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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남정일기 南征日記

이 자료는 1894년 5월초부터 6월 27일까지 봉건정부의 요청에 따라 진주


한 청병淸兵의 진주 사실과 동태를 보고한 일기이다. 저자는 청병淸兵을 맞이
하기 위해 파견된 영접관迎接官 이중하李重夏인 것으로 보인다.
주요한 내용은 5월 1일 영접관迎接官으로 임명된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부
터 시작하여 청병의 도착에 대한 보고서, 5월 6일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이, 7
일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가 이끄는 청병淸兵이 아산읍牙山邑에 들어왔다는 사실,
6월 25일까지 청병과 동행하면서 정부에 보낸 보고서로 이루어져 있다. 책
의 중간에 6월 27일 성환에서 벌어진 청일 양군의 접전 사실에 대한 장계가
삽입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朝鮮에 진주한 청병淸兵의 경로와 조
선정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
어 있다
남정일기 南征日記 399

남정일기
南征日記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 나이 57 호號 서경曙卿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 나이 54
통령統領 섭옥표 玉票

영무처營務處 용전양龍殿揚 나이 52 호號 근신覲辰


인천영사仁川領事 유영경劉永慶
유장영劉長英 정윤화程允和
오감천吳鑑泉
장기경張綺卿
노신보路信甫

1894년 [甲午]

5월 [五月]

초 1일. 갑오년甲午, 1894년 5월 초1일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길, “중국 군


함[兵艦]의 소식에 곧 와서 정박할 것이라 하니, 접대하고 응대하는 절차를 잠
시도 늦출 수 없는 바, 공조참판工曹參判 이□李□1)를 영접관迎接官으로 임명하여

1) 李□ : 이중하(李重夏)를 일컫는 듯. 당시 공조참판은 이중하였다.


400 청일전쟁 관련 자료

그로 하여금 마중 나가 일을 처리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


에 전교하시길, “윤허한다”하시고, 아뢰는 일을 맡은 이[司謁]에게 하교下敎하
신 내용을 입으로 전하게 한 바, 영접관은 당일로 하직하고 길을 떠나게 하
였다. 그리고 인신印信과 마패馬牌를 하사하시어 하직하고 물러났는데, 날이
저물어 떠나지를 못하였다.

초 2일. 아침 일찍 출발하였는데, 세아世兒와 마을 사람 등이 모두 강가


까지 전송하러 나왔다. 삼종제三從弟인 영장營將 완하完夏, 기영畿營의 배행리陪行
吏 이계인李啓仁, 통사通詞 장진기張晋基, 집에서 부리는 아이[家 ] 종원동이鍾元同伊
가 길을 따라 나섰다. 오시에 과천읍果川邑 중화中火에 다다랐는데, 본읍의 수
령[本 ] 윤병尹秉이 와서 배알했다. 그리고 곧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화성華城 말
마 馬를 지났는데, 중군병사中軍兵使 서형순徐珩淳이 와서 배알하였으나 길 위
에서 급히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작별하였다. 그리고 중치中峙에 도착하
자 날이 저물어 횃불을 들고 오산烏山에 이르러 차효순車孝淳의 집에서 숙박하
였다.

초 3일. 아침에 출발하여 율포栗浦에 들어가 승지承旨 범창가範昌家가 참봉


參奉 형님의 궤연 筵, 靈 와 신주·혼백을 모셔두는 곳에 절을 하고, 아침밥을 먹은 후
곧 출발하여 군문진君門津을 건너 평택平澤에서 잠시 쉬었다. 그곳의 수령[本 ]

홍승택洪承宅이 와서 배알하였다. 점심을 먹고 곧 출발하여 둔포屯浦를 지나


저물녘에 아산牙山의 백석포白石浦에 이르렀다. 그곳의 수령 정인진鄭寅鎭, 온양
溫陽의 수령 서만보徐晩輔, 직산稷山의 수령 이봉우李鳳宇 등이 모두 와서 중국의
군함[兵艦]을 기다렸다. 잠시 사이에 우마牛馬와 강척舡隻을 마련하고 응접할 온
갖 일들을 급작스레 다 준비하는 한편, 관문을 내어[發關] 각읍各邑에 동칙董飭,
감독하고 독촉하며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하니, 이교吏校들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남정일기 南征日記 401

초 4일. 인천영사仁川領事 유영경劉永慶이 윤강輪舡을 타고 먼저 도착하였다.


