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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 구스띠 노와 함께 하 는

영적 독서

성 아 우구 스띠노 와 함 께 하는 영적독 서

목 록 (저작 순위)

제 1 장

설교집

1. 빈첸시오는 세상을 쳐 이기신 분 안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Sermo 276,1-2: PL 38,1256)

2. 내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


(Sermo Guelferbytanus 32, De ordinatione episcopi: PLS 2,639-640)

3. 이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전한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Sermo 295,1-2.4.7-8: PL 38,1348-1352)

4.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깁시다.


(Sermo Guelferbytanus 3: PLS 2,545-546)
5.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은 복되다.
(Sermo 103,1-2.6: PL 38,613.615)

6. 나는 여러분에게 있어 주교이고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Sermo 340,1. PL 38,1483-1484)

7.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가로 얻은 순교자의 죽음은 보배롭습니다.


(Sermo 329,1-2: PL 38,1454-1455)

8.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Sermo 171,1-3.5: PL 38,933-935)

9.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Sermo Caillau-Saint-Yves 2,92: PLS 2, 441-442)

10.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봉사자였습니다.


(Sermo 304,1-4: PL 38,1395-1397)

11.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Sermo 23A,1-4: CCL 41,321-323)

1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


(Sermo 8, in octava Paschae 1.4: PL 46,838-841)

13. 요한은 소리이고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Sermo 293,3: PL 38,1328-1329)

14. 주님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려라.


(Sermo 34,1-3.5-6: CCL 41, ?24-426)

15.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오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도다.


(Sermo 185: PL 38,997-999)

16.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


(Sermo de Ascensione Domini, Mai 98,1-2: PLS 2,494-495)
17. 말씀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
(Sermo 194,3-4: PL 38,1016-1017)

18.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Sermo 13 de Tempore: PL 39,1097-1098)

19. 성모님은 신덕의 힘으로 믿고 신덕으로 잉태하셨습니다.


(Sermo 25,7-8: PL 46,937-938)

20. 우리 안에 있는 주님 집의 건축과 축성
(Sermo 336,1.6: PL 38[edit. 1861], 1471-1472. 1475)

21. 그리스도의 죽음 값으로 구원된 순교자들의 죽음은 귀중하다.


(Sermo 329, In natali martyrum: PL 38,1454-1456)

22.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 목장의 백성입니다.


(Sermo 47,1.2.3.6, De ovibus: CCL 41,572-573.575-576)

23. 내가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


(Sermo 47,12-14, De ovibus: CCL 41,582-584)
24. 하느님이 받아들이시는 제물은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Sermo 19,2-3: CCL 41,252-254)

25. 성덕에로의 보편적 성소


(Sermo 96,1.4.9: PL 38,584.586.588)

26.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는 선하신 하느님께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Sermo 256,1.2.3: PL 38,1191-1193)

** 나는 수도생활을 선택한다.
(Sermo 355.2: PL 38,.... )

제 2 장
목자들 에 대한 강론

27. 위로의 붕대를 주십시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1-12: CCL 41,538-539)

28. 연약한 그리스도인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3: CCL 41,539-540)

29.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훈계하십시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4-15: CCL 41,541-542)

30.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8-19: CCL 41,544-546)

31.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0-21: CCL 41,546-548)

32. 내 양 떼를 좋은 목장에서 기르리라.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4-25.27: CCL 41,551-553)

33. 모든 착한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습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9-30: CCL 41,555-557)

34.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지도자입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의 시작 (Sermo 46,1-2: CCL 41,529-530)

35.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3-4: CCL 41,530-531)

36. 바울로의 모범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4-5 CCL 41,531-533)

37. 각자는 자기 이익을 찾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아야 합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6-7: CCL 41,533-534)

38. 신자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9: CCL 41,535-536)

39.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여라.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0-11: CCL 41,536-538)

제 3 장

시편 주해

40. 신적 의사
(「시편 주해에」에서 Ps. 103,5-6)

4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받


아들이십니다.
「시편 주해」에서(Ps 85,1: CCL 39,1176-1177)

42.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주해」에서(Ps 61,4: CCL 39,773-775)

4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혹 받았고 또 그분 안에서 악마를 눌러 이겼습니다.


「시편 주해」에서(Ps 60, 2-3: CCL 39,766)

44. 하느님의 약속은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취됩니다.


「시편 주해」에서(Ps. 109,1-3: CCL 40,1601-1603)

45. 당신의 소원이 바로 당신의 기도입니다.


「시편 주해」에서(Ps. 37,13-14: CCL 38,391-392)

46.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겪는 수난


「시편 주해」에서(Ps 140,4-6: CCL 40,2028-2029)

47. 파스카 축제의 알렐루야


「시편 주해」에서(Ps 148,1-2: CCL 40,2165-2166)

48. 주님께 멋진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시편 주해」에서 (Ps 32, sermo 1,7-8: CCL 38,253-254)

49. 양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형제들입니다.


「시편 주해」에서(Ps 32,29: CCL 38,272-273)

50. 어서 와, 주님의 산에 올라가세.


「시편 주해」에서(Ps 47,7: CCL 38,543-545)

제 4 장

요한복 음 주해

51.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다.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5,10-12.16-17: CCL 36,154-l56)

52. 그리스도는 빛과 진리와 생명에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34,8-9: CCL 36,315-316)

53. 완전한 사랑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84,1-2: CCL 36,536-538)

54. 교회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24, 5: CCL 36,684-685)

55. 새 계명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65,1-3: CCL 36,490-492)

56. 두 가지 생활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24,5.7: CCL 36,685-687)

57. 사랑의 이중 계명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7,7-9: CCL 36,174-175)

58. 보라, 나는 내 백성을 구하리라.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26,4-6: CCL 36,261-263)
요한 1 서 주해

59. 생명 자체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 1 서 주해」에서(Tract 1,1.3: PL 35,1978.1980)

60. 우리 마음은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요한 1 서 주해」에서(Tract. 4,6: PL 35,2008-2009)
제 5 장

프로바 에게 보낸 편 지

61. 우리의 욕망이 기도 안에서 수련되도록 합시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8,15.17-9,18: CSEL 44,56-57.59-60)

62. 일정한 시간에 우리 마음을 기도하는 일에로 되돌이키도록 합시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9,18-10,20: CSEL 44,60-63)

63.주의 기도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1,21-12,22: CSEL 44,63-64)

64. 주의 기도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2,22-13,24: CSEL 44,65-68)

65.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4,25-26: CSEL 44,68-71)

66.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십니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4,27-15,28: CSEL 44,71-79)

제 6 장

고백록

67. 영원한 지혜를 찾읍시다.


「고백록」에서(Lib. 9,10-11: CSEL 33,215-219)

68.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고백록」에서(Lib. 7,10.18; 10,27: CSEL 33,157-163.255)

69.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고백록」에서(Lib. 10,43,68,70: CCL 27,192-193)
제 7 장

기타 저적

갈라디 아서 주해

70.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읍시다.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Praefatio: PL 35,2105-2107)

71.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기를 기원합니다.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Nn. 37.38: PL 35,2131-2132)

신국론

72. 어디서나 내 이름으로 흠 없는 제사가 바쳐진다.


「신국론」에서(Lib. 10,6: CCL 47,278-279)

파우스 투스를 거 슬러

73. 우리는 사랑에서 나오는 존경심과 그들의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교자들을 공경
합니다.
「파우스투스를 거슬러」에서(Lib. 20,21: CSEL 25, 562-563)

성인들 에 대한 예정

74.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성인들에 대한 예정」에서(Cap. 15,30-31: PL 44,981-983)
제 1 장

설교집

1. 빈첸 시오 는 세상 을 쳐 이기 신 분 안에 서 승리 를 거두 었습 니다 .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빈첸시오 부제는 이 두 가지 은혜를 받아 두 가지 모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서 이 은혜들을 받지 않았더라면 자기 힘만으로는 지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말할 때 용기

를 지녔고 고난당할 때 인내심을 지녔습니다.

따라서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고 유혹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힘

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슬기롭게 하기 위해선 우리의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와야 하고, 어려움을

용감히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내심도 하느님에게서 와야 합니다.

주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해주시는 권고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순교자들의 임금으로서

당신의 군사들을 영적 무기로 무장시키시고 그들이 맞아야 할 투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도와주시

고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리라. " 하고 말씀하셨지만,

즉시 그들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시고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빈첸시오가 세상을 쳐 이기신 분 안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무엇이 놀랍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리라."고 하셨지만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즉, 고난이

우리를 짓밟는다 해도 우리를 부서뜨리지 못하고 우리를 공격한다 해도 우리를 이겨내지 못한다는 점입니

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거슬러 두 가지의 공격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속이려고 아

첨을 부리고 또 우리를 부서뜨리고자 겁을 줍니다. 우리의 쾌락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잔

혹성이 우리를 겁주지 못한다고 할 때 세상은 패배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쾌락과 잔흑 성이라는 이 두 가지 공격을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맞으러 나오시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패배 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공격을 당할 때 고난 가운데 인간이 보여 주는 그 인내심

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권능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 됩니다.

순교자의 몸에 잔인하게 가하여지는 고통이 큰 만큼 그의 목소리에 나타나는 평온도 그만큼 컸습니다.

그의 팔과 다리에 잔인무도하게 가해지는 고문이 심한 만큼 그가 하는 말에서 드러나는 확신도 그만큼 강

했습니다. 빈첸시오가 고난을 당할 때 고초를 당하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였

을지 모릅니다.

형제들이여, 정말 그러했습니다. 그때 분명히 그러했습니다. 말하는 이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복음서에서 당신의 증인들을 투쟁에 대비시키실 때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너희는 무슨 말

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 그러므로 육신은 고난을 당하고 영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의 말씀으로 불경건은 패배 당했을 뿐만 아니라 나약성은 굳세어졌습니다. (강론

276,1-2 )
2. 내 양들 을 위해 서 고난 을 받으 라.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

러 온 것이다. "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섬기셨고 또 우리에게도 이런 봉사자가 되라고 명하

셨습니다. "그분은 맡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셨습니다. " 즉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을 구속할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피와 죽음으로 말

미암아 죽음에서 해방되고, 그분의 겸손으로 말미암아 넘어져 있던 상태에서 똑바로 일어섰습니다. 우리

는 그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몸의 지체

로서 우리가 가진 것이 적다해도 그것을 다른 지체들에게 바쳐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주

님의 모범을 본받도록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

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

사도 요한이 서간에서 우리보고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

주님도 부활하신 후 당신 친히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

니다. 베드로는 "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

서 세 번이나 물어 보시고 베드로가 세 번 대답했을 때 그때마다 주님은 "내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양들을 잘 돌보아 줄 때가 아니라면 어떻게 보여 주겠느


냐? 너는 모든 것을 나에게서 받았는데 나를 사랑함으로써 네가 너의 것으로서 나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

단 말이냐?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곧 "내 양들을 잘 돌보는"일이

다.

한번 또 한번 그리고 세 번까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고 주님은 물어 보시고 베드로는 그때마다 "네,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으며, 주님은 또한 세 번이나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

다.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사랑으로 세 번 주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침내 세 번째에 당신의 양들을 베드로에게 맡기신 후, 자신의 대답으로 사랑을 고백하

고 두려움을 전주하고 지워버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고 네

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

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가올 십자가를 알리시고 그가 받을 고난을 예언하신 것입니

다. 위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내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 "는 뜻이었습니다. (강론 Gue lf erb yta nu s 3 2, 주교 서품 에 관하 여)


3. 이 순교 자들 은 자신 들이 전 한 것을 눈 으로 보 았습 니다 .

복된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순교는 이날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퍼져 나가고, 그들의 말은 땅 끝까

지 번져 갔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전한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정의의 길을 좇아 진리

를 고백하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도들의 으뜸이요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한 복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는 영예를 얻었습니

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 즉 반석이다." 이 말씀은 이보다 앞서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베드로 즉 반

석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즉, 네가 고백하는 신앙을 내가 이 반석 위에 세우리라. 네

가 나더러 "주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말했으니 내가 그 고백 위에 내 교회

를 세우리라, 너는 베드로 즉 반석이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서 나

오지 않고 반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라는 이름도 '베

드라'(반석)라는 말에서 연유하지 베드라가 베드로라는 이름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수난 당하시기 전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만이 거의 어디서나 온 교회를 대표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온 교회

를 대표할 책임을 맡은 베드로만 그리스도께로부터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열쇠는 한 사람만 받은 것이 아니고 온 교회가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탁월

함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의 표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너에게

열쇠를 주겠다." 라고 하실 때, 모든 이에게 주신 것을 베드로에게 위탁하시는 것입니다. 원래하늘 나라의

열쇠는 그리스도께서 온 교회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모든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

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역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칠 과업을 맡겨 주셨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베

드로 혼자서만 주님의 양 떼를 쳐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시기 위

해 이 말씀을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하십니다. 사도들 중 으뜸인 베드로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여, 실망하지 마십시오. 한번, 두번, 세번까지 대답하십시오. 당신의 경솔한 자신감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세 번이나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당신은 사랑의 고백도 세 번 해야 합니다. 세 번 묶은 것은 역시 세번

풀려져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묶은 것을 사랑으로 푸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 번뿐만 아니라 두번, 세번까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셨습니다. 이 두

사도들의 순교는 같은 날에 기념합니다. 이 두 분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날에 순교했

지만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가고 바울로가 뒤따랐습니다. 사도들의 피로 우리에게 거룩하

게 된 이 축일을 경건히 지내고 그들의 신앙과 생활, 그들의 수고와 고난, 그리고 그들의 증거와 복음 전파

를 공경하도록 합시다. (강론 295, 1-2 .4 .7-8 )


4. 우리 도 그리 스도 의 십자 가를 자 랑으 로 여깁 시다 .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영광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고 인내에 대한 교훈

입니다.

성부와 함께 영원하신 독생 성자께서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그 사람들의 손에서 죽기까지 하셨다면, 신자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무엇인들

기대할 수 없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신 미래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해

주신 것,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그것은 더욱 위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악인들을 위해 죽으셨을 때 그들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주님이 먼저 악인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면, 성도

들에게 당신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나약함이여! 왜 너는 우리가 언

젠가는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 데 망설이는가?

이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써 일어났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

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말씀이 아니시겠습니까?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

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

다." 그분이 우리에게서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을 취하셨기에, 불사불멸이신 분께서 죽으실 수 있었고 멸하고야 말 것에다 생명을 주실 수 있

었습니다. 그분은 먼저 멸하고야 말 인간의 것을 취하셨으므로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

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생명을 얻을 능력이 없고 그분께는 본질상 죽음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와 놀라운 상호 교환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

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죽음을 보고 수치심을 갖기는커녕 거기에 모든 신뢰심을 두고 크게 자랑

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찾으신 죽음을 취하심으로써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그 생명을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지극히 충실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죄 없으신 그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겪으실 만큼 우리를 그토

록 사랑하셨다면, 우리를 의화 시키신 그분이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약속하신 분

이 진실하다면, 아무 죄 없이 악인들로부터 형벌을 견디어 내신 그분은 우리에게 성인들이 받는 상급을 주

시지 않겠습니까?

형제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용감하게 또 분명히 고백합시다.

망설이는 마음이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수치심을 지니고서가 아니라 자랑스럽게 고백합시다.

이 점을 잘 이해했던 사도 바울로는 이것을 자랑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실상 바울로는 그리스도께서 아

버지와 함께 계실 때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또는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을 때 만물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신적인 많은 업적들을 회상하면서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로가 말한 것은 이것뿐입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

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강론 Guel fe rbyt an us 3)


5. 그리 스도 를 자기 집 에 맞아 들일 수 있 었던 사 람은 복 되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지상의 허다한 걱정 속에서 일하는 가운데에도 우리가 향하는 어떤

한 가지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아직 안식처에 도달하지 못한 길 가는 나그네로서, 아

직 본향에 닿지 못한 여정 중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직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

으로서, 아직도 무엇을 향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언젠가 그 곳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게으름을 이겨내고 끊

임없이 앞으로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매간이었습니다. 혈육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으로도 자매간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주님께 매달려 그분께서 세상에 육신으로 현존하실 때 한마음으로 섬겨 드렸습니다. 마르타는 마치 나그

네를 맞아들이듯 주님을 맞아들였지만, 사실은 종이 주인을, 환자가 구원자를, 피조물이 창조주를 맞아들

였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영적 양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인간으로서 육신적 양식을 공급받아야 하실

주님을 맞아들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종들로부터 육신의 양식을 받기를 원하셨습니

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고 다만 사람을 생각해서 받기를 원하신 것이었습

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양식을 요청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볼 때 명예였습니다. 그분은 배고프고

목말라 하는 육신을 지니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손님으로 오실 때 당신 백성 모두가 그분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

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종들을 받아들이시어 당신의 형제들로 삼

으시고 공동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 중 혹시 누가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은 복되다."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

랍니다! 여러분은 육신으로 계신 주님을 볼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

오. 실상 그분께서는 우리가 육신으로 계시는 당신을 볼 영예를 앗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고 말씀하

십니다.

마르타여, 여하튼 나는 당신이 시중을 들었기에 평화를 얻어 복되다고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수고에 대

한 보상으로 안식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들의 육신이라 하지만 그래도 석어 버릴 육신에다 양식을

공급하는 데에 당신은 너무 정신없이 바쁩니다.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당신이 거룩한 본향에 도달할 때

거기에도 맞아들여야 할 나그네가 있겠습니까? 당신 빵을 나누어 주어야 할 굶주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실 것을 주어야 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방문해 주어야 할 병자가 있겠습니까? 화해시켜

야 할 분쟁에 휩싸인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장사지내야 할 죽은 이들이 있겠습니까?

저 위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마리아가 택한 것이 있

을 것입니다. 즉 시중드는 것보다 시중 받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기서 마리아가 택한 것이 성취되고 완

성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주님의 부요한 식탁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부스러기만 모았을 뿐이었습니

다. 한마디로 거기에서 우리가 받을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주님 친히 당신 종들에 대하여 말씀하

십니다. "분명히 말한다. 주인이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 (강

론 103,1-2 .6)

6. 나는 여 러분 에게 있 어 주교 이고 여 러분 과 함께 그 리스 도인 입니 다.

주교직의 짐을 내 어깨에 떠맡은 이래 (그에 대해 상세히 셈 바쳐야 합니다.) 이 직위에 대해 항상 염려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직위 수행에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여러분의 구원에 유익이 되는 것보다 거기서 나

오는 영예를 구하고 즐기는 그런 위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 대한 책임 때문에 두려워하

지만 한편 여러분과 함께 있음을 생각할 때 위로가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있어 주교이고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내가 받은 직위를 뜻하고 후자는 내가 받은 은총을 뜻합니다. 전자는 위험을 내

포하고 후자는 구원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우리 직위의 수행에서 일어나는 폭풍 때문에 광대한 바다 위에서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그

러나 누구의 피로써 구속되었나를 되새길 때 이 생각은 우리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잔잔한 항구에 들

어가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직분에 진력하면서도 거기에서 나오는 공동의 혜택은 위로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여러분과 함께 구원받았다는 생각은 내 마음을 더 즐

겁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여러분과 같은 형제가 되게 한 그 구속의 은혜에 배은망덕한 자로 보이지

않고 주님의 명에 따라 여러분의 참된 봉사자가 되도록 나는 더욱 힘써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구세주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되살려 나도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

들을 잘 돌보아라." 주께서는 이 말씀을 한번, 두번, 세번까지 하심으로 먼저 그에게서 사랑을 구하시고 다

음으로 그에게 짐을 부과하셨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짐은 그만큼 더 가벼워지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내가 그분의 양 떼를 침으로써 그분에게서 받은 은혜

를 갚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앞서 만사를 행하신다면 어떻게 내가 그런 일로 인해 주님께

보답해 드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양 떼를 보수 없이 치고 있다고

는 하지만 실은 보상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순수한 사랑으로 양 떼를 친다고 하면서

도 한편은 그 일 때문에 보상을 구함은 모순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보상이 사

랑받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기만 하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일할 때에도 사랑받고 있는 사람에게서 보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양 떼를 침으로 그분에게서 받은 구속의 은혜를 갚아 드리려 한

다면, 우리를 양 떼의 목자로 세워 주신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악한 목자라

면 (그렇게 됨을 막아주시기를! 우리의 사악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착한 목자라면 그렇게

되게 해주시기를!) 그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말기를 간절히 권고합니다." "여러분

이 하느님의 밭" 인 만큼 우리 직위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직위가 되게 해주십시오. 외적으로는 심고 물

주는 사람을 영접하고 내적으로는 자라게 하시는 분을 영접하십시오. 내 기쁨이 여러분을 다스리는 데보

다 여러분을 섬기는 데에 있게끔 기도와 순종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강론 340, 1)


7. 그리 스도 의 죽음 의 대가 로 얻은 순 교자 의 죽음 은 보배 롭습 니다 .

거룩한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업적은 방방곡곡에서 교회를 꽃피게 합니다. 우리가 방금 노래한 시편의

다음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우리 눈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보배로운가." 그 죽음은 우리가 보기에 보배롭고 또 주님을 위해서 바친 것이므로 주님 자신이 보

시기에도 보배롭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죽음들의 대가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숱

한 죽음들을 사들이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죽지 않으셨더라면 하나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 즉 우리 구원의 시각이 다가올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여러분이 들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상에서 주님은 엄청난 거래를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군인이 창으로 당신의 늑방을 펼치어

그 상처에서 온 세상의 대가가 흘러나올 때, 우리 속량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

자들과 순교자들이 속량되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충실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즉 그들이 흘린 피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때문에 지불된 대가를 되갚아 요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듯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

야 합니다."

그리고 성서 다른 곳에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높은 자와 한 식탁에 안게 되거든 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라. 너도 같은 식탁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탁의 주인 자신이 음식이 되어 주는 잔치

는 참으로 성대한 잔치입니다. 자기의 살로 손님들을 먹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

께서는 이것을 하십니다. 그분은 초대하는 분이 되시고 또 음식과 음료가 되십니다.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받은 음식과 음료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 그만큼 갚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값을 지불하시어 순교자들이 당신께 갚아 드려야 할 것을 미리 그들에게 주시지 않

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갚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나

는 구원의 잔을 받들겠노라." 이것은 무슨 잔입니까? 이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그 맛이 쓰지만 구원을 가

져다주는 잔입니다.

의사가 먼저 그것을 마시지 않았으면 병자는 두려워 감히 손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수난이 바로 이 잔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의 말씀으로 이 잔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저에


게서 거두어 주소서." 이 잔에 대해 순교자들이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고 말했습

니다.

