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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수록隨錄

본 자료는 무주관아茂朱官衙에서 중앙정부 및 전라도 각 지역의 관아와 주고


받은 공문서를 모아 엮는 것이다. 수록연대는 1894년 3월부터 1897년까지인
데, 본 국역총서 에는 1894년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번역하여 실었다.
주요 내용으로, 1894년 3월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발표한 포고문과 각 지
역 수령의 보고문 내용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전라감사의 계초, 무
주에 통고된 감결, 염찰사의 계초, 그리고 효유문 등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각 지역 수령의 동정 및 대책 등을 알 수 있다.
본 자료는 공문서로써 개인적 견해보다는 객관적 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당시 동학농민혁명의 동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원자료는 일본 경도대京都大 하합문고河合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수 록 隨錄 3

수록隨錄

무장현에서 동학인포고문을 베껴 올리다 [茂長縣謄上東學人布告文]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과 부자의 관
계는 인륜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는 곧으며, 아비는 자
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효를 행한 다음에야 가정과 나라를 이룰 수 있으며,
끝없는 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이 깊
고 자애로우며 신명하시고 총예하시어서, 어질고 곧은 신하들이 잘 도와 다
스리게 한다면, 곧 요순의 정치와 한나라의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꼭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바랄 수 있다.
오늘날 신하된 자는 보국輔國은 생각지 아니하고, 녹봉과 벼슬자리만을 도
둑질하며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첨하는 말을 일삼아 충성스럽게 간하는 선
비를 일컬어 ‘요언妖言’이라고 하고 정직한 사람을 일컬어 ‘비도匪徒’라고 한
다.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침학하는 관리가 많아져,
백성들의 마음은 나날이 더욱더 변해갔다.
안으로는 즐겨 생업을 할 수 없고, 밖으로는 보호하고 베풀어줄 대책이 없
다. 학정은 날로 더 심해가고 원성은 서로 이어져, 군신간의 의리와 부자간의
윤리, 상하간의 분수가 드디어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가 말
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하기를, “사유四維1가 펼쳐지지 않으면 국가는 곧 망한다”고 하였는데, 오늘


날의 형세가 옛날보다 심한 것이 있도다.
공경이하로부터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처한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몸을 살찌우고 집안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을 꾀하고 있다.
관료를 선발하는 것을 돈을 벌어들이는 길로 여겨서 과거를 보는 시험장을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모두 만들었으며, 수많은 재물과 뇌물들은 국가의
창고에 바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사사로이 차지하여 국가에는 부채가 쌓여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안일에 빠져 두려워하거나
거리끼지 않으며, 전국을 짓밟고 으깨어 만민은 도탄에 빠져 있다. 수령방백
의 탐학함이 참으로 그러하니 어찌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
의 근본이니, 그 근본이 다치게 되면 곧 나라는 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輔
國安民의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밖으로 고향에 집을 마련하여, 오직 혼자만
온전하기 위한 방도를 도모하고 다만 녹봉과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옳게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의 유민遺民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을 것을 갈아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니, 국가가 위험에 처하여 망하게 된 것을 그냥 앉
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전국이 마음을 같이하고 수많은 백성들의 의견을
물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살기를 맹세하였으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랄 일
이 있어도 절대로 두려워 움직이지 말고 각기 본업을 편안히 여기며 태평세
월을 함께 빌고 모두 임금의 덕화를 기린다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 사유(四維):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말한다.


수 록 隨錄 5

1894년 3월 27일 계초 [甲午三月卄七日 啓草]


이달 22일 도착한 무장현감 조명호趙命鎬의 보고 내용에, “이달 16일 무장
현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堂山 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난류배亂類輩 수천 명이
무리를 모아 가까이 다가와 머무르고 있으며, 그들의 종적이 수상하다고 전
하는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리한 서리와 장교를 보
내어 몰래 조사하여 알아보니, 이들은 본 읍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거의 모두
가 다른 읍의 백성들이었습니다. 해당 촌 백성들의 집에 모였는데 동학도東學
徒라고 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00여 명을 넘지 못하였으나, 16일부터 18일까지 며칠 사이에
밤낮으로 사방에서 몰려와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해당 촌의 앞에 있
는 평야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주하는 곳이 영광靈光과 법성法聖 양 읍의 경계
에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저들 무리 중 수백 명이 법성 진량면陳良面 용현
리龍峴里의 대나무 밭이 있는 곳에 가서 대나무를 베어 창을 만들었고, 혹은
각처에 있는 촌민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남아 있는 약간의 조총과 쇠뇌와
낫과 삽 등의 물건을 일일이 수색하여 빼앗아 갔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의 학學을 비방하거나 그들의 학에 반대하는 사람과 일
찍이 혐오했던 자를 모두 잡아가서 구타하였습니다. 이웃마을 석교촌石橋村
안덕필安德必의 집에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미리 사 놓은 쌀이 있었는데,
백미 60여 석도 또한 빼앗고 곧바로 그 집을 헐었습니다. 해당 촌에 사는
송경수宋京洙 집의 재산도 부숴 버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웃하는 면에
서 소요가 일어나면 평민들은 흩어졌습니다. 진실로 저들이 한 짓을 살펴보
면, 참으로 큰 변괴입니다.
근처에 있는 백성들은 금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
리와 향임을 보내어 이치를 따져 밝혀서 깨우치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사람
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을 보내어 명령을 내어 타일러서 해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 무리


의 기세는 수천에 가까워서 읍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저들
무리들이 ‘며칠 사이에 다른 경계로 옮겨갈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들 무리가 말한 것을 접하여 보니, 또한 ‘하루 빨리 경계를 벗어날 것’이
라고 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종적과 수상한 무리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습니
다. 그래서 서리들에게 다시 더욱더 몰래 탐지하게 하니, 부대를 나누거나
혹은 여러 곳에 흩어져 점차로 행장을 차리는 기미가 있으나, 그들이 향할
곳과 자취를 정확하게 탐지하기 어렵습니다. 물어본 이야기가 대개 이와 같
아서 우선 사실에 의거하여 보고牒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4일 도착한 흥덕현興德縣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이달 22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무렵에 어느 곳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북치며 나팔을 불고 총을 쏘았는데,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고창의 경계에서부터 본 현의 사후포沙後浦에 이르러 머물러서 숙박하
였고, 다음 날 3월 23일 곧바로 부안扶安 줄포茁浦를 향하여 갔다”고 합니다.
그날 3월 23일 도착한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의 보고서牒呈 내용에, “이달
23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무렵에 어느 곳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십여 명이
머리에 황건을 쓰고 손에는 쇠로 된 창과 죽창을 잡고 본 현의 흥덕 줄포에
도착하였는데, 점심 밥 3,500상을 배정하여 마련해 달라고 알려 왔습니다.
그 뒤를 따라서 2,000~3,000명이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와서 줄포의 사정射亭에 모였는데, 깃발의 구호는 인仁, 의義, 예禮, 지
智, 신信을 쓰거나 혹은 순천順天, 광주光州라고 썼습니다. 행색이 수상하여 심
히 놀라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잇달아 도착한 부안현의 보고 내용에, “부안현 줄포에 와서 모인 무리들은
3월 23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무렵에 줄포에서 출발하여 고부로 향할 것입니
수 록 隨錄 7

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4일 도착한 고부군의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고부
군수가 부임하여 취임인사를 하기 위해 감영으로 빨리 나아갔고, 3월 23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에 동학도 3,000여 명이 혹은 창을 지니고 혹은 죽창을
지녔는데, 총을 쏘면서 읍내로 난입하였습니다. 말을 탄자가 20여 명이었으
며, 모두 향교와 관청건물에 모였습니다. 저녁밥은 읍내의 서리와 민가에 나
누어 분담하도록 정하였으며, 그들이 행패를 부린 것은 끝이 없었습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3월 25일 도착한 고부군의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저들
무리들이 군무기 창고로 향해 가려다가, 먼저 실수로 화약고에 불을 내어 그
자리에서 즉사한 자가 몇 명이었고, 창에 찔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또한 많았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 무렵에서야 고부군의 서북쪽 사이에 난
길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4개 읍의 보고와 문장에서 보고한 것으로 그
들의 수를 세어보면, 혹은 수천 명이라 하고, 혹은 3,000여 명이라 하며, 또는
2,000명에서 3,000명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쪽은 많고 저쪽은 적어서 숫
자가 비록 같지 않으나, 처음엔 평민들이 없고 모두 동도였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서 갈수록 뒤를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대나무를 잘라 창을 만들고 포와 검을 거두어들였으며, 인가를 부
수고 돈과 곡물을 찾아내어 빼앗는 등의 여러 정상은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
다. 그들이 창궐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약고에 실수로 불이 붙었다고 말한
것은 비록 매우 모호하지만 그들의 행동들은 매우 놀랄 정도입니다. 잇달아
향교에서 발생한 일은 전에 없었던 일로 매우 놀랍고 두려운 것입니다.
이를 만일 빨리 무찔러 없애지 않으면 장차 오랫동안 시끄러워질 염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방도와 전략을 궁구하여 잡아들일 계획을 세웠
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습니다. 그런데도 고부 고을의 백성들은 두려운 나머지 진정되지 못하고 있


습니다. 후에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길거리에서 소문이 서로 전해져서, 마
을 사이에도 이제는 괜히 놀라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막 농사철이 되는데도
떠나는 자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일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
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이다. 그러한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 무리들이 점차 전진하여 막 금구 원평에 이르렀는데, 순영문에서는
곧 감결甘結을 내어서 감영 직할지와 가까운 읍에서 포군 수백 명과 보상褓商
수백 명을 뽑아 올리라고 하였으며, 아울러 병정들과 함께 성 안팎의 이민들
을 묶어서 용두치龍頭峙로 출진하게 하여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초토
사 홍재희洪載熙2가 경군京軍 1,500명을 거느리고 화륜선에 타고 내려갔으며,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육지에 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대인袁大人, 원세개
도 그 뒤를 이어서 또한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894년 4월 5일 계초 [四月初五日 啓草]


동학의 무리들이 지난 달 28일 곧바로 태인현泰仁縣 동헌과 내아內衙에 들어
가서 칼을 휘두르고 고함치면서 군기를 빼앗은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이달 초 1일에 도착한 태인현감 홍면주洪冕周의 보고 내용에, “저들 무리들은
그날 4월 초 1일 사시巳時 무렵에 금구현金溝縣 원평院坪을 향하여 갔습니다”라
고 하였는데, 같은 날 도착한 금구현령 김명수金命洙가 보고한 사연의 일반과
같았습니다. 4월 초 4일 도착한 금구현령의 보고내용에, “어제 4월 초 3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저들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갔습니다”라고 하고, 같은 날
도착한 태인현감의 보고 내용에, “저들 무리가 원평으로부터 와서 태인현 인

2 홍재희: 홍계훈의 다른 이름으로 본명은 홍재희(洪在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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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仁谷 북촌北村 용산龍山 등의 곳에 모여, 곧바로 머물러 잤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의 자취는 갈수록 세력이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을 토멸
하는 것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신영新營의 병사와 보
상褓商을 정하여 별초군으로 부대를 나누어 이끌게 하고, 한편으로는 태인·
금구 양 읍의 험하고 좁은 길목을 지키게 하고, 한편으로는 저들 무리들이
만나기로 한 곳에 군대를 보내어 타이르게 하였습니다. 하루 빨리 저들을 토
멸하기를 도모할 것이며, 이후의 상황은 잇달아 보고할 생각입니다. 그러한
연유를 아울러 빨리 아뢰며 그에 의하여 보고할 것입니다.

4월 초 5일 [同日]
4월 초 2일에 도착한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의 보고 내용에, “고부군 백산白
山의 남은 무리들이 본 읍에 살고 있는 그들 무리들을 충동하여, 하동면下東面
분토동分土洞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거의 500명 쯤 되었는데 각자 죽창을 들고
있었고, 또한 붉은 기를 걸었는데 깃발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씌어 있
었습니다. 또한 작은 깃발에는 부안, 고부, 영광, 무장, 흥덕, 고창 등의 읍호
를 썼습니다. 모인 무리 중에서 200여 명은 4월 초 1일 안으로 난입하여, 장청
에서 대기하던 순영문의 포군들을 그들이 맘대로 쫓아내며 말하기를, ‘지금
이들 장정을 모으는 것은 오로지 우리를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일제히 나가서 각자 자기가 하던 일을 종사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며, 그들
무리들은 곧이어 분토동을 향해 곧바로 돌아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월 초 3일 도착한 태안현감 보고 내용에, “어제 아침 일찍 저들이 태안현
공형들에게 사통私通을 보냈는데, 사통의 내용에, ‘시장에서 분전分錢하여 세
금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4개조 항목을 관가에 아뢰었습니다. 지금
부터 장시場市에 전령傳令한 것 중에서는 다시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되는 것
1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은 없을 것이며, 어떠한 명목의 돈과 곡물 중에서 양미 10석과, 돈 200냥을


곧바로 실어서 보내고, 그에 따른 값은 이후 구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 읍의 공형을 모두 즉각 잡아갔습니다. 요구한 돈과 곡물은 마련하
여 보낼 뜻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식의 위협과 협박을 또한 읍에 속한 마을들을 두루 다니면서
행하였으며, 사또와 여행자들도 수색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본 현의 장
신리長信里 신재명辛在明의 집에 사들여 놓은 쌀 120석을 집류한다고 하면서 다
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지난 분기의 지목전持目錢3 이라는 명
색名色을 들면서 4,000냥을 공형에게 추납하게 하였는데, 소위 지목전이란 것
은 어떤 명색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연이어서 요구하는 것이 그침이 없고 전
혀 거리낌이 없으며, 그날4월 초 3일 유시酉時 무렵에 일제히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총을 쏘아 읍의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서도면西道面 부흥역扶興
驛으로 옮겨서 모여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무리들의 자취는 금산錦山·태인에서 소란을 일으킨 무리들과 같은
무리이기도 하고 다른 무리이기도 합니다. 이들을 합하면 하나의 단團을 이
루고 나누면 3개의 부대가 되는데, 서로 연락이 닿게 하여 여기저기에서 갑
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법의 뜻에 비추어보아 매우 흉악하고 완악합니
다. 각 동의 백성들을 많이 동원하여 부안현의 포군과 함께 힘을 합쳐서 토
멸하자는 뜻으로 처결한 내용을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에게 보냈습니다. 이후
의 상황은 차례로 보고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 지목전(持目錢): 특수한 목적사업을 위해 염출하는 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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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 8일 계초 [四月初八日 啓草]
동학도당들이 4월 초 3일 부안현 부흥역으로 옮겨서 모여 있으며, 1개 부
대가 4월 초 3일 태인현 인곡, 북촌, 용산에서 머물러서 잤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아울러 일시에 빨리 보고하였습니다. 4월 초 5일에 도착한 부안현의
공형이 문장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어제 오시午時 무렵에 동학도 수천 명
이 또 금구현 원평으로부터 도착하였으며 금구현에 이미 모여 있던 무리들과
합세하여 동헌으로 돌입하였습니다. 금구현 현감은 사면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 인사를 살필 수 없었습니다. 공형들을 결박하고 군기를 탈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알려온 것으로 저들의 광경을 생각해보면, 금구현감이 그 자리
에 갇혀 있어서 위급하였으므로, 출진한 장관에게 명령을 내려서 한 무리의
군병들을 나누어 보내어 금구현을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4월 초 7일 도착한 부안현 이철화의 보고 내용에, “현감이 그간 저들에게
붙잡혔다가, 저들이 고부의 도교산으로 향해 갈 때를 틈타서 겨우 탈출하여
관청으로 되돌아왔습니다”라고 하며, 4월 초 7일 도착한 태인현감 홍면주의
보고 내용에, “그날4월 초 7일 술시戌時 무렵에 저들이 본 읍의 태인현 인곡 북촌
용산에서 고부의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월 초 8일 도착한 고부군수 박명원朴源明의 보고서의 내용에, “어제 오시午時
무렵에 태인·부안 양 읍에 모인 동도들이 고부군 도교산으로 옮겨와 주둔하
며, 순영문에서 발송한 병정, 별초군, 부상負商 등과 함께 서로 접전하였는데,
순영문의 병정들이 마침내 패하여 사졸 중에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저들 무리들은 곧바로 정읍현井邑縣 연지원蓮池院으로 향하여 갔습니다”라고 하
였으며, 처음부터 신영新營의 병정과 각 읍의 포군을 각처의 험하고 좁은 길
입구에 나누어서 지키게 하고 경군京軍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흉도들 두 무리가 한 곳에 함께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모인 것은 질
1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서가 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세력은 점차 벌떼처럼 일어나듯 합니다. 어제


인시寅時, 오전 3~5시 무렵에 사방을 둘러싸고 갑자기 돌진하여, 영군營軍들이 패
하여 무너져 흩어졌으며 오히려 죽임을 당하거나 다쳤으니, 더욱 분하고 한
탄스럽습니다. 초토사인 신臣 홍계훈洪啓薰은 장위영 병사를 거느리고 4월 초
7일 제가 있는 순영에 도착하여 곧바로 머물러 잤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
고 적을 토벌하여, 지금 함께 구제할 것을 서로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상황은
차례로 아뢸 생각이므로 연유를 빨리 임금께 아뢰는 일입니다
경군의 한 부대는 지금 바로 흥덕현 지방으로 내려가서, 바로 금구, 태인,
정읍, 흥덕, 무장, 고부, 고창 8개 읍에 전령할 것입니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寄]
一. 지금 4월 초 6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부안현 공형이 낸 문장文狀에서,
“부안현감이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며,
공형 또한 저들에게 주리를 틀리고 매우 맞아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
에 있습니다. 주둔한 저들 무리들은 군기를 빼앗아, 그날 진시 무렵에
남쪽대로를 향하여 갔으며, 그들이 간 것은 아마도 고부군으로 향하는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잇달아 도착한 당일 신시申時에 낸 부안현의 보고에, “현감이 그간 저
들에게 잡혀 있다가 저들이 떠나려고 할 때 겨우 몸을 피하였는데, 김
제 죽산에 영군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진이 있는 길을 택하여 가다가, 또 죽산 진영의 군대가 고부로 돌
아서 향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백산으로 갔다. 그러나 죽산과 백산 양
진이 합세하여 이미 군대를 이동시키고 저들 무리들이 향하는 곳으로 전
진하였으므로 현감은 그대로 관청으로 돌아갔다”라고 하였습니다.
수 록 隨錄 13

一. 별초군別抄軍 80명은 순영문에서 함께 점검하여 최한택崔漢澤은 본진으


로 내려 보냈습니다.
一. 4월 초 7일 오시午時에 낸 금구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들이 고부 황토산
영진으로 진을 옮겼다고 하며, 또 황토산 아래에 진을 쳐서 신시申時
무렵 접전을 하였고, 그날 동이 틀 때에 패주하여 도망쳐서 각처로 흩
어졌다고 합니다.
一. 초토사또가 경군 5백 명과 청나라 사람 10명을 이끌고, 4월 초 7일
영하에 행차하였습니다.
一. 우영관右領官 이곤양李昆陽, 대관隊官 이재섭李在燮, 유판근柳判根, 교장敎長 백
경찬白景贊, 진영교陳永敎, 서기 이돈승李敦昇, 김화형金化炯 등이 병사와 각
읍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는 포군 등을 이끌고 4월 초 3일 사시巳時에
행군하여 출발하였습니다.
一. 초토사가 경군 900명을 이끌고 군산항에서 4월 초 7일 전주부에 들어가
서 유숙하였고, 청나라 사람 17명은 대환포大丸砲 4좌를 지고서 함께 와서
그들에게 대접할 것과 처소를 순영과 부의 각 공청에 나누었습니다.4
一. 대관인 유판근, 이재섭과 교장 백경찬, 진영교, 집사 정창권鄭昌權은 고부
군에서 4월 초 8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피하여 달아나 돌아 왔습니다.
一. 4월 초 8일 인시寅時에 낸 정읍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 수천 명이 4월
초 7일 미시未時에 고부의 경계에서 이곳에 도착하여 정읍현의 경계 연
지蓮池 모천茅川 강변에 모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술시에 곧바로 읍내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4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강화도에서 배로 군산항으로 들어와 육로로 거쳐 전주로 입성하


였다.
1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군수에 보충하기 위하여 내는 돈은 여산礪山의 수령이 500냥, 김제의


수령이 300냥이며, 모두 단자를 갖추고 아울러서 올라 올 것입니다.
一. 4월 초 8일 정읍 겸임 태인현에서 보고한 내용에서, “저들 무리가 곧
바로 장청에 들어가서 방문을 부수고 갇혀 있는 저들 무리 6명을 풀어
준 후 또 군문을 부수고 많은 양의 기계와 창과 검을 가져갔으며, 동헌
각 곳에 있는 공형과 여러 서리들과 도사령都使令의 가산을 모두 부수
고, 부상들이 살고 있는 3채로 모두 불살랐으며, 곧바로 저녁밥을 먹고
해시亥時, 오후 9~11시에 곧바로 고부 삼거리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8일 유시酉時에 낸 금구현의 보고에서 저들은 그날 동이 틀 무
렵 흥덕현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고부, 부안, 태인, 고창, 정읍 등 5개 읍의 군기를 저들 무리들이 모두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寄]
一. 고부 안핵사께서 이번 3월 17일 전주부에 행차하였습니다.
一. 동학도 수천 명이 지금 4월 24일 고부군에서 군기를 탈취하여 각각
창과 칼을 가지고 총을 쏘며 곧바로 태인으로 향하였다고 하며, 고부
군 공형이 문장으로 빨리 순영문에 보고하였다. 그러므로, 감영과 전
주부의 영리를 모아서 4월 25일부터 사대문을 지키도록 하였고, 각 읍
의 포군은 기계를 가지고 또한 내세워서 보내도록 하라고 방금 포군이
소재한 각 읍에 전령을 보냈으며, 태인, 금구, 고부, 고창의 수령들이
지금 바야흐로 감영에 올라가 행차하였습니다.
一. 고부의 문장文狀에서, “3월 23일 술시戌時 무렵에 동학도 3,000여 명이
창과 검을 지녔거나 혹은 죽창을 지니고, 총을 쏘며 난입하였으며, 말
수 록 隨錄 15

