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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계초존안 啓草存案

의정부議政府에서 1894년 7월 21일부터 같은 해 11월 20일 사이에 상계上啓


한 것을 의정부 기록국記錄局이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특정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 상황을 망라하고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청일전쟁에 참여한 청병淸兵이 지나가는 고을에서 수령이 양초우마粮草牛馬
등을 민간에서 징발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 남양부南陽府 민요죄인民擾罪人 정인
식鄭寅植의 처벌문제, 농민군 수천명이 전라우수영 군기와 공전公錢을 빼앗아
간 일, 1894년 7월말에 전주사민全州士民이 연명정상聯名呈狀한 사항 중에서 국
계國計에 관련되는 7개조의 내용, 각지의 민란 상황, 전라감영 군사마軍司馬 송
인회宋寅會와 군관 김성규軍官 金星圭가 농민군의 초유 귀화招諭 歸化에 공이 많으므
로 도내수령道內守令으로 임명할 것을 전라감사 김학진이 건의한 일, 각지 수
령들이 야용공전揶用公錢한 사실, 성주星州에서의 농민군 활동 상황, 각지 수령
이 읍폐민막邑弊民瘼의 시정을 건의한 사실, 경상도 예천군醴泉郡의 농민군 활동
상황, 각지에서 농민군이 군기를 빼앗는 일, 전라도 남원南原중심 일대에서의
농민군 활동상황, 경상도 서남부지역에서의 농민군 활동 상황, 경기도 지평
현砥平縣 농민군의 활동 상황 등이다.
위의 사실들은 모두 동학농민혁명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들로서,
집강소 단계와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함에서 기초적인 사실들이 이 책
에는 많이 수록되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39

계초존안 啓草存案

1894년[甲午]

7월[七月]

21일.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강원도와 함경도 두 도의 외국군대가


지나간 곳에서, 그 곳 지방관이 군량 ․ 마초馬草 ․ 소 ․ 말 등의 물건을 민간에
배당해 거두어 들여서 백성들의 소요를 크게 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은
애당초 의정부의 지시가 없었는데, 연도沿道의 각 관리가 어떻게 감히 마음대
로 행하여 민폐를 끼칠 수가 있습니까? 사체事體에 있어 경고하고 문책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당 관찰사를 모두 추고推考하고, 각 지방관들은 받아야 할
죄를 지닌 채 임시로 직무를 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전에 남양부南陽府 백성들의 소요를 야기한 정인식鄭寅植을 관찰
사가 엄히 추고하여 보고하라고 한 일을 초기草記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 계하啓下된 경기도관찰사의 조사 보고서를 보니, ‘정인식이 근래에 자복
自服하였는데 그 공초供招에서는, 처음에 통문을 돌리러 왔을 적에 단지 노복
1명만 보냈고 소요를 일으켰을 때에는 마침 먼 고장에 나가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억울하게 죄에 걸렸으니 이는 모두 자신을 모함하는 이군옥李君玉의
공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수의 공초가 오로
34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지 죄를 발뺌하는 것만 일삼으니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그러나 증명할 길이


없으므로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형벌을 택한다’1)라는 법전法典을 시행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인식은 이미 음직蔭職, 조상의 공로에 따라 주는 벼슬을 역임
하였으므로 경기감사 홍순형洪淳馨에게 잠시 의금사지사義禁司知事를 겸직시켜
감영監營의 뜰에서 개좌開坐2)하여 한 차례 엄히 형벌로 신문하고 원지로 정배
定配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당일에 계하啓下를 받았
다.

27일. 아뢰기를, “지금 찰리사察理使, 군무로 지방에 나가는 사신 이규원李奎遠의 첩


보牒報를 보니, ‘금년 본주本州의 공마貢馬, 공물로 바치는 말는 중대한 일인데, 지나치
게 변란에 놀라서 연도 각 고을의 장리將吏들이 대부분 달아났으며 더러 부랑
배들이 약탈하는 폐단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탐하여 회보回報하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도로가 막힌 것이 과연 들은 바와 같습니다. 도중에 환란을 만나 무


사할 수 없으니, 차라리 기한을 조금 늦추어서 내년 봄에 상납上納하도록 하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30일. 아뢰기를, “계하啓下된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규환李圭桓의 장본狀本


을 지금 보니, ‘동도東徒 수천 명이 갑자기 성에 들어와서 군기고軍器庫를 부수
고, 비축해둔 무기를 일일이 찾아 갔으며, 장교들이 차고 있던 환도還刀와 백
성들의 집기도 전부 빼앗아갔습니다. 심지어는 공전公錢도 빼앗기는 지경에

1) 󰡔서경(書經)󰡕 ‘순전(舜典)’의 말로서 “고요(皐陶)가 순(舜)임금의 덕(德)을 찬양하여 말


하기를, ‘죄가 의심스러우면 오로지 가볍게 처벌하고, 무고한 자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도를 잃어 실패하려 하셨다”라는 것에서 인용한 말이다.
2) 개좌(開坐) : 관청에서 관원이 출근해서 사무를 본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형벌을 가
하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말이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41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근일에 비류匪類들이 연해의 고을에 출몰하


여 무기를 약탈하는 사건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각 지방관들에 대
해서는 모두 관찰사와 병사兵使 ․ 수사水使의 계청啓請에 따라 잡아들여 문초하
겠지만, 어찌 수영水營과 같은 중요한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대비하
지 못하고 저들이 약탈하도록 내버려두고 금지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였겠
습니까? 군정軍政으로 헤아려볼 때 매우 놀랍습니다. 판부判付3) 내에 이미 대
죄待罪하지 말라는 본부를 내렸으나 뜻밖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 수사水使를 우선 엄중하게 추고하고, 이어 관할
하는 고을과 진鎭에 엄히 신칙하여 그 비도匪徒들을 기한을 정하여 잡아들이
되,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하고, 분실한 무기 등의 물건은 일일이 되찾아서
군기고에 넣은 뒤에 보고하도록 하며, 시일을 지체하여 엄하게 추궁 받는
일이 없도록 삼현령三懸鈴4)으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8월[八月]

초 1일.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의 장본을 지금 보니,


전주全州의 사민士民들이 연명으로 올린 소장의 여러 조항 가운데 국가재정과
관련하여 처분을 바라는 것이 7개 조항이었습니다. 첫째, 엽전 5만 냥을 공
금 가운데서 화재를 당한 민호民戶들에게 빌려주어 5년을 기한으로 나누어

3) 판부(判付) : 임금에게 아뢴 형사사건에 대한 임금의 재가로, 판하(判下)와 같다.


4) 삼현령(三懸鈴) : 조선시대에 공문서를 전달하던 통신수단인 파발의 속도이다. 파발은
1597년(선조 30)에 설치되었다. 파발에는 말을 타고 연락하는 기발(騎撥)과 사람이 속보
로 걸어서 연락하는 보발(步撥)이 있었다. 파발은 일의 완급을 나타내는 방울을 달아 전
송했는데, 방울 셋을 단 3현령(三懸鈴)은 긴급사태를 의미했다. 보통은 하나를 달고, 이
보다 급한 일은 2개를 달았다.
34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갚도록 하는 일입니다. 둘째, 계사년1893년에 내려준 각 면面의 세미稅米 중에


아직 거두지 못한 5,516석을 무자년의 전례에 따라 매 석 당 25냥씩 거두어
들이고, 부내府內 4개 면의 세미 중에 거두지 못한 520석은 특별히 견감蠲減해
달라는 일입니다. 셋째, 과거 각 연도의 미납한 쌀과 콩 4,235석을 상정가詳
定價5)로 대신 징수하고 군포軍布 35동同 20필疋 13척尺은 순전히 돈으로 대신
징수하도록 해달라는 일입니다. 넷째, 보세洑稅6)와 잡세雜稅를 혁파해 달라는
일입니다. 다섯째, 진결陳結7) 230결結 10부負에 대한 조세를 기한을 정하여 다
시 견감해 달라는 일입니다. 여섯째, 전운소轉運所8)에서 새로 만든 잡비와 양
여미量餘米, 정량을 넘게 거두는 쌀를 시행하지 말아달라는 일입니다. 일곱째, 균전답
均田畓, 결세를 고르게 하는 전답에서 도조賭租를 지나치게 거두는 것과, 마름과 하례下隷
들의 폐단을 금지해 달라는 일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전주全州는 국가의 발
상지로서 각별히 중요한 지역인데도, 비류들이 창궐한 이후로 민가가 거덜
나고 백성들이 떠나가서 격심한 변화와 큰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를 생
각하면 참혹하고 측은하므로 돌보아주는 것이 합당합니다. 불에 탄 집을 새
로 짓는 비용으로 공전 5만 냥을 빌려주고 5년 내에 나누어서 갚도록 하는
일과, 계사년1893년 조의 세미稅米 가운데 거두지 못한 5,556석을 매 석 당 25
냥씩 거두어들이며 520석을 견감해주는 일의 두 조항은 모두 시행하도록 특
별히 허락해 주십시오. 과거 각 연도의 미납한 쌀과 콩 및 군포는 이미 조사
하여 보고하도록 하였으니, 도내道內에서 성책成冊을 작성하여 보고하기를 기

5) 상정가(詳定價) : 전세의 특별조치법인 상정법에 근거해 수세하는 것으로, 각 지방의 실


정에 따라 차별을 두어 전세를 징수하였다.
6) 보세(洑稅) : 보수세(洑水稅)의 준말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보를 쌓으려고 걷는 세금을
말한다.
7) 진결(陳結) : 묵은 토지를 말한다.
8) 전운소(轉運所) : 조선후기 지방에서 세금으로 걷은 쌀을 운반하는 선박과 뱃길을 담당하
던 관청이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43

다렸다가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세와 잡세에 대해서는 지난 10


년 사이에 새로 만든 조세를 모두 폐지하라는 분부를 이미 내렸으므로, 다
시 거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결에 대한 조세를 기한을 정하여 다시 견감
해 달라는 일은 연분年分9) 장계狀啓를 기다려서 다시 품처하겠습니다. 전운소
의 잡비와 양여미量餘米 등의 명목은 전에 염찰사廉察使의 논계論啓에 따라 관찰
사와 총무관摠務官이 충분히 토의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으니, 그에 따라 처
리하도록 하십시오. 균전답에서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폐단도, 관찰사가
엄중하게 조사하여 일일이 엄하게 금지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10일. 아뢰기를, “계하된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의 장본을 지금 보니,


‘영천군永川郡의 난민 수천 명이 각자 창과 몽둥이를 들고 관아에 돌입하여,
창문과 벽을 부수고 군안軍案을 불태우고 민가를 허물고 무리를 지어 행패를
부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영남의 민심이 불안하여 전해지는 소
문이 놀라운데, 이번 영천 백성들의 소요사태는 너무나 도리에 어긋나고 악
독하여 평범하게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영해부寧海府 안핵사按覈使, 조사를 맡은 사신
이중하李重夏로 하여금 일이 마무리 된 뒤에 해당 군郡으로 달려가서 엄히 조
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전 군수 홍용관洪用觀은 관찰사의 장계에서 이
미 죄를 청하였으나, 정사政事에 실책한 바가 없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겠습
니까? 조사하여 보고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아뢰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4일. 아뢰기를, “번신藩臣, 관찰사이 봄과 가을에 관할 지역을 순행하는 것

9) 연분(年分) : 그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토지세를 징수하는 제도로, 연분 9


등 등이 있다.
34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은 백성들을 도와주는 취지를 갖고 있는데, 오래도록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농사일이 한창인데, 이러한 때에 폐
를 끼치는 것은 더욱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팔도의 가을 순행을 모두
정지하도록 하고, 기내畿內의 능원陵園과 동북도東北道의 각 능침陵寢을 봉심奉審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근년의 예에 따라 도내의 관작이 높은 수령이 대신 거
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5일.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지금 보니, ‘군사


마軍司馬 송인회宋寅會와 군관軍官인 전 주부前 主簿 김성규金星圭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세심하고 위험에 직면하여 용감하게 맞서서, 여러 달 동안 군대를 가
로막았던 비도의 괴수를 제 발로 와서 항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
러 고을에서 약탈을 하는 것이 종종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이 두 사람을 자
격에 구애되지 말고 도내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지역을 나누어서 난을 막도
록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송
인회와 김성규는 두루 다니면서 초유招諭하여 저들로 하여금 감동하여 깨닫
고 태도를 바꾸어 귀화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로가 가상합니다. 장계의 요청
에 따라 도내의 상당하는 수령으로 임명해 보내어서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7일. 아뢰기를, “수령이 체직遞職되어 돌아갈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부채를 지지 말도록 전후에 조정에서 신칙한 것이 진실로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경상 감사 조병호의 장본을 보니, ‘인동 전 부사仁同 前 府使 이소영
李紹榮은 재임기간이 4개월이 되지 않는데도 새로 받은 결전結錢, 전세를 돈으로 환산

한 것을 유용한 것이 1,313냥兩 3푼分이니, 그 죄상을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


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으며, 전하께서 이에 대하여 계하하셨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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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라의 법[典憲]이 엄중하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죄를 범하니 대단히 놀랍


