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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

양호전기(兩湖電記)

본 자료는 1894년 4월 3일에서 같은 해 5월 28일까지 초토사 홍


계훈과 각처(各處)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 순서로 수록한
것이다.

주요한 내용으로, 홍계훈이 1차 동학농민혁명 진압과 관련하여 서


울을 출발하여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당시 전황과 정부의 대책에 관
련되는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당시 전보를 주고받은 곳이
집권층 내부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 많았으므로 전주성 공방
전과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기까지 집권층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5월 5일 내서(內署)의 전보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
혁 요구에 대하여, “귀화지설(歸化之說)은 믿을 수 없다. 기어이 소
멸하도록 하되 평민에게 이르러서는 불가불 충분히 신중하게 판단
하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휴전제의를 거절하였지만, 5월 7일에는
그 사자(使者)가 일전에 소지(所志)한 바 민원을 상계(上啓)하고 실
시하면 해산하겠다는 공문을 제출하였고 5월 8일에도 비슷한 내용
의 공문을 제출하였다고 하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본 자료는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 과 더불어 1차 동학농민


혁명 당시 정부진압군의 입장과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상황을 구체적
으로 알 수 있는 1차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본 자료의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호전기(兩湖電記) 187

양호전기(兩湖電記)

대조선개국 503년 1894년 4월 [大朝鮮國五百三年 甲午 四月]

4월 초 3일 기유 [初三日 己酉]

여러 군사가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하였다는 내용을 공사청(公事廳), 혜


당댁(惠堂宅), 본영 사또댁(本營使道宅), 수교대신댁(水橋大臣宅)에 전보
(電報)하였다.

4월 초 4일 경술 [初四日 庚戌]

금월 초 4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경에 장위영(壯衛營)1) 대


관(隊官) 원세록(元世祿)이 거느리고 있는 1개 부대의 병력이 군수물자
와 대포를 창룡호(蒼龍號)에 싣고, 대관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리고 있는
1개 부대의 병력은 한양호(漢陽號)에 탑승하였으며, 그 나머지 3개 부대
의 병력은 중국의 군함 평원호(平遠號)에 탑승하고 신시(申時, 오후 3∼5
시) 경에 출발하여 호남으로 내려간 연유를 공사청, 혜당댁, 본영[장위영]

1) 장위영(壯衛營): 조선 후기 수도방위를 위하여 두었던 3군영의 하나로, 1888년(고종


25) 5개의 친군영(親軍營)을 3군영으로 개편하면서 종래 친군의 전영(前營)과 좌영(左
營)을 통합하여 장위영이라고 하고, 친군 3군영의 좌영으로 삼아 청기(靑旗)로써 부대
표시를 하였다.
18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사또댁, 수교대신댁에 전보하였다. 군함에 올라 떠나려 할 때 원세개(袁


世凱)2)의 전보를 접하여 보니 이르기를, “홍초토사(洪招討使, 洪啓薰)의
서신으로 알아 이미 평원호를 관할하는 곳인 인천 이사(仁川理事)3)에게
조회하여 일렀는데, 서울로부터 나에게 병선을 요청하는 서찰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답전을 한다”고 하였다.

4월 초 5일 신해 [初五日 辛亥]

전보 없음.

4월 초 6일 임자 [初六日 壬子]

전보 없음.

4월 초 7일 계축 [初七日 癸丑]

공사청, 혜당댁, 본영 사또댁, 수교대신댁에 전보하기를, “7일 유시(酉


時, 오후 5∼7시) 경에 완산(完山)에 도착하니 비도(匪徒)들이 창궐하여
완군(完軍)의 기가 꺾여 그들을 효유(曉諭)하지 못하고 중지하였으니 엎
드려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또 전보하기를, “중국인 서방걸(徐邦傑)4)이 형편을 알려고 하여 동행

2) 원세개(袁世凱): 청국의 서울주재의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인데


당시 서울에 주둔하는 청군의 총사령관의 역할을 맡아 제독인 섭지초(葉志超), 통령(統
領, 總兵)인 섭사성(聶士成) 등을 거느렸다. 뒤에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다.
3) 인천이사(仁川理事): 외국의 통상과 외국인 관련의 업무를 관장하는 인천 감리서의 책
임자를 말한다. 감리서는 개항장에 두었다.
양호전기(兩湖電記) 189
하기를 원한다고 하기 때문에 15인과 함께 전주에 도착하니 <동학농민
군이>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관리(管理)5)로부터 온 전보에, ‘귀
하의 집[홍계훈] 소식은 편안하다’고 기별하여 왔으며, 조금 전에 온 전
보에서는, ‘동요(東擾)는 어떠한지? 과장(科場)의 급제자를 발표하는 일
을 모레로 연기하고, 임금의 행차를 정지하는 일, 그리고 박주사(朴主
事)6)는 평안하고 그 집도 평안하다’고 전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답전(答電)하기를, “일행은 동요함이 없이 오늘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동요가 창궐하여 전주 감영군이 패배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사처(四處, 공사청・혜당댁・본영사또댁・수교대신댁)에 전보하기를,
“중국 병선(兵船)이 바다에 큰 안개가 끼어 지체하였다가 초 5일 유시
경 군산포 앞 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이 얕아 포구에 들어가
지 못하고 초 6일 오시 경 육지에 내려 곧바로 전주로 향하였습니다”라
고 하였다.
중국인 서방걸이 원세개의 진영에 전보하기를, “흠헌감(欽憲鑑)7)이 초
7일 오후 6시 반에 전주에 도착하니, 감사가 말하기를 ‘부안(扶安)의 난
당 수천 명이 고부(古阜)의 난당 천여 명과 결합하여 돌아왔다. 전라감
영의 부대가 단결해 전투를 벌였지만 난당이 산을 점거하였기 때문에 우
리부대가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고, 여러 진영에서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왔다”고 하였다.

4) 서방걸(徐邦傑): 원세개 휘하에 있는 청군의 장교로 전주 현지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정찰 또는 정보수집활동을 벌였다.
5) 관리(管理): 중앙과 지방의 금고를 관리하던 벼슬아치를 말한다. 관리영은 개성부의
군무를 맡아보던 영문이며 관리서는 사찰을 맡아보던 관서이므로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았을 것이다.
6) 박주사(朴主事): 누구인지 미상. 홍계훈 집안의 일을 보던 사람인 듯하다.
7) 흠헌감(欽憲鑑): 청군의 통령인 섭사성의 직책을 가리킨다.
19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4월 초 8일 갑인 [初八日 甲寅]

혜당댁에서 전보하기를, “여러 군사가 잘 도착하였으니, 바라건대 <적


을> 가볍게 보지 말고 잘 조처할 것이며 여러 군사들을 위문하라”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에서 전보하기를, “군함이 무사히 도착하였으니 매우 다행
한 일이다. 마필을 미리 대기하지 못하여 장병들이 보행하게 되었으니,
어찌 먼저 전보를 발송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는가! 어느 곳에 머물고 있
으며, 여러 장병은 무고하며, 저녁 식사는 어떻게 먹었는가? 비류(匪類)
들은 지금 어느 곳에 이르렀으며 적의 정세는 어떠한지를 함께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답전(答電) 하기를, “여러 군사들은 잘 도착하여 중영(中營)에 머물러
저녁 식사를 하였는데 본부(本府)에서 잘 대접하였으니 다행입니다. 저들
무리 백여 명을 지금 포로로 잡아 진영(鎭營)에 가두었습니다. 고부(古
阜) 도교산(道橋山)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전주 감영군이 70여 명이라고
하니 이 사정을 대내(大內, 궁중)에는 전보로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저
들을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완백(完伯, 전라관찰사)과 상의하
여 여러 부대에 일일이 위문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영(錦營, 충청도 감영)에서 언문으로 전보하기를, “최한(崔漢, 최시
형)의 통문은 만 가지로 통탄할 일입니다. 저들이 회덕(懷德)의 백사장에
있다고 하여 감영에서 회덕으로 포군(砲軍)을 동원하여 보냈으나, 그 수
가 150명에 불과하니 고민스럽습니다. 청산(靑山)8)의 일은 포교(捕校)를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아직 보고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內署)9)로부터 비밀 전보가 왔는데 이르기를, “기회에 따라 변하
는 사태에 대응하되 적의 괴멸을 기하라”고 하였다.

8) 청산(靑山): 현(現)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곳으로, 최시형이 1894년 봄 이곳에 도소


(都所)를 정하고 머물자 많은 동학교도들이 몰려들었다.
9) 내서(內署): 내무행정을 맡아보던 내무아문 또는 내부의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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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청, 혜당댁, 본영 사또댁, 수교 대신댁에 전보하기를, “중국 군함의
함장 이화(李和)는 전주에 이르러 적들의 실정을 정탐한 뒤에 형세를 보
아 육지에 내리기로 서로 약속하였으며, 소 1마리, 돼지 10마리, 계란
1,000개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진세(陣勢)가 매우 커서 군함
을 오래도록 바다에 정박시킬 수 없으니 엎드려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금영에서 온 전보에 이르기를, “지금 회덕의 보고를 보니 저들 수천
명이 어젯밤에 관아에 돌입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장차 진잠(鎭岑)으로
향한다고 하니 어찌 놀랍고 한탄스럽지 않습니까? 엄하게 방어함이 마땅
하지만 손을 쓸 수 없으니 귀 부대의 군사 중에 몇 백 명을 우리 감영에
나누어 보내서 형편에 따라 저들을 견제함이 어떠합니까? 지금 정부에
전보를 할 계획이니 깊이 헤아려 지연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답전(答電)하기를, “마땅히 군사를 파견할 터이니 필요한 물품들을 미
리 준비하고, 각 읍에 관문10)을 보내어 고을을 굳게 지켜 기다리도록 하
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사처(四處)에 전보하기를, “오늘 술시(戌時, 오후 7∼9시)경 어제
정읍현감이 발송한 보고문을 보니, 저들[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곧바로
본 현(縣)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날 원세록에게 한 무리의 병사를 진
군시켜 태인(泰仁)・흥덕(興德)・정읍(井邑)・장성(長城) 등지로 보내어 저
들을 쫓아 잡을 계획입니다. 곧 금백의 전보를 보니 저들이 괴수 최법헌
(崔法軒, 최시형)의 통문을 돌려 초 6일에 청산의 소사전(小蛇田)에 모여
회덕의 무기를 탈취한다고 하니 매우 분하고 통탄할 일입니다. 정읍의
형적을 염탐하는 사람이 현지에 도착하니 저들이 동헌과 여러 아전・행
상・부상들의 집을 파괴하고, 곧바로 고부로 향하여 가는 곳마다 노략질

10) 관문(關文): ① 조선시대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 혹은 동등 위상의 관청간에 보내


는 공문서. ②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내리는 허가서(許可書). 관(關). 관자(關
子)라고도 함.
19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을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군함이 출발한다고 하니 오늘 지휘할 뜻을 사


처에 전보로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4월 초 9일 을묘 [初九日 乙卯]

공사청, 혜당댁, 본영 사도댁, 수교대신댁에 전보하기를, “지금 금백의


전보를 보니 ‘저들 수천 명이 회덕의 무기를 탈취하여 진잠으로 향하였
다고 하니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잡은 비류 80여 명을 어젯밤에 공초(供
招)하였는데, 그 중 자세히 시말을 아는 자가 몇 명 있어 장차 결정해
처리할 것입니다. 지금 공주부의 서쪽 거마산(車馬山) 아래로 부대를 이
동합니다’고 하니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전보하기를, “인천항의 계본(啓本, 왕에게 올리는 보고문)은 격식을
어겼으니 황공합니다. 추후에는 계본을 반드시 차례대로 서울에 이르게
하겠으며, 아울러 이를 정지시키고 이제 다시 보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에서 회전(回電)하기를, “장병이 잇따라 무사하니 다행이고
저들이 정읍에 들어갔다고 하니 정형이 어떠한지 자세히 알릴 것이다”라
고 하였다.

4월 초 10일 병진 [初十日 丙辰]

본영 사또댁에서 회전하기를, “회덕의 무기탈취사건은 분하고 통탄할


일이다. 다만 경병(京兵)만 거느리고 거마산으로 이동하였는가? 또는 다
른 병사 몇 명도 함께 인솔하였는가? 그 곳의 산은 후미진 곳인가? 인
가 근처인지, 공주부와의 거리는 몇 리인가? 언제 부대를 이동할 것인
가? 밤의 순찰과 적정의 시찰을 특별히 경계 단속하라. 많은 장병이 애
를 쓰니 만 가지로 가엽다. 자세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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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본영 사도댁에서 회전하기를, “원세록이 한 무리의 병사들을 거느
리고 네 고을에 진출한다고 하니 어느 때 출발하는가? 특별히 단속하여
소홀하게 하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저 괴수의 실정은 갈수록 헤아
릴 수 없으니 통탄스럽고 얄밉다”라고 하였다.
사처에 답전하기를, “어제 오시 경에 원세록에게 명령하여 다만 서울
의 병사만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진을 옮길 적에 깃발과 나팔・북을 치
고 시험 삼아 포를 쏘고 병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게 하였는데, 공
주에서 5리쯤 떨어진 곳이어서 다만 위엄만을 보이고 부대로 돌아왔습니
다. 밤에 순찰하면서 적진을 바라보고 더욱 단속하였으나, 적정을 헤아릴
수 없으니 걱정스럽습니다.
또 들으니 완영(完營, 전라감영)의 우영관(右領官) 이경호(李景鎬)가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저들에게 돌격하여 몇 십 명을 찔러 죽이고 끝
내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전라감사가 초상의 준비를 갖추어 들것에 싣고
왔습니다. 그의 높은 절의는 대중을 감격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비밀리 전보가 왔는데 이르기를, “경군(京軍)이 가진 무기는
비록 정교하지만 모두 저자거리에서 놀던 사람으로 제대로 익히지도 못
하였고 먼 길의 행군에 지쳤는데, 전라 감영군이 먼저 패배한 것을 보고
힘이 약해지고 놀라 겁을 먹었다. 저 적들은 밤에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
고 그 요해처를 아는데, 경군은 도로에 익숙하지 못하여 어둔 밤에 저들
의 책략에 말려들어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삼가 적정을 정탐하여 심란한 걱정이 없게 하라. 순찰하는 부대를 나
누어 보내면 우리 군사의 성세(聲勢)를 크게 손상시키게 된다. 어찌하여
우리의 군사는 적고, 적이 많은 것을 생각하여 참작하면서 위세로 적을
물리치지 못하는가? 부대를 나누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비밀리 전보하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상대할 때 자세히 형편
을 헤아리고 또 적의 많고 적음을 살펴 기회에 따라 힘을 헤아려 도모할
것이요. 미약한 군사로 적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19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또 비밀 전보에 이르기를, “이경호의 순절을 들으니 매우 놀랍고 근심


