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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박봉양경력서朴鳳陽經歷書

본 자료는 박봉양이 농민군을 방어한 내용을 기록한 공적서로서, 군공조사


위원총대軍功調査委員總代 권재형權在衡에게 제출한 것이다. 박봉양은 이서 출신
으로 주서主書 벼슬을 얻었는데, 당시 운봉에 살면서 창의소를 설치하고 민보
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과의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2차 봉기 때에는 김개남이 북상하자 남원을 점령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때 박봉양은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였다는 협의로 선봉장 이두황에게 체포
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후 그 공로가 인정되어 내부주서로 임명되
었으며, 운봉에 공적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주요 내용으로, 박봉양이 1894년 8월 운봉에서 김개남과 공방전을 벌여 승
리한 내용과 2차 봉기 때 남원을 점령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동학
농민군 토벌 당시 사상자 명단과 노획한 물품 목록, 그리고 1894년 8월 경상
도 전라도 각 읍에 띄운 격문檄文과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가 그의 공적을 인정
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본 자료는 남원에 있던 김개남이 운봉을 거쳐 영남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사실 등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개남과 이에 대응한 민보군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원본은 박봉양의 손자인 박병래朴秉來씨가 소장하고
있다.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41

박봉양경력서朴鳳陽經歷書

운봉군전주서 박봉양경력서 [雲峰郡前注書 朴鳳陽經歷書]


봉양鳳陽은 보잘것 없는 시골사람으로 상喪을 당하여 여막에 거처하며 외부
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 지난해 비류匪類들의 소요로 몹시 혼란
하여 일도一道가 분탕되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었습니다. 저들 무리들의 정황
을 들으니 적괴賊魁 김개남金介男·이사명李士明·유복만劉福萬·남응삼南應三 등
이 남원南原 토비土匪 김홍기金洪基·김우칙金禹則·이춘종李春宗·박정래朴定來·
박중래朴仲來·김원석金元錫 등과 협동하여 성에서 버티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서로 연결하고 또 떠들썩하게 세를 과시하며 급히 운봉장영雲峰將營을
빼앗아서 영남嶺南을 유린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공
허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정황이 확연히 드러났으니 참으로 애통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성彛性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겠습
니까. 저는 격분이 되어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해 7월 26일에 궤연 筵1에 곡을 하여 아뢰고 뜻을 같이 하는 족당
族黨 30여 명과 가동家憧 수십 명을 불러 모아 도적을 막자는 단순한 계책을
언급하자 모두들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초기의 엉성한 모습이

1 궤연( 筵): 죽은 사람의 혼령(魂靈)을 위하여 차려 놓은 제향 도구를 모셔놓은 곳을 말한다.


24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갖추어졌습니다. 경내의 사민士民들에게 두루 알리자 며칠이 되지 않아 즐거


이 달려온 자가 도합 1,200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나누어 보내어 남
원 경계의 요충인 여원치女院峙·입망치笠望峙·유치柳峙의 세 길목을 굳게 지켰
습니다. 뒤이어 증가된 인원까지 합치니 총 5,011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위 100리의 협로에 적도賊徒들이 노리는 곳이 모두 37군데였습니다. 그래
서 지형의 중요도를 헤아려서 민정民丁을 뽑아 보내고 방어 장비를 고루 배치
하였습니다.
이즈음에 본 군郡의 군수郡守 이의경李義絅은 길을 재촉하여 8월 22일에 부임
하였습니다. 부임하는 당일에 먼저 각처의 방비에 대하여 묻고는 수성守城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반 사무를 충분히 토의하여 조치하고
엄격하게 신칙하고 위무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몸소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술과 고기를 나누어주고 날마다 식량을 지급하여 그들이 해이
해지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바칠 생각을 가질 지경에 이르렀
습니다. 그러나 적의 형세를 정탐하니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은 근심이 없지
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남의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서 와서 도와주기
를 요청하였으며, 또 본 관官에서 영영嶺營, 경상감영과 촉영矗營, 경상우병영에 위급
함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먼저 인접한 함양군咸陽郡에서 창포군砲軍 150명을
뽑아서 보내왔기에 본 읍의 수성군守城軍에 합세시켜 군사훈련을 하였습니다.
9월 17일 한밤중에 군의 서쪽 10리 떨어진 남원 경계 방아치方峨峙 위에 수
십 명의 적도들이 경계를 침범하였다는 경보가 갑자기 날아들었습니다. 그래
서 즉시 수하 100여 명의 포창군砲 軍을 데리고 힘차게 돌격하여 우선 마주
친 거괴巨魁 임창순林昌順을 베고 교전을 하고 있을 때 본관 이의경이 수성군과
함양의 원병을 거느리고 급하게 달려와 합세하여 총을 쏘고 화살을 날려 적
도를 10여리 밖으로 몰아내었습니다. 이때 총탄과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43