습니다. 인동 전 부사 이소영을 해당 관의금부에서 체포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고, 그의 집이 경상도에 있다고 하니 장계의 내용대로 지방관에게 엄히
신칙하여 집의 노복을 잡아가두고 빠른 시일 내에 추징하도록 분부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충청도 선무사忠淸道 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의 장본을 보니 묘
당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여러 고을에 무리지어
모여 있는 비도들이 이미 선유宣諭를 받고 감복하여 뉘우치지 않는 자가 없는
데, 도처에서 미쳐 날뛰는 습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공주公州에 모여서
충청도의 관찰사와 판관判官을 유임시켜 달라고 주장하는 자가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임시켜 주기를 원한다고 해놓고 창을 들고 총을
쏘며 대오를 지어 길을 막는 것은 그 의도가 본래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저
들의 행동과 해괴한 짓들은 전에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유임시켜
줄 것을 청한다’는 등의 말을 상주上奏하는 글에 실었으니 대단히 외람됩니
다. 선무사에게 추고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십시오. 해당 비류들에 대해서
는, 줄곧 은혜로 위무만 할 수는 없으며 위엄을 보여서 그들이 두려워 움츠
러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산할 기미가 조금 보인다면 전적으로 위엄
으로만 복종시켜서는 안됩니다. 해당 선무사와 관찰사에게 각별히 신칙하
여 다시 별도로 효유하여 일일이 귀화시킨 뒤에, 즉시 보고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보니, ‘나주 전 목사羅州 前 牧使
민종렬閔種烈을 특별히 유임시켜 줄 것을 묘당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
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이를 계하하셨습니다. 이 수령은 비도들의
소요가 발생한 이후 4개월 동안 성을 지키면서 성첩城堞을 수리하고 장정을
모집하여, 우뚝하게 홀로 보전하여 저들을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에 위무하는 방도와 방어하는 책임을 신임 수령에게 맡기기 어려우니 장계
34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에서 요청한 대로 특별히 유임시키고, 이어서 해당 진鎭의 영장營將과 협동하


여, 관하 각 고을을 토벌하고 위무할 방도를 형편에 따라 마련하도록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완결 짓는 성과가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9일. 아뢰기를, “이전에 의금부義禁府에서 당시 구금되어 있던 죄인 임


응호任應鎬에게 받은 공초의 계목啓目으로 인하여, 묘당에서 아뢰어 처리하라
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가져다 살펴보니, 조사과정에서 농간을 부
린 일을 오로지 이무영李務榮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왕부王府, 의금부에서는 과
거 대질對質한 전례가 없습니다. 임응호를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하고 이무
영을 잡아다가 대질하여, 공정하게 재판한 뒤에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0일. 아뢰기를, “관서선유사關西宣諭使, 평안도 선유 담당 사신가 방금 출발하였


으나 해도에서 새로 외국군대의 난[청일전쟁]을 만나 선유사의 사무가 매우 많
습니다. 기무처機務處10) 회의원會議員 권영진權濚鎭과 외무아문 참의外務衙門 參議 이
학규李鶴圭를 모두 파견하여 선유사와 함께 여러 고을을 나누어 다니면서 힘
써 효유하도록 하되, 하직인사를 생략하고 떠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6일. 아뢰기를, “계하된 경상 감사 조병호의 장본을 지금 보니, ‘영천


전 군수 홍용관이 횡령한 사건에 대하여 그를 죄줄 것을 청하고, 장전贓錢, 부정
한 돈을 추징할 것을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

10) 기무처(機務處) : 군국기무처의 줄인말로, 1894년 7월 여러 제도를 개혁키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이다. 일정한 수의 회의원을 두어 합의제도로 처리하였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47

습니다. 들춰내어 열거한 죄상들이 많아서 대단히 놀랍기는 하지만 조사하


라는 명령을 이미 해당 군에 내렸으니, 조사하여 보고하기를 기다렸다가 다
시 아뢰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경상 감사 조병호의 장본을 보니, ‘창락도 찰방昌樂道 察訪
김태욱金泰郁이 3년 동안 역참을 맡으면서 오로지 백성들을 침학하기만 하여,
드러난 장전이 7,562냥 5전 6푼입니다. 우선 파면하여 담당 부서로 하여금
그 죄상을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고, 장전을 추징하는 일은 묘당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으며, 전하께서 이에 대하여 계하하셨
습니다.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일에 대하여 지금까지 조정에서 신칙한 것이
얼마나 엄중한데 이렇듯 쇠잔한 역참에서 이렇게 많은 액수를 횡령하니 대
단히 놀랍습니다. 창락도 찰방 김태욱이 횡령한 돈은 실제 액수에 따라서,
법무아문으로 하여금 집의 노복을 잡아가두고 빠른 시일 내에 추징한 뒤 해
당 관할 도道로 돌려보내, 여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7일. 아뢰기를, “관서關西가 난리를 겪은 이래, 아전과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매우 염려가 됩니다. 위무하여 안착시키는 방책을 시행하는 것
이 한시가 급한데 새로 제수除授받은 도신道臣, 관찰사은 아직 가는 도중이라고
하니, 사체로 헤아려볼 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엄중하게 추
고하는 형전을 시행하여 빠른 시일 내에 도의 경계에 도착하도록 하십시오.
비록 업무를 인수하기 전이라도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그 상황을 신속
하게 보고하라고 전보電報를 보내어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34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9월 [九月]

초 2일. 아뢰기를, “계하된 충청 전 감사 이헌영李金憲永이 노성현魯城縣 백성


들의 소요를 다시 조사한 장본을 지금 보니, ‘양여미量餘米 200석이 전운소에
이속된 이후에 정세正稅를 가져다 썼다고 하는 것은 그 조세 장부를 조사해보
니 이미 형적形跡이 없습니다. 그리고 장두狀頭, 등장의 우두머리 유치복兪致福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고, 도망 중인 박관화朴寬和 ․ 윤상건尹相健 ․ 이성오李成五 ․ 윤자형尹
滋馨은 이제야 비로소 잡아서 모두 조사하였습니다. 백윤백白允伯은 주범과 종
범 관계를 따져보면 가볍게 처벌해야 하니, 묘당에서 다시 아뢰어 처리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쌀을 가져다 썼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없고 일을 주모한 자도 법망을 빠져나갔으니, 조사의 원칙으로 논한
다면 사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박관화 등 4명의 죄수는 통문을 돌리는데
참여하거나 무리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결탁한 죄가 없지 않으니, 관찰사가
<죄의>경중을 분별하여 형배刑配하도록 하십시오. 백윤백의 경우는 관청의
뜰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에 가담하였는데도 오로지 장두에게 미루기만 하
고 끝내 자복하지 않으니, 매우 교활하고 악독합니다. 다시 엄한 형벌을 가
하여 자복을 받아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유치복과 윤상집尹相執 ․ 윤성칠尹
成七은 계속 각 진鎭에 신칙하여 기한을 정하여 체포하고 엄히 조사하여 보고
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
답을 받았다.

초 9일. 아뢰기를, “지금 영백嶺伯, 경상감사의 전보를 보니, 비도 수백 명이


성주星州로 들어오려고 하여 아전과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지키고 있을 때,
성주의 수령이 밤을 틈타 몰래 달아나서 결국 성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합니
다. 근일에 토비土匪들의 약탈이 곳곳에서 우환이 되고 있으니, 어찌 마음대
로 고을을 범하는, 전에 없었던 이러한 변고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하였겠습
계초존안 啓草存案 349

니까? 너무나 놀라워서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령의 직책에 있


는 자는 본디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려움이 닥치자 도리어
구차하게 도피하여 민심을 흩어 놓아 성을 지킬 수 없도록 하였으니 그 죄
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성주목사 오석영吳錫泳을 우선 파면하여 빨리 의금
부에서 체포하여 엄히 처벌하도록 하고, 그 대임代任으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
院事 조익현趙翼顯을 임명하여 당일로 말을 지급하여 내려 보내십시오. 아울러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곤진梱鎭, 병영과 수영에 신칙하여 기한을 정하여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하되, 먼저 그 괴수를 처형한 뒤에 상황을 보고하도록 삼현령
三懸鈴으로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의 장본을 지금 보니, ‘노성현의
무기는 이미 회수되었으며 백성들도 모두 현감이 그대로 머물기를 원하므
로, 노성 현감을 그대로 머무르도록 하는 일을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
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의 장계에서 파면을 청한 것은 실
제로 사체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나 현감이 떠나는 것을 백성들이 애석해하
니 그의 치적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노성현감 김정규金靖圭를 특별히 죄를 지
닌 채 업무를 보도록 하여 앞으로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대구 전 판관大邱 前 判官 신학휴申學休를 이미 처벌하였습니다. 그
가 횡령한 돈은 법무아문에 명하여서 집의 노복을 잡아가두고 빠른 시일 내
에 추징한 뒤 경상 감영으로 내려 보내 여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초 10일. 아뢰기를, “연이어 기백箕伯, 평안감사의 전보를 받으니 숙천 부사


肅川 府使는 관인官印을 버리고 달아났고, 영변부사寧邊府使 ․ 안주목사安州牧使 ․ 성천
35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부사成川府使 ․ 상원군수祥原郡守 ․ 강동현감江東縣監 및 병우후兵虞候11)는 모두 관부官


府를 비웠다고 합니다. 관서에 일이 발생하였을 때, 많은 수령들이 관부를
지키는 것은 잊어버리고 어렵지 않게 관부를 제멋대로 이탈하며 인신印信을
버리고 도망가는 자까지 생겨났으니, 법과 기강으로 볼 때 대단히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숙천부사 신덕균申德均 ․ 영변 전전 부사寧邊 前前 府使 임대준任大
準․ 안주목사 김규승金奎升․ 성천부사 심상만沈相萬․ 상원군수 이국응李國應․ 강동
현감 민영순閔泳純 ․ 병우후 김신묵金信默 등을 우선 모두 파면하고, 그들이 마음
대로 관부를 이탈하여 도망간 상황을 관찰사에게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
하도록 함으로써,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영천군수榮川郡守 홍용관은 영천永川12)에 재직할 때 소요를 야기
하고 횡령 한 일 때문에 지금 처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천榮川을 여러 달
동안 비워두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러우니, 우선 그를 파면하고 대임을 임명
하여 속히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1일. 아뢰기를, “계하된 염찰사 엄세영嚴世永의 장본을 지금 보니, 고을


수령 2명과 진장鎭將 1명의 훌륭한 업적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표창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흥양현감興陽縣監 조시영曺始永은 비용을 절약해서 굶주린 백성
들을 구휼하여 백성들이 실제로 혜택을 입었으니, 말을 하사하는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여산부사礪山府使 유제관柳濟寬은 포수砲手를 선발

11) 병우후(兵虞候) : 병마절도사와 우후. 병마절도사는 도 단위로 1~3명을 두어 지방군을


통솔하게 하였고, 우후는 병사의 보좌관. 평안도에는 2명의 병사를 두었다.
12) 영천(榮川) ․ 영천(永川) : 영천(榮川)군은 오늘날의 경북 영주시인데 1914년 영주군으
로 개칭. 영천(永川)은 경북동남부 영천군을 가리킨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51

해서 요충지를 지켜 적도들이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순천 영장


順天 營將 오보영吳普泳은 도적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서 온 경내가 피해를 입
지 않도록 하였으니, 모두 변지邊地13)의 이력을 허용하도록 하십시오. 영광
전 군수靈光 前 郡守 민영수閔泳壽의 죄목은 모두 관찰사의 계사啓辭에 들어있으나,
아직 처분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수령에 대한 조사 보고는 이미 담
당관서의 아뢰어 처리하라는 절차를 거쳤는데 지금까지 4~5개월이 되도록
아직 처벌하지 않고 있으니 법과 기강에 관계됩니다. 속히 법무아문에서 잡
아오도록 하여 이것을 문목問目에 더 보태어 엄히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계로 인하여, 합천군수陜川郡守 민치순閔致
純과 의흥 전 현감義興 前 縣監 채경묵蔡慶黙의 횡령한 돈을 추징하는 일을 의정부
에서 아뢰어 처리하라고 계하하셨습니다.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일에 대하
여 전후로 신칙한 하교가 얼마나 엄중하였습니까? 그런데 최근 영남 수령들
이 횡령하였다는 논계論啓가 연이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위의 2명의 수령이 처
벌되기를 기다린 후 법무아문에서 집의 노복을 잡아가두고 모두 빠른 시일
내에 추징한 뒤 경상 감영으로 내려 보내 여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12일. 아뢰기를, “지금 황해감사 정현석鄭顯奭이 올린 장계의 등보謄報를


보니, ‘서흥부사瑞興府使 홍종윤洪鍾奫이 일본군 진영에 구금되었으며 아전과 백
성들은 도망가서 흩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이 일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

13) 변지(邊地) : 변경에 둔 첨사(僉使)를 말하는데, 변경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첨사에게는


일정한 가산점을 부여하여 장려하는 뜻을 보였다.
35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치를 보인 것이 대단히 크므로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우선 그를 파면하고 관찰사가 그 곡절을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도
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양호선무사 정경원鄭敬源의 장본을 지금 보니, ‘충주 전
목사忠州 前 牧使가 내직으로 옮긴 뒤에 백성들이 그를 떠나보내려고 하지 않아
서 울부짖으며 머무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수령이 아니라면 비도
들을 회유하여 안정시킬 수가 없어 한 고을의 백성들이 장차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평소 실적이 백성들에게 믿음을 샀음을 미
루어 알 수 있습니다. 전 충주목사 민영기閔泳綺를 특별히 그대로 유임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기백箕伯이 부임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아직 전해 받지 못하여 계본啓本을 작성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변방
의 보고가 한창 올라오는 때에 보고문서가 중단되는 것은 사체에 어긋납니
다. 평안감사의 인신을 해당 아문衙門에서 빠른 시일 내에 주조하여 보내고,
병부는 평안도관찰사에게 각별히 더 찾아보게 하고 찾았는지의 여부를 자
세하게 보고하도록 한 뒤에 다시 아뢰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
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5일. 아뢰기를, “계하된 경상감사 조병호의 폐단을 바로잡는 여러 조


항을 아뢴 장본을 지금 보니, ‘첫째, 도내 환곡의 총액 가운데 포흠逋欠이 누
적된 11개 고을과 역참의 포흠은 탕감해주고, 통영統營의 환곡 폐단은 모두
바로잡아 달라는 일입니다. 둘째, 진결陳結 1만 1,703결을 영구히 탈급頉給해
달라는 일입니다. 셋째, 결가結價, 한결에 대한 조세의 액수는 전錢으로 납부하고, 태가
駄價, 운반비는 될수록 적게 납부하며, 정비情費14)와 잡비雜費는 받지 말아달라는
일입니다. 넷째, 진상進上 물품과 전문箋文을 올릴 때의 정비도 민호에서 거두
계초존안 啓草存案 353