순교자여, 당신은 수난에서 실패할까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네,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 하신

분이 순교자들 안에서 승리하지 않으셨다면 순교자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임금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입을 지탱하고 계셨고, 그들을 통해 지상의 마귀를 정복하시어 하

늘에서 그들에게 월계관을 주셨습니다. 이 잔을 마신 이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고통을 다 마치고 영예를

얻었습니다. (강론 329, 1-2 )

8. 주님 안 에서 항 상 기뻐 하십 시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지 세상을 두고 기뻐

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말해 주는 대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

의 원수가 됩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함께 기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이 끝나 버리도

록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날로 증가하고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은 날로 감소하여 사라지도록

하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기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에 있는 동안

이라도 이미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기뻐한다면 내가 있

는 곳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여러분이 세상에 있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

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로가 아테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우리 주 창조주이신 하느님

께 대해 하는 말씀을 들으십시오."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디에나 계

시는 분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로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십시오."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 위에 드높이 오르시면서도 동시에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과 가까이 계시는 분이 참으로 무한한

분이십니다. 멀고도 가까이 계시는 이분이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가까워지신 그분이 아니라면

누구이겠습니까?

전 인류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길바닥에 누워 있는데 사제와 레위는 못 본 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부축하여 간호해 주고 돌보아 주었던 바로 그 사람과 같습니다. 불사불멸이시고 의로우신

분께서는 죄인이고 죽어야 할 우리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셨지만, 멀리 떨어져 계신 그분은 우리의 이

웃이 되시고자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

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합니까? 외 아드님께서는 외아들로 홀로 남아 계

시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홀로 죽으신 그분은 홀로 계시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

아드님은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피로써 형제들을 사들이시고, 당신께서 단

죄 받으심으로 단죄 받은 이들을 구하시고, 팔려 가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시고, 모욕당하심으로 그들에게

영광을 가져다주셨으며, 죽으심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

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인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

러분이 어디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강론

171,1-3 .5)
9. 끝까 지 참는 사 람은 구 원을 받 으리 라.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것은 책벌도 되고 우리 잘못을 고쳐 주는 권고도 됩니다. 성서마저 우

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약속하지 않고 복음서도 우리에게 다가올 환난과 압박과 유혹을 숨기려 하지 않습

니다. 그러나 성서는 역시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고 말해 줍니다. 첫 사람이 죽음의 선고

를 받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 그 저주를 받은 후부터 이 세상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형제 여러분, 불평하지 맙시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하다가 살육의 천사의 손에 멸망을 당했다." 고 사

도는 말합니다. 지금 우리 인류가 당하고 있는 고통 중에 우리를 앞서간 선조들이 당하지 않은 무슨 특별

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뿐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고통 가운데서 선조들이 당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고통들과 비교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옛날이 훨씬 더 좋았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이 시대를 불평하

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조상들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때에도 똑같은

불평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과거 시대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게 되었으며 성서의 말씀으로 교훈 받아 온 사람들이 아담의 시

대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겐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조상들은 아담이 받은 저주를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다음의 성서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저주입니다. "너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이것이 바로 아

담이 받은 몫이고 당한 고통이며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이 그에게 내린 책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거

가 우리 시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첫 사람 아담 때부터 그의 후손들인 현재 우리 시대까

지 사람들이 받은 몫이란 수고와 땀, 가시덤불과 엉겅퀴였습니다. 노아 때의 홍수가 우리에게 언제 있었습


니까? 하느님을 거슬러 불평할 근거가 되는 역사책에 기록된 옛 시대의 기근과 무서운 전쟁이 우리 시대에

있었단 말입니까?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옛 시대의 형편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옛 시대의 그런 이야기들을 듣거나 읽

을 때 치를 떨지 않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우리 시대를 볼 때 우리에겐 불평할 것보

다 감사드릴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강론 Cail la u-S ai nt-Y ves 2 ,92: )

10. 그는 그 리스 도의 거 룩한 피 의 봉사 자였 습니 다.

오늘 로마 교회는 복된 라우렌시오의 개선을 기념하고 경축합니다. 그는 성난 세상을 짓밟고 세상이 던

지는 유혹의 미소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노리는 마귀를 패배시켰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라우렌시오는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

내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복된 사도 요한은 "주의 만찬" 의 신비를 다음과 같

이 명백히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라우렌시오는 이 말씀을 잘 이해했습니다. 이해한 것뿐만 아니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

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을 본받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보

다 그분께 대한 사랑의 더 훌륭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만 고난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고난은 그런 사람에게만 효과를 미

친다고 말해 주는 듯합니다.

거룩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피를 흘리기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이 지나간 후에도 다리는 끊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마신 샘도 마르지 않

았습니다.
형제들이여, 주님의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순교자들의 장미꽃만이 아니라, 동

정녀들의 백합화도, 기혼자들의 담쟁이 꽃도, 과부들의 제비꽃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소명에 대해 실

망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피를 흘리고 고난당함으로써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힘써

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

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신적 위치를 보존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 위대한 엄위여! 바울

로는 덧붙여 말합니다. "오히려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오, 지고한 겸손이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여기에 본받을 그분의 모범이 있습니

다.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분이 되셨습니다." 왜 당신은 오만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

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거기까지 그분을 따라갑시다. 사도 바울로가 하는 말

씀을 잘 들읍시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

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강론 에 304,1-4 )

11. 주님 은 우리 를 불쌍 히 여기 셨습 니다 .
우리가 듣고 노래하는 것을 또 실천에 옮길 때 참으로 행복합니다. 듣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훈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성

당에 다닌 이후부터 아무 열매도 맺지 않으면, 즉 이렇게도 아름다운 진리를 들은 후에 선행을 하지 않으

면 안 되겠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

다. "실상 과거 우리 생활에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사랑하실 선행, 즉 "이 사람들의 생활은 선하기 때문

에 그들에게 가서 도와주자." 고 하실 그런 선행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활을 좋아하

지 않으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일도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당신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바를 싫어하

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행한 바를 단죄하실 것이고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구원하실 것

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착한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악한 이들을 위해서, 의로운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롭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시려

고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에 더

하여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

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을 용기가 있는 사람을 혹시 찾아볼 수 있을지 모릅

니다. 그러나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의화 시킬 능력을 지니신 완전한 의인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누가 의

롭지 않은 사람과 악한 사람과 죄 많은 사람을 위해 죽기를 원하겠습니까?

형제들이여, 우리는 선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은 다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

들이 행한 일은 이러하다 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을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금이나 은

이 아닌 당신 피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흠 없는 어린 양처럼 허물로 물든 양들을 위해, 물들기만 했지 완전히 썩지는 않은 양들을 위왜 도

살자에게 끌려 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이것입니다. 우리 생활이 이 은혜를 모독하지 않도록, 주어

진 이 은혜에 따라 살도록 합시다. 참으로 위대하신 의사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버

리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병에 걸리고 싶어 한다면, 우리 자신에게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의사께도 배

은망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길, 특히 당신이 걸어가신 겸손의 길을 따라가기로 합시다.

그분은 참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 길을 고통 속에 걸어가심으로써 겸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불사불멸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도록,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무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도록 또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죽음을 멸하시기 위해, 불사불멸

에서 사멸성을 취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행하셨고 우리에게 이 은혜를 남겨 주셨습니다. 위대하신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심

으로 죽임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어, 우리를 죽은 자로 지옥에 두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신앙

과 고백으로 들어 높여지신 것처럼, 죽은 이들의 부활로 우리를 당신과 함께 들어 높이시기 위해 들어 높

임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겸손의 길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합당히 다음

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나이다, 하느님, 감사하나이다. 당신 이름 부르는 우리, 묘하신

일들을 일컫나이다." (강론 23A, 1- 4)

12. 그리 스도 안 에서 의 새로 운 창조 .

새로이 태어난 유아들, 그리스도 안의 작은 자들, 교회의 새로운 자녀들, 성부의 선물, 어머니 태중의 풍

성한 열매, 거룩한 새싹들, 새롭게 된 무리, 우리 명예의 꽃, 우리 수고의 열매, 나의 기쁨과 화관, 흔들림

없이 주님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빌려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성사로써 옷 입은 것을 생활 속에서

옷 입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 "세례를 받

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사의 효력입니다. 세례는 새 생명을 주는 성사입니다. 이 새 생명은 자기의 모든 죄를 용

서해 줌으로써 지금 시작되고 죽은 자의 부활 때에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생명의 새로움 속에 거

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이 죽을 육신을 입고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에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습

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확실한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향하는 이 길은 여러분을 위해 사람이 되

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풍성한 위안을 주시며, 그 위안은 지금 우리


가 희망 안에서 받는 것을 실제로 받을 때, 그분께 희망을 두는 이들 안에서 드러나고 또 완전해질 것입니

다.

오늘은 여러분이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입니다. 옛 성조들 간에 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했던 육체

의 할례가 지닌 신앙의 표지가 오늘 여러분에게 완성됩니다. 주님은 부패하는 육체에서 벗어나 같은 육신

이면서도 죽지 않는 육신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이날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주님의 날은 주님이 수

난 받으신 후 사흘째 되는 날이지만 이 날은 안식일 (토요일)로부터 세면 여드레째 되는 날 즉 주간의 첫

날입니다.

여러분은 실제로는 아니지만 이것의 표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확실한 희망 속에 성령의 보증을 받았습니

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

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

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강론 8, i n oct ava P ascha e 1 .4)

13. 요한 은 소리 이고 그 리스 도는 말 씀이 십니 다.

요한은 소리였지만 주님은 태초부터 계시는 말씀이셨습니다. 요한은 지나가는 소리였지만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한 말씀이셨습니다. 말을 제거한다면 소리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리가 의미

를 전달하지 않을 때 그것은 빈 소리에 불과합니다. 말이 없는 소리는 귓전을 울리기는 하지만 마음을 감

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전달할 때 그 과정이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말할 바를 생각할 때 이

미 내 마음속에 말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당신에게 전하려고 할 때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당신의

마음속에다 전달할 수단을 찾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이미 있는 말에게 소리를 주어, 그 소리를 통해

서 당신에게 그 말을 전달하게 됩니다. 말의 소리는 그 말의 내용을 전달하고 그 일을 마칠 때 사라집니다.

그러나 소리로써 당신에게 전달된 말은 내 마음을 떠나지 않은 채 이제 당신의 마음속에도 있게 됩니다.

말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갈 때 소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지 않습니까? "그는(말은) 더욱 커져야 하

고 나는(소리는) 작아져야 한다." 목소리는 그 말이 들리게 하도록 울립니다. 그리고 자기 임무를 마치고

나면 "이것으로 나는 기쁨에 넘친다." 라고 말하는 듯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마음속 깊이 잉태된 말을

우리 마음에서 흘려보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지나가고 하느님의 말씀께서 남아 계시다는 것을 보고 싶습니까? 요한이 베푼

세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요한은 자기 사명을 다하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집행되는 것은 그리스


도의 세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말해 준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과 소리는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리

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말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이 소리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습

니다. 소리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러

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말하자, 그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라고 대

답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곧 침묵을 깨는 소리였습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고 말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당신들 마음에 그분이 들어가실 수 있도록 외치고 있

다. 그러나 당신들이 길을 곧게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내가 들어가셨으면 하고 바라는 곳으로 들어가시

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길을 곧게 하라." 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마땅히 기도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요한이 주는 겸손의 모범을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생각할 때 자기

는 백성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오류를 자기를 높이는 데 이용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요한이 "내가 그리스도요." 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백성들은 틀림없이 그 말을 쉽게 믿었

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이 말하기도 전에 요한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자기 신분 그대로를 시인하고 자신과 그리스도의 차이점을 밝히면서 자

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요한은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 보았습니다. 자신은 등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

아 교만의 바람으로 그 등불을 꺼버리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강론 293, 3)


14. 주님 께 사랑 의 노래 를 불러 드 려라 .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리라

고 권고합니다. 새 사람은 새로운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노래는 기쁨의 일이며 좀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

것은 사랑의 일입니다. 새 생활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새로운 노래를 할 줄 압니다. 새로운 노래는 생활

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노래, 새로운 계약, 이 세 가지 모두 유일하고 같은

하느님 나라에 속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노래를 부를 것이며 또 새로운 계약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사랑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지 그것이

바로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할 때 사

랑의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선택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

습니까? 먼저 사랑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의 말을 들으십시오. "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합니다. " 과연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고 여러분이 물어 본다면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내

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사랑의 대상으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결국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원천을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원천을 바울로 사도는 좀더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

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습니다. " 그러면 그 사랑은 어디서 옵니까? 우리 자신에게서 옵

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 옵니까? 우리에게 부어 주신 성령을 통해서 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이 사랑의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합시다. 성 요한은

더 명확히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 이는 "사랑은 하느님께

로부터 옵니다. "라는 말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 누가 감히 이와 같

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랑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며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십니다. "나를

사랑하라. 그러면 나를 소유하리라. 너희가 나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고 위로부터 태어난 나의 형제들, 나의 아들들, 가톨릭교회의 자녀들, 그리

고 하늘나라의 거룩한 씨앗들인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십시오.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려

라. ""그러나 나는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여러분은 대답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노래합니다. 물

론 노래하지요. 나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의 입과 다른 음률로 노래하지 않

는지 생각하십시오.

목소리로 노래하십시오. 마음으로 노래하십시오. 입술로 노래하십시오. 여러분의 거룩한 생활로 노래하

십시오.'"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려라," 여러분은 사랑하는 그분에 대하여 무엇을 노래해
야 하는지 물어보고 있습니까? 물론 사랑하는 분에 대해 노래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노

래할 때 무슨 찬미를 드려야 하는지 물어 본다면 그 찬미의 내용을 벌써 들었습니다. "주님께 노래하라. 새

로운 노래를 불러 드려라." 여러분은 찬미한 내용을 찾고 있습니까?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

노래하는 사랄 자신이 바로 찬미가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찬미를 전하고 싶어 합니까? 노래하

는 바를 자신의 생활로 실천하십시오. 선한 생활을 하면, 여러분이 바로 그분께 대한 찬미가 되는 것입니

다. (강론 34, 1-3 .5-6 )

15. 진리 가 땅에 서 움터 나 오고 정 의가 하 늘에 서 굽어 보았 도다,

사람이여,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잠자는 이여, 잠에서 깨어나

십시오. 죽음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다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죽은 채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죄 많은 인

간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결코 죄의 육신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이 당해야 할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

면 당신은 생명을 다시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패배하고 말았

을 것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구원과 구속의 오심을 즐겁게 경축합시다. 이 축제의 날을 경축합시다. 거대하고도 위대한 날에서

나오는 거대하고도 위대한 날이신 분이 이 짧고도 일시적인 우리 이날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정의가 되시고 우리의 성화와 구속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

거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왔습니다." "나는 진리이다." 라고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

습니다.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사람인 당신에게

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왔습니다." 그것은 "말씀께서 육신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가 땅에서 움터 나왔습니다." 육신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습니다." "사

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화된 우리는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도록 합시다." "정의와 평화가 함께 입 맞추었

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즉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왔기 때문입니

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바울로는 "우리의 영광" 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 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정의가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굽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랑하

는 자는"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동정녀에게서 주님이 태어나셨을 때 하늘에서 천사들의 노래가 들려 왔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

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오고" 즉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태

어나셨기 때문이 아니라면 세상에 평화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

다." 우리가 마음 착한 사람이 되고 일치의 감미로운 유대로 묶이도록 "그분은 두 민족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 은총에 대해 기뻐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영광은 우리의 선한 양심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합시다. 시편은 말해 줍니다. "주여, 당신은 내 머리를 들게 하시는 내 영

광이오이다." 우리에게 밝아 온 하느님의 이 은총보다 더 큰 은총이 또 있겠습니까? 외 아드님을 지니셨던

하느님께서는 그 외 아드님을 사람의 아들로 만드시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사람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자녀

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신 편에서 어떤 공로나 권리나 선행이 있어서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

다. 이것은 은총으로만 된 것입니다. (강론 185)


16. 하늘 에서 내 려오 신 분외 에는 아 무도 하 늘에 올 라간 일 이 없습 니다 .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마음을 드높입시다.

바울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잘 들읍시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

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주께서는 승천하셨어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 것

과 같이, 우리도 비록 그분의 약속이 우리 육체에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도 이미 그분과 함께 천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천상으로 오르셨지만 당신 지체인 우리가 지상에서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당신도

겪고 계십니다. 그분은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바울로를 부르시고 "내가 목말랐

을 때, 너희는 마실 것을 주었노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우리는 왜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천상에 계신

그분과 함에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계시면서도 우리

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지상에 있으면서도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신성과 권능과 사랑으

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비록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처럼 그 신성으로 그분과 함께 있을

수는 없지만,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천상에서 우리에게 내려 오셨을 때 천상을 떠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다시 천상으로 오르

셨을 때 우리를 떠나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 친히 이곳에 계실 때 이미 천상에 계셨음을 보여 주셨습

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에 계신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과 우리와의 일치를 강조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

는 그분의 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어느 의미에서 보면

그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또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다 하나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로 사도는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역시 그러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리스도는 그러합니

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도 역시 그러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많은 지체

들이지만 한 몸입니다.
그분은 자비하셔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분만 스스로 올라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은혜로써 올

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올라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머리가 몸 때문에 그 위엄을 잃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리와 결합된 몸이 머리에

서 떨어지는 일이 없기 위해서였습니다. (강론 Se rmo d e A sce ns ion e D om ini , M ai 98,1 -2 )

17. 말씀 을 뵈옴 으로 흡 족하 오리 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고 그분의 육신의 가난 속에 숨겨져 있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를 다 알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또 가난해지심

으로써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을 운명에 놓여 있는 육신을 취하여 죽음을 겪으셨을

때 인간 상태의 가난 속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하실 때 당신이 지니신 부요를 잃거나

누구에게 빼앗긴 일이 없으시고 장차 그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서 감추어 두시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인자하

심은 얼마나 큽니까! 우리의 현재 지식은 완전한 것이 나타날 때까지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으로서 아버지와 같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신분을 취하셔

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를 개혁시키십니다. 하느님의 외 아드님께서
는 몸소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인간의 많은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보이는 종의 모

습을 취하심으로 종인 우리를 양육하시고 자유인의 신분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

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그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와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신 그 부요

함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느님의 크나큰 그 자비하심도 우리를

흡족히 채워 주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서는 말해 줍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시편 16 편에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당신 영광을 뵘으로 흡족하오리이다." 이 말씀을 하시는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그분을 보는 사람

은 역시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야말로 영광의 임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시고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구원되고 충만하게 되며 만족을 누릴 것입

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즉 그분이 우리를 충만케 하실 것을 보여 주시고 또 우리가 그분의 생명

의 샘에서 흡족히 마실 수 있게 될 때까지, 우리가 그분에게서 떨어져 유배지에서 믿음 안에서 거니는 동

안 즉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며 표현할 수 없는 열정으로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애타게 보고 싶어 하

는 동안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의 탄생을 열렬한 마음으로 경축하도록 합시다.

태양이 뜨기 전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신 그분을 아직 보지 못한다면, 한밤중에 동정녀에게

서 탄생하신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하고, 또한 해가 뜨기 전 영원으로부터 계신 분을 아직 알아보지 못한다

면 "환한 가운데 당신 장막을 마련하신 분" 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아버지 안에 계시는 외 아드님을 아직 보지 못한다면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을 기억토록 하고,

아버지의 잔치를 맞이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유로 나아가도록 합시

다. (강론 194, 3-4 )


18. 사람 이 하느 님이 되 도록 하 느님 께서 사 람이 되 셨습 니다 .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영원으로부터 만물의 창조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어머니로부

터 탄생하시어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시간을 넘어 아버지의 영원성에로 인도하시려고 그리

스도는 자유로운 의사로 역사에 들어오시어 오늘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

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천사들의 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오늘 천사들의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오늘 그 옛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늘은 위로부터 이슬을 내리고, 구름은 비처럼 의인을 내리라. 땅

은 열리어 구원자를 싹트게 하리라."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으시려고 당신이 지어내신 사람

과 같이 되셨습니다. 시편에서 "내가 낮추어지기 전에는 나는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사람은 고백합니다.

사람은 범죄하여 죄인으로 판단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으로 판단 받은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사

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은 넘어지고 말았지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은 가련하게

넘어졌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이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은 교만으로 넘어졌지만 하느님은 은총으로 내려오

셨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것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적이요 놀라움입니다! 자연의 법은 한 인간 안에서 변

모되었습니다. 하느님은 탄생하십니다. 동정녀가 남자를 모르고 잉태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남자를 모

르는 여인을 모친으로 만듭니다. 그 여인은 어머니이시고 동시에 동정녀이십니다. 그는 어머니가 되셨지

만 순결을 잃지 않으시고 동정녀가 아들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를 모르며, 그 몸은 언제나 봉인되어 있지만

불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홀로 죄 없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육신적 결합의 욕정 없이 마음의 복종으로

인해 여인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강론 13 d e Tem por e)


19. 성모 님은 신 덕의 힘 으로 믿 고 신덕 으로 잉 태하 셨습 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하신 다음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나를 보내 주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

매요 어머니이다." 신덕의 힘으로 믿으시고 신덕으로 잉태하시며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낳게 해주

실 여인으로 간택되시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창조되시기 전 그리스도께서 창조해 주신 동정 마리아께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있어서 그리스

도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

습니다. 성모님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신 것은 더 큰 영예이고

더 큰 행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스승을 낳으시기 전 그분을 모태에 모시고 계셨기 때문에 정말 복되셨습

니다.

내가 하는 말이 정말인지 한번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과 함께 두루 다니시고 신적 기적

을 행하실 때 한 번은 어떤 여인으로부터 다음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행복" 은 육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고 하셨습

니다.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마리아는 당신 태중

에 모신 육신보다 마음에 지닌 진리를 더 열심히 간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십니다. 그

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 태중에서 육신이십니다. 그러나 태중에 있는 것보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거룩하시고 마리아는 복되십니다. 그러나 동정 마리아보다 교회는 더 그러합니다. 왜 그렇습니

까? 마리아는 교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부분, 뛰어난 부분, 엄위로써 다른 모든 지체들보다

더 고귀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온 몸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지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의 한 지체라면 물론 그 한 지체보다 그 온 몸은 더 보배롭습니다. 주님은 머리이시고 그리스도의 전체

는 머리와 몸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적인 머리를 모시고 있고 우리의 머리로 하

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잘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지체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여러분

이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인지를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

다.

형제들이여, 보십시오. 여기에서 형제 그리고 자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산은 같은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자비심으로 홀로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 모두 아버지

의 상속자,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강론 25, 7-8 )

20. 우리 안 에 있는 주 님 집의 건 축과 축 성.
오늘의 집회는 기도의 집을 축성한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입니다. 성전은 우리 기도의 집이지만 우리 자

신은 주님의 집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집일진대 우리는 세말에 봉헌되기 위하여 현세에서 건축되고

있습니다. 건축은 수고를 동반하지만 봉헌은 기쁨을 줍니다.

성전이 세워질 때에 이루어졌던 일이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과 숲 속에서 나무가 잘려지고 돌이 캐어지는 셈이고,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을 때에 목수와

미장이의 손으로 나무와 돌이 다듬어지고 깎여지고 모습을 갖추어 맞추어지고 짜여지는 셈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서로 붙지 못하면 주님의 집을 세울 수 없습니다. 나무와 돌이 서로 바른 질서로 결합되

지 못하고, 서로 안전하게 붙지 못하고, 서로 붙어서 사랑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이 집의 재목이 될 수 없습

니다. 공장에서 나무와 돌이 서로 잘 조화됨을 보는 사람은 이 집에 들어와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어 우리 안에 거처하시려고 우리를 건축하시며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

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시며 "너희에게 계명을 준다." 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옛사람이었고 내 집을 짓지

않았으니 너희는 멸망 속에 누워 있었다. 그러니 옛 멸망에서 구원되기 위하여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

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이미 예언되고 약속된 대로 온 세상에서 그 집을 완성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귀

양살이에서 풀려나 집을 지을 때에 시편에 있듯이 "새 노래를 주께 불러 드려라. 온 세상아, 주께 노래하

라."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새 노래" 라고 하였으나 주께서는 여기서 "새 계명" 이라고 하십니다.