죽은 자가 17명이었으며 부상을 입고 달아난 자는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러나


아군 가운데 총탄에 맞아 죽은 자는 1명이었고 부상자는 20명이었습니다. 가
파르고 험한 길에서 궁지에 몰린 적을 추격하지 말라는 교훈이 갑자기 떠올
라서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서 본군을 지켰습니다. 이때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
撫營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저를 참모관參謀官으로 차출하였으며, 이어서 기복起
復2하여 전쟁터로 나가라는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이에 마음이 놀라고 움츠
러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단지 놀랍고 두려워하며 힘을 다하고 목숨
을 바쳐 보답할 생각만 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20일 경에 이르러 남원에 거주하는 전 군수 양한규梁漢奎, 선
비 장안택張安澤, 정태주鄭泰柱 등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府, 남원부의 성은 적
괴 김개남의 근거지가 되어 머물고 있었습니다. 저놈들이 지금 이미 전주全州
로 출발하였으니 이때에 귀 읍의 의사義士들이 부대를 나누어 성에 와서 수비
하면서 새 수령이 부임하기를 기다리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접한 지역을 서로 구원하는 도리에서 차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하기로 허락하고 24일로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창포군 2,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그 부의 성에 도착하니 김개남의 대부대가
과연 이미 철수한 뒤였습니다. 성에 남아 있던 무리들의 숫자가 얼마였는지
는 모르겠으나 소문을 듣고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성에 있던 관리와 백성들 남녀노소가 울부짖으며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운봉의 의병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성의 힘없는 백성들은 생명을 보전할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진영을 두고서 약간의

2 기복(起復): 부모가 죽어 3년상을 치르기 전에 관직에 나오는 것을 말한다.


24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토비를 잡아서 다스리고 적도들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곡식의 수효를 맞추어


서 본부의 사민士民과 관속들에게 맡겼으며, 염려하지 말고 성을 지키라고 이
르는 곳마다 효유한 뒤에 군사를 지휘하여 돌아왔습니다.
그 후 며칠이 되지 않아 적괴 유복만·김경률金京律·남응삼·김홍규金洪
奎·김우칙·이춘종·김원석 등이 적당을 거느리고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습
니다. 이들은 각 방坊의 곡물과 짚신·목면·담배·피물皮物·죽물竹物 등을
많이 빼앗아서 각 청廳에 쌓아두었습니다. 또한 상인들의 포백布帛을 강제로
빼앗아 새로 깃발과 군복을 만들어 다시 기세를 떨치며 장차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향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러한 때에 누가 간담이 떨리
고 머리카락이 송연해지지 않겠습니까. 이에 적의 상황에 대한 정탐꾼의 보
고에 따라 방어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11월 13일에 군의 서쪽에 있는 관음치觀音峙의 방수장防守將인 전 주부前主簿
정두회鄭斗會가 와서 말하기를, 고개 아래 남원 산동방山東坊 부동촌釜洞村 앞에
성에서 나온 적들이 많이 모여서 장차 우리 경계를 넘어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원부사에게 알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수성군과 방어군
2,000명을 뽑아서 데리고 14일 축시丑時, 오전 1시~오후 3시 쯤에 관음치 정상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인 후에 높은 곳에 올라 정찰을 하니, 부동촌 앞에
모인 적도 중에 담양潭陽의 남응삼과 남원의 관노官奴 김원석 등이 그들 무리
의 각 포包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저들의 이른바 접주接主 무리들이 전대前隊와
후대後隊를 조직하여 노비와 사령 및 무부巫夫들과 함께 깃발을 펼치고 크게
나팔을 불고 음악을 연주하며 태연히 산으로 올라와서 본 고을의 경계를 침
범하니 그 세력이 대단하였습니다.
만약 아군이 산을 내려가서 적을 상대한다면 길이 험하고 비탈이 가팔라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45

