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77

해제

동비토록東匪討錄

본 자료는 제 1차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 대해서 전라도 각 지역으로부터


중앙정부가 받은 전보문과 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편집한 책이다. 편집자는
알 수 없으나 내용을 보면 의정부가 편찬의 주체임을 알 수 있다.
주요 내용으로, 1894년 4월 5일 전보로 접수된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시작
으로, 의정부에 도착한 전라관찰사, 충청관찰사, 양호초토사, 각 지역 수령의
전보 및 보고문을 접수순으로 배열하고 해당되는 일자日字에 국왕의 전교와
의정부의 초기를 수록하였다. 특히, 무장포고문과 농민군의 통문, 12조의 훈
령, 호남유생이 초토사招討使에게 보낸 원정문原情文 등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본 자료는 편집자가 전보 및 보고문을 일자별로 편집한 것으로, 당시의 전
투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원자료는 강릉의 이강융李康隆씨가 소
장하고 있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93

동비토록 東匪討錄

초 5일 술각의 전보 [初五日戌刻 電報]


동학배 본읍 포고문 무장東學輩本邑布告文茂長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인륜人倫이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은 인륜 중에 제일 큰 것으로 임금이 어질고 신하는 곧으며
아버지는 자애慈愛롭고 자식은 효성스러운 뒤에야 나라와 집안을 만들 수 있
고 끝없는 복에 다다를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신神처럼 밝고 성인처럼 슬기로워서 현명한 신하가 보좌하면 요순堯舜의 교화
와 한나라 문제와 경제의 정치를 날을 꼽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신
하는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녹봉祿俸만을 도둑질하며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하면서, 충직한 선비의 말을 ‘요언妖言’이라고 하고 정직한 신하를
‘비도匪徒’라고 한다. 그래서 안에서는 나라를 보필할 인재가 없고 밖에서는
백성을 침탈하는 관리가 많아서, 인민人民의 마음은 날로 더욱 변하였다. 집
에 들어가서는 삶을 즐겁게 할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몸을 보전할 계책이
없는데, 학정虐政이 날로 심하여 원성이 서로 이어졌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
아버지와 자식의 윤서倫序, 상하上下의 분별이 마침내 무너져서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펼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멸망한다”라고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하다. 공경公卿이하부터 방
9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백方伯과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대부분 자


신을 살찌우고 집안을 윤택하게 하는 꾀만을 도모한다. 관리를 선발하는 과
거를 재물을 낳는 길로 보고 시험에 응시하는 곳을 교역交易하는 장소로 만들
어, 허다한 뇌물을 임금의 창고에 들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창고를 채운다.
나라에 빚이 쌓여도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여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다. 팔도八道가 어육魚肉처럼 죽었고 백성들이 도
탄塗炭에 빠진 것은 수령의 탐학에 참으로 이유가 있으니, 어찌해서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피폐해
진다. 그런데도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향제鄕第를 세워 자신만을 온전히 할 방도를 도모하며 단지 녹봉과 자
리를 도둑질하니, 어찌 이치에 합당하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
遺民으로 임금의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있으나, 국가의 위
태로움을 앉아서 볼 수가 없다. 팔도가 마음을 함께하고 모든 사람들이 의논
하여,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생사生死를 맹세하였다.
지금의 상황이 비록 놀라움에 이어지고 있으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
지 말고 각자 그 생업을 편안히 하고 태평성대를 함께 축원하면서, 날마다
달마다 모두 임금의 교화를 아름답게 여긴다면 매우 다행스럽겠다.

초 5일 오시 완영의 전보 [初五日午時 完營電報]


정부政府가 부안扶安 교임校任의 품목稟目 을 보니, “어제 오시午時, 오전 11 오후

1시경에 동도東徒 1,000여 명이 원평院坪에서 와서 본읍本邑, 부안에 모인 무리와


합세했는데, 칼과 창이 삼엄하고 포를 쏘아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갑자기 동
헌東軒에 들어와서 본관本官을 포위하고 군기軍器를 빼앗았습니다. 일의 형세가
황급하여 본 수령은 첩보牒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엄중히 영군
동비토록 東匪討錄 95

營軍1에 지시하니, 기한 내에 추격하여 토벌하고 단속하라.

완백 [完伯]
정부가 지금 고산高山의 보고를 보니, “오늘 아침에 문루門樓밖의 기둥에 방
榜을 내걸었는데, ‘금마목사金馬木蛇에서 초순에 점심을 먹었다. 제 2번째 줄에
는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4월 5일 신시申時, 오후 3시 5시에 고산을 지나갈
것이니 각자 짚신 1 켤레와 돈 1 냥씩을 미리 준비하라. 천명天命을 어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잘 알아서 거행하라. 제 3번째 줄에는 동도대장東徒大
將 서徐의 서명이 있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일일이 체포하고 그 형편을 지체 없이
빨리 보고하도록 제송題送2한다.

완백 [完伯]
동도가 원평에서 모였다. 영군營軍이 오늘 114명을 사로잡았고, 병사를 사
방으로 나누어 뒤쫓아 체포하였다.

초 6일 [初六日]
동도가 부안의 동헌에서 본읍 뒤의 성황산城隍山에 옮겨와서 주둔하였는데,
5개 읍에서 온 자가 모두 수만 명이 되었다. 해당 수령은 놀라서 가만히 있고
군대를 출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주족走足이 탐문해 온 것을 보니, 잠시

1 영군(營軍): 전주에 둔 친군영인 무남영(武南營)을 말한다.


2 제송(題送): 상급 관아에서 어떤 취지나 지령(指令)을 공문서에 적어서 하급 관아로 보내는 것을 말
한다.
9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영군營軍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 연이어 초토사招討使에게 지시하여 군대 200명


이 어제 신시申時에 먼저 배에서 뭍으로 내렸고 연이어 1,300명이 도착하였다.

초 7일 완백 [初七日 完伯]
5일 사시巳時, 오전 9 11시에 진잠鎭岑의 평민 수천 명이 일제히 모여 동도東徒
의 집 9채를 부수어 태워버리니 동도들도 통문을 보내 모두 모으려고 했기
때문에 평민과 동도를 모두 잡아들이고 엄중히 지키며 단속할 것을 지시하였
습니다. 제송하기를, “영진營鎭의 교졸校卒을 나누어 보내어 잡아들이도록 하
라. 지금 임금께 아뢰면서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다는 염려가 없지 않을 듯
하여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초 7일 진시 [初七日辰時]
저들이 부안에서 고부古阜로 향하여 고부의 도교산道橋山 위에 집결하였는
데, 그들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경군京軍, 장위영군이 오늘 새벽에 완부完府에 도
착할 수 있다고 하여 지금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 7일 신시 [初七日申時]
저들이 고부의 도교산 위에 자리 잡고 아군我軍의 고립되고 허약한 점을
엿보아 갑자기 아군을 습격하여 겹겹이 포위되어 곤경을 겪고 있어 더욱 통
탄스럽습니다. 경군京軍이 오늘 새벽에 완부에 도착한다고 해서 지금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 9일 금백 [初九日 錦伯]
지금 회덕懷德의 보고를 받아보니, “동도 몇 천 명이 어젯밤에 관정官庭을
동비토록 東匪討錄 97

점거하고 군기를 빼앗아갔다”라고 하니, 그 정세를 더욱 헤아리기가 어렵다.


또한 영교營校의 회답을 들어보니, “저들이 공주公州의 사오沙塢 감송甘松에 모
였다가 군상하리軍上下里 회덕 선창先蒼 등지를 쳐부수고 진잠으로 향하였
다”라고 한다.
진잠읍의 형편이 매우 소홀하니 은진恩津을 지키는 병정을 보내어 진잠읍
을 지키게 하라. 지금 계문하면 금백錦伯이 소홀함을 모면하기 어렵다. 그래
서 초토사에게 전보로 통보하니, 경군을 적절하게 헤아려서 대관隊官을 정하
여 그들로 하여금 공주에 파송하여 바로 보고하게 하라.

초 9일 초토사의 전보 [同日 招討使電]


전주에 도착하니 적의 기세가 매우 대단하여 말로 타일러서 그만두게 할
수가 없어 처분을 기다립니다.

초 9일 금백 [初九日 錦伯]
지금 정탐영교偵探營校의 치보馳報를 받아보니, “동도 최법헌崔法軒이 통문을
돌려서 말하기를, ‘호남에서 모두 죽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다. 6일에
청산靑山의 소사전小蛇田에 모이자’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그 정세가 더욱 심
해져서 매우 걱정스럽다. 지금 다시 청산 등의 읍에 관문關文으로 지시한다.
아전과 백성을 모집하여 특별히 엄중하게 지켜라.

초 9일 완백 [初九日 完伯]
지금 정읍井邑의 보고를 받아 보니, “7일 술시戌時, 오후7~9시에 읍내에 들어와
장청將廳3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동도 6명을 풀어주었고, 다시 군기 창고를 부
수어 창 칼 기계器械 등을 가져갔으며 동헌東軒의 각 청廳에 있던 아전들의
9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가산家産과 부상負商 접주들의 집을 모두 부수고, 해시亥時, 오후 9시 11시에 고부


삼거리三巨里로 향하였습니다. 갈수록 원통스러우나 초토사는 아직 행진行陣하
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8일 술시 초토사의 전보 [初八日戌時 招討使電]


지금 정읍에서 어제 보낸 보장報狀4을 보니, “저들 수천 명이 그 현에 바로
들어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9일 상동 [初九日 上同]
지금 금백의 전보를 보니, “저들 몇 천 명이 회덕의 군기를 빼앗고서 진잠
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사로잡은 비류匪類 는 80여 명이고, 어젯밤에 몇 명
을 취초取招5하여 그 전말을 상세히 안 자는 처결을 하려고 하며 지금 진영을
관아의 서쪽 차마산車馬山 아래로 옮길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초 9일 초토사 [初九日 招討使]


원세록元世祿에게 행군하여 태인泰仁 흥덕興德 정읍 장성長城 등지에 한
무리의 병사들을 보내 정탐하는 대로 보고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지금 금백
의 전보를 보니, “저들 중에 최법헌이 윤통輪通하여, 6일에 청산의 소사전에
모여 회덕의 군기를 빼앗았다”라고 합니다. 정읍의 정탐꾼이 막 도착했는데,
“동헌과 아전들의 집 및 부상의 집을 부수고 바로 고부로 향하였으며 가는

3 장청(將廳): 군아(郡衙)와 감영에 속한 장교가 근무하던 곳을 말한다.


4 보장(報狀): 하급 관아에서 상부 관아에 올리는 공문을 말한다.
5 취초(取招): 죄인을 문초하여 범죄사실을 자백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99

곳마다 약탈을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선兵船을 출발하여 다시 돌아와서


오늘 지휘를 합니다.

초 10일 금백 [初十日 錦伯]


회덕의 일은 직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진실로 모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들이 수천 명씩 각처에 주둔해서 각 읍에 지시하여 아전과 백성을 모집하
였으나 모두 오합지졸烏合之卒이고, 본영의 포군砲軍도 거의 없습니다. 병영兵營
에서 징발한 병정은 200명이고 이 밖에 다시 징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
들의 기세가 이와 같고 관군官軍의 수는 적은데, 길을 나누어 토벌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경군을 나누어 보내는 일은 전보로 통지합니
다. 초토사도 저들을 보지 않았으나 반드시 그 수가 점점 늘어나 하루 종일
근심이 될 것입니다. 충분히 헤아려서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초 10일 초토사 [初十日 招討使]


지금 완영의 우영관右領官 이경호李景鎬가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저들에게
돌진하여 수십 명을 베었으나, 끝내 해를 입어 완백이 장례葬禮를 치르려 시
신을 싣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평소 절개가 감탄할 만하다.

초 10일 완백 [初十日 完伯]


지금 태인의 보고를 받아 보니, “어제 유시酉時, 오후 5 7시에 도착하여 받은 정
읍 공형公兄의 문장文狀에, ‘동도가 정오에 흥덕에 머물렀다가 고창高敞과 무장 등
지로 향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정탐한 보고를 받아 보니,
10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동도가 어제 노산령蘆山嶺, 갈재을 넘어 나주羅州로 향하였다”6라고 하였기


때문에 초토사와 함께 상의하여 관문으로 지시한다. 기한 내에 체포하고 엄
중히 단속하라.

초 11일 초토사 [初十一日 招討使]


김시풍金始豊은 동학의 괴수魁首로 방백을 위협하여 외람되게도 영장營將 자
리를 얻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보답해야 하나 고관高官이 되려고 사람을 모
으고자 선동하였고, 앞에서는 싸우고 뒤로는 물러나기로 거짓으로 약속하였
습니다. 경향京鄕에서 뒤를 밟아 오늘 잡아서 가두었습니다. 술시戌時에 죄를
문초하는 자리에서 불손한 말이 많아 절대로 신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통분을 참지 못하여 막 형장刑杖을 시행하려고 할 때에 그가 힘을
써서 갑자기 일어나니 포승 끈이 저절로 끊어졌습니다. 병정의 군도軍刀를 빼
앗아 좌우로 제멋대로 움직이고 큰소리로 그들의 무리를 부르니, 수십 명이
손에 창과 칼을 가지고 담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그 때의 광경은 법도가 없
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결박하여 가두었습니다.

11일 완백 [十一日 完伯]


흥덕재관齋官7의 보고에, “저들이 그저께 바로 읍내에 들어와서 군기를 탈
취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고창으로 향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고창 공형
의 보고에 의하면, “그저께 술시戌時에 동도가 흥덕에서 바로 본읍本邑, 고창에

6 동학농민군은 장성에서 갈재를 넘어 정읍으로 올라왔으니 나주로 향한다는 것은 오보이다. 1차 봉


기시기 농민군은 나주에 입성한 적이 없었다.
7 재관(齋官): 재랑(齋郞) 참봉(參奉) 등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01

들어와 갇혀있던 자들과 같은 무리 7명을 옥을 부수어 풀어주었고, 현령을


지낸 동부東部의 은대정殷大靜 집에서 가산을 부수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군기를 탈취하고 장적狀籍을 찾아내어 검사하며 인부印符를 빼앗으려고 하였
습니다. 본 읍의 수령은 간신히 위험을 피하였고, 그들은 어제 무장으로 방향
을 돌렸습니다”라고 하였다.

11일 금백 [十一日 錦伯]


회덕에 주둔한 동도를 토벌할 것을 출정한 영군관營軍官과 청영淸營의 대관
에게 엄중히 지시하였습니다. 지금 군관의 수본手本을 받아 보니, “어젯밤에
저들 가운데 귀화하여 흩어졌다고 하는 자가 1,000여 명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고, 연이어 대관의 수본을 받아 보니, “옥천沃川에서 길을 떠나 회덕에
도착했는데 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砲를 쏘며 돌진하니 저들이
이전에 탈취한 군기를 버리고 도망갈 때에 2놈은 사로잡아 우선 진중陣中에
가둬두고, 총 44자루 창 41자루 칼 60자루 탄환 수천 개 활 3자루 화
살 300발 도끼 철추鐵椎 5자루를 회수하여 모두 그곳 현에 맡겼습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군기를 제대로 거두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상세히 알 수는 없
으나 몇 놈을 잡은 것은 또한 다행스럽습니다.

초 10일 초토사 [初十日 招討使]


처음에 선동한 비류와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인심을 어지럽힌 자를 몰
래 정탐해서, 3놈에게 정법正法을 시행하여 2개 도道의 인심을 안정시켰습니
다. 감히 아룁니다.
10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1일 금백 [十一日 錦伯]


회덕의 일은, 옥천에 주둔한 병정을 해당 읍에 옮겨 동도 몇 백 명을 격파
하고 잃어버린 군기를 도로 빼앗았으며 동도 2놈을 사로잡아서 결박하여 진
중陣中에 가두었습니다. 또한 순영巡營, 순무영의 지시에 따라 진영을 유성儒城으
로 옮겼고 동도의 나머지 무리는 흩어져서 도망하였습니다.

12일 진시 완백 [十二日辰時 完伯]


정부가 지금 무장에서 10일에 보낸 보고를 보니, “해당 수령이 막 부임하
려고 할 때에, 유향소留鄕所의 문보文報에 의하면, 감영이 장정을 모집하여 징
발하면서 저들 44명을 잡아 가두었는데, 9일 사시巳時에 동도 10,000여 명이
갑옷을 입고 각자 창과 총을 지니고 본 현에 들이닥쳐서, 동헌과 각 건물을
모두 부수고서 잡아 가둔 자들을 풀어주었고 읍내의 민가에 불을 질렀으며,
본 읍의 수령은 아직 부임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어느 곳으로 갔는지를 화급하게 보고하도록 제송하였습니다. 저들을 잡아 가
둔 곳에서 늘 이처럼 독을 드러내고 그 흉악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 많아 더
욱 분통이 더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11일 진시 완백 [十一日辰時 完伯]


휴가를 받은 수령이 있는 도내道內의 흥덕 광주光州 광양光陽 익산益山
정읍 곡성谷城과 수령이 아직 부임하지 않은 용안龍安 무장 장성 금산錦
山 제원濟原에 재촉하여 내려 보내 주십시오.

