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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0304 동비토록 (전라)
ch0304 동비토록 (전라)
동비토록東匪討錄
동비토록 東匪討錄
완백 [完伯]
정부가 지금 고산高山의 보고를 보니, “오늘 아침에 문루門樓밖의 기둥에 방
榜을 내걸었는데, ‘금마목사金馬木蛇에서 초순에 점심을 먹었다. 제 2번째 줄에
는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4월 5일 신시申時, 오후 3시 5시에 고산을 지나갈
것이니 각자 짚신 1 켤레와 돈 1 냥씩을 미리 준비하라. 천명天命을 어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잘 알아서 거행하라. 제 3번째 줄에는 동도대장東徒大
將 서徐의 서명이 있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일일이 체포하고 그 형편을 지체 없이
빨리 보고하도록 제송題送2한다.
완백 [完伯]
동도가 원평에서 모였다. 영군營軍이 오늘 114명을 사로잡았고, 병사를 사
방으로 나누어 뒤쫓아 체포하였다.
초 6일 [初六日]
동도가 부안의 동헌에서 본읍 뒤의 성황산城隍山에 옮겨와서 주둔하였는데,
5개 읍에서 온 자가 모두 수만 명이 되었다. 해당 수령은 놀라서 가만히 있고
군대를 출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주족走足이 탐문해 온 것을 보니, 잠시
초 7일 완백 [初七日 完伯]
5일 사시巳時, 오전 9 11시에 진잠鎭岑의 평민 수천 명이 일제히 모여 동도東徒
의 집 9채를 부수어 태워버리니 동도들도 통문을 보내 모두 모으려고 했기
때문에 평민과 동도를 모두 잡아들이고 엄중히 지키며 단속할 것을 지시하였
습니다. 제송하기를, “영진營鎭의 교졸校卒을 나누어 보내어 잡아들이도록 하
라. 지금 임금께 아뢰면서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다는 염려가 없지 않을 듯
하여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초 7일 진시 [初七日辰時]
저들이 부안에서 고부古阜로 향하여 고부의 도교산道橋山 위에 집결하였는
데, 그들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경군京軍, 장위영군이 오늘 새벽에 완부完府에 도
착할 수 있다고 하여 지금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 7일 신시 [初七日申時]
저들이 고부의 도교산 위에 자리 잡고 아군我軍의 고립되고 허약한 점을
엿보아 갑자기 아군을 습격하여 겹겹이 포위되어 곤경을 겪고 있어 더욱 통
탄스럽습니다. 경군京軍이 오늘 새벽에 완부에 도착한다고 해서 지금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 9일 금백 [初九日 錦伯]
지금 회덕懷德의 보고를 받아보니, “동도 몇 천 명이 어젯밤에 관정官庭을
동비토록 東匪討錄 97
초 9일 금백 [初九日 錦伯]
지금 정탐영교偵探營校의 치보馳報를 받아보니, “동도 최법헌崔法軒이 통문을
돌려서 말하기를, ‘호남에서 모두 죽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다. 6일에
청산靑山의 소사전小蛇田에 모이자’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그 정세가 더욱 심
해져서 매우 걱정스럽다. 지금 다시 청산 등의 읍에 관문關文으로 지시한다.
아전과 백성을 모집하여 특별히 엄중하게 지켜라.
