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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24)
3권 5장 3-5절

3. 순교자들은 그들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는 공로가 있어 그것이 교회의 보고에 쌓이게 된다는 망상

로마 주교 레오(Leo)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이러한 신성 모독을 아주 분명하게


거부한다. “많은 성도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었지만(시 116:15), 그렇다고 해서 어
떤 사람의 무고한 죽음도 세상을 용서하는 값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았지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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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본을 낳았으나 의의 선물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
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지 다른 사람의 빚을 끝내 갚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그리스도는 한 분
이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고, 모든 사람이 죽고, 장사되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이는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으므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 515)1) 불경건한 교리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데
있어 이보다 더 명쾌한 가르침이 어디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못지않은 아주 적절한 판단을 내린다. 그의 말은 이러하다. "우리는 형제로서
우리 형제를 위하여 죽지만 어떤 순교자의 피도 죄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이를 행하셨다. 그가 자기의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흉내 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
라 그것을 기뻐하며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같은 생각이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
들이 자기와 함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으시려고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그리하여 오직 그만이 우
리를 대신하여 자기가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한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그를 통하여 우리가 행하지 않은
선에 대한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셨다.” 516)2)
참으로 면죄부 장사치들의 모든 교리는 무시무시한 불경과 모독으로 짜깁기되어 있다. 그 모독은 어떤
다른 것보다 더욱 괴기스럽다. 다음 내용이 자기들의 학설인지 아닌지 그들이 깨닫도록 하자. “순교자들은
자기들의 죽음으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바쳤으며 더 많은 공로가 있었다. 그들에
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쳐서 흘러 들어갈 아주 많은 공로가 여분으로 있었다. 이 대단한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하려고 그들은 자기들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에 섞는다. 이 두 피로부터 죄의 용서와 보속을 위한
교회의 보고가 만들어진다. 517)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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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채우노라'(골1:24)라는 바울의 말씀은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518)4) 그들의 이런 행태가
그리스도께 단지 이름만을 남겨 놓고, 그를 무리 가운데서 거의 구별되지 않는 또 다른 한 평범한 성도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분, 그 한 분만이 설교됨이 마땅하다. 그 한 분만이 드러남
이 마땅하다. 그 한 분만의 이름이 불림이 마땅하다. 죄사함과 속죄와 무릎에 대한 어떤 논의에서도 그 한
분만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간단한 논법은,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공공의 선에 제공되지
않으면 헛되이 뿌려지게 된다는 데 있다.
진정 그러한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아무 열매가 없는 것인가? 자기들의 피로 하나

1) 515) Leol, Letters cxxiv. 4; clxv, 5 (MPL 54, 1064f; tr, NPNF 2 ser, XII, 107); clxv, 5 (MPL 54. 1163);
Leol. Sermons Ixv, 3 (MPL 54, 359f.). Quot, Battles tr., n. 6,
2) 516) Augustine, John's Gospel Ixxxiv, 2 (MPL 35, 1847; tr, NPNF VII, 350);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V iv. 6 (MPL 44, 613; tr, NPNF V, 419), Quot, Battles tr.. n. 7.
3) 517) "martyres plus morte sua Deo praestitisse ac meritos esse quam sibi opus esset, tantamque illis
me ritorum largitatem superfuisse quae in alios redundaret, Ne igitur supervacuum sit tantum
bonum, commisceri eorum sanguinem sanguini Christi, et ex utroque thesaurum ecclesiae confici, ad
remissionem et satisfactionem peccatorum,"
4) 518) Cf. Ac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v, 1, 2; Eck, Enchiridion, ch. xxiv (1533); Fisher, Confir
tatio, pp, 304ff, Quot, Battles tr,, n, 8,
님의 진리를 입증함이, 현재의 삶을 경멸함으로써 자기들이 더 나은 삶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함이 자
기들의 한결같음으로 적들의 완고함을 깨뜨리고 교회의 믿음을 확증함이 진정 아무 열매가 없는 것인가?
분명 그들은 만약 한 분 그리스도만이 대속자시라면, 오직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오직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제물로 드려지셨다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
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그들의 침상에서 죽었을지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수고를 다 하였으므로 그 피가 그저 아무것도 배태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열매 맺을 수
없다면 이는 하나님의 의에 제대로 부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자기가 베푸신 선
물의 분량에 따라 자기 종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을 알지 못하신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 여
하튼 이러한 그들의 승리로 인하여 그들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교
회가 일반적으로 받은 혜택은 더할 나위 없이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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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스도는 성도의 구원을 위한 모든 고난을 그 육체 가운데다 당하셨으므로 그 외의 공로가 필요


