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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 십국 시대는 공식적으로 당나라가 멸망한 907 년부터

송나라가 만들어진 960 년까지 정말 작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패권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싸움은 강했죠.

주전충
본명이 주온인 주전충은 오대 십국 시절을 연 무장이죠. 사실 본래는 반란군인 황소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 무술과 싸움질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황소의 밑에 들어가서는 여러가지로
큰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덕분에 황소에게 견제를 받게 되죠.

그런데 주전충은 교활한 사람이라 그걸 눈치채고 오히려 당나라와 내통하며 황소를 박살내버리게 됩니다.

반란군에서 당나라의 공신으로 갈아탄 주온은 바로 그때 당나라에게서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데,


당나라에 충성하라는 뜻이지만 주전충 본인은 그걸 인왕중심人王中心이라는 단어로 해석하고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학살하는등 만행을 벌입니다.

급기야는 당나라 황제를 살해하고 어린 아이를 황제로 앉혀 꼭두각시로 만든후, 여러가지 준비를 끝내자
선위를 받고 당나라를 공식적으로 멸망시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후량입니다. 그 아이는 후에
독살시켜버리구요.

황제가 된 후에는 악랄한 짓이 한층 도를 더해, 단지 심심풀이로 옛 당나라 신하 30 여명을 강에 던져


버리는가 하면 양아들의 며느리와 간통하는등 온갖 패악을 벌였습니다.

결국 잠자던 도중 자신의 아들인 주우규에게 살해당했죠.


이극용

독안룡이라는 별명이 있는 이극용은 본래 돌궐계 사람이었습니다. 당나라가 기풍이 특이한것이, 몹시


호전적이라 주변의 다른 국가, 민족과 싸움을 벌이면서도 배타적인건 덜했죠. 아무튼 이극용의 본래
성씨는 사타(沙陀)이고 아버지는 사타적심(沙陀赤心)인데 성이 주사씨이고 아버지는 주사적심이라고도
하더군요.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때 당나라는 방훈의 난이라는 커다란 난이 있었습니다.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는데, 사타적심은 그


반란을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워 당나라의 국성인 이씨성을 받지요. 이건 나중에 후당을 세우는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이극용이 독안룡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가 태어날때부터 한쪽 눈이 작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시절부터 용맹무쌍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한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역시
당나라군에 패배하였습니다.

허나 황소의 난이 일어나고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했던 당나라는 이극용의 죄를 사해주고 난을 진압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극용의 용병술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여 황소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는데, 이극용의
정예병력은 "검은 갈가마귀 군대" 라고 해서 온몸을 칠흑같은 검은색 복장과 망토로 통일한 부대를 이끌어
주위로부터 두려움을 받았습니다.

아문절도사(雁門節度使)에 임명된 이극용은 883 년 장안을 수복하였고 다시 이듬해 884 년 황소군을


최종적으로 격파하여, 황소는 결국 자결하게 됩니다.

이제 황소의 난은 평정되었고,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앞서 말한 주전충, 이극용, 그리고 또 이무정


(李茂貞)이라는 군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중에 주전충에게 제거당합니다. 공신들이 모여 술자리를
벌이는 모임에서 이극용은 주전충을 비웃으며 모욕을 주죠. 그러자 주전충은 몹시 화가 났고, 둘은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싸움이면 몰라도 정치 게임에서는 주전충이 이극용보다 한수 위였습니다. 더구나 이극용의


갈가마귀 부대는 용맹하긴 하나 전쟁을 안하다 보니 그저 난폭한 부대에 불과해 조정에서 평판도 주전충이
더 좋았습니다. 둘은 이제 대놓고 군사를 사용해 겨루었는데 주전충은 결국 901 년 하중(河中) 지역을
점령하여 이극용은 태원에 갇힌 상태가 되고, 두려워질게 없어진 주전충은 902 년 이무정등을 살해하고
재상인 최윤을 죽였으며 수많은 조정 대신들을 학살하며 조정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앞서 말한대로 조정을 농락하며 결국 황제가 되죠. 물론 이극용은 이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본인은 꼼짝없이 갇힌 상태여서 손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몸이 안 좋아 죽어가고 있었죠. 그는
아들인 이존욱을 불러 화살 세개를 주면서 유언을 남깁니다.
"유인공 부자가 나를 배신하고, 거란의 야율아보기 또한 나와의 맹약을 배신했다. 주량(주전충을 말함)은
나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3 개의 화살 중 첫 번째는 유인공에게, 두 번째는
거란에게, 세 번째는 주전충을 멸망시킬 때 각각 사용하거라.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소원이다."