초 9일 완백 [初九日 完伯]
지금 정읍井邑의 보고를 받아 보니, “7일 술시戌時, 오후7~9시에 읍내에 들어와
장청將廳3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동도 6명을 풀어주었고, 다시 군기 창고를 부
수어 창 칼 기계器械 등을 가져갔으며 동헌東軒의 각 청廳에 있던 아전들의
9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9일 상동 [初九日 上同]
지금 금백의 전보를 보니, “저들 몇 천 명이 회덕의 군기를 빼앗고서 진잠
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사로잡은 비류匪類 는 80여 명이고, 어젯밤에 몇 명
을 취초取招5하여 그 전말을 상세히 안 자는 처결을 하려고 하며 지금 진영을
관아의 서쪽 차마산車馬山 아래로 옮길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12일 [十二日]
의정부議政府의 초기草記에, “지금 충청 감사의 전보를 보면, 회덕에 모인 무
리는 모두 흩어져서 귀화했다고 합니다. 지금 농사가 한창인 때에 각 해당
읍으로 하여금 농민을 위로하게 하고 각각 생업을 안정시켜 농사 때를 잃어
버리지 않게 조치하도록 호남과 호서의 관찰사에게 상세하게 관문으로 지시
하십시오”라고 하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윤허한다. 편안함을 쫓고 위험을
피하는 것은 인간의 평상마음이다. 근래에 모인 백성들이 어찌 모두 그 생업
을 즐겁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큰 잘못을 기꺼이 저지르려고 했겠는가? 이
것은 모두 탐관오리의 침학으로 스스로 안도하지 못한데서 연유한다. 떠들썩
하게 군대를 만들어 마침내 소요에 이르렀다가 바로 귀순한 자는 그 행적이
비록 매우 괘씸하지만 그 실정은 모두 불쌍하다. 관찰사가 특별히 위로하게
하고 각각 제자리에 돌아가게 하라. 혹시 재산이 흩어지고 집이 없는 자가
있으면 각 해당 지방관은 방책을 세워 구제하여 거처할 수 있게 하고 자무지
10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4월 13일 [四月十三日]
의정부의 초기에, “지금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전보를 보면, 완영우영관 이
경호가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저들에게 돌진하여 수십 명을 베었다고 합
니다. 그 의로운 용기가 매우 가상하니 규례에 따라 포상하는 처사가 있어야
합니다. 병조참의兵曹參議를 특별히 추증追贈하시고 시신을 가지고 돌아가 장례
를 치룰 때에 특별히 돌보아주도록 해당 관찰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
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윤허한다. 용감하게 돌진하여 군
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죽는 데에 이르렀다는 것을 들으니 슬프다. 특별
히 병조참의에 제수하여 조정에서 규례에 따라 포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
라”고 하였다.
4월 15일 [四月十五日]
의정부의 초기에, “명령을 받들어 안핵按 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급박
합니까? 그러나 처음에는 병을 핑계대고 바로 길을 떠나지 않다가 끝내 소요
를 만나 돌아오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일이 소용없게 되었으니 누가 그
18일 [十八日]
전교하기를, “전라감사의 후임에 외무협판外務協辦 김학진을 제수除授하니
지체말고 사조辭朝하라”고 하였다. 사알司謁에게 구전口傳으로 하교下敎하기를,
21 효근(效芹): 미나리를 바친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미나리는 자신의 정성을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다.
11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전교하기를, “호남에 출정한 병사들이 여러 날 동안 노숙露宿을 했는데, 질
병은 면할 수 있고 또한 먹는 것이 어려운 걱정은 없었는가? 마음에 걱정이
되어,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위문하게 하고 특별히 내탕금內帑金27 10,000
냥을 내리니, 초토사가 잘 헤아려서 나누어 주게 하라.
정탐기 [偵探記]
동도대장東徒大將이 각 부部의 대장隊將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기를, “늘 적
11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6일 [二十六日]
우리들의 오늘 거사는, 위로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호하고 아래로는 백성
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으로써, 죽음을 각오하고 맹세했으니 두려워하여 동요
하지 말라. 앞으로 고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을 보면, 아전과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전운영轉運營, 균전관均田官28이 폐단을 제거하려다가 다른 폐단을 생기게
하는 것, 각 시정市井, 시장에서 분전수세分錢收稅29하는 것, 각 포구浦口 선주船主
의 강탈, 외국 잠상潛商이 곡식을 구매하는 것, 소금에 대한 시장세, 각종의
물건을 도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 백지징세白地徵稅와 송전松田을 경작하거나
묵히는 것, 와환臥還30으로 밑천을 뽑아내는 것 등으로 각종의 폐단을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우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가지 생업을 가진 백성들이 한마음
으로 협력하여 위로는 국가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빈사濱死상태의 민생을 안
26일 [二十六日]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진주병영의 서목에, 부정한 방법으로 속인 죄인 백도홍白道弘을
6월 15일에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윤음綸音
전교하기를, “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걱정하고 애쓰는 것은 백성을 위
한 한 가지 일인데, 백성이 더욱 곤궁하여 곳곳마다 소란스럽고 헛소문이 퍼
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폐단이 되는 단서는 나도 종종 들은 것이 있다.
