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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0404 홍양기사 (층청)
ch0404 홍양기사 (층청)
홍양기사洪陽紀事
홍양기사 洪陽紀事
1894년 4월 [甲午四月]
승지承旨 이승우李勝宇를 홍주목사洪州牧使로 특별히 제수한다는 명命을 받들
었다. 이때에 호남의 난민이 동학東學을 빙자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해서
여러 고을이 소란스러웠다. 홍주도 민요民擾가 있었다가 겨우 진정되었으나
여러 해 동안 정공正供 은 모두 포수逋藪2가 되었고 온갖 폐단이 생겨서 다스
리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의논하여 이승우를 특별히 천거하여
홍주를 맡긴 것이었다.
15일 [十五日]
이공李公, 이승우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와서 나를 불렀는데, 마침 고향
집에서 병으로 누워있어 일어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모두
가도록 권하며 말하기를, 화병으로 인한 병은 울적함을 풀어버리면 나을 수
있다 라고 하였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16일 [十六日]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여 어천漁川에 이르러 하룻밤 묵었다.
17일 [十七日]
오후에 성城, 한양으로 들어갔다.
18일 [十八日]
회동會洞에 머물렀다.
19일 [十九日]
회동에 머물렀다.
20일 [二十日]
주공主公, 이승우이 먼저 남문南門 밖에 나가서 머물렀다.
21일 [二十一日]
주공을 쫓아 출발하여 과천果川의 갈산점葛山店에 이르렀는데, 신영新迎하는
관속官屬이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수원水原 남문 밖에 이르러서 유숙留
宿하였다.
22일 [二十二日]
진위현振威縣에서 점심을 먹고, 평택현平澤縣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53
23일 [二十三日]
아산牙山의 곡교시曲橋市에서 점심을 먹고, 대흥군大興郡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4일 [二十四日]
홍주에 도착하였다.
29일 [二十九日]
주공이 충청감영에 갔다.
5월 초 6일 [五月初六日]
남양南陽에 심부름꾼을 보내고, 주공은 관아로 돌아왔다.
초 7일 [初七日]
조정에서 호비湖匪, 호남의 비도를 걱정거리로 생각하여 청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하니 청국이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해 가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참판參判 이중하李重夏를 영접사迎接使로 삼아 제독을 안내하게 하였
는데, 제독이 마침 아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물길이 홍성의 내도內島3와 통해
있었기 때문에 영접사가 도착한 뒤, 바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려왔다. 주공
이 편지를 받고서는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주공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편지에서 말하기를, 주공이 내도에 도착하니
초 10일 [初十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왔다.
영접사가 편지를 보내와서 전주全州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보
다 앞서 호남의 비괴匪魁 전봉준全琫俊, 俊은 準의 오기이 무리를 모아 날로 기세가
드세져서 여러 고을의 군기를 빼앗고 전주에 이르렀다. 감사監司 김문현金文鉉
은 겁을 먹고 밤에 도망하였고,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군대를 주둔시키
고 관망을 하였으며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여산礪山에 있으면서 들
어가지를 못하였다. 전적全賊, 전봉준이 이에 완성完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조
정에서는 이원회李元會를 순변사巡邊使로, 엄세영嚴世永을 염찰사廉察使로 삼아 가
서 토벌하게 하니, 적이 전주를 버리고 달아났다.
12일 [十二日]
내도에서 보고가 왔다. 그 보고에 의하면, 청국군함이 계속 정박하면서
지주地主, 홍주목사를 보기 원한다 라고 하여, 주공이 바로 출발하였다.
14일 [十四日]
영접사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이전에 보낸 시詩에 화답을 하였다.
17일 [十七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왔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55
6월 23일 [六月二十三日]
읍예邑隸가 한양에서 돌아와 소식을 전했는데, 21일에 대궐안에 변란變亂4
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서 영접사에게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영접사의 답장을 받고 한양의 변고變故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영접사가 원수
섭사성에게 군대를 북쪽으로 전진하도록 요청하여 성환역成歡驛에 이르렀는데, 한
양으로부터 전보電報가 와서 중지하고 성환에 지금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주공이 내게 말하기를, 그대에게는 노모老母가 있는데, 이런 유사시를 맞
아 친구에게 부모의 임종을 못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어찌 한번 집에 가
서 뵙지 않겠는가? 그대가 돌아갈 때에 일은 다행히 급박한 낌새가 없으니
바로 돌아오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바로 출발하여 덕산읍德山邑에서 점심을 먹고
북창北倉에 이르러 유숙留宿하였다.
26일 [二十六日]
신천의 금초錦樵 이장헌李章憲에게 들렀다가 오후에 내도에 이르렀다. 본주本州, 홍
27일 [二十七日]
내도에 머무르며 탐리探吏5를 통해 영접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28일 [二十八日]
배를 타고 출발하려고 할 때에 멀리서 일본 병선兵船 2척이 앞바다에 닻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작은 배 1척이 조수를 타고 빠르게 아산 백석포로 향했
는데, 해변에서 그것을 보는 자들이 모두 의심을 하고 겁을 먹었다. 관리가
내 길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지금 저 병선의 기세가 좋지 않은데, 어찌 배를
타서 서로 가까워질 필요가 있겠는가? 다시 육로를 잡는 것이 매우 좋을 듯
싶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나는 웃으면서 배에 올라 돛을 올렸다. 이미 저녁
조수가 지나가서 율도栗島에 도착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그래서 배 위에서
잠을 청하였다.
29일 [二十九日]
7월 초 1일 [七月初一日]
초 3일 [初三日]
초 4일 [初四日]
일찍 내도에 정박했는데, 섬의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 흩어져서 그 형편이
참담하였다. 며칠사이에 사람의 일이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변하였기에 찾아
가서 일의 연유를 물어 보았더니, 지난 달 27일에 청나라 군대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소사素沙와 성환에서 패하였으며, 패잔군이 여러 고을에 흩어졌
고 또한 약탈을 자행하여 백성들이 모두 풍학風鶴6처럼 움직였으며 여러 날이
초 5일 [初五日]
덕산 대천大川 장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에 홍주에 들어가니 주공이
손을 잡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별한 뒤의 전투 상황을 말하고 더욱이 그 날에
맹서한 글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고립된 성城은 방비가 없어 앉아서 성
을 잃어버리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적의 칼날에 치욕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의義를 따르는 것이 낫다 라고 하였다. 순영巡營, 감영 인편에 영
접사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그 편지에서 전하기를, 지난날에 성환에서 패
하였으나 다행히 모면하여 지금 조정에 돌아왔다. 청나라 병사들이 청주淸州를
거쳐 관동關東을 돌아 토산兎山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였다 라고 하였다.
초 6일 [初六日]
주공이 병요兵擾를 겪은 뒤에 음우陰雨7을 매우 걱정하여 장리將吏를 통솔해
서 성첩城堞을 견고하게 수축하고 화포와 창을 수리하였다. 김병돈金秉暾을 중
군中軍으로, 한응준韓應俊을 참모로 삼아 성城아래 병정兵丁을 훈련시켜 미리 대
비하는 방책을 세웠다.
이 날 순영에 갔다.
초 7일 [初七日]
초 9일 [初九日]
우연히 동쪽 문루門樓에 올랐다가 마침 패류悖類가 시가市街를 제멋대로 다니며
공사公私간의 말과 노새를 빼앗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보는 자들은 피하고 감히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시임時任 병
교兵校 김순흥金順興이 그들의 협박 때문에 그만두었는데, 매우 통탄스럽다.
