가의 시인은, 본절에서 이러

한 아픔을 실제로 체험한 바를 노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나로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라고 탄식한 내용

은 결코 단순한 감정표현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 김은 콧에서 우러

나오는 탄식이요, 구원을 위한 절규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과

슬픔이 하나님의 소위임을 깨닫는 한, 그에게는 분명히 소망이 있

을 것이다(애 3: 32-33).

딘띄눈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얽어

내목에올리사내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붙이셨도다

m 주석

이 14절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내 최악의 멍에률 …묶고 라는


구절에서 “묶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니세카드 ’인데, 그 둘째

자음을 ‘신’으로 읽으면 ‘묶고’가 되고, ‘쉰’으로 보아 ‘니쉐카드’로

읽으면 ‘지켜보고’라는 뭇이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단어

를 ‘올’로 읽으면 ‘멍에’가 되지만, ‘알’로 읽으면 영어의 ‘오버’


(over) 와 같이 지켜보는 대상을 지시하는 전치사가 된다. 그리고

세번째 단어 ‘페샤아이’(내 죄) 를 ‘페사아이’(내 발걸 음)로 바꾸어


1:14 / 115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하여 ‘주님이 내 발걸음을 지켜보

시고’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70인역 헬라어 성경 (LXX) 과 라

틴어 성경 (Vulgate) 은 “주님이 내 최악을 지켜보셨다”로 번역했다.

이것은 ‘니쉐카드 알 페샤아이’로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업장에서


는 둘째 행의 내 목에 올리사의 앞에 본래는 ‘올’(멍에)이 있었는데,

발음상의 이유로 그것이 탈락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내 목에

멍에를 올리사’가 되어 그 뭇이 선명해지고 동시에 3+2의 ‘키나’


음조도 제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묶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세카드’를 ‘무겁고’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

이다. 그럴 경우 ‘내 죄악의 멍에는 무겁고’가 된다.

그러나 히브리 원전 (MT) 은 우리말 성경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절 전체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나타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나’ 곧 예루살렘의 최악을 재료로 손수 멍에를 제작

해서 내 목에 걸어 놓으심으로써 나를 무력화하셨다는 것이다. 그

리고 힘있는 원수에게 사로잡히게 하셨다는 것이다. “표준 새번역”


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

“주께서 내가 지은 죄를 묶고 얽어서

멍에를 만드시고,

그것을내 목에 얹어서

힘을쓸수없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내가 당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념기셨다"

위의 ‘맹에’는 괴로움과 고통의 상징 (애 3 : 27) 이기도 하고, 노예

의 상정 (사 14 : 25) 이기도 하다. 그 손으로 …얽어 는 히브리어로 ‘베

야도 이스탈구’다. ‘베야도’는 ‘그의 손안에서’란 뭇이며, ‘이스탈

구’는 ‘사락’의 헛파옐 • 3인청 • 남성 • 복수 • 미완료형으로서 ‘얽혀


116 / 예레미야애가

뭉쳐지게 했다’는 말이다. 내 목에 율리사의 목적어는 “내 최악의

멍에”다. “내 목”은 ‘내 목 뒷럴미’라는 말이므로 “최악의 멍에 n가

목 뒷렬미에 올려짐으로써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피곤케 에 해당

하는 히브리어 ‘히크쉴’은 그 어간 ‘카살’의 히펼 변화로서 ‘쓰러질

듯 비틀거린다’라는 뭇이다. 히필 변화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하나


님이 하신 일임을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m신학적 메시지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대신 젊어진 예루살램의 죄악을 언젠가는

용서하시겠지만, 그 일에 앞서 철두철미한 형벌을 내리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


시는 것을 여기서 똑똑히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계약백성이 당하는

고통이 그들 아년 어느 누구를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은 자숭자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들은 일단 그들의 목덜미를 짓누르는 죄악의 멍에 때문에 하나님에

게도, 원수에게도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


때 그들이 절망 가운데서도 바라볼 대상은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달리 없었다.
그러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이 애가의 시언은 어떤 전숭의 계

통에 속한 사람이었을까? 과거에는 학자들이 그를 신명기 계통의


신학과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여

기에 냐타난 이 시인의 입장은 어느 한 계통의 전숭만으로는 설명

할 수 없는 복합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신명기적 신


학의 계통에 속한 사람이라고 보기보다는 신명기적 사상 이외에 예

언서, 다윗-시온을 부각시킨 왕조전숭, 제사장 신학, 지혜 교훈

등을 망라한 여러 계통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는 분명히 국가의 붕괴로 말미암아 전숭의 계열이 함께 혼란에
1:D / 1l 7

빠져 있는 상황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갈래의 전숭

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가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곤경과 귀추를 설

명하고자한듯하다.

첫째로, 그는 예언자적 • 신명기적 사상의 영향으로 유다의 법죄

가 민족의 각종 체제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확고한 신념을


표명했다. 그가 그 백성을 신앙없는 더럽혀진 여인의 모습으로 묘
사한 것과, 유다와 마찬가지로 열국들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

과, 전폭적인 최 고백과 회개를 촉구한 것이 그 점을 보여준다.

둘째로, 그는 지혜적 교훈에 따라 하나님의 초월적 신비를 말하

면서 고난은 형벌인 동시에 훈련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하나님


의 거시척 (巨祖的) 정의를 인내섬을 가지고 기다렬 것과 하냐님 안

에서 소망을 가질 것을 역설한다.
셋째로, 시언이 왕조전송에 익숙해져 있었던 증거로는, 하나님

의 약속에 따라 난공불락일 것으로 확신했던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

에 대해 놀람의 탄성을 지르는 과객을 풍장시키는가 하면, 야훼의

기름부음받은 자로서 왕에게 전폭적으로 신뢰한 백성들의 집단적

인 비탄에 대해 언급하고, 원수들의 성전 침범에 대해 충격척인 반

웅을 보이는 점을 들 수 있다.

넷째로, 시인이 유다의 정치척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규탄하지

않고, 다만 거짓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공격의 초점을 맞추었


다는 점은 그가 포로시대 이후의 제사장적 전숭에 힘입어 개혁노선

을 취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뎌희싸멕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모아내소년들을
118 / 예레미야애가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솔틀에 밟으셨도다

매 개요

내 지경 안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을 ‘나’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루

살렘 성안’이라는 뭇이다. “지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케레브’

인데, ‘한가운데’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나의 한


가운데에’ (in the midst of me) 로 번역했다. 이럴 경우, ‘우리 백성

사이에’란 뭇이 나타나게 된다.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는 원문에 ‘살


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살라’(거부하다)의 피옐 • 3 인청 • 단수 •

남성 • 완료형이므로 ‘배척했다’ 또는 ‘멸시했다’라는 의미로 이해해


야한다.
둘째 행의 성회를 모아의 원문을 직역하면, “나를 거슬리는 집회

를 소집하여”가 된다. 여기의 “성회” 곧 ‘모에드’는 신성한 집회라

기보다는 세속적인 의미의 집회를 말한다. 곧 그들은 예루살렘을

멸하기 위해 불러들인 군사집단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영어성경

(NIV) 은 그것을 ‘군대’ (army) 라고 번역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

‘모에드’의 어간인 ‘야아드’는 ‘정해진 때에 맞추어 모인다’라는 뭇

이므로(애 22 : 22 ; 호 9: 5) , ‘정한 때’ 그리고 ‘정한 장소’에 모이는

‘정해진 집회’란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하

나님이 예루살렘을 형벌하기 위해 작정하신 디 -데이 (D-day) 의 발

동을 뭇한다(호 10: 10 ; 천 3: 1-8).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루살렘

의 청년들 곧 내 소년들 을 모조리 진멸케 하셨던 것이다. “소년”은

원문에 의하면 ‘선택된 젊은 사람’이란 뭇이다. 부수심이여 에 해당

하는 허브리어 ‘리셰보르’는 ‘샤바르’(부수다)의 칼 • 부정사 • 연계형


1: 15 / 119

( construct) 으로서 산산이 조각을 낸다는 말이다.


셋째 행은 참으로 섬뜩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다. 처녀 유다는 원

문에 의하면, ‘처녀 유다의 딸’ 즉 예루살렘의 거민을 뭇한다. 술툴

곧 ‘가트’를 밟으셨다는 것은 살륙과 심판을 상정하는 말이다. 포

도즙 틀 옆구리에서 붉은 액즙을 쏟아내듯이 예루살렘 거민이 붉은

피를 쏟아내는 참상을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m 신학적 메시지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 성안에서 더욱 참혹하게

나타난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마침내 성중에 남아 있는 유다


의 용사들을 진멸하게 하셨다. 그들이야말로 백성의 기둥이요 꽃
이었는데, 이제 예루살렘 전역은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바벨론

군대를 통한 하나님의 공격은 마치 숭틀에서 포도를 밟는 것과도

흡사했다. 포도처럼 예루살렘의 젊은이들이 밟혔고, 포도에서 터

져나오는 붉은 액즙과 같이 젊은이들의 피가 터져나왔다. 포도즙


술틀을 밟는다는 표현은 전쟁에서의 완전한 파멸을 묘사하는 데 자
주 비유로 사용되었다(사 63: 1-6; 용 3 : 12-13; 계 14: 17- 20 ; 19 :

“처녀 유다”는 원문에 의하면 유다의 딸, 예루살렘을 뭇한다. 과


거에 한 번도 유련된 일이 없었던 예루살렘의 순결함을 나타내기

위해 처녀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예루살렘을 하나님은 군대

를 보내 파멸케 하셨던 것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


어나고야만 것이다.
이러한 일은 하나닝을 믿는 오늘날의 신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계획에 동참하


지 않는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하나님이 정한 때를 기다리

셨다가 반드시 버리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호 10 : 1 이. 하나님


120 / 예레미야애가

의 뭇을 무시하고 교세를 과시하는 일밖에는 여념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마치 처녀 유다의 딸, 예루살렘을 술틀에

밟으신 것같이 밟으설 것이다. 이사야서 63장 3절에 보면, 하나념

께서 일찍이 행하셨던 일이 참으로 섬뜩한 광경으로 묘사되어 있

다. 즉 “내가 흘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

를 밟았고, 분함을 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

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옛일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오


늘의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이다.

뎌희아인
이를 인하여 내가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멸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매 주석

이톨 언하여 내가 우니 는 앞서 13-15 절에 언급한 너무나도 가혹

한 재난 때문에 내가 운다는 말이다. 여기의 ‘나’는 의인화된 예루

살램이며 시인이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니”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 ‘보키야’가 1 인챙 • 여성 • 단수 • 분사형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여성명사인 예루살렘이 그 주어임을 알 수 있다. 그

리고 분사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울음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내 눈에 의 원문은 ‘에니’인데, 히브리 원전 (MT)


1:16/121

에는 두 번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70언역 헬라어 성경 (LXX) , 라

틴어 성경, 시리아 사본에는 한 번뿐이므로, 아마도 중복시킨 것

은 착오 때문인 듯하다. 영어성경 (RSV) 둥 대부분의 현대어 성경

은 하나로 줄여서 번역했다. 역시 그래야만 3+2의 ‘키나’ 음조로

나타내는 데 유리할 것이다. 타르꿈은 그 대신에 ‘내 두 눈’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성경은 ‘엔 에니’(내 눈의 생)로 고치는 것이 좋겠

다고 하지만, 이를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둘째 행은 직역하면 “진실로 위로자 곧 내 섬령을 소성시킬 자가

내게서 멀리 있기 때문이다”가 된다. 위로하여는 그저 ‘위로자’라는


뭇의 ‘메나햄’을 문맥에 따라 의역한 것이다. 내 영은 히브리어로
‘나페쉬’인데 ‘내 생명’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내 영융 소생시킬 자

는 ‘내 생명을 살렬 자’란 말이다.


셋째 행은 원수들이 강대해지므로 내 자녀들이 쇠퇴하게 되는 것
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여기의 내 자녀 는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들

이다. 외홉도다의 원문은 ‘쇼메멈’이다. 그 어간 ‘샤맴’의 뭇은 ‘황


폐해진다’ 또는 ‘폐허가 된다’이므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파

멸되는 신세가 되었다는 말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에 표현된 슬픔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의 슬픔이다. 시인은 그


러한 예루살렘의 업장이 되어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내용으로

애가를 융고 있다. 시인은 누군가의 위로와 도움을 바라며 손을 내


밀고 우는 과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그를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갯세마네에서 가슴 아

프게 통콕하듯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본문의 히브리 원문에서는 ‘내 눈이, 내 눈이 물같이 념쳐 흐른


다’라고 시언이 절규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눈동자가 녹아서 념쳐
122 / 예레미야애가

흐르는 것같이 눈물방울이 렁맹 쏟아져 내렴을 말하는 것이다. 시

인이 이토록 슬픈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위로하고 새 생명으로

살리실 분이 가까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누구일까? 2

장 19절에 보면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라고 했고, 또 3장 21 절에 보면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


려 소망이 있아옴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그에게 향하사 참위로자가

’ 누구인지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하나님은 멀리 떠

나가신 것이 아니라, 히브리 원전의 원문대로 단지 멀리 계실 뿐이

며 여전히 지쳐보고 계신다(용 16: 19; 19 : 25). 그러나 예루살렘

이 심판과 정벌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그 위로자가 잠시 비껴 서

계시는 것이다.

뎌긴페
시온이 두손을폈으나
위로할자가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변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저회 가운데

불결한자같도다

m 주석

이제까지는 시인이 예루살렘을 대변하여 예루살렘의 딱한 사정

을 하나님께 아뢰며 호소하는 내용으로 계속되다가, 여기 17절에

서는 1 - 11 절과 마찬가지로 시인 자신이 주격이 되어 예루살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1:17 / 123

시옹은 역시 여성으로 인격화되어 예루살렘 대신에 사용되었다.

그 시온은 마치 장닝이 지망이를 사용하듯 그녀의 두 손을 펴서 촉

각 안테나로 삼아 자기를 위로할 자를 찾아 더듬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주변에서 찾지 못했다. ‘손을 펴다’란 말은 흔히는 기도하는 자


세를 나타내지만(출 9: 29; 렘 4: 31) , 여기서는 도움을 간청하며

간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시 146: 6 ; 사 1 : 15).

시온이 위로자를 만나지 못한 까탑이 둘째 행에서 언급되었다.


그것은 야훼께서 이웃나라 백성에게 유다의 대척이 되게 하셨기 때

문이다. 야곱은 포로시대 및 포로 이후 시대의 문헌에는 이스라엘


과 동일한 뭇으로 나타나 있다. 사변에 있는 자는 히브리어로 ‘째비

바우’다. 이들은 2절의 “사랑하던 자” 및 “친구”, 19절의 “사랑하

는 자”와 동일한 대상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명에 의해 원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셋째 행의 언급과 같이, 예루살
렘이라는 여인이 불절한 자이기 때문이다. “불결한 자” 곧 ‘니다’는

8절에 이미 나와 있듯이, 생리중의 여인이 제의에 참석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으로 다루어지는 경우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상정적인

표현으로서 사람들이 혐오하는 대상을 말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불결한 자 같도다”라고 했으나, 원문에는 그냥 “불결한 자”라고

되어 있다. 져회 가운데는 ‘사면에 있는 이웃나라들 가운데’란 뭇이

다. 그들은 본래 예루살렘과 동맹관계에 있었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본절에서는 시온, 예루살렘, 야곱이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유다

의 곤고와 환란을 껴관적으로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불결한 여

인같이 되었기 때문에 위로자가 없고, 그 대신에 원수들로 둘러싸


인 것이라고 말하며, 그 딱하게 된 처지를 애처로워하고 있는 것이
124/ 예레미야애가

다. 의인화된 예루살렘은 주변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으나 사면

초가였고, 따라서 저주받은 도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은 실제로 역사척으로 발생한 일이다. 바멜론 군대의 침공을 받았

을 때 유다의 위정자들은 그 당시의 동맹국, 특히 이집트의 원군을

기대했으나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사가 열왕기하에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유다 나라에 대해 적대행위를 자

행했다. 그리하여 유다는 주변 나라에게는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도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않다가 하

나념으로부터 버렴을 받는다면, 이제까지 우호적이던 비기독교인


이나 타종교인들이 하나님의 묵인 아래 우리에게 적대적언 태도를

취할 것이며, 우리가 ‘불결한 자’로서 매도당할 것은 당연한 이치


인 것이다.

딘희차데
여호외는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회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근심을볼지어다

나의 처녀와소년들이

사로잡혀갔도다

매 주석

여기서는 다시 의인화된 예루살렘이 시인의 업을 벌려 직접적으

로 이야기한다. 인격화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1:18/125

불명하지 않는다.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형벌을 감수하겠다고

표명하면서도 그 형벌이 너무나 견디기 어려워서 몸부렴친다.


첫째 행은 “야훼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나 예루
살램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이미 회개하는 의미가 충분히 나타나 있다 (λ1119: 75-

77) • 여기의 ‘하나님의 의로우섬’은 하나님의 속성이 의로우시다는


뭇만이 아니라, 그가 하시는 일 곧 그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의 명령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피후’는 ‘그의 입’이란

뭇인데, 그의 대변자인 예언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나


타내는 말이다. 거역하였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리티’는 ‘내가
불순종했다’라는 뭇이다.
둘째 행에서 주인공은 자기의 기가 막힌 사정을 만천하에 광고하

려는 뭇에서 소리를 높이고 있다. 듣고는 원문에는 ‘시메우-나’라

는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표현 즉 ‘제발, 내 말좀 들어보

시오’란 말로 되어 있다. ‘시메우-나’의 ‘나’는 ‘자, 이제’ 또는 ‘제


발’이란 뭇의 표현이다. 그리고 ‘시 메우’는 ‘들어달라’라는 명령문이
다. 내 근심 즉 ‘마크오비’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내 고통’, ‘내

고난’이란뭇이다.
셋째 행의 냐의 쳐녀와 소년들은 예루살렘의 자녀들 곧 유다 백성

을 가리킨다. 사로잡혀 갔도다는 원문에는 ‘할쿠 앗셰비’로 되어 있


는데, ‘앗셰비’는 포로된 상태로 있다는 뭇이며, ‘할쿠’는 그들이

어느 지점으로 갔다는 뭇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미 ‘사로잡혀 가

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마치 자녀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흘로

남아 슬퍼하는 여인을 연상케 한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서 시인은 다시금 예루살햄의 입장이 되어 자기의 최가 너무


126 / 예레미야애가

나 막중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는 진정으로 회개하며 소망 가운

데서 고통을 참으려고 노력하지만, 동족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버

린 엄청난 비극적 현실이 너무나 원통하고 절통해서 세상 모든 백


성에게 절규하게 되는 것이다(시 49: 1- 2). 이것은 우리 주님이

갯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일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두 단계의 심정의 과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계약백성을 정계하기 위해 그들을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게 하신 일에 대해 암담한 심정을 풍고 호소


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들이 깊이 생각한 후에 ‘하나님은 의로우시
도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불행은 우리 탓입니다. 우

리가 야훼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회개하면서 구원의


소땅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 미치기 어려운 갚은 신앙적 경지가

그 배후에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애를 통해서 깨닫게 하

신 복음의 진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불평과 원망을 하

게 된다. 즉 공연히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친 것처럼, 마치 세상이

불공명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세

상의 불공평을 방치하지 않으신다. 죄에 눈이 어두워 일시적 쾌락

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예루살렘은

그러한 쾌락을 맛보기 위해 자신의 하나님을 버렸던 것이었으나,

이제 그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진실한 성도라면, 주위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정

도의 극심한 곤고 중에서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도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시 119: 137). 따라서 성도들은 어떤 상황 가운

데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섬’을 확신해야 한다.

디밀코프
1 : 19 / 127

내가 내 사랑히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나를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매 주석

내 사랑하는 자 즉 ‘메아하바이’는 ‘내 애인들’이라는 뭇이나, 여

기서는 동맹국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의 18개월에

걸친 포위로 극도의 곤경에 빠졌을 때, 주변의 동맹국에게 구원을

요청한 일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나률 속였으며 의 원문 ‘럼무니’는

‘라마’(속이다)의 피옐 • 3인칭 • 남성 • 복수 • 완료형에 1 인칭 어미가


붙은 변화다. 따라서 그것은 피옐 변화로서 ‘그들이 나를 배신했
다’라는 뭇이다. 실제로 예루살렘이 강성할 때는 주변의 나라들이
동맹을 맺고 서로 돕는 우방인 척했으나, 유다가 위급할 때에는 배

신했던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원문의 둘째 행과 셋째 행을 뒤섞어서 번역한 생


이다. 그 원문을 직역하면 “나의 제사장들과 나의 장로들은 그 도

시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들은 진작에 그들의 신혼(身塊)

을 되살리려고 자신들을 위해 음식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옮길 수 있다.

나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 속한 제사장들을 말한다. 여기의 주

격은 어느 개인이 아니라 인격화된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성중에서 는 예루살렘 성의 거리바닥을 말하는 것 같다. 기철하였


128/ 예레미야애가

도다의 원문은 ‘가와우’다. 그 어간 ‘가와아’는 ‘파멸하다’란 뭇이므

로 ‘그들이 죽었다’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그 당시 제사장들과 장

로들이 굶어 죽을 정도라면 예루살렘 성중의 기근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소생시킬 이라는 말의 목척어가


빠져 있으나, 원문에는 ‘나페삼’(그들의 신혼)이 첨가되어 있다. 따
라서 그것은 직역하면 ‘그들의 혼을 돌이킬’이라는 돗이지만, 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또는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려고’란 말

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척군에게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있었던 때의 이야기다. 그 성

중에는 큰 기근이 있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까지도 굶어서 죽어

가고 있었다. 역사 기록에 보면 예루살렘 성은 1년 6개월 동안,

즉 시드기 야 9년 10월 10 일부터 11년 4월 9 일까지 바멜론 군대 에

의해 포위되어 “성중에는 기근이 심하여 백성의 양식이 진하였다”

고 했다(왕하 25: 1-3). 설상가상으로 그 이전까지 그렇게 가까웠

던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배신하여 아무런 도

움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상의 이야기는 하나념에게서 버렴받은 백성의 비참한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찰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런 때 신앙인이 취해야 할


방도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일이다. 하나님만이

도움을 요청할 때 손을 내멀어 주신다. 예루살렘이 환난을 당할 때

동맹국이 배신했듯이 사람들은 배신하기 일쑤다(시 119: 105). 그

들은 남이 강성할 동안 모두 솔선하여 도우려고 하다가도, 곤궁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는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그러한 호의는 애초에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1 : 20/129

덜피헤쉬
여호와여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후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m 주석

히브리어 원전에는 첫째 행이 “마음이 번뇌하오니”까지 이어진

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의 첫째 행은 단지 그 첫 소절을 구성하는


세 단어만을 옮긴 것이다. 여호와여 톨아보융소세 는 원문에서는 ‘레

에 야훼’라는 두 단어가 쓰였을 뿐이다. 내가 환난 중에셔 마옴이 괴

홉고는 원문의 ‘키-차르-리’라는 한 단어를 의역한 것이다. 즉 그

것은 ‘차르-리’(내게 환난이)와 접속사 ‘키’(왜냐하면)의 합성어다.

영어로 말하면 ‘퍼-디스트레스 -투 미’ (For-distress-co me) 라는 표

현이 되겠는데, 그 히브리 원문 자체가 곤고를 호소하는 관용어인

듯하다.
마융이 번뇌하요니의 원문은 ‘메아이 하마르마르우’다. 그 돗을 직

역하면 “내 내장이 부글부글 끓는다”이다. 히브리어로 ‘내장’은 사


람의 감정의 원천이므로 ‘내 마음’이라고 옮긴 것이고, ‘부글부글
끊는다’의 ‘하마르마르우’는 어간 ‘하마르’의 페알랄. 3 인청 ·복

수 • 수동태 완료형으로서 ‘그것들이 붉게 되었다’와 ‘그것들이 끓어


올랐다’의 두 가지 뭇으로 사용된다(용 16: 16 ; 애 1 : 20 ; 2 : 11).

이 낱말의 마지막 음절 ‘마르’가 반복된 것은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130 I 예레미야애가

것으로서 소위 페알랄형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마음이 (심히) 번

뇌하오니’로 ‘심히’를 첨가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히브리 원문은

이상으로 첫째 행의 3+2의 다섯 강음구가 끝나고 둘째 행으로 넘

어간다.
우리말 성경에는 둘째 행 첫 소절을 이루는 세 단어가 생략된 셈

이다. 그것은 ‘네헤파크 리비 베키르비’인데, 직역하면 “내 성장이

내 속에서 뒤집혀졌다”이다. ‘네헤파크’는 ‘뒤집혀졌다’라는 뭇이


다. 이 말은 심한 고민의 흔란상태를 표현한 말이다(호 11 : 8). ‘리

비’는 ‘레브’(심장)와 ‘이’(나의)가 합성되어 ‘내 심장’ 또는 ‘내 마

음’이란 뭇을 나타낸다. 원문에는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앞에 ‘그 까닭은’이라는 뭇을 나타내는 접속사 ‘키’가 있으나, 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가 원문에

서는 ‘마로 마로티’로 표현되어 있는데, ‘마로티’는 어간 ‘마라’(거

역하다)의 칼 • 1 인칭 • 단수 • 완료형이다. 그 앞에 강조하기 위한


절대형 부정사(不定詞) ‘마로’를 놓음으로써, ‘내가 진실로 심히 패

역했나이다’라는 뭇이 된 것이다. 그 까닭에 내 마음이 번뇌하고,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뒤집혀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심한 고통은 하나님을 반역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셋째 행에서는 밖으로는 곧 ‘미후츠’에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

는 곧 ‘바바이트’에는 죽음이 있다는 비참한 광경의 묘사가 나온다.

신명기 32장 25 절 상반젤에도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라는 유사한 표현이 있다. 그리고 앞서 서론에서 언급

한 바와 같이 수메르인의 애가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찰의

살륙은 히브리어로 ‘쉬캘라-헤레브’인데, ‘쉬켈라’는 부모가 자녀


들의 죽음을 보는 경우 둥에 사용되는 표현이다. 우리말로는 ‘살플

한 사람을 사별한다’는 말에 가깝다. 따라서 인격화된 예루살렘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겨 슬퍼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

다. “집에는” 곧 내부에는 “사망 같은 것” 아마도 사망만큼이나 무


1:20 / 131

서운 기근 혹은 전염병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문의 ‘캄마


웨트’는 ‘카’(같은)+‘마웨트’(죽음)이므로 ‘사망 같은 것’이라고 우

리말 성경에 번역되어 있으나, 시리아 사본에는 ‘카’가 없이 그냥


“사망이 있나이다”로 되어 있다. 영어성경 (RSV) 은 “집안은 죽음
같은 상태 입 니 다 .. (in che house ic is like deach) 라고 되 어 있다.

m신학적 메시지

본절은 시언이 예루살렘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

리는 내용인데, 22절까지 계속된다. 밖에서는 칼에 의한 살륙이

벌어지고 있고, 안에서는 역병이 성해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온은 온가족을 잃은 과부의 모습으로 이제까지는 지나


가는 과객에게 부르짖다가 (12-19절) ,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기도로

깐구한다. 배반당하고 찢기고 고통을 받은 예루살렘 곧 시온은 야


훼께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어 자기의 고난을 돌봐주시기를 간청한
다. 이제 예루살렘을 대신한 시인은 목소리를 높여 다음과 같이 기

도한다. “야훼여, 내가 환난 중에 있나이다. 나의 패역이 륨니다.


밖에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안에는 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를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괴롭습니다 .. 이 고백의 기도

에는 확실히 뒤우침과 회개하는 마음의 모든 상태가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제 야훼 하나님만이 자기들을 도우실 분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야훼에게만 소망을 걸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

은 죄를 더 이상 변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그러한 비극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예루살렘 성이 느부


갓네살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을 때, 포위망

을 뚫고 자유를 위해 도망치려고 했던 시드기야왕과 그 신하들의

일부는 칼에 쓰러졌다. 성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기근과 역병으


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겪은 유다 백성들에 대해서 시
132/ 예레미야애가

인은 하냐님께서 언젠가는 자기네 대적 앞에서 자기네들을 일으켜

세우설 것과, 이미 받은 수치를 보상해서 명예회복을 해주설 것이

라는신념을나타낸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탄식의 기도와 불신자의 탄식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양자는 탄식의 내용에 있어서는 같다. 그러

나 신앙인에게는 그 탄식 뒤에 회개와 심히 낮아지는 겸손이 따르

는 데 비해서, 불신앙인에게는 원망과 저주가 따르는 법이다. 시


인은 “내 패역이 진실로 심히 릅니다”라고 스스로 최인됨을 고백하
는 데서 신앙인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소망을 버리지 않

고 하냐님의 응훌을 간구한다.

덜끄연
저회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위로하는자가없고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저회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매 주석

져회가 나의 탄식율 들었으나 라는 구절에서 “저희가…들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샤메우’라는 말로 쓰였는데, 이는 칼·

3 인칭 • 남성 • 복수 • 완료형이다. 그런데 3인칭 복수인 “저회”는


누구일까? ‘내 사랑하는 자’ 혹은 ‘나의 모든 원수’얼 터인데, 아
마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을 배신한 동맹국으로서의 ‘내 사랑하는
1:21 / 133

자’일 것이다. 그들은 19절에서 언급된 ‘예루살렘을 속인 자’일 것


이다. 70인역 헬라어 성경 (LXX) 은 “저회가…들었다”를 2 인칭 복

수 명령형으로 간주하고, “너회는 들으라”로 번역했다. 시리아역


(Peshita) 도 야훼 하나님께 호소하는 의미에서 2 언청 • 단수 • 명령형

을 사용해서 ‘들으십시오’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영어성경


(RSV) 은 “내가 어찌 탄식하는지 들어보십시오" (Heat how 1 groan) 라

고 번역했다. 그러나 우리는 히브리 원전 (MT) 대로 따라야 옳다고

본다. “나의 탄식”에서 “나”는 시인의 목소리의 주체이지만, 실제


로는 의인화된 예루살렘이다. “탄식”은 히브리 원어로는 ‘네에나
하’인데, 니팔 • 분사형으로서 탄식의 계속성과 심각성을 나타낸다.
둘째 행은 나의 원수가 내 불행의 소식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했다”라는 이야기다. 그 원수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점에서 시인의 전통적 신앙을 감지할 수
있다. 원운에는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그들이 기뻐했다고 표현되

어 있다. ‘그들이 기뻐하나이다’의 원문 ‘수수’는 의기양양해서 심


히 기뻐한다는말이다.
셋째 행의 주깨셔 반포하신 날 에 관해서 영어성경 (RSV) 은 역시

시리아역을 따라 “그날을 초래하옵소서”로 번역했다. 또 다른 번역


(NIV) 은 기원형 (힘顧쩔- May you bring the day ... )으로 번역했다. 우

리나라의 표준 새번역도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히

브리어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히

브리 원전에 충실해서 하나님께서 돼정하신 심판의 날야 하나님 스


스로의 의지에 따라 이르게 된다는 예언척 의미가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원문으로 ‘용-카라타’인데, 그 뭇은 ‘하나님께서 부르


신 날’ 곧 ‘야훼의 날’, ‘심판의 날’이다(사 13 : 6). 이 날은 또한 그

대척에게 원수갚는 보수일이기도 하다(햄 46: 10). 여기서의 ‘그날’

은 계약백성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은 심판의 날안 동시에 대척에게

원수갚는 날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앞으로도 계속되는 야훼


134 / 예레미야애가

의 심판의 날이다. 저회가 나와 갈이 되겠나이다는 원수들도 하나님

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예외가 아니라는 신앙고백이다. 그들도 때

가 되면 예루살렘이 당한 것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본절에서는 하냐님이 계약백성을 정벌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원

수들에게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나타나기를 간구하고 있다.


여기에는 도덕적으로 창조된 세계 안에서는 남을 괴롭힌 범죄자가

무사할 수 없다는 신앙이 나타나 있다. 22절의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서 나타내시고”라는 말에 비추어볼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

을 막론하고 악한 모든 것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원수들 역시


죄악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세계의 주관자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올바로 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언된 ‘그날’은 ‘야훼의 날’로 반포된 심판의 날이다.

이때는 불의를 복수하시고 약속된 의의 날이 도래케 될 하나님의

심판이 온 땅에 마치는 때다. 그런데 시인은 원수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나의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 행하옵소

서”라고 하나님께 간청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주관자 하나

님의 주권이 높이 드러나서 하나님이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그날이

속히 임하기를 갈망하는 데서 오는 간구인 것이다.

팅킴타우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죄악을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회에게 행하옵소서
1: 22 / 135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곤비하니이다

m주석

히브리 원전의 원문대로라면, 첫째 행은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드러내시어 그들을 정벌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다. 물론 여


기의 ‘저회’는 앞절에서 언급한 대로 예루살렘의 불행을 기뻐하는

무리다. 우리말 성경은 히브리 원전의 첫째 행의 후반절 “저회에게

행하옵소서”를 둘째 행으로 넘기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예루살

렘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 언급했다.

주 앞에는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 앞에’라는 말이다. 나타

내시고는 이 문장의 주어인 ‘그들의 모든 악’ 곧 ‘콜-라아담’을 ‘드

러나게 해주십사’라고 희구하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보’

(온다)의 칼 • 3 인청 • 여성 • 단수 • 미완료형이지만, 다음에 오는


‘행하옵소서’ 즉 ‘올렐’이란 말이 명령형으로 쓰였으므로 강한 소원

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 악의 세력을


어서 속히 하나님의 준엄한 공의의 심판으로 처단해주십사 하는 기

도언 셈이다. 그런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서 정벌받

는 모양으로 행해주십사 하는 희구인 것이다.

셋째 행은 이미 앞서 언급한 예루살렘의 고통을 다시 인식해주기

를 바라는 말로 매둡짓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

나, 접속사 ‘키’는 어떤 이유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라는 돗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나의 탄식’과 ‘마음의 곤비’가 자심

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구절은 이 첫째 애가

전체를 끝맺음에 있어서, 기도하는 당사자의 곤고한 처지를 일깨

우며,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는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다. 나의 탄


136/ 예레미야애가

식이란 말은 용이 탄식할 때 사용한 말과 같은 표현이다(용 3: 24 ;

23 : 2). 곤비하니이다 곧 히브리어로 ‘다와이’는 항시 마음이 상해서


기절할 듯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다. 이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심정적인 고통을 말한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본절은 예루살렘을 심판한 것같이 원수에게도 형벌을 내려달라

는 기도로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였다고 해

서 심판이 면제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공정


하기 때문이다(시 18: 30).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 지혜, 은혜에

대한 시언의 신념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는 혼히 원수의 멸

망을 간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마

5: 44; 녹 23 : 24). 그리스도의 교훈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원수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원수는 하나님에게

범죄한 원수요 그리스도 교회의 원수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하는 하나님의 원수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


는것이다.
그러나 우리 개인의 원수에 대해서는 결코 저주해서는 안된다고

칼빈은 교훈하고 있다. 칼번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들의 멸망을

간구하는 때에도 먼저 우리의 감정이 순결해야 하고 공익을 위해


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

다.
두번째 비탄의 노래
2. 진노의 날의 참상 (2 : 1-22)

“아아, 이럴 수가 ! 어찌하여 주께서 그같이 진노하사 야곱의 보

금자리를 사정없이 불사르시고 유다의 성채를 무너뜨려 땅에 옆으


시고, 나라와 통치자들을 욕보이십니까?" 이런 탄식으로 시작되

는 이 비탄의 노래는 첫번째 비가와 마찬가지로 알파뱃 두운법 (頭

體法)의 답관체로 된 노래다. 이 애가는 역시 3 행으로 된 매 연(聯,

스탠자)의 첫글자가 두운으로 히브리어 알파뱃 순서대로 하나씩 밟

아나가는 형식의 시다. 그리고 시의 가락은 3+2의 ‘키나’조 운율

이다.
역시 ‘에카’(아, 어찌하여 이런 슬픈 일이 ! )라는 감탄사로 시작되

는 이 노래는, 예루살렘의 참상과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이 더욱 생

생하게 묘사된 점과, 구원의 호소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더구나 그 파괴현장에 관한 박진감 넘치는 묘사와 시


인의 흥분된 감정표현으로 보아,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훼파 직
후, 재난의 현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첫번째 비
탄의 노래와는 달리, 여기서는 16절과 17절의 알파뱃 순서가 바핀

것이 첫번째 비가와 두번째 비가가 서로 다른 시인에 의한 것임을

139-
140/ 예레미야애가

암시한다.

이 두번째 애가 역시 시인과 여인 시온이 함께 발언하는 비가다.

그런데 첫번째 애가에 비하면 시온이 훨씬 적게 발언한다. 시인이


더 세밀한 사항에 대해 서술하며, 여러 모로 살펴보는 내용의 발언

을 한다. 그리고 시온에게 직접 말을 결기도 하며, 그 엄청난 비극

적 사건에 시온과 함께 동참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온 곧 예루살

렘에 대해 감정척으로나 사상척으로 밀접한 감정이업을 꾀한다.

시인은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한 형별임을 잘 알고 있

다. 그러나 형벌의 수단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매

우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원수들의 모욕적이고도 포학한 행위, 기

근에 의한 어린이들의 죽어감, 이런 것들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유다 나라에 대한 심판의 일환으로서 예루살렘이 조직적으로 파

괴되는 현장에 대한 생생한 목격자의 충언이 연거푸 이어지면서 독

자의 가슴을 아프게 연타한다. 궁전과 요새, 성전과 제단, 성곽과

성벽, 성문과 빗장 등이 노도와 같은 바멜론 군대의 침입에 의해

사정없이 분쇄되어 처참한 꼴이 되어 버린다. 시온의 광채는 검은


구름에 가려졌고, 이스라엘의 숨결은 끊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

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있었고, 예언자와 제사장은 벙어리가 되

었다.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처녀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땅에

머리를 떨구고 있다. 아,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우리가 영낙없

는 원수나 되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에게 불 같은 노여움을 쏟으시

니 말이다. 이 모든 일은 주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주께서 시온을

폐허로 만들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야훼에게 철저히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이 애가의 중간 부분에서 직접 시온을 향해 말을 걸고 있


다. 무고한 아이들의 곤경이 시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집안의 어른들과 마을의 장로들은 속수무책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개요 /141

어떻게 할 수 없는 시온의 폐허는 그 상처가 바다처럼 크다고 했

다. 예언자들은 시온의 참상의 원인을 밝히기를 꺼려 했다. 그것


은 하나님이 직접 작정하신 대로 행하신 정벌인데도, 그들은 회개

를 역설하지 않고, 그저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뿐이다.


‘페’로 시작되는 16절과 ‘아인’으로 시작되는 17절에 있어서 ‘페’가

‘아인’보다 먼저 나오는 것을, 랍비들은 ‘페’는 업, ‘아인’은 눈이므


로 ‘이스라엘은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을 업으로 먼저 말하는 죄악을
범했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거짓 예언자의 경우
가바로 이에 해당된다.

그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

다. 그는 사람들에게 야훼께 부르짖을 것을 권하고, 어떤 말을 해

야 할 것인지까지 보여준다. 그들은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다. 하나님 아닌 데서 구원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는 동족에게 기도로써 슬픔을 달탤 것을 일러준다. 신령
한 비탄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로 전환되게 마련(고후 7 : 1 이이기 때

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20-22절에서 예루살렘이 드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비극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면서 끝까지 하나님께 호소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 살펴주십시오. 이 비참한 현장을 그
냥 내버려 두시렵니까?"

1) 시온의 철저한 수난 (2 : 1-1 이

매 개요

시온이 당하는 심판의 원인은 물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에


142 / 예레미야애가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시온의 철저한 수난의 직

접척인 집행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이며, 따라서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신

학적 견해가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이 당한 무서운 고통의 사실이 객관적으로 서

술되어 있다. 그 자세한 기사로 보아, 시인은 직접적인 목격자였

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 있어서 놀라운 사실은 야훼가 유다의 실

제적인 적수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시인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진노의 대가가 . 가공할 만큼 섬대했던 모양이다. 신약성

서에도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에게 내렬 형벌에 관해서 “살아 계신 하나념 손에 빠져 들

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 : 31) 라고 말씀한 구절이 있는데,

그 예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외변하여 대적할 때 나타나는 형벌인 것이다. 이 경우 그


형벌을 내리는 주체는 엄연히 하나님이시다.

이 부분에서는 시인이 주로 대신 발언해주는 가운데, 예루살렘

은 비탄과 공포에 떨며 내심 지난일을 반성하고 있다. “야훼여, 이

참상을 보십시오. 이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왜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 하고 소리없이 항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이 일찍이 자신의 발등상이었다는 사실

도, 그가 택한 도시였다는 사실도, 그 백성과 특별한 관계였다는

사실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보였다.

OJ 알레프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2 : 1 / 143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

매 주석

슬프다 …어찌 그리 에 해당되는 원문은 ‘에크’인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얼이 일어난 데 대해 탄식하는 표현이다. 첫번째 애가 즉

1장 1 절의 주석을 참고하라. 진노하사는 ‘그의 진노에서’ (in His

anger) 라는 돗인 ‘베아포’가 그 원문이다. 처녀 시온은 아름다운 시

온을 말하며, 예루살렘 자체 또는 그 주민들을 뭇한다. 히브리 원


전에는 ‘시온의 딸’로 표현되어 있으나, 그 관용어가 뭇하는 것은

시온을 의인화해서 아름다운 여인의 신분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


에 “처녀 시온”이라고 한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구륨은 암혹을 표
상하기도 하고(삼하 22: 12) , 번개와 우뢰를 연상케 하기도(시 18 :

12-14) 하는데, 구륨으로 엎으셨는고가 원문에서는 ‘야이브’라는 하

나의 동사로 표현되 어 있다. 이 말은 ‘흐리 게 하다’ (becloud) 또는

‘흔미케 하다’라는 뭇인 ‘우브’가 그 어간이다. 이리하여 심판의 하


나님이 구름을 타고 엄재하심을 연상케 한다(사 19: 1 ; 시 104: 3).

결국 솔로몬의 성전에 임했던 ‘영광의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구름’으로 시온을 덮으셨다는 말이다. 어떤 학자 (W. F.

Albright) 는 아라비아어에 의거해서 그 어간을 ‘우브’ 대신 ‘이브’로

볼 경우, ‘맘신스럽게 된다’라는 뭇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 하여 “시 온을 경 멸로 대 하셨다" (has treated Zion wich concempc)

로 번역하는 것이 전후 문맥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

말 표준 새번역이 “시온의 앞길을 캄캄하게 하신” 것으로 번역한


것은 좀 지나친 의역인 듯하다.
144/ 예레미야애가

툴째 행에서 이스라옐의 아톰다운 것 은 ‘이스라엘의 영광’으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성전 (사 64: 11) 을 뭇할 수도 있겠으나, 예루살


램 전체를 뭇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로는 이스라엘 자체를 뭇
하는 경우도 있다(삼하 1 : 19). 하늘에셔 땅에 던지셨용이여 는 하늘

의 별갈이 영광스러웠던 처지가 이제는 몰락해버렸다는 뭇이다.


셋째 행은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던지 이제까지 발등상의 구

실을 했던 성전이나 법례까지도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같이

여기실 정도라는 내용이다. 그 발둥상은 성전(겔 43: 7 ; 사 60 : 13)

또는 법궤 (대상 28: 2 ; 시 99 : 5) 를 뭇했다. “그 발둥상을 기억지 아

니하셨도다”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탈한 백성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매 신학적 메시지

예루살렘의 재난에 대한 참된 원인에 초점을 맞추어 이 얘가를

시작한 시인은, 결과론척으로 시온 성과 그 백성을 파멸로 몰아넣

은 실질적인 집행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역셜했다. 이

시점에서는 그들이 당한 재난의 현장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항에다 관심을 집중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심판을 유발케 한 원인은 그들 자신의 죄임에 틀렴없


지만, 불 같은 진노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정계의 채찍을 후려
치시는 하나님 앞에 그들이 정면으로 마주서 있는 현실에 역점을

두게 된 것이다.
시인은 처녀 시온의 견고한 성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 뼈아픈 심정으로 셜명하면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육체적인


고통 이상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에서 그들이 소외되

고 있는 점을 더 안타까워. 하고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던지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광의 자리에서 몰아내셨다는 것이다. 그리


2: 2 / 145

고 하나님의 발등상이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법궤를 아무 쓸모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내버리셨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인가?

