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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권
저 자 : 冷河祥
출판사 : 민 우 사
연 도 : 1984. 09. 18
타이핑 : 나우 ID(추녀) 김진호
序 文
序章(Ⅰ)
序章(Ⅱ)
제 1 장 南昌城의 작은 청부업자
제 2 장 江南第一妓女의 안타까움
제 3 장 運命이 안배한 三男一女
제 4 장 女人의 論理
제 5 장 碧風天中劍을 얻다
제 6 장 각시와 신랑
제 7 장 魔風, 魔風이 대륙을 찢는다
제 8 장 독종의 미소
序 文
글(文),
모든 글에는 생명(生命)이 있기 마련이다.
허나,
텁텁하든, 새콤하든, 짜릿하든,
글에는 어쨌든 생명이 있기 마련이다.
허나,
생명이 없는 글들도 많다.
썼다고 해서 모두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독자제현들은 일단 생명이 있는 글을 즐겨 찾는다.
해서,
나 냉하상(冷河祥)은 대체 무협에는 얼마나 되는 생명있는 글들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지만 해답은 얻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결국 누워서 침뱉는 격이 되고 말테니......
무협을 사랑하여 무협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면 어쨌든 무협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냉하상은 사랑하며 생명있는 글을 사랑한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되새길 수 없는 글은 이미 글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어느 특정된 한 장면을
연출해 내기 위한 죽어 있는 소도구일 뿐이다! 글이란 단 한 줄의 글이더라도
생명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장면을 떠나서라도 능히 하나의 뜻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냉하상은 또한 말하고 싶다.
"글에는 향기(香氣)가 있어야 한다! 한 줄의 글을 읽고서도 잊혀졌던 것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음미하는...... 그래서 그 한 줄의 글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지침(指針)은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되어야 한다! "
<天穹天>
냉하상의 천(天) 시리이즈 네 번째 작품이다.
가장 책을 잘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얻었느냐 하는 것이다.
나 냉하상(冷河祥)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天穹天>
초 가을의 문턱에서,
著者 冷河祥
[3486] 제목 : [냉하상] 천궁천 서 장
올린이 : 추녀 (김진호 ) 97/05/12 16:21 읽음 :1607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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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章(Ⅰ)
마천종(魔天宗),
마천종(魔天宗),
허나,
그는 그 하늘을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천종이었기에......
정(正),
마(魔),
그것마저 초월한 마천종이었으므로........
× × ×
변황사대마역(邊荒四大魔域),
북해(北海) 빙혈천궁(氷血天宮).
동해(東海) 마마도(魔魔島).
부상(扶桑) 태하전(太河殿).
서장(西藏) 혈마천성(血魔天城).
마천종(魔天宗)!
× × ×
대변혁(大變革)이 있었다.
변황사대마역을 완전히 통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그였다.
그가 변황을 통일한 것이다.
유사 이래로 전례없던 대변혁이었다.
변황의 완전통일,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원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천하인들은 변황을 통일한 천황혈군이 중원을 도모할 것이라고 공포에 떨었으나,
천황혈군은 중원을 외면한 채 변황의 문을 굳게 닫고만 있을 뿐이었다.
무위상인(無爲上人).
× × ×
천하사대마보(天下四大魔寶)-------!
序 章(Ⅱ)
혈월막(血 幕)------
중원(中原),
이 드넓고 광활한 대륙에 억겁의 역사 속에 명멸해 간 문파들이 어디
한 두 개련만은....
허나,
혈월막,
이 이름보다 천하인들에게 가공할 공포를 심어준 문파는 없었다.
전에도.....
또한 앞으로도.......
혈월막은 여러 가지 의미를 대신한다.
공포,
죽음,
잔혹,
살인,
그리고 그런 류의 모든 것으로.....
혈월막은 일개 살수집단이었다.
허나,
그 일개 살수집단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무림의 북두(北斗)인 대소림사(大少林寺)보다 더 컸으니.....
대소림사가 생(生)의 이름이라면,
혈월막은 죽음의 이름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치 않은 최강의 살수집단,
삼천 번의 살수 주문을 받았으며 삼천 명의 무림고수들을 지옥최명부에 기록한,
자신들에 대해선 완벽한 비밀을 추구하고 있는,
혈월막,
그들은 혈월막이었다.
천하인들은 말한다.
그들,
혈월막에 대해 더이상 표현한다는 것.
그것은 그들의 저주받은 마명(魔名)을 오히려 깎는 것이다.
혈월막(血 幕)!
단지 이 이름만으로도 그들의 설명은 모자람도 더함도 없을 것이다.
제 1 장에 계속
제 1 장 南昌城의 작은 청부업자
"꼼짝마라! "
느닷없는 대갈일성이 터졌다.
"헉! 누구.... 냐? "
잇달은 다급한 비명성,
이곳은 남창성으로 이르는 한적한 관도,
길은 넓지 않았는데,
지금 그 길의 복판에 한 명의 복면인이 태산처럼 막아서 있었다.
복면인의 손에는 날이 시퍼런 귀두도(鬼頭刀)가 쥐어져 있었다.
귀두도의 끝,
한 명의 풍채 좋은 노인이 사색(死色)이 되어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비단보자기로 싸인 물건을 메고 있었는데 몹시 소중한 것인 듯
급급히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다.... 당신은..... 누군데.... 배..... 백주..... 에...... "
그는 얼마나 공포에 질렸는지 말을 하는건지 염불을 외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복면인은 음침한 흉소를 흘렸다.
"흐흐흐..... 두 가지 중에 하나만 택해라! 네놈의 목숨이냐? 아니면 네놈의
심장을 덮고 있는 그 물건이냐? "
노인은 와들와들 떨며 물건을 더욱 깊이 끌어 안았다.
"이..... 이건.... 안됩.... 니다..... 제발.... 이건 소인 집안....의
가보(家寶)이오니 제발.... 돈이라면.... 있는 데로..... "
"집어 치워라! 흐흐..... 네놈은 목숨이 두 개 정도 되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그 중에 하나를 내가 취해 주지..... "
복면인은 두 눈에서 살광을 뿜으며 귀두도를 바짝 들이 밀었다.
"으헉! "
노인은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죽기 직전의 살색깔이 어떻게 변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제...... 제발...... 으으..... 목숨만...... "
노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이마빼기가 터져라 땅에 이마를 부딪쳤다.
복면인은 음산무비하게 웃었다.
"흐흐.... 처음엔 물건만 내놓으면 살려줄 생각이었으나..... 흐흐..... 이제
마음이 변했다. 네놈을 죽이고 물건을 가져가야 되겠다. "
"아...... 아이고.... 나으리..... 목숨만....... "
순간,
"에잇! 죽엇.......! "
복면인은 냅다 귀두도를 휘둘렀다.
"허..... 헉......! "
노인은 기절초풍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돌연,
"멈춰라! "
우렁찬 호통성과 함께,
"퍼----- 억! "
죽은 강아지 두들기는 음향이 터졌고,
"아이...... 고고.... 잘못했습니다.... "
죽는 듯한 엄살소리가 뒤이어 터졌다.
"........ "
노인은 물건을 꼭 끌어안은 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아아...... "
그의 입이 어린애 머리통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찢어져라 벌어졌다.
그의 면전,
한 청년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만면에 노기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는 조금 전에 노인을 협박하던 복면인이 눈을 감싸안은 채 끙끙
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담박에 일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썩 꺼지지 않고 뭘 우물대는 것이냐? "
청년의 노갈에 복면인은 꽁무니가 빠져라 도주했다.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만면에 근심스런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급급히 노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진대야(陣大爺)..... 다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
극히 공손한 어조였다.
"아아....... "
노인,
진대야는 감격으로 일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눈 앞의 청년,
노인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청년은 평소 진대야에게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었다.
그 이유는 그가 고아이며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청년이 진대야의 딸을 사모하니 혼인시켜 달라고 했을 때 진대야는 청년을
거의 다 죽을 정도로 팼던 기억이 있었다.
"가난뱅이 놈이 감히 누구의 천금 같은 딸을 넘봐.......? "
진대야는 그때 그에게 침을 뱁으며 욕했었다.
허나,
(아아..... 부끄럽다! )
그런 그에게 생명을 구함받은 것이다.
(나는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주었건만.... 아아..... 그는 오히려
나를 구하다니.... 누.... 눈이 멀었었다......! )
진대야는 청년의 부축을 받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때,
청년은 극히 공손히 진대야에게 절을 올렸다.
"진대야.... 혼자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이제 이 남창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
그는 진대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순간,
진대야는 벼락 같은 충격을 받았다.
"떠.... 떠나다니.... 어디로 말인가......? "
그의 음성은 복면인에게 협박받을 때보다도 더 떨렸다.
청년은 슬프게 웃었다.
"후후.... 소인이 성내에서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
"무..... 무엇 때문에..... 내가 자네에게 모욕을 주었기 때문인가.....? "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어린 소인이 나이 많으신 진대야에게 꾸중을 듣는 것이야 당연하죠.... "
"하면......? "
"실은...... "
청년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망설이다가 끝내 몸을 돌렸ㄷ.
"그냥....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읍니다. "
진대야는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떠나.... 다니..... "
이어,
자신도 놀랄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이 배운망덕한 놈아! 장인을 버리고 가다니..... 이놈아! 장인이 다쳤으면
집까지 모셔야 할 것이 아니냐? "
순간,
우뚝!
청년은 걸음을 멈췄다.
"지금 뭐라고..... "
"이놈아! 장인이 사위에게 반말좀 했기로서니 안됐느냐? "
장인.......
사위......
돌연,
"핫핫핫........! "
진대야는 호탕하게 웃으며 청년의 어깨를 얼싸안았다.
"하마터면 나는 천하제일의 신랑감을 놓칠 번했네......! 가세, 하하하....
내가 알고 있기로는 내 딸도 자네를 끔찍이 좋아한다던데...... "
청년의 얼굴은 희열에 넘쳤다.
그는 진대야가 끄는대로 따라가며 내심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풍야(風爺)......! 고맙네! 이 은혜는 죽어서라도 잊지 않았네.....! )
숲,
진대야와 청년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눈물짓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흐느꼈으나 그 흐느낌이 기쁨을 참지 못한 것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대야의 딸이었다.
그녀는 진대야가 복면인에게 협박받을 때부터 줄곧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우는지 조차 못 느낄 정도로 기쁨에 넘쳐 있었다.
바로 그때,
"어이쿠...... 제길..... 한 번만 더 사랑하는 남녀 붙여줬다가는 장님되기
꼭 알맞겠군..... "
부스럭 소리와 함께 투덜거리는 소리가 소녀의 등 뒤에서 들렸다.
소녀는 황급히 교구를 돌렸다.
거기,
한 복면인이 서 있었다.
헌데,
아아......
복면인,
그는 조금 전에 진대야를 협박하던 그 복면인이 아닌가?
그의 손에는 아직도 귀두도가 쥐어져 있었다.
소녀는 행복한 미소를 담뿍 띄우며 그에게 다가갔다.
"정말..... 고마와요.... 풍야.....!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어요....! "
복면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잊어도 좋아..... 대신 이런 일거리는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 "
일거리....?
소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품 속에서 은자 열 냥을 꺼냈다.
"헌데... 은혜에 비해서 보수가 형편없어서 어쩌죠? 황대야(黃大爺)의 황금
백 냥짜리 대신에 저희들 일을 처리해 주셨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
복면인은 기이하게 웃으며 은자를 받아 품 속에 넣었다.
"나도 돈 벌자고 이짓하는 건 아니야.... 먹고 살기만 하면 됐지..... "
이어,
"이제 잘 해 보라고... 괜한 부부싸움으로 날 다시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말고... "
그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숲으로 걸어갔다.
소녀는 무슨 말인가 그에게 꼭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풍야(風爺)...... 제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린 사랑을 하면서도 뼈아픈
이별을 해야할 뻔 했어요.... 풍야.... 당신은.... 남창성 모든
사람들의 은인이시랍니다......! )
사르락......
미풍만이 소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날 뿐이었다.
× × ×
남창성(南昌城),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역대의 명도(明都),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 중에 그 경관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파양호( 陽湖)를
끼고 있으며 역대 제왕의 도읍이자 내수륙의 교통요로에 위치한지라 그
풍물이 극히 번화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질어질한 금칠홍장(金漆紅粧)의 주루와 기루(妓樓),
윤이 나는 청석대로(靑石大路) 위로는 화복(華服)을 입은 청년과 미녀들이
자신의 용모를 뽐내며 걸었다.
그리고,
연도변에 수많은 장사치들과 성민들,
때는 산천초목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는 춘삼월(春三月) 호시절(好時節),
게다가 정오 무렵,
포근한 봄볕과 춘풍이 성민들의 마음마저 따사롭게 만들고 있었다.
헌데 돌연,
성내의 복잡한 거리에 한 명의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
그는 대략 십 오륙 세 가량의 나이였다.
일신에는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비록 깨끗했으나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색이 다 바랬으며 여기저기 꿰맨 곳 투성이었다.
헌데,
오오!
소년의 용모,
치렁치렁한 흑발은 백색 천으로 질끈 묶어 허리까지 길게 드리웠다.
햇살처럼 맑은 표정,
그를 보고 있노라면 비록 죽을 정도의 걱정이 있어 일시에 싹 씻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먹물을 찍어 그은 듯한 짙고 긴 눈썹은 귀에까지 뻗어 있고,
눈썹 아래로는 한 쌍의 추수처럼 맑고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있었다.
그 눈은 흑요석(黑曜石)처럼 영롱했으며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혜지를 담고 있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천공을 자를 듯이 힘찼고,
주사빛 붉디붉은 입술은 금시라도 붉은 물을 떨굴 듯했다.
소년,
한 마디로 천하에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완벽한 절세미소년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마치 그의 몸의 일부분처럼 항상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 미소는 신비했으나 범인들이 본다면 단지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평온한
것만을 느낄 그런 미소였다.
헌데,
그의 미소,
그것은 어떤 은폐물 역활을 하고 있었다.
소년의 전신에선 필설로써 표현하지 못할 무궁무진한 기(氣)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만인을 위압하는 위엄 같기도 하고,
사람의 심장을 도려낼 듯한 비수 같은 날카로움 같기도 하고,
천하의 모든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는 조소 같기고 하고,
설사 하늘(天)이라도 오시(傲視)할 듯한 오만함 같기도 했으나......
미소,
그의 미소는 그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그 모든 것들을 은연 중에 가려주고 있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단지 그가 명랑하여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소년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소년,
그는 수많은 성민들이 왕래하는 거리 한복판을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작작한 걸음이었다.
헌데,
오오...... 맙소사!
소년의 한쪽 눈,
마치 쇠망치에라도 얻어터진 듯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지 않은가?
그의 신적인 용모와,
그의 해맑은 미소와,
그의 눈에 난 시퍼런 멍은 묘한 대조를 이루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성민들은 소년을 발견하고 한결같이 한마디씩 건넸다.
그것은 명랑하며 조금의 가식도 섞이지 않은 것이었다.
"하하.... 웬일로 한쪽 눈에 퍼런 염색을 했는가......? 하하...... "
"후후..... 풍야! 이번 일거리가 대체 뭐였기에 눈퉁이까지 밤톨만해졌느냐? "
"풍야......! 하하..... 지난번에 고마왔네! 자네 덕분에 오새 마누라의
봉사가 그만일세..... 하하...... "
성민들은 악의 없는 진담과 농담을 섞어 던졌다.
소년,
풍야는 그들에게 일일이 미소로써 대답했다.
풍야(風爺)!
이 이름을 남창성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죽은 자이거나
어제 갓 태어난 어린 아기 뿐일 것이다.
풍야는 유명한 존재였다.
유명해도 그저 유명한 것이 아니라 남창성의 성주보다도 더 유명했다.
게다가 성민들에게 성주보다 더한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렇다고 성주가 그를 시기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남창성주조차도 풍야를 극히 좋아하며 신임하고 있었으므로.....
---풍야(風爺)-------
그런 소년이었다.
한동안 거리는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그것은 풍야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헤헤...... 풍야.... 풍야......! "
"풍야다.....! 풍야......! "
성민들은 괜히 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쁜 표정이었다.
"헤헤..... 풍야! 오늘 저녁에 시간이 좀 있는가? 왜냐하면 마누라가 지난번
일로 고마운 뜻에서 풍야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네..... 헤헤..... 어떤가?
풍야.....? "
"풍야! 영화루에 가는가? 영화루의 장돼지는 풍야에게 하해 같은 은혜를
입어 풍야라는 말만 들어도 꿈뻑 죽지.... 하하..... "
성민들의 말 중에는 은연 중에 이 나이 어린 소년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다.
풍야는 입가의 미소를 한층 명랑하게 지었다.
"하하.... 이노대(李老大)의 말많은 딸은 잘 있소? 내가 어디 마땅한 혼처라도
알아보리까? "
그 역시 거리낌 없이 그들과 농담을 주고 받았다.
"하하..... 황삼(黃三), 당신 마누라가 밤봉사를 그렇게 잘해준다니
다행이오.... 여자란 모름지기 밤에 그 시중을 잘 들어야 일등
여인인 법이오......! 하하..... "
"하하.... 육칠(六七), 당신의 예쁜 딸은 앞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구료....
다시 납치 됐다고 날 찾아온다면 그땐 공짜로는 힘들 것이오! "
풍야는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채 무엇이 좋은지 연신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 성의 동쪽인 호천로(虎天路)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남창성에서 유명한 영화루(榮華樓)가 있는 곳이었다.
× × ×
풍야(風爺),
이 이름은 남창성의 수많은 명승고적보다 백 배나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는 남창성 최고의 명물인 것이다.
남창성의 성민들,
아니 남창성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까지 남창성 최고의 명물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풍야를 꼽는다.
왜냐.....?
허허......
그는 다름아닌 풍야이기 때문이었다.
풍야를 설명하자면 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삼 년 전,
"설마...... "
"그럴 리가..... "
성민들은 믿지 않았다.
허나,
그들의 내심을 알고 있는 듯 이번에는 또 다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 이름이었다.
"이봐! 천풍이 이번에 엄청난 일을 해결했다는군....... "
"허허...... 성주님의 천금인 난화(蘭花) 아가씨를 그 무서운 녹림채(綠林寨)에서
감쪽같이 구해 낸 것을 말하는가? "
"그.... 그렇다네..... "
"하하.... 그 사실을 모르는 성민이 어디 있겠는가? 아울러 천풍에게 큰 상을
내린 성주님의 명령에 의해 앞으로 그를 풍야(風爺)라고 부르라는 것을
모른다면 남창성민이 아닐 걸세..... "
만사여의방,
천풍,
풍야,
제 2 장 江南第一妓女의 안타까움
영화루(榮華樓),
풍야가 남창성에 나타나기만 해도 남창성 최고의 명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영화루는 주루와 기루를 겸한 남창제일의 반점이었다.
이청(李淸),
그가 바로 영화루의 주인이었다.
그는 풍야에게 은혜를 입은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영화루는 문을 들어서면 휘황찬란한 홍석(紅石)이 깔린 소로(小路)가 나타난다.
소로의 양쪽에는 희귀한 수목과 기이하게 생긴 바위,
그리고 기화이초가 어우러져 보기만해도 마음이 시원한 기경(奇景)을 자아냈다.
홍석이 깔린 소로를 백 장쯤 걸어 들어가면 호화가 극에 달한 이층으로 된
누각(樓閣)이 나타난다.
누각이라곤 하지만 그 사방이 족히 백 장은 되어 보였다.
누각을 오르는 계단은 값진 대리석으로 되었고,
이층의 탁자는 화려한 벽옥(碧玉)으로 만든 것이었다.
탁자와 탁자 사이에는 벽수(碧水)가 일렁이는 조그만 연못들이 위치했고,
또한,
기화이초들이 싱그러움을 자아냈다.
그렇다고 아래층이 범속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래층의 백여 개의 탁자는 서장산 흑오목(黑烏木)으로 되어 있어 일반
객점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극적인 고급품위를 나타냈다.
누각의 뒤쪽으로는 누각보다 열 배는 더 화려한 한 채의 거대한 전각이 위치했다.
그곳은 바로 영화루의 실질적인 수입원인 기루였다.
그곳에는 강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강남삼홍(江南三紅)이 아직 처녀지신
(處女之身)의 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풍야는 주루의 이층 계단을 느릿하게 오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혼을 잃을 듯했고 또한 더없이 평온한 느낌을 주는
마력이 있었다.
풍야는 왼쪽 눈의 시퍼런 멍을 어루만지며 계단을 다 올랐다.
순간,
벼락을 맞은 강아지소리 같은 외침이 안쪽에서 들렸다.
"아..... 아이고, 풍야! 어서 오십시오! "
그는 영화루의 이층을 맡고 있는 점소이의 우령(寓令)이었다.
그의 손님 다루는 솜씨는 전례에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는 처음 보는 손님이라도 손님이 좋아할 음식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 맞혔다.
그리고,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손님이 말하기도 전에 잽싸게 대령하는 눈치가 있었다.
우령을 아는 손님들은 아예 음식주문을 그에게 완전히 맡기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져다주는 음식은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손님들의 입맛에 꼭
맞았으므로......
그가 아무리 비싼 음식을 가져와도 손님들은 아무런 의견없이 잘 먹었다.
그래서 영화루의 주인인 이청은 우령을 몹시 아꼈다.
우령,
그는 풍야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존경했다.
그것은 일 년 전 무림인 손님이 우령을 죽어라 패던 날부터였다.
하락오패는 자타가 공인하는 건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공연한 시비를 걸어 우령을 개패듯이 패고 있는 것을 풍야가
발견한 것이었다.
다른 손님들은 하락오패의 횡포를 익히 아는터라 수수방관 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 이청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느닷없이 풍야가 뛰어든 것이었다.
풍야는 하락오패에게 완전히 초주검이 되도둑 맞았으나,
결국,
그들 중에 한 명에게 달라붙어 그의 허벅지를 물어뜯고 쓰러진 그를 청동화로로
내려쳐 머리통을 부숴놓았다.
하락오패의 나머지 네 명은 그만 공포에 질려 도주하고 말았다.
관가에선 원래 하락오패로 인하여 골치를 썩어오던 터라 이 일을 은연중에
마무리 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우령은 풍야를 은인 아닌, 그 이상으로 따르며
존경해왔다.
우령은 안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주인님! 풍야께서 오셨습니다...... "
그는 풍야만 보면 공연히 싱글벙글 웃는 버릇이 생겼다.
풍야가 이층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영화루의 주인인 이청이 달려나왔다.
"허허...... 풍야! 어서 오게..... 허허..... "
그도 풍야만 보면 웃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하하..... 이대인(李大人), 안녕하시었소? "
풍야는 대답하며 주루 내를 한 바퀴 쓸어 보았다.
문득
(........ )
그의 두 눈이 이채를 띄웠다.
주루의 반 이상을 기이한 형색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무림인..... 헌데 무슨 일로..... )
그렇다.
그들은 무림인이었으며 그것도 보통 무림인이 아닌 일류 고수급들이었다.
그들은 소리 죽여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가끔씩 주위를 예리한 시선으로 쓸어 보았다.
그 외의 손님들은 남창의 유지들과 타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풍야를 발견한 남창성의 유지들은 한결같이 아는체를 하였다.
"하하.... 풍야! 어제까지 괜찮던 눈은 왜 시퍼렇게 멍이 들었나? "
"허허...... 풍야, 지독한 일거리가 들어왔던 모양이군? "
그들은 풍야의 멍든 눈을 화제로 삼았지만 무슨 일거리였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풍야의 일거리가 비밀이라는 것은 풍야가 모든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고 있는
이유 중에 한 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풍야의 시선이 한 곳에서 머물렀다.
그곳은 창가였는데,
청년 한 명과 소녀 한 명 그리고 육순 가량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풍야도 잘 알고 있는 이 지방의 토호(土豪)인 진대야였다.
풍야의 입가에 뜻모를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는 슬쩍 왼쪽 눈두덩을 쓰다듬었다.
왜냐하면,
그 시퍼런 멍은 진대야를 협박하다 생긴 영광의 상처였기에.......
"하하..... 풍야! 이리 오게! "
진대야는 전에 없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풍야를 불렀다.
진대야의 옆에 앉은 청년은 풍야의 멍든 눈두덩을 미안한 표정으로 주시하였다.
그런 그의 표정은 풍야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청년,
그는 얼마 전에 진대야를 협박하는 흑의복면인을 일수에 물리친 사람이었으며,
풍야의 눈에 멍을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세 명밖에 없었다.
풍야, 청년, 그리고 그 청년을 사랑하는 소녀.......
그러나,
진대야는 더없이 기뻐했다.
"하하..... 풍야! 나는 마침내 천하제일의 신랑감을 찾아냈네...... "
"후후... 정말 다행이군요. "
"그렇지. 그 신랑감을 내 딸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더없이 잘된 일이지....
하하...... "
청년과 소녀는 극히 고마운 눈빛으로 풍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진대야에게 혼인을 승낙받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하..... 풍야, 내 오늘 한 잔 사겠네.... 오늘처럼 기쁜 날.... "
진대야는 호탕하게 웃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풍야의 눈에 난 시퍼런 멍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 아니....? 풍야, 그게 어찌된 일인가? 대체 어떤 놈이 자넬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말해 보게, 내 그놈을 당장..... "
그는 노기등등하여 소매를 걷어 붙였다.
풍야는 씨익 웃었다.
"하하.... 진대야의 말씀은 고마우나 이 상처를 만든 사람을 혼내지는 마십시오. "
"그게 무슨 말인가? "
청년과 소녀를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떨구었다.
푸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사람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
순간,
청년과 소녀의 만면에 격동의 기색이 완전히 떠올랐다.
"하하...... 나는 단지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
풍야는 가식없이 소탈하게 웃었다.
(아아.... 풍야! 고맙네..... )
청년은 눈물을 진정 마음으로 흘렸다.
진대야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때,
이청이 풍야의 어깨를 감쌌다.
"풍야.....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
그의 어두는 웬지 힘이 없었다.
풍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청이 힘이 없는 이유를 아는 듯했다.
풍야는 묵묵히 좌중의 무림인들을 한 번 더 쓸어보았다.
이후 몸을 돌려 이청을 따랐다.
화려가 극에 달한 객식,
탁자를 마주하고 풍야와 영화루의 주인인 이청이 마주앉아 있었다.
풍야는 묵묵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청은 침중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풍야..... 원래 나는 영화루를 팔려고 내놓았었네..... "
"아..... 그랬었소? "
풍야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청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헌데 어제 마침내 팔렸다네. "
"아..... "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영화루를 산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일세..... 그는 단지 제삼자를 통해 영화루를 매도했다네..... "
"......... "
풍야는 별로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청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는데..... 도무지 만날 길이 없으니..... "
풍야는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무슨 부탁이오? "
"나는 고향의 노모를 모셔야겠기에 영화루를 팔았으나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걱정이라네..... "
문득,
풍야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평소에 그가 짓는 미소와 다른 것으로써 모든 것을 신비 속에 파묻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대야의 말씀은 영화루가 팔림으로 인하여 영화루의 이백여
식솔들의 생계가 걱정된다는 것이 아니오? "
이청은 자신만 실속을 차리려는 대개의 사람들과 달리 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풍야가 그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네.... 나 하나 편하자고 그들의 생계를 망쳤으니.... 후유..... "
풍야는 나직이 웃었다.
"이대야,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순간,
이청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풍야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말인가? "
"후후..... 그 일을 내게 맡기는 것이오! "
"....... "
"나는 무슨 일이든 주문받는 청부업자가 아니오? 허니 그 영화루를 산
신비인을 만나 식솔들을 계속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오. "
이청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그.... 그렇군! 나는 자네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천하제일의
청부업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군...... "
그는 마치 일이 성사되기나 한 것처럼 기뻐했다.
"좋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더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내 대가는
얼마라도 치루겠네. "
풍야는 고개를 저었다.
"대가는 필요 없소이다. "
"........ "
"하하.... 그동안 이대야가 내 단골이었던 점을 미루어 헤어지는 마당에 이번
일은 무료로 봉사해 드리겠소.......! "
이청의 만면에 감격의 물결이 일렁였다.
"그.... 그래도 그럴 수가....... "
"아니, 아니오.....! 이것은 내 마음의 정표외다! "
이청은 묵묵히 그를 주시하다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좋네. 좋아.... 그렇다면 나도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근사한
술자리를 선사 하겠네. 하하..... 영화루의 문을 닫고 우리 근사하게 한
번 마셔보게..... "
풍야,
그가 이런 굴러들어온 떡을 걷어찰 위인인가?
"하하..... 좋소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나 천풍의 임시 생일로 지정하겠소이다!
임시 생일.....! "
"하하..... 잠깐 기다리게...... "
이청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갔다.
그는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아...... 내가 왜 풍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
이백여 식솔들의 생계를 풍야에게 맡긴 것,
그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풍야라면 실패를 모르는 청부업자였으므로......
혼자 남은 풍야는 의미있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후후... 이대야.... 당신처럼 선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하오.... 식솔들은
걱정하지 말구료! 그 신비인은 그들을 당신보다 더 아끼며 살펴줄 테니까
말이오......! )
그의 말,
그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청죽헌(靑竹軒),
그곳은 영화루의 가장 뛰어난 기녀인 강남삼홍 중에서도 으뜸인 냉설화
(冷雪花)의 처소였다.
띵------- 띠딩!
뚱----- 따당! 뚱------ 땅!
지금 그곳에선 침상의 음률을 방불케 하는 극히 감미로운 비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죽헌,
영화루가 생긴 이래 이곳에 들어와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냉설화,
그녀는 기녀는 기녀로되 몸을 파는 기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빈청에서 비파를 타 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역활을 다했다.
그녀의 미모는 가히 천신조차도 넋을 잃을 정도로 절륜가경하여 수많은
고관대작이나 영웅협객들은 그녀의 얼굴만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했다.
허나,
천하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청풍,
그만이 이곳 청죽헌에 이미 수십 번도 더 와봤다는 사실을.....
천풍은 기분좋게 술에 취해 비스듬히 호피의에 기대 있었다.
탁자에는 황제조차 군침을 삼킬 엄청난 미주가효(美酒佳肴)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아아.......
창가,
그곳에는 선녀가 내려와 있었다.
선녀는 무릎에 비파를 올려놓고 있었고,
수백 송이 꽃송이가 수놓인 화의(花衣)를 입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노을을 비스듬히 받고 앉은 그녀의 용모,
둥그스름한 어깨를 덮고 있는 구름결처럼 부드럽고 윤이 아는 흑발(黑髮),
백옥처럼 흰 이마에 역시 초생달처럼 흰 아미,
그 아래의 두 눈은 추수처럼 서늘하고 맑았다.
흡사 보석이라도 박아놓은 듯이.......
오똑한 코,
알맞게 솟아 올랐지만 코 끝이 날카로와 자존심이 강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붉은 장미꽃잎 두 송이를 문 듯한 입술,
세류요에 알맞게 살찐 동그란 둔부는 의자 위에 살포시 얹혀 있다.
그리고,
아아.......
가슴을 덮은 옷을 비집고 나올 듯한 풍만한 육봉,
그것은 설사 부처라도 뿌리치지 못할 유혹이었다.
한 나라가 온통 망한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란 바로 이런 여인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선녀!
그녀는 선녀라도 불러도 도리어 모자람이 있는 강남삼홍 중에 냉설화였다.
그녀,
바로 강남삼홍 중에 제일미녀인 냉설화였다.
띵------ 띠딩!
뚱------ 땅!
희디흰 섬세한 손가락이 비파의 현을 유연하게 뜯는다.
그녀의 음률에선 온갖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비와,
꽃들과,
그리고 사랑하는 그 무엇들.......
그녀의 음률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벌나비를 기다리는 안타까움이라 할까?
하여간,
그런 진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음률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황제라도 된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아름다왔다.
헌데,
천풍.
그는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풋풋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도 냉설화의 천상음률에 취했는가?
이청은 천풍과 냉설화만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자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문득,
........
비파음이 끊겼다.
냉설화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천풍을 돌아보았다.
이어,
그녀의 아름다운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자신의 음률에 천풍에 도취된 것이 기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비파를 밀어넣고 가만히 천풍에게 다가왔다.
사르락.......
그의 곁에 나비가 나래를 접듯 앉아 그윽이 천풍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특이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사랑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랑,
그렇다!
냉설화는 확실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헌데,
아아......
안타깝게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남창 최고의 명물이었으니......
천풍!
바로 그였다.
지금.
그녀의 옆에는 자신이 탄 비파음에 심취한 천풍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냉설화는 천풍에게 바램이 많았으나 그가 자신의 탄금에 심취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천풍,
그는 냉설화에게 있어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존재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그윽한 시선으로 천풍을 내려다보던 냉설화는 대경하고 말았다.
"드르릉....... 쿨...... "
천풍이 가는 코고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아아...... 맙소사!
그렇다면 천풍,
그는 냉설화의 탄금에 심취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녀의 천상음률을 한낱 자장가로 여기다니......
파르르.......
냉설화의 고운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모욕이나 수치가 아니었다.
자신의 정성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데에서 오는 짙디짙은 비애였다.
냉설화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천풍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았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냉설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호오...... "
그녀의 서늘한 눈에 짙은 우수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아아.......
언제였던가?
이 분을 사랑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또한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장 확실한 한 가지는,
그녀는 천풍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랑,
그것도 그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것은 천풍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또한 살 희망을 가진 것은 언젠가는 천풍이 자신을 거두어 주리란 희미한 때문이었다.
천풍이 그녀를 거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래도 그녀는 천풍을 사랑하리라!
사랑은.....
결코 목적을 위한 수단일 수 없기에......
제 3 장에 계속
× × ×
비룡보(飛龍堡)-------
화려한 내실,
자단목의 탁자를 마주하고 일남일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허름한 백의차림의 십 오 세 가량의 절세미소년,
그는 다름아닌 청풍이었다.
그의 맞은편,
수국처럼 청초한 십 사오 세 가량의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처럼 흰 백의를 입고 있었다.
헌데,
오오......
그녀의 미모......
아름다왔다.
보라!
선연히 해맑은 이마에 고운 아미는 밤하늘의 초생달같지 않은가?
깊은 지혜와 따뜻한 은광으로 일렁이는 두 눈은 또한 어떠하랴?
고즈넉하고 반듯한 콧날의 선,
그 아래 꽃잎을 문 듯한 붉고 두툼한 입술,
그리고,
이를 데 없이 맑고 투명한 피부라니.....
대저 하늘 아래 그녀와 같은 미녀가 존재했었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이가 어려 보이기는 했으나 그런 것이 그녀의 타고난 미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
바로 비룡보주의 천금인 하운미(河雲美)였다.
그녀의 타고난 미색과 하늘을 경동시키는 총명함은 이미 비룡보의 위명을
능가할 정도였으니......
헌데,
지금 이 순간,
웬일인지 그녀는 얼굴 가득 짙은 수심을 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천풍은 찌푸렸던 얼굴을 띄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흐음.... 그러니까 운미소저의 말은 아버님이신 하대협께서 요새 어떤 일로
극히 불안해 하신다는 것이오? "
하운미는 추수처럼 맑은 두 눈에 근심을 가득 담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요.... 여태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으셨는데.... 벌써 보름째 일체
문밖 출입을 안 하시니..... 저러시다가 병이라도 나신다면.... "
그녀는 금시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로 미루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부친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는 말이오? "
"네..... "
"흐음..... 그것 이상하군.... 하대협 같은 분이 불안해 할 정도라니.... "
문득,
하운미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군요..... "
"무슨 일이오? "
하운미는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보름 전이었어요. 아.... 그래요. 그때부터 아버님께선 계속
불안해 하셨어요! "
"무슨 일이 있었소? "
"별다른 일은 없었고.... 단지 아버님께선 근 한 달 동안 외지(外地)에
출타하신 일이 계셨어요.... "
"한 달씨이나.....? 전에도 그런 일이 있으셨소? "
하운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예요....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아버님께서는 여간해선 보를 비우시지
않으셔요! 비우셔도 하루나 이틀이셨어요..... "
"으음...... "
천풍은 이마를 짚으며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다.
(이상하군..... 하대협은 정인군자이며 누구에게 원한을 살만한 사람도
아니거늘..... 으음.... 이일에는 반드시 어떤 흑막이 있을 것이다......! )
그는 하운미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더이상 들을 것은 없을 것 같군..... )
그때,
하운미는 초조한 신색으로 말했다.
"풍야! 어려운 일인지는 알지만 부탁이예요....! 제발 아버님이 불안해
하시는 것을 알아줘요....! "
그녀의 음성은 애원에 가까왔다.
이어,
그녀는 품속에서 한 알의 보주(寶珠)를 꺼냈다.
그것은 야명주(夜明珠)로써 족히 황금 만 냥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약소하지만.... 이건 보수예요. 오래 전부터 간직하던 것이었죠..... "
순간,
천풍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섰다.
"아니, 보수는 일을 처리한 다음에 받겠소! 그것은 내 철칙이니까...... "
그는 몸을 돌려 방문으로 걸어갔다.
문득,
그는 방문 앞에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까지 비룡보에 관한 모든 것을 작성하고 보 내의 약도를 그려 놓으시오.... "
"알았어요....! "
하운미는 망설임 없이 승락했다.
비룡보에 대한 모든 것을 외인에게 알려주다니.....
하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천풍,
그는 언제나 그래왔으며 그것은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또한,
그는 그런 비밀들을 완벽히 지켜주기 때문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문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 내일 보겠소..... "
그 말을 남기고 천풍이 방을 나서자 하운미는 다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걱정거리는 천하에서 가장 확실한 풍야가 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또 다른 표정,
그것은 못내 아쉬운 듯한 것이었으니......
문득,
그녀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풍야.....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가 좀더 가까와 질 수 있기를 바래요..... "
그녀,
하운미!
그랬었는가?
그녀도 저 천하의 천풍을......
× × ×
아는가?
운명(運命)은 천풍의 나이 열 다섯에 격변과 시련의 연속을 안배했다는 것을.....
운명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 × ×
배(船),
푸른 벽파(碧波)가 넘실대는 파양호반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그리 크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바로 만사여의방(萬事如意幇)의 본거지이며 천풍의 거처였다.
사람들은 그의 배를 가리켜 수중월(水中月)이라 불렀다.
수중월,
뜻하여 물가운데 달(月).......
한 칸의 선실,
극히 검소한 선실이었다.
벽에는 전 중원의 커다란 지도가 붙어 있었고,
두 벽에는 서가가 있었으며 그곳에는 빽빽이 서책들이 꽂혀 있었다.
방 가운데에 위치한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지금 네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천풍,
그는 한창 어떤 서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책의 겉표지에는 다만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오류(五類),
무엇을 분류해 놓은 것 같았는데 대체 무엇이 오류라는 말인가?
천풍이 읽고 있는 장,
오오!
놀랍게도 그가 읽고 있는 장에는 비룡보에 관한 것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대체 언제 누가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이란 말인가?
문득,
천풍은 서책을 덮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으음..... 나는 이책 이외에 네 권의 책을 이미 반 년 전에 완성했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것..... 허나, 아아.... 나는 아직도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
그것,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작성한 일류부터 오류까지의 서책에는 도합 삼백 칠십 방파의 이천 명의
무림인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허나..... 내가 찾는 것은...... )
그의 검미가 잔뜩 찌푸러졌다.
문득,
그는 눈을 뜨고 탁자 주위에 앉아 있는 세 명을 둘러보았다.
그의 좌측,
한 명의 십 삼 세 가량의 소녀가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헌데,
오오......
그녀의 용모를 보라!
그녀가 입은 옷은 낡은 무명옷,
허나,
그것이 그녀의 천하를 진동시킬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어딘가 고귀한 품위를 뿌리는 소녀,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꽃으로 비유한다면 만화(萬花)의 여왕인 백합 같다고나 할까?
치렁치렁한 흑발 아래 이마는 마치 햇살처럼 밝았다.
보석 같은 한 쌍의 눈과,
발그레한 두 뺨은 노을녘 같고......
온갖 꽃의 정화를 모아 놓은 듯한 붉디붉은 입술을 벌리면 국향이라도 물씬
새어나올 듯한 경국경성지색의 미모였다.
그녀가 천풍을 바라보는 눈빛은 은요로움과 존경 그리고 사랑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소군(小君)!
제 4 장 女人의 論理
× × ×
"크쿳..... 제기랄..... 어머님.... 이 바보 같은 풍아는 아직도 어머님의
원수조차 찾아내지 못했읍니다. "
차라리......
심장을 조각내어 누런 황톳길 위로 뱉는 듯한......
그것은 절규!
절규였다.
천풍,
그는.......
모친의 원수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가?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
그것은 삼년 전까지만 해도 그가 천하에서 가장 사랑하던 모친을 위한 것이었으니.....
하늘을 얼릴 듯한 비애(悲哀),
천풍은 그것을 시린 가슴 한 구석에 안고 있었다.
× × ×
제 5 장 碧風天中劍을 얻다
파천사대마보(破天四大魔寶)!
수천 년 무림사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이 이름,
그 중에 단 한 가지만 얻어도 족히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한다는
절대마보(絶代魔寶)가 아닌가?
벽풍천중검(碧風天中劍)!
그것은 천 년전,
부상제일검(扶桑第一劍)이라 지칭되던 태무랑(太武狼)의 신검(神劍)이 아닌가?
태무랑의 일신절학이 비장되어 있다는.......
제 6 장 각시와 신랑
눈(眼),
그것은 한쌍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귀화처럼 번쩍였다.
천풍은 얼음가루 같은 냉소를 입가에 매단 채 혈의복면인을 쏘아보았다.
혈의복면인,
그는 서서히 사위를 쓸어 보았다.
그의 눈은 일말의 감정도 지니지 않은 듯 무심으로 가득했다.
무심(無心),
그것은 살수(殺手)가 갖추어야 할 첫째 조건이었다.
허나,
혈의복면인의 무심한 눈빛이 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루로 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유중강(柔中强)이요, 무중유(無中柔)가 아닌가?
스슷......
그의 두 발은 전혀 지면에 닿지 않은채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혈의복면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어,
전신의 피를 얼리는 으스스한 음소를 흘렸다.
"흐흐..... 제법 영리한 놈이군.....! 허나..... "
철나,
스스스.....
그의 신형이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음 순간,
슈리리----- 릿!
그의 신형은 숲 사이를 종횡무진 날아 다녔다.
천풍은 눈을 파랗게 빛냈다.
(크쿳.......! 혈월막의 추종술이 천하제일이라 하더니.... 허나, 후후....
그가 과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
혈의복면인은 얼마 전에 천풍이 지나왔던 나무들을 한 그루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한순간,
스스슷......!
혈의복면인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천풍의 면전에 날아 내렸다.
천풍은 침음했다.
(으음...... 혈월막.....! 상상을 훨씬 능가한다.......!)
혈의복면인은 천풍의 삼 장 앞에서 약간 당황한 듯 했다.
".........? "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가끔씩 들려오던 불규칙적인 숨소리도,
천풍이 남긴 극히 미미한 흔적조차도......
혈의복면인은 날카롭게 주위를 쓸어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심장을 얼릴 듯이 싸늘했다.
그의 뒤쪽에서 천풍은 득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후후..... 하대협은 나를 살리기 위해 네놈을 유인했던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배신이지...... )
순간,
혈의복면인은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음산무비하게 중얼거렸다.
"흐흐.... 쥐새끼 같은 놈,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로 나를 속이다니.....
흐흐..... 네놈이 이곳에 흔적은 남겨 나를 유인하고 그 사이에
이곳으로 도주한 모양인데..... "
다음 순간,
스스슷-----
그는 희끗한 혈무만을 남긴 채 그자리에서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는 천풍에게 속았다고 했지만,
기실 그는 두 번 속은 것이었다.
천풍,
그는 한껏 눈을 부릅떴다.
(이후..... 나 천풍이 네놈들 혈월막의 유일한 적(敵)이 되.... 리.... 라..... )
그는 이가 시리게 중얼거리다가 스르르 혼절의 늪으로 빠졌다.
"으으....... "
천풍은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아스라이 느끼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 마자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을 맛보았다.
그것은 혈의복면인에게 입은 상처였다.
그가 앉은 주위는 온통 홍건한 핏물투성이였다.
그의 출혈은 극심했다.
"으으....... "
천풍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시릴 정도의 온요로운 햇살이 잘게 부서져 그의 눈 안으로 쏟아졌다.
아침이었다.
"크쿳....... 난 살았군...... "
그는 회색빛 웃음을 발했다.
이어,
천천히 자신의 전신을 쓸어 보았다.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크ㅋ......! 꼴 좋구나 천풍.......! "
그는 찢어진 손과 옆구리를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응시했다.
"헌데..... 제기랄, 어깨의 상처는 대체 어찌된 건가.....? "
문득,
그는 자신의 우측 어깨로 눈을 돌렸다.
어깨는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허연 뼈가 드러났으며,
그 뼈마저도 갈라져 있었다.
"후후..... 지독하군..... 이건 무림인들을 죽인 수법보다 더 악랄하군.
후후..... 만약 다른 곳에 맞았더라면...... 팔다리 하나쯤은 날라갔을
것이다...... "
그는 메마르게 툴툴 웃었다.
그러다 한순간,
그의 두 눈이 경악으로 찢어졌다.
"으으...... 이..... 이것은.......? "
그의 눈빛이 원한으로 이글거렸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으며 석상처럼 굳었다.
그의 바싹 마른 입술을 헤집고 튀어나온 한 마디,
"으으...... 찾았다! "
찾았다?
대체 무엇을 찾았다는 말인가?
"크으으..... 삼 년, 뼈를 깎는 고통이었는데...... 으으...... "
그의 시선은 자신의 어깨에 난 상처에 못밖혀 있었다.
"흐흐...... 혈월막! 네놈들이었구나..... 네놈들...... "
순간,
"우욱.......! "
그는 너무도 분노하고 격동한 나머지 울컥 검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주르륵.......
그의 입을 타고 그의 시린 한처럼 피가 흘렀다.
그의 뇌리로 어느 순간 잊을 수 없는 뼈저린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 × ×
노을이었다.
그것도 핏빛 노을이었다.
언덕,
백화(百花)가 만발했고,
새파란 잔디가 끝간 데 없이 펼쳐진 곳,
거기.......
명랑한 소년 소녀의 웃음 소리가 먼곳까지 메아리쳤다.
"하하하....... 소군.......! 빨리 와라! "
"호호......! 아이..... 오빠 숨이차요! 조금만 쉬어요. "
흐드러지는 꽃향기를 헤치고 아름다운 미소년과 미소녀가 나타났다.
아아!
그들은 마치 천상의 아이들처럼 비할데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왔다.
소년의 나이는 십 이삼 세 가량,
그리고,
뒤따르는 소녀의 나이는 십 일이 세 정도였다.
"하하..... 소군, 넌 그것 뛰고 지치다니..... 하하...... 이제보니 형편없는
약골이었구나! "
소년의 명랑한 웃음이 노을 속으로 퍼져갔다.
소년은 우뚝서서 노을을 바라보며 소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해맑은 두 눈은 천하를 담고도 남을 듯하였다.
소년은 어떤 큰 포부를 가슴 가득 담고 있었다.
그때,
"호호..... 잡았어. 내가 오빠를 잡았어.......! 호호....... "
뒤따르던 소녀가 어느새 다가와 소년의 목을 얼싸안았다.
소년은 소녀를 덥썩 등에 업었다.
"하하......! 소군, 네가 날 잡은 것이냐? 아니면 내가 널 잡은 것이냐......? "
소녀는 그의 넓은 등에 얼굴을 묻었다.
"으응...... 우린 서로 잡았고..... 서로 잡힌거야.....! 그렇지 않아? "
"하하...... 맞다! 우린 잡히고 잡은거야........! "
소녀는 꿈꾸는 듯한 눈빛이 되었다.
(아아......! 오빠! 나는 오빠의 각시가 될거래요.......! )
그녀의 뺨은 노을보다 더 붉었다.
(아까..... 어머님과 큰 이모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연히 들었지요....... )
소녀,
그녀의 이름은 화소군(華小君),
그녀의 모친과 소년의 모친은 한 사부를 모신 사매지간(師妹之間)이었다.
소년의 모친이 큰 제자고,
소녀의 모친이 작은 제자였다.
무슨 일인지 사부는 소년의 모친을 사문에서 축출시켰지만,
두 사매는 여전히 사이가 좋았다.
소녀는 우연히 그녀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호호..... 언니, 우리 군아와 풍아(風兒)를 정혼시키는 것이 어떤가요? "
"아! 그것 좋은 생각이로군.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거야! "
소군은 소년의 등에서 잠든 것처럼 행복에 겨워했다.
소년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곳은 천태산(天台山)의 몹시 깊은 곳,
소년은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소군 모녀외에 사람이라곤 구경한 적이 없었다.
문득,
"오빠.........? "
잠든 줄 알았던 소군이 소년을 불렀다.
"왜.......? "
"아..... 아니야.......? 그냥....... "
소군은 괜히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 했다.
"하하...... 싱겁기는....... "
소군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오빠는 자기의 신랑이 될거라고 믿고 있었다.
노을은 점점 더 붉어졌다.
"어머님......! "
"호호..... 어머님.......! "
그들이 초옥의 울타리를 들어서며 모친을 불렀을 때,
그들을 반기는 것은 정겨운 모친이 아니었다.
피(血),
구역질이 날 듯한 짙은 피비린내 였다.
"어머님.......! "
그들은 구르듯이 한 곳으로 달려갔다.
화단,
그곳에는 두 명의 여인이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다.
그녀들은......
장차 신랑과 각시가 될 아이들의 모친이었다.
× × ×
× × ×
뢰영(雷影),
그는 침중한 기색으로 하나의 선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빛은 산 사람의 얼굴 빛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문득,
뢰영은 서찰을 내려다 보았다.
"이..... 선실에는 대가께서 나 뢰영을 위해 안배한 것들이 있다고 서찰에
적혀 있었다.......! "
그의 음성은 평소처럼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대가는..... 자신이 한달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는 이 서찰을 읽어보라고
했었다..... 그 말은 삼 년 전부터 입버릇 처럼 해오던 말...... "
그는 힐끗 옆을 돌아 보았다.
옆 선실문 앞,
남의 청년,
비우가 평소보다 더욱 헐쑥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에도 힘겨울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다.
그의 하늘(天),
천풍,
그의 실종은 그에겐 죽음과 같은 비중의 충격이었다.
비우의 일 장 앞,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벽에 기대 있는 소녀가 있었다.
소군,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왜냐면,
그녀의 호흡이요, 그림자인 천풍이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해맑던 두 눈은 아무 곳도 보고 있지 않아다.
단지,
눈 앞에 아른거리는 천풍의 영상만을 쫓고 있었다.
그녀의 전면에도 예의 하나의 선실이 위치해 있었다.
또한 그녀의 손에는 눈물 젖은 서찰 한 통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비우의 손에도.......
그들은 천풍이 남긴 서찰에 의해 각자 자신의 앞에 있는 선실에 들어가야 했다.
그것은 천풍의 명령이기 이전에 그의 바램이었다.
순간,
뢰영은 선실문을 밀었다.
이어,
한서린 중얼거림을 흘렸다.
"만약.... 누군가 대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린다면 그자의 죽음으로
보복하리라.... "
그의 마지막 말은 선실 안쪽에서 들렸다.
그리고,
탁,
선실문은 닫혔다.
비우,
그는 한 걸음 선실문을 향해 대디뎠다.
휘청......!
그는 쓰러질 듯이 선실문을 잡으며 쓰디쓰게 말했다.
"후후..... 풍대가......! 대가의 몸에 손을 댄 녀석이 대명(大明)이라도
비우는 대명(大明)을 모조리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리라..... "
대명을.....
그가 선실 안으로 사라지자,
소군은 허망한 시선으로 자신이 들어가야 할 선실문을 바라보았다.
"풍가가........ "
삐이....... 익!
선실문이 서서히 열렸다.
어두운 실내,
거기,
천풍의 잔영이 남은 듯한 착각에 소군은 끌리듯이 들어섰다.
그녀의 수척한 얼굴에는 한 줄기 해사한 미소가 피어났지만,
그것도 잠시,
소군은 꺼질듯한 한숨을 흘렸다.
"소녀는..... 풍가가의 영원한 각시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녀는..... 흑.....! 가가께서 변을 당하셨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만약...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가가의 영혼과 함께 평생을 보낼 거예요..... "
탁!
천풍의 영혼을 안은 소녀,
소군은 선실 안으로 사라졌다.
천풍을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세 사람,
이후,
무림은 그들로 인하여 엄청난 피의 회오리를 격어야만 했으니.....
아아......
운명이여......!
운명이여......!
제 7 장에 계속
× × ×
쿠르르릉-------
은은한 굉음과 함께 백 장 높이의 얼음산(氷山)이 반으로 갈라졌다.
순간,
휘류류------ 류륭!
슈슈슈------- 슈슈우우웅!
괴물의 아가리 같은 속에서 천하의 모든 것을 얼릴 듯한 극랭한 한풍(寒風)이
쏟아져 나왔다.