돌격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나누어 반은 산 위에


머무르면서 뒤에서 응원하도록 하고 반만 통솔하여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먼저 교전을 펼치다가 거짓으로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천천히 군사를 이
동시켜 점차 산으로 올라가며 몰래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썼습니다. 그리하
여 본 경내의 요해처에 다다른 뒤에 급히 아군의 발걸음을 돌려서 탄환을
쏘면서 교전하였습니다. 또 뒤에서 호응하는 군사로 하여금 남쪽과 북쪽의
꼭대기를 에워싸고 돌과 화살을 퍼붓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좌우에 잠복
한 병사들이 임시로 만든 목대완구木大碗口를 발사하여 저들 무리들을 많이 죽
이고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끝내 저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고 더욱 날뛰
었습니다.
그래서 11월 14일 인시寅時, 오전 3~5시부터 15일 진시辰時, 오전 7~9시까지 교전
하는 동안 곧바로 평정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같이 싸우는 사졸들과 하늘을
가리키며 맹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단검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며
전진하여 눈앞에 닥친 저들의 괴수인 이용우李用右·박중래·고한상高漢相·조
한승曺漢承·황경문黃京文 등 다섯 놈을 죽이자 적의 기세가 마침내 꺾였으며
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승세를 타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할 때,
구덩이에 빠지고 좁은 길에서 넘어지고 총탄과 화살 및 칼날과 창끝에 목숨
을 잃은 자의 숫자를 나중에 계산하였더니 2,0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다만
전투에서 승리하여 개선할 때 적도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수습하니 그 숫
자가 상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읍과 마을의 사녀士女들이 술과 밥을 가져와서 길을 막고 먹여주었
으며 더 이상 후환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가벼운 걸음으로 회군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군 중에서 목숨을 잃은 자가 8명이었으며 부상을 당한 자는 25명이
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무리 수천 명을 죽였으나 죽고 부상당한 아군 30여명
24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을 생각하면 어찌 통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죽은 자를 장사지내고 부상당한


자를 구원할 때 진주晉州 전 만호前萬戶 윤순백尹順伯이 촉영矗營의 지시에 따라
원병 2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본군의 수성군에 합류시키고 따로 적
의 형세를 살폈습니다.
11월 24일에 남원 송내촌松內村의 김원집金元執과 양상렬梁相烈이 그 부중府中
의 적의 형세를 살피고 와서 말하기를, “지금 성 안에 모여 있는 적 이사명·
유복만·김경률·김홍기·김우칙·이춘종·이춘흥李春興·권일선權一先·김원
석·최진악崔鎭岳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대장大將을 자칭하는 중놈 등의 무리들
은 4,000명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 유복만은 운봉의 군세軍勢가 매우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일전에
그 무리 300여 명을 데리고 곡성谷城 길로 출발하였습니다. 그 밖의 근 1,000
명은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러 각 마을로 흩어졌으며 성에 남아있는 자는
3,000명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틈을 타서 토벌하지 않는다면 사방의
적들이 반드시 날마다 모여들어 그 세력이 점차 커져서 끝내 도모하기 어려
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본군의 군수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군의 서쪽 불
선치佛仙峙로 출발하였다가 다시 남원으로 길을 돌려 부동촌 뒤에서 유숙하였
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남원 동쪽 10리 떨어진 남평촌藍坪村 앞에 이르러 군사
를 머무르게 하고 식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때 본군 유치柳峙의 방수장 오재언吳在彦의 급보를 받아보니, 장수長水의
비괴匪魁 황내문黃乃文이 무리를 이끌고 유치 아래의 반암磻巖가는 길에 와서 관
음치 전투에서 패배한 잔당과 합세하여 길가의 시골마을과 원근의 산록에 불
을 지르고 바야흐로 경계를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 군수는
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임지로 돌아가고 봉양은 군사를 재촉하여 길을 되돌아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47

