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93

해제

홍양기사洪陽紀事

본 자료는 홍건洪健이 홍주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것이다. 홍건은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의 친우로 그의 막객幕客이 되어 농민군 진압활동
을 벌였다. 이승우가 홍주목사로 있는 동안 홍주지역은 농민군에게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는데,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이승우는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로
임명되었고, 홍건도 홍주영장洪州營將에 발탁되었다.
자료에는 1894년 4월부터 12월 29일까지의 기사와 부록 난중기문亂中記聞이
수록되어 있다. 주요 내용으로, 청일전쟁시기 성환 전투, 면천沔川 농민군 이
창구李昌求의 활동과 체포 과정, 2차 봉기 당시의 신례원 전투와 홍주 전투의
전개과정과 관군 유회군 일본군의 전투 참여 양상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
다. 부록 난중기문에는 관군과 유회군의 명단과 군공록을 수록하고 있다.
본 자료는 충청도 서북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관군의 진압 활동을 보
여주는 자료이다. 원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51

홍양기사 洪陽紀事

1894년 4월 [甲午四月]
승지承旨 이승우李勝宇를 홍주목사洪州牧使로 특별히 제수한다는 명命을 받들
었다. 이때에 호남의 난민이 동학東學을 빙자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해서
여러 고을이 소란스러웠다. 홍주도 민요民擾가 있었다가 겨우 진정되었으나
여러 해 동안 정공正供 은 모두 포수逋藪2가 되었고 온갖 폐단이 생겨서 다스
리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의논하여 이승우를 특별히 천거하여
홍주를 맡긴 것이었다.

15일 [十五日]
이공李公, 이승우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와서 나를 불렀는데, 마침 고향
집에서 병으로 누워있어 일어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모두
가도록 권하며 말하기를, 화병으로 인한 병은 울적함을 풀어버리면 나을 수
있다 라고 하였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1 정공(正供): 정당한 부담이라는 뜻으로 부세(賦稅) 방물(方物)을 말한다.


2 포수(逋藪): 죄를 짓고 달아난 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부정을 일삼는 도둑 의
소굴이 되었다는 뜻으로 쓰였다.
5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6일 [十六日]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여 어천漁川에 이르러 하룻밤 묵었다.

17일 [十七日]
오후에 성城, 한양으로 들어갔다.

18일 [十八日]
회동會洞에 머물렀다.

19일 [十九日]
회동에 머물렀다.

20일 [二十日]
주공主公, 이승우이 먼저 남문南門 밖에 나가서 머물렀다.

21일 [二十一日]
주공을 쫓아 출발하여 과천果川의 갈산점葛山店에 이르렀는데, 신영新迎하는
관속官屬이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수원水原 남문 밖에 이르러서 유숙留
宿하였다.

22일 [二十二日]
진위현振威縣에서 점심을 먹고, 평택현平澤縣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53

23일 [二十三日]
아산牙山의 곡교시曲橋市에서 점심을 먹고, 대흥군大興郡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4일 [二十四日]
홍주에 도착하였다.

29일 [二十九日]
주공이 충청감영에 갔다.

5월 초 6일 [五月初六日]
남양南陽에 심부름꾼을 보내고, 주공은 관아로 돌아왔다.

초 7일 [初七日]
조정에서 호비湖匪, 호남의 비도를 걱정거리로 생각하여 청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하니 청국이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해 가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참판參判 이중하李重夏를 영접사迎接使로 삼아 제독을 안내하게 하였
는데, 제독이 마침 아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물길이 홍성의 내도內島3와 통해
있었기 때문에 영접사가 도착한 뒤, 바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려왔다. 주공
이 편지를 받고서는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주공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편지에서 말하기를, 주공이 내도에 도착하니

3 내도(內島): 충청남도 북서해상에 있는 섬을 지칭한다.


5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영접사는 먼저 아산으로 출발하였고, 청국이 다시 원수元帥 섭사성 士成을 보


내와서 모두 아산의 백석포白石浦에 머물렀다 고 하였다. 주공에게 답장을 하
고, 시詩 1수首를 영접사에게 함께 바쳤다.

초 10일 [初十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왔다.
영접사가 편지를 보내와서 전주全州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보
다 앞서 호남의 비괴匪魁 전봉준全琫俊, 俊은 準의 오기이 무리를 모아 날로 기세가
드세져서 여러 고을의 군기를 빼앗고 전주에 이르렀다. 감사監司 김문현金文鉉
은 겁을 먹고 밤에 도망하였고,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군대를 주둔시키
고 관망을 하였으며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여산礪山에 있으면서 들
어가지를 못하였다. 전적全賊, 전봉준이 이에 완성完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조
정에서는 이원회李元會를 순변사巡邊使로, 엄세영嚴世永을 염찰사廉察使로 삼아 가
서 토벌하게 하니, 적이 전주를 버리고 달아났다.

12일 [十二日]
내도에서 보고가 왔다. 그 보고에 의하면, 청국군함이 계속 정박하면서
지주地主, 홍주목사를 보기 원한다 라고 하여, 주공이 바로 출발하였다.

14일 [十四日]
영접사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이전에 보낸 시詩에 화답을 하였다.

17일 [十七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왔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55

6월 23일 [六月二十三日]
읍예邑隸가 한양에서 돌아와 소식을 전했는데, 21일에 대궐안에 변란變亂4
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서 영접사에게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영접사의 답장을 받고 한양의 변고變故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영접사가 원수
섭사성에게 군대를 북쪽으로 전진하도록 요청하여 성환역成歡驛에 이르렀는데, 한
양으로부터 전보電報가 와서 중지하고 성환에 지금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주공이 내게 말하기를, 그대에게는 노모老母가 있는데, 이런 유사시를 맞
아 친구에게 부모의 임종을 못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어찌 한번 집에 가
서 뵙지 않겠는가? 그대가 돌아갈 때에 일은 다행히 급박한 낌새가 없으니
바로 돌아오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바로 출발하여 덕산읍德山邑에서 점심을 먹고
북창北倉에 이르러 유숙留宿하였다.

26일 [二十六日]
신천의 금초錦樵 이장헌李章憲에게 들렀다가 오후에 내도에 이르렀다. 본주本州, 홍

4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한 일을 말한다. 일본군은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과 1차


전주화약을 맺어 자국의 세력 진출이 어려워 질것을 예상하여 개혁(갑오개혁)을 도와준다는 빌미
로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23일 아산만에 정박 중인 청국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야기함으로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드러내었다.
5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성의 아전들이 청국 군함을 영송迎送하는 일 때문에 모두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27일 [二十七日]
내도에 머무르며 탐리探吏5를 통해 영접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28일 [二十八日]
배를 타고 출발하려고 할 때에 멀리서 일본 병선兵船 2척이 앞바다에 닻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작은 배 1척이 조수를 타고 빠르게 아산 백석포로 향했
는데, 해변에서 그것을 보는 자들이 모두 의심을 하고 겁을 먹었다. 관리가
내 길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지금 저 병선의 기세가 좋지 않은데, 어찌 배를
타서 서로 가까워질 필요가 있겠는가? 다시 육로를 잡는 것이 매우 좋을 듯
싶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나는 웃으면서 배에 올라 돛을 올렸다. 이미 저녁
조수가 지나가서 율도栗島에 도착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그래서 배 위에서
잠을 청하였다.

29일 [二十九日]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별다른 탈이 없었고, 막내 아우가 하동河東에서 올


라와 있었다. 소식이 끊겼던 뒤라 매우 반가웠다. 그 기쁨은 손으로 움켜쥘
정도로 분명하였다. 이때에 성환역에 주둔한 청나라 군사가 일본군에게 습격
을 받아 한꺼번에 도망하여 흩어졌다는 소문이 소란스러웠으나 그 단서는 자
세하지 못하였지만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한쪽 길이 막혔다고 한다.

5 탐리(探吏): 봉명사신(奉命使臣)의 가는 길을 탐문(探問)하는 아전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57

7월 초 1일 [七月初一日]

막내 아우로 하여금 한양에 올라가게 하였으나 감히 편지를 하지 못하고 구


두口頭로 승선承宣 송언회宋彦會에게 보고하였다. 대략 홍주 관아의 소식과 내가
집에 돌아온 연유를 전하였고, 한양의 최근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초 3일 [初三日]

막내 아우가 내려와서 송승선宋承宣, 송언회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막 홍주를 향하


여 돌아가려고 어머니에게 거취를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는 나를 괘념치 말라. 충절忠節을 다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신하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 옳다. 비록 가지고 있는 직함은 없더라도 이미 외람되게 벼슬을 했
으니 평민과는 다르다. 또한 홍주목사가 너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덕하니 정
의情誼상 무시하기가 어렵다. 너는 가서 함께 주선하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명命
을 받들고 물러나서 배를 재촉하여 돌아왔다. 밤에 바다위에서 묵었다.

초 4일 [初四日]
일찍 내도에 정박했는데, 섬의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 흩어져서 그 형편이
참담하였다. 며칠사이에 사람의 일이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변하였기에 찾아
가서 일의 연유를 물어 보았더니, 지난 달 27일에 청나라 군대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소사素沙와 성환에서 패하였으며, 패잔군이 여러 고을에 흩어졌
고 또한 약탈을 자행하여 백성들이 모두 풍학風鶴6처럼 움직였으며 여러 날이

6 풍학(風鶴): 풍성학려(風聲鶴 ), 진(晋)나라 때에 전진(前秦)의 부견( 堅)이 비수( 水)에서 대패한


뒤에 그의 군사들이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듣고서도 추격병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
워했다는 고사이다.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에도 크게 놀라는 것을 말한다.
5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지나도 진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배에서 내려 걸어서 고생을 하여 신


천 이금초李錦樵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초 5일 [初五日]
덕산 대천大川 장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에 홍주에 들어가니 주공이
손을 잡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별한 뒤의 전투 상황을 말하고 더욱이 그 날에
맹서한 글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고립된 성城은 방비가 없어 앉아서 성
을 잃어버리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적의 칼날에 치욕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의義를 따르는 것이 낫다 라고 하였다. 순영巡營, 감영 인편에 영
접사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그 편지에서 전하기를, 지난날에 성환에서 패
하였으나 다행히 모면하여 지금 조정에 돌아왔다. 청나라 병사들이 청주淸州를
거쳐 관동關東을 돌아 토산兎山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였다 라고 하였다.

초 6일 [初六日]
주공이 병요兵擾를 겪은 뒤에 음우陰雨7을 매우 걱정하여 장리將吏를 통솔해
서 성첩城堞을 견고하게 수축하고 화포와 창을 수리하였다. 김병돈金秉暾을 중
군中軍으로, 한응준韓應俊을 참모로 삼아 성城아래 병정兵丁을 훈련시켜 미리 대
비하는 방책을 세웠다.
이 날 순영에 갔다.

초 7일 [初七日]

내가 빈 관아에 있었는데, 밤에 어떤 소리를 들었다. 시끄러운 것이 파리巴

7 음우(陰雨): 예기치 못한 재난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59

俚같기도 하고 무당이 외우는 것 같았다. 시장 거리에서부터 성 밖의 교외郊外


까지 가득하여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밤새 끊이지 않아 괴이하여
시동侍童에게 물어보았더니, 시동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동학이 주문을
외는 소리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밤마다 점점 더해져서 이교吏校와 노
령奴令8 같은 것들도 감염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시 외촌外村에서 전해온
것을 들어보니, 난도亂徒가 사방에서 일어나 무리를 불러 모아 패악을 자행하
였는데,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남의 말과 가축을 빼앗았으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감히 금하지 못하였고, 돈을 빌려준 자는 감히 돈을 돌려받지
못하였으며, 사소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을 당하였다. 그 기세가 더욱 대단
해져서 종이 주인을 범하고 아전이 관장官長을 핍박하며 천한 사람이 귀한 사
람을 능멸하고 수절守節하는 과부와 혼기婚期가 찬 규수를 겁탈하려 했다고 한
다. 허다한 변고를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초 9일 [初九日]
우연히 동쪽 문루門樓에 올랐다가 마침 패류悖類가 시가市街를 제멋대로 다니며
공사公私간의 말과 노새를 빼앗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보는 자들은 피하고 감히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시임時任 병
교兵校 김순흥金順興이 그들의 협박 때문에 그만두었는데, 매우 통탄스럽다.

12일 [十二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와서 길을 가다가 겪은 것을 하소연하였다. 돌아올 적

8 노령(奴令): 지방 관아의 관노(官奴)와 사령(使令)을 지칭한다.


6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에 공주公州 동천점銅川店에 이르렀는데, 무리들이 1쌍의 푸른 깃발을 나부끼며


갑자기 다가와서는 몰고 가던 말 3필을 빼앗아 갔다. 그들을 불러서 물어보
기를, 너희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우리는 도
인道人으로 접주接主의 명령으로 왔다 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희 접주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였더니, 저들이 두메산골 한 곳을 가
리키며 저 곳에 있다 라고 하였다.
공公이 수레를 몰아가서 보니 산의 중턱에 병풍과 장막을 치고 위에는 6
7명의 두령頭領이 앉아있었고 아래에는 수 십명의 무리들이[ ]9 둘러싸고 있
었다. 공이 수레에서 내려 자리로 가서 일일이 성명을 묻고 나서 질문하기를,
내가 지금 온 것은 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마디 말로 서로 분별
하려고 하니 그대들은 들어보아라. 그대들이 말하는 도를 나는 무슨 도인
지 알지 못하나 그 도를 들어보니 바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화거의斥和擧義라
고 하는데 그러한가 라고 하였더니, 그렇다 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
대들은 어찌하여 말이 어긋나는가? 지금 그대 무리들이 하는 짓은 악행이 아닌
것이 없다. 마을이 소란스러워서 백성이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할 수 없고 군읍郡
邑이 어지러워서 관아에서 그 영令을 시행할 수가 없다. 조정의 명리命吏10는 곤
욕을 당하고, 길 가는 상인들은 길이 막혀 있으니, 이것이 보국안민이란 말인가?
거의척화라는 얘기는 이치에 어긋남이 더욱 심하다. 만약 의義를 내세워야만 하
는 시기를 만나 바른 명분을 세웠다면 식량과 마필馬匹 등은 격문 하나 만으로도
몰려들 것이다. 지금 당장 내세울만한 의가 없이 명분 없는 의를 빌려 불의한
일만을 행하였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만약 불의한 죄를 들어 불의한 형벌을

9 누라( ): 일정한 기반을 갖고 있는 도적의 무리나 악인(惡人)을 쫓아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10 명리(命吏): 어떤 사명을 띠고 특별히 임명된 관리를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61

시행한다면 그대들은 장차 어떤 말로 스스로를 변명하겠는가? 그대들은 생각해


보아라. 내가 지금 길을 가는데 말이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차 순영에 글
을 써서 보고하여 말을 빌려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자리를 떠나 편지를 써서 봉封하고 떠나려하니 사람들이 제법 동요하
는 기색이 있었다. 서로 돌아보며 의논한 뒤에 말을 돌려주고 화해를 권하며
가게 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곤경을 당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주공이 관아를 비었을 적에 내가 눈앞에서 본 것을 적어서 보고하고 바로
일어나 그의 손을 끌어 취은루醉恩樓의 난간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공은 들어
보십시오. 성 안팎에서 개구리가 울고 매미가 우는 소리는 모두 지기시천至氣
侍天11의 주문입니다 라고 하니, 공이 탄식하고 배회하다가 망루로 내려가 앉
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견해로는 어떻게 다스려야 가능하겠는가? 지금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 일개 주州의 목사로 와서 포악을 금지하고 난리
를 그치게 하지 못하니 이것은 바로 일을 그르치고 직임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송구스럽지 않겠는가? 그대는 생각해보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공이 하신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하게 하나
지금 인심은 흩어지고 세도世道는 음험하게 성하여 사류邪類가 태동하자 많은
무리들이 따라 일어나서 마치 맹렬한 불과 스며드는 물과 같습니다. 향리鄕里
에는 정도正道를 지키는 선비가 없고 군현郡縣에는 법을 세우는 관장官長이 없
는데, 공께서 어찌 홀로 서서 한손으로 물결을 막고 외로운 등불로 어둠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11 지기시천(至氣侍天): 동학에서 지기는 우주의 근본적 실재인 한울님의 원기(元氣)를, 시천은 한울


님을 보신다는 뜻을 말한다. 동학의 주문에는 지기 로 시작하고 시천 이 들어 있다. 곧 “至氣今
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을 말한다. .
6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우리 문정門庭, 관아의 추종하는 무리들이 조금도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우리


의 명령만을 따르게 하여, 물과 불을 사양하지 않게 한 뒤에야 비로소 위엄을
펴고 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읍의 관속들 가운데 절반
은 이미 동학에 감염되었고 며칠 안에 저들에게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자들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저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하루
속히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조정의 명리로서 한
곳의 난도도 금지하지 못한 채 지금 스스로 물러난다면 위로는 임금께서 맡
기신 명命을 받들지 못하고, 아래로는 나약하고 못났다는 질책을 견딜 수 있
겠는가? 지금 이 성 아래의 관원과 백성이 비록 동학에 감염되었다고 해도
그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뉘우치는 것도 반드시 쉬울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저들 무리에 들어간 것은 어리석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따라
서 그들을 인도하여 교화로 향하게 하면 될 것이니, 어찌 그 방법이 없겠는
가? 그대는 깊이 생각해보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혹시 마음을 돌려 우리
쪽으로 오기를 바라지만, 부족한 것은 재물과 곡식입니다. 지금 이곳 읍속들
가운데 먼저 오염된 자들은 모두 포흠逋欠12을 짊어진 아전들과 급료가 없는
교졸校卒들입니다. 만약 그 양식과 급료를 넉넉하게 주어 눈앞의 먹을 것을
위해 그 포흠을 받아내는 것을 늦추어주고 훗날에 탕감해 준다는 뜻을 보인
다면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듯합니다. 공께서는 이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바로 내 마음과 일치한다. 어찌 재물과
곡식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지금 세금을 낼 돈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

12 포흠(逋欠): 관아의 전곡(錢穀)을 사사로이 소비하여 축낸 것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63

수 만냥을 내려가지 않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환자미還上米13 또한 1,000여


석이 넘는다. 내가 나라의 재물을 나랏일에 쓰는데, 어찌 죄를 짓는 이유가
되겠는가? 내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그대는 잠자리에 들라 고 하였다.

13일 [十三日]
주공이 일찍 일어나서 관아를 열고 진鎭과 부府의 관속들을 모두 불러 영令
을 내려 말하기를, 이른바 지금의 동학은 분명히 기강과 본분을 범한 무리
로서 왕법王法에 따라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이다. 나는 요즈음 너희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동학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나는 너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너희들 가운데 남을 속이는 짓거리를 즐기고자 하거나,
괴이하게도 죽을 때까지 그러한 행동을 뉘우치지 않는 자들은 나 또한 어찌
할 수가 없다. 너희들은 좋아하는 것을 좇아 각자 돌아가라.
만약 이성 性이 없어지지 않아 처음에 비록 잠시 미혹되었다고 해도 지금 바
로 뉘우친다면 나는 예전처럼 대우하여 스스로 거듭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너희들은 숨김없이 각자 자신의 뜻에 따라 동서東西로 나뉘어 서라 고 하였다.
명령을 서너 차례 내리니 아전과 관노官奴 및 사령使令 등이 모두 엎드려서 자
수하여 말하기를, 소인小人 등이 저들에게 들어간 것은 정말로 그 도를 즐거워
하고 그 행동을 동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공예公隸로서 포흠을
지고 있거나 원망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저 난도는 평소에 서로 관계가 없는
자가 없습니다. 명목이 없는 돈은 그 수효가 많다고 함부로 몽둥이질을 합니다.
사소한 원한도 조금이라도 반드시 비교하여 바로 곤욕을 가하여 명命을 감당할

13 환자미(還上米): 춘궁기에 빌려 주었다가 일정한 이자를 붙여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곡식으로 구


휼미의 성격을 띤다.
6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곤경을 막는 방법을 물었더니 모두 그 도를 배워 그


무리와 함께 한다면 바로 면할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구차하게 그 이름을
빌려 잠시 그 화를 늦추었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그들의 말을 듣고 용모를 보니 또한 불쌍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말한 것은 정말로 진정에서 나왔다. 사
람이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뉘우치는 것이 더욱 귀중하다. 너희들은 생각해 보
거라. 비류匪類에게 이름을 의탁하여 법령을 범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돌려 교
화하여 각기 본 업을 지키는 것만 같겠는가? 너희가 뜻밖의 재난을 겪으면 내
가 보호해 줄 것이고 너희가 배고픔과 추위에 괴로워하면 내가 구제할 것이다.
내가 지금 법제法制를 만들어 난류亂類를 뿌리 뽑을 것이다. 나의 지령을 너희는
따라야 할 것이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에 마을에서 현명한 선비와 호걸들을 선출하여 인솔하게 하고, 진부鎭府
에서 교졸 100여 명을 뽑아 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환미還米와 봉하여 둔 세전稅錢을 내어 월급으로 주었다.
또한 성 아래 4 개 마을에 명하여 5가家를 1통統으로 만들어 수상한 자를
정찰하고 근심과 어려운 일은 가서 서로 돕게 하였다. 창고를 열어 빈곤한
자를 구제하고 거리와 시장에 방榜을 내걸어 마을에 명령을 선포하여, 저들
가운데 패악을 행하는 자는 바로 잡아들이게 하였다. 만약 그 패거리들이 많
아 잡기 어려우면 바로 달려와 보고하도록 일일이 조약을 정하였다.

