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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본 자료는 순무선봉장(巡撫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기록한 진중


일기(陣中日記)로서 1894년 9월 21일부터 12월 12일까지 동학농민
군을 토벌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규태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
전관(宣傳官)과 훈련도정(訓練都正),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등 내
외(內外) 무관을 역임하고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자, 장위영의 선봉장
으로 뽑혀 직접 동학농민군 진압 일선에 나섰다.

주요한 내용으로, 10월 18일 발포한 「순무선봉진방시문(巡撫先鋒


陣榜示文)」을 비롯하여 순무영(巡撫營), 충청감영(忠淸監營) 각 읍
(邑) 수령, 장위영 영관 이두황(李斗璜) 등 각급 지휘관과 주고받은
전령과 첩보 등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 일기체로 기술하였으므로 사
건 일시가 정확하며 여러 사건을 망라해 다루고 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기록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 자료는 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 지역에서 벌어진 정부군과


동학농민군의 전투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정부군의 진압
대책과 더불어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알 수 있는 기본 자료라 할 수
있다. 본 자료의 원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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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1894년(고종 31)

9월 21일 조지 [九月二十一日 朝紙1)]

정부초기(政府草記)에, “양호(兩湖) 지역에 비류(匪類)가 창궐하여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순무사(巡撫使)2)
로 임명하고 군영(軍營)을 설치해 여러 군대를 통솔해서 비도들을 진압
함이 어떠합니까?”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윤허 한다”하였다.

9월 22일 조지 [九月二十二日 朝紙]

어제 순무사를 임명하는 초기 중에, “순무사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고칠 것이니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9월 24일 조지 [九月二十四日 朝紙]

순무영(巡撫營)3)의 중군(中軍)에는 허진(許璡)을 임명하고 종사관 2명

1) 조지(朝紙):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아침마다 적어 벼슬아치들에게 알리는 종이를 말


한다. 오늘의 작은 신문과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 奇別 朝報라 부르기도 한다.
2) 순무사(巡撫使): 조선시대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과 전시(戰時)의 군무(軍務)를 맡아본
임시직책으로 총지휘를 맡은 순무영의 총책임자인데 당시 신정희(申正熙)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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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단자(單子)에는 황장연(黃章淵)과 정인표(鄭寅杓)로 결정하였다.

9월 26일 조지 [九月二十六日 朝紙]

양호(兩湖) 도순무영(都巡撫營)의 초기에, “장위영(壯衛營) 정령(正領)


이규태(李圭泰), 전 방어사(前 防禦使) 이희중(李熙重)・이병세(李秉世),
부평부사(富平府使) 신림(申林), 통위영(統衛營)4) 참령관(參領官) 구연항
(具然恒), 전 부사(前 府使) 홍운섭(洪運燮)・신좌희(申佐熙)를 아울러 별
군관(別軍官)으로 임명하고 전 도사(前 都事) 김근식(金近植), 군무아문
(軍務衙門) 주사(主事) 오진영(吳振泳), 전 사과(前 司果) 홍건조(洪建
祖)・유학(幼學) 박영세(朴永世), 진사(進士) 이명상(李明翔)을 아울러 참
모사(參謀士)로 임명하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10월 초 3일 관보 [十月初三日 官報]

어제 양호도순무영의 초기에, “본영(本營, 장위영) 별군관 이규태를 선


봉장으로 임명하여 통위영 병사 2개 중대를 거느리고 다음날 우선 공주・
청주 등의 길로 출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군은 대대군병을 거느
리고 그 뒤를 이어 출발토록 할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하
였다.

3) 순무영(巡撫營): 1894년(고종 31) 9월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


한 군영을 말한다. 이곳의 순무사(巡撫使)는 토벌 대책을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4) 통위영(統衛營): 1888년(고종 25)에 친군영(親軍營) 속의 우영(右營)・후영(後營)・해방
영(海防營)을 합쳐서 설치한 군영(軍營). 이때 함께 설치된 장위영(壯衛營)과 1891년에
설치된 경리청(經理廳)과 함께 3군영 체제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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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 4일 관보 [十月初四日 官報]

양호도순무영이 아뢰기를, “권종석(權鍾奭)・이구영(李龜榮)・이승욱(李


承旭)・정도영(鄭道永)・황승억(黃昇億)을 아울러 참모관으로 임명하고 유
석용(柳錫用)・이달영(李達榮)・송흠국(宋欽國)・허완(許岏)・이필영(李弼榮)・
이재화(李在華)・박정환(朴晶煥)을 아울러 별군관으로 임명하여 선봉진에
보내어 군무(軍務)에 종사케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0월 초 6일 관보 [十月初六日 官報]

초 2일 순무영 초기에, “통위영 병사를 거느리고 다음날 출발하는 것


은 교도소(敎導所)의 병사와 통위영의 병사를 거느리고 우선 출발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니 특히 유념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10월 18일 관보 [十月十八日 官報]

의정부가 아뢰기를, “금백(錦伯, 충청도관찰사)의 전후 장계(狀啓)의 등


본5)을 계속해서 보니 <동학농민군을> 막을 수 있는 대비책이 없는 상
황이므로, 순무영으로 하여금 속히 내려오게 해달라고 청하고, 청주 등지
에 주둔하고 있는 장위영(壯衛營)・경리청(經理廳)의 영관(領官)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그 감영은 요충지로
서 <동학농민군을> 막는 것을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되니 순
무영에 급히 알리고, 날짜를 정하여 가서 지원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
까?”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하였다.

5) 장계 등본: 지방장관이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를 승정원에게 베껴 돌려서 다른 부서에


서 참고하게 하였다.
25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순무선봉진에서 알리는 글 [巡撫先鋒陣榜示文]

아! 안타깝도다. 너희 비류(匪類)들아! 모두 나의 말을 들으라. 너희의


학(學)은 무슨 학이며, 너희의 도(道)는 무슨 도인가? 대대로 벼슬한 구
족(舊族)을 강제로 비도에 가담하게 하고 밭에서 일하는 어리석은 백성
을 협박하여 한 무리가 되게 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남의 묘를 파헤치
며 남의 집을 불사르고 남의 부녀를 겁탈하고 남의 자제를 죽이면서 끝
내는 무기를 빼앗아 수령들을 해치는 데까지 이르니 진실로 학(學)의 큰
변(變)이요 도(道)의 큰 적(賊)이다.
이른바 천주(天主)가 영험이 있다면 반드시 너희에게 화를 줄 것이요,
주문(呪文)이 신령하다면 반드시 너희에게 형벌을 내릴 것이다. 치우(蚩
尤)6)가 안개를 토하였지만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고, 장각(張角)7)은 신
(神)을 불렀지만 마침내 소멸되었다. 너희들은 본래 이런 사술(邪術)도
없으면서 허풍으로 사람을 속이고 현혹시켜 <남의 재물을> 겁탈하고 훔
치는 일을 자행하니 이와 같이 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일은 귀신과 사람
의 이치에 없는 바라. 일찍이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어야 했지만 한 가
닥 은혜로 용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개 너희들은 조종(祖宗)의 교화를 입고 자란 백성이요, 성명(聖明)의
사랑하는 적자(赤子)이다. 너희들이 이를 믿고 스스로 요행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혼미하여 감히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며 전날의 잘못을 고치지 않
고 무리를 모아 날뛰면서 날로 더욱 방자해지니 신의 노하심이 오래되었

6) 치우(蚩尤): 중국 황제(黃帝) 시대의 제후이다. 싸움을 좋아하여 칼・창・ 쇠뇌 등 무기


를 만들어 천하의 포악한 자가 되었다. 황제가 그를 정벌하여 탁록(涿鹿)에서 싸우는
데 그들은 큰 안개를 뿜어 방향을 흐리게 하니 황제는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그들
을 격파하여 죽였다.
7) 장각(張角): 후한 거록(鉅鹿) 사람이다. 황제 노자의 도를 배워 주문으로 병을 고친다
고 하고 태평도(太平道)라 이름을 하고 대현양사(大賢良師)라고 자칭하였다. 제자가
10만이었는데 영제 때 난을 일으켜 스스로 황천(黃天)이라 칭하고 그의 무리들은 노
란 수건을 머리에 써서 사람들이 황건적(黃巾賊)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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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늘의 싫어함이 절박하다.
아! 너희 괴수는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너희 무리는 무슨
죄가 있는가? 거칠고 괴상한 말로 서로 속이고 허탄한 말로 서로 모여
바람과 비는 살을 외이고 춥고 배고픔은 뼈를 스미니 비유하자면 마른
가지가 화창한 봄빛을 스스로 끊는 것이요, 음지(陰地)가 태양을 스스로
등지는 것이다. 각각 마음을 고치고 깨우쳐서 혹 함께 괴수의 목을 베어
다 우리의 진 앞에 바치든가 혹 의병을 일으켜 반란하는 자를 소탕하는
것이 바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아! 곡식이 이미 익었고 채소도 이미 수확을 하게 되었으니 모두 너희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고 처와 자식을 부양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몸은 모진 형벌[斧鉞]을 받을 것이요, 뼈는 백사장에 묻힐 것이요, 놀라
고 원통한 혼백은 저승의 속에서 울 곳도 없을 것이다. 너희 부모는 문
에 기대어 너희가 오기를 바라볼 것이요, 너희 처자는 문에서 기다리며
울 것이니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음에 혹 화(禍)를 후회함이 없겠는
가? 이 말을 듣고 귀화하라.

10월 16일 충청 감사의 공문 [十月十六日 錦伯移文]

충청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상고하는 일입니다. 17일 우리 감영에 급


한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가 있으나 병사들이 많지 않음을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많은 군사가 와서 지원한다면 감
히 <동학농민군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귀 군대[순무선
봉진]는 밤낮을 가리지 말고 길을 재촉하여 13일 오전까지 우리 감영에
도착하여 함께 위급함을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25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0월 16일 충청 감영에 보내는 회답하는 공문 [同日 回移錦營]

양호순무선봉진(兩湖巡撫先鋒陣)에서 살피는 일입니다. 귀영[충청감영]


의 공문이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진[순무선봉진]이 화성부(華城府)에
주둔해 있는 것은 순무영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영의 급한 상
황이 기일이 정해진 환란이라고 하지만, 기한이 이미 지났고 함께 일을
구제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렇지 못해서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일본
군 3개 중대가 곧 화성부에 도착할 것이니 내일 아침에 출발해 길을 재
촉하여 가서 지원하도록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협력하여 저들을 방어하
고 토벌하도록 응접하고 호응케 하십시오.

10월 18일 경리부영관 안성 군수 홍운섭에게 전령함 [十月十八日


傳令 經理副領官安城郡守洪運燮]

주력 부대가 지금 성환・천안의 등지로 출발함에 영관(領官)이 거느린


장병이 지금 몇 부대가 있는지라 본 읍이 조금 안정되어 근일에 비류들
의 창궐이 없다고 하니 본진에서 거느린 각 소대와 일본 병사를 몇 곳에
파견하여 보내면 허술할 염려를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전령을 내린
다. 휘하 군사의 많고 적음에 따라 20일까지 천안 지역으로 가게 하여
기회에 따라 응접하도록 할 것이다. 무엇보다 엄숙해야 할 것은 군사의
기율이요, 기밀을 지켜야 할 것은 군사의 일이니 각별히 단속하여 한 푼
이라도 소홀하거나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전령이 도착하는 때
와 휘하의 몇몇 부대를 곧 소상하게 급히 보고하여 참고하도록 하라.

10월 18일 충청 감사의 공문 [同日 錦伯移文]

충청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고찰하는 일입니다. 앞서 초 2일 도순무영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53
의 초기(草記)를 보니, “별군관 이규태(李圭泰)를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통위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일 출발하여 우선 청주・공주의 등지로 향하
였다”라고 합니다. 지금 듣건대 귀군이 이미 수원에 도착하여 다른 곳으
로 우회하면서 행군한다고 하니 과연 그런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그 마땅한 시기를 크게 잃는 것이며, 또한 처음 보고한 의도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영에서는 본 읍의 사정을 여러 번 보고하고
아울러 귀군이 빨리 와서 구원해 주기를 청하고 재촉하였습니다.
현재 적의 기세는 격렬하면서 급하지만 초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날
씨는 춥고 식량은 적어 도중에 도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지금 진격
하면 반드시 <적을> 무찌르는 공을 이룰 것이니 바라건대 지연하지 말
고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려 와야 할 것입니다. 경리청 영관 성하영(成夏
永)과 장위영 영관 이두황(李斗璜)이 지금 보은 등지에 있으면서 이미
며칠 전에 공문을 내고 동원하여 온다고 아울러 보고하였으니 조만간 도
착할 듯합니다. 또 충청병영의 병정도 수백 명이나 함께 온다고 하니 만
약 합세한 병사로 적을 물리치면 파죽지세와 같을 것이니, 귀군이 속히
진군할 것을 이에 공문을 보내어 번거롭게 청합니다.

10월 18일 충청 감영에 보내는 회답문 [同日 回移忠淸監營]

어제 신시(申時, 오후 3∼5시)와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귀영이 보


낸 2통의 공문이 있었습니다. 본진이 어제 천안읍에 도착하여 자고 곧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일본 병사와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정확
한 출발 일시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유성(維城)・경천(敬川)・은진(恩
津)・노성(魯城) 사이에 비류가 출몰하여 앞일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
무튼 전진하여 섬멸하는 계책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위영과
경리영의 2개 부대가 중로에 주둔하여 아직 서로 접응할 계책이 정해져
있지 않고, 또한 군량의 보급에 궁색함이 많습니다.
25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우선 성하영이 거느린 부대를 귀영에 보내기로 지시하였습니다. 그리


고 이두황이 거느린 부대와 함께 움직이게 되면 거꾸로 쫓아가는 폐단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두황이 거느린 부대는> 유성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귀영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로
하여금 감성(紺城)의 입구로 옮겨 주둔하게 하여 적세의 변동을 보고 기
회에 따라 호남의 비류가 경유하는 환란을 막게 할 것입니다. 혹 지원
부대가 적을 염려가 있으면 귀영에서 적과 대응하라는 뜻을 알려줄 때까
지 기다리라고 명령을 할 것입니다. 반드시 귀영으로부터 자세히 적정
(賊情)을 탐지하여 조정해 가면서 지원하여야 하겠습니다. 소요되는 군량
은 적절히 조달해주어 궁색한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며 장위영과 경리청
2개 부대는 지금 이미 조정하였으니, 귀영의 완급에는 조금 풀릴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시각이 급한 일이 아니면 본진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 적절하게 출동하여 이용하는 것이 아마도 합당하고 편할 것이니
이를 고찰하십시오.