병함兵艦의 소식을 대체적으로 듣고, 수계修啓, 문서나 글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상주함하여
올려 보내길, “신은 이달 초1일에 명을 받잡고 출발하여 초3일에 아산牙山 백
석포白石浦에 도착하였사옵니다. 초4일에 아침 일찍 인천영사 유영경이 윤함
輪艦을 타고 각종 물건을 싣고 왔사온 바, 병함兵艦의 소식을 물어본즉, 섬서陝
西의 진태鎭台, 淸代에는 總兵이라 칭함 섭사성 士成이라 하는데, 초5일에 도착할 것이
라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육로로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가 초6일에
도착할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그런데 이곳의 포구[本浦]는 물이 얕은 까닭에
병함兵艦은 앞 바다의 내도[前洋內島]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운반할 것이라고 하
옵니다. 그래서 신 혼자만 금일 저녁 조수가 밀려나길 기다렸다가 몸소 내
도內島로 들어가, 기다렸다가 맞이하여 위로할 것이므로 이에 계문을 올리옵
니다. 그리고 아산牙山은 본디 잔읍殘邑이라 각종 접응接應에 필요한 것들을 전
연 갖출 수 없으므로 신이 민망하고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겠기에 이후의 형
편은 이어서 곧 보고할 계획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아울러 보고드리옵니
다. 이런 전차詮次, 까닭로 선계善啓, 임금에게 서면으로 아뢰는 일을 높이어 이르는 말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유시酉時에 차비관差備官 고영선高永善 박종선朴鍾善 이필균李弼均, 통사영리通詞營
吏 등을 거느리고, 조수가 밀려난 틈을 타서 내도內島로 달려 들어갔다. 삼종
제三從弟 치룡致龍의 가동家 종원鍾元이 수행하였다. 밤이 깊어지고 달빛도 어
두운 데다가 암초가 위험하게 놓여 있어 뱃길[舡路]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어
쩔 수 없이 중간에서 닻줄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놓기로
하였다.

초 5일. 아침에 배를 출발하여 오시午時가 가까워서야 내도內島에 다다랐


다. 전 양화원前洋華員 이화륜李和輪이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명첩名帖을 먼저 보내고 검칙檢飭하였는데, 각처에서 40여 척의 배가 모여들었
402 청일전쟁 관련 자료

다. 그대로 머물러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에 바람이 일고 배가 흔들


려서 어지럼증이 심하여 잠시 섬 기슭에 배를 대고, 어부의 집에서 쉬었다.
신시申時 후에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의 병함兵艦이 도착하였다. 곧바로 차비관差
備官 통사通詞 등을 거느리고 작은 배의 노를 저어 병함이 있는 곳으로 갔다.
먼저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한 후, 섭통령 統領과 잠시 말을 나누었다. 섭통
령의 수행원인 이화李和 정윤화程允和 원세렴袁世廉이 옆에 있었는데, 모두에게
정성껏 대하였다. 원세렴은 곧 원세개袁世凱의 동생이었다. 또한 원세개의 조
카가 옆에서 접대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로써 원사袁使, 원세개가 우리나라
에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배를 돌려 다시 하
처下處, 임시 머무르고 있는 곳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천영사仁川領事 유영경劉永慶에게 계
문을 보냈다. “초4일에 아산牙山 백석포白石浦에 다다른 형편은 전에 이미 보고
를 올렸거니와, 그날 신이 저녁때의 조수를 타고 홍주洪州의 내도內島 앞바다
로 나갔사온즉, 먼저 온 작은 병함兵艦 1척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있었사옵니
다. 그리고 초5일 유시酉時 쯤에 중국 병함兵艦 1척, 소륜함小輪艦 1척이 도착하
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차비관差備官 통사通詞 등을 거느리고 가서 만났사온
즉,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이 말을 타고 오기에 먼저 명을 받잡고 위로하고 문
안하는 뜻을 건낸즉, 손을 들고 고맙다[稱盛]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느리고 온
군사의 수를 물어본즉 글로써 보여주었는데, ‘내가 거느리고 온 보대步隊 1천
과 기병 1백은 지금 이미 도착하였고, 섭제독葉提督이 거느린 보대步隊 1천5백
과 기병 150은 내일 하오에 도착할 것입니다. 또한 보대步隊 2천5백과 기병
500은 뒤이어 며칠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산牙山에 들어올 것인지 물어본즉, 내일 다시 상의하자 하였습니
다. 그래서 신은 그대로 내도內島에 머무르면서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의 병함兵
艦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병강兵舡이 닻을 내리고 머무르
고 있는 곳에서 아산牙山 백석포白石浦까지는 수로로 근 100리에 이르는 먼 거
리이온즉, 작은 배로 운반하는 것 등 수많은 접응接應에 관한 절목은 일일이
남정일기 南征日記 403