14일 [十四日]

읍내의 백성들이 크게 나쁜 풍속을 바꾸었으나 여전히 옥출곤玉出崑과 서봉


인徐鳳仁이란 자는 끝내 굽히지 않고 사류와 몰래 교류하며 늦은 밤에 주문을
암송하였다. 이에 엄중히 곤장을 치고 형구刑具를 씌워 가두었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65

15일 [十五日]

촌민들이 서로 다투어 난도를 결박하여 데려왔다. 난도 중에 힘이 세어 대


적하지 못해서 도움을 청하는 보고가 있으면 바로 군졸을 보내 잡아들였다.
이교에게 명하여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었더라도 구애받지 말고 보고하며 위
급함을 알리는 것을 지체하지 않도록 하였다.

16일 [十六日]

주공이 성 북쪽의 문루에 앉아 옥에 가둔 난도들을 북을 치며 시장을 돌게


하였다. 그 괴수는 엄중히 곤장을 쳐서 다시 형구를 씌워 가두었고, 그 나머
지 무리들은 조사하여 모두 풀어주니 시장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칭송하지 않
는 이가 없었다.

18일 [十八日]

이때부터 몽둥이질 하는 소리가 날마다 공정公庭을 시끄럽게 하였고, 기찰


譏察하여 난도亂徒를 잡는 군졸이 도로에 이어졌다. 난도가 경내에 들어올 경
우에는 바로 심문을 받았다. 그래서 저들 무리들의 동요가 날로 일어나서 성
전체를 유린하는 모습과 같았다. 관속 중에 혹시 의심을 품고 겁을 먹은 자
들도 여유가 있고 진정이 되었다.

20일 [二十日]
조정에서 선무사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을 파견하여 호서湖西지역을 돌면서 비도
匪徒를 잘 타일러 귀화하게 하였다. 선무사의 행차가 공주에 도착하여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왔다. 바로 순사巡使 박제순朴齊純과 상의하여 임시방편
6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의 정사로 비괴匪魁 최시형崔時衡, 형(衡)은 형(亨)의 오기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있


는 그들의 무리 중에서 뽑아 집강執綱의 직임을 주어 그들 중에 패악을 저지
르는 자를 살피게 하였다. 이에 그 직임을 받은 자는 도리어 그것을 빙자하
여 권력으로 여기고 더욱 교만해져 날뛰었다.

26일 [二十六日]
도사都事 이정우李靖宇가 조만승曺萬承을 압송하는 일 때문에 호남에 갔다가
돌아왔다. 그가 겪은 동비의 소요를 듣자 매우 두려웠다.

30일 [三十日]
주공이 비도가 더욱 창궐한데 대비하는 병사가 너무 적은 것을 걱정하여 내게
병사를 양성하는 방법을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지금 저들을 보면 비록
1,000만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촌동네의 어리석은 백성들이고, 더욱이 그들이
가진 병기는 단지 여러 고을에서 빼앗은 파손된 총과 형편없는 창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훈련시킨 병사 500명을 얻어 예리한 무기를 준다면 반드시
비도를 섬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500명의 정예병을 양성하려면 한 달에 훈련비
용으로 거의 수 만냥의 재물이 들 것인데, 지금 읍의 형편상 어찌 조달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성 아래 민정民丁을 모집하여 날마다 조련하고, 저들에게 들
어가지 않은 포군砲軍을 다시 뽑아 번番을 나누어 출입시켜 병가兵家의 선성先
聲14 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형세를 보아 적을 상대한다면 반드시 이기지 못
할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주공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14 선성(先聲): 먼저 위세를 떨쳐서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것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67

초 6일 [初六日]
선무사가 홍주에 도착하여 경내에 있는 이른바 접주들을 불러 모으고 윤
음綸音을 읽으며 잘 타일렀다. 이때 이름 있는 우두머리를 모두 적을 수 없으
나 가장 유명한 자들은, 홍주의 김영필金永弼 정대철丁大哲 이한규李漢奎 정
원갑鄭元甲 나성뢰羅成 , 덕산의 이춘실李春實, 예산禮山의 박덕칠朴德七15 박
도일朴道一, 대흥大興의 유치교兪致敎, 보령保寧의 이원백李源百, 남포藍浦의 추용성
秋鏞成, 정산定山의 김기창金基昌, 면천沔川의 이창구李昌求이다. 그 가운데 이창구
의 무리가 가장 많아서 50,000 60,000명이라고 하였다. 덕산의 한명보韓明甫
와 한응고韓應古 형제는 매우 완강하여 전후前後에 걸쳐 잘 타일렀지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공이 여러 차례 사람을 이창구에게 보내 한번 함께 볼
것을 요구했는데, 답장은 오만스러웠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초 7일 [初七日]
주공이 이번 소요를 맞아 백성에게 거두는 삼정三政과 같은 일은 관례에
따라 시행할 수가 없어 추등秋等16에서 호포戶布를 줄여주는 것과 반료頒料17에
기민飢民을 구제할 쌀을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하는 일로 선무사에게 논보論報18
하고 각 마을에 전령傳令을 보내 호포세를 경감해 준다는 뜻을 알렸다. 창고
에 있던 돈 1,400여 냥을 내어 긴급한 용도에 대비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기
뻐하였다.

15 박덕칠(朴德七): 충청도 해안지방의 덕의대접주 박인호(朴寅浩)를 말한다. 1892년 광화문상소운


동을 주도하였고, 뒤에 천도교 교주가 되었다.
16 추등(秋等): 봄과 가을 두 번에 나누어 내게 된 제도에서 가을에 내는 세금을 말한다.
17 반료(頒料): 나라에서 달마다 주는 급료를 말한다.
18 논보(論報): 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에 자신의 의견을 붙여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6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8일 [十八日]
주공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비요匪擾가 날로 심해져서 그것을 없앨
방법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보았다. 지금 참문讖文을 만들어
유포하면 저들을 교란시켜 저절로 해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법도에 어긋난 괴이한 행동에 가깝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 계책은 매우 훌륭합니다.
병법兵法 장감선사편將鑑選士篇19에 술사術士 2명과 무당의 속임수로 망령되게
귀신에 의지하여 적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것에 의지하여
실행한다고 해서 어찌 옳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런데 이 계책을 빨리 실행해야 하는데 맡길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나를 위해 이 계책을 실행할 것
이며, 조심하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라 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
곳에서 한다면 은밀하게 하지 못할 것 같으니 구실을 대고 한양에 올라가서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19일 [十九日]
태산泰山이 집안의 편지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어머님이 편치 못한다는 소
식이어서 바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막 떠나려고 할 때에 주공이 참문의 일
을 거듭 부탁하였다. 이에 동문東門 밖에 나가보니 10리의 길에 행렬이 가득
이어졌는데 모두 비도들이었다. 어떤 이는 살찐 큰 말을 타고 제멋대로 달려
서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고, 길을 걷는 자들은 팔을 흔들고 활보하여
곁에 사람이 없는 듯이 매우 날뛰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에 상복喪服을 입고

19 장감선사편(將鑑選士篇): 병서로 무과시험의 한 과목이었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69

큰 노새를 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큰 말을 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


고 짐을 실은 말 1필이 있었는데 돈을 가득 싣고 따르고 있었다. 그가 이창구
라고 하는 자인데 지금 최적崔賊, 최시형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예산
신례원新禮院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점포의 사내놈이 둘러앉아 주문呪文을 암
송하였는데 밤새 그치지 않았다. 그 사내의 아녀자도 어지럽게 암송하면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사악한 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
이 이와 같도다!

20일 [二十日]
일찍 출발하여 신창읍新昌邑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부예府隸, 하인가 한
양에서 내려오다가 이도사李都事, 이정우의 편지를 전하였다. 평택에 이르러 유
숙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동창진東昌津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떠났다. 안시安市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에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의 병세가 그 사이에 이미 회복되어 있어 매
우 다행스러웠다.

23일 [二十三日]
아침 일찍 출발하여 당일 회동에 도착했다. 송영감과 참문을 유포하는 일
을 상의하고 서로 보며 크게 웃었다.
그 참문에 의하면, 청마靑馬는 90에 살기殺氣가 많아 검은 것을 숭상하는
자는 죽는다. 옛날 문생文生은 어떠하였는가? 해가 나오니 지금 그대와 나아
가지 못하고 풀꽃에 떨어진다 라고 하였다.
7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4일 [二十四日]
다시 출발하여 부곡富谷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집에 돌아와서 작은 조각의 나무를 가져다가 도장처럼 만들어 참문을 새
겨 수천 장을 찍어내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2개의 길로 나누었
다. 하나는 직산稷山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호서의 경계까지 가는 것이고, 다
른 하나는 남한강나루를 따라 호서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거쳐서 한산韓山과
서천舒川의 끝까지 가는 길이었다.

29일 [二十九日]
길을 떠나 학현鶴峴에 이르러 이청양李靑陽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30일 [三十日]
한강나루를 건너 이경二更, 밤 9 11시 쯤에 금초의 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9월 초 1일 [九月初一日]
관아에 돌아오니 유포한 참문이 이미 도착하여 경내 가까운 사람들이 모
두 전해 들어 외우고 있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우스운 일에서 나왔으나 그
일을 나중에 살펴보니 우연히 서로 들어맞았으니 기이하다.

초 6일 [初六日]
운현궁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파견하여 글로 동도東徒를 타일렀는데,
홍양기사 洪陽紀事 71

글의 뜻이 간절하였다. 주공이 말하기를, 지금 저들은 모두 여항閭巷에서 배


우지 못한 부류들이다. 한번 지나치듯 들으면 알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그
래서 그 글을 언문諺文으로 풀고 노래를 지어 부녀자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
여 아침저녁으로 외우게 하였다.

초 7일 [初七日]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에, 비류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화량花梁
과 송산까지 이르러서 지금 점점 소란을 피우고 있다 고 하였다. 바로 사람
을 시켜 본관本官에 편지를 보내고 아울러 조정과 순영의 금지를 지시한 관문
과 비괴 최적崔賊의 통문通文20을 가져가게 하였다. 또한 다스려서 이미 효과
를 본 일을 대략 적어서 보냈다.

14일 [十四日]
별유관別諭官 김경제金慶濟가 홍주에 도착하였다. 주공이 별유관을 영접하여
정아正衙21에 앉아 비괴를 불러 포유문布諭文을 읽고 그것을 듣게 하였다. 공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금 포유문을 듣는데, 신분을 어지럽히고
등급을 없애서는 안될 것이다. 양반은 대청에 올라 난간밖에 엎드리고 상놈과
천인賤人은 계단 중간에 엎드려서 듣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저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했으나 불만스런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는 자가 많았다. 포유문을
읽는 것이 끝나자 공이 또한 일일이 성명을 들어 패악한 행동을 적발하여 책망
하기를, 이처럼 따뜻하게 타일렀는데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으면 곧이어 법으

20 통문(通文): 최시형은 자신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연달아 단속령을
내리고 가도인(假道人)을 가려내려고 교리문답을 실시하였다. 10월에 들어서 대동원령을 내렸다.
21 정아(正衙): 수령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곧 동헌을 말한다.
7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로 다스려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소리와 낯빛이 모두 엄중하


여 보고 듣는 자가 공손하게 얼굴빛을 바꾸었다.
이때 본읍의 세미稅米는 여러 해 동안 이포吏逋22가 거의 10,000석을 넘었다.
주공이 부임한 후에 아전이 축낸 곡식을 받아내는데 매우 힘을 써서 거둬들인
쌀이 3,000여 석이나 되었으며, 서남西南쪽의 2개 창고에 쌓아두었다. 이미 배
를 빌려 적재한 것이 2,000석이었고 그 나머지를 계속해서 실으려 할 적에 비
요가 점점 심해져서 적재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아전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지금 바다에도 난당亂黨이 출몰하여 호남의 여러 고을에서는 이미 많은 세미
를 그들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본읍에서 적재한 쌀도 이로 인해 본읍에 정박
하여 체류하며 감히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박하여 풀어서 본
창고에 쌓았다가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리도록 명령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니, 주공도 의심스럽고 두려워서 결정하지 못하고 나에게 계책을 물었
다. 그래서 내가 대답하기를, 제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2,000석
의 이 곡식은 공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모은 것입니다. 지금 이미 내어서 실
었으니 당장 배를 보내는 것이 본래 정당한 도리인데, 어찌 헛된 말에 흔들려
서 다시 정박하여 풀어서 쌓겠습니까? 아전들의 보고는 반드시 믿기가 어렵
고, 그 사이에 다른 일이 생길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다시 배
의 짐을 풀어 육지에 내린다면, 쌀이 줄어들고 또한 포흠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비도가 집결하여 무리를 이루면 어찌 꺼리어서 그것을 취하지 않겠습
니까? 이것을 도적에게 주는 양식[齎盜粮]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바다
에 나가 변고가 있더라도 이것은 하늘의 운수이고 또한 변명할 말이 있어

22 이포(吏逋): 아전의 포흠(逋欠)을 지칭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73

묘당廟堂의 처분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의심하지 마시고 바로 배를 떠나도록


영令을 내리십시오. 그 성패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하니, 주공
이 크게 깨닫고 바로 배를 띄우라고 영을 내렸다.
1척의 배가 순풍順風에 바로 경강京江에 도착하였다. 진성陳省23을 들이는 날
에 탁지당상度支堂上이 크게 감탄을 하여 저울에 재지 않고 다만 곡식의 섬수石
數만을 계산하여 받은 뒤에 자문尺文24을 내어 주었다. 이 때문에 예전에 관례
상 주었던 잡비雜費는 조금도 없어 전에 비해 300여 석의 이득을 보았다. 해
당 아전이 혜택을 받은 것은 고을이 생긴 후에 처음 본다고 하였다. 서창西倉
에 쌓아놓은 나머지 수백석의 쌀은 끝내 비도에게 빼앗겼으니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다.

18일 [十八日]

정부 초기草記에 의하면, 나주羅州 홍주 순창淳昌 안의安義 등의 4개 고


을의 수령은 비류가 창궐하는 때를 맞아 헌신적으로 그들을 막고 토벌하거나
법을 세워 방어하여 경내가 오염을 모면해서 이웃 고을이 의지하여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비류를 섬멸하고 보듬는 방법을 해당 수령에게 위임하니 바로
시행할 일이다 라고 하였다.

22일 [二十二日]
순영巡營, 감영에서 박세강朴世綱과 박동진朴東鎭을 금강錦江에서 목을 베었다. 일
행을 회유하여 이 2명이 비도와 연결된 일이 드러났고 법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23 진성(陳省): 진성장(陳省狀)이다. 지방 관아에서 중앙 관서에 올리는 각종 보고서를 말한다.


24 자문(尺文): 지방 관아에서 조세를 호조에 바치고 받는 영수증을 말한다.
7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3일 [二十三日]
경내에서 이름을 올린 비도 중에는 처음에 억지로 들어갔다가 끝에 진짜
가 되거나 혹은 악에 기대어 나쁜 짓을 즐겨하여 끝까지 강경 완악한 자가
있었다. 조정의 선유宣諭를 거듭 반복하고 영읍營邑의 위무慰撫가 있었으나 세
찬 불길은 끝내 그치게 할 수 없었고 거침없는 물길은 막을 수가 없어 경향京
鄕이 어수선하였다. 장차 일본군을 보내어 그들을 모두 토벌한다는 일종의
소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두려워하였다.
주공이 내게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선비의 기세를 진작하고 비도의 간담
을 무너뜨릴 기회이다 라고 하고, 다시 고을 전체에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지금 사류가 제멋대로 다니는 것은 오직 유도儒道가 쇠약해진 까닭이다. 향
중鄕中의 유자儒者들은 각기 거처하는 마을에 유계儒 를 옛 향약처럼 설치하고
유계에 참여하는 사람은 명망 있는 집안인지를 따지지 말며 사류에 물든
자가 아니면 모두 동참을 허락하여 유자로 대우하라. 또한 혹시 처음에 협박
때문에 할 수없이 사류에 물든 자가 어둠을 버리고 밝은 데로 나와 참여하기
를 바란다면 역시 허락하라. 더욱이 지금 일본군이 가까운 시일에 경내에 들
어오면 반드시 옥석玉石이 함께 불 탈 염려가 있으니 사람들은 각자 유표儒標를
가진 뒤에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그래서 도서圖署를 새로 새겨 찍어내어
나눠 줄 것이니 각자 잘 알아 제때에 만들어 성책成冊하여 바치라 고 하였다.
바로 전 승지前承旨 정헌조鄭憲朝를 홍주의 도회장都會長으로, 전 군수前郡守 이
주승李周承을 부회장으로 삼아 고을 전체에 알리게 하였다. 계 를 만드는 날에 술
과 음식비용을 관에서 보조하니 선비의 기세가 비로소 진작되었다. 경내의 유회儒
會는 하루가 안되어 만들어졌고, 이웃 고을도 그 효과를 본받아 각기 계안 案을

만들어 서로 다투어 바쳤다. 그래서 동그랗게 만든 나무 조각에 유儒라는 글자 1자


를 새겨 두꺼운 종이에 찍고 다시 관인官印을 찍어 사람마다 1장씩 주었으며 옆에
홍양기사 洪陽紀事 75

는 그 사람의 거주지와 성명을 적게 하여 호패號牌처럼 증명으로 삼았다. 큰 길가에


각기 유막儒幕을 세워 교대로 수직하며 모든 행인들을 유표를 지녔는지 검문하였
다. 이 때문에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와서 유표를 받기를 원했다. 속으로는
못된 생각을 품었지만 겉으로는 귀화한 자들도 주위에 부탁하여 받으려고 해서
관문官門은 시장처럼 북적여 밤낮으로 번잡하였다. 그래서 인동印 , 도장 찍는 시동이

팔이 빠지는 데에 이르기도 하였다.