12일 [十二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와서 길을 가다가 겪은 것을 하소연하였다. 돌아올 적
13일 [十三日]
주공이 일찍 일어나서 관아를 열고 진鎭과 부府의 관속들을 모두 불러 영令
을 내려 말하기를, 이른바 지금의 동학은 분명히 기강과 본분을 범한 무리
로서 왕법王法에 따라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이다. 나는 요즈음 너희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동학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나는 너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너희들 가운데 남을 속이는 짓거리를 즐기고자 하거나,
괴이하게도 죽을 때까지 그러한 행동을 뉘우치지 않는 자들은 나 또한 어찌
할 수가 없다. 너희들은 좋아하는 것을 좇아 각자 돌아가라.
만약 이성 性이 없어지지 않아 처음에 비록 잠시 미혹되었다고 해도 지금 바
로 뉘우친다면 나는 예전처럼 대우하여 스스로 거듭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너희들은 숨김없이 각자 자신의 뜻에 따라 동서東西로 나뉘어 서라 고 하였다.
명령을 서너 차례 내리니 아전과 관노官奴 및 사령使令 등이 모두 엎드려서 자
수하여 말하기를, 소인小人 등이 저들에게 들어간 것은 정말로 그 도를 즐거워
하고 그 행동을 동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공예公隸로서 포흠을
지고 있거나 원망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저 난도는 평소에 서로 관계가 없는
자가 없습니다. 명목이 없는 돈은 그 수효가 많다고 함부로 몽둥이질을 합니다.
사소한 원한도 조금이라도 반드시 비교하여 바로 곤욕을 가하여 명命을 감당할
14일 [十四日]
15일 [十五日]
16일 [十六日]
18일 [十八日]
20일 [二十日]
조정에서 선무사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을 파견하여 호서湖西지역을 돌면서 비도
匪徒를 잘 타일러 귀화하게 하였다. 선무사의 행차가 공주에 도착하여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왔다. 바로 순사巡使 박제순朴齊純과 상의하여 임시방편
6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6일 [二十六日]
도사都事 이정우李靖宇가 조만승曺萬承을 압송하는 일 때문에 호남에 갔다가
돌아왔다. 그가 겪은 동비의 소요를 듣자 매우 두려웠다.
30일 [三十日]
주공이 비도가 더욱 창궐한데 대비하는 병사가 너무 적은 것을 걱정하여 내게
병사를 양성하는 방법을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지금 저들을 보면 비록
1,000만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촌동네의 어리석은 백성들이고, 더욱이 그들이
가진 병기는 단지 여러 고을에서 빼앗은 파손된 총과 형편없는 창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훈련시킨 병사 500명을 얻어 예리한 무기를 준다면 반드시
비도를 섬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500명의 정예병을 양성하려면 한 달에 훈련비
용으로 거의 수 만냥의 재물이 들 것인데, 지금 읍의 형편상 어찌 조달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성 아래 민정民丁을 모집하여 날마다 조련하고, 저들에게 들
어가지 않은 포군砲軍을 다시 뽑아 번番을 나누어 출입시켜 병가兵家의 선성先
聲14 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형세를 보아 적을 상대한다면 반드시 이기지 못
할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주공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초 6일 [初六日]
선무사가 홍주에 도착하여 경내에 있는 이른바 접주들을 불러 모으고 윤
음綸音을 읽으며 잘 타일렀다. 이때 이름 있는 우두머리를 모두 적을 수 없으
나 가장 유명한 자들은, 홍주의 김영필金永弼 정대철丁大哲 이한규李漢奎 정
원갑鄭元甲 나성뢰羅成 , 덕산의 이춘실李春實, 예산禮山의 박덕칠朴德七15 박
도일朴道一, 대흥大興의 유치교兪致敎, 보령保寧의 이원백李源百, 남포藍浦의 추용성
秋鏞成, 정산定山의 김기창金基昌, 면천沔川의 이창구李昌求이다. 그 가운데 이창구
의 무리가 가장 많아서 50,000 60,000명이라고 하였다. 덕산의 한명보韓明甫
와 한응고韓應古 형제는 매우 완강하여 전후前後에 걸쳐 잘 타일렀지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공이 여러 차례 사람을 이창구에게 보내 한번 함께 볼
것을 요구했는데, 답장은 오만스러웠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초 7일 [初七日]
주공이 이번 소요를 맞아 백성에게 거두는 삼정三政과 같은 일은 관례에
따라 시행할 수가 없어 추등秋等16에서 호포戶布를 줄여주는 것과 반료頒料17에
기민飢民을 구제할 쌀을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하는 일로 선무사에게 논보論報18
하고 각 마을에 전령傳令을 보내 호포세를 경감해 준다는 뜻을 알렸다. 창고
에 있던 돈 1,400여 냥을 내어 긴급한 용도에 대비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기
뻐하였다.
18일 [十八日]
주공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비요匪擾가 날로 심해져서 그것을 없앨
방법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보았다. 지금 참문讖文을 만들어
유포하면 저들을 교란시켜 저절로 해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법도에 어긋난 괴이한 행동에 가깝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 계책은 매우 훌륭합니다.
병법兵法 장감선사편將鑑選士篇19에 술사術士 2명과 무당의 속임수로 망령되게
귀신에 의지하여 적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것에 의지하여
실행한다고 해서 어찌 옳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런데 이 계책을 빨리 실행해야 하는데 맡길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나를 위해 이 계책을 실행할 것
이며, 조심하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라 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
곳에서 한다면 은밀하게 하지 못할 것 같으니 구실을 대고 한양에 올라가서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19일 [十九日]
태산泰山이 집안의 편지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어머님이 편치 못한다는 소
식이어서 바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막 떠나려고 할 때에 주공이 참문의 일
을 거듭 부탁하였다. 이에 동문東門 밖에 나가보니 10리의 길에 행렬이 가득
이어졌는데 모두 비도들이었다. 어떤 이는 살찐 큰 말을 타고 제멋대로 달려
서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고, 길을 걷는 자들은 팔을 흔들고 활보하여
곁에 사람이 없는 듯이 매우 날뛰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에 상복喪服을 입고
20일 [二十日]
일찍 출발하여 신창읍新昌邑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부예府隸, 하인가 한
양에서 내려오다가 이도사李都事, 이정우의 편지를 전하였다. 평택에 이르러 유
숙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동창진東昌津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떠났다. 안시安市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에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의 병세가 그 사이에 이미 회복되어 있어 매
우 다행스러웠다.
23일 [二十三日]
아침 일찍 출발하여 당일 회동에 도착했다. 송영감과 참문을 유포하는 일
을 상의하고 서로 보며 크게 웃었다.
그 참문에 의하면, 청마靑馬는 90에 살기殺氣가 많아 검은 것을 숭상하는
자는 죽는다. 옛날 문생文生은 어떠하였는가? 해가 나오니 지금 그대와 나아
가지 못하고 풀꽃에 떨어진다 라고 하였다.
7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4일 [二十四日]
다시 출발하여 부곡富谷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집에 돌아와서 작은 조각의 나무를 가져다가 도장처럼 만들어 참문을 새
겨 수천 장을 찍어내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2개의 길로 나누었
다. 하나는 직산稷山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호서의 경계까지 가는 것이고, 다
른 하나는 남한강나루를 따라 호서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거쳐서 한산韓山과
서천舒川의 끝까지 가는 길이었다.
29일 [二十九日]
길을 떠나 학현鶴峴에 이르러 이청양李靑陽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30일 [三十日]
한강나루를 건너 이경二更, 밤 9 11시 쯤에 금초의 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9월 초 1일 [九月初一日]
관아에 돌아오니 유포한 참문이 이미 도착하여 경내 가까운 사람들이 모
두 전해 들어 외우고 있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우스운 일에서 나왔으나 그
일을 나중에 살펴보니 우연히 서로 들어맞았으니 기이하다.