가 곧바로 번암방蟠巖坊3 원촌院村에 이르렀으며, 날이 저물어 그곳에서 유숙하


였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의 무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창졸간에 교전하여 저들의
무리 21놈을 때려죽이고 36놈을 사로잡자 나머지 무리들은 산과 들로 달아
나서 장수 경계의 두메산골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수습하여 호궤하
였습니다.
28일에 군사를 통솔하여 바로 남원부 동문 밖 5리 떨어진 빈 들판에 도착
하여 군인들에게 새벽밥을 먹도록 한 후에 방천 뒤의 울창한 숲속에 잠복시
켰습니다. 그리고 일을 함께 도모하는 여러 명과 더불어 산 위에 올라가서
성내 및 원근의 적의 형세를 관찰하니, 그 부府의 남쪽 3리 떨어진 애현艾峴
위에 흉도 수백 명이 모여 있으면서 성 안의 적과 서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군砲軍 100여 명을 나누어 배치하여
총을 쏘면서 몰아내니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갔습니다.
군사를 지휘하여 네 갈래로 나누어서 세 갈래는 동·서·북쪽의 세 문의
바깥에 매복하게 하고 한 갈래는 바로 남문 밖으로 들이닥쳐 적의 무리들을
자극하여 나와서 싸우도록 하였습니다. 적은 감히 나오지 못하고 성 위에 늘
어서서 돌을 날리고 총을 쏘니 아군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남문 밖의 민가에 몸을 숨기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총을 쏘자 저들 무리들
은 상황이 다급함을 보고는 횃불을 아래로 던져 불길이 인가로 번졌으니 그
들의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신시申時에 이르러 그의 아들 양준良俊과 흥준興俊 및 포군들과 함께 장작을

3 번암방(蟠巖坊): 본디 남원부에 속했으나 1895년 장수군으로 편입되어 상 번암, 중번암, 하번암으


로 나뉘어졌다. 장수와 남원의 길목에 있다.
24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안고 불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성문 아래로 돌진하여 한편으로 불을 놓고


한편으로 민가에서 나무사다리를 찾아내어 가져가서 성에 기대어서 크게 소
리를 질렀습니다. 군사들이 개미떼처럼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쏘자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어서 또 동문과 서문의 두 문에서 불길이
치솟자 저들 무리들은 급히 북문을 열고 도주하거나 혹은 성을 넘어 달아났
습니다.
당시 날이 이미 캄캄해져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기 힘들어서 즉시 군사
를 철수시켰습니다. 그런데 저들 무리들이 성 안에서 흩어져 달아날 때 칼날
과 총탄에 쓰러진 자가 30여 명이었으며 사로잡힌 자가 100여 명이었습니다.
사실을 조사하여 괴수 표자경表子景·최진철崔鎭哲·고량신高良信 등 8놈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위협에 못 이겨 따라온 자들이었기
때문에 곤장을 쳐서 풀어주어 귀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아군을 점검하니 총탄
에 맞아 사망한 자가 5명이고 부상자가 84명이었습니다. 사망자는 시신을 메
고 와서 장사지냈으며 부상자는 약으로 치료하였습니다. 그대로 며칠을 머물
면서 부민府民들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군사를 철수할 생각이었습니다.
읍과 시골의 백성들이 밥과 술을 가져와서 다투어 군사들을 먹이면서 성
을 되찾아준 노고에 감사하고 도망간 적들을 잡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궁리하고 탐색하였는데 그 부府의 사인士人 김택주金澤柱·오주영吳柱永이 민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적을 잡을 계책을 서로 의논하
였습니다.
12월 3일에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전주全州에서 와서 소인배들의 참언을 들
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니 서로 용인하지 않는 모습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부
의 모든 일을 경군京軍과 일본군에게 맡기고 부의 남쪽 40리 지점의 산동원山
洞院으로 군사를 이동시켜 구례求禮와 하동河東에 있는 동태를 탐색하고자 하였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49

습니다. 같은 달 5일에 일본군 대대장大隊長4이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군무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나주羅州로 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달 7일에 출발하여 11일에 나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서로
만나서 묻고 대답하는 도중에 갑자기 화를 내면서 결박하여 구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원통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수감되었습니다. 섣달 그믐
날에 경사京司로 압송되었으며 서울에서도 석 달 동안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재판을 거쳐 을미년 3월 29일에 비로소 풀려났습니다.
이어 내부內部의 부름을 받아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 공무를
보고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의 경력은 이상과 같습니다. 전후에 전투를 하며 함께 공로를 세운
자들과 사상자들 및 획득한 기물 등은 아래에 열거하였으니 참고하십시오.
격식에 따라 증인을 세워 품고稟告합니다.