10월 18일 경리청 전 영관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전령함 [同日 傳


令 經理前領官瑞山郡守成夏永]

주력 부대가 남쪽으로 내려간 지 10일이 지나 겨우 충청감영의 공문


으로 인하여 비로소 본 부대[경리청]가 모로원(毛老院)에 주둔한 소식을
알았다. 또한 청주의 보고에 대한 제사가 도착한 소식은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생각건대 군무(軍務)의 허술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그러
나 본 진영이 보고를 전하는 권한이 없으니, 혹 용서할 수 있다. 이번
모로원에 주둔한 것은 아직 거기에 접응할 수 있는 필요한 군수(軍需)가
없으니 그 주막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당연히 생각할 바이다. 전령이 도
착하면 즉시 공주의 감영으로 가서 다시 지휘를 기다려라.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55
10월 18일 장위영의 영관 죽산부사 이두황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壯衛營領官竹山府使李斗璜]

주력 부대가 남쪽으로 내려간 지 10일이 되었다. 겨우 충청감영의 공


문으로 인하여 비로소 본진이 연기읍(燕岐邑)에 주둔하였다는 것을 알았
으니 군무를 생각하면 이보다 허술함이 심할 수 없다. 진실로 법에 따라
문책하여야 하지만 본진에서 전하는 보고의 권한이 없으니 혹 용서할 수
있다. 연기에서 유성(維城)의 거리가 40리가 된다. 지금 듣건대 비류가
그곳에서 출몰한다고 하니 만일 감성(紺城)의 입구 등지로 이동하면 먼
저 그들이 날뛰는 폐해를 막고 또 호남 비도(匪徒)가 경유하는 환란을
끊어버리는 것이 옳다. 그들을 섬멸하는 일에 있어서는 고립무원의 염려
가 있다. 충청감영의 지원군을 기다려 진퇴를 하되 변란을 살펴보고 기
회를 따라 오로지 현지에서 적과 대응하는 데 있으니 멀리서 헤아려 지
휘할 것이 아니다.
대저 견고하게 요새를 지키는 것으로 만전의 계책을 삼으라. 마땅히 이
런 뜻으로 충청감영에 공문으로 통고하였으니 소상한 공문의 지시가 있
을 것이다. 마땅한 바를 헤아려 거행하고 좋은 기회를 잃지 않아야 한다.

10월 18일 충청 감영에 회답하는 공문 [同日 回移錦營]

방금 귀영이 보낸 공문이 도착하였습니다. 방금 안성군수 홍운섭과 영


관 구상조(具相祖)에게 명령하여 경천점(敬川店)에 나가게 하였습니다.
반드시 고립무원의 염려가 있으니 일본 병사와 서울의 부대 2곳의 군사
중에 기회에 따라 그 영관이 보고하여 함께 적을 방어하는 곳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마도 일에 합당할듯하므로 그렇게 알도록 하십시오.
25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0월 18일 안성 군수 홍운섭과 경리영관 구상조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安城郡守洪運燮 經理領官具相祖]

방금 도착한 충청감영 공문에, “서산군수 성하영이 18일에 모로원에


주둔해 있으므로, 본영에서 안내하는 군관을 보내어 그들을 이끌고 방금
본영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뒤를 따라 안성군수 홍운섭 또한 금강진(錦
江津)에 도착하였으며, 곧 병사를 나누어서 성하영은 다만 1개 소대만
거느리도록 하였습니다. 성하영은 비록 순무영으로부터 공주로 가서 지
원하라는 전령을 받았으나 병사를 나눈 뒤에 관할할 권한이 없으므로,
귀 선봉진에서 급히 안성군수 홍운섭과 영관 구상조에게 명하여 힘을 합
쳐 비도들을 섬멸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경천점의 부대에 명하여 호남에서 운반하여 오는 쌀을 빼앗아
군량으로 충당하도록 하고, 아울러 의각(犄角)의 형세8)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경천점의 백성들은 저 비도들에게 시달려서 관군
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니 만약 한 번 군사를 머물게 하면 반드시 힘을
합칠 것입니다. 이에 공문을 보냅니다”라고 한다.
지금 경천의 형편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금영에서 공문을 보낸 내용
이 명백하니 살펴서 거행할 것이다. 만약 고립무원의 염려가 있으면 금
영에 보고하여 일본 병사나 서울의 2개 부대 군사[장위영과 경리청] 중
에 얼마를 파견하게 하여 완급을 조절하게 하라.

10월 21일 충청 감사에게 회답하는 공문 [十月 二十一日 回移錦伯]

양호순무선봉진에서 살피는 일입니다. 방금 귀영이 보낸 공문이 도착


하였습니다. 본진이 이곳에 주둔한 것은 일본 병사와 함께 주선하여, 차

8) 의각(犄角)의 형세 : 병력을 여기저기에 주둔시켜 적을 견제하거나 서로 지원하게 하


는 형세를 말한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57
차 진군할 계획입니다. 홍운섭이 거느린 각 부대가 귀영의 공문에 의하
여 경천으로 나가 방어하겠다는 내용으로 어제 이미 명령하였고, 또한
보낸 명령에 대한 회답공문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두황에게 들으니 그가
거느린 각 부대는 귀영의 공문에 의해 유성에서 가까운 감성 입구로 이
동하여 주둔하라는 내용으로 엊그제 명령을 내었으며, 또한 그렇게 하겠
다는 내용의 회답을 같은 시기에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귀영의 공
문을 받아 보니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니, 매우 의심이 나서 답답합
니다.
본진은 이미 명령을 내려서, 남하(南下)하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하였습
니다. 다시 귀영에서 조치하라는 말로 공문을 내어서 조정하여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호남 비류에 대한 대비는 이 공문에 따라 편의 종사함이 합
당할 것이니 이것으로 알아 양해하십시오.

10월 22일 충청 감영의 공문 [十月 二十二日 錦營移文]

운운(云云) 방금 귀영[순무선봉진]이 보낸 공문을 받아보니 진퇴 지속


(進退遲速)을 스스로 접응하는 방법이 있지만 각 부대가 이미 함께 도착
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도순무영으로부터 전령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땅히 그 명령에 따라 준비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본영[충청감영]
에 주둔해 있는 경리청의 군사는 아직 대기하고 이동하지 않고 귀 선봉
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위영의 군사는 죽산부사가 대동하여 연
기에 도착하였으나, 주둔하고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고 군대가 남하하는
날에 기회에 따라 이동할 것이라 합니다. 이곳의 정형은 정탐군(偵探軍)
의 도착을 기다려 차례로 공문을 보내 계획한다는 연유의 일입니다.
25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0월 23일 공주에 주둔해 있는 경리영관 성하영・홍운섭에게 전령


함 [二十三日 傳令 公州留陣經理領官成夏永 洪運燮]

최근 비류들의 정형을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 <귀진이> 공주부에 들


어가는 날에 살펴 관망하는 절차가 없으면 안 되겠기에 각 부대에서 90
명의 군사를 뽑아 봉황산(鳳凰山)・효포봉(孝浦峰)・연미봉(燕尾峰)의 3곳
에 30명씩 배치하되 내일 아침 식사 후에 글을 아는 교장(敎長)을 시켜
뜯어보게 하라. 각각 맡은 곳에서 명령에 의하여 자세히 살펴 거행하고
혹 미리 뜯어보고 기밀을 누설시켜 군사기밀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
야 할 것이다.

10월 23일 충청 감사의 공문 [同日 錦伯移文)

즉시 도착한 의정부에서 <충청감영에> 보낸 공문을 받아보니, 이번


의정부에 하교한 문서는 이러하였습니다.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계
속해서 올린 전후 장계의 등사(謄寫) 내용을 보니, 적을 방어할 대책이
없다는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순무선봉진을 속히 내려 보내고 청
주에 주둔하고 있는 장위영・경리청의 두 영관의 시급한 지원을 요청하였
다. 해당 영[충청감영]은 요충지에 처해 있어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으
므로 순무영에 속히 알려 빨리 가서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라고 하니 비답에 ‘윤허한다’는 전교를 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교의 분부를 받들어 시행하라는 관문(關文, 상급관청에서 보내는 공
문)을 전하였으니, 관문의 사연대로 고찰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본
영[충청감영]의 상황이 매우 긴박하므로 공문이 도착하는 즉시 밤새도록
진군하여 와서 지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 잠시라도 늦춰져서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59
충청 감사에게 보내는 회답 공문 [回移錦伯]

이번에 귀영[충청감영]의 공문을 받아보니 우리 군사의 행진 속도를


아직 확실하게 알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의정부에서 엄준한 복계
(覆啓)9)를 받든 것이어서 실로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본영은
지금 여기에 도착했고 내일 전진할 예정인데, 일본 병사가 시간을 어겼
으므로 전후 형편을 살펴 출발할 것입니다. 이를 헤아려 주기 바랍니다.

10월 26일 통위영 경리청 영관과 대관에게 전령함 [十月 二十六日


傳令 統衛營經理廳領官隊官]

감영 밑에 주둔한 경리청의 2개 부대는 판치(板峙)에 가서 주둔하고, 판


치에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의 2개 부대는 이인(利仁)으로 가서 대신하여
주둔하고 이인에 주둔한 통위영의 2개 부대는 돌아와 감영 밑에 주둔하라.

10월 27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에게 전령함 [十月 二十七日 傳令 壯


衛營領官李斗璜]

공주부에 들어와 숙영한 뒤에 각 부대 병사들의 피곤한 기색이 없도록


낱낱이 위문할 것이다. 영관 이하의 성명과 각 부대 병사들의 인원수와
성명을 책으로 만들어 급히 보고하고, 선발하여 등용하도록 하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에게 전령함 [傳令 壯衛營領官李斗璜]

곧 금영(錦營)으로 회군하여 지원하라는 전령이 있었으나 이곳은 밤이

9) 복계(覆啓):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바른 조치를 내려주어 달라고 임금에게 반복해서


올리는 글을 말한다. 이는 제도로 보장되어 있다.
26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깊어 아직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본 진영에서 보낸 군관


이창식(李昌植)의 보고에 의하면 병사 30명을 거느리고 덕산(德山)과 합
덕(合德)의 유회소(儒會所)에 이르렀다가 비도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매우
시급한 지경에 이르러 군사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예산의 적이 합덕으로
향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있다. 즉시 군사를
재촉하여 급히 이 곳으로 진군할 것이며, 대관(隊官) 박영호(朴永祜)는
밖으로부터 곧바로 갈 것이다. 이는 군사의 기율(紀律)과 관계있으니 급
히 와서 대기해야 할 것이다.

11월 초 2일 우금치진 경리영관 구상조, 웅치진 서산군수 성하영,


금학동진 통위영관 장용진, 장기대진 통위대관 오창성에게 전령함
[十一月初二日 牛金峙經理領官 具相祖 熊峙陣瑞山郡守 成夏永 金鶴
洞陣統衛領官 張容鎭 將旗臺陣統衛隊官 吳昌成]

밤새도록 노숙하고 비가 내림이 이와 같으며 또 급한 경보(警報)가 없


으니, 적을 지키고 있는 각 부대들은 우선 감영 밑으로 철수하라.

11월 초 3일 판치진 통위영에게 전령함 [十一月初三日 傳令 板峙陣


統衛營]

본진이 나가 주둔하는 것은 허술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저녁 식사 후


에 별도로 1개 부대의 병력을 파견하여 효포봉에 나가 주둔하여 지원하
게 할 것이다. 혹 급한 경보가 있으면 1발의 포를 쏘고 위급하면 3발의
포를 연속으로 쏘아서 구원을 청하도록 하라. 무단으로 포를 쏘는 일은
엄금한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61
경리청 대관 백락완에게 전령함 [傳令 經理隊官白樂浣]

오늘 판치에 주둔하고 있는 통위진(統衛陣)은 허술한 염려가 있는 듯하


다. 저녁 식사 후에 군사를 거느리고 효포봉에 나가 주둔하여 서로 지원을
하라. 혹 급한 경보가 있으면 1발의 포를 쏘고 위급하면 3발을 연속으로
쏘라는 뜻은 이미 통위진에 명령하였다. 조용하고 무사하면 다만 지키도록
하고 만약 <적진에서> 포성이 있으면 우리 진의 포로 응하되 즉각 와서
보고하라. 혹 무단으로 포를 쏘아 군사를 소란하게 하지 말도록 하라.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에게 전령함 [傳令 敎導所中隊長李軫鎬]

지난번 북어 5바리를 반찬으로 하도록 내려 보냈다. 또 탄약 6궤짝과


회룡총(回龍銃) 1자루, 무명으로 만든 갑옷 2바리는 순무영에서 내려 보
낸 것인데, 처음에는 본진[순무선봉진]이 주둔한 곳을 몰라 운송하지 못
하고 이곳에 머물러 보관하여 본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 문의(文義)
와 회덕(懷德) 등지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고, 또 확실한 장소를 지정하지
않았으니 이처럼 중한 물건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운송할 수 없는 것이
다.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고 이에 전령한다. 확실히 어느 날 연산(連山)
에 도착한다는 보고가 있으면 주력 부대가 또한 날짜에 맞추어서 논산
(論山) 초포(草浦)에 적이 모인 길로 나아가서 토벌하고 이 물건을 운반
할 계획이다. 행군하는 날짜와 주둔할 지역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급히
보고하고 날짜에 맞춰 적을 섬멸하도록 하라.
이곳에 거느리고 갈 병사를 보내면 마땅히 운송할 것이다.