‘주께서 그 발둥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라는 말은 성전이 이


방군대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당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뭇이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어떤 제도나 예배의식이나 예배처소도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

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못하는 성

천은 하나의 형범한 건축물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를 기억해주시는 것

도 결코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당 건물이나 운집하는 교인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 행해지는 거룩한 예배와 아름다운 교제 그

리고 세상에서의 헌신적인 봉사 때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댐빼트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공훌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방백A로

욕되게하셨도다

매 주석

“야곱”은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별칭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모든


거쳐 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의 터전과 그들의 지배계급까지를
146 / 예레미야애가

의미한다. 그리고 둘째 행의 유다의 견고한 생과는 대칭이 된다. 여

기의 “거처”를 뭇하는 ‘네오트’는 목장에 지은 간이 막사 또는 장막

에서 파생된 말인 것 같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 나

라의 주축이 되는 집단의 거처였다. 상키시고 곧 히브리어로 ‘빌라

아’는 그 어간 ‘발라아’의 피엘 • 완료형이므로 ‘삼켜버렸다’ 또는


‘파괴해 버렸다’라는 완전 파괴의 뭇 이 나타나 있다(겔 36: 3). 이

것은 유다 왕국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한 말이다. 공훌히 여기지 아

니하셨다 곧 ‘로 하말’은 시리아역과 라틴어 성경에는 그 앞에 ‘그리

고’를 뭇하는 접속사가 있으므로, ‘삼켜 버렸다. 그리고’ 즉 ‘삼키시

고’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말 성경도 이에 따른 번역을 한 셈

이다.
둘째 행의 노하사 는 ‘그의 넘 치는 진노에서 ’ (in His overflowing

rage) 라는 뭇을 지닌 히브리어 ‘베에브라토’를 의역한 것 이다. 처녀

유다는 원문에는 ‘유다의 딸’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유다의 모든


거민을 가리킨다. 유다의 견고한 생 은 요새들과 성곽을 말한다. 그

어간 ‘바차르’는 ‘돌을 다듬고 깎는다’는 뭇을 지닌다. 협어 의 원문

‘하라스’는 ‘헐어서 던진다’는 뭇이다.

셋째 행에 땅에 엎으시고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 역시 땅에 내동

탱이친다는 뭇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강한 주권을 엿볼 수 있


다. 나라는 유다 왕국이며, 그의 방백 이라는 구절에서 “그의”는 역

시 유다 왕국의 소유격이다. 욕되게 하였도다 즉 ‘힐렐’은 ‘할랄’의

피옐 • 완료형 • 3 인칭 • 단수 • 남성 변화이므로, 욕되게 함이 크게


강조된 돗으로 나타나 있다 (사 43:28).

매 신학적 메시지

하나념께서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그의 발등상’이라고 했던 성

전과 법궤까지도 기억지 않으시고 던져버리실 것이라고 말했던 1


2:2 / 147

절에 이어, 여기서는 그 하나님이 계속해서 유다 전역의 도시와 성

채를 파멸시키고 또한 그 백성의 지도계층으로 하여금 척에게 수치

를 당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는 시인의 마음은 한없는 큰 상처


를 업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이제까지 그토록

사랑하고 아껴주시던 하나님의 직접척인 소행임을 생각할 때, 하

늘이 꺼지는 듯한 기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형벌이 우연의 소치거나 운이 나빠

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념에게서 임한 것임을 인정하는 일은 결

과적으로 매우 유익하게 될 수 있다. 그러한 인정은 회개의 출발점

。l 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불타는 진노로 말미암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무자비한 전사로서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시인은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말을 하기보다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


을 어떻게 감당하며 참고 견디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듯하다.

신성하다고 인정받았던 성전과 독실한 신앙인의 무리로 정형이 나


있는 ‘땅의 백성’ (Am haare다)의 생활 근거를 파괴하는 동시에, 하

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서 백성들 위에 세워졌던 그


땅의 통치자와 지도자들을 하루아침에 비천한 존재로서 수치를 당
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어떤 몽가짐을 취해야 할지 참

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시드기야왕은 쫓겨났고, 다윗 왕조는 무

너졌다. 사람들은 이러한 고난을 통과해야만 바로 살 수 있는 교훈


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당장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으란 법이 있는가? 이런 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불행의 심연에 잠겨서 죽음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인생은 없는가? 우리가 그렬 경우, 이 애가의 시

인 자신이 어둠에서 광명에로 헤쳐나오는 과정을 우리도 충실히 뒤


따라 밟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야만 그리 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진정으로 효험을 나타내게 됨을 실

감할수 있을 것이다.
148/ 예레미야애가

댐기멜
맹렬한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앞에서
오른손을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혹 사름같이

야곱을사르셨도다

매 주석

맹혈한 진노가 원문에는 ‘바호리 아프’(시 79 : 5 ; 89 : 46) 로 되어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진노의 화염 속에’라는 말이다. 이스라옐

모든 뽑이라는 구절에서 “뿔”은 무력과 위엄(威廠)을 상정한다(삼상


2 1. 시 75: 11 ; 램 48 : 25). “자르셨다” 곧 ‘가다아’는 잘라서 제거

했다는 뭇인데, 모든 세력을 멸절할 때 사용된 상정적 표현이다(속


2: 18-21).

둘째 행의 하나님의 오른손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사랑과 보호

의 손길이다(시 74 : 11 ; 121 : 5). 이제 그 손을 떼시고 심판의 불인

적의 병화로써 유다 왕국을 태우신다는 것이다. 거두시고의 원문은

‘헤쉬브 아호르’인데, 직역하면 ‘그가 뒤로 되돌리시고’이다. 그 말

은 하나님이 사랑과 보호의 손길을 철회하셨다는 뭇이다.

셋째 행에서 시인은 마치 맹렬한 불길이 사방을 삼켜버리듯이,

하나님이 야곱 곧 이스라엘을 불사르셨다고 한탄한다. 맹렬한 용은

원문대로는 ‘타고 있는 불길’이라는 말이다. 사항으로 사륨은 원문

대로는 ‘사방을 삼켜버리듯 남깅없이 불태운다’라는 뭇이다. 즉 ‘사


2 : 3/149

르다’는 히브리어로 ‘아클라’인데, 주어가 여성명사인 ‘불’이므로

‘게 걸스럽게 먹는다’ 또는 ‘삼킨다’는 뭇의 어간 ‘아칼’의 칼 • 3인

청 • 여성 • 단수· 완료형이다. 야곱융 사르셨도다를 직역하면 “그가


야곱 안에서 불태우셨다”이므로, “야곱”은 사람이 아닌,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권력층을 제거하셨는

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어 원수의 공격 앞에 노

출되게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시드기야왕과 그 왕가는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스라엘의 모든

뿔”은 이제까지 이 스라엘의 권좌에 있던 권력을 가리킨다. 여기의


뿔은 황소의 뿔에서 비유한 무력과 오만의 상갱이다.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을 섬기고 봉사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고 인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국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황소가 뿔을 자랑

하듯 자기들의 권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알 종교에 물들


어 열광주의를 얼삼았고, 야훼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동맹국
이집트의 군마를 의지했다. 백성들은 이런 그릇된 통치자들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줄 알고, 예루살렘 포위기간에 모진 고초를 무

릅쓰고도 그들을 믿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사랑과 보호의 손길을 매정하게 거두시


고, 그 백성들이 기대해오던 힘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요원의 불길같이 불타

올라 사방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옛


날 고린도 교회의 폐단과 같은 열광주의와 자기자랑과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대신 물질의 힘으


150 / 예레미야애가

로 행세하려고 하는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 일부 이런 한국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까 두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과

연 몇이나 될 것인가?

댄달햇
원수같이 활을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모든자를

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불처럼 쏟으셨도다

매 주석

하나님이 마치 이스라엘의 원수가 된 것처럼 공격을 가해 오셨

다. 활은 모든 무기의 대명사다. 당기고 곧 ‘다라크’는 ‘밟는다’는

말이지만, 활과 함께 사용될 때에는 ‘구부린다’는 뭇으로 쓰인다.

즉 화살을 쏘기 위해 활을 굽힌다는 뭇이다(렘 51 : 3 ;시 12 : 2 ;

37:14). 대척처렵 곧 ‘케차르’는 원문에 있어서는 둘째 행에 있고,


첫째 행은 오른손올 들고 서셔로 끝난다. 여기서의 “오른손”을 사랑
과 보호의 손길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능력의 손으로 이해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행에서 시인은 “대적처럼 하나님이 고귀한 자들을 모조리
살륙하셨다”고 탄식한다. 눈에 아륨다운 모든 자는 ‘콜 마하마데 아

인’이라는 원문을 직역한 것이고, 그 뭇은 ‘고귀한 사람들 모두’인


셈이다. 살륙하셨음이여는 원문에는 ‘하라그’(쳐죽이다)의 칼. 3 인
2:4 / 151

챙 • 단수 • 남성의 ‘와우’-계속법 인 ‘와이 야하로그’로 되 어 있다.


셋째 행에서 처녀 시옹의 장막(곧 시온의 딸의 장막)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거처를 뭇한다.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심지어 온 유다의

가옥들을 불태우심으로써 자신의 노하심을 표현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장막’ 곧 ‘오헬’은 임시적 막사란 돗이 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정착된 거처’를 말한다. 원문에는 “시온의 딸”로 되어 있는
“처녀 시온”은 시온을 의인화한 표현인 동시에, 시온 곧 예루살렘

의 거민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장막”은 성전을 돗할 수도 있는


데, 하나님이 불태우시는 대상은 성전을 포함한 모든 가욱일 것이

다. 노률 불처렵 쏟으셨도다라는 구절의 원문 ‘샤파크 카에슈 하마

토’는 ‘그의 노’(하마토)를 ‘불처럼’(카에슈) ‘쏟으셨다’(샤파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불을 마치 물처럼 쏟은 것으로 말

한 것은, 물처럼 일시에 쏟아부은 것으로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여

겨진다.

매 신학적 메시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극도에 달하다 보면, 마치 원

수지간같이 직접 이스라엘을 공격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야훼 하


냐님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사정없이

살륙하시고, 눈동자처럼 아끼시던 계약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미련

없이 불태워버리시는 심청은 바른 신앙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로 이

전 시대의 예언자들의 수없이 되풀이되었던 경고와, 미래에 나타

날 하나넙 나라의 비전과, 그리고 지혜문학에서 제시된 교훈에 젖

어 있던 시인과 마찬가지의 신앙의 경지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우


리가 이러한 암흑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포로 이후 시대의 위로와

회복의 예언이 참으로 절실하게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게


152/ 예레미야애가

될 것이다.
본절에서 ‘원수같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처럼
대하셨다는 뭇이지만, 그 내면의 뭇에는 이스라엘이 끝까지 회개
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라는 내
용이 전제되어 있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

이 를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파멸을

겪게 만든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죄가 하나님

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원수되게 만들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는 하나님께로부터 멸어졌던 자들을 가까워지게 하고(엠 2 : 13) ,

원수되었던 자들을 화목케 한다(엘 2 : 16 ; 골 1 : 20 , 22; 히 10: 19,

딩혜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궁을삼키셨고

견고한성들을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매 주석

이 ‘헤’ 연(聯)은 앞의 ‘베트’ 연 (2 : 2) 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다만 거기에 나타나 있는 “야곱의 거처”, “유다의 견고한 성”, “나

라와 방백”에 대칭되게 여기서는 “이스라엘”, “견고한 성들”, “모

든 궁”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주째셔 훤수갈이 되어 에서 “원수같이”


2:5/153

는 히브리어로 ‘케오예브’인데, ‘같이’를 나타내는 ‘케’는 여기서는

단순히 비슷하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원수가 되


어’ (has become a veritable enemy)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스

라옐”은 유다 나라를 가리키지만, 이때의 ‘이스라엘’은 나라의 고


유명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약백성 전반을 뭇한다. “삼키셨다” 곧
‘빌라아’는 단숨에 집어삼키는 듯한 파괴의 과격성을 함축한다. 그
리고 문법적으로는 강조를 위한 피옐형이다.

둘째 행의 훼따하샤 곧 ‘쉬헤트’는 역시 강조를 위한 피옐형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유다의 수도도, 촌락도, 성전도, 견고한 성

들도 적군의 병화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셋째 행에서 쳐녀 유다는 ‘처녀 시온’과 대구를 이룬다. 전자가

유다의 백성을 뭇한다면, 후자는 예루살렘의 주민을 뭇한다. 원문

에는 ‘유다의 딸 안에’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다 백성 전체에 피


해가 확대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곤심과 얘흥은 둘 다 같은 어간
‘아나’(애도하다)에서 온 여성명사로서 같은 낱말의 중복형이다. 즉

그 원문이 ‘타아니야 와아니야’(애도함 그리고 애도함)로 중복됨으로


써, 그 슬픔과 탄식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사 29: 2). 더하셨도다는
원문에 ‘와예레브’로 되어 있는데, 그 어간 ‘라바’(늘어나다)의 히

필 • 미완료 • ‘와우’-계속법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을 보여준

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본절에서는 사람들이 바멜론의 갈대아 군대의 잔혹성만 보고,

그 배후의 하나님의 행위를 보지 못한다면, 그들이 당하는 비극의

참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시인은 우려했다. 그는 이스라옐

의 재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믿음

의 눈’이 어두운 그 백성들은 그 배후의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


154 / 예레미야애가

들이 그러는 동안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어서

속히 하나님을 발견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오른손의 구원을 호

소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이유없이 그들을 정

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키셨다’고 탄식했는데, 여기서

는 유다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했다. 이 명청에는 특별히


계약백성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처럼 귀한 이름을 받은

그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정별로 ‘삼키워져야’ 했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모든 것이 훼파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남은 것

은 애통과 탄식의 증폭뿐이었다. 새로운 계약백성으로서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 차야 할 오늘날의 신앙인 공동체가 옛날의 비극의

주인공들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도록 ‘믿음의 눈’을 밝히도록 밤낮


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댐와우

성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버리시며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옹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왕과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m주석

앞절까지에 이어서 나오는 연의 내용은 국가적인 물질적 재산을

파멸하는 형벌인 데 비해, 이 ‘와우’연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기초


2:6 / 155

가 되었던 종교제도의 철저한 파괴를 보여준다. 성막이 원문에서는

‘수코’라고 되어 있는데, ‘그의 초막’ 즉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이

다 (시 76: 2). 원문에 는 하나님 이 그의 초막을 ‘동산같이 ’ (각간) 헐

어버리셨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동산에 있는 초막을 혈듯이 성

스러운 그의 성전을 헐어서 폐기하셨다는 뭇이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동산의 초막같이 라고 ‘ ... 의 초막’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추

수가 끝나면 동산을 이루었던 설치물을 치워버린다. 그와 마찬가


지로 벙죄한 백성이 장만한 성전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서 폐기하

셨다는 뭇이다. 공회 처소는 “성막”과 대칭되는 것으로서 제의를


위해 ‘지정된 장소’다. 휘l 따하셨도다 곧 ‘쉬헤트’는 피옐이므로 캉조

형이다.
둘째 행에 나오는 잊어버리게 하시며는 원문으로 ‘쉬차흐’인데, 역

시 피옐변화이므로 강한 사역을 나타낸다. 철기 로 번역된 ‘모에드’

는 첫째 행에서는 “공회 처소”로 번역되어 있다. 즉 첫째 행에 나

오는 ‘모에드’는 ‘그의 지청 장소’인 데 비해, 둘째 행의 ‘모에드’는

‘지정된 집회 혹은 시간’이므로 “절기”로 번역된 것이다. 절기와 안


식일을 잊어버리게 한다는 것은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상

태가 된 것을 말한다.

진노하사에 해당하는 원문 ‘베자암 아포’를 직역하면 “그의 노하

심의 분노로써”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중의 강한 말이 되었다.


왕과 제사장은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로서 서로 결탁하여 형식적인

제의에 관여했기 때문에 규탄의 대상이 된 것이다. 멸시하셨도다는


미워하셨다는 말이다(렘 14:21).

m신학적 메시지

하나님의 진노는 주의 성소에도 쏟아졌다. 성전 중심의 예배가

형식화에 머물러 있는 데 대해 혐오하셨고(사 1 : 13) , 절기와 안식


156/ 예레미야애가

일이 아무련 의미 없는 행사에 그친다고 보고 없애버리셨다. 그리

고 정치와 종교의 결탁에서 오는 천박한 행위 때문에 왕과 제사장

을 심판하셨다(습 3 : 11-13). 여기에 ‘공회 처소’까지도 훼파하셨

다고 언급되어 있다. ‘공회 처소 l란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

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는 장소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에 해당한

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처소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경우,

언제든지 훼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1 장 4절에서 언

급된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

로다”라고 슬퍼하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그리스도 교회가 바로 서게 하는 일차적인 책엄은 당연히

교회 지도자에게 있다. 여기의 셋째 행에서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

을 멸시하셨도다”라고 했는데, 우리에게 매우 떨리는 심정을 자아


낸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던 때, 실제로 이 말씀 그대로 시드기야

왕은 비창하게도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되어 바멜론으로 꿀려


갔고(왕하 2~ : 7) , 또 당시의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

는 처참하게 학살되었던 것이다(렘 ~2 : 24). “멸시하셨도다”라는


말은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어져야 할 존재로 간주한다

는 뭇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은 꼭 있어야 할 하

나님의 종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스스로 반성하고 기도해

야 할 것이다.

띠자인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미워하시며

궁.~을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2:7 / 157

저회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같이하였도다

매 주석

여호와쩨셔 또 라는 구절에서 “또”는 원문에는 없으나, 앞 연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행위의 계속으로 보아 첨가한 듯하

다. 자기 재단융 버리시며 의 “버리시며”는 히브리어로 ‘자나흐’인데,


‘깔보다’라는 뭇을 지닌다. 그런데 그 뭇으로는 이 문맥에서는 너무

약한 표현인 것 같다. 그래서 좀더 적극적으로 ‘버리다’로 번역한


듯하다. 이 말의 또 다른 뭇은 ‘역겹다’ (smell bad)이므로 하나님이

그의 제단을 미워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사 19: 6). 그러나

그때에는 그 뒤에 오는 자기 생소톨 미워하시며 의 “미워하시며” 곧

‘니에르’와 같은 표현으로 번역하게 될 것이다. 이 ‘니에르’는 ‘버린


다’라는 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문을 살펴서, “주께서 그의 제
단을 혐오하셨으며, 그의 성소를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셨다”

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영어성경 (RSV) 은 “주

는 자기 제단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으셨고, 자기 성소를 버리셨다”


(The Lord has scorned his altar, disowned his sanctuary) 라 고 번 역 했 다.

시현 89편 39절에서도 “ ...미워하사,욕되게 하셨다”와 같이 ‘자

나흐 ’와 ‘니에르 ’가 꼭 같은 대구로 나와 있다.


둘째 행의 궁장은 궁전의 담장이란 말이다. 현수의 손에 률이셨으

배에서 ‘붙인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싸가르 ’ (포로되게 하다)의 히

필 • 3인칭 • 단수 • 남성 • 완료형인 ‘히쓰기르’로 되어 있다. 이 말


은 주로 사람을 원수에게 내어주어 포로가 되게 한다는 뭇언데, 여

기서는 사람 아닌 궁장을 원수에게 파괴되도록 내어주었다는 것이


다. 이는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 툴째 행은 우리말로 옮켰을 때는
비교적 짧은 표현이 되었지만, 원문으로는 ‘키나’ 운율의 3+2의
158 / 예레미야애가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원문의 “궁전”이란 말이 ‘그녀

의 궁전’과 같이 여성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이 말이 여성명사인

예 루살렘 의 궁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셋째 행은 원수들이 성전에 침업하여 떠들며 소란을 피운다는 내

용이다. 훤화하기률 은 원문으로는 ‘콜 - 나트누’인데, 그들이 외치는


소리 (콜)를 질러했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22장 20절에도 같은 용

례가 나와 있다. 여기서는 원수들이 하나념의 성전에서 전쟁의 승


리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함성을 높이 외쳤다는 것이다. 시편 74면

4절의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

을 삼았으니”라는 말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성전에 침입하는 것이

그들의 최후의 공격목표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의 그 함성과

기쁨의 소리가 마치 절기 때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제행사를


방불케 했다는것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하나님은 신앙없는 제사나 드리는 제단을 혐오하고 거부하신다

(시 89: 38-4이. 적에게 파괴될 수밖에 없는 성전도 포기하셨다(겔

24: 21). 그 바람에 원수들은 제멋대로 성전에 난업해서 큰소리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소란을 피우게 되었다. 그 꼴이 마치 절기

때 축제로 떠들썩하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 아

닐수없다.
성소는 법궤가 있는 곳이다. 그콧에 이방인들이 난입하여 소란

을 피울 때, 하나님께서 그곳을 내버리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문의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라는 말은 그 원문의 뭇에 있어서

그 성소를 폐쇄한다는 뭇이기도 하다. 그것은 너무나 역겨워 내버

리시는 것이다. 그것은 문법상으로는 피앨형식으로 강조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제단이 고약한 냉새 때문에 역겨워진 것 이상으


2: 8 / 159

로, 자기의 성전이 싫어져서 내버리셨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

님께서는 성전을 버리시고, 제단을 헐어버리시고, 법궤까지도 포

기하신 것이다. 이 일은 무서운 심판이다. 이제까지 그토록 귀하


고 신성하던 성전과 제단과 법궤가 범죄한 이스라엘에 의해 더러워

진 것에 비하면, 이방인의 군대가 성전과 제단을 유린하는 것은 그

다지 심각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단지 신실한 신앙인에게만 슬

프고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념에게


버렴받는 일이 없도록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댐혜트
여호와께서 처녀 시옹의 성을

헐기로결심하시고

줄을띠고훼파햄l 서

손을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회가함께 죄하였도다

매 주석

성을 헐기로의 “헐기로”는 히브리어로 ‘하셰히트’인데, 그 어간

‘샤하트’(황폐케 하다)의 히펼 • 부정사 • 연계형이다. 예레미야서에


는 “멸하며”로 번역되어 있다(렘 36 : 29 ; 51 : 20). 이 말 앞에 ‘
위해’라는 뭇의 전치사 ‘레’가 붙어 있다. 철심하시고 곧 ‘하샤브’는

본래 ‘생각하다’ 또는 ‘계획하다’라는 의미이지만, 주어가 하나님일

경우, ‘결심하셨다’라는 돗이 된다.


160 / 예레미야애가

둘째 행의 줄율 띠고라는 말은 측량줄을 펼친다는 말인데, 건물

을 지을 때만이 아니라 힐 때도 사용되었다(왕하 21 : 13 ; 사 34:

11) • 훼파함에셔 손융 거두지 아니하사는 삼켜버리는 듯한 파괴의 주


권적 행위를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셋째 행에서 생과 학은 요새와 성벽이다. 홍곡하게 하셨으매 곧

‘와야아멜’은 그 어간 ‘아밸’(통곡케 하다 또는 탄식케 하다)의 히필 •

3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의 ‘와우’-계속법이다. 여기서는 “성과


곽”이 의인화되어 통곡하고 있다. 저회가는 “성과 곽”을 가리킨다.

함쩨 쇠하였도다의 “함께”는 ‘야흐다우’인데, 연합을 의미하며, ‘쇠


하였도다’는 심히 쇠약해져서 기운이 빠져 버린 것을 말하는데, 요

새와 성벽이 방호의 기능을 상설함을 뭇한다.

매 신학적 메시지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라는 표현에서 심지어 무생물까

지도 통곡할 정도로 예루살렘에 임한 파괴가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인류의 멸망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사역에 앞

서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통곡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

나 새로운 시대의 현실에 대해 사람들이 무감각할 경우, 예루살렘

성벽의 돌들이 기어코 구원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을 소리 높이 와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돌들은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에 무


고하게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활유법으로 나타낸다. 지도자들은 그

이전에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둘러썼던 성벽과 같은

존재로 묘사될 수도 있다. 즉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채와 성벽이 파

괴된 것과 같이 지도자의 보호기능도 무너졌다. 그들이 순전히 하


나님만을 의지하고 , 백성을 자기희생적으로 보호하고 보살피려는

의지가 결핍했기 때문이다. 성곽과 성문의 파괴는 한 나라의 최후

의 멸망을상정한다.
2: 9 / 161

하나님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은 더 이상

의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뭇한다.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과

계획에서 이루어진 이 행위 앞에, 사람들에게는 오직 철저한 굴복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결심은 변할 수 있겠으

나, 하나님의 생각과 결심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그대로 이루시기 위해 ‘손을 거두지 아니’하셨다는 것

은 인간이 마땅히 시인해야 할 현실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일이 실

제로 일어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

상에 보내셔서, ‘그의 손을 거두시고’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고난을 인류 대신 몸소 겪게 하신 사실이다. 이제 ‘성과 곽


으로 통곡’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이 최악의

습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자연을 따괴하며 공혜를 일삼고 있으

니 아직도 ‘성과 곽’의 통곡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댐헤트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방백들이율법없는
열방가운데 있으며

그션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매 주석

묻혀며 의 원문은 ‘타베우’인데 , ‘타바아’의 칼 • 3인청 • 복수 • 완


16 2 1 예레미야애가

료형으로서 형태가 드러나지 않게 가라앉아 있다는 뭇이다. 꺾여

훼파되고 는 ‘이바드’(파괴했다) 및 ‘쉬바르 ’ (훼파했다)와 같이 각기

피옐 • 3 인청 • 단수 • 남성 • 완료형으로 서로 동의어가 되는 동사를


중복시켰는데, 이 첫째 행의 전후 두 소절을 살펴보면, 첫 소절이

3강음구이고, 둘째 소절도 5강음구로서 3+3으로 되어 있다. 그래

서 여기의 ‘이바드’ 및 ‘쉬바르’는 둘 중 하나를 생략해야만 ‘키나’

운융에 맞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의 주어는 물론 야훼 하나님이시


다. 벗장은 원문으로는 ‘그녀의 빗장’이라는 뭇인데, 01 는 예루살렘

의 빗장을 가리키며, 따라서 그 도시의 성문의 빗장을 하나님께서

훼파하셨다는 말이다. 성문과 빗장은 백성들의 안전과 평안을 상


징하는 것이다(램 51: 30-32).

둘째 행은 우리말 성경에 의하면, 왕과 방백들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에 끌려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영어성경 (RSV 및 K]V)

은 두 문장으로 구분하여, 왕과 방백들이 열방에 끌려가 있으며,

그 결과로 유다 땅에는 율법(제사장을 통한 교훈)이 다시 없게 되었

다는 내용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에 오는 “여호와의 묵시

를 받지 못하는도다”와 대구가 된다는 점에서, 영어성경의 번역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의 율법 은 융법서라기보다는 그

백성들의 생활과 행동을 지도하는 원리와 종교적 교훈을 말한다.

셋째 행의 첫머리에는 ‘또한 ’이라는 돗을 갖는 ‘감’이란 낱말이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는 시언이 예언자

들까지도 야훼로부터 환상이나 비전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에


놓여 있다고 탄식한다. 이러한 현실은 모든 것이 끊어진 암흑시대

인 것이다. 이제는 그곳에 남은 백성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도


없고, 예언자를 통한 예언이나 묵시도 없는, 은혜를 상실한 백성

으로전락해버렸다.

매 신학적 메시지
2 : 10 / 163

앞절에 이어 시인은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파괴를 증언하고 있


다. 성문이 무너져 내리고 빗장이 꺾여 땅에 매몰되니, 적군이 제

멋대로 첨업해서 그 도시를 마음대로 유련하고 있다. 왕과 방백들


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꿀려갔다. 이제는 융법이 소용없고 예

언도, 계시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본 ‘테드’ 연은 정치적 파멸과 함께 종교적 파멸을 보

여준다. 예루살렘의 성문은 밤에는 닫고 낮에는 여는 것이 일상의


일이었다(사 60 : 11). 이러한 성문은 유다 나라의 .국방과 안보를

상정했다. 그런데 그러한 성문이 땅에 매몰되었다는 것은 그 나라


의 완전한 멸망을 뭇했다. 율법은 본래 성전에서 제사장을 통해서
가르쳐지고 있었으나, 성전의 파괴와 제사장들의 흩어짐으로 말미

암아 다시는 율법이 시행될 수 없게 되었다. 예언자들도 타락하여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하거나 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할 수 없게


되었다. 환난에 환난이 겹쳐지니 사람들이 예언자에게서 묵시를
들을 수 없었고, 제사장에게서 융법을 배울 수도 없었다(첼 7:

26-27) • 그리하여 하나념 없는 완전한 암흑세계와 같은 상태에서

사람들은 한편에서는 한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통곡할 수밖에 없

었다.

뎌띠요드
처녀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잠잠하고

티끌을머리에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처녀들은
164/ 예레미야애가

머리를땅에 축였도다

m 주석

땅에 앉아 곧 ‘예셰부 라아레츠’는 그들이 “땅에 (아레츠) 주저앉았

다(야사브)"라는 말이다. 장장하고 곧 ‘이데무’는 그들이 ‘말문이 막


혔다’(다맘)는 말이다. ‘예셰부’와 ‘이데무’는 각기 칼 • 3 인청 • 복
수 • 미완료형으로 그 행위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이데무’의 어간
‘다맘’은 어떤 엄청난 사건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사 23 : 2). 또는 하나

님의 구원을 바라고 야훼 앞에서 침묵을 지킬 때도 사용된다(애

3 : 28). 장로들 곧 ‘제케님’은 본래 백성들을 지혜의 말씀으로 지도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인데, 여기서는 도저히 그런 역할을 감당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행은 큰 불행을 당했을 때 사람들이 큰 슬픔을 표현하는 양

식을 보여준다. 무륨쓰고 곧 히브리어로 ‘헤엘루’는 그 어간 ‘알라’

(던져올리다)의 히필 • 3인칭 • 복수 • 완료형이다. 이 말은 티플 곧

‘먼지를 머리에 덮어쓴다’는 뭇이다. 굵은 베훌 허리에 툴혔옴이여 는


우리나라의 상주들의 행색과 비 슷한 애도의 표현이다. 티꿀을 머

리에 무릅쓰는 일과 베를 허리에 감는 일 모두가 큰 슬픔을 표현하


는 태도를 보여준다(용 2 : 12 ; 사 15 : 3).

셋째 행에는 특별히 처녀들 곧 ‘베툴라’가 언급되어 있다. 회희낙

락하고 쾌활한 것이 처녀들의 특정인데, 그들이 머리를 땅에 숙였


다는 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상황묘사다. 앞부분에서 장로들을 언

급하고 여기에서 처녀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 사회의 각계각

층을 망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의 “처녀들”은 예루살렘을

처녀로 인격화한 것과는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결혼 전의 부모 슬


하에 있으면서 인생의 꽃다운 시절을 누리는 계충을 말한다. 이들
2 : 10 / 165

은 본래 머리 단장에 정성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숙여

땅에 갖다대고 있었다는 것은 큰 슬픔에 빠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본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 도시 안의 백성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

는지를 여실히 묘사하고 있다. 백성들을 다스리던 왕과 방백들은


바멜론으로 꿀려갔고, 율법을 가르쳐야 할 제사장과 하나님의 말
씀과 묵시를 전해야 할 예언자들은 모두가 그 기능이 마비되어 폐

물과 같이 되었고, 인생살이의 지혜로 상담자가 되어야 할 장로들

마저도 얼이 빠져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모두가 슬픔에 잠겨 “땅

에 앉아 잠잠하고” 있는 터에,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들이 노래를


앓고 절망과 슬픔 가운데 “머리를 땅에 축였도다”라고 묘사했다.
용의 친구들이 용과 함께 “철일칠야를 땅에 앉았다"(용 2 : 8 , 13) 는

사정도 그와 유사한 경우일 것이다.


이와 같이 무고한 자녀들의 곤경이 시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

았다. 집안의 어른들이나 마을의 장로들은 한결같이 속수무책이

다. 남녀노소는 물론 형소에 쾌활하던 처녀들까지도 슬픔과 고뇌

에 잠겨 침묵하고 있다. 시온에 엄한 환난은 한정이 없었다. 이러


한 사태를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다고 한다면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녹 13: 1-5).

늙은이와 처녀들을 함께 언급한 것은, 백성의 양 끝을 차지하는

두 계층이 애도하는 일에 동참함으로써(메리즘의 표현법) , 백성 전

체가 유다 나라 멸망을 슬퍼하는 국가적 행사에 참여한 사실을 나

타내기 위해서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그 당시 유포되었던 처녀신

의 애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신화의 영향도 있었으리라는 주장도 있

다. 그리고 땅에 앉아 애도하는 전통적 태도(창 37: 34 : 삼하 13:


166 / 예레미야애가

31 ;수 7: 6; 용 2:12-13; 겔 26: 16 ;느 9: 1) 는 자기비하의 표현으


로서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행위이기도 했다. 땅은 가장 낮은 처지

를 상징하며, 흙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표지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로들이 머리에 티꿀을 무릅쓰고 땅바닥에 앉아 일정기

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일종의 애도행위의 관습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온 국민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직접적인 원인은 특히 종

교지도자들의 실패와 잘못이었다. 예언자들은 거짓 환상과 거짓


신탁을 제시할 뿐,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을 능력이 고갈되어

있었고, 장로들은 권위가 땅에 떨어져 아무런 위로나 훈계도 줄 수

없었다. 그들은 고작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땅에 앉아 침묵할

따름이었다.
하나님의 미래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침묵

만 지키는 종교지도자는 오늘날에도 많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하고 거짓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지도자는 더욱

많다(뻗전 4 : 17).

2) 위로하는 사람 없는 시온 (2 : 11-16)

m 개요

예루살렘의 참화로 말미암아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찾다가 어머

니 품에서 숨져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시인은, 애절한 노래로 참

을 수 없는 단장의 슬픔을 토로한다 : “예루살렘아, 너에 관해 무엇

이라고 증언하며, 무엇에 비유하여 네 고통을 묘사하랴. 시온아,

너를 무엇에 견주어 위로하랴. 네 상처가 바다처럼 광막한데 누가

너를 낫게 할 수 있겠느냐? " 그는 고통당하는 동포들을 위로할 길


2 : 11 / 167

이 없음을 슬퍼할 따름이다. 실상 거짓되고 허황된 예언만 일삼던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시온의 멸망을 기뻐하며 조롱하는 원수들의 수모는 더욱 견딜 수

없는 원통한 일이었다. 그러한 모욕을 받고도 대답할 말이 없게 된

시인의 처지는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며카프
내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창자가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매 주석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에서 “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데마오

트’로 여성 복수형이다. 그리고 그 앞에 ‘바’라는 전치사가 붙어서

‘많은 눈물을 흘림으로써’라는 뭇이 된 것이다. “상하며”는 히브리

어로 ‘칼루’ 즉 ‘칼라’의 칼 • 3 인청 • 복수 • 완료형이다. 그 말의 뭇


은 ‘소진되었다’, ‘끝장01 났다’, ‘다 써버렸다’라는 것이다. 그러므

로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는 “그 많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내


눈이 진물러 버렸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내 눈의 눈물이 바닥
이 나서 눈으로서 쓸모가 없게 쇠퇴해버렸다”는 말이다. 내 창자
곧 ‘메아이’는 내 오장육부 또는 ‘나의 내장’이란 뭇이면서, 히브리

적 사고로는 ‘마음’ 또는 ‘영혼’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끓으며 는 원


168 / 예레미야얘가

문으로 ‘호마르메루’인데, 그 어간인 ‘하메르’(끓는다)의 끝음절을

반복하는 페알랄. 3 인칭 ·복수· 완료형의 변화를 통해 강조하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는 의미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내 마음이


심히 안타까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라는 말이다.
둘째 행에 있어서 간 곧 ‘케베드’는 첫째 행의 “창자”와 마찬가지

로 히브리적 관용에서는 감정이 자리잡는 콧으로 간주되었다(시

62 : 8). ‘케베드’는 ‘영광’ 또는 ‘무겁다’는 돗도 있다(시 7 : 5). 쏟아


졌으니는 ‘샤파크’(쏟다)의 니팔 • 3 인청 • 남성 • 단수 • 완료형으로서

원문에는 ‘니셰파크’로 되어 있다. 이 말은 마음을 전혀 가다듬을


수 없을 만큼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뭇이다. 그 까닭은 내 백생
이 패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꽤망”이 원문에서는 히브리어 ‘셰
베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분쇄’라는 뭇이다. 즉 시인이 속한 유
다 백성이 파멸했기 때문에 슬픔으로 폼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셋째 행은 어린 자녀 와 젖먹는 아이들 이 죽어가고 있는 딱한 사정

을 노래로 움고 있다. 생옵 킬거리 는 예루살렘 도성의 넓은 광장

곧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암 5 : 16) 를 가리키는 것이다. 혼미합은


원문으로 ‘아태프’인데, 몹시 쇠약해지다 못해 죽어가는 상태를 나
타내는 데 사용된 말이다. 실상 예루살렘 도시는 장기간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기근으로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그려 보여

준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본 연은 예루살렘 패망의 날에 어린이들이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한 시인이 토로한 애끓는 비탄의 노래의 한마당이다.


“내 눈이 ... 내 창자가… 내 간이"라는 용어는 그 당시 그 지역에

서 극심한 고뇌를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그는 자기


2 : 12/169

동족들의 고통의 현장을 눈으로 목도했던 대로 일일이 묘사하며 비

가를옮었다.

그는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성융과 더불어 비틀거리며,

어린 자녀들과 젖먹는 아이들이 굶주렴과 질병으로 숨져자는 것을


보고 있다(사 51 : 2 이. 그들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헐떡거리는 숨소

리와 함께 우리 귀에 들리는 것같이 느껴진다. 이것은 그 어떤 비


극보다도 훨씬 더 큰 괴로움을 부모들에게 안겨주어서, 마침내 자

기들의 죄로 말미암은 엄청난 사태에 대한 죄책감을 뼈저리게 느끼

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뎌낄라멧
저회가성읍길거리에서
상한자처럽 혼미하여

그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매 주석

12절 ‘라멧’ 연윤 앞의 연속으로서, 어머니 품의 어린이들이 주

어로 언급되어 있다. 이 연의 세 행은 우리말 성경과 히브리 원전

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 있다. 히브리 원전에서는 첫째 행은 아이들

이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조르는 내용이다. 그리고 둘째 행은 그들


이 걸거리에서 전쟁 부상자처럼 빈사상태에 처한 내용이며, 셋째

행은 그들이 어머니 품에 안겨서 숨을 거둔다는 딱한 상황을 말하


170 / 예레미야애가

고있다.

우리는 현의상 우리말 성경의 순서에 따라 주석할 것이다. 생융

킬거리에서 곧 ‘비레호보트 이르’는 이미 앞절의 셋째 행의 주석에

서 언급된 대로, 시내의 네거리와 같은 넓은 광장을 말한다. 상한

자 곧 ‘할랄’은 남성 • 단수 • 영사로서 전쟁의 부상자와 같이 창에

찔려 결정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을 뭇한다. 혼미하여 는 그 원문

‘베히트아트맘’이 ‘베’( ... 하는 가운데)라는 전치사 뒤에 어간 ‘아타

프’의 헛파엘 • 3 인칭 • 남성 • 복수 • 연계형 부정사가 붙은 말이므


로, ‘그들이 스스로 실신상태에 있는 가운데’라는 뭇이다.
둘째 행의 혼이 떠날 빼에 는 직역하면 “그들의 흔(나프상)을 스스

로 쏟아내고 있을 때에”로 옮길 수 있다. “흔”은 곧 생명을 뭇하므


로, 둘째 행 전체의 내용은 그 아이들이 어머니 풍에서 스스로 숨

을 거두는 동안에 일어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행은 어린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음식을 찾았다고 말하는 내


용이다. 이르기률은 원문으로 ‘요메루’인데, 그 어간 ‘아마르’의

칼 • 3인칭 • 복수 • 미완료형이므로 과거 사건의 계속성을 나타낸

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어머니에게 먹을 것이 어디 있느냐고 계속

조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JB) 은 본문

을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빵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졸라댔


다~ (They kept saying to their mothers , “ Where 잉 the bread ?") 라 고 번 역

한다. 곡식과 포도주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의 대명사로 쓰인 것이다

(삼하 16 : 2).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에서는 무고한 어린이들에게 닥쳐온 기근의 실상을 한층 더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식이라고는 도시 어디에도 바닥이

나 있었는데, 굶어 죽어가는 자녀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다가


2:13 / 171

그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는 애절한

광경이다. 그 사회의 지도자들과 부모들의 잘못이 죄없는 어린이

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 어린이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죽어가면서 “곡식과 포도주가 어

디 있나요? "라고 말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곡식’이란 말

은 먹을 양식 곧 ‘떡’을 의미한다. 어린아이들이 죽어가면서 떡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극한적인 비극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어
린아이가 어떻게 포도주를 찾았을까? Ir예루살렘 영어성경 .n OB) 은
이 ‘포도주’라는 말은 생략하고 ‘떡’으로만 번역했다. 그러나 ‘포도

주’라는 말은 실질적인 물품의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인 음료를 가


리킨다. 흔히 주린 자에게는 떡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포도주

를 마시게 한다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기도 했다. 따라서 ‘떡과 포


도주’는 우리나라의 ‘밥과 국’에 해당되는 말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버리신 예루살렘 도시에서는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들조차도 아이들의 생명에 필요한 음식을 줄 수 없었

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념의 돗을 거역하고,

교회 분열과 교권주의와 물량주의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않는다

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에 굶주려 의미없는 삶을 살다가 죽어


간다고 해도, 생명에 펼요한 영의 양식을 그들에게 줄 수 없을 것

이다.

뎌희맴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172 /예레미야애가

너의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니

누가너를고철소냐

매 주석

처녀 예루살햄이여 라는 구절이 원문에는 “예루살렘의 그 딸이여”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정관사가 불어 있으므로 ‘하나밖에 없는

너 예루살렘의 딸아’라는 살플한 감정을 나타낸다. 내가 무엇으로

네게 중거하며 곧 ‘마-아이데크’의 ‘아이데크’는 어간 ‘우드’(되풀이

말하다, 타이르다)의 칼 • 1 인청 • 단수 • 미완료형 +2 인칭 접미로서,


‘마’(무엇)를 앞에 붙였을 때 “내가 무어라고 네게 슬픔을 달래줄
수 있을까”라는 말이다. 여러 가지 영어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 “내가 너를 위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What
can 1 say for you? , RSV) , “내가 너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 "

(How can 1 describe you? , JB) • “내가 너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 "

(Can 1 cheer you? , NEB) , “내가 너에게 어떻게 충고할 수 있겠느

냐 ? " (How shall 1 때


a dmonis

문은 이 모든 뭇을 함축하고 있다. 무엇으로 예게 바유합꼬 곧 ‘마

아담메-라크’에서 ‘아담메’는 그 어간 ‘다마’(같아지다)의 피옐 • 1

인청 • 단수 • 미완료형으로 ‘내가 비유할 것이다’라는 뭇이다. 따라


서 전체적으로 ‘내가 네게 견주어서 무엇으로 비교대상을 지시할
수 있을까’라는 뭇이다.
둘째 행은 거의 첫째 행의 되풀이인 셈이다. 쳐녀 시용이여 라고

한 우리말 성경과는 달리, 히브리 원전에는 “처녀 시온의 딸이여”

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예루살렘의 주민을 가리킨다. 내가 무엇

으로 배게 비교하여는 원문에 ‘마 아셰웨-라크’라는 말로 쓰였는데,

‘아셰웨’의 어간 ‘샤와’는 ‘비슷하다’라는 뭇이다. 그리하여 “내가

너를 무엇과 같다고 할 것인가?"라는 말로 쓰였다. 너훌 위로합꼬


2:13/173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나하메크’인데, 이 말은 어간 ‘나함’(위

로하다)의 피옐 • 1 인청 • 단수 • 미완료형이므로, 그 앞에 나오는


‘마’(무엇)와 함께 사용해서 “내가 너를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

까? "라는 말이 되었다.
원문의 셋째 행의 맨 앞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전치사 ‘키’가 있
다. 앞의 행에서 시인이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을 무슨 말
로도 달래줄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여기에서 그 까닭을 말하고 있

다. 곧 그들의 상처의 크기가 바다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


의 따괴됩 곧 ‘쉬베레크’는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말한다. 누가 너훌

고철소냐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은 ‘미 이레파-라크’다. ‘이레파’

는 그 어간 ‘라파’(고치다)의 칼 • 3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인
데, ‘미’(누가)가 앞에 붙고, ‘라크’(너를 위해)가 뒤에 옴으로써,

“누가 너(예루살렘)를 원상대로 회복시켜 줄 것인가? " 곧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너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 되었다.

매 신학적 메시지

남을 위로할 때 혼히 그 사람의 불행과 유사한 경우를 들어가며

이야기해주변, 어느 정도 그의 슬픔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

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비슷한 파괴를 당한 도성에 역사상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발생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당한

재난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기 때문에 그 유례를 달리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애가 시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파괴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또한

비교할 펼요도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 파괴의 상처가 바다같이


크니, 어느 누가 치유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는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 파괴의 주체가 하


174 1 예레미야애가

나님이라면, 오직 그 하나님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으며 구원도

가능한 것이다.

디띄눈
네 선지지굉룰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고로

네 죄악을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회가거짓 경고와

미혹케할것만보았도다

매 주석

네 션지자들 곧 ‘네비아이크’는 물론 거짓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헛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웨’(헛된 것)는 남성 • 단수명사다.

이 헛된 것은 거짓된 것 이며, 텅 빈 것이다. 거짓 예언자가 말하는

헛된 것은 명안이 없는 데도 평안이 있다고 해서 백성들에게 거짓

소망을 갖게 한다. 어리석은 묵시 는 원문에 ‘타펠’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설익은 것’ 또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뭇이다. 따라서 허무맹


랑한 예언이란 말이다. 보았으므로 는 히브리어로 ‘하주’인데, 그 어

간 ‘하자’의 칼 • 3 언청 • 복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묵시나 환상을

보았다’라는 말이다.