초 6일 [初六日]
운현궁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파견하여 글로 동도東徒를 타일렀는데,
홍양기사 洪陽紀事 71
초 7일 [初七日]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에, 비류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화량花梁
과 송산까지 이르러서 지금 점점 소란을 피우고 있다 고 하였다. 바로 사람
을 시켜 본관本官에 편지를 보내고 아울러 조정과 순영의 금지를 지시한 관문
과 비괴 최적崔賊의 통문通文20을 가져가게 하였다. 또한 다스려서 이미 효과
를 본 일을 대략 적어서 보냈다.
14일 [十四日]
별유관別諭官 김경제金慶濟가 홍주에 도착하였다. 주공이 별유관을 영접하여
정아正衙21에 앉아 비괴를 불러 포유문布諭文을 읽고 그것을 듣게 하였다. 공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금 포유문을 듣는데, 신분을 어지럽히고
등급을 없애서는 안될 것이다. 양반은 대청에 올라 난간밖에 엎드리고 상놈과
천인賤人은 계단 중간에 엎드려서 듣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저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했으나 불만스런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는 자가 많았다. 포유문을
읽는 것이 끝나자 공이 또한 일일이 성명을 들어 패악한 행동을 적발하여 책망
하기를, 이처럼 따뜻하게 타일렀는데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으면 곧이어 법으
20 통문(通文): 최시형은 자신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연달아 단속령을
내리고 가도인(假道人)을 가려내려고 교리문답을 실시하였다. 10월에 들어서 대동원령을 내렸다.
21 정아(正衙): 수령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곧 동헌을 말한다.
7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8일 [十八日]
22일 [二十二日]
순영巡營, 감영에서 박세강朴世綱과 박동진朴東鎭을 금강錦江에서 목을 베었다. 일
행을 회유하여 이 2명이 비도와 연결된 일이 드러났고 법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23일 [二十三日]
경내에서 이름을 올린 비도 중에는 처음에 억지로 들어갔다가 끝에 진짜
가 되거나 혹은 악에 기대어 나쁜 짓을 즐겨하여 끝까지 강경 완악한 자가
있었다. 조정의 선유宣諭를 거듭 반복하고 영읍營邑의 위무慰撫가 있었으나 세
찬 불길은 끝내 그치게 할 수 없었고 거침없는 물길은 막을 수가 없어 경향京
鄕이 어수선하였다. 장차 일본군을 보내어 그들을 모두 토벌한다는 일종의
소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두려워하였다.
주공이 내게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선비의 기세를 진작하고 비도의 간담
을 무너뜨릴 기회이다 라고 하고, 다시 고을 전체에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지금 사류가 제멋대로 다니는 것은 오직 유도儒道가 쇠약해진 까닭이다. 향
중鄕中의 유자儒者들은 각기 거처하는 마을에 유계儒 를 옛 향약처럼 설치하고
유계에 참여하는 사람은 명망 있는 집안인지를 따지지 말며 사류에 물든
자가 아니면 모두 동참을 허락하여 유자로 대우하라. 또한 혹시 처음에 협박
때문에 할 수없이 사류에 물든 자가 어둠을 버리고 밝은 데로 나와 참여하기
를 바란다면 역시 허락하라. 더욱이 지금 일본군이 가까운 시일에 경내에 들
어오면 반드시 옥석玉石이 함께 불 탈 염려가 있으니 사람들은 각자 유표儒標를
가진 뒤에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그래서 도서圖署를 새로 새겨 찍어내어
나눠 줄 것이니 각자 잘 알아 제때에 만들어 성책成冊하여 바치라 고 하였다.
바로 전 승지前承旨 정헌조鄭憲朝를 홍주의 도회장都會長으로, 전 군수前郡守 이
주승李周承을 부회장으로 삼아 고을 전체에 알리게 하였다. 계 를 만드는 날에 술
과 음식비용을 관에서 보조하니 선비의 기세가 비로소 진작되었다. 경내의 유회儒
會는 하루가 안되어 만들어졌고, 이웃 고을도 그 효과를 본받아 각기 계안 案을
25일 [二十五日]
갑자기 방성榜聲25이 있어 문이 소란스러웠다. 주공을 지금 막 완백完伯에
특별히 제수除授한다는 명을 받들었다. 호남의 비요가 한창이어서 김개남金介
男은 남원南原을 점거하고 있고, 전봉준은 삼례三禮, 三은 參의 오기26에 주둔하고
있어 갑자기 토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
25 방성(榜聲): 방(榜)을 전하는 사령이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외치는 소리를 말한다.
26 전봉준(全琫準) 삼례(參禮): 전봉준은 9월 말경부터 북상하려 삼례에 근거지를 두고 농민군을 결
집하였다.
7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6일 [二十六日]
홍주 결성結城 보령 대흥 덕산 청양靑陽 예산 면천 등의 8개 고을
대소의 민인民人이 목사의 유임을 청원하는 일로 서로 모의하지 않고 모였다.
한편으로 감영에 호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양에 올라가려고 식량을 가지
고 다투어 나온 자가 700 800명이었다. 진신搢紳, 관리과 장보章甫, 유생들도 별
단別單을 지어 올려 보냈다.
그 별단의 장사狀辭에 의하면,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관리가 나가서 백성
을 다스리는데, 그 지위의 높고 낮음과 관할지역의 크고 작음은 비록 계급의
다름이 있다고 해도 그 재목에 따라 직임을 주고 일을 맡겨 이루도록 독려하
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3년마다 성적을 살피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맡겨 공적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맡겨 더욱 독려하는 것은 이미 검
증되어 결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순선旬宣, 관찰사과 자목子牧,
수령의 직임을 받은 자가 만약에 인애仁愛가 있어 백성들의 마음에 깊게 젖어
들었다면 1년 동안 유임을 바라거나 두 곳이 서로 오기를 다툽니다. 이것이
어찌 실심實心과 실정實政의 결과로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것이고, 여론이 같아서 하지 않아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홍주목사 이공은 주군州郡을 두루 거쳐 이미 법을 지키며
선량하다는 평판이 드러났고, 병법에 박식하여 실제로 유장儒將28의 풍모가
있습니다. 홍주에 부임한 지 겨우 5개월이 되었는데, 모든 조치가 나라를 이
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에서 하나도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10월 초 1일 [十月初一日]
경영京營의 군사31와 일본군을 합한 200명이 예산에서 홍주에 도착하여 하
2일 [初二日]
주공이 상소를 써서 보냈다. 그 상소에 의하면, 삼가 생각건대, 신이 홍양
洪陽, 홍주의 별칭에 부임한지 반년이 되었으나 본래 거칠고 조잡한 성품으로 매
우 어려운 때를 만나 분골쇄신粉骨碎身하였으나 아직 티끌만큼의 효과도 없어
성은을 저버려서 임금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뜻밖에도
신을 전라 감사로 제수한다는 명이 멀리서 내려왔습니다. 신이 그 명을 듣고
처음에는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것 같아 정신이 없어서 바로 땅을 파고 들어
가 인간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번병藩屛33의 직임은 어느 곳이나 중요하지 않겠으며 순선旬宣의 재목은
어느 때나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호남의 땅은 본래 중요합
니다. 근래의 변고는 평상시와 다릅니다. 비록 기주冀州를 다스린 범려范 와
촉蜀을 다스린 장량張良이라도 손을 대기가 쉽지 않은데, 어찌 신처럼 용렬한
자가 하루라도 외람되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혹시 영록榮祿, 관직과 봉록
을 탐하여 그 자질을 헤아리지 않고, 분의分義에 구애되어 그 사사로움을 따
지지 않으면서 부임하는데만 힘써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면 신이 지은 죄는
용서받기에 부족할 것이고 나랏일의 낭패스러움은 어떠하겠습니까?
