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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스도의 무릎을 무력화시키고 보속 교리의 해괴함을 합리화시키는 연옥의 조작

이제 우리는 그들의 연옥으로 528)1) 더 이상 성가심을 당하지 않도록 하자. 529)2) 그것은 이 도끼로 말미
암아 부서졌고, 베였으며, 완전히 뿌리 뽑혀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연옥에 대한 논의
는 신랄한 논쟁들을 야기할 뿐 건덕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에 숨기고 생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게 동의하지 않는다. 530)3) 분명히 나는 사소한 것들은 그냥 사소한 데 머물러있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
지 않는다면 무시되어도 좋다고 충고하고 싶다. 그러나 연옥은 수많은 모독 위에 세워졌고, 날마다 새로운
모독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많은 심각한 위반을 야기하기 때문에 결코 그저 지나치듯 바라보아서는 안 된
다.

여하튼 아마 한동안 사람들은 연옥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게 기이하고 맹목적으로 무모함을 내세워
고안된 것이었다는 사실, 사탄의 계교로 조작된 그들이 말하는 모종의 '계시'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연옥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확정하기 위해 어떤 성경 본문들이 무식하게 곡해되었다는 사실을 묵인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은 사람의 만용이 자기의 은밀한 판결의 장소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는 자기의 음성을 무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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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죽은 사람들부터 진리를 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셨다(신 18:11). 그뿐 아니라 자기의 말씀이 불경건
하게 오염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 한동안 참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죄를 속하는 것을 그리스


도의 피 외에 다른 곳에서 추구하고 무릎을 다른 것으로 옮길 때 침묵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우리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과 양쪽 폐로부터 나오는 소리로도, 연옥
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전복시키며 파괴하는 사탄의 치명적인 허구라는 것을
외쳐야 한다. 531)4) 그들의 연옥은 그들의 방식으로 죽은 영혼들이 죄를 보하기 위하여 치르는 형벌 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보속의 개념이 파괴될 때 연옥 자체도 뿌리로부터 뽑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해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죄를 위한 유일한 무릎, 유일한 속죄, 유일한 정화연옥은 순전히 그리스도에 대한 두려운 모독일 뿐 그 외
에 무엇이다.이 남아 있는가? 532)5) 연옥을 날마다 변호하는 신성 모독과 연옥이 종교에 있어서 양산하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 또 그와 같은 불경건의 샘에서 습관적으로 흘러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

1) 528) "de suo purgatorio,"


2) 529) 다음은 로마 가톨릭의 연옥 교리에 대한 칼빈의 입장에 대해서 다룬다. Heinric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tr. Harold Knight (Richmond, VA: John Knox Press, 1955), 102-107.

3) 530) 멜란히톤(Melanchton, 1497-1560)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 1530)와 그 변증서


(Apology of Augsburg Confession)에서 연옥을 다루지 않았다.
4) 531) "Clamandum ergo non modo vocis, sed gutturis ac laterum contentione, purgatorium exitiale
satanae esse commentum, quod Christi crucem evacuat, quod contumeliam Dei misericordiae non
ferendam irrogat, quod fidem nostram labefacit et evertit."
5) 532) "Christi sanguinem unicam esse pro fidelium peccatis satisfactionem, expiationem, purgationem:
quid superest nisi purgatorium meram esse eamque horribilem in Christum blasphemiam? Cf,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Appendix II. Quot. Battles tr., n. 14.
른 것들에 대해서는 넘어가려고 한다.

