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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19)
범위: 3권 4장 30-31절
제목: 자녀를 징계하심
본문: 시 94:12-15

30. 죄사함과 방면은 오직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의 무릎으로 말미암음

여전히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부과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묻고


자 한다. 그는 자기 몸으로 나무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고(벧전 2:24) 우리가 말할 때, 그것
은 다름 아니라 그가 우리의 죄에 부과된 형벌과 징벌을 다 치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 혹은 견책이 그에게 맡겨졌다고 말하면서(사 53:5) 이 사실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선포했
다. 만약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와 화목하기 위해 먼저 치러야 하는
빚을 갚는 것, 즉 형벌을 치르는 것 외에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견책이 어디 있겠는가? 진정 당신은 그리스
도가 죄의 형벌을 감당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그것으로부터 구속하셨음을 분명히 보고 있지 않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해 언급할 때마다 그것을 "화목제물"(απολυτρωσις)이라고 부르곤 했다(롬 3:24 참
조. 고전 1:30; 엡 1:7; 골 1:14).일반적으로 이것은 대속이라고 이해되지만 또한 대속의 값 자체 그리고
대속의 무릎을 459)1) 뜻한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
대속물"(ἀντιλυτρον)로 주셨다고 기록한다(딤전 2:6).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용서란 여호
와 앞에서 희생제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희생제물은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460)2) 죄의 해독(害毒)을 하시려고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제일 먼저 우리
에게 파성추(坡城鎚)를 부여하신다. 율법에는 어떤 값을 치러야 죄를 무르게 되는지에 대한 방식이 구체적
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호와가 요구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을 통하여 모든 것을 갚음에 있다는 사
실이 분명히 그곳에 선포된다. 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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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그는 죄를 속하기 위한 모든 의식을 가장 자세하면서도 가장 엄격한 순서로 제시하신다(출
30:10; 레 4:1-7:16; 민 15:22-31). 그리고 자기의 심판이 오직 한 종류의 무름으로만462)4) 진정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는 범죄를 다스리시면서 행위로 그 값을 치르는 것은 전혀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희생제물만을 속죄에 필요한 것으로 요구하시겠는가?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이
태워서 드린 희생제물은 사람들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그 자체의 실제인 유일한 그리
스도의 희생제물에 의해서 463)5) 헤아려졌다.

호세아는 여호와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보상이 무엇인지 몇몇 말씀으로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오 하나님
이여,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호 14:2)라고 했으니 여기에 죄사함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호 14:2)라고 했으니, 여기에 무릎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바, 실로 그들은 영원한 형벌과 일시적 형벌을 서로 464)6) 구별함으로써 아주 더 교묘하게

1) 459) "pretium ipsum et satisfactionem redemptionis."


2) 460) Augustine, Psalmus, Ps, 129. 3 (MPL 37, 1697; tr. NPNF VIII, 13), Quot, Battles tr., n, 65, Cf
Comm.. Eph. 5:2 (CO 51,214),
3) 461) "Neque enim illic Dominus hanc aut illam satisfaciendi rationem constituit, sed totam in sacrificiis
compensationem requirit,"
4) 462) "unicum satisfactionis genus,"
5) 463) "a sua veritate, hoc est unico Christi sacrificio."
6) 464) "inter aeternam poenam et temporales."
이 사안을 피해 가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일시적 형벌은 하나님이 몸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가하는 모든
종류의 징벌로서, 다만 영원한 사망은 제외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변명하는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인용했던 말씀들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
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과를 너그럽게 보셔서 사해 주신다는 조건 아래 우리가 그에게 받아들
여져 은혜를 누리게 됨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은 죄를 사해달라는 은총
을 간구할 때 동시에 형벌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이 그들을
이렇게 몰아가는 것이다. 한편 그들은 여호와가 베푸시는 자비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전할 때 거의 언제나
형벌과 함께 형벌의 사함을 공언하며 선포한다. 분명 에스겔을 통하여 여호와는 자기가 바벨론 유배를 끝
내실 것이며 이는 유대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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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서라고 선포하심으로써(겔 36:22, 32) 이 두 가지가 모두 값없이 이루어질 것임을 충분히 보여 주신
다.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그것으로부터 야기되는 형벌도
반드시 그치게 될 것이다.