아! 비록 어리석고 천하지만 외람되게 은황銀黃34의 끝에 참여하여 대대로
관리가 되어 임금의 은혜가 골수를 적시고 고마움이 심장과 간에 맺혀 있습
니다. 나랏 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은 스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지금 나라에 일이 있는 때를 만나 오히려 몸을
들어 의를 떨쳐 목숨을 바치지 못했으니 이것은 신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초 3일 [初三日]
각처의 동도가 최괴崔魁, 최시형의 지휘라고 하며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
고 곳곳마다 지렁이처럼 이어졌다. 서산수령 박정기朴錠基 태안부사 泰安府
초 6일 [初六日]
비도가 결성結城에 들어가 그 인부印符와 군기를 빼앗았다. 결성 현감은 밤
에 달아나서 겨우 몸을 피하였다.
초 7일 [初七日]
금군禁軍38이 주공을 완백으로 임명하는 교유서敎諭書를 가지고 내려와서 동
38 금군(禁軍): 궁궐을 지키고 임금이 거동할 때 호위와 경비를 맡아보던 군사를 말한다.
8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8일 [初八日]
정탐하던 병사가 와서 보고하기를, 비도 수 백명이 지난 밤에 수영水營에
들어와서 군기를 모두 탈취하여 배에 싣고 갔는데, 그 행보를 헤아려보면 오
후에 옹암瓮巖과 광천땅에 도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관군官軍 중에
서 정예병 260여 명을 뽑아 김동현 김석교 이석범 등이 이끌게 하고 군대
를 출전시키라고 급히 영令을 내렸다. 관군이 적에게 나가 싸우는 것이 오늘
시작되었는데, 공이 칼을 뽑아 단상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했는데 의기意氣가
복받쳐서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은혜에 감동하고 군율을 두려워하였다. 기세
좋게 뛰어올라 앞으로 가서 홍주와의 거리가 30리 되는 광천시장에서 적을
만났다. 적이 먼저 산위에 자리를 잡아 지형의 이로움을 얻고 있었고, 우리
군대는 산 아래에 있어 공격하기가 어려워서 주저하며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석범이 칼을 뽑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언덕을 뛰어올라가니 뒤에 있던
군대가 한꺼번에 산에 올라갔다. 화포소리가 나는 곳에 맞아 쓰러진 적들이
수십 명이었고, 적들이 일시에 놀라서 흩어졌다. 관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9
명의 적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군기를 모두 거두어서 돌아왔다. 대포가 40여
문門이고 화약이 수천 근이었으며 그 밖에 갑주甲 활 화살 화전火箭 납
9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9일 [初九日]
매성梅城의 농보군이 광천에서 패하여 흩어진 적을 추격하여 그들의 돈
500냥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돈 중에서 200냥을 농보군의 군사들을
먹이는 비용으로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의정부議政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 홍주목사 이승우를 완백으로 옮기
도록 명을 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이 홍주는 호서의 요충지에
있는데 해당 수령이 미리 방비를 해서 비류가 감히 경내를 침범하지 못하여
인근의 7 8개 고을이 의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기신耆紳과 사민士民
들이 계속하여 그의 유임을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진실로 싸움터에 나간 장
수를 바꾼다는 탄식이 있으니 전 홍주목사를 특별히 유임시켜 주십시오 라
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근래에 길이 막혀 집에서 오는 편지가 오랫동안 끊겼다. 홍양이 함락되고
나도 해를 입었다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남쪽 고향에 퍼져나갔다. 사중舍仲, 작
은 형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바로 내려오다가 중도에 목시의 적들에게 잡
혀 뜻하지 않게 결박되어 구타를 당했다. 하룻밤의 곤욕를 치르다가 거짓말
을 하여 탈출을 해서 이 날에 도착을 하였다. 그래서 내가 적의 형편을 물어
홍양기사 洪陽紀事 91
11일 [十一日]
새벽에 각 진陣에서 건장하고 용감한 군사 500명을 뽑아 밥을 먹이고 장비
를 갖추어 중군 김병돈이 인솔해 가서 목시의 적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
날 새벽에 짙은 안개가 들에 가득하여 지척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관군이 목
시에 도착하니 적들이 모두 영루營壘를 비우고 민가에 들어가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관군은 혹시 계략이 있을 것을 의심하여 나가지 못하고, 먼저 큰소리
를 지르고 화포를 쏘아 위세를 드러내었다. 적들이 갑자기 화포소리를 듣고
조수가 빠지는 것처럼 흩어져서 포구를 따라 도망을 쳤다. 관군도 추격을 할
수가 없어 그 군기와 말 등을 거두어서 돌아왔다.
12일 [十二日]
목시에 출전한 군사들 중에 민가에서 옷을 빼앗아 가져온 자가 많았다. 중
군 김병돈이 그 옷들을 모두 거두어서 바치고 죄를 청하며 말하기를, 장수
가 되어 군사들을 단속하지 못하여 군율을 어겼으니 소인의 목을 베어 군사
들을 권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새로 모집
한 병사들을 모두 통솔하지 못하였다. 지금 은혜와 믿음이 부합되지 못하고
위엄 있는 명령이 세워지지 않아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의 잘못
9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3일 [十三日]
매성보梅成堡에서 바친 대포 5문門은 바로 수영에서 비도에게 잃어버려 옹
암에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보령현保寧縣의 아전과 향임鄕任이 향정鄕丁 900여
명을 모아 방비할 계책을 세우고 보령현의 비괴 5놈을 잡아왔다. 이보다 앞
서 보령의 아전과 향임이 그 군기를 몰래 비괴 이원백의 처소에 옮겨 놓았는
데, 이원백이 와서 그것을 바치고 자수하며 말하기를, 본현의 군기를 다른
적에게 빼앗길 것이 걱정되어 감히 가져와서 홍주에 바치기를 원합니다 라
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아전과 향임이 다시 와서 아뢰기를, 이원백에게 있
던 군기를 다시 가져가서 그것을 가지고 지키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한가지 일을 보면 이원백이 자신의 악행을 덮으려고 이향吏鄕들과 제멋대로
군기를 주고받은 사실이 휜하게 드러나서 가릴 수가 없었다. 진실로 그 죄를
논하여 바로잡아야 하지만 공은 일부러 관대하게 용서하여 불안해하는 자들
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조정에서 주공을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40로 삼았는데,
병인丙寅, 1866년에 연안부사延安府使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10월 8일에 정부
가 임금에게 아뢰어 저보邸報가 이 날 홍주에 내려왔다. 군민이 모두 뛰고 손
바닥을 치며 기뻐했고 사기는 갑절이나 되었다.
14일 [十四日]
초토사가 북문에 개좌하여 광천에서 잡은 포로와 각처에서 기찰하여 붙잡
아서 가둔 28명을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나누어 처리하였다. 죄가 무거운 4명
은 바로 목을 베어 경계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일단 비도를 다스
린 뒤에 감옥에 가둔 자에게 아침밥과 저녁밥을 주었고 풀어준 자에게는 양
식과 돈을 주었다.
15일 [十五日]
진영鎭營에 전령을 보내 처단하지 않고 옥에 가둔 비괴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 경계하라고 하였다.
16일 [十六日]
비도 수 천명이 합남合南41땅에 주둔하여 그 기세가 대단해서 관군을 보내
어 토벌하였다.
17일 [十七日]
관군이 덕산과 대천의 시장에 이르러 적도가 숨겨둔 군기를 찾아내어 모
두 가지고 돌아왔다.