갈라진 빙산의 백 장 밖,
근 천여 명의 인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부신 은의(銀衣)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두 눈에서는 만년한풍(萬年寒風)과도 같은 극음한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지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그들의 내공은 이미 일류고수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정중앙,
높은 단(檀)이 세워졌다.
단은 북해에서만 나는 한옥(寒玉)으로 만들어졌으며,
단의 정상에는 희귀한 교룡피(蛟龍皮)가 깔려 있었다.
거기에......
한 명의 노인이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나이는 대략 칠십여 세 정도,
은발(銀髮), 은염(銀髥)의 은의노인(銀衣老人),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투명했으며,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도는 장중한 중에서도 하늘마저 뒤덮을 듯
패도적이었다.
그의 뒤쪽에는 각각 홍(紅), 청(靑), 흑의(黑衣)를 입은 세 노인이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그들은 표정이 없었다.
단지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한기(寒氣)만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귀밑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으로 미루어 이미 반박귀진(返撲歸眞)의
경지에까지 이른 듯......
헌데,
지금 빙산 앞에 도열한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반으로 갈라진 빙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갈라진 빙산,
때아닌 천재지변(天災地變)을 일으켰는가?
돌연,
천지를 함몰시킬 굉렬무비한 폭음이 터졌다.
쿠쿠아아아------- 아아앙!
꽈꽈꽈----- 르르릉!
다음 순간,
직경 백여 장,
둘레가 족히 삼백여 장은 됨직한 빙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콰콰콰------- 꽈꽈아아앙!
무수한 얼음덩이들이 비산했다.
찰나,
천여 명 은의인들의 두 눈에 일제히 격동의 기색이 물결쳤다.
헌데 그 순간,
슈슈슈----- 슈아아----- 아앙!
허공으로 치솟는 백색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빛(光),
아니,
그보다 천 배나 쾌속함으로 무려 수백장 허공으로 솟구쳤다.
은의인들은 만면에 더할 수 없는 격동을 떠올린 채 허공을 주시했다.
그때 돌연,
허공 중에서 낭랑한 대갈이 터졌다.
"빙유겁멸황(氷幽劫滅荒)-----! "
찰나,
오오......
은의인들의 전면 아스라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얼음산,
그것은 방금 전에 부서진 빙산보다 열 배는 거대했으며,
고오오----- 큐큐큐-------!
허공에서 실로 가경가공할 기운이 해일처럼 그곳으로 쇄도해갔다.
중인들의 시선이 기대로 물들 때,
츠츠----- 파아아앗!
얼음산을 횡(橫)으로 가르는 엄청난 섬광이 있었고,
돌연,
꽈꽈꽈------ 꽈꽈----- 꽈르릉!
천지가 암흑으로 뒤덮인 가운데 얼음산은 그 웅장한 모습을 산산이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오오..... 마침내...... "
"아아.... 대공자께서...... "
"으으..... 저건..... 신(神), 신의 무학이다...... "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순간,
슈리리리----- 릿!
허공에서 한줄기 가공할 속도ㄹ 백영이 단으로 내리꽂혔다.
찰나,
스스스.....
단 앞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중인들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뒷걸음질쳤다.
"으으.... 심맥이 터..... 질 것 같다.... "
"우우.... 대공자의 무공은 기(氣)로써도..... 상대를 죽일 정도다..... "
백의청년(白衣靑年),
그는 단 위의 은의노인을 향해 공손히 절한 다음 태산을 압도할 기세로 우뚝 섰다.
헌데,
아아!
백의청년,
그의 용모는 완벽,
바로 그것이었다.
칠 척의 훤칠한 체격,
창백하리만치 희디흰 얼굴,
길게 뻗은 검미는 무서운 예기(銳氣)를 뿌렸다.
그 아래,
크고 검은 두 눈은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고 얼음 가루를
뿌릴 듯이 차갑기도 하였다.
그의 전신에선 천지를 얼려버릴 듯한 기운이 흘렀다.
또한,
천아웅주로서의 장중한 기개와 헌앙(軒昻)한 위엄이 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그,
단지 우뚝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늘을 뒤덮는 기도를 뿌리고 있는 청년,
그의 나이는 불과 이십여 세 가량이었다.
순간,
"으핫핫핫! 빙옥(氷玉)! 너의 출관을 축하한다! "
단 위의 은의노인이은 쩌렁쩌렁한 광소성을 터뜨렸다.
빙옥,
그것이 청년의 이름인가?
청년은 빙긋 웃었다.
"하하..... 이 모든 것이 사부님의 하늘 같으신 은혜입니다! "
헌데,
그의 미소,
오오......!
그것은 단지 웃는 것만으로도 천지를 일시에 얼려버릴 듯 하지 않은가?
은의노인은 흡족하게 웃었다.
"핫핫핫...... 빙옥, 너의 출관을 기점으로 본 빙혈천궁(氷血天宮)은 마침내
긴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
그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광망이 쏟아졌다.
"흐흐흐..... 천 년 전, 중원도모에 실패한 조사(祖師), 빙혈천존(氷血天尊)의
한을 풀 때인 것이다! 흐흐.... 이제 중원을 얻으리라.....! 중원의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마천종(魔天宗)의 후예를 찾아라......! "
오오......
빙혈천궁!
아아.....
빙혈천존의 천년지한(千年之恨),
"빙옥! 모든 준비는 끝났다! 중원은 본 궁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마천종,
그의 후인을 죽여야만 진정한 천하패주(天下覇主)가 되는 것이다! "
순간,
"존명을 받듭니다! "
빙옥대공자의 복명에 이어 천여 명의 은의인들도 일제히 부르짖으며 부복하였다.
"존명......! "
은의인들,
그들은 북해(北海) 빙혈천궁의 삼만 제자들 중에서 뽑은 일당 백의용사들이었다.
빙혈천궁,
그들은 마침내 중원을 햐애, 아니 마천종의 후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
스스스......
스스스.......
복건성(福建省)에 연한 해변,
그곳으로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인영들이 스며드는 것을 천하인들은 꿈에서조차
모르고 있었다.
야공(夜空)엔 달(月)도 없었다.
그리고 별도.....
그 가운데....
수천 명의 괴인들이 바다에서 해변으로 흔적없이 스며드는 것이다.
스스스......
스스스.......
제 8 장 독종의 미소
× × ×
"으으....... "
한 소년,
전신은 만신창이로 찢어져 있었으며,
힘겹게 내딛는 한 걸음마다 선혈이 한 사발씩이나 흘렀다.
그가 입은 옷은 원래의 색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먼지와 흙과 핏물에 범벅이 되어 있었으므로.....
머리는 봉두난발,
얼굴에는 때가 한 치나 두껍게 덮였다.
숲(林),
마른 나뭇가지가 즐비하게 깔렸고 날카로운 돌들이 산재한 곳을 소년은 맨발로
걷고 있었다.
새하얀 발이 터져 선혈이 소년의 시린 한(恨)처럼 흘러나왔다.
헌데,
소년,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심장이 멎을 듯한 새파란 한광을 뿜어내는 소년,
오오.....!
그는 바로 천풍이 아닌가?
천풍,
그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허나,
"후후....... "
그는 웃고 있었다.
비틀..... 비틀......
그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이 휘청였으나,
또한,
한 걸음마다 천 근을 짊어진 듯한 고통을 받았으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고,
도리어 웃었다.
"후후..... 절강성(浙江省), 제아무리 영활한 혈월막이라해도.... 후후.....
내가 이미 절강에까지 온 사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후후..... "
탁....... 타...... 탁!
그는 수중의 헝겊으로 싼 긴 물건으로 전면의 나뭇가지들을 헤쳤다.
"후후..... 보름..... 지난 보름 동안 나는 벌써 아홉 번의 사로(死路)를
지났다..... 그리고 후후..... 구백 리를 왔다...... "
보름 동안에 구백 리,
무공에 무자도 모르는 그가.....
아아!
단지 그의 초인적인 인내에 할 말을 잃을 뿐이었다.
뭉클..... 뭉클.....
비룡봉에서 다친 그의 어깨에선 쉴새없이 선혈이 흘러나왔다.
또한,
그 외의 상처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천풍은 웃었다.
천하를 갈아마실 듯한 웃음이었다.
"후후..... 내게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문진법과 독술이 없었다면....
벌써 아홉 번은 죽은 목숨이리라..... "
아홉 전을 죽은 목숨......!
타...... 탁...... 탁....!
그가 나뭇가지를 쳐내고 있는 긴 물건,
그것은 바로 비룡보주 하비웅이 그에게 죽어가며 준 벽풍천중검이었다.
"크ㅋ..... 혈월막! 네놈들이 노리는 것이 이 검이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허나 내게는 쓸모없는 검일 뿐이다......! "
오기(傲氣)!
그는 처음부터 벽풍천중검에 욕심이 없었다.
단지 그것을 탈취하고자 무참한 살륙을 서슴치 않는 혈월막이 가증스럽기
때문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
그의 눈 아이 탁 트이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천풍은 눈을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숲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밑에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놓여 있었다.
쏴아아.......!
철썩......! 철썩........!
절벽 아래에선 규칙적으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강(江),
지금 천풍이 와 있는 곳은 장강(長江)의 하류였다.
거기,
넓이가 오백여 장은 될 듯한 장강이 검푸르게 흐르고 있었다.
"크ㅋ....... "
천풍은 쓰게 웃었다.
"제길.......! 길을 잘못 들었군...... 이런 곳에서 그놈들의 공격을 받는다면
영락없이 죽어야겠군......! "
그가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흡사 염라사자의 음성과도 같은 것이 들렸다.
"흐흐흐.... 네 말은 맞았다. 너는 죽기에 몹시 적당한 곳을 찾았구나..... "
찰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츄리릿-------!
우측 숲에서 섬광 한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우웃........! "
섬광이 닥쳐오기도 전에 천풍은 목줄기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순간,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벽풍천중검으로 자신의 목을 막았다.
카----- 캉!
"우욱! "
섬광은 벽풍천중검에 맞아 방향을 바꾸었고 대신 천풍의 목을 길게 찢어놓았다.
그가 휘청이고 있을 때,
스----- 스------ 스------
핏빛 그림자 하나가 땅거미처럼 덮쳐왔다.
그 속도는 빛, 그 이상이었다.
다음 순간,
천풍은 벽풍천중검을 번쩍 쳐들었다.
이어,
그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 마디,
"후후...... 좋은 구경을 시켜줄까......? "
그가 서 있는 곳은 절벽의 끝,
순간,
스슷.......
그의 삼 장 전면에 한 무더기 혈무와 함께 한 명의 혈의복면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천풍은 득의하게 웃으며 벽풍천중검을 든 손을 강쪽으로 향했다.
"후후..... 이 검이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겠지......? "
그는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 웃었다.
혈의복면인은 흠칫했다.
허나 곧 으스스하게 음소했다.
"흐흐.... 약은 놈.....! 그런 방법을 쓰다니.... "
그는 자신의 목적이 벽풍천중검에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었다.
"후후.... 약지 않았으면 내가 여태껏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
천풍은 표정없이 웃었다.
"흐흐.... 허나, 네놈이 그것을 던지기도 전에 너는 죽을 것이다.......! "
"후후..... 한 번 시험해 보지 않겠소? "
"........ "
"후후..... 과연 내가 먼저 죽는지..... 아니면 이 검이 먼저 강에 빠질지.... "
순간,
혈의복면인의 두 눈에서 심장을 짓이길 듯한 살광(殺光)이 폭사되었다.
"찢어죽일 놈......! "
"후후..... 혈월막이 언제 사람을 찢어죽이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
혈월막!
그 가공할 명호가 천풍의 입에서 동네 강아지 이름처럼 튀어나왔다.
"흐흐..... 나는 네놈으로 인하여 본막의 명예에 먹칠을 하였다!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본막의 명예에.... 흐흐.... 허나 막주(幕主)께선 네놈을
죽이고 스스로 자결하라는 은혜를 내게 베푸셨다......! 이 길마저
놓친다면..... 흐흐.... 나는 영원히 쓸모없는 놈이란 낙인을 지우지
못하고 처참히 죽게 될 것이다..... "
혈의복면인,
그는 바로 비룡보에서 하비웅을 죽였던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백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던 혈월막에 실패를 안겨준 인물인 것이다.
남창의 명물 천풍에 의해서.......
천풍은 빠르게 주위를 쓸어 보았다.
(진을 펼쳐야 한다......! 나를 은폐한 후에 도주해야 한다...... )
헌데 돌연,
혈의복면인의 눈이 한 차례 기광을 뿌리는가 싶더니,
파아----- 앗!
섬전, 그 이상의 가공할 검광이 천풍의 허리를 쓸어왔다.
"헛........! "
천풍이 다급한 경악성을 터뜨렸을 때에는,
검기(劍氣)는 이미 그의 복부를 헤집고 있었다.
슈----- 팍!
그의 등 뒤로 피분수가 솟구쳤다.
천풍은 아득한 상태에서 체내의 모든 것이 뚫린 등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스------ 스----- 슷!
그는 자신을 향해 쾌속절륜하게 미그러져 오는 혈의복면인을 발견했다.
(으으...... 안돼......! )
그 순간,
휘----- 익!
그는 신형을 허공으로 날렸다.
혈의복면인의 갈고리 같은 손이 그의 어깨를 막 낚아채려 했을 때,
천풍의 만신창이 몸은 간발의 차이로 인해 검푸른 장강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촤아아.....
복부와 등으로 시리도록 아픈 선혈을 뿜으면서......
혈의복면인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 독종이다.....! 내 생전 저런 독종은 처음 본다......! "
그의 화산처럼 이글거리는 눈에 천풍의 몸이 점으로 화하여 강물 속에 잠기는
것이 보였다.
그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흐흐..... 허나 이것이 끝이라고는 여기지 마라...... "
그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第 1 卷 끝 >
제 9 장에 계속
제 2 권
저 자 : 冷河祥
출판사 : 민 우 사
연 도 : 1984. 09. 18
타이핑 : 나우 ID(추녀) 김진호
제 9 장 一招의 絶代劍法
제 10 장 날개를 키우는 飛龍
제 11 장 巨步를 딛다
제 12 장 天劍門을 얻은 風
제 13 장 세 개의 수급, 시작되다
제 14 장 순진하고 아름다운 色女
제 15 장 오오, 가련한 者여, 너의 이름은 女子
제 16 장 女人을 안은 다음엔
제 9 장 一招의 絶代劍法
꿈(夢),
천풍이 꾸는 꿈은 모두가 핏빛이었다.
핏빛 하늘과,
핏빛의 산야(山野),
그리고 그곳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두 여인이 피를 토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들이 뭐라고 부르짖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천풍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제 10 장 날개를 키우는 飛龍
× × ×
천태산(天台山),
절강성(浙江省) 북단에 위치한 이 명산(名山)은 중원오악에 뒤지지 않는
경관을 자랑하는 명려대산(明麗大山)이다.
깊은,
그래서 태고 이래로 단 한 번의 더럽힘도 입지 않은 곳,
그곳에 두 개의 봉분이 있었다.
봉분에는 잡초가 무성했으며,
묘비에는 단지 이렇게만 새겨져 있었다.
천풍,
바로 그였다.
그는......
그곳에 기거하며 두 가지를 키우고 있었다.
첫째는,
묵혼에게서 전수받은 일초검식이었다.
둘째는,
한(恨)이었다.
그 두 가지의 목적은 한 가지였다.
혈월막!
바로 그것이었다.
바야흘로......
천태산의 한 이름없는 계곡에서 비룡(飛龍)이 날개를 키우고 있었다.
날개를.......
제 11 장에 계속
대중원(大中原)!
---흑의검천(黑衣劍天)----
바로 이 사나이였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두 가지 특징이 있을 뿐이다.
첫째,
그는 일초검식 외엔 펼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상대는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둘째,
그는 말이 없었다.
혹자는 그가 벙어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비밀이었다.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며,
목적이 무엇인지.....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중원,
그곳에는 이미 그의 적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원대륙,
이곳 넓디넓은 광활대륙엔 태산을 가르고 사해를 뒤엎을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그러나,
흑의검천의 등에 비스듬히 멘 한 자루 장검은 중원을 무인지경(無人之境)으로
만들었다.
처음엔 그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검을 아무도 주의해 보지 않았다.
허나,
그가 중원대륙에 모습을 나타낸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그의 검은 무림사상
가장 유명한 검들 중에 하나가 되었다.
풍운진천검(風雲震天劍) 조부일(曹夫日),
마중마효(魔中魔梟),
그는 이 시대가 거부할 만큼 가공할 개세마인이었다.
그가 새로 만든 검을 시험하기 위해 한 마을 칠백여 명을 모조리 죽였던
이야기는 무림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헌데,
그 역시 흑의검천의 검 아래 일 초를 넘지 못했다.
이후,
무림은 어찌 되었겠는가?
아아!
가련한 무림이여!
무림은 더이상 흑의검천의 적수가 없음을 통탄하였다.
아니,
어쩌면 흑의검천을 응징할 기인은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흑의검천이 대륙을 횡단하며 무려 백여 명의 절정고수들을 주살하도록....
× × ×
"크으으....... "
"으윽..... 천하에..... 이처럼 지독한..... 독이..... "
"크르륵...... 큭....... "
× × ×
무산(巫山),
사천제일(四川第一)의 명산이자 험산(險山),
무산 삼천봉(三千峯) 중에서도 가장 높으며 그 정상이 넓은 첨일봉(尖一峯),
이곳의 지형은 특이했다.
아니,
천험의 요새였다.
한 명이 능히 백 명을 막아낼 수 있는 곳,
그곳에,
바로 남북십삼개성(南北十三個省)의 녹림총단(綠林總檀)이 웅장하게 위치해 있었다.
또한,
십병사제(十兵邪帝) 독고야(獨孤夜),
그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우수에는 섭선을 쥐고 있었으며,
양어깨에는 한 쌍의 극(戟)을 메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마기(魔氣)가 뼈마디 갈라지게 뿜어지는 천하마병(天下魔兵)인 듯,
극에서는 스스로 질식할 듯한 묵광(墨光)이 귀무(鬼霧)처럼 스물스물 뿜어 나왔다.
묵의청년,
마유강(魔幽强)!
바로 그였다.
그 말고 천하에 그 누가 이처럼 처절한 마기를 쏟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녹림총단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첨일봉 정상에 도도하게 우똑서서 달(月)을 보고 있었다.
그의 희다 못해 푸르기까지한 얼굴에는 하늘도 숨 죽일 오만과 자부가
깔려 있었다.
마치 옥(玉)으로 깎아 다듬은 듯한 얼굴,
여인처럼 섬세한 얼굴이었다.
헌데 돌연,
스스스.....
스---- 스----- 스-----
그의 면전에 자욱한 흑무(黑霧)가 피어났다.
흑무는 피어나는가 싶더니 곧 네 명의 흑의노인으로 변했다.
흑의노인들,
그들의 안색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퍼런 귀무에 휩싸여 있는 그들은 사신(死神),
바로 그것이었다.
더도 덜도 아닌......
그들은 마유강의 면전에 마치 하늘을 대한 듯한 공손한 태도로 깊숙이 부복했다.
순간,
"속하들이 주공(主公)을 뵈옵니다! "
그들은 일제히 복명하였다.
오오!
음성,
그것마저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이한 것이었으니.....
돌연,
쿠당.......
마유강의 면전에 한 명의 적포노인이 보기 흉하게 나뒹굴었다.
적포노인,
호상(虎像)의 우람한 체격,
극강한 사기(邪氣)를 물씬 풍기는 그는,
바로 남북십삼성의 총표파자(總飄把子)인 십명사제 독고야였다.
그는 혈도가 제압 되었는지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아!
믿을 수 없다.
백 번을 죽인다해도 믿을 수 없다는 부르짖을 일이었다.
사(邪)의 하늘(天)인 그가 이런 참담한 처지에 처하다니....
십병사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마유강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네놈이.... 본좌의 수하들을 비열하게 독살.... 했느냐? "
순간,
퍼----- 억!
"허억..... "
흑의노인 중에 한 명의 일지가 그의 옆구리를 뚫었다.
"독고야! 네 앞에 계신 분은 하늘이시다...... "
하늘(天)!
공손치가 못하다는 뜻이었다.
"으으..... "
십병사제는 핏덩이를 왈칵왈칵 쏟으며 말없이 마유강을 쏘아 보았다.
그의 표정에선 불복의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마유강이 소매를 슬쩍 흔듬과 동시에 그의 마혈은 풀렸다.
"으으..... "
십병사제는 퉁기듯이 벌떡 일어섰다.
이어,
스르릉-----
어깨의 검을 뽑았다.
문득,
마유강은 여전히 달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본좌가 녹림총단에 절독을 풀어 그 중에 십분지 삼을 죽인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고..... "
"으으.... 비열한...... "
"녹림총단의 이만 수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
"임변을 지꺼릴 참이냐? "
십병사제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 소인배는 아니었다.
마유강에게 불손하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 불손하게 행동했다.
마유강은 발작하려는 흑의노인들을 턱으로 제지하며 처음으로 십병사제를
쳐다보았다.
순간,
"으으..... "
십병사제는 부지 중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으으.... 저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다.... 마(魔), 그 자체.... 이다..... )
어이없게도 그는 난생처음 공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마유강의 눈빛,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라곤 한 올도 담겨 있지 않은 가공한 마안(魔眼)이었다.
"독고야! 불복한다는 것이냐? "
오오!
음성,
염라대왕이 들었다면 영락없이 할아범 하고 절할 정도로 음산무비하다.
마유강은 분명 십병사제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렀지만,
듣는 십병사제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덤벼라..... 그리하면 왜 본좌가 독을 썼는지 알게 될 것이다! "
마유강의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십병사제는 불끈 검을 힘주어 잡았다.
허나,
허나 말이다.
"으으..... "
마유강을 쳐다본 순간 그는 전신의 맥이 일시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으으... 이럴 수가..... "
마유강은 묵묵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털썩......
십병사제는 한순간 무릎을 꺾고 말았다.
그는 전신을 푸들푸들 떨며 머리를 지면에 쳐박았다.
문득,
"알겠느냐...... "
마유강의 스산한 물음이 그의 뒷통수에 떨어졌다.
헌데,
아아......!
믿을 수 없다.
"아..... 알겠습니다..... "
십병사제는 공손히 떨리는 어조로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을 알았느냐? "
"으으..... 만약.... 독을 쓰시지 않았으면.... 녹림총단의 이만 수하는
한 명 남김없이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 "
"됐다! "
됐다!
광오한 이 한 마디가 이곳에선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니.....
마유강,
그는 마유강이기 때문이리라......!
"본좌가 너희를 죽이지 않은 것은 너희를 거두기 위함이었다. "
십병사제의 전신은 식은땀에 젖어 전율하고 있었다.
"황공..... 황공할..... 따름입니다....... "
황공이라니......
아아......
그가 마유강에게서 느낀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문득,
마유강은 야공을 응시하며 어둠처럼 웃었다.
"후후.... 얻으리라.... 천하를 얻어 진정한 마(魔)를 심으리라.... "
흑의노인들과 십병사제는 오체투지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이것은 시작일 뿐, 녹림총단을 얻음같이 녹림수로채(綠林水路寨)도 얻을
것이며 천하도 얻을 것이다! "
천하를 얻을 것이다!
순간,
마유강은 흑의노인들을 쓸어 보았다.
"사혈마노(四血魔老)! "
부름과 복명은 거의 같이 일어났다.
"존명을...... "
"모든 것은 계ㅎ한 대로 진행한다. "
"천명(天命)! "
"본좌는 홀로 행동하리라...... "
홀로.....
흑의노인, 사혈마노가 흠칫 신형을 떨 때,
마유강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천검문(天劍門),
이 문파는 중원제일의 명도인 무창성(武昌省)의 교외에 위치했다.
무림에서 천검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왜냐면,
한마디로 별볼 일 없는 문파였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쟁쟁한 명성을 날렸던 적도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신비성이 없었다.
문인(門人) 오십여 명의 작은 문파,
천검문은 검(劍)을 사용하는 검파였다.
그들은 농사를 짓든가 장사를 하든가 아니면 표물( 物)을 호위하는 등의
무림과는 관련이 없는 일들을 주업으로 삼았다.
헌데,
× × ×
---천풍(天風)----
그를 제외하고는.....
그렇다!
그는 바로 천풍이었던 것이다.
천풍,
그는 왜 돌연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일 년이 지난 후에.....
이제 그의 나이 십 육 세가 되어 있었다.
꽃다운 십육 세,
문득,
노인은 정색을 하며 천풍을 바라 보았다.
"상공.... 그대의 말.... 방금 한 말은 제정신으로 한 말이었소.....? "
그의 표정에는 불신의 기색이 역력했다.
노인은 천검문의 문주(門主)인 천율일검(天律一劍) 사마충(司馬忠)이었다.
천율일검 사마충,
가슴에 태양을 담고도 남을 야망을 지녔으나,
하늘을 얻지 못해 주저 앉은 인물,
세인들을 그를 타락한 검파의 쓰레기 문주라고 손가락질 한다.
천풍은 그런 그를 찾아온 것이다.
천풍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대한 순간 사마충은 다시 한 번 머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으.... 저 미소! 도무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종잡을 수 없다...... )
그는 내심 이시린 침음을 흘렸다.
그때,
천풍은 여유있는 어조로 말했다.
"내 말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분명하오! "
사마충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어,
노갈을 터뜨렸다.
"씨도 안 먹히는 소리, 무림이 어수선하니 별 것들이 날뛰는구나....
본문이 아무리 쇠락 했기로.... 네놈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접수를
한다구......? "
접수?
천검문을 말인가?
허허.....
천풍!
네놈은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것이냐?
하여간,
천풍,
그가 거보(巨步)를 내딛었다.
거보를.........
제 12 장에 계속
제 12 장 天劍門을 얻은 風
× × ×
× × ×
봉황각,
이곳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은 후원의 세 개의 정자였다.
매향정(梅香亭),
봉황각이 자랑하는 세 개의 정자 중에 하나,
원래,
고관대작이나 명문의 인물들 외에는 출입을 불허하는 곳,
헌데,
뚱..... 따당......!
띵..... 따당......!
대낮임에도 그곳에선 황홀한 음률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호호..... 아이..... 풍야께선 너무 응큼하셔..... 흐응..... "
"아유..... 아유..... 풍야, 그만 좀 웃기세요..... 호호호..... "
"천첩의 배꼽이......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겠어요..... 호호..... "
또한,
기녀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성이 흐트러지게 울려 퍼졌다.
천풍,
그는 천하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그의 표정은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탁자,
족히 장정 다섯이서나 들을 수 있는 거대한 탁자에 황제조차 군침 흘릴 미주가효가
차려져 있었다.
헌데,
오오.....
맙소사!
천풍의 좌우,
요염절륜한 기녀 두 명이 거의 반나의 몸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터질 듯한 젖가슴은 천풍의 얼굴에 밀착됐고,
팽팽하고 풍만한 둔부는 그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천풍은 연신 그녀들의 둔부와 젖가슴을 주무르며 기고만장해 있었다.
아아.......!
천풍,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제 13 장에 계속
제 13 장 세 개의 수급, 시작되다
흑야(黑夜)----
매향정은 깊디 깊은 암흑에 잠겨 있었다.
천풍은 매향정의 실내에 있었다.
침상,
그는 그 위에서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천풍,
헌데,
그의 얼굴 모습은 이 순간 장엄하게까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얼굴은 은은한 서기레 휩싸여 있었으며,
전신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에 감싸여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각이 흘렀을까?
돌연,
번쩍!
천풍의 눈이 떠지며 찰나 무쇠를 녹일 듯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허나 그것도 순간일 뿐,
그의 눈빛은 원래의 고요로움 속에 잠겨들었다.
문득,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묵혼이 전수해준 일초 검식을 십이성까지
연성하는데 성공했다. "
아아!
묵혼이 전수한 일초검식을......
"허나 그것으로 묵혼을 능가했다고 볼 수 없다.... 그는 십성, 나는 십이성이라
해도.... 그가 익힌 무공은 그것 한 가지가 아닐 테니..... "
언제부턴가 천풍은 상대적으로 항상 묵혼을 생각해 왔었다.
자신의 무공은 최소한 그를 능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풍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후후.... 나는 천검문을 얻음으로 여러가지 이득을 보았다! "
아아!
그랬던가?
"후후.... 내가 천검문을 얻으려 했던 것은 하류문파가 혈월막을 붕괴시켰다는
쾌거를 원했던 것, 헌데.... 천검문에 천검상인의 실전된 천검검급(天劍劍 )과
일식(一式)의 신법이 소장되어 있을 줄은 몰랐었다! "
오오......
실전되었던 천검상인의 천검검급과 일식의 신법,
그것이 천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니......
헌데,
그렇다면 천검문은 왜 여태껏 삼류 문파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 했었다는 말인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후후..... 비급이 나도 골치 아픈 회회문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나로서는 다행한 일이었지..... "
아아!
회회문(回回文),
천하에서 가장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
당금 천하에서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천검검급이 그런 회회문으로 적혀 있었다니.....
천풍은 천검검급의 첫 장에 적혀 있는 천검상인의 글을 기억해 냈다.
천검상인,
그는 자신들의 후예가 강하기를 바랬다.
해서 이런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후후..... "
천풍은 허리를 쭈욱 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천검문에 머물며 천검검급과 일식 신법을 최소한 연성했다. "
오오....
과거 천검상인조차 칠성까지 밖에 연성하지 못한 것을 그가 십성까지 익히다니.....
그것도 불과 한 달만에.....
천풍,
과연 그의 능력의 한계는 어디에서 어디까지란 말인가?
천풍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문인들에게는 각자에게 맞도록 쉽게 풀이하여 전수했으니 오래지 않아 절정에
이르리라... "
이어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다.
성격마저도,
그때 문득,
"......... "
천풍은 안색을 굳혔다.
(후후...... 이제야 오는가? 혈월막....... )
그의 입가에 평소와는 달리 살얼음 같은 살기가 매달렸다.
그의 이목,
그것은 그가 묵혼이 전수한 검식과 천검검급을 연성하는 동안 부수적으로 발달되었다.
그는 검식을 단지 검식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로 활용한 것이다.
무엇이라고 집어 밝힐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의 이목은 두 가지 검법을 시전하는데 한 치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순간,
그는 미끄러지 듯이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의 일련의 신법은 마치 구름이 흐르듯이 유연했다.
천풍은 침상 위에 벌렁 누웠다.
이어 검을 허리에서 풀어 우수 바로 옆에 두었다.
찰나,
(왔다! )
그는 두 눈을 살기로 물들이며 숨을 고르게 내뱉았다.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의심을 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긴장이나 경계의 의미도 되었으므로........
헌데,
심장을 얼릴 듯한 그의 두 눈에서의 살기가 일시에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후후.... 살수들은 민감하다!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그는 내가 지극이
평범해야만 공격할 것이다! )
그의 중얼거림이 끝났을 때,
순간,
스..... 스.....
마치 달빛에 묻어 미풍이 실려오듯 기척없이 한 줄기 바람이 실내로 불어왔다.
단지 그것 뿐,
슈---- 웃!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단지 핏빛 광채만이 침상의 천풍을 쾌속절륜하게 베어갔다.
그 빠르기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천풍은 방어하지 않았다.
대신,
검자루에 손을 댔다.
그것으로 그갸 해야 할 일은 끝난 것이다.
파아---- 아앗!
그의 우수에서 눈이 멀 정도의 찬란한 청광이 천정으로 폭사되었다.
그것은 최소한 덮쳐오던 혈광보단 백 배나 빠른 것이었다.
찰나,
"크으으...... "
천정에서 폐부를 쥐어 뜯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다음 순간,
투.... 툭!
두 개의 크고 작은 물체가 천정에서 떨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머리통과 하나의 몸뚱이였다.
머리에는 몸이 없었고,
몸뚱이에는 머리가 붙어 있지 않은.....
두 개의 잘려진 물건에는 똑같이 핏빛 헝겊이 감아져 있었다.
그 두 개가 합쳐지면 사람들은 아마 그를 보고 혈의복면인이라 불렀을 것이고,
또한 혈월막의 살수라고 불렀을 것이다.
천풍은 혈월막의 살수 한 명을 이렇게 죽인 것이다.
천풍은 침상에서 내려오며 차갑게 웃었다.
"이것은..... "
그는 시체를 발로 툭 찼다.
"시작일 뿐이다...... "
시작,
이렇게 시작되었다.
천풍,
그에 의해서.......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난 성민들은 기절초풍했다.
그들은 전신을 푸들푸들 떨기까지 했다.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불쑥 튀어나온 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곳,
그곳은 무창성에서도 제일 높은 성루(城樓)였다.
성루,
오오.....
맙소사!
그곳에는 한 구의 수급이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며 뾰족한 첨탑 위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성민들은 단박에 그 수급이 혈월막 살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수급에는 핏빛 복면이 덮여 있었기에........
"우우...... 어찌 된 일인가...... "
"천풍이..... 풍야가 그를 죽였다는 말인가....... "
성민들은 두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
헌데,
수급의 아래쪽에는 한 장의 종이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백래백사(百來百死)----
백이 오면 백 모두 죽으리라!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성민들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고,
다음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천풍을 칭찬했다.
"하하..... 천풍, 천하에서 이런 일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할 사람은 천풍,
그 하나 뿐이지..... "
"허허..... 십 년 묵은 체중이 쑤욱 내려가는군...... "
허나 그들은 곧 쥐죽은 듯이 침묵했다.
왜냐면,
천풍을 칭찬하던 사람들의 몇몇이 처참하게 죽어갔기 때문에.....
그래도 통쾌한 것은 통쾌한 것이라면 성민들은 속닥거렸다.
무창성루(武昌城樓),
먼젓 번에 천풍에 의해 성루에 매달렸던 혈월막 살수의 수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하나의 수급이 새로 달렸다.
그 수급이 혈월막 살수의 수급이라는 사실은 강아지까지도 아는 터,
바야흐로,
천풍의 명성은 중천의 태양보다 더 찬란히 떠올랐고,
혈월막의 살명(殺名)은 여지없이 뒷간의 구겨진 종이뭉치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혈월막은 그래도 혈월막일 뿐이라고 성민들은 쉬쉬했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그리고.....
무창성루에 다시 세 번째 수급이 걸렸다.
성민들은 더 이상 통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렴풋하던 것,
남창의 명물 천풍의 희미하던 의도가 확연해진 것이다.
천풍과 혈월막의 정면대결,
반신반의하던 그것이 만천하에 사실로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무창 성루에 걸린 세 개의 수급,
하나는 바싹 말랐고,
또 하나는 대충 말랐으며,
다른 하나는 싱싱한......
시작됐다!
천풍과 혈월막의 정면대결이......
천하인들은 결과는 뻔하다고 했지만,
(후후.....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이지...... )
무창성을 떠나면 천풍은 득의하게 웃고 있었다.
× × ×
허나,
이후 혈월막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기에 그 말은 어느덧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혈월막,
그들은 천풍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혈월막을 실패로 몰아 넣었고,
또한,
그에게는 벽풍천중검이 있지 않은가?
그러던 중에 천검문의 천풍을 죽여달라는 청부를 받고 금액이 적음에도 군말없이
나섰던 것이다.
헌데,
사마충은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혈월막은 두 번째에도 실패했고 세 번째에도 실패했으니..... 우리가 그들에게서
받은 손해배상은 도합 황금 삼백만 냥 입니다..... "
오오......
맙소사!
천풍,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황금 삼백만 냥을 벌었다는 말인가?
"후후..... 이런 것을 두고 님도 보고 뽕도 딴다고 말하는 것이오...... "
"하하..... 그렇습니다.... 본 문의 제자들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
천풍은 정색을 하였다.
"기억하시오. 수석호법!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
순간,
사마충은 천풍의 전신에서 자신의 심맥이 모조리 끊어질 듯한 살기가 뿜어나옴을
느끼고 부지중 전신을 떨었다.
"문주! 명심하겠습니다! "
천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
이어 빠른 어조로 지시했다.
"본 문을 원래의 계ㅎ대로 그곳으로 옮기도록 하시오..... "
"알겠습니다....... "
"또한 내가 지시한 본 문 내의 일들은 한 치의 어김이 없도록..... "
"속하의 목숨을 다하여...... "
"좋소. 그리고 암암리에 무림의 정세를 파악하여 신속히 내게 알려 주시오......! "
사마충은 깊이 머리를 굽혔다.
그는 눈 앞의 열 여섯 살 약관 청년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그럼...... "
그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스----- 스---- 슷!
사마충의 신형이 마치 구름을 밟듯 유연하게 찰나지간에 십여 장 밖으로 미그러져갔다.
그와 같은 절륜한 신법은 얼마 전의 그는 펼칠 꿈도 꾸지 못했다.
헌데,
천풍,
그가 천검상인이 남긴 일식 신법을 사마충에게 맞게 변형시켜 그에게 전수한 것이다.
그는 그 신법의 이름을 무영무풍(無影無風)이라고 불렀다.
사마충이 사라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천풍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지...... "
순간,
슈욱!
그의 끝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이미 백여 장 밖을 행운유수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천검상인이 남긴 만리표영비(萬里飄影飛)였다.
× × ×
해도 들지 않는 숲 가운데의 암석군(岩石群),
그 가운데,
가장 흉험하고 난폭하게 생긴 암산(岩山),
높이는 무려 이백여 장,
그 가장 아래쪽엔 하나의 동굴이 있었다.
햇빛은 들지 않으며,
뾰족한 바위들에 가려 입구가 보이지 않는......
동굴 안,
돌연,
"흑흑...... 이놈들.... 뼈를 갈아마시리라......! 어머님과 아버님을 처참히
죽인....... 네놈들을...... 흑흑....... "
동굴 안쪽의 어두운 곳에서 웅크린 사람이 처절하게 흐느꼈다.
음성을 들어보니 여인이 분명했다.
"흑흑..... 본장의 삼백여 식솔들을 무참히.... 학살한 네놈들을.... 흑흑...... "
어떤 처절한 한(恨)이 있는 듯,
"내가 죽은 줄 알았지만..... 흑흑 나는 죽은 체 했었다......! 흑흑.....
원수를 갚기 위해서..... 네놈..... 마유강(魔幽强)이란 놈...... 뽀드득.....! "
음성을 들으니 아직 어린 듯,
동굴 전체는 서리서리 한에 뒤덮여 있었다.
"호호...... "
돌연 여인은 웃었다.
미친 것인가?
"훗훗......! 허나 두고봐라......! 내가 이 동굴에서 얻은 이 사사천경(邪邪天經)만
연성한다면..... 호홋.......! 그때 네놈을 처참히 찢어 죽이리라......! "
오오........!
그녀는 방금 사사천경이라고 했는가?
---사사천경(邪邪天經)------
무림사상 단 한 명만이 사종(邪宗)이라 지칭 받았었다.
--사사천황(邪邪天皇)---
바로 그였다.
그는 하늘도 치를 떨 정도의 가공할 사(邪)의 조종(祖宗)이엇다.
사사천경,
그것은......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전설상의 비급이었다.
천하만사만악인(天下萬邪萬惡人)들이 목숨을 초개로 알고 얻으려던 사중사록(邪中邪錄).
그것을 얻으면 만사지존(萬邪至尊)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헌데,
그것을 얻다니.......
문득,
여인은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아...... 그러나, 이것을 익히자면........ "
사사천경!
그것을 익히자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운명은......
한 여인을 사(邪)의 하늘로 만들려 했는데.......
제 14 장에 계속
제 14 장 순진하고 아름다운 色女
대별산중(大別山中),
천하제일험산(天下第一險山)이라 불려도 과연 손색이 없는 거산(巨山)이다.
"제기랄....... "
연신 투덜거리며 울울창창한 숲 가운데를 걷고 있는 끔찍하도록 준수한
약관청년이 있었다.
천풍,
바로 그였다.
그는 한 자루, 눈이 시리도록 푸른 검으로 앞을 막는 잔가지들을 치며 걸었다.
푸른 검,
오오......
그것은 바로 중원사대마보(中原四大魔寶) 중에 하나인 벽풍천중검이 아닌가?
벽풍천중검,
한 자 반 길이의 평범하게 생긴 검,
허나,
그 검에서 뿜어지는 검광(劍光)은 눈을 못뜨게 할 정도로 찬란했다.
또한,
그 검광을 대하면 자신도 두려운 마음일 일게끔 하였다.
허나,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
천풍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단지,
타탁........!
탁.........!
천하에 다시 없을 벽풍천중검이 이곳에선 나뭇가지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천풍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다름아닌 천풍이었으므로.......
그때였다.
카------ 앙!
돌연 벽풍천중검이 무엇엔가 호되게 부딪혔다.
"음........? 이 검은 강철을 무우 베듯 한다 던데........ "
천풍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면을 보았다.
전면에는 하나의 절벽이 태산처럼 가로 막혀 있었다.
너무도 울창한 숲 때문에 절벽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천풍은 다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무리 바위라도 그렇지..... 벽풍천중검을 퉁겨 나오게 하다니...... "
절벽을 자세히 살피던 천풍은 문득 눈을 빛냈다.
절벽의 중간,
그곳에는 하나의 주먹만한 흑빛의 바위가 약간 튀어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것은 바위같기도 했으며 쇠같기도 하였다.
그것에는 약간 긁힌 흔적이 나 있었다.
"흐음..... 감히 이것이 내 검에 부딪친 모양이군....... "
천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내딛었다.
순간,
"차------ 앗! "
그는 흑빛 물체를 향해 일검을 날렸다.
다음 순간,
카----- 칵!
기이한 음향과 함께 불똥이 퉁겨졌다.
천풍은 흑빛 물체를 주시했다.
순간,
그는 검미를 잔뜩 찌푸렸다.
흑빛 물체,
그것은 약간만 손상이 났을 뿐 끄덕도 없지 않은가?
"흐음...... 요것 봐라....... "
천풍은 은근히 오기가 치밀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쳐갔다.
"호..... 혹시 이것은 만 년 오금철(萬年烏金鐵)이 아닐까? "
아아.......
만년오금철,
천지간의 이물로써 우주(宇宙)의 이원(二元)중에 태극지기(太極之氣)를 받아
형성된 것이다.
만년오금철은 천지간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전해진다.
강(强),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그것이 지금 천풍의 면전에 나타난 것이다.
천풍은 어깨를 으쓱 거렸다.
"크크.... 이게 웬 떡..... 아니 웬 만년오금철이냐? "
그는 그것이 만년오금철일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왜냐하면,
벽풍천중검에 두 번이나 격중 당하고도 끄덕 없었으므로......
"후후 이것은 하늘이 나 천풍이가 착해서 내리신 복(福)이리라........! "
착해서.......
제기랄.......
그처럼 착한 사람만 세상에 산다면 천하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아뭏튼,
착한 천풍은 벽풍천중검을 높이 번쩍 쳐들었다.
"좋아........! 이 기회에 천검검급 중에 천검무형뢰강인(天劍無形雷 印)을
시험해 봐야 되겠군...... "
천검무형뢰강인,
그것은 천검상인이 남긴 단 일 초식의 절초 검법이었다.
천풍의 화후는 이미 십성 경지에 이른 터,
순간,
"천지간의 으뜸 강(强)은 뢰(雷)........! "
그의 입에서 산천초목이 기겁할 대갈이 터져 나왔다.
"천검무형뢰강인........! "
다음 순간,
벽풍천중검이 번갯불처럼 허공에 도합 팔백 팔십 변(八百八十變)을 쏟아냈다.
허나,
오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꽈르르르...... 르르르릉........!
아아........!
천공(天空)을 박살내고 대륙을 두 동강낼 듯 천번지복의 굉음만이 터졌다.
가공하기 짝이 없는 뢰성이었다.
돌연,
콰르르르르.........!
천풍의 주위 이십여 장 이내의 모든 것이 박살이 나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찰나,
카카카....... 카아앙!
쇠와 쇠가 드세게 격돌하는 날카로운 음향이 터졌다.
잠시 후,
모든 소요가 가라앉자 주위의 광경이 드러났다.
헌데,
오오...... 세상에,
숲,
아니,
이제 숲이라고 불리울 수 없었다.
단지 웬만한 연무장 넓이의 드넓은 평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검무형뢰강인,
이 일초 절학의 여력은 모든 것을 날려보낸 것이었다.
만년오금석,
"큭큭......! 제까짓게 별 수 있나? "
천풍은 킬킬거리며 절벽으로 다가갔다.
만년오금석은 이순간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제아무리 만년오금석이라곤 하지만 벽풍천중검의 신력(神力)과 천검무형뢰강인의
위력 앞엔 무너지고 만 것이다.
만년오금석은 거무튀튀했으며 그 무게가 주먹만한 것이 족히 황금 천 냥의 무게였다.
천풍은 득의하게 웃으며 만년오금석을 품에 넣었다.
"이렇게 무거워서 천하이물(天下異物)이라 부르는 게로군..........? "
이어,
벽풍천중검을 검집에 꽂으려다가 흠칫 놀랐다.
벽풍천중검,
검의 손잡이 ㄷ부분이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칫......! 천하마병도 별수 없군? 그따위 만년오금석에 갈라지다니...... "
그는 투덜거리다가 눈을 잔뜩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은 갈라진 검자루 끝부분에 못박혔다.
"이...... 이것은.......? "
그의 영감을 거세게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검자루 끝,
그것은 갈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원래 뚜껑으로써 열려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헌데,
그것이 만년오금석과의 거센 충돌로 열려진 것이었다.
빠끔이 열려진 곳으로 하나의 붉은 수실이 보였다.
천풍은 흥분과 기대에 부풀어 수실을 잡아 당겼다.
스르르.......
수실에 끌려나온 것,
그것은 누렇게 빛이 바랜 한 통의 양피지였다.
그것은 둥글게 말려 있었다.
천풍은 빠르게 그것을 펼쳤다.
순간,
"아아........! "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토해냈다.
양피지,
그곳에는 어떤 지명을 가리키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두말하면 잔소리,
"이..... 것이다.......! "
천풍은 그것이 벽풍천중검을 남긴 부상제일인(扶桑第一人) 태무랑(太武狼)의
절학이 감춰져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오오.......!
기연(奇緣),
천 년을 이어 내려오며 벽풍천중검의 주인이 바뀌기를 수백 번,
그들 중에 단 한 명도 벽풍천중검의 비밀을 풀지 못했건만.......
또한 천풍도 무수히 벽풍천중검을 관찰하고 살폈건만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아아......!
하늘은 이처럼 오묘한 안배를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에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검자루 속에 비밀이 소장되어 있었다니.......
천풍은 격동으로 몸을 떨었다.
이어,
뚫어지게 양피지의 그림을 주시했다.
산,
그리고 강과 계곡등이 세밀히 그려져 있었다.
천풍은 검미를 잔뜩 찌푸렸다.
(많이 눈에 익은 지형인데....... )
그렇다!
양피지의 지형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헌데,
돌연,
"으핫핫핫........! 바로 그렇다! "
천풍은 하늘을 우러르며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바로 내가 열흘간이나 외조부(外祖父)를 찾고자 헤매던
대별산(大別山)이 아닌가? "
오오......!
그렇다면 부상제일인 태무랑의 절학이 이곳 대별산에 비장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후후.... 어쩐지 낯설지 않더니만....... "
천풍은 흡족하게 웃으며 양피지를 손안에 넣고 재로 만들었다.
스스스.......
양피지의 내용은 이미 천풍의 머리 속으로 옮겨진 후였다.
현재 천풍의 내공수위는 일 갑자에 달했다.
그것은 천풍이 혈월막 살수에게 중상을 입었을 때,
묵혼이 그를 치유하며 영약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천풍은 그 사실을 그가 전수한 검식을 연성하며 깨달았었다.
허나,
천풍이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벽풍천중검의 또 하나의 비밀이었다.
천풍은 벽풍천중검을 허리게 차며 걸음을 옮겼다.
"좋아......! 후후.... 우선 외할아버지를 찾은 다음에 태무랑을 만나봐야겠군..... "
죽은 태무랑을 만나다니.......
과연 그다운 표현방법이었다.
헌데,
그가 채 열 걸음도 걷기 전에,
돌연,
"깔깔깔....... 까르르....... "
허공 중에서 괴상망측하며 요사스러운 웃음성이 터졌다.
".........? "
천풍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순간,
휘------ 익!
그의 전면 오 장에 한 명의 소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소녀,
일신에는 홍의를 입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갈가리 찢어졌으며,
때가 잔뜩 낀 지저분한 옷이었다.
헌데,
소녀의 용모,
아아.......!
그것은 도도하기 짝이 없는 천풍마저 입을 쩍 벌릴 정도의 천하절색이 아닌가?
비록 머리는 산발한 채 마구 헝클어져 있었지만,
본래의 지닌 바 경천동지할 미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갸름하며 약간은 수척한 얼굴 윤곽,
희다 못해 눈 가루라도 뿌릴 듯한 빙기옥골지신(氷肌玉骨之身),
약간 위쪽으로 상큼 치켜 올라간 초생달 아미(蛾眉),
그 아래 보석처럼 빛나는 한 쌍의 추수 같은 봉목,
끝이 뾰족한 것이 오만해 보이기 까지한 오똑한 콧날,
그리고.....
짙디 짙은 꽃향기를 금새라도 뚝뚝 떨굴 듯한 도톰하며 작은 입술,
그 모든 아름다움의 극치미는 격렬하고 도발적인 유혹을 담고 있었다.
감춰져 있는 듯하며 노출된 내외십전미(內外十全美)를 지닌 소녀,
뿐인가?
몸매,
오오.......!
천풍은 자신이 여태껏 보아온 모든 여인의 늘씬했다고 생각하던 몸매가
마치 돼지의 그것을 본 듯한 착각을 느꼈으니.......
사슴을 닮아 섬세하며 수려한 목덜미의 호선,
찢겨진 옷 사이론 눈부신 어깨와 봉곳한 젖무덤이 은은한 유혹을 뿌렸고,
역시 찢겨진 옷 사이로 그녀의 늘씬섬약한 세류요가 엿보였다.
여인의 가장 소중한 그곳이 보일 듯 말 듯.......
천풍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 아래쪽을 보았다.
오오.......!
알맞게 살이 올랐으며 미끈 절륜하게 쭉 곧게 뻗은 다리,
보는 이의 심장이 절로 터져 죽게 만들 듯한 엄청난 유혹이었다.
잔잔한 수면을 차고 뛰어오른 은어의 눈부심이여.......!
어찌,
이 소녀의 곧은 다리 앞에서 스스로를 추하다 여기지 않겠는가?
소녀,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는 사뭇 명랑한 향기였다.
아무리 악하게 보아주려 해도 악하게 볼 수가 없는 그런 소녀였다.
또한,
그녀는 단지 그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모든 것을 활기에 넘치게 하였다.
활발히 살아 숨쉬는,
펄떡펄떡 살아 있는 관능미였다.
헌데 돌연,
"훗훗훗........! "
천풍은 소녀의 숨 넘어갈 듯한 요염한 웃음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일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의 청순한 용모와 요염한 웃음...... 거 이상하군...... )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헌데,
오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가려졌던 신비스런 곳이 슬쩍 노출되었다.
(억.......! )
천풍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양 허벅지가 발달된 곳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순간,
흠칫,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양다리를 오무리며 손으로 그곳을 가렸다.
또한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천풍은 다시 고심했다.
(요염하게 웃는 소녀가 수줍음을 탄다........? )
순간,
천풍의 표정을 살피던 소녀는 손을 그곳에서 떼고 다리를 약간 벌렸다.
그러자 붉은 천조각 사이로 겨우 가린 그곳이 어뜻 노출되었다.
소녀는 요염어색하게 웃었다.
"호호호...... 너는 본 대별마희(大別魔姬)의 백일춘음산(百日春淫散)에 이미
중독되었다......! "
천풍은 어리둥절했다.
(대별마희라.....? 무림에 그런 별호도 있었던가......? 게다가 뭐? 백일춘음산
이라구......? )
소녀,
자칭 대별마희는 천풍의 그런 표정을 발견하고 움찔 교구를 떨었다.
(방금 생각해낸 대별마희라는 명호가 이상했나......? 왜 저런 표정을 짓지.......? )
오오.......!
대별마희여.......!
천하에 하오문(下五門)의 잡배들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는 천풍에게 방금 생각해낸
명호를 말하다니.......
(아아.......! 허나 이럴 수 밖에 없어....... )
소녀는 요염한 표정 뒤에서 초조한 진짜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천풍은 코를 벌름 거렸다.
순간,
마치 강아지 꼬리털을 태운 듯한 역겨운 비린내가 전해졌다.
이어,
머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후후..... 정말 백일춘음산이로군....... 헌데 정말 이상하군? 저런 소녀가
색녀 행세를 하다니..... 그게 정말이라면 난 조물주에게 대가리가
터지도록 따져 봐야겠군...... )
그때,
대별마희는 늘씬한 허리에 두 손을 앙증맞게 얹으며 호통쳤다.