스럽다. 조정에서 내릴 조처를 기다려 결정할 것이니 완백과 상의하여
초상을 치르는 범절을 각별히 돌아보고 도우라”고 하였다.
사처(四處)에 전보하기를, “김시풍(金始豊)은 비도의 괴수가 되어 이를
빌어 위협하면서 외람되게 영장(營將)이 되기를 도모하였으니 만분의 일
이라도 갚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고관(高官)이 되고자
<대중을> 선동하고 불러 모으고는 제 놈이 나온 뒤에 무리들이 물러가
기로 약속하는 따위의 것으로 경향(京鄕) 간에 날뛰고 다녔기 때문에 잡
아 가두었습니다. 죄를 물을 즈음에 그 말이 매우 광패(狂悖)하여 절대
로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습니다.
바야흐로 형(刑)을 가하고 문초를 하려 하자, <그가> 힘을 써서 갑자
기 일어나 포승을 스스로 끊었으며, 병사의 군검(軍劒)을 탈취하여 이리
저리 날뛰면서, 소리를 크게 지르자, 그 무리 수십 명이 무기를 가지고
담을 넘어오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현장에서 일어난 그 광경은 잠
시도 그냥 둘 수 없어서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감
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4월 11일 정사 [十一日 丁巳]

본영 사또가 회전하기를, “극로백(克爐伯, 크루프 소총)과 실탄(藥丸)을


소지한 1개 부대의 군사에 대한 일은 상부에 아뢰어 처분을 받은 뒤에
곧 다시 전보할 계획이다. 김시풍의 일은 이 어찌 의심하거나 염려할 바
이겠는가? 평일에 흉측한 마음은 고사하고 당장의 태도가 어찌 통탄스럽
고 악독하지 않겠는가? 심히 통쾌하게 처리하였다. 원세록은 지금 어느
곳에 이르렀으며 계속 탐문하는지? 그가 거느리는 군사는 모두 잘 있는
지? 상세히 알려라”고 하였다.
서울로부터 완백에게 전보하기를, “일전에 향군(鄕軍)이 패배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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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군(京軍)이 겁을 먹었다고 하니, 1개 부대를 파견하여 태인・정읍 2개
고을을 다니면서 순찰하게 하라. 혹 비류들의 계책에 넘어가 불리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불리하니 적을 가볍게 보지 말고, 또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지도 말라. 비록 호서(湖西)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가 있으나, 아직
토벌하지 못하고 있다. 고부의 난민은 충분히 조심성 있게 다룰 것이요.
절대로 적을 가볍게 보지 말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에서 전보하기를, “이경호가 죽었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참담하다. 원세록은 그저께 어느 곳으로 가서 밤을 보냈으며 오늘은 어
느 곳에 머무는지, 장병들의 무고한 소식은 계속 들었지만 절대로 소홀
하게 하지 말라. 원세록의 행군(行軍)은 무슨 포를 가지고 갔는가? 비밀
전보에 대한 일은 삼가 대내(大內)의 처분에 의하여 거행할 것이다. 지난
날 진산(珍山)과 금산(錦山)의 소요11) 시에 힘써 싸운 상인(商人) 김치
홍(金致洪)・임한석(任漢錫)을 장차 발탁하여 쓸 것이고, 그 외의 사람에
대한 실상도 아울러 자세히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비밀리 전보하기를, “적들의 실정을 살폈으나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고 또 호서가 소요스러우며 경기도의 방어는 미비하니 경군을
또 보내면 서울이 허술함을 면치 못한다. 전주 감영군과 민간에서 모집
한 장병과 도내의 보부상은 밖[지방]에서 지원하도록 하라. 경군은 기회
에 따라 임기응변할 것이다. 보부상들은 손에 무기가 없으니 도내 각 읍
의 무기를 내주어 방어에 대비하도록 하고 조금도 놀라거나 겁을 내어
약함을 보이지 않도록 하라. 어쩔 수 없이 연락할 일 외에는 번거롭게
각처에 전보를 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호서가 또 소요스럽고 경기에는 방비가 없으니
고민스러우며 향군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공격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
다. 보부상은 겨우 수백 명이지만 보발(步撥, 걸어서 문서를 전달하는 사

11) 1894년 3월경에 진산과 금산 두 곳의 농민 수천 명이 관아를 공격하고 구실아치들


의 집을 파괴하자 보부상들이 이를 토벌하였다. 당시 두 곳은 전라도에 속하였다.
19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람)로 소식을 탐지케 하였습니다. 파송된 대관 원세록은 지금 태인읍(泰


仁邑)에 군사를 주둔하여 민심을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비도 중에 통문을 들고 왕래하는 자와 사방에 흩어져서 백성을
침탈하는 자를 체포하게 하였는데, 나주목(羅州牧)에서는 19명, 무장현
(茂長縣)에서는 9명을 붙잡았고, 주발, 염주, 부적과 여러 가지의 술수
통문과 사서(私書) 등 책자를 수색하여 얻었고, 또 심문하여 체포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지금 군민(軍民)들을 크게 모아 김시풍과 더불어 내외로
서로 호응함이 가장 심한 자 세 놈을 함께 효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엊그제 각처에 전보하기를, “극로백 1좌, 화약과 실탄 각 1,000봉, 나
화(挪火, 불을 붙이는 부싯돌) 2,000개와 장병 1개 소대를 번갈아 곧 보
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전보하기를, “김시풍은 이미 처형되었고 김인동(金仁同)은 이미 도
주하였으며 정석희(鄭錫禧)는 잡아 가두었습니다. 또 지난번에 사로잡는
80여 명 중 세 놈은 오늘 남문 밖에서 처형하고 67명은 무죄로 훈방하
여 보내고 15명은 그대로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국(商局)12)에서 온 전보에 이르기를, “지난날 진산・김산에서 있었던
동도(東徒)의 소요에 너희들 두 상인(商人)이 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부
상을 무릅쓰고 토벌하여 체포하였으니 극히 가상한 일이다. 그 중에 김
치홍과 임한석이 제일 먼저 힘을 내어 이처럼 충성을 돈독하게 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들을 양국(兩局)13)에 발탁하여 임용하려 하니, 사인
(士人)인지의 여부와 내력이 어떠한지를 탐지하여 전보로 보고하고, 또
상인 중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몇 명인지 성명을 기록하여 전보로 알리
고 동도 몇 명을 잡아 바쳤는지 일체를 자세히 전보하라.

12) 상국(商局): 혜상통국(惠商通局) 또는 상리국(商理局)의 줄인 말인데 상당(商堂)이라


고도 한다. 이 기구는 상업관련의 일을 보았다. 한편 보부상을 관리하는 기구로
1883년 혜상통국을 설치해 보상과 부상을 완전 통합하였고 1885년 내무부로 이관해
상리국으로 개칭하고 부상을 좌사, 보상을 우사로 구분하였다.
13) 양국(兩局): 보부상을 관리하는 좌사(좌단)과 우사(우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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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들이 진산・김산의 소요뿐만 아니라 다른 곳의 소요도 우리 상인들
이 마음과 힘을 합하여 쫓아가 체포하고 토벌하여 괴멸시키면 모든 다른
상인보다 크게 빛날 뿐 아니라 장차 조정에서 수고에 보답하는 은전(恩
典)이 있을 것이니, 특별히 생각하여 방어에 대비하도록 하라. 조정으로
부터 무기를 내어 주라는 내용으로 장차 영읍에 관문으로 명령을 할 것
이니 이 명령이 있기 전에 혹 싸움에 이르게 된 일이 있으면 곧 영읍에
보고하여 무기를 받아 사용하도록 하라.
또한 이 전보를 감영과 초토사에게 알려 영읍에서 각별히 힘써 돕게
하라. 감영에 전보하여 모두 살펴서 알게 할 것이니 너희들이 이런 사세
(事勢)를 혹 털끝만치라도 소홀하게 하면 장차 말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
를 것이니 끝까지 마음을 다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도모하라”고 하였다.

4월 12일 무오 [十二日 戊午]

“지금 무장에서 보고한 문서를 보니, 초 9일에 저들 무리가 갑자기 들


어와 동헌과 인근 마을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 현감은 아직 부임하
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태인에 주둔한 부대에 계속 통지하여 그 성을 굳
게 지킬 것을 명하였으며, 저들 무리가 날로 증가하여 심한 자는 우리가
지나온 길로 도망쳐 곳곳에서 못된 짓을 하고, 무뢰배들도 저들에게 더
해져 적은 수의 장병으로는 움직이기 어려우니 삼가 고민스럽습니다”라
고 하였다.
또 각처에 전보하기를, “통위병 500명과 장위영 영병 2개 부대와 극로
백 1좌와 화약과 총알 각 1,000봉지를 갖추어 기선(汽船)으로 곧 내려
보내 주시고, 장위영이 머물러 있는 곳에 중국 옷[華服] 400건을 아울러
내려 보내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관리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이희준(李羲駿)을 금국(錦局)에 파견
하여 군무를 도모하게 하여 적을 토벌케 하였는데, 승리를 보고하였다”
19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라고 하였다.
혜당댁으로부터 완백에게 권유하여 적을 토벌하라는 전보에 이르기를,
“각 읍에서 저 무리들을 잡아 가두면 매양 무장의 지난 일과 같이 반드
시 행패를 부릴 것이니 어찌하여 급히 도모하지 않는가? 토벌하여 전멸
시키면 어찌 날로 더 왕성하겠는가? 이와 같이 버려두면 도내에서 패배
하지 않을 수 없고 순찰사와 병사는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장
차 어떻게 되겠는가? 우선 앞에 있는 참(站)의 요해처를 방비하고 특별
히 용단을 내어 공략하도록 도모하라. 초토사의 비밀 전보책(電報冊)이
궁내(大內)에 있어서 풀어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혜당댁에서> 전보하기를, “저 무리들이 도처에서 행패를 부려도
한 곳도 서로 버티지 못하고 또 두절시키지도 못하며 각 도로에는 진군
하는 장병도 없고, 보루(堡壘)에서는 기회를 보아 적을 섬멸해야 하는데
오래도록 전주에 주둔하여 있으니 적이 스스로 죽기를 기다리는가? 피로
하여 저절로 지루하여 해산하기를 기대하는가? 지금 농사의 시기를 당하
여 하루가 급하다. 만약 하루를 지연시키면 거기에 <일이> 더해지는 날
이 많으니 속히 토벌하여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답전하기를, “연일 전보로 전달되어도 하나도 하답을 받지 못하여 답
답하였는데, 지금 오히려 해독하지 못한다는 전보를 받으니 송구하옵니
다. 저들의 정세는 수가 만여 명이나 되어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갑자기 모였다가 곧 흩어져 일정하게 주둔하는 곳이 없습니다. 큰 군사
가 만약 전진하여 한 마을을 추격하여 저들을 잡으려하면 마을이 텅 비
고 여러 읍이 소요스럽고 농민이 일을 못하게 됩니다. 또 함부로 움직이
지 말고 부대를 나누어 방어하지 말라는 궁내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미약한 군사로 어떻게 하루빨리 섬멸할 수 있겠습니까? 토병
(土兵)14)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으니 오랑캐로 오랑캐를 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에야 이 전교(傳敎)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혹 소홀함

14) 토병(土兵): 그 지역에 붙박이로 사는 사람으로서 뽑힌 군사를 말한다.


양호전기(兩湖電記) 199
이 있으면 어떻게 진군을 합니까? 자세히 하달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보
의 책은 오늘에 비로소 순영(巡營)의 문건에 있음을 알았으니 어떻게 번
번이 빌려 올 수 있겠습니까? 장위영(壯衛營)의 병사를 시켜 하송을 맡
김이 어떠한지요?”라고 하였다.

4월 13일 기미 [十三日 己未]

본영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어제 2통의 전보는 곧 위


에 보고하여 대내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원세록은 지금
어느 읍에 있으며 장병들은 사고 없이 계속 염탐하는가? 원세개의 진영
으로부터 전주에 주둔한 중국인에게 유시하기를, ‘중당(中堂)15)께서 보십
시오. 지난 번 인천의 전보에 의하면 일본 군함 대화환(大化丸)이 항구로
진주하였습니다’라고 원세개가 아뢰었다”라고 하였다.