내가 공에게 말하기를, 공이 이런 일을 하는 까닭은 사정邪正을 구별하여
그들을 뿌리 뽑으려고 하는 것인데 지금은 그 진위를 구별할 수 없고 이처럼
뒤섞여서 종이와 먹만을 허비하니 거의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 공
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해가 될 것이 없다. 만약 법도를 어긴 무리들이 그것을
가져가서 목숨을 구하는 방편으로 삼는다면 이것도 점점 교화를 하는 것이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이들은 매우 어리석어 단지 사는 것에 연연해 할
뿐이다. 전에 사류에 오염되었다가 나중에 배반한 것은 목숨을 구하려는 어
리석은 계책이 아닌 것이 없다. 미루어서 용서한다. 참으로 불쌍하기에 내가
심하게 추궁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오면 바로 받아들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갑자기 방성榜聲25이 있어 문이 소란스러웠다. 주공을 지금 막 완백完伯에
특별히 제수除授한다는 명을 받들었다. 호남의 비요가 한창이어서 김개남金介
男은 남원南原을 점거하고 있고, 전봉준은 삼례三禮, 三은 參의 오기26에 주둔하고
있어 갑자기 토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

25 방성(榜聲): 방(榜)을 전하는 사령이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외치는 소리를 말한다.
26 전봉준(全琫準) 삼례(參禮): 전봉준은 9월 말경부터 북상하려 삼례에 근거지를 두고 농민군을 결
집하였다.
7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나 홍주는 호우湖右의 요충지로 겨우 스스로를 보존하고 있어 여러 고을의 사


람들이 장성長城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주목사가 옮겨간다는 소식
을 듣고 부내府內의 이민吏民과 인근 지역에서 온 자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유
임을 바라며 수레를 붙잡아서 밤새 매우 소란스러웠다. 부녀자들은 혹시 잃
어버릴 것을 걱정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이 날 밤에 내가 조용히 주공에게 말하기를, 공이 이 고을에서 여러 달
동안 고생하여 이민들의 마음이 서로 믿을만 하고 싸워서 지킬 장비도 갖추
어졌다고 합니다. 비도가 두려워서 감히 엿볼 수가 없고 궁박한 백성이 믿고
서 기꺼이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호우의 한쪽을 지키는 관건임이 분명
합니다. 공이 지금 완백으로 제수한 명을 받들어 여기를 버리고 간다면 사람들
의 마음은 실망하고 적도賊徒는 때를 얻어 성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곧 올
것입니다. 또한 지금 호남의 형세는 흩어진 백성들을 갑자기 모으기가 어렵
고 미친 듯이 날뛰는 적들을 일거에 토벌하기가 어려워서 그 성패와 운수의
좋고 나쁨은 실제로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호남과 호서는
모두 국가의 땅이나 공에게 있어 공을 이룰 수 있는 득실과 어렵고 쉬운 정
도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국가에서도 싸움에 나간 장수를 바꿔서는 안됩니
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어 양호兩湖를 모두 잃는다면 어찌 매우 잘못된 계
책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에서 호우의 사정을 충분히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공께서 이 중요한 일을 상소하여 신명新命27을 사양한다면
의논하는 사람들은 회피한다고 생각하여 질책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뜻
을 세워 일을 시행하는데 공정함을 지켜야 합니다. 어찌 비난 때문에 가벼이
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매우 그렇다고 여겼다. 상소를 쓰기 전에 먼저

27 신명(新命): 전라감사로 새로 임명된 것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77

사정을 규지揆地, 담당재상에게 아뢰었다.

26일 [二十六日]
홍주 결성結城 보령 대흥 덕산 청양靑陽 예산 면천 등의 8개 고을
대소의 민인民人이 목사의 유임을 청원하는 일로 서로 모의하지 않고 모였다.
한편으로 감영에 호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양에 올라가려고 식량을 가지
고 다투어 나온 자가 700 800명이었다. 진신搢紳, 관리과 장보章甫, 유생들도 별
단別單을 지어 올려 보냈다.
그 별단의 장사狀辭에 의하면,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관리가 나가서 백성
을 다스리는데, 그 지위의 높고 낮음과 관할지역의 크고 작음은 비록 계급의
다름이 있다고 해도 그 재목에 따라 직임을 주고 일을 맡겨 이루도록 독려하
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3년마다 성적을 살피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맡겨 공적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맡겨 더욱 독려하는 것은 이미 검
증되어 결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순선旬宣, 관찰사과 자목子牧,
수령의 직임을 받은 자가 만약에 인애仁愛가 있어 백성들의 마음에 깊게 젖어
들었다면 1년 동안 유임을 바라거나 두 곳이 서로 오기를 다툽니다. 이것이
어찌 실심實心과 실정實政의 결과로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것이고, 여론이 같아서 하지 않아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홍주목사 이공은 주군州郡을 두루 거쳐 이미 법을 지키며
선량하다는 평판이 드러났고, 병법에 박식하여 실제로 유장儒將28의 풍모가
있습니다. 홍주에 부임한 지 겨우 5개월이 되었는데, 모든 조치가 나라를 이
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에서 하나도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28 유장( 將): 문무(文武)를 겸한 것을 말한다.


7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눈앞의 소요를 다스린 효과로 말씀을 드리면, 동요東擾가 극성한 데에도 홀로


폭력을 금하고 난리를 그치게 하는 정치를 시행하였습니다. 우러러 임금의
지극한 뜻을 알고 태공太公, 흥선대원군의 효유曉諭를 받들어 펴서 소문이 이르는
곳마다 이웃 군의 비류도 제법 두렵고 위축되어 감동하여 떠받들어 귀순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난도의 협박 때문에 거처를 잃고 떠도는 자가 소문을
듣고 귀화하여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인화人和를 깊이 얻어 사람들
의 마음이 성을 이룬 것처럼 단단하다고 할 만합니다. 군자는 그를 믿어 두
려움이 없고, 소민小民은 그를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를 신명神明처럼 존경
하고 부모처럼 사랑하여 덕화德化가 널리 퍼지고 태평성대를 회복하는 것을
오랫동안 서서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때에 정부의 의안議案중에, 여러 고을에서 비도를 토벌하고 보듬는
방법을 해당 수령에게 위임하니 바로 시행하라 는 계청啓請29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우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서 서로 말하며 이마에 손을 얹고 임금의
윤허가 내리기를 고대하였습니다. 뜻밖에 오늘 호남의 순선旬宣으로 특별히
제수한다는 저보邸報, 조보가 있어 일제히 온 경내가 솥에 물이 끓는 것처럼 황
급하게 달려와서 소리를 지르며 통곡하였습니다. 단지 젖먹이가 먹을 것을
잃고 외로운 배에 밧줄이 없는 것으로 비유하겠습니까? 이공이 고을을 떠나
는 날은 바로 호우가 무너지는 때입니다. 저와 같이 흉악한 비도를 누가 막
겠습니까? 불쌍하고 이 궁박한 백성을 누가 보호하겠습니까? 조정에서 일개
읍邑과 일개 성省을 보는데, 크고 작은 구별은 있지만 모두 같은 백성으로 보
아 그들을 구제하는 은혜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일개 고을의 민심으로 말
해서는 아니 됩니다.

29 계청(啓請): 주청(奏請)이라고도 하며,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던 일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79

만약 정부의 의계議啓30처럼 비도를 토벌하고 보듬는 것을 관할하는 직임


을 준다면 호서 전체가 거기에 의지하여 온전할 것이고, 조정에서는 실제로
직임을 주어 그것을 이루도록 독려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호서의 백성
들은 임금의 은혜를 펴고 인정仁政을 베푸는 은택을 입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초야草野의 못난 백성인데, 어찌 함께 조정 관리의 인사에 논의를 하겠습니
까? 그러나 아프고 가렵다고 말하며 부모에게 호소하고 꾸지람을 피하지 않
는 것이 사람의 일상적인 마음입니다. 지극한 마음에 쫓겨서 국법의 엄중함
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큰 소리로 권세를
쥔 총규總揆, 영의정께 호소합니다. 이 10,000명의 여론을 전하께 상주하여 이
공에게 홍주목사의 직임을 다시 주어 죽어가는 우리 만백성의 목숨을 구해주
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에 비도가 사방에서 일어나 현저하게 군사를 일으킬 조짐이 있어 동
요가 날로 더하여 진정되지가 않았다. 광천廣川의 시장 장사꾼 정원갑은 바로
이창구의 심복으로 극악하고 매우 패악한 자였다. 갈산葛山의 촌사람 이한규
는 바로 참판 김학근金鶴根의 집에서 낳고 자란 놈인데 앞장서서 패악한 짓을
저지르고 주인집을 능욕한 자였다. 먼저 잡아가두고 감영에 보고한 자인데,
지금 유언비어가 퍼지는 때에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먼저 2명
의 흉악한 놈을 때려 죽여서 적을 반드시 토벌한다는 뜻을 내보였다.

10월 초 1일 [十月初一日]
경영京營의 군사31와 일본군을 합한 200명이 예산에서 홍주에 도착하여 하

30 의계(議啓): 임금이 명령한 일을 신하들이 의논하여 상주(上奏)하는 것을 말한다.


31 경영(京營)의 군사: 장위영의 부영관 이두황(李斗璜)이 이끄는 군사를 말한다. 죽산부사 이두황은
장위영군사를 이끌고 보은과 세성산을 거쳐 예산 등지의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8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루를 묵고 떠나갔다.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서 별다른 일이 없자 민심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저들은 더욱 거리낌이 없이 관장官長을 몰아내고 군기를 빼앗
았다. 관망하던 어리석은 백성들이 많이 그들에게 붙어 적들이 나날이 늘어
나서 매우 위험하고 두려웠다. 나는 본래 병으로 누워있어 세상 생각이 없었
으나 주공에게 나를 알아주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공의 뒤를 따라
온 지가 이미 반년이 넘었다. 마침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나 적이 조만간에 성
에 다다를 기미가 있었다. 주공이 등에 땀을 흘리며 맹세하여 이미 성과 생
사를 함께 하겠다고 했으니 그를 보좌하는 자도 당연히 처음과 끝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연로한 어머니를 생각하니 의리상 그 몸을 사사롭게 하여
남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가 없어 마음이 저절로 산란해졌다.
지금 그만두고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승선 김복한金福漢32에게 말을
하였더니 복한이 말하기를, 그대의 형편이 그렇지만 지금 전쟁의 조짐이 있
는데, 그대가 갑자기 떠나가면 주공은 외롭고 위태로워지고, 주공이 위태로
워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질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지면 이 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이 성을 지키지 못하면 호우는 무너질 것이다. 어찌 그
대가 떠나갈 때인가? 그대가 부모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이미 선유先儒의 정
론定論이 있는데, 백정자伯程子 두 사람이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은 교훈이 그것
이다. 지금 그대의 거취는 크게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난류를 토벌하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니 어찌 단지 맨손으로 호랑
이를 잡는 것에 비유할 뿐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32 김복한(金福漢): 홍주출신의 양반유생으로 뒤에 의병장이 되었으며 유림중심의 파리장서사건에도


앞장 섰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81

2일 [初二日]
주공이 상소를 써서 보냈다. 그 상소에 의하면, 삼가 생각건대, 신이 홍양
洪陽, 홍주의 별칭에 부임한지 반년이 되었으나 본래 거칠고 조잡한 성품으로 매
우 어려운 때를 만나 분골쇄신粉骨碎身하였으나 아직 티끌만큼의 효과도 없어
성은을 저버려서 임금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뜻밖에도
신을 전라 감사로 제수한다는 명이 멀리서 내려왔습니다. 신이 그 명을 듣고
처음에는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것 같아 정신이 없어서 바로 땅을 파고 들어
가 인간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번병藩屛33의 직임은 어느 곳이나 중요하지 않겠으며 순선旬宣의 재목은
어느 때나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호남의 땅은 본래 중요합
니다. 근래의 변고는 평상시와 다릅니다. 비록 기주冀州를 다스린 범려范 와
촉蜀을 다스린 장량張良이라도 손을 대기가 쉽지 않은데, 어찌 신처럼 용렬한
자가 하루라도 외람되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혹시 영록榮祿, 관직과 봉록
을 탐하여 그 자질을 헤아리지 않고, 분의分義에 구애되어 그 사사로움을 따
지지 않으면서 부임하는데만 힘써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면 신이 지은 죄는
용서받기에 부족할 것이고 나랏일의 낭패스러움은 어떠하겠습니까?
아! 비록 어리석고 천하지만 외람되게 은황銀黃34의 끝에 참여하여 대대로
관리가 되어 임금의 은혜가 골수를 적시고 고마움이 심장과 간에 맺혀 있습
니다. 나랏 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은 스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지금 나라에 일이 있는 때를 만나 오히려 몸을
들어 의를 떨쳐 목숨을 바치지 못했으니 이것은 신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33 번병(藩屛): 감사와 병사를 일컫는 말이다.


34 은황(銀黃): 은인(銀印)과 황수(黃綏)로 지위가 높은 관리를 의미한다.
8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죄입니다. 더욱이 어찌 차마 어려움에 처하여 회피하고 속으로 자신을 온전


히 할 계책을 생각하며 관례에 따라 사양을 꾸미어 명성을 도모할 방법을
도모해서 거듭 스스로 불충하고 불효한 죄에 빠지겠습니까? 해와 같이 위에
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구구한 마음을 하늘과 땅 같고 부모 같은 임금 앞에 한번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어 감히 임금께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를 덧붙여 참월僭越의
혐의를 피하지 않고 만번의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임금께서 굽어 살펴
주시기를 엎드려 간청합니다.
근래에 동도의 소요는 양호兩湖에서 가장 심합니다. 호남은 맨 먼저 난리가
일어난 땅으로 지금까지 평정되지 않아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호서는 지
난 봄 보은報恩에서 해산된 뒤에 소굴이 점점 늘어나고 더욱 퍼져 올해의 변고
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호남에 비교할 수가 없어 마치 거대한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사나운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동한東漢때의 황건적黃巾
賊과 명明나라 때의 유적流賊에다가 그 위험을 비유하기에 부족합니다. 아! 차
마 말을 하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동학의 명칭은 그 유래가 오래되지 않아 처음에는 이
단이나 미혹할 만한 설이 아니었고 잡술雜術이나 남을 속일만한 방법이 없었으
며, 단지 근거 없는 사설邪說이나 은밀히 선동하여 패거리를 모아 적을 만드는
계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일찍 뿌리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렸다면 설
령 창궐하더라도 어찌 오늘날처럼 심한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아! 임금의 은택이 막혀 아래에서 구할 수가 없고 법망은 성글어서 거리
끼는 것이 없습니다. 신은 참으로 어리석으나 일찍이 이것을 개탄하고 있었
습니다. 그리고 명을 받들어 홍주에 오니 바로 소요가 시작되어 어지러운
때여서 그것을 수습할 방도를 생각하였습니다. 왕령王靈에 의지하여 법으로
홍양기사 洪陽紀事 83

다스리고 단지 임금의 말씀을 펴서 은혜로 보듬었으며 본분을 어기고 기강


을 범한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교화되어 돌아온 자는 이어서 권장을
하였습니다. 실정實政을 시행하는데 힘쓰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태하지 않
으며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지략智略이 얕고 모자라기 때문에 위엄이
크게 행해지지 않아 약간 오래되었으나 아직 효과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
래서 신이 이 고을에서 감히 직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달 사이에 아전들의 얼굴을 익히고 백성들의 마음을 알아 다방면에 조치를
시행하였으나 그 유종의 미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신이 이 고을에
연연해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차마 그만두고 가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신의 분수로 말한다면 한산한 곳에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목州牧의
직임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중임에 있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어찌 감
히 스스로 옛날 군자가 대를 버리고 소를 취한 의기義氣와 존엄을 사양하고 비
천한 데에 거처한 풍모를 모방하여 참월한 상소를 해서 위로는 아버지와 같은
임금을 기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속여 불의不義에 돌아가겠습니까? 삼가 바라
건대, 임금께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과 더할 수 없는 뛰어난 지혜로 신의
뜻에 다른 것이 없음을 살피시고 신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신에게서 완백의 직함을 거두시고 다시 홍주목사의 직임을 주어 나라
의 체통을 높이고 신의 분수를 편안히 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라고 하였다.

초 3일 [初三日]
각처의 동도가 최괴崔魁, 최시형의 지휘라고 하며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
고 곳곳마다 지렁이처럼 이어졌다. 서산수령 박정기朴錠基 태안부사 泰安府

使 신백희申百熙 별유관別諭官 김경제가 모두 그 피해를 당했다. 해미 예


산 덕산 등의 고을에서는 군기를 모두 빼앗겼다. 해미성 덕산 대천 예
8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산 목시木市 등지에서 진세陣勢를 이루어 그 무리를 나누어 보내 노점을 지켰


다가 행인을 잡아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 데려갔다. 경장京庄35에서 가을에 추
수한 곡식을 실은 배가 미처 떠나지 못한 것을 모두 빼앗아 쌓아두었는데
마치 산과 같았다. 소 말 종이 무명이 그 안에 가득하였다.
장차 홍주성을 침범할 것이라고 드러내어 말을 하였다. 주공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하룻길 정도 되는 곳에 주둔하고 있어 예기치 못할 근심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성을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이에 장리將吏를 불러 모아 각
기 방략方略을 주고 관병官兵을 모집하여 5개의 진영으로 나누었다. 남영관南領
官에 김명헌金明憲을, 동영관東領官에 이창욱李昌旭을, 중령관中領官에 이능연李能淵
을, 서령관西領官에 한상익韓相翼을, 북령관北領官에 김주현金周炫을, 군기감관軍器
監官에 김관성金觀成을 정하였다. 중군中軍 김병돈이 군무를 모두 감독하였고,
양향수향糧餉首鄕 이규태李奎泰가 말먹이용 풀과 땔나무 및 횃불 등을 주관하였
다. 오위장五衛將 장영식張永植은 영내營內에서 조달할 각종 물건을 담당하였다.
기관記官 이창억李昌檍으로 하여금 경향京鄕 각 관아와 인근 고을의 모든 문첩文
牒을 관할하게 하였고 최학연崔學淵 이기용李琦鎔 김굉현金宏炫 등으로 하여금
각각 전담하게 하였다. 이석범李錫範 김동현金東鉉 김석교金錫敎를 군중에서
뽑아 군관의 직임을 맡기었다. 부상負商 중에서 재빠르고 재치가 있는 4 5명
을 뽑아 여러 곳에 보내어 그들의 동정을 정찰하였다. 유회와 농보군農堡軍36
이 연이어 성원하여 마을의 장정들을 모집해서 번番을 나누어 출입하였다.
성안에 늘 지키는 병사들이 700여 명이 되었다.

35 경장(京庄): 한양에 사는 사람이 시골에 가지고 있는 농장을 말한다.


36 농보군(農堡軍): 농보는 도둑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논밭 주위에 설치한 보루를 말하는데 민
보군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85

이에 각 진陣에 군제軍制를 게시하여 말하기를, “임관任官과 자목字牧 약사略


事, 군사지휘와 도필刀筆37 등은 일찍이 군대의 일을 강구해 본 적이 없어서 갑자
기 이런 때를 만나 하는 일마다 생소하다. 다만 생각해보니, 세상의 모든 일
이 의로써 일을 다스리고 믿음으로써 영令을 시행하며 형세에 따라 대응하여
기습과 정면공격을 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기율이 있는 후에야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군제를 만들었다. 이에 고시告示하니 모두 잘 알아
서 군율을 어기지 말라.
一. 지금 병사를 뽑는 것은 호적에 따라 장정壯丁을 선발한 것이 아니고 바
로 의병을 모아 비도를 토벌하려는 거사이다. 혹시라도 명분을 어지럽
히거나 어기지 말라.
一. 5부五部는 각기 영관領官을, 초哨마다 초장哨長을, 군대마다 대장隊長을 두
어 각자 단속하라.
一. 대열을 지어 서고, 군대마다 서로 마주보라. 제멋대로 대열을 떠나서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웃지 말며 공연히 손가락
으로 가리키면서 돌아보지 말라.
一. 군무의 크고 작거나를 막론하고 한걸음이라도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것은 장수의 명령을 준거로 삼아 영기令旗를 가지고 시행하라. 말로 분
부할 때는 절대로 듣지 말라.
一. 각 군대마다 군대이 인정한 깃발에 따라 대오를 이루고 바꿔 섞이게
하지 말라.
一. 추운 밤의 파수把守는 번番을 나눠 휴식하고 군대마다 차례대로 번갈아
바꾸고, 혹시라도 뒤섞여 편리한대로 골라서 하지 말라.

37 도필(刀筆): 하급 관리인이 아전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8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식사할 때는 북을 치고 식사가 끝나면 징을 울려라. 나가고 멈추는 데


일정하게 하라.
一. 각 진陣내의 순군巡軍은 번을 나눠 교대로 돌다가 행동이 수상하거나 얼
굴이 생소한 자가 있으면 특별히 뒤를 밟아 은밀히 내력來歷을 탐문하라.
一. 야경夜警을 돌 때에 불조심을 가장 신중히 하라. 만약 혹시라도 조심하
지 않아 잘못된다면 먼저 영관領官부터 군율을 시행하라.
一. 어느 방향에서 오는 도둑이 있으면, 각기 그 문의 영관은 정찰병이
보고한 것을 은밀히 중군에게 보고하고 지휘를 받으며 혹시라도 먼저
징을 쳐서 소동을 피우지 말라.
一. 군대의 대열을 제멋대로 이탈한 자는 영관이 곤장을 쳐서 다스리고 그
대장은 나중에 중군에게 보고하라.
一. 영관은 군오軍伍중에서 가장 건실하고 용력勇力이 있는 자를 살펴보았다
가 따로 적어 중군에 보고하라. 중군은 그것을 받아 기록하였다가 격
려하라.
一. 읍촌에서 참전參戰을 자원하여 1개의 군대를 감당할 만한 자는 특별히
거두어 쓰라.
一. 허다한 군제軍制는 갑자기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군대를 정비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힘을 모으는 것을 먼저 하라.