을 탄 20여 명은 아마도 틀림없이 장두狀頭인데 향교 및 공해에 모였습


니다. 저녁밥은 읍내의 서리 집에 나누어 정하였고, 그들이 행패를 부
린 것은 다만 난론亂倫으로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며, 처결한 내용에 “이후의 상황을 연속하여 빨리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一. 흥덕 공형들이 낸 문장에서, “동학도 3,000여 명이 말하는 바로는 고부
문장을 낸 날 고창현으로부터 와서 흥덕현 후사포後沙浦에 도착하여 머
물러 잤으며, 부안 줄포로 전진하여 고부군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一. 3월 25일 낸 금구현의 보고에서, “저들 무리들이 태인에서 점심을 먹고
원평에서 머물러 잤으며, 전주로 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원평
의 마을두민의 문장에 의거하여 이에 첩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3월 25일 미시未時에 고부군 공형이 낸 문장에서, “저들 무리들이 두지
면斗池面에 나아가 주둔하다가, 화약고가 실수로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
다”고 하였습니다.
一. 저들 무리들이 무장에서 고창을 거쳐 들어갈 때, 고창현감이 나와서
만났습니다. 저들의 말에 “이미 구폐교정절목救弊矯正節目이 있는 까닭
에, 겨우 해산하였는데, 잡으려고 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생각인지?
장차 전주로 향하여, 이러한 연유를 감사와 안핵사에게 묻겠다”고 말
했다고 합니다. 해당 현감이 감영으로 급히 달려가 순사도에게 직접
보고하였으며, 감영과 전주부의 삼반三班 하인들을 불시에 점고하여 부
내의 모인某人을 불러 성을 지키도록 분부하여 엄히 잘 타이르고, 영리
들을 타일러 서문을 수직하게 하고, 부리府吏들은 남문을 지키도록 하
였고 병정 수십 명 또한 와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1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남원, 장성, 진안, 용담, 태인 등의 화포군들이 기계를 지니고 빨리 보


내게 하는 일로 몰래 전령하였으며, 대장을 따라서 급히 달려갔습니
다. 곧 이는 내서內署의 비밀 관문關文에 따른 것입니다.
一. 3월 26일 낸 태인현의 보고에서, “그날 유시酉時 무렵 저들 무리들이
고부의 백산 예동禮洞에서 일시에 산을 내려와 본 읍의 용산면 화호禾湖
신덕정리新德亭里로 옮겨 주둔하고, 총을 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세력
이 매우 커서 방어할 계책이 없다”고 합니다.
一. 태인 공형의 문장에서, “지금 3월 29일 저녁 그들 무리들이 곧바로 동
헌에 들어와서 군사들을 풀어 놓았으며, 또 내아로 들어가서 칼을 휘
두르고 고함을 쳐서 제반 광경이 끝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삼반관속들
이 모두가 도망하였고, 본 현감에게 요청하여 인부印符를 빼앗으려 하
였으나, 그들을 질책하고 주지 않았더니, 그들이 화를 내면서 칼을 견
주었습니다. 비록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세력이 약하고 도움을 받을
수 없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공형 또한 전주 이세봉과 함께 아울러
잡혀 들어가서 결박되어 관청 마당에서 주리를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밤을 지나서 지금에야 비로소 풀려났으며, 이제
겨우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태인현 4월 초 1일 오시午時에 낸 보고에, 저들이 밤을 지새우면서 소요
를 일으킨 상황은 이미 공형들이 문장으로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매를
맞고 방벽에 구류되었고, 읍의 옥에 갇힌 자를 풀어 주었으며, 금구에
서 내세워 순찰하기 위한 포군은 수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우선 나타
나는 대로 잡아들이고, 머물지 말아야 할 자는 한꺼번에 풀어 주었으
며, 공전문부公錢文簿는 모두 찾아내었습니다. 그날 사시巳時 무렵에 원
평의 큰 길로 곧바로 향한 후 가만히 상황을 보고, 군기와 집물들을
수 록 隨錄 17

꺼내어 관청의 마당에 흩뜨리니, 사방에서 그간에 잃어버린 것은 보전


하기 어렵고 반드시 정해진 수의 유무가 없으니 잇달아 급히 보고한다
고 하였습니다.

금번에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이 비록 스스로 돌보고 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으니, 어찌 그 책임을 피하겠
습니까. 생각건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처결하신 내용에, “어
제 급한 보고馳告를 보니 군기는 모두 빼앗겼다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
금 보고를 보니 잃어버린 것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말을 한 것은, 보고하는
말로써 어찌하여 모호한가 합니다. 이미 임금께 보고하였으니, 마침내 마감
하는 것은 오직 묘당의정부에서 처분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一. 4월 초 1일 술시戌時에 낸 금구현 공형의 문장에는, “동학인 6,000
7,000명이 지난 달 3월 29일 술시戌時무렵 태인현에 도착하여 곧바로
머물러 잤으며, 그날 오시午時 무렵 금구현 원평점에 도착하여, 그 마을
앞에 진을 치고 곧바로 머물러 잤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4월 초 1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낸 금구의 문장에는, “동학도
6,000~7,000명이 3월 29일 술시戌時에 태인현에 도착하여 곧바로 머물
러 잤고, 4월 초 1일 오시午時에 금구현 원평점에 도착하여, 그 마을
앞 냇가에 진을 치고 곧바로 머물러 잤다고 하며, 다시 향한 곳은 없
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4월 초 1일 유시酉時에 낸 부안현의 보고에는, “부안현 포군과 한산배閑
散輩들을 일일이 뽑아서 충당하였으며, 출발하려고 할 때에 하동면下東面
분포동分土洞에 모인 동학인 200여 명이 곧바로 성안에 들어갔으며, 점
고한 군사들이 그들을 놓아주자 사방으로 도망하여 막을 수 없었습니
1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다. 매우 엄한 군무로서 모이도록 기약한 것이었는데, 군율을 어지럽


게 하였습니다. 스스로 거행한 것을 살펴보니 두려운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단단히 조사하여 처단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이에 대하여 처결한 내용에, “어제 또 영을 내려 단단히 타일렀으
며, 이미 뽑은 포군들이 동도 200여 무리들이 소요를 일으켰기 때문에
모두 도망하였다니, 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빨리 서둘러서 사람들을
뽑아서 모집하고, 4월 초 4일에 순영 아래에 대기하도록 할 것이되, 만
일 혹시라도 기한을 어기면 좌수와 공형을 효수하여 경계할 뿐 아니
라, 모일 기약에 나오지 않은 책임을 마땅히 법에 의거하여 처리할 것
이니 경계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3일 금산 공형의 문장 내용에, “본 현은 때마침 관아가 비어서
과연 의뢰할 것이 없었으며, 또 동학인 수천 명이 바야흐로 진산珍山
방축리防築里와 충청도 옥천 서화면西化面에 모이도록 했다는 것을 들었
다는, 확실한 정보를 담은 편지가 도착하였으나, 갑자기 읍내에 들어
와서 백성들을 도륙할 것이라고 소문이 낭자하여 울음이 계속 이어졌
습니다. 만일 별다른 구호를 하지 않으면, 그 방도가 없을 것이니, 처
분을 쉽게 마련하여 거의 죽게 된 목숨들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병사와 각 읍에서 와서 기다리는 포군은 4월 초 3일 사시巳時에 행군하
여 출발할 것입니다.
一. 사월 초 2일 신시申時에 낸 것에, “금산군 행상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
錫 등이 앞장서서 부르짖어 행상과 읍민 1,000명을 이끌고 곧바로 진산
방축리에 동학도의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였는데, 114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으니, 이후 사실은
수 록 隨錄 19

잇달아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처결한 내용에, “상민이


힘을 합하여 토멸하니 용감한 뜻을 알 수 있다. 연이어 지킬 것을 엄히
타이르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3일 신시申時에 낸 금구의 첩정에서, “현령이 진을 쳐서 길을
막았더니, 저들 무리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3일 술시戌時에 낸 태인의 첩정에, “저들 무리들이 금구 원평에
서 그날 유시酉時 무렵에 흩어져서 혹은 읍내의 대로 쪽으로 가거나,
혹은 골짜기 길이나 풀이 난 들판으로 가서, 본 읍의 인곡仁谷, 북촌北村,
용산龍山 등의 곳에 머물러 잤다”고 합니다.
一. 4월 초 2일 해시亥時에 낸 금산 겸임 용담현감의 첩정에서, “진산군에
모인 무리들인 동학도를 쳐서 죽인 행상과 읍민들이 그날 유시酉時에
환군還軍하였으므로, 나가서 맞이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하였으며,
묶어서 데리고 온 9명은 군의 감옥에 가두어서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
였습니다. 처결한 내용에, “9명은 모두 엄히 가두고 그들 무리들을 모
두 잡기를 기약하고, 조사하는 것 또한 즉각 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4일 묘시卯時에 낸 고산현高山縣의 첩정에, “오늘 동이 튼 후에
1장의 방문榜文이 문밖의 기둥에 걸려 있었으므로, 방의 내용을 별지에
베껴서 올려 보냈는데, 저들 무리들이 자신의 세력을 과장하고 돈과
신발을 토색한 것은 이미 매우 변괴라”고 하였습니다. 방에 쓰인 글의
내용은, “금마목사에서 초순에 점심을 먹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장차 3,0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4월 초 5일 신시申時에 고산
을 지나갈 것이니, 각자 짚신 1켤레와 돈 1냥씩을 미리 준비하여 천명
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잘 알아서 거행토록 하라. 동도
2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대장 서東道大將 徐5. 이름과 서명을 하지 않음”이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5일 오시에 낸 부안의 공형 문장에서, “금구 원평에 주둔하여
모인 저들 무리들이 어제 오시午時에 본 읍에 난입한 까닭을 이미 급히
보고하였는데, 공형이 온 몸에 매를 맞아 걸을 수가 없고, 군기는 모두
빼앗겼습니다. 밤이 되자 총을 쏘는 소리가 이어져서 끊이지 않았으
며, 방울을 흔들고 경계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 사람
들을 잡아다가 연이서 볼기를 매우 쳐서 마치 소송을 판결하여 처리하
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날 오후에 본 읍의 동헌에 모였던 저들 무리들
이 본 읍의 주산主山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이주하여 주둔하였으며, 정읍
에서 온 자들 또한 수백 명이었는데, 그들이 합세한 연유를 보고합니
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4일 동학인 103명, 원평에서 잡아온 1명, 여산에서 잡아온 2명
과 전주의 마을에서 잡아온 자 모두를 진영의 감옥鎭獄에 가두었습니다.
一. 경군京軍이 전라도로 내려가 동학도를 토벌할 때 여당들이 반드시 흩어져
호서로 들어갈 것입니다. 험하고 좁은 길목隘口을 잘 지켜서 하나하나 잡
아서 빠져 나가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완영完營에서 보낸 전보가 있었으
므로, 본도의 순영에서 병영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 120명이 내려와서 삼
거리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고 합니다. 본 읍에서는 전라도로 통하는 골
목에 있는 삼옥치三玉峙, 장찬리長贊里, 강청리江淸里, 모오리毛五里, 광평廣坪,
압치押峙 등의 곳에 본 읍의 장차將差와 부보상負褓商 및 포군들을 보내어
지키도록 하되, 좁은 골목에서 삼거리에 이르는 1리마다 자세히 조사하

5 동도대장 서(東道大將 徐): 북접의 강경파인 서장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서장옥은 금산 등
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수 록 隨錄 21

는 자 1인을 두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유진留陣에 기별하도록 하였습니다.


一. 순영의 영교營校가 어제 또 내려왔는데, 금구의 동학도 수만 명이 태인
등 4개 읍의 군기를 탈취하여 곧바로 전주감영에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
으로, 전주감영에서 전보를 보낸 것이 본도의 감영에 도착하였습니다.
一. 동학도들은 각각 몸을 보호하는 물건을 가지고 청산고개靑山峙에 모두
모이라는 뜻으로 그들 무리들이 통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사
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습니다. 다만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一. 신관사또가 부임하는 행차는 보지 못하였고, 문안사의 회답처결에,
“하인들이 언제쯤에 미리 준비하고 기다릴 것인지, 어느 곳에서 준비
하고 기다릴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읍의 일이 이와 같은 때에
이처럼 소란스러우니, 생각건대 매우 고민스럽고 답답합니다. 겸임한
수령이 감영에서 신칙한 것 때문에 이제 막 본 읍에 좌정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8일에 담양부에서 낸 보고에, “난리를 부린 무리들의 동
정을 정탐하고자 도참道站을 배치하였으며, 연이어 조사하여 살폈습니
다. 이번 4월 7일 미시未時 전에 관군이 고부에서 패하였다는 급한 기
별이 도착하였습니다. 상심하여 깜짝 놀라서 사실을 조사하려할 때에
무리들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본 읍의 수성장 국인묵鞠仁 이, 스스
로 홀로 힘써 칼을 잡고 싸우다가 길에서 힘이 다하였습니다. 기력이
더하지 못하여 바삐 몸을 빠져나와 정읍의 경계에 도착하여서는 업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다친 형상을 살펴보았는데, 정수리에서
턱까지 환도로 내려 친 것이 있었으며, 살이 드러나고 뼈가 부서졌고,
양쪽 어깨뼈와 어금니 2개에 칼을 맞은 흔적이 있었고 온 몸에 피가
낭자하여,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포군과 수성군
2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을 전후로 일으켜 보냈으니 합이 93명이며, 상처를 입어서 돌아온 자


는 12명이었는데, 혹 총에 맞거나 창과 칼에 맞아서 얼굴의 피부가 떨
어져 나가거나 어깨가 부러져 하나라도 완전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
나머지 살아남은 자들도 이후의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마땅히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 난류들이 이와 같이 창궐하여 전에 없는 특
별한 처분을 내려 하루 빨리 초멸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9일 오시午時에 고창현 공형이 낸 문장에서, “동학배 7명을
잡아 가둔 연유를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동학을 잡아들인다는 설을
미리 전파하였더니, 이번 4월 8일 술시戌時 무렵 동학 수천 명이 흥덕현에
서 곧바로 본 읍에 들어와서 먼저 옥문을 부수고 갇혀 있는 동학배 7명을
놓아 주었으며, 또 은대정殷大靜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본 후, 가산을
때려 부수고 곧바로 불을 지르고 이어서 성 안에 들어가 군기를 빼앗고 장
적을 거두어 들였으며, 동헌과 관청건물을 부순 후에 인부印符를 빼앗으려
하니 일이 매우 급박하였습니다. 그래서 현감은 몰래 몸을 피하였고 그들
무리들은 4월 9일 인시寅時 무렵 무장현으로 향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10일 인시에 흥덕 겸임 태인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들이
이번 4월 초 8일 사시巳時 무렵 고부군 신점新店에서 곧바로 태인현에
들어가서 군기를 탈취하고 곧바로 고창현의 경계로 향한 연유에 대해
그 현의 좌수가 발송한 문장을 중간에 또한 탈취 당하였으며, 다시 보
고함에 있어 지체되었습니다. 동 집물을 일일이 찾아낸 후에 책을 만
들어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 고산 수령이 군수전을 보충하여 내기
위한 300냥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9일 술시戌時에 낸 태인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들이 어제
흥덕현에서 오참午站한 후에 곧바로 고창, 무장 등의 곳으로 향하였다”
수 록 隨錄 23

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9일 무장 공형의 문장에, “동학당 209명을 잡아 가두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10일 인시寅時에 낸 흥덕 겸임 태인현의 보고에 의하면, “4월
초 9일 해시亥時에 도착한 같은 현의 유향좌수 문장의 내용에, ‘4월 초
8일 사시巳時에 저들 무리 수천 명이 각각 총과 창과 활을 가지고 고부
현 신점에서 곧바로 본 읍에 들어와 포성이 진동하였으며, 창과 검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서, 남녀노약자들이 겁을 먹고 도망을 가니, 저
들은 노약자를 잡고서 저녁밥을 토색討索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
에 들지 않으면 총을 들이대고 칼을 겨누어 여러 가지로 협박을 하여
이르기를, 이 모군募軍은 누구인지 반드시 조사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
였으며, 심지어 늙은 부인과 어린 아이를 묶어서 주리를 틀었으며 총
이나 칼로 때리기도 하여, 중상을 입은 자가 3명, 잡힌 자가 2명이었으
며, 담배를 요구한 후 군기고에 돌입하여 창고 문을 부수고, 탄환과 총
과 창을 어렵지 않게 탈취하여 갔습니다. 같은 날 미시未時 무렵에 곧
바로 고창의 경계로 향하였으며 연유를 빨리 순영문과 겸관에 보고 하
기 위해 지자持者6를 보냈습니다. 지자 또한 잡혀서 문부를 모두 빼앗
기고, 또 중상을 입어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고할 때에 이에서
지체되어 빼앗긴 군기와 집물을 일일이 적간한 후 빨리 보고할 생각입
니다’라고 알렸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9일 신시申時에 낸 흥덕현 공형의 문장에, “저들 무리 수천

6 지자(持者): 원문에서 지자(持者)는 지자(持字)를 잘못 쓴 듯하다. 지자(持字)는 지자군(持字軍)으로


지방 관아들 사이에서 공문이나 물건을 지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2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명이 지나간 후 그날 미시未時 무렵 20여 명이 1부대를 이루고, 40여


명이 1부대를 이루어서 선후를 나누어 풀어주었습니다. 각각 총과 칼
을 가지고 와서 정읍에서부터 본 읍 이동면二東面 율현栗峴 대로를 거쳐
서 일남면 구산 앞 대로를 거쳐서 곧바로 고창을 향하였으며, 앞에 지
나간 수천 명은 초 8일 고창에 머물러 잤으며, 그날 무장으로 출발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초 10일 초토사추열기 [初十日 招討使推閱記]


전영장前營將 김시풍金始豊을 잡아들이라는 분부에, 이와 같이 먼 고을의 직
품으로도 국가의 은혜가 융숭하여 영장이 되었으면 마땅히 조금이라도 보답
하여야 하는데, 이를 행하지 않고 비도의 괴수가 되어 그들을 모으고 해산하
기를 자기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현을 합하여 그를 처형하라는 분부가 있었
으니, 그를 취초한 내용에 국왕을 핍박하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7월 15
일 불궤不軌, 반역의 설說’을 진술하였습니다. 엄히 곤장을 치려 할 때에 힘을
써서 갑자기 일어나 결박을 풀고 좌우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그들의 무리들을
크게 불러대자, 군병들이 그들을 막았습니다. 당장當場의 모습이 끝이 없어,
죄를 물어 처형하였습니다.
一. 4월 초 10일 술시戌時에 낸 무장현의 보고에서, “현감이 부임하기 위하
여 인부와 열쇠를 이미 전하여 주었는데, 장성부長城府에서 아직 출발하
지 않았으며, 연이어서 유향좌수의 문장을 접하였습니다. 또 적의 정
세를 정탐한 자의 보고에는, 4월 초9일 신시申時 무렵에 저들의 무리
10,000여 명이 읍내의 동헌과 각 관청에 난입하여 모두 헐어버렸으며,
그들 무리 40여 명으로 읍에서 이미 잡아 가둔 자들을 모두 풀어주었
습니다. 성내와 성외의 칠거리에 있는 인가는 모두 불을 질러서 불빛
수 록 隨錄 25

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으며, 좌수와 공형 및 수교, 읍에 사는 관속들


은 잡히는 대로 모두 죽였습니다. 한편으로 주거지를 포위하여 성을 만
들고 항시 총을 쏘았고, 한편으로 남은 무리들을 요로에 파송하여 관속
들을 수색하여 찾도록 하였으며, 한편으로 읍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
에 있는 호산봉狐山峰에 진의 위세를 크게 벌였으며, 어떤 자는 갑옷을
입고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세가 매우 두려웠으며,
읍의 모양은 짓밟고 으깨어 결딴난 형상이어서, 다시는 통고하는 사람
이 없었으며, 또한 가서 탐지할 길도 없습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一. 11일 초토사 추열기에 김시풍이 비도의 두목이 되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말이 흉악하고 참혹하여 임금을 핍박하였으
며, 김영희金永禧, 김국하金國夏는 청병한다고 하면서 비도들을 창궐하게
하고, 김동근金東根은 비도들과 교통하였으니,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에
서 지은 죄를 모두 법률에 따라 효시하였습니다.
一. 김학구金學九 등 608명은 비도들의 꼬임에 질펀하게 물들어서 잡혀서
갇히게 되었으나, 그들이 무고함을 진술하여 모두 곧바로 풀어주어 일
에 안주하여 농사에 힘쓰도록 하고 국가의 법을 범하지 않도록 하되,
만일 행상과 부상負商들이 침어하는 일이 있으면 결박하여 와서 고하
라 하였습니다.
一. 영문에 있는 병사 정석희鄭錫禧는 고부의 민요民擾시 진중에서 출사하였
을 때 괴수 등에게 뇌물을 받고 풀어준 죄로 주리를 튼 후에 엄히 곤
장 5대를 치고 칼을 씌워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一. 초 9일 지방에 내려 보낸 경군京軍 1개 부대는 정읍에 갔다가, 4월 11일
다시 올라왔으며, 14일 경군 2개 부대 280명을 저들 무리들이 도착한
곳에 내려 보냈습니다.
2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동복의 수령이 군수전 300냥을 와서 바쳤습니다.