4월 14일 경신 [十四日 庚申]

상당(商堂, 商局과 같은 말)에서 보부상에게 전보하기를, “무리를 모아


소요하는 자는 영읍의 명령에 의하여 모두 철저하게 잡아들이라고 했지
만, 만일 집에 있으면서 생업에 종사하는 자를 전날의 동도라 하고, 다른
곳에 나갔다가 돌아온 자를 적의 주둔지에 가서 참여하였다고 하고, 집
안 형편이 요부한 자는 비류들의 친척이라 하고, 귀화하여 새로워진 자
를 전날의 죄로 체포하고 있다. 혹 꾀를 써서 침해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할 염려가 있으니 이런 뜻을 도내의 여러 보부
상에게 통고하되 한 사람의 상인도 빠짐없이 알게 하여 죄에 저촉되는

15) 중당(中堂): 이홍장의 아호이다. 이홍장은 북양대신으로 있으면서 모든 군사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본디 대신들이 집무를 보는 곳을 말한다.
20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일이 없게 하라”라고 하였다.
어제 대내로부터 비밀전보로 내리기를, “경군(京軍)을 또 파견하여 보
내기 어렵기 때문에 심영(沁營) 병사 4백 명을 그 곳 병방장(兵房將)16)
으로 하여금 거느려 내려 보내서 합심하여 함께 일을 완성하도록 하라.
크루프 1좌도 마땅히 내려 보낼 것이고 각처에 보낸 비밀 전보는 그저
인심만 소요스럽게 하니 다만 대내와 상의하라”고 하였다.
공사청과 본영 사또댁에 전보하기를, “심영의 장병은 어느 날에 내려
오며 군도 10자루와 좋은 품질의 대포와 자기황(自起黃, 화약)을 내려
보내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원세록은 어제 불러 돌아오게 하였고, 지금
이학승(李學承)과 이두황을 파견하여 2개 부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금구
(金溝)・태인・정읍・고창(高敞)・흥덕 등지로 보낸 연유를 알립니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비밀리 전보하기를, “2개 부대의 장병은 어제 보내었고 한편
으로는 장병의 위엄을 보이며 한편으로는 방문으로 효유하고 만일 귀화
하지 않으면 남김없이 섬멸시킬 계획입니다. 심영 병사가 법성포(法聖浦)
에서 하선한 것은 매우 온당합니다. 저 무리들의 정세는 한결같게 날뛰
지만 호서에서는 흩어졌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초 9일에 호서로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대내에서 회전(回電)하기를, “어제의 전보는 백성을 안도시키고 어루만
지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무장에 있는 저 무리의 동정은 어떠한가? 심
영의 병사들이 법성포의 슬실(蝨悉)이라는 땅에 내렸으니 서로 호응하여
적을 토벌함이 어떠한가? 호서의 동도는 모두 이미 귀화하여 안정되었
다”라고 하였다.
어제 정부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왕에게 아뢰기를, ‘금백의 전보
를 보니 회덕(懷德)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무리는 지금 다 물러가 흩
어져 귀화하였다고 합니다. 대저 우리 백성[赤子]들이 혹 잠시 속이는 말

16) 병방장(兵房將): 지방 관아에 딸려 군사의 일을 보는 우두머리를 말한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01
로 사주를 받거나 협박을 당하여 끌려 들어갔다가 곧바로 마음을 바꾸고
뉘우쳐 일제히 우리에게 오니 백성들의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마땅히
빨리 왕명을 따르게 하여 각각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
다. 가산을 탕진하여 의탁할 곳이 없는 자는 특별히 각 해당 지방관에게
명하여 더욱 구제하고 가엾이 여겨 안정시키고 살게 해야 합니다. 혹 다
시 무리를 모으는 자는 반드시 반항하려 하는 자이니 결단코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체포하여 왕법(王法)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농사의 일이 바쁜 때입니다. 일찍이 무리를 모아 소요스럽게
한 곳이나 그들이 지나간 여러 읍은 놀라고 소요스러워 농사에 방해가
됨이 없도록 각 해당 읍으로 하여금 농민들을 품고 편안하게 해주어 각
각 생업에 편히 종사하도록 하게 하여 농사의 때를 잃지 말도록 하는 일
로 말을 만들어 양호의 감사에게 공문으로 명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
까?’라고 하니, 비답하시기를, ‘편안한 데로 가고 위험을 피하는 것은 사
람의 본정이다. 근래 무리를 모아 소란을 일으킨 백성들이 어찌 모두 그
즐기는 생업을 버리고 큰 잘못을 즐겨 범하려 함이겠는가? 이는 대체로
탐관오리들이 그들을 침범하여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시끄
럽게 소란을 일으켜 마침내 교화가 통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곧바
로 귀순하였으니 그 자취는 심히 통탄스럽고 놀랄 일이나 그 정황은 가
엾고 슬픈 일이다.
그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특별히 도와주어 각각 살던 곳에 돌아가게
하라. 혹 가산을 탕진하여 집을 기울게 한 자는 특별히 각 해당 지방관
에게 명하여 계획을 세워 도와주어 편안히 살게 하여 힘써 사랑하는 도
리를 다하여 내가 백성들을 다칠까 염려하고 어린 아이를 돌보는 일 같
이 하는 지극한 뜻을 보여주라. 혹 다시 무리를 모아 한결같게 완강히
반항하는 자는 적자(赤子)로서 용서할 수 없으니 그 도의 감사와 초토사
는 법을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하다. 아울러 이런 뜻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라’고 하여 의정부로부터 전교를 공문으로 보내니 전교 내의
20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말뜻을 받들어 살펴 시행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전교의 내용은 이러하다. “대저 백성은 어루만져 편안히 해주면 법을
중시하고 관장(官長)을 두려워하며 군색하게 핍박하면 관장도 법으로 견
제하지 못한다. 지금 저 무리를 모아 소란을 일으킨 백성들이 어찌 모두
사람마다 현혹되고 혼미하여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대체로 그 이유는
<관리들이>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무단으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편
안히 살 수 없게 되어 <백성들이> 일어나 소란을 만들어 교화가 통하
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어리석고 미련한 습성은 족히 통탄스럽고
놀랄 일이나 그 실상을 살펴보면 또한 측은하고 가련하다.
소위 동도라고 하는 자들의 거짓되고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처음에는
아이들도 속일 수 없었고, 비록 어리석고 둔한 백성이라도 반드시 이것
에 현혹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을[동학] 빙자하여 무리를 모은 세력이
백성들을 침학한 수령을 통쾌하게 한번 혼내 주려고 한 것이다.
지금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귀화하려고 모이는 것은 백성의 본뜻으로
보인다. 마땅히 위로하고 어루만져 각각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혹 떠돌아다니면서 살 곳을 잃은 자는 각 지방관에게 명하여 계책을 세
워 구휼하여 일정한 거처를 얻게 하고, 무릇 백성에게 폐가 되는 것은
일체 고쳐 힘써 백성들이 자기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
혹 머뭇거리면서 해산하지 않고 다시 완강하게 거역하는 자는 반란을 하
려고 기약하는 자이니 비록 우리 임금의 천지처럼 살리기를 좋아하는 큰
덕과 나라의 법에 바라더라도 가히 굽힐 수 없다.
해당 도신들과 초토사는 이들을 일일이 체포하여 누락된 자가 없게 하
라. 또 지금은 농사철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소요로 인하여 농사의 때를
잃을까 더욱 염려가 된다. 각 해당 읍으로 하여금 극진히 가엾게 여겨
놀라 농사에 방해가 됨이 없게 하라.
대저 우뢰(官軍)가 격동하는 데는 곤륜산의 화염처럼 포학할 뿐17) 아

17) 곤륜산에는 옥이 생산된다고 하였다. 이곳에 불행히 화재가 나면 옥과 돌이 함께 타


양호전기(兩湖電記) 203
니라 옥과 돌을 구분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진실로 많은 백성이 한 두
사람의 현혹시키는 무리에게 강제로 협박을 당하여 일찍이 스스로 벗어
나지 못하고 국가의 법에 죽어도 달게 여기는 자는 지극히 어리석고 무
지할 뿐이다. 그 전날에 <동학에> 물든 것을 씻어버리고 모두 유신에
참여하여 후회함이 없게 할 뜻으로 아울러 널리 고하여 알림이 마땅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초 10일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원세록은 언제
출발하는가? 길이 익숙하지 못하고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으
니 한 부대의 병력이 허술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충분하게 깊이 계산하
여 절대로 경시하지 말기를 천만 바란다”라고 하였다.
혜당댁에 전보하기를 “심영의 병사는 어느 날에 내려옵니까? 2개 부대
의 병력을 무장의 근처 5개 읍 등지에 파견했습니다. 호서의 <동학농민
군은> 물러가 해산하였다고 하니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4월 15일 신유 [十五日 辛酉]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지금 무장에서 알린 바를 보면 저 무리들이 큰


깃발을 세우고 영광군 쪽으로 향하면서 무장에서 25리쯤 되는 장자산(莊
子山)에 주둔하고 있는데 그 기세가 치열합니다. 심영의 병사들은 어느
날에 성당(聖堂)의 지역에 도착합니까? 자세히 안 연후에 전주로부터 병
력이 이동하여 뒤에서 호응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전주의 진영도
온전히 비워두기 어렵습니다. 어제 2개 부대의 병력을 보내어 태인 등
여러 읍에 주둔하면서 군량만 소비하였으니 어떻게 합니까? 전운사(轉運
使)에게 공문으로 명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버린다. 여기서 화재는 군사를 투입시켜 섬멸함을 뜻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장병


을 투입시켜 섬멸하면 죄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 함께 죽는다는 말이다.
20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대내에서 비밀리 전보하기를, “심영의 병사들이 16∼17일 간에 비로소


출발할 것인데 저들이 이미 영광을 점거하였으니 심영의 병력을 미리 목
포에 보내고 나주를 굳게 지키게 하여 저들의 가는 길을 끊어 전후로 적
을 공격하는 것이 어떠한가? 형편을 자세히 알려라”고 하였다.
회전하기를, “심영의 병사들이 목포의 육지에 내리고 나주를 굳게 지
키게 함은 형편상 온당합니다. 저들이 이미 오래 점거하였으니 준비가
있을 듯합니다. 속히 내려오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이미 2개의 부대를 파
견하여 전진하게 하고 장차 차례로 뒤에서 지원하게 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혜당댁에 전보하기를, “영광의 수령은 이미 초 9일에 저들이 읍에 들
어온다는 정보를 알고 피하여 배를 타고 도주하였습니다. 2개의 부대를
보내어 뒤를 차단하고 심영의 병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전후에서 서로 호
응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혜당댁에 전보하기를, “완산에 이르러 즉일로 한편에는 방문을 붙
여 타이르고 한편에는 한문과 언문으로 공문을 내어 골골에 부쳐 백성을
편안히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하였습니다. 저들은 점점 도주하여 하도(下
道)로 향하고 있는데 2・3차 타이른 뒤에 부득이 2개의 부대를 보내어 위
엄을 보이면서 계속 행군하게 하고, 여러 읍에 공문으로 명하여 장병들
이 용감하게 싸우도록 하였으며 며칠 사이에 또 후원 부대를 파견하여
지원할 계획이오나 병력이 적어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4월 16일 임술 [十六日 壬戌]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장병들의 급료를 주라는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심영의 병사들이 지금 출발하는데 극포(克砲)를
더 보냈다. 심영의 장병들은 대포가 없어서 크루프와 회원포의 두 포를
강화에 보냈고, 다만 중국 복장 100건과 군도 10자루를 강화의 군함을
양호전기(兩湖電記) 205
이용해 이태황(李台璜)편에게 부쳐 보냈으나 저들의 내막은 헤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혜당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익산은 이 임무를 감당할 만하
다. 전에 머문 2개 부대의 병력을 전후로 서로 지원하여 장병들의 기를
약하게 하지 말라. 비록 동학인이라도 만일 귀화하는 자가 있으면 전의
과실을 씻어주고 업무에 편히 종사할 뜻으로 급히 각 읍에 공문을 보내
라”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2개 부대가 이미 전진하였으니 후원의 부대가 없
을 수 없습니다. 내일 군대를 보내어 멀리서 호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심영의 병력은 군산포에
정박하지 않을 듯하니 응접하지 말라”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에 답전하기를, “마땅히 지시한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곧 총무관의 공문을 보니 물품을 싣기 위하여
한양호를 법성(法聖)의 구수포(九峀浦)에 보냈는데 저들 무리 수백 명이
총을 쏘면서 갑자기 들어와 위원 김덕용(金德容)과 일본 사람, 그리고 강
인철(康寅喆)을 묶어서 구타하고, 선판(船板)을 깨부수었으며 김・강 2사
람은 저들 속에 구류되었고 10,000냥의 돈을 토색질 당하였다고 합니다.
듣기에 놀라오니 만일 함부로 움직이면 방어를 잘못할까 걱정스럽습니
다. 반드시 살피고 삼가야 하니 심영의 병사들을 법성포에 정박 하륙할
뜻으로 재촉하여 보내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4월 17일 계해 [十七日 癸亥]

완백이 정부에 전보하기를, “저들 무리의 정적을 정탐하니 한편은 영


광에 머물러 있고 한편은 함평(咸平)으로 향한다고 하니 경군이 길을 재
촉하여 저들이 머문 곳으로 쫓아가 장차 접전을 할 계획입니다. 오늘 아
20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침에 또 2개 부대의 병력을 출발시켜 길을 재촉하여 전진하게 하였습니


다”라고 하였다.
정부에 전보하기를, “저들이 반은 영광에 머물고 반은 함평・무안(務安)
등지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일전에 2개 부대의 병력을 파견하고 오늘 새
벽에 2개 부대의 병력을 보내어 차차 연속 전진하고 후원할 계획입니다”
라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외지에 나가 머물고 있
는 장병의 옷감으로 쓸 무명[木] 1필씩을 내려주라는 전교가 있었다”라
고 하였다.
답전하기를, “무명 1필씩 내려주시니 다행한 일이며 오늘 또 2개 부대
를 파견하여 전진하게 하고 차차 후원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저들이 한편으로는 영광에 머물고 한편으로
는 무안・함평 등지로 향한다고 하니 오늘 또 2개 부대를 파견하여 전진
하게 하였으며 다시 정적을 탐지한 뒤에 후원할 계획입니다. 중국사람
정득붕(丁得鵬)이 적의 정형을 탐지하기 위하여 어제 전주에 도착하였으
며 출진한 장병에게 무명 1필씩 내려주는 일은 일일이 말하였습니다. 어
제 보고한 것은 아직 회전을 받지 못하여 답답하였으나, 지금 자세한 소
식을 들으니 모두 평안하다고 하오며 일행들도 모두 무사하다고 하니 천
만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다시 보고하기를, “각 읍의 보고문은 탐리(探吏)18)가 알린
것인데, 소위 탐리는 저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합니다.
때문에 <그들의 보고는> 길에서 얻어 들은 말에 불과할 것이니 깊이
믿을 수 없습니다. 별도로 종사인(從事人, 특정한 일을 보는 심부름꾼)을
사방으로 보내어 널리 정탐하게 하였고, 걸인의 모양으로 복장을 변복하
여 며칠을 두루 다니게 하였습니다. 오늘 술시 경에 염탐꾼이 들어왔기

18) 탐리(探吏): 실정을 정탐하는 아전을 말한다. 1894년 당시에는 지방관아의 아전과
보부상을 첩보원으로 이용하였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07
에, 자세히 저들의 형상을 물으니 13・14 양일 밤에 혹 6・70명씩 혹 4・
50명씩 총과 창・칼을 가지고 흥덕을 지나 부안으로 향하고 영광에 주둔
한 자가 날마다 더욱 늘어나 짚을 모아 사토(沙土)를 섞어서 성첩을 쌓
고 남문만을 열어 군량을 운반하여 쌓아두니 그 기세가 점점 성대하다고
합니다. 보고 들은 것이 확실히 이와 같으니 적은 군사로는 함부로 움직
이지 못하겠기에 매우 걱정이 됩니다. 심영의 병사들을 재촉하여 내려
보내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4월 18일 갑자 [十八日 甲子]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저들이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나타나고 있어서


염려됩니다. 오늘의 행군은 영광으로 하는 연유를 알립니다”라고 하였다.
병사 조희연(趙羲淵)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전 번에 기기국(機
器局)19)에서 총약을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대포의 화약은 어느 곳에 있
는 것을 가지고 갔는가? 총약은 탄내(彈內)에서 지고20) 가라고 하교하였
으니 곧 돌려 알리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기기국에서 전보하기를, “총약은 작년에 청주(淸州)에서 온 것이 10통
이고 장위영에 있는 것과 청평천(淸平川)에서 만든 총약은 본국[기기국]
으로부터 가지고 왔는데 합 20통이니 탄내에서 지고 왔습니다. 오늘 행
군은 금구에 이르러 길을 배로 빨리 걸어 곧바로 태인으로 향하였습니
다. 이번에 강화의 군함편에 보내주는 총약은 어떤 것입니까? 상품(上品)
으로 보내주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장위영에 전보하기를, “어제 2개 부대를 파견하였는데 경군은 지금 정

19) 기기국(機器局): 내아문에 속한 무기제조 업무를 담당한 기구를 말한다.


