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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화성행차, 을묘년의 행행(行幸)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모두 66회 왕릉에 직접 가서 참배함


특히 사도세자의 묘역인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옮기고 나서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참배함
: 능행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적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기대했음
-정조는 자신의 행차를 행행( 行幸)으로 규정
: 자신의 행차가 행복을 주는 일이길 바랬던 것

1. 을묘년의 화성행차, 8일의 일정

-정조가 화성을 방문한 것은 모두 13차례


-을묘년(1795년) 방문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것
: 혜경궁과 사도세자는 동갑내기. 따라서 이해는 두 분의 회갑년
*을묘년의 화성 행차에 대한 자료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화성에 행차한 전 과정을 기록한 책
: 행사에 관련된 왕의 명령,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 음식의 종류, 숫자, 잔치에 들어간 숟가락과 젓가락
개수까지 일일이 기록
-진찬도병(進饌圖屛) : 현재 남아 있는 것은 8폭
: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봉수당진찬도, 낙남헌양로연도, 서장대야조도, 득중정어사도, 환어행렬
도, 한강주교환어도

2. 준비단계

-주관기구는 정리소( 整理所). 1794년 12월에 설치함


-경비는 약 10만냥(10만3천61냥 확보).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으로 충당함
-1년 전 시흥로 건설
-한달 전 1795년 2월 10일 화성에서 무과( 武科) 초시 시행
-13일에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치

*현륭원으로 가는 길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
돈화문→통운교→종루 전로→대광통교→숭례문→청파교→나업산 전로→노량진 배다리→노량진 용양봉저정
→만안현→번대방 천교→번대방평→마장 천교→문성동 전로→시흥행궁→대박산 전평→염불교→만안교→안
양참발 소전로→군포 천교→원동천→사근참행궁→지지현一괴목정교→여의교→만석거→영화정→대유평→관
길야→장안문→종가→호성참발 소전로→좌우군영 전로→신풍루 전교→신풍루→화성행궁

3. 8일간의 일정

①1일째
-1795년 아침, 어머니와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 등과 함께 출발
대비인 정순왕후와 왕비인 효의왕후는 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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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배다리 만들어 건넘. 11시경 노량진의 용양봉저정에서 휴식을 취함
-시흥행궁에서 묵음

②2일째
-오후에 화성 도착
: 비가 오는 가운데 황금 갑옷을 입은 정조는 화성 성문을 들어섬
-화성행궁에서 머뭄

화성행궁 평면도 한강주교환어도 서장대야조도-4일째

③3일째
-아침에 화성향교에 들러 대성전에 참배함
-낙남헌에서 문무과 향시를 치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

④4일째
-아침 일찍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 참배
-오후~새벽에 걸쳐 서장대에서 야간 군사 훈련을 실시함

⑤5일째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회갑연을 치룸

봉수당 진찬도-5일째 낙남헌양로도–6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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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6일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줌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치룸
-군복을 갖춰 입고 화홍문을 지나 방화수류정에 행차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함, 저녁에는 득중정에서 매화포( 埋火砲)를 쏘며 불꽃 놀이
⑦7일째
-아침에 화성을 떠나 시흥으로 향함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시흥행궁에 오후에 도착

⑧8일째
-아침 일찍 시흥행궁 출발
-문성동 앞길에서 현령이 백성들을 이끌고 기다림. 이들의 고충을 물었고 세금에 대한 방책을 내림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음
-배다리를 엮느라 애쓴 사공들에게 상을 내림
-창덕궁에 도착

환어행렬도-8일째

4. 정조의 화성 행차와 그 의미

-효심을 표현함
-원행길에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살피고 해결하는 기회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를 등용, 정책 방향의 지지세력 양성
-수도권의 방위 체제 점검
-특히 1795년 을묘년의 화성 행차는 어머니와 아버지께 동시에 효성을 보이고 함 + 그동안 자신이
쌓은 위업을 과시하고 신 료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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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문화유산
문화의 꽃을 피우다-02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1. 진경산수화-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등장 배경

①사상적 배경
: 퇴계 이황, 율곡 이이에 의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
: 임진왜란, 정유재한 /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후 사회 재건 과정에서 성리학 이념 강화
→조선 고유의 것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기 시작
문학에서는 송강 정철이 한글 가사문학을 선보이고 점차 한글가사문학이 유행하게 됨
서예에서는 석봉 한호가 석봉체를 이룸
회화에서 겸재 정선이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새로운 그림기법을 창안

②산수유람 문화의 유행
: 17세기 후반부터 문인들 사이에 자연 친화적 풍류 의식의 확산에 산수유람 문하가 성행하기 시작
하여, 18세기에는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음
: 금강산이 대표적인 유람지로 떠오름

삼일포 구룡연폭포 김홍도-구룡폭

2. 겸재의 화법의 특징

①중국의 새로운 준법에 대한 탄탄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수를 그리기에 적절한 준법을 사용
: 각 소재에 맞게 남종화법과 북종화법을 적절히 사용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개성을 더했음
②실경산수화이지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 것이 아님
: 감성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과감히 생략하기도 하고 더하기도 했음
③산수화 내에 등장하는 인물을 조선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함
→기존 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하고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경관에서 받은 감흥과 정취를 구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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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겸재, 조선을 그림

1720년 하양(河陽) 현감→영남첩


1733년 청하현(淸河縣) 현감→관동팔경
1737년 모친의 3년 후 청풍, 단양, 영춘, 영월 명승지 유람→사군첩
1738년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1740년 ( , 京郊名勝帖). 총33점
: 양천현령 부임, 친구인 사천 이병연이 시를 보내면 정선은 그림을 그리기로 약조함
: 한강 주변의 명승지와 서울 백악 동부 일대의 명승지를 그림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 간송미술관소장). 총33점
1751년 사천 이병연이 81세로 타계 후, ( )를 그림
비 개인 인왕산 모습을 농묵쇄찰법(濃墨刷擦法)으로 표현+바탕을 그대로 두어 운무를 표현

4. 겸재, 금강산을 그림

숙종 37년(1711). 36세. 김창흡의 금강산 유람에 동행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1712년 금강산 유람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1713년 중국의 마유병이 겸재의 그림을 높이 평가함 →조선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함
: 풍악내산총람(간송미술관소장), 금강전도(호암미술관소장), 해악팔경 8폭(간송미술관소장)
1747년. 72세. 금강산 유람 →해악전신사생첩(개인소장)、해악전신첩(간송미술관소장)
: 36년 전 처음 그렸던 장면들을 다시 그림
1757년 경 금강대(金剛臺), 정양사(正陽寺) 등을 그림
1759년 3월24일 인곡정사(仁谷精舍)에서 84세로 일생을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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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겸재의 화풍을 잇다

강희언-인왕산도 이인문-단발령망금강

김홍도-낙산사 강세황-송도기행첩

심사정-삼일포 김홍도-삼일포

총석정 김홍도-총석정 이인문-총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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