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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일기 沙亭日記

김영식金永植(1849~1924)이 1894년 평안도平安道 일대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淸日戰爭의 실상을 수문수견隨聞隨見에 따라 적은 일기이다.
김영식金永植은 충주군忠州郡 거곡면居谷面 상사정上沙亭(현재 음성군陰城郡 감곡
면甘谷面 사곡리沙谷里 사장골)에 사는 광산김씨光山金氏 가문家門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중재重齋로 전우田愚와 박기화朴基和에게서 수학受學한 전형적 척사파
斥邪派 유림계열이다. 그는 한때 과거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도학에 잠심했
다. 그리하여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도 여러 차례 올렸고 또 명성황후가
피신하며 머물렀던 장호원長湖院의 은신처를 모궁某宮 모전某殿으로 정명定名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1892년 동문수학同門受學의 동료요 종인宗人인 김일식金一植이 압록
강 아래 신도첨사薪島僉使로 부임할 적에 동행하여 1년 4개월을 타향他鄕에서
보냈다. 그는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때에 서상렬徐相烈의 소모참모召募參謀가 되
기도 했고 1905년에는 새로운 의병모의義兵謀議에 가담했다가 발각되기도 하
였고 그 후에도 유림운동儒林運動 또는 반일운동反日運動을 벌였다.
『사정일기沙亭日記』는 갑신년(1884)에 시작하여 갑자년(1924)까지 40여
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전 5권으로 되어 있는데, 갑오
년 부분은 권3에 수록되어 있다. 계사년 부분에서 보은집회報恩集會 사실이 기
술되지 않은 것은 그 당시 신도薪島에 있었던 때문인 듯하다.
계사년(1893) 5월초 서울을 출발해서 평안도平安道에 도착하여 갑오년말甲午年
末 귀가 때까지는 관서일기關西日記 라고도 하였는데, 여기에는 갑오년분甲午年
分만 수록했다. 갑오년 앞부분은 일상의 사실을 적었으나 당시 평안도일대
해제

의 분위기와 관가의 동정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어 그대로 수록하기로 하였


다.
이해 5월 이후 남쪽 동학농민혁명의 전문傳聞을 기록하였고 민영준閔泳駿이
유배 도중 도망한 사실을 정확히 적고 있다. 그리고 7월 이후 청일군淸日軍의
아산일대 격전과 청군의 압록강 도강渡江, 청군淸軍의 토색, 일대 인민의 피란
등을 기술하였다. 또 일본군에 동원된 양복군粮卜軍이 수천 명이라는 사실도
밝히고 그가 귀로에 오를 적에 일본군의 횡포가 없었음도 부기附記하고 있
다. 그가 귀가할 적에 충주 등 농민군의 활동과 자기 가정의 피해 등을 단편
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자료는 1894년 당시 평안도 일대의 사실과 청일전쟁 당시의 과정을 민
간 차원에서 기술한 것으로 대단히 희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평안도 지방
의 관계사실을 적은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 영상永相은 율산일기栗山日記 를 남겼는데 4년분이 수록되어 있
다. 이 일기 끝부분인 계사년(1893)에 보은집회 사실을 기록하면서 같은 해 4
월 15일자에 동학東學측의 요구조건은 ① 척왜양사斥倭洋事 ② 민씨축출사閔氏逐
出事 ③ 호포혁파사戶布革罷事 ④ 당오혁파사當五革罷事 ⑤ 각읍세미정지사各邑稅米精持
事 ⑥ 착목면불통외국물색사着木綿不通外國物色事 등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사실은 그동안 보은집회가 교조신원敎祖伸 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요구
만 있는 것으로 본 관점에 대해 일대 수정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 율산일기栗山日記 는 동학東學의 활동을 별로 풍부히 기재
치 않았기 때문에 위의 사실만 알리고 여기에 수록하지 않기로 했다.
이 두 원본은 김영식金永植의 친손 김용준金容駿이 보관하고 있다.
416 청일전쟁 관련 자료

사정일기
沙亭日記

성상31년 광서20년 갑오 [聖上三十一年 光緖二十年 甲午]

정월 [正月]

초 1일. 기묘[己卯]
맑고 따뜻함. 여러 장리將吏들이 아침에 와서 문안하였다. 주령主令1)이 달
력 하나씩을 나누어 준다고 하였다. 황 단천黃端川, 단천수령을 지낸 황씨를 말함. 아래도 동
일이 아들을 데리고 왔다. 황 참봉黃參奉의 아들 형제가 들어와서 만났는데 모
두 단아하고 사랑스러웠다. 망건식網巾飾을 황령黃令, 황 단천을 가리킴에게 맡겼다.

초 2일. 밤에는 눈이 내렸으며, 맑고 따뜻함. 고 중군高中軍과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김아金雅2)가 용천龍川에서 돌아왔다. 평양平壤의 가마꾼이 출발
하였으며, 주령은 그 편에 감사와 막중幕中3)에게 편지를 부친다고 하였다.

1) 주령(主令) : 손님이 정3품 이상의 위치에 있는 주인을 높여 부르던 말로, 여기서는 신도


진첨절제사(薪島鎭僉節制使) 김일식(金一植)을 가리킨다. 이 글의 저자인 김영식(金永
植)은 이때 동문수학한 동료이자 종인(宗人) 김일식이 신도진첨절제사로 부임할 때 동행
하여 함께 생활하며 막하(幕下)로 일을 보았다.
2) 김아(金雅) : 아(雅)는 미칭.
3) 막중(幕中) : 비장(裨將). 감사의 잡무를 보는 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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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3일. 맑고 따뜻함. 각 동의 존위尊位와 여러 손님이 왔다가 갔다. 이군


李君도 왔다.

초 4일. 맑고 따뜻함. 고 함종高咸從과 김제원金濟元, 황 단천, 이인건李仁鍵이


모두 왔다가 갔다.

초 5일. 흐리고 따뜻함. 김아金雅가 나에게 붓 한 자루를 주어 감사하였


다. 이군李君이 와서 공부하였다.

초 6일. 맑고 따뜻함. 이방吏房이 황가黃哥의 일을 구두로 보고하였다. 최


崔는 용천龍川으로 잡혀 갔다고 하였다.

초 7일. 맑고 따뜻함. 주령이 박천군수博川郡守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였


다. 신 첨지申僉知와 고 함종,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초 8일. 맑고 따뜻함. 고 함종 소유의 회남자淮南子 를 어제 돌려보냈다.


오위장五衛將 김경달金景達이 와서 잤다. 신학수申學洙가 와서 잤다.

초 9일. 맑고 따뜻함. 뒷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빙산氷山이 만리에


걸쳐 있었다.

초 10일. 맑고 따뜻함. 김아金雅가 용천으로 갔다. 조용주趙用周가 왔다가


갔다. 갓에 옻칠을 새로 해 와서 값으로 5전錢을 지불하였다. 새로 부릴 계집
종 월선月仙이 들어왔다. 홍 훈장洪訓長이 왔다가 갔다.

11일. 맑았다가 흐림. 새 옷을 입었다. 이군이 연일 와서 공부를 하였으


418 청일전쟁 관련 자료

나 내일은 동생의 혼사 때문에 간다고 하였다.

12일. 아침에 안개가 끼며 맑고 따뜻함. 간밤에 눈이 왔다. 황 단천과


고 함종이 왔다가 갔다. 박석준朴石俊이 왔다가 갔다. 김아金雅가 용천龍川에서
왔다. 감사監司의 편지가 주령에게 왔는데, 2월의 동궁東宮 망삼십望三十4) 연회
용으로 명주 40필을 복정卜定5)한다는 내용이었다. 쇠잔한 진鎭에서 일이 매
우 난처하게 되었다.

13일. 맑고 따뜻함. 명주는 주령이 용천龍川에 편지를 보내어 부탁하였


다고 한다. 저녁에 주령과 함께 달빛을 받으며 황 단천과 고 함종의 집으로
갔다가 닭이 운 뒤에 돌아와서 잤다.

14일. 맑고 따뜻함. 오늘 저녁은 바로 대보름날이어서 고향 생각이 더


욱 간절하였다.

15일. 맑고 따뜻함. 고 함종이 와서 내일 서울로 길을 떠난다고 말하였


다. 그래서 간동間洞에 편지를 부치고 집에 보내는 편지도 부쳤다. 주령도 서
울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평아平娥가 와서 조가趙哥를 데리고 갔다. 주령은
그 편에 감영監營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고 하였다. 황 참봉과 이변李弁이
왔다가 갔다.

16일. 맑고 따뜻함. 황 단천이 와서, 그의 족인族人 황가가 방송放送되었으

4) 동궁(東宮) 망삼십(望三十) : 순종은 1874년이다. 곧 이 해 탄신일이 ‘망삼십’이 되는 달


이다. 망삼십은 30세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21세를 가리킨다.
5) 복정(卜定) : 정기적으로 징수하던 공물(貢物) 이외에, 필요에 따라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에 그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던 일.
사정일기 沙亭日記 419

며, 황 소년黃少年이 왔다가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17일. 맑고 따뜻함. 김아金雅가 용천으로 가기에, 오 생원吳生員에게 보내


는 편지를 부쳤다. 돈 20냥兩을 얻어 수집사首執事, 일을 맡아 보는 우두머리 관원에게 맡
겼다.

18일. 맑고 따뜻함. 새벽에 김아金雅가 돌아왔다. 용천부사龍川府使의 편지


가 도착하였는데, 물목 내역을 바꾸는 일이 실패하였다. 주령은 즉시 답장
을 보냈으며, 곧장 김학린金鶴 을 의주로 보냈다. 주령은 길인범吉仁範에게 패
문牌文6)을 부쳐 원보元寶7) 2개를 사서 보내도록 부탁하였다. 뒷산에 올라 바
다를 바라보니 얼음이 점차 풀리고 있었다. 용천의 이아 신묵李雅信默8)이 왔
다가 갔다.

19일. 맑고 따뜻함. 새벽에 김아金雅에게 용천의 환간換簡9)을 가지고 의


주로 발송하도록 하였다. 황 단천과 김인건李仁鍵, 김중군金中軍이 왔다가 갔다.
망건식網巾飾이 도착하였다.

20일. 맑고 바람이 붐. 김학린이 길인범의 고목告目10)을 가지고 아침에


의주에서 왔다. 물목 내역을 바꾸는 일이 또 실패하였다. 즉시 급족急足11) 재

6) 패문(牌文) :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내리는 통문. 공문의 성격임.


7) 원보(元寶) : 말굽 모양으로 만들어진 은덩이. 말굽은이라 부르는데, 중국에서는 화폐처
럼 사용했다.
8) 이아 신묵(李雅信默) : 아(雅)는 상대방에 대한 미칭.
9) 환간(換簡) : 먼 곳의 사람과 금전 거래를 할 때에, 지정된 제삼자에게 돈을 주라고 써 보
내던 편지. 받는 사람은 편지에 적힌 액수대로 치르되, 치를 수 없을 때는 그냥 ‘퇴(退)’ 자
를 써서 돌려보냈다. 환표(換標)라고도 한다.
10) 고목(告目) : 각사(各司)의 서리 및 지방 관아의 향리가 상관에게 공적인 일을 알리거나
문안하는 일 또는 그때에 올리던 간단한 문서 양식.
420 청일전쟁 관련 자료

신才信을 평양으로 보내어 어떤 방식으로든 주선하여 탈을 면하게 해달라고


막중幕中에게 편지를 부쳤다고 하였다. 잡기雜技에 관한 일은 오늘부터 명령
을 철회한다고 하였다. 이군이 날마다 병을 무릅쓰고 와서 뵈었다.

21일. 맑고 따뜻함. 경주인京主人 김명석金命錫이 와서 평양에서 물목 내역


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령이 다시 막중에게 편지를 부쳤다. 초시初
試 김제원金濟元이 왔다가 갔다. 이흥보李興甫에게 내일 새벽에 출발하라고 분부
하였다고 한다.

22일. 맑고 바람이 붐. 김아金雅가 의주에서 왔다. 길인범이 원보元寶 2개


를 사서 보냈으나 이제는 소용이 없어서 도로 그의 형 길인덕吉仁德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신용환申用桓과 송신옥宋信玉, 이 감찰李監察이 왔다가 갔다. 이흥보
李興甫가 오늘 새벽에 감영으로 출발하였다. 송신옥이 담배 2줌을 보내 주었
다.

23일. 맑고 따뜻함. 고 중군高中軍이 왔다가 갔다. 신도薪島 중군中軍의 고목


告目이 왔는데, 김 중군金中軍의 혼수를 보내 왔다고 한다. 주령이 중화中和의 오
태영吳台泳에게 편지를 부쳤다고 하였다.

24일. 맑고 따뜻함. 김아金雅와 여러 날을 함께 머물다가 오늘 비로소 헤


어지니 섭섭하였다. 붓 값 200냥을 바꾸어서 간다고 한다. 김대경金大敬이 왔
다가 갔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25일. 맑고 따뜻함. 뒷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니 얼음이 녹아 떠


다니고 있었다. 서전書傳 10권을 모두 읽었다.

11) 급족(急足) : 급한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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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맑고 따뜻함. 고 중군高中軍이 왔다가 갔다. 동네에서 성황제城隍祭


를 지내면서 소를 잡아 소가죽 1조를 들여왔다.

27일. 맑고 따뜻함. 김제원이 편지를 보내와서 중군中軍의 일을 부탁하


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장이주張履疇와 그의 친족이 함께 왔다가 바로 갔
다. 신용환이 왔다가 갔다. 섬의 진속鎭屬12)들이 모두 나왔다.

28일. 맑고 따뜻함. 육지와 섬의 관속官屬들이 회합을 하니 마치 웅장한


고을과 같았다. 섬에서 야견사野繭絲, 멧누에고치실 1통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호인
胡人, 만주에 사는 북방민족. 곧 여진족들의 뱃짐이 전복하여 흘러내려온 것이다. 박석준
朴石俊이 왔다가 갔다. 이흥복李興福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 또 편지가 도착하였
다. 오늘 저녁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삿날이어서 슬픈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고향 생각이 갑절이나 간절하였다. 오늘은 경칩驚蟄이다.

29일. 맑고 따뜻함. 섬의 진속鎭屬들이 하직하고 섬으로 들어갔으며 더러


남는 자도 있었다. 이한종李漢宗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김제원의 편지가
와서 답장을 보냈다. 김 중군金中軍이 들어왔다.

2월 [二月]

초 1일. 무신[戊申]
맑고 따뜻함. 김제원이 주령의 비위를 거슬렀는지라 와서 사과하고 갔다.
남의 무덤을 파헤친 죄인 매장梅長 김金가 두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가 중방中
房13)이 술에 취해 놓치는 실수를 하여 책망을 당하였다고 한다.

12) 진속(鎭屬) : 각 진영(鎭營)에 속한 구실아치.


13) 중방(中房) : 고을 원의 시중을 들던 사람.
422 청일전쟁 관련 자료

초 2일. 맑고 따뜻함. 섬의 수임首任들이 모두 들어갔다고 한다. 신 첨지


가 왔다가 갔다. 상서尙書 서경 의 별칭 10권을 모두 읽었다. 아전 원元씨에게
서 수호지水滸志 20권을 가져왔다. 감영으로 갔던 하인 흥보興甫와 재신才信
이 돌아왔다. 감사와 막중의 편지를 보니, 복정한 명주 가격 600냥과 새로
정한 절목節目의 상납전을 잘 납부하라고 하였으며, 황주黃州와 중화中和14)의
민요가 매우 심하다고 하였다. 김아金雅가 필공筆工의 밥값 4전을 확실하게 전
달하기 위하여 신 첨지에게 내어주었다.

초 3일. 맑고 따뜻함. 김가가 홍洪가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은닉하


였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다. 황 단천과 김 중군이 왔다가 갔다. 아전 박도겸
朴道兼이 와서 아뢰기를, 시신을 은닉한 사건은 모두들 홍가를 의심한다고 하
였다. 아래에서부터 은밀하게 염탐하였다고 한다.

초 4일. 맑고 따뜻함. 오위장 김경달이 왔다 가면서 세금을 감면해 달라


고 부탁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박도겸이 시신을 은닉한 사건은 김가의 농
간이라고 은밀히 아뢰었다. 수호지 를 읽기 시작하였다.

초 5일. 맑고 따뜻함. 박도겸으로 하여금 수감된 죄인 김가를 데리고 가


서 시신을 찾도록 하였다. 김가와 홍가 양측이 사적으로 화해하였다고 하였
다.

초 6일. 맑고 따뜻함. 김가와 홍가 두 사람이 사적으로 화해하고 순조롭


게 끝내었다고 하였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14) 황주와 중화의 민요 : 1893년(계사년) 가을에서 겨울까지 각지에서 민요가 일어났다. 북


쪽의 종성과 성천에 이어, 황주 중화 청풍 개성 재령 등지에서 백성들이 관속의 집을
파괴하거나 폐막을 시정해 달라고 관정에 돌입했다( 고종실록 계사년 11월, 12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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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7일. 맑고 따뜻함. 경주인15) 김명석이 왔다가 갔다. 황 참봉이 왔다


가 갔다. 오위장 김경달이 왔다 갔는데, 마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달포 전에
전錢 10냥을 이방에게 보냈다고 하였다. 통인通引 석석石錫이 죄를 지어 경외境
外로 추방되었다고 하였다. 섬의 장리將吏가 왔는데,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가
지고 왔다.

초 8일. 흐리고 따뜻함. 섬의 김장원金長元과 김옥련金玉連을 심문하였다.


옥련은 곤장을 맞고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다. 일전에 남의 무덤을 파헤
쳤던 김이용金理用이 와서 문안하고자 하였으나 밖에서 꾸짖어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초 9일. 아침에 눈이 내리고 낮에는 흐림. 김 중군의 딸이 그 남편과 다


투고는 약을 먹고 죽었다. 달려가서 곡을 하고 관아에 발고發告하였으며, 그
를 달래어 마음을 진정하도록 권하였다. 쫓겨난 통인 송석석이 새로 속량贖
良16)된 계집종 월선月仙을 꼬드겨서 저녁에 도주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 애통하였다.

초 10일. 맑고 따뜻함.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고 중군이 왔다가 갔다.


김 중군의 처가 딸이 비명횡사한 것 때문에 행패를 부리자 그 사위가 관아
로 달려 들어와서 소란스러웠다. 황경록黃景祿을 새로 통인으로 임명하였다.

11일. 맑고 바람이 붐. 주령이 맹자孟子 를 읽기 시작했다. 그가 막중에

15) 경주인(京主人) : 지방관청과 중앙관청의 연락사무를 보기 위해 지방에서 파견된 구실


아치. 공물 따위 일을 대행함.
16) 속량(贖良) : 공사의 노비가 속량전이라는 대가를 내고 노비신분을 면제받는 것. 제도로
보장되었다.
424 청일전쟁 관련 자료

게 편지를 부쳤다고 하였다. 정언正言 이석영李錫泳이 와서 만났다. 그는 원래


강생講生이었으므로 반나절 동안 경전의 의미를 토론하고 갔다. 새 옷을 입
었다. 이군이 왔다.

12일. 맑고 따뜻함. 집사執事의 자리가 비어서 그 대임代任을 물색한다고


하였다.

13일. 맑고 따뜻함. 신 첨지의 편지가 왔는데, 새로 임명된 통인 황경록


의 임무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야견
사野繭絲 1통 1만 3,250개를 호인胡人이 사갔는데, 가격은 29냥이라고 하였다.
서울에 사는 바느질 노파와 용천의 바느질 노파가 와서 머물렀다. 이방을
의주로 보냈다고 한다.