주로 탐관오리가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침탈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생
업에 편안하게하지 못하고 압박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데서 연유한다.
보고를 듣는 대로 탐관오리를 내쫓아서 하루라도 지체하여 한 가지의 피해라
도 더하지 않게 하라. 가장 불선不善한 자에게는 해당 형률로 엄중히 징계하
여 민심에게 사죄하게 하라. 호우豪右가 이유 없이 관장官長을 위협하거나 저
무고한 사람들을 살 수 없게 하면 잡아다가 단속해야 한다.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부축하여 궁박한 집을 호구戶口로 편입하여, 바쁘게 그들을 받아들여
깃들게 하는 것에 힘쓰고, 혹시라도 소민小民이 어리석게 무리를 모아 소란을
피워 명분을 훼손하는 것도, 또한 금지하고 다스려야 한다.
또 나라의 조세는 소중하니 비록 한줌이라도 경솔하게 하지 말라. 늘리는
것 또한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는데, 탐관오리가 제멋대로 더 거두어 토지 1
결에 많게는 원총原摠, 원래의 결수보다 2배나 4배가 되게 하여, 농민이 일 년 내
내 고생을 해도 항아리에 남는 것이 없고, 비록 풍년을 만나도 조세를 내기에
도 충분하지 않아서, 백성이 뿔뿔이 흩어진다. 관리로서 이런 짓을 한 자가
단지 백성을 학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과연 국법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인
가? 원결原結 이외에 지금 더 거둔 것이 있는지를 철저히 조사하여 그들이 범
한 죄목을 엄중하게 논해야 한다. 무명잡세無名雜稅를 무수히 요구하여, 한 가
지 물건에 도장을 찍으면 색목色目이 실처럼 뒤섞이고, 배 1척이 경계를 넘으
면 항구의 수문에 바둑처럼 섞여서 상민商民 모두 괴로워한다. 재원이 줄어들
12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同日]
정부의 초기에, “중요한 곳에 병사兵使나 수사水使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새로 제수한 충청 병사 신석희申奭熙에게 말을 주어 바
로 내려 보내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27일 [同日]
내무부內務部의 초기에, “호남과 호서의 비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여 완
부 근처까지 왔다고 합니다. 경군을 뽑아서 보낸 지가 이미 수십 일이 지났
으나, 바로 토벌하지 않고 도적과 노는 것 같으니, 참으로 해괴합니다. 우선
27일 [上同]
아뢰기를, “지금 내린 전교는 백성의 고통과 관련하여 충분히 헤아리지 않
은 것이 없습니다. 이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누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비록 전교의 뜻을 먼저 각 읍에 관문으로 명령하더라도, 이것은
1 2개 읍, 1 2가지 일이 아니어서 경솔하게 논계論啓할 수가 없습니다. 행
호군行護軍 엄세영嚴世永을 염찰사廉察使로 임명하여, 먼저 삼남三南에 보내어 민
폐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채방採訪하는 대로 편의에 맞게 재단하여 계속 보고
해서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
고 하였다.
27일 같은 시각 [同時]
정부가, “초토사가 지금 이 곳에 있지 않은데, 저들의 선봉이 이미 원평에
도착했습니다. 수하에 병졸 1명도 없어 성을 지킬 일이 매우 당황스럽고 어
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강곤康梱, 강진의 병사이 오늘 일찍 출발했습니다”라고
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전교하기를, “비류가 직접 완부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상황이 어
떤지를 모르겠다.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를 모신 곳에, 이런 소요가 있어
놀라움과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다. 바로 예조 당상을 파견하여 살펴보
고 오라”고 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가 사은謝恩을 한 뒤에 바로 하직 인사를 하였다.
