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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22)

3권 4장 37-39절

제목: 죄사함 받은 자의 사랑

본문: 누가복음 7:41-47

37. 사랑하여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 받아 사랑하게 됨

누가의 말씀에 관한 한(눅 7:36-50), 그곳에서 주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을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읽
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주님이 그렇게 자상
함을 보이시면서 한 여자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지만 정작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셨다고 심중에
생각했다. 주님이 만약 그녀가 어떤 죄인이라는 것을 아셨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바리새인은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이 이렇게 속으실수 있는 분이시므로 선지자가 아니라고 추론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이미 죄를 사함 받은 그 여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한비유를 제시
하셨다. “빚 주는 사람 하나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
을 졌는데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 누가 더 큰 은혜를 받았느냐? 바리새인이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은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 이에 주님께서 이르시되, 이 여인의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이 많음이
라' 적용. 눅 7:41-43,47).

여기에서 보듯이, 이러한 말씀으로 주님은 그 여자의 사랑을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그 증거로 484)
삼으셨다. 왜냐하면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빚쟁이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그 빚쟁이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
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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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풀어 쓸 수 있다. "당신은 이 여자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받은 은총에 대해서 감
사를 돌리는 그녀의 사랑을 통해 당신은 그녀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고백을 했어야 마땅하다."

이는 어떤 것이 그것을 따르는 표징들에 의해서 증명되는 후험적 논증을 담고 있다. 주님은 어떤 방법


으로 그녀가 죄사함을 받았는지 명백하게 증언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눅 7:50)라는 그의
말씀이 그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는 사함을 얻고, 사랑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주님의 은총을 증
언한다. 485)1)

38. 스콜라주의자들의 보속 교리는 고대 저술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함

1) 485) Fide igitur remissionem assequimur; caritate gratias agimus et Domini beneficentiam testamur." 486)"ubi
misericordia flagitatur, interrogatiocessat; ubi misericordia postulatur, iudicium non saevit; ubi misericordia petitur,
poenae locus non est; ubi misericordia, quaestio nulla; ubi misericordia, condonata responsio est,"
Pseudo-Chrysostom, Homily on Ps. 50, hom, ii, 2 (MPG 55, 577). Quot, Battles tr.. n. 76.
보속에 관해서 고대 저술가들이 개진한 여러 입장은 나를 거의 감동시키지 않는다. 그중 적잖은 사람들
이, 실상 현존하는 저술 거의 전부가, 타락했거나 너무 날카롭고 거친 언사들을 쏟아 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나는 그들이 단지 교양이 없었다거나 무식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편견은 많은 부분 보
속을 옹호하는 저 새로운 무리들이 그들의 글들을 자의적으로 읽고 곡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어느 곳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비가 간청되는 곳에는 수사가 그친다. 자비가
탄원되는 곳에는 심판이 노를 삭인다. 자비를 구하는 곳에서는 형벌이 자리할 곳이 없다. 자비가 있는 곳
에서는 심문(問)이 없다. 자비가 있는 곳에서는 너그러운 응답이 있다."486) 이 말을 아무리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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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시킨다고 하더라도 결코 스콜라주의자들의 교리들에 가닿게 할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이 기입된 책 교회의 교리(De dogmatibus ecclesiasticis)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회개의 보속은 죄의 원인들을 잘라내는 데 있는 것이지 그것들에 이르는 길을 못 본 척하며
허용하는 데 있지 않다. "487)2) 이로부터 우리는 심지어 그 당시에도 저질러진 범죄들에 대한 대가를 지불
하는 방식으로서 보속을 다루는 교리는 모든 곳에서 조롱을 받았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사람들은 이후에 죄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데 모든 보속이 관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지은 범죄들을 눈물로 고백하는 것 이상이 아니라는 크리소스토무


스의 가르침을 488)3) 나는 굳이 여기서 인용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과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
가운데 이와 동일한 내용이 누차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상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곳에서 자비의 행위가
죄사함을 얻는 처방이라고489)4)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 그의 이러한 말에 현혹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리스도의 육체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희생제물이다. 그 죄는 세례에서 전체적으로 지워
진 것뿐만 아니라 연약함으로 인하여 이후에 은밀히 들어온 것도 아우른다. 이런 이유로 전체 교회는 '우
리의 죄[빛]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날마다 외친다. 이러한 죄[빛]는 저 특별한 희생제물을 통해서
사해진다.”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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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스콜라주의자들의 보속 교리는 옛 사람들의 가르침을 왜곡할 뿐 그들의 권위에 의존하는 바가 없음