명령이 이미 갖추어지자, 주공이 직접 돌아보며 위로하였다. 날마다 2차례


씩 하였는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도 그만두지 않았다. 5일마다 1번씩 소
를 잡고 술을 걸러 병사들을 대접하였고 반드시 직접 와서 함께 앉아 먹었다.
장리將吏가 들어와 보고하기를, 지금 성을 지키는데는 먼저 양식을 쌓아놓
아야 합니다. 형편상 고을의 요민饒民들에게 돈과 곡식을 분배해야 조달할 수
홍양기사 洪陽紀事 87

있습니다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불쌍하게도 저 촌민은 비도에게 곤경


을 당하고 거의 모두 빼앗겼는데, 지금 다시 관에서 거둔다면 어찌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나는 차마 이것을 할 수가 없다. 읍내에 있는 사람들의 곡식
은 가져올 수 없고 저들에게 가져오는 것은 내가 시가時價로 살 것이다. 반드
시 이런 뜻을 먼저 곡식 주인에게 알리고 섬수를 계산하여 조사하라. 아울러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과 함께 군수비용에 쓸 것이다. 또한 가까운 고을
의 면에서 올해 세미는 결민結民을 지휘하여 능력에 따라 바치게 하되 또한
독촉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 고을의 백성들이 이 말을 다투어 암송하고 자원하여 군향미軍餉米를 돕
는 자를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원하여 바친 군수
중에서 쌀은 176석 13두이고, 조租는 575석이며 돈은 5,700냥이고 소는 15마
리였다. 그 밖에 술과 떡을 수레에 싣고 날마다 왔다. 그래서 모인 곡식을
창고에 쌓지 못하고 아울러 관아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곡식과 함께 내다
가 밖에 쌓았는데 성위로 높이 나오게 하여 비축이 많은 것처럼 드러내었다.
이때부터 각 영營의 문첩이 계속 오고 가서 많이 지체되었다.

초 6일 [初六日]
비도가 결성結城에 들어가 그 인부印符와 군기를 빼앗았다. 결성 현감은 밤
에 달아나서 겨우 몸을 피하였다.

초 7일 [初七日]
금군禁軍38이 주공을 완백으로 임명하는 교유서敎諭書를 가지고 내려와서 동

38 금군(禁軍): 궁궐을 지키고 임금이 거동할 때 호위와 경비를 맡아보던 군사를 말한다.
8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문東門에 도착했는데, 군민軍民이 막아 들어오지 못하였다. 주공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렵고 당황하여 군민을 타일렀다. 성 밖에 나가 맞이하고 빈관 官에

이르러 공손하게 교유서를 받았다. 이때에 완영完營의 문사問使도 왔는데, 순


군巡軍에게 막혀서 오랜 뒤에 들어왔다.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주공을 잃을
것을 걱정하여 서로 통보해서 남쪽으로 완영으로 가는 길을 지켜 신연新延을
막고 북쪽으로 한양을 가는 역참驛站을 저지하여 새로 부임하는 수령을 막았
다. 공이 매우 두렵고 근심이 되어 여러 가지로 영을 내려 타일렀으나 그치
게 할 수 없었다.
이때에 남원의 선비들이 공이 도백道伯, 전라감사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
지 몇 명과 함께 낮에 숨고 밤에 걸어서 간신히 도착하여 공을 뵙고 감영에
도착할 기한期限을 물었는데, 의병을 모집하여 중도에서 공을 영접하려는 것이
었다. 또한 경영京營에서 지금 병정 200명을 파견하였는데, 길을 인도하여 감
영에 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공이 내게 묻기를,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간다
면 의병과 경병京兵이 위험을 막고 길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이 되겠는
가? 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저 호남의 비도는 본래
견딜 수 없는 약탈에서 연유하여 점점 서로 부추겨서 난을 일으키는 데에 이
르게 한 자들입니다. 마음속으로 빼앗을 것을 생각하여도 반역이고, 빼앗지
않아도 반역의 뜻입니다. 협박에 따른 무리들은 오히려 모두 제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자리를 둘둘
말듯이 빠르게 북쪽으로 가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을 모아 경내에 주둔하여
관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공이 1대의 수레로 가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
이고 은혜와 믿음으로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을 더한다면 저들도 바로 동천銅川에
서 말을 돌려준 부류와 마찬가지인데,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을
진압하려고 군대의 위엄으로 크게 토벌을 한다면 그 성패는 알 수가 없습니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89

지금 믿고 쓸 만한 것은 바로 의병과 경병입니다. 그러나 의병은 모두 맨손에


몽둥이를 가지고 있어 저 화포와 창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경병은 본래 내
가 훈련시킨 자들이 아니고 성격이 거칠고 강해서 다스리기 어려우며 반드시
군율을 많이 어길 것입니다. 엄중히 단속하려고 하면 쉽게 원망을 하고, 관용
으로 보듬으려고 하면 그들의 약탈을 막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 그들을 쓰겠습
니까? 1대의 수레로 먼저 가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제가 뒤를 따라 약간의
도움을 드리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니, 공이 그렇게 생각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정탐하던 병사가 와서 보고하기를, 비도 수 백명이 지난 밤에 수영水營에
들어와서 군기를 모두 탈취하여 배에 싣고 갔는데, 그 행보를 헤아려보면 오
후에 옹암瓮巖과 광천땅에 도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관군官軍 중에
서 정예병 260여 명을 뽑아 김동현 김석교 이석범 등이 이끌게 하고 군대
를 출전시키라고 급히 영令을 내렸다. 관군이 적에게 나가 싸우는 것이 오늘
시작되었는데, 공이 칼을 뽑아 단상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했는데 의기意氣가
복받쳐서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은혜에 감동하고 군율을 두려워하였다. 기세
좋게 뛰어올라 앞으로 가서 홍주와의 거리가 30리 되는 광천시장에서 적을
만났다. 적이 먼저 산위에 자리를 잡아 지형의 이로움을 얻고 있었고, 우리
군대는 산 아래에 있어 공격하기가 어려워서 주저하며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석범이 칼을 뽑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언덕을 뛰어올라가니 뒤에 있던
군대가 한꺼번에 산에 올라갔다. 화포소리가 나는 곳에 맞아 쓰러진 적들이
수십 명이었고, 적들이 일시에 놀라서 흩어졌다. 관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9
명의 적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군기를 모두 거두어서 돌아왔다. 대포가 40여
문門이고 화약이 수천 근이었으며 그 밖에 갑주甲 활 화살 화전火箭 납
9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촉蠟燭 등의 물건은 한달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갖추어 성을 지키는데, 기계가 많
지 않고 훌륭하지 않아 늘 걱정이었다. 지금 한번에 크게 이겨서 정예한 무
기를 많이 얻었으니 어찌 쥐와 개처럼 작고 추악한 비도를 걱정하겠는가 라
고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춤추고 사기는 갑절이나 되었다.

초 9일 [初九日]
매성梅城의 농보군이 광천에서 패하여 흩어진 적을 추격하여 그들의 돈
500냥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돈 중에서 200냥을 농보군의 군사들을
먹이는 비용으로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의정부議政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 홍주목사 이승우를 완백으로 옮기
도록 명을 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이 홍주는 호서의 요충지에
있는데 해당 수령이 미리 방비를 해서 비류가 감히 경내를 침범하지 못하여
인근의 7 8개 고을이 의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기신耆紳과 사민士民
들이 계속하여 그의 유임을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진실로 싸움터에 나간 장
수를 바꾼다는 탄식이 있으니 전 홍주목사를 특별히 유임시켜 주십시오 라
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근래에 길이 막혀 집에서 오는 편지가 오랫동안 끊겼다. 홍양이 함락되고
나도 해를 입었다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남쪽 고향에 퍼져나갔다. 사중舍仲, 작
은 형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바로 내려오다가 중도에 목시의 적들에게 잡
혀 뜻하지 않게 결박되어 구타를 당했다. 하룻밤의 곤욕를 치르다가 거짓말
을 하여 탈출을 해서 이 날에 도착을 하였다. 그래서 내가 적의 형편을 물어
홍양기사 洪陽紀事 91

보고 제법 상세하게 알아 그들의 허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공이 늘 이 적


을 쳐부수려고 했으나 정찰을 하지 못하여 근심을 하고 있었고, 주공을 보좌
하는 나도 그들의 위세가 대단한지를 의심하였다. 이 때문에 어려워 한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작은 형의 말을 듣고 비로소 저들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주공에게 날을 정해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고, 다시 중군을 불러 적의 형편
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11일 [十一日]
새벽에 각 진陣에서 건장하고 용감한 군사 500명을 뽑아 밥을 먹이고 장비
를 갖추어 중군 김병돈이 인솔해 가서 목시의 적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
날 새벽에 짙은 안개가 들에 가득하여 지척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관군이 목
시에 도착하니 적들이 모두 영루營壘를 비우고 민가에 들어가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관군은 혹시 계략이 있을 것을 의심하여 나가지 못하고, 먼저 큰소리
를 지르고 화포를 쏘아 위세를 드러내었다. 적들이 갑자기 화포소리를 듣고
조수가 빠지는 것처럼 흩어져서 포구를 따라 도망을 쳤다. 관군도 추격을 할
수가 없어 그 군기와 말 등을 거두어서 돌아왔다.

12일 [十二日]
목시에 출전한 군사들 중에 민가에서 옷을 빼앗아 가져온 자가 많았다. 중
군 김병돈이 그 옷들을 모두 거두어서 바치고 죄를 청하며 말하기를, 장수
가 되어 군사들을 단속하지 못하여 군율을 어겼으니 소인의 목을 베어 군사
들을 권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새로 모집
한 병사들을 모두 통솔하지 못하였다. 지금 은혜와 믿음이 부합되지 못하고
위엄 있는 명령이 세워지지 않아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의 잘못
9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이다. 그러나 군율을 어긴 자에게 경계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북문北門에서 개좌開坐39하여 중군을 곤장으로 다스리고 장수와 병사들
을 타일렀다. 그리고 노략질한 옷을 모두 가져다가 네거리에서 불태웠다.

13일 [十三日]
매성보梅成堡에서 바친 대포 5문門은 바로 수영에서 비도에게 잃어버려 옹
암에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보령현保寧縣의 아전과 향임鄕任이 향정鄕丁 900여
명을 모아 방비할 계책을 세우고 보령현의 비괴 5놈을 잡아왔다. 이보다 앞
서 보령의 아전과 향임이 그 군기를 몰래 비괴 이원백의 처소에 옮겨 놓았는
데, 이원백이 와서 그것을 바치고 자수하며 말하기를, 본현의 군기를 다른
적에게 빼앗길 것이 걱정되어 감히 가져와서 홍주에 바치기를 원합니다 라
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아전과 향임이 다시 와서 아뢰기를, 이원백에게 있
던 군기를 다시 가져가서 그것을 가지고 지키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한가지 일을 보면 이원백이 자신의 악행을 덮으려고 이향吏鄕들과 제멋대로
군기를 주고받은 사실이 휜하게 드러나서 가릴 수가 없었다. 진실로 그 죄를
논하여 바로잡아야 하지만 공은 일부러 관대하게 용서하여 불안해하는 자들
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조정에서 주공을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40로 삼았는데,
병인丙寅, 1866년에 연안부사延安府使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10월 8일에 정부
가 임금에게 아뢰어 저보邸報가 이 날 홍주에 내려왔다. 군민이 모두 뛰고 손
바닥을 치며 기뻐했고 사기는 갑절이나 되었다.

39 개좌(開坐): 관원이 모여 일을 보는 것을 말한다.


40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충청도 해안지방의 농민군을 토벌하는 총사령관격으로, 당시 홍주에 호
연초토영을 설치하고 동시에 나주에 호남초토영을 설치하였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93

14일 [十四日]
초토사가 북문에 개좌하여 광천에서 잡은 포로와 각처에서 기찰하여 붙잡
아서 가둔 28명을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나누어 처리하였다. 죄가 무거운 4명
은 바로 목을 베어 경계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일단 비도를 다스
린 뒤에 감옥에 가둔 자에게 아침밥과 저녁밥을 주었고 풀어준 자에게는 양
식과 돈을 주었다.

15일 [十五日]
진영鎭營에 전령을 보내 처단하지 않고 옥에 가둔 비괴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 경계하라고 하였다.

16일 [十六日]
비도 수 천명이 합남合南41땅에 주둔하여 그 기세가 대단해서 관군을 보내
어 토벌하였다.

17일 [十七日]
관군이 덕산과 대천의 시장에 이르러 적도가 숨겨둔 군기를 찾아내어 모
두 가지고 돌아왔다.

18일 [十八日]
작은 형님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41 합남(合南): 합덕(合德)의 남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9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9일 [十九日]
순영巡營, 감영에서 나누어 준 1,000냥을 광천싸움에 나간 장수와 병사들에
게 등급에 따라 나누어주었고, 다시 관아의 돈 400냥을 내어 목시 전투에 참
여한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덕산에서 연이어 급보가 와서 바로
200명을 징발하여 합남과 원평院坪 등지를 순찰하였다. 예산현에서 비괴 유치
교를 잡아왔다.

20일 [二十日]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장수와 병사들이 싸움에 나갔다. 연이어 파발擺撥
이 왔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관군이 덕산 대천 면천 남산南山에서 2곳
의 적들 사이에 있어 형세가 고립되고 힘이 모자라서 상대하기가 어렵다 라고
하여 300명을 다시 뽑아 보냈다. 신시申時, 오후 3 5시에 합덕合德에서 첩보捷報가
왔는데 다시 화약을 요청하여 1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운송하게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관군이 합덕에서 진陣으로 돌아왔다. 비도 중에 총에 맞아 죽은 자는 헤아
릴 수가 없었고, 사로잡은 자는 60여 명이었다. 그들을 5개 진영에 나눠 배속
하여 일을 시키고 밥을 먹게 하였다.

22일 [二十二日]
이보다 앞서 이창구를 사로잡을 일로 중군과 은밀히 모의하여 말하기를,
이 놈은 의지가 매우 세고 굽히지 않아 힘으로는 사로잡기가 어렵고 지혜로
잡을 수 있다 라고 하고, 바로 김석교를 보내어 그가 새로 얻은 애첩을 잡아
다가 성안의 외지고 조용한 곳에 두고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중히 금하며
홍양기사 洪陽紀事 95

그 음식대접을 넉넉히 하였다. 사사로이 오고 가는 편지를 모르는 척하고 막


지를 않았다. 그 때에 이적李賊, 이창구의 일을 와서 얘기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나는 이李, 이창구가 쓸만한 인재라고 생각하나 그가 고집스럽
고 미혹하여 깨닫지를 못하고 있어 애석하다. 지금 마음을 돌려 귀화한다면
내가 조정에 천거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아 비류를 토벌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을 세워 죄를 갚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뜻을 전하여 그를 깨우치
게 할 수 없어서 한스럽다 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적李賊이 면천 숭악崇嶽의 농보農堡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와서 간절하게 귀화를 원하고 자신의 첩을 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초토
사가 기뻐서 허락하여 말하기를, 지금 군사를 풀고 산을 내려오면 바로 네
가 요청한대로 해 주겠다 라고 하니, 이적이 약간의 군기를 풀어 신천의 도
회소都會所에 보내고 사람을 시켜 동학을 버리고 귀순한다는 글을 바쳤다. 공
이 넉넉하게 답장을 써서 장려하고 어느 날에 그의 첩을 어느 곳에 보내겠다
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김창기金昶基 이근영李瑾永으로 하여금 그의 심복인 강
종화姜鍾和 편중삼片仲三 김영배金永培 등 3명을 회유하여 말하기를, 이적을
사로 잡는 날에 너희들은 공범의 형률을 피하기가 어렵다. 지금 이창구가 거
짓으로 배도背道한다고 하며 자신의 첩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나 초토사가 그
것을 허락한다는 뜻도 알기가 어렵다. 너희들이 만약 이 기회에 이적을 사로
잡아서 바치고 자수한다면 우리들은 너희를 위해 알선하여 분명하게 보호를
받게 하겠다 라고 하였다. 또한 김영배의 사촌동생인 명배命培가 이어서 권면
하니, 3명강종화 편중삼 김영배이 말하기를, 초토사가 과연 우리들을 받아들이
겠는가? 라고 하였다.
김창기가 말하기를, 이것은 어렵지가 않다. 내가 너희를 위해 먼저 초토사의
맹세를 받아 주겠다 라고 하고, 김명배와 함께 들어가서 주공에게 말을 하여
9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속죄를 허락하는 글을 명배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였다. 또한 이적에게 말을


전하기를, 3일내에 너의 첩을 보내겠다 라고 하였다. 김창기가 그 첩을 데
리고 가니 이적이 정말로 그 날에 산을 내려왔다. 이근영 등이 밤에 그의 방
에 들어가 이적을 결박하고 촌민들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압송하여 왔다. 도
착하자마자 바로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덕산과 면천에 사는 수천명의 촌민
들이 한꺼번에 와서 오히려 이적을 가볍게 처리할 것을 걱정하며 서로 앞을
다투어 말하기를, 이적을 참수斬首하는 것을 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
라고 하고, 눈雪을 무릅쓰고 노숙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그 날에 형벌을 시행
하였다. 광천에서의 싸움 이후에 3번 싸워 이긴 일과 적괴賊魁, 이창구의 목을
베어 경계한 일을 일일이 들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23일 [二十三日]

적의 위협이 날로 급박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해미 여미餘美 홍주 원


평 등지에 지금 주둔하여 10만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석권하고 있다고 말하
였다. 마을을 만나면 불을 지르고 사람을 보면 화포를 쏘아서 그 위세가 대
단하였다. 그래서 바로 장좌將佐를 불러 군대를 보낼 방책을 의논하였는데,
모두 지세地勢가 험준하여 가볍게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중군을 시켜 해미성에 있는 적의 형세를
탐문하여 이것을 통하여 군대를 전진시키려고 하였다. 마침 경군京軍과 일본
군이 내려온다는 보고가 있어 급히 탐리探吏를 예산에 보냈는데, 그 회보回報
에 의하면, 경군 50명과 일본군 100여 명이 밤에 예산의 신례원에서 묵고
덕산과 대천을 경유하여 바로 면천으로 향했다 라고 하였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97

24일 [二十四日]
저녁이 지나서 덕산에서 당보塘報42가 왔는데, 그 당보에 의하면,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道洞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번 싸워 이기
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병京兵 1명이 면
천에서 도망쳐 돌아왔다고 하며 그가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경병과 일본군
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
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라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새벽쯤에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에서 포위를 뚫고 밤새 달려서 홍주에 도착
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피해가 없었다. 장위영壯衛營 별군관別軍官 김홍수金弘秀
는 고향 사람으로 통위영統衛營교장敎長 황수옥黃水玉과 함께 경군을 이끌고 왔
다. 일본군의 보병步兵은 교위校尉 아카마츠赤松國封와 통역관 이이다飯田가 군사
를 인솔해 왔다. 바로 공해公 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고 일을 의논하였다. 그
때에 면천의 고명高名한 선비인 서상리徐相理가 난리를 피하여 성에 들어와서
만나 보기를 청하고 적의 형세의 허실을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여미와
원평으로 행군行軍하는 길과 산과 계곡의 험준하고 완만함을 그려서 바쳤다.
장좌를 불러 의논하기를, 지금 적이 여미에 주둔하여 군사를 풀어 약탈을
하니 긴급히 공격하여 쳐부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군대가 출동하는 길은
다만 2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바로 원평으로 직접 가는 길이나 이 곳은

42 당보(塘報): 척후(斥候)하는 군사가 깃발을 가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적의 동정을 살펴서 알리


는 일이다. 여기서는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9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험준하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부근에 매복할 데가 많습니다. 이미 적이


그 위를 점거하고 있어서 군대를 드러내어 그 곳에 깊숙하게 들어가 적의
예봉銳鋒과 부딪혀서는 안됩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해미를 돌아가는 길입니
다. 해미성을 점거하고 있는 적들은 반드시 정예병을 뽑아 모두 여미로 보내
고, 노약한 자를 해미에 남겨 놓고는 성원을 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에
우리 군대를 2길로 나누어 하나는 경병과 합하여 바로 해미성을 공격한다면
한번에 깨뜨릴 수 있습니다. 남쪽의 유군儒軍을 후군後軍으로 삼아 계속하여
달려가서 여미의 뒤로 나가 시끄럽게 북을 쳐서 적이 나가도록 압박한다면
뜻밖이라 감히 군사를 돌려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원평으로 직접 가는 길을
따라 모두 덕산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한쪽의 군대가 일본군과 합세하
여 덕산 동남쪽의 들판에 주둔하고 있다가 적의 길을 막고 형세를 보아 합
덕 신북 면천 등의 유군을 움직여서 산 위에 각각 의병疑兵43을 두고 원근
에서 서로 호응 한다면 적은 반드시 나아가고 물러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완벽한 계책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적의 군대가 너무 많기 때문에 끝내 의심하고 겁을 먹었다.
일본군은 지난 밤에 포위를 당한 뒤라서 싸울 마음이 없었고, 경병은 그
수가 많지 않아서 일본군의 눈치를 보며 진퇴를 할 뿐 떠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적의 위협이 밤새 이어져 어수선하였고, 사
람들이 여미에서 몰려 나왔으며 덕산 큰 길가의 초막들이 모두 불탔다. 100
리에 걸쳐 사람의 그림자가 끊어졌고 바람과 학 울음소리에 놀라는 것처럼
소란스러웠으며 머지않아 닥칠 근심거리가 되었다. 장수와 아전을 모두 불러
그들을 토벌할 의논을 했으나 경병과 일본군은 성을 굳게 지키는 것만을 훌

43 의병(疑兵): 적을 미혹시키기 위하여 가장한 군대를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99

륭한 계책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아군도 따라서 태만해져 용감하게 진격할


뜻이 없게 되었다.