개국開國 504년 9월 2일 전 주서이며 양호도순무영 참모관을 역임한 박봉양


입증인 전 군사마軍司馬 김응진金應鎭
전 군수郡守 김정수金 洙

초비군공조사위원총대군부협판剿匪軍功調査委員總代軍部協辦 권재형權在衡 각하

함께 공을 세운 사람
전 군사마 김응진, 전 군수 김정수, 전 찰방察訪 박봉규朴奉奎, 전 오위장五衛將
박형철朴烱喆, 유학幼學 박량준朴良俊, 김영춘金永春, 박흥준朴興俊, 박봉주朴奉珠, 전

4 일본군 대대장: 일본군 현지 총지휘관인 미나미(南次郞)중좌로,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단계에 나주


에 주둔하였다.
25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주부主簿 정두회鄭斗會. 이상은 4차례 적을 토벌하였음.


전 영장營將 박귀진朴貴鎭, 유학 박홍조朴洪祚, 호장戶長 박일화朴日華, 유학 오재
언吳在彦, 한량閑良 윤승렬尹承烈, 최대룡崔大龍, 이봉권李鳳權, 이방吏房 박광식朴光植.
이상은 군량을 공급하고 3차례 적을 토벌하였음.
전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 1차례 적을 토벌하였음. 남원부에서 포창군砲
軍 60 명을 뽑아서 일본군과 함께 장흥長興 땅으로 갔음.

4차례 적을 토벌할 때 사망한 사람


김무안金務安, 최암회崔巖回, 박정민朴正民, 김영호金永浩, 박동이朴童伊, 윤원근尹
元根, 김수용金水用, 강영문姜永文, 황권일黃權日, 김이성金伊成, 김건지金乾之, 정종완
鄭宗完, 홍소영석洪小永石, 이윤용李允用
부상당한 군인: 129명

4차례 적을 토벌할 때 획득한 기물


불란구佛蘭口 3문 - 본읍의 군기軍器에 소속시킴.
양총洋銃 4자루 [3자루는 본도 관찰사의 지시에 따라 완부完府, 전라부로 보내고 1자루는 일본군

이등소랑伊藤小朗이 가져감]

천보조총千步鳥銃 15자루
조총鳥銃 473자루
- 합계 488자루를 본읍의 수성청守城廳5에 소속시켰는데, 그 중 300자루는
일본군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남원부로 보내고 남은 188자루는 대부분
망가져서 군기軍器에 포함시켰으며, 일본 순사가 부수어 매각함.

5 수성청(守城廳):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고을마다 설치한 임시기구로 수성군을 두었다.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51

삼혈포三穴砲 3자루 [본도 전주관찰사의 지시에 따라 완부로 보냄]

장전長箭 1,300개 [수성청에 소속시킴]

환도環刀 31자루
철편鐵鞭 22자루
철창鐵 55자루
- 이상 3가지는 전투에 참가한 군인에게 나누어줌.
화약 305근
연환鉛丸 10말
철환鐵丸 3말
- 이상 3가지는 포군砲軍에게 나누어줌.
백본차일白本遮日 5개
백포장白布帳 7개
- 이상 2가지는 옷이 없는 군정軍丁에게 나누어줌.
- 이상 8가지는 본군의 군기軍器에 소속시켰으며, 일본군과 일본순사가 부
수어 매각하였음.
기치旗幟 83면
피갑皮甲 33벌
피주皮 39개
- 이상 3가지는 수성청에 소속시켰으며 모두 망가져서 소각함.
방패 55개
- 민가의 풀과 짚, 죽비竹扇, 사립문 문짝은 모두 소각함.
묘로구卯爐口 3개
- 2개는 망가졌고 1개는 온전함. 수성청에 소속시킴
25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쌀米, 평말 37석
- 15석은 본 군대의 군량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22석은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두 번째로 남원성을 수복할 때 성에다 내줌.

소 18마리
- 7마리는 경군京軍과 일본군에게 내줌.
- 9마리는 본 군대를 먹임.
- 나머지 2마리는 사상자를 위한 위령제와 치료를 위하여 본군에 남겨둠.
남원에서 공문을 보내어 가져감.

말 27필
- 12필은 경군京軍이 가져감.
- 5필은 병으로 죽음.
- 7필은 각읍에서 공문에 의거하여 내줌.
- 나머지 3필은 각읍의 공마公馬로 파발마로 사용함.