11일 금백 [同日 錦伯]


전보電報의 내용은 잘 알았습니다. 상경上京한 수령은 바로 청산 아산牙山
동비토록 東匪討錄 103

회인懷仁 홍주洪州 연원連原 평신平薪으로 화급하게 재촉해서 내려 보내 주시고, 공


주 옥천 청진淸鎭 등의 아직 부임하지 않은 곳도 빠른 시일 안에 임소에 도착
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2일 초토사 [十二日 招討使]


지금 무장현의 보고를 보면, “9일에 갑자기 들이닥친 저들이 동헌과 부근
의 촌락에 불을 질렀고 그곳 현감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인 유대留隊의 통지에, 저들이 불어나는 것이 날로 더하여 <결락> 곳곳마다
사악한 무뢰배가 저들에게 들어가서 고립된 병사도 움직이기 어려워 매우 근
심스럽습니다.

12일 [十二日]
의정부議政府의 초기草記에, “지금 충청 감사의 전보를 보면, 회덕에 모인 무
리는 모두 흩어져서 귀화했다고 합니다. 지금 농사가 한창인 때에 각 해당
읍으로 하여금 농민을 위로하게 하고 각각 생업을 안정시켜 농사 때를 잃어
버리지 않게 조치하도록 호남과 호서의 관찰사에게 상세하게 관문으로 지시
하십시오”라고 하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윤허한다. 편안함을 쫓고 위험을
피하는 것은 인간의 평상마음이다. 근래에 모인 백성들이 어찌 모두 그 생업
을 즐겁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큰 잘못을 기꺼이 저지르려고 했겠는가? 이
것은 모두 탐관오리의 침학으로 스스로 안도하지 못한데서 연유한다. 떠들썩
하게 군대를 만들어 마침내 소요에 이르렀다가 바로 귀순한 자는 그 행적이
비록 매우 괘씸하지만 그 실정은 모두 불쌍하다. 관찰사가 특별히 위로하게
하고 각각 제자리에 돌아가게 하라. 혹시 재산이 흩어지고 집이 없는 자가
있으면 각 해당 지방관은 방책을 세워 구제하여 거처할 수 있게 하고 자무지
10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도字撫之道8를 다하여 내가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보호하려는 지극한 뜻을 보


이도록 특별히 지시한다. 혹시라도 다시 무리를 지어 여전히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백성으로서 용서할 수가 없다. 해당 관찰사와 초토사는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뜻을 인민에게 널리 알리고 묘
당廟堂에서는 글을 지어 관문으로 지시하라”고 하였다.

4월 13일 [四月十三日]
의정부의 초기에, “지금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전보를 보면, 완영우영관 이
경호가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저들에게 돌진하여 수십 명을 베었다고 합
니다. 그 의로운 용기가 매우 가상하니 규례에 따라 포상하는 처사가 있어야
합니다. 병조참의兵曹參議를 특별히 추증追贈하시고 시신을 가지고 돌아가 장례
를 치룰 때에 특별히 돌보아주도록 해당 관찰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
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윤허한다. 용감하게 돌진하여 군
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죽는 데에 이르렀다는 것을 들으니 슬프다. 특별
히 병조참의에 제수하여 조정에서 규례에 따라 포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
라”고 하였다.

4월 15일 [四月十五日]
의정부의 초기에, “명령을 받들어 안핵按 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급박
합니까? 그러나 처음에는 병을 핑계대고 바로 길을 떠나지 않다가 끝내 소요
를 만나 돌아오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일이 소용없게 되었으니 누가 그

8 자무지도(字撫之道): 사랑하며 어루만진다는 뜻으로 지방관이 백성을 잘 보살피라는 의미이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05

허물을 고집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체事體를 고려하면 경고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고부군 안핵사 이용태李容泰9에게 견책하여 파직하는 형벌을 시행하
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시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13일 진시 완백 [十三日辰時 完伯]


영관領官 이하의 사망자는 바로 계문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연이어 해당 지
방관에게 지시하여 상세하게 적간摘奸10 해보니 모두 114명이었고, 그 밖에
감영에서 알아 본 이들은 모두 평민병사 보부상 수성군守城軍 각 읍의 포
군砲軍 백정들인데 흩어져서 모이지 않아 아직 실제 죽거나 산 자의 숫자를
구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수계修啓가 이 때문에 지체되었습니다. 지
금 각각 해당 읍에 감결甘結을 보내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각 읍
의 군기는 대부분 빼앗겨서 지금 양쪽 보부상에게 내어 줄 것이 없습니다.
군기를 빼앗기지 않은 읍은 지금 그 읍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황토
산黃土山이 바로 도교산道橋山입니다. 이미 계문하였으니 저들의 실정을 정탐하
는 대로 수계하겠습니다. 경군의 군량은 공곡公穀과 공전公錢에서 나눠 줄 생
각입니다.

13일 해시 초토사 [同日亥時 招討使]


심영沁營의 병사는 언제 내려옵니까? 군도軍刀 10자루와 좋은 품질의 자기
황自起 을 내려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원세록을 어제 소환하고 지금 이두

9 이용태는 고부에 와서 사실 조사를 한다는 구실아래 혐의자를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약탈 방화


일삼아 재봉기를 유발하였다.
10 적간(摘奸): 잘못된 실정을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10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황李斗璜 이학영李學永으로 하여금 2대隊의 병사를 인솔하게 하여 금구金溝


태인 정읍 고창 흥덕 등지에 보냈습니다.

15일 진시 전라감사의 비밀전보 [十五日辰時 暗電惠堂宅完伯]


순창 수령의 협록11淳昌 夾錄

이 달 3 4일 사이에 동비東匪가 금구와 태인 땅에서 부안과 고부 등지로


후퇴하여, 관군이 추격해서 고부와 정읍의 경계 지역인 승두산僧頭山, 두승산12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 산의 모양이 쟁반과 같았습니다. 저들이 산 위에 진을
치고 밖으로는 흰 베로 둘러싸고 몰래 토성土城을 쌓은 뒤에 안에 마른 풀을
깔아 그 아래에 몸을 숨기고 포를 쏘았습니다. 관군이 진을 친 곳은 저들과의
거리가 동서東西로 몇 궁弓13에 지나지 않는 곳으로 지형이 조금 낮았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저들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아래로부터 기어 올라와
서 죽을힘을 다해 우리 관군을 공격했는데, 관군은 본래 오합지졸이라 갑자기
무너지는 형세를 맞아 조수鳥獸처럼 흩어지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죽임을 당
한 자는 그 수를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대체로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서 사
람들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고 군의 사기는 다시 진작하기가 어렵습니다.
태평성대가 오래되어 병사가 병사답게 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 군대
를 맡은 자가 일에 직면하여 두려워하거나, 도모하기를 좋아해서 공을 이루
려는 자를 얻지 못해서입니까? 이것은 오히려 적의 기세가 대단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어서 후환이 끝이 없습니다. 그들이 본래 3,000 4,000명이 되지

11 협록(夾錄): 편지 속에 따로 넣은 작은 쪽지에 적은 글을 말한다.


12 승두산(僧頭山): 전투지역은 승두산이 아니라 그 아래의 황토재였다.
13 궁(弓): 원래는 과녁까지의 거리를 재던 단위였는데, 나중에는 땅을 재는 단위로 사용되었다. 1궁
은 6자나 8자이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07

않았으나 아마도 이때부터 수가 더해진 듯합니다. 더욱이 도처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늙은이가 골짜기에 쓰러지고 장정은
길을 헤매이니 어찌 떠나가서 도적이 되지 않을 것을 알겠습니까?
호남 우도右道의 여러 읍은 빈 곳과 같아서 만약에 조정에서 특별히 안무按
撫하는 방도를 내리지 않는다면, 지혜로운 자도 다스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들이 부적과 도참圖讖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서로 불러서 무리를 모으며, 거
짓으로 왜와 양을 배척한다는斥倭斥洋 명분을 내걸고 수령의 탐학에 허물을 두
었습니다. 하루 아침저녁의 이유가 아니어서 이것은 왕법王法에 있어 그 죄악
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하기에 부족한 병력을 어찌 하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한편으로 방백의 소임은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
며, 탐학한 수령은 징치懲治하지 않으면 안되며, 세금을 거두는 폐단은 고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뒤에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무사宣撫使를 급히 파견하여 군병軍兵으로 대처하고 의리로써 회유
하며 은혜로써 어루만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끝내 소란을 일으킨 뒤에야 토
벌을 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혹시 병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유화책을 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무리를 해산시킨 뒤에야 우두
머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궁박한 도적이 되었는데, 급히 압박하
면 그 형세가 서로 얽혀서 풀기가 어렵습니다. 느슨하게 하면 그 마음이 교
만해져서 숨지를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면하기가 어
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희 고을의 사정을 말한다면, 복역하는 100명의 포
군砲軍 중에 도망간 자는 수십 명에 불과하나 그 나머지의 생사는 거의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군기는 거의 없어져서 남은 것이 없고 비록 적이 문
밖에 있어도 포 하나도 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고을들이 대개 이와 같은데
어찌 하겠습니까?
10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오시午時에 무장 수령의 편지를 받고 다시 흥덕 공형의 문장을 받아 보았는


데, “저들이 무장에서 2개의 부대로 나누어 영광靈光으로 방향을 바꿨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영광에서 인편으로 보낸 회답을 보니, “그곳 수령은 식량
을 싣고 배에 올라 칠산七山 바다로 피신하였고, 흉악한 무리는 성내에 집결
하여 군기와 화약을 모두 제멋대로 빼앗았으며 성문을 굳게 잠그고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군량은 성 밖의 조정언曺正言과 김진사金進士 두 집에
배당하였습니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거나 협박하는 일이 많았습
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의 계책은 성을 점거하여 완강히 저항하려는 계
획이어서 사정이 더욱 흉악합니다.

15일 완백 [同日 完伯]


정부가 지금 영광 수령의 보고를 보니, “12일에 10,000여 명의 무리들이
성안에 난입하여 거주하는 백성이 흩어졌으나, 저들을 토벌할 계책이 없어
황송스러움을 견디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15일 정부초기 [同日 政府草記]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초토사가 인솔하는 장위영壯衛營의 병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미에 따라 대처하는데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심영의 병사 4초
哨14를 징발하여 심영의 병방兵房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해서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내려가 그들을 진무鎭撫하고 토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14 초(哨): 군제의 단위로 1초는 100명 가량 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09

16일 금백 [十六日 錦伯]


정부의 전보로 보낸 관문은 읽어보았고, 지금 글을 지어 보낸 관문은 받아
보았습니다. 저들이 아직 집결한 곳은 없으나 청산에 다시 모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영의 군교軍校를 보내어 정탐한 뒤에 다시 보고하
겠습니다.

16일 해시 완백 [十六日亥時 完伯]


정부에서 지금 전운사轉運使가 초토사에게 보낸 문서를 보면, “한양선漢陽
船15이 곡식을 싣고서, 13일에 영광 구유포九峀浦를 떠났는데, 14일 유시酉時에
동도 10,000명이 법성포法聖浦 앞뒤의 산과 구유포 앞뒤의 산에 진을 치고 있
다가 각기 창과 칼을 지니고 포를 쏘며 한양선에 난입하여 배판을 부수었습니
다. 사공과 격군, 그리고 일본인을 갑자기 구타했으며, 인항仁港 위원委員16인
김덕용金德容와 그곳의 종인從人 강인철康人喆17을 결박해서 잡아갔습니다. 한양
선은 압류를 당하여 곡식을 싣지 못하고 그 날 군산항에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일이 매우 놀라워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16일 해시亥時 완백

16일 대신의 수차18 [十六日 大臣袖箚]


국가가 수십 년 전부터 백성의 힘이 이미 궁핍해지고 근본이 점점 동요하
여 호남의 소요가 있었는데, 바로 황지潢池의 반란과 솥 안에서 물고기가 노
니는 것이라고19 할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장수를 명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15 한양선(漢陽船): 홍계훈부대를 싣고 온 배로 법성포 세미를 싣고 가려고 이곳에 정박하였다.


16 인항위원(仁港委員): 인천에서 대일무역을 맡아보는 관리를 말한다.
17 강인철(康人喆): 앞의 자료 수록의 강인철(康寅喆)과 동일인물이다.
18 수차(袖箚): 임금을 뵙고 직접 바치던 상소를 말한다.
11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반역을 다스리려는 마음을 견지하였고, 저들도 대항하여 관군을 죽여서 스스


로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아는데 어찌 기꺼이 죽으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걱정하는 첫 번째입니다. 여러 날을 곁에서 들었으나 그들을 섬멸
했다는 보고는 없고, 관리와 장졸將卒이 완산성完山城 안에 모여서 한가지의 방
략도 없이 병사만 늘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걱정하
는 두 번째입니다. 우리에게는 1 명의 병사가 줄고 저들에게는 100배의 기세
가 더해져서 저들이 관군은 두려워할 것이 못되고 외국 군대는 말할 것이
못됨을 알면 비로소 나라를 경시하는 마음을 가져서 재앙이 더욱 심해질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걱정하는 세 번째입니다.
적은 병사가 많은 병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병법에서는 보통의 형세
입니다. 그러나 적은 병사로 많은 병사를 이긴다면 도리어 방략이 어떠하겠
습니까? 이미 호남의 반민叛民은 수만 명 이하가 아닌데, 진실로 방략方略이
없다면, 비록 날마다 병사를 보낸다고 한들 어찌 그 많은 반민을 감당하겠습
니까? 병사는 많은 데에 있지 않고 오직 그 병사를 운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빨리 문무文武를 두루 갖춘 자를 뽑아서 자격에 구애받지 말고 초모招募의 직
임을 맡겨, 기미에 따라 대처하고 계획을 세워 토벌한다면 경병京兵을 기다리
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 인재가 드물고 장략將略을 쓰는 자
는 더욱 어렵습니다. 반부병서半部兵書20를 읽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어찌
장대를 든 사람들을 걱정하겠습니까? 또한 그들을 토벌하고 위무하는 책임
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있지만, 일이 없으면 백성을 학대하여 소요를 낳고 일
이 있으면 벼슬을 버리고 자리를 떠나갑니다. 변변치 못한 효근效芹21을 바칠

19 부어지유(釜魚之遊): 솥 안에 있는 물고기가 노니는 것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것을 말한다.


20 반부병서(半部兵書): 병서를 숙독(熟讀)한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11

길이 없어 쓸데없는 걱정만 간절합니다.

16일 초토사 [十六日 招討使]


초토사협록招討使夾錄
동도가 날로 늘어나서, 정읍에서는 전주 감영의 병사와 보부상이 패하여
죽은 자가 200여 명이고, 부안과 흥덕에서는 군기를 빼앗겼으며, 그 밖의 여
러 읍도 많이 피해를 입은 연유는, 먼저 전보로 보고하였으니 다시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종적이 일정하지 않아서, 400 500명
또는 1,000 2,000명씩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고 동에 번쩍 서에 번
쩍하여 특별히 방향을 지정할 수가 없습니다. 군대를 모두 내어 추격해서 잡
으려고 하였으나, 허다한 군사들이 길을 왕래하느라 매우 피로하여 잠시 그
만두었습니다. 농번기로 매우 바쁜 때를 맞아 농민이 놀라서 생업을 잃어버
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우선 정탐꾼을 보내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피게 하
였습니다. 여러 읍에 관문을 보내서, 만약에 그들이 집결한 곳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게 하여, 적의 형세를 알고 난 뒤에 보내어 섬멸할 계획입니다. 붙잡은
비도 80명 중에서 어젯밤에 몇 명을 취초하였는데, 제법 전말을 상세히 아는
자는 기미를 보아 형벌을 시행할 것입니다. 지금 진영을 관아의 서쪽 차마산
車馬山 아래로 옮겼습니다.

18일 [十八日]
전교하기를, “전라감사의 후임에 외무협판外務協辦 김학진을 제수除授하니
지체말고 사조辭朝하라”고 하였다. 사알司謁에게 구전口傳으로 하교下敎하기를,

21 효근(效芹): 미나리를 바친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미나리는 자신의 정성을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다.
11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김학진은 하직 인사 전에 직무를 대리하고 그대로 일을 보라”고 하였다.

