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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0303 수록 (전라)
ch0303 수록 (전라)
수록隨錄
수록隨錄
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4일 도착한 고부군의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고부
군수가 부임하여 취임인사를 하기 위해 감영으로 빨리 나아갔고, 3월 23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에 동학도 3,000여 명이 혹은 창을 지니고 혹은 죽창을
지녔는데, 총을 쏘면서 읍내로 난입하였습니다. 말을 탄자가 20여 명이었으
며, 모두 향교와 관청건물에 모였습니다. 저녁밥은 읍내의 서리와 민가에 나
누어 분담하도록 정하였으며, 그들이 행패를 부린 것은 끝이 없었습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3월 25일 도착한 고부군의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저들
무리들이 군무기 창고로 향해 가려다가, 먼저 실수로 화약고에 불을 내어 그
자리에서 즉사한 자가 몇 명이었고, 창에 찔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또한 많았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 무렵에서야 고부군의 서북쪽 사이에 난
길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4개 읍의 보고와 문장에서 보고한 것으로 그
들의 수를 세어보면, 혹은 수천 명이라 하고, 혹은 3,000여 명이라 하며, 또는
2,000명에서 3,000명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쪽은 많고 저쪽은 적어서 숫
자가 비록 같지 않으나, 처음엔 평민들이 없고 모두 동도였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서 갈수록 뒤를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대나무를 잘라 창을 만들고 포와 검을 거두어들였으며, 인가를 부
수고 돈과 곡물을 찾아내어 빼앗는 등의 여러 정상은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
다. 그들이 창궐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약고에 실수로 불이 붙었다고 말한
것은 비록 매우 모호하지만 그들의 행동들은 매우 놀랄 정도입니다. 잇달아
향교에서 발생한 일은 전에 없었던 일로 매우 놀랍고 두려운 것입니다.
이를 만일 빨리 무찔러 없애지 않으면 장차 오랫동안 시끄러워질 염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방도와 전략을 궁구하여 잡아들일 계획을 세웠
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4월 초 5일 [同日]
4월 초 2일에 도착한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의 보고 내용에, “고부군 백산白
山의 남은 무리들이 본 읍에 살고 있는 그들 무리들을 충동하여, 하동면下東面
분토동分土洞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거의 500명 쯤 되었는데 각자 죽창을 들고
있었고, 또한 붉은 기를 걸었는데 깃발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씌어 있
었습니다. 또한 작은 깃발에는 부안, 고부, 영광, 무장, 흥덕, 고창 등의 읍호
를 썼습니다. 모인 무리 중에서 200여 명은 4월 초 1일 안으로 난입하여, 장청
에서 대기하던 순영문의 포군들을 그들이 맘대로 쫓아내며 말하기를, ‘지금
이들 장정을 모으는 것은 오로지 우리를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일제히 나가서 각자 자기가 하던 일을 종사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며, 그들
무리들은 곧이어 분토동을 향해 곧바로 돌아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월 초 3일 도착한 태안현감 보고 내용에, “어제 아침 일찍 저들이 태안현
공형들에게 사통私通을 보냈는데, 사통의 내용에, ‘시장에서 분전分錢하여 세
금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4개조 항목을 관가에 아뢰었습니다. 지금
부터 장시場市에 전령傳令한 것 중에서는 다시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되는 것
1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4월 초 8일 계초 [四月初八日 啓草]
동학도당들이 4월 초 3일 부안현 부흥역으로 옮겨서 모여 있으며, 1개 부
대가 4월 초 3일 태인현 인곡, 북촌, 용산에서 머물러서 잤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아울러 일시에 빨리 보고하였습니다. 4월 초 5일에 도착한 부안현의
공형이 문장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어제 오시午時 무렵에 동학도 수천 명
이 또 금구현 원평으로부터 도착하였으며 금구현에 이미 모여 있던 무리들과
합세하여 동헌으로 돌입하였습니다. 금구현 현감은 사면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 인사를 살필 수 없었습니다. 공형들을 결박하고 군기를 탈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알려온 것으로 저들의 광경을 생각해보면, 금구현감이 그 자리
에 갇혀 있어서 위급하였으므로, 출진한 장관에게 명령을 내려서 한 무리의
군병들을 나누어 보내어 금구현을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4월 초 7일 도착한 부안현 이철화의 보고 내용에, “현감이 그간 저들에게