20) 탄내는 화약 탄약 등을 보관하는 탄약고를 말함인 듯하다. 본문의 길(吉)은 이두로
짐을 진다는 뜻이고, 길짐은 관가에서 짐을 나를 적에 길가에 사는 백성들에게 번갈
아 가면서 짐을 나르게 하는 짐을 말한다.
20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읍의 경내에 있습니다. 오늘 행군은 금구에 도착하여 곧바로 태인으로


향한 연유를 알립니다”라고 하였다.
대내의 전보에 이르기를, “심영의 병력이 오늘 인천으로부터 출발하니
적의 사정을 계속 더욱 자세히 탐지하라”라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어제 경군의 2개 부대는
과연 파견하여 보냈는가? 이미 2개 부대를 파견하여 보냈으면 어느 곳
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4월 19일 을축 [十九日 乙丑]

공사청, 혜당댁, 본영 사또댁, 수교대신댁에 전보하기를, “금월 19일 오


시 경 정읍현에 이르러 영광군수의 보고한 바를 보니 저들은 경군이 계
속 나누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16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경에
10,000여 명이 함평지역을 향하여 물러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다음날
흥덕에 주둔하여 뒷길을 차단하고, 나주목사에게 요로를 엄중히 방어하
도록 지휘하였으며 심영의 병력이 하륙하기를 기다려 앞뒤에서 공격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부하를 거느리고 금구에
도착한 장병은 무고하며 먼저 도착한 정읍의 장병도 또한 편안히 행군하
였는가? 내일 급료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답전하기를, “아까 도착한 내용은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급료를 지급하
라고 한 것은 다행이오며 일일이 타일러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희연(趙羲淵)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호남의 적도는 그간에
과연 토벌하여 안정되었습니까? 근일의 동정을 자세히 알려주기를 바랍
니다”라고 하였다.
답전하기를, “저들은 물러가 함평을 점거하였으며 우리는 지금 나주로
행진합니다”라고 하였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09
대내에 전보하기를, “19일 신시 경에 나주의 보고를 보니, 16일에 저
들은 함평으로 들어가 날뛰면서 장차 나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나주에
서 저들의 탐정꾼 2명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더욱 방어를 굳게 하고 있
으나,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은 것이 걱정스럽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4월 20일 병인 [二十日 丙寅]

조희연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어제의 전보는 이미 보았습니다.


대포와 탄내의 화약(火藥)은 이미 수령하여 갔습니까? 전교를 내려 가지
고 가라고 재촉하였는데 그 여부를 속히 알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고창에 있으시면서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20일에 정읍으로부터 행군
하여 오시 경에 흥덕을 거쳐 고창에 도착하였고 내일 영광으로 향하여
곧바로 함평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읍마다 저들과 내응하는 자가 많이
있어 여러 가지 정탐하는 일은 논할 바 아니고 방어하는 여러 가지 일은
백번천번 공문으로 명령하여도 어찌할 수 없으니 염려됩니다. 심영의 병
사들은 19일에 군산창(群山倉)에 도착하여 식량을 싣고 배를 띄워 목포
로 향할 뜻으로 심영의 병방(兵房) 서병훈(徐丙勳)이 연유를 보고합니다”
라고 하였다.

4월 21일 정묘 [二十一日 丁卯]

어젯밤 공사청, 혜당댁, 본영 사또댁, 수교대신댁에 전보하기를, “20일


에 고창에 이르러 장병들을 합쳐서 내일 영광으로 향하고 곧바로 함평으
로 들어갈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청주진(淸州鎭)에 전보하기를, “저 무리들이 함평으로 들어간다고 하기
에 전주로부터 행군하여 고창에 이르고 장차 저들의 모인 곳으로 향할
21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전주의 좌병방(左兵房) 김한정(金漢鼎)이 경군
의 뒷바라지를 전적으로 거행하였습니다. 새로 온 감사가 처음으로 부임
하여 여러 가지의 뒷바라지 일에 생소할 듯하니 김한정은 특별히 이전의
임무를 그대로 계속하여 거행하도록 하라는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
였다.
기기국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청평천에서 새로 제조한 화약 5
궤와 일본 화약 5통과 양화약(洋火藥) 300봉과 대포약 40봉과 나개철(螺
盖銕)21) 400개를 지난 16일 강화의 군함편에 이미 실려 보냈습니다”라
고 하였다.
회답하여 전보하기를, “모든 화약을 내려 보냈는데 자기황은 보내지
않았습니까? 아무 알림이 없으니 의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4월 22일 무진 [二十二日 戊辰]

대내에 전보하기를, “21일에 영광에 군사가 도착하였는데 심영의 병사


들이 19일에 웅연(熊淵)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함평과의 거리가 조금 멀기 때문에 법성포에서 육지에 내리는 것으로 약
속을 하였습니다. 지금 함평의 보고를 보니 저들은 경군이 추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미시(未時, 오후 1∼3시) 경에 또 흩어져 장성・나주
등지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방금 2개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파견하였는데
저들이 갑자기 모였다가 흩어지고 도로가 험하고 좁아 대포를 운반하기
어렵고 여러 군사들도 추격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각 읍에 거듭 명하여
특별히 방어하게 하였으나 토병들은 제대로 방어하지는 못합니다. 저들

21) 나개철(螺盖鐵): 위에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긴 못을 서너 개 세우고 밑에 말징처럼


생긴 쇠에 박은 상해용 무기이다. 산길이나 풀섶에 깔아두고 다니는 사람들이 밟아
상처를 내게 하는 도구이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11
이 흩어져 영남으로 도주할 염려가 있는 듯하니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
였다.
정부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완백과 초토사는 함께 보라. 위문하
는 선전관이 내려가기를 기다려라. 금액 2천 냥을 준비하여 갔다. 어제
진중(陣中)에 전교를 내렸으니 그 말뜻을 한문과 언문으로 번역하여 등
사해서 저들을 효유하기 바란다.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이는 반란의 마
음으로 시위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한 쪽으로 살 길을 열어줄
것임을 전하여 깨우쳐 주라. 저들의 답하는 바가 어떠한지 문초한 것을
받들어 곧 올려 보내라. 경군은 오늘 어느 곳에 있는가? 또한 알려라”고
하였다.

4월 23일 기사 [二十三日 己巳]

기기국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심영의 병력이 내려갈 때에 대


포와 화약 및 자기황 납화(自起黃拉火)22) 500개, 나개철 300개를 이미
보냈습니다. 다시 더 보낼까요?”라고 하였다.
대내에서 전보하기를, “<관군이> 영광에 이르렀다는데 만일 저들이
함평에 있다고 하면, 주력부대를 영광에 머무르게 하라. 먼저 일전에 내
린 전교의 말로 타이르고 또 상하가 서로 호응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라”
라고 하였다.
술시(戌時) 경 대내에 다시 보고하기를, “윤음사(綸音使)인 종사(從事)
이효응(李斅應)이 2차례 타이르고 5차례나 효유하였지만 저들은 10,000
명의 무리를 믿고 끝내 귀화하지 않습니다. 한 번 전주감영군을 패퇴시
킨 이후로부터 분에 넘치는 생각이 날로 생기고 각 읍과 각 리에 방(榜)

22) 자기황 납화(自起黃拉火): 자기황은 화약과 다른 물질을 섞어 문지르거나 부딪쳐 불


이 붙게 하는 고체이고, 납화는 불을 붙이는 심지를 말한다. 조총이나 대포를 쏠 적
에 사용한다.
21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을 부쳐 말로 핍박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지만 전보로 보고하기는 어렵


습니다.
23일 미시경에 장성 황룡장터에서 접전하여 저들의 부상자는 7・80명
이나 됩니다. 그러나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 대관 이학승이 순국하고
장병 4명이 부상을 입고 극로백 1좌와 회선포(回旋砲) 1좌를 잃어버렸으
니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잠깐
씩 합치고 모이니 다만 30,000명이란 숫자만으로 말할 수 없고 읍과 촌
마다 내응하는 자가 많습니다.
여러 읍의 수령들은 놀라고 겁을 내며 여러 장병들은 담이 떨어질 지
경이니 한 조각의 외로운 성에 연약한 장병들은 심영의 병사와 합쳐도
천여 명에 불과하고 무기가 정교하다고 하지만 군사들이 약하고 겁을 먹
어 싸워 막아낼 방책이 없습니다. 비록 후퇴하여 완영을 지키고자 하나
거리가 200여 리나 되고 군수품과 탄약이 많아 가볍게 움직이기 어렵고
전보도 자주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들은 날뛰면서 날로 더욱 수가
많아지고 우리는 외롭고 적어 후원하는 자가 없어 어찌할 수 없으니 엎
드려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4월 29일 을해 [二十九日 乙亥]

금영에서 대내에 전보하기를, “23일 장성 황룡장 전투 후에 저들은 장


차 순창(淳昌)・담양(潭陽)・나주 등지로 향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함평으
로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완영을 지키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25일에
군사를 돌려 전주로 향했습니다. 적당(賊黨)이 과연 장성의 갈재[葛峴]를
넘어 완영으로 가기에 앞서 금구의 원평(院坪)에 이르렀을 때, 노문선전
관(勞問宣傳官)과 하인 2사람, 윤음선유종사(綸音宣諭從事) 이효응・배은
환(裵垠煥)을 모두 살해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역적이 있습니
까? 죽여도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급히 달려 뒤를 따르면 항상 하루의
양호전기(兩湖電記) 213
거리 앞에 있어 마침내 적이 먼저 전주를 점거하였습니다.
전주판관과 새로 부임한 감사는 겨우 화를 면하여 다른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28일 진시 경에 전주의 앞산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였지만 악전고투하였습니다. 신시 경에 이르러 적당 중에 갑옷을
입고 칼춤을 추며 천보총(千步銃)을 쏘는 자 30여 명을 사살하고 그 나
머지 수백 명을 베고 승리의 기세를 타서 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게 되었
는데 해가 어두워 장병들을 후퇴시켰습니다.
술시 경에 적당은 성 내외의 관청건물과 집에 불을 질러 다 태우고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킴에 급히 공격하여 함락시키기는 어려웠습니다. 우
선 산 위에 진을 치고 마을의 집에서 식량을 빌려먹으니 외로운 전세가
민망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저들을 적자(赤子)로 볼 수 없으므로 섬
멸하여 남김이 없어야 백성들의 소생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살펴주시기
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5월 초 1일 정축 [五月 初一日 丁丑]

공사청으로부터 금영을 경유하여 온 언문 전보에 이르기를, “6・7일 동


안 소식이 없어 심히 답답하더니 전보를 보니 매우 상쾌합니다. 그러나
선전관과 종사관이 살해를 당하였다고 하니 참혹하고 통분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찌 이와 같은 변괴가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적의 성을 공략하고 적을 베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연시
킬 수는 없습니다. 적의 형세는 가벼이 볼 수 없으니 형편을 보아 군사
를 지휘하십시오. 후원할 군사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이원회(李元會)를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고 기영병(箕營兵, 평양의 장병) 500명과 통위영
포대 장병은 대포를 끌고 어제 출발시켜 보냈으며 청나라 병사 3,000명
이 며칠 안에 나올 것입니다. 군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보로 금백에게
명하여 금전과 군량을 준비하여 보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십시오. 승
21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리의 전보를 앉아서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내의 전보가 노성(魯城)23)으로부터 와서 이르기를, “그 간에 전공
(戰功)을 얻었고 장병들은 무사하며 군량과 실탄은 모자라지 않은가? 청
주의 군사들도 출발하였다고 하니 그간에 도착하였을 듯하고, 군량은 충
청감사가 보내줄 것이다. 충청감사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으니 쓰는 대
로 요청하라”고 하였다.
혜당(惠堂)이 금백에게 전보하기를, “초토사가 원평으로부터 와서 오늘
전주 접전에 참여한다고 한다. 금영에서 급히 <초토영에> 통지를 보내
어 여산(礪山)과 은진(恩津) 두 곳 중에 와서 방어하라는 뜻을 전하도록
하라. 곧 처분이 있을 것이다. 심영의 병력은 군산으로 돌아와 육로의 어
느 곳에 있는지 곧 함께 서로 통지하여 힘을 합쳐 방어하고 가벼이 먼저
접전하지 말고 다시 자세히 탐문하라. 향하는 바가 어디인지 속히 탐문
하여 알도록 하라. 비록 포군・보부상이라도 며칠간 잘 방어하면 대군이
당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전날 혜당 어르신과 왕복한 문서
의 전달은 새벽에 파발마 쌍편으로 급히 보냈습니다. 아직 받아보지 못
했습니까? 여산으로 퇴진하여 다시 경중을 들은 뒤에 진퇴하는 것이 좋
을 듯합니다. 답신은 곧 혜당께 전보하고 회답의 전보를 기다려 다시 통
지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혜당댁에서 신임 완백의 공주 금강(錦江) 처소에 전보하기를, “완영의
소문은 자세히 들었습니까? 염찰사 엄세영(嚴世永)과 순변사 이원회(李
元會) 두 사람이 병력을 이끌고 내려갔습니다”라고 하였다.