一. 12일 진시辰時 무장현에서 보고하기를, “동학배들이 난입하여 소란을 일
으켰으며, 이교吏校들이 잡혀 죽은 자가 10여 명이고, 촌락의 도로 사이
에서 잡혀서 죽은 자는 그 수가 수십 명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마침내
군기와 집물 및 화약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남은 것이 없으며, 각양
문서와 장부들은 고금의 문적들을 불에 태웠고, 사람의 목숨이 다치고,
읍은 읍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여 황공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4월 12일 신시申時 낸 영광군의 보고서에는, “4월 12일 사시巳時 무
렵 동도東徒 10,000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 총을 쏘면서 성안에서 함
부로 뛰어다녀서 민인民人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들을 쳐서 물리칠 계책
이 없어서 황공하고 죄송스럽습니다”고 하였습니다.
一. 4월 13일 미시未時에 낸 흥덕 공형의 문장에, “저들 무리들이 무장에서
4월 12일 영광군에 투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오늘4월 14일 초토사가 친히 군병을 이끄는데, 내일 군량을 미리 준비할
수 없으므로, 곡물의 공사公私를 논하지 말고 충분하게 집류하여 초토사
의 수송하라는 명령을 기다렸다가 빨리 거행하라. 만일 조금이라도 소
홀하면 해당 수령과 공형을 군율로 시행할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
는 마음으로 거행하되, 집류한 석수石數는 책을 2건 만들어서 1건은 순
영문에 보고하고, 1건은 초토사에 보고하라. 그리고 지나는 각 읍에서
사용할 비용, 군수품, 소와 말, 큰 기구를 미리 준비하여 기다릴 것임을
정읍, 나주, 장성, 고부, 흥덕, 무안, 영광, 함평, 공주, 고창에 전령한다.
一. 4월 14일 곧바로 도착한 의정부 전보의 내용에, “오늘 본 충청감사의
전보에서 회덕에 모인 무리들은 지금 모두 물러나 흩어져 귀화하였다
고 한다. 빨리 명령하여 깨우친 것에 따라 각각 살고 있는 곳에 돌아가
수 록 隨錄 27

고 재산을 모두 써서 없애버려 의지할 곳이 없는 자는 해당 지방관을


타일러서 그로 하여금 진휼을 극히 잘해주어서 머물러 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13일 유시酉時에 낸 영광군 공형의 문장에, “동학의 무리 수천
명이 무장에서 4월 13일 미시未時에 총을 쏘면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
면서 성안에서 함부로 날뛰고 군기를 침범하여 인가에서는 강제로 빼
앗기에, 성 내부에 사는 민들이 바삐 흩어진 연유에 대한 첩보였습니
다. 그에 대한 처결에, ‘이것은 왕에게 보고할 때 올리는 공첩公牒인데,
12일에 보고한 것이 지금 겨우 와서 바쳤다. 거행하는 것으로 살펴보
건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사건이 끝난 후에는 마땅히 법률에 의하여
처단할 것이다. 동도의 수효를 10,000여 명이라 보고하였는데, 그대의
보고에서는 수천 여명이라고 하니 어찌하여 이와 같이 일체 상반되는
가? 실제의 수를 조사하여 매우 급히 알리고 잠시라도 지체되어 못된
행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15일 익산수령이 군수전 500냥을 와서 바쳤습니다.
一. 익산수령을 운량관의 일을 보게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15일 미시未時에 낸 군산진의 보고에, “한양 윤선輪船, 한양호이
법성진法聖鎭에서 4월 14일 미시未時에 본진에 도착하였습니다. 함께 모
인 곳에서의 소문은, 동도 수십 명이 각각 창과 칼을 지니고 배 안에
함부로 들어와서 선판을 부수고 격군格軍을 구타하였으며 인천항 위원
인 김덕용金德容, 전운소轉運所의 종인從人 강인철康寅喆을 결박하여 잡아갔
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초토영의 제사의 내용에, “들으니 극히 놀랍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운소로 문서를 보내 회이回移할 바가 있으니, 방
어하고 수호하는 것 등의 일은 착실히 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2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이번 4월 17일 금구현에서 바친 것에서 정탐하러간 구실아치의 보고내


용에, “저들 무리들은 아직 영광에 있어서 볏짚을 거두었고 성가퀴城堞
을 채워서 쌓고 군양미를 운반하여 들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완영의 유진소에 영광에서 올려 보낸 저들의 통문 [靈光上送彼類


通文 完營留陣所]
오늘 우리들의 의거는 결단코 다른 의도가 없으며, 탐관오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나라를
감시하고 위로는 종사를 보존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
이다. 부자간의 천륜과 군신간의 대의를 온전하게 하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들이 자연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감히 국가를 해치게 하는 독벌
레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말을 여기에 그칠 따름이다.
창의소倡義所 1894년 4월 16일
一. 4월 16일 진시辰時에 영광서 내어 올린 것에, “동도 10,000여 명이 각각
창과 칼을 가지고 이번4 12일 사시巳時에 성에 들어왔으며, 4월 16일
진시에 곧바로 함평을 향하여서, 전운위원轉運委員 2명과 수성별장 정만
기鄭萬基를 모두 잡아다가 마구 때린 후 길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
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이번 4월 17일 인시寅時에 낸 함평의 보고에, “이번 16일 신시申時에 동
도들이 어림짐작으로 6,000~7,000명 가운데 혹 갑옷을 입은 자도 있
고, 전립戰笠을 쓴 자도 있고, 혹은 머리에 색깔이 있는 수건을 두른 이
들이 검무를 추면서 충돌하여 성 아래를 포위해 들어가서 곧바로 동헌
을 향하기에, 서리와 장교 및 관노 사령과 수성군 등 150여 명이 관문
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들이 관문을 부수고 곧바로 동헌을 갈 때에 삼
수 록 隨錄 29

반 중에서 창과 칼에 상처를 입은 자가 있었는데, 백성들은 겁을 먹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근래 이들 무리들이 도착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외촌의 사민士民 100여 명이 여러 날 계속하여 동헌에 들어와
지켰습니다. 거의 수천 명이 주위를 둘러싸고 총을 쏘는 것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십 명이 당에 올라서 말하기를, “우리 무리는 보국안민하여, 한편으로는
탐관오리를 징계하여 꾸짖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잡기 위해 각
읍을 두루 다니다가 본 읍을 거치게 되었다. 지금 사민들이 들어와서 보호하
는 것을 보면 이 읍 수령의 치적이 과연 소문과 같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
습니다.
이들은 지난번 작청作廳, 교형노령청校刑奴令廳에 진영을 머무르면서 읍 아래
의 요민들에게 분정하여 각 집에서 밥을 짓도록 하였고, 공형은 영입迎入을
하지 않았다하여 잡아들여 결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관정이 먹을 항목을 헤
아리고 다시 관에 바치지 않았다고 하여 곤장 5대를 쳤습니다. 이후 포리逋吏,
부정한 아전의 성명과 각 공문서를 거두어 오게 하여 방출하였습니다. 이후 상
황을 보고하여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一. 이번 19일 순사도의 벼슬을 깎아내리는 법과 안핵사를 유배보내는 법,
그리고 전 고부군수를 격식을 갖추어 잡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一. 같은 날4월 19일 신임 사또에 김학진으로 비답을 내리셨다고 정부의 전
보를 내려 보냈습니다.
一. 초토사가 이번4월 18일 군대를 움직여 출발하였으며, 저들 무리들이 이
른 곳에 머물렀습니다.
一. 전주의 수령이 군수전 500냥을 바쳤습니다.
一. 구례의 수령이 군수전 300냥을 바쳤습니다.
3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만경의 수령이 군수전 200냥을 바쳤습니다.


一. 전운어사7가 군수전 1,000냥과 소 2마리를 초토사도에게 보낸 편지에
따라 바쳤습니다.
一. 이번4월 18일 영문에 있던 병사 정석희는 고부민요시 장두를 잡아오기를
바랐는데, 돈 2,700냥과 쌀 300냥의 뇌물을 받고 잡아오지 않은 죄로
전참前站에 압송하여 보내고 금구현에서 효수하였다고 합니다.

4월 12일 계초 [啓草 四月十二日]


동학도당이 이번 초 9일 무장현으로 방향을 바꾼 연유는 어제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4월 11일 도착한 무장현감 김오신金五信의 보고서의 내용에,
“현감으로 부임하기 위하여 인부印符와 열쇠를 이미 전하여 받았으며, 장성에
서 아직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연이어 접한 유향좌수의 문보文報와 정탐을 한
구실아치의 보고에서, ‘4월 초 9일 신시申時 무렵 저들 무리 10,000여 명이 읍
내 동헌과 각 관청에 들어가 모두 부숴버리고, 그들 무리 4,000명이 읍에서
잡아 가둔 자를 과연 모두 방출하였습니다. 성내와 성외 7거리의 인가를 모
두 불에 태워서 불빛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좌수, 공형, 수교 및 읍에 사는
관속들을 잡히는 대로 모두 죽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주위를 둘러싸서 성을 만들고 진의 위세를 읍에서 1리 떨어진
호산봉狐山峰에 크게 만들어서 어떤 자는 갑옷을 입고, 어떤 자는 총과 창을
가졌습니다. 그 세력이 매우 두려워서 읍의 모양은 짓밟혀 결단이 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재차 통고할 사람도 없고, 또한 가서 조사할 길도 없습니다”

7 전운어사(轉運御使): 1893년 경상 전라 충청도의 세미를 통괄하는 관서를 두고 이의 수용책임자인


전운사 조필영(趙弼永)을 임명했다.
수 록 隨錄 31

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무장 1개 읍은 성 전체가 피해를 입


었으니, 몹시 놀랍고 탄식할 일입니다. 현감은 이미 부임할 수 없을 만큼,
적의 세력이 갈수록 창궐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시일이 급합니다.
초토사 신臣 홍계훈과 상의하여 하루빨리 초멸할 계책을 기약하고 이런 연유
를 아룁니다

4월 17일 [四月十七日]
고부군 도교산道橋山에 있는 무남영의 진영이 도리어 피해를 입은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신영新營의 우영관 이경호李景鎬는 군병을 이끌고
적과 겨루어 토멸할 적에 위험함을 거리끼지 않고, 혼자서 진을 지켜 가슴에
총을 맞고 얼굴에 창을 찔리고도 형색을 움직이지 않고 적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저들은 그 수가 많고 이쪽은 약하여서 마침내 전쟁
에서 사망하였으니 충의가 모두 온전하여 마땅히 포상하였습니다.
서기 이은승李殷升은 영관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마음을 지녔으며
자기가 맡은 곳을 떠나지 않아 총알에 맞았으나 죽을 때에도 물러서지 않았
습니다. 이름은 서리직을 띠고 있으나, 그 명을 다하면서 죽었으니, 그가 의
로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세웠으니 진실로 가
상합니다.
태인의 전 감역인 유병직劉秉稷은 이미 행부보상行負褓商의 반수班首였는데,
여러 상인들을 통솔하여 스스로 영관이 된 후 군대의 뒷전에 있었으나 창과
칼에 어지럽게 찔려 진문陣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한 정상이 매우 극히 참혹
하고 슬프며, 그의 의리는 또한 가상합니다.
담양의 국인묵은 담양의 수성별장으로, 그가 거느리고 있는 포군을 이끌고
와서 먼저 백산을 방어하는 중요 거점에서 적의 자취를 탐문하고, 이어서 험
3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하고 좁은 골짜기 입구에 가서 양진의 형세를 보았습니다. 전군前軍이 외롭고


힘이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 힘을 합쳐 나아가 토벌하였으며, 또한 창과 칼에
찔리어 생명이 오래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집사 정창모鄭昌模는 자원하여 의로움을 발휘하여 몸을 던져서 적에게 나아
갔으며, 처음에는 나누어 지키다가 끝내 합세하였는데, 사졸들이 떠나자 단
신으로 계책이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아뢸 만한 공은 얻지 못하였지만, 그의
용맹스러운 의로움은 볼만 합니다.
중군 김달관金達寬은 신영병방新營兵房을 겸대하여 적세를 살피지 못하고 갑
자기 도망하여 물러갔으니, 망령되고 경솔하나 이미 군향을 마련하였으니,
이는 두려워서 포기하고 도망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참작하여 용서할만한
일입니다.
신영대관新營隊官 이재한李在漢, 유판근柳判根 등은 모두 영관으로 고부군에 탄
약을 수송하여 올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은 즉, 당장의 일의 기미가 비록 급한
것은 아니지만 목숨을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군제로 살펴보건대 매우 소홀
한 것입니다. 교장 백찬경白贊景, 육용규陸龍圭 등은 그 군졸들이 먼저 도망하는
것을 보고, 서로 놀라서 멀리서 바라보고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부상負商 도반수都班首인 송병호宋秉浩는 거느리는 자들이 이미 활도 없고 가
진 것 또한 군사용 칼도 아니어서 능히 세력을 도울 수 없었으므로 괴이한
것은 없습니다. 법의 뜻에 의하면 마땅히 조사하여 따져야 할 것입니다.
이상 5명은 저의 영臣營에서 경중을 나누어 감안하여 처리하여 할 것이며,
그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병사와 보부상과 각 읍의 포군의 사망실수는 지
방관이 조사하여 적발한 것을 보고하여 오면 차례차례 아뢸 생각입니다.
수 록 隨錄 33

4월 18일 [四月十八日]
금산군 보상 접장褓商接長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石이 거느린 행상과 읍민
500~600명이 진산읍에 들어가서 동학도당을 모두 죽인 연유는 전에 이미 급
히 보고하였습니다. 이번 이들 두 사람은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을 하였으며,
또 영읍에서 알리지 않았어도 먼저 스스로 의로움을 내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금산군에서 처음으로 그들의 집을 부수고 또한 진산에서 거의 100명
에 가까운 자를 모두 죽였으며, 이어서 머물러 모였다가 남은 무리들을 체포
하였습니다. 병사들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비류들은 멀리 도망하였습
니다. 생각해보니 진실로 그의 의기가 매우 가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들을 격려하려고 지금 바로 포상하려 하지만, 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
니, 모두 담당하는 기관에서 아뢰어 처리할 일입니다.

순상 합하가 계시는 곳에 급함을 알리는 보고 [巡相閤下行所告急


文狀]
저희들이 성에 들어가 옛 관찰사에게 원통함을 씻고자 하여, 새로운 사또
께 억울함을 호소해서 조정에 아뢰어 지극히 원통하고 통분한 일을 펴주기를
바랐습니다. 초토사가 와서 효유하는 글자가 하나도 없이 모든 일을 죽이고
치는 것을 일삼아서, 대포를 어지러이 쏘아대고 나서, 곧바로 성안을 향하였
습니다. 소중한 양전兩殿8이 여러 차례 큰 탄환에 맞아서 파괴되었으며, 성
내외의 인가가 모두 불에 타고, 무고한 백성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괴는 예나 지금이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금일에 양전이 파괴

8 양전(兩殿):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慶基殿)과 이성계 조상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肇慶廟)를


말한다.
3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되고, 인가가 불에 탈것을 알았다면, 저희가 성에 들어가 뒤늦게 후회하여


통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명을 받들어 위무하는 임무를 맡고서 처음부터 효유하지 않고 양전에
대포을 쏘았으니, 도대체 어떤 생각입니까? 불을 놓고 백성을 죽이니 그 뜻
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순상 합하께서는 임금의 덕을 널리 펴시고 백성을
즐겁게 하는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머물러 지체되게 하겠습니까? 저희들은
비록 죽을 지경에 있더라도 원컨대 덕화가 가득해지길 바랍니다. 빨리 성으
로 들어가셔서 만민들을 맞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영에 모인 여러 유생들이 삼가 인사를 하고 글을 올립니다.

순변사 이원회李元會, 염찰사 엄세영嚴世永


시위봉심사9 김종한金宗漢

5월 5일 관문과 감결을 베낌

삼남염찰사가 각관에 보낸 감결 [三南廉察使甘結各官]


[5월 초8일 오시午時에 도착함]

사또께서 경계에 도착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무릇 모든 사무를 대강을 짐


작하여 알 수는 없습니다.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백성의 안정을 꾀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등짐을 지고 떠돌며 구덩이에서 살려달라고 호
소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정情狀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불쌍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그들을 보호하고 살피기를 다른 때보다 배로 해야 하는 데 성교聖敎

9 시위봉심사(侍衛奉審使): 경기전과 조경묘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벼슬아치를 말한다.


수 록 隨錄 35

중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시기를 “밤낮으로 백성을 위하는 한 가지 일에 근심


하고 힘썼으나, 백성들이 더욱 빈곤하고 야위어 있으며, 곳곳마다 잘못 전해
져 소요를 일으킨 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는 어떠한 까닭인가! 대개 폐
해가 되는 단서는 나 또한 종종 들은 것이 있다. 오로지 탐관오리들이 보살
피지 않아 백성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없는데서 말미암아 근래에 이런
일을 불러 왔으며 토호의 무단이 관장보다 더 두려운 것이 되었다. 불쌍한
저들 무고한 자들은 의지하여 살 길이 없는데, 국가의 토지에 부과하는 것이
원래의 총액보다 몇 배나 되게 부과하여 항아리에 남은 것이 없어 흩어져
떠났으며, 무명잡세 등을 토색하여 허다한 화폐의 근원이 다하여 말라서 물
자를 옮기는 것이 막히니 이는 어찌 수령들이 직분을 받드는 도리이겠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궁중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이 이처럼 잊지 못하기에 이르렀으니, 누구
도 감히 우러러 체득하여 임금의 명령을 널리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탐
오하고 불법을 저지르고 향곡에서 무단을 저지르니, 정공正供을 더하여 거두
어들이는 것과 잡세를 원징寃徵하는 것을 일체 혁파하여 실효를 입을 수 있게
하고, 혹시라도 잘못된 것을 따라 하지 않도록 하되, 듣는 대로 하나씩 물리
쳐서 해당하는 법으로 크게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본사本使는 안핵하는 일로
충분히 염두에 두고 국법을 범하지 않게 하며, 여러 가지 조항의 폐단을 일으
킨 근원들은 뒤에 기록한 것에 의하여 밤을 새워 행도소行到所에 빨리 보고하
도록 하여 참고로 삼을 것입니다.
이 감결의 말을 한문으로 쓰고 한글로 번역하여 베껴서 마을에 게시하도
록 하여 한 사람의 백성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십시오. 감결이 도
착한 일시를 먼저 빨리 보고하시오.
이때에 영營·진鎭·역驛이 있는 곳의 관리는 관아의 공문을 주고받아서
3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시행하고 마지막에 도착한 관에서는 원래의 감결을 도로 올려 보내서 근거로


삼아 살피시오.
一. 병정이 지나간 읍은 백성들이 반드시 놀라서 흩어져 농사를 지을 시기
를 놓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러한 모양이 발견되면 소를 빌려주고
양곡을 빌려주어서 농사를 권장하여 생업에 안심하여 종사하게 한다.
一. 작년 삼세三稅 항목을 내어서 주판籌板을 자세하게 열거하여 기록하되,
1결 마다 들어가는 잡비는 또한 곧바로 가려내어서 보고 한다.
一. 환곡을 발본하여 입본立本한 석수石數는 전수錢數를 이미 납부한 것과 미
납한 읍을 각각 구획하여 어떠한 지를 자세히 성책을 만들어서 갖고
올 것이다.
一. 세곡을 전운소에 수납할 때 들어가는 곡斛과 두斗의 수, 잡비가 얼마나
되는지, 남는 것이 얼마인지, 납부한 것과 납부하지 못한 것을 자세하
게 보고한다.
一. 근래 새로 만들어진 세는 명목이 없는 것이어서 거두는 명목을 어느 곳
에 내야할지, 받을 것과 받지 않을 돈과 물건의 실수를 자세히 보고한다.

무주에서 용담 진안 장수 운봉까지 이름 [自茂朱龍潭鎭安長水雲峰至]


용담공형이 기록하여 보고한 것이 5월 9일 사시巳時에 도착하였다.
당일 고산高山 옥포역玉圃驛의 직사直使가 가져온 감결이 도착하였으므로, 영
아래를 탐문한 것인데, 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은 전주 북문 밖에 사는데,
오늘 아침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이야기하기를, ‘청 나라上國의 군병이 어제
저녁에 성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성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비록 매우 불쌍
하지만, 결코 이로써 구애되어 잠시라도 관망할 수 없다’고 이르고는 곧바로
가서 도륙하고, 저들 무리들을 크게 무찔렀다. 본 것들이 무서워서 밤을 가리
수 록 隨錄 37

지 않고 이곳에 왔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증거로 댈 만한 문적은 없으나,


그 말은 정녕코 사실이므로, 이에 기록하여 알려 드립니다.