7. 성경은 현세 이후에는 죄사함이 없음을 말함

그러나 그들이 거짓되고 무모하게 낚아채곤 하는 저 성경 본문들을 그들의손에서 빼앗아 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님이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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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막 3:28-29 눅 12:10)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을 때, 동


시에 오는 세상에서도 죄사함이 있다고 암시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533)6)

그러나 여기에서 주님은 죄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연옥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죄에 대한 형벌을 연옥에서 당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현세의 삶 가운데 죄과에 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왜 부인하지 않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훨씬 더 용이한 해법을 제시하겠다. 주님은 이렇듯 몰염


치한 불법에 대해서는 어떤 용서도 누릴 수 없게끔 소망을 단절시키고자 원하셨을 때, 그것이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그리하여 이를 더욱 부각시키시
고자 모든 사람의 양심이 이 땅의 삶에서 경험하는 심판과 부활 때 공개적으로 주어지는 최후의 심판을
구별하셨다.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듯하다. “너희는 악의적인 반역이 현세의 파멸과 다르지 않음을
주의하라. 성령의 빛을 받고도 고의로 꺼뜨리려고 하는 자는 죄인들의 회심을 위하여 부여된 이 땅의 삶에
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들에 의해 양들이 염소들과 분리되며 천국이 모든 거치는 것들로부터 깨끗하
게 되는 마지막 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참조, 마 25:32-33).

그들은 또한 마태복음으로부터 저 유명한 비유를 끌어온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 사화하라 그 고발하


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네가 한 푼
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만일 본문의 재판관이 하
나님을 고발하는 자가 마귀를 옥리가 천사를, 옥이 연옥을 뜻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굴복할 것이
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공평한 화합을 한층 더 강력하게 권고하시
기 위하여, 공평과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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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행하는 것보다 극단의 법규를 534)7) 더 좋아하는 완고한 사람들은 수많은 위험과 나쁜 것에 직면하
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려 했음이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연옥은 어디서 발견되는가? 나
는 이에 대해서 묻고자 한다.

8. 연옥 교리의 근거로 삼는 마카비서는 정경이 아니므로 권위가 없고 그 내용이 망상에 그침

6) 533) Lombard, Sentences IV, xxi, 1 (MPL 192, 895); Eck, Enchiridion (1526), ch, xxv;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vi, 11 (MPL 183, 1100; tr, S. J.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405f.
Quot, Battles tr,, n. 15.
7) 534) "summunius." 여기서 칼빈은 "summum ius, summa iniuria"(극단의 법규는 극단의 불의)라는 키케로의 말
을(On Duties I. x) 염두에 둔 듯하다. Quot. Battles tr.. n. 16.
그들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535)8)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께 꿇게 하
시고"(적용. 빌 2:10)라고 선포하는 바울의 말씀을 증거로 삼는다. 536)9) 그들은 '땅 아래'를 영원한 저주
에 묶여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입장에 서서 이 단어를
연옥에서 고통을 겪는 영혼에 적용시킨다. '무릎을 꿇게 하시고'라는 표현으로 사도가 지칭한 것이 경건한
참된 예배였다면 그들의 추론도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이로써 모든
피조물이 복종하는 지배권이 그리스도께 부여되어 있음을 단순히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땅 아래'라는 표현은 마귀들, 즉 하나님의 심판좌 앞으로 출두당해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들의
심판자를 인정하게 될 것이 분명한 마귀들을 의미한다고(참조, 약 2:19; 고후 7:15) 우리가 이해한다 해서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같은 예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지 않는가?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싫을 것이
요”(롬 14:10-11 사 45:23).

그렇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의 다음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라는 것은 아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 위에


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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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
지어다" (계 5:13).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피조물'이 무엇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이성이 없는 것들과 무생물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세계의 모든 부분이 각
각 하늘 꼭대기로부터 땅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제 모양대로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풀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참조, 시 19:1).