14일. 맑고 바람이 붐. 박도겸이 김가와 홍가의 송사에서 이간하는 말


로 속인 죄가 있었기 때문에 이치를 들어서 책망하였다. 강교康校, 구실아치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분부하였다. 오늘은 춘분春分이다.

15일. 맑고 바람이 붐. 용천 기녀妓女 옥진玉眞의 편지가 와서 답장을 보냈


다. 이군이 왔다가 갔다.

16일. 맑고 따뜻함. 집사에 김도린金島 을, 주사별장舟師別將17)에는 김명


현金明玄을 임명하였다고 하였다. 이군이 주령의 명으로 덕계德溪의 김씨 문중
에 가서 맹자 1권을 빌려 왔다. 황경록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읽게 하였
다. 박도겸이 김가와 홍가의 송사에서 관아를 속인 죄가 있었기 때문에 곤

17) 주사별장(舟師別將) : 주사는 수군, 별장은 하사급 군직의 하나로 수군의 중간직 장교를
말한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25

장을 맞았다고 하였다. 4개 마을의 존통尊統들이 모두 들어와서 새로 정한 절


목의 영납전營納錢, 감영에 납부한 돈을 백성들에게 거두는 일을 품의하였다고 한다.

17일. 종일 비가 내림. 적막하고 무료하여 수호지 만 보았으며, 주령


과 맹자 를 읽기도 하였다.

18일. 종일 흐림. 호인胡人인 국경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는 법으로 금지


된 것이어서 잡아 가두었다고 한다.

19일. 아침에 비가 오고 오후에 맑음. 매장梅長 김가가 홍가의 장례비를


지급하지 않은 죄 때문에 그를 잡아 가두었다고 하였다. 이방이 의주에서
돌아왔다. 동헌東軒의 중수에 쓸 종이류를 사가지고 왔다고 한다. 대매관자
瑁貫子, 대모나 망건 줄을 매는 고리의 가격은 2냥이며, 흑전黑氈, 검은 방석 1개의 가격은 9
전, 주머니 끈 1건의 가격은 3전으로, 도합 2냥 9전이라고 하였다.

20일. 맑고 따뜻함. 황 단천과 이한종李漢宗이 왔다가 갔다. 주령의 둘째


형 종인宗人 경칠景七이 내려왔다. 격조하였던 터에 반갑게 맞이하였다. 삼가
2월 초7일에 형님이 서울에서 쓴 편지를 보니, 형제들의 집안은 별다른 큰
탈이 없으며, 익아益兒, 익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 호칭의 공부도 이제 통감通鑑 3권을
읽어서 조금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갖추었으니 익수益洙 때문에 걱정하지 말
라고 하였다. 또 머슴 이李가가 10월 그믐에 경주慶州로 갔으며, 머슴 김金가는
그대로 두었는데, 사람됨이 순박하여 다행이라고 하였다. 추수한 곡식은 20
석이 되지 않아 종자와 조세를 제외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호戶18)는 친구 홍경림洪景臨의 호戶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용오用五가 7월에

18) 호(戶) : 1894년 여러 민요에 대비키 위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했는데 다섯


호를 하나로 묶고 그 호수를 지정했다. 여기의 홍경림은 호수임.
426 청일전쟁 관련 자료

100냥을 납부하고 섣달에 50냥을 납부하였다고 하였다. 정월 18일에 길을


떠나 2월 초하루에 성城에 들어갔으며, 형제들은 강령康翎 어른의 집에 머물
고 있다고 하였다. 집안일과 아이의 공부는 걱정하지 말고 몸을 잘 보전하
라고 하였으며, 죽암竹岩의 사돈 신申씨와 친구 홍씨가 봉납捧納하는 것은 영원
히 탕감하였다고 하였다. 11월 25일자 편지와 12월 5일자 편지 및 정월 17
일자 편지를 모두 읽어보았다고 하였다. 익아益兒와 용손容孫이 짝이 되어 어
울리니, 이것이 세상 사는 재미라고 하였다. 대상臺上의 홍洪 서방 내외는 잘
지내고 있으며, 죽암竹岩의 이李 서방은 함께 상경하였다고 하였다.
또 장제章弟, 장의 이름을 가진 동생의 호칭의 편지를 보니, 팔송八松에서 모임을 갖기
로 약속하였으나 별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어 잠시 중지하였다고 하였다. 과
거科擧의 일에 대해서는 강령康翎 어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하였다. 산소
의 나무에 대하여는, 지금은 와서 침탈하는 사람이 없으며 저 민씨閔氏도 후
회하고 있으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종제從弟 치일致一도 무탈하다고 하
였다. 망건網巾 1개를 사서 보낸다고 하였다.
또 익아益兒가 직접 쓴 편지를 보니, 자획이 글자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참으로 기특하였다. 오늘 집에서 부친 편지를 보고 천리 먼 곳에 있는 나그
네의 회포를 조금은 달래 주었으나 고향집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
졌다.
또 강령 어른의 편지를 보니, 단비 가죽은 가격이 비싸서 그만두었으며,
율종栗宗의 집터를 기필코 주선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또 늑현勒峴의 일에 대
하여 들었는데, 종인宗人 성함聖咸이 공주公州로 이사를 갔다고 하여 안타까웠
다.

21일. 맑고 따뜻함. 서울에 사는 바느질 노파가 떠난다고 하였다. 주령


은 환곡還穀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창고로 나갔다. 매장梅長 김가는 홍가에
게 줄 돈을 내준 뒤에 즉시 석방되었다고 한다. 김 중군을 불러서 주령이 돈
사정일기 沙亭日記 427

을 빌리는 일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22일. 맑고 따뜻함. 매장梅長 김영겸金永兼이 잡혀 와서 곤장을 맞고 석방


되었다.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경주인 김명석이 와서 작별을 고하고 떠났
다. 우교右校19)에게 돼지를 잡으라고 분부하였다.

23일. 맑고 따뜻함. 황 단천과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점심에 냉면을


먹었다.

24일. 맑고 따뜻함. 오교吳校가 벌목을 하기 위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25일. 맑고 따뜻함. 통인 태옥泰玉이 지난 20일에 섬에 들어갔다가 오늘


나왔다.

26일. 맑고 따뜻함. 만윤灣尹, 의주부윤 조만승曺萬承이 감영의 장계狀啓로 파


직20)되었으며, 시골 장리將吏 10여 명은 용천으로 옮겨서 수감되었다고 하였
다. 이군이 부모의 병환에 시탕侍湯한다고 겨를이 없어서 오늘에야 비로소
와서 뵈었다. 이인건李仁鍵이 왔다가 갔다.

27일. 맑고 따뜻함. 국경을 넘어오는 배를 검사하기 위하여 김명인金明仁


을 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관선官船에 보내어 날마다 수직守直하게 하였다고 한
다. 정언正言 이석영李奭泳이 왔다가 갔다. 오늘 저녁은 아내의 기일이어서 나

19) 우교(右校) : 진보(鎭堡)에서는 군교를 좌교와 우교로 나누어 각기 직무를 맡겼다.


20) 감영의 장계로 파직 : 지방 수령의 파직은 상급기관인 감사의 보고를 받은 임금이 결재
하는 제도가 있음. 수령은 임금이 직접 임명하므로 감사가 임의대로 파직할 수 없었다.
428 청일전쟁 관련 자료

그네의 마음이 쓰라렸다.

28일. 흐리고 바람이 붐. 의주를 지나가는 선박 한 척을 붙들어 왔으며,


적재한 화물은 관아에 소속시켰다고 하였다. 황 단천과 김제원이 왔다가 갔
다. 오교吳校와 좌교左校가 나왔다. 서울 노파가 다시 왔다.

29일. 종일 비가 내림. 황경복黃景福의 집에서 떡을 보내 왔다.

30일. 오늘은 청명淸明이자 한식寒食이다. 맑음. 오늘 명절을 맞으니 집안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정언 이석영에게 편지를 보내어 맹자 를 빌리고
자 하였으나 마침 출타 중이어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뒷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호인胡人의 선박이 강을 오가고 있었다.

3월 [三月]

초 1일. 무인[戊寅]
맑고 바람이 붐. 이 정언이 편지와 함께 맹자 2권부터 7권까지를 보내
왔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고 중군高中軍이 왔다가 갔다. 이방에게서 명주 22
자를 다듬이질하여 왔다.

초 2일. 맑고 바람이 붐. 섬에서 농어[ 魚] 2마리를 가져왔다.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초 3일. 맑고 바람이 붐. 연일 수호지 를 읽었다. 이른바 강호의 호걸


이란 자 중 강도가 아닌 자들이 없었다.

초 4일. 맑고 바람이 붐. 중군中軍 김계옥金啓玉이 섬 안의 연대별장烟臺別


사정일기 沙亭日記 429

將21)에 김득정金得正을 차출하였다고 하였다. 주령이 몸이 불편하여 의원을


불러오기 위하여 신 첨지에게 편지를 부쳤다. 황 단천과 이한종이 왔다가
갔다.

초 5일. 맑고 따뜻함. 황 참봉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는데, 그의 아들


이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형님의 집터 일과 강령 어른이 파
주坡州와 포천抱川을 거쳐 회암檜岩의 산소에서 성묘를 하고 충주忠州로 내려간
일을 알게 되었다. 또한 고 함종에게 엽전 10냥을 융통하여 썼으며, 장제章弟
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또 2월 7일자로 종인宗人인 주서注書 영
기永冀가 보낸 편지를 보니, 말을 무역하는 일은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또 동
헌東軒으로 온 서울 편지에는, 초8일 응제應製에서 224인을 선발하였는데, 대
과大科가 9인이고 진사進士가 77인이며, 그 나머지는 대과 초시初試와 감시監試
초시의 상격賞格22)이었다고 하였다. 만윤灣尹 조만승의 장전贓錢, 부정한 돈은 29만
냥이었으며, 그의 후임으로 이용직李容稙을 임명하다고 하였다. 주령의 병세
가 끝내 차도가 없어 소호少湖의 김金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하고 갔다. 동헌을
수리할 목재를 백성들의 힘으로 끌고 왔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초 6일. 맑고 따뜻함. 용단龍丹 오 생원의 편지와 신학수申學秀의 보고가 도


착하였다. 마른 짚신 2켤레를 보내 왔으며, 값은 5냥이라고 하였다. 주령이
병중이라 공해公 의 수리를 잠시 중지하였다. 감영에 납부하는 일을 처리하
기 위하여 김봉린金奉 이 떠났으며, 주령은 막중幕中에게 편지를 부쳤다고 하
였다. 의주 양상楊上 충무동忠武洞의 김 의원이 와서 주령의 병을 진찰하였다.

21) 연대별장(烟臺別將) : 연대는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는 돈대(墩臺)를 말하며, 별장은


돈대를 설치한 곳의 봉화를 올리는 책임을 맡은 장교이다.
22) 상격 : 과거에서 급제를 하지 못했으나 그 실력을 인정해 상을 주는 격례(格例). 여기 상
격에는 상격목이라는 이름의 무명을 상으로 줌.
430 청일전쟁 관련 자료

저녁에 이군이 들어와서 그 부모의 병이 위중하다고 하였다.

초 7일. 흐리고 간혹 비가 내림. 김 의원을 떠나보냈다. 아침에 나의 맥


을 짚어 보고는, 몸은 튼튼하고 정신은 총명하다고 하였다. 하습증下濕症에는
계퇴수鷄退水로 뒤를 씻으라고 하였고, 송충증 蟲症에는 아침에 뱅어회[白魚膾]를
먹으라고 하였으며, 비홍증鼻紅症에는 율무죽을 오랫동안 복용하고 코끝을 침
으로 가늘게 찔러 피를 내고 거기에 붉은 가지의 즙을 바르라고 하였다.

초 8일. 맑고 따뜻함. 의원 김승락金承洛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주령의 병


이 아무런 차도가 없자 내아內衙에서 신에게 빌기로 하였다고 한다. 지난 6일
에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23)의 쌍령산雙嶺山 분묘를 허물었는데 오늘 보령保寧으로
발인한다고 하였다.

초 9일. 맑고 따뜻함.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신 첨지의 편지가 도착하


였다.

초 10일. 맑고 따뜻함. 수호지 20권을 다 읽었다. 이른바 천강성天 星

36좌와 지살성地煞星 72좌의 정기가 110 갈래로 흩어졌다가 내려와서 108인


이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강도로서 양산박梁山泊에 모여 조직하였는데, 주군
州郡에서는 제압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하나가 되었다고 하니 어찌 진실 됨이
있겠는가. 이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니 참으로 우습구나. 이 책은 본래 이내암
施耐菴24)이 짓고 김성탄金聖歎이 평어評語를 단 것으로 4대 기서奇書에 속한다. 20

23)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1799년(정조 23)~1858년(철종 9)]. 이름은 민치록(閔致祿)이


며,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아버지이다.
24) 이내암(施耐菴) : 수호지 의 저자인데 ‘시’(施)가 성으로 쓰일 때는 ‘이’로 발음함. 성
의 고유성을 표현하는 음의 관례임. 거(車)를 차가로 부르는 것과 같음.
사정일기 沙亭日記 431

권을 아전 원영보元永輔에게 돌려주었다. 오늘부터 맹자 를 연구하여 천리天


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막는 데 힘쓸 계획이다. 지나가는 밀매상의 배를 붙
들어 왔다고 하였다.

11일. 맑고 따뜻함. 어떤 경객經客, 경을 외는 판수 정鄭씨가 이방의 집에 왔는


데, 주령의 병이 점차 심해져서 내일 경經을 왼다고 하였다. 이는 망령된 일
이나 병중이니 어찌하겠는가? 태옥泰玉을 김 의원 집에 보내어서 약을 조제
하여 왔다고 하였다.

12일. 맑고 따뜻함. 산에는 꽃이 활짝 피었고 제방의 버드나무는 점차


초록빛을 띠었다. 좋은 날을 헛되이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주
령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정객鄭客으로 하여금 동헌에서 경經을 외도록 하
고 주령은 작청作廳25)으로 자리를 피하였다.

13일. 흐리고 따뜻함. 황黃 소년 형제가 왔다가 갔다. 중방中房이 병을 돌


볼 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 피접을 간다고 하였다. 의주 양시陽市에 명의名醫 이
李가가 있다고 하여 이방이 글을 보냈다.

14일. 종일 비가 내림. 용천龍川 노파가 3전을 빌려 가고, 서울 노파가 2


전을 빌려 갔다.

15일. 오늘은 곡우穀雨이다. 맑고 따뜻함. 새 옷을 입었다. 황 단천이 왔


다가 갔다. 경객經客이 사귀私鬼를 잡아 가두었다고 한다. 참으로 우습다.

16일. 맑고 바람이 붐. 신 첨지가 왔다. 이방이 8냥짜리 신발 3켤레의

25) 작청(作廳) : 군아(郡衙)에서 구실아치가 일을 보던 곳.


432 청일전쟁 관련 자료

값으로 7냥 5전을 들였다. 이를 오 생원에게 전해 달라며 신 첨지에게 주었


다. 중방이 들어왔다. 고 중군高中軍이 왔다가 갔다. 경객經客이 일을 파하여 돌
려보내고 주령이 동헌으로 들어가서 좌정하였다.

17일. 맑고 따뜻함. 밤을 지내고 나니 주령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하


는 수 없이 용천 고을로 피접을 갔다. 아침을 먹은 뒤에 출발하였는데, 그 서
글픔을 형용할 수 없었다. 각종 수쇄收刷 업무가 전혀 두서가 없는데, 또 관아
까지 비우게 되니 참으로 답답하였다.

18일. 맑고 따뜻함.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피고 버드나무의 녹음이


짙어지니 참으로 좋은 날씨다. 주사별장舟師別將 김명현金明玄이 검색하는 과정
에 사사로운 정을 두는 일이 있으므로 불러들였다. 어제 황 단천이 와서 방
문해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종인宗人 경칠景七과 함께 문을 나서 황 참
봉의 집에서 단천의 집으로 갔으며, 다시 그들과 함께 용수암龍首菴에 갔다.
그 암자는 폐사된 지 이미 오래되어 별달리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단천이 비
빔밥과 술, 안주를 내어왔다. 해가 질 때 들어와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다.

淡烟微雨喜新晴 옅은 안개 보슬비 내린 뒤 새로 갠 날이 좋아서


數里芳園一杖輕 수 리 길 꽃동산 지팡이가 가볍구나
春服冠童當與點 봄옷 입은 어른 아이, 증점曾點과 함께 하며26)
前川花柳又思程 앞개울의 꽃과 버들에 또 고향 생각이 나네
油窓靜 高人臥 유지창 가 고요한 안석에 고상한 사람이 누워

26) 봄옷 입은 어른 아이, 증점(曾點)과 함께 하며 :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뜻


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자 오륙 인에다 동자 육칠 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다
음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편).
사정일기 沙亭日記 433

食匏樽遠客迎 도시락밥과 한 동이 술로 멀리서 온 객을 맞이하네


西出關山今日會 서쪽으로 관산關山을 나서서 오늘에야 만났으니
幷州鄕裏故人情 병주향幷州鄕27) 속의 친구의 정일세라

저녁을 먹은 뒤에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신병이 밤새 더 악화되


어, 각종 수쇄收刷와 환곡을 나누어 주는 업무는 이방에게 분부하였다고 하였
다. 병증이 이와 같으니 듣기에 매우 걱정스러웠다. 주령이 관아를 비운 뒤
로 배를 나누어 보내는 것은 내가 기록하여 두었다.

19일. 맑고 따뜻함. 주사별장을 질책하고 수검소搜檢所, 수색하고 검문하는 곳로


내보냈다. 국경을 넘은 배 1척을 붙들어 와서 뱃놈들을 즉시 가두었다. 용천
노파의 소지所志를 작성해 주었는데, 용천으로 보내는 글을 고쳐 준 것이다.
어제 이군에게 갔는데, 그 사이 서모庶母의 상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그 집안
형편이 딱하였다.

20일. 맑고 바람이 붐. 하인을 용천으로 보내어 주령에게 편지를 보냈


다. 황 단천이 와서 함께 가자고 간청을 해서 우리 두 사람은 다시 그의 집
으로 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돌아왔다. 이군이 와서 경의經義와 집안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논하였다. 주령이 읽었던 맹자 1권을 오늘에서
야 이군으로 하여금 돌려주게 하였다.

21일. 맑고 따뜻함. 종일 맹자 를 연구하였다.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


였는데, 병세가 줄곧 차도가 없다고 하였다. 국경을 넘은 배의 선원에 관한
일은 중간에서 조치하라고 하였다.

27) 병주(幷州) : 제2의 고향을 말한다. 당(唐)의 가도(賈島)가 병주(幷州)에 오래 살다가 떠


난 후 시를 지어 그곳을 고향처럼 그리워한 데서 유래하였다.
434 청일전쟁 관련 자료

22일. 맑고 따뜻함. 용천에 편지를 보냈다. 의주의 국경을 넘은 선박이


50냥을 속전贖錢으로 내어 일이 순조롭게 끝났다. 이방과 우교右校가 수쇄 업
무 때문에 섬으로 들어갔다. 김 오위장의 편지가 와서 즉시 답장을 보냈다.
신 첨지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23일. 맑고 따뜻함. 언덕의 꽃들이 점차 떨어지고 냇가의 버드나무에


녹음이 짙어지니 늦봄임을 알겠다. 회포를 부치는 시를 지었다.

空堂盡日坐如禪 빈 대청에 종일 참선하듯 앉아 있으니


愁裏春光過遽然 근심 속에 봄빛은 쏜살같이 지나가네
佳氣最多芳草野 아름다운 기운 가장 많이 서린 꽃다운 들판이지만
何生不見落花年 어느 때인들 꽃잎 떨어지는 해를 보지 않겠는가
關山非我因緣好 관산關山은 나와 좋은 인연이 아닌데
京洛無人信息傳 서울에서는 아무도 소식 전하는 이 없네
此地始知知己少 여기에서 비로소 나를 알아주는 이 적음을 알았으니
未聞佳節設詩筵 좋은 계절에 시회詩會를 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네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근자에 또 학질이 더해졌다고 해서 걱정스러웠다.