17일 신각 금백 [十七日申刻 錦伯]


전교하기를, “대개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있지
않은가? 만약에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여 백성에게 근심이 없게 하고,
스스로 그 밥을 달게 먹고 그 삶을 즐겁게 여기게 한다면, 비록 어지러운 얘
기로 권유하여 소란스럽게 하더라도, 어찌 기꺼이 하겠는가? 여러 읍들이 다
스려지는 여부를 감찰하여 지방관의 직책을 올리거나 내쫓을 것이다. 처음부
터 탄압하여 따르게 해서 이곳에 이르게 할 수 없고, 또한 어루만져서 다스릴
수가 없다. 바로 실정을 조사하여 치계馳啓하라. 심상하게 여겨 날을 보낸다
면, 방면方面을 맡긴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우선
간삭刊削22의 형벌을 시행하라.
남쪽의 백성이 소요를 일으킨 것은 처음에 고부에서 연유하여 점차로 나
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한번 실정을 조사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전 군수 조병갑趙秉甲은 왕부王府에서 금부도사를 파견하
여 구격具格23해서 잡아오라. 안핵의 본뜻이 얼마나 긴급한데, 지금까지 사계
査啓24도 없고 도리어 더욱 소요를 초래하여, 일이 중지되고 어지러운 것도
많다. 고부군 안핵사 이용태에게 찬배竄配의 형률을 시행하라. 그리고 관찰사
는 소요를 일으킨 읍의 수령을 낱낱이 조사하여 논계論啓25하게 하고, 조정도
그 경중을 살펴 빨리 합당한 형률을 시행하여 민심을 위로하라. 이런 뜻을

22 간삭(刊削):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23 구격(具格): 죄인에게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우는 것을 말한다.
24 사계(査啓): 사실을 조사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것을 말한다.
25 논계(論啓): 신하가 임금에게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13

즉시 민인에게 펴서 알리라. 이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관문으


로 지시하라.
전교하기를, “전라 감사의 후임에 외무협판 김학진을 제수하니, 하루빨리
사조하라”고 하였다.
지금 진잠의 보고를 받아 보니, “저들이 이미 출발하여 병정이 계속 이어
져서 매우 근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고, 출정한 군관과 탐교探校가 돌아와서
한 보고를 받아 보니, “청산과 옥천 등지에서는 아직 움직임이 없고 귀화하
는 이도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종적은 종잡을 수 없고 정상
은 예측하기 어려워서, 전부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형편으로 말
씀을 드리면 다수의 군병이 오랫동안 출정하여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영문營門의 병사와 상정商丁, 보부상에게 지금 돌아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연이
어 전라감사의 전보를 받아보니 호남의 소요가 더욱 심하다고 하여 본도의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에 청주 진남영의 병사 200명을 은진과 옥천
2 개 읍의 요충지에 나누어 보내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구유具由26하여 계문
하니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식량을 다시 조달하는 일을 과연 계속 잇는
것이 어려워서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18일 완백 [十八日 完伯]


초토사가 오늘 저들이 모인 영광 땅으로 진군하였습니다.

18일 완백 [同日 完伯]


정부가 영광 공형의 문장을 보니, “영광 수령이 세미稅米일로 9일에 전운소

26 구유(具由): 모든 사유(事由)를 열거하여 보고한다는 뜻이다.


11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轉運所로 갔는데, 저들이 관아가 빈 것을 이용하여 12일에 성안으로 난입하였


습니다. 본읍의 수령은 아직 관아로 돌아오지 않았고, 저들은 성안에 집결하
여 다른 조처를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계문을 올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9일 [十九日]
전교하기를, “호남에 출정한 병사들이 여러 날 동안 노숙露宿을 했는데, 질
병은 면할 수 있고 또한 먹는 것이 어려운 걱정은 없었는가? 마음에 걱정이
되어,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위문하게 하고 특별히 내탕금內帑金27 10,000
냥을 내리니, 초토사가 잘 헤아려서 나누어 주게 하라.

20일 체직된 완백 [二十日 遞完伯]


지금 함평咸平의 보고를 받아 보니, “16일에 동도 6,000 7,000명이 영광에
서 본현으로 곧바로 들어왔습니다. 깃발을 들고 포를 쏘며 각각 총과 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말을 탄 자가 100여 명이었고, 갑옷을 입고 전립戰笠을
입거나 물든 두건을 두르고 칼춤을 추기도 하였습니다. 읍내에서 충돌하여
바로 동헌으로 들어갔는데, 이교吏校 노령奴令 수성군 100여 명이 막았으
나, 바로 관문官門이 깨어질 때에 삼반三班의 과반수가 창에 찔렸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각 건물에 머무르며 자신들이 먹을 쌀을 요민饒民에게
할당하였습니다. 공형을 잡아가서 그들을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다
고 하여 곤장을 때렸습니다. 포흠逋欠을 한 아전의 성명과 각각의 문서와 장
부를 거두어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27 내탕금(內帑金): 국가재정에 포함된 것이 아닌 국왕이 직접 소유한 재산으로 궁궐내의 창고에 넣


어둔 재물이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15

20일 초토사가 대신댁에 전보 [招討使電大臣宅 二十日]


19일 오시午時에 정읍현에 이르러 영광군수의 보고를 받아 보니, “저들은,
경군이 계속하여 나누어서 전진한다는 소문을 듣고, 16일 진시辰時에 10,000
여 명이 함평으로 퇴각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일 흥덕에 주둔하여
퇴로를 끊고, 나주목사에게 엄중히 요충지를 지키도록 지휘하였으며, 심영의
군대가 뭍에 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과 끝을 차례대로 갖추어
아뢸 계획입니다.

같은날 초토사가 대신댁에 전보 [招討使電大臣宅 同日]


19일 신시申時에 나주] 목사의 보고를 받아 보니, “16일에 저들이 함평에
들어와 창궐猖獗하여 나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주에서 잡은
2놈을 옥에 가두고 더욱 잘 지키도록 지휘하였습니다. 초토사가 대신댁에 전
보를 합니다.

21일 가도사의 전보 [二十一日 假都事電]


정부가 영광 군수의 치보에 의하면, “동도 10,000여 명이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19일에 성에 들어와서 군기고의 문을 부수고 무기 등의 물건을 무수
히 가져갔으며 공해公 의 문서와 장부를 찾아내어 모두 불태웠고 요호饒戶에
게서 전곡錢穀과 말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15일에는 법성포에 짐을 실러 온
전운轉運 위원委員 2명이 저들에게 잡혀서 무수히 맞았습니다. 16일 아침이 지
난 뒤에 수성통장守城統長 정만기鄭萬基도 그들에게 잡혔는데, 결박하여 데려가
다가 중도에서 총을 쏘아 죽이고 바로 함평으로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정탐기 [偵探記]
동도대장東徒大將이 각 부部의 대장隊將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기를, “늘 적
11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을 상대할 때마다 우리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자가 공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절대로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늘 행군하며
지나갈 때에 절대로 사람과 가축을 해치지 말라. 효제孝悌와 충성스런 행동을
한 사람이 사는 마을의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군대를 훈계하는 12개조 호령 [十二條戒軍號令]


一. 항복한 자는 아끼고 대우한다.
一.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一. 탐욕스런 자는 내쫓는다.
一. 따르는 자는 공경하여 복종시킨다.
一. 배고픈 자는 음식을 준다.
一. 간특하고 교활한 사람은 그만두게 한다.
一. 도망가는 자는 추격하지 않는다.
一.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一. 반역하는 자는 잘 타이른다.
一. 아픈 자는 약을 준다.
一. 불효자는 죽인다.
이상의 조항은 우리들이 배우고 실천하는 근본이다. 만약 명령을 어긴다
면 지옥에 가둘 것이다.

4월 초 4일 동도가 법성포의 아전과 향임에게 보내는 통문 [四月


初四日 東徒通文法聖吏鄕]
임금이 위에 계신데,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민폐의 근
본은 아전의 포흠에 있고, 아전 포흠의 근본은 탐악한 관리에서 연유한다. 탐
동비토록 東匪討錄 117

악한 관리가 탐악을 저지르는 것은 집권자의 욕심에서 연유한다. 아! 어지러


움이 극성하면 잘 다스려지고 어둠이 변하면 밝아지는 것이 불변의 이치이다.
지금 우리들은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처지인데, 어찌 아전과 백성의
구별이 있겠는가? 그 근본을 살펴보면 아전도 백성이다. 각 공문과 장부에서
아전의 포흠, 민폐의 조건을 모두 보고하면 당연히 구별하는 방도가 있을 것
이니 걱정하지 말고 가져오라. 시각을 어기지 말고 유념하여 잘 알아서 하라.
제중의소濟衆義所 도서圖書에 도장을 찍은 것은 수령의 인신印信과 같다.

26일 [二十六日]
우리들의 오늘 거사는, 위로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호하고 아래로는 백성
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으로써, 죽음을 각오하고 맹세했으니 두려워하여 동요
하지 말라. 앞으로 고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을 보면, 아전과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전운영轉運營, 균전관均田官28이 폐단을 제거하려다가 다른 폐단을 생기게
하는 것, 각 시정市井, 시장에서 분전수세分錢收稅29하는 것, 각 포구浦口 선주船主
의 강탈, 외국 잠상潛商이 곡식을 구매하는 것, 소금에 대한 시장세, 각종의
물건을 도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 백지징세白地徵稅와 송전松田을 경작하거나
묵히는 것, 와환臥還30으로 밑천을 뽑아내는 것 등으로 각종의 폐단을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우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가지 생업을 가진 백성들이 한마음
으로 협력하여 위로는 국가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빈사濱死상태의 민생을 안

28 균전관(均田官): 농지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된 관리를 말한다. 또한 균전사(均田使)


는 묵은 토지를 개간하여 일정기간 그 조세를 면제하는 소임을 맡은 임시 벼슬아치를 말한다.
29 분전수세(分錢收稅): 물건값에 따라 세율을 정하여 거두어 들이는 잡세로. 곧 분세(分稅)를 말한다.
30 와환(臥還): 관아에서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던 환곡을 가을에 거두어들이지 않고 이자인 모곡(耗
穀)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11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정시킨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22일 정부가 아뢰기를, “죄인 조병갑을 조사하여 봉초捧招31를 올려야 하지
만 판의금判義禁 한장석韓章錫과 동의금同義禁 이면상李冕相이 모두 신병身病이 있
고, 지의금知義禁 서정순徐正淳은 시소試所, 시험 장소에 나가 지의금知義禁 이용익李
容益 1명만 있었기 때문에 개좌開坐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직책의 교체를 허락한다. 전망前望을 들이라”라고 하였다. 판의금에 이돈하
李敦夏를, 지의금에 김병익金炳翊을, 동의금에 윤성진尹成鎭을 낙점하였다.
의정부의 초기에, “균전사均田使를 파견했으나 아직 일을 끝내지 못했습니
다. 그러나 지금 남쪽의 소요를 생각할 때에 주전廚傳32의 역役을 더한다면,
이런 때에 백성과 읍이 받는 폐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균전사
를 줄이는 일을 해당 관아와 해당 도에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의금부의 초기에, “이용태를 김제군金堤郡으로 귀양 보내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초토사의 서목書目에, “감영 수교首校 정석희鄭錫喜를 취초取招해보니 그 죄상
이 하나라도 용서하기가 어려워서, 그 날 미시未時, 오후 1시 3시에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했습니다”라고 한 일을 전보하였다.

26일 [二十六日]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진주병영의 서목에, 부정한 방법으로 속인 죄인 백도홍白道弘을
6월 15일에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31 봉초(捧招): 죄인에게 구두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32 주전(廚傳): 공무로 지방에 나간 관리에게 음식과 말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19

27일 [二十七日]
윤음綸音
전교하기를, “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걱정하고 애쓰는 것은 백성을 위
한 한 가지 일인데, 백성이 더욱 곤궁하여 곳곳마다 소란스럽고 헛소문이 퍼
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폐단이 되는 단서는 나도 종종 들은 것이 있다.
주로 탐관오리가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침탈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생
업에 편안하게하지 못하고 압박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데서 연유한다.
보고를 듣는 대로 탐관오리를 내쫓아서 하루라도 지체하여 한 가지의 피해라
도 더하지 않게 하라. 가장 불선不善한 자에게는 해당 형률로 엄중히 징계하
여 민심에게 사죄하게 하라. 호우豪右가 이유 없이 관장官長을 위협하거나 저
무고한 사람들을 살 수 없게 하면 잡아다가 단속해야 한다.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부축하여 궁박한 집을 호구戶口로 편입하여, 바쁘게 그들을 받아들여
깃들게 하는 것에 힘쓰고, 혹시라도 소민小民이 어리석게 무리를 모아 소란을
피워 명분을 훼손하는 것도, 또한 금지하고 다스려야 한다.
또 나라의 조세는 소중하니 비록 한줌이라도 경솔하게 하지 말라. 늘리는
것 또한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는데, 탐관오리가 제멋대로 더 거두어 토지 1
결에 많게는 원총原摠, 원래의 결수보다 2배나 4배가 되게 하여, 농민이 일 년 내
내 고생을 해도 항아리에 남는 것이 없고, 비록 풍년을 만나도 조세를 내기에
도 충분하지 않아서, 백성이 뿔뿔이 흩어진다. 관리로서 이런 짓을 한 자가
단지 백성을 학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과연 국법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인
가? 원결原結 이외에 지금 더 거둔 것이 있는지를 철저히 조사하여 그들이 범
한 죄목을 엄중하게 논해야 한다. 무명잡세無名雜稅를 무수히 요구하여, 한 가
지 물건에 도장을 찍으면 색목色目이 실처럼 뒤섞이고, 배 1척이 경계를 넘으
면 항구의 수문에 바둑처럼 섞여서 상민商民 모두 괴로워한다. 재원이 줄어들
12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고 교역이 막히는 것이 날로 더해지고 값이 폭등해지니 일체 폐지해야한다.


이러한 민폐들을 수령이 된 자가 생각하지 않고, 나의 백성을 위한 고심을,
자신을 구제하는 사사로운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니, 이를 생각건대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감찰하여 두루 살피는 것은 지방관의
책임이다. 지금 민심이 시끄럽고 어지러워 채방採訪33을 기다리지 않아도 소
문이 낭자하여 내 스스로 금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용하여 한
번도 등문登聞34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뜻을 널리 알리는 의[對揚]
이겠는가? 그 개탄스러움은 해당 수령에게 원인이 있지만 또한 묘당에도 있
다. 살피고 감독하여 그들이 직임을 하지 못한 것을 크게 징계하고 폐단을
엄중히 고치는 것은 바로 단행할 수 있고, 품재稟裁35할 수가 있다. 빨리 시행
하되 천천히 하지 말라. 아울러 이런 뜻을 엄중히 관찰사에게 지시하라.

27일 [同日]
정부의 초기에, “중요한 곳에 병사兵使나 수사水使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새로 제수한 충청 병사 신석희申奭熙에게 말을 주어 바
로 내려 보내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27일 [同日]
내무부內務部의 초기에, “호남과 호서의 비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여 완
부 근처까지 왔다고 합니다. 경군을 뽑아서 보낸 지가 이미 수십 일이 지났
으나, 바로 토벌하지 않고 도적과 노는 것 같으니, 참으로 해괴합니다. 우선

33 채방(採訪): 민심을 찾아다니며 모으는 것을 말한다.


34 등문(登聞):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임금에게 알리는 것을 말한다.
35 품재(稟裁): 임금께 아뢰어 재가를 받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21

대죄戴罪36하며 중임重任을 거행하고 공을 세워 스스로 아뢰게 하십시오. 또한


요충지를 지키는 계책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대호군大護軍 이원회李元會를 양호
순변사兩湖巡邊使로 임명하여 병정 몇 대를 임시로 품지稟旨37하고, 그로 하여금
그 날 바로 하직하고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이미 파견한 경병京兵과 강화 진
무영의 병사는 모두 절제사節制使가 기미에 따라 대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27일 [上同]
아뢰기를, “지금 내린 전교는 백성의 고통과 관련하여 충분히 헤아리지 않
은 것이 없습니다. 이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누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비록 전교의 뜻을 먼저 각 읍에 관문으로 명령하더라도, 이것은
1 2개 읍, 1 2가지 일이 아니어서 경솔하게 논계論啓할 수가 없습니다. 행
호군行護軍 엄세영嚴世永을 염찰사廉察使로 임명하여, 먼저 삼남三南에 보내어 민
폐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채방採訪하는 대로 편의에 맞게 재단하여 계속 보고
해서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
고 하였다.