11월 초 3일 관보 [同日 官報]

순무영이 아뢰기를, “선봉장 이규태의 보고 내용에 ‘지난 10월 25일에


26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통위영 군사 2개 소대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바라보니 적이 높은 봉우리


위에 있으면서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공주의 효포봉과 납
교봉(蠟橋峰)으로 부대를 나누어 싸움을 독촉하였습니다. 통위영의 대관
신창희(申昌熙)・오창성(吳昌成)이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비류(匪類)
5・60명을 사살하였으며, 그 부상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에
적은 기세가 꺾여 후퇴하여 도망쳤습니다.
또 당일에 서산 군수 성하영은 대관 윤영성(尹泳成)・백락완(白樂浣)・
조병완(曺秉完)・이상덕(李相德)과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할 때에 적
의 우두머리가 가마를 타고 일산(日傘)을 펴고는 깃발을 날리며 호각을
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70여 명을 사살하고 2놈을 사로잡았
으며 대포와 군기를 노획하였습니다. 또한 경리청 군사 12명은 회선포
(回旋砲) 1좌를 노획하였으며, 나머지 다른 비류들은 밤을 타서 도망쳤습
니다.
경천점에서 두 차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다친 바 없
었으니 왕의 신령이 내린 것으로,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노획한
군수물자는 책을 만들어 기록하여 올릴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군수물자는 별도로 단자를 만들어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알았다”하였다.

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금일 10월 24일에 충청감영의 적이 10


리 밖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길을 재촉하여 진군한 사유를 이미 급
히 보고하였습니다. 또한 당일 신시경에 금강 장기진(將旗津)에 이르러
공주부에 들어갈 여유도 없이 곧 납교(蠟橋)의 후봉에 올라 적의 전세
(戰勢)를 바라보니 적은 건너편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 깃발을 벌려 세
우고 수십 리의 산꼭대기에 뻗쳐 있는 것이 마치 병풍으로 둘러싼 것과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63
같았습니다. 서로의 거리가 1리쯤 되는데 중간에 하나의 개천과 큰 들이
있어 총탄이 미치지 못하는 거리였고 날은 이미 어두움에 임박하여 형편
상 진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우금치・금학동・효포봉・납교후봉 및
동쪽 갓 산성의 요해 각처에 적을 바라보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25일 새
벽에 선봉이 통위영 영관 이하 2개 소대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진을
벌였으나 형편상 진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적의 형세를 자세히
염탐하니 이른바 저들의 주력 부대는 효포봉 건너편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통위진영의 건너편에 있는 적진은 모두 성원(聲援)하는 적이어서, 납교
후봉(後峰)의 앞과 효포봉의 방어하는 곳은 남북으로 뻗힌 서로의 거리
가 수 십리 정도이고 계속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음에 한 곳으로만 진격
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효포 등지를 방어하는 각 진에
명령하여 곧바로 진격하게 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 진을 헤아리고
독촉하여 함께 진격했는데, 이때에 통위영 대관 신창희・오창성, 교장 김
상운・박상길(朴相吉)이 용기를 분발하여 격렬하게 나아가 위험을 돌보지
않고 총을 쏘면서 앞장서 인도했고 또 군사를 독촉하여 곧바로 적진을
향하면서 어지럽게 총을 쏘아 <적을> 사살하였습니다. 적은 총탄에 맞
은 자가 5・60명이 되고 부상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선
봉이 한 번 꺾임에 산꼭대기에 올라 벌려 서서 바라보던 적은 모두 산에
서 내려 후퇴하여 도망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전과 같이
군사를 거두어 방어하였습니다.
당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경, 서산 군수 성하영이 올린 보고[牒
呈] 내용에 24일로부터 25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경에 이르기까지
적을 방어한 일은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적과 더불어 싸운 것이 이
미 이틀이 지났지만 적은 조금도 후퇴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대
관(隊官) 윤영성・백락완이 군사를 나누어 3가지 길로 함께 공격하여, 전
투가 반나절이 되어서 수십 명을 사살하자 적이 비로소 후퇴하였습니다.
26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때문에 추격하여 대포 2좌(坐)와 총・창・탄약・깃발 등을 빼앗았고, 저들


은 흩어져 산꼭대기로 피하였습니다. 격퇴하고 있을 즈음에 선봉진을 지
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관 백락완으로 하여금 부대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게 하여 이미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지금 가까운
산꼭대기에 퍼져 있고 군수가 거느린 군사는 지금 4일 밤낮으로 싸우면
서 잠시도 쉬지 못하여 힘이 다 빠져 전투에 임하여 힘을 쓰지 못하니
송구함을 가누지 못합니다. 이에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동시에 안성군수 홍운섭의 보고한 내용에 금월 24일 대교(大橋)로부터
공주목으로 돌아와 주둔한 사유를 이미 보고 드린 바 있습니다. 당일 술
시 경에 곧바로 금영에 도착하여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명령을 받아 군
수는 대관 조병완과 함께 소대 한 개의 병력을 거느리고 금강의 진두에
나아가 지켰고, 참령관 구상조는 참모관 이상덕・신효식(申孝湜)・황승억
(黃昇億)과 대관 이상덕, 교장(敎長) 김홍엽(金弘燁)・이봉춘(李鳳春)・이장
혁(李章爀)・우기준(禹基埈)・장대규(張大奎)와 함께 소대 한 개를 이끌고
봉수현(烽燧峴)을 지켰습니다. 그 이튿날 25일 인시(寅時, 오전 3∼5시)
경에 받은 전령에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적과 더불어 웅치에서 서
로 버티고 있은 지 며칠이 되어도 적의 기세가 심히 커서 <우리가> 소
홀함이 있을까 염려스러워 길을 나누어 지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군수는 다만 20명만 대동하여 전날처럼 파수를 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관 조병완을 시켜 군수가 대동한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부터 오른 쪽을 공격하게 하였고, 참령관 구상조는 그가 거느린 장졸을
거느리고 일본 병사 30명과 함께 남쪽으로부터 그 왼쪽을 공격하였습니
다. 서산군수 성하영이 지난번 적을 향하여 진격하였는데 적의 기세가 과
연 들은 바와 같아 산과 들에 가득하였습니다. 소위 추장(酋長, 우두머리)
인 전봉준(全琫準)이란 자가 가마를 타고 일산(日傘)을 펴고 깃발을 날리
며 호각을 불고 벌떼처럼 옹호하면서 다가 왔습니다. 3곳으로 부대가 진
격하여 한나절을 힘껏 싸워도 승부를 알 수 없더니 포시(晡時, 오후 3∼5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65
시)에 이르러 70여 명을 사살하고 2명을 사로잡고 군기(軍器)를 뺏으니
적의 기세가 점점 꺾여 조금 후퇴한 뒤, 들 건너 바라보이는 시야산(時也
山) 능선에 모여 진을 쳤습니다. 해는 이미 저물고 군사도 피로하여 서로
교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또한 군사를 거두었습니다. 오경(五更)쯤 되어
여러 적은 어두움을 타고 도주하여 남쪽의 30리 쯤 되는 경천점으로 향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승리하였다고 하여 방어를 소홀하게 할 수는 없
기 때문에 각별히 단속하여 전과 같이 파수를 세워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사살하고 포로로 잡은 숫자와 뺏은 기물은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겠거
니와 2번 접전할 때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부상자가 없었으니 심히 다
행한 일입니다. 적의 기세는 저와 같이 크고, 우리 관군[王師]은 사방으
로 나누어 방어하여 형세가 매우 고단하였으나, 장졸 이하 각 부대의 병
사들이 오직 강렬한 충성심으로 몸의 고통을 잊고 힘을 내어 진격하면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적을 모두 섬멸시키지는 못하였으나 크게 적
의 기세를 꺾어 날뛰지 못하게 하여 물러가서 형적을 숨기게 하였으며
사살한 자도 적지 않고 기물을 뺏은 것도 심히 많았는데 적의 큰 부대를
탈환함이 더욱 가상합니다. 이튿날 오시(午時)경에 경리청의 병정 12명
은 적의 남은 무리가 모여 진을 친 곳을 바라보고 갑작스럽게 그들의 대
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하니 적들은 놀라 겁을 먹고 도주하였으며, 회선
포(回旋砲)를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수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의 소굴 뒤를 엄습하였으니 가상한 일입니다.
당장에 <사기를> 격동시키고 권장하는 상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포를 뺏은 경리청 병정 12명에게 은전(銀錢) 1푼씩 시상하
였습니다. 각 영에서는 많지 않은 군사로써 각처에 나누어 진을 치고 적
은 수로써 많은 적과 접전할 때 한 사람도 부상자가 없었는데, 이는 왕
의 신령이 미친 것으로 엎드려 기쁨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각 영의 적
을 사살한 수효와 탈취한 적의 물품 숫자를 하나하나 책자를 만들어 올
려 보낼 것입니다.
26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제(題): 도착한 문서는 임금에게 아뢸 것이며, 전후로 거듭 두 번을 승


리하였다고 하니 장수의 기개와 명령에 잘 따른 병사들이 극히 가탄할
일이다. 경리청 군사가 회선포(回旋砲)를 탈취한 일은 기특한 공이다. 아
울러 가상한 일이니 책자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11월 초 4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에게 전령함 [初四日 傳令 壯衛領


官李斗璜]

지금 듣건대 홍주(洪州)에 모여 진을 친 수만 명의 적을 각 군이 토벌
함에 사살한 수가 수천 명에 이르고 병기를 많이 뺏었다고 하니 비록 공
적인 보고서가 없으나 확실한 정보인 것 같다. 그 날짜를 계산해보니 본
진은 홍주에 도착할 수 있으며, 천천히 쫓아가 잡거나 날짜만 소비해서
는 안될 뿐 아니라 지금 적의 소굴이 논산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 군사
를 합쳐 진격해야만 할 것이다. 때문에 길을 재촉하여 쫓을 것을 급히
전령한다.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곧바로 정산(定山)의 길로 향하여 밤낮
을 가리지 말고 이인(利仁)의 앞길로 달려가서 때에 맞게 병력을 사용하
게 해야 한다. 홍주로부터 특별히 향도 몇 사람을 정하여서 우회함이 없
도록 하라. 시급한 군사의 일에 크게 관계되니 깊이 생각하여 단속하고
날짜를 정하여 달려가라.
이에 전진(前陣)은 반드시 왕진(旺津)에서 건너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서 배를 기다리도록 명령하였으니 이를 알아 할 것이다.

11월 초 4일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瑞山郡守成夏永]

외부에 나가 주둔한 각 부대는 형편상 교체할 것이다. 경리청의 좌 2


소대를 거느리고 내일 동녘이 틀 무렵에 판치와 수유(水踰) 두 마을 사
이에 나가 주둔하되 편리한대로 주둔한 뒤에 금일 주둔한 통위영 2개 부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67
대는 이인으로 이동하여 주둔할 뜻으로 이에 전령한다. 일체를 통위영의
부대에 전하여 알릴 것이며 감영 아래에 머물러 주둔한 중(中) 2소대는
이인에 주둔한 경리청의 2개 부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또한 곧바로 출
발하되 아울러 거느리고 있는 좌 2소대와 함께 합세하여 주둔하라.

11월 초 5일 경리청 영관 구상조에게 전령함 [十一月 初五日 傳令


經理領官具相祖]

외부에 나가서 주둔한 각 부대는 형편상 돌아가며 교체한다. 통위영의


2개 부대가 나와 주둔하기를 기다려 모두 곧 감영 아래에 둔 유진소(留
陣所)10)로 이동하라.

11월 11일 통위영 영관 장용진에게 전령함 [十一月 十一日 傳令


統衛領官張容鎭]

병사들이 여러 날 노숙하고 있어 극히 고통스럽기 때문에 경리청의 각


부대로 교체하도록 올려 보낼 것이다. 본 부대를 두 곳에 파견하여 지키
고 있는 병사들을 우선 철수시켜 돌아가며 휴식하게 하라.

11월 11일 경리청 영관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經理領官]

통위영의 각 부대와 본영의 각 부대가 여러 날 노숙하고 있어 극히


고통스럽다. 본영의 좌 2소대와 중 2소대는 이미 2일간 휴식하였다. 봉
수(烽燧)・웅치(熊峙)・금학(金鶴)・효포(孝浦) 등지는 2개의 영(營)이 각각

10) 유진소(留陣所): 군영이 현지에 주둔할 때 임시로 설치한 지휘본부. 이때는 선봉장
이규태가 유진한 곳을 말한다.
26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진을 치고 파수를 서게 하였는데 지금 교체하여 파수를 서도록 할 것이


니 특별히 명하여 적을 멀리서 조망하게 하고 번갈아 휴식하게 하라.

11월 11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壯衛領官李斗璜]

지금 들으니 본 부대가 길을 유구(維鳩)로 경유한다고 하지만 충청감


영을 거칠 필요는 없다. 곧바로 정산(定山)을 향하여 차차 진군하고 논
산에 이르면 일본 사람의 서신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로써 전령하니
곧바로 진군하여 차차 편의에 따르라.

11월 12일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에게 전령함 [十一月 十二日 傳令


敎導所中隊長李軫鎬]

연산(連山) 등지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이미 전달하였는데 그간 도착하


였는지 알 수 없다. 지금 듣건대 호남의 동비가 진잠(鎭岑)과 유성을 경
유하여 청주를 범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확실히 믿기는
어려우나 본진은 이미 논산에서 지원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비록 이런
급한 보고가 없었으나 <그들은> 반드시 유성을 경유할 것이다. 때문에
다시 명령을 하니 이를 자세히 헤아려 길을 정하도록 하라. 실제로 <저
들이> 청주를 침범할 기미가 있으면 유성과 진잠 사이에 군사를 주둔시
켜 그들이 오면 섬멸토록 하라. 아무튼 우선은 연산 등지로 진군하라.

11월 13일 경리 부영관 홍운섭에게 전령함 [十一月 十三日 傳令


經理副領官洪雲燮)

연기(燕岐) 등지에서 본영의 좌 2소대와 우 1소대 등 2개의 소대를 빼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69
내어서 출발하게 하니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단속하여 거느리고 출발하라.