감사는 교체되어 병조판서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신임 감사는 민영달閔泳達
대감이라 하고 혹은 민영규閔泳奎 대감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기필할 수 있겠
느냐고 하였다.

24일. 맑고 따뜻함. 늑현勒峴의 하인 최여홍崔汝弘이 출발한다고 하여 그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25일. 맑고 따뜻함. 김학린金學 이 감영에서 돌아와 신임 감사는 심상훈


사정일기 沙亭日記 435

沈相薰 대감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병저리兵邸吏28)가 알려 오기를, 주령이 보낸


짚신 30매를 남겨 두었다고 하였다. 박도겸이 와서 맹자 부정제기장簿正
祭器章 29)을 강론하였다.

26일. 맑고 따뜻함. 오위장 김경달이 주령의 편지를 소매에 넣어서 왔


는데, 죽동궁竹洞宮에 상납할 언문으로 된 목록諺錄을 만들어 보낸다고 하였다.
학질은 그간에 나았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이방이 섬에서 나왔다. 김 의원
이 비자枇子를 보내 왔다.

27일. 맑고 바람이 강하게 붐. 이방의 보고에, 섬의 수쇄收刷 업무는 별다


른 낭패가 없었다고 하였다. 어제오늘 두 노파가 서로 위로하였다.

28일. 종일 비가 내림. 패실浿室이 통증을 느껴서 향소산香蘇散 2첩을 썼


다.

29일. 맑고 따뜻함. 이방과 우교右校가 용천으로 가기에 주령에게 편지


를 부쳤다. 뒷산에 올라 우연히 봄을 전별하는 시를 지었다.

四序成功古語云 옛말에 사계절이 공을 이룬다고 했는데


落花時節忽相分 꽃 지는 계절에 갑자기 이별하네
來如有意多遲日 올 때는 뜻 있는 듯 날이 더디었는데
去是無情散片雲 떠날 때는 무심히 조각구름 흩어지듯 하네
此日三春經蝶夢 오늘 석 달 봄날에는 나비 꿈을 꾸었으나

28) 병저리(兵邸吏) : 병영에 딸린 저리. 중앙관청과 지방의 병영 업무를 연락하는 구실아


치. 감영에 딸린 영저리도 있다. 저리를 주인이라고도 함.
29) 부정제기장(簿正祭器章) : 맹자 만장(萬章) 하에 나온다.
436 청일전쟁 관련 자료

明朝四月始鶯聞 내일 아침 사월에는 비로소 꾀꼬리 소리 듣겠네


初心好作還鄕伴 처음에는 그대를 귀향길 동무로 삼으려 하였는데
君去我留我送君 그대는 떠나고 나는 남아 그대를 보내누나.

4월 [四月]

초 1일. 정미[初一日 丁未]


오늘은 입하立夏이다. 종일 비가 내림. 냉면을 먹었다. 김 오위장의 편지가
와서 답장을 보냈다.

초 2일. 맑고 따뜻함. 장리將吏들이 용천에서 돌아왔다.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병세는 여전하다고 하였다. 감영의 막중幕中이 녹지錄紙30)를
보내왔는데, 감사의 교체와 관련한 사항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
였다. 서울 소식은, 고부古阜 등 7개 고을의 동학東學 무리들이 완영完營, 전라감영
에 모였다는 전보電報가 답지하였는데, 군대를 출동시켜 토벌하는 것 외에는
해산시킬 방도가 없다고 하니 참으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초 3일. 맑았다가 흐리고 저녁에 비가 내림. 황 참봉의 편지가 왔으며,


꿀 1종지를 보내 왔다. 관노官奴 재신才信과 방자房子가 용천으로 가기에 주령
에게 편지를 부쳤다. 섬에 있는 하인이 농어 3마리를 가져왔기에 2마리는
용천으로 보냈다. 황 단천과 김제원이 와서 객지의 회포를 달래 주어 감사
하였다. 냉면을 먹었다. 이방이 용천에서 와서 만났다. 4월 초1일에 용천 노
파가 와서 내아內衙의 일을 상의하였다.

초 4일. 맑았다가 흐림. 식전에 송충증 蟲症 때문에 꿀에 잰 비자枇子를

30) 녹지(錄紙) :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어떤 사실의 대강만을 추려 적은 종이쪽지.


사정일기 沙亭日記 437

먹었다. 관노 재신才信 편에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그의 중씨仲氏를 초열흘께


떠나보내는 일을 부탁하였다.

초 5일. 맑았다가 흐림.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감영에서 경운미


京運米, 서울로 보내는 쌀 200석을 1석에 3냥으로 대전代錢하기 위하여 영리營吏가 내
려오며, 그래서 김영하金永河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으며, 환곡을 보내라고 하
였다.

초 6일. 맑고 따뜻함. 김영하가 가는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이


방이 돈으로 바꾸는 일[換事]을 논의하러 송宋가에게 갔다가 못 만나고 왔다고
하였다. 허 국수許局守의 말 값이 135냥이라고 하였다.

초 7일. 맑았다가 흐리고 저녁에 비가 내림. 여러 장리將吏와 중방中房이


모두 용천으로 가기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으며, 나 훈장羅訓長 편에 또 편지
를 부쳤다. 이방을 양시陽市로 보냈다. 섬의 주사별장이 농어 2마리를 들여보
냈다. 저녁에 객지의 쓸쓸함이 갑절이나 더하였다.

초 8일. 아침에는 비가 내리고 낮에는 맑음. 관노 재신 편에 주령의 편


지가 왔으며, 정육正肉, 쇠고기과 생조기를 보내 왔다. 연대별장과 주사별장에
게 전령傳令이 왔다. 서울에 사는 첨지僉知 변흥식卞興植이 의주에 와서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새 옷을 입었다.

초 9일. 맑고 따뜻함. 이방이 양시陽市에서 돌아왔다. 송宋가와의 환사換事


가 실패하여 한탄스러웠다. 양사洋紗, 서양 옷감 8자의 가격이 4냥 4전이고, 당목
唐木, 중국 목면 13자의 가격이 8냥 4전 5푼으로 도합 12냥 8전 5푼이었다. 중방中
房이 용천에서 돌아오면서 주령의 편지를 갖고 왔는데, 보름 전에 김제원의
438 청일전쟁 관련 자료

집으로 와서 머물 것이라고 하였다.

초 10일. 오전에는 비가 내리고 오후에는 맑음. 이필손李弼孫이란 놈이


칼을 뽑아 사람을 해쳤다고 하여 잡아 가두었다.

11일. 맑고 따뜻함.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저녁에 답장이 왔다. 환


사換事가 성사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
용천 노파에게 돈 4전을 빌려 주었다.

12일. 맑고 따뜻함. 신 첨지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저들의 배가 콩을


사러 와서 정박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경운미京運米 200석
을 1석에 3냥으로 대전代錢하면 200석의 값은 600냥이 되는데, 이를 백성들
에게 나누어 주었다. 감영의 제사題辭31)가 이와 같았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
쳤다.

13일. 맑고 따뜻함.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직접 신변申弁32)의 집


에 가서 콩을 파는 일을 대면하여 논의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김영하金
永河를 대신 보냈다. 이방이 섬에서 보고하여 오기를, 콩을 파는 일 때문에 대
동구大同溝로 간다고 하였다. 신변申弁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콩을 파는 일은
이미 작정하였다고 하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는데, 주령의 편지도 같이 붙
여서 보냈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달이 밝으니 고향 생각이 났
다.

31) 제사(題辭) : 백성이 제출한 소장, 또는 청원서에 대해 관청의 판결이나 결정을 지시하
는 글. 일종의 판결문 성격을 띤다.
32) 신변(申弁) : 변(弁)은 무관의 고위직을 일컫는 호칭. 여기의 신씨는 첨지 직함을 가지고
있어서 높여 부르는 말.
사정일기 沙亭日記 439

14일. 맑고 따뜻함. 맹자 7권을 전부 읽었으며, 또 서전書傳 을 읽었


다.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17일쯤에 김제원의 집으로 온다고 하였다. 저녁
에 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김영하金永河가 신변申弁의 집에서 돌아와서 콩
을 파는 일을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15일. 맑고 따뜻함. 신 첨지가 와서 만나 조세로 받은 콩을 매매하는 일


을 논의하였는데 상당 부분 뜻이 맞지 않았다. 섬에서 농어 2마리를 보내 왔
다. 대청 아래 장미꽃이 만발하였다.

16일. 맑고 따뜻함. 신 첨지가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왔기에 그만두겠다


는 뜻으로 답장을 보냈다. 김영하를 저들의 배로 보냈다. 저녁에 나그네의
울적한 심사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17일. 맑고 따뜻함. 주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그의 중씨仲氏가 20일


에 길을 떠난다고 하였다. 아전 김씨가 저들과 콩을 매매하기로 결정하였으
나 내어준 콩 섬의 양이 많이 축나 있다고 하였다. 저녁에 이방이 대동구大同
溝에서 와서 콩을 파는 일을 아직 작정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김 중군金中軍
이 술을 가지고 와서 만났다.

18일. 맑았다가 흐림.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답장이 왔는데,


오늘 덕계德溪 김제원金濟元의 집으로 옮겨 머문다고 하였다. 김영하金永河와 이
방이 동창東倉에 가서 저들에게 콩을 내어 주고 원보元寶 3개를 받아 왔다.

19일. 맑고 따뜻함. 평실平室33)의 생일이었으나 별달리 물품이 없어서

33) 평실(平室) : 실(室)은 아내, 또는 시집간 딸에게 붙이는 호칭. 기록자는 현지에서 첩을
둘 두고 있었고 딸 내외를 데리고 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평안도 남편을 둔 딸을 호칭
440 청일전쟁 관련 자료

서글펐다. 신변申弁의 나귀를 얻어 와 그것을 타고 덕계로 가서 주령을 만났


다. 주령의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어서 걱정스러웠으나 격조하였던 회포를
풀고 거기서 잤다.

20일. 맑고 따뜻함. 주인 김제원의 좋은 집터와 건물 등 모든 것들은 속


태를 면하였으며 칭찬할 만하였다. 훈서勳西에게 보낼 작은 쪽지를 작성해
두었다. 오후에 주인의 노새를 타고 돌아왔다. 떠내려 온 유하목流下木이 26
개라고 하였다. 주령은 용천 노파에게 30냥을 주라고 시켰다고 하였다.

21일. 맑고 따뜻함. 집에 보내는 편지와 서울에 보내는 편지 및 늑현勒峴


에 보내는 편지 등 10여 통의 편지를 썼다. 본가에 보내는 포布 2필, 석새삼
베 2필, 돈 4냥을 쌌다. 중포中布 1필의 가격은 11냥 6전, 36자의 가격은 10냥
8푼, 적진赤袗 10자의 가격은 3냥 1전 5푼, 중의中衣 15자의 가격은 4냥 3전 5
푼으로 도합 29냥 1전 8푼이다. 낭사囊絲의 가격은 6전 5푼이다.

22일. 맑고 따뜻함. 종인宗人 경칠景七이 오늘 출발할 계획인데 원보元寶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안타까웠다. 관아의 목수가 대로 만든 화살통을 만들어
지고 왔는데, 황칠黃漆 장식을 한 1쌍의 값으로 1냥을 지급하였다. 황 단천과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원보 2개는 아직 소식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내아內
衙의 침모針母에게서 담배를 구하고 값으로 1냥 5전을 지급하였다.

23일. 맑고 바람이 붐. 주령이 본가에 보내는 포布 18필 14자가격은 215냥 1전


8바리 짐을 두 마리 말가격은 285냥에다 포장하여 실었다. 아전 김씨와 전田씨가
와서 아뢰기를, 저들의 원보가 내일 온다고 하였다. 용천 노파의 옷감이
왔다.

한 것으로 보인다. 관례로 이가에게 시집간 딸은 이실(李室)로 부른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41

24일. 맑고 따뜻함. 아전 김씨와 전씨에게 동남창東南倉으로 나가서 조세


로 받은 콩 199석을 저들에게 지급하라고 분부하였다. 종인宗人 경칠景七은 먼
저 덕계로 출발하였다. 천리 타향에서 작별을 하자니 슬퍼서 넋이 나가 견
디기 힘들었다. 22일에 쓴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또 종인 성함聖咸에
게도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원보元寶 2개가 들어왔다. 이전의 3개와 함께 포
장하니 모두 5개로 가격은 3,000냥이었다. 아전 이보근李甫根이 은銀으로 바꿀
때 방해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통탄스러웠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바
로 답장이 왔다. 서울에서 갓을 사서 보내는 일을 노미老未에게 거듭 부탁하
고 돈 10냥을 그 값으로 지급하였다. 주사별장 김명현金明玄이 후추 한 봉지
를 들여보냈다. 전송하기 위해 출타하였다가 이군과 김 중군金中軍에게 들러
서 만나 보았다.

25일. 맑고 따뜻함. 중방中房과 노미老未가 아침에 출발하였다. 천리 길을


함께 왔다가 지금 작별을 하자니 더욱 섭섭하였다. 그도 눈물을 흘렸다. 함
께 거처하던 두 사람이 모두 떠나고 나만 홀로 객지에 남으니 나그네의 서
글픔을 견디기 힘들었다. 태옥泰玉 편에 주령의 편지가 왔다. 섬에서 장리將吏
가 나와서 지난 22일에 건져 낸 유하목流下木34)이 133개라고 하였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어서 뜻밖이었으나 다행이었다.

26일. 맑고 따뜻함. 오위장 김경달金景達의 편지가 와서 즉시 답장을 보


냈다. 내아內衙에 그네를 매달았다. 오후에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억류하고
있던 선박을 풀어 주라는 일이었다. 섬의 장리將吏가 들어갔다.

27일. 맑고 따뜻함. 나귀를 타고 덕계로 가서 주령을 만나 제반 사무를

34) 유하목(流下木) : 뗏목으로 운송한 목재. 압록강 등 큰 강에서는 목재를 뗏목을 이용해
수송했다.
442 청일전쟁 관련 자료

논의하였다. 용천부사龍川府使의 편지가 왔으며 거기에 녹지錄紙가 있었는데,


“동학東學이 호남湖南의 고부古阜와 정읍井邑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서울
에서는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羲를 파송하였으나 관군은 왕왕 패배하였다. 이
달 초7일부터 초10일까지 완백完伯, 전라감사과 금백錦伯, 충청감사의 전보가 날마다
이어졌으며, 호중湖中, 충청도의 회덕懷德과 공주公州 등지에서도 저들 무리들이
크게 회합을 가지었기 때문에 군사를 소모招募하여 방어하였다. 적의 세력이
이처럼 창궐하여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민심이 어수선하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걱정스러웠다. 저들 무리들이 고부에서 내린 글35)을 보니 이치
에 매우 가까웠다. 지금 세상에 난리가 일어났는데 천리 밖의 객지에 있어
서 고향 소식을 아득히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오후에 돌아왔다.
어제와 오늘 이틀 저녁은 나그네 수심이 더욱 깊었다. 관아의 목수가 가래
나무 1개를 가져갔다.

28일. 맑고 따뜻함. 고 중군高中軍이 왔다 갔다. 황경록黃景祿이 가는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즉시 답장이 왔다. 이방이 섬으로 들어갔다. 아
전 김씨가 원보元寶 1정錠을 들여왔기에 내아內衙에게 맡겼다.

29일. 맑았다가 흐림. 고 중군이 왔다가 갔다. 주령에게 편지를 부치자


즉시 답장이 왔는데, 이필손李弼孫을 석방한 일 때문에 중군中軍을 크게 질책하
였다고 하였다. 백목白木 15자의 가격은 3냥 4전 5푼이고 상목常布 6자의 가격
은 1냥 2전으로 합이 4냥 6전 5푼이라고 하였고, 신임 만윤灣尹, 의주부윤 이근명
李根命이 지난 27일에 부임하였다고 하였다.

30일. 맑고 따뜻함. 김 중군金中軍이 이필손을 사사로이 석방한 일 때문

35) 고부에서 내린 글 : 1894년 3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은 전라도 무장에서 창의문을 발


표하여 전국에 보냈고 부안 백산에 집결해서도 많은 글을 띄웠다. 이를 말함인 듯.
사정일기 沙亭日記 443

에 주령에게 질책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부자리를 새로 꿰매는 일을 용천


노파에게 맡겼다.

5월 [五月]

초 1일. 정축[初一日 丁丑]


맑고 가뭄. 황 참봉의 집에 갔다. 주령이 보내는 편지를 홍국弘局이 가지고 왔
다. 변 주사卞主事에게 보내는 물건을 신변申弁에게 거듭 부탁하고, 콩을 팔아
은으로 바꾼 일로 작정한 수쇄전收刷錢 천여 냥을 빠른 시일 내에 신변申弁의
집으로 실어 보내라고 하였다. 훈서勳西의 창방唱榜36)을 치하하는 녹지錄紙를
써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연대별장으로 하여금 먼저 100냥을 신변의 집
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고 함종高咸從이 패浿, 대동강의 별칭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 하므로 즉시 편지를 부쳤더니 답장이 왔다.

초 2일. 맑고 가뭄. 섬에서 농어 3마리를 보내 와서 2마리를 덕계로 보


내고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즉시 답장이 왔다. 이방이 섬에서 나와서
수쇄전收刷錢 200냥을 즉시 신변申弁의 집으로 실어 보냈다. 유하목流下木 절반
117개 345냥어치를 내일 실어 보낼 계획이다. 세모시 1필 40냥 어치를 내아
內衙에서 매입하고자 한다는 뜻으로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즉시 답장이
왔다. 고 함종高咸從이 왔다. 격조한 나머지 반갑게 맞이하였다. 2월에 서울에
서 형님과 동생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김 중군의 집에서 술값으로 5전을 사용하였다. 침모에게 단의單衣를 새로 손
질하도록 하였다.

36) 훈서(勳西)의 창방(唱榜) : 조정에서는 서북 지방 인사들에게 특별 과거시험을 때때로


보였다. 그 명목은 ‘서북 지방의 공훈을 기린다’고 붙였다. 훈서는 서북의 공훈을 뜻함.
창방은 그 합격자 발표 명단.
444 청일전쟁 관련 자료

초 3일. 맑고 가뭄. 관아의 수쇄전收刷錢 300냥을 신변의 집에 보내니 도


합 600냥이라 하였다. 시장에서 흥정한 흰 모시 18자의 가격은 8냥 2전 8푼
이고, 망건식網巾飾의 공단孔緞이 2전, 당줄이 3전으로 합계 8냥 7전 8푼이었
다.

초 4일. 맑고 가뭄. 주령으로부터 두 차례 편지가 와서 역시 두 차례 편


지를 부쳤다. 농어 2마리가 들어와서 1마리를 덕계로 보냈다. 육류肉類가 들
어왔다. 황 단천과 함께 고 함종을 보러 갔으며, 지나다가 황 참봉에게 들러
서 만났다. 저녁에 이군이 병을 무릅쓰고 와서 뵈었다. 내일이 명절이어서
저녁에는 나그네 수심이 더욱 깊었다. 고 함종이 서울에서 빌려 주었던 돈
10냥을 갚았다.

초 5일. 맑고 가뭄. 아침에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집에 있는 원보元寶 1


개를 보내라고 하였으며, 의주로 갈 하인을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즉시
답장을 부쳤다. 아침을 먹은 뒤에 나귀를 타고 덕계로 갔다. 주령의 병세는
여전하였다. 김 오위장과 신 첨지를 만나서 덕천산德川山에서 곱사춤을 함께
구경하였는데 별달리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오후에 길을 떠났는데 촌가에서
비를 피하였다. 김아金雅의 집에서 유진油袗, 기름을 먹여 방수가 되는 옷을 내어주어 비
를 무릅쓰고 돌아왔다.