들 수 없으니 민망하고 송구스럽기 그지 없사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


서 보고드릴 계획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급히 보고드리옵니다. 이런 전차詮
次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전국관리電局管理가 전신을 설치한 일[設電
事]로 전보電報를 보내왔다. 그래서 섭통령 統領의 병함兵艦이 도착한 일을 경전
국京電局과 금영錦營에 전보로 보냈다.

초 6일. 새벽 조수가 밀려들어왔을 때, 섭통령 統領이 아산읍牙山邑으로


들어왔다. 이날 작은 배로 군량과 군기[糧械]를 운반하느라 종일 시끌시끌 하
였다. 저녁때 비바람이 몰아쳐 건널 수가 없었으므로 깊은 근심과 시름 속
에 잠겼다. 이날 초토사招討使의 전음보電音報를 통해 ‘초3일에 대승을 거둔 소
식’을 들었다.

초 7일. 밤비가 아침까지 이어졌다. 사시巳時에 제독葉提 섭지초督志超의 병


함兵艦이 도착하였다. 즉시 작은 배를 내어 찾아 뵙고 위로와 문안을 드린 뒤
돌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풍랑이 점차 심해져서 작은 배가 흔들리고
안정되지 않아, 일행이 모두 어질어질하고 정신이 흐려졌다. 나 또한 심히
어지러웠다가 한참 후에 점점 깨어났다. 제독과 모든 군사들이 육지로 내려
오려고 배를 방패처럼 묶고, 윤함輪艦을 정박시키라고 지시하였는데, 바람이
일고 물결이 높아져 배를 댈 수가 없었다. 제독은 반나절이나 배안에서 지
체하였다. 심히 민망하고도 민망하였다. 이날 밤 수계修啓, 문서나 글을 작성하여 임금
에게 상주함에, “중국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이 초5일에 내도內島의 앞바다에 도착한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 임금에게 급히 서면으로 상주함하였거니와, 초6일 새벽에 조
수를 타고 섭사성 士成이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백석포白石浦에 내려 아산읍牙山邑
에 들어가 머무르고 있사온즉, 마군馬軍은 작은배[小舡]에 싣기가 어려워서 그
대로 내도內島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홍주洪州 지방의 마른 길[旱路]을 따라 길
을 나서 아산牙山에서 만날 것이라고 하오며, 같은 날 미시未時 쯤에 병함兵艦 1
404 청일전쟁 관련 자료

척이 또한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초7일 사시巳時 쯤에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가


병함兵艦 1척을 거느리고, 이어서 내도內島의 앞바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
서 신이 차비관差備官 통사通詞 등을 거느리고 곧바로 그 병함兵艦 안으로 들어
가 섭지초를 뵙고 먼저 명을 받자온 대로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하였사온즉,
손을 잡고[擧手] 고맙다고[稱盛]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산牙山에 들어갈 것
인지 물어본즉, 배와 말이 준비되는 대로 곧 육지에 내려 나아갈 것이라고
하온 바, 신이 금방 해당 읍에 동칙 飭하여 계속하여 기다리라고 하였사오
나, 사세가 되어가는 형편이 자꾸 지체되어 송구스럽고 민망한 심정을 이길
길 없사오며, 이후의 형편은 연속하여 보고할 계획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치계馳啓하옵는 전차詮次, 까닭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초 8일. 섭수葉帥, 섭제독의 대군이 아침 일찍 조수가 밀려들 때 배를 타고