고산공형이 사통한 내용 [高山公兄私通內]


이번5월 초 8일 저녁 무렵 저들 무리들이 동문·북문·서문을 통해 나와서
창을 갖고 포를 등에 지고는, 한 무리의 군사들은 황방산黃方山에 옮겨서 주
둔하였으며, 한 무리의 군사들은 검암리黔岩里 뒤쪽 산기슭으로 옮겨 주둔하
였다. 곧바로 황혼을 틈타 김제金堤로 향하여 가서 조광진趙廣津의 집을 부숴버
리고, 밥을 해먹은 후 고부의 백산을 향하여 옮겨갔다고 합니다.
이번5월 초 9일 초토사가 본부의 질청으로 행차한 후 전주에 원래 거주하던
동학배 6명을 경병들이 잡아서 모두 죽인 일은 저희 읍의 아랫것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입니다. 새로 온 사또와 판관께서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성에 들
어와 행차할 것이라고 합니다. 염찰사께서 어제 위봉산성威鳳山城10의 진에 숙
소를 정하고 지금 막 저희 읍에 행차하실 것이라고 배행영리陪行營吏에게 분부
하셨으므로, 21명으로 수를 나누었으니 이로써 살펴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무주사또에게 보낸 금산서리의 고목 [錦山吏告目于茂朱使道]


5월 11일에 내고 12일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사는 한선달에게 가서 초토
사를 배래하여 전주에 진을 머물게 하였는데, 이 읍에 인척 집이 있었다고
하고 어제 이경二更, 밤 9시~11시에 도착하였으므로 내력을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4월 28일 이후 접전하였는데 그 사이에 죽인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라

10 위봉산성(威鳳山城): 완산에 있는 산성으로 1차 봉기때 전주판관 민영승이 경기전의 이성계 초상


을 이곳 위봉사에 봉안하였다.
3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고 합니다. 저들 무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소장을 내기를 빌었으므로 허락


하였다고 합니다. 처결의 내용에, 각 읍의 군기를 모두 상납하였고 초 8일에
물러간 자가 어림짐작으로 1,000명에 가까웠고, 곧바로 김제 등지로 향하여
진을 쳤는데 혹자는 5명이라 하고, 혹자는 6 7명이라 하고, 혹은 점차 해산
하여 갈 것이라고 해당 읍에서 보고서報狀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신임사또는
이번 초 9일 감영으로 올라갔으며, 초토사가 성안의 진에 머물러 있어서 다
시는 다른 뒷 염려가 없다고 합니다.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라감사 김학진이 올린 계초 [全羅監司金鶴鎭啓草]


승정원에서 열어보십시오. 비류들이 전주 성 안에 널리 주둔하고 총과 창
으로 못된 짓을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행로가 막혔습니다.
신臣은 아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연유를 신이 여산부에 있을 때에 이미 보
고하였습니다. 이번5월 초 4일 신은 여산에서 출발하여 위봉산성 행궁으로 들
어갔으며, 위안제와 단오절 제사를 겸하여 지냈습니다. 초 5일 전주 삼례역參
禮驛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러 거쳐하였습니다. 곧바로 접한 초토사 신 홍계훈
洪啓薰이 이문移文한 내용에, 이번 5월 초 3일 신시申時 무렵에 적도賊徒 수천 명
이 북문을 열고 나와서 용두현龍頭峴 서봉西峰을 향하여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재빨리 달려 앞으로 왔을 때에 우리 진영의 병사들은 일제히 한바탕 대포를
쏘아 사살하고 소위 대장기를 뽑아서 먼저 그들의 괴수 김순명金順明과 어린
장수인 이복용李福用을 잡아서 모두 참수하였습니다. 같은 무리 500여명을 대
포를 쏘아 죽였고 거두어들여 가지고 온 총검이 모두 500여 자루였으며, 그
나머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한 적은 각 처의 백성들이 차례로 잡히기를 기
다려서 잡는 대로 참수하였다”고 합니다. 장리將吏를 따로 정하여 정탐을 더
하였으며, 초토사의 이문移文과 특별히 서로 다른 것이 없었으며, 몸을 숨기고
수 록 隨錄 39

도망한 자들 또한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괴수는 이미 다 죽었으며, 같은 무리들도 죽였으니, 적의 세력은
날로 꺾여서 성 안에 남아서 주둔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들은 죽어야할 도
둑이지만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로 막아 머물게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고 있
습니다. 이와 함께 난처한 것은 성지城池를 능히 회복하는 데 시일이 늦어지
는 것이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연이어서 몰래 초토사에게 문서를 보내어서
방략을 상의하여 빨리 초멸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차례로 아
뢸 생각이며 연유를 아울러 급히 보고합니다.

승정원이 열어볼 것 [承政院 開坼]


이번 5월 초3일 적의 괴수가 이미 섬멸되었으며, 같은 무리들을 죽인 상황
에 대해서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이번5월 초 8일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도착한 초토사 신 홍계훈의 이문 내용에는, “저들 무리들이 이미 모두 도망
하여 흩어져서 지금 부에 들어와 성을 회복하였습니다. 이에 감사가 머문 곳
으로 이문移文합니다. 하루 빨리 감영에 도착하여 조치를 서로 상의합시다”라
고 하였습니다. 일시에 도착한 전주판관 신臣 민영승閔泳昇의 첩정 내용에는
초토사의 감결의 내용에서 저들 무리들이 이미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으며,
초토사께서는 이미 성에 들어갔으므로, 판관은 지금에 이르러 관청으로 돌아
가서 일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에 등보謄報한다고 하였습니다.
장리將吏를 따로 정하여 빨리 보내서 정탐하게 하였은 즉, 과연 이미 도망하
여 흩어졌습니다. 비류들이 성지城池에서 스스로 도망하였고 예전과 그대로
여서 다행이지만, 재앙의 싹을 모두 없애지 못하여 혹시라도 다시 싹이 터서
나중에 염려가 될 것이 두렵습니다. 모두 풀어주는 것은 불가하며, 많은 사람
들이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분개하고 있는 때에, 순변사 신臣 이원회가
4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당일에 여기에 이르렀고, 아울러 초토사와 함께 상의하여 조속히 쫓아가서


탐지하여 초멸하기를 도모하기를 꾀하였습니다. 신臣은 이를 따라서 감영에
들어갈 생각이며, 이런 연유를 알립니다.

무주에 보낸 감결 [甘結 茂朱]


곧바로 도착하였다. 상국淸의 제독인 섭지초葉志超가 보낸 고시문 내용에,
“흠명제독 직예전성 군문총통 산해노태고북구 준련마보수전 각영액도혼파도
노欽命提督 直隸全省 軍門總統 山海蘆台古北口 准練馬步水電 各營額圖琿巴圖魯 섭葉이 효유하는
일이다. 본 군문이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전보로 보낸 자문을 받은 것에
비추어, 통리교섭통상사의 겸 전군익장統理交涉通商事宜兼全軍翼長인 원세계袁世凱가
보낸 전보를 받은 것에 의거하여, 조선정부가 보낸 문서를 받아 전라도 관할
각 현에서 토비土匪들이 난을 주창하여 성읍 십여 개 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
고, 또한 북쪽으로는 전주성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알았으며, 북양대신 이
홍장에게 장차 군대를 파견하여 대신하여 토벌할 것을 명하도록 주청해줄 것
을 전보로 간청하였다. 대황제께서 번방의 복속을 생각하고, 요청한 것을 승
인하여 본 군문이 명을 받들어서 토벌을 독려하려 한다. 이에 밤새 바다를
건너 앞으로 왔으며, 거느리고 있는 각 영은 모두 많은 전투를 거친 장수들이
있어서 한번 북을 치면 탕평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오직 협박을 받은 민인
들이 시세에 쫓기어서 모두 마음에 달게 여기지 않으면서 적을 따르다가 함
께 주륙을 당할 것이 염려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지 못해 마음을 펴는
것을 참지 못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나아가서 효유하여, 이를 보여
주고 읍인들이 모두 알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핍박을 받은 양민으로 기회를 타서 해산하도록 힘쓰고 혹 영에
와서 스스로 본 군문에 투항하면 경중에 따라 관대하게 용서할 것이며, 비록
수 록 隨錄 41

깊이 따지지 않더라도 곧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되어 적에게 이용되었


으며, 진정으로 일을 일으킨 사람은 아닐 것이다. 만일 병기를 버리고 죄를
뉘우쳐서 와서 투항하면 또한 반드시 정해진 규정 외로 은혜를 더해줄 것이
다.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방법으로 끝내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고 관군에 항
거하면 군문에는 일률一律이 있어서 초토하여 하늘의 토벌을 펴려 한다. 이에
너희들은 군진에 임할 때에 무릇 군기를 버리고 진실로 투항하는 자는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다. 군기를 잡고 항거하는 사람은 창이나 총으로 쏘아서도
죽지 않은 자는 또한 반드시 잡아서 목을 베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너희들은 목숨을 보살펴서 비도의 우두머리들이 어리석게 여기는 바가 되지
말고 의젓하여 특별하게 보이라”고 하였다.
이들 무리들이 무너져 흩어지고 후회하여 깨달아서 귀화한 자들은 보호하
여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잡아서 가두어 보고하여 처
분을 기다려서 처결하라. 감결을 내려 경계 하노라. 지금 이에 고시하는 말
의 뜻이 엄중하니 깨끗하게 회복하여 비록 미련하고 못난 무리들도 반드시
모두 감화하고, 무릇 홀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인들 두려
운 듯 하면서 마음을 고쳐서 방향을 고치지 않겠는가? 도착하는 즉시 베껴서
마을에 게시하고 하나의 백성도 모르는 폐단이 없게 하라. 감결이 도착한 사
정을 보고하라. 1894년 5월 10일 초토사

경기전 봉안대신이 근래에 전주부에 들어왔음 [慶基殿奉安大臣日


間入府]
옛 관찰사를 제주에 정배하고, 판관은 임금께 아뢰어 파직하는 것을 민인
들이 등소하였다. 임금께 아뢰는 것을 정지하고 영장과 중군은 곤장을 쳐 파
직하고, 대관 3인과 이재한李在漢 등은 형배하였다고 한다.
4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영문에서 보낸 기별과 염찰사의 계초 [營寄 廉察使 啓草]


고산현감 민영운閔泳雲이 정사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서吏胥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소송을 처리하는 것에 또한 민원이 많았고, 법외의 결結에
조세를 배정하여 징수하고, 무명잡세를 징수하는 등 모든 일이 불법이어서
수많은 백성들의 비방을 불러들였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감영의 지시營飭도
없이 군수곡軍需穀이란 명목을 구실로 집류한 것이 1,000여 석, 돈 10,000여
량이나 되었으며, 작은 고을과 가난한 집에 분담시켜서 원성으로 떠들썩하였
기에, 길거리에 그 죄상을 볼 수 있도록 방을 걸어 놓았으며, 해당 관청이
아뢰어 처리하도록 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一. 순변사가 어제 윤선을 따라서 부대를 되돌렸습니다.
一. 염찰사가 어제 오후 남고산성南固山城에 행차하였으며, 며칠 내에 동도
들이 거쳐 간 읍을 순행할 것입니다.
一. 초토사가 오늘 한로旱路에서 부대를 되돌렸습니다.
一. 상국淸國의 군사가 그간 아산牙山에 도착하였으나, 소요가 그쳤다는 소
식을 듣고 부대를 되돌렸다고 합니다.
一. 영정을 다시 봉안하기 위해 대신과 예조판서대감이 행차한다고 하는
데, 그날이 5월 27일입니다. 오늘 조정에 하직인사를 하였으며, 혹자
는 말하기를 조趙 대감이라 하고, 혹자는 정鄭 대감이라 하는데, 예조판
서 대감은 사동寺洞의 판서인 김성근金聲根 대감이라고 합니다.
一. 전주 판관이 그대로 임명된 일은 순영과 염찰사가 모두 이미 계청하였
지만, 판관은 굳이 고집을 부리고 떠나려고 합니다.
一. 저들 무리들은 다만 드러나게 경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一. 소와 말을 나누어 정해 모두 되돌려 주었습니다.
一. 임금께서 내려준 돈 10,000냥을 갈라서 내어 주어, 성안과 성 밖의 불
수 록 隨錄 43

에 탄 인가를 구휼하였습니다.
一. 강화병사 500명에게 잠시 부대에 남아 성을 지키도록 영을 내렸습니다.
一. 선화당을 수리하는 것이 끝나지 않아서, 감사가 아직 작청作廳에 머물
고 있습니다.
一. 전운사轉運使인 순창군수가 대신 보낸 전보에 5월 16일 저물어서 도착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奇]
책응관策應官은 전주판관.
운량관은 임피臨陂현령.
염찰사께서 본부 감찰 김준문金俊文의 집에 행차한 곳.
저들 무리들이 5월 초 8일에 내려갔는데, 태인을 넘었다가 몇몇은 무장으
로 도망하고, 몇몇은 무리를 나누어 백성들을 상대로 토색討索을 일삼았으며,
전주 구이동九耳洞의 부민富民들이 사는 곳 등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초토사또께서 오늘 전주부에 들어갔으며, 20일에 장위영壯衛營 병사를 이끌
고 금영錦營으로 행차하였다고 합니다. 총제영總制營 병방兵房이 총제영 병사
500명을 이끌고 전주부에 진을 머무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삼례에 진을 쳐서 머물고 있는 기영箕營의 병사가 지금은 잠시 동안 떠나갈
기약이 없다고 합니다.
순변사 이원회

파출을 요청하는 계초 [罷黜 啓草]


신은 이번 달 5월 초9일 전주부에 도착한 연유를 이미 급히 임금께 보고하
였습니다. 지난달 4월 27일 비도들이 전주성에 들어와 흉봉을 휘둘러 걷잡을
4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수 없이 세차게 일어나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남아 있


는 군졸들이 파수把守하였으나 적과 대항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며, 처음부터
방어할 생각도 없어서 텅 비었습니다. 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논할 수 없다
고 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라 하므로, 중군 김달관은 신영新營의 병방을 겸대
하여 남은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킨 것이 다른 사람보다 배가 되어야 하지만,
총소리를 듣자 먼저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전주영장 임태두任泰斗는 몸소 적들의 자취를 엿보았다가 전진하였으며, 성
밖으로 나아가서 기다렸다가 곧바로 발길을 돌려서지는 않았으나 갑자기 몸
을 피하여, 기강이 쓸어버린 듯이 없어져 이보다 심한 것이 없었습니다. 전주
판관 민영승閔泳昇은 묘廟와 전殿을 한꺼번에 옮겨서 봉안하게 되어 정신없이
급한 상황에서 조치를 취하지 못하던 중 칼과 화살이 찌르는 것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서 배행하여 받들었으며, 전 감사에게 받은 영읍진의 도장과 병부印
符를 모두 허리에 차고 나와 잃어버린 것이 없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정성
을 다한 것은 볼 만 하지만, 그가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자로서 또한
자신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 책임은 면하기 힘듭니다. 일의 체모로 살펴보
건대 용서하기 힘듭니다.
앞서 언급한 중군 김달관, 영장 임태두는 스스로 저희 영에서 엄히 곤장을
친 후 모두 판관 민영승과 함께 파출하였으므로, 그의 죄상은 담당 기관에서
아뢰어 처분하게 하고, 해당 조曹에서 각별하게 골라서 정하여서 하루빨리 내
려 보내십시오. 또한 신영의 대관 이재한李在漢, 유재풍柳在豊, 유판근柳判根으로
말하자면, 이미 패한 병정들은 남은 용기가 없으며, 이끌고 다니던 비婢와 백
성들은 비록 규율이 없지만 끓는 물이나 뜨거운 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무난히 도망하였습니다. 군율로 살펴보건대 보류할
수는 없으므로, 또한 신이 있는 영에서부터 경중을 가려서 죄를 심리하고 처
수 록 隨錄 45

단할 생각입니다.
신이 영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대개 성의 서남문의 안팎을 볼 수 있는데,
인가들이 모두 불에 타 검게 그을려서 붉은 벽에 연기와 불기를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요호饒戶들이 저축했던 것은 이미 탕진되었고, 백성들의
항아리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녀노소가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를 지르
며, 도로 위에 줄지어 넘어져 있었으며, 광경이 처참하여 차마 말할 수 있겠
습니까? 또한 크고 작은 관청 건물 및 방과 문이 제대로 남은 것이 없으며,
각종 장부들은 찢겨지고 불살라져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백성과 서리, 관
속들은 모두가 떠나갔고 남은 호는 10개 중에서 9개가 비어서 큰 고을을 짓
밟아 뜻하지 않게 하루아침에 결단이 나기에 이른 것이 이와 같이 극함에
이르렀습니다.
전주부는 주나라 때의 빈과 기岐지역에 해당하며, 한 나라의 풍패豊沛에 해
당하는 곳입니다. 원묘廟의 의관을 구멍내는 것과 영부營府를 방위하는 것과
의 중요함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한편으로 직접 대면하여 유
시하고, 한편으로 영을 계시하여서 살고 있는 자들이 안도하게 하며, 떠나
가버린 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큰 불행을 당한 시
기에 서둘러서 슬기롭게 보존하여 불에 타는 것을 구원하고 화톳불을 끄는
것을 위시하여 비로소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만들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록 많은 것을 강구하여도 공사가 모두 가난하여 나올 것이 없는 상황에서
아침저녁에도 걱정하면서 서로 모습을 다시 찾게 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사
람들을 나누어 보내어 다시 불타고 헐어버린 집부터 일일이 조사한 후에 다
시 속히 임금께 알릴 것입니다.
4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잉임토록 하는 내용으로 계초하다 [仍次 啓草]


전주판관 민영승을 파출한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이르러 비
류들이 창궐하여 여러 읍들이 번잡하고 소란스러워졌으나, 한마음으로 모든
지역을 위무하였습니다. 또한 군수물자를 대줄 것을 강구해서 백성들이 힘들
지 않게 하여, 농상들이 편안하게 여겨서 각각 자신의 직업에 편안하게 종사
하게 될 것입니다. 남기를 원하는 곳에서는 마당 가득히 다시 돌아왔으며,
두려워 떠났던 마음은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비단 민심만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성지城池가 탕잔되어 넉넉하지 못하여 그들을 건져내어 구제하
고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 붙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이에 감히 빨리 임금
께 아룁니다. 동 판관은 특별히 그대로 머물러서 많은 사람들의 뜻에 따르도
록 하게 하여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책임지우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묘
당으로 하여금 아뢰어서 분부를 받도록 하여주십시오.
경병운량관은 익산수령이며, 강화도군병의 운량관은 임피수령이다
一. 병영에서 파송한 포군砲軍 300명을 우영장이 이끌고 왔으나 전주에 도
착하지 못하였으며, 순영에 물려서 보냈습니다.

무주에 보낸 감결 [甘結 茂朱]


비록 어제 소란을 피웠으나, 만일 오늘 귀화하였다면 이는 임금의 백성이
다. 전주에서 해산한 것은 그 뜻이 각각 편안하게 자신의 일에 종사하게 되
었음을 말한다. 근래에 각 읍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하나같이 모두 소요를
일으켜서 읍과 촌이 시끄럽다고 한다. 그러므로 효유문을 만들어서 보내면,
본 읍에서 각 점막 각 동리의 일을 잘 해결하는 자들을 불러서 각각 이 효유
문 1통을 지급하고, 점막에는 벽 위에 게시하며, 동리에는 집집마다 효유하
여 살고 있는 자나 다니는 자가 듣지 못했다고 하거나 알지 못했다고 하는
수 록 隨錄 47

폐단이 없게 하라. 거행하고 있는 상황을 먼저 빨리 보고하라.


