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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의 비유

1. 槪論
예수님의 말씀은 소외되고 가난한 민중이 쉽게 알아 들을수 있는 말씀이어야 했고, 저잣
거리에서 늘 들을 수 있는 소재와 언어로된 이야기체의 설교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언
어 자체가 동등 복합문으로 되어 이야기를 만들기에 좋았다. 그들의 口碑傳乘을 통하여 전
해지던 삶의 풍부한 지혜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와 어울린 야훼신앙은 AD
1000년경 글로 기록되어 옮겨지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와 詩歌 그리고 豫言文學에는 수많은 表象과 直喩(隱喩) 또는 比喩들이
등장한다. 이 세가지는 이야기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그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핀 꽃과 같다”라고 하면
풀포기와 꽃은 表象이요 문장전체로는 直喩이다. 비유는 이 둘보다 더 긴 구조를 지니며 서
론과 본론과 결론을 갖춘 본격적인 이야기이다. 비유는 어떤 한가지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
해 잠시 고용되었다가 버려지는 일회용 예화가 아니라 자체의 특성을 지니면서 여러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자립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비유가 어떤 특정한 상황을 위하여 고용되었
을 때, 스스로 지니고 있는 이야기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문맥 전체의 주제를 강조해 주
는 기능을 수행한다. 比喩는 寓話와도 다른데 寓話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부 묘사들이 저
마다 숨은 뜻을 지니고 있는 데 비해 比喩는 이야기 전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일반
적으로 비유는 듣는 이의 관심을 얻어내기 위하여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비유가 복음서에 실리는 과정은 네 단계로 구분할수 있다. 먼저 예수께서 어떤 자리와 특
정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설교하시는 가운데 비유를 말씀하셨다. 둘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비유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분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다른 이
들이 시대적 상황도 다르고 청중과 문화적 여건, 사목적 관심도 다른 속에서 비유를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로 口傳되던 비유들이 문자로 기록으로 옮겨졌다.(q文獻, 도마복음서)
이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달되던 시절의 자유로움과 유연성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로 비유들은 복음서 안에 說話의 한 단계로 정착되었다.
비유가 共觀福音에 실려 있기 때문에 共觀福音의 구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共觀福音연
구는 예수의 원초적 비유말씀을 가려내고 복음사가들의 편집작업(저자가 자신의 고유한 언
어와 문체를 구사하여 전해 받은 전승 자료를 글로 엮어 내는 갖가지 문학활동과 스스로 전
승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 메시지를 복음으로 전하는 신학활동)을 가려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런 방법론으로 二出典說이 매우 중요하다. 이 假說은 마태오와 루가가
저마다 두 가지 구별되는 사료를 사용했을 것으로 가정하는 이론이다. 이것은 마르코복음
(60-70)과 예수어록(50)을 말한다.

Ⅰ부 하느님 나라의 발견
◎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예수께서 公生活중 가장 중요하게 전해주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소식이었다.
이 포도원 주인의 비유의 초점은 주인의 非正常的 처사에 있다. 여기에 관한 해석은 보통3
가지가 있는데 전통적해석과 오리게네스(3세기)의 해석 그리고 은총론적 해석(바울로와 루
터)가 그것이다.
주인의 의도적 임금계산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의 가치와 비유가 제시하는 하늘나라
의 가치 사잉에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늘나라는 엄정한 정의와 질서의 체계가
아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 선두주자나 꼴지, 의인이나 죄인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가치, 곧 하늘나라에서의 위치는 무엇이 올바른 행
동인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받아들임으로 측정된다. 곧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며 구원은 하느님의 초대에 얼마나 흔쾌히 응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 보물의 비유(마태 13:44)/ 진주의 비유(45-46)
두 비유는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쳐 준다. 곧 놀라운 보물을 만나게 되었으면 그것
을 얻기 위해 기쁘게 삶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유다나 기타 文化
圈의 類似한 比喩들이 가지고 있는 神話的(勸善懲惡, 좋은 결말등)요소나 지혜론적 요소가
들어 있지 않다. 예수의 비유는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데 특히 이 비유에 따르면 최상의
가치를 만난 인간은 자기의 것을 모두 잃어 버리고 그 가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 찾은 자의 기쁨 : 양의 비유(마태 18.12-14, 루가 15.4-7)/ 은전의 비유(루가 15.8-10)
양의 비유가 루가와 마태오 복음 양쪽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비유의 근원지는 예수 어록
이다. 그런데 왜 은전의 비유가 마태오 복음에서는 빠져 있을까? 그것은 루가 복음과 청중
의 차이, 양을 잃게 된 경위등을 비교해 볼 때 알수 있을 것이다. 앞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
는 마태오가 원래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이 비유를 사목적 목적에 사
용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곧 이 비유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사목자들에게 비록 자기 탓으로
떨어져 나갔다고 할지라도 共同體에서 이탈된 신자들을 힘써 찾아 나서 달라고 부탁하는 것
이다. 루가 또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말미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주제는 감자기 끼여든
것이다. 이 양의 비유의 초점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에 있다. 유다이즘에서의 죄인들
은 하느님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거나 그런 율법이 있는지 조차 모르거나 아니면 경멸
받는 직업 탓에 의인들과 영원히 결별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두 비유는 이런 잃어 버린
사람들을 되찾은 기쁨을 강조한다. 마태오는 양의 비유를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원들
가운데 소외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촉구하는 가르침으로 사용하였다. 이와는
달리 루가는 두 비유를 다 소개하고 비유가 등장하게된 상황까지 올바르게 설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즐겨 다루는 주제 즉 “회개와 용서”의 메시지를 비유의 끝에 첨가 함으로
써 약간 빗나간 것이다.
여기서 묘사되는 하느님은 償善罰惡의 전통적 하느님관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위험을 무
릅쓰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잃어 버린 자를 몸소 찾아 나서는 분이다. 여기서 예수에게
독특한 점은 하느님의 무한히 자비로운 다스리심 곧 하느님 나라가 예수의 삶을 통하여 인
간 역사의 현장에 결정적으로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루가 15-32)
이스라엘 사람들은 他 民族에 대한 優越性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서의 이야기들을 이용하였
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들은 농경민족인 가나안 원주민들에 비하여 목축인들을 宣祖로 한
자신들이 우월함을 보이기 위하여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는 에사오의 후손인 에돔족을 야
곱의 후손인 자신들이 마땅히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전제된 것이고 이사악과 이스마엘의
이야기 역시 북부 아라비아 사막을 輾轉하던 이스마엘인들에 대한 우월감의 표시이다. 이와
비슷하게 초대교회도 유대민족과 신약의 백성간의 관계를 長子-次子의 틀 속에서 이해해
왔다. 이 비유는 세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① 예수의 비판자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관념속의 그런 하느님 즉 질서와 규율에 얽메인 분이 아니다. 그분은 오히려 어머니 같은
분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이며
자신은 이런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죄인들과 격의 없는 친교의 식탁을 나누는 것이라고 역
설하신다.