23) 본래 전주에 전보 시설을 두고 서울에 전보를 교환하였으나 농민군이 전주성을 공격


할 때 이 시설을 노성으로 옮기고 전보 업무를 대행하였다. 홍계훈과 서울 사이 왕
복한 전보는 파발마를 이용해 전달하였다. 전주성에서 농민군이 물러난 뒤에 노성의
전보시설을 다시 전주에 설치하였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15
5월 초 2일 무인 [初二日 戊寅]

내서에서 전보를 보내어 이르기를, “전날에 너희 군사들은 영광에 있


고 비류는 전주를 함락함에 형세가 급박하여 순변사를 임명하여 보냈다.
지금까지 너의 장병들이 전공을 세웠으니 이때에 적을 치는 일은 잠시도
가벼이 할 수 없다. 때문에 이미 먼저 계획을 세우고 뒤에 보고할 뜻으
로 순변사에게 전보로 명하였으니 주저하지 말고 기회에 따라 잘 응변하
여 큰 공을 세우기를 기약하라”고 하였다.
진남영(鎭南營)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탄약 20궤와 병력 100
명이 초 1일 신시 경에 출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영의 전보에 답하여 이르기를, “연일 악전고투함에 적의 장병 50명
과 적당 수백 명을 체포하거나 베고 몇 번 성에 올랐으나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 성을 수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성곽이 완전하고 튼튼하니
이와 같은 적은 군사로는 포위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주의 병력과 은진을
방어하는 병력을 주야로 길을 재촉하여 보내십시오. 적의 무리가 후원군
이 있을 듯하니 신속함이 상책입니다. 순변사는 어느 날에 도착한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지난 29일 2통의 전보는
보았는가? 군중(軍中)은 무사한가? 먼 곳에서 매우 걱정이 된다. 적을
사살한 것이 많았으니 매우 다행하고 그간의 군량과 반찬・신발 등은 반
드시 모자랐을 것이다. 삼으로 짠 미투리[麻鞋] 4,500켤레와 조기 3,000
속, 발싸개 감[裹足次]의 무명 10동을 수송하였고 쌀은 전운영(轉運營)에
서 수송하도록 하였고 개화포(開花砲)24)와 실탄 40,000개를 내려 보냈다.
기영의 병력 500명은 순변사가 거느리고 갔으니 내일 모래 사이에 도착
할 것이고 청국의 군사가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아산(牙山) 둔포(屯浦)
에 도착하여 하륙한 뒤에 지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24) 개화포(開花砲): 대포의 일종으로 불꽃이 꽃처럼 일어난다는 뜻을 따 붙였다.


21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5월 초 3일 기묘 [初三日 己卯]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엎드려 내무부의 공문과 순변사의 전령을 보니


대저 기회에 따라 응변할 적에 매사를 급히 보고하여 위에서 답이 있은
연후에 거행하라고 하니 이렇게 되면 군사의 일이 지연됨이 많습니다”라
고 하였다.
내서에서 전보하기를, “이미 전공을 얻었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이
때에 적을 공격함은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모든 일을 스스로 결단
하여 먼저 행하고 뒤에 순변사에게 보고할 뜻으로 이미 순변사에게 명하
였으니 지연되는 일이 없도록 기회를 엿보아 공을 세우기를 기대한다”라
고 하였다.

5월 초 4일 경진 [初四日 庚辰]

독판(督辦)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어제의 대첩은 매우 다행한


일이니 치하합니다. 귀댁에도 평안하고 군중도 평안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전투에 사망한 여러 사람은 이미 염습을 하여 매
장하고 영혼을 위로하였습니다. 실탄과 흰 무명은 마땅히 추산하여 사용할
계획입니다. 적이 믿는 바는 전녹두(全祿豆, 전봉준)와 14세의 동자인 장
사 이복용(李福用)인데 전녹두는 우리의 총탄에 부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쓰지 못하고 이복용은 어제 나가 싸우겠다고 큰 소리를 하다가 우리 군에
게 목을 베이고 나머지는 모두 도주하고 흩어져 성안으로 들어가 담략이
떨어지고 혼을 잃어 지금 자중지난 중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영에 전보하기를, “어제 악전고투 끝에 저들의 괴수 몇 사람과 동자
장사 한 사람과 그 나머지 5백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고 소위 대장기를
탈취하고 총과 창 3백여 자루를 취하니 적의 무리가 반은 도주하였습니
다. 중상을 입은 자는 성안으로 들어간 뒤에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습
양호전기(兩湖電記) 217
니다. 청국의 군사가 만약 상륙하면 양호의 민폐가 적지 않을 것이니 천
천히 동정을 보면서 그들을 상륙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순변사
는 어느 날에 귀영(貴營)에 도착하였습니까? 은진에 진영을 머물게 하고
3백 명은 출발시켜 보낸 연후에야 전주를 지탱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5월 초 5일 신사 [初五日 辛巳]

내서로부터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의옹협만(誼雝協瞞)25)은 총탄이


남은 것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회룡총(回龍銃) 400자루와 실탄 40,000개
를 수송하여 들여와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금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요즈음 동정이 어떠합니까?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지금 교동(校洞)26)의 전보를 보니 청군(淸軍)은 다만 하
륙하고 아직 전진하지 말라는 뜻으로 원세개의 공관에 전달이 오고 갔습
니다. 순변사는 전진하여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였습니다. 적을 가벼이
보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 순변사에게 전보로 통지하였습니다. 이해
하여 주십시오. 적의 동정을 계속 알려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초 5일 사시 경에 호분위(虎賁衛)27)의 사관(士
官)이 대내에서 주는 실탄을 가지고 도착하여 일일이 얼굴을 대면하여
삼전궁(三殿宮)28)의 위로문을 받들어 하달하였고 하교의 말씀에 적과 민
간인을 잡은 것은 다소를 계산하여 이름을 기록하라고 하였기에 이런 연

25) 의옹협만(誼雝協瞞): 외국 인명으로 보이나 미상.


26) 교동(校洞): 여흥 민씨들이 모여 살던 곳. 고관을 지낸 민씨를 교동대감이라 불렀다.
오늘날 인사동 일대이다. 오늘날의 창덕궁 왼편에 있는 교동에도 민씨들이 많이 살
았다.
27) 호분위(虎賁衛): 본래 5위의 하나였는데 1882년 폐지하고 1883년 압록강 쪽 국경
수비를 위해 같은 이름의 지방군사조직을 의주에 두었다.
28) 삼전궁(三殿宮): 임금인 고종과 왕비인 민씨(명성황후) 그리고 왕세자를 말한다.
21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유를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혜당댁에 전보하기를, “본영 사또의 분부를 받고 여러 장졸을 위문하
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장성에서 전사한 관병(官
兵)의 일은 놀랍고 참혹하다”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계속 승리를 하니 장병들의 충성
심은 가상하다. 모두 아무 탈 없는가? 멀리서 매우 염려된다. 비록 승리
하였으나 더욱 더 단속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라. 적을 잡아 올린 민간인
의 성명을 일일이 기록하여 뒷날의 시상을 기다리라. 적을 잡은 다소의
성과에 의하여 시상의 차등이 있을 것이니 이를 알려 더욱 권장하고 힘
쓰게 하라”고 하였다.
혜당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크게 승리하여 전공을 이루었으
니 여러 장병들을 축하하고 위로한다. 비록 무찔러 이겼으나 절대로 적
을 가벼이 보지 말고 백성들을 품고 보호하라”고 하였다.
내서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귀화한다는 말은 믿을 수 없으니 적
을 섬멸하기를 기하라 평민에 이르러서도 충분하게 살피고 삼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5월 초 6일 임오 [初六日 壬午]

내서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며칠이 지나도 전보가 없으니 답답


하다. 그간에 적의 정세는 어떠한가? 전하여 들은 바로는 저들이 북동문
으로 몰래 도주한 자가 많다고 하니 순변사가 거느리고 간 기영의 군사
들이 북동문에 진을 설치하여 머물고 몰래 도망치는 자를 차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서 지휘는 순변사가 잘 알아서 거행하고 상의하여 함께
적을 초멸하고 며칠 안으로 전공을 세우기를 기하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기회에 따라 응변하여 먼저 행하고 뒤에 보고
양호전기(兩湖電記) 219
하라 하시니 하교하신 대로 거행하오며 초 3일 대첩한 후로부터 전주 이
하 각 읍의 백성들을 안도시켜 본업에 종사하게 하였습니다. 적도(賊徒)
들은 대패한 이래 굳게 성을 지키고 하나도 포를 쏘지 않으며 연일 방문
을 걸고 괴수 전명숙(全明淑)이 이미 죽었다고 하면서 살려주기를 애걸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형은 믿기 어렵습니다. 어제 장병들에게 음식을
보내어 성대하게 위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초 3일의 큰 승리는 기쁘
고 다행한 일이다. 장병들은 태평한가?”라고 하였다.
금국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오늘 본댁 평산29)이 금국에 도착
하였는데, 댁내는 무고하고 오늘 완영으로 떠나면서 하인을 은진에 보냈
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일전에 <전주의> 승리는 매우 통
쾌하고 다행한 일입니다. 중국의 군사는 아직 하륙하지 않았으니 일이
매우 합당하기 때문에 지금 정부와 교동에 전보하여 헤아려 처분하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5월 초 7일 계미 [初七日 癸未]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어제 미시에 적이 두 사람을 보내어 귀화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면서 비록 물러가 해산하려고 해도 거리에서 사람들이
구타할까 염려가 된다고 하기에 양민으로 적의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
는 마땅히 논하지 않을 뜻으로 타일러 보냈습니다. 새로 온 전라감사는
끝내 아직 오지 않았고 지금 삼례역(參禮驛)에 있습니다. 순변사도 아직
도착하지 않고 포와 실탄은 시급합니다. 염찰사는 어제 왔다가 삼례로

29) 평산(平山): 친군통위사를 맡아 농민군 토벌을 지휘하던 신정희(申正熙)를 가리킨 것


으로 보인다. 신정희는 청주출신으로 평산 신씨이다. 신정희는 1894년 10월에 순무
영이 창설되어 순무사의 직책을 맡았다.
22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로부터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비록 애걸하면서 살려주기를 구
하더라도 적의 심정은 믿기 어려우니 세밀하고 견고하게 포위하여 방어
함이 타당하다. 청나라 군사는 어제 먼저 하륙하여 전진하면서 형세를
관망할 뜻으로 원세개의 공관에 통보하였다. 어제 아침의 전보는 받아
보았는가?”라고 하였다.
혜당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밤비가 계속하여 내리는데 장병
들이 노숙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황우 5마리와 백미 10석을 전보로 의탁
하니 완백은 이를 찾아 장병들을 위문하고 내 말로서 한 사람 한 사람
음식을 대접한 뒤에 잘못을 바로 잡도록 하라”고 하였다.
금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곧 탐문한 군교(軍校)의 보고를 보
니 청국의 섭통령(聶統領, 섭사성)이 보병 1,000명을 거느리고 상륙하여
아산읍으로 향하고, 마군(馬軍) 100명과 섭제독(葉提督, 섭지초)이 거느
린 보병 1,500명과 마군(馬軍) 150명이 오늘 상륙한다고 하니 매우 답답
합니다. 밤비는 비록 단비이지만 진중에 노숙하는 군병들이 어떻게 밤을
새우는지 옷이 젖어 떠는 모양은 절실히 마음이 아픕니다. 적도의 정형
은 어떠한지 자세히 알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금영에 답전하기를, “청국 군사가 상륙하여 유진한다고 하니 다행입니
다. 적도들은 초 3일에 대패한 뒤에 기운이 위축되어 연일 살려주기를
애걸합니다. 그러나 진정이 아닌 듯하니 그 말을 깊이 믿을 수 없습니다.
순변사는 어느 날에 도착합니까?”라고 하였다.
금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일간에 동정은 어떠합니까? 지금
교동의 전보를 보니 청나라 군사는 육지에 내렸을 뿐이요 진군하지 말라
는 뜻으로 원세개의 공관에 <전보로> 왕래하였다고 하고 순변사는 진군
하여 아군과 합세하여 토벌하되 적을 경시하지 말라는 뜻으로 순변군에
전보를 하였으니 이런 줄 알고 정형을 계속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여러 차례 접전할 때 적의 무리 중에 용맹스럽
양호전기(兩湖電記) 221
고 힘 있는 자를 격살한 것이 태반이나 됩니다. 지금 성안에 점거하고
있는 자는 모두 남은 무리라고 하는데, 수가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성의
주위 10여리에는 기영의 군사가 아직 오지 않아 군사가 적어 포위하기가
어려우니 비록 요새의 길을 막고 차단하더라도 밤에는 빠져나가 도망치
는 자가 많고 쓸데없이 여러 날을 보내고 있어서 성안에 남아 있는 적도
들을 전부 놓칠까 두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히 운제(雲梯, 사다리)를
만들어 성을 넘어 들어가 섬멸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혜당에 답전하기를, “밤비가 연이어 퍼부으니 옷이 흠뻑 젖어서 걱정
스럽습니다. 내려 보내신 소 5마리, 쌀 10석을 삼가 하교하신대로 마련
하여 노고를 위문하였으며, 얼굴을 맞대고 타이르고 음식을 대접하였습
니다. 적의 정세를 살피건대, 근일에는 살려주기를 애걸하고 있으나, 그
들의 뜻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이번 성안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의 숫자는 아직도 적지 않고 성의
둘레가 10여 리인데, 기영의 군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군대의 수
가 적어 포위하기 힘듭니다. 비록 요로를 막아도 밤에 빠져 나가는 자가
많고, 쓸데없이 여러 날을 보내면서 시일을 오래 끌게 되니, 성에 남아
있는 적들을 모두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급히 사다리를 만들
어서 성을 넘어 적을 토멸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금영에 전보하기를, “요즈음 적의 동정은 귀화하기를 애걸하지만 야간
에 도망치는 자가 많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청나라 군사가 상륙을 하면
그들을 접대하는 일이 극히 어려울 것입니다. 오고 오지 않는 것은 조정
의 처분에 달려 있으나 아무튼 이곳의 동정을 보고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비가 내리는 일이 계속 되니 온 장병들의 젖는 것이 걱정스럽
습니다”라고 하였다.
22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5월 초 8일 갑신 [初八日 甲申]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적도들이 싸움에서 여러 번 패한 이후로 첨예