새 노래는 새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노래는 사랑하는 자의 것입니다. 이 노래하는 자의 목소리는

거룩한 사랑의 열성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만들어진 것을 이 건물에서 육안으로 보는 대로 영신적으

로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기 바라며 여기서 나무와 돌로 완성된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의 몸속에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온갖 좋은 것과 온갖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마음을 다하여 그 선하심

을 찬미합시다. 이 기도의 집을 건축하시기 위하여 몸소 당신 신자들의 마음을 찾아주시고, 정을 일으키시

고 도움을 주셨으며, 원치 않는 사람까지 원하도록 감도하시고, 착한 이들의 노력을 성취하도록 도와주셨

으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착한 마음을 일으키시고 완성하시는 이 모든 일을 몸소 시작하시고

완성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강론 336,1. 6)

21. 그리 스도 의 죽음 값 으로 구 원된 순 교자 들의 죽 음은 귀 중하 다.
거룩한 순교자들의 귀중한 업적으로 어디서나 교회가 융성하고 있으니, "갸륵할쏜 주님의 눈에, 성도들

의 죽음이여." 하며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옳은 일인지, 우리 눈에도 다시 한 번 되새겨집니다. 우리 눈에

도 갸륵하기만 하니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바쳐진 죽음이 주님의 눈에 갸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죽음의 값은 한 분의 죽음이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죽어 썩지 않았던들 그 많은 열매

는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분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죽음들을 구원하였습니까? 수난이 가까워지고 우

리 구원이 임박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

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큰 매매가 이루어졌으니, 거기서 우리의 몸값이 치러졌습니다. 군사의 창으로 주님의 심장이

찔렸을 때 전 인류의 몸값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몸값으로 신자들과 순교자들이 속량되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믿음의 시련을 받았습니다. 피가 그 증거입니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몫을 다하며 "그리스도께

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 하신 사도 요한의 말씀을 채우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 기록되기를 "큰 잔칫상에 안게 되면 무엇을 차려 놓았는지 자세히 살펴 두었다가 너도 그런

것을 준비해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큰 잔칫상은 그 주인 자신이 잔치일 경우를 말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하객들에게 음식으로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이 초

청인이시고 몸소 음식이 되시고 음료가 되십니다. 순교자들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를 알았고 자신들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먼저 자신을 음식으로 제공하신 그분이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갸륵할쏜 주님의 눈에, 성도들의 죽음이여," 라는 시편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망합니까?

하느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살펴본다면 전능하신 그분이 내리신 은총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잃은 다음 다시 찾으시고, 찾은 다음에 용

서하시고, 싸울 때 약한 힘을 도와주시고, 휘청거릴 때 버리지 않으시고, 이길 때에 월계관을 씌우시고, 당

신 자신을 상급으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본 사람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

오리, 구원의 잔을 받들리라," 하고 기꺼이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잔은 과연 무엇입니까? 구원을 주는 쓰라린 수난의 잔입니다. 의사가 먼저 마시지 않는다면 병자

가 마시기를 두려워할 그런 잔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신

그리스도의 입에서 그 잔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잔에 대하여 순교자들은 "구원의 잔을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하였습니다. 지칠 것을 겁

내지 않았을까?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속을 이겼으니 너희는 기뻐하라." 하신 그분이 순교자들 안에서 이겨 주시지 않았더라면 순교자들

이 어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의 임금님이 그들의 마음과 혀를 지배하시며 땅에서 그들을 통해서 마

귀를 이기시고 하늘에서 순교자들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 잔을 마신 이들은 행복합

니다. 고통은 끝나고 영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생각하여 "갸륵할쏜 주님의 눈에, 성

도들의 죽음이여." 라는 내용을 마음에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강론 329, In na ta li ma rty ru m)

22. 그분 은 우리 의 하느 님이 시고 우 리는 그 목 장의 백 성입 니다 .

방금 노래한 시편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양 떼라는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 너희는 알라.

우리를 내셨으니, 우리는 당신의 것 당신 백성이어라. 기르시는 그 양 떼이어라. " 인간 목자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양들을 스스로 지어내지 않았고 자기가 기르는 양들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우리

주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또 창조주이시기에 당신이 소유하고 기르시는 양들을 친히 지어내셨습니다. 하

느님께서 기르시는 양들은 다른 누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양들은 또 다른 누가 기르

는 것도 아닙니다.

이 시편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양들, 그 목장의 백성, 당신 손이 이끄시는 양 메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제 하느님께서 당신의 양들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도록 합시다. 이전에 주님은 목자들에게 말

씀하셨습니다. 이제 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자인 우리는 그전의 말씀들(즉 목자들에 대한 말씀)을 떨면

서 들었지만 여러분은 평온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제 이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것(즉

양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 하겠습니까?

전과 반대로 우리는 평온한 마음으로 듣고 여러분은 떨면서 들어야 되겠습니까 ?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목자는 주님께서 목자들에게 하시는 말씀뿐만 아니라 양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떨면서 들어야 합니다.

만일 목자가 주님께서 양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평온한 마음으로 듣는다면 그 목자는 양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목자인 우 리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아


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한 면에서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또 다른 면에서 여러분의 지도자라는 두

가지 점입니다.

우리는 지도자로서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해야만 목자의 반열에 들 것이지만 한편 우리는 역시 그리스

도인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양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목자들에게 말씀하시든 양들에게 말씀하

시든 간에 우리 마음에서 여러분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지 않도록 그 모든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주님께서 좋지 못한 양들을 어떻게 꾸짖으시고 또 당신 말씀을 잘 듣는 양들에게 무엇

을 약속하여 주시는지 들어봅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양들이다. "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양 떼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이것은 이 세상의 눈물과 걱정 가운데서도 큰 기쁨을 가져다줍

니다. 성서가 말해 주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는"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잠들 때나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인간 목자가 양 떼를 기를 때 그 양 떼가

평온을 느낀다면 하느님 친히 우리 목자가 되실 때 우리는 더 큰 평온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기르실 뿐 아니라 지어내시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 떼인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에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 시비를 가려 주리라."

하느님의 양 메 안에서 염소는 무엇을 합니까? 하느님의 왼편에 안기로 되어 있는 염소들은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기로 된 양들과 같은 풀밭, 같은 샘에서 함께 섞여 있습니다. 하느님은 지금 이 상태를 참아주시지

만 장차 염소들을 가려내실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께서 참으시는 것처럼 양들도 참아주어야 합니다. 장차

염소와 양을 가르시어 하나는 왼편에 하나는 오른편에 두실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강론 47, 1.2 .3. 6)

23. 내가 사 람들 의 호감 을 사려 고 한다 면 나는 그 리스 도의 일 꾼이 아 닐 것입 니다 .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 양심의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을 경솔하게 판단하고 멸시하며 말을

물어 나르고 그들을 비판하고 보지 못한 것을 추측하려 들며 아무 근거 없이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길이란 우리 양심의 증거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형제들이여, 영혼의 목자인 우리는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서마저 우리 자신의 영광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들의 구원만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길을 걸어간다면 그들은 우리를 따라오게 되

므로 곁길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에 그들도 우리를 본받게 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을 때는 그들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본받게 해야 합니다. 주님, 당신 홀로 당신 양 떼

를 기르십니다. 자기 양떼를 잘 기르는 목자들이 다 주님 안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익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좋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 때 그것이 우리 명예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선이 되

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자기 이익만을 찾는 목자들을 거슬러 사도 바울로는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

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바울로의 이 두

가지 말씀은 다 명백하고 순수하고 온화하며 두 가지 다 잡것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단

순히 풀을 먹고 물을 마시도록 하십시오. 그 대신 풀을 먹을 때 풀을 짓밟거나 물을 마실 때 물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사도들의 스승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으리라 믿습니다. "너희도 이

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즉 현재

의 너희를 지어내신 분을 찬양하게 하여라." 실상 우리는 "그 목장의 백성이고 당신 손이 이끄시는 양 떼입

니다." 여러분이 착한 사람들이라면 모든 영예는 여러분을 선하게 지으신 하느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악하게 될 뿐이기에 선행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왜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여러분의 영예로 돌리고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수치를 하느님의 잘못으로 돌려 진리를 뒤틀어

놓습니까?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라."고 말씀하신 분은 같은 설교에서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두 가지 사도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서

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듯이 지금 이 두 가지 복음 말씀도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의 물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면 복음서의 이 두 말씀은 조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또 여러분도그 말씀과 일치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잘 살아가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그뿐 아니라 사람

들 앞에서 훌륭히 처신하도록 합시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행동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거기에 더하여

연약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만큼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이라도 더 약한 형제로 하여금 좋지 못한 의심

을 자아내게 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우리가 깨끗한 풀을 먹고 맑은 물을 마실 때 하느님의 풀밭을 짓밟지 않도록 조심하여, 약한 양들이 우리

가 짓밟아 놓은 풀을 먹어야 한다거나 흐려진 물을 마시는 일이 없게끔 해야 합니다. (강론 47,12-1 4)

24. 하느 님이 받 아들 이시 는 제물 은 뉘우 치는 마 음입 니다 .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삽나이다." 내가 내 죄를 알고 있사오니, 하느님이시여, 내 죄

를 잊어 주소서, 우리는 죄 없는 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활이

칭송 받을 만한 때에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타인의 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고쳐 줄 마음으로 그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하려고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 릴 줄 모르고 타인의 잘못을 곧잘 나무랍니다. 이것은 다윗이 우리에게 보

여 준 기도하는 법도 하느님과 화해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

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의 눈

을 자신에게로 돌려 겉으로가 아니라 내심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

서를 청할 때 교만하게 청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원합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화해하시도록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

는지 알도록 하십시오. 같은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는 당신이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려

도 받지 아니 하시리이다." 그렇다면 제사를 바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 어떤 번제를 드린다 해도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바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시편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사는 당신이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 하시리이다." 시편을 계속 읽어 내려가며 말씀

을 들어보십시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
이다." 여러분은 이제 이전에 바친 것을 포기하고 앞으로 바쳐야 할 것을 찾아냈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옛 조상들처럼 제사라고 하는 양의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하느님이 즐기지 않으십니다.

" 하느님께서는 이전의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고 어떤 새로운 제사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 하시리이다." 하느님께서 번제를 즐기지 않으신다고 해서 여

러분이 제사를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

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 여러분은 이제 바칠 제물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제물

을 양떼에서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향을 가져오려고 배를 장만하여 먼 지방까지 항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즐겨 하시는 것을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음이 부서지고 낮추어져야 합니다. 그런

데 마음이 부서지면 그것이 소멸해 버리리라고 걱정합니까? 여기에 있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따라서 마음을 깨끗이 만들도록 먼저 불순한

마음을 부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때 하느님께서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가집시다. 그

리고 우리에게는 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들도 싫어한다는 이 한 가지 점

에서 하느님처럼 됩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한다면 적어도 부분

적으로라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것입니다. (강론 19, 2-3 )

25. 성덕 에로 의 보편 적 성소 .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끊어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끊어 버

리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가혹하고 무거운 것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명령하신 대로 이루어지도록 도와

주시는 분의 명령이기에 가혹하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습니다.

"당신 입술 그 말씀 좇아, 율법의 길을 지켰나이다." 하는 시편의 말씀도 옳은 말씀입니다. 또 "내 멍에는

펀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계명 속에 가혹한 것이 있다면 사랑이 그것을 부드

럽게 만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는 것은 무엇입니까 ? 귀찮은 것을 참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활

과 계명을 따르기 시작하면, 많은 반대자를 만나고 많은 방해자와 말리 는 자를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동행자같이 따를 것입니다. 소경이 부르짖는 것을 못하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협박이나 아첨이나 어떤 종류의 제지도 주님을 따르려면 그것을 십자가로 생

각하여 참고 지고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이미 거룩하고, 착하고, 화해하고 구원된 세상입니다. "희망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되

었노라." 하신 말씀대로 희망으로 구원된 세상이기에 후일에 구원될 세상이라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바로 이 세상이기에 "나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끊어 버리라." 는

말씀은 교회 전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동정녀들은 듣고 시집간 여인은 듣지 말아야 한다든지, 과부는 듣고 재혼한사람은 듣지 말고,

수도자는 듣고 결혼한 사람은 듣지 말고, 성직자는 듣고 평신도는 듣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가, 온몸이, 모든 지체들이, 직책이 서로 다르더라도 모든 이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유일한 온 교회는 비둘기처럼, 신부처럼, 신랑의 피에 젖어 구원된 신부처럼 따라야 합니다. 온전한 동정

자도, 과부의 수절도, 부부의 정절도 모두 이 속에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제자리를 가지고 있

는 모든 지체들이 제 신분에 따라 제자리에서 제 나름대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고 자기를 끊어야 합니다.

즉 자기를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이 갖다 주는 어려움

을 참아 받아야 합니다.

홀로 속이지도 않으시고 홀로 속지도 않으시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약속하신 것이 진실된 것이니 그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믿음이 당장 주지 못하고 뒤뚝거리고 있어도 기다리며 항구히 참으며 십자가를 지

고 미루어짐을 참아야 합니다. (강론 96, 1.4 .9)

26. 우리 를 악에 서 구하 시는 선 하신 하 느님 께 알렐 루야 를 노래 합시 다. (강론 256, 1.2 .3 )


언젠가 저 위 천상에서 평화 속에 노래할 수 있도록 이 아래 지상에서 아직 걱정 가운데 있는 동안 알렐

루야를 노래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걱정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땅 위에서의 인생은 시련에

가득 찬 생이 아닌가." 라는 말씀이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

어 기도하라." 하는 말씀도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기도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청하라고 명하는데

그렇게도 유혹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면 어떻게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기도에서 우리가

매일 용서를 청하고 있지만 매일 용서받아야 할 죄를 짓고 있습니다.

매일 내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위험에서 구출될 도움을 청한다면 아무 걱정 없이 살라고 말할 수 있겠

습니까』그리고 과거에 범한 죄를 생각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

소서." 하면 즉시 이어서 다가올 위험을 생각하여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하고 덧붙입니다.

다른 신자들도 나와 함께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하는데 어떻게 걱정 없이 살 수 있겠습니

까? 그럼에도 형제들이여, 우리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는 선하신 하느님께 알

렐루야를 노래합시다.

위험과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와 또 다른 모든 이들도 다함께 알렐루야를 노래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

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시므로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

러므로 이 지상에서도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사람은 아직 죄인이지만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

다. 위의 성서 말씀에서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신다." 고 하지 않고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시고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다." 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시련을 겪게 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시련에 빠지지 않도록 빠져 나갈 길을 마련하십니다. 여러

분은 옹기장이가 만드는 그릇처럼 말씀을 들음으로써 조형되고 환난의 불 속에서 단련되어야 합니다. 여

러분이 시련을 겪게 될 때 거기에서 빠져 나갈 것임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은 신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

니다."주께서는 나가거나 들어가거나 너를 지켜 주시리라."

이 몸이 불멸의 것이 되고 썩지 않을 몸이 될 때 온갖 시련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때 이 지상의 몸이 참으

로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몸이 죽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생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화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몸을 죽은 것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성서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

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영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

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몸은 육적 상태이지만 그때에는 영적 상태일 것입니다.


저 위 천상에서 부를 알렐루야의 함성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안전하며 또 얼마나 평화롭겠습니까! 저

위 천상에는 우리의 원수 되는 사람이 없고 친구를 잃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님께 바치는 찬

미가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그 찬미가는 울려 퍼지지만 여기에서는 걱정 가운데 거기에서

는 걱정 없는 평화 가운데, 여기에서는 죽어가는 이들이 거기에서는 승리한 이들이, 여기에서는 희망 가운

데 거기에서는 직접 보는 가운데, 여기에서는 여정 중에 거기에서는 본향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이여, 노래합시다. 천상의 양식을 즐기기 위해서보다 우리 수고의 피곤을 풀기 위

해서 노래합시다. 길 가는 사람처럼 노래합시다. 노래하십시오. 그러나 계속 걸어가십시오. 노래함으로써

수고의 짐을 가벼이 하고 게으름에는 빠지지 마십시오. 노래하면서 발걸음을 계속하십시오. "발걸음을 계

속하라." 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덕행에로 정진하라는 말입니다. 사도가 말하듯이 정진하기는 하지만 악

행에로 정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진한다면 발걸음을 계속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

나 덕행에로, 올바른 신앙에로, 거룩한 생활에로 정진하십시오. 노래하면서 걸음을 계속하십시오. (강론

256,1. 2. 3)

** 나는 수 도생 활을 선 택한 다.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여러분들 앞에서 주교로 서는 저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젊은이로 이 도시

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는 저는 수도원을 세우고 제 형제들과 함께 이곳에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었습니

다. 제가 이미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제가 되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안 되려고, 차라리 제가

지금의 내가 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인들의 천막에서 사는 것보다 하느님의 집에 종으로

서 살으렵니다." (시편 94,1 이. 교회의 지도자들의 무리에 속했으나 그들 중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과는 어

울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저의 주님의 잔치에 보다 더 윗자리를 원하지 않았고 눈에 띄지 않는 아래 자리

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여보게, 저 윗자리로 앉게 하셨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이미 하느님의

종들 중에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제가 의도적으로 주교좌가 비워진 그 도시를 피하도

록 했습니다. 높은 자리의 심각한 위험을 피하면서 차라리 낮은 자리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마음을 쓰고

노력하며 성직자의 품위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종은 그의 주인의 명령을 거스른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이 도시에 사는 한 형제와 함께 수도원에서 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고를 얻으

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도시에 주교가 계셨기 때문에 안전할 줄 알고 있었지만 억지로 저를 붙잡아서

사제로 삼은 결과로 이 주교좌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아무것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날에 입었던 옷으로만 이 교회에 들어 왔습니다. 여러분들

이 사랑하던 제 선임 주교이신 발레리우스는 제가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을 세울 계획과 희망에 대해 알게

되신 후 현재 수도원의 부지를 기증하셨습니다. 저와 같은 뜻 있고 저를 본받아 가진 것 없고 가난한 생활

을 선호하는 형제들이 모였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만만치 않은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

람들대|게 나누어 준 것처럼, 저와 함께 생활하고자 하는 이들은 우리가 공동 소유하는 것으로만 살기 위

해 그들도 그들의 재산을 처리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공동 재산으로 얻

은 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주교가 되어 깨달은 것은 주교답게 모든 손님들과 나그네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베풀어

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어떤 주교가 그런 책임을 소홀히 했더라면 그는 냉정한 사람으로 판단을 받

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는 이런 관례는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제가 이 주교관 안에

서의 성직자들을 위한 기숙사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사는 방식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중대| 개

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없습니다. (설교 355. 2)

제 2 장

목자 들에 대한 강론

27. 위로 의 붕대 를 주십 시오 .
성서는 주님이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은 이와 반대로 "여러분은

이 성서 말씀에서 제외될 것이요." 하고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견책의 고통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하느님 자녀들의 대열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반응을 보일지

모릅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예외 없이 모든 자녀들에게 매를 드신단 말입니까?" 하고.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을 예외 없이, 당신 외 아드님까지 견책하십니다. 외 아드님은 아버

지의 본체에서 탄생하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말씀이시므

로 견책을 당할 까닭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견책 당함이 없이 남아 있지 않도록 인간육신을 취하셨

습니다.

하느님께서 죄가 하나도 없으신 당신 외 아드님까지 이렇게 견책하셨다면 죄 많은 양자들을 고통에서 면

제시키시겠습니까? 사도는 우리가 양자됨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외 아드님과 함께 상속

자가 되고 또 그분의 유산이 되기 위해서 양자가 되었습니다. "내게 청하라. 나는 이방인들을 네 유산으로

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겪으신 수난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가 미래에 닥쳐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거짓된 희망으로 속이거나 두려움으로 산산

이 부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에게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여라," 고 말해 주십시오. 이 말

을 들을 때 그는 아마도 전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때 그에게 다음의 성서 말씀도 상기시키십시오. "하느님에서는 신의가 있는 분이시므로 여러분에게 힘

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이렇게 어떤 것을 약속하고 또 동시에 다가올 고통을 예견해 주

는 것은 약한 자에게 힘을 주는 것입니다. 누가 지나칠 정도로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있다면, 그가 유혹에

면역 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에게 하

느님의 자비를 약속해 주십시오. 이 약속은 부서진 것을 다시 결합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환난이 닥쳐온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을 더욱 굳건히 무장하고 그 고통의 잔을 목말라하는 이들이 있습

니다. 그들은 일반 신자들이 겪는 보통의 어려움을 하찮은 치료제로 여기고 순교자의 영광을 열렬히 찾습

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히 닥쳐오기 마련이고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자

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체험하지 않는 그 미래의 피치 못할 시련에 대해 듣고서, 그 시련들이 닥쳐올 때

마음이 부서져 주저앉아 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위로의 붕대를 주어 부서진 것을 싸매 주고 다음의 말을 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

당신이 믿어 온 그분은 시련이 닥쳐올 때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하느님께서는 신의가 있는 분이시므

로 당신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소. 이 말은 내 말이 아니오.'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

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원합니까?'하고 말한 바울로 사도의 말이오. 그러므로 당신이 이 말을 들을 때 그것


은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듣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기르시는 목자에게서 듣는 것이오. 시편 작가는 그 목

자에게 이렇게 말했소. '주님은 우리에게 견딜 만큼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바울로 사도가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고 말한 것을, 여기

예언자는 '견딜 만큼의 눈물을 마시게 한다.' 고 말하고 있소. 여하튼 당신은 당신을 꾸짖으시고 격려하시

며, 겁을 주시고 위로하시며, 때리고 또 상처를 싸매 주시는 주님을 버리지 마시오." (「목 자들 에 대한

강론」 46, 11-1 2)

28. 연약 한 그리 스도 인들 .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약한 것을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지 않고 아픈 것을 고쳐 주지 않았다."