"호호..... 네놈은 운이 좋은 놈이다......! 본녀의 치마밑에서..... 극치의
쾌락을 맛보다가 죽게 되었으니....... "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찰나지간에 엷은 홍조가 스치듯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후후.....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나는 그렇게 한가한 몸은
아니지만 한 번 같이 어울려 봐.......? )
소녀는 천풍이 오랫동안 쓰러지지 않자 고운 아미를 살포지 찌푸렸다.
아아......!
그 모습이란..... 그 절묘한 아름다움이란........
"애송아! 네놈은 왜 쓰러지지 않는 것이냐? "
대별마희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짐짓 음탕하게 물었다.
천풍,
그는 의술과 독술에 대가인 모친에게서 자라왔다.
현재 그의 몸은 극독은 모르겠지만 웬만한 독은 침범하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그것은 그의 모친인 냉운벽의 걸작이었다.
백일춘음산,
그것은 강호의 삼류 색한들이 주로 사용하는 치졸하기 비길 데 없는 춘약이었다.
그것에 중독되면 극렬한 욕정을 느끼며 그 욕정은 무려 백 일이나 간다.
허나 무림인들은 백일춘음산을 사용하는 인물들은 아예 인간취급도 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순간,
천풍은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떠올리며 천천히 쓰러졌다.
(후후..... 그냥 쓰러져 주는 거야 뭐 어렵나? 불쌍할지도 모르는 한 소녀를
도와주는 일인데..... )
그는 내심 야릇한 기대를 느끼며 백일춘음산에 중독되어 쓰러졌다.
문득,
"휴우...... 정말 다행이다......! "
대별마희는 손으로 가슴을 지긋이 누르며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이어 주춤주춤 천풍에게 다가왔다.
(히히.... 오는구나.......! )
천풍은 득의하게 키득 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어떤 나쁘지 않은 일이 꼭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별마희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천풍을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순간,
천풍은 전신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하마터면 탄성을 터뜨릴 뻔 하였다.
풍만하며, 늘씬하며, 보드라우며 푹신한 감촉이 전신으로 스물스물 전해왔다.
(제기랄.....! 만약 어떤 놈이 내게 알몸의 여인으로 고문한다면 나는 묻지
않은 것 까지 죄다 말하고 말걸......? )
그가 내심 투덜거릴 때,
"호오...... "
대별마희는 가슴이 저며지는 한숨을 흘렸다.
"반드시..... 반드시 이래야만...... 하는가.......? "
이어,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 15 장에 계속
동굴,
화르륵........
타닥.... 탁!
중앙에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동굴은 그리 넓지 않았다.
입구는 나뭇가지와 풀로써 엄밀히 막혀 있었고,
입구에서 동굴 끝까지 길이는 불과 십여 장 남짓,
헌데,
동굴의 가장 안쪽,
그곳에는 천풍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아니,
단지 혼절한 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옆에 소녀, 대별마희가 초조한 기색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타오르는 모닥불에 비쳐 몹시도 아름다왔다.
헌데,
웬일인지 그녀는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오랜 시각이 지났다.
문득,
천풍은 살며시 눈을 떴다.
지겨움을 참지 못한 것이다.
헌데,
오오......!
헌데 말이다.
천풍이 눈을 뜨자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
맙소사!
그것은 잔뜩 쪼그리고 앉은 대별마희의 은밀한 곳이 아닌가?
포동포동한 허벅지가 약간 벌어진 채 고요롭게 감싸고 있는 숨막히는 절경,
비록 붉은 천 조각에 가려져 있다고는 하나,
천조각의 크기라야 불과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것,
천풍은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순간,
"으윽....... "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묘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크....... )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흠칫 숨을 죽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대별마희의 반응을 기다렸다.
헌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말이 아닌가?
"아.... 벌써 춘약이 발작을 일으키는구나....... "
그녀의 안색은 더욱 핼쓱하게 변했다.
천풍은 내심 쾌재를 질렀다.
(크큭...... 하늘이 나 천풍을 돕느라 실수도 덮어 주는군....... )
이어,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음...... 으으...... "
소녀의 안색은 더욱 더 핼쓱해졌다.
"아아.... 어떻게 하나...... "
천풍은 내심 실소했다.
(자칭 마희라는 계집애가 어떻게 하냐구......? ㅋㅋ..... 알고보니 이 계통에
처음 진출한 신출나기 마녀로군...... )
신출나기 마녀.....
어쨌든,
대별마희는 자신의 명호 중에 마희라는 이름은 어디다 팽개쳤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아.... 큰일이야..... 내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엉겹결에 백일춘음산을
썼으니..... "
그녀는 섬세한 교구를 파들파들 떨었다.
그러면서 천풍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천풍은 하나의 난관에 봉착했다.
(제길..... 백일춘음산에 중독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니..... )
기실 그는 그 파렴치한 춘약 따위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계속 신음만 지르고 있어.....? )
헌데 그때,
대별마희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아아..... 어떡하나? 이제 곧 일아나서 내게 덤벼들텐데...... "
그녀는 위급할 때마다 천풍을 도와주었다.
(일어나서.... 덤벼들어...... )
허나,
천풍은 조금 전보다 더 큰 난관에 부딪쳤다.
(덤비다니.... 아..... 내가 천풍이란 말인가? 제기랄......)
입맛이 썼다.
쓰다 못해 시큼텁텁했다.
대별마희는 천풍의 그런 고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아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
그녀의 시선은 천풍의 얼굴에 고정 되었다.
"사사천경(邪邪天經) 중에 혈혈천녀빙마공(血血天女氷魔功)을 익히려면......
나는..... 이 사람과 교합을 해야만 한다...... "
오오......
사사천경,
혈혈천녀빙마공,
천풍은 내심 경악성을 토했다.
(사사천경....... )
그는 재빨리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지 비사(秘事)를 떠올렸다.
광오로 가득찬 말,
천풍은 또 한 가지를 기억해 냈다.
제 16 장 女人을 안은 다음엔
"천풍....... "
대별마희의 중얼거림은 경악을 넘어서서 공허허기까지 했다.
천풍은 씨익 웃엇다.
"그래..... 혹시 나를 알아? "
허나,
완전히 넋이 빠진 대별마희가 대답을 하겠는가?
"아..... 아니...... 아아...... "
그녀는 절망으로 할딱거렸다.
그녀에게 천풍이 누구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단지.
"아아...... "
절망,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깨어져 버렸다는 절망감 뿐이었다.
적을 위해서 자신의 순결마저 버려야 했는데,
아아......
헌데,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대별마희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천풍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후후..... 대별마희님, 어째서 유쾌한 일을 하다 멈추는 것인가? "
순간,
대별마희는 발작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비... 켜요......! "
"비키라구......? 난 아주 편한데 왜 비켜야 하는 거지......? "
대별마희는 눈이 파랗게 변했다.
분노,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전신 심맥이 일시에 폭발할 듯한 엄청난 분노를 그녀는
그제서야 느꼈다.
바로 자신을 깔고 누워 히죽거리는 한 사내에게 말이다.
능글맞고, 파렴치하고, 비열하고, 간교해 보이는 한 사내,
그의 이름이 천풍이란 것은 바로 얼마 전에 안 사실이었다.
대별마희는 교갈을 터뜨렸다.
"어서..... 비켜요! 비키지 않으면...... "
천풍은 태연했다.
"비키지 않으면.......? "
"비키지 않으면...... "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비키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이 상황에서 말이다!
아아......!
답답함이여!
대별마희는 천하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답답함이란 사실을 그제서야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때,
천풍은 옆으로 몸을 굴려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 주웠다.
대별마희,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천풍은 자신의 몸 위에서 영원히 내려오지 않을 것 같더니,
그 스스로 내려온 것이 아닌가?
아아......!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남자란 말인가?
허나,
그녀가 천풍이란 사람을 약간만 알았더라면 그처럼 고민 하지 않아도 좋았으리라.....!
천풍,
그는 강요보다는 부탁을 좋아한다.
또한 그는 그 스스로 하고 싶어야 하는 성미지 남이 하래서 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런 괴퍅한 그의 성미를 순진한 마녀 대별마희가 알리가 있었겠는가?
대별마희는 잠시 그대로 누운 채 생각을 정리했다.
(대체.... 어찌된 것인가? 내 목적은 어찌되었으며.... 혈혈천녀빙마공은....... )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찰나,
그녀는 누운 자세 그대로 천풍을 향해 덮쳐가며 한꺼번에 도합 서른 여섯 번의
금나수(擒拿手)를 펼쳐냈다.
그 수법은 천풍조차도 감탄할 정도의 쾌속절륜한 수법이었다.
스물 여섯 개의 장영이 천풍의 얼굴을 뒤덮는 순간,
"아아....... "
대별마희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분명히 손에 잡히리라 확신했던 천풍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순간,
"ㅋㅋ.......!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
오오..... 맙소사!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천풍의 웃음소리는 그녀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아버님의 독문 금나수를..... 피할 수 있다는 말인가.....? )
그때였다.
그녀는 자신이 여태껏 놀란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백 배나 더 놀랐으니.....
천풍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온 것이었다.
"하하.... 혜련(慧戀), 어찌 하늘 같은 지아비를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순간,
대별마희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자신이 완전히 알몸이란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천풍은 느릿하게 일어나 앉으며 히죽 웃었다.
"혜련....! 내말이 틀렸느냐? 어찌 됐던 너와 나는 서로의 몸을 확인했으니....
부부가 아니겠느냐......? 헌데 어찌..... "
대별마희는 전신을 가늘게 떨며 입술을 열었다.
"어..... 떻게 내 이름을......? "
"하하.... 그것이 뭐가 이상하다는 말인가? 지아비가 아내의 이름도 모른데서야..... "
오오..... 천풍!
너는 정말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인정한다는 말인가?
천풍,
그는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천성적으로 장난이 심한 그는 염라대왕에게도 장난을 칠 놈이었다.
대별마희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물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
"나? 나 말인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 이름은 천풍이고 너의 낭군이라고.... "
대별마희는 정색을 하고 그를 쏘아 보았다.
"말해요! 당신이 어떻게 나를 알고 있죠? 혹시 당신은... 마유강(魔幽强)의
수하가 아닌가요....? "
천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유강......? 그가 누구지? "
"흥! 시치미를 뗄 생각이군요.......? "
"시치미라고........? "
"흥! 그렇지 않으면........? "
"하하...... 나 천풍이 시치미를 땐다는 말인가? "
문득,
"천풍.......? "
대별마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천풍!
천하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실 그녀는 너무도 경황 중이라 그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신이.... 천풍이란 말인가요......? 남창성의 명물..... 천풍. "
천풍은 빙긋 웃었다.
"천풍이란 이름은 모친께서 지어주신 것이니 틀림없고..... 남창의 명물이란
사람들이 단지 그렇게 부르더군...... "
대별마희는 그제서야 천풍을 자세히 보았다.
순간,
"아아....... "
그녀는 부지중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천풍의 신적인 용모에 감탄을 금치 못한 것이다.
그녀는 천풍처럼 멋진 남자를 여태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녀도 여자임에 분명한 터,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헌데 그때,
천풍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수줍음을 더욱 가중시켰다.
"하하.... 혜련, 너는 알몸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토록 내 앞에서
알몸으로 서 있고 싶었느냐......? "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쭈그리고 앉으며 가슴과 소중한 곳을 작은 손으로 가렸다.
천풍은 여전히 히죽거렸다.
"하하..... 가려도 소용없다. 이미 볼 것은 모두 봤으니까...... "
"어.... 쩜...... 으으..... "
그녀는 수치와 분노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문득,
천풍은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혜련..... 이리 와라......! "
순간,
대별마희, 즉 혜련은 교구를 부르르 떨었다.
눈 앞의 남자,
분명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치고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남자이거늘.....
그의 부름에 그녀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기이한 마력을 느꼈으니....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마치 그가 오랜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혜련은 천풍에게 다가갔다.
엄밀히 논한다면.....
그녀는 이 순간 한 사내에게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혜련은 천풍의 옆에 다소곳이 몸을 숙였다.
몹시 부끄럽고 어색한 태도였다.
허나,
"자...... "
천풍은 그녀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그 자연스러움이 혜련의 어색함을 충분히 사라지게 해주었다.
천풍에겐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어떤 온유로움이 있었다.
혜련은 눈물이 왈칵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오랫동안 쌓였던 설움이 천풍의 따스한 말과 행동에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혜련.... 울어라.....!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우는 것이 가장 좋다.....! "
천풍은 그녀가 무엇 때문에 상심하는지는 몰랐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다.
혜련은 천풍의 가슴이 홍건히 젖도록 눈물을 철철 흘렸다.
천풍은 그녀의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려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혜련.....!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
".......! "
혜련은 눈물을 고인 눈을 들어 천풍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슬 머금은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부모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
천풍의 물음에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이라뇨.....? 저희 부모님을 아시나요.....? 아.....! 그리고 보니
당신은 얼마 전에 제 이름을 불렀었는데....... "
그것은 그녀로선 몹시 궁금하던 것이었다.
천풍은 히죽 웃었다.
"후후..... 혜련, 네가 누군지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
".........? "
"후후..... 너는 얼마 전에 내게 네 부친의 독문 금나수법(擒拿手法)인
범천삼십육영원익수(梵天三十六影元翼手)를 시전하지 않았었느냐? 천하에서
그 독문 금나수가 성심장(聖心莊)의 가전절기라는 것을 모르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
".........! "
"하하......! 범천삼십육영원익수는 성심장주(聖心莊主) 성심대협(聖心大俠)
반효숭(潘孝嵩)의 성명절기(性命絶技)가 아니더냐? 하하..... 네가 그
수법을 알고 있다면 네가 바로 반대협의 금지옥엽인 만화옥성녀(萬花玉聖女)
반혜련(潘慧戀)이 아니겠느냐? 하하하...... "
혜련,
반혜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쩜..... 금나수법 하나로 모든 것을 확연히 알아 버리다니......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창성의 명물 풍야(風爺)의 소문을 믿지 않았더니.... 이제보니 부족했었군요.....? "
"하하...... 혜련, 내 얼굴에 금칠을 할 셈이냐........? "
"호호..... 남창의 풍야가 겸손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
"하하.... 그렇던가? "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잊고 유쾌하게 웃었다.
천풍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헌데...... 혜련,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강호사옥녀(江湖四玉女) 중에 하나인
네가 어설픈 대별마희라니...... "
순간,
반혜련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의 눈에 금새 눈물이 솟았다.
헌데,
강호사옥녀!
오오.....
천하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멍청이가 있을소냐?
그 명호는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이름이었다.
또한,
천하 모든 여인의 앞에 서는 이름이었다.
천하인들은 무림이 생긴 이래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들이 한꺼번에 네 명이나
나타났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강호사옥녀,
그것은 네 명의 절세적인 용모를 지닌 소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헌데,
그녀들은 지닌바 미모만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에게는 천하인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었다.
그 중 만화옥성녀 반혜련,
그녀는 기쁨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존재해도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을 끝없이 기쁨으로
물들이며 존재한다.
그녀가 웃는 것도 아니거늘,
천하인들은 단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즐거워한다.
천하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만화옥성녀 반혜련,
그러한 그녀가 지금 발가벗은 채 천풍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다.
그녀의 부친인 성심대협 반효숭,
그는 천하에 대협이라 불리울 수 있는 네 명 중에 한 명이다.
중원사협(中原四俠),
그들은 십오대문파(十五大門派)의 장문인과 버금가는 명성을 떨친 성협들이었다.
천하인들이 그들의 이름만 듣고도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들의 죽음을 초월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숭고함 때문이었다.
해서,
천하인들은 중원사협이 기거하는 성협사장(聖俠四莊)을 성역시 하는 것이었다.
반혜련은 천풍 때문에 잊었던 일을 떠올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위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넘치게 만드는 그녀가 울자 주위의 모든 것들도
따라서 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반혜련은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흐흑..... 아버님과..... 어머님께선 돌아가셨어요...... 흑흑....... "
천풍은 짐작은 했던 터였지만 적지 않게 놀랐다.
"아.....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 말이냐....... "
그는 시종 반말이었다.
하나 반혜련은 개의치 않았다.
"흑흑...... 벌써 석 달 전이었어요...... "
석 달 전,
형산(衡山)의 성심장에 일단의 무리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단지 들이닥쳤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성심장의 삼백여 제자들은 한 명 남김없이 시체로 변한 후였다.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게다가,
성심대협,
그조차 변변히 반항조차 못하고 어이없이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성심장에 들이닥친 인물은 불과 다섯 명,
그들의 목적은 오직 죽이는 것 뿐인 것 같았다.
반혜련은 한 시녀의 거룩한 희생 덕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석 달,
그녀는 눈물도 메말라 버린 지경에 처해 미친 듯이 산을 헤맸다.
그녀의 머리 속엔 처참하게 죽은 부모와 식솔들의 모습 뿐이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부모의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공존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눈만 뜨면 원수를 갚기 위해 혈안이 되어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하늘이 그녀를 버리지 않았음인지 그녀는 천고의 기연을 얻게 되었다.
사사천경(邪邪天經),
바로 그것을 얻은 것이었다.
허나,
아아........
그녀는 다시 한 번 좌절의 쓴맛을 봐야만 했으니.....
사사천경,
그것은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곤 모조리 남자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던 것이다.
해서 그녀는 그 단 한가지 무공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천성적으로 청명이 절정에 달한 그녀는 곧 혈혈천녀빙마공의 가공할 위력을
알게 되었다.
허나,
난관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으니......
혈혈천녀빙마공을 연성하자면 반드시 극히 뛰어난 골격을 지닌 남자의 순양지기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남자의 순양지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순양지기를 얻는다는 것은 곧 외간 남자와 몸을 섞는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순양지기를 취하기로.....
그만큼 그녀의 원한은 골수에 사무치는 것이었으니.....
해서 그녀는 숲에 숨어 적당한 남자를 물색하기에 이르렀고,
태고 이래로 사람의 발길 한 번 닿아본 적이 없는 그곳에서 남자를 얻으려는
그녀의 바램은 어찌된 일인지 들어 맞았으니....
헌데,
행인지 불행인지......
천풍,
바로 천둥벌거숭이 천풍을 만난 것이었으니.......
< 第 2 卷 끝 >
제 17 장에 계속
제 3 권
저 자 : 冷河祥
출판사 : 민 우 사
연 도 : 1984. 09. 18
타이핑 : 나우 ID(추녀) 김진호
× × ×
"됐어...... "
천풍은 손을 거두었다.
그의 면전에는 반혜련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헌데,
그녀의 전신에는 무려 삼백 육십 여섯 개의 크고 작은 금침(金針)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전신 삼백 육십 여섯 군데의 혈도에 말이다.
문득,
천풍은 양손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순간,
휘리리리릭......!
반혜련의 전신에 박혀 있던 무수한 금침들이 순식간에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왔다.
천풍은 하나의 금갑에 금침을 갈무리하며 중얼거렸다.
"어머님께 전수받은 현체이기음양비합대법(玄體以氣陰陽秘合大法)을 처음
시전하는 것이라 함들었더니 다행이 성공이군...... "
오오......!
현체이기음양비합대법!
그것은 천지(天地), 바로 그 자체라는 천기노인(天機老人)의 독문의술대법
(獨門醫術大法)이 아닌가?
어떤 독특한 무공을 연성하기 위해 그것에 맞도록 신체의 구조를 바꾼다는,
이론상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경천동지할 비술이 아닌가?
헌데,
그것을 어떻게 천풍이.......
천풍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후후..... 이제 혜련은 혈혈천녀빙마공을 익혀도 된다.......! "
아아......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그가 펼친 현체이기음양비합대법이......
순간,
천풍은 소매를 흔들어 혼절해 있는 반혜련의 혼혈을 풀었다.
"으음....... "
반혜련은 전신을 가볍게 떨며 깨어났다.
그녀가 눈을 뜨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아아.......! "
그녀는 눈으로 천풍을 찾으며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웃고 있는 천풍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풍가가....... "
천풍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혜련, 어떻느냐? "
반혜련은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성공했군요..... 소녀는 이제 혈혈천녀빙마공을 연성할 수 있겠군요...... "
"다행히 성공했다......! 이제 너는 내게 손해 봤다고 더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
반혜련은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반혜련은 눈물이 가득 고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예요.....! 풍가가..... 당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도..... 소녀는.....
풍가가를 원망하지 않았을 거예요...... "
"호오..... 그건 무엇 때문이지.......? "
"그..... 그건..... "
"하하..... 설마 나 천풍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
"....... "
"하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난 큰일났는걸......? "
반혜련의 만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건...... 왜요......? "
"하하... 대별마희라는 희대의 마녀가 날 사랑한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느냐......? 하하하..... "
순간,
반혜련은 그를 하얗게 흘겼다.
"모...... 몰라요.....! "
이어 그의 품으로 놀란 참새처럼 뛰어들었다.
천풍은 그녈르 부드럽게 안았다.
그녀는 행복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풍가가......! 가가의 하늘 같은 은혜를.... 소녀는 어떻게 갚지요....? "
천풍은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애무하며 대답했다.
"후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
"그.... 그게 뭔가요......! "
천풍은 음탕하게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후후..... 얼마 전처럼 나는 혼절한 척 하고 있을테니 다시 한 번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지..... 어때 어려운 것은 아니지.....? "
"어마? 어마.....? 능글맞아라......! 이런 벌건 대낮에...... "
그녀는 예쁘게 외치면서도 그의 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천풍은 혼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백일춘음산이 때를 가리고 발작하느냐? 아직 백 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나는 아직 춘약에 중독된 상태가 아니더냐? 하하..... "
반혜련은 부끄러움에 뭐라고 반박하려 했으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라!
어찌 남자의 두툼한 입술이 덮고 있는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녀의 전신은 점차 얼마 전에 비로소 경험한 희열이란 놈이 지배하고 있었으니......
과연,
백일춘음산의 위력은 대단했으며,
때를 가리지 않고 발작한다는 무림의 통념은 맞는 말이었다.
제 18 장에 계속
제 18 장 一代劍皇의 絶學을 얻다
× × ×
아아.......!
간다 간다!
다시는 못뵐 것 같은 님이 저기 간다.
대지를 뒤덮은 햇살보다 내 사랑이 더 큼을 모른 채.......
허망한 내 눈빛 속에 님의 모습 백이요 백을 담은 채......
아아......
간다 간다!
가시는 걸음마다 서러움을 뿌리면서,
이별이라 말하고 싶지 않은 이별을 남긴 채......
아아.......!
간다 간다!
나의 심혼을 울리신,
사랑하는 님이 저어기 간다.
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아아.......!
그대에도 이몸은 살아 있으려는가........?
× × ×
× × ×
십 육 일째,
천풍은 사방이 온통 깎아지른 절벽으로 막힌 곳에 이르렀다.
그곳은 그가 벽풍천중검에서 얻은 양피지의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곳이었다.
십 칠 일째,
대별산의 가장 깊은 곳에도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천풍은 그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로 작정했다.
십 팔 일째,
강의 발원지(發源地)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허나 천풍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십 일째,
마침내 천풍은 강의 발원지를 발견했다.
그곳은 하나의 작지 않은 호수였고,
호수 속에는 아홉 개의 달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 × ×
화려한 내실,
모든 것이 호화의 극을 넘어선 상태였다.
황비조차 초라함을 느낄 정도의 극히 호화찬란한 실내,
창가,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한 명의 여인이 시름없이 서 있었다.
여인의 나이는 대략 삼십 오륙 세 가량,
헌데,
아아.... 그녀의 용모!
해와 달을 무색케 하는 경국경성지색이 아닌가?
천하에 그 짝을 찾기 힘들 정도의 절륜한 용모의 여인이었다.
마치 월궁의 항아(姮娥)가 잠시 지상에 하강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신녀의 미태를 지닌 고아한 풍모의 여인이었다.
헌데,
웬일인지 여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또한,
두 눈은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마치 천하의 근심을 혼자 간직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녀의 서늘한 두 눈에 가득히 고여 있는 것,
아아...... 그것은 바로 눈물이 아닌가?
대체 무엇이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드는 것인가?
여인의 눈가에 걱정으로 인한 듯한 잔주름이 가늘게 잡혀 있었다.
문득,
그녀는 시리디 시린 한숨을 흘렸다.
"아아.... 중랑(仲郞)....! 천첩은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하나.... 흑흑....
허나... 당신은 막(幕)으로 돌아오시면 아니되옵니다..... "
막(幕).......?
여인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호오.... 천첩은 당신이 천첩을 찾아가기 위해 막주(幕主)의 조건을 승락했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
막주(幕主).......?
마침내 여인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창백한 뺨으로 흘리고야 말았다.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막주는 이미 나의 몸을 더럽혔다는 사실을 당신도 아시면서.... 그처럼 무모한
짓을.... 흑흑흑..... 그것이 벌써 십 오 년 전의 일이거늘..... 당신은
아직도 천첩같이 추한 여인을 사랑하시다니.... 흑흑..... "
그녀의 말은 흐느낌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흑흑...... 중랑.....! 당신이 벌써 십오대문파의 수석장로(首席長老)들을
베고 막으로 돌아 오신다는 사실을 막주는 알고 있어요.... "
그녀는 서럽게, 몹시도 서럽게 흐느꼈다.
"흑흑.... 흑흑흑.... 막주가 당신의 요구를 들어 주리라고 생각하셨나뇨.....?
당신은 돌아오면 죽어요......! 당신을 죽이기 위해 막주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어요..... 흑흑.... 돌아 오시면 아니되니다.... 흑흑...... "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 범벅이었다.
"당신은... 흑흑.... 천첩 하연(河娟)의 생명과도 같은신 분.... 당신이 변을
당하신다면..... 흑흑.... 천첩이 무슨 바람으로 살아 있으리요.... 흑흑..... "
아아.....!
하연,
그녀는 스스로를 하연이라 했는가?
묵혼(墨魂)의 여인이라던......
하연, 그녀였다는 말인가?
하연은 창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흑흑..... 돌아 오시지 마세요...... 돌아오시면 아니 되옵니다.... 흑흑..... "
묵혼,
아아.....!
아느냐?
이 여인의 애절한 갈망을......?
바로 그때,
방문이 왈칵 열렸다.
이어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달려 들어왔다.
하연은 창에서 얼굴을 들며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보지 않고서도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팔랑팔랑 뛰며 달려와 하연의 목에 매달렸다.
"호호..... 어머니, 이것 보세요.....! 아버님께서 소녀에게 이것을 주셨어요....! "
소녀는 명랑하게 웃으며 품에 있는 것을 하연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한 마리의 노란 앵무새였다.
소녀는 티 한 점 없이 순진무구했다.
눈이 유난히 검은 소녀,
나이는 대략 십오 세나 되었을까?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랄만한 미모를 지닌 그녀는 바로 하연의 딸이었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은 홍의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부처가 보더라도 침을 흘릴 정도로 늘씬했으며 풍만했다.
하연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녀가 내민 노란 앵무새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 돌연, 앵무새가 눈알을 말똥거리며 칼칼한 목소리로 외쳤다.
"묵혼이.... 돌아온다.....! 막주는 묵혼을 죽이겠다고 했다.... 묵혼은 죽는다..... "
순간, 하연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전신을 파르르 떨며 쓰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어머니....... "
소녀는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어디 편찮으세요.......? "
"아..... 아니다......! 오랫동안 서 있었더니..... 어지러워서..... "
"아이..... 그럼 쉬셔야죠..... 아버님께서도 어머님이 요새 몸이 허약해
지셨다고 걱정하시던데.... "
딸은 모친을 침상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모친을 침상에 눕히고 앵무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놈은 아까부터 이상한 말만 하고 있어.....! 아버님이 수하 한 명 죽이시는
것을 가지고 법석을 떠네...... "
앵무새는 나죽어라 비명을 내질렀다.
"아얏! 왜 때리는 것이지? 막주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난 들었단 말야....
왜 때려..... 앵무새라고 무시하기냐......? "
소녀는 귀엽다는 듯 앵무새의 뺨을 비볐다.
"호호.... 아유..... 허지만 고까짓 수하 한 명 죽는건 흉내내지 않아도 돼,
알았니? 너는 품위 있는 말만을 배워야 한단다......! "
앵무새는 비명을 질렀다.
"아앗! 나도 여자란 말이야! 같은 여자까리 이게 무슨.... 흉한 짓이야? 남들이
흉본다구..... "
"호호.... 아유..... 아유 귀여워.....! "
딸이 아주 즐거워 할때,
모친은 뼈를 깎는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하연은 전신을 파들파들 떨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녀는 신음을 지르지 않으려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미려(美麗)야.....! 고까짓 수하 한 명의 죽음이라고.....? 아아.... 아느냐.....?
고까짓 수하라고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분이 네 친부(親父)라는....
사실을..... )
아아......!
그랬던가?
그랬었던가?
미려.....
강미려(姜美麗),
그녀가 묵혼의 딸이였다는 말인가?
운명은......
참으로 얄궂어서......
모친은 지아비로 인해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에 시달리게 하고,
딸은 귀여운 앵무새를 소유한 기쁨에 겨워하는 이율배반을 킬킬대며 즐겁게 훔쳐보고
있었다.
묵혼과 하연과,
그리고.......
강미려.....
운명은 그들을 외면한 지 오래였다.
제 19 장에 계속
제 19 장 血, 血, 血
혈풍지천하(血風之天下)!
마유강(魔幽强)!
마천부(魔天府)!
바로 그것이었다.
천하에 마천부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은 없을 정도였다.
천하는......
마천부에 의해 빠른 속도로 썩어가고 있었다.
허나,
천하인들은 아직 마천부의 진정한 힘(力)을 알지 못했다.
분명 마천부는 천하의 반 이상을 재패했거늘,
천하인들은 대체 무엇이, 어떤 문파가 그들에게 흡수당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마천부!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가공할 것이었다.
천하인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어쩌면...... 네가.....
아니..... 너일지도 몰라.......
그들은 주위의 모든 것이 마천부의 휘하일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마유강(魔幽强)!
× × ×
빙혈천궁(氷血天宮)!
은의사미랑(銀衣死美郞)!
× × ×
흑의검천(黑衣劍天)!
죽립과 단 일초식의 검식으로 천하를 위진시킨 그는,
이미 사백 명의 수급을 베고 있었다.
혈혈단신,
그는 말이 없었기에,
천하인들은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단지,
두려움과 공포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가 베는 무림인들의 이름만을 되뇌일 뿐이었다.
그는 한 개인의 힘으로 무림에 마유강이나 은의미사랑 같은 가공할 존재로
취급받고 있었다.
마유강!
은의사미랑!
흑의검천!
천하인들은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짓터질 듯한 이들 삼 인을 일컬어 이렇게 불렀다.
---삼혈마천수라(三血魔天修羅)----
그 명호,
잔혹과 죽음과 피로 얼룩진 공포의 이름이었다.
× × ×
소림사(少林寺).
숭산(嵩山)의 세 봉우리 중에 소실봉(小室峯)에 위치한 당금 정파의 북두(北斗).
어김없이 소림사에도 밤은 찾아와 있었다.
장로원(長老院).
거대한 대청,
기다란 탁자를 마주하고 여섯 명의 사람이 마주해 있었다.
중앙에는 백미노승(白眉老僧)이 근엄한 신태로 앉아 있었다.
정광이 안으로 갈무리 된 모습,
전신에선 범접치 못할 위엄이 뿜어졌고,
눈빛이 한없는 자비로움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백미노승,
그는 바로 현 소림사의 장문인인 혜천대사(慧天大師)였다.
그의 옆에는 한 명의 미청년이 공손한 태도로 시립해 있었다.
팔 척의 장대한 체격,
물빛처럼 고요한 눈빛,
전신에서 뿜어지는 벼락처럼 패도적인 기운,
그는 혜천대사의 수제자이며 속가제자인 은월천강(銀月天强) 모용익(慕容翼)이었다.
그는 혜천대사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소림사상 최고의 제자였다.
또한,
무림의 수많은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무림인들은 입을 모아 그를 이렇게 평한다.
× × ×
밤(夜),
그 속에서 한 마리의 전서구가 높이 날아올랐다.
전서구의 다리에는 혜각대사의 친필이 적힌 서찰이 매달려 있었다.
제 20 장에 계속
제 20 장 사랑의 새로운 역사
와르르----- 르릉!
번------- 쩍!
콰다탕! 쿵쾅!
경천동지할 굉음,
꽈꽈꽈------ 르르릉!
우르르르------ 르릉!
조물주가 심심해서 장난을 치는가?
대별산(大別山) 남쪽의 높이 오백여 장 가량의 거대한 산 하나가 온통 작살이
나고 있었다.
번개와 뇌성과 화산 폭발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듯,
조물주가 하강하여 한바탕 살풀이를 하고 있는 듯,
휘이이------ 잉!
우지끈! 뚝딱!
아름드리 거목들이 지푸라기처럼 날아갔고,
콰콰------ 앙!
꽈꽈------ 앙!
집채보다 백 배나 더 큰 바위가 두부처럼 부서졌다.
아아........!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처럼 가공가경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천번지복!
한 치도 틀림이 없는 천번지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포효(咆哮)!
"우와----- 아야---- 우와-----! "
산산조각난 산중을 선불맞은 산돼지처럼 날뛰는 한 괴인이 있었다.
"부셔라......! 으핫핫핫......! "
머리는 허리에까지 치렁치렁하고,
입은 옷이라곤 중요한 곳만 겨우 가린 남자였다.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헌데,
오오......!
괴인이 펼쳐내는 신법,
쉬아아---- 아아앙!
빛(光),
아니 빛조차도 괴인의 경천동지할 절세신법을 본다면 분명 자신의 초라함을 통감할 것이다.
슈슈슈------ 슝!
괴인의 신법은 바람(風)이었고,
구름이었고,
공기 그 자체였다.
돌연,
스르릉......!
괴인은 신형을 질주시키며 허리의 검을 뽑았다.
검,
아아.......!
그것은 눈이 아리도록 새파란 청광을 뿜어내는 바로 벽풍천중검(碧風天中劍)이 아닌가?
그렇다면.......?
괴인은......?
아아...... 그렇다!
괴인,
그는 바로 태무랑의 절학을 얻고 반 년간이나 태무랑의 동부에서 절학을 연성했던
천풍이었던 것이다.
천풍,
이 하늘마저 깔보는 천둥벌거숭이가 다시 중원에 나타난 것이었다.
순간,
괴인, 천풍은 벼락 같은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척(剔)----- 강( )----- 류(流)------! "
척강류!
오오......!
그것은 천 년 전에 천하무적(天下無敵)을 자랑하던 태무랑의 신검삼초(神劍三招)
중에 제일 초식이 아닌가?
다음 순간,
콰우우---- 콰콰----- 르르릉!
도저히 검이 뿜어내는 음향 같지 않은 굉음이 터졌다.
찰나,
전면 삼백 장에 도도히 위치해 있던 거대한 암산 하나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우우-----!
통천가공!
그것은 버젓이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 일검으로 높이 오십여 장의 암산을 마치 두부처럼 쪼개다니......
헌데 돌연,
"철----- 천----- 인------! "
섬전처럼 질주하던 천풍의 입에서 다시 산천을 전율케 하는 기합성이 터졌다.
다음 순간,
츠----- 츠---- 츠----- 츠----- 츠-----!
벽풍천중검의 검신에서 해일과 같은 검강(劍 )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갔다.
촤라라----- 라라락!
아아.....!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부챗살처럼 사방 아니, 도합 삼백 육십 방향으로 뿜어나가는 광경이란......
츄츄츄----- 츄츄이이잉!
마치 순풍에 일렁이는 바다의 잔물결과도 같았고,
울울창창한 숲에서 미풍에 흔들리는 수많은 나뭇잎 같기도 한,
찰나,
가가가------ 가가강!
카카카------ 카라라락!
기이무쌍한 음향이 삼백 육십 방향에서 터졌다.
헌데,
오오......!
스스스------
휘리리리------- 링!
허공으로 마치 함박눈인 양 솟아오르는 것,
그것은 바위며, 나무며, 숲의 모든 것들이 아닌가?
헌데,
지금 이순간,
그것들은 마치 잘 다져진 고기처럼 얇게 베어져 눈가루처럼 솟아오른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방원 백여 장 이내,
아아.......!
철저하게도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 완벽하게 얇디 얇게 베어져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오오......!
대저 천하에서 이런 가공가경한 검식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태무랑(太武郞),
과연 그는 부상제일인(扶桑第一人)으로서 추호의 손색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부상제일인이란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천풍은 온 산을 미친듯이 헤집고 다녔다.
"핫핫핫핫....... 이번에는 마지막 절초인 우주종말 검식이다......! "
순간,
슈우우우-------
그는 돌연 까마득한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의 모습은 콩알만하게 보였다.
다음 순간,
"탁---- 천----- 황-----! "
그의 기합성이 터짐과 동시에,
비유유유-----
그의 검에서 감히 처다볼 수도 없는 극강한 광채가 뿜어졌다.
헌데,
촤촤촤....... 차차차........!
아아........!
벽풍천중검에서 마치 폭풍처럼 폭사되고 있는 것,
그것은 수십 아니, 수백 자루의 벽풍천중검이 아닌가?
오오.......!
벽풍천중검은 여전히 천풍의 우수에 굳게 쥐어져 있건만,
수백 자루의 벽풍천중검이 쏟아져 나오다니......
찰나,
지상으로 쏟아져 내린 수백 자루의 벽풍천중검은 지상의 모든 것을 향해 밀물처럼
쇄도해 갔다.
콰콰콰아아아........!
그리고는........
산(山),
둘레 오십여 리의 거대한 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조리,
모조리 수백 자루의 벽풍천중검에 의해 박살이 나버린 것이었다.
헌데 수천 자루의 벽풍천중검,
그것들은 모든 것이 붕괴되는 것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괴변(怪變),
진정 인간의 머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핫핫핫....... "
천풍은 황폐한 산이 무너져라 대소를 터뜨리며 솜털처럼 지면으로 내려섰다.
그는 어느새 벽풍천중검을 허리에 찬 후였다.
천풍은 어깨를 으쓱이며 초토로 변한 산을 쓸어 보았다.
"후후.... 탁천황, 과거 태무랑조차 오성밖에 연성하지 못했던 것...... 허나
나는 구성까지 연성했다.......! "
아아.......!
탁천황을 창안한 태무랑조차 오성밖에 연성하지 못한 것을 그가 불과 반 년 만에
구성까지 익히다니.......
천풍은 흡족하게 웃었다.
"후후...... 검령(劍靈), 벽풍천중검의 혼(魂)인 검령, 후후.... 천하에서 누가
한꺼번에 구백 구십 구 개의 검령을 피할 수 있겠는가? "
오오.......!
검령,
검령이라니......
그렇다면 조금 전에 그가 펼쳐낸 수백 자루 아니, 구백 구십 구 자루의 벽풍천중검이
검령이었다는 말인가?
아아...... 그럴 리가........
검도(劍道)의 극(極)이라는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을 한 단계 초월한 검령조화지경
(劍靈造化之境)의 단계,
검도로서는 더이상 오를 곳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천풍,
이미 그는 올 데까지 다 온 것이다.
천풍은 손을 툭툭 털며 히죽 웃었다.
"ㅋㅋ....... 좁은 동굴 속에서 반 년이나 처박혀 있어서 몸이 근질거려 가볍게
살풀이를 했는데...... "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좀 심했나? "
오오......!
맙소사!
천풍,
산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의 의미를 잃을 정도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좀
심했느냐고.....?
아아.........!
어쨌든,
천풍,
그는 반 년 동안 갇혔던 살풀이를 요란뻑적지근하게 벌인 것을 신호로 다시 무림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과연,
이후 무림은 그로 인하여 얼마나 진통을 겪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천풍,
그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떠난 산은 들리지 않은 흐느낌을 조물주에게 보내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 × ×
은의사미랑(銀衣死美郞),
그는 검미를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전면을 향해 있었다.
그의 풍모는 여전히 비범했다.
눈부신 은의(銀衣)를 입었으며,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까지도 은색인 그의 용모,
가히 탈속한 신선의 비범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주고 있는 곳,
그곳은 그가 앉은 탁자의 건너편이었다.
창 밖을 슬픈 눈으로 망연히 바라보는 한 소녀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소녀,
오오......!
그녀의 용모란,
어찌 하찮은 세 치 혀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만약 누군가 그녀의 신적인 미모를 표현하려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몰매를 맞고말 것이다.
왜냐하면,
어줍잖은 표현은 그녀의 개세적인 미모에 오히려 누가 되었으므로......
그녀의 살결은 희디희었다.
그래서 마치 얼음을 깎아 다듬은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전신에서는 얼음가루처럼 차가운 냉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웬만한 간담을 지닌 자라면 그녀의 곁에 근접도 못할 정도의 한랭한 냉기였다.
추수처럼 해맑은 두 눈은 웬일인지 슬픔에 차 있었다.
오만할 정도로 오똑 솟은 콧날,
보는 이의 가슴을 푸들푸들 떨게 만드는 한 떨기 장미입술,
슬프도록 길고 우아한 목덜미,
오오........!
그녀의 풍성한 둔부를 받치고 있는 너 행복한 의자여......!
그녀,
하여간 아름다왔다.
죽을 때까지 어째서 저런 아름다운 여자가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를
골머리 아프도록 끙끙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문득,
은의사미랑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벽월사매(碧月師妹)...... "
벽월,
그것이 소녀의 이름인가?
아아.......!
이름 또한 누가 지었는지 그녀와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헌데,
벽월이란 이 소녀가 바로 은의사미랑의 사매였다는 말인가?
벽월,
그녀는 은의사미랑의 부름을 못 들었는지 여전히 시선을 창 밖에 고정시킨 채였다.
"........ "
은의사미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매.......! "
그의 언성은 약간 높아졌다.
"아.......! "
그제서야 벽월은 망중한에서 깨어나 그를 돌아 보았다.
은의사미랑을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슬퍼보였다.
"무슨 일인가요........? 빙옥사형(氷玉師兄)....... "
빙옥대공자(氷玉大公子),
은의사미랑의 이름,
북해(北海) 빙혈천궁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인물,
원래 빙옥과 벽월은 어릴 때부터 정혼한 사이였다.
천하가 깨지지 않는 한 그들의 혼인도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헌데,
삼 년 전에 중원으로 먼저 들어온 벽월은 옛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매사에 흥미가 없었으며,
허구헌날 창 밖만 망연히 바라보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그녀는 빙옥의 물음에도 어떤 때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넋 빠진 사람 같았다.
빙옥은 답답했다.
그녀가 왜 그러는 것인지 이유만이라도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허나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이날까지 지내온 것이었다.
빙옥은 지그시 그녀를 쏘아보았다.
"벽월사매......! 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를 알아야 되겠소......! "
벽월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무엇을 말인가요......? "
"사매가 왜 나를 멀리하는지를 말이오.......! "
"멀리한다고요......? "
"그렇소! 분명히 의식적으로 사매는 나를 멀리하고 있는 것이오.....! 그렇지 않소? "
빙옥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벽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께선 소매의 일에 관계하지 마세요......! "
순간,
빙옥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관계하지 말라니.....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소?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이거늘..... "
그 말에 벽월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부부.... 라고요......? "
"그렇소! 사부님게서는 곧 사매와 나를 혼인시키려 하고 계시오......! "
그 말에 벽월은 교구를 한 차례 가늘게 떨었다.
이어,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어떤 상념에 잠겼다.
"......... "
빙옥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할 뿐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약 한 식경 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벽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헌데,
그녀의 큰 눈에 가득히 고여 있는 것,
아아......!
그것은 바로 눈물이 아닌가?
빙옥은 흠칫했다.
"아니..... 사매.......! "
벽월은 고개를 흔들어 그에게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고였던 눈물이 그녀의 창백한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얼음을 타고 흘러내리는 옥(玉)처럼.....
"사형......! 말씀 드리겠어요......! "
그녀의 말에 빙옥은 긴장했다.
"말해보시오......! "
벽월은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빙옥은 그녀의 깎은 듯한 옆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문득,
벽월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하.... 사형, 사형의 말은 맞아요.....! 소매는 분명 의식적으로 사형을
피하고 있어요......! "
순간,
빙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음....... "
그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벽월은 여전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지워버릴 수 없는 이유가...... "
"그게 무엇이오? "
빙옥의 어조는 차분했다.
극도의 놀람에도 냉정을 잃지 않는 그,
과연 은의사미랑다운 행동이었다.
"소매에게는 잊지 못할 한 사람의 영상이 가슴에 새겨져 있지요...... "
순간,
빙옥의 눈이 쭈욱 찢어졌다.
허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매가 그 사람의 영상을 지우지 못하는 한.... 사형과는 맺어질 수 없을 거예요.... "
빙옥은 전신의 피가 억류함을 느꼈으나 침착을 잃지 않았다.
그는 벽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벽월은 그를 보지 않았다.
도저히 그를 돌아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빙옥이었기에.....
"소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사람이지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
문득,
그녀의 눈빛이 꿈꾸듯이 몽롱하게 변했다.
반대로 빙옥의 목줄기에 굵은 힘줄이 특 불거졌다.
그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격분을 참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를..... 그를 사랑하오.....? "
그는 그렇게 묻고서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증오했다.
"사랑하느냐고요.....! 호호.....! 네, 사랑하죠....! 소매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설사 목숨까지라도....... "
빙옥의 눈에 질투의 불길이 확 일어났다.
"그도..... 사매를 사랑하오.....? "
순간,
벽월은 교구를 파르르 떨었다.
"그는.... 그는..... "
빙옥의 눈에서 이글이글 화산이 타올랐다.
"말하시오! 그도 사매를 사랑하오......?
문득,
벽월은 고개를 떨구며 흐느꼈다.
"흑흑.... 그는..... 소매를..... 거들떠 보지도 않아요..... 흑흑.... 아시나요?
빙옥사형이 가장 좋아하는 소녀의 비파음을 그는 자장가로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
맙소사!
빙옥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명을 바쳐 사랑하는 벽월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놈이 있다니.....
"그는.... 누구요? 그리고 어디에 있소? "
빙옥은 격하게 물었다.
"풍야(風爺)......! 그의 이름은 천풍(天風)이예요..... 흑흑.... 허나 어디에
계시는지는 소매도 몰라요..... "
"천풍...... "
빙옥은 씹어뱉 듯 뇌까렸다.
"그를 찾겠소......! 해서 그가 만약 사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겠소!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죽이겠소.....! "
벽월은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아.... 안 되어요....! 그는 무공을 몰라요...... "
"무공을 모른다고......? 그런 놈을...... "
빙옥은 더더욱 모멸감을 느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자신마저도 어려워 하는 벽월을 헌신짝 취급을 한다는 말인가?
헌데,
벽월의 다음 말은 그를 더욱 수치에 휩싸이게 하였으니.....
"허나..... 그를 건드려서 사형도 이득을 볼 것은 없을 거예요....... "
"그건 무슨 말이오......? "
"그는..... 천풍, 호호.... 천풍이기 때문이지요..... "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천풍을 자랑하는 그녀의 표정이 봄바람처럼 훈훈하게 변한 것을 빙옥은 똑똑히 보았다.
그는 노화를 어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은....... "
순간,
그는 분노를 웃음으로 터뜨렸다.
"핫핫핫......! 그 자가 설마 하늘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나 빙옥의 면전에서 그
자를 칭찬하다니..... "
헌데,
벽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요.....! 천풍, 그는 하늘이지요.....! 하늘...... "
빙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소? 그렇다면 그 하늘을 내가 필히 만나리다! 해서 진정한 사랑의 위력을 보여
주겠소....! "
그는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그는 내심 모래알을 씹듯 뇌까렸다.
(천풍.....! 이것은 내가 속이 좁아서가 아니라 내 사랑을 위함이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므로.... 해서 난 너를 꾸짖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본 적도 없는
네놈이 부러울 정도이다.....! 허나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
벽월,
헌데,
그녀가 누구이기에 천풍을 사랑한다는 말인가?
유일무이한 중원의 천둥벌거숭이를 말인가?
문득,
그녀는 시선을 들어 먼 하늘가를 쫓으며 탄식을 흘렸다.
"아아.... 아시나요.....? 천풍, 소녀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아.....
무정한 사람..... 소녀를 이처럼 난처하게 만들다니..... "
그녀는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천풍만 생각하면 그녀는 어렵지 않게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아아..... 대답해 주세요..... 소녀... 남창성의 기녀 냉설화(冷雪花)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지..... "
아아......!
냉설화!
그녀가 냉설화였다는 말인가?
헌데,
그녀의 용모는 냉설화와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는 기녀 생활을 하며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녀는 스스로의 미모 때문에 귀찮은 일을 초래할까봐 얼굴을 감추었었던 것이다.
지금의 용모,
그것은 과거 냉설화였을 때와는 명월과 반딧불의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천풍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천풍,
도대체 너는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울리고 다녀야 직성이 차겠느냐......?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제 21 장에 계속
푸드득.......!
한 마리의 희귀한 검은색 전서구가 야공을 가르고 하강했다.
푸드득.......!
전서구가 내려간 곳은 웅장무비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세워진 고루거각들의 중심주였다.
휘익......!
전서구는 그 중에서 가장 웅대한 건물의 열려진 창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서구는 한 명의 혈의인의 팔에 앉았다.
구구구......
전서구가 나직이 울 때 혈의인은 이미 전서구의 다리에서 서찰을 풀었다.
그는 자세를 흐뜨리지 않고 서찰을 읽었다.
잠시 후,
스스스......
서찰은 삼매진화에 의해서 한 줌의 재가 되었고,
혈의인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령(地令)....... "
순간,
마치 그 자리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한 인물이 혈의인의 면전에 나타났다.
나타난 인물은 혈의인의 면전에 깊숙이 부복했다.
"불러 계십니까? 막주(幕主)......... "
오오......!
음성,
그 음성만으로도 족히 듣는 이의 오장육부를 갈가리 찢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그는 지옥사자 뺨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단지 음성만으로도.....
헌데,
지령이라 불린 인물,
그는 혈의인에게 지금 막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오.....!
천하에 막주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
오직 한 명 뿐이지 않은가?
혈월막주!
그가 아니면 뉘라서 이토록 가슴 서늘한 명호를 듣고도 의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혈의인,
그는 모든 것이 완전히 신비에 감춰져 있는 혈월막의 최고인물인이었다.
혈월막주는 묵묵히 지령을 주시했다.
"은월천강 모용익이란 놈을 아느냐......? "
"알고 있습니다......! "
"음....... "
혈월막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죽여라.....! "
죽여라!
살인명령이었다.
지령은 더욱 깊이 몸을 깔았다.
"명심 봉행! "
순간,
스스슷!
지령의 모습은 마치 연기처럼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은월천강 모용익!
소림의 목표가 그가 어떻게 혈월막의 목표가 되었다는 말인가?
하여간,
혈월막주의 말 한 마디에 은월천강 모용익은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가 없었는데......
혈월막주는 나직이 웃었다.
"흐흐..... 그 놈이 눈치를 챘다고.....? 건방진 애송이놈..... "
그의 눈에서 돌연 허파에 경련이 일 듯한 광망이 무섭게 폭사 되었다.
으으.....
그것은 무림의 일류고수라 하더라도 전신이 얼어붙고 말 듯한 소름끼치는 안광이었다.
"흐흐.... 아직은 때가 아니다. 혈월막이 왜 생겼는지 밝힐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
비밀,
어떤 은밀한 비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혈월막의 사대살수(四大殺手) 중에 한 명인 지령 정도라면 능히 모용익을
죽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변수가 없는 한.....
허나 그는 아는가?
조금 전에 본 지령의 모습이 그에게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 × ×
"아아...... "
소녀,
그녀는 전신에 청의경장을 입고 있었다.
몸에 찰싹 달라붙은 경장은 그녀의 폭발적인 몸매를 유감없이 표현해 주었다.
터질 듯이 팽팽한 젖가슴은 큰 기복을 일으키고 있었고,
한줌 세류요는 보는 이가 저절로 침을 꿀꺽 삼킬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아래,
탄력있는 둔부는 알맞게 위치했다.
쭉 곧게 뻗은 다리는 바닥을 사뿐히 받치고 있었다.
뿐인가?
그녀의 용모,
용모 또한 경국경성지색(傾國傾城之色)이었으니......
초생달 같은 아미에,
웬일인지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고,
달을 벨 듯한 콧등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또한,
앵두처럼 붉은 입술은 약간 벌어진 채 미약한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소녀의 용모,
어디 한 곳 흠잡을 데 없는 팔등신이었다.
헌데,
그녀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인가?
소녀는 황급히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
한결같이 어지럽게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시체들은 모두 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관병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아....... "
그녀는 절망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관병은 그녀와 한편인 듯,
헌데,
스스슷.......!
스스스스........
그녀의 주위,
오오......!
도합 십 인(十人)의 혈의인들이 미끄러지듯이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지 않은가?
혈의인들,
마치 전신에 핏칠을 한 듯 시뻘건 혈의로 감싸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청의소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소녀에게 점차 다가갈수록 소녀는 전신을 격하게 떨었다.
순간,
소녀는 발악적으로 부르짖었다.
"발칙한 자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
허나,
혈의인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소녀의 부르짖음은 거의 절규에 가까왔다.