전교하기를, “순변사는 기다리라”고 하였다. 다시 전교하기를, “순변사는 입
시入侍하라”라고 하였다.
29일 [二十九日]
예조참판 김종한金宗漢이 조경묘와 경기전을 봉심奉審하는 일로 전주에 갔다.
29일 [同日]
전교하기를, “기영箕營, 평양 감영의 병정 5초哨를 그 영의 좌영관左領官이 대신
인솔해서 올라와 기다리라”고 하였다.
29일 [同日]
의정부 초기에, “지금 호남의 비류들이 완부에 난입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놀랍고 참담합니다. 전 관찰사가 방어하지 못하고 황급히 경계를 넘었
으니 전후의 잘못이 큽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어디에 봉강封疆40의 책임이
5월 초 1일 금영 [五月初一日 錦營]
정부의 회답고시에, “전주 동악사東岳寺의 승려를 만나 탐문해보니, 27일에
전주 판관이 경기전과 조경묘의 영정을 받들어 동악사로 옮겼다가, 28일에
다시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이 승려가 직접 본 것이라고 하
니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5월 초 2일 [五月初二日]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合啓해서 다시 아뢰기를, “전 전라감사 김문현의 죄
는 죽여야만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주는 바로 호남의 중요한 번진藩鎭으로 조
경묘와 경기전을 모신 곳입니다. 소중함이 어떠하며, 위임하신 뜻이 어떠하
5월 초 2일 [同日]
의정부의 초기에, “중국의 군함이 와서 정박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
다. 공조참판工曹參判 이중하를 영접관으로 임명하여 미리 가서 일을 처리하도
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초 1일 금백 [初一日 錦伯]
지금 정탐을 나간 군교의 보고를 들어보니, “어제 전주에서 돌아왔는데,
초토사는 용두산龍頭山에 있으며, 강화 진무영의 군대는 서쪽에 진을 쳤고, 저
들은 성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움직임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2일 금백 [初二日 錦伯]
지금 하교를 받아 보고 알았습니다. 청국 진중에서 소용되는 것은 모두 영
접관의 명령에 따라 공전과 공곡에서 가져다가 거행하도록 거듭 각 읍에 지
시하였고, 또한 이런 뜻을 전주 감영에 전보로 알렸습니다.
초 2일 금백 [同日錦伯]
정부에서, “염찰사廉察使가 지금 충청감영에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3일 금백 [初三日 錦伯]
정부에서, “지금 정탐 군교의 보고를 들어 보면, 전주의 형세는 전과 같고,
감영아래 10리 안의 인민이 모두 피신했다고 합니다. 빠져나가지 못한 무수하
게 많은 아전과 백성은 어육보다 심하여, 우는 소리가 인근까지 이르렀다고 하
니, 마음이 매우 참담합니다. 은진에 주둔했던 군대는 오늘 이미 완부에 도착
했고, 청주 병영의 군대도 노전蘆田에 도착하여 은진의 경계에 물러나 있으니
통신을 편리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초 3일 [初三日]
같은 날 정부에서, “전임 전라도 관찰사의 소재처에 전보를 보내려고 염찰
사로 하여금 조사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완부는 경기묘와 조경전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곳인데 소요가
일어나서 마음에 근심스러웠다. 지금 그 사이에 영정과 위패를 이미 위봉산
성의 행궁行宮에 모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랍고 송구스럽던 중에 참으로 매
우 다행스럽다. 위안제慰安祭를 바로 관찰사가 지내도록 하고, 태묘太廟, 종묘의
당실當室에도 고유告由하는 행사가 있어야 한다. 그곳 관아로 하여금 전례를
참고하여 마련하게 하라”고 하였다.
