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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황해도동학당정토약기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본 자료는 황해도에 출동했던 스즈키鈴木 소위가 자료 동학당정토약기東學黨


征討略記의 내용에서 나카야마中山 중위의 말을 빼고 자신의 활동을 중심으로
보고한 것이다.
주요 내용으로, 스즈키 소위가 개성開城, 평산平山, 해주海州로 출동하여 각지
의 농민군 활동을 보고하는 기록이 있다. 농민군 세력을 ‘진정동학당眞正東學
黨’, ‘일시적동학당一時的東學黨’, ‘위동학당僞東學黨’으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위동학당’이 가장 많은데, 그 이유로 사금채집沙金採集을 금지하여 광부들
이 호구지책으로 동학당에 많이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뒷부분에는 전봉준全
琫準이 충청감사에게 보낸 상서, 이유상李裕尙이 충청감사에 보낸 상서, 호주대
의소湖州大義所의 통문通文, 창의소倡義所의 경통敬通, 농민군의 단자單子 등이 수록
되어 있다.
본 자료는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살
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497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대일본 육군보병소위 스즈키 담화 [大日本 陸軍步兵少尉 鈴木彰


講話]
소관小官은 작년 10월 충청도 방면의 동학당 토벌을 위해 출장의 조선병사
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용산龍山을 출발하여 공주公州 및 청주淸州 부근에
서 동도東徒와 싸운 뒤, 공주에서 체류 중 독립 제19대대獨立第十九大隊1와 교대하
고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음달 11월 26일 용산으로 돌아왔다. 남방의 정
황에 대해서는 남방 토벌대장으로부터 이야기가 있을 것이지만, 소관은 이곳
으로부터 북방, 즉 황해도 지방의 정황에 따라 그 경과의 대략을 보고하겠다.
충청도에서 귀대한 다음날, 즉 작년 11월 27일, 어은동漁隱洞2에 있는 후쿠
하라福原 병참감의 명령을 받았는데, “재령載寧부근의 비도匪徒가 요즈음 평산平
山 부근에 나타났으니 속히 그들을 토벌하고 수괴를 체포하여 그를 이노우에

1 독립제19대대(獨立第十九大隊): 일본 대본영의 직속부대로 용산에 본부를 두고 동학농민군 토벌을


전담하였다.
2 어은동(漁隱洞): 서해연안에 있는 지명. 일본군 황해도 진압군은 용산의 후비보병 6연대 4개 중대
가 동원되었다. 이들 일본군은 북쪽 농민군을 토벌키위해 군함으로 이동하여 풍천(현재 송화군 풍
해면)에 상륙해 병참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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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上馨 공사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소관은 명령을 받자마자, 바로 용산을 출


발 개성부에 도착하여, 동도의 상황에 대해 얻어들은 것을 말하면, “2~3일전
적賊은 금천병참부金川兵站部에서 총수병참부蔥 兵站部3로 보낸 식량을 평산 부
근에서 약탈당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날 밤 1시경 금
천병참부에서 개성 병참사령관에게 급보로 전하기를, “동도가 평산에 급습하
여 민가를 불태우고 관사를 불태우며 약탈과 폭력이 극에 달하고, 금천 역시
위험하니 토벌대로 하여금 빨리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날 밤 2시 바로 개성부로 급히 갈 때 야행인 동시에 도로가
험악하여 보행이 자유롭지 않은 불효점拂曉漸 청석관靑石關4에 이르자, 재차 금
천의 급보 소식을 전한 연락병을 만나니 말하기를, “급히 달려오라”기에 즉
시 달려 나아갔다.
이처럼 급히 금천으로 달려가자, 평산의 적도賊徒가 이미 금천으로 향했기
에, 금천 병참사령관은 병력 10명을 이끌고 마을의 빈곳을 방어하였고, 또
병참부는 이미 금고를 흙 속에 파묻어 어느 때 동도가 습격하여도 대비가
가능하도록 용의주도하게 기다렸는데, 그때 평산부사도 달아나 이 곳에 있었
다. 소관은 서서 병사와 함께 설익은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급히 평산으로
가는 도중에 전신電信 인부로서 선혈이 낭자하고 칼을 찬 한 사람의 부상 인
부를 호판戶板에 싣고 오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자 말하기를 “오늘 새벽 우리
인부는 총수병참부 병력 십 수명과 함께 평산에 집합하는 동학당을 습격하여

3 금천병참부(金川兵站部) 총수병참부(蔥 兵站部): 일본군은 청군을 몰아내기 위해 북쪽각지에 병


참부를 두고 군사주둔과 식량확보의 기지로 삼았다. 금천은 장단군의 경계에 있으며 총수는 평산
과 해주근방에 있는 지명으로 총수전천(蔥 全川) 이다.
4 불효점(拂曉漸) 청석관(靑石關): 불효점의 점(漸)은 점(店)의 오기로 보인다. 청석관은 금천 제석산입
구의 청석골을 말한다. 천연의 요새로 일컬었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499

이미 모두 물리쳤다”라고 했다. 이에 동도의 숫자와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도주했는지를 묻자 말하기를, “그 수는 대략 300~400명이고, 남서 즉 해주
방향으로 도주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평산에 이르자 관사는 모두 불타고 민가 역시 3~4채가 불타버렸
고, 관사에 보관했던 우리 공병의 철선鐵船 및 전신기기도 완전히 파괴된 것
을 보았다. 또 인민의 가재도구는 모두 파괴되었고, 게다가 집안 내에 많은
수의 큰 돌을 던져 관리를 비롯하여 인민 모두 도피하여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잠시 지나 두세명의 관리와 인민이 돌아오기에 적의 동정을 물어보
니 말하기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이곳을 습격했던 적은 평산 이남
에서 온 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적을 추적하여 누천漏川에 이르자, 이미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토민土民이 말하기를, “평산에서 도망 온 적도들이 어제 밤 모두 이곳에 모였
다가 갑자기 흩어져 도주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촌리村吏를 불러 적이 도망간
방향과 이 마을 안에 적도의 가옥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자 그들이 말하
기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하나의 수차水車에 조 백
수십 가마니가 저장된 것을 발견하고 그 소유자를 묻자, 말하기를 “이 마을
의 쌀”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소관은 이 마을 안에 동도의 쌀이 약간 저장되
어 있다고 평산에서 들었기 때문에 이 촌리의 대답을 의심했으나 그날 밤에
는 일부러 방임했다.
다음 날 아침 출발할 때, 다시 촌리를 심문하자 마침내 자백하여 말하기를
“모두가 동도의 양식”이라고 하였다. 소관은 그 촌리가 동도의 소재를 알 것
이라 여겼으나, 촌리가 고하지 않으므로 즉시 협박하여, “사실을 고하지 않
는다면 너를 죽일 것이며, 네가 곧바로 말하면 불문에 부칠 것”이라 말하였
다. 소관이 우선 칼을 한번 쳐서 상투를 잘라 내자 그는 크게 공포를 느끼고
500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애걸하며 말하기를 “내가 말한 것을 비밀로 해 달라. 여기서 1리 반쯤 떨어


