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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10)
범위: 3권 4장 4-7절
제목: 생명에 이르는 회개(1)
본문: 야고보서 5:16

4. 둘째 요소: 입의 고백.
성경은 제사장들 앞에서의 죄의 고백을 명령하지 않음

고백에 관하여 교회법 학자들과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 큰 분쟁이 항상 있어 왔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고
백이 하나님의 규범에 의해서 명령된다고 주장했던 반면, 교회법 학자들은 그것이 오직 교회의 법들에 의
해서 명령된다고 주장했다. 357)1)

진정 이 싸움을 통하여 신학자들의 악명 높은 몰염치함이 뚜렷이 나타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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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 인용했던 성경 본문들 모두를 부패시켰으며 힘을 써서 왜곡시켰다. 그
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가 이런 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교하게 보이기를 원해서, 고백은 그 실체에 관한 한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나왔으나 그 형식은 이후에 실
정법으로부터 받았다는 탈출구로 도망쳤다. 물론 소송 절차에 까다로운 법률가들이라면 그중 가장 어리석
은 자들만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적용 창 3:9)라고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법으로 돌릴 것이다. 또
한 “당신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적용. 창 3:12)라고 대답한 아담의 항변 358)2)도, 아담은
이를 항변하듯이 말했던바, 그렇게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경우 모두 그 형식은 시민법으
로부터 나왔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논점들로 이 고백이, 그것이 혹은 정형적이든 혹은 비정형적이든, 하
나님의 계명이라고 증명할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주님은 나병환자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셨다(마 8:4; 막 1:44; 눅 5:14; 17:14). 왜 그렇게 하셨는가? 고백
을 위해 보내셨는가? 도대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고백을 듣기 위해 임명되었다고 한 말씀을 들은 사
람이 있는가? (참조, 신 17:8-9)이러하니 그들은 다음과 같은 논법의 풍유로 피난처를 삼는다. 모세의 율
법에 의해서 제사장들은 나병의 정도를 판단하도록 규정되었다(레 14:2-3). 죄는 영적인 나병이다. 그러므
로 이것에 관해서 선포하는 것은 제사장들에게 속한다.

나는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과정에 먼저 묻는다. 만약 이러한 본문이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을 영적인 나병


의 재판관들로 만든다면, 왜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나병에 관한 지식을 그들 자신에게 돌리는가? 이것은
분명히 성경을 조롱하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왜곡된 입장에 서서 육체의 나병에 관한 지식을 영적 나병
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본다면, 이를 우리에게 적용할 경우, 육체의 나병을 진단하는 의사들은 영적인 나병
인 우리의 죄에 대한 심사관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제 나는 대답한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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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히 7:12) 모든 제사장 직분은 그리스도께 옮겨졌다. 그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완결되었다. 따라서 그 한
분께 모든 법과 제사장의 영예가 옮겨졌다. 만약 그들이 풍유를 심히 좇고 있다면 유일하신 제사장 그리스

1) 357) 이에 대한 입장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일치하지 않는다. Lombard, Sentences IV, xvil, 1-4 (MPL 192, 880ff); Gratian,
Decretum II. 1. 30-37 (Friedberg 1, 1165-1167), Cf. H. C. Lea, History of Confession and Indulgences 1. 168ff. Quot, Battles tr., n.
8.
2) 358) "exceptionem." 여기서 칼빈은 의도적으로 법률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도를 자기들 앞에 세우게 하자. 그리고 관할권에 제한이 없는 그의 심판좌에 모든 일을 두도록 하자 35
9)3) 우리는 용이하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순수한 정치법을 의식들 가운데 속한 것으로 여
기는 그들의 풍유는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나병환자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셨는가? 그는 치료를 받은 나병환자가 제사장 앞