② 예수의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정당
한 상속자요 사랑 받는 아들임을 잊은채 아버지 집안에서 머슴처럼 일하는 장자와 같다. 이
런 관계는 종과 상전의 고용관계일 뿐이다.
③ 예수의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으로 단죄한 사람들의 고통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앓고 있는 병자들이다.
이 비유의 중점 관심은 잃은 자를 찿은 기쁨이다. 그런데 루가는 여기에다 회개라는 개념을
추가한다. 이는 그의 공동체 상황에서 비롯된다. 그의 공동체는 이방인들이 주류가 되어 이
루어 졌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유다인들과의 갈등, 이완주의와 엄격주의의 갈등이 있을 수밖
에 없고 루가는 거기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죄인의 진정한 회개는 하느님의 큰 사
랑을 만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회개라는 주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를
빚었다.
◎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루가 7.36-50), 돈놀이꾼의 비유(루가 7.41-42)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나온다. 이것을 자세히 비교해 본 결과 마태오는
마르코의 본문을 대부분 수용했고 요한은 마르코를 따르면서도 루가를 많이 참조했으며 루
가는 전승에 출실하면서도 자신의 신학적 주제와 문학적 재능에 따라 자유롭게 편집하였다.
루가가 구전으로 받은 전승은 죄 많은 여인에 대한 예수의 용서와 감사, 돈놀이꾼과 두 빚
진자의 비유이고 문서로 받은 전승은 마르코가 전해준 ‘향유를 부은 여인’이야기다. 즉 루가
는 마르코를 골격으로 하여 문서 전승을 첨가한 것이다.
이 비유의 올바른 해석을 위하여는 47절과 50절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어역에서 47절은 전
반부와 후반부가 용서의 원인에서 대립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어와 아라메
어 연구결과 밝혀진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죄많은 여인의 사랑이 죄사함의 결과로 드러난
다. 이것은 여인의 행동이 감사의 행위적 표현이었다는 사실과 아람어로 수동태로 번역된
이 문장은 흔히 하느님의 능도적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50절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마르코 복음+70인역) 이 구절은 47절에서 직접 이끌어낸 결론이자 두
비유 전체의 결론이다.
죄사함을 통한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 편에서의 용서와 그 용서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믿음
이 어우러 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는 죄인을 받아 주시고 용서하
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보여주어야 할 믿음을 가르쳐 주신다. 이 믿음은 행위로 표현되
어야 한다. 여기서 비추어 볼 때 애덕을 강조하는 가톨릭적 해석이나 루터의 은총론적 해석
모두 일면을 강조하는 오류임을 알수있다.
◎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돈놀이꾼의 비유는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후자는 죄많은 인간
들 상호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태오는 이 비유를 18장(그리스도인의 상호관
계)의 결론으로 제시하는데 그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한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받
아들임과 용서가 그리스도교적 인간관계의 핵심원칙이라는 것이다.
이 비유도 마태오의 편집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그 근거는 첫째 이 비유의 도입 부분과 비
유 자체가 다른 관심사를 드러낸다. 이것은 루가복음의 병행구를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난다.
루가 복음은 이 도입 부분이 일방적인 가르침으로 되어 있고 마태오 복음에서는 질의와 응
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질의-응답과 비유에는 내용적 차이가 있다. 질의-응답
이 용서의 빈도와 반복에 관한 것이라면 비유는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야 할 필연성을 제시
한다. 둘째 ‘주님’이란 칭호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것이 마태오의 편집적 요소이다. 셋째로는
도입부분에서 주님과 질의 응답을 하는 제자는 베드로 혼자인데 비하여 결말에는 제자들로
바뀐다. 이것은 이 비유를 공동체에 적응 시키려는 마태오의 의도를 드러낸다. 또 27절의 하
느님 자비에 대한 강조와 34절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상충되는데 34절이 마태오의 삽입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23절에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수 있다.’라는 표현, 하늘나라라는 어
구 자체, ‘형제’라는 어휘등도 마태오의 특유의 어휘이다.
두 빚진 자의 비유’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죄인의 깊은 감사와 만난다는 사실을 강조한

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하느님의 큰 용서와 자비가 죄인의 감사와 같은 긍정적인 행위
로 이어질 수 있지만, 반면에 동료에 대한 불감증으로 이어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이웃이나 원수에 대한 사랑을 결코 한 순간의 영감이나 결단으로 쉽게
실천할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으셨다는 사실도 시사해 준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의 전반부
는 ‘두 빚진자의 비유’와 일치한다. 그러나 비유의 후반부는 하느님과우리 사이의 수직 관계
가 우리와 이웃 사이의 수평 관계에 직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 이 비유는 하느
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가 법과 의무에 바탕을 두지 않음을 알려 준다.
◎ 이웃이 되어준 사람(루가 10.25-37)
루가는 이 대목의 전체 구도를 마르 12.28-34에서 따왔지만, 그 세부 사항에 있어서는 마르
코복음보다 그 병행구인 마태오복음(22.34-40)에 일치한다. 곧 마태오와 루가의 본문이 마르
코보다 짧고, 둘 다 마르코의 율법학자 대신에 율법교사를 등장시키며 이 율법교사가 예수
께 던지는 질문 서두에 마르코에는 없는 ‘선생님’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도한 마르코복
음과는 달리 율법교사의 질문의도는 좋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은 사랑의 이중 계명이 예수
어록에도 실려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루가는 신명기 6.5과 레위 19.18의 전승을 받아 들이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서 제시한다. 즉 이 비유는 하느님 사랑과 분리될수 없는 진정한 이웃사랑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웃의 개념은 무엇인가? 당시 바리 사이들이나 쿰란 공동체는 죄인
들이나 어둠의 자식들을 이웃에서 제외함으로써 레위기 19.34절의 정신에서 오히려 퇴보한
경향을 보여 준다. 이는 특히 칠십인역에서 이웃을 개종자들로 번역한데서도 드러난다.