진 곳에 가지촌加之村이 있다. 그 마을은 모두 동도들이다”라고 말했다.
양식은 어떻게 해서든 병참부로 수송하려고 생각했으나 도로가 멀고 운반
이 곤란하기 때문에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어서 불을 놓아 불태워버렸다.
그러니 수차장水車場 주인이 거듭 감사하며 말하기를, “동도가 날을 정하여 이
것을 빻도록 하였는데,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수족이 끊겨 나갔거나, 듣는다
해도 노임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군이 이것을 다 불살랐으
니, 저의 몹시 어려운 일을 없애주어 후일 화가 될까 하는 근심이 사라졌으니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촌민을 선도에 세우고 가지촌을 포위하여 수색하니, 한 사람의 남자도 보이
지 않고 부녀자와 노인만이 겨우 남아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여자
를 붙잡아서 무슨 까닭에 남자가 없는가를 묻자 말하기를, “오늘 아침 성인은
모두 온정溫井에 모이라는 격문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온정으로 갔다”고 하였
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촌내의 큰 집 두서넛을 수색하였으나 한 사람의 동도
도 없었고 겨우 3~4가마니의 떡과 여러 명이 식사할 수 있는 식기를 넣은 가
마니만 발견하였을 뿐이다. 떡은 우리 군사가 구워서 다 먹었는데, 이것도 역
시 적도의 식량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곳에서 전진하여 온정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의 동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촌민에게 그 이유를 질문하자 말하기를 “일찍이 온 적이 없다”고 하였다. 마
침 해주 감사가 과거 동도에게 부상을 당해 그 아들 정헌시鄭憲時5라는 자가
경성에서 간호를 위해 해주에 가겠다며 소관의 뒤를 쫓아오므로 해주로 먼저

5 정헌시(鄭憲時): 황해감사 정현석(鄭顯奭)의 아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농민군 토벌을 위한 의병


을 일으켰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01

떠나게 하여 적의 유무를 보고할 것을 약속하였다. 다음 날 그로부터 해주에


적이 없다는 보고가 와서 우리 소대는 각 마을을 정찰하면서 12월 6일 해주
로 들어갔다.
해주는 황해도 감사監司가 있는 곳으로 호수가 3천정도 되는 도회지이다.
그러나 이전에 동도가 이미 난입하여 약탈하였기에, 우리 소대가 들어갈 때
민가를 살피니, 모두 다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관사 같은 곳은 문짝 하나도
파괴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감사는 협소한 민가에 거주하고, 인민은 물론
관리도 도주하여 그 적막함은 실로 해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
다. 관리로서 성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감사, 중군中軍, 판관判官과 그 밑에 있
는 관료 7~8명에 불과했다.
소관은 먼저 감사를 만나 동도의 동정을 물으려했으나, 감사의 나이가
70~80세로 눈을 볼 수 없고 귀로는 들을 수 없으며 입술이 떨려 말을 할 수
없기에, 소관은 처음에는 감사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바로
감사라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 판관도 역시 70~80세의 노인으로 감사
와 같으며 중군도 역시 노인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며 사무를 맡아보
고 있는, 이름이 이민조李敏祚라는 자에게 가서 동도의 동정을 묻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해주 부근의 인민은 모두 동학당”이라고 하였다. 다시 이들이 집
합하여 있는 곳을 묻자 말하기를, “남쪽으로는 녹산綠山의 송림松林6 끝에서부
터 강령현康翎縣, 서쪽으로 옹진瓮津, 장연長淵, 죽산竹山 등지에서 북쪽으로 송화
松禾, 신천信川, 문화文化 등지에서 발호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그들이 나타나면 인민을 살해하고 돈과 곡식을 빼앗고 가옥을 불태우며 난
폭함이 극심하여 도저히 조선의 병력으로 진압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남아

6 녹산(綠山)의 송림(松林): 해주에 인접해 있는 벽성군의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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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진무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처음에 소관은 용산에서 그것을 듣건대 황해도의 적은 오직 재령에만 있
다는 것이었으나, 이번에 그곳에 이르러 상황을 듣고는 실로 놀랐다. 바로 황
해도의 3분의 2는 모두 동도로 채워지고 있으니, 어떻게 오합지졸로 그것도
겨우 40~50명의 적은 병사로, 병참감의 명령대로 신속히 그들을 평정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수괴를 체포하여 공사公使에게 보내는 것은 도저히 쉽게 이
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소관은 지금의 책략으로 먼저 한쪽 방향에서 파괴
유린하여 적의 세력을 좌절시킨 후, 수괴를 체포함과 동시에 중요한 문서도
획득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강령현 현감이 해주감사에 급한 사환을 보내 말하기를, “동비 수
백 명이 다음 날을 기약하여 이 읍을 습격할 것이라고 하니 속히 와서 도와
달라”고 했다. 소관은 그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강령 쪽으로 출발토록 했다.
원래 동비는 그 잔학하고 사나운 것과 달리 일본병사를 보면 바로 도망가
숨으므로 불의의 타격을 주고자 하여 야행하였다. 새벽에 강령에 도착하여
먼저 이 지방 사람을 보내 적의 상황을 정찰시켰는데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
기를 “이곳에서 남으로 반 리里 떨어진 고현장古縣場에 수백의 동비가 집합하
여 종을 울리고 큰 북을 치며 깃발을 세우고 있으니, 장차 강령을 향해 갈
것 같다”라고 하였다.
바로 병력을 나누어 하나는 정면에서 다른 하나는 측면에서 나아가 격전
을 치른 지 한 시간 만에 마침내 그들을 격파하였고, 적은 세 방향으로 나뉘
어 도주하였다. 강령의 양민은 그 동도와 구별하기 위해 현감의 날인된 종이
조각을 모자에 부착시켰다. 모여든 적 가운데 길을 잃은 자 수명이 산꼭대기
에 있었는데, 우리의 병사가 추격하여 체포하니, 모두 모자에 종이가 붙어있
으나 그 관인官印은 색이 달랐다. 매섭게 추궁하니, 그들은 결국 일시의 궁여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03

