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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가 만들어진 960 년까지 정말 작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패권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싸움은 강했죠.
주전충
본명이 주온인 주전충은 오대 십국 시절을 연 무장이죠. 사실 본래는 반란군인 황소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 무술과 싸움질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황소의 밑에 들어가서는 여러가지로
큰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덕분에 황소에게 견제를 받게 되죠.
그런데 주전충은 교활한 사람이라 그걸 눈치채고 오히려 당나라와 내통하며 황소를 박살내버리게 됩니다.
급기야는 당나라 황제를 살해하고 어린 아이를 황제로 앉혀 꼭두각시로 만든후, 여러가지 준비를 끝내자
선위를 받고 당나라를 공식적으로 멸망시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후량입니다. 그 아이는 후에
독살시켜버리구요.
이존욱
자신감이 생긴 이존욱은 자신의 이씨성이 당나라의 국성임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하면서
당나라를 다시 세우고 황제가 됩니다. 이 나라가 후당이죠. 결국 후당은 후량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장승업은 환관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여러 환관이 병페를 저지른것이 많았지만, 장승업에 있어서는
해당이 없는 말로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 능력을 나라를 위하여 불살랐습니다. 이존욱은
그를 몹시 신임해 태원 방면의 군사 문제 모두를 장승업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으고
말을 사 모으고, 농경지를 개간하여 군량미를 보급하고 갈곳없는 유랑민을 정착시키는등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이 장승업의 도움 떄문에 이존욱은 아무런 걱정없이 후량과의 전쟁에 힘을 쏟을 수가 있었죠.
헌데 장승업은 아첨할줄 모르는 사람이라 이존욱은 살짝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연회 자리가
벌어지고 이존욱의 아들이 나와서 춤을 추자, 장승업은 그에게 한주머니의 재물과 말을 건넸습니다.
당나라 시대에는 그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제가 늙긴 했으나 자손을 위한 재물 따윈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재물을 아낌은 대업을 위한것이니,
재물이 모두 흩어져 버린다면 어찌 대업을 이룩하겠습니까?"
"네 놈은 본래 주온과 한 패거리가 아니냐? 어찌 대왕에게 아첨을 하며 그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느냐?"
한편 이존욱의 어머니이자 죽은 이극용의 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와 이존욱을 나무랐습니다.
다음날이 되서 술이 꺤 이존욱은 그때서야 잘못을 깨닫고 장승업에게 사죄했지요.
나중에 이존욱이 황제가 되려하자 장승업은 반대하지만, 이존욱은 듣지 않습니다. 실망한 장승업은
단식한 끝에 죽게 됩니다.
주덕위
후당의 장수인 주덕위는 이극용과 이존욱의 아래에서 무용을 떨친 장수입니다. 본래 그도 황소의 반란군
패거리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주덕위는 지혜가 풍부하며 눈에는 광채가 빛나고 웃어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기마전에 매우 뛰어나고 피어오르는 먼지구름만 보고도 기병의 숫자를 파악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극용이 황소군을 섬멸시키려고 하자, 주덕위와 나와 이극용과 한참을 어우려져
싸웠으나 결판을 내지 못했고, 이극용은 제안을 하나 합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주덕위는 그렇겠다 하고 승낙을 했지만 이극용은 곧바로 독수리를 쏘아 맞힙니다.
그걸 본 주덕위는 놀라서 말에서 내려 곧바로 충성을 바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후 무용으로 큰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이존욱이 유수광을 격파하라고 보낸 장수도 주덕위였죠.
주전충은 생전에 주덕위를 꺼림찍하게 생각해 "주덕위를 생포한다면, 그를 자사로 임명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진야차'라는 별명이 있던 후량의 장수 진장은 호기롭게 말합니다.
"주덕위는 내가 잡을 것이다."
주덕위는 진장을 발견하자 평범한 병사로 위장을 하고, 부하들에게 진장에게 일부러 쫒겨 그를 유인하라고
하였습니다. 진장이 신나서 달려오자, 주덕위는 곧바로 달려들어 그를 쇠망치로 때려 눕혀서 오히려
사로잡게 됩니다.
왕언장
이 왕언장으로 말할것 같으면 철창의 명수로서 무용으로 따지면 당대에 누구도 비할 바 없었으며,
주전충이 아직 주온이었던 시절부터 용맹하게 싸워 그를 보필해온 충신이었습니다. 처음에 왕언장은
수백명을 이끄는 대장이 되고자 하였으나 명성이 전혀 없어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왕언장이 "내가
가시덤불 속을 걸어다닐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하나도 나지 않을테니 그리 알아라." 라고 말했고 모두들
"어찌 가시덤불 속을 걸어가는데 상처가 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지만 왕언장은 실제로 맨발로
가시덤불 위를 걸었고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전충이 놀라서 달려와 그 모습을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왕언장을 등용하였죠.
풍도
풍도는 대단히 현명했고 수많은 공부를 통해 고금 학문의 일인자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검소하고
자기자랑을 하지 않는데다 백성들과 같이 논밭을 가는등 성실하기도 하였고, 명종은 풍도를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오대 십국시대에서도 드물게 태평성대였고, 사람들은 명종을
칭찬했습니다.