18일 [十八日]
작은 형님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19일 [十九日]
순영巡營, 감영에서 나누어 준 1,000냥을 광천싸움에 나간 장수와 병사들에
게 등급에 따라 나누어주었고, 다시 관아의 돈 400냥을 내어 목시 전투에 참
여한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덕산에서 연이어 급보가 와서 바로
200명을 징발하여 합남과 원평院坪 등지를 순찰하였다. 예산현에서 비괴 유치
교를 잡아왔다.
20일 [二十日]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장수와 병사들이 싸움에 나갔다. 연이어 파발擺撥
이 왔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관군이 덕산 대천 면천 남산南山에서 2곳
의 적들 사이에 있어 형세가 고립되고 힘이 모자라서 상대하기가 어렵다 라고
하여 300명을 다시 뽑아 보냈다. 신시申時, 오후 3 5시에 합덕合德에서 첩보捷報가
왔는데 다시 화약을 요청하여 1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운송하게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관군이 합덕에서 진陣으로 돌아왔다. 비도 중에 총에 맞아 죽은 자는 헤아
릴 수가 없었고, 사로잡은 자는 60여 명이었다. 그들을 5개 진영에 나눠 배속
하여 일을 시키고 밥을 먹게 하였다.
22일 [二十二日]
이보다 앞서 이창구를 사로잡을 일로 중군과 은밀히 모의하여 말하기를,
이 놈은 의지가 매우 세고 굽히지 않아 힘으로는 사로잡기가 어렵고 지혜로
잡을 수 있다 라고 하고, 바로 김석교를 보내어 그가 새로 얻은 애첩을 잡아
다가 성안의 외지고 조용한 곳에 두고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중히 금하며
홍양기사 洪陽紀事 95
23일 [二十三日]
24일 [二十四日]
저녁이 지나서 덕산에서 당보塘報42가 왔는데, 그 당보에 의하면,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道洞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번 싸워 이기
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병京兵 1명이 면
천에서 도망쳐 돌아왔다고 하며 그가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경병과 일본군
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
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라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새벽쯤에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에서 포위를 뚫고 밤새 달려서 홍주에 도착
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피해가 없었다. 장위영壯衛營 별군관別軍官 김홍수金弘秀
는 고향 사람으로 통위영統衛營교장敎長 황수옥黃水玉과 함께 경군을 이끌고 왔
다. 일본군의 보병步兵은 교위校尉 아카마츠赤松國封와 통역관 이이다飯田가 군사
를 인솔해 왔다. 바로 공해公 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고 일을 의논하였다. 그
때에 면천의 고명高名한 선비인 서상리徐相理가 난리를 피하여 성에 들어와서
만나 보기를 청하고 적의 형세의 허실을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여미와
원평으로 행군行軍하는 길과 산과 계곡의 험준하고 완만함을 그려서 바쳤다.
장좌를 불러 의논하기를, 지금 적이 여미에 주둔하여 군사를 풀어 약탈을
하니 긴급히 공격하여 쳐부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군대가 출동하는 길은
다만 2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바로 원평으로 직접 가는 길이나 이 곳은
26일 [二十六日]
해가 뜰 때에 내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창억이 창밖에
와서 말하기를, 지금 막 군대를 출동하였습니다 라고 하여 내가 깜짝 놀라
서 옷을 입고 동헌東軒에 올라갔더니 초토사는 벌써 먼저 출발하고 없었다. 내가
황급히 동문 앞에 나가서 보니 군대가 이미 열을 지어 행군하고 있었고, 초토사
는 길가에 서서 막 군대를 점검하고 행군을 독촉하고 있었다. 내가 감히 출군한
이유를 묻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마침 박봉진朴鳳鎭
이 짐을 꾸려 앞을 지나가기에 내가 그를 끌어 당기고서 묻기를, 지금 출군은
도모하지 않고 나가는데 어느 곳으로 가서 무슨 적을 토벌하려고 하는가? 라고
하니, 봉진이 말하기를, 밤에 예산 유회의 첩보諜報가 있었는데, 여미에 있는
적의 전위부대가 이미 신례원에 도착하여 예산 고을이 소탕을 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와서 구해줄 것을 급히 요청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갑자기 군
사를 징발하여 예산의 군대와 합세하여 협공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경병 및 일본군과 상의하여 함께 가는
가? 라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중군이 지금 일본군의 숙소에 가서 일을
의논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끝내 기꺼이 따르려고 하지 않아서 중군이 이것
때문에 아직 오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묻기를, 만약 그들이
끝내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장차 어찌 하겠는가? 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군대의 출동은 경병과 일본군이 따르는 여부로 아군의 행동거지를 삼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적들이 많다고 해도 이미 그들의 허실을 알았는데 어찌
심하게 걱정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물러서서, 지난 밤에 병
10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박봉진을 중군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의 여론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유학
정기황鄭基璜과 조종세趙鍾世를 좌군관左軍官과 우군관右軍官으로 삼아 처음으로
패배한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적의 기세가 승세를 타고 여러 고을에
창궐하여 솥에 물이 끓는 듯해서 수령들이 스스로 지키기를 못하였다. 그래
서 대흥 수령 이창세李昌世와 예산 수령 이건李健이 모두 홍주에 들어왔고, 부
안수령扶安守令 윤시영尹始永44은 집이 덕산에 있어서 또한 난리를 피해 들어와
성을 지킬 계책을 상의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이른 아침에 나는 장수 몇 사람과 간동諫洞 뒤의 고개에 올라가서 적이 주
둔한 곳을 바라보니 바로 우리 홍주와의 거리가 30리가 되는 덕산 땅이었다.
산과 들을 뒤덮은 것은 모두 적賊들의 기운이었고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여
수십리에 걸쳐 있었다. 오시午時, 오전 11 오후 1시 쯤에 적의 깃발 하나가 바람에
날리며 달려갔는데, 바로 덕산을 거쳐 길게 이어져서 홍주로 향하였다. 전군
이 매우 많았다.
갑자기 1명의 적이 대포를 가지고 동문 아래에 와서 위로 쏘아 그 탄환이
서까래를 맞추었으나 서까래가 도로 떨어져서 화포를 쏘았던 자가 바로 죽었
다. 문루門樓 위에 있던 아군이 내려다보고 웃었다. 이에 적들이 다시는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서문의 적들이 허수아비를 만들어 집 위에 세워 우리
를 속여 탄환을 허비하게 하려고 했으나 아군이 이미 그 간계를 알고 있어서
계책을 시행할 수가 없었다. 이 날 밤에 초토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무
장을 하고 창을 들고 밤새 성을 돌며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화포의 탄환이
비처럼 머리 쪽에 떨어졌고 소매에 떨어져서 누렇게 태우기도 했으나 두려워
하지 않았다. 순시를 멈추지 않고 더욱 격려하니 장졸將卒들이 모두 솜옷을
입는 은혜46와 함께 술을 먹는 것47에 감동하여 거의 추위와 배고픔을 잊어
버렸다. 하룻밤을 격렬하게 싸웠는데, 단지 화포로만 하였다.
아군의 대포는 멀리까지 날아가고 일본군이 대포를 잘 쏘아서 반드시 적
중하여 조금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으나 저들의 병기는 뛰어나지 못하고 서툰
자들이 쏘고 법도가 없어서 끝내 아군 중에 1명도 해칠 수가 없었다. 또한
성안의 군민은 이미 기율에 익숙하여 밤새 시끄러운 소리가 없었고 닭과 개
도 놀라지 않았다.