주께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이 아닌 제 이익만 찾고, 또 젖과 양털을 마음껏 즐기지만 양들을

결코 돌보지 않거나 병든 양을 고쳐 주지 않는 악하고 거짓된 목자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내 생각으론,(우

리가 어떤 때 병자를 허약자라 하지만) 허약자와 병자를 잘 구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약자는 튼튼하지

않은 사람이고 병자는 어떤 질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더욱 큰 주의를 기울인다면 내가 여기서 구별하고자 하는 것들 간의 차이점을 좀더 잘 이끌어 낼 수 있

고, 또 나보다 더 박식하고 열심한 다른 사람이 물론 더 잘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러분이 허전한 감을 갖

지 않도록 이 성서 말씀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해 보겠습니다. 허약자는 유혹이 밀어닥치면 넘어질 우려

가 있는 사람이고, 병자는 하느님의 길로 발걸음을 내닫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에서 멀어

지게 하는 나쁜 욕망으로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착한 생활을 하기 원하고 또 이미 그렇게 마음먹은 사람들을 한번 봅시다. 그들은 어떤 때 착한 생활을

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만큼 어려움을 겪을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정코 견고한 그리스도인

은 착한 일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힘든 일이나 역겨운 일을 참아 내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

는 데 열심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가오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참아 내고 싶어 하지 않거나 또는 참아내지 못

하는 이들은 허약자입니다. 그리고 어떤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을 사랑하고 선행에서 물러서는 이들

은 병들어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 때문에 힘이다 빠져 선행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를 들고 왔던 사람들이 지붕을 벗기고 그 곳으로 주님께 내려진 그

중풍 병자가 이런 상태에 있던 영혼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체를 통제할 수 없게 되고 선행을 조금도 하

지 못하며 죄에 짓눌려 나쁜 욕망이라는 병에 걸린 여러분의 마비된 영혼을 위해 기꺼이 지붕을 벗겨 주님

께 내려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여러분의 지체가 모두 말을 듣지 않는 상태이고 여러분의 내

부에 마비증이 있다면, 의사께 도달하기 위해선 (그분이 숨어 계신지, 집안에 들어가 계신지, 확실한 의미

를 성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지붕을 벗겨 중풍 병자를 내려 보냄으로써 감추인 것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 하는 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아픈 것을 고쳐

주지 않고 상처 입은 것을 싸매 주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유혹의 두려움으

로 인해 상처를 입었습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싸매 주어야 할 위로의 붕대는 바로 성서의 다음 말씀입니

다. "하느님께서는 신의가 있는 분이시므로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목자 들에 대한 강론 」

46,13)
29. 기회 가 좋든 지 나쁘 든지 꾸 준히 훈 계하 십시 오.

"너희는 길 잃고 헤매는 것을 찾아 데려오지 않았도다." 이제 우리는 강도의 손아귀와 잔악한 늑대의 이

빨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위험들 앞에서 기도해 주기를 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양들마저 뺏뻣한 상태입니다. 그들이 방황하고 길을 잃어버려 우리가 찾으러 나가면 자기들은 오류와 파

국 상태에 빠져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왜 나에게 신경을 쓰는 거요? 왜 나를 찾아다니

오? "우리가 그들에게 신경을 쓰고 그들을 찾는 이유가 홉사 자기네들이 방황하고 길을 잃어버려서가 아

닌 것처럼 대꾸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류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자라면 왜 나에게 신경을 쓰며 찾

아다니는 거요?" 바로 당신이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당신을 돌이키고자 하는 것이고 또한 당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에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방황하고 싶고 파국 상태로 있고

싶소."

그렇게도 방황하고 싶어 하고 파국 상태에 있고 싶어 합니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당신이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솔직히 말합니다. 나는 고집불통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말씀

을 전하고 훈계하십시오." 라는 사도의 말씀이 내 귀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회가 좋고 또 누

구에게 기회가 나쁘겠습니까? 원하는 이에게는 기회가 좋고 원치 않는 이에게는 기회가 좋지 않습니다. 나

로 말한다면 고집불통이므로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당신은 방황하고 싶어 하고 파국 상태에 있고 싶어 하

지만 나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그분이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내가 만일 그

것을 원한다면,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꾸짖으실 것입니다. "너희는 길 잃고 헤매는 것을 찾아 데

려오지 않았다. "내가 그분보다 당신을 더 두려워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

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헤매는 것을 돌이키고 파국에 처해 있는 것을 찾을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든 말든 그렇게 하

겠습니다. 그것을 찾다가 숲 속의 가시 덩굴에 찔린다 해도, 가장 좁은 산길까지 헤치고 들어가, 내가 두려

워하는 주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데까지 온 천지를 두루 돌아다닐 것입니다. 나는 헤매는 것을 되돌아

오게 하고 파멸 지경에 처해있는 것을 찾아내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을 견딜 마음이 없다면

헤매지 말고 파멸의 지경에 빠지지 말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당신이 헤매고 파멸에 빠져 드는 것을 볼 때

내가 마음 괴로워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소홀히 한다면 그로 인해 튼튼한

양까지도 파멸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예언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살진 놈을 잡아먹었도

다." 내가 해매고 파멸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튼튼한 양까지도 헤매고 파멸에 빠져 들지

누가 알겠습니까? (「목 자들 에 대한 강 론」 46,14-1 5)

30. 교회 는 포도 나무 처럼 자 라나 온 세 상에 퍼 져 나갔 습니 다.
"내 양들은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온 세상에 흩어졌다." "온 세상에 흩어쪘다." 는 말은 무

슨 뜻입니까? 이는 온갖 지상적인 것을 따라가고 지상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함을 뜻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지게 하는 그 죽음으로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

들은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 지상적인 것을 사랑하고 길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 흩어진

것입니다. 이런 양들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한 어머니이신 가톨릭교

회가 낳은 것처럼, 그들도 모두 한 어머니인 교만이 낳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만이 분열을 낳게 하는 것처럼 사랑이 일치를 낳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한 어머니

이신 가톨릭교회와 그 교회 안의 한 목자께서는 어디에서나 헤매는 이들을 찾으시고 허약자를 굳세게 하

시며 앓는 이를 돌보시고 상처 입은 이를 싸매 주십니다. 교회가 어떤 이들은 이런 곳에서 찾고 또 다른 이

들은 저런 곳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교회는 모든 이와 합치되어 있으

므로 그들 모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간 포도나무와 같고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하여 농부의 낫으로 교회라는 포

도나무에서 잘려진 쓸모없는 가지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포도나무를 모조리 잘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려진 가지는 잘려진 바로 그 곳에 남아 있지만 그 포도나무는 모든 곳

으로 자라나 붙어 있는 가지도 알고 있고 잘려져 떨어져 있는 가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 헤매는 이들을 되부르고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가 갈라진 이 가지들에 대해서 "하느

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여 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 때를 떠나 헤매

는 양들이건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이건 최고의 목자이시고 참된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양들을 되부

르시고 또 가지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 양 떼는 온 세상에 흩어졌지만' 그 악한

목자들 중에 "그들을 찾아다니는 목자는 하나도 없었도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하느님

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증거로 삼아 맹세하십니다. 목자들

은 죽었지만 주님은 살아계시므로 양들은 안전합니다.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

다."

그런데 죽은 목자들은 어떤 목자들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지 않고 자기 이익만 찾는 목자들입

니다. 자기 이익을 찾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이익을 찾는 목자들이 앞으로 있겠고 또 찾아 볼 수 있겠습

니까? 분명히 있을 것이고 또 분명히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

입니다. (「목자 들에 대 한 강론 」 46, 18-1 9)


31. 그들 이 말하 는 것은 다 실 행하 고 지켜 라 그러 나 그들 의 행실 은 본받 지 말아 라.

"목자들아, 이 주님의 말을 들어라." 목자들이 들어야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다. 목자라는 것들은 내 눈 밖에 났다. 내 양 때를 그 손에서 찾아내리라. "

하느님의 양 때들이여, 이 말씀을 듣고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악한 목자들의 손에서 당신의 양들

을 찾아내시고 양들의 죽음에 대해 셈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같은 예언자를 통하여 다른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새운다. 너는 나에게서 경고하는 말을

받거든 그대로 일러주어라.

내가 한 죄인에게 '너는 사형이다.' 하고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죄인은 자기 죄 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의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

그러나 네가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 주었는데도 그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

릇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죄 값으로 죽겠지만 너는 죽지 아니하리라."


형제들이여,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볼 수 있습니다. 그 죄인

은 당연히 죽습니다. 자신의 죄과와 잘못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입니다. 그의 게으름이 그를 죽이는 것입니

다. 그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고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목자를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

신의 보초와 지도자로 임명된 사람에게서 아무런 경고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래서 그는 응당히 죽겠지만 그에게 경고를 주지 않았던 사람도 응당히 단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그를 칼로써 위협하실 때 당신이 그 죄인보고 "당신은 분명히 죽

을 것이오." 하고 말해 주어도 그 죄인이 자기 머리 위에서 위협하고 있는 칼을 피하는 데 소홀히 한다면,

그 칼은 떨어져 그를 죽일 것입니다. 그때 그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 죽는 것이지만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는 침묵을 지키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의무는 우리가

침묵을 지키는 때라도 성서로부터 목자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내가 이미 제시한 바대로 과연 주님이 양들을 악한 목자에게서 빼내시어 그들을 착한 목자들에게 맡겨

주시는지 보기로 합시다. 다음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 친히 양들을 악한 목자들에게서 빼내십니다. "목자라

는 것들은 나의 눈 밖에 났다. 나는 그들 손에서 내 양 떼를 찾아내고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 떼를

기르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목자들에게 양 떼를 돌보라고 할 때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돌보기

때문에"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 떼를 기르지 못하게 하리라."

주님은 어떻게 목자들에게서 양 떼를 빼내어 그들을 기르지 못하게 하십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이것은 흡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듯 합니

다. "그들은 내 말을 전하는 것이지만 자기네들에게 이익 되는 일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악한 목자

들의 행실을 따라가지 않을 때에 너희를 기르는 것은 그 목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을 실행할 때

너희를 기르는 것은 나다."

(「목 자들 에 대한 강 론」 46,20-2 1)
32. 내 양 떼를 좋 은 목장 에서 기 르리 라.

"나는 내 양 떼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오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모아 들여 본고장으로 데리고 와서 이

스라엘의 산들에서 기를 것이다." 이스라엘의 산이란 성서의 저자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안전한 데서

풀을 먹고 싶으면 성서에서 먹으십시오. 거기에서 듣는 것은 모두 다 기꺼이 맛보십시오. 그러나 성서 외

에서 나오는 다른 모든 것은 거절하십시오. 안개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목자의 목소리를 잘 들으십시오.

성서라는 산위에 모여 드십시오. 거기에는 여러분 마음의 기쁨이 있고 독성이나 해로운 것이 조금도 없습

니다. 그것은 가장 비옥한 목장입니다. 건강한 양들이여, 찾아가 이스라엘의 산에서 풀을 먹으십시오.

"시냇물이나 사람 사는 땅 어디서나 그들을 기를 것이다." 사실 "그들의 소리 온 땅으로 퍼져 나갈 때" 에

위에서 언급한 산들로부터 복음 전파의 시냇물이 흘러나오고 사람 사는 땅 그 어디나 양들이 풀을 먹을 수

있는 즐겁고도 비옥한 땅이 되었습니다."좋은 목장에서 기르며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은 그들의 안식처가

되리라." 즉, 그들은 "참 좋구나." 할 수 있고, "사실이다. 분명하다. 우리는 속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며 편

히 쉴 수 있는 그 곳에서 안식하게 되고, 흡사 자신의 안식처인 듯 하느님의 형광 속에 안식하게 될 것입니

다. 거기에서 그들은 "잠을 잘 것이며" 곧 안식을 취할 것이며 "기쁨 중에 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좋은 목장을 찾아다니며 기르리라." 그리로부터 우리에게 도움이 오도록 우리 눈

을 드는 그 좋은 산들인 이스라엘의 산들에 대해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

을 지으신"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을 그 좋은 산에다 걸지 않도록 주님은 "이스라엘

의 산들에서"라고 말씀하신 다음 여러분이 그 산에 남아 있지 않게끔 덧붙여 "내가 내 양들을 기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로부터 도움이 오는 그 산으로 눈을 드십시오. 그러나 "내가 내 양들을 기

르리라," 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

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그리고 나는 올바르게 그들을 기르리라." 그분 홀로 올바르게 기르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양을 제대로 기르실 줄 압니다. 자기 동료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

니까? 이 세상은 옳지 못한 판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했던 사람이 갑자기 회개하여 아주 좋

은 사람이 되는 일도 있고 우리가 잔뜩 희망을 걸었던 사람이 뜻밖에 타락하여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일

도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도 확실치 않고 우리의 사랑도 확실치 않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현재 어떤 사람인지 자기 자신도 간신히 압니다. 그는 오늘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

도는 알고 있지만 내일 어떤 사람이 될지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올바르게 기르셔서 모

든 이에게 각자의 조건에 따라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것을, 각자가 응당히 받

아야 할 이런 저런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인간으로부터

재판 받으심으로써 속량해 주신 이들을 올바르게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친히 올바르게 기르

시는 것입니다. (「목자 들에 대 한 강론 」 46, 24-2 5. 27)

33. 모든 착 한 목자 들은 한 목 자 안에 있 습니 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올바르게 기르시고 당신의 양들을 당신의 양들이 아닌 것과 구별하십니다. 그

분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를 따라온다."

이 말씀에서 나는 한 목자 안에 모든 착한 목자들이 있음을 봅니다. 착한 목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이 한 목자 안에 있습니다. 목자들이 서로 갈라져 있을 때 그들은 여러 목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만, 여기서 한 목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일치를 권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여러 목자들에 대해 말

하지 않고 한 목자가 언급되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양 떼를 맡길 다른 목자를 찾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사

실 주님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사람에게 맡기실 때에도 일치를 강
조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많았지만 한 사람에게만 "내양들을 치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 착한 목자들이 없지 않기를 기원하며, 또한 주님의 자비가 그들이 없는 것을 허락치 않고 그들을

많이 보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착한 양들이 있는 데에는 분명히 착한 목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착한 양들로부터 만들어지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착한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고 한 목자입니다. 그들이 양들을 기를 때 그리스도

께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신랑의 목소리로 인해 몹시 즐거

워합니다. 그들이 양들을 기를 때 그분 친히 기르시는 것이고 그분의 목소리와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기른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실 때 그것은

한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었지만 그래도 베드로가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습

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를 표상하는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그리

스도와 베드로는 신랑과 신부처럼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실 때, 그 양들을 마치 다른 남에게 맡긴다는 인상을 주

지 않기 위해 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두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정

말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다시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

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다시 "예, 저는 주님

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세 번이나 사랑을 확인하심으로써 일치를 견고히 하십

니다. 주님은 목자들 안에서 홀로 양들을 기르시고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서 양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여러 목자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또 동시에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자들은 자랑

합니다. 그러나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친히 기르시므로

목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길러야 하며 그리스도 외에 자기 자신들을 위해 길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맡길 자가 없어서 "내 양 떼는 내가 돌보리라." 고 하면서, 예언자가 장차 다가올

악한 시대를 예언한 것처럼 장차 목자들이 없으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을 때, 모든 목자들이 그분 안에서만 하나가 되는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모든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고 그 목자의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양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자

기 목자를 따르며 이 목자 저 목자가 아닌 한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모든 목자들은 여러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그분 안에서 한목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

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시기를 호소합니다." 이렇게 양들은 온갖 분열과 온갖 이단

에서 정화된 이 목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그 목자를 따라갑니다. "내 양들은 내 리를 알아듣

고 나를 따라온다." (「목 자들 에 대한 강 론」 46, 29-3 0)


34. 우리 는 그리 스도 인이 고 또 지도 자입 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든 희망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이시고 참된 영광

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진리를 지금에서야 비로소 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을 인도하시고 기르시는 그분 양 떼의 한 부류입니다. 그러나 자기네들이 목자라고 불리우기를 간절히 원

하지만 목자로서의 직분 수행을 거부하는 목자들이 있기 때문에, 예언자가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들어 보기로 합시다. 여러분은 귀담아듣고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일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방금 이 독서 봉독을 잘 들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더불어 주석해 보고

자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견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주님 친히 우리가 진리를 전하도록 도와주실 것

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만을 말한다면 양 떼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이 되겠

지만,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바를 말한다면 그분은 당신이 원하시는 아무를 통해서라도 여러분을 당신 친

히 기르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

자들아, 목자들이 양 떼를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목자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길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목자들을 거슬러 내리시는 하느님의 첫 번 째 고발은 바로 이것입

니다. 그들은 제 자신만을 돌보고 양 떼를 기르지 않습니다. 양 떼를 기르지 않고 제 자신만을 돌보는 사람

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사도가 말하는 다음의 사람들입니다. "모두들 자기 이익만 찾고 그리스도의 일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당신의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세워 주신 우리는 (이 직분에 대한 셈 바

침은 정말로 두렵습니다.) 두 가지 점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지도자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고 지도자로

뽑히었다는 사실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면에서 볼 때에는 우리 자신의 선익을 보

아야 하고, 지도자라는 면에서 볼 때에는 여러분의 선익만 생각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아닌 하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혹시 더욱 쉬운 길로 여행할지 몰라도, 하느님께 도달하는 많

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짐이 가벼운 만큼 그만큼 더 홀가분하게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생활에 대해 하느님께 셈 바쳐야 하지만, 다음에 또한 지도자로서의 우리 직분

수행에 대해서도 셈 바쳐야 할 것입니다. (목자들 에 대한 강 론」 46, 1-2 )

35. 자기 자 신만 을 돌보 는 목자 들.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어떻

게 말하고 있는지 보기로 합시다.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

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다만 못

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씀에서 양을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이 욕심내는 것이 무엇이고 또 소홀히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욕심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젖이나 짜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누가 포도밭을 만들어 놓고 그 포도밭에

서 열매를 따먹지 않겠습니까? 또 도대체 누가 양을 친다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양

의 젖이란 하느님의 백성이 자기 지도자들에게 생계를 위해 바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말씀에서 사도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는 자기 손으로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길을 택하고 양의 젖을 짜 먹는 길을 찾지 않았지만, 그

래도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제정해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양의 젖을

짜 먹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자신의 동반자들인 다른 사도들이 수탈

해 버린 권리가 아닌 이 정당한 권리를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바울로는 더 나아가 응당히 자기 몫으로 받아야 할 것을 포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아야 할 것

을 포기했다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 받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로는 그 이상을 한 것뿐

입니다. 바울로는 상처 입은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간 그 사마리아인이 한 말을 반영해 주는지도 모릅니

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양들의 젖을 요구하지 않는 목자들에 대해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자비의 직분을 수

행함에 있어서 더욱 더 너그럽고 환대합니다. 이들 목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

니다. 우리는 그들을 칭송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목자들을 나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혜택

을 구하지 않았던 사도 자신도자기 양 떼가 메마르고 결실을 맺지 못하는 양 떼가 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양 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목자 들에 대 한 강론 」 46, 3-4 )

36. 바울 로의 모 범.
바울로 사도가 한 번은 진리의 증거 때문에 감옥에 갇혀 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형제들로부터 그 궁핍

을 해결할 생계 수단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감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여러분은

고맙게도 내 어려움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주었습니다."

바울로는 자기가 신자들에게 행한 선행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며 또 자신이 자기 자신만

을 돌보고 양 떼를 기르지 않는 목자들 틈에 끼어 들어가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형제들이 자기의 궁핍을

해결해 주는 것을 기뻐하기보다 그들이 열매 맺는 일에 대해서 기뻐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선행에서 무

엇을 구했습니까?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선물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일뿐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만족감을 누리기를 바

라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열매 맺지 못하는 신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로처럼 자기 손으로 벌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목자들은 신자들한테 생계에 필요한 모

든 것을 받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양들의 나약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목자들은 자신

들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 복음을 전파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자기 유익만을 찾지 말아야 하며,

사람들을 밝게 비출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이라는 빛을 발해야 합니다.

다음의 복음 말씀처럼 그들은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알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

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여러분이 집에서 등불을 켜놓으면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계속 부어 넣지 않겠습니까? 기름을 부

은 후 등불이 빛을 계속 비추지 않는다면 등경 위에 놓아두기보다는 더 이상의 수고의 필요 없이 부숴 버

릴 것입니다. 생계에서의 어려움은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고 사람은 그것을 줄 의무를 집니다. 그러나 복

음이 마치 팔아야 할 물건인 듯 그것을 전파하는 이들이 자기 생계를 위해 받는 것을 그 복음의 대가로 생

각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복음을 이런 식으로 판다면 가치로운 것을 헐값으로 파는 결과가 됩니다. 그들은 생계에 필요한 것을

신자들로부터 받되 자기 봉사에 대한 참된 상급은 주님에게서 기대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복음에 대한 사

랑 때문에 봉사하는 분들에게 제대로 보상할 수 없습니다. 목자들은 신자들이 구원을 받는 그 같은 원천에

서가 아니면 다른 데에서는 상급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목자들이 힐책받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무엇 때문에 고발당합니까? 양 떼들의 젖을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자기 양들을 돌보는 데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목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익이 아닌 자기 이익만 찾는 것입니다. (「목자 들에 대 한 강론 」46,4-5 )

37. 각자 는 자기 이 익을 찾 지 말고 그 리스 도의 이 익을 찾 아야 합 니다 .

지금까지 양의 젖을 짜 먹는 것이 무슨 뜻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는

것이 무슨 뜻인지 보기로 하겠습니다. 젖을 준다 함은 양식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양틸을 준다 함은 영예

를 주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고 양 떼를 제대로 기르지 않는 목자들이 신자들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즉 생활비를 제공받는 혜택, 그리고 영예와 칭송입니다.

옷이란 영예를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옷을 입어 알몸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는 연약합니다. 여러분을 지도하는 나라고 해서 다를 바 있겠습니까? 나도 육신을 가지고 있으며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먹고 잠자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태어나고 또 죽습니다. 여러분이 "나" 라

는 인간 그 자체를 두고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인간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에게 엄

청난 영예를 바칠 때 흡사 그의 나약성을 옷으로 가리우는 것 같습니다.

바울로 사도도 하느님의 착한 백성들에게서 이와 같은 옷을 얻어 입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느님의 천사와도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만일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나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큰 영예를 얻은 후 그들을 꾸짖는다면 그 영예가
혹시 거부되거나 감소되지 않을까 두려워, 길을 잘못 들어선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까? 만일 그렇게

했다면 자기 자신은 돌보고 양들은 제대로 기르지 않는 목자들의 부류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로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각자가 제멋대로 하

도록 내버려두자. 내 생계도 염려할 바 없고 내 영예도 안전하다. 젖과 양털, 이런 건 충분히 갖고 있다. 각

자 자기 길을 가도록 해주자." 그래, 각자가 자기 길을 간다고 할 때 당신의 모든 것이 안전하겠소? 그렇다

면 나는 당신을 지도자로 삼는 것을 거부하겠소. 당신을 백성 가운데로 돌려보내겠소.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아파하지 않겠소?"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그들한테 받은 영예를 잊어버린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그들에게서 받은 영접을

상기하면서 그들에게 자기를 하느님의 천사와도 같이 영접해 주었고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주었을 것이라고 중언합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그는 병든 양들을 찾아가 썩은 데를 잘라 내어 부패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합니다. "이제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나를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까?" 바울로는

우리가 먼저 본 대로 양들의 젖을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었지만 양들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지 않

았습니다. 그는 자기 이익을 찾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았습니다.(「목자 들에 대한 강론 」 46,6-

7)

38. 신자 들의 모 범이 되 십시 오.

