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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12)
범위: 3권 4장 12-15절
제목: 사적인 죄의 고백
본문: 마태복음 5:23-24

12. 유익을 좇아 자유롭게 행하는 사적인 고백

더욱이 성경은 사적인 고백의 두 가지 형태들을387)1) 인정한다. 하나는 우리자신을 위한 388)2) 것인데,
이는 야고보가 우리가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한 말씀에 해당한다(약 5:16). 여기에서 그는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상호 간에 나누면서 조언과 위로로 서로 도우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이웃을 위해서 389)3) 행해
져야 할 고백이다. 이는 우리의 악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게 된 이웃을 누그러뜨리고 이웃이 우리와 화목하
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종류의 고백에서 야고보는 누구의 가슴에 우리의 짐을 풀어놓아야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지정하지
않고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여 교회의 무리 중에서 최고 적합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하라고 여지를 남겨
놓았다. 그러나 목사들이 누구보다 특별히 뛰어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되므로 그만큼 그들을 더 선
호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적합하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고유한 사역의 소명을
좇아 그들을 지명하셔서 그들의 입을 통하여 우리가 교훈을 받아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교정하며 또한 은
총의 확신을 통하여 위로를 얻도록 하시기 때문이다(마 16:19; 18:18; 요 20:23) 390)4) 상호 간의 훈계와
책망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것이나 특별히 사역자들에게 명령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서로
를 위로하고 서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을 확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양심이 죄사
함을 더욱 확신하게끔 사역자들 자신이 그것에 대한 증인이자 보증인으로 임명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
하여 그들은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해방한다고 일컬어지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391)5) 이런 직분이 그들에
게 돌려진다고 당신이 들을 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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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당신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392)6) 그러므로 어떤 신자는 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죄
에 대한 의식으로 고통을 당할 때, 그리하여 외부의 도움 없이는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을 때, 주님
이 그 처방으로 부여하신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의무의 일부이다. 달리 말하면, 자기의 짐을 덜기 위하
여 자기 목사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 유용하며, 자기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적으로 그의 도움을 간청하여 얻
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복음적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 그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다음의 절제를 지켜야 한다. 즉 하나님이 확실하지 않은 것을 명령
하실 때에는 결코 확실한 멍에로 양심을 옭아매서는 안 된다. 393)7)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이런 고백은 모든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에 맡겨져 있으므로, 오직


그것이 필요함을 이해하는 자들에게만 권해야한다. 필요를 좇아 고백을 하는 경우에도 모든 죄를 다 헤아
려 열거하도록 어떤 명령에 의해 강요되거나 어떤 술책에 의해서 회유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이러한 고백

1) 387) Duas privatae confessionis formas,"


2) 388) “nostra causa."
3) 389) "in proximi gratiam,"
4) 390) "quod ipsa ministerii vocatione nobis a Domino designantur, quorum ex ore erudiamur ad subigenda et corrigenda peccata,
tum consolationem ex veniae fiducia percipiamus,"
5) 391) "videmus tamen ministros ipsos, ut de remissione peccatonum certiores reddant conscientias, testes eius ac sponsores
constitui, adeo ut ipsi dicantur remittere peccata, et animas solvere,"
6) 392) Cf. J. D. Benoit, Calvin: directeur d'émes, pp. 2451; McNeill, A History of the Cure of Souls. PP. 197, 209, Quot, Battles tr., n,
23.
7) 393)"ne ubi Deus nihil certum praescribit, conscientiae certo jugo alligentur."
이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간주하는 만큼 행하여 위로의 견실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충실한 목사들은
이 자유를 교회에 맡겨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사역을 전제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백성을 미신으
로부터 떠나게 하려면 그 자유를 보호하고 굳건하게 변호해야 한다.

13. 이웃의 상처를 치료하고 화목에 이르기 위한 고백

나아가 두 번째 종류의 고백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태복음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
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그러므로 우리의 죄로 찢겼던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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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죄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용서를 구함으로써 수선된다.

전체 교회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데까지 죄를 지은 자들의 고백도 이러한 종류에 포함된다.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사적인 위반도 대단하게 여기셔서 어떤 식으로든 형제들에게 죄를 짓는 모든 자에게 정당한 배상
을 치러 화목하게 될 때까지는 거룩한 예식들을 금하시는데, 전형적인 어떤 악한 일을 저질러 교회에 상처
를 입힌 자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화목하게 되어야 할 이유는 훨씬 더 크지 않겠는가? 394)8) 우리가 보
듯이, 고린도 교회의 신자는 견책에 복종하는 처신을 함으로써 다시금 교제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후
2:6).