29일 [二十九日]
11월 초 1일 [十一月初一日]
초 2일 [初二日]
초 3일 [初三日]
도망하여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이 예산땅에 물러나서 여전히 모여 해산하
지 않았다. 대흥의 유군이 가서 쳐부수었다. 이때에 일본군 1진陣이 금영錦營
초 4일 [初四日]
탐문한 보고가 연달아 왔는데, 도망간 적이 점점 해미에 들어와 점거하여
다시 일어날 상황인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바로 나아가 쳐부술 것을 의
논했으나 그들이 점거한 곳이 험준하고 멀어서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기가 어
려웠다. 그래서 서상리가 바친 지도를 장수와 아전에게 내어 보이고 병사를
3길로 나누는 계책을 세웠다. 예산에서 적을 쳐부순 상황과 성 아래에서 적
을 물리친 연유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초 5일 [初五日]
유언비어가 다시 일어났는데, 적들이 밤에 성을 약탈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때때로 서로 유언비어를 말하였다. 초토사가 직접 돌
아다니며 잘 타일러서 진정시키었다.
초 6일 [初六日]
천안天安의 의병장義兵將 감찰監察 윤영렬尹英烈과 출신出身 조중석趙重碩이 병사
400여명을 인솔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배를 타고 아산포牙山浦에 정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당보塘報에 의하면, 순무영巡撫營49 별군관 죽산부사竹
50 유서(諭書): 임금이 지방으로 파견하는 관찰사 절도사 등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말한다.
51 부월(斧鉞): 임금이 내린 작은 도끼와 큰 도끼로 대장에게 주는 통솔권을 상징한다.
10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7일 [初七日]
죽산의 병사가 해미로 전진하였고, 천안의 병사는 광석廣石을 경유하여 해미
의 북문을 공격하였다. 관병 100명이 앞을 인도하고 150명은 군관 정기황으
로 하여금 인솔하게 하여 덕산과 대천을 거쳐 여미의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일본의 육군 대위 야마무라山村忠正가 병사 200명을 이끌고 아산에서 들어왔다.
초 8일 [初八日]
의병 진영의 첩보牒報에 의하면, 죽산의 병사가 먼저 해미성을 공격했는
데, 적이 바로 무너져서 흩어져 서산의 도비산道飛山에 물러나서 주둔하였습
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반계의 병사를 불러 관병과 합친 300명을 박봉진
으로 하여금 인솔하여 서산의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초 9일 [初九日]
일본군 소위少尉 아카마츠가 공주를 향해 떠났고, 야마무라는 해미로 갔다.
죽산의 병사들이 서산에서 돌아왔다. 순무영 별군관 이창직李昌稙이 병사 30
명을 이끌고 여러 고을을 순찰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죽산의 병사들이 하루를 묵고 공주로 갔는데, 온갖 병사들의 폐단이 성에
가득하여 시끄러웠다. 관리가 나아갈 수 없었고 점인店人들이 모두 피신하였
다. 그들이 떠나갈 때에 밥을 먹고 난 뒤의 그릇과 잠을 잔 곳의 돗자리를
모두 걷어 가지고 소와 말에 실었다. 병사들은 베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모두 약탈한 물건이었다. 홍주의 관병이 그것을 보고 모두 분개하고 미워하
며 서로 공격할 것 같았는데 초토사가 엄중하게 명령하여 탈이 나게 하지
홍양기사 洪陽紀事 109
11일 [十一日]
남포藍浦의 방어소防禦所에서 보고하기를, 비도가 지금 홍산鴻山을 점거했으
니 하루가 가기 전에 그들을 토벌하여 죽임을 당하는 여러 군郡을 구해주시
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장리를 보내어 그들의 허실을 정
탐하였다.
12일 [十二日]
박봉진이 서산에서 개선하였는데, 비괴 최동신崔東信 문학준文學俊 박춘
석朴春石 옥출곤을 잡아왔다.
13일 [十三日]
적괴 이병호와 최동신 등을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덕산 수령 조두환曺斗煥
과 해미 수령 이일李鎰이 모두 군무 때문에 왔다. 남포의 전 승지 임상호任尙鎬가
밤에 남쪽 연안 적의 위협 때문에 보고하기를, 양호의 적이 연계하여 수많
은 사람들이 어제 한산을 침범하였습니다.52 남포의 위급함이 조석간에 달려
14일 [十四日]
초토사가 남정南征53을 결의하고 본영本營의 총수銃手와 창수槍手 150명을 뽑
았다. 여러 고을에 전령을 보내 동시에 모두 거병擧兵하여 남포에 가서 지키
게 하였다. 보령 수령 이교철李敎哲 해미 수령 이일 청양 수령 정인희鄭寅
羲 소모관召募官 이장규李章珪 등이 모두 와서 함께 군무를 의논하였다. 이때
에 경영에서 온 장병들이 많은 약탈을 일삼았다. 순무군관巡撫軍官 이창직은
주군을 두루 다니면서 순찰을 빙자하여 평민을 침탈하였고, 억지로 비도의
죄목을 씌우고 뇌물을 요구하여 소요를 겪고 겨우 진정된 백성이 놀라고 두
려워서 안정되지 못하였다. 초토사가 바로 패악을 들어 순무영에 조목조목
보고하였다.
15일 [十五日]
일본군이 해미 서산 태안 등지를 돌아보고 소위 제등온齊藤溫을 홍주에
남겨두었다.
16일 [十六日]
처음에 성을 지킬 때에 내가 비도를 토벌할 만한 상황을 외람되게 조목조
목 논하여 승선 송언회에게 편지를 하였다. 송宋, 송언회이 그것을 적어 총상摠
相54에게 보여주었는데 총상이 듣고 나를 쓸만 하다고 여겨 이번달 11일에
임금에게 본진本鎭의 영장營將으로 삼을 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여 영장의
관직을 제수하니 사조辭朝하라는 명命이 있었다. 저보邸報가 오늘 내려오니 영
광스러우나 황송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진영鎭營의 장리들이 모두 영광스럽
게 여겼다. 신례원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도 포상을 받았는데, 김병돈에게
는 군무참의軍務參議를, 이창욱과 주홍섭 형제에게는 군무주사軍務主事를 주었
고, 한기경에게는 정려旌閭55를 베풀었다.
순영巡營, 공주감영에서 보고가 왔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완비完匪 전봉준이
공주를 침범하였고, 김개남은 청주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전적全賊은 패배하여
논산으로 도망갔다 라고 하였다. 남포에서 파발擺撥이 오고 연이어 급보가 있
어 안면도安眠島의 병사 150명과 본영의 병사 50명을 더 뽑아서 보냈다.
17일 [十七日]
18일 [十八日]
19일 [十九日]
20일 [二十日]
22일 [二十二日]
박홍양의 첩보에 의하면, “완비完匪가 경군에게 패배를 당하여 사방으로 흩
23일 [二十三日]
초토영의 감결의 지시에 따라 옥에 가둔 비도 14명을 등급을 나누어 처리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순무영 군관을 겸임하여 경병을 이끌고 공주를 순찰
하였다. 한산과 서천 등지에 이르러 비도를 격퇴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원정을
나간 군대가 철수를 하였다. 초토사가 본영本營에 말하기를, 남쪽으로 원정을
나간 군대가 부대를 정돈하여 환호성이 진동하고 기쁜 기운이 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만 장졸이 여러 날 동안 노숙을 하여 혹시라도 병이 나지 않았는지
걱정스럽다. 음식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는 것을 빨리 시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리 보고를 듣고 기다렸다가 경계에 직접 나가 맞이해서 비록 솜옷을 입혀주는
것처럼 할 수는 없더라도 다만 술을 풀어 먹게 하는 것은 보일 수 있다.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한 뒤에 군물을 갖추어 북을 치고 인솔하여 돌아오라 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남문 밖 오리정五里亭에 나가 남쪽으로 원정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군대를
맞이하여 위로를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남산 10리에 나가 남쪽에 원정을 나간 군대를 맞이하여 위로하고 돌아왔다.
