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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16)
범위: 3권 4장 24-26절
제목: 대리적 속죄의 값
본문: 요일 2:1-2

24. 사람들이 만든 법에 따른 강요된 고백

이 사안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이런 거짓된 고백의 저자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들의 헛됨이 논박될 것이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그들이 인용하는 몇몇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았
다. 그들이 말하는 고백에 관한 법은 사람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독재자의 법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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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멸하는 가운데 공표된 법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을 자기의 말씀에 묶으시며 사람들의 권세
로 그것이 풀리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두시기를 원하셨던 것이 은총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명령되는 것을 나는 결코


참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고유하게 속한 일 중에 우리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
는, 죄를 사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기 때문이다. 435)1)

또한 나는 이 독재가 도입된 것이 세계가 더러운 야만 세력에 압제당할 때였다는 것을 제시했다.

게다가 나는 이것이 유해한 법이라는 사실을 가르쳤다. 혹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넘치
는 곳에서는 비참한 영혼이 절망으로 내몰리게 되고, 혹 그것에 대하여 무관심한 곳에서는 공허한 아침이
무성한 위로와 그에 따른 나태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이 제시하는 완화책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순수한 교리를 뒤섞고 모호하게 하며
부패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자기들의 불경건한 행위들을 다양한 색으로 위장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25. 셋째 요소 : 행위의 보속. 구원의 은총에는 값이 요구되지 않음

그들은 회개에 있어서 셋째 주제를 보속에 할당한다. 그들의 모든 공론을 우리는 단 한마디 말로 뒤집을
수 있다.

그들은 회개하는 자가 행했던 것에 대해서 주님께 속하지 아니한다면 이전의 악행을 삼가고 행동 습관을
더욱 좋게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속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
움거리가 있다며 눈물, 금식, 봉헌, 자선, 그리고 다른 사랑의 의무들을 열거한다. 그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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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면, 이것들로 주님이 용서하시도록 해야 하고, 이것들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 진 빚이 모두 배상되어야
하고, 이것들로 우리의 범죄를 대신해야 하고, 이것들로 은총의 값이 치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후
한 자비로 죄를 사하신다.

1) 435) "quia nihil Deo magis proprium, quam peccata remittere, in quo nobis sita est salu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의 훈련으로서 형벌을 남겨 두신다. 이것이 보속에 의해서 속해져야 할 형벌이다.
436)2)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관용으로부터 범죄에 대한 은총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행위의 공로가 중재하는 가운데 주어진다. 이 중재를 통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값이 지불되어
하나님의 의에 따른 합당한 보속이 이루어진다. 437)3)

이와 같은 거짓말들에 반대해서 나는 값없이 주어지는 죄사함을 말한다. 이것에 대해 성경보다 더 명확하


게 설명된 곳은 어디에도 없다(사 52:3; 롬 3:24-25; 5:8;골 2:13-14: 딤후 1:9; 딛 3:5). 무엇보다도 순수
한 후하심의 선물 외에 무엇이 죄사함인가? 죄를 사한다고 일컬어지는 분은 돈을 지불받고 영수증을 주며
그것을 입증하는 채권자가 아니라, 어떤 지불을 받음도 없이, 자원해서, 자기의 은총으로 빚을 진 자의 이
름을 지워 버리시는 분이시다.

보속에 관한 모든 입장을 제하여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왜 "값없이" 438)4)라는 말이 더해졌겠는가?


이러함에도 무슨 자신감으로 그들은 강력한 벼락으로 꺼꾸러뜨려진 자기들의 보속 교리를 여전히 세워가
고 있는가? 무엇 때문인가? 여호와가 이사야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라고 선포하실 때 그는 오직 자기의 선하심에 죄를 사하는 원인과
근거가 있음을 밝히 선포하고 계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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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오직 그의 이름으로만 죄사함을 받게 된다고 전하지 않는가?
(행 10:43) 이 이름이 다른 모든 이름을 배제하지 않는가? 어떻게 그들은 보속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가? 심지어 그들은 보속이 그 자체로는 마치 보조하듯이 중재할 뿐이라고 말할 때에도 죄
사함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말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기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라고 구실을 댈 수 없으며, 오
직 그리스도의 위탁에만 의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이렇게 선포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리
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그리고 그는 곧이어 그 방법과 이유를 말한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
은"(고후 5:21).