게 되므로 정비의 징수를 금지하여 달라는 일입니다. 다섯째, 재해를 입은


50여 고을의 공납公納은 신납분新納分과 구납분舊納分을 막론하고 내년 가을까지
미루어주고, 양호의 세미稅米 수만 석을 우선 이전해 달라는 일입니다. 여섯
째, 각 역驛에서 사복시司僕寺의 입파入把15)에 보충할 말馬의 세전貰錢은 수량을
줄여서 정식定式으로 삼고, 공조工曹의 도롱이와 언치[言赤]는 혁파해 달라는 일
입니다. 일곱째, 전운소에서 징수하는 것을 대전代錢으로 징수하면 운반비
및 여러 가지 폐단이 변통될 수 있다는 일입니다. 여덟째, 바닷가 각 고을의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를 사실대로 조사하여 바로잡아 달라는 일입니다.
아홉째, 남영南營16)의 병사에게 지급하는 급료의 부족액을 모종의 공전으로
지정해 붙여달라는 일입니다. 열째, 도내 백성들의 소요는 바로 규정 외에
추가로 징수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으니 위의 여러 폐단들을 차례로 바로잡
아 달라는 일입니다. 이 모두를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주십시
오’라고 하였습니다. 영남 일도一道가 연이어 흉년을 만나 백성들의 목숨이
위태로우며 온갖 폐단이 날로 증가하여 온 도내가 소란스러우니, 안접시킬
방책을 충분히 강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관찰사와 선무사가 연이어 요
청하니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군포 ․ 환곡 ․ 결전은 국가
의 큰 정사이고 경장更張에 관계되므로 더욱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마침 계신計臣, 회계를 담당하는 탁지아문 대신과 회동하여 충분히 토의하여 삼가
별단別單을 작성하여 올린 후에, 계하를 기다려서 행회行會17)하고, 관찰사와
선무사에게 적절하게 협의하고 성실하게 처리하도록 하여 실제 혜택이 아

14) 정비(情費) : 조세를 바칠 때 비공식으로 아전들에게 주던 잡비를 말한다.


15) 입파(入把) : 대기하고 있는 말(馬)을 가르키며, 관아에서 급하게 말을 이용하기 위해서
항시 준비해 두었다.
16) 남영(南營) : 1887년(고종 24) 대구에 설치한 친군영이다.
17) 행회(行會) : 중앙정부의 지시를 관사의 우두머리가 부하에게 알리고 실행방법을 정하
기 위한 모임을 말한다.
35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래에 미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별단
영남 도내 각종 환곡이 72만여 석이 되는데 이를 여러 고을에 나누어 저
장해두고 법에 의거하여 거두고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감영과 고
을로 이무移貿18)한다고 하면서 간사한 자들이 쉽게 농간을 부립니다. 지금
11개 고을과 역驛의 포흠이 적체되어 전쟁이나 흉년에 대비할 수가 없으므
로, 관찰사가 현재의 실제 총액을 각별히 조사하여 사창의 환곡으로 만들어
서 백성들로 하여금 법에 따라 받아가고 바치도록 하며, 전후로 감영과 고
을에서 유용한 것들과 아전들이 축낸 것들을 일일이 조사하여 받아내고, 장
부에만 올라있는 거짓 액수는 모두 탕감하도록 하십시오. 서울 ․ 감영 ․ 고을
에서 받아야 할 모전耗錢19)은 도내의 원결原結을 전부 계산하여 고르게 배분
하며, 통영과 우병영右兵營의 곡식은 모두 매 석 당 8냥으로 값을 정하여 거두
어들여 이 수량에 따라 지불하십시오.
하나. 결정結政은 대전으로 징수한다는 일에 대하여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전에 조운漕運으로 납입하던 고을에 대하여는 모두 쌀로 값을 정하여 거두어
들이고, 경사京司에 납입하는 전세田稅 ․ 대동미大同米 ․ 삼수미三手米20)와 콩 그리
고 아래에 내려주는 쌀들에 대하여 명목을 나누지 말고 석 수를 모두 계산

18) 이무(移貿) : 구실아치가 자기 고을의 곡식을 비싸게 팔고, 값이 싼 고을의 곡식을 매입


하여 채워서 이익을 남기는 행위를 말한다.
19) 모전(耗錢) : 환곡을 대여하고 나서 다시 받아들일때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10분의 1을
더 받아내는 돈을 말한다.
20) 삼수미(三手米) : 훈련도감의 포수(砲手) ․ 사수(射手) ․ 살수(殺手)를 훈련하는 비용으
로 거두던 세미(稅米)이다. 훈련도감이 존속되었던 1602년(선조 35)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계속 징수하였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55

하고 거기에 잡비까지 합하여 탁지아문度支衙門에 상납하도록 하십시오. 포량


미砲糧米21)는 예전대로 심영沁營, 강화진무영으로 옮겨서 납입하고, 감영 ․ 진영鎭營 ․
고을의 비용으로 쓰는 쌀은 서울에 납입하는 쌀값에 준하여 납입하도록 하
고, 산골 고을에서는 포목布木으로 바치지 말고 대전으로 바치되 원래 내는
쌀로 값을 정하여 시행하고, 태가駄價는 모두 그 안에서 제하고 추가로 거두
지 마십시오.
하나. 진결은 재해 상황을 조사한 뒤에 별도로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십
시오.
하나. 진상 물품은 모두 경작공京作貢22)으로 시행하고, 정비情費는 영구히
감면하며, 바닷가의 민호는 2년에 한하여 지급을 해주어 감영이나
고을에서 더 이상 징수하지 못하게 하여 재해를 입은 백성들이 이
에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전문箋文은 관찰사가 신의 부[의정
부]에 올려 보내 바치게 하되, 정비는 영구히 감면하며, 병사兵使와 수
사水使 이하는 물품을 봉진封進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하나. 재해를 입은 고을의 공납公納을 일률적으로 미루어줄 수 없으므로
감영과 고을에서 그 위급한 정도를 조사하여 곤궁한 지역을 뒤섞어
서 침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양호兩湖의 곡식을 옮겨달라는 요청
은 탁지아문에서 방법을 정해서 배로 운반하여 판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 사복시의 입파入把에 보충하는 말과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에게 제
공하는 말은 오래도록 각 역驛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지

21) 포량미(砲糧米) : 강화진무영에서 사용되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거두는 세미를 말한


다.
22) 경작공(京作貢) : 지방에서 공물을 마련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공계(貢契)를 두
어 공물을 바치던 일이다.
35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금부터 모두 시행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전에 공조에 납입하던 도


롱이와 언치 등의 조목은 일률적으로 영구히 혁파하십시오.
하나. 바닷가 고을의 어세 ․ 염세 ․ 선세는 각 해당 고을로 하여금 조사하
여 감면해주도록 하고, 근년에 부당하게 징수하던 것들은 모두 혁
파하십시오.
하나. 남영의 병사들에게 급료로 주는 돈은 관찰사가 그 실제 액수를 조
사하여 도내의 민호에게 고루 할당하도록 하고, 병사들의 급료를
핑계 삼아 부당하게 징수하던 조목은 모두 견감하고, 각 고을에서
재해면적으로 설정한 토지를 조사하여 모두 총면적으로 올리게 하
며, 그 밖에 염세 등의 명목으로 징수하던 것은 일일이 탁지아문에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아뢰기를, “지금 영남 선무사 이중하의 장본을 보니, 여러 고을과 백성들


의 폐막을 나열하면서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
다. 첫째, 하천에 의해 유실된 진황결陳荒結, 농사를 짓지 않는 토지에 대하여 억울하
게 징수하는 것입니다. 둘째, 장부에 허위로 올라있는 환곡에 대하여 터무
니없이 모곡耗穀, 이자로 받는 곡식을 징수하는 것입니다. 셋째, 결역전結役錢23)과 호
포전戶布錢24)이 해마다 증가하는 것입니다. 넷째, 전운소에서 허다하게 징수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영영嶺營, 경상감영에서 병료전兵料錢25)을 분배하여 징수
하는 것입니다. 지금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에 대하여 아뢰어 조사한 것이
있으니 계하를 기다려 일체로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

23) 결역전(結役錢) : 결세 중에서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에게 주는 급료를 말한


다.
24) 호포전(戶布錢) : 모든 호구세에서 똑같이 부담하는 병역세를 말한다. 흥선대원군 집권
기에 양반의 특혜를 배제하고 동일하게 부담하도록 하였다.
25) 병료전(兵料錢) : 군졸들에게 주는 급료를 말한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57

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수원유수水原留守 조병직趙秉稷의 장본을 지금 보니, ‘해당
부府의 판관 심능필沈能弼을 이미 파면하였으나 드러난 횡령 액수가 적지 않습
니다. 당해 판관이 처벌되기를 기다려서, 법무아문에서 집의 노복을 잡아가
두고 횡령한 돈 3만 8,020냥을 빠른 시일 내에 추징한 뒤 수원으로 내려 보
내 여러 백성들에게 되돌려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영남 선무사 이중하의 장본을 지금 보니, ‘동도 4,000~
5,000명이 와서 예천군醴泉郡을 침범하자 해당 군郡의 아전과 백성들이 힘을
합해 격퇴하여 많은 숫자를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달아
났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기세를 틈타서 쫓아가서 잡았으며 경내에 있는 저
들의 소굴을 불태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도들이 번성하여 날로 창궐
하고 있으나, 수령들은 아무도 이를 막지 못하고 있으며 평민들은 지탱하여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천군의 아전과 백성들이 협심하여 폭거를
막았으니 대단히 가상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앞장서서 계획을 세우고 용
기를 발휘하여 이끈 사람이 있을 것이니, 경상도 관찰사에게 상세하게 조사
해서 명단을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거두어서 쓰고 격려하는 방도
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16일. 아뢰기를, “각도의 모든 상납은 균일하게 대전代錢으로 마련하되,


먼저 기전畿甸, 경기도부터 결가結價를 정하고, 평안도와 함경도 외에 5도에서 납
입해야 하는 쌀 ․ 콩 ․ 포목은 모두 석수石數와 필수疋數에 준하여 대전으로 거
두도록 의안議案을 행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일전에 영남의 결정結政에 대
하여 별단으로 계하하신 것이 있으니, 양호兩湖 ․ 해서海西 ․ 강원 등 4도의 쌀 ․
콩 ․ 포목은 역시 영남의 전례대로 산골과 바닷가의 마을을 구분하여 매 석
35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과 매 필 당 가격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탁지아문에서 관문關文을 돌려 지시하


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각도에서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을 관찰사 이외에는 모두 그만
두라고 이미 명을 내리셨습니다. 각도 관찰사의 전문은 일전에 계하하신 별
단의 영남의 규례에 따라 모두 신의 부[의정부]로 올려 보내 취합하여 아뢰도록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17일. 아뢰기를, “지금 경상감사 조병호가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용궁현감龍宮縣監 이주의李周儀를 논죄하는 일을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무기를 잃어버렸으니 법에 따
라 잡아다가 처벌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러한 유사시에 처벌할 동안
직무를 비워두는 것은 대단히 소홀히 하는 처사입니다. 특별히 죄를 지닌
채 직무를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 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지금 보니, ‘나주 영장羅州
營將 이원우李源佑를 특별히 유임시키도록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주 영장은 비도들이 소란을 피우던 시기에 목
사와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굳게 지켜 외로운 성을 홀로 보전하였습니다. 그
런데 갑자기 체임遞任되니 군인과 백성들이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
습니다. 장계의 요청대로 특별히 유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완결 짓는
성과가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호남의 비도들이 곳곳에서 행패를 부려서 전후로 무기를 잃
어버린 수령과 진장鎭將으로서, 관찰사의 계사에서 처벌을 요청한 자가 29명
계초존안 啓草存案 359

이나 됩니다. 평소에 엄히 단속하고 방어하였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생겨


났겠습니까?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일일이 잡아다가 법대로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도道 전체가 소란스러
운 이때에 처벌하는 동안 각 고을과 진鎭의 업무가 방치될까 매우 걱정스럽
습니다. 임실현감任實縣監 민충식閔忠植 ․ 임피현령臨陂縣令 송순혁宋淳爀 ․ 동복현감同
福縣監 유치성兪致誠 ․ 무안현감務安縣監 이중익李重益 ․ 옥과현감玉果縣監 홍우석洪祐奭 ․
흥양현감興陽縣監 조시영曺始永 ․ 익산군수益山郡守 정원성鄭元成 ․ 화순현감和順縣監 민
영석閔泳奭 ․ 용안현감龍安 縣監 민진호閔進鎬 ․ 법성첨사法聖僉使 권인하權寅夏 ․ 격포 첨
사格浦 僉使 유협柳香夾 등은 특별히 죄를 지닌 채 직무를 거행하도록 하고,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해남 이규환李圭桓은 전에 이미 문비問備26)하였으므로, 지금은 잠
시 두고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
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지금 보니, ‘비도들이 남원
부南原府에서 무리를 모아 무기를 빼앗고 부중府中을 점거하고 있는데, 남원 부
사 윤병관尹秉觀은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가 방금 재촉을 받고 돌아왔
습니다. 저들이 전에는 귀화한다고 하였다가 즉시 또 행패를 부려서 이러한
큰 고을을 점거하는 변란이 발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
도 저들을 막았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으니 이러고서도 나라에 법이 있다
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히 놀랍습니다. 남원부사 윤병관은 이러한 때에
관부를 비워서 성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단지 잡아 신문하는 것만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그를 파면하고 그 대임代任으로 군무아문 참의軍務衙門 參議
이용헌李龍憲을 임명하여 당일로 말을 지급하여 내려 보내어, 비도들을 토벌
하고 진압하도록 하십시오. 관찰사도 사전에 미리 신칙하지 못하였으며, 지

26) 문비(問備) : 관리의 죄상을 관원 명부에 적어 두었다가 인사 행정에 반영하기에 앞서 심


문하던 일이다.
36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금 이 계문啓問이 얼마나 긴급한 것인데 일자를 이렇게 지체하였으니 깨우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중하게 추고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경상감사 조병호가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용궁현감
龍宮 縣監 이주의李周儀를 논죄하는 일을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
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법에 따라 잡아다가 처벌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러한 유사시에 처벌할 동안 직무를 비워두는 것은 대단히 소
홀히 하는 처사입니다. 특별히 죄를 지닌 채 직무를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지금 보니, ‘전 도신 김문현
金文鉉이 재임 시에 무남영武南營, 전주에 설치된 친군영 병사들에게 급료로 주는 쌀을,
각 고을 아전들의 은결隱結27)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거둔 것이 총 5,000석
이었습니다. 그 중 먼 고을의 것을 대전代錢으로 마련하여 가까운 고을의 곡
식으로 바꾸어서 바친 것이 전주와 김제金堤 두 고을의 세미稅米로 도합 2,664
석이었습니다. 이것과 대전 1만 8,548냥은 이미 급료로 지불하였습니다. 또
대전을 거두지 못하여 공공물자와 군수물자를 새로 마련할 돈에서 추심하
여 옮긴 것이 도합 1만 3,065냥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은결은 이미 염찰사
가 혁파하였기 때문에 현재 그것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두 고을의 쌀 도
합 2,664석은 해당 읍의 세곡稅穀으로 회감會減28)하고, 이미 거둔 대전 1만
8,548냥과 거두지 못하여 추심하여 옮긴 돈 1만 3,065냥은 감영의 상납전上
納錢에서 떼어 주도록 의정부에서 품지稟旨하여 분부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
였습니다. 전임 관찰사가 거짓 명목으로 은결을 조사하여 마음대로 세납稅納
을 전용한 것은 법과 기강으로 헤아려볼 때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

27) 은결(隱結) : 조세의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기 위해 양안에 올리지 않은 토지를 말한다.