27일 완영의 보고 [同日 完報]


정부가, “저들의 선봉先鋒이 지금 두정豆亭에 도착했는데, 감영과의 거리가
30리 입니다. 경군의 소식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매우 당황스럽고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36 대죄거행(戴罪擧行): 죄를 지었으나 죄과가 정해질 때까지 본디 업무를 보게 하는 규정으로 공을


세우면 상쇄하게 한다.
37 품지(稟旨): 임금께 상주하여 분부를 받는 것을 말한다.
12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같은 시각 [同時]
정부가, “초토사가 지금 이 곳에 있지 않은데, 저들의 선봉이 이미 원평에
도착했습니다. 수하에 병졸 1명도 없어 성을 지킬 일이 매우 당황스럽고 어
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강곤康梱, 강진의 병사이 오늘 일찍 출발했습니다”라고
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전교하기를, “비류가 직접 완부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상황이 어
떤지를 모르겠다.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를 모신 곳에, 이런 소요가 있어
놀라움과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다. 바로 예조 당상을 파견하여 살펴보
고 오라”고 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가 사은謝恩을 한 뒤에 바로 하직 인사를 하였다.
전교하기를, “순변사는 기다리라”고 하였다. 다시 전교하기를, “순변사는 입
시入侍하라”라고 하였다.

28일 금백 [二十八日 錦伯]


전주의 소식이 아득하여 듣지 못해서, 급족急足38을 보내 밤을 무릅쓰고 왕
래하게 하는 일은 3일이 소요되는 360리 길이므로,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분
국 주사分局 主事39가 지금 떠나 중도에서 보발步撥 등을 지휘하여 배치하면 일

38 급족(急足): 급한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을 말한다.


39 분국 주사(分局 主事): 전보국을 설치하고 지방에 분국을 두어 주사를 배치했다. 전주 노성 등지
에 분국을 두었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23

을 거행하는 것이 지체될 듯하니, 송구스럽고 걱정스럽습니다. 도내 수령 중


에 옥천과 아산은 아직 관아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옥천이 가장 시급하여
내려가는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29일 금영의 보고 [二十九日 錦報]


전주의 보고가 금영으로부터 왔는데, 비류 수만 명이 성 안으로 바로 들어
와서 불을 질러 성안이 전부 비었고, 직위가 바뀌게 된 완백은 물러나서 금영
에 있으며 완주판관이 경기전과 조경묘의 영정을 받들어, 성 밖으로 나갔다
고 합니다.

28일 밤 혜당 민영준이 좌의정에게 보낸 편지 [二十八日 夜惠堂


札于左閤]
지금 금영의 전보를 들어보니 직위가 바뀌게 된 완백이 금영에 있다고 전
보를 쳤습니다. 어제 사시巳時에 저들이 성안에 들어와서 성안에는 우는 소리
가 가득하여 그대로 길을 떠났으며, 초토사는 영광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기전과 조경묘를 모시는 것이 어떠했는지를 듣지 못해 매우 당황스럽습니
다. 어찌할 줄을 모르겠고 어떻게 대처해야 좋겠습니까? 이런 때에 전묘를
살펴보는 일이 시급하지만 만약 문적文蹟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9일 진시 체직된 완백 [遞完伯 二十九日辰時]


정부에서, “어제 사시巳時에 저들 수만 명이 전주 성안에 난입하여 한편으
로는 포를 쏘고 불을 질러 성안이 온통 비었습니다.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간신히 도망하여 공주에서 비로소 전보로 보고합니다. 초토사는 영광靈光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12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9일 진시 금영의 전보 [同日同時 錦電]


지금 돌아온 사람이 탐문하여 전하는 것을 들어보니, “어제 사시巳時에 저
들이 완영에 난입하여 성안의 관리가 피신했습니다”라고 하여 매우 당황스
럽고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29일 오후에 금영 [二十九日午後 錦營]


정부가 지금 은진 대관의 수본을 보면, “초토사가 길을 재촉하여 원평에 행
군했고 오늘 전주에 도착하여 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저들이 만약 쫓겨난다면
반드시 은진을 침범할 터인데, 방비가 너무 소홀해서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더욱 정탐하여 완백에게 아뢰고 은진으로 출발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9일 [二十九日]
예조참판 김종한金宗漢이 조경묘와 경기전을 봉심奉審하는 일로 전주에 갔다.

29일 [同日]
전교하기를, “기영箕營, 평양 감영의 병정 5초哨를 그 영의 좌영관左領官이 대신
인솔해서 올라와 기다리라”고 하였다.

29일 [同日]
의정부 초기에, “지금 호남의 비류들이 완부에 난입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놀랍고 참담합니다. 전 관찰사가 방어하지 못하고 황급히 경계를 넘었
으니 전후의 잘못이 큽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어디에 봉강封疆40의 책임이

40 봉강(封疆): 일정한 땅을 봉토(封土)로 주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25

있겠습니까? 우선 왕부王府에서 잡아와 엄중히 가두고 사실을 조사하여 정배


定配하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이미 그들을 막지 못했고 그
곳을 지키지 못한 것도 놀랍지만, 묘전廟殿을 모신 소중한 땅에서 제멋대로
구차하게 피신하였다. 단지 자신만을 도모하고 의로운 명분은 생각하지 않는
가? 아뢴 대로 바로 잡아 가두라”고 하였다.

30일 금백 [三十日 錦伯]


30일 병조순변종사관41의 단망 [兵曹巡邊從事官單望 三十日]
지금 정탐을 나간 군교의 보고를 받아 보니, “어제 전주에 도착했으나 가까이
들어가지 못하였고, 단지 30리 밖에서 대포소리만 들어서 접전을 했는지는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길거리의 얘기를 들어보면, 저들이 은진으로
향할 것이라고 합니다. 정형情形이 교활하여, 먼저 은진으로 가려고 한다는
말을 퍼뜨리고 진산과 금산 길로 해서 옥천으로 간다는 것도 알 수가 없습니
다”라고 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병영兵營, 청주병영과 본영本營, 공주감
영에 지시하시고, 옥천은 관아가 비어있어 걱정스러우니 밤을 무릅쓰고 내려
보내십시오.

30일 금백 [同日 錦伯]


지금 정탐을 나간 아전의 보고를 받아보니, “초토사가 정말로 접전을 하여
포 소리를 멀리서 들었다고 합니다. 은진으로 향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으
나, 어찌 그것이 허장성세가 아니고 반드시 진산과 금산 등지에서 옥천의 경

41 병조순변종사관(兵曹巡邊從事官): 순변사는 병조에 소속되었는데, 순변종사관은 양호순변사 이원


회를 돕는 종사관을 말한다.
12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계를 경유할 줄을 알겠습니까? 실정을 매우 예측하지 못해 지금 더욱 단속하


게 했으나, 실제로 특별히 지킬 방도가 없어 근심스럽습니다. 옥천만 아직
관아가 비어 있어 매우 걱정입니다.

30일 초토사 홍계훈 [同日 招討使洪]


공사청에, “23일에 황룡장黃龍場42에 도착한 뒤에, 저들이 나주 등지로 향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추격하려고 했으나 저들은 간사한 꾀가
많고 완영을 지키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25일에 회군하여 전주로 향했는데,
저들이 장성 갈치葛峙, 갈재를 경유하여 먼저 완영으로 향하였습니다. 아군이
금구 원평에 도착했는데, 길에서 선전관宣傳官과 하인 2명 그리고 윤음과 선유
宣諭를 할 종사관從事官과 배리陪吏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
다.43 세상에 어찌 이러한 역적이 있습니까? 바로 달려가서 뒤를 쫓았으나
아직 하루 걸리는 여정이 남아있고, 먼저 저들이 완영을 점거하여 전주 판관
과 직위가 갈린 감사는 겨우 화를 모면하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28일 진시辰時경에 아군이 전주의 앞산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성을 공격하
며 악전고투를 했습니다. 유시酉時 경에 이르러 저들 중에 갑옷을 입고 칼춤
을 추며 천보총千步銃44을 쏠 수 있는 자 30여 명을 잡아서 죽였고, 그 밖에
수 백 여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습니다. 승세를 타서 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려
고 했으나 날이 저물어서 군사를 물렸습니다. 술시戌時쯤에 저들이 불을 지르

42 황룡장(黃龍場): 장성의 황룡장터. 농민군은 장성 황룡장을 사이에 두고 월평과 신호리에서 관군


과 전투를 벌였다.
43 임금이 효유문을 들려보낸 이효응과 배은환, 내탕금 1만냥을 관군에 전달하려는 선전관 이주호
와 하인 2명 등을 죽여 조정에 대한 반감을 보였다.
44 천보총(千步銃): 영조때에 박영준(朴永準)이 발명한 화승총의 일종으로 사거리가 1000보(步)여서
총의 명칭을 천보총이라고 하였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27

고 성안을 다 어지럽혔으며, 거괴渠魁들은 남은 무리를 모아 성첩城堞을 굳게


지키며 포를 쏘면서 대항을 하였습니다. 지금 특별히 계책을 써서 공격을 하
고 나중에 아뢸 계획입니다. 명령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적자赤子로써 기한 내에 그들을 토벌하고 백성을 위로해야 조금이나마 안정
시킬 수 있으니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나
중의 염려가 없지 않으니 청영淸營, 청주 병영의 병사를 하루 안에 내려 보내 주
시기를 바랍니다.

30일 밤 혜당 민영준이 좌의정에게 보낸 편지 [同日夜 惠堂禮于


左閤招]
남쪽의 소요가 비록 절박하다고 해도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청의 구원병
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저들이 한강에 도착하면 우리의 패잔병과 함께 죽기
로써 싸운다면 어찌 방도가 없겠습니까? 저들이 어찌 감히 평지를 걷는 것처
럼 올라오겠습니까? 청병을 이미 요청했는데 지금 어찌 요청을 그만둘 수 있
겠습니까? 우선 요청한대로 준비하여 기다린 뒤에야 사리와 체면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성화같이 관문을 보낸다고 해도 어찌 수백 필의 말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요청한 여러 가지 것들을 모두 바로 시행하기가 어려워서 매
우 걱정스럽습니다. 바로 금백에게 전보로 지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바로 배를 뭍에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심한 것은 없으니 응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섭협판交涉協辦 이중하李重夏를
영접관迎接官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가서 처리하게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탐초기下探草記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지금 처분이 있
었기 때문입니다.
12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5월 초 1일 금영 [五月初一日 錦營]
정부의 회답고시에, “전주 동악사東岳寺의 승려를 만나 탐문해보니, 27일에
전주 판관이 경기전과 조경묘의 영정을 받들어 동악사로 옮겼다가, 28일에
다시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이 승려가 직접 본 것이라고 하
니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4월 30일 원세개가 머리를 조아립니다 [四月三十日 袁世凱頓首]


삼가 말씀드릴 것은 지난번에 훌륭한 편지를 받아 본 뒤에 비도가 이처럼
창궐한 것을 알고 매우 원통하였습니다. 이미 바로 부상傅相, 부관에게 전보를
쳐서 날짜를 정해 병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했습니다. 행군할 때에는 반드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각각의 일은 이미 공무를 띠고 파견되어있는 인천이사
仁川理事 유직목劉直牧을 신속하게 아산에 보내 일체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특별
히 단자單子 1장을 보내니, 반드시 귀 정부에서 읽어보고 받들어야 하는 것입
니다. 바로 분별하여 신속히 거행해서 군대가 도착한 뒤에 군사상의 기밀이
잘못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해서 먼저 말
씀드린 뒤에 삼가 임금의 복을 칭송하니 밝게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만 줄입니다.

원세개 진영의 요구사항 [袁陣所請諸條]


一. 신속하게 짐을 실을 말 200필과 소 50필을 준비하여 군대를 따라다니
며 군량과 기계를 운송하는 데에 쓰게 하고, 반드시 5필마다 두목 1
명을 파견하여 매일 관리원을 임명해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을 먹여 기른다. 평상시에 소와 말을 운송할 때에는 반드시 해당 지방
관이 품삯을 대신 지불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29

一. 평상시에 사용하는 기마 50필을 신속하게 준비하여 전후의 정탐에 쓰


이는 데에 대비한다. 말마다 이름을 적어 군무를 기다리고, 군무가 끝
나면 바로 돌려준다.
一. 옛 병사 중에 젊고 건강한 보병 40명과 두목 4명을 파견하여, 각 군대
에 나누어서 따라다니며 잡다한 일을 해줄 것을 요청한다. 매일 관리
원을 시켜 먹을 것을 헤아려서 나누어 준다.
一. 잘하는 통역관 몇 명을 신속하게 선발하여, 각 군대에 나누어서 따라
다니며 통역에 편리하도록 해주시기를 요청한다.
一. 반드시 각처의 지방관에게 먼저 관문으로 지시하여, 군대가 지나가는
지방에 길과 농사사정을 잘 아는 믿을 수 있는 복역 중인 군교 몇 명
을 보내어 길을 안내하여 돕고 아울러 쌀 땔감 말먹이 등을 마련하
는 일을 돕는다.
一. 중신 1명을 파견하여 군대를 따라 다니며 일체의 군무를 상의해 처리
한다. 죄를 지어 생포된 군병이 있으면 해당 관원이 심문하여 처벌한
다. 아울러 각 도의 조선 병정을 징발하여 그들을 도와 지킨다.
一. 포원捕員 몇 명을 파견하여 복역 중인 군교를 데리고 군대를 따라가서
비도의 도망을 막되 바로 각 지방의 포교와 약속하여 포위해서 잡는다.
一. 약간의 젊은 장수를 파견하여 군대를 따라 다니면서 전쟁하는 진법陣法을
보고 익히게 하여 장래에 부대를 인솔할 수 있는 선발장교로 삼게 한다.
一. 누락
一. 익숙한 뱃군을 파견해 내지의 각 포구에 작은 화륜선 2척을 보내어
배를 끌기에 편리하도록 일체 연결한다.
一. 편지를 받는 대로 아산의 지방관에게 관문으로 지시하여 군병이 도착
할 때 위의 일과 품삯을 대신 주는 일을 처리하게 하고, 배로 많이 운
13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송하여 해안에 내리는 것을 편하게 한다.


一. 편지를 받는 대로 전국電局에 지시하여 바로 천안天安일대에 사람을 보
내어 임시로 지선을 설치하여 아산까지 군대의 소식을 전달하는데 편
하게 한다.

정부가 원세개의 관사에 조회 [右政府照會於袁館]


조회照會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전라도가 관할하는 태인과
고부현 등은 민습이 흉악하고 성정이 교활하여 평소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
였습니다. 근래에 동학교에 빌붙은 비도가 무리 10,000여 명을 모아 현과 읍
10여 곳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지금 다시 북쪽으로 올라와 전주지역을 함
락시켰습니다. 이전에 정예군을 보내 토벌과 위무를 하였으나, 그 비도들이
끝내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해서 정예군이 패배하여 많은 포와 무기를 버리고
물러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이 흉악하고 완악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스럽게 할 것 같아 매우 근심스
럽습니다. 더욱이 지금 한성漢城과의 거리가 겨우 4백 몇 십리입니다. 만약에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방치한다면, 기보畿輔, 경기도가 어수선해져서 손
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새로 조련한 수군水軍의 현재
숫자로는 겨우 도회都會를 지킬 수 있을 뿐이고, 또한 전쟁에서 진법을 해보
지 않아 그들을 써서 흉악한 적을 제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이
불어나서 시일이 오래되면 청국 병사에 근심을 끼쳐 대신 평정을 해야 하기
에 구원병을 청하려고 합니다.
귀국의 통리統理45가 빨리 전보로 북양대신北洋大臣에게 간청하여 병사 몇

45 통리(統理): 한성에 주둔한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 원세개를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31

부대를 보내어 대신 그들을 토벌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병사와 장수로 하


여금 따라다니며 군무를 익히게 해서 장래에 호위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합
니다. 사나운 비도를 섬멸하는 대로 철군을 요청하고 감히 연장을 청하지 않
도록 하여 천병天兵, 청나라 병사이 밖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에 귀국의 총리께서 빨리 계획하여 급박함을 구제해주시기를 요청하고 간
절히 기다립니다. 반드시 조회照會해야 할 것입니다.

원세개의 관사에서 조회 [右袁館照會]


귀 정부가 말한 것은 받아 보았습니다. “전라도의 동학교비東學敎匪가 무리
10,000여 명을 모아 현縣과 성城 10여 곳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전에 토벌
과 위무를 나간 정예군은 이미 저항을 받아 패배하여 많은 포와 기계를 잃어
버리고 물러났으며, 우리나라의 군대로는 그들을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군대를 보내어 대신 토벌해주기를 전보로 요청합니다”라고 한 것을 바로 북양
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전보로 아뢰었습니다. 빨리 보내어 바로 회답전보를 받
았는데, 본 총리總理, 원세개에게 겸충전영익장兼充全營翼長 등을 맡겼습니다. 다행
히 이것을 제수 받았으니 외상外相에게 물어 글을 지어 귀 정부의 요청에 조복
照覆46하며 사조査照해서 시행하려고 합니다. 반드시 조복할 것입니다.