26.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무름만이 있을 뿐, 스콜라주의자들이 말하는 보속은 없음

진정 그들의 사악함이 다음 말에 있다. 세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우리가 받아들
여질 때 죄사함과 화목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지만, 세례 후에는 보속을 통하여 다시 일으켜져야 하는바,
교회의 열쇠를 통하여서 분배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피는 아무 효력이 없다. 439)5) 나는 지금 불확실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둘이 아니라 모든 스콜라주의자가 아주 분명하게 자기들의 오점
을 글들로 폭로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생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좇아 그리스도가 나무 위에서 우리 죄
에 대한 값을 치르셨다고(벧전2:24) 고백한 후에, 그 진술을 다음과 같은 예외를 들어 수정하였다. 곧 세례
의 때에 완화되는 죄에 대한 모든 현세적 징벌이 세례 후에는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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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36) "Quamvis enim largitate misericordiae culpam remiserit, poenam tamen retinere disciplina iustitiae: hancesse
poenam quae satisfactionibus redimenda sit." Lombard, Sentences IV, xvi, 4 (MPL 192. 879); Gratian, Decretum II,
xxxiii, 3. 1. 42, 63 (MPL 187, 1532, 1544; Friedberg I. 1168, 1177), Quot. Battles tr.. n. 50.
3) 437)"nos quidem a Dei clementia delictorum veniam impetrare, sed intercedente merito operum, quibus peccatorum
noxa compensetur, quo debita iustitiae Dei satisfactio persolvatur,"
4) 438) "gratis."
5) 439) "et peccatorum remissionem, et reconciliationem fleri semelquum in gratiam Del per Christum in baptismo
recipimur; post baptismum, resurgendum esse per satisfactiones; sanguinem Christi nihil prodesse, nisi quatenus
per claves ecclesiae dispensatur,"
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경감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회개가 함께 작용하게 된다고 하였다. 440)6)

그러나 요한은 이와 아주 다르게 전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
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요일 2:1-2). “자녀들아 내가 너
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 2:12). 그리스도를 죄에 대
한 용서로서 제시하면서 요한은 진노하신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유화적이거나 온유해질 수 있는 다른 보속
은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번에 화목하게 되신 하나님이 화목을 위한 다른
방법들을 찾으신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중재로 항상 우리에게 하
나님의 은혜를 회복시키시는 영원한 대언자로, 죄가 속하여지는 영원한 용서로 삼는다. 왜냐하면 세례 요
한이 전한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참조. 요 1:36.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지고 가신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이 홀로 하나님의 어린양, 홀로 죄인들을 위한 제물, 홀로 속죄, 홀로 무


름이시기 441)7)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442)8) 죄를 관대히 봐주시는 권리와 권한은 성부께 고유
하게 속한다. 이 점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는 서로 구별되신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다른 위치를 점하시는
바, 우리가 빚진 형벌을 그 자신이 맡으신 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도말하셨다. 이에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수된 속죄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다만 자기들이 보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
기는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자들이 자기들의 것이라며 낚아채려고 애쓰는 저
영예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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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40) "quod in baptismo omnes peccatorum poenae temporales relaxantur, sed post baptismum, poenitentiae
beneficio minorantur; ut ita simul cooperetur crux Christi et nostra poenitentia," Lombard, Sentences III. xix, 4
(MPL 192, 797):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iv. 5. Quot, Battles tr.. n. 52,
7) 441) ipse solus est agnus Dei, solus quoque oblatio est propeccatis, solus expiatio, solus satisfactio."
8) 442) Institutio, 2.16.3-5.
9) 443) "Nam quum ius et potestas ignoscendi proprie competat in patrem, ubi a filio distinguitur, utiam visum est, in
altero gradu Christus hic locatur, quod poenam nobis debitam in se transferens. reatum nostrum deleverit coram
Dei iudicio, Unde sequitur, non aliter nos fore participes expiationis a Christo peractae, nisi apud eum resideat
honor ille quem sibi rapiunt, qui Deum placare tentant suis compensationi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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