그들이 마카비(Maccabee) 가문의 역사에서 끌어오는 것은(마카비하 12:43)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다. 나는 그것을 거룩한 책들의 목록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먼저 아우구스티누스가 얼마나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했
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이 그가 한 말이다. "유대인들은 마카비서를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으로 간주하
지 않는다. 주님은 이 책들이 자기의 증인들이 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신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
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그러나 그것을 정신을 차리고 읽
고 듣는다면 교회에 무익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537)10) 그러나 히에로니무스는 주저 없이 이 책의
권위는 교리를 확증하는 데 조금도 효과적이지 않다고 가르친다. 538)11) 키프리아누스의 작품이라고 생각
되는 사도신경 해석』(De expositione symboli)에 따르면, 마카비서는 고대 교회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하
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539)12) 이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럴진대 왜 나는 여기서 이 헛된 논쟁을 계속하
고 있는가? 이 책에서 저자는 끝에 가서 자기가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데(마카비하 15:39), 이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이러한 책을 쓸 만큼 존경을 받을 사람은 아니라
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듯하다. 자기가 쓴 글들이 은총을 필요로 한다고 인정하는 사람
은 그것들이 성령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8) 535) infernorum."
9) 536) Eck, Enchiridion (1526), ch, xxv, Cf, Herbom, Enchiridion xlvii (CC 12, 162), Quot, Battles tr., n.
17.
10) 537) Augustine, Against Gaudentius I, xxxi, 38 (MPL 43, 729). Quot, Battles tr,, n. 18.
11) 538) Jerome. Preface to the Books of Samuel and Malachi (MPL 28, 556), Quot, Battles tr., n. 19.
12) 539) Rufinu Commentary the Apostles' Creed xxvill (MPL 21, 374) 이 글은 에라스무스
(DesideriusErasmus, 1466-1536)가 편집한 키프리아누스 저작집(1530-1540)에 실렸으나 칼빈은 이를 키프리아누
스의글로 생각하지 않는다. Cf. Institutio, 4,1,2, Quot, Battles tr.. n.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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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뿐 아니라 그 책에 나타나는 유다의 경건은 그가 마지막 부활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예루살
렘에 있는 죽은 자들에게 제물을 보냈다는 단지 한가지 명목으로 칭찬을 받았다는 점 외에는 없음을(마카
비하 12:43) 우리는 지적해야 한다. 이 역사의 저술가는 유다의 이 행위가 대속의 값을 치렀다고 자리매김
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 조국과 종교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나누려는
목적으로 한 일이라고 간주했다. 실로 이 행위에는 미신이 없지 않았으며 무모한 열정이었다. 심지어 그리
스도의 강림으로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고대의 율법주의
적인 희생제물을 연장하여 적용시키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9. 성도의 공적을 시험하는 불은 연옥의 불이 아니라 성령을 뜻함

그러나 그들은 바울 안에서 무적의 군대를 발견하며 그것은 쉽게 공략될 수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
인데 주의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이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
이라 ……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
으리라"(적용, 고전 3:12-13, 15). 그들은 이것이 사람들에게서 죄의 더러움을 제거해 내서, 순수한 사람들
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연옥의 불 540)13)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대부분 옛날 저자들은 이를 다르게 이해하여 그것을 고통 혹은 십자가로 보았다. 이를 통하여 주님


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여 그들이 더 이상 육체의 더러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속에 살지 않도록 시험하
신다는 것이다. 5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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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저 거짓된 연옥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람들의 입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 본문에 대한 훨씬 더 분명하고 명확한 이해에 이르렀다고 보기 때문이
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서 나는 그들이 모든 사도와 성도가 이 연옥의 불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묻


고자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들은 아마 이를 부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들과 성도들의 공로
가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넘쳐흐른다고 몽상하고 있는데, 사도들과 성도들조차도 연옥에 들어가야 한다면
이는 극히 모순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
만의 공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적이 판단을 받아 밝혀질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는 나의 논법이 아니라
이러한 해석에 분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법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들의 해석은 더욱 모순된
다. 사도가 위에서 전하는 바는, 결코 그들이 어떤 공적 때문에 불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이 최고로 충실하게 교회를 세웠다면 그들의 공적이 불에 의해 시험을 받게 될 때 보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542)15)

첫째, 우리가 보듯이, 사도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머리로 고안해 낸 교리들을'나무나 풀이나 짚'이라는 은유

13) 540) "ignis …… purgatorius,"