지책으로 나왔음을 자백하였다. 여전히 가슴 속에 수십의 가짜 관인을 찍은


종이조각을 갖고 있으므로 사로잡아 해주로 보내 참수하였다.
또한, 앞서 말한 송림과 녹산 방면의 동비 수천인이 그 부근에 집합하여
재차 해주를 습격하려고 한다고 감사로부터 급보가 옴에 따라, 소관은 강령
에서 옹진, 장연 등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이 급보를 접하고 바로 해주로 돌아
가려고 했다. 그러자 인민이 소관을 둘러싸며 애걸하기를 “귀 군사의 일부가
가버리면 동도가 다시 습격할 것이니, 바라건대 병력을 나누어서 이곳에 남
겨두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통솔하는 병사 겨우 40~50명 만으로
는 그 요청을 따를 수 없다고 위로하여 말하고, 바로 해주로 출발하였다. 우
리 부대가 장차 가버릴 것이라고 하자, 인민은 동도의 집에 불을 질러 4~5채
를 불태웠다. 그리고 현감을 비롯한 소리小吏, 인민 등이 모두 출발하여 우리
부대와 함께 해주로 왔다.
그 후 우리 부대가 해주에 있을 때, 그 지역의 인민이 글을 써가지고 와서
애걸하여 말하기를 “관아는 동도에 의해 파괴되고 몇 명의 인민도 역시 살해
되었으니, 바라건대 도와 달라”라고 했다. 그러나 해주가 위험하기 때문에
끝내 다시 가서 그곳을 원조하지 않았다. 강령현은 겨우 2~3명을 제외하고
모두 동도에 반대하였는데, 소관이 고현장古縣場7을 공격토록 할 때, 남자는
각각 칼과 창을 휴대하고 우리 부대의 말미에 와서 있는 힘을 다하였다. 관
아를 파괴하고 많은 인민을 살해하였으니, 이는 대개 복수를 당한 것이다.
해주로 돌아와 한인韓人들로 하여금 적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니, 돌아와 보
고하여 말하기를 “송림과 녹산의 동도 천여 명이 취야장翠野場8에 모인 뒤 계

7 고현장(古縣場): 송화군 도원면에 있는 장터로 옛 현의 소재지였다.


8 취야장(翠野場): 해주 서쪽 취야수가에 있는 장터로 해주 물산의 공급기지였다.
504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속해서 그 근방의 동지를 규합하여 그날로 해주를 습격하고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동도는 일본 병사의 모습을 목도하면
바로 도주하니, 이번에도 불시에 토벌하려고 새벽 3시에 해주를 출발하여 오
전 6시 취야장 부근에 도착하였다. 그때 적의 초병이 먼저 알고 발포하였다.
우리는 즉시 부대 일부를 적의 측면으로 우회시키고 다른 일부 병사와 한국
병사 약간은 정면으로 나아가 격전을 치르니, 대략 2시간이 지나자 적의 병
력이 궤멸되어 도주했다.
마을 내의 모든 집은 적이 기거하는 집이 되고, 또 천여 명의 취사를 명령
을 받아 모두 그 부담으로 곤란하게 되었다. 소관 등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
자, 촌민 최약崔躍은 기뻐하며 와서 술과 안주를 내어 크게 노고를 위로하였
다. 동도 집합지의 인민은 모두 이처럼 양식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만약 명
령을 따르지 않으면 갑자기 살해되거나 또는 집이 방화되니 하니 양민의 고
통을 진실로 생각해야 된다.

(문) 해주감사의 성명은 무엇이라 하는가?


(답) 정헌석鄭憲奭이다.

이 싸움에서 적 십수명을 죽이고 수 명을 포획하고 또 서류를 획득하였다.


여기에 있는 것은 충청도 감사와 황해도 감사에게 동도의 수괴가 보내온 서
류를 베낀 것이다. 황해도의 것은 새로 온 감사의 훈시를 받은 후에 보낸 것
이고, 계속해서 충청도 동도의 격문 및 황해도 수괴의 편지도 일람하도록 제
공하였다. 이 두 통은 따로 따로 획득한 것이다. [이때 소위는 여러 통의 문서 사본을

총리대신 등에게 보임. 서류의 사본은 권말에 첨부했다] 그 외 2~3통은 이노우에 공사와 후
쿠하라 병참감에게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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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야장에 최윤학崔潤鶴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우리 부대가 강령을 왕복할


때 그의 집에서 음식을 끓여 식사를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 자는
일본병사에게 취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결국 동도에게 살해되었고, 가산은
모두 빼앗겨 유족은 나중에 해주에 와서 대단히 힘들게 생활하였다. 그 모습
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서 우리 장교와 사병들은 전날의 의리를 갚기
위해 약간의 금액을 갹출하여 유족으로 하여금 주점을 개업하게 하였다. 이
와 같이 가련한 인민은 아직도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취야장에서 획득한 적들의 편지에 따르면, 평산, 배천白川, 연안 등지로 적
도들이 집합하고 있었고, 또 해주를 동서에서 협공하려는 것 같았다. 또 이때
개성 병참부로부터도 배천, 연안 부근에 적도가 집합한다는 보고가 있었으므
로 배천 부근에 집합하는 것을 점차 분명히 알았다. 병참부의 위험을 생각하
여 곧 연안을 향해 가서 도착했으나, 이미 연안부사 이하계李夏啓가 배천 연안
부근의 동도를 설득하여 해산시킨 후였다.
그때 후쿠하라 병참감이 명령하기를 해주로 돌아가 적의 상황을 정찰하라
고 말했다. 바로 급히 다시 해주로 가는 도중에 해주에서 6리 떨어진 청단靑丹
에서 감사의 급보를 접하였는데, 말하기를 “동도 수 천명이 4~5리 떨어진 곳
에서 습격했으니, 빨리 와서 구원해 달라”고 했다. 즉시 급히 가서 해주에
이르니 해주성의 교외 멀리서 이미 총성이 들리고 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에 대해 소관은 동도가 우리 부대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해
주를 함락시키려고 습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급히 해주성에 들어가니, 인민
가운데는 이미 물건을 지고 난리를 피하려고 하는 자가 있었고, 혹은 칼·
창·총기를 휴대하고 사방으로 도망하는 자가 있었고, 혹은 부녀가 낭패하여
흐느끼는 자들이 있었다. 그 혼란한 모습은 말로 이루 다할 수 없었다.
소관이 성문에 올라갈 때, 남쪽과 서쪽의 산꼭대기에는 이미 동도가 모여
506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있어 새하얀 모습을 이루고 있었고 그 수는 적어도 6,000~7,000명 정도였다.