주전충과의 대립은 말 할것이 없습니다. 유인공은 하북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유수광은


아버지의 애첩을 건드렸다가 들통나자 유인공을 잡아 가두고 자기가 절도사직을 대신 합니다. 그리고 본래
이극용과 친하게 지내던 노선을 돌리고 주전충의 후량에 투항해서 그의 속지가 되었습니다.

거란,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한때 이극용과 거의 의형제 사이였고 함께 적을 공격하자고 손을


잡기도 했지만 이극용을 배신하고 주전충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극용은 죽어가면서도 이 세가지가 몹시
분했던 것이죠.

이존욱

예전에 이걸 이극용이라고 올린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존욱같습니다.


이존욱은 이극용의 아들입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이 있어 이극용이 아들을 데리고
당나라의 소종을 만나러 가자 소종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의 모습이 비상하니 나라의 기둥이
될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는 기술, 활을 쏘는 기술에 모두 능하였고
음률에도 조예가 있어 혼자서 100 곡이나 되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유지를 이어받은 그는
아버지의 사당을 만들고 세 개의 화살을 그곳에 세워둔 다음 적과 싸워 이길 때마다 포로의 귀를 잘라
그곳에 바치게 됩니다.

우선 이존욱은 부하를 파견하여 유수광을 물리쳐 첫번째의 복수를 하고 후량을 살펴봅니다. 그 당시


후량의 상황은 몹시 어지러웠습니다. 이때까지 주전충은 아직 살아있었지만 만행을 부리고 있었고,
이존욱이 군대를 이끌고 상대하자 이겨낼수가 없었습니다. 계속된 대패로 주전충은 자신감을 잃고.
나중에는 "아들은 이아자같은 사람을 낳아야 한다. 이극용은 죽었지만 계승자가 있으니 어쩔수가
없구나." 라고 한숨을 쉬기까지 합니다. 아자는 이존욱의 아명이었습니다. 911 년 백향 전투에서
패배하자 주전충은 완전히 의기소침하죠.

주전충은 자신의 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당하지만, 주우규 역시 1 년을 채우지 못하고 동생인 주우정에게


살해당하죠.

자신감이 생긴 이존욱은 자신의 이씨성이 당나라의 국성임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하면서
당나라를 다시 세우고 황제가 됩니다. 이 나라가 후당이죠. 결국 후당은 후량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끝낸 이존욱은 갑자기 술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세수와 폭정을


저질렀고, 군대에 환관을 감찰로 파견하는 제도를 부활시켜 무장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이에
친위부대들은 반정을 일으켜 이존욱을 참살하고, 이극용의 양자이자 이존욱의 시대에 무장으로 활약했던
이사원(李嗣源)을 황제로 삼으니 이 사람이 명종입니다. 명종은 7 년동안 재위를 했는데 바로 이 시대가
오대 십국 시대에서는 가장 평화로운 시기중에 하나였습니다. 아무튼 이존욱이 이렇게 승리를 할 수
있었던건 두 명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치에서는 장승업, 싸움에서는 주덕위의 도움이 있었죠.
장승업

장승업은 환관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여러 환관이 병페를 저지른것이 많았지만, 장승업에 있어서는
해당이 없는 말로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 능력을 나라를 위하여 불살랐습니다. 이존욱은
그를 몹시 신임해 태원 방면의 군사 문제 모두를 장승업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으고
말을 사 모으고, 농경지를 개간하여 군량미를 보급하고 갈곳없는 유랑민을 정착시키는등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이 장승업의 도움 떄문에 이존욱은 아무런 걱정없이 후량과의 전쟁에 힘을 쏟을 수가 있었죠.