26일 [二十六日]
해가 뜰 때에 내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창억이 창밖에
와서 말하기를, 지금 막 군대를 출동하였습니다 라고 하여 내가 깜짝 놀라
서 옷을 입고 동헌東軒에 올라갔더니 초토사는 벌써 먼저 출발하고 없었다. 내가
황급히 동문 앞에 나가서 보니 군대가 이미 열을 지어 행군하고 있었고, 초토사
는 길가에 서서 막 군대를 점검하고 행군을 독촉하고 있었다. 내가 감히 출군한
이유를 묻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마침 박봉진朴鳳鎭
이 짐을 꾸려 앞을 지나가기에 내가 그를 끌어 당기고서 묻기를, 지금 출군은
도모하지 않고 나가는데 어느 곳으로 가서 무슨 적을 토벌하려고 하는가? 라고
하니, 봉진이 말하기를, 밤에 예산 유회의 첩보諜報가 있었는데, 여미에 있는
적의 전위부대가 이미 신례원에 도착하여 예산 고을이 소탕을 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와서 구해줄 것을 급히 요청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갑자기 군
사를 징발하여 예산의 군대와 합세하여 협공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경병 및 일본군과 상의하여 함께 가는
가? 라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중군이 지금 일본군의 숙소에 가서 일을
의논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끝내 기꺼이 따르려고 하지 않아서 중군이 이것
때문에 아직 오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묻기를, 만약 그들이
끝내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장차 어찌 하겠는가? 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군대의 출동은 경병과 일본군이 따르는 여부로 아군의 행동거지를 삼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적들이 많다고 해도 이미 그들의 허실을 알았는데 어찌
심하게 걱정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물러서서, 지난 밤에 병
10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법을 논의한 것은 계책이 아닌 것이 없는데 의심해서 주저하다가 결정하지


못하고서 어찌 갑자기 이웃 고을의 첩보 하나에 단연코 군대를 움직이는 것
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또한 상대를 얕보고 공功을 다투는 것은 병가兵家에
서 가장 꺼리는 것인데, 지금 아군이 여러 번의 승세를 타고 몸을 내어 앞으
로 나아가니 적을 가볍게 여기는 기색이 현저하다. 경병과 일본군의 행동거
지를 살피지 않고 먼저 올라가 무공武功을 휘날리려고 하니 제법 공을 다투고
겨루려는 마음을 품고 있어 혹시라도 소홀히 여겨 잃어버릴 걱정이 있으나
또한 싸움에 직면하여 의논을 확대해서 사기士氣를 떨어뜨려서는 안된다 라
고 생각하여 잠자코 물러났다.
갑자기 경군과 일본군도 짐을 꾸려 성을 나가 비로소 마음이 위로되고 근
심이 풀렸으나 여전히 중군을 보지 못하여 군사상의 기밀을 상세히 알지 못
해 혼자 의아해 하고 울적해 있었다. 다시 후군後軍의 장령將領에게 경계하기
를, 혹시라도 먼저 가볍게 나아가지 말고 반드시 경군과 일본군과 일을 함
께하라 고 하였다. 관군이 먼저 가서 끝내 경군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산에 올라가서 진영을 갖추는데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이 아군의
빈약함을 보고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을 모아 둘러쌓는데, 마치 벌이 에워싸
고 개미가 몰려들며 뱀이 또아리를 틀고 지렁이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김병돈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기세를 돋우고 병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사방에서 포를 쏘니 예산의 군대가 갑자기 저절로 무너졌고 관병도
따라서 놀라 흩어졌다. 김병돈이 힘을 내어 수습하려고 했으나 수습할 수가
없었고 포위를 뚫지 못하여 적에 잡혔으나 크게 그들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끝내 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영관 이창욱 주홍섭朱弘燮 창섭昌燮 형제, 한량閑良
한기경韓基慶, 예산의 유생 홍경후洪敬厚, 덕산의 의동義童, 나이가 어린 의병 신태봉申泰
鳳이 함께 죽음을 당했다. 관군 중에 죽은 사람은 10여 명이 되었고 박봉진과
홍양기사 洪陽紀事 101

이석범은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을 만나 군대가 패배


한 연유를 설명하고 함께 가서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군이 따르지 않았다.
패배했다는 소식이 이르자 부중府中이 두려움에 떨었고 싸움에서 전사한
자들의 가족들이 달려와서 통곡을 하였다. 초토사가 직접 가서 위로하고 사
기를 북돋워 복수할 뜻으로 격려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하고 밤이 되어
곧 진정되었다.

27일 [二十七日]
박봉진을 중군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의 여론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유학
정기황鄭基璜과 조종세趙鍾世를 좌군관左軍官과 우군관右軍官으로 삼아 처음으로
패배한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적의 기세가 승세를 타고 여러 고을에
창궐하여 솥에 물이 끓는 듯해서 수령들이 스스로 지키기를 못하였다. 그래
서 대흥 수령 이창세李昌世와 예산 수령 이건李健이 모두 홍주에 들어왔고, 부
안수령扶安守令 윤시영尹始永44은 집이 덕산에 있어서 또한 난리를 피해 들어와
성을 지킬 계책을 상의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이른 아침에 나는 장수 몇 사람과 간동諫洞 뒤의 고개에 올라가서 적이 주
둔한 곳을 바라보니 바로 우리 홍주와의 거리가 30리가 되는 덕산 땅이었다.
산과 들을 뒤덮은 것은 모두 적賊들의 기운이었고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여
수십리에 걸쳐 있었다. 오시午時, 오전 11 오후 1시 쯤에 적의 깃발 하나가 바람에
날리며 달려갔는데, 바로 덕산을 거쳐 길게 이어져서 홍주로 향하였다. 전군

44 윤시영(尹始永): 1차봉기와 집강소기간 전라도 수령들은 대부분 임지를 떠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부안군수 윤시영은 뒤에 임지를 떠났다하여 견책을 받았다.
10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前軍, 전위부대은 이미 홍주의 북쪽 10리 되는 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내가 바로 산을 내려가 성에 들어가서 주공에게 말하기를, 각 문門을 지휘
하여 그 문의 자물쇠를 단단히 하고 각 진陣을 단속하여 나누어서 성첩을 지키
십시오 라고 하였다. 다시 서남쪽의 돈대墩臺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이 적현赤峴
에 이르러 2개의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간동으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서문西門
을 향하였다. 일본군 30명이 서문을 나가 외빙고外氷庫의 고개에 숨어 있다가
화포를 쏘아 선봉에 선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으나 군사의 수가 적어 상대
할 수가 없어 다시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켰다. 적이 동서의 양쪽 산에서 진영
을 갖추었는데 새의 날개와 같았고 깃발 북 말 가축 등은 중앙에 모았다.
양쪽 날개의 군대는 쑥대처럼 헙수룩한 머리에 흰 옷을 입고 손에는 병기가
없이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으며 서로 뒤섞여서 대오가 없었다.
향교는 간동의 서쪽에 있었는데, 성전聖殿을 지킬 방책이 없어 다만 매우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교생校生 오경근吳景根 최민지崔民志 최학신崔學信 방
세영方世永 방석규方錫珪 이만오李萬五 등이 재복齋服을 입고 묘정廟廷에 나누어
서서 지켰다. 적들이 난입하자 소리를 질러 꾸짖으며 한걸음도 떼지 않고 적
들의 칼에 모두 죽었다. 아! 원통스럽다. 날이 이미 어두워지니 적이 먼저
동문 밖의 민가 여러 채를 불태웠고 약탈만을 일삼았다. 성의 근처에 있는
인가에 몸을 숨겼다가 나와서 총을 쏘고 다시 숨어버려 성위의 서있는 군사
들은 탄환을 허비하고 1명의 적도 맞추지 못하였다. 주공이 이에 군교軍校에
게 명하여 청야법淸野法45을 사용하게 하여 불화살을 많이 쏘아서 성 아래의
건물들을 불태웠다. 대포를 연달아 쏘아 탄환에 맞거나 불에 타서 죽은 적들

45 청야법(淸野法): 들판의 집과 양식 우물을 모두 없애고 철수하여 적의 근거지를 없애는 전술. 헌


건물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꾸는 수법을 썼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03

이 매우 많았다.
갑자기 1명의 적이 대포를 가지고 동문 아래에 와서 위로 쏘아 그 탄환이
서까래를 맞추었으나 서까래가 도로 떨어져서 화포를 쏘았던 자가 바로 죽었
다. 문루門樓 위에 있던 아군이 내려다보고 웃었다. 이에 적들이 다시는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서문의 적들이 허수아비를 만들어 집 위에 세워 우리
를 속여 탄환을 허비하게 하려고 했으나 아군이 이미 그 간계를 알고 있어서
계책을 시행할 수가 없었다. 이 날 밤에 초토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무
장을 하고 창을 들고 밤새 성을 돌며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화포의 탄환이
비처럼 머리 쪽에 떨어졌고 소매에 떨어져서 누렇게 태우기도 했으나 두려워
하지 않았다. 순시를 멈추지 않고 더욱 격려하니 장졸將卒들이 모두 솜옷을
입는 은혜46와 함께 술을 먹는 것47에 감동하여 거의 추위와 배고픔을 잊어
버렸다. 하룻밤을 격렬하게 싸웠는데, 단지 화포로만 하였다.
아군의 대포는 멀리까지 날아가고 일본군이 대포를 잘 쏘아서 반드시 적
중하여 조금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으나 저들의 병기는 뛰어나지 못하고 서툰
자들이 쏘고 법도가 없어서 끝내 아군 중에 1명도 해칠 수가 없었다. 또한
성안의 군민은 이미 기율에 익숙하여 밤새 시끄러운 소리가 없었고 닭과 개
도 놀라지 않았다.

29일 [二十九日]

아침이 지나서 초토사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동루東樓에 올라 간동에 주둔


한 적을 바라보니 어제와 비교하여 이미 많이 도망쳤으며 그 대오는 더욱

46 협광지혜(挾 之惠): 위로를 받아 감격하여 추위를 잊는 것을 말한다.


47 투료지음(投 之飮):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술을 강물에 풀어 백성과 함께 먹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군민(軍民)과 함께 고락(苦樂)을 같이하는 것을 말한다.
10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흩어지고 어수선하였다. 앉거나 일어나서 뒤섞여있었고 손으로 가리키고 돌


아보며 당황하는 것이 짐을 꾸려 도망가는 모습과 같았다. 서문의 적은 산허
리에 숨어 때때로 포를 쏘았으나 대포 소리에 힘이 없어 반드시 이것은 화약
이 떨어져가는 것이었다.
내가 부안 수령 윤尹, 윤시영에게 말하기를, 저 적들의 기세가 다하고 탄약
이 떨어지면 도망갈 것인데, 지금 정예병사 1대隊로 성을 나가 공격할 수 있
습니다. 저들이 군대를 보면 반드시 급하게 달아날 것입니다. 비록 추격하여
모두 죽일 수 없더라도 그들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전부 노획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 초토사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바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성문城門을 맡아서 지키고
완강히 열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로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간동의
적은 과연 모두 흩어져서 도주하였고 서문의 적도 차차 해산하였다. 성위의
관병 중에 스스로 분통이 나서 다투어 성을 넘어 내려간 100여명이 1리 정도
추격하여 화포를 쏘아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서문 밖의 민가에서 약탈을
당한 물건은 거의 모두 되찾았다.
이 날에 홍주와 대흥의 유병儒兵이 모두 적들이 성을 포위할 것을 알고 서
로 다투어 구원하러 온 병사가 5,000 6,000명이 되었는데, 홍주의 남산 위
에 주둔하여 성원을 하였다. 적들이 도망하여 사로잡은 자도 많았고 이틀 동
안 성 아래에서 죽은 적은 대략 600 700명이 되었다.

11월 초 1일 [十一月初一日]

때때로 토병土兵을 모집하였는데, 모두 가르치지 않아서 기율이 없었으나


은혜를 베풀고 위로하는 데에 부합되었다. 큰 난리를 겪어 부형父兄의 원수를
홍양기사 洪陽紀事 105

만나고 약탈의 화를 입은 자는 모두 이를 갈며 복수하였다. 일단 저들을 만


나면 그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살육만을 하여 종종 뜻하지 않게 총에 맞
거나 찔리는 자가 있어 인심이 도리어 다시 어수선해졌다. 불안한 자가 스스
로 안정할 수가 없었다. 초토사가 이것을 매우 우려하여 방榜을 내걸어 영令
을 내려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였다. 죽일만한 죄악이 있는 자라도 관의
판결에 따르지 않고 사사로이 손을 대는 자는 상명償命의 형률48을 시행할 것
이고 관이 죄를 판결할 때도 주모자는 죽이고 종범從犯은 용서하는 은전恩典을
규정으로 삼을 것을 두루 이웃 고을에 알렸다.

초 2일 [初二日]

반계磻溪의 유병 200명과 유곡酉谷의 유병 200명 및 보령의 향병鄕兵 250명


이 왔기에 성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갈산 등지에 나누어 보내어 소굴에
아직 남아있는 유명한 적괴를 잡게 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계속해서 전진
하여 결성의 공수동公須洞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바로 처음부터 비도가 자리
를 잡고 있던 곳이었다. 군사들의 마음이 도착하자마자 분노하여 바로 불을
질러 죽이고 빼앗아 모두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초토사가 그것을 듣고 바로
전령을 보내어 병사를 거두었다.

초 3일 [初三日]
도망하여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이 예산땅에 물러나서 여전히 모여 해산하
지 않았다. 대흥의 유군이 가서 쳐부수었다. 이때에 일본군 1진陣이 금영錦營

48 상명지율(償命之律): 남의 목숨을 해친 자는 목숨으로 갚는다는 뜻으로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말한다.


10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에 주둔하고 있다가 정산의 괴수 김기창을 토벌하였다. 완적完賊에 빌붙은 자


들이 모두 패하여 흩어졌으나 사방에서 적의 위협이 여전하여 어수선했기 때
문에 지킬 대비를 더욱 엄중하게 하였다.

초 4일 [初四日]
탐문한 보고가 연달아 왔는데, 도망간 적이 점점 해미에 들어와 점거하여
다시 일어날 상황인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바로 나아가 쳐부술 것을 의
논했으나 그들이 점거한 곳이 험준하고 멀어서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기가 어
려웠다. 그래서 서상리가 바친 지도를 장수와 아전에게 내어 보이고 병사를
3길로 나누는 계책을 세웠다. 예산에서 적을 쳐부순 상황과 성 아래에서 적
을 물리친 연유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초 5일 [初五日]
유언비어가 다시 일어났는데, 적들이 밤에 성을 약탈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때때로 서로 유언비어를 말하였다. 초토사가 직접 돌
아다니며 잘 타일러서 진정시키었다.

초 6일 [初六日]
천안天安의 의병장義兵將 감찰監察 윤영렬尹英烈과 출신出身 조중석趙重碩이 병사
400여명을 인솔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배를 타고 아산포牙山浦에 정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당보塘報에 의하면, 순무영巡撫營49 별군관 죽산부사竹

49 순무영(巡撫營): 정식 명칭은 양호도순무영. 9월 들어 2차봉기가 일어나자 중앙에서는 도순무영


이란 이름으로 모든 부대의 단일 지휘소를 임시기구로 조직하고 도순무사로 신정희(申正熙)를 임
명하였으며 이어 우선봉에 이두황, 좌선봉에 이규태로 정했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07

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이 병사 1,800명을 이끌고 덕산의 가야동伽倻洞에 와서 묵고


내일 해미로 진격할 것입니다. 의병 진영에 격문을 보내 함께 진군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금군이 초토사에게 내린 유서諭書50와 부월斧鉞51을 가지고 왔다. 또한 특별
한 은혜를 베풀어 가선嘉善으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온 군사들이 그 영광을
축하해 주었다.
초토사가 참모관參謀官과 별군관을 추천하여 보고하려는데, 나를 뽑으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공이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외로운 성
을 지켜서 오늘이 있게 한 것은 단지 정성을 다하고 공평하게 사사로운 마음
을 드러내지 않아서입니다. 지금 장수를 추천하는 날에 저를 거기에 채운다
면 누가 공정하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지금이 나아가기를 구하고 몸을 도모
할 때가 아닙니다. 명공明公, 홍주 목사께서는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튼튼한
갑옷을 입고 예리한 무기를 잡고서 몸으로 칼날을 무릅쓴 자를 먼저 천거하
고, 다음에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군량을 도운 자를 들어 장수에 둔다면 저들이
모두 자신의 몸을 잊고 공을 위해 죽어 하루가 안되어 적을 평정할 것입니다. 나
랏일이 끝나고 민생이 편안해지면 저는 영예에 있어 여기에서 지극할 것입니다.
지금 어찌 때를 타고 영예를 도모하는 것을 벼슬길에 나아가는 수단으로 여
겨 명공으로 하여금 사사로움을 따른다는 의심을 받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
니, 공이 낯빛을 바꾸고 칭찬하였다. 결성에서 박태건朴台建을 잡아서 바쳤는
데, 바로 수영의 군기를 훔칠 때에 주모한 우두머리였다.

50 유서(諭書): 임금이 지방으로 파견하는 관찰사 절도사 등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말한다.
51 부월(斧鉞): 임금이 내린 작은 도끼와 큰 도끼로 대장에게 주는 통솔권을 상징한다.
10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초 7일 [初七日]
죽산의 병사가 해미로 전진하였고, 천안의 병사는 광석廣石을 경유하여 해미
의 북문을 공격하였다. 관병 100명이 앞을 인도하고 150명은 군관 정기황으
로 하여금 인솔하게 하여 덕산과 대천을 거쳐 여미의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일본의 육군 대위 야마무라山村忠正가 병사 200명을 이끌고 아산에서 들어왔다.