주님은 이런 목자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후 그들이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양

들의 허물은 거의 보편적입니다. 튼실하고 살진 양들 즉 진리의 양식으로 튼튼해지고 하느님 은총의 풀을

잘 먹는 양들은 드뭅니다. 악한 목자들은 이런 양들마저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병들고 허약한 양들이나

길 잃고 헤매는 양들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한 튼실하고 살진 이런 양들을 죽

이려 듭니다. 그래도 이 양들은 살아 있지 않습니까?

네, 하느님의 자비로써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악한 목자들은 이 양들을 죽일 마음뿐입니다. "어떻

게 하여 이 양들을 죽이게 되는 것인가?" 하고 여러분은 물어 볼 것입니다. 악하게 살고 나쁜 표양을 줌으

로써입니다. 최고 목자이신 분의 제자 중에 뛰어난 하느님의 종인 디도에게 바울로가 한 다음 말은 조리

없는 말이 아닙니다. "그대는 스스로 모든 일에 있어서 좋은 행동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아무리 건실한 양이라 해도 자기 목자가 보통 악하게 사는 것을 볼 때 그는 하느님의 법에서 눈을 돌려

사람만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 지도자가 그렇게 산다면 나인들 그가 하는

것처럼 할 수 없단 말이냐?" 그 목자는 자기 스스로 그 양을 튼튼히 키우지 않았으면서도 튼실하거나 살진

것을 보면 자신의 악한 생활로 그것을 죽여 버리는데 다른 양들을 가지고 무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거듭 말씀드립니다. 양들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 굳건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도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하는 주님의 말씀에 굳게 매달려 살아 있다 해도, 신자들

앞에서 악하게 사는 목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자기의 행실을 보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양이 아직 살아남아 있다 해도 목자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양이 살아남아 있다 해도

그 목자는 여전히 살인자입니다. 흡사 색을 탐하는 자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을 때 여자는 비록

정결하지만 그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간음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에 대해 하신 말씀은 아주 명백합니

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그는 그 여자의

침실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의 내부 침실에서 이미 욕정으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지도하는 사람들 앞에서 악하게 사는 목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튼튼한 이들까지 죽이

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죽고 그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살아남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목자는

둘 다 죽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

나." (「목자 들에 대 한 강론 」 46, 9)

39. 다가 올 시련 에 대비 하여 라.

지금까지 악한 목자들이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잘 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등한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 보십시오.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어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

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건실한 것들을 파멸시키고 잡아 죽였을 뿐입니다. 양은 쉽게 병에 걸립니다. 용기

가 부족해 유혹이 다가올 때 주의하지 않고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쉽사리 넘어가고 맙니다.

게으른 목자는 이런 종류의 양들을 만날 때 다음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들아, 네가 주님을 섬기려면

스스로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굳게 가져 동요하지 말며 역경에 처해서도 당황하지 말아라." 이렇

게 말하는 이는 약한 자를 튼튼히 하고 그를 약한 자 대신 강한 자로 만들어, 이제 그가 이 말씀을 믿게 될

때 자기 희망을 이 세상의 번영에다 두지 않게 합니다. 그가 만일 이 세상에다 희망을 두도록 배운다면 번

영 그 자체로 말미암아 부패될 것이며 역경이 찾아 들 때 동요하여 끝장이 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세우는 이는 바위이신 그리스도 위에다 세우는 것이 아니고 모래 위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의 바위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아야 하고 쾌락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한 자는 다음 말씀을 들을때 튼튼해질 것입니다.

"세상의 역경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지만 네 마음을 주님에게서 멀리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거기서 너를 구

하여 주시리라. 주님은 수난 당하시려 오시고 죽으시려 오셨으며, 침뱉음 당하시려, 가시관을 쓰시려, 모욕

당하시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나무에 못 박히시려 오셨는데 그것은 네 마음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너를 위해 당하셨지만 네가 당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님이 당신 자신을 위해 당하신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해 당하신 것이다."

자기네가 말해 주는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임박한 시련에 대비시켜 주지 않을 뿐더러, 하느

님께서 세상에게 약속하지 않으신 이 세상의 행복을 약속까지 해주는 그네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

들이겠습니까? 주님은 이 세상이 다 끝나는 순간까지 수고에 수고가 오리라고 예고하셨는데, 당신은 그리

스도인으로서 이 수고에서 면제되기를 바랍니까? 당신은 바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더 많

은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목자여,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지 않고 당신의 이익만을 찾는 당신에게 사도 바울로가 위의 말씀을 하셨는

데, 당신은 다음의 이 말을 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온갖 좋은 것이 풍성히

내리리라.

그리고 자식이 없었어도 많이 두게 되고 그들 모두를 양육할 수 있으며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으리라." 목

자여, 이것이 당신의 건설 방법입니까?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에다 건물을 세우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세우고 있는 건물은 모래 위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

면 그것들은 당신이 세운 건물을 쳐서 무너뜨려 큰 파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래에서 끌어내다가 바위 위에 세워 놓으십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

람은 그를 그리스도 위에 기초 세워 주어야 합니다. 감히 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

고, 아무 죄 없이 당신의 빚이 아닌 다른 이의 빚을 갚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

님은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라는 성서 말씀을 믿도록 하십시오. 그가 매를 맞을 마음 채비

를 갖추지 않는다면 아들로 여겨지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목 자들 에 대한 강 론」 46,10-1 1)

제 3 장

시편 주해
40. 신적 의 사

"주님은 너희 모든 질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허물들이 나을 것입


니다. 여러분의 상처들이 많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질병보다 의사가 더 강하십니다. 지극하신 이에게

치유하실 수 없는 병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치료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의사의 손을 거부하지 마십

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인자를 받는 듯이 그분이 주시는

치료의 고통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치료의 고통을 참을 수 있다면 앞날에 회복을 완전히 얻을 것입니

다.

건강을 약속하시는 신적인 의사는 여러분을 속아지 않습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조차 지어내 주셨는

데 어떻게 새로이 창조될지 그분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오직

그의 손에서 치유를 끈기 있게 맡기십시오. 그분의 솜씨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먼저 창조하신 그

분이 무료로 틀림없이 여러분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병세가 심각해도 불구하고 의사의 능력을 인정하십시오. 여러분을 건전한 형상대로 내셨으니

여러분을 다시 치유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처방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이 그분의 형상으로 여러분을 창조해주셨기 때문에 꼭 여러분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치


유를 원해야만 되겠습니다. 그분께서 치유를 사절하는 이들을 고쳐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은 보다 더 기뻐 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의 손에 즉 여러분의자유의지로 여러분이 회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또 모든 이들에게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앓고 있는 모든 이가 여러분의 건강을 생각해 보십

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건강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구원 약물의 잔을 받으십시오. 그

리스도는 "여러분의 모든 질병을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로 선태만 한다면 여러분이 회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으나 우리 구원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하늘 높은데서 계시

는 몸의 머리이신 그분께서 그 몸의 지체들인 우리를 치유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상해 103,5-6 )

41. 예수 그리스 도께 서는 우리 를 위하여 기도 하시 고 우리 안에서 기도 하시 며 우리의 기도 를 받

아들이 십니 다.

말씀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말씀을 만물의 머리로 삼으신 것-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사람들

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체들로서 그 말씀에 결합시키

시어 당신의 아들이신 그 말씀을 사람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아버지와 같이 유일한 하느님이신 그분을 사

람들과 함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할 때 아드님을 하느님과 분리시키

면 안 되고, 또 우리의 기도는 그분의 신비체로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때 우리 머리이신 그분과 분

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 신비체의 유일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또 우리의 기도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기도 소리를, 우리 안에서 그분의 기도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언서

같은 데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하여 하느님께는 합당치 않은 수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을 때 우리

는 그것을 주저 없이 그리스도께 돌려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분을 통해서 만들어져 만물의 주인이심

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주저 없이 우리와 결합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음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분의 위엄과 신성을 바라봅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

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보다 높고 또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위대하고도

가장 뛰어난 하느님 아들의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달리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분

은 애통하시고 기도하시며 하느님께 찬양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성은 그분의 신성을 생각하는 나머지 그분이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데에

느려서 그런 말씀들을 그분께 돌리기를 주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선 당신 인성에 대해서 하시는 말

을 그분께 돌리는 것이 혹시 그분께 부당한 짓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

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으로서의 그분께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그분이 낮추어지셨다는 말을 들을 때 놀라

고 그. 뜻을 바꾸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는 것은 그분과 잘 어울리는 것이고 그분의 본

모습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잠에서 깨어나 신앙을 굳건히 보존합시다. 조금 전에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바라보았

던 그분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점에 주목합시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모습으

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나의 하느

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말씀을 당신 것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종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처음 경우에

는 창조주로서 나중 경우에는 피조물로서 하십니다. 자신은 변하시지 않은 채, 그분은 변해야 하는 피조물

이 되시어 머리와 몸처럼 우리를 당신 자신과 하나로 결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 안에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말하며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말씀하십니

다. (「시편 주 해」 에서 Ps 85, 1)
42. 그리 스도 의 고난 은 그리 스도 홀 로 받는 것 이 아닙 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을 지니신 한사람이십니다. 그분은 몸의 구원자이시고 또 몸의 지체이시기에

하나의 육신 안에, 하나의 목소리 안에, 하나의 고난 안에 둘이시고 이 죄스러운 세상이 다 사라져 버릴 때

하나의 안식 안에 둘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와 몸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리스도를 머리로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의 고난이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분의 지체 중 하나인 사도 바울로가 "그리

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여러분이 누구이든 간에,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건 지금 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그리스도의 지체라면 틀림없이 듣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이들에

게서 당하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고난입니다.

그 때문에 그 고난을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고난으로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고

흘러넘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머리로서 고난 당하셨고 또 이

제 당신 지체인 우리 자신 안에서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전체 고난에 기여하여야 하는 만큼 고난을 당

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역량에 따라, 그리고 어떤 일정한 고난의 규범에 따라서 일종의 공동 복

지에 우리가 기여해야 할 바를 기여합니다. 모든 고난은 이 세상이 끝날 때라야만 다 채워질 것입니다. 그

러므로 형제들이여, 악인으로부터 박해받은 의로운 사람들과 심지어 주의 오심을 미리 전하려고 주님에

앞서 온 이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도읍에 속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온 도읍은 의인 아벨의 피에서부터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말해 주고 있고, 그 후 같은

한 도읍은 요한의 피에서 시작하여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피와 또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피를 통하여 말해

줍니다. (「시편 주 해 Ps 61, 4)


43. 우리 는 그리 스도 안 에서 유 혹 받았 고 또 그분 안 에서 악 마를 눌 러 이겼 습니 다.

"하느님, 듣자옵소서, 내 부르짖음을. 내 비는 기도를 살펴 들어주소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

입니까? 한 사람인 듯하지만 정말 한 사람인지 봅시다. "시름없는 이내 마음 땅 극변들에서 당신을 부르고

있사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그분의 지체들이고 그리스도는 한 분이

시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같은 한 사람이 땅 극변들에서 부를 수 있겠습니까? 땅

극변들에서 부르는 이 는 다음 시편이 말해 주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게 맡기신 그 유산이 아니겠습

니까? "내게 청하라. 나는 이방인들을 네 유산으로 땅의 극변까지 네 소유로 주리라."

그러므로 땅 극변들에서 부르는 이는 이 그리스도의 소유, 이 그리스도의 유산, 이 그리스도의 몸, 이 그

리스도의 하나인 교회, 그리고 우리가 이루는 일치입니다. 무엇을 부릅니까? 위에서 말한 부르짖음입니다.

"하느님, 듣자옵소서, 내 부르짖음을. 내 비는 기도를 살펴 들어주소서. 이내 마음 땅 극변들에서 당신을

부르고 있사옵니다." 말하자면 부르짖는 것은 땅 극변들에서부터 즉 사방에서부터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부르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고뇌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통해 주님은 세

계의 모든 민족과 사랑들에게 당신이 위대한 영광 속에서가 아니라 깊은 근심과 유혹에 싸여 현존하신다

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

고 유혹을 당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유혹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월계관을 받지 못

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이겨내지 못하며 원수가 없거나 유혹을 당하지 않으면 투쟁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땅 극변들에서 근심으로 인해 부르짖지만 버림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간

적 육신에 생긴 일을 통해, 즉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신 그 몸 안에서 당신의 신비체인 우리 삶의 상

황을 예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체들도 머리가 이룬 것을 이루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악마에게서 유혹 당하셨을 때 그 유혹을 통해 우리가 당할 유혹을 상징적으로 예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의 복음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 당하셨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악마에게 유혹 당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유혹 당합니다. 왜

냐하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고 여러분은_그분에게서 구원을 얻었고, 즉 그분은 여러분

에게서 죽음을,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생명을, 그분은 여러분에게서 모욕을,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명예를,

그분은 여러분에게서 유혹을,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승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시 편 주해」 Ps 60,

2-3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혹을 당했다면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마귀를 쳐 이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리스도께서 유혹을 당하셨다는 사실에만 주의를 기울이는데, 왜 그분이 이 유혹을 이기셨다는 것은 생각


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유혹 당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 안에서 역시 승리하리라는 사실

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를 멀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혹 당하시지 않으

셨다면 유혹을 당하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이겨내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44. 하느 님의 약 속은 아 드님 을 통하 여 우리 에게 성 취됩 니다 .

하느님께서는 약속의 때와 그 약속을 성취하실 때를 정하셨습니다. 약속의 기간은 예언자들로부터 세례

자 요한까지였고 그 약속이 성취되는 기간은 세례자 요한부터 세말까지입니다. 우리에게 빚진 분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충실한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

도 큰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빚진 분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만으로 만족

하지 않으시고 글로써 약속이 묶이는 것을 택하시어 우리에게 일종의 약속 증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것은 하느님께서 약속을 성취하기 시작하실 때 우리가 그 증서에서 성취의 순서를 볼 수 있게끔 하시기 위

함이었습니다. 이미 몇 번 말한 바대로 예언자의 시기는 그 약속의 선포 시기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구원, 천사들과 함께 누리는 끝없는 축복의 생활, 시들지 않는 유산, 영원한 영광,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하늘에 잇는 당신의 거룩한 성소, 그리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의 부활로 인한

죽음의 두려움에서의 해방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마지막 약속들은 궁극적인 약속들입니다. 우리

의 모든 지향이 그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얻은 후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가 이를 때 생길 일의 순서를 감추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미 약속하시고 드러내

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사람들에게 신성을, 죽어야 할 이들에게 불사불멸을, 죄인들에게 의화를, 버림받은 이들

에게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멸성과 부패와 버림받은 상태와 연약성, 그리고 먼지와 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느님

의 천사들처럼 되리라는 이 하느님의 약속은 사람들에게 믿기 힘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글로서 계약을 맺으시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 충실성의 중재자로 어

떤 왕이나 천사나 대천사가 아닌 당신 외 아드님을 세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해서 당신이

약속하신 목적지까지 인도하실 길을 가르치고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가르쳐 주는 분으로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신 것만으로 만족치 않으시고

아드님 자신이 길 자체가 되게 하시어 그분의 안내로써 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 아드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시어 육식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

고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오르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실 분이 되시고 약속하신 것을 뭇 민족

가운데서 성취하려 하셨습니다. 또한 약속들을 성취하신 후 마지막 날 우리에게 다시 오시어 당신이 베풀

어 주신 것에 대해 셈 바치도록 하시고, 분노와 자비의 그릇을 구별하시며 버림받을 이들에겐 책벌을, 의

인들에겐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 일들이 갑자기 일어남으로 사람들이 공포에 떨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이 일들을 미리 믿고 기다리도

록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예언하시고,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미리 선포하셔야 했습니다. (「시 편 주

해」In p s. 1 09,1- 3)

45. 당신 의 소원 이 바로 당 신의 기 도입 니다 .

"애끓는 마음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오나이다." 인간의 귀가 포착할 수 없는 감추어진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거센 욕망이 마음을 사로잡아 그 마음에 상처를 입힘으로 그의 내적 고통이 귀로

들을 수 있게 외적 소리로 표현될 때, 그것을 듣는 사람은 그 원인을 찾아내고 싶어 하면서 "아마도 이러이

러한 일이 그에게 울부짖음을 낳게 했으리라. 아마도 이러이러한 것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라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 울부짖음을 보고 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그 원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울부짖음을 들을 때 대개 외적 소리 즉 으르렁대는 소리만을 듣고 마음속에 감추어진

울부짖음을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울부짖음의 원인을 누가 알고 있었습니까? 시편 작가는 덧붙여 말합니다. "내 모든 소원은 당

신 앞에 있나이다." 내 모든 소원이 마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있는 것


입니다." 당신의 모든 소원이 주님 앞에 있다면 감추어진 것을 보시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들어주실 것입니

다.

당신의 소원이 바로 당신의 기도입니다. 당신의 소원이 항구하다면 당신의 기도도 항구합니다. 사도 바

울로가 "끊임없이 기도하라." 고 말할 때 그 말씀은 무익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도의 권고를 따르

려 한다면 계속해서 무릎을 꿇거나 바닥에 엎드리거나 또는 손을 쳐들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법이라면 그야 물론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소원이라는 내적 기도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영원한 안식일을 바라면서 한다면 당신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셈입니다. 기도를 중단하

고 싶지 않다면 끊임없이 소망하십시오.

당신의 소원이 끊임없다면 당신의 목소리도 끊임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중단할 때 침묵에 빠져 들게

됩니다. 누가 침묵에 빠져 들었습니까? 성서가 말하는 바와 같이 "악이 늘어나 사랑이 식어진" 이들입니

다.

사랑의 냉각은 마음의 침묵이며 사랑의 불타는 열정은 마음에서 나오는 함성입니다. 당신 안에 사랑이

언제나 머문다면 당신은 항상 함성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항상 함성을 지른다면 항상 소망하고 있는 것이며

또 소망하고 있다면 당신의 생각은 그 안식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모든 소원이 당신 앞에 있나이다." 만일 소원이 주님 앞에 있고 울부짖음이 그분 앞에 있지 않다고 하

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당치 않은 일입니다. 소원의 소리가 울부짖음인데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

까?

따라서 시편 작가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울부짖음은 당신께 감추어지지 않나이다." 주님께는

감추어져 있지 않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겸손한 종은 어떤 때 "내 울

부짖음이 당신께 감추어지지 않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지만 어떤 때에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소원이 사라졌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소원이 있

으면 울부짖음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귀에 늘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귀에는 끊임없이

도달합니다. (「시편 주 해」 In ps. 37, 13-1 4)


46. 그리 스도 의 몸 전체 가 겪는 수 난.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소서." 이와 같은 말은 우리 모두가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나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전체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께

서 육신을 가지고 계실 때 드리셨습니다. 그분은 이승에 계실 때 당신의 육신적인 몸으로 성부께 기도 드

리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는 동안 핏방울이 그분의 온 몸에서 흘러내렸습니다. 복음서에 "예수께서는

열렬하게 기도하셨다. 그러는 동안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몸에서 흘러내리는 이 피는 온 교회의 순교자들이 겪는 수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소서. 내 항상 당신께 부르짖을 때 이 목소리 귀

여겨 들어주소서." 그런데 여러분은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라고 외침으로 기도하는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까? 부르짖은 후에 이것으로 마음이 흡족함을 느끼면 안 되겠습니다. 환난이 끝나면 부르짖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환난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마지막 날까지 계속된다면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

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소서."라고만 기도해서는 안 되고 "내 항상 당신께 부르짖을 때 이 목소리 귀

여겨 들어주소서."라는 기도도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 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 제사 같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기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분이 바치시는 기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상 주님은 저녁이 다가오고 있을

때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다시 얻으실 당신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우리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아

니었습니까? 성부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이시고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신 그분을 언젠가 한번 멀리하고 버리

셨는데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 한 사도의 말대로 우

리의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의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이 바로 저녁 제사요 주님의 수난이고 주님의 십자가이며 구원의 희생 제물의 봉헌이고 하느님의 마

음에 드시는 번제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 저녁 제사는 아침 제사가 되었습니다. 믿는 이의 마음

에서 솟아오르는 기도는 거룩한 제단에서 향이 피어오르듯 순수하고 바르게 올라갑니다. 주님의 향기보다

더 향긋한 것이 없습니다. 믿는 이는 모두 이 향기를 지녀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

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시편 주 해 (P s 1 40,4-6 )

47. 파스 카 축제 의 알렐 루야 .

하느님께 대한 찬미는 현세 생활에서 우리 묵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후세 생활에서도 찬미는 우리

기쁨의 영원한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세 생활에서 그러한 묵상으로 스스로 준비하지 않는

다면 아무도 후세 생활에 들어갈 자격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 생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

하고 또한 그분께 청원합니다. 우리의 찬미는 기쁨으로 표현되고 우리의 청원은 탄식으로 표현됩니다. 우

리는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미래에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분은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기에 우리는 희망 안에서 기뻐하지만 약속하신 것을 아직 받지 못했기에 갈망으로 탄식합니

다. 약속받은 것을 이를 때까지 그것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침내 탄식은 끝나고 찬

미만이 들어설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역사에는 두 가지의 시기가 있습니다. 첫 시기는 이 생활에서 당하는 유혹과 시련의 현 시기이

고 두 번째 시기는 영원한 안전과 기쁨의 미래 시기입니다. 부활 축일전과 후의 두 가지 시기가 제정된 것

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활 축일 전 시기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을 의미하고 부활 후의 현재 시기

는 후세에 누릴 행복을 의미합니다. 부활축일 전에 경축하는 것을 우리는 현세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부

활 축일 후에 경축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첫 시기를 단식과

기도로써 지내고, 지금 이 시기에는 단식을 풀고 찬미 속에 경축합니다. 이 때문에 지금 우리는 알렐루야

를 노래합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이 두 가지 시기를 모두 상징해 주고 표현해 줍니다. 주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부활과 그의 영광은 우리가 받을 생명을 가

리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이제 여러분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독려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알렐루야" 를 노

래할 때 우리 자신들을 서로 독려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주를 찬미하라." 고 할 때에 그들도 여

러분에게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두 다 서로서로 격려하고 격려하는 것을 실행합니다.

여러분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입과 목소리로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양심과 생활과

행동을 통해서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우리는 교회에 모일 때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누가 교회에서 일터로 돌아올 때 어느 의미로 보면 하느님

께 대한 찬미를 중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한 생활을 중단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계속 찬미하는 것입니

다. 여러분은 정의와 하느님의 뜻에서 돌아설 때에만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중단하게 됩니다. 만일 선한

생활에서 결코 돌아서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입술이 잠잠하다 해도 여러분의 생환은 소리 높여 말하고 하

느님의 귀는 여러분 마음의 박동을 듣습니다. 우리의 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만 하느님의 귀는 우리

의 생각까지 듣습니다. (「시편 주 해」 Ps 148, 1- 2)

48. 주님 께 멋진 노 래를 부 르고 기 쁨의 노 랫가 락을 읊 으십 시오 .