남문 가까이에 온 적병 300여 명이 근방의 소나무 숲에 은밀히 모여 있기에
포격을 하여도 서쪽의 적은 단지 깃발만 흔들 뿐이고 재차 포격하지 않음에
따라 총포가 없음을 알았다. 40명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20명은 성에 남아
남문의 적을 맡게 하였고, 나머지 20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갑자기 나아가서
2~3회의 사격을 가하자, 갑자기 도주를 시작하여 마침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남문의 적을 향해 그 전면과 측면에서 십자형으로
사격하여 몇 명을 쓰러뜨렸으나 여전히 퇴각하지 않았다. 저들이 더욱 왕성
해져 계속 발포하였기 때문에 탄환이 거의 떨어지게 되어 매우 위험하게 되
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사격을 멈추고 두 방향에서 돌진하였다. 그러자 이
형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마침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거의 1리 반 정도를
추격했지만, 그들은 3~4방면으로 나뉘어 신속히 도주하여 결국 그 방향을 놓
쳤다. 전투개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대략 5시간을 허비하였다. 이처럼 강
경하게 저항하는 동도는 많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저들의 총기는 대개 화승
총이지만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고 휴대한 탄약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열되어 고전하였다.
그 후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날 적은 무려 30,000명이 넘었고, 재령, 신천,
문화, 장연, 옹진, 강령 등의 적도가 모두 왔다고 한다. 즉 성문 밖까지 접근
한 자가 6,000~7,000명, 또 1리 밖에 있는 자가 10,000명, 3리 밖에 떨어져
있는 취야장에 13,000~14,000명이 있었다. 그 총수를 합하면 무려 30,000명
으로 실로 그들이 전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소관이 해주로 돌아오자 인민이 기뻐하며 좋아하고 인민의 총대표가 와서
감사해 하며 말하기를 “오늘 귀관이 없었다면 동도는 성내로 침입하여 민가
는 물론 관사도 불살라지고 가산은 약탈되었을 것이다. 감사를 비롯하여 인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07

민도 반드시 그들의 독수毒手에 걸려 비참한 상황에 빠졌을 것인데, 다행히


그 재해를 면하게 되어 귀관 등에게 감사한다”라고 하며 대단히 기뻐하며 소
관의 송덕비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가 시작될 당초, 동도는 성 밖 민가를 불태우고 노략질하였는데,
우리 부대가 그것을 격파하고 추격하였다. 그러자 인민은 또 동도의 집에 불
을 놓아 복수하였기 때문에 해주성 밖 1~2리 사이의 인가는 모두 화재로 몽
땅 타버렸으니, 실로 참상이 극에 달하였다. 이처럼 동도가 양민의 집을 불사
르면 양민도 역시 동도의 집을 방화하여 서로 복수로 치달아 거의 방화를
어린아이 장난처럼 생각하였다.
작년 충청도에 갈 때에도 경성 및 지방의 한인 병사가 누차 방화하여 소관
은 매우 경계한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의 군기가 있는 관병으로 하여금 약
탈방화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그 지휘관인 자가 묵과하며 재차 이를 제
재하는 일이 없어서, 인민이 이들을 칭하여 제2의 동학당이라고 불러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방의 이른바 의용병義勇兵인 자는 동도 토벌을 명
분삼아 약탈을 자행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일전으로 적의 세력이 크게 줄어든 것 같지만,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
은 본디 추측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부하 병사는 앞에서 말한 것처
럼 겨우 소수이므로, 도주道主, 감사가 교묘한 수괴들을 추격 체포하는 일이 쉽
지 않았다. 게다가 휴대한 탄약도 거의 소모되고 남아 있는 것이 평균적으로
겨우 12~13발에 불과하여 할 수 없이 보급과 증병을 병참감에게 요구하였다.

(문) 황해도 감사는 와 있었는가?


(답) 이 전투는 전 감사 정씨의 재임 중이었다.

마침 이 싸움 후 4~5일이 지나 신임감사 조희일趙熙一9이 평안도에서 와서


508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전 감사 정씨와 교대했다. 조씨는 부임 도중 재령 부근에서 동도 때문에 억


류되었고, 백방으로 설득해도 풀어주지 않자, “감사의 사무인계가 목전에 있
다”고 협박하면서 점차 설득하고 속여서 달아나 왔다고 한다. 그때 감사에게
딸려 온 마부 2명은 일본 은화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도에 의해 살해
되었다고 한다. 신임 감사와 동도 진압을 위해 종종 상담하였으며, 그가 말하
기를 “나는 새로 부임하여 동도와 은원恩怨이 없어 혹여 내가 설득하면 복종
할지 모르니, 바라건대 한번 설득을 시도하려 한다. 그래도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즉시 청하여 귀군의 토벌에 일임하겠다”라고 말했다.
그 때 경성에서 초무사招撫使 및 소모관召募官도 와 있었으므로 소관은 그 의
견을 받아들였고, 감사는 바로 여러 곳으로 설유사說諭使를 보냈다. 또한 소모
관 등도 직접 갔기 때문에 점점 좋은 결과를 보고하게 되었다. 종래 해주에
한국 병사가 30~40명이 있었으나, 이때 감사와 협의하여 병력을 증가하여 거
의 300명이 되었고, 그 복장도 대체로 일정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훈
련시키고 통솔하는 자가 부족한 것은 소관이 가장 유감으로 여기는 바였다.
그때부터 4~5일을 지나 즉 금년 1월 2일 나카야마中山 중대장이 왔다. [이 경과

는 이후 중대장으로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그 후 소관은 장연부長淵府 방면으로 향하였다. 그 이유는 어은동의 병참감