28) 회감(會減) : 받을 것과 줄 것을 상쇄하여 회계 처리하는 방식을 말한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61

지만, 현재 섬에 안치되어 있으므로 다시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곡公穀과


공전公錢 가운데 보충해 넣을 수 없는 것은 탕감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래서 이미 장계에서 말한 대로 두 고을에서 바꾸어 쓴 쌀 2,664석은 해당 읍
의 세곡으로 회감會減하고, 이미 징수한 대전과 추심하여 옮긴 돈 도합 1만
1,613냥은 해당 감영의 상납 중에서 떼어 주도록 탁지아문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전에 호남의 균전均田에 백징白徵29)을 한 곡절을 조사하여 보고
하도록 관문으로 해당 도에 물었습니다. 지금 관찰사의 장계를 보니, ‘전주
全州 ․ 김제金堤 ․ 금구金溝 ․ 태인泰仁 등 4개 고을에서는 원래 백징을 한 적이 없
고, 임피臨陂의 진답陳畓에서 도조賭租를 거둔 것이 1,196석, 부안扶安의 진답에
서 도조를 거둔 것이 305석, 옥구沃溝의 진답에서 도조를 거둔 것이 76석이었
습니다. 그래서 균전리均田吏에게 조사하여 캐물었더니, 위의 7개 고을에서
무자년1888년의 진답에 소와 식량을 지급하고 경작을 권유하여 양안量案, 토지대장
을 만들었으며, 가을이 되어 도조를 책정한 이후에 경작할 수 없는 병자년
1876년의 진답도 함부로 균전 양안에 집어넣어 도조를 받은 것이 있어서, 그
대로 둘 것과 뺄 것을 구별하여 양안을 개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별도로 조사하였더니, 전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의 장계로 등문하여 진
결陳結 3,901결結 89부負, 2속束에 대한 조세를 연한을 정하여 기한을 뒤로 물
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균전의 도조가 고을의 결세結稅보다 가벼워서 속
이고 균전에 끼워 넣은 것이 많아져서, 결국 병자년과 무자년이 서로 혼동
되고 진답陳畓과 폐답廢畓이 서로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경작할 수 있는 토지
는 따로 총면적을 조사하여 도로 수조안收租案에 넣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합
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균전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세
심하게 살피고 성심으로 경작을 권장하지 못하여 이렇게 결세를 피하여 도

29) 백징(白徵) : 세금을 납부할 이유나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징수하는 것을 말한다.


36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조를 내거나 진답과 폐답이 서로 뒤섞이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농간을 부


려 잇속을 챙기고 죄를 지은 것이 더없이 심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불문에 부칠 수는 없습니다. 전 균전사 김창석에게 정배의 형전을 시
행하고, 위의 7개 고을에서 개간한 토지는 금년조부터 원래의 총면적에 도
로 넣도록 탁지아문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
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충청감사 박제순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노성현감
김정규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호남 비도들의 경보가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비도들의 난리 형국이 이미 드러났는데 관찰사와 수령
들은 토벌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아서, 고을에서 올린 보고가 이처럼 소홀하
며 관찰사의 장계에서도 애당초 수령에 대한 처벌을 논하지 않고 수령의 보
고를 그대로 베껴서 일반적인 규례에 따라 등문하였으니, 국가의 기강에 있
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단지 놀랍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해
당 관찰사와 수령을 파직하고 잡아 문초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러한 시기
에 바꾸어 임명한다면 또한 직무를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
두 잠시 죄를 지닌 채 일을 거행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각 고을과 진鎭에 각
별히 신칙하고 엄히 단속하여 병사들을 소집하여 방어하도록 하십시오. 완
백完伯, 전라감사으로 말하자면, 변란의 싹이 전라도에서 생겨났는데 처음부터
장계를 올려 보고하지 않았으니 사체에 크게 관계 됩니다. 따라서 우선 감
봉의 형전을 시행하고, 또 병영과 수영 및 각 고을에 신칙하여 방법을 강구
하여 토벌한 뒤에 그 상황을 계속 보고하도록, 삼현령으로 두 도의 관찰사
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
을 받았다.

19일. 아뢰기를, “지금 평안감사 김만식金晩植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


니, ‘전 감사 민병석閔丙奭의 소재지를 알지 못하여, 인신과 병부 및 도내 각
계초존안 啓草存案 363

고을과 진鎭의 수령과 변장邊將의 병부 좌척左隻, 반절의 왼쪽이 모두 없으므로, 인


신과 병부를 속히 만들어서 내려 보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인신은
방금 주조하여 보냈습니다. 병부는 승선원에서 속히 만들어서 내려 보내고,
각 고을과 진의 병부 우척右隻, 반절의 오른쪽은 새것을 만들어서 내려 보낸 뒤에
옛것은 올려 보내 태워 없애버리도록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제주濟州 전 목사前 牧使 이규원李奎遠이 진휼賑恤을 마치고 올
린 장계를 보니, ‘본주 전 오위장前 五衛將 김응병金膺柄이 전미田米 670석을, 이시
영李時英이 전미 560석을 의로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내어 놓았으니 참으로 가
상합니다. 당연히 별도로 격려하고 권면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 현감 송두옥宋斗玉은 스스로 쌀 100석을 준비하였으며 본주의 판관 채구석
蔡龜錫은 봉미俸米, 급료로 받는 쌀 60석을 내어 놓고 전미 70석을 스스로 준비하였
으므로, 실질적인 혜택과 큰 업적이 되기에 일체로 논열하였습니다. 작년
여름과 가을에 정퇴한 환곡 6,765석은 흉년 뒤의 민심을 생각하면 독촉할
수가 없어서 절반만 징수하여 올렸습니다. 각종 명목으로 매긴 조목의 환모
還耗 1,500석石 10두斗 1승升 5홉合은 지급을 막았으나, 떠돌이 걸인들이 심한
곳에서 받아 간 환곡 4,851석 12두 7승 9홉은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서 받아
낼 수가 없습니다. 진상하는 각종의 본미本米는 환곡 가운데에서 모곡耗穀을
취하여 진배進排해야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모곡은 고사하고 원래의 환곡
조차도 물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874석은 어떻게 조처를 취하
고, 그 나머지 3,977석 12두 7승 9홉은 환곡의 총수에서 탕감해 주지 않을
수 없으나 막중한 국가의 곡식을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
였습니다. 생각건대, 도내 백성들이 이처럼 연이은 흉년을 만나 살 곳을 잃
고 흩어졌으며, 심지어는 육지로 나가 살길을 도모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고
르게 보살펴 주는 도리로 보아 널리 은혜를 베푸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
니다. 환곡 3,977석 12두 7승 5홉은 5년의 기한을 정하여 기한을 뒤로 물리
36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자원하여 곡식을 바쳐 진휼에 보태고 의로


운 마음으로 곡식을 출연한 것은 더욱 가상한 일이니, 전 오위장 김응병과
이시영은 모두 관내의 수령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임명하여 보내고, 전 현
감 송두옥은 가자加資하고, 본주의 판관 채구석은 승진시켜 임명하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22일.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지금 보니, ‘남원


부에 모여 있는 비도 5~6만 명이 각자 무기를 들고 밤낮으로 날뛰자, 전주와
금구金溝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이미 귀화하였다가 다시 행패를 부리고 있습
니다’라고 하였습니다.30) 그러나 토벌에 관한 계책은 한 마디도 언급이 없
으니 관찰사의 책무가 본디 이와 같은 것입니까? 사체로 헤아려볼 때 대단
이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전라도관찰사를 우선 파면하는 형전을 시행하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기백箕伯의 전보를 접하니, 가산 군수嘉山 郡守는 관아를 비
웠으며, 용천부사龍川府使는 도망갔으므로 파면을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두 수
령의 죄상은 관찰사의 계사에서 논열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은 관서關西
의 고을을 잠시도 비워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가산 군수 김종환金鍾桓
과 용천부사 권국현權國鉉을 모두 우선 파면하고 즉시 다른 사람을 대신 임명
하여 속히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양호 지역에 이렇게 비류가 창궐하니 그 근심이 그칠 날이 없
습니다.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31)로 차하하여, 그로

30) 전주에서 농민군이 후퇴한 뒤 집강소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는데, 남원에서는 김개남이,


전주와 금구 등에서는 전봉준이 활동한 사실을 말한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65

하여금 군영을 설치하고 각 군대를 지휘하여 형편에 따라 토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3일.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전라감사 이승우李勝宇는 현재 충청도 홍


주목洪州牧의 임소에 있으니 그로 하여금 조정에서 하직인사 하는 것을 생략
하고 속히 부임하도록 하며, 밀부密符는 전 감사가 차던 것을 그대로 수여하
고,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는 승선원에서 작성하여 안보安寶, 임금이 옥새를 찍는 것한 뒤
에 금군禁軍을 정하여 파발로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새로 임명한 호남의 수령들 가운데 남원부사 이용헌과 흥양
현감 박시순朴始淳을 모두 소모사召募使로 임명하여 내려가는 길에 한편으로는
소모召募하여 협력해서 토벌할 수 있도록 하고, 흥양현감은 당일에 하직토록
하고 말을 지급하여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
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하동河東에 비도들의 소요가 있다고 합니다.32) 새로 차하
한 부사 홍택후洪澤厚로 하여금 당일에 하직토록 하고 말을 지급하여 내려 보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
다.

24일. 아뢰기를, “양호의 비류들이 근래에 다시 영남 ․ 관동關東 ․ 경기 ․


해서 등지로 세력을 뻗치고 있다고 합니다. 각처의 토벌과 위무 업무를 모

31) 도순무사(都巡撫使) : 중앙 정부에서 농민군이 2차 봉기를 준비할 무렵인 9월, 중앙에


도순무영을 설치하고 도순무사가 모든 군사를 총지휘토록 하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였
다.
32) 전주성 철수 이후 김인배는 영호대접주가 되어 순천과 광양을 석권하고 하동의 농민군
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하동과 진주 등지로 진출하였다.
36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두 순무사巡撫使로 하여금 일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5일.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통제사統制使 홍남주洪南周는 창원부사昌原府


使에서 옮겨서 임명하였습니다. 밀부密符는 전 통제사가 차던 것을 그대로 수
여하고,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는 승선원에서 작성하여 안보安寶한 뒤에 금군을
정하여 파발로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새로 임명한 홍주목사 조재관趙載觀은 전에 해도의 병사兵使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격례格例, 일정한 전례에 어긋나서 부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사시에 이런 것으로 구애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
니, 신칙하여 하루빨리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새로 임명한 호남의 수령들 가운데 장성부사長城府使 이병훈李秉
勳을 또한 소모사召募使로 임명하여, 내려가는 길에 소모하여 협력해서 토벌하
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영백嶺伯의 전보를 보니, 대구판관33)이 비도들을 토벌하
는 일로 하동과 진주晉州 등지로 파견되었으며, 안의 현감安義 縣監은 함양咸陽을
겸하여 다스리면서 현재 비도들을 방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捕使로 임명하고 안의현감 조원식趙元植을 조방장助防將으
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하고 토벌하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전보를
발송하여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33) 대구판관(大邱判官) : 당시 경상감영의 판관은 지석영이었는데, 관내인 진주, 남해, 하


동 등지의 농민군 토벌을 위해 일본군과 합동작전을 펼쳤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67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양호도순무사가 지금 이미 관부官府를 설치하였으니 밀부密符를
주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는 승선원에서 작성하
여 안보한 뒤에 일체로 전해 주도록 하고, 순찰사巡察使 이하는 그가 전적으로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
답을 받았다.