11월 14일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에게 전령함 [十一月 十四日 傳令


壯衛副領官李斗璜]

주력 부대가 지금 용수막(龍水幕)에 도착하여 유숙하니 새벽에 즉시


경천 등지로 출동하여 일본 병사와 함께 상의하여 합세토록 하고 나아가
토벌하라.

11월 14일 통위영 대관 오창성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統衛隊官吳昌成]

주력 부대가 지금 용수막에 도착하여 유숙하니 새벽에 즉시 경천 등지


로 출동해 일본 병사와 함께 상의하여 합세토록 하고 나아가 토벌하라.

11월 15일 통위영 및 장위영의 영관과 대관에게 전령함 [十一月


十五日 傳令 統衛壯衛領官隊官]

각 부대는 무사히 경비하고 장졸도 모두 편안히 지냈으니 일찍이 부대


를 합동하여 진격하되 일본 부대와 함께 상의할 것이며 그들의 돕는 일
을 위하여 참모군관 몇 사람을 파견하여 보내서 합세하여 진군하라.

경리청 영관과 대관에게 전령함 [傳令 經理領官隊官]

금방 도착한 순무영 전령을 내어 경리청 대관의 임무 교대와 관련된 것


으로서, 금번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 중에 차례로 승진시켜야 하는데, 보
고의 글에서는 겨우 해당 부대에서 승진시키는 것으로 결재하여 내려 보
27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냈다. 지금 해당 부대에서는 본영의 지휘와 조처를 따르도록 말을 하니,


이에 전령을 한다. 도착하면 즉시 원보장(原報狀)에 의하여 시행하여 권장
하라고 하셨던바, 이번에 논공(論功)하여 승진시키는 일은 사실상 적극적
으로 권장하라는 뜻이다. 지난날의 보고에 의하여 좌 2소대 대관 백락완을
옮겨 교대할 것이며, 교장 김명환(金命煥)을 승진시키고, 그를 대신하여 규
칙(糾飭) 고진룡(高鎭龍)을 아울러 승진시켜 영솔(領率)하도록 하라.

11월 16일 관보 [十一月 十六日 官報]

순무영에서 아뢰기를, “선봉장 이규태가 이달 초 10일에 보고한 내용


을 보니 금월 초 8일에 비도 몇 만 명이 고개를 넘어와서 포위하였기
때문에 병사 2개 소대가 일본 병사와 함께 합세하여 도우러 가서 적의
복부와 배후의 부대를 격퇴시켰습니다. 또한 초 9일에는 적군이 포를 쏘
고 깃발을 흔드는데 그 세력이 매우 성대하였으므로, 서산 군수로 하여
금 교전하게 하여 죽은 적의 숫자가 많았고, 적진을 함락하여 군수품을
탈취하니, 비도(匪徒)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짐승처럼 도주하였습니다. 탈
취한 군수품은 책을 만들어 보고할 것으로 말을 하니 노획한 군수품의
숫자는 별책으로 올리겠습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알았다”하였다.

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두 진영의 군사가 이인과 판치의 두


곳에서 번갈아 방어하겠다는 내용의 보고를 이미 올린바 있습니다. 초 8
일 미시(未時, 오후 1∼3시)경에 판치에 주둔한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가
구두로 전한 급보에 의하면, “당일 미시 경에 비도 몇 만 명이 경천점에
서 곧바로 올라오고 혹은 노성현(魯城縣)의 뒷산에서부터 산으로 올라와
서 포위하니,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이 어지러우며 고함소리가 함께 나왔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71
습니다. 우리의 병력으로는 막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선 효포・웅치
등지의 요새라 할 수 있는 높은 봉우리에 나아가 진을 치고 특별히 지키
고 멀리서 조망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례로 도착한 이인에 주둔하고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이 구두
로 전한 급보의 내용에, “비류 몇 만 명이 논산의 직행로에서 고개를 넘
어 공격해 오고 또 몇 만 명은 오실산(梧室山) 길을 따라 우리의 뒤를
끊어 포위하여 머무는 지라. 한편으로는 일본군 장교에게 보고하여 군사
를 동원하게 하고 또 부대에 머문 통위영의 군사 2개 소대를 파견하게
하여 나누어 보내서 지원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연이어서 판치에 있는 부대의 급한 보고에서, 효포와 능치(陵峙)의 방
어선 뒤로부터 비도들의 무리가 산과 들에 가득하고 비록 곧바로 올라오
지는 못하지만 두루 잡색의 깃발을 꽂아 기세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워질 무렵에 이르러도 아직 별다른 소요스러운 정형은 없었습니다.
이어 이인에 주둔한 부대의 긴급한 보고 내용을 접하니 두 길의 적병과
더불어 힘을 다해 교전하여 적의 복부와 등의 두 적을 격퇴시키니 10리
쯤 되는 우금치에 물러가 머물렀습니다.
술시 경에 이르러 우리 두 부대의 병사와 군수물자에는 손실된 것이
없었으며, 다만 좌 2소대의 병사 김명수(金明壽)가 왼쪽 어깨에 실탄을
맞아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밤은 깊어 다시 정세를 정탐할 수 없고, 지
형이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후속 군사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후퇴하여
우금치에 진을 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거느리고 있는 서산 군수 성하영과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이 소수
의 병력을 이끌고 이인 지역을 지원할 때에 복부와 배후에서 공격을 받
았지만 몇 만의 비류를 사살하여 격퇴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병사들에게
명하여 전군이 후퇴하여 주둔하게 하였으니 만일 힘을 분발하여 몸을 바
치지 않았다면 이런 전과를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각처에서 적을 방
어하고 관망하는 일은 특별히 단속을 가하게 하였고 일본 병사의 사관
27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士官) 육군 보병 대위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우금치로 나가 일제히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초 9일 새벽에 적진의 형세를
정탐하니 각 진의 바라보이는 곳에 깃발을 두루 꽂았는데 동쪽은 판치
뒤 봉우리에서부터, 서쪽으로 봉황산의 뒤 봉우리에까지 3∼40리를 이어
뻗쳐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하
고 매우 커서, 우리 군대가 미약한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금학(金鶴)・웅치・효포의 건너 봉우리에 있는 비도들은 10리쯤 서로 바
라보이는 높은 봉우리에 나열하여 진을 치고 때로는 고함소리를 지르며,
때로는 포를 쏘아 항상 공격할 기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학동에서
방어하는 통위영 대관(隊官) 오창성(吳昌成), 교장(敎長) 박상길, 웅치의
2곳에 방어하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구상조・ 대관 조병완(曺秉完)・이상
덕(李相德), 참모장 이상덕(李相德)・황승억(黃昇億), 별군관(別軍官) 유일
환(兪一煥), 교장(敎長) 김홍엽(金弘燁)・이봉춘(李鳳春)・이장혁(李章爀)・
우기준(禹基埈)과 효포 봉수의 방수 통위영 영관 장용진(張容鎭), 대관
신창희(申昌熙), 교장 김상운(金相雲)에게 특별히 명하여 각각 요해처를
관망하도록 단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비의 정형은 종일토록 출몰하여
곧 공격해 올듯하였고 조금만 소홀하면 산에 올라 시험하고 포를 쏘면
갑자기 몸을 피하니 만일 적이 유혹하는 계책이 아니면 필시 많은 군사
의 지원을 요하는 것이니 우리의 단속하는 바가 교전할 때보다 배나 되
었습니다.
우금치의 서쪽과 남쪽 2곳의 적도(賊徒)들은 고함소리를 시끄럽게 내
면서 항상 공격할 듯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주둔한 서산 군수 성하영,
경리청 영관 윤영성・백낙완에게 명하여 일본 병사와 더불어 진격하여 토
벌하게 하였습니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경으로부터 비로소 포를 발
사하고 몇 차례 적과 교전하였으며 일본 병사는 진을 벌려 앞 봉우리에
올라 총과 포를 몇 십 차례 발사하니 적의 피살자가 많아 감히 가까이
범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과의 차이가 나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73
미시 경이 되어도 격퇴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성심으
로 분격하고 사졸들이 분개할 때 참모관 전 도사(前 都事) 권종석(權鍾
奭)과 참모사 전 주서(前 注書) 이규백(李圭白), 유학(幼學) 정도영(鄭道
永) 등은 사졸들을 단속하여 용감하게 전진토록 하였습니다. 본영에서
아뢰어 별군관으로 임명한 출신(出身) 이달영(李達榮)・송흠국(宋欽國),
전 만호(前 萬戶) 이지효(李志孝), 전 감찰(前 監察) 이재화(李在華), 전
중군(前 中軍) 이종진(李宗珍), 전 수문장(前 守門將) 유석용(柳錫用), 전
부장(前 部長) 박정환(朴晶煥), 사과(司果) 이흥교(李興敎), 본 진영에서 군
관으로 임명한 전 오위장(前 五衛將) 황범수(黃凡秀), 유학(幼學) 이주서
(李周瑞), 사과(司果) 이선(李璿), 경리청 교장 김명환・정재원(鄭在元)・장대
규(張大奎)・정인갑(鄭寅甲) 등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올라가
서 분발하여 사살한 적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비류들을 계속 진격하여 쫓아가서 적진의 높은 봉우리를 탈환 점거하
고 병기와 대포 및 깃발 6・70개를 탈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장교
대위를 비롯하여 일본 병사들과 함께 중로를 따라 남으로 향하면서 적을
쫓았습니다. 공주 영장(營長) 이기동(李基東)은 그 진영의 수교(首校) 박
준식(朴準植)과 병교(兵校) 박춘식(朴春植)・안재후(安在厚), 집사(執事)
김백현(金伯鉉)・양원길(梁元吉), 천총(千摠) 박순달(朴順達)・좌별장(左別
將) 박춘명(朴春明), 우별장(右別將) 조광승(曺光承), 파총(把摠) 송시원
(宋始元), 장무군관(掌務軍官) 정평오(丁平吾) 등 그 진영의 병사들을 거
느리고 봉황산 뒤 원봉(圓峯)의 능선을 지키다가 분발하여 북쪽에서부터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진격하여 적을 쫓아냈습니다.
경리대관 조병완・이상덕, 참모관 황승억 등은 웅치의 가장 높은 봉우
리를 방어하다가 1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의 길에서부터 왼쪽을
따라 돌격하여 힘을 합쳐 교전하면서 10리 쯤 되는 곳까지 쫓아갔으며
경리대관 윤영성과 백락완 등은 우금치의 동쪽 최고봉을 방어할 때 계속
해서 올라오는 몇 천 명의 동비들을 힘을 합쳐 방어하여 사살하고 격퇴
27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시켜, 다행히 방어하는 데 실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비도(匪徒)가 도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해가 이미 어두워졌
으므로 병사들을 모두 철수시켜 우리 진영으로 돌아오게 하니, 끝내 섬
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참모관 전 학관 이구영(李龜榮)과 유학 이승욱
(李承旭), 전 사과 신효식・이윤철(李潤徹), 별군관 전 부사 이필영, 전 오
위장 김진옥(金振玉) 등은 탄알을 조달하여 보내와서 각 부대로 하여금
조금도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병사들을 단속하여 방만하게 순서를 잃
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충청감영의 지형은 서북쪽의 큰 길이 큰 강이 횡
류(橫流)하는 곳에 이르렀고, 산성은 험한 곳을 의지하고 있으며, 동남의
산세는 높은 봉우리와 절험의 요새로 다만 몇 갈래의 도로가 있기 때문
에 비록 성곽의 방어선은 없으나 본래 믿고 방어할만한 곳이라고 칭하였
습니다.
아! 저 비류 몇 만 명의 무리가 4∼50리를 이어 포위하여 길이 있으면
쟁탈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으면 다투어 점거하여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으로 가며 좌측에서 번쩍 우측에서 번쩍하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려고 하니 저 무슨 의리며 무슨 담략
입니까? 그들 실정을 생각하면 뼈와 마음이 떨리는바 우리의 이와 같은
병력으로 전후좌우에서 대비하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사람마다 힘을
다하여 용기를 내어 먼저 오르지 않는 자 없으나 마침내 토벌하여 섬멸
하지는 못하여 비류가 아직도 날뛰고 있으니 절통하고 한탄스럽습니다.
다행히 일본군의 대위와 각 부대의 장졸 및 종군하는 여러 사람과 토
병(土兵) 민정(民丁)의 분투하고 합심한 노력에 힘입어 적의 기세는 조
금 꺾였으나 남은 잔당이 아직 많으니 사실상 헤아릴 수 없는 정형이 있
습니다. 때문에 전처럼 방어하게 하여 더욱 적을 살피게 한 바 이와 같
은 미약한 병력으로 갖은 고생을 한지가 벌써 6∼7일의 오랜 시간이 지
났습니다. 싸움을 크게 치른 뒤에도 밤에 노숙하였기 때문에 극히 고통
스럽습니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75
경리청 좌 2소대 병사 남창오(南昌五), 중 2소대 병사 김관일(金寬一)
은 분발하여 앞에서 싸우다가 남창오는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고 김관일
은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으나 다행히 몸을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
다. 때문에 어제 총탄을 맞은 병사 김명수와 함께 치료케 하였으며 비류
가 날뛸 때는 성에 가득한 백성들이 울면서 도망쳐 잠시라도 보전하지
못하는 듯하여 보이기에 매우 참담하더니 승리한 뒤에 미쳐서는 노소 백
성들이 각각 뺏은 깃발을 가지고 기뻐 뛰면서 각 부대와 아문에 알리고
한편으로는 울면서 한편으로는 웃고 기뻐하니 하늘의 뜻과 민심은 환하
게 일치되었습니다.
위에 부상한 두 병사와 분발하여 먼저 적진에 오른 장졸과 참모 군관
은 비록 직분에 맞는 일을 했으나 포상하여 권면하는 법에 합당하되 감
히 함부로 편의에 따르지 못하겠고 탈취한 무기는 책자를 만들어 위에
보고할 것입니다. 무기를 탈취하여 부대 앞에 바친 병사는 뒤에 마땅히
구별하여 보고할 계획이며, 군관인 전 오위장 황범수, 사과 이선, 유학
이주서 등은 우선 임금께 아뢰어 임명케 해서 권면하여 본받게 하는 것
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뒤의 상황은 아울러 차례로 보고 하겠습니다.
제(題): 보고문은 도착하였거니와 임금에게 아뢸 것이며, 장관(將官)의
적개심과 사졸들이 잘 따라서 행군한 이후로 가장 큰 승리이다. 극히 가
상한 일임에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하고 남은 잔당이 아직 성행하고 괴
수를 잡지 못하였으니 이는 앞으로 크게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병사들
을 진격하도록 하여 섬멸하기를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회에 따라
특별히 도모할 것이며 부상을 입은 3명의 병사는 각별히 구제하고 간호
하며 이후의 상황을 계속 보고하고 청한 바 3명의 군관은 다시 공을 세
우기를 기다려 포상할 것이다.
나머지는 갑오년(1894년) 11월 27일 관보의 공산초비기(公山勦匪記)11)

11) 공산초비기(公山勦匪記): 공주전투의 작전과 승리상황을 요약해 보고한 기록이다. 이


인 효포 우금치에서 벌어진 세 전투를 설명하고 각기 군사를 배치한 상황을 표시한
27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안의 이인지역(利仁之役)과 28일 관보의 효포지전(孝浦之戰), 29일 관보


의 우금지사(牛金之師)를 보고 참고할 것.
광무 2년(1898년) 무관학교 시험 보일 때와 광무 4년(1900년) 무관학
교 시험을 보일 때 시관(試官) 신기선(申箕善)의 제(題)에, “이규태가 전
봉준을 격파한 보고서로 시험을 치른다”라고 하고 일성록(日省錄) 편집
관(編輯官) 이승욱(李承旭)의 제문에 요약하여 이르기를, “아! 공은 진실
로 죽지 않았도다. 대저 효포의 전투와 우금치의 승리는 어찌 공의 웅도
대략(雄圖大畧)이 솟구치고 출몰함과 방불하지 않겠는가?”하였다.