"감히.... 나 무정옥녀(無情玉女)를 핍박하다니....... "
아아......!
무정옥녀!
청의소녀,
그녀가 바로 강호사옥녀(江湖四玉女) 중에 일 인인 무정옥녀 도수아(陶髓蛾)였다는
말인가?
무정옥녀 도수아,
천하에서 강호사옥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허나,
강호사옥녀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해도 무정옥녀라는 이름은 안다.
그녀의 명호가 말해주듯이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악을 원수처럼 증오하며 무림의 악도들은 그녀를 만나면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정도였다.
그녀는 악도들에겐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무공은 말할 수 없이 고강하여 여태 적수를 만나보지 못했었다.
무정옥녀 도수아,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또 있다.
보국대장군(補國大將軍) 도강휘(陶强輝),
당금 대명의 황제를 제외한 최고의 실력자이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당금 황제인 륭경제(隆慶帝)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헌데,
무정옥녀 도수아는 바로 그의 무남독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부러운 것 없이 자랐으며,
그녀를 무공면으로 능가하는 사람이라도 항상 그녀에게 져주는 편이었다.
그러는 편이 자신의 신상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해서 무정옥녀 도수아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오만을 가슴에 담고 이날까지 살아 왔었다.
헌데,
헌데 말이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천하에 자신을 막을 자는 없다고 기고만장하던 그녀가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이다.
"아아..... "
도수아는 혈의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알고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자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으으.... 감히 보국대장군의 딸인 나를....... "
그녀는 부러져도 휘지는 않는 성미였다.
순간,
챙!
그녀는 어깨의 검을 벼락같이 뽑았다.
이어,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득달같이 혈의인들을 향해 덮쳐갔다.
허나,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상대는 혈월막이라는 것과,
그녀의 그런 행동은 상대를 오히려 돕는 결과라는 사실이었다.
순간,
도수아는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전신의 힘이 일시에 빠졌다.
어느새 마혈이 제압된 것이다.
"으음...... "
그녀는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것을 신호로 혈의인들은 묵묵히 몸을 돌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들은 도통 말이 없었다.
오십 명의 관병들을 깡그리 죽였을 때에도,
또한 도수아를 제압했을 때도 말이 없었다.
화르르----- 릉!
불길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무서운 기세로 번져왔다.
도수아는 한 혈의인의 옆구리에 매달려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이놈들아.......! 나를 납치하다니..... 아버님이 가만 계실 줄 아느냐....? "
혈의인들은 그녀의 외침에도 반응조차 없이 훌쩍 신형을 날렸다.
그 순간,
꽈아아----- 앙!
한쪽 벽이 풍지박살나며 굉음이 터졌다.
다음 순간,
쿠당탕........!
한 인물이 바닥에 호되게 굴러 떨어졌다.
"아구구..... 염병할.......! "
떨어진 인물은 죽는 소리를 하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치렁치렁한 흑발을 허리에까지 기른,
해처럼 빛나는 용모에,
전신에서 장난기가 넘쳐 흐르는........
중원의 천둥벌거숭이,
바로 천풍이었다.
혈의인들,
혈월막의 살수(殺手)들인 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천풍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날리려던 신형을 멈추고 그를 돌아 보았다.
그러는 그들의 눈빛은 번들번들 살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천풍은 몸을 일으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허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아니..... 당신들은 지금 제정신들이오? 불을 끄지 않다니.... 이 아까운 배를
모두 태울 셈이오.....? "
혈의인들은 어리둥절했다.
천풍은 아랑곳 않고 냅다 호통을 쳤다.
"그래도 불을 끄지 않는 게요? 좋아, 당신들이 불을 끄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이
배를 포기한 것으로 알고 이 배는 내가 갖겠소......! "
도대체 눈앞의 이 놈은 어디서 나타났다는 말인가?
배는 장강의 한복판에 떠 있어 좌우의 거리가 무려 이백 장은 될 것이 아닌가?
배를 타고 왔으면 자신들이 모를 리 업었을 텐데......
게다가,
이놈은 또 불을 끄라고 호통치지 않는가?
돌연,
천풍은 웃옷을 훌훌 벗었다.
이어,
무서운 기세로 타고 있는 불덩이 속으로 뛰어 들었다.
순간,
그는 불덩이 한 걸음 앞에서 홱 몸을 돌려 혈의인들을 쏘아 보았다.
"혹시..... 당신들, 내가 불을 모두 끄고 나면 배를 다시 뺏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
"........? "
혈의인들은 천풍을 미친놈이라고 단정했다.
천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그럴 마음은 없다는 것이로군........ "
그는 히죽 웃으며 느닷없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
말이 그냥 불이지 천풍이 뛰어든 불구덩이는 불의 할아비 같은 불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까이 접근도 못할 정도의 엄청난 불이었던 것이다.
배는 온통 불에 휩싸여 있어서 잠시 후면 혈의인들이 서 있는 곳까지도 불에
휩싸이게 될 판국이었다.
헌데,
오오......
헌데 말이다.
천풍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우와아......! 꺼져라! 네놈들이 꺼져야 이 배는 내 것이 된다! 와아아......! "
고함도 그냥 지르는 것이 아니라 미친 황소처럼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다.
"우핫핫핫......! 덕분에 배 한 척 공짜로 생겼다......! 우핫핫핫.......! "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영락없는 미친놈이었다.
그런데,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불,
순식간에 배를 짓태울 듯하던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것이 아닌가?
스...... 스....... 스......
여기저기에서 간간이 연기만 피어오를 뿐,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 "
"..........? "
혈의인들의 두 눈이 놀람으로 물들 때,
"헤헤..... 이제 군말 없는거야......? 이 배는 내거란 말씀이야....... "
손을 툭툭 털면서 천풍이 그들의 면전에 다시 나타났다.
혈의인들의 머리 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간,
번------ 쩍!
그들의 눈에 동시에 이글거리는 살광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츄리리릿!
극강한 검기가 천풍의 전신으로 쏟아져 왔다.
언제 검을 뽑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쾌속절륜한 수법이었다.
천풍은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어이구구......!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불을 죄다 꺼놓으니까 본전
생각이 난 게로군...... "
그의 마지막 투덜거림은 공격을 한 혈의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 "
혈의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는 자신의 검초를 이처럼 쉽게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제서야 천풍이 숨은 고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정옥녀 도수아,
그녀는 가몸에 단비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어깨를 활짝 펴고 싱글싱글 웃고 있는 천풍을 바라보았다.
"나..... 나를 구해 주세요...... "
혈의인들은 천풍은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천풍은 도수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냐? 설마 이 배를 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
배,
그는 마치 죄다 타 버린 배에 미친 사람 같았다.
도수아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게 아니예요...... 이 배는 원래 소녀의 것이었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드리겠어요...... "
그녀는 천풍이 어렵지 않게 불을 끄고 혈의인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구해 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순간,
쐐------ 애----- 액!
슈아아------- 악!
혈의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아이구..... 이제보니 자기들 배도 아니면서..... 이크.... 어이쿠...... "
그는 허둥지둥하며 가까스로 그들의 공격을 피해 다녔다.
혈의인들의 공격은 가공할 것이었다.
그들 각자의 무공수위는 강호의 일류고수들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일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
도수아는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소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겠어요..... "
천풍은 좁은 선실내를 오락가락 하며 그녀를 돌아 보았다.
"무엇이든지......? "
그가 그렇게 말하는 중에 몇 자루의 검이 그를 악랄하게 베어왔지만 그는
기우뚱거리며 잘도 피했다.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
그는 일변 혈의인들의 공격을 피하며,
일변 히죽히죽 웃으며 도수아의 늘씬한 몸을 쓸어보았다.
그의 눈빛이 음탕하게 변했다.
마치 도수아의 육체에 침을 질질 흘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수아는 그의 의도를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런 파렴치한....... "
천풍은 전신을 요리저리 비틀어서 혈의인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파렴치하다고.......? 남을 구해 주려는 사람은 그런 욕을 먹는 것인가? "
"그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좋아요..... 보물...... 황금을 원하시나요.......? "
천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나는 보물 따위는 무거워서 지니고 다니지 않는 성미란
말씀이야..... "
".......... "
그 사이에도 혈의인들의 공격은 점차 잔혹악랄하게 변했다.
쐐애------ 액!
슈----- 칵!
"그.... 그럼..... "
"후후..... 정말 네 몸은 근사하구나...... "
천풍은 정말 음탕하게 중얼거렸다.
도수아는 두 눈에서 새파란 원독의 빛을 와르르 쏟아냈다.
"으으..... 인간 같지도 않아..... 네놈에게 구함을 받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 "
"그래.......? "
순간,
스..... 스..... 스......
천풍은 순식간에 뒤로 오 장이나 물러나 전권을 완전히 빠져 나갔다.
그에게는 그런 것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혈의인들은 그 짧은 시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눈 앞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그는 절대 자신들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천풍은 뒷짐을 지고 혈의인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들었소? 저 계집애는 지금 몹시 죽고 싶어하오. 그러니 당신들은 저 계집애를
마음대로 하시오.......! "
순간, 도수아의 두 눈은 금새라도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이..... 이..... "
천풍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아마 저 계집애는 천하에서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죽고 싶을 것이오...... "
그는 도수아를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으냐.....? "
도수아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너..... 너..... "
"하하.... 그것보라구.... 대답을 안하는 것 보니 너도 좋은 가 보구나..... "
천풍은 그녀를 아예 외면해 버렸다.
제 22 장에 계속
× × ×
× × ×
천주산(天柱山),
안휘성(安徽省)에 위치한 험산,
구름조차도 천주산은 넘기 힘들어 돌아간다는 대산(大山),
그래서인지 이름도 천주산,
즉, 하늘의 기둥이란 뜻인가?
천주산에서 가장 깊은 곳,
그곳은 천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름조차도 없다.
운무(雲霧),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엄밀한 운무가 계곡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때는 조각달만이 아이가 베어먹은 떡처럼 달랑 걸린 그믐달,
돌연,
운무에 가려져서 그곳이 계곡인지도 모를 정도인 그곳에서 한 줄기 인영이 솟구쳤다.
스----- 스---- 스------
인영의 신법은 이미 초절정고수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마치 구름이 흐르듯,
인영은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진 후였다.
혈의복면인,
한 명의 혈의복면인이 나뭇잎이 많은 나무 위에 숨어 있었다.
헌데,
그에게서는 전혀 아무런 것도 풍기지 않았다.
그가 나뭇잎 사이에 있으니,
단지 나뭇잎 같이만 보일 뿐이었다.
숨소리도 없었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기(氣)를 감춘 채 혈의복면인은 때때로 사방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순간,
스스슷-----!
나무 아래쪽에 돌연,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인영,
그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자였다.
그는 사방을 한 차례 쓸어보더니 나무 위를 올려보았다.
이어,
얼음처럼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내려와도 좋다.....! "
순간,
"헉......! "
나무 위의 혈의복면인은 나직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귀.... 귀신같다....! 삼십 년을 연성한 내 은신술을 단 한 순간에 간파하다니.... )
그는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연기처럼 나무 아래로 내려섰다.
그는 검은 복면을 한 인물을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혔다.
"혈공자(血公子)이십니까.......? "
대공자,
"........ "
검은복면의 인물은 침묵으로 그 물음을 시인했다.
혈의복면인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에게선 가히 상대의 심장을 짓찢을 듯한 가공할 기(氣)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문득,
대공자라고 불리운 인물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혈의복면인은 급히 품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공손히 그에게 주었다.
대공자는 펴보지도 않고 서찰을 품 속에 쑤셔 넣었다.
이어,
묵묵히 혈의복면인을 주시했다.
순간,
(으으....... )
혈의복면인은 전신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대공자의 눈빛,
그것은 그를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하였다.
스물스물......
대공자의 두 눈에서는 숨이 탁 막히는 가공할 마기(魔氣)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 대공.... 자..... 왜..... 크윽.....! "
혈의복면인은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허리를 앞으로 꺾었다.
숙인 그의 등 뒤로 대공자의 옥처럼 투명한 손이 삐져나와 있었다.
"후후...... 비밀을 지키는데는..... 죽여 입을 봉하는 것이 으뜸이지..... "
그의 입술 사이로 모골을 송연케 할 잔소(殘笑)가 흘러 나왔다.
"..........? "
서문여정(西門汝晶),
그녀는 무림출도(武林出道)를 며칠 남겨 놓지 않은 터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서 머리도 식힐겸 곡 밖으로 나와 흐드러지는 달빛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헌데,
한순간,
그녀의 전신 피를 일시에 동결시키는 일을 목격한 것이다.
전면 삼십여 장,
그곳에서 두 사람이 은밀히 마주서 있지 않은가?
(누군데.......? )
그녀는 장차 정파(正派)의 맹주(盟主)가 될 여인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거둔 불해선사나 청송진인, 그리고 검극옹의 바램이었다.
그런 신분인 그녀가 자신들이 십여 년간 비밀에 붙여온 이곳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사람들을 모른척 할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흔들, 어깨를 움직였다.
찰나,
슈----- 슈------ 슈-------
그녀의 신형은 흐릿하게 변하더니 곧장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녀가 이십여 장쯤 질주했을 때,
털썩.....!
두 사람 중에 혈의를 입은 사람이 돌연 쓰러졌다.
그의 등 뒤로 옥처럼 투명한 손이 삐져나온 것을 그녀는 얼핏 발견하였다.
슈----- 슈------
그녀가 대공자와 오 장까지 이른 곳에 다달았을 때,
츠츠츠.......
죽은 혈의복면인의 시신이 한줌 혈수로 화하고 있었다.
(음.......? )
대공자는 극히 미세한 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신형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서문여정......! 저 계집이...... )
그는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보았을 것이라고 간파했다.
다음 순간,
그는 훌쩍 야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저 계집은 나보다 한 수 위다......! 상대하면 나만 손해다.....! )
순간,
"멈춰요.....! "
서문여정의 날카로운 호통이 야공을 울림과 동시에,
츠으으----- 으으--------!
한 줄기 음유한 경기가 대공자의 전신을 덮쳐왔다.
그것은 소림의 비전절기인 불영지(佛影指)였다.
"웃......! "
대공자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불영지는 소림최강이라 할 수 있는 절학이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도 손꼽을 정도였다.
다음 순간,
대공자는 바싹 긴장하여 일 장을 쪼개냈다.
위이----- 잉!
태산처럼 가공할 위력이 담긴 장공이었다.
꽈꽈------ 꽝!
엄청난 굉음이 터지고 대공자는 그 여력에 의해 퉁겨지듯이 수십 장 밖으로
쏘아가고 있었다.
서문여정,
그녀는 그를 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쫓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방금 전에 대공자가 펼친 장공 때문에 너무 놀란 나머지 쫓을 생각조차
못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망연히 중얼거렸다.
"분명히..... 소림의 나한십팔장(羅漢十八掌)이었어......! 불해사부께서 천하에
그 수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 십 오 명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시던..... "
오오..... 그렇다면?
"그렇다면..... 외부인과 은밀히 만난 신비인은 바로 십 오 명 중에 한 명이란
말인가.....? "
그녀의 중얼거림에는 불신의 기색이 역력히 담겨 있었다.
문득,
그녀는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쓸어 올렸다.
"일단 곡으로 가서 사부님과 의논해야겠다...... "
헌데,
오오.....!
희미한 달빛에 나타난 그녀의 용모,
아아........!
어찌 그녀의 미모를 인세에서 먹고 마시며 웃고 우는 인간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천지간의 모든 만물을 한없는 초라함으로 몰아넣는 절세적인 미모였다.
꽃(花),
꽃은 향기롭다.
여인(女人),
여인은 꽃보다 더 그윽한 향기를 주위에 가득히 뿌리고 있었다.
서문여정,
대략 십 육 세 남짓,
그녀의 미모를 설명하기 위해 꽃 따위와 견주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그녀는 아름다왔다.
우리는 그녀의 미를 표현하기 위해 부질없이 수많은 형용사를 사용치 말기로 하자.
천 날을 만 번이나 곱해 입에서 불을 뿜어도 결국 원래 그녀의 지닌 바 미의
십분지 일조차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한 마다로......
그녀는,
고결하고, 성스러우며,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미를 지녔으며,
여인이란 이름 중에서 진정코 여인이라 자신있게 불림을 받을 수 있는 여인,
바로,
서문여정이란 아리따운 이름을 지닌 여인, 아니 아직 풋풋한 십 육 세 소녀였다.
서문여정,
서문여정,
서문여정............
제 23 장에 계속
검소한 석실 안,
하나의 석탁을 마주하고 다섯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세 명의 노인과 영기발랄한 젊은 일남일녀,
그들은 웬일인지 한결같이 만면에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문득,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한 노승이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결국 외부와 내통한 그 자를 찾지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
노승의 연륜은 백 세가 훨씬 넘어 보였고,
전신에선 장중한 가운데 은은한 자비로움이 풍기고 있었다.
눈을 완전히 뒤덮은 허연 백미(白眉),
배에까지 이르는 갈대꽃 같은 백염,
어느모로 보나 세속을 떠난 불존(佛尊)과 같은 인자한 노승이었다.
불해선사(佛海禪師),
바로 그였다.
현 소림장문인 혜천대사의 사부이며,
당금 무림에서 가장 지고한 신분의 생불(生佛),
그는 또한 달마조사(達磨祖師) 이래로 소림사상 가장 뛰어난 승려로 지칭받는
노승이었다.
헌데,
그의 인자한 노안에는 지금 짙은 근심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그의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한 별같은 소녀가 입술을 열었다.
"허나..... 사부님, 그자는 어떻게 하든 반드시 찾아내야만 해요......! "
입을 열자 깊은 계곡의 시냇물 흐르는 듯한 그윽한 옥음이 중인들의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음성에선 듣는 이의 고뇌를 일시에 사라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녀,
바로 서문여정이었다.
그녀와 같은 완벽한 미를 지닌 여인이 어찌 천하에 두 명이나 있겠는가?
"그렇지...... "
불해선사의 안색이 더욱 근엄하게 굳을 때,
묵묵히 있던 늙은 도인(道人)이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정(汝晶)아.....! 너는 죽은 그 자를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냐.....? "
도인은 안색이 어린 아이처럼 붉으며 우의성관(羽衣星冠)을 쓴 눈빛이 아주 맑은
청수한 모습이었다.
그는 바로 무당파(武當派)의 가장 높은 배분인 청송진인(靑松眞人)이었다.
그의 물음에 서문여정은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오......!
그녀의 아미를 찌푸린 아름다운 자태란.....
어찌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있으리오!
문득,
그녀는 고개를 들며 눈을 빛냈다.
헌데,
그녀의 눈을 빛내는 해 같은 용모,
아아......!
그것은 방금 전에 아미를 찌푸렸던 모습보단 천 배나 아름답지 않은가?
"아.....! 제자는 죽은 그 자가 혈의를 입은 것을 본 것 같아요..... "
순간,
불해선사와 청송진인, 그리고 그 옆의 육십여 세 가량의 청수한 노인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혈의라고.......? "
서문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해요......! 게다가 그 자는 얼굴에 핏빛 천으로 가리고 있었어요...... "
순간,
세 사람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어,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침음을 흘렸다.
"혈월막....... "
순간,
서문여정과 또 한 명의 청년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혈..... 월막......! "
"설마..... 그들이...... "
그때,
육십여 세 가량의 노인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음..... 당금 강호에서 전신을 혈의로 감싸고 다니는 인물들은 혈월막의 살수들
뿐이지...... "
노인,
그는 무림에서 검신(劍神)으로 알려진 곤륜파(崑崙派)의 검극옹이었다.
그의 연륜이 젊어 보이는 이유는 그의 무공이 이미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불해선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선 죽은 그자가 혈월막의 살수였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순간,
서문여정의 곁에 공손히 앉아 있던 화복청년(華服靑年)이 격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의 정체가 혈월막이라고 밝혀진 이상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읍니까? 며칠 있으면
우리는 무리에 출도할 것이니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지 않읍니까? "
청년의 나이는 대략 이십 이삼 세 가량,
보기 드물게 준수하게 생겼으며,
강인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콧날,
천하를 거칠게 휘몰아 치는 폭풍과 같은 기상을 강렬하게 뿜어내는 청년,
모름지기 이런 청년은 부러질지어정 휘지 않을 대쪽 같은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헌데 그의 눈빛,
그의 전신에서 풍겨지는 패도적인 기운과는 달리 깊이를 측량키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를 일견하면 천하의 그 누구라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리라!
그는,
바로 무당 청송진인의 애제자며 십 오 명의 영재들 중에 서문여정 다음으로 탁월한
재질을 지닌 기재였다.
그의 격한 말에 청송진인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비웅(飛雄)아! 그 어인 망발이란 말이냐......? "
사부의 꾸지람에 비웅이란 청년은 찔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름은 사공비웅(司空飛雄)이었다.
청송진인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혈월막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상대이다. 차후 너희가 강호게 나가더라도 가장
주의해야 할 상대인 것이다......! 비웅, 너는 사매인 여정에게 매사를
현명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아직도 많이 배워야겠다......! "
사매에게 배워라........?
그것은 어쩌면 패기만만한 사공비웅에겐 수치스런 일일런지도 모른다.
허나,
그는 공손히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사부님.......! "
이어,
그는 서문여정을 온화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여정사매는 앞으로 더욱 나를 채찍질 해줘.......! "
서문여정은 노을처럼 얼굴을 붉혔다.
"무슨 말씀을....... "
그때,
불해선사는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편으론 혈월막의 살수와 은밀히 만난 첩자를 찾음과 동시에 너희 십 오 명은
계ㅎ대로 내일 무림에 출도한다. 너희들은 각각 십오대문파를 이끌 책임이
있으며 무림의 존망이 너희에게 달렸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도록..... "
서문여정과 사공비웅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명심 하겠습니다....... "
그들이 물러나자 세 무림의 명숙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 "
".......... "
침묵이 흘렀다.
그런 성질의 침묵은 세 사람에겐 일찌기 없던 것이다.
문득,
검극옹이 침묵을 깼다.
"선사.......! 누구일 것 같소......? "
그 물음은 물론 첩자가 누구일 것 같으냐는 말이다.
불해선사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그것을 노납인들 어찌 알겠소...... 단지...... "
".........? "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제자들 중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뿐이오..... 허나 곧 밝혀지리라 생각하오.....! "
"복안이라기 보다는 조호이산지(調虎離山之)를 써볼까 하는 생각이오...... "
"어떤 복안이라도.......? "
조호이산지계!
호랑이를 산 밖으로 불러 낸다.
"조호이산지계라 하시면.......? "
청송진인의 물음에 불해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것은........ "
× × ×
배(船),
천하에는 정말 많고도 많은 배들이 있지만,
또한 수만 종류의 배들이 있지만,
배(船),
오오........!
지금 장강을 유유히 떠가는 이 배와 같은 배가 일찌기 존재했었던가?
장강의 드넓은 수면 위에 아름답고 웅장한 수많은 배들 사이를 천연덕스럽게
스쳐가는 배 한 척,
아아.....!
머리를 싸매고 싶다.
누구든 이 배를 봤다면 그런 말부터 외치고 말리라!
아아.......!
뉘라서 이 배를 배(船)라고 명명하겠는가?
컸다.
배의 크기는 근처의 유수한 다른 배들보다 갑절은 컸다.
헌데,
제기랄!
크면 뭐하겠는가?
모조리 타버려서 앙상한 뼈대만 남은 배를......
그렇다!
배는 처참하리만큼 완벽하게 타 있었다.
배라는 것이 저렇게 타고서도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배는 수면과 닿아 있는 밑창 부분만 간신히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외에는 폭삭 타버렸다.
굵직한 뼈대만을 남겨놓은 채,
헌데,
그 배는 신기무쌍하게도 아직 선실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반쯤 타다가 말았는데,
아마 배를 몰고 있는 사람은 그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천풍,
그는 천하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기름진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우적.... 우적......! "
그의 볼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맛있게 먹으며 중얼거렸다.
"말해.....! 대체 혈월막이 내게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
그는 대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닭다리를 다뜯고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입으로 빨며 말을 이었다.
"말만 해준다면 이 닭고기를 주지..... 허나 나 천풍은 마음이 약해서 남에게
강요란 것을 못해....! 마음대로 하라고.....! "
그는 상체를 일으키며 옆에 놓여있는 마지막 남은 닭다리를 집어들었다.
그의 눈,
그곳은 천정을 향해 있었다.
천정........?
헌데,
오오.......!
맙소사,
천정,
그곳에는 한 명의 전라소녀(全裸少女)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대롱 대롱.....
소녀의 용모는 잠자던 천신이 하체를 움켜잡고 뛰어내려올 정도로 절륜했으며,
그녀의 미끈 풍만한 몸매의 아름다움이야 어찌 세 치 혀로 모두 설명하랴.......!
군살 한점 없는 곧은 종아리의 위쪽에는 질긴 칡덤불이 여린 살결을 파고든 채
묶여 있었고,
팽팽한 둔부는 부끄러움도 아랑곳 않고 엄청난 유혹을 뿌리고 있다.
아아......!
그리고......
그리고......
꿀꺽!
포동포동한 허벅지가 은밀히 감싸고 있는 그곳, 그곳이여.......!
보송보송한 음모가 수줍게 가린 그곳,
아아..... 여인의 비림이.....!
소녀의 세류요는 대체 그곳에 인간의 오장육부가 들어 있는 것인지 조차 의구심이
들 정도로 ㅏ늘디 가늘었다.
허리에서 가슴..... 으으.... 가슴으로 이어지는 영롱한 호선,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젖가슴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제흥에 겨워 출렁거린다.
그리고 얼굴,
앗!
그런데 소녀의 얼굴은 몹시 낯이 익지 않은가?
그럴 수밖에.....
그녀는 천하가 손을 흔든다는 무정옥녀 도수아였으므로.....
무정옥녀 도수아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로 미루어 그녀가 얼마나 울었는지를 쉽게 집작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탈진한 표정으로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마혈이 제압된 상태라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서 눈만 뜨면 저 능글맞은 늑대 같은
천둥벌거숭잉의 낯짝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지금 죽을 힘을 다해 유혹을 뿌리치고 있었다.
유혹,
그녀는 오늘까지 무려 사흘을 굶은 상태였다.
거꾸로 천정에 매달린 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처음에는 발악도 해보았고 소리도 쳐 보았지만,
헛고생이었다.
또한,
처음에는 배고픔보다는 전라가 됐다는 수치심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수치보다는 극도의 허기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에야 세상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언제 배고픔을 느껴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산해진미 앞에서도 입맛이 없다고 투정부리던 그녀가
아니던가?
헌데,
아아......!
도수아는 살며시 눈을 떴다.
저기 얄미운 이의 손에 들려진 채 막 없어지려는 위기에 놓인 마지막 닭다리가
둥근 달만큼이나 크게 보였다.
(아아..... 참을 수가 없어...... )
그녀의 입 안에 그득이 침이 고였다.
그때,
"먹고 싶니.......? "
돌연 천풍이 물었다.
순간,
도수아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나쁜 자식.......! )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허나,
사실 그녀는 자신의 끈기없음과 지조없음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깟..... 닭다리 때문에.... 천하에 무정옥녀가....... )
그때,
탁.........!
미약한 음향에 그녀는 가만히 눈을 떴다.
순간,
(아아....... )
그녀는 천지의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좌절을 맛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멈춰진 곳,
그곳에는 살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닭뼈다귀가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천풍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올려다 보며 자신의 불록한 배를 툭툭 두들겼다.
"난 네가 원한다면..... 네가 죽어 백골이 될 때까지 널 그곳에 매달아 둘 수도
있지..... "
도수아는 무엇이라고 욕설을 퍼부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그녀의 의지일 뿐 입술을 달싹거릴 힘도 없었던 것이다.
거칠게 자란 사람은 그까짓 사흘쯤은 악으로라도 버틴다.
그러나 그녀는 온실에서 자란 꽃이 아닌가?
천풍은 뱃전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맞은편 강언덕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오랫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따스한 양광을 받아 강심에선 뽀얀 강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천풍은 그 강안개 속에서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인,
여인은 천풍을 향해 햇살처럼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천하에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고아한 기품의 여인이었다.
천풍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강안개 속에 피어난 여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툭.......
입술이 터져 새빨간, 마치 그의 아픔처럼 붉은 핏물이 흘렀다.
천풍은 심장을 조각내어 뱉듯 작게,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어.... 머니..... "
아아.......!
어머니!
삼 년이나 잊고 지냈던 그 이름이여!
지금은 어둡고 음습한 지하에서나 아들의 목매인 외침을 들을 그 이름의 주인이여.......!
"ㅋㅋ...... "
천풍은 목젖 갈라지는 웃음을 흘렸다.
이어,
품 속에서 천천히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하나의 옥패(玉牌)였다.
비룡보에서 혈월막의 살수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어머님께서.... 어머님께서 날..... 보호하신 거야..... )
문득,
그의 눈가에 반짝 물기가 어렸다.
아아.....!
정에 약하며 마음이 여린 너, 천풍이여.....!
그 뼈저미는 슬픔을 감추려고 그다지도 유별나게 행동하였던가?
도수아,
그녀는 지금 몹시 기이한 시선을 천풍의 등에 주고 있었다.
(저 뒷모습..... 저 사람의 저런 뒷모습은 어딘가 그답지 않아....... )
누군가 여자를 일컬어 감성이 예민한 동물이라 했던가?
(몹시...... 쓸쓸하며.... 고독해 보인다....... )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이 천풍에게 받았던 모진 수모를 떠나서 단지 한 인간으로서
천풍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저 사람은 참기 힘든 외로움을 달래느라..... 일부러 괴퍅하게 행동하는
지도 몰라..... )
영특한 여우...... 도수아,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천풍이 전혀 딴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가 전에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든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천풍의 전혀 새로운 모습에 엷은 희열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천풍은 홱 몸을 돌리며 능글맞게 소리쳤다.
"이 건방진 계집애야! 너는 지금 내 품에 안기고 싶어서 환장할 지경이지.......? "
순간,
도수아의 뇌리를 가득 지배했던 천풍에 대한 전혀 새로운 사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목에 힘줄을 돋우며 빽 교갈을 터뜨렸다.
"네놈 이야말로 정신 차려라! 이 미친 놈아.......! "
그녀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천풍을 이해하려 했었다는 사실이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마치 다 이루어진 혼사가 눈 앞에서 깨진 것 같은 속상함, 그런 기분이었다.
배,
배 같지도 않은 배가 초추의 따사로운 양광을 받으며 그 시커먼 동체를 수면 위로
미끄러뜨리고 있었다.
< 第 3 卷 끝 >
제 24 장에 계속
제 4 권
저 자 : 冷河祥
출판사 : 민 우 사
연 도 : 1984. 09. 18
타이핑 : 나우 ID(추녀) 김진호
제 24 장 상처입은 猛獸의 咆哮
제 25 장 運命의 만남
제 26 장 陰謀는 안개처럼
제 27 장 英雄과 英雄의 만남
제 28 장 人間과 大魔雄 사이에서
제 29 장 죽은 듯이 산 女人
제 30 장 逆天의 章
제 24 장 상처입은 猛獸의 咆哮
은월천강(銀月天 ) 모용익(慕容翼),
나한삼십육금강대진(羅漢三十六金剛大陣),
그것이었다.
소림사가 자랑하는 소림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과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 지닌 바 위력이란 천하의 그 어떤 절진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삼십 육 인의 승려들은 비감한 신색으로 계도(戒刀)를 움켜잡고 모용익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용익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명중사질..... 결국 이래야만 한다는 말인가.......? "
그의 음성에선 역력한 고뇌가 일렁였다.
명중(明中),
그는 소림의 삼대제자(三代弟子)로써 소림 나한삼십육금강대진을 지휘하는 뛰어는
고수였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모용익을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사숙......! 뭐라고 말씀하셔도 소승들은 사숙을 소림으로
모셔 가야만 합니다..... "
"으음....... "
모용익의 이빨 사이로 침음성이 이시리게 새어 나왔다.
"사숙, 길은 두 가지 뿐입니다. "
".........? "
"순순히 본파로 돌아가는 것이냐.......? 아니면 소승들의 힘을 시험하고 나서야
가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
모용익은 더이상 말해보았자 소용없음을 느꼈다.
"으음.... 정히 그렇다는 말인가......? 대소림이 성한 것과 섞은 것도 못 가릴
지경이 되었다는 말인가......? "
그의 어조는 심장을 조각내어 뱉어내듯이 비통했다.
순간,
"닥치시오.....! 아무리 사숙이지만 본파를 더이상 모욕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소.....! "
명중은 우뢰처럼 일갈했다.
모용익은 허허롭게 웃었다.
"핫핫.......! 좋아.....! 내 비록 무력하나 나한삼십육금강대진을 견식하도록 하지..... "
이어,
스르릉.......!
어깨에서 애도(愛刀) 은월천강도를 서서히 뽑았다.
츠츠츠-------
은월천강도에서 은은한 오색 광채가 사위를 물들이며 뿜어졌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
그는 굳게 도를 잡았다.
(나는 내 운명을 사랑했고...... 내게 소림제일제자(少林第一弟子)라는 혜택을 준
신(神)께 언제나 감사했다......! 허나, 허나..... )
순간,
스------ 스----- 스!
나한삼십육금강대진이 마침내 발동했다.
전신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극강한 압력이 모용익의 전신으로 밀려왔다.
스----- 스----- 스!
모용익은 나한삼십육금강대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후후..... 나를 이 따위 진으로 잡겠다고......? )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옮기는 걸음은 나한삼십육금강대진이 도저히 따라잡지 못할 기괴한 방위였다.
(후후.... 내게 나한삼십육금강대진을 사용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
그 순간,
"엇......! 감(坎)이 뚫린다...... "
한 승려의 다급한 비명성이 터졌다.
찰나,
스스스.....
감의 방위에 세 명의 승려들이 물결처럼 보충되었다.
그때,
(후후.... 그것은 허초였다........! )
모용익은 어느새 이(離)로 향하고 있었다.
슈우우------
허공을 한 줄기 오색 도광이 가르는가 싶더니,
"으윽........! "
두 명의 승려가 허리를 꺾었다.
명중의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아..... 미타불....... 처음부터 나한삼십육금강대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
순간,
"어윽.......! "
"흑........! "
세 명의 승려들이 다시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피를 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용익은 칼등으로 그들을 쳐서 혼절만 시켰던 것이다.
그는 진세를 가볍게 벗어나 기이하게 웃었다.
그것은 극히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명중.....! 나는 더이상 그대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
명중은 벌써부터 그의 말에 진심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아미타불.... 사숙,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소승들이 모두 죽더라도 장문인의
명령을 어길 수는...... "
"후후..... 그런가......? "
모용익은 자주 웃었다.
그의 웃음은 운명에 대한 도전이었고,
생에 대한 조소였다.
문득,
명중은 곤혹한 표정으로 엄숙히 외쳤다.
"아미타불..... 소림의 제자들은 일제히 반도를 포박하라.....! 경우에 따라서는
죽여도 좋다......! "
순간,
모용익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죽이라구.....? 나를 말인가......? 그.... 그것은 사부님의 명령인가......? "
"아닙니다.....! 혜각 사숙조의 명령이었읍니다......! "
"혜각......! 그 놈이.....! "
모용익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십여 년 동안 불도에 심취했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 누군가를 증오했던 적이 없었던 그였다.
"죽일 테다....! 죽이고야 말리라.....! "
그는 처음으로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극도의 살심을 느꼈다.
그 순간,
쐐애------ 액!
휘이------- 잉!
소림 승려들의 무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모용익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으으...... "
맹수,
그는 맹수가 되었다.
궁지에 몰려 발버둥치는......
상처입은 맹수가......
찰나,
"은월천강개천도(銀月天 蓋天刀)! "
그의 입에서 산천도 놀랄 대갈일성이 터졌다.
다음 순간,
츄츄츄츄------- 츄우우웅!
그의 도에서 가공할 도기(刀氣)가 오색 빛을 동반한 채 주위 삼십여 장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쏴아아아------ 아아앙!
순간,
소림 승려들은 혼비백산했다.
"도.... 도기(刀氣)다......! "
"피..... 피해라......! "
허나,
"흐흑.......! "
"크윽.......! "
소림 승려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모용익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들을 쓸어 보았다.
"........ "
그의 표정은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뇌!
자책!
비감!
문득,
그는 은월천강도를 어깨에 꽂았다.
이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명중은 상체를 일으켰다.
이어 재빨리 쓰러진 승려들을 쓸어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서 어떤 기이한 눈빛이 쏟아졌다.
승려들,
그들은 도를 맞았지만 한결같이 급소는 아슬아슬하게 피한 상태였다.
또한,
한 푼의 극히 경미한 상처였다.
(사..... 사숙.....! )
명중은 내심 쓰게 부르짖었다.
그의 눈에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모용익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승려들은 우루루 그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멈춰라! "
명중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외쳤다.
".........? "
"........? "
승려들은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명중은 모용익을 바라보았다.
"......... "
"......... "
문득,
그는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
돌아간다!
"아니........? "
"장문인의 명령을........ "
명중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벌은 소승이 받을 것이다! 더이상..... 더이상... 사숙을 괴롭히지 말라...... "
모용익은 흠칫했다.
"명중....... "
명중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사숙.... 우둔한 소질은 이제야 알았습니다........! "
"........ "
"그렇다고 사숙께서 반도가 아니시라는 것은 아니지만...... "
그는 눈을 빛냈다.
"사숙께선 결국 소질들의 사숙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명중....... "
"사숙의 분노한 마음 속에서 아직도 소림의 불심(佛心)이 남아 있음을 본 것입니다.... "
모용익은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돌아간다.......! "
명중은 훌쩍 신형을 날렸다.
소림승려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혼절한 승려들을 업고 총총히 그의 뒤를 따랐다.
"명중...... "
모용익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을 느꼈다.
그것은 오랫 동안 잊었던 것을 다시 찾았을 때와 같은 희열이었다.
"명중...... 그대와 같은 사람이 있기에 소림은..... 결코 썩지 않을 것이니...... "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 칵!
검(劍),
이 순간,
모용익은 옆구리에 화끈한 아픔을 느끼며 몸을 꺾었다.
그는 천천히 쓰러지며 옆구리의 격심한 통증보다는 다른 한 가지 사실에 대경했다.
(천하에..... 이처럼 빠른 검이 있다니...... )
그렇다!
그는 대체 검이 어느 곳에서 찔러온지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땅에 얼굴을 묻었다.
이후,
뺨을 지면에 댄 채 눈을 껌벅거렸다.
순간,
스스스......
그의 바로 코 앞의 땅이 쩌억 갈라지며 하나의 흑무가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 "
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 때,
스스스......
그의 면전에 한 명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흑의인,
그는 마치 오래 전부터 모용익의 면전에 있던 것처럼 나타났다.
그의 전신에서 풍겨지는 것은 전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죽음(死),
사이롭도록 완절무결한 죽음의 냄새만이 뿜어지고 있었다.
모용익이 그가 자신을 습격한 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의 검에 한 방울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의인의 검이 햇빛에 번쩍일 때,
모용익은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누..... 누구...... "
"흐흐..... 애초부터 본막(本幕)의 일에 끼어든 것이 잘못이었다....... "
흑의인은 마치 유리끼리 맞닿는 듯한 껄끄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본막이라고.......? "
"흐흐....... 사람들은 흔히들 혈월막이라고 부르지..... "
순간,
"으으...... "
모용익은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이처럼 허무하게 당했다는 데서 오는 수치였다.
찰나,
슈슈욱!
흑의인의 손에 쥐어 있던 검이 전혀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가공할 속도로 베어왔다.
(피..... 피해야...... 한다...... )
모용익은 내심 목이 터져라 외쳤다.
카아아-------
흑의인의 검이 닥쳐오기도 전에 엄청난 검기가 모용익의 가슴을 찢었다.
"크으으...... "
그 순간,
카------ 앙!
흑의인의 검은 모용익의 가슴을 꿰뚫지 못하고 단지 길게 찢은 채 멀리 퉁겨 나갔다.
"누구냐.......? "
흑의인은 슬쩍 소매를 흔들며 으스스하게 외쳤다.
날아가던 검은 그의 접인공(接引功)에 의해 다시 그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검신에는 콩알만한 흔적이 몇 개 나 있었다.
흑의인은 사방을 예리하게 쓸어 보다가 나직한 헛바람을 들이켰다.
"으헛.......! "
울창한 숲,
그곳에서 한 명의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녀,
오오........!
흑의인은 눈을 부릅떴다.
눈 앞의 소녀,
그녀는 도저히 인세의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절대완벽한 미모를 소유하고 있엇다.
평생을 살수(殺手)로 보낸 흑의인마저도 경악할 정도의 미모를 그녀는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성스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무, 풀, 하찮은 작은 돌까지도......
그녀가 딛고 선 대지도,
그녀가 이고 선 하늘도 성결하게 물들여 놓았다.
단지,
한 소녀가 말이다.
허나 그것은 지극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소녀,
그녀는 바로 서문여정이었으므로......
흑의인은 재빨리 정신을 수습했다.
"네..... 년은......? "
그가 수없이 해왔던 년, 이란 욕을 하기 위해선 그조차도 망설여야 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서문여정은 고결했던 것이다.
서문여정은 마치 봄바람처럼 훈훈한 미소를 머금고 사뿐사뿐 다가와 흑의인과
모용익의 중간에 섰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아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모용익의 상세를 살펴 보았다.
모용익은 한 줄기 신선한 향기가 밀려옴을 느끼고 희미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누구..... 신지요....? 소생의...... 생명을...... "
그는 그녀가 자신을 구했으며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렵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문여정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몸을 움직이시면 안되요......... "
아아.......!
그녀의 음성이란.....
모용익은 귀먹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서문여정의 다사롭고 온유한 손길이 모용익의 옆구리 상처를 어루만졌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모용익은 상처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서문여정,
그녀에겐 바로 그런 기이한 힘이 있었다.
순간,
"웬 계집이 내 일을 방해하느냐......? "
흑의인은 죽음 같은 일성을 터뜨리며 검과 한 몸이 되었다.
슈아아아아------ 앙!
태산이라도 양단시킬 듯한 가공할 검세였다.
허나,
"잠시 누워계세요...... "
서문여정은 모용익에게 온화하게 웃어 보인 후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등 뒤의 흑의인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여유로움이었다.
슈슈슈슈------- 슝!
검기는 이미 그녀의 반 장 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문득,
"구제할 수 없는 중생........ "
서문여정은 예쁘게 중얼거리며 소매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헌데,
아아.......!
그것은 하나의 천축산(天竺産)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든 보리수(菩提樹)
나뭇가지가 아닌가?
그것에선 마치 불타(佛陀)의 자비로운 미소 같은 장엄한 서기(瑞氣)가 폭포처럼
뿜어나왔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모용익은 전신을 새차게 부르르 떨며 탄성을 터뜨렸다.
"대.... 천여래..... 옥수엽(大天如來玉樹葉)........! "
아아........!
대천여래옥수엽,
그것은 소림의 창시자인 달마조사가 천축에서 왔을 때 손수 지니고 왔다는 신성하기
그지없는 소림의 최고영부(最高令符)가 아닌가?
그것의 권위는 장문인이 지니는 녹옥불장을 백 배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지닌 사람은 달마조사를 보는 것처럼 대하라는 것이 대대로 소림에 이어내려
오는 엄격한 법규(法規)였다.
그 순간,
꽈----- 꽝!
한 소리 천지를 함몰시키는 굉음이 숲을 진저리치게 하였다.
"으윽........ "
그 가운데 흑의인은 폭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쿵........!
"으으..... 이럴 수가...... 본막의 사대살수 중에 일인인 내가..... 으으...... "
그는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겨우 중얼거렸다.
허나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심맥이 모조리 끊어지고 오장육부가 뒤엉켜 버린 것이다.
서문여정은 더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사르르 교구를 돌려 모용익을 바라보았다.
헌데,
"왜.......? "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크게 떴다.
모용익,
그는 옆구리에서 왈칵왈칵 선혈을 흘리며 서문여정을 향해 부복해 있지 않은가?
그는 전신을 가늘게 떨며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서문여정은 눈망울을 사르르 굴렸다.
"당신은 소림의 제자인가요.....? "
그의 물음에 모용익은 황송한 듯이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제자는 장문인의 제자인 모용익입니다..... "
서문여정은 활짝 웃었다.
"아.....! 장문인에게 한 명의 영웅 같은 제자가 있다 하더니..... 바로 당신이
은월천강 모용익소협이었군요......! "
모용익은 그녀가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했다.
"황송합........ 니다...... "
그는 정말로 황송해서 더욱 몸을 굽혔다.
장문인조차도 수하로 부릴 수 있는 지고한 신분이 면전에 있지 않은가?
그는 상처의 고통마저도 잃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 분은.... 불해사조님의 수제자이신.... 서문서저..... )
그는 그제서야 그녀가 누구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때,
"이제 그만 예를 거두세요.... 우선 그대의 상처부너....... "
서문여정이 부드럽게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을...... "
모용익은 펄쩍 놀랐다.
서문여정은 나직이 한숨을 불어냈다.
"아하..... 당신은 어리석군요.....! 당신이 죽어가는 마당에 그깟 예가 문제인가요? "
모용익은 대경했다.
소림사는 어느 문파보다 예를 존경했다.
헌데,
서문여정은 그것을 그깟 것이라고 일축하지 않은가?
(오오..... 이 분은...... )
"그대가 이 대천여래옥수엽 때문에 소녀를 어려워한다면...... "
서문여정은 대천여래옥수엽을 다시 소매 속에 갈무리하였다.
그리곤 활짝 웃어 보였다.
"자.....! 어떤가요? 이제 그대와 소녀는 똑같은 사람이예요. 이젠 소녀의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요....... "
모용익은 감격을 거듭했다.
(아아......! 이분이야말로.... 아아...... )
그는 자신이 하늘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순간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드디어...... 나는 내가 생명을 맡길 분을 찾았다.......! 아아.... 이후 나,
모용익은 이 분의 그림자가 되리라......!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햇살처럼 밝은 서문여정의 옥용이 가득히 들어왔다.
(누....... 눈이 부시다.......! )
그는 외면했다.
순간,
(........! )
그는 두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
전면,
쓰러졌던 흑의인이 사력을 다해 하나의 죽통을 입에 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죽통,
거무튀튀한 음침사악하게 생긴 것이었다.
찰나,
"아..... 안돼.......! "
그는 옆구리를 쓸어 안고 신형을 날렸다.
그의 우람한 몸이 서문여정의 가냘픈 교구를 반쯤 가렸을 때,
푸슈슈------ 슝!
허공을 완전히 뒤덮는 은빛 암기들이 있었다.
서문여정은 소매를 뒤로하여 막강한 경기를 밀어냈다.
순간,
모용익은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다.
"안됩니다.......! "
허나,
퍼------ 엉!
경기는 은침들을 격중시켰고,
쏴르르-------- 릉!
수천 개의 은침들은 다시 수만 개로 불어나 두 사람을 덮쳐왔다.
하늘과 같은 무공을 지녔지만 강호경험이 부족한 서문여정의 실책이었다.
"아아....... "
"으윽...... "
두 사람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암기세례를 받고 금시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모용익은 하늘이 무너짐을 맛보며 꿈길처럼 중얼거렸다.
"절..... 명은사비침(絶命銀蛇飛針)을 쓸...... 줄이야...... "
그의 흐릿한 시야에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흑의인이 어렴풋이 보였다.
(안돼.......! 어.... 떻게 만난..... 하늘인데..... 아..... 안돼..... )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보다 남을 염려하고 있었다.
제 25 장에 계속
제 25 장 運命의 만남
흑의인,
혈월막 사대 살수 중에 일 인,
그는 통칭 지령(地令)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지령,
그는 칠공에서 검은 피를 줄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형상은 마치 악귀를 보는 것처럼 끔찍했다.
그의 수중에선 검 한 자루가 죽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흐흐..... 감히 혈월막의..... 일을 방해하다니...... "
그는 이미 일 장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때,
"으음....... "
서문여정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절명은사비침(絶命銀蛇飛針),
그것은 천하삼대절명암기(天下三大絶命暗器) 중의 하나로써 서장산(西藏産)이었다.
그것은 천 가지 극독 속에 무려 백 년 동안이나 담그었기에 그것에 격중되면 설사
대라신선이라 해도 고개를 흔드는 수 밖에 별 수가 없었다.
또한,
절명은사비침의 가공한 것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절명은사비침은 시전되는 순간 주위 오십여 장 이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며,
어떠한 힘에 부딪치는 순간 폭발하여 원래의 열 배로 불어나 덮쳐든다는 사실이었다.
서문여정,
그녀는 지닌바 공력이 심후하여 가까스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지령을 마주했다.
"그런..... 비열한...... "
그녀는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소매 속에서 대천여래옥수엽을 꺼냈다.
허나,
툭......!
대천여래옥수엽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원래 대천여래옥수엽의 무게는 수백 근에 달했다.
헌데 현재 서문여정은 그것마저 들 힘이 없었던 것이다.
"흐흐..... 생각지도 않던..... 보물을 얻다니...... "
지령은 음흉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칠공에서 피를 흘렸지만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서문여정이란 큰 떡을 얻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는 검을 비스듬히 치켜 들었다.
순간,
"아아....... "
서문여정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너무...... 경솔했다...... 아아....... )
"흐흐흐....... "
지령의 입가에 득의만만한 흉소가 넘실거렸다.
그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할 때,
순간,
"서! 안 서......? 네놈이 서지 않는다면 원래의 방법을 바꿔 아주 처참한 방법으로
구워 먹고 말테다! "
숲 속에서 씨근덕거리는 호통성이 터졌다.
다음 순간,
후다닥.......!
한 마리 토끼가 숲에서 허겁지겁 뛰쳐나와 세 사람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 "
지령은 이 뚱딴지 같은 일에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
서문여정도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며 음성이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때,
"어이......! 이봐, 그 토끼좀 잡아 줘! 잡아만 준다면 다리 한 쪽은 양보하지.....! "
숲에서 아주 낡은 백의를 입은 약관소년이 달려나왔다.
그는 마치 해처럼 눈부신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등 뒤의 흑발은 치렁치렁 허리에서 넘실거렸다.
물론 그는 중원의 천둥벌거숭이 천풍이었다.
식량이 떨어져 먹을 것을 구하러 나왔던 길이었다.
세 사람은 멀건히 그를 바라볼 뿐 토끼를 잡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이 남의 토끼를 잡아줄 입장인가?
모용익은 가물거리는 눈을 입술을 짓깨물며 거부했다.
허나,
천풍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 극도의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천풍,
그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낙척서생으로 닭모가지 하나 비틀힘이 없어 보이지 않은가?
그 사이,
천풍은 씩씩거리며 그들에게 달려왔다.
"제기랄.....! 좀 잡아달랬더니......! 인심도 고약하구나! "
토끼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천풍은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훑어 보았다.
"제기랄...... 고스란히 굶게 생겼군......! "
그가 입맛을 쩝쩝 다실 때,
"아아....... "
털썩!
서문여정이 무릎을 꺾었다.
"엥.......? "
천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말이 그렇게 심했다는 말인가? 쓰러질 정도로......? "
문득,
천풍은 서문여정의 전신에 박혀 있는 가느다란 은침들을 발견하였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절명은사비침...... "
순간,
지령은 흠칫했다.
(이놈이.......? )
찰나,
그의 두 눈에 엄청난 살기가 일렁였다.
다음 순간,
슈------- 칵!
그의 검히 허공을 반으로 갈랐다.
헌데,
"어이......? 이봐! 무식해도 분수가 있지...... 다친 여자를 핍박하다니..... "
천풍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손을 휘둘렀다.
찰나,
따앙!
강한 금속성과 함께 지령의 검은 무려 십여 장이나 날아갔다.
"헉.......! "
지령은 경악했다.
그는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왈칵 핏덩이를 토해냈다.
보았다.
서문여정은 거의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천풍이 지령의 검을 날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도와...... 줘요...... "
막 돌아서려던 천풍의 발목을 그녀의 가느다란 음성이 붙잡았다.
(그가..... 이대로 가면.... 우린 죽을 것이다...... )
천풍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순간,
천풍은 탄성을 터뜨렸다.
"히야.....! 기가 막힌 미인이로구나.......! "
정말이었다.
천풍은 수많은 미녀들을 보았지만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소녀처럼 완벽한
미녀는 머리털 나고 처음 본 것이다.
서문여정,
그녀는 아련한 의식 속에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안기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크아------ 악! '
한 마디 처참한 비명성을 들었다.
그리고는 끝없는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아아...... )
서문여정은 무수한 악몽을 꾸었다.
그녀는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뱀굴에 떨어진 꿈을 꾸었다.
또한,
절벽에 매달린 채 밑에서 자신을 잡으려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손을 보았다.
그녀가 뱀떼에게 전신을 물어뜯기 전,
그녀가 악마에게 발목을 잡히기 전에,
한 명의 해 같은 미청년이 나타났다.
미청년은 소리쳤다.
