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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21)

남상수 목사

범위: 3권 4장 34-36절

제목: 징계하시는 뜻

34. 신자들을 향한 징계의 복과 불신자들을 향한 징벌의 저주

고통의 쓰라림 가운데서도 성도는 다음을 인식하여 교훈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 그곳에서 그의 이름이 일컬음"(적용, 렘 25:29)을 받는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그들이 느끼는 하나님의 엄격함을 그의 보복이라고 믿고 있다면 무엇을 하고자 할 것인가? 하나님의 손에
맞아 그를 징벌하시는 심판관으로 여기는 사람은 그를 단지 진노하시고 악의를 지니신 분으로만 생각할
것이며 그의 채찍 자체를 저주와 비방이라고 생각하여 혐오할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를 벌
주시려는 마음을 품고 계신다고 느끼는 사람은 결코 자기가 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감화에 이를 수 없
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지만 사람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선하신 분이
시라고 깊이 헤아리는 자만이 그의 매로 끝내 유익을 얻게 된다. 478)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자기가 경험한 것을 불평하는 자리에 우리가 서게 되는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진
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시 88:16). 이에 대해서 모세도 다음과 같이 쓴다. "우
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
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7-9).

한편 다윗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베푸시는 징계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압박보다 도움을 더
많이 받는다고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
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
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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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불신자들을 아끼시고 그들의 행한 범죄들은 못 본 척하시면서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


하게 대하시는 듯이 보일 때, 분명히 이는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다
윗은 우리가 위로를 받아야 할 이유를 덧붙여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의 권고이다. 이를 통
하여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돌이켜 올바른 길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이 자신들의 구원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사실과, 불경건한 자들이 맹목적으로 그들 자신의 오류들로 돌진할 때 그 마지막에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
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기에는 형벌이 영원하든지 일시적이든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전쟁, 기근,
역병, 질병은 마지막까지 사악한 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호와의 진노와 보복의 도구들로서, 영원한 죽음
의 심판 그 자체와 다르지 않은 하나님의 저주들이기 때문이다.
35. 다윗을 징계하신 하나님의 뜻

내가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은 다윗을 향한 주님의 책망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깨닫고 있다.


그것은 살인과 간음이 하나님을 심히 불쾌하게 한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것들에 대해 심히
언짢아하신다는 사실을 공표하심으로 다윗이 이후로는 감히 그러한 범죄들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교훈하셨
다. 그것은 형벌을 치름으로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여호와가 백성에게 심한 역병을 붙이신 또 다른 견책에 대해서도 판단을 해야 한다. 이


견책은 자기의 인구를 계수함으로써 다윗이 범한 불순종 때문에 가해졌다(삼하 24:15). 여호와는 다윗에게
죄에 대한 형벌을 값없이 사해 주셨다. 그러나 모든 세대에 공적인 본보기를 남기고 다윗을 겸손하게 하는
두 가지 모두의 목적을 위해서, 여호와가 자기의 채찍으로 다윗을 혹독하게 징계하심으로 그러한 죄가 형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게 하신 것은 적합했다.

인류의 보편적인 저주에 대해서도(참조, 창 3:16-19)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견232지해야 한다. 우리가 은
혜를 얻고 난 이후에도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죄에 대한 형벌로 가해졌던 그 모든 비참함을 겪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가 그의 법을 위반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경고를 받
게 됨을 의식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깨달아 낙담하며 겸비하게 되어 참된 복을
더욱 열렬히 갈망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겪는 현세의 재난들을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로 부과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극히 어리석다. 나에게는 크리소스토무스가 다음 글에서 말하고자 한 뜻이 여기에 있었던 것같이 보인
다. "만약 하나님이 형벌을 부과하는 이유가 그가 악행을 계속하는 자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다면 그들이 회개를 보인 후에는 더 이상 형벌이 필요 없을 것이다. "479)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가 아신 바대로 각 사람의 천성에 유익하게 어떤 사람은 한층 더 냉혹함으로, 다른


사람은 더욱 유순하게 관용으로 다루신다. 이렇듯 그는 과도한 형벌을 무분별하게 가하지 않으신다. 이 사
실을 가르치시고자, 매를 맞고도 죄를 그치지 않는 강팍하고 완고한 백성에게는 책망을 더하시는 것이다
(렘 5:3).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아 한쪽만 익은 전병과 같다는 그의 책망을 바라보아야 한
다(호 7:8). 이는 회초리가 그 백성의 영혼에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했으므로 악이 남은 부분을 잘 익혀 내
서 그들이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확실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든지 회개를 하면 즉시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과, 우리의