헌데 장승업은 아첨할줄 모르는 사람이라 이존욱은 살짝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연회 자리가
벌어지고 이존욱의 아들이 나와서 춤을 추자, 장승업은 그에게 한주머니의 재물과 말을 건넸습니다.
당나라 시대에는 그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헌데 술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한 이존욱은 자기 아들에게 재물을 너무 적게 준다고 장승업을 나무랍니다.


"이보게, 내 아들이 쓸 돈이 없는데 자네는 어찌 그리 인색한가? 적어도 한 상자는 주어야지! 금고를
열게"

"재물과 말은 신의 봉록으로 산것이니 문제가 없습니다. 허나 금고는 대왕님의 병사들에게 보급하는데 쓸


중요한것이니, 어찌 공금으로 개인의 사정으 살피겠습니까?"

"이 늙은것이 나를 무시하는것이냐?"

이존욱은 대노해서 장승업을 몰아부치지만, 장승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충언을 계속했습니다.

"제가 늙긴 했으나 자손을 위한 재물 따윈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재물을 아낌은 대업을 위한것이니,
재물이 모두 흩어져 버린다면 어찌 대업을 이룩하겠습니까?"

이존욱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칼을 꺼내서 그를 겨누었습니다. 하지만 장승업은 계속 '차라리 죽는다면


내가 죽어서 선왕인 이극용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다' 며 뻣대었습니다. 보다못한 염보라는 신하가
장승업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장승업은 오히려 그를 걷어차면서 소리쳤습니다.

"네 놈은 본래 주온과 한 패거리가 아니냐? 어찌 대왕에게 아첨을 하며 그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느냐?"
한편 이존욱의 어머니이자 죽은 이극용의 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와 이존욱을 나무랐습니다.
다음날이 되서 술이 꺤 이존욱은 그때서야 잘못을 깨닫고 장승업에게 사죄했지요.

나중에 이존욱이 황제가 되려하자 장승업은 반대하지만, 이존욱은 듣지 않습니다. 실망한 장승업은
단식한 끝에 죽게 됩니다.

주덕위
후당의 장수인 주덕위는 이극용과 이존욱의 아래에서 무용을 떨친 장수입니다. 본래 그도 황소의 반란군
패거리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주덕위는 지혜가 풍부하며 눈에는 광채가 빛나고 웃어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기마전에 매우 뛰어나고 피어오르는 먼지구름만 보고도 기병의 숫자를 파악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극용이 황소군을 섬멸시키려고 하자, 주덕위와 나와 이극용과 한참을 어우려져
싸웠으나 결판을 내지 못했고, 이극용은 제안을 하나 합니다.

"만약 저 하늘위를 날고 있는 독수리를 쏘아 맞춘다면 내가 이긴것이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주덕위는 그렇겠다 하고 승낙을 했지만 이극용은 곧바로 독수리를 쏘아 맞힙니다.
그걸 본 주덕위는 놀라서 말에서 내려 곧바로 충성을 바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후 무용으로 큰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이존욱이 유수광을 격파하라고 보낸 장수도 주덕위였죠.

주전충은 생전에 주덕위를 꺼림찍하게 생각해 "주덕위를 생포한다면, 그를 자사로 임명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진야차'라는 별명이 있던 후량의 장수 진장은 호기롭게 말합니다.

"주덕위는 내가 잡을 것이다."

그말을 들은 주덕위는 진장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함부로 말을 하고 있구나."

주덕위는 진장을 발견하자 평범한 병사로 위장을 하고, 부하들에게 진장에게 일부러 쫒겨 그를 유인하라고
하였습니다. 진장이 신나서 달려오자, 주덕위는 곧바로 달려들어 그를 쇠망치로 때려 눕혀서 오히려
사로잡게 됩니다.

이렇게 주덕위는 용맹스러웠으나 너무 적을 경시하는것이 문제였습니다. 평소에 이존욱은 주덕위에게 그런


지적을 했지만, 결국 주덕위는 호류파 전투에서 후량의 맹장 왕언장에게 패배하고 참살당합니다.

