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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트리스 공작가의 뒷마당에서는 십 대 아이들의 고조된 웃음소리가 뒤엉켜서 끊임없이 들렸다.

그들은 일제히
자신 또래의 한 아이를 향해, 더럽고 추악한 말들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고개만 숙이고서 아무 반응도 없는
아이의 행동이 짜증났는지,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들과 양복을 차려 입은 남자아이들은 일제히 아이를 빙
둘러싸고서 조롱하듯 욕설을 내뱉으며 강도 높은 폭력을 가했다.

베로나이카 루셔리아는 십 대 아이들의 집단 속에서 꽤 유명한 아이였다. 연보라색의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앞머리로 눈을 반 쯤 덮은 그는 확실히 어두운 분위기였으나, 그는 저지른 무례도, 잘못도 없었다. 다만,
집단에서 리더 격인 유나인 모트리스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었다. 다만 그 관심이 다소 부정적이었다는 점이
유명세와 폭력의 결정적 이유.

유나인은 그녀의 티파티, 베로나이카의 사교계 데뷔 무대에서 그를 비웃으며 조롱했다. 바보 취급하며, 웃음을
잔뜩 머금고 그에게 건넨 첫 한마디.

"나? 나랑 네 가문을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는거야? 어머,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었구나?"

사교계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그런 말들을 고스란히 삼켰다. 그 일이 자신을 업신여겨도 좋다는 허락이 되어, 12
살의 그는 또래들의 폭력 속에서 불행하게 자라났다.

고통 속에 여러 생각들이 밀려왔다. 차례대로 몸이 마비되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니 놀랍도록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덮쳐왔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 볼 겸, 아득한 어린 시절의 회상을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뜻 들으면 영애라고 오해할만한 이름, 얼굴을 가리는 기다란
머리카락과 꽤나 왜소한 체격은 또래들의 흥미를 불러왔는지, 사교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줄곧 괴롭힘을
받아 왔다. 하지만 내가 끔찍한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된 사건은 따로 있었다.

유나인 모트리스와는 소꿉친구였다. 비슷한 수준의 공작가의 또래 자제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와는 나름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원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두꺼운 벽을 세우고 있었다. 당연하게
유나인에게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친절을 베풀며 나에게 웃어주고는 했다. 전해오는
모든 말이 선의로 가득 차 있어서 조금씩 나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유나인의 티파티 날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믿고있었다. 처음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기대감 등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해서 흐릿한 아침 날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에게 처음으로 밝게 웃어보자고 주먹을 쥐며 다짐했던
것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티파티에서도 그 다짐을 실제로 실천했다. 유나인에게 웃음지으며 인사를 건넨 순간,
그녀에게 배반당한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유나인은 예쁜 얼굴로 나에게 바보 취급하며 가문을
조롱했다. 사교계에 문외한이었다는 점과 그녀를 믿었다는 점 탓에 멍하니 아무런 반박도 못한 채로 나는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후로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욕했다. 나를 괴롭히던 다른 아이들과 나를 배신한 유나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싫어했으며, 그 상황에서조차 아무런 대꾸도 없이 멍청하게 행동해버린 나를, 어딘가 멍한 눈을 띄고 있는 내
눈동자를, 혐오스럽게 일그러진채 거울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을 혐오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반항해볼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나 자신만 끊임없이 혐오했다.

괴롭힘은 과할 정도로 심했다. 아이들은 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영악했고, 철저하도록 괴롭힘을 은폐했다.
멍들게 하는 법 없이 폭력을 가했으며, 나에게 악마라 욕하며 침을 뱉고, 정신적으로 끈질기게도 괴롭혔다. 그
괴롭힘 중에서도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 있었다. 그 날도 폭력을 각오하고 티파티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한 아이는 내가 귀족 영애같다며, 진짜 여자가 아니냐고 비웃으며 상반신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그림이라도 보듯이 가벼운 말들을 내뱉었다. 유나인은 언제나처럼 그저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날 나와 눈이 마주쳤을때는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부정이 불가능한 비웃음 그 자체였다.

그 날을 기점으로 폭력은 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마침내 나를 추행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때 나는


연속된 폭력으로 반쯤 멍한 상태였고, 반항을 포기한 상태였다. 아이들의 우악스러운 손이 튀어나올 것을
예상했지만, 앞머리 사이로 보인 것은 연보라색 드레스 자락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하얗고 예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요. 상대해줄 필요 없어요."

나는 괴롭힘의 강도가 더욱 세지는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 또한 폭력이 가해지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 등으로