키프리아누스(Cyprianus)가 다음에서 상기시키듯이, 초대 교회의 고백 형태도이와 같았다. 그는 말한다. "


그들은 적정한 시간 동안 회개를 하고 그 후에 참회하러 와서 주교와 성직자들의 안수를 통하여 교제의
권리를 받게 된다."395)성경은 다른 방식이나 형태의 고백은 그 무엇이든 부인한다. 그리스도가 가장 엄격
한 명령으로 금지하게 하시는 새로운 사슬로 우리의 양심을 예속시키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한편
나는 양들이 성찬에 참여하고 싶을 때마다 자기들의 목사 앞에 나타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
는 이것이 모든 곳에서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왜냐하면 이로써 짓눌린 양심이 각기 고유한 열매를 맺
고, 권면을 받아야 할 자들이 권면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억압과 미신은 항상 배제되
어야 한다.

14. 성도의 사적인 고백에 대하여 오직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작용하는 열쇠의 권한

열쇠의 권한은 세 가지 종류의 고백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전체 교회가 자체의 악행을 엄숙히 인정하는
가운데 은총을 간청할 때, 어떤 현저한 범죄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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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러 모두에게 걸림돌이 된 사람이 자기의 회개를 선포할 때, 불안한 양심으로 인해 사역자의 도움이 필요
한 사람이 자기의 연약함을 그에게 드러낼 때이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행위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거


는 양심의 평화가 결과적으로 부여되기는 하지만, 그 주요한 목적은 사람들 가운데서 증오를 제거하고 그
들의 마음을 평화의 고리로 서로 하나로 묶는 데 있기 때문이다(참조, 엡 4:3).

그러나 내가 말했던 저 열매, 즉 우리가 더욱 기꺼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게 되는 그 은총은 결코 내버려서


는 안 된다. 전체 교회가 이른바 하나님의 심판좌 앞에서 자기 죄책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그 유일

8) 394) 칼빈은 이를 제네바 교회규칙서에 규정하고 있다.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CO 10/129f; tr. LCC XXII, 70f.). Quot, Battles tr.,
n. 24, 395) Cyprian, Letters xvi, 2 (CSEL 3. ii, 518; tr. ANF [letter ix, 2] IV. 290), Quot, Battles tr., n, 25.
한 피난처로 삼을 때, 그곳에 화목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함께 현존한다는 것은 그저 범상하거
나 경미한 위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신으로부터 무죄 방면의 소식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참조, 고후5:20). 사신으로서의 그의 직분이 의롭게 순서에 따라, 종교적으로 기품이 있게 수행될
때 열쇠의 유용함이 찬미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여하한 까닭으로 자기를 교회로부터 소원하게 했던 사람이 용서를 받고 회복되어 형제적인 하나 됨에 다


시 들게 될 때, 그는 그리스도가 "너희가 누구의죄든지 땅에서 사하며 하늘에서도 사하여질 것이요"(요
20:23과 마 18:18 병합 적용)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 의해 자기가 용서받게 됨을 인지하게 되니 얼
마나 그 축복이 크다고 할 것인가!

자기들의 연약함을 오직 하나의 처방으로 경감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


적인 방면)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작용이나 열매가 결코 덜하지 않다. 왜냐하면 종종 있는 일이지만, 신자들
전체 회중을 향하는 일반적인 약속에 대해서는 여전히 약간의 의심을 지니고 있으며 마치 아직 사함을 얻
지 못하기라도 한 듯이 불안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영혼의 비밀스러
운 상처를 자기 목사에게 밝히고 그로부터 특별히 자기를 향해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라는 복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면, 마음이 확정되고 이전에 자기를 괴롭히던 근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어
찌 평정을 얻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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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열쇠의 문제가 제기될 때 언제나 우리는 복음의 선포와 분리된 어떤 재능을 꿈꾸지 말도록 주의해
야 한다. 396)9) 이 사안에 대해서는 교회의 통치를 다루는 다른 곳에서 397)10) 더욱 상세하게 다시 설명
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교회에 부여된 매거나 푸는 권리는 말씀에 매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
다. 주님이 임명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의 은혜가 공적이며 사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에 인쳐진다는 사실
에 열쇠의 권한 전체가 기반하고 있음을, 이러한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는 오직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15. 열쇠의 권한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성도의 고백을 왜곡시키는 로마 신학자들

로마의 신학자들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남성과 여성에 속한 모든 사람은 398)11) 분별력이 있는 나이에 이
르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자기 사제에게 자기들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그들은 규정한다. 만약
죄를 고백하고자 굳게 마음먹은 맹세가 없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그 용서의 가능성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이 맹세가 수행되지 않는다면 낙원에 이르는 어떤 길도 더 이상 열려지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매면……”(마 18:18)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허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을 풀고 매는 열쇠
의 권한이 399)12) 사제에게 고유하게 부여된다고 그들은 규정한다. 400)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권한을 두고 서로 간에 격렬하게 다툰다. 어떤 사람들은 본질상 열쇠는, 즉


매고 푸는 권한은 하나로서, 지식은 단지 선(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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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야 할 부착물과 같아 필요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고 여겼다.40
1)14) 다른 사람들은 이 권한을 극도로 고삐가 풀린 방자함으로 보고 사려분별과 권한이라는 두 열쇠를 열