유다인들에게는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할 의무가 있었다.(레위 19.18) 그러므로 율법
교사의 질문은 이미 이웃으로 정해진 사람들 곧 유다 동족과 개종자들 가운데서 사라으이
의무를 어디까지 확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구체적으로 비유안에서 등장하는 부상당한 이의 처리에 있어서는 바리사이들은 아무도 장례
지내줄 자가 없는 시신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을 타지 않는 다고 주장한다.(미쉬나, 탈무드)
그러나 상류 사제 지배층이던 사두가이들은 어떤 경우나 부정을 타게 된다고 여겼다. 따라
서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반 성직주의를 대변해 주시리라 여겼
던 것이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나를 중심에 놓고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 경우 이웃은 당연
히 나의 혈족, 친지가 된다. 그러나 예수의 질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중심이다. 즉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곁을 지나는 모든 이가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 비유는 우화이며 동시에 예화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마리아인에 연결시켜 표현한 우화이자 우리의 사랑에 선택
에 대한 구체적인 한 예를 제시하는 예화인 것이다.
◎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
이 본문은 세가지 다른 형태로 전해진다. 질좋고 오래된 사본이 뒷받침 하는 것으로 기존의
성서와 같은 내용이다. 다음은 처음만은 못하나 역시 중요한 사본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마
지막은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어긴 둘째 아들을 올바르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예로니모의 지
지를 받았다. 1,2본문은 마태오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1본문에서 큰 아들은 세리와 창녀들
을 가리키고 2본문에서는 큰 아들이 유다인들이다. 3본문은 유다인들의 명예와 체면을 중시
하는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이 대목은 예수의 권한 논쟁(21.23-27)과 비유 자체(21.28-32)로 나뉜다. 전자의 구조를 보면
예수의 권위를 두고 종교 지도자들이 던진 질문과 예수의 반문 그리고 수수께끼의 논리와
예수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후반부는 예수의 질문과 비유자체, 비유의 내용에 대한 예수의
질문과 종교인들의 답변, 예수의 확신, 비유의 적용으로 나뉜다. 이러한 연결은 마태오의 편
집에 의한 것이다. 그 근거는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 하느냐?’라는 질문은 마태오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 회개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등의 표현도 마태오의 표현이다. 따라서 원래
의 비유는 31절에서 끝나야 한다.
우선 이 비유는 앎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차원들도 있는데 논쟁차원과
그리스도론적 차원들이 그것이다. 즉 예수는 처음에 자신을 받아들이다 배척하는 종교지도
자들을 비판하는 무기로 이 비유를 드신 것이다. 이는 직접 그리스도론으로 이어진다. 종교
지도자들은 옛 질서와 전통에 집착하여 예수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
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완고한 종교 지도자들 보다는 처음에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다가 예
수의 말씀을 듣고 회개의 길에 들어선 죄인들이 낫다.
마태오는 원래 관련이 없었던 두 아들의 비유를 세자 요한과 연관시킨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마태오가 예수와 세자요한의 관계를 매우 가까운 사이로 묘사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
요가 있다. 마태오는 이처럼 예수와 요한이 같은 선교 사명을 수행한 것으로 묘사할 뿐만
아니라 유다 지도자들이 두분에게 같은 적대의 반응을 보였다고 증언한다. 마태오는 이렇게
요한과 유다 지도자들의 관계를 언급함으로써 비유 안에 담긴 논쟁적 요소와 그리스도론적
요소를 강조 하고 싶었던 것이다. 곧 예수께 적대적인 이 지도자들은 이미 요한에게 똑같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고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그들은 이미 요한의 말을 믿지 않고 배
척하였다.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
26절까지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형성 배경이 다르다. 전반부는 근동 문헌에서 발견되고 이것
이 발전하여 윤리적 요소가 가미된 랍비문학에도 찾을수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근원을 초
대교회의 삶에서 찾는 것이 좋겠다. 다시 말해 이 비유의 후반부는 성서에 예고된 예수의
부활을 부정한(모세와 예언자들이 증언한) 유다인들과 논쟁하던 교회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
다. 특히 이 비유의 후반부는 루가 24장의 부활기사에 관련이 있다. 공통적인 요소는 첫째
불신이다. 두 번째는 모세와 예언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셋째는 그리스 단어 아니스테미의
사용 넷째는 회개이다.
*토막지식
-라자로 : 하느님께서 도와 주실 사람
-하데스 : 지하 세계의 신이다. 후대에는 무덤이나 대문을 가진 죽은 자들의 처소를 뜻하기
도 했다. 칠십인역에서는 아주 드물게 죽어서 가는 곳, 그리고 활동력이 없는 상태로 생존을
계속하는 곳인 히브리 성서의 셰올을 하데스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부활과 인과응보의
개념이 도입된 후기 유다이즘에서는 셰올은 두 영역으로 나뉘는데 죄인들에 주어지는 지하
세계를 하데스라고 한다.
이 비유는 몇가지 의문을 일으킨다. 우선 부를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보는 전통을 거부한다.
또한 인과응보 사상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부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깨우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대문간에 상존하는 라자로의 비참한 삶이 이 부자에게는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는 기회였
다. 그러나 그는 이 귀중한 기회를 온전히 저버렸다. 마태오는 실존적 가난을 겪는 이들이
그들의 불행 자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주목을 받게 되리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이와
유사한 세리와 율사의 비유에 대조적이다.(선한자가 살아 불행한 것은 작은 잘못을 현세에
벌하시어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 하느님 정의의 표현이다.)
Ⅱ. 복음의 씨앗
●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 마태 13.1-9, 루가 8.4-8 11-15)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사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비유를 예수에게
소급되어지되 그 해석은 초대교회의 소산으로 간주된다. 이 비유는 세가지 형태로 전해지는
데 마르코와 도마의 비유는 거의 같고 클레멘스 서간에 수록된 것은 요한의 밀알의 비유처
럼 오히려 부활에 대한 이야기이다.
▷ 마르코 복음의 비유
1-2절의 갈릴래아 호숫가 배경은 마르코의 창작이다. 그 근거는 ‘비유로 가르치다’‘배를 띠워
군중을 가르치다’는등의 내용이 전형적인 루가의 표현인 것이다.