초 6일. 맑고 가뭄. 본 진鎭의 주민이 용천龍川의 주민과 다투다가 그의


배를 찔렀으며, 용천 주민도 원수를 갚느라 신도진薪島鎭 주민의 배를 찔렀다
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놀라웠다. 우교右校에게 줄 용천의 부비조浮費條37) 5냥
을 받아서 보관해 두었다.

37) 부비조(浮費條) : 일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의 조목. 교량을 놓거나 도로를 보수할 때 드는


비용 등을 말한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45

초 7일. 맑고 가뭄. 이방이 양식으로 쓸 쌀 1석을 덕계로 실어 보내기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 김제원에게도 편지를 부치고 우진雨袗, 비옷을 돌
려보냈다. 즉시 답장이 왔다. 용천부사가 시신을 검안檢案하고 갔다고 하였
다. 참빗 1개의 값으로 1전 8푼을 지급하였다. 정월 이후로 사용한 돈이 90
냥 5전 9푼이다. 설 이전에 남아 있던 돈 163냥에서 이것을 제하면 남은 돈
은 72냥 4전 1푼이다.

초 8일. 맑고 가뭄. 하루 종일 우공禹貢 서경 의 편명을 읽기만 하였다. 어


제 저녁과 오늘 저녁에는 두 노파가 와서 바느질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초 9일. 맑고 가뭄. 관노 사령이 가는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즉시 답장이 왔으며, 또 국수를 보내 왔다.

초 10일. 밤에는 비가 조금 내리고 낮에는 맑음. 평양 사람 김성은金聖殷


에게 쌀 10석과 좁쌀 28석을 팔기 위해 내어주었는데, 쌀은 1석당 27냥 3전
이고, 좁쌀은 15냥이라고 하였다.

11일. 밤에는 비가 조금 내리고 낮에는 맑다가 흐림. 관노 편에 주령에


게 편지를 부쳤는데 즉시 답장이 왔다.

12일. 밤에 비가 내리고 종일 비가 내림. 가뭄 뒤에 비가 흠뻑 내려서


보리농사에 희소식이었다. 방자房子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치면서 달걀 20
개와 섬에서 가져온 농어 1마리를 보냈다. 오후에 답장이 왔으며, 통인通引
최장석崔長石을 새로 임명한다는 패지牌旨38)에 도장을 찍어 보내 왔다. 어제

38) 패지(牌旨) :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리는 서면. 여기서는 임명장을 뜻함. 임금의 임명
장은 교지(敎旨)라 함.
446 청일전쟁 관련 자료

저녁과 오늘 저녁은 나그네 수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영하金永河


에게 일을 맡긴 대가로 20냥을 받아서 보관해 두었다. 아전 김씨가 최장석
에게 일오표一五標를 받아서 보관해 두었다고 하였다.

13일. 맑고 더움. 주령이 덕계에서 시를 지었다.

主人知己許心寬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너그러이 마음을 허락하며


殊遇能令客意歡 특별한 환대로 나그네 마음을 기쁘게 하네
守將無憂遊翰墨 수장守將은 근심없이 필묵을 가지고 노닐며
高朋多會盡衣冠 훌륭한 벗 많이 모였는데 모두 의관衣冠이로다
數篇詩曲南風和 몇 편의 시에 남풍이 온화하고
一片氷心五月寒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은 오월에도 차갑구나
麥雨知時三日洽 맥우麥雨39)가 때맞추어 사흘 동안 흠뻑 적시니
昇平烟月好相看 태평세월에 만나 보기 좋구나

새 옷을 입었다. 최장석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14일. 맑고 간혹 비가 내림. 농어 3마리가 들어와서 2마리는 덕계로 보


내고 1마리는 내아內衙에 들여보냈다. 주령에게 편지를 쓴 다음 봉하여 아전
원元씨에게 주었다. 내아內衙의 평상을 만들어 왔다.

15일. 맑고 간혹 비가 내림. 서울로 갔던 하인이 돌아왔는데 여행 중에


무사히 서울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아 보지 못하여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호남의 동도東徒의 난리는 줄곧
소란스럽다고 하였다. 매우 걱정이 되었다.

39) 맥우(麥雨) : 보리가 익을 무렵 오는 비.


사정일기 沙亭日記 447

16일. 맑고 더움.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즉시 답장이 왔다. 서울 소


식도 적어서 보내 주었는데, 거기에는 지난달 27일에 동도東徒가 완부完府, 전주
에 입성하여 버티고 있는데 그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며, 도백道伯, 전라감사 김문
현金文鉉이 허둥지둥 경계를 넘어 달아났기에 즉시 잡아 가두라는 명령이 내
렸다고 하였다. 이달 초3일에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羲가 보낸 전보에는, 그날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적과 접전을 벌여 그 우두머리 김순명金順明과 14세짜리
아기장군 이복룡李福龍40) 및 전녹두全綠豆41)를 참수하니 인심이 조금 진정되었
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으니 어찌 걱정을 놓을 수
가 있겠는가? 완백完伯, 전라감사은 김학진金鶴鎭이고, 영백嶺伯, 경상감사은 조병호趙秉
鎬이며, 금백錦伯, 충청감사은 이헌영李金憲永이라고 하였다. 주령이 경영하는 일은
어지러운 말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 주선할 것이라고 하였다.

17일. 맑고 더움.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방곡防穀42)하라는 전령傳令


이 도착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달밤에 마당을 거닐면서 집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난세를 당하여 집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노년의 형제들과 어미
없는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일. 맑고 더움. 나귀를 타고 덕계로 가니, 주령의 병세는 마찬가지였


다. 주인 김아金雅가 나를 문장으로 대우하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시고詩稿
를 빌려 주어 보았다. 오후에 돌아오며 이군에게 들렀다. 당목唐木 5자가격은 3냥

40) 김순명 이복룡 : 홍계훈의 보고에 따르면, 5월 초3일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대장기를 빼
앗고 거물급인 김순명과 나이 어린 동장사(童壯士) 이복룡을 사로잡아 참수했다고 하였
다.(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 ). 이복룡은 농민군 사이에서 소년장사로 이름을 떨
쳤다 한다.
41) 전녹두(全綠豆) : 전봉준(全琫準)을 말하는 것 같으나, 전문(傳聞)에 의하여 기록한 것
이어서 착오가 있는 듯하다. 전봉준은 이 때 죽지 않고 12월 2일에 순창에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42) 방곡(防穀) : 곡식을 다른 곳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막는 것.
448 청일전쟁 관련 자료

1전 5푼와 담배 1줌가격은 1냥 5전을 샀다. 내아內衙에 들여보낸 모시항라 4자는 가


격이 3냥으로 침모가 흥정하였다고 하였다. 오늘은 하지夏至이다.

19일. 밤에는 크게 비바람이 치고 낮에는 맑음. 유하목流下木이 두포豆浦


에서 건져 올린 것이 36개이고 용암龍岩에서 건져 올린 것이 12개이며, 김치
영金致永이 건져 올린 것이 2개로 도합 50개라고 하였다. 매일 서전書傳 을 읽
었으며 오늘은 이훈伊訓 과 태갑太甲 등의 편篇을 연구하였다.

20일. 맑음.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오후에 답장이 왔다. 관아 소유


의 유하목流下木이 28개라고 하였다. 주령이 덕계에서 시를 지었다.

西來先學子長遊 서쪽으로 온 선학先學은 자장子長처럼 노닐며


周覽關山四十州 관산關山 사십 고을을 두루 유람하였네
遠戍功名都逆旅 변방 수자리에서 공명功名을 세워 봐야 한갓 나그네 신세
지만
故人文酒好風流 친구의 글과 술은 좋은 풍류로다
麥秋方至民歌野 바야흐로 보리가 익어가니 백성들은 들에서 노래 부르고
秧雨初晴客滿樓 모내기 때 내리는 비 처음 개이니 손들이 누각에 가득하네
泉石烟霞高士宅 안개와 놀 낀 산수 간 고상한 선비의 집
有君知我我來留 그대 나를 알아주니 내가 와서 머무네

최장석이 밀주蜜酒 1병을 가져왔다. 용천의 강교姜校라는 자가 왔다고 하


였다.

21일. 맑음.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즉시 답장이 왔다. 콩을 매매하


는 일로 아전 전田씨와 김씨를 덕봉德峰으로 보냈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49

22일. 맑았다가 흐림. 오늘 저녁은 증조할아버지의 제삿날이어서 집 생


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23일. 밤에 비가 내리고 종일 비가 내림. 하루 종일 반경盤庚 과 열명


說命 서경 의 편명을 공부하였다.

24일. 맑았다가 흐리고 간혹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답장이 왔다. 강교姜校가 20냥을 얻어서 갔다고 하였다.

25일. 밤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으며 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림. 보


리농사가 거의 흉년이 들어 걱정스러웠다. 농어 1마리를 가져왔다.

26일. 맑았다가 흐리고 간혹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붐. 오교吳校가 술 반


사발을 들여왔다. 사흘 동안 비가 내리니 고향 생각이 갑절이나 간절하였
다.

27일. 맑았다가 흐리고 더움.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병세는 그간 더욱


심해졌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걱정스러웠다. 관아로 돌아오는 것은 내달
초5일 무렵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 처음 참외를 먹었다. 황경록으로부
터 명주 1필이 왔다.

28일. 맑았다가 흐리고 간혹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답장이 왔는데 내달 초2~3일 사이에 관아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오교吳校의 집에서 술값 5전을 썼다. 아전 김씨가 와서 말하기를 최장석으로
부터 150전을 받아 두었다고 하였다. 새 옷을 입었다.
450 청일전쟁 관련 자료

29일. 종일 비가 내림. 오교吳校의 집에서 술 1사발을 샀는데 값이 1냥이


었다. 망건 고치는 공임으로 1냥 5전을 지불하였다. 침모에게 망건을 꾸며
달라고 하였다. 관아의 목수에게서 목침모木枕帽 1개를 가져왔다.

6월 [六月]

초 1일. 병오[六月 初一日 丙午]


조금 맑고 간혹 비가 내림. 아전 박씨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섬의
백성들이 주령의 선정에 감화하여 비석을 세운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으
니 매우 기뻤다. 저녁에 음산하게 비가 내리고 습하여 나그네의 수심을 견
디기 어려웠다.

초 2일. 아침에 비가 퍼붓다가 낮에 조금 갬. 아전 박씨 편에 답장이 왔


다. 최야崔也에게 줄 돈 50냥을 내가 가져다 쓰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여 매우
감격하였다. 용천 노파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즉시 답장이 왔는데
병은 여전하다고 하였다.

초 3일. 종일 비가 내림. 오교吳校에게서 또 술 1사발을 가져왔다. 아전


김씨가 술 2사발을 보내 주어 감사하였다. 내아內衙가 여러 날 동안 몹시 아
파서 걱정이 되었다. 소포少浦의 김 의원에게서 가미패독산加味敗毒散 2첩을 지
어 와서 복용하였다. 저녁에 술 몇 잔을 마시고 나그네의 회포를 풀었다.

초 4일. 종일 비가 내림. 개천의 물이 크게 불어났다고 하였다. 사령使令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치고 아울러 진신[泥鞋]43) 견본을 보냈다. 즉시 답장
이 왔는데, 근자에 오한이 든다고 하였다. 걱정이 되었다. 또 김제원金濟元에

43) 진신(泥鞋) : 들기름을 가죽신에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한 신. 유혜(油鞋).


사정일기 沙亭日記 451

게서 편지가 왔다. 황 참봉의 집에서 꿀 1종지를 얻어 와서 술을 꿀과 섞었


다. 이흥복李興福에게서 농어 1마리가 왔다. 5전이 들어왔는데 침모針母에게 2
전을 빌려 주고, 어린 닭 2마리를 샀다. 저녁에 내아內衙의 통증이 심하여 걱
정스러웠다. 오늘 저녁은 고조할아버지의 기일이다.

초 5일. 오늘은 소서小暑이다. 종일 비가 내림. 주령이 병저리兵邸吏, 병영의 저


리가 가져온 문서를 어제 보내 주었다. 동학東學을 믿는 유생이 초토사招討使에
게 사정을 하소연한 것으로, 처음에는 백성의 나라의 근본이라고 언급하고,
중간에는 폐단을 늘어놓고, 마지막에는 국태공國太公을 감국監國으로 받들자고
하였다. 우교右校가 후추胡草 반 급級을 보내 왔다. 저녁에 침모에게 옷을 다 빨
았느냐고 물었다.

초 6일. 비가 내리고 간혹 맑고 바람이 붐. 저녁에 비가 많이 왔다. 하루


종일 강고康誥 서경 의 편명의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한다[明德新民]”는 대
목을 공부하였다.

초 7일. 맑고 더움. 홍국弘局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답장이 오


지 않았다. 김아金雅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즉시 답장이 왔다. 황 단천이 왔다
갔으며, 참외를 보내 왔다. 이방으로부터 산고散稿 1권을 들여왔는데, 청나
라 사람의 시가 있었다.

隔水相思信息遲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지만 소식이 더디구나.


門前爲種綠楊枝 문 앞에 푸른 버드나무 가지를 심으니
繁陰細雨新晴後 우거진 녹음에 가랑비 내리다가 새로 갠 뒤에
兩兩黃 喚友宜 꾀꼬리는 쌍쌍이 정답게 지저귀네.
452 청일전쟁 관련 자료

또,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인 내용의 시가 있었다.

金鳳仙花血色殷 핏빛 같은 봉숭아로
佳人染得指尖端 아름다운 이가 손톱을 물들이네.
彈琴亂落桃花片 거문고 탈 때는 어지러이 떨어지는 복사꽃잎이요
行酒輕浮玳瑁盤 술잔 돌릴 때는 가볍게 떠다니는 대모반玳瑁盤이로다
摩鏡火星流夜月 거울을 닦으니 화성火星이 달 속으로 흐르고
掃眉紅雨過靑山 눈썹을 그리니 붉은 비가 청산을 지나가네.
然一笑支 坐 아리땁게 웃으면서 턱을 괴고 앉으면
依舊 脂點玉顔 아름다운 얼굴에 예전처럼 연지를 찍은 듯하네

초 8일. 밤에는 크게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렸으며 낮에는 흐리고 간혹 비


가 내림. 술이 떨어져서 마시지 못하여 더욱 무료하였다. 이방이 양시楊市에
가면서 유진油袗, 비옷을 빌려 갔다. 백목白木 20자의 값은 4냥이고 갓끈의 값은
1냥 1전이었다.

초 9일. 밤에 크게 우레와 비바람이 쳤다. 새벽에 일어나 등불을 밝히고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다. 이는 성인聖人이 “반드시 변화한다[必變]”고 한 뜻이
다. 낮에는 맑고 더웠다. 고 중군高中軍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는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초 10일. 종일 비가 내렸으며, 낮에는 크게 우레와 비바람이 쳤다. 섬의


이한종李漢宗이 편지와 함께 마른 농어 1마리를 보냈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이시권李時權 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녁에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11일. 밤새도록 비가 내리고 낮에는 조금 갬. 여러 군교軍校들이 가는 편


사정일기 沙亭日記 453

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으며, 즉시 답장이 왔다. 아전 원元씨가 중국 두루


마리[唐周紙] 1축을 보냈다.

12일. 맑았다가 흐림.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으나 답장이 오지 않았다.


김 중군金中軍이 꿀을 탄 술 몇 잔을 들여보냈다. 저녁에 그것을 마시고 나그
네의 회포를 풀었다. 주령이 중군中軍을 불러 갔는데, 관노 사령을 진휼하는
일에 대해 분부하였다고 한다.

13일. 아침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림. 이방이 양시楊市에서 돌아왔다. 오


늘 저녁은 고조할머니의 제삿날이다.

14일. 흐리고 간혹 비가 내림. 이방이 가는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


다. 즉시 답장이 왔다. 또 김제원의 편지가 도착하였으며, 주서백선朱書百選 44)

3권을 보내 왔다. 감사하였다. 김 중군이 들어와서 나가자고 하여 같이 나갔


다가 크게 취하여 들어왔다. 밤새도록 몹시 아팠다.

15일. 오늘은 초복初伏이다. 흐리고 더움. 이경세李京世가 술 1사발을 보내


주었다. 종일 몹시 아팠다. 이방이 섬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창고의 비축미
10석으로 관속官屬들을 진휼한다고 하였다.

16일. 맑고 더움. 주사별장 김명현金明玄이 술 반 사발을 들여보냈다. 공


방工房이 제수를 들여보냈다. 나졸羅卒이 가는 편에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다.
답장이 왔는데, 병세는 오한 때문에 종종 괴롭다고 하였다. 고 함종高咸從이
의주에서 와서 만났다. 안경 50경鏡 1개를 사가지고 왔으며 값은 7냥이라고
하였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청淸과 왜倭가 병선兵船을 불러 경강京江에 정박하

44) 주서백선(朱書百選) :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의 편지 글에서 백 가지를 뽑아 모은 책.


454 청일전쟁 관련 자료

고 있다고 하였다. 몹시 걱정스러웠다. 저녁에 술 몇 잔을 마셨다.

17일. 맑고 더움.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으며, 답장이 왔다. 또 김제원에


게 편지를 부쳤다. 포제褒題45)를 베껴 오기 위하여 박도겸朴道兼을 용천으로
보냈다.

18일. 맑고 더웠으며 간혹 비가 내림. 섬에 사는 이창규李昌圭가 말린 새


우 몇 되를 보내 왔다. 섬의 장리將吏들이 모두 나왔다. 말을 타고 덕계로 갔
다. 오리정五里亭에 이르렀을 때 비를 만나서 황재명黃在明의 집으로 피해 들어
갔다. 이군李君을 불러서 만나 보았다. 날이 갠 뒤에 출발하여 곧장 김아金雅의
집에 도착하였다. 주령의 병세는 마찬가지였다. 포제褒題를 보니, “열악한 진
보鎭堡에서 백리에 걸쳐 합당한 조치를 하였다[何有殘堡合施百里上]”고 하여 매우 기
뻤다. 신 첨지를 만나 보았다. 육지와 섬의 장리將吏들이 모두 와서 문안하였
다. 저녁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 이군이 들어왔다. 섬의 좌교左校를
불러서 관재장官齋長의 일을 의논하였다. 새 옷을 입었다.

19일. 맑고 더우며 간혹 비가 내림. 이창규李昌奎가 술 몇 잔을 들여보냈


다. 주령이 김제원에게 서문序文을 써서 보내 주라고 나에게 부탁하기에 골
똘히 생각하였다. 이방이 용천 노파의 은가락지 값으로 26냥 6전 3푼을 빌
려 주었다고 하였다.

20일. 밤에 비가 내렸으며 낮에는 맑고 더우며 간혹 비가 내림. 주령에


게 편지를 부쳤으나 답장이 오지 않았다.

45) 포제(褒題) : 감사가 관할 지역 수령의 치적을 조사하여 그 성적을 매긴 포폄(褒貶)을 임


금께 아뢰는 글.
사정일기 沙亭日記 455

21일. 맑고 더움. 아전 김씨가 술 1사발을 들여보냈다. 김제원의 서문序


文을 짓고 아전 박씨에게 글씨를 쓰도록 하였다.

22일. 맑고 더움. 주사별장 김명현이 술 반 사발을 들여보냈다. 중군中軍


이 참외 몇 개를 들여보냈다. 용천의 수통인首通引 박근양朴近陽과 공리工吏 오병
하吳丙夏가 와서 만났다.