으로부터 “그곳에 동도 3,000~4,000명이 있으니 속히 가서 그들을 토벌하라”
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출정은 봉산 병참부로부터 우리 병력의 한
부대가 장연 북방에서 오고, 소관은 부하와 해주의 한인 병사 30명을 인솔해
남방에서 오게 해서 협공하려는 목적으로서 장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적

9 조희일(趙熙一): 조희일은 김홍집내각에 의해 9월 평양 이북에서 청천강 이남의 일본군 원조를 위


해 파견되어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황해감사로 임명되었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09

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마침 그 때 부사가 왔다. 내가 온 이유를 묻


자, 그 까닭에 대해 답하여 말하기를 “당부當府, 장연부에 모여 있는 자는 모두
의용병義勇兵으로 결코 동학당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의용병은 우리 부
대가 도착하는 전날에 도망가서 숨어 하나도 남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묻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과거 일찍이 동학당이었지만 신임 감사의 설득
에 따라 그 잘못을 깨닫고 지금은 장연의 의용병이 되었고 동학에서 이름을
거짓으로 빌려 썼다. 동학당을 토벌하려고 모여 있었지만, 귀 부대가 왔다는
것을 듣고 만약 동도로 오인되어 살육된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도주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소관은 “과연 마음을 돌려 진실로 의
용병이라면 속히 불러 모아야 한다”고 하니, 날을 약속한 뒤 봉산에서 왔고,
군조軍曹와 병졸을 남겨두었다. 과연 부사가 이를 실행하는지 아닌지를 보도
록 하고, 소관은 신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다음날에 이르러 백여 명이 와서
집합하였다고 한다.
이 부사는 신임자로 아직 지방의 정황도 정통하지 않았다. 우연히 전 부사
가 여전히 이곳에 체재하고 있어서 동도의 정황을 들으니, 그가 말하기를
“작년 10월 동도가 처음 난입하여 관사에 와서 무기를 탈취하고 양민의 가
산을 약탈 난폭함이 극에 달해 도저히 우리들이 설득할 수 없었고, 또 위해를
가하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감사에게 보고하려고 해도, 그들
은 항상 내 주위에 있으면서 그것을 방해하여 사자使者를 보내면 길에서 억류
하였으니, 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동도가 봉기한 지방의 관리는 모두 이런 종류
이다. 만약 강하게 동도에게 저항한다면 관리는 머리가 잘리지 않을 수 없었
고, 또 가옥은 불살려지고 양민은 살해되고 말았다. 적도들이 하는 대로 내버
려 두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들의 모습은 과거 무정부와 같은 상황
510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이었다.
이곳에 동도의 화약제작소가 있는데, 큰 가마 3~4개를 갖추고 회즙취착소
灰汁取搾所10를 설치하였지만 추위가 심했기 때문에 회즙을 얻을 수 없었다. 제
조도 중지되어서 단지 몇 가마니의 목탄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것들은 바로
파괴하여 불을 질러 태워 없앴다. 그곳에 있었던 구식 조선대포 몇 문과 포
탄 약간을 보고 판단하건데, 어느 지방의 관사에도 반드시 총기 탄약이 있으
며 그들의 총기 탄약은 그 이전에는 모르지만, 지금은 적을 방어하는 무기가
아니라 오히려 적에게 공급되는 무기가 되었다. 바로 관아가 적의 무기 공급
소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에서 송화 온정에 이르는 곳에 도창刀槍 제작소가 있고, 그 근방 눈 속
에서 조선에서 진귀하고 뛰어난 창 30~40자루를 얻었다. 창은 해주로 보내고
제작소는 파괴하였다. 거기서부터 재령 지방에 있는 본대와 합류할 목적으로
신천을 향해 갔다. 그곳에는 의용병이 있었는데, 그 수는 200~300명이었다.
또 신천의 남쪽으로 약 3리 떨어진 어떤 읍에 안태운安泰運11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의용병을 모집하여 스스로 의병부대 대장이 되어, 그들을 통솔하여
산속에서 농성하면서 누차 동도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그
안태운이라는 사람은 단지 자기 읍을 지키기만 하였고, 다른 지방의 적을 치
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안태운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부사, 군수,
현감 등이 모두 이처럼 1군 1읍의 안전만을 도모해왔다. 소관은 글을 써서

10 회집취착소(灰汁取搾所): 화약제조하는 곳으로, 화약을 만들때 목탄의 재를 채취하여 흙과 배합하


였다.
11 안태운(安泰運): 안태훈(安泰勳)의 오기이다. 신천의 토호로 천주교신자가 되었고 그의 아들 안중
근이 동학농민군 토벌에 동참하였다. 뒤에 황해감영을 공격할 때 소년접주였던 김구가 찾아가
그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11

안태운에게 보내어 한번 만날 예정이었지만, 그가 병이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부호이면서 또한 명성이 자못 높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전
감사 정씨가 재직할 때 수양산성首陽山城의 별장別將을 했던 자에게 부탁하였지
만 끝내 오지 않았다.
신천에 이르러 군수 모씨와 면회하여 적의 상황을 묻자, 군수는 다른 사람
이 듣는 것을 꺼려 적의 수괴와 그들이 거주하는 곳을 글로 써서 말하기를
“이 일이 누설되면 안된다. 이 글을 잃어버려 다른 사람이 주워서도 안된다”
고 했다. 이것은 대개 훗날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동도를 두려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이곳에서 수비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바로 그곳
으로 군사를 돌렸다.
먼저 소관이 경과한 대략은 위와 같다. 소관이 황해도에 있는 기간은 대략
3개월로 해주성 같은 곳은 처음 매우 적막했던 것과는 달리 인민들은 거의
귀가하여 각각 생업에 종사하고 아침에 여는 시장의 경우는 실로 시끌벅적한
모습이 되었다. 소관이 해주성을 떠나는 날, 한국 병사와 인민은 멀리 성 밖
까지 와서 송별하였다. 어떤 한인 부대장의 경우는 석별의 정으로 슬피 울었
다. 그들이 얼마나 동도를 두려워하는지, 얼마나 소관들을 큰 힘으로 생각하
고 있는지 그 일단을 엿보기에 족했다. 모든 한인 병사에 대하여 의용봉공義
勇奉公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 관한 간단한 연설을 하니 크게 감격해 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과연 진실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해주에 체류 중 감사의 요청에 따라 한국 병사에게 간단한 조련 및 전투법
을 교육하거나 혹은 소학교를 설치하여 아동을 교육할 것 등을 생각했다. 그
렇지만 어쨌든 소관은 동도 토벌의 명령을 받았고 또한 짧은 일수로는 도저
히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그 청에 응할 수 없었다. 지방의
한인 병사는 온순하게 명령에 복종하였고, 용기에 있어서도 경성의 병사보다
512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나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전투할 때, 민가에 난입하여 재산을 약탈하는 점