"토끼를 잡아 줘! 그럼, 다리 한 쪽을 주겠어.......! "
"아아...... "
서문여정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가만히 눈을 떴다.
어둠,
어슴푸레한 어둠이 자신과 자신이 있는 곳에 가득했다.
(이곳은.......? )
그녀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렇지.....! 나는 소림제자를 구하려다 암기에 맞았는데...... )
그녀는 가만히 운기해 보았다.
".........! "
순간,
그녀는 전신의 공력이 원래 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공력은 예전보다 반 배 가량 증가해 있었다.
(대체 누가....... )
그녀는 살며시 사방을 쳐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간간이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었다.
철썩..... 쏴아아.....
(바다......? 아니면..... 강인가........? )
그녀는 짙은 호기심을 느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은 낡은 백의에 덮여 있었다.
스르르.......
백의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완벽한 나신이 어둠 속에서 횃불처럼 빛났다.
윤기어린 흑발은 허리에서 흡사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슬픈,
차리라 슬프리까지한 목덜미가 아름다움으로 빛나며 세속의 아름다운 것을 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깨와 가슴으로 이어지는 숨막힐 듯한 호선,
허나,
아아.......!
숨이 막힌다!
눈이 머는 것 같다!
젖가슴,
오오......!
어찌 그것을 단지 여인이 아이에게 물리는 유방이라 할 수 있겠는가?
여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유방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방일 뿐,
그것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허나,
여기 도도히 하늘을 향해 그 자태를 드러낸 젖가슴을 보라!
아아.......!
천하여!
천하의 여인들이여!
그대들의 유방이 아름답다함을 이 젖가슴 앞에서 말하겠는가?
서문여정이 호기심으로 호흡할 때마다 젖가슴은 작게 물결쳤다.
어둠이 살며시 내려앉은 요요한 세류요,
그것은 대체 인간의 육신의 한 부분을 지키기 위한 허리인지,
아니면 하나의 아름다움 덩어리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극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턱...... 턱!
숨이 등가죽에서 막힐 지경이었다.
만지면 눈 가루라도 묻어날 듯한 뽀안 허벅지가 감싸고 있는 그곳,
도저히 음욕이 일지 않는,
차라리 성스럽기까지한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지닌 성역(聖域),
아아......!
표현하단면 그 입을 짓뭉개고 싶을 정도의 고귀한 곳,
살짝, 살짝,
그녀가 몰래몰래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었다간 나타나고,
다시 나타났다간 숨는.......
아아......!
누가 이 몸을......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몸을 인간의 것이라 하겠는가?
서문여정은 사방을 한 바퀴 둘러 본 연후에야 이곳이 한 척의 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 대체 누구의........ )
그때였다.
갑자기 한 쪽이 환하게 밝아졌다.
뒤를 이어,
터덩...... 터덜.......
자유분방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 )
서문여정은 직감적으로 자신을 구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가슴을 두근거렸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
그녀의 시선은 환하게 밝아지는 쪽에 못박혀 있었다.
순간,
"핫핫........ 일어났느냐.......? "
호호탕탕한 음성이 들렸다.
(이 목소린.......? )
무척 귀에 익은 그 음성의 주인을 떠올리기도 전,
한 명의 미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순간,
"아아.....! "
서문여정이 나직한 탄성을 터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천풍,
바로 그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천풍은 그녀의 나신을 핥듯이 쓸어보며 히죽 웃었다.
"하하..... 여기 또 알몸에 자신이 있는 여자가 있었군. 허나 과연 자랑할만한
몸매로다......! "
순간,
"어맛! "
서문여정은 그제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어,
재빨리 바닥의 낡은 백의를 주워 알몸을 가렸다.
그렇다고 백의가 그녀의 알몸을 모두 가려주진 못했다.
어쩌면 그녀의 그런 자세가 더욱 사내의 간장을 녹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으며 천풍을 쏘아보았다.
"나빠요......! 놀리다니..... "
평생 타인의 눈길 한 번 묻지 않았던 성결한 육체가 아니던가?
천풍은 껄껄 웃었다.
"핫핫.....! 가려도 소용없다.....! 얼마 전에 나는 네 몸을 싫도록 봤었으니까...... "
서문여정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그..... 그런.... "
"핫핫.....! 그렇다고 나를 욕하지는 말아라! 절명은사비침이 너무 많이 박혀 옷을
찢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
"....... "
서문여정은 얼굴을 노을처럼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이 나의 몸을..... )
수줍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문득,
"배고프지......? "
천풍은 그윽히 물었다.
서문여정은 문득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 "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후후....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둔 별미가 있었지.......! "
천풍은 기이하게 웃으며 밖을 쳐다 보았다.
"핫핫..... 이리 가져 오너라......! "
이후,
털썩.......!
천풍은 서문여정의 면전에 주저 앉았다.
"너도 앉으려므나......? "
"아..... 네...... "
서문여정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은...... )
처음보는 자신에게 꺼리낌없이 반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그것이 싫지 않은 이유를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헌데,
천풍의 상체만 가리던 백의만으로 어찌 그녀의 무르익어 터질 듯한 나신을 완전히
덮을 수 있다는 말인가?
쪼그리고 앉아 옷을 무릎 아래로 끌어내리면 젖가슴이 불쑥 튀어나오고,
다시 끌어올리면,
뽀얀 허벅지와 은은한 비림(秘林)이 활짝 공개되니.....
"아아...... "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천풍을 힐끔 쳐다보다가 더욱 어쩔 줄을 몰랐다.
천풍,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녀가 가리지 못하는 부위를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리며
감상하는 것이 아닌가?
문득,
천풍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고민할 것 없어.....!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 "
"........? "
서문여정은 귀가 솔깃했다.
"후후..... 그 옷을 집어던지라고...... 그럼 어느 곳을 가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지..... "
오오......!
맙소사!
그나마 가리고 있던 옷을 집어 던지라고.......?
천풍,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장차 정파무림(正派武林)의 맹주(盟主)가 될 지고한 신분인 그녀에게........
헌데,
오오.......!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서문여정,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게 간단한 것을...... "
다음 순간,
그녀는 그나마 자신의 나신을 가려주던 천풍의 백의를 멀리 집어 던졌다.
문득,
천풍은 눈을 빛냈다.
서문여정은 약간 부끄러워 하였으나 조금 전처럼 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터질 듯한 아름다움이 천풍이 들고 온 등불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천풍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눈 속으로 빨아들일 듯이......
서문여정은 더이상 몸을 가리지 않았다.
여자라면 반드시 자신의 알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것이 없거늘......
더군다나 그녀 같은 지고한 신분의 여인이야 어떠하랴?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부질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똑바로 천풍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고마와요......! 그런 쉬운 방법을 알려주셔서...... "
천풍은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고마와할 것까진 없어..... 왜냐면..... 난 얼마 전에 채 보지 못한
것이 있었거든.....? "
보지 못한 것,
맙소사!
천풍,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천풍일 수 밖에 없었다.
서문여정은 그가 자신의 젖가슴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목덜미까지 붉어졌으나 가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
그녀는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흘렸다.
운명,
그녀는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을 느꼈다.
천풍의 눈빛은 전혀 음탕하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듯,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 듯,
순진무구한 눈빛이었다.
서문여정은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실내로 누군가 다가오는 경미한 기척을 감지했다.
(또 누가......? )
그녀는 당혹함을 느꼈다.
천풍 앞에선 알몸일 수 있으나,
외인이 출현하는 데에 당황하는 자신을 그녀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제 26 장에 계속
제 26 장 陰謀는 안개처럼
서문여정이 당황할 때,
"그대로 있어......! "
천풍은 담담히 말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문여정은 그의 말대로 따랐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천풍을 신뢰하게 하였다.
그래도 그녀는 양다리를 바짝 오므리고 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그때,
........
몹시 구수한 향기가 먼저 풍겨오더니 한 명의 소녀가 들어섰다.
소녀,
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서문여정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아...... "
나타난 소녀,
절세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천하에 그 누구라도 능가하지 못할.........
허나 서문여정과 비교하면 약간의 모자람이 있었지만,
정작 서문여정이 대경실색한 것은 그녀가 전신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을
전라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실내로 들어선 소녀 또한 서문여정과 다름없이 완전 나신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몸매 또한 가히 절세적이지 않은가?
헌데,
그녀는 서문여정을 발견하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서문여정은 그녀의 그런 행동에 저으기 안심했다.
그녀가 자신을 눈여겨 보았다면 분명히 자신은 부끄러움을 느꼈겠지만,
그녀가 외면하자 어쩐지 안심이 되는 까닭은......?
허나,
천풍은 태연했다.
그때,
나타난 소녀는 두 사람의 중앙에 들고온 음식을 공손히 내려놓았다.
음식은 타다남은 나뭇조각을 두드려 만든 소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소녀는 음식을 놓고 뒷걸음질 쳐 나가려 하였다.
그때,
"수아.....! 너도 먹거라.....! "
천풍은 담담히 그녀를 불렀다.
헌데,
아아........!
수아라니........?
그렇다면 저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가 천하에 다시없는 말괄량이 무정옥녀
도수아라는 말인가?
아아......!
믿을 수가 없다.
이 사실을 믿어버린다면 결국 달이 낮에 뜨고 해가 밤에 뜬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까지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네....... "
수아, 도수아는 극히 공손하게 대답하며 천풍의 옆에 다소곳이 앉는 것이 아닌가?
어쩌다가......
아아.... 어쩌다가 천하의 무정옥녀 도수아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또한 명명백백하다.
천풍,
무정옥녀 도수아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상대는 천풍이었지 않은가?
그녀는 결국 천풍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이제,
천풍은 양쪽에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칠공에서 피를 흘릴 전라의 미녀 둘을 앉힌
채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천하인들이 단지 먼 발치에서나마 보기를 원하는 미녀들을 말이다.
문득,
"먹자...... "
천풍은 말하며 음식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길죽한 것을 불에 바짝 구운 것이었는데,
누릇하지만 매우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으적...... 으적.......
그는 씹자마자 삼키더니 다시 한 조각을 집었다.
서문여정은 도수아를 힐끔 보았다.
도수아는 천풍이 음식에 손을 먼저 대기를 기다렸다가 한 조각을 집어들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서문여정은 조심스럽게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워낙 배가 고팠기에 그것은 씹기도 전에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다시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무심코 천풍에게 물었다.
"무슨 고기인가요.....? "
천풍은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맛있느냐? "
"네....... "
"그럼 알려 하지마라......! 맛있으면 됐다! "
"........? "
서문여정은 괜시리 호기심이 일었다.
"말씀해 보세요.....! 궁금하잖아요.....? "
천풍은 먹는 것에 열중하며 도수아에게 명령했다.
"말해줘라.......! "
서문여정은 도수아를 바라보았다.
도수아는 막 한 조각의 고기를 입 속에 넣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뱀(蛇)! "
순간,
"........? "
서문여정은 눈을 더할 수 없이 크게 떴다.
"무..... 무엇이라고요......? "
도수아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못 들었나요......? 뱀이라고 말했어요.....! "
다음 순간,
"우욱...... "
서문여정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왈칵 뱉아냈다.
이어,
허리를 구부리고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웩...... 우욱....... "
아아.......!
뱀,
맙소사!
천하에서 가장 고결한 신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녀가 뱀고기를 먹다니.....
(우욱..... 뱀이라니..... 나쁜..... 나쁜 사람...... )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눈으로 천풍을 쏘아보았다.
순간,
"그만 두지 못해? "
도수아는 돌연 빽 소리쳤다.
".........? "
서문여정이 어리둥절할 때,
도수아는 그녀를 활활 타오르는 눈길로 쏘아보았다.
"아아......! "
서문여정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타오르는 눈빛 속에 경멸의 빛이 역력히 담겨 있음을......
도수아는 발딱 일어나며 외쳤다.
"이것도 엄연히 음식이란 말이야.......! 나와 공자께서도 먹고 있는...... "
흠칫,
서문여정은 몸을 떨었다.
"네가 우리보다 낫다는 말이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 호호.......! 나는 무림에선
무정옥녀라고 부르지..... 아느냐? 내가 보국대장군(補國大將軍)의
금지옥엽이라는 사실을..... "
도수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뼈저린 경험을 하였고,
천풍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남들이 먹는다면 나 또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수아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먹는 것을 네가 못 한다면 우린 짐승이란 말이냐? 너는..... 너는....
닷새 굶은 후에도 과연 이 뱀고기를 안 먹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아아.....!
깨달음이여.......!
서문여정의 얼굴에선 수치도 분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아..... 그렇다! 내 어찌 세인들과 같지 않고서 그들을 무림의 도탄에서
구하겠다고 망발하였다는 말인가.......? )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나 또한 인간이며.... 이들이 뱀을 먹는다면 나 또한 먹을 수 있거늘..... )
문득,
그녀는 천풍을 바라보았다.
일순,
(아아.......! )
그녀는 내심 탄성을 터뜨렸다.
착각이었을까?
한순간 얼핏 본 천풍의 뱀고기를 먹는 모습이 세속의 추함을 삼키고 고뇌를
속으로 삭히는 천신과도 같이 보인 것은.......
그의 모습은 해보지 않고서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었고,
더러움 속에 뛰어들어 보지도 않고서 더러움을 비웃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는 듯하였다.
문득,
천풍은 몸을 일으켰다.
이어,
밖으로 나가며 담담히 말했다.
"수아, 그녀를 너무 꾸짖지 말아라......! 그녀가 어찌 죽어보지 않고서 죽은 자의
고통을 알겠느냐......? "
순간,
"아아......! "
오오.......!
서문여정은 작은 가슴이 갈가리 터질 것 같은 깨달음의 희열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다.....! )
그녀가 다급히 천풍을 찾았을 때,
천풍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문득,
서문여정은 도수아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죽어 보았나요......? "
순간,
도수아는 방금 전과는 달리 활짝 웃어 보였다.
"물론이죠........! "
"누가..... 당신을 죽였나요......? "
"공자께서지요.....! 소녀는 그분을 하늘이라 여긴답니다......! "
"아아.......! "
한 번의 죽음은 한 번의 깨달음,
"뱀고기.... 이것은..... 그가 시킨 것인가요......? "
"그래요......!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였조......! "
기묘한 대화는 계속되었다.
"나의 오만함을...... 나의 무지함을..... 나의 허영을 죽이기 위해서.... "
"그래요.....! 소녀 또한 공자의 은혜로 모든 더러움을 죽일 수 있었지요....... "
문득,
서문여정은 얼마 전에 천풍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옷을 집어 던지라구.... 그럼 어느 곳을 가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
"그렇다! "
서문여정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내.... 거짓을.... 내 위선을 던지라는 말이었어....... "
그녀는 중얼거렸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것을 깨달은 그녀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맞아요.....! 당신은 금새 깨닫는군요......! 소녀는 그것을 깨닫기 위해 오 일
동안이나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
그녀는 알몸이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랬군요...... 그랬군요..... "
서문여정은 교구를 부들부들 떨었다.
깨달음에서 오는 전율이었다.
"공자께선 천하에 대천여래옥수엽(大天如來玉樹葉)을 지닐 사람은 한 사람
뿐이라고 말씀하셨죠..... 그 분은 무림을 구하실 분이라고.... "
도수아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계셨어...... 알고 계셨어..... )
"이것을....... "
서문여정은 도수아가 내미는 대천여래옥수엽을 무심코 받았다.
(아아......! 내가 만났던 분은 혹시 인간이 아니신 신이 아닐까......? )
그때,
도수아는 담담히 말을 했지만 서문여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무림을 이끌어 나가실 분은 강하셔야 한다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천하를 잘
아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
"아아.......! "
"그래야 천하인들은 참다운 무림맹주(武林盟主)를 얻게 될 것이라고..... "
돌연,
서문여정은 뱀고기가 담긴 음식그릇 앞으로 달려갔다.
"........? "
도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서문여정은 이미 한 조각의 뱀을 삼키고 있었다.
불과 일각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반 접시의 뱀고기를 말끔히 먹어치웠다.
도수아는 대경했다.
(아아.... 나는 공자께서 시키시기에 억지로 먹었거늘...... )
도수아,
그녀는 반을 깨달았고,
서문여정,
그는 완전히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도수아와 서문여정의 차이점이었다.
뱀고기를 모두 먹어치운 서문여정의 두 눈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 × ×
× × ×
별유천지(別有天地)와도 같은 곳,
도도히 흐르는 강가에 한 채의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정자,
그곳에 일남일녀가 언제부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청년,
전신에 검디 검은 묵의(墨衣)를 걸쳤으며,
양어깨에서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한 쌍의 극(戟)이 죽음의 빛(死光)을 흩뿌리고 있었다.
묵염쌍마극(墨炎雙魔戟)!
바로 그것이었다.
천하에 다시 없을 천하마병(天下魔兵),
천하사대마보(天下四大魔寶) 중에 하나인 그것,
청년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그는 주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죽음으로 뒤덮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은 숨을 죽였다.
쏟아지는 달빛도 그의 주위에 이르러선 죽음의 빛으로 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청년,
마유강(魔幽强),
바로 그였다.
그는 한 여인을 보고 있었다.
여인,
아니 아직 여인이라기 보단 소녀에 가까운,
대략 십 육 세 가량의 소녀였다.
헌데,
아아.......!
소녀의 용모를 보라!
눈처럼 흰 백의를 입었다.
등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그리고 유연한 몸매,
흐드러지는 달빛은 소녀의 모습을 가슴이 찡하도록 애처롭게 만들었다.
아아......!
빙기옥골지신(氷肌玉骨之身),
화용월태(花容月態),
침어낙안(沈魚落雁),
그 하질 것 없는 어휘들은 이미 이 소녀의 앞에서는 어의(語意)를 잃고 있었다.
하여튼 소녀의 용모는 감히 말로써 형용을 불허할 정도로 완벽절미했다.
헌데, 소녀의 두 눈,
유난히 검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어떤 알 수 없는 슬픔에 가득차 있었다.
소녀,
한 마디로 전신에서 보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슬프게 만드는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문득,
오랜 침묵을 깨고 마유강이 입을 열었다.
"소저.....! 나 마유강은 오늘 분명한 대답을 들어야겠소.....! "
대답?
소녀는 그의 말에 흠칫 교구를 떨며 강심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설사 천신이라도 눈물을 떨굴 정도로 애처롭게 보였다.
문득,
죽음만이 담겨 있던 마유강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것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허나 그는 곧 평소의 담담한, 즉 죽음 같은 눈빛을 되찾았다.
"분명히 말하겠소......! 내게는 천하를 얻을 힘이 있으며, 천하의 그 어떤 것이든
소유할 힘이 있소.......! 그런 내가.... 나 마유강이 그대 백리하(百里霞)에게
청혼하고 있는 것이오! "
오오........!
마유강,
그는 지금 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으며,
청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마천부주(魔天府主)인 그가 말이다.
헌데,
백리하!
아아.......!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취련옥선(翠戀玉仙) 백리하(百里霞).
아아........!
그렇다!
그녀가 바로 강호사옥녀 가운데 일녀인 취련옥녀 백리하였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는.......
심장이 약한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눈물을 떨군다는......
만약,
그녀가 눈물을 짓는다면 천신조차 통곡을 할 것이라고 세인들은 입을 모을
정도였으니.....
마유강,
이 죽음으로 심장을 무장한 희대의 사신(死神)이 취련옥선 백리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마유강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일..... 나는 소저의 대답을 들으러 오겠소.....! 유념해야 할 것은......
오늘의 청혼은 마천부주 마유강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인 마유강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오..... "
그 말을 끝으로 마유강은 어둠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정자 안에는 마유강의 마지막 말의 여운이 맴돌고 있었다.
오래..........
침묵과 시간이 흘렀지만,
취련옥선 백리하는 움직일 줄 몰랐다.
돌연,
"흑........! "
백리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흐느낌,
단지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모든 것은 와르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쏴아아.......
철썩...... 철썩.........
정자 아래의 강물도 흐느끼며 흘렀다.
백리하는 두 줄기 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아.......!
그 순간의 애조띈 그녀의 모습을 어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문득,
백리하는 울음섞인 중얼거림을 흘려냈다.
"흑흑.... 한 인간 마유강이라고요.......? 흑...... 어떻게 희대의 살인마가 말
한 마디로 순수한 범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
희대의 살인마,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내게 청혼해 온 방법 역시 천하를 질타하던 무자비한
방법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요......? "
백리하는 울먹였다.
"흑흑.....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
그녀는 와락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 백리하는 당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아니 사랑조차 느낄 수 없다는 것이예요.... "
미녀의 흐느낌,
"그런 말을 그대에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잔혹한 그대가 본 장에 보복을
할까 두려워서지요..... "
백리하는 밤과 함께,
깊고 깊게 슬퍼하고 있었다.
제 27 장에 계속
제 27 장 英雄과 英雄의 만남
문득,
서문여정은 고개를 흔들며 교구를 일으켰다.
"알 수가 없군요......! 허나 당신께서 배고파 하시니 소녀는 무창에서 당신의
구명지은(求命之恩)에 만분지 일이라도 갚도록 하겠어요! "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분을 무림정의를 위한 일에 기여하도록 하고 말 테다.....! )
× × ×
소문,
그것은 전 무창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아니,
전 무림의 영웅들을 상심하게 하였다.
취련옥선(翠戀玉仙) 백리하(百里霞),
× × ×
관 속,
그곳에는 한 소녀,
취련옥선 백리하가 누워 있었다.
그녀의 호흡은 이미 끊어진지 오래였다.
또한 심맥도 끊어진 상태였다.
허나,
(이 사람은 누구기에 내 죽음을 이다지도 슬퍼한다는 말인가......? )
그녀의 머리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머리마저 죽어 버린다면 그녀는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죽은 백리하가 머리만 살아 있다니......
(나는 여지껏 남자라면 가까이에서 대한 적이 없건만.... 헌데 이 사람은...... )
그녀는 눈도 뜰 수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뇌(腦) 뿐이었다.
그때,
천풍의 오열하는 곡성이 들렸다.
"꺼이.... 꺼이..... 사랑한다고......! 혼인하자고 그렇게 굳게 맹세해 놓고 먼저
죽다니..... 크흐흑......! "
백리하는 어이가 없었다.
(혼인하자고......? 내가.... 누구에게 그랬다는 말인가......? )
아아.......!
그녀는 머리까지 죽었더라면 이 터질 듯한 머리의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천풍,
문득,
그는 한 가지 기이한 것을 느꼈다.
(죽지.... 않았다.....! 이 관 속에는 누군가 누워 있기는 하지만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
오오.......!
이것은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관이란 죽은 사람만의 점유물이거늘,
어찌 산 자가 누워 있다는 말인가?
(으음..... 관 속에는 분명 여인이 누워 있다......! 호흡이 끊기고 심맥이
끊어진 상태다......! 후후..... 허나 나를 속일 수 없다.......! 이것은
묘강산(苗疆産) 십야환혼사령단(十夜還魂死靈丹)을 복용한 상태와 한 치의
어김도 없다.....! )
아아......!
십야환혼사령단!
그것은 천하에 알려지지 않은 묘강의 원주민들 사이에 비범으로 전해 내려 오는
비약이 아닌가?
그것은 이름 그대로 일단 복용하면 전신에 모든 것이 일시에 마비되어 호흡과 심맥이
끊어진다.
전신에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오직 머리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머리마저 죽는다면 그것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십야(十夜),
십야환혼사령단을 복용하면 십 일 동안 죽었다가 다시 멀쩡하게 살아난다.
헌데,
관 속의 소녀,
취련옥선 백리하,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그 묘강의 비약을 복용했다는 말인가?
천풍은 마유강의 표정을 힐끗 살피며 내심 차갑게 웃었다.
(후후..... 짐작할 수 있겠다.....! 일이 정말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
짐작?
천풍,
과연 그는 무엇을 짐작했다는 말인가?
제 28 장에 계속
천풍,
그는 벌써 수십 잔의 술을 비우고 있었다.
허나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정신은 오히려 더욱 말똥말똥 해졌다.
그는 마유강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기실 암암리에 그의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유강은 무심히 천풍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의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이하게 변해 갔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저놈에게선 조금도 적의를 느낄 수가 없다.....! )
그렇다!
웬일인지 그는 천풍에게서 조금의 적의나 살심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저놈은 필경 범상한 신분이 아님은 틀림없다.........! 이대로
헤어진다면 이후 저놈은 나 마유강의 가장 골치아픈 상대가 될 것이다......! )
그것 역시 떨칠 수 없는 그의 내심이었다.
그는 천풍의 감춰져 있는 그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류의 것이었다.
천풍,
그는 생각했다.
(마유강......! 으음.... 과연 천하를 마도천하로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마웅다운
기개를 갖추었다......! 허나,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마기로 일렁이는
눈빛은 그의 진심이 아니다......! 혹독한 수련이 그를 단지 그렇게 만들었을 뿐,
그의 눈 깊은 곳에는 극도의 외로움이 감춰져 있다.......! )
천풍은 침음했다.
(으음..... 어쩌면 이것은 나와 동류(同類)의 고독감인지도 모른다.....! 마유강......!
황야(荒野)에 버려진 늑대(狼)의 처절한 고독에 휩싸인 마웅...... )
천풍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후후..... 마유강, 나 천풍이 많은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부러워하느냐......? )
순간,
마유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천풍의 눈빛을 보았다.
추수처럼 맑고 깊으며,
상대의 심혼을 빨아들일 듯한 신비함이 깊숙이 감춰져 있었다.
그는 읽었다.
천풍의 눈을 통해 그의 진정한 내심을.......
(하하..... 마유강! 내가 진정 행복한 놈이라고 여기느냐......? 너는 많은 음식을
먹었다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많은 여인에게 둘러싸여
있으므로 행복하다면 너 마유강 또한 천하를 얻었기에 행복할 것이 아니냐......?
헌데 어찌 외롭다 여기는 것이냐? 그것은 나와 같다. 내가 여인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도 그와 같지 않겠느냐.......? )
"으음...... "
마유강은 묵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돌연,
그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순간,
스스스!
그의 신형은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순식간에 아득한 곳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섬전이 바람에 묻혀 쏘아가는 듯한 가공할 절세신법이었다.
사혈마노는 살광을 폭출시키며 천풍을 쏘아 보았다.
"천풍....! 네 이름을 기억해 두겠다.....! 노부의 사망영부(死亡令簿)에 말이다..... "
천풍은 마유강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
"으으...... "
"으음....... "
사혈마노는 그의 눈빛을 접한 순간 부지중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천풍의 눈빛,
아아.......!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태양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니,
우주, 그 자체를 보고 있는 듯하였다.
천풍의 눈빛은 담담하며 고요했으나,
그들은 그 속에 태양과 우주가 들어 있음을 알았다.
"으으..... 이런 눈빛이..... "
"이... 이건..... 신의 눈빛이다...... "
천하를 진저리치게 했던 그들의 입에서 어이없게도 이시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천풍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가라......! "
다음 순간,
부르르.....
사혈마노는 거짓말처럼 뒷걸음치더니 한순간에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서문여정,
그녀는 방금 전에 눈 앞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천풍,
그가 마천부주 마유강과 평수(平手)를 이루었다는 사실과,
그의 가공할 기도에 공포의 사혈마노가 꼬리를 말고 도주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천풍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도수아나 모용익도 마찬가지였다.
구경꾼들은 멀리서 두려운 듯 천풍을 주시하며 수근거렸다.
"천풍.....! 저 미청년이 천풍이야...... "
"아아..... 혈월막의 살수들의 수급을 성루에다 매단 천풍이야...... "
"오오....! 그가 마유강과 평수를 이루다니..... 남창의 풍야(風爺)가..... "
천풍의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중원인으로서는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허나,
그는 무공방면 보다는 기지와 풍류(風流), 괴퍅한 사건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천하의 마유강과 평수를 이룬 것이다.
천풍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아앗.......! 하아(霞兒)! "
대청의 구석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구석,
그곳에는 취련옥선 백리하의 부친이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관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
"글세 말이야.......? "
허나,
천풍,
그는 알고 있었다.
(후후.... 백리장(百里莊)의 장주인 백리승(百里昇), 나는 당신의 속을 좀 태워야
되겠소....! 그것은 당신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나의 징계이오..... )
백리승,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선비였다.
지극히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그,
천풍은 묵묵히 몸을 돌렸다.
서문여정 등도 그를 따랐다.
수많은 사람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천풍의 앞길을 터주었다.
천풍은 신비한 미소를 입가에 담고 백리장을 떠났다.
그의 등 뒤로 백리승의 넋나간 외침이 들렸다.
"죽었어......! 하아가 죽었어......! 하아가........ "
수많은 사람들이 그 외침에 대답했다.
"아가씨는 분명히 죽었소.....! 장주께서도 아시고 계셨지 않소......? "
"그렇습니다......!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것은 전 무림이 슬퍼할 일이지요.... "
"아아.... 취련옥선이 죽었다...... "
취련옥선 백리하,
그녀는 산 듯이 죽어 있었고,
죽은 듯이 살아 있었다.
천풍은 거리를 걸어가다 돌연 대소를 터뜨렸다.
"우핫핫핫핫.......! "
서문여정과 도수아, 모용익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들은 혹시 천풍이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랴?
천풍은 이 순간 사색으로 변한 백리승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음을.......
제 30 장에 계속
제 30 장 逆天의 章
부상제일인 태무랑,
역사의 찬란한 한 장을 장식한 절대고수,
그의 진전을 천풍이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전 중원은 천풍으로 인해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요란했다.
× × ×
× × ×
은의사미랑(銀衣死美郞),
그는 지금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몹시 흥분해 있었다.
장강(長江) 이북의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한 빙혈천궁(氷血天宮)의 세력은 눈
덩이처럼 커저 암암리에 장강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빙혈천궁은 무림제패라는 과제를 매우 낙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현재 세력은 가히 십오대문파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빙혈천궁이 무림을 제패하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수근거릴 정도인 것이다.
허나,
은의사미랑은 언제부턴가 몹시 침울해 있었다.
그의 내심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거 냉설화(冷雪花)라고 불리웠던 벽월(碧月)뿐이었다.
빙옥대공자(氷玉大公子),
은의사미랑의 진정한 신분,
벽월은 원래 그의 정혼녀가 아니었던가?
헌데,
중원의 기밀을 알아내라고 삼 년간 중원에 머물러 있게 하였더니,
아아......!
어느새 한 남자를 사랑해 버리고만 것이다.
빙옥(氷玉),
× × ×
"크아----- 악! "
"캐에----- 엑! "
피(血),
차라리 아름답기까지한 핏방울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후두둑........!
십여 명의 혈의인들이 낙엽처럼 그 핏물 위에 나뒹굴었다.
그들의 가슴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혈향과 함께 선혈을 뿜어내고 있었다.
절명,
즉사한 것이다.
순간,
"우욱....... "
허파짓이기는 듯한 묵직한 신음성이 들렸다.
아아.......!
한 명의 묵의중년인,
대략 삼십 오륙여 세 가량의 인물,
그의 수중에는 아무런 광채도 뿜지 않는 거무튀튀한 묵검(墨劍) 한 자루가 힘겹게
쥐어 있었다.
묵의중년인과 묵검,
아아......!
그는 바로 묵혼(墨魂)이었다.
묵혼,
그가 어찌.......
헌데,
그의 옆구리,
오오.......!
처참하리만큼 잔혹하게 뜯겨 나갔다.
검이 박혀 옆구리를 헤집어 놓은 듯,
엄중한 중상이었다.
한 자 이상이나 찢겨져 나간 상처에선 검붉은 선혈과 함께 내장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크으으...... "
묵혼은 씹어뱉 듯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그는 현재 검을 들 힘도 없는 상태였다.
방금 핏물 속에 몸을 눕힌 열 명,
그들을 거꾸러뜨린 것이 묵혼으로서는 마지막 사력이었다.
묵혼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딛는 걸음마다 핏물이 홍건하게 고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문득,
그는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뇌까렸다.
"크으..... 나.... 묵혼은 이미.... 알고 있었다....... "
...........?
그는 손으로 쏟아지려는 내장을 쑤셔막으며 입술을 씩룩거렸다.
"흐흐..... 내가 막주의 조건을..... 십오대문파 수석장로의.... 우욱...... 수급을....
베면 그녀.... 하연과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던..... 크으으..... "
조건,
십오대문파의 수석장로의 수급과 여인의 교환,
"허나... 나.... 는 처음부터..... 막주.... 그놈을 믿지 않았다..... 허나....
나는..... 십오대문파의 수석장로들을.... 죽였고..... 막(幕)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그것은.... "
묵혼은 죽어 있는 혈의인들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내.... 사랑이.... 생명보다.... 소중한 사랑이.... 그곳에..... 막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연...., 그녀가..... 으으..... "
그가 걸음을 옮기는 것은 거의 초인적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이미 생을 포기해야 했을 텐데,
그에게는 죽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죽어서는 안될.......
"크으으.... 막주.....! 이 비열한 놈..... 나 하나를 죽이기 위해 무려....
삼십 개의 함정을 만들어 놓다니...... "
순간,
"크흐흐...... "
그는 웃었다.
웃음,
그것은 피를 토해내는 것이었고,
심장을 쪼개는 것이었다.
"흐흐..... 하나 나는 이렇게..... 탈출했다..... 삼백 명의 혈월막 살수들을 베어
넘기고..... "
삼백 명의 혈월막 살수를 베고.......
"흐흐..... 나를..... 혈월막 사대살수(四大殺手) 중에서도 가장 강한 나를 일찍
알았어야 했다......! 흐흐..... 그들 세 명이 동시에 덤벼도 나를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우욱..... 허..... 허나..... "
그는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뭉클뭉클.......!
옆구리에서는 그의 한(恨)처럼 선혈이 쏟아졌다.
"그...... 아이만 아니었다면..... 그 아이만..... 크으윽...... 비열한 놈들.....
그 아이를 앞세우다니....... "
그 아이라니?
묵혼은 사력을 다해 지친 몸을 일으켰다.
"미.... 려(美麗)..... 그 아이의..... 검은 막을 수가..... 없었다...... "
살수의 막음이란 상대를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다.
헌데,
미려,
묵혼,
아아........!
그녀의 검을 막을 수가 없었다는 말인가?
문득,
묵혼은 한 얼굴을 떠올렸다.
몹시 보고싶은 얼굴이었다.
웬지 정이 끌리던,
그래서 그를 죽음에서 구했고 일초검식을 전수해 주었던.....
천풍,
그가 생각난 것이다.
순간,
묵혼의 일그러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려.... 그 아이와 천풍 그..... 놈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 었는데... "
강미려와 천풍,
허나,
묵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건 있을 수 없는 망상.... 일 뿐..... "
그는 천풍의 어떤 한 마디를 기억해 냈다.
---만약 당신이 혈월막의 인물이라면 다음에 만날 땐 죽여 버리겠소.......!
묵혼은 묵검으로 몸을 지탱하여 걸음을 옮기며 쓰디쓰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 놈이 나의 죽음을 원한다면.... 기꺼이 죽어 주리라.... 단지.....
막주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 "
피,
묵혼은 피를 뿌리며 쓰러질 듯이 핏빛 노을 속으로 걸어갔다.
핏빛 노을 속으로........
× × ×
소하연(素河娟),
바로 그녀였다.
혈월막의 내자(內子)인 그녀,
헌데,
그녀가 탈출을 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헌데,
더욱 기이한 것은,
혈월막주,
그의 표정이 전혀 동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도리어 그녀가 탈출한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문득,
혈월막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
순간,
스슷.......!
오체투지했던 혈의인은 부복한 자세 그대로 뒤쪽으로 미그러져 그대로 사라졌다.
그것은,
혈월막의 일개 살수가 지니고 있는 일신절기의 한 가지일 뿐이었다.
혈월막주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잔혹악랄하며 음사(陰邪)한 것이었다.
마치 먹이를 궁지에 몰아넣고 어떻게 죽일 것인지의 변태적인 방법을 궁리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문득,
"천옥(天玉). "
그의 나직한 부름에,
"명을 받듭니다.......! "
담담한 듯하며 공손한 음성이 혈월막주의 우측에서 들려왔다.
백의중년인(白衣中年人),
일신에는 눈처럼 흰 백의를 입었으며,
용모 또한 준수하며 마치 여인처럼 뽀얀 살결을 지닌 인물이었다.
천옥,
혈월막 사대살수 중에 일 인이었다.
혈월막주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들었느냐........? "
천옥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들었습니다....... "
"좋아.... 너는 곧 수하를 풀어 그녀의 뒤를 추격한다. 흐흐...... "
"....... "
"그 계집이라면 묵혼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놈이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문득,
천옥의 두 눈에서 찰나간에 번쩍 기광이 뿜어졌다.
"사냥입니까.......? "
사냥!
"흐흐...... 그렇다! 원래 십 육 년 전에 했어야 할 사냥이었다...... "
십 육 년 전,
"흐흐..... 본좌가 묵혼의 계집이었던 그년을 취한 뒤..... 그 계집은 언제나
본좌를 독살할 기회를 노려왔었다.......! 그년은 단 한 번도 잠자리에서
본좌를 남자로써 대한 적이 없었다..... "
혈월막주의 두 눈에서 분노에 찬 화염이 이글거렸다.
"흐흐...... 본좌는 그 계집의 육체는 얻었으나...... 그 계집을 완전히 얻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그 계집이 본좌에게서 도주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흐흐흐..... 그 시기가 닥친 것이다! "
천옥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수하 삼백을 풀어 사냥을 시작한다......! 소하연, 그 계집이 절대 눈치채지
않도록 그 계집의 주위 삼십 리 이내를 완전히 차단한다......! "
"알겠습니다.......! "
"수하 삼백의 우두머리로는 미려를 삼는다......! "
"소막주(小幕主)를........? "
혈월막주는 득의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크핫핫핫......! 멋있지 않느냐? 천옥! 그들의 여식이 그들의
숨통을 죄이다가 죽음을 당한단 말이다......! 그들 두 년놈이 낳은
딸자식의 손에 말이다.....! "
천옥의 눈에는 어떤 변태적인 살광이 이글거렸다.
"쿠캇캇캇.......! "
혈월막주는 대전이 떠나가라 광소를 터뜨렸다.
천옥은 그 어떤 참을 수 없는 기대감에 눈을 번들거렸다.
돌연,
뚝!
혈월막주는 광소를 멈추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사요(邪妖).......! "
다음 순간,
스르르르.......
돌연,
대전 가득이 살랑이는 미풍이 부는가 싶더니 한 줄기 그윽한 향기가 풍겨왔다.
찰나,
"불러 계십니까........? "
향기가 코 끝에 전해짐과 동시에 듣는 이의 숨이 넘어갈 듯한 요기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이어,
스스스......
혈월막주의 좌측에 한 명의 자의소부(紫衣少婦)가 홀연히 나타났다.
사요,
혈월막 사대살수 중에 마지막인 사요였던 것이다.
그녀의 용모는 천하에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절륜했다.
단지,
두 눈가와 입가에 음탕함과 사악함이 맴돌고 있다는 것이 흠이었다.
허나,
그것은 그녀가 마음 먹기에 따라 감쪽같이 지울 수 있었다.
그녀는 사요,
사요였기 때문에......
혈월막주는 명령했다.
"천풍, 그 놈이 무창에 있다! 그놈을 죽이고 벽풍천중검을 탈취하라.....! "
사요는 날아갈 듯이 절했다.
"명을 받듭니다........! "
"수하 오백으로 그놈의 숨통을 막아라! "
"물론이예요......! 그놈은 지령(地令)을 죽인 찢어죽일 놈이 아닌가요? "
그녀는 교태를 부리며 풍만한 육체를 기묘하게 꼬았다.
혈월막주는 기묘하게 웃었다.
"실수가 없어야 한다......! 벽풍천중검은 소성주(小城主)께 진상할 것이니 말이다..... "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사요를 믿으세요...... 호호...... "
드넓은 대전에 사요의 요기로운 교성이 파도처럼 퍼져갔다.
헌데,
혈월막주가 말한 소성주란 누구를 일컫는 것인가?
벽풍천중검을 그에게 진상할 것이라니.......
그렇다면.......?
그렇다면........!
변수(變數)!
그것의 하나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제 5 권
저 자 : 冷河祥
출판사 : 민 우 사
연 도 : 1984. 09. 18
타이핑 : 나우 ID(추녀) 김진호
제 31 장 運命에 희롱당한 美女
제 32 장 風哥哥
제 33 장 분노의 章
제 34 장 뜨거운 友情
제 35 장 憤 淚
제 36 장 神이여, 나를 동정하소서
제 37 장 짓밟힌 運命과 순결의 所産
제 31 장 運命에 희롱당한 美女
× × ×
백리장(百里莊),
모든 문상객들이 모조리 돌아간 후,
백리장주 백리승은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 슬픔은,
결코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딸의 가짜죽음에는 구름처럼 많은 문상객들이 찾아와 진심으로 슬퍼해 주었지만,
딸의 진짜 죽음에는 아무도 슬퍼해 줄 사람이 없었다.
모든 문상객들이 돌아간 후에야 백리장은 진짜 초상을 치르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벌써 사흘이 지났고,
내일이면 취련옥선 백리하는 저 차가운 땅 속에 묻혀야 하는 것이다.
백리승은 자신이 생각해낸 십야환혼사령단은 완벽하리라고 믿었다.
허나 그것이 자신의 딸을 죽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어도 그는 십야환혼사령단이 잘못되어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상심에 빠진 채 사흘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딸을 죽였다고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장,
괴괴한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남들은 알지 못할 슬픔에 쌓여 있었다.
돌연,
스스스......
한 줄기 미풍이 장의 서쪽으로 불었다.
미풍,
그것은 단지 미풍이었을 뿐이었다.
관,
그 속에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한 여인이 죽은 듯이 살아 있었다.
운명이 이름하기를 취선옥련 백리하라 명명한 절세소녀,
문득,
스스스.....
한 줄기 미풍이 살랑이는가 싶더니,
"후후...... "
관 앞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사흘 내내 백리장주가 관을 떠나지 않아서 기회가 없었지....... "
담담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칠 척의 후리후리한 체격,
검날 같은 눈썹에 추수처럼 맑고 서늘한 눈을 지닌 절세미장부,
바로 천풍이었다.
천풍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관을 내려다 보았다.
"후후.... 처음부터 그녀가 취련옥선이란 것을 알았다면 난 그녀의 생전
정혼자라고 사칭(詐稱)하진 않았을 것이다.....! "
그는 몸을 굽혔다.
이어 천천히 관뚜껑을 열었다.
순간,
시체,
모든 사람들이 시체라고 인정한 한 소녀의 청순한 얼굴이 나타났다.
한 번 가짜로 죽었으며,
다시 가짜로 죽은,
천풍이 살리지 않으면 영원히 죽어야 할 취련옥선 백리하인 것이다.
백리하의 미모는 확실히 대단했다.
누가가 검은 것이 몹시 슬퍼보였으며 한 번 본 사람이면 죽을 때까지라도 잊지
못할 경국지색의 미모였다.
천풍은 히죽웃었다.
"ㅋㅋ......! 과연 마유강 그 놈이 탐낼만 하군....... "
이어,
두 손을 쭉 뻗었다.
"제기랄..... 금침을 꼽을 때처럼 간단하면 얼마나 좋을까.......? "
그는 투덜거리며 백리하의 전신을 세밀히 더듬기 시작했다.
"후후..... 쇄심새혈반유대법(碎心塞血返幽大法)을 이렇게 써먹다니..... "
쇄심새혈반유대법,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 한 명 뿐이다.
천기노인,
바로 그 뿐인 것이다.
쇄심새혈반유대법이란 도합 삼백 육십 다섯개의 금침을 사용하여 사람의 전신 심맥과
혈맥을 일시간 봉쇄하는 기상천외한 대법이었다.
전신에 박힌 금침음 삼백 육십 다섯 군데의 혈맥 속에 파고들어 전신의 모든
기능을 일시에 마비시킨다.
쇠털보다 백 배 가는 금침이 혈맥을 차단하고 있는 상태기 때문에 금침을 뽑는 것은
시전할 때보다 만 배나 어려웠다.
그 무렵,
천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백리하의 소복을 거의 벗기고 있었다.
옷을 벗겨야지만 금침을 뽑을 수 있는 것이다.
한순간,
"으음..... "
천풍은 묵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백리하,
그녀의 나신이 드러난 것이다.
강호사옥녀(江湖四玉女) 중에 일녀인 그녀의 나신,
오오......!
더이상 무슨 미사여구로 그녀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나신을 표현하랴?
백리하는 여전히 곧게 누워 있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이......
구름 같은 흑발이 은은히 어깨를 덮었으며,
옥을 깎아 다듬은 듯한 우아한 목덜미는 흐드러지는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동그라한 어깨와,
아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두 개의 능선,
한 손으로도 다 못 쥘 듯한 풍만함이었다.
젖가슴 끝에 수줍게 매달린 연보라빛 유실,
건드리면 금시 꽃잎처럼 떨어지고 말 듯 교교하다.
그리고......!
반듯하게 두 손이 올려진 버들허리,
그 아래......
아아......!
갑자기 좌우로 확산되며 팽팽한 긴장으로 뭉쳐진 둔부,
그것은 결코 인간의 뼈와 살로 이루어졌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현란한 허벅지,
그 모든 것들이 감싸듯 쓸어안을 태고의 신비림,
슬픔에 젖어 있는 극치미가 그곳에 도도히 숨쉬고 있었다.
문득,
천풍은 한차례 크게 심호흡했다.
"흐음......! 내가 정신을 잃어서야 어찌 이 아름다운 몸의 임자를 살릴 수
있겠는가......? "
그는 두 손을 내밀어 그녀의 나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아.......!
감촉이여......!
심산유곡에서 유유히 흐르는 계류(溪流)에 손을 담근 듯,
펄떡이는 은어를 막 물에서 건져낸 듯한 신선함이여!
천풍은 두 손 끝이 가늘게 떨렸다.
"제기랄.....! 나 천풍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말인가.......? 이따위 뼈에다
살가죽을 입혀놓은 것을 보고 손이 떨리다니..... "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의 나신을 쓰다듬 듯이 더듬었다.
순간,
스슷.......!
스읏.......!
경미한 음향과 함께 그의 손끝에 다려나오는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리하의 전신경맥을 막고 있던 금침이었다.
천풍의 손은 안가는 곳이 없었다.
젖가슴......
허리......
아아..... 둔부의 풍성함,
그리고.......
그리고.... 거기....... 그곳........
천풍은 약 일 다경이 지나서야 금침을 모두 뽑아낼 수 있었다.
"휴우..... 제기랄, 나 천풍이 다시는 여자에게 이따위 대법을 펼치면 사람이 아니다! "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ㄸ으며 연신 투덜거렸다.
문득,
그의 얼굴에 곤혹한 표정이 가득 떠올랐다.
"어쩐다.....? 이제 이 소녀를 깨우려면 추궁과혈을 시전해야 하는데...... "
오오..... 맙소사!
추궁과혈이라니,
그럼 백리하의 전신을 마구 주물러야 한다는 말인가?
천풍은 한참이나 전전긍긍하다가 비로소 손을 내밀었다.
"후후..... 내가 망설이다니.... 이건 전혀 나답지 않은 짓이야...... "
이어,
마치 떡반죽을 하듯 백리하의 섬세한 전신을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반각의 시간이 흘렀다.
천풍의 이마에 조금 전보다 더 많은 땀방울이 맺혀졌다.
(이제 됐다....... )
천풍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막 손을 거두려 하였다.
헌데 돌연,
"앗! 누구냐......? "
느닷없이 그의 등 뒤에서 다급한 외침성이 터진 것이다.
(이런..... 하필 이럴 때......! )
천풍은 나타난 사람의 음성만 듣고서도 그가 백리승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렇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백리승이었으며,
그는 내일이면 묻힐 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밤늦게 왔던 것이다.
헌데,
마른 하늘에 청천벽력이지,
기구하게 죽어서 더욱 한맺힌 딸에게 해괴한 짓을 벌이고 있는 괴한을 발견했으니......
백리승은 자신이 무공을 모른다는 사실도 잊은 채 벼락같이 달려 들었다.
"이놈.....! 인간으로서 어찌 그런 짓을...... "
그는 관뚜껑이 열렸으며 그 안에 누운 백리하의 나신을 천풍이 마음껏 주물럭거리는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는 구르듯이 천풍의 등 뒤로 덮쳐갔다.
천풍은 옆으로 스르르 미끄러지며 뒤로 돌아섰다.
그의 앞에 두 눈에 분노의 화염을 담고 있는 백리승이 곧 덮쳐들 기세로 서 있었다.
백리승은 딸의 나신을 힐끗 보며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이..... 이놈.....! 저 아이의 죽음으로 노부 또한 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다!
네놈을 죽이고 노부도 죽겠다......! "
그는 전후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제기랄......! 일이 이상하게 꼬였군......! )
천풍은 쓴웃음을 지으며 훌쩍 창틀 위에 올라섰다.
"잠깐 진정하고 내 말을 들으시오. "
"말은 무슨 말......! 네놈을 죽일 테다.......! "
백리승은 막무가내였다.
그가 다시 천풍을 덮쳐갔을 때,
(으음..... )
관 속의 백리하는 전신을 가늘게 떨며 깨어나고 있었다.
(나..... 나는 어찌된 것인가......? )
그녀는 깨어나며 제일 먼저 한 사람의 음성을 떠올렸다.
(그..... 그렇다! 그 사람이..... 날....... )
그녀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아.......! )
움직였다.
(내가 움직이는 것이 저승에서인가......? 아니면.......? )
순간,
"잠깐, 백장주......! 내 말을 들어 보시오.......! "
한 음성이 그녀의 고막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 음성은 그녀가 죽어서 한 줌 흙이 된다 해도 기억할 수 있는 음성이었다.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이다.....! 내가 깨어나면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사람..... 아.... )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때,
"닥쳐라! 악적! "
창노한 노갈이 터졌다.
(아..... 아버님...... )
순간,
휘익!
한줄기 바람소리가 났다.
천풍,
그는 신형을 날려 사라지며 말했다.
"당신 딸의 몸조리나 잘 시키시오......! "
".........? "
백리승이 어리둥절할 때,
"아아.... 가지 마세요.....! "
그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터졌다.
"........? "
백리승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찰나,
"아아..... 하아아...... "
그는 눈을 부릅뜨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렇다!
죽어 있어야 할 백리하가 눈물을 뿌리며 대청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
그는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가지 마세요..... 상공! 가지 마세요......! "
백리하는 대청 밖의 땅바닥에 쓰러져 오열했다.
"흑흑...... 가지..... 마세요..... 흐흑...... "
그때,
먼 곳에서 천풍의 아련한 음성이 들렸다.
"하하..... 낭자! 마유강, 그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외다......! 그와 잘 사귀어
보구려..... "
아아......!
음성,
음성이여!
× × ×
제 32 장 風哥哥
먼 길,
그 먼 길의 의미를 서문여정과 도수아는 다음 날 아침에야 알았다.
"헤어진다고요..... "
도수아는 안색마저 헐쑥하게 변해 중얼거렸다.
천풍은 느긋했다.
"왜? 헤어지면 좋지 뭘 그래.... 내가 지겹지도 않아? "
"무.... 무슨 말을...... "
도수아는 금시라도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서문여정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헤어져야할 것인데..... )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착잡했다.
(나는 이 달 보름 때까지 소림사에 갔다가 다시 그믐에 열 네 명의 사형제들을
만나야 하지 않은가...... )
그녀는 애써 감정을 억제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윽한 시선으로 천풍을 바라보았다.
"상공께선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
천풍은 히죽 웃었다.
"나야.... 원래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 어디로 가든지 잠잘 곳이
없을까? "
"....... "
문득,
서문여정은 여태껏 전혀 느낀 적이 없던 천풍의 이면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코 끝을 찡하게 만드는 고독(孤獨)이었다.
(그랬었어..... 이 사람은 겉으로 가장 행복한 듯이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고독한 사람이었어..... )
그녀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사람은....... )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여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 서문여정에게 무림맹주로서의 기품과 깨달음을 얻게 해준 사람.... )
문득,
그녀는 자신이 천풍을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어마......? 내가 왜....... )
허나,
그녀는 곧 자신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저 사람은 내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나는 단지 그것 때문에..... )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가 없었다.
그때,
천풍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럼 잘들 가라구...... "
"아아...... "
도수아는 마침내 방울방울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가시다니..... 이렇게..... 허무하게..... )
그녀는 멀어지는 천풍에게 외쳤다.
"언제....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천풍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하하.....! 글쎄.... 어쩌면 우린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 할지도 모르지.... "
그 말에 도수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주..... 죽을 때까지..... 아아..... "
그 사이 천풍은 더욱 멀어졌다.
문득,
천풍은 이십여 장 밖에서 몸을 돌리고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수아, 나는 하마터면 잊을 뻔했구나......! 너는 품 속의 물건을
조심하거라......! "
(품 속에 물건.....? )
도수아는 재빨리 품 속에 손을 넣었다.
순간,
손 끝에 와 닿는 뭉툭한 물건이 있었다.