조회 [照會]
조회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해 5월 1일에 북양대신 이홍장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이홍장이 조선 정부의 글을 보아 알고 나서, 바로 “상국商局의
화륜선을 조달하여 북쪽으로 와서, 당고塘沽에서 섭사성 士成이 관할하는 진
13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3일 [初三日]
조경묘와 경기전에 단오제端午祭를 지내려 하는지를 바로 탐문探問하도록 지
시하라. 청국의 군함이 아산에 도착해서 포구에 주둔할 때에, 제반사항을 급
속히 거행하고 지시나 명령을 기다리는 일은 이미 전보로 지시했고, 모두 일
일이 준비하여 혹시라도 기일에 임박하여 기다리게 하는 잘못은 있지는 않은
가? 일이 군대의 대오에 관계되니 충분히 엄중하고 신속하게 유념하여 거행
하도록 각 해당 읍에 특별히 단속하라.
초 4일 [上同]
적이 의지하는 자들은 전녹두全祿斗와 14세 소년장사 이복용입니다. 그러나
전녹두는 우리 총에 부상을 당하여 왼쪽 다리를 쓰지 못합니다. 이복용은 어
제 큰소리를 치고 출전하였으나 아군에게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는 모두 도
망쳐서 전주성에 들어갔습니다. 적들은 낙담하고 혼이 나가 지금 자중지란自
中之亂에 빠졌습니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35
초 4일 [初四日]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조병갑은 말이 많고 모호하여 더욱 통탄스럽습
니다. 다시 엄형을 가하여 실정을 얻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
였다. 다시 아뢰기를, “이 죄수는 나쁜 짓을 해서 재물을 탐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괴롭혀서 호남의 소요를 초래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차례 엄형을 가하고 빨리 원악도遠惡島에
안치하는 형벌을 내리어 바로 그 날에 압송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전교하기를, “지방관을 부임시키는 곳 중에 전주는 중요한 지역이다. 처음
에 소요를 금지하지 못하고 그들이 난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바로 성을
버리고 경계를 넘었다. 봉강을 주는 것한 신하가 봉강에서 죽는 것에 그 의
리가 있다. 그러므로 그가 범한 죄를 논한다면 해당 형률이 있을 것이다. 비
록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하게 하더라도 그 죄를 풀 수가 없을 것이나 참작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특별히 백성을 살리기를 좋아하는[好生之德] 미루
어 죄인 김문현을 거제부巨濟府에 죽을 때까지 안치하라”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전교하기를, “군대가 호남에 내려 간지가 한 달이 넘었다. 지금까지 더위
에 길을 걷고 칼날을 밟으며 고생하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연이어 승리의 보고를 받으니 그들이 애써 노력하는 것이 가상하다.
선전관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관찰사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한 뒤에
동비토록 東匪討錄 137
초 7일 금백 [初七日 錦伯]
정부에서, “어제 초토사의 전보를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반드시 형세를
헤아려서 이런 전보를 쳤을 것입니다. 지금 영접사迎接使의 전보를 보니, ‘통
령統領 섭사성 士成이 5일 유시酉時에 왔고 제독 섭지초葉志超는 내일 도착하며,
마보군馬步軍은 3,000명이고 지원 병력도 3,000명이 되어, 처음에 마련한 배와
말은 태반이나 부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6,000명의 많은 병력이 뭍에 내
리는 데에 여러 날 동안 비용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빈약한 도道의 형편과
재력으로, 또한 춘궁기를 맞아 어찌 마련을 하겠습니까? 불화가 생길 것은
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것을 마련하는 방도가 있더라도,
동비토록 東匪討錄 139
초 7일 금영 [同日 錦營]
정부에서 지금 전라 감사의 전보를 보니, “묘전廟殿에 단오제를 지낸 뒤인
지금 삼례參禮에 이르렀습니다. 3일에 저들의 괴수 3 4명과 수백 명을 붙잡
았고 도망간 자도 수백 명이어서 멀지 않아 소탕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
고, 초토사의 말에 의하면, “청국 군대가 안에 머물러서 각 고을에 폐단을
일으키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헤아려서 재가해 주시기
를 바랍니다.