한 기세가 꺾여 비록 호소하는 정상이 있고 계속 귀화하기를 애걸하지만
그 정형은 헤아릴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또 적도가 매우 많고 성
첩은 견고하고 완전하니 적을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좀더 생각을 해
야 할 무렵에, 적도들이 동문과 북문의 두 문을 따라 도주하는 자가 있
다고 들었습니다. 당일 사시 경에 300여 개의 사다리를 만들어 성 밖에
가까이 세우고 병사들로 하여금 일제히 성을 넘어서 남문을 활짝 열게
하였습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 한편으로는 공격하고, 한편으로는
도망치는 자를 쫓아갈 때에 적도들이 동문과 북문을 나와 머리를 싸매고
사방으로 흩어지니 모두 실탄에 맞아 부상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일일
이 잡아들이라는 뜻으로 특별히 각 읍에 명령하였고 또 몇 부대의 병력
을 파견하여 보내서 뒤를 쫓아 섬멸할 계획입니다.
지난번에 잃어버린 극로백 1좌와 회선포 1좌, 실탄과 각 읍에서 탈취
한 군기(軍器)인 총・창 1,000여 자루와 불랑기(佛狼機)대포 24좌와 연환
(鉛丸) 10두, 화약 1,000여 근과 그 나머지 활・화살・갑옷・투구・군도・도
끼는 아울러 모두 걷어 모았습니다.
완백에게 공문을 보내어 날짜를 정하여 속히 부임하게 하고 전주 판관
도 곧 돌아와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순변사가 도착하지 않아 청
나라 군사가 진주하면 음식의 접대가 극히 어려우니 다시 처분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내서로부터 어제의 전보에 하답하기를, “보내온 전보의 뜻은 잘 알았다.
사다리로 성을 오르는 일은 매우 경솔한 것이었다. 적의 정세를 상세히 탐
지하고 성문을 몰래 격파하여 성을 회복하라. 기영의 장병이 곧 도착할 것
이니 힘을 합쳐 하루빨리 섬멸하고 불을 지른 뒤에 청군이 전진하는 일이
없도록 속히 도모하라. 8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라고 하였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23
5월 초 9일 을유 [初九日 乙酉]

공사청, 혜당댁, 본영 사또댁・수교대신댁에 전보하기를, “적의 무리가


처음 전주성에 들어갈 때는 수가 2∼30,000명이더니, 세 차례에 걸쳐 포
로로 잡은 자들의 목을 벤 뒤에는 몰래 도망치고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믿는 자는 김순명(金順明)과 동자 장사 이복용 및 박선봉(朴先鋒)・정장
군・박장군 등 수백 명이었으나 모두 참획되었고, 나머지 몇 백, 몇 천
명은 섬멸하여 남음이 없게 하려고 합니다.
만약 화포(火砲)를 성안에 발사하면 옥과 돌을 분별함이 없이 몇 만의
생민들이 다 죽습니다. 또 성을 회복하는 것이 비록 시급하다고 하나 천
천히 하면서 백성들을 잘 보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성을 넘어갈 기세를 펴면서 적이 스스로 궤멸하도록 하여 성안
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전하고, 성을 회복한 뒤에 널리 도망친 백성들
을 불러 모아 자기의 생업에 편히 하도록 하여 왕가의 호생지덕(好生之
德)을 널리 베풀겠습니다. 새어 도망간 나머지 괴수들을 섬멸할 여유도
없지만 이 백성들을 어루만진 뒤에 적발하여 판결 처단하는 것이 매우
일에 합당합니다.
또 전녹두는 이미 죽었다는 공초를 받았으니 비록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니, 지금에 이르러 남은 적을 추격하여 체포하는 일은 삼가 처
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기영의 병사들은 아직 전진하지 못하고 지금 삼례
(參禮)에 주둔하고 있으며 장위영과 심영의 장병들은 달이 넘도록 노숙
하고 몇 차례 비를 맞아 병이 생긴 자가 많으니 의복이 시급합니다. 조
금 며칠을 기다려 장병들을 파견하여 보내서 추격 섬멸할 계획입니다”라
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에 전보하기를, “장병들이 밖에서 바람과 이슬을 피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 비를 맞음에 병이 생긴 자가 많으니 군의(軍醫)로 하
여금 치료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혜당댁에 전보하기를, “어제 전주성을 회복한 사유를 이미 분명하게
22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전보로 전달하였는데 어찌하여 아직 답전이 없는지 엎드려 염려되고 답


답합니다. 전후의 상황을 지금 정서(正書)하여 본영의 교장(敎長)에게 발
송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전
주성을 수복하였으며 적의 무리를 섬멸하여 이런 큰 공을 세웠으니 극히
가상한 일이지만 장병들이 1개월 동안이나 밤낮으로 노고가 컸으니 걱정
스러운 일이다. 이번의 전투에서 부상한 자는 없는가? 멀리서 염려됨이
적지 않다. 장위영과 심영의 장병들에게도 똑같이 위문하라”라고 하였다.
혜당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곧 전보를 받음에 전주성을 수
복한 듯하니 매우 다행이다. 전후의 상황을 분명히 전보로 알려주는 것
이 좋을 듯하다. 달이 넘도록 수고하여 이렇게 성공을 하니 매우 축하한
다”라고 하였다.
본영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전주성을 수복하였으니 대
단히 기쁘고 다행이다. 장병들은 무고한가? 자세히 알려라”라고 하였다.
금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전주성을 수복한 것은 매우 다행
스럽습니다. 동문과 북문은 처음부터 방비가 없었습니까? 뒷날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저들이 내려간 곳을 거듭 정탐하고 쫓아가 체포하고 청
나라 군사들의 행진(行陣) 실상은 지금 전보로 교동에 탐문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혜당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지금은 진영과 전주부가 모두
성 밖에 모여 있다. 성안의 민가와 감영 이하의 관아는 어떠한 처지이며
포위에서 벗어난 적도들은 어느 곳으로 향하였는지 자세히 알려라. 지난
날 사살한 적의 괴수의 목을 바치는[馘] 관례가 있으니 그 머리는 잘 두
었는지 상황을 자세히 알려라”라고 하였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25
5월 초 10일 병술 [初十日 丙戌]

내서로부터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일전에 내려 보낸 총과 실탄(鐵


丸)은 생각건대 아직 도착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소요가 진압되어 전
주성을 수복하였으니 <이 총과 실탄은> 사용할 긴급한 곳이 없을 것이
니 시급히 사람을 부려 돌아오는 선박 편에 도로 올려 보내라.
청국의 군사는 요행히 진군할 뜻이 없으니 수일간에 고국으로 돌아간
다고 한다. 일본 사람은 자기 나라의 상민(商民)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전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왔다. 초 9일 해시”라고 하였다.
내서로부터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선전관・대관(隊官) 및 적군에게
살해를 당한 여러 사람을 후하게 매장하고 각각 표를 세워 제향을 올려
서 우선 가엾게 여겨 혼을 위로하는 뜻을 보이라”고 하였다.
혜당댁에 전보하기를, “연일 서북쪽에 밤중에 불미스러운 기운이 있으
니 이는 병란(兵亂)의 조짐인 듯합니다. 서울 군사의 다수가 밖으로 파
견하여 나가 있으니 또한 흠이 됩니다. 도성 내의 여러 진영을 특별히
더욱 방어에 힘쓰도록 단속시켜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내서에서 내려 보낸 물건은 흰 무명 이외에는
모두를 돌아가는 선박 편에 다시 납부하겠습니다. 청군(淸軍)의 귀환은
양호의 폐해를 덜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며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온 것
은 의심스러우니 예상치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라고 하였다.
전동(磚洞) 민판서댁, 전동(典洞) 민판서댁, 훈서동(勳西洞) 민판서댁에
전보하기를, “그간 허다한 사무가 분주하여 틈을 얻지 못하여 한 통의
전보도 올리지 못하였으니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형편상 그러하였
습니다.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처음 장병을 거느리고 전주에 도착하니 믿
기가 어려울 정도로 적의 정세는 여기저기에서 번쩍거렸습니다. 때문에
장병을 거느리고 적이 주둔한 곳에 쫓아가 장성의 땅에서 한 번 접전하
22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였지만, 장병들을 휴식시킬 때 적도들이 지름길을 따라 전주로 향하는


고로 곧 추격하여 전주에 이르니 적은 그 날로 전주를 함락하고 성을 점
거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군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연속적으로 승리하
였으며, 이번 달 초 8일에 완전히 성을 수복하였고 나머지 무리가운데
사방으로 흩어져간 자들은 각 읍으로 하여금 잡아들이도록 하였습니다.
전후 상황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청주 영장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전주성을 수복하였으니 천만
다행입니다. 비류가 도망쳐 흩어진 뒤에 혹 다른 곳에서 무리를 모으는
일은 없습니까? 뒷날의 염려가 있고 없는 것을 자세히 알려주기를 엎드
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청주 영장에게 답전하기를, “진압된 일은 다행이다. 전주성이 수복 된
지 며칠이 되었는데 비류는 아직 무리를 모은 곳은 없다. 뒷날의 염려가
있고 없는 것은 아직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지금 듣건대 순변사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울
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적도들의 정형은 완전히 안심할 수 없으니, 기영
의 장병 300명을 초토사에게 파견해 보낼 뜻을 순변사에게 전보로 명하
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5월 11일 정해 [十一日 丁亥]

내서로부터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남은 잔적이 김제


에 모여 있다고 하니 허실을 자세히 탐지한 뒤에 기회를 타서 쫓아가 토
벌하라. 장위영과 강화영의 장병들이 병이 났다고 하니 매우 염려된다.
의원과 치료할 물건을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떠한지 자세히 알려라. 장병
들의 의복은 각각 집에서 구해 보내온 것인가? 전주부에서 만들어 쓰는
길이 있는가? 내려 보낸 흰 무명과 음식물, 미투리 등의 물건과 실탄은
양호전기(兩湖電記) 227
필요한 만큼의 수량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올려 보내라.
총병영(總兵營)의 실탄은 그간에 며칠 지연되어 발송하였으니 생각건
대 아직 도착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착하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양을 정하여 사용하라. 일본 군사 1,000명이 오늘 서울의 성안에 들어와
지금 정탐을 벌이고 있는데, 청군이 나온 것 때문에 그런 것이지 별도로
다른 사유는 없다고 한다. 서울에는 우리 군사가 심히 적어 기영의 군사
300명이 올라와 서울에 머물 뜻을 어제 순변사에게 전보로 명하였다. 10
일 자시(子時, 오후 11∼오전 1시)”라고 하였다.
사동(寺洞)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내서의 전보는 자세히 알았
으나 어느 날에 발신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주성을 수복하였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장병들이 병이 난 자가 많다고 하니 걱정스럽습니다.
금계랍(金鷄蠟)30)을 이미 심영의 진영에 보냈습니다. 학질에만 쓸 뿐 아
니라 백 가지의 병에 모두 효과가 있다고 하니 2・3푼의 분량을 간혹 병
세의 경중에 따라 조제하여 복용하고 땀을 내면 다스려 집니다. 남은 적
들이 아직도 무리를 지어 각 읍에서 번쩍이면서 무기를 많이 사용한다고
하니 급히 쫓아가 섬멸한 연후에 백성들을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심영
의 장병들의 옷과 회룡총・실탄・대포・탄환은 어제 오시에 먼저 발송하였
으니 심영의 병방영관(兵房領官)과 더불어 모든 일을 상의 하십시오”라
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조심성 있게 일을 처리하
니 매우 합당한 일이다. 장위영과 심영의 두 진영 장병들이 한달 동안
모진 고생을 하면서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겠는
가? 앞일이 걱정이다. 의복에 대한 일은 걱정스럽다. 총상을 입어 올라온
포병들에게는 곧 양의를 보내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30) 금계랍(金鷄蠟): 염산 키니네의 속칭이다. 여름철 유행하는 학질에 특효약으로 알려


졌으며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었다.
22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또 말하기를, “장병들을 치료한 후에 큰 병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적의 잔당도 쫓아가 잡도록 하되 형편에 따라 도모하라. 의복은 서울이
나 시골에서 편한 대로 전달하라는 처분이 있었으니 황송하고 감사하다”
라고 하였다.
대내에 전보하기를, “남은 적도들은 진을 치고 모인 것이 아니라 목숨
을 걸고 도주하는 길에 백성들이 잡을까 두려워 혹 모인 자들이 있는데
대개는 각처로 흩어져 돌아갈 계책입니다. 한 달이 넘게 지친 장병들을
경솔하게 쫓아가라고 할 수 없고 백성들을 무마하면서 차차 잡을 계획입
니다.
병이 생긴 장병들은 이미 의원인 고제완(高濟完)을 시켜 치료하게 하
여 점점 효과가 있으니 꼭 다시 내려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의복은 각
읍에 분배하여 만들어 줄 계획이며 여러 가지 무기는 모두를 다 반납하
고 다만 실어 올 흰 무명은 모든 장병들에게 써야 할 물품이니 도착되는
대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일본 군사들이 정탐하는 일은 괴상함은 없는 듯하나 더욱 방어하고 지
키기를 바랍니다. 기영의 장병들은 돌려보낼 뜻을 순변사에게 사람을 보
내 전달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에게 회답한 전보에 이르기를, “2통의 전보는 다 잘 보았습
니다. 포병도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남은 무리들을 추격
하여 체포하는 일은 기회에 따라 할 계획입니다. 의복의 일은 전주부에
서 맡아 하기는 사세가 난처하니 각 읍에 분배할 일로 전보로 전달하였
습니다”라고 하였다.
대내에 전보하기를, “적의 무리들은 저들의 괴수가 죽음을 당한 뒤에
사기가 죽어 사방으로 흩어져 각각 도주하면서 목숨을 보전한 자는 그
수가 몇몇에 불과하니 특별히 여러 읍에 명하여 비밀리에 그들을 체포하
여 뒷날의 걱정을 막았습니다. 순변사는 행진(行陣)한 지가 이미 오래고
또 전보로 명하였으나 날짜만 미루고 군사를 안무하고 진군하지 않으면
양호전기(兩湖電記) 229
서 사태의 동정만을 보더니 전주성을 수복한 뒤에야 비로소 삼례역에 도
착하니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생업에 편히 하려는 자들이 겁에 질려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등장(等狀)을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처분[題
給]을 내려서 이르기를 만약 귀화하여 각각 해산한 사람은 침범하여 책
망하지 말고 본업에 종사하게 하고, 만일 무기를 가지고 작요(作鬧)를 하
는 자가 있으면 이는 귀화가 안 된 사람이니, 각 읍・면・리로부터 낱낱이
잡아 죄를 주라는 뜻으로 지금 특별히 여러 읍에 알렸는데 모두 해산하
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윤길병(尹吉炳)의 전후 상황은 김제・금구
등지에 자세히 염탐하니 어제 이미 올라갔다고 합니다. 통촉하소서”라고
하였다.