백석포白石浦로 향했다. 나도 일행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작은배를 타고 뒤를
따랐다. 홍주목사[洪牧] 이李에게 발문發聞하여 지금 내도內島에 도착해 있으라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여 안타깝게 되었다. 배가 포구에 가까워져 멀리 섭
수葉帥의 대군을 싣고 있는 배를 보니, 얕은 여울에 좌초되어 움직이질 못하
였다. 그래서 급히 강격舡格, 격군과 통사通詞 등을 보내고, 가서 본 후, 나의 배
로 옮겨 실을 것을 청하였다. 노를 놓고 한참이 지난 후, 날이 저물자 섭수葉
帥가 비로소 그의 배를 물결 위에 띄울 수 있었다. 그래서 육지에 다다른 후,
기슭에 배를 대고 백석포白石浦에 잠시 쉬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관리官吏와
관민官民들이 시끌벅적하였다. 아산 수령에게 일을 맡기고, 나는 곧 읍관邑館
의 작청作廳으로 들어가, 밤에 섭제독의 진[葉陣]에 이르러, 제독提督을 뵙고 위
로와 문안을 한 후, 곧 돌아왔다. 좌부左副의 령 김병수金令炳秀, 검교춘방檢校春坊
의 령 정세원鄭令世源이 임금의 첩지[御睿帖]를 받들고 내려왔는데, 서로 만나 기
쁨을 나누었다[相逢歡敍]. 이날 밤 수계修啓, 문서나 글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상주함하기를, “섭
제독葉提督의 병함兵艦이 내도內島에 도착하였다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
남정일기 南征日記 405

였거니와, 초8일 아침 일찍 조수를 타고 제독의 대군이 내도內島에서 배에


올라 유시酉時 쯤에 육지에 내려, 그대로 아산읍牙山邑에 들어가 관사官舍에 머
물러 있사옵고, 섭통령 統領의 군사들은 관사官舍 앞의 언덕에 주둔하고 있사
옵니다. 행군行軍의 기일은 하루이틀 쉬어 고달픔을 푼 뒤에 잡아 나아갈 것
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 이
런 전차詮次, 까닭로 선계善啓, 임금에게 서면으로 아뢰는 일을 높이어 이르는 말하옵니다”라고 하
였다.

초 9일. 김승선金承宣이 서울로 돌아가는 편에 집에 보내는 글을 맡겼다.


또한 병정兵丁 1명이 상경上京하는 편에 집에 보내는 글을 맡겼다. 오후에 금
백錦伯이 보낸 전신電信을 보았는데, ‘초토사招討使가 초8일 사시巳時에 크게 이겨
비류匪類들이 도망가고 흩어졌다’고 하였다. 이에 제독提督을 찾아뵙고 전후
사정을 갖추어 적도賊徒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진군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섭제독[葉帥]은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뜻을 수계修啓하기를,
“중국의 대진大陣이 아산읍牙山邑에 주둔하고 있다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
啓하였거니와,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은 내일 행군할 것이라 하고, 제독提督 섭지
초葉志超는 모레 행군할 것이라고 하옵니다. 그래서 다만 며칠만이라도 쉬면
서 피곤함을 풀고, 잠시 정탐한 사실을 기다린 후 행군할 것인지 머물 것인
지 결정하자는 뜻을 완곡히 진언하였사오되, 제독의 말로는 ‘공주公州에 도착
하여, 친히 적들의 형세를 살펴본 연후에 행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
하겠다’고 하며, 이에 공문公文 1통을 보내었기에, 굳게 봉하여 올려 보내오
며,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이므로 이런 전차詮次, 까닭로 선계善啓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초 10일. “중국 대진大陣이 행군하는 형편은 연일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초


10일에 아산牙山에서 출발하여 행군하는 것은 영을 내려[申令] 약속하옵더니,
406 청일전쟁 관련 자료

당일 신시申時 후에 섭제독葉提督이 수행원을 보내어 전하는 말에는, ‘지금 원


세개가 머무는 관사[袁館]에서 보내온 전신을 보니, 역시 전봉준의 비류[全匪]들
이 도망치고 흩어졌다하니, 생각건대 행군을 늦추고 달리 사람을 파견하여
실정을 탐문한 후, 다시 행군할 것인지 머물 것인지를 정할 것인즉, 이에 특
별히 글을 올려 뜻을 밝힌다’고 하옵거니와, 그대로 행군을 멈추고 아산읍牙
山邑에 머물러 있사옵니다. 호궤 饋의 차비次備로 쌀 200석, 소 10마리를 보내
어 군사들을 위로하는 뜻을 전하였더니, 감사의 표시를 그치지 않았사옵니
다. 쌀과 소는 대진大陣에 나누어 주었고, ‘읍촌邑村에서 짐을 질 백성[役負之民]들
은 뽑아 군에서 필요한 땔감과 풀 등 각종 물건의 짐을 지도록 하는 것 등은
모두 값으로 쳐서 지급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내걸었사옵니다. 이후의 형편
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 이런 전차詮次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
였다.