범죄들을 징계하실 때 엄격함을 발하시는 것은 그를 향한 우리의 사악함 때문이며 우리의 자원적인 교정
이 있다면 그것을 거두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징계가 필요할 정도로 강퍅함
과 무지에 휩싸여 있으므로 지극히 현명하신 우리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예외 없이, 전
생애를 통하여 매를 드시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이 이렇듯 한 사례인 다윗에게만 눈을 모으고, 값없는 죄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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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마땅히 묵상해야 할 그 많은 다른 사례들에 대해서는 아무 감동도 없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세


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눅 18:14 성전으로부터 내려갔다는 말씀을 읽는다. 그에게는 아무 형벌도 따르
지 않았다. 베드로는 범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았다(눅 22:61).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그의 보속을 읽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읽게 된다고 480)
암브로시우스는 말한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일어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적용 마 9:2)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에게는 아무 벌도 부과되지 않았다. 성경에 언급된 모든 방면은 값없이 주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규범은 내가 모르는 어떤 고유한 것을 내포한 저 한 가지 예를 통해서보다 이 다수의 예들
을 통하여 추구되어야 한다.

36. 그리스도의 피 외에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구속의 값을 치를 수 없음

다니엘은 자기의 권고로 느부갓네살을 설득해서 그가 의로써 자기의 죄를 가난한 사람을 구휼함으로써 자
기의 불법을 속하게, 즉 "사하게 적용. 단 4:27) 했다. 이는 그 왕의 의와 자비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으
로부터 용서를 얻고 형벌에 대한 구속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피 외에 다른 어
떤 '속죄물'이 있다는 생각을 일체 멀리하자!

여기에서 일컫는 구속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계되었다. 마치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오 왕이시여, 당신은 불의하고 난폭한 통치를 행하셨습니다. 당신은 겸손한 사람들을 억압하셨습
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잔인하고 부당하게 대하셨습니다. 이제 불의한
착취대신에, 폭력과 압제 대신에, 자비와 의를 당신 앞에 두소서!"마찬가지로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
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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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의해 가려진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언급이 포함된 전체 본문은 다음과 같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
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 여기에서 솔로몬은 자기가 하던 예대로 대구(對句)를 통하
여서 미움으로부터 나는 악행들을 사랑의 열매들과 비교한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상호 간에 물고, 뜯
고, 비난하고, 모든 것을 악으로 변화시킨다. 반면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많은 것을 속으로 감추
며, 많은 것을 눈감아 주고, 많은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악행을 들춰내어 증언하
지 않으며, 그것을 서로 비난함으로 악화시키기보다 참고 훈계함으로 치료한다. 이런 뜻에서 베드로는 본
문을 인용하고 있다(벧전 4:8). 그가 성경을 더럽히고 교활하게 곡해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없을진대, 여기
에는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솔로몬이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잠 16:6)라고 가르칠 때 이는 여호와 앞에서 그 값이
지불되어 그러한 보속으로 너그럽게 되신 하나님이 본래 가하려고 하신 형벌을 사하여 주심을 뜻하지 않
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의 방식을 좇아 하나님은 과거의 악행과 불법을 떠나 경건과 진리
가운데 자기에게로 회심한 자들을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지적한다.481)

이는 마치 우리가 범죄를 그칠 때 여호와의 진노가 물러가고 그의 심판이 그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는 은총의 수단이 아니라 참된 회심의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의 의무들
을 다하는 순전함을 즐거워하심에도 불구하고 위선자들이 회개 대신 하나님에게 거짓된 예식들을 무모하
게 행하고 있다고 자주 비난하는 것이 동일한 뜻을 지닌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자선과
인정을 베푸는 것을 칭찬하는 가운데 그러한 희생제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우리에게 상기시킨
다(히 13:16) 대접은 닦으나 마음의 정결함은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을 그리스도가 조롱하시면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려면 구제를 하라고 명령하실 때(눅 11:39-41 참조 마 23:25), 그가 그들에게 요구한 것이 보
속이 아님은 분명하다.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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