1894년 8월 일 전라도 경상도 각읍 격문초 [全羅道慶尙道各邑檄文


草 甲午八月日]
운봉창의소雲峰倡義所 전 주서 박봉양은 삼가 대의大義로써 호남과 영남 고을
에 사는 충효의 가문과 절의節義의 선비에게 포고한다. 오래 다스려진 나라에
서는 혹 재앙이 생겨나기도 하며, 어지러운 세상에는 충의忠義가 드러나게 된
다고 들었다. 우리 성조聖朝가 개국한 지 500여 년 동안 예의와 문명이 고금
에 우뚝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시운이 불행하여 사악하고 어그러진 기운이
삼남三南에 은밀히 흘러들자, 흉악한 무리들이 요사스런 정령을 빌어서 그림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53

자처럼 나타나고 이매 魅와 망양輞 6이 사람의 탈을 쓰고 횡행하고 있다. 크


게는 성읍에 개떼처럼 모이고 작게는 마을에서 쥐 떼처럼 와글거리는데 방백
方伯은 벙어리 정사를 하고 있으며 수령은 자리만 지키고 있다. 국법은 기강
을 잃고 천륜은 땅에 떨어졌다.
지나가면서 노략질하는 것이 적미赤眉7보다 심하며, 참람하게 행동하는 것
은 황건적黃巾賊보다 지나치다. 혹은 어린아이에게 홍포紅袍8를 입혀 군대의
앞에 싣고 다니며 거짓된 말을 하니 입에 담을 수가 없고, 혹은 바위에 고전
古篆9을 새겨 거짓으로 비결을 지어 잘못된 설을 퍼뜨리니 귀로 차마 들을 수
가 없다.
그 무리들을 속이고 대궐에 글을 올릴 때 자칭하여 계경鷄京, 경주를 말함
의 유생이며 서추틈徐酋闖으로 개명하였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정씨鄭氏이다.
심지어 깃발에 특별히 ‘팔유대부八酉大 ’10라고 썼으며, 서추틈의 기이한 형
상을 일컬어 닭벼슬과 용비늘鷄冠龍鱗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
을 선동하면서 꺼리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그 반역의 정황을 조사하면
만 번을 능지처참하여도 오히려 가벼우니 산천이 일제히 노하고 사람과 귀신
이 함께 화를 낸다.
우리 조정의 여러 문무 관료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무기의 날을 세우고 깃

6 이매망량( 魅 ): 얼굴은 사람 모양이고 몸은 짐승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네 발 가진 도깨비를 뜻한다.


7 적미(赤眉): 중국에서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 말기에 농민반란을 일으킨 자로, 후에 후한(後
漢)의 광무제가 된 유수에게 평정되었다.
8 어린아이 홍포(紅袍):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전투이후 영광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어린아이에게 붉
은 옷을 입히고 앞세운 일로 이 아이를 이인(異人)으로 받들었다.
9 바위에 고전(古篆): 동학농민군 지도자 손화중 등이 고창 선운사 절벽 미륵불상에서 세상을 바꾸
는 비결을 꺼냈다는 전설을 말한다.
10 팔유대부(八酉大 ): 정(鄭)자의 파자(破字)이다. 1892년 동학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는 서병학
서장옥 등이 주동했는데 서추틈 은 오식으로 보인다.
25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발을 휘둘러 쉼이 없이 이들을 죽여서 멸절시켜야 한다. 그러나 성덕聖德이


하늘과 같이 크시어 여러 차례 은전을 내리시어 차근차근 간절하게 깨우치시
어 귀순하도록 힘쓰셨으니 비록 교척 11의 마음이나 짐승의 심성을 가지
고 있더라도 반드시 감읍하여 순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당逆黨들은 도리
어 더욱 교만하고 횡포하여 흉도凶徒들을 불러 모아 남원과 전주 등 각 고을
을 함락하였다. 나라 창고에 있는 무기를 빼앗아 성곽에 웅거하여 험준한 지
역을 지키며 감히 호령하며, 장차 영남으로 향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
하고 있다. 겉으로는 비록 일본을 배척한다고 하나 속으로는 반란을 도모하
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충신들이 피눈물을 삼켜야 할 날이며 열사들이 쓸개
즙을 맛보아야 할 때이다.
아, 우리 삼남은 특별히 200년 동안 국가의 성대한 은혜를 입었으며, 추로
鄒魯의 습속을 권장하고 관대冠帶12의 고장으로 대우하였다. 봉양은 충의忠義에
서 우러나오는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장사 수천 명을 모집하였으니 모두 호
남의 준걸들이다. 역당逆黨들과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기로 맹서하니
호남·함양咸陽·하동河東의 의사들 중에 소문을 듣고 와서 참여한 자들이 수
백 명이었다. 이들이 주먹을 어루만지고 이를 깨무니 그 형세가 마치 뇌성벽
력과 같았다. 지금 날을 택하여 출정의 제사를 지내고 남쪽의 대방帶方, 남원
으로 내려갔다.
여러 읍에서 누대로 벼슬하던 집안과 훌륭한 유생들은 반드시 격분하여