11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초토영이 5명의 죄수를 압송하여 공초供草를 받아 논보論報하였는데, 그것
에 대해 회제回題하기를, 죄인의 공초를 참작해보니, 전혀 범행한 것이 없다.
만약 형을 가하여 엄중히 문초했다면 어찌 감히 이처럼 소홀하겠는가? 엄중
하게 형을 가하여 자백을 받아 다시는 이처럼 하지 말라 고 하였다. 다시 보
고하기를, 영장營將의 자질이 본래 우매하여 일의 실상을 조사하는 것에 서
툴고, 성품도 나약하여 신문訊問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죄수들에게
받은 공초는 핵심을 분명히 하여 실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지엄하신 제교題敎
를 받으니 매우 송구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
하기에, 죄수의 자백이 만약 그 죄가 현저하여 반드시 죽여야 할 사안이 아니
라면 처음에 평문平問57을 하고 5청五聽58을 참조하여 죄인의 말 중에 그 단서
를 얻은 뒤에야 죄인의 죄상을 깊이 규명하는 것을 모색하여 비로소 진범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죄안罪案을 만드는 데에 급급하여 바로 지나친 형을
가하면 어찌 혹시라도 거짓으로 자백하여 진실을 잃어버리는 탄식이 없겠습니
까? 지금 여러 죄수들을 보면, 박원배朴元培는 연이어 엄중히 문초問招를 했으나
한마디도 자백하지 않아 전혀 실정을 알지 못했고 이미 그를 잡아둘 수 있는
진장眞贓59이 없습니다. 정말로 악명惡名을 억지로 더하기가 어렵습니다.
박수선朴水先과 서춘성徐春成은, 기찰포교譏察捕校의 보고에 의하면, 접주接主
손치재孫致才가 이위원李渭原의 집에 도망가서 숨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밟아
29일 [二十九日]
이때에 경박하고 추잡한 무리들이 교졸을 사칭하여 마을에 출몰하면서
민간에 근심을 끼쳤다. 이에 관할하는 각 고을에 관문을 보내 말하기를,
영문營門의 교졸들이 외촌外村에 근심을 끼치고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는 것
은 비록 평상시라도 이미 없애기 어려운 고질적인 병폐이다. 더욱이 이런 난
리를 겪은 뒤에 혹시 일 때문에 나가서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하거나 교졸
을 사칭하여 기회를 이용해서 토색질을 저지른다. 이것을 만약 특별히 금지
하지 않는다면 난리 뒤에 겨우 사는 백성이 어찌 견디겠는가? 이것이 초토영
에서 조목조목 나열하여 관문으로 일러 경계하는 이유이다. 본영本營에서도
특별히 단속하여 그 폐습을 없앨 것이다.
소위 영속營屬은 본래 산란하여 기율이 없는 무리로 갑자기 규정을 만들어
다스리기가 어렵다. 또한 혹시 비도匪徒의 남은 무리들이 영속을 사칭하고 저
녁에 외로운 마을에 칼을 들고 행패를 저지른다는 얘기가 종종 들리는데, 이
것이 과연 정말인가? 지금부터는 비록 진짜 교졸이 공문을 가지고 나온 자이
더라도 만약에 본관本官에게 공문을 보내지 않고 먼저 체포하는 자는 그 마을
에서 잡아 두고 관에 보고하여 분부를 기다려서 거행하라. 만약에 공문이 없
이 소란을 저지르는 자는 진짜 가짜를 막론하고 난류이니 모두 결박하여 본
홍양기사 洪陽紀事 117
30일 [三十日]
적의 위협이 조금 그치어 성의 수비를 막 풀고, 남문 밖에서 크게 군사들
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번番을 교대하는 촌민을 해산하여 보내고 영부營府
의 관속만으로 나누어 각 문을 지켰다.
12월 1일 [十二月初一日]
초토사가 성묘聖廟, 향교의 공자사당에 배례拜禮를 하고 학생들을 불러 모아 선비
의 상견례를 행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뛰어난 자를 뽑아 재실齋室에 거처하여
책을 읽고 5일 동안 강講을 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선비에게
땔나무 쌀 기름 소금을 제공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배분했다. 그래서
선비의 기세가 더욱 진작되었다.
초 5일 [初五日]
이보다 앞서 향인鄕人 유기석劉基錫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었는데, 동도
가 일어날 때에 억지로 가입시키려고 하니 유劉, 유기석는 바로 거절하고 도리
11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8일 [初八日]
순무영 별군관 최일환崔日煥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평민을 침탈하였다.
가는 곳마다 인가의 자산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 초토영에서 잡아 옥에 가
두고 순무영에 논보論報하여 그 회제回題,에 따라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초 9일 [初九日]
19일 [十九日]
20일 [二十日]
27일 [二十七日]
치사면雉寺面 신리新里의 옥사獄事를 초토영에 논보하기를, 분부해서 도달하
여 받은 감결에 고남高南 아랫마을에 사는 이성진李成振의 발괄白活69에 의하면,
그의 아비가 애초에 동도에 물들지 않았는데, 10월 그믐에 덕산땅에 갔다가
치사 신리의 윤덕배尹德培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습니다. 덕배를 지금 잡아들
여 법에 따라 처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여 죄인 윤덕배를 회동하여
장자狀者70를 압송해서 상세히 사실을 조사하고 확실하게 보고하라 고 하였
29일 [二十九日]
초토사가 본영本營, 초토영의 장관將官과 각 고을의 유회장儒會長 농보장農堡
長 소모관召募官 의병장 전망인戰亡人 절의인節義人 열행인烈行人의 공로功
勞와 사실을 따로 갖추어 성책해서 논보하였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군부장관 軍部將官
열행인烈行人
홍주 고故 학생 學生 유진뢰兪鎭雷의 아내 이씨 송종록宋鍾祿의 아내 정씨鄭氏.
중군中軍 박봉진朴鳳鎭
일을 처리하는 것이 확실하고 조심스러우며 근실하였다. 예산에서 패하여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포위를 뚫고 혼자 탈출하였다. 해미성에서 선봉이
되어 승리했으나 공을 사양하고 그것을 자처하지 않았다.
별군관別軍官 이주승李周承
방략이 넉넉하고 명성이 일찍 드러났다. 유음諭音을 펴서 비도들을 귀화시
키고 오랫동안 고생하며 면을 돌아 유회를 창도하여 저 강한 적을 상대하고
떨쳐 일어나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별군관 정기황鄭基璜
처음에 유장儒長이 되어 인심을 동요시키는 소문을 진정시켰다. 늦게 좌막
佐幕에 임명되어 마침내 여러 번의 전공戰功을 세웠다.
별군관 송태현宋台顯
군무를 잘 알고 과감한 용기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왕사王事에 힘써서
부탕도화赴湯蹈火73의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35
별군관 최낙규崔洛圭
책략들을 모두 수행하여 막부幕府의 속관屬官이 모두 추대하였다. 치밀하
고 상세하게 공무를 처리하여 군읍의 선비가 모두 청렴하고 공평하다고
하였다.
참모관參謀官 서상신徐相臣
억지로 막료幕僚을 응낙하여 고상한 선비의 기상을 더럽히는 것 같았으나 묵묵
히 장막帳幕의 계책을 운용하여 아낙네가 치밀하게 도모하는 것을 보는 듯하였다.