붙잡혔다가, 저들이 고부의 도교산으로 향해 갈 때를 틈타서 겨우 탈출하여
관청으로 되돌아왔습니다”라고 하며, 4월 초 7일 도착한 태인현감 홍면주의
보고 내용에, “그날4월 초 7일 술시戌時 무렵에 저들이 본 읍의 태인현 인곡 북촌
용산에서 고부의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월 초 8일 도착한 고부군수 박명원朴源明의 보고서의 내용에, “어제 오시午時
무렵에 태인·부안 양 읍에 모인 동도들이 고부군 도교산으로 옮겨와 주둔하
며, 순영문에서 발송한 병정, 별초군, 부상負商 등과 함께 서로 접전하였는데,
순영문의 병정들이 마침내 패하여 사졸 중에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저들 무리들은 곧바로 정읍현井邑縣 연지원蓮池院으로 향하여 갔습니다”라고 하
였으며, 처음부터 신영新營의 병정과 각 읍의 포군을 각처의 험하고 좁은 길
입구에 나누어서 지키게 하고 경군京軍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흉도들 두 무리가 한 곳에 함께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모인 것은 질
1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寄]
一. 지금 4월 초 6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부안현 공형이 낸 문장文狀에서,
“부안현감이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며,
공형 또한 저들에게 주리를 틀리고 매우 맞아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
에 있습니다. 주둔한 저들 무리들은 군기를 빼앗아, 그날 진시 무렵에
남쪽대로를 향하여 갔으며, 그들이 간 것은 아마도 고부군으로 향하는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잇달아 도착한 당일 신시申時에 낸 부안현의 보고에, “현감이 그간 저
들에게 잡혀 있다가 저들이 떠나려고 할 때 겨우 몸을 피하였는데, 김
제 죽산에 영군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진이 있는 길을 택하여 가다가, 또 죽산 진영의 군대가 고부로 돌
아서 향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백산으로 갔다. 그러나 죽산과 백산 양
진이 합세하여 이미 군대를 이동시키고 저들 무리들이 향하는 곳으로 전
진하였으므로 현감은 그대로 관청으로 돌아갔다”라고 하였습니다.
수 록 隨錄 13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寄]
一. 고부 안핵사께서 이번 3월 17일 전주부에 행차하였습니다.
一. 동학도 수천 명이 지금 4월 24일 고부군에서 군기를 탈취하여 각각
창과 칼을 가지고 총을 쏘며 곧바로 태인으로 향하였다고 하며, 고부
군 공형이 문장으로 빨리 순영문에 보고하였다. 그러므로, 감영과 전
주부의 영리를 모아서 4월 25일부터 사대문을 지키도록 하였고, 각 읍
의 포군은 기계를 가지고 또한 내세워서 보내도록 하라고 방금 포군이
소재한 각 읍에 전령을 보냈으며, 태인, 금구, 고부, 고창의 수령들이
지금 바야흐로 감영에 올라가 행차하였습니다.
一. 고부의 문장文狀에서, “3월 23일 술시戌時 무렵에 동학도 3,000여 명이
창과 검을 지녔거나 혹은 죽창을 지니고, 총을 쏘며 난입하였으며, 말
수 록 隨錄 15
5 동도대장 서(東道大將 徐): 북접의 강경파인 서장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서장옥은 금산 등
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수 록 隨錄 21
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9일 무장 공형의 문장에, “동학당 209명을 잡아 가두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10일 인시寅時에 낸 흥덕 겸임 태인현의 보고에 의하면, “4월
초 9일 해시亥時에 도착한 같은 현의 유향좌수 문장의 내용에, ‘4월 초
8일 사시巳時에 저들 무리 수천 명이 각각 총과 창과 활을 가지고 고부
현 신점에서 곧바로 본 읍에 들어와 포성이 진동하였으며, 창과 검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서, 남녀노약자들이 겁을 먹고 도망을 가니, 저
들은 노약자를 잡고서 저녁밥을 토색討索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
에 들지 않으면 총을 들이대고 칼을 겨누어 여러 가지로 협박을 하여
이르기를, 이 모군募軍은 누구인지 반드시 조사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
였으며, 심지어 늙은 부인과 어린 아이를 묶어서 주리를 틀었으며 총
이나 칼로 때리기도 하여, 중상을 입은 자가 3명, 잡힌 자가 2명이었으
며, 담배를 요구한 후 군기고에 돌입하여 창고 문을 부수고, 탄환과 총
과 창을 어렵지 않게 탈취하여 갔습니다. 같은 날 미시未時 무렵에 곧
바로 고창의 경계로 향하였으며 연유를 빨리 순영문과 겸관에 보고 하
기 위해 지자持者6를 보냈습니다. 지자 또한 잡혀서 문부를 모두 빼앗
기고, 또 중상을 입어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고할 때에 이에서
지체되어 빼앗긴 군기와 집물을 일일이 적간한 후 빨리 보고할 생각입
니다’라고 알렸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9일 신시申時에 낸 흥덕현 공형의 문장에, “저들 무리 수천
4월 17일 [四月十七日]
고부군 도교산道橋山에 있는 무남영의 진영이 도리어 피해를 입은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신영新營의 우영관 이경호李景鎬는 군병을 이끌고
적과 겨루어 토멸할 적에 위험함을 거리끼지 않고, 혼자서 진을 지켜 가슴에
총을 맞고 얼굴에 창을 찔리고도 형색을 움직이지 않고 적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저들은 그 수가 많고 이쪽은 약하여서 마침내 전쟁
에서 사망하였으니 충의가 모두 온전하여 마땅히 포상하였습니다.