9) 396) "semper cavendum est ne facultatem aliquam somniemus ab evangelii praedicatione separatam."
10) 397) Institutio, 4,11-12.
11) 398) "omnes utriusque 5. 앞의 제7절에서 이에 대한 논란을 다루었다.
12) 399) "potestatem……clavium, quibus peccatorem solvat ac liget"
13) 400) Lombard, Sentences IV, xvii, 2, 4; IV. xviii, 1 (MPL 192, 881, 883, 885), Quot, Battles tr., n, 27,
거했다. 402)15) 또 다른 사람들은 사제들의 불순함이 그러한 절제심으로 억제된다고 보는 가운데 다른 열
쇠들을 만들어 냈다.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사리분별의 권위, 그리고 자기들의 판단을 집행하는 데 활용되
는 권한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지식이 마치 고문관(官)과 같이 이것들에 덧붙여졌다. 403)16)

그러나 감히 그들은 매고 푸는 것을 단지 죄를 사하고 제하여 주는 것으로서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가 선지자를 통하여서 외치시는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
른 신이 없도다 나곧 나는 너 이스라엘의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43:11 25 병합 적용). 그러나 그들은
누가 매였는지 혹은 누가 풀렸는지를 선언하고 누구의 죄가 사함을 받았는지 혹은 그냥 남았는지를 공표
하는 것은 사제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고백을 통하여 죄를 사하고 남겨 두거나, 판결을 통하
여 출교하고 성례의 교제에 받도록 할 때에도 사제가 공표한다. 404)17)

마지막으로, 자기 사제에 의해 부당하게 매이거나 풀린 사람들은 이후 하늘에서는 그렇게 매이거나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 항시 제기될 수 있다는 난점으로부터 자기들이 아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기에, 이에 대한 마지막 피난처로서 열쇠의 수여가 다음과 같은 제한 가운데 이해되어야 한다고 응수한
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의 심판좌 앞에서 사제의 판결이 승인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매인 자와 풀린
자에게 요구되는 공로에 따라서 올바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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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되는 경우에 한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 열쇠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사제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그들이 승급할 때 주교들에 의해서 수여되지만 그 자유로운 사용은 오직 이와 관련된 교
회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수중에만 있으며, 그들 가운데 출교된 자들과 휴직 중에 있는 자들 가운데
는 녹이 쓸고 묶인 채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모루 위에서 새로운 열
쇠들을 만들어 내고 교회의 보고가 405)18) 그것들로 잠겨 있다고 말하는 아래 사람들보다는 더 겸비하고
더 신중하게 보인다. 이 판단은 그릇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이후 적합한 곳에서 406)19) 설명하도록
하자.

14) 401) "unicam esse clavem in essentia, scilicet potestatem ligandi et solvendi; scientiam ad bonum
quidem usum requiri, sed tantum instar accessorii esse, non essentialiter cohaerere." 다음은 이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다. Alexander of Hales, Summa theologiae IV. qu. lxxix, memb, 3. art. 1. Quot, Battles
tron, 28.
15) 402) "quia videbant hanc nimium effraenatam licentiam, duas claves recensuerunt, discretionem et
potestatem."
16) 403)"autoritatem discemendi, qua in definiendo uterentur, et potestatem, quam exsequutione suae
sententiae exercerent; scientiam accedere velut consiliarium,"
17) 404) Lombard, Sentences IV. xviii, 4, 6, 7, 8; IV, xix, 1 (MPL 192, 886-889), Quot, Battles tr., n, 29.
18) 405) "thesaurum ecclesiae."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보고(thesaurus ecclesiae) 교리에 근거해서 열쇠의 권한을
복음의 선포와 무관한 것으로 변질시켰다. 이 교리는 헤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1183-1245)의다음 책에서 처
음으로 제시되었다. Summa theologiae IV, qu, bxxxiii, memb, 1, art, 1; memb, 3, art.5. 그리고 아퀴나스와
다른 신학자들에 의해서 수정되었고,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 1342-1352)가 1343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하
여 간명하게 정의되었다. Unigenitus, Friedberg II. 1304; tr. Bettenson,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p. 259f; J. F. Clarkson, et al., The Church Teaches, P. 31. 로마가톨릭은 '교회의 보고는 그 원천
이 값없이 부어지는 그리스도의 피와 마리아 및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공로에 있으므로 무한하다고 여긴다. Cf.
Bonaventura,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V, xx, part 2. art,1. qu. 3.4 (Opera omnia IV, 521-525);
Lea, History of Confession and Indulgences I. ch, vii: 1, 506;R. Seeberg, History of Doctrines; tr. C. E.
Hay, II. 139. 루터는 이를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Cf. Fisher,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 (1523), ch,
xviii (pp., 298-313). Quot, Battles tr,, n, 30,
19) 406) Institutio.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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