왕언장

이 왕언장으로 말할것 같으면 철창의 명수로서 무용으로 따지면 당대에 누구도 비할 바 없었으며,
주전충이 아직 주온이었던 시절부터 용맹하게 싸워 그를 보필해온 충신이었습니다. 처음에 왕언장은
수백명을 이끄는 대장이 되고자 하였으나 명성이 전혀 없어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왕언장이 "내가
가시덤불 속을 걸어다닐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하나도 나지 않을테니 그리 알아라." 라고 말했고 모두들
"어찌 가시덤불 속을 걸어가는데 상처가 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지만 왕언장은 실제로 맨발로
가시덤불 위를 걸었고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전충이 놀라서 달려와 그 모습을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왕언장을 등용하였죠.

이존욱은 후량에게 번번히 승리하여 모두들 그를 두려워 하였는데 왕언장 만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이존욱이 왕언장의 부인과 자녀를 생포한 후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왕언장은 두 번
듣지도 않고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사신의 목을 날려버립니다. 이 소리를 들은 이존욱은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이때 이존욱은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에 차있어, 자신의 이(李)씨 성은 할아버지가 공을 세워 국성을


받은것이니 자신은 당나라의 이씨를 계승한다 말하고는 당나라를 다시 세웁니다. 이것이 바로 후당(後唐)
의 건국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후량의 주우정은 당황하여 왕언장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말했고 왕언장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수천명을 물리치는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왕언장이 죽을 힘을 다해 승리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하나, 후량은 이미 망하게 될 나라라


도리가 없었습니다. 간신배들이 중상모략을 하며 그를 모함했고, 왕언장은 조암과 장한걸이라는 소인들이
나라를 망치는것을 알고 그들을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조암과 장한걸은 왕언장을 미워하며
단응이라는 무장과 함께 그를 해치려 하였습니다. 단응은 왕언장을 매우 시기하고 있었기에 이에 동조하여
당시의 황제인 주우정에게 모함을 하였고, 왕언장은 죄도 없이 파면 되었습니다.

바로 그해 10 월, 형세가 몹시 위급해져 왕언장을 다시 등용해 단응과 함께 10 만군을 이끌게 하였지만


주력은 단응이 이끌었습니다. 적은 병력으로 뭘 해볼수도 없어 왕언장은 이존욱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이존욱은 왕언장을 놀려봅니다. "그대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여긴다고 하는데 어찌 나에게
사로잡혔는가? 자네는 아직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가?" "대세가 이미 기울어 인력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다네." 이존욱은 왕언장을 흠모하므로 그를 치료해주고 자신에게 귀순할것을
권고하지만 왕언장은 듣지 않았습니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법이지! 나는 나라에 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아침에 양나라의 장수가 되었다가 저녁에 당나라의 장수가
되겠는가!" 그가 결코 귀순하지 않을 것을 깨달은 이존욱은 어쩔수 없이 그를 처형합니다. 한편, 주력을
이끌던 단응은 5 만의 군사와 함께 귀순하고, 후당은 후량의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후량을 멸망시킵니다.

풍도

이존욱이 죽고 황제가 된 명종 이사원은 본래 이극용 때부터 싸움터에서 구른 무장으로, 알고 있는 글자도


몇개 되지 않고 예전의 역사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적절한 신하가
없는지 고심하게 되다가 풍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풍도는 대단히 현명했고 수많은 공부를 통해 고금 학문의 일인자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검소하고
자기자랑을 하지 않는데다 백성들과 같이 논밭을 가는등 성실하기도 하였고, 명종은 풍도를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오대 십국시대에서도 드물게 태평성대였고, 사람들은 명종을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명종이 죽자 석경당(石敬塘)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형세가 불리해지자 뜬금없이


요나라의 거란군을 불러 외세를 개입시킵니다. 이때 거란의 황제가 바로 요태종이었습니다. 이때
이사원의 양아들이자 마지막 황제인 이종가는 일이 글렀음을 깨닫고 최후의 불구경이나 하기 위해 낙양성
전체에 불을 저지르려 합니다. 이게 시행되었다면 동탁 이후에 다시 한번 낙양이 초토화가 되었겠지만
이종가의 부인이 이렇게 말했니다. "전하. 그렇다면 백성들은 궁궐과 성을 다시 지어야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종가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져 포기하고 자신의 누각에만 불을 지릅니다. 이
과정에서 시황제가 만들었던 옥새가 사라졌다 합니다.