23일. 맑고 더움. 저쪽 사람들의 군함이 강을 메우면서 가서 사하자沙河


子에 진을 쳤다고 한다. 민심이 어지러웠다.

24일. 맑고 더움. 주령의 편지가 왔다. 일본 사신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가 우리나라에 올린 글과, 승지承旨 서상교徐相喬가 천진天津에서 보낸 전보電
報가 도착하였다.46) 고 중군高中軍이 와서 술을 가져갔다. 주령에게 답장을 부
쳤다. 또 김아金雅에게 편지를 부치고 서문序文과 이전의 운韻에 화답한 시를
보냈다. 어제 저녁과 오늘 저녁에는 술을 마셨다.

25일. 오늘은 중복中伏이다. 밤에 비가 내리고 낮에는 맑고 더움. 주령에


게 편지를 부쳤더니 답장이 왔다. 어제 덕계로 보낸, 이전의 운韻에 화답한
율시律詩 2수와 절구絶句 1수는 다음과 같다.

<율시 1>
知己幸逢長者寬 지기知己가 다행히 너그러운 장자長者를 만나
通心主客兩相歡 주인과 손이 마음을 통하고 서로 기뻐하네.

46) 승지(承旨)……도착하였다 : 이때 서상교(徐相喬)는 주진독리(駐津督理) 이면상(李冕


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천진(天津)에 주재하고 있었다.
456 청일전쟁 관련 자료

風流太守同留席 풍류 넘치는 태수가 자리를 함께 하고


勝會高朋每正冠 성대한 모임의 훌륭한 벗들은 늘 의관을 단정하게 하네.
病長歸應不起 더위 병은 멀리 가서 다시 생기지 않고
雷鳴東野 無寒 동쪽 들에 천둥 소리 나서 아직 춥지 않네.
願隨孤月詩家宿 외로운 달을 따라 시가 있는 집에서 머물면서
長得諸君帶笑看 오래도록 여러분들을 웃으며 바라보고 싶네.

<율시 2>
南遊遊子又西遊 남쪽에서 놀던 나그네 또 서쪽에서 노네.
到處萍鄕是幷州 도처의 평향萍鄕은 제이의 고향 병주幷州로다.
宇宙百年人已老 우주에서 백년, 인생은 이미 늙었고
風塵萬事水東流 풍진 속의 만사, 물은 동쪽으로 흐르네.
有名高士開書 유명하고 뛰어난 선비는 서재의 창문을 열고
無事將軍下戍樓 일없는 장군은 수루戍樓에서 내려오네.
長夏孤堂狂叫客 긴 여름날 외로운 당堂에서 미친 듯이 부르짖는 나그네
緣 何敢願同留 세상을 멀리 하니 어찌 함께 머무르자고 할 수 있겠나.

<절구>
獨在愁城未解圍 홀로 근심의 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네.
問君何事却忘歸 그대 무슨 일로 돌아갈 것을 잊어버렸나
靑山誰喚故人去 청산은 누가 불렀나, 벗님들 떠나가네.
伐木丁丁黃鳥飛 나무 찍는 소리 쩡쩡 들리고 꾀꼬리 날아드네.

26일. 맑고 더움. 주령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답장이 왔다. 청군淸軍 1만


여 명이 의주성義州城에 주둔하고 있으며, 또 안주安州와 평양平壤 두 지방에도
군대를 나누어서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혜당惠堂, 선혜청당상 민영준閔
사정일기 沙亭日記 457

泳駿이 이달 12일에 잡혀 갇혔다고 하였다. 나라와 집안을 걱정하며 밤새도


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러 장리將吏를 불러서 성城을 잘 지키라는 뜻으로
분부하였다. 새 옷을 입었다.

27일. 맑고 더움. 말을 타고 덕계로 가서 주령을 만났다. 청군淸軍 1만여


명이 과연 상경하여 연로 각 고을에서 온갖 폐단이 발생하였다. 특히 백성
들의 소로 무기를 실어서 가버리니 인심이 소동하여 차마 보고 들을 수가
없었다. 고향집은 까마득히 천리 밖에 있어서 소식이 막연하니 이를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루 종일 주령 및 주인과 문장을 논하다가 거기서 잤다.

28일. 맑고 더움. 여러 사람들과 시회詩會를 열었다. 술과 안주가 나왔


다. 주령의 시는 다음과 같다.

關防地重愧人輕 변방의 중요한 지역에 사람이 가벼워 부끄럽네.


不是尋常太守行 평범한 태수의 행차가 아니구나.
病起詩朋開小硯 병에서 일어나니 시 짓는 벗들이 작은 시회를 열고
時平壯士老孤城 시절이 태평하여 장사壯士는 고성孤城에서 늙어가네
田禾帶新 色 물 댄 논의 벼 띠는 새로운 빛을 띠고
暮樹蟬淸近日聲 저물녘 나무의 청신한 매미 소리는 해 가까이서 들리네.
一詠一觴今日會 한 번 읊고 한 잔 마시는 오늘의 모임
幷州鄕裏故人情 병주향幷州鄕 속 벗님의 마음

나는 아래의 시를 지었다.

千里關河一杖輕 천리 산하를 가벼운 지팡이로 돌아다니다


暮年詩賦又西行 만년에 시부詩賦 지으며 또 서쪽으로 가네.
458 청일전쟁 관련 자료

長天一色連滄海 넓은 하늘은 푸른 바다와 이어져 한 색깔이고


遠峀千重望塞城 먼 산은 첩첩이 쌓여 요새와 마주하네.
鄕國何天來雁信 고향에서는 어느 날에 편지가 오려나
君家今日又蟬聲 그대의 집에서는 오늘 또 매미 소리가 나네.
主人戀戀猶無盡 주인의 애틋한 마음은 끝이 없는 듯하여
罷詩筵更有情 시 짓는 잔치를 끝내자마자 다시 정이 생겨나네.

오후에 돌아오면서 이군의 집과 김 중군金中軍의 집을 들렀다. 저녁에 술


몇 잔을 마셨다.

29일. 맑고 더움. 주령이 부탁한 용천부사와 오 생원吳生員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어서 하인 재신才信 편에 덕계로 보냈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죄
를 짓고 쫓겨난 통인通引 송석석宋石錫이 나타났다. 이에 이치를 따져 엄하게
꾸짖었다. 지난 27일에 포촌浦村에 압류해 둔 곡식이 68석이었는데, 그 배의
선주 안주安州 사람이 몰래 빼돌려서 실어 가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장
교를 보내어 엄하게 지키도록 하였다. 저녁에 고사떡을 가져왔다. 오늘 저
녁은 5대조 할아버지의 제삿날이다.

7월 [七月]

초 1일. 을해[初一日 乙亥]


밤에는 큰 비가 내리고 낮에는 맑고 더웠으며 간혹 비가 내림. 재신才信이
돌아오는 편에 주령의 편지와 김제원의 편지가 왔다. 용천부사의 답장과 오
생원의 답장을 보니, 26일에 별사別使를 지공支供하기 위하여 역참에 나갔는
데, 그날 마 통령馬統領의 부대가 지나가고 그 이튿날에는 위 통령衛統領47)의 부

47) 마통령 위통령 : 청군의 총사령관은 제독 섭지초(葉志超)였으며 그 아래 총병 총령의


지휘관이 있었다. 마통령은 마옥곤(馬玉昆), 위통령은 위여귀(衛汝貴)를 가리킨다. 두
사정일기 沙亭日記 459

대가 연이어 도착하여 소와 땔감 등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서울 소


식은 막연하여 종묘사직의 안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애통하지 않은 점
이 없다. 우리 주객主客의 고향집 소식을 아득히 들을 길이 없으니 어떻게 견
딜 수 있겠는가? 마음이 저절로 요동쳤다. 오교吳校에게서 술 1사발을 가져왔
다. 송도松都, 개성와 평양에도 왜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섬뜩하였다.

초 2일. 맑고 더움. 송병조宋丙祚 편에 주령과 주아主雅, 김제원에게 편지를 부


쳤다. 황 단천의 집에 갔더니 고 함종도 와서 만났다. 오후에 돌아왔다. 주
령과 주아主雅의 답장이 왔는데, 내일 관아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만부灣府, 의주
의 전보 내용 중에, 아산牙山의 전투48)에서 왜군이 대패하였다고 하였다. 저
녁에 술 몇 잔을 마셨다.

초 3일. 맑고 더움. 오전에 주령이 관아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헤어져 있


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청군이 계속하여 들어와 8영營의 대군이 8만여 명
이라고 하였다. 민심이 더욱 동요하고 두려워하였다. 저녁에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히 났다.

초 4일. 맑고 더움. 고 함종과 고 중군, 황 단천,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주령이 6월 10일 서울에서 발송한 편지를 보고는, 일본인과 청국인이 바야
흐로 접전을 벌이고자 하여 도성에는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고 하
였다. 나는 집에서 온 편지를 보지 못하여 걱정이 되고 답답하였다.

지휘관은 평양전투에 참여했다.


48) 아산전투 : 당시 청군은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본군은 육지로 평택을 거쳐 성환역에 도
착하여 양군이 접전을 벌였다. 이어 일본군은 소사평에서도 청군을 공격해서 대승했다.
이를 성환전투 또는 소사전투라 하는데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본문의 ‘왜군이 대패’
는 오류이다.
460 청일전쟁 관련 자료

초 5일.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며 흐리고 더움. 섬의 장리將吏들이 어제


나왔다가 오늘 갔다. 무기를 수선하는 일을 분부하였다고 한다.

초 6일. 맑고 더움. 나 훈장羅訓長과 이흥복李興福이 왔다 갔다. 서전書傳


10권과 언해諺解 5권을 돌려보냈다. 오늘 저녁은 증조할머니의 제삿날이
다.

초 7일. 맑고 더움. 오늘은 입추立秋이다. 김대경金大景이 왔다가 갔다. 용


천으로 갈 편지를 써두었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초 8일. 맑고 더움. 김제원의 편지가 왔다. 동헌東軒에 용천부사와 오 생


원의 답장이 왔는데 모두 말하기를, 왜군이 대궐을 포위49)하였으며 삼전三
殿50)은 파천播遷하였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망극하였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나라와 집안의 소식을 까마득히 들을 수가 없으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초 9일. 맑고 더움. 정언正言 이석영李奭泳이 와서 주령이 술 1사발을 사서


대접하였다. 황 참봉과 고 중군이 왔다가 갔다. 방어사防禦使의 관문關文, 상급관청
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는 공문은 변경을 잘 살피라는 내용이었고, 감영의 관문은 오가
작통五家作統51)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초 10일. 맑고 더움. 김제원과 황 단천, 고 함종이 왔다가 오후에 갔다.


왜군이 도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으며, 또 임진강臨津江과 송도松都를 막고 있다

49) 왜군의 대궐 포위 : 1894년 6월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진주했고, 이어 남산에


주둔하면서 6월 21일 경복궁 점령을 계획했다. ‘삼전은 파천’은 오류이다.
50) 삼전(三殿) :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 동궁(東宮)을 말한다.
51) 오가작통(五家作統) : 민호(民戶) 다섯 집을 1통(統)으로 편성하는 호적법이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61

고 하였다. 청군들이 계속하여 올라간다고 하였다. 만부灣府에서 관문이 왔


는데, 청군을 수로水路로 올려 보낼 것이니 선박 20척을 준비하고 기다리라
고 하였다. 이 또한 큰일이다. 저녁에 이군이 왔다가 갔다.

11일. 맑고 더웠으며 낮에 소나기가 내림. 맹자孟子 여섯 책을 이 정언


李正言에게 전하라고 김대경金大京의 집으로 보냈다. 김제원에게 편지를 써서
말과 마부를 빌려 왔다.

12일. 맑고 시원함. 아침에 의주로 길을 떠났다. 선사船泗에 이르러 김제


원의 아들을 만나 동행하였다. 고성古城 장아張雅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에 출발하였다. 중도에 말과 마부를 장아張雅의 집으로 보냈다. 청군들이 말
을 보면 빼앗아 간다고 하기에 이렇게 하였다. 걸어서 성으로 들어갔다. 산
천과 누대樓臺, 성곽 등이 관서關西에서 가장 웅장한 고을이다. 남문南門으로 들
어가니 편액에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이라고 적혀 있었다. 발동撥洞 백 공방白工
房의 집에 여장을 풀고 호방戶房인 향소鄕所 김약순金若淳을 만났다. 저녁에 예방
禮房 이 학관李學官을 만나 서울 소식을 탐문하였다.

13일. 맑고 시원함. 아침에 들어가서 만윤灣尹, 의주부윤 이근명李根命을 만나


서울 소식을 들었다. 6월 21일 저녁에 왜군이 궐내로 돌입하여 삼전三殿을 에
워쌌는데 우리 조정의 여러 신하는 한 사람도 호위하는 자가 없었으며 대원
위大院位, 흥선대원군의 호칭 역시 포위되었다고 하였다. 듣기에 망극하였다. 23일의
정사政事, 인사 이동에서는 선혜청당상 어윤중魚允中, 독판督辦 김가진金嘉鎭,병조판서
김학진金鶴鎭, 호조판서 민영달閔泳達, 전라감사 박제순朴齊純이 임명되었으며,
민영준閔泳駿 응식應植 형식炯植 치헌致獻 4사람은 섬으로 유배되고, 흉적凶賊 옥
균玉均, 김옥균에게는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고 한다. 일본인이 정권
을 잡고 있어서 국사가 날로 잘못 되어가니 통곡하지 않을 일이 없다고 할
462 청일전쟁 관련 자료

수 있다.
아침을 먹은 뒤에 김군金君과 함께 백일원百一院에 가서 청군의 위용을 살펴
보고 영루營壘를 돌아보니 상국上國 군세軍勢라고 할 만하였다. 원통령袁統領52)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그는 “지금은 바빠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
다”고 하였다. 곧장 홀로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월사月沙 이 상국相國, 李廷龜 공의
운韻에 화답하였다.

半倚靑天半倚山 반은 푸른 하늘에 의지하고 반은 산에 의지하여 있는


西城亭子最龍灣 서성西城의 정자는 용천龍川과 만부灣府에서 으뜸이네
願逢天下無雙士 천하에 둘도 없는 선비를 만나
同上海東第一關 함께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에 오르고 싶네.
鴨水三江襟帶裏 압록강 세 줄기는 금대襟帶 속에 있고
燕城萬里枕交間 만 리 길 연성燕城은 침교枕交 사이에 있네.
長安近日無消息 장안은 근래에 소식이 없는데
遊子驚秋尙未還 나그네는 가을에 놀랐지만 아직 돌아가지 못하였네

저녁에 만윤灣尹에게 가서 그의 조카 진사進士 이문로李文魯를 만났다. 낮에 지


은 시를 만윤에게 고쳐 달라고 하였더니, 크게 칭찬하면서 ‘강江’ 자를 ‘조條’
자로 고쳐 주었다. 또 시국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하였다. 또 신도薪島에서
준비하도록 한 선박을 20척에서 11척으로 줄여 달라고 부탁하여 작정하였
다. 밤이 깊은 후에 나왔다. 이 진사李進士는 승지承旨 이영석李永奭의 생질이다.

14일. 맑고 시원함. 한국영韓國永과 함께 서문西門을 나서서 청마령淸馬嶺으


로 갔다. 이곳은 바로 압록강 변으로 상국上國, 중국과 통하는 대로이다. 청군
이 강변의 넓은 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쌀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으며, 휘

52) 원통령(袁統領) : 청의 장수. 이름은 미상.


사정일기 沙亭日記 463

두르는 창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청군이 지나가는 연로沿路 각 고을의


인부와 소를 모두 동원하여 짊어지게 하자 백성들이 전부 흩어져 떠돌게 되
었으니 세상일이 한탄스럽다.

15일. 종일 비가 내림. 호방戶房 김약순金若淳이 아침밥을 성대하게 차려


주어 감사하였다. 한국영韓國永과 백낙원白樂元 등 여러 향인鄕人이 모두 모였다.
서울에 사는 상인喪人53) 이 첨정李僉正도 함께 머물렀다. 어제저녁과 오늘 아
침에 본관本官54)에게 들어가서 만나 회포를 푼 뒤에 작별을 하였다. 한국영
이 저녁을 성대하게 차려서 나를 초청하였다. 그곳에서 잤다.

16일. 맑고 더움. 마부와 말이 어제 이미 고성古城에서 들어와 있었다.


당초에 노자로 15냥을 받아 왔는데 남은 3냥으로 흥정하였다. 오전에 출발
하여 두 개의 나루를 건너 입암立岩 장아張雅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17일. 맑고 더움. 곧장 출발하였다. 중도에 김군과 작별하고 오전에 본


진鎭에 도착하였다. 왕복 도합 90리였다. 주령과 서울 소식 및 세상일에 관
하여 의논하였다. 말과 마부를 돌려 보내고 4냥을 값으로 지급하고, 그 편에
김제원에게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술 몇 잔을 마셨다.

18일. 맑고 더움. 주령이 선박을 점검하기 위하여 두포豆浦로 나갔다. 고


함종과 황 단천이 와서 함께 선포船浦로 갔다. 생선과 술이 있었다. 20척이
와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쓸 만한 선박 1척을 골라 붙들어 두었다.
오위장 김경달金景達도 와서 함께 황 단천의 집으로 갔다. 주물상晝物床55)을 나

53) 상인(喪人) :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


54) 본관(本官) : 의주부윤 이근명(李根命)을 가리킨다.
55) 주물상(晝物床) : 귀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다담상(茶啖床).
464 청일전쟁 관련 자료

중에 들여왔다.

19일. 종일 비가 내림. 청군의 군량선軍糧船 10여 척이 두포豆浦에 정박하


여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고 급히 보고하였으므로, 별견別遣과 통사通事 김옥련
金玉連을 보내어 잘 이야기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20일. 밤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으며 낮에는 맑고 시원하고 바


람이 붐. 본 진鎭의 중군中軍으로 고국서高國瑞를 임명하였다.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전쟁으로 길이 막힌 때에 형제와 처자의 소식이 아득하여 나도 모르
게 눈물을 흘렸다.

21일. 맑고 시원함. 말을 타고 길을 떠나 용천 고을로 가서 생원 오필선


吳必善을 만났다. 전란 중의 막혔던 회포를 풀고 술 몇 잔을 마셨다. 김윤탁金允
琢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즉시 출발하여 용천관龍川館 청류당聽流堂에 도착하여
용천부사를 만났다. 기쁘게 손을 잡고 마주하여 술을 마시면서 회포를 풀고
세상사를 이야기하였다. 섬으로 유배된 죄인 민영준閔泳駿은 임금을 버리고
도주하여 평양의 아전 집에 숨어 있다가 또 자산慈山 땅으로 도망갔는데, 지
나가는 포수에게 붙들려서 마 통령馬統領의 부대로 압송되어 산발을 하고 결
박당하여 있으며, 그 죄상은 권세를 잡아 백성들을 학대하고 나라를 그르친
간신이므로 지옥에 갇힐 것이라고 하였다.
기백箕伯, 평안감사이 갈리게 되어 김만식金晩植이 임명되었는데, 마 대인馬大人은
“이러한 때에 도백道伯을 체차하는 것은 틀림없이 왜인倭人들의 위협 때문이
다”라고 하고는, 신임 도백이 감영에 부임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김백金伯, 김만
식이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몸을 숨겼다고 하였다. 안곤安梱, 평안병사56) 김동훈金東
勛이 죽었다고 하였다. 현재는 왜인들이 도성에 쫙 깔려 있으며, 대전大殿께서

56) 안곤 : 평안도병사의 약칭. 곤(梱)은 병마절도사의 별칭.