서기 이은승李殷升은 영관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마음을 지녔으며
자기가 맡은 곳을 떠나지 않아 총알에 맞았으나 죽을 때에도 물러서지 않았
습니다. 이름은 서리직을 띠고 있으나, 그 명을 다하면서 죽었으니, 그가 의
로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세웠으니 진실로 가
상합니다.
태인의 전 감역인 유병직劉秉稷은 이미 행부보상行負褓商의 반수班首였는데,
여러 상인들을 통솔하여 스스로 영관이 된 후 군대의 뒷전에 있었으나 창과
칼에 어지럽게 찔려 진문陣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한 정상이 매우 극히 참혹
하고 슬프며, 그의 의리는 또한 가상합니다.
담양의 국인묵은 담양의 수성별장으로, 그가 거느리고 있는 포군을 이끌고
와서 먼저 백산을 방어하는 중요 거점에서 적의 자취를 탐문하고, 이어서 험
32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4월 18일 [四月十八日]
금산군 보상 접장褓商接長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石이 거느린 행상과 읍민
500~600명이 진산읍에 들어가서 동학도당을 모두 죽인 연유는 전에 이미 급
히 보고하였습니다. 이번 이들 두 사람은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을 하였으며,
또 영읍에서 알리지 않았어도 먼저 스스로 의로움을 내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금산군에서 처음으로 그들의 집을 부수고 또한 진산에서 거의 100명
에 가까운 자를 모두 죽였으며, 이어서 머물러 모였다가 남은 무리들을 체포
하였습니다. 병사들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비류들은 멀리 도망하였습
니다. 생각해보니 진실로 그의 의기가 매우 가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들을 격려하려고 지금 바로 포상하려 하지만, 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
니, 모두 담당하는 기관에서 아뢰어 처리할 일입니다.
5월 5일 관문과 감결을 베낌
에 탄 인가를 구휼하였습니다.
一. 강화병사 500명에게 잠시 부대에 남아 성을 지키도록 영을 내렸습니다.
一. 선화당을 수리하는 것이 끝나지 않아서, 감사가 아직 작청作廳에 머물
고 있습니다.
一. 전운사轉運使인 순창군수가 대신 보낸 전보에 5월 16일 저물어서 도착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奇]
책응관策應官은 전주판관.
운량관은 임피臨陂현령.
염찰사께서 본부 감찰 김준문金俊文의 집에 행차한 곳.
저들 무리들이 5월 초 8일에 내려갔는데, 태인을 넘었다가 몇몇은 무장으
로 도망하고, 몇몇은 무리를 나누어 백성들을 상대로 토색討索을 일삼았으며,
전주 구이동九耳洞의 부민富民들이 사는 곳 등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초토사또께서 오늘 전주부에 들어갔으며, 20일에 장위영壯衛營 병사를 이끌
고 금영錦營으로 행차하였다고 합니다. 총제영總制營 병방兵房이 총제영 병사
500명을 이끌고 전주부에 진을 머무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삼례에 진을 쳐서 머물고 있는 기영箕營의 병사가 지금은 잠시 동안 떠나갈
기약이 없다고 합니다.
순변사 이원회
단할 생각입니다.