11일. 비가 내렸다. 섭제독[葉帥]이 찾아와서 필담筆談을 나누다가 두어 시


간쯤 지나서 오후에는 산 위로 올라가 각 진을 돌며 위로하였다. 그리고 통
령統領 섭옥표 玉票와 잠시 담화를 나누었다. 이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렸는데,
노숙하고 있는 군사들을 보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12일. 비바람이 몰아쳤다. 섭葉 섭 두 장수를 찾아뵈었다. 오후에 유


장영劉長英 오감천吳鑑泉 장기경張綺卿 김경자金慶慈 등 여러 사람이 와서 이야기
를 나누었다. 계啓를 하되, “대진大陣이 아산牙山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은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초10일에 먼저 대포 군량 군기 등을 천안天安으로
보냈던 것은 어제 이미 거두어 들였사옵고, 대진大陣이 전주全州로 파송하였던
인원은 오늘 비로소 정탐한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적도賊徒들은 흩어져 고부
古阜 등지로 향하여 방자한 짓을 저지르고 노략질을 하였다고 하온 바, 섭대
수葉大帥가 말하길, ‘전봉준의 비도들[全匪]이 흩어져 달아나고, 오늘 이와 같이
남정일기 南征日記 407

정탐하여 오니 곧 계啓를 올려 북양北洋의 회유回諭를 기다릴 것인즉, 수군과


육군舡陸의 거취는 잠시 정할 수 없다’라고 하옵니다. 어제와 오늘 연일 큰 비
가 내리고 아울러 바람까지 불어대니 각 진의 장졸들이 한데서 비에 젖고
있어 보기에 참으로 민망하옵고, 일용품도 연달아서 지급되지 않는 등 각종
범절이 갈수록 궁핍해지니 신은 황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 이런 전차詮次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
고 하였다.

13일. 집에서 보내온 글을 통사通詞가 돌아오는 편에 받아서 보았다. 계


啓를 올리되, “대진大陣이 그대로 아산牙山에 머물러 있는 형편은 전에 이미 치
계馳啓하였거니와, 행군할 것인지 머물 것인지는 연이어서 탐문하고 있사온
즉, 북양北洋의 전유電諭를 기다려 진퇴를 결정하겠다고 하옵니다. 금일 오시午
時에 중국 해군영무처海軍營務處의 용전양龍殿揚이 종자從者 2인을 거느리고 병함兵
艦에서 육지로 내려와 아산牙山의 대진大陣에 들어왔는데, 거느린 수사水師 1천
5백 명 중에서 6백 명은 거느리고 와서 내도內島 앞바다의 병함兵艦에 있다고
하옵고, 9백 명은 인천仁川에 있다고 하옵니다. 용전양龍殿揚이 와서 전하는 말
에 ‘어제 바다에 풍랑이 크게 일어서 조선朝鮮의 미강米舡, 쌀을 실은 배 1척이 바람
에 부서졌다 하고, 배 안에 있던 사람 덕산德山의 윤구서尹九瑞 등 5명이 파도
속에 잠겼으나 곧 작은 화륜선[小火輪]을 보내어 모두를 건져 내었으며, 이에
은전銀錢 각각 6원圓씩을 주어 구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아
산牙山에 도착하였는데, 섭대수葉大帥가 또한 휼급미恤給米 30석을 내려 각자 생
활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내란이 귀국貴國으로 옮겨왔다’고 합니
다. 이에 그 연유를 치계馳啓하옵니다. 이런 전차詮次를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14일.
408 청일전쟁 관련 자료

15일. 오시午時에 섭통령 統領을 초대하여 같이 점심을 먹었다. ○ 관리管


理가 전보를 보내왔는데, ‘태인泰仁의 백성들이 귀화하고 병기兵器를 바쳤다’고
하였다. 통사通詞 김기태金基泰에게 집에 보내는 글[家書]을 붙였다.