사정일기 沙亭日記 465

는 대궐에 갇혀 있고, 정사는 모두 왜인들의 손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듣기


에 매우 애통하였다. 용천 고을의 장리將吏들이 인부와 소를 보내 달라고 청
하였므로 일의 형편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꾸짖고 타일렀다. 6월
27일부터 청군이 매일 끊이지 않고 지나므로,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서는 모
두 인부와 소로 저들의 짐을 실어 보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곤궁해지고
재산은 고갈되었으며, 소는 지치고 곡식은 거덜나서 고을마다 모두 텅 비었
다고 하였다. 세상일이 한심하였다.

22일. 맑고 시원함. 대청마루 앞에 작은 봉우리가 있고 또 기이한 수석


水石이 있는데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본 고을의 수령과 함께
올라가서 술 몇 잔을 마시고 내려왔다. 그런데 서울 상인인 청나라 사람들
이 왜란倭亂을 피하여 도망쳐 와서 말하기를, 왜추倭酋, 일본 우두머리가 비단 서울
만이 아니라 광주廣州 여주驪州 충주忠州 안성安城 화성華城 등의 고을을 포위하고
있어서 진을 치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간담이 내
려앉는 듯하였다. 고향 소식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어린 자식이 아비를
부르는 소리와 형제들이 그리워하는 정이 마음에 걸려 가슴이 서늘해지고
간담이 내려앉았다. 오후에 출발하여 곧장 용천 고을에서 20리 지점에 이르
렀다.

23일. 종일 비가 내림. 오늘은 처서處暑이다. 오 생원과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김윤탁金允琢의 집에 와서 잤다. 밤이 깊은 뒤에
본 고을 수령은 관아로 돌아갔다.

24일. 맑고 시원함. 노자 3냥 가운데 과일 값을 흥정하여 하인에게 주


고 요기채饒氣債를 제하고 1냥 4전이 남았다. 아침에 본 고을 수령에게 들어
가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 뒤에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김제원
466 청일전쟁 관련 자료

의 집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장 본 진鎭에 도착하였


다. 주령이 의주로 선박을 보내면서 소를 잡고 술을 하사하여 일꾼들을 먹
이자 뱃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출발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선정善政이다. 저
녁에 객중의 회포가 평온하지 않아 단잠을 이룰 수 없었다.

25일. 맑고 시원함. 주령이 술 1사발을 가져오고 고기를 삶아서 안주를


만들어 나를 대접하였다. 천리 밖 먼 변방의 객지에서 2년간 고생한데다 또
병란까지 만나 집안과 나라의 존망의 소식을 아득히 들을 길이 없었다. 형
제와 처자들은 필시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터이니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간
담이 떨어지고 애가 끊어져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전 원元씨가 상
을 당한 이후 처음 들어왔다.

26일. 흐리고 시원하며 또 바람이 붐. 단천 황 참봉과 덕계 김아金雅, 김제


원 두 사람이 와서 함께 뒤쪽 제방으로 천렵川獵을 나갔다가 바람을 맞으면서
돌아왔다. 용천의 강교姜校라는 자가 왔다고 하였다.

27일. 맑고 시원하였으며 간혹 비가 내림. 주령이 더위로 인한 설사 때


문에 몸이 불편하여 걱정스러웠다. 별당別堂에 온돌을 수리하였다.

28일. 흐리고 시원함. 안주병영安州兵營 우후虞候 김신묵金信默의 편지가 왔


는데, 그사이 병사兵使가 갑자기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은, 광서光緖
연호를 동립東立 원년57)으로 부르고, 지벌地閥, 지체와 문벌을 혁파하고, 반상班常을
막론하고 인재를 거두어 쓰고, 관제官制를 통일하고, 복식을 개정하는 등 갑

57) 동립 원년 : 당시 광서는 청의 연호였는데 종전에 사용하던 광서 연호를 이때 ‘개국 503


년’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동립(東立)이란 연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잘못 알았던지 아
니면 ‘독립’(獨立)의 오기로 보인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67

신년甲申年의 예58)를 따랐다고 한다. 기타 절목節目은 기록할 수가 없었다. 왜


추倭酋가 정권59)을 잡고 있어서 대전大殿께서는 팔짱을 끼고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오백 년 동안 지켜온 예의禮義가 전부 사라지게 되었으니 애통하도
다.

29일. 맑고 시원함. 주령이 술 5사발을 가져다 두었다. 값은 5냥 2전 5


푼이라고 하였다. 고 함종과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백현栢峴 김 참봉이 주령
에게 고기와 장醬을 보냈다고 하였다. 이틀 저녁 술을 마셨다.

30일. 맑고 시원함. 백현 김 참봉이 김제원의 편지를 갖고 왔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어제 시장에서 산 당목唐木 6자의 가격은 3냥 9전이며, 담배 1
묶음의 가격은 9전이었다.

8월 [八月]

초 1일. 을사[八月 初一日 乙巳]


맑고 시원함. 주령이 용천부사에게 편지를 부쳤다. 오 생원이 농어 10마
리를 보냈다고 하였다. 의주에서 선박을 수령하여 갔다. 별견別遣 김득정金得正
이 와서 선박을 아무 탈 없이 잘 내어주었다고 하였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초 2일. 맑고 서늘함. 고 함종이 왔다가 갔다. 금년 정월에 와서 머물렀


던 필사筆士 김아金雅가 왔다. 참으로 뜻밖이어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용천부
사의 답장이 왔는데, 민영준閔泳駿이 석방되었다고 하였고, 원 대인袁大人60)이

58) 갑신년(甲申年)의 예 :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들이 내세웠던 개혁안을 말한다.


59) 왜추 정권 : 이 해 7월 이후 일본의 사주를 받은 개화파들이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을 두고 일반적 정서를 전한 것이다.
60) 원 대인 : 원세개는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라는 직함을 가지고
조선의 문제를 간섭하였다. 대인은 존칭. 청나라는 당시 성환ㆍ풍도 등지에서 일본군에
468 청일전쟁 관련 자료

4만의 군대를 이끌고 가까운 시일에 온다고 하였으며, 마 통령馬統領이 황주黃


州로 가서 진을 쳤다고 하였다.

초 3일. 맑고 서늘함. 주령이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가서 전해 달라고


김아金雅에게 부탁하여 그가 수락하였다. 다행이었다. 서울로 보내는 편지와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광주廣州와 충주忠州로 가는 도로가 막혀
서 산길로 갈 계획을 세웠다.

초 4일. 맑고 서늘함. 김아金雅가 출발하여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으


나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답답하였다. 이런 난리 통에 천여 리를 왕복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가슴이 답답하였다.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청
군의 군량선 10척이 본 포구에 와서 정박하였다. 청국인들이 진鎭에 들어와
서 토색질을 하므로, 동헌東軒으로 불러들여 관에서 잘 타일러서 보냈다. 저
녁에 술을 마셨다.

초 5일. 서늘함. 청국인들의 작폐를 금지하도록 해달라고 만영灣營에 보


고를 하고 만윤灣尹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 호방戶房 향소鄕所 김약순金若淳에게
편지를 부쳤다. 황 단천과 이 정언이 왔다가 갔다. 밤이 깊은 뒤에 각 방房의
하인들을 점고하였다.

초 6일. 맑고 시원함. 청군들의 토색질을 금지하여 달라는 일로 청군 진


영의 마 대인馬大人에게 보고하도록 글을 작성해 두었다. 청군의 군량을 실은
선박이 지나가면서 토색질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군中軍을 파견하여
탈 없이 보내었으며, 중군이 청국인 풍국장馮國璋의 명함을 받아 왔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패전한 뒤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69

초 7일. 맑고 시원함. 김제원과 고 함종이 와서 소를 잡고 술을 마련하


였다. 남동南 의 갈대밭을 관아에 소속시키라는 뜻으로 본 동洞에 전령을 보
냈다. 저녁에 이방에게서 술 1사발값 1냥을 가져왔다.

초 8일. 맑고 시원함. 김봉린金奉 이 의주에서 돌아왔으며, 만윤灣尹의 답


장이 왔다. 보고한 문서에 대한 엄한 제사題辭와 관문關文에, 통사通事와 뱃사람
들이 폐단을 일으키는 일을 엄금한다고 하였다. 또 청군 진영의 고시告示 1통
도 구하여 보내었는데, 청군들이 작간을 부리는 일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청한 일들이 일일이 시행되어 감사하였다. 호방戶房 향소鄕所 김약순金若淳의
편지가 왔다. 용천부사의 편지가 왔다.

초 9일. 오늘은 백로白露이다. 맑고 시원함. 중국어를 잘하는 김여항金呂恒


이라는 자를 불러서 진鎭 내에 머물도록 하였다. 주령을 대신하여 다시 김제
원에게 주는 서문을 지었다. 또 율시 1수를 지었다.

平生幽趣愛幽居 평생 고요한 정취를 가지고 고요한 거처를 좋아하여


十載關西處士廬 십 년을 관서關西에서 처사의 오두막에 살았네
白首不談今世事 허옇게 쇤 머리는 오늘날 세상사를 말하지 않고
靑燈長對古人書 푸른 등잔에서 옛 사람의 책을 오래도록 대하네
俟時 秋吟意 때를 기다리는 귀뚜라미는 가을에 울고
棲老梧桐月向初 봉황이 깃든 벽오동 늙은 가지는 애초부터 달을 향하네
先問夫君常設榻 먼저 그대에게 묻노니, 상은 항상 펼쳐 놓았는가
我非陳也子眞徐 내가 할 것이 아니네, 그대 참으로 느리구나

초 10일. 아침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렸으며 낮에는 흐림. 섬의 관재장


官齋長으로 이시권李時權 군을 차출하였다고 하였다. 남동南 의 갈대밭은 오학
470 청일전쟁 관련 자료

민吳學民 집안의 장토庄土이나 관아로 소속시키라는 뜻으로 전령을 보냈다. 저


녁에 술을 마셨다.

11일. 맑고 시원함. 고 함종과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중국어 책 2권을


얻어 왔다. 중흥中興과 신흥新興의 도보장都堡長61)으로 황 단천을 선발하였으
며, 돌성乭城과 모전毛全의 보장堡長으로 황재록黃才祿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12일. 맑고 서늘함. 황재록이 와서 만났다. 오위장 김경달이 왔다가 갔


다. 관아에서 순해군관巡海軍官 2명을 추가로 늘렸다고 하였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13일. 맑고 시원함. 주령이 대군물大軍物62)로 나가서 오가작통군五家作統


軍63)을 점고하고, 또 시험 사격을 하고 저물 무렵 관아로 돌아왔다. 오늘 저
녁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삿날이다. 평상시라도 천리 먼 변방에서 2년이나
객지 생활을 하였다면 슬픈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터인데 이러한 난세를
만나 집안 소식이 아득하다. 또 오늘 밤을 당하니 길러 주신 어머니의 괴로
움이 하늘처럼 끝이 없으니, 형제와 처자들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 나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다. 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웠다.

14일. 맑고 시원함. 황 참봉이 술 1주발을 보내 왔다. 장청將廳64)에서 소

61) 도보장(都堡長) : 보(堡)는 보(保)의 오식인 듯함. 오가작통에 따라 보를 지정하고 이를


상위 단위로 통괄하는 조직을 말한다.
62) 대군물(大軍物) : 군인이 완전한 격식의 군장(軍裝)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간편
한 격식의 소군물(小軍物)이 있다.
63) 오가작통군(五家作統軍) : 다섯 호를 한 통으로 묶어 군사 체제로 만든 것. 일종의 지역
방위군.
64) 장청(將廳) : 군아(郡衙)와 감영(監營)에 속한 장교가 근무하던 곳.
사정일기 沙亭日記 471

를 잡았다. 내일은 명절이다. 오늘 저녁은 달이 밝아 맑은 하늘 아래서 집


생각을 하니 어찌 나그네의 수심을 견딜 수 있겠는가? 술 몇 잔을 마셨다.

15일. 맑고 시원함. 이인건李仁鍵이 와서 만났다. 오늘은 명절이어서 고


향 생각이 갑절이나 간절하였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16일. 맑고 시원함. 용천 관아에서 보내 온 서울 소식에 정사축政事軸이


왔는데, 6월 22일부터 그믐까지의 정목政目65)이었다. 관제와 의복제도 및 기
타 장정章程은 한결같이 왜제倭制를 따랐으며, 대관大官은 모두 개화開和, 開化의 오기
신료들로 임명하였다. 세상일이 지극히 한심하였다. 감영에서 감결甘結, 하급
관청에 보낸 공문이 왔는데, 주령은 이미 체직遞職되었다. 그러나 청군 진영[天
陣]에서는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도백道伯과 수령守令을 개체改遞하지 못하
도록 하고, 천조天朝, 청국 조정에서 결정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임지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신정新政을 일체 발송하지 말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령
의 거취가 기한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한탄스러웠다. 돈 5냥을 김여항金呂恒
에게 빌려 주었다.

17일. 밤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렸으며 낮에는 맑음. 황 단천과 황 참


봉, 김대경金大敬이 왔다가 갔다. 감영의 감결이 도착하였는데, 성향미城餉米, 성
에 비축한 공적인 쌀 창고를 열어 이달 20일로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이시권 군
이 섬의 관재官齋로 옮겨 갔다고 하였다.

18일. 맑고 시원함. 주령이 김례항金禮恒, 金呂恒의 오기로 보임으로 하여금 학당


學堂을 개설하고 진鎭 내의 소년들을 뽑아서 중국어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
때 청군 진영에서 소용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였다. 김아 제원金雅濟元과

65) 정목(政目) : 조선 시대 때 벼슬아치의 임면(任免)을 적은 기록.


472 청일전쟁 관련 자료

그의 족인族人이 왔다가 갔다. 신발 값 3전을 용천 노파에게 빌려 주었으며,


또 10냥을 빌려 주었다.

19일. 맑고 시원함. 지난밤에 패전한 청국인 군함이 와서 정박하고 있


다고 하였다. 통사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전에 보낸 본 진鎭의
군량운반선이 돌아왔는데, 그동안 왜군과 청군이 강서江西 땅에서 접전을 하
여 청군이 패하여 달아나 패성浿城으로 들어가자 왜군들이 성 밖을 에워싸고
군량선을 가져갔으며, 청군 수십 명은 도망쳐 왔다고 하였다. 듣기에 가슴
이 몹시 한심하였다. 의주의 상인喪人 이李씨가 와서 유숙하였다. 섬의 장리將
吏들이 나왔다.

20일. 맑고 시원함. 김아金雅와 황 소년黃少年이 왔다가 갔다. 감사가 11일


에 보낸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본 진鎭에 군수전軍需錢으로 500냥을 배정한다
고 하였다. 내아內衙에서 매일 한기가 심하게 들고 몹시 아프다고 하여 걱정
스러웠다.

21일. 맑고 시원함. 성향곡城餉穀의 창고를 열어서 직접 거두었다고 하였


다. 한어학당漢語學堂, 중국어 학습소에 가서 술값으로 5전을 썼다. 청군의 패잔병
이 모두 도망와서 폐단을 일으키고 있으며, 용천부사는 촌가에 피신하였다
고 하니 한탄스럽다. 민영준閔泳駿을 의주의 청군 진영으로 잡아 갔다고 하였
다.

22일. 맑고 시원함. 김제원이 왔다가 갔다. 용천과 의주 두 고을의 많은


백성이 난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 진鎭으로 옮겨 와서 인심이 소란스러웠다.
흰 종이 1묶음으로 책을 만들어 들여왔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73

23일. 맑고 시원함. 지난밤부터 곽란 亂으로 몸이 불편하여 걱정스러웠


다. 의원 이재명李在明이 (결락) 2첩을 지어 왔다. 고 함종이 왔다가 갔다. 주령
이 용천부사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답장이 왔는데, 패성浿城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이 모두 내려와서 무수히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였다. 민영준이 18
일에 역참을 지나갔다고 하였다. 담배 5전어치를 샀다.

24일. 오늘은 추분秋分이다. 맑고 시원함. 병이 조금 나았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25일. 종일 가는 비가 내림. 오늘 비로소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었다.


고 함종의 편지가 왔다. 이방에게서 술 1사발을 들여왔다. 값은 1냥이다.

26일. 지난밤에 큰 비가 내리고 낮에는 맑고 시원함. 원 대인袁大人 진중


의 번역관인 첨사僉使 김의순金宜淳이 탄 배가 서울에서 7월 27일에 출발하여
두포豆浦에 정박하였다. 그가 오늘 들어와서 만나 서울 소식을 들으니, 민영
달閔泳達 대감은 그 사이 이미 유배에 처해졌다고 하였다. 또 삼전三殿과 대원
위大院位 대감은 궁중에 포위되어 왜인들의 지시만을 따르고 있으며, 여러 신
하는 한 사람도 입조入朝하지 않고 모두 낙향하였다고 하였다. 듣기에 심히
통탄스러웠다. 삼남三南에서 동도東徒가 크게 일어나서66) 왜인을 토멸하는 것
을 명분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듣기에는 다행스럽지만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나랏일을 생각하면 통곡만 나올 뿐이다.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27일. 맑고 시원함. 김아 제원金雅濟元의 편지가 왔는데, 감사가 마 대인馬


大人을 쫓아오느라 배를 타고 철주鐵州, 鐵山 고을에 와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편

66) 삼남에서 동도가 크게 일어나서 : 전봉준과 손병희는 연합해 2차 봉기를 서둘러서 이해


9월에 본격적으로 항일전선을 형성하고 논산 공주로 진격했다.
474 청일전쟁 관련 자료

지를 보내 용천부사를 불러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곽산군수郭山郡守 한치유韓致


兪는 걸어서 만부灣府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즉시 용천 관아에 편지를 부쳤
다. 시국이 이렇게 한심하였다. 동남창東南倉이 파괴되어 곡식을 들여 놓기가
힘들어 동헌東軒에 곡식을 받아 두었다. 오늘은 형님의 생신이어서 형제와
아들, 조카들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서로 알 길이 막
연하니 어느 날이나 지탱하며 살아가겠는가? 단지 통곡할 뿐이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28일. 맑고 시원함. 용천 오 생원의 답장이 왔는데, 감사가 과연 철산


고을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가마꾼 4명도 왔다. 주령은 즉시 철산으로 출
발하였다. 황 단천과 황 참봉, 김대경金大京이 왔다가 갔다. 청군 진영의 패잔
병 몇 명이 육지에 내려 잠시 머물면서 폐단을 일삼고 갔다고 하여 한탄스
러웠다.

29일. 맑고 시원함. 학당學堂에 가서 술값으로 3전을 썼다. 또 김 중군金中


軍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감사가 용천부로 와 어제
중도에 함께 용천 관아로 갔다고 하였다. 감사는 몸을 빼어 도망 나와 의복
이 전혀 없으니 이곳에서 옷을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만들어 둔 의복 몇
벌을 편지와 함께 싸서 보냈다. 고 함종에게 편지를 부쳐, 여름에 사가지고
온 안경 값 7냥을 보냈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9월 [九月]

초 1일. 갑술[初一日 甲戌]


맑고 시원함. 이방에게서 술 1사발을 가져왔다. 주령이 관아로 돌아왔다.
그에게 들으니, 감사가 청군과 왜군의 평양 접전 시에 총탄 속에서 몸을 빼
서 도망 나와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오늘은 만부灣府로 들어간다고 하
사정일기 沙亭日記 475

였다. 용천의 내행內行67)이 배로 길을 떠난다고 하였다. 이곳 진鎭의 내행도


출발한다고 하여 나도 함께 떠날 계획을 세웠다. 매우 서운하였다. 고 함종
이 왔다가 갔다.