1894년 5월 22일 도순사 (押)

효유문 [曉諭文]
너희들이 전주에서 해산하여 간 것은 무기를 버리고 농사를 지으러 각각
옛 날에 하던 일로 돌아가려 하였음을 말한다. 지금 들어보니 몇 곳에는 남
은 무리들이 오히려 다시 병기를 놓지 않고 있는 곳에서 주둔하여 모여 있다
고 한다. 이것은 어떠한 연고인가? 윤음이 여러 번 내려갔으며, 나라의 뜻이
간절하고 정성을 다하니 진실로 미련하고 못 생긴 자들과 나무나 돌처럼 감
정이 없는 자에게도 감화를 미쳤다.
고을의 경계에 도착하는 날에 관문을 번역하고 각 읍으로 하여금 마을에
게시하도록 하여, 너희들을 효유하였는데, 아직도 혹시 그것을 보지 못하였는
가? 보고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반복된다면, 진실로 미련하고 못 생긴 자나
나무나 돌처럼 감정이 없는 자들 보다 못하며, 아직도 미치지 못하였다면 이
는 도신이 능히 널리 알리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성상께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호하려고 하시는데, 만약에라도 너희들이 끝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이 되게 하겠느냐. 생각이 이에 미치니, 만일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이에 군관
이용인李容仁을 보내니 다시 진실한 마음과 실제 상황을 드러내도록 하라.
너희들은 이 말을 잘 듣고 서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서로 겁을 먹지 말고
각각 향리로 돌아가서 너희 밭을 잘 갈고, 너희 집을 잘 짓도록 하여 다시
평민이 된다면, 모두 생명을 보전하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며, 형벌에 빠지고 국법을 거스르게 되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
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또한 열성조 오백 년 동안 이치에
따라 잘 다스려지고 교화되었다. 이미 떳떳한 품성을 갖추었으니, 어찌 끝내
4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미혹하고 어둡고 완악하여 다스려지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이에 뒤에 기


록한 몇 가지 조목을 너희들과 약속하니, 어찌 너희들을 속이겠는가. 만일
너희들을 속인다면 단지 백성들이 사지에 두는 것만 아니라, 진실로 외롭게
되고 우리 임금께서 맡기신 중요한 일을 저버리는 것이니 너희들은 조금이라
도 잘 알도록 하고, 오히려 혹시라도 의심함이 없을 것이다.
一. 백성에 해가 되는 폐정은 이미 바로잡은 바가 있다. 임금의 명을 받은
것은 일체 고치도록 하고 다만 너희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작
은 것은 감영에서 혁파하고, 큰 것은 임금에게 아뢰어서 혁파하기를
청할 것이다.
一. 조정은 이미 너희들의 귀화를 허락하였다. 순영문에서도 또한 그러하
니, 너희들이 다시 돌아온 날에는 평민이 될 뿐이다. 만일 이웃에서
옛날의 원한으로 지목하거나 만일 관리가 이전 일로 침학한다면 단지
너희들 종적이 위태하여 안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정이 너희들을
허락했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순영문에서는 마땅히 타일러서 엄하
게 금하도록 하고, 너희들이 안도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너희들이
사는 면리에는 각각 집강執綱을 두어서, 만일 너희들이 억울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해당 집강이 사유를 갖추어 순영문에 호소하게 하
고 공정한 결정을 기다릴 것이다.
一. 너희들이 지녔던 병기는 형세가 곤궁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계책
인 것이다. 마땅히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각각 소재한 군현에 바치
도록 할 것이다.
一. 병기를 환납하는 것 외에 무릇 재물과 곡식 등과 관련 된 건수는 비록
민소民訴로 추심하려 하더라도, 오늘 “원년元年에 사령이 내리기 전인
것으로 이름을 붙여서 영원히 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순영문에서 각
수 록 隨錄 49

읍에 관문을 보낼 것이다.
一. 너희들은 이미 농사철을 놓쳤으며 또한 재산을 모두 다 써버려서 지금
비록 집에 돌아가더라도 살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금년에 호역과 각
종 공납을 마땅히 일일이 없애줄 것이다.
一. 너희들로 하여금 귀화하게 한 날에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고 즐
겁게 사는 것은 책임이 사또에게 있다. 여러 급한 일은 차례로 시행하
여 조처할 것이니, 지금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奇]
一. 5월 13일에 낸 고부의 보고에, 동도 1,000여 명이 난산卵山의 저자에
모여 있으며, 50명에서 60명이 혹 태인 땅에 갔으며, 100명에서 200명
이 무장의 굴치屈峙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5월 14일 태인에서 낸 보고에, 읍저 2리쯤에 있는 동구천洞口川에 동도
100여 명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모여 있으며, 본 리里에서 간간이 총을
쏘거나 혹은 요민들에게서 돈과 재물을 빼앗았으며, 또는 그들이 살고
있는 각 마을里에 모여서 장차 좌도의 각 읍으로 향하려 한다고 보고하
여 왔습니다.
一. 순창 수령 이성렬李聖烈을 전운어사로 임명하였습니다.
一. 5월 17일 신시申時에 낸 부안의 보고에는 저들 무리들이 가고 머문 상
황에 대하여 정탐하였더니, 수백 명이 각각 칼을 차고 총을 쏘며 말을
타서 깃발을 세워 태인읍 고현면古縣面·동촌면東村面·남촌면南村面에 모
여 있으며, 그들의 기세가 두려울 정도라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전주 판관 민영승을 성이 함락된 일로 법전에 의거하여 임금에게 아뢰
어 파직하였습니다. 전주의 각 면리의 민인들이 낮과 밤으로 유임을
5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원하여서 곧 유임케 해달라는 장계狀啓를 올렸습니다. 영장營將과 중군


中軍 영감은 각각 곤장 5대를 치고 파출하였습니다.
一. 초토사께서 이번5월 19일 장위영 병사를 이끌고 출발하여 행차하였는
데, 총제영 병정 700명이 잠시 전주에 남아서 성을 지켰습니다.
一. 순변사께서 이번 18일 출발하여 군산항에 행차하였습니다.

순변사께 올립니다. 전 정읍 경내의 동학 유생東學會生들이 소장을 올립니


다. 삼가 저희들은 매우 원통한 사정에 대해 소장控訴을 낼 곳이 없으며, 지난
날 전주에 들어간 것은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동학은 선왕조의 교
화를 받은 가운데에 있는 유민들입니다. 옛 관찰사가 어찌하여 군대를 일으
키고 사람을 죽여서 이와 같은 대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까? 초토사가
처음부터 효유도 하지 않고 거병하여 사람을 죽였으니, 옳은 것인지 모르겠
습니다. 양전兩殿 건물에 총을 쏘고 민가를 태운 것은 큰 죄인데, 오히려 저희
들을 역적이라 이르고 체포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읍에 감결을 보내어 오히
려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집으로 돌려보내 평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라는 이야
기는 모두 백성을 속인 것입니다. 열거해 기록하여 계문啓聞한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국사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원하는 바를 조목조목 열거한 것만 못하
니, 금일에 비록 흩어지더라도 다음 날 다시 모이는 것을 기약할 수 없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형편을 양해하시어서 특별히 국왕께 아뢰니 지극히 원
통한 마음을 풀어주셔서, 저절로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주십시오.
엎드려 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一. 25일 정읍현에서 낸 보고에, 이번5월 17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무렵에
동도 수백 명이 각각 창과 총을 가지고 태인현의 경계에 와서 정읍
북면 한교漢橋를 지났으며, 점店에 있는 노파인 양조이梁召史를 묶어서
수 록 隨錄 51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곧바로 읍에서 3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연지


점막蓮池店幕에 도착하였으며, 또 도리都吏인 박민창朴敏昶의 집에 들어가
서 집안 물건들을 부수고, 백성을 겁주고 서리를 찾아내는 등 여러 가
지 형태로 행패를 부린 것은 일일이 들 수 없습니다. 다음 날 미시未時,
오후 1~3시 무렵에 한 무리가 장성을 향하여 갔으므로, 정읍에서 3차례
이 동도들의 겁략을 겪었습니다. 공사公私의 일이 쓸쓸하고 매우 한심
스러운 상태임을 첩보합니다.
一. 경기전慶基殿의 영정을 다시 봉안하기 위하여 이번 5월 27일 날짜를 택
하였으며, 우의정 정범조鄭範朝, 예조판서 김성근金聲根 대감이 이번 5월
19일 서울에서 행차를 출발하여 이번 5월 24일에 감영에 도착하셨으
며, 필요한 물품 등은 무주·금산·고산·만경·운봉·남원에서 역참
驛站에 배정할 것이다.
一. 영정을 봉안하는 제사에서 대축大祝은 함열, 축사祝史는 금구, 알자謁者는
진안, 찬자贊者는 옥구, 재랑齋郞은 임실이 맡는다.
一. 영정을 다시 봉안하는 길일은 6월 16일 인시寅時로 다시 정한다.
一. 전주판관은 지금 그대로 일을 맡고 공무를 행한다.
一. 상국의 병사가 내려오는 일은 우선 정지하도록 한다.
一. 5월 28일 순창 공형의 문장에서 비도들이 장성 백양사白羊寺에 머물고
있는데, 이곳은 태인 장성 담양의 경계를 접하고 있다. 혹 10명 혹은
20명에서 30명으로 무리를 이루어 사방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얼마 되지 않는 요호들에게서 돈과 곡식과 총 등의 물건을 어렵지 않
게 빼앗아 갔으며, 같은 날 4월 모일에 장정을 모집할 때에 올라간 포
수와 보부상褓負商 등을 만나면, 죽이겠다는 뜻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끝이 없어서 보고하여 왔습니다.
5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저들 무리들이 각처에 머물고 있는 수가 혹 700명에서 800명이라 하


며, 청나라 사람 3명이 2차례 내려가서 원하는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
여 주라고 효유하였으며, 다만 소란을 피우지 말 것을 엄하게 신칙하
였다고 하는 일입니다.
一. 담양부에서의 보고에 5월 28일 동도 500여 명이 부중府中에 난입하여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이어서 숙박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또한 6월
초2일에 담양부에서 보고한 것에, 동당 40여 명이 정읍의 경계에서 들
어와서 수성청守城廳에 불을 지르고, 수성별장 국인묵의 집을 헐어서 부
쉈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상국淸國의 통령 섭사성과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군병 50명을 거느리고
이번 초 3일에 감영에 도착하였는데, 은전 20,000냥을 가지고 와서 주
면서 불에 탄 집을 구제하기 위한 특전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5월 서울에서 보낸 기별 [五月 京奇]


5월 초 10일 일본 수군 500명이 성에 들어왔다가 다음날 다시 나갔습니다.
12일에 일본군 마보군馬步軍 1,000여 명이 성에 들어왔으며, 다음 날 1,000여
명이 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별탈 없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날 밤 일본군 수천 명이 성의 1, 2척의 높이를 허물고 철제 사다리를 접해
놓아서 성을 넘어 들어갔으며, 남산 조망의 요지에 나누어 주둔하였습니다.
동문과 남문 서문 밖에도 또한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나누어 주둔하여, 낮과
밤을 돌아가면서 지켰으며, 화포, 회선포回旋砲, 대완포大碗砲를 묻었습니다.
원대인袁大人께서 일본공사를 보고 말하기를, “너희에게 어떤 긴급한 일이
있기에 단서도 없이 남의 나라의 도성 안으로 군사를 이끌고 밤을 타서 성을
넘고 들어왔는가? 우리들은 12개 나라와 이미 조약을 맺었으니, 어찌 배반할
수 록 隨錄 53

수 있겠는가? 만일 너희들의 죄를 논한다면, 마땅히 12개 나라가 일제히 모


여서 토벌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를 용서하니 죄를 대신할 은전 30만 원圓
을 내어 갚고, 속히 군대를 거두어서 돌아가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토벌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공사가 크게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日本의 군대가 온 것은
다른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12개 나라가 함께 모여 조약할 때에 어떤 나라
를 물론하고 만일 근심이나 재난이 있게 되면 곧 피차 서로 구제한다는 뜻을
이미 정하였다. 현재 조선 전라도에 동학의 무리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조선 병력은 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 나라에 병사를 청하였으므로,
우리는 앉아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환난을 구제한
것이다.
밤을 타서 성을 넘어 간 것은 오경五更, 오전 3시~5시인 때에 나누어서 문밖에
도착하였으니, 문을 닫아서 열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또 말하여 “조선왕이 너의 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나왔는가? 우리
는 조선왕이 군사를 청하였기 때문에 온 것이다”라고 하였고, 두 사람이 크
게 언쟁을 벌여서 서로 공격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일본 사람은 성내에서 서
로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말하기를, “너의 마음 씀이 본래 괴이하
므로, 갑신년 갑신정변에 4흉과 함께 어울려 한 통속이 되어 난리를 일으키
더니, 지금 너희는 또 난리를 일으키려는 것인가? 조선은 비록 작은 나라이
지만, 어찌 다른 나라가 도성 안에서 싸움을 벌이려 하는가”라고 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임금께서 이를 듣고 크게 겁을 먹어 독판督辦을 시켜 각국 영사관에게 다니
면서 애걸하고 서양의 각국 영사관에 청하여 주연을 외아문에서 베풀고, 각
5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국 영사관이 모두 와서 모여 마신 후에 공로와 죄과 및 시비를 따지면서 다


른 나라를 무단으로 군사를 일으켜서 어두운 밤에 성을 넘어 들어오니, 죄는
돈으로도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서양의 영사관이 대단하게 말을
하니 일본은 서양인들과 한통속이었다. 일본이 거듭 사죄하며 말하기를, 돈
으로 죄를 갚을 것을 마련해 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자세하게 말을 따져서 꾸짖으니 일본이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은 본래 임금께서 민영준閔泳駿과 함께 상의하여 청하여 온 것이었습니
다. 원대인이 혜당惠堂을 보고 말하기를, “만일 일본사신이 말하면, 너는 마땅
히 매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여 일본사신이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여,
‘군대를 이끌고 환국하라’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혜당이 응낙하고 왔는
데, 과연 일본사신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이 우리가 오도록 청하였으
나, 지금 어떠한 소식도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라 하자, 혜당이 모호하
게 우물쭈물 대답하였습니다. 원대인이 또 혜당을 보고 묻기를, “내가 이미
부탁하였다.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나는 몹시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자, 혜
당이 모호하게 대답하니, 원대인이 크게 화를 내면서 질책하여 이야기하기
를, “너는 소국의 세력을 부리는 신하이나 다른 사람에게 권세를 부리는 신
하가 되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뇌물을 구하는 것을 좋
아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이르게 하는가”라고 하여, 혜당이 수없이 곤란할 정
도로 책망을 당하였습니다.
일본 군사들이 나날이 들어온 자가 늘어나 수만 명에 이르렀으며, 혜당의
집 식구들은 모두 문 밖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원대인은 대부인을 또한 청국
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고, 청인 장사꾼을 원대인이 모두 불러서 유시하기를,
“각국이 화친하여 물화를 서로 통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이 또한 나
온 것인데, 지금은 유사시有事時이므로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목숨을 잃게
수 록 隨錄 55

되는 화를 면하라. 만일 조선인들과 관련된 셈細音이 있으면 표를 그 사람에


게 받아서 나에게 맡기면 이후에 추심하여 줄 것이다”라고 하니, 청나라 상
인들이 철시하고 들어갔습니다. 일본공사가 들어가 임금을 뵙고 말하기를,
“우리 군사들이 나왔으니, 비용이 있어야 합니다. 군사 1명당 10,000냥씩 주
십시오”라고 하였으며, 임금께서 백미 500석과 소 50필을 상으로 왜병들에게
내려주어 먹이도록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화를 내어 정
벌하고야 말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달 15일부터 10여 일이 지나기까지 피란한 자들은 그 수를 알 수 없
습니다. 청나라 군선 6척이 마산포에 정박하였고, 일본병선 3척이 또한 마산
포에 정박하였는데, 일본군들이 경성 근처의 출입하는 길을 닦고 다리를 고
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멀리 내다보는 계책입니다. 청나라 군사들이
초 2일에 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원대인이 임금께 말하기를, “5명을 내어
주면 한 칼에 그들의 목을 베고, 일본인들을 정벌하여 죽이겠습니다. 며칠
전에 종각에서 방을 붙일 때에 혜당과 조병직趙秉稷과 어윤중魚允中, 조병갑趙秉
甲을 합하여 5명이 왜적들과 함께 어울려 한 통속이 되었으니, 그들의 죄는
허리를 베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4명을 베어버린다면 조선은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주감영 이방 영리 조만기가 김학관의 집에 보낸 고목告目

6월 초6일 냄 [六月初六日出]
비류가 근래 담양에서 떠나 순창으로 들어갔으며, 청나라 대인 1원이 총제
영 대관 이웅천李熊川과 함께 모두 담양으로 가서 저들 무리를 만나 효유하니,
곧바로 귀화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병장기들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병기
를 실어 온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상국청나라 통령 섭사성 士成이 기병 60명
5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을 이끌고 일전에 이곳에 와서 적의 정세를 탐문하고, 전주부 내의 화재를


입은 집에는 매호당 은전 2부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제 올라가는 길로
방향을 바꿔 돌아갔습니다. 서울의 소식京毛은 모두 뜬 소문으로 사실이라는
별다른 기별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6월 모일에 순창에 모인 유생會生 전봉준全琫準, 송대화宋大和, 송창헌宋昌憲, 정
창진鄭昌振, 김대춘金大春 등이 등장等狀을 올립니다. 삼가 백성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겠다고 이처럼 거사를 일으켰으며,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생업이 없고
무뢰한 무리들의 싹이 그 사이에 계속하여 앞 사람의 뒤를 이어서 부민을
침학하는 자가 자주 있었습니다. 무장, 흥덕, 고창, 고부, 정읍, 장성 등은 혹
무리를 지어 혹은 20명에서 30명 많으면 50명에서 60명에 이르렀으며, 갑자
기 이쪽에서 나타났다가 저쪽에서 나타나 그들을 막을 수 없으니, 이들을 장
차 어찌해야 할 것입니까?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계책이 오히려 백성을 해치
고 있으며, 황공하게도 하늘아래 용서받기 힘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곳에
관차官差11를 신칙하여 보내어 잡아서 엄하게 금지하고, 나주와 금구의 수령
을 파직하여 내쫓아 처단한 후 모두 흩어져 자기의 일에 돌아가게 하면 죽어
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빨리 임금께 보고하여 회답을 받아서
수많은 백성들의 원한을 씻어 주십시오. 간절히 바랍니다.
처결하신 내용에, “해로운 풀을 제거하여 곡식을 잘 키우는 뜻은 이미 어
제 효유문에서 살폈다. 관청에서 그들을 체포하더라도 끝내 너희들이 쉽게
변별하는 것만 못하겠지만, 너희들이 밝혀야 하는 것 또한 이러한 거사에 있
다. 각지의 집강들을 빨리 정하여 엄히 금지하고 잡아 바쳐서, 그러한 행동을
인정하여 너희들의 수치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나주와 금구 2개 읍에서의

11 관차(官差): 관아에서 파견하던 군뢰(軍牢), 사령(使令) 따위의 아전을 말한다.


수 록 隨錄 57

일과 같은 것은 의심스럽고 걱정스러운 때에 발생한 것이다. 지금 어찌 일부


러 일을 일으킬 단서를 찾을 리가 있겠는가? 반드시 다시 염려할 필요는 없
으니, 즉각 고향으로 돌아가 평안히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였다.

다시 상서함 [再上書]
삼가 저희들이 이러한 거사를 일으킨 것은 탐관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강
제로 빼앗은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지나온 읍의 폐단은 작으면 관에 알려
서 고치도록 하고, 큰 것은 관찰사에게 직접 소장을 내어서 고치도록 하였습
니다. 지금 순창군에 도착하였는데 곧 백성에게 폐단이 된 원인의 하나는 계
조 租를 새롭게 만든 것이요, 둘째는 죽창군竹 軍 한 달에 3번 점고點考한 것
이요, 그 외에도 백성들을 위하는 듯 하면서 실제로는 해를 끼쳐서 만민들이
원통함을 부르짖은 연유를 우러러 호소합니다. 특별히 해당 읍에 감결을 보
내 2개 조건을 혁파하여 원통해하는 백성들을 위해 일을 끝맺으십시오. 바라
고 또 바랍니다.
처결을 내린 내용에, “계조를 시행하는 것이 편리한 지의 여부는 지금은
다만 자세하지 않으며, 설혹 폐단이 되면 읍의 백성들이 정소함이 옳다. 죽창
군을 점고하는 것은 포악함을 막으려는 대비함이다. 어찌 폐단이 되는 것이
라 하여 갑자기 파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 같은 자들이 떠맡을 만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1894년 6월 22일 서울에서 보낸 기별 [甲午六月二十二日京奇]


통위사겸부장統衛使兼副將 신정희申正熙
총위사겸경리사摠衛使兼經理使 이봉의李鳳儀
장위사壯衛使 조희연趙羲淵 좌장左將 이원회李元會 우장右將 안경수安 洙
5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총제영혁파 심유摠制營革罷沁留12 김윤식金允植


혜당惠堂 어윤중魚允中 병판兵判 김학진金鶴鎭 완백完伯 박제순朴齊純
일본인들이 궐문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奇]
신임 사또께서 이달6월 초 5일에 장흥부에서 출발한 행차가 초 9일에 금구
의 금산사金山寺에 머물러 주무셨고, 감영에 올라갈 날짜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으며, 짐을 실을 말 3필과, 상소할 종이와 서사리書寫吏 1명을 금산사에서
등대하라는 장흥에서 따라온 배종의 사통私通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번5월 초 6일 동학도인 전봉준이 접에 소속된 수십 명을 이끌고 내려와
서 부에 들어가 연일 읍양정揖讓亭에 머물러서 있었으며, 회계會計 나으리 송사
과宋司果님께서 행차 과정에서 영접하여 들어오시게 하고, 친절하게 잘 대접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6월 초 8일에 도인 전봉준이 봉상면鳳翔面 구미리九尾
里13로 향하여 갔고, 나머지 접들은 혹 흩어지거나 혹은 모여서 왕래가 끊이
지 않고, 부府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부의 내외 각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서
울의 소식은 처음부터 들을 길이 없습니다.