(........? )
그녀가 그것을 꺼내려 했을 때,
천풍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네가 내게 말해 준 증세대로 해약을 만들어 보았는데..... 아마 효험이 있을 것이다! "
순간,
도수아는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아......! 언제 이것을..... "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의 품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황제이신 륭경제(隆慶帝)의 밀명으로 그녀가 강호게 나온 목적과 같은 것이었다.
천기노인(天機老人)을 만나 황궁으로 데려오는 것,
그 이유는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당해 있는 기이한 만성지독의 해약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헌데,
그녀가 황제의 밀명을 이행하지 못해 근심하고 있을 때,
천풍은 어느새 해약을 만들어 그녀의 품 속에 넣은 것이다.
"어떻게..... 해약을...... "
꿈,
그녀는 이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허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수줍게 한 것은 천풍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힐 때쯤,
천풍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수아는 소리쳤다.
"상공! 꼭 한 번 금릉(金陵)의 장군부(將軍府)에 오셔야 해요.....! "
"............ "
허나, 대답은 없었다.
"아아...... "
그녀는 갑자기 다리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모용익,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천풍.......! 그라면 혼란한 무림을 위해서 큰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
그는 천풍의 인간됨이나 그의 신적인 능력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의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천하을 질타하여 모든 것을 우습게 여기는 허허로운 성격......! 허위와 위선에
가득찬 천하인들을 조롱하는 듯한 행동과 말...... 아아.......! 나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배ㅇ다......! )
그것은 모용익의 진심이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들어 서문여정을 돌아 보았다.
순간,
그는 흠칫했다.
"소저.......! "
서문여정,
아아......!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으며,
호수처럼 맑은 두 눈에는 뽀얀 안개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생각했던 것은..... 그가 나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
그녀의 말에 모용익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소저...... "
(아니었어...... 아니었어...... )
아아.......!
서문여정,
그녀는 간신히 천풍에게 기울어지는 마음이 단지 그가 자신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었다.
헌데,
막상 천풍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찾아든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폭풍처럼 휘감았다.
그리고,
어떤 엄청난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돌연,
"상공.......! "
그녀는 하늘도 놀랄만한 외침을 터뜨리며 천풍이 사라진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휘----- 익!
천풍은 그녀의 외침에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넓은 가슴으로 섬세한 서문여정의 교구가 안겨 왔다.
"상공.... "
천풍은 얼떨결에 그녀를 마주 안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
서문여정은 다시는 그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깊게 파고 들었다.
그리고 돌연,
"사랑해요.....! 소녀의 말을 아시겠어요......?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
"........ "
"소녀의 말을 못 알아 들으시겠어요.....? 소녀는.... 천풍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예요......! "
천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 "
"방금.....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
"으음.......? "
"당신이 같이 계실 때에는 몰랐는데..... 당신이 떠나시니 미칠 것만 같았어요.... "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중얼거렸다.
"하하...... "
천풍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아주 웃었다.
"핫핫핫......! 자신이 있느냐? "
"........? "
"나 천풍을 사랑할 자신이 있느냐는 말이다......! "
서문여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예요....! 소녀는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할 자신이 있어요.....! 당신의
개구장이 아이를 낳을 자신도 있구요..... 또..... "
그녀는 점점 고개를 더 숙이며 기어들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 당신이 흘리신 피 한 방울까지도 사랑할.... 자신이
있어요.... "
당신이 흘리신 피 한 방울까지도......
순간,
"푸핫핫핫.....! 여정! 여정! 나는 방금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났다! "
"무.... 무엇인가요......? "
향후 무림맹주가 될 여인은 그저 한 명의 소녀가 되고 있었다.
"푸핫핫....!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
"아아......! "
순간,
천풍은 서문여정을 번쩍 안아올려 허공에서 팽그르르 돌렸다.
"하하하......! 여정! 사랑한다! "
"호호호......! 풍가가(風哥哥)! 사랑해요.........! 죽도록...... "
이로써,
천둥벌거숭이 천풍을 풍가가라고 부를 수 있는 여인은 세 명이 되었다.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멀리서 도수아는 입술을 삐쭉거렸다.
(내가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건데...... )
× × ×
사해일신검(四海一神劍) 악효균(岳孝龜),
그는 점창파(點蒼派)의 영재로서 무림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왜냐면,
그는 지난 십 년 동안 어떤 은밀한 곳에서 고된 수련을 받고 이제야 강호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림 십오대문파에서 뽑은 십오 명의 영재들 중에 일인이었다.
그는 한적한 관도를 극상승의 신법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 신법은 소림의 비전신법인 달마유행보(達磨流行步)였다.
슈우우우-------
그의 신형은 섬전과도 같이 질주하였다.
(빨리 본파로 돌아가 예정된 백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무림맹(武林盟)이 발족되는
운검평으로 가야한다........! )
그의 신형은 하나의 점으로 화해 아스라이 사라졌다.
그 순간,
스스스------
방금 그가 지나간 곳에 세 명의 화상들이 나타났다.
육십여 세 가량의 노화상들,
그들은 소림사의 삼대제자로서 신법에 조예가 깊은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신형을 질주시키며 힐끗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빈승은 악시주가 혈월막의 첩자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 "
아아.....!
그렇다면,
점창의 사해일신검 악효균이 바로 혈월막의 첩자였다는 말인가?
"아미타불..... 빈승도 그리 생각하지만.... 사존께서 그를 엄밀히 감시하라 하셨으니.... "
"우리는 단지 그가 누구를 만나는 것인가만 알면 되는 것인데...... "
"그렇지....... "
세 화상의 신형을 사해일신검 악효균이 사라진 방향으로 빛살처럼 쏘아갔다.
순간,
"흐흐흐.... 어리석은 놈들...... "
음침사악한 음소와 함께 장내에 두 명의 혈의인들이 나타났다.
혈월막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두 눈에서 살 떨릴 살광을 폭사시키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네놈들이 제아무리 악가놈을 감시해도 우리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다....! "
"크흐흐..... 물론 악가놈을 쥐도새도 모르게 처치하면 저 땡중들은 갈피를
잃고 허둥대겠지..... 흐흐...... "
다음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헌데, 오오......
그들의 말,
사해일신검을 죽이다니.....
그는 혈월막의 첩자가 아닌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자신의 편을 죽인다는 것은 전혀 상식밖의 일이거늘......
그곳에서 가히 멀지 않은 곳,
"크으으..... "
악효균은 전신이 무참히 난도질 당한 채 거꾸러지고 있었다.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는 혈월막의 살수 두 명이 있었다.
"흐흐..... 네놈이 죽음으로써 진짜 첩자는 더욱 확고한 발판을 굳힐 수 있는 것이다! "
"흐흐.... 네놈을 첩자일 것이라고 네놈 사부에게 말해 준 사람이 진짜 첩자라는
사실을 네놈은 죽어서도 모를 것이다..... "
아아......!
음모, 암계(暗計),
그 가운데에서 한 애궂은 인재가 죽어갔다.
× × ×
스스스.......
스슷.......!
천풍의 주위로 살기가 먹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천풍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눈을 굴려 좌우를 쓸어보았다.
(보통 놈들이 아닌데......? 살기가 엄청나군....... )
순간,
스스------ 스스슷------!
천풍의 주위에 도합 열 명의 혈의인들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핏빛 석양을 등지고 있어서 더욱 귀기스럽게 보였다.
그들의 어깨에는 역시 핏빛 혈도가 메어져 있었다.
문득,
천풍은 낮게 코웃음 쳤다.
"흥! 이제보니 혈월막의 잡종개들이었군......! "
혈월막의 잡종개,
욕치고는 지독한 욕이었다.
허나,
혈월막의 살수들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묵묵히 천풍을 포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풍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용무인가? 혹시 이 검을 원하는 것이냐? "
그는 허리의 벽풍천중검을 툭툭 쳐 보였다.
문득,
"그렇다....... "
혈의인들 중에 한 명이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풍은 무섭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히 떠올렸다.
"세상에..... 이 따위 검 때문에 그토록 무서운 표정들을 짓고 있다니..... 헌데
이 검을 주면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냐? "
방금 대답했던 혈의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죽는다.......! "
"그래도 죽는다고? 그런 엉터리가..... 좋아. 나는 검을 주면 목숨은 살 줄 알았는데
죽이겠다니...... 이왕이면 죽어도 검을 지닌 채 주겠다....... "
이어,
천풍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순간,
전혀 예기치 않는 순간에 혈의인들은 도를 뽑았고,
득달같이 천풍의 전신을 베어왔다.
쐐------ 액!
쏴아아----- 앙!
전혀 숨조차 쉴 틈이 없는 엄밀한 검막이었다.
천풍은 내심 저으기 감탄했다.
(과연...... 오늘날의 혈월막이 천하를 위진시킬만 하다......! 허나, 후후...... )
그는 싸늘하게 웃었다.
(일찌기 나는 맹세한 적이 있었다.......! 혈월막의 무리라면 개 한 마리조차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
천풍은 사방에서 베어오는 검을 쓸어보며 입꼬리에 얼음 같은 냉소를 달았다.
순간,
"잔월섬좌(殘月閃坐)! "
그의 입에서 나직한 호통성이 터짐과 동시에,
츄아아------ 앗!
그의 검이 도저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속도로 뽑혔다가 다시 꽂혔다.
찰나,
츠------ 이이이------ 잉!
츠츠츠------ 츠츳!
도합 열 줄기의 검강(劍 )이 사방으로 부챗살처럼 뻗어나갔다.
아아.......!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검식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쾌검식이었다.
바로,
묵혼이 전수해준 일초검식이었던 것이다.
천풍이 잔월섬좌라고 이름붙인........
돌연,
"크에------- 엑! "
"우아------- 악! "
간을 도려내고 심장을 짓이기는 처참무비한 비명성이 터졌다.
도합 열 마디,
츄츄...... 츄츄........
노을처럼 붉은 피를 뿌리며 열 개의 몸이 스무 개로 변하고 있었다.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찰나,
푸---- 앗!
천풍은 막 걸음을 옮긴 땅 속에서 무려 다섯 자루의 도(刀)가 섬전처럼 솟구쳐 나왔다.
푸슈슈------ 슉!
천풍은 대경성을 터뜨렸다.
"아이고, 가랑이 찢어진다. "
그는 얼른 사타구니부터 감추었다.
허나 다음 순간,
슈슈------ 슝!
다섯 자루의 도는 모조리 허공을 베고 말았다.
천풍,
그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
".........? "
지면으로 반쯤 솟은 혈의인들은 눈알을 데룩거렸다.
그때,
"ㅋㅋ......! 그냥 죽어 주려 했더니 아무래도 안되겠어......! 난 아직 자손을
못 봤다는 말씀이야.......? 헌데 가랑이가 찢어져서야 되겠나? "
천풍의 비웃는 음성이 들렸다.
순간,
혈의인들은 번개같이 땅 속에서 솟구쳤다.
허나,
"끄------ 악! "
"케에------ 엑! "
그들은 껍질 벗겨지는 비명을........
아니었다.
바로 가랑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피를 뿌렸다.
천풍,
스스스.......
그는 땅 속에서 솟아나오며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있었고,
그의 사방으로 그를 죽이려 했던 혈의인들이 가랑이가 찢어져 내장을 쏟으며
거꾸러지고 있었다.
천풍은 사방을 쓸어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알겠느냐.......? 이것은 단지 시작이라는 것을...... "
그는 가랑이가 찢어져 죽은 열다섯 구의 시신을 뒤로 하고 점차 멀어져 갔다.
노을 속으로......
혈월막,
그들은 실수를 하였다.
천풍,
상대는 바로 그인 것을.......
쯧쯧.......!
제 33 장에 계속
제 33 장 분노의 章
혈보(血步),
피의 걸음이었다.
천풍,
그의 한걸음 한걸음은 바로 혈보였던 것이다.
서문여정 등과 헤어진 지 칠 일째,
그는 벌써 삼백여 명의 혈월막 살수들을 주살했으며,
남(南)쪽으로 육백여 리밖에 내려오지 못한 상태였다.
천풍은 지난 칠 일 동안 단 일 각도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혈월막의 살수들은 그에게 잠잘 틈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천풍의 극히 미세한 헛점도 간과하지 않았다.
어떤 시각,
어떤 각도에서도 그들은 가공할 살수를 가차없이 뻗쳐왔던 것이다.
그것은 거의 천풍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계속되었다.
그가 지나온 길은 근래에 없던 혈로(血路)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피의 육백 리,
아아........!
전 무림의 이목은 천풍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걸어온 피의 육백 리,
오래 전부터 이어온 천풍과 혈월막과의 싸움,
과연,
천풍,
그는 혈월막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할 것인가?
그것이 전 무림의 관심사였다.
× × ×
× × ×
남창성(南昌城),
천풍,
그는 마침내 그곳에 모습을 나타내고야 말았다.
그는 북문쪽에 나타나자 마자 벌써 다섯 명의 살수들을 죽였다.
거리에는 기이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때는 정오인 오시(午時),
평상시 같은 수많은 사람으로 붐빌 시각임에도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그것은,
남창성,
아니 전 중원에 삽시에 퍼진 소문이었다.
제 34 장 뜨거운 友情
마천부(魔天府),
빙혈천궁(氷血天宮),
암암리에 장강이북 지역에 전 세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중원에 퍼지고 있었다.
빙혈천궁이 일제히 밀고 내려오면 중원은 사상 유래 없는 대혈겁을 당하게 될 것이다.
대혈겁,
중원인들은 숨을 죽인 채 빙혈천궁의 다음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혈월막,
유사 이래 중원의 최고 세력이라는 혈월막은 기이하게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단지,
남창의 명물인 천풍만을 최대의 적으로 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중원을 뒤덮고 있었ㄷ.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 역시 중원인들에게 무언 중에 커다란 공포를 안겨주고 있었다.
중원,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유수한 세력들의 가공한 피의 저주,
우우......
우우.......
× × ×
화소군(華小君),
천풍을 처음으로 풍가가(風哥哥)라고 부른 소녀,
그녀는 지금 천풍을 만난 기쁨보다는 산 같은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침상,
천풍이 마치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시체,
그렇다!
그는 거의 시체나 다름 없었다.
소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천풍이 여구리에 박혀 있던 사요의 비수는 이미 뽑혀졌다.
또한,
그의 앞가슴과 복부에 박힌 수백 개의 암기들도 이미 뽑혀진지 오래였다.
허나,
허나 말이다.
소군은 망설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침상 옆에 앉아 천풍의 창백한 얼굴을 극히 슬픈
얼굴로 주시하고 있었다.
천풍의 상체는 완전히 벗겨져 있었지만 하의는 핏물에 젖은 채 입혀진 채 였다.
문득,
"호오....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
소군은 나직한 한숨을 불어냈다.
순간,
그녀는 손을 뻗었다.
이어,
천풍의 하의를 잡았다.
허나,
그녀는 곧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얼굴은 노을처럼 붉어졌다.
"아아.... 빨리 풍가가의 하..... 체에 박힌 암기를 뽑지 않으면 위험한데...... "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애ㄷ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아.......!
그렇다!
그녀는 지금 천풍의 하체에 박힌 암기를 뽑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천풍의 하의에 손을 댔다가 떼었던가?
허나,
어찌 순결한 소녀의 몸으로 남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겠는가?
그것도 여인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위에 말이다.
한 순간,
소군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아니야.....!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
그녀의 만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풍가가와 나 소군은 남이 아니거늘..... 어찌 풍가가의 생명이 경각에 달한
이때에 그 따위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
그녀는 결심했다.
"아차피..... 풍가가와 나는 정혼한 사이...... "
소군은 마음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이어,
천풍의 하의에 손을 뻗었다.
허나,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으음...... "
그녀는 천천히 천풍의 하의를 아래로 내렸다.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잠시 후,
그녀는 손을 가늘게 떨며 천풍의 하의를 완전히 내렸다.
그러나 볼 수가 없었다.
어찌........
(아아.... 소군아.......! 너는 어찌 망설이냐......? 너의 무능함으로 풍가가께서
돌아가셔도 좋다는 말인가........? )
소군의 천하절색의 얼굴에 짙은 자책의 기색이 떠올랐다.
순간,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찰나,
천풍의 건장한 하체가 그녀의 두 눈에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마치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듯,
매끄럽고 곧은 천풍의 두 다리,
(이.... 이건 내님의 다리일 뿐이야......! )
그녀는 문득 눈을 더할 수 없이 크게 떴다.
천풍의 하체,
아아........!
그곳에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무수한 암기들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어쩌면 이처럼 처참할 수가...... )
그녀는 세차게 몸서리쳤다.
천풍,
아아......!
그의 하체에는 얼마전에 소군이 뽑아낸 상체보다 배나 많은 암기들이 박혀 있지 않은가?
소군은 극도의 경악을 만면에 떠올렸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어, 빠르게 두 손을 움직여 천풍의 전신에 박힌 암기들을 뽑기 시작했다.
약 일 각의 시간이 흐른 후,
"아아...... "
그녀는 암기들을 모두 뽑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허나,
이제 더 큰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젠..... 독이 퍼지지 않도록 독을 빨아내야 하는데..... )
소군,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님을 위한 길인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어,
암기가 박혔던 모든 곳을 정성껏 빨아내기 시작했다.
..........
침묵이 흘렀다.
단지 입술로 독을 빨아내는 기음만이 잔잔이 실내에 흐를 뿐,
한순간,
소군의 교구가 움찔 멈춰졌다.
그녀는 한곳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천풍의 허벅지,
다른 곳은 모두 빨았는데 아직 그곳만은 빨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허벅지..... 소군을 더할 수 없이 망설이게 하였다.
"아아...... "
나직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눈을 감아본다.
순간,
소군은 천풍의 허벅지에 입을 대었다.
그녀는 내심으로 외치고 있었다.
(풍가가......! 사랑하는 당신을 위한 일인데...... 사랑하는 당신을 위한 일인데..... )
아아.......!
누가 이 모습을 추하다고 손가락질 할 것인가?
누가 이 소녀의 행동을 나무랄 것인가?
아무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 × ×
× × ×
영화루(榮華樓),
이 년 전,
남창의 명물이었다가 천풍의 출현으로 인하여 명물 자리를 뺐겼던 남창제일주루,
허나,
남창제일주루인 영화루의 원주인인 이청(李淸)이 누군가에게 영화루를 판 다음에는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원래 주루와 기루(妓樓)를 반반으로 병업하던 것을 주루를 패쇄하고 완전히 기루로
개조한 것이었다.
영화루는 본래의 거대한 건물에 무려 열 배나 큰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영업을 시작했다.
영화루가 불가 육 개월이 지나기 전에 천하제일기루(天下第一妓樓)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영화루에선 억만금을 들여 천하의 무수한 미녀들을 모았다.
영화루의 제일 하급 기녀라 해도 천하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이쯤 되니,
영화루가 천하제일기루가 된 것은 명약화한 일이 아니겠는가?
영화루,
그곳의 주인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화루의 주인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영화루의 가장 깊은 곳,
수중월(水中月),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는 한 정자가 있었다.
후원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인공 연못 가운데 지어진 화려의 극치를
이룬 정자,
그곳은 여태껏 존재 여부조차 완전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영화루 내의 인물들조차 그곳 근처는 출입을 불허 하였으며,
그곳이 왜 지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어느 날엔가 그곳에 드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곳에 드는 사람이야말로 여태껏 신비에 가려진 영화루이 진정한 주인일 것이라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알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수중월,
물 속에 뜬 달(月),
그 신비한 정자 속에 누워 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전신에 눈처럼 흰 백의를 입었으며,
천상에서 방금 내려온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천하제일의 용모를 지닌 청년,
바로 천풍이었다.
그는 지금 지극히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세 명의 남녀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면전에는 소군이 약간은 수줍고 약간은 행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우측,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같은 패도적인 기도를 지닌 한 청년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냉담한 표정,
마치 얼음으로 조각한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헌데,
오오......!
그,
그는 바로 뢰영(雷影)이 아닌가?
천풍이 남창성에서 만사여의방(萬事如意幇)을 운영할 때 그를 대가(大哥)로 모시던
뢰영이 아닌가?
그리고,
천풍의 좌측,
남루한 청의를 입은 이십 삼사 세 가량의 청년이 역시 공손히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마치 중병을 앓고 있는 듯 누렇게 떴으나,
전신에선 감히 범접치 못할 기도가 뿜어지고 있었으며 두 눈에선 맑은 혜광이
은은히 뿜어지고 있었다.
그,
그는 바로 비우(悲雨)였다.
과거 사 년 전,
금릉성에서 문전걸식 하던 그를 천풍이 거두었지 않았는가?
존엄한 황궁대학사(皇宮大學士)의 독자(獨子)이던 신분,
허나,
그는 단지 이 순간 천풍을 천하에서 가장 존경하며 따르는 천풍의 아우일 뿐이었다.
천풍이 자신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천풍은 웃고 있엇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오랫동안 그가 잊고 있던 명랑하며 흐룻한 웃음이었다.
문득,
천풍은 그들을 쓸어보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하하......! 너희들의 얼굴을 보니 지난 이 년 간 적지 않은 성취가 있었던 것
같군.... "
세 사람은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모든 것이 대가의 은혜입니다! "
천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따위 말투를..... 나 천풍은 단지 너희들의 대가일 뿐이지 상전이 아니란 말이다.... "
"대가...... "
"이후에는 내가 흡족하도록 스스럼없이 대했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그러니
마치 남을 대하는 것 같구나...... "
천풍의 말에 그들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대가...... "
"풍가가...... "
천풍은 껄껄 웃었다.
"좋아.... 좋아.......! 핫핫......! 어쨌든 너희를 만나니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구나..... 헌데 하는 일들은 잘 되고 있고......? "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가께서 떠나시기 전에 우리 아우들에게 치밀한
안배를 해두셨기 때문입니다...... "
비우는 공손히 말했다.
천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희가 그것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너희의 앞날과
너희 스스로를 지키는데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세 사람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소군이 몹시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헌데, 왜 혈월막이 풍가가를...... "
문득,
그녀의 물음에 뢰영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허나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천풍은 얼굴을 굳혔다.
"혈월막.....! 으음.......! 소군, 혹시 너는 알고 있느냐? 그때 어머님과 이모님의
가슴에 남아 있던 검흔(劍痕)을..... "
소군은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물론이예요.....! 소녀가 죽어 흙이 된다한들 그것을 잊을 리가 있겠어요? "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원독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천풍은 씁쓸하게 웃었다.
"후후.... 소군.....! 나는 바로 그 검흔을 찾았다.......! "
순간,
"네엣......? "
소군은 대경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에선 극도의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천풍은 쓰게, 아주 쓰게 웃었다.
"후훗.....! 그 검흔은 바로 혈월막의 살수들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바로 혈월막...... "
소군의 얼굴이 차디차게 굳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맑은 눈물이 이슬처럼 고였다.
헌데,
뢰영,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고뇌의 기색이 역력했다.
허나,
누구도 그의 그런 표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소군은 부르짖 듯 외쳤다.
"풍가가! 마침내 원수들을 찾았군요......! 그놈들을...... 아아..... "
눈물이 그녀의 창백한 뺨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소녀는 반드시...... 그놈들을 죽이고 말거예요........ "
문득,
천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소군, 혈월막은 내가 맡겠다........! "
순간,
소군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싫어요! 왜 소녀는 원수를 갚으면 안된다는 것인가요? 풍가가만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돼요! "
천풍은 놀랐다.
아니,
최소한 뢰영과 비우도 눈을 동그렇게 뜰 정도로 대경했다.
그들은 여태껏 소군이 이처럼 크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천풍의 말에 불복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항상 천풍의 말이라면 지나칠 정도로 공손히 따랐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천심(天心)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헌데,
"풍가가.......! 소녀의 모친도 혈월막에 죽음을 당하셨다면 소녀 또한 그들을 죽여
원수를 갚아야 자식된 도리가 아닐까요.....? "
그녀의 말은 조목조목 이치에 맞았다.
소군,
그녀가 어찌 천풍의 내심을 모르겠는가?
그런 위험한 일에 자신은 끼게하지 않으려는.....
그러나,
(소녀가 위험하다면.... 풍가가께서도 위험한 일이 아닌가요.....? 소녀는 풍가가
혼자 그런 위험한 일에 고군분투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
소군의 내심은 오직 천풍의 걱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문득,
비우는 진심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가.....! 대가의 원수는 소군 뿐만이 아니고 아우들에게도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
천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라구......? 그건 대체 무슨 말이냐? "
비우는 안색을 굳혔다.
"이 년 전, 대가께서 안배하신 곳에는 순전히 우리 세 아우들의 신변을 위해서만
안배되어 있었습니다......! "
"으음..... 그래서......? "
"하하......! "
문득,
비우는 쓰게 웃었다.
"대가! 대가께선 우리 세 사람이 자신들의 신변에만 급급한 사람들로 보셨습니까? "
"비우......! 그것은 너희들이 험한 강호를 살아가자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준비한 것이다...... 헌데! "
비우는 전과는 달리 강경하게 말했다.
"대가! 분명히 밝혀 두겠습니다! 소제들은 이미 대가의 안배에 일문(一門)의 지존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
그의 어조는 힘이 있었다.
헌데,
일문(一門),
일문이라니......?
그랬었던가......?
비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소제들이 대가의 안배를 받아들여 지존이된 것은 소제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
"비우....... "
천풍은 웬지 모를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소제들은 이미 대가에게 하늘고 같은 은혜를 입은 몸...... 어찌 스스로의
사욕을 위하겠습니까? 만약 대가의 복수가 아니었다면 소제들은 대가의 뜻에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
천풍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달 동안 대가께서 돌아오시지 않고 소제들이 세 개의 선실 앞에 서서 맹세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
"........! "
"소제는 생명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만약 대가를 다치게 한 것이 황궁(皇宮)이라면
대명의 황실을 쑥밭으로 만들고 말겠다고 말입니다.....! "
그의 말에 천풍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더이상 얼굴에 웃음을 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뢰영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소제는..... "
그의 얼굴빛은 검었으나 음성은 힘이 있었다.
"소제는..... 누가 대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면 만 명의 생명으로 보상
받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
"뢰아우....... "
문득,
"소녀는...... "
소군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 듯이 작게 말했다.
"소녀는..... 대가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
소군은 고개를 더욱 깊이 떨구었다.
"생긴다면...... "
그녀의 음성도 잦아 들었다.
"소녀는.... 가가의 영혼과....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했..... 어요..... "
모두 말해버리고 난 그녀는 더이상 부끄럽지가 않았다.
(어떠랴.......? 내님 앞에서 나의 사랑을 고백한 것이거늘..... )
사랑은 그녀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천풍,
그는 묵묵히 그들을 쓸어보았다.
(이들.... 이들에게 도움을 받게 되다니.... ㅋㅋ......! 이 좋기만 한 녀석들에게
말이다..... )
순간,
천풍은 그들 세 사람의 손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 "
".......! "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고맙다......! 아우들.......! "
천풍의 음성을 뜨거웠다.
"대가......! "
"풍가가.....! "
문득,
비우는 생각났다는 듯이 불쑥 말했다.
"참, 헌데 국수는 언제 먹게 해 주실 참입니까? "
"국수......? "
"소군을 언제쯤 소제들의 형수로 만들어 주실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
순간,
소군은 손을 빼며 황급히 문 밖으로 도망쳤다.
"어멋? 몰라요! 우오빠는 어무 짓ㄱ어요....... "
세 사람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
"으하하하.......! "
소군,
영화루의 주인이던 그녀는 창 밖에서 기쁨에 섞인 수줍움을 남몰래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정말 우오빠는 미워.......! )
허나,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비우가 밉다는 생각은 전혀 일지 않았다.
전혀........
제 35 장에 계속
[3560] 제목 : [냉하상] 천궁천 제 35 장
올린이 : 추녀 (김진호 ) 97/06/14 11:01 읽음 : 948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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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 장 憤 淚
마유강(魔幽强)!
바로 그였다.
그의 머리는 지금 이 순간 마구 헝클어져 있었으며,
전신의 옷은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또한 전신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화산처럼 강렬한 마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크으으..... 급습을 가했음에도 사혈마노(四血魔老) 중에 두 명이나 잃다니..... "
그의 입술 사이로 이시린 중얼걸림이 흘러나왔다.
그의 어깨에는 그의 마병(魔兵)인 묵염쌍마극(墨炎雙魔戟)이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는데,
묵염쌍마극에는 새빨간 선혈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그의 옆,
각기 한 팔과 한 발을 잃은 혈검노(血劍老)와 혈독노(血毒老)가 극히 피로한
기색으로 시립해 있었다.
문득,
혈검로가 피로한 어조로 말했다.
"허나, 주군......! 혈월막도 이 이상이 붕괴되지 않았습니까? "
순간,
"무슨 소리! "
마유강은 일갈했다.
"중요한 것은 나 마유강이 혈월막에게 패했다는 사실이다! 나 마유강이 말이다! "
혈검노는 움찔했다.
그는 마유강의 승부욕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
마유강은 문득 나직이 중얼거렸다.
"........? "
마유강도 고개를 깊이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혈검노와 혈독노는 묵묵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마유강은 고개를 들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분명하다.....! 혈월막! 그들은 단순한 살수집단이 아닐 것이다. 일개 살수집단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다! "
혈검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
"후후........ "
마유강은 차갑게 웃었다.
"내가 그들에게 패했다고 해서가 아니다! "
그는 패한 것이 아니었다.
혈월막을 완전히 초토로 만들었으나,
사혈마노중에 두 명을 잃었고,
남은 사람도 성하지가 않았다.
완전히......
혈월막을 붕괴시켰다고 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부합되지 않았다.
철저히,
그는 무엇 이든지 철저히 붕괴 시켜야만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뭔가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
마유강은 확신하듯 중얼거렸다.
× × ×
"크아------ 악! "
"으아------ 악! "
살륙(殺戮),
오오.......
그것은 대살륙(大殺戮)이었다.
형산(衡山)불회곡(不回谷)에서 벌어지는 두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대살륙이었다.
"크에------ 엑! "
"케에------ 엑! "
피(血),
피안개가 하늘을 시뻘겋게 뒤덮었다.
그리고......
우우......
불회곡의 드넓은 곡 내에 갈가리 찢겨진 채 널부러져 있는,
오오......
시체,
그렇다!
그것은 바로 시체였던 것이다.
수백,
아니, 근 천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
이야말로 시산(屍山) 혈해(血海)가 아니겠는가?
그 가운데,
불과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수백 명의 혈의인들에게 포위당한 채 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혈의인들,
오오......!
그들은 바로 혈월막의 살수들이 아닌가?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혈월막은 마유강에 의해 재기불능할 정도로 붕괴가 되었는데 그들이 어찌 수백
명씩이나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모를 일이었다.
진정,
모를 일이었다.
혈월막의 살수들의 무공은 가공했다.
중앙에 포위당한 이십여 명은 전전긍긍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들은 만면에 더할 수 없는 불신의 표정을 가득 떠올리고 있었다.
불신,
그렇다!
"아미타불.......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
불해선사(佛海禪師),
이 소림최고의 배분인 고승은 지금 이 순간 인자한 얼굴 가득 짙은 회의를 떠올리고
있었다.
형산 불회곡,
이곳은 불회선사와 청송진인, 검극옹 등이 비밀리에 물색한 정파무림맹(正派武林盟)이
발촉한 장소였다.
이 비밀스런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정파의 정령(正靈)들인 십오 명의 영재들
뿐이었다.
불해선사등 삼 인이 키운 십오 명 뿐,
십오 명의 영재들 중에 오직 한 명 만이 그 사실을 잘못 알고 있을 뿐이었다.
사해일신검(四海一神劍) 악효균(岳孝龜),
제 36 장 神이여, 나를 동정하소서
× × ×
"천풍각(天風閣)......? "
천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하필 천풍각이지? 다른 이름도 많은데? "
비우는 누렇게 뜬 병색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대가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하하....! 어떻습니까? 그 이름이.... "
천풍은 쓰게 웃었다.
"어찌 그것이 나만의 각(閣)이겠느냐? 그것은 공평치가 않다! "
비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그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
".......? "
"하하.... 뢰아우의 살수 집단은 뢰당(雷堂), 소제의 은자집단(隱者集團)은
우당(雨堂), 그리고 소군의 정보집단은 화당(花堂)입니다! "
천풍은 그의 말에 나직이 반추했다.
"뢰당과 우당과 화당이라..... 하하..... 거 썩 좋은 이름이군. "
"하하......! 우리 세 아우가 합친 것이 바로 대가의 천풍각입니다. "
비우는 웃음이 헤퍼졌다.
그 이유는 천풍이 앞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소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정이 담뿍 담긴 눈빛으로 천풍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만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허나,
뢰영(雷影),
그는 간간히 애써 웃어 보일 뿐,
침중한 기색이었다.
천풍은 가끔 그를 이상한 듯 바라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했었다.
그때,
비우는 지혜스런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대가! 헌데 대가께서 남기신 비급들은 대체 어디에서 나신 것들입니까? "
비급이라니?
기실,
천풍은 이 년 전에 뢰영과 비우, 소군에게 각각 안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안배,
뢰영과 비우에겐 무려 백여 권의 비급을 남긴 것이고,
소군에겐 영화루(榮華樓)의 경영권을 남긴 것이다.
비급,
천풍은 담담히 웃었다.
"하하.... 너희는 내 모친께서 무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
순간,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아아...... 백모님께서 무림인이셨습니까.......? "
그들은 천풍에게 한 가지 검흔의 생김새를 받아 천하로 그 검흔의 출처를 찾아
헤맸을 뿐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소군만이 천풍과 동일한 아픔을 지니고 있었을 뿐,
"하하......! 어머님께선 바로 천기노인(天機老人)의 따님이셨지...... "
천풍은 웃으며 말했으나 그의 웃음 이면에는 잘게 부서지는 비애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세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
뢰영과 비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오.... 천기노인.....! 그분께서..... "
천기노인!
극히 신비한 인물,
의술은 하늘에 닿았고,
기문진법과 천문지리 등 천하잡학에 정통한 일대기인,
그가 천풍의 외조부였다니.......
"핫하.....! 외조부께선 무공에도 상당한 조예가 계셔서 어머님께 약간의 비급을
주셨던 것이다..... "
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
"후후.... 또한 내가 만사여의방(萬事如意幇)의 방주 노릇을 할 때 대가로 받았던
비급들을 내 나름대로 변형시켜 너희에게 주었던 것이다. "
비우는 저으기 감탄했다.
"아아.....! 대가 대가께서 주신 은자술(隱者術)의 비급은 정말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
"하하..... 그렇게 봐 주니 고맙군.......! "
문득,
비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허면 이제부터 혈월막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것입니까? "
"그렇다......! 이제부터 본격적이지......! "
천풍은 엄숙하게 굳어졌다.
비우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
"대가! 무엇이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이행하겠습니다! "
천풍은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너희들은 나에게 큰 힘을 줄 것이다.....! "
이어,
천풍은 자신의 계ㅎ을 그들에게 세밀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혈월막을 깨부술 계ㅎ을.......
× × ×
시산혈해(屍山血海),
형산 불회곡에서 벌어진 경천동지할 대살륙,
그 시체를 딛고 혈랑군은 노갈을 터뜨렸다.
"서문여정, 그녀를 잡아라......! 수중에 들어온 먹이를 놓치다니...... 으으....
그녀를 잡지 못한다면 나 혈랑군의 이름을 걸고 천하를 더 농락하다 괴멸시키고
말리라......! "
그의 분노는 온 형산을 뒤덮고 남음이 있었다.
× × ×
여인(女人),
운명은 그녀의 이름을 소하연(素河娟)이라 하였다.
소하연,
× × ×
"아아...... "
소하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이 인간다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린 상태였다.
그녀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되어 있었다.
머리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감지 않았으며,
또한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
묵혼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심정이었다.
그녀의 한 서린 생명은 묵혼에게 메인 것이었기에......
그녀의 몸에 걸쳤던 의복은 이미 의복이란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였다.
군데군데 찢겨져 그 사이로 뽀얀 속살이 엿보였다.
그녀는 발길이 가는 대로 걷고 있었다.
그저 걷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 발길이 끝나는 곳에는..... 그이.... 중랑(中郞)이 계실 것이다..... "
확신,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어떤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험한 산길의 돌들은 그녀의 연약한 발을 사정없이 짓이겨 놓았다.
찢어져서 피가 흘러도,
그녀는 단지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태어난 것이 오직 걷기 위한 것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아ㅆ.
마치 걸음이 멈춰지면 그 순간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에겐 신념(信念)이 있었다.
묵혼을 만날 수 있다는 신념,
그래서 걷는 것이다.
걷는 것이다.
눈,
한 쌍의 아름다운 눈은 뽀얀 이슬을 담고 있었다.
그 눈은 한 여인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운명에게 철저히 희롱 당하고 있는 여인,
소하연,
한 쌍의 눈은 그녀를 한사코 쫓고 있었다.
그 눈의 주인 역시 운명에 짓밟히고 있었다.
강미려(姜美麗),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혈월막의 살수 십여 명이 묵묵히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를 자들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기실 그들은 강미려와 소하연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수백 명의 혈월막 살수들,
그들은 근처 오십 리 이내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소하연의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녀가 목혼을 찾아내면 그를 죽이는 것이 그들의 최후 임무였다.
강미려의 두 눈은 뽀얀 물기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얼음 같은 한기를 흘리고 있었다.
눈 앞에 벌어지는 모친의 처절한 모습에 가슴이 메어지는 듯이 아팠고,
모친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눈빛을 차게 만들었다.
강미려는 심한 양면성적인 갈등에 허덕이고 있었다.
(바보같이..... 그 따위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
강미려는 어깨의 검을 움켜 잡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녀가 잡은 검은,
자신의 모친과 전혀 남이 아닌 묵혼을 베야만 하는 검이었다.
× × ×
숲,
숲은 천하에서 가장 울창했고 가장 깊었다.
그 숲의 가장 깊은 곳,
한 사람이 이제 생명의 불꽃을 끄려하고 있었다.
맹수(猛獸),
그는 한 마리의 맹수였던 사람이었다.
그가 천하를 질타할 때에는 천하인들은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목을 만져
보았었다.
아직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으으....... "
맹수는.....
죽어도 맹수일 수 밖에 없다고 사람들은 깨달음처럼 말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서도 맹수가 맹수이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으으.....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크으으..... "
맹수가 목떠는 소리를 내듯,
그는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쓰러져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운명은,
그에게 살수(殺手)로서의 모든 것을 부여했지만,
한 가지만은 주지 않았다.
사랑,
그것을 주지 않은 것이다.
묵혼(墨魂)!
오오.......!
신이여.......!
듣는가.......?
신이여!
나의 손을 잡은 죽음의 신이여.........!
나의 일생이 당신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한 번만 거역하게 해주시오.......
내가 맡고 있는 향기가 당신의 죽음의 향기라면,
잠시만 내가 이고선 하늘을 떠나주오.......!
동정하시오!
가련히 생각하시오......!
나는 묵혼이 아니외다!
내가 처음부터 당신에게 속한 사람이었다면......
이 순간 만큼은 당신의 속함에서 벗어나게 해주시오......!
나는 한 여인을 사랑했고,
얼마나 사랑했느냐고는 묻지 마시구료.......
그때 만큼은 내 검은 살수 묵혼의 검이 될테니까.......
그 물음이 내 사랑을 수치로 알게 하는 것이거늘.......
제 37 장에 계속
바스락.......!
".......? "
묵혼은 분명히 무슨 소린가 들었다.
최소한 그의 살수적인 귀는 그것을 감지했다.
순간,
그는 어떤 벼락같은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은 삽시간에 그의 심혼을 뒤흔들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아니,
말로는 표현될 수도 없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 그녀다.......! )
그녀,
그는 그녀라는 생각을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렸다.
그는 감기려는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바삭.........!
익숙한 살내음이 전해왔다.
그리고 그 살내음의 임자는 금방 묵혼의 면전에 나타났다.
여인,
소하연은 와락 묵혼의 품에 야윈 몸을 던졌다.
"중..... 랑.......! "
묵혼의 품으로 안긴 그녀의 중얼거림은 금방 외침으로 변했다.
"중..... 랑......! "
그녀는 묵혼의 온몸과 온 마음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감쌌다.
"하연..... 와 주었구료..... 와 주었어...... "
묵혼은 눈을 뜨지 않고서도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안겨 있는 여인이 하연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하에.....
묵혼의 이름을 이토록 정겹게 불러줄 수 있는 여인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으므로.....
묵혼과 소하연은 한 몸이 되어 얽혔다.
그들은 몸으로 얽혔고,
영혼으로 얽혀 있었다.
"당신..... 다치셨군요..... 아아.... 중랑...... "
소하연은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하연.... 대수롭지 않소...... 하하..... 그대가 옆에 있거늘..... 하하...... "
묵혼은 죽어가면서도 웃었다.
이젠 자신있게 웃을 수 있었다.
소하연,
그녀가 품 안에 안겨 있지 않은가?
"아아.... 중랑..... 아아...... 중랑..... '
얼마나 오랜만에 안겨보는 님의 품인가?
실로 이십 년 만이 않은가?
축축히 젖어 있는 눈이 있었다.
강미려,
그녀의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그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
그녀의 두 눈은 원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모친의 부정을 발견한 분노에 치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검을 잡았다.
부모를 향해 뽑아야 하는 운명의 검이었다.
강미려는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려고 애썼다.
그리고,
한 곳을 향해 그림자처럼 나아가기 시작했다.
스..... 스...... 스.......
불륜한 부모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하연......!
저 아이는 이대로 행복하지 않소?
아아..... 그래요.... 저 아이는 최소한 자신의 부모가 기구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해 하고 있지요..... 호호..... 행복하고 말고요.......!
하연.......? 저 아이의 행복을 깨뜨리지 맙시다.....! 나는 여태껏 한 번도 저
아이에게 아비다운 일을 해보지 못했소.......! 허허.... 마지막 가는 길에나마
저 아이를 위한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오......?
그래요, 중랑. 당신의 말씀은 모두 옳아요...... 중랑......
× × ×
강미려에게 할당됐던 혈월막의 삼백 명 고수들은 이미 철수했다.
강미려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마음으로 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꺼이 즐거운 생각을 하려해도,
그녀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죽인 한 쌍의 부정한 남녀의 담담히 죽어가던 모습이외에는.....
그녀가 걷고 있는 곳은 숲길이었다.
문득,
"....... "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녀가 한 곳을 봤을 때,
그녀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천옥(天玉),
사대살수 중에 일인이며,
항상 뜻모를 비밀을 안고 다니는 인물,
그녀는 천옥이 다가올 때까지 그를 주시했다.
"무슨 일인가요? "
"....... "
천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앞에 다가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강미려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어도 아무런 말이 없자,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거기에는 천옥이 없었다.
단지,
한 마리 짐승이 있을 뿐이었다.
천옥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
강미려가 기이함을 느꼈을 때,
"으윽...... "
그녀는 전신의 맥이 풀리며 쓰러져야만 했다.
이미,
천옥의 손이 그녀의 마혈을 제압한 후였으므로......
"무.... 무슨 짓이냐.......? "
강미려는 두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뜨며 외쳤다.
천옥은 그녀를 덥썩 안아 부드러운 풀이 깔린 곳에 눕혔다.
강미려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천옥..... 네놈이..... "
천옥은 이미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흐흐..... 막주께서 너를 내게 주셨다. "
강미려의 상의가 벗겨졌다.
"아버님이.......? 그..... 그럴리가...... "
"흐흐...... 아직도 막주를 그렇게 부르는가.......? "
천옥이 그렇게 말했을 때에는 강미려는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나신이 쏟아지는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천옥의 두 눈은 욕화로 이글거렸다.
"흐흐.... 오래 전부터 네년을 소유하고 싶었다. "
아아......!
불신,
강미려는 가슴이 빠개지는 듯한 불신의 아픔만을 느꼈다.
모친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더니......
이젠 수하가 상전을 탐하는 불신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썩 비키지 못할까? 네놈이 감히 막주의 딸인 나를..... "
천옥은 강미려의 터질 듯한 젖가슴을 입안 가득히 물며 괴이하게 말했다.
"흐흐.... 네년은 막주의 딸이 아니다.......! "
강미려의 수치는 유방 끝에서부터 전해왔다.
"으으..... 무슨 개소리냐.......? "
"흐흐..... 막주는 원래 동자공(瞳子功)을 연성해서 여인과 몸을 섞을 수 없는
몸이다..... "
"........ "
"네년은 묵혼의 딸이다.....! 흐흐...... 네년은 묵혼과 하연의 딸이란 말이다.....! "
순간,
엄청난 경악의 충격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허튼 소리.......! 찢어진 입이라 망발을 하는구나......! "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천옥은 그녀의 전신을 샅샅이 더듬고 있었다.
가장 신비한 곳과,
여인의 몸 구석구석을 거침없이 핥고 애무했다.
강미려는 전신을 파들파들 떨며 악에 바쳐 부르짖었다.
"네놈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감히 나를...... "
천옥은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흐흐.... 소하연은 원래 묵혼의 아내였다.....! 막주는 그녀의 미모를 탐하여
그녀를 강제로 소유했다. 흐흐..... 묵혼은 그녀를 돌려받기 위해 무진 고생을
하였지..... 해서 십 육 년이 지난 지금.... 막주는 그에게 조건을 내걸었지...... "
"아아...... "
강미려의 전신에서 벼락 같은 충격이 일었다.
천옥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깊숙이 손을 밀어 넣었다.
강미려는 마치 시체처럼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가 없었다.
"흐흐.... 허나 처음부터 막주는 묵혼이 십오대 문파의 수석장로들을 죽여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다......! 해서 얼마 전에 그를 죽일 함정을 수십 개나 파놓은
것이지...... 묵혼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흐흐.... 끝내 돌아왔다..... "
강미려의 전신에서 모든 힘이 빠져 나갔다.
(그랬었나......? 그랬었나....... )
"묵혼이 돌아온 것은 오직.... 하연을 보고 싶어하는..... 일념 때문이지.... 흐흐... "
한 순간,
강미려는 하체 한복판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허나,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을 뿐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천옥은 그녀의 슬픈 나신 위에서 욕심을 채우기 시작했다.
강미려의 머리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아.......
더러운 운명이여......!
이윽고 천옥은 욕심을 채우고 그녀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의 옷을 입고 강미려의 나신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만면에는 정복자의 득의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강미려의 음모는 새빨간 선혈로 물들여 있었다.
불신이 만들어낸 파괴의 피(血)였다.
허벅지에도 그 피는 점점이 얼룩져 있었다.
"흐흐..... 아깝지만..... 막주가 널 죽이라 했기에..... "
천옥은 우장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허나 강미려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성을 잃기나 한 것처럼.....
천옥이 막 일 장을 내리치려 할 때,
"멈춰...... "
바람처럼 잔잔한 음성이 들렸다.
"........? "
천옥이 돌아보자 거기 한 명의 백의청년이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천하의 미장부,
바로 천풍이었다.
천풍은 마침 지나다 천옥이 강미려를 죽이려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천풍은 강미려를 힐끗 보고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너는 정말 치사한 놈이구나......! 실컷 재미를 보고 여자를 죽이려 하다니..... "
천옥은 어이가 없었다.
"미친 놈.....! "
순간,
쐐애----- 액!
그는 강미려에게 가하려던 일 장을 느닷없이 천풍에게 뿜어냈다.
허나,
"클클..... 아직 멀었어.....! 재미를 보느라 힘이 빠진 모양이군..... "
천풍의 음성은 뒤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음.......? "
천옥은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직감했다.
"한 수 아는 놈이로군......? "
순간,
스르릉.........!
그의 어깨의 검이 뽑히는 것과 같은 순간에,
츠...... 파앗!
새파란 섬광이 허공을 반으로 쪼갰다.
찰나,
천풍의 두 눈이 번쩍 기광을 뿌렸다.
(저 검초는......? )
그렇다.
방금 천옥이 펼쳐낸 검초는 그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검초가 아닌가?
바로 모친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검흔이 아닌가?
천풍은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그 순간,
"어----- 억! "
천옥은 두 눈을 뽑고 싶은 대경성을 터뜨렸다.
면전에서 천풍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다시 코 앞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허나,
그는 채 다음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왜냐면,
천풍의 강철 같은 손이 그의 목줄기를 움켜 쥐었으므로......
"케엑.......! "
그의 두 눈은 불신으로 튀어나올 듯이 부릅떠졌다.
천풍은 윽박질렀다.
"말해라......! 네놈은 혈월막의 개(犬)냐>? "
혈월막의 개,
그렇다!
적어도 천풍에겐 혈월막의 인물들이라면 모조리 개로 보였다.
천옥은 그의 가공한 기세에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다......! 나는..... 사대살수...... "
"흐흐.... 그래? 후후 그렇군. 살다보니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이군...... "
천풍은 퍼렇게 웃었다.
"네놈은..... "
천풍은 손에 힘을 가했다.
우두둑.......!
천옥의 목뼈가 꺾였다.
"후후.... 네게는 물을 자격이 없다.....! 말해라....! 넌 오 년 전, 천대산에서
두 여인을 죽인 적이 있느냐........? "
"케에...... 그..... 그렇다..... "
"그래? 후후 제대로 만났군......! 누구의 명령이었느냐? 막주 그 개자식의
명령이었느냐......? "
"끄으으.... 그렇다..... "
천옥은 눈을 허옇게 뒤집었다.
"ㅋㅋ...... 그렇다구.....? 후후..... 그렇다는 말이지.....? "
천풍은 그의 목을 놓아 주었다.
대신,
벽풍천준검의 자루를 잡았다.
순간,
파아..... 아앗!
부챗살처럼 찬란한 검강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갔다.
천옥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쭈욱 양 쪽으로 찢어졌다.
"으으...... "
찰나,
"크아아------ 악! "
천옥은 폐부 갈라지는 처참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리고......
우수수수.......
허공에서 눈가루처럼 얇게 저며진 그의 살점들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눈꽃처럼.....
천옥이 서 있던 자리에는......
단지 하나의 백골이 버젓이 서 있을 뿐이었다.
방금 발라낸 듯한 퍼런 뼈조각을 안고......
천풍은 메마르게 웃었다.
"크ㅋ...... 나는 마침내 갚았다. 어머님과 이모님의 원수를..... "
그는 소리 죽여 키득거렸다.
"허나 아직 완전히 갚은 건 아니지.... 혈월막주 개 같은 자식을 죽이기 전에는..... "
그는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
강미려는 그가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누워 있었다.
천풍은 그녀의 동공에 초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쯧쯧....... "
천풍은 혀를 찼다.
"남의 일인데 안됐다고 할 수는 없고..... "
그는 봇짐에서 한 벌의 백의를 꺼내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래..... 잘 됐다.....! 잘 됐어...... "
맙소사!
어이없게도 겁탈을 당한 그녀에게 잘 됐다니......
천풍이 옷을 덮어 주었음에도 강미려는 눈을 뜬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천풍은 은근히 물었다.
"저놈을 아나......? "
그는 버젓이 서 있는 천옥의 백골을 턱으로 가리켰다.
"........ "
"흠..... 하면, 혹시 강미려라는 계집애를 알고 있니? "
순간,
강미려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으나 곧 초점 없는 눈빛으로 되돌아갔다.
천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는 모양이군......! 어쩐다. 묵혼이 혈월막의 잡종들은 모두 죽여도 그
계집만은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
강미려,
그녀의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은 천풍은 그저 그러러니 넘겼다.
"젠장......! 그 계집애가 묵혼의 딸 정도는 되는 건가? 계집의 얼굴이라도
알아야 살리던 죽이던 할 게 아냐? "
천풍은 투덜거렸다.
"좋아......! 묵혼을 다시 만나면 자세히 물어 봐야겠다.......! "
이어,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전에 그는 강미려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참..... 보면 볼수록 묵혼과 닮은 계집애일세...... 거참...... "
천풍은 그 말만을 남겨 놓고 터덜터덜 사라져 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강미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
알 수 있었다.
그래,
묵혼,
그가 내 아버님이었어.......
어머님이 왜 그를 그렇게 사랑했었는지........
이젠 알 수가 있어........
그리고,
내가 아버님을 검으로 찌를 때 왜 그 분이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았는지도 알 수 있어....
나는.....
나는.....
묵혼,
진실한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분의 진정한 딸이었기에.....
강미려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누운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혈도는 천풍에 의해서 이미 풀려 있었다.
아아...... 강미려!
강미려여........
< 第 5 卷 끝 >
제 38 장에 계속
제 6 권
저 자 : 冷河祥
출판사 : 민 우 사
연 도 : 1984. 09. 18
타이핑 : 나우 ID(추녀) 김진호
제 38 장 죽음이 피우는 꽃
제 39 장 죽음, 그 뒤는
제 40 장 魔天宗의 復活
제 41 장 만남의 기쁨과 슬픔
제 42 장 女人의 질투가 불러들인 대가
제 43 장 南蠻女人의 뜨거움
제 44 장 세 男兒의 友情
제 45 장 여자는 죽어서 말한다
제 38 장 죽음이 피우는 꽃
구화산(九華山)----
안휘성 남부에 위치한 화려하기로 이름난 명산(名山),
아홉 개의 봉우리가 마치 아홉 송이의 연꽃(蓮花) 같다하여 예부터 구련산(九蓮山),
또는 구화산(九華山)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산이다.