5월 12일 무자 [初十二日 戊子]

전선이 통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보가 없었다. 큰 비가 오고 우뢰가


쳤다

5월 13일 기축 [十三日 己丑]

대내에 전보하기를, “당초에 각 읍의 수령은 방어가 급선무임을 생각


하지 않고 거짓 소문이 전해지면 도피를 위주로 하여서 적도들이 관아가
비어 수비가 없음을 알고 마치 자기 주머니 속의 물건을 취하듯이 군수
물자를 약취하는 따위로 창궐하였습니다. 별도의 엄중한 명령으로 조처
하고 더욱 심한 읍은 파면 축출한 뒤에 선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또
전주의 중군(中軍)과 영장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함이 막심하니 감당할
사람으로 가려 임명하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23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요즈음의 바람과 비속에


장병들은 무고한가? 출진한 장병은 지난 달 초하루로부터 지금의 초하루
까지 <급료를> 모두 지급하였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에 전보로 회답하여 이르기를, “며칠간의 풍우에 장병들
은 아무런 사고가 없고 출진한 장병들은 이 달의 급료를 지급하여 주시
니 매우 감사합니다. 곧 각 소대에 배포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내에 전보하기를, “전주부의 성 안팎에 이번에 불에 탄 가옥은 지금
사실을 조사하니 그 중에 극히 가난하여 집을 짓지 못하는 몇 백호는 장
차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탕금에서 얼마쯤을 주어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수많은 백성들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할 것이나 나라의 용도가
궁핍하니 삼가 고민스럽습니다. 집을 짓는 방법은 일일이 의논하여 보고
할 뜻을 소신에게 전보로 명하면 마땅히 완백과 함께 상의하여 전보로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전동(磚洞)의 민판서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지난번의 전보는
잘 알았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수고하였으니 무슨 손상됨이 있는지 장
병들은 병이 없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번의 큰 승리는 나랏일에 다행
한 일입니다. 저들의 남은 무리는 기어코 없애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
다”라고 하였다.
내서에 전보하기를, “전주판관 민영승(閔泳昇)31)과 순창군수 이성렬(李
聖烈)32)은 진실로 도내를 잘 다스렸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신뢰하며, 이
번 적도들이 매우 귀중한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에 난입하였을
때 전주판관이 힘을 다하여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니 그 수고가 적지
31) 민영승(閔泳昇): 전주부의 판관으로 있으면서 위봉진의 수성장을 겸임하였다. 농민군
들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경기전에 봉안한 태조의 영정을 그곳 참봉이 말아서 가지
고 달아나는 광경을 보고 공을 세우려고 빼앗아 위봉산 절에 봉안하였다. 새 감사
김학진이 그의 죄를 물어 파직하려 하였으나 민씨들의 세도에 힘입어 다시 연임하였
다. 연임의 구실은 많은 부민들이 그의 선정을 호소하였다는 것이다.
32) 이성렬(李聖烈): 선정을 베풀어 민원을 갈아 앉혔다 한다. 전주성을 회복한 뒤 백성
과 구실아치의 요구로 유일하게 연임하였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31
않습니다.
장병들을 위문하고 마을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줄 적에 만일 판관이
아니었다면 이런 계책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들으
니 전라감사는 성을 잘 지키지 못한 것으로 왕에게 아뢰어 파직시키는데
이르고 본 판관은 직무를 유기한 것으로 문서에 올라 있습니다. 성을 지
키는 일로 말하면 그 직을 맡은 자가 따로 있는데 어찌 판관에게 죄를
옮깁니까? 새로 만들어가는 시기를 당하여 며칠 동안 직무를 폐하였고,
겨우 돌아온 백성들은 모두 울면서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별도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적도들이 날뛰는데도 <감사가> 입으로는 잘 다스린다고 말하지
만, 영문(營門)과 관청은 때려 부숴 남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주부
는 감히 한 걸음 앞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여 창이나 문이 모두
온전하였으니 이를 미루어도 그 치적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문서를 갖
추어 파직을 논합니까? 소신이 만일 사사로운 정으로 보고한다면 <감사
는>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5월 14일 경인 [十四日 庚寅]

대내에서 내린 전보에 이르기를, “집을 짓는 방안을 전보로 지시하였


는데 수효가 얼마의 액수이면 분배할 수 있는지 상세히 보고하라. 일본
병사는 비록 며칠 있다가 돌아간다고 하나, 날마다 더 들어와 수효가
1,000명이 넘는다. 그 뜻은 자못 간악함이 있을 것이다. 청국의 군사가
돌아가는 날에 철거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으나, 청나라 군사는 남쪽의
소요[동학농민군의 소요]가 진압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면서 가지 않아
두 나라가 서로 미룰 뿐이다.
남쪽의 소요가 거의 진압되어 염려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내서에 분명
하게 전보하여 두 나라 군사를 빨리 가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라. 이렇게
23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속히 전보함이 온당하다. 14일 자시”라고 하였다.


내서에 회답하기를, “비류 수천 명을 참수하고 포획하였고, 거괴는 법
에 따라 처리되었고, 몇몇 도망갔던 자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각각 돌아
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이후에 염려가 없도록 하고 회군함
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안무(按撫)하고 불에 탄 집을 짓기 위
하여 잠시 진을 치고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로부터 하달한 전보에 이르기를, “지금 원세개 공관의 말을 듣건
대 일본 군사가 만약 며칠이 지나도 지체하면 청나라 군사는 장차 서울
로 올라가 성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이와 같으면 크게 사고가 생길
것이다. 저들은 토벌하여 섬멸하고 잔당은 귀화한 사유를 오늘 내에 내
서에 분명히 전보하기를 바라며, 이로써 외세의 걱정을 없앰이 타당하다.
14일 자시”라고 하였다.
내서에 전보하기를, “순변사가 전주에 들어온다는 말이 며칠 전에 있
었는데, 성 안팎의 백성들이 비를 맞으면서 도망쳐 거의 성안이 비었기
때문에 사방에 효유하지 못하였습니다. 곧바로 들으니 순변사가 삼례에
진을 치고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이 돌아오고 있으나 평안하게 진정시키는 방법이 걱정됩니다.
백성들이 전주판관이 직무 유기로 파면되었다는 말을 듣고 지금 일제히
와 모여 그가 머물기를 원하면서 경내가 시끄러우니 빨리 처분을 내려주
기를 바랍니다. 무기를 반납하고 귀화한 자는 양민이니 만약 토벌 섬멸
하는 것을 위주로 하면, 호남의 도내 전체가 도탄에 빠질 것입니다. 그들
을 회유하고 어루만져 마음을 고치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
한편으로는 진정시켜 편안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각 읍을 엄하게 단속하
여 그들의 허수아비가 된 자를 체포하게 할 계획입니다.
청나라 사람 6명과 일본 사람 3명이 탐지하는 일로 내려와 머물고 있
어서 먹을거리를 보내 잘 대접하였고, 적들이 후환이 없는 상황을 낱낱
이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고, 그들 또한 정세를 탐지하러 온 의도를 와
양호전기(兩湖電記) 233
서 자세히 이야기하였는데, 그들도 병사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전보를
보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5월 15일 신묘 [十五日 辛卯]

내서에 전보하기를, “적의 남은 무리로 흩어져 돌아간 자들은 약간의


총과 창을 혹 버리거나 혹 반납하여 모두 돌아가 농사를 짓고, 또 남은
무리로 죽지 않은 자는 모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여 정신을 잃었을 뿐
만 아니라, 당초에 염주를 목에 걸고 몸에 부적(符籍)을 붙이면 총이나
창에도 부상을 입지 않는다는 말에 심히 현혹되었다가 동도 괴수가 많이
죽는 것을 보고 동학을 배척하면서 후회하고 도주하니 뒷날의 걱정은 없
을 듯 합니다.
지금의 사세는 그들을 회유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에 대
한 조처는 새로 온 전라감사에 있으니 원근을 탐지해 보아도 염려할 것
은 없습니다. 또 전주부가 새로 일을 시작하는 초창기에 많은 군사를 접
대하고 뒷받침하기는 모두 어렵고, 서울의 군사는 오래도록 노숙하였으
니 또한 염려됩니다.
기영의 군사 3백 명은 영관 김유현(金有鉉)으로 하여금 전주부에 진영
을 머물게 하여 민심을 진정시키도록 하고 초토사는 군사를 돌려 호서의
비류를 진압한 뒤에 서울로 올라가도록 하고 순변사는 심영의 군사와 함
께 곧바로 회군을 하면 청국과 일본의 양쪽 군사가 그 무사함을 보고 돌
아갈 것이니, 처분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서에 전보하기를, “위문 선전관이 15일 유시에 도착하여 왕의 하사
품[祗受]을 받은 것을 장위영・진남영의 장병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었
습니다. 섭제독(葉提督)이 백성에게 알리는 방서(榜書, 공고문)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를 베껴서 각 읍에 공문으로 보내니 소신이 일찍이 공문
을 보낸 내용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234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내서에서 내린 전보에 이르기를, “<전주의> 불에 탄 가옥을 짓는 방


도와 임금께서 내리는 내탕금이 얼마면 타당한지 자세히 보고하라. 순변
사와 심영의 병방(兵房)은 배편으로 서울로 돌아간다는데 육로를 따라
편한대로 서울로 가면서 호서의 비류를 진압하였으면 매우 좋았을 것이
다. 내서의 초기(草記)33)에는 다만 초토사 순변사 심영 병방은 일체 서
울로 군사를 돌리라는 뜻으로 말을 만들었는가? 일본병사가 날로 더 들
어오니 심히 고민스럽다. 15일 자시”라고 하였다.

5월 16일 임진 [十六日 壬辰]

전동 민판서 댁에 전보하기를, “본관 어르신은 평상시에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신뢰하였는데 새로운 감사가 갑자기 파직을 논함은 과연 규정
밖에서 나온 것임을 누차 언급하였으나, 전례(前例)가 있는 일이라고 핑
계대면서 요청을 들어 주지 않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전주부는
난리를 겪고 난 뒤 만약 본관 어르신이 아니면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안
정시킬 수 없습니다.
백성들은 판관이 바뀐다는 말을 듣고 몇 만 명이 모여 온 경내가 소
요스러워 거의 농사를 폐기하다시피 하니 지금 만약 바뀌어 돌아가면 온
고을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
는 큰일이니 일정하게 격식을 갖추는 예로써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되므
로 만 번 헤아려 잠시 이번 일을 멈추는 전보를 위에 급히 아뢰기를 바
랍니다”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내려온 전보에 이르기를,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은 단
서가 있다. 심영의 장병은 전주의 군영에 주둔시키고, 기영의 장병을 서
울에 올라가게 할 내용으로 지휘함이 타당하다. 16일 인시(寅時, 오전 3

33) 초기(草記): 중앙의 각 관아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항을 요약해 임금에게 올리


는 문서를 말한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35
∼5시)”라고 하였다.
내서에 전보하기를, “전주부 안팎과 각 읍에서 화재를 당한 가옥을 조
사하였더니 1,500여 호였습니다. 지금 궁내에서 내려주신 은전이 있다면
물자가 많고 적음이 있지 않고, 모두가 삼가 천은(天恩)으로 받들었습니
다. 엽전 10,000냥을 내려준다면 각 읍과 전주부에 대략 나누어 주어 집
을 짓는데 쓸 것입니다.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
순변사와 기영의 장병은 배편으로 올려 보내고 심영의 장병은 전주부
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합당한 일이오니 이를 초기한 연후에 소신이 대략
일을 마친 뒤에 충청도로 향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5월 17일 계사 [十七日 癸巳]

혜당댁에 전보하기를, “적의 목을 베어 바친 것은[獻馘] 어떻게 할는지


하달하여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전동 민판서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난리에 임하여 전묘의
영정[태조비의 영정]을 받들고 산성을 지키는 것이 본관인데, 죄도 없이
욕을 당하였습니다. 어찌 무릎을 세우고 쭈그리고 앉아 있게 할 수 있겠
습니까? 사백어른이 어전회지에서 좌우의 모양새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
다”라고 하였다.
공사청과 정부에 전보하기를, “순영에서 전주판관 민영승의 파직을 논
하는 말이 민간에 낭자합니다. 난리를 겪은 이후로 백성 수천 명이 전주
부에 모여와 이들의 여론이 시끄러우니 속히 처분을 내리셔서 민심을 안
도시키기를 삼가 바랍니다.
지금 모내기가 한창인데 생업을 폐하니 민망스럽습니다. 전주판관은
원래 위봉(威鳳) 수성장(守城將)을 겸하였으니, 조금도 성을 지키지 못한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회신의 전보가 있은 뒤에라야 백성들을 타일러
안도시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36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공사청에 전보하기를, “순변사는 배편으로 군사를 철수시키고 심영의


병방은 영관과 함께 장병과 대포 1좌, 회선포 1좌를 가지고 그대로 진
(陣)에 주둔하고, 초토사는 장위영의 장병을 거느리고 18일에 길을 떠나
호서로 향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내려 보낸 전보에 이르기를, “화재를 입은 백성들은 인정상
가엾으니 어떤 명색의 것을 논할 것 없이 우선 납입한 것 중에서 엽전
(葉錢) 10,000냥을 한계로 하여 조치하되, 알맞은 양을 헤아려 나누어 주
어서 왕가에서 구조해주는 뜻을 보여서 군령을 내려 타이른 뒤에 출발하
라”고 하였다.
혜당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현익선(顯益船)34)이 내일 군산
포에 정박할 것이니 배에 올라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로 올라오라. 순
변사와 초토사를 함께 만나겠다”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18일에 회군한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오직 장병들이 편안하게 올라오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정부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적을 진압한 뒤에는 백성을 어루만
지고 안도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니, 전주판관을 그대로 연임시키는 일은
장계(狀啓)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민원에 따라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의
논할 것이다. 이렇게 타일러 민심을 안도시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5월 18일 갑오 [十八日 甲午]

공사청과 정부에 전보하기를, “완백과 염찰사(廉察使)가 전주성 내외의


화재를 당한 수만여 명을 모이게 하여 궁내에서 하사한 1만냥과 전교한
말씀의 뜻으로 일일이 타일렀고, 집을 짓는 방법은 도백(道伯)과 상의해
조치하였으며 잘 의논하여 금구・무장 등지의 화재를 당한 가옥 일체를

34) 현익선(顯益船): 운수회사인 이운사 소속의 기선을 말한다.