둘째 행은 그들이 포로로 꿀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이 마

땅히 그 백성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

적인 안전으로 그들을 만족케 함으로써 재앙을 초래했다는 내용이

다. 드러내어 곧 ‘길루’는 그 어간 ‘갈라’(벌거벗다)의 피옐 • 3 인


2: 14 / 175

청 • 복수 • 완료형 이다. 이 말은 ‘감춘 것을 그들이 폭로시 킨다’라


는 뭇이다. 에 사로잡힌 것 곧 ‘셰브테크’는 여성 • 단수 • 명사인 ‘셰
브트’(포로상태)에 2 인칭 접미어가 붙은 것이다. “돌이키다”는 원
문에 ‘레하쉬브’(되몰려 보내지기 위하여)가 쓰였는데, 여기서는 ‘되
돌려 보내지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 곧 최악을 드러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셋째 행에서 경고는 원문에서 ‘신탁’이란 뭇의 ‘마스오트’가 쓰였

다. 이 말은 그 어간 ‘나사’(들어올리다)에서 명사로 파생된 ‘마사’


의 복수형인데, ‘소리 높여 선포하는 말씀’ 또는 ‘선포하기에 부담
이 되는 말씀’이란 돗이다. 아마도 우리말 성경에 “경고”라고 번역
된 것은 후자의 뭇을 살리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런데 이 “경고”
는 그 뒤에 오는 ‘샤웨’(헛된 것)란 말 때문에 ‘거짓 경고’로 번역되
었다. 미혹케 활 것 은 히브리어로 ‘마두힘’인데, 남성 • 복수 • 명사
로서 ‘잘못 인도하는 것’이란 뭇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이 연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있어서 거짓 예언자들의 책임

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준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뭇을 알아낸 것처럼 가장하고, 어마어마한 환상을 본 것처럼 가장

하면서, 거짓 묵시로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다(겔 13 : 1 이. 그들은 ‘죄’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복’

에 대해 말하기를 더 좋아했고, ‘회개’와 ‘심판’을 선언하기보다 ‘평


강’을 선포하기를 더 좋아했다(램 8 : 11). 결국 죄의 문제가 해결되

지 않고서는 참된 복이 있을 수 없으며, 회개가 선행되지 않는 형

안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때의 예언자들은 우선 회중들의 마

음에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거짓된


위로와 형강을 벌어주기에 급급했다.
176/ 예레미야애가

사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죄를 지적해주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회의 전반적인 풍조가 불건전하고 부패해


있을 때에는, 그런 일을 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
언자의 역할이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법도가 요구하는 올

바른 기준을 제시하고, 거기에 어긋나는 죄악들을 낱낱이 지적해

주는 일이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셨고, 예언자들은

이런 엄박한 재난을 알려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해야만 했던 것

이다. 그런데도 그 당시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에 원수들의 손에 넘겨져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유를 얻지 못할

처지가되고 말았다.

이런 일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 사

역자들과 심지어 일반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오늘의 신앙인


들도 백성들의 최악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야 한다.

이때 조심해야 할 일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남을 정죄하는 마

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다. 남의 찰못을 지적하는 사람 자신

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연약하고 허물투성이의 인간에 불

과하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서, 먼저 스스로의 마음과 행실을 깨끗


이 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뎌희,싸멕

무릇지나가는자는다
너를향하여 박장하며

처녀 예루살렘을향하여

비소하고머리를흔들며
2 : 15/177

말하기를 온전한 영팡이라, 천하의 회락이라


일걷던 성이 이성이냐 하며

매 주석

첫째 행은 지나가는 나그네들도 예루살렘의 폐허를 보고 동정하

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는 내용이다. 박장하며는 원문에 ‘싸페

쿠 카파엄’이 쓰였다. ‘싸페쿠’는 ‘싸파크’(때리다)의 칼 • 3 인청 • 복

수 • 완료형 이며 , ‘카파임 ’은 ‘카프’(손바닥)의 복수형 명사다. 따라

서 두 단어가 합쳐져서 “그들이 손빽을 치며 통쾌해했다”는 말이


되었다.

둘째 행의 벼소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레쿠’는 어간 ‘샤라


크’(혀를 차다)의 칼 • 3인청 • 복수 • 완료형이다. 이 말은 ‘윗’하는
소리를 내어 남의 주의를 끄는 경우에 사용되는데, 주로 남을 비웃

을 때 사용된다(램 19: 8 ; 겔 27 : 36). 머리률 혼들며 도 역시 비웃음

을 표현한다(왕하 19: 21).

셋째 행은 보통의 ‘키나’ 운율보다 길어졌다. 어떤 학자 (Haller)

는 운율상의 이유로 ‘하이르 셰요메루’(일걷던 성)를 생략하면, 4


+2의 ‘키나’ 운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학자는 그대신 시

온을 수식하는 말 중에서 ‘마소슈 레콜-하아레츠’(천하의 희락)를

생략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예루살렘은 영광의


도성 또는 천하의 회락의 도성이라고 주변의 많은 족속들에게 불렸
기 때문에 여기에서 함께 언급된 것 같다(시 48 : 2). 온천한 영광

즉 ‘켈렬라트 요피’의 ‘캘릴라트’는 ‘완전성’이란 뭇을 지난 여성 명

사의 연계 형으로서 ‘요피 ’(아름다움, 영광)와 함께 ‘아름다움의 완

전’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의 극치’ 또는

‘영광의 극치’란 뭇이다. ‘마소슈’는 ‘기쁨 또는 환회’란 뭇야며, ‘레

콜-하아레츠’는 ‘온 땅에게’ (to all the earth) 란 뭇이다.


178 / 예레미야애가

매 신학적 메시지

그 화려했던 도성,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이제 지나

가는 모든 나그네들의 조소거리가 되고 말았다. 예루살렘의 주민

들이 예전에 얼마나 거만하고 독선적이며 부도덕했으면, 주변 나


라에 사는 백성들에게 그토록 미움을 사게 되었던 것일까? 하나님
에게 범죄한 백성이었으므로 이웃에게도 악독한 행동을 자행했으

리라고 짐작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도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고 동정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비웃고 손빽치며 통쾌해하는 것


이었다.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자랑하던 성이 고작

이 꼴이 되 었단 말인가” 하며 경 멸해 마지 않았다.
사실, 모질고 부도덕하면서도 호화찬란한 생활을 하던 사람얼수

록 그가 몰락하게 되면 그에 대한 조소와 멸시가 더욱 큰 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섬기며 하나님과

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의 신앙공동체가 온전한 아름다움


과 온 지상의 기쁨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며, 결코 몰락해서 이웃

의 조소와 멸시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디희회1
너의 모든원수는
너를향하여 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저를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2:16 / 179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매 주석

위의 첫째 행에서 입올 벌리며 라는 말은 크게 멸시해서 비웃는

행위를 가리킨다(시 35 : 21 ; 용 16: 1 이. 둘째 행의 비소하고 곧 ‘샤

레쿠’는 앞에서 이미 검토한 바와 같이 조소하는 ‘윗’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이를 갈며는 그 원문 ‘와이야하레쿠-웬’이 어간 ‘하라
크’(이를 갈다)의 칼 • 3 인칭 • 남성 • 복수 • 미완료 ‘와우’-계속법에
다 ‘웬 (0 1. 치아)이 합해져서 복수의 감정이나 적대감정을 나타내

는 말로 쓰인다(시 37: 12). 우리가 삼켰도다 곧 ‘빌라에누’는 그 어

간 ‘발라야’의 피옐 • 1 인청 ·복수· 완료형으로서, “우리가 멸망시

켰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피옐형이므로 강조된 표현이다.


셋째 행에 있어서 우리가 바라던 은 “날”을 선행사로 한 관계대명
사구로서, 그 어간은 ‘카와’(기대하다, 예상하다)이며 피옐형이다.
그 뒤에 오는 과연 이 날이라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아, 바

로 이 날이다”로서, “과연”에 해당되는 ‘아크’(아켄의 단축형)라는

응정척 분사가 앞에 붙어 있다. 얻기도 하고는 ‘우리가 획득했고’라

는 말이다. 그리고 보기도 하였다는 구절은 확실한 숭리를 체험했

다는 돗이다. 영어성경 (RSV) 은 “이제 우리가 그것을 얻었고, 그것

을 보았다 .. (now we have it , we see it) 라고 옮겼고, 또 다른 영 어 성 경

OB) 은 “이제 우리는 그것을 만지게 되었고, 그것을 보게 되었다”


(now we can touch it , see it) 라고 옮겼다.

매 신학적 메시지

앞의 연에서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조소를 말했으나, 여기서는

직접적인 원수들의 조소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예


180 / 예레미야애가

루살렘을 점령하게 된 것은 결코 그들의 정당성 때문이 아니었으

며, 오히려 유다와 그 도성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범죄한 데서 그들

이 얻은 결과였다. 그런데도 원수들은 자기네들의 불의한 숭리에

도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슬픈 운영을

보고 기뻐하는 원수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로,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공공연하게 비소했다. 그들

은 척의 에 가득 차서 이를 갈며 예루살렘 점령을 정당화했다. 그리

고는 그들의 이러한 승리의 날을 고대하던 끝에 마침내 뭇을 이루

었다고 하며 당연한 일로 여겼다.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


이처럼 미워하는 마음이 컸다면, 그들이 포로로 잡아간 이 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가혹하게 학대했을지 짐작이 간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수모와 멸시를 당해야 하고 학

대와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역대기

의 기록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

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서 이르셨으나, 그 백성

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고"(대하 36: 15-16) 예

언자들을 배척한 것이다. 이것이 곧 원수들의 비웃음과 멸시 를 당


· 해야 할 원인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만이라도 그들의 재난의 원언

을 바로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의 응훌과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

기를 바라는 심정을 피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


서 계약백성을 위로할 자는 이 세상에 하나닝 외에는 아무도 없다

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다.

(3) 주님께 소망을 둔 시인의 기도 (2 : 17-22)


개요 / 181

매 개요

세계 제 2차 대전 말, 일본 히로시마의 참담한 폐허 앞에 섰던 살

아 남은 일본 국민들은 자책하며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


기네 군국주의 침략 야욕의 결과가 이런 모양임을 인식하고, 명화

지향적인 국민이 되기로 결의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는 하나님 앞에서의 반성과 회개와 사최의 기도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적인 의미의 대통아공영권의 꿈과 팔광일우의 이상은


포기했을지 몰라도, 또 다른 의미의 경제척 • 물량주의적 세계지배

의 꿈은 아직 버리지 못했을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진정한 의미의 반성과 회개는 인간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철저

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닝의 주권만이 인간사회를 주장할 수 있도


록, 하나님께 소망을 둔 기도가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신앙 안에서 살아

온 본 애가의 시언이 이 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전폭적인 헌신을 다짐하며 구원을 간구하고 있고, 또한 동족들에

게도 권유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읽을 수 있다. 여기

에서 우리는 진정한 슬픔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와 믿음의 교훈을 얻


을 수 있다. 사람이 자기가 낳은 자녀를 잡아먹어야 할 만큼의 막
다른 골목의 저주(신 28 : 53 ; 레 26 : 29) 아래 처해 있으면서, 하나

님께 간구하는 기도야말로 새로 거듭남으로써 하나념과의 관계를


갱신하는 확실한 길임을 강하게 인상지어 준다.
그래서 시인은 유다의 죄 때문에 시온 천숭과 다윗왕조 전송에

입각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보호의 약속이 무효화되었다는 사실

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유다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비극적 상황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탄식하라고 강한 어조로 권고한다 (17-19절) •

그러자 시온은 곧바로 그대로 따라서 기도하고 있다 (20- 2 2절) • 국


182 / 예레미야애가

가와 성전의 상실, 대량학살과 파괴, 기아로 말미암은 비인륜적이

고도 비극적인 사건들에서 극심한 심적 충격을 받아가면서 탄식과

애도를 주도하는 시인은, 백성들에게 슬픔을 한껏 토로하게 하고

죄책감을 철저하게 표현하게 함으로써, 적절한 소망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뎌긴아인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공훌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m 주석

우리가 이미 서론부분에서 고찰했지만, 16절과 17절의 알파뱃

표기는 순서가 서로 바뀌어 있다. 원래 ‘아인’, ‘페’가 되어야 하는

데, ‘페’, ‘아인’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갱하신 일 곧 ‘아셰르

자맘’은 관계대명사 ‘아셰르’와 ‘자맘’(정하다)이라는 칼 • 3 인칭 • 단

수 • 남성 • 완료형 동사가 결합된 것으로서, 하나념에 의해 ‘계획된


것’ 또는 ‘작정된 것’을 말한다. 명하신 말씀올 다 이루셨음이여 에서
“이루셨다”란 말은 원문에 ‘비차아’(피옐 • 3인청 • 단수 • 남성 • 완료
형)가 쓰였는데, ‘그가 성취했다’ 또는 ‘그가 실천했다’라는 뭇을

지닌다. 본래 이 말은 그 어간 ‘바차아’(잘라내다 / cur off)에서 온

것인데, 강조형인 피옐로 나타냉으로써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담


2 : 17 / 183

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

다’는 이 구절의 돗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이 결코 우연한 사건

。l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성취된 것임을 말한다. 앞서


우리가 살핀 대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자기들이 그

것을 얻었다고 기뻐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신 것

이다.
둘째 행의 공훌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는 부정을 뭇하는 ‘로’와 ‘하

말’(살려주다, 아끼다)의 결합어로서, ‘그가 아끼지 않으셨다’라는

뭇을 내포하고 있다. 훼파하사 곧 ‘하라스’는 ‘그가 헐어버리셨다’

또는 ‘그가 찢어버리셨다’라는 뭇이다. 원수로 너률 언하여 즐거워하

게 하며 는 히브리 원전에서는 셋째 행에 나타나 있는데, 우리말 성

경은 번역상의 이유로 둘째 행에 들어 있다. “즐거워하게 하며”는

원문에 ‘와예삼마흐 ’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와우’-계속법으로서

그 어간 ‘사마흐’(즐거워하다)의 피옐 • 3 인청 • 단수 • 남성 • 미완료
형인데, 이 말속에는 의기양양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한다는 뭇이
깃들여 있다.

셋째 행에서 뿔 곧 ‘케렌’은 흔히 힘의 표상으로 사용되었다(신

33 : 17). 그러므로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라는 말은 대적의 힘을


더하게 해서 기세를 높이게 하셨다는 뭇 이다. 또한 “뿔”은 권위와

영광을 상징하기도 한다(시 75 : 1 이. 그런데 “높이 들리게 하셨도

다”라는 말과 같이 이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원수들은 힘과

권위를 내세워 즐거워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하지만, 유다의 멸


망은 그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하는것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바벨론 침략군은 하나님의 예정없이는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없


184 / 예레미야얘가

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칼에 불과하기 때문이

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당한 그때의 재난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한

일을 행하시려고, 예정했던 말씀의 성취였던 것이다. 분명히 그들


을 버리시고 응훌히 여기지 아니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너의 대

척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


님은 의도적으로 바멜론 군대에게 힘을 주고 의기양양하게 하셨

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 편에 계시는 것은 참으로 괴롭고도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인내로 극복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 하나님께 복

종하는 길이다. 그 까닮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원대하신 인류구원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거

쳐야 할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주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셨다”라고 증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계획에


의한 결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재앙을 계획하셨다”
(램 18 : 11).

둘째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서 정당화된다. 하나닝

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일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그가 옛

날에 범죄하는 백성에게 행하실 것으로 예언자들을 통해서 경고한

말씀을 실행했다. 특히 모세를 통해서 융법을 주실 때에, 그들이

율법을 범하면 어떤 심판이 내려질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는

데, 이제 그들이 그 융법을 어겼기 때문이다(레 26 : 16).

딘희차데
저회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옹의 성곽아

너는밤냥으혹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2: 18/18 ’

스스로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매 주석

시인은 이 ‘차데’ 연과 다음의 ‘코프’ 연에서 고난받은 예루살렘


을 향해서 야훼께 부르짖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

로 호소하고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신령한

비탄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로 전환되므로(고후 7 : 1 이, 먼저 눈


물을 강처럼 흘리라고 권한 다음, 기도로써 그 슬픔을 달래라는 것

이다.
첫째 행을 직역하면 “처녀 시온의 성벽아 하며,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는다”가 된다. 여기의 저희 마융 곧 ‘그들의 마
음’은 누구의 마음일까?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백성들의 마음일

것이다. ‘부르짖음’은 완료형으로 되어 있으나, 시인이 노래할 당

시에 계속되던 행위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 (NIV) 은 현

재 형으로 “그 백 성 의 마음들이 주께 부르짖는다" (The hearts of the


people c까 out to the Lord) 라고 번역했고, 또 다른 영어성경 (RSV) 은
명령형으로 “주께 큰소리로 외쳐라"(Cry aloud to the Lord!) 라고 번역
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아직 회개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않

은, 단지 고통을 참지 못하는 인간적인 부르짖음일 것이라고 칼빈

은 생각했다.
둘째 행에서, 밤낮요로가 원문에서는 ‘낮으로 그리고 밤으로’라고

되어 있다. 낮시간 줄곧 울다가 밤시간에도 이어서 눈물을 흘리라


고 한 것이다. 강처험 에서 “강” 곧 ‘나할’ (nachal) 은 우리나라의 강

과는 다른, 일종의 ‘급류’로서, i영상시에는 물이 말라 있다가도 비


가 쏟아절 때에는 억수같이 흘러념치는 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186 / 예레미야애가

강은 ‘나하르’ (nahar) 라는 말로 구별되어 사용되었다.

셋째 행의 스스로 쉬지 말고의 원문을 직역하면 “너에게 쉽을 제

공하지 말라”가 된다. 여기의 ‘쉽’은 히브리어로 ‘푸가트’(푸가의 소


유격)인데, ‘중단’ 또는 ‘무감각’ (rorpir) 이라는 뭇을 지닌다. 그 어

간 ‘푸그’는 ‘식어지다’, ‘감각이 없어지다’라는 돗을 지니고 있으므

로, 감정이 메마른 상태를 말한다. 네 눈동자는 히브리어로 ‘바트


에네크’인데, 직역하면 “네 눈의 딸”이다. ‘눈의 딸’은 곧 ‘눈동자’
를 말한다(시 17 : 8). 영어성경 (RSV , NIV , JB 등)은 ‘눈동자’ 대신

단순히 ‘눈’이라고 옮겼다. 쉬게 하지 말지어다라는 구절은 앞의 ‘쉽’

과는 다른 말로 나타나 있다. 원문의 ‘알-티돔’의 ‘알’은 ‘말라’라


는 부정을 나타내며, ‘티돔’은 그 어간 ‘다맘’(잠잠하다, 멈추다)의

칼 • 2 인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으로서 ‘알’과 함쳐져서 명령의

뭇으로 사용되었다.

m 신학적 메시지

이 연의 첫째 행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

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에서 그 주어가 누구인지 막연


하기 때문이다. 원문의 ‘립밤’은 ‘레브’(마음)에다가 3 인칭 • 남성 •
복수 접미어가 붙어서 ‘그들의 마음’이란 돗을 나타내며, ‘차아크’

는 ‘부르짖었다’라는 말이므로 여기의 주어를 ‘그들의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부르짖었

다고 하면서, “시온의 성벽아, 눈물을 강처럼 흘려라”라고 말했다

는 것은 팩 불합리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 (R . Gordis) 는 ‘부르짖었

다’의 원문 ‘차아크’를 명령형 ‘체키’(쏟아 부어라)의 오기로 보고,

또한 ‘럽밤’ 대신 ‘럽베크’(네 마음)로 고쳐 얽음으로써, “네 마음을


주를 향해 서 쏟아 부어 라" (Pour our your hearr ro rhe Lord) 로 번 역 해

야 한다고 했다. 그럴 경우, 첫째 행은 “처녀 시온의 성곽아 ! 네


2 : 19 / 187

마음을 주를 향해서 쏟아 부어라”가 될 것이며, 전체적으로는 하나


님께 네 마음속의 생각을 솔직히 고백하고, 밤낮으로 눈물로 호소

하라는 시인의 권면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네 마음을 주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라는 말은 진실

한 기도를 드리라는 뭇이다. 그 백성은 가장 김숙한 생각과 감정의


끈을 풀고 기도해야 한다(시 42 : 4 ; 62 : 8 ; 142 : 2). 그리고 기도하

면서 진정으로 뒤우치는 마음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려야 할 것이

다.

뎌희코프
밤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마음을주의 얼굴앞에
물쏟듯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m주석

이 연(스탠자)은 4행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연의 마지막 행 (우리말 성경의 셋째 행)인 “각 길머리

에서 주려 혼미한”이라는 구절을 예레미야애가 2장 11 , 12절을 참

조한 행 간의 주해 (gloss) 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마땅히 생 략해 야


188/ 예레미야애가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경 OB) 및 어떤 영어성경

(NEB) 은 실제로 이 부분을 생략해서 다른 연과 마찬가지로 3행이

되게 번역했다.
첫째 행의 밤 초정 은 원문으로는 ‘레로슈 아셰무로트’인데, ‘레로

슈’는 ‘첫머리’이며, ‘아셰무로트’는 밤 파수〔흉훌〕란 뭇이다. 그 당

시에는 밤 파수를 하기 위해서 시간을 세 등분해서 ‘삼경’으로 나누


었던 것이다. 첫 야경은 일몰 때부터 지금의 10시경까지, 중간 야

경은 오후 10시경부터 새벽 2시경까지, 마지막 야경은 2시 후부터

해뜨기까지를 말한다. 이 세 부분이 시작될 때마다의 첫머리를 ‘레


로슈’라고 했다. 따라서 “밤 초경”을 정확히 나타내면, 첫 야경의
시작뿐만 아니라, 밤 삼경이 시작될 때마다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영어성경 (NEB) 은 “매 파수의 시작에 "(at the begin-

ning of eveπwatch) 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 번에


걸친 밤 파수가 시작될 때마다 일어나서 기도하라는 뭇이다. 이와
같은 밤 파수는 그들의 유목생활에 있어서 양떼를 지키는 일을 상

교대로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네 교대로 바뀌었는

데, . ‘저물 때’, ‘밤중’, ‘닭울 때 ’, ‘새벽’의 사경으로 되어 있었다

(마 14 : 25 ; 막 13: 35). 일어나 부르짖율지어다는 두 개의 명령형 ‘쿠

미’(얼어나라) , ‘폼니’(부르짖으라)로 이어져 있다. ‘론니’는 큰소리

로 부르짖으라피 할 때 사용된다.
둘째 행의 배 마음율 …물 쏟듯 합지어다 를 직역하면 “네 마음을

물과 같이 쏟으라”가 된다. 이런 표현은 구약성서에 단지 두 번만

나온다. 이곳과 시편 62면 8절이다. 이 말은 ‘네 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토로하라’는 뭇이다. 주의 얼굴 앞에 는 원문으로

‘노카흐 페네 아도나이’다. ‘노카흐’는 ‘마주 대해서 ’라는 전치사이

며, ‘페네’(얼굴)와 ‘아도나이’(주님)가 결합되어 ‘주의 열굴 앞에’라

는 뭇을 나타낸다. 이 둘째 행의 내용은 간콕한 회개의 기도를 드

리라는 권면이다.
2: 19/189

셋째 행은 앞서 말한 대로 생략해도 무방한 구절이다. 이것은 넷


째 행의 수식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 역본인 70인역

헬라어 성경 (LXX) 을 위시해서 다른 고대 역본은 히브리 원전 (MT)

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이 첨가되어 4행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후

에 첨가된 것이라고 해도, 팩 오래 전에 이루어진 때문인 듯하다.


각 킬머리에셔는 원문으로 ‘로슈 콜-후초트’로서, 직역하면 “모든

거리의 초업”이라는 말이다. 즉 많은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장소를

가리킨다. 주려 곧 ‘베라압’은 굶주려 있는 상태를 나타내며, 혼미


한은 원어로 ‘하아투펌’인데, 몹시 쇠약해서 빈사상태에 있음을 나

타내는 말이다.
넷째 행에서, 배 어련 자녀의 생명융 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 그

들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할 때, 부모들이 취할 마음

가짐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주톨 향하여 손융 들지어다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돗이다. 여기의 “손” 곧 ‘카프’는 ‘손바닥’을 말


하는데, 두 손바닥을 위로 높이 올리는 모습은 하나념의 웅답을 기

다리는 기도의 자세를 가리킨다.

매 신학적 메시지

시인은 동족들에게 “밤 초경에 얼어나 부르짖을지어다”라고 호소

했다. 신약의 에베소서 6창 18절, 골로새서 4장 2절의 “깨어 기도

하라”고 권연하는 말을 방불케 한다. 여기의 “밤 초경”이란 말을


원문대로 이해한다면, 밤의 어느 한때를 뭇하는 것이 아니라 ‘밥

상경’(三更) 전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인과 그의 동족이 처해 있

는 현실은 매우 다급한 위기상황이었으므로, 온 밤을 기도해도 모

자랄 지경이었을 것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

어다”라고 한 것과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릴지어다”라


고 한 것에 비추어서 생각할 때, 손을 높이 쳐들고 기도하는 사람
190 / 예레미야애가

들의 모습이 갯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에 근접한

것으로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예수의 기도의 내용과는 다르다. 그들의

기도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범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는 즉각적인 기도이며, 끈질긴 기도여

야 한다. 땅으로부터, 그리고 절망으로부터 일어나서 온밤을 하나

님께 호소해야 한다. 그들은 깨어 있으면서 무릎을 끓고 자비 를 베

풀어 달라고 집요하게 호소해야 한다. 손을 주를 향해서 쳐들고,

마음을 열어 모든 사정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성실하고 진실되

게 기도해야 한다. “이 어린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 어린


자녀의 생명을 살려주십시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 역시 죄에 빠져 죽어가는 형제자매의 생영

을 위해 기도하는 여기의 기도의 모형과 같아야만 할 것이다.

덜피레쉬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

m 주석

첫째 행은 기도의 서두로서, 본래 그들이 계약백성이며 돼함받

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야훼 하나님의 각별한 돌보


2 : 20 / 191

심을 간청하는 내용이다. 감활하소셔가 원문에서는 ‘레에’(보십시오)

와 ‘웨합비타’(그리고 살피십시오)의 두 낱말로 구성되어 있다. ‘합

비타’는 그 어간 ‘나바트’의 허필 • 2 인칭 • 단수 • 명령형으로서 ‘신


중히 살피시오’라는 뭇이다. 즉 하나님께서 ‘꼭 감찰해주소서’라는
강한 애원을 나타낸다. 뒤게 이 같이 행하셨는지 요 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의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임을 확인하는 표현이다. 즉 “그

대상이 바로 우리들인 줄 잘 알고 있나이다”라는 말의 역설적인 표


현이다. ‘행하셨다’ 곧 히브리어로 ‘올랄타’는 그 어간 ‘알랄’(일을
수행하다)의 포옐 • 2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이다. 따라서 ‘당신
이 기어코 실행하셨습니다’라는 뭇이며, 거기에는 단호함이 깃들여

있다.
둘째 행은 어미가 사랑하는 자녀를 잡아먹을 만큼 극도의 굶주령

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묘사했다. 이 구철은 형식상 ‘임 ’( ... 일지 /

wherher) 으로 시작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물론 부정적인 대답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심한 기근으로 아이를 잡아먹은 비참한 일이 예


루살렘 포위 때 (586 B. c.) 실제로 있었다(렘 19 : 9). 여기의 질문

은 현실을 수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럴 수가 있습니까? " 하고

현실의 비극을 탄식하며 호소하는 질문이다. 손에 받든 아이 는 번역


상 어려움이 있다. 원문에는 ‘올를레 티푸힘’으로 되어 있는데, 이

는 ‘올를레’와 ‘티푸힘’이라는 두 낱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올


를레’는 남성 복수명사의 연계형으로서 ‘ ... 의 아이들’이란 뭇이며,

‘티푸힘’은 ‘타파흐’(두 손바닥 위에 받들다, 애지중지하다)의 남성 복

수명사다. 따라서 영어로는 “그들의 보살펌을 받는 아이들" (rhe


children of rheir render care) 인 데 , 어 떤 영 어 성 경 OB) 은 “그들의 팔에
서 간호받고 있는 아이들"(rhe children rhey had nursed in rheir arms!)

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 ‘티푸힘’의 단수형 ‘테파흐’는 손바닥


만큼의 길이를 나타내므로, ‘손바닥만한 크기의 아이들’ (children of
a span long) 로 번역한 영어성경 홈정역 (KJV) 도 있다. 아마도 부모
192/ 예레미야애가

가 어린아이를 잡아먹더라도 아직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신생아를

주로 대상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셋째 행도 역시 ‘엄’으로 시작된 질문이다. 주의 생소는 히브리어

로 ‘미케다슈 아도나이’인데, 직역하면 “주님의 거룩한 장소”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집이란 뭇의 성전과 같은 의미다. 사실 하나님

의 백성들 중에서 제사장과 예언자는 특별히 보호를 받는다(시

105:15). 그런데 그러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더구나 ‘주의 성


소’에서 원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매 신학적 메시지

20절에서 22절까지는 형식상요로는 의인화된 예루살렘 자체가

시인의 권면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러나 실제로는 시인 스스로가 드리는 중보자척인 애원의 기도다.


시인의 이 기도는 출애굽기 32장 11 절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를 연

상케 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진노하시나이까? " 하고 모세가

하나닝께 애원했듯이, 여기의 시인도 “어찌하여 여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낳은 아기를 잡아먹게 하시며, 어찌하여 제사장들과 예언


자들을 주의 성소에서 살륙당하도록 하십니까?"라고 중보적인 기

도를올리고 있다.

적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될 때, 가공할 참화를 겪는 것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우르 훼파에 대한 애가’ (Lamenrarion over rhe

Desrrucrion of Ur, ANET , p. 459) 라고 불리는 기록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활보하던 높다란 성문 위 통로에는 시체들이 링굴고, 축

제가 벌어지던 대로에는 시체들이 곳콧에 누워 있으며, 사람들이

힘차게 활보하던 모든 거리에도 시체가 널려 있고, 그 땅의 축제가

행해지던 요소마다 죽은 사람틀이 겸경이 누워 있도다”라고 기록되


어 있다.
2: 2l / 193

그러나 예루살렘의 재난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도시들의

재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계약백성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이러한 비극을 구원의 과정으로 삼을 수 있었다. “야훼여, 우리들

하나님의 태하신 백성을 보소서. 그리고 살펴주소서. 언제까지 이

렇게 진노하시렵니까? " 시인의 기도는 시면기자가 시면 79면 5절


에서 “야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라고 탄식했던 얼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이 이처럼 환난을 당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소망이 있었다. 그들이 그 앞에서 회개할 수 있었기

때운이다. 그들을 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아는 자는 그들을 싸매


어주실 이도 하나님이심을 알 것이다. 그들은 회개의 기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밍끄연
노유는다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처녀들과소년들이

칼에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공훌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

m 추석

첫째 행에서는 힘없는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연이 묘사되어 있는데, 노유는 노인과 유년을 말한다.

“노유”가 원문에서는 ‘나아르 웨자켄’(유년 그리고 노인)으로 나타나


19 4 / 예레미야애가

있다. ‘나아르’는 원래 청소년을 뭇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린

이’를 가리킨다. ‘자켄’은 직무상으로는 장로를 뭇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나이 많은 자’를 가리킨다. 킬바닥에의 원문 ‘라


아레츠 후초트’는 직역하면 “집 밖의 땅에”가 된다. ‘아레츠’는 ‘땅’
이며, 앞에 ‘라’가 붙어서 ‘땅에’라는 말이 되었다. ‘후초트’는 ‘후

츠’의 남성 • 복수 • 명 사로서 ‘옥외 ’ (the outside 또는 out of doors) 라는

뭇이다. 엎드러졌사요며 곧 ‘셰케부’는 그 어간 ‘샤카브’의 칼. 3 인

청 • 복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말없이 누웠다’라는 돗이다. 즉


죽어 엎드러진 것을 말한다.

둘째 행에서 내 처녀들과 소년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처녀들과 소

년들을 가리키는데, 히브리어로는 ‘베툴로타이 우바후라이’다. “처


녀”를 뭇하는 ‘베물로트’ (Berhulorh) 는 이미 장성한 여성을 말하며,

“소년”을 뭇하는 ‘바후르’는 역시 청년기에 들어선 혈기왕성한 남성

을 말한다. 칼에 죽었나이다 곧 ‘나펠루 베하레브’는 직역하면 “칼에


의해 그들이 나명굴었다”라는 말이다. ‘나펠루’는 그 어간 ‘나팔’
(쓰러지다)의 칼. 3 인칭 ·복수·완료형이다(삿 5 : 27 ; 삼상 14 : 13 등) •
셋째 행의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는 ‘당신 의 진노의 날에’라는 구절

을 의역한 것이다. 죽이시되 의 원문은 ‘하라그타’인데, ‘하라그’(쳐


죽이다)의 칼 • 2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으로서, ‘당신 이 쳐죽이
셨다’라는 뭇이다. 그 뒤에 오는 살륙하셨나이다의 원문은 ‘타바흐
타’인데, ‘타바흐’(살륙하다 /slaughrer) 의 칼 • 2 인청 • 남성 • 단수 • 완
료형으로서 ‘당신이 살해하셨다’라는 뭇이다. 그 두 낱말은 거의
동의어이지만, 전자의 어원은 전쟁, 분쟁, 혼란을 전제로 하는 말

로서, 싸우다가 사람을 쳐죽이는 것을 가리킨다(창 4: 8 ; 민 31 : 7

등) . 후자의 경우는 짐승 같은 것을 도살할 때 쓰이는 말이다(창

43: 16; 삼상 25 : 11 등) • 이 두 가지 낱말은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을 비참하게 죽게 하신 것을 나타낸다. 응훌히 여기

지 아니하시고는 하나님이 무자비하게 그 계획을 실천하셨다는 말


2:21 / 195

이다. 그 원문 ‘로 하말타’의 ‘하말타’는 ‘하말’(불짱히 여기다, 아끼

다)의 칼 • 2 언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이다(출 2: 6; 램 15 : 5 등) •
우리는 시인이 이러한 하나님에게 매어달리는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앞절의 계속으로서 이 절에서는 남녀노소 연령에 관계없이 비참

하게 살륙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비참한 광경은 역대

하 36장 17절과 예레미야 6장 11 , 25 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외견상으로는 바멜론 군대의 공격 때문이며,

그들의 포학한 학살에서 온 결과임에는 틀렴없으나, 실상은 “주께

서 죽이시되 공훌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라는 시인


의 중언과 같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계획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그 당시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사태의 원인이 바로 그 백성

의 죄악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의 유다와 예루살렘의 비참한 환난


은 하나님이 분노의 채찍을 휘두르신 결과임을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자기네 처지를 헛되이 비관하고 원

망하는 일을 그치고, 오히려 그들을 파멸케 한 그 원인을 슬퍼해야

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정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했던 것이다.


업을 티꿀에 대고 하나념을 향해 회개하는 자에게만 소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세상의 원수의 손아


귀에 빠져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중에 빠져 정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의 지혜의 뭇에 순종할
때, 그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자기 자녀들을

잠시 버리지만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설 것’(애 3 : 31) 이 분명하기


196 / 예레미야얘가

때문이다. “주여 보시고 살피소서. 그리고 당신의 뭇어 이루어지


이다"

다낄타우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뺑l 서 부르지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m 추석

이 마지막 절에서도 예루살렘을 대신한 시인의 기도가 계속된

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이 절기에 많은 무리를 불러모음같이 원

수들을 불러들여 유다와 예루살렘을 쳐서 살아 남은 자가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히브리 원전에서는 첫째 행의 부르시기륨은 ‘타우’로 시작되는 낱

말로서, 이 절의 맨 처음에 자리잡고 있다. 그 원문은 ‘카라’(부르

다)의 칼 • 2 인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인 ‘티케라’다. 이 말은 하


나님께서 축제날 무리를 부르신 것을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마치
‘절기 ... 같이’,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셔 부르셨다는 것이다. 철기

.,.감이는 원문으로는 ‘케용 모에드’다. ‘케’는 ‘같이’란 뭇의 전치사

이며, ‘용 모에드’는 ‘정한 시간 또는 정한 장소’를 뭇하는 ‘모에드 ’

와, ‘날’을 뭇하는 ‘용’이 결합되어 ‘절기’를 가리킨다. 내 두려운 일

은 원문으로 ‘메구라이’다. 낱말 끝의 ‘이’는 1 인청 소유격 어미 ‘나


2:22 / 197

의’라는 뭇이므로, 나머지 부분은 ‘공포’란 뭇의 ‘메구럽’(남성 ·복

수형 명사)의 연계형 ‘메구레’다. 이 ‘공포’는 구약성서에서 언급되

는 세 가지 재난 곧 칼과 기근과 온역인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겪은 전쟁의 두려움’일 것이다. 곧 구체척으로는 척병들을 가리키

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마치 축제 때와 같이 ‘사방에서’ 척병들을

불러들이셨다는 말이다. 어떤 영어성경 (NEB) 은 이 말을 “나의 대


척들" (my enemies) 로 번역했다.

둘째 행에서, 여호와의 진노하신 날에 곧 ‘베용 아프-야훼’는 직

역하면 ‘야훼의 진노의 날에’라는 말이다. 피하거나는 원문으로 ‘팔


리드’(피한 자)인데, 명사로 되어 있다. 남은 자 역시 ‘사리드’(살아
남은 자)로서 명사다. 따라서 둘째 행을 직역하면 “야훼의 진노의

날에 피한 자 그리고 살아 남은 자는 존재하지 않나이다”로 된다.


셋째 행을 칙역하면 “내 귀하게 손바닥에 받든 자 그리고 내 기

른 자를 내 원수가 소멸시켰다”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는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귀엽게 기른 아기를 뭇한다. 다 멸하였나이다

는 원운으로 ‘킬랑’이다. 이 말은 그 어간 ‘칼랄’(끝장내다, 탕진하

다)의 피옐 • 3 인청 • 단수 • 남성 • 완료형에다가 ‘맴’(그들을)이 첨가


되어, ‘그들을 남낌없이 멸했다’라는 돗이 된다.

에 신학적 메시지

이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야훼가 절대척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것

을 고백한다. 그의 재난 이해의 기본적 범주는 다음과 같은 것이


다.
첫째로, 야훼에 대한 유다의 죄의 심각성에 대해 하나님이 결코

묵과하지 않으시고, 그의 ‘진노의 날’ 그들을 갱계한다는 예언자

척 • 신명기적 견해의 반영이다.


둘째로, 이련 이해는 하나님의 무조건척 보호의 환상을 깨고,
198 / 예레미야애가

출애굽, 가나안 정유의 전숭이 시온전승, 다윗왕조 전승을 극복한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예언자적 태도, 신명기 사가의 태도로 유

다에게 지나친 응정행위를 한 나라들에 대해 형벌을 예견하는 한

편, 회개한 유다에게는 다시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벌과 회복의 소망 사이의 긴장관계를 지혜

적인 교훈으로 극복함으로써, 야훼를 인내 가운데 기다리라는 호


소가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심판의 칼을 휘두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을 백성들에게 강조하면서, 하나담이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기게

하셨다는 것을 명심케 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기도 속에 자비와

구원을 하나님께 요청하는 심정을 내비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극단적인 비극을 들어가며 애원하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

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리라는 신념이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은 진실로 회개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입증해주셨던 것이다.
세번째 비탄의 노래
3. 폐허 앞에 선 수난자의 간구 (3:1-66)

이 노래는 3절씩 짝지 어 머리글자가 히브리 알파뱃 순서로 가락


을 짓도록 3행 연구懶句)로 된 두운법 (頭뼈法) 답관체 시다. 이와
비슷한 형식의 시로서 ‘키나’ 가락은 아니지만, 시편 119편의 시가
있다. 각기 3행으로 구성된 22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앞의 두 노래

와는 다르게, 이 노래는 각 절야 한 행으로 됨으로써 행의 수는 전

자와 같이 66행이지만 절의 수는 66절로 되어 있다. 이 시는 알파

뱃 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제약 때문에 군데군데 어색한 점이 비


치기는 하지만 대체로 찰 다듬어진 노래이며, 내용변에서도 사상
적 가치가 높아서 애가서의 핵심이 될 만하다. 학자들은 이사야
53장 및 시편 22편과 함께 이 노래를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로 볼
수있다고말한다.
여기서는 유다 나라의 멸망의 비운을 옴소 겪은 시인이 그 백성

의 죄과에 대한 가책을 깊이 느끼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분노에 의


해 분쇄된 신앙공동체의 처지를 자신의 개인적 운명으로 감수하며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훌과 자비를 확신하는 기분을

풍겨주면서, 절망에 사로잡힌 듯한 어조로 동족을 대변하여 발언

-201-
202 / 예레미야애가

한다. 1 , 2 , 4장의 애가의 주제가 국가적 파멸과 포로생활이라는

비운을 다룬 것과는 달리, 이 3장은 다섯 편의 애가 중 가장 격조

높고 심도있게 개인척 비탄의 심정을 토로한다.

여기에 나오는 익명의 비가 시인은 제 2장인 두번째 비탄의 노래

를 지은 시인과는 구별된다. 여기의 시인은 “주님의 진노의 채찍으

로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나이다"(애 3 : 1) 라고 고백하면서, 직접

적인 수난자로서 호소한다. 이렇게 하나님께 따고들 듯 말을 거는

시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 노래가 문서로 고정되기 이전

에는 이 노래를 제의(察嚴)에서 낭독할 때, 각각 다른 처지의 사람

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는 내용으로서 번갈아가며 발언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세번째 애가를 여러 사람의 발언자로 나누

어서 낭독할 때, 교대로 낭독하게 하거나 억양을 달리하게 함으로

써, 각기의 발언자를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고정된 형태로서는 의미의 새로운 문맥이 형성됨

에 따라 본래 간직했던 직접성이 줄어드는 반면, 더욱더 시각 의존


적이 되며, 독자 자신의 경험에 의존해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어떤 변에서는 편집자가 오히려 독자들이 과거의 고난에 관

한 경험에 깊이 관여해 상상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기 위해서,

일부러 발언자의 정체를 막연하게 나타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

다. 그리하여 이 노래에 퉁장하는 익명의 시인의 체험과 고백에 비


추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과거에 개별적으로 경험한 역경을 헤쳐

서 소망과 신앙의 연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한국백성은 이 노래를 통해서 민족적 고난에 관해서 배우게 되는

바가클것이다.

동시에 이 시에서는 ‘나’를 주어로 하는 부분과 ‘우리’를 주어로


하는 부분이 교차됨으로써, 민족적 고난과 개인적 고난 사이의 구

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를 주어로 한 발언을 통해서

는 신앙을 공고히 하고 소망을 일깨워주는 반면에, ‘우리’를 주어


개요 1 203

로 한 공동척 비가에서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하나님 의존적인 발언

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이 시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다가 하

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존하는 기도로 끝맺는다는 특성을 나타낸다.


이제 계약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 백성의 회개에

따른 구원의 희망이라는 ‘애가’의 공통적 주제에 비추어서, 개인적

비가로서의 색채가 농후한 이 세번째 애가의 내용을 간추린다면,


다음과 같다. 즉 죄로 말미암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야곱의

야훼에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야훼는 의

롭다. 그러나 이 심판은 너무나 가혹하다. 시인은 그 심판을 뼈저

리게 통감한다 (3: 1-18).

한편, 그 격렬한 성판의 그늘에서 하나님은 고통을 스스로 젊어


지신다. 그것을 깨달은 시언은 흘연히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

을 실감한다 (3 : 22). 인간이 받는 심판이 그토록 참당한 처지에서

도, 하나님의 성실의 위대하심은 더욱 푸렷해진다 (3:23). 이 성

실하신 하나님, 한없는 사랑의 하나님께 우리는 희망과 신뢰를 두


어야 한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3:25 , 26). 극한 상태에 이른 고난

을 참을 때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흩의 복음이 찾아든다고 시

인은 단정적으로 말한다 (3: 27-33). 이같이 분쇄된 영흔이 공동체

와 함께 조용히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난의 포로민에 대한 ‘애가’에 간직된 위안과 격

려의 원천인 것이다. 그들에게 장차 임하게 될 영화로운 생활로의


변화의 맥박이 이미 여기에서 회망의 새싹같이 건강하게 고동치고
있다는 조짐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1) 수난자의 호소 (3: 1-18)


204 / 예레미야애가

개 개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받고 그분을 찬양하는 일이나, 하나

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고 마음에 확신과 소망을 가지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냐 모든 것이 절망척이고 하나님께서 그 믿는 사

람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이 비참한

자들, 보잘것없는 자들, 버렴받은 자들, 절망척인 상태에 빠진 자

들에게 손을 뻗으시리라고 믿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여

기에 나오는 시인에게는 실제로 그런 일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의

정계를 당하는 익명의 ‘나’(아마도 시인 자신)는 유다 백성이 당하는

그 엄 청난 고난을 고스란히 온옴으로 껴 안고 텅구는 모습을 나타내


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대리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삶 속에서 몽소 감수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


님의 ‘진노의 매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한 실존척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는 철혹 같


은 절망의 극한척 경지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손을 뻗으시리라는
확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띠-댐알레프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자는내로다

나를 이끌어 혹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히셨으며

종일토록손을돌이켜
자주자주나를치시도다
3: 1-3 /20'

m주석

l절의 여호와의 노하신 배의 원문은 ‘셰베트 에베라토’다. ‘셰베트’


는 ‘채찍‘이란 뭇이며, ‘에베라토’는 ‘그의 진노’란 뭇이다. ‘진노’에
해당되는 ‘에베라’는 감정 따위의 ‘분출’ (outpouring) 을 뭇하는 여

성 • 단수 명사다. 따라서 이 말은 보통 ‘에베로트 아포’(그의 노하


심의 분출)라고 해야 하겠지만, 여기서처럼 단순히 ‘그의 분출’이란

뭇의 ‘에베라토’만으로도 ‘그의 진노’란 뭇으로 사용.된다. 고난당한

자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고난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뭇


을 지닌 ‘학게베르’는 청관사 ‘하’가 붙은 ‘게베르’(사람)인데, ‘바로

그 사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게베르’는 주로 시에

만 사용되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본다’는 말 ‘라아’는 체험을 말할


때도 쓰인다 (1 am the man who has experienced affliction"').