무주에 보낸 감결 [甘結 茂朱]


이번 도착한 의정부 관문 내용에, 현재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14를 거쳐 의논

12 심유(沁留): 심유는 강화도 유수이며, 충청도 면천에 유배되어 있던 김윤식이 잠시 이 자리를 맡


았었다.
13 구미리(九尾里): 전주부 관할의 구역인데 전봉준이 한때 이곳에 살았다는 설이 있다
14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1894년 6월 설치한 임시기구, 관제 세제 군사 산업 등을 회의체로 합의
해 개혁안을 냈다.
수 록 隨錄 59

하여 정한 개혁정치를 절목을 만들도록 하고, 마땅히 임금에게 아뢰어 허락


을 받았습니다. 원래 정한 절목을 가지고 보내니 관칙이 도착하는 즉시 한문
과 한글로 번역하여 베껴서 나누어 관할 하에 있는 각 읍 진에 신칙하여 마
을에 걸어두게 하여 한 사람의 백성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도록 함이 옳다
는 관문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뒤에 기록한 것 내에 사연을 살펴서 시행하
라고 하여, 이러한 뜻을 한문과 한글로 번역하여 마을에 걸어두어 한 사람의
백성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감결이 도착한 일시를 먼저 빨리
보고함이 옳다.
갑오 7월 12일

一. 문벌, 반상班常의 등급을 타파하고, 귀천에 구애되지 않고 인재를 선발


하여 등용한다.
一. 죄인은 자신 이외에 친족에게 연좌하는 법을 일체 시행하지 않는다.
一. 처와 첩이 모두 자식이 없을 때에만 양자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며,
옛 법을 거듭 밝힌다.
一. 남녀가 일찍 결혼하는 것은 빨리 엄하게 금지하고, 남자는 20세, 여자
는 16세가 된 이후에라야 혼인을 허락한다.
一. 과부가 재가하는 것은 귀천을 논하지 말고 자신의 의사에 맡기도록 한다.
一. 공노비와 사노비에 관한 법은 일체 혁파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엄
하게 금지한다.
一. 조정 관리의 의복에 관한 제도는 임금을 뵐 때에 입는 공복은 사모紗帽,
장복章服으로 깃이 둥글고 소매가 좁은 것, 품대品帶, 목이 긴 신발靴子로
하며, 한가할 때에 지내는 사복은 칠립漆笠, 더그레搭護, 사대絲帶로 하며,
사인士人과 서인庶人의 의복에 관한 제도는 칠립, 두루마기周衣, 사대로
6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하며, 군사의 의복에 관한 제도는 가까운 예를 준하여 따르고 장수와


병졸의 차이가 없다.
一. 대소관원의 공적이건 사적으로 움직일 때에는 가마를 타거나 혹은 걷
게 하는 것은 편한대로 하게하고, 평교자와 소헌은 영원히 폐지한다.
一. 장리贓吏의 법은 옛 법을 거듭 밝히고, 엄하게 살펴서 혹 팽형烹刑이나
혹 장형杖刑15을 가하고, 원래 숨긴 물건은 관에 들이도록 한다.
一. 역인驛人·재인才人·백정白丁은 모두 면천을 허락한다.

감결 [甘結]
곧바로 도착한 의정부 관문의 내용에, “현재 군국기무처에서 정한 새로운
정식新定式이 있어서, 국내외 공사문첩에는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쓰게 하는 것
을 임금께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이에 관칙이 도착하는 즉시 관하의 각 읍
과 진에서는 지금부터 무릇 공문의 연월일과 관련되는 것은 다만 ‘개국 503
년 월 일’로 쓰는 것이 옳다고 타이르도록 하라”는 관문이 있었다고 하며,
관문의 내용의 말을 살펴 시행하라.
1894년 7월 13일

서울에서 보낸 기별 [京奇]
민영준閔泳駿은 백성을 침학하였으니, 곧 나라를 저버리고 오로지 거두어들
이기만 했으며, 마침내 자기를 살찌웠다.
민형식閔炯植은 끝없이 백성을 침학하고 재물을 탐내서, 각 도에 해를 끼쳤다.

15 팽형(烹刑)·장형(杖刑): 팽형은 솥에 삶아 죽이는 것, 장형은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다.


수 록 隨錄 61

김세기金世基는 권세 있는 가문에 뇌물을 썼으며, 헛소문이라 했지만 끝내


는 염치와 예의가 없었다.
이상은 안치한다.
민응식閔應植은 관청을 짓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꾀하지 않은 것이 없으
면서 세금을 포탈하고, 백성을 수탈함이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매우
통탄스럽다.
민치헌閔致憲은 수령의 직을 여러 번 맡으면서 분수에 넘치는 한없는 욕심
을 부렸다.
이상은 정배한다.

의정부 [議政府]
一. 각사의 관원과 서리, 조예의 액수를 자세히 조사하여 알릴 것.
一. 각사의 비용으로 받지 못한 것未捧과 전해져 내려오는 공납公納을 자세
히 조사하여 알릴 것.
一. 각궁, 각영, 각사의 도장導掌16은 전답과 제언堤堰, 세장稅場, 시장柴場 등
각 명목을 명확히 조사하여 알릴 것.
이달6월 초 10일 일제히 와서 의정부에 바칠 것.
의복의 바뀐 제도는 또한 초 10일을 기한으로 삼는다.

군국기무처 장정 1894년 6월 26일 [軍國機務處章程 甲午六月二


十六日]
一. 군국기무처는 군국기무를 모여서 의논하며, 일체의 제도를 새롭게 개

16 도장(導掌): 궁방이나 둔전의 도조나 결미를 징수하는 사람으로 개인에 딸린 마름(舍音)과 같은


역할을 했다.
6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혁하여 처리하는 곳이다.


一. 군국기무는 군국기무처의 의논을 거친 후에 아뢰어서 거행한다.
一. 총재 1명, 부총재 1명, 의원은 10명 이상 20명 이하, 서기관은 2명 혹
은 3명이다.
一. 의장은 서기관 중 1명을 택하여 비서관으로 삼는다.
一. 군국기무처의 직무의 분담은 다음에 열거할 바와 같다.
一. 경외의 여러 관부의 직제
一. 주현의 직제
一. 의결을 행하거나 사법과 관련된 것으로 응당해야 할 일체의 규례
一. 전부田賦, 화세貨稅 및 각항의 재정으로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체의 규례
一. 학교관련 행정
一. 군사관련 행정
一. 식산흥업 및 상행위 소관 일체의 사무는 이상 여러 조항 외에 군국과
관련된 것 일체 사무는 모두 회의할 수 있다.
一. 군국기무처 회원이 반수 이상 와서 모이면 개회할 수 있다.
一. 군국기무처의 회의시에 총재가 의장이 되며, 의장이 사고가 있으면 부
의장이 대신 사무를 집행한다. 의장과 부의장이 모두 사고가 있으면
그 다음 의원이 대변한다.
一. 의원이 의논하는 일은 가부의 다소를 따라서 변별한다. 만일 가부가
서로 같게 되면 의장이 결정한다.
一. 군국기무처에서 의논하는 일은 의장 부의장에서 의원에 미치기까지
발론한 자와 무릇 논의할 만한 일과 관련된 자는 기초위원이 있어서
그 의안을 기록하게 한다.
一. 기초위원은 의장이 의원 중에서 2인 혹은 3인을 선정한다.
수 록 隨錄 63

一. 기초위원은 그 때 기초된 논의와 기타 사건을 강론할 수 있다.


一. 의장은 군국기무처소속 일체의 사무를 총관하며, 또한 군국기무처에서
발행한 일체의 공문에 서명한다.
一. 서기관은 의장의 지휘를 지키고 받들어서 어기지 않고, 본처의 일상
사무를 관리하고, 또한 회의 자리에 있어서 그 의논된 것을 옆에서 기
록하고, 또한 초기할 만한 것과 의논할 만한 일을 의원에게 교부한다.
一. 각 아문의 일체 사무는 마땅히 회의에서 작정하여 고친 것에 의거하여
맞게 정하고, 해당 장관은 상업과 관련된 사건을 발생하게 되면 초본
을 열고 직접 여러 파원들에게 가서 어려움을 물어서 갖출 것
一. 매일 근무하는 시각
3월에서 8월까지는 상오 9점에 나와서 하오 4점에 퇴근할 것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상오 10점에 나와서 하오 4점에 퇴근할 것
중요한 사무가 있으면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은 이러한 계산에 해당되
지 않는다.

6월 21일 전교傳에, “크고 작은 사무는 대원군께 아뢰어서 결정하라”고 하


였다.

22일 전교에, “병판을 체직하여 전라감사 김학진17으로 제수하고, 전라감


사에는 장흥부사 박제순을 제수하며, 병조참의 김가진을 판서서리로 삼아라”
고 하였다.

17 김학진(金鶴鎭): 1894년 7월 관직개편으로 병조는 군무아문으로 바꾸었는데 김학진은 7월 18일


자로 그대로 전라감사로 재임명되었다.
6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내무협판 유길준兪吉濬에게 외무협판을 겸찰하게 하다.


직장直長 정운붕鄭雲鵬을 별군직으로 임명하였다.
13일 민영준, 민응식, 김세기를 원악지遠惡地에 안치하도록 하고, 민형식,
민치헌을 원악도遠惡島에 정배하였다.
홍계훈을 별군직에 임명하였다.

14일 호조판서는 민영달閔泳達을 삼고, 춘천 유수春留에는 이규석李圭奭, 별입


직에는 민영환閔泳煥, 민영소를 삼았으며, 강화유수에는 김윤식을 삼았다.
一. 피난한 사람들을 안무하고, 무뢰배들을 금하도록 지시하는 방을 붙이
라고 대원군께서 분부하였다.

25일 좌포장에는 조희연趙羲淵을 삼았다. 유형진柳瀯鎭을 기기국방판機器局幇辦


으로 삼았으며, 외무참의로 임명하였다. 김학우金鶴羽를 연무공원참리鍊武公院參
理로 삼았으며, 전 주사 김하영金夏英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하였다가 그대
로 체직시켜 내무참의에 임명하였다. 영의정에는 승동承洞의 김병시金炳始가
상소를 올려 체직하자, 훈동勳洞의 김홍집金弘集을 삼았다. 무릇 정치를 대경장
大更張하고 대징창大懲創하니, 장차 크게 새롭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 밤에
인사가 시작되었으며, 수령들을 각별히 골라서 임명할 것이라고 한다. 병조
에서의 인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회의소를 내무부에 설치하고 여러 날 계속하여 회의를 하였으며, 총재는
영의정이 맡고, 회의원은 17명으로 박정양, 민영달, 김윤식, 어윤중, 김가진,
신정희, 이봉의李鳳儀, 조희연, 안경수, 김종한金宗漢, 이원긍李源兢, 박준양朴準陽,
김학규金鶴圭, 유길준 등이다.
각사各司를 혁파하고 10부府를 새로이 설치하였으며, 궁내부宮內府, 의정
부, 내무아문內務衙門, 외무아문外務衙門, 탁지아문度支衙門, 군무아문軍務衙門, 법무
수 록 隨錄 65

아문法務衙門, 농무아문農務衙門, 학무아문學務衙門, 공무아문工務衙門 등이다.

6월 26일 인사행정이 있었다. 경주는 남계희南季熙, 장흥에는 박헌양朴憲陽,


호조참의에는 한시동韓蓍東, 대제학에는 김익용金益容, 영의정에는 훈동의 김홍
집, 선혜청 당상에는 어윤중, 평안감사에는 김만식金萬植, 황해감사에는 김춘
희金春熙, 호조판서에는 민영달 등이다. 새로운 절목의 회원으로는 강화유수
김윤식, 동부승지 박준양, 김하영이다. 17원은 각 아문의 당상으로 궁내부,
내무아문, 탁지아문, 군무아문, 학무아문, 의정부, 외무아문, 법무아문, 공무
아문, 농상무아문, 철원부사에 홍계훈, 연안부사에 김승집金升集, 황해감사에
정현석鄭顯奭, 남양부사에 신태희申泰熙, 남병사에 이유인李裕寅, 자성慈城군수에
상직현尙稷鉉, 혜상국 당상에 안경수 등이다.
6월 29일 부수찬에는 홍승운洪承運, 병조정랑兵正에는 이경호李暻浩, 병조좌랑
에는 김응권金應權, 전섬典 에는 홍현승洪顯昇, 호조정랑戶正에는 조용희趙容熙,
재릉참봉齋陵令에는 김진구金鎭九, 경릉참봉景陵令에는 서상락徐相洛, 조경묘참봉肇
慶廟令에는 이기호李氣鎬, 영희전참봉永禧參奉에는 이범신李範臣, 온릉참봉溫陵參奉에
는 이상우李相宇, 능참봉에 한정화韓正和, 종묘령에 김종희金宗熙, 광주光州목사는
이희성李羲性, 영흥부사는 이남규李南珪, 하동부사는 이채연李采淵, 영월부사는
엄야흥嚴夜興, 함양군수는 김영순金永順, 수안군수는 이경호李京鎬, 배천白川군수
는 윤기선尹夔善, 곽산군수는 이민제李敏濟, 무장현감은 민배호閔配鎬, 강릉부사
는 김영진金永鎭, 금산金山 군수는 박준빈朴駿彬, 고성군수는 조원식趙元植, 시흥현
령은 이민헌李敏憲, 제천현감은 김완한金完漢, 안의현감은 이유형李裕亨, 한성주
부漢主는 이용직李用稙, 친군영 도제조는 단망單望18으로 훈동의 영의정, 협판

18 단망(單望): 인물을 추천할 때 세 후보자를 기재해야 하는데 1인만 기재하는 것을 말한다.


6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내무부사는 단망으로 정경원鄭敬源이다.


7월 초 1일 전교에, “권봉희權鳳熙, 안효제安孝濟를 수찬에 제수하고, 부사과
최재철崔在撤을 부수찬에 제수하며, 행호군 최익현崔益鉉을 공조판서에 제수한
다. 검열 민후식閔厚植은 승륙陞六19시키라”고 하였다. 초 2일에는 병조에 구전
에 의한 인사가 있었다. 좌익찬左翊贊에는 민영억閔泳檍, 좌위솔左衛率에 박자양
朴字陽, 좌부솔左副率에 김용범金容範, 우시직右侍直에 김유증金裕曾, 좌세마左洗馬에
김성한金聲漢을 임명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장위영 문안文案인 권재봉權在鳳을 내무참의內務參議에
임명한다”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지사 이유인李裕寅을 남병사에 제수하고, 자성慈城은
궐원된 것을 대신하여 상직현尙稷鉉으로 한다”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좌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체직도록 한다”고 하였다. 지
난 망단자望單子를 들어서 이병훈李秉勳과 오중선吳仲善이 각각 낙점되었다.
사알司謁이 구전으로 전교하여, 서영西營, 평양군영의 병정이 돌아 올 때,
새로운 관찰사가 통솔하여 내려 보내라고 하였다. 초 3일에 이조참의를 체직
하도록 하였다. 지난 망단자에 올랐던 정인승鄭寅昇이 낙점되었다.
좌의정 조병세趙秉世가 소를 올렸다. 전교하기를 “오늘 날 국가의 세력이
위급하니, 진실로 어떠한 때인가. 경이 충성하면서 어찌 말을 남기고 갈 수
있겠으며, 내가 맡기는 것을 어찌 듣고서 갈 수 있는가?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
는 뜻으로 한결같이 진퇴하여 마음을 먹지 말도록 하고 의정이란 직함에 단단
히 마음과 힘을 다하고. 지금 다만 힘써 따르도록 하고, 경은 더욱더 마음과

19 승륙(陞六): 7품이하 벼슬아치가 6품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출륙(出六)이라고도 하는데 고관에


들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수 록 隨錄 67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함께 구제하기를 깊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전 묘관墓官 이태욱李泰郁을 공조참의에 제수한다”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전후에 귀양을 간 자들을 풀어주고 모두 죄를 씻
어주어 벼슬에 올려서 기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참작
해 처리할 것이 있다. 옥에 갇힌 죄인 이승일李承一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초
4일 좌부승지와 우부승지로 임대준任大準과 김유성金裕成을 각각 낙점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독판을 교체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강화유수 김
윤식을 임명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영변부사는 궐원이 된 것을 대신하여
이범진李範晉으로 대신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독판은 정원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여 곧바로 공
무를 보도록 하라. 동부승지는 외방에 있으므로 체직하라”고 하였으며, 지난
망단자를 들여서 한창수韓昌洙를 낙점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대호군 이윤
용李允用을 금군별장으로 제수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한성부 당
상을 체직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판윤 변원규卞元圭를 낙점하였다. 초 5일 우
의정 정범조鄭範朝가 상소를 올렸다. 국왕이 이르기를, “좌의정이 바로 떠날
것을 고하였으며, 물러나겠다는 소장이 또한 따랐다. 경이 힘써 충성을 다하
는 것을 깊이 알고 있다. 경은 일체 고심하여 헛된 문장으로 고집을 피우지
말고 상소를 올린 것 중에서 쓴 직임은 지금 다만 따라주는 것이니, 경은 나
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려 책임을 벗었다고 자처하지 말고 말로써 좋은 계책
을 내어서 이러한 시기에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조에 대해 구전에 의한 인사가 있었다. 장위영 부영관副領官이 단망으
로 오석영吳錫永이 임명되었다. 전교에 이르기를, “제중원의 주사主司 김경하金
經夏를 외무참의로 임명하고, 선공감 별제繕別 이인영李寅榮을 내무참의內務參議
로 임명하라.”고 하였다. 외무독판 김윤식金允植이 상소하였다. 그에 대하여
6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이르기를, “지난 일은 지금 이와 같이 인용할 수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즉시 공무를 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독판 김윤식의
상소에 대해서는 비답을 이미 내렸다. 곧바로 승지를 보내어 불러오도록 하
고, 만일 어기게 되면 호망呼望20하지 않도록 하라. 우부승지를 체직하라”고
하였다. 지난 망단자를 들여 채규룡蔡奎龍을 낙점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평해의 조종성趙種成, 위원渭原의 한기동韓起東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제수하
라”고 하였다.

7월 초1일 공조참의 김경하金經夏, 돈녕도정 이인영, 내금위장 채규준蔡奎駿,


동부승지 신경균申敬均, 청주 신일영申一永, 용인 조준영趙浚永, 응교 이용구李容九,
장위병방 민치기閔致驥, 동몽교관 김인규金仁圭, 김두한金斗漢, 이조참의 이중두李中
斗, 좌부승지 유진필兪鎭弼, 우부승지 목종원陸鐘元, 우의정 정범조의 상소가 있었
으며 체직하였다. 동부승지에 윤상학尹尙學, 우부승지에 김동안金東顔, 좌승지에
홍우상洪祐相, 이조참의에 김가진, 평안병사에 이용한李用漢, 능주綾州에 조존두趙
存斗, 경리사에 안경수, 우승지에 심상만沈相萬, 장위영 영관領官에 이병무李秉武, 이
범래李範來, 이광하李匡夏, 판윤에 안경수, 동부승지에 조선창趙善昌을 임명하였다.
초 8일 의정부 초기 내용에, “근래 화폐법이 문란하여 당오전과 엽전을 끝
내 분별하지 않고 당오전 안에 엽전을 집어넣어 함부로 당오전으로 충당하여
사용하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모두 제도를 위반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엄하
게 신칙하여야 합니다. 법전을 설치한 후 엽전은 반드시 100문을 1냥이라 칭
하게 하고 있으며, 만일 당오전 내에서 엽전을 잡스럽게 집어넣어서 사용하
는 자는 당오전은 곧바로 엽전에 비추어서 숫자를 세어 계산하여 폐단을 막

20 호망(呼望): 천망(薦望)이라고도 하며, 벼슬아치로 임명해 불러들이는 것을 말한다.


수 록 隨錄 69

아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상납하는 것과 각 항목에서 나누어 주는 것은


지금부터 모두 엽전으로 계산하여 내려줄 것이니, 빨리 알리도록 하고, 평안
도 내에 있는 주전소는 또한 철파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병조에서 구전의 인사가 이루어졌다. 총어영 문안文案이 단망으로 김익식金
益植이다. 기사장騎士將이 단망으로 조동원趙東院이다.

一. 내무부 초기에, 전 참군 윤갑병尹甲炳, 사용 이준필李駿弼, 유학 신좌균申


佐均을 모두 본부의 주사로 임명하는 일이었다. 전교에 이르기를, “그
렇게 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이조참의를 체직하고, 부호군 오덕영吳德永을 제수하라”


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협판 김가진을 병조참의를 다시 주라”고
하였다. 곧이어 서리를 하도록 하였다. 이조에서 구전의 인사가 있었다.
병조참의 이최영李 榮

一. 승정원에서 아뢰어 우부승지 이중두李中斗가 현재 영평永平 땅에 있어서


올라오게 하기를 청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체직하게 하라”고 하였
다. 지난 망단자를 들이게 하여 서병선徐丙善을 낙점하였다. 판윤 안경
수가 가자되었으며 숙배하였다.
一. 사알司謁이 구전으로 전교하여, “평산부사에게 말을 주어 당일에 내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조참의 오덕영吳德永을 오늘 가선嘉善을 가
자하여 더하라는 전교를 받들었음. 초 9일.

이조참의에 김유성金裕成, 교리에 이근보李根輔, 변종헌卞鍾獻, 부교리에 이중구


李中久, 이기일李起鎰, 수찬에 김경제金慶濟, 서행보徐行輔, 부수찬에 윤시영尹始永, 김
7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준한金駿漢, 형조판서에 조희연, 돈녕도정에 이회원李會源, 우부승지에 유진수兪鎭


壽, 동부승지에 정병하鄭秉夏, 호서동학선무사에 정경원, 소윤 정만조, 동부승지
박현양朴顯陽, 금산군수에 임영호, 파주목사에 이건호李建鎬를 임명하였다.