☞ 팔레스티나 용법 : 여름철이 끝나갈 무렵, 농부들은 파종을 앞두고 땅을 대충 갈아 놓는
다. 파종 시기는 봄이 아니라 가을이다. 농부들은 보통 음력 9월 부드러운 가을비가 땅을 적
시는 때에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덮어 놓는다. 이때의 경작은 흙으로 씨앗을 덮어 새들이나
짐승들이 씨앗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가을비가 늦어지면 사람들이 밭을 가로
지르며 길을 만들어 놓는 수가 있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비유가 원래의 예수 메시지와 작가의 우화적 해석이 결합되었다고 본
다.(우화적 해석 : 원 비유의 모호함을 벗기고 비유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비유에 나오는 여러 표상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비유의 초점은
씨 뿌리는 사람의 내적 자세와 씨앗의 운명이 내적 초점이다. 예수의 마음이 곧 이와 같다.
당신의 전도말기 그 성과를 비웃는 자들 앞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법하다.
특별히 10-12절의 해석이 매우 어렵다. -여기는 이사야 6.9-10이 이용되고 있다.- 이것은 우
선 복음사가가 비유라고 옮긴 히브리어 마샬은 수수께끼로 사용되는데 비하여 사가는 이를
교훈적 의미를 강조하는 παραβολτ로 직역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추종자들에게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 주시기 위해 수수께끼로 말씀하신 것을
마르코는 좀더 쉽게 풀어 설명하는 비유로 말함으로써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또 하나는 마
르코의 특징인 메시아 비밀을 들수 있다. 더불어 이 비유는 인간 편에서 진지한 노력을 하
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12절은 특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는 예언자들의 구실을 먼
저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회개를 촉구하고 징벌을 예고했다. 즉 이 구절은 결
정적 징벌에 대한 선언이며 신앙의 선구자들에 대한 노고와 좌절 신앙고백을 역설적으로 표
현한 것이다.
☞ 우화적 해석
13절에 제자들의 몰이해란 주제가 처음 등장한다. 이 해석은 초창기의 부진한 선교에 대하
여 전도자들을 격려하고 안이한 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 저절로 자라는 씨앗(마르 4.26-29)/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36-43)
▷저절로 자라는----
이 비유는 마르코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고 분명하게 선언한 첫 번째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씨를 뿌린 사람의 무심함과 능동적으로 성장하는 씨앗자체의 태도이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성찰을 이해해야 하는데 땅에서 곡식이 저절로 자
란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가리킨다.
▷가라지의 비유
신학적 주제의 차이로 말미암아 마태오는 이 비유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마르
코의 경우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예수의 정체를 연결시키면서 예수의 삶 안에서 하느님 나
라가 숨겨져 있다가 극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한편,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를 애써 규명하고자 한다. 마태오의 경우에는 종말론적 전망안에서 예수
의 제자들이 실천해야할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고 교회의 복음적 체제와 운영의 원칙을 마련
하는데 주력한다. 마태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경직되게 죄인을 심판
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
●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 마태 13.31-32/ 루가 13.18-19) 누룩의 비유(마태13.33 루가
13.20-21)
이 비유의 강조점은 작은 시작과 놀라운 결과의 비교에 있다. 이 비유는 두가지 형태로 전
해졌다. 하나는 도마복음과 맥을 같이하는 마르코복음 전승과 다른 하나는 예수어록이다. 마
태오는 마르코와 예수어록을 절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루가는 예수어록만을 충실하게 반영
한다.
☞ 겨자의 표상 : 원초적인 창조질서 유지의 관점에서 부정하게 취급. 씨가 작다.
이 작은 겨자씨가 큰 푸성귀가 되는 과정에 바로 하느님이 개입하신다.
☞ 나무의 표상 : 구약성서에서 나무는 하느님의 보호나 큰 왕국을 의미했다
(시편 1.3/에제31/시편 104.12) 유대인들도 이런 왕국을 기대했으나 예수
님께서 선포하신 나무는 평범한 새들의 안식처였다.
☞ 누룩의 표상 : 그리스문화권에서도 불결하고 생각됨. 1고린5.6에서도 부정하게 여겨짐

이 비유의 결론은 먼저 작은것과 큰것의 대비이다. 둘째는 성과 속의 초월이다. 마지막으로


나무의 표상에서 이끌어 낸 것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 밭가는 종의 비유(루가 17.7-10) 깨어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루가 12.35-40)
충성스럽거나 불충한 종의 비유(루가 12.41-48/ 마태 24.45-51)
☞ 고대 주종관계 : 가족관계처럼 자발적이고 지속적이다. 상호의존과 연대의식에 바탕함 서
로에 대한 신뢰관계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강제성과 폭력적 해결은 이 관계
의 부정적 측면이기도 하다.
▷ 밭 가는 종의 비유
주인의 언사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 비유는 예수께 소급된다. 이것이 편집을 통하여 현재
의 형태로 발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처음 비유의 주요대상은 바리사이처럼 자신을 하느
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를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해석한다. 즉 이 비유는 의무의 완전한 수행이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과 의무수행
을 자기 과시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는 것이다.
▷ 깨어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
35-38의 전반부와 39-40의 후반부로 나뉜다. 서로 다른 이 비유는 루가에 의하여 주제의 유
사성으로 연결되었다. 초대교회는 이를 재림에 대한 경고로 이해한다.
▷ 충성스럽거나--
이 비유는 충과 불충중 어느길을 갈지 결정해야 하며 이 종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전혀 다
른 조처를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12.41절은 이 비유를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
려는 루가의 편집이다. 이 비유 역시 ‘항상 깨어 봉사할 준비를 하라’는 가르침이 재림에 대
한 준비를 하라는 가르침으로 발전한 것이다.
Ⅲ. 기도
● 빵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루가 11.5-8)
루가사가는 기본적으로 기도에 관심이 많다. 다른 저자들에 비하여 기도또는 기도하라는 낱
말을 자주 사용하고 루가만이 기도에 대한 비유를 셋이나 남겼다.
*“너희 중 한사람” : 예수어록과 루가의 특수 사료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이다. 청중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동화되고 메시지 앞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 첫 이유문에서는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두 번째 이유문에서는 그를 누
구로 보느냐에 논란이 있고 이에 따라 메시지가 사뭇 달라질수 있다. 빵을 청하는 친구로
이를 해석하면 이는 “청하는 자의 염치없음 때문에..”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부탁받은 친구
로 이를 해석하면 “자기의 체면 손상때문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는 염치없음이란
뜻의 희랍어 아나이데이아(αναιδεια)가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아마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는 비유의 후반부에 비추어 보면 후자의 해석이 맞는 듯
하다. 물론 친구의 끈질긴 태도도 간과할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루가가 빵이 나오는데 착안
하여 이 비유를 주의 기도와 연결시킨 반면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는 재판관의 의미를 사람
에 아들에 연결시켜 종말에 대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비유의 강조점은
청하는 자의 끈기보다는 들어주는 자의 체면존중에 있다.