은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군인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기와 규율이 없
었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군주도 국가도 없었다. 단지 급료 때문에 병사가
된 자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교육을 잘 시
킨다면 선량한 병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출군 당초부터 지방관 가운데 “동학당에 가담하는 자가 자못 많다”는
풍설을 누차 들었으나, 실제로 보면 고등 관리로 적도에 가담한 자는 거의
없었다. 단지 소리들이 처지에 따라서 적도와 통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풍설이 생겨나는 이유는 오로지 서로 의심하거나, 혹은 그 거동
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여 추측하는 말을 하거나, 혹은 그 부하로서
도망간 소리小吏들이 동도에 가담한 것을 가지고 그 상관도 모두가 동도가 되
었다는 풍설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도의 거동을 들추어내거나 혹
은 방해할 경우 후환이 두렵기 때문에 각 군현의 관리는 모두 자기 관할 내
의 동비에 관해서는 알고 있어도 비밀로 하고, 오직 다른 관내만을 적발하여
결국 서로 다른 이를, 동도가 되었다는 풍설을 받게 했던 것 같다.
황해도에서 봉기한 동학당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 소관이 목격한 바를
생각하여 말하겠다. 황해도의 동학당은 다음의 3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제1종 진정동학당眞正東學黨
제2종 일시적동학당一時的東學黨
제3종 위동학당僞東學黨

제1종의 동학당은 동학이라는 일파의 종교를 신봉하는 무리로서 경전을 암


송하고 그 가르침을 신봉하면 온갖 병도 모두 나을 수 있고 재물도 모이고 온
갖 재앙이 사라지고 수명도 연장된다고 믿는 무리로 바로 진정한 동학당이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13

제2종의 동학당은 동학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위협을 당하거나


기타의 이유로 그 생명 재산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여기에 가
담한 자이다.
제3종에 속한 비도 즉 위동학당은 그 종류가 자못 많다. 지금 중요한 것을
들면, 지나인을 제외하고 모든 외국인을 혐오하는 무리, 강도·절도 기타의
범죄자·무직자로서 생계를 찾으려는 무리, 지방관에 원한이 있는 무리, 당
오전 1문의 손실에도 분노하는 무리, 사금채집 광부 등이다.
그 대부분은 모두 사금채집 광부이다. 소관이 신천, 장연, 송화 등에서
실제 조사한 바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수의 사금 광부가 무엇 때문에 변하여
동비가 되었는가를 살펴보니, 작년에 채집을 금지12했기 때문에 갑자기 호구
지책을 잃어버려 바로 적도가 되어 협박해 빼앗는 것을 일삼게 되었다고 한
다. 원래 이 사금광부 같은 자는 대부분 집도 없고 처도 없고 따라서 애들도
없으며 오직 매일의 노동으로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자라고 한다. 그런데 하
루아침에 채집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호구지책을 찾을 수 없어서 도당徒黨과
결합하여 스스로 동학당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사금 채집의 일에 대해서는 대군주폐하께 아뢸 때, 폐하께서도 크게 고민
스러운 모습으로 종종 하문하셨다. 이 채집을 금지한 이유를 들으니, “채집
자는 마치 쥐새끼처럼 논밭 도로 교량을 가리지 않고 땅을 파서 그 황량한
모습을 그대로 방치하고 돌보지 않으므로 농민과 기타의 이유로 손해가 적지
않기 때문에 금지했다”고 한다.
총리대신이 논밭에 피해를 주지 않는 채집은 지장이 없다고 훈령을 내리

12 황해도 동부지역의 산간지대에는 광산취락마을이 많았다. 남강 홀동 등의 마을은 금광으로 이


루어진 마을이다. 1894년 6월 이곳의 금은 채취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514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고 황해도 감사가 말하기를, “채집 방법이 일정하여 다른 피해를 주지 않는


다면 채집을 허가할 것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문) 채집을 금지한 것은 언제인가?


(답) 작년 6월이다.

황해도에 봉기가 일어나고 동학당이 발발한 원인은 앞서 이와 같은 일 때


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동학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 즉 진정한 동학당
은 겨우 몇몇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평하는 무리와 먹고살기 힘든 궁
박한 백성뿐이라고 믿는다.
위僞동학당 수괴로서 중요한 인물은 다음 4명이지만, 그들은 출몰이 마음
대로여서 결국 사로잡을 수 없었다.

임종현林鐘賢 김명선金明善
원용일元容一 김영하金榮河

이 4명은 가장 흉악한 무리로 그 중 임종현은 스스로 해주를 함락시켜 감


사의 위치에 오르고 기타의 흉악한 무리를 각 부군현府郡縣의 수장으로 삼으
려고 이미 부사와 군수로 할 인물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또 김명선과 같은
자는 해주의 수대산水大山에 108명의 흉악한 무리를 모아, 옛 양산박梁山泊이라
고 자임하고, 원근에서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명치明治, 28년 3월 7일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15

양호창의영수 전봉준이 삼가 백배하고 호서 순상합하께 글을 올


립니다 [兩湖倡義領袖全琫準謹百拜上書于湖西巡相閤下]
세상천지에 인간에게는 기강과 법도가 있어 만물의 영장으로 일컬어지니,
한번 뱉은 말을 지키지 않거나 마음을 속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논할 수 없습
니다. 하물며 이 나라가 어려움과 근심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감히 겉으로
꾸미고 안으로 미혹되게 하여 하늘 아래 한 순간이라도 목숨을 가지기를 용
납받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도적놈이 전쟁을 일으키고 군사를 움직여 우리 임금을 핍박하고 우
리 백성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차마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옛날 임진壬辰
년 때에 능침凌寢, 凌은 陵의 오기을 더럽히고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며, 군주와 부
모를 욕되게 하고 백성을 살육한 것은, 신민이 함께 분노하여 천추에 잊지
못할 한恨입니다. 초야의 몽매한 필부도 매우 답답하고 울적하여 겨를이 없
는데, 하물며 합하처럼 나라의 녹을 먹고 충심이 평민보다 갑절 높은 사람에
있어서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현재 조정대신이 구차스럽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마음을 망령되게 하고서
위로는 군주를 위협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기망하고, 동쪽 오랑캐와 마음을
잇고서 남쪽 백성들에게 원망을 가지게 하였으며, 나라의 군사를 함부로 움
직여 선왕의 백성들을 해치고자 하니 실로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하고자 하
시는 것입니까.
지금 저의 행위는 실로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편단
심 죽음을 무릅쓰고 천하의 신하된 자로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없애서, 선왕조
오백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도 용
맹하게 반성하여 함께 의義로써 죽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갑오甲午, 1894년 10월 16일 논산에서 삼가 드립니다.
516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공주창의소의장 이유상이 순상합하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公州