으로 보이고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속죄되어야 한다고 명령한 율법을 자기가 어겼다고 제사장들이 중상하
지 않게 하기 위해 깨끗해진 나병환자들에게 율법에 속한 대로 행하게 명령하신다.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율법에서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적용 마 8:4; 눅 17:14)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진실
로 이 기적이 그들에게 증언이 되었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그들을 나병환자들이라고 선포했으나 그는 이제
그들이 나았다고 선포한다. 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는지 간에 주님의 기적들에 대한 증인들이 되도록 강
요받고 있지 않는가? 주님은 그들에게 자기가 행하신 기적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허용하신다. 그들은 이
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머뭇거리므로, 그는 이 일이 그들에게 증언이 되게
하신다. 그리하여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마 24:14). 또한 “너희가 ……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 그들에게 증
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적용 마 10:18)라고 하신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더욱 강력
하게 유죄의 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스콜라주의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크리소스토무스를 선호하여 그의 입장에서 지지를 얻으려고 하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가 이 일을 행하신 것이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즉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간주
되지 않으려 하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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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라고 가르친다. 360)4) 그리스도는 법적인 권리를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공공연히 복음의 적들을 자
처하는 제사장들, 곧 입을 막지 않는 이상 언제든지 아우성치며 복음을 훼방할 의도를 지니고 있는 바로
그 자들에게 내맡긴다고 선포하시는 것을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이런 사안을 놓고 누군가의 도움
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파 사제들을 이러한 자리에 세
워서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를 저주하지 못하도록 힘으로 억제된 자들과 그들이 공개적으로 한편이 되게
하자. 왜냐하면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5. 생명을 살리는 사죄의 권세는 사람에게 있지 않음: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예

그들은 두 번째 논의를 동일한 원천에서, 즉 풍유에서 이끌어 낸다. 마치 풍유가 어떤 교리를 확정하는 데
매우 유효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한다. 나는 풍유를 그들보다 더 그럴듯하게 적용할 수 있다. 만약 내
가 이를 보여 줄 수 없다면 그들의 적용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면 될 것이다.

주님이 일으킴을 받은 나사로를 동인 것으로부터 풀고 자유롭게 하라고 명령하신 대상은 제자들이라고 그


들은 말한다(요 11:44) 361)5)

우선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디를 읽어 봐도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

3) 359) "Omnia sacerdotia ad Christum translata sunt, in eo impleta et finita; ad eum igitur unum ius omne et honos sacerdotii
translatus est, Si tantopere amant allegorias sectari, unicum sacerdotem Christum sibi proponant, et rerum omnium libera
iurisdictione tribunal elus cumulent,"
4) 360) Chrysostom, Homilies on the Canaanite Woman, hom, ix (MPG 52, 456f), Quot, Battles tr., n, 10.
5) 361) Ps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x. 25 (MPL 40, 1122); Gratian, Decretum II. i. 88 (Friedberg 1. 1188), Quot,
Battles tr., n, 11.
하고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곳에 있었던 유대인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은 자기의 기적이 속임수라는 어떤 의심도 가질 수 없게끔
분명하게 예시하시고 죽은 자들을 만지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음성으로만 일으켜 세우시는 자기의 더욱 큰
능력을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게 보여 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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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따라서 나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주님은 모든 사악한 의심을 유대인들
로부터 제하시기 위해서, 그들이 돌을 구르고 썩은 냄새를 맡고, 죽음의 확실한 표징들을 지켜보고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그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살아 있은 그를 제일 먼저 만지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크리소스
토무스의 견해이다. 362)6)

만약 주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저 스콜라주의자들은 무엇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그들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푸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지 않겠는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보
다 이를 얼마나 더 적절하고 더 적합하게 풍유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인가?

즉 하나님이 이 징표로 자기의 신자들에게 교훈하기를 원하신 바는 자기에 의해 일으킴을 받은 자들을 그


들이 풀어 주고, 즉 그 자들의 죄를 그들이 기억하지 않고 자기가 방면한 자들을 그들이 죄인이라고 저주
하지 않으며, 자기가 너그럽게 봐주신 것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비난을 그치며 자기가 자비를 베푸시고 용
이하게 감싸 주시고자 하셨을 때 그들이 잔인하고 모질게 형벌을 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듯 확실히, 지나치게 냉혹하고 몰인정한 자들은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심판관은 우리
가 마음을 바꾸어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봐주는 자리에 서도록 하시는 최고의 본이 되신다. 이 교훈을 받
은 그들로 하여금 나가서 지금 자기들의 풍유를 전하게 하자.