16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 중국의 진영에 관한 형편은 연달아서 치계馳


啓하였거니와, 각 진영은 그대로 머물러 진을 치고 있사옵고, 대진大陣에서 소
속 관원[屬員]을 전주全州에 보내 두었던 바, 그 관원이 어제 전보를 보내왔는
데, ‘적당賊黨은 그래도 몇몇 군데에 둔을 치고 모여 있다’고 하므로 대진大陣
에서 오늘 다시 소속 관원을 전주로 파송派送하여 상세히 탐지하여 오라고 하
였습니다. 그리고 13일에 들어왔던 수사영무처水師營務處의 용전양龍殿揚은 14
일 오시午時 쯤에 윤강輪舡을 타고 인천仁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큰비가
연일 내려 땔감과 꼴이 모두 고갈되어 [중국군을] 접응接應하는 형편이 만만萬萬 민
망하고 궁색[悶迫]하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라
고 하였다.

17일.

18일.

19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이 아산牙山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은 연달


아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제가 내무부內務府에서 전보로 보낸 영[電飭]을 받자온
바, 위로하고 호궤 饋차 내린 문이文移로 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백미 100석,
황우 10마리, 돼지 60마리, 닭 700마리, 계란 5천 개, 진유眞油 10말을 준비한
후 신이 차비관差備官 통사通詞 등을 거느리고, 서쪽 진문陣門에 이르러 먼저 명
을 받자온 대로 위로하고 호궤 饋하는 뜻을 전하고, 준비된 각종 물품을 전
남정일기 南征日記 409

하였습니다. 그러한즉, 섭대수葉大帥가 ‘군사를 진군시켜 성을 회복하고 비적


들을 쓸어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차례 음식을 보내고 위로한 것만으로
도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는데, 다시 또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으니 어떻게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리신 물품은 각 영의 관 변 용
정官弁勇丁에게 나누어주어, 귀국貴國의 왕이 군사들을 위로하는 성의를 알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졸들이 기뻐하는 마음을 대신하여 감사드리니 그 뜻
을 전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0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섭대수葉大帥가 최근 전주全州에 머물러 있던 파견원[派員]의
정탐보고[探報]에서 ‘여비餘匪가 아직도 많이 몰려 있다’라고 한 것에 따라 어제
는 수비守備 윤득승尹得勝과 병용兵勇 20명을 파송하였고, 오늘은 천총千摠 언옥춘
玉春과 병용兵勇 20명을 파송하여 적들의 소굴로 나아가 돌아다니면서 비수匪
首를 잡아들이겠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갖추어 이미 흩어진 여비餘匪
들은 저들 스스로 귀화할 것인즉, 이와 같이 사람을 파송할 필요는 없을 것
이라는 뜻을 전하였사오나 탐정探情의 업무를 확실히 하여 [적들을] 응당 숙청하
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중국 병사들을] 위로하고 호궤한 후
에 섭대수葉大帥는 명함名銜 2개[二片]를 보내어, 주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전
한다고 하였으므로 이것을 내무부內務府로 올려 보냈사옵니다. 이후의 형편
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1일. 병정兵丁을 상경上京시켜 집에 보내는 글[家書]을 붙였다.

22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중국의 마대초관馬隊哨官 요옥상姚玉祥, 영관營官 손리달孫利達
410 청일전쟁 관련 자료

이 마대馬隊 1백, 병용兵勇 4백, 수뢰군水雷軍 1백을 거느리고 병함兵艦에서 백석포


白石浦로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미시未時 쯤에 아산읍牙山邑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진영에 머물러 있사온 바, 이에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23일. 통사通詞 김익정金益淨 편에 집에서 보내온 글[家書]을 보았다.