때는 정오 무렵,
찬연한 태양이 구화산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한데, 그곳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햇살보다 더 눈부신 인물,
아!
천풍,
그는 바로 천풍이 아닌가?
장군부(將軍府)로 향했던 그가 이곳엔 웬일인가?
한데, 보라!
피(血)..... 그리고 피(血).......
그의 전신은 온통 선혈한 피투성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하면 그 피는.......
이때 문득,
천풍은 중원에 떠있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유강..... 그마저 나를 노리다니..... 나는 남창성을 떠나온 이후 하루 동안
무려 오백 명에 달하는 마천부(魔天府)의 인물들을 죽였다. 마유강..... 그가 왜? "
일순 그의 두 눈이 강렬히 빛났다.
"마유강, 백리하의 일을 안 것인가? 아아! 귀찮다! 하나.... 올테면 와라! 죽고자
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 주겠다! "
스스스------- 팟------
그의 전신에서는 천지를 산산이 찢어 발길 듯한 가공할 살기(殺氣)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천풍------
분명 그는 예전의 천풍이 아니었다.
부드러운가 하면 강인하고, 장난기 어린가 하면 위엄스럽던 천둥벌거숭이 천풍,
한데,
지금의 천풍은 살기에 가득찬 살신(殺神)의 모습이 아닌가?
대체 누가 그를 이토록 변하게 만들었는가?
혈월막..... 마천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천하의 천풍으로 하여금 분노케 한 것이다.
유하림 부녀(父女)의 죽음.........
혈월막의 살수.....
거기에 뒤이어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마천부의 魔手)........
천풍------
그것이 그를 분노케 만든 것이다.
지난 하루,
그의 발길은 피의 연속이었다.
피(血), 피(血), 피(血)......
혈로(血路)!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
(나의 앞길을 막는 자는 죽음(死) 뿐이다! )
아무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이때, 천풍은 두 눈을 싸늘히 빛내며 스산한 일성을 발했다.
"마유강! 내가 그를 잘못 보았는가?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역시 일개 마인(魔人)에 불과했던가? "
한데 돌연,
".........! "
천풍의 두 눈에 기이한 광채가 피어났다.
(이번엔 어떤 놈이.......? )
바로 그 순간,
주위의 공기가 싸늘히 냉각되는 것과 동시에,
스스스---- 슷!
청, 홍, 흑색의 세 줄기 빛살이 천풍의 둘레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세 인영-------
각기 청색, 홍색, 흑색의 장삼을 걸친 노인들,
한결같이 강팍하고 냉막한 용모였고,
전신에서는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듯한 가공할 냉풍(冷風)이 몰아치고 있었다.
주위는 삽시간에 만년빙굴(萬年氷窟)에 들어선 듯한 냉기(冷氣)에 휩싸였다.
아! 그들은.......
삼빙천존(三氷天尊)--------
빙혈천궁(氷血天宮)의 삼빙천존, 바로 그들이 아닌가?
마천존(魔天尊),
사천존(邪天尊),
악천존(惡天尊),
(.......? )
천풍은 한차례 그들을 훑어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
이때,
홍의의 마천존이 얼음가루가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네놈의 목숨을 취하러 온 죽음의 사자(使者)! "
"........! "
순간, 천풍의 입꼬리가 기묘한 호선을 그렸다.
"ㅋ! 나를 죽이겠다고...... 나 천풍을.... 후후! 일찍 죽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군. 더이상 없는 줄 알았는데..... "
".......! "
일순, 얼음으로 박아 넣은 듯한 삼빙천존의 눈에서 일제히 싸늘한 기광이 뻗쳤다.
살(殺)!
그것은 죽음의 빛이었다.
흑의노인, 악천존이 으스스한 한소(寒笑)를 불어냈다.
"크흐흐..... 천풍! 네놈은 지금 지쳐있다. 노부들은 지난 하루 동안...... "
"호오! 당신들이었군. 내 주위를 맴돌며 나타나지 않던 겁먹은 쥐새끼 같은 자들이
누군가 궁금했는데...... "
순간,
(쥐새끼....... 쥐새끼라고? )
삼빙천존의 눈에 짙은 살기가 뻗쳤다.
하나, 그들의 안색은 얼음처럼 냉막했다.
"어린 놈이 입심 하나는 드세구나. 하나 천하가 천풍, 네놈을 두려워 해도 우리
삼빙천존은 다르다. "
"........! "
천풍은 두 눈을 빛냈다.
(삼빙천존..... 저들은 빙혈천궁의 인물들이 아닌가? 한데 저들이 왜? 빙혈천궁도
나에게 볼 일이 있었던가? )
"삼빙천존...... 바로 당신들이었군. "
"흐흐흐.... 두려워졌느냐? "
"ㅋ! "
천풍은 헛바람 빠지는 듯한 괴소를 터뜨렸다.
"천하에 나 천풍이 두려워 하는 자가 있었던가? "
"크흐흐...... "
삼빙천존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천풍은 어깨를 으쓱했다.
"후후.... 믿지를 못하겠다면 시험해 보시지..... 대체 누구의 목이 먼저
허전해질지..... "
"크흐흐.... 그렇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었다. "
순간,
스르르.......
삼빙천존은 바람처럼 천풍에게 다가들며 냉막하게 말했다.
마천존,
스르르----- 릉!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핏빛의 섬뜩한 반월형의 기형도(奇形刀)가 들려 있었다.
"빙혈참도(氷血斬刀).... 언제나 상대의 심장을 원한다. 이것이 너의 심장을 쑤실
것이다. "
사천존,
"나의 소매 속에는 백팔십 개의 소빙륜(小氷輪)이 있다. 이것이 한번 펼쳐지면
천지 팔만사천 방위가 모두 차단된다. 그 중 하나라도 맞는다면 너는 죽는다.
천하의 그 누구도 천라빙살륜(千羅氷煞輪)을 막지 못한다. "
악천존은 소매를 걷어 붙이며 차갑게 냉소했다.
"크흐흣! 나의 빙백참마편(氷魄斬魔鞭)은 네놈의 살점을 조각조각 뜯어낼 것이다. "
그의 왼손,
빙옥으로 만든 듯 으스스한 한기를 뿌리는 눈부신 백색의 채찍이 뱀처럼 칭칭 감겨
있었다.
살기(殺氣)!
피부를 가르는 듯한 살기가 터질 듯 고조되었다.
한순간,
"빙옥대공자께서는 네놈을 잡아오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네놈을 죽여야겠다. "
마천존이 빙혈참도를 번쩍 쳐 들었다.
다음 순간,
"죽어랏------ "
고막을 뒤흔드는 폭갈과 함께 빙혈천존의 신형이 무섭게 퉁겨졌다.
동시에 빙혈참도가 가공할 기세로 부챗살처럼 퍼지며 하늘 가득 핏빛 도영이 뒤덮였다.
스스스------ 스악!
아아,
"흐흣! 뒈져라------! "
사마천의 냉갈과 함께 그의 소매 속에서 수십 수백 개의 광망이 폭출하며 천풍을 휩쌌다.
이에 질세라 악천존의 빙백참마편이 먹이를 노리는 독사(毒蛇)처럼 쏘아져 왔다.
퓨퓨퓨퓨------ 퓽------!
츄리리릿-------!
엄청나다.
가공하다.
오오..... 완벽한 합공(合攻)!
하늘아래 대저 뉘라서 가공무쌍한 공격을 막을손가?
".........! "
천풍은 두 눈을 무섭게 빛냈다.
(삼빙천존..... 역시 보통고수가 아니다. 하나 당신들은 나 천풍을 잘못 건드렸다. )
순간,
번----- 쩍------!
츄피----- 이----- 익!
수백 수천 가닥의 섬광이 천풍의 주위를 거미줄처럼 뒤덮었다.
한순간,
카카카----- 카앙------!
뼈골시린 금속성이 터지며 빙혈참도의 공격이 봉쇄되고 수백 가닥의 찬라빙살륜과
빙백참마편이 모조리 퉁겨졌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오오, 그 빠름이란,
차라리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저.... 저럴 수가...... "
마천존의 두 눈이 찢어져라 흡떠졌다.
인간이 저토록 빠르고 완벽한 방어를 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지 못했다.
(저... 저놈이 저토록 강할 줄이야..... 우리가 잘못 생각했단 말인가? 조금도
지치지 않았어.... )
(하나.... 제놈도 강철이 아닌 사람일진데..... )
"천풍! 네놈은 일 각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다. "
그는 재차 무섭게 덮쳐갔다.
츄----- 아---- 악!
빙혈참도가 죽음의 태풍을 일으켰다.
순간,
"애송이 놈! 다시 한 번 받아봐라! "
사천존과 악천존도 천번지복의 기세로 재차 덮쳐왔다.
슈우우우웃!
촤르르----- 륵!
츳! 츠츠츠츠츳!
도영(刀影), 륜영(輪影), 편영(鞭影)이 천지를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찰라지간, 천풍은 무섭게 머리를 회전했다.
(이 상태의 싸움이라면 내게 불리하다. )
그렇다.
사실 하루 동안 계속된 싸움으로 그는 무척 지쳐 있었다.
더욱이 조금 전의 일 합의 충돌, 그것은 그의 내부를 무섭게 진탕시켰던 것이다.
(모험이다! 사사천경(邪邪天經)의 사사기환술(邪邪奇幻術)에 승부를 걸어 보자! )
다음 순간,
"잔월섬좌------! "
찬풍의 벽풍천중검이 빛을 수만분지 일로 나눈 만큼의 가공할 빠르기로 빙혈천존을
쪼개갔다.
스---- 슝!
수비는 배제는 살인검초(殺人檢招)!
그것은 인세(人世)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미증유의 초거력(超巨力)이었다.
순간,
마천존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그는 천풍이 그 같은 무모한 공격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 저놈이..... )
하나 그것이 끝이었다.
"크아---- 아악! "
빙혈참도가 박살나며 마천존의 몸이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쪼개져 나갔다.
실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억! 저놈이...... )
사천존과 악천존은 두 눈에 불똥이 퉁기며 가공할 기세로 공격했다.
츄리리리----- 릿!
스파파----- 파---- 팟-----!
그 순간,
(윽! )
천풍은 옆구리와 허벅지 부근에 화끈한 감각을 느꼈다.
(천라빙살륜.......! )
바로 그때,
빙백참마편이 독기 오른 독사처럼 천풍의 심장을 관통했다.
(흐흐..... 죽었다! )
악천존은 쾌재를 불렀다.
하나,
카앙!
빙백참마편은 애ㄲ은 바위만 박살을 냈을 뿐이었다.
천풍,
그는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헉! )
악천존은 불신과 경악의 눈빛으로 급히 신형을 날렸다.
하나 그 순간,
그는 사타구니에서 싸늘한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그는 뼈를 깎는 듯한 기괴한 음향을 들었다.
스가가---- 아---- 악------!
순간,
"크아악! "
악천존은 참담한 비명을 터뜨렸다.
아----- 보라!
그 역시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반 동강이나 나 통나무 쪼개지듯 쪼개지는 것이 아닌가?
사천존,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광란했다.
"죽어라! 천라--- 파황---- 빙륜강(千羅破荒輪 )------! "
그---- 아---- 아----- 앙!
수천의 가공할 륜강이 천풍의 전신을 휘감아 갔다.
하나,
천풍은 유령처럼 또다시 사라지고,
사천존이 놀랄 사이도 없이 그는 눈앞의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뒤이어 아련한 음성,
"철(綴)----- 천(天)----- 인( )------! "
그것이 끝이었다.
"........ "
비명도 없었다.
사천존의 모습도 없었다.
다만.......
후두두둑!
하늘 가득 안개처럼 펼쳐져 있는 피(血), 혈육(血肉).... 그리고 뼈조각들.......
그 가운데,
스윽!
한 인영이 유령처럼 솟아 올랐다.
천풍이었다.
헌데,
비틀.... 비틀.......
그의 신형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지 않는가?
아! 그 역시 부상이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사사기환술 중 환사둔영잠(幻邪遁影潛)이 효과적이었다. )
천풍은 삼빙천존의 주검을 싸늘히 바라보았다.
"삼빙천존..... 당신들은 강했다. 하나 당신들은 나를 모르고 있었다. 나 천풍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
이윽고, 그는 자신의 상처를 살폈다.
그의 옆구리와 허벅지에는 대여섯 개의 천라빙살륜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통증은 없었다.
오직 싸늘한 감각 뿐......
곧 그는 천라빙살륜을 뽑았다.
(윽! )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하나, 피는 나오지 않았다.
상처부위는 하얗게 얼어 있었던 것이다.
(천라빙살륜..... 역시 무서운 것이었다. )
천풍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틀...... 비틀..........
그가 구화산을 떠나는 가운데,
하늘,
하늘엔 붉은 태양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 × ×
와룡협(渦龍峽)------
구화산과 천도산(天都山) 사이에는 양자강을 끼고 도는 굽이굽이 험준한 협곡(峽谷)이
있다.
와룡협------
천하에서 험준무비하기로 이름난 바로 이곳이다.
와룡협을 따라 십여 리를 내려가다 보면 천야만야 낭떠러지로 둘러진 호리병 모양의
협곡이 나온다.
그곳의 물은 비교적 얕다.
하나,
칼날같이 솟아있는 무수한 암초와 무섭게 소용돌이쳐 돌아가는 물길은 가히 물귀신이라도
공포에 떨기에 족한 곳이다.
더욱이 이곳에는 사시사철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한 가공한 돌풍이 분다.
사풍귀곡탄(死風鬼哭灘)--------!
바로 그곳이다.
휘우우----- 우----- 웅!
쏴---- 아------! 쏴아!
콰르---- 릉----- 콰콰콰!
칼날보다도 예리한 바람(風)!
뇌성같은 굉음을 울리며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거센 급류!
폭발하듯 퉁겨지는 물보라의 새하얀 포말!
사풍귀곡탄-----
실로 보기만 해도 아찔한 곳이다.
사풍귀곡탄의 정상,
초목(草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삭막한 암석군(岩石群),
태양은 바로 그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헉헉..... 으으...... "
한 줄기 답답한 신음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그곳에 나타났다.
백의청년,
한데, 오오..... 그의 모습을 보라!
너무도 끔찍했다.
혈인(血人)!
피(血)로 목욕을 한 듯 그의 전신은 피범벅이었다.
얼굴은 온통 핏칠이 되어 있어 용모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으로 부여잡고 있는 복부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오른손은 가죽만 붙어있는 듯 맥없이 대롱거리고 있었고 등에는 한
자루 검(劍)이 앞가슴까지 관통되어 있었다.
후둑...... 후두둑!
핏물은 혈선(血線)을 그리며 그의 뒤를 타고 있었다.
너무도 처참한 몰골.
한데,
오오.... 이럴 수가!
그의 복부를 움켜쥔 손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시뻘건 물체,
내장..... 내장이 아닌가?
토막토막 잘린......
아........!
놀랍다.
어찌 인간이 저런 상황에서도 죽지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나, 백의청년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비틀..... 비틀.......
그의 두 눈은 핏발이 곤두서 시뻘겠다.
하나, 그 두 눈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드러선 인물,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참혹한 상황 하에서도 움직이게 하는가?
모를 일이다.
이때 돌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가?
풀------ 썩!
백의청년이 힘없이 쓰러졌다.
하나 곧 그는 일어나려는 듯 꿈틀댔다.
하지만 그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일이 아니었다.
"안 돼...... 나.... 는..... 가야 해.... 맹.... 주께..... "
그는 입술이 터져라 이를 악물고 손끝으로 바위를 긁었다.
부----- 욱! 북!
금방 손끝이 터지고 손톱이 빠지며 다섯 줄기의 혈선(血線)이 그어졌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 혈수(血手)로 바위를 긁어 당겼다.
부---- 욱! 부북!
한 치.... 또 한 치......
그의 몸은 앞으로 나아갔다.
실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뿐,
기진한 듯 그의 몸은 움직일 줄 몰랐다.
죽었는가?
한데 돌연 백의청년은 고개를 쳐들며 피를 토하듯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아... 나 사해일신검(四海一神劍)... 악효균(岳孝龜)..... 의 죽음이 이렇게
허무해야 된다..... 말.... 인가.... 으흐흐..... "
아!
사해일신검 악효균이라니.......
그가 바로 점창기재 사해일신검이었단 말인가?
한데 그가 어떻게.........
순간,
퍼억! 퍽퍽!
그는 자신의 이마를 바위에 마구 찧었다.
피가 튀었다.
"으흐흐..... 의심의 치욕을 씻기 위해..... 이렇게 살아 왔는데..... 이렇게 살아
왔는데..... 결국 여... 기서.... "
피 어린 오열!
아! 그랬던가?
하나, 그는 아는가?
자신의 의심이 이미 풀려 있음을......
다만 그것이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란 것을.......
아! 비운의 기재 사해일신검 악효균-------
죽음(死)!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허무하게.... 너무도 허무하게......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응? 이것이 웬 피(血)인가? "
한 줄기 낭랑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나타났다.
나타난 인물 역시 혈인(血人),
오! 천풍-------
그는 천풍, 바로 그였다.
그는 사해일신검을 발견했다.
"어? 웬 사람이 이곳에서 죽었지? "
바로 그때,
"으..... 으..... "
인기척을 느꼈음인가?
사해일신검이 나직이 신음했다.
"어? 아직 살아있군. "
천풍은 조용히 다가가 사해일신검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사해일신검의 몸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손을 썼는지 더럽게 잔인했군. "
순간 사해일신검은 힘겹게 눈을 떴다.
"당...... 신..... 은......? "
천풍은 혀를 차며 말했다.
"츳! 당신은 살기는 글렀소. 한데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소? "
"혈..... 월..... 막.... '
"혈월막! "
순간 천풍의 두 눈에 가공할 살기가 폭출했다.
"무엇 때문에......? "
사해일신검은 또다시 물었다.
"당신.... 은......? "
"알고 싶소? 천풍! 혈월막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는 사람이오. "
"아.... 천풍....... "
일순 사해일신검의 죽어가는 두 눈에 일말의 다행의 빛이 피어났다.
"나는.... 사해.... 일신검....... 점창.... 악효균...... 이다..... 천풍....
무림맹주(武林盟主)께 한 가지..... 소식을.... "
천풍은 고개를 갸웃했다.
(점창.... 사해일신검 악효균? 무림맹에 무슨 일이...... )
"말해 보시오. "
"무림맹의 첩자.... 그는 사공(司空)..... 끄르륵! "
순간,
사해일신검은 두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털썩!
이어 그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죽음(死)!
결국 그는 죽은 것이다.
순간, 천풍은 두 눈에 기광을 뿌리며 깊은 생각의 나래 속으로 잠겨 들었다.
(무림맹의 첩자라..... 혈월막이 사해일신검을 죽이려 한 것을 보면 역시 무림맹에서도
혈월막의 첩자가..... 으음..... )
(그렇다면 나 천풍이 절대 무관할 수 없는 일..... 더욱이 무림맹, 그곳에는...... )
문득,
천풍의 뇌리에는 사랑을 고백하며 눈물짓던 서문여정의 그윽한 옥용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
이윽고,
그는 사해일신검의 참혹한 주검을 조용히 내려다 보았다.
(사해일신검.... 그대는 죽어도 절대로 그저 죽은 것이 아니오. 그대의 죽음은 한
송이 정의(正義)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오. )
죽음,
그것은 언제나 또 하나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천풍은 천천히 일어섰다.
한데 그 순간,
"그대가 천풍인가? "
음성,
아니 그것은 음성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만일 그 소리를 들었다면 살이 에이고 뼈가 저미는 듯한 혹독무비한
북풍한설(北風寒雪)이 전신을 엄습한 것 같은 착각에 몸서리치리라!
그 음성----- 그것은 결코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다.
제 39 장에 계속
제 39 장 죽음, 그 뒤는
".........! "
천풍은 내심 흠칫했다.
(이토록 가까이 접근했는데도 모르다니.... 보통 인물이 아니다. )
허나 그는 천풍다웠다.
그는 내색치 않고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시야에 한 인물이 들어왔다.
은의미공자(銀衣美公子)------
이십여 세쯤 되었을까?
무심하리 만큼 무표정하고 빙옥으로 깎아만든 듯 새하얀 절륜절색의 용모,
눈이 시릴 듯 눈부신 은의장삼을 나부끼는 미청년,
허나,
그의 몸에서는 아무런 기도도 풍기지 않았다.
눈(眼)!
다만 그의 두 눈에서 문득문득 뻗치는 냉전(冷電)같은 시선이 주위를 동결시키는 듯 했다.
천풍은 그를 발견한 순간 내심 침음했다.
(천하에 저런 인물은 오직 하나..... 마유강과 함께 천하를 반분(半分)한 인물.....
은의사미랑(銀衣死美郞)! 으음.... 마유강 못지않군. 오히려 그 이상일 수도... )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은의미공자를 바라보았다.
은의사미랑-----!
그렇다.
은의미공자는 바로 은의사미랑 빙옥대공자(氷玉大公子)였던 것이다.
빙옥대공자,
그도 천풍을 보는 순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감히 본 공자 앞에서 저토록 담담한 자는 없었다. 으음.... 대지, 그 자체인 듯
당당하고 대해(大海) 그 자체인 듯 고요하고도 기이한 분위기의 인물.... )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천풍.... 벽월이 죽자사자 덤빌만한 놈이다! )
그는 묘한 질투를 느꼈다.
이어,
빙옥대공자는 예의 얼음 같은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천풍인가? "
오만하고 냉막한,
그래서 하늘마저도 무시해 버릴 것 같은 말투였다.
천풍은 씩 웃었다.
"후훗! 은의사미랑께서 나 천풍에게 볼 일이 있으셨던가? "
문득,
빙옥대공자의 입꼬리에 얼음 알맹이 같은 미소가 달랑 매달렸다.
"나의 수하를 놀라운 솜씨로 해치웠더군. "
"오! 삼빙천존...... 사실 지금 말하지만 그들은 감히 죽음(死)을 건드렸지.
그 결과는 뻔한 것..... "
"죽음이라...... "
빙옥대공자는 눈꼬리에 잘디잔 주름을 잡았다.
살기를 품었을 때 나타나는 그 특유의 표정.
(죽음..... 감히 본공자 앞에서 죽음을 운운하다니..... )
하나,
그는 마음이 깊었다.
그는 담담하지만 여전히 냉풍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 점은 짐작한 바.... 허나 본공자가 묻고자 하는 것은 다르다. "
".........? "
"벽월,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
"벽월......? "
천풍은 고개를 갸웃했다.
빙옥대공자의 눈빛은 점차 싸늘해지고 있었다.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
순간,
"쿡! "
천풍은 기가막힌 듯 괴소를 터뜨렸다.
"은의사미랑, 뭔가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내가 천하의 모든 여인을 차지한다고
해도 어찌 감히 은의사미랑의 여인을 건드리겠는가? "
일순 빙옥대공자의 두 눈에 지독히 차가운 냉선이 쏟아졌다.
"천풍.... 나의 참을성을 시험하려 하지마라! "
사실,
그는 많이 참고 있었다.
한 여인의 사랑, 그것을 당당히 쟁취하기 위해서.......
"냉설화는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
"냉설화..... "
"냉설화가 바로 벽월이다. "
"........! "
천풍은 내심 짚이는 바가 있었다.
(냉설화...... 슬픔에 가득찬 여인.... 신비를 간직한 여인.... 그녀가 바로
은의사미랑의 여인이었던가? 헌데..... )
"냉설화..... 그녀야 알지. 헌데 왜? "
순간,
빙옥대공자의 두 눈에서 얼음가루 같은 냉섬(冷閃)이 풀풀 날렸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녀를 사랑하느냐? "
"사랑? "
천풍은 어이가 없었다.
"냉설화와의 사랑..... 그것 때문인가? 삼빙천존 역시 그 때문에..... "
"무슨 말을 원하는가? "
빙옥대공자의 준미한 얼굴은 한 덩이 얼음 같았다.
"하느냐? 안하느냐? "
"........! "
순간, 천풍은 가슴 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느꼈다.
(하면 어떻고 안 하면 어떠냐? 은의사미랑 너는 아느냐? 나 천풍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란 것을....... )
그것은 강요하는 것이다.
그는 안색을 무섭게 굳혔다.
"대답하기 싫다면...... "
"싫어도 해야한다. 나는 대답을 원한다. "
천풍은 내심 조소했다.
(후훗...... 은의사미랑이라하여 기대했었는데..... 후후.... 치정(癡情)에 미친
덜 된 위인이군. 그토록 냉설화를 생각한다면..... 좋다! )
그는 싸늘히 대꾸했다.
"안 한다! "
"........! "
빙옥대공자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흘러갔다.
허나 곧,
그의 두 눈은 가공한 살기로 무섭게 번뜩였다.
"안한다고.... 벽월은 그토록 네놈을 좋아하는데.... 네놈은 안 한단 말인가?
벽월에게 치욕감을 줄 놈.... 죽여버리겠다! "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순간,
우우우.......
그의 전신에 냉혹무비한 살기가 폭풍처럼 일었다.
"죽이겠다! "
우우우......
살기는 갈수록 더욱 거세졌다.
찡----- 쩌----- 엉------!
주위 암반이 허옇게 서리가 앉으며 쩍쩍 거미줄 처럼 터졌다.
실로 가공한 한냉기(寒冷氣)였다.
허나,
천풍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그 말을 하려고 그토록 서술이 길었던가? "
"벽월의 마음을 짓밟은 놈..... 죽이고 말겠다. "
"........? "
"무슨 말인가? 마음을 짓밟다니..... "
하지만 천풍은 더이상 마음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죽인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
"내 말은 곧 법(法)이다. "
"법..... 법이란 깨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내가 그것을 깬다면..... "
"....... "
빙옥대공자의 눈꼬리에 깊숙한 주름이 잡히며 눈에서 시퍼런 냉전이 폭출했다.
다음 순간,
"빙옥파천탁(氷玉破天 )-----! "
빙옥대공자의 입에서 으스스한 냉갈이 터짐과 동시에,
번----- 쩍! 츠츠츳!
여인의 손보다 곱고 새하얀 그의 우수(右手)가 눈부신 백광(白光)을 뿌리며 스물스물
백색 기류를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또한,
슈슈슈..... 슈슈.......
그의 전신에서도 기이한 백색 기류가 뿜어지며 천지를 뒤덮었다.
찰나간 천지는 백색 기류에 휩싸이며 새하얗게 얼어버리고 말았다.
순간,
천풍은 뼈골 저미는 듯한 가공한 냉기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으음...... 실로 가공할 빙기(氷氣)다. )
그 찰나,
"이것이 죽음이다-----! "
츄츄츄........ 츄츄........
팟스...... 슷!
오오!
파도,
무섭게 일렁이는 파도,
그것은 가공한 빙기(氷氣)의 파도였다.
빙옥파천탁!
북해의 만년빙정(萬年氷精)을 함유한 빙옥마공의 제 일초식인 빙옥파천탁이 펼쳐진
것이다.
순간,
".........! "
천풍의 두 눈이 무섭게 빛남과 동시에 그의 우수가 벽풍천중검의 손잡이에 이르렀다.
이어,
"척(剔)------- 강( )----- 류(流)-------! "
번----- 쩍!
츄리리---- 리---- 링!
한 줄기 눈부신 검광이 무지개처럼 치솟으며 빙기의 파도를 쪼개갔다.
다음 순간,
찌찌찌------ 찍!
파파팟----- 꽈---- 앙!
하늘이 쪼개지는가?
땅이 갈라지는가?
천지가 무너지는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쏴아...... 아......
쿠르릉! 쩌----- 쩌----- 쩍!
빙기와 검기,
통천가공할 두 기운은 주위 수십 장을 산산이 부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
모든 것이 일시에 멈췄다.
천풍,
그는 벽풍천중검을 비켜들고 비스듬히 서 있었다.
헌데,
그의 전신에는 새하얀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또한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빙옥대공자,
피(血)!
그의 왼쪽 어깨쭉지에서는 핏물이 눈부신 은의를 타고 선명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상이었다.
일순, 빙옥대공자의 얼굴이 수치로 물들었다.
"천풍..... 놀랐다. 나에게 부상을 입히다니..... 본공자가 네놈을 과소평가 했구나. "
천풍은 히죽 웃었다.
"당신..... 역시..... 멋..... 있군..... "
그는 애써 웃었지만 엄청난 한기에 그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으.... 더럽게 춥구나. 제기랄...... 생긴대로 노는군. 한빙기에 내상을 입었다.
지체하다간 한 덩이 얼음이 되겠군. 속전속결..... 그 수 밖에 없다..... )
내심 그는 놀라고 있었다.
빙옥대공자의 가공한 빙공에........
또한 빙혈천궁의 능력에 대해서......
이때,
"천풍, 본 공자의 진실된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 "
빙옥대공자는 이를 부드득 갈고는 돌연 한 걸음 나서며 옥수를 높이 치켜들었다.
순간,
번쩍-----!
그의 손바닥 중앙에서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가공할 백광(白光)이 폭출했다.
슈------ 우----- 우-----!
그그그..... 으응!
백광(白光)------
그것은 예사 빛이 아니었다.
그것에 부딪치는 물체는 모조리 얼음가루가 되어 하얗게 부서져 내렸던 것이다.
천풍은 혀를 찼다.
(쳇! 제발 뜨거운 맛이기를 바랬는데........ )
순간,
그는 벽풍천중검을 가슴 앞에 우뚝 세우고 태산처럼 몸을 세웠다.
천풍,
아! 그가 언제 이토록 신중하게 싸움에 임했던가?
바로 그때,
"빙옥---- 파----- 천---- 황(氷玉破天荒)----! "
그--- 으---- 응!
슈----- 우------ 우----- 우------!
백광이 빛을 폭출했다.
태양도 그 빛과 열기를 일시에 잃었다.
혹한무비한 한빙의 백광,
천풍은 저절로 흔들리는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악물며 벽풍천중검을 떨쳐 내었다.
"철( )------ 천(天)----- 인(刃)-----! "
순간,
츄리리릿-----!
스------ 아---- 아----- 앙!
수천 수만 가락의 가공할 검강이 부챗살처럼 천지를 뒤덮었다.
아아!
일대장광------
허나,
그것은,
천지종말..... 우주함몰의 순간이기도 했다.
백광, 검풍에 휘말리는 것은 무엇이건 간에 흔적없이 가루로 변했다.
빙옥대공자의 모습은 백광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헌데 그때,
빙옥대공자는 왼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꺼냈다.
"빙옥마궁(氷玉魔弓)의 위력을 보여주마..... 흐흐..... "
그 속에서 그는 으스스하게 웃었다.
오오.......!
빙옥마궁이라니......
심장이 짓터지도록 가공절륜한 이름이 아닌가?
그것은.......
천하사대마보(天下四大魔寶)의 하나가 아닌가?
탄궁으로 천지를 말한다는.......
천풍은 방심하지 못했다.
(으음.... 저자가 빙옥마궁을 열었단 말인가? )
그는 벽풍천중검에 혼신의 진기를 주입했다.
그 순간,
"빙옥탄궁(氷玉彈弓)------! "
한 소리 냉갈과 동시에,
눈부신 백광과 부챗살 같은 검강이 무섭게 뒤엉켰다.
허나,
...........
아무 소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천지는 지극히 무거운 정적 속에 잠겼다.
또한 천지는 빙글빙글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었다.
천풍은 그렇게 느꼈다.
또한 그의 벽풍천중검은 든 손은 솜뭉치를 가격한 듯 터전했고, 귀는 멍멍했으며
심장은 짓터지는 고통과 함께 팽창했다.
진공(眞空)-----
마치 진공상태에 처한 상태였다.
(헉..... )
천풍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헌데 그때,
그는 자신의 눈 앞에 어떤 거대한 힘(力)이 몰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사사령천공(不死邪靈天功)으로 심맥을 보호했다.
바로 그 순간,
콰---- 앙!
천풍은 거대한 쇠망치가 앞가슴을 강타하는 충격을 받았다.
"어----- 억! "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깊은 혼몽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아련한 의식 속에 자신이 허공을 날고 있으며, 매서운 바람이 전신을
휘감음을 느꼈다.
그 뿐이었다.
바로 그때,
"안----- 돼! "
스스------ 슷!
한 줄기 은영이 절벽 끝에 이르렀다.
빙옥대공자였다.
그는 망연한 시선으로 사풍귀곡탄을 내려다 보았다.
천풍의 모습이 아스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 천풍......
그가 사풍귀곡탄, 죽음의 협곡 아래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한편,
빙옥대공자-----
그의 은의는 갈가리 찢어져 있었고 선렬한 핏물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그 역시 부상이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천풍..... 나는 역시 강했다. 네놈이 부상만 당하지 않고... 빙옥마궁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절대 이토록 쉽게 이길 수는 없었으리라! )
그는 자신의 왼손을 천천히 폈다.
그의 손 안에는 장난감 같은 지극히 작은 소궁(小弓)이 있었다.
눈부신 백옥빛의 궁신(弓身)과 푸른빛이 은은히 도는 궁현(弓弦).....
한 손에 쏘옥 들어가고도 남을 작고 앙증맞은 소궁이었다.
아!
빙옥마궁----
그것이 바로 사대마보의 하나인 빙옥마궁이었단 말인가?
한데,
한데 말이다.
빙옥대공자의 얼굴 가득 어려있는 애석해 하는 표정은 무엇인가?
패자(敗者)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승자(勝者)의 관용인가?
아니면......
"천풍, 네놈을 절대 죽일 생각 생각은 없었다. 떳떳이 네놈 앞에서 벽월을 취하고
싶었다. 벽월은 내가 네놈을 죽였다고 증오하겠지! 하나 나는 그런 치사한 놈으로
전락되고 싶지 않다. "
넋두리인가?
하나,
빙옥대공자,
이미 네놈은 치사한 놈이 되어 버렸다.
"하나..... 네놈이 죽은 이상 더 무엇을 말하랴! 이제 벽월은 내 것이다. 또한
천하도 내것이 되리라...... 크하하하.... "
광소-----
승자의 광소였다.
한데,
그 광소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빙옥대공자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황량한 사풍귀곡탄만이 울부짖고 있었다.
아아.....
천풍이여!
그대는 이대로 가고만 것인가?
말좀 해보라!
하나 천풍은 말이 없다.
태양, 아니 하늘조차도.......
× × ×
소문,
한 가지 소문이 천하를 발칵 뒤짚어 놓았다.
<천풍(天風)이 죽었다!
그를 죽인 사람은 은의사미랑이었다! >
그것은.....
비탄과,
분노와,
슬픔의 소문이었다.
× × ×
여인,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찢기고 할퀴고 더렵혀진 처참한 몰골의여인,
그녀는 울부짖고 있었다.
"천풍.... 그 분이 죽다니.... 믿을 수 없어. 그 분은 절대 죽지 않았다. 나는
그 분을 찾을 거야....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빙옥(氷玉), 그 자를 죽이고
나도 천풍의 뒤를 따를 거야..... "
벽월(碧月)-----
그녀는 사랑을 찾아 떠난 여인, 바로 벽월이었다.
× × ×
× × ×
암흑(暗黑)!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가슴이 부서지는 듯 아프다.
고통을 느낀다면 나는 산 것인가?
하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어둠 뿐.....
아아........!
답답하다.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죽어서는 안돼.
나는 할 일이 많은 몸......
천풍(天風)!
힘을 내라! 힘을.......
"으..... 음! "
천풍은 어둠과 고통의 깊은 나락에서 삶의 몸부림을 쳤다.
순간,
번쩍!
그의 두 눈이 생(生)의 빛을 발했다.
이때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회색빛 암울한 빛과 역시 회색빛의 삐죽삐죽 솟은 석순들이었다.
(저것이 지옥의 모습인가? 별거 아니군...... )
천풍은 망연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아련히,
빙옥대공자와의 대결이 떠올랐다.
(은의사미랑..... 해볼만한 상대였다. 내가 피로해 있지만 않았다면..... "
문득,
그는 깨달았다.
"아! 나는 살았군. "
벌떡!
그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는 전신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
그 중 앞가슴의 고통이 가장 예리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의 앞가슴,
의복은 뻥 뚫려 있었고 가슴 피부는 손바닥 크기로 검게 죽어 있었다.
"빙옥마궁.... 무서운 위력이었다. 한데 이렇게 내가 살아있음은..... 천우신조....
바로 불사사령천공의 위력이 분명하다. "
아!
불사사령천공(不死邪靈天功)------
사사천경에 수록된 광세비공,
심맥(心脈)만 살아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재생(再生)시키는 일대기공
(一代奇功)이었다.
천풍은 자신도 모르게 불사사령천공의 혜택을 받은 것이다.
고통은 남아 있었다.
하나,
움직이기에는 불편함이 조금도 없었다.
문득,
천풍은 자신이 조그만 석동의 물과 땅 중간에 누워있음을 발견했다.
"......... "
석동,
반은 물이었고, 반은 푸석푸석한 땅이었다.
(기이한 일이로군. 대체 내가 왜 이곳에 누워 있을까? 나는 분명..... )
한데 그때였다.
"....... "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천풍은 석동 한 구석에 둥근 석문이 있음을 발견했다.
석문,
그곳에는 두 줄의 글귀가 깊숙이 패어져 있었다.
<마종천부(魔宗天府). >
<마종군림(魔宗君臨). >
제 40 장 魔天宗의 復活
석실,
회색빛 기광이 밝혀져 있었다.
중앙 석대------
한 흑의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가슴까지 흘러내린 흑염(黑髥), 청수한 용모......
일견 비범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하나, 그의 의복은 물론 전신은 깊숙한 상흔(傷痕)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지금 막 피 어린 싸움에서 돌아온 모습이었다.
다만 검게 달라붙은 핏자국이 상처를 입은 지 오랜 시일이 지났음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검은 철함이 놓여 있었다.
천풍은 흑의노인이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대체 누군데 이런 곳에서 죽어 있지...... )
문득, 그는 피식 웃었다.
"후후.... 이곳은 부상당한 사람만 오는 곳인가? "
그때 돌연,
음성이 들렸다.
석실을 쩌렁하게 울리는 메아리 같은 음성이었다.
"이놈! 어른을 보면 예를 올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거늘..... 건방진 놈이로고...... "
호통!
"어? 이곳에 사람이 따로 있었던가? "
천풍은 의아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메아리 같은 음성이 다시 들렸다.
"눈까지 어두운 놈이로고.... 네놈 말고 석실에 누가 있느냐? "
"아.......! "
천풍은 내심 놀랐다.
그는 흑의노인을 보고 뜻밖인 듯 물었다.
"노인장, 당신은 죽지 않았소? "
"죽었다. 그것도 오래 전에...... "
"죽은 사람이 어찌 말을 하시오. 그럼 애기가 안 되는데...... "
"엉뚱한 놈이로군. 그래도 예를 올리지 못하겠느냐? "
괴성은 호되었다.
하나, 천풍은 뻣뻣이 선 채 고개를 저었다.
"싫소이다. 나는 강요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오. 또한 나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소. 더욱이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희롱하는 것에
기분이 나빠졌소. "
순간,
"크하하.... 핫! 역시 뭘 해먹어도 될 놈이다. 아이야! 본좌는 너같은 아이를
만나기 위해 천 년을 기다려 왔다. "
"천년.....! "
"하늘은 무심치 않구나! 너같은 아이를 본좌에게 보냈으니..... "
괴성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천풍은 나직이 물었다.
"노인장..... 떠나시려 하오? "
"본좌의 사령(死靈)은 너의 생기(生氣)를 만나 일 각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
"아! "
"아이야! 본좌.... 는 너를..... 제자로 삼.... 지.... 는...... 않게..... 다.
다만 제이의 마천..... 종(魔天宗)이 되.... 어.... 본... 좌..... 의.....
절.... 학.... "
메아리 같은 괴성은 아련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데 마천종(魔天宗)이라니.......
마천종(魔天宗)!
천 년 전,
마(魔), 그 자체였고......
무(武), 그 자체였던......
천상천하 초강고수(超强高手)였던 천고제일인(千古第一人),
아!
흑의노인이 바로 그였단 말인가?
천풍------
그도 그 사실에 엄청난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설의 기인이며 영원히 중원의 혼(魂)으로 존재한 분.... 이분이 바로 그 분이라니.... )
그의 말투는 달라지고 있었다.
눈빛 역시 경의의 빛으로 물들어 갔다.
마천종------
역시 존경받을만한 인물이었다.
천풍은 마천종의 정체를 알고 감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포권을 쥐었다.
"노선배님,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
하나,
누가 알까?
그것이 천풍에게는 최대의 예의라는 사실을......
이윽고,
그의 시선은 검은 철함에 꽂혔다.
(철함을 언급하시던데...... )
철함!
철함을 보았다.
순간,
번----- 쩍!
츠츠츠------ 츳!
가공할 검은 광채!
그것은 가슴이 섬뜩할 정도의 마기(魔氣)가 서린 빛이었다.
반지(環)!
그것은 한 개의 묵옥반지에서 뻗치고 있었다.
순간,
천풍은 탄성했다.
"아! 마천환(魔天環)------! "
아! 그렇다.
마천환(魔天環)!
철함 안,
그곳에는 마천환 외에 흑색 삼각소기, 낡은 고서, 밀납에 싸인 흑색 단환,
그리고 한 통의 서찰이었다.
서찰,
천풍은 맨처음 서찰을 집어 들었다.
"........... "
비사(秘史)-----
그것에는 엄청난 천년비사(千年秘史)가 쓰여 있었다.
<후인이여!
이글을 읽는 그대는 곧 마천종(魔天宗)이다.
나 마천종은 과거 천상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또한 내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중원을
감히 넘보지 못했다.
하나,
아아...... 운명의 그날이여!
변황사대마역(邊荒四大魔域)-----
그 중 북해 빙혈천궁(氷血天宮)의 빙혈천존(氷血天尊)과 동해 마마도(魔魔島)의
묵염수라(墨焰修羅), 그리고 부상 태하전(太河殿)의 태무랑(太武郞) 등 삼마역
(三魔域)의 인물이 단합하여 중원을 쟁취하러 왔다.
결국, 나 마천종과 그들은 칠주야의 혈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결코 나 마천종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죽음 직전에 놓였으나 나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양패공상(兩敗共傷)!
아아.....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변황사대마역의 나머지 하나인 혈마천성(血魔天城)의 천황무존(天皇武尊)의
거대한 음모였음을......
우리가 깊은 부상에 처했을 때 돌연 구파일방 등 정파무림인들이 나타나 우리를
공격했던 것이다.
우리가 음모를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결국 노부 등은 깊은 부상으로 어쩔 수 없이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 일이 있은 후 영악한 천황무존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인이여!
혈마천성,
그들이 언젠가는 중원을 도모할 것을 명심하라!
어쩌면 그대의 대(代)에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
후인이여!
나 마천종의 모든 것을 남기노니 그것으로 노부의 뜻을 이어주기 바라노라.
이제 그대가 천마종이니라.
그리고, 환단 천마천단(天魔天丹)---- 그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삼각도기 집마평천기(集魔平天旗)---- 십팔마존(十八魔尊)의 후예를 부르는
영기(令旗)이며,
마천환과 고서 천궁마극마천록(天穹魔極魔天錄)---- 그것에는 노부 마천종이 있으리라.
부디 나의 염원을 풀어주기 바라노라.
마천종(魔天宗) 서(書). >
금릉(金凌),
대명황실(大明皇室)의 영화로움이 찬란한 국도(國都).
밤(夜)-------
장군부(將軍府)-------
보국대장군(保國大將軍) 도강휘(陶强輝)의 사택,
밤,
그것은 이곳에도 어둠의 장막을 무섭게 드리우고 있었다.
영빈각(迎賓閣)-----
장군부를 찾는 손님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한 방,
창가에 한 인물이 쓸쓸이 서서 어둠을 가름하고 있었다.
청의서생,
이십 이삼 세쯤 되었을까?
남루한 청의에 문사건을 쓰고,
준수한 용모이나 병색이 깃든 창백하고 우수 어린 얼굴.....
그는 비우(悲雨), 바로 그였다.
한데, 그의 창백한 얼굴에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문득, 그는 침통히 중얼거렸다.
"오늘도 오시지 않으시는가? 벌써 육 일째.... 아.....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하나 대가(大哥).... 그 분은 절대 요절할 상이 아니었다. "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렀다.
"후후..... 우아우, 내가 요절해서야 쓰겠나? 슬퍼할 사람이 너무 많아 요절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거든. "
순간, 비우는 몸을 떨었다.
음성, 너무도 귀에 생생한 한 사람의 음성이 아닌가?
휙!
비우는 그로서는 더이상 빠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한 인물의 여유로운 모습이 보였다.
천풍,
아시나요?
사랑하는 님이시여!
소녀의 마음 속의 무정은 오래 전에 사라졌음을 아시나요?
아름다운 님이시여!
소녀의 가슴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뜨거워졌음을......
다정옥녀(多情玉女)-----
그래요.
소녀는 다정의 여인이 되었답니다.
풍가가, 당신을 알고부터........
아! 사랑의 아픔을 느꼈읍니다.
"뚝! "
천풍은 도수아의 등을 토닥이며 준엄하게 그녀를 나무랬다.
도수아는 재빨리 울음을 멈추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풍가가.... 죄송해요. "
천풍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수아.... 너는 착한 여인이다. 여자란 무릇 정랑(情郞)을 하늘같이
여겨야 사랑을 받는다. "
순간,
"아...... "
도수아는 감격에 몸을 떨었다.
(풍가가... 소녀를 당신의 여인으로 생각해주고 계시군요. 기뻐요.... 정말 기뻐요. )
그녀의 두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눈물 속에는 사랑의 빛깔이 오색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정옥녀 도수아, 그녀는 사랑을 얻었다.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그녀는 감격하고 있었다.
한데 이때,
"어흠! "
헛기침 소리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인물이 들어왔다.
사오십 세 쯤의 중년거한,
붉그레한 혈색, 부리부리한 두 눈, 우뚝한 콧날, 얼굴의 반을 덮은 시커먼 표범수염......
청포에 싸인 강철같이 단단해 보이는 몸집......
일견, 사천왕(四天王)이 현신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했다.
보국대장군 도강휘,
바로 그였다.
도강휘는 한 차례 자신의 딸인 도수아를 훑어 보았다.
순간, 도수아는 그의시선을 느꼈음인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도강휘는 흐뭇해하며 웃었다.
(천하의 말괄량이라서 시집은 못갈줄 알았더니.... 저토록 얌전해질 줄이야.....
대체 누가 우리 수아를...... )
그는 천풍에게 시선을 던졌다.
순간,
(아! )
그는 내심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눈이 부셨다.
아니 감히 쳐다보기가 두려웠다.
천풍------
조용히 미소짓고 있는 그의 전신에서 기이한 서광이 뻗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서광,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굴복케 하기에 족했다.
도강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엄.... 엄청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는 일국의 황제에게나 나타날 만승지존
(萬乘至尊)의 황기(皇氣)가 아닌가? )
도강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아가 그토록 입이 닳도록 칭찬한 인물.... 천풍, 역시 그다. 후후.....
수아가 사람 하나는 잘 골랐군. )
그는 도수아를 향해 큰기침을 했다.
"수아야! 손님이 오셨으면 인사를 시켜 주어야지..... "
"참 아버지도..... "
도수아는 여전히 얼굴을 붉힌채 두 눈을 새초롬히 떴다.
"이분은 천풍...... 풍가가이시고.... 이분은 저희 아버님...... "
이에, 천풍은 한걸음 나서며 포권했다.
"천풍입니다. 장군부에 무단 난입한 죄..... 용서를..... "
도강휘는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헛헛헛! 용서라니.... 내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드나들게. 천풍공자..... 수아를
통해 애기를 많이 들었네. "
순간,
"어머! 아버지는..... "
도수아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며 잘익은 홍시처럼 되었다.
부끄러워 하는 모습,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그녀의 행동이었다.
한순간,
"헛헛헛헛! "
"하하하...... "
도강휘와 천풍은 낙락장소를 터뜨렸다.
도수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것은.....
잠시 후, 웃음을 멈춘 도강휘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천풍공자, 수아를 통해 보내준 해약.... 고마왔네. 황궁의 인물들은 모두 해독이
되었다네. 한데..... "
"....... "
천풍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일순, 도강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제.... 황제께서만 해독이 되지 않았네. "
"황제만? "
천풍은 두 눈에 기광을 뿌렸다.
(하면 황제께 중독된 독은 또 다른 것인가? )
그는 도강휘를 향해 조용히 미소했다.
"걱정 마십시요. 제가 직접 가서 진맥한 후 해독해 드리겠읍니다. "
"아! 하면 언제..... "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 밤이 좋겠죠. 내일 밤..... "
"알겠네. 하면 이 늙은이는 이만..... "
도강휘는 슬쩍 도수아를 바라보고는 껄껄 웃으며 방을 나섰다.
이윽고, 도강휘가 떠나자 천풍은 조용히 도수아를 불렀다.
"수아.... 잠시 자리좀 피해 줘야겠는데..... "
"네. "
도수아는 군말없이 방을 나섰다.
그녀는 순한 양이었다.
잠시후, 천풍과 비우는 뭔가 숙의에 들어갔다.
"........ "
방,
천풍이 거할 침실이다.
천풍은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무엇인가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이때,
사르르르.....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새하얀 나삼(羅衫)의 미소녀가 들어섰다.
도수아,
그녀였다.
그녀는 조용히 천풍 곁으로 다가와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이때, 인기척을 느꼈음인가?
천풍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일순, 그의 두 눈에 묘한 빛이 찰나간 스쳐갔다.
(청초할 정도로 아름답군. 후후... 처음 만났을 때 개망나니 같던 그녀가 아니야..... )
그는 내심 감탄했다.
하나,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그녀의 그런 변화가 바로 자신 때문이란 것을.....
그는 무심히 말했다.
"웬일인가? 자지않고..... "
도수아는 애절한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다.
"여인(女人)이 되고 싶어요. "
"여인이..... "
"네. 제 몸에 풍가가의 체취를 남기고 싶어요. "
"........ "
순간, 도수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허락치 않으면 소녀는 죽고 말 거예요. "
천풍은 탄식했다.
(아! 결국 그렇게 되는가? )
"너의 사랑이 그토록 간절했더냐? "
"미칠 정도로.... "
천풍은 쓰게 웃었다.
(허허..... 수아, 그토록 사랑했던가? )
천하에서 가장 강한 병,
사랑의 병!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이리 와라. "
"풍가가! "
도수아의 가녀린 몸이 천풍의 품 속에 허물어졌다.
"사랑의 병은 사랑만이 고칠 수 있는 것..... "
천풍은 도수아를 안아 침상에 가만히 눕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뜨거운 육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수아의 옷이 벗겨졌다.
이어, 환한 불빛 아래 눈부신 여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옥(玉)으로 빚은 듯한......
티없이 맑고 고운 옥체(玉體)였다.
땀을 촉촉히 머금은 옥체는 향기로왔다.
천풍은 옷을 벗었으며 단단하고 옥빛처럼 투명한 살결이 드러났다.
"아아..... 풍가가...... "
도수아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는 듯 천풍을 끌어 안았다.
사랑(愛)!
그것은 사랑이었다.
"수아...... "
"아아...... 풍가가..... 참을 수가....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아.... "
사랑!
뜨겁고... 짙게......
깊어가는 밤처럼 깊어갔다.
날이 샜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자연철칙이 아닌가?
장군부, 어둠이 밝음을 완전히 차단할 시각,
스----- 슥!
장군부를 바람처럼 빠져 나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날고, 또 한 사람은 그의 옆구리에 끼인 사람,
천풍과 비우, 바로 그들이었다.
제 41 장에 계속
제 41 장 만남의 기쁨과 슬픔
자금성(紫禁城),
누구라서 이곳을 모르랴.
하늘 아래 가장 극귀(極貴)한 황제께서 중원 대륙을 굽어 살피는 곳이 아니던가!
.......
구중궁궐(九重宮闕) 깊고도 깊은 심처(深處).
그곳에서도 신(神)을 제외한 천하의 인간들 중에서는 두 서너 명밖에 모르는
비처(秘處)가 있다.
잠룡전(潛龍殿)------
× × ×
은빛 가루 같은 월광(月光)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은......?
자금성 축성(築城)의 역사(歷史)와 더불어 같이한 백양림이었다.
백양목(白楊木) 하나 하나가 몇 아름이 넘는 천여 평의 수림(樹林).
그 백양림 앞에 흑오석으로 만든 비석(碑石)이 서 있었다.
천쇄미목호나사진(天鎖迷木幻死陣).
× × ×
잠룡전,
수천 명은 능히 수용하고도 남을 거대한 대전이었다.
그것은 황금(黃金)과 그 값어치가 버금간다는 순청석(純靑石)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뿐 아니다.