5월 초 2일 [五月初二日]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合啓해서 다시 아뢰기를, “전 전라감사 김문현의 죄
는 죽여야만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주는 바로 호남의 중요한 번진藩鎭으로 조
경묘와 경기전을 모신 곳입니다. 소중함이 어떠하며, 위임하신 뜻이 어떠하

46 조복(照覆): 어떤 사항을 물어온 것에 대한 회답을 말한다.


13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겠습니까? 애초에 방어하지 못하여 비류匪類들로 하여금 난입하게 하였고, 마


침내는 허겁지겁 자신만 경계를 넘어 제멋대로 구차하게 피했습니다. 신하로
서 지켜야 할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도모하였으니 왕법에 살펴보
면, 하벽何 47에 부합됩니다. 신등은 조사를 기다리지 않고, 빨리 해당 형률
을 시행하여 국법을 지키고 군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김문현은 논죄해야 할
것이다. 경들은 물러가서 처분을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5월 초 2일 [同日]
의정부의 초기에, “중국의 군함이 와서 정박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
다. 공조참판工曹參判 이중하를 영접관으로 임명하여 미리 가서 일을 처리하도
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초 1일 금백 [初一日 錦伯]
지금 정탐을 나간 군교의 보고를 들어보니, “어제 전주에서 돌아왔는데,
초토사는 용두산龍頭山에 있으며, 강화 진무영의 군대는 서쪽에 진을 쳤고, 저
들은 성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움직임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2일 금백 [初二日 錦伯]
지금 하교를 받아 보고 알았습니다. 청국 진중에서 소용되는 것은 모두 영
접관의 명령에 따라 공전과 공곡에서 가져다가 거행하도록 거듭 각 읍에 지
시하였고, 또한 이런 뜻을 전주 감영에 전보로 알렸습니다.

47 하벽(何 ): 큰 죄로서 사형에 해당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33

초 2일 금백 [同日錦伯]
정부에서, “염찰사廉察使가 지금 충청감영에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3일 금백 [初三日 錦伯]
정부에서, “지금 정탐 군교의 보고를 들어 보면, 전주의 형세는 전과 같고,
감영아래 10리 안의 인민이 모두 피신했다고 합니다. 빠져나가지 못한 무수하
게 많은 아전과 백성은 어육보다 심하여, 우는 소리가 인근까지 이르렀다고 하
니, 마음이 매우 참담합니다. 은진에 주둔했던 군대는 오늘 이미 완부에 도착
했고, 청주 병영의 군대도 노전蘆田에 도착하여 은진의 경계에 물러나 있으니
통신을 편리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초 3일 [初三日]
같은 날 정부에서, “전임 전라도 관찰사의 소재처에 전보를 보내려고 염찰
사로 하여금 조사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완부는 경기묘와 조경전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곳인데 소요가
일어나서 마음에 근심스러웠다. 지금 그 사이에 영정과 위패를 이미 위봉산
성의 행궁行宮에 모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랍고 송구스럽던 중에 참으로 매
우 다행스럽다. 위안제慰安祭를 바로 관찰사가 지내도록 하고, 태묘太廟, 종묘의
당실當室에도 고유告由하는 행사가 있어야 한다. 그곳 관아로 하여금 전례를
참고하여 마련하게 하라”고 하였다.

조회 [照會]
조회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해 5월 1일에 북양대신 이홍장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이홍장이 조선 정부의 글을 보아 알고 나서, 바로 “상국商局의
화륜선을 조달하여 북쪽으로 와서, 당고塘沽에서 섭사성 士成이 관할하는 진
13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과 산해관山海關에서 섭지초葉志超의 군문의 군사 약 2,000명을 나누어 싣고 면


수沔水의 입구에 가서, 길 안내를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받들어 호응하여 글을 갖추어 조회합니다.

초 3일 [初三日]
조경묘와 경기전에 단오제端午祭를 지내려 하는지를 바로 탐문探問하도록 지
시하라. 청국의 군함이 아산에 도착해서 포구에 주둔할 때에, 제반사항을 급
속히 거행하고 지시나 명령을 기다리는 일은 이미 전보로 지시했고, 모두 일
일이 준비하여 혹시라도 기일에 임박하여 기다리게 하는 잘못은 있지는 않은
가? 일이 군대의 대오에 관계되니 충분히 엄중하고 신속하게 유념하여 거행
하도록 각 해당 읍에 특별히 단속하라.

초 4일 초토사 [初四日 招討使]


3일 신시申時에 적과 싸움을 하여 그 대장을 공격하여 바로 그 괴수 김순명
金順明과 14세 소년장사 이복용李福龍과 그를 따르는 무리 500여 명을 베었습니
다. 총과 칼 300자루를 빼앗았고, 도망가는 적들을 일일이 잡았습니다. 머지
않아 전주를 회복할 날을 기약할 수 있겠습니다.

초 4일 [上同]
적이 의지하는 자들은 전녹두全祿斗와 14세 소년장사 이복용입니다. 그러나
전녹두는 우리 총에 부상을 당하여 왼쪽 다리를 쓰지 못합니다. 이복용은 어
제 큰소리를 치고 출전하였으나 아군에게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는 모두 도
망쳐서 전주성에 들어갔습니다. 적들은 낙담하고 혼이 나가 지금 자중지란自
中之亂에 빠졌습니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35

초 5일 순변사가 금영에서 [初五日 巡邊在錦營]


같은 날 신시申時에 초토사가 한차례 크게 이긴 것은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이 사실을 이곳의 군병과 민인 등에게 일일이 알려주었으며, 무장과 전주의
일을 각 읍의 군병과 하예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금영에서 쌀 200석과 돈
20,000냥을 마련하여 은진현감을 운량차사運糧差使로 정하였습니다.

초 5일 순변사 [巡邊使 同日]


오늘 묘시卯時, 오전 5 7시에 전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초 5일 총제영병방이 전주에서 [初五日 摠制營兵房在全州]


오늘 오시午時에 적도賊徒 수천여 명이 성채를 공격하여 싸움을 했는데, 저
들은 죽거나 다친 자가 적지 않으나 본영의 병정은 1명만 죽었습니다.

4일 아침에 초토사 [四日晩朝 招討]


지난 달 21일에 의정부의 전보에 따라 전교하신 뜻을 선유할 때에, 이효응
李斅應과 배은환裵殷煥, 殷은 垠의 오기을 적진에 보냈는데, 여전히 대항하고 말이
무엄한 데에 가까웠으며 2명을 가두었습니다. 그래서 대관을 보내서 군사를
인솔하여 장성땅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서로 싸우는 데에 이르러, 처음에는
적류賊類 수백 명을 죽였으나, 끝내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아군이 불리하여,
대관과 효응이 순절하였고48 병사 4명이 해를 입었으며, 대포 1좌 회선포回
旋砲 1좌를 잃어버렸습니다. 심영의 군사를 함께 맡으라는 뜻으로 23일 술시

48 대관(隊官)은 장위영의 장교인 이학승(李學承)을 말하는데 장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여기에서


효응이 순절하였고 는 오류이다. 이효응은 원평에서 농민군에게 처형되었다.
13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戌時경에 영광군靈光郡에서 긴급 전보를 보냈으나, 아직 회답 전보를 하지 못하


여 근심스럽습니다. 다시 아뢰겠습니다.

초 4일 [初四日]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조병갑은 말이 많고 모호하여 더욱 통탄스럽습
니다. 다시 엄형을 가하여 실정을 얻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
였다. 다시 아뢰기를, “이 죄수는 나쁜 짓을 해서 재물을 탐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괴롭혀서 호남의 소요를 초래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차례 엄형을 가하고 빨리 원악도遠惡島에
안치하는 형벌을 내리어 바로 그 날에 압송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전교하기를, “지방관을 부임시키는 곳 중에 전주는 중요한 지역이다. 처음
에 소요를 금지하지 못하고 그들이 난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바로 성을
버리고 경계를 넘었다. 봉강을 주는 것한 신하가 봉강에서 죽는 것에 그 의
리가 있다. 그러므로 그가 범한 죄를 논한다면 해당 형률이 있을 것이다. 비
록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하게 하더라도 그 죄를 풀 수가 없을 것이나 참작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특별히 백성을 살리기를 좋아하는[好生之德] 미루
어 죄인 김문현을 거제부巨濟府에 죽을 때까지 안치하라”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전교하기를, “군대가 호남에 내려 간지가 한 달이 넘었다. 지금까지 더위
에 길을 걷고 칼날을 밟으며 고생하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연이어 승리의 보고를 받으니 그들이 애써 노력하는 것이 가상하다.
선전관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관찰사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한 뒤에
동비토록 東匪討錄 137

장문狀聞하도록 분부하라”고 하였다.

부사과 이설의 상소 [副司果 李 疏]


운운하였다.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사사로움을 도모하여,
원성이 길에 가득차서 난리를 만든 자는 조필영趙弼永입니다. 밖으로는 균전均
田의 명령을 빙자하여 백지징세白地徵稅를 하여 백성이 그 해독을 입었습니다.
김창석金昌錫49도 난리를 만든 자 중에 한명입니다. 난리의 시작은 고부에서
일어났고, 온갖 방법으로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서 그 난리를 불러일으킨 자
는 조병갑이 아닙니까? 안핵의 명을 받들어 권세를 잡아 재물을 빼앗아서 그
난리를 촉진시킨 자는 이용태가 아닙니까? 전 감사 김문현은 더욱 심합니다.
제멋대로 돈과 재물을 탐하고 또한 백성을 어루만져 편하게 하지 않았습니
다. 그럼에도 적의 깃발 하나가 날리자 짚신을 거꾸로 신고 경기묘와 조경전
의 귀중함을 생각하지 않고 번병藩屛50을 잃어버리게 하였는데, 오히려 천분
天分을 지닌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 읍들의 수령 중에는 기미를 보고 산으로 도망을 간 자가 있고 화를
피해 경계를 넘은 자도 있으며 공사公私를 핑계 삼아 영하營下에 투신한 자도
있습니다. 전 영광 군수前靈光郡守 민영수閔泳壽는 식량을 싣고 바다에 나가 그
죄가 현저한데도 엄중히 처벌을 하지 않고 관직을 제수하는 명령이 도리어
내려지니, 이것은 반드시 임금께서 밝게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김
문현의 망명亡命을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 이것을 초래한 것은 바른 도가 밝지 않아서입니다. 공의公議가 실현되
지 않아서입니다. 사사로이 따로 진상을 바치는 것이 바로 전례가 되어서입

49 김창석(金昌錫): 조필영에 앞서 균전사를 맡았다.


50 번병(藩屛): 변방의 중요한 진(鎭)을 비유한 말이다.
13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니다. 교섭통상交涉通商이 근실하지 않아서입니다. 과환科宦이 지나치게 많고


세금이 과중하며 토목의 부역이 지리支離하고 경연經筵이 오랫동안 없어져서
입니다. 이런 증세를 치료하는 데에는 5가지가 있습니다.
一. 빨리 애통하다는 조서를 내려 반성의 뜻을 보여 주어, 사람들의 마음
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一. 진휼하는 정사를 급히 펴서 도망간 사람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一. 궁궐의 방비를 더욱 엄중히 해서 간사한 짓을 하는 사람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一. 언로言路를 넓혀 계책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一. 원병援兵의 도움에 기대어 방비를 느슨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참으로 이와 같이 논한 것이 모두 놀


랍게 들린다. 혹시라도 지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묘당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따져 묻게 하고, 해당 관찰사에게 즉시 여쭈어 처결하게 하라”고 하였다.

초 7일 금백 [初七日 錦伯]
정부에서, “어제 초토사의 전보를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반드시 형세를
헤아려서 이런 전보를 쳤을 것입니다. 지금 영접사迎接使의 전보를 보니, ‘통
령統領 섭사성 士成이 5일 유시酉時에 왔고 제독 섭지초葉志超는 내일 도착하며,
마보군馬步軍은 3,000명이고 지원 병력도 3,000명이 되어, 처음에 마련한 배와
말은 태반이나 부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6,000명의 많은 병력이 뭍에 내
리는 데에 여러 날 동안 비용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빈약한 도道의 형편과
재력으로, 또한 춘궁기를 맞아 어찌 마련을 하겠습니까? 불화가 생길 것은
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것을 마련하는 방도가 있더라도,
동비토록 東匪討錄 139

나라의 계획과 고을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매우 걱정스럽


기 때문에 아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초 7일 금영 [同日 錦營]
정부에서 지금 전라 감사의 전보를 보니, “묘전廟殿에 단오제를 지낸 뒤인
지금 삼례參禮에 이르렀습니다. 3일에 저들의 괴수 3 4명과 수백 명을 붙잡
았고 도망간 자도 수백 명이어서 멀지 않아 소탕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
고, 초토사의 말에 의하면, “청국 군대가 안에 머물러서 각 고을에 폐단을
일으키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헤아려서 재가해 주시기
를 바랍니다.

초 7일 금백 [同日 錦伯]
지금 아산 탐교探校의 고목告目을 보니, “어제 사시巳時에 청국의 통령 섭사
성 士成이 보군步軍 1,000명을 인솔하여 고을로 향하였고 마병馬兵 100명은 아
직 뭍에 내리지 않았으며 제반 집물什物은 계속 말로 운송하고 있습니다. 제
독 섭지초葉志超의 보군 1,500명과 마군 150명은 내일 뭍에 내린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제반사항을 각별히 거행하고 나중에 뭍에 내린 형편을 화
급하게 치보하도록 지방관과 호송관護送官에게 각별히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초 8일 초토사 [初八日 招討使]


8일 사시巳時에 전주를 회복하여 성에 들어갔습니다. 3일에 그 선봉 중에
장수와 장군이라고 하는 자를 베어버린 뒤에, 적들이 연이어 귀화를 애걸하
고 담을 넘어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형을 예측하기 어려워서 신중히 하
지 않으면 안되었고, 수효가 많아서 성원聲援도 그 뒤로는 가볍게 볼 수가 없
14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었습니다. 동북문에서 종종 도주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구름다리 300


개를 만들어 성을 넘어 공격하여 지난날에 잃어버렸던 대포 1좌 회선포 1
좌 각 읍에서 잃어버린 군기와 화약 및 철환을 모두 찾았습니다. 성을 넘을
때에 자연스럽게 기밀이 새어나가 적들이 사방으로 도주하였으나, 모두 우리
총에 부상을 당하여서 낱낱이 붙잡아 들이도록 각 읍과 진鎭에 지시를 하였
습니다. 지금 신임 감사와 전주 판관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형편에 기병箕兵과 청국의 군대가 호남과 호서의 농촌에 진주한다면 매
우 모양새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소 돼지 닭 계란 등을 청국 군대
가 머무는 곳에 보낼 계획입니다.

초 8일 초토사 [初八日 招討使]


순변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초 8일 유시 완백 [同日酉時 完伯]
완성完城 안의 적들은 각기 병기를 가지고 동문과 북문으로 나가 사방으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지금 초토사의 편지를 보니, “사시巳時 경에 성을 회복하여
전주에 들어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전보로 알리고 상세한 사정은
초토사의 공문으로 계문할 것입니다. 순변사는 지금 이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12일 [十二日]
시임時任, 현직 원임原任, 전임대신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51를 올리기를, “근

51 차자(箚子): 소장( 章)의 하나로서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간단히 사실만을 적어 올리는 상
소를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41

심스런 마음에서 빨리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감히 아룁니다”라고 입계入啓하


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들의 정성을 모두 알았다. 그 행적을 조사하
고 그 죄를 논할 때에 이러한 논의가 있어서 지난번의 것을 참작하여 처분하
였다. 경들의 노성老成한 의견도 헤아려서 막지 않는 것도 공의公議이다. 위리
圍籬의 형률을 더하여 시행할 것이니 경들은 헤아려주기를 바란다. 사관史官을
보내 이 비답을 전하라”고 하였다.
삼사三司가 합계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이 죄인의 일에 대해 법을 어기려
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실정을 참작한 것이다. 지금 삼사의 논의가 매일
논쟁을 하여 공의가 갈수록 들끓는 것을 보았다. 죄인 김문현을 위리안치圍籬
安置하고 가극加棘의 형벌을 더하여 시행할 것이다. 이와 같이 처분을 한 뒤에
도 번거롭게 하면, 이것은 나와 승부를 겨루려는 것이니, 대궐 안에 있는 경
들은 잘 알아라”라고 하였다.