초 7일 금백 [同日 錦伯]
지금 아산 탐교探校의 고목告目을 보니, “어제 사시巳時에 청국의 통령 섭사
성 士成이 보군步軍 1,000명을 인솔하여 고을로 향하였고 마병馬兵 100명은 아
직 뭍에 내리지 않았으며 제반 집물什物은 계속 말로 운송하고 있습니다. 제
독 섭지초葉志超의 보군 1,500명과 마군 150명은 내일 뭍에 내린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제반사항을 각별히 거행하고 나중에 뭍에 내린 형편을 화
급하게 치보하도록 지방관과 호송관護送官에게 각별히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초 8일 유시 완백 [同日酉時 完伯]
완성完城 안의 적들은 각기 병기를 가지고 동문과 북문으로 나가 사방으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지금 초토사의 편지를 보니, “사시巳時 경에 성을 회복하여
전주에 들어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전보로 알리고 상세한 사정은
초토사의 공문으로 계문할 것입니다. 순변사는 지금 이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12일 [十二日]
시임時任, 현직 원임原任, 전임대신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51를 올리기를, “근
51 차자(箚子): 소장( 章)의 하나로서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간단히 사실만을 적어 올리는 상
소를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41
12일 [同日]
전교하기를, “이번 남복南服, 남쪽 지역이 소요를 야기하여, 비록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해도 군졸들이 한달 넘게 이슬을 맞는 것을 생각하면, 그
고생을 알 수가 있다. 용감히 나아가 애쓴 것이 가장 뛰어난 자는 해당 군영
에서 순서 없이 받아들여 써라. 죽은 자는 본도로 하여금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장관將官과 관인官人으로 해를 입은 자는 직접 싸움에 참가한
경우와 뜻하지 않게 겪은 경우를 막론하고 나랏일을 위해 죽은 것은 마찬가
지이다. 포상하고 관직을 추증하는 일은 그 사실에 따라 바로 시행하라. 군
수비용을 마련한 자는 해당 영과 해당 도에 상세히 물어보아서 회감會減52하
완백 [完伯]
어제 김제의 보고를 받아 보니, “비도 700 800명이 깃발을 들고 포를 쏘
며 창과 칼을 지니고 읍내에 들어와서 머물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안
의 보고를 받아 보니, “어제 신시申時에 비도 몇 천 명이 동진東津55 나루를
건너 대요大腰 석교石橋 등지로 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순변사 초토사와 함께 의논을 하였습니다.
60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인천으로 도망쳐 간신히 일본배 '치토
세마루(千世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 것을 말한다.
61 수하(誰何): 누구인지 신분을 자세히 살피고 확인하는 일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49
65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음모에 시달렸다. 민씨 일파가 계속해 보내는 자객들에 의하여 고
통어린 세월을 보내면서 일본정부에 의해 먼 외딴 섬이나 북해도의 벽지로 끌려가 연금 생활 10
년을 보내야 하였다. 그러다가 김옥균은 민씨 일파의 자객인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
학생 출신인 홍종우에 의해 상해로 유인되어 1894년 2월 22일 살해되었다.
15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악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만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정치가 사나운 호랑이보다 심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의 소란이 있었겠습니까? 근래에 탐욕의 풍속이 습속을 이루어 뇌물을
예사로 여기니,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는 반드시 더욱 심합니다. 그 이익은
아래로 돌아가고 원망은 위로 돌아가는데, 전철을 밟아 한결같이 돌이킬 줄
모르니, 백성이 어찌 괴롭지 않으며 나라가 어찌 병들지 않겠습니까? 신이
어리석어 죽을죄를 지고 있지만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
하여 음양이 순서를 잃어버리고, 경연을 오랫동안 그만두어 유신儒臣이 헛되
이 매어있으며, 언로가 막혀서 공정한 논의가 관철되지 않고, 재물을 절약하
지 않아 심지어 차관을 하였습니다.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는 것은 사사로움
을 따라 문학文學은 일어나지 않으며, 상벌이 밝지 않아 법은 해이해졌습니다.