신이 영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대개 성의 서남문의 안팎을 볼 수 있는데,
인가들이 모두 불에 타 검게 그을려서 붉은 벽에 연기와 불기를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요호饒戶들이 저축했던 것은 이미 탕진되었고, 백성들의
항아리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녀노소가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를 지르
며, 도로 위에 줄지어 넘어져 있었으며, 광경이 처참하여 차마 말할 수 있겠
습니까? 또한 크고 작은 관청 건물 및 방과 문이 제대로 남은 것이 없으며,
각종 장부들은 찢겨지고 불살라져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백성과 서리, 관
속들은 모두가 떠나갔고 남은 호는 10개 중에서 9개가 비어서 큰 고을을 짓
밟아 뜻하지 않게 하루아침에 결단이 나기에 이른 것이 이와 같이 극함에
이르렀습니다.
전주부는 주나라 때의 빈과 기岐지역에 해당하며, 한 나라의 풍패豊沛에 해
당하는 곳입니다. 원묘廟의 의관을 구멍내는 것과 영부營府를 방위하는 것과
의 중요함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한편으로 직접 대면하여 유
시하고, 한편으로 영을 계시하여서 살고 있는 자들이 안도하게 하며, 떠나
가버린 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큰 불행을 당한 시
기에 서둘러서 슬기롭게 보존하여 불에 타는 것을 구원하고 화톳불을 끄는
것을 위시하여 비로소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만들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록 많은 것을 강구하여도 공사가 모두 가난하여 나올 것이 없는 상황에서
아침저녁에도 걱정하면서 서로 모습을 다시 찾게 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사
람들을 나누어 보내어 다시 불타고 헐어버린 집부터 일일이 조사한 후에 다
시 속히 임금께 알릴 것입니다.
4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효유문 [曉諭文]
너희들이 전주에서 해산하여 간 것은 무기를 버리고 농사를 지으러 각각
옛 날에 하던 일로 돌아가려 하였음을 말한다. 지금 들어보니 몇 곳에는 남
은 무리들이 오히려 다시 병기를 놓지 않고 있는 곳에서 주둔하여 모여 있다
고 한다. 이것은 어떠한 연고인가? 윤음이 여러 번 내려갔으며, 나라의 뜻이
간절하고 정성을 다하니 진실로 미련하고 못 생긴 자들과 나무나 돌처럼 감
정이 없는 자에게도 감화를 미쳤다.
고을의 경계에 도착하는 날에 관문을 번역하고 각 읍으로 하여금 마을에
게시하도록 하여, 너희들을 효유하였는데, 아직도 혹시 그것을 보지 못하였는
가? 보고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반복된다면, 진실로 미련하고 못 생긴 자나
나무나 돌처럼 감정이 없는 자들 보다 못하며, 아직도 미치지 못하였다면 이
는 도신이 능히 널리 알리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성상께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호하려고 하시는데, 만약에라도 너희들이 끝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이 되게 하겠느냐. 생각이 이에 미치니, 만일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이에 군관
이용인李容仁을 보내니 다시 진실한 마음과 실제 상황을 드러내도록 하라.
너희들은 이 말을 잘 듣고 서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서로 겁을 먹지 말고
각각 향리로 돌아가서 너희 밭을 잘 갈고, 너희 집을 잘 짓도록 하여 다시
평민이 된다면, 모두 생명을 보전하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며, 형벌에 빠지고 국법을 거스르게 되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
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또한 열성조 오백 년 동안 이치에
따라 잘 다스려지고 교화되었다. 이미 떳떳한 품성을 갖추었으니, 어찌 끝내
4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읍에 관문을 보낼 것이다.
一. 너희들은 이미 농사철을 놓쳤으며 또한 재산을 모두 다 써버려서 지금
비록 집에 돌아가더라도 살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금년에 호역과 각
종 공납을 마땅히 일일이 없애줄 것이다.
一. 너희들로 하여금 귀화하게 한 날에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고 즐
겁게 사는 것은 책임이 사또에게 있다. 여러 급한 일은 차례로 시행하
여 조처할 것이니, 지금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奇]
一. 5월 13일에 낸 고부의 보고에, 동도 1,000여 명이 난산卵山의 저자에
모여 있으며, 50명에서 60명이 혹 태인 땅에 갔으며, 100명에서 200명
이 무장의 굴치屈峙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5월 14일 태인에서 낸 보고에, 읍저 2리쯤에 있는 동구천洞口川에 동도
100여 명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모여 있으며, 본 리里에서 간간이 총을
쏘거나 혹은 요민들에게서 돈과 재물을 빼앗았으며, 또는 그들이 살고
있는 각 마을里에 모여서 장차 좌도의 각 읍으로 향하려 한다고 보고하
여 왔습니다.