11 교척( ): 장교(莊 )와 도척(盜 )을 말한다. 장교는 중국 초나라때, 도척은 노나라때의 전설적


인 도적의 우두머리였다.
12 관대지향(冠帶之鄕): 국가의 교화에 항상 적극 따르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중국에 대해 조선은
관대지국(冠帶之國) 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중화(中華)의 풍교(風敎)를 사모하고 있음을 비유한 말
이다.
박봉양경력서 朴鳳陽經歷書 255

의로운 전쟁에 달려와서 함께 역당을 주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혹 사


악한 것에 미혹되고 더러운 것에 오염된 자가 있더라도 과거의 잘못을 깨닫
고 완전히 고쳐서 함께 왕실을 떠받치며 공을 세워 속죄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만약 미혹함에 빠져 깨닫지 못하고 역당을 도와 함께 죄를 저지르는
자가 있다면 의병이 이르는 곳에서 그를 죽이고 멸족시켜 한 점의 혈육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밖에 화적의 잔당과 가뭄이 든 지역의 유민들이 의식
衣食을 구걸하여 잠시 역당에 붙은 자들은 모두 흩어져서 풍요로운 고장으로
돌아가서 사도邪道를 멀리하여 각자 남은 목숨을 보전하여야 할 것이다. 역괴
逆魁의 수급을 베어 바치는 자에게 백금을 상으로 내릴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
들을 선도하고 충효로써 깨우쳐서 역당을 해산시키는 자에게는 천금을 상으
로 내릴 것이다.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여러 읍의 수령과 충효로운 선비들은 즉시 출발하
여 함께 본읍으로 와서 제단을 마련하여 맹약을 하고 힘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적도를 토벌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 격문을 각 읍으로 차례차례 전달하
여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일
것이다.

이도재가 전라도를 안렴할 때의 포계 [李道宰全羅道按廉時褒啓]


지난 갑오년에 흉악한 기운이 창궐하여 여러 군이 바람 앞의 초목처럼 쓰
러졌으나 유독 운봉의 전 주서 박봉양은 비분강개하여 종중의 재산을 출연하
고 문중을 모아 제단을 쌓아 출정의 제사를 지내고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도
모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내와 영남에 격문을 돌려 의병 5,000명을 모집하고
이들을 나누어서 38곳의 요로를 방어하였습니다. 최초로 방아치에서 전투를
하여 거괴巨魁를 크게 섬멸하였는데 당시 선무사宣務使가 그 공을 임금에게 아
25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뢰어 참모관參謀官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관음치에서 전투를 하였고 세 번째는 유치의 번암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매번 군졸들보다 앞장서서 수천 명의 적을 베고 수많은 무기들을
획득하였습니다. 승세를 타고 패배하는 적을 쫓아 남원 성 아래에 이르러 적
의 예봉을 무릅쓰고 먼저 성에 올라 마침내 성을 되찾았습니다. 대개 비적을
토벌한 이래로 이처럼 여러 차례 승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밖에 영남과 호남의 요충을 장악하였으니 적들이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운봉을 지켜낸 덕분이었습니다. 비단 본도에서만 그
업적을 보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백嶺伯도 그 공을 아뢰어서 내부 주사에 임
명하였으나 시기를 틈 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집에 있으면서 공을 말하지 않지만 영남과 호남에서는 그 공이 알려
지지 않고 인멸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은 해당 군
을 순시하여 그 전적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창의의 전말을 자세히 알아보았습
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공적은 우등으로 벼슬과 상을 내려 격려하고 권장하
는 것이 합당하옵니다.
1900년 경자庚子 3월 일
(번역 : 장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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