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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02)

범위: 3권 3장 9-10절

제목: 그리스도와 살고 죽음

본문: 갈라디아서 3:20

9. 그리스도와 동참함으로 옛사람을 죽임과 새사람을 살림 

이 두 가지 모두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참함으로써254)40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그의 죽음과 실제로


교통하려면 우리 옛사람이 그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죽어야 한다(롬 6:6). 그리하면 부
패한 처음 본성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일으킴을 받아 하나님의 의에 상응하는 삶의 새로움에 이르게 될 것이다. 255)41 

그러므로 나는 한마디로 회개를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바, 중생의 목표는 다름 아닌 아담의 위반 이후로 더


러워지고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일신(一新)하는 데 있다. 256)42 

이런 맥락에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


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또 다른 본문에서,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


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3-24).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이러하므로 아담을 통하여 죽게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이러한 중생에 의해 회복되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여호와는 자기가 생명의 기업으로 뽑는 사람은 누구든지 순
전하게 되도록 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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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기를 기뻐하신다.257)43 그러나 실로 이런 회복은258)44 한 날이나 한 해, 어느 한 순간에 완전하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계속적이기는 하나 때때로 아주 늦은 걸음으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서 육체의 부패
를 지워 내고, 그들의 불결함을 씻어 깨끗하게 하며, 그들을 자기의 성전으로 삼고자 거룩하게 구별하신
다. 이를 위해 그는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서 진정한 정결함에 이르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생 동
안 회개 가운데 훈련받게 되며 그 전쟁이 오직 죽음의 때에 끝이 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하니 저 추한 논쟁가이자 배교자인 스타필루스45는 내가 바울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을 (고후 4:4) 거


룩함과 참된 의라고 해석함으로써(참조, 엡 4:24) 현세의 삶의 상태를 하늘 영광과 혼동하고 있다고 재갈
거리는데, 그의 사악함이야 말로 더욱 크다.259)46 과연 마치 어떤 것이 정의될 때 그 자체의 순전함과 완
전함을 추구해서는 안 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장의 여지가 부인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자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모양에 가까이 나아가게 되면 그만큼 더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서 빛나게
된다. 신자들이 그곳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경기장을 맡기셔서 그들이 일생 동안 그곳에서
뛰어가도록 하신다. 

 
10. 중생한 자들에게도 여전히 정욕이 일며 그것은 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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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육의 괴롭힘
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유를 획득하여 완전하게 소유하는 데 이른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움거리가
항구적으로 남아있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훈련을 받게 된다. 단지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의 연약함도 더 잘 배우게 된다. 

이 사안에 대해 남보다 더 건전한 판단을 하는 모든 저술가는 중생한 사람에게도 영구적으로 욕정을 일으


켜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하는 악의 부싯깃이260) 남아 있음을 인정한다. 

거룩한 자들도 저 정욕의 질병에 묶여 여전히 얽혀 있어서261)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때때로 들뜨기도 하
고 충동을 받기도 해서 육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다른 모든 악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저자들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의식했는지 알아내려고 너무 오랫동안 애쓸 필요는 없


다. 오직 아우구스티누스만으로도 이를 위해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지런함을 다하여 충실하게
모든 사람의 의견들을 모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고대인들이 이
와 관련하여 뜻한 바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우리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 차가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는


신자들이 죽을 인생의 몸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고삐가 풀린 절제되지 않는 정욕에 매여 정욕을 갖지 않
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질병을 "연약함"이라는 이름으로 262) 지정하는 데 만족할 뿐감히
"죄"라고 263)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비로소 행위나 동의가 그것의 개념이나 이해에 뒤
따라 일어날 때, 곧 의지가 첫 번째 욕구에 굴복할 때라고 264)47 그는 가르친다. 26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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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어떤 욕망에 의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조금 자극되
기만 해도 266)49 죄라고 여긴다. 우리가 죄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안에 이러한 욕망을 생기게 하는 사
악함 그 자체 267)50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 가운데는 그들이 인생의 몸을 벗어버릴 때까지 항상 죄
가 있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체 가운데 올바름에 대적하는 정욕을 일게 하는 그 사악함이 거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의 말에서 보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라는 이름을 항상 금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
은 육체적인 정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일으키는 것을 '죄'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관한
한 이 땅에서는 절대적 지배권을 잃고 하늘에서는 소멸되고 만다."268)51 이 말을 통하여 그는 신자들이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고 있는 이상 그들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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