12일 [同日]
전교하기를, “이번 남복南服, 남쪽 지역이 소요를 야기하여, 비록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해도 군졸들이 한달 넘게 이슬을 맞는 것을 생각하면, 그
고생을 알 수가 있다. 용감히 나아가 애쓴 것이 가장 뛰어난 자는 해당 군영
에서 순서 없이 받아들여 써라. 죽은 자는 본도로 하여금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장관將官과 관인官人으로 해를 입은 자는 직접 싸움에 참가한
경우와 뜻하지 않게 겪은 경우를 막론하고 나랏일을 위해 죽은 것은 마찬가
지이다. 포상하고 관직을 추증하는 일은 그 사실에 따라 바로 시행하라. 군
수비용을 마련한 자는 해당 영과 해당 도에 상세히 물어보아서 회감會減52하

52 회감(會減): 받을 것과 줄 것을 상쇄하여 회계하는 것을 말한다.


14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거나 급대給代53하여 누락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헤아려서 여쭈어 처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초 10일 초토사의 전보 [初十日 招討使電]


처음에 전주성에 들어 온 적들은 30,000명이었으나, 세 차례의 전투 뒤에
몰래 도망가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자들은 김순명과 14
세의 소년장사 이복용 선판길宣判吉, 선봉인 정장군鄭將軍 곽장군郭將軍 등의
수백 명이었으나 거의 모두 머리를 베어 수급首級을 바쳤고 나머지 무리 몇
백 명은 남김없이 섬멸하려고 합니다. 만약 대포를 쏜다면, 성안의 몇 만 백
성들 중에 옥석玉石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성을 회복하는 것이 비록
시급하다고 해도 천천히 하는 것만 못하며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낫다고 생
각했기 때문에, 밖으로 성을 넘는 세력을 과장하여,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너지게 하고 성안의 백성에게 들어갔습니다.
성을 회복한 뒤에 도망간 백성을 널리 불러 모아서 그 생업을 안정시키고
조정의 백성을 살리려는 어진 마음을 폈습니다. 빠져나간 나머지 무리들을
토벌할 겨를은 없지만, 생민을 어루만져 안정시킨 뒤에,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이 매우 사리에 부합됩니다. 또한 전녹두는 이미 죽은 것으로 공초供招를
받았습니다. 비록 살았다고 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지금 추격하여
체포할 지 여부는 삼가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기영의 군대는 아직 전진하
지 못하고 지금 삼례에 있습니다. 장위영과 심영의 병사는 여러 달 동안 이
슬을 맞고 며칠 동안 비에 젖어 병이 난 자가 많아서 의복이 시급합니다. 며
칠을 기다렸다가 파송하여 그들을 추격해서 섬멸할 계획입니다.

53 급대(給代): 비용을 다른 물건으로 주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43

5월 13일 내서 [五月十三日 內署]


흠명제독 직예전성 군문총통 산해노태고북구 준련마보수전 각영액도혼파
도노欽命提督 直隸全省 軍門總統 山海蘆台古北口 准練馬步水電 各營額圖琿巴圖魯의 섭지초葉志超
가 고시告示를 내어 효유할 일은, 본 군문軍門이 북양대신 이홍장의 전보 자문
咨文과 통리조선교섭통상사의 겸 전군익장統理朝鮮交涉通商事宜 兼 全軍翼長 원세개의
전보 정문呈文 및 조선 정부의 관문에 의거하여 잘 알았다.54 전라도가 관할
하는 각 현들에서 토비土匪가 난리를 일으켜서 성읍城邑 수십 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시 북쪽으로 전주지역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전보로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간청하여, 주청奏請에 따라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보내 대신 평
정하게 하였다.
대황제께서 번진藩鎭을 걱정하여 요청을 재가하셨다. 본 군문이 명을 받들
어 토벌을 독려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건너왔다. 부대는 모두 수많은 싸움을
치룬 군대로 한번 공격하여 그들을 평정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협박
을 받은 백성은 시세에 떠밀리고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적을 따른 것도 아닌
데,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양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럽
다. 마음에 실제로 차마 하지 못하고 고시를 내어 효유하니, 이 고시를 여러
읍의 사람들은 잘 알아야 한다. 너희들 중에 협박을 받은 양민은 기미를 보
아 해산을 하였는데, 혹시라도 군영에 와서 스스로 투항하면, 본 군문은 관대
하게 용서하고 결코 심하게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
가운데 적에게 잘못 쓰이고, 진심으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만약 병기를
버리고 죄를 뉘우쳐서 투항한다면, 역시 편안하게 맞이하는 것 이외에 은혜
를 베풀 것이다. 내가 정벌을 하는데, 너희들과 약속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54 조득(照得): 조사하여 알았다는 뜻으로 공문(公文)의 첫머리에 쓰이는 말이다.


14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때에 무기와 성을 버리는 자는 결코 죽이지 않지만, 무기를 가지고 저항하는


사람은 바로 창과 포로 죽이지 않고 서서히 베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너희가 만약 스스로 목숨을 돌아본다면 비도의 우두머리가 되지 말라. 공포
한 것을 특별히 알리니 모두 잘 알라. 1894년 5월 11일 고시告示

완백 [完伯]
어제 김제의 보고를 받아 보니, “비도 700 800명이 깃발을 들고 포를 쏘
며 창과 칼을 지니고 읍내에 들어와서 머물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안
의 보고를 받아 보니, “어제 신시申時에 비도 몇 천 명이 동진東津55 나루를
건너 대요大腰 석교石橋 등지로 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순변사 초토사와 함께 의논을 하였습니다.

형조참의 이남규의 상소 [刑曹參議 李南珪疏]


삼가 생각해보니, 우리 전하께서는 호남의 비도가 준동하여 새벽부터 밤늦
게까지 편안하지 못하셔서, 군사를 일으키고 죄를 물으시니 그 위엄이 서릿
발처럼 엄하셨고, 세금을 줄여주고 폐단을 물으시니 그 덕의가 봄의 훈기처
럼 온화하였습니다. 저들이 비록 돼지나 물고기와 같더라도 두려워하고 고마
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흉악하고 야만스러운 한 부류가 감히 교화를 저해하
고 성읍城邑을 침범하였으며 사자使者56를 마구 죽였습니다. 심지어 전주에 난
입하여 경기묘와 조경전을 놀라게 해서, 사람과 신령이 화를 내고 어린애와
어른이 모두 분노하였습니다.

55 동진(東津): 김제평야와 부안 백산 사이에 흐르는 동진강 입구에 있는 나루이다.


56 사자(使者): 이효응과 배은환 등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45

그러나 전하의 신령한 군대에 힘입어 연달아 승리하여 성을 회복해서 지


치고 병든 백성들이 덕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사직社稷의 큰
복이고 장구한 천명天命을 이어갈 기회입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이런 때에
크게 분발하고 진작하셔서, 당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래서 위로는
하늘의 돌보심에 응답하고 아래로는 세상의 물정을 수습하셔서, 원망을 노래
로 바꾸고 의심과 불화를 화합과 기쁨으로 변화시키신다면, 한 곳에 이미 드
러난 우환을 없애는 데에 그치지 않고 또한 사방에 드러나지 않은 근심을
없앨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땅은 협소한데, 토지의 세와 호구戶口
의 부역은 들어올 것을 헤아려서 지출을 해서, 늘 공급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
였고 모든 경비를 절약해서, 위로는 일정한 쓰임이 있었지만 사사로이 저장
하는 것이 없었으며, 아래로는 정공正供이 있었지만 사사롭게 바치는 것이 없
었습니다. 위에서 하고자 하는 것에 무익한 비용이 있다면, 유사有司는 반드
시 간언諫言하여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마음이 임금을 받드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 절제에 힘쓰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하지 않으면, 백성이 그 괴로움을 받아 나라가 그것에
따라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세입이 적더라도 경용經用은 매우 부족하
지 않습니다. 지금에는 토지와 호구는 예전과 같으나 비용이 매우 부족한 것
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찌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에 무익한 비용이 있는
데도, 유사가 그만두기를 간언하여 절제하게 하지 않아서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예전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매우 부족한 것
입니까? 신이 감히 전하에게 이런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순임금이 성인이었으나 고요皐陶는 안일安逸하지 않도록 경계하였
고, 무왕武王이 성인이었으나 소공召公은 무익한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계하였습
니다. 전하가 비록 순임금과 무왕의 자질이 있으시더라도 전하의 좌우에 고
14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요와 소공처럼 경계를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천 번 생각에 한 번의 실


수가 없음을 보장하겠습니까? 무릇 유한한 재정으로 무한한 경비를 지급하
고 순순히 따라 부족한 것을 말한 적이 없으니, 비록 유안劉晏과 한황韓滉으로
유사有司를 삼더라도 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형세가 방백과 수령에게
재물을 징수하고 방백과 수령은 무슨 방법으로 응하겠습니까? 그 형세는 반
드시 백성에게 주구해야 합니다. 다행히 자립할 수 있는 자는 조심스럽게 스
스로를 지키고 공公을 빙자하여 사사로움을 이루지 않을 뿐이지, 또한 감히
한마디 말로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 밖의 어리석고 용렬하며 이로
움을 좋아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모두 진헌進獻을 구실로, 취렴聚斂57
을 직무로, 관절關節58을 장정章程으로, 각박 剝59을 수완으로 삼아, 마른 연못
에는 물고기가 없음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몸을 살찌우고 그 집안을 윤택하
게 하는 것을 구합니다. 백성에게 거둔 재물은 10에 8 9가 개인에게 돌아가
고 관고官庫에 들어가는 것은 겨우 1 2입니다. 백성에게서 받은 원망은 10에
8 9가 위에 돌아가고 아래에 내려가는 것은 겨우 1 2입니다.
시경詩經 에서, “재물을 착취하여 백성에게 원망을 사는 것을 덕으로 여
긴다”고 했는데,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방백과 수령이 거리
낌 없이 그것에 의지하여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유사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지키지 못하고 도망을 하여 자신만을 생각하고 전묘殿廟를
돌아보지 않은 방백은 처벌하지 않았고, 백성을 침탈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수령은 섬에 유배하는 데에 그쳤으며, 안핵을 잘못하여 소요를 심화시킨
자는 귀양 보내는 데에 그쳤습니다. 균전을 하여 민폐와 읍폐를 저지른 자는,

57 취렴(聚斂): 세금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


58 관절(關節: 뇌물을 써서 관리와 결탁하는 것을 말한다.
59 각박( 剝): 독점 판매를 하여 이익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47

단지 그 관직을 낮추고 그 사람은 처벌하지 않았으며 바로 풀어주었습니다.


전운사가 규정 외에 더 거두어서, 비난과 원성을 초래하여 난리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고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지목했으나, 끝내 죄를 묻지 않았습
니다. 그 밖에 수령 중에는 속으로 근심하여 기미를 보고 도망간 자와 겁을
먹고 위기에 처하여 구차하게 살아남는 자들이 이전의 직임을 그대로 제수
받거나 내직內職으로 옮겨 전하의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법도를 잃
어버린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먼저 성총聖聰을 회복하시고 직접 절약을 해서
유사들을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해당 관서에게 명하여 방백수령 전운사
안핵사 균전사를 그 죄에 따라 처벌하는 왕법을 펴서 세상인심에 사과하고,
나라 안팎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들의 침탈이 조정의 의도에서 나오지 않았다
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십시오.
법은 편애하여 용서하지 않은 이후에야, 도리어 두려워서 그만두게 할 수
있고, 모든 백성들이 흔쾌히 복종할 수 있으며 신하들이 두려워할 수 있습니
다. 만약 한가하고 편안함을 따라 날을 보낸다면, 목전의 시급함은 비록 조금
늦출 수 있더라도 태평성대의 기틀은 기약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
께서는 어찌하여 안위의 향배가 정해지는 이 기미를 정신을 가다듬어 살피지
않습니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말이지 소신 한사람만
의 말이 아닙니다.
신이 이것보다 급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인이 군대를 인
솔하여 도성都城에 들어왔는데, 외무대신이 힘껏 저지했으나 듣지 않았습니
다. 신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군대가 몇 명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만
약 이웃의 어려움을 구제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요청한 적이 없고,
상민商民을 보호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여 근심이 없게 할 것
입니다.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구제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14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거짓말입니다. 보호하여 근심이 없는데도, 오히려 보호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의리가 아니고 뒤의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저들을 질책한다면, 저들이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이웃과 교류하는 도리는 의리와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지 않고 우호를
지켰다는 것은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춘추春秋에서 맹서할 때에, 먼저
간사한 자를 보호하지 말고 사특한 자를 머무르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다음
으로 재난과 근심을 구제하라고 하여, 급히 하고 천천히 하는 순서가 참으로
분명합니다.
도망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흉악한 무리를, 저들이 숨겨주어 보호하고 머무
르게 하니60 분명히 비호하는 것입니다. 춘추의 맹서로 따져보면 이미 신의
를 저버린 것입니다. 지금 그 군대가 구제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이미 완급의
순서를 잃어버렸으니, 더욱이 구제가 아닙니다. 방위를 명분으로 하니, 또한
방위할 근심이 없겠습니까? 설령 정말로 방위할 근심이 있더라도, 우리의 조
약에 따라 보호하고 지켜야 합니다. 저들이 바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우
리 국경을 건너와서, 출입을 묻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의 도성문을 조금도 망
설이지 않고 들어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말로 더욱 동요하게 하는 것
은 무엇입니까? 신은 그 안에 속임수가 있으나 우리에게 사람이 없다고 말할
까 걱정스럽습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작지만, 작은 칼을 쓰지 않고도 1,000리의 사람들을 떨게
하여,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일단 그 진퇴를 기다리며, 감히 수하誰何61를
하지 못했습니다. 도성 안에 저들이 점포를 열도록 허락한 것은 식자識者들도

60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인천으로 도망쳐 간신히 일본배 '치토
세마루(千世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 것을 말한다.
61 수하(誰何): 누구인지 신분을 자세히 살피고 확인하는 일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49

오히려 부끄러워하는데, 더욱이 군대의 주둔을 허락하고 막지 않는 것에 있


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외무대신이 의리로 질책하고 정성과 신뢰로 말을
하면, 저들이 반드시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의리와 성의 및
신뢰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적이지 이웃이 아닙니다.
적과 이웃이 되어, 안으로 의심을 품고 밖으로 굴레와 고삐를 보이는데, 끝내
무사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의 말을 시의
時宜와 일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대사大事를 말하여 이웃과 말다툼을
초래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구차하고 고식姑息적인 말일 뿐입니다. 대개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국가의 체신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나라의 체통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시의에 맞고 일의 형편에 부합하는 것은 신은 듣지 못
했습니다.
옛날 서성徐盛62은 한마디 말로 나라 사신의 교만함을 꺾었고, 호전胡銓63은
편지 한 장으로 강한 오랑캐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두 사람이 어찌 시의와
일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대사를 말하여 이웃과 다툼을 초래했겠
습니까? 단지 작고 가까운 의리라도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일렀는데도 체통
은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며 체통이 존중되지 않으면, 나라를 비록 보존하려
고 하더라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갑신년의 치욕에서 죽지 못하여, 이미
두 사람에게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지금 이 말 때문에, 저들이 만약 다툼
이 생겨 신의 몸을 잡아 사과하기를 바라고, 저들이 신으로 하여금 머리의

62 서성(徐盛): 삼국(三國)때 낭야거(琅 ) 사람으로 손권(孫權)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위(魏)의


사신 형정(刑貞)이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크게 분개하여 꾸짖었다고 한다.
63 호전(胡銓): 송(宋)때 사람으로 자는 방형(邦衡)이고 여릉(廬陵)출신이다. 상소를 올려 왕륜(王倫)
진회(秦檜) 손근(孫近)의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걸 것을 주장하였다. 금나라 사람이 그것을 천금
(千金)을 주어 사고 크게 놀라 군대를 물렸다고 한다.
15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피로 땅을 적시기를 요구하여, 지하에서 두 사람을 따르게 된다면 죽더라도