6. 성경의 명령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죄를 서로 고백하라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다음과 같은 본문들로 무장하여 더욱 가까이 맞붙어
싸우고자 나선다. 요한의 세례로 나아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다(마 3:6).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약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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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명령한다. 363)7)

세례받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말씀된
바와 같이 요한은 "회개의 세례 (막 1:4)를 선포했으며 물로 회개에 이르는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자기들을 죄인들이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겠는가? 세례는 죄사함
의 징표이다. 자기들을 그런 사람들로 인정하는 죄인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징표를 받도록 허용되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받기 위해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한 것이다.

야고보가 "서로 고백하며”(약 5:16)라고 명령했던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바로 이어


지는 구절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이 구절 또한 자기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
았을 것이다. 사도는“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서로 기도하라" (약 5:16) 라고 전한다. 여기에서 상호 고백
과 상호 기도가 서로 연결된다. 이렇게 볼 때, 만약 고백이 오직 하급사제들에게만 해야 하는 것이라면 기
도도 오직 그들을 위해서만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오직 하급 사제들에게만 고백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

6) 362) Pseudo-Chrysostom, Contra Judaeos, Gentiles et haereticos (MPG 48, 1078), Quot, Battles tr,, n, 12,
7) 363) 중세의 저술가들은 입의 고백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 본문을 가장 빈번히 인용하였다.
이 야고보의 말씀을 좇아서 나올 수 있겠는가? 실로 그가 서로 고백하기를 원한다고 전할 때, '서로'(ἀλλ
ήλοις)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고백을 서로 번갈아 돌아가면서, 만약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서
로 주고받고 하면서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만을364)8) 염두에 둔 것이다. 진정 고백을 듣기에 부적합한 사
람들은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고백을 할 수도 없다. 365)9) 그들은 오직 하급 사제들만 이 특권을 지닐 자
격이 있다고 하니 결국 오직 그들에게 우리가 고백해야 할 의무도양도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시한 것들은 내버리도록 하자. 그리고 간단하고 분명한사도의 마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
도록 하자. 즉 우리의 연약함을 서로 돌아가면서 상대방의 품에 내려놓음으로써 상호 간의 권고, 상호 간
의 긍휼, 상호 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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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우리가 서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리고 형제의 연약함을 상호 간에 의식하면서 서로를 위해서 주
님께 기도하자. 왜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고백을 힘써서 권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를 반대하기 위해서 야고보를 인용하는가?

여하튼 자기의 비참함을 먼저 고백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고백을 할 수가 없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천사들 앞에서. 교회 앞에서,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를 죄인이라
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저주가 있다고 우리는 선포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갈 3:22) 이는 "모든 입을 막고"(롬 3:19) 모든 육체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게 하려 하
시기 때문이다(롬 3:20; 참조. 고전 1:29). 이러하니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참되시다"(롬 3:4)라고 일컬어
질 것이며 홀로 높임을 받으셔야 할 것이다.

7. 고백의 법이 고대에는 없었음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고백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라고 감히 얼마나 무모하게 주장하는지 나는
놀란다. 참으로 그것을 시행한 것이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옛날에는 자
유로웠다는 것을 쉽게 밝힐 수 있다.

그들의 연감들 역시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 시대 이전에는 이것에 관한 어떤 법이나 칙령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보다 더 오래된 고대의 법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것을 붙들고 있었을 텐데 기껏 라테란 회의(1215년)의 칙령 정도에 만족하고 그것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
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그것에 관한 고대의 법이 전무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다른 사안들에 대해서는
고대 회의들의 산물이라면서 위작된 교사들을 남발하여 고대에 대한 경의를 표함으로써 단순한 마음을 지
닌 사람들을 꼼짝없이 사로잡으려고 한 것이 상례였지만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무모하게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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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들이밀고 이러한 거짓을 저지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이 증인이 되듯이, 인노켄티우
스 3세가 덫을 쳐 놓아 필히 고백을 할 수밖에 없게 한 지 아직 300년이 흐르지 않았다. 366)10)

그러나 시간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그곳에 사용된 말들의 야만성만으로도 우리는 그 법을 불신할 수밖
에 없게 된다. 그 선한 신부들은 남성과 여성에 속한 모든 사람이 367)11) 한 해에 한 번 그들의 모든 죄