초 2일. 맑고 시원함. 나의 삭전朔錢, 매월 지급하는 돈 중에 남은 부분 총 400


냥을 이방에게 분부하여 즉시 들이라고 하였다. 오교吳校에게 술값 2냥을, 김
중군에게 술값 3전을 갚았다. 내일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느라 어수선하였
다. 아전 김씨에게 맡겨 두었던 50냥, 즉 전 28냥과 은환銀丸 1개의 결가結價
22냥을 들여왔다. 김제원과 김 오위장이 왔다가 갔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
다.

초 3일. 맑고 시원함. 식후에 출발하였다. 백성들이 중도에 모두 모여서


머물러 있기를 희망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한탄스러웠다. 고
함종이 와서 노자 10냥을 주었고, 김제원이 신발 1켤레를 보내 왔고, 김 오
위장이 노자 5냥을 주었다. 모두 감사하였다. 김제원에게 빌려 온 주서백
선朱書百選 3권을 반드시 믿고 전달해 달라는 뜻으로 고 함종에게 보냈다. 저
녁에 백성들이 수직守直을 한다고 하였다.

초 4일. 맑고 시원함. 하루 종일 심란하였다. 이아 인건李雅仁建과 신학수


申學洙가 와서 잤다. 일전에 왜인倭人 6명이 용천에 들어왔다가 무사히 지나갔
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밤마다 수직을 하니 한탄스럽다.

초 5일. 맑고 시원함. 김제원이 와서 말하기를, 용천의 내행內行이 어제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 안타까울 따름이다. 장리將吏
들이 백성들과 한통속이 되어 관리의 행차를 방해하니 애통하다. 이방에게

67) 내행(內行) : 부녀자가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말함. 혹은 그 부녀자를 말함.


476 청일전쟁 관련 자료

서 찾은 돈 346냥 1푼 가운데 용천 노파에 준 돈 42냥 8전을 제하면 실제로


303냥 2전 1푼이 남는다. 그 중에서 돈 150냥과 장도長刀 및 안경끈 가격 20
냥, 합계 170냥을 내주고 나머지 133냥 2전 1푼을 박소점朴所店에 가져다주었
다. 안타까웠다.

초 6일. 맑고 시원함. 며칠 안으로 출발하려는데 선주船主들이 배를 내어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탄스럽다. 고 함종과 황 단천,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초 7일. 맑고 바람이 붐. 김제원과 김 오위장이 배를 주선하였으며, 김


오위장은 그 일 때문에 유숙하였다. 저녁에 왜인 6명이 동헌으로 들어왔으
나 별다른 탈은 없었다. 그 가운데 높은 자는 금정의일今井義一이고, 그 다음은
자견묘삼自見卯三으로 연해의 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의주에서 왔다고 하였다.
감사와 병사兵使가 모두 새로 부임하였으며 전임 도백道伯은 어디로 가서 어떻
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왜군의 무기는 사람을 두렵게 하였다. 잡아
두었던 배 3척 중에 1척은 관용官用으로 쓸 계획이었다.

초 8일. 맑고 바람이 붐. 왜군들이 아침을 먹고 떠났다. 김제원의 아들


이 가지고 온 별은別銀, 황금 2돈 2푼쭝의 값은 36냥이고, 은환銀丸과 모은毛銀 2근
1냥 3돈쭝의 값은 10냥이고, 세목細木 1필의 값은 16냥이고, 산주山紬 20필의
값은 13냥으로 도합 75냥을 맡겨 두었다. 이방 (결락) 조 133냥 2전 1푼 가운
데 120냥은 관아에 납입하고 기록하였으며, 13냥 2전 1푼은 은 1냥중 (결락)

애통하였다. 용천 노파는 4월 초1일부터 나의 소실小室이 되었는데, 지금 따


라가려고 하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데리고 갈 작정이다.

초 9일. 맑고 서늘함. 김제원이 아침에 왔다. 오전에 두포豆浦로 갔다. 고


사정일기 沙亭日記 477

함종이 이별주를 권하였고, 김아金雅는 시를 지어 주었다. 황 단천과 황 참봉


도 모두 와서 작별을 하였고 여러 장리將吏들도 모두 하직하였다. 너무나 서
운하여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하였다. 용천 노파와 서울 노파가 모두 배에
올랐다. 함께 배 안에서 잤다.

초 10일. 맑고 서늘함. 새벽에 배가 떠났다. 도중에 섬의 좌교左校 박효


긍朴孝兢과 육지의 이방吏房 전치락田致洛 및 김제원의 아들을 만났다. 오늘은 남
풍이 순조롭지 못하고 파도가 세차게 일어 주령이 멀미가 나서 드러누워 걱
정이 되었다. 겨우 용천 곽곶포郭串浦에 정박하였으며 중류中流에서 유숙하였
다.

11일. 맑고 서늘함. 새벽에 배를 출발시켰다. 순풍을 타고 철산鐵山의 선


사宣沙 개하도介 島를 지났고, 또 선천宣川 상각산角山 아래를 지나가니 산천이
볼 만한 곳이 많았다. 정주定州 가산포嘉山浦를 지나갔다. 하루 종일 망망대해
에서 한 톨의 좁쌀 같은 몸으로 떠가는 것도 하나의 장관이었다. 저물녘에
박천博川의 포구에 정박하여 배 안에서 잤다.

12일. 맑고 서늘함. 새벽에 배를 출발하여 안주安州, 숙천肅川, 순안順安 등


지를 지나 오전에 한천漢川 부근의 포구에 정박하였다. 조수가 빠져 중류中流
에서 머물렀다가 다시 한천포漢川浦로 들어갔다. 또 장시場市에 일본인들이 들
어왔다고 하여 즉시 장시 가로 가서 시장 사람 최 감찰崔監察과 육지에 내리는
문제를 상의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배 안에서 잤다.

13일. 맑고 서늘함. 배에서 박朴가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오후에 다시


산북山北 이기현李奇玄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국선國善이 평실平室을 친정으로
보냈다.
478 청일전쟁 관련 자료

14일. 맑고 시원함. 이기현은 평실의 친척집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집에 머물렀다. 바닷가로 가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15일. 맑고 시원함. 돈 1냥 5전을 가지고 두 노파를 데리고 먼저 출발하


였다. 김미력金彌力의 어미가 길을 안내하며 함께 갔다. 30리를 가서 전산錢山
의 김가金哥 주막에서 잤다.

16일. 맑고 시원함. 바로 출발하여 원장시元場市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송현松峴의 이응상李應祥 집에 도착하였다. 주령이 내행內行을 데리고 들어왔다.

17일. 맑고 시원함.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산당山堂으로 가서 머물렀다.


또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18일. 맑고 시원함. 돈 2냥을 갖고 감영으로 출발하였다. 40리를 가서


기성箕城, 평양에 도착하였다. 예부터의 제일강산이 모두 폐허로 변하였고, 1만
여 호가 모두 텅 비어 처절한 전장이었다고 할 만하였다. 들어가서 오위장五
衛將 한익상韓益相를 만나고 또 중군中軍 이희식李希植을 만나 주령이 올라온 일을
의논하였다. 저녁에 신임 감사 김만식金晩植 대감을 뵈었더니 극진히 환대해
주어 감사하였다.

19일. 맑고 시원함. 아침에 한령韓令, 한익상과 감사를 만나 주령의 일을 거


듭 부탁하고 바로 작별하였다. 도교道橋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산당山堂에
도착하였다.

20일. 맑고 시원함. 주령이 산당에서 독정獨亭의 촌가로 옮겨 거처하였


다. 나는 그대로 산당에서 잤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79

21일. 맑고 시원함. 주령이 감영으로 들어갔다. 나는 산당에서 송현의


이응상 집으로 가서 잤다. 유아 석흥劉雅錫興과 말을 사는 일을 의논하였다.

22일. 맑고 시원함. 유아劉雅와 함께 종인宗人 참봉의 집으로 가서 나귀를


샀다. 값으로 75냥을 치른 후 산당으로 끌고 오니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과
연 감사가 환대해 주었다고 하였다. 신임 첨사僉使 홍봉관洪鳳觀이 도착하였다
고 하였다. 일본인이 평양-용강龍崗 간 전선을 가설하였다.

23일. 맑고 시원함. 지난밤에 서리가 내림. 방자房子 윤관允觀에게 인신印信


을 맡겨서 보내고 또 편지도 부쳤다. 편자를 사기 위하여 응상 형 도순道順과
함께 태평시太平市에 갔다가 헛걸음을 하였다. 응상과 도순은 평실平室의 외숙
이다. 나는 산당에서 잤다.

24일. 맑고 시원함. 유아劉雅에게 가서 재갈을 구하는 일을 부탁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산당에서 잤다.

25일. 맑고 시원함. 주령이 어제 저녁에 돌아왔다. 아침에 가서 만났는


데, 교귀交龜, 업무 인수인계하는데 24일이었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은, 대전大殿께
서 이제 황제皇帝68)를 칭하였고, 민씨閔氏들은 한 사람도 조정에 있는 자가 없
으며, 삼남三南에서 동학東學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였다. 응상이 태평시로 갔
으나 편자가 없어서 헛걸음을 하고 돌아왔다.

26일. 맑고 시원함. 가서 유아劉雅를 만났다. 재갈을 구하지 못하여 안타


까웠다. 도순道順이 산북山北에 가서 돈을 실어 왔다. 방자를 도마시道麻市로 보

68) 이 해 12월 17일 왕실의 존칭을 변경했는데 고종을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라 하였다.


황제라는 호칭은 아직 사용치 않았다.
480 청일전쟁 관련 자료

내 편자를 사 와서 바로 달았다. 다행이었다.

27일. 맑고 시원함. 내 돈 115냥 가운데 75냥을 나귀 값으로 제하고 40


냥이 남았다. 거기에서 20냥은 짐 속에 넣었으며 20냥은 (결락) 할 계획이다.
감영에서 일본인의 물금체[勿禁帖]69)를 얻어 두었다. 주령이 나더러 먼저 출발
하라고 하였다.

28일. 맑고 시원함. 두 노파를 데리고 출발하였다. 주령과 함께 천리 길


을 와서 2년 동안 변방에서 지내다가 이제 처음으로 작별을 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길을 떠나 험한 나루인 석호정石湖亭을 건넜다.
방자가 여기까지 와서 이별을 고하였다. 서운하였다. 돌박점乭朴店 황黃씨 집
에서 잤다. 하루에 30리 길을 갔다. 밥값은 2전 3푼이었다.

29일. 맑고 시원함. 아침에 출발하여 낮에 중화촌中和村 김씨 민가에서


쉬었다. 일본인들의 폐단이 없다고 하여 대로로 길을 잡아 50리를 가서 중
화읍中和邑에서 잤다.

30일. 맑고 시원함. 황주黃州 장야長野에 도착하여 일본인 대군大軍과 마주


쳐서 작은 길로 들어 소농동小農洞의 김씨 민가에서 잤다. 오늘은 40리를 갔
다.

10월 [十月]

초 1일. 새벽과 낮에 비가 내림.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동

69) 물금체[勿禁帖] : 조선시대 관부에서 일정한 일에 대한 제제를 내리는 명령 문서. 이 물


금체를 지닌 사람에 대하여는 관부에서 금지하는 일이나 활동을 금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81

선정洞仙亭에서 비를 피하였고, 봉산읍鳳山邑에서 잤다. 모두 40리를 갔다.

초 2일. 맑고 바람이 붐. 아침에 출발하여 신원점新院店 정씨 집에서 잤


다. 내를 건너면 흥수원興水院의 큰 주막으로 서흥瑞興 땅이다. 이날 모두 40리
를 갔다. 은전銀錢 1원을 사고 값으로 3냥 7전을 지불하였다. 여러 날 동안의
여행으로 인한 괴로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초 3일. 맑고 서늘함. 도중에 은전銀錢 1원을 사고 값으로 3냥 8전을 지불


하였다. 서흥읍瑞興邑 김점金店에서 잤다. 모두 30리를 갔다. 짐이 무거워서 은
전 8푼을 사고 1푼당 3냥 6전을 지불하였다. 은전은 도합 10원이 되었다. 황
봉산黃鳳山에서 서흥에 도착하니 왜군의 식량 운반꾼이 수천 명이나 되어 놀
랐다.

초 4일. 맑고 서늘함. 아침에 출발하여 금수역錦水驛을 지나 평산平山 땅 장


지두長之頭에 있는 정점鄭店에서 잤다. 모두 40리를 갔다. 또 은전 1푼을 먼젓
번 가격으로 샀다.

초 5일. 맑고 서늘함. 아침에 총수역 秀驛과 평산읍平山邑을 지나 □마동□


馬洞에서 잤다. 모두 50리를 갔다.

초 6일. 맑고 서늘함. 아침에 저탄교猪灘橋를 지나고 낮에 금천읍金川邑과


병전餠廛을 지나 청석관靑石關에서 잤다. 모두 50리를 갔다.

초 7일. 밤에는 비가 내리고 낮에는 흐림. 길이 질었다. 미력당彌力堂에서


별도의 지름길로 들어 송도松都에 도착하였다. 남문 밖 구리가九里街의 이 교관
李敎官 집에서 유숙하였다.
482 청일전쟁 관련 자료

초 8일. 맑고 서늘함. 이 집은 서울 노파의 종형從兄 집이어서 나를 극진


히 환대하였다. 남문에 올라 시판詩板의 시를 읊조리고 왔다.

초 9일. 맑고 서늘함. 감영 앞의 청향각淸香閣을 감상했다. 연못에 가니


그곳에도 읊조려서 적어 둔 시가 많았다.

초 10일. 맑고 서늘함. 선죽교善竹橋에 가서 정 문충공鄭文忠公의 혈흔을 보


고 간절한 흠모의 정이 생겨났다.

11일. 맑고 서늘함. 두 노파와 함께 길을 떠났다. 길에서 양주楊州의 조


아趙雅를 만났다. 장단읍長湍邑에서 잤다. 40리를 갔다.

12일. 맑고 서늘함. 아침에 출발하였다. 파주坡州 신주막新酒幕에서 잤다.


모두 55리를 갔다. 현곡玄谷의 김아金雅를 만났다.

13일. 맑고 서늘함. 곧장 출발하였다. 고양高陽 전석 石에서 잤다. 모두


45리를 갔다. 이곳은 서울에서 20리 거리이다.

14일. 맑고 서늘함. 길을 출발하였다. 길에서 강령 어른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았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삼남에서 동학의 무리가 크게 노
략질을 하고 있는데 충주가 특히 심하다고 하여 매우 놀랐다. 홍제원弘濟院에
서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가 강령 어른 댁에 도착하였다. 오위장五衛將을 못 만
나서 즉시 서울 노파와 함께 입동笠洞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술과 안
주를 내어왔다. 용천 노파도 그 집에 머물렀다. 또 송현松峴의 이노미李老未를
찾아보았다. 간동間洞, 間은 諫의 오기인 듯에 와 자면서 주인 가족과 회포를 풀었다.
사정일기 沙亭日記 483

15일. 맑고 서늘함. 교동橋洞의 승지承旨 영석永奭을 만나 세상일을 의논하


니 한심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입동笠洞의 노파 집에 갔다. 그의 다섯 딸이
나를 은인으로 대접하며 나와서 절을 하였다.

16일. 맑고 서늘함. 용천 노파를 데리고 길을 출발하였다. 송파松坡를 건


넜다. 인심이 크게 변하였다. 또 광주廣州에서 소요70)가 발생하여 몹시 걱정
이 되었다. 친구 노원오盧元五의 집에서 잤다.

17일. 맑고 서늘함. 길을 떠나 저녁에 근현勤峴에 도착하였다. 여러 종친


이 모두 모여서 회포를 풀었으나 집의 소식은 여전히 듣지 못하였다. 충주
의 동도東徒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노은老隱71)이 크게 걱정이 되었다.

18일. 맑고 서늘함. 다리가 아프고 발이 부르터서 길을 떠날 수가 없었


다. 여러 종친 및 유아兪雅와 함께 앞에 있는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공주公州
에서 와서 머물고 있는 종인宗人에게 가서 반갑게 만났다.

19일. 맑고 따뜻함. 길을 출발하는데 종인宗人 경칠景七이 노자 1냥을 주


었다. 감사하였다. 부동釜洞의 사돈 심沈씨 댁에서 잤다. 비로소 집안 소식을
들었다. 그사이 위급하고 곤란한 경우를 겪었으나 모두 겨우 목숨은 보전하
고 있고, 큰집 식구들은 사동沙洞으로 돌아왔으며, 옛 집과 여러 친족들도 모
두 안전하다고 하였다. 큰 다행이었다. 오늘 저녁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
삿날이다. 그러나 멀리서 제사에 참석할 수 없어 서글펐다. 각처의 동도東徒
가 점차 사기를 잃어가고 있다고 하여 다행이었다.

70) 당시 경기도 일대에서도 잦은 농민봉기가 있었는데 광주에서는 가장 늦게 폐막을 고쳐


달라는 소장을 내고 소요를 일으켰다.
71) 노은(老隱) : 충주 내의 지명.
484 청일전쟁 관련 자료

20일. 맑고 따뜻함. (결락) 재종 영교永敎의 집에 (결락) 곧 당숙堂叔의 대기大


忌일이다. 영준永俊, 종경從景, 영만永萬이 모두 왔다. 작년 7월에 재종숙모 윤尹
씨가 (결락) 지금 처음으로 세 종제를 보니 목이 메었다. 그사이 재종매와 삼
종질 응수應洙는 모두 상산尙山 김□金□의 집과 성혼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성
□醒□ 덕성德誠의 후손이다. 다행이었다. 집안 소식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어
서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21일. 맑고 따뜻함. 사촌 경년景年과 함께 그의 새 사돈인 친구 김경옥金


景玉의 집으로 갔다. 친구 김성보金成甫가 동행하였다. 저녁에 재종再從의 집으
로 왔다.

22일. 맑고 따뜻함. (결락) 친구 이병응李秉應 (결락) 곧장 사동沙洞의 집으로


돌아갔다. 형님은 팔송八松으로 행차하셨고 태아泰兒와 장제章弟가 있었다. (결

락) 용천 노파는 뒤에 남았고 사촌 경덕敬德이 함께 왔다. 후원의 구목丘木72)은


모두 베어져 벌거숭이가 되었다. 장호長湖의 백성 놈들이 이가 갈리도록 분
하다. 그런데 나무 값 3,000냥을 민경식閔 植, 은 烱의 오기에게 찾아왔으나 동
학의 접주接主 이덕흥李德興이란 놈에게 빼앗겼으니 너무나 분통하다. 어찌 원
한을 갚을 날이 없겠는가? 하늘을 가리켜 맹서하였다. 질녀의 혼사는 단호丹
湖의 이 병사李兵使 집으로 정해졌다. 이 집은 청강淸江 제신濟臣의 11대손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23일. 맑고 따뜻함. 집에서 성묘를 한 뒤에 최아 숙빈崔雅叔賓에게 가서


조문하였다.

24일. 맑고 따뜻함. 용천 노파와 장평長坪의 동생 집에 갔다. 저녁에 근

72) 구목(丘木) : 무덤 가에 있는 나무.


사정일기 沙亭日記 485

현勤峴에서 하인이 왔다. 가져온 편지를 열어 보니, 종인宗人 일현一鉉의 편지였


다. 마침 아주 좋은 일이 있어서 장제章弟가 곧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였다.

25일. 맑고 따뜻함. 동계洞 가 열려서 가서 살펴보았다. 서울에서 온 하


인에게 노자 1냥을 지급하였다.

26일. 맑고 따뜻함. 오신梧申의 윤경춘尹景春 어른을 찾아가서 만나고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윤씨 어른 집에서 잤다. 동몽계童蒙 의 쌀과 돈을 쪼개서
쓰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제章弟가 함께 왔다고 하였
다.