이렇게 석경당은 남의 나라를 데려와서 자기가 황제가 되어 이종가를 죽이고 개봉으로 도읍을 옮겨 936 년
새 나라를 건국하는데 이것이 진나라고, 바로 후진(後晉)입니다. 후진은 이름만큼 후진 나라였는데
순전히 요나라의 위성 국가 수준이었습니다. 매년 비단 30 만필을 바치고 하북의 연윤 16 주를 내주는데
송나라 때까지도 이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나라의 힘이 약해서 공물을 바치는건 어쩔수가 없다지만 그렇게
된 이유가 한 사람 욕심 때문이라는건 안타까운 노릇이죠. 더구나 석경당은 이존욱과 명종의 아래에서
많은 공을 세워 총애를 받고 백성들로부터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석경당의
아들 석종귀는 945 년에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는등 다시 나라를 부강하게 해보려고 하나, 욕심을 부려
수비가 아닌 직접 요나라로 쳐들어가다 요태종에게 대패하여 후진은 그렇게 멸망합니다.

이때 후진의 절도사이자 석경당의 부하로 많은 공을 세웠던 유지원은 요나라가 개봉을 박살낸 후 돌아가자
그 틈을 노려 왕조를 세웁니다. 이게 정당하다고 보기 힘든것은 후진이 요나라에 공격받을때는 장수가
출병 명령도 거부하고 가만히 있다가 왕이 사로잡혀가자 빈집을 노린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그는 947 년
한나라를 건국했는데 이것이 후한입니다. 과거 통일 한나라의 전한과 후한을 서한, 동한 이리 부르는것은
이 나라와 구분하기 위해서인듯도 합니다. 그는 광무제의 여덞번째 아들 유병의 자손임을 강조했으나,
그는 사실 돌궐 사타족 출신입니다.
유지원은 후한을 건국한지 10 개월 만에 죽고, 나라는 3 년만에 내분이 일어나 장수들을 무차별적으로
제거하는 황제 유승우에게 분노한 장수 곽위는 반란을 일으키고 유빈(劉贇)이라는 사람을 불러 황제로
삼지만 그가 죽자 자기가 황제가 되고 주나라를 건국합니다. 이 나라가 바로 후주(後周)입니다. 곽위는
황제가 된 후 수많은 개혁을 펼쳤고, 여러 선정을 펼쳤습니다. 죽었을때는 사치스런 장례 대신 간촐한
비석만 세웠습니다. 그리고 곽위의 양자가 세종이 되어 즉위를 하였는데 이 사람이 오대십국 시대 최대의
명군이라 평가받는 세종 시영 입니다.

후주의 세종 시영

세종은 정말로 뛰어난 왕이라, 전란으로 망가진 중원을 회복시켰습니다. 내정적으로는 농정에 유의하여
권농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민전, 호구를 조사하여 균세법을 시행하고 조세 부담의 공평을 도모하였으며
《대주형통》,《대주통례》등을 편찬케 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죠.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군사력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난세의 종결"을 목표로 그동안 오대의 황제들이 시행하지 못했던
천하통일을 목표로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먼저 고평의 전투에서 북한을 쳐서 힘을 없애고, 후촉을
멸망시킨뒤 친정하여 남당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과거 석경당 이후로 늘 부담스러웠던 북방의 요나라와
전면전을 벌여 승리하여 후주의 영광은 절정에 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세종 시영은 병환으로 죽게 됩니다. 아직 젊은 나이었죠. 959 년 새롭게 황제가 된