2절의 냐톨 이물어는 히브리어로는 ‘오티’(나를) ‘나하그’(내몰았

다)로 표현했다. ‘나하그’는 목자가 양떼를 몰아서 일정한 방향으

로 나아가게 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혹암에 행하고 곧 ‘와이용


라크 호셰크’의 ‘와이용라크’는 ‘할라크’(행하다, 걸어가다)의 히필 •

3 인청 • 남성 • 단수· 미완료· ‘와우’-계속법이다. 따라서 주님이 나


로 하여금 ‘호셰크’(혹암) 가운데 걸어가게 하셨다는 뭇이다.

3절을 직역하면 “진실로 그가 그의 손을 온종일 나를 거슬러 거

읍 되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이다. 원문에는 ‘진실로’에 해당되는


‘아크’란 말이 있으나,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다. 손율 률이쳐 자

주자주는 원문에서 ‘야슈브 야하포크 야도’가 사용되었다. ‘야슈브’

는 ‘슈브’(돌아오다)의 칼 • 3 인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으로서 ‘되
풀이한다’라는 뭇이고, ‘야하포크’는 ‘하파크’(되돌린다)의 칼. 3인

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으로서 ‘되돌려놓는다’라는 뭇이다. 따라


서 나를 치시기 위해 ‘야도’(그의 손)를 되풀이하여 되돌려놓는다는
206/ 예레미야얘가

말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는 진노의 손이 계속 반복된다는 돗

이다.

m 신학적 메시지

우리가 이미 살펀 바대로 이 비가는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과 네

번째 것에 비해서,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보다 더 감동적이며

격조높은 ‘키나’조의 시가다. 이 노래의 작자는 예레미야는 아니더

라도 그가 경험한 일을 마찬가지로 경험하고 같은 신앙으로 반응한

사람인 듯하며, 여기에 나타나 있는 그가 토로한 심정이나 신앙태

도가 예레미야를 방불케 한다. 이 노래에 그려진 사상의 흐름은 수

난의 묘사에서 시작해서 그 고난에 대한 수용을 거쳐 회개와 기도

로 이어진다. 여기 1-3절은 하나님의 진노의 매를 맞는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고난당하는 사람은 ‘내로다’라는 말로써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자기 백성에게 내려진 큰 재난을 모두 자기 자신의

슬픔과 아픔으로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체험하

는 고난 (오니 / affliction) 은 자기 백성들이 느끼는 육체적 인 고난뿐

아니라, 그보다도 더 큰 ‘심령의 뼈아픔 ’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하


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그의 막대기(셰베트)로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던 목자였으나, 이제는 흑암에로 몰아넣는 채찍을
휘두르는 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소망이 끊어졌다고 슬퍼

하면서도 어느덧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칼로 쳐서 아주 멸하지 않고, 다만 진노의 막대기로 징계

하시는 것뿐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댐-댐베트
나의 살과 가죽을 죄하게 하시며
3:4-6 / 207

나의 뼈를꺾으셨고

딩즙과수고를쌓아
나를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매 주석

4절의 쇠하게 하시며는 원문에 ‘벌라’라는 히브리어로 쓰였는데,

그 어간 ‘발라’(하락하다)의 피옐 • 3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이다.

이 말은 피옐형이므로 주께서 나의 살과 가죽을 쇠약하게 하셔서

쓸모없는 것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꺾으셨고는 그 원문이 ‘십바


르’인데, ‘샤바르’(부수다)의 피옐 • 3 인청 • 단수 • 남성 • 완료형이다.
역시 피옐형이므로 주께서 나의 뼈를 분쇄하셨다는 말이다. 구약

성서에는 ‘뼈’라는 말이 큰 고통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사 38 : 13 ; 렘 50 : 17).

5절을 직역하면 “그가 나를 맹 둘러막고, 독초와 수고로 에워썼

다”는 말이다. 당즙은 독초를 말하는데, ‘비통함’을 나타내는 것이


다. 쌓아는 히브리어로 ‘바나’인데, 사람이나 정숭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담을 쌓는 것을 말한다. 에우셨으며 는 그 원문이 ‘와이야카

프’다. 이것은 그 어간 ‘나카프’(두르다)의 히필 • 3 인청 • 남성 • 단


수 • 미완료 • ‘와우’-계속법으로, ‘그가 포위했다’라는 뭇이다. 아
마도 이 말은 그 당시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된 상태

에서 당하던 고통을 연상시켜 주는 표현인 듯하다.


6절은 시편 143편 3절 하반절과 그 표현이 같다. 혹암은 길을 찾

을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곳을 뭇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


208/ 예레미야애가

하여 암혹한 장소(시 143: 3) , 또는 무덤과 음부와 같은 암혹한 곳

(시 88 : 18) 을 말한다. 이 말은 곧 심한 괴로움을 상갱한다. 거하게

하시기톨은 원문에 ‘호시바니’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야샤브’(거하

다)의 히펼 • 3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에 l 인청 어미가 붙여진


것으로서, ‘그가 나를 거하게 했다’라는 뭇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의 강한 사역을 보여주는 주권적 의지가 나타나 있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 0B) 은 “그가 냐를 억지로 거하게 했다" (He has forced me

to dwell) 라고 번역했다. 죽은 지 요랜 자 갈게 곧 ‘케메테 올람’은

병원의 사자 같은’이라는 뭇이다. ‘올람’(영원)은 오랜 시간의 경과

를 가리킬 뿐, 반드시 헬라 사상에서 말하는 영겁을 뭇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지 오랜 자 같다”는 말은 살아 있으나 시체 같은 존
재가 됨을 뭇한다.

매 신학적 메시지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내리신 재난 때문에 자신의 온몸

이 부서져서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음을 하소연한다. 실상 그것은

이스라엘이 지은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 스스로의 고통이 시인에게


반영된 것이다. 시인의 살파 가죽이 쇠하여 무용지물이 되었고,

그의 뼈가 무참히 꺾였다는 것은 각각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

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사 38: 13 ;시 32 : 3-4; 38: 3 ; 42 :

1 이. 그리고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라는 표현에서


‘당즙’은 사람을 죽이는 독초를 말한다. 이러한 독초는 견디기 에려
운 괴로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괴로움과 고역의

담이 나를 포위했다”는 것은 삶에 아무런 낙이 없고, 오직 고난만


이 있는 극단척인 절망상태를 나타낸다.

시인은 그 백성을 대리해서 영과 육이 동시에 분쇄되고 절망상태

에 빠져 있으므로, 살아 있으면서도 마치 시체와 같은 팔이 된 것


3:7-9/209

이다(시 107: 10-12; 143: 3). 나로 하여금 억지로 혹암에 몰아넣

어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게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업에 동참


할 자격이 박탈되어 이제는 살아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는 잊혀진

바 되어, 아무도 기억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속 깊은 콧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풍훌을 믿는

신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엎드러질지라

도 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


설 것임이로다"(미 7 : 8) ; 그리고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혹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 : 7) 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띠-밍 71 멜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내첩경을굽게하셨도다

매 주석

7절을 직역하면 “그는 나의 주위에 담을 둘러썼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는 내 붓쇠 (사슬)를 무겁게 했다”가 된

다. 냐톨 둘러써셔 의 원문은 ‘가다르 바아디 ’다. ‘가다르’는 칼 • 3 인

청 • 단수 • 남성 • 완료형으로서 , ‘담을 둘러썼다’라는 뭇이다. ‘바


210 / 예레미야애가

아디’는 ‘내 주위에’라는 뭇이다. 이 말은 최수를 가두는 행위를 나

타내는 것인데, 가끔 하나님의 징계의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용 19: 8).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에서 “나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는 ‘에체’인데, 그 어간 ‘야차’(나아가다)의 칼 • 1 인청 • 단수 • 미

완료형이므로, 그 행위가 끝나지 않고 계속 시도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냐의 사슬은 원문에서는 ‘나의 농쇠’라는 말로 쓰였는데, 이

는 옛날에는 무쇠 대신 농쇠로 사슬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겁게


하셨으며 의 원문은 ‘히크버드’인데, '7'}바드’(무겁다)의 히필 • 3 인

청 • 남성 • 단수 • 완료형으로서 ‘그가 무겁게 해주었다’라는 뭇이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가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사슬을 무캡게 하셨다는 말이 되었다.

8절의 원문에는 ‘감’(또한, 비록)이란 말이 서두에 냐옴으로써 다

음에 오는 ‘키’( ... 하나)를 강조하지만, 우리말 성경에는 ‘감’이 빠져

있다. 내가 (또한)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의 “부르짖어”란 말의 원


문은 ‘에제아크’인데, 그 어간 ‘자아크’(부르짖다)의 칼 • 1 인칭 • 단

수 • 미완료형으로 ‘내가 부르짖을 것이다’라는 뭇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도움을 구하냐의 원문은 ‘아샤웨아’인데, 그 어간 ‘샤와아’

(도와달라고 소리치다)의 피옐 • 1 인청 • 단수 • 미완료형으로 ‘내가

도와달라고 소리칠 것이다’라는 뭇이다. 내 기도률 풀리치시며 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내가 도와달라고 큰소리로 기도했으나 가로

막으셨다는 말이다. “물리치시며”의 원문 ‘사탐’은 ‘가로막다, 훼방

하다’라는뭇이다.

9절의 다듬은 롤 곧 ‘가지트’는 ‘다듬는 일’이란 뭇이지만, 톨 곧


‘에벤’(복수일 때 ‘아바님’, 연계형이면 ‘아브네’)이 생략된 채로 ‘다듬

은 돌’。l 라는 뭇이 되었다(출 20: 25). 하나님께서 다듬은 돌을 갖

고, 7절에 언급한 대로 ‘가다르’ 곧 ‘담을 둘러싸서’ 내 길을 가로

막으셨다는 것이다.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았다면 그것은 허물 수 없

는 견고한 담을 의미한다. 다듬은 돌이라면 큰 돌들일 것이며, 서


3:7-9 / 211

로 이가 맞게 축조했을 것이므로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이

다. 내 첩경융 굽게 하셨도다의 “첩경”은 원문으로는 ‘네티바’다. 이


것은 도보로 다니는 소로걸 (a footpath) 이다. 굽게 하셨다는 원문으

로 ‘이와’인데, 그 어간 ‘아와’(구부리다)의 피옐 • 3 인청 • 남성 • 단

수 • 완료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가 나아가는 큰 길을 다듬


은 돌로 견고하게 담을 쌓아 갈 길을 막더니, 몰래 나갈 수 있는

셋길까지도 막아버리셨다는 말이다. 이제 나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불가불 되돌아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m신학적 메시지

여기 ‘기멜’ 연도 하냐님께서 ‘나’에게 가하시는 형벌의 연속이

다. 여기서 ‘나의 길’을 담으로 둘러싸 가두어 버렸다고 했는데,

그것은 유다 백성이 바멜론에 의해 포로가 된 상태를 반영한다(시


88 : 8). 그리고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라는 표현에서 그들의 절망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시 22 : 2 ; 용 30: 2이 . 9절에서는 하나님의

집요한 형벌 집행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하는 시편 88편 6-7절에서


“주께서 나를 깊은 응덩이 어두운 콧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

다”라고 한 말씀을 방불케 한다. 주께서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


으며”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의 행위가 순전히 하나님의 장중에 달
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신체적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
물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를 묶은 사슬이 무거
워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 징벌이 하나님의
손에서 온 것임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신체적 자유

를 구속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면, 그만큼 하나님에게 소망


을 두게 된다. 시인은 그 백성에게 그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회개에
212 / 예레미야애가

이르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8절에 의하면, 시인이 시현 91 현 l~P셜의 “저가 내게 간

구하리니 내가 웅답하리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구원을 구하는 기도

를 드렸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기도를 거절했다는 것


이다. 그러나 시인의 그런 절망척인 고백 가운데도 결코 절망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언다. 인생의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곤경으

로 가득 찬 절망상태에서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호소할 자유만은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들이 기도드릴

때 얼굴을 숨기신다(사 59 : 2). 그래서 시인은 주께서 구름으로 스

스로를 가려서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셨다고 탄식하기도 했다(합

1 : 2 ;용 19 : 7 ; 30 : 2이. 그러나 구름에 가려진 태양도 언젠가는

다시 밝은 햇빛을 비치듯이, 우리는 하나념께서 얼굴을 다시 드러

내시리라는 소망을 갖게 된다. 그가 잠시 동안 얼굴을 숨기시는 데

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성하고 회개한 끝


에,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며, 견디고, 기다리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뎌띠-디킬달렛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곳의 사자같으자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로적막하게하셨도다

활을당기고
나로과녁을삼으심이여

매 주석
3: 10-12/213

져는 내게 대하여 에서 “저는”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갱어미 대신에


독럽척인 대명사 ‘후’를 사용했다.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은 원문으로
‘도브 오레브’다. 이 ‘달렛’ 연의 두운(Alliteration) 에 맞추기 위해서

‘곰’이란 뭇의 ‘도브’가 이 문장의 맨 앞에 나오게 되었으나, 성경척

용례로 보아서는 ‘엎드리어 기다리는’ 짐송은 ‘사자’가 되어야 적합


할 것이다(시 10: 9). 여기서 하나님이 곰과 사자와 같은 맹수로

비유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숨은 사자와 같이 사람을


해친다고 묘사되었다(호 13 : 8 ; 암 5 : 19). 옹밀한 곳은 히브리어로

‘미셰타렴’인데, 그 어간 ‘싸타르’(숭다)의 남성 ·복수· 명사다.

11절의 나의 킬로치우치게 하시며는 ‘나의 길’곧 ‘데라카이’가본

래의 방향을 일탈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치우치게 하시며”는


원문에서 ‘쏘레르’로 되어 있는데, ‘쑤르’(길에서 벗어나다)의 포

앨 • 3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으로 ‘그가 딴 데로 이끌었다’라는


뭇이다. 결국 ‘숨어 있는 사자’를 피해서 ‘나’는 가던 길을 돌리게
되었다는 말야다. 내 몹율 찢으시며는 ‘나’는 피하려 했으나, 그 사

자에게 찢긴 폼이 되었다는 말이다. 원문에 쓰인 ‘파셰혜니’는 ‘그


가 나를 갈기갈기 찢었다’라는 뭇인데, 그 어간 ‘파샤흐’의 피앨 • 3
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에 1 인청 어미가 붙은 것이다. 그것은
미완료형이지만 ‘와우’-계속법으로 사용되어, 완료형의 뭇을 나타
낸다. 나로 척악하게 하셨도다는 ‘나로 파멸케 하셨다’라는 말이다.
12절을 직역하면 “그가 그의 활을 밟고, 나를 화살의 과녁같이

삼았다”로 된다. 활율 당기고 에서 “당기고”는 히브리어로 ‘다라크’


인데, ‘밟는다’라는 뭇을 지닌다. 그것은 활을 당길 때 발로 밟고
당기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 과녁훌 삼으심이여 란 표현은 용기에 자

주 나온다(용 7 : 20 ; 16 : 12). 한편, 화살은 질병을 상정해서 사용

되는 경우가 있다(용 34: 6; 시 91: 5-6). 과녁 곧 ‘마타라’는 그 어

간인 ‘나타르’(지키다)에서 은 여성 • 단수 명사다.
214/ 예레미야애가

m 신학적 메시지

시인은 죄의 결과가 사람들을 단순히 갇혀지는 상태로 끝나게 하

는 것이 아니라, 온통 옴이 찢겨지고 심지어 화살의 과녁이 되리만

큼 만신창이가 된다는 것을 증언한다. 이런 일은 다름아닌 하나님

의 정별행위였던 것이다. 그가 곰과 사자처럼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주께서 십자가상에서 “내 하나님이

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식하실

때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시 22 : 1). 그러나 그러한 무

서운 징벌이 하나님의 손에서 온 것이라고 느끼는 신앙인에게는 소

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치기도 하고, 싸매주는 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분 이외에 구원을 기대할 분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뎌희-뎌희헤
전동의살로
내 허리를맞추셨도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취하게하셨으며

매 주석

13절의 천동의 살은 원문에는 ‘베네 아슈파토’(그의 전통의 아들)


3: 13- 15 / 215

로 되어 있다. 전통에서 나오는 화살이니까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

이다(용 41: 26; MT에는 41:20). 우리말 성경은 ‘전통’(節簡)을 ‘전

동’이라고 번역했다. 이 전통 즉 화살통은 하나념의 전통을 의미한

다. 내 허리률 맞추셨도다에서 “허리”는 히브리어로 ‘킬레야’인데,


감정이 자리잡은 기관으로 여겨지는 콩팔을 뭇한다. 우리말로 감
정의 자리는 성장이므로 ‘내 심장을 맞추셨도다’가 더 적절할 것이
다. 영어성경 (RSV) 은 “그가 내 심장을 관통시켰다" (He drove into
my heart) 라고 번역했다. 맞추셨도다 곧 ‘헤비’는 그 어간 ‘보’(들어가
다)의 히필 • 3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으로서, ‘그가 꿰뚫었다’,
‘그가 관통시켰다’라는 뭇이다. 즉 하나님이 쏟 화살이 내 몸의 예
민한 급소에 박혔다는 말이다.
14절을 직역하면 “내가 온종일 내 백성 모두에게 웃음거리 곧 그 ‘

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다”로 된다. 내 모든 백성은 다른 사본에는 약

간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유다 백성 이외에 다른 백성까지

도 포함해서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영어성경


(RSV) 은 ‘모든 백성들’ (all peoples) 로 번역했다. 우리는 원문대로

“내 백성 모두”로 읽고, 시인 ‘나’는 비록 유다와 예루살렘 전체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지만, 다른 나라 백성에게 조롱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백성에게까지도 조롱거리가 되어 수모를 겪는

다는 뭇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홍거리 곧 ‘세호크’는 ‘웃음거

리’란 뭇이다. 그들의 노랫거리는 히브리어로 ‘네기나탐’인데, ‘네기

나’는 ‘풍자노래’라는 뭇이다.


15절의 쓴 것은 원문으로 ‘메로렴’이다. 이 말은 ‘쓴 풀’을 가리키
는 것으로 고난을 상정한다. 배폴리시고는 괴롭도록 지나치게 많이

먹게 했다는 말이다. 쑥은 히브리어로 ‘라아나’인데, 역시 고뇌를

상정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쑥보다 더 독한 성분을 갖고 있다. 취

하게 하셨으며는 원문으로 ‘히레와니’인데, 그 어간 ‘라와’(포식하다)

의 히필 • 3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에 1 인청 어미가 붙은 것으로


216/ 예레미야얘가

서, ‘그가 나로 하여금 포식하게 했다’라는 뭇이다. 즉 쑥에 물리


게 했다는 말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이 ‘헤’ 연 역시 앞 연의 계속이다. 시인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

의 대표자로서 자기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정벌을 화살로 비유했

다. 화살은 질병을 상갱하거나, 때로는 환난과 핍박을 상칭하기도


한다(용 6: 4; 시 38: 2). 그러한 시언을 두고 그의 동족들마저 조

종하고 수모를 가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쓰디

쓴 고통에 눌려 쑥과 담즙을 억지로 포식하는 꼴이 된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당하는 고초를 표현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전통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다”고 했다. 여기에서 ‘내 허리’는 허


리 부위에 있는 콩팔과 내장의 급소를 뭇한다. 그러므로 하나념의

진노의 화살이 시인의 내장의 급소를 관통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토록 엄히 정벌했다는 뭇이다. 그러한 육

체적 고난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자기의 동족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는 정신적 고초까지 겹치게 했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


으로 지음받아 고귀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 존엄성은 곧 생명

의 존엄과 인격의 존염이다. 시인은 지금 이 두 가지 존엄성이 파

괴된 슬픔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딘희-딘희와우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재로나를덮으셨도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3 : 16-18 / 217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매 주섹

위에서 조약톨 곧 히브리어로 ‘하차츠’는 본래 그 어간의 뭇이

‘쪼개다’라는 말이다. 큰 돌이 쪼개져서 조약돌이 되었기 때문일 것

이다. 장언 20장 17절에는 ‘모래’로 번역되어 있다. 내 이톨 꺾으시

고에서 “꺾으시고”는 히브리어로 ‘와이야게레쓰’라 하며, 그 어간

‘가라쓰 ’ (분쇄하다)의 ‘와우’-계속법 • 히필 • 3 언청 • 남성 • 단수 • 미

완료형이다. 이 낱말은 시편 119편 20절에는 ‘상하다’란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어떤 영어성경 (RSV) 은 “내 이를 꺾으시고” 대신에
“내 이를 마멸케 하시고"(He has made my teeth grind ... )라고 번역했

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떡을 주시지 않고, 돌을 업에 넣어


내 이를 상하게 하셨다는 뭇이다(마 7: 9). 채로 나톨 엎으셨도다라
는 구절에서 “나를 덮으셨다”라는 말은 원문에 ‘히케피샤니’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카파슈’(덮다, 위축시키다)의 히펼 • 3 인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인데, ‘그가 나를 겸손케 하셨다’, ‘그가 나로 하여금


낮은 자세를 취하게 하셨다’라는 말이다. RSV 빛 NASB의 영어성
경은 “그가 나를 움추리게 했다" (made me cower) 라고 했고, NIV의

영어성경은 ‘위축케 했다’ (He has trampled me) 라고 했다.

17절의 내 섬령으로 명강율 멀리 떠나게 하시니 는 직역하면 “당신 •


이 내 영혼을 명강에서 배제하셨다”로 된다. “멀리 떠나게 하시니”
의 원문은 ‘와티제나흐’다. 이 말은 그 어간 ‘자나흐’(멀어내다, 거

절하다)의 칼 • 2 언청 • 여성 • 단수 • 미완료 • ‘와우’-계속법이므로,


“내 영혼(여성명사)이 명강으로부터 배제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영어성경 (RSV) 은 “나의 영혼이 명강을 잃었다"(my soul 잉 bereft of
218 / 예레미야애가

peace) 로 번역했다. 70인역 헬라어 성경 (LXX) 은 ‘와티제나흐’를

‘와이제나흐’로 고청으로써 3 인칭으로 나타냈다. ‘복’ 곧 히브리어

로 ‘토바’는 우리가 혼히 생각하는 바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

는 ‘복’과는 다르게, 모든 ‘좋은 것’, ‘번영’, ‘행복’, ‘은전’ 퉁 주로


외형적인 것이다. 잊어버렸음이여는 원문으로 ‘나쉬티’인데, 그 어

간 ‘나샤’의 칼. 1 인청 • 단수·완료형으로서 ‘내가 소흘히 하여 포

기했다’라는 뭇이다. 그리하여 행복이 무엇인지, 번영이 무엇인지

를 잊어버렸다는 말이다.

18절을 직역하면 “그래서 내가 말한다. 내 확신과 야훼로부터의


내 소망이 사라졌구나”라는 말이다. 나의 힘은 원문에는 ‘니체히’로
되어 있는데, 그 어간 ‘네차흐’는 ‘영광’, ‘찬란’이란 뭇을 지니고
있으나, ‘믿음’, ‘확신’이란 뭇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영어성경
(RSV) 은 “사라진 것은 나의 영광이다"(Gone is my gIory) 라고 번역

했다.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은 원문대로는 ‘야훼로부터의 내 기대’


(my expecrarion from Yahweh) 다. 즉 소망의 근원은 야훼 이 신데 , 이

제 그 소망이 소멸되었다는 말이다. 끊어졌다의 원문은 ‘아바드’다.

이 말은 ‘잃어버렸다’ 또는 ‘소멸되었다’라는 뭇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유다와 예루살렘의 동족을 대표하여,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한

탄하는 시인의 고백은 이제 절정에 도달한 감이 있다. 떡 대신 돌

을 씹어야 하며, X영강과 행복이란 이미 하나닝을 배반한 백성에게

는 전혀 고려될 수 없는 그런 버러지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 것이

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아무런 믿음도 소망도 없는 암담함이 있을

뿐이다.

시인은 절망의 수령에 빠져 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는다 : “나

의 확신과 야훼에게 결 수 있는 나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졌구나"


개요 / 2 1 9

사방이 꽉 막혀 버렸으며 온갖 슬픔과 고통으로 심신이 지철대로

지치고, 상할 대로 상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최후는 하나님께서 간섭할 순간이다. 정확히 이 시
점에서 신앙과 소망이 확고히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

께로부터 버렴을 받았다는 심한 슬픔과 고통은 하나님 자신의 슬픔


과 고통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그러

한 아픔과 슬픔의 통곡이 하나님께로부터의 위로와 형강에로 이어

지게 될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주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2 : 18) ,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하며 "(2 : 19) , “눈물을 강처럼

흘리는 자에게 "(1: 16) 하나님께서 “그 풍부한 자비대로 응훌히 여

기실 것 "(3:32) 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믿고 오래 인내할 때, 신앙이 솟아나고 힘과 영광과

탁월함이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절망은 사라지고 야훼로부터 오

는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 신도들은 끊임없이 절망과

맞서 대항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명강 안에 자리잡기

까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다.

2) 고난 중의 구원의 소망 (3 : 19- 39)

매 개요

시인은 이제까지 자기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애원과 하소연으로

일관해오다가, 그의 기력과 소망이 소진해지면서 체념상태에 빠지


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겸손하고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린다. 고
요한 가운데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이제 온유하게 기도하기 시작
220/ 예레미야애가

한다 : “주님이시여, 나의 고초를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낙섬되오

니 통찰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마침내 소망을 갖

게 되고, 신앙이 솟아남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또 자기 동족들에

게 소망을 굳게 갖고, 업을 티끌에 대고 경손히 회개하며 수욕을


참아 이기라고 권면하고 있다. 결코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은 형벌

에 대해 불명하지 말고, 오히려 회개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권면하

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기도와 동족에 대한 권연은 우리가 귀기울여야 할


신앙과 회망의 말씀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비와 뭉훌하섬은 무궁하시다는 고백이 나온

다. 우리가 비록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설하시다. 그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3절) 하고 큰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야훼는 나의 기업 (즉 나의

소망)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24절)고 다짐한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길이 최상의 길이라고 고백한다. 야훼

하나님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 (25절) . 그

리고 구훤의 문을 열어주신다고 확신을 갖고 말한다.


셋째로, 그는 수욕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 사

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스스로 겸비해서 예수처럼 “때리

는 자에게 자기 뺨을 갖다 대며 "(30절) , 비록 수욕을 당할지라도

남을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고천 4: 12 ; 뻗전 2 : 23). 이런 사람을

“주께서는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31절) •


넷째로, 고난에는 도먹척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이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서도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

에게 더 좋은 선이 오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인간이 감당할 만한 고

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악한 것을 보시고 철저히 벌하신다는 것이

다. 그는 정의를 굽게 하는 자에게 어검없이 진노와 형벌을 가하신


3: 19-21/221

다는 것이다 (35 - 36절) .

여섯째로, 사람이 고통에 대해 지나치게 애통하는 것은 옳지 못


하다고 시인은 타이른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 되는 것은 하

나도 없다. 그는 세상에 화와 복이 함께 존재하도록 허락하셨다


(38절). 따라서 자기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인데, 불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39절) •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에 대해 불펑하지 말


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 슬퍼해야 하는 것이
다.

맥-텍차인
내고초와재난곧
쑥과담즙을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매 주석

19절의 내 고초…융 기억하소셔 라는 구절은 원문에서 ‘제가르-아

네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두 낱말을 묶어 한 낱말로 만든 것인

데, 이것은 ‘키나’조 운율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제카르’(기억하소

서)는 칼 • 2언청 • 남성 • 단수 • 명령형이다. ‘아네이’는 ‘오니’(고


초, 고난) +1 인칭 접미어로서 ‘내 고초’란 돗인데, 심한 가난을 의

미하기도 한다. 채난은 원문에는 ‘내 재난’ 곧 ‘메루디’로 되어 있


다. 이 말은 ‘핍박’이라는 뭇인데, 그 어간 ‘루드’는 ‘정처없이 방황
222/ 예레미야애가

한다’, ‘불안정하다’라는 의퍼다. 예레미야애가 1장 7절에서는 이


말이 ‘군박’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내 고초’와 ‘내 재난’이 모두 비
참하고 괴로운 것이므로 곧 쑥과 당즙으로 동일시해서 표현했다.
19절을 “내 고초와 내 군박을 기억하소서. 그것은 내게는 쑥과 담

즙과 같나이다”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영어성경 QB) 은 “내


고뇌와 고초를 곰꼼 생 각하는 것은 담즙과 쑥 그대로다" (Brooding

on my anguish and afflicrion is gall and wormwood) 라고 번역했다. 쑥과

담즙은 모두 심한 고난을 상징하는 말이다.

20절에서 내 심령이 그것올 기억하고는 19절에서 언급된 심한 고

난을 기억한다는 것인데, 원문에는 ‘그것을’에 해당되는 낱말이 없

다. “기억하고”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자코르 티제코르’인데, 강


조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래서 ‘확실히’ 또는 ‘진실로’라는 말을
첨가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기억하고’라는 표현은 도저

히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기억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


체험한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당즙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낙심이 되오나의 원문 ‘웨타쇼아하’는 ‘슈아하’(풀이 죽다)의 칼 • 3 인

청 • 여성 • 단수 • 미완료형의 ‘와우’-계속법이다. 3 인칭 • 여성 • 단
수로 된 것은 그 주어 ‘내 심령’이 여성 • 단수 명사이기 때문이며,
미완료형의 ‘와우’-계속법이므로 완료형의 뭇으로 번역해서 “내

심령이 풀이 죽었다” 곧 “내 심령이 낙심되었다”라고 한 것이다.


21 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가 이것을 내 마음에 다시 떠올린

다. 그러므로 나는 소망한다”로 된다. 중심에 회상한즉에서 우리말


성경에는 ‘이것을’이 생략되었고, ‘내 마음에’를 “중심에”로 옮긴
것을 얄 수 있다. “회상한즉”은 어떤 사실을 마음에 다시 떠올린다
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가 마음에 회상
한 사실은 그가 재난 속에서 낙심천만했던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

을 회상할 때, 오히려 그에게 소망이 솟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왜

냐하면 그렬 때 그는 오직 하나념만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었


3: 19-21 / 223

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설명했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 연약함을 느

껄수록 그것이 소망의 기초가 되는 법이다. 우리말 성경에 오히려

라고 된 말의 원문은 ‘알-켄’(그러므로)이다. 이 ‘그러므로’는 소망


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다. 소망이 었나이다의 원문은 ‘오

힐’이다. 이 말은 그 어간 ‘야할’(소망하다, 기다리다, 참다)의 히

필 • 1 인청 • 단수· 미완료형인데, ‘내가 옴소 소망케 된다’라는 뭇

이다. 이 말은 미완료형이므로 계속적으로 소망을 갖게 된다는 의

미로서 생각하면 할수록 소망이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우리말 성경이 이 ‘자인’ 연을 완결된 것으로 나타내지 않고, “소

망이 있사옴은”이라고 끝맺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

다. 그것은 그 앞에 오는 “중심에 회상한즉”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회상의 내용이 그 뒤에 오는 22절의 “여호와의 자비와 공

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주석난에


서 고찰한 바대로 ‘자인’ 연 3행이 충분히 독립성을 가진 짜임새를

갖추고 있는 데다가, 극심한 고초와 재난 때문에 그들이 철저히 낙


성하던 끝에 자신들의 연약함을 회상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께

로부터의 소망이 솟아남을 고백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소망이 있

나이다’와 같이 완결된 문장으로 번역했으면 더욱 좋았을 듯하다.


어떤 주석가는 사람이 자신이 당하는 극심한 재난을 생각하면 낙섬

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공훌을 생각함으로써 소망을 품게 된다

고 해석하고 있으나, 성서기자의 신앙은 오히려 철저한 좌절 가운

데 하나닝을 만나고, 자신의 연약함을 설감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오는 유형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 19절에서 말하고 있

는 외적인 고통과 내적인 동요가 시언을 절망으로 몰고갔으나, 그


가 재난 속에서 낙심천만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하나
224/ 예레미야애가

념만을 바라보게 되며 그에게 의지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그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그와 그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는 중거가 된다. 심판은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사람

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응훌


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헤트 ’ 연에서
는 야훼의 자비와 공훌에 관해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심판받는 사람이 실존적인 연약함을 고백하면

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내용으로 나타나 있다. “내 고초와 재난


을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
과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기도드릴 때에는 “하나님의 S영강이 그리
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벌 4: 7) 는
말씀을 믿고, 괴로움을 혼자 탄식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 호소
해서 위로받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게 되는 것이

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만일 나에게 기


도가 없었더라면, 더욱 크게 낙심했을 것이다. 기도로 이어지는

낙심은 소망의 기초가 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쩨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 : 5). 이

렇게 신앙인은 재난 중에도 소망을 노래하게 될 것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예수가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씀하신 뭇을 이
해할 것 같다(막 5 : 36).

뎌김-댐빼트
여호와의 자비와 공훌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합이니이다

이것이 아칭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크도소이다
3: 22-24/225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매 주석

여호와의 자비 의 원문은 ‘하써l 데 야훼’인데, ‘하째데’(헤쩨드의 복

수 연계형)는 ‘변함없는 사랑’이란 뭇이다. 그러한 야훼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진멸되지 않고’, 이렇게 살아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에 감

사함을 표현하고 있다. 공훌이 무궁하시므로 는 원문으로는 ‘키 로­

칼루 라하마우’인데, ‘키’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며, ‘로-칼


루’는 ‘그것들이 끝이 없다’ 곧 ‘그것들(뭉훌)이 무궁하다’라는 뭇이
며, ‘라하마우’는 ‘그의 공훌들’이라는 뭇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
님의 뭉훌이 무한하시므로’라는 말이다. 우리가 22절을 다시 번역

한다면 “야훼의 인애하심으로 인해, 곧 그의 공훌, 그것들이 무한


하시므로, 우리가 소멸되지 않았다”로 할 수 있다.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항이니이다 의 원문은 ‘로-타메누’다. ‘타메누’는 ‘타맘’(소멸되

다)의 칼 • 1 인칭 • 복수 • 완료형이다.
23절의 이갯이 는 원문에 없는 것이나, 우리말 성경에서 앞절과

관련시키기 위해서 첨가되었다. 아챔마다는 히브리어로 ‘랍베카럽’


인데, ‘베카렴’(아침들) 앞에 전치사 ‘라’(에 대해)가 붙어서 ‘매일

아침마다’라는 뭇으로 사용된다. 새로우니는 히브리어로 ‘하다심’인

데, 형용사 • 복수형이다. 그것은 복수 명사인 ‘아침’에 대해 서술

척 용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공

흩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말이다. 주의 생생은 ‘에무나테카’ 곧 ‘당신


의 성설’이라는 말이다. 성실 (fideli마)은 하나님 의 속성의 하나다.

그 명사의 어간 ‘에무나’는 여성 명사로서 ‘확고부동’, ‘안전성’, ‘성


226/ 예레미야애가

실’이라는뭇이다.
24절을 살펴보자. 내 심령에 이르기톨 곧 ‘내가 자신에게 말하기

를’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 신앙고백의 내용은

직역하면 “야훼는 내 기업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는 기대하리라”


로 된다. 나의 기업은 히브리어로 ‘헬레키’다. 이 말은 민수기 18장
20절에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

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하고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신 데서 처음으로 사

용되었다. 사람은 자기의 기업이 있는 곳에 마음을 쏟는다. 시인


도 하나님이 자기의 기업이므로 항시 하나님을 바라보겠고, 하나

님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 것이다. “내 싱령에 이르기를”은 ‘나


자신에게 심각한 심정으로 말한다 ’라는 돗이다. 그것은 지 • 정 • 의
의 갚은 콧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내가 저를 바라리라

는 원문으로 ‘오힐 로’다. ‘로’는 ‘그에 대해’ 또는 ‘그를 향해’라는

뭇이고, ‘오힐’은 그 어간 ‘야할’(희망하다, 기다리다)의 히필 • 1 인

청 • 단수 • 미완료형이다. 영어성경 (RSV) 은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1 will hope in Him) 라고 했고, 또 다른 영어성경 (NIV) 은

“나는 그를 대 망하리 라 .. (1 will wait for Him) 라고 했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에는 하나님의 어김없는 자비와 공훌의 확증이 아름답게 묘

사되어 있다. 먼저 고난받는 백성에게 충분한 위로가 엄한 것을 말


한 시인은,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흉을 새롭게 채워주시는 하
나님의 성실에 더할 나위 없는 감사를 드린 끝에,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내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겠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시인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절망척인 화절 가운데서도 “하나님
의 인애하심이 실로 다함이 없고, 하나님의 응훌하심이 분명히 끝
3: 25-27 / 227

이 없으시다”라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은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연속

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중언하고 있다. 시편 30편 5절에서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형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노래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토록 날마다 새롭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의 성실하섬에 대해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과 함께 “주님은 나의 기업이시니 주념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란 말은 하나님만이 나의 전부란 말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환난 많은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인내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환난과


곤고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념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되

는 것이다(롬 8 : 37). 이러한 우리의 기업이 되신 하나님은 사망


중에 우리의 생명이시요, 암흑 중에 빛이시다. 그는 진실로 환난
중에 피난처시요, 궁핍 중에 풍요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다.

댐-댐헤트
무릇 기다리는 써1 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장장히 기다림이좋도다

사람이 젊었을때에

멍에를메는것이 좋으니
228/ 예레미야애가

매 주석

위의 ‘테트’ 연은 히브리 원문에는 각 행이 ‘토브’(좋도다)로 시작

된다. 마치 예수의 산상수훈의 ‘여닮 가지 행복’과 같이 ‘사람이 ...

함이 좋도다’라는 형식인 것이다.

25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사람이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그


영혼이 그를 찾는 그 사람에겐 야훼가 좋도다n로 옮길 수 있다. 기

다리는 자에게는 원문으로 ‘레코와우’다. 이 말은 어간 ‘카와’(기다리

다)의 칼 • 능동분사 앞에 전치사 ‘레’가 붙고, 뒤에 3 인칭 • 남성 •


단수 접미어가 붙은 것으로서, ‘그에게 소망을 두는 자’란 뭇이다.
구하는 영혼에게 는 원문으로 ‘레네페슈 티드레웬누’다. ‘레네페슈’의

‘레’는 ‘ . . .에게’를 뭇하는 전치사이며, ‘네페슈’는 여성명사로 ‘영혼’

이란 뭇이다. ‘티드레웬누’는 그 어간 ‘다라슈’(찾다)의 칼. 3 인


청 • 여성 • 단수· 미완료형에 3 인청 • 남성 • 단수 접미어가 붙은 것
으로서, ‘그를 그녀 (영혼)가 찾을 것이다’라는 뭇이다. 그리하여 두

낱말이 결합되어 ‘그를 찾는 영흔에게’라는 뭇으로 나타난다. 여호


와째서 션융 배푸시는도다의 원문은 ‘토브 야훼’다. 이 말은 ‘야훼가
좋도다’라는돗이다.

26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사람이) 야훼의 구원을 바라고 조용

히 기다렴이 좋도다”로 옮길 수 있다. 여호와의 구현 이라는 구절에


서 “구원”은 ‘야샤아’(구원하다)에서 온 것인데, 예수 및 여호수아

라는 이름이 연관된 낱말이다. 바라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

힐’이다. 이 말은 형용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대함’( expecting ,

hoping) 이라는 뭇이다. 장장히 기다럽은 원문에 ‘두밥’으로 되어 있

다. 이 말은 부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말없이 기다렴’ (to wait

quietly) 이 라는 뭇이다. “사람이 ”란 말은 원문에는 없으나, 우리 말


성경에는 문장의 주어로서 첨가되어 있다. 좋도다란 말은 이 문장
3: 25-27/229

서두에 ‘토브’로서 자리잡고 있다.


27절의 사랍이는 1절에서 이미 나온 ‘게베르’로 표현되어 있다.

이 말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청장년을 가리킨다. 젊었융 빼


의 원문은 ‘비네우라우’인데, ‘1:11 ’는 ‘ ...동안’, ‘ ... 안에’를 뭇하는 전
치사이며, 끝에 있는 ‘우’는 ‘그의’에 해당되는 접미어다. 나머지
부분은 ‘나아르’(젊은이)의 여성 복수 명사다. 따라서 ‘그의 젊은
생애 동안에’라는 뭇이다. 멍에는 히브리어로 ‘올’이다. 이 말은 ‘곤
고’를 상정하는 말이지만, 주로 훈련된 교육을 워해 메워진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곤고의 멍에는 사람들이 기피하지만, 그것으로 인


해 연단된 자는 드디어 소망을 이루게 되고(폼 5:3-4) , 명강의 열

매를 맺게 된다(히 12:11).

m신학적 메시지

이 ‘테트’ 연에서 시인은 “사람이 어찌어찌 하는 것은 유익한 일

이다”라는, 마치 어린이 교육을 위한 교과서의 내용과 같은 형식으


로, 하나념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인상깊게 표현했다. 그

리하여 그러한 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성도있게 깨닫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야 하며, 그

러고 나서 주님의 구원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온다. 그리고 젊었을 때 고초와 시련을 겪고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후일의 복된 삶을 위해 매우 유익한 것이다.

자녀들에게 이런 교훈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책임감을 갖


고 그들을 교육해야 할 것이다. 만얼 그렇지 못해서 소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한다면, 차라리 연자뱃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는 예수의 경고가 현실척인 일로 나타나게 될 것이


다(마 18: 6). 우리의 자녀나 다른 사람의 자녀를 그릇된 길로 인
도하는 일은 곧 성령을 거슬리는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230/ 예레미야애가

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때에 그들에게 좋으시고, 또 그

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함이 좋은가를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

이다.
그 내용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특히 고통과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

라보며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복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그러

한 사람에게 자비와 공훌을 베푸시며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을 기

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시편 기자도


“너는 야훼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당대하며 야훼를 바랄지어다”

(시 27 : 14) 라고 권변했다. 세상에는 밤과 낮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슬픔이 있으면 반드시 기쁨이 있는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번

갈아 나타나는 것이 세상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언제나 즐

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슬픔이 있을 때일수록 “야훼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렴이 좋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


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에게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도다”

라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메워주

신다면, 그것은 교육을 위한 것이거나 정계를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하나
님께서는 결코 메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그것을 메

고 참고 기다리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멍에를 벤 자는 오히려 기

쁨으로 소망을 가지고 참고 견디며, 그 멍에를 감당함이 좋은 일인

것이다.

圖-멜요드
혼자 ~:l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업을티꿀에 댈지어다
3: 28-30 / 231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배불릴지어다

매 주석

이 ‘요드’ 연은 교육적 성격을 띤 앞 연의 계속으로 보인다. 이

본문은 성경 번역본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다. 70인역 헬라

어 성경과 영어 홈정역은 서술형으로 보았고, 개정표준 영어성경

(RSV) 은 권연(j ussive) 으로 보았다. 또 어떤 번역본 QB) 은 ‘좋도다’

의 구조로 된 앞 연의 계속으로서, 그 내용을 알기 쉽게 조목조목

제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27절에 이어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28절) , “업을 티꿀에 대는 것은 "(29절) “그의 뺨을

대는 것은 "(30절) 각기 “주께서 메우셨기 때문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수욕으로 배불렬 것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타이른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은 ‘ ... 지어다’와 같이

권연섞인 명령형으로 나타내고 있다.

28절에서 혼자 앉아셔 장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 ‘멍에’를 주께

서 메우셨기 때문임을 타이르고 있다. 곧 주께서 그것율 매우셨옴이

라고 표현했는데, 원문에는 ‘주께서’와 ‘그것을’이 없고, 다만 “왜

냐하면 그가 그에게 메우셨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절은 27절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9절의 업율 티플에 댈지어다에서 “댈지어다”의 히브리어는 ‘이텐’


(그가 줄 것이다)인데, 그 어간 ‘나탄’의 칼 • 3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이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권변형 (jussive) 으로 보고, “그로

하여금 주게 하라(대게 하라) "(Let him give (put)) 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표현은 동양적인 독특한 표현으로서 심히 낮아진 상태


232/ 예레미야애가

를 말한다(사 49: 23 ; 미 7: 17). 혹시 는 히브리어로 ‘울라이’인데,

불확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한다면, 결과

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을 보여주는 말이다(창 18 :

24 ; 호 8 : 7). 소망은 히브리어로 ‘티케와’다. 이 말은 ‘카와’(기다리

다)에서 파생된 여성 명사다.