초 8일 [初八日]
의병 진영의 첩보牒報에 의하면, 죽산의 병사가 먼저 해미성을 공격했는
데, 적이 바로 무너져서 흩어져 서산의 도비산道飛山에 물러나서 주둔하였습
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반계의 병사를 불러 관병과 합친 300명을 박봉진
으로 하여금 인솔하여 서산의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초 9일 [初九日]
일본군 소위少尉 아카마츠가 공주를 향해 떠났고, 야마무라는 해미로 갔다.
죽산의 병사들이 서산에서 돌아왔다. 순무영 별군관 이창직李昌稙이 병사 30
명을 이끌고 여러 고을을 순찰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죽산의 병사들이 하루를 묵고 공주로 갔는데, 온갖 병사들의 폐단이 성에
가득하여 시끄러웠다. 관리가 나아갈 수 없었고 점인店人들이 모두 피신하였
다. 그들이 떠나갈 때에 밥을 먹고 난 뒤의 그릇과 잠을 잔 곳의 돗자리를
모두 걷어 가지고 소와 말에 실었다. 병사들은 베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모두 약탈한 물건이었다. 홍주의 관병이 그것을 보고 모두 분개하고 미워하
며 서로 공격할 것 같았는데 초토사가 엄중하게 명령하여 탈이 나게 하지
홍양기사 洪陽紀事 109

말고 좋은 말로 보내게 하였다. 시장의 가게에서 빼앗긴 그릇 등의 물건들은


이창억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기록해서 빠짐없이 값을 치르게 하였다. 이 때
문에 아전과 백성이 더욱 가깝게 여겼고 다른 곳에서 온 군대가 고을을 지나가도
원망하고 거스르는 뜻이 없었다.
합북合北의 유병이 비괴 이병호李炳浩를 잡아서 바쳤다.

11일 [十一日]
남포藍浦의 방어소防禦所에서 보고하기를, 비도가 지금 홍산鴻山을 점거했으
니 하루가 가기 전에 그들을 토벌하여 죽임을 당하는 여러 군郡을 구해주시
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장리를 보내어 그들의 허실을 정
탐하였다.

12일 [十二日]
박봉진이 서산에서 개선하였는데, 비괴 최동신崔東信 문학준文學俊 박춘
석朴春石 옥출곤을 잡아왔다.

13일 [十三日]
적괴 이병호와 최동신 등을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덕산 수령 조두환曺斗煥
과 해미 수령 이일李鎰이 모두 군무 때문에 왔다. 남포의 전 승지 임상호任尙鎬가
밤에 남쪽 연안 적의 위협 때문에 보고하기를, 양호의 적이 연계하여 수많
은 사람들이 어제 한산을 침범하였습니다.52 남포의 위급함이 조석간에 달려

52 9월 들어 전라도 해안지대의 농민군은 군산포의 금강을 넘어 충청도 아래 해안지대 농민군과 연


합하여 한산 서천 홍산 면천 등지를 석권하였다.
11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있으니 병사를 보내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니, 초토사가 관병이 멀


리 출정하면 민폐가 심하여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패하여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이 호남의 적과 연계하여 남쪽
연안을 침범하여 한산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그 기세가 반드시 대단해져 북쪽
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 고을에서 웅크리고 관망하던 자들이
반드시 호응하여 저절로 지난날의 서산과 태안을 석권했던 형세를 이룰 것입
니다. 그리고 성 아래의 일도 이어서 일어날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빨리 관
병을 보내고 보령 수영의 둔병屯兵도 남포와 서천에 내려 보내 그 요충지를
지키고 그들의 동정을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성대해지기 전에 도모하
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14일 [十四日]
초토사가 남정南征53을 결의하고 본영本營의 총수銃手와 창수槍手 150명을 뽑
았다. 여러 고을에 전령을 보내 동시에 모두 거병擧兵하여 남포에 가서 지키
게 하였다. 보령 수령 이교철李敎哲 해미 수령 이일 청양 수령 정인희鄭寅
羲 소모관召募官 이장규李章珪 등이 모두 와서 함께 군무를 의논하였다. 이때
에 경영에서 온 장병들이 많은 약탈을 일삼았다. 순무군관巡撫軍官 이창직은
주군을 두루 다니면서 순찰을 빙자하여 평민을 침탈하였고, 억지로 비도의
죄목을 씌우고 뇌물을 요구하여 소요를 겪고 겨우 진정된 백성이 놀라고 두
려워서 안정되지 못하였다. 초토사가 바로 패악을 들어 순무영에 조목조목
보고하였다.

53 남정(南征): 여기서는 남포와 한산의 비도를 토벌하는 것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11

15일 [十五日]
일본군이 해미 서산 태안 등지를 돌아보고 소위 제등온齊藤溫을 홍주에
남겨두었다.

16일 [十六日]
처음에 성을 지킬 때에 내가 비도를 토벌할 만한 상황을 외람되게 조목조
목 논하여 승선 송언회에게 편지를 하였다. 송宋, 송언회이 그것을 적어 총상摠
相54에게 보여주었는데 총상이 듣고 나를 쓸만 하다고 여겨 이번달 11일에
임금에게 본진本鎭의 영장營將으로 삼을 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여 영장의
관직을 제수하니 사조辭朝하라는 명命이 있었다. 저보邸報가 오늘 내려오니 영
광스러우나 황송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진영鎭營의 장리들이 모두 영광스럽
게 여겼다. 신례원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도 포상을 받았는데, 김병돈에게
는 군무참의軍務參議를, 이창욱과 주홍섭 형제에게는 군무주사軍務主事를 주었
고, 한기경에게는 정려旌閭55를 베풀었다.
순영巡營, 공주감영에서 보고가 왔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완비完匪 전봉준이
공주를 침범하였고, 김개남은 청주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전적全賊은 패배하여
논산으로 도망갔다 라고 하였다. 남포에서 파발擺撥이 오고 연이어 급보가 있
어 안면도安眠島의 병사 150명과 본영의 병사 50명을 더 뽑아서 보냈다.

54 총상(摠相): 내각총리대신을 달리 부르는 호칭으로, 7월 갑오개혁으로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하


고 총리대신에 김홍집(金弘集)을 임명하였다.
55 정려(旌閭): 충신 열녀를 기려 사당을 짓고 그 앞에 정려문을 세워 표시함. 현재 홍주읍내에 한기
경 충렬비가 세워져 있다.
11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7일 [十七日]

남쪽으로 토벌을 나간 관군이 보고하기를, 어제 비인庇仁의 판교板橋에 진


군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18일 [十八日]

예산의 의병소義兵所에서 비괴 박순칠朴順七을 사로잡아서 보냈다. 기교譏校


김석교가 최태진崔台進을 포박하여 바쳤다.

19일 [十九日]

합덕의 유병 180명이 왔기에 서천에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초토영 참모


관 박홍양朴鴻陽도 창군槍軍 50명을 인솔하여 비인과 남포에 가서 돌아보았다.
이 날에 전임 관리와 교대하고 바로 그 날 밤에 5개 진陣을 돌며 돈 100꾸러
미를 나누어 주어 강에 술을 풀어 고락을 함께 한다는 은혜56를 내보였다.

20일 [二十日]

초토영의 감결에 따라 전후前後에 걸쳐 자백을 받고 감옥에 가둔 비도 163


명을 그 죄의 경중에 따라 구분하여 총을 쏘아 죽인 자는 40명이고 풀어준
자는 115명이었다. 태안의 거괴 김낙연金洛璉은 목을 베었다.

22일 [二十二日]
박홍양의 첩보에 의하면, “완비完匪가 경군에게 패배를 당하여 사방으로 흩

56 하료지혜(河 之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강물에 술을 풀어 백성과 함께 먹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고락(苦樂)을 같이하는 것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13

어져 도망가서 아군이 추격하여 수십명을 사로잡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에 수성군守城軍이 남쪽으로 많이 출전하였기 때문에 성을 수비하는 것이
허술해졌다. 그래서 합덕의 병사 230명을 징발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다.

23일 [二十三日]
초토영의 감결의 지시에 따라 옥에 가둔 비도 14명을 등급을 나누어 처리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순무영 군관을 겸임하여 경병을 이끌고 공주를 순찰
하였다. 한산과 서천 등지에 이르러 비도를 격퇴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원정을
나간 군대가 철수를 하였다. 초토사가 본영本營에 말하기를, 남쪽으로 원정을
나간 군대가 부대를 정돈하여 환호성이 진동하고 기쁜 기운이 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만 장졸이 여러 날 동안 노숙을 하여 혹시라도 병이 나지 않았는지
걱정스럽다. 음식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는 것을 빨리 시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리 보고를 듣고 기다렸다가 경계에 직접 나가 맞이해서 비록 솜옷을 입혀주는
것처럼 할 수는 없더라도 다만 술을 풀어 먹게 하는 것은 보일 수 있다.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한 뒤에 군물을 갖추어 북을 치고 인솔하여 돌아오라 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남문 밖 오리정五里亭에 나가 남쪽으로 원정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군대를
맞이하여 위로를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남산 10리에 나가 남쪽에 원정을 나간 군대를 맞이하여 위로하고 돌아왔다.
11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27일 [二十七日]
초토영이 5명의 죄수를 압송하여 공초供草를 받아 논보論報하였는데, 그것
에 대해 회제回題하기를, 죄인의 공초를 참작해보니, 전혀 범행한 것이 없다.
만약 형을 가하여 엄중히 문초했다면 어찌 감히 이처럼 소홀하겠는가? 엄중
하게 형을 가하여 자백을 받아 다시는 이처럼 하지 말라 고 하였다. 다시 보
고하기를, 영장營將의 자질이 본래 우매하여 일의 실상을 조사하는 것에 서
툴고, 성품도 나약하여 신문訊問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죄수들에게
받은 공초는 핵심을 분명히 하여 실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지엄하신 제교題敎
를 받으니 매우 송구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
하기에, 죄수의 자백이 만약 그 죄가 현저하여 반드시 죽여야 할 사안이 아니
라면 처음에 평문平問57을 하고 5청五聽58을 참조하여 죄인의 말 중에 그 단서
를 얻은 뒤에야 죄인의 죄상을 깊이 규명하는 것을 모색하여 비로소 진범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죄안罪案을 만드는 데에 급급하여 바로 지나친 형을
가하면 어찌 혹시라도 거짓으로 자백하여 진실을 잃어버리는 탄식이 없겠습니
까? 지금 여러 죄수들을 보면, 박원배朴元培는 연이어 엄중히 문초問招를 했으나
한마디도 자백하지 않아 전혀 실정을 알지 못했고 이미 그를 잡아둘 수 있는
진장眞贓59이 없습니다. 정말로 악명惡名을 억지로 더하기가 어렵습니다.
박수선朴水先과 서춘성徐春成은, 기찰포교譏察捕校의 보고에 의하면, 접주接主
손치재孫致才가 이위원李渭原의 집에 도망가서 숨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밟아

57 평문(平問): 형구(刑具)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58 5청(五聽): 소송을 듣는 다섯가지 방법을 말한다. 사청(辭聽, 말이 번거로우면 옳지 않은 증거)
색청(色聽, 옳지 않으면 얼굴이 붉어짐) 기청(氣聽, 진실이 아닐 때 숨을 헐떡거림) 이청(耳
聽, 진실이 아닐 때 곧잘 잘못 들음) 목청(目聽, 진실이 아닐 때 눈의 정기가 없음)이다.
59 진장(眞贓): 도둑질한 물건인 줄 뻔히 알면서도 감추어 주거나 팔아 준 사실이 확인된 흔적을 말
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15

그 집에 가서 보니 손한孫漢, 손치재은 이미 도주하였습니다. 이씨네 집주인이


종 2명을 지목하여 저 놈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잡아왔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기찰포교의 보고도 의심스럽습니다. 손적孫賊, 손치재이 이씨 집에 숨
었다는 것을 알고 잡지 못했는데 어찌 그 주인은 놓아주고 주인의 말만 따라
의심을 받은 종을 잡아옵니까? 지금 만약 그 실정을 파헤친다면 일은 커져
쉽게 널리 퍼지고 종 2명에게 지나치게 형을 가해 적을 잡을 종적을 찾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강웅이姜雄伊는 정행선鄭行善의 접솔接率로 그의 지
시를 듣고 재물과 가축을 빼앗는 곳에 따라갔다고 자백했습니다. 한금달韓今
達은 말을 잘 둘러대고 벗어날 계책만을 찾으나 양반가의 땅문서를 별 어려
움이 없이 빼앗은 것은 이미 그의 공초供招에 나와 있어 다른 행패는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2놈에게 먼저 해당 형률을 시행하는 것이 전형典刑60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서산의 선전관을 지낸 이병재李秉在는 지독하게 비도의 화를 입어 가산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심지어 사판祠版, 신주이 변고를 겪고 관고官誥, 교지는 잃어
버렸다. 그 참담하고 치욕스러움에 사람들이 모두 매우 놀랐다. 그 괴수魁首
한철록韓喆祿과 김치성金致成은 초토영에서 염탐하여 잡아서 본영本營에 보내왔
기 때문에 자백을 받아 논보하고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이 때에 각 고을과
마을에서 비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이 모두 보복을 하려고 다투어 잡아와서
서산과 태안의 거특巨慝, 우두머리으로 지목하거나 홍주에서 성을 침범한 수창자
首倡者로 지목하여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나 처벌할 때에는 늘 사실과 어긋
났다. 만약 신정訊政61의 문란함을 특별히 조치하지 않는다면 뜻밖의 재앙을

60 전형(典刑): 예전처럼 행하여 온 변경할 수 없는 법을 말한다.


61 신정(訊政): 죄인을 심문하여 처벌하는 일을 말한다.
11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겪은 억울한 백성을 거의 안정시킬 수 없어 반드시 떠돌게 될 것이다. 초토


사에게 말씀을 드려 여러 고을에서 잡아서 바친 자들은 해당 고을에 돌려보
냈고 각 마을에서 압송해 온 자는 조사하여 다시 해당 마을로 하여금 논보하
게 하였다.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반드시 증거를 가지고 대면하여 물은 뒤에
판결을 하고 사사로이 체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법망에서 빠진 유
명한 거괴는 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29일 [二十九日]
이때에 경박하고 추잡한 무리들이 교졸을 사칭하여 마을에 출몰하면서
민간에 근심을 끼쳤다. 이에 관할하는 각 고을에 관문을 보내 말하기를,
영문營門의 교졸들이 외촌外村에 근심을 끼치고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는 것
은 비록 평상시라도 이미 없애기 어려운 고질적인 병폐이다. 더욱이 이런 난
리를 겪은 뒤에 혹시 일 때문에 나가서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하거나 교졸
을 사칭하여 기회를 이용해서 토색질을 저지른다. 이것을 만약 특별히 금지
하지 않는다면 난리 뒤에 겨우 사는 백성이 어찌 견디겠는가? 이것이 초토영
에서 조목조목 나열하여 관문으로 일러 경계하는 이유이다. 본영本營에서도
특별히 단속하여 그 폐습을 없앨 것이다.
소위 영속營屬은 본래 산란하여 기율이 없는 무리로 갑자기 규정을 만들어
다스리기가 어렵다. 또한 혹시 비도匪徒의 남은 무리들이 영속을 사칭하고 저
녁에 외로운 마을에 칼을 들고 행패를 저지른다는 얘기가 종종 들리는데, 이
것이 과연 정말인가? 지금부터는 비록 진짜 교졸이 공문을 가지고 나온 자이
더라도 만약에 본관本官에게 공문을 보내지 않고 먼저 체포하는 자는 그 마을
에서 잡아 두고 관에 보고하여 분부를 기다려서 거행하라. 만약에 공문이 없
이 소란을 저지르는 자는 진짜 가짜를 막론하고 난류이니 모두 결박하여 본
홍양기사 洪陽紀事 117

관에 잡아 들여서 금지하는 방도로 삼을 것이다. 또한 관문을 받는 곳에서


본읍 이속吏屬의 간악한 꾀와 허위 보고 때문에 기꺼이 잡아 보내지 않으려는
폐단이 있어 영읍에 불화가 반드시 없으리라는 것을 보증하기 어렵다. 늘 이
런 일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만약 각자 그 도를 다하고 법을 어기지 않는
다면 관은 걱정할 일이 없고 백성은 믿고 안심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관문으로 민간에 영令을 내려 타일러서 지키도록 하고, 감영의 비밀 명령에
따라 기찰하여 잡는 자에게는 그 때에 이르러 특별한 지시가 있을 것이다 라
고 하였다.

30일 [三十日]
적의 위협이 조금 그치어 성의 수비를 막 풀고, 남문 밖에서 크게 군사들
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번番을 교대하는 촌민을 해산하여 보내고 영부營府
의 관속만으로 나누어 각 문을 지켰다.

12월 1일 [十二月初一日]
초토사가 성묘聖廟, 향교의 공자사당에 배례拜禮를 하고 학생들을 불러 모아 선비
의 상견례를 행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뛰어난 자를 뽑아 재실齋室에 거처하여
책을 읽고 5일 동안 강講을 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선비에게
땔나무 쌀 기름 소금을 제공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배분했다. 그래서
선비의 기세가 더욱 진작되었다.

초 5일 [初五日]
이보다 앞서 향인鄕人 유기석劉基錫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었는데, 동도
가 일어날 때에 억지로 가입시키려고 하니 유劉, 유기석는 바로 거절하고 도리
11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어 동도를 역류逆流로 지목하여 크게 그들을 거슬렀다. 그들이 기병起兵하여


성을 침범하는 날에 이르러서 비류가 유기석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중에 이흥수李興水라는 자가 남보다 먼저 칼로 베어야겠다고 하니 유기석이
크게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적李賊, 이흥수을 기찰하
여 체포해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초 8일 [初八日]
순무영 별군관 최일환崔日煥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평민을 침탈하였다.
가는 곳마다 인가의 자산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 초토영에서 잡아 옥에 가
두고 순무영에 논보論報하여 그 회제回題,에 따라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초 9일 [初九日]

결성 화산花山의 승선을 지낸 이설李 이 그 촌민을 감독하여 월산月山에 보


루를 쌓고 초토사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저의 생각으로 지금의 계책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병사를 가려 뽑는 것이고, 둘째는 보루를 수축하는 것입
니다. 병사를 뽑은 뒤에 토벌을 할 수 있고, 보루를 수축한 뒤에 방어할 수
있습니다. 병사는 정예에 있지 많이 징집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병사
10,000명이 모여도 정예 수천명을 모집한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옛사람이
병사를 가려 뽑은 뜻입니다. 쳐다보고 공격하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내려다보며 물리치는 것은 계란을 누르는 것처럼 쉽습니다. 평지의
금성탕지金城湯池62는 산성山城에서 총알을 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옛사람

62 금성탕지(金城湯池): 금성(金城)은 방비가 매우 튼튼한 성(城)이고, 탕지(湯池)는 끓는 물이 괴어 있


어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지(城池)를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19

이 보루를 수축한 뜻입니다. 근래의 일로 본다면 관군은 모두 가르치지 않은


백성입니다. 이것은 시장사람을 몰아가서 싸우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적도도 일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고 적이 적으면 적이
패하고, 우리가 적고 적이 많으면 적이 이기니 승패의 운수는 단지 병사들의
많고 적은 데에 있고 병사들의 강하고 약한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산에서 손
해를 본 것은 적이 많고 우리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쳐들어오는 날에
관군이 비록 많았어도 겁을 먹고 나아가지 못했고 일본군은 비록 적었어도 힘
을 쓸 수 있었습니다. 병사를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은데서 쓰임새가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한번 이긴 것이 비록 다행스럽다고 해도 이웃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은 병사는 혹시 토비土匪에게 쓸 수는 있으나 어찌 외구外寇에게 쓸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두려워하며 한심스럽게 여긴지도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병사를 가려 뽑는 것을 시급하게 여기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을 방어하는 방법은 성을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 근래에 여러 고을이 성
을 지키지 못하고 함락된 것은 사람의 계책이 훌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에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홍양의 성을 지킨 것을 살펴
보면, 특별히 단속하고 연락할 곳과 험준하고 막혀서 근거할 땅이 없습니다.
평지에 넓은 들판이고 사방에 막힘이 없어 만약 적도에게 수 만명을 인솔하
게 하여 요충지를 나누어 점거하여 밖에서 구원할 길을 끊어버리고 반드시
싸우지 않고 오래 끌었다면 승패의 운수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적이 하루의 계책이 없고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로
저절로 흩어져 도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은 토비는 막을 수 있어도 외구
는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보루의 수축을 급하게 여기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12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병사를 뽑는 것은 바로 옛날에 선봉先鋒을 선발하던 것을 말합니다. 옛사람