초 3일 사옹첨정에 정홍교鄭鴻敎, 희릉령에 고대진高垈鎭, 기국사사機局司事에


이건홍李建弘,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영건李榮建, 예릉령睿陵令에 김석진金碩鎭, 교섭
주사에 유철준兪哲濬, 종묘령에 서상락徐相洛, 온릉령溫陵令에 조종설趙鍾卨, 경릉
령敬陵令에 이찬호李瓚鎬, 경릉령景陵令에 박하양朴夏陽, 동지에 윤용식尹容植, 이교
영李敎榮, 동훈련同訓鍊에 안경수安 壽, 첨지에 조선창趙善昌, 훈련도정에 이규태
李圭泰, 선전관에 정준영鄭峻永, 유길노柳吉魯, 원용전元容銓, 내금위장內禁衛將에 김
규오金圭五, 전라좌수사에 김철규金澈圭, 삼척령장三陟令將에 구연규具然奎, 충청병
사에 장석태張錫泰, 전라병영우후全羅兵候에 이풍의李豊儀, 황해수사 정광진鄭光軫,
선전관에 윤석천尹錫天, 이남규李南奎, 조방현趙邦顯, 협판내무부사에 유형진柳瀅鎭
을 임명하였다. 전 묘관 박병묵을 지금 가선嘉善을 더하라는 전교를 받들었
음. 판부사가 단망으로 조 趙 이다.
7월 초 4일 예조판서 신헌구申獻求, 참의 송영대宋榮大, 형조판서 이봉의李
鳳儀, 참판 조희연, 참의 조명교趙命敎, 좌윤 김상규金商圭, 우윤 남치원南致源, 전
의全義에 이교승李敎承을 태릉령泰陵令에 조연趙(木+延), 대교臺敎에 서회순徐晦淳,
목릉령穆陵令에 최문환崔文煥,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단망으로 김윤
식, 장위영 문안文案에 단망으로 정봉림鄭鳳林이 임명되었다. 초 5일 인사가 있
었다. 응교에 이순하李舜夏, 기국사사機局司事에 김순병金淳秉, 선공감 별제繕別에
서주보徐周輔, 사농판관司農判官에 정태용鄭台鎔, 교섭주사에 이만녕李萬寧, 기국사
사機局司事에 이석래李錫徠, 정윤성鄭潤性, 북부령北部令에 황희철黃羲喆, 길주목사에
한창교韓昌敎, 장단부사에 홍용관洪用觀, 태안부사에 신백희, 밀양부사에 이범
수 록 隨錄 71

선李範善, 평산부사에 오석영吳錫永, 장연부사에 정창현鄭昌鉉, 양양부사에 김정


진金靖鎭, 덕원부사에 윤충구尹忠求, 무산부사에 이교문李敎文, 면천군수에 조중
하, 문천군수에 윤자선尹滋善, 위원군수에 이범주李範疇, 평해군수에 황철연黃哲
淵, 곡성현감에 이문영李文榮, 옥구현감에 김주호金疇鎬, 강진현감에 이규하李奎
夏, 적성현감에 이명우李明宇, 남영南營 문안文案에 곽진곤郭鎭坤, 건릉령健陵令에
이호집李鎬潗, 내무주사에 박주동朴注東, 정욱조鄭旭朝, 제중원 주사에 권재기權載
紀, 감역監役에 이범준李範準, 금부도사에 이두하李斗夏, 동부도사에 신습申 , 중
부도사에 남상봉南相鳳, 후릉참봉에 김종진金鍾振, 현릉참봉에 고필주高弼柱, 공
릉참봉恭陵郎에 허헌許憲, 휘릉참봉徽陵郞에 이덕래李德來, 휘경원 묘관에 정창시
鄭昌時, 순창원 묘관에 육용필陸用弼, 영회원 묘관에 이유열李裕烈, 순강원 묘관에
신면희申冕熙, 영천榮川에 유인시柳寅時, 통천군수에 박시병朴時秉, 비인현감에 신
태긍申泰兢, 영천永川군수에 남정헌南廷獻, 홍천현감에 서학순徐學淳, 금화현감에
오응선吳應善, 은진현감에 권종억權鐘億, 봉화현감에 채경묵蔡慶 , 예안현감에
이중헌李重憲, 진천현감에 안필수安弼壽, 거창부사에 김홍국金弘國, 양천현감에
임시익林時益, 의흥현감에 성태영成泰永, 무안현감에 이응직李膺稙, 장기현감에
이매구李邁久, 평창군수에 심의평沈宜平, 재령군수에 김영직金永稷, 은산현감에
김직수金稷洙, 남포현감에 정추택鄭樞澤, 상서원 별제尙瑞別提에 강홍姜泓, 화릉참
봉에 김병우金秉祐,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에 권종철權鐘哲, 가감역에 정재효鄭在孝,
수릉참봉綏陵郞에 성낙선成樂善, 형조정랑秋正郞에 김흥기金興基, 효릉참봉孝陵令에
정대위丁大緯, 금부도사에 김영준金永準, 선릉참봉宣陵令에 서채순徐采淳, 사직령社
稷令에 홍재봉洪在鳳, 사복시 주부에 신학균申學均, 동지에 장시표張時杓, 백성기白
性基, 겸훈련도정에 이희빈李熙斌, 조사장曹司將에 이주영李周永, 선전관에 구연학
具然學, 강원 중군에 김덕진金德鎭, 부산첨사에 이종호李鐘浩, 신도첨사薪島僉使에
임영호任榮鎬, 절영첨사絶影僉使에 박기종朴淇琮, 신광첨사神光僉使에 박추진朴樞鎭,
7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에 박세혁朴世赫, 가리포첨사에 이범륙李範陸, 가덕첨사加德僉


使에 송희필宋熙弼, 경상좌병영우후慶尙左兵候에 최경국崔敬國, 전라수사에 신홍,
선전관에 신승균申昇均, 판중추부사에 단망의 정범조鄭範朝가 임명되었다.

의정부의 장안 1894년 6월 29일 [議狀案 甲午六月二十九日]


一. 광서光緖 청의 연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폐지하고 새롭게 조선연호를
세운다. 이후부터 국내외 공사의 문서文字에는 ‘개국기년’을 쓴다.
一. 청국과 조약을 개정한 후 특명전권대신을 여러 나라에 보내어 자주적
이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음을 알리도록 할 것.
一. 문반과 무반, 존비의 구별을 폐지하며, 다만 품계를 따르고 서로 상견
相見의 의식이 있도록 한다.
一. 죄인은 자신 외에 연좌하는 법률을 일체 시행하지 않도록 한다.
一. 적처와 첩이 모두 자녀가 없을 경우에 비로소 양자를 데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옛 법舊典을 명확하게 밝힌다.
一. 남녀가 일찍 결혼하는 것은 마땅히 엄하게 금하도록 하며, 남자는 20
세, 여자는 16세 이후가 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혼인할 수 있게 한다.
一. 부녀자가 재가를 할 때에 신분의 귀천을 물론하고, 자신의 의사에 맡
긴다.
一. 승려가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것을 폐지한다.21
一. 공노비와 사노비의 제도를 일체 혁파하고, 인구人口와 자녀를 매매하는
것을 금한다.
一. 비록 평민이라도 만일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의견을

21 승려해금: 의정부의 의안에는 이 항목이 없다.


수 록 隨錄 73

내놓는 자는 군국기무처에 글을 올려서 회의에 붙이도록 한다.

이 첨사가 한성에 있으면서 본 관가에 보낸 글 [李僉使在漢抵本


官家書]
1894년 7월 22일 대구에 있을 때 씀.
일본인이 동래에서 서울에 도착하여 새롭게 전기를 설치하고 또한 동래,
대구, 상주, 문경 등의 곳에 각각 진을 쳐서 군대 수천 명씩을 두었고 또한
대구의 전국電局을 빼앗아 전국위원電局委員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들이 부린 행
패는 조그마한 것은 모두 들기 어려울 정도이며, 일본인과 10건의 조목을 헤
아려서 정하였습니다. 묘당에서 관문이 왔습니다. 박영효는 일전에 여기에
도착하였으며, 본영의 사또를 만나려고 요청했지만, 사또는 다른 핑계를 대
면서 만나지 않고 곧바로 서울로 갔습니다.
며칠 전에 서울의 소식이 내려와서 당오전을 1문으로 사용하고, 또한 구멍
이 없는 돈을 사용한다고 하였습니다. 청나라 군사가 평양에 도착하였고, 일
본군사는 또한 내려갔다고 한다고 하였다.

새로이 관제를 정하고 당상을 임명하였다 [新定官制堂上差下]


1894년 7월 일(甲午 七月 日)
총리대신 영의정 김홍집
찬성 김수현金壽鉉 이유승李裕承
대사헌22 박용대朴容大 이중하李重夏 이태용李泰容 조인승曺寅承
유길준

22 대사헌(大司憲): 본디 1인이나 이때에 복수로 개정되었다


7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궁내대신 영종정경 이재면李載冕 협판 김종한金宗漢


내무대신 민영달閔泳達 협판 이준용李埈鎔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 협판 김가진金嘉鎭
탁지대신 어윤중魚允中 협판 김희수金喜洙
법무대신 윤용구尹用求 협판 김학우金鶴羽
공무대신 서정순徐正淳 협판 한시동韓耆東
학무대신 박정양朴定陽 협판 정경원鄭敬源
군무대신 이규원李奎遠 협판 조희연趙羲淵
농무대신 엄세영嚴世永 협판 정병하鄭秉夏
매 아문에 각각 참의 5원員, 주사 수십여 원인데 아직 다만 임명하지 못하
였다. 이번7월 22일을 위시하여 이로써 정식을 삼으니, 그 외의 각사는 모두
해당하는 아문에 붙여서 속한다.
경찰사警察使23는 안경수이며, 곧 전의 포도대장捕將의 임무이다.
통위사統衛使는 이준용이다.
이조참의에 정학묵을 제수하였으며, 공릉참봉恭參에는 허헌, 휘경원참봉徽
慶參에는 정창시를 임명하였다.

무주에 보낸 감결 [甘結 茂朱]


무뢰잡류를 금집禁集하는 일로 전봉준 등이 아뢰었다.
지난 달6월 15일 감결을 보내어 신칙하여, 거듭 되풀이 하여 알렸을 뿐만
이 아니었지만, 몇 개의 읍에서 보고한 것과 공형들의 문장을 연이어서 보니,
이들 무리들이 돈과 곡물을 토색하고, 겁탈과 약탈을 자행한 것이 여러 읍에

23 경찰사(警察使): 경무사(警務使)의 오기이다.


수 록 隨錄 75

두루 가득 차 있으며,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각 읍에서는 어찌하여 쓸데없이


영칙을 내리고 처음부터 금하여 막지 않았다. 포성이 한번 터지자 관리들은
바쁘게 뛰어다니지만 마음이 안정된 듯 편안한 듯이 그들이 마음대로 날뛰도
록 내버려 두었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데도 관에서
는 관여하여 묻지 않았다. 마침내 진동학인眞東學人들이 그들이 끼친 누로 피
해를 당하였다. 집강을 정하여 법을 설치하여 금단하는 조치를 하기에 이르
렀으나, 수령 된 자는 오히려 수수방관하고 있다. 군사를 일으켜서 이에 이르
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지금7월 초 6일 전봉준과 그의 학도들은 순영문에 와서 모여 참된 마음으
로 모두 제거한 후에 또한 열읍의 집강과 굳게 약속하고, 통문을 지어 만들었
다고 한다. 그래서 가만히 그들의 통문을 보니, 말이 실심實心에서 말미암아
서 나왔으며, 모두 사리에 합당하고 간절하였다. 자세히 살펴서 반드시 모든
것을 극진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대개를 들어서 다음에 기록한다. 이에 다시
감결을 내니 도착한 즉시 한문과 한글로 번역하여 베껴서 마을에 게시하고
대소의 민인들이 경계하고 두려운 듯이 거행하게 하라.
이후부터 만일 이와 같은 무리들이 전과 같이 소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
면 비록 진동학眞東學이라도 발견되는 대로 관칙을 기다리지 않고 마을에서
힘을 합쳐 잡아서 관에 바치고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용서하지 않고 법에 비
추어서 처단할 것이다. 또한 곧바로 집강소에 통하여 한 마음으로 어지럽히
는 것을 막도록 하되, 어떤 읍을 따지지 않고 만일 하나같이 그대로 지나치면
고식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 즉, 이는 해당 수령이 도리에 어긋
난 패악한 자들을 일부러 놓아준 것으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저 전봉준 등이 참된 마음으로 일을 판단하는 것을 보면 부끄럽지 않은가?
7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과 관련된 것은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이며, 마땅히 국왕


에게 아뢰어 파직을 논할 것이니 예사롭지 않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감결이 도착한 상황을 먼저 빨리 보고함이 옳다.
1894년 7월 8일 도순사

후록 [後]
각 읍의 집강들이 전봉준이 보낸 통문 원폭을 가지고 있다. 대략의 내용에,
“지금 우리들의 이와 같은 거사는 오로지 백성을 위하고 폐해를 없애려는 것
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저들이 떠돌아다니는 무리들이 교묘하게 속여서 여기
저기서 함부로 날뛰고 마음대로 일을 저지르고 있으며 백성을 괴롭히고 포학
하게 행동하여 마을에서 잔인하게 상처를 입히고 있으며, 자그마한 혐의가 있
거나 조그만 잘못이 있으면, 봉해 두었다가 반드시 갑작스레 보복하였다. 이
는 덕에 반대되고 선을 해치는 무리이다. 각 읍의 집강들이 자세히 살펴서 금
단하게 하라”고 하였다. 후록에서 대략 말하기를, “이미 거두어들인 포, 창,
칼, 말은 이미 관에 바쳐서 속하게 하고, 각 접주에게 돌려서 통지하여 포,
창, 칼, 말의 수효를 차지한 자의 성명과 거주지를 자세히 적고 책자를 2건
만들어 단장하여 순영문에 바쳐라. 첩帖을 만든 후에 1건은 순영에 올리고, 1
건은 다시 각 집강소에 두어서 이후에 살피기 위한 것으로 삼도록 할 것이다.
역마와 상마商馬는 각각 본주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지금 이후부터 포를 거
두고 말을 징발하는 것을 일체 금단하며 돈과 재물을 토색하는 자는 이름을
거론하여 순영에 보고하여 군율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남의 무덤을 파거나
사채를 거두는 자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절대로 시행하지 말 것이며,
만일 이와 같은 법을 범하는 자는 순영에 보고하여 율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수 록 隨錄 77

무주 집강소 [茂朱 執綱所]


방금 외적이 대궐을 침범하였으며, 임금께서 욕을 당하셨다. 우리들은 마
땅히 죽을 각오로 일제히 나아가라. 저들 외적들이 바야흐로 청국의 군사와
함께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데, 그들 군대가 매우 날래고 민첩하다. 지금 만약
갑자기 싸우게 되면 그 화는 예측할 수 없어서 종사에 미칠 수 있을 듯하니,
물러나 잠적하는 것만 못하다. 시세를 본 후에 기운을 북돋아주어서 계획을
실천한다면 만전을 기하는 대책이 될 것이다. 바라건대 무주 내의 각 접주들
에게 통문을 내어서 면마다 상의하여 각각 그 업에 편안하게 종사하게 하고,
경계 내에 각 접주들 여러 사람들과 직접 상의하여 각각 편안하게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게 하고 절대 경계 내에 있는 무리들이 마음대로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도록 절실히 바란다.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이른 후에 이와 같은 폐단을 고치지 못하면 해당 집강들을 영에 보고하여
엄히 처단할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해당 접의 사람으로 법을 어기는
자는 마땅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시행할 것이다. 절대 예사롭게 보지 않도
록 하라.
1894년 7월 17일 영하(營下)에서.
좌우도소 (押) 도서圖署를 새겼음. 좌우도左右道
도집강都執綱

서울에서 보낸 기별 [京奇]
밀양부사 정동기鄭東箕, 한산군수 정대무丁大懋, 양구현감 임창진任昌鎭, 보성
군수 윤심尹沁, 지평현감 안욱상安昱相, 옥천군수 김동민金東敏, 영덕현령 조현식
趙賢植, 전주판관 신영휴申永休, 봉화현감 고영철高永喆, 결성현감 박기붕朴基鵬, 진
산군수 신상申 , 연천현감 조명식趙明植, 송화현감 조중식趙重軾, 순창원참봉順昌
7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令 이재두李在斗, 기기주사機司 민영설閔泳卨, 민명식閔明植, 연풍延豊현감 서상학徐


相鶴, 정평定平부사 정태석鄭泰奭, 흥덕현감 윤석조尹錫祚, 고성부사 신경균申慶均,
당진현감 윤우선尹寓善, 영동현감 오창근吳衡根, 단천부사 홍종후洪鍾厚, 영천군
수 홍용관洪用觀, 내무대신內務大臣 민영상閔泳商, 법무대신 한시동韓蓍東, 공무협
판령工務協辦令 조숭정趙崇政, 경무사警務使는 단망으로 이봉의李鳳儀, 임천군수 한
진태韓鎭泰, 공주판관 조명호趙命鎬, 기장현감 이준필李駿弼, 여주목사 서의순徐誼
淳, 나주목사 박세병朴世秉, 순천부사 이수홍李秀洪, 안동부사 이희원李喜元, 회령
부사 어병억魚秉億, 강령현감 유관수柳灌秀, 장수현감 이장호李章鎬, 해미현감 심
의창沈宜昌, 종성부사 이용인李容仁, 교동부사 이상춘李春常, 통진부사 윤구성尹九
成, 만경현령 조희관趙羲寬, 동몽교관 조준희趙準熙, 이천부사 남정기南廷綺, 순천
부사 이정태李鼎泰, 김포군수 이도승李道承, 금산군수 이용덕李容德, 영암군수 남
기원南起元, 진위현령 조복래趙復來, 진해현감 구준길具俊吉, 이천찰방 김영제金永
濟, 해남현감 윤홍구尹弘求, 자여自如찰방 한경근韓敬根, 담양부사 조중구趙重九, 운
봉현감 이의형李義炯.
평양 관속 이하의 민인 등이 작은 돌을 모아 산과 같이 쌓아서 일본 군사
가 만일 이 곳에 오면 석전石戰을 벌여 도륙하려 하였고, 대동강에 있는 배들
을 모두 서쪽 물가西涯에 묶어 두었다. 근래 새로 임명되어 온 수령들은 실로
국왕이 임명한 자가 아니고, 모두 저들 무리들이 마음대로 차출하여 온 자들
이었다. 절대 강을 거슬러가서 입성하지 못하였으므로, 부득이 새로 온 관찰
사는 부득이 물러나서 황주 정방산성에 나아갔으며, 안주병사安梱 또한 평산
부에 있어서 여러 수령들 모두 강을 넘을 수 없었으며, 구 관찰사와 안 식구
와 백성들 모두가 짐을 지고 깊은 곳에 숨었다고 한다.
이번 초 3일 청나라 군사 3,000명과 말이 평양에 와서 외성에 주둔하였는
데, 체구가 장대하였고 모양은 매우 흉악하고 어수선하였다. 그래서 몽고병蒙
수 록 隨錄 79

古兵이라고 불리었다. 보병은 압록강에 이르러서 나무를 베고 강을 거슬러서


왔다고 하는데, 몇 천만 명인지 알 수 없다. 일본군사가 임진臨津과 청석관靑石
關에서 방어하였다. 여기에서부터 연속으로 군대를 출발시켰으며, 15일에 원
산에 있던 일본인은 4,000명이었고, 동소문에서 밤을 타고 들어온 자 또한
6,000명의 병사로서 장차 들어오려 하였다. 동래에서 10,000명이 계속하여
올라올 것이라고 하는데, 온다면 서로西路로 보낼 것이다. 22일 일본군사
3,000명이 또한 서울에 들어와서 궐내를 지키는 병사들을 점차 해산시키고
서로西路로 보냈으며, 만리창萬里倉24에 주둔한 병사들 또한 해산하여 보냈다.
약간 머물고 있던 오오도리大鳥는 밤낮으로 초조해 하면서 발광하였다고
한다.
23일 일본군 2,000명이 또 서울에 들어왔는데 전후로 들어 온 자가 거의
30,000명이며, 합친 수는 알 수 없다. 청국군이 온다 안 온다 하는데, 행인들
의 왕래가 갑자기 끊어져 또한 들은 것이 없다고 한다. 춘외春外에 들어간 청
국군이 토산兎山, 수안遂安을 나갔다고 한다.
일본인이 지금 빈민들을 진휼하고 무너진 집들을 조사하여 은전을 대
가로 줄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인심을 수
습하려는 것이다.
순검 300명을 선출하였으며, 동래인과 포청의 짐군擔軍들이 많이 들어
갔으며, 모두 일본 옷을 입었다. 밤에는 도성 내외를 두루 다니고 장위영 병
정을 염탐하였다. 일본인들이 골격을 어루만지고서, 그들 스스로 500명을 선
출하여 장차 싸움에 나가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24 만리창(萬里倉): 용산에 두었던 세미창고로, 일본군이 이 곳에 주둔하였고 뒷날 군사기지로 삼


았다.
8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양서兩西 각 읍에서 청병을 위하여 군량을 준비하였다. 오직 해서 연읍


에서만 일본 군사가 탈취하여 갔고 또한 더 거두어갔다고 한다. 백성들이 무
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양도兩道는 각 10,000석씩이라고 한다.
통위영에서 선발하는 것이나 선발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달
려 있으며, 병사를 선택하지 말라는 뜻으로 장신將臣에게 분부하자, 일본인들
이 부득이 그쳤다.
동도인 전녹두가 올라와서 스스로 회의하는 곳에 나타났다. 그래서 여
러 가지로 그들을 설득하였고, 반드시 국가에 힘써 충성하고 소란을 그칠 방
법을 기약하였은즉, 끝내 직을 주었다고 한다. 전녹두가 답하여 말하기를, “호
남의 일은 저들이 이미 담당하여 해산시켰다. 그러나 의병을 칭하면서 일어난
군사는 금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바로 내려 보내니 호서지방에서
일어난 소요는 서병학徐丙鶴, 박동진朴東鎭 2명이 소요를 그치는 일을 담당하였
다고 한다. 무사할 것을 바라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봉준을 이미 죽였다는 뜻으로25 조정을 기망하였으니, 이때문에 홍
계훈에게 시비是非가 있었다.
민영준이 평안도로 도망하여 숙천肅川지역에 이르렀는데, 병정과 민인
들이 잡아서 청나라 진영에 데리고 갔는데, 손을 묶고 발을 채우도록 하여
부대에 있는 옥에 가두었다. 혹자는 북경으로 잡아갔다고 하며, 혹자는 곧바
로 참수할 것이라고 하는데, 처단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홍삼과 수만 냥의
지전紙錢 등 각각의 물건을 말에 태우고 모두 청나라 진영에 바쳤다고 한다.
전 춘천유수 민두호閔斗鎬는 간 곳을 모르며, 춘천의 새롭게 만든 집은 백성들
이 태워버렸다고 한다.