참모관 정한조鄭翰朝
적의 동정을 정탐하여 안으로 기포譏捕하는 방법에 도움을 주고, 유군을 인
솔하여 밖으로 성원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참모관 박홍양朴鴻陽
무예가 출중하고 일처리가 뛰어나서 적의 기밀을 기찰하였다. 직접 정찰
을 나가 1달 동안 고생을 하며 1개 성省에서 도적의 뒤를 밟아 체포하였다.
참모관 한응준韓應俊
병학兵學에 정통하고 당시의 깃발 색깔을 바꿨다.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반
년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괴로움을 겪었다.
참모관 장정식張定植
부절을 맞춘 것처럼 계책을 세운 것이 어긋남이 없었고, 재물을 내어 군수
참모관 이종원李鍾遠
유회를 이끌고 격문을 전하여 이웃 군의 사람들 중에 호응하지 않는 이
가 없었다. 나루터의 길을 끊고 배를 침몰시켜서 이웃 성省의 적이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참모관 이두종李斗鍾
막료를 응낙하고 지혜를 내어 계책을 도와서 늘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성城이
위태롭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구원하고 1대隊를 담당하였다.
종사관從事官 윤자혁尹滋赫
저 양호의 교차하는 곳에 비도가 가장 극성스러운 것을 보고 포의布衣를
입은 일개 선비로 몸을 떨치어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여러 고을의 유회가
뒤를 따랐고 경내를 나간 관군이 모두 앞을 다투었다.
종사관 조종세趙鍾世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이 군사의 계책을 도와 먼저 승패를 정했는데 손
바닥에 보여주는 것처럼 확실하였다. 적의 동정을 정찰하여 요충지를 잘 알았다.
종사관 표구석表龜錫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군향軍餉, 군량을 돕고 단지 그릇을 기울여 남기는 것이
없었다. 서명좌막署名佐幕, 막료으로 돌과 화살을 무릅썼으며 공로가 있었다.
향관餉官 이규승李奎承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여 실제로 훌륭한 아녀자와 같은 손길이 있었
다. 먹을 때마다 반드시 배부르게 먹여서 병사들의 환심을 깊이 얻었다.
영선營繕 장영식張永植
온 성내의 집이 기다렸다가 횃불을 들어 5개 진陣의 병사들이 추운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오진영관五陣領官 김상범金商範 등 5인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촌정村丁, 장정을 5개 부대로 나누어 그들을 교습敎習하는데
늘 고생을 하였고 늘 갑옷을 입어 이 가 생겨날 정도로 삼동三冬을 지나며 잠잘
겨를이 없었다.
순초군관巡哨軍官 이석범李錫範
적고 나약한 군사들을 지휘하여 홀로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직접 크고 작
은 싸움에 참가하여 자주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기교譏校 김석교金錫敎
기찰을 매우 은밀히 하여 사정을 알아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어렵고 위
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법망에서 빠진 우두머리를 결박하였다.
13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선계감관繕械監官 이응로李應老
도검韜鈐76을 다루는 데에 뛰어나 요속僚屬, 동료이 모두 연달鍊達, 장인로 추대하여
공야工冶하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그 기계가 정밀하고 예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호장戶長 김관섭金寬燮
7효孝 집안의 가훈을 이어받아 30일 동안 싸움터에 나가 힘을 다해 충성으
로 직접 앞장을 섰다.
기관記官 이종응李鍾應
사악한 술법術法을 배척하여 미약할 때에 막았다. 수리首吏로서의 책임을 자
임하여 군무를 도와 변고에 대비하여 실제로 병사를 만족시키는 계책이 많았다.
형리刑吏 최학연崔學淵
공이公移, 공문를 다루는 데에 민첩하여 혼자 감당하며 고생을 하였다. 포로
의 사송詞訟에 조리가 있었고 반드시 적의 실정을 찾아내었다.
김복동金福東
70세의 늙은이가 어찌 구하는 것이 있겠는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충임을 알
뿐이다. 천만 명을 내가 가게 할 수 있다. 먼저 유생을 일으켜서 싸움터에 나갔다.
77 공황( 黃): 한(漢)나라 때의 순리(循吏,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인 공수( 遂)와 황
패(黃覇)를 말한다.
14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소모관召募官 이장규李章珪
실제로 공로가 많아 상을 베풀어야 한다. 의병의 깃발을 달고 병사를 모집
하여 모두 소모의 직분을 다했다고 하였는데, 서첩書帖을 거두었다가 다시 주
니 출처에 명분이 없는 것이 애석하다.
의병장義兵長 이시우李時宇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병사를 모으고 집안의 재물을 쏟아
그 군량을 끊이지 않게 하여 주둔한 병사들이 감복하여 따랐다. 극악한 적을 잡으
면 반드시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을 하였고 흩어진 백성들이 그를 믿고 안정되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김병돈金秉暾
마음으로 책략을 다하여 먼저 전공戰功을 이루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그
를 따라 죽음에 나아가게 할 수 있었다. 그의 담략을 미루어 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끝내 죽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이창욱李昌旭
부고 鼓를 잡고 병사들과 거의 고생을 함께 했고 중군의 소임을 오랫
동안 하며 무기와 갑옷을 깔고 잤다. 그래서 적에 나아가 죽는 것을 서로
다투게 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주홍섭朱弘燮형제
한번 죽는 것을 가볍게 여겨 칼날을 밟고 자신의 몸과 집안을 돌아보지
홍양기사 洪陽紀事 141
전쟁에서 죽은 사람 한기경韓基慶
뜻이 숙성하여 진실로 공융孔融과 같았고 옥에 나갈 만한 어린 나이就獄에
용기있게 떨쳐 일어나서 왕기汪 처럼 사직社稷을 지켰다는 이름을 얻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홍경후洪敬厚
적이 없는 것처럼 보았으므로 용기 1,000만의 적이라도 반드시 갔을 것이
다. 사람의 힘을 얻어 12명과 함께 죽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이종국李鍾國
유군儒軍을 통솔하여 용감하게 100부夫의 우두머리가 되어 용감하게 적진
에 나아갔고 한번 죽겠다는 뜻이 결연하였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신태봉申泰鳳
저 사람은 아이가 아닌가? 남은 용기를 사고 싶다. 서로 맞붙어 싸워 힘이
다 빠졌다. 흉도도 그 의를 추앙하여 시신을 거두어 묻고 표지標識를 하였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김계련金啓連 등 4명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구제하였다. 같은 마을에서 남전藍田의 규약規約78을
강구하여 목숨을 바치고 수양성 陽城의 위험79이 몰려오는 외로운 성城을 떠
나지 않았다.
절의節義 유기석劉基錫
악惡을 미워하는 것을 마치 원수처럼 여겨서 오랫동안 추악한 무리들의 반
감을 샀다. 재난에 직면하여 구차함이 없이 먼저 흉악한 적의 칼날에 죽음을
당했다.
절의 황종원黃鍾元과 김상엽金商燁
유장儒長으로서 저들의 분노를 사서 기어코 죽이려고 하였다. 적괴에 대항
하여 자신의 혀를 보이며 크게 꾸짖어 성망이 있었다.
절의 김명황金命璜 부자父子
한번 죽는 것을 이루고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두
개의 절개를 빛냈으니 가상하고 충효라고 할 만하다.
절의 송봉훈宋鳳勳 부부
사생을 함께 하며 그 임소任所를 떠나지 않고 아전으로서 충성을 다하였다.
시신을 잘 거두어 집에 안치하였다. 아내도 현명하였다.
절의 오경근吳景根 등 6명
광진狂塵, 동학교도이 성묘聖廟, 향교의 공자사당를 침범하였을 때에 6명이 죽음으
로 지켜 재복齋服이 피로 더럽혀졌고 한꺼번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