"비파로 주님께 감사드리며, 십현금 맞추어 읊조리어라. 새로운 노래 불러 찬미하여라." 새 노래를 알게

되었으니 낡은 것을 벗어 버리십시오. 새사람, 새 계약, 새 노래. 새 노래는 낡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

습니다. 새 노래는 새 사람들만 즉 은총을 통해 낡은 것에서 새로워져 하늘나라의 새 계약에 속하는 사람

들만 배웁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은 이 하늘나라를 갈망하고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입으로써가 아니

라 생활로 부르도록 합시다.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멋진 가락을 읊으십시오."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어떻게 하

느님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부르십시오. 그러나 음에 맞지 않게 부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당

신 귀에 거슬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형제들이여, 멋진 가락을 읊으십시오. 누가 당신보고 음악 전문가 앞에서 그의 마음에 들도록 노래하라고

한다면 음악 기교에 대해 별 준비가 없는 당신은 그 전문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말

미암아 노래할 때 벌벌 떨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음악 전문가는 잘 인식

하고 비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음악 평론가이시고 만사를 일일이 살펴보시며 만사를 잘

들으시는 하느님 앞에 가서 훌륭히 노래 부를 자신감을 지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도 완

전한, 귀에 거슬리지 않는 멋진 노래를 부를 기교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다음 노래의 기교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가사 즉 당신

의 내적인 정감을 알려 주는 듯한 그런 말들을 찾는 데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쁨의 노랫가락

을 읊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있어 훌륭히 노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

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을 언어로써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추수할 때나 포도를

거둘 때나 어떤 일을 열심히 할 때 노래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즐거움을 어떤 가사로써 표현하지만,

그 다음에는 감흥이 고조되면 말로써는 그 즐거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사 없는 가락으로

감흥을 털어 버립니다. 이것은 기쁨의 노 fot 가락을 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기쁨의 노랫가락은 마음이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출하게 하는 가락입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아니라면 이 기쁨의 노랫가락은 누구에게 더 마땅히 읊을 수 있겠습니까? 실상 당신이 말

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은 표현 불가능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말로써 표현은 못해도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면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때 마음은 말의 도움 없이 기쁨으로 펼쳐져 그 기쁨의 광대함은 말의 한계를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멋진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시편 주 해」 Ps 32, s erm o 1 ,7- 8)
49. 양 우리 밖 에 있는 사 람들 도 그들 이 원하 든 원하 지 않든 우 리 형제 들입 니다 .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사랑을 보여 주기를 권고합니다. 여러분 서로에게 뿐만 아니라 아

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외교인이건 우리에게서 갈라져 우리와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그

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이건 양 우리 밖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 사랑을 보여 주기 바랍니다. 형

제들이여, 그들을 우리 형제들처럼 마음 아파합시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하튼 그들은 우리 형제

들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중지하게 되면 그때에만 우리 형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가 어떤 사람에 대해 말했습니다. "너희는 '우리형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아니

다, 우리는 너희의 형제들이다.' 하고 대답하여라." 예언자는 누구를 두고 이 말을 하였겠습니까? 외교인들

입니까? 아닙니다. 성서와 교회 관습에 따라 외교인들을 형제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유다대인들을 두고 이 말을 하였겠습니까?

바울로 사도의 글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그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

인을 뜻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도리어 서로 억울하게 해주고 속여먹습니다.

더구나 형제들끼리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

우리를 보고 "너희는 우리 형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외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때

문에 자기네들이 베푸는 세례가 우리에게는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자기네들의 형제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유가 여기 있고 또 그들의 오류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왜 우리를 보고 "그들에게 '너희는 우리 형제들이다' 라고 대답하라." 고 말합니까?

그들이 베푸는 세례를 우리가 반복하지 않는 세례와 같은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들은 우리

세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형제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한편 우리는 그들의 세례를 반복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세례와 같은 것이라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너희는 무리 형제들이다." 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우리를 찾고 왜 우리를 원하느냐 ?" 고 묻는다면 우리는 "너희가 우

리 형제들이기"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또 이렇게 반응을 보일지 모릅니다. "가버려라. 우리

는 너희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

다. 우리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같은 몸에 속하며 같은 머리 아래 있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당신의 젖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당신의 빵으로 견고하게 해주시는 분의 사랑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자비를 두고 여러분께 권고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위대한 사랑과 풍성한 자비

를 보여 줄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바른 이성을 되찾게 하시어 그

들이 진리를 반대할 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청합시다.

그들에겐 반감의 약점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반감이란 강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약합니

다. 연약한 사람과 세속적으로 지혜로운 자와 "육적인 사람"을 위하여 다시 간청합니다. 그들은 우리 형제

들입니다. 그들의 성사는 우리와 함께 거행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거행하는 성사와 같습니다. 그들이 하는

"아멘"은 우리와 함께 하지는 않지만 같은 "아멘"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위한 사랑을 모두 쏟아 하느님

께 기도하십시오. (「시편 주 해」 Ps 32, 29)

50. 어서 와 , 주님의 산 에 올라 가세 .
"우리가 들은 그대로 우리가 보았노라. "복된 교회여! 너는 듣기도 하고 보기도 했도다. 약속을 들었고 이

제 그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는도다. 예언서에서 들었고 이제 복음서에서 보고 있도다. 현재 완성에 이

른 모든 것은 과거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도다.

교회여, 네 눈을 들어 세계를 두루 응시해 보라. 땅 극변에까지 퍼져 있는 네 유산을 바라보라. 성서에

"세상의 임금들이 모두 다 조배하며 만백성이 그이를 섬기리이다. " 고 예언자가 말한 것이 실현된 것을 보

라. "하늘들 위에, 하느님, 나타나소서. 온 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 이라는 예언자의 청원이 성취된

것을 보라. 그 손발이 못에 쩔리우고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주사위를 던져 옷을 나눠 가진 그분을 보라.

땅 위에 거니실 때 사람들이 멸시했던 그가 하늘에 좌정하시고 계심을 보라. "땅이란 땅 끝마다 돌이켜 주

님께 돌아오고, 만백성 온갖 족속이 당신 앞에 절하오리다." 는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라. 이 모든 것을 보

고 기려 외쳐라." 우리가 들은 그대로 우리가 보았노라."

교회여, 너는 응당히 뭇 백성 가운데서 호출 되었도다. "듣거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이라. 네 겨레와

아비 집을 잊어버려라." 듣고 보라, 우선 보지 못한 것을 듣고 후에는 들은 것을 보게 되리라. 주께서 말씀

하신다. "내 모르던 백성이 나를 섬기고 내 말을 듣자마자 복종했도다." 그들이 "듣자마자 복종했다면" 먼

저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저희에게 일일이 이야기해 준 일이 없었던 것을 그들이 보겠고 그들이

본 적이 없는 것을 새로 이해하게 되리라." 는 구절은 또 무슨 말입니까?

예언자들의 파견을 받지 못한 이들이 앞서서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이해했지만, 즉 예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 이들은 후에 그 말을 듣고 놀랐지만, 반면 예언자들의 파견을 받은 이들은 성서를 가지고 있

었으나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계약의 조문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유산을 얻지 못했기에 뒤에 처져 있었습

니다. 그러므로 "들은 그대로 보았노라." 라는 말씀 역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만군의 주님의 도성에서, 우리의 하느님의 도성에서" -바로 거기서 우리는 듣고 또 보았습니다. "하느님

이 도성을 영원히 굳히셨습니다." 아무도 "보라,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보라, 그가 거기에 있다." 고 뽐

내면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이 시편에서 하느님께서는 교회

에 일치를 약속하셨습니다.

"왕들이 함께 모여 왔고" 분열로 말미암은 흩어짐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도

성인 교회가 혹시 언젠가는 전복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도성

을 영원히 굳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기초를 영원히 굳히셨다면 이 기초가 무너질까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시 편 주해 」에 서(Ps 47, 7)


제 4 장

요한 복음 .서간 주해
51. 한 사마 리아 여 인이 물 을 길러 왔 다

"한 여인이 왔다. "이 여인은 아직 의화 되지는 않았지만 의화 되려고 하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바

로 오늘 복음 내용입니다. 그 여인은 무심코 와서는 예수를 만나고 주님은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무엇을 하는 여인이었고 왜 물을 길러 왔는지 알아봅시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 민족

에 속하지 않는 민족으로서 외국인이었습니다. 교회의 상징인 이 여인이 외국인이었다는 것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유대인들에게는 외국인이었던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를 표시하는 그 여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인식하며 하느님

께 감사드립시다. 그 여인은 본래 실재가 아니고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상징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

기 때문에 실재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우리에게 자신을 상징으로 놓아 주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

다. "그 여인은 물을 길러 왔다."일반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그 여인도 단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였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가고 없었다. 사

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상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

리아인의 그릇조차 사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물동이를 가지고 왔을 때 유대인이 와서는 다른

유다인과는 달리 마실 물을 달라고 청하므로 그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마실 물을 청했지

만 주님이 참으로 목말라 하신 것은 그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들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

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

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마실 물을 청하시고 또 마실 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결핍 상태를 표시하시고 만족할 정도로 줄 의향이 있는 사람처럼 풍요를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선 말씀하

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네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하

느님이 주실 선물은 성령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에게 넌지시 말씀하시면서 조금씩 그 여인 안에 들

어가시며 교훈을 주십니다. 이 권고 말씀보다 더 감미롭고 더 자비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


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

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그 여인에게 주시고자 하는 물은 확실히 성서에 기록된 물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나이다. 그런데 "당신 진미의 강물을 마시게 된" 이들이 어떻게 목마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풍족한 음식과 성령의 충만함을 주겠다고 제의하시지만 그 여인은 아직 깨닫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결핍된 가운데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인은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그 여인은 물이 필요하기에 수고를 해야 되지

만 나약하기 때문에 그 수고를 피하려 했습니다. 그 여인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들었더라면! 그 여인의 고생이 없어지는 것, 이것

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그 여인에게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아직 그 말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 복음 주 해」 Tract. 15, 10- 12. 16-1 7)

52. 그리 스도 는 빛과 진 리와 생 명에 로 인도 하는 길 입니 다

주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이 몇 마디 말씀은 부분적으로 명령이고 또 부분적으로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주십사고 우리가 요청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염치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도록 먼저

주님이 명하시는 것을 따르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 날에 주님이 이렇게 꾸짖으시며 말씀하실 것

입니다. "내가 약속한 것을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너는 내가 명한 것을 행했느냐?" 주 하느님이여, 당신은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명했노라." 여러분은

하느님에게서 삶에 대한 권고를 찾았습니다. 이 삶의 권고는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나이다."라고 성서에

서 말하는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시다. 그분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사슬들을 부숴 버리도록 합시

다. "당신이 제 결박을 푸셨나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그 결박을 풀어 주시는 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누


가 그 쇠사슬을 풀 수 있겠습니까? 시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로잡힌 이를 풀어 주시고 억눌린

이를 일으켜 주시도다."

그리고 풀려지고 일으켜진 이 사람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나오는 그 빛 외에 또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주님

은 눈먼 자에게 빛을 주십니다. 형제들이여, 지금 우리 눈은 믿음의 약을 발라 회복되어 빛을 봅니다. 그런

데 주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쳐 주실 때 먼저 당신의 침을 흙과 섞으시어 그 사람의 눈에 발

라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담 때문에 눈먼 자로 태어났으므로 주님에게서 시력을 되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침과 흙을 섞으셨습니다. 즉 "말씀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

다."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오리라." 하는 예언에 따라 그분은 침과 흙을 섞으셨습니다. 그분은 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얼굴을 서로 맞대고 바라볼 때 그 진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누가 감히 기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불완전하게 알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또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

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

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놀

라운 약속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은 이렇게 물어 볼지 모릅니다. "나는 그분을 사

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길로 그를 따라야 합니까?" 여러분의 주 하느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진리를 갈망하며 생명을 열렬히 원하는 여러분은 틀림없이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은 말로 구했을 것입니다. "진리는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귀중한가! 내 영혼이 거기에 도

달할 길만 있다면!"

정말 어떤 길을 통해서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

오. "나는 길이다." 여러분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먼저 걸어야

하는 길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 목적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다. 또 나는 진리이고 생명이다." 아버

지와 함께 계시기에 주님은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실 때 길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보시고 "너희가 진리와 생명으로 가기 위해 먼저 길을 찾도록 노력하라."하고 말씀하

시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이여! 일어나시오. 길 자체께서 여러분에게 오시어 여러분을 잠에서 깨우셨습

니다. 여러분이 진정 잠 깨었다면 일어나 걸으십시오. 여러분은 아마 걸으려고 하지만 발이 아프기에 걸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왜 발이 아픕니까? 발이 탐욕으로 충동되어 거칠은 길을 달려왔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절름발이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보라, 나

는 튼튼한 발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길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은 맹인에게 시력을 되찾아 주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한 복음 주 해」 Tract . 3 4,8-9 )

53. 완전 한 사랑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여야 하는 완전한 사랑을 주님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

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리고 요한은 서간에서 다음과 같

이 결론짓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

들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즉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

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이 이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능한 분

과 식탁에 앉게 되거든 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라. 그리고 너도 그만한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라." "능한 분의 식탁"이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데가 아니

겠습니까? "그 식탁에 앉게 되는 것"이란 그 곳으로 겸손히 다가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아라."는 말은 위대한 은총의 가치를 올바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너도 그만
한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라."는 말은 내가 이미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생

명을 바치셨듯이 우리도 또한 우리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베드로

도 이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

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만한 식탁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복된 순교자들은 불타는 사랑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분들의 기념제를 공허하게 거행하지 않으려면, 또 그분들이 영하여 충족한 잔

치인 주님 식탁에 뜻있게 다가가려면, 우리도 그분들처럼, 받은 대로 주고자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거행하는 순교자들에 대한 기념제는 안식을 누리고 있는 다른 죽은 이들에 대한

기념제와는 다릅니다. 즉 우리가 순교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바짝 좇아

갈 수 있도록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사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완전한 사랑에 도달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식탁에서 받은 똑같은 사랑의 증거를 형제

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순교의 피까지 흘린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주 그리스도와 동등한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목숨을 바칠 권한과 다시 되찾을 능력

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원하는 만큼 살 수 없으며 원치 않는다 해도 죽어야 합니다. 그분은

죽으심으로써 당신 안에서 죽음을 멸하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죽음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분의 육신에는 부패가 없었지만 우리 육신은 부패된 후 세말에 가서 그분을 통하여 불멸을 입을 것입니

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그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

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떠나서는 생명을 누릴 수 없는 포도 가지인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로 주셨

습니다. 형제들이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해도 순교자의 피는 형제들의 죄 사함을 얻도록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당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

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양이 아니라 즐거워해야 할 기쁨의 연유를 주셨습니다. 순교자들이 형제들을 위

해 자기 피를 흘렸을 때 이것은 자신들이 주님의 식탁에서 받은 대로 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

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요한 복음 주

해」Tract. 84, 1-2 )


54. 교회 는 베드 로가 고 백한 그 반 석 위에 세 워져 있 습니 다.

하느님께서는 불쌍한 인류를 끊임없이 위로해 주시지만 이 일반적 위로 외에 또 다른 특별한 위로를 주

시고자 하셨습니다. 때가 차자, 즉 그렇게 할 시간이 이르렀다고 하느님께서 생각하실 때, 그를 통하여 만

물을 창조하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사람이 되게 하시고,"인간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재생의 물을 통하여 온갖 죄의 씻음을 받은 이들이 영원한 단죄에서 해방되고, 믿음

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시련

속에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육체적 영신적 위로를 얻어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앞에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간다 해도 이 현세 생활에서의 나약성

때문에 아무 죄 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슬서." 하고 청하는 죄의 용서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은

애긍 시사라는 유익한 치료제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인생의 역경에 직면하는 동안 복된 희망 속에서 이것

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므로 이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한 인간이었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더 풍부한 은

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사도, 첫 사도였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

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온 교회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현세에서 여러 가지 시련들, 말하자면

폭풍, 심한 비 그리고 태풍으로 흔들리지만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오는 이름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먼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이 뜻하시

는 바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으며 그

기초 위에 베드로 자신도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이미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베드로를 통하여 천국의 열쇠 곧 죄를 묶고 풀 권세를 받았습니

다. 이처럼 교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름으로써 악에서 구출되고 죽기까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

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더 잘 따르게 됩니다.


(「요 한 복음 주 해」 Tract . 1 24, 5)

55. 새 계명 .

주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 서

로 사랑하여라."

그런데 이 새 계명은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는 하느님의 옛 율법에 이미 들어 있

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왜 주님은 이 말씀이 분명히 옛 것인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십

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옛 것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기에 새 계명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

까? 네 그렇습니다. 이 계명이 말하는 것을 잘 듣고 또 특히 잘 실천하는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보통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육적인 사랑과 구별하십니다. 이 사랑

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씀하실 때의 그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사랑은 심지어 옛 의인들과 성조들 그리

고 예언자들까지도 새롭게 했습니다. 후대에는 사도들을 새롭게 했고 지금은 이방인들을 새롭게 하고 있

습니다. 이 사랑은 전 세계 모든 민족으로부터 하느님 외아들의 새로운 신부의 몸인 새 민족을 만들어 냅

니다. "하얀 옷으로 단장하고 치솟는 그 여인이 누구인가?" 라는 아가서의 말씀은 이 사랑을 두고 하는 말

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새로워졌기에 하얀 옷으로 단장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새 계명이 아닙니까?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서로서로에 관심을 갖습니다. 만약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모든 지체들은

그와 함께 고통을 받고 또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그와 함께 즐거워합니다. 교회는 "나는 너

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 서로 사랑하여라." 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잘 지키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명하시

는 사랑은 서로에게 해가 되는 더러운 사랑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에게 단순한 인간으로서 베푸는 그런 사

랑도 아닙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백성과 자녀들로서 그리고 그분 외 아드님의 형제들로서 가져야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즉 욕망을 성취해 주고 그 욕망의

참된 만족을 가져다 줄 종말에로 이끄는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실 때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욕망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고 말씀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당

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함께 묶으셨으며, 지체들을 함게 묶으심으로 해서 이 부드러운 유대 속에 우리가 그

뛰어난 머리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 복 음 주해 」Tract. 65, 1-3 )


56. 두 가 지 생활 .

교회는 계시를 통해서 알려지고 권고된 두 가지 생활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을 통한 생활이고, 다

른 하나는 하느님을 직접 바라보는 생활입니다. 하나는 현재의 순례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삶의 생

활입니다. 하나는 수고의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휴식의 생활입니다. 하나는 여정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이

고 다른 하나는 본향에서 실현되는 생활입니다. 하나는 행위와 수고의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관조라는 보

상을 받는 생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첫번째 생활을 나타내 주고 사도 요한은 두 번 째 생활을 나타내 줍니다. 첫 번 째 생활은

지상에서 진보하여 이 세상 마지막까지 지속되고, 두 번 째 생활은 세말에 완성되고 후세에는 끝이 없습니

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시고, 반면 요한에게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가 남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십니

다.

말하자면 "베드로, 너는 잠시 동안 고통을 당하는 데 있어 나를 본받아 따라야 하고, 요한 너는 내가 영원

한 축복을 가지고 올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완성을 지향하는 활동은 내 수난

을 본받아 또 나를 따름으로 되는 것이고, 시작한 관조는 내가 올 때까지 지속되어야 하고 내가 올 때 완성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죽기까지 인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완전한 지혜는 그리

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 죽음의 땅에서는 세상

의 고통을 겪고 저 생명의 땅에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남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라는 말을 "남아 있다" 또는 "살아 있다." 라

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기다리다" 또는 "기대하다." 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리

스도께서 요한에게 하신 이 말씀은 지금 성취되지는 않고 다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성취되겠다는 것을

뜻하고, 베드로에게 하신 "너는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은 기대하는 것이 성취되려면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

를 따르는 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두 사도들을 지나치게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두 사도 모

두에게서 실현되었고, 요한에게 하신 말씀도 두 사도에게서 모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

하면 베드로는 따랐고 요한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실제 신앙생활을 보면 두 사람 모두 이 비천한 생

활의 고통을 겪었고 또 후세 행복의 은혜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두 사도들에게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정배인 거룩한 가톨릭교회

도 그러합니다. 온 교회는 내세의 기쁨을 이루려고 현세 생활의 유혹을 견디어 이겨 나가야 합니다. 베드

로와 요한은 각각 이 두 가지 생활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둘 다 신앙 안에 현세 생활을 거쳐 지나갔고 또

둘 다 영원한 행복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모든 성도들의 죄를

묶고 풀 권리를 받아 이 현세의 폭풍우 속에서 그들을 인도해 나갈 책임을 맡았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그리스도의 품에 머리를 기대어 모든 성도들에게 그 신비스러운 생명의 안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묶고 푸는 사람은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온 성교회입니다. 태초부터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시었던 그 말씀과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진리를 알게 도니 사람도 요한만이 아닙니다. 이 세

상에서 주께서 오실 때까지 거울처럼 희미하게 들여다보고 하느님 나라에서 눈으로 직접 바라볼 그 신비

들을 주님 품의 샘에서 마신 사람은 요한만이 아닙니다. 주님 친히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하셨고 모든 사

람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그것을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요한 복 음 주해 」Tract. 124, 5. 7)

57. 사랑 의 이중 계 명.

주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의 교사로서 세상에 오시어, 예언의 말씀대로 "요약된 말씀을 하시면서" 모

든 율법과 예언서는 사랑의 두 가지 계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 두 가지 계명이란 어떤 계명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 두 가지 계명은 우리가 다 잘

알아야 하는 계명들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언급할 때만 그것이 마음에 떠오르면 안 됩니다. 사랑의

계명은 우리 마음에 항상 새겨져 그 마음에서 없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어디서나 하느님과 이

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열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사랑을 항상 깊이 생각하고 깊이 묵상하며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에 옮기면서 성

취해야 합니다. 계명의 면에서 볼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먼저 나오지만 실천의 면에서 볼 때 먼저 나오

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은 먼저 이웃에 대


한 사랑, 그 다음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이런 순서대로 명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랑을 명하시고 그 다음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

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사랑하라." 는 이 계명을 들을 때 나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응답할는지도 모르겠습니

다. "먼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그분을 보여 주십시오." 라고. 거기에 대해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

다." 라는 요한의 말 외에 나에겐 대답할 다른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을

뵈올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

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

랑이 어디서 나오는지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사랑할 수 있는 그만큼, 여러분은 이 지상에서 하느님

을 뵙게 될 것입니다.

우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즉 "가진 빵을 굶주리는 사람과 나누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고 여러분 집안사람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하면 무엇을 얻겠습니까? "그때 너희 빛이 아침 햇살처럼 비치게 되리라." 여러분의 빛

은 바로 여러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밤이 지나고 여러분에게 오실 "아침 햇빛" 이십니

다. 그분은 뜨지도 지지도 않으시고 항상 빛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일에 마음을 쓸 때 삶의 여정에서 진보를 이룹니다. 우리 여정의

목적이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열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 아닙니까? 우리

가 아직 주님이 계시는 데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이웃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함께

머물고자 하는 그 하느님이 계시는 데에 도달할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 여정을 밟고 있는 이웃을 도와주

십시오. (「요한 복 음 주해 」Tract. 17, 7-9 )


58. 보라 , 나는 내 백성 을 구하 리라 .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당신을 억지로 끌어들

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은 사랑의 힘으로도 이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서 말하는 사람

이라도 신적 사정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는, 위의 성서 말씀을 반박하면서 우리 보고 하느님이 나를 이끄신

다면 내가 어찌 내 의지로 믿을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말하는 이들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

다. 이런 이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의지로만 믿는 게 아니오. 기호로 말미앙아도 이끌리는

법이오."