14) 541) Chrysostom, Homilies on Repentance, hom, vi, 3 (MPG 49, 317f.); Augustine, Enchiridion viii, 68
(MPL 40, 864f; tr, LCC VII, 379f); City of God XXI. xxvi, 1, 2 (MPL 41, 743f; tr, NPNF II. 473f). CF.
Lombard, Sentences 1-3. Quot, Battles tr.. n. 21.
15) 542) Augustine, Enchiridion viii, 68 (MPL 40, 864f,; tr, LCC VII, 379f), Quot, Battles tr., n. 22.
를 사용해서 지칭하였다. 이 비유의 논법은 쉽게 드러난다. 즉 나무에 일단 불이 붙으면 즉시 타버려 사라
지고 말듯이 이러한 것들도 시험을 받을 때가 오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험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기의 이 비유의 맥
을 좇아 각 부분을 서로 간의 고유한 관계에 비추어 적합한 자리에 배치한다는 뜻에서 그 시험을 '불'이라
고 칭하는 것이다. 금이나 은은 불에 더 가까이 둘수록 그 순결함과 순수함에 대한 증거를 더 확실하게 보
여 준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리는 영적으로 더 엄밀하게 헤아려질수록 그 권위가 더욱 완전하게 확정된
다. 543)16)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이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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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순식간에 타버린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발명품들은 성령의 시


험을 견뎌 낼 수 없고 즉시 꺼꾸러져 소멸되고 만다. 요컨대 조작된 교리들을 나무나 풀이나 짚에 비유해
서 그것들이 불에 타서 소멸됨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 본문의 뜻일진대, 불처럼 태워서 흩어 버리는 일을
하시는 분은 주님의 성령이시다. 즉 그들의 교리가 시험을 받게 되는 불은 성령이시라는 사실이다. 성령에
의한 이 시험을 사도는 성경의 일반적 용법을 좇아 "주의 날"544)17)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방
식으로 자기의 현존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실 때마다 '주의 날'이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실로주님의 얼
굴이 가장 빛나는 것은 그의 진리가 빛을 발할 때이다. 이제 바울이 말한 '불'은 다름 아닌 성령의 시험을
545)18) 뜻함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그 불을 통하여 자기들의 공적을 잃게 되는 일을 겪는 자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고전3:15)


사도가 이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이해하면 이 질문에 답하기가 어
렵지 않다. 여기에서 사도는 합당한 기초를 유지하되 부적당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즉 주요하고 필요한 믿음의 교리들로부터는 멀리 떨어져있지 않지만 덜 중요하고 덜 위
험한 것들에 있어서는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발명품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혼합
시키는데, 말하자면 그 발명품들이 파괴되어 자기들의 공적을 잃게 되는 일을 필히 겪게 된다. "구원을 받
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5).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의 무지나 환영이 주님 앞에
서 받아들여질 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그것들로부터 깨끗해지지 않
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금과 같은 순수함을 연옥이라는 오물로 더럽히는 자는 필히 자
기 공적을 잃는 일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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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옛 교회의 저술가들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보속의 측면에서 다루지 않았음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가장 오래된 교회의 규칙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반박을 잠재우고자 바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까지도 포함시켜, 교회를 적합하지 않은 기초 위에 세우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들의 공
적을 잃어버리는 일을 겪을 것이라고 선언한다(고전3:11-15).

그러므로 나에게 대적하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1300년 동안 실행되어져 온 관습이었다고


546)19)반박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 어떤 계시에 의해서, 어

16) 543) "Domini veritas, quo exactius spirituali examine expenditur, eo maiorem sumit autoritatis
confirmationem."
17) 544) "dies … Domini"
18) 545) "spiritus sancti examen."
19) 546)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bxxt 2-8. 여기서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연옥에 있는 자들을 위
해서만 효력이 있다고 밝히고, Qu. xxi.10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한 면죄부를 논한다. cf. J. Latomus,
Dequibusdam articulis in ecclesia controversis (Opera [1550], fo, 199a); J. Cochlaeus, Confutatio ccccc
earticulorum M. Lutheri ex xxvi sermonibus eius, xviii (art, 305); Augustine, Enchiridion xxix, 109f,
떤 예를 좇아서 그렇게 했는지를 되묻고자 한다. 547)20) 이것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
도들의 예를 모두 읽어 봐도 그것을 보여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애도하는 것이나 매장하는 의무에 대
한 부분을 다루는 곳에서는 많은 기록이 있고 때로는 상세한 설명도 찾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기도에 대
해서는 토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사안이 더 중요할수록 그것에 대한 언급도 더욱 분명하게 되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죽은 자
들을 위하여 기도를 퍼부은 고대의 저술가들도 정작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도 합법적인 예도
모두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548)21)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감히 그렇게 하였는가? 나는 그들이 무
언가 인간적인 것에 사로잡혀 이런 일로 허덕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했다고 해서 그것을 본보
기로 삼아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확실한 양심이 따르지 않으면 어떤 일도 착
수해서는 안 되며, 바울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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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치듯이(롬 14:23), 특별히 기도에 있어서 이런 확실성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몰린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자기들
의 슬픔을 경감시켜 줄 위로를 찾고 있었으며, 죽은 자들을 향한 사랑의 증언을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것
이 몰인정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경험을 통하여 사람의 본성이 이런 감정에 어떻게 쏠리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