31. 아들에게 베푸는 징계의 심판은종에게 가하는 징벌의 심판과 다름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의 증언들로 자기들을 무장할 때 제시하는 논거들이무엇인지 살펴보자.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자.

그들은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자기가 저지른 간음과 살인에 대하여 책망을받은 다윗은 죄를 사함 받는 은
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그 간음으로 난아이가 죽는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삼하 12:13-14),
죄과의 사함을 받은 후에도 형벌이 가해지는바 보속에 의해 그 형벌이 속해진다는 사실을 배운다고 말한
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구제함으로써 죄를 배상하도록 권고했다(단 4:27).솔로몬은 "인자와 진리로 인
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잠 16:6)라고, 또한 다른 곳에서는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 참
조 벧전 4:8)라고 쓴다. 베드로 역시 이런 입장을 확정한다(벧전 4:8).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죄를 지은 한
여자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465)7)

여기에서 보듯이, 그들은 항상 얼마나 사악하고 터무니없이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가! 만약 그들이 하나


님의 심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면, 그들은 다윗에 대한 선지자의 책망 속에
포함된 형벌의 형태는 보복을 염두에 두고 가해지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고려할 수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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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텐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점을 우리는 절대 간과해서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징계의 목적에 적잖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목적이 불경건한 자들과 유기된 자들을 향하여 그가 분노를 드러내는 경우와는 얼마나 다른지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사안을 다음과 같이 타당하게 정리할 수 있다.

가르침에 유익하도록 우리는 하나를 징벌의 심판,466)8) 다른 하나를 징계의 심판467)9)이라고 부른다. 징

7) 465) Aquinas, Summa Theol, III, bxxxvi, 1, 4. reply to obj. 3; III, xlix, 1: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 (1543, fo, 147 D);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iutatio (on 1Peter 4:8), p. 302; Eck,
Enchiridion, ch, ix, Quot, Battles tr,, n, 66,
8) 466) "[iudicium] vindictae,"
벌의 심판은 하나님이 자기의 적들에 대해서 보복하시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그들에 대하여 자기
의 진노를 발하시고,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며, 흩으시며, 허무에 빠뜨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를 처벌과 분노가 결합된 고유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징계의 심판에서 하나님은 분노하실
정도로 잔혹하지 아니하시며 파괴하거나 벼락을 쳐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징벌을 가하지 아니하신다.
결론적으로 이를 형벌이나 징벌이라고 부르기는 적절하지 않고 견책과 훈계로 468)10) 보아야 한다. 이 가
운데 징벌의 심판은 심판자에 속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다. 469)11) 심판자는 범죄자
를 벌할 때 범죄 자체를 질책하고 죄행 자체에 관한 형벌을 요구한다. 반면에 아버지는 한층 더 엄하게 아
들을 견책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보복하거나 학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르치고 이후에 더욱
신중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어느 곳에서 조금은 다른 비교를 하고 있는데 다음에서 보듯이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아들은 매를 맞는다. 종도 매를 맞는다. 그러나 후자는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노예로서 형벌을
받는다. 전자는 자유인이자 아들로서 훈육의 필요를 채우고자 징계를 받는다. 아들을 향한 견책은 연단과
개선을 낳으며 종에게는 그것이 매질과 형벌이 된다. "47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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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67) Miudicium) castigationis."


10) 468) "non est supplicium.aut vindicta, sed correctio et admonitio.
11) 469) "Alterum iudicis est, alterum patris."
12)
470) Pseudo-Chrysostom, Defide et lege naturae iii (MPG 48, 1085), Cf, Institutio, 3.8.6. Quot,
Battles tr,, n,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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