영광스럽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중국에 도움을 구한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황지潢池,
작은 연못의 좀도둑을 현리縣吏 1명과 방백 1명이 다스리지 못하여, 점점 커져서
큰 도적이 되어 초토사와 순변사를 연이어 출정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거
의 1,000근의 쇠뇌를 쥐 때문에 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또한 우리가 순리로 역도를 토벌하
는데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내
부의 허약함을 보이고 도움을 구하는 데에 급급하였으나, 끝내 그 힘을 빌리
지 않고 우리가 이미 토벌을 하였습니다.
단지 공억供億64을 허비하고 물자를 운송하는 데에 고생을 하였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를 나약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일본 사람이
이런 기회에 우리의 형편을 살펴, 군대로 시험해보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저들과 화친을 했으니, 지금 갑자기 힘으로 대항해
서는 안됩니다. 의리와 정성 및 믿음으로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했
는데도 뉘우치지 않으면, 이것은 끝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갑옷을 수선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대비해야 합니다. 어찌 다른 나라의 군대가
도성 안에 있는데도, 편안히 여겨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태평성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군대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사
람들이 우리가 군사제도에 서툴다고 합니다. 우리도 애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안일함에 빠져서 저절로 서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졸
이 정예롭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장수는 마땅한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 다만

64 공억(供億): 수요에 따라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51

시험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난 인물을 분별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근래


에 보고 들은 것을 말씀드리면, 옥적玉賊, 김옥균은 매우 사악한 사람이었습니
다. 가슴에 충의를 품은 선비 하나가 높은 파도를 건너고 사나운 풍랑을 넘
어가서 맨손으로 그를 죽였는데65 마치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나무를 부러
뜨리는 것 같았습니다.
호남의 비도는 큰 도적입니다. 일단 초토사가 새로 모집한 수백 명의 병사
를 인솔하여 한번 토벌해서 그 우두머리를 죽였고 다시 토벌해서 그 성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육도六韜의 옥검편玉鈐篇 같은 병서를 배우지 않
았고 활과 말에도 익숙하지 않았으며, 방략은 남보다 뛰어난 적이 없었고 이
름도 남보다 드러난 적이 없었으나, 하루아침에 오히려 이와 같이 뛰어난 공
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충의로 나라를 세워,
선왕의 은택과 전하의 자애가 사람의 피부와 골수를 적셔, 임금에게 무례한
것을 보면 삼척동자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반드시 갚으
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
니다. 조정과 대대로 벼슬살이하는 집안은 말할 필요가 없고, 초야의 선비와
하급군인까지도 이 두 사람과 같은 마음이 없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원
한을 갚으면 어떤 원한인들 갚지 못하며, 이것으로 적을 토벌하면 어떤 적인
들 토벌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이 우리나라를 천하에서 막강한 나
라로 만든다는 것은 당연하고 과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여 스스로

65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음모에 시달렸다. 민씨 일파가 계속해 보내는 자객들에 의하여 고
통어린 세월을 보내면서 일본정부에 의해 먼 외딴 섬이나 북해도의 벽지로 끌려가 연금 생활 10
년을 보내야 하였다. 그러다가 김옥균은 민씨 일파의 자객인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
학생 출신인 홍종우에 의해 상해로 유인되어 1894년 2월 22일 살해되었다.
15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경시해서, 다른 나라의 수모를 받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지금의 때를 적의 형세로 여기셔서 이미 민심을 꺾었고, 이
미 이웃의 우호를 단정하여 틈이 없으며 서울과 시골에 경계가 없어 근심하
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분발하고 진
작해서, 당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여 한없는 근심을 풀어버리는 것을 생각해
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이하에서 기술할 것을 따르고 조종祖宗
을 본받으십시오. 마음을 바르게 하여 온갖 교화를 펴고 기강을 세워 명분을
바로 잡으며,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여 재물을 탐하는 자를 징계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구휼하십시오. 그리고 상벌賞罰을 신중
히 하여 공功과 죄를 엄중히 하고, 쓸모없는 것을 줄여 경비를 절약하며, 융정
戎政66을 훈계하여 뜻밖의 재난에 대비하고, 작록爵祿을 주어 따스한 기운을
불러오십시오. 충직한 사람을 쓰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아첨으로 총애를 받는 간사한 소인의 문로를 막아 가려지는 것을 제거하고,
간쟁諫諍의 길을 넓혀 잘못을 밝혀 바로 잡는 것에 이용하십시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도를 논하고 다스림을 구하여, 애민愛民을 편안함의 근본으로 삼
고 자강自强을 수양修養의 요체로 삼는다면, 상하가 마음을 써서 어찌 따르지
않으며, 원근에서 마음이 끌려 누가 감히 어기겠습니까? 울음을 바꿔 웃음이
되고 위기를 돌려 안정이 되어, 한 달 내에 태평성대를 이룰 것입니다.
신은 이미 사리판단에 어둡고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호남 비도의 소요가
시작하는 때에 아뢰려고 했으나, 임금께서 편안하지 아니 하신데, 거듭 요구
에 응하는 괴로움을 주는 것을 신하의 도리상 감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래서 묵묵히 12일 동안 가슴에 쌓이고 맺혀서 이미 드러내기가 어렵습니다.

66 융정(戎政):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53

지금 비록 조금 가라앉았어도 드러나지 않는 걱정은 더욱 급박한 것이 있습


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살피지 않고 임금의 귀를 더럽힙니다. 임금께서
직위를 넘어선 신의 참월함을 너그럽게 보시고 임금께 숨기지 않는 신의 의
리를 살피시어, 하찮다고 하여 그 말을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일을 논한 것이 조리가 있고 그 말도
절실하여 매우 감탄하였다”라고 하였다.

부사과 이최승의 상소 [副司果 李最承上疏]


운운하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면서 나라가 두려워할 만한 것도 백성
에 있습니다.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를 반석과 태산처럼 안정시킬 수 있고,
백성이 흩어지면 나라가 육마六馬의 썩은 줄처럼 될 수 있습니다. 비유하면
저 물이 배를 실을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옛날
에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반드시 그 백성을 안정시켰습니다. 바르고 청렴
한 사람을 뽑아 지방관의 직임을 주었고, 요역 役을 가볍게 하고 비용을 절
약하여 진휼의 방도를 넉넉히 구하였습니다. 병란의 침략과 소요를 걱정하여
군사에 관련된 장비를 모으고 익혔으며, 풍속이 괴탄해짐을 염려하여 학문을
권장하고 선善을 장려하였습니다. 하루의 모든 일이 백성을 안정시키는 방법
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나라를 억만년동안 안정
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호남 비도들의 소요는 참으로 지난 역사에 없었던 것입니다. 국법
으로는 죽여야 하나, 그 실정을 구해보면 또한 측은하게 여길만한 자들로,
모두 전하의 적자입니다. 모두 요순 시기의 인물인데, 난리를 즐겨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이지, 어찌 그 본성이 그런 것이겠습니까? 처음에 뼈에 사무치
는 원한 때문에 달려가서 호소하다가, 점차로 격렬해져서 매우 흉악하고 극
15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악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만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정치가 사나운 호랑이보다 심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의 소란이 있었겠습니까? 근래에 탐욕의 풍속이 습속을 이루어 뇌물을
예사로 여기니,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는 반드시 더욱 심합니다. 그 이익은
아래로 돌아가고 원망은 위로 돌아가는데, 전철을 밟아 한결같이 돌이킬 줄
모르니, 백성이 어찌 괴롭지 않으며 나라가 어찌 병들지 않겠습니까? 신이
어리석어 죽을죄를 지고 있지만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
하여 음양이 순서를 잃어버리고, 경연을 오랫동안 그만두어 유신儒臣이 헛되
이 매어있으며, 언로가 막혀서 공정한 논의가 관철되지 않고, 재물을 절약하
지 않아 심지어 차관을 하였습니다.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는 것은 사사로움
을 따라 문학文學은 일어나지 않으며, 상벌이 밝지 않아 법은 해이해졌습니다.
수령과 방백이 탐학하여 소요가 더욱 일어났고, 서학西學이 금지되지 않아 동
도가 번성해졌습니다. 환곡은 비어있으니 군량을 어디에 의지하겠으며 호포
戶布를 배정하여 군정軍丁을 군적에 올릴 수가 없으며 관작官爵이 뇌물로 이루
어져 규범이 문란해졌고, 관직公器이 바르지 않아 명분이 모두 없어졌으며 전
운소가 폐단을 만들어 징수가 절도가 없으며 녹봉은 주지 않아 배고픈 기색
이 처량하며 무당이 출입하는데도 궁궐이 엄중하지 않고,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아 관부의 창고가 비었으며, 1푼으로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물가가 급등
하였으며, 당오전을 한가지로 발행하여 명실名實이 서로 어긋났습니다.
신이 개진한 여러 가지 조항들은 지금 매우 절실한 폐단이어서 제거해야
할 병폐입니다. 밝으신 전하께서 다스리려고 도모하지 않으시면 그만이지만,
다스리려고 하신다면 어찌 그 방법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지금 민생
은 불이 붙고 물에 빠진 것보다 궁박하고 화급합니다. 만약 급히 구제하지
않는다면, 몇 만 명의 백성들이 서로 빠지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할 것
동비토록 東匪討錄 155

입니다. 어찌 밝으신 임금께서 위에 계시는데, 이 백성으로 하여금 대명大命


이 가까운 시일 내에 내려 구해줄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때를 놓
치고 구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백성이 남지 못할까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전하가 비록 다스리고자 해도 시행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라는 것이 상서尙書의 교훈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널리 낭
묘廊廟에게 나라 다스리는 도를 물으시고,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에 성실히
힘쓰시며, 급하지 않은 직무는 먼저 혁파하고, 진언進言하는 길을 널리 열어,
조정의 득실과 생민의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매일 임금께 아뢰게 하여 좋은
것을 받아들여 정사에 보탬이 되게 하십시오. 유신을 맞이하여 자주 경연을
열어, 고금의 치란治亂을 토론하며 나라를 안정시키는 근본으로 오늘 정치에
서 먼저 해야 할 일로 삼으십시오. 유신維新의 명命을 지금 시작한다면 실제로
만세동안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신의 말이 채택되고 시행되는 은혜를 입어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된다면, 비록 망령된 말 때문에 죽게 되더라도, 진실로 마음이 흡족할 것이
니,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런 작은 마음을 한번 아뢰려고 했으나,
지난번에 이필李泌이 헌신獻身하는 일을 맞아, 스스로 장구령張九齡이 진감進鑑한
뜻에 덧붙여서 후원喉院, 승정원에 상소를 냈으나, 임금께 올려 지지 않았습니
다. 신이 여러 날을 송구스럽고 부끄러워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남쪽 땅이 안정되지 않고 소요가 계속되는 때를 맞아, 만약 언사言事의 글
로 난리를 그치게 할 계책을 개진한 것이 있다면, 승정원에 있는 신하가 어찌
감히 글의 지엽적인 부분을 따지고 격식과 관례에 어긋났다고 하여 먼저 물
리쳐서 스스로 임금의 귀와 눈을 가리는 짓을 합니까? 신이 여기에서 더욱
송구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15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금의 폐단을 말하니 매우 가상하


다”라고 하였다.

호남 유생이 초토사에게 드리는 원정문 [湖南儒生原情于招討使文]


호남 유생들이 한을 품고 피를 머금으며, 지엄하신 위엄으로 밝게 들으시
는 초토사께 백번 절하며 편지를 올립니다. 삼가 저희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 교화에 참여한 사람인데, 어찌 감히 함부로 의롭지 못한 일을 일으켜서,
스스로 형벌에 빠지겠습니까?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는 것이 옛 성인이 남긴 교훈이고 시무時務의 대강大綱입니다.
방백과 수령은 목민牧民하는 사람입니다.
선왕의 법으로 선왕의 백성을 다스리면, 천년이 지나더라도 그 나라를 향
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방백과 수령은 왕법을 돌아보지 않고 왕민王民
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탐학이 무상하고 군전軍錢을 때도 없이 지나치게 거둡
니다. 또한 환전還錢은 원금까지 내기를 독촉하고, 명목이 없는 조세를 더 거
두며, 각종의 연역烟役67을 날마다 중복하여 징수하고 인척에게 나누어 거두는
것이 한이 없습니다. 전운영은 더 거두어 납부를 독촉하고, 균전관均田官은 결
수結數를 농간질하여 세금을 거둡니다. 각 관사의 교예배校隸輩들의 토색討索과
탐학은 하나하나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거처를 잃어버린 자가 10
에 8 9가 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는 자는 길에 흩어집니다. 노인네를
부축하고 어린애를 끄는 자가 연이어 도랑과 골짜기를 메웁니다. 살아갈 방
도가 10,000에 1가지도 없습니다. 불쌍한 이 민생民生이 죽지 못하여, 수백
명이 모여 본 관아에 호소하려고 하면 난류亂類라고 하고, 영문營門에 호소하

67 연역(烟役): 연호잡역의 준말로, 민호에 매긴 여러 부역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57

려고 하면 역류逆類로 지목하여, 막중한 친군親軍을 제멋대로 내어 여러 읍에


서 병사를 모집해서 칼로 죽입니다. 살육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니, 교화를 펴
고 백성을 기르는 사람이 참으로 이와 같을 수가 있습니까?
저희들의 오늘 일은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손에 병기
를 잡은 것은 단지 몸을 보호하기 위한 계책일 뿐입니다. 일이 이런 지
경에 이르러, 억조億兆의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하고 8도가 의논하여,
위로는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감국監國 하게하여 부자父子의 인
륜과 군신君臣의 의리를 온전히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안정시켜 다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호할 것을 죽어도 변치 않기로 맹서하였습니다. 살
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내무부의 초기에, “지금 순변사 이원회와 초토사 홍계훈의 전보를 받아보
니, ‘호남의 비류 중에 그 우두머리는 이미 섬멸하였습니다. 협박에 따르게
된 나머지 무리 중에서 흩어진 자들은 등소等訴하여 애걸하고 모두 이미 병기
를 버리고 귀화하였습니다. 불안하여 돌아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명령을 내
려 일일이 타일러서 귀농하게 하여 그 생업을 안정시켰습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그런데 지금 소요를 겪은 뒤라서, 민심이 많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워 할
것입니다. 초토사와 심영병방沁營兵房은 우선 주둔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
해서 안정시키고, 순변사는 바로 철수하여 돌아오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의정부의 초기에, “지금 초토사 홍계훈의 전보를 받아보니, ‘처음에 각 읍
의 수령은 방어를 급선무로 생각하지 않고, 헛소문을 들으면 도피를 주로 해
서 적들로 하여금 관아가 비어 대비가 없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물을 탈취하는 것이 주머니를 뒤지는 것과 같게 되어 이처럼 창궐하게 되
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글을 지어 엄중히 지시했습니다. 더욱 심한 읍은
15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우선 파면하여 내쫓고 처리한 것을 보고하겠습니다. 곤외梱外68의 명령을 받


지 않고 융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였거나, 군무에 관계된 수령으로 근실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 자는 바로 먼저 파면한 뒤에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
습니다. 지금 이 보고는 애초에 지시한 것이 아니고, 단지 논죄한 것은 사체
事體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토사 홍계훈을 추고推考하도록 특별히 지시한 뒤
에, 관찰사에게 관아를 비우고 대비가 없는 고을의 수령을 철저히 조사하게
하여, 하루가 가기 전에 등문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다시 의정부의 초기에, “소요를 겪은 호남 읍들이 공사公私간에 피폐한 것
은 이미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반드시 특별히 견감 減하여 보충하는 방도를
기다린 뒤에야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호서와 경기도의 군대가 지나
간 곳은 말먹이와 곡식을 마련하고 주전廚傳69을 제공한 것이 비록 공전과 공
곡에서 융통했다고 해도, 그 밖에 손해를 본 자질구레한 비용은 지금 생각하
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한양의 각 관아가 연례적으로 복정卜定70하는 제반
청구와 예목禮木,71 수령이 새로 제수 받은 뒤에 내는 당참채堂參債72 등 각 읍
들의 잡비는 회복되기 전까지 절대로 거론하지 말도록 엄중히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소요를 겪은 읍을 특별히
구제하는 것은 늦춰서는 안된다. 군대가 지나가는 연로沿路에 끼친 폐단도 아

68 곤외(梱外): 지방에 주둔하는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홍계훈을 가리킨다.


69 주전(廚傳): 관리에게 음식과 말을 접대하는 것을 말한다.
70 복정(卜定): 공물 이외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상급관청에서 결정하여 하급관청으로 하여금 각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납입하게 하던 일을 말한다.
71 예목(禮木): 예를 표하기 위해 보내는 포목(布木)이다.
72 당참채(堂參債): 새로 수령이 되거나 다른 고을로 옮겨 갈 때에 이조나 병조의 관리에게 바치던
예물을 말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59

뢴 대로 바로 분부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완부는 지금 안정되었으니, 조경묘와 경기전을 봉안奉安하는
일은 조금도 늦춰서는 안된다. 해당 관아로 하여금 날을 잡아 대신과 예조판
서를 보내어 그곳 관찰사와 함께 가서 받들어 오게 하고, 바로 환안제還安祭를
지내라”고 하였다.