▷ 비유의 적용부분 : 9절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기도와 관련된 동사가 셋이 나오는데 구하
다는 청원기도를 의미한다. 찾다는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고 두드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
역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닫혀진 것을 두드리는 것이다. 13절에서 성령의 언급은 루가의
덧붙임으로 보인다.
●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루가 18.1-8)
이것은 “명예와 치욕”이란 고대 근동의 사회적 규범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의 송사를 들
겨 들어 주신다는 유다교의 종교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비유는 도입붑분(1절), 비유
자체(2-5절), 적용(6-8절)로 이루어졌다. 도입부는 루가의 편집이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 오
시는 날’이 바로 앞에 언급된 것과 관련하여 공동체를 격려하고자 한다. 다음 비유 자체는
예수께 소급된다. 적용부는 논란이 있는데 에수께 소급시키는 학자들은 여기서 쓰인 아람어
어법과 관용구 그리고 파렴치한 재판관이란 독특한 등자인물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반대자
들은 공관복음에서 비유의 적용은 보통 비유자체와 분리된 이차적 해석이라는 점, 선택의
개념은 예수전승에서 입증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일반적 기도에 관한 권고는 예수의 고
유한 가르침에 속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다.
*팔레스티나의 법정 : 보통 팔레스티나에는 두가지 법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종교
적 법정과 세속법정이 그것이다. 산헤드린은 유다의 최고 종교법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
사하지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없었다. 유다인들의 재판은 종교법정에서 유다인과 이방인
이 얽힌 재판은 세속 법정에서 심리하였다.
*과부의 억울한 일 : 단독심을 요구하는 것을 보아 유산상속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남
편이 죽을 경우 그 부인에게는 생존에 위협되지 않을 정도의 남편의 소유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다. 우선 아내는 남편집에 머물러 권리를 행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 청상
은 친정으로 돌아갔는데 이 경우 재혼을 강력히 요구 받았다. 그 다음 남편의 경작지는 과
부와 그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서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한 지참금도 다시 반환되
는 것이다.
비유가 부각 시키려는 메시지는 ‘빵을 구하는 친구’처럼 ‘작은것에서 큰 것으로’라는 적용 원
칙에 따라서 불의한 재판관과 정의로운 하느님을 대비하고 있다. 즉 이렇게 파렴치한 자들
도 끈질긴 요구에 무릎을 꿇었는데 하물며 하느님은 어떠하시겠는가? 라는 물음인 것이다.
그러나 8절의 후반부는 초대교회가 덧붙인 것으로 이를 17.20-37의 종말론적 담화에 연결시
키기 위하여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 참기도(루가 18.9-14)
본격적인 비유는 10-14절 전반부까지 이고 나머지는 루가가 덧붙인 것이다. 루가는 9절에서
바리사이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견해를 덧붙인다. 14절 후반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은 떠돌이 토막말씀으로 루가가 결론으로 덧붙인 것이다.
*종교적 신분의 장벽 :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배울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은 그 자체로 죄인
으로 간주되었는데 목자, 세리, 창녀등이 그들이다.
▷ 바리사이 기도의 구조 : 죄악에 물들지 않았음을 감사+자신의 신심을 고백
여기서 욕심많은 사람이란 돼지치기나 강도, 부정직한 사람은 세리, 음탕한자는 창녀를 의미
한다. 그는 이어서 자신의 신심을 구체적으로 보고한다. 단식은 유배시대 이후에 나온 전통
으로 보이는데 공적인 전통은 속죄의 날에 철저한 금식을 요구했고 그밖에 다른 기회에도
요구한다. 초대교회의 디다케 문헌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단식일로 지내는 유다교와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도록 권고한다.이 바리사인의 잘못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함으로써 하느님에게 자신이 의인임을 인정해주도록 압력을 넣고 있는
셈이다.
반면 세리는 그 애도와 절망은 나태내는 행위자체로 기도한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
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의화의 개념 : 복음서에서 개인에게 이 용어가 적용된 곳은 이곳 뿐이다. 이는 시편
24.3-5;51장에서 볼수 있듯이 구약성서에도 있는 개념이었다.(2에스 12.7절)
Ⅲ. 과감한 투자와 결단.
● 달란트의 비유(마태 25.14-30), 미나의 비유(루가 19.11-27)
흔히 예수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주종관계는 주인의 떠남과 돌아옴 종들의 셈바침이란 큰 틀
로 짜여져 있다. 이 달란트의 비유는 이런 두가지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1)루가복음과 마태오의 복음
우선 미나의 비유가 달란트의 비유보다 더 길고 복잡하다. 후자에는 없는 이야기 곧 어떤
귀족이 왕위에 오르는이야기가 전자에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가의 첨가로 보인
다. 이 부분이 첨가된 것은 다음의 몇가지 근거를 살펴보면 알수 있다. ㉠미래의 왕이 될 사
람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돈을 맡긴다. ㉡왕위를 받으러 가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장사를
하라고 명하는가? ㉢열명 가운데 단지 셋만이 셈을 바치는 것도 이상하다. 따라서 이 대목
은 기원전 4년경 헤로데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계승에 실패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
매아만을 다스리게된 경위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루가의 그
리스도관이 우화의 형태로 드러난다.
2)원초 비유에 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① 루가가 미나의 비유에서 논리적인 모순을 감수면서 까지 작은 미나단위를 고집하는것
② 원래는 아마도 세명이 종이 등장했을 것이다.
③ 주어진 돈의 액수는 마태오를 따라서 세단계로 능력에 따라서 맡겨졌을 것이다.
④ 마태오의 비유에만 있는 “자 와서 기쁨을 네 주인과 함께 나누어라”는 대목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짐으로써 전체 비유에 어긋난다.
⑤ 마태복음 25.30절에서 사용하는 ‘바깥 어두운곳’이라거나 “거기서 가슴을 치며~”등은 예
수어록에 나오는 것으로 마태오가 즐겨 인용하는 곳이다.