30절은 자기를 때리는 자에게 뺨을 갖다대라고 하면서 오히려

그런 수모를 강수함이 좋은 일이라고 다시금 타이른다. 여기에 나

오는 ‘이댄’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권면형이다. 빼리는 자 곧 ‘마케

후’는 ‘그를 때리는 사람’이란 뭇이다. 여기서 때린다는 것은 때로

는 죽이는 일까지를 포함한 강한 표현이다(삼상 18 : 7). 수욕 은 욕

설을 의미한다. 배불릴지어다는 원문으로 ‘이스바아 ’인데, ‘사바아’

(만족하다)의 칼 • 3 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 (He will be satisfied)


이지만, 권면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m 신학적 메시지

여기에서는 앞 연과 마찬가지로 겸손히 기다리며 장장할 것을 가

르쳤고, 업을 티끌에 대기까지 회개하며 겸손할 것을 권연했다.


그래야만 소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마주해 있는 상대
는 이제 업을 대지에 댄다. 그리고 매맞고 쓰러진 상태에서 “내 희

망은 깨어져도 주여 뭇대로 하옵소서. 내 희망 대신 주님의 희망,

이것만이 확실한 희망업니다”라고 기도한다.


칼빈은 이 부분을 해석하며 말하기를, 성실한 성도는 하나님 앞
에 겸손히 엎드려 스스로 탄식하며, 자기는 벌써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라고 했다. 본문에

서 “업을 티끌에 탤지어다”라는 말은 사람이 심히 낮아지고 겸손할


것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업을 봉하고 아무런 불

평 없이 온천히 순종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표현


3: 31-33 / 23 3

은 ‘잠잠히 기다리는’ 일과도 연결이 된다. 심히 낮아지고 겸손한

태도로 잠잠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참으로 인내하여 기다렬 줄 아는 신설한 사람은 자


기를 때리는 자,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자에게 뺨을 맡길 것이다.
그리하여 능히 수모를 감수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

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즉 종국의 회복에 대한 희망으로 고난을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댐J- 옆최 카프
이는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비록근심케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공훌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매 주석

이 ‘카프 ’ 연도 앞 연의 연속이다. 여기의 31 절, 32절, 33절이

한결같이 문장의 서두에 알파뱃 두운법 (acrosric) 에 맞추어서 ‘키 ’

(왜냐하면, 그 까닭은)라는 낱말이 나와 있다.

31 절을 직역하면, “그 까닭은 주께서 영원토록 배척하지는 않으

실 것이기 때문이다”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버린다’는 히브리


어로 ‘이제나흐’인데, 그 어간 ‘자나흐’(거절하다, 배척하다, 내어쫓

다)의 칼 • 3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32절은 역시 ‘키’로 시작되면서 “비록 그가 고통과 근심을 초래
234 / 예레미야애가

하시더라도 그의 자비하심이 큰 것만큼 그가 공훌을 베푸실 것이

다”라고 안심시키는 내용이다. 져가 …근심케 하시냐는 원문으로는

‘호가’다. 이 말은 ‘야가’(슬퍼하다)의 히펼 • 3 인청 • 남성 • 단수 • 완
료형으로서 ‘그가 슬픔을 초래했다’, ‘그가 고통케 했다’라는 뭇이
다. 그 풍부한 자비대로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자비의

풍부함에 따라서”다.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인데,

이것은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광범위한 의미 를 갖는 낱말


이다. 이 말은 흔히 ‘자비’, ‘응흉’, ‘인애’, ‘신설’, ‘선하심’, ‘경

건’, ‘충성’, ‘친절’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말이다. 공훌히 여기

질 것엄이라는 원문으로 ‘리함’인데, 이 말의 어간 ‘라함’(부드럽다,

애듯하다, 인자하다)의 피엘 • 3 인청 • 남성 • 단수 완료형으로서, ‘그

가 애정을 나타냈다’라는 뭇이다. 여기서는 ‘와우’ - 계속법으로 사


용됨으로써 ‘그가 응훌히 여기실 것이다’로 된 것이다. 이 ‘라함’이

란 말은 모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해서 깊은 동정과 사랑을 표시

하는 말이다.
33절도 ‘왜냐하면’을 뭇하는 ‘키’로 시작된다. 원문 서두에 나오

는 ‘키 로 이나 멀리보’를 풀이하면 “그 까닭은 그가 그의 진섬에서


괴롭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나’는 ‘그가 괴
롭혔다’라는 뭇이며, ‘멀리보’는 ‘그의 마음으로부터’라는 돗이다.
‘주께서’라는 구절이 원문에는 없으나, 31 절과 연관시켜서 주어로

삼은 것이다. 인생으로… 근심하게 하심 이라는 구절에서 ‘인생’은 원

문에 ‘사람의 아들들’로 나타나 있다. “근심하게 하섬”은 원문으로


는 ‘와우’-계속법으로 된 ‘와이야게’다. 이 말은 32절에 이미 나온

‘야가’의 히필 • 3 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33;셜을 다시 번


역하면 “그 까닭은 그가 인생 (사람의 권속)을 진심에서 괴롭히고

슬프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로 할 수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3: 34-36/235

여기에서 시인은 독자에게 회개에는 반드시 소망이 따른다는 것

과, 하나님의 정계는 잠시 동안에 불과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참

마음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공훌과 자비를 맛보아 아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혹시 우리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엄청난 실

패를 맛보았다고 해서 영영 자포자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곧 하나

님의 무궁한 자비와 응훌을 아직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고난은 단지 잠깐인 데 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응훌은 무한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

신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의 배후에는 하나

님의 사랑이 있다. 따라서 환난은 하나님의 숨기신 사랑의 선물이

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호 6: 1 ;사 54: 8 ;용 5 : 18).

이 ‘카프’ 연은 각 절이 이유를 말하는 ‘키’라는 접속사로 시작된

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기다렴’과 ‘인내’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


는 말이다. 이 연에서 시인은 우리가 환난 중에 참아야 하고, 소망

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근거와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리의 위로와 소망의 근

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로 고생케 하며 근섬케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연단하고 성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참아가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녕김-圖라멧
세상에모든갇힌지를

발로밟는것과
236/ 예레미야애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매 주석

이 ‘라멧’ 연은 외형적으로는 갇힌 자를 학대하는 일, 사람을 불

의로 재판하는 일,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기쁘게 여

기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심오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감

에 있어서 위로와 소망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

다.
34절의 방는 것, 35 절의 뭄게 하는 것, 36철의 억울케 하는 것 은

한결같이 전치사 ‘레’+부정사 연계형의 형식을 취해서 ‘ ... 함에 관

해서는’이라는 뭇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항목이 맨

끝 구절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에 결부되어 그 목

적구가 된다. “밟는 것”은 원어로 ‘레다케’인데, ‘다카’(밟아 으깨

다)의 피옐 • 부정사 • 연계형에다 전치사 ‘레’가 그 앞에 붙은 낱말


이다. 발로는 ‘그의 발 밑에’란 뭇의 ‘타하트 라젤라우’다. 써상에
모든 갇힌 자 라는 구철은 원문대로는 ‘그 땅의 포로들 모두’라고 번

역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바멜론에 끌려간 포로들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스라엘의 포로들만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란 말의 원문은 땅을 뭇하는 ‘아레츠’로 표현되어 있는데,


한 지역을 념어 지상의 도처에 있는 약자들을 뭇했을 것이다.

35절의 지극혀 높으신 자는 히브리어로 ‘옐레용’이다. 사랍의 째판

은 ‘사람의 권리’ 또는 ‘사람의 바른 도리’를 뭇하는 ‘미슈파트 가베


3: 34-36/237

르’라는 히브리어로 쓰였다. 그러므로 많은 현대어 성경에는 본문

의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을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


또는 ‘사람의 바른 행동을 왜곡시키는 것’이라는 뭇으로 보았다 (To
turn aside the cight of a man) • ‘미 슈파트 가베 르’ (j ustice of a man) 라는
히브리어의 표현은 ‘사람의 재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의 권

리’, ‘사람의 바른 도리’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가

베르’(사람)는 집합단수, 다른 말로 대표단수이므로 단수이지만 ‘사


람 일반’을 뭇한다. 뭄게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레하토트’인데, 앞

서 설명한 대로 전치사 ‘레’+부정사 연계형이다. 이 말은 그 어간

‘나타’(옆으로 비끼다)의 히필 • 부정사 연계형 앞에 ‘레’를 붙인 것

으로서, ‘굽게 하는 것’ 이외에 ‘뒤집어엎는 것’ 또는 ‘빼앗는 것’이

라는뭇도 있다.

36절의 사랑의 송사는 원문대로 칙역하면 ‘그의 송사에 있어서 사

람을’로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사람을 억울케 하는 것”으로 읽어


야 할 것이다. 영어성경 (KJV , RSV) 은 “한 사람을 그의 송사에 있
어서 파멸시키는 것 "(To subvert a man in his cause) 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의 ‘사람’은 ‘아담’으로 표현되었는데, ‘아당’은 ‘이슈’나 ‘가베

르’보다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36절에서 어려운 문제는 다 주의 기


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라고 한 하반철이다. 그 원문은 ‘아도나이

로 라아’(주께서 보시지 않으리로다)인데, 영어성경 (KJV) 은 “주께서

인정 (숭인)하지 않으신다”로 번역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보신다는 것으로는 뭇이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은 그래서

‘기쁘게’란 말을 보충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 본문은 번역상의


난제가 있으나, 문맥상 그 나타내는 뭇은 분명하다. 곧 하나님께
서는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을 결코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

드시 악한 자를 심판하시리라는 말이다.

m 신학적 메시지
238 / 예레미야얘가

여기에서 시인은 세상에서 포로된 자를 잔인하게 다루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굽히고 사람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것과, 송


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문란시키는 것이며,
주께서 기쁘게 보시지 않고 오히려 진노하셔서 성판할 것이라고 경

고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말은 그 당시의 포로로 끌려가서

핍박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밖에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

는 억눌린 백성들에게는 위로와 소망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

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것을 보시고 책망하신다는 것을 확
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불의하게 행하는 것을 미워하신다. 정의를 굽게 하는 것은 종교적

요인이든 정치척 요인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을 받을 것이다. 시인은 분명히 선포하기를 인간의 고난은 결코 하

나님의 의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애당초에 인간 자신의 악행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35절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

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은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의사에 거슬려서 사람의 본연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이
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본연의 모습이다. 출애

굽기 33장 20절에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

가 없음이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아무도 하나님의 본성을 밝히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뭇한다. 출애굽기 33장 23절에서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한 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본성은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시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본문에 열거한 악행들이 모두 하나님

의 본연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반드시 진노와 형벌이 따르리

라는 컷을 역설한 것이다.
3: 37-39 / 239

렘-탤김영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m 주석

37절은 원문을 쉽게 풀이하면 “주께서 명하지 않으신다면, 누가

그 일을 말하고 또한 성취할 수 있겠는가 7"로 표현된다. 참성취는


하나님의 뭇을 따름으로써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철은 시편

33편 9절의 “저가 말하시매 이루었으며 영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

고 한 말씀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말하여 야루게 는 창세기 1장 3

절의 “있으라 하시매 있었고”와 같은 표현이다. 본문의 “말하여 이

루시다”는 원문으로 ‘아마르 붓테히’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또는

‘그가 지시했다’란 뭇의 ‘아마르’는 칼 • 3 언청 • 남성 • 단수 • 완료형


이지만, ‘붓태히’는 ‘와우’-계속법의 3 인칭 • 여성 • 단수 • 미완료형
이다. 그 어간은 ‘하야’(존재하다, 이룩되다)이며, 그 주어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해진 명령이다. 주의 명령이 아니연 을 그 원문대로

옮기면 “주께서 흠정하지 않으셨다(연)"로 표현된다. “명령”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는 ‘치와’인데, 그 어간 ‘차와’(명령하다, 홈정하다,

제정하다)의 피옐 • 3 인청 • 남성 • 단수 • 완료형으로서 ‘그가 홈정하


셨다’라는 뭇이다. 아모스 3장 6절에서는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
고야 재앙이 어쩨 성읍에 임하겠느냐”라고 했는데, 모든 것 이 하나
240/ 예레미야애가

님의 명령과 그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상과 관련이

있다.
38절의 화는 원어로는 ‘라오트’인데, 추상척 복수· 여성 명사다.

이 말은 ‘곤고’, ‘재난’, ‘악’을 나타내는 말로서, 인간의 육체적인

비참한 재화를 가리킨다(암 3: 6; 사 45 : 7). 복은 ‘토브’로 표현되

며, ‘번영’, ‘복리’ 등을 가리킨다. 이것 역시 육체적인 좋은 일을

말하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라오트’ 및 ‘토브’는 정관사 ‘하’를 앞

에 붙여서 사용된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요로 는 ‘미피 엘레용’이

라고 표현되었는데, ‘미’는 ‘ ... 로부터’라는 뭇이며, ‘피’는 ‘입’이란

뭇의 남성 • 단수 명사 연계형이다. 나오지 아니하냐의 원문은 ‘로

테체’언테, ‘테체’는 그 어간 ‘야차’(나오다)의 칼 • 3 인칭 • 여성 • 단

수·미완료형이다. 따라서 이 말의 주어는 여성 영사인 ‘화’인 것

이다. 본절은 앞절의 구체적인 설명인 셈이다.


39절을 직역하면 “사람이 그의 죄로 인하여, 살아 있는 사람으
로서 무엇에 대해 불명할 수 있으랴”라고 표현된다. 여기의 ‘그의
죄’는 단순한 죄를 의미하기보다는 ‘그의 죄’의 결과인 형벌을 의미

한다는 것이 성서기자들의 함축된 생각이다(창 4: 13). 따라서 사


람이 그가 지은 죄로 인해서 재난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유한한 인
간이 원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의 살아 있는 사랍은 원문에는
‘아담 하이’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사람을 뭇하며, 부족한 피조

물임을 나타낸다. 자기의 최로 벌융 받나니는 원문을 의역한 것이

다. 그 원문은 ‘게베르 알-하타아우’인데, 직역하면 “사람이 그의

죄 때문에”가 된다. 우리말 성경에는 ‘게베르’(사람)를 생략한 후,


‘자기 최 때문에’에다 그 죄의 결과인 ‘벌’을 첨가해서 의역한 것이

다. 그러나 어떤 영어성경 OB}은 사람이란 뭇의 ‘게베르’를 ‘굳센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 구절을 “사람은 자기의 죄에 대항해 담대

함이 마땅하다" (Better for him to be bold against his sins) 로 번 역 했 다.

어찌 현망하랴는 원문으로 ‘마-이트오넨’이다. 이 말은 ‘무엇’ 또는


3: 37-39/241

‘왜’를 뭇하는 ‘마’와 ‘아난’(슬퍼하다, 불명하다)의 헛파옐 • 3 인칭 •

남성 • 단수· 미완료형의 동사가 결합된 말로서, ‘어찌하여 슬퍼하

느냐’라는뭇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하

나님은 인간에게 때로는 화를 내리시기도 하며, 때로는 복을 주시


기도 한다. 그가 일찍이 신명기 30장 19절에서 모세를 통해서 “내
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중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
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는 생명과 복을 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람이 사망과 저주를 택하면 악을 행할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셨으니 사람이 재


앙을 받더라도 종당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언은 사람의 책임을 이야기하면서, 사람이 고난을 당

한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 없는 처지임을 역설한다. 사람

은 자기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형별을 받는 것이므로 불명할 것이


아니라 다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화를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


러나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억울하다고 지나치게 애통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화와 재난은 인간의 죄가 불러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대리인으로서 인간들은 그 당연한 결과로 형벌
이 뒤따르는 악을 선돼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범하
고서 받게 되는 고난에 대해 불형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자기에게

고통을 안겨다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 그러는 가운

데 그 형벌을 감수하면, 그 고난은 축복의 방편으로 전환될 수 있

을것이다.
242 / 예레미야애가

하나념의 돗은 항거할 수 없다. 책임은 우리들 인간에게 있는 것

이다. 인간은 자기의 뭇을 하나님의 뭇에 순응하게 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하심이 아니고서 자기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계획하고 성취할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

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화와 재난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사 45 : 7 ; 암 3 : 6). 우

리는 가끔 재난 같은 것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시키심에 따라 나타

날 수 있을까 하고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재난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재난


때문에 더욱 성숙한 인간성을 갖추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더욱

귀히 쓰시는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큰


재난도 복으로 전환될 수 있다. “하나님의 뭇대로 부르심을 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롬 8:

28).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의 죄에 대해서만 탄식해야

한다. 또한 자기 죄에 담대히 대항해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한

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죄 때문에 받는 형벌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해

야 하는 것이다.

3) 회개의 권면 (3 : 40-48)

매 개요

이 부분은 먼저 간곡한 회개의 권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부


개요 / 243

분이 앞부분과 다른 점은, 주어가 1 인청 복수형 ‘우리’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일관된 것이연서도, 여기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심

도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부분에서 시인이 호소하는 주제는 세

가지인데, 스스로 살피고, 회개하고, 성실하자는 것이다. 그리하


여 그는 스스로 동족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호소했

던 것이다.

시인은 백성들의 죄악과 반역 때문에 고난과 형벌이 임했으므로

우선 그들에게 스스로의 행위를 살피고 회개해서 하나님께로 돌아

갈 것을 호소했다. 그는 그들이 최소한 그들의 상태를 정직하게 반

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이 신앙과 행위의 정상적 관계의 실

천적 태도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이 받은 고난의 의미와 목


적을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목적은 그들이 하나
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돌아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

브’는 ‘회개한다’라는 의미다. 시인은 인간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


서 필요한 방편인 기도를 통해서 간절히 스스로를 반성할 것과 기

도할 때에는 하나님께 마음과 손을 함께 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쏟아내라는 돗이다. 여기서 마음을 강조

하고 있는 것은 기도가 진실하게 되기 위해서는 간구하는 외적인


행위와 더불어 내적인 순종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반성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 반역한 일이 재난의 원인이

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때 그들이 범죄하고 패역함을 고백하면서

경건한 슬픔 곧 애통함이 수반된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써 나타나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첫째, 하나님의 자비를 막아버

렸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회개할 때까지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

신다. 둘째, 무자비한 형벌을 초래한다. “주께서 살륙하시며 공훌


을 베풀지 않으신다" 셋째, 범죄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244/ 예레미야애가

된다. 최 악의 구름이 사람과 하나념 사이를 가려서 “기도가 상달될

수 없다" 사람이 반역에서 돌이킬 때에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

‘신다(시 66 : 18). 넷째, 수모와 슬픔을 가져온다. ‘주께서 우리를

쓰레기와 폐물처럼 삼으셨기 ’ 때문이다. 다섯째, 살륙과 혼란을 초

래한다. ‘두려움과 함정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라는 말과 같이 재


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

매를 맺으라”고 권면한 것이다(마 3 : 8).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인식
해야 하며,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야훼 하나

님께 돌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제 시인이 자기 백성들

의 죄와 반역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결과를 꼼꼼히 생각하면서 중보

의 기도를 드린 것을 본받아, 우리도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어

야 할 것이다. “내 동족의 따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릅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멕-뎌김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돌아가자

마음과손을이울러

하혈l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힘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매 주석

40절에서는 우리의 죄에 대해 스스로 살핀 다음, 탄식하고 회개


3: 40-42 / 245

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


로 하여금 ... 케 하자’ (Let us.. . )의 뭇으로 나타나는 1 인청 • 복수 • 미
완료형 +자청형 ‘헤’ (Volumative he) 형식의 동사가 연달아 세 번

나온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훌 조사하고는 원문으로 ‘나흐페사 데라

케누’인데, 직역하면 “우리의 길을 우리가 살피자”라는 말이다.


‘데라케누’는 ‘데레크’(길)+‘누’(우리의)이며, ‘나흐페사’는 그 어간
‘하파스’(살피다, 탐색하다)의 칼 • 1 인칭 • 복수 • 미완료+ ‘헤’인데,
‘우리가 살피자’라는 뭇이다. 그리고 원문에는 t워나흐코라’가 덧붙

여져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생략된 셈이다. 이 말은 ‘그리고


우리가 검사하자’라는 뭇인데, ‘하카르’(검사하다)의 칼 • 1 인칭 • 복

수 • 미완료형 +‘헤 ’ 앞에 ‘워 ’(그리고)가 붙은 낱말이다. 우리말 성


경은 돗이 비슷한 두 동사를 하나로 묶어서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라고 번역한 것이다. 여호와체로 톨아가자는 원문으로 ‘워
나슈바 아드-야훼’다. ‘워나슈바’는 ‘워’(그리고)+‘나슈바’(우리가
돌아가자)인데, ‘나슈바’는 그 어간 ‘슈브’(돌아가다)의 칼 • 1 언청 •

복수 • 미완료형 +‘헤’다. ‘아드-야훼’는 ‘여호와께로’라는 뭇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옐-야훼’가 있는데, 이 말이 야훼를 향해 가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드-야훼’는 분명한 목적지의 어떤 지

점을 말한다.
41절에서 마융과 손율 아울러 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우리의 마음

을 양손바닥에 향하여”가 된다. “손을 아울러”에 해당되는 원문은


‘옐-카파엄’인데, ‘옐’은 ‘ ... 에 향하여’ (co) 이지만 ‘더불어’ (cogether
with) 라는 돗도 있으므로 ‘손을 아울러 ’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

런데 ‘카파임’은 ‘카프’(손, 손바닥)의 쌍수다. 어떤 학자는 ‘우리의


마음을 양손바닥에 받들어서’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째는 원문으로 ‘옐-옐 바샤마임’인데, ‘옐-엘’은

‘옐’(하나님)을 ‘옐’(향하여) , 곧 ‘하나님’과 ‘ ... 에게’가 비슷한 발음

이기 때문이다. ‘바샤마임’은 ‘샤마임’(하늘)이 ‘바’(안에)와 결합되


246 / 예레미야애가

어 ‘하늘에 계신’이라는 뭇이 된 것이다. 들자의 원문은 ‘니사’다.


이 말은 그 어간 ‘나사’(쳐들다)의 칼 • 1 인칭 • 복수 • 미완료형인데,

이 낱말 끝에는 ‘헤’가 없지만 ‘우리는 쳐들자’ (Let us lift up) 라는 자

청형 (Volunrative 또는 Cohortative) 으로 사용된 것이다.

42절부터 기도의 내용이 시작된다. 서두에 나오는 우리의라는 말

은 원문에서 ‘우리가’와 같이 1 인칭 복수 대명사가 주어로 사용되

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는 원어로 ‘아나헤누’이지만, 두운법에 맞

추어 히브리어 ‘눈’자가 처음에 나오게 하기 위해서 ‘나헤누’라는

단축형이 사용되었다. 42절 전체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우리는 범

죄했습니다. 그리고 반역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셨습

니다”로 표현된다. 범최함은 ‘파샤아누’(우리가 범죄했다)라고 원문


에 나타나 있고, 패역함은 ‘마리누’(우리가 반역했다)로 나타나 있

다.

매 신학적 메시지

우리는 앞의 연에서 우리의 죄의 결과로 오는 재난을 탄식할 것

이 아니라, 우리의 죄에 대해서 뒤우치고 슬퍼해야 한다는 것을 교

훈으로 깨닫게 되었다. 시인이 역설하는 교훈은 우리가 죄의 결과

를 슬퍼하면 죽음밖에 없으나, 고통의 근원인 죄에 대해서 슬퍼하

면 소망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연에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를 조사하자”고 시

인이 권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행위’는 히브리어로 ‘데레


크’(걸)로 나타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생활방
식과 도덕적 행동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그러한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를 낱낱이 파헤쳐 드러내어 검토하고 바로잡자는 뭇이다. 그


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우리의 본연의 하나님 의존관계를 회복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그 원점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마땅히 가야


3: 43-45 / 247

할 길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을 돌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써 우리의 실존이 바로잡히게 하는

일이다(시 109 : 59).

그러나 이러한 일이 현실에 나타나게 될 실존적 비결의 전제조건

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철저히 확신하는 일이다. 이처럼 신

앙과 행위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우리의 실존적 비결이 현실성을 갖


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까탑에 시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로 전면적으로 향하게 해서 기도할 것을 권변하게 된 것이다. 그야

말로 진실되고 진지하게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용 2 : 13). 그래야만 하나님의 용서의 놀라운 일을 만끽하게 된다

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되고 진지한 기도는 자기의 죄를 기탄없이

고백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패역함”

은 모든 재난의 원인이며 뿌리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고백함으로

써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실존이 바로

깝힐 것이며, 동시에 모든 재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42절 이하부터 66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기도 내용이

다. 기도할 때에는 먼저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그

래서 “우리가 범죄하고 패역했나이다”라고, 백성들을 대변해서 고.'


백했다. 그리고 그 고백에는 애통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주님께

서 사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통곡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되


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할 때까지는 용서하

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개란 첫째로, 자기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구체적인 고백을 의미하며, 둘째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갈망하는 태도이며, 셋째로, 모든 삶을 주께 온전히 맡기고 오직

그분의 교훈과 법도와 뭇에 따라 살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

다.
248 / 예레미야애가

댐-딩릴싸액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응훌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열방가운데서

진개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

m주석

우리가 만일 죄 용서에 대한 보증과 위로를 강요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가열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의 존재는 쓰레기와 같이 폐기되

고 말 것이다(고전 4 : 13).

43절을 직역하면 “당신은 진노로 감싸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추격하셨습니다. 당신은 살륙하셨습니다. 용서치 않으셨습니다”로


된다. 스스로 가리우시고는 원문으로 ‘싸코타’인데, 그 어간 ‘싸카

크’(덮다, 감싸다)의 칼 • 2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이다. 원문에

는 ‘스스로’라는 말이 없으나, 문맥상 하나님이 스스로를 강썼다는


뭇으로 나타나 있다 (You have covered yoursel f). 이 말은 하나님이

한껏 노하셨다는 못이다. 우리툴 군축하시며 는 원문에 ‘와티르데페

누’로 되어 있다. 이 말은 그 어간 ‘라다프’(추격하다, 뒤쫓아서 괴롭

히다, 법박하다)의 ‘와우’-계속법 • 칼 • 2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


형에 1 인칭 복수 대명사 접미로서 ‘당선이 우리를 추격하셨다’라는

뭇이다. 응훌올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는 ‘로 하말타’인데, ‘하말타’

의 어간 ‘하말’은 ‘공훌히 여기다, 용서하다’라는 뭇이므로 “당신이


3 : 43-45 / 249

용서치 않으셨나이다”라는 말이다.

44절은 직역하면 “당신은 구름으로 당신을 감싸셨습니다. 기도


의 상달(한계)을 념도록”이다. 우리말 성경의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에서 “기도”는 히브리어로 ‘테필라’다. 그리고 ‘상달치 못하


게 했다’라는 원문은 기도의 통로가 격리되었다는 의미다. 그 원문

은 ‘메아보르’인데, ‘메’는 ‘민’( ...로부터,를 넘어, ...를 벗어나서)


의 단축형이므로 ‘아보르’(상달, 도달)의 격려상태를 뭇한다. 따라

서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구름으로 스스로 감싸고 얼굴을 가리

셨기 때문에, 기도가 구름의 두꺼운 충을 뚫고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다는 말이다.
45절을 직역하면 “당신이 우리를 뭇백성들 사이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만들고 계십니다”라고 해야 한다. 진개는 히브리어로 ‘써l 히’

인데, ‘쓰레기 또는 배셜물’을 말한다. 혜물은 원문으로 ‘마오쓰’인


데, ‘쓸데없는 것’을 의미한다. 삼으셨으므로는 히브리어로 ‘테시에

누’인데, 어간 ‘스므’(세우다, 만들다)의 칼 • 2 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에 1 인청 ·복수 대명사 어미가 붙은 것으로서, ‘당신이 우리

를 …로 만드십니다’라는 뭇이다. 열방은 ‘하암멈’인데, 정관사 ‘하’

+‘암’(백성)의 복수형이다.

m신학적 메시지

이 연은 42절에서 시작되는 기도문의 연속언데 , 이 기도는 이

노래의 끝인 66절까지 계속된다. 이 연에서는 하나님의 척극적인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하게 된 것을 탄식하며 기도를 드린다. 이때
시인은 동족을 대표하는 가운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

심을 고백한다. 우리의 고난은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명을 일삼는다. 하나념이 진노로 얼굴을 돌리

고 계속척으로 우리를 핍박하신다고 불명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250 / 예레미야애가

구름으로 스스로를 단절하심으로써, 우리의 기도에 귀기울이지 않

는다고 불펑하기 일쑤다. 그리고 최 용서에 대한 보증과 위로가 없

다고 해서 불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


다. 그대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시인의 기도는 결코 그런 불평의 발설일 수 없다. 그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당연한 처사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응하는 것이며, 찬양하는 심정으로 고백하는 내용인 것이다. 흔

히는 시련이 길어지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의 존재를 의심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인의 기도에는 추호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


심하는 내용이 없다. 그는 하나님이 항상 계셔서 기도를 들으신다

고 믿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질적 차이를 인식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쓰 레기더미에 내던

져진 진개와 폐물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가장 천한 자로

서 구경거리가 되었고, 뭇백성들 가운데서도 마땅히 치욕의 대상


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다가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

고 난 다음, 때가 되어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는 날, 거룩한 백성으

로 격상될 소망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 일 하나만을 위해서도 하


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한 일이다. 더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사실을 깨닫는다는 일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뎌희-딩회페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크게 별렸나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3: 46-48 / 251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m 주석

두번째 비탄의 노래 (제 2장)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아

인’과 ‘페’의 순서가 바뀌어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잔에 이론

이 분분하다. 아마도 알파뱃의 순서가 옛날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페’ 다음에 ‘아인’이 쓰이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네번째 비탄의

노래(제 4장)에서도 이와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46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모든 우리의 원수들이 그들의 업을

우리를 대항하여 벌렸나이다”가 된다. 이 말은 시인이 하나님께 기


도하는 가운데 원수들이 그들을 삼키려는 듯이 맹렬히 침략해 들어

오고 있음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우리를 향하여 의 원문은 ‘알레누’

인데, 전치사 ‘알’은 여기서는 ‘방향’을 말하고, ‘누’는 ‘우리를’이라

는 뭇이므로, ‘우리를 거슬러서’라는 말이 된다. 업올 크게 벌렸나이

다란 말에서 “크게”란 말은 원문에는 없으나, 우리말 성경을 위시


해서 몇몇 현대역들 (RSV, NIV) 이 강조하는 뭇에서 ‘벌리다’ (open)

‘크게’ (wide) 를 보충해서 의역했다. 그리고 “벌렸나이다”의 원문은

‘파추’인데 , 그 어간 ‘파차’의 칼 • 3 인칭 • 복수 • 남성 • 완료형으로

서 ‘그들이 벌렸나이다’라는 뭇이다. 그런데 이 어휘는 ‘삼킨다’는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예를 들면 땅이 사랑을 삼키려고 벌릴 때(창
4: 11 ; 민 16: 30 ; 신 11 : 6) , 또는 원수들이 그 백성을 멸하려고 덤
벼들 때 (시 22: 13) 등에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때는 주로 전

치사 ‘알’(대항해서, 거슬러서)이 수반된다.

47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두려움과 함정이 우리에게 있나이

다. 곧 그 황폐와 그 파괴가”로 된다. 두려웅과 함청이란 표현은 예


레미야 48장 43절 및 이사야 24장 17절에도 나온다. 이 말에는 각
2'2 / 예레미야애가

기 정관사가 없고, 뒤에 오는 그 황왜와 그 파괴 에는 각기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이 이상스럽다. 우리에게 임하였도다는 원문으로 ‘하야

라누’인데, ‘하야’는 ‘존재하다’, ‘발생하다’라는 뭇이며, ‘라누’는


‘우리에게’란 뭇이다. 우리말 성경에 잔해라고 번역된 원문 ‘핫셰트’

는 ‘때려부수어 폐허로 만든 상태’라는 뭇으로 정관사+여성 • 단

수 • 명사다. 멸망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핫샤베르’는 ‘산산이 부


서진 상태’라는 뭇으로 정관사+남성 • 단수· 명사다. 그런데 모든
현대역은 ‘잔해와 멸망’에서 정관사를 생략하고 번역했다.
우리말 성경대로 48철의 내 운에 눈물이 시내처렴 흐르도다는 의역

한 것으로서, 원문에는 ‘내 눈’이 주어로 되어 있다. 원문대로 직

역하면 “내 눈이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물의 줄기를 흘려


내린다”로 된다. “눈물이 시내처럼”은 원문으로 ‘팔레게 -마 임’(물

의 줄기 -streams of waters) 이다. 두 낱말은 각기 남성 • 복수 • 명사

다. “흐르도다”의 원문은 ‘테라드’인데, 그 어간 ‘야라드’(흘러내리


다)의 칼 • 3 인칭 • 여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그것은 주어인 ‘내
눈’ 곧 ‘에니’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문의 돗은 눈

물이 내 눈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되어서 시뱃물처럼 흘러내린

다는 말이다. 쳐녀 내 백생은 원문대로는 ‘딸 내 백성’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시인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원수들이 유다 백성을 해치려고 업을 크게 벌리고 달려

들고 있다는 말로써, 그들이 멸망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리고 그 백성의 파멸 때문에 시인 자신이 눈물을 강물

처럼 흘리고 있음을 호소했다. 여기에서 ‘업을 크게 벌렸다’는 말

은 첫째로, 원수들의 잔인한 공격과 사정없이 살륙하는 모습을,

마치 사나운 짐숭아 먹이를 삼키려고 업을 벌리고 달려드는 형상으


개요 /253

로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다. 둘째로, 땅이 갈라져서 죄를 범한 사

람들을 함몰시키는 상황을 방불케 한 것이다. 그리고 ‘업을 벌렸


다’는 말의 EE 다른 함축된 의미는 원수들이 업을 크게 벌려 저주

하며 모욕하는 것을 상정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혼히 핍박을 당


하는 자가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심한 저주와 수모를 당한다는 것

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인 것이다(시 22:6-7 , 13). 시인은

그 백성이 멸망당하는 결정적 국변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면


서, 그 자신은 눈물을 시뱃물처럼 쏟았던 것이다(캠 14: 17 ; 시

119: 136).

47절에 언급된 모든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은 그 백성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거역한 결과다. 유다 백성이 죄의 무서운 결과

를 알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그들 자신의 최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48절 이하에서는 주어가 복수에서 단수로 바뀌어 있


다. 이것은 시인이 백성의 대표로서 흩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

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계약백성의 따멸의 운명을

슬퍼하며 눈물을 쏟은 것이다. 그런데 이 시언의 통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 연으로 념어가면서 계속된다.

4) 구원의 간구와 회 개 (3 : 49- 54)

매 개요

시인의 중보의 기도는 이 부분에서 더욱 애절하며 숨이 끊어질

듯한 통곡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살펴주시


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는 엄청난 체력의 소모를 무륨쓰고 기도
254 / 예레미야애가

를 계속한다. 시인이 그 백성을 대신해서 ‘나’라는 입장에서 하소

연하는 그 비극적 현실은, 어느 누구도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

이었다. “내 눈이 내 심령을 녹입니다”라는 표현은 그의 생명이 가


물가물 꺼져가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한다(시 31: 9-1 이. 그는 죽은

자와 같다고 고백했다. 그는 쫓겨 기진맥진해진 ‘새와 같이’ 박해

자들의 공격 앞에서 절망상태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그를 구덩이

와 무덤에 던져놓고 그 위에 돌을 던지는 것이다. 이제는 죽여 매

장했으므로 부활의 가능성조차 없다. 버림받은 자는 “이제는 멸절

되었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시 31:22).

그러나 고난받는 그들을 지격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시인의 중

보기도의 간구를 달래줄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

는 시인의 기도는 그 백성들의 회개를 이끌어 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신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다면 만

사가 잘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시 80 :


19 ; 단 9: 17). 하나님이 그들을 은혜롭게 살피시고 구원하실 것을
그들은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이 애통하기를 계속하고, 기다리기 를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콧으로부터 구원을 기

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회복만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

을뿐이다.

댐-펙아인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 를 기다리는도다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3: 49-51 / 255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매 주석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그 자신을

‘나’로 내세우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로 나타내던 것이 ‘나’로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 자신의 슬픔이 너무 격해져서 부지

불식간에 그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하소연을 계속하다가, 어느덧 구원의 소망이 싹

터감을깨닫게 된다.
49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 눈이 쏟아접니다. 그리고 멈추지

아니합니다. 중단함이 없습니다”가 된다. 우리말 성경의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란 말은 의역이다. 여기의 주어는 “내 눈” 곧 ‘에니’인
데, 그 눈 자체가 물과 같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모양을 나타낸 것
으로, 지극히 아픈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흐르는”의 원문은 ‘니

그라’인데, 그 어간 ‘나가르’(쏟다, 흘러내리다)의 니팔 • 3 인청 • 여

성 • 단수 • 완료형이다. “내 눈” 곧 ‘에니’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치지 아니하고도 원문에서 ‘로 티드메’로 여성으로 변

화되어 있다. 즉 그 어간 ‘다마’(멈추다)의 칼 • 3 인청 • 여성 • 단


수 • 미완료형으로 변화되어 있다. 쉬지 아니함이여 의 원문은 ‘메엔
하푸보트’인데, ‘메엔’은 ‘ ... 함이 없이’란 뭇이며, ‘하푸고트’는 ‘중

단함’이란 뭇의 여성 • 복수 명사다.
50절을 직역해보자. “야훼께서 하늘에서부터 하감하시고 보실

때까지”로 되어 있을 뿐, ‘기다리는도다’라는 말이 원문에는 없다.

이 구절은 앞절의 계속으로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

서 돌보아주설 때까지 눈물을 계속적으로 쏟으리라는 사실을 말하

는 것이다. 살피시고는 원문으로 ‘야슈키프’인데, 그 어간 ‘샤카프’


(내려다보다, 하감하다)의 히필 • 3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256/ 예레미야애가

톨아보시기률 은 원문으로 ‘예 레 ’다. 그것은 ‘라아’(보다, 바라보다)의

칼 • 3 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이 말은 얼굴을 나타내시


며 ‘보시는 것’을 뭇한다. 곧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시고’와는 반
대되는 말이다.
51 젤에서는 시인의 슬픔이 안으로 스며들어 내 심령융 상하게 하

는도다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그의 눈이 그의 성령을 상하게 하는

이유는, 예루살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이 당하는 재난의 잔혹함 때


문이다. 여기서도 그 문장의 주어는 ‘내 눈’이다. 원문대로 직역하

면 “내 성읍의 모든 딸들 때문에 내 눈이 내 영흔에게 괴롭게 했

다”로 된다. 우리말 성경은 원문의 ‘모든 딸들’을 모든 여자로 번역


했다. “상하게 하는도다”는 원문에 ‘올렐라’로 나와 있는데, ‘알랄’

(괴롭히다, 심하게 군다)의 피옐 • 3인청 • 여성 • 단수 • 완료형이다.


여성으로 변화된 것은 여성명사 ‘내 눈’ 곧 ‘에니’가 주어이기 때문

이다. 이 말은 예루살렘의 여자들의 수난을 보고 시인의 섬령이 몹


시 상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에서 하나닝을 신앙하는 시인의 심정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

인의 심정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하나닝을 참으로 의


지하는 성도들의 슬픔과 눈물이 불신자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인은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최종적 절망에는

이르지 않는다. 그것은 종국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

이다. 믿는 사람은 닥심치 않고 하나님께서 돌아보실 때까지 기도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바멜론 포로생활에서 하나님께 돌이켜 간구

하면 그들을 회복시격 주시겠다고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있었다(신 30: 2-3). 그 까닭에 시인이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켜
3: ~2-~4 / 2~7

달라고 야훼께 계속해서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정점에 이르기까지 자기 목숨을 걸고 기도했다. 그는 슬픈 탄식 속
에서도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볼수 있었다.

우리는 혼히 어려운 역경에 처하게 될 경우, 하나님이 가까이 계

시지 않음을 안타까워할 때가 많다. 그러나 시인과 마찬가지 신앙

을 가진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낮은 나를 굽어 보시리라는 믿음 때문에, 슬픔을 참고 고난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곤고와 시험을 당해도 하나

님이 저 멀리 하늘에 계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를

낮추어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

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세우선다고 고백했다(시 113:~-9).

맡긴-딩띄차데
무고히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새와 같이 심히 쫓도다

저회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위에 돌을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에 념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매 주석

52절의 우고히 나의 대척이 펀 자 라는 구절은 원문으로는 ‘오예바

이 힌남’이다. 이 말을 풀이하면, ‘힌남’(까닭없이)이라는 부사와


258 / 예레미야애가

함께 ‘오예바이’(나의 원수)가 결합되어서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라는 뭇이 된다. 그리고 직역하면 “까닭없는 내 원수”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대적이 된 자는 바벨론 군대일 것이다. 나툴 새와 같

이 심히 쫓도다에서 “새와 같이”는 원문에 ‘갓치포르’라고 되어 있는


데, 전치사 ‘카’(처럼)+정관사+여성 명사 ‘치포르’(새)로 분석된

다. “나를 ... 심히 쫓도다”는 원문으로 ‘초드 차두니’인데, 각기 그

어간 ‘추드’(사냥하다)의 칼 • 부정법 • 절대형과 칼 • 3 인칭 • 복수 •

완료형에 1 인청 • 단수 인청어미가 붙은 용법으로서 ‘나를 사냥하려


고 심하게 추격했다’라는 의미가 된다.
53절을 직역하면 “그들이 내 목숨을 구덩이 속에서 끝장내려고

했으며, 내게 돌을 던졌나이다”로 된다. 내 생명을 끊으려고의 원문

은 ‘차메투’인데, 그 어간 ‘차마트’(끝나게 하다)의 칼 • 3 인칭 • 복

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끝을 가져오게 했다’라는 뭇이다. 그 위

에 롤을 던짐이여 에서 “그 위에”는 원문의 ‘비’(내 위에)를 의역한


것이다. 여기에서 ‘돌’이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같

이 “나를 구덩이에 넣고, 구멍이에 돌을 던져 덮었다”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 이 다. 그러 나 영 어 성 경 에 는 (casr srones on me) ‘돌’을 복수

로 고쳐서 “내 위에 돌들을 던졌다”라고 번역한 현대어 역본이 있


다. 영어홈정판 (KJ) 은 “내 위에 돌 하나를 던졌다 .. (casr a srone

upon me) 로, 원문대로 단수로 되어 있다. 던짐이여 의 원문은 ‘와이


야두’다. 이 말은 ‘야다’(던지다)의 피옐 • 3 인칭 • 복수 • 남성 • 미완
료형의 ‘와우’-계속법으로 ‘그들이 던졌다’는 말을 강조한 것이다.

54절을 다시 번역해보면 “물이 내 머리 위에 념쳤나이다. 나는

말했나이다. 나는 끝났구나”라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풀이 내 머


리에 념치니는 심한 고통과 절망상태를 나타낸다. 이제는 멸철되었다

하도다에서 “이제는”이란 말은 원문에는 없다. “멸절되었다”의 원


문은 ‘니게자르티’인데, 그 어간 ‘가자르’(잘리다, 실패하다, 삼키우

다)의 니팔 • 1 인칭 • 단수 • 완료형으로서 ‘냐는 망했다’라는 뭇이


3 : 52- 54 / 2 59

다. 즉 그것은 자기에게 죽음이 임했다는 절망적인 발언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시인의 간절한 기도가 계속된다. 우리말 성경에는 기도하는 내

용으로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실제로는 하나님께 애타게 호소하

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중을 대표하기보다는 ‘나’로


서 자신의 아픔을 심각하게 하소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의 ‘자

기’는 여전히 유다와 예루살렘의 대표자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

그들의 운명이 마치 새와 같은 것임을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그의


기도 제목은 예전부터 해오던 것인데, 마치 새를 사냥하듯 그를 잡
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원수들(시 11 : 1 ; 124 : 7; 140: 5 ; 램 16 :

16) 을 막아주십사 하는 내용과, 구덩이에 쳐넣고 돌을 던지는 자의

소행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물이 념친다’는 표현은 ‘스올’의 물에

관한 전통적 개념을 통해서 절망적 상태를 형상적으로 묘사한 것이


다(용 2: 5-6; 삼하 22:5-6). 이 노래의 처음 부분에서는 야훼가

원수같이 험악한 모습으로 등장했었는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정


한 모습으로 대면해 계시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시인은 야훼에게
“내 원수가 까닭없이 나를 괴롭히나이다. 그리하여 마치 새를 사냥
하듯 나를 잡으려고 쫓아옵니다”라고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제는 야훼가 이스라엘을 동정해서 바멜론과 에돔을 징계하설 때가

가까워온 것이다.

시인의 기도는 그의 육신의 고통 때문에 나오는 탄식으로 얼룩져


있으나, 실은 소망없이 죽어가는 자의 독백과는 거리가 멸다. 그
가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는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구원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60/ 예레미야애가

5) 신뢰의 노래 (3 : 55 - 66)

매 개요

이 노래의 시인이 기도를 계속함에 따라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그의 확신은 더욱 증대해간다. 그는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

을 깨닫는다. 그는 하나님이 척당한 시기에 그들을 구원해주실 것

을 분명히 믿을 수 있었다.