공제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요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이틈을 이용해서 후주를 물리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호락호락 하지가 않은것이, 후주에는 가공할 명장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조광윤입니다. 어찌되었건 세종의 치세는 겨우 6 년에 지나지 않으나, 송나라 초기의 정책은 대부분
세종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만큼 그는 뛰어난 황제였습니다.
조광윤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흔은 후주의 금군을 지휘해 군벌을 제압해 명성을 쌓았고, 이 집안에서 태어난
조광윤은 타고나면서 부터 무인이었습니다. 처음 후주의 세종이 북한과 겨루었을때 세종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나, 이때 조광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황제를 구원하여 신임을 얻습니다. 그후 난세종결을
위한 통일전쟁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다섯번을 싸워 다섯번을 이기고, 거란의 도움을 받은 군벌들
까지 격파합니다. 세종은 그를 굉장히 신임했고 조광윤 또한 충성심이 남들보다 뒤지지 않았습니다.

허나 세종은 앞서말한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황제가 즉위해 정국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때
조광윤은 최고의 군공과 명성을 지녀 황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이에 부하들이 계획을 세웁니다. 960 년, 조광윤은 요나라와 싸우기 위해 나서는 길에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서 잠시 묵게 됩니다. 술자리가 벌어지고, 평소에 무인 답게 취할때까지 마시는 버릇이 있던
조광윤은 술을 거푸 마시다가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러자 부하들은 곧바로 조광윤에게 황제의 옷을
입히고,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조광윤은 난감해하다가
황제 등극에 찬성합니다. 대규모의 병력과 함께 조광윤에 개봉에 돌아오자 후주의 어린 황제는 조광윤에게
황제를 넘겨줍니다.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한것이죠.

그러나 조광윤은 여러 과거의 황제들이 선양으로 자리를 넘겨 받으면 무자비한 숙청을 했던것과 달리,
물러난 공제 시종훈을 우대하였고 시씨 일족들을 법으로서 보호하여 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종훈이 죽었을때는 황제의 예로서 장사를 지냈죠. 후대의 사람들은 조광윤이 술에 취해 황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미화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요나라 군은 그때 쳐들어왔고 인질이 될 수도
있었던 가족들은 수도에 두고 왔던 조광윤 입니다. 어떻게 판단할지는 개인의 관점이겠죠.

이제 황제가 된 조광윤에게는 공신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로 남았습니다. 황제가 된 몇 달 후,


조광윤은 진교에서 자신을 황제로 받든 석수신, 왕심기, 고희덕, 장령탁, 조언휘 5 대 공신을 불러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진심으로 감사하오.(…) 하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소. 물론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경들 중 누군가의 부하들이 언젠가 딴 마음을 먹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그러자 공신들은 모두 놀라 무릎을 꿇고 눈치를 보았고, 조광윤은 술을
마시며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모두들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삶을 편안히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뿐인데, 그나마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그러니 경들은 각자의 병권과 지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오.” 결국 공신들은 모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떠났고, 이렇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가장 민감한 문제인 공신의 문제를 해결 할수
있었습니다.

이후 조광윤은 세종 시영의 유지를 이어받아 통일 사업에 전력을 다합니다. 963 년 형남이 멸망했고, 965
년 후촉을, 971 년 남한을 멸망시킵니다. 하지만 아직 천하 통일은 끝나지 않고, 그 대업은 동생인
송태종이 이어받게 됩니다.

송태종 조광의

헌데 이 과정에서는 좀 의문스런게 있습니다. 조광윤이 죽던 날 밤 동생 조광의가 광윤의 침실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하들이 방문 밖에서 바라보니 누군가 도끼를
방바닥에 찍으면서 "그렇게 하라!" 라고 외치는게 촛불 그림자로 비치고 있었죠.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조광의가 나와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남 조덕소가 아직 어리고 천하일통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후주 공제처럼 나라를 잃을까 두렵다. 아우가 제위를
물려받으라.' 라고 하셔서 내가 사양하니 형님이 도끼로 나를 위협하여 어쩔수 없이 제위를 받겠다고 하자
형님이 숨을 거두셨다."라고 주장하며 제위에 올랐습니다.
아무튼 송태종은 978 년 오월을 합병하고 979 년 북한을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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