옛날 사람들은 대체로 보속을 하나님께 돌려지는 보상이 아니라 출교로 징벌을 받은 사람이 성도의 교
제에 다시 들어오기 원하여 자기의 회개를 교회에 더욱 확신시키기 위한 공적인 증언이라고 부른다. 당시
에는 회개한 사람들에게 모종의 금식들과 다른 의무들이 부과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전의 삶을 마음속
으로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진실하게 증명하고 나아가 이전의 기억들을 지우게끔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다고491)6) 일컬어졌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편람』

2) 487) "poenitentiae satisfactio est, causas peccatorum excidere, nec eorum suggestionibus aditum
indulgere." Pseudo-Augustine, De dogmatibus ecclesiasticis xxiv (MPL 58. 994), Quot, Battles tr., n. 77.
488)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hom, x, 2 (MPG 53, 83ff.). Quot, Battles tr,, n, 78,
3) 488)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hom, x, 2 (MPG 53, 83ff.). Quot, Battles tr,, n, 78,
4) 489) "opera misericordiae remedia.... obtinendae peccatorum remissionis."
5) 490) "Caro Christi, inquit, verum est et unicum pro peccatis sacrificium, non modo iis quae universa
in baptismate delentur, sed quae postea ex infirmitate subrepunt; propter quae universa quotidie
clamat ecclesia: remitte nobis debita nostra, Et remittuntur per singulare illud sacrificium," Augustine,
Enchiridion xix, 72 (MPL 40. 266; ed, O. Scheel, p. 46; tr, LCC VII, 382);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vi, 16 (MPL 44, 600; tr, NPNF V, 409f.), Quot, Battles tr.. n. 79.
(Enchiridion)에서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에게 표한 입장과492)7) 다르지 않다. 이러한 옛날의 예식으
로부터 오늘날 실행되고 있는 고백들과 보속들이 기원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독사의 자식들로 인해서 (참
조, 마 3:7 12:34) 그 좋은 것의 형태가 심지어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때때로 옛날 사람들의 말이 다소 무모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493)8) 나는 그들에게 잘


못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오점들이 흩어져 있었던 그들의 작품들에 저 사람들의
닦지 않은 손이 닿았을 때에는 완전히 더럽혀지고 말았다. 만약 우리가 옛 사람들의 권위에 의지해서 논쟁
을 해야 한다면, 선하신 하나님이여, 그들은 우리에게 그 옛 사람들 중 누구를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려고
합니까? 그들의 지도자인 494)9) 롬바르두스가 자기의 단편들을 편집하면서 인용한 작품들 대부분은 수도
사들의 허무맹랑한 정신착란에서 나온 글들을 담고 있으며, 그것들이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아우구
스티누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으로 사칭되어 전해져 왔다. 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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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다루는 이 논쟁에 대해 롬바르두스는 거의 모든 것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회개」(Depoenitentia)라


는 책에서 취했다. 엉뚱하게도 그곳에는 어떤 열광적인 음유 시인에 의해서 좋은 작가들과 나쁜 작가들의
글들이 무분별하게 나란히 꿰어져 있다.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을 담고 있지만 평범한 식자라면
아무도 그것이 그의 것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495)10)

나는 여기에서 내가 스콜라 학자들의 어리석음을 예리하게 탐색하지 않고 있음에 대해서 독자들이 너그


럽게 양해해 주시를 간구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히려 독자들의 짐을 덜고자 함에 있다. 스콜라주의자
들이 지금까지 비밀들이라고 자랑해 온 것들을 조롱하고 그들에게 큰 수치를 안기는 것이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뿐더러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유익하게 가르치는 데 49
6)11)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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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91) "non Deo, sed ecclesiae satisfacere."


7) 492) Augustine, Enchiridion xvii, 65 (MPL 40, 262f; tr, LCC VII. 377); Gratian, Decretum II. xoxoxiii. 3.
84 (Friedberg 1. 1183; MPL 187, 1533), Quot, Battles tr., n, 80,
8) 493) 제38절을 칭한다.
9) 494) "coryphaeus."
10) 495) 칼빈은 의사 아우구스티누스(Pseudo-Augustinus)로부터 많은 구절을 출처에 대한 의심 없이 인용하였으나
여기에 인용된 De vera et falsa poenitentia는 후대의 저술임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누차 배척하였는데, 단
한 곳 Institutio. 3.14.8에서만 그 내용에 동의하는 인용을 하였다. Quot. Battles tr.. n. 83.
11) 496) "fructuose doc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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