11월 16일 관보 [十一月十六日 官報]

순무영이 아뢰기를, “선봉장 이규태가 11일에 올린 보고를 보니 경리


청 부영관 홍운섭이 적 4∼5명을 사살하니, 적도(賊徒)들이 멀리 도주하
였으며 노획한 무기는 책자를 만들어 올릴 것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노
획한 무기의 실 수효를 별단(別單)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하니 비
답하기를, “알았다”하였다.

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휘하 각 부대와 각 소대는 별 이상 없


이 잘 잤으며 각처의 방어선과 각 부대의 보고를 접하니 각처에 주둔한
적은 오후부터 조금씩 해산하였으며 각처를 살펴보니 모두 형적을 감추
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능치(陵峙)를 방어하고 있는 경리청 부령관 홍운
섭의 보고 내용을 접하니, 적도(賊徒) 수천 명이 요새에 버티고 주둔하여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고 있지만, 격파할 계책이 없었습니다.

지도를 첨부하였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77
한나절에 교장 이봉춘이 훈련된 병사 10명을 이끌고 모두 군복을 벗
게 하여 비류의 복장으로 꾸미고 점점 앞으로 나아감에 적이 의심하지
않거늘 이로 인하여 산에 올라 적진의 가까운데 이르러 일제히 총을 발
사하여 4∼5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이에 적은 무기와 군수물자를 버리고
몸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적은 군사로는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지만 계속 총을 쏘아 위엄을 보여 그들을 멀리 도주하게 하였습니
다. 그런 뒤에 노획한 무기와 물자를 운반하여 왔으니 책자를 만들어 올
립니다. 또한 적의 정세를 정탐하니 패하여 흩어진 잔당은 계룡산 등지
로 향하였는바 노획한 군수물자의 실 수효를 책자로 만들어 보낼 것입니
다. 이러한 과감한 군사의 마음은 별도로 권장하는 방법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1월 16일 서산 군수 성하영에게 전령함 [十一月十六日 傳令 瑞山


郡守成夏永]

지금 듣건대 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에서 비류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 하니 여러 날을 허술하게 보내면 안 될 것이다. 경리청 좌 1소대와
중 2소대의 두 군사는 영관 구상조와 함께 당일 진군하여 섬멸하고 안정
을 취한 뒤에 곧바로 서산・태안 등지로 나가 또한 모두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태안에는 아직 도로를 통행하는 자가 없으니 비류의 무리가 진
을 치고 출몰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그 고을에 가서 당초에 난동
을 부린 이유를 자세히 조사하여 살펴야 할 것이며 좌 1소대는 한산읍에
도착하여 본래대로 돌린 뒤에 그 형편을 관망하고 영관 구상조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고 금영으로 돌아오게 하라.
27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1월 15일[十五日]

출전한 장위영 영관 겸 죽산 도호부사가 보고하는 일입니다. 지시한


바에 따라 정해진 날짜에 맞춰 공주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금월 초 9
일에 해미(海美)를 떠나 홍주에 도착하여 주둔한 이유를 이미 보고하였
습니다. 그 이튿날 초 10일에 30리를 행군하여 대흥읍(大興邑)에 주둔하
였으며, 유회소(儒會所)에서 지적한 동도(東徒)를 체포하여 곧바로 처리
하였습니다. 11일에는 40리를 행군하여 공주의 유구에 주둔하고 있었습
니다. 12일 축시(丑時, 오전 1∼3시) 경에 도착한 전령에 의하면, 곧바로
정산(定山)으로 진군하여 군사를 연합하도록 하라고 했기 때문에 명령에
의해 곧 회군(回軍)하여 정산 쪽으로 전진하였으며 11일 신시 경에는 유
구에 도착하여 주둔하였습니다. 그 때에 부대를 풀어 놓고 병사들을 쉬
게 하였더니 의병 진영에서 동비 9명을 체포하여 보내왔는데, 그놈은 유
구에 거주하던 놈이었습니다.
곧바로 공초를 받으니, 유구의 소위 충경포(忠慶包) 휘하에는 <동학농
민군이> 4∼5,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저들은 서로 약속하기를 당일
밤이 깊은 뒤에 산에 올라가서 포를 발사하고 여러 대중을 현혹시킨 뒤
에 관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강의 북쪽에 있는 동도를 지원하려 한다고
공술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녁시간이 되었으나 식사를 할 여유도 없
이 황혼에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엄습하여 밤을 새워 천여 명을 체포
하여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놈을 문초하였더니 거괴가 상당수였으며, 위협으
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자도 있었습니다. 모두 처형하는 것이 사
리에 맞겠으나, 거괴는 섬멸하고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말라
는 뜻에 따라 그 거괴는 처형하고, 그를 따른 자는 석방하였습니다. 유구
는 적의 큰 소굴이었는데 오늘의 소탕은 전쟁으로 총을 발사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으니, 또한 적을 무찔러 길을 열어서 무고한 자를 구제하고자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79
한 계책이었습니다.
공주 감영에서 서울로 가는 데는 3갈래의 길이 있는데 동쪽에는 대교
(大橋)가 있고 가운데는 광정(廣亭)이 있고 서쪽은 유구(維鳩)이니 유구의
한 길은 사실에 널리 통행되었으나 대교와 광정은 요즈음 어떤 형세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남북의 두 적이 서로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관군을 포위하는 것을 가장 좋은 계책으로 삼고 있었으니 그 예
측할 수 없음은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담한 여러 놈은
처리하여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겠으며 그 괴수 중에는 선봉진의 별군관
한 명이 있어 묻고 들어보니 큰 차이가 있고, 범한 것이 또한 많았습니
다. 곧바로 죽여서 뿌리를 제거[除根]함이 마땅하오나 군관(軍官)에 걸려
있는바 회답을 기다려 거행하려고 공사(供辭)를 받은 것을 덧붙여서 보고
하며, 대흥읍에서 죽인 동도의 성명도 책을 만들어 보고하겠습니다.
제(題): 소위 저 비류들의 ‘설포(設包)’라는 것은 그 속내를 살펴보면,
괴수와 위협에 따른 자 사이에 <그 죄과에는> 차이가 없겠지만 귀화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당장에 거역할 형상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들을
문초한 것을 모두 불살라서는 안 될 것이다. 현지에 가서 그 문초한 내
용을 들어보니 어찌 용서할 수가 있겠는가? 처음 군관으로 임명할 적에
그가 사교(邪敎)에 물든 것을 자세히 알 수 없어 그로 하여금 백성을 안
정시키게 하려 한 것이다. 임명장[帖紙]은 본진으로부터 즉시 회수할 것
이다. 만일 당장에 범법한 일이 없으면 이는 조정의 관인이니 해당 부대
에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고 답변의 제사(題辭)를 기다려 거행해야 하
니 아직 진중(陣中)에서 명령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거괴(巨魁) 중에 선봉진 별군관은 곧 전 현령 오정선(吳鼎善)이다. 그
뒤에 일본군 부대로부터 압송하여 갔는데 얼마 안 가서 석방되고 을미년
(1895) 2월에 금구(金溝)의 수령으로 제수되었다.
28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1월 15일 순무영에 보고한 일 [同日 報巡撫營]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를 접한 내


용에, “대저 유구(維鳩)의 각 동(洞)에 당초 포(包)를 설치하였다가 추후에
귀화한 것은 최근 각 읍 각 동의 상투적인 일이다. 지금 장위영이 본동에
들어와 주둔하던 날에 체포한 비류(匪類)의 문초가 이처럼 엄중하고 그 임
무를 맡은 자는 그들을 징계하는데 빈틈이 없었습니다. 비류들이 도처에서
난동을 부림에 어찌 심하고 심하지 않은 구별이 있겠습니까? 그 난을 일
으킨 형세를 살펴보면 대략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귀화한 이후에 이를 참
작하여 구별한다면, 이후에 다시 징계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사교에 물들어 참여한 오정선이 조정의 신료이니 마땅히 그 법을
배로 엄중하게 해야 한다하지만 지금 귀화하였다면 다만 난류(亂類)의
공초로서 조정의 신료를 구속하는 것은 너무 <형평에> 차질이 있기 때
문에 우선 진중에 대령시키고 회답의 제사(題辭)를 기다려 거행할 뜻으
로 제사를 보내니 공손히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공초한 문서를 어찌하여 올리지 못하는지 곧 속히 보고하여
처결하게 할 것이며 소위 별군관 한 사람의 성명이 또한 보고해 오지 않
으니 심히 모호하다. 아울러 오정선과 함께 잡아가둔 뒤에 보고하라.

11월 21일 관보 [十一月二十一日 官報]

순무영이 아뢰기를, “선봉장이 15일에 보고한 내용을 보니 전투에 임


한 영관 이두황의 보고에 11일 유구에 도착하여 비류 천여 명을 체포하
고 괴수 최한규(崔漢圭) 등 27놈을 죽였으며 나머지 잔당은 ‘위협에 따
른 자는 치죄하지 말라’는 지시를 생각하여 엄하게 징계하고서 석방하였
습니다. 또 대흥읍에서 체포한 비류 19놈도 즉시 죽였습니다”라고 하였
습니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81
11월 16일 [十六日]

소모관(召募官) 천안군수가 보고하는 일입니다. 본 감영의 후록조열(後


錄條列)내의 벼슬아치[紳士] 중에 만일 좋은 꾀나 생각을 내어 비도를
섬멸하는 계책을 올리면 인재에 따라 등용하고 예외를 두어 권장하여 시
상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번 본군(本郡)의 비류가 날뛰던 날에 있어 민
심이 흉흉하고 사기가 저하되었는데 이때를 당하여 몇몇 현량한 사람이
일어난 것이 그 효과가 컸습니다. 전 도사(前 都事) 홍유주(洪有周)는 연
전(年前) 성균관 시험에서 사예(司藝)로 선출되었는데 경술과 문학이 뛰
어나고 청백하며 조심성이 있습니다. 본래 호우(湖右, 충청 우도)의 중망
을 지고 이미 조정에서 취한 바 있었습니다. 진사 박영민(朴永民)은 문
학이 일찍이 저명하였고 재주와 총기를 겸비하여 사우(士友)들의 칭송을
많이 듣고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일에도 관통하였습니다.
유학 박제면(朴齊冕)・이주혁(李周爀)은 국량이 깊고 크며 재주와 지식
을 떨쳤습니다. 이 4사람은 함께 본군에 살면서 서로 권면하고 기강을
심어 난당(亂黨)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향리(鄕里)가 모두 이들
을 의지하고 바라보았으니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어 한 고을의 모
범이 되었습니다. 지금 깃발을 흔들며 서로 통하여 앞장섬에 은혜와 위
엄이 떨쳐 사도(邪徒)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민심은 사방으로 흩어
졌습니다. 민심을 고무시키고 바로잡는 데는 준수한 인걸을 나오게 하고
사림(士林)을 권면하는 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명망 있는 사람들
은 발탁하고 권장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는 바 삼가 감영의 감칙(甘
飭)에 의하여 이에 사실대로 초하여 보고하니 사또께서 참작하여 특별히
임금에게 아뢰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제(題): 마땅히 두루 알리겠거니와 일읍의 표준이 될 뿐 아니라 족히
이웃 고을에도 모범이 되니 극히 공경하여 권장해야 한다.
28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1월 16일 순무영에 보고함 [同日 報巡撫營]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소모관 천안 군수 김병숙(金炳塾)의 보


고한 내용에 이르기를, “이번 소요한 때를 당하여 4사람이 유독 의리를
지키고 우뚝하게 흔들리지 않아 온 경내로 하여금 본받게 하였으니 실로
사림의 표준이 됩니다. 삼가 해당 읍 수령의 청원에 의하여 특별히 발탁
하여 그들로 하여금 민심을 고무시킨다면 여론에 합당하오니 마땅히 의
정부에 보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마땅히 의정부에 보고할 것이다.

11월 17일 안성 군수 홍운섭과 서산 군수 성하영에게 전령함 [十一


月十七日 傳令 安城郡守洪運燮 瑞山郡守成夏永]

순무영에 도착한 전령에 의하면 영관 홍운섭이 거느린 군사는 아울러


서산 군수 성하영에게 이동하여 소속시킨 뒤에 해당 영관은 곧 본관으로
복귀하는 뜻으로 두 진장(陣將)에게 알려 지시하라.