또한 관솔불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펴서 타오르게 하는 한 관습이 채택되었다. 우리가 알듯


이, 이방인들 가운데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행하여 온, 죽은 사람들의 빚을 갚아 해방시켜 주는 장례 의식
이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정결하게 하는 의식들이 그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거행되었다. 사탄은 이
러한 술책들로 어리석은 인생들을 우롱하는 와중에 다음과 같은 올바른 원리에 편승하여 그 속일 기회를
얻었다. 즉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이생으로부터 다른 생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미신 자
체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심판좌 앞에서 유죄의 선고를 받게 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왜냐하면 그들
은 자기들이 믿고 있다고 공언한 미래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여 그곳에 아무 생각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죽은 자들에게 마치 그들


이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어떤 의무를 수행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그들의 잘못된 열심
이 도모되었다. 만약 그들이 장례식이나 연회나 제사를 돌보는 것에 부지런함을 다하지 않으면 큰 비난에
자기들이 직면할 것이라고 염려하였던 것이다. 549)22) 이런 해괴한 경쟁으로부터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덧붙여져서 고통 가운데 죽은 자들을 돕는 것이 교황권의 으뜸가는 거룩함이 되었다. 550)23)

그러나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증언하면서 훨씬 더 뛰어나고 완전한 위로를 제
공하고, 바로 이어서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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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 (계 14:13) 라고 그 이유가 덧붙여진다. 더군다나 사랑의 도가 지나쳐 교회안에 왜곡된 기도의 관습
이 세워지는 것을 방관하는 데 이르러서는 안 된다.

(MPL 40, 283; tr, LCC VII, 405), Quot, Battles tr.. n. 23.
20) 547) Calvin, Vera Ecclesiae Reformandae Ratio, CO 7,656. Quot, Battles tr., Supplement.
21) 548) Tertullian, Exhortation to Chastity xi; On Monogamy x (CCL Tertullianus II, 1031, 1243; tr, ANF
IV, 56,66f), Quot, Battles tr.. n. 24.
22) 549) Cf, Calvin, Consilium de Luxu, CO 10/1,205, Quot, Battles tr., Supplement.
23) 550)"ut praecipua sanctitas papatus sit mortuis laborantibus opem affere."
확실히 조금이라도 사려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안에 대해 고대의 저자들이 쓴 글 가운데서
무엇을 읽든지 그것은 공공의 관습과 무지로 허용되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나는 교부들도
이 오류에 휩쓸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신중하지 않은 경신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판단력을 앗아가
곤 하기 때문이다. 실상 그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그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권하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이 망설였는지가 잘 설명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Confessiones)에서 말하기를, 어머니 모니카
가 그에게 제단에서 성례를 거행할 때마다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 노인
의 간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아들은 그것을 성경의 규범에 따라 판단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자기의 자연
적인 정서를 좇아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551)24)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죽은 자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돌봄」(De cura pro mortuis agenda)에는 이러한 기도에대해서 너무나
많은 의혹을 표출하고 있는데, 그의 냉정함이 죽은 자들을 위한 보호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의 어리
석은 열심의 불길을 당당히 꺼뜨려 버릴 것이다. 그 냉정한 상상들로 인하여 이전에 그 기도에 대해 근심
하던 사람들도 평정을 되찾게끔 될 것이다. 552)25) 이 책이 지지해 주는 바는 오직 한 가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관습으로 널리 작용해 왔으므로 그 의무가 멸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밖에 없다.