도탄 속에서 드리는 그 백성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리라는

것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확실시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시


련을 주연서도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그들이 보아왔기 때문이

다. “너회는 나를 헛되이 찾지 말라”라고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서, 깊은 구덩이에 빠진 시인은, 마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처
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55절) , 구덩이 속에서도 하나님에게 접
근할 수 있음을 그가 발견했기 때문이다(시 130: 1) ,

“주께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당신의 해를 가리우지 마옵소


서" (56절). 이 기도는 호소이며 동시에 소망이다. 이러한 탄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입깅을 불어넣어 주셨고, 이에 대해 백


성들은 감사와 찬송으로 내쉬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리하여 하

나님은 김은 구덩이에서 드리는 시인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다. 이때 감사와 찬송이 메아리치게 된다. 이제 그들의 공포는 사
라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
워 말라 하셨나이다" (57절) , 그는 우리가 순종할 때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그런 그 하나님

이 죽음에서부터 “내 영혼을 구원하셨나이다"(58절)라고 시인은 고

백했다. 이와 같이 구원은 뭇하지 않은 곳에 임하는 까닭에 우리가


3: ~~-~7 / 261

제아무리 극심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분은 나를 고난에서 건지신다. 그리하여 ‘내 생명의 원


통함을 펴주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섬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울함에 대해 직접 보복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유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

으시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한다. “저회가 내게 보수하

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60절) . “저희가 나를

훼파하며…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61-62절) . 시인은 이러한

원수들의 훼따와 모해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했다. “주께

서 이 진상을 보셨고, 냐는 그것을 주께 맡겼사오니 그들을 처리하


옵소서" “그들이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것이 그들에게 임
하게 하옵소서 "(64절) • 그것은 결코 나를 위한 보복이 아니라 주의

질서 있는 세계를 위해서 공의를 세우는 일이다. 따라서 “진노로


저회를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66절)라고 시인은 기도를

끝맺었다.

댈-뎌긴코프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정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총11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내가 주께 아펀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매 주석
262 / 예레미야애가

이 연에서는 시인이 하나님의 음성, ‘알 티라’(너회는 두려워 말

라 ! )라는 말을 듣고 위로를 받게 된 사실을 기도로서 언급하고 있


다.
55 절을 직역하면 “야훼여, 낮은 곳의 구덩이에서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로 된다. 심히 깊은 구덩이에셔 는 원문에 ‘미보


르 타헤티요트’로 표현되어 있다. ‘미’( ...로부터)+‘보르 ’ (구덩야)

곧 ‘구덩이에서’는 전치사+남성 단수명사의 연계형이므로, 정확히

말하면 ‘ ... 의 구덩이에서’다. ‘타헤티요트’는 ‘가장 낮은 장소’라는


뭇의 여성 • 복수영사다. 아마도 음부와 같은 김은 지하세계를 가
리키는 듯하다(시 63 : 9 ; 88 : 5). 주의 이름을 불렸나이다라는 말에

서 “이름”은 그 대상의 속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실체 를 대표하

는 것이므로 야훼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됨을 전제로 해야만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56절을 직역하면 “당신은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내게 대한

형별유예와 나의 호소에 당신의 귀를 막지 마옵소서”라고 할 수 있

다.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 에서 “이제”라는 말은 원문에 없다.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은 원문으로 ‘레라웨하티 레샤웨아티’다.


두 낱말의 앞에 있는 ‘레’는 전치사로서 ‘ ... 대해’라는 돗이며, 뒤에
있는 ‘티’는 ‘타우’에 1 인청 단수 소유격 어미가 붙어 ‘나의’라는 뭇

이 된 것이다. 그리고 각기의 명사는 ‘레와하’(형벌유예, 구원) 및

‘샤웨아’(호소)다. 결국 “나의 구원 호소에 대해 당신의 귀를 막지


마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이다.

57절을 쉽게 풀이하면 “내가 당신을 불렀던 날에 당신이 가까이


하셔서 ‘너는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로 된다. 내가 주께

아흰 날에 는 원문대로라면 “내가 당신을 부른 날에”라는 말이다.

주께서 내게 가까이하여 는 히브리어로 ‘카라브타’인데, 그 어간 ‘카


3 : 58- 60 / 263

라브’(가까이 오다)의 칼 • 2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이다. 두려워


말라는 원문으로 ‘얄 티라’(너는 두려워 말라)인데, 이는 성경에서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자주 주신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다. 때로는 큰 축복이요 약속의 말씀으로 들려주시기도 했다.

매 신학적 메시지

절망의 심연에 있어서의 시인의 뒤우칭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념이 그의 옆에 다가와서 구속자로서 위로

의 말씀을 주셨다 (시 69: 26- 36). 그분의 말씀은 ‘두려 워 말라’라

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으나, 시인과 그 백성을 소생케 하기에 충

분한 것이었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고 다만 믿기만 하라”라고 자주 말
씀하셨다. 바울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했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

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임후 1 : 7) 라고 타일렀던 것


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현재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지극히 크다

할지라도, 과거에 우리가 누련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되새겨 봄

으로써,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과연 하나

님은 자기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여기에

서 확인할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언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

님의 일관된 사랑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과거에 가까이하셨던 주

님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또한 과거에 “두려워 말라”고 하신

주님은 지금도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신다.

댈-달끄레쉬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264 / 예레미야애가

내 생명을속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저회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m 주석

58절은 법정의 송사의 맥락에서 쓰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에게 기

도하는 것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주여, 당신은 내 영흔의 다툼을

편들어 주셨습니다. 내 생명을 속하셨습나다”로 된다. 여기의 내

심령의 현홍이란 말은 원문으로 ‘리베 나프시’인데, ‘리베’는 ‘다툼,


소송안건’이란 돗의 남성 • 복수 영사의 연계형이므로 ‘ ... 의 다툼 ’이

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나프시’는 ‘내 영혼’이란 뭇인데, 생

명의 주체가 되는 것이므로 ‘나 자신’을 가리킨다. 영어성경 (RSV)

은 ‘리 베 나프시 ’를 그냥 “나의 송사"(my cause) 라고 했다. 우리말

성경은 내 심령이 당한 억울한 일로 해석해서 “내 심령의 원통”이


라고 의역한 것이다. 펴셨고는 ‘원통한 일을 해소해주셨다’라는 돗
인데, 원문으로는 ‘라브타’ 즉 ‘당신이 싸워주셨다’라는 뭇이다. 이
말은 그 어간 ‘리브’(대항하다, 다투다)의 칼 • 2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이다. 속하셨나이다는 히브리어로 ‘가알타’ 즉 ‘당신이 속량하

셨습니다’인데, 그 어간 ‘가알’(대가를 치르고 되찾다)의 칼 • 2인

챙 • 남성 • 단수 • 완료형 이다.
59절을 직역하면 “야훼여, 당신이 내 찰못됨을 보셨습니다. 내
송사를 재판하옵서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풀이하면, “하나
님이여, 내게 가해진 부당한 일을 보셨사오니, 나의 재판사건을
3:61-63 / 26 ’
주께서 심의해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 냐의 억율은 히브리어
로 ‘아와타’다. 이 말은 ‘나에게 행해진 불의한 일’이란 뭇언데, 법

정재판에서의 찰못된 판결 또는 구부러진 판정을 가리키는 것이


다. 나률 위하여 신원하융소셔 는 원문을 직역하면 “내 송사를 재판

하소서”로서 “나의 억울한 판결을 바로잡아 주소서”라는 말이다(삼


상 24 : 1~).

60절의 져회가 내게 보수하며 냐률 모혜함율 은 원문대로는 “나에

대한 모든 그들의 앙갚음을, 모든 그들의 책략을”이다. 이런 일들


을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말이다. “이런 억울한 일들을 주께서 감찰

하시고 우리를 신원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내용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풀어주며, 내 생명

을 구속해주는 구속주이시다. 구원은 생각지 않던 곳에 엄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고자 십자

가의 희생제물이 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의 자비와 뭉훌의 나타남인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고 있는 모든 공격과 도전을 대신 싸워 물리쳐 주셨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방어자’ (defender) 시요, 우리의 ‘구속자’ (redeemer)

이시다. 이 연에 나오는 표현은 하나님께 간청하는 형식의 기도로

되어 있으나, 신앙적인 업장에서는 우리를 방어해주셨고, 구속해


주셨고, 신원해주신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의 억울한 일을 감찰하시고, 그들을 도와
주시며, 그들의 송사를 변호해주시며, 원수의 책략을 신원해주십

사 하고 간청하는 중에, 이미 그의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와


뭉훌을 확신하고 그대로 실현된 것처럼 간주했음이 분명하다.
266 / 예레미야애가

回-圖쉰
여호와여 저회가 나를 훼파하며

니-를모해하는 것

곧 일어나 니를 치는 자의 업술에서 나오는 것과

종일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저회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히는 것을 주여 보용소서

매 주석

이 연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응흉을 확신하면서 기도를 계 속하

고있다.
61 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야훼여, 그들의 모욕, 나에 대한 그

들의 모든 책략을 당신께서 들으셨습니다”로 된다. 나률 훼파하며

는 원문에는 ‘헤레파탑’(그들의 비난 곧 모욕)이라는 여성 명사로 쓰

였는데,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의역했다. 나률 모해하는 것 은 원문


으로 ‘콜-마흐셰코탐 알라이’(나에 대한 모든 그들의 모해 곧 책략)

인데, 역시 우리말 성경은 의역했다. 그리고 원문의 ‘샤마아타 ’ (당


신이 들으셨습니다)를 62절로 념기고 있다.

따라서 원문의 62절은 ‘샤마아타’의 목적절이다. 즉 62 절을 원문

대로 옮기면 “내 적수의 입술놀림과 온종일 나에 대한 음모의 속삭


임’이라는 말이다. 일어나 나률 치는 자는 원문으로 ‘카마이’인데,

‘내 대적자’란 뭇이다. 업술에서 나오는 것은 원문에는 ‘시프테’ 즉

‘사파’(입술)의 쌍수· 연계형으로 되어 있는데, 업술놀럽에서 나오

는 악담을 뭇한다. “모해하는 것”은 원문의 ‘헤그요남’ (그들의 악한


3: 64-66 / 267

생각)을 의역한 것이다.

63절은 “보옵소서, 그들의 앉음과 그들의 일어남. 나는 그들의

노래이옵니다”로 번역된다. 저회가 앉든지 셔든지는 원문으로 ‘시베


탑’(그들의 앉음) ‘웨키마탑’(그리고 그들의 일어섬)이다. 나를 노래하

는 것은 나를 갖고 그들이 조롱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보

융소서는 깊은 관심을 갖고 돌봐달라는 말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원수가 시인을 대표로 하는 계약백성을 모해하며 조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모두 들으셨고 감찰하셨다는 신앙고백과

함께 시인의 기도가 계속된다. 하나님께서는 계약백성들을 해치려


는 원수들의 생각과 행동을 사전에 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
므로 그들의 악한 행통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은 다반 인내
하고 기도해야 한다. 더구나 원수들의 모해가 날마다 계속된다면,

성도들의 인내와 기도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인내의 힘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모해함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 나


온다. 마치 스데반이 ‘예수의 서신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죽음을
이긴 것과 같이 (행 7 : 56) , 우리도 인내와 믿음의 기도로써 괴로움

을 이길 수 있을것이다.

圖-圖타우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흔

행한대로보응하사

그 마음을 강약하게 하시고

저주를더하시며
268 / 예레미야애가

진노로저회를군축하사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매 추석

이 마지막 연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간청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자비와 뭉훌을 확신함에서 오는 회복의 소망을 표명함으

로써 끝난다. 이 연에 나오는 ‘보웅하사’, ‘더하시며’, ‘군축하사’,

‘멸하시리이다’라는 동사들은 미완료형이지만, 미래형이라기보다는


기도의 맥락에서 간청의 뭇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것들
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리하시리라는 확실한 신념의 표현이다.

우리말 성경이 ‘ ... 하시리이다’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64절을 원문에 따라 번역하면 “야훼여, 그들의 손의 소행에 따

라 그들에게 보웅을 갚아주시융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이 된다. 대


개의 번역본은 “보웅하사”를 명령형으로 번역했는데, 그러한 기원
의 뭇을 반영시키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6:; 절의 그 마융율 강약하게 는 원문으로는 명사구다. 즉 ‘에긴나

트-레브’인데, ‘ 레브’(마음) ‘메긴나트’( ... 의 강약, ... 의 우둔함, ...


의 혼미)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메긴나트’는 ‘메긴나’(가리우는

것, 어둡게 하는 것)의 연계형이다. …하게 하시고는 원문으로는 ‘티


텐 라햄’ 즉 ‘라햄’(그들에게) ‘티텐’(주시옵소서)이다. ‘티텐’은 그

어간 ‘나탄’(주다)의 칼 • 2 인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이지만, 앞
서 말한 바와 같이 기원의 뭇인 명령형으로 번역된 것이다. 져주톨
더하시며는 원문으로는 ‘타알라트카 라햄’이다. ‘라햄’(그들에게) ‘타

알라트차’(당신의 저주)라는 명사구가 ‘주시옵소서’라는 뭇인 ‘티탠’


의 목척어가 되어 “주의 저주를 내려주시옵소서”라는 말이 된 것이

다.
66절올 직역하면 “노여움을 갖고 추격하옵소서. 그리고 그들을
3: 64-66/269

야훼의 하늘 아래로부터 멸하옵소서”로 나타낼 수 있다. 저희톨 군

축하샤는 현문으로 ‘티레도프’인데, ‘당신께서 추격하시리이다’라는

뭇일 뿐, “저회를”은 첨가한 것이다. ‘티레도프’는 그 어간 ‘라다

프’(추척하다, 핍박하다)의 칼 • 2 인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이다.

멸하시리이다는 ‘타슈미템’으로 원문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그 어

간 ‘샤마드’(파괴하다, 멸절하다)의 히필 • 2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

료형에 3인챙 • 남성 • 복수 접미어가 붙어서 ‘그들을 멸하옵소서’라


는뭇으로새길 수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이 비가의 시인과 함께 우리들 신앙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

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바멜론 군대의 지나친

만행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심판의 하수인에 불과한 자들


이 하나님의 법 안에서 특권을 누리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
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서 그들의 복수, 그들의 음모, 그들의 모

욕, 그들의 조흥을 일삼았다. 그러나 심판의 당사자인 하나님께서


는 그들의 부당한 행위를 보고 보웅하셨다.
이 세번째 비가의 시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옐을 심판하신 것과 마

찬가지로 그들을 괴롭힌 바멜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

야 한다고 믿고, “당신의 저주를 그들에게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


원했다. 그런 저주는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들

의 최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찾게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선교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인이 어떻게 원

수들의 멸망을 기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원수의 멸망을 기원해야 할 것이다. 많은


나라들을 괴롭힌 바멜론은 이 땅에서 멸망되어야 했다. 진실로 그
270 / 예레미야얘가

들은 ‘그들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야훼

의 하늘 아래로부터’ 악의 세력은 물러가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번째 노래는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 다섯 편의


애가 중에서도 가장 갚이있는 개인적인 서정시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처음부분에서의 확인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고난

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온갖 표현은 누구도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전례 없는 번민과 극한적인 절망을 전달해준다. 이 수난자의 고난


묘사는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비탄의 심도와 격정의 진폭이 증대해

간다. 이 시인은 그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혹독하

게 정계하신다는 것을 그의 온몸의 아픔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

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절망상태에서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다. 스

스로를 하나님의 배려의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밝은 미래를 바라

보는 소망으로 그의 목소리에는 생기를 띠게 된다. 그리고 옛날의

하나님의 자비와 응훌을 회상함으로써 용기를 얻어 감히 기도할 수

있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케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

로다"(3: 33) 라는 확신이 시인으로 하여금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

게 하며, 소망 가운데서 기도하게 한다. 이제 시인과 그 백성의 삶

에는 생기와 희망이 맥박치면서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

리게 되었다.
네번째 비탄의 노래
4.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소망 (4: 1-22)

이 노래도 역시 알파뱃 두운법 답관체 형식의 시다. 그런데 이제

까지의 노래들이 한결같이 3행으로 한 연(스탠자)이 구성된 데 비

해, 이 노래는 2행으로 한 연이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제 16번째

와 제 17번째의 알파뱃 문자가 바뀌어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시의 현저한 특정은 예루살렘의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황폐함

을 강하게 대조시킨 데서 나타난다. 예전에 신성한 용도를 위해 봉

헌되었던 귀중한 물품들이 산산이 부서져서 거리에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 이제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던 시온의 주민들이 이제는 질
그릇같이 되고 말았다. 극심한 고난 때문에 사람들이 너나없이 비
정해졌다. 젖먹이 어린 것들은 먹지 못해 죽어갔고, 어른들은 굶

주리다 길바닥에 쓰러졌다. 화려한 옷차럽의 사람들이 갯더미 속


에 파묻혔다.

옛날 소돔의 죄인이 받은 재난은 이들이 받은 재난에 비하면 오

히려 가벼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늠름한 자태였던 시온의 귀


족들은 숨덩이처럼 검은 얼굴로 변했고, 마른 막대기같이 초라해
졌다. 이런 모양으로 굶어죽느니 차라리 창검에 쩔려 죽는 편이 오

274/ 예레미야얘가

히려 나을 것 같다. 자애롭기 짝이 없던 여인들도 굶고 또 굶다못

해 자기들의 자녀를 삶아먹는 지경이 되었다. 그토록 존경받던 예

언자와 제사장들은 의인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그 옷이 피에 더러워

졌다. 이제 사람들은 독수리 앞의 새와 같이 쫓기는 몸이 되고 말


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뭉흘이 그들에게 소망을 일깨워 주었

다. 처녀 시온이 주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였고, 이즈음에서 “네 최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리라”는 주의 선포가 내려진 것이다. 하나님


은 공의로우신 분인 까닭에, 예루살렘에 내려진 진노의 화살이 이
제는 에돔의 최악을 벌하는 데로 돌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처녀 에
돔에게 그 잔이 이르게 되어, 그들이 취해서 벌거벗는 추태를 연출

하게 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이 시에서 묘사한 문학적 양식은 앞서의 제 1 , 제


2장과 마찬가지로 ‘키나’ 음조인데다가 역시 시인-시온의 대화시

형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언으로 변장해서 등장한 시온은 주

로 듣는 입장에 서 있을 뿐, 스스로 나서서 발언하지는 않는다. 다


만 시인이 여인 시온에 관해 언급하거나 대신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여인 시온은 17-20절에 들어서면서 시인과 한

목소리가 되어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다. 제 1 , 제 2 , 제 3장의 특정

이라고 할 개인화된 유다의 고난 대신, 여기서는 노골척인 고난자

집단의 발언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네번째 비가 전체는 유다

상류사회의 정치적 ·도덕적 타락을 반영하고 있다. 거짓 예언자

및 제샤장들은 마치 문둥병자같이 배척된다. 슬픔에 젖은 백성들

은 동맹국과 그들의 왕에게 실망하면서 모든 거짓 소망을 배제하게

된다. 그 대신 유다의 형벌의 종결을 알리는 예언자적 선포 (21-22

철)가 이미 제 3장에 냐타나 있는 소망을 정당화해주는 것이다(사

40: 2).
4: 1 / 275

1)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재난 (4: 1-12)

매 개요

여기에서 시인은 처녀 시온을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옮기 시작했

다. 그는 척군의 침략과 약탈의 참상과 기근의 비참한 결과를 묘사

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상처와 모욕을 함께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화 속의 예루살렘과 수치 속의 예루살렘의 대조가

길게 이어진다. 그들의 범죄의 결과가 이렇게 비참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모성애는 완천히 기능이 마비되었고
어린이 학대는 극에 달했다. 그 도시의 파멸은 순식간에 멸망한 소

돔의 최후를 오히려 부러워할 정도로 지연되는 죽음을 초조하게 맞

도록강요했던 것이다.

[I]알례프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매 주석

금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원문에서는 각기 다르게 ‘자하브’


276/ 예레미야애가

와 ‘케템’이란 말이 쓰였다. 아마도 같은 낱말의 반복을 피하기 위


해서 그리했던 것 같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좋은 금’이란 뭇으

로 ‘학케탬 핫토브’와 같이 정관사+‘토브’(좋은)라는 형용사를 덧


붙였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를 청금이라고 번역했다. 빛

율 앓고는 원문으로 ‘요암’인데, 그 어간 ‘아맘’(숨다, 자취를 감추

다)의 호팔 • 3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으로 ‘그 빛이 사라진다’

라는 뭇이다. 변하였으며 는 원문으로 ‘이셰네’인데, 그 어간 ‘샤나’

(변하다)의 칼 • 3 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으로 ‘그것이 변해진

다’라는 뭇이다. 미완료형 동사를 사용한 것은 현재의 변해진 상태

를 말하기 위한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이 네번째 애가에 있어서는 알파뱃

두운법이 각 연의 첫째 행에서만 밟아졌다. 이 연에는 그 첫 단어

가 ‘에카’(슬프다)로 나와 있다. 각 연의 둘째 행은 알파뱃 자모와

상관없이 다만 3+2의 ‘키 나’ 음조만 지켜서 노래하고 있다. 생소의


률은 ‘아브네-코데슈’ 곧 ‘신성한 돌’이다. 영어성경 (RSV) 은 “그

신성한 돌들" (The holy stones) 이라고 번역했다. 각 꺼리 머리 는 모든

거리의 업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거리의 모퉁이를 뭇한


다. 쏟아졌는고는 원문으로 ‘티슈타페크나’다. 이 말은 ‘샤파크’(쏟

아붓다)의 헛파옐 • 3인청 • 여성 • 복수 • 미완료형으로서, 여성 명

사인 ‘돌들이 스스로 쏟아버려진 상태에 있다’라는 뭇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이 네번째 버탄의 노래는 앞서 나오는 두번째 비탄의 노래와 함

께 동일한 시인의 것으로 추측된다. 저자의 상황묘사가 매우 생생


하고 구체적이어서, 그는 분명히 바멜론 군대의 침략을 직접 목격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노래는 첫 절부터 너무나 얘절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려준다.


4: 2/277

1 절에 언급된 ‘금’과 ‘정금’ 그리고 ‘성소의 돌’은 문자적으로 이

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와 동시에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워 정금

에 비할러니”라는 2절의 말에 비추어보면, 유다 민족의 영광을 상


정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상정척으로 해석할 경
우, 그것들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과 정금이
벚을 잃었다고 했는데, 원래 금은 변색되지 않는 것이므로 실제로

는 원수들이 다 거두어가는 과정에서 금으로 만든 모든 시설과 그

릇들을 파괴한 사실을 그렇게 묘사한 듯하다. 또한 상갱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젊은 이들을 보배로운 정금과 신성한 돌로 비유해서 그
들이 혼미해 쓰러진 상태를 보고 슬퍼한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영
화로운 시절에는 금처럼 귀했으나, 이제는 폐물이 되어 길 모퉁이

에 버려진 꼴이 된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꼭 이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밍베트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종L이의 만든

질항아리같이 여킴이 되었는고

매 주석

첫째 행을 직역하면 “그 고귀한 시온의 아들들은 그 무게가 정금

의 값이 었다”로 된다. 시용의 아들률이 보배로와 의 원문은 형용사


‘예카립’(고귀한, 보배로운)이 ‘베네 치용’(시온의 아들들)을 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럴 때, 이 구절은 “그 고귀한 시온의 아들


들”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형용사가 ‘시온의 아들들’을
278 1 예레미야애가

서술한 내용으로 보면,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롭다”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후자의 경우인 데 비해, 영어성경은 거의


가 전자의 경우로서 ”시온의 그 귀한 아들들" (The precious sons of

Zion) 로 되어 있다. ‘예카림’에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이므로 전자

의 경우가 옳다고 생각된다. 청금은 1 절에 나오는 ‘자하브 ’ 나 ‘케

템’과는 다른 ‘판’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 낱말은 ‘찰 제련되다’


라는 뭇을 지니고 있으므로 ‘잘 제련된 순금’이란 말이다. 버합러니

는 그 원문이 정관사가 붙은 ‘메쏠라임’인데, 이 말은 분사로서 ‘그

만큼의 무게를 갖는 자들’이란 뭇이다. 따라서 이 문장 전체는 “그

고귀한 시온의 아들들은 정금만큼의 값진 존재였다”라는 말이다.

둘째 행에서는 ‘그런데 지금은’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한

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에카’라고 탄식하는 감탄사를 앞세

워서 그 정금 같던 예루살렘의 아들들이 질항아리 곧 ‘니벨레-헤레

슈’같이 여겨지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항아리” 곧 ‘네벨’은


그 탕시에 천하게 사용되던 그릇이다. ‘헤레슈’는 ‘흙으로 만든 것’

이란 뭇이다. 여겁이 되었는고는 원문으로 ‘네흐셰브’인데, 그 어간

‘하샤브’(간주하다, 짐작하다)의 니팔 • 3 인청 • 복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간주했다’라는 뭇이다. 토기장이의 만든이라는 구절은 원문

에는 ‘토기장이의 손의 작품’이란 뭇으로 나타나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라면 왕과 제사장 등을 가리킨다. 이


제 이들이 유린당하고 학대받아 마치 질항아리같이 되었다. 질항

아리는 쓸모없고 비천한 처지를 비유한 표현으로 쓰인다. 실로 유

다 백성은 하나님의 돼하신 백성으로서 만국 가운데 제사장 나라였

으나(출 19: 6) , 지금은 지극히 낮아져서 이방 나라의 포로로 꿀려

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4:3/279

우리는 본문에서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심각한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 안에서 영광스럽고 행복한 삶


을 살도록 지음받은(시 8:4-6; 히 2 : 6- 8) 인간을 사망의 종으로
전락시킨 것이 바로 죄였음을 깨닫게 된다(롬 3:23;6:23).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

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어, 토기장이의 손에서 부

서진 질항아리같이 천하고 비열한 삶에 굴러떨어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댐기멜
들개는오히려 젖을내어

새끼를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잔인하여

굉。벼 타조같도다

m주석

첫째 행의 들개 는 원문에 ‘탄닌’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아람어

‘탄’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히브리어의 ‘타님’과 같은 낱말

인 셈이다. 그러나 히브리 원천 (MT) 에서는 단수로 사용되기도 하

므로, 우리말 성경이 이것을 ‘들개’와 같이 단수로 번역한 듯하다.

그러나 원문에는 복수로 쓰인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아프


리카 등지에 사는 ‘재칼’을 가리킨다. 창세기 1장 21 절 및 용기 7

장 12절에는 “바다의 용" (sea-monster) 으로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는 히브리어로 ‘감’인데, 흔히 ‘또한’이라고 번역되는 말이지만, 여

기서는 뒤에 오는 말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들개까지


라도’의 뭇으로 나타난다. 젖융 내어는 원문으로 ‘할추 샤드’인데,
280/ 예레미야애가

직역하면 “그들이 가슴을 내어놓았다”이다. 그것은 동물이 새끼에

게 젖을 먹이기 위한 동작을 말한다. 새끼는 ‘구레헨’(그들의 새끼

들)이라는 남성 • 복수명사다. 이 말은 주로 맹수의 새끼에게 사용


된다. 벅이나의 원문은 ‘헤니쿠’인데, 그 어간 ‘야나크’(빨다)의 히

필 • 3 안칭 • 남성 • 복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빨게 했다’라는 뭇


이다. 이 말은 완료형이지만 그런 현상을 흔히 볼 수 있으므로 현

재시상으로 번역한 것이다.


둘째 행에서 처녀 내 백생 이라는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내 백

성의 딸”이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이 의역한 것이 원래의 뭇에 부

함된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거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잔인

하여는 전치사 ‘레’가 붙은 남성 • 단수 형용사인 ‘레아크자르’다. 그

뭇은 ‘잔인한 자 되어’로 나타난다. 팡야의 타조 감도다는 원문으로

‘바미드바르’(광야 안의)로 이어진다. 타조는 동물들이 갖는 본능적

인 모성애조차도 갖지 않는 것으로 찰 알려져 있다(용 39: 13-

18). 이처럼 “처녀 내 백성”이 타조처럼 매정한 백성이 된 것을 한

탄한 것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이 연에서는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주민이 너무나

도 곤고해져서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마저 잃어버리고, 짐숭보다도

더 잔인한 행태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들개도 모성애가

있어서 제 새끼를 먹이는데,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광야의 타조가

알을 땅에 버려두어 지나는 자의 발에 깨지거나 들짐송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않는 것과 같은 잔인함을 나타낸다고 고발하고 있다.


시온의 어머니들이 이같이 비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

은 원수들에게 캉요된 일이거나 심한 기근으로 도저히 자녀들을 돌


볼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6.25사변 당시 피난민들이 어린
4:4/281

자녀를 버린 사례가 있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없을 때, 그 아이들을 생각하는 일만으

로도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젖먹이 아이가 목이 말라 혀가 업천장

에 달라붙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댐달렛
젖먹이가목말라서
혀가입천장에 붙웅이여

어린아이가맥을구하나
떼어 줄사람이 없도다

매 주석

젖벅이는 원문에 ‘요네크’로 되어 있는데, ‘젖 빠는 자’란 뭇이다.

옥말라셔 는 원문에서 ‘바차마’라는 단어가 쓰였다. 즉 ‘차마’(목마


름, 잘중) 앞에 ‘바’(안에, ...로 인해)라는 전치사가 붙은 것이다.
불옴이여는 원문으로 ‘다카크’언데, ‘달라붙는다’라는 돗의 칼. 3인

칭 • 단수 • 남성 • 완료형이다. 이 말은 완료형이지만 경험을 보여


주는 완료형이므로 현재형으로 번역된다. 젖먹이들의 혀가 입천장
에 달라붙였다는 말은 심한 기갈 때문이며, 그 까닭에 어린이들이

울 수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시 22: 15).


둘째 행의 어련아이는 히브리어로 ‘올라렴’이다. 그들이 ‘샤알루’

(청했다) ‘레햄’(떡)을, 즉 그들이 떡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런데 아무도 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때의 사정이다. 빼어 줄 사랍은


원문에는 ‘나누어주는 사람’ 곧 ‘포레스’로 되어 있다. 없도다는 ‘엔

라햄’인데, ‘엔’(없다) ‘라햄’(그들에게)으로 나타나 있다.


282 / 예레미야애가

매 신학적 메시지

시인은 어린이들의 곤경을 내세워 어른들의 난감한 처지를 묘사

했다. 예루살렘의 부모들은 어린이들의 목마름과 굶주렴을 보면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전쟁 뒤끝에는 살인과 겁탈만이 아니라

질병과 기근이 따르는 법이다. 어머니들은 어린 자식이 숨을 거둘


때까지 젖을 물린다. 그러나 젖먹이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게 되

었다면 그 기갈의 정도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다. 어미의 젖은


고갈되어 있었을 것이며, 어린아이의 혀가 붙였으니 울 수도 없었

을 것이다. 결국 어린 젖먹이들은 소리없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


리고 좀더 자란 어린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었으나, 아무도 먹
을 것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풍족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

님의 은총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나님을 배


반하고 이기적인 생활태도로 과소비와 냥비를 일삼으면서 이웃에

게 억울한 일을 강요한다면, 이 시인이 탄식하던 일이 우리들의 현

실에도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되혜
진수를먹던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매 주석

진수률 먹던 자는 히브리어로 ‘하오켈림 레마아단님’이다. ‘하오켈


4 : 5 /2 83

럼’은 정관사 ‘하+오캘 렴’(항시 먹던 자들 -rhe ones who used ro ear)


이다. ‘레마아단님’은 전치사 ‘레+마아단닝’(맛있는 음식들)인데,

그 어간 ‘아단’(사치하다, 즐겁다)의 남성 • 복수 영사다. 거리에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미 살핀 대로 ‘바후초트’(거리 안에서)다.

외로웅이여 는 ‘나삼무’로 나와 있는데, 직역하면 “그들이 황폐했다”

이다. 즉 그 어간 ‘샤뱀’(황폐해지다, 멸하다)의 니팔 • 3 인청 • 복

수· 완료형이다. 그러나 이 완료형은 소위 경험의 완료형이므로


과거형으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

로 번역해야 한다. 영어성경 (KJV) 은 “그들이 거리에서 쓸쓸하게


되었다" (They are deso!are in rhe srreers) 로 번역했다. 우리말 성경이

“외로움이여”라고 나타낸 것은, 황페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 듯하

다.
둘째 행을 직역하면 “자주빛깔 위에서 양육받은 자들이 거름더미

를 껴안았도다”라는 말이 된다. 천에는이란 말은 원문에는 없으나,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을 대조시키기 위해서 보충한 것 같다. 또한

원문에는 흙은 옷이란 말에서 ‘옷’이란 말은 없고, 다만 ‘붉은 것’이


라고만 되어 있다. 이제는도 원문에는 없으나,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을 대조시키는 구도에서 보충한 것이다. 거륨더미 는 원문으로

‘아슈파토트’인데, 그 단수 영사 ‘아슈포트’는 가축의 배설물 같은

것과 모든 쓰레기들을 모아둔 것으로, 연료 또는 비료로 사용되는

것이다. 안았도다는 원문으로 ‘히브쿠’인데, 그 어간 ‘하바크’(껴안

다)의 피옐 • 3 인청 • 복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껴안았다’ 또는

‘그들이 껴안기 위해 누웠다’라는 돗이다. 그리고 이 말 역시 상태


를 나타내는 완료형이므로 현재형으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한 영

어 성 경 (KJV) 은 “그들은 거 름더 미를 껴 안았다" (rhey embrace dung-


h피5) 라고 번역했고, 또 다른 영어성경 (RSV) 은 “그들은 갯더미 위

에 누웠다" (rhey !ie on ash heaps) 로 번역했다.


284/ 예레미야얘가

매 신학적 메시지

이 연은 일반 백성의 어린 자녀들이 불행한 처지로 전락했다는

탄식과 함께, 더 나아가서는 존귀한 계충에 속한 사람들이 비참한

생활로 전락했다는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자주빛깔의 호화로운

옷을 업고 맛있는 진수성찬을 먹으며 살던 계충도 전쟁으로 인해

거름더미를 안고 길거리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것은 가난한 자가 진토에서 일으켜지는 것같이 (시 113:7) , 또한

부자가 쓰레기더미로 떨어져버린 것과 같은 계충의 변동을 나타내

는 것이지만, 존귀했던 사람들에게 곤경이 올 때 그 고통은 갑철이

나되는것이다.
그들이 붉은 옷을 업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힘

입어 특별히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선교

에 동참할 특별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본문에서 ‘붉은


옷’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툴라아’인데, 지중해 연안에서 잡히는 벌

레 모양의 생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벌레의 내장에서

붉은 빛깔의 원료를 얻었는데, 그 분량이 적기 때문에 매우 값비싼

염료였다. 그 당시는 귀족들과 제사장이나 장로들과 같은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만이 붉은 옷과 붉은 채색의 침대와 의자를 소

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거에는 ‘진수를 먹던 자’와 ‘붉은 옷을

업던 자’들이 이셰는 거리에서 굶주려 죽어가고, 거름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거름더미가 있는 콧에 집없는 자와 거

지들이 모여드는 것은 혼히 있는 일이었다. 특히 예루살렘 성에는


분문(實門)이라고 불리는 성문이 있었는데 (느 2 : 13 ; 3 : 14) , 그것

은 그 문밖에 거름더미를 모아 쌓았기 때문이다. 사우옐상 2장 8

철에서는 그 당시 가난한 자와 번핍한 자들이 거름더미에서 살았다


는 것을 암시하는 기사가 있다.
하나님의 뭇을 거역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하루아침에 그의 운명
4: 6/285

이 변동된다는 것을 우리는 영심해야 할 것이다.

댐와우
전에 소돔이 사랑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최악보다 중하도다

매 주석

우리말 성경은 히브리 원전 (MT) 의 첫째 행과 둘째 행을 바꾸어

서 번역했다. 원문의 첫째 행을 직역하면 “내 백성의 딸의 최가 소


동의 최악보다 막중하도다”로 된다. 그리고 툴째 행을 직역하면

“그것은 양손이 순식간에 그녀(그 도시) 안에 휘감아 치지 않고서

무너졌다”로 된다. 이와 같이 원문을 살필 때, 첫째 행의 사람의


손 이라는 구절은 “손” 즉 ‘야드 ’의 쌍수 ‘야다임 ’(양손)이 쓰였는데 ,

그 손은 사람의 손임에 틀림없다. 대지 않고는 원문으로는 ‘로-할


루’다. ‘할루’는 그 어간 ‘훌’(치다, 손을 대다)의 칼 • 3 인칭 • 복수 •

완료형이다. 이 말에 부정사 ‘로’가 붙어서 ‘그(손)들이 치지 않았

다’라는 뭇이 된 것이다. 경각간에 는 원문으로 ‘케모- 라가아’(한순


간같이)인데, 소돔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예루살렘의 장기간의

곤경에 비하면, 오히려 나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

한말인것같다.

둘째 행에서 처녀 내 백생 은 원문으로는 ‘내 백성의 딸’이지만,


여기서는 예루살렘 주민을 뭇한다. 그들의 최 곧 ‘온’과 소돔의 최

악 곧 ‘하타트’는 내용상으로는 범죄요 부당한 행위임에는 마찬가


지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일은, 우리가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286 / 예레미야애가

같이 히브리어에 있어서 최악은 단순히 범죄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

니라, 반드시 형벌을 수반한다는 것 이다. 따라서 죄는 형벌과 동


의어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온’ 및 ‘하타트’는 최악에 수

반되는 ‘형벌’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어성경 (K]V) 은

“그 부정에 대한 형벌 ... 그 죄악에 대한 형벌" (the punishment of the


iniqu꺼 … the pun잉hment of the sin) 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서 “처

녀 내 백성”이 ‘소돔’이 받은 형벌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은 것

은, 그 죄의 무게만큼 오랜 기간 재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인 것으

로나타나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새

로운 역사적 증거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신학적으로는 해결하기 어

려운 문제를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전쟁의 결과

라기보다는 천재지변과 같은 초자연적 험에 의한 결과일 것이기 때

문인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는 소돔의 멸망이야말로 인간의 최악에 대한 가장 가혹

한 형벌의 전형으로 인식되어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예루잘

렘이 겪고 있는 형벌은 그보다도 더 가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리고 계약백성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들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더 막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소돔보다 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실로 예루살렘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엄
청난 형벌이 임했던 것이다. 본래 그들은 대단히 많은 은총과 특권

을 향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형벌은 소음보다 갑절이나 비

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고통이 장기간에 걸쳐 진

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칼

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으니 "(4: 9) 라고 말했던 것이다.


4:7-8 / 287

단번에 죽는 것보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더 괴로운 것이다.

띠자인
전에는존귀한자의 몽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회며

산호보다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한 청옥 같더니

댐혜트

이제는 그 얼굴이 술보다 검고


그기죽01 뼈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

매 주석

여키까지 ‘전에는 ... 이제는 ... ’의 형식이 절 단위로 계속되다가,

그 범위가 커져서 7 절과 8절이 합해져서 ‘전에는 ... 이제는 ... ’의 형

식을 나타내었다. 즉 위의 두 절을 통해서 아름답고 윤택하던 옛모


습은 없어지고, 심한 굶주렴과 곤고함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숨 같

고 옴이 마른 막대기같이 되어 딴사람같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7절 첫째 행의 존귀한 자의 몸은 원문으로 ‘네지레야’인데, 직역

하면 “그녀 (예루살렘)의 나실 사람들”이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계층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독실한 야훼 신
봉자 집단을 가리킨다. 우리말 성경은 이 말을 의역해서 ‘존귀한

자’로 번역한 것이다. 이들이 그 백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288/ 예레미야얘가

일정한 지위를 얻게 된 듯하다. 영어성경 (RSV , NIV) 도 이들을 “그

녀의 군주들" (her princes) 로 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홈정역

영어성경 (KJV) 에는 “그녀의 나실인들" (her Nazaritrs) 로 되어 있다.


이 말의 원돗은 ‘헌신자들’이므로 “그녀의 봉헌자들" (her devotees)
로 번역한 사람도 있다. 눈보다 깨끗하고에서 “눈보다”는 ‘미셀레그’

인데, ‘젤레그’(눈) 앞에 비교를 나타내는 전치사 ‘민’이 온 것 이


며, “깨끗하고”는 히브리어로 ‘자쿠’인데, 그 어간 ‘자카크’(순결하

다)의 칼 • 3 인칭 • 복수 • 완료형이다. 젖보다 회며는 원문으로 ‘차후

메할라브’인데, ‘눈보다 깨끗하고’와 같은 형식의 문장이다. 즉 ‘차


후’는 그 어간 ‘차하흐’(회다, 눈부시다)의 칼 • 3 인청 • 복수 • 완료형
이며, ‘메할라브’는 ‘할라브’(젖) 앞에 비교를 나타내는 전치사 ‘민’

이 온 것이다.
7절 둘째 행의 산호보다 불어 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의 옴이

산호보다 붉다”로 된다. 아가 5 장 10절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


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라고 했는데, 첫째 행의 ‘희다’

와 둘째 행의 ‘붉다’가 서로 대구가 되어 아름다움을 표시한 것이

다. 그리고 “산호보다 붉어”의 원문의 형식은 첫째 행의 두 문장과


동일하다. 즉 ‘아데무’(붉다) ‘에챔’(그들의 몸) ‘미페니념’(산호보다)

이다. 그 융랙함이 마팡한 청육 칼더니의 원문은 ‘싸피르 기제라탐’인

데, 직역하면 “사파이어가 그들의 다듬어짐이다”로 된다. ‘기제라


탐’은 ‘기제라’(여성 명사로서 ‘갈고 닦음- cutting , polishing’)에 3인

청 • 남성 • 복수 접미 (그들의)가 붙은 것으로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역해서 ‘그 윤태함이’란 말을 첨가한 것이다. 결국 ‘존귀한 자’의
폼, 특히 얼굴이 윤태하고 광채가 났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청옥은 ‘싸피르’ (aaπcPélPOí;) 의 번역인데, 호화로운 왕의 장식용(첼


28: 13) 또는 제사장들의 에봇에도 장식된(출 28 : 18 ; 39: 11) 것으

로 ‘남보석’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제는으로 시작되는 8절 첫째 행의 그 얼굴이 윷보다 검어는 원문
4: 8 / 289

으로 ‘하샤크 미섹호르 타아람’이다. ‘타아람’ (그들의 용모) 이 ‘미섹

호르’(매연, 검탱이보다) ‘하샤크’(검다)라는 말이다. ‘하샤크’는 그

어간 ‘하샤크’의 칼 • 3 인칭 • 단수 • 남성 • 완료형으로, 그 어간과


인칭 변화가 통일하지만, 뭇은 ‘그것이 검다’로 나타난다. 거리에셔
알 샤랍이 없도다라는 구절의 원문을 칙역하면 “그들이 거리 가운데

서 알아차려지지 않았다”로 된다. 즉 ‘로 니베루 박후초트’로서 ‘박


후초트’(거리에서 - in the streets) ‘니베루’ (they are recognized) 의 부정

인 ‘로’(아니)가 결합된 문장이다. ‘니베루’는 그 어간 ‘나바르’(알아

본다)의 니팔 • 3 인칭 • 복수 • 완료형이다.

8절 둘째 행을 직역하면 “그들의 피부는 그들의 뼈 위에서 시들


었다. 그것은 말랐다 (it has become dry). 그것은 나무같이 되었다”

로 번역된다.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의역해서 시척 표현이 되게 한


것이다. 그 가죽은 히브리어로 ‘오람’인데, ‘그들의 피부’란 뭇이다.

막대기 는 원문에는 ‘에츠’로 표시되어 있는데, ‘나무’ 또는 ‘목재’란


뭇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민수기 6장 2절에 보면, 나실인은 야훼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렸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존귀한 자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몽이 깨끗했고 얼굴


은 윤태했다. 원래 눈은 순결의 표시이며 청옥은 영광의 상정인
데, 그들의 몸은 눈보다도 더 순결했고, 그들의 용모는 사파이어
같이 윤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모스 2장 12철의 언

급과 같이 그 백성이 나실 사람으로 하여금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예언자들에게 예언하지 못하게 한 결과, 사태는 극도로 악화된 것

이다. 그틀의 처지는 용기 19창 20철과 30장 30철에 묘사된 대로,

피부와 살아 뼈에 붙였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더니, 가죽은


290 / 예레미야애가

검어져서 떨어졌고 뼈는 열기로 타버렸다는 용의 고백과 꼭 같아진

것이다.
아무리 존귀하고 고결한 사람이라 해도, 민족적인 재난에 처해

서는 남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재앙을 겪는다. 오늘의 교회지도자

들도,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흰 피부, 건강한 안색과 밝은 ‘표

정을 지으며 남들의 존경을 받다가도, 일단 심판 아래 놓이면 그들


의 얼굴이 상하여 숨보다 더 검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굶주리다

그 가죽이 뼈에 달라붙고 나무조각같이 마르고 딱딱해질 것임에 틀

림없다.