26일. 아뢰기를, “근래에 듣건대, 비류들이 횡행하는데, 각 고을의 수령


들은 저들을 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종종 후하게 대접하는 자도 있다고 합
니다. 그것이 과연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대단히 놀랍
고 통탄스럽습니다. 그러한 수령들을 보이는 대로 적발하여 엄중하게 논죄
하도록 삼남三南의 관찰사에게 관문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경기감사 신헌구申獻求가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지평
현砥平縣의 비도 수백 명이 홍천洪川 땅에 접接을 설치하고 드나들면서 온갖 약
탈을 자행하자, 본현에 거주하는 전 감역前 監役 맹영재孟英在가 부약장副約長이
되어 관포군官砲軍과 사포군私砲軍 100여 명을 데리고 홍천 땅에 도착하여, 그
괴수 고석주高錫柱 ․ 이희일李熙一 ․ 신창희申昌熙를 사로잡고, 혹은 베고 쓰러뜨려
서 그들 무리 5명을 죽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34) 저
들이 버리고 간 창槍 58자루는 거두어서 군기고에 넣었습니다. 포군砲軍 김백
선金伯先35)은 저들 무리들에게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맹영재가 의분을 발휘

34) 강원도 농민군 차기석 등은 9월부터 홍천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10월 22일 맹영재의 민
보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와 홍천 서석 자작골에서 격전을 펼쳤으나 패배하였다.
35) 김백선(金伯先) : 강원도 포수 출신으로 민보군에 가담하였고, 1895년 1차 의병봉기 당
시 의병장 유인석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나, 양반 의병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
다.
36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하여 저들을 참획斬獲하고 포군들이 힘을 다하여 싸움에 뛰어든 것에 대하여,


포상의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니,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
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호畿湖 지방에서 비도들의 소요가 있은 이
래로, 관리와 백성들이 대부분 두려워하며 피하였기 때문에 세력이 불어나
서 도모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보고를 보니, 맹영재는 향
신鄕紳으로서 의분을 발휘하여 고을의 경계를 넘어 비도들을 토벌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합니다. 듣건대, 지금 순무영巡撫營에서 소모관召募官을 아뢰어 임
명한다고 하니, 그에게 더욱 격려하여 비도들을 추격하여 체포하는데 전력
하도록 하며 수령의 자리가 나는 대로 임명해 보내고, 부상당한 포군은 감
영과 고을에서 비용을 지불하여 치료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7일. 아뢰기를, “충청수사忠淸水使 이봉구李鳳九는 날전복을 올리지 않은


일 때문에 내국內局, 내의원에서 초기草記를 올려 파면을 청하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때에 관리를 교체하는 데 따르는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특별히 보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
답을 받았다.

28일. 아뢰기를, “계하된 영남선무사 이중하의 장본을 보니, ‘의흥 백


성들의 소요사태의 장두狀頭 이장학李章鶴이 무리를 모아 고을로 들어와서 가
옥을 불태우고 관장官長을 끌어내어 모래사장에 버렸습니다.36) 주동한 죄를
그가 이미 자복하여 지금 대구 진영으로 이감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반란의 괴수 이장학을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군인과 백성들을 대대적으

36) 당시 수령이 부정한 짓을 하게 되면 해당 고을의 백성들이 멍석말이를 하여 지경 밖으로


몰아내는 관례가 있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처벌받지 않고 일정정도 용인되었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69

로 모아놓고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킨 뒤에 보고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 박제순의 등보를 보니, 병사兵使 이장회李長會의
보고를 낱낱이 열거하면서 ‘이달 24일에 비류 수만 명이 성 아래를 침범하
였는데, 병사兵使가 직접 막아 싸워서 적도 수십 명을 죽이자 적이 비로소 물
러나서 흩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남의 비도들은 서로 연락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감영과 병영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방금 상당上黨, 청주에 있는 산성에서 병기를 잃었다는 급보를 들었는데 이번 보
고가 뒤이어 올라왔습니다.37) 호서湖西의 감사와 병사가 평소에 대비하지 못
하였으니 극히 소홀히 한 것입니다. 순무영에서 빨리 병사들을 징발하여 구
원하러 가는 방도를 마련하여, 이 비도들을 빠른 시일 내에 소탕하도록 하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9일. 아뢰기를, “양호의 비류들을 지금 순무영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하고 있으니 원근의 사민士民들 중에는 반드시 이러한 소식을 듣고 기의
起義하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과 여산부사礪山府使
유제관柳濟寬을 호남 소모사에 추가로 임명하고, 홍주목사 조재관과 진잠현감
鎭岑縣監 이세경李世卿을 호서 소모사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병을 불러 모
아 하루빨리 소탕하도록 하고, 영남에서는 창원부사 이종서李鍾緖와 전 승지前
承旨 정의묵鄭宜默, 상주소모사로 활동을 소모사로 임명하여 일체로 방어하도록 분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
다.
아뢰기를, “계하된 영해부 안핵사 이중하의 장본을 지금 보니, 여러 주범

37) 1894년 9월 김개남은 전봉준과 길을 달리하여 금산을 거쳐 청주병영의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37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과 종범들의 죄상을 열거하면서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곳


영해 백성들의 집단 항거는 다만 결가結價를 줄여달라는 것이었으며 여러 날
동안 버티다가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해산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쫓아가서 체포하니, 완악한 마음이 격발하여 수령을
들어다 버리는 변고까지 발생하였습니다. 분수를 범하고 기강을 어겨 스스
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으니 그 행동을 지적하여 논한다면 법에 의한
처벌이 오히려 가벼울 정도입니다. 남응복南應福은 본래 시골의 패악한 부류
로 고을의 소요를 기꺼이 주동하였습니다. 장두狀頭로써 난을 선동한 것은
비록 이미 자복하였으나 실제로 직접 완악한 짓을 하였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조사한다는 취지에 따라 의심스러운 죄는 가
볍게 처벌하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고 세
차례 엄하게 형신刑訊한 다음 종신토록 원악도遠惡島로 정배하십시오. 신쾌연申
快淵은 하리下吏의 신분으로 오래도록 전곡錢穀을 담당하면서 재물을 거두고 축
적하여 비방과 원망을 사서 변란의 실마리를 제공하였으며, 박경분朴敬分과
권용평權用平은 스스로 폐단을 바로잡는다고 하면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요를
야기했으니, 논의를 주도한 죄목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두 차례 엄하
게 형신한 뒤에 원악지遠惡地에 정배하십시오. 그 나머지 죄인들은 관찰사가
<죄의> 경중을 분별하여서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영해부사寧海府使
김헌수金瀗秀는 본래 성품이 급하여 형벌을 가혹하게 한 부분이 많았는데, 결
국 일처리가 적절하지 못하여 이 같은 격변을 초래하였으니 엄중하게 처벌
해야 하며, 횡령한 돈에 대해서는 법무아문에서 그 집의 노복을 가두어 일
일이 추징한 다음 해당 도道로 내려 보내, 공용에 충당할 것은 충당하고 해당
백성에게 돌려 줄 것은 돌려주도록 관찰사에게 분부하도록 하십시오. 조사
하여 올린 장계에서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해달라고 청하지 않은
것은 마음대로 처신하고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이니, 안핵사를 추고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71

아뢰기를, “계하된 영남선무사 이중하의 장본을 보니, ‘의흥 백성들의 소


요사태의 장두 이장학이 무리를 모아 고을로 들어와서 가옥을 불태우고 관
장官長을 끌어내어 모래사장에 버렸습니다. 주동한 죄를 그가 이미 자복하였
습니다. 이러한 반란의 무리는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는 것이 합당하
므로 지금 대구 진영으로 이감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반란의 괴수 이
장학을 경상도 관찰사가 군인과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킨 뒤에 보고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양호의 비류들이 귀화하였다가 곧바로 배반하니, 줄곧 은혜로
써 위무할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 병사들을 징발하여 토벌하고 있으니, 선
무사 정경원鄭敬源을 지금 잠시 직책을 감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30일. 아뢰기를, “순무영이 방금 병사들을 징발하여 나누어 보냈으니


군량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호畿湖의 관찰사가 연로沿路 부근의 고
을 가운데서 그 편의를 헤아려 모종某種의 공곡公穀과 공전公錢 중에서 계속 실
어 보내게 하되, 필요한 수량을 순무영의 지시를 기다려서 응접하도록 하며,
각 도내의 수령 중에서 별도로 운량관運糧官을 정하여 속히 거행하도록 일체
삼현령으로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
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본을 보니, 진해 전 현감鎭海 前 縣監
정규찬鄭逵贊이 2 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결같이 탐학만 일삼아서 횡령한 액수
가 9,624냥 1전이나 된다고 합니다. 진해 현감 정규찬이 처벌된 뒤에, 그가
횡령한 돈을 법무아문에서 집의 노복을 잡아가두고 추징하여 본도로 내려
보내, 그곳 백성들에게 돌려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37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0월 [十月]

초 1일. 아뢰기를, “최근에 들으니 관동關東에서도 비류들이 출몰한다고


하니 요충지를 방어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횡성현감橫城縣監 유동
근柳東根이 이미 토포사를 겸직하고 있으니, 본부本府의 주사主事 정준시鄭駿時를
소모관召募官으로 임명해서 협력하여 비류들을 막고 토벌하도록 분부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2일. 아뢰기를, “계하된 경기감사 신헌구의 장본을 지금 보니, 음죽


현감陰竹縣監 김종원金鍾遠의 첩보를 낱낱이 열거하면서, ‘비도匪徒들이 관부를
에워싸고 무기를 모두 빼앗아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해 수령은 당연
히 처벌해야 하겠지만 이러한 때에 관부를 비워두는 것은 매우 소홀한 처사
이므로 특별히 죄를 지닌 채 일을 보도록 하고, 관찰사의 계사啓辭에서 처벌
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므로, 관찰사를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충청감사 박제순과 병사 이장회의 장본을 지금 보니,
청안현감淸安縣監 홍종익洪鍾益이 비도들에게 무기를 빼앗긴 일로 처벌을 논하
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법에 따라 파면하고 잡아와야 하지만 호서 고을에
서 수령을 처벌하는 동안 직무를 비워두는 것은 매우 소홀히 하는 처사이므
로, 특별히 죄를 지닌 채 일을 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
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4일. 아뢰기를, “법무협판法務協辦 김학우金鶴羽38)가 지난밤에 어떤 무


뢰배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합니다. 도성 안에서 조정의 관리가 아무런 까닭

38) 김학우(金鶴羽) : 본디 친러파였으나, 김홍집 내각에 들어와서 농민군 토벌의 강경파로


활동하였다. 흥선대원군 계열인 전동석(田東錫)에게 암살되었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73

없이 살해된 것은 근고近古에 없던 변고입니다. 빨리 경무청警務廳에서 기한을


정하여 조사해서 흉범 여러 놈들을 잡아다가 통쾌히 형률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방금 전교傳敎를 내려서 “묘당에서도 각별
히 신칙하였으니, 속히 잡아다가 형률에 따라 바로잡아라!”라고 하였다. 당
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5일. 아뢰기를, “계하된 충청감사 박제순의 장본을 지금 보니, ‘청안


현감淸安縣監 홍종익洪鍾益과 영동현감永同縣監 오형근吳衡根을 무기를 잃어버린 일
때문에 파면하라고 아뢰었으나, 그들이 떠나는 것을 민심이 안타까워하니
모두 잠시 죄를 지닌 채 일을 보도록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해주십
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파면하였다가 곧바로 유임시키는 것은 비록 엉
성한 조치이지만, 이러한 때에 임시방편의 정사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안
현감은 전에 이미 아뢰어 처리하였으니, 영동현감도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초 6일. 아뢰기를, “홍주목사를 완백전라도관찰사으로 옮겨 제수한 지가 이


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듣자하니, 이 홍주는 호서 연해의 요충에 위치하
는데, 당해 수령이 방비를 잘 하고 있어서 비류들이 감히 그 경내로 들어가
지 못하고 있고, 부근의 7~8곳의 고을들이 이곳을 의지하며 소중하게 여기
고 있어서, 사대부와 백성들이 연이어 와서 유임시켜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전투에 임박하여 장수를 바꾸는 것과 같은 걱정이 있으니, 전 홍주
목사 이승우李勝宇를 특별히 유임시키고, 전라감사의 대임으로 공무 협판工務
協辦 이도재李道宰를 임명하여 조정에서 하직 인사 하는 것을 생략하고 고향집
에서 밤을 새워 부임하도록 하며, 밀부密符는 전임 감사가 차던 것을 그대로
수여하고,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는 승선원에서 작성하여 안보安寶한 뒤에 금군을
37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정하여 파발로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7일. 아뢰기를, “홍주목사 이승우가 유임하게 되었습니다. 병인년


1866년 연안부사延安 府使의 예에 따라 그를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하여 호서 연해
각 고을에서 비도를 막고 토벌하는 일을, 그로 하여금 지휘하도록 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기백箕伯의 전보를 보니, 서윤庶尹, 감사 휘하의 실무자이 병이 들
어 직무를 살피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곳의 응접應接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
지 고민스럽습니다. 평양서윤平壤庶尹 이우영李遇永을 바꾸어 임명하고, 즉시 대
임을 임명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8일. 아뢰기를, “관서와 관북에서 전후로 운반하는 유의襦衣39)와 지


의紙衣40)는 봉수대와 수자리를 지키는 장수와 병졸들의 추위를 막는 물품인
데, 서울에서 만들어 지급하였던 것은 그 지역에 면綿이 귀하였기 때문입니
다. 지금은 그 지역에서 생산하는 것도 많을 뿐더러 상품으로도 유통되고
있으니, 신미년1871년에 시행한 규례에 따라 모두 해당 지역에서 서울로 상납
하는 물품 중에서 대전代錢으로 적절하게 책정하여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고,
안무영按撫營, 안무사가 일을 보는 곳과 평안감영에서 이를 주관함으로써 장거리 수송
으로 인하여 지체되는 폐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두 도의 관찰사와 수신帥臣, 병
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

39) 유의(襦衣) : 남자가 겨울에 입는 저고리로, 추운 변경 지역의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40) 지의(紙衣) : 솜 대신에 종이를 채워 만든 겨울 옷으로, 서북쪽 국경지역을 지키던 병사
들이 입었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75

답을 받았다.