몇 년은 풍요롭게 살아가고도 남을 그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
잠룡전 중심에 위치한 내실(內室),
호화로우면서도 품위를 느낄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창문가에 놓여진 비단 침상.
흑염(黑髥)을 가슴까지 기른 노인이 병색이 완연한 채 누워 있었다.
거의 피골이 상접한 것으로 보아 이미 생사(生死)가 경각에 달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흑염의 노인을 진맥하고 있는 인물.
학발동안(鶴髮童顔)의 신선 같은 백의(白衣)노인.
전신에서 절로 심연한 기품이 흐른다.
문득,
백의 노인은 무겁게 가라 앉은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폐하! 만성절독이 이미 뇌와 심장으로 침투하여 지극히 힘든 상태이오나 손을
쓴다면 천수에는 상관 없을 것 같읍니다. "
폐하?
그렇다면.......
아!
그렇다.
륭경제,
중원 대륙의 모든 것의 주인이면서도 저승 문턱을 넘어 가려는 만상지존(萬象至尊)의
황제 륭경제였다.
그럼 백의노인은 자연히 천기노인이란 애기가 아닌가?
천기노인,
그는 금경제의 생명을 장담하면서도 실상은 내심 근심하고 있었다.
"세 시각 후면 만성절독이 뇌와 심장을 파괴해 버린다. 그러기 전에 손을 써야
하는데 복룡금와가 없으니...... "
"복룡금와가 없으면 손을 써도 소용이 없다! 또 구하기에도 너무 시간이 없으니.... "
그때였다.
천풍.
그가 보국대장군의 안내를 받아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천풍은 자연스럽게 천기노인과 륭경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으음! 저 분은 내 외할아버지..... "
보국대장군은 부복의 예를 취한 후 공손히 천풍은 소개했다.
"폐하! 제 미천한 딸 년을 통해 만성절독의 해약을 보낸 소협을 모셔왔읍니다. "
그러자,
륭경제는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는 용안(龍顔)에 미소를 띄우고 천기노인은
지극히 복잡한 표정으로 천풍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그러다.
천기노인은 불안할 정도로 기대 어린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소협! 그 만성절독의 해독법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애기해 줄 수 있겠나? "
천풍은 많은 의미가 담긴 눈길로 천기노인을 바라 보았다.
"어릴때.... 어머님에게서 배웠읍니다! "
순간,
"뭐라 그랬나? 어머니라고......? "
천기노인은 황제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황급히 되물었다.
"그렇읍니다. 분명..... "
"자, 자네 어머니 이름이......? "
"구름 운(雲)자에 푸른 벽(碧)자의 이름을 가진 냉가(冷家)의 여식이라 하더이다! "
냉운벽.
천기노인이 어찌 이 이름을 잊을 것인가!
자신이 지은 이름을.....
천기노인은 망연한 눈길로 천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온갖 회한과 상념..... 슬픔이 밀물처럼 그의 안면에 쌓였다.
그러다 천천히......
천기노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렇다면 네가......? "
"그렇읍니다. 외할아버지! 소손(小孫)의 예를 받으십시오. "
천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배지례를 올렸다.
"내 무슨 자격으로 네 절을...... "
천기노인은 절 하는 천풍을 눈시울이 뜨겁게 바라보다 그만 주루룩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천풍의 머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
천기노인은 외할아버지다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 어머니를 쫓아낸 이 할아비를 원망하지는 않느냐? "
천풍은 손자답게 말했다.
"어머님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니 누굴 탓하겠읍니까? "
"녀석.... 그래 어머니는 잘 있느냐? "
그 물음에 천풍은 손자답게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을 회피했다.
"그 전에 먼저 황제마마의 병부터 고치는 것이 좋겠읍니다. "
천기노인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다고 느꼈다.
허나,
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어디 네가 한 번 폐하를 진맥해 보겠느냐? "
"후후.... 사자 앞에서 위엄 잡으란 말이지요? "
천풍은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륭경제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도 허약하여 뛰는 동맥의 맥박, 차가운 체온(體溫),
천풍은 민활하게 염두를 굴렸다.
"역시! "
천기노인은 잔뜩 기대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알 수 있겠느냐? "
"제가 보기에는 신혈무골독(辛血無骨毒) 같읍니다만..... "
"허허허.... 과연 내 손자답다! 헌데.... 이 할아버지가 손을 쓰면 어떻게 되리라
생각하느냐? "
"폐하께서는 한 십 년은 더 젊어지셔서 회복되실 겁니다. "
"그럴것이다. 허나 어떤 한 가지가 없으면 이 할아버지도 아주 쓸모가 없음도 아느냐? "
"후후.... 제 할아버지를 쓸모 없게 만들 수는 없지요! "
천풍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품 속에서 조그만 옥갑을 꺼내 밀었다.
천기노인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옥갑을 열었다.
옥갑 안에는.....
흡사 용(龍)이 또아리를 튼 듯한 두꺼비가 들어 있었다.
순간,
"응? 이..... 이것은 바로 복룡금와가 아니냐? "
천기노인은 경악과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후후..... 이제 할아버지께서 치료하실 일만 남았읍니다. "
천풍은 또 한 차례 신비로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네가 어디서 어떻게 알고 복룡금와를 구해 왔는지 모르지만 일단
황제폐하부터 구하고 보자! "
복룡금와(伏龍金蛙).
봉래산 어느 계곡 폭포,
천여 장 절벽에서부터 용트림치며 낙하(落下)하는 폭포소리 장엄하고,
연못에서 다시 위로 솟구치는 포말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데,
한 자의(紫衣) 소녀가 폭포 옆 암반에 그림처럼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깊고도 깊은 산중 어느 폭포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자의 소녀라.......
피리소리에 심취되어 끌려갔던 륭경제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무엇에 이끌리듯 다가가 자의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자의소녀는 처음에는 흠칫 놀라는 듯 했으나 륭경제의 악의(惡意) 없음과 비범한
신태에 마음을 놓고 대했다.
어느 정도 말이 오고가자 두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서 서로 놀라고 말았다.
그 박식함과 상대방의 마음에 담긴 선한 포부에 서로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해서......
밤이 새는줄 모르고 애기에 몰두했었다.
륭경제는 언뜻 무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하룻밤을 같이 애기 하다보니 짐은 그만 소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말았네. "
좌중의 인물들은 이제 묘한 호기심에 륭경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
"짐이 태어나 지금까지 가장 사랑하는 소녀를 그때 만났었던거야.... 그 소녀
역시 짐을 살아하게 되었으니....... "
잊어야겠지?
그녀는 이제 한조각 회색빛 영혼이 되었으니까......
사랑의 애련한 슬픔의 추억과 천하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넘긴 채
삶의 연극을 끝낸 그녀이니까......
잊긴 잊어야겠지만 슬퍼 해서도 안되겠지?
내가 슬퍼하면 그녀의 회색빛 영혼은 저승의 안식처를 뛰쳐 나와 잿빛 하늘을
떠돌며 흐느낄 테니까......
웃으며 잊어주어야 겠지.
그녀에게 베풀지 못했던 사랑을 대신 받아 줄 아들이 태양보다 찬란히 내 앞에
나타났고, 내 죽어 저승의 문턱을 넘어 서면 제일 먼저 그녀는 날 반겨줄 테니까.....
하하..... 그렇지.
그녀도 조금 참다가 만나는거야......
× × ×
륭경제와 천기노인,
둘은 어색한 표정을 풀고 정식으로 장인과 사위로 수인사(修人事)를 주고 받았다.
너무나 과분한 사위를 졸지에 힘 하나 안들이고 얻은 천기노인.
"황제 사위, 노년(老年)에 소식 없이 찾아온이 과량한 영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
그는 륭경제와 여식 냉운벽을 어떻게 호칭 해야 될지 몰라 이 정도로 수인사를
끝냈고, 대륙의 제황이라 하나 실상 외로웠던 륭경제,
"장인, 여러모로 불편한 사위, 앞으로 잘 이끌어 주시기 바라오. "
그는 천기노인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혀 당사자는 물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둘
바를 모르게했다.
한데,
천풍,
그는 마치 자기가 무슨 몇 백년 굴러먹은 늙은 생강이라고 륭경제와 천기노인의
수인사를 심각하게 바라보다 한다는 한마디가,
"크크.... 이토록 번잡한 예절을 그 어떤 골빈 작자가 만들어 냈을까? 예절
따위가 없다면.... 사위는 장인에게 딸 하나 잘 키웠읍니다 한마디 하고 장인은
사위에게 딸 도둑아! 키우느라 들인 밑천 토해 놓고 훔쳐가라. 한마디 쉽게 하면
될 것을..... "
이렇게 심오 난해한 말을 최대한 심각한 표정으로 뇌까리더니 점잖게 혀를 툭툭
차는 것으로 끝냈다.
"쯧쯧...... 인간이 이같이 예절이라 하는 것 같이 골치 아픈 것에 얽메이지
않았다면 아마 좀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
천풍의 말대로 하자면......
아행의 인간이 되어 발가벗고 살자는 것인데......
키키킥...... 그것도 좋지!
생각해 봐!
눈만 뜨고 둘러 보면 희멀건 여체가 천지사방에 널려 있을 테니.....
그럼 집에 틀어박혀 잠잘 한심한 사내는 없을 거야.
미쳤어?
좀더 눈알을 부라리고 여체를 하나라도 더 감상 하려고 걸신 들린 아귀처럼 헤메고
다닐거야.
× × ×
문득,
륭경제는 약간 떨어져 부복해 있는 비우에게 시선을 던지며 천풍에게 물었다.
"저 청년은 누군가? "
천풍은 그때서야 비로서 비우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비우.... 슬픈 분노를 느끼고 있군! 역모에 휩쓸려 참수(斬首)를 당한 아버지
때문 이겠지? 하나 그 또한 잊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아니겠나? )
그는 내심 가슴 아리게 뇌까리며 짐짓 모르는 척 소개를 시켰다.
"수년 전 한림원 대학사를 지냈던 구양승의 자제 구양휘라 합니다. "
"으응.........? "
륭경제는 뜻밖이라는 듯 새삼스런 눈길로 비우---- 구양휘를 살폈다.
한데,
륭경제의 눈빛에는 한오라기 미안한 감정도 없질 않은가?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허허.... 그래! 대학사에게 신동(神童)이라 불리던 자식이 있었지, 고개를 들라. "
고개를 들라.... 그 누가 황제의 명(命)을 거역하랴!
비우---- 구양휘는 몇 번을 망설이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륭경제는 구양휘의 눈빛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대는 짐을 원망하는가? "
구양휘는 어금니를 아프도록 질끈 깨물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읍니다! 분명....... "
륭경제는 구양휘의 슬픈 분노가 어린 대답에 의외로 담담한 미소를 보냈다.
"짐에게 불경(不敬)하면 어찌 됨을 아는가? "
"죽음이 내려 지겠지요. 하나 그래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읍니다. 그것은 또한
거짓을 아뢰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감히 말씀 드리건데 생각해
보십시요. "
"........ "
"폐하께선 좀전 황태자(皇太子) 마마를 얻었다는 기쁨에 웃으셨고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의 소식에 우셨읍니다...... "
"으음.... "
"그것이 곧 인지상정(人之常情)이거늘.... 아비를 잃은 자식의 슬픔과 분노가 어찌
죄가 되겠읍니까? "
"허허허.... 딴은 맞는 말이로다! "
륭경제는 그 무엇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린 후 천풍에게 물었다.
"너 또한 그렇게 생각 하느냐? "
"제가 아버님을 잃었다면... 후후, 천하가 어찌 지금까지 혈해(血海)에 잠기지
않았겠읍니까? "
"흐음.... 그래! 좋아 그 문제는 접어 두고 대학사의 자식 구양휘와 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뇨? "
"제 머리 즉, 군사입니다. "
"호오? 좋아, 좋아.... 그렇다면 짐의 대군사를 네 군사와 만나게 해 누가 더
뛰어난가를 시험해 보리다. "
갑자기 꺼내는 엉뚱한 착상.
하나,
그 누가 있어 황제의 제의에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륭경제는 침상 손잡이를 왼쪽으로 세번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크르르릉-----
음향이 들리며 역시 왼쪽 벽에 두 서녀 명이 드나들 정도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 × ×
긴 통로.
점점이 박힌 야명주(夜明珠)가 길게 이어진 통로를 밝히고 있다.
그 통로를 따라 민첩하게 따라 움직이고 있는 두 인물,
남의 중년인,
사오십 대 쯤 되었을까?
출중한 기품에 고요한 눈빛은 헤아릴 수 없는 현기(玄氣)를 내포하고 있다.
또 한 인물,
전설의 뇌공(雷公)인가?
건장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안광(眼光),
뻣뻣한 고슴도치 수염,
일견(一見),
일신의 내력이 예사롭지 않은 두 인물은 미끄러지듯 통로를 빠져 나갔다.
× × ×
잠시 후,
륭경제에 의해 생긴 문전에 깊숙히 부복하는 두 인물이 있었다.
바로 긴 지하 통로를 바삐 걷던 두 인물이 아니겠는가.
남의 중년인,
"폐하! 신(臣) 대군사.... 방 폐하의 성체(聖體)를 뵈옵니다. "
고슴도치 수염의 호한(虎漢),
"폐하! 신 어령대장군 폐하의 옥체(玉體)를 뵈옵니다. "
한데,
백의 중년인----- 대군사를 구양휘가 보는 순간,
".........? "
그는 갑자기 석상(石像)이 된 듯 전신이 뻣뻣이 굳은 채 두 눈 만을 부릅떴다.
륭경제는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대군사를 이렇게 부른 까닭은 한 귀재를 소개하기 위함이라오! 고개를
들어 그 귀재를 살펴 보시오. "
대군사는 황송한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좌중을 살폈다.
먼저 천풍이 눈에 들어 오고.....
그 다음에 구양휘를 보았을 때,
돌연,
대군사는 황제의 면전이란 사실도 잠시 잊은 듯 낮게 부르짖었다.
"너, 너는 휘아가 아니더냐? "
그때서야 비로서 구양휘는 이 믿지 못할 사실이 현실임을 느끼며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렇읍니다! 아버님.....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옵니다. "
아!
그렇다면 대군사는 바로 삼 년 전 참수 당했다고 알려진 한림원 대학사 구양승이란
말인가?
어떻게... 그가 살아 있단 말인가?
그거야 어찌 됐든,
"휘아! "
"아버님! "
구양승과 구양휘는 서로 부등켜 안고 왈칵 눈물을 흘렸다.
죽어 저승에 가서나 뵐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부자(父子)의 극적인 상봉, 이렇게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못했건만......
해서,
그 어떤 고통스런 삶도 죽는 것 보다 낫고 아름답다고 했던가.
.......
문득,
구양승과 구양휘는 지금 이 자리에 지엄한 황제의 면전이라는 사실이 생각나자 급히
떨어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또한,
사경(死境)을 헤매던 륭경제가 병상에 눕기 보다 더 활기 찬 모습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천기노인이라 하나.... 이렇게 빨리 쾌유 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
구양휘와 어령대장군은 감히 의혹스러운 눈초리로 륭경제를 우러러 보았다.
륭경제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으허허허..... 의아해 할 거 없노라! 이 모두가 장인 여른과 아들 덕택이니..... "
장인.... 아들?
구양승과 어령대장군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둘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았다.
륭경제 옆에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천풍을,
그 태양처럼 찬란한 용모와 신태(身態)를......
(오오! 저토록 뛰어난 청년이 황태자 저하......? )
헌데,
륭경제가 문득 구양휘에게 냉엄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이래도 짐을 불경스럽게 대할 것인가? "
구양휘는 등줄기로 식은 땀이 쫘악 흘러내림을 느꼈다.
(주, 죽었다. )
그는 아예 엎드리듯 오체복지(五體伏地)했다.
그리고 가슴 떨리게 외쳤다.
"폐하, 죽여 주십시요...... "
순간,
"으허허허....... 좋은지고! 좋다....... "
륭경제는 또다시 대소(大笑)를 터뜨리며 연신 무엇을 좋다고 했다.
구양휘와 어령대장군은 이제 머리가 헛갈려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병상을 털고 일어난 황제, 륭경제,
아닌 밤중에 홍두께 보다도 더 졸지에 나타난 황태자와 장인,
스스로 죽여 달라는 구양휘,
<어의천기혈단(馭意天旗血團). >
천풍,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생각을 검토하고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신혈무골독! 그것은 중원에서 사용되는 독이 아니다. 아니.... 천하에서 그 독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남만 독황부 밖에 없다! )
(그렇다면.... 황궁의 음모에 독황부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했다는 애긴데....
그들이 왜? 아니.... 독황부 인물이라 할지라도 감히 황제를 시해하고 황궁을
넘볼 정도로 간덩어리가 크지는 못하다! )
그의 눈빛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또한 혈월막은 전에 도수아를 납치하려 했었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독황부와 혈월막이 손을 잡고 황궁을 노렸다? 아니야.... 일개 살수 집단이
황궁을 넘볼리가 없지! )
.........
(그렇다면.... 혈월막과 독황부 뒤에는 어떤 엄청난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결론! 후후.... 혈월막이 왜 살수의 직업을 포기하고 십오대 문파의 수석장로를
바꿔치기 했으며 정파 무림맹을 박살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겠지! 놈들은 명령에
움직이는 수족(手足)에 불과 했던 거야..... )
그의 눈빛에 점차 강렬한 살기(殺氣)가 고이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누가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게 황궁 전체에 만성지독을 펼칠 수 있었단
말인가? 여기에는 필히 황궁수뇌 인물이 처음부터 개입해야 가능하다! )
누군가?
구족멸문(九族滅門)의 음모에 처음부터 동조한 황궁 수뇌인물이.....
(좋다! 후후.... 나 천풍이 개입한 이상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끝이다! )
결정,
천풍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렇게 되면.........
× × ×
천풍,
그는 대군사 구양승이 밝혀낸 변절자 명단을 접수한 후 잠룡전을 떠났다.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서,
× × ×
북로대원수(北路大元帥) 섭청,
북로대원수 섭청,
그는 근력(根力)을 자랑이나 하듯 이제 겨우 십 팔 세의 애첩을 탐닉하고 있었다.
백사(白蛇)처럼 새하얀 몸을 지닌 꽃다운 애첩 가홍(佳紅),
"하흐흑..... 아아..... "
그녀는 몸으로 울며 뜨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는 사내를 후끈 달게 하는 사향내음과 비음이 흘러 나왔고,
환처럼 휘어진 허리 밑에 풍요하게 매달린 둔부는 파도를 타고 있었다.
섭청은 곰처럼 굵은 허리를 움직이며 가홍의 속살에 깊숙이 침몰되어 갔다.
........
"허허허..... 고년! 가면 갈수록 나를 미치게 하는군. "
섭청은 가홍의 배 위에서 일어나며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가홍은 허여멀건 나신(裸身)을 축 늘어뜨린 채 요염한 미소를 배여물었다.
"나으리는 정녕 밤의 제황이세요..... "
"하하하..... 아직 하룻 밤에 서녀 명의 계집을 갈아 치울 자신은 있느리라! "
그 말에 답하듯,
"일찌감치 깨어나! 그건 개꿈이야. "
한 소리 냉랭한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허억! 언제.... 내 이목을 속이고 누가 침입을......? )
섭청은 내심 헛바람을 토하며 팽그르 신형을 돌리며 그대로 일장(一掌)을 날렸다.
"허어! 이 늙은이가 충고해 주는 어르신네에게 손을 허위적거리고 그래? "
섭청은 비릿한 야유 소리를 들어야 했으녀,
"끄윽..... "
목줄기를 쥐어 잡히며 영 체통없는 비명을 터뜨려야 했다.
어느새 마혈까지 제압되어 있었다.
섭청은 희번덕거리는 눈길로 자신의 목줄기를 닭모가지처럼 잡고 있는 인물을 보았다.
천풍,
바로 그가 아니겠는가!
.......
천풍,
그는 섭청을 개(犬)처럼 꿇어 엎드려 놓고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금군교두위장(禁軍橋頭威將), 어사대부, 좌상(左相), 사원태상백(司元太上伯),
판호부(判戶部),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등등..... "
천풍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황궁의 어마어마한 실력자들을 쭈욱 열거한 후
섭청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겠지? 모두 당신처럼 목숨도 살고 영화(榮華)도 누리었던
반역자들이야..... "
"....... "
"헌데, 그들은 안타깝게 목숨도 잃은 채 저승의 문턱을 넘고 말았어! 바로 오늘 밤
본 공자의 손에 의해서..... "
"........ "
"그것도 여러가지 차이가 있게 죽여 주었지! 목을 통째로 뽑아 죽이고 사지를
절단해 죽이는 것부터 간단히 머리만 박살내는 걸로 끝내 버리기로 했지.
왜 차이를 두었나 하면.... "
천풍은 잠시 말 끝을 흐리며 섭청에게 눈길을 던졌다.
섭청,
(으으! 웬 흡혈귀가 난데없이 찾아 왔단 말인가? )
그는 내심 어금니 시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등줄기가 통째로 빠져 나가는 듯한 공포에 혼절할 지경이었다.
천풍은 말을 끝맺었다.
"본 공자의 물음에 신경질 나도록 시간을 끄는 놈이 있는 반면에 시원하게 대답하는
놈등..... 차이가 있다 보니 죽이는 데도 차이를 두게 되더군! "
천풍이 쉽게 애기한 것의 요점은 신원하게 죽여줄 테니 묻는 말에 속시원히
대답하고 빨리 저승이나 구경하라는 말이었다.
섭청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새도 침입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소에 소리 없이 나타난 인물이라면 능히....
천풍은 북해(北海)의 모든 얼음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묻겠다! 황제에게 독을 쓴 황궁 음모의 최고 수뇌는 누구냐? "
......
완전히 기가 죽은 섭청의 입은 저절로 더듬더듬 열렸다.
"하.... 황후마마께서..... 시키셔서...... "
(황후가........? )
.......
천풍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황후가 정녕 황제에게 그 악랄한 독을 사용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
천풍은 월정황후에게 향했다.
물론 한 번 묻는 말에 즉각 대답한 섭청의 머리를 딱 한 번에 잘 익은 수박처럼 깨놓고.....
× × ×
상아궁,
백옥(白玉)처럼 새하얀 대리석을 정교하게 깎아 다듬어 만든 아름다운 궁전,
월정황후의 거처였다.
황후의 거처답게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궁내(宮內) 무사와는 틀린 복장을 한 인물들도 다수 끼여 있는 것이 아닌가?
바람이 상아궁을 통과하지 못할지라도 천풍에게만은 예외다.
왜?
그는 단순한 바람이 아닌 하늘의 바람(天風)이기에.......
천풍,
그는 한줄기 연기로 변해 상아궁 깊숙이 침투한 후 월정황후의 침실 벽으로 스며들었다.
.......
월정황후의 침실,
비단으로 벽을 도배한 지극히 화려한 침실이었다.
헌데, 침상을 보라.
이 무슨 해괴 망측하고 낯 뜨거운 광경이란 말이더냐?
"아흑.... 아..... 그만..... "
월정황후가 웬 복면인과 함께 침상에서 뒹굴고 있으니 말이다.
황후의 신분으로 불륜의 불장난을 하고 있으니.....
월정황후,
아직도 얼핏 보아 이십대 몸매 같은 그녀의 여체는 무서운 격랑에 휘말린 듯
흔들리고 있었다.
탐스러운 젖무덤은 사내의 우악스런 손길에 터질 듯 짓눌려 있었고,
하얀 박속 같은 둔부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사내의 굵은 허리에 희롱당하고 있었다.
"아학...... 몰라...... "
달디단 내음이 풍기는 그녀의 입에서는 죄악에 물들여진 쾌락의 신음이 새여 나오고
있었다.
복면의 사내, 모든 옷을 다 벗고 월정황후의 배 위에서 노를 젓고 있으면서도
얼굴을 가린 복면만은 벗질 않고 있었다.
그는 륭경제만이 취할 수 있는 월정황후의 몸을 마음대로 즐기고 있었다.
벽 속에 스며들어 있는 천풍,
그는 무서운 분노를 느끼기에 앞서 어이가 없었다.
(이.....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보았나?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월정황후를 대략 열 댓번 까무러치게 한 복면의 사내는 그녀의 몸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월정황후는 허탈한 가운데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복면의 사내는 음침한 눈길로 자신이 즐기던 월정황후의 나신을 훑으며 징그럽게 웃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대를 내게 달라고 간청할 생각이오. "
월정황후는 놀란 듯 물었다.
"당신 위에 또 상전이 있나요? "
"물론! 내 위에는 부주(府主)가 있고 그 위로는 부주조차 하늘로 섬기는 성주(城主)가
계시오! "
"성주......? "
"지금 알려고 할 필요는 없소. 소성주(少城主)께서 이미 중원으로 들어오셨고, 곧
천하는 그 분 발아래 엎드릴 테니...... "
"....... "
"그때 어쩌면 한 번 보게 될지도 모르니...... "
월정황후는 잠시 호기심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약간 차갑게 물었다.
"황제를 왜 죽이지 않죠? "
아! 그녀의 입에서 너무나 서슴없이 뱉어진 말,
황제를 왜 죽이지 않느냐------!
복면의 사내는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아직 명령이 없어 미루지만 곧 황제는 죽을 것이다. 한데.... 그토록
절실히 황제를 죽이고 싶은가? "
"물론이예요! "
월정황후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표독한 살기마저 일었다.
"황제는 이십 년 전 밀행을 다녀온 후 저와 동침을 피해왔어요. 흐흥! 진정
사랑하는 여인을 놔두고 나와 살을 섞을 수 없다는 생각이겠죠. "
"........ "
"거기에다가 황제가 그 어떤 계집을 찾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
아아! 월정황후여,
그대가 천하에서 가장 질투가 많은 여인이리라.
영혼과 몸을 조금씩 죽여 가는 질투의 화신(化身) 월정황후,
천풍,
그는 황궁을 깨끗이 정리한 후 남만 독황부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대군사와 어령대장군이 만든 어의천기혈대 백 인(百人)에게 태무랑의
가공할 무공을 전수했다.
왜.......?
제 43 장에 계속
제 43 장 南蠻女人의 뜨거움
남만(南蠻).
눈을 씻고 보아도 맨 땅이라곤 어디 한 군데 찾아보기 힘든 밀림의 세계.
비(雨)가 하루도 쉴 새 없이 내리고 사철 후덥지근한 날씨,
그 덕택에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밀림지대에는 수천 수만의 독충(毒蟲)이
우글거리고 있다.
× × ×
독황부(毒皇府).
멸천독존(滅天毒尊) 갈모위(葛某爲),
독황부의 부주(府主).
독황부의 이천 팔백(二千八百)에 달하는 독공(毒功)과 독술(毒術)을 완전히 연성한
독인(毒人).
독마지체(毒魔之體)의 경지에 이른 그의 몸은 거의 불괴지신(不壞之身)에 가깝다.
× × ×
생사독전(生死毒殿).
멸천독존의 침소가 있는 대전,
한 걸음걸음마다 죽음의 독이 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멸천독존 갈모위는 생사독전에서 가장 은밀한 곳에서 한 인물과 마주 앉아 있었다.
.........
검다고 표현할 정도이 피부 색깔을 가지고 있는 멸천독존,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인물은?
전신에서 칼날 같은 살기가 쉴새 없이 뻗치고 있는 혈의(血衣) 복면인 이었다.
둘은 한동안 애기를 나눈 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
문득, 혈의 복면인이 자신의 옷처럼 붉은 음성으로 말했다.
"성주께서 부주의 노고와 황궁을 쉽게 장악한 독술에 대해 칭찬한 바 있으니.....
천하가 수중에 들어온 후...... "
"........ "
"부주는 틀림없이 상당한 지위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오. "
갈모위는 황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득의의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통사(通使)께서 노부를 잘 애기해 준 덕분이 아니겠소? "
"별로! 하나.... 천하를 접수 할 때까지 한 가지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
"....... "
"대신 죽음을 받아야 될테니 끝까지 신경을 곤두 세워야 할 것이오! "
"물론이오. 헌데....... "
갈모위는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뒷말을 이었다.
"그 계집을 등에 업고 내 잔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삼혈독신(三血毒神) 때문에
요새 두통을 앓고 있소이다. "
삼혈독신(三血毒神)).
× × ×
× × ×
갈모위,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탁자에 앉아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제길! 젠장할...... "
알 수 없는 무슨 일 때문에 연신 투덜거리며,
그때, 혈의복면인이 축 늘어진 갈주니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 왔다.
갈모위는 벌떡 일어나며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아니 천혈독신이 있음을 잊었소? "
조심해서 행동 하라는 말이다.
하나, 혈의 복면인은 갈모위 옆에 털썩 주저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내 생전 이렇게 센 계집은 처음이오. 하다 하다 지쳐서 임시 수혈을
제압해 두었소만..... "
"......... "
"저 계집은 좀더 몸을 풀어야지만 극열요혈향의 춘향(春香)이 풀어질 텐데....
큰일이오. "
"통사의 뜻은? "
"흐흐..... 좀 창피한 애기지만 내 대신 이 계집 뒷마무리 좀 해 달라는 것이오. "
"........? "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은 극열요혈향을 풀지 못하고 죽을 테고 자연 성주의
명(命)을 거역하게 되기에 부탁 드리는 것이오. "
"으음..... "
갈모위는 약간 뜸을 들이다가 짐짓 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나, 이 계집이 탐나서 통사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님을 아시오. "
"흐흐...... 물론이오! "
혈의복면인은 혼절한 갈주니를 갈모위에 건넸다.
갈모위는 받으려고 팔을 뻗었다.
휘익------ 짝!
"윽....... "
혼절해 있던 갈주니가 돌연 두 눈을 파랗게 뜨며 번개처럼 갈모위의 뺨을 후려
갈기는 것이 아닌가?
갈모위는 볼을 싸안고 몇 걸음 물러 갔다.
그는 직감적으로 사태가 이상함을 느꼈다.
"통사로 가장한 네놈은 누구냐? "
그 말에,
"큭큭..... 죽을 놈이 알아서 뭐하겠다는거냐? "
"흘흘흘...... 뼈를 추려도 시원찮을 놈! 감히 가짜 부주 노릇을 해. "
괴이한 음성과 함께,
스스슥! 스윽.......
삼인(三人)의 괴노(怪老)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전신이 완전히 독(毒)으로 뭉쳐진 삼인의 괴노를,
바로 독황부의 삼혈마신이었다.
(헉! 죽었다. 그러하면 도망 가는 것이 상책이다. )
가짜 갈모위는 다급히 염두를 굴리자마자 쾌속하게 창문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허나,
"클클...... 하늘 끝까지 도망 가 봐라. 네놈이 사나? "
삼혈마신은 특유의 괴소(怪笑)를 흘리며 유령처럼 쫓아 갔다.
혈의복면인, 그는 천풍이었다.
그는 복면을 벗으며 갈주니에게 생긋 미소를 던졌다.
"어떻소. 부주가 가짜임이 드러났으니 약속대로 하시오? "
약속? 갈주니는 약간 풀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 자 정도 길이의 회초리를 천풍에게 건넸다.
천풍은 점잖게 앉으며 회초리로 인정사정 없이 갈주니의 종아리를 때렸다.
휘익...... 차악!
"아악! "
갈주니는 찡한 고통에 손을 꼬옥 모아 쥐며 부르르 떨었다.
"감히 낭군 되실 분에게 처음부터 반물을 했겠다? "
천풍은 이렇게 말하며 회초리 춤을 추기 시작했고,
"아악..... 흑흑...... "
갈주니는 아이처럼 울어야 했다.
약속이란 이런 것이었다.
어쨌든,
천풍.
문득, 갈주니의 애절한 흐느낌을 뚫고 저 멀리서 아련한 비명이 들려왔다.
가짜 갈모위가 생(生)을 끝맺는 소리였다.
제 44 장에 계속
제 44 장 세 男兒의 友情
서문여정(西門汝晶),
그녀는 소림사에도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였다.
소림,
아아.......!
그곳은 이미 악마의 소굴로 변해 있었다.
혈월막,
그들에 의해 소림은 천오백 년의 불문성지(佛門聖地)를 악마에게 넘겨줘야만 했다.
아니, 혈월막이 아니었다.
혈월막은 단지 한 어마어마한 세력의 빙산일각 같은 극히 지엽적인 것이었을 뿐,
혈월막과 남만의 독황부(毒皇府)는 그 세력의 전초세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혈마천성(血魔天城)--------!
× × ×
흑의검천(黑衣劍天),
그는 전 중원을 위진시킨 삼혈마천수라(三血魔天修羅) 중에 일인이었다.
마유강(魔幽强),
은의사미랑(銀衣死美郞) 빙옥(氷玉),
흑의검천(黑衣劍天),
× × ×
은의사미랑 빙옥,
바로 그였다.
그는 몹시 피로해 보였고,
군데군데 상처를 입고 있었다.
"으으.... 혈랑군(血郞君), 그 놈에게 패하다니.... 그것도 혈마천성의 소성주에게....
이제는 혈마천성의 수중에서 벗어났다고 여겼는데.... 으드득...... "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중원의 반을 차지했던 그의 빙혈천궁의 중원거점을 혈마천성의 소성주가 느닷없이
급습한 것이다.
오십 년 전,
변황사대마역을 지배하던 서장의 혈마천성의 수중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는데,
중원을 거의 제패하려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철저히 패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해에는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북해 빙혈천궁은 이미 혈랑군의 수중에 떨어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중원의 미아(迷兒),
은의사미랑은 그런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부드득.... 기다려라! 혈랑군, 언젠가는 네놈을 반드시 씹어삼키고 말테다.....! "
빙옥은 이가 부러져라 갈았다.
그 순간,
"아하하....! 빙옥! 쫓겨 꽁지가 보이지 않게 도망쳐야 할 네게 과연 그럴 능력이
있을까.....? "
바로 코 앞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지는 것이 아닌가?
"웬놈이냐.......? "
빙옥은 노갈을 터뜨리다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아..... 네가..... "
그의 면전에 태산 같은 신태로 우뚝 서 있는 미장부,
그는 바로 빙옥에게 죽음을 당한 천풍이 아닌가?
"네놈이.... 어떻게..... "
천풍은 비웃듯이 웃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느냐 그 말이냐? 후후.... 그것은 궁금한 것이 못돼, 그보다
천하의 은의사미랑이 어쩌다가 이처럼 가련한 신세가 되었는지가 더 궁금하지
않은가? "
"빙옥은 수치로 벌겋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놈을..... "
그는 즉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천풍은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비릿하게 웃었다.
"핫핫.......!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 빙옥......! "
순간,
빙옥은 부지중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으으..... 이놈, 예전의 천풍이 아니다.....! 아니 예전보다 최소한 백 배는 더
강해졌다. )
그렇다!
눈 앞의 천풍,
그는 이미 옛날의 천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천풍은 표정을 진중하게 굳혔다.
"빙옥! 너는 아직도 혈마천성이 너희 빙혈마궁의 힘에 눌려 북해에서 손을
떼었다고 생각하느냐......? "
빙옥의 얼굴이 노화로 잔뜩 일그러졌다.
"무슨 개소리냐? "
"하하... 혈마천성은 혈월막과 남만의 독황부를 거느릴 정도이다! 너희 빙혈천궁이
그들 두 세력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헌데 그 정도의 혈마천성이 어찌
힘에 밀려 북해에서 떠났다고 여기느냐? "
순간,
빙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음...... 그건 그렇다......! 그 정도의 혈마천성이 그다지 쉽게 물러서다니...... )
"핫핫....! 빙옥, 그들은 단지 북해와 동해 마마도(魔魔島)의 힘을 이용했을 뿐이다.
두 세력이 중원을 거의 접수했을 때 자신들이 나타나 너희 두 세력만 깨부수면
천하는 자연히 자신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테니까..... "
빙옥은 깨달았다.
(그.... 그렇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노린 것이다.....! 간교한
놈들.... )
천풍은 엄숙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최소한 나는 중원을, 너는 북해를 되찾아야
한다..... "
"너의 뜻은......? "
"도와 다오......! 중원을 건지고 북해를 되찾아야 한다......! "
빙옥은 웃었다.
"후후.... 설사 우리가 힘을 합친다 해도 우리 둘만의 힘으로 가능할까.......? "
그 웃음은 극히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때,
"그렇지 않다 빙옥, 나도 천풍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돌연,
인간의 음성이 아닌 목소리가 들리더니 좌중에 한 명의 묵의청년이 나타났다.
그를 발견하는 순간 천풍은 반갑게 외쳤다.
"마유강......! 반갑군......! "
그렇다!
나타난 묵의청년은 바로 북해 마마도의 도주인 마유강이었다.
천풍과 그의 추췌한 몰골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혹시 마유강 너도...... "
마유강은 쓰게 웃었다.
"그렇다! 나 마유강도 그놈, 혈랑군에게 철저하게 짓밟혔다.... 그 놈에게..... "
천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
문득, 천풍은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유강, 나를 돕겠느냐? "
"그것은 내가 너 천풍을 돕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네가 힘을 합친다는 것은 스스로를
위하는 것일 뿐이다. "
"그렇다! 해서 나는 그 스스로를 돕자는 것이다.......! "
마유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린 서로를 도와야 한다.....! "
마유강은 약간 변해 있었다.
전날의 그 타협을 모르는 불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천풍은 빙옥을 돌아보았다.
"자..... 빙옥, 어떻게 할 테냐? "
빙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나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다...... "
"무슨 일이냐? "
순간,
스스----- 팟!
빙옥의 장심에서 돌연 찬란한 백광이 섬전처럼 뿜어져 천풍의 가슴을 쓸어왔다.
천풍은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후후.... 빙옥파천황(氷玉破天荒), 여전히 위력적이군...... "
순간,
꽈꽝!
빙옥의 일장은 고스란히 천풍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한데,
천풍은 단지 두 걸음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가슴을 문지르며 씨익 웃었다.
"후후.... 승락한다는 인사치곤 거칠군. "
빙옥의 표정은 수차례나 복잡하게 변했다.
한순간,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웃었다.
"후후...... 천풍, 너는 나조차도 반할 정도로 멋진 놈이다..... "
"그런가? 한데 나는 왜 아직도 홀아비신세를 못 면하는 것일까? "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핫핫..... 빙옥, 자네가 나중에 중신 좀 서 주겠나..... "
빙옥은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하하..... 나는 이미 좋은 혼처를 생각했네..... "
"응? 벌써....... "
"핫핫... 벽월, 그녀라면 어떤가? 그녀도 자네없이는 죽고 못사니.... "
그렇게 말하는 빙옥의 표정은 조금의 가식도 없었다.
천풍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츳! 또 그놈의 벽월타령이군...... "
그때,
마유강도 손을 내밀어 그들의 손을 잡으며 껄껄 웃었다.
"핫핫핫....... 빙옥! 자네가 그렇게 중매를 잘 서면 나 마유강도 하나 서 주게,
난 얼마 전에 한 여인에게 딱지 맞은 적이 있어서..... "
천풍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백리하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나중에 연이 닿는다면 자네의 중매는 내가 책임지겠네...... )
그렇게,
세 영웅(英雄)과 마웅(魔雄)의 손이 굳게 얽혀졌다.
그 손을 통해 뜨거운 사나이들의 우정이 오고갔다.
문득,
빙옥이 침중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본궁의 잔존세력은 불과 오백 명 뿐일세.... 한데 어찌 혈마천성의 수만 명을
당할 수 있겠는가.......? "
그의 말에 마유강도 안색을 굳혔다.
"내게 남은 수하도 오백 정도일세...... "
천풍은 호탕하게 웃었다.
"왜들 이러나? 자네들은 여태 싸움을 숫자가지고만 해 보았나? 숫자만 많다고
제일은 아니네..... "
"하하.... 그렇군! 천풍, 자네의 말이 맞네...... "
"하하....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멍청하군......! "
두 사람은 웃어 보였지만 심중은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나,
이렇게......
세 사람은 맺어진 것이다.
중원의 마지막 기로에서.......
제 45 장에 계속
소문,
그것은 무림이 생겨난 이래 가장 기쁜 소문이 되어 삽시간에 전 중원으로 퍼졌다.
중원은 발칵 뒤집혔다.
뒤집혀도 그저 뒤집힌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희열로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전 중원인들은 자나깨나 천풍의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오오..... 천풍!
아아...... 천풍!
한데,
그와 때를 같이 하여 한 문파의 발족이 있었다.
발족?
아니,
그것은 먼저있던 문파가 새롭게 변해 등장한 것이다.
천검문(天劍門)........!
이 년 전만 해도 시선조차 주지 않던 삼류 중에 삼류문파였다.
하나,
천검문주,
그가 바로 천풍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진 후부터는 더이상 천검문을
삼류문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도리어 천검문을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 천검문에서 전 중원이 떠들썩할 일 하나를 발표했다.
들끓었다.
피가 들끓었다.
사해팔황이 들끓었으며,
중원의 혼(中原之魂)이 들끓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중원에서 일어난 중원의 일이었다.
× × ×
슈슈------ 우우우-----
스스------ 스스------- 스스------
쏴아아----- 아아------
일단의 무리들,
도합 십 구 명,
중원과 서장의 경계 지역인 옥문관(玉門關)을 빛살처럼 지나치는 인물들,
그들은 곧장 서쪽으로.....
서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 × ×
× × ×
어둠,
그 어둠은 어느 어둠과 같았다.
하나,
돌연,
"크아----- 악! "
"끄아----- 악! "
"케에----- 엑! "
침묵의 어둠을 산산이 깨는 처참한 비명성이 있었다.
비명,
그것은 한두 마디가 아니었다.
"끄아---- 악! "
"으악.......! "
수십 수백 마디의 비명성이 한꺼번에 줄을 지어 연달아 터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천하제일의 마역,
혈마천성(血魔天城),
바로 그곳이었다.
"크으으..... 독(毒)이다....... "
"끄으으..... 이 독은 독황부...... 만이 펼칠 수 있는 것인데....... "
"끄르르...... "
주니의 독황부 천 명의 독인(毒人)들,
그리고 십팔마존,
그들은 고요한 혈마천성에 뛰어들어 마치 무인지경인 양 살륙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피(血),
그것만이 이 밤의 전부였다.
그리곤 축제, 죽음의 축제가 밤이 새도록 벌어지고 있었다.
꽈당-----!
"나와라......! "
천풍은 하나의 석벽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며 한 밀실로 뛰어들었다.
와당탕......!
어딜 가나 엄청난 소란을 몰고 다니는 놈,
중원의 천둥벌거숭이 천풍,
그는 석벽을 깨는데 너무 힘을 많이 쓴 탓에 석실 안에 보기좋게 나뒹굴었다.
석실 안,
그곳에는 놀랍게도 약 이십 명 가량의 나녀들이 하나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가 중원 여인들이었으며,
공포에 질려 있기도 했고 바들바들 떠는 여인도 있었다.
그리고,
그 연무장만한 침상의 중앙에선 지금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명의 건장하며 살찍 라마승,
그는 막 한 여인의 몸 위에서 살찐 몸을 뒤흔들다가 석벽이 부서지는 바람에 놀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천풍은 바닥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며 눈을 휘둥그래 떴다.
"히야.... 천하에서 나보다 더 밝히는 인간이 있다니....! "
그때,
"네놈은 누구냐? "
돼지 조상 같은 라마가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천풍은 손가락으로 도리어 그를 가리켰다.
"그렇게 묻는 너는 혹시 혈마천성의 성주 아미랍(阿彌拉)이 아니냐? "
"그.... 그런데..... 네놈은 누구냐.......? "
아미랍은 불기둥을 움켜잡으며 몸을 날리려 하였다.
하나,
"네가 아미랍이면 됐다. 잘못 죽이면 안되니까..... "
순간,
"수라혈폭참(修羅血爆斬)------! "
천풍의 대갈일성과 함께,
"께에------ 엑! "
아미랍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수급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천풍은 그의 수급을 주으며 투덜거렸다.
"이 수급을 중원으로 가져가자면 꽤나 애먹겠군....... "
하긴,
보통 머리의 다섯 배는 넘었으니......
× × ×
여기,
중원이 생겨난 이래 가장 참담한 대살륙이 벌어지고 있었다.
살륙,
무산(巫山),
만평야(萬坪野),
그곳은 혈마천성의 중원진출 거점이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한데,
그곳에는 지금 어떤 굉렬한 함성이 일고 있었다.
"와아아-----! 천풍, 만세! "
아니,
대살륙은 이미 끝나 있었다.
곳곳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인물들, 아니 시체들,
그들의 복장은 특이했으며,
그런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서장인(西藏人)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수효는 근 오천여,
일방적으로 죽어 있었다.
함성,
와아....... 아아------!
"천풍, 와아..... 그는 어디에 있는가? 와아..... 아아! "
오오......!
족히 십 오만 평 가량의 어마어마한 군중들이었다.
그들은 만평야를 완전히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겹겹으로 원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만세를 부르며 천풍을 찾고 있었다.
천풍,
그는 십팔마존을 동반하고 전력으로 무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그 함성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직이 히죽거렸다.
"젠장! 벌써 끝난 모양이군......! 심심하게..... "
그의 옆에는 주니가 그 크고 검은 눈을 사르르 굴렸다.
"어마? 풍가가는 중원의 공적(公敵)이었나요? 왜 저 사람들이 풍가가를 찾는
건가요.....? "
그 말에 천풍은 히죽거렸다.
"누군가 나를 공적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최소한 심심치는 않겠지...... "
주니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소녀들,
서문여정(西門汝晶),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로 잔뜩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산 밑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그 옆,
오수아(陶隨蛾),
강호사옥녀(江湖死玉女) 중에 일녀인 그녀는 초조한 기색으로 산 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서문여정을 힐끗 거렸는데,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뻐기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보라! 사랑은 네가 먼저 풍가가께 고백했지만.... 풍가가는 나를 먼저
품에 안으셨다.....! )
대별마희(大別魔姬),
아니,
강호사옥녀 가운데 일녀인 만화옥선녀 반혜련,
한데,
아아.......!
그녀의 품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명의 아기가 생글생글 웃고 있지 않은가?
아기는 누군가를 닮았다.
몹시 영특하게 생긴 것이 크면 영락없이 천둥벌거숭이가 될 것 같은......
반혜련은 전날보다 더 아름다와 졌다.
그녀는 서문여정과 도수아를 향해 턱을 약간 세운 모습이었다.
여자들은 그런 모습을 일컬어 잘난체라고 한다.
그녀는 내심 득의하게 중얼거렸다.
(호호.... 도수아, 너는 겨우 그것갖고 으시대느냐? 호호.... 나는 그이의 아기를
낳았다는 말씀이야...... )
아아......!
그랬던가?
그녀의 품 안에 아니가 천풍의 아기였다는 말인가?
그녀의 옆에는 천풍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소군이 묵묵히 서 있었다.
천풍의 정혼녀,
모든 아픔을 함께 딛고 오늘날 천풍이 있기까지 숨은 뒷바라지를 해왔던 소녀,
그녀의 옆에는 벽월(碧月)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소녀들과는 달랐다.
(다른 여자들은 그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아아..... 나는..... )
그녀는 남몰래 쓰린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그가 나를 싫다고 한다면 죽어 버리든지 그의 종이라도 될 테야..... )
입술을 깨무는 여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취련옥선 백리하였다.
그때였다.
"풍가가...... "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다음 순간,
다섯 소녀들은 일제히 외쳤다.
"풍가가.....! "
그 함성은 십 오만 명의 군웅들의 함성보다 백 배나 더 컸다.
아아......!
여인들의 위대함이란.....
한 곳,
슈우우......
빛이 되어 날아오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옆에는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한 까무잡잡한 소녀가 따르고 있었다.
뒤로는 십 팔 인의 노인들,
천풍,
휘익!
그는 장내에 내려서자마자 기분나쁜 일성을 터뜨렸다.
"제길.....! 내 차지도 안 남기고 혈마천성 놈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는 말인가? "
소녀들은 일제히 그의 주위를 애워쌌다.
"아니예요. 풍가가! 가장 굵직한 놈으로 남겨 놓았어요......! "
그것은 누구의 음성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굵직한 놈으로.....? "
그 말에 천풍은 비로소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누구..... 누구야? "
순간,
일대장관이 벌어졌다.
좌아아...... 악!
십 오만 명이 펼치고 있던 원의 한쪽이 썰물처럼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겉에서 중앙까지의 거리는 자그마치 오 리,
천풍은 그 중앙에 안색이 흑빛으로 변해 있는 한 금의청년을 발견하고 기쁜 빛을
떠올렸다.
"히야.......! 정말 굵직한 놈을 남겨 놓았구나.......! "
순간,
쉬아아..... 앙!
그의 신형은 이미 원의 중앙에 이르러 있었다.
원의 중앙,
그곳에는 한 명의 금의청년이 안색이 푸르락 붉으락하며 사방을 이리저리 쏘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혈랑군,
원의 가장 안쪽은 무림에서도 가장 엄청난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유강, 빙옥, 흑의검천과 삼백여 명의 부상살수,
그들은 진을 치고 있는데 어찌 혈랑군이 도주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설사 벗어났다 해도 원의 길이가 무려 오 리에 달하니 그가 한 번에 오 리를 날아가는
재주가 없는 이상 꼼짝없이 ㄷ에 걸린 원숭이 신세였다.
"천풍.....! "
"천풍......! "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아는 체를 하자 천풍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가만.... 내 금방 저 중원을 어지럽힌 미꾸라지를 처치하고 나서 이야기 하자구..... "
미꾸라지?
천하의 혈랑군이 미꾸라지?
천풍은 뚜벅뚜벅 그에게 다가갔다.
혈랑군은 장엄하게 쌍장을 들어올려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일견하기에도 심상치 않은 자세였다.
군웅들의 안색이 긴장으로 굳었다.
"오라.....! 죽이리라...... "
혈랑군은 죽음을 각오한 듯이 딱딱하게 말했다.
천풍은 그에게 다가갔다.
혈랑군이 벼락같은 일갈을 터뜨렸다.
"아수라파천....... "
그는 뚝 호통을 멈추었다.
"........? "
눈앞의 천풍이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요놈! 요 미꾸라지 같은 놈...... "
혈랑군의 뒤에서 호통성이 터졌다.
"앗! "
그가 다급히 돌아서기도 전에,
우두둑.......!
천풍은 그의 목을 닭모가지 비틀듯이 비틀었다.
혈랑군은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
아이고?
과연 일대마웅다운 비명소리였다.
천풍은 혈랑군의 목을 비틀어 이리저리 흔들다가 홱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휘------ 익!
"에고고...... "
그가 날아가고 있는 밑에는 십 오만의 군웅들이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 뒤는 상상치 않아도 되리라.
천풍은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ㅋㅋ...... 손댈 가치도 없는 놈이야......! "
군웅들의 사기는 신(神)의 바지가랑이를 찢을 정도로 높았다.
"와아아------ 아아..... 천풍! "
"와아------ 만만세------ 천풍! "
천풍은 거드름을 피우며 그들을 쓸어 보았다.
순간,
(히야.... 무지하게 많구나....... )
그는 적이 놀랐다.
"에...... "
그가 입을 열자 장내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어어..... 왜 이리 조용하지.......? )
천풍은 괜히 머쓱해졌다.
"에..... 에..... "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십 오만 군웅들은 목을 빼고 천하영웅 천풍의 말을 기다렸다.
순간,
"아차! 아까보니 아기가 있었던 것 같던데..... "
그는 얼굴을 붉히며 신형을 날려 반혜련이 안고 있는 아기를 낚아챘다.
"혜련.... 이 아기는 누구의 아기지......? "
반혜련은 수줍게 대답했다.
"풍가가... 당신의 아기예요..... "
"호오... 풍가가의 자식이라고.....? 그놈 정말 잘 생겼..... 엥..... 누구의
자식이라고? "
"풍가가의..... "
"으핫핫..... 내 새끼라고? 아이고..... 내 새끼.......! "
천풍은 아기를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른 소녀의 입술들이 한 발이나 튀어나왔다.
순간, 그녀들은 일제히 천풍에게 덤벼들었다.
"풍가가.... 소녀도 당신의 아기를 갖게 해주세요.......! "
"소녀도 당신의 아기를 갖고 싶어요......! "
"풍가가.... 소녀도..... "
여자들이란, 제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똑같았다.
그것을 몸으로 입증하고 있는 사람이 천풍이었다.
"아이고.....! "
천풍은 아기를 들쳐업고 뛰기 시작했다.
"풍가가......! "
"풍가가! 제발..... "
소녀들은 까마귀떼처럼 그의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순간,
"와핫핫핫......! "
"우핫핫핫...... "
군웅들은 일제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천풍, 그가 얼마나 여인들의 숲(林)에서 죽지 않고 견딜 것인가.......?
정력이 고갈될 때까지.....
만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산, 그곳에 한 구의 시체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여인은 아니지만 소녀, 소녀의 이름은 강미려,
그녀는 죽었다.
목 가운데에 스스로의 비수를 꽂은 채,
그녀의 옆에는 하나의 인두(人頭)가 놓여 있었는데,
그 수급의 임자는 혈월막주였고,
강미려는 죽어서도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