一. 순창 수령 이성렬李聖烈을 전운어사로 임명하였습니다.
一. 5월 17일 신시申時에 낸 부안의 보고에는 저들 무리들이 가고 머문 상
황에 대하여 정탐하였더니, 수백 명이 각각 칼을 차고 총을 쏘며 말을
타서 깃발을 세워 태인읍 고현면古縣面·동촌면東村面·남촌면南村面에 모
여 있으며, 그들의 기세가 두려울 정도라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전주 판관 민영승을 성이 함락된 일로 법전에 의거하여 임금에게 아뢰
어 파직하였습니다. 전주의 각 면리의 민인들이 낮과 밤으로 유임을
50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6월 초6일 냄 [六月初六日出]
비류가 근래 담양에서 떠나 순창으로 들어갔으며, 청나라 대인 1원이 총제
영 대관 이웅천李熊川과 함께 모두 담양으로 가서 저들 무리를 만나 효유하니,
곧바로 귀화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병장기들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병기
를 실어 온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상국청나라 통령 섭사성 士成이 기병 60명
56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다시 상서함 [再上書]
삼가 저희들이 이러한 거사를 일으킨 것은 탐관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강
제로 빼앗은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지나온 읍의 폐단은 작으면 관에 알려
서 고치도록 하고, 큰 것은 관찰사에게 직접 소장을 내어서 고치도록 하였습
니다. 지금 순창군에 도착하였는데 곧 백성에게 폐단이 된 원인의 하나는 계
조 租를 새롭게 만든 것이요, 둘째는 죽창군竹 軍 한 달에 3번 점고點考한 것
이요, 그 외에도 백성들을 위하는 듯 하면서 실제로는 해를 끼쳐서 만민들이
원통함을 부르짖은 연유를 우러러 호소합니다. 특별히 해당 읍에 감결을 보
내 2개 조건을 혁파하여 원통해하는 백성들을 위해 일을 끝맺으십시오. 바라
고 또 바랍니다.
처결을 내린 내용에, “계조를 시행하는 것이 편리한 지의 여부는 지금은
다만 자세하지 않으며, 설혹 폐단이 되면 읍의 백성들이 정소함이 옳다. 죽창
군을 점고하는 것은 포악함을 막으려는 대비함이다. 어찌 폐단이 되는 것이
라 하여 갑자기 파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 같은 자들이 떠맡을 만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奇]
신임 사또께서 이달6월 초 5일에 장흥부에서 출발한 행차가 초 9일에 금구
의 금산사金山寺에 머물러 주무셨고, 감영에 올라갈 날짜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으며, 짐을 실을 말 3필과, 상소할 종이와 서사리書寫吏 1명을 금산사에서
등대하라는 장흥에서 따라온 배종의 사통私通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번5월 초 6일 동학도인 전봉준이 접에 소속된 수십 명을 이끌고 내려와
서 부에 들어가 연일 읍양정揖讓亭에 머물러서 있었으며, 회계會計 나으리 송사
과宋司果님께서 행차 과정에서 영접하여 들어오시게 하고, 친절하게 잘 대접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6월 초 8일에 도인 전봉준이 봉상면鳳翔面 구미리九尾
里13로 향하여 갔고, 나머지 접들은 혹 흩어지거나 혹은 모여서 왕래가 끊이
지 않고, 부府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부의 내외 각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서
울의 소식은 처음부터 들을 길이 없습니다.
감결 [甘結]
곧바로 도착한 의정부 관문의 내용에, “현재 군국기무처에서 정한 새로운
정식新定式이 있어서, 국내외 공사문첩에는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쓰게 하는 것
을 임금께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이에 관칙이 도착하는 즉시 관하의 각 읍
과 진에서는 지금부터 무릇 공문의 연월일과 관련되는 것은 다만 ‘개국 503
년 월 일’로 쓰는 것이 옳다고 타이르도록 하라”는 관문이 있었다고 하며,
관문의 내용의 말을 살펴 시행하라.
1894년 7월 13일
서울에서 보낸 기별 [京奇]
민영준閔泳駿은 백성을 침학하였으니, 곧 나라를 저버리고 오로지 거두어들
이기만 했으며, 마침내 자기를 살찌웠다.
민형식閔炯植은 끝없이 백성을 침학하고 재물을 탐내서, 각 도에 해를 끼쳤다.
의정부 [議政府]
一. 각사의 관원과 서리, 조예의 액수를 자세히 조사하여 알릴 것.