24일. 수계修啓하기를, “섭통령 統領이 거느린 병사 1천이 전주全州로 출


발하였고, 화진華陣의 원변員弁을 전주로 파송派送하였다는 뜻은 전에 이미 치
계馳啓하였거니와, 어제 섭대수葉大帥가 전주에 파견한 관리[派員] 사룡운史龍雲의
전보電報를 보고, 비당匪黨이 아직도 장성長城 고부古阜 등지에 남아 있고 다시
방자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고 여겨, 지금 병사들을 진군시켜 적들을 쓸어버
릴 것이라고 하옵니다. 그래서 신이 지금 초토사招討使를 철회撤回시켰고, 여비
餘匪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근심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은 알 만하고, 사룡운[史
員]이 보고한 바 역시 낱낱이 반드시 사실과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다
시 적확的確하게 탐지探知한 연후에 병사들을 진군시키는 것이 옳다는 뜻을 여
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섭대수葉大帥는 이미 북양北洋에서 속히 남비
南匪를 쓸어버릴 일에 대하여, 전보로 영을 받은 것[電飭]이 지엄하므로 감히 잠
시도 늦출 수 없다하여,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에게 소속된 병용兵勇 900명, 진마
陣馬 100필을 거느리고, 각 영과 각 역[各營各驛]은 말 150필을 대기시키라 하고
는 오늘 축시丑時 쯤에 전주全州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그래서 호행차사원
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 부마차사원夫馬差使員 금정찰방金井察訪 피병
간皮秉侃, 차비관差備官 고영선高永善 박종선朴宗銑, 그리고 통사通詞 2명을 같이 출
발시켰습니다. 섭수葉帥의 대진大陣은 그대로 아산읍牙山邑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치계馳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25일. 수계修啓하기를, “이계인李啓仁 편에 집에서 보내온 글[家書]을 보았습


남정일기 南征日記 411

니다. 화진華陣의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이 전주全州로 출발한 연유는 어제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방금 도착하여 받은[到付]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
郡守 서만보徐晩輔의 첩보[牒呈]에, ‘섭통령 統領 일행은 이달 24일 사시巳時 쯤에 차
례로 천안군天安郡에 도착하였고, 땔감 풀 말먹이콩 등은 넉넉하게 준비하여
놓았으므로 아무탈없이 머물 수 있게 되었으며, 내일 광정참廣亭站으로 출발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수는 지위知委, 지시에 따라 오늘 먼저 광정廣亭으로 달려
갔습니다. 이에 그 연유를 첩보牒報하옵니다’라고 하기에 호행護行의 절차를
더욱 조심하여 거행하라 경계하였사오며,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6일. 수계修啓하기를, “관사에 온[來館] 병정이 돌아가는 편에 집에 보내


는 글[家書]을 붙였습니다. 화진華陣의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의 군사가 천안군天安
郡으로 행군하여 도착했다는 형편은 어제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도착하여
받은[到付]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가 보내온 첩보[牒呈]에,
‘섭통령 統領 일행이 천안군에서 떠나 이달 25일 사시巳時 쯤에 抵到 공주公州
경계 광정廣亭에 도착하여 무사히 주둔하고 있으며, 내일 공주로 출발할 것입
니다. 그리고 군수郡守는 지위知委, 지시에 따라 오늘 먼저 공주로 달려갔습니
다. 이에 그 연유를 치보馳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호행護行의 절차
를 더욱 조심하고 경계하여 거행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그 연유를 보고 드
립니다”라고 하였다.

27일. 병정이 돌아오는 편에 집에서 보낸 글[家書]을 받아 보았다. 수계修


啓하기를, “화진華陣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 일행이 공주公州 경계 광정廣亭에 도착
한 연유는 어제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방금 도착하여 받은[到付] 호행차사
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의 첩보牒呈에, ‘섭통령 統領 일행이 광정
412 청일전쟁 관련 자료

廣亭에서 출발하여 이달 26일 진시辰時 쯤에 공주읍公州邑에 도착하여 무사히 주


둔하고 있거니와 이에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옵기로 그 연유를 치계
馳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6월 [六月]

초 3일. 수계修啓하기를, “도착하여 받은[到付]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


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의 첩보[牒呈]에, ‘이달 초2일, 섭통령 統領은 단출하게 기병騎
兵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서 그대로 전주全州로 향해 가고, 막원幕員 정윤화程允和
에게 진영을 거느리고 길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공주 경계 광정
참廣亭站에 도착하여 숙박하였습니다. 초3일 사시巳時 쯤에 천안군天安郡에 도착
하여 그대로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옵기에 그 연유를 치계馳啓합니다”라
고 하였다. 초6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의 막원幕員 정윤화程允和가 진영을
거느리고 길을 돌려서, 이달 초3일에 천안군에 도착하여 묵었다는 형편은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방금 도착하여 받은[卽到付] 호행차사원 온양군수 서
만보의 첩보[牒呈]에, ‘정윤화程允和가 대신하여 섭장군의 진영[ 陣]을 거느리고
이달 초6일 축시丑時에 천안군에서 출발하여 아산현牙山縣으로 향하였던 바,
정윤화程允和가 거느린 화진華陣 일행은 당일 사시巳時 쯤에 아산읍으로 돌아와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이에 그 연유를 치계馳啓합니다”라고
하였다.