27일. 맑고 따뜻함. 아침식사 후에 장평長坪의 동생 집으로 돌아갔다. 형


님이 어제 저녁에 돌아오셨다고 하여 즉시 사동沙洞으로 가서 울면서 형님을
뵈었다. 뒤에 장제章弟도 왔으나 그는 곧장 서울로 길을 떠났다. 난세라서 이
번 걸음 또한 크게 염려가 되었다. 도무지 형제가 단란하게 모일 날이 없어
안타까웠다.

28일. 맑고 따뜻함. 조카와 사촌동생, 제종동생 경조景造 및 친구 김성보


金成甫와 함께 출발하였다. 경조에게 돈 3전을 빌려 주었다. 팔송八松의 본가에
도착하였다. 익아益兒와 소실은 무고하였다. 서로 울면서 만났다. 오늘 저녁
은 당숙의 대기大忌일이다. 달이 작기 때문이다. 옥호玉湖의 종조모께서 그사
이 돌아가셨는데 종숙의 대기大忌가 또 오늘 저녁이었기 때문에 함께 온 여러
사람이 모두 옥호로 갔다.

29일. 맑고 따뜻함. 동네 친구들이 모두 와서 만났다. 홍洪 사돈 형제와


486 청일전쟁 관련 자료

몇몇 친구들이 왔다가 갔다. 모두 난리를 겪은 일을 위로하였다.

11월 [十一月]

초 1일. 계유[初一日 癸酉]


종일 비가 내림. 집을 떠났다가 수년 만에 지금 비로소 돌아왔다. 살림이
영락하여 탄식이 나왔다.

초 2일. 흐리고 따뜻하며 간혹 비가 내림. 태아泰兒가 옥호玉湖에서 와서


재종형수 윤尹씨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여 매우 놀랐다. 홍 사돈의 부인
이 딸을 데리고 (결락) 사봉沙峰의 형수가 와서 잤다. 질녀의 혼사 날짜를 11월
29일로 확정하였다.

초 3일. 맑고 따뜻함. 친구 정주로鄭周老와 홍경림洪景臨, 홍여도洪汝道, 이봉


여李奉汝가 와서 안부를 묻고 갔다.

초 4일. 맑고 따뜻함. 친구 정맹선鄭孟善과 홍경림洪景臨이 왔다가 갔다. 대


동大洞에서 가마를 빌려 왔다. 순만順萬을 사동沙洞으로 보냈다.

초 5일. 맑고 따뜻함. 삼락三樂에 갔다가 저녁에 왔다. 영준永俊이 소실을


데리고 왔다. 천여 리를 걸어서 오늘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초 6일. 맑고 따뜻함. 사촌 영준永俊과 함께 옥호玉湖로 갔다. 사촌 순기順


起가 초2일에 그 처를 잃어 온 집안 분위기가 애처로웠다. 종조할머니 한韓씨
의 산소를 배알하고 곡하였다. 곧장 장인어른을 뵈러 갔다. 수자壽資73)하신

73) 수자(壽資) : 장수한 자에게 벼슬을 내리는 일.


사정일기 沙亭日記 487

뒤에 처음 뵈었다. 그곳에서 잤다.

초 7일. 맑고 따뜻함. 윤尹씨 문중의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진사 윤흥섭


尹興 을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길을 떠났다. 삼락三樂에서 저녁에 돌아
왔다.

초 8일. 맑고 따뜻함. 천룡天龍으로 가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저녁에


사돈 홍여도洪汝道와 함께 사봉沙峰 형수에게 가서 잤다.

초 9일. 맑고 따뜻함. 친구 홍경림이 와서 시사와 문학에 대하여 논의하


다가 갔다.

초 10일. 맑고 따뜻함. 사촌 덕립德立과 함께 말을 타고 돈담敦潭으로 가


서 능북陵北 대모大母, 친족의 할머니뻘 되는 호칭를 조문하고 신申 사돈집에서 잤다. 친
구 홍씨에게 빚을 독촉하였으나 별로 신통하지가 않았다.

11일. 맑고 따뜻함. 곧장 장평長坪으로 갔다. 죽산댁竹山宅의 딸과 왕王 서


방이 어제 결혼을 하여 오늘이 우례于禮74)날이었다.

12일. 맑고 따뜻함. 길을 떠나 원당元堂의 친구 이공직李公直 집에서 점심


을 먹고 저녁에 봉천蓬川 삼종의 집에 도착하였다. 오늘은 종증조할머니 남南
씨의 제삿날이다.

13일. 맑고 따뜻함. 사촌 경년景年의 사돈인 친구 김경옥金景玉과 김문여文


汝, 그리고 족속이 모였다. 재종숙모의 산소에 가서 배알하였다.

74) 우례(于禮) : 신부가 처음 시집으로 들어가는 예식.


488 청일전쟁 관련 자료

14일. 맑고 따뜻함. 비가 올 듯하였다.

15일. 맑고 따뜻함. 친구 최경효崔景孝에게 들러서 만나 보고 친구 이공


직李公直의 집에서 잤다.

16일. 맑고 따뜻함. (결락) 하사下沙에 들렀다가 곧장 사동沙洞으로 돌아


왔다.

17일. 맑고 (결락) 장평長坪에서 (결락) 친구 윤응칠尹應七의 집에서 잤다.

18일. 맑고 따뜻함. 친구 이대래李大來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곧장 상촌上


村으로 가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으며, 친구 신국보申國甫의 집에서 잤다.

19일. 맑고 추움. 동몽계童蒙契의 분용전分用錢75)을 1인당 돈 5냥과 쌀 4말


로 정하였다. 그래서 우리 형제의 몫으로 10냥을 가지고 와서 5냥은 왕王씨
어른을 시켜 동생 집으로 보냈다. 판요板要에서 친구 이윤명李允明을 조문하러
갔다. 소실과 익아益兒가 17일에 와서 머물렀다.

20일. 맑고 추움. 이천利川의 심경렬沈景烈 군이 와서 잤다.

21일. 밤에는 눈이 조금 내렸고, 낮에는 바람이 불고 추움. 혼사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일이 전혀 두서가 없어 걱정이 되었다.

22일. 맑고 추움. 길을 떠나 신申 사돈과 심沈군을 만나 임현점林峴店에서


술 몇 잔을 마신 뒤에 죽암竹岩에서 잤다. 사돈 이사용李士用을 조문하였는데

75) 분용전(分用錢) : 계의 기금을 마련한 뒤 필요에 따라 액수를 정해 나누어 주는 돈.


사정일기 沙亭日記 489

그 집안 살림이 영락하여 측은하였다. 사위 이李 서방은 돌림병을 몹시 앓고


있어서 걱정스러웠다. 또 사촌 신씨의 집에 갔으며, 친구 김순화金順化의 집에
서 잤다.

23일. 맑고 추움. 사촌 신씨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


다.

24일. 맑고 추움. 아침에 술을 마셨다. 인서仁瑞 집의 제주祭酒였다. 집에


있는 우술又術에게 품삯을 독촉받았다.

25일. 흐리고 추움. 삼락三樂에서 왔다. 태아泰兒가 왔다. 김 영남金嶺南에


게 다시마가격 1전 2푼와 북어 1마리가격 8전를 도합 2전에 샀다.

26일. 맑고 따뜻함. 오늘은 동지이다. 아침에 다례茶禮를 올렸다. 태아泰


兒는 덕립德立을 따라갔다. 친구 김순화金順化와 김성택金聖澤이 와서 함께 천룡天
龍으로 갔다. 홍응오洪應五 군에게 돈 11냥을 빌려 와서 6냥은 먼저 우술又術에
게 품삯으로 지불하고 4냥은 완돌完乭에게 상인喪人 이李씨의 품삯조로 지불하
였으며, 성로星老에게 6전 2푼을 갚고, 4전은 채소의 씨앗 값으로 순만順萬에
게 갚았다.

27일. 맑고 따뜻함. 홍리백洪利伯 어른과 화백和伯, 경림景臨, 이연履淵이 와


서 성로星老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내동內洞의 안아安雅가 왔다가 갔다.

28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으며 흐리고 따뜻함. 행랑살이 하는 (결락) 과


몇몇 (결락) 을 데리고 큰댁으로 갔다. 저녁을 먹기 전에 혼행婚行이 들어오고
새 사돈 이근택李根澤이 뒤따라 왔다. 신랑이 아주 훌륭하여 다행이었으며, 홍
490 청일전쟁 관련 자료

洪 서방이 바로 데리고 갔다. 한밤중에 납채納采,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례


를 행하였다. 산곡蒜谷의 친구 신이회申而恢가 술을 가지고 왔다. 봉천蓬川의 삼
종숙질이 왔다.

29일. 맑고 따뜻함. 오전에 대례大禮를 거행하였다. 새 사돈이 오후에 하


인을 데리고 바로 떠났다. 사위 정운흥鄭雲興도 와서 기쁘게 맞이하였다.

30일. 맑고 따뜻함. 우례于禮 행렬을 보냈다. 태아泰兒가 어미 없는 어린


딸을 데리고 길을 떠난 뒤에 마음을 안정하기가 힘들었다. 저녁에 태아泰兒
가 돌아왔다. 잔치의 제반 격식을 제대로 갖추었다는 것을 들으니 매우 기
쁘고 다행스러웠다.

12월 [十二月]

초 1일. 계묘[初一日 癸卯]


밤에는 눈보라가 쳤으며, 낮에는 눈이 내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초 2일. 맑고 추움. 익아益兒와 태아泰兒, 소실, 정鄭 서방, 홍洪 서방을 데리


고 출발하였다. 신申 사돈을 만나 국수 값으로 1전을 썼다. 황강黃江의 진사
권필상權必相을 용당龍堂에서 만났다.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죽은 큰형수의 제삿날이다.

초 3일. 맑고 추움. 홍洪 서방이 떠나는 편에 홍洪 사돈에게 편지를 부


쳤다.

초 4일. 맑고 추움. 정鄭 서방이 떠났다. 태아泰兒와 함께 천룡天龍으로 가


사정일기 沙亭日記 491

서 나귀의 편자를 달아서 왔다. 처음으로 자리를 짰다. 오늘 저녁은 종숙부


의 담사일 祀日76)이다.

초 5일. 맑고 추움. 저녁에 선장善長의 집으로 갔다. 또 상인喪人 허許씨의


소기小忌에 조문을 하였다. 현곡玄谷의 김아 치래金雅致來가 구슬을 만들어 와서
자고 갔다.

초 6일. 맑고 추움. 정鄭 서방이 수철水鐵에서 왔다. 조아 치원趙雅致元의 집


에 가서 술을 마셨다.

초 7일. 맑고 추움. 친구 홍경림洪景臨이 와서 저녁에 갔다. 진천鎭川의 삼


종三從 덕흥德興이 왔는데, 그의 형 덕준德俊이 호남에서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
여 다행이었다.

초 8일. 맑고 추움. 정鄭 서방이 떠났다. 태아泰兒가 조순일趙順一에게서 받


을 45냥 중에 겨우 15냥만 받았다고 하였다.

초 9일. (결락) 조아趙雅에게 (결락) 밥솥을 전당잡혔다. 태아泰兒가 떠났다.


입장立場의 친척 소년이 와서 잤다. (결락)

초 10일. (결락) 김아金雅가 왔다가 갔다. 조순명趙順明이 백하주 1주발을 가


져왔다. 값은 2전이었다.

76) 담사일( 祀日) : 대상을 치른 뒤 그 다음 달 또는 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 담제라


고도 함. 사정에 따라 날짜의 차이가 있음.
492 청일전쟁 관련 자료

11일. 맑고 (결락) 사촌 덕흥德興이 갔다. 대상臺上 홍 사돈의 딸이 왔다가


갔다. 홍이백洪利伯 어른이 왔다가 갔다.

12일.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낮에는 맑고 따뜻함. 외사外舍를 수리하였다.


김 영남金嶺南에게 2전을 빌려 썼다.

13일. 맑고 따뜻함. 친척 홍덕일洪德一이 아침에 왔다고 하였다. 진영鎭營


의 수통인首通引 최윤화崔允化가 서울에서 내려왔다가 바로 떠났다.

14일. 맑고 따뜻함. 언곡彦谷의 친구 이백행李百行이 어제 와서 자고 갔다.


친구 홍치화洪致化가 왔다가 갔다.

15일. 맑고 추움. 대상臺上 홍洪군이 왔다가 갔다. 조성기趙聖基가 집터 도


지조賭地條로 메밀 1말을 가져왔으며, 아직 1말 5되의 조租가 남았다. 친구 정
맹선鄭孟善과 그의 동생 택여澤如가 와서 만났다. 친구 택여는 여러 해 만에 처
음 만났다. 반갑게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후에 갔다.

16일. 흐리고 추움. 순만順萬에게 북어 2마리1전 4푼와 다시마 1조8푼, 정육6


전등 도합 8전 2푼어치를 외상으로 사오도록 하였다.

17일. 맑고 추움. 내동內洞의 상인喪人 윤덕중尹德中이 왔다가 갔다. 장제章弟


가 서울로 올라간 뒤 여러 달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답답하였다.

18일. 맑고 추움. 자리 1개를 짰다. 상인喪人 윤덕중尹德中이 왔다가 갔다.


형님이 종제從弟를 데리고 행차하여 고기 3냥 어치를 사오셨다. 오늘 저녁은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어서 사무치는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동沙洞의 구
사정일기 沙亭日記 493

목邱木 값을 모두 받아 두었다고 하여 다행이었다. 그 중에 내가 쓸 몫은 엽전


20냥이다.

19일. 맑고 추움. 집에 있는 우술又術의 품삯을 또 8냥 지불하여 전후로


지급한 액수는 엽전 16냥이다. 사돈 홍여도洪汝道가 왔다가 저녁에 갔다. 사
봉沙峰 형수가 어제 왔다가 오늘 갔다. 홍순백洪順百이 (결락) 왔다가 갔다. 종제
從弟가 이대梨垈로 갔다.

20일. 맑고 추움. 형님을 모시고 천룡天龍으로 갔다. (결락) 상인喪人 홍응오


洪應五에게 주었다. 친구 홍치화洪致化에게 5전을 빌려 썼다. 사돈 홍여안洪汝安
이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안타까웠다. 저녁에 돌아왔다. 종제도 와 있었다.

21일. 밤에는 눈이 조금 내리고 낮에는 맑고 추움. 종제에게 당목唐木 10


자를 사오게 하고 값으로 5냥을 지불하였다. 상인喪人 홍응오洪應五에게 편지
를 부쳐 엽전 10냥을 얻었다. (결락) 친척 홍화백洪化伯이 저녁에 갔다.

22일. 맑고 추움. 순만順萬에게 흥정조로 8전 2푼을 갚았다. 사촌 신경덕


申景德이 목화를 지고 (결락) 왔다. 값으로 5냥 2전을 지급하고 1전이 남았다.
조아 군칠趙雅君七도 왔다 갔다. 형님이 어제 죽암竹岩에서 잤다고 하였다.

23일. 맑고 추움. 소요 사태가 또 발생하였으며, 동도東徒가 다시 날뛴다


고 하였다. 일본인 수십 명이 앞길로 지나갔다. 개탄스러웠다.

24일. 맑고 지독히 추움. 상인喪人인 종인宗人 김태경金泰敬에게 가서 미후


리[麻履]을 부탁하였다. 지나면서 치로致老와 인서仁瑞 두 친구를 만났다. 오늘
494 청일전쟁 관련 자료

저녁은 종조할아버지의 제삿날이다.

25일. 맑고 추움. 조아 덕윤趙雅德允이 와서 말하기를, 구비답九肥畓 9부負 6


속束을 자신의 호戶에 넣고 3속을 더 내었다고 하였다. 개탄스러웠다. 상인喪
人 윤덕중尹德中이 왔다가 갔다.

26일. 맑고 추움. 순만順萬을 데리고 읍으로 갔다. 친구 김순여金順汝의 집


에서 점심을 먹었다. 읍의 북쪽 정 동돈鄭同敦의 집에 도착하였다. 적조한 터
에 반갑게 만났다.

27일. 맑고 추움. 박아 경림朴雅景臨에게 편지를 부치고 곧장 진장鎭將 박기


인朴基仁을 만나러 갔다. 종일 진중鎭中의 일을 의논하였는데, 언급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었다. 또 결전結錢으로 1원짜리 은전銀錢 9푼을 납부하였다. 복단卜
丹에게 25냥을, 용전龍田에게 20냥의 자문[尺文]77)을 발급하였다. 저녁에 나올
때 친구 김우신金有信에게 들러서 만났다. 저녁을 먹은 뒤에 친구 박경림朴景臨
이 나와서 만났다. 고마웠다.

28일. 맑고 추움. 교관敎官 신학균申學均을 만나 금생면金生面 성현星峴의 집


터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들어가서 진장鎭將과 친구 박경림朴景臨을 만나
다시 동도東徒를 엄중하게 응징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근래 일본인들이 폐단
을 일으킨 일 때문에 사직서를 올리고 공무를 중단하였으나 오늘 사직서가 반
려되었다고 하였다. 또 친구 홍문습洪文習과 홍성초洪聖初를 만나 보고 저녁에
나왔다. 주인인 친구 경백景伯이 연일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를 대접하여 감
사하였다. 친구 박경림은 내일 설을 쇠러 고향으로 간다고 하면서 고기 3근
을 보내 주었다. 고마웠다.

77) 자문[尺文] : 관아에서 조세 따위를 받아들이고 발급하는 영수증.


사정일기 沙亭日記 495

29일. 맑고 추움. 유운풍劉雲豊과 유정풍劉正豊 등이 모두 와서 만났다. 아


전 박후영朴厚榮이 구관舊官 박세병朴世秉 (결락) 서울로 올라갔다가 어제 비로소
돌아왔다. 그에게 서울 소식을 들으니, 신관新官으로 조한국趙漢國이 임명되었다
고 하였다. 일본인이 요동遼東에서 크게 패하였으며78) 청국인이 (결락) 하였다
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박영효朴泳孝와 서광범
徐光範은 갑신년甲申年, 1884년의 역신逆臣으로 다시 세상에 나와서 시무時務한다고
하니 세상일이 개탄스러웠다. 술과 밥을 먹은 뒤에 주인 친구와 작별하고
출발하였다. 지나면서 창주滄洲 정해안鄭海晏 동돈同敦, 왕실의 친척을 뵙고 동국통
감東國通鑑 에 대하여 논하였다. 또 그의 아들 장릉령莊陵令 태원台源을 만나 술
몇 잔을 마셨다. 그 후 또 승지承旨 정세원鄭世源과 진사 정운태鄭雲泰를 만나 몇
잔을 마셨다. 곧장 길을 떠나 걸파桀坡의 친구 정일원鄭一源에게 들러서 만나
보고 또 고 생원 정평여鄭平如를 조문하였다. 곧장 출발하여 저물녘에 집에 도
착하였다. 조아 성조趙雅聖祚가 오늘 죽었다고 하였다.

30일. 맑고 추움. 친구 정맹선鄭孟善과 정주로周老 및 정씨 집안의 여러 친


구들을 찾아가서 만난 뒤, 주로周老와 동행하여 간촌間村으로 와서 작별하였
다. 저녁에 집에 도착하니 형님은 이미 행차하셨으며, 온 집안이 태평하여
다행이었다. 그런데 장제章弟는 서울에 머물면서 여전히 소식이 없어서 걱정
이 되고 답답하였다. 오늘 섣달 그믐날 밤을 당하여 온갖 감회가 층층이 생
겨났으나 그나마 형님을 모시고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번역 : 장승현>

78) 일본인이 요동에서 크게 패 : 이 해 8월 17일 일본군은 평양전투에서 청군을 대패시키고


압록강을 넘어 봉황성 요양 등지를 점령하고 이어 대련 여순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작은 전투는 부분적으로 패전한 경우가 있었으나 승승장구해 요동을 석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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