3)본문 비유의 재구성
29절을 제외하고는 예수께 소급시킨다. 29절은 떠돌이 토막말씀으로 초대교회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가장 중점이 되는 것은 세 번쩨 종의 태도다. 이는 율법에 대한 미쉬나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율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게는 기쁨이었고 이를 손상하지 않는 것은 가
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세 번째 종의 태도는 일견 잘못이 없어 보이나
그는 창의성과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4)마태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예수 재림의 비유들”에 포함시킨다. 그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가 좋은 그리스도인들과 나쁜 그리스도인들이 한데 모여 심판날까지 함께 살아가야하는 집
단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 공동체에 끊임없는 격려와 경고, 권고를 보낸다. 그는 언제
나 책임있는 윤리적 삶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태오가 예수의 비유에 첨부시킨 메시지는 미
래의 심판에 대비하여 적극적인 봉사의 삶을 살라는 윤리적 권고라 할 수 있다.
루가는 이 비유를 철저한 우화로 바꾼다. 왕이된 귀족은 그리스도, 먼 나라는 천국,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승천이다. 그리고 왕이 되어 돌아옴은 심판을 가리키며 고향사람은
유다인이고 열 종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우화는 그리스도론적이다. 곧 그리스도의 과거사
와 미래사를 다룬다. 즉 두 복음의 저자는 이 비유에 각각 종말론적 요소와 그리스도론적
요소를 부여하면서, 마지막 결산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자신에게 맡겨진 봉사에 충실할 것
을 권고한다.
● 거부의 대가(마르 12.1-12: 마태 21.33-46: 루가 20.9-19)
우선 비유와 우화를 다시 고찰하자 비유는 일반적으로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
하지만 우화는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표상들마다 나름대로 정해진 실재들을 가리킨다. 예수
의 비유들은 대부분 우화가 아니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를 자신의 현실에 비추어 우화적으
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초대교회의 산물로
간주한다. 그 근거는 ① 예수께서 자신의 마지막 운명에 너무 잘맞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
리 없다. ② 외아들 살해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③ 예수 당시 유다교에서는 메시아에
게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더구나 메시아가 살해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
지 못할 일이었다.
1) 마르코복음 분석
*12.1a 동사+동사부정법은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는 용법이고 “비유로”라는 어휘도 마르코의
표현이다.
*12.b에 반영된 이사 5.2와 10-11에 반영된 시편 118.22-23은 히브리성서가 아니라 마르코가
사용한 희랍어 성서에 가깝다.
*“아직(ετι)”은 마르코가 즐겨 쓰는 표현이며 “사랑하는”이란 말은 예수의 세례와 변모시
하늘에서 들려 온 것으로 마르코가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이런 편집부분을 사용하면 도마복음과 상당히 유사한 대목으로 마르코복음을 재구성할수 있
다. 그럼에도 도마복음과 다른 몇 부분은 ①이사 5.2이 도마복음에는 인용되지 않았다. ②세
번의 파견에 각각 한 사람씩만 등장하고 그가운데 죽는 사람은 아들 한 사람뿐이다. ③주인
은 소작인을 응징하기 위하여 돌아오지 않는다. ④65항 마지막에 종말론적 경구로 토막말씀
이 하나 나온다. ⑤시편 118편 22이 비유와 분리되어 66항에 나온다.
그럼 도마복음의 저자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복음의 저자는 참 “빛”이신 예
수 그리스도를 인식해야 한다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도마복음
과 마르코 복음중 어느것이 원 비유와 가까운가? 도마복음에 마르코의 비유가 두 대목으로
분리되고 이사야서가 없는것과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마르코를 보다 오래된 것으로 본다.
예수의 비유에 담긴 메시지는 다급한 경고와 호소 그리고 심판의 위협이다. 마르코는 이를
우화적으로 해석한다. 포도밭의 등장은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포도밭이란 舊
約의 表象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단 구약의 표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포도밭의 주인은 하
느님, 소작인은 백성의 지도자, 아들은 예수로 손쉽게 이해될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마르코가 전편을 통하여 강조하는 수난하는 메시아상과 일치한다. 살해된 아들을 예
수로 이해했다면 당연히 그 부활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가
이 부분이다. 주인이 포도밭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준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상속받
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마르코는 포도밭을 전통적으로 해석하여 이사야서 5.2을 끌
어 들였지만 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집착하여 포도밭의 원래 의미가 이스라엘 백성에서
복음으로 달라진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마태오와 루가가 시도한 寓話化
루가는 마르코의 비유를 옮기는 과정에서 포도밭을 바로 이스라엘의 표상으로 우화하 하지
않았다. 루가는 본래 비유에서 포도밭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 비유
를 구세사의 거역할수 없는 흐름 즉 이스라엘이 거부한 기쁜 소식이 이방인들에게 선포된다
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내었다. 이 구세사의 정점인 예수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큰
재앙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마태오는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이 비유에 관련시켜 이해한다. 또 그는 ‘윤리적 결실’을
강조하는데 이스라엘의 죄악은 윤리적 행동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출을 내
는 민족 곧 이상적인 교회가 하느님의 유산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예수 재앙이 오기전에 복음을 받아 들이라는 호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을 반영하
마르코 여 그리스도를 수난 받는 하느님의 외아들로
묘사
예수사건을 구원의 정점으로 보는 구세사관
루가 에 입각하여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고
요구
마태오 그리스도론 +교회를 기쁜 소식의 전수자로 보
는 관점을 첨가함
● 청지기의 비유(루가 16.1-13)
청지기의 비유와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는 비유가 어디서 끝나는가 하는 것과 비유의 의미
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8절의 해석에 달려 있다.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위기
의 상황에 대한 신속한 판단과 대응이었다. 이제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자
ⓐ 구조에 대한 견해
① 1-7은 비유자체, 8-9절은 적용
② 1-7만 예수께 소급되고 나머지는 첨가
③ 예수께 소급되는 비유는 1-8a뿐이고 나머지는 초대교회의 전승이 첨가
④ 원 비유는 1-8까지이고 9-13은 루가가 다른 전승에서 옮겨 비유의 적용으로 덧붙임

ⓑ 구체적 주석
9절은 4절의 반복이다. 종말론적인 가르침과 윤리적 지침이 혼합되어 제시되고 있다. 10-12
절은 각 절마다 대비되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이 세구절은 모두 특수 전승으로 루가의 첨가
로 보인다. 13절은 재물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이는 예수어록에만 속한 것이다. 이곳
과 한 단어만 다른 내용이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 루가의 견해
루가는 16장 전체에서 재물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나에게 맡겨진 재물이 부정직한 재물일
수 있지만 이를 자선에 사용하면 하느님께 보상을 받을수 있고 이렇게 작은 것이라도 성실
히 사용해야 참된 재물을 맡게될 밑거름이 되리라고 보았다. 여기서 참된이란 알레티노스αλ
란 희랍어는 참 빛(요한 1.9)이나 진정한 빵(요한 6.32)처럼 영원한 생명과 연관되어
ηθιγος
사용된다.
