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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2), 3 3 9-10
( ) (102), 3 3 9-10
기독교강요 강설(102)
범위: 3권 3장 9-10절
제목: 그리스도와 살고 죽음
이러하므로 아담을 통하여 죽게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이러한 중생에 의해 회복되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여호와는 자기가 생명의 기업으로 뽑는 사람은 누구든지 순
전하게 되도록 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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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장의 여지가 부인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자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모양에 가까이 나아가게 되면 그만큼 더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서 빛나게
된다. 신자들이 그곳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경기장을 맡기셔서 그들이 일생 동안 그곳에서
뛰어가도록 하신다.
10. 중생한 자들에게도 여전히 정욕이 일며 그것은 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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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육의 괴롭힘
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유를 획득하여 완전하게 소유하는 데 이른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움거리가
항구적으로 남아있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훈련을 받게 된다. 단지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의 연약함도 더 잘 배우게 된다.
거룩한 자들도 저 정욕의 질병에 묶여 여전히 얽혀 있어서261)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때때로 들뜨기도 하
고 충동을 받기도 해서 육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다른 모든 악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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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어떤 욕망에 의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조금 자극되
기만 해도 266)49 죄라고 여긴다. 우리가 죄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안에 이러한 욕망을 생기게 하는 사
악함 그 자체 267)50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 가운데는 그들이 인생의 몸을 벗어버릴 때까지 항상 죄
가 있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체 가운데 올바름에 대적하는 정욕을 일게 하는 그 사악함이 거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의 말에서 보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라는 이름을 항상 금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
은 육체적인 정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일으키는 것을 '죄'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관한
한 이 땅에서는 절대적 지배권을 잃고 하늘에서는 소멸되고 만다."268)51 이 말을 통하여 그는 신자들이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고 있는 이상 그들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