倡義所義將李裕尙謹上書于巡相閤下]
삼가 천하에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자고로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른바 자
신을 알아주는 자는 의義가 의와 만나고 지智가 지와 만납니다. 혹 원수이지만
서로 구제하거나 혹 은애恩愛하지만 서로 반목하여 마음을 쓰는 동안에 뒤집
어지는 경우가 흔하게 많으니, 실로 어리석고 평범한 자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소생이 합하와는 비록 깊은 인연은 없으나 정사를 펼칠 때에 존안
을 모셨고 문서를 꾸밀 때에 고심을 알고 있습니다. 임천林川과 노성魯城으로
달려가 여러 접주接主를 각별히 깨우치고 소요를 그치도록 도모하는 것은 마
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영右營13의 영웅호걸과 맺고자 하고 또 확실
히 그들의 뛰어남을 신임하였습니다. 실로 권하는 일마다 난리를 그치게 하
고 대하는 사람마다 분란을 해결하였습니다. 온순하게 말하여 거짓말과 놀라
운 말이 적었으며, 세월로 기약하며 함께 애락愛樂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갑자기 9월 21일에 어떤 자가 병정을 이끌고 노성읍을 탄압하였는데, 당시
로 말하자면 호랑이를 내몰아서 이리를 잡아먹는 것에 가깝고, 또한 새를 그
리면서 활을 감추어 두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대장부는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며, 재상은 지혜롭지만 다른 사람에게 기만책을 쓰지
않습니다. 지금 비록 좁고 어리석은 소견이라도 어찌 편안하고 보존하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일의 형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다시 의병을
불러 모으니 겨우 지용智勇이 뛰어난 200명과 포수 5,000명을 얻었을 뿐입니
다. 이번 달 12일에 논산포 들머리에 진을 치고, 남쪽으로 땅과 하늘을 바라
보니 창과 총포가 마치 숲과 같았습니다. 급히 초병을 세워 앞을 살펴보니

13 우영(右營): 호우 곧 홍주초토영을 가리킨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17

도의 남군南軍 16만 7천명이 있음을 보고하였습니다. 전장全將, 전봉준을 보기를


요청하여 군사를 일으킨 이유를 물으니, “어제 법헌法軒의 호서湖西 도회都會14
의 통문을 받들고 장차 북쪽으로 향할 것이며 나는 금영錦營과는 일찍이 숙원
宿怨이 없으니 우리의 의로운 군사가 지나가고자 하나 수비하고 경계함이 마
치 철옹성과 같다고 합니다. 큰 길을 버리고 샛길을 따라가서 그런 혐의를
피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대저 합하께서 성을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히 묻건대, 청나라를 막자는 것입니까. 일본을 막자는 것입니까. 의병을 막
자는 것입니까. 청나라를 막자는 것은 대의를 멸시하는 것이고, 의병을 막자
는 것은 그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일본을 막자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 누군
들 그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형세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고, 화를 내고
기뻐하는 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군사를 거두어
주십시오. 직임을 맡아 엄정하게 얼굴 빛을 꾸미면, 의로운 깃발은 반드시
감사하며 지나가고 교활한 자는 반드시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만약 고립된
군사를 많은 군사라 말하고 의병을 비도로 칭한다면, 청나라 사람을 축출하
고 일본 병사를 맞이하는 것이니 무슨 의義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소생의 이
말은 실로 헛된 말이 아닙니다. 과거 자신을 알아주는 데에 고맙게 여기어
장막 아래에서 비웃음을 사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감히 번거롭고 어지롭
게 합니다. 오로지 명공明公15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만약 의병과 서로
다투며 그 말이 불순하다면 또한 백성은 무슨 죄입니까. 마땅히 형편을 살피
시고 정신을 쏟으시어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10월 15일

14 호서(湖西) 도회(都會): 최시형이 1894년 9월에 들어 전국에 통문을 보내 대동원령을 내렸다.


15 명공(明公): 높은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518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공주 호서 구접중 [公州湖西九接中]
방금 왜병이 크게 소란을 피워 조야가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처럼 우려
하고 있는 사이 조정의 비밀 지시가 신령스럽고 간절한데, 머리를 조아리며
이를 받드니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 또한 청나라 군사는 오로지 우리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피를 흘리며 길을 여는데, 우리 보국안민補國安民, 補는 輔의
오기의 의리를 가지고서 어찌 편안히 앉아서 바라만 보겠는가. 바라건대 오도
吾道의 여러 군자는 하나의 북소리에 함께 일어나 이구동성으로 크게 힘쓰며,
제반 군대에 필요한 것을 제빨리 마련하고 훈련에 힘써서 충성을 다하여 나
라에 보답하기를 바란다.

1894년 9월 11일 진시辰時 출出


호주湖州 대의소大義所

경통 [敬通]
평산平山 수접주首接主
경통敬通하는 일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도의 충군효친忠君孝親과 광제창생
廣濟蒼生의 근원은 크고 크도다. 그런데 아아, 저 해백海伯, 황해감사의 부자父子16
는 왜놈과 같으니 죽일 수 있다. 해주와 강령의 동학 도인 100여 명을 해치
고, 백성을 도륙하였다. 이 같은 부자 두 놈은 개국 오백 년이래 처음 나온
대역죄인이다. 때문에 영서營西 10여 읍에 일제히 격문을 발포하여 기포起包
해 모인 자가 50,000~60,000명에 이르렀다. 취야翠野 북쪽에 진을 치고 그

16 해백(海伯)의 부자(父子): 황해감사 정현석과 그의 아들 정헌시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동학농민


군을 섬멸하려 하였다. 이학규 조희일 권형진 등이 이 일대에 파견되었다.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19