주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높은 사람이라도 볼 때의 두렵고 당황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들을 보자,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들었다. 살짝 어지러움을 느끼며 무심코 잡은 그녀의 손은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살짝. 아니 상당히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짙은 검은 색이었다. 그녀의 눈은
짙은 푸른빛이 섞인 어두운 눈동자는 나와는 달리 당당했다.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었으며 다른 아이들 또한
그녀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의 손을 이끌며 아무도 없는 장소로 데려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이란 웨이드였다. 황족의 양녀로 들여졌다는 그녀는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처음 나는
그녀를 믿지 않았을뿐더러, 약간의 혐오감 마저 지니고 있었다. 메이란도 유나인과 같은 부류일 것이라는 생각,
금새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버릴 가식적인 태도, 높은 신분에서 비롯된 동정심 등 그녀를 싫어할만한 이유가
넘쳤다. 특히 자기 혐오를 넘어 인간 자체를 혐오할 만큼 비관적이었던 나로서는 차라리 솔직한 폭력이 나았다고
말 할 수 있었다. 메이란과 내가 만나는 날은 모두 누군가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였다. 참가가 필수인 공적인
무도회나 티파티라면 모를까, 아무리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초대한 자리라도 메이란과 나는 그곳에 가지
않고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나는 어느 숲의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마당에는 예쁜 벤치가 있었는데,
주변에 보이는 숲과 호수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우리는 꽤 높은 빈도로 만났지만 그 때마다 메이란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띄우곤 했다. 나는 어떤 속셈인가 경계하면서 끊임없는 비관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어느새 그 시간을 진심으로 즐겼다. 메이란은 항상 고요한 시간을 즐기면서도, 가끔은 나에게 솔직한
속마음이나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한 위로들을 건네곤 했다. 내가 그 시간 뿐만 아니라 메이란이라는 존재 자체가
좋아졌음을 깨닫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리는 오랜 시간 연인이었으며, 십 대의 반을 의지하며
지냈다. 그녀는 피해자였던 나를 유일하게 격려해준 존재였다.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로 인하여 나의 어린 시절은 비극 뿐 만이 아니었다. 또한 그녀가 나에게 붙여준 애칭,
베론이라는 그 이름은 나에겐 큰 행복이었다. 그녀는 내가 붙여준 란이라는 애칭 또한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란은 그렇게 나에게 뿌리내린 부정적인 생각들을 통째로 바꾸어줬다. 성별에 대한 자기 혐오는 사랑으로
사라져버렸고, 괴롭힘 또한 서서히 잊어갔다. 나는 란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살아는 있을지 조차 불분명했다.
그런 나였지만 한순간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본인을 아스모데우스라 소개한 악마는 달콤한 계약을 제시했다. 나에게 모든 여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힘,
영구적이고 대가 없는 그 힘을 주겠다고 속삭인 것이었다. 그 계약은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다.
깊은 상처로 남은 폭력의 기억이 너무나 커서, 복수심으로 가득 차버린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정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당연히도 그 힘을 가지고 마을에서 살아갈 수는 없었기에 고민하고있던 찰나에,
악마는 숲 속의 저택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완벽하게 간섭 받지 않을 낙원을 마련한 악마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그 선택으로 중요한 것을 여러가지 잃었다. 바로 생각나는 것은 란이라는 존재였다. 악마와 금단의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란은 사라졌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으며 완벽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처음엔 그녀를 어떻게든
찾으려 온갖 노력을 들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 일은 내려두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작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란을 잊기 위해 그녀는 대신할 다른 여자들을 찾고는 했다. 그 시점의 나는 어린 시절과 큰 변화가
있었다. 연보라색 긴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했으며, 대게는 검은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체구는 제법
커졌고, 성격은 반 쯤 비뚤어져서 이상한 취미를 즐겼다.

내 저택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여자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예전에 폭력 당하는 날 구경거리 삼아 수다를 떨던


영애들, 직접적으로 심한 폭력을 반복하던 영식들의 연인들, 그리고 날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유나인
모트리스까지. 그 뿐만 아니라 란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여자들은 모조리 끌어들여 지하실에다 데려다놓았다.
복수심과 증오를 담은 광기의 밤이 끝없이 이어졌다. 매료로 인한 환상은 여자들을 속였으며, 내 저택에 발을
들이고 나서는 다시는 현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멍청하게 나만을 바라보는 여자들과 애인을 잃어
절망하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즐기고는 했다.

항상 후회는 하고 있었다. 내 선택에 대한 후회와 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잊기 위해 끝없이


이 행동을 반복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들 사이에서 란을 만날 수 있을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어느 때와 같이 문이 열리고, 새로운 부인이 될 여성이 들어온다. 나는 미소를 띄고는 들어오는 여성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들어온 여자를 보고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란?"

조용히,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눈 앞의 여자는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다. 허리까지 오는 긴


흑발은 찰랑거렸으며, 짙은 푸른 눈동자는 매우 아름다웠다. 세월이 흘렀지만, 란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분명하게도 그녀였기에 못 알아보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란 또한 나에게 매료당한 것일까.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안기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어지럽도록 여러가지 생각이 꼬이고 풀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절대 란을 이런 방법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방에 데려다놓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멍해보였던 그녀를 바라보며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그 후로 일주일에 5 번은 란의 옆에서 이야기들을 털어놓고는 했다. 마치 어렸을 때와 반대가 된 것 처럼.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 느낀 생각들 등 나에 대한 것은 숨김 없이 모조리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녀가 듣지 못해도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또한, 란을 만나고 나서는 다른 여자들에게 내 발로 찾아가기가 싫었다. 여전히 색다른
여자들을 맞이하는 날들을 보냈으나, 그 빈도가 확실히 줄어든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러가지 종류의 후회심 등에
자신을 비관하는 시간은 많아졌다.

나를 찾아온 그 여자는 어딘가 이상했다. 문을 열고 수줍은 듯이 들어오는 금발의 여자는 보통보다 체격이 살짝
컸으며, 드레스가 부자연스러운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못한 채,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은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심장을 꿰뚫었다. 셔츠의 가슴 부분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금발의 여자는 가발을 벗으며 웃었다. 그녀, 아니 그는 자신의 연인을 찾으러 온 청년이었다. 손에는 단도가
들려있었으며, 근처에 있던 유나인을 감싸듯 끌어안는 것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 따위를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독이 묻었는지 호흡이 점점 힘들어졌고,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시야가 흔들리고,
뒤엉켰으며, 때로는 흐려졌다. 쓰러진 나는 마침내, 유나인의 비웃는듯한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고통 속에 여러 생각들이 밀려왔다. 차례대로 몸이 마비되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니 놀랍도록 생각들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모든 회상들 끝에 속으로 중얼거린다. 란에게 털어놓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중에서 그녀를
사랑한다고는 단 한번도 말하지 못했음을.

아직은, 아직은 절대 죽기 싫었다. 란에게 진심을 담은 그 말을 전하고 싶었다. 아아, 끝까지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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