밍헤트
칼에죽은자가

주려 죽은자보다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쩔림같이 점점 죄약하여 감이로다

매 주석

첫째 행의 칼에 죽은 자는 원문으로는 ‘할렐레 헤레브’ 곧 ‘칼의


희생자들’이라는 말이며, 주려 죽은 자는 원문으로 ‘할렐레 라아브 ’

곧 ‘굶주‘럽의 희생자들’이라는 말이다. 나옴은은 원문으로 ‘토엄 하


유’로서, 직역하면 “그들이 좋은 상태다”가 된다. ‘토엄’은 형용사
‘토브’(좋은)의 복수형이다.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즉

석에서 죽는 편이 오래 끌면서 고통을 받으며 죽는 것보다 좋다는

뭇이다.
둘째 행은 첫째 행의 이유 설명에 해당된다. 직역하면 “그 까닭

에 그들이 밭의 소출 때문에 쇠잔해지고 쩔린 자 되었던 것이다”로


4: 9/291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설명은 충분치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 (Ehrli야1) 는 갱챔 쇠약하여 감의 원문인 ‘야주부’의

어간을 ‘준’(먹이다)의 니팔로 보고, 칼에 쩔렴받아 부상업은 사람

은 밭의 소산으로 급식할 수 있으나, 굶주렴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애초에 밭의 소산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로

해석한다. 본문의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에 해당하는 원문은 ‘미터

누보트 사다이’(밭의 결실 때문에)이므로, “소산이 끊어지므로”라고

한 우리말 성경은 지나친 의역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다이’는

‘밭, 토지’이며, 전치사 ‘미’+‘터누보트’( ...의 소산)와 함께 ‘밭의

소산으로 인해’라는 돗에 불과하며, “끊어지므로”는 문맥상의 필요


에 의해 첨가된 것 같다. 밭의 산물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어지는
것언데, 이제는 반대로 그 밭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산을 중단한

것이 그들을 찌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아무리 난폭해도 급작스런 죽음이 굶주령으로 서서히 고통받으

며 죽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는 말은 참으로 비애의 심정을 자아내

는 것이다. 기아와 굶주렴이 이토록 무서운 것인가? 6.25동란을

겪은 사람은 짐작이 가겠지만, 대부분의 6.25 이후 세대 사람들에

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흔히 굶주럽은 인간의 가장 극심한

잔학행위를 유발시킨다. 명소에는 인자하던 어머니들마저도 자신

의 어린 자녀를 잡아먹은 일이 실제로 기원전 586년의 예루살렘

포위기간에 발생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신명

기 28장 53-57절에서 하나님께서 불순종할 때에는 언제든지 저주

를 내리시겠다고 경고한 사실을 기억한 시인이, 지금의 예루상램

이 바로 그들의 불복종으로 말미암은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


닫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292/ 예레미야애가

앞에서 “소돔의 심판이 예루살렘의 심판보다 나았다"(얘 4: 6) 는

시인의 고백을 살펴보았지만, 이런 말은 살아서 받는 심한 고통보

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죽기를 원했


던 용의 심정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용은 마침내 하나님을 만남으

로써 그 난관을 극복했던 것이다.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의 고난은 연제받았으니, 이제는 하나

님께 순종하는 길만이 남은 것이다.

뎌띠요드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부녀가손으로

자기 자녀를삶아

식물을삼았도다

매 주석

이 연에 대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히브리 원전 (MT) 의 시행 (詩

行)과는 다르게 나타나 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자애로운 여인들의 여러 손이

그들 자신의 어린이들을 삶았도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멸망할 때

그들의 식물이 되었도다"

처녀 내 백생은 ‘바트-암미’(내 백성의 딸)를 의역한 것이다. 멸망


할 빼에는 원문으로 ‘베셰베르’인데, 전치사 ‘베’(안에, 때에)+‘셰베
4 : 10 /293

르’( ... 의 파멸)다.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는 원문에서는 ‘손들’이 주어

로 나타나 있다. 즉 ‘여데’( ... 의 손들) ‘나섬’(여인들) ‘라하마니요

트’(인자한, 자애로운-형용사 • 여성 • 복수)의 어순으로 나와 있다.

둘째 행에서 자기 자녀톨 삶아는 원문에 ‘비셀루 얄레데햄’으로 되

어 있다. ‘비셀루’는 그 어간 ‘바살’(삶다)의 피옐 • 3 인칭 • 복수 •


완료형으로 ‘그들이 삶았다’라는 말이다. ‘얄레데햄’은 ‘얄레데’(아

이들) ‘햄’(그녀들의)으로서 ‘그녀들의 아이들’이란 뭇이다. 식물융


삼았도다는 원문에서는 그 삶아진 아이들이 주어가 되어 ‘그들을 위

한 식물로 되었다’라는 말로 나타나 있다. 즉 ‘하유’(그들이 되었다)

‘레바로트’(먹을 것으로) ‘라모’(그들에게)의 어순으로 되어 있다.

매 신학적 메시지

계약백성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때,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명소에는 인자하던 모성들도 주용기의 상태로 귀

녀(鬼女)의 소행을 저지를 때 지옥의 정경을 전개하게 된다. 열왕


기하 6장 24-29절에 보면, 이런 일이 그보다 이전에 북왕국 사마

리아 성에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범최


하면 그 같은 일이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명기 28장 1-14절에 의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어

떻게 영화로워질 것인지를 말하기도 했다. 즉 순종하기만 하면 “성

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폼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숭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


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룻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분명히 약속했다. 그러


나 만일 불순종하면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가… 다리 사이에서 나
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척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


294/ 예레미야애가

함이리라"(신 28: 56-57) 고 했다. 우리가 범죄해서 하나님의 은혜

의 손길 이 거두어진다면, 이처럼 사람에게서 그 인간성은 없어지

고 잔인한 통물성만이 남게 될 것이다.

다끄카프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노를쏟으심이여

시온에불을피우사
그지대를사르셨도다

m 주석

첫째 행의 분율 발하시며 에서 “분을”은 히브리어로 ‘에트-하마

토’인데, ‘하마토’(그의 격노)가 목적격을 나타내는 ‘에트’와 결부된


것이다. “발하시며”는 원문에 ‘킬라’로 되어 있는데, 그 어간 ‘칼
라’(끝내다, 성취하다, 한껏 나타내다)의 피옐 • 3 인칭 • 단수 • 남성 •
완료형으로서 ‘그가 한껏 발했다’라는 뭇이다. 맹렬한 노률 쏟으심이

여 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가 그의 분노의 맹렬함을 쏟아부으셨다”


가 된다. 즉 ‘샤파크’(그가 쏟아부었다) ‘하론’(…의 맹렬함) ‘아포’

(그의 분노)의 어순으로 되어 있다.

둘째 행의 활융 피우사 는 원문으로 ‘와이야체트 에슈’다. ‘에슈’는

‘불’이란 뭇이며, ‘와이야체트’는 그 어간 ‘야차트’(방화하다, 피우

다)의 히필 • 3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 ‘와우’-계속법이므로,

‘그가 불타게 했다’라는 뭇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이 직접 불을 피

우신 것이 아니라 남을 시켜서 불타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 지대률

샤르셨도다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 불이 시온 곧 예루살렘의 기초

를 살라버렸다”는 말이다. 우리말 성경의 “사르셨도다”는 좀 지나


4:11-12/295

친 의역이다. 그 원문을 살필 때 ‘와토칼’은 그 어간 ‘아칼’(먹다,

삼키다)의 칼 • 3 인칭 • 여성 • 단수 • 미완료형의 ‘와우’-계속법이므


로, 여성 명사인 ‘불’이 주어이고 하나님이 주어가 될 수 없다.

매 신학적 메시지

이 연의 내용은 계약백성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나

도 맹렬해서 바벨론 군대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

리게 하셨다는 시인의 증언을 담고 있다. 이제 시온의 기초마저 사

라져버렸다. 기초가 남아 있어야만 재건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소망도 기대할 수 없는 “돌 위에 돌이 첨놓이지 않으리라”는 말씀
과 같이 철저한 멸망을 시인은 슬퍼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로 표현하는 예가 많이 나온다(신


32 : 22 ; 사 10: 17 ; 램 17 : 27 ; 21 : 14 ; 49 : 27 ; 50 : 32 ; 호 8: 14 ; 암

1: 4 , 7 , 12 , 14). 그러나 시인이 여기서 언급한 내용은 실제로 발

생한 일에 대한 증언이므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더 큰 의미를 던

져준다. 우리는 자비와 응훌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

서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임


하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헛된 상념을 쫓아 산다면, 언제든지 하

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의 목적과 근거도

송두리째 소설되고 말 것이다.

뎌김라멧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호

들어갈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296/ 예레미야애가

매 주석

이 절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첫째 행과 둘째 행이 바해어져 있

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

“지상의 왕들은 믿지 아니했다.

세상의 모든주민들도

압제자와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 안에 들어갈 줄은"

첫째 행의 대척과 원수는 같은 대상 같지만 “대적” 곧 ‘차르’는 그

어간 ‘차라르’(압박하다)에서 온 남성 • 단수 명사이므로 ‘압제자 ’란


뭇이다. 또 “원수” 곧 ‘오예브’는 ‘적대자’란 뭇이다. 들어갈 줄은 의
원문은 ‘키 야보’인데, 접속사 ‘키’ 뒤에 ‘야보’가 옴으로써 ‘그가 들
어간 사실을’이라는 뭇이 된 것이다. ‘야보’는 그 어간 ‘보’(가다,
들어가다)의 칼 • 3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둘째 행의 세상 옐왕은 원문에서는 ‘땅의 왕들’ 즉 ‘멜케-에레츠 ’

로 되어 있다. 천하 모든 백생 은 원문에는 ‘세상의 모든 주민들’ 즉


‘콜 요셰베 테멜’로 되어 있다. ‘에레츠’는 ‘땅, 지상’이라는 뭇이

며, ‘테멜’은 보다 범위가 넓은 ‘세계’, 사람이 사는 ‘세상’을 뭇한


다. 믿지 못하였었도다는 원문으로 ‘로 헤에미누’인데, ‘헤에미누’는 그

어간 ‘아만’(믿다)의 히펼 • 3 인칭 • 복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믿었


다’라는 뭇이므로 ‘로’와 함께 ‘그들이 믿지 못했다’는 말이다.

매 신확적 메시지
개요 /297

이 시인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주변에 사는 백성들이나 다른 나라


왕들이, 한결같이 예루살렘이 야훼의 도성이므로 신성불가첨일 것
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념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했다. 사실 예루살렘은 웃시야왕 이후 여러 번 견고하게 보강
되었다(대하 27 : 3 ; 33 : 14). 그래서 예루살렘은 안전해 보이는 완

벽한 요새였다. 시인의 그런 생각은 예레미야의 사상과는 다른 것

이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난공불락이라고 주장하는 것


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고 항변한 일이 있다(햄 27 : 14).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했던 일이 무너지고 예

루살램은 파멸되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던 거룩한

성읍이고, 과거에는 공격할 수 없었던 그 성이 함락된 사실에 대해

주변 나라 왕들과 주민들이 놀라게 되었다. 이 일은 인간의 생각과


는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도에 의해서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

날 수 있다는 중거인 것이다.

2) 지도자들의 죄와 그 결과 (4: 13-2 이

매 개요

예루살렘이 파멸된 첫번째 근본 원인은 예언자들의 죄와 제사장

들의 과오였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의 기능을 다해야 할

지도자들이 타락했던 것이다. 그들은 공의를 지키고 하나님과의


계약에 충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최한 사람들의 피를 흘렸고
그 피로 더러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러운 문둥병자를 피하듯

이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피해다녔다.


298/ 예레미야애가

재난의 두번째 원인은 외국과의 헛된 통뱅이었다. 그러나 지도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이집트의 도움으로 바멜론의 침

략을 막으려고 했다(켈 29: 6-7). 그러나 바벨론의 군대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더 빨리 와 마침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말았다.

예루살렘 몰락의 세번째 원인은 시드기야왕의 무책임한 행위였

다. 시드기야는 야훼의 기름부음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백성 을

버리고 도망가려 했다(램 39: 2-7). 그러다 그는 척에게 사로잡혀

그의 아들들은 살해되고 그는 사슬에 묶여 꿀려갔다. 결국 예루살

렘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뎌킹명
그선지지들의 죄와

제사장L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회가성읍중에서

의인의 피를흘렸도다

매 주석

첫째 행에서 그 션지자들의 최는 원어로 ‘하토트 네비에하’다. ‘하

토트’는 ‘ ... 의 죄들’이란 뭇의 여성 • 복수 명사 • 연계형이다. ‘네비

에하’는 ‘그녀의 예언자들’이란 뭇이다. 여기의 ‘그녀’는 예루살렘 을

말한다. 원문에서는 ‘메하토트 네비에하’와 같이 전치사 ‘메’가 붙

음으로써 ‘ . .. 죄 때문에’라는 뭇으로 나타나 있다. 제사장들의 최악


은 원문으로 표현하면 ‘아우오노트’(- .. 의 죄악들) ‘코하네하’(그녀의

제사장들)다. ‘아우오노트’라는 남성 ·복수명사· 연계형은 그 어간

인 ‘아와’(구부러지다, 꼬이다)에서 온 것이다.

둘째 행을 직역하면 “그들은 그녀 (예루살렘) 한가운데서 의인들


4 : 13 / 299

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다”라고 표현된다. 생융 중에셔는 ‘베키르

바흐’의 의역으로서, 직역하면 ‘그녀의 한가운데서’(띠 the midst of

her) 다. 져회가 …피톨 훌렸도다는 ‘담’(피)과 함께 사용되어 ‘하쇼페

컴’(훌리게 한 자들)의 의역이다. 정관사 ‘하’ 없이 ‘쇼페컴’은 그 어

간 ‘샤파크’(흘리다)의 칼 • 능동분사 • 남성 • 복수형이다.

m신학적 메시지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인데도 당시의 거짓 예언자들과 제사장

들은 그들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백성의 최악을

합리화하는 데 급급해 있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을 선하고 의로


운 길로 지도하고 이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타락해 악을
조장하고 불의를 일상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마침내 온 이 스라엘

백성이 범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

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의 악행이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지


만, 특별히 지도자들의 범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파급효과

를 감안할 때, 더 큰 책임추궁을 받을 수밖에 없다(약 3 : 1). 한

편, 그들은 경고하지 않는 파수꾼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램 ~ :

여기에는 백성들도 연류되어 있었다.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의


그릇된 가르침을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짓 예언

자와 부때한 제사장에게 합류한 죄를 지은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방선 몰록에게 희생제물로서 어린아이를 드린 얼이 있었고, 우

상에게 제물을 드리기 위해 이 를 반대하는 의로운 사람의 피를 흘

리게 했다(왕하 24 : 4). “너회가 의로운 자를 저주하고 죽였도다”

(약 ~ : 6). 후대에도 그런 일이 되풀이되곤 했다. 그때마다 하나님

의 심판이 어검없이 내리게 된 것을 역사는 중언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불신
300 / 예레미야애가

자들에 대해 영적 지도자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서 (마 5 :

13-16) , 불의와 최악이 들끓는 이 세상을 건져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딘띄눈
저회가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으로

사람이 만질수없도다

매 주석

첫째 행을 직역하면 “그들이 소경처럼 거리 안을 헤매였다. 그들


이 피로 더러워졌다”로 되며, 둘째 행을 직역하면 “그래서 사람들

이 그들의 옷을 감히 만지지 못했다”로 된다. 우리말 성경은 히브


리 원전과 비교해볼 때, ‘피로 더러워졌다’는 말이 둘째 행으로 옮

겨진 것을 알수 있다.
소경감이는 히브리어로 ‘이웨럽’이라고 되어 있어 명사같이 보이

지만, 실은 남성 ·복수· 형용사이므로 ‘소경처럼’ 또는 ‘소경되어 ’

라는 말이다(신 28 : 29) . 저희가는 거짓 예언자 및 제사장을 가리킨

다.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는 거짓 예언자 및 제사장이 의인의

피를 흘리게 하다가 그들의 옷이 더러워졌다는 말이다. 사랍이 만

질 수 없도다는 주민들이 그들의 옷을 만질 수 없었다는 말인데, 마

치 문둥병자 대하듯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의 ‘만진다’에 해


당하는 원문은 ‘이게우’인데, 그 어간 ‘나가아’(만지다)의 칼 • 3 인

청 • 남성 • 복수 • 미완료형이다. 그 당시 거짓 예언자와 제사장들


이 소경같이 거리를 방황할 때, 사람들은 그들의 피묻은 옷에 접촉
4: 14-15 / 301

되어 더렵혀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은 율법에 따라서 부

정한 컷에 접촉된 자는 부정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레 22 : 5-6; 민

19 : 22).

매 신학적 메시지

그 당시 예루살렘 성중에는 전쟁과 질병과 기아로 인해 죽은 시

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최를 법해 심판받아 소경같이 된 (사

59: 1 이 종교지도자들이 거리를 더듬는 가운데 부정한 것들에 접촉


되어 더러워졌을 것이다(민 19 : 16). 그리고 앞의 연에서 언급한
대로 의인의 피를 흘리게 하다가, 그들의 옷은 이미 더러워져 있었
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피해 멀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혹시 우리는 선한 것을 보는
데는 소경이요, 부정한 일을 행하는 데는 민첩한 자들이 아닌지 ?
성도들의 순결한 피로 옷이 더럽혀져서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하는

일은 없는지 ?

더희싸맥
사람이 저회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 가라,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저회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회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매 주석

이 행은 다른 연에 비해 시의 길이가 길다. 3+2의 ‘키나’ 형식


302/ 예레미야애가

이 2+2+3으로 늘어나 있다. 그리고 첫째 행은 사람들이 거짓 예

언자 및 제사장에게 말한 내용이며, 둘째 행은 이방인 들 이 예언자


들과 제사장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첫째 연에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문풍병자 취급을 받

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레위기 13장 45절에 의하면 “부정하다,

가라, 만지지 말라”라고 외쳐야 할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문둥병자 자신이어야 한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원문을 번역할 때

“저회가 사람들에게 외쳐 이르기를”로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원문에는 양자가 다 3 인칭 복수로 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번역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가라는 히브리어로 ‘쑤루’다. 이 말은 ‘너희들

은 비켜라’라는 뭇의 2 언청 • 복수 • 명령형이다. 부정하다 곧 ‘타메’


라고 외치는 것은 문둥병자가 건강한 자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
고하는 말이다. 우리말 성경의 번역대로 수용하자면, 소경되어 스
스로 부정한 줄 모르고 더듬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기 방어적으로 외치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영어성경 OB , NASB) 은 이 외칭을 부정한 자들 스스로

의 외침으로보았다.
둘째 행은 좀 까다롭다. 우리말 성경에 이방인이 이르기톨로 되어
있는 부분의 원문 즉 ‘아메루 박고임’을 직역하면 “이방 중에서 그

들이 말하기를”이 된다. 이 원문에서 “그들”은 이방 사람들일 수


있으나, 이방에 유리방황하는 부정한 자들 곧 예언자 및 제사장일

수도 있다. 영어성경 홈정역 (KJV) 은 이 둘째 행을 다음과 같이 번

역했다:“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 이방 중에서 말했다. 그들

이 더 이상 거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도망하여 방황합 예는

원운으로 ‘키 나추 감-나우’다. 이 말을 직역하면 “그들이 도망했

고, 역시 방황했을 때”로 된다. 이 말에서 우리는 창세기 4장 12 ,


14절에 나오는 가인의 방랑을 연상케 된다. 그래서 져회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그들이 이민자로서 거기에 더는 정착


4 : 16/303

하지 못할 것이다”로 이해하게 된다.

매 신화적 메시지

시인은 이 연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종교지도자들의 비참한 처지

를 그렴과 같이 묘사했다. 문둥병자 신세로 사람들의 혐오를 받다

못해 이방으로 도망가 방랑할 때, 그콧에서도 이민자, 곧 오늘날

의 경우, 망명자로서 정착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참으로 딱한

처지가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여기서도 더 살 수 없구나’라고

독백하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어디에 흩어져 갈지라도 그들의 쉴

콧은 없다. 곧 가인 같은 신세언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선

포하지 못하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무서운 보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순결을 가장한 비열한 자들의 말로는 한층 더 비참하다.

뎌희왜l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저회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매 주석

이 네번째 비탄의 노래도 16절과 17절의 알파뱃 두운법이 바뀌

어서 ‘페’ 다음에 ‘아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시리아역은 알파뱃

본래의 순서대로 17절이 먼저 나오게 했다. 이 연에서는 야훼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특히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멸시의 대상이 되었음을 노래한다.


304/ 예레미야애가

첫째 행의 여호와깨셔 노하여 흩으시고는 원문에는 ‘야훼의 얼굴이

그들을 흩으셨다’로 되어 있다. “야훼의 얼굴” 곧 ‘페네 야훼’는 야


훼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말 성경의 “노하여”는 원문에는 없지만,
“흩으시고”라는 뭇의 ‘힐레캄’이 ‘할라크’(흩으다)의 피옐 • 3 인칭 •

남성 ·단수·완료형 +3 인청 복수어미로 ‘그들을 흩으셨다’라는 강

조형이므로 첨가한 것이다.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라의 원문은 ‘로

요씨프 레합비탐’이다. ‘요씨프’는 그 어간 ‘야싸프’(더하다)의 히

필 • 3 인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으로서 ‘더 이상…하리라’라는 뭇
- 이다. ‘레합비탑’의 ‘레’는 전치사이며, ‘합비탐’은 그 어간 ‘하바트’
(주의하다, 관심올 기울이다)의 히필 • 3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에

3 인칭 복수 어미가 붙어서 ‘그가 그들을 대단하게 여겼다’라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맨 앞에 ‘로’(아니)가 있으므로 전체적으로는 “야훼

가 그들을 더 이상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라는 말이다.


둘째 행의 원문을 직 역하면 “그 제사정F들의 얼굴을 그들은 높이
지 아니했다. 장로들을 호의로 대하지 아니했다”로 옮길 수 있다.
여기의 저회가라는 주어는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사람이거나 이방인

들을 가리킬 것이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


음을 보여준다. 어떤 영어성경(JB) 중에는 “장로들”의 자리에 ‘예

언자들’이란 말이 놓여 있다. 아마도 13절의 “예언자들과 제사장


들”이라는 말의 대구를 고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대첩지 아니하고의

원문은 ‘하나누’인데, 이 말은 그 어간 ‘하난’(응훌을 베풀다, 호의로

대하다)의 칼 • 3 인칭 • 남성 • 복수 •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친절히


돌보아주었다’라는 뭇이다. 이 말도 그 앞에 ‘로’가 있으므로 그 반

대의 뭇이 된다.

m신학적 메시지

이 연을 읽으면 시인이 절망의 심연에서 자포자기하고 있는 듯이


4 : 17 / 305

느껴질 것이다. 하나님이 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 흩어지

게 하시고 다시는 거들떠 보지 않으설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쓸모


없는 그릇을 깨뜨려 버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중에는 “너회

쫓겨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 4) 고

했고, 시변에도 “이 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시 147 : 2) 라

고 증언되어 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받

아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다만 여기서는 일시적인 검은 구름


이 뒤덮여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포로생활 “ 70년이

차면 ... 돌아오게 하리라"(렘 25 : 12 ; 29: 10) 고 구체적으로 약속하

셨지만, 그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볼 때는 그러한 희망을 풍기에는

너무나도 암담했던 것이다. 그때는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었다.

성전도 파괴되었으니 종교도 없었다. 오직 폐허뿐이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폐허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일어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라”는 시인의 탄식에서 새로운 소망을 위한


해산의 고통을 엿볼 수 있다. 우리들도 그와 같은 고통의 경로를

통과해서 밝은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다긴아인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바라보았도다

매 주석
306/ 예레미야애가

본절의 원문 서두에 ‘오데누’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이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라는 뭇이다.

곧 그들이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있었던 일을 회상

하면서, 시인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의 그릇된 판단에서 야기된 불행인 것이

다. 헛되이 도용융 바라므로의 원문은 ‘옐-에즈라테누 하벨’이라고

되어 있는데, ‘에즈라테누’(우리를 구조함, 우리에 대한 원조)는 여

성 • 복수 영사 • 연계형에 1 언챙 복수 어미가 붙은 것이며, ‘하멜’


은 ‘헛된 것’이란 뭇의 남성 명사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

면 “우리에 대한 실속없는 원조를 바라다가”로 된다.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의 원문은 ‘티벌레나 에네누’다. ‘에네누’는 ‘우리의 두 눈’


이라는 뭇을 지닌다. ‘티벌레나’는 그 어간 ‘발라’(힘이 빠지다, 쇠잔

하다)의 칼 • 3 언챙 • 여성 • 복수 • 미완료형이다.
둘째 행의 우리훌 구훤치 못함 나라는 원문으로 ‘고이 로 요시아’

다. ‘고이’(나라)+‘로 요시아’(그가 구원치 못한다)인데, ‘요시아’는


그 어간 ‘야시아’(구하다)의 히필 • 3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으
로서 , ‘그가 구원한다’라는 뭇이 다.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는 원문으

로 ‘베치피타누 치피누’인데, 직역하면 “우리의 따수대에서 우리는


바라보았다" (in our watchtower we have watched) 라는 말이 된다. ‘우

리는 바라보았다’라는 돗의 ‘치피누’는 피옐 • 1 인칭 • 복수 • 완료형

이므로 강조형이다. 따라서 애써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서 시인은 ‘우리’라는 말을 통해서 정치지도자들 빛 그 나라

백성들과 함께 자신들의 ’헛된 기대를 위우치며 부끄러워하고 있

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바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이접


4 : 18/307

트의 원조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다. ’ 망루에 올라서서 이집트의 구

원군이 올 것을 바라보았으나, 끝내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사


36: 6-10 ; 렘 37: 5-1 이.

일찍이 유다 왕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권고를 뿌리치고 친이집

트 정책을 폈다. 그러나 유다가 바멜론 군대의 침공을 받았을 때,

이집트는 전혀 유다를 품지 못했다. 도리어 친이집트 정책으로 유


다는 훨씬 큰 보복을 바멜론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다. 세상 사람들
로부터 참되고 영원한 도움을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며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에서 도움을 얻으려 하는
것은 도리어 참된 도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

기 때문에 더 큰 재난의 원인이 될 뿐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을 바라보고 새 힘과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사 40 : 31 ; 45 : 22) .

더회차례
저회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

매 주석

저회가 우리 자취훌 엿보니 의 “저희”는 바멜론 정령군을 가리킨


다. 여기의 “우리 자취”는 곧 ‘체아레누’인데, ‘우리의 발걸음’이라
는 말이다. “엿보니”는 히브리어로 ‘차두’인데, ‘그들이 미행했다’
라는 뭇이다. 이는 정령군이 예루살렘 주민의 행동을 샅샅이 감시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거리에 나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행은 ‘키나’ 음조가 걸어져서 2+2+2가 되어 있다. 여기에
308 / 예레미야애가

서 시인은 그들의 최후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탄식한다. 우리

의 풍은 원문에 ‘키체누’로 나와 있다. 이 말은 그 어간 ‘카차’(단절

하다)의 피옐 • 부정법 +1 인칭 복수 어미로서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이다. 가깝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라브’(가까이 다가오다)

다.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의 “다하였고” 즉 ‘말레우’ (그것들이 다 이

루었다)는 ‘카라브’와 서로 대구를 이룬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

다는 원문으로 ‘키-바키체누’인데, ‘키체누’는 이미 나온 대로 ‘우

리의 끝’이라는 뭇이다. ‘키’(분명히)와 ‘바’(왔다)가 함해져서 ‘우리

의 끝이 분명히 왔다’라는 말이 되었다.

m신학적 메시지

18절에서 20절까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멜론 군대에게 완전

히 정령된 상태를 묘사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거리에 내왕할 수 없


도록 감시당하거나 미행당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금상태

는 엄중해졌다. 이제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이 명약관화해졌다. 그

들의 종말은 성벽이 무너짐과 함께 멀어닥쳤다. 이제 그 나라 방위

의 소망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


여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였더라. 갈대아인이 그 성읍을 에워썼

더니 성벽을 깨뜨리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결문 길로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인의 군대가 시드기

야왕을 쫓아가서 여리고 형지에서 미치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그들이 왕을 잡아가지고 하맛 땅 럽나에 있는 바

멜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를 신문하니라"(램 52:6-9; 왕하 25 :

3- 이라는 중언과 같이, 여기의 시인의 중언은 예루살렘 멸망의 참

상을 직접 목격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아마도 적군은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완전 점령하기 전에도 일

부가 성안에 침투해 들어와서 그 백성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


4: 19 / 309

다. 그래서 백성들은 거리로 나다닐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다가 최후의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기어이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라는 시인의 외침에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감돌고 있

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기 백성의 운명을 한 개인의 목숨에 비유해

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날이 다하였다’라는 말은 우리 삶의 기약

의 때가 다 갔다는 말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듯이 개인의 때와


민족의 때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 가나안 7족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에게 붙여서 멸하게

하신 것도 때가 있었던 것같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최악도 심판의


때가 있어, 이제 그 때가 차서 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열

왕기서와 역대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동안 하나

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오래 참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갔다. ’ 시인은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


렀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뎌빌코프
우리를쫓는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쫓고

광。뻐l도 매복하였도다

매 주석

첫째 행의 우리훌 쫓는 자는 그 원문이 ‘로데페누’다. 이 말은 ‘라

다프’(추적하다, 핍박하다)의 칼 • 남성 • 복수 • 능동분사에 1 인칭 •


복수 어미가 붙은 것이다. 공중의 독수리보다의 원문은 ‘민니슈레
310 / 예레미야애가

샤마임’인데, ‘민’은 여기서는 비교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쓰였으며,

‘니슈레’는 ‘네셰르’(독수리)의 복수 연계형 곧 ‘ . .. 의 독수리들’이라

는 못이다. 그리고 끝에 오는 ‘샤마임’(하늘)과 합쳐서 ‘공중의 독

수리들보다’라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짜륨이여 는 남성 • 복수 • 형


용사 ‘칼럼 ’이 특히 ‘하유’ 곧 ‘하야’ (존재한다, 생성한다)의 칼 • 3 인

칭 • 복수 • 완료형과 함께 사용됨으로써 강조된 뭇으로, ‘그들이 재

빠르기 짝이 없는 존재다’라고 한 것이다.

둘째 행의 원문을 직역하면 “여러 산들 위에서 그들이 우리를 열


화같이 쫓았다. 광야에서 우리를 매복했다”로 된다. 여기의 쫓고는

첫째 행의 ‘쫓는 자’와는 다른 낱말로 표현되어 있다. 즉 ‘텔라쿠

누’는 그 어간 ‘달라크’(불탄다, 열화같이 추격하다)의 칼 • 3 인칭 • 복

수 • 완료형에 1 인칭 복수 어미가 붙어서 ‘그들이 우리를 세차게 추


격했다’라는 뭇이 되었다. 이 비슷한 용례가 창세기 31 장 36절 및

사무옐상 17장 53절에도 나온다. 매복하였도다는 원문우로 ‘아르부’


인데, 앞서 3장 10절에서는 원수들이 곰과 사자같이 ‘엎드리어 기

다린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m 신학적 메시지

여기에는 시인의 다급한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짧은 표현임

에도 폭 넓은 정황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일찍이 경고

한 말을 연상케 한다. “보라 그가 구름같이 올라오나니 그 병거는


회오리바람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

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램 4: 13). 이제 그들은 ‘하룻밤에 시들

어버린’ 요나의 박녕쿨 신세가 된 것이다. 어디에도 속시원한 해법

이 없고,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법을 제공


해주실 것이며, 하나님만이 피난처인 것이다.

예레미야 39장 47절의 증언에 의하면 시드기야왕과 그의 왕자들


4: 20 / 311

이 적병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가 보았으나 허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시인 자신도 도망을 시도하다가 실패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의 묘사가 너무도 생생하기 때문에 그런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그가 다음 연에서 시드기야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가 시드기야와 함께 헛되이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시름을 달랜 것이 아닌가 추측

케 한다.

뎌괴레쉬
우리의 콧검 곧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가

저회 함정에 삐쳤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매 주석

첫째 행의 우리의 콧김 은 그 원문이 ‘루아하 아페누’다. 이 말은

왕을 가리키는데, ‘우리의 생명의 기반’임을 말해준다. ‘루아하’는


‘숨’이란 뭇이면서도 ‘영’, ‘정신’이란 뭇이다. ‘아페누’는 ‘우리의 콧
구멍’이란 뭇이다. “우리의 콧검”이라는 표현은 외래적인 것이다.
아마르나 문서에 의하면 가나안의 왕들에게 사용된 일이 있으며,

이집트에서도 람세스 2세에게 그 칭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인이 설명하→듯이 “우리의 콧깅”은 ‘메쉬아하 야
훼’(야훼의 기름부으신 자)다. 다시 말하면 야훼께서 택하신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를 가리킨다. 바로


그가 척들의 함정 안에 사로잡혀 버렸다는 것이다. 다윗의 후예로
서 백성들이 믿고 의지해오던 그가 마치 사냥군의 몇에 걸린 들짐
312/ 예레미야애가

숭같이 포획되고 만 것이다. 짜졌옴이여 의 원문은 ‘닐카드’인데, 이

말은 그 어간 ‘라카드’(사로잡다)의 니팔 • 3인청 • 남성 • 단수 • 완료
형으로 ‘그가 사로잡혔다’, ‘그가 포로되었다’라는 뭇이다.
둘째 행의 원문은 관계대명사 ‘아셰르’란 말로 시작된다. 즉 “우
리의 콧킴”에 관해서 우리가 말해온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 내
용은 단 세 단어인데, ‘베칠로 니헤예 바고임’이다. ‘베칠로’는 전

치사 ‘베’+‘첼’(그늘)+‘오’(그의)로 분석되며, ‘그의 그늘 아래’란


뭇이다. 즉 ‘그의 보호 아래 ’란 말이다. ‘니헤예 ’는 ‘하야’(살다)의

칼 • 1 인칭 • 복수 • 미완료형으로서 ‘우리가 살리라’라는 말이다. ‘바


고임’은 전시차 ‘바’+‘고임’(열국) 즉 ‘여러 나라들 안에서’란 뭇이

다. 전체적으로 다시 번역하면 “그 사람에 관해서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보호 아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가리라’라고 했
던 것이다”로 된다.

m 신학적 메시지

이 연에서 우리는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기대가 허무한 것임을 깨


닫게 된다. 참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기대할 것

이 못된다. ‘메쉬아하’ 곧 헬라어로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시 2:2-4).

여기에 언급된 ‘우리의 콧깅’ 시드기야왕은 불운하게도 요르단의

숲에서 바벨론 병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자기들의 생명이 그에게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 동안, 하늘에 매여


있는 생명줄을 끊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궁극적 지혜와

힘의 근원으로서 인간을 의지한 것이 잘못이었으며, 그 때문에 엄

청난 불행을 가져왔다는 것을 시인은 중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


자를 붙들고 그컷의 사라짐을 슬퍼하는 그 백성들을 그래도 하나님

께서는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4:21 / 313

3) 위로와 소망 (4: 21-22)

m개요

신명기 28-30장에 나타나 있는 중언대로, 이스라엘과 맺은 하

나님의 계약 때문에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수 있었

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미래의 소망을 확실히 간직한 가

운데 이 노래의 마지막 두 절에서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이방원수인

에돔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시인의 견해로는 하나님이 전세계

의 주재자이시므로 에돔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돔은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형제국인 유다의 희생으로 이득

을 보려고 했다(용 10-16장) • 이제 유다는 스스로의 죄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고 한숨 돌렬 수 있겠으나(사 40: 2) , 에돔은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로하


는 갱표가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실상 에돔은 예루살렘이 바멜

론에게 멸망하도록 조장하는 척극척인 역할을 했다(겔 25 : 12-

14) • 자기 형제 야곱에 대한 에돔의 죄는 심판받아 마땅하다. 에돔


이 예루살렘의 재난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더 ‘쓴잔’이 그들에게 이를 것이다.

텍쉰
우스 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314/ 예레미야애가

잔이 네게도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매 주석

우스 땅에 거하는의 원문은 ‘요셰베트(거하는 자) 베에레츠( ... 의

땅 내에) 우츠’로서 ‘우스 땅 안에 거하는 자인’이라는 뭇이다. 우

스 땅은 용의 고향이다. 처녀 에돔 은 ‘바트-에돔’(에돔의 딸 혹은

딸 에돔)으로 표현되어 있다. 출거워하며 기빼하려무나는 원문으로

‘시시 웨시메히’다. ‘시시’는 ‘수스’(즐거워하다)의 여성 • 단수 • 명령


형이다. ‘웨’(그리고)+‘시메히’는 ‘기뻐하다’라는 뭇을 지닌 ‘사마

흐’의 여성 • 단수 • 명령형이다.
둘째 행의 잔 곧 ‘코쓰’는 진노의 잔을 말한다(램 25:15). 네게도

는 원문에는 ‘감-알라이크’(역시 네 위에)로 되어 있다. 이률지니


곧 ‘타아바르’는 그 어간 ‘아바르’(넘어가다 -pass over) 의 칼 • 3인
칭 • 여성 • 단수 • 미완료형으로서, 그 주어 ‘잔’이 여성명사이므로
‘그녀 (잔)가 넘어갈 것이다’라는 말이 된다.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

라의 원문은 ‘티셰커리 웨티태아리’다. ‘티셰커리’는 그 어간 ‘샤카

르’(취하다)의 칼 • 2 인칭 • 여성 • 단수 • 미완료형인데, ‘너 처녀 에

돔이 취할 것이다’라는 뭇이며, ‘웨’(그리고)+‘티테아리’는 그 어간


‘아라’(벌거벗다)의 헛파옐 .2 인청 ·여성 ·단수·미완료형이므로, ‘그

리고 너 처녀 에돔이 스스로 벌거벗을 것이다’라는 뭇이 된다.

매 신학적 메시지

교만의 죄가 한 민족을 어떻게 망쳐 놓는가의 한 예가 여기에 나

온다. 에돔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유다와는 형제종족인데도 불구

하고, 이스라엘과는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4:22 / 315

에 대해 항상 거만하고 적대적이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적과 동

맹한 가운데 남왕국 유다의 불행을 이용해서 가능한 한 유다의 영


토를 많이 침범했다(첼 35: 10-12). 그러한 부당한 처사를 천지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이 묵인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그들에게로 몰려지고야 말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취해서 벌거벗

게 될 것이다. 그들도 부끄러움, 혼란, 슬픔, 파괴를 겪게 되리라


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과연 후세의 역사는 이 일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많김타우
처녀 시옹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쳐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매 주석

네 최악의 형벌이 다 하였으니의 원문은 ‘탐 아오네크’다. ‘탐’은 그

어간 ‘타맘’(성취하다, 이루다)의 칼 • 3 인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이


며, ‘아오네크’는 ‘네 죄악’이라는 뭇이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죄악’이 곧 그 형벌까지를 함축하므로, 이 말은 ‘네 죄에 대한 형

벌은 이미 끝이 났다’라는 돗이다. “사로잡혀 가게”의 원문은 ‘레하

글로테크’인데, 전치사 ‘레’ 이하의 ‘하글로테크’의 어간 ‘갈라’(히필

의 경우, ‘잡아가다’)의 히필 • 부정사 연계형에 2 인칭 • 여성 • 단수


어미가 붙은 것으로서, ‘처녀 시온이 잡혀가게 되는 일’이란 뭇이

다. 그런데 원문에는 그 앞에 ‘로 요씨프’라는 말이 옴으로써, “주

께서 처녀 시온이 잡혀가게 되는 일을 다시는 없게 하시리라”고 말


316/ 예레미야얘가

한 것이다. ‘요씨프’는 그 어간 ‘야싸프’(더하다)의 히펼 • 3 인청 • 남

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둘째 행의 네 최악율 벌하시며 의 “벌하시며” 곧 히브리어로 ‘파카

드’는 ‘방문한다’라는 뭇도 있으나, 여기서는 ‘그가 벌하신다’라는


뭇으로 쓰였다. 네 허률은 히브리어로 ‘하토타이크’인데, 처녀 에돔

의 죄를 가리키므로 여성인 ‘네 죄들’이란 뭇이다. 드러내시리로다

의 원문은 ‘길라’인데, 그 어간 ‘갈라’(벌거벗기다, 밝혀내다)의 피

옐 • 3 인칭 • 단수 • 남성 • 완료형 이 다.

매 신학적 메시지

여기서 시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야훼의 형벌을 받아 새로 거듭

날 때가 된 것으로 판단했다. 이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라고

생각했다.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도다’라는 말은 마치 죄수가


형기를 마치고 출감할 때 새 출발을 기약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는 과거의 허물이 일단 용서된 이후에는 완전

히 청산된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래서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라는 보증이 완전무결한 것이 될


수 있다. 세상의 전과자는 늘 깨진 그릇과 같은 취급을 받겠지만,

하나님의 사하심은 홈없는 새 사람으로 재창조해주신다. 이사야서

40장 이하의 포로해방의 기쁜 소식도,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 태어

남의 계기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소망하는 백성은 복이 있다. 우리는 고

난 중에 있을 때에라도, 남들의 조롱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현재

의 재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는 심사를 갖지 말아야 한다.

다만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리며 겸손히 기도해야 한다. 그

럴 때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 삶의 질을 한껏 고양시킬 것이다.


다섯번째 비탄의 노래
5. 회개하는 공동체의 기도 (5 : 1-22)

이 다섯번째 노래는 애가서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공동체적인 비

가다. 여기에는 유다가 바벨론 치하에서 당연한 경제적 궁핍과 사


회적 무질서, 청치적 압제 등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이 비
가에는 앞의 제 3장 및 제 4창의 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패러독스적

인 요소가 나타나 있다. 즉 유다가 하나념에게 거슬리는 죄악을 저


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바멜론
은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재기불능의 경지에 이를 만큼 철저하게
응정, 파괴함으로써, 그 도가 지나쳐서 오히려 하나님의 계약백성

에게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노래에서는 전체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이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물론 이 유다 공동체는 그 자신의 죄를 충분히 시인하며 뼈저리


게 뉘우치고 있다 (5:7 , 16).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억울하게 당하

고 있는 수모와 압제는 위로받아야 마땅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5 :

1 , 17-20). 그들은 수치와 압제를 면해줄 것을 야훼에게 직접 간청

한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상으로 회복될 것을 집단적으로

호소한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까? 우리에게서 진노

-319-
320 / 예레미야애가

를 풀지 않으시렵니까? "(5: 22) , “이미 주신 하나님의 교훈을 우

리가 저버렸기 때문에 관계회복의 기회를 놓쳐버렸단 말입니까? ..

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의 관계를 여전히

고려하고 계시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것

인지, 이것이 문제다. 그러나 일견 절망적인 듯한 22 절이지만, 이

스라엘 신앙언들은 그 뒤에 21 절을 다시 읽음으로써, 구원의 소망

에서 오는 밝은 빛이 비치게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노래에서는 제 3장의 노래에 나타나 있는 ‘나’의 확신에

찬 음성은 찾아볼 수 없다. 본래 여기의 ‘우리’로 나타나 있는 공동

체 전체의 마음에는 실의와 불안에 사로잡힌 데서 오는 어두운 그

링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야훼 하나닝을 향해서

기도하는 가운데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 아마도 이런 일은 애


가서의 면찬과정에서 제 3장인 세번째 비탄의 노래에 어느 정도 접

근하도록 전체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오늘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노래는 ‘키나’ 형식의 시가 아니라 시편에 가땐 형식을 취하
고 있다. 각 행은 두 소절의 균형잡힌 대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리
듬과 사상 형식에 있어서 서로 대응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계약백성이 겪고 있는 이 엄청난 수모와 고통을 헤아

려 주십시오”라고 말문을 연 다음, 지금 고아와 같은 처지에 있다

고도 했다가, 노예상태에서 박해받으며 신음하고 있다고 하면서,

노래를 실감나게 옮고 있다. 역시 대구로 표현하는 가운데, 부녀


들과 처녀들, 방백들과 장로들, 소년들과 노인들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시온 산은 폐허가 되어 여우가 살

고 있다는, 그렴과 갇은 묘사가 연달아 전개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서 있는 현장에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는 마음을 토로하면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 점에서 그가 단순히 시인이라기보다는 독실
개요 / 321

한 신앙인임을 알게 된다. 즉 ‘영원히 살아 계시는 야훼 하나님의

보좌는 세세에 미칠 것’인데, 그분이 그 백성을 결코 잊으실 리 없


을 것이며, 그들을 ‘옛날같이 회복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감돌
고 있다 (5 : 19- 22). 따라서 애가서의 마지막 결론인 이 노래는 첫

째로, 계약의 하나님 앞에서의 소망과 둘째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비탄이 교차된 것으로서, 과거는 현재의 비극을 낳고 현재의

비극은 미래의 소망을 잉태한다는 내용요로 나타나 있다.