초 8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의 통령統領 섭사성 士成이 단출하게 기


병騎兵만 거느리고 공주公州에서 그대로 전주全州를 향하였다는 연유는 전에 이
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섭통령 統領이 전주에서 길을 돌려 이달 초8일 사시巳
時 쯤에 아산읍牙山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 연유
를 치계馳啓합니다”라고 하였다.
남정일기 南征日記 413

13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의 형편은 연달아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섭


통령 統領이 금일 술시戌時에 단출하게 10여 기騎만 거느리고 길을 나서 성환成
歡을 향했다고 하기에, 섭대수葉大帥에게 물어본즉, 진위振威 양성陽城 수원水原
등지를 둘러본 뒤 약 수3일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
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6일. 수계修啓하기를, “섭통령 統領이 잠시 진위振威 수원水原 등지로 갔


다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오늘 축시丑時 쯤에 아산읍牙山邑으
로 돌아왔기에 그간의 경과 내용을 물어본즉, ‘13일에 아산에서 출발하여
성환역成歡驛에 가서 묵었습니다. 14일에는 진위현振威縣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午 ] 저녁때 수원水原에 다다랐으나 영하營下에 들어가지는 않고 성 밖
에서 훑어본 후 그곳에서 길을 돌려 대황교大皇橋에 묵었습니다. 15일에는
평택현平澤縣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午 ] 밤이 깊어서야 아산으로 돌아왔습
니다’라고 하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라고 하
였다.

14일.2)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하였거니


와, 이달 22일 중국 병선兵船 4척이 홍주洪州의 내도內島에 와서 정박하였고, 통
령統領 강자강江自康과 병용兵勇 2천 명을 아산牙山의 소선小船에 나누어 싣고 백석
포白石浦에 내려 주둔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23일 새벽에 통령統領 섭사성 士

成은 그가 거느린 부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성환成歡으로 진을 옮겼사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달아서 보고드릴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21일 병정 유
기영劉基永을 보내어 집에 보내는 글[家書]을 붙였다. 오후에 전국電局의 주사主事
현왕운玄旺運이 황급히 들어와서 손에 든 전보쪽지[電紙]를 보여주었는데,
‘묘시卯時에 일본 군사[日兵]들이 갑자기 광화문光化門으로 들어가 포성이 끊이

2) 24일의 오기임.
414 청일전쟁 관련 자료

질 않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놀랍고도


황망한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섭대수葉大帥를 찾아 뵙고 변란에 대해 갖추어 말
한즉, ……

25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의 형편은 연달아서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아산읍牙山邑에 머물러 있던 각 진各陣은 일본 군대[日兵]가 점차로 핍박해 오고
있어서 차례로 진영을 성환成歡 등지로 옮겼습니다. 이날[本日] □시□時 쯤에 섭
대수葉大帥 역시 진을 □지□地로 옮겼고, 신 역시 차비관差備官 박종선朴宗銑 이필
균李弼均 등을 거느리고 군대를 따라 같이 갔사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
서 보고할 계획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치계馳啓합니다”라고 하였다.

승정원개탁 [承政院開 ]

영접관迎接官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이李[가 보고드리오니]


승정원承政院은 열어보소서[開坼].
“섭대수葉大帥 섭통령 統領이 천안天安 직산稷山에 나누어 진을 친 연유는 전
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27일 새벽부터 성환成歡의 섭통령의 진영[ 陣]과

일본군사[日兵]들이 접전을 벌여 상호간에 죽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마침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사시巳時 쯤에 이르러서는 섭통령 統領의 모든 군
사들이 천안天安으로 후퇴하여 섭제독葉提督의 대진大陣과 더불어 일시에 흩어
져 공주公州로 퇴각하였습니다. 신 역시 진영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당일當日
해시亥時 쯤에 공주에 도착하여 대진大陣이 그대로 진을 치고 머물러 있사옵
고, 섭통령 統領 강통령江統領이 거느린 부대의 병사들로 하여금 공주 광정현
廣亭峴을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곧바로 이어서 보고드릴 계획
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치계馳啓하옵는 전차詮次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
남정일기 南征日記 415

였다.
광서光緖 20년1894년 6월 27일.

<번역 : 장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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