이렇게 석경당은 남의 나라를 데려와서 자기가 황제가 되어 이종가를 죽이고 개봉으로 도읍을 옮겨 936 년
새 나라를 건국하는데 이것이 진나라고, 바로 후진(後晉)입니다. 후진은 이름만큼 후진 나라였는데
순전히 요나라의 위성 국가 수준이었습니다. 매년 비단 30 만필을 바치고 하북의 연윤 16 주를 내주는데
송나라 때까지도 이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나라의 힘이 약해서 공물을 바치는건 어쩔수가 없다지만 그렇게
된 이유가 한 사람 욕심 때문이라는건 안타까운 노릇이죠. 더구나 석경당은 이존욱과 명종의 아래에서
많은 공을 세워 총애를 받고 백성들로부터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석경당의
아들 석종귀는 945 년에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는등 다시 나라를 부강하게 해보려고 하나, 욕심을 부려
수비가 아닌 직접 요나라로 쳐들어가다 요태종에게 대패하여 후진은 그렇게 멸망합니다.
이때 후진의 절도사이자 석경당의 부하로 많은 공을 세웠던 유지원은 요나라가 개봉을 박살낸 후 돌아가자
그 틈을 노려 왕조를 세웁니다. 이게 정당하다고 보기 힘든것은 후진이 요나라에 공격받을때는 장수가
출병 명령도 거부하고 가만히 있다가 왕이 사로잡혀가자 빈집을 노린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그는 947 년
한나라를 건국했는데 이것이 후한입니다. 과거 통일 한나라의 전한과 후한을 서한, 동한 이리 부르는것은
이 나라와 구분하기 위해서인듯도 합니다. 그는 광무제의 여덞번째 아들 유병의 자손임을 강조했으나,
그는 사실 돌궐 사타족 출신입니다.
유지원은 후한을 건국한지 10 개월 만에 죽고, 나라는 3 년만에 내분이 일어나 장수들을 무차별적으로
제거하는 황제 유승우에게 분노한 장수 곽위는 반란을 일으키고 유빈(劉贇)이라는 사람을 불러 황제로
삼지만 그가 죽자 자기가 황제가 되고 주나라를 건국합니다. 이 나라가 바로 후주(後周)입니다. 곽위는
황제가 된 후 수많은 개혁을 펼쳤고, 여러 선정을 펼쳤습니다. 죽었을때는 사치스런 장례 대신 간촐한
비석만 세웠습니다. 그리고 곽위의 양자가 세종이 되어 즉위를 하였는데 이 사람이 오대십국 시대 최대의
명군이라 평가받는 세종 시영 입니다.
후주의 세종 시영
세종은 정말로 뛰어난 왕이라, 전란으로 망가진 중원을 회복시켰습니다. 내정적으로는 농정에 유의하여
권농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민전, 호구를 조사하여 균세법을 시행하고 조세 부담의 공평을 도모하였으며
《대주형통》,《대주통례》등을 편찬케 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죠.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군사력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난세의 종결"을 목표로 그동안 오대의 황제들이 시행하지 못했던
천하통일을 목표로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먼저 고평의 전투에서 북한을 쳐서 힘을 없애고, 후촉을
멸망시킨뒤 친정하여 남당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과거 석경당 이후로 늘 부담스러웠던 북방의 요나라와
전면전을 벌여 승리하여 후주의 영광은 절정에 달합니다.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흔은 후주의 금군을 지휘해 군벌을 제압해 명성을 쌓았고, 이 집안에서 태어난
조광윤은 타고나면서 부터 무인이었습니다. 처음 후주의 세종이 북한과 겨루었을때 세종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나, 이때 조광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황제를 구원하여 신임을 얻습니다. 그후 난세종결을
위한 통일전쟁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다섯번을 싸워 다섯번을 이기고, 거란의 도움을 받은 군벌들
까지 격파합니다. 세종은 그를 굉장히 신임했고 조광윤 또한 충성심이 남들보다 뒤지지 않았습니다.
허나 세종은 앞서말한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황제가 즉위해 정국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때
조광윤은 최고의 군공과 명성을 지녀 황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이에 부하들이 계획을 세웁니다. 960 년, 조광윤은 요나라와 싸우기 위해 나서는 길에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서 잠시 묵게 됩니다. 술자리가 벌어지고, 평소에 무인 답게 취할때까지 마시는 버릇이 있던
조광윤은 술을 거푸 마시다가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러자 부하들은 곧바로 조광윤에게 황제의 옷을
입히고,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조광윤은 난감해하다가
황제 등극에 찬성합니다. 대규모의 병력과 함께 조광윤에 개봉에 돌아오자 후주의 어린 황제는 조광윤에게
황제를 넘겨줍니다.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한것이죠.
그러나 조광윤은 여러 과거의 황제들이 선양으로 자리를 넘겨 받으면 무자비한 숙청을 했던것과 달리,
물러난 공제 시종훈을 우대하였고 시씨 일족들을 법으로서 보호하여 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종훈이 죽었을때는 황제의 예로서 장사를 지냈죠. 후대의 사람들은 조광윤이 술에 취해 황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미화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요나라 군은 그때 쳐들어왔고 인질이 될 수도
있었던 가족들은 수도에 두고 왔던 조광윤 입니다. 어떻게 판단할지는 개인의 관점이겠죠.
이후 조광윤은 세종 시영의 유지를 이어받아 통일 사업에 전력을 다합니다. 963 년 형남이 멸망했고, 965
년 후촉을, 971 년 남한을 멸망시킵니다. 하지만 아직 천하 통일은 끝나지 않고, 그 대업은 동생인
송태종이 이어받게 됩니다.
송태종 조광의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조광의가 나와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남 조덕소가 아직 어리고 천하일통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후주 공제처럼 나라를 잃을까 두렵다. 아우가 제위를
물려받으라.' 라고 하셔서 내가 사양하니 형님이 도끼로 나를 위협하여 어쩔수 없이 제위를 받겠다고 하자
형님이 숨을 거두셨다."라고 주장하며 제위에 올랐습니다.
아무튼 송태종은 978 년 오월을 합병하고 979 년 북한을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