이 다섯번째의 비탄의 노래는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앙고백

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유


다 백성에게 내리신 형벌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

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불형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더 나

아가서 그토록 절망적인 상태의 한가운데서 희망이 솟아나오는 것


을 감지하고 있다. 계약백성이 겪은 미중유의 불행은 그들의 신앙

을 말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하나닝을 의지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자산을 한 단계 더 높이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1) 자비의 간청 (5: 1-7)

매 개요

‘키나’ 음조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자유로운 시로서 하나님께 호

소하는 기도형식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인은 백성들의 대변자가

되어, 주로 ‘우리’라는 주어를 취해서 하나님의 ‘헤세드’(자비)와

‘라함’(응흉)을 간구한다. 흔히 이 노래는 자비를 간구하는 공동체


의 기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의 형식은 시편에 가까운 것으로
322 / 예레미야애가

서 5장 1 절은 2+2+3 이며, 5장 2 절은 3+2 이며, 5장 3절은 2+2

+2 이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행은 대개가 3+3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인은 될 수 있는 한, 시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로움을 갖고 그들의 슬픈 사연을 하나님께 아뢰고자 했다. 먼저 그

는 최에 대한 참회의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은 최 때문에

죽었고, 우리는 그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나이다" 이와 같이 하

나님의 정의에 그들 자신을 복종시킨다. 그들은 행악하는 자의 후

예이며 죄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땅과 집은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없는 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는 치욕적인 것이었다. 나라와 민족은

고아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필수품을 얻으려고 종의 신분을 감수해야
했다고, 하나님께 애절하게 아뢰었던 것이다.

띠-밍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히옵소서

우리 기엽이 외인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

매 주석

l절의 우리의 당한 것 은 원문대로 옮기면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

났었는지에 대해”란 말이 된다. 우리의 수욕은 원문으로 ‘헤레파테

누’다. 이 말은 ‘치욕’, ‘멸시’, ‘조소’, ‘비난’ 등의 뭇을 가진 ‘헤레


파’(여성 • 단수명사)의 연계형에 1 인칭 • 복수 접미사 ‘누 ’가 붙은 것
5:1-2 / 323

이다. 감활하융소셔는 원문으로는 두 낱말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합

비타 우레에’인데, ‘합비타’는 그 어간 ‘나바트’(눈여겨보다)의 히


펼 • 2 인칭 • 남성 • 단수 • 명령형으로 “당신이 주의를 기울여 보옵

소서”란 뭇이며, ‘우’(그리고)+‘레에’는 그 어간 ‘라아’(보다)의


칼 • 2 언청 • 남성 • 단수 • 명령형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자세히 보
고 또 보옵소서”라는 말이다. 영어성경 (KJV) 은 “숙고하라, 그리고

보라"(consider, and behold) 라고 했고, 또 다른 성경 (RSV) 은 “보라,

그리고 또 보라"(behold, and see) 라고 했다.

2절의 우리 기업은 히브리어로 ‘낳할라테누’다. ‘유업’, ‘유산’이라

는 뭇을 지닌 ‘낳할라’(여성 • 단수명사)의 연계형에 1 인청 • 복수 접


미사 ‘누’가 붙어서 “우리 기업”이란 말이 된 것이다. 이 기업은 하
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말한다. 외인 이란 말은 두

번 나오는데, 원문에서는 각기 다른 낱말을 사용했다. 즉 처음의


“외인”은 ‘자렴’(낯선 사람들) , 나중의 “외인”은 ‘나케림’(외국사람
들)이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기업을 보존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인데, 실상은 그렇지 못

했기 때문에, 그 기업을 외인들 곧 이방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톨아갔나이다는 히브리어로 ‘네헤프카’인데, 이 말은 그 어

간 ‘하파크’(넘어가다, 돌아가다)의 니팔 • 3 인칭 • 여성 • 단수 • 완료

형이다. 이 문장의 주어는 여성 명사인 기업 이다. 곧 여성 명사인


그 기업이 “외인”에게 념어가게 되었다는 뭇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시인은 그 백성이 당하고 있는 억울한 일을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자바와 공훌을 간구하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기억하소

서’, ‘눈여겨 보옵소서’, ‘보옵소서’라고 말문을 연 것은 구원을 호

소하기 위한 서두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의 딱한 처지를 자세히


324/ 예레미야얘가

보고 자비와 공흉을 베풀어주시기를 주저하지 말아 달라는 뭇이

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명예를 매우 존중했는데, 이제는 그들의

기업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이 견딜 수 없는 수치가 된 것

이다(시 79: 4; 89: 41 ; 123: 3, 4) . 그들이 유업으로 받은 땅과 집

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것들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 무너진다는 뭇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무너진다

는 뭇이기도 하다(왕상 21 : 3).

그 반면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낯선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소중한 기업(토지)과 거처하는 집이 념겨지고 말았다는 사

실은 대단히 괴롭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야곱의 후손

들이 어떻게 돼함을 받았고, 어떻게 출애굽해서 가나안을 기업으

로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

던 일의 성취로서 그 의미가 매우 성장한 것으로, 이렇게 이방인들

에게 넘겨진 사실이 계약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무로

짐작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닝으로부터의 소외이며 저버림이


기 때문이다.

댐-댐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과부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주고짚을얻으오며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매 주석
5: 3-5 / 325

여기에서는 시편에서 혼히 볼 수 있는 시적 형행법이 잘 나타나

고있다.
3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는 아비 없는 고아들이 되었다. 우
리의 어미들은 과부들과 같다”로 된다. 여기의 ‘고아’와 ‘과부’는

예루살렘 멸망 후 흩어진 백성들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 각기 복수로 나타낸 것은 흩어진 유다 백성들 전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 이라고 한 것

은, 히브리인들의 경우, 아비가 죽으면 어미는 과부가 되고 그 자

녀는 고아가 되기 때문이며, 고아는 외로운 자식 인 생이므로 그렇

게 표현한 듯하다. 그 원문은 ‘예토멈’(고아들)이다. ‘과부들’은 히


브리어로 ‘알마노트’다. 구약성서에서는 이렇게 ‘고아’와 ‘과부’가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출 22 : 21 ; 신 10: 18 둥) • ‘과부’는 ‘억울함을

당하는 자’(사 1 : 23) , ‘도움을 받아야 할 가난한 자’(용 31:16) ,

‘보호를 받아야 할 자’(말 3 : 5) 등으로 인식되었다.

4절에서도 ‘물’과 ‘밸감’이 대구가 되어 명행을 이룸으로써, 시적

감흥을 일으켜준다.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의 물을 은(돈)을 내고

우리가 마셨다. 우리의 탤나무는 대가에 따라 그것이 와진다”로 된

다. 이 말은 본시 물과 옐나무는 그 백성들의 소유인데도 불구하

고, 바벨론이 그들을 강접한 이후로는 부당하게도 돈을 내고야 물


을 마실 수 있고 또한 연료를 구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은올 주

고는 원문으로 ‘베케셰프’ 곧 ‘베’(‘안에, ‘갖고’, ‘동안’이란 뭇의 전치


사)+‘케셰프’(‘은’이란 뭇의 명사)다. 물율 마시며 는 원문으로 ‘샤티

누’인데, 그 어간 ‘샤타’(물마시다)의 칼 • 1 인칭 • 복수 • 완료형으로

서 ‘우리가 물을 마셨다’라는 뭇이다. 그 시제는 비록 완료형이지

만 경험의 완료형이므로 현재의 의미도 있다. 강율 주고는 원문에

‘비메히르’로 나타나 있다. ‘비’는 ‘갖고’란 뭇의 전치사이며, ‘메히

르’는 ‘대가’ 또는 ‘값’이란 돗이다. 얻으요며 는 그 원문이 ‘야보우’


326 / 예레미야얘가

인데, 그 어간 ‘보’(온다)의 칼 • 3 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으로


서 ‘그것이 온다’라는 돗이다.
5 절의 원문을 직역해보자. “우리의 목 뒤까지 우리는 추적당했

나이다. 우리는 지쳤나이다. 우리에게 휴식이 없나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원문에는 ‘우리를 쫓는 자’라는 말은 없으나, 의역하다

보니까 첨가된 것이다. 본문에는 그대신 ‘우리가 추적되었다’라는

뭇의 ‘니르다프누’가 나와 있다. 이 말은 ‘라다프’(쫓다, 추적하다,

핍박하다)의 니팔 • 1 인청 • 복수 • 완료형이다. 목옵 눌렀사요니는 목

뒷럴미까지 추적해 왔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의역한 것이다. 한 영


어성경 (KJV) 은 “우리의 목이 핍박자에게 눌렴을 받고 있다”라고

문자적으로 번역했고, 또 다른 성경 (RSV) 은 “우리의 목 위에 멍에

를 올려 놓은 채로 우리가 추적받았다”로 번역했다. 후자의 경우는


원문에 있는 ‘알’( ... 위에) 앞에 ‘올’(멍에)을 첨가해서 해석했기 때

문이다. 우리가 곤비하여 의 원문은 ‘야가아누’인데, 그 어간 ‘야가


아’(피곤하다, 고통스럽다)의 칼 • 1 인칭 • 복수 • 완료형이다. 이 완
료형은 상태완료형으로서 현재시상으로 번역된다. 쉴 수 없나이다

는 ‘로 후나하-라누’로 표현되어 있는데, ‘라누’(우리에게) ‘후나하’

(쉽이 주어졌다) ‘로’(아니다) 곧 “우리에게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

다”라는 뭇이다. ‘후나하’는 그 어간 ‘누아하’(쉬다)의 호팔 • 3인

칭 • 남성 • 단수 • 완료형 이 다.

매 신학적 메시지

회중들이 모여 하나님의 자비와 응훌을 회구하는 기도를 계속하

고 있다. 그들이 당하고 있는 참담한 사태, 억울한 사연이 하나님

의 소관인 것은 분명하지만, 슬픔에 잠긴 백성들이 구원을 간청할

대상은 그래도 하나님이다. 그들에게 땅과 집을 주신 분이 하나님

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고아같이 버려진 상태에서 생필품을 숭리


5: 6-7 / 327

자로부터 구매해야 할, 주객이 전도된 딱한 사정을 누구에게 호소

할것언가?

그들은 소유를 잃은 것 외에 자신들의 권리까지 잃었다. 그들의

새로운 주인은 잔인한 독재자들이었다. 그들의 왕도 끌려갔고 나


라의 주권도 무너졌으니, 이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거나 그들의

공의를 보장해줄 자가 아무도 없었다. 과연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통치는 잔악했다. 백성들은 그들이 마실 물과 연료로 이용할 나무

를 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쉴 새 없이 노역에 종사해야 했으며 박

해와 공포가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다녔다(신 28 : 65-67 ;켈 5 : 2 ,

12).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불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다시금 노예상태로 되몰려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목에 멍에를 메우고 우리를 핍박하였사오니”라는

말로도 표현될 만큼, 비참한 노예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스라

옐은 스스로 교만해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책망받아 오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원수를 시격서 강제로 그 목에 멍에를 메우고 눌러, 그
들의 교만을 꺾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그 백성에 대한 하나

님의 형벌이 급기야는 자비와 응훌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아무리


벙최한 백성이라도 형벌을 통해 갱신되었을 때, 새로운 신앙공동
체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가운데 화해와 사랑의 봉사를 감당할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댐-띠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랑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328 / 예레미야애가

m 주석

여기서 이집트와 앗시리아를 언급한 것은 지리적으로 세계의 두

지역, 곧 남방과 북방을 망라해서 그들이 강대국에 추파를 던졌다

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유다 백성들이 압제

를 견디다 못해서 그곳으로 도피해가서 가난을 연해보고자 했던 것

이다. 또한 7절에 나온 바대로 예루살렘 함락으로 말미암아 그들

의 아비들은 범죄의 대가로 죽었고, 지금은 남은 백성들이 열조의

잘못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16절에 이르러서 현재


의 그들도 그 죄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6절의 우리가 애굽 사랍과 …악수하고 라는 구절에서 “악수하고”는

원문으로 ‘나타누 야드’인데, ‘야드’(손)+‘나타누’(우리가 주었다)의


원뭇은 양식을 얻기 위해 비굴한 자세로 그들과 화친하는 모양을
묘사하는 것이다(램 44 : 8, 12). 어떤 영어성경 (Moffan) 은 “우리가

항복했다 .. (we surrendered) 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본문에 “얘굽 사

람과 앗수르 사람”으로 나와 있는 것은, 시인의 생각으로는 남쪽의

이집트 사람, 북쪽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사람을 뭇했을 것이다.

그 당시 앗시리아는 이미 멸망하고 바멜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관례대로 앗시리아 사람이라고 표현한 듯하다(스 6 :

11 • 렘 2 : 18). 양식올 얻어 배훌리고자라는 구절이 원문에서는 ‘리셉

보아 라햄’이라는 말로 쓰였는데, ‘리’(‘위해서’란 뭇의 전치사)+‘셉

보아’(‘만족함’-어간 ‘사바아’의 칼 • 부정사 • 연계형)+‘레햄’(떡)으로

풀이된다. ‘레햄’이 문장의 맨 끝에 오면 ‘라햄’으로 발음한다.


7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의 아비들은 범죄했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들의 죄악을 젊어졌다”가 된


다. 본문에 “우리 열조는 ... 없어졌고”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5: 6-7 / 329

라고 원문에 나타나 있다. 그 최악율 당당하였나이다는 원문으로 ‘아

오노태햄’(그들의 죄악) ‘싸발르누’(그 어간 ‘싸발’의 칼 • 1인칭 • 복

수·완료형)인데, ‘그들의 최악을 우리가 젊어졌다’라는 말이다. 예

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라는 말도 같은 말이다(사 53: 4,

m 신학적 메시지

양식을 얻기 위해 자유를 판다는 것은 하나닝을 믿는 신앙인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유다가 멸망하게 된 근본 원인이 하나님


을 의지하는 대신, 강대국의 보호를 통해서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
려고 한 데 있었다(대하 30: 7-8). 그러한 과오로 말미암아 예루살

렘 멸망 당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은

백성들은 다시금 이집트 사람과 바벨론 사람으로부터 생필품을 얻

으려고 종의 신분을 감수하게 되었다. “양식을 얻기 위해 얘굽 사


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했다”는 것은 그들과 협정을 맺었다는 것
인데 (왕하 10: 15) , 종종 협정한 집단이 좀더 힘이 센 집단에게 굴

복하거나 복종하는 것이 상례였다. 여기의 시인과 함께하던 세대


는 그 아버들의 죄악을 탓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그 아버들과 마

찬가지의 과오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오늘의 불행을 옛 세대의 과오의 탓으로 돌리고 원

망하기 쉽다. 물론 우리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의 결과를 정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는 일에 열을 올리다가 우리

의 현재의 잘못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조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

는 지난 세대의 죄악과 과오를 비난하는 대신, 오히려 그 비난을

혼자 젊어지신 예수를 본받을 일이다.


330 / 예레미야애가

2) 시온의 참상과 철저한 고백 (5 : 8-18)

매 개요

여기서 시인은 시온의 참상을 한층 더 생생하고도 사실적으로 묘

사하고 있다. 독자들은 결코 이 광경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모든 참상이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

이니이다>>(5 : 1 이라는 고백을 함께 외치게 될 것이다.

바벨론 통치하의 그들의 생활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기근이 폭풍같이 몰아닥쳐서 목숨을 걸고 떡 한 덩이 를 구해야만

했다. 식량을 구하고자 광야에 나가면 베두인 약탈자의 위협을 무

릅써야 했다. 그들은 모여앉아 하나님에게 그들의 본래의 지위를


회복해 주십사 하고 기도할 뿐이다. 그리고 바벨론 총독의 가혹한

통치를 더 이상 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거룩

한 산 시온에서는 부녀들에게 능욕이 자행되고 있었고, 황폐한 성

전터에는 여우가 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시인은 ‘우

리 탓으로 우리의 존귀가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 참회의 고백을 하

고 있는 것이다.

댐-뎌띠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그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굉e뻐1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5: 8-10 / 331

주럼의 열기로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매 주석

8절의 총들 곧 ‘아바덤’은 갈대아 군대를 가리킬 것 이나, 그들이

바멜론 왕 느부갓네살의 고용병들이므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즉 남의 나라 왕의 고용병이 유다 백성을 통치한다는 사실은 수치

였던 것이다. 그들의 압제와 수모를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큰 수치였다(장 30: 21-22) . 관합함이여 는 원문에 ‘마셀루’로 되어

있는데, 그 어간 ‘마살’(다스리다, 통치하다)의 칼. 3 인청·복수·

완료형이다. 따라서 ‘그들이 통치했다’이다. 이 말은 백성들의 생


사의 주권까지라도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건져낼 자’는 원문으로
‘포레크’인데, ‘파라크’(빼앗아내다, 구조하다)의 칼 • 능동 분사다.
9절을 직역하면 “우리의 영혼(목숨)으로써 우리의 떡을 얻나이

다. 광야 안의 칼 앞에서”가 된다. 또 의역하면 “광야에서 만나게


될 칼의 위험 때문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 떡을 구하고 있나이다”라
고 옮길 수 있다. 광야에서 만나게 될 칼은 아마도 베두인족의 약

탈을 뭇하는 듯하다. 광야에서 양식을 얻는다는 것은 전쟁으로 수


확을 거두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나마 거두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죽기훌 우홉써야 라는 구절은 원문에서는 ‘베나프셰누’라는

말로 쓰였다. 곧 ‘베’(‘안에, 더불어’란 뭇의 전치사)+‘네페슈’(영혼,

생명)+‘누’(우리의)로 분석되는데, 그 뭇은 ‘우리의 목숨을 걸고’라

는것이다.

10절의 주림의 옐기로 인하여 의 원문인 ‘법퍼네 잘아포트 라아브’

를 직역하면 “주림의 열기 앞에서”가 된다. 그런데 이를 다시 의역


하면 “맹렬한 기아상태로 말미암아”란 말이 된다. 즉 ‘민’(때문에)
332/ 예레미야애가

+‘퍼네’(얼굴) , 다씨 말하면 ‘ .. . 앞에 놓여서’라는 말과 ‘잘아포트’

(열기, 타오름-여성 • 복수영사 • 연계형) ‘라아브’(기근-남성 • 단수 영

사)라는 말이 결합된 것이다. 아궁이처렴 검으니이다 에서 “검으니”


는 원문에 ‘니크마루’로 되어 있는데, 그 어간 ‘카마르’(뜨거워지다)

의 니팔 • 3인칭 • 복수 • 완료형이므로 ‘그들이 열을 받았다’라는 뭇

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치 태양열에 검게 타듯이 ‘기

근의 열기’ 때문에 피부가 검게 거철어졌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 낱말이 시리아 지방에서는 ‘검어진’ 경우에도 쓰

인다는 것이다. 한 영어성경 (KJV) 은 “우리의 피부가 검어졌다”


(our skin was black) 라고 했고, 또 다른 영 어 성 경 (RSV) 은 “우리 의

피 부가 뜨거 워 졌다>> (our skin is hot) 라고 했다.

매 신학적 메시지

하나님의 성민인 그들을 통치하는 자들은 점령군으로서, 진주해

들어온 갈대아 고용병들이다(왕하 25:24). 그들은 유례없이 포학

하고 잔인한 군대로 알려져 있었다. 유다 백성들은 그동안 제사장

나라의 백성임을 자처했고, 또한 열국 중에서 존경을 받던 예루살

렘의 주민임을 자량해왔다. 그런데 이제 원수들의 비천한 종들에

게 통치받는 수모를 겪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잠 19: 10 ;전 10: 17). 네 가지의 참을 수 없는 것 중의 하

나가 ‘종이 주인을 관할하는 일’이라고 잠언 기자는 말했다(잠 30 :


21-22).

나라를 다스릴 자격과 능력이 없는 자가 관할할 때, 나라의 치안


은 어지렵고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백성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며, 기아상태가 극에 달해서


모두가 산송장이 되고 피부색은 아궁이처럼 검어질 것이다. 이제
최악의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죽음 직전에 있는 그들을 누가 하나님
5:11-12/333

의 백성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들은 기껏해야 종들의 종에 불과했

다.
여기서 우리는 영의 양식을 갈망하지 않는 자는 오직 육신의 양

식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삶 특히 생명까지라도 내걸고 살아

야 하며, 그런 삶이 결코 성공척일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는 자는 도무지 세상의 자기

중심적인 명예와 재물과 권세로도 채울 수 없는 기아상태의 열기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극도의 굶주럽으로 피

부의 윤기가 사라지고 얼굴이 창백해지다가, 마르고 굳어지고 검

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며-딘김
대적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방백들의 손이 매어달리며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매 주석

바멜론 군대의 예루살렘 정령 이후의 혼란상태가 전개되고 있

다.
11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여인들은 시온에서, 처녀들은 유다의

여러 성읍들에서 강간당했나이다”로 된다. 대척이란 말은 원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문맥상 여성들을 능욕한 당사자들이 바멜론 군대

임이 분명하므로 번역상 첨가한 것이다. 원문의 주어는 ‘나성’(여인

들)과 ‘베툴로트’(처녀들)로 나와 있다. 욕보였나이다는 원문으로


‘인누’인데, 그 어간 ‘아나’(강간하다, 욕보이다)의 피앨 • 3 인청 • 복
334/ 예레미야얘가

수 • 완료형이다. 이 말은 ‘그들이 강간당했다’와 같이 과거형으로


할 것이 아니라, 소위 경험적 과거형으로서 현재형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부녀자들이 겁탈되는 것은 원수에게 정령된 패전국 백성

이 당하는 큰 비극 중 하나다.
12절의 빵백들의 손이 빼어달리며 라는 말을 십자가 형틀에 못박히

는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의 문맥은 방백 (고관)들이 처

형당한 것을 말해준다. 즉 방백들이 처형된 후, 그 시체의 ‘손을

묶어’(베야당) 군중이 볼 수 있도록 매단 것을 의미한다. 이런 처

형방법에 관해서는 신명기 21 장 22-23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

나 또 다른 견해는 방백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는 것이다. 또는 방백들이 ‘원수들의 손에 의해서’ 피살된 후 매어
달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베야담’이 ‘베’(…로써)+‘야당’(그들의

손)으로 풀이되므로, 이상의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대

개의 영어성경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방백들이 매어달렸다" (Their

hands hanged our princes ; )로 번역 했다. 장로들의 얼굴 은 장로들 자


신을 말한다. 장로들이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방의 체제가
판을 치는 바람에 그들의 권위가 인정받지 못하게 된 상황을 말하
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체제가 무너진 무법천지

의 상황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그 나라가 멸망했을 때의 혼란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시

인의 가슴은 메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거룩한 산 시온에서 그리

고 성읍 도처에서 부녀자들이 능욕당했다. 귀족과 고관들이 처형

당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그 시체들이 매어달려 전시되

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의 목척과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할 수밖

에 없었다. 이런 때에 여기에 나타나 있는 공동체는 그들 하나님의


5:13-14 / 335

백성이 당하게 되는 일에 원한보다는 슬픔으로 반웅하고 있다. 그

들이 주를 의지하지 않고 방백들을 의지하다가 그들의 몰락과 함께

망하고 만 것이다(시 146: 3). 그들에게는 복수의 감정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 정당성을 깨끗이 인정


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

이다. 시인은 동족을 대표하여 죄를 뒤우치고 겸허한 성정으로 묵


묵히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뎌희-디김
소년들이 뱃돌을지오며
아이들이 짚을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소년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m주석

이제 예루살렘은 질서가 무너져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심

한 노역만이 있을 뿐,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그 공동체는

개탄하고 있다.
13절을 다시 번역하면 “젊은 남자들은 뱃돌일에 종사했나이다.

그리고 소년들은 나무를 지고 비틀거혔나이다”로 표현된다. 본문

의 소년이란 말은 원문에서는 ‘박후럽’이라는 히브리어가 쓰였는데,


그 원뭇은 ‘젊은이들’이다. 그 어간 ‘박하르’는 ‘선출하다’라는 돗인
데, 아마도 군대로 뽑혀 나갈 수 있는 ‘장정’이란 의미에서 온 듯하

다. 아이들 은 원문에 ‘네아럼 ’이 쓰였는데 , 20셰 이전의 소년들(때

로는 소녀도 포함)을 뭇한다. 뱃톨융 지요며 의 “지오며” 곧 ‘나사우’

는 그 어간 ‘나사’(쳐들다, 들어 나르다)의 칼 • 3 인칭 • 복수 • 완료형


336/ 예레 "1 야얘가

으로서 ‘그들이 노역에 종사했다’라는 돗이며, 문법적으로는 경험

적 완료형이므로 현재시상으로 번역할 수 있다. 뱃돌질과 성을 지

는 일은 그 당시 노예들이 하는 비천한 일이었다(삿 16: 21 ; 사 47 :

2. 수 9: 27). 엎드러지요며 의 원문은 ‘카살루’인데 , 그 어 간 ‘카살’


(비틀거리다, 옆드러지다, 무너지다)의 칼 • 3인청 • 복수 • 완료형으로

서 역시 경험적 완료형으로 다룰 수 있다.

14절의 노언 은 ‘장로들’이라고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잠 31:23).

14절을 직역하면 “장로들은 성문에서 불러났고, 젊은이들은 그들

의 노래에서 물러났나이다”로 된다. 생문 앞에는 장로들이 앉아서


백성들의 재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며 (암 5 : 1 이, 상거래나 중대

한 결의채태도 하는 광장이 있었다(램 14: 2). 앉지 못하고는 그 원

문 ‘샤바투’(그들이 파했다, 그들이 중단했다)를 의역한 것이다. 장로

들이 성문에 앉기를 파했다면, 그것은 벌써 모든 질서와 규범이 무

너진 것을 뭇한다. 노래하지 못하나이다의 원문은 “그들의 노래를


중단했나이다”라는 돗을 지난다. 여기의 “노래” 곧 ‘네기나’는 현악
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부르는 것을 말한다. 성문 앞 광장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집회장소로서, 젊은이들이 거기에서 각종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매 신학적 메시지

바멜론의 침공으로 살아 남은 어린 소년들과 나라의 동량으로 장

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들이 노예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에는 가축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물들이 할 일을 사람들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되


었다. 옛날 삼손에게 시켰던 것처럼 (삿 16 : 21) 곡식을 빵기 위해

젊은 남자들은 뱃돌을 몰려야 했다. 그리고 소년들은 도시에 필요

한 목재와 밸감을 운반해야 했다. 유다의 희망이었던 사람들이 가


혹한 노역으로 쓰러져 갔다. 지혜와 정의와 행복은 그 나라에서 자
5:15-16/337

취를 감추었다. 장로들이 주관하던 성문 앞 광장에서는 정의와 지


혜가 선포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장로들에게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로들이 이미 떠났으므로 그콧에 가

보아야 소용이 없었다. 거기에는 음악도 없었다. 명소에는 기쁨과

행복을 구가하는 노래가 거기에 울려퍼지곤 했으나, 이제 바멜론


의 잔인한 손아귀에서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기뻐할 것이 아무것
도없었다.
“소년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라는 본문의 탄식은 백성의
큰 재앙을 반영한다. 여기에 슬픔의 파도가 휩쓸려왔다. 거기에는

음악 대신 애통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나귀가 해야 할 중노동인 뱃


돌 돌리는 수치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뎌되-뎌희
우리 마음헤 회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m주석

우리 마음에는 회락이 사라졌고, 우리의 춤은 애통함으로 전환

되었다는 것이 15절의 내용이다. 본시 유다 사람은 노래를 잘하고


춤을 좋아했다고 한다. 절기가 되면 마음껏 환희하며 가무를 즐겼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말했다.


희학 곧 ‘메소스’는 큰 감격을 동반하는 기쁨을 뭇한다. 그 대칭으
로 나오는 얘흉 곧 ‘에멜’은 역시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의 통절한
슬픔을 말한다. 무도 곧 ‘멕흘’은 특별히 큰 기쁨의 표현을 말하는
338/ 예레미야애가

것으로, 가끔 소고와 수금의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시 149 :


3-4).
16절의 연류판이 벌어졌샤오니 는 국가의 멸망을 상정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램 13:18). 곧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국가적 영

광이 실추된’ 사실을 슬퍼하는 것이다. 원문대로 말하면 ‘우리 머

리의 면류관’이란 곧 ‘아테레트’(면류관) ‘로셰누’(우리 머리)로서 하

나님과 다윗의 계약, 즉 유다 왕권의 상갱적인 표현이다. 더 나아


가서 유다 백성 전체의 영광을 의미한다. ‘아태레트’는 ‘아타라’의

연계형으로서 ‘ ... 의 면류관’이란 뭇이다. ‘아타라’는 ‘연류관’ 외에

‘화관’ 또는 ‘화환’ 퉁 가장 좋은 것 또는 모든 영화를 상갱하는 말


로 사용되었다(잠 17: 6; 사 62: 3 동) . 요호라는 원문으로 ‘오이­

나 라누’인데, “이제 우리에게 화로다”라는 말이다. ‘나’(지금) ‘라


누’(우리에게) ‘오이’(화있도다)로 풀이된다. 우리의 법최함융 언함이

니이다 는 원문에는 ‘키 하타누’가 쓰였는데,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

리가 범죄했나이다”로 표현된다.

매 신학적 메시지

그토록 즐겁던 절기행사는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모든 영광은

종말을 고했다. 그 자리에는 애통함과 수치만이 남아 있다. 유다

백성들에게는 정의의 공정한 집행이 영광이었고, 하나님의 말씀대

로 다스리는 다윗 왕조의 위염이 영팡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영

광의 면류관이 떨어졌고 그들에게 화있도다 ! 그들이 범죄한 까닭

에 형벌을 받게 됨을 인식하고, 그 공동체가 참회의 고백을 한목소

리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너무나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계속 이렇게 탄식과 애통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죽음

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그들은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
,: 17-18 / 339

다”라고 고백했다. 이 말은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땅히 받


아야 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환란이 크다고 해서 원망하는 자는 소망이 없으나, 그 환

란의 근원이 되는 자기의 최를 슬퍼하는 자는 소망이 있다.

뎌긴-더희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시온산이 횡무하여
여우가거기서 노나이다

매 주석

처음의 이러므로는 ‘알-제’(이것 때문에)이며, 그 다음의 이러므

로는 ‘알-엘레’(이것들 때문에)다. 아마도 전자는 16절의 ‘면류관의


실추’ 때문일 것이며, 후자는 8절 이하부터 15 절까지의 모든 불행

때문임을 말하는 듯하다. 어쨌든 그 모든 일 때문에 ‘마음이 피곤

하고’,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옴이 피곤


하고는 원문으로 ‘하야 다레 리베누’다. ‘리베누’는 ‘레브’(마음)

+‘누’(우리의)이며, ‘하야’는 그 어간 ‘하야’(존재하다, 생성하다)의

칼. 3 인청 • 남성 • 단수· 완료형으로서, 그 뒤에 오는 형용사 ‘다

레’(아픈, 비참한)와 결합되어 ‘그것 (마음)이 아픈 상태에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우려 눈이 어두우며 곧 ‘하셰쿠 에네누’는 ‘우리의


눈들’이란 뭇의 ‘에네누’가 ‘어두워졌다’란 뭇의 ‘하셰쿠’와 연결된

것이다. ‘하셰쿠’는 그 어간 ‘하샤크’(어두워지다)의 칼 • 3 언칭 • 복

수· 완료형이다.

18절을 직역하면 “그 황폐해진 시온 산 때문에 그콧에 재칼(여


340 / 예레미야애가

우)이 배회하나이다”로 된다. 그 원문 맨 앞에 있는 ‘알’은 17절 서


두의 ‘알-제’(이것 때문에)와 같이 ‘... 때문에’ 또는 ‘ ... 까닭에’로 해
석된다. 그리하여 시온 산이 황폐해진 사실이 슬픔의 이유라는 것

이다. 우리말 성경은 이 ‘알’을 생략해서 번역했다. 황무하여 의 원

문 ‘셰샤멤’은 관계대명사 ‘셰+샤멤’(황폐해졌다)으로 풀이된‘다.


‘샤멤’은 칼 • 3 인칭 • 단수 • 남성 • 완료형이다. 여우는 원문에 ‘슈

알’의 복수인 ‘슈알림’으로 나와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시랑’ 또는

‘들개’라고 번역된 콧도 있다(시 63 : 1 이. 엄격히 말하면 재칼이라


고 해야 할 것이다. 삼손이 여우 삼백을 붙들었다는 말도 이 ‘슈알
렴’를 두고 한 말이다(삿 15 : 4).

매 신학적 메시지

시인은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일성동체가 되어, 앞서 열거한


여러 가지 비탄의 사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눈이 침침해진
것을 고백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성전이 자리잡았던 시온

산이 황폐해져서 정신적인 구성점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허함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될

내용이 침투해 들어와서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

곧 여우가 시온 산 위에 배회한다는 말로 표현했다(사 13 : 19-2 2 ;

34: 11 - 17). 가장 신성해야 할 시온 산이 과거의 영광은 어디가고


이제는 여우의 소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실상 성전의 파괴는 백

성들 자신의 파멸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들이 소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막막했던 것 이다. 일찍이 그


들은 시펀 23편 6절대로 “나의 형생에 선하성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옮던

것이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런 때 “오호라, 우리의 법죄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자


개요 / 341

복하고 회개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

고 새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렴으로 기도를 올려야 했던 것이다.

3) 구원을 위한 기도 (5 : 19-22)

m 개요

시인과 그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원성에 의해 위로받으

며 절망상태에서 헤어나올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야훼여, 주는 영

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라는 믿음으로 자신

틀을 고무할 때, 곤고한 그들의 기도에는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

다. 땅 위의 어떠한 변동도 주의 영원성을 교란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통치의 영원성을 바라보았다. ‘연류
관이 그들의 머리에서 떨어져도’ 하나님의 보좌는 여전히 존속됨을

그들은보았다.
이제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자신들의 딱한 처지를 하소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원이 지연되는 데 대해서는 “어찌하여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하고 간청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리고 “우리를 주께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
겠사오니"(시 80: 3, 7; 110: 3) ,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곧

“선조들이 누리던 행복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옹소서”라고 간

절히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회개하고 그들이 할 일을 솔선하여 실천하면 기

쁨이 충만해지고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부


터 있는 것 (시 25 : 6) 이므로, 그들야 간구하면 주께서 자기 백성을
342/ 예레미야애가

아주 잊으신 것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확신

과 소망으로 한껏 부풀게 되는 것이다(롬 11: 1-2).

맥-멜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매 주석

19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당신, 야훼여, 영원히 머무르시나이

다. 당신의 보좌는 세대에서 세대까지 이어지나이다”로 나타낼 수

있다. 원문 서두에 ‘아타’(당선, Thou) 라는 말로 강조되어 있다.

어떠한 고난 중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이 시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시온의 성전은 무너졌어도 하늘의 보좌는 영


원하다는 말이 곧 이어진다. 영원히의 원문은 ‘레올람’인데, ‘레’(위

하여, ... 에로)+‘올람’(영원)으로 풀이된다. 계시오며 는 그 원문이


‘테셰브’다. 이 말은 그 어간 ‘야샤브’(앉다, 머물다, 거하다)의 칼 •

2 인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이다. 그리고 이 말이 함축하는 뭇은


‘당신이 다스리십니다’라는 말이다. 세세에 미치나이다는 원문에는

단순히 ‘레도르 와도르’로 표현되어 있다. 즉 이 말은 전치사 ‘레’

+‘도르’(세대) , 접속사 ‘와’+‘도르’(세대)이므로 “세대 그리고 세대

에로”라고 직역할 수 있다.


20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어찌하여 끝까지 당신은 우리를 잊으

시나이까. 많은 날들의 길이로 당신은 우리를 버리시나이까”로 표


현된다. 어쩌 에 해당되는 원문은 ‘람마’(왜, 어찌하여)다. 영원히 의
5: 19-20 / 343

원문은 ‘라네차흐’인데, ‘끝까지’ 또는 ‘항상’으로도 번역할 수 있

다. 잊으시오며는 그 원문의 어간이 ‘샤카흐’(잊어버리다, 등한히 하

다)인데, 그것의 칼 • 2 인칭 • 단수 • 남성 • 미완료형이다. 이같이 오

래 는 ‘레오레크 야멈’을 의역한 것이다. ‘야멈’(날들 -days) 은 ‘양’


(날)의 복수형이다. ‘오레크’는 ‘길이’ (lengch) 이며, ‘레’는 전치사

다. 그리하여 전체척으로 ‘오랫동안’ 또는 ‘종신토록’이란 뭇을 지

난다. 버리시나이까의 원문은 ‘타아즈베누’다. 이 말은 그 어간 ‘아

자브’(버리다, 떠나다, 같이하지 않는다)의 칼 • 2 언칭 • 남성 • 단수 •


미완료형에 1 인청 • 복수 • 접미사가 수반된 것으로서, ‘당신이 우리
를 버리신다’라는 뭇이다.

매 신학적 메시지

완전히 폐허가 된 듯한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에게 소망이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야훼만이 참하나님이

시다. 그분이 결코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해서 유다가 이 꼴이 된


것이 아니다. 바로 야훼가 유다에 재난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제
유다의 멸망을 가져온 그 하나님이 때가 되면 유다의 회복을 가져

올것은분명하다.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든 바멜론 제국은 결국 영원하지 못하고 오

래지 않아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영원

히 살아 계신 분이시므로 바로 그 분을 신뢰하고 따름으로써, 예루


살렘은 새로운 희망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처

한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참으로 크다 할지라

도, 언젠가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영원하신 주

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영원한 복락을 주님과 함께 공동체 안에


344 / 예레미야애가

서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곁끄
여호외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히옵소서

매 주석

21 절은 다른 절에 비해 길어졌다. 그리하여 2+2+3의 음조를

이룬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


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는 예레미야 31장 18절 후반절의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연 내

가 돌아오겠나이다”와 같은 내용이다. 다만 여기서는 주어가 ‘우


리’인 데 비해, 예레미야서에서는 ‘나’로 되어 있다. 우리률 …률이
키소셔 의 원문은 ‘하쉬베누’다. 이 말은 그 어간 ‘슈브’(돌아가다)의

히펼 • 2 인청 • 단수 • 명령형에 1 인청 • 복수 • 접미사가 붙어서 ‘우


리를 되돌아 가도록 해주십시오’라는 하나님의 강한 주권적인 활동

을 간청하는 말이다. 그리하시면 …톨아가겠사요니 의 원문은 ‘웨나


슈바’다. ‘웨’는 천치사로서 ‘그리고’ 또는 ‘그리하면’이란 뭇이며,
그 어간 ‘슈브’(돌아가다)의 니팔 • 1 인칭 • 복수 • 미완료형이다. ‘나

슈브+아’로 어미 ‘아’가 붙은 것은 주께로 향해 가는 ‘방향’을 나타


낸다. 써홉게 하사 즉 ‘하데슈’는 피옐 • 명령형으로서 강한 소원을

나타낸다. 옛척 갈게는 원문에 ‘케케템’으로 되어 있다. ‘케’는 전치

사로 ‘같은’이라는 뭇이며, ‘케템’은 은혜스러웠던 그 옛날을 말한

다.

m 신학적 메시지
5 : 22 / 345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우

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폭


적으로 인정하고, 인간의 피조물됨을 겸손히 시인하는 데서 오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회복을 회구하는 심정의 발로다.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는 하나넙의 의지가 앞서고, 인간의 순종하는 둬지

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빙자해서 문화를


창조하거나 제도와 사상을 꾸며놓고는, 그것을 절대화하고 우상화

하기 쉽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겠다고 나서기에 앞서, 하나님

께서 우리를 그분께로 돌이켜 주시도록 자비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올려야 한다(시 80: 3).

우리의 본성에는 하나념으로부터 떠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

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의지와 행동에 작용하기 전에는 좀체로

하나념에게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

본위의 신척 대상을 만들어 거기에 충성을 맹세할지언정 궁극적 실

재이신 참하나님 앞에 서기를 꺼린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


를 돌이키소서. 그렇지 않으면 끝없이 방황할 뿐업니다”라고 진실
로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팅김
주께서 우리를 이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매 주석

22절은 그 문체와 낱말이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는 것임에도 불

구하고 전후 문맥상 매우 부자연스럽다. 그 까닭은 이제까지의 흐


름으로 보아서, 그토록 참담한 상황에서도 그 신앙공동체는 대담
346/ 예레미야애가

한 믿음을 갖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미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향을 드러내다가, 이곳 22절에서 다시
금 어두운 그렴자에 휩싸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

시인의 절망의 호소가 아니다. 이 절은 독럽적인 문장이 아니라,


21 절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

께서 진실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

심하지 않으시다면,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

소서”라고 해석한 학자도 있다. 아마도 이 비슷한 견해로 유대교


회당에서는 22절을 낭독한 후에 다시 한번 21절을 읽었던 것 같

다.
그런데 이 22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견해가 분분한 이

유는 이 문장 서두에 나오는 ‘키 임’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있다.


어떤 영어성경 (RSV) 은 ‘키 임’을 ‘또는’으로 해석하여 “그렇지 않으

시다면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극심하게 진


노하신 것입니까? "라고 번역했다. 그리하여 은연중에 ‘주님, 설마
그런 것 이 아니지요?’ 하고 다짐하는 듯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키 엄’이 ‘또는’으로 해석되기에는 문법적으로 어

색하다. 또 다른 영어성경 (NEB) 은 그 말을 조건문을 나타내는 풍

사로 보고, “만일 주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버리셨다면 주께서 우리

에게 진노하심이 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로 번역했다. 그러나 원


문의 둘째 소절이 첫째 소절의 결과절이 아니라 평행절이므로 이것

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 또 다른 영어성경 OB 빛 NIV) 은 22

절 자체를 21 절에 연속된 문장으로 다루어서 ‘키 임’을 ‘않는다면’,

‘만약 .. . 이 아니라면’으로 보고, “만약 주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버리

지 않으셨고, 또한 우리에게 정도 이상으로 노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Unless you have urrerly rejecred us , and are ang까 wirh us beyond

measure) 이라고 번역했으나, 이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키 임’은 부정절과 함께 사용될 때만 ‘ Unless’의 돗이 되기 때문이


5: 22 / 347

다(창 32 : 27). 그 밖에도 여러 가지의 시도가 있으나 모두 약간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우리말 표준 새번역은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까? 우리에게서 진노를 풀지 않으시렵니까? .. 로 되어

있는데, 좀 지나친 의역인 데다가 이 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말로서는 아무래도 부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번역본을 참작해서 5장 20-22절을 다음과 같

이 번역하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어찌하여 주께서 영원히 우리를 잊으시오며

우리를 그토록 오랫동안 버리시나이까.

야훼여, 우리를 주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나이다.

비록 주께서 우리를 몹시 혐오하셨사오나

그리고 우리에게 크게 진노하셨사오나

우리의 날을 옛날같이 새롭게 하옵소서.

매 신학적 메시지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다섯번째 비탄의 노래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서, 유다와 예

루살램 공동체는 지난날의 그들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현재의


고초에서 하루속히 구원해주실 것을 안타깝게 간구하면서도, 자기

들의 주변 사정을 다시금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그 공동체를 대표한 시


인은 그들의 회개의 성취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속히 진정되시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예루살렘의 황폐와 대조적인
348 / 예레미야얘가

하나님의 영원하섬과 불변하심을 바라볼 때, 그들의 구원의 소망

은 더욱 확실해졌던 것이다.
22 절은 말라기서처럼 (말 4: 6) 부정적인 내용의 결말이다. 그래

서 유대교 회당에서는 절기에 본서를 읽을 때, 22절 다음에 다시

21 절을 읽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을 전후 문맥을 살피며 차근


히 읽으면 그 숨은 내용이 표면에 드러난다. 그들이 고백하고자 한
내용은 그들이 지은 그간의 좌악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진노하심

이 매우 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시인하면서, 지금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이 걷히고 옛날 같은 행복된 관

계로 회복될 날을 마음 조이며 기다리는 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탕아가 제정신을 차린 것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차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그들을 영영 버리셨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롬 11: 1-2).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자비와 공훌을 사

모하는 곳에서만 참질서와 평화와 행복이 있다.


이제 우리는 본 애가의 침울한 내용을 넘어서 밝고 희망적인 경

지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시에 박진감 념치게 묘사된 비극의 현실

에 들어서서 그들의 흐느낌과 탄식 속에 큰 희망이 념쳐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미래지향적인 소망의 노래다. 우리는 애가를

원음으로써, 세기적 파멸을 눈앞에 당하면서도 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 한목소리로 하나념을 찬양하지 않고는 못배길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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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건국대학교 졸업 / 중앙신학교 졸업 / 한신대학교 대학원 졸업 /
건국대학교 대학원 졸업 /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 /
중앙신학교 학장 역임 /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 역임 /
한국 구약학회 회장 역임 / 강남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역임 /
현, 강남대학교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 •

• 저서
r사고와 기호 J . 형설출판사 /r현대논리학J . 형 성 출판사 /
r역대기 주해 J . 전망사 /r기독교개론 J . 공저, 형설출판사.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23(II) 예레미야애가

1994년 8월 20 일 인쇄 1994년 8월 30 일 발행

지은이 선우 남

펴낸이 검소영

펴낸콧대한기독교서회

주소 135-090 서울 강남구 삼성동 169-1


퉁록 1967. 8. 26 동록 제 1 - 77호
대체 010041- 31- 0501395
지로 3014459
Tel. 553-0870-7/ 553- 3343 (영업부 직통)
FAX. (02) 555-7721 , 564- 3532 책번호 205 7

@ 선우 남, CLSK, 1994 값 18 , 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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