초 9일. 아뢰기를, “계하된 강화유수江華留守 김윤식金允植의 장본을 지금


보니, ‘심영沁營의 포량砲糧에 충당하는 전錢 ․ 미米 ․ 목木 가운데서, 전에 무위소
武衛所41)에 옮겨 지정해 주었던 수삼세水蔘稅와 포삼세包蔘稅 15만 3,800냥과 동
래목東萊木, 동래부에서 부담하는 포목 10동 2필, 통위영統衛營의 전 해방아문海防衙門에 옮
겨 지정해 주었던 쌀 9,855석, 경리청經理廳에 옮겨 지정해 주었던 무주목茂朱
木, 무주현이 부담하는 포목 15동 1필을 모두 본영本營으로 환속還屬하도록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강화도 진무영鎭撫營은 국
방의 요충지로서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도 늘 군량
이 부족하여 걱정인데, 학도學徒와 해군海軍까지 신설하여 지출이 너무나 많습
니다. 방어를 견고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 군량을 보충할 밑천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원래 포량으로 충당되던 전 ․ 미 ․ 목 가운데 각 영營에 옮겨 지정하
였던 것을 모두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환속시켜 결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충청감사 박제순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병영의 영
장領將 염도희廉道希가 병정 80명을 인솔하여 연산連山과 진잠鎭岑을 나누어 순찰
하고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와 대전大田, 한밭 땅에 이르러 갑자기 비도 1만여 명
을 만나 사로잡혀 불에 타 죽었습니다’라고42) 하였습니다. 당해 영관이 한

41) 무위소(武衛所) : 1873년(고종 10)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경복궁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
하여 설치한 궁궐 수비 관청이다. 1874년 무위청(武衛廳)과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500명을 새로 뽑아 훈련도감 지휘 하에 1회 100명씩 5교대로 궁중숙위를 담당 하였으
며, 이후 1879년 북한산성에 있던 경리청(經理廳)을 소속시키고, 총융청 소속의 북한성
관장(北漢城管將) 이하 모든 관원을 무위소에 소속시켜 무위소는 궁궐숙위뿐만 아니라
수도방위업무까지 담당하였다.
42) 충청병영 지휘관 염도희가 이끄는 관군은 1894년 당시 공주와 대전에서 농민군에게 몰
살당하였으며, 이후 청주에 모충사를 지어 이들의 죽음을 추모토록 하였다.
37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달 넘도록 돌아다니며 순찰을 한 것으로도 이미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결


국 ‘적도들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놀랍고 참담합
니다. 나랏일을 하다가 죽었으니 포상을 추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다시
그 실상을 조사하여 빨리 시행해 주십시오. 전사한 병정들에 대해서는 충청
병영에서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사상자를 장사지내고, 유
족들을 위무하고 구휼해 주는 은전은 넉넉하게 베풀도록 하며, 생전의 신역
身役 ․ 환곡還穀 ․ 군포軍布는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십시오. 비류들이 제멋대로
창궐하는 사태가 갈수록 더욱 심하여 감히 관군官軍을 해치기까지 하였으니,
토벌을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경영京營과 충청병영의 병정이 서로 돕고
힘을 합쳐서 빠른 시일 내에 적들을 토벌하도록, 충청도관찰사와 병사 ․ 수
사에게 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
에 비답을 받았다.

11일. 아뢰기를, “방금 서산군瑞山郡 예리禮吏43)가 전패殿牌, 임금의 위패를 모


시고 와서, 당해 고을의 비류들이 변란을 일으켜, 군수 박정기朴定基가 살해되
고 공해公廨는 모두 소진되었다는 소식을 확실히 들었다고 합니다. 적의 세
력이 창궐하여 장리長吏, 수령를 죽였으니 너무나 놀랍고 통탄스러운데, 전패
까지 옮겨서 봉안하게 되었으니 매우 놀랍고 황송합니다. 전패는 경기 감영
의 객사客舍에 임시로 봉안하였습니다. 안성安城 전 군수前 郡守 성하영成夏泳은
전에 논파論罷된 후에 연이어 비류들을 토벌하여 드러난 성과가 상당히 있으
니, 특별히 용서해서 서산군수로 임명하여 편리한 길로 즉시 부임하게 하고,
거느리고 있는 중앙 군사를 그대로 나누어 통솔하여 하루빨리 비류들을 토
벌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순무영에 명하여 삼현령으로 지시하도록 하며,
당해 군수를 구휼하는 은전은, 관찰사의 계사를 기다려서 다시 아뢰어 처리

43) 예리(禮吏) : 지방관아에 소속된 예방의 관속이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77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3일. 아뢰기를, “계하된 영천안핵사 이중하의 장본을 지금 보니, 여러


주범과 종범들을 나열하면서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당해 고을의 백성들
의 소요는 그 원인이 3가지이니, 첫째, 결세結稅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며,
둘째, 관아의 정사가 탐오한 것이며, 셋째, 명례궁明禮宮44)의 보세洑稅입니다.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영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은, 새 법령에서 역役을 감면하여 준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는 관리들이 이제까지 그러한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고 제멋대
로 의심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화란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잇달
아 모여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관아에 난입하며, 심지어 수령을 들어다 내
버리는 변고까지 발생하였습니다. 분수를 어기고 기강을 어지럽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정용채鄭容采는 본래 유명한 부랑배로 온 고을 사
람들이 모두 죽여도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또 앞장서서 소요를 일으켰으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피 중이라고 하니, 신칙하
여 기한을 정하여 잡아들여서 바로 사형[一律]45)에 처하도록 하십시오. 정기
석鄭基碩은 비록 차석의 장두狀頭라고는 하나 무리를 모아 변란을 일으키는 일
에 있어서 앞장 선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승연李承然은 돈을 추징한다고 하
면서, 형세를 타서 변란을 주창하였으며 의복을 빼앗고 욕을 보인 것이 끝
이 없습니다. 위의 두 죄인에 대하여는 여러 사람들의 공초도 일치하며 그
들도 모두 자복하였으니, 관찰사가 군인과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고 효수하
여 백성들을 경계시키도록 하십시오. 박동업朴東業은 유감을 품고 있다가 변

44) 명례궁(明禮宮) : 궁방(宮房)의 하나이다. 궁방은 후비, 왕자, 공주, 옹주의 궁실과 궁가
를 뜻하는데 각지에 궁방전을 두고 국가를 대신하여 수조하여 경비로 충당하였다.
45) 일률(一律) : 사형에 해당하는 죄.
37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란을 틈타 관아의 안채까지 범하였으므로, 차율次律46)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


합니다. 3차례 엄히 형신한 다음 원악도에 종신토록 정배하십시오. 이정용李
正用 ․ 양성진梁成振 ․ 정작지鄭作之는 나쁜 짓을 함께 하며 서로 도와주었다는 증
거가 명확하므로, 모두 2차례 엄히 형신한 다음 절도絶島로 정배하십시오. 나
머지 여러 죄수들은 경중을 나누어 적절하게 처벌하십시오. 전 군수 홍용관
은 거듭 수령을 지내면서 모질게 수탈하여 오래도록 온 경내 백성들의 원망
을 사서 결국 전에 없는 변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합당하며, 횡령한 돈이 매우 많으니 법무아문에서 추징하도록 하십시오. 늘
어나는 결세와 보세의 폐단은 실로 백성들의 고통과 관계됩니다. 이처럼 난
리를 겪은 뒤에는 백성들을 보태주는 정사를 베푸는 것이 적절하니, 결수結數
와 민호民戶에 따르는 세금을 줄이고 궁방宮房의 보세를 되돌려주는 것은, 모
두 복명하여 아뢴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
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5일. 아뢰기를, “매번 행행行幸, 임금의 행차할 때 기내畿內의 여러 고을에서


결소結所47)에 진배하는 것이 있는데, 액속掖屬48)과 경예京隸49)들이 규정 외에
강제로 수탈하여 도처에서 폐단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피해가 결국 백성
들에게 돌아가고 있으니, 곧 힘써 방편을 강구하여 백성들을 유지하는 방도
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제공하는 모든 비용은 서울의 각 해당
관사官司에서 진배하도록 하고, 결소에서 진배하는 일은 영원히 시행하지 못
하도록 하여, 조정에서 백성들을 보살피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

46) 차율(次律) : 사형에서 한 등급을 낮추어서 유배형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47) 국왕의 행차시 시위군이나 행렬이 잠시 머물거나 담당 업무를 준비하는 곳을 말한다.
48) 액속(掖屬) : 액정서(掖庭署)에 소속되어 있는 아전과 하인을 말한다. 액정서는 궁궐의
호위와 심부름 등의 업무를 담당하던 관아이다.
49) 경례(京隷) : 내수사(內需司) 등 중앙 관서에 소속되어 있는 하인들을 말한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79

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6일. 아뢰기를, “우찬성右贊成 이용원李容元이 소疏를 올려 비답을 받든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사정이 편안하지 않다고 하여 성 밖에 와 있으
면서 여전히 명령을 받들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로 헤아려 볼 때 매우 적절
하지 못합니다. 승선원에서 패牌를 보내 불러서 숙배肅拜하도록 엄하게 신칙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
다.

17일. 아뢰기를, “계하된 충청감사 박제순의 장본을 지금 보니, ‘적의


세력은 강대한데, 서울의 지원군은 아직도 지체되고 있고 감영에는 성첩城堞
도 없어, 백성들이 의심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순심巡審하는 규례에 따
라, 기미를 봐서 옮겨서 주둔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충청감
영은 양호兩湖의 요충에 끼어 있어서 소홀히 할 수 없는데, 관찰사가 이를 방
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옮겨서 주둔하기를 요청하니, 어떻게 여러 고을을
통솔하고 군대의 사기를 고무할 수 있겠습니까? 사체에 있어 대단히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우선 감봉 3등의 형전을 시행하고 더욱 단속하여 빠른 시
일 내에 토벌하라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라고 하였다.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18일. 아뢰기를, “충청감사 박제순이 전후하여 올린 장계의 등보를 연


이어 보니, 방어할 대책이 없는 상황을 진술하면서 ‘순무영의 선봉진先鋒陣50)
을 속히 내려 보내주시고,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 두 영營의 영관領官 가운데 청

50) 선봉진(先鋒陣) : 순무영에서는 현지 농민군 토벌을 위해 선발대를 보냈는데 좌선봉과


우선봉으로 각각 나누어서, 좌선봉장에는 이규태, 우선봉장에는 이두황을 임명하였다.
38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주淸州 등지에 있는 자들도 즉시 와서 도와주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


니다. 충청 감영은 요충지에 위치하여 방어를 소홀히 할 수가 없으니 순무
영에 속히 지시하여 빠른 시일 내에 가서 도와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2일. 아뢰기를, “영남과 관동에서 비도들의 소요가 아직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거창부사居昌府使 정관섭丁觀燮과 강릉부사江陵府使 이회원李會源을 모두
소모사로 차하하여 방어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
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충청감사 박제순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태안泰安
전 부사前 府使 신백희申百熙, 서산瑞山 전 군수前 郡守 박정기朴錠基, 종친부宗親府에서
파견된 김경제金慶濟를 돌보아주는 은전을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
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난리 통에 갑자기 목숨을 잃었으니 매우 참
혹하고 측은하지만 사망의 경위가 아직 명백하지 않습니다. 관찰사에게 상
세하게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게 한 뒤에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고, 시신을
운구하여 올 때 연로沿路에서 담군擔軍, 짐꾼들을 지정해 공급하고 특별히 마음
을 써서 호상護喪하도록, 두 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4일. 아뢰기를, “계하된 충청병사 이장회의 장본을 지금 보니, 아산牙山


․ 청산靑山 ․ 연기燕岐 3곳의 고을에서 무기를 빼앗긴 정황을 낱낱이 열거하면
서, 해당 수령들을 모두 죄를 지닌 채 업무를 보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습
니다. 수신帥臣이 수령을 파직하라고 논하는 것은 군율상 그럴 수 있으나, 죄
명을 지닌 채 일을 보도록 해달라고 곧장 요청하는 것은 사체를 크게 손상
시키는 것이니 깨우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해 수신을 엄중하게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계초존안 啓草存案 381

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본을 지금 보니, ‘김해 전전 부사
金海 前前 府使 민영은閔泳殷이 재임 시에 유용한 공전公錢 7만 5,348냥 5전 8푼을
추징하도록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공전을 유용하여 여러 해 동안 납부를 어긴 것은, 법과 기강으로 헤아려볼
때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법무아문에서 잡아다 구금하여 기한을 정
하여 받아내어 공납公納을 채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
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관찰사가 장계에서 충청병사 이장회를 파직시킬 것을 요청하
였습니다. 관찰사가 장계로 처벌을 논하는 것이 군율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
만, 행군이 지체된 것은 사정이 있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전투에
임박하여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5일. 아뢰기를, “계하된 강원 감사 김승집金升集의 장본을 지금 보니,


‘각종 환곡이 16만 석을 넘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모곡을 거두어 지출하기
에는 부족하여 작두전作頭錢51)을 더 받는 폐단이 생겨났습니다. 근래 엽전과
당오전當五錢을 서로 교환하여 사용함에 따라 아전들이 횡령을 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데, 그 폐해가 극에 달하였으므로 변통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모두 대납代納을 허락하고, 분할하여 결전結錢에서 이자를 거두어서 환곡의 폐
단을 바로 잡도록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
습니다. 지금 조세제도를 차례로 개혁[更張]하고 있으니 환정還政의 누적된 폐
단도 함께 바로잡는 것이 타당합니다.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51) 작두전(作頭錢) : 작전(作田)과 같은 전세를 받을 때 현물 대신 환가하여 돈으로 내게 하