치 않음

그들은 바울이 자기를 드려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한 말씀을 얼마나 사악
하게 왜곡하고 있는가! (참조, 골 1:24) 519)5)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부족함과 그것에 대한 채움은 구속과
무릎과 속죄의 작용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모든 성도가 육체 가운데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감당해야 할 고난을 가리킨다. 520)6)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안에서 한 번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께 이제는 자기 지체들 안에서 날마다 당하셔야할 고난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우리가 영예를 받을 가지가 있게 하신다. 그는 우리의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헤아리시고 그렇게 삼으신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골 1:24) 라고 덧붙였을 때 이것은 구속을 위한다거나, 화목을 위한다거나, 교회의
무릎을 위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세움과 진보를 위한다는 뜻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 2:10).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자기가 당한 환난을
무엇이든 다 참아낸 것이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고 썼다(고후 1:6).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자기가 “교회의 일꾼"(골 1:25; 참조 롬 15:19)이 된 것은 대속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고 덧붙인다.
만약 나와 다투는 자들이 여전히 다른 해석자를 필요로 한다면 그들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듣게 하
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고 전체 몸
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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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있다. 521)7) 이러하므로 바울은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이에 대해서 듣고 있는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한다면 당신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자들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다." 참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하여 겪은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는 내가 당신에게 나아가는 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리스도
의 피로 미리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이다(참조 요 10:7). 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서
선포된 당신의 값을 인식하라."522)8)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생명을 내려놓은 만큼 우

5) 519) 앞의 제3절의 논의를 칭한다.


6) 520) "Non enim defectum illum supplementumve illud ad redemptionis, satisfactionis, expiationis opus
refert, sed ad eas afflictiones quibus Christi membra, nempe fideles omnes exerceri oportet, quamdiu
in hac carne agent,"
7) 521) "Passiones, inquit, Christi in solo Christo, ut in capite; in Christo et ecclesia, ut in toto corpore,"
8) 522) "Christus mihi lanua est ad vos; quia oves Christi estis, sanguine eius comparatae, agnoscite
리도 우리의 형제를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이는 평화를 세우고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523)9) 여
기까지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보았다. 저들의 주장은 이와 전혀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는 모든 의와 구원과 생명의 충만함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
해서 다른 것을 덧붙이기를 원했다고 생트집을 잡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부요함이
너무 후하게 부어져 모든 죄의 권세를 훨씬 더 압도했다고 명료하면서도 웅장하게 설교한다(참조, 롬
5:15). 베드로 역시 자기들의 삶과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런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명확하게 증언한다(참조 행 15:11). 그러므로 어떤 성도의 고귀함이든 오직 하나님의 자
비에만 의지해야지 다른 것에서 그것을 찾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를 모욕
하게 될 것이다. 이런 해괴한 것들은 폭로하는 것이 곧 물리치는 것일 텐데, 여전히 모호한 무엇이 남아
있기라도 하듯이 내가 더 여기에 지체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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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님을 모독하는 보속 교리와 맞물린 면죄부의 허황된 구실

이러한 역겨운 것들은 넘어가자. 그렇다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주님이 복음의 말씀으로 전해
지길 원하셨던 그 은혜를, 교황에게 가르쳐 납과 양피지에 담도록 했는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면죄부가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증인이 되듯이, 그리스도는 복음 가운데서 하늘
의 풍성한 은총과, 자기의 모든 공로와, 자기의 모든 의, 지식, 은혜와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
어지셨다. 524)10) 바울은 화목의 말씀이 일꾼들에게 맡겨진 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행하게 하
셔서 그를 대신하여 간청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고후 5:18-21).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
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
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0-21).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κοινωνια)의 가치가,
동일한 사도가 증언하듯이, 우리가 누리게끔 부여된 복음 가운데 나타남을 알고 있다. 반면에 면죄부는 할
당된 어떤 분량의 은혜를 교황의 보관 창고로부터 끄집어내서 납, 양피지, 심지어 어떤 장소에 부착시킴으
로써 그 은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찢어 낸다.
면죄부의 기원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면, 그것이 악용된 것은 이전에 통회하는 자들에게 감당할 수 없
을 정도의 엄격한 보속이 명령되었던 때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부과된 회개가
너무나 과중하여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중압감을 느끼게 되자 교회로부터 그것을 완화할 방도를 찾았던 것
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허락된 사함이 면죄(免罪)525)11)라고 칭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 쪽으
로 옮기고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스스로를 속하기 위해 치러야 할 보상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와
동시에, 면죄를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형벌을 우리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속죄의 처방으로 526)12)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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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버렸다.13) 그들은 수치를 모르는 그 뻔뻔함으로 우리가 언급한 부분에 대해 이러한 신성모독을 조
장했기 때문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pretium vestrum, quod a me non datur, sed per me praedicatur."


9) 523) Augustine, Psalms, Ps. 61.4 (MPL 36, 730; tr. LF [Ps. 62] Psalms III, 187); John's Gospel xlvil. 2
(MPL 35. 1733; tr, NPNF VIL, 260), Quot, Battles tr., n, 10,
10) 524)"evangelio Christum, cum omni affluentia bonorum coelestium, cum omnibus suis meritis, omni
sua iustitia, sapientia, gratia, exceptione, nobis offerri,"
11) 525) "indulgentia"
12) 526) "expiatoria remedia,"
13) 527) Luther,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positio 33 (Werke WA 1, 235), Quot,
Battles tr,, n,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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