Ⅳ. 오늘 마지막 때를 살며.
● 무화과 나무와 새순의 비유(마르 13.28-31, 마태 24.32-35, 루가 21.29-33)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의 비유(루가 13.6-9)
마태오와 루가가 마르코의 본문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있다. 곧 마르코와 마태오는 이 비유
에 묵시적 종말론의 색채를 진하게 넣는 반면 루가는 이 비유를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관한
것으로 분류했다.(사람의 아들 자리에=하늘나라)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심판의 조짐을 알라
고 촉구 하고 계시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의 비유는 루가복음에만 나온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회개하도록 호소하고 계신다.
● 잔치의 비유(마태 22.1-14, 루가 14,16-24)
마태, 루가, 도마복음서의 비유를 비교하여 原比喩를 밝혀 보면 原比喩에는 주인공이 왕이
아니라 단지 ‘어떤 사람’이란 것이 가장 커다란 특징으로 드러난다. 그외에도 잔치의 성격은
만찬(도마), 종들의 숫자는 종이라는 단수(도마), 루가지의 세가지 핑계가 원래 비유에서 유
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주인의 극심한 분노도 유다교와 갈들을 빚던 루가와 마태오의 첨
가일 가능성이 많다. 또한 루가 복음서만 두 번의 종의 파견이 있다. 이중 첫 파견인 “가난
한자, 절름발이등의 초대”는 루가의 첨가이다. 마태복음의 22.11-14절은(옷을 입지 않은 자
의 축출) 마태오가 자신의 교회관을 첨가하기 위하여 덧붙인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핵심은 선택된 사람들의 거절과 주인의 보편적 재선택에 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인간의 저항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천
면하신다. 이 비유는 심판이나 징벌의 선포를 담고 있지 않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특권을 받
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호소 하신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특전에 연연하여 예
수의 가르침에 눈감아서는 안된다.
*마태복음의 메시지 : 해석의 초점은 우화적 해석과 교회론적 해석이다. 마태오는 특히 우
화적 해석을 극대화 시켰다. 마태오는 21.28-22.14절까지 세단계에 걸친 하느님의 사절들의
파견을 이야기 하고 있다.(세자 요한 - 예수 - 그리스도교 선교사) 이들이 당한 박해의 절
정에 70-72년의 예루살렘 파괴과 있다. 7절의 표현은 이의 반영이다.
*루가와 도마 : 루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으나 그들이 모두 거절
하자 이방인들을 부르기로 하셨다는 자신의 구세사관을 재확인 하고자 한다. 또 가난한 사
람들에게 대한 관심과 선행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도마복음의 비유는 특이하게도 초대를 거
절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영지주의적 도마 복음이 세속의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을 경고 하기 위한 것임에 비추어 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 1-13)
이 비유는 예수께 소급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초대교회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엇갈
리고 있다. 초대교회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여기서 묘사된 혼인의 과정이 적합한가를 두
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초대교회로 소급하는 이론은 재림의 지연에 대한 해명으로 이 비유
를 이해한다. 종말이 닥치기 전에 상당히 긴 시간이 지속될 터인즉, 저마다 등불만 들고 있
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기름(선행)까지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 팔레스티나의 결혼풍속.
먼전 신랑은 신부를 장인 집에서 데려오기 앞서, 두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인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계약서에서는 신랑측이 지불해야 할 신부의 몸값과 신부측에서 지불해야할
지참금이 적혀있고 흔히 신부 쪽 식구들에게 줄 선물까지 자세하게 명시되어 있다. 신부쪽
계약 당사자는 신부의 아버지나 오빠가 된다.
☞ 마태오가 첨가한 부분
ⓐ“그때에”(공동번역 無)는 재림의 때와 마지막 날 드러날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는 중요한
표현이다.
ⓑ열처녀를 슬기로운 이들과 미련한 이들의 묘사하는 것은 마태오의 교회관의 반영이다.
ⓒ13절의 경고는 24. 42-44의 내용의 중복이다. 이는 이 비유에 대한 마태오의 해석의 반영
ⓓ10-12절은 루가 13.25에 같은 내용의 병행구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5절은 하느님 나라가 지체없이 오리라는 예수의 일반적 가르침과 상반된다.

예수의 원비유에서 신랑은 예수가 아니라 하느님이다. 구약성서에서 신랑은 언제나 하느님
을 가리켰다. 그리고 혼인잔치는 구약시대의 메시아의 잔치, 신약의 하느님 나라와 직결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는 예고된 사건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하여 분명하게 선포된
이 나라를 맏아들이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요구하는
것은 회개이다.
마태오에서 이 비유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우화의 색채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
서는 신랑은 재림하실 예수요, 잔치는 심판을 의미하게 되었다. 종말이 연기되기는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시기에 반듯이 닥칠 것이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최후의 심판(마태 25. 31-46)
마태오는 이 비유를 예수의 공적 가르침을 총결산 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23장부터 시작되
는 이 종말론 담화에서 특징적인 것은 종말의 임박과 지연에 대한 개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종말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고한다. 이 깨
어 있음은 윤리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아 시적과의 비교나 밭에서 일하던 두사람의
비유, 맷돌 갈던 여인의 비유등은 불충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와 같은
긴 비유처럼 깨어 있슴에 대한 강조이다.
☞ 마태오의 편집
ⓐ31-32a는 오나전한 마태오의 편집이다.
ⓑ34절에서 “그때에”와 “내 아버지”라는 표현은 편집적 요소이다.
ⓒ40절과 45절의 “분명히 말한다”나 41절의 “영원한 불”도 편집요소이다.
ⓓ‘모든 민족’들이라는 표현이나 ‘의인’이라는 표현도 마태오에게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
표현들이다.