11월 17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壯衛領官李


斗璜]

주력 부대의 군사가 노성(魯城) 읍내에 주둔하면서 분주하게 하는 일


이 많다고 하니 철수하여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본 현의 현감과
함께 방법을 상의하여 읍저(邑底)나 논산 중에 마땅한 대로 주둔하여 지
휘를 기다리도록 하라. 논산은 본래 강가에 즐비하게 모인 마을로 근래
적의 소굴이 되어 무뢰배들이 모두 그 무리에 들어가고 선량한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안정을 찾지 못하여 온 마을이 텅 비고 가재도구는 모두
버렸다고 한다. 이를 단속하는 군사들은 물건을 탈취하는 습관을 철저히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83
금하고 유리(流離)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각각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
고 군사의 식사하는 일과 주둔하는 상황을 차례로 보고하라.

11월 17일 통위영 영관 장용진에게 전령함 [同日 傳令 統衛領官


張容鎭]

난리를 겪은 황폐한 마을에 여러 날 주둔하고 있으니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유산(流散)한 백성들을 불러 모아 대략 편안하게 살도록 하고
곧 돌아와 본영에 주둔하라.

11월 25일 관보 [十一月二十五日 官報]

순무영 초기(草記)에 “선봉장 보고를 보니 별군관 최일환(崔日煥)이 적


정을 정탐하고 섬멸할 때 직산의 괴수 황성도(黃聖道) 등 4명과 부괴수
김춘일(金春日) 등 1명과 진천의 괴수 박명숙(朴明叔) 등 2명을 효수(梟
首)하고 목천의 괴수 최창규(崔昌奎) 등 2명과 공주 괴수 지명석(池命石)
등 아울러 2명을 잡아 죽였으며, 공주 달동(達洞)의 접주(接主) 장준환
(張俊煥)이 몰래 포(包)를 설치하려 함에 전 오위장 이상만(李象萬)이 마
을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체포하여 왔기 때문에 곧 효수한 뒤에 그를 격
려하고 권장할 것을 생각하여 상을 주고 노획한 물자는 책을 만들어 올
려 보낼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초기에, “선봉장이 금월 18일에 보고한 것을 보니, 통위영 영관 장
용진 보고에 금월 15일에 장위영과 일본 군사가 함께 세 갈래의 길로 나
누어 노성(魯城)의 봉수봉 아래로 진군하여 동비들을 사살하고 논산의 대
촌과 고봉(高峰) 두 곳으로 진격하여 적을 사살함이 많았고 적진을 탈취하
여 점거함에 남은 적이 호남의 경내로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장위영 영관
28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이두황의 보고한 내용에 노성으로 진군하여 갑자기 은진 황화대(黃華臺)에


진을 친 적을 만나 곧 대관 윤희영 등을 파견하여 의병(疑兵)12)을 만들어
나누고 영관이 의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적진에 달려들어 공격 사살한 것
이 300명이나 됩니다. 밤에 정산(定山)에 도달하여 동비 10명을 체포하여
죽였으며, 노획한 물자는 책자를 만들어 올려 보낼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공주 달동의 접주 장준환은 예전부터


행패가 심하였고 한 읍의 괴수로 지난 25일 호남의 비류가 패하여 돌아
간 뒤에도 감히 포(包)를 만들려고 하여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듣기에 통분하고 놀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월 초 1일에 병사와 공주
진영의 포교(捕校)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분통하게도 저 장준환이란 놈이
기미를 알고 도피하여 곧바로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집을 수색하
였더니 깃발을 만들고 모아 놓은 무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당장에 찾
아낸 물건은 총 3자루・환도 1자루・창 13개와 나머지는 설포(設包)하고자
한 각각의 자취들이었습니다. 금월 초 3일에 공주에 사는 전 오위장 본
진의 별군관 이상만이 원당(元塘)・당평(丹坪)의 두 마을 장정들을 거느
리고 장준환의 뒤를 쫓아 체포하여 본 진영의 앞에 왔습니다.
이번 이상만이 의분을 내고 힘을 다해 괴수를 체포한 일은 대단히 가
상하기 때문에 우선 본진에서 엽전 50냥으로 시상하고 또 공주 감영으로
부터 별도로 200냥을 주고 두 마을의 동포(洞布)13)를 탕감하여 권장의

12) 의병(疑兵): 적이 식별하기 어렵게 적의 복장을 하고 적에 접근하여 혼란시키고 싸우


는 병사를 말한다.
13) 동포(洞布): 마을에서 바치는 군포를 말한다. 19세기에 들어 장정 개인이 내는 군포
를 마을 단위로 내게 하여 가난한 장정의 부담을 덜게 하였다. 마을에서는 고루 가
담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시기를 맞추어 바쳤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85
뜻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 오위장 이상만은 별도로 권장하는 일이 없
어서는 안되므로 특별히 처분해야 하며 장준환은 잠시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본진 앞에서 효수하여 대중의 원통함을 풀어주었습니다.
또 초기에 선봉장이 금월 18일 통위영 영관 장용진이 올린 보고를 보
니 금월 15일에 장위영이 일본 병사와 더불어 세 갈래의 길로 노성의
봉수봉 아래로 진군하여 비류를 사살하고 논산의 대촌(大村)과 고봉(高
峰) 두 곳으로 진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적의 진지를 탈취하니 남은
적이 호남의 경내로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장위영 영관 이두황이 동시에
보고한 내용에 노성에 진군하였다가 갑자기 은진의 황화대에 주둔한 적
을 만나 곧 대관 윤희영(尹喜永) 등을 파견하여 나누어 의병(疑兵)을 만
들고 영관이 그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적진을 공격하여 사살한 것이 300
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밤에 정산에 도착하여 비류 10명을 잡아 죽였으며 노획한 물자는 책
자를 만들어 올려 보낼 것입니다.

원보장 [原報狀]

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17일에 도착한 통위영 영관 장용진의


보고한 내용에 금월 14일 진시 경에 선봉의 대 부대가 동시에 출발하여
참모관 권종석(權鍾奭), 군관 유석용(柳錫用)・이지효・황범수・이주서 등이
유시 경에 용수막의 30리 쯤 되는 곳에 도착하여 숙박하고 선봉진은 공
주로 돌아와 주둔한 뒤에 일본군 대위가 거느리는 부대와 더불어 각각
배치할 것을 정하고 해시 경에 일본군 대위의 지시에 의하여 참모관 권
종석・별군관 유석용 등을 이인에 보내어 장위영의 부대에 머물렀다가 곧
바로 노성읍의 서쪽 길로 들어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일본군 대위의 부대는 노성의 봉수봉 뒷길을 따르게 하고 본진은 경천
길을 따라 곧바로 노성의 동쪽 길로 들어가 모두 세 곳의 길을 따라 자시
28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경에 출발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상지(相池)로 간 좌 3소대의 군사도 일


제히 도착하기를 기다려 때에 맞춰 출발하여 곧바로 노성의 동쪽 길로부
터 적진이 있는 곳에 달려 들어가니 날이 샐 무렵에 도착하였습니다.
소위 둔취해 있던 적은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하여 매우 의심스러웠습
니다. 그래서 총을 쏘아 서로 신호로 응하니 봉수봉의 뒤에 있는 일본 군
사와 서쪽 길에 진군한 장위진이 일제히 신호에 응하여 양쪽 길에서 달
려옴에 그 형세가 산악과 같은 바 일제히 노성읍으로 진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적을 쫓아 체포하여 각각 그가 잡은 것들을 모조리 사살하였습니
다. 비류가 논산 등지로 도주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길을 나누어
추적하니, 과연 대촌(大村)의 뒤 원봉(圓峰) 위에서 깃발을 이어 세우고
간간히 포를 쏘아 몹시 놀라웠기 때문에, 군사들을 독촉하여 대관・참모・
별군관 등과 함께 힘을 다하여 쫓아 올라갔습니다. 약간의 진을 치고 모
여 있는 적이 모두 도주하기 때문에 그 곳을 탈취 점거하여 적의 깃발을
뽑아버린 뒤에 기를 흔들어 서로 응하여 관군의 점거를 알게 하였습니다.
또 봉수봉과 고봉을 바라보니 진을 치고 모인 무리가 있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몇 리쯤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승승장구하면서 총을 쏘고 일
본 병사와 함께 일제히 진격하면서 진세를 유지하고 오르면서 쟁탈 점거
할 때에 장위영 부대는 또 한쪽에서 진군하여 와서 힘을 합하여 토벌하
면서 모두를 쫓아 보내고 한편으로는 총을 쏘면서 쫓아가 죽인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히 많았습니다. 10리쯤 되는 곳에 이르자 해
가 저물어 각 부대는 논산 등지로 돌아가 주둔하였습니다.
몇 백의 여염집은 모두 비어 있어 걱정이 되고 참혹하였으며, 밤이 지
난 뒤 그 이튿날 16일에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적들의 자취는 전연
볼 수 없었습니다. 전해 들으니 그들은 호남의 경내로 도주하였다고 합
니다. 때문에 각 부대는 노성읍에 돌아와 주둔하려고 강촌(江村)에 도착
하였는데 화약을 제조한 곳이 있고, 또 접(接)을 설치한 장소가 있다는
것을 들었기에 참모관・별군관 등이 병사 몇 사람을 거느리고 곧바로 그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87
집에 들어가 화약을 만드는 기구를 모두 깨버리고 남은 깃발과 짚신, 잡
물 등을 부숴버렸습니다.
일본군 대위의 지휘에 따라 경천점의 앞길에 주둔하여 경비하였으며
각 부대의 장졸은 한명도 부상한 자가 없고 노획한 군수 물자와 칼을 가
지고 적진에 먼저 오른 장졸의 성명은 차례로 책자를 만들어 보고할 것
입니다.
다음에 도착한 장위영 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전령으로 인하여
정산에서부터 출발하여 금월 14일 이인에 주둔하여 숙박한다는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당일 해시 경에 선봉진 참모관이 와서 일본군 장
교의 지시를 전하되 곧바로 용수막에서 군사를 합치라고 하기에, 당일
자시 경에 행군하여 용수막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를 접견하니 앞으로 노성의 적과
싸울 것인데, 길은 3갈래로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본 부대는 서쪽의 길
을 따라 날이 밝기 전에 전투할 곳에 이르러 서로 접응하자고 하였기 때
문에, 듣는 즉시 행군하여 노성의 주산 서남쪽의 능선에 도착하니 날은
아직 밝지 않았습니다. 암석의 송림 숲 사이에 군사를 잠복시키고 적이
모인 곳을 바라보니 먼 곳에 불빛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노성읍인 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요하여 아무런 소리가 없어 몰래 잠복
하고 밝기를 기다렸으나 1시간쯤 지나도 날이 밝지 않았습니다. 불빛이
먼저 주산에서 솟아오름에 우리 군사들이 먼저 점거한 줄을 짐작하고 그
대로 빨리 걸어 전진하여 노성읍에 향하니 주민들이 전하기를 적은 어제
이미 도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관 이규식(李圭植)을 보내어 일본 병사의 약속에 따라 노성읍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하여 논산의 10리 쯤 되는 초동(轈洞)에 이르러 식
사를 하고 물을 마시며 잠시 머물렀는데 이미 일본군사가 통위영 병사와
함께 논산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갔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듣는 즉시
장비를 갖추고 뒤를 따라 겨우 몇 리를 행하니 <어떤 병사가> 말을 급
28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히 몰면서 와 보고하기를 논산에는 적이 들에 가득히 있으면서 관군을


막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관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사를 재촉하여 전진하였습니다. 몇
리를 못 가서 전투 현장에서 총소리가 들판을 울렸으며 적병의 깃발이
해를 가릴 정도였습니다. 우리 부대의 군사가 총소리를 듣고 깃발을 보
며 사기가 솟아 앞에 달리던 여러 장관(將官)이 부대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뒤를 따라 지원하였습니다. 일본 병사와 통위영 병사가 이미 소
토산(小土山)14)의 적진을 탈환하고 적의 깃발을 휘두르면서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에 우리 부대의 병사들도 일제히 소리를 내어 호응하였으
되 적진은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무리를 정돈하여 몇 보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후퇴하여 은진(恩津)의 황화대를 거점으로 삼았으므로 장차 다시
돌진할 염려가 있었습니다.
일본 병사와 통위영 병사들은 먼저 적진을 격파하여 피로할 것을 헤아
리고 우리 부대가 앞의 언덕을 점거하여 적정을 정찰하니 적이 황화대를
지키고 있었는데 형세는 오뚝하게 홀로 큰 들 가운데에 서 있고 사방의
능선이 조금씩 외워 있고 가운데의 봉우리는 평평하고 사방에서 외운 산
은 천연적으로 성곽이 되어 있었습니다.
망원경[遠照鏡]15)으로 살펴보니 주위가 심히 넓었으며, 적병이 사방에
서서 각양의 총을 번갈아 발사하니 그 소리가 각각 달랐습니다. 천보총
(千步銃) 소리는 크고 탄환은 멀리 가며, 후문총(後門銃) 소리는 약하고
탄환은 빨리 날며, 화승총(火繩銃)16) 소리는 빈 소리를 내며 탄환은 가
까이 떨어지는데, 뒤섞어 마구잡이로 발사하여 탄환이 멀리 날아가거나
가깝게 날아가서 마치 곡식이 흩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14) 소토산(小土山): 논산에 있는 작은 산으로, 은진(오늘날 논산시)의 황화대가 있는 토