양호전기(兩湖電記) 237
도울 뜻으로 지금 두 읍에 감결(甘結)로 명령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5월 19일 을미 [十九日 乙未]

전주로부터 출발함. 전보가 없었음.

5월 20일 병신 [二十日 丙申]

여산에 있으면서 내서에서 내려 보낸 전보를 받았는데 여기서 이르기


를, “장위영의 대포 2좌와 포대 장병과 청주영의 장병은 우선 심영의 장
병에게 부쳐 함께 전주부에 주둔했다가 올라옴이 타당한 일이다”라고 하
였다.
내서에 전보하기를, “하달한 전보는 다 알았습니다. 장위영의 포 2좌와
포대의 장병과 청주영의 1대는 정예한 자를 뽑아 이미 심영에 부처 전주
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소신(小臣)은 어제 전주를 출발하여 여산에서 숙
박하고 곧 공주로 향할 계획입니다. 아산의 청국 진영에서 파견한 관원
이 부하 7명을 거느리고 적정을 정탐 차 내려오다가 길에서 만나 사유를
묻거늘 적의 정세는 염려할 것이 없는 것으로 자세히 말했더니 내려가서
탐지한 연후에 곧 돌아온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5월 21일 정유 [二十一日 丁酉]

대내와 혜당댁, 수교대신댁, 본영 사또댁에 전보하기를, “지금 21일 미


시 경에 장병들은 무사히 금영에 도착하였습니다. 길에서 정탐 차 전주
로 내려가는 섭통령이 보낸 윤득승(尹得勝) 등을 만났는데 호남의 정세
는 염려할 것이 없다고 자세히 말을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이미 장수
238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의 명령을 받았으니 잠깐 갔다가 곧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또 일본 사람 3명을 만났는데 저들도 전주로 향한다고 하면서 정탐
차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미 금영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러 정탐한
뒤에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 듯하니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진남영 병방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남쪽의 소요를 토벌하여
안정시키고 지금 군사를 철수하니 나라에 다행한 일입니다. 완영에 머물
러 있는 장병들의 군복은 오늘 부쳐 보냈는데 순찰[輪回]하는 일은 병영
에서 묘당의 지휘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공주로 부대를 이동하는 일은
어느 날에 출발하며 우리 진영의 장병 80명은 우리 진영으로 돌려보내도
록 지시해 주기를 삼가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정익산(鄭益山)35)으로부터 보낸 전보에 이르기를, “휴가를 얻지 못하
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총제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행차는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
침에 일부러 사람을 시켜 글을 올렸으니 내일이면 받아 보실 것입니다.
요사이 태인에 있는 적도가 장성으로 갔는데 수효는 많지 않고, 순창으
로부터 순천으로 간 자는 수효가 100명도 안 되는데 조석으로 음식을
사서 먹습니다. 각자가 귀화할 뜻이 있다고 두 읍에서 올린 보고가 순영
에 들어왔습니다. 순창군수가 순영에서 급히 달려갔을 때 확실히 귀화하
는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식구와 집이 있는 자들은 모두 이미 귀화하였고, 도로에서 방황하는
자들은 식구도 집도 없고 추적당하여 체포될지 겁을 내어 아직 흩어져
가지 못한다고 순천 부사와 영장의 보고가 왔습니다. 삼가 차례로 들은
바에 따라 다시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심영의 영관과 전주부에 전보하기를, “요즈음 저들의 정세는 어떠합니

35) 정익산(鄭益山): 고을 수령을 표시할 적에 성을 붙여 적는 관례가 있었다. 그 당시


의 익산군수는 누구인지 미상.
양호전기(兩湖電記) 239
까? 길가는 사람들의 말만 따르지 말고 사실에 의하여 자세히 알리면
대내에 전보로 보고할 계획입니다. 섭통령(聶統領)이 군사 400명을 거느
리고 전주로 향하였다고 하니,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청의 파원(派員)들
이 저들 무리가 아직도 고부(古阜)에 진을 치고 있다고 전보하였기 때문
에, 청국 군사들이 내려온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완영에 전보하기를, “정익산은 군량을 운반한 문서를 아직 마감도 하
지 않은 일로 위에 여쭈었으나 휴가를 주라”라고 하였다.
사처에 전보하기를, “엎드려 금영에서 온 전보를 보니 ‘섭통령이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전주로 향하였다’고 하니 전주의 백성들이 난리를 겪
은 이후로 겁을 먹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냥 놀라 혹 짐을 지고 나가
피하였다가 곧 다시 들어오기 때문에 섭통령이 파견한 청의 파원이 길에
떠도는 말을 믿고 이렇게 군사를 동원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저 <동학
농민군의> 형세는 아무런 일이 없기 때문에 전보로 보고하고 전주를 떠
났습니다. 이미 청주영과 심영의 장병들을 <전주에> 머물게 하여 저들
을 진압하게 하였습니다.
저들 무리 중 아직 진을 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혹 5・60명 혹 10명
혹 5・6명에 이르는데, 아직 본업에 편히 종사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태
인・금구・정읍・고부의 아전이나 관노 사령의 무리들이 전날의 원한을 씻
고자 그들의 살림을 몰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돌아가도 의지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어 도로에서 방황하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부유한 집에 가서 밥을 뺏어 먹을 뿐, 감히 전과
같이 노략질을 하지는 못합니다. 또 살기를 애걸하며 귀화한다는 호소문이
있기 때문에 먼저 전보로 이런 상황을 보고하였으니 이해하기 바랍니다.
5월 초 7일 저들이 올린 글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저희들은
귀화하는 날이 곧 신원되는 날입니다.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일전에 호소한 민원은 조목마다 왕에게 보고되고 여러 읍에 하달되어 백
성들이 편안하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40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그 이튿날 초 8일 올린 문서에 이르기를, ‘지금 귀화하는 날에 엄한


명령이 거듭되니 감히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민원
에 따라 관청의 뜰에 오르게 되어 영원히 덕을 송축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합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저희들은 곧 문에 나가 물러가서 다음의
밝은 하회(下回)를 기다립니다. 무기는 분부대로 반납하겠습니다라고
’ 하
였습니다. 그 정상이 이와 같으니 그들을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며 선
후책의 길은 감사와 수령에게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내려 보낸 전보에 이르기를, “청국군, 일본군 및 각국의 사람
들이 비류를 토벌하였다고 하자 초토사가 속여서 보고하였다고 하면서
끝내 믿지 않고 있다. 전주성을 수복한 사실과 적도들이 올린 문서를 속
히 먼저 올려 보내어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돌려 보여서 그들의 의혹을
없애고 입을 놀리는 단서를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5월 22일 병신 [二十二日 丙申]

본영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장병들이 사고 없이 공주


에 이르니 다행이다. 섭통령이 전주로 향한다고 하니 뜻밖이어서 걱정스
럽다”라고 하였다.
완영에 전보하기를, “진영(鎭營)의 토벌 장교를 곧바로 분부하여 보내
오는 것이 어떠한지요?”라고 하였다.
전주에 머무는 총제영 영관에게 전보하기를, “어제의 전보는 자세히
보았습니다. 적의 머리를 곧바로 보내려 하니 어떻습니까? 저들의 정세
를 듣는대로 일일이 자세히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 내서에서 내려 보낸 전보에 이르기를, “공주에 머무르면
서 형세를 보아서 올라오라”라고 하였다.
오후 무렵 내서에서 내려 보낸 전보에 이르기를, “일본군사의 동정을
헤아리기 어렵고 경군은 힘이 미약하니 속히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오라”
양호전기(兩湖電記) 241
라고 하였다.
내서에 전보하기를, “일본 병사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염려됩니다. 지금
비로소 밥과 술로 군사들을 위로하니 내일 마땅히 올라갈 계획입니다”라
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에 전보하기를, “중국 군사는 우선 정지하는 뜻을 전달
했다고 영접사(迎接使)가 전보하였습니다. 우리 장병들은 무고하니 다행
입니다. 내일에 출발하여 서울로 회군하여, 26일에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그 날짜를 예측하여 군사 수삼백 명과 깃발과 호차(胡車)36) 2・
30대를 한강 들머리로 내보내십시오. 만약 호차가 없으면 비록 우리나라
의 수레라도 내보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본영의 사또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청병(淸兵)이 정지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26일 한강 들머리에 나가 기다리는 일은 아뢰어 처분을
받아 할 계획이다”라고 하였다.
완영에 전보하기를, “보내온 전보는 잘 알았습니다. 저 무리들의 정형
은 통탄하고 놀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내서에 올라온 전보를
받았으며 내일 출발하겠습니다. 운량관은 말미를 주어 밤낮 없이 올려
보내겠습니다. 하기(下記)37)는 들여서 살펴주시는 것이 시급하며, 감영과
전주부의 하기 담당 아전도 밤낮 없이 진(陣)이 도착되는 곳에 보냄이
어떠하겠습니까? 아산의 청병은 우선 정지한다고 하니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전주에 머물고 있는 심영의 영관에게 전보하기를, “지금 내서에서 올
라오라는 전보를 받았으니 내일 출발할 것으로 보고하고 곧 서울로 회군
할 계획이니 염려하지 말고 진(陣)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어떠합니까?”라
고 하였다.

36) 호차(胡車): 서양식 짐수레를 말한다. “胡”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37) 하기(下記): 치른 돈의 내역을 적은 장부 또는 중여한 사항임을 알리기 위해 본문
아래 특별히 적은 내용을 말한다.
242 1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완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어제 내서의 전보를 받으니 총제


영의 운량관은 익산군수(益山郡守)로 정하였기 때문에 목하의 사무로 인
하여 말미를 주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운량관의 담당 아전은 문서를 가
지고 밤낮 없이 올려 보낼 계획입니다. 우두머리의 군교와 아전은 이미
출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총제 영관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내려주신 전보는 삼가 보았
습니다. 내일 행차는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적의 정세는 전과 같은지
들은 바 없습니다. 심영의 회군을 이처럼 염려해 주시니 온 장병들이 매
우 감사해 합니다”라고 하였다.
완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두 번의 전보는 잘 보았습니다. 아
산의 파원이 엊그제 여기[전주]에 왔기 때문에 적도가 다 해산되었다는
뜻으로 분명하게 말하고 곧 돌아가게 하였더니 머뭇거리면서 출발하지
않고 어제 또 금구로 세 사람이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전보로
섭통령이 세 사람을 보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라고 말하니, 아산 파원
의 전보가 아니고 원세개 공관의 전보인 것 같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어제 저녁 유시 경에 출동을 중지하라는 뜻으로 파원에게 말을
하니, 그 사람이 섭통령에게 전보하였으나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니 심
히 걱정스럽습니다. 저 무리들은 어제 정읍의 읍보(邑報)를 보니 17일
18일 간에 저들이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 행패를 부리다가 뒤에 장
성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지금 부안의 읍보를 보니 무장에서는 저들이 무덤을 파고, 사는 집을
헐면서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태인의 잔당들은 태인의 수령이 순영의
효유문을 가지고 몸소 가서 효유하였더니 저들은 모두 감화되고 깨우쳐
서 농사를 짓고 생업에 편히 종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기는 아직도
반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적도들의 머리는 오늘 아침에 발송하였습니
다”라고 하였다.
총제영 영관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하달하신 전보는 삼가 보
양호전기(兩湖電記) 243
았습니다. 요즈음 적의 정세는 특별히 보고할 일은 없으며 각 읍의 보고
도 아직 순영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삼가 마땅히 확실한 소식에 의
하여 다시 아뢸 계획입니다. 사살한 적의 머리는 어제 본관으로부터 발
송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5월 28일 갑진 서울 [二十八日 甲辰 在京]

금영에서 전보하기를, “섭대인(聶大人)의 행군에 보낸 물건이 있는데


받고 받지 않은 것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자세히 탐문하여 보고하십시
오”라고 하였다.
금영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섭지초(葉志超)가 보낸 호궤(犒饋)
의 물품에 답하기를, 삼가 닭 200수와 계란 2,000개, 그리고 나머지 가축
과 구슬38)을 받았으니 감사하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영접사가 회답하여 말하기를, “어제 주신 편지는 감사합니다. 4가지의
물건은 주력부대의 섭장수에게 보냈습니다. 반은 받고 반은 받지 않았으
니 내역도 함께 부쳐 올립니다. 감사해하는 답장의 편지에 잘 보내주었
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섭장수에게 가지고 간 물건에 대하여 칭송하는
것입니다. 전주의 아전이 가지고 공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전주에 머무는 총제영 영관에게 전보하기를, “장병들이 병에 걸릴 염
려가 많은 것으로 이미 아뢰었으니 청국군에서 파견한 관원이 올라오기
를 기다린 뒤에 철수하여 돌아갈 것으로 하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38) 구슬: 여러 종류의 보석을 말한다. 민씨들은 당시 청군의 지원을 요청하여 출동하자
청군 수뇌부에 많은 뇌물을 바쳐 큰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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