이 말하기를, 선봉을 뽑지 않은 군대는 반드시 패배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당의 태종은 정예병 수천명을 뽑아 모두 검은 옷에 검은 갑옷을 입혀
그들을 좌대左隊와 우대右隊로 삼았는데, 선봉이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었습니
다. 송나라 때에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유기劉錡같은 사람들은 함께 할 만한
자가 거의 없었으나 상대를 만나면 반드시 승리했던 것은 정예병사 때문이었
고, 유인劉麟63이 70만의 군사를 가지고 회수淮水가에서 패배했는데, 그것은
민병民兵때문이었습니다. 선봉을 뽑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사람 중에
서 겁쟁이는 10명 중에 9명이고 용감한 사람은 10명 중에 1명입니다. 그들이
평소에는 함께 대오를 이루어 한결같아서 구분할 수 없지만 강한 상대를 만
나면 겁쟁이는 먼저 무너지고 용감한 자도 달아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형
세가 마치 성난 파도처럼 서로 이끌어서 모두 무너지면 비록 맹장이 있어
그들을 나아가게 해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관군과 유병의 숫자를 살펴보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 건장
하고 용감한 자를 뽑으면 100명 중에 10명, 1,000명중에 100명을 반드시 얻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또한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유학幼學 한량閑良 공사천公
私賤 관속官屬 재인才人 승도僧徒 백정白丁 등을 막론하고 용감하고 건장한
자를 모집하여 각각 몇 사람을 추천하게 하는데, 그 고을의 크고 작은 규모에
따라 100명이나 50 60명 또는 20 30명으로 하고 면천免賤하여 그 몸을 영화
롭게 하거나 후한 상으로 그 뜻을 격려하십시오. 일일이 불러서 그 모습을 먼
저 살펴보고 그 힘을 시험해 본 뒤에 기예技藝를 가르치십시오. 진실로 이와

63 유인(劉麟): 송(宋)때의 유예(劉豫)의 아들로 자는 원서(元瑞)이다. 아버지를 따라 금(金)나라에 항


복하였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21

같이 하면 수천의 정예병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선봉


으로 삼아 먼저 올라가 적진을 함락시키는 데에 쓴다면, 옛날에 배외군背嵬軍이
라고 하던 것도 이들을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까마귀가 모인 것처럼 훈련
되지 않은 병사는 망을 볼 때에 쓰거나 과시하여 적의 의심을 도모할 때에
쓸 수가 있어도 어찌 충돌해서 적을 꺾어 함락시키는 데에 쓸 수가 있겠습니
까? 싸움은 형세로 승리하고 병사는 사기에 따라 쓸 수가 있습니다. 우리 형
께서 이것에 유의하신다면 나라와 군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보루를 수축하는 것은 바로 옛날에 험준함에 근거하여 청야 전술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천시天時는 지형의 이로움만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아성亞聖, 맹자과 같은 재주로 전국戰國시대의 세상에서 늙었는데, 어찌 보고 후세에
교훈을 남길 것이 없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바다의 귀퉁이에 치우쳐있고, 산천이
험하고 막혀있기 때문에 용병하는 방법에 있어 공격하여 얻는 데는 못하나 지키는
데에는 뛰어납니다. 지키는 방도는 산성山城만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
에 적이 침입하여 갑자기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선산善山의 백성들이 금오산성
金烏山城을 지켰고, 문화文化의 백성들은 구월산성九月山城을 지켰습니다. 권원수權元帥,
권율가 독성禿城, 독성산성을 지켰고, 학관學官 안정란安廷蘭은 유민流民을 이끌고 인천
仁川을 지켰습니다. 산성이 방어에 효과가 있음을 이전의 교훈이 이와 같습니다.
병법에서 말하기를, 제후가 싸우면 그 땅은 싸움터가 된다 라고 하였습니
다. 어수선한 때를 맞아 백성이 모두 피난하여 흩어지면 마을은 비고 사람과
연기가 끊어져서 병사의 형세는 더욱 고립되어 관은 스스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미리 험준함에 의지할 곳을 만듭니다. 변고를 듣고 부모를 모시고 처자
식을 이끌며 식량과 재물을 운반하게 하여 들판을 비우고 기다린다면 백성은
흩어지지 않고 끝내 믿고 의지하며 공사公私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굳게 지킬
것입니다. 비록 100만의 강한 적이라도 하나의 작은 보루를 어찌 할 수가 없을
12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것이니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대개 홍양 경내에 보루를 쌓을만한 곳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충지를 만들어 보호할 만한 것은 월산만한 곳이 없고
가까이에 위치하여 구원을 알릴 수 있는 곳은 용봉龍鳳64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두 곳은 실로 홍양의 보장保障으로 결코 등한시 할 곳이 아닙니다. 비유
하면 도성의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습니다.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이 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두 곳의 보루를 쌓는 일은 바로 우선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옛 보루가 있던 곳은
그 터를 수축하고, 보루를 쌓을만한 곳은 새로 만들어야 관은 지킬만한 방도
가 있고 백성은 흩어질 걱정이 없습니다. 곳곳마다 서로 바라보며 별처럼 벌
여 있고 바둑돌처럼 널려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홍양에 있어 마치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막고 자식과 동생이 아버지와 형을 보호하는 것과 같습니
다. 성세聲勢가 서로 호응하고 명령이 소통할 수 있어 성공의 계책은 이것보
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형께서 유념하신다면 나라와 군대에 매우 다행
이겠습니다.
아! 형님은 지금 세상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기가 비록 피부를 물어도
쥐는 실제로 맛있게 먹고 여우는 안색을 바꾸거나 고래는 머리를 내놓지 않
습니다. 어진 사람과 군자가 불행하게도 이런 때를 만나 어찌 운수와 운명에
맡기고 모른 척하며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이 만약에 어려움에 닥쳐
서 회피하여 몸을 온전히 하고 집안을 보호하는 것에 마음을 쓴다면 그만이
지만, 그렇지 않고 제갈공諸葛公이 직접 고생을 다하고 악무목岳武穆이 등에 땀
을 적시며 은혜를 갚은 것을 스스로 기약하여 대의를 세상에 펴고자 한다면,

64 월산(月山) 용봉산(龍鳳山): 월산은 현재 홍성읍 서쪽에 있는 백월산(394미터), 용봉은 현재 홍성


읍 동북부에 있는 용봉산(381미터)을 가리킨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23

병사가 아니면 토벌할 수 없고 성이 아니면 지킬 수 없습니다. 선봉을 뽑고


보루를 수축하는 것이 실제로 오늘에 시급한 일입니다. 국가가 편안하여 즐
긴 것이 이미 오래되어 군제가 해이해져 흙처럼 무너질 재앙이 조만간에 닥
칠 것이지만 일을 맡은 사람은 어리석어 알지 못하고 사람은 알아도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통곡하고 눈물이 흐릅니다. 계
속하여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지만 멈춰지지 않습니다.
형님이 저의 생각을 선택하여 채용할 뜻이 있다면 선봉을 뽑는 방법과
보루를 수축하는 제도도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 깊이 생각
하여 처리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또 제가 정성을 다하려는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군율을 엄중히 하는 것입니다. 군법은 반드시 일정한
규정이 있어 은혜로 맺으면 오기吳起처럼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빨고 법으
로 처단하면 제갈량처럼 친구를 참수합니다. 모든 일에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군율이 엄하다고 합니다. 군율이 엄하면 차마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군율을 엄중히 하지 않고 은혜만을 주로 한다면 병사는 나
와 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끓은 물에 나아가게 하고 불을 밟게 하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곽자의郭子儀가 관용으로 병사를 다스린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때가 같지 않고 형세가 다른 점이 있으니 형께서는 재삼 생각해 보시기 바랍
니다 라고 하였다.

19일 [十九日]

초토사가 금마천金馬川에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직접 전사한


장병과 순절한 사람에게 술을 부어 제사를 지냈다. 또한 사람을 보내 신에게
12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제사를 지내어 고하고 죄를 지어 죽은 사람을 불러 안심을 시켰다. 김병돈을


제사지내며 말하기를, 내가 살리려고 하였고 적이 죽이려고 한 것을 사람들
은 알 것이다. 임금 섬김을 충이라고 하고 어미 섬김을 효라고 했으니 달리
무엇을 비교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주홍섭 형제를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아! 2명의 주씨 형제는 누가 더 나은지를 알기가 어렵다. 어찌 애주愛蛛의
정65을 잊어버리겠는가 라고 하였고, 한기경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네
아비가 너를 부르니 붉은 대추棗丹66가 있고, 네 어미가 너를 기다리니 색동
옷班衣67이 있네. 붉은 작설綽楔68이 너의 집안을 빛나게 할 것이니 너는 와서
임금의 은혜를 받으라 고 하였다.
병사들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자식을 기다리려고 마을 어귀에 가고
형님을 보러 산등성이에 올라가며 아내는 울부짖고 어린 애가 우는 것이 내
옆에 있는 듯하다. 나라에서 은전恩典을 베풀 것이니 죽고 사는 것에 유감을
갖지 말고 너의 혼령은 각각 너의 집으로 돌아가라 고 하였다.
이창욱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예산에서 잃어버린 것을 홍주에서 거두어
서 산 자가 화를 면했으니 죽은 자의 공이다 라고 하였고, 교생校生 6명을 제사지
내면서 말하기를, 자리가 우뚝하니 누구나 알고 높이지 않겠는가? 이 적들이 모

65 애주지정(愛蛛之情): 주희(朱熹)의 주(朱)와 거미의 주(蛛)가 서로 음이 같기 때문에 거미를 아끼는


것을 말한다. 사모하는 정을 뜻한다.
66 조단(棗丹): 효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증자가 아버지 증석(曾晳)이 대추를 좋아했던 것을 생각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대추를 먹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67 반의(班衣): 늙으신 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 노래자(老萊子)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
로 효심을 말한다.
68 작설(綽楔): 기려 세우는 홍살문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25

르고 이 문을 감히 침범했는데 너희 6명이 없었다면 누가 성인의 관冠과 선비의


의복을 지키겠는가? 선비는 죽었어도 바름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유기석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진실로 죽음에 합당하여 그 꾸
짖음에 위엄이 있고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았으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하
게 여긴다 라고 하였고, 죄를 지어 죽은 사람을 불러서 타이르기를, 사람이
죽으면 바로 귀신이고 귀신은 사람보다 영험하다. 귀신은 다시 생각해보아
라. 하늘이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 스스로 죽지 못하고 누가 죽였는가? 아!
너희들아, 내 마음이 정말 슬프다 라고 하였다.

20일 [二十日]

조정에서 판서判書 박제관朴齊寬을 파견하여 호서를 선무했는데, 이 날 홍주에


도착했다.

27일 [二十七日]
치사면雉寺面 신리新里의 옥사獄事를 초토영에 논보하기를, 분부해서 도달하
여 받은 감결에 고남高南 아랫마을에 사는 이성진李成振의 발괄白活69에 의하면,
그의 아비가 애초에 동도에 물들지 않았는데, 10월 그믐에 덕산땅에 갔다가
치사 신리의 윤덕배尹德培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습니다. 덕배를 지금 잡아들
여 법에 따라 처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여 죄인 윤덕배를 회동하여
장자狀者70를 압송해서 상세히 사실을 조사하고 확실하게 보고하라 고 하였

69 발괄(白活): 관아에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70 장자(狀者): 소지를 올린사람, 즉 이성진을 가르킨다.
12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습니다. 죄인 윤덕배를 바로 잡아들여 일찍이 이성진의 아비와는 무슨 원한


이 있었는지, 어떻게 때려서 죽는 데까지 이른 연유를 엄중히 조사하고 세밀
하게 물었더니, 죄인이 말하기를, 저는 성진의 아비와는 평소에 얼굴을 알
지 못하는데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지난 10월 그믐은 바로 동적東賊이 성城을 침범했다가 패배하여 흩어지는
때였습니다. 제가 사는 치사면의 유회 회원들이 초막을 설치하고 지켰습니
다. 도망가는 동학의 무리를 만나면 바로 검문하여 죽이거나 잡아서 초토영
에 바친 자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유회에 참여하여 분명히 목도하였습니다.
그 때에 마침 어떤 노인이 황급히 뛰어 지나갔는데, 유회의 회원 한사람이
잡아서 물어보니 말이 모호하고 행색이 수상하였기 때문에 그 짐을 뒤져보았
더니 동학표東學標 2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의 분노가 일제히 폭발
하여 한 목소리로 죽여야 한다고 하고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찼는데 어찌
그 성명을 물어 볼 겨를이 있으며 누가 그의 거처를 알겠습니까? 그래서 죽
게 되어 바로 땅에 묻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홍천洪天, 天은 川의 오기 지동池洞에
사는 김공실金公實이 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너희 동네에서 죽여서 묻은 자가
혹시 고남의 이씨 노인인가? 지금 그의 아들 성진이 아비의 시신을 찾으려고
가까운 마을에서 사방으로 찾고 있다. 설령 그것이 확실한 지를 알지 못하고
알려 주더라도 혹시 맞으면 성진의 입장에서도 하나의 좋은 일이다 라고 하
기에, 저는 어리석은 생각에 일이 생길 줄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방하다고 대
답을 하였습니다.
성진이 땅을 파서 진짜 자신의 아비임을 확인하고 시신을 지고 갔기 때문
에 처음으로 그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진이
공실을 증인으로 세워 자신의 아비가 저에게 맞아서 죽었다고 하며 저를 주
범으로 여겨 영문營門에 고발을 하였으나 이것은 적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살
홍양기사 洪陽紀事 127

해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 곳


에 있던 사람이 적류賊類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때리려고 하지 않으며 누구나 죽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은
자의 죽음은 실제로 사람들이 난당을 함께 없애려는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
다. 지금 저의 이름만이 주모자로 거론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특별
히 분명하게 조사하여 논보해서 뜻밖의 화를 면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
습니다.
그래서 김공실을 바로 잡아오려고 하니 소장을 낸 이성진이 김공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자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잡아들여 조사하였
더니, 김공실이 말하기를, 이성진의 아비가 신리에서 죽은 일은 들어서 알
고 있으나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난 11월에 신리를 가는 도중에 이성
진과 4 5명이 그 아비의 시신을 찾으려고 마을을 두루 돌아다녔기 때문에
저는 저 윤덕배를 만나 성진이 시신을 찾는 일을 이야기하고 만약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혹시 너희 마을에 일이 생길까 걱정된다고 하였더니, 윤
가尹哥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어찌 걱정하겠는가? 시신
이 있는 곳을 이미 알고 있으니 네가 알려주라. 하필 나에게 묻는가 라고 하
였기 때문에 정말로 알려주었습니다. 성진이 시신을 찾은 뒤에 도리어 저를
의심하고 그것을 알게 된 연유를 따졌기 때문에 윤가를 통해 들었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진이 이것으로 윤가를 주모자로 삼은 것이지 실제로
제가 정녕 증거를 내세워 준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네가 성진의 친척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시신을 잃어버리거
나 찾는 것은 네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또한 신리의 주민이 아닌데 남의 동
네에 일이 있거나 없는 것을 네가 어찌 간섭하는가? 왕래하며 일을 찾아 농
간을 부리고 사단을 야기하니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너는 이가李哥, 이성
12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진에게 시신을 찾은 것을 공으로 삼아 사심이 있고 해당 마을에는 큰 일이


있을 것이라고 공갈을 치며 토색질을 했을 것이다. 마음을 먹고 모의를 한
것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하라. 또한 네가 성진 아비가 신리에서 죽어 어디
에 묻었는지를 누구로부터 알게 되었는지를 한 마디 한 마디 바른대로 자백
하라 고 하였더니, 김공실이 말하기를, 이가에게 정말로 조금도 사심에 구
애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신리 마을에서 호戶마다 2두斗의 조租를 받았고, 이
번 일은 저의 장인 하여범河汝凡이 신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상세히 알게 되었
습니다 라고 하여, 바로 하가河哥, 하여범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신리 마을의 상하노소上下老小가 모두 와서 전후의 사실을 등소等訴하였는데,
윤덕배의 공초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신리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직접
때렸다고 하며 서로 다투어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그 일을 진술하기를, 지
난 10월 그믐은 바로 어떤 때입니까? 저 사방으로 흩어진 적을 사람들이 잡
아 죽였습니다. 어리석은 저 성진의 아비는 바로 늙고 패악한 퇴물로 망령되
게도 평탄한 길을 한가롭게 걸을 계책을 내고 위험한 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일부러 어겼으며 비도의 표를 얻어 몸을 보호하는 부적을 만들었습니
다. 유군을 만나 잡혀서 그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갔는데, 사도邪道에 물들
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니 누가 믿으려 하겠습니까? 만약에 신리의 백성들로
하여금 일을 처리하는 의를 알아 그 표를 가지고 가서 그 목을 바치고 그
곳의 일을 바로 보고하게 했다면 공을 논하여 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찌
오늘의 송사가 있었겠는가? 지금 이 작은 잘못으로 난리 중의 마을사람들을
심하게 추궁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짐 속의 표는 지금은 검증할 곳이 없어
의심할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유막에서 사람을 보고 검문한 것은 바로 통행하는 규정으로
선비를 보호하고 비도를 토벌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세상의 일상적인 실정
홍양기사 洪陽紀事 129

입니다. 성진의 아비만 절대로 검문하지 않을 리가 없고 죽일 만한 행적이 없


다면 반드시 보호할 유도儒徒인데 어찌 악의를 가지고 가담했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고 증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로 헤아려보아도 의혹을
깨뜨릴 수 있으니 가식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성진에게 말을 한다면 사람의
자식으로서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에 누군가가 때렸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고발한 것은 당연하나 이런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늙은
아비의 무모한 행동을 만류하지 못하여 위험한 곳에 들어가게 했고, 이후에는
원수의 물증을 얻었다고 하였으나 오래 지나서야 비로소 말을 했습니다. 이것
은 모두 실정에 가깝지 않아서 모두 그 말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한마디 말로 한다면, 예로부터 병란 중에 뜻밖에 죽음을 당한 자가 어찌
한정되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참을 지나 의심스런 처지에 송사訟事를 일으
킨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지금 성진의 아비는 반드시
죽을 처지를 자초했고 또한 죽일만한 단서가 있어서야 어찌하겠습니까? 송
사의 실정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십시오. 이 송사의 발단은 전적으로 김공실
이 야기시킨 데에서 연유했으나 다행히 이웃마을에 일이 있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남을 위해 시신을 찾아주어 대략 덕색德色71이 있을지 염려되었
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호마다 조 2두의 재물을 거두고서도 그 욕심을 채우
지 못하여 다시 어리석은 백성에게 화를 전가하고 법을 훼손하려고 했으나
그 간사한 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기꾼은 징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진옥鎭獄에 가두시고, 윤덕배는 비록 주범으로 지목받고 증거
를 알려준 무고誣告를 받았으나 마을 전체의 일인데 죄가 편중되어서는 안됩
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피고는 처분을 기다려 거행할 것이고 모두 그대로 옥

71 덕색(德色): 남에게 조금 고마운 일을 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말이나 태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13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에 가둬두며 연유를 첩보합니다.