성과 함께 평야에 솟은 산이다.
15) 망원경[遠照鏡]: 당시 일본군과 관군은 적진을 관찰할 때 망원경을 이용하였다. 그
때에는 원조경이라 불렀다.
16) 화승총(火繩銃): 화승으로 불을 당겨 발사하는 구식 총으로, 화승은 화약심지를 말한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89
충분의 용기가 격동하였기 때문에 날랜 적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대
관 윤희영・김진풍(金振豊), 별군관 윤지영(尹摯榮)・이겸래(李謙來)를 파
견하여 2개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의 서쪽 넓은 들 가운데를 따라 그
서남쪽을 포위하게 하고, 참령관 원세록에게 소대원의 반을 주었으며, 뒤
쪽에 의병(疑兵)을 만들어 대관 박영호(朴永祜)・이규식(李圭植), 별군관
김광수(金光洙)와 더불어 몸소 3개 반의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의 동북
쪽 작은 능선을 따라 큰 고함을 내면서 곧바로 올라가 적의 서쪽을 격파
하여 포위하니 적은 남쪽의 능선을 향하여 도주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부대의 장졸을 지휘하여 고함을 치면서 쫓아가 그 뒤를 압박하여 공격하
니 남은 적 천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 새벽하늘의 성근 별 같고 추풍의
낙엽과도 같았습니다.
길에 버린 총과 창이며 밭가에 있는 시체는 눈에 걸리고 발에 차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서산에 해는 걸리고 바닷바람은 점점 일어남
에 지는 해를 돌리지 못함을 탄식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병사를 수습하여
드디어 황화대에 주둔하면서 마을의 여염집을 찾아 식사를 하게하고 풍
설을 무릅쓰고 밤을 새웠습니다. 이날의 전투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제반
일을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와 함께 하면서 보니 모리오
가 마음을 쓰면서 힘을 내는 것이 실로 흠탄(欽歎)할만 하고, 우리 군사
가 몸을 버리고 명령을 따르는 것도 가상하였습니다.
이튿날 모리오(森尾)의 지시에 따라 노성읍으로 회군하여 주둔하게 하
였으며 회군하던 길에 은진 묵동(墨洞)이 화약을 만드는 곳이란 것을 탐
문하여 들었기 때문에 참령관 원세록을 시켜 그 마을에 들어가 체포하도
록 하였는데, 사살한 자가 7명이고 나머지는 타일러 석방하였으며 화약
을 만드는 기구는 모두 부숴버렸습니다. 어느 지방에 머물러야 할는지
다시 명령을 기다려 거행할 계획입니다.
접전할 때 적에게 부상을 입은 병사 김치순(金致順)은 보부상(褓負商)
에게 업혀서 공주 판관(判官)에게 보내어 치료받게 하고 식사하도록 한
29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연유를 보고합니다. 이번 노성과 논산 두 곳의 승리는 비록 괴수를 섬멸


하여 다 죽이지는 못 하였으나 사살한 자와 익사한 자가 대략 수 삼백
명이 넘었으며 이미 나무로 새긴 인장(印章)을 뺏고 또 저들의 이른바
괴수의 깃발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비록 흩어졌다하나 또 호남
등지에서 날뛰는 것은 극히 통분하고 한탄할 일입니다.
힘을 내어 충의에 분발하여 명령을 받고 적진에 먼저 오른 각 부대의
장졸은 포상하고 권면하는 합당한 법이 있으니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겠
습니다. 통위영에서 뺏은 군기의 물자를 책자로 만들 것과 장위영의 죄
인성책(罪人成冊)을 아울러 잘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지금 충청도 왼편에는 아직 동비가 모여 진을 치고 소요스러운 보고가
없으니 점점 깨끗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내포(內浦)의 임천(林川)・한산
(韓山) 등의 읍과 서산・태안 두 읍은 아직 섬멸하여 안정을 찾지 못하였
습니다. 그러나 이미 경리청의 두 소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급
히 차례로 보고할 계획이라는 연유의 일입니다.

12월 28일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과 교도대장 이진호에게 전령함


[十二月二十八日 傳令 壯衛副領官 李斗璜, 敎導隊長 李軫鎬]

본 부대는 지금 금구(金溝) 등 읍에 전진하는 바 각 부대를 거느리고


전주에 머물러 주둔하여 출발 명령을 기다릴 것이며, 또 일본 군대의 지
휘에 의하여 움직일 것.

11월 26일 관보 [十一月二十六日 官報]

순무영의 초기(草記)에, “동비가 모이고 흩어짐이 일정하지 않으니 선


봉장 이규태를 좌선봉장에 임명하고, 장위영 영관 이두황은 여러 번 전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91
공(戰功)이 있으니 우선봉장에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적
을 섬멸하고 체포함이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하라”는 왕명
을 받들었다.

12월 초 9일 순무영에게 전령함 [十二月初九日 巡撫營傳令]

11월 25일에 아뢰기를, “적도(賊徒)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선봉장 이규태를 좌선봉장으로 임명하고 장위영 영관 이두황은
여러 번 전투의 공이 있으므로 우선봉장으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길
을 나누어 적을 섬멸하고 포획케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니 전교하기
를, “윤허 한다”고 하여 이에 전령한다. 도착하면 즉시 통위영・경리청・교
도중대(敎導中隊) 3개 부대의 장관 이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과 같이
인솔하여 우선봉의 부대와 더불어 충분히 상의하고 길을 나누어 기한을
정하여 적을 섬멸하고 포획할 것이다. 좌선봉의 수기(手旗) 하나를 새로
만들어 내려 보내니 받으면 곧바로 보고하라.

장성의 각 면에 전령한다 [傳令 長城各面]

지금 읍의 경내에 도착하여 여론을 탐문해보니 혹 강압에 못 이겨 동학


[道]에 가담한 자도 있고, 혹 즐겨 따르면서 행패를 부린 자도 있으니 그
죄를 가지고 벌을 주면 장차 씨가 남을 수 없다. 설혹 전날에 현혹되었더
라도 지금 귀화하면 조정의 적자(赤子) 아님이 없을 것이니 어찌 사람마다
다 죽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돌아온 뒤에라야
의구심이나 망설이는 염려가 없을 것이니, 이에 명백하게 전령을 한다.
이제부터 마음과 얼굴을 바꾸어 각각 생업에 종사하라. 설사 죄를 범
함이 있었더라도 행동을 고치면 참작하여 용서할 것이요, 혹 행패를 부
리고 방종하게 하는 자 있으면 각각 그 마을로부터 결박하여 잡아 올려
29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서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혹 사심에 따라 숨겨두면 이는 한 경내의 좀


벌레니 각각 신중하게 생각하여 낱낱이 적발하여 한 푼이라도 허술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경기・호서・호남의 각읍에 보내는 관문 [發關京畿湖西湖南各邑]

양호순무선봉진에서 고찰한 일이다. 주력 부대가 수원부에 주둔하였으


니 곧 은혜와 위엄(威嚴)으로 비류들을 안정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본
읍의 경내에 이런 무리의 형적이 근래에 어떠한지 알 수 없다. 만약 깨
우쳐 귀화하게 하더라도 한결같이 방종하거든 본 읍으로부터 특별히 괴
수를 멸하거나 체포하여 부대에 바치고 위협에 가담한 사람은 다스리지
말고 본 고장에서 편안히 살게 하라. 만일 읍의 힘으로 진압하기 어려워
곧 급히 보고하면 군사를 나누어 가서 토벌하게 할 것이다.
여기서 보내는 순무영과 선봉진의 방시문(榜示文) 2건은 한문과 언
문으로 번역하여 써서 일체를 깨우친 뒤에 거리에 부쳐 한 사람이라
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게 할 것이다. 이는 막중한 군무(軍務)에 관
계되니 별도로 군법이 있다. 특별히 두렵게 생각해서 거행할 일이다.
10월 14일

수원 유수에 보내는 문서 [移文 水原留守)

양호순무선봉진에서 고찰한 일입니다. 본진의 별군관 최일환(崔日煥)은


체포하여 중영(中營)에서 직산(稷山)으로 옮겨 구금할 것이며 마산에 사
는 비류 황성도(黃聖道)는 기호지방의 거괴이므로 잠시라도 용서할 수
없으니 귀영[수원부]에서 즉시 효수하여 사람들을 깨우친 뒤에 계문(啓
聞)하십시오. 10월 21일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93
충청도 운량관(運糧官) 신창현감 최재학(崔在鶴)
경기 동(仝) 양성현감 남계술(南啓述)
호남 동(仝) 익산군수 정원성(鄭元成)

11월 29일 관보 [十一月二十九日 官報]

순무영 초기(草記)에 “선봉장 이규태의 보고를 보니 11월 초 5일 교도


소(敎導所) 영관 이진호(李軫鎬)의 보고한 내용에 ‘대관 이겸제(李謙濟)가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함께 청산(靑山)으로부터 옥천 등지로 향하
는데 수만의 동비를 보는 대로 사살하여 사살된 자가 흡사 300명이나 되
고 생포한 50명 중에 제일 우두머리 서도필(徐道弼) 등 9명은 곧 사살하
였으며 접사(接司) 이만영(李晩榮) 등 3놈은 본진에 가두고 38명은 위협
을 받아 가담한 자이기에 깨우쳐 귀화시키고 탈취한 군수물자는 읍이 허
’ 보고하였다고
술한 점이 많아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모두 부숴 녹이라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12월 초 3일 전라 병사에게 보내는 문서 [十二月初三日 移文 全羅兵使)

순무선봉진에서 살피는 일입니다. 지난 달 30일에 본 부대가 천원역


(川原驛)에 주둔하였는데 전적(全賊, 전봉준)이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피하여 숨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관과 관군을 동원하여 쫓아가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 전적이 이미 기미를 알고 도
주했으며 다만 그의 별장(別將)과 진속(鎭屬)만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사실을 물으니 전적이 과연 전날 밤에 와서 자고는 경군(京軍)이 행진하
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식사를 한 후 곧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소
위 별장이라고 하는 자는 당초 행진소(行陣所)에 몰래 통보도 하지 않고
294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적과 함께 먹고 자고 성문이 있는 곳까지 가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일


은 그를 당장에 잡아 와서 적을 엄호하고 또 불고지율(不告之律)17)로 시
행해야 하지만 참작할 일이 있어 아직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또 듣건대 백양사(白羊寺)로 도주하여 숨었다고 전하는 자가 있기 때
문에 군관(軍官)과 경병(京兵), 그리고 일본군 병사를 파견하였습니다.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에 “전봉준[此賊]이 그믐날 이 절에 피하여 있다가
초 1일 오전에 입암산성에 있는 어느 놈의 통지를 듣고는 점심을 먹지
않고 곧바로 담양 등지로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소위 산성 별장은 비록 진장(鎭將)이지만 직책이 방어하는 데 있거늘
역적놈을 숨겨 두고 처음부터 보고하지 않았으며, 또한 진속(鎭屬)이나
진민(鎭民)을 단속하지도 않아 짜여진 기밀을 누설시키는데 이르렀으니
전후를 헤아려 보면 죄가 군율에 합당합니다.
본진(本陣)은 아직 정해진 곳이 없어 그를 압송하여 조사하지 못하고,
또한 신중히 판단해야 할 것이기에 급히 결단하지 못하고 이에 공문을
보냅니다. 귀영[전라병영]에서 그 별장을 체포하여 엄하게 그 사유를 조
사한 뒤에 즉시 공문에 답하고 조처해야 할 것입니다. 또 사리로 말하면
이미 주력 부대가 경내를 진압한 줄을 알면서도 진수(鎭守)의 책임자가
되어 처음부터 와서 나타나지도 않았으니 하나하나 통탄하고 놀랄 일입
니다. 끝까지 조사해 주십시오.

12월 초 5일 관보 [十二月初五日 官報]

순무영 초기(草記)에 “선봉장이 보고한 것을 보니 교도소(敎導所) 영관


의 보고한 내용에 지난 12월 25일에 1대의 병력과 일본 군사 1대를 거느

17) 불고지율(不告之律): 역모 등 주요한 범죄사실을 알고도 관에 알리지 않으면 중한 범


죄로 다스리는 형율을 말한다. 예외로 아들이 아버지, 종이 상전을 고발하지 않아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95
리고 금구(金溝)의 원평(院坪)에서 적 수만 명을 만났는데, 대관 최영학
(崔永學)이 칼을 빼들고 앞장서 적 37명을 죽이고 회룡총(回龍銃) 10자
루, 조총 60자루, 납탄 7섬, 화약 5궤짝, 포 10좌, 도창(刀槍) 200자루,
쌀 500석, 전(錢) 3,000냥, 목(木) 10동(同), 소 2쌍, 말 11필, 쇠가죽 10
장, 호피(虎皮) 1령(領), 문서 2궤짝 등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일본진에 넘겼으며, 아군과 일본 병사는 한 사람의 부상자 없이 어두워
지자 머물러 잤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주 공형의 문서[文狀]에, “적의 무리가 성을 포위하였기 때문에 28일
선봉이 통위영 병사와 일본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본장[本狀]

좌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22일 나주의 공형이 보낸 문서에, 본


읍이 저들 무리 수만 명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하여 긴박함이 조석
간에 있다고 위급함을 보고한바, 통위영의 2개 소대를 동원하고 일본 병
사의 부대에까지 전하여 일본 병사 100여 명과 함께 선봉진에서 거느리
고, 당일 진시 경에 금구 등지를 출발하였습니다.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
과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는 각각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부에 주둔하
여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또 일본 부대의 지휘를 들고 출동하라는
뜻을 지시하였으므로 이 연유를 보고합니다.

12월 초 5일 호남 각 읍에 감결을 보냄 [初五日 甘結 湖南各邑]

비류들이 지금은 이미 흩어져 하나도 진을 치고 모인 곳이 없으나, 거괴


는 반드시 앞으로 시골 마을에 숨어 있을 것이다. 특별히 각 면과 마을
296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및 바닷가 등에 흩어져 도주해 숨어 있는 자는 한결같게 모두 체포해야


할 것이다. 이름이 알려져 있는 거괴와 각처에서 행패를 부린 접주(接主)
는 반드시 성명을 바꾸었을 것이다. 비록 위협에 가담하여 따른 자라도 특
별히 엄하게 사실을 조사하여 실정을 얻도록 하고 엄하게 가둔 후 보고할
것이며 감결(甘結)이 도착하는 일시와 거행한 상태를 빨리 보고하라.