는 것을 말한다.
38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강원 감사 김승집의 장본을 지금 보니, ‘춘천부春川府52)
가 영營으로 승격된 후에, 서울의 각 관사官司에 상납上納하는 것을 그대로 해
당 부府에서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총어영摠禦營에서 옮겨온 군보軍
保53)가 756명, 상번군上番軍으로 옮겨온 병조兵曹의 기병騎兵이 6명입니다. 이렇
게 많은 수를 각 고을에서 배정하여 바치도록 하는 것은 역役을 이중으로 부
담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춘천의 군포를 없애려면 서울의 각 관사에 상
납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
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춘천이 납부해야 할 것을, 관동의 여러
고을로 옮겨서 바치도록 하는 것은 역을 이중으로 부담하게 하여 백성들에
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견감해주는 것이 합당하니, 장계에서 요청한 대
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6일. 아뢰기를, “충청 병사 이장회를 파면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라고


한 일은, 전에 이미 초기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 충청 병사<이장회>
가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관찰사가 장계로 자신의 파면을 요청한 것에
대하여, 시끄럽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말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관찰사가 곧바로 수신帥臣을 파면하는 것이 본래 군율에 있다는 것을, 어찌
듣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국법[典式]에 완전히 어두우며 번거롭고 외람되기가
막심합니다. 당연히 잡아다가 처벌해야 하겠으나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므

52) 1888년 춘천을 유수도(留守都)로 승격하고 유수를 두었으며, 이곳에 이궁(異宮)을 짓도


록 하였다. 유수는 관찰사와 동격이다.
53) 군보(軍保) : 군역의 의무자로서 현역에 나가는 대신 정군(正軍)을 지원하기 위하여 편
성된 신역의 단위를 말한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83

로, 잠시 죄를 지닌 채 업무를 보도록 하고, 원래의 장계를 물리쳤는데 후원


喉院54)에서 규례에 따라 받아들인 것은 잘 살피지 못한 실수를 면하기 어렵
습니다. 당해 승선承宣을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7일. 아뢰기를, “방금 외무아문外務衙門의 보고를 보니, ‘일본공사日本公使


가 보내온 글 속에, 경상도 병참사령부慶尙道 兵站司令部의 보고를 들어 문경부사
聞慶府使가 전 교리前 校理 이용호李容鎬와 전 참군前 參軍 윤尹아무개가 왕명을 사칭
하여 난을 선동한 사실을 적발해 내었는데, 실은 그들이 범죄자의 우두머리
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보고 내용을 법무아문에 신칙하여 법에 따라 조사
하고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패악한 무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며 비도를 선동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랍습니다. 이 무리들
의 행적이 지금 이미 탄로가 났으니 속히 체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데 윤아무개는 윤갑병尹甲炳이라고 하므로, 전 교리 이용호와 농상아문 참의農
商衙門 參議 윤갑병을 모두 법무아문에서 잡아다 구금하여 엄히 조사한 다음 아
뢰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
에 비답을 받았다.

28일.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55) 김철규金澈圭의 장본을 지


금 보니, ‘비도들이 날뛰고 있어 이들을 토벌하려고 하나, 수영水營에 비축된
양곡이 없어 군량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부근 고을의 각종 명목의 쌀

54) 후원(喉院) : 승정원의 별칭. 승정원은 1894년 개편되어 이름을 승선원으로 바꾸고 궁내
부에 소속시켰고 다음해 비서감으로 바꾸었다.
55)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이끄는 농민군이 여수의 전라 좌수영
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순천 광양으로 후퇴하였다.
38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가운데 1천 석에 한하여 떼내어 지급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전라좌


수영은 호남의 요충에 위치하여 그 방어를 하루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
다. 광양光陽의 옛 둔전屯田의 곡식 가운데서 재량껏 가져다 군수에 보태어 쓰
고 나중에 보고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
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전에 나주목사 민종렬로 하여금 당해 진영鎭營의 장수들과 협
동하여 관하 각 고을을 토벌하고 위무하는 방도를, 형편에 따라 처리하도록
이미 계품啓稟하여 행회하였습니다. 호남 비도들의 소요가 갈수록 더욱 창궐
하고 있으나, 나주목은 줄곧 굳게 지키면서 우뚝하게 버팀돌이 되고 있다고
하니 듣기에 너무나 가상합니다. 홍주목사의 예에 따라 나주목사 민종렬을
호남초토사로 임명하여 호남 우도右道 각 고을을 지휘하도록 하여, 오로지 비
도들을 토벌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
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경상 감사 조병호가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무기를
잃어버린 선산부사善山府使 ․ 상주영장尙州營將 ․ 곤양군수昆陽郡守 ․ 독용별장禿用別將
을 담당 관서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므로 처벌을 하는 여러 날 동안 업무를 방치하게 되
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산부사 윤우식尹雨式 ․ 상주영장 민치
완閔致琓 ․ 곤양군수 송휘로宋徽老 ․ 독용별장 민치원閔致源을 모두 특별히 죄를 지
닌 채 업무를 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전에 영남의 진휼 물자를 탁지아문에서 방법을 강구하여 배
로 운반하도록 행회하였습니다. 지금 경상도 관찰사의 장본을 보니, ‘농사
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의 힘이 고갈되어 실제로 공납公納을 독촉하기 어
렵습니다. 다음번에 진휼하는 정사를 베풀 적에 전혀 대책이 없으므로 위의
진휼 물자를 속히 떼내서 지급하도록 묘당에서 품지하도록 분부해 주십시
계초존안 啓草存案 385

오’라고 하였습니다. 4년 동안 참혹한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므로, 백성


들을 보살피는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도의 작황이 비
록 큰 흉년이라고 하지만, 형편이 넉넉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각각 다르
므로 세액의 납부를 전부 면제해 주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현재 경비가 고
갈되었으므로 참으로 달리 대책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도내의 상납 가운데
전錢 30만 냥과 미米 1만 석을 특별히 떼내서 지급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적절
하게 헤아려서 나누어 주게 하여, 실질적인 혜택이 미치도록 함으로써, 남도
의 백성들에 대한 우리 전하의 걱정을 덜어드리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29일. 아뢰기를, “수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부채가 있는지 없는지


를 사실대로 보고하도록 한 정식定式이 있는데, 지금 경상감사 조병호의 계본
을 보니, 안동 전 부사安東 前 府使 홍종영洪鍾榮 ․ 대구 전 판관大邱 前 判官 신학휴申學
休 ․ 영덕 전 현감盈德 前 縣監 장췌식張萃植 ․ 의흥 전 현감義興 前 縣監 채경묵蔡慶黙은
공금을 유용하고 개인적인 부채를 진 것이 이렇게 많다고 합니다. 국법[典憲]
으로 헤아려볼 때 대단히 놀랍습니다. 법무아문에서 잡아다 구금하고 일일
이 추징하여 경상도로 내려 보내어 공납公納에 충당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관서 선유사關西 宣諭使 조희일趙熙一의 장본을 지금 보니,
‘관서 여러 고을들이 난리를 겪은 후에 견디기 힘든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
면서 군전軍錢과 결전結錢의 금년조 중에서 약간의 거두지 못한 부분과 내년의
각종 상납분 가운데 15만 냥을 면제해주도록 묘당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후에 피난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 도로에 연이어져 있어 매우 비참합니다. 이러한 때에 보살피
고 안정시키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고을의 형편과 백성들의
사정으로 보더라도 원래의 수량대로 징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장계에서 요
38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청한 대로 특별히 시행하도록 허락하고 관찰사에게 사실을 조사하여 감면


해 주게 함으로써,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며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함경 감사 박기양朴箕陽이 올린 재실분등災實分等56) 장계를
보니, 정평定平 등 8개 고을은 초실稍實로 분류하고, 고원高原 등 3개 고을은 지
차之次로 분류하고, 덕원德源 등 3개 고을은 우심尤甚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덕
원부의 포락浦落, 홍수 따위로 유실된 원전元田과 속전續田 7결 50부 8속은 특별히 조
세납부를 중지하고 내년에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총면적에 포함
시키겠다고 하였으며, 아울러 아래에 열거한 여러 조항을 모두 묘당에서 품
지하여 분부하도록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농사를 시작할 때 비가 내리고
햇빛이 따뜻하게 비쳐서 풍년을 기대하였으나, 가을이 되어 가뭄이 들었습
니다. 막바지에 날씨가 순조로워 비옥한 지역에서는 그런대로 작황이 좋았
으며, 서리가 늦게 내려서 도처에서 백성들의 마음이 조금 놓였습니다. 그
러니 전 도를 두고 말한다면 흉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연분年分을 3등급
으로 나눈 것은 당연히 적절하게 생각하여 정하였을 것이니 그대로 시행하
게 하십시오. 덕원부의 포락된 농토에 대하여는 이미 관찰사의 장계가 있었
으니 돌보아주는 정사가 없을 수 없습니다. 3년에 한하여 특별히 조세납부
를 중지시켜주고, 나머지 조항에 대해서는 전례가 많고 또 백성들의 힘을
덜어주는데 관계되므로, 모두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수원 유수 조병직이 올린 농사의 풍흉에 관한 장계를 보
니, 새로 재해를 입은 결結에 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기존에 전해오던 진결
陳結 99결 46부 6속은 조사하여 총면적에 채워 넣을 계획이고, 노비를 추문推

56) 재실분등(災實分等) : 흉년이 들거나 수확을 거둔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전세를 매


기는 제도.
계초존안 啓草存案 387

問하여 부채를 받아내는 일은 내년 가을까지 막아주도록 묘당에서 품지하여


분부하도록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비가 내리기를 바라면 비가 와서 농부들
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으며 서리가 늦게 내려 결실을 잘 맺도록 하였습니
다. 들판에는 기장과 벼가 풍성하고 마당에는 바구니와 수레에 곡식이 가득
합니다. 이처럼 복이 내려 상서로움이 나타난 해에 거론할 만한 재결災結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존에 전해오던 진결에 대하여 경작 여부를 조사하
여 총면적에 다시 포함시키는 것과, 노비를 추문하여 부채를 받아내는 일을
막아달라는 것은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1월 [十一月]

초 1일. 아뢰기를, “각 도의 조세를 모두 대전代錢으로 마련하였으니 전


운轉運, 물자수송에 관한 일은 논의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호남총무관湖南摠務
官 이성렬李聖烈과 영남총무관嶺南摠務官 정병하鄭秉夏를 모두 감하減下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관서關西는 일본군의 주둔지로 응대할 일이 매우 많다고 합니
다. 선천부사宣川府使 권영진權濚鎭을 반접관伴接官으로 임명하고, 전 사과前 司果 김
응옥金應玉을 반접종사관伴接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전념하여 맡아보도록 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2일. 아뢰기를, “전 교리前 校理 송정섭宋廷燮57)이 경향 각지에 출몰하며


왕명을 사칭하여 난을 선동하고 있다고 하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법무아문

57) 송정섭(宋廷燮) : 흥선대원군 계열로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을 들고 농민군 지도


자와 밀통했다고 전해진다. 전주등지에서 전봉준과도 만났다 한다.
38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에서 잡아다 엄히 조사하여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듣건대, 황해도 감영58)에서 지금 비류들이 창궐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관찰사가 장계로 보고하지는 않았으나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
다. 순무영에서 빨리 황해도의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에 신칙하여 방법을 강구
하여 토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
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어리석은 비류들은 바로 보잘것없는 좀도둑인데, 가는 곳마다
걸핏하면 소란을 피우니 매번 분통이 터집니다. 지금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이
승우李勝宇의 치계馳啓를 보니, 의리를 내세우고 적개심을 발휘하여, 여러 고을
을 선도하여 군사의 위세를 떨치고 3차례의 토벌로 적의 괴수를 잡아 죽였
으니, 대단히 감탄할 일입니다. 초토사 이승우를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
십시오. 장수와 군졸들이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
쓰고 공을 세웠으니, 장려하는 조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장관將官 가운데 실
직實職을 역임한 자에게는 수령 자리가 나는 대로 조용調用하고, 실직이 없는
자들에게는 모두 무관직武官職의 낭관郎官의 품계를 주며, 나머지 전투에 참가
한 군졸들에게는 전錢과 목木을 넉넉하게 나누어 주되, 공납公納 가운데서 회
감會減한 뒤에 보고하게 하며, 각별히 신칙하고 단속하여 나머지 잔당들을 깨
끗이 소탕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5일. 아뢰기를, “새로 임명한 황해감사 조희일趙熙一에게 편리한 길로


빨리 부임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밀부密符는 전임 감사가 차던 것을 그대로

58) 황해도 감영(黃海道 監營) : 황해도 일대 농민군이 해주의 감영을 공격해 10월 6일 점령
하였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89

수여하고,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는 승선원에서 작성하여 안보安寶한 뒤에, 금군


을 정하여 파발로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
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6일.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남원부사 이용헌이 도중에 군사를 모


집하다가 비도에게 붙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
니다. 우뚝한 충정과 탁월한 절개는 사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하니, 특별히
군무아문 협판軍務衙門 協辦을 추증하고 그 아들에게 관직을 수여하십시오. 시
신을 고향으로 옮겨 올 때 연도에 상여꾼들을 특별히 공급하고, 거쳐 가는
각 고을에서 주의를 기울여서 호상護喪하도록 각 해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
며,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사를 치른 뒤에는 별도로 제사를 지내줌으로써 조
정에서 기리고 보살펴 주는 은전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순무영의 첩보를 보니 소모관 맹영재의 보고를 낱낱이
열거하면서, 이번에 비도들을 토벌할 때 전후로 공을 세운 의사義士들을 장려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의리를 떨쳐 용감하게 적도들을 소탕하
였으니 대단히 가상합니다. 유학幼學 최태헌崔台憲 등 7인에게 우선 낭관郎官의
품계를 수여하여 재능에 따라 등용하고, 포군砲軍 고치백高致伯 등 7인에게는
모두 체가帖加하여 조정에서 표창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
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초 7일. 아뢰기를, “지금 경기감사 신헌구가 올린 연분年分 장계를 보니,


연분을 3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거론하지 않고, 갑술년1874에 태胎59)를 봉안

59) 갑술년 태(胎) : 고종 11년 2월 원자(뒤에 순종)가 태어나 태봉(胎封, 태를 묻은 곳) 경비


를 염출한 것과 관계되는 사실을 말함.
39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할 때 과천果川 등 3개 고을에서 전부터 내려오던 허결虛結60) 358결 81부 1속


