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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00)

범위: 3권 3장 2-4절

제목: 복음적 회개

본문: 시편 130:1-18

2. 회개는 복음적 믿음에서 비롯되며 그 믿음과 함께 이르게 됨 

그들은 그리스도와 요한이 회개를6 219) 촉구하는 말씀을 백성에게 먼저 선포하신 다음에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덧붙였다고 이유를 댄다(마 3:2: 4:17) 사도들이 선포하라고 받았던 명령도 그러했고 누가가 전하
는 바에 따르면 바울도 그러한 순서를 좋았다는 것이다(행 20:21). 

그러나 그들은 자구(字句)들의 전후 관계에 미신적으로 집착하여 그러한 말씀들을 함께 하나로 묶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주 그리스도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라고 선포
하실 때, 회개의 원인이 은혜 자체와 구원의 약속에 기인된다고 보고 있지 않는가?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의 말씀은 실제로,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라."라는 뜻을 지닌다. 같은 맥락에서 마태는 요
한이 선포한 것이 무엇인지를 언급하면서 그 안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기술한다. "광야에 외
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마 3:3; 사 40:3).
그러나 선지자에게 임한 이 음성은 위로와 기쁜 소식으로부터 시작되게끔 명령되었다(사 40:1-2). 

이렇듯 회개의 기원을 믿음에 돌린다고 해서, 믿음이 회개를 낳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공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 진지하게 회개에 열의를 다하려면 필히 먼저 자기가 하나님
께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뜻할 뿐이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자기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에 대해 참된 감화를 갖지 못한다.7220) 이 사안들은 이
후에 더욱 분명하게 논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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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컨대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아는 지식에 젖어 들기 전에라도, 심지어 그 맛을 보기 전


에라도, 양심의 전율에 압도당하거나 훈련을 받아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속임수에 빠져 있다. 그
들이 덕성 중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 시작 단계의 두려움이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를 참되고
의로운 순종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8 221)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끌어 가시는지, 혹은 우리를 준비시켜 경건을 추구하게 하시는지를 질문하고 있지 않
다. 

나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자기 지체들에게 자기를 교통하시기 위해 받으신 성령이 다스리지 않으시는 곳


엔 어떤 올바름도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대저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
다" (적용 시 1304)라는 시편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신뢰하는 자 외에는
그 누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경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자기의 복종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감화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붙들어
매어 율법을 준수하는 데 이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악을 보아 넘기시고 참으시는 이러한 관대함은 하나
님의 부성적 호의의 표징이 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라는 호세아의 권고는 또한 이를 예시한
다. 이와 같이 은총의 소망이 마치 박차와 같이 가해져서, 우리가 각자의 죄에 빠져서 게으름을 피우지 못
하도록 한다.9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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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성의 외양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바, 그들은 새로
개종한 자기 사람들에게 자기 훈련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몇 날을 규정하고 마침내 그 기간
이 지나면 그들을 복음적 은혜의 교제로 받아들인다. 지금 나는 재세례주의자들 가운데 아주 많은 자들,
특별히 영적이라고 여겨주면 광적으로 즐거워하는 자들,10223) 그들과 동류들인 예수회 회원들,11224) 그
리고 다른 유사한 자들 모두에 대해서 말한다. 명백히 저 미혹의 영은 그리스도인이 전 생애 동안 지속해
야 할 회개를 겨우 몇몇 날에 한정시키는 그런 열매를 맺는다. 

3. 죽임과 살림 

심지어 이 시대가 오기 훨씬 전에 회개에 관해서 정통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규범에 따라서 그것이 '죽
임'과 '살림' 225)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단순하고 진지하게 말하기를 원했다.12 226) 그들은 '죽임'을
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배태된 영혼의 고통 및 공포라고13 227) 해석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죄에 대한 참 지식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순간 그는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저주하
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비참하고 타락했다고 고백하
며,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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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어떠한 의식이 생겨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때, 한 가지 일이 즉시 다


른 일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듯이. 그 순간 그는 참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겁에 질려 쓰러지고, 전락하
여 버림받아 전율하며, 마음속으로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것이 회개의 첫째 부분으로서, 사람들은 이
를 일반적으로 "통회"라고14 228) 일컬었다. 

그들은 '살림'을 믿음으로부터 생겨나는 위로라고15 229) 해석한다. 확실히 죄에 대한 양심으로 좌절하고
하나님에 대한 공포로 충격을 입은 사람이 이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곧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
은혜, 구원을 바라보게 될 때, 그는 자기를 일으켜 세우고, 시름을 버리며, 용기를 내며, 말하자면 죽음으
로부터 생명으로 돌아온다. 

실로 이러한 말들은 올바른 해석이 따른다면 회개의 힘을16 230) 충분히 잘 표현해 준다. 그러나 '살림'을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평온해진 마음이 누리는 즐거움으로17 231) 받아들인다면18 232) 나는 이에 동
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람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열의를19 233)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열의는 다
시 태어남으로부터20 234) 솟아 나온다. 이는 마치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
기 시작하는 것을21 235) 말하는 것과 같다. 

4.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 

다른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 이름이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고, 회개의 두 양상을 제시했다. 그들은
어떠한 표지로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를 "법적 회개"라고22 236)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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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라는 부식제 상처를 입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로 닳아 버린 죄인은 율법적 회개를 통하여서 불안
에 옥죄인 채 묶여 있어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구출해 낼 수가 없다. 그들은 다른 하나를 복음적 회개"라고
23 237) 말했다. 죄인은 실로 극심한 곤궁을 자기 마음속에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적 회개로 말미
암아 그 곤궁 너머로 더 높이 솟아올라 그리스도를 자기 상처를 고칠 약이요, 공포를 이길 위로요, 비참함
을 피할 도피처로 붙든다.24 238) 
'율법적 회개'의 예들로 가인(창 4:13), 사울(삼상 15:30), 유다(마 27:4)가 있다. 성경은 그들의 회개를 상
기시키면서 그들이 자기들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했다는 점을 우리로 하
여금 깨닫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단지 보복자와 심판자로만 생각하면서, 그 의식 때문에 절망했
다. 그러므로 그들의 회개는 모종의 지옥의 현관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이 땅의 삶에서 그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그의 엄위로운 진노의 형벌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음속이 죄의 가시로 헐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으로 일으켜지고 소생되어
주님께로 돌아선 모든 사람 가운데서 복음적 회개'를 본다. 히스기야는 죽음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몹시
놀랐으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확신을 회복했다(왕하 20:2; 사 38:2). 니느
웨 사람들은 멸망에 대한 가공할 위협으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웠으나 여호와가 그들에게로 돌이키셔서 진
노의 격분을 멀리하시기를,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서 소망하며 기도했다(욘 3:5, 9). 다윗은 자기가 백
성을 조사하는 큰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으나 "여호와여 ……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삼하 24:10)라고
덧붙였다. 그는 나단이 책망하자 간통의 죄를 인정했고 주님 앞에 엎드렸으나 동시에 은총을 기대했다(삼
하 12:13 16) 베드로의 설교로 마음에 가책을 느꼈으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뢰하는 가운데 “형제들아 우
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덧붙인 사람들도 이러한 회개를 하였다. 베드로 자신의 회개도 이러하였다.
그는 실로 쓰라리게 울었다(마26:75; 눅 22:62). 그러나 소망하기를 단념하지는 않았다.25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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