25 전봉준 사망설: 전주 공방전 당시 전봉준은 부상을 입었는데 죽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수 록 隨錄 81

청나라 대인 정여창丁汝昌, 마대인馬大人, 섭대인葉志超 등 5 6명의 장수들


이 병사를 이끌고 들어왔으며, 정대인이 각 읍에 관문을 내어서 포군 외 백성
들을 불러 모았으며, 모두 그들을 향하여 따랐는데, 분발하여 떨쳐 힘쓰게
하였다고 한다.
6월 21일 이후 새로이 임명된 관찰사와 수령들을 모두 부임하지 말게
하라고 황제가 엄단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은진 의병소에 보낸 통사 [通辭 恩津義兵所]


근래 국가의 일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위로는 나라의 근심이
더욱더 심해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져서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
운 자 모두가 눈앞에 매우 위태로워 망할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한즉 무릇 우리나라 백성들이 누군들 몸을 다하여 한 가지
일에 온 마음을 쏟아 한 마음으로 토벌하기를 서약하는 것이 어떠한가? 조정
의 의견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변괴가 여기저기서 나타나서 임금을 버
리고 친척들이 흩어지는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익을 찾기를
좋아하고 수치스러움이 없는 무리들이 관류關類26들에 교섭하여 묘당 위에
나무를 깎아서 사람을 만들었으며 전의 계단사이에는 나라를 팔아먹는 도둑
이 득실거리고 원수의 군사들을 불러서 임금을 겁주었다.
저들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대국에 저항하여 약속을 배반하였으니, 하
늘을 속였다고 하겠다. 하늘의 위엄이 지척에 있으며, 충역이 나누어지지 않
아서 인심이 조석에 달려 있는데, 의리가 심하게 막혀서 오백 년 종사가 권신
들에게 좌우되어 위태롭고 삼천리강산이 장차 오랑캐들에게 지배를 받게 될

26 관류(關類): 중요한 자리에 있는 무리들을 말한다.


8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아픔을 어찌 참겠는가? 아아! 조정이


사대부를 대하는 것이 어떠하였으며, 열성조의 깊은 은택이 사람의 골수에
깊이 스며들어서 오랫동안 잊지 못하였다. 옛날 예양豫讓의 고사에서 보이는
협객은 국가에 보답할 것을 잊지 않았고, 한신과 같은 용맹한 자는 남에게
베푸는 은혜를 잊지 않았다. 지금 이와 같이 배양한 은택은 국가에 대한 은
혜를 보답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마땅
히 만에 하나라도 갚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도 선창하여
국가를 위하여 힘을 내는 자가 없으니, 어찌 하늘이 우리를 다치게 하고, 동
쪽의 떳떳함을 먼저 떨어뜨린 것이 아닌가?
호남 1도에 이르러 말하자면 옛날에는 의리를 앞세운 곳이었다. 이곳의 문
생들과 그의 후예들의 오랫동안 전하여 오늘에도 풍속이 이어졌으나, 다른
도道들이 전혀 행하지 못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열 집이 있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있으니, 53현縣27에 어찌 한사람의 의사義士가 없으
랴. 만일 무릇 사람마다 같은 뜻으로 모아서 읍마다 의거를 일으키고, 명성과
위세를 일으키고 펴서 소문을 듣고 행동을 같이한다면, 진실로 싸움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적들의 기세를 이와 같은 창의를 내세우는 것에서 빼앗을
수 있다. 넘어지는 것을 부축하고 무너진 것을 보충하는 것은 돌아보건대
귀 도의 전라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인가?
우리들은 선비들로서 춘추에 매달린 말학으로 노를 두드리면서 맹세하니,
진晋의 조적祖狄이 국가가 위태로움에 처했을 때 충성을 맹세한 것에는 못 미
치지만, 매양 왕실을 생각하니, 한漢 나라 때 원안袁安이 눈물을 흘린 것을 금
할 수 없다. 군대는 군사가 많은 것에 있지 않다. 곧바로 장계를 올려서 맹주

27 53현(縣): 전라도 지역에 있는 군현의 수를 말한다.


수 록 隨錄 83

의 명을 받들었으니, 이에 사신이 와서 알리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대소의


인원人員을 물론하고 선무사가 가르친 옛날 향단鄕團의 규칙에 의거하여 어려
운 때임을 들어서 한 마음으로 기의起義하면 천만 다행이겠다.

의병소조약 [義兵所條約]
一. 지금 이 의거는 오로지 국가를 위하고 힘써 충성을 다하는데서 나온
것인즉, 상하를 물론하고 그 의로움에서는 하나이다. 명분에 구애되지
말고, 힘세고 건장한 자를 골라서 소임을 짜도록 한다.
一. 본도에서 거사한 것은 적을 치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런즉 같은 배를
탄 것이라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와 내가 같은 성 가운데 있으니,
어찌 선후를 나누랴. 서로 힘을 써서 화목하여 서로 뒤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도포道包, 동학조직에 입록한 자가 의소義所에 입록하려는 것은 금하지 말라.


또한 도인 중 아버지나 형제, 아들, 조카 등에 구애받지 말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라. 만일 두 사이에서 혹 돈이나 곡식 때문에 혹은 미워하고 원망이
있는 것 때문에 서로 관련이 있는 자는 유사를 정하여 이치에 의거하여 엄하
게 금하도록 한다. 또한 혹 각각 서로 준수하지 않는 자는 관에 고하여 심리
하는 뜻으로 각각 조약을 정한다.
一. 만일 다만 입도하지 않고서 좌우를 관망하면서 의소에 곧바로 입록하
지 않은 자는 잡아와서 무겁게 다스린다.
一. 의소에 입록한 자는 각각 호패를 차고, 뒷면 위쪽에는 ‘의義’ 1자를 새
긴다.
一. 입록한 자는 몇 원員을 논하지 말고 재산의 다소에 따라 혹 50명, 혹은
84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100명 한 단위가 되어 5일에 한하여 의소에 입번토록 하여 교련을 하


도록 한다. 교련할 때 죽창도 무방하다.
一. 현재의 조정은 모든 정사가 날로 변하여 명령이 행해지지 않고, 감영
과 관아 등의 지방관청의 일이 격이 폐기된 지 오래되었다. 진실로 매
우 한심하다. 기의起義한 날부터 시작하여 도포道包와 약속을 정하여 무
릇 일체의 공무는 관가에서 주관하도록 하며, 양소 중에서 세력에 의
지하여 명령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양소에서 관청에 잡아들이도록 하
고, 법에 따라 징치懲治할 것이다.
一. 지금 이번 의거는 비록 국가를 위한 것이지만, 먼저 집을 보존하지 않
으면 쉽게 해산하게 된다. 먼저 의병의 가족들을 합하여 한곳에 모아
두고, 만전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 사람의 뜻한 바에 뜻을
둘 수 있은즉, 보堡를 쌓거나 혹은 험한 곳에 의지하여서 사람들을 모
아 조치를 의논할 것.
一. 군사들이 먹을 것과 무기 등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것은 하나하나를
달아서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기미에 따라서 그때그때 편하게
할 것이다.
一. 각 읍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에, 곧바로 호서의병소에 알려서 고할 것
이다.
一. 통문을 돌려서 고산향교에 도착하면, 읍에서 1건을 잘 베껴서 역내에
돌려보게 하며, 원래의 통문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서 전주에 부치면,
전주향교에서 몇 장을 베껴서 여러 읍에 돌려 전달할 것이다.

6월 초 3일 [六月初三日]
경기도 관찰사의 장계에, 양성陽城 현감의 보고의 내용에, “지난 그믐날5월
수 록 隨錄 85

30일에 청나라와 일본이 소사素沙에서 서로 싸워서 다만 승부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알 수 없으나, 창고의 곡식 980석을 일본군이 마음대로 가져간 일입
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섭지초葉志超의 군대가 공주의 산성으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황해도 감사의 장계에 청국병정이 영국 오죽선五竹船을 빌려서 18장場에 도
착하였으나, 수뢰포水雷砲에 다친 자가 2,000여 명이었다. 나머지 남은 자가
24명이고, 영국인 1명이 등주登州의 어선에 구조되었으며, 지금 수영水營에 머
물고 있습니다.
지난 그믐날에 진에 주둔한 종사관 서상교徐相喬가 인천항에 도착하여 이 일의
상황을 들었으며, 청나라에 사실을 변명하려고 천진天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간절하게 효유하는 글 [興宣大院君爲 切曉諭事]


우리나라는 어질고 후덕으로 나라를 세웠다. 예의가 풍속이 되었고 거듭
빛이 나서 충분히 젖어들었다. 오백년간 백성들은 군대를 보지 못하면서, 지
금에 이르렀다. 무릇 어찌하여 근년 이래 기강이 해이하여 풍속이 점차 무너
져서, 방백과 수령들이 탐학하고 토호들은 강한 세력을 지녀 무단을 부리고
간활한 서리들이 백성들을 침해함이 날마다 늘어나서 끝이 없는가. 우리 조
종조가 품으신 백성들이 모두가 살아갈 길이 없게 되었으며, 서울은 높고 멀
어서 호소할 길이 없으니, 드디어 동학에 이름을 의탁하여 무리를 모아서 스
스로 보호하려 하며, 하루라도 살아남기를 바라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정상
을 살펴보니, 아아! 또한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또한 슬프도다. 내가 본래
문을 닫고 한가하게 살아온 것이 20여 년이 되었고, 이미 늙고 병들어서 세
상의 일을 듣지 않았다. 근래 국가가 어려움이 많아서 병든 몸을 부축하여
대궐에 들어갔는데, 밖을 바라보니 서울 근교 사방의 많은 성채들이 연기와
8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먼지로 가득 차 보이고, 안을 살펴보니 서울이 고립되어 위험에 처해있어 마


치 권신들에게 좌우되어 있는 듯하다.
전국을 둘러보니 믿고서 국가를 위할 만한 것은 오직 삼남뿐이다. 생각건
대 이렇게 믿을 만한 삼남이 태반이 잘못되어 물들었다. 처음에는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일어났다가 점차 세력을 타서 움직이게 되었으며,
도처에서 소요가 많아졌고 분수를 범하게 되었다. 관들이 정치를 베풀 수 없
고, 조정은 영을 행할 수 없으며, 백성들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없다.
너희들은 이것이 과연 의거에서 나왔는지, 패거에서 나온 것인지 시험 삼
아 생각해보라. 지금 동도라고 칭하는 자들은 모두 난민들이다. 마땅히 초토
하여 죽여야 하는데, 나는 홀로 차마 너희들에게 난민이라고 지목할 수가 없
다. 너희들은 모두 우리 조종이 기른 백성들이다. 내가 그들의 성정을 쫓아
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여 난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또한 어찌 차마 군사
로 서로를 겨누겠는가? 조정을 서로 거역하니 이제 난민이란 지목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국가가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는 것은 항상 얻을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모두 빠지게 될 염려가 있을까 두려우니 또한 슬퍼하거나 애석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우리 성상의 뜻을 본받아 마음속의 것을 말하여
털어놓으면서 널리 포고한다.
너희들이 만일 곧바로 깨달아서 무기를 놓고 농사일을 하게 되면 결코 조
금도 죄를 더할 이치가 없다. 지금 곡식들이 이미 익은 것을 보니 부모처자
와 함께 배부르고 즐거움을 함께 누려서 영원히 태평성대의 백성이 되도록
하라. 재주가 있으면서도 영락해 있는 자들이 들어오면 마땅히 정부에서는
재주에 따라 수용할 것이다. 만일 경계한 것을 따르지 않고서 마음대로 법을
범하여 개미나 벌과 같이 모여서 바라보면서 해산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
로 화를 부르는 것이다. 내가 또한 사랑하고 있으며 이것보다 더 도와줄 수
수 록 隨錄 87

있는 것은 없다. 내 나이 올해 80이 다 되어서, 달리 구하려는 것도 없다.


단호하게 오직 종사와 생령에 하나같이 마음을 둘 뿐이다.
해가 하늘에 있으니 결코 서로 속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너희 무리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자 3 4명이 와서 직접 효
유하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스러운 것이 풀리고 얼음이 녹듯이 될 것이
고, 두려운 듯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근래 조정의 개혁정치를 너희
들 또한 들었느냐? 종전의 잘못된 폐단으로 백성들에게 해가 된 것을 하나하
나 고쳐서 화목을 다지고 이웃과 두터운 정분을 쌓아 더욱더 평화로운 복을
펴도록 하라. 이는 모두 우리 성상께서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고심에
서 나온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할 것이며, 마음을
편하게 갖고 속지 않도록 하라. 어떤 괴로움이 있기에 평온한 즐거움을 버리
고 스스로 위험에 나아가려 하는가? 아아! 오늘 이는 너희들에게는 화복이
갈리는 시기이며, 사람과 귀신을 구분하는 관문인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으로 그치겠다. 각각 살펴서 듣고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절실하게 이로
써 특별히 유시한다.
1894년 8월 일

9월 초 4일 [九月初四日]
그저께 서울에서 주사 2원員이 대원군의 효유문을 받들고 이곳에 내려와서
먼저 감영아래에 있는 동학도소에 효유하였다. 그래서 도집강 송희옥宋憙玉과
그가 거느리고 있는 무리들은 어제 모두 성을 나와서 흩어졌고, 이후 주사
2원員이 효유문을 받들고 곧바로 남원 등 동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여
갔다.
소모사 승지 이건영李建永이 9월 초 일에 전주부에 들어갔다. 다음 날 전주
8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부에서 나와서 갔다.


순유사巡諭使는 판서 박재관朴齊寬, 민영환閔泳煥, 이정로李正魯이다.
초 9일 도소의 집강 여러 사람들이 파하여 갔다.
초 10일 이백李伯 등이 난민을 이끌고 들어왔다. 도소가 이미 파하였음
을 듣고 다시 나갔다.

대군주께서 종묘에 전알하여 서약하여 고하는 글 [大君主展謁宗


廟 誓告文]
유維 개국 503년1894년 12월 12일 감히 황조皇祖와 열성列聖의 신령 앞에 고합
니다. 생각건대 짐朕은 어린 나이 때부터 우리 조종祖宗을 이어 지켜 제도를
그대로 따라 어려움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그 남긴 위업을 그르치지 않았
습니다. 짐이 어찌 감히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든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실로 우리 조종께서 돌보아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황조가 우리
왕조를 세우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 지도 503년이 되었습니다. 짐의 대에
와서 시운時運이 크게 변하고 인문이 개화하여 크게 번창하였으며 이웃 나라
들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의견이 서로 도와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자주독립自主獨立만이 우리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습니다.
짐이 어찌 감히 하늘의 시운을 받들어 우리 조종께서 남긴 왕업을 보전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감히 분발하고 가다듬고 힘써서 선대의 업적을 더욱 빛내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다른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국운을 융성하게 회복하여
백성의 복지를 만들어 나아감으로써 자주 독립의 기틀을 튼튼히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그 방도는 혹시라도 낡은 습관에 얽매지 말고 안일하고 편안하게
즐기기를 탐닉하지 말며 우리 조종의 큰 계책을 공손히 따르고 세상의 형세를
잘 살펴 내정內政을 개혁하고 오래 쌓인 폐단을 바로 잡을 것입니다.
수 록 隨錄 89

짐은 이에 14개 조목의 홍범洪範28으로써 하늘에 있는 우리 조종의 신령


앞에 고하며, 이에 조종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고, 감히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밝은 신령께서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一. 청淸 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튼튼
히 세운다.
一.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분수와
의리를 밝힌다.
一. 대군주는 정전正殿에 나아가 정무政務를 보되 직접 대신大臣들과 의논
하여 재결裁決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一. 왕실에 관한 사무와 국가의 정사에 관한 사무는 반드시 분리하고,
서로 뒤섞이게 하지 않는다.
一. 의정부議政府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와 권한을 명백히 제정한다.
一.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法令으로 정한 비율에 의하고 함부로
명목을 더하여 과도하게 징수할 수 없다.
一. 조세를 부과하는 것과 경비를 지출하는 것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
에서 관할한다.
一. 왕실의 비용을 솔선하여 줄이고 절약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 관청
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一. 왕실 비용과 각 관청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재정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一. 지방 관제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28 홍범(洪範) 14조: 1894년 12월에 반포한 정치혁신의 강령을 말한다.


9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一.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


의 학문과 기술을 전습 받는다.
一.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徵兵法을 적용하여 군사 제도의 기초를 튼
튼하게 정한다.
一. 민법民法과 형법刑法을 엄격하고 명백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一. 인재 등용은 문벌에 구애되지 말고. 선비들을 구하는 것은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미쳐서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관보 1894년 12월 16일 [官報 開國五百三年十二月十六日]


칙령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예법을 참고하여 개정하되 간소하게
하도록 힘쓰라”고 하였다. [총리대신아문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령에, “지금부터 국가
의 정사에 관한 사무는 짐이 직접 각각의 대신大臣들에게 물어서 재결裁決하겠
다. 의정부議政府를 대궐 안에 옮기고 내각內閣으로 고쳐 부르며, 처소는 수리
해 쓰도록 하라. 규장각奎章閣은 내각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총리대신아

문이 칙명을 받들었다]

또 칙명에, “조신朝臣의 대례복大禮服은 흑단령黑團領을 사용토록 하고 대궐에


나올 때 보통의 예복은 두루마기와 더그레搭護로 하며, 흑색의 토산 가는 베
와 사모, 목이 긴 신발을 사용토록 한다. 내년 설부터 시행한다. [총리대신아문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령에,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이하는 이제부터 국왕에게


상소를 직접 올리지 말고 사무를 구별하여 해당 아문衙門에 보고하면, 거기서
참작하여 주된 내용을 보고케 하라”고 하였다. [총리대신아문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령에, “높고 낮은 관리들이 서로 만났을 때 대하는 예법을 개정하라”고


수 록 隨錄 91

하였다. [총리대신아문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령에, “지방 제도를 개정하기에 앞서 주州, 군郡의 크기와 거리의 정도를


보아 다만 한 개 읍의 수령이 몇 개 읍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라”고 하였다.
[총리대신 내무대신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령에, “이제부터 팔도八道의 각 지방 수령들의 정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내무아문內務衙門을 거쳐 수시로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그것을 바로잡고
고쳐 나아갈 방책을 물어서 찾아내어 아뢰어서 시행하라”고 하였다. [총리대신

내무대신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령에, “크고 작은 제사를 참작하고 토의 결정하여 들여오라”고 하였다.


[총리대신 탁지대신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명에, “칙임관勅任官과 각부各府·아문衙門의 서기관書記官, 비서관秘書官은 합


문閤門 밖에까지 말을 타게 하고, 각처의 육군 장교陸軍將校와 경무관警務官도 이
규례대로 하라”고 하였다. [총리대신 각 아문대신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명에, “이제부터 만일 의견을 말한다는 것에 망령되게 핑계를 대어 국시


國是를 뒤흔들어 놓는 자가 있으면 원소原疏는 받아들이지 말고, 상소를 올린
사람은 직접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잡아다가 엄하게 징계하라”고 하였다. [총리

대신 법무대신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명에, “전후로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을 모두 사실을 해명하여 풀어


주도록 하며 죽은 사람은 벼슬을 회복시켜 주라”고 하였다. [총리대신 각 아문대신

이 칙명을 받들었다]

총리대신이 주청하기를 “호남湖南 지방에 지난 번 비적匪賊들이 들고 일어


났으니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와 지방관들의 공로와 죄과를 관리를 파견
하여 조사하여 헤아리고, 이치에 맞게 뒷마무리를 잘하였는가에 대한 것과
구휼할 방도에 대하여 각별히 생각하여 계획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9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라고 하니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또 주청하여,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장계를 즉견하게 하였다.
총리대신 김홍집, 내무대신 박영효, 학무대신 박정양, 외무대신 김윤식, 탁
지대신 어윤중, 농무대신 엄세영, 군무대신 조희연, 법무대신 서광범, 공무대
신 김가진
(번역 : 양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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