에 대하여 5년 동안 세를 감면해주었는데, 그 기한이 만료되었으나 모두 하
천의 유실로 포락浦落되어 경작할 길이 없으니 기한을 다시 연장해달라고 하
였습니다. 또 아래에 언급한 여러 조항도 함께 묘당에서 아뢰어 처리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도내 환곡 중에 장부에 거짓 기록으로만 남아있
어 징수할 길이 없는 경우는 모두 탕감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금위영禁衛
營과 어영청御營廳의 두 군영이 전에 강화도에 보관해 둔 군량용의 쌀과 콩 및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두 군영의 장초군壯抄軍, 군인이 될 장정을 뽑는 군사과 아병牙
兵, 대장의 휘하에 있는 병정 등의 신미身米도, 전례에 따라 대전代錢으로 징수하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셋째, 각 아문과 궁방의 둔토屯土는 정해진 총액에 구애받
지 말고 실상에 따라 거두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넷째, 노비를 추문推問, 추
구하여 문책하여 부채를 추징하는 일을 내년 가을까지 막아달라는 것입니다. 비
와 바람이 순조로워 가뭄과 수해의 근심이 없었으며 골짜기와 들에서 농사
일에 힘을 써서 모두들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가을에 가뭄이 약간 들었으
나 마지막에는 추수를 잘 하였으며, 늦은 서리와 따가운 햇볕이 곡식을 잘
여물게 하여 마침내 풍년이 들었습니다. 지금 연분을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온 도가 풍년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천 등 3개 고을의 허결虛結
은 백성들의 고통과 관계되므로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당해 연도에는 견
감해 주고, 환정還政은 중요한 문제여서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렵지만 한갓 거
짓 장부만 가지고 있어서 백성들에게 고통이 되므로, 다른 여러 조항과 함
께 모두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
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영남 비도들의 소요가 아직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인동 부사 조

60) 허결(虛結) : 경작지가 없는 농민에게 토지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 전세를 물리는 부정행
위. 결수를 늘리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91

응현趙應顯을 토포사로 임명하고, 하동 부사 홍택후를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오로지 토벌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탁지아문의 보고를 보니, ‘평창군수平昌郡守 심의평沈宜平이
전에 재령군수載寧郡守로 있을 때 공금을 횡령한 액수가 많으니 추징하도록 하
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국법으로 헤아려 볼 때 그냥 버려둘 수가 없
으니, 평창 군수 심의평을 파면하고 법무아문에서 잡아다가 횡령한 돈을 추
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
을 받았다.

초10일. 아뢰기를, “지금 법무아문의 보고를 보니, 현재 구금되어 있는


죄인 이용호와 송정섭의 정절情節은 분명히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나 공초에
서 줄곧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엄히 조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두
형벌로 추문推問하여 사실을 캐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1일. 아뢰기를, “지금 수원 유수 조병직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동학東學의 괴수를 잡아 바친 본영本營의 집사 엄태영嚴泰永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적합한지의 여부를 당해 아문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어 비도의 괴수를 잡아다 바쳤
으니 대단히 가상합니다. 격려하고 권면하는 뜻에 있어서 마땅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 엄태영을 좋은 지역의 변장邊將으로 차송하고, 그가
통솔하던 아병牙兵들은 그곳 수령이 후하게 상을 내리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강원 감사 김승집이 올린 연분 장계를 보니, 새로 재해를
입은 결結에 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원주原州 등 18개 고을은 초실稍實로 분
39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류하고, 영월寧越 등 5개 고을은 지차之次로 분류하고, 평해平海 등 2개 고을은


우심尤甚으로 분류하였으며, 아래에 언급한 여러 조항과 함께 모두 묘당에서
품지하여 분부하도록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강릉 등 9개 고을의 대동
포大同布와 각종 군포軍布를 모두 대전代錢으로 납부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각 군문軍門의 둔세屯稅, 둔전의 세와 각 궁방의 면세 토지는 현재 경작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세를 거두도록 엄히 신칙해 달라는 일입니다. 셋째,
노비를 추문하여 부채를 추징하는 일을 내년 가을까지 막아달라는 것입니
다. 씨를 뿌린 뒤에 비가 내렸으며, 때에 맞추어 열매가 맺고 서리는 늦게 내
렸습니다.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여 온 도의 사람들이 규벽奎璧61)을 바쳐 제
사를 지내자, 바로 단비가 내려 온갖 곡식이 바구니와 수레에 가득찰 것임
을 미리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전 도의 농사를 논한다면 실제로 큰 풍년일
것입니다. 3등의 연분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적절하게 생각하여 정하였을 것
이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십시오. 대동포와 군포를 대전으로 납입하도록 허
용하는 문제는 지금 조세제도를 차례로 개혁하고 있으니, 탁지아문에서 가
격을 정하여 마련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 밖의 여러 조항은 대부분 전례
가 있으므로 장계의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였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3일. 아뢰기를, “지금 평안감사 김만식이 올린 연분 장계를 보니, 연


분을 3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애당초 거론하지 않고, 아래에 언급한 여러 조
항을 묘당에서 품지하여 분부하도록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각 고을과
진鎭의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화전火田 가운데 4분의 1은 조세를 임시로 감면
해주고, 진보鎭堡에 급대給代하는 것의 부족분은 호戶와 결結에 따라 배정하여

61) 규벽(奎璧) : 제사지낼 때 신(神)에게 바치는 구슬로 󰡔시경(詩經)󰡕의 대아(大雅) 운한


(雲漢)에서 나온 말이다. 가뭄으로 천지와 산천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93

편리한 대로 구획區劃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새로 개간하거나 다시


경작하게 된 진전陳田과 화전으로 총액에 포함된 부분은 근년의 예에 따라 징
수를 정지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셋째, 각 궁방과 각 아문의 둔토屯土는 사실
에 준하여 조세총액에 포함하되, 그 가운데 내각內閣의 둔토는 별도로 관리를
파견하여 적간摘奸, 부정을 캐는 것하여 억울하게 징수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입
니다. 전쟁으로 백성들이 겁을 먹어 처음에는 농사를 제때에 짓지 못할까
걱정을 하였으나, 단비가 넘쳐흘러 비옥한 지역에서는 풍년을 예상할 수 있
었습니다. 남과 북의 농사를 헤아려보면 비록 낫고 못한 차이는 있지만, 골
짜기와 들판의 여러 사정을 두루 살펴보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할 수 있습니
다. 3등급의 구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고을의 보고가 없었기 때문
입니다. 온 도가 동일하므로 농사의 형편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덧붙인 여
러 조항은 너그럽게 조처하는 것이 합당하므로 모두 그대로 시행하도록 허
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
다.
아뢰기를, “지금 호연초토사 이승우의 치계를 보니, ‘의분을 떨쳐 무리들
과 맹서를 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적의 괴수를 죽여, 비류들이 소문을 듣고
여러 고을로 달아났으며 저들을 소탕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에 내리신 전하의 하교는 지극히 간곡하여, 난리를 만나 집이 불탄 민호들
에게 공전公錢을 나누어주어 안정을 찾도록 하였으며, 힘껏 싸우다 죽은 사람
들에게는 그 공을 기려서 장려하고 구휼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덕음德音이
미치는 곳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감복하여 삼가 우러러 칭송하는 마
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출정한 군관 김병돈金秉暾과 이창욱李昌旭은 먼저 뛰
어나가 적을 꾸짖으며 대항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으며, 주홍섭朱弘燮과 주
창석朱昌燮은 형제가 목숨을 같이하여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절의를 지켰으
며, 한기경韓基慶은 16살의 어린나이에 용기를 발휘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죽
었으니 창을 들고 사직을 지킨 것이 왕기汪錡62)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39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들 모두는 풍교風敎를 세워 세상을 면려하기에 충분합니다. 김병돈은 전에


실직을 역임하였으므로 특별히 군무아문 참의를 추증하고, 이창욱 ․ 주홍섭 ․
주창섭은 모두 특별히 군무아문 주사主事를 추증하고, 한기경63)은 특별히 정
려旌閭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그 아비를 돌보아주어 종신토록 복호復戶64)하고,
나머지 전사한 군졸들은 넉넉하게 도와주어 장사지내주며 생전의 신역身役 ․
환곡還穀 ․ 군포軍布를 탕감해 주고, 부상당한 자들은 각별히 치료해주도록 해
도의 도신과 초토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김산金山, 현재의 김천은 양남兩南,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충에 위치하므로
지금과 같은 때에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전 승지 조시영曺始永을 소
모사로 차하하고 금산 군수 박준빈朴駿彬을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
금 나누어서 방어하도록 하십시오. 조시영은 전에 흥양 현감으로 재임 시에
관아를 비워 무기를 분실한 일로 현재 잡혀 심문 중에 있으니 특별히 용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14일. 아뢰기를, “전라도 가도사假都事 정해원鄭海遠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고부군수古阜郡守 양필환梁弼煥은 비도에게 붙잡혀 결국 죽임을 당하여서
매우 불쌍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의리를 내세워 적을 꾸짖었다고 하니 뛰
어난 절개가 가상합니다. 표창하고 돌보는 은전이 없을 수는 없으니, 특별
히 군무대신 협판을 추증하고 시신을 운구하여 올 때 담군擔軍, 짐꾼들을 지급

62) 왕기(汪錡) : 춘추 시대 노(魯)의 아이로서, 제(齊) 나라와의 전투에 참가하여 싸우다가


희생되었다. 노나라에서는 특별히 성년(成年)의 예로써 장례를 지내 주었다.(󰡔춘추좌
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1년 조 참조)
63) 한기경(韓基慶) : 현재 홍성 오관리에 충렬비가 세워져 있다.
64) 복호(復戶) : 군인 양반 또는 궁중 노비에게 조세나 국가부담을 면제해 주는 특전.
계초존안 啓草存案 395

해주고 거쳐 가는 각 고을에서 특별히 마음을 써서 호상護喪하도록 각 그 도


의 도신감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영남 위무사慰撫使의 전보를 보니, 진주목사의 병이 위중


하여 업무를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중요한 요충지를 잠시도 방치해 둘 수
가 없으므로 진주목사 유석柳王奭을 고쳐 임명하고 그 대임代任으로 대구 판관
지석영을 옮겨서 임명하여 편리한 길로 빨리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다.”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규환李圭桓과 동래부사東萊府使 민영돈閔泳敦
이 모두 글을 올려 신병을 이유로 직무의 교체를 바라고 있으니 모두 고쳐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
았다.
아뢰기를, “계하된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본을 지금 보니, ‘문경부사 김정
근金禎根은 성실하게 정사를 행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잘 돌보아주었는데 이제
임기가 만료되었으니 특별히 유임하도록 해주시고, 포군 100명을 더 충원하
고 군량을 마련해주도록 묘당에서 품지하여 분부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수령은 성을 축조하며 무기를 수선하고, 군사들을 독려하며
적들을 막아내었습니다. 군사업무가 복잡다단한데다 백성들이 유임시켜 달
라고 하니 장계의 요청대로 유임시키고, 군수물자에 관한 일은 그곳 부府의
결세結稅 중에서 떼내어 붙여주되 돈과 쌀 중에서 어느 것으로 조달할 것인가
는 나은 쪽으로 조처하여 다시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6일. 아뢰기를, “계하된 황해 전 감사 정현석의 장본을 지금 보니, 강


령현감康翎縣監 유관수柳灌秀와 송화현감松禾縣監 조중식趙重軾이 무기를 잃어버린
39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일 때문에 처벌을 논하였습니다. 당연히 법에 따라 파직하고 잡아와야 하지


만, 이러한 때에 고을 수령을 처벌할 동안 직무를 방치하는 것은 대단히 소
홀히 하는 처사입니다. 특별히 죄를 지닌 채 직무를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7일. 아뢰기를, “황간현감黃磵縣監 송창로宋昌老 ․ 평택현감平澤縣監 이종욱李


鍾郁 ․ 회덕현감懷德縣監 이규서李圭瑞 ․ 보은군수報恩郡守 이규백李奎白 ․ 옥천군수沃川郡
守 김동민金東敏이 무기를 잃어버린 일 때문에, 전에 청곤淸梱, 충청 병사이 파직을
논하였습니다. 지금 그곳 도 관찰사의 장계를 보니, 각 고을에서 무기를 잃
어버린 일은 용서해줄 여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직무를 방치하는 것은
대단히 소홀히 하는 처사이니, 위의 5개 고을 수령들을 장계의 내용대로, 모
두 특별히 죄를 지닌 채 직무를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궁내부宮內府의 초기를 보니, ‘전라 가도사假都事의 장계에,
경기전 영慶基殿 令 김동석金東錫이 갑자기 비적들의 소요에 직면하여 단신으로
적을 막아내었으며 위졸衛卒들을 단속하고 자신의 봉록으로 그들을 위로하
며 도와주었으니 장려하고 등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묘당에서 아뢰어 처
리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으며, 전하께서는 이를 윤허하셨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며 방어하고 보호하였으니 그 정성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경
기전 영 김동석에게 승진시켜 임명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18일. 아뢰기를, “보은은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위치하므로, 형편에 따


라 방어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 고을 군수 이규백李奎白을 조방
장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
답을 받았다.
계초존안 啓草存案 397

20일. 아뢰기를, “내년 을미년1895년의 역서曆書를 현재 개국기년開國紀年65)


으로 간행하였습니다. 이번 동지부터 종묘 ․ 사직 ․ 전殿 ․ 궁宮 및 각 능陵과 원
園의 제향祭享 ․ 축식祝式을 모두 여기에 의거하여 바로잡고, 축문祝文 속에도 그
내용을 알리는 글을 더 적어 넣도록 궁내부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번역 : 장승현>

65) 개국기년(開國紀年) : 조선왕조가 건국한 해를 기준으로 연대를 표시하는 것. 을미년을


개국 504년으로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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