서쪽으로 식량 보급로와 인적을 끊었음에도 뒤를 따라 기포한 자가 부지기


수이다.
귀 읍邑 각 포包의 도인들에게 크게 바라니, 분발의 탄식이 어찌 없겠는가,
일제히 널리 알리고 만약 이를 받았으면 속히 기포하여 돌장승이 있는 곳에
모여서 주둔하면서 동쪽 식량 보급로를 끊으면 몇 일이 안 되어 두 놈이 필
시 도망하여 곧바로 평산·금천 북쪽 땅으로 내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뜻을 연안·배천白川·평산·금천의 각 포의 수접주에게 통문을 돌린다. 연
안·배천 두 읍의 도원道員들이 한곳에 만나서 그 읍천泣川 도로를 단절시키
고, 평산·금천 두 읍의 도원들도 또 한 곳에서 만나서 작천鵲川의 북쪽땅을
지키도록 하라. 동서가 수미상관하니 이놈들을 생포하는 것은 묶음 속에서
물건을 취하는 것과 같다. 하물며 지금 천병天兵, 청국군사 백만이 왜구를 내쫓고
강을 건너 강계江界·의주義州 북쪽 땅에 주둔하고 조선인으로 왜를 돕는 자는
박멸한다는 뜻의 문서가 해주와 안악安岳의 수접주에게 있었음에랴. 그러므
로 지금 창의한 자들은 황해감사 부자를 먼저 참하여 그 머리를 청나라 진영
에 바치도록 하라. 그 후에야 우리 도인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부지할 것
이다. 서둘러 기포하여 대세를 실기하지 않기를 몹시 바란다.

1894년 11월 23일 묘시卯時 창의소

도내 각 읍의 유생 등 단자 [道內各邑儒生等單子]
삼가 바라건대 순상 합하閤下께서는 세심하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경經에
서 이르기를,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고, 근본이 굳건하면 나라가 평안하다”
라고 했습니다. 사史에서 이르기를 “배가 굶주려서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
하고 추워도 옷을 입지 못하면, 비록 자애로운 아비라도 그 자식을 보호할
520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억만 백성들은 열성조列聖朝께서 사랑하며


키운 적자赤子가 아님이 없거늘, 어찌하여 전임 순사巡使, 감사는 이런 백성을 돌
보지 않아, 요역 役이 배로 혹독하고 무고한 자에게 형벌을 가하여 죽여서,
사방에 원망하는 소리가 가득하며 모든 백성들이 흉흉해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낳은 사람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 好生之德 이라 하겠습니까. 그래도 천운天
運이 순환하여 이 백성을 버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오직 우리 순상巡相이 백성들을 살피시는 초기에 은혜로서 깨우치고 삼가
서 옛 것을 고치고 새것을 따름으로써 널리 백성을 구원하는 은택을 누리게
되었으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감히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세세하게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보신 후 호생好生의 은택을 특별히 베풀고 태평성대의
백성을 만들어 그 생업에 안도하게 해주십시오. 군수물자에 이르러서는 내일
수영水營으로 수송하여 들일 것이니, 지극한 정성에 부응하게 해주십시오. 영
구히 기릴 교화의 정사가 이루어지도록 천만번 엎드려 축원합니다.

장두狀頭 임종현林宗鉉

삼곡 유생 등 단자 해주·강령 [三谷儒生等單子海州康翎]
맹자孟子에서 말하기를 “인仁의 마음이 있는데도 자기 부모를 버리는 일은
없으며, 의義의 마음이 있는데도 그 군주를 뒷전으로 돌리는 법은 없다”고 했
습니다. 무릇 충군효친忠君孝親은 오륜五倫의 으뜸이요, 모든 행동의 근원입니
다. 사람이고서 불충不忠하고 불효不孝하다면, 천지 사이에 어떻게 설 수 있겠
습니까. 저희들이 비록 외지고 먼 곳에 있다하더라도, 성세聖世의 교화의 은
택으로 길러져서 왕의 신하가 아님이 없고, 왕의 백성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21

충효의 의義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근래 화폐17가 누차 바뀌어 여러 폐단이 번잡하게 일어나고, 또 수령의 탐
욕과 리예吏隸의 간교함을 입어 요역이 날과 달로 증가하여 지탱할 수 없습니
다. 지난 번에 소요를 일으킨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나 다행인지 우리 밝은 순상巡相이 경계에 도착하여 처음 감영
에 부임하신 후 포고문으로 거듭해서 깨우쳐주셨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
다. 과거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갑자기 저절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곧 많은 백성이 곤경에 처해있음을 아시고, 흘러넘치는 제교題敎에 이르러서
는 눈물이 나와 황송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지금 또 소모사召募使와 좌막佐幕
이 내린 면유面諭을 받들고 보니 더욱더 감사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고어古語에서 말하기를 “인간이 비록 허물이 없어도 고치는 것이 좋다”라
고 했습니다. 저희들은 비록 우매하고 무지하더라도 돌연 과거의 잘못을 깨
닫고, 모든 조화가 하나로 귀결되어 영구히 선량한 백성이 되겠습니다. 관의
군기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처음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위 몇몇 병
사가 가진 것은 시골 마을의 화승총 몇 자루를 빌려 얻은 것이고, 각자의 호
미와 낫을 모아 장촉杖鏃을 주조한 것은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귀화하는 처지에서 무기를 풀어 모두 거두어 올리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리 순상께서는 매우 어진 은택을 베푸시어 궁핍한 백성
들의 정경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아, 칼을 팔아서 호미와 소를 사고 각기
그 생업에 안도하게 해주십시오. 옛날 발해 공수 遂18의 덕화德化를 오늘날에

17 근래 화폐: 1880년대 당백전 당오전 등의 발행을 말한다. 또 갑오개혁때 모든 공납을 돈으로 내


게한 조치도 있었다.
18 공수( 遂): 한(漢)나라 선제(宣帝)때의 발해태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 그곳에 부임하여 백성들을 기
아에서 구해 내고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칼을 팔아서 소를 사도록 시켰다고 한다.
522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백성의 폐단이 되는 것은 추후 조목을 나열하


여 올리는 단자를 기다려 일일이 혁파하시어, 근본을 튼튼히 하는 정사를 베
푸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기원합니다.

후록 [後]
최유현崔琉鉉 오응선吳膺善 김동춘金東春 정헌용鄭憲鎔
김용극金龍克 강관영姜寬永 안주승安周承
(번역 : 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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