29일 [二十九日]
초토사가 본영本營, 초토영의 장관將官과 각 고을의 유회장儒會長 농보장農堡
長 소모관召募官 의병장 전망인戰亡人 절의인節義人 열행인烈行人의 공로功
勞와 사실을 따로 갖추어 성책해서 논보하였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군부장관 軍部將官

영장營將 홍건洪楗 전 영장前 營將 한택구韓澤 토중군土中軍, 향병의 지휘관 박


봉진朴鳳鎭, 별군관別軍官 전 군수前 郡守 이주승李周承 유학幼學 정기황鄭基璜 조
종세趙鍾世 서상신徐相臣 정한조鄭翰朝 출신出身 송태현宋台顯 최낙규崔洛圭,
참모관參謀官 전 중군前 中軍 박홍양朴鴻陽 전 도사前 都事 한응준韓應俊 전 영장
前 營將 장정식張定植 유학幼學 이종원李鍾遠 이두종李斗鍾, 종사관從事官 전 도사
前 都事 윤자혁尹滋赫, 대솔군관帶率軍官 전 오위장前 五衛將 표구석表龜錫, 양향관糧餉
官 좌수座首 이규승李奎承, 영선감관營繕監官 전 오위장前 五衛將 장영식張永植, 오진
영관五陣領官 김상범金商範 김종헌金鍾憲 김주현金周炫 한상익韓相翼 이능연李
能淵, 순초군관巡哨軍官 이석범李錫範, 기교譏校 김석교金錫敎, 수성감관修城監官 최동
훈崔東薰 이흥조李興朝 한덕용韓德鏞 최응순崔應淳 출신出身 이희원李熙元
이영식李永植 유상묵柳相 이희겸李熙謙 이계춘李啓春 박춘식朴春植 한영륜
韓永崙 심은서沈恩瑞, 선계감관繕械監官 이응로李應老 호장戶長 김관섭金寬燮, 기관
記官 이창억李昌檍, 형리刑吏 최학연崔學淵.
유회장儒會長
전 승지前 承旨 정헌조鄭憲朝 전 군수前 郡守 김세희金世熙 전 현감前 縣監 이기
홍양기사 洪陽紀事 131

호李基鎬 전 군수 이주승李周承 전 학관前 學官 이능순李能淳 전 오위장 박영시


朴永蓍 진사進士 조문영趙聞永 전 참군前 參軍 조주현趙周顯 전 오위장 김영한金
永漢 출신出身 오주영吳 永 정인호鄭寅好 유학幼學 이장헌李章憲 이근학李根
學 임익현林翼鉉 윤용유尹容裕 서인보徐仁輔 이건영李建永 심광택沈光澤 정
기황鄭基璜 정순해鄭舜海 이상우李相宇 김상중金商重 박순환朴舜煥 최의영崔
義榮 안창식安昌植 송진옥宋瑨玉 김병희金秉熹 채상만蔡相晩 김복동金福東
전 학관 이규응李奎應 출신 남건희南建熙 유학 홍관후洪寬厚 윤선직尹善稷.
농보장農堡長
전 현감 민기호閔岐鎬 전 학관 이규응李奎應 진사 표학수表鶴洙 유학 황영
수黃英秀.
소모관召募官
진사 이장규李章珪.
의병장義兵將
전 현감 이시우李時宇.
전망인戰亡人
증 군무참의贈 軍務參議 김병돈金秉暾 증 군무주사贈 軍務主事 이창욱李昌旭 주
홍섭朱弘燮 주창섭朱昌燮 정려旌閭 한기경韓基慶 유학 홍경후洪敬厚 이종국李
鍾國 동몽童蒙 신태봉申泰鳳 태안泰安 전 감찰 김계련金啓連 한량閑良 이명숙李
明淑 포수砲手 김우련金佑連 박신근朴信勤.
절의인節義人
홍주 유학 유기석劉基錫 덕산 전 도사 황종원黃鍾元 해미 유학 김상화金商
華 예산 전 오위장 김명황金命璜과 그의 아들 한정漢廷 서산의 아전 송봉훈宋
鳳勳 홍주 교생校生 오경근吳景根 최민지崔民志 최학신崔學信 방세영方世永
방석규方錫珪 이만오李萬五.
13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열행인烈行人
홍주 고故 학생 學生 유진뢰兪鎭雷의 아내 이씨 송종록宋鍾祿의 아내 정씨鄭氏.

난중기문을 덧붙인다 [附亂中記聞]


보령현의 어떤 처자 1명이 동도에 끌려가다가 미리 숨겨 두고 있던 숟가락
끝으로 자결을 하였다. 난도가 놀라고 두려워서 이후부터는 부녀자를 욕보이
는 패악한 행동을 그만두어 1개 현이 그 은혜를 입었다.
홍주의 유생 유진뢰의 아내 이씨와 송종록의 아내 정씨鄭氏는 모두 일찍이
과부가 되었으나 늙은 시부모를 봉양할 수 없을 것을 걱정하여 차마 결심을
하지 못하다가 동도가 일어나서 욕설이 자기에게 미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모두 약을 먹고 자살을 하였다.
보령현의 조씨趙氏부인 송씨는 정숙한 여자였다. 그 집안이 제법 넉넉하여 해
마다 쓰고 남은 곡식으로 재산 늘리는 것을 도모하지 않고 모두 손님을 접대하
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자식을 가르치는 비용으로 썼다. 늙어서 며느리와 자
식의 말을 들은 뒤에는 가산은 점점 늘어갔으나 손님은 점점 줄었다. 그 자식이
함께 교유하는 자들이 모두 재물을 늘리는 부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식을
불러 꾸짖고 다시 직접 집안 일을 단속하여 옛날 규례를 회복하니 마을에서 칭
송하였다. 그 증손에 이르러 늙은 과부와 어린 애만이 있었다. 동요가 일어났으
나 난도들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송씨네 집에 침입하지 않았다.
동요가 일어났을 때에 마침 노비를 풀어주는 조령朝令72이 있었는데, 난도가 이
것을 빙자하여 행패를 저지르고 마음대로 빼앗았다. 홍주의 어떤 사람에게 나이
어린 여종이 있었는데, 그 노비문서를 내어 주어 떠나가게 하였다. 여종이 이에

72 갑오개혁 당시 개혁조항에 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33

손가락을 물어 뜯어 피가 문서를 적시었고 소리내어 울며 끝내 떠나가지 않았다.


홍주의 푸줏간 종의 자식이 저들의 꾀임에 빠져 어느 날 밤에 주문을 외었는데,
그 아비가 심하게 매질을 하고 깊숙한 방에 가두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목천의 유생 주경섭朱經燮이 비도의 협박을 받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차라
리 지하의 무두귀無頭鬼가 될지언정 어찌 인간세상에서 성인이 짓지 않은 글을
읽겠는가 라고 하고, 바로 칼을 빼어 자살을 하니 저들이 놀라 흩어졌다.
목천현에 어떤 촌노村老 1명이 있었는데, 비도에게 협박을 당하여 말하기
를, 나는 그대의 신통한 술법으로 총구멍에서 물이 나온다고 들었다. 내가
시험해 볼테니 그대는 내가 쏘는 포를 받아 보라 고 하니, 저들이 더욱 억압
하였다. 늙은이가 바로 새로 갈은 도끼를 들어 자신의 발을 자르면서 말하기
를, 우리 마을의 사람 중에 적을 따르는 자는 이 도끼로 내 발처럼 그 머리
를 자르겠다 라고 하니, 적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다.
전의全義 땅에 향천鄕賤, 천민 1명이 비도에 억지로 들어갔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
를, 나에게 난적의 자식이 있으니 어찌 구차하게 살겠는가 라고 하고, 마침내 음
식을 끊고 굶어 죽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 아내도 말하기를, 내가 차마 부도不道하
고 불효한 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라고 하고, 역시 전혀 먹지 않고 죽을 것을
맹서하였다. 그 사람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가서 이 일을 고하며 말하기를,
나 한사람을 죽여 내 어머니와 아내를 온전히 하겠다 라고 하니, 적도 놀라고 두
려워서 바로 그들을 떠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군부의 장관 유회의 회장 의병장 소모관 전몰자 열행인의


제목에 대한 보고 [報軍部將官會長及義兵召募戰亡烈行人題目]
군부장관
영장 홍건
134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계책을 다하여 벽루壁壘의 모양을 바꾸어 성을 지켰다. 어머니의 병환에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2명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은 비유를 인용할 수 있다.
그 자리에 나아가 융무戎務를 보아 비로소 천리마千里馬의 숨겨진 뜻을 폈다.
전 영장 한택구韓澤
처음에는 담담하게 일이 없는 듯하다가 끝내 떨쳐 일어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부절符節을 지니고 가서 위무慰撫를 다했으니 공적에 따라 보답을 받아야 했다. 그
러나 갑자기 병으로 교체가 되니 모두 그가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중군中軍 박봉진朴鳳鎭
일을 처리하는 것이 확실하고 조심스러우며 근실하였다. 예산에서 패하여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포위를 뚫고 혼자 탈출하였다. 해미성에서 선봉이
되어 승리했으나 공을 사양하고 그것을 자처하지 않았다.

별군관別軍官 이주승李周承
방략이 넉넉하고 명성이 일찍 드러났다. 유음諭音을 펴서 비도들을 귀화시
키고 오랫동안 고생하며 면을 돌아 유회를 창도하여 저 강한 적을 상대하고
떨쳐 일어나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별군관 정기황鄭基璜
처음에 유장儒長이 되어 인심을 동요시키는 소문을 진정시켰다. 늦게 좌막
佐幕에 임명되어 마침내 여러 번의 전공戰功을 세웠다.

별군관 송태현宋台顯
군무를 잘 알고 과감한 용기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왕사王事에 힘써서
부탕도화赴湯蹈火73의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35

별군관 최낙규崔洛圭
책략들을 모두 수행하여 막부幕府의 속관屬官이 모두 추대하였다. 치밀하
고 상세하게 공무를 처리하여 군읍의 선비가 모두 청렴하고 공평하다고
하였다.

참모관參謀官 서상신徐相臣
억지로 막료幕僚을 응낙하여 고상한 선비의 기상을 더럽히는 것 같았으나 묵묵
히 장막帳幕의 계책을 운용하여 아낙네가 치밀하게 도모하는 것을 보는 듯하였다.

참모관 정한조鄭翰朝
적의 동정을 정탐하여 안으로 기포譏捕하는 방법에 도움을 주고, 유군을 인
솔하여 밖으로 성원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참모관 박홍양朴鴻陽
무예가 출중하고 일처리가 뛰어나서 적의 기밀을 기찰하였다. 직접 정찰
을 나가 1달 동안 고생을 하며 1개 성省에서 도적의 뒤를 밟아 체포하였다.

참모관 한응준韓應俊
병학兵學에 정통하고 당시의 깃발 색깔을 바꿨다.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반
년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괴로움을 겪었다.

참모관 장정식張定植
부절을 맞춘 것처럼 계책을 세운 것이 어긋남이 없었고, 재물을 내어 군수

73 부탕도화(赴湯蹈火):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을 밟는다는 뜻으로 어려움과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136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를 보태어서 군중軍中이 호경지탄呼庚之歎74을 면하였다.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경내境內에 장정壯丁을 조사하는 수고가 없게 하였다.

참모관 이종원李鍾遠
유회를 이끌고 격문을 전하여 이웃 군의 사람들 중에 호응하지 않는 이
가 없었다. 나루터의 길을 끊고 배를 침몰시켜서 이웃 성省의 적이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참모관 이두종李斗鍾
막료를 응낙하고 지혜를 내어 계책을 도와서 늘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성城이
위태롭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구원하고 1대隊를 담당하였다.

종사관從事官 윤자혁尹滋赫
저 양호의 교차하는 곳에 비도가 가장 극성스러운 것을 보고 포의布衣를
입은 일개 선비로 몸을 떨치어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여러 고을의 유회가
뒤를 따랐고 경내를 나간 관군이 모두 앞을 다투었다.

종사관 조종세趙鍾世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이 군사의 계책을 도와 먼저 승패를 정했는데 손
바닥에 보여주는 것처럼 확실하였다. 적의 동정을 정찰하여 요충지를 잘 알았다.

74 호경지탄(呼庚之歎): 군량을 빌리는 괴로움을 뜻한다. 춘추(春秋)시대에 오(吳)의 대부 신숙의(申叔


儀)가 노(魯)의 대부에게 군량을 꾸어 달라고 했더니, 수산(首山)에 올라 경계(庚癸)라고 외치면
승낙하겠다 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37

종사관 표구석表龜錫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군향軍餉, 군량을 돕고 단지 그릇을 기울여 남기는 것이
없었다. 서명좌막署名佐幕, 막료으로 돌과 화살을 무릅썼으며 공로가 있었다.

향관餉官 이규승李奎承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여 실제로 훌륭한 아녀자와 같은 손길이 있었
다. 먹을 때마다 반드시 배부르게 먹여서 병사들의 환심을 깊이 얻었다.

영선營繕 장영식張永植
온 성내의 집이 기다렸다가 횃불을 들어 5개 진陣의 병사들이 추운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오진영관五陣領官 김상범金商範 등 5인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촌정村丁, 장정을 5개 부대로 나누어 그들을 교습敎習하는데
늘 고생을 하였고 늘 갑옷을 입어 이 가 생겨날 정도로 삼동三冬을 지나며 잠잘
겨를이 없었다.

순초군관巡哨軍官 이석범李錫範
적고 나약한 군사들을 지휘하여 홀로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직접 크고 작
은 싸움에 참가하여 자주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기교譏校 김석교金錫敎
기찰을 매우 은밀히 하여 사정을 알아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어렵고 위
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법망에서 빠진 우두머리를 결박하였다.
138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수성감관修城監官 최동훈崔東薰 등 12명


판삽版 75을 가지고 일을 끝냈다. 3리里의 성城과 7리의 곽郭, 그리고 자물
쇠를 단단히 하여 재난에 대비하였다. 1명이 10,000명을 감당하여 성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선계감관繕械監官 이응로李應老
도검韜鈐76을 다루는 데에 뛰어나 요속僚屬, 동료이 모두 연달鍊達, 장인로 추대하여
공야工冶하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그 기계가 정밀하고 예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호장戶長 김관섭金寬燮
7효孝 집안의 가훈을 이어받아 30일 동안 싸움터에 나가 힘을 다해 충성으
로 직접 앞장을 섰다.

기관記官 이종응李鍾應
사악한 술법術法을 배척하여 미약할 때에 막았다. 수리首吏로서의 책임을 자
임하여 군무를 도와 변고에 대비하여 실제로 병사를 만족시키는 계책이 많았다.

형리刑吏 최학연崔學淵
공이公移, 공문를 다루는 데에 민첩하여 혼자 감당하며 고생을 하였다. 포로
의 사송詞訟에 조리가 있었고 반드시 적의 실정을 찾아내었다.

75 판삽(版 ): 성을 쌓는데 사용하는 기구를 말한다.


76 도검(韜鈐): 병서(兵書)인 6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을 말한다.
홍양기사 洪陽紀事 139

홍주洪州 도회장都會長 정헌조鄭憲朝


태평성대의 연로한 관리로서 많은 선비들의 영수領袖였고 3가지를 갖춘 달
존達尊으로 사람들의 신망이 일찍이 있었다. 소속한 유회를 이끌어 일향一鄕의
사기士氣가 그것에 의지하여 비로소 진작되었다.

유회장儒會長 김세희金世熙 등 35명


공황 黃77으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바른 가르침을 오랫동안 닦아 집에
거처하면서도 벼슬하는 것처럼 하여 늘 나라를 걱정하며 공公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한 기운과 한 목소리로 일어나서 위정척사衛正
斥邪의 거사를 하였다.

김복동金福東
70세의 늙은이가 어찌 구하는 것이 있겠는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충임을 알
뿐이다. 천만 명을 내가 가게 할 수 있다. 먼저 유생을 일으켜서 싸움터에 나갔다.

덕산德山 면천沔川 당진唐津의 홍관후洪寬厚와 해미海美 서산瑞山 태안泰安


의 윤선직尹善稷.
6개 고을에 관이 비게 되어 어지러움이 끝내 진정되기가 어려웠다. 2명의 선비를
얻어 백성을 이끄니 완악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비로소 향배向背를 알게 되었다.

농보장農堡長 민기호閔岐鎬 등 4명.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요새에 자리잡아 그것에 의지하여 밖으로부터

77 공황( 黃): 한(漢)나라 때의 순리(循吏,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인 공수( 遂)와 황
패(黃覇)를 말한다.
140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의 구원부대로 삼았다. 4개의 방패를 동여매고 4개의 갑옷을 수선하여 급보


를 들으면 떨쳐 일어나서 반드시 먼저 달려갔다.

소모관召募官 이장규李章珪
실제로 공로가 많아 상을 베풀어야 한다. 의병의 깃발을 달고 병사를 모집
하여 모두 소모의 직분을 다했다고 하였는데, 서첩書帖을 거두었다가 다시 주
니 출처에 명분이 없는 것이 애석하다.

의병장義兵長 이시우李時宇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병사를 모으고 집안의 재물을 쏟아
그 군량을 끊이지 않게 하여 주둔한 병사들이 감복하여 따랐다. 극악한 적을 잡으
면 반드시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을 하였고 흩어진 백성들이 그를 믿고 안정되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김병돈金秉暾
마음으로 책략을 다하여 먼저 전공戰功을 이루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그
를 따라 죽음에 나아가게 할 수 있었다. 그의 담략을 미루어 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끝내 죽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이창욱李昌旭
부고 鼓를 잡고 병사들과 거의 고생을 함께 했고 중군의 소임을 오랫
동안 하며 무기와 갑옷을 깔고 잤다. 그래서 적에 나아가 죽는 것을 서로
다투게 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주홍섭朱弘燮형제
한번 죽는 것을 가볍게 여겨 칼날을 밟고 자신의 몸과 집안을 돌아보지
홍양기사 洪陽紀事 141

않았다. 두 혼령을 불러 위로하니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알기가 어렵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한기경韓基慶
뜻이 숙성하여 진실로 공융孔融과 같았고 옥에 나갈 만한 어린 나이就獄에
용기있게 떨쳐 일어나서 왕기汪 처럼 사직社稷을 지켰다는 이름을 얻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홍경후洪敬厚
적이 없는 것처럼 보았으므로 용기 1,000만의 적이라도 반드시 갔을 것이
다. 사람의 힘을 얻어 12명과 함께 죽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이종국李鍾國
유군儒軍을 통솔하여 용감하게 100부夫의 우두머리가 되어 용감하게 적진
에 나아갔고 한번 죽겠다는 뜻이 결연하였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신태봉申泰鳳
저 사람은 아이가 아닌가? 남은 용기를 사고 싶다. 서로 맞붙어 싸워 힘이
다 빠졌다. 흉도도 그 의를 추앙하여 시신을 거두어 묻고 표지標識를 하였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김계련金啓連 등 4명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구제하였다. 같은 마을에서 남전藍田의 규약規約78을
강구하여 목숨을 바치고 수양성 陽城의 위험79이 몰려오는 외로운 성城을 떠
나지 않았다.

78 남전지약(藍田之約):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말한다. 송(宋)의 여대균(呂大鈞)이 자신의 고향인 남전


에서 실시한 향촌의 자치규약이다.
79 수양지위( 陽之危): 당(唐)나라 때의 장순(張巡)이 안녹산(安祿山)과의 싸움에서 수양성( 陽城)에
웅거한데서 연유하여 위태로움을 뜻한다.
142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절의節義 유기석劉基錫
악惡을 미워하는 것을 마치 원수처럼 여겨서 오랫동안 추악한 무리들의 반
감을 샀다. 재난에 직면하여 구차함이 없이 먼저 흉악한 적의 칼날에 죽음을
당했다.

절의 황종원黃鍾元과 김상엽金商燁
유장儒長으로서 저들의 분노를 사서 기어코 죽이려고 하였다. 적괴에 대항
하여 자신의 혀를 보이며 크게 꾸짖어 성망이 있었다.

절의 김명황金命璜 부자父子
한번 죽는 것을 이루고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두
개의 절개를 빛냈으니 가상하고 충효라고 할 만하다.

절의 송봉훈宋鳳勳 부부
사생을 함께 하며 그 임소任所를 떠나지 않고 아전으로서 충성을 다하였다.
시신을 잘 거두어 집에 안치하였다. 아내도 현명하였다.

절의 오경근吳景根 등 6명
광진狂塵, 동학교도이 성묘聖廟, 향교의 공자사당를 침범하였을 때에 6명이 죽음으
로 지켜 재복齋服이 피로 더럽혀졌고 한꺼번에 죽었다.

열녀烈女 이씨李氏 정씨鄭氏


시부모의 종양終養80을 하는 데 믿을 곳이 없음을 걱정하여 3년을 견디다
가 성城이 무너지는 치욕과 광포한 적의 패악悖惡을 듣고 일생을 죽음으로 맹
세한 뜻을 정하였다. (번역 : 최원경)

80 종양(終養): 죽을 때까지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