기호로 말미암아 이끌리는 게 무엇입니까? 시편은 말합니다.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

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 그러니까 마음속에는 천상의 빵에 대해 구미를 당기게 하는 어떤 기호가 있

는 것입니다. 옛 시인이 "각 사람은 자신이 지닌 기호에 의해서 이끌려진다."

즉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호에서,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즐거움에서 이끌린다고 말

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를 뜻하는 진리와 축복과 정의와 영원한 생명을 즐거워하는 이는 그리스도께로

이끌린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의 감각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은 어떤 기호를 갖는 것이 허락될 수 없단 말입

니까? 영혼이 기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시편 작가는 어떻게 다음 말씀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여, 인

간의 자손들이 당신 날개 그늘로 숨어드나이다. 당신 집 기름기로 그들은 흐뭇하며, 당신 진미의 강물을

마시우시나니,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사랑하는 이를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언가 욕구하는 이, 배고파하

는 이, 목말라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집의 샘물을 갈망하며 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를 보여 주십시오.

그들도 내가 하는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냉냉한 사람에게 이 말을 한다면 그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양에게 새파란 풀잎을 보여 주면 그것이 그 양을 끌어들입니다. 소년에게 호도를 보여 주면 뒤따라옵니

다. 자기가 잡으려고 달려가는 그 사물에 의해 이끌리고, 그것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이끌리며, 아무런 육

체의 강박도 엄이 마음의 기호로 인해 이끌립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지닌 기호에 의해서 이끌린다." 는

말은 사실인데, 지상의 쾌락과 즐거움을 누구에게 보여 줄 때 그것이 참으로 사람을 이끈다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끄시지 알겠습니까? 영혼이 진리보다 더 열

렬히 갈망하는 것이 또 있겠습니까? 사람이 다 충족시키지 못하는 식욕을 가지는 것과 진정한 것을 식별해

내는 건전한 내적 미각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지혜와 정의와 진리와 불사불멸의 생명을 먹고 마시기 위해

서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그러한 것입니

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세에서 그럴 것입니다.) "나는 그가 사랑하는 것을 주고 그가

희망하는 것을 주리라. 지금 보지 못하면서도 믿는 것을 장차 보게 되리라. 지금 배고파하는 것을 장차 먹

을 것이고 지금 목말라하는 것을 장차 마시게 되리라. 그런데 언제 어디서 그렇게 되셨는가? 죽은 이들이

부활할 때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주해 」Tract . 26, 4-

6)

59. 생명 자 체께 서 육신 으로 나 타나 셨습 니다 .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말씀을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사람

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육신이 되신 이 말씀께서 육신을 취하신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사가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라고 말할 때 표현하는

대로 말씀의 존재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방금 들은 서간의 말씀은
다음의 복음서 말씀으로 확증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

과 함께 계셨다."

여기에는 "생명의 말씀"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말씀" 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손으

로 만져 본 그리스도의 실제 몸이 아니고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

니다. 그래서 요한은 덧붙여 말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지만 아직 사람

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당신을 보고 천상 빵으로 받아 모시는 천사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

데 성서는 무엇을 또 말합니까? "마침내 사람들도 천사의 빵을 먹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심으로 영적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

이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어 영혼이 치유되었습니다. 사실 말씀은 영적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육

신은 육신의 눈으로도 봅니다. 우리가 육신을 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씀을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시어 우리 마음을 고쳐 주심으로 말씀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복음사가는 또 말합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

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라는 이 말을 좀더 명확히 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셨습니다." 라는 말입

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어 보십시오."우리가 보고 들

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사도들은 육신으로 현존하시는 주님 자신을 보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

는 말씀을 실제로 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듣기는 했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직접 보고 들은 사도들보다 덜 복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만일 우리가 덜 복된 사람들이

라면 복음사가는 다음 말씀을 덧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

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가는 다음 말씀으로 끝마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충만한 기쁨은 바로 이 친교에, 이 사랑에 그리고 이 일치에 있습니다. (「요 한 1 서 주해 」Tract

1,1. 3)
60. 우리 마 음은 하 느님 을 갈망 합니 다.

우리가 무슨 약속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 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다 말했습니다. 그 나머지는 마음의

숙고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는 것을 실재와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얼마 되지 않는데, 요

한이 지닌 능력과 비교도 안 되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마음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주님 임재의 은총으로 돌아갑시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

것을 아직 볼 수 없기 때문에 애타게 갈망할 뿐입니다.

열심한 그리스도인의 전 생활은 하나의 거룩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아직은 볼 수 없습니

다. 그러나 갈망한다면 장차 보게 될 것에 이를 때 그것을 누릴 능력을 갖게 됩니다.

어떤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받아 넣을 것이 너무 많다면 그 용기가 자루이건 부대이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더 크게 만듭니다. 그리고 넣을 것이 너무나 많고 담아 넣을 용기는 작을 때 그 용기를 늘려서

용량을 늘립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갈망을 채워 주시는 것을 늦추심으로써 그

갈망을 더 크게 하시고 갈망을 더 크게 하심으로써 우리 영혼을 넓히시고 또 이렇게 넓히심으로써 영혼의

용량을 늘리십니다.

형제들이여, 언제나 갈망하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언제나 채워질 것이기 때문

입니다. 성 바울로는 장차 올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자기 마음을 활짝 펼쳤습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

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그 희망을 아직 이루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대답합니

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바울


로는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갈망하는 것을 따라간다고 말합니다. 그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하지 못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이것이 우리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어 버리면

끊어 버리는 그만큼 거룩한 갈망은 우리 마음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미 말했듯이 비어 있는 것만 채울

수 있습니다. 선으로 채우고자 한다면 먼저 악을 쏟아 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꿀로 채우고 싶어 하신다고 합시다. 만일 우리 마음이 식초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어

디에다 꿀을 넣겠습니까? 먼저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릇도 씻어야 합니다. 받아 넣을 것

이 무엇이든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부지런히 거듭거듭 속을 닦아 내야 합니다. 그 안에다 담아 넣을

것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꿀도, 황금도, 포도주도 아닙니다. 그래도 굳이 이름붙이고 싶다면 "하느님" 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런데 "하느님"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세 마디로 된 이 한 단어가 우리가 기대하는 전부입

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실재보다 부족합니다. 그분이 오실 때

우리를 채우실 수 있도록 그분께로 우리 자신을 펼칩시다. "우리는, 그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에 그분

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 한 1 서 주해 」Tract. 4, 6 )

제 5 장
프로바 에게 보낸 편지
61. 우리 의 욕망 이 기도 안 에서 수 련되 도록 합 시다 .

기도할 때 우리가 응당치 않은 것을 청할까 두려워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마음이 흐트러진

다면 유익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그만두고 오히려 다음의 시편 말씀으로 기도함이 좋겠습

니다.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주

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외다. "거기 주님의 집에서는 날들이 오고 가는 일이 없고 한 날의 시작은 그 전

날의 끝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모든 날은 동시에 끝없이 계속되고 그날을 살아가는 삶은 끝이 없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분께서는 이 복된 삶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

을 더 많이 할수록 주님이 우리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는 양 그것을 많은 말로 하라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주 친히 말씀하시듯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그것을 청하기 전 우리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시는 분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기 전에 주님이 우리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신다면 왜 청하라고 하십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시

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는 우리의 욕망을 더 잘 아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

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기도 안에서 우리의 욕망이 수련되기 위해서입니다. 실은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선물은 크지만 그것을 받으려고 하는 우리 마음은 작고도 협소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

다. "여러분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짓지 말도록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큽니다. 그것은 "눈으로 본 적이 없고(색깔이 없습니다.)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음

의 진동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은 그것에로 올라가야 합

니다.)" 우리가 더욱 충실히 믿고 더욱 굳게 희망하며 더욱 열렬히 욕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시들지 않는 욕망으로 늘 기도하지만 일정한 시간과 때에 어

떤 선택된 말을 통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릴 때도 있습니다. 이는 그러한 말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권고를

받고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진전했는지 깨닫게 해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강렬히 이 욕망을 증대시

키도록 분발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

욕망이 더 불타면 불탈수록 그에 뒤따르는 효과도 그 만큼 더 가치롭습니다. 이 욕망을 분발시키기 위해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


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영원한 삶인 복된 삶을 끊임없이 갈망하라는 뜻입니다. (「프 로바 에게 보 낸 편지 」

Ep. 130, 8,1 5.1 7-9 ,18)

62. 일정 한 시간 에 우리 마 음을 기 도하 는 일에 로 되돌 이키 도록 합 시다 .

주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복된 삶을 항상 욕구하며 그 열망이 끊임없는 기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이 열망을 냉각시켜 버리는 분주한 일과 걱정거리를 떠나 일정한 시간에 우리 마음을 기도

하는 일에로 되 돌이키고 기도의 말로써 우리가 욕구하는 것에다 집중하도록 해야 합니다. 식어지는 열망

을 자주 분발시키지 않는다면 완전히 냉각되어 그 열망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알리십시오." 라는 사도의 권고 말씀은 우리가 그 소원을 하느님께 알

려 드려야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되고(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려 드리기 전에 그것을 이미 다 알

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소원을 더 잘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

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해 보이는 것이 되기보다 하느님 면전에서 인내심에

찬 끊임없는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좋은 일이나 꼭 해야 할 일이 막지 않는 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오랫동안 기도드리는 것

은 나쁜 일도 아니요 무용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말씀드린 대로 이런 경우에도 항상 같은 열망으

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기도드리는 것은 많은 말로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말로 기도드리는 것과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주님 친히 밤새워 기도하시

고 또 동산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신 것은 지상에 계실

때 올바르게 기도드리시고 이제 영원 속에 아버지와 함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분이 기도의 모범

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겠습니까?

에집트에서 은수 생활을 하는 형제들은 기도를 자주 바치되 그것을 짧은 화살기도의 형식으로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 바치는 이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인 열정과 주의력이, 기도 바치지 않는 시간

이 너무 길어, 약화되거나,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형제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점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열정과 주의력이 지속되지 못할 때 그것을 강제로 생기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지속될 때 재빨리 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도에서 지나치게 긴 말은 없애 버려야 하겠지만 열정이 지속될 때에는 많은 간구가 없어서는 안 되겠

습니다. 많은 말로 기도드리는 것은 필요한 것을 불필요한 말로 청하는 것이지만, 한편 쉬지 않고 기도드

리는 것은 하느님의 문을 간단없는 경건한 마음의 열정으로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 기도의 일

은 말로써보다는 탄식으로써 숨소리 보다는 눈물로써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아 두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의 말을 요구하시지 않는 하

느님께 "우리의 애통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프로 바에 게 보낸 편 지」 Ep . 1 30,9, 18- 10, 20)
63. 주의 기 도.

기도할 때 말이 필요한 것은 그 말로써 우리 자신을 자극시키고 우리가 청하는 것의 내용을 인식하기 위

함이지 주님에게 무엇을 알려 드리거나 주님을 우리 의지에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은 항상 거룩하지만, 사람들도 그러한

것으로 여길 것을 즉 멸시치 말기를 욕구하도록 우리 자신을 자극시키는데, 이것은 하느님께 아니라 사람

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임하소서." 할 때 그 나라가 우리에게와 우리가 거기에서 다스릴 수 있기를 청하면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곧 다가올 그 나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할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

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그 뜻을 이루게 하는 참된 순종을 그분께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할 때, "오늘" 이라는 말로 이 현세를 뜻하고 "양식" 이라는 말로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 있어 근본적인 것만을 표현하지만, 삶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청할 뿐만 아니라

현세의 행복이 아닌 영원의 행복을 얻기 위하여 믿는 이들이 현세에서 필요한 성사를 청한다고도 볼 수 있

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할 때, 우리가 청하는 것을 얻을 수 있

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할

때,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어 속아서 유혹에 응해 버리거나 고통을 받아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느

님의 도우심을 청하라고 우리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할 때, 우리가 아직도 온갖 악을 배제하는 그 완전한 선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우리 자신에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주의 기도의 이 마지막 청원은 매우 광범한 뜻을 지니고 있

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당하는 어떤 고통에서도 다른 기도의 형식을 찾을 필요 없이 그 청원만으로 자신의

애통을 드러내고 눈물을 쏟으며 그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하고 그것으로 계속해야하며 그것으로 기도를

끝마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기도문에 나오는 말들로써 그들이 뜻하는 실재 자체들을 우리 기억에다 새

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도할 때 마음의 열정에서 나오는 다른 말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들은 열정에서 흘러 나을

때 그 열정을 명료화하고, 열정을 뒤따를 때 그것을 증대시킵니다. 그러나 주의 기도를 정상적으로 또한

뜻을 파악하여 바친다면 그 열정에서 나오는 말들 가운데는 주의 기도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하

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가 만일 주의 기도에 나오는 것과 무관한 것을 청한다면 그것은 비합법적인

기도라 할 수는 없다 해도 육적인 기도라 하겠습니다. 사실 비합법적인 기도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성

령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은 항상 영에 따라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로 바에 게 보낸 편지」 Ep .

130,11, 21-1 2,22)


64. 주의 기 도에 이 미 포함 되어 있 지 않은 것 은 찾아 볼 수 없을 것 입니 다.

예를 들면 "주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을 이방인들이 본 것처럼 주님의 거룩하심이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보게 하소서." 하고 또 "당신 예언자들의 말이 참되었음을 보여 주소서." 하고 또

"당신 예언자들의 말이 참 되었음을 보여 주서서." 하는 이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하는 것

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우리에게 힘을 도로 주시고, 부드러운 얼굴을 보여 주서서, 우리가 당장 살아나리이다." 하는 이

는 "그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말씀으로 내 발걸음 이끄시어, 어느 악도 내 안에서 못 이기게 하소서." 하는 이는 "오늘 우리에

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여, 다윗을 잊지 마옵시고 애쓰던 그의 정성 돌아보소서." 하고, 또 "내 주 하느님, 그런 짓을 내 했다

면, 이 내 손이 부정이 있다 한다면, 내가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이라고 하는 이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

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서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원수에게서 나를 구하여 주서서, 내게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하는 이는 "악에

서 구하소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청원들을 두루 훑어간다면 주의 기도에 포함되지 않거나 거기

에서 연유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찾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드릴 때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청하는 것이 허락되지만 다른 내용을 청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친척을 위해, 우리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원수들을

위해서까지 주저 없이 청해야 합니다. 관계가 가까우나 머냐에 따라 기도하는 이의 마음에 서로 다른 정이

일어나겠지만, 그래도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당신이 취해야 할 기도 방법만이 아니라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밝혀 주었다고 나는 생각

합니다. 내 가르침으로서가 아니라 황송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주신 그분의 가르침으로 말씀 드렸습

니다.

복된 생활은 추구해야 하고 그것을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된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저

자들이 이에 대해 장황하게 토론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그렇게 많은 저자들과 저술들

을 다 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성경은 간략하고도 적절히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느님이

그 주님이신 백성은 복되어라." 그리고 우리가 그 백성의 무리에 속하여 하느님을 관조하고 그분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에 다다르기 위하여, "계명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우

러나오는 사랑이다." 라는 성서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성서 말씀에 나오는 세 단어 가운데 선한 양심을 대신하여 희망이라는 말을 놓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기도하는 사람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믿고 희망하고 갈망하며 또 주의 기도에서 주

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주의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느님께 다다를 것입니다. (「프로 바에

게 보 낸 편지 」Ep. 130, 12,2 2-1 3,2 4)

65. 우리 는 무엇 을 응당 히 청해 야 하는 지 모르 고 있습 니다 .
당신은 다음과 같이 물어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왜 사도는 '우리가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

르고 있다.' 고 말씀하시는가?" 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한 사도나 그것을 들은 신자들이 주의 기

도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사도는 자기 자신도 이런 모르는 상태에서 예외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로

가 자기가 받은 계시의 웅대함으로 말미암아 들뜨지 않도록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그를 줄곧 괴롭혀 온, 육

신을 가시로 찌르는 병을 얻었을 때, 그는 자기가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

서 주님께 그 고통이 자기에게서 떠나게 해주십사고 세 번이나 간청한 것입니다.

이 점을 보아서 그 당시에 사도가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그는 왜 자

기와 같은 위대한 사람이 청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이루어지는 것이 왜 합당치 않은 일인지

를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에게는 내 은총으로 충분하다. 내 권 능은 약한 자 안

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는 이들 고통에서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은 언제나 무겁고 짜증스러우며 인간의 허약감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

문에,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공통 심리에 따라 그것을 우리에게서 거두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 주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고통을 우

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신다 해도 그분이 우리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을 경건한

인내력으로 참아 낸다면 우리가 더 좋은 것을 얻으리라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가 위의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사람이 청하지 않으면 더 좋을 것을 애타게 청함으로써 자

기 기도가 응답 될 때 교만해지지 않게끔 하기 위함이고, 또 한편 실상 청하는 바를 얻게 된다면 더 지독한

고통이 초래되거나 또는 얻은 행운이 도리어 그를 타락으로 떨어뜨리게 할 수 있기에, 하느님께서 그 청원

을 들어주시지 않는데, 그런 경우는 실망감에 젖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청하는 것과 반대되는 어떤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내로이 견디고 만사에서 감

사드리면서 우리가 원했던 것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 우리에게 더 적합한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말

아야 하겠습니다. 중재자께서는 우리에게 이에 대한 하나의 증거를 다음의 말씀에서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고 말씀하신 다음, 당신의 인성 안에

취하신 인간의 의지를 바꾸시고는 덧붙여 즉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소서." 바로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된 것입니다." (「프로 바에

게 보 낸 편지 」Ep. 130, 14,2 5-2 6:)


66. 성령 께서 는 우리 를 대신 하여 기 도하 십니 다.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의심 없이 확신 가운데 청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얻으

면 자기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하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얻은 여타의 모든

것은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이 한 가지란 육신과 영혼에서 불멸과 비 부패를 얻어 영원토록 주님의 즐거

움을 관조하는 참되고도 유일한 복된 삶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여타의 것은 이 한 가지 은총에 예속시켜

청해야만 타당한 청원이 됩니다. 이 복된 삶을 얻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 전부를 갖게 되며, 따라서 타

당치 않은 것을 얻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 가운데 살면서 희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기도드릴 때, 그 샘을 목말라해야 합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어" 우리의 온갖 열망

이 향하는 그분의 면전에서 "당신 집 기름기로 흐뭇해지고 당신 진미의 강물을 마실 수 있도록" 그 샘을 목

말라해야 합니다. 우리의 열망이 온갖 은총으로 충족되어 애통으로 청하는 일이 없고 모든 것을 기쁨 가운

데 소유하게 될 때에만, 그분은 진정 우리 생명의 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빛으로 빛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의 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 속에 그것을 청할 지라

도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실제 그대로 생각해 내지 못
할 때 그것에 대해 분명히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사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모두 실

재와 맞지 않다고 보고서 그것을 거절해 버리고 경시해 버립니다. 이는 우리가 비록 그 실재를 사실 그대

로 알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가 구하는 바는 우리 사고에 들어오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

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는 우리의 나약성을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영께서 가르쳐 주신 일종의 "유식한 무지" 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끈기 있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

고 말한 다음, 이에 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

그러나 이 말씀을, 삼위일체의 품안에서 불가견적인 하느님이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한 하느님이신 성

령께서 하느님이 아니신 것처럼 성도들을 대신하여 기도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

서 성도들을 대신하여 기도 하신다." 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기도하게끔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이것은 너희가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다." 라는 구약의 말씀

도 있는데, 이 말씀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시험해 보시려 하는 것은 당신께서 사람의 마음을 " 아시기 위해

서' 라는 의미가 아니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알게끔"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애서는 성도들이 끈기 있게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은 모르고 있는 그 위대한 것에

대한 열망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르고 있는 것을 욕구할 때 어떻게 그것에 대하여 기도 속에서 이야기 할 수 있

겠습니까? 그것이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면 틀림없이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을 보았

다면 욕구하지도 않고 탄식으로 찾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프 로바 에게 보낸 편지 」Ep.

130,14, 27-1 5,28)


제 6 장

고백록
67. 영원 한 지혜 를 찾읍 시다 .

그녀가 이승을 하직할 날 - 우리는 모르는 채 당신만이 아시던 그날 - 이 가까워 왔을 때, 정녕코 그것은

당신의 그윽한 손길로 마련된 줄 아옵니다만 우연히도 그와 나는 단 둘이서 창문에 기대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 맞은쪽에 집안의정원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 곳은 오스티아 티베리나! 지루하고 고달프던 여행 끝

에 속간을 멀리한 우리는 거기서 배를 타려고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둘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즐겁기만 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잊고, 눈앞의 일에만 열중하고

우리는 진리이신 당신의 어전에서 더듬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 성자들의 영생, "눈에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고,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은" 그 미래의 생활을 우리는 차라리 마음의 입을 벌리고 당

신께 있는 생명의 샘, 그 샘물의 하늘스런 흐름을 목말라 했사옵니다.

꼭 이 말 이대로는 아닐망정,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오나 주여, 당신은 아시나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던 그날, 말하는 동안 이 세상은 그 온 가지 쾌락과 더불어 하찮게만 보여 졌던 것입니다. 그

때 그녀는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

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더 살고 싶어 했

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 그랬더니

천주께선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이 말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지 닷새가 다못가서 아니, 더래야

얼마 못되어서 그는 열병으로 눕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앓던 어느 날, 실신하여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바삐 가서 보니 이내 정신을 회복하고는 나와 내 형이 곁에 있는 것을 익히 보더니 무엇

을 묻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디 있었더라?" 그는 다시 눈을 들어 슬픔에 당황하는 우리를

보고 말했습니다. "어미를 여기다 묻어 다오."

나는 말문이 막히고,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내 형은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차라리 고향에서 돌아

가셔야 마음이 편하지, 남의 땅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찌푸린 얼굴로 나무란 다음, 나를 향하여 말하였습니

다. "보아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어서 또 우리 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몸뚱이사 어디다 묻든

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들 말거라.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

서 날 기억해 다오." 어미는 간신히 이런 말로 그 뜻을 전하다가 뚝 그치고, 치열해 오는 증세 때문에 진땀

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백 록」 Li b. 9, 10-1 1)

68. 오, 영원 한 진리 여, 참스 런 사랑 이여 , 사랑스 런 영원 이여

거기로부터 내 자신으로 돌아오라는 타이르심에 당신의 이끄심 따라 나의 가장 안으로 들어왔삽고, 그리

될 수 있삽기는 당신이 나를 도와주신 때문이었습니다. 들어오고 나서 나는 무엇인지 모를 눈으로 영혼의

정신이 미치지 못하는 상주 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예사롭지 않고, 육안에 비쳐지지도 않는 이 빛은, 질은 같아도 크기가 더하여서 그만치 밝기를 더하고 모

든 것을 비추는 따위의 그러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따위가 아닌 색다르고, 딴 모든 것과 아주 다른 빛

이었습니다. 그것은 물 위의 기름이나 땅 위의 하늘같이 내 영혼 위에 있는 것이 아니오나 나를 만들었기

에 내 위이고, 나는 그의 지음을 받았기에 그 아래였습니다. 무릇 진리를 아는 이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

영혼을 알며, 그를 아는 것은 곧 사랑이로소이다.