예수께서 전하고자 하신 메시지는 세상 종말에 하는미의 심판에서 각 사람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인종이나 종교가 아니라 고통밭는 이웃에 대한 태도에 있다는 것이
다. 마태오는 여기다가 묵시론적 전망을 통한 보편적 구원관,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의 연결,
진정한 제자됨과 정의와 사랑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의 근본 윤리등 복음서 전체의 가르침을
담아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적용을 위해서는 먼저 24-25장의 묵시론적 관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현세의 고통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어긋나는 것인데 그래도 이것을 이겨 냄으로로써 결구에 이루어질 정의
에 바탕한 질서를 희망하도록 권고한다. 다음으로 마태오는 전통적 묵시론에 두가지 수정을
가하여 심판의 정황보다는 척도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서 “정의”의 개념이 부각된다. 정의
는 하느님 편에서는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행위이고 인간 편에서는 동료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또 하나의 수정은 묵시론을 구세사의 역사안에서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리스
도의 삶안에서 자비와 사랑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지금 정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질서의
회복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안에서 구현된다. 셋째로 마태오는 이 비
유에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마태오가 덧붙인 모든 민족이란 것은 이방인들 그리
고 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박해받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다.
신약의 주요 개념에 대한 연구
1.후기 유다이슴과 예수의 비유
예수말씀의 1/3을 차지하는 비유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랍비 문헌에 등장하는 비유들
과 유사하다. 랍비 문헌에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로 번역되는 마샬(‫)מטל‬의 구조는 다섯가지
요소를 지닌다.
*비유의 주제 또는 이야기의 초점
*도입정식 : “비유”, “그것은-과 같다”등의 표현
*본격적인 비유
*비유의 적용 : 이와같이로 시작됨
*성서인용 : 말씀대로, 기록된 대로라는 표현과 같이 등장

2. 구약과 하느님 나라
구약에 하느님 나라 개념은 왕정제도의 도입과 더불어 생겨났다. 이 개념이 가장 분명히 드
러나는 것은 이사야 예언서이다. 586년 유배시대에 접어들면서 백성들은 자신을 보호하리라
기대했던 왕정이 바빌론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이런 절망속에서 나타난 것이
2,3 이사야 그룹이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때가 온다’는 소식을 전하기 시작
한다. 이들에게서 복음(ευαγγελιον)이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3.후기 유다이즘과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
후기 유다이즘에 자주 나오는 말쿠트 샤마임 즉 하늘 왕국이란 표현은 ‘하느님은 왕이시다’
곧 하느님의 다스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면 무방하다. 랍비문헌에서 이 개념은 결코 장
소를 의미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랍비 문헌에는 두가지 중요한 표현이 있는데 하나는
‘하늘 나라의 멍에를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을 왕으로 받아 들이고 다른 신을
거부하는 개인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것이다란 말
이다. 이는 전자의 배척 가능성에서 자연 스럽게 생겨나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가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러한 배척은 사라질 것이란 말이다.
묵시론과 메시아주의
4.
묵시론이 이원론에 입각하여 초월적 천상왕국을 고대한 반면 메시아 주의는 옛 군주제도를
부흥시키고 이상적 다윗 왕정을 회복시킬 현세적 지상 왕국을 추구하였다. 이는 나단의 예
언에 근거한 것이다.(2사무 7.11-17)
5.예수와 하느님 나라
예수님은 성서의 전통에 따라 통치행위나 통치권 자체를 가리키는 하느님 나라 개념을 선포
하신다. 이는 현실적 차원과 종말론적 차원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 나라는 가시적
이고 물리적으로 분명히 드러나지만 죽음과 악을 완전히 정복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
은 미래적 사건이란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선포에서 특징적인 것은 하느님 나라를 당
신 자신의 인격과 삶안에서 구현시킨 것이다.
6.미드라쉬, 타르쿰, 미쉬나등에 관하여...
㉠ 미드라쉬 : 성서의 주석과 해석을 말하지만 좀더 전문적으로는 성서 해석의 특별한 방법,
성서 주석의 문헌 작업을 의미한다. 후자를 보통 미드라쉼이라 부른다. 미드라쉬를 내용적으
로 구분하면 할라카식(법적, 절차적)일 수도 있꼬 하가다식(묘사적, 회화적)일수도 있다. 양
식으로 구분하면 주석일수도 있고 설화적, 설교적일수 있따.
㉡ 미쉬나 : 유다이즘의 구전전승 안에서 발전된 할라카식 자료의 권위있는 모음집이다. 미
쉬나는 탈무드의 기초와 뼈대를 이룬다. 미쉬나는 여섯 항목으로 구분되고 소고를 포함한
다.(씨앗, 축제, 여인, 손해, 성스러움, 정결..)
㉢ 타르굼 : 일반적으로는 번역이나 해석을 의미하나 성서학계에선 구약성서의 아람어 역본
을 의미한다. 랍비 문헌에서 타르굼은 에즈라, 느헤미야, 다니엘서에 나오는 아람어 부분이
다. 이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을 위해서 히브리 성서 본문을 아람어 번역과 같이 회
당에서 읽은데서 비롯하는데 이 경우 타르굼은 일종의 해석으로 성서를 확장한다.
㉣ 탄나임 : 탄나는 일반적으로 미쉬나에 언급된 율사나 미쉬나(20-200)시대의 율사를 말한
다. 이들의 가르침을 모은 것이 탄나임문학이다. 탄나임 문학은 크게 미쉬나(여러 가지 법률
형식이나 그 밖의 암기방법에 따라 정리된 할라카식의 간결한 정식)과 할라카식 미드라쉼
(모세오경의 각권에 대한 주석)의 두가지 전통에 속한다. 1세기의 유명한 탄나임은 샴마이와
가믈리엘 1세와 힐렐등이 있다.
㉤ 페쉐르 :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 몇가지 문헌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된 히브리어이다.
이것은 하가다식(설화적) 미드라쉬에 속한다. 곧 법적 부분이 아닌 부분에 대한 성서 주석이
다. 그런데 이 페쉐르는 구약의 예언서들이 마지막 날에 관한 신비를 담고 있다고 보는 데
서 다른 주석서와 다르다.
㉥ 하가다 : 율법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랍비들의 문헌적 자료. 이야기, 일화등
㉦ 할라카 : 삶의 일상에서 지켜야 할 규범들을 소개하는 랍비문헌을 가리키거나 랍비들이
기록이나 구전으로 된 율법의 권위있는 해석으로 받아들여 후대에 전한 규범들과 결정들을
의미한다. 이는 미드라쉬와 미쉬나 두 형태로 보존된다. 주로 법적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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