부연한다면, 나는 고대의 교회 저술가들이 죽은 자들을 돕는 것을 경건한 일처럼 여긴 것을 인정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무엇을 기도 속에 집어넣는 것은 불법이라는 속일 수 없는
규범을 항상 지켜야 한다. 우리의 간청은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원하시
는 것을 우리가 간구하기를 원하시며 그것은 그의 의지에 달렸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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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우리가 보듯이, 모든 율법과 복음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의 자유를 제안하는 것은 실로 단 한마


디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서 무엇을 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기도를
더럽히는 것이다. 553)

그러나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들이 고대 교회가 이른바 오류에 있어서 자기들의 동료라도 되듯이 우쭐대지
못하도록, 나는 그들과 고대 교회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
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모든 관심을 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그들을 기념하며 기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였다고 인정하였다. 연옥에 대해서 그들
은 어떤 확실한 것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불확실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연옥에 대해 꿈꿔 온 것을 의심 없이 신앙의 조항으로 견지할 것을 요구


한다. 옛날 사람들은 성찬의 교제 가운데서 드물게 그리고 단지 행사를 치를 목적으로, 자기들에게 속한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끈질기게 강요하고 성가
시게 선포함으로써 모든 사랑의 직분보다 그것을 더 우선시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554)26)

참으로 고대 저술가들이 당시에 행해지던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모두 뒤집어엎었음은 명백하다. 그들의


증언들을 제시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의 부활과 영원한 영광

24) 551) Augustine, Confessions IX, x1, 27; IX, xiii, 37 (MPL 32, 775, 779f; tr, LCC VII, 195, 200), Quot,
Battles tr.. n. 25.
25) 552) Augustine. On Care for the Dead (MPL 40. 591-610; tr. NPNF III, 539-551), Quot, Battles tr., n.
26.
26) 554) Augustine, Enchiridion xvill. 69; xxix, 110 (MPL 40, 265, 283f; tr, LCC VII 381, 405); Terrullian,
Exhortation to Chastity and On Monogamy, as cited I note 24, above: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bxxi: Latomus, as cited in note 23, above: Paris Faculty of Theology, Instruction on the of
Melanchthon (1535), art, 12, in Daniel Gerdesius. Historia reformationis sive annales evangelii seculo
XVI IV, 86, Quot, Battles tr.. n, 27.
이 모든 사람에 의해 대망되나, 누구든 죽을 때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죽음 후에 안식이 따른다고 가르
친다. 이러하므로 모든 경건한 사람은 선지자, 사도, 순교자와 다름없이 죽음 후 즉시 복된 쉼을 누린다고
그는 증언한다. 555)27) 그들의 조건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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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하다면 우리의 기도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묻고 싶다.

그들이 단순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현혹시킨 우둔하기 이를 데 없는 미신들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도 한


다. 그것들은 수를 셀 수 없으나 대부분 너무나 흉측해서 기품이 있는 색으로는 그 가장자리를 그려낼 수
도 없다. 또한 나는 세상의 그 심각한 아둔함 속에서 자기의 육욕을 채워 온 극히 몰염치한 저장사치들에
대해서도 침묵하겠다. 왜냐하면 이를 다루면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더
라도 경건한 독자들은 여기에서 자기들의 양심을 평온케 하는 데 충분한 것들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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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555) Augustine, John's Gospel xlix, 10 (MPL 35. 1751; tr, NPNF VII. 273f). 칼빈은 1534년에 쓰고 1542년
에 발표한 「영혼 수면설 반박(Psychopannychia)이라고 칭하는 다음 책에서 이를 상세하게 다룬다. Vivere apud
Christum non dormire animis sanctos qui in fide Christi decedunt (CO 5.177-231); tr. Calvin, Tracts I,
419-490, Quot, Battles tr., n,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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