一. 각사의 비용으로 받지 못한 것未捧과 전해져 내려오는 공납公納을 자세
히 조사하여 알릴 것.
一. 각궁, 각영, 각사의 도장導掌16은 전답과 제언堤堰, 세장稅場, 시장柴場 등
각 명목을 명확히 조사하여 알릴 것.
이달6월 초 10일 일제히 와서 의정부에 바칠 것.
의복의 바뀐 제도는 또한 초 10일을 기한으로 삼는다.
후록 [後]
각 읍의 집강들이 전봉준이 보낸 통문 원폭을 가지고 있다. 대략의 내용에,
“지금 우리들의 이와 같은 거사는 오로지 백성을 위하고 폐해를 없애려는 것
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저들이 떠돌아다니는 무리들이 교묘하게 속여서 여기
저기서 함부로 날뛰고 마음대로 일을 저지르고 있으며 백성을 괴롭히고 포학
하게 행동하여 마을에서 잔인하게 상처를 입히고 있으며, 자그마한 혐의가 있
거나 조그만 잘못이 있으면, 봉해 두었다가 반드시 갑작스레 보복하였다. 이
는 덕에 반대되고 선을 해치는 무리이다. 각 읍의 집강들이 자세히 살펴서 금
단하게 하라”고 하였다. 후록에서 대략 말하기를, “이미 거두어들인 포, 창,
칼, 말은 이미 관에 바쳐서 속하게 하고, 각 접주에게 돌려서 통지하여 포,
창, 칼, 말의 수효를 차지한 자의 성명과 거주지를 자세히 적고 책자를 2건
만들어 단장하여 순영문에 바쳐라. 첩帖을 만든 후에 1건은 순영에 올리고, 1
건은 다시 각 집강소에 두어서 이후에 살피기 위한 것으로 삼도록 할 것이다.
역마와 상마商馬는 각각 본주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지금 이후부터 포를 거
두고 말을 징발하는 것을 일체 금단하며 돈과 재물을 토색하는 자는 이름을
거론하여 순영에 보고하여 군율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남의 무덤을 파거나
사채를 거두는 자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절대로 시행하지 말 것이며,
만일 이와 같은 법을 범하는 자는 순영에 보고하여 율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수 록 隨錄 77
서울에서 보낸 기별 [京奇]
밀양부사 정동기鄭東箕, 한산군수 정대무丁大懋, 양구현감 임창진任昌鎭, 보성
군수 윤심尹沁, 지평현감 안욱상安昱相, 옥천군수 김동민金東敏, 영덕현령 조현식
趙賢植, 전주판관 신영휴申永休, 봉화현감 고영철高永喆, 결성현감 박기붕朴基鵬, 진
산군수 신상申 , 연천현감 조명식趙明植, 송화현감 조중식趙重軾, 순창원참봉順昌
7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의병소조약 [義兵所條約]
一. 지금 이 의거는 오로지 국가를 위하고 힘써 충성을 다하는데서 나온
것인즉, 상하를 물론하고 그 의로움에서는 하나이다. 명분에 구애되지
말고, 힘세고 건장한 자를 골라서 소임을 짜도록 한다.
一. 본도에서 거사한 것은 적을 치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런즉 같은 배를
탄 것이라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와 내가 같은 성 가운데 있으니,
어찌 선후를 나누랴. 서로 힘을 써서 화목하여 서로 뒤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6월 초 3일 [六月初三日]
경기도 관찰사의 장계에, 양성陽城 현감의 보고의 내용에, “지난 그믐날5월
수 록 隨錄 85
9월 초 4일 [九月初四日]
그저께 서울에서 주사 2원員이 대원군의 효유문을 받들고 이곳에 내려와서
먼저 감영아래에 있는 동학도소에 효유하였다. 그래서 도집강 송희옥宋憙玉과
그가 거느리고 있는 무리들은 어제 모두 성을 나와서 흩어졌고, 이후 주사
2원員이 효유문을 받들고 곧바로 남원 등 동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여
갔다.
소모사 승지 이건영李建永이 9월 초 일에 전주부에 들어갔다. 다음 날 전주
88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자료
문이 칙명을 받들었다]
칙명을 받들었다]
이 칙명을 받들었다]
라고 하니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또 주청하여,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장계를 즉견하게 하였다.
총리대신 김홍집, 내무대신 박영효, 학무대신 박정양, 외무대신 김윤식, 탁
지대신 어윤중, 농무대신 엄세영, 군무대신 조희연, 법무대신 서광범, 공무대
신 김가진
(번역 : 양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