15일 신시 삼례에 주둔하고 있는 순변사의 보고 [十五日申時 參


禮留巡邊使]
의정부가 보내신 전보는 삼가 잘 알았습니다. 10일 술시戌時에 보낸 고부의
첩보에 의하면, “김제군에 머무르던 저들 400 500명이 고부군 덕림면德林面
에서 무장으로 향해 갔습니다”라고 하였고, 11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흥덕
현의 첩보에 의하면, “저들 500여 명이 고부 흥덕리에 머무르다가 오늘 묘시
卯時, 오전 5시~7시쯤에 60여 명이 각각 고창 땅으로 달아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무장으로 향해 갔는데, 지나가는 연로에 밥상을 배정하고 짚신을 빼앗았습니
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창과 무장 등의 읍에서는 아직 첩보가 없습니다. 그
후의 형편은 정탐하는 대로 전보로 아뢸 계획입니다.

인천감리 김 [仁監 金]
내서가 5월 14일에 인천감리仁川監理의 전보에 의하면, “일본 영사가 육군제
독陸軍提督 오오토리大鳥圭介가 인솔하는 3,300명의 군대가 한양으로 진군할 때
에 며칠 항구에 머문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4일 신시 인천감리 김 [十四日申刻 仁監金]


배에서 뭍에 내린 일본 병사는 2,332명이고 말은 218필이며, 대환구大 口
16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가 6좌 탄약 50궤짝 탄환 724궤짝이었습니다.

인천감리 김 [仁監 金]
일본 병사 80명이 지금 한양으로 향했는데, 그 군대가 중도에 머물렀는지
한양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인천감리 김 [仁監 金]
일본 병사 79명 말 22필 탄환 420궤짝을 어제 술시戌時 정각에 내렸고,
병사 65명이 오늘 묘시卯時 정각에 한양으로 출발하였습니다.

16일 [十六日]
내무부의 초기에, “비도는 이미 제거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서 도
망하였습니다. 귀농이 현재의 급선무인데, 그것은 신속하게 군대를 되돌리는
데에 있습니다. 심영 병방은 잠시 전주에 주둔시키고 초토사는 바로 회군하
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의정부의 초기에, “지금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전주 판관 민영승閔


泳昇이 이미 파면되었으나, 유임을 바라는 소원이 뜰에 가득하다’라고 합니다.
치적을 알 수가 있으니, 특별히 유임시켜서 공효를 이루도록 독려하십시오”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24일 완백의 전보 [二十四日 完伯電]


내서가, “지금 영접사의 전보를 보니, ‘화병華兵, 청나라 군대 2,000명이 오늘
아산에서 전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어제 인시寅時, 오전 3 5시에 아산에서 천
동비토록 東匪討錄 161

진天津의 무비학원武備學員 10여 명이 공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 본도에 주


둔하는 군대의 요구사항이 대단하여 매우 걱정스러우니 바로 회답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24일 영접관의 전보 [同日 迎接官電]


전보로 하신 하교는 잘 알았습니다. 통령 섭사성의 군대가 오늘 축시丑時,
오전 1 3시에 출발하여 이미 천안에 도착했고, 대수大帥, 총사령관 섭지초의 진영
은 아직 아산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섭통령 統領이 군대를 인솔하여, 전주와 고부 등 나머지 비도가 모


여 있는 곳에 가서 그들을 토벌하려는 까닭이다.

26일 [二十六日]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이 입래入來 하였다.

전라 병사 서병무의 장계 [全羅兵使徐丙懋 狀啓]


동학 도당이 지금 도내의 전주 등지에 집결한 연유는 이미 치계하였습니
다. 저들이 지난 4월 27일에 전주를 점거하여 지금 행동거지가 흉악하다는
소문이 낭자합니다. 그곳 판관 신臣 민영승은 성을 잃어버린 지가 보름이 되
어 가는데, 아직 어떠한 보고가 없고 아전의 치고馳告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주진全州鎭의 영장營將 신臣 임태두任泰斗는 그 직임이 적을 체포하는
것인데, 이 적의 난리를 당하여 처음부터 보고하지 않았으니 모두 놀랍고 한
탄스럽습니다. 판관 신 민영승과 그곳 영장 임태두의 등한시한 그 죄상을 맡
은 관사로 하여금 여쭈어 처결하게 하십시오. 도내 각읍의 군병 중에 정예
16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포군砲軍 300명을 뽑고 도총장都摠將전 호군前護軍 조송현趙宋鉉을 차출하여, 군대


를 인솔하게 해서 나주진羅州鎭 우영장右營將 신臣 이원우李源佑에게 일제히 귀속
시키십시오. 그리고 밤을 무릅쓰고 전주부로 달려가서 초토사 홍계훈의 지휘
하에 힘을 합쳐 토벌하도록 바로 전령을 보내십시오. 전주의 수리首吏와 좌수
座首는 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죄를 조사하여 처리할 생각입니다.

전라감사 김학진의 장계 [全羅監司 金鶴鎭狀啓]


신이 이 달 9일에 전주부에 도착한 연유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지난 달
27일에 비류가 성에 들어올 때에 흉악한 칼날이 창궐하여 막을 수 없는 형세
였고, 형편없는 병졸로 성을 지키는 것은 상대가 안되는 처지여서 애초에 방
어하지 않았습니다. 법의 취지가 허물어졌으니 지난 일이라고 논죄하지 않아
서는 안됩니다.
중군中軍 김달관金達寬은 신영병방新營兵房, 무남영을 겸직하고 있어 성 지키는
것에 힘을 대하기를 남보다 갑절이나 해야 하는데도, 포소리를 듣고 먼저 도
망가서 목숨을 도모하는데에 급급했습니다. 전주 영장 임태두는 적의 종적을
살핀다고 하며 먼저 성 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돌아오지 않고 갑자기 피신했
습니다. 기강이 무너진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성을 지킬 임무가
있는 전주 판관 민영승도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습니
다. 우선 파면하여 내쫓고 담당 관사로 하여금 여쭈어 처결하게 하십시오.
또한 신영 대관新營 隊官 이재한李在漢 유재풍柳在豊 유판근柳判根으로 말한다
면, 이미 패배한 병사들이 남은 용기가 없고 거느리는 주민州民이 비록 기본
법식이 없더라도,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을 밟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
는데, 어려워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군율로 살펴보면, 잠시도
보류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신의 감영에서 죄의 경중을 가려 죄상을 조사하
동비토록 東匪討錄 163

여 처벌할 생각입니다.
감영으로 들어오는 길에 성의 서남문 안팎 인가들이 모두 불에 타서 계단
은 검게 그을리고 벽은 붉게 물들었으며, 연기와 먼지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요호가 저장한 것은 이미 없어졌고 편맹編氓73의 항아리는 남은 것이 없어서,
남녀노소가 끌어안고 손을 끌며 길 위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이 참담하니 어찌 말로 하겠습니까? 또한 크고 작은 창고의 문은 제대로
된 것이 없고 각종의 문서와 장부는 거의 불타버렸습니다. 이민과 관예배官隸
輩들이 모두 흩어져서 남은 호수가 10집에 9집은 비어 있었습니다. 금탕金湯,
견고한 성과 웅장한 관부官府가 맥을 못 추고 하룻밤에 무너져서 이런 지경에 이
르렀습니다. 더욱이 이 관부는 주의 기읍岐邑과 한의 풍패豊沛74와 같고 묘전의
의관이 매우 가까우니, 영부營府 방어의 중요함을 비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대면하여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令을 내걸어 거주하는
자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고 떠난 자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도록, 특별히 위로
하고 구제하였습니다. 매우 불행한 이때를 맞아 서둘러 품어 보호하기를 마
치 불에 타는 사람을 구제하고 불길을 잡는 것처럼 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집을 지어 살게 하는 방법은 비록 강구하고 싶어도, 공사公
私간에 너무 가난하여 낼 곳이 없습니다. 이른 밤에 걱정하여 빙탄 炭이 마음
에서 교대합니다. 보좌하는 관리을 나누어 보내어 불탄 집을 일일이 직접 가
서 조사하게 한 뒤에 다시 치계하겠습니다.

73 편맹(編氓): 호적에 편입된 평민을 말한다.


74 기읍(岐邑) 풍패(豊沛): 임금의 고향 또는 도읍지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전주를 풍패지향
(豊沛之鄕) 이라 부른다.
16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삼남염찰사 엄세영의 장계 [三南廉察使嚴世永狀啓]


고산현감高山縣監 민영운閔泳雲은 정치를 하는 것이 전적으로 아전의 손에서
나와 송사를 처리하는 것도 백성의 원성이 많았습니다. 규정 외에 결수結數를
배정하고, 명목 없는 세금을 거두었는데, 모두 불법으로 사람들의 비방을 초
래하였습니다. 더욱이 애초에 감영의 지시가 없는데, 군수를 빙자하여 곡식
1,000여 석을 집류執留하였고, 돈 10,000여 냥을 할당하여 작은 읍과 궁박한
집에서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길에 내걸린 방문榜文을 보고 읍에 들어가 장부
를 조사해보니 차이가 없이 실제로 소문과 일치하여 우선 파면하여 내쫓았습
니다. 그 죄상은 담당 관사로 하여금 아뢰어 처결하도록 하겠습니다.

6월 초 6일 [六月初六日]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성근金聲根이 조경묘와 경기전을 배봉陪奉하는 일로 전주
에 내려갔다.

호남 회생들의 상서 [湖南會生等 上書]


삼가 저희들의 거사는 모두 전임 감사김문현의 날조로 꾸민 것입니다. 군사
를 일으켜서 병기를 지니고 도망하여 목숨을 보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처지
에서 나왔습니다. 사람 중에 누가 살기를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이 없겠습니까? 동학교도들도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행동
거지와 사리의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고,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없애며 아버
지와 자식을 죽여, 그 참화慘禍가 혹독했습니다.
사람이 살아서 생업을 즐기려고 하지 어찌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지난번
함평땅에서 초토사가 임금의 윤음을 받들고 내려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원통한 심정을 호소하려고 한차례 의송議送을 내었는데 말이 매우 슬프
동비토록 東匪討錄 165

고 간절하였으나, 한 자의 효유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장성長城, 땅에서 많은


대포 탄환을 뜻밖에도 어지럽게 쏘아 수백 명을 죽였습니다. 전주 감영에 들
어갈 때에도 효유도 없이 많은 대포 탄환을 어지럽게 성안으로 바로 쏘아서,
매우 중요한 양전兩殿이 거의 무너졌고 인가 수천호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죽
거나 다친 사람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 임금의 신민으로 이런 패악한 변고가 있었다는 것은 고금古今에서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명령을 받든 신하가 사람을 살리려는 국가의 은
덕恩德을 펴지 않고, 도리어 김문현과 김명수金命洙의 간사한 청탁을 듣고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까? 저희들의 오늘 형편은 진퇴유곡進退維谷과 같습니
다. 비록 초토사의 화해和解75의 명령을 받았더라도, 지나가는 읍들이 군대를
만들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금구관아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였고, 나주목사는 영장과 함께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 그 수를 셀
수가 없습니다. 각자 돌아가서 생업을 편안히 하라는 말씀을 어찌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또한 백성이 없는 것은 두려워 할
만하다고 합니다. 교화를 펴고 백성을 기르는 관리가 생업에 돌아갈 것을 회
유한 뒤에 죽이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른 것입니까? 사람 중에 누가 부모
를 그리워하고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집이 불타고 처자가 죽
은 자가 10에 8 9입니다. 집에 들어가는 날에 관속官屬이 뒤쫓아 와 잡아가
서, 죽어도 그 장소를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집에 돌아가 생업을 안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랫사람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생업을 소중히 여기
지 않는 성품을 질책합니다.
진퇴를 용납하기 어려운 중에 지금 고시告示를 받으니, 살아날 희망이 있는

75 화해(和解): 홍계훈이 전봉준에게 폐정을 제시하면 조정에 보고해 시정하겠다는 제의로 화약을
맺은 일을 말한다.
16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듯합니다. 특별히 임금께 아뢰어 원정原情의 조목마다 일일이 허락해서 시행


해 주신다면 저희들이 돌아가서 안정하는 것은 저절로 될 것입니다. 밝게 살
펴서 처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순변사巡邊使께. 1894년 5월 일

요구사항을 열거함 [所願列錄]


一. 전운소의 조복遭卜, 경비은 해당 읍에서 상납하고 예전대로 복구하라.
一. 균전관이 진결陳結에 농간을 부려 백성의 피해가 심대하니 혁파하라.
一. 결미結米는 예전 대동법大同法의 관례에 따라 복구하라.
一. 환곡還穀은 전임 감사가 이미 원금까지 깡그리 돈을 거둬들였으니 다시
징수하지 말라.
一. 어느 곳의 보洑를 막론하고 수세收稅를 혁파하라.
一. 해당 읍의 지방관이 자신의 읍에서 논을 사고 산을 이용76하는 것을
형률에 따라 처벌하라.
一. 각 읍의 시정市井과 각 물건에 물가에 따라 돈을 매겨 수세하는 것과
도고都賈 명색名色을 혁파하라.
一. 포흠을 한 공전이 1,000금이면 죽여서 속죄케 하고, 친척에게 물리지
말라.77
一. 관장官長을 끼고 오래된 사채私債를 강제로 받아내는 것을 모두 금지하라.
一. 여러 읍의 이속吏屬에게 아전의 직임職任을 주고 그들에게서 임채任債를
받고 차임差任하는 일을 엄중히 금지하라.

76 용산(用山): 장지로 사용하는 산을 말한다.


77 친척에게 물리지 말라 는 족징(族徵)을 말하고, 이웃에게 대신 물리는 것은 인징(隣徵)이라고 한다.
동비토록 東匪討錄 167

一. 세력을 믿고 남의 산소를 빼앗는 자는 죽여서 징계하라.


一. 각 포와 항구의 잠상潛商이 쌀을 사들이는 것을 금지하라.
一. 각 포와 어염의 세전稅錢을 거두지 말라.
一. 각 읍 관아의 물종物種을 들여 올 때는 시가時價에 따라 배정하고, 상정
례詳定例78를 혁파하라.
一. 잔민殘民을 침학하는 탐관오리는 일일이 파면하라.
一. 죄 없이 죽거나 갇힌 동학인東學人을 일일이 신원伸寃하라.
一. 민간에 전보국電報國의 폐단이 가장 크니 혁파하라.
一. 보부상褓負商과 잡상雜商이 떼를 지어 행패를 부리는 것을 영원히 혁파
하라.
一. 흉년과 기근이 든 해에 백지징세白地徵稅를 시행하지 말라.
一. 연호잡역煙戶雜役을 따로 더 거두는 조항을 모두 혁파하라.
一. 결結에 두전頭錢, 구문과 고전考錢, 품삯79을 각 읍에 해마다 늘이는 것을
모두 시행하지 말라.
一. 경영京營의 병사와 저리邸吏의 급료로 주는 쌀[料米]은 예전의 예에 따라
줄여라.
一. 본 영문營門의 진고전賑庫錢80은 바로 모두 백성의 고혈膏血이니 영원히
혁파하라.

78 상정례(詳定例): 원문에서 상정(詳定)을 상정(常定)으로 잘못 적은 듯하다. 상정(詳定)은 관아에서


쓰는 물건의 값 세액(稅額) 공물액(貢物額) 등을 심사하여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79 고전(考錢): 고전(雇錢)을 잘못 쓴 듯하다.
80 진고전(賑庫錢): 구휼을 위해 거두는 돈을 말한다.
16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정읍의 지자가 가져온 편지 [井邑持者便來]


삼가 저희들은 매우 원통한 실상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지난날에 전주
에 들어간 것도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나왔습니다. 동학은 선왕조의 교화를
받은 유민인데, 전임감사는 어찌하여 군사를 일으켜 갑자기 공격해 죽여서
이런 큰 난리를 초래하였습니까? 초토사는 애초에 효유하지 않고 군사를 일
으켜 살육하니, 그것이 옳은 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경기전과 조경묘에 포
를 쏘고 민가에 불을 지르는 것도 큰 죄인데, 도리어 저희들을 역적이라 하고
체포하는 것을 위주로 합니다. 여러 읍에 감결을 보내 도리어 소동을 초래하
니, 집에 돌아가서 생업을 편안히 하라는 말은 완전히 백성을 속이는 것입니
다. 열록列錄을 계문啓聞하면 반드시 나라를 속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소원
을 조목조목 나열한 것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오늘 해산하더라도 내일 다시
모이는 것은 기약하지 않아도 올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헤아려서 특별히 계
문하여 매우 원통한 심정을 풀어주신다면, 자연히 생업을 편안히 여길 것입
니다.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5월 18일 유생들이 정읍의 경계에서
(번역 : 최원경)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