12월 초 7일 [初七日]

호남소모관이 보고한 일입니다. 동비(東匪) 중에 고부(古阜)에 사는 전


봉준(全琫準)은 본래 동도(東徒) 중에 제일 먼저 선동한 거괴입니다. 많
은 죄상을 낱낱이 들기는 어려우나 대중을 속여 군사를 만들고 관군에
항거하여 주현(州縣)을 타파하고 창고를 불사르며 마을을 겁탈하고 무기
고를 탈취하여 양호(兩湖) 천리(千里) 간에 오래도록 사람의 자취[人烟]
가 끊어지게 한 것은 모두 이놈의 소행입니다.
옛날 홍산(鴻山)의 역적 이몽학(李夢鶴)18)은 6곳의 성곽을 함락하였어
도 오히려 패역(悖逆)이라 일렀는데, 하물며 60여 성을 함락하고 몇 만
명의 백성을 죽였으며 2∼3명의 읍재(邑宰)를 살해한 것도 이놈[전봉준]
이 한 짓입니다. 그 죄상을 따져보면 가히 한나라의 황건적(黃巾賊)에
비교되며 오히려 명나라의 유적(流賊)19)보다 더한 놈이니 조금도 늦추지
말고 그를 섬멸하고 죽여야 합니다.
다행히도 하늘이 길을 가리켜주어 금월 초 2일 밤에 저놈은 김개남(金

18) 이몽학(李夢鶴): 임진왜란 시기 서얼출신인 이몽학은 장정을 모으고 부여 임천사의


승려를 규합하여 승속군(僧俗軍) 7백여 명을 이끌고 충청도 서쪽을 석권한 끝에 홍
주전투에서 패전하였다.
19)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마적 고영상((高迎祥)의 비장이
었는데 영상이 죽자 추대되어 틈왕(闖王)이라 칭하고 서안에 머물다가 뒤에 북경으
로 들어와 자금성에 들어가니 숭정제는 목을 매고 죽었다. 오삼계(吳三桂)가 산해관
에서 들어오자 서쪽으로 도주하여 구궁산(九宮山)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97
介男, 혹은 開南)과 서로 만나려고 몰래 순창의 피노리(避老里)를 지나는
데 그 마을의 선비 한신현(韓信賢)이 분발해 의거를 하여 김영철(金永
徹)・정창욱(丁昌昱) 2사람과 함께 몰래 마을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여러
가지로 주선하여 그를 따르는 3놈과 함께 일시에 생포하였습니다. 이른
바 함정을 파고 맹호(猛虎)를 유인한 것이요 그물을 치고 맹금(猛禽)을
기다린 것이니 어찌 성덕의 미친 바가 아님이 없다고 하겠으며, 그리고
삼민(三民)이 분발하여 의거한 일은 어찌 가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권장하는 방법으로 우선 본소(本所)에서 상금 1,000냥을 주려합
니다. 죄인 전봉준은 격식을 갖추어 본도 순영[전라감영]에 압송20)하려 하
였습니다. 이때에 일본군 주력부대가 읍에 들어와 말하기를, “우리가 남하
한 것은 오로지 이 한 놈 때문이니 서로 지키면서 경사(京司)로 압송하여
추국함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끌고 가려 하였는데 막지 못하고 부득이 죄
인 전봉준을 일본인에게 내 준 것으로 그 연유를 보고하십시오.

순창군에 감결을 보냄 [甘結 淳昌郡]

지금 본군[순창군] 소모관의 보고를 보니 금월 초 2일에 본군 피노리


에 사는 선비 한신현(韓信賢)・김영철(金永徹)・정창욱(丁昌昱)이 함께 분
발 의거하여 비류들의 거괴 전봉준을 체포하였다고 했다. 곧 마땅히 보
고하고 표창하되, 당장에 격려하고 권장하는 뜻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다. 본진[순무선봉진]에 이미 저축한 것이 없고 다른 읍에 주둔하고 있어
서 형편이 어렵고 궁색하기 때문에 이에 감결을 발송한다. 본군[순창군]
에서는 모모 명목의 공전(公錢) 중에 엽전 1,000냥을 우선 지급하도록
하라. 이후 정부와 본도의 순영[전라감영] 등 2곳에 보고하고, 또 한편으

20) 전봉준이 잡혀서 전라감영으로 끌려갔다가 서울로 압송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


우가 많다. 전봉준은 나주 초토영(招討營)감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끌려와 재판을
받았다.
298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로는 본진에 보고하여 증빙이 되게 할 것이며 거행한 사실을 먼저 보고


하라.

전라도 관찰사에게 관문을 보냄 [移關 全羅道觀察使]

호서의 각 읍은 지금 조금 안정되었으며, 전라도의 연해읍 또한 혹 안


정이 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비류들이 출몰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것은 아직 소탕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근 호서에서 패하여 흩
어진 무리들이 장차 귀도에 흘러 들어가 흩어질 것이라고 하므로, 바닷
가 각 읍을 방어하는 일은 특별히 더 단속해야한다는 뜻을 일체의 각 읍
에 엄히 명하고, 수령이 없는 고을은 즉시 재촉하여 부임하게 하여 각
경내를 안정시켜서 혹 허술하게 하여 적이 다시 방자하게 날뛰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12월 27일 관보 [十二月二十七日 官報]

칙령(勅令): 남비(南匪)를 차례로 평정하였으니 순무영을 해체21)하고,


나가 싸운 장졸은 모두 군무아문(軍務衙門)으로 하여금 절제하게 하고,
남은 잔당은 하루빨리 체포하도록 하라.

21) 공주 논산 원평 태인전투가 끝나고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된 뒤 임시지휘본부인 도순


무영이 해체되어 그 고유의 군통제기구인 군무아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좌선봉장
이규태는 이때부터 현지의 사정과 지휘를 도순무영이 아닌 군무아문에 보고하고 그
지휘통제를 받았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299
12월 19일 해남에 주둔한 통위영 영관과 대관에게 좌우수영이 전
령함 [十九日 傳令 海南出駐統衛領官隊官(左右水營)]

어제 어느 지방에 도착하여 숙박하였으며, 일찍이 해남읍에 <다시 돌


아와> 도착하여 각 부대는 안심하게 지내며 <그동안> 노숙의 폐해를
입은 것은 없는가? 또한 특별한 경보(警報)는 없었는가? 이를 먼저 위문
한다. 비괴(匪魁)가 읍이나 마을에 숨어 있는 자를 조사하여 묻고 또한
마을로부터 체포하여 오는 자가 있는가? 군사들을 단속하여 소요스럽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하고, 주둔한 뒤의 사정과 전날 읍에 있는 각 부대의
소식을 듣는 바에 따라 일체를 보고하라.

12월 21일 통위영 영관 장용진,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에게 전령함


[二十一日 傳令 統衛領官張容鎭 敎導所中隊長李軫鎬]

해남 비류들이 지금 이미 흩어졌으니 본관으로 하여금 감결(甘結)에


의하여 성화같이 각 면이나 촌리(村里)에 사유를 알려 거괴를 잡아 바치
게 한 연후에 한편으로는 백성을 안정시키고 한편으로는 잡아 죽이는 것
이 조정에서 백성을 불쌍히 여겨 몹시 슬퍼하는 뜻을 받드는 것이다. 그
렇거늘 지금 듣건대 군사들이 멋대로 사방의 촌려(村閭)에 흩어져 누구
의 집을 막론하고 죄가 있든 없든 간에 마을마다 약탈하고 집집마다 수
색하여, 비록 선량한 백성이라도 편하게 살지 못하게 하여 온 경내가 비
어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죄를 범한 자들을 찾아내 유배를 보낸다 해도 족히 아까울 것은
없지만, 양민이나 강압에 가담되었다가 귀화한 자를 돌아보면 어찌 애석
하지 않을까? 이것이 어찌 조정의 명령을 받드는 뜻인가? 전령이 도착
되는 즉시 각각의 해당 우두머리를 잡아 엄하게 조사하여 단속할 것이
다. 만약 한결같이 고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읍에 도착해 군법으로 시행
300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하되 결코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잘 생각하고 단속하여 후회함이 없


게 할 것이며, 이를 범한 여러 놈을 우선 지명하여 급히 보고하라.

해남읍에 공고함 [榜示海南邑]

읍 근처에 도착하여 여론을 들으니 몇 놈이 행패를 부린 것으로 인하


여 죄가 있거나 없거나를 물론하고 모두 도주하였으니 10집에 9집이 비
었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 것이 어찌 조정에서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본
뜻이겠는가? <동비의> 거괴로서 행패를 부린 자 이외에 강압에 못 이
겨 가담되었다가 귀화한 자는 곧 선량한 백성이다. 아전이나 백성을 논
할 것 없이 조금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곧바로 생업에 종사하여
편안히 지내도록 하라. 만일 한결같게 머뭇거리거나 회피하다가 뒤따라
체포할 때 잡히면 단연 사형[一律] 으로 시행할 것이니 속히 집으로 돌
아갈 것이요, 머뭇거리다가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12월 12일 군무아문에 보고함 [十二月十二日 報軍務衙門]

좌선봉진에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장성(長城)에서 이동한 사유를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행군하여 40리 지점인 북창참(北倉站)에 도착하여
아무런 탈이 없이 잘 숙박하고 <12월> 초 10일 진시 경에 나주목에 도
착하여 아무런 탈이 없이 숙박하였습니다. 초 7일에 발송하여 초 9일에
도착한 병영의 이문(移文)에, “비류들이 장흥(長興)을 함락하여 <관아로>
들어간 사유를 어제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연이어 전초병이 탐지한 사태
를 보니 비류들이 장흥부사를 포살하고 이어 <관아를> 불질렀으며 총검
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여 시체가 산과 같이 쌓였고, 피가 흘러 방아공이
가 뜰 지경이며 피비린내가 온 성안에 가득합니다. 모든 관아와 인가는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301
모조리 불에 타고 다만 객사(客舍)만 남았습니다.
<비류들은> 초 6일 사시 경에 벽사역(碧沙驛)의 뒤 고개에 이동하여
주둔하고, 미시 경에 다시 장흥과 강진 병영 접계인 사인점(舍人店) 앞들
에 이동하니 병영과의 거리가 10여 리에 불과합니다. <동학농민군의>
흉특한 큰 소리가 낭자하게 전해져 동에서 공격할듯하다가 서쪽을 공격
하여 과연 예측하기가 어려움에 미약한 군사로는 방어할 계책이 없어 위
급한 화가 급박하게 닥쳐오니 어찌 급하게 보고하지 않겠습니까? 장흥부
사가 피살될 적에 관인[印符]이 어느 곳에 떨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공형
도 함께 죽어 일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온 성 안이 텅 비었으니 공문
이 아직 이르지 않은 것도 억지로 책임지우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이런
시각에 저들과 상대할 군사가 없으면 병영이 함락되는 환란은 서서 기다
리게 되는 것이니, 귀 부대에서 특별히 속히 지원하여 한 영(營)을 보전
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도착한 공문 내용에, “저들의 사인점(舍人店) 앞들에 이동하여
주둔한 사유를 갑작스레 이미 이문(移文)으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들은 오늘 사시 경에 강진현22)을 범하여 들어가 인가에 불을 지르고 포
를 쏘아 사살하고 칼로 찔러서 통곡하며 달아난 사정을 보발(步撥)로 빗
발치듯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곧바로 병영을 도륙할 것이니 아직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나, 화가 곧 닥쳐올 것입니다. 다시 급히 이문을 보내
니 귀 군진에서 정병을 재촉해 출발시켜 밤낮이 없이 달려가 구원하여
이 한 영(營)을 보전해 주십시오”하였습니다.
초 8일에 발송하여 초 10일에 도착한 이문 내용에, “비류가 강진현을
함락하고 들어간 사유를 어제 이미 발마(撥馬)로 급히 이문을 보냈거니

22) 잔여 동학농민군은 태인전투와 나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장흥일대에 모여 장흥부 관


아를 점령하고 이어 강진현 관아를 점령하였으며 마지막 강진지역에 있는 전라병영
(현재, 강진군 병영면 소재)을 점령하려 하였다. 잔여 동학농민군들은 전라병영마저
점령한 뒤 관군과 일본군이 밀려오자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였다. 이 전
투는 북상하는 손병희가 지휘한 보은 북실전투와 함께 마지막 항전으로 꼽힌다.
302 2차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와 동비들이 어제 축시 경에 각처에 이동 주둔하여 지금 3갈래의 길로


영을 침범하려 하는데, 장흥부와 강진현을 지키지 못하여 군사들을 모을
길이 없기 때문에 영암군에 명령하여 포군을 징발하도록 하였습니다. 발
마(撥馬)를 보내어 이미 8・9차례나 독촉했는데도 속이고 농간을 부려 곧
바로 보내오지 않으니 방심의 환란이 당장에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 군
수[영암군수]의 하는 바를 헤아려보면 어찌 놀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
까? 바야흐로 장계로 보고하여 처리하려고 하거니와 만약 귀 군진이 지
원하여 접응하지 않으면 성이 무너지는 근심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니,
특별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도착한 강진현감의 보고문에, “금월 초 7일 진시 경에 비류
10,000여 명이 장흥부로부터 내려와서 사면으로 돌입하여 성을 함락하고
인가에 불을 질러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장리(將吏)・별포(別砲)・수
성군과 성에 가득한 백성들이 포에 맞아 사살되고 도륙되어 살아 도망친
자가 거의 없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였으니 삼
가 황공하고 두려움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연달아 일본 진영
에 알렸습니다.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南少四郞)가 명령하여 3갈래로 군사를 출동하였
는데, 대위 이시구로 고세이(石黑光正)는 그의 부하 1개 소대와 2개 분
대, 교도중대 2분대를 거느리고 영암 땅으로 나아가고 제 1중대 1소대와
통위병 30명은 능주(綾州)의 땅으로 나아가고 히라기(白木) 중위는 그의
군사와 교도중대의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장흥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군
사의 수는 모두 일본의 진영에서 거느리기 때문에 확실한 숫자는 보고하
지 못합니다. 선봉진에서 거느리는 남은 부대는 진시 경에 60리를 행군
하여 유시 경에 무안읍에 도착하여 이상 없이 숙박하고 식사를 한 연유
를 알립니다.
제(題): 공문이 도착하였거니와 상황을 계속 보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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