수령과 방백이 탐학하여 소요가 더욱 일어났고, 서학西學이 금지되지 않아 동
도가 번성해졌습니다. 환곡은 비어있으니 군량을 어디에 의지하겠으며 호포
戶布를 배정하여 군정軍丁을 군적에 올릴 수가 없으며 관작官爵이 뇌물로 이루
어져 규범이 문란해졌고, 관직公器이 바르지 않아 명분이 모두 없어졌으며 전
운소가 폐단을 만들어 징수가 절도가 없으며 녹봉은 주지 않아 배고픈 기색
이 처량하며 무당이 출입하는데도 궁궐이 엄중하지 않고,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아 관부의 창고가 비었으며, 1푼으로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물가가 급등
하였으며, 당오전을 한가지로 발행하여 명실名實이 서로 어긋났습니다.
신이 개진한 여러 가지 조항들은 지금 매우 절실한 폐단이어서 제거해야
할 병폐입니다. 밝으신 전하께서 다스리려고 도모하지 않으시면 그만이지만,
다스리려고 하신다면 어찌 그 방법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지금 민생
은 불이 붙고 물에 빠진 것보다 궁박하고 화급합니다. 만약 급히 구제하지
않는다면, 몇 만 명의 백성들이 서로 빠지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할 것
동비토록 東匪討錄 155
인천감리 김 [仁監 金]
내서가 5월 14일에 인천감리仁川監理의 전보에 의하면, “일본 영사가 육군제
독陸軍提督 오오토리大鳥圭介가 인솔하는 3,300명의 군대가 한양으로 진군할 때
에 며칠 항구에 머문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 6좌 탄약 50궤짝 탄환 724궤짝이었습니다.
인천감리 김 [仁監 金]
일본 병사 80명이 지금 한양으로 향했는데, 그 군대가 중도에 머물렀는지
한양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인천감리 김 [仁監 金]
일본 병사 79명 말 22필 탄환 420궤짝을 어제 술시戌時 정각에 내렸고,
병사 65명이 오늘 묘시卯時 정각에 한양으로 출발하였습니다.
16일 [十六日]
내무부의 초기에, “비도는 이미 제거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서 도
망하였습니다. 귀농이 현재의 급선무인데, 그것은 신속하게 군대를 되돌리는
데에 있습니다. 심영 병방은 잠시 전주에 주둔시키고 초토사는 바로 회군하
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이 입래入來 하였다.
여 처벌할 생각입니다.
감영으로 들어오는 길에 성의 서남문 안팎 인가들이 모두 불에 타서 계단
은 검게 그을리고 벽은 붉게 물들었으며, 연기와 먼지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요호가 저장한 것은 이미 없어졌고 편맹編氓73의 항아리는 남은 것이 없어서,
남녀노소가 끌어안고 손을 끌며 길 위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이 참담하니 어찌 말로 하겠습니까? 또한 크고 작은 창고의 문은 제대로
된 것이 없고 각종의 문서와 장부는 거의 불타버렸습니다. 이민과 관예배官隸
輩들이 모두 흩어져서 남은 호수가 10집에 9집은 비어 있었습니다. 금탕金湯,
견고한 성과 웅장한 관부官府가 맥을 못 추고 하룻밤에 무너져서 이런 지경에 이
르렀습니다. 더욱이 이 관부는 주의 기읍岐邑과 한의 풍패豊沛74와 같고 묘전의
의관이 매우 가까우니, 영부營府 방어의 중요함을 비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대면하여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令을 내걸어 거주하는
자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고 떠난 자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도록, 특별히 위로
하고 구제하였습니다. 매우 불행한 이때를 맞아 서둘러 품어 보호하기를 마
치 불에 타는 사람을 구제하고 불길을 잡는 것처럼 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집을 지어 살게 하는 방법은 비록 강구하고 싶어도, 공사公
私간에 너무 가난하여 낼 곳이 없습니다. 이른 밤에 걱정하여 빙탄 炭이 마음
에서 교대합니다. 보좌하는 관리을 나누어 보내어 불탄 집을 일일이 직접 가
서 조사하게 한 뒤에 다시 치계하겠습니다.
6월 초 6일 [六月初六日]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성근金聲根이 조경묘와 경기전을 배봉陪奉하는 일로 전주
에 내려갔다.
75 화해(和解): 홍계훈이 전봉준에게 폐정을 제시하면 조정에 보고해 시정하겠다는 제의로 화약을
맺은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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