8) 364)"qui aliorum confessionem audire possint………mutuo, invicem, vicissim, aut si malunt, reciproce."
9) 365) "Confiteri autem reciproce nequeunt, nisi qui sunt audiendis confessionibus idonei,"
10) 366) 초기 교황들의 것이라고 각색된 위조 교령들(the Forged Decretals)은 850년경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나 타났다. Cf. P. Hinschius,
Decretales Pseudo-Isidorianae et Capitula Angilrammi; E. H. Davenport, The Forged Decretals, J. Haller, Nikolaus I und
Pseudoisidor; P. Foumier and G. Le Bras, Histoire des collections canoniques en Occident depuis les fausses décrétales jusqu'au
décret de Gratien 1. 196f; W.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pp. 167-189. Quot. Battles tr.. n. 14.
11) 367) Lateran Council (1215) canon xxi, Text in Mansi XXII, 1007ff,; Hefele-Leclercq V, 1350, Quot, Battles tr.. n. 15.
를 그들이 속한 자기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재치가 넘치는 사람들은 익살맞게 이 명령은 오
직 자웅 동체를 칭함으로 남자이거나 여자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런
데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자기 사제"는 368)12) 누구를 뜻하는가?

그들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더 한층 혼란스럽게 한다. 교황이 고용


한 이러한 논객들이 뭐라고 주절대든지 간에 우리는 사람들을 권고하여 그들의 죄를 빠짐없이 열거하도록
하는 이 법의 저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런데 이제 그의 부활 후 1200년이 지나서
야 이전에 없던 법이 나타났다. 경건과 교리가 소멸된 가운데 거저목자들의 가면만 주워 쓴 자들이 닥치는
대로 갖은 방자함을 다 보이며 행세하는 이러한 전제가 마침내 도입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명백한 증언들이 역사 서적들과 다른 고대 저자들의 글들을 통하여서 현존한다. 그 증언들


은 이것이 주교들에 의해서 제정된 정치적인 훈육이었으며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이 아
니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많은 것들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증거물이 될 오직 한 가지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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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제시하겠다. 소조메노스(sozomenos)는 이 주교들의 칙령이 서방 교회들 특히 로마에서 열심히 지켜졌
다고 언급함으로써 그것이 모든 교회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제도는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장로
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직무를 감독하는 자로서 특별히 지정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
한 열쇠들이 사제 계급 전체에 구별 없이 주어졌다고 하는 그들의 거짓말을 넉넉하게 반박한다. 참으로 그
것은 모든 사제에게 속한 공통적인 직능이 아니라 감독에 의해서 그 일을 위해서 선택된 한 사람의 고유
한 역할이었다. 그 사람을 오늘날 개개의 대성당에서는 "청죄 사제"(聽罪司祭)369)13)라고 부른다. 그의 일
은 심각한 범죄들을 조사하고 그것들 가운데서 본을 삼아 징계할 대상을 정하는 것이다.

또한 소조메노스는 어떤 귀부인이 고백을 가장하여 한 부제와 가졌던 더러운 동거 관계가 탄로 날 때까지


이 고백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습이었다고 덧붙인다. 이 범죄 때문에 그 교회의 주교로서 거룩함과 학식
으로 유명했던 넥타리오스(Nectarios)가 고백하는 의식을 폐지했다. 370)14)

여기에서 진정 여기에서, 이 당나귀들이 귀를 세우도록 하자.

만약 귀에 하는 고백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넥타리오스가 그것을 제거하고 근절했겠는가? 그들은 모든 고


대 사람의 동의로 훌륭히 증명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넥타리오스를 이단과 분파주의에 빠졌다고 비난할
것인가? 그렇다면 실로 같은 잣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도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한동안 그곳에는 고백
하는 관습이 은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기억에 따르면 폐지되었다고 소조메노스는 주장한다. 이러하
니 만약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친다면,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동방의 교
회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된 거역할 수 없는 법을 무시했던 배교자들로 만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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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368) "proprius sacerdos."


13) 369) "poenitentiarium."
14) 370) Sozomen, Ecclesiastical History vii, 16 (ed. R. Hussey (Oxford, 1860] II. 724ff);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IX, 85 (MPL 69,
1151; tr, NPNF 2 Ser, II. 386f.), Quot, Battles tr., n,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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