오,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

숨짓노라. 내 처음 그대를 알았을 때 그대 나를 맞아들여, 내가 볼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나는 아직 볼 자

격이 없는 것을 보여주었나니 ‥‥‥ 아찔하도록 쇠약한 내 안광에 세찬 빛을 쏘아주었기 난 사랑과 두려

움에 떨고 있었노라. 마치도 하늘로부터 "나는 장성한 자의 음식이로라. 너는 커라. 이에 나를 맛보리라.

내 육체의 음식처럼 나를 네게 동화시키지 말라. 오히려 너를 내게 동화시킬 것이니라." 하는 그대의 목소

리를 듣는 듯 나는 얼마나 그대와는 멀리 등차의 세계에 있는지를 발견했노라.

당신을 누리기에 알맞은 힘을 기르고자 방법을 모색하여 보았으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 만물

위에 계시어 세세에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 를 받들어 모시기까지는 얻을 수 없었

나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 부르신 그분께서 - 말씀이 살이 되심으로써

- (나는 아직 허약하며 먹지 못할 몸이었으나) 음식을 살에 섞으셨으니 갓난이 우리에게 당신 슬기의 젖을

먹이시기 위함이었고, 실상 그 슬기로써 당신은 이미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었나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

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 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

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

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고백 록」 Li b.

7,10. 18; 1 0,27)

69. 그리 스도 께서 는 모든 이 를 위해 죽 으셨 습니 다.

참다운 중개자는 은밀한 당신의 자비로써 겸비스런 자들에게 보내 주시고 보여 주신 그분! 우리로 하여

금 그를 본받아 겸손을 배우게 하시니, 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

을 죄인들과 아니 죽으시는 거룩한 님과의 사이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죽으시되 하느님과

더불어 의로우신 분. 이로써 그분은 -


의로움의 삯이 생명과 평화인지라 - 하느님에 이어진 의로 의화된 죄인들의 죽음을 쳐부수고자 그들과

공통된 죽음을 받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중개자가 옛 성인들에게 계시되기는 마치 우리가 이미 지나간

그의 고난을 믿는 것처럼 그들은 장차 수난하실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기 위함이었나이다.

그분은 인간이시기에 중개자이시나 말씀님으로서 사이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니 하느님과 같으시고, 하

느님 안에 계시사 같은 한 하느님이신 까닭이니이다. 좋으신 아버지여, "당신 외 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시

고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내주시기까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 "당신과

같으심을 강탈로 여기지 않으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시었으니." 그

는 당신 앞에 우리를 위한 승리자요 희생, 희생이기에 승리자! 당신 앞에 우리를 위한 사제요 제사, 제사이

기에 사제! 당신께로 조차 나시사 우리를 섬김으로써 우리를 종에서 자식으로 당신께 바치신 분이 그분이

시니이다. 당신 오른편에 앉아 우리 위해 빌으시는 그분을 보아 내 모든 병을 낫우어 주시리라는 여기에

진정 내 희망이 굳사오니, 그렇지 않으면 절망하고 말 것이니이다. 크고 많은 병, 그렇습니다. 크고 많사오

니 더 더욱 큰 당신의 약이 있는 것이옵니다. 당신의 "말씀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살지" 않으셨던

들 인간과는 동떨어지신 줄로 알아 우리의 희망이 끊어질 뻔하였습니다.

허구한 내 죄악, 내 비참에 몸이 떨려 마음속으로 헤아리기를 광야로 도망이나 쳐볼까 하였었으나 님은

내 힘을 돋우어 주시며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죽으심은 사는 이들로 하여금 다

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기 위함이니라." 주여, 이젠 나 살

고자 내 걱정일랑 당신께 맡기고, "당신 법의 묘함을 생각하오리다." 둔하고 병든 줄을 님이 아시오니 가르

치소서, 낫우어 주소서. 당신의 외 아드님,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있는" 그분께서 그 피

로써 나를 속량해 주셨나이다. "오만한 자들이 내게 하리놀지 말 것이," 나는 내 몸값을 생각하고, 먹고 마

시고 나누어 주며, 저 먹고 배부른 그들 가운데서 나 가난할망정 그분으로 배 부르려 하노라. "그분을 찾는

이들이 주를 찬미하리로다." (「고 백록 」Lib . 1 0,43, 68, 70)

제 7 장

기타 저적
70. 하느 님의 은 총을 깨 달읍 시다
바울로 사도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그들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을 율법

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의 은총이 그들에게 전파될 때 할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받은 은총의 선물의 가치를 제대

로 평가하지 못하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있기를 원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의를 섬기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죄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부과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의로운 법을 주심으로 해서 그 율법이 사람들

의 죄를 드러내 주기만 하고 없애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활동하는 신앙의 은총만

이 우리 죄를 없애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은총 지위에 세워져

있던 갈라디아인들을 율법의 지배 아래 두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고 유

대교 예배의 외적 예식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복음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

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사도 바울로가 이방인들이 개종할 때 그들에게 유다의 관습을 따

르라고 권한 다른 사도들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그에 대해 의심

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그런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복음을 받아

들인 이방인들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복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인 것

처럼 행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편지에서 말해 주고 있듯이 바울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더러 이중적인 행동을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로는 이 문제에 대해 말해 주고 있지만 갈라디아서와는 한 가지 차이점을 지닙니다. 로

마서에서는 이 문제에 있어 뚜렷한 결정을 내리면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과 이방출신의 신자들 간에

발생한 이 논쟁을 해결해 줍니다.

한편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로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로부터 율법 준수를 강요받아 그들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있던 이들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사도 바울로가 자기들을 보고 할

례를 받지 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참된 교리가 아니라고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서두의 말씀은 이 문제점을 간단한 말로 넌지시 비쳐줍니다. 앞에 나오는 인사의 말씀에도 자기가 사

도라고 말할때 "그 사도직은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라고 덧붙입니다. 이와 같

은 말은 바울로의 다른 편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울로 사도는 이 말씀으로써 갈라디

아인들 보고 유다 율법의 필요성에 대해 납득시키려 하는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서 온 이들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고, 복음적 증거의 권위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낮

은 사도로 여김 받을 이유가 없으며,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 라디 아서 주해 」

에서 (P raef atio )

71. 여러 분 안에 그 리스 도가 형 성되 기를 기 원합 니다

바울로 사도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말합니다. "나도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즉 나 역시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기에 "여러분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즉, 내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영적 판단력을 얻어

온갖 육적인 생각들을 배격하듯이,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이 말씀을 하고나서 그는 갈라디아인들에

게 자신이 어떤 반감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려고 부드러운 말로 그들에 대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랑을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잘못한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말하자

면, 내가 여러분을 공격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어서 바울로는 그들을 "나의 자녀들" 이라고 불러 그들이 바울로 자신을 그들의 아버지로서 본받게 합

니다. 또 계속하여 말합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겠습니다." 바울로가 어머니이신 교회를 대신하여 이 말씀을 한 것입니다. 다른 데서 그는 "우리는 여러분

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라고 말합니

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은 은총의 자유로 부름 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업적이 이

룬 무가치한 공로를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공로는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그런 영적인 사람

안에서, 그의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신앙인을 당신

의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즉 당신 자신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는 형성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사랑으로 그리

스도께 결합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

의 인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말하

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인간 존재들은 형성되기 위해서 어머니의 모태에서 잉태되고, 일단 형성되면 해산의 고통을 겪는 가운데

태어납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겠습니다." 고 말한 것입니다. 이 해산의 고통은 바울로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낳기 위해 겪은 고통과

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해산의 고통은 그들이 유혹이라는 위협으로 미혹될 위험이 있는 동안 계속됩

니다. 그리고 바울로가 그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느끼고 있는 이 해산의 고통은 "그들이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바울로가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고 말할 때 그는 그들의 신앙의 첫걸음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성장과 성숙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고린토 후서에서 약간 다른 말로 이 해산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

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갈라 디아 서 주

해」Nn. 37. 38:)


72. 어디 서나 내 이 름으 로 흠 없는 제 사가 바 쳐진 다.

참된 제사란 하느님과 거룩한 친교를 이루게 하고 또 우리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최고의

선에로 향해진 온갖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돕고자하는 자선 행위도 하느님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참된 제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사란 사람이 거행하거나 바치는 것이지만 신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옛

라틴 저술가들은 제사를 "신적인 일" 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되고 자기 자신

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해 살고자 세상에 대해 죽는 사람인 한 하나의 제사입니다. 그

봉헌이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하는 자선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네 자신을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면서 네 자신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라." 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하는 자선행위가 하느님과 연관하여 행해진다면 참된 제사

가 됩니다. 자선 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비참에서 건져내고 이로 인해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는 일입

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편이 말하는 그 행복을 얻어야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니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귀한 머리의 몸이 되도록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바쳐지신 대사제께서는 보편적 제사로서 속량된 온 도시 곧 사도들의 공동체를 하느님께 바치십

니다. 그분은 종의 모습으로 바쳐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종의 모습을 바치셨고 종의 모습으로 바쳐지셨

습니다. 종의 모습 안에서 그분은 중재자시요 사제이시며 또한 재물&&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우리 육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또 진정한 영적 예

배로서" 바치고, 현세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

이 무엇이고, 선하고 완전한 것 즉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주고 또 우리 자신이 제사

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덧붙여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평가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사람의 몸

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의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

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

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사가 곧 이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는 것입니

다."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제단의 성사에서 교회는 이것을 자주 거행합니다. 이를 행할 때 교회가 그 봉

헌에서 자기 자신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국 론」 Li b. 10, 6)

73. 우리는 사랑 에서 나오 는 존경심 과 그들의 동반 자가 되고 자 하는 마음으 로 순교자 들을 공경

합니다 .
그리스도교 백성들은 순교자들을 본받을 마음을 북돋우고 그들의 공로를 함께 나누며 그들의 기도가 주

는 도움을 받고자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경건한 예식으로 그들을 경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덤에다

제대를 세울 때 그것을 그들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에 대한 기념으로 하느님에 바치는 것입니

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 중 누가 "이 제사는 베드로 당신께, 바울로 당신께, 또

는 치쁘리아노 당신께 바칩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거기에 바치는 제사는 월계관을 받은 순교자

들의 기념 성당에서 바치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고 그 월계관을 주신 하느님께 바치는 것

입니다. 이럼으로써, 바로 그 장소는 우리가 순교자들을 본받을 수 있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본받

는데 있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좀더 깊이 되살아나게 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을 공경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치

고자 하는 경건한 성도들을 공경할 때 가지는 같은 사랑의 존경심과 그들의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같은 마

음으로 그들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모든 투쟁을 이겨내고 승리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 순교자들에

게 바치는 공경은 현세에서 아직 전투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바치는 것보다 더 경건하고도 확고한 공경입

니다. 그리스어로 "라트리아" (경배)라고 하는 흠숭은 하느님께만 바치고 또 하느님께만 바쳐야 한다고 우

리는 가르칩니다. 경배는 오직 하느님께만 합당히 바칠 수 있는 흠숭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에서 바치는 제물은 "라트리아" 즉 경배로서 바치는 제물입니다. 그래서 우상들에게 바치는 제사는

"이돌로라트리아" 즉 우상 경배 (숭배)라고 합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이나 거룩한 영혼들이나 천사들에게

이와 같은 제사를 절대로 바치지 않으며 또 바치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만일 이런 오류에

빠진다면 우리는 건전한 신앙 교리에 따라 정정이나 경고로써 마땅히 그의 잘못을 고쳐 줍니다.

성인들이나 일반 사람들도 하느님께만 합당히 바칠 수 있는 이 경배를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도 이렇게 했습니다. 리가오니아의 시민들이 그들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몹시 놀라 그들이 신인

것처럼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 했을 때 이 두 사도들은 자기 옷을 찢어 맹세하며 자기들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납득시켜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이것이지만 참아 주어

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르쳐야 하는 것은 이것이지만 우리가 할 수 없이 고쳐 주어야

하는 것은 또 다릅니다. 잘못을 고쳐 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참아 주어야 합니다. (「파 우스 투스 를 거

슬러」 에서 (L ib . 2 0,21)

74. 예수 그 리스 도는 인 성으 로 말하 면 다윗 의 후손 으로 태 어나 신 분이 십니 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우리 구세주는 하느님의 예정과 은총의 찬란한

빛이십니다. 인간 예수가 지니신 그 위대한 지위는 그분이 과거에 행하신 어떤 선행과 또 그분이 지니신

신앙의 공로로써 얻은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사람이 있으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성부와 함께 영
원하신 말씀께서 한 위격 안에서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는데 그 사람은 무슨 공로로 하느님의 외 아드

님이 되셨습니까?

그것은 인간 예수께서 이미 행하신 어떤 선행 때문이겠습니까? 또 인간 예수께서는 표현할 수 없는 탁월한

그 지위에 이르려고 어떤 선행을 하시거나 어떤 신앙을 지니시거나 또는 어떤 기도를 바치셨습니까? 인간

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 예수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하느님의 외

아드님으로서 존재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께서 그 인간을 지어내시고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원천이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은총은 지체들에게 그

들 각각의 능력에 따라 흘러내립니다. 신자는 그 은총을 통하여 신앙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고 인간

예수는 같은 은총을 통하여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하는

그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에게 죄 사함을 베풀어주시는 그 같은 성령

께서는 인간 예수를 온갖 죄로부터 미리 건져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하실 이 모든 것을 이미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에 대한 예정은 성인

중의 성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찬란히 빛났습니다. 진리가 말하는 것을 옳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 예정의 교리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영광의 주님 자신도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만큼

예정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친히 예정되셨습니다. 인성을 따라 다윗의 후손이 되실 그분은 거룩함의 영을 따라 권능으로 하

느님의 아들이 되시기로 예정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 마리아에게서 탄생하

셨습니다.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독특하고도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한 인간을 취하셨으므로 그분은 동

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시오 사람의 아들이라고 참으로 또 합당히 일컬어질 수 있습니다.

말씀께서 취하신 인성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아들이시고 인성을 취하신 그 하느님의 외 아드님으로 말미암

아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삼위일체가 아니시고 사위 일체이실 것

입니다.

인성이 이렇게도 위대하고 높게 이렇게도 탁월한 위치로 예정되었으므로 그보다 높은 위치로 드높여질

수 없습니다. 한편 신성은 나약한 인성을 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하심으로 자신을 그 이상 더

낮추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기로 예정되신 것처럼 많은 수효의 우리도 그

분의 지체가 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의 외 아드님이시고 홀로 주님이

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얻는 하느님의 은총이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 머리이신 그리

스도의 독특한 탄생이 그분이 이미 지니신 공로에 의한 것임을 본 사람은 누구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
체들인 우리도 그분께서 이미 지니신 공로로 인해 재생했다는 것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인 들에

대한 예정 」Cap. 1 5,30-3 1)

목 록 (주제 순위)

대림 (강생 )

13. 요한은 소리이고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Sermo 293,3: PL 38,1328-1329)

14. 주님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려라.


(Sermo 34,1-3.5-6: CCL 41, ?24-426)

15.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오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도다.


(Sermo 185: PL 38,997-999)

16.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


(Sermo de Ascensione Domini, Mai 98,1-2: PLS 2,494-495)

17. 말씀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


(Sermo 194,3-4: PL 38,1016-1017)

18.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Sermo 13 de Tempore: PL 39,1097-1098)

19. 성모님은 신덕의 힘으로 믿고 신덕으로 잉태하셨습니다.


(Sermo 25,7-8: PL 46,937-938)

40. 신적 의사
(「시편 주해에」에서 Ps. 103,5-6)

4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받


아들이십니다.
「시편 주해」에서(Ps 85,1: CCL 39,1176-1177)

59. 생명 자체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 1 서 주해」에서(Tract 1,1.3: PL 35,1978.1980)

74.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성인들에 대한 예정」에서(Cap. 15,30-31: PL 44,981-983)

사순기

11.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Sermo 23A,1-4: CCL 41,321-323)

24. 하느님이 받아들이시는 제물은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Sermo 19,2-3: CCL 41,252-254)

46.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겪는 수난


「시편 주해」에서(Ps 140,4-6: CCL 40,2028-2029)

69.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고백록」에서(Lib. 10,43,68,70: CCL 27,192-193)

부활
1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
(Sermo 8, in octava Paschae 1.4: PL 46,838-841)

26.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는 선하신 하느님께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Sermo 256,1.2.3: PL 38,1191-1193)

47. 파스카 축제의 알렐루야


「시편 주해」에서(Ps 148,1-2: CCL 40,2165-2166)

48. 주님께 멋진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시편 주해」에서 (Ps 32, sermo 1,7-8: CCL 38,253-254)

싱앙 생활

8.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Sermo 171,1-3.5: PL 38,933-935)

20. 우리 안에 있는 주님 집의 건축과 축성
(Sermo 336,1.6: PL 38[edit. 1861], 1471-1472.
1475)

25. 성덕에로의 보편적 성소


(Sermo 96,1.4.9: PL 38,584.586.588)

** 나는 수도생활을 선택한다.
(Sermo 355.2: PL 38,.... )

28. 연약한 그리스도인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3: CCL 41,539-540)

44. 하느님의 약속은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취됩니다.


「시편 주해」에서(Ps. 109,1-3: CCL 40,1601-1603)

51.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다.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5,10-12.16-17: CCL 36,154-l56)
52. 그리스도는 빛과 진리와 생명에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34,8-9: CCL 36,315-316)

53. 완전한 사랑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84,1-2: CCL 36,536-538)

60. 우리 마음은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요한 1 서 주해」에서(Tract. 4,6: PL 35,2008-2009)

67. 영원한 지혜를 찾읍시다.


「고백록」에서(Lib. 9,10-11: CSEL 33,215-219)

68.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고백록」에서(Lib. 7,10.18; 10,27: CSEL 33,157-163.255)

70.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읍시다.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Praefatio: PL 35,2105-2107)

71.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기를 기원합니다.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Nn. 37.38: PL 35,2131-2132)

참회

11.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Sermo 23A,1-4: CCL 41,321-323)

24. 하느님이 받아들이시는 제물은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Sermo 19,2-3: CCL 41,252-254)

39.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여라.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0-11: CCL 41,536-538)

42.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주해」에서(Ps 61,4: CCL 39,773-775)
4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혹 받았고 또 그분 안에서 악마를 눌러 이겼습니다.
「시편 주해」에서(Ps 60, 2-3: CCL 39,766)

55. 새 계명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65,1-3: CCL 36,490-492)

56. 두 가지 생활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24,5.7: CCL 36,685-687)

57. 사랑의 이중 계명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7,7-9: CCL 36,174-175)

58. 보라, 나는 내 백성을 구하리라.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26,4-6: CCL 36,261-263)

기도

45. 당신의 소원이 바로 당신의 기도입니다.


「시편 주해」에서(Ps. 37,13-14: CCL 38,391-392)

60. 우리 마음은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요한 1 서 주해」에서(Tract. 4,6: PL 35,2008-2009)

61. 우리의 욕망이 기도 안에서 수련되도록 합시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8,15.17-9,18: CSEL 44,56-57.59-60)

62. 일정한 시간에 우리 마음을 기도하는 일에로 되돌이키도록 합시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9,18-10,20: CSEL 44,60-63)

63.주의 기도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1,21-12,22: CSEL 44,63-64)

64. 주의 기도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2,22-13,24: CSEL 44,65-68)
65.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4,25-26: CSEL 44,68-71)

66.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십니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4,27-15,28: CSEL 44,71-79)

72. 어디서나 내 이름으로 흠 없는 제사가 바쳐진다.


「신국론」에서(Lib. 10,6: CCL 47,278-279)

교회

22.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 목장의 백성입니다.


(Sermo 47,1.2.3.6, De ovibus: CCL 41,572-573.575-576)

23. 내가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


(Sermo 47,12-14, De ovibus: CCL 41,582-584)

29.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훈계하십시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4-15: CCL 41,541-542)

30.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8-19: CCL 41,544-546)

46.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겪는 수난


「시편 주해」에서(Ps 140,4-6: CCL 40,2028-2029)

49. 양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형제들입니다.


「시편 주해」에서(Ps 32,29: CCL 38,272-273)

50. 어서 와, 주님의 산에 올라가세.


「시편 주해」에서(Ps 47,7: CCL 38,543-545)

54. 교회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주해」에서(Tract. 124, 5: CCL 36,684-685)
72. 어디서나 내 이름으로 흠 없는 제사가 바쳐진다.
「신국론」에서(Lib. 10,6: CCL 47,278-279)

순교

1. 빈첸시오는 세상을 쳐 이기신 분 안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Sermo 276,1-2: PL 38,1256)

2. 내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


(Sermo Guelferbytanus 32, De ordinatione episcopi: PLS 2,639-640)

3. 이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전한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Sermo 295,1-2.4.7-8: PL 38,1348-1352)

4.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깁시다.


(Sermo Guelferbytanus 3: PLS 2,545-546)

7.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가로 얻은 순교자의 죽음은 보배롭습니다.


(Sermo 329,1-2: PL 38,1454-1455)

9.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Sermo Caillau-Saint-Yves 2,92: PLS 2, 441-442)

10.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봉사자였습니다.


(Sermo 304,1-4: PL 38,1395-1397)

21. 그리스도의 죽음 값으로 구원된 순교자들의 죽음은 귀중하다.


(Sermo 329, In natali martyrum: PL 38,1454-1456)

46.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겪는 수난


「시편 주해」에서(Ps 140,4-6: CCL 40,2028-2029)

73. 우리는 사랑에서 나오는 존경심과 그들의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교자들을 공경
합니다.
「파우스투스를 거슬러」에서(Lib. 20,21: CSEL 25, 562-563)
섬김

5.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은 복되다.


(Sermo 103,1-2.6: PL 38,613.615)

6. 나는 여러분에게 있어 주교이고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Sermo 340,1. PL 38,1483-1484)

** 나는 수도생활을 선택한다.
(Sermo 355.2: PL 38,.... )

27. 위로의 붕대를 주십시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1-12: CCL 41,538-539)

28. 연약한 그리스도인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3: CCL 41,539-540)

29.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훈계하십시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4-15: CCL 41,541-542)

30.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8-19: CCL 41,544-546)

31.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0-21: CCL 41,546-548)

32. 내 양 떼를 좋은 목장에서 기르리라.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4-25.27: CCL 41,551-553)

33. 모든 착한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습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9-30: CCL 41,555-557)

34.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지도자입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의 시작 (Sermo 46,1-2: CCL 41,529-530)
35.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3-4: CCL 41,530-531)

36. 바울로의 모범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4-5 CCL 41,531-533)

37. 각자는 자기 이익을 찾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아야 합니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6-7: CCL 41,533-534)

38. 신자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9: CCL